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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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ST BAEK GU

도화의 주방에 매캐한 연기가 자욱했다. 하지만 도화의 표정은 밝았다.

“도명 씨가 해 준 낙지볶음하고 완전 비슷해!”

도화는 엄청난 과학 공식을 발견한 사람처럼 요리법을 꼼꼼하게 적어 내려갔다. 

그리고는 흥분된 표정으로 엉망이 된 주방을 정리했다. 그가 흥분한 상태에서 정리를 해서 그런지 정리를 한 후에도 여전히 주변이 어수선했다.

도화는 결국 싱크대에 남은 그릇을 쓸어 넣었다. 그리고는 접시에 방금 완성한 낙지볶음을 조심스럽게 담았다. 도화는 아랫입술을 문 채 생각에 잠겼다. 

고민 끝에 냉장고에서 파슬리를 썰어 놓은 것을 꺼내 작은 섬을 만들었다. 그제야 도화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도명 씨!”

도화가 흥분하며 도명의 가게에 들어왔을 땐 안에 손님이 있었다. 그 손님의 얼굴이 도화의 눈에 낯이 많이 익었다.

“어?”

“어? 도화 씨 오래간만이네요.”

서윤이 도화를 향해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사람의 경계심을 무장해제 시키는 서윤의 친근한 환대에 도화 역시 환한 표정을 지었다. 도화는 일단 자신이 만든 낙지볶음을 중앙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도화 씨, 미안한데 우리 일하고 있는데요.”

도명이 도화를 향해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아 미안해요. 도명 씨. 지금 제가 너무 흥분해서 그만.”

도화가 도명의 말에 가져온 접시를 챙겨 서둘러 나가려는데 도화가 만든 낙지볶음이 이미 서윤의 입안에 들어가 있었다. 도화와 서윤이 눈이 마주치자 서윤이 머쓱한 표정으로 낙지 다리를 입안으로 후룩 집어넣었다.

“아 미안해요. 너무 맛있는 냄새가 나서 허락도 없이 먹었네요. 그런데 너무 맛있네요.”

“괜찮아요. 진짜 맛 괜찮아요?”

“네!”

도화의 질문에 서윤이 엄지를 들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화 씨. 우리 일 얘기 중이었다니까요.”

“방금 계약서에 사인했는데 무슨 일 이야기를 또 해.”

서윤이 끝자락에 낙지볶음 소스가 묻은 종이를 챙기며 말했다. 도명은 서윤의 엉망인 계약서 관리에 미간을 구겼다. 서윤은 미간을 구긴 도명의 입에 도화가 만든 낙지볶음을 넣어 주었다.

도명은 하얀 셔츠에 붉은 소스가 묻을까 봐 실랑이하는 것을 그만두고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도화의 눈이 도명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하지만 도명의 접힌 미간을 펴질 줄을 몰랐다.

“어때? 맛있지? 도화 씨 요리 제법 하네요. 전에는 요리라고는 한 번도 못 해 본 사람 같더니! 그사이 엄청 늘었어요.”

“연습했어요. 도명 씨가 하는 방법 그대로. 도명 씨는 요리 강사로 좋은 자질은 없지만 어쨌든 제가 해냈어요!”

“와-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음. 도명 씨는 어때요?”

“네, 잘 만들었네요.”

도명이 깔끔한 어조로 답했다. 하지만 도명의 표정은 서윤과 달랐다. 도화의 눈에는 도명이 도화가 어서 나가달라는 바람을 담아 형식적인 반응을 하는 것 같았다.

“진짜요?”

도화가 도명을 향해 어서 더 칭찬해 달라는 표정을 지었다.

“네.”

하지만 도명의 반응은 무미건조했다. 

무미건조할 뿐 아니라 심지어 얼굴에는 짜증까지 배어 있었다. 도명이 테이블 위를 탁탁 두들기며 도화의 이목을 집중시키고는 다시 한번 말했다.

“우리 일하고 있는 중이라고요.”

“아, 네. 죄송합니다.”

“아, 저 이거 더 먹고 싶은데요.”

서윤이 접시 모서리를 자신을 향해 끌어당기며 말했다. 서윤의 뒤에는 도명이 그런 그의 태도에 못마땅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도화는 서윤의 그런 반응이 내심 고맙기까지 했다.

성격 좋은 서윤이 아니었다면 싸늘한 도명의 반응에 흥분된 감정만큼 기분이 바닥으로 내리꽂혔을 것이다.

“아. 놓고 갈게요. 음, 도명 씨랑, 아니 도명 씨 빼고 서윤 씨만 먹어요. 딱 서윤 씨만!”

“그럴 수는 없죠. 저랑 도화 씨랑 먹어야죠. 넉넉잡아 한 40분이면 우리 일 이야기 완전히 끝날 것 같으니까 내려와서 같이 저녁 먹는 거 어때요?”

“아, 좋아요. 저는.”

도화가 도명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남의 집에서 저녁 먹는 걸 가지고 너무 둘이서만 정하는 거 아니야?”

도명이 불만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형이 싫다고 하면 제가 도화 씨 집에 올라갈게요.”

“여기서 먹어. 도화 씨 서윤이 말대로 40분 후에 내려와요. 아니 한 시간 후에. 밑반찬도 준비해야 하니까.”

“네.”

도화가 어정쩡한 걸음으로 집에 올라가고 난 후 서윤이 도명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하고 싶은 말을 참은 듯 입술만 움찔거리다가 일 이야기로 돌아갔다. 

도명이 도화에게 일하는 중이니 사라져달라고 했던 게 무색해질 만큼 일 이야기는 10분 만에 끝났다.

항상 하던 계약 양식이었고 서윤이 도명의 회사 일을 한 지 꽤 돼서 디테일에 대한 설명도 필요 없었다. 꼼꼼한 도명조차 뻔한 이야기를 지루하게 설명하는 것을 귀찮아하는 기색이었다.

“형, 도화 씨 그 사람하고는 어떻게 되어 가?”

일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서윤이 아까부터 참고 있던 말을 내뱉었다.

“누구?”

“도건 씨가 소개해 준 그 사람 말이야. 형이 마음에 안 들어하던.”

“아.”

도명의 추임새가 이상했다. 그 사람에 대한 무시가 분명하게 느껴졌다.

“잘 안 됐지.”

도명이 희미하게 입꼬리 끝을 올렸다.

“아, 그래?”

도명의 말에 서윤이 눈에 띄게 기뻐했다.

“같이 영화 보자고 할까? 어때? 형? 도화 씨 영화 좋아하나?”

서윤의 말에 도명이 한참을 말이 없었다. 도명은 고민을 하다가 서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서윤아. 도화 씨 내 파트너야.”

“응, 파트너?”

서윤은 상상할 수도 없었던 도명의 말에 순간 도명의 말을 못 알아들었다. 도명이 서윤을 똑바로 쳐다보며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도화 씨 내 SM 파트너라고.”

도명의 말에 서윤은 머리가 잠시 멍해졌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니까 형 SM 파트너의 소개팅 자리를 만든 거야? 왜?”

서윤이 그렇게 말하니 도명은 자신이 정말 이상한 사람 같이 보였다. 진실과는 조금 다르지만.

“일단 그때는 도화 씨는 내 SM 파트너는 아니었어. 도화 씨가 그놈과 헤어지고 난 후 그렇게 된 거지.”

“그놈과 헤어지고 난 후 왜 그렇게 됐는데? 갑자기 두 사람 다 심경의 변화가 오기에는 너무 짧은 기간 아니야?”

“전부터 SM 파트너를 하느니 마느니 하고 있긴 했었지.”

이제 이다음 들어올 질문이 도명의 입장에선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결국 도화 씨가 소개팅에 나왔다는 건 SM 파트너를 안 하기로 결정했었다는 거네. 왜?”

“도화 씨는 이런 쪽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막연히 겁이 났었겠지.”

“형은 어땠어? 형은 도화 씨를 그쪽으로 끌어들이는 데 얼마나 적극적이었어?”

“적어도 도화 씨한테 SM의 위험성이나 처음인 사람들이 불편해할 만한 것들에 대해선 충분히 이야기했지.”

“그러면서 동시에 적극적으로 도화 씨를 유혹도 했겠지. 안 그래?”

서윤은 도명이 두루뭉술하게 피해 나가려고 하는 것에 당하지 않았다.

“도화 씨는 어때? 그쪽 성향에 맞는 사람이야?”

“확실히 기질이 있지.”

도명은 분명한 어조로 대답을 한 후 조금 후 낮게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그래, 하지만 SM을 안 해도 못 살 사람은 아니야.”

“그래서 기질이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도화 씨가 알에서 깨자마자 처음 본 사람은 나야. 그냥 일이 그렇게 된 거지. 그냥 주사위 던지기 하듯이 일어난 일의 순서에 대해서 따져서 뭐해.”

“도화 씨가 조류도 아니고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형을 보면 사람들 안에 있던 SM 기질이 깨어난다는 거야? 형이 무슨 마성이 게이, 아니 마성의 마스터야 뭐야?!”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새끼야.”

서윤이 연달아 예민한 질문들을 해대자 참을 수 없는 짜증이 치밀어 오른 도명이 그답지 않은 양아치 같은 어투로 말했다. 친한 서윤과 있을 때 가끔씩 터져 나오는 말투였다.

서윤은 도명의 인생에서 그가 가장 종잡을 수 없는 인간관계 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지금까지 만나고 다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와. 그러니까 도화 씨가 형을 먼저 봤다고 성향이 그쪽으로 완전히 틀어졌다는 거야?”

“응.”

도명이 단언했다. 서윤이 얼굴을 찡그리며 도명을 쳐다보았다. 서윤은 도명의 태도가 거슬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형은 지금까지 SM 파트너하고 연인은 다른 거라고 말해왔지?”

“응.”

“그런데, 플레이를 하다가 상대방이 진심으로 좋아진 적은 없어? 단 한 순간도?”

“없어.”

“그럼, 도화 씨는 뭐가 되는데?”

서윤이 기분 나쁘다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나를 몰라? 상대방한테 이런 관계 강요한 적 없어. 기묘한 거짓말도 안 했고. 내 말이 틀렸는지 직접 물어보든가. 아, 나는 정말 상관없는데 도화 씨는 불편하겠다. 갑자기 성적 취향을 친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취조당하는 거니까. 그래도 궁금해서 견딜 수 없으면 물어봐.”

도명이 묘하게 ‘친하지도 않은 사람’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내가 형을 몰라? 형은 언제나 강요한 적 없지. 그 당당하고 오만한 표정 진짜 가식적이고 재수 없는 거 알아?! 형이 의도적으로 상대방 행동 조절하려고 하는 그 수법들을 내가 모르냐고. 그리고 전부터 도화 씨 대하는 형의 태도 진짜 거슬렸어. 뭔가 언제나 명령조이고. 도화 씨는 형 눈치만 보고!”

“누가 보면 도화 씨가 네 지인인 줄 알겠다. 그리고 나 이런 사람인 거 몰랐어?”

서윤의 신랄한 비판에 도명이 입술을 비틀면서 말했다.

“알았지. 형 성향 이해할 수 없어도, 그다지 상관은 없었어. 사람들은 원래 다른 거니까. 근데 지금은 엄청 거슬리네.”

“누가 보면 도화 씨가 네 애인인 줄 알겠다. 너 지금 반응, 혼자 앞서나가고 있는 건 알고 있긴 하냐.”

“애인 아니지.”

“아닌데?”

“아닌데, 관심 있는 사람이니까, 아니 그런 쪽으로 관심 없어도 내가 아끼는 지인이 형하고 SM 파트너라고 상상하니 기분이 좋지는 않네. 지금까지 그런 사람이 없어서 몰랐는데, 그러네. 아, 그래 이제야 알겠네. 난 그동안 가식을 떨고 있었던 거야. 다른 사람과의 취향 차를 쿨하게 인정하는 그런 사람인 척하고 싶었던 거지.”

서윤의 말에 도명은 네 기분 알 게 뭐야, 라는 듯이 손가락을 까닥였다.

“사랑이라도 해?”

“앞으로 할 수 있지. 원래 호감에서 시작하는 거잖아. 나 도화 씨하고 잘해 보고 싶은데 형, 잠시라도 도화 씨랑 SM 파트너인지 뭔지 풀면 안 돼? 형은 지금까지 SM 파트너가 애인 생기면 쿨하게 보내 줬잖아.”

“응. 안 돼. 도화 씨가 지금 당장 너랑 아무 사이 아니니까. 그리고 네가 깨 달라고 해서 내가 파트너 관계 일방적으로 깨면 도화 씨 입장에선 그게 더 무례한 거 아냐? 좀 상식적으로 생각해라.”

“만약 도화 씨하고 내가 사귀게 되면? 언제나 형의 완벽한 규칙에는 파트너 관계 유지하는 게 이상한 거 아냐?”

“요즘 이상하게 내 규칙 가지고 딴죽 거는 사람들이 많네.”

도명이 뒷머리를 천천히 쓸어 넘기며 말했다. 도명의 눈빛에 짜증이 잔뜩 어려 있었다.

“혼잣말하지 말고, 형이 세운 규칙 위반이잖아.”

“그래. 당연히 그렇게 되는 거지.”

“알았어. 데이트 신청한다. 약속 지켜. 나는 내 애인이 형하고 그런 놀이하는 꼴은 못 봐.”

도명이 서윤을 향해 느긋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도화 씨가 알에서 깨자마자 본 것이 하필이면 나라는 이야기는 귓등으로 들었어?”

“도화 씨는 사람이지 새 대가리 아니거든.”

서윤은 핸드폰으로 요즘 개봉 중인 영화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좀 지나자 서윤이 도화와 볼 영화 후보에 오른 영화가 두 가지로 압축되었다.

“아, 이거 요즘 엄청 떠들더라. 공포영화인데 엄청 무섭대. 공포영화 매니아들 사이에서 완전 화제더라.”

서윤이 언제 도명과 옥신각신했냐는 듯이 자연스럽게 영화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아 맞다. 형은 공포영화에 대해서 관심 없지? 도화 씨도 그러려나? 도화 씨 마음 약해서 이런 거 못 볼 것 같아. 아 보고 싶은데. 처음 데이트하는 사이끼리 공포영화 보면 좋다고 하더라. 그 심장 뛰는 느낌하고 설레서 심장 뛰는 거하고 비슷하다나 뭐라나.”

도명은 서윤이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는 듯 주방에서 도화가 한 낙지볶음하고 먹을 소면을 삶고 있었다. 서윤은 도명이 자신의 말에 아무런 관심 없어도 혼자 주절주절 잘도 떠들었다.

“하지만 역시 도화 씨를 겁먹게 하고 싶지는 않은데.”

서윤은 그렇게 혼잣말을 하고는 다시 현재 개봉 중인 영화를 다시 검색했다. 한참을 혼자 핸드폰을 하다니 서윤이 도명의 소매를 끌어당기며 외쳤다.

“아, 이거 보고 싶어!”

“뭔데?”

도명은 팔이 갑자기 잡히자 형식적으로 질문했다.

“캘리포니아에서 백구가 잃어버린 주인 찾아오는 내용이래!”

“음? 캘리포니아? 백구?”

두 개의 어울리지 않은 단어 조합에 도명은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아까처럼 서윤이 혼잣말하다 지치게 놔둘 생각이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질문이 터져 나왔다.

“응. 캘리포니아에서 주인인 황 할아버지를 백구가 다시 찾아오는 내용이래.”

“아니, 캘리포니아에 대체 백구가 왜 있어?”

“황 할아버지하고 이민을 간 거지.”

“백구하고?”

“응, 황 할아버지는 농사꾼 중의 농사꾼이었어. 할아버지에게는 기특한 강아지가 하나 있는데 그게 백구야. 형 개 풀 뜯어 먹는다는 소리 알지? 근데 개가 진짜 풀 뜯어 먹는 건 알아?”

“알아.”

“그래. 이 백구가 너무 똑똑해서 할아버지네 논에서 벼 말고 잡초만 뜯어 먹는 개야. 정말 영리하지 않아?”

“아 그래…….”

도명은 자신이 왜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하나 회의감마저 들기 시작했다.

“어쨌든 황 할아버지는 농사에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마을의 그랜드 마스터였대. 그런데 딱 하나 실패한 농사가 있지. 바로 자식 농사. 황 할아버지의 논이 있는 땅값이 어마어마하게 오른 거야. 자식들이 아직 정정하신 황 할아버지 재산을 두고 묘한 신경전을 벌이는 거지. 황 할아버지는 갑자기 이곳에서의 모든 생활이 염증 나기 시작했어. 그래서 땅을 처분하고 캘리포니아로 떠났어. 자식들 몰래 홀연히. 황 할아버지는 자식들은 두고 가면서도 백구는 반드시 데려갔어. 자식보다 더 소중한 개인 거지.”

“아, 그래 감동적이네.”

도명이 이죽거렸다.

“황 할아버지는 그렇게 캘리포니아로 떠났어.”

“왜 하필 캘리포니아야?”

“할아버지가 새벽에 TV 채널을 아무렇게나 돌리다가 다큐멘터리를 보는데 체크무늬 셔츠를 입은 미국 농부를 보고 그게 쿨하다고 느꼈대.”

“아. 그래.”

“그래서 황 할아버지는 백구와 캘리포니아로 떠났지. 한동안 그 둘은 너무 행복했어. 하지만 캘리포니아에 토네이도가 분 거지. 그렇게 백구와 할아버지는 헤어졌어. 그런 백구가 살아남아서 황 할아버지를 찾아다니는 감동 재난 어드벤처라고 적혀 있군.”

“그게 대체 왜 보고 싶은 거야? 시나리오 어떤 멍청이가 쓴 거야? 사람들이 좋다는 걸 무조건 다 때려 박은 이상한 내용이잖아.”

“그래! 완전 이상하지 않아?! 이 이상한 영화 대체 뭐야?! 하는데 이 네 글자를 보는 순간 너무 보고 싶어! 이건 참을 수가 없지.”

“하아. 뭔데?”

“감, 동, 실, 화.”

“이게…… 실화야? 그게 무슨.”

“그러니까! 그리고 이 매력적인 포스터를 봐!”

서윤이 도명을 향해 보고 있던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핸드폰 액정 속 영화 포스터에는 시골 동네에서 볼 법한 백구가 목에 미국 농부 체크 셔츠를 목에 두른 채 혀를 귀엽게 내밀고 있었다. 그리고 백구가 서 있는 배경에는 강렬한 토네이도가 몰아치고 있었다.

“이게 매력적이야……? 디자인도 최악인데, 이 해맑은 백구 얼굴하고 뒤에 무시무시한 토네이도의 이상한 조합은 뭔데?”

“완전 이상하지?”

“너 이런 b급 감성 좋아하냐?”

“아니, 아니 이런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이 백구 얼굴을 봐봐. 왠지 누군가가 떠올라!”

“……난 모르겠다.”

도명이 괜히 서윤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 사실 도명은 그렇게 말했지만 도명은 서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아 고민이다. 모두가 극찬한 공포영화와 이 백구 영화 중에 뭘 보자고 하지? 나 공짜 표 생겼다고 할 거란 말이야. 빤하고 고전적인 방법이지만 그래야 상대방이 부담을 덜 느낄 거 아냐. 형, 도화 씨 영화 취향 몰라?”

“내가 도화 씨 영화 취향을 어떻게 알아.”

***

약속한 시각에 도화가 도명의 가게로 내려왔다. 세 사람은 도화가 만든 낙지볶음을 먹기 시작했다.

“도화 씨 저 공짜 표 생겼는데 영화 볼래요? 다른 친구들은 다 약속이 있네요.”

식사 중에 서윤이 도화를 향해 자연스럽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

“공짜 표요? 무슨 영화인데요?”

도화가 낙지볶음을 입안에 넣고 씹으며 물었다.

“이거요. LOST BAEK GU.”

서윤이 도화에게 핸드폰으로 영화 포스터를 보여 주었다.

“아, 네. 공짜 표가 확실해 보이네요.”

***

서윤이 가고 난 후 도명과 도화가 나란히 서서 설거지를 했다. 도화는 설거지하는 중간중간에 서윤이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면이 있다고 주절거렸다.

도명은 처음에는 형식적으로 그의 말에 그렇다고 하다가 나중에는 형식적임 추임새도 안 넣었다. 결국 도화 혼자 떠들다가 저녁 식사의 뒷정리가 끝나갔다.

도화는 이제 도명이 어떤 그릇을 어디에 넣는지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공동 작업은 매끄러웠다. 도명은 설거지를 하는 내내 말이 없다가 도화가 마지막 그릇을 넣는 순간 넌지시 말했다.

“도화 씨, 맹랑한 구석이 있어요.”

“네?”

도화는 도명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몰라 반문했다. 도명은 도화의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에 한쪽 입꼬리를 비릿하게 올렸다.

“이 완벽하게 순진한 표정, 나 참.”

도명은 더 이상 이야기하기 싫다는 표정으로 마지막 정리를 했다.

“제가 뭘 어쨌다는 건데요.”

도화가 순식간에 굳은 표정으로 돌아서려는 도명의 팔꿈치를 잡았다. 도화의 손끝에 힘이 제법 들어갔다. 그러자 그런 도화의 손을 보는 도명의 눈이 조금 매서웠다. 

도화는 그런 도명의 눈빛에도 불구하고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제가 도화 씨 애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기 돔 앞에서 다른 남자 데이트 신청을 아무렇지 않게 받네요. 물론 제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눈앞에서 대놓고 그러는 건 좀 맹랑한 구석이 있는 거 아닙니까? 어쨌든 제가 도화 씨 연애에 간섭할 사람은 아니지만 저한테는 도화 씨 마음이 어느 정도 결정 나면 이야기해 줘야 예의인 겁니다. 혹시 모를까 봐 이야기하는 겁니다.”

“네?”

“이쯤 되면 이런 순진한 반응도 사실은 계산 아닙니까?”

“아니, 진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니까 그러는 거죠.”

“서윤이 데이트 신청 왜 받아 줬습니까?”

“서윤 씨요? ……아, 영화 보자는 거요? 그게 왜 데이트 신청인데요? 영화 같이 보는 게 뭐요. 지인끼리 볼 수도 있는 거죠.”

“도화 씨. 그게 공짜 표라는 말을 믿어요? 그 진부한 핑계를 믿는 겁니까?”

“그런 영화를 자기 돈 주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아, 그건.”

도명은 도화의 말에 순간 말문이 탁 막혔다. 도화의 추론은 어느 정도 상식적이었지만 도명의 가슴은 고구마를 한꺼번에 삼킨 듯 답답해졌다.

그렇다고 서윤이 그 영화를 선택한 이유들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하자니 그것도 뭔가 이상했다. 어쨌든 이 주제를 가지고 대화를 끌고 가다가는 대화가 옆길로 샐 확률이 높았다.

“서윤이 같은 사람이 같이 영화 볼 지인이 없다는 말도 믿고요?”

“그럴 리는 없죠.”

“그런데 왜 굳이 도화 씨에게 영화를 보자고 했을까요?”

“다들 서윤 씨한테 핑계를 댔겠죠. 시간이 없다고. 하지만 진실은 그게 아닐 거예요. 누가 그런 영화를 시간을 내서 보고 싶겠어요. 아무리 공짜라도 말이에요. 음, 그러니까 다들 너무 착해서 서윤 씨한테 영화 취향 이상하다는 말은 못 하고 에둘러 말했을 거예요.”

도화의 말에 도명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한심하다는 도명의 반응에 도화가 잔뜩 억울한 표정으로 언성을 높였다.

“제 생각이 맞아요! 누가 그런 영화를 보고 싶겠어요! 그것도 영화관까지 가서.”

“저기. 도화 씨. 하아. 아니 어쨌든 그러는 도화 씨는 그런 영화를 왜 보러 가겠다고 한 건데요?”

“너무 간만이에요. 다른 사람하고 영화관 가는 거! 예전에 영화관 참 좋아했었거든요. 그냥 영화관 가는 거 자체가 너무 좋아요.”

도화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러다가 도명을 향해 웃음을 참느라 광대가 봉긋해진 채 물었다.

“도명 씨는 서윤 씨가 저한테 데이트 신청했다고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오해가. 아니라. 하아.”

결국 도명은 지나친 답답함에 말을 하다 말았다. 

도화는 정말 그가 데이트 신청한 줄도 모르고 있는데 괜히 서윤의 마음에 대해서 말했다가 도화의 지금 기준에서는 평범한 외출에 이상한 설렘을 얹을 것 같아서였다.

“밤이 늦었으니 얼른 들어가서 자요. 내일 출근도 해야 하잖아요.”

“아, 서윤 씨하고 데이트 약속 잡은 줄 알고 도명 씨 기분이 안 좋았던 거구나.”

도화가 뒤돌아서는 도명의 뒤통수에 대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도명이 도화의 혼잣말에 다시 도화를 향해 뒤돌아섰다.

“기분 안 좋지 않았어요. 다만 도화 씨가 상대방에 대한 기본 예의를 모를까 봐 우려했을 뿐이지.”

도명이 힘주어 말했지만 도화는 그가 기분이 안 좋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설거지하는 내내 그의 심기가 안 좋아 보여서 괜히 분위기를 띄우려 이런저런 말을 했었다.

지금, 이 순간 도화는 아까 느낀 것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도화는 도명처럼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 이따금 왜 자신의 감정을 두고 거짓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도명 씨 파트너인 혁준 씨는 중간에 연애했다면서요. 혁준 씨는 도명 씨가 매우 시원스러웠다고 하던데. 혁준 씨 오해였어요?”

도화는 예전에 도명이 길들이느라 공들인 것이 손에서 떠나가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를 호소하던 모습이 생각났다. 지금 보니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까지 담담하리라는 법은 없었다.

“신경 안 써요. 그냥, 거짓말이 싫을 뿐이에요. 말해야 할 내용을 일부러 누락하는 것 또한 거짓말이에요.”

도명이 감정이 배제된 말투로 깔끔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도명은 더 이상 이런 소모적인 대화를 하기 싫다는 듯이 등을 돌렸다. 도화가 도명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도명을 뒤에서 안았다.

도화의 갑작스러운 포옹에 도명이 우뚝 섰다. 그의 몸짓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도명의 눈동자가 양옆으로 거세게 흔들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만큼 그에게 불안정한 정서는 없었다. 도명은 자신을 혼란스럽게 하는 도화를 뿌리치고 싶어서 손을 움찔거렸다.

“원래. 돔이라는 게 그런 거예요?”

도화가 도명의 등에 얼굴을 묻은 채 말했다.

“그런 게 뭔데요?”

“그러니까 언제나 감정이 없는 척하는 거 말이에요. 자신의 상실감조차 표현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진짜 저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포지션을 맡기가 싫네요.”

“상실감이라는 표현이 과하네요.”

“하다못해 아끼던 열쇠고리를 잃어버려도 사람은 상실감을 느껴요. 하루 종일 섭섭하고. 고작 용 모양 가죽 열쇠고리인데 그래요. 상실감이 뭐 얼마나 대단한 표현이라고 입 밖으로 못 내밀어요.”

도명은 용 모양 가죽 열쇠고리라는 말에 그가 예전에 도화에게 사 준 것이 생각났다. 도명이 고개를 도화를 향해 획 돌리며 물었다.

“제가 사 준 거 잃어버렸습니까?”

“아…….”

도화가 눈을 옆으로 굴리며 짧게 탄식했다.

“잃어버렸군요.”

“아, 결국엔 찾았어요. 그것도 퇴근 후 집 현관문 앞에서. 어쨌든 하루 종일 섭섭했어요.”

“사람이 참, 은근히 칠칠치 못합니다.”

“어쨌든 도명 씨는 언제나 괜찮은 척하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무슨 괜찮은 척이요?”

“나는 다른 사람들 때문에 마음 아플 일은 없을 거라고 주문을 거는 사람 같아요.”

“제가 도화 씨하고 다시는 못 놀까 봐 불안해하고 있기라도 한단 건가요?”

“그러면 안 되나요? 저도 나름 도명 씨가 2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공들인 사람인데요. 오히려 조금이라도 그런 마음이 들어야 정상 아닌가요? 당신이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말이에요.”

“네, 솔직히 신경 쓰이네요.”

“와.”

도화가 도명을 향해 방긋 웃었다.

“참, 얄밉게 웃네요.”

도명이 도화의 볼을 제법 힘주어 늘리며 말했다.

“어쨌든 다 도명 씨가 오해한 거예요.”

“영화관 가고 싶었습니까? 그런 영화도 보러 갈 생각을 할 만큼?”

“혼자서는 몇 번 갔죠. 공포영화 기대작 나올 때마다. 그런데 정확히, 다른 사람하고는 못 갔습니다. 지금까지 이대로도 정말 괜찮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사실은 아니었나 봐요. 영화관에 다른 사람하고 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갑자기 좋았던 시절이 생각나는 겁니다. 학창시절에 뭐 하나 개봉할 때마다 친구들하고 우르르 몰려갔었는데.”

도화가 그립다는 듯이 눈을 감으며 말했다.

“진영 씨하고도 안 갔습니까?”

“네, 그놈은 영화관에서 영화 보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해요. 너무 크고 시끄럽대요.”

“그렇게 가고 싶었으면 한두 번은 억지로라도 가 달라고 할 수 있었잖아요.”

“저는 그놈한테 조금이라도 뭐든 강요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놈은 주기적으로 제가 너무 가기 싫은 축구장을 끌고 가는데도 말이에요.”

“진영 씨를 잃을까 봐 두려웠습니까?”

“그랬던 것 같네요.”

“음, 도화 씨 이번 주말에 영화 보러 갈까요?”

“정말요? 저 이번 주만 다른 사람하고 무려 두 번이나 영화 보는 겁니까?”

“네. 그동안 못 간 것이 많으니까. 몰아서 한다고 생각하면 되죠.”

“저, 이번에 꼭 보고 싶은 거 있었는데! 혼자라도 보러 가려고 했거든요.”

“설마, 그거입니까? 그.”

도명은 아까 서윤이 보여 준 공포영화 포스터를 기억해내려고 애썼다. 아까 도명이 워낙 무심하게 반응하느라 포스터를 자세히 보지 못했다. 하지만 도명은 결국 포스터에 적힌 영화 제목을 생각해냈다.

“사람의 숲.”

도명의 입술에서 떨어지는 제목에 도화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도화가 손가락 끝을 부산스럽게 흔들었다.

“네! 네! 네!”

“대답은 한 번으로 충분합니다. 도화 씨.”

“와. 도명 씨가 새로 개봉한 공포영화 제목까지 알고 있고!”

“그다지 알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도명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어떻게 알게 된 건데요?”

“그냥. 차 타고 영화관 앞을 지나가다 보게 됐습니다.”

도명은 서윤이 도화와 영화를 보기 위해 한참을 영화 내용과 리뷰 등을 검색하던 것을 말해 주기 싫었다.

“요즘 공포영화 마니아들에게 화제라고 하더군요.”

“네! 완전 화제에요! 그건 또 어떻게 알게 됐는데요?”

“운전하는데 제 옆 좌석에 앉은 직원이 말해 줬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거 보는 겁니까?”

도화가 도명의 손을 꽉 잡고 기대에 잔뜩 부푼 표정으로 말했다. 도명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네. 보죠.”

‘그래 봤자, 영화지. 그냥 영화다. 영화다. 영화다. 상업 영화들이 사람 겁주는 방식은 뻔해.’

“세상에 너무 완벽해요!”

“그렇군요. 완벽하군요.”

도명이 도화의 앞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기며 배시시 웃었다.

***

다음날, 도명이 가게 테이블에 앉아서 일을 하고 있는데 잘 차려입은 서윤이 도화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도명은 지금 복잡하거나 골치 아픈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데 갑자기 관자놀이가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도명이 커피를 새로 내리고 있는데 도화가 2층에서 후다닥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도화는 숨이 차는지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도명은 순식간에 밀려오는 불쾌감에 괜히 커피잔을 탁 소리 나게 놨다.

“확실히 불안하고 불쾌하네.”

도명은 도화의 말을 상기했다.

‘그러면 안 되나요? 저도 나름 도명 씨가 2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공들인 사람인데요. 오히려 조금이라도 그런 마음이 들어야 정상 아닌가요? 당신이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말이에요.’

“그래 그런 마음 들 수도 있지. 내가 백구한테 들인 정성이 얼마인데.”

도화는 갑자기 집 앞이라는 서윤의 말에 놀라서 내려왔다. 서윤이 도화의 흩뜨려진 옷을 정리해 주며 말했다.

“어, 그렇게 뛰어 내려올 필요는 없는데요. 제가 지나치게 일찍 도착한 거잖아요.”

“어, 그런데 우리 영화관에서 보기로 한 거 아닌가요?”

“날씨가 너무 좋잖아요.”

“날씨가 너무 좋은 거하고 서윤 씨가 여기까지 온 거하고 무슨 상관인데요?”

“영화관 가는 길에 진짜 보기 좋은 길이 있거든요.”

서윤이 도화에게 카메라에 담은 풍경을 보여 주었다. 도화가 작은 카메라 화면을 공유하기 위해서 서윤의 옆에 어정쩡한 자세로 섰다.

그러자 서윤이 자연스럽게 도화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그러자 도화가 서윤의 옆에 바짝 붙어 카메라 액정 화면을 보았다. 도화의 어깨와 서윤의 어깨가 자연스럽게 맞닿았다.

“와- 이런 곳이 있어요?”

“네.”

“그런데 진짜 사진작가는 뭔가 다르긴 하네요.”

“뭐가 다른데요?”

“그냥, 사진 속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요. 제가 찍으면 와- 하는 감탄사가 나오는 곳도 막상 사진 찍어 놓으면 눈으로 본 것보다 못한 느낌을 받거든요.”

“여기는 실제로도 좋아요. 시간 여유 있으니까 산책 어때요? 산책 좋아해요?”

“네.”

“정말로요?”

“산책 너무, 너무 좋아합니다.”

“네! 저도 너무너무 좋아합니다.”

도명은 서윤과 도화가 자신의 가게 앞에서 카메라 속 화면을 공유하며 바짝 붙어서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면서 입술을 비틀었다.

“저 자식, 또 자기 밥줄로 사람 꾀네. 빤한 놈. 수법이 어떻게 대학생 때 이후로 발전을 하지 않는지 모르겠군.”

그리고 이내 도명은 서윤이 저 수법으로 얼마나 수월하게 원하는 사람과 연인관계가 됐는지를 상기하며 얼굴에 웃음기가 싹 가셨다.

***

영화가 시작하는 시간이 애매하게 20분 남았다. 무언가를 하기에는 짧고 가만히 있자니 지루한 시간이었다. 영화를 기다리는 동안 서윤은 도화에게 자신이 찍은 것을 보여 주었다.

“미안해요. 도화 씨를 좀 몰래 찍었어요. 대놓고 찍으면 도화 씨가 자꾸 이상한 표정을 짓더라고요.”

서윤이 도화에게 카메라를 통째로 넘겨 주며 말했다. 자신이 이 카메라 안에 담긴 내용에 대해서 더 이상 숨기는 것도 없고 떳떳하지 못한 내용도 없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이것 봐요. 사진 찍자고 하면 이렇게 이상한 포즈를 하고 있잖아요. 그리고 잔뜩 굳은 얼굴 좀 보세요. 누가 보면 제가 도화 씨를 인질로 잡고 있는 것 같잖아요.”

서윤이 산책하다가 도화에게 사진을 찍자고 하니까 도화가 다리를 X자로 꼬며 손가락 끝이 구부러진 V자 모양을 했다. 

그 하나같이 우스꽝스러운 모습들이 서윤의 카메라 안에 담겨 있었다.

사진을 확대해서 보니 도화가 입꼬리를 애써 올리고 있는데 턱에 지나치게 힘을 주고 있는 모습이 영 어색했다.

“저는 사진을 찍은 적이 별로 없어서요. 그 증명사진 빼고 이렇게 사진 찍은 적이 거의 없어요. 그나저나 서윤 씨한테는 저보다 더 근사한 피사체도 많을 텐데 왜 굳이 저를…….”

도화가 민망한 듯 귀 옆을 긁적이며 말했다. 도화의 반응에 서윤이 빙긋 웃으며 자신이 도화의 신경이 다른 곳에 가 있을 때 찍은 사진을 보여 주었다.

자신의 모습에 별다른 애정이 없는 도화가 보기에도 자신의 모습이 너무 분위기 있어 보였다.

무언가를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는 유리알처럼 맑았으며 얼굴 근육은 부드러우면서 동시에 생동감 있었다.

도화가 자신의 얼굴을 낯선 사람인 것처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사진 속 자신의 얼굴이 마음에 드는지 입꼬리를 실룩샐룩 올리다가 서윤의 눈치를 보았다. 왠지 자신의 얼굴을 보고 만족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들키는 것이 부끄러웠다.

“이 정도면 몰래 찍은 거 용서해 줄 거죠?”

“네.”

도화가 고개를 푹 내리며 작게 이야기했다.

“사진 더 있어요. 넘겨 보세요.”

서윤이 자연스럽게 도화의 어깨에 몸을 반쯤 기울인 채 버튼을 눌렸다. 도화는 어느새 자신의 사진을 구경하는 재미에 빠졌다.

“도명 씨가 서윤 씨 실력 좋다고 했는데 진짜네요. 신기합니다. 이렇게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을 보니까 진짜 신기해요.”

도화는 정말 서윤이 찍은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드는지 카메라의 작은 액정화면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그러다가 남의 카메라에 너무 지문을 찍어대는 것 같아 급히 손을 거두었다.

“아니요. 특별한 건 도화 씨죠.”

서윤이 도화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저는 평범한 회사원인 걸요. 그것도 하루 종일 숫자하고 서류만 보는 그런 사람이요.”

도화가 손가락을 기계적으로 딸깍거리는 흉내를 내며 말했다.

“아닌데. 특별한데.”

서윤이 도화를 향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도화는 그런 서윤의 웃음에 따라 웃었다.

“아. 저…….”

“인화해서 줄게요.”

서윤이 도화가 하고 싶은 말의 운을 떼기만 했는데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아, 그냥요?”

“그냥이 아니면요?”

“아 음, 어떤 답례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입니다. 더군다나 전문 직업이신데.”

“자주 놀아 줘요. 말없이 찍어도 매번 용서해 주고.”

서윤이 약속하라는 듯이 손가락을 흔들면서 말했다. 도화가 머뭇거리면서 손가락을 걸었다. 그와 약속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괜히 그와 하는 모든 것이 쑥스러웠다.

“도화 씨 부끄러움 엄청 타네요.”

서윤이 도화와 눈을 마주치기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서윤은 어렴풋이나마 도명이 파트너들과 어떤 수위로 노는지 알고 있었다. 이렇게 수더분한 사람이 어떻게 도명과 어울리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서윤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 저는 도명 씨나 서윤 씨와는 달리 그냥 사람 대하는 게 익숙하지가 않아서.”

“아. 그래서 지금 불편해요?”

“아니요! 너무 좋아요. 그냥 사람하고 친해지는 과정이 낯간지러워서 그래요.”

도화의 말에 서윤도 낯간지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 이제, 영화 시간 다 됐네요.”

“아. 네.”

영화 시간이 다 되자 서윤과 도화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도화의 품 안에는 사이즈가 제일 큰 팝콘이 들려 있었고 서윤 역시 콜라와 오징어 같은 것을 한가득 들고 있었다.

서윤이 영화표를 준비했으니 영화 보면서 먹을 건 도화가 사겠다고 해서 일어난 참사였다. 영화관 온 김에 영화관에서 유명한 간식은 다 먹어 보겠다는 도화의 의욕이 그들의 품 안에 가득 쌓여 있었다.

“아. 우리 영화가 목적이 아니라 먹으러 온 사람 같아요.”

도화가 본인이 봐도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오래간만에 하는 영화관 나들이에 너무 신이 난 모양이었다. 도화는 뒤늦게 민망함이 밀려왔다.

“맞아요.”

“네?”

“사실, 이 영화 이상할 게 뻔한데. 영화관 분위기 즐기는 거죠.”

“……네?”

“정말 진지하게 이 영화를 기대하고 온 거예요? 여기 감동 실화라고 적혀 있지만 누가 이런 영화에 울겠어요. 전 감동보다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코미디를 기대하고 있어요. 원래 이런 영화는 까면서 보는 재미가 있거든요.”

서윤이 이런 영화를 자기 돈 주고 사 놓고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했다.

“아, 서윤 씨도 이 영화 이상하단 걸 알고 있었군요! 정말 모르는 줄 알고 전 혼자 영화 내용 괜찮은 척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단 말이에요.”

“이 영화 이상하단 걸 어떻게 모르겠어요.”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웃을 뿐이었다.

***

영화가 끝나고 영화관을 나오는 서윤의 눈가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도화는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휴지를 꺼내 서윤에게 건네주었다.

“저, 서윤 씨 괜한 오기 부리지 말고 그냥 울어요.”

도화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슬아슬하게 달려 있던 서윤의 눈가에 굵은 눈물방울이 뚝 떨어졌다. 도화는 그런 서윤의 반응에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 천천히 토닥거렸다.

“이런 영화 보고 누가 우냐고 그랬잖아요.”

도화가 웃음을 참느라 애쓰며 뒤돌아서 서성거렸다.

“도화 씨야말로 저를 놀리고 싶으면 그냥 놀려요.”

“아니에요. 그런 거.”

도화가 봉긋한 광대를 억누르며 정색을 하고 말했다. 도화는 괜히 잠겨오는 목 때문에 헛기침을 했다.

“아니, 어디서 그런 연기 잘하는 백구를 구해왔는지 모르겠어요. 아. 너무 귀여워서 죽는 줄 알았네요.”

“아, 음 백구가 왜요?”

“연기를 너무 잘하잖아요.”

서윤이 도화가 챙겨 준 휴지로 코를 풀며 말했다. 도화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관자놀이만 검지로 긁었다. 하지만 서윤은 계속 하고 싶은 말을 주절주절 내뱉었다.

“그 백구의 눈을 보니까 갑자기 눈물이 나오는 거예요.”

“아, 그 개가 연기를 잘하긴 하더라고요.”

“그죠!”

도화의 말에 서윤이 깊은 공감을 큰 목소리로 드러내며 말했다.

“백구뿐 아니라 그랜드 마스터 황 할아버지를 맡은 그 배우분도 연기를 잘하더라고요. 이딴 스토리에 어째서 다들 그렇게 연기를 잘하던지.”

“아. 음 그렇다고 눈물 나오는 정도까지는…….”

도화는 서윤이 기분 나쁠까 봐 자신의 목소리를 점점 줄였다. 하지만 서윤은 도화의 말을 분명히 들었다.

“저 눈에 페티쉬 있단 말이에요.”

“아. 그러니까.”

“어떻게 그런 눈들을 보고 같은 감정에 안 젖을 수가 있어요. 그 사람들 아니, 개와 황 할아버지는 진짜 배우예요. 너무, 너무, 대배우예요.”

도화는 역시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다시 서윤의 등을 토닥거렸다. 그러다가 계속 등을 토닥이는 것도 민망해져 오자 조심스럽게 입술도 열었다.

“쉬, 괜찮아요. 황 할아버지와 백구가 결국은 만났잖아요.”

***

도명은 일이 끝나고 단골 디저트 가게에 들렀다. 도명의 얼굴을 바로 알아본 여직원이 헤실헤실 웃으며 말했다. 단정하게 묶은 머리가 깔끔해 보이는 여자였다.

“어! 저번에 잔뜩 사 가셨잖아요. 사 간 지 얼마 안 되셨는데. 당분간 못 볼 줄 알았거든요. 아. 물론 자주 오셔서 싫다는 뜻은 아니고요.”

여직원이 마지막 사족을 안 붙여도 그녀가 뭘 말하고 싶은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그녀는 잘빠진 도명의 얼굴만 봐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도명은 가볍게 눈웃음을 치다가 쇼케이스 안에 진열되어 있는 매혹적인 디저트들을 눈으로 훑었다.

“저번에 사 가신 건 다 드셨어요?”

“아직이요. 냉장고에 마카롱이 아직도 한가득이죠.”

“아, 그런데 왜 벌써 다시 오셨어요? 아 물론.”

“알아요. 다시 봐서 반갑다는 뜻이죠?”

“네. 당연히 그런 뜻이죠.”

도명이 살포시 웃었다. 도명은 어디가든 이런 환대를 받는 것에 익숙했다. 사람들은 보기 좋은 사람에게 언제나 친절했다.

완벽한 옷차림에 가뜩이나 태어날 때부터 잘생긴 얼굴을 다른 사람들보다 공들여 가꾼 그가 하대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도명은 유리 케이스 안 화려한 디저트들을 보다가 난감한 듯 이마를 긁적였다.

“아, 마음에 드시는 게 없나요?”

“그렇다기보다 고르기 힘드네요. 제가 평소에 사 가는 것과는 조금 성격이 달라야 합니다. 그리고 아주- 특별해야 해요.”

“아주 중요한 손님이 오시나 봐요. 언제나 모임이 많잖아요.”

“네, 아주 중요한 손님이에요. 그래서 저번에 사 간 걸로는 만족스럽지 않아서 다시 왔죠.”

“아, 입맛이 까다로운 분인가요?”

도명이 아랫입술을 엄지로 훔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실 주면 뭐든 다 잘 먹긴 하는데, 그래도 오늘은 아주- 특별한 걸 먹이고 싶습니다. 왠지 저녁밥은 먹고 올 것 같아서 디저트를 고르고 있긴 한데, 흠.”

도명의 설명에 그녀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에도 도명은 까다로운 손님이었는데 오늘의 그는 더욱 까다로워 보였다.

“아, 제가 너무 뭉뚱그려서 말하고 있군요. 그러니까, 먹는 순간 집으로 돌아와 보니 여기가 역시 최고지, 라는 기분이 들게 할 만한 건 없나요? 아. 이 말도, 어렵네요.”

도명이 자신이 그녀를 난감하게 만들고 있다는 듯이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무언가가 생각났다. 하지만 이 까다로운 손님에게 막상 말하려니 긴장이 되었다.

“아, 하나 생각났어요. 제가 집에 들어갈 때마다 사 가는 게 있어요. 그런데 아주 특별한 건 아니라서 조금 조심스럽네요.”

“뭔데요?”

“당근 케이크요. 꼭 화려한 게 엄청 특별한 건 아니니까요.”

“그렇군요. 그럼 그걸로 하나 주겠어요?”

여직원이 도명이 산 케이크를 초콜릿 색 종이 케이스에 넣었다. 그리고는 민트색 리본을 달아 포장해 줬다. 도명이 가게에서 나오려는데 어떤 조금은 익숙한 얼굴이 도명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단순히 그가 잘생겨서 넋 놓고 쳐다보는 게 아니라 그를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어, 도명 씨?”

결국은 남자가 도명을 붙들었다. 그러자 도명도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술을 열었다.

“아, 오래간만이네요.”

도명 역시 상대방 얼굴이 익숙했다. 그는 그가 정확히 누구인지 알고 있지만 그의 이름만은 생각나지 않았다.

“한국에 돌아왔네요.”

“네.”

“다시 봐서 반가웠습니다. 그럼.”

도명은 상대방을 상대하는 시간을 무의미하게 생각했다.

“아, 저 도명 씨, 서윤이는 잘 지내나요?”

남자는 순간 아련한 표정으로 말했다. 도명이 이 남자를 상대하는 시간을 무의미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가 서윤의 전 애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서윤은 도명과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으니 그의 애인이면 그가 신경 써야 할 사람이었다. 하지만 애인 말고, 전 애인이면 도명이 시간을 쓸 이유 같은 건 없었다.

“못 지낼 건 없죠. 언제나 잘 지내는 녀석이잖아요.”

‘지금 특히 아주 잘 지내고 있지. 빌어먹을 놈.’

“아. 그렇군요. 아, 저.”

“그나저나 원하시던 것은 얻었습니까?”

“아, 네. 모두.”

원하는 모든 걸 얻었다는 남자의 표정은 그다지 완벽한 인생을 사는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잘됐네요.”

도명이 남자에게 축하한다는 듯이 형식적으로 악수를 했다.

“그런데, 완벽하진 않죠. 이제 옆에 서윤이가 없잖아요.”

두 사람은 완벽한 연인관계였다. 두 사람은 열정적으로 사랑했었다. 도명은 남자의 어깨를 꽉 쥐었다 손을 풀며 낮게 혀를 찼다.

“서윤이하고 다니면서 당신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을 본 건 한두 번이 아니에요. 잊어요. 여기에 두고 갈 때처럼 깔끔하게.”

“두고 간 게 아니에요. 전 두고 간 적 없어요.”

“알아요. 서윤이에게 화냈다면서요. 왜 자기와 같이 미국으로 가지 않느냐고. 본인이 어떤 기회를 잡은 건지 알기냐 하는 거냐고.”

“서윤이는 재능 있어요. 그러니까 어디 가서도 사진작가로서 커리어를 잘 쌓을 거예요. 오히려 한국보다 미국이 더 넓은 시장을 가지고 있고.”

도명은 더 이상 들어 주기 피곤하다는 듯이 미간을 주물럭거렸다.

“제가 알아야 하나요? 두 사람이 예전에 결론 내린 이야기에 대해서 말이에요.”

“네. 그렇죠.”

남자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도명은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가 지금 신경 쓰고 있는 건 방금 산 당근 케이크가 도화에게 얼마나 특별한 것으로 다가올지가 중요했다. 하지만 형식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전화해 봐요. 그놈은 숫자 외우는 것에 약해서 전화번호 잘 안 바꾸니까. 알잖아요.”

“아. 네. 서윤이는 그렇죠. 숫자도 잘 못 외우고, 끊임없이 길 잃어버리고. 은근히 손이 참 많이 가는데 또 막상 저 없어도 뭐든 잘하죠.”

남자는 계속 도명과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나 대충 대화를 마무리 짓고 가게 앞에 세워둔 차로 돌아왔다. 도명은 조수석에 케이크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운전석에 앉았다.

도명은 바로 집으로 출발하지 않고 거리를 바라보았다. 서윤의 전 애인이 멍한 눈으로 서 있었다. 도명은 그런 그를 보고 중얼거렸다.

“그렇게 애달프면 전화를 해라. 멍청아. 왜 하나같이 서윤이 전 애인들은 저 모양이야. 하나같이 나사가 빠졌지.”

도명은 혀를 차다가 운전대를 잡았다. 서윤은 잔상이 강한 사람이었다. 만나고 있는 순간보다 헤어지고 난 후 더 진득하게 다가오는 사람이었다. 

도명은 신호를 기다리다가 조수석에 가지런히 놓인 당근 케이크를 보며 중얼거렸다.

“당근 케이크, 네가 이길 거다. 한서윤 따위.”

***

서윤과 도화는 영화를 보고 난 후 삼겹살을 먹으러 왔다. 두 사람은 제일 구석 자리에 앉았다. 도화는 서윤이 왜 굳이 이런 자리에 앉는지 조금 의아했다.

그를 알게 된 지 얼마 안 됐지만 왠지 그와 어울리는 것은 풍경이 시시각각 변화는 번화가의 창가 자리였다.

“이 자리가 나름 명당이에요. 고기 연기 빼는 것도 세고 억지로 테이블을 만든 자리라 다른 테이블과 적당히 떨어져 있죠. 소리를 일부러 크게 지르지 않으면 아무도 우리가 무슨 대화를 하는지 몰라요. 직원들도 동선상 자주 왔다 갔다 하지 않고. 그러니까 손에 힘 딱 주고 숟가락 바닥에 떨어뜨리지 마요. 직원 부르기에는 조금 성가신 자리니까요.”

“아, 그러니까.”

“우리는 무심코 튀어나오는 말이 생각이 비좁은 사람에게는 큰 가십거리를 제공하니까. 뭐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솔직히 알 바는 아니지만 불필요한 평가질을 당하기가 싫죠.”

서윤의 말에 도화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윤의 말대로 그들이 자연스럽게 말하는 목소리 크기로는 그들이 어떤 말을 해도 사람들이 들을 것 같지는 않았다.

사실 굳이 옆 테이블과 가까워도 다른 테이블에 있는 사람들 말은 잘 안 듣지만 그래도 마음이 어딘가 불안했다. 그런 의미에서 서윤이 왜 이 구석진 자리를 명당이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저, 서윤 씨는 커밍아웃 누구누구한테 했어요?”

“처음엔 가족한테 했어요. 그 후에는 동성애자를 제외하고 친한 이성애자 친구 중에는 서너 명 정도요. 아, 직업적으로 엮인 사람들한테는 아무리 친해도 안 해요. 아 도명 형 직원들은 어쩌다 보니 알고 있고요.”

“저는 도명 씨하고 서윤 씨가 처음이에요. 아 고등학교 때 이성애자한테 고백한 거 빼고요. 커밍아웃한 이성애자 친구 세, 네 명은요?”

“아주 오래된 친구도 있고, 좀 특이한 취미 때문에 만난 여자 친구들도 있고요.”

도화는 서윤의 좀 특이한 취미라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도명의 영향 때문에 좀 특이한 취미라고 하면 그쪽으로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참고로 말하는데 도명 형 취미하곤 달라요.”

“아, 음. 도명 씨 어떤 취미요?”

도화는 순간적으로 서윤의 말을 알아들었으면서도 괜히 모른 척했다. 자신도 도명의 취미에 엮여 들어간 사람이니 괜히 찔리는 것이다.

“잠자리 취향이요.”

“아. 네.”

도화는 괜히 젓가락을 들었다 놓는 것을 반복했다. 서윤은 도화가 당황하자 괜히 삼겹살을 주문하며 대화의 흐름을 끊었다.

서윤의 말대로 이쪽 자리에서 직원을 부르는 것은 과도한 팔 흔들기와 높은 목소리가 필요했다.

“아. 여기 맛있네요.”

“여기가 특별히 맛있다기보다는 같이 있는 사람 분위기 타는 거죠.”

서윤이 잘 구워진 삼겹살을 도화의 앞 접시에 올려 주며 말했다.

“네, 네. 그런 것 같아요. 도명 씨는 삼겹살도 잘 굽거든요. 그런데 여기는 또 다른 분위기에요. 도명 씨는 삼겹살을 구워도 왠지 미국 바비큐 파티 분위기 나고 그러는데 지금은 진짜 삼겹살 먹는 기분 나네요. 이 편안한 느낌 왠지 그리웠어요. 이게 삼겹살이죠!”

“도명 형 요리 잘하죠. 과자 집 굽는 마녀같이.”

“과자 집 굽는 마녀요?”

“헨젤과 그레텔이요.”

“아!”

도화는 서윤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본 영화에 대한 짤막한 리뷰가 지나가고 자연스러운 대화가 무르익어갔다.

어느새 대화는 이어가다 보니 도명의 남다른 취향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 흘러 들어갔다.

“아. 도명 씨가 서윤 씨한테도 말했어요? 커밍아웃은 자기 이름 말하듯 하는 것 같은데 그쪽 취향은 웬만하면 말 안 하는 것 같은데요.”

도화는 서윤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서 심장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굳이 이 화제로 돌아가기는 싫었지만 그놈의 호기심이 문제였다.

“그쪽 계열 사람들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들한테 그쪽 이야기는 잘 안 하죠.”

“도명 씨는 동성애자인 사실보다 그쪽인 걸 사람들한테 이해받기 힘든가 봐요.”

“그게 말하고 나면 하는 행동 하나하나마다 특정 이미지에 대한 낙인이 찍히거든요. 뭐 동성애자도 비슷비슷하지만. 사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런 식으로 돌아가긴 하지만 어쨌든 이쪽 동네나 저쪽 동네에 대한 이미지에 대한 적대감은 비교적 크니까요.”

“도명 씨가 서윤 씨한테는 말 한 거 보니까 서윤 씨는 그런 거에 그렇게 신경 안 쓰나 봐요. 그러니까 말 그대로 사람을 있는 그대로 봐 주는 거죠.”

“아, 그런 줄 알았는데.”

서윤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중얼거렸다. 서윤이 쌈을 싸서 도화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러면서 ‘제가 찾은 황금 쌈 비율이에요.’라고 첨언하였다. 도화가 맛있다는 듯이 쌈을 씹으며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아, 진짜 너무 좋다.”

도화가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탁 치며 말했다.

“비율 최고죠?”

“아. 것도 그렇고요. 진짜 간만에 제대로 사람 만나는 기분이에요.”

“왜요? 그동안은 안 그랬어요?”

“제가 이번에 결혼하는 이성애자 친구가 하나 있거든요. 완전 오래된 친구예요. 진짜 좋은 놈이고요.”

“그런데요?”

“그런데 그놈을 만날 때마다 이 언저리가 뭉치는 기분이 들었거든요. 그것도 유일하게 남은 친구인데요.”

도화가 명치 부근을 손바닥으로 누르며 말했다. 서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도화의 말에 추임새를 넣었다.

“그런데 그 친구한테 커밍아웃을 못 했어요. 솔직히 앞으로도 할 생각은 없고요. 어쨌든 그래서 그런지 가장 절친한 친구와 있는데도 말조심하게 되고 조마조마한 기분이 항상 있어요.”

“아. 그렇죠. 어떤 기분인지 알아요.”

“아, 서윤 씨는 아는구나! 도명 씨는 본인이 커밍아웃이 취미라고 남들까지 쉬운 줄 안다니까요. 그냥 무조건 오래된 사이니까 커밍아웃해 버리라고 저번에 흘러가듯이 이야기하는데 열 뻗쳐서 저도 모르게 전화 꺼 버렸잖아요.”

“와- 도명 형이 전화 끊김을 당했어요?”

서윤이 고소하다는 듯이 실실 웃음을 흘렸다. 도명에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건 자신뿐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도명이 그의 섭에게 당했다는 생각에 통쾌했다.

“여러모로 바쁘기도 했었고, 어쨌든요. 제가 그 친구랑 10년이 넘었거든요. 그런데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서윤 씨가 더 편해요.”

“더 자주 놀자고요.”

“네! 네!”

“자주- 자주- 만나요.”

“네! 네! 네!”

“네. 자주~ 만나요.”

도화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청양고추를 넣어 속이 뻥 뚫리는 된장찌개를 숟가락으로 떴다. 그리고는 행복감에 어깨를 부르르 떨며 말했다.

“도명 씨는 제가 아까처럼 신나서 네를 두 번만 반복해도 그 특유의 깐깐한.”

“재수 없는.”

서윤이 입술이 툭 튀어나온 채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네! 재수 없는! 그 정확히 뭐라고 해야 하나, 갑자기 그 쉬운 단어가 생각이 안 나는데.”

“선생 같은 말투요.”

서윤의 말에 도화는 자신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반가움에 눈이 툭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네! 네! 그 선생 같은 말투로 굳이 지적을 한다니까요. 대답은 한 번으로 충분합니다. 도화 씨.”

도화가 마지막에 도명의 말투를 따라 하며 말했다. 서윤이 도화가 도명을 흉내 내자 웃음을 터뜨렸다. 서윤은 지금 즐거운 듯 웃고는 있지만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도화는 언뜻 보기에는 도명을 같이 깔 사람을 만나서 눈이 반짝거리고 있는 것 같지만 서윤이 보기엔 달랐다. 그의 눈빛에 도는 생기와 흥분감이 도는 낯빛이 딱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아이 같았다.

“그런데 서윤 씨는 도명 씨를 어떻게 알게 된 거예요?”

“대학에서 만났죠. 도명 형이 학과 선배고 그때 전 신입생이었고요. 둘 다 광고홍보 학과인데 둘 다 조금 과에서 벗어난 일을 하고 있죠. 도명 형은 졸업하자마자 갑자기 화원 일을 배우더니 잡지사를 차리고 전 대학교 때 취미가 직업이 됐죠.”

“와- 20대 초반의 도명 씨……. 서윤 씨는 도명 씨 처음 봤을 때 어땠어요? 너무 궁금해요. 20살의 도명 씨라니.”

‘파릇파릇한 도명 씨라니 상상만 해도 이상해!’

“아…… 음, 솔직히 말해도 돼요?”

서윤이 난감하다는 듯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네. 솔직히 말해 주세요.”

“신입생 환영회 때 도명 형을 보고 생각했죠. 아, 절대 친해질 형은 아니다.”

“왜요?”

도화는 왠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지만 일단 질문을 했다. 

서윤은 고민을 하다가 어쨌든 결국은 도명과 친하니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도화에게 할 이야기도 도명하고 이미 한 이야기라서 딱히 뒷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었다.

“사람이 지나치게 번지르르하고 완벽해서 뭔가 싸하더라고요. 이게 뭐랄까. 딱히 말로 흠잡을 건 없는데 동물적인 직감이 이건 아니다 싶은 느낌이요? 어쨌든 이게 다른 사람한테 뭐라 하기에도 애매해서 굳이 말하고 다니면 너무 괜찮은 사람을 까고 다니는 기분? 근데 웃긴 게 뭔지 아세요? 나중에 친해지고 나니 형도 저랑 같은 생각을 했다는 거예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 새끼와는 거리를 두자, 라고 생각했대요.”

“아 저, 사실 서윤 씨 기분 알아요. 저도 사실 도명 씨 첫인상이…… 어쨌든 도명 씨는 서윤 씨 같이 성격 좋은 사람을 왜요?”

“도명 형이 그때 과 대표였거든요.”

“아, 도명 씨는 대학교 때도 완장 차고 있었네요.”

“왜요?”

“아니 그냥, 도명 씨 학교 다닐 때 쭉 반장이었다고 해서요. 반장이 아닌 자신은 이상하다고 생각될 정도였다고…….”

“아, 형은 어릴 때부터 포지션이 그랬구나. 어쨌든 형이 저를 거슬려 한 이유가 그냥 과 대표로서 저 새끼는 과의 변수가 될 거다, 라는 느낌이었대요. 저 형하고 친해지고 나중에라도 그 말 듣고 억울해서 항의했거든요. 왜냐하면 제가 조금 자유로운 영혼이긴 해도 단체 생활 할 줄 아는 사람인데 말이에요.”

“오히려 다른 의미로 제멋대로인 건 도명 씨죠.”

“제 말이요! 도명 형이 규칙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니까요!”

“본인이 규칙을 정하니까요. 상대방 의견을 충분히 묻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본인 멋대로 하죠.”

“제 말이요!! 단체 생활의 귀염둥이는 저였단 말이에요! 도명 형은 단체 생활의 사관 같은 존재고요!”

서윤이 10년 치 고구마를 목구멍 아래로 한꺼번에 눌러 보낸 것처럼 크게 공감했다.

“어쨌든 이야기가 샜는데, 알고 보니 저를 지칭하는 별명도 있었다니까요.”

“뭔데요?”

“나비요.”

“아. 음 좋은 뜻 아닌가요? 나비 보통 좋은 뜻이 더 많지 않아요?”

“그 말 알죠? 나비의 날갯짓이 시간이 흐른 후 토네이도가 된다는 말이요.”

“나비효과요?”

“네! 그 나비효과의 나비요. 저 정말 별짓 안 했거든요. 그런데 과에 뭔 일만 일어나면 도명 형이 저를 지그시 노려보고 가는 거예요. 그리고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대요. 아. 저 나비 날개 찢어 버리고 싶네! 라고!”

“아. 무서워!”

도화가 서윤의 말을 듣는 순간 본능적으로 두 팔을 감싸며 소리쳤다. 

서윤도 떨리는 아랫입술을 감싸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도화는 당신의 공포를 충분히 공감한다는 듯이 서윤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그리고는 힘내라는 듯이 쌈을 싸서 서윤의 입에 넣어 주었다.

“도명 형 습관이 하나 있는데 저를 나비라고 부른 것처럼 속으로 상대방을 별명으로 부르거든요.”

“아 저도 있을까요?”

“음, 아마 있을걸요.”

“하지만 저를 별명으로 부른 적은 없었는데요.”

“도명 형이 저를 나비라고 부르고 있단 걸 얼마 만에 알게 된 줄 알아요?”

“아, 음. 한 6개월 정도요?”

“3년 만에 알게 됐어요. 그것도 엄청 친해 져서 서로의 첫인상에 대해서 솔직히 이야기하다가 형이 정확하게 알리려고 작정한 상태에서 ‘나비’ 이야기를 한 거죠. 도명 형은 생각보다 속으로 상대방의 별명을 습관적으로 부르거든요. 그런데 그걸 실수로라도 입 밖으로 안 내뱉는 게 정말, 소름 돋지 않아요?”

“아…… 저도 별명이 있을까요?”

“있을 거예요. 형은 상대방을 자기만의 단어로 치환해야 직성이 풀리거든요.”

도화는 도명이 자신을 속으로 뭐라고 부르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 그런데 대체 어떻게 친해진 거예요? 서윤 씨의 말만 들으면 둘은 절대 친해질 수 없는 사람들 같은데요.”

“사람은 비밀을 공유하면 친해지는 법이죠. 그렇게 서로 교묘하게 피하면서 대학 생활 하고 있는데, 게이 바에서 눈이 마주치고 말았어요. 그것도 아주 웃긴 상황에서. 그러니까 저는 게이 바에서 지나치게 화려한 생일 이벤트의 주인공이었어요. 전 애인이 그 바의 주인이라서……. 온 근방의 게이들이 모두 그날이 제가 생일인 줄 알았죠.”

서윤은 트라우마가 생각나자 이마를 손바닥으로 쓸어 넘기며 중얼거렸다. 그때 서윤의 나이는 23살이었다. 서윤이 그가 좋아하는 파란색 안개꽃으로 꽉 찬 무대에 민망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성능 좋은 클럽의 스피커에서는 생일 축하 노래가 우렁차게 들렸고 서윤이 살려달라고 무대 아래를 쳐다봤을 땐 그의 연상의 애인이 어서 감동해서 울라는 듯이 기대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결국 그 무대에서 내려가지 못한 서윤은 다른 의미로 눈물을 흘렸었다.

서윤은 트라우마를 넘기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열정적인 연상의 애인은 걸핏하면 절 클럽 무대에 세웠어요. 각종 기념일마다! 아, 이야기가 샜네요. 어쨌든 화려한 단상에 서 있는 저를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는 도명 형을 본 거죠. 정말 번쩍이는 불빛 아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딱 한 사람이 보일 수가 있더라고요. 어쨌든 도명 형도 그런 곳에 있었으니 같은 동성애자구나, 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괜히 불안해서 다음날 따로 불렀죠. 그리고 물어보니 역시 형도 동성애자더라고요. 그 후로 천천히 친해졌죠.”

서윤은 덧붙여서 아직도 도명이 자신의 생일마다 파란색 안개꽃을 보낸다고 중얼거렸다. 서윤은 꾸준한 도명의 악행에 언제 한 번은 도명이 보는 앞에서 안개꽃을 불태워 버린 적도 있었다.

다행히 드라이플라워라 꽃이 잘 타서 그의 분노는 극적으로 표현됐다. 문제는 도명이 그마저도 재밌어 죽으려 했다는 게 문제였다.

도화는 그 후에도 계속 서윤에게 도명에 대해서 질문했다. 서윤이 다른 화제로 돌려도 결국은 도명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왔다.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공통분모가 도명을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이야기 화제가 그쪽이라 튀는 거라고 해도 도화의 머릿속이 온통 도명으로 꽉 차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서윤은 자신의 등 뒤에 있지도 않은 도명이 거만한 웃음을 짓고 서 있는 것을 느꼈다.

‘도화 씨가 알에서 깨자마자 본 것이 하필이면 나라는 이야기는 귓등으로 들었어?’

도화는 이야기하다 보니 자신이 도명의 SM 파트너라는 것까지 튀어나왔다. 서윤이 대화상대로 지나치게 편한 사람이라는 탓이 컸다. 서윤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 과장해서 놀라는 척하거나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도명을 오래 알고 있다 보니 그쪽 세계에 대해서 익숙하다는 반응 정도였다.

도화는 점점 서윤과 같이 있는 것이 신났다. 진영과 있을 땐 그가 동성애자라는 것을 숨겨야 했고 도명과 있을 땐 그가 정한 규칙들 사이를 기웃거리느라 자신의 말들을 검열해야 했다. 하지만 서윤은 달랐다.

“아, 정말 뭐든 말할 수 있는 친구를 알게 된 것 같아 너무 기뻐요.”

도화의 말에 서윤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도화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서윤에게 더 이상 넘어오지 말라고 콘크리트 벽을 세워 놓은 것과 다름없었다.

“그래요? 저한테는 뭐든 말할 수 있어요?”

“네!”

도화가 마지막 남은 삼겹살을 입안에 집어넣으며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도명 형, 많이 좋아해요?”

“네?”

서윤의 칼날처럼 툭 튀어나온 질문에 도화의 젓가락 사이에서 잘 익은 양송이가 빠져나갔다.

“아, 아닌데요. 아. 좋아하긴 하죠. 그러니까 다른 뉘앙스로. 사람과 사람의 신뢰 관계, 뭐 그런 거 있잖아요. 아 갑자기 한국말이 어렵네요.”

“좋아한다는 말이 이상하게 애매하네요. 그러니까 도명 형 많이 사랑해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도화가 빠르게 부정했다. 도화는 서윤이 만들어 주는 편안한 분위기에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까먹었다. 서윤은 자신의 지인이 아닌 도명의 지인이라는 것이었다.

“네. 그렇군요.”

서윤은 도화가 이 주제로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 같지 않아 화제를 돌렸다. 하지만 이미 도화의 머릿속은 경고음으로 빨갛게 익어 있었다. 

서윤이 지나가는 말로라도 도명에게 ‘도화 씨 말이야, 형 사랑하는 것 같은데?’라고 했을 때의 상황이 아찔했다.

“저 서윤 씨. 말하지 말아 주세요.”

서윤의 예리한 질문 이후에 계속 혼이 반쯤 나가 있던 도화가 내뱉은 첫 마디였다. 그래서 서윤은 도화가 어떤 말을 하지 말아 달란 건지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우리 별말 안 했잖아요. 안 그래요?”

“네. 별말 안 했죠.”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보통 이런 경우 분위기를 다시 밝게 만들어 줄 사람은 서윤 쪽인데 서윤 역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도화는 괜히 손가락만 한 크기로 네모지게 썰어진 오이를 씹었다. 배는 거의 다 찼지만 돼지 껍데기와 소주 한 병도 추가로 주문했다.

“고마워요.”

일련의 침묵 끝에 나온 도화의 말은 고작 네 마디였다. 소주가 나오자 서윤이 도화의 잔에 소주를 따라 주었다. 도화의 손끝이 차가운 유리 표면을 초조하게 긁었다.

“저 자신도 지금껏 인정하기 싫었어요. 나도 모른 척하고 살았다고요. 그런데 그렇게 서윤 씨가 입 밖으로 아무렇지 않게 꺼내 버리면 전 어떻게 해요.”

도화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서윤은 그런 도화의 반응에 반사적으로 ‘미안해요.’란 말만 반복했다. 서윤의 반복되는 미안하다는 말에 도화는 급히 손을 내저었다. 이 슬프면서 황당한 상황에 결국 먼저 웃음이 터져 나온 것은 도화 쪽이었다.

“왜 웃어요?”

“그냥. 웃기잖아요.”

두 사람은 추가로 주문한 돼지 껍데기 1인분마저 다 해치우고 가게를 나왔다. 서윤이 택시를 잡았다. 서윤이 택시를 잡는 데 성공하고 두 사람은 택시를 탔다. 

서윤이 먼저 도화의 집 주소를 부르는데 도화가 손을 내저었다.

“오늘 단 하루만큼은 우리 건물주님 얼굴 안 보고 오늘을 마무리 지을 겁니다.”

“네? 왜요?”

두 사람의 길어질 것 같은 대화에 택시기사가 눈치를 줬다.

“그냥 문득 너무 미워서요.”

“아니, 그렇다고 집에 안 들어가요? 몰래라도 들어가요.”

“안 마주치고 몰래 들어갈 수 없는 구조라고요. 무슨 검은 셰퍼드처럼 밤마다 가게 앞 벤치에 앉아 있다고요! 집 뒤에 낮은 담장이 있긴 한데 그마저도 식물 모종으로 부비트랩을 만들어놨다니까요!”

“아, 그럼 어떻게 하게요?”

“서윤 씨 독립했다고 했죠? 오늘 처음 보는데 자고 간다고 하면 저 진상인가요?”

도화가 일단 말을 꺼내놓고는 서윤의 눈치를 보았다. 서윤은 일단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서윤이 안 된다고 하려는데 도화의 표정을 보니 거절의 말은 나오지 않았다.

“저는 괜찮아요. 도화 씨 말고도 다들 자기 아지트처럼 쓰니까. 아주 작지만 나름 게스트 룸도 있어서 자기도 좋아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도화가 택시 안에서 갑자기 깍듯하게 고개를 90도 꺾어서 인사했다. 서윤은 택시 기사에게 자신의 집 주소를 불렀다.

***

한편 도명은 테이블 위에 당근 케이크를 올려놓았다. 

도화에게 먹이기 전에 일단 자신이 먼저 맛보았다. 확실히 화려하진 않지만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 짓기 좋은 적당한 달콤함과 푸근한 감촉이 기분 좋았다. 마지막까지 코끝에 감도는 희미한 시나몬 향도 일품이었다.

도명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도명은 당근 케이크를 한 입 더 먹고는 신중하게 맛을 느꼈다. 당근 케이크에 어울리는 음료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일단은 우유도 준비하고 커피도 내릴 준비를 했다. 도명은 테이블 위를 응시했다. 

무심한 듯 테이블에 어울리는 간단한 패턴이 있는 테이블보도 깔았다.

그리고는 혼자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딱 이 느낌이지. 집에 와서 다행이야.”

***

밤 12시, 도명은 테이블 위에 놓인 당근 케이크를 잘라 먹었다. 도화에게 줄 케이크를 먹는다는 건 오늘 밤 그와 좋은 시간을 보낼 거라는 기대에 대한 체념이었다.

마지막 남은 미련처럼 작게 잘린 케이크 조각이 도명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도명은 케이크를 입에 집어넣자마자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도명은 자신이 방금 지은 이상한 웃음의 의미에 대해서 입안에서 잘게 부서지는 케이크 조각과 함께 곱씹었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 도명은 자신의 이상한 웃음에 대해서 정의 내릴 수 있었다.

‘아, 너라도 있어서 다행이야.’

승리의 케이크가 어느새 위로의 케이크가 되어 있었다.

30대 중반의 도명은 20대의 도명보다 뭐든 쉬웠다. 심지어 세상에서 가장 어렵다는 사람을 뜻대로 움직이게 하는 것도 쉬웠다. 

그가 어떤 절대적이고 신비로운 노트에 앞으로 일어날 일을 적으면 그대로 이루어지는 노트를 가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의 세상은 완벽한 균형을 이룬 것 같았다. 이 안에서 그는 하나의 작은 신이었다. 처음에 만났을 때는 미지의 존재였던 그의 식물들은 그의 관리 안에서 번성했고 가장 화려한 꽃과 달콤한 열매를 가졌다.

이 공간에 들어선 사람들은 최면에 걸린 것처럼 그에게 호의적이었고 그의 전화 한 통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은 열렬히 말하지 않아도 도명의 일을 처리해 주었다. 사람들은 도명이 예상한 대로 반응하고 움직였다.

그런 그가 작은 케이크 안에 담긴 균형감 좋은 달콤함에 위로받고 있었다. 케이크를 다 먹고 도명이 마음을 먹은 듯 두 개의 전화번호 사이에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전화번호 하나는 도화의 것이었고 하나는 서윤이었다.

도명의 손가락이 그 두 개의 번호 사이를 어지럽게 서성거렸다.

도명은 심호흡을 하다가 손가락으로 이마를 두들겼다. 역시 가장 현명한 판단은 주변을 정리하고 침실로 가서 잠이 드는 것이다. 그의 미련은 도화를 위해 준비한 당근 케이크를 다 먹어 치운 순간 처리가 된 것이다.

***

서윤의 작업실 구석에 있는 문을 열면 그의 개인 주거 공간이 나왔다. 

아주 작지도 크지도 않은 실용적인 주거 공간이었다. 그 주거 공간의 복층 다락방에는 서윤이 취미 생활을 하는 작은 공간이 있었다. 온갖 잡다한 것들이 상자마다 조금은 두서없이 섞여 있었다.

이 공간의 반은 여러 가지 만화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도화는 서윤의 비밀 서재에서 책을 읽느라 정신이 없었다. 서윤이 벽에 등을 기대고 만화책을 넘기고 있는 도화에게 잘 익은 컵라면을 내왔다.

컵라면 뚜껑 사이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참을 수 없는 냄새가 새어 나왔다. 

도화는 한밤의 라면 냄새에 저절로 코가 벌렁거렸다. 서윤이 젓가락을 비비며 하나로 묶여 있는 것을 두 개로 만들었다.

“이런 공간 완전 부러워요.”

도화가 읽고 있던 만화책을 보고 있던 그대로 뒤집어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엄청 가식적이지 않아요?”

“뭐가요?”

“작업실 서재에는 그럴듯한 아트 북이나 인문학 책으로 가득 채워놓고 남들이 볼 수 없는 곳에는 이런 만화책으로 가득 채워 놓고 있는 거요.”

“아니요. 엄청 인간적인데요.”

“이게요?”

“네. 원래 사람이란 그렇잖아요. 그럴듯해 보이고 싶은 건 어쩔 수 없다고요. 더군다나 돈 벌어먹는 직업과 관련되면 포장은 필수죠. 그리고 이런 만화책들은 확실히 서윤 씨 외에 다른 사람들이 많이 왔다 갔다 하는 작업실에 두기엔 위험하죠.”

도화가 컵라면이 잘 익었는지 젓가락으로 면을 휘저어 보며 말했다.

“확실히 위험하긴 하죠.”

“네. 절대- 안 돼요.”

도화가 면발이 충분히 익었다고 판단되자 면을 입안으로 후루룩 넣었다.

“이 시간에 먹는 라면은 왜 이렇게 맛있는 거야! 아. 대기업 맛.”

“도화 씨 라면 좋아해요?”

“사실 좋아하지 않아요. 너무 자주 먹어서.”

도화는 맛없다는 사람치고 잘 익은 면을 입속으로 야무지게 빨아올리고 있었다. 

서윤은 이쯤 되니 도화가 남들이 보기에 맛있어 보이게 먹는 재주가 있는 것뿐이고 본인은 남들이 보는 것만큼 맛있게 먹고 있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제가 지금 라면 싫어하는 사람한테 라면 대접한 거예요?”

“근데 이상하게 지금은 너무 맛있네요.”

“음, 12시라서?”

“같이 먹어서요. 이상하게 라면 별로 안 좋아하는데 같이 먹으면 맛있더라고요.”

“아, 그 느낌 뭔지 알아요.”

서윤이 반찬 통째로 가져온 김치를 젓가락으로 찢어 도화에게 권했다. 도명의 집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반찬 통에서 반찬을 접시에 안 덜고 먹다니!

음식 관리 면에서나 비주얼 면에서나 도명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도화는 서윤에게 김치가 너무 맛있다고 했다. 적당히 익어서 라면과 먹기에 완벽한 김치였다.

“이 김치 어디서 산 거예요?”

“가족 행사에요. 때 되면 집에서 다 같이 모여서 김장해요.”

“아. 그렇구나.”

도화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엄마가 담가 준 김치라니. 어쩐지 마트 김치와 묘하게 달랐다.

“서윤 씨는 애인을 어머니한테 보여 준 적 있어요?”

“네.”

“우와, 반응이 어떠세요?”

“첫 애인은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하시다가 이제는 익숙해지셔서 그냥 아들 하나 더 생겼다고 생각하죠.”

“정말요?”

“네. 도화 씨가 만약 제 애인이고 이렇게 잘 먹는 모습까지 보신다면 엄마가 도화 씨 김치도 챙겨 줄걸요.”

“아, 아주 잠깐이지만 혹했어요. 꼭 애인이어야만 해요?”

“음, 친구 사이면 엄마 마음에 아주 들어야 할 겁니다. 일단 당장은 걱정 말고 집에 갈 때 덜어 줄게요.”

“아, 진짜요?”

“네. 뭐 대단한 일이라고 그런 표정 짓고 그래요.”

“그냥, 제가 서윤 씨를 만난 게 길 가다가 엄청 액수 큰 수표 주운 느낌이라서요. 왠지 신이 있다면 이번 년도 운은 이걸로 퉁 치자고 할 것 같기도 하고.”

“우리 엄마 김치가 대단하긴 한가 보네요.”

“아니 김치 때문만은 아니라, 서윤 씨는 모를걸요. 오늘의 일상적인 하루가 저에겐 어떤 의미인지.”

“네, 모르겠으니까 어떤 의미인지 잘 말해 볼래요?”

서윤의 말에 도화는 생각에 잠겼다. 막상 표현하라고 하니 작문 숙제를 받은 기분이었다. 자신이 느끼고 있는 이 기분을 최대한 근사하게 표현하고 싶었다.

하지만 도화는 수학은 잘 했지만 언제나 국어엔 약했다. 그의 선생님들은 그가 언제나 문장을 지나치게 장황하게 만든다고 지적하곤 했다.

역시 이번에도 그가 원하는 대로 근사한 문장 같은 건 만들어지지 않았다. 결국 도화는 근사한 작문은 포기하고 느끼는 것 그대로 말했다.

“음. 이 기분을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제가 어떤 10평짜리 방에 갇혀 있었던 상황인 거죠. 거기에는 창문이 있긴 한데 열거나 할 수는 없고 관망만 할 수 있는 창? 그런 거요. 그 10평짜리 방에는 인터넷도 잘 깔려 있고 TV도 나와요. 그런데 나갈 수는 없는 거죠. 그리고 공기도 10평으로 제한되어 있어서 30년 동안 공기가 모자랄까 봐 숨을 의식적으로 옅게 쉬고 있는 거죠. 그러다가 마침내 문이 열리고 신선한 공기가 한꺼번에 폐에 들어오는 기분이요. 오늘 하루 동안 제가 말을 제일 많이 한 것 같아요.”

도화는 영감이 넘치는 시인처럼 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싶었는데 말들을 생각나는 대로 정렬하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다.

“우와, 엄청난 찬사 고마워요. 그러면 도명 형과의 하루는 도화 씨에게 어떤데요?”

“음…….”

작문 숙제를 하나 끝내자마자 이어지는 또 다른 작문 숙제에 도화의 미간이 심각하게 구겨졌다. 도화는 입가에 묻은 라면 국물도 제대로 닦지 못하고 머리를 굴렸다. 이번에도 시인이 되지는 못할 것 같다.

“도명 씨와의 하루는 불꽃놀이 같아요.”

“불꽃놀이요?”

“네. 불꽃놀이. 그 있잖아요. 그냥 바닥에 놓고 하늘로 터뜨리는 불꽃놀이 말고 막대 같은 것을 들고 있으면 그 끝부터 타는 거요. 그래서 빙빙 돌리면서 노는 종류의 불꽃놀이. 너무 황홀하고 모든 감각이 기뻐서 날뛰죠. 물론 폭죽은 바닥에 놓고 하늘로 날아가는 게 더 화려하지만 내가 이 작게 타오르는 불꽃을 직접 들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감각이 더 생생하게 날뛰죠. 그러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이걸 들고 있다는 게 너무 무섭기도 한 거예요. 놀이가 길어질수록 언젠가는 놓아야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조금만 더-를 외치고 있는 느낌이에요. 도명 씨와 지낸다는 건, 그런 느낌이에요.”

“그렇군요.”

“제가 도명 씨를 정말 언젠가는 놓아야 할까요?”

도화가 라면 국물에 떠다니는 면을 젓가락으로 휘저어 건지며 여상한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의 질문은 질문을 받는 사람에겐 너무 무겁고 생각을 복잡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적어도 겁에 질려서 놓진 말아요.”

서윤은 도화의 어려운 질문에 깔끔하게 답했다.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모르겠어요.”

“맘껏 사랑하고 얽히고 얽혀 보라고요.”

“불꽃놀이 위험하게 하면 안 되는데…….”

도화가 마지막 라면 국물까지 깨끗하게 들이마시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잘못해서 손을 데어도 그게 맞아요. 도화 씨말대로 고작 불꽃놀이라면 손가락 정도 데이겠죠.”

“도명 씨가 이미 경고했어요. 넌 섹스 파트너 관계와 연애를 헷갈리고 있다고. 무려 두 번이나. 이상하게 세 번째 경고는 앞의 두 경고보다 더 두려운 느낌이 있잖아요. 그리고 도명 씨의 다른 섹스 파트너도 그러는데 도명 씨가 사랑을 요구하는 관계를 유지한 적이 없다고도 했어요.”

“그래도.”

“음 조금. 남의 이야기라고 쉽게 이야기하는 느낌인데요.”

“쉽게 이야기하는 거 아닌데요.”

“진짜 진지하게 도명 씨를 마음껏 좋아하라고요? 도명 씨가 이미 경고했다는 말 못 들었어요?”

“네, 그리고 표현도 막 하고요. 확성기라도 빌려주고 싶은 심정이네요. 도화 씨가 확성기에 대고 좋아한다고 소리칠 수 있게.”

“진짜요?”

도화는 미심쩍다는 듯이 고개를 양옆으로 기울였다. 그리고 다시 생각에 잠기다가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저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아요. 제가 고등학교 때 오래된 친구한테 고백했거든요. 그때 저는 모든 걸 잃었다고요. 다시 말하지만 이번엔 절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요.”

두 사람 다 라면을 완전히 비우자 이번에는 서윤이 오징어를 구워서 왔다. 이곳은 완벽하게 만화방 같았다. 그것도 두 사람만이 전세를 놓은 그런 환상적인 만화방이었다. 도화와 서윤은 오징어를 씹으며 단짝 친구처럼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고백 후에 그 오래된 친구를 잃었어요?”

“당연하죠. 이성애자였다고요. 빤히 알고 있었는데 바보 같은 실수를 했죠.”

“도화 씨가 실수라고 표현하니까 저도 일단은 실수라고 표현할게요. 그런 실수는 결국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요. 다만 조심하면 조금 더 늦게 터질 실수지.”

“어째서요? 저는 그때 실수 이후로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정말 뼈저리게 느꼈다고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만큼 아직까지도 무릎이 쑤셔서 잠이 안 와요.”

“상대방이 이성애자인 거 빤히 알고 있었다면서요. 그때 도화 씨가 잃을 것들에 대해서 몰랐어요? 두려움이 없었어요?”

“그땐 아마 어려서 지금보다 더 용감했을 수도…….”

도화가 목소리 끝을 뭉갰다.

“결국 터질 마음은 터지는 거 아닌가요? 안 되는 이유를 아무리 나열해도 결국은 그렇게 되어 버리는 거예요. 그때 도화 씨가 어려서 할 수 있었던 게 아니라, 그냥 마음이 터진 것뿐일 수도 있죠.”

서윤은 더 이상 이야기하면 자신이 자신의 주장을 너무 답인 것처럼 말하는 것 같아서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화는 서윤의 말에 두려움을 느낀 듯 손톱을 물어뜯다가 다시 보고 있던 만화책으로 정신의 반향을 돌렸다. 서윤은 도화의 무릎에 누워서 자신이 좋아하는 만화책을 정독했다.

그러다가 문득 서윤이 시계를 보았다.

“우와. 벌써 한 시예요.”

“아, 저는 서윤 씨만 괜찮다면 여기서 이거 다 읽고 자러 들어가도 되나요?”

“뭔데, 못 끊고 그러는 건데요?”

서윤이 도화가 보고 있는 만화책을 자신에게로 가져왔다. 만화책 표지에는 검은 머리를 한 냉철해 보이는 남자가 볼을 살짝 붉히고 있었다. 제목은 ‘나에게만 다정한 폭군’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 이거 표지는 귀여워 보이는데 이 남자 집착공이잖아요. 집착공 중에서도 좀 심한 유형인데. 아 귀여운 표지와 제목에 속아서 전권 다 사 버린 거예요. 완전 달달한 건 줄 알았거든요.”

서윤이 속 쓰린 표정을 지었다. 일단 샀기 때문에 책장에 꽂아는 두는데 좋아하는 만화책은 아닌 모양이었다.

“집착공이요?”

“말 그대로 집착이 심한 탑이요.”

“아. 그런 뜻이구나. 집착공…….”

도화는 만화책 속 탑이 마음에 드는지 서윤이 알려 준 용어를 외우려 애를 쓰고 있었다.

“왜요? 마음에 들어요?”

“아, 그냥, 공이 질투하는 게 너무 설레요.”

도화의 말에 서윤은 무슨 심리인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도명 씨도 나한테 이러면 좋겠다.”

서윤이 도화의 혼잣말에 그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지나가는 말로 하는 거죠?”

“음…… 안 되나요?”

“현실에서 그러면 안 되죠!”

“아…… 음. 그런가요?”

“도화 씨 지금 플레이하고 현실하고 헷갈리는 거 아니에요? 현실에서는 그러면 안 돼요! 형도 그러면 안 되고 도화 씨도 그런 취급 받으면 안 되는 거예요.”

서윤의 단호한 말에 도화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눈동자만 양옆으로 굴려댔다. 도화의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에 서윤이 단호하게 올린 눈썹을 다시 부드러운 모양새로 내리며 도화의 허벅다리 위에 다시 누웠다.

“아, 저 지금 지나치게 진지했죠. 어쨌든 현실에서는 부재중 통화 10통만 넘어도 순간 이게 뭔가 싶을걸요.”

서윤은 그렇게 말하고 자신이 보고 있던 것을 다 보자 핸드폰을 봤다. 그때 서윤은 도명으로부터 부재중 통화 8통이 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서윤은 순간 소름이 돋았다. 다른 사람의 부재중 통화였으면 아, 그냥 급한 일이 있나 싶을 텐데 발신인이 도명인 걸 안 순간 머리카락이 빳빳해졌다. 

도화와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도명에 대해서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아, 서윤 씨 무슨 일 있어요?”

“아, 무슨 일이 있긴 하죠.”

“정말로요?”

“그러니까 제 클라이언트한테 전화가 왔었는데 못 받았네요.”

“이 시간에요?!”

전문적으로 칼퇴근을 하는 직장인인 도화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하, 진상 중의 진상 클라이언트라서.”

“아, 저는 프리랜서는 못 해 먹겠네요.”

“저 통화 좀 하고 올게요. 그나저나 그거 다 읽고 싶어요? 그거 권수가 꽤 돼서 밤새야 할 텐데.”

“아. 그렇겠네요.”

도화가 미련이 짙게 남은 표정으로 만화책을 내려다보았다. 두 주인공 주인수가 사귀는 것은 보고 자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솔직히 내일은 쉬는 날이라 딱히 밤새도 상관은 없었지만 집주인인 서윤이 피곤할까 봐 자기는 밤새도 괜찮다고 말은 못 했다.

“그거 빌려줄게요.”

“아 진짜요?”

“네. 아까 욕실하고 게스트 룸 알려 줬죠. 보고 있던 만화책은 빌려줄 테니까 걱정 말고 잡시다.”

서윤이 도화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러면서 서윤의 시선은 핸드폰 화면에 가 있었다. 타이밍 좋게 도명이 서윤에게 전화를 다시 걸었다. 

도화가 보고 있던 책들을 정리하며 서윤에게 자신은 신경 쓰지 말고 일 보라는 듯이 눈짓을 했다. 서윤이 도명의 전화를 받았다.

“아, 네. 유 대표님! 네. 네. 통화 가능하죠. 목소리가 왜 그러십니까? 당연히 유 대표님이 건 시간엔 전화가 올 거라고 예상 못 하고 있죠! 일부러 안 받은 건 아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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