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칙 위반
새벽 2시경 서윤이 문을 열자 도명이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그의 스튜디오 현관문 앞에 서 있었다. 서윤은 피곤하다는 표정을 하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도화 씨, 어디 있어?”
도명이 형식적인 인사말도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왔다.
“나 참, 내가 도화 씨 어떻게 하기라도 하겠어.”
“어떻게 할 생각이 없는 애가 첫날부터 자기 집에 데려와? 그것도 아무 경계심이 없는 해맑은 도화 씨를 상대로.”
“도화 씨 해맑은 것만큼 나도 해맑은 남자거든.”
“말장난하지 말고.”
“게스트 룸에 있어. 알잖아. 손님 오면 내가 손님 재우는 방.”
서윤의 말에 도명 역시 그의 집이 익숙한 듯 바로 도화가 잠든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용히 걸어. 도화 씨 잠 깨겠어. 지금 너무 행복한 표정으로 잠들었단 말이야.”
“자기 집도 아닌데 여기서 왜 자. 한 달에 집세 30만 원이나 내면 알뜰히 자기 집에서 자야지. 만 원은 돈이 아니야?”
도명이 그리 말하며 도화가 잠든 방문을 열었다. 도명이 도화에게 다가가려는데 서윤이 도명의 앞을 팔로 막으며 말했다.
“무사한 거 확인했으면 놔둬. 지금 너무 잘 자고 있는데.”
도명은 순간 서윤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도화가 빨간색 19금 딱지가 붙은 만화책, ‘나에게만 다정한 폭군’을 안고 자고 있는데 표정이 너무 행복해 보였다.
도화는 마치 좋아하는 동화책을 안고 자는 어린아이 같았다. 다만 은은한 스탠드 불빛 아래에서 19라는 빨간 글씨와 함께 희미하게 빛나는 빨간 색 원 테두리가 그가 성인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형, 굳이 깨울 거야?”
서윤이 이마를 문질거리며 도명에게 다시 말했다. 도명은 짜증이 잔뜩 묻어나오는 표정으로 도화가 자고 있는 방의 방문을 닫았다.
“이왕 왔으니까 자고 가든지.”
“나 침대 아니면 못 자.”
“내가 바닥에서 잘게.”
서윤의 말에 도명은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도명은 뻔뻔스러운 얼굴로 자신이 그의 침대에서 자는 것이 원래 권리인 양 행동했다.
“그나저나 너 도화 씨한테 어떤 이상한 책을 쥐여 준 거야?”
“도화 씨가 직접 고른 거야.”
“애초에 그 문제의 방에 왜 들인 건데. 그것도 이상한 19금 마크가 잔뜩 있는 매체가 있는 방으로 말이야. 거기다가 네가 보유하고 있는 그것들은 남자 동성애자에 대한 요상하고 고착적인 이미지를 덧씌운단 말이야. 도화 씨한테 보여 줘 봤자 백해무익해.”
서윤은 벌써부터 도명의 잔소리에 질렸다는 듯이 귀를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서윤의 마음에 들지 않는 태도에 도명의 한쪽 눈썹 끝이 실룩거렸다.
“형. 그런 건 유치한 맛에 보는 거야!”
서윤이 도명을 향해 답답하다는 듯이 소리를 치다가 잠이 든 도화가 잠에서 깰까 봐 목소리를 급히 낮추었다.
“그런 거를 안 보태도 도화 씨는 이미 좋지 않은 매체에 깊숙이 빠져 있어. 굳이 네가 거기다가 그런 불량한 미디어를 보탤 건 또 뭐야.”
“세상엔 형이 모르는 다양한 즐거움이 있어.”
서윤의 침실로 가는 길에 도화와 서윤이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시간을 보냈던 그의 비밀 서재가 있었다. 그 방 앞을 지나가는데 도명의 코끝에 희미하게 라면 냄새가 났다.
서윤이 도명에게 시달리느라 라면 그릇을 아직 치우지 못한 탓이었다. 도명이 걸음을 멈추고 희미하게 남은 그 냄새의 정체를 확정 짓기 위해 코끝의 감각을 예리하게 세웠다.
“라면 먹었어?”
“응.”
“도화 씨하고?”
도명은 서윤을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손님을 집에 초대해 놓고 고작 라면을 먹였다고? 그런 건 너나 먹지. 도화 씨까지 먹일 건 뭐야. 설마 라면이 저녁은 아니었지?”
“그 전에 삼겹살 구워 먹었지. 라면은 후식이야.”
도명은 그나마 도화가 저녁을 라면으로 때운 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의 속은 여전히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도명이 노골적으로 서윤을 마음에 안 든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니 라면이 왜.”
서윤이 도명의 불편한 심기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화 씨 그렇지 않아도 지금까지 그런 불량식품들로 배를 채운 사람이야. 이미 충분히 도화 씨 안이 싸구려 칼로리로 가득 차 있다고.”
“오늘 하루쯤은 라면 먹어도 큰 문제 없어.”
“오늘 하루쯤이 아니라니까. 네가 도화 씨를 몰라서 그래. 걸핏하면 그런 걸로 저녁을 때우는 사람이라고. 이왕이면 간식을 줄 거면 제대로 만들어 줘야지. 넌 요리도 잘하잖아. 그런데 손님 대접을 그렇게 대충 했단 말이야?”
“형이 만화방 음식의 향수에 대해서 알아?! 만화책을 읽으면서 먹을 음식으로 라면만큼 완벽한 게 어디 있어. 어쩔 땐 사람에게 음식의 질보다 더 중요한 건 즐거웠던 기억이야. 영양학 따윈 개나 줘 버려.”
서윤이 도명의 잔소리를 못 참고 외쳤다. 그리고는 어서 씻고 잠이나 자라는 듯이 화장실 문 앞에서 도명의 등을 떠밀었다. 그리고는 손님용 일회용 칫솔을 꺼내서 도명의 손에 쥐여 주었다.
도명은 서윤이 억지로 쥐여 준 칫솔을 든 채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아직도 서윤에게 할 말이 한가득이었다.
“너!”
도명이 칫솔을 서윤에게 무기인 것처럼 겨누며 짧고 굵게 말했다.
“나도 형한테 할 말 많아! 나도 지금 잔소리 참고 있어!”
참다못한 서윤이 도명에게 선전포고했다. 도명은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듯이 턱짓을 오만하게 했다.
“형, 규칙 위반이야.”
“무슨 규칙 위반?”
“도화 씨는 형의 SM 파트너지 애인이 아니라고! 지금 형이 여기 와 있는 것 자체가 규칙 위반이야! 도화 씨가 형과의 플레이 시간 외에 누구와 뭘 하고 있든 형이 무슨 상관이야.”
서윤은 그렇게 말하고는 획 뒤돌아섰다. 그러다가 다시 돌아와서 도명의 면전에 대고 다시 말했다.
“규칙 위반.”
***
새벽 4시, 도명은 서윤의 방 안에서 눈을 번쩍 떴다. 아무렇지 않은 척 반듯이 누워서 쓸데없이 뒤척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역시 잠은 오지 않았다.
도명에게 규칙은 그의 세상을 예상 가능한 범위 내에서 매끄럽게 돌아가게 만드는 아주 중요한 요소였다. 규칙은 도명의 세상을 지켜 주는 파수꾼이었다.
그래서 그가 일상생활에서 매고 있는 가늘고 검은 넥타이는 그에게 답답함보다는 깊은 안정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 목조임이 살짝 느껴지는 그 감각이 도명에게 네가 규칙을 인식하고 있으므로 모든 것이 완전할 것이라고 속삭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도명은 목 끝까지 가지런하게 얹어진 이불의 가벼운 무게감조차 답답하게 느끼고 있었다. 도명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의 규칙이 자신을 무겁게 억누르고 있음을 느꼈다.
도명은 결국 이불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명은 괜히 아무것도 없는 목을 손바닥으로 어루만졌다. 도명은 어둠 속에서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그가 자고 있는 침대 아래에는 서윤이 팔자 좋게 잠들어 있었다. 대(大) 자로 뻗은 채 이불을 반쯤 걷어찬 그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도명은 속 편해 보이는 서윤을 보자 얄미워서 견딜 수 없었다. 도명은 건우에게 했던 것처럼 그를 질퍽한 물웅덩이에 머리를 처박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명분이 없었다.
서윤은 확실히 도화에게 좋은 사람이었다. 규칙을 자기 좋을 대로 바꾸는 것에 이번엔 한도 초과였다. 거기다가 이번엔 그의 규칙이 그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족쇄가 되어서 발목을 감싸고 있었다. 모든 상황이 도명에게 불리했다.
도명은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명은 찬물로 세수를 한 후 방과 방들을 잇는 통로에 우두커니 섰다. 도화가 평화롭게 잠든 방문이 보였다. 복도의 가장 끝자리에 있는 그 방으로 도명은 홀리듯 들어갔다.
도명이 어둠 속에서 여전히 만화책을 품 안에 끌어당긴 채 잠들어 있는 도화를 내려다보았다. 도화를 내려다보는 도명의 시선이 어딘가 음습했다.
도명은 도화의 품 안에서 만화책을 빼냈다. 그리고는 책 표지를 구경하다가 실소를 했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제목과 표지였다.
이런 게 무려 6권이나 나와 있었다. 도명은 종이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도명은 만화책을 침대 옆 탁자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그리고는 도화의 머리맡에 앉아서 그의 동그란 두상을 쓰다듬었다.
따뜻하고 보슬보슬한 느낌이었다. 도화의 두상에서 은근하게 피어오르는 열기에 묘한 기분 좋음이 퍼졌다. 도명의 손가락이 도화의 열 많고 보드라운 입술을 쓰다듬었다.
도명은 도화의 입술 끝에 손가락을 대다가 바지를 내렸다. 그는 지금 이 순간 그의 순종을 확인하고 싶었다. 도명은 도화가 그의 모든 신체에 대한 통제력을 자신에게 순순히 넘기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도명은 페니스를 꺼내서 도화의 인중에 갖다 댔다. 부드럽게 퍼지는 도화의 숨결에 몸이 은근하게 달아올랐다. 도명이 귀두를 도화의 입술 사이로 밀어 넣었다. 하얀 치아의 단단함이 살갗에 느껴졌다.
잠에 깊숙이 빠져 있던 도화가 이상한 느낌에 슬며시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 어떤 페니스가 자신의 입술을 문대고 있었다. 도화가 순간 너무 놀라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서윤 씨?”
도화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자고 있는 집주인을 떠올렸다. 하지만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서윤이 가지고 있는 기운치고는 기운이 너무 음습했다.
도명의 손이 도화의 목을 감싸왔다. 도화가 놀라서 자신의 목을 서서히 감싸오는 사람의 손끝을 더듬었다. 어둠 속이지만 그 손끝의 감각이 익숙했다.
손마디의 느낌은 남자의 것이라 억센 면이 있었다. 하지만 그 뼈마디를 감싸는 피부 결은 지나치게 부드러웠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의 살결에서 알싸하고 향긋한 허브향이 났다.
“도명 씨?”
“그래요. 나예요.”
도명이 어둠 속에서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모든 저항을 풀어요.”
도명의 마법 같은 말 한마디에 도화는 몸의 힘이 저절로 빠져나감을 느꼈다. 도명이 도화의 몸 위에 올라탔다. 도화는 상황 파악을 하기 위해서 바쁘게 눈동자를 굴려댔다.
이 시간에 도명이 여기 왜 있는지도 모르겠고 목 언저리에 단도처럼 놓인 딱딱한 도명의 페니스 상태 때문에 정신이 알딸딸했다.
이쯤 되면 자신이 야한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명은 잠자는 중에 일어난 일을 순종적으로 받아들이는 도화의 태도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입술을 벌려요. 서툰 것을 연습해야죠.”
도화가 뭐라 하기도 전에 도명의 페니스가 도화의 입안에 욱여넣어졌다. 비릿한 욕정의 열기가 도화의 입안을 가득 찼다. 도화는 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전에 마구 욱여넣어지는 도명의 페니스 때문에 거부감이 먼저 들었다.
“우웃.”
도화는 본능적으로 도명의 아래에서 몸부림쳤다. 도화가 갑자기 힘을 줄수록 도명은 그답지 않게 요령 없이 굴었다. 어둠 속에서 손과 손이 어지럽게 얽혀 들어갔다. 두 사람의 실랑이가 한참 동안 벌어지고 도화가 어둠 속에서 외쳤다.
“도명 씨, 싫어요.”
“갑자기 왜요. 야한 거 좋아하잖아요.”
도명이 발기한 페니스를 여전히 도화의 입가에 들이대며 말했다. 도화의 입가가 도명의 귀두 끝에서 흘러나온 투명한 액체로 너저분해졌다.
“싫다고요!”
“알았어요. 천천히 할 테니까 빌어먹을 힘 좀 풀어요.”
도명의 고상한 입술 끝에서 상스러운 소리가 났다.
“싫어요.”
도화가 다시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도화는 지금 이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것도 도명이 설계한 플레이가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이런 플레이는 하고 싶지 않았다.
도화는 솔직히 지금 누워 있는 곳이 자신의 침실이기만 했어도 도명이 원하는 대로 했을 것이다. 아무도 보지 않는 둘만의 장소면 어떤 너저분한 취급도 괜찮았다. 아니 오히려 그의 갑작스러운 발정에 평소보다 흥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서윤의 집이었다. 서윤이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 알고 있고 SM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해도 직접 보게 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사람과 사람으로서 호감을 가지고 있는 상대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 줄 순 없었다.
이런 요소가 플레이의 스릴을 더하는 경우도 있지만 도화에게 이건 스릴을 위한 플레이로도 즐길거리가 아니었다. 명치 깊숙한 곳에서 거부의 반응이 진하게 흘러나왔다.
도화는 분명 싫다는 말을 여러 번 했음에도 도명이 들어 주질 않자 그의 손목을 있는 힘껏 물어뜯었다. 분명 악 소리가 터져 나올 만큼 아팠을 것이다.
하지만 도명은 지독하게도 옅은 신음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다만 팔에 힘을 더욱 세게 쥘 뿐이었다.
도화의 턱 힘과 도명이 가진 근육의 팽팽함 사이에 신경전이 일었다. 도화는 턱에 힘을 더욱 세게 쥐면 그의 팔에서 피가 새어 나올 것 같았다. 그래서 차마 그의 팔을 물고 있는 턱에 힘을 더욱 세게 주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놓지도 못했다.
“이런 거 좋아하잖아요.”
도명이 어둠 속에서 이를 악물며 도화에게 세뇌를 걸듯이 속삭였다. 그러자 도화의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도화가 도명의 팔을 물은 턱에 힘을 풀고 말했다.
“도명 씨.”
도화는 다음 말을 내뱉으려고 하니 급격히 목이 잠겨오는 것을 느꼈다.
“도명 씨.”
“말해요.”
여전히 도화의 목 언저리에는 도명의 발기한 귀두가 거칠게 문질러졌다. 도명은 귀두 끝으로 도화의 목 혈관이 헐떡이고 있음을 느꼈다.
“도명 씨.”
“말하라니까요.”
“도명 씨, 사랑해요.”
도명은 도화의 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음을 느꼈다. 도화의 어깨를 막무가내로 짓누르는 도명의 손힘이 맥없이 풀렸다. 도화는 자신을 억세게 억누르고 있던 힘이 사라지자 겨우 다음 말을 이어갈 수 있었다.
“세이프 워드 썼으니까 이제 그만 해요.”
도명은 여전히 도화의 뜨거운 입술에 자신의 흥분한 페니스를 욱여넣고 싶었다.
하지만 다시 규칙이 그를 묶어두었다. 도명은 답답함에 숨을 거칠게 토해냈다. 도명은 이성을 겨우 추스르며 말했다.
“네. 그래요.”
도명이 흥분이 가시지 않은 페니스를 대충 브리프에 구겨 넣었다. 어수룩한 도화는 눈치 못 채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이건 플레이도 아니었다. 강간 그 자체였다.
이기적인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죄책감이 그의 온몸을 짓눌렀다.
도화는 무릎을 가슴 부분까지 끌어당긴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는 옷을 정리하는 도명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제가 세이프 워드를 써서 화났어요?”
“세이프 워드 썼다고 화내는 돔이 어디 있어요.”
“실망했다든가.”
“실망도 하면 안 되고요.”
도명은 도화의 순한 말투에 더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 자신이 강간당한 줄도 모른 채 상대방 기분을 살피는 그의 얼굴을 보니 절로 나오는 게 한숨이었다. 도명의 손끝이 바람에 이는 이파리처럼 경련을 일으켰다.
도명이 물끄러미 도화를 쳐다보니 그의 입가에는 아직도 그가 짐승처럼 뿌려댄 투명한 액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도명은 당장 이곳에서 도망가고 싶은 충동을 겨우 억누르며 휴지를 뽑아 도화의 입가를 정리해 주었다.
도화는 도명의 손길에 부드럽게 눈을 감았다.
“저, 이런 걸 강간 플레이라고 하죠?”
“네.”
도명이 거짓말을 했다. 방금 건 그냥 강간이었다.
“우리 둘 다 집에 들어가면 그런 플레이를 해도 돼요. 그냥 여기서는 하기 싫었어요.”
“…….”
“다음 주 내내 두 집이 이어진 그 문을 열어둘게요.”
그의 침묵에도 계속 이어지는 도화의 말들에 도명이 어이없다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정말 원해서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도명의 말에 도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화는 ‘나는 당신이 나를 지독하게 원하는 걸 원해요.’라는 뒷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도명은 지금의 기억 때문에 당분간은 도화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하고도 강간 플레이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우리 다음에 하는 거예요?”
도화는 도명답지 않게 대답을 두루뭉술하게 하는 그가 답답해서 재차 물었다.
“네. 다음에.”
“다음에 언제요?”
“……그냥 다음에요.”
“도명 씨답지 않게 대답이 애매한 것 같아요. 아, 이건 그런 플레이니까 지금처럼 예고 없이 해야 해서 그래요?”
“아니요. 그냥. 네.”
설명 좋아하는 도명이 설명하는 것조차 싫어서 말을 애매하게 뭉갰다.
“그러니까 도명 씨, 지금은 장소가 싫었어요. 그 점은 이해해요?”
도화는 도명이 지금 대화하는 것을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해서 더욱 집요하게 질문을 해댔다.
“네. 이해해요. 여기가 서윤이 집이라서 싫은 거잖아요.”
도명의 대답에 도화는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도명이 대답이 틀린 건 아닌데 뭔가 아주 정확한 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대답을 고치기에는 정확히 뭐가 틀렸는지 알 수 없어서 도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
서윤과 도명이 한 주방에 서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서 그런지 역할 분담이 정확했다. 도명은 차가운 파스타를 만들고 서윤은 샐러드를 만들었다.
주방에서 도마질하는 소리와 그릇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도화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도화는 엉덩이를 긁으며 서윤의 스튜디오로 나갔다.
서윤의 집 역시 도명의 집과 구조 개념이 비슷했다. 일하는 공간과 사는 공간이 벽 하나와 계단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일하는 공간과 사는 공간의 중간 영역으로 넓은 주방이 있었다.
1인 가구치고는 사치스러울 정도로 큰 주방은 평소 끼니를 해결하는 공간이자 여러 사람들과 만나는 공간이었다. 도명의 화원에 있는 주방이 바처럼 있듯이 서윤의 주방 역시 스튜디오 안에 있었다.
도화가 스튜디오로 들어서자 서윤과 도명이 아침을 만들고 있었다. 도화는 혼자 늦잠 잔 것이 미안해서 괜히 머리를 긁적였다.
“아 죄송해요. 저만 늦잠 잤네요.”
“괜찮아요. 좀 더 자지 그랬어요.”
서윤이 도화를 향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니요. 잠은 충분히 잤어요. 저는 뭐 할까요?”
도화가 주방에 다가오며 말했다. 서윤은 의자를 빼 주었다. 그리고 앉으라는 듯이 고갯짓을 했다. 도화는 일단 서윤이 시키는 대로 앉았다.
그러고 이제 뭘 해야 하는지 알려 달라는 듯이 서윤을 올려다보았다. 서윤은 도화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어서 손가락이 근질거렸다.
“여기 앉아서 뭐든 떠들어 봐요.”
“네?”
“도명 형은 재미가 없으니까.”
“갑자기 떠들라고 해도, 뭘 떠들어야.”
“하지만 거의 다 했는걸요. 도화 씨가 이제 와서 뭘 도와준다고 해도, 음.”
“아 방해된다는 뜻이군요.”
“네. 그러니까 여기 앉아서 뭐든 구경해요. 아, 신경 쓰이면 다 먹고 설거지 좀 도와줘요.”
“아 저 설거지 잘해요. 도명 씨도 그건 인정할걸요? 그렇죠?”
도화가 도명의 뒷모습을 향해 말했다. 그리고는 도명에게 좋은 반응이 오기를 기다렸다.
“네.”
도화는 ‘네.’라는 말 뒤에 다른 수식어를 붙여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서윤은 샐러드를 마무리 짓기 위해 다시 조리대로 돌아왔다.
“아 저 그런데 도명 씨 어제 새벽엔 여기에 왜 온 거예요?”
도화의 질문에 서윤과 도명의 손이 동시에 멈췄다. 도명은 그 질문 자체가 불편했고 서윤은 그걸 왜 모르냐는 표정이었다. 서윤의 눈동자가 도명과 도화를 빠르게 번갈아 보았다.
“아침에 서윤이하고 일로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도명은 깔끔한 말투로 거짓말을 했다. 서윤은 대체 무슨 말이냐는 듯이 말없이 도명을 쳐다보았다. 도명은 적당히 알아서 호흡 맞추든지 입을 다물든지 하라는 듯이 서윤의 발끝을 지그시 밟았다.
서윤 역시 도명이 도화 때문에 새벽 2시에 왔다는 사실을 굳이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도명이 질투 때문에 새벽에 들이닥친 걸 알면 도화는 좋아하는 표정을 못 숨길 것이 분명했다.
도명에게 도화를 기쁘게 할 방법을 굳이 알려 주고 싶지는 않았다. 서윤의 얼굴에 심술이 가득했다.
“도명 씨, 정확히 몇 시에 왔는데요?”
도화는 잠결에 자신이 자고 있던 방에 도명이 갑자기 들어온 것은 본 것이어서 그가 온 시간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다만, 햇볕이 잘 들어오는 구조의 방 안은 여전히 어두웠고 또 그가 들이닥친 시간을 상식선에서 유추하려고 애쓸 뿐이었다.
“5시 정도요.”
“무슨 일이기에 새벽부터 온 거예요? 서윤 씨, 도명 씨 자주 그래요?”
“네. 아주 돈으로 사람 영혼까지 사려고 하는 악독한 사람이에요.”
서윤은 도명의 거짓말의 합을 맞추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 사실 도명은 개인적인 관계를 제외하면 클라이언트로서는 예의 바른 편이었다. 도명은 서윤을 쥐어짠다고 사진이 더 잘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탓도 컸다.
서윤은 자유분방해 보이는 성격과는 달리 약속을 아주 잘 지키는 사람이었다. 예술을 한다는 사람치고 비즈니스 관계에 대해서 이해력이 아주 좋았다. 그래서 굳이 도명이 서윤을 쥐어짤 이유는 없었다.
“아 진짜 최악의 클라이언트다. 그렇게 쥐어짜면 서윤 씨가 일을 더 잘하기라도 해요?”
“네. 쥐어짜면 잘해요.”
“아, 서윤 씨 불쌍해요. 새벽 5시에 제 클라이언트가 집에 들이닥친다고 생각하면 소름 돋는다고요.”
도화는 약 한 시경에 서윤이 ‘유 대표님.’이라면서 전화를 받고 그의 비밀 서재를 나섰다는 것이 생각났다.
우연히 서윤의 진상 클라이언트 성이 도명의 성과 똑같다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어제의 그 진상 ‘유 대표’도 도명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서윤이 도명을 형이라고 안 부르고 딱딱하게 ‘유 대표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딘가 많이 어색하긴 하지만.
“혹시 도명 씨 새벽 한 시 경에 서윤 씨한테 전화했었어요?”
서윤과 도명이 서로 눈빛 교환을 빠르게 했다. 서윤이 먼저 도화의 질문에 답을 했다.
“네, 그 진상도 여기 유 대표님이십니다.”
서윤이 익살스럽게 잘 구운 빵과 파스타를 내려놓는 도명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는 서윤 씨가 도명 씨를 그렇게 딱딱하게 부르는 걸 처음 봐서 성이 같아도 도명 씨인지 상상도 못 했어요.”
“너무 얄미울 때는 그렇게 선을 그어서 불러요. 얄미울 상황일 만도 했잖아요. 새벽 한 시에 작업이 어떻게 되어 가냐고 전화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요!”
도명은 서윤이 거짓말에 장단을 잘 맞춰 줘서 다행이긴 한데 생각보다 거짓말을 술술 하는 서윤을 보자 도명의 눈이 가늘어졌다.
언제나 감정에 솔직한 편이라 거짓말 같은 거 잘 못 할 줄 알았는데 저렇게 잘하는 모습을 보니 자신도 모르게 저 능구렁이 같은 놈에게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도명은 적당히 하라는 듯이 서윤의 옆구리를 슬며시 찔렀다. 서윤은 왜 그러느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하, 도명 씨 화났나 봐요.”
도화가 도명이 서윤의 옆구리를 찌르는 것을 타이밍 좋게 보며 말했다.
“하지만 맞는 말이잖아요.”
“네 맞는 말이에요. 도명 씨, 사람들은 그런 걸 갑질이라고 부른다고요.”
“네네. 알았어요. 우리 을들께서는 갑이 만들어 주는 음식이나 먹어요.”
도명이 빵을 적셔 먹을 올리브 오일을 담은 작은 그릇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서윤이 아침에 어울리는 경쾌하면서도 지나치게 소란스럽지 않은 음악을 틀면서 아침 식사가 시작되었다.
도명이 서윤에게 음악이 거슬린다고 했고 도화는 서윤의 편을 들었다.
“아, 부산스러워.”
도명이 결국 참지 못하고 아침부터 잘 정리된 머리를 쓸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왜 좋잖아.”
서윤의 말에 도화가 면을 입안으로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이는 와중에도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도화의 발끝이 서윤이 튼 음악을 따라 발끝을 튕겼다. 서윤 역시 발끝으로 음악을 즐기다가 도화와 발끝이 부딪쳤다.
그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어색하게 교차했다. 쌍방과실인데도 도화가 먼저 미안하다고 하려는 찰나 서윤이 장난스럽게 도화의 정강이를 살짝 찼다.
그러자 식탁 아래서 작은 토닥거림이 일어났다. 다 큰 남자들이 치는 장난질치고 유치하기 짝이 없었지만 두 사람은 즐거워 보였다.
“애들이야?!”
도명이 참지 못하고 언성을 조금 높였다. 그러자 서윤과 도화가 시무룩한 얼굴로 식사에 열중했다.
“도명 씨는 언제나 왜 그렇게 심각해요?”
도화가 포크로 접시 밑바닥으로 쿡 찌르며 말했다.
“제가요? 지금 제가 여러분들과 같이 발장난을 안 쳤다고 지나치게 심각한 사람이 된 건가요?”
“아니 그렇다기보다, 이 맛있는 걸 먹으면서 내내 표정이 안 좋잖아요.”
도화가 도명이 만든 파스타에 서윤이 만든 샐러드를 한 포크에 집어서 동시에 입안에 밀어 넣으며 말했다. 원래 따로따로 먹어야 하는 거지만 섞어 먹으니 또 다른 색다른 맛이 났다.
도명은 도화가 굳이 두 음식을 섞어서 동시에 먹는 모습이 거슬렸다. 이 거슬림은 마음속 깊숙한 곳까지 비틀어지게 만들었다.
도명은 굳이 먹는 법까지 까다롭게 정해 주는 건 아니다 싶어서 하고 싶은 말을 목 끝으로 삼켰다. 도명은 밀려오는 짜증을 억누르기 위해 이마를 문질거렸다.
도화가 두 개를 섞어 먹는 것에 맛 들였는지 서윤이 만든 샐러드를 듬뿍 덜어서 도명의 냉 파스타 안에 넣었다.
“저 도화 씨 그거 꼭 그렇게 먹어야 해요?”
도명이 애써 표정관리를 하며 말했다. 하지만 그가 억지로 웃는 입꼬리 끝이 부들거렸다.
“도명 씨 회사에 혹시 문제 있어요?”
도화가 진심으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인생의 중심이 되는 일 하나가 잘 안 풀리면 모든 것에 화가 나는 법이었다.
“아니요. 회사는 순조롭게 돌아가고 있어요.”
“그런데 왜 그렇게 예민해요? 아니면 회사 말고 다른 문제 있어요?”
“제가 예민한 게 어디 한두 번인가요?”
“예민한 도명 씨치고도 예민해요.”
도화가 자신이 새로 창조한 요리를 도명의 입 앞에 들이밀었다.
“먹어 봐요. 맛있다고요. 이것도 완벽해요. 두 사람의 솜씨를 합치니까 이렇게 맛있다고요.”
도화가 포크를 도명의 코앞까지 내밀었지만 도명이 한사코 고개를 돌렸다. 도화는 자신이 먹고 있는 게 얼마나 완벽한지 도명이 알아주지 못하자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좋은 것을 알게 됐는데 자신만 알고 있는 건 왠지 외로웠다.
아침 식사가 끝나고 도화가 설거지를 하려고 고무장갑을 끼웠다. 서윤이 같이 하겠다고 했지만 도화가 자신이 혼자 다 해야 일이 공평하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나저나 서윤 씨는 그릇 어떻게 정리해요?”
“음, 그냥 여기에 아무렇게나 놓아요.”
“아, 정말 제가 아무렇게나 놔도 돼요?”
“네.”
서윤은 도화에게 마무리를 잘 부탁한다는 듯이 어깨를 토닥였다.
도명은 도화와 같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명은 서윤의 스튜디오 안에 있는 서재 안락의자에 앉아 그의 책들을 무심한 표정으로 훑어보고 있었다.
서윤이 도명의 맞은편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는 도명을 고찰해야 하는 철학자 같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확실히 도화를 대하는 도명의 태도는 서윤이 알고 있던 도명과 달랐다. 도화의 마음은 만난 지 하루 만에 다 들켜 버렸고 도명의 마음은 오리무중이었다. 도명의 마음속은 빤히 알 것 같다가도 종국엔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었다.
도명은 자기가 소유한 볼펜 하나도 남들이 함부로 탐내면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의 집착의 유무와 사랑을 동일시하는 오류에 빠지면 안 되는 것이다.
“뭘 그렇게 사람을 동물원 원숭이처럼 쳐다봐?”
“형한테 도화 씨가 얼마나 특별해?”
도화가 설거지를 하고 있는 주방과 그들이 앉아 있는 서재 사이에는 벽이 없었다. 그래서 서윤은 상체를 도명에게 기댄 채 최대한 목소리를 죽인 채 말했다.
“어떻긴. 많이 아끼는 거 안 보여?”
“왜 아끼는데?”
“뭐?”
“왜 아끼는 거냐고. 형은 형이 가진 클립 하나도 다 아끼잖아. 거기에 이유들도 정확히 있고.”
“그냥. 도화 씨는 내 취향이야.”
“겨우 그 정도야?”
“그냥 취향인 것 이상이긴 하지.”
도명의 말에 서윤은 표정이 굳어졌다. 자신이 서로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 불시착한 재롱 피우는 원숭이가 된 기분에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취향 이상인 것이 뭔데?”
“도화 씨는 언제나 가지고 싶었던 유형의 사람인데 두려워서 못 가지던 유형의 사람이었어. 그런데 이번에 용기 내서 가진 거지.”
“도화 씨는 어떤 유형인데?”
계속 이어지는 서윤의 질문에 도명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도명은 낮게 한숨을 쉬며 시선을 여전히 보고 있던 사진집에 고정한 채 말을 이어나갔다.
“그냥 나와 정반대의 사람. 사람들은 다 똑같아. 다 나와 비슷한 욕망을 가졌어. 물론 성분은 조금씩 다르긴 하지. 어쨌든 사람들은 다 나와 완전히 다른 척들을 하지. 그들은 원하는 걸 가지지 못해서 타협했을 뿐이야. 난 수단이 많아서 가지는 데 성공했을 뿐이고. 그런데 다들 날 비난하는 데 열들을 올리지.”
도명은 학교 내 행사가 있을 때마다 교단에 섰다. 그리고는 동급생들을 한 단 높은 시선에서 그들의 얼굴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때마다 생각했다. 눈동자들이 참 비슷비슷하다. 하지만 상황이 그들을 다른 표정들을 짓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도화 씨는 정말 나와 달라. 정말 희귀한 걸 내 집 앞에서 만났어. 그런 행운이 내게 떨어질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해? 내가 아끼는 것들은 사람이든 물건이든 많지만, 이번엔 정말 아끼는 거야. 그런데 네가 그것만 콕 집어서 가져가려 하고. 내가 어떻게 널 안 얄미워해. 진짜 개인적인 감정으로 갑질하고 싶어서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거든. 겨우 참고 있으니까 정도껏 해라. 나 진짜 아끼는 행운의 클립 있으니까 차라리 그걸 가져가.”
도명은 정말 그의 말대로 열이 뻗치는지 셔츠 소매를 풀어서 걷어 올렸다. 그러자 서윤의 눈에 도화에게 물려서 온통 시퍼렇게 변한 도명의 팔이 보였다. 잇자국을 중심으로 주변이 온통 빨갛고 파랗게 부어 있었다.
“팔 왜 그래?”
놀란 서윤의 말에 도명이 자신의 팔을 물끄러미 보다가 별 것 아니라는 듯이 다시 셔츠를 내렸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어젯밤 도화 씨가 물었어.”
“왜?”
“도화 씨와 나 둘 중에 누가 잘못했겠어? 당연히 내가 잘못했겠지. 도화 씨는 이렇게 심한지 몰라. 입조심 해.”
“도화 씨한테 무슨 짓을 했기에?”
서윤이 시선을 조심스럽게 도화의 뒷모습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 그리고는 다시 시선을 도명에게로 날카롭게 돌리며 말했다.
“무슨 짓 했냐고!”
“너, 이미 고꾸라진 사람 밟는 취미 있어? 충분히 자기 혐오하고 있으니까 가만히 내버려 둬. 제발 헤집지 마.”
서윤이 도명을 더 추궁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설거지를 마친 도화가 해맑은 표정으로 두 사람 사이에 섰다.
“아, 저 도명 씨, 영화표 예약했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게 오늘인 것 같은데. 몇 시에요?”
“3시 표입니다.”
“앞으로 한 5시간 남았네요.”
“네.”
“아 근데 도명 씨 괜찮아요? 그거 진짜 무섭다던데.”
“네. 괜찮습니다.”
도명이 여유로운 척하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직원이 그 영화의 명성에 대해서 너무 열렬히 떠들어서 예매한 걸 후회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 둘이 영화 보러 가요? 오늘?”
서윤이 두 사람 사이에 끼며 말했다.
“네!”
도화가 잔뜩 신이 난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영화인데요?”
“사람의 숲이요.”
“아, 그거.”
서윤이 눈을 가늘게 뜨며 도명을 쳐다보았다.
“그나저나 도화 씨는 공포영화 잘 봐요?”
“그럼요. 공포영화에 대해서 궁금한 거 있으면 저한테 다 물어보면 될 정도로 오랜 취미에요.”
도화가 자부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서윤은 열이 올라오기 시작하는지 손깍지를 끼고 무릎 위를 누르며 도명을 쳐다보았다.
“형은 도화 씨가 공포영화 잘 보는지 알고 있었나 봐.”
도명이 민망함에 서윤의 시선을 피했다. 도명이 침묵을 지키는 동안 도화가 주절주절 떠들었다.
“그럼요. 매번 제 취미 가지고 뭐라 하는데요!”
***
서윤의 집을 나서는 동안 도화는 도명과 영화를 보러 갈 생각에 설레는 모양이었다. 그들의 집으로 가는 내내 도화는 계속 영화에 대해서 떠들어댔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기본 설정이, 사회에 사이코패스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자 도시 하나로 그들을 강제 이주시키는 것에서 시작해요. 그래서 사이코패스들만이 사는 작은 도시 하나가 있는 거죠.”
“아니 그전에, 사이코패스들이 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요?”
영화 설명 시작부터 도명이 의문을 제기했다.
“리뷰를 보니까 그 이유에 대해서는 마지막까지 안 나오는 모양인데요.”
“그렇다면 설정이 어설픈 거 아니에요?”
“원래 이런 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영화가 설정한 특수한 상황에서 공포를 어떻게 다루느냐가 더 중요한 거지.”
도화가 도명을 향해 뭘 모른다는 듯이 은근히 핀잔을 주었다. 도명은 그런 도화의 핀잔이 귀엽다는 듯이 한쪽 입꼬리를 피식 올렸다.
“어쨌든 그래서요?”
“이 세계관에서는 정기적으로 사람들이 반사회적인 인격을 가지고 있는지 심사를 해요. 여기서 공무원이 서류 작업을 잘못하죠. 사이코패스가 아닌 사람을 사이코패스들만이 사는 도시에 집어넣게 되는 것에서 시작해요. 그 사이코패스들만 사는 도시에서 살아남는 생존 공포영화에요.”
도화는 영화의 설정을 설명하는 것에서 끝내지 않고 감독의 이력이라든지 시나리오의 원천이 된 소설 이야기 같은 것을 줄지어 이야기했다. 하지만 도명의 신경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도명의 눈앞에 계속 머릿속이 만들어낸 빨간 글씨가 아른거렸다. 마치 자동차 앞 유리가 글씨를 써서 내보내는 전광판이라도 된 것 같았다.
글씨는 ‘규칙 위반’이라고 계속 도명에게 알리고 있었다. 도화와 영화관에 갈 생각을 하며 같이 볼 영화에 대해서 떠드는 것이 ‘규칙 위반’이라는 것이다. 도명은 뇌가 만들어내는 경고를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
서윤의 집을 나선 지 40분 만에 그들의 집에 도착했다. 도화는 자연스럽게 제집처럼 도명의 가게 주방에 서서 차가운 물을 따라 마셨다.
“이것 봐요. 시간이 애매하게 남았잖아요.”
도화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차로 영화관까지 가는데 얼마 정도 걸려요?”
“넉넉잡아 30분이면 됩니다.”
“엄청 가깝네요. 역시 너무 서둘러서 나온 건 아닌가 싶어요.”
도화가 아쉬움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도화는 중간에 시간이 애매하니 서윤의 집에 계속 있다가 영화 시간에 맞춰 나서자고 했었는데 도명이 그의 의견을 기각했다.
그래서 도화는 서윤이 빌려준다는 만화책을 바리바리 싸 들고 그의 집을 나섰다. 도화는 벌써부터 서윤의 집이 가진 마력에 취한 것 같았다.
하지만 조금 생각을 바꿔 보니 이 황금 같은 일요일 날 도명과 단둘이 반나절 이상을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이내 온몸이 간질거리면서 이상한 기대로 몸이 달아올랐다.
이동 시간을 따지면 애매한 자투리 시간이 많이 생긴다는 것을 알면서 도명이 왜 굳이 중간에 이곳을 들리려고 했을까?
도화는 도명의 얼굴을 흘깃 보다가 종종걸음으로 도명의 가게 창가에 섰다. 그러고는 괜히 창밖의 풍경에 관심이 많은 척 밖을 응시했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매일 보는 집 앞 풍경이 아니라 도명임을 그의 곁눈질이 말해 주고 있었다.
“도명 씨, 급하게 온 이유가 있어요? 그러니까 여기서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라든지.”
도화가 괜히 발끝을 꼬며 말했다. 그리고는 가게 창가에 있는 블라인드를 조절하는 막대를 괜히 손바닥 안에 넣고 굴렀다.
이런 거에 눈치 빠른 도명이 도화의 엉큼한 머릿속을 못 읽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도명은 성욕의 해결보다 머릿속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비우는 것이 더 급했다. 도명은 모르는 척 새로 장만한 안락의자에 몸을 뉘었다.
원래 화원 안에서는 중앙의 커다란 테이블을 중심으로 등받이가 딱딱한 의자들밖에 없었다. 지금 도명이 누워 있는 의자는 지인에게 선물을 받은 것이었다.
그의 지인이 화원에 와 보고 이런 편한 의자 하나쯤은 놔두고 잠깐의 오수라도 즐겨야 오히려 일의 효율이 는다며 잔소리를 퍼붓더니 오지랖 넓게도 의자까지 배송 보낸 것이다.
도명은 일상적인 식사 때 빼고는 업무공간이라고 규정지은 곳에 이런 늘어지는 의자는 역시 장소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사람의 성의가 있으니 버릴 수도 없고 구석에 밀어 넣고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도명보다 그의 절친한 지인들이 이 의자에 엉덩이와 등을 더욱 많이 비벼댔을 것이다.
“회사 일이라면 없어요. 일단은 주말이잖아요.”
도명은 일단 회사 일을 하는 척할 수는 없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도화는 도명이 그랬던 것처럼 가게 안의 블라인드를 내렸다.
도화가 블라인드 내리는 소리는 도명이 블라인드를 내리는 소리처럼 촥 소리 나게 깔끔하게 떨어지지 않고 어딘가 수줍은 가득한 소리였다.
촤르륵, 드륵. 촤륵, 촤륵. 촤르……륵.
도화는 가게 문도 잠갔다. 그리고는 괜히 축축해진 목 뒤를 손바닥으로 비비며 도명을 은근하게 쳐다보았다.
도명은 도화의 확실한 섹스 시그널에 안락의자에 누워서 생각에 잠겼다. 도명은 지금 도화와 어떠한 신체적 접촉도 원하지 않았다. 신체적 접촉은 물론이고 심리적 접촉조차 피곤했다.
단 몇 시간만이라도 그와 거리를 두고 싶었다. 그의 얼굴을 보면 머리 위로 커다란 쇳덩어리가 얹어진 것처럼 묵직해지면서 가벼운 두통이 일었다.
어느새 도화는 도명이 누워 있는 의자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 도화 특유의 순한 눈동자가 도명을 부끄러움이 가득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도화 씨.”
도명이 딱딱한 목소리로 도화의 이름을 불렀다.
“아 저, 일단은 간단한 플레이를 할까요? 아니면 펠라 할까요?”
도화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조심스럽게 도명의 허벅지 위로 올렸다.
“도화 씨, 저는 영화관 가기 전에 쉬고 싶습니다.”
도명의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도화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도명 씨는 누워 있고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도화가 사탕을 조르는 어린애처럼 도명의 허벅지를 움켜쥐었다. 도화의 손이 기어코 도명의 바지 버클을 건드렸다.
“쉬고 싶다는 이야기 못 들었어요?”
“저 도명 씨 혹시 제가 새벽에 플레이 거절해서 화났어요?”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 거 정말 아니니까 이 작은 머리로 온갖 이상한 추측하지 말아요. 도화 씨 추측은 언제나 한 끝 차이로 빗나가잖아요. 승률도 안 좋으면서 어째서 매번 그러는 거예요?”
도명이 피곤한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 하지만 지금 달아오른 도화의 머릿속에는 온통 섹스 생각뿐이었다.
“아, 펠라가 시시하면 강간 플레이 할까요?”
“네? 강간 플레이가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쓰게 만드는지 알아요? 제가 쉬고 싶다는 말을 그냥 쉬고 싶다는 말로 못 알아듣습니까?”
도명의 말에 민망해진 도화의 얼굴이 빨갛게 익었다.
“도명 씨가 피곤하면 제가.”
당황한 도화가 생각나는 대로 아무 말이나 횡설수설 내뱉어댔다.
“제가 뭘요?”
도명이 황당함이 가득 찬 어조로 되물었다. 도명은 도화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의 다음 말을 이미 들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 제가 한다고.”
도명과 말을 섞을수록 도화의 머릿속이 엉킨 붉은 실타래로 이루어진 것인 양 이상한 방향으로 꼬여 들어갔다. 도화가 계속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동안에 도명이 입으로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러니까 도화 씨가 저를 강간하겠다고요?”
“네? 아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요? 말 좀 똑바로 해 봐요.”
“아 제가…… 도명 씨를 강간…… 아. 그게 그렇게 되네요.”
도화가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며 말했다.
“자기 섭한테 강간당하는 돔 만들기 싫으면 제발 저 좀 자게 내버려 둘래요?”
도명의 말에 도화는 아쉬움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누워 있는 도명을 안았다.
덩치가 좋은 도화가 위에서부터 안아 오자 대형견에게 애정으로 공격당하는 주인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뭔가 부들부들하면서 기분은 좋은데 난처하고 불편함에 얼굴이 찡그려졌다.
“도화 씨.”
“아, 그냥 마지막으로 안고 갈 생각이었어요. 그러니까 뭘 더 어떻게 하겠다는 게 아니라요. 잘 자라고 하는 포옹 같은 거예요.”
“포옹이 참 숨 막히네요. 묵직하고.”
“앗 미안해요. 잘 자요. 도명 씨. 때 되면 깨우러 내려올게요.”
“네. 부탁할게요.”
도화가 어색함에 관절이 나무토막으로 만들어진 사람 같이 뒤돌아섰다. 그런 도화의 움직임에 도명이 입꼬리를 장난스럽게 올렸다.
“도화 씨.”
도명이 도화의 이름을 부르고 뜸을 들였다.
“이왕 유모같이 굴 거면 이마에 입이라도 맞추고 가든가요.”
도명의 요구에 도화는 수면 위에서 먹잇감을 끌어올리는 물총새처럼 도명의 이마에 입을 갖다 대고 허리를 급히 폈다. 도화는 도명과 떨어지자마자 자신이 이곳에서 벌인 일련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생각나서 황급히 자신의 집으로 올라갔다.
드디어 도명은 혼자 남을 수 있었다. 도명은 눈을 감았다.
아직도 도화와 닿은 살갗이 정전기가 도는 것처럼 간질간질했다. 그냥 기분이고 자시고 도화가 자신의 페니스를 빨아 주는 걸 즐길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화의 얼굴을 안 보자 그의 비밀스러운 죄책감이 옅어졌다.
도명은 어젯밤 거의 잠을 제대로 못 잤기 때문에 그의 몸이 젖은 솜으로 가득 찬 인형이기라도 한 것처럼 무거움을 느꼈다. 도명의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의 뇌는 그동안 많이 지쳤는지 눈꺼풀이 닫히자마자 그를 깊숙한 아래로 끌어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