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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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단편 2 - BISCUIT FOREST

계속 추락하고 있던 도명의 발밑이 바삭한 바닥에 닿았다. 도명은 파란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파란색 중에서도 채도가 높은 편이라 도명의 기준에서는 자신이 살짝 우스꽝스러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도명은 발끝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연 베이지색의 바닥 표면이 바삭거리는 소리와 함께 바스러졌다. 대지에서 참을 수 없는 고소한 냄새가 풍겨 나왔다.

도명은 자신도 모르게 바스러진 땅 표면을 주워서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냄새를 자세히 맡았다. 역시 그가 알고 있던 흙의 냄새는 아니었다.

그는 낯선 식물들을 키우기 위해 온갖 종류의 흙냄새를 맡아 보았고 흙의 배합에 따라 냄새가 어떻게 다른지까지도 알 수 있었다. 도명은 확신했다. 그가 디디고 있는 곳은 땅이 아니라 아주 커다란 비스킷이었다.

도명은 현실 세계에서는 절대 하지 않을 일을 했다. 손바닥 위에 바스러진 것을 혀끝을 세워 맛보았다. 맛을 보니 그의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아주 커다란 비스킷 위라는 것을. 그것도 아주 잘 구워진!

비스킷 위는 온갖 이국적인 식물들로 꽉 차 있었다. 어떤 것은 입과 꽃, 줄기가 전부 보라색인 것도 있었다. 식물들의 상태는 아주 좋았다.

인조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윤기가 돌았고 작은 부분 끝까지 벌레가 좀먹거나 마른 부분은 없었다. 도명은 이곳을 산책하면서 깊은 안정감과 만족감을 느꼈다.

숲의 크기는 생각보다 컸다. 도명이 한참 걷고 나서야 숲의 중앙에 들어올 수 있었다. 숲의 정원에는 그가 익숙해하는 주방이 있었다. 

찬장의 색, 그가 기억하는 자잘한 스크래치 같은 것들까지 꿈은 그대로 그의 주방을 옮겨 왔다. 도명은 그것이 마음에 들어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렸다.

도명은 찬장 문을 손바닥으로 쓸어 넘겼다. 원목의 감각이 손 안에 오롯이 묻어나왔다. 감촉조차 완벽했다. 도명은 자신의 공간을 탐미하는 것을 그만두고 찬장을 열어 보았다.

그가 좋아하는 각양각색의 허브들이 들어간 유리병들이 보였다. 유리병 표면을 타고 햇빛이 반짝거렸다. 잘 밀봉된 뚜껑들 사이로 허브의 향기가 느껴졌다. 정확히는 향기가 난다기보다는 향기를 기억하는 도명의 머릿속이 만들어낸 향기였다.

도명이 좋아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도명의 행복한 고민을 보여 주듯이 병들 사이에서 도명의 손가락이 춤을 추었다. 모두가 도명이 눈만 감아도 향과 맛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들이었다.

도명은 익숙한 것들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낯선 것을 발견했다. 찬장 가장 깊숙한 곳에 있어서 꺼내려면 잘 정리된 병들의 배열을 흔들어야 했다. 도명은 왠지 내키지 않았지만 기어코 잘 말린 진홍색 허브 병을 꺼냈다.

너무 오래되어서 관리가 안 된 모양인지 뚜껑 위로 진득한 먼지층이 생겨 있었다. 

도명은 먼지를 닦고 뚜껑을 열었다. 낯선 냄새가 도명의 코에 확 끼얹어졌다. 꿉꿉하면서 묘한 달콤함이 섞여 있었다. 도명은 병 윗부분을 덮은 말려진 이파리들을 손가락으로 휘저었다.

그러자 병 안 내부에 자리 잡은 미니어처 같은 풍경이 보였다. 안에는 그의 어머니가 의자에 앉아서 도도를 돌보고 있었다.

도명이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대로 떨어지라는 도도의 말을 안 들어서 그런지 그는 권위를 잃고 네 발로 부산스럽게 제자리를 뱅뱅 도는 멍청한 강아지로 변해 있었다.

도도는 벌어진 배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내장을 개 목줄처럼 질질 끌고 다니며 도명의 어머니에게 애교를 피우고 있었다.

투명한 병 안의 공간은 일종의 오르골 같아서 같은 장면이 계속 반복되었다. 어머니는 오르골 안에서 반복되는 간단한 멜로디처럼 같은 말과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우리 아들, 도명이는 어딘가 소름 돋지 않아? 너도 그렇게 느끼지 않니? 도도?’

도명은 구경하는 것을 그만두고 유리병 뚜껑을 닫았다. 

오래된 먼지의 끈적끈적함이 도명의 깔끔한 손바닥에 묻어 나왔다. 뚜껑을 열기 전에 분명히 닦았는데도 오랫동안 습기를 머금은 먼지의 흔적은 한 번에 지울 수 없고 또, 다시 망각하는 사이 더욱 진득하게 쌓이는 법이다.

도명은 찝찝함에 황급히 병을 다시 가장 구석에 밀어 넣었다. 이미 그가 좋아하는 유리병들은 한가득이니 아무것도 아닌 양 쓰레기통에 통째로 버릴 수도 있었지만 왜인지 그럴 수는 없었다.

도명답지 않게 이도 저도 못 하는 사이에 결국 그 진홍색 내용물을 담은 유리병은 다시 가장 구석 자리로 갔다. 그것은 또다시 구석에서 가장 습하고 진득한 먼지가 쌓일 것이다.

도명은 파란색 물이 진하게 우려 나오는 파란 병을 골라잡아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그가 내리고 있는 허브차가 온 숲에 퍼졌다. 파란 안개가 숲에 퍼지니 그가 주인인 숲이 더욱 신비로운 풍광을 자랑하였다.

도명이 향기와 색에 취해 눈을 감고 있을 때 그의 완벽한 숲이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도명이 위를 보니 아주 커다란 백구가 해맑은 표정을 하고 도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백구는 아무것도 해치지 못하는 표정을 짓고 혀를 내밀고 있었다. 백구의 코가 벌렁거렸다.

백구가 코를 벌렁거리기만 했는데도 그의 세상엔 강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백구의 입이 크게 벌려졌다. 하얗고 튼튼한 이에서는 진득한 타액이 뚝뚝 떨어졌다.

백구가 BISCUIT FOREST의 땅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비스킷이 백구의 이 사이에서 부서지며 바삭거리는 소리가 온 숲에 지진처럼 퍼졌다.

도명의 발밑이 다시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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