10평짜리 신의 위기
도명이 숨을 급하게 들이쉬며 눈을 떴다. 여전히 그를 괴롭히는 비스킷 먹는 소리가 그의 귀 주위에서 선명하게 돌고 있었다.
도명이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고개를 돌려 보니 도화가 그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손님용 비스킷을 먹어 치우고 있었다. 도명과 도화의 눈이 마주쳤다. 도화는 그제야 도명의 눈치를 보며 반쯤 먹은 비스킷을 조심스럽게 아래로 내려놓았다.
“허락 없이 먹어서 죄송해요.”
“아니요. 어차피 손님용이니까요. 전에도 제가 도화 씨에게 손님용이라고 말했으니까 굳이 허락이 필요 없을 거라고 생각했겠죠. 저도 딱히 신경 쓰지 않고요.”
‘그 소리에 내가 다시 추락하는 꿈을 꾸지 않았다면 말이지.’
“너무 맛있게 생겨서. 그만.”
도화는 여전히 민망한지 뒷머리를 긁적였다. 도명이 애매하게 먹다가 남겨서 쓰레기 만들지 말라는 듯이 도화의 잇자국이 남은 비스킷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도화가 한입에 반쯤 남은 비스킷을 털어 넣었다.
도명은 잠시 자신의 화원에 의미 없는 시선을 던졌다. 그의 눈빛이 아직도 꿈의 잔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흐리멍덩했다. 도명은 다시 눈을 감았다.
“아 저.”
다시 누워서 잘 것 같은 도명의 태도에 도화가 안절부절못했다.
“5분만요. 과자 마저 먹고 있어요. 냉장고에서 우유도 꺼내먹고요. 아니 그 전에 몇 시입니까?”
“2시 20분이요.”
도화는 언제나 여유시간을 두고 출발하는 편이기 때문에 조금 일찍 내려온 모양이었다.
“그러면 5분 괜찮겠네요.”
“네.”
도화가 의자에 앉아서 도명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도명이 말한 5분 내내 이러고 있을 모양이었다. 도명은 눈을 감고 있어도 그런 도화의 시선이 느껴져서 신경 쓰였지만 그와 이런 걸로 실랑이를 벌일 정신이 없었다.
잠에서 깨자마자 도화와 이야기하느라 도명이 꿈을 꾼 내용의 대부분이 날아갔다. 싱숭생숭하고 이상한 꿈을 꾸면 자신도 모르게 그 내용을 곱씹게 되기 마련인데 이미 그 황금 시간이 날아가 버렸다.
도명이 기억나는 건 첫 번째 꿈에서는 촌스러운 토네이도 사진, 정신과의 일부 풍경. 그가 가장 좋아했던 얼굴로 자신을 끝없는 곳으로 밀어 버린 도도 정도였다. 두 번째 꿈에서는 이상하고 완벽했던 비스킷 숲, 과자 먹는 커다란 백구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도명이 꿈을 꾼 건 아주 오래간만이었다. 최근 10년간 이렇다 할 꿈을 꾼 적이 없었다. 도명은 그 이유를 현실에 큰 불만이 없고 그가 현실에서 온갖 감각을 다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렇게 생각해서인지 도명은 자신이 꿈을 꾼 것 자체가 혼란스러웠다. 그것도 잠에 빠진 지 아주 짧은 시간에 두 편의 꿈을 연달아 꿨다.
도명은 이상했던 꿈을 곱씹는 것이 더 이상 의미 없어지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머리가 엉망이 되지는 않았는지 단장을 했다. 도명은 자신의 외모에 어느 정도 만족하자 도화를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도화 씨, 영화 보러 갑시다.”
***
영화 ‘사람의 숲’.
주인공은 사이코패스로 둘러싸인 사무실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일을 하고 있었다. 싸이코패스들의 세상이라고 해서 특별히 폭력적인 사회는 아니었다. 처음에는 오히려 그가 살고 있는 세상과 분위기가 크게 다를 게 없어서 당황했다.
그가 상상한 이 사회는 아침에 지정된 집에서 나오자마자 시퍼런 칼날이 그를 난도질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적당히 예의를 지키며 적당한 표정을 짓고 돌아다녔다.
이곳도 사회인지라 서로의 욕망을 견제하는 암묵적인 롤이 있었다. 오히려 그가 살고 있는 사회보다 질서가 엄격하게 톱니바퀴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서로의 폭력성을 알기에 피로 얼룩진 일정 기간이 지난 후 자기들끼리 룰을 만든 모양이었다.
이들이 살던 곳에서는 거리의 사람들이 다 사냥감이었지만 지금은 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사냥꾼이었다. 누군가 하나 총부리를 들이대면 금세 난장판이 될 판이었다.
이 세상은 여느 사회와 다를 게 없어 보였지만 묘한 싸늘함이 주인공의 목을 조여 오는 느낌이었다. 자신을 향해 웃는 그 얼굴들이 소름 돋았다.
서로 누가 더 상위 포식자인지 가늠하기 위한 탐색들이 일상 곳곳에 여상스럽게 파고들었다. 주인공이 살던 전의 세상도 사실은 그런 식이었지만 이곳에서는 좀 더 원초적인 본능이 느껴졌다.
직장 동료가 주인공의 업무 책상 위에 방금 탄 커피를 놓고 갔다. 주인공의 직장 동료가 그를 향해 헤벌쭉 웃었다. 그 올라간 입꼬리가 어딘가 소름 돋았다. 직장 동료가 놓고 가는 커피 하나에도 그는 생각이 많아졌다.
하지만 주인공은 그 역시 이곳의 포식자들과 같은 종류의 사람인 것처럼 연기했다. 그가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하면서 무명 배우 시절을 유지했던 그 기간이 도움이 되었다.
사람의 행동을 관찰하고 모방하던 버릇이 그가 이 소름 돋는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스며들도록 좋은 위장이 되어 주었다.
어느 날 주인공의 눈에 한 여자가 들어왔다. 그녀는 사람들과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다가도 자주 손끝을 부르르 떨었다. 시선도 언제나 불안했다. 가뜩이나 작은 그녀의 체구와 하얀 피부도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런 그녀의 이상함을 모르는 척하다가 그녀가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를 향해 동시에 눈동자를 돌렸다. 주인공은 그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그녀의 처지가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처럼 아슬아슬해 보였다. 주인공은 그날 밤 그녀가 칼로 난도질을 당한 채 사무실에 굴러다니고 사람들이 낄낄대는 꿈을 꾸었다.
주인공이 혼자 야근하던 날 밤, 주인공은 불이 꺼진 사무실 안에서 더 이상 못 견디겠다고 생각했다. 겨우 참고 있던 공포와 외로움이 그의 몸을 엄습했다.
그는 자신의 IP가 노출되지 않는 방식을 통해 구조요청을 보냈다. 빌어먹을 공무원의 실수로 멀쩡한 자신이 이 소름 돋는 사회에 들어와 있다고. 제발 살려달라고.
회의 시간이 지연되었다. 주인공은 업무 이야기를 하는 것 외에 다른 주제가 생길 때마다 손바닥에 땀이 차올랐다. 그때 누군가 주인공의 심장을 조여 오는 소리를 했다.
이 사무실 안에서 누군가가 행정 실수로 이 사회에 격리되었다는 신호를 보냈다고. 어떤 사이코패스가 이 사회에서 나가려고 그런 자작극을 벌인 이후로 그런 건 이제 안 통한다고 깐죽거렸다. 그러다 누군가 흥분을 참지 못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번에는 진짜면요?”
그의 한마디에 사람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사람들의 눈이 먹잇감을 찾아 순식간에 빠르게 서로의 눈을 훑었다. 주인공은 한 끝 차이로 그들의 소름 돋는 표정을 모방했다.
그때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의 규칙을 만든 그들만의 정부가 속보를 보냈다. 그들 사회의 누군가가 본능을 못 이기고 살인을 저질렀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경고 삼아 그런 이를 TV 앞에 세우고 공개 처형을 했다.
그냥 죽이는 게 아니라 온갖 방법으로 잔인하게 천천히 죽였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의 얼굴과 고문의 디테일이 이 방송의 포인트라는 듯이 여과 없이 방송되었다.
그 방송을 보는 사람들의 표정이 묘했다. 희열과 함께 경고신호가 그들의 머릿속을 뜨겁게 번갈아 오갔다. TV 속 남자가 결국엔 죽고 사람들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이번엔 너무 짧다, 창의성이 점점 부족해지는 것 같다, 등등의 평가가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왔다. 주인공은 구역질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결국 남자는 사람들의 눈이 없는 틈을 타 구토를 했다. 구토를 하고 나오는 화장실 앞에서 남자는 그가 신경 쓰고 있던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영화의 중반, 주인공과 여자의 관계가 점점 긴밀해져 갔다. 성적인 면에서의 긴장감도 있고 사람과 사람의 감정이 두 사람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단둘이 있는 여자의 집, 여자가 커피를 타며 말했다.
“저도 연극을 했었어요. 다른 사람의 감정에 지나치게 동요하는 것이 이쪽 경력을 가진 사람의 혜택이자 불운이죠.”
“네 맞아요.”
주인공의 말 한마디에 여자의 확장된 눈동자에 눈물이 흘러넘쳤다. 그 여자의 눈물에 주인공의 마음에 동요가 일었다.
“저는 이곳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요.”
여자가 무너져 내리는 표정으로 말했다.
스크린 밖에서 이 장면을 보고 있는 도화의 눈동자가 글썽글썽했다. 여자와 주인공이 얼마나 저 무서운 세상에서 외로웠을까를 상상하니 눈물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반면에 도명은 동공이 확장된 채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아, 안 돼…….”
최대한 좌석 등받이에 몸을 붙이고 있던 도명의 입에서 억눌린 소리가 흘러나왔다.
주인공이 여자에게 자신도 행정 실수로 이곳에 온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주인공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여자가 입꼬리를 최대한 귀 끝까지 위로 쭉 올렸다.
그녀의 눈빛이 완전히 변한 채로 연기를 위해 흘린 눈물은 그대로 살갗 위로 뚝뚝 흐르고 있었다. 슬픔의 눈물이 어느새 환희로 눈물로 의미가 완벽하게 반전되었다.
도명은 가면을 바꾸는 것처럼 순식간에 바뀐 여자 표정을 차마 끝까지 보지 못하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도명은 자신이 영화를 차마 못 보고 얼굴을 가린 것을 도화가 봤을까 봐 눈동자를 굴려 도화를 쳐다보았다.
도화는 영화가 주는 서스펜스에 감동해서 몸을 부르르 떨며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도화 역시 영화 안 사이코패스 여자처럼 희열에 차 있었다. 도명은 그런 도화의 표정에 순간 아까 처형장면을 보는 사람들 얼굴이 생각났다.
도명은 도화가 누구보다 선한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고 그가 웃는 건 영화 속 사람들과 장르가 다르단 건 알고 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둠 속에서 웃고 있는 도화의 얼굴이 정말 딴 사람 같았다.
‘아, 도화 씨 얼굴이 더 무서워. 아 씨발, 살려 줘.’
여자에게 남자의 정체를 들킨 이후 영화는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주인공 회사의 사람들이 여자를 주목하곤 했던 건 그녀가 이곳에 들어오기 전 37명의 사람을 가장 잔인하게 죽이고 온 희대의 연쇄 살인마였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불안정한 몸 떨림과 눈동자는 살인 욕구를 참지 못해서였다. 주인공은 그녀의 작은 체구, 흰 피부가 주는 이미지와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에 잘못된 판단을 내린 거였다.
심리적 압박을 주는 장면과 잔인한 장면이 영화관의 커다란 화면을 채웠다. 영화관을 나오는 도화의 얼굴은 신이 나 있었고 도명의 얼굴은 창백했다.
도화는 한참 신나 있다가 살짝 떨리는 도명의 팔을 요양 병원 환자를 돌보는 간호사처럼 부축했다.
***
도명은 화원 일을 마치고 안락의자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이유 없이 허전한 마음에 넋을 놓았다. 그러다 문득 뇌리에 꽂힌 것이 하나 있었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도명은 전화번호 목록을 뒤졌다. 통화 연결이 되고 도명이 사무적인 말투로 말했다.
“아, 네, 유도명입니다. 부탁할 게 하나 있어서요. 백구 얼굴 하나 그려 주시겠어요? 쿠션 같은 데 박아 넣기 좋게요.”
“아, BISCUIT FOREST에서 백구 그림이 왜……?”
잡지의 외주 작가인 그녀가 흐름을 알 수 없는 업무 내용에 의아해하며 말했다. 보통 그가 의뢰하는 일은 대부분 식물 삽화라든가 가끔씩 인물화 정도였다.
“아, 회사 일은 아니고, 개인적인 의뢰입니다.”
“아, 대표님, 반려견 생기셨어요? 그렇다면 키우시는 반려견 사진 있으면 작업을 이해하기 더 좋아요.”
“아니요. 반려견이 생긴 건 아닙니다.”
“그런데 왜? 프로젝트 자체가 이해가 안 가서요. 조금 더 설명해 주시겠어요?”
“그냥, 별다른 거창한 이유는 없습니다. 그저 백구 그림이 그려진 쿠션을 주문 제작하려는 겁니다. 그게 다예요. 아, 티셔츠도 만들면 좋습니다. 머그잔도요.”
도명은 그 후로 한참 자신이 원하는 백구 그림에 대해서 설명했다.
***
하루에도 도명에 대한 도화의 생각이 수십 번씩 바뀌었다.
오늘은 도화의 컨디션이 너무 좋아서 출근 준비 한 시간 전에 눈을 떴다. 습관이 돼서 그런지 한번 떠진 눈을 다시 감으면 잠이 충전되기는커녕 몸의 텐션만 느려지는 기분이었다. 도화는 조깅을 할 겸 밖을 나왔다.
그때 화원 앞을 정리하던 도명이 도화를 불러 세웠다.
“도화 씨 앞으로 온 겁니다.”
도화의 손 위로 조금 묵직한 종이의 무게가 느껴졌다. 도화는 포장을 뜯기도 전에 그것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도명 역시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주소지와 함께 포장 겉면에 잡지사 로고가 박혀 있었다.
“패션잡지 주문했습니까?”
“네.”
“갑자기 왜요?”
“제가 하도 옷을 잘 못 입으니까요.”
도화는 안의 내용을 어서 훑어보고 싶은지 그 자리에서 포장을 뜯고 안의 내용을 대충 훑어보았다.
“서윤이가 자주 일하는 잡지사군요.”
“네.”
“알고 있었군요.”
혼잣말하듯 말하는 도명의 말투가 의미심장해 보였다.
도화는 서윤에게는 도명과 지금 가지고 있는 관계 이상을 꿈꾸지 않는다고 했지만 솔직한 마음을 말하라는 그의 부추김에 내심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다가 그의 스튜디오에서 그가 찍은 멋진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다.
전형적인 미남, 미녀 사진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아도 사람을 홀리는 매력이 있는 사람들의 사진 역시 많이 보았다. 그게 도화의 뇌리에 인상 깊게 남아 있었다.
그래서 패션잡지 구독을 신청했다. 도명에게 조금 더 매력적인 사람이 되면 어쩌면 지금 관계 이상의 꿈을 꿀 순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지난번 서윤 씨 스튜디오에서 구경했어요. 아, 그런데 서윤 씨가 찍은 사진은 어디 있어요?”
도화는 알고 있는 사람이 작업한 게 이렇게 출간돼서 나오자 새삼 신기했다. 도화의 바로 옆에 서 있는 도명도 잡지사 대표지만 도명의 잡지는 도화에게 크게 와 닿지 않았다. 도명의 잡지는 너무 세련된 나머지 묘한 심오함이 있어 보였다.
반면에 도화가 들고 있는 잡지사는 도명이 만드는 잡지보다 대중성이 있고 좀 더 조잡스러워 보였다. 표지의 구석 한 부분을 가득 채운 할 말 많아 보이는 다양한 폰트와 헤드라인들이 수다스러워 보였다.
“아마 뒷부분일 겁니다. 화보 부분이요.”
도화는 도명의 말에 뒷면을 펼쳐 보았다. 그리고 도명이 말한 부분을 찾았다. 서윤이 모델들과 일한 화보가 펼쳐졌다.
솔직히 잡지에 나오는 옷들은 나도 걸치고 싶다는 기분보다는 이 안의 사람들이 너무 멋지다는 생각만 들었다. 이 모델들이 뿜어내는 아우라에 속았다가 조금은 난해하고 실험적인 스타일에 오히려 낭패를 볼 것이다.
“우와, 서윤 씨는 이런 멋진 사람들과 일하는구나.”
도화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러다가 도화의 눈길이 은근히 도명에게로 향했다. 아침부터 눈부신 그의 외모와 스타일에 갑자기 뿌듯함이 밀려왔다.
‘내 이웃이자 섹스 파트너의 클래스가 이 정도다!’라는 자부심이 도화의 얼굴에 묻어나왔다.
도화는 도명을 보자 기분이 좋았다가 도명의 가게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갑자기 기분이 축 처졌다. 후줄근한 트레이닝복에 세련됨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수더분한 인상이 갑자기 창피해졌다.
“도명 씨, 저는 좀 많이 촌스러운 편이죠?”
도화의 질문에 도명은 웃음을 못 참았다. 하지만 그의 웃음에는 귀여워 죽겠다는 마음도 담겨 있었다. 도명이 난감한 듯 귀 옆을 긁으며 말했다.
“세련된 편은 절대 아니죠.”
도명의 확인사살에 도화는 순식간에 시무룩해 있었다. 그러다가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다는 듯이 힘을 냈다. 과거의 자신과 달라지겠다며 구독 신청을 한 잡지가 때마침 도화의 손바닥 위에 올라가 있었다.
도화는 아예 도명의 가게 앞 벤치에 앉아 당장 자신에게 맞는 세련된 스타일을 찾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패션잡지 이곳저곳을 뒤졌다. 아주 잠시이지만 도명이 자신을 보며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쳐다보는 장면을 상상했다.
도명의 사랑에 빠진 눈을 상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도화는 상상력을 총동원했다. 그래서 그런지 도화가 상상한 사랑에 빠진 도명의 모습은 현실적이라기보다는 만화적이었다.
상상만으로 도화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도명은 갑자기 외모에 열을 올리는 도화의 모습이 왜인지 불편했다. 도명은 하던 것을 멈추고 잡지를 열심히 훑어보는 도화의 옆에 앉았다. 미간까지 찌푸리며 자신에게 맞는 스타일을 찾는 도화의 옆모습이 사뭇 진지해 보였다.
도화는 도명이 자신에게 맞는 스타일을 찾는 일에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아서 혼자 머리 굴리지 말고 그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어차피 도화는 지금 자신의 모습 자체에 불만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도명의 눈을 사로잡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불만이었으니 그가 새로 만든 스타일이 도명에 마음에 드는 것이 중요했다.
“도명 씨는 어떤 게 좋아요?”
도화가 도명을 향해 패션잡지를 들이밀며 말했다.
“도화 씨 입고 십은 거 입어야죠.”
도명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심 불안했다. 도명이 정론을 제대로 말한 것은 맞는데, 잡지 한구석에 도화와 같은 취향의 사람이 있었다. 지구는 둥글며 세상을 넓고 어떤 취향이라도 어딘가는 존재하는 법이었다.
하지만 잡지 속 남자는 도화와 달리 화려한 호랑이 무늬가 그려진 셔츠를 입고도 조폭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도명은 잡지 구석에 있는 호랑이 티셔츠를 입은 남자를 자연스럽게 손바닥으로 덮었다.
“저는 취향 같은 거 없어요. 잘 보이고 싶은 거죠.”
도화가 도명의 눈을 살짝 피하며 말했다. 마음 같아선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그의 반응을 살피고 싶었지만 그런 용기 같은 건 생기지 않았다.
도명은 도화의 한마디에 갑자기 그의 옷 고르는 것에 관심 없다는 듯이 나란히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화는 도명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혼자 잡지를 보며 시무룩해했다.
***
회사로 출근하는 버스 안에서 도화는 심장에 자리한 꽃씨 같은 기대감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며 회색 창밖을 쳐다보았다.
오늘 회사는 꽤 바빴다. 도화는 그 바쁨에 오히려 정신의 단순함을 느끼며 휴식을 하는 기분이었다. 정신없는 업무 처리가 끝났다.
도화는 바쁜 와중에 실수는 하지 않았는지 마지막으로 파일을 한 번 더 점검했다. 일의 한 단락이 완벽한 마침표를 찍으려는 순간 진동으로 해 놓은 전화벨이 울렸다.
부동산이었다. 까다로운 당신이 원하는 물건이 나왔다는 전화였다.
부동산 중개인 입장에서는 도화는 진상 고객이었다. 가진 돈에 비해서 거는 조건이 너무 까다로웠다. 부동산 중개인은 참다못해 도화에게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빈정대기까지 했다.
부동산 중개인의 말과는 달리 도화는 세상 물정을 모르지는 않았다. 다만 그가 매일 하는 업무처럼 마침표를 깔끔하게 찍는 일을 못 했을 뿐이었다. 부동산 중개인은 왜인지 도화의 요구에 대한 도전의식을 불태운 모양이었다.
도화에게 새 매물에 대해 설명하는데 이 어려운 걸 해내는 자신에 대한 만족감이 말투에서 그대로 묻어나왔다. 도화는 부동산 중개인의 자부심에 비해서 무미건조한 말투로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말 뒤에 직접 매물을 보기 위한 약속을 잡았다.
도화는 전화 통화를 하기 위해 나온 회사의 회색 복도에서 진한 우울함을 느꼈다. 마음속 미련이 그의 발밑에 진득하게 묻어나왔다. 그러다 도명과 지냈던 그동안의 시간에 대해 곱씹었다.
갑자기 어쩌면 그도 섹스 파트너 이상의 기분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시그널을 감지했다.
***
그날 저녁 도화는 도명과 플레이를 했다. 작은 신비로운 숲 같은 도명의 화원 한가운데 도명의 안락의자가 놓여 있었다. 도화는 발가벗고 도명은 안락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도명은 도화를 무릎 꿇리고 등 뒤에서 손을 벨트로 묶었다. 도화의 여린 애널에는 러브젤로 잔뜩 적신 바이브레이터가 꽂혀 있었다. 도화의 엉덩이가 쾌락에 위로 치켜 올라간 채 떨리고 있었다.
“하악… 하아. 하아… 하아… 하아….”
도명의 발꿈치가 도화의 등줄기에 닿았다. 본격적인 플레이를 시작한 지 10분밖에 안 지났지만 그의 등줄기는 땀으로 흥건했다.
도명은 손을 뻗어 헐떡이는 도화의 목줄기를 손가락으로 살살 긁었다. 그러자 젖어 있는 순종적인 눈동자가 도명을 응시했다. 도명은 그 눈빛에 눈을 감고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도명은 눈을 감아도 도화의 눈빛을 그려낼 수 있었다. 도명이 그림에도 재주가 있었으면 하이퍼 리얼리티로 그의 눈동자를 그려냈을 것이다. 도명의 집요한 성격으로는 도화의 속눈썹 끝에 매달린 미세한 습도조차도 화폭에 담으려 했을 것이다.
도명이 눈을 감자 손끝에 도화의 목울대가 진동하는 것을 온연히 느낄 수 있었다. 목줄기에 간헐천처럼 흐르는 도화의 땀에 도명의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오늘은 아주 기본적인 플레이를 할 거라고 했죠. 순종에 대해서 다시 한번 복습하는 겁니다.”
도명이 도화가 좋아하는 쓰다듬어 주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리고는 도화의 땀으로 젖은 자신의 손바닥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그리고는 안락의자 옆에 쌓아둔 두께가 얇은 아트 북들을 훑었다.
“저는 이제부터 책을 읽을 겁니다. 방해 안 되게 조용히 할 수 있죠?”
도명은 그리 말하고는 발을 뻗어 발가락으로 도명의 애널에 진동하는 바이브레이터를 더욱 깊숙이 박았다.
“바이브레이터 꽉 물고요.”
도명은 자신의 발밑 아래에 쾌락과 자신의 인내심 사이에서 헤매고 있는 도화를 둔 채 책들 중 하나를 골라 집었다. 도화의 소개팅에 왔던 사람들 중 하나인 진호가 만든 책이었다.
그의 서점에서는 정기적으로 일반 사람에 가까운 아마추어 작가들의 작품을 묶어다가 아트 북으로 만들곤 했다.
도명은 진호의 안목과 책을 만드는 실력을 존경하지만 그가 매년 기획하는 이 프로젝트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도명이 보기엔 내용이 제본의 퀄리티에 비해서 충분히 다듬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진호의 기획 자체가 도명의 취향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도명은 매번 진호의 서점에서 아마추어 작가들의 책을 샀다. 진호에 대한 존중의 표현이었다. 어쨌든 그는 자신이 기획한 것을 책장의 종이로 표현하는 데 능하니까 구입해 둬서 나쁠 건 없었다.
도명의 발밑 아래에서 도화가 온몸을 크게 움찔거렸다. 도화의 등에 대고 있던 도명의 발꿈치가 크게 출렁거릴 정도였다.
“가구가 지나치게 움직이네요.”
도명이 도화를 향해 못마땅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자 도화는 온몸에 힘을 주고 몸이 튕겨 나갈 것 같은 충동을 억눌렀다. 그래도 그의 몸이 조금씩 흔들렸지만 최선을 다하는 도화의 모습에 도명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도명은 어차피 마음에 완벽히 안 드는 책이기에 아무거나 골랐다. 달콤함이 묻어 나오는 것 같은 빨간색 책이었고 크기는 손바닥보다 조금 컸다. 단편들로 구성된 소설 모음집이었다.
“하아. 하악…… 아아… 도명 씨.”
바닥에 도화의 정액이 진득하게 고였다. 하지만 그의 발기는 끝날 줄을 몰랐다. 바닥에 이미 고인 정액 위로 새로 나온 정액이 층을 이루다 하나의 덩어리로 변했다.
시간이 15분쯤 지나자 도명은 쾌락과 한계 사이에서 헤매고 있는 도화를 내려다보았다.
“한 20분 남았네요. 남은 시간 버티기 정신적으로 어떻습니까?”
“하아… 하아… 힘들어요.”
“제가 지금 읽고 있는 책을 낭독해 주면 어떻습니까?”
도명의 말에 도화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도화의 눈이 빠르게 도명이 들고 있는 책을 훑었다.
책이 작은 편이지만 두께가 얇지는 않았다. 다시 생각해 봐도 도명이 원하는 것만큼 잘 해낼 자신은 없었다.
“걱정 말아요. 단편집이니까. 한 편 정도만 읽을 건데 겨우 10p 정도네요.”
“네.”
“착하네요.”
도명은 책의 아무 페이지나 펼쳤다. 10평짜리 신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주 간단한 이야기였다. 10평의 공간에서 신인 남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10평짜리 공간 안에서 규칙을 만들었고 그 안에서 모든 것이 완벽했다. 하지만 그는 규칙의 완벽함을 위해 그의 공간에 그와 같은 다른 신을 들이지 않았다. 변수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신의 공간은 완벽했고 완벽한 만큼 완벽하게 외로웠다.”
도명이 이야기의 마지막 구절을 읽었다. 도명의 울림이 좋은 목소리가 화원의 식물들이 속삭이듯 잎사귀를 서로 부딪치는 사근사근한 소리에 섞여 들어갔다.
도명이 이 모든 일을 마무리 짓는다는 듯이 책을 탁 소리 나게 닦았다. 그는 그렇게 소리로 마침표를 찍었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집인데, 어떻습니까? 도화 씨. 감상을 이야기해 봐요.”
도화는 지금 간단한 말을 하는 것조차 힘겨웠다. 도화는 긴 감상을 입술로 주절거리는 것 대신 땀으로 젖은 상체를 들어 올려 도명의 목울대에 입을 부드럽게 맞추었다.
도명은 그가 예상한 대로 도화가 제대로 대답을 제대로 못 하면 그가 읽어 주는 책의 내용에 집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엉덩이를 후려치는 걸로 플레이를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도화의 감상이 마음에 들어 도명은 말없이 그의 젖은 눈동자를 내려다보았다.
“감히 잔머리를 굴리다니 가중 처벌하고 싶지만, 이렇게 좋은 표정을 짓고 있으니 나 참, 더 이상 엄격해질 수 없네요.”
도명은 결국 손바닥으로 도화의 엉덩이 전체가 물결치며 흔들리도록 세게 후려쳤다. 도화의 살은 땀에 녹진하게 젖어 도명의 손바닥 안에 착 감기는 감촉이 진득했다.
도명은 그 여운을 느끼기 위해 그의 엉덩이 살이 주름 쥐도록 세게 움켜쥐고 흔들었다.
도명은 도화가 사랑스러운 탓에 관대하게 처벌을 그것으로 끝냈다. 도화 역시 도명의 손바닥 감촉이 좋은지 빨개진 입술을 살짝 벌렸다. 도명이 손가락을 벌려진 도화의 입술 안에 집어넣고는 속삭였다.
“수고했습니다. 도화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