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SM 나라의 앨리스
하얀 욕조 앞에 한 남자가 팔을 가죽벨트로 결박당한 채 가쁜 숨을 쉬고 있었다.
남자는 젖은 이마를 욕조 모서리에 기댔다. 단정했던 그의 앞머리는 흠뻑 젖어선 욕조에 빠져 있었다. 그의 검은 머리가 물속의 잉크처럼 퍼졌다.
“좀 처지는데, 분위기 전환 좀 해 볼까요?”
도명이 핸드폰으로 노래 선곡을 하고는 남자를 향해 싱긋 웃었다.
육중하면서 낭만적인 음향이 욕실의 벽을 튕기며 공간을 가득 채웠다. 허스키한 외국 남자의 목소리가 바이올린과 피아노 선율에 맞춰 나지막하게 울려 퍼졌다.
“민수 씨가 좋아하는 곡이에요. 마음에 들어요?”
도명이 남자의 뒷덜미를 손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다가 대답하라는 듯이 남자의 턱을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전혀 웃지 않은 채로 그를 응시했다. 남자는 눈물을 쏟아내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겨우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네. 맞아요.”
“그럼 즐겨 봐요. 한 30초 정도 전주만 들읍시다.”
도명이 욕조에 걸터앉아 구둣발을 까닥였다. 남자는 도명이 준 30초의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숨을 최대한 들이마셨다.
그가 좋아하는 곡이었지만 도명의 눈치를 보느라 완전히 노래를 즐길 수 없었다.
“그러면 안 돼요. 이 분위기를 즐겨야죠.”
도명이 손목시계를 응시하며 젖은 남자의 등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었다.
남자의 단정했던 하얀 셔츠가 물에 젖어 그의 몸에 비닐처럼 달라붙었다. 중간에 도명이 말을 시킨 덕분에 초조하게 시간을 대뇌이던 그의 흐름이 끊겼다.
서서히 도명이 틀어놓은 음악이 그의 고막 속을 파고들었다.
그때 도명의 손이 그의 뒷덜미를 잡고는 그의 머리를 욕조 속으로 처박았다. 모든 일이 갑작스럽게 일어났다. 그의 입장에선 갑자기 어둠 속에서 손이 튀어나와 그를 심연의 어둠을 향해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죽음 비슷한 망울진 공포가 그의 눈앞을 뒤덮었다.
도명은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서서히 발버둥 치는 그의 머리를 억눌렀다. 숨을 못 쉬는 남자의 팔뚝에 퍼런 핏줄이 섰다. 하지만 도명은 카메라 렌즈 같은 눈동자로 그의 모든 몸짓을 쳐다보았다.
결박당한 남자의 손이 도명의 옷자락을 처절하게 움켜쥐었다. 도명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중얼거렸다.
“아니죠. 아니죠. 이건 당신이 원하는 건 아니에요. 더 깊은 것을 원하잖아요.”
도명은 자신의 팔뚝 전체가 잠기도록 남자의 머리를 욕조에 더욱 깊이 처박았다.
도명의 표정에는 어떠한 망설임도 없었다. 이 상황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안달이 나 떨리는 그의 사지를 보고도 아무런 동정도 들지 않았다.
도명은 지금 그가 느끼고 있는 감정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도명은 그의 처절한 몸짓에서 기쁨의 메시지를 읽었다. 잘못 해독하고 있을 거란 의심을 들지 않았다.
사전에 그의 욕망에 대해서 많은 대화를 했고 호흡도 여러 번 맞추어 보았다. 하지만 그런 데이터에 대한 확신이 있어도 사람들은 흔들렸다. 하지만 도명은 달랐다.
욕조 안은 남자가 만드는 물거품으로 보글거렸다. 남자는 겨우 잡고 있던 머릿속 어떤 실이 끊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왔을 때 시야가 환해졌다. 물이 고막 안에 가득 찬 느낌뿐이었는데 희미한 음악이 그의 고막 안에서 부유하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시각과 청각은 점점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곧장 터질 것 같던 그의 폐도 어떤 해방감에 크게 꿈틀대는 느낌이었다.
남자가 좋아한다는 노래가 감정의 절정에 도달하고 클라이맥스 부분이 다가왔다.
남자는 숨을 거칠게 내뱉어 대며 그의 노래를 온전히 느꼈다. 도명은 헐떡이는 남자의 젖은 등을 쓰다듬으며 그의 귓가에서 속삭였다.
“수고했습니다.”
도명은 남자의 팔에 걸린 결박을 풀어 주었다. 그리고는 남자를 결박했던 그 벨트를 다시 바지춤에 맸다. 찰칵거리는 쇳소리가 깔끔했다.
도명이 욕실에 걸려 있는 수건으로 젖을 팔을 닦았다. 도명은 남자의 머리를 더 깊이 처박느라 소매를 걷어 올린 것을 내렸다. 그리고는 소매 단추까지 완벽하게 채웠다. 도명은 고개를 양옆으로 풀었다.
남자는 아직도 허파의 뻐근함과 정신의 몽롱함에 빠져 있었다. 도명은 그럼 남자를 흘깃 내려다보고는 상태가 괜찮다는 확신이 들자 욕실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비추며 머리를 단정하게 쓸어 넘겼다.
플레이 중에도 단정했던 그이지만 더욱 완벽하게 자신을 다듬었다. 자신을 쳐다보는 도명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그의 완벽하게 정리된 모습은 이 안에서 그가 계산한 모든 것이 잘 되었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도명이 틀어놓은 음악이 완전히 끝났다. 도명은 자신의 핸드폰을 챙기며 구석에 반쯤 널브러져 있는 남자를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여운을 즐기다가 오세요.”
도명이 욕실에서 나와 어떤 복도로 걸어 나왔다. 복도에는 액자 안에 딱정벌레 표본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화려하고 단단한 껍질을 가진 그것들은 핀셋에 꽂힌 채 벽을 장식하고 있었고 액자 아래에는 표본의 학명과 잡힌 시기 같은 것이 적혀 있었다.
이 긴 복도에서 극명하게 밝은 부분은 핀셋에 꽂힌 다리가 여러 개 달린 키틴질의 표면들이었다.
도명이 긴 복도를 걸어 나오자 커다랗고 환한 거실이 보였다. 좁고 긴 복도는 적당히 어두워서 거실의 밝음을 더욱 극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거실에는 온갖 희귀식물들이 늘어져 있었다.
거실 가운데에는 8명은 족히 앉을 법한 커다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테이블에는 이 집의 주인인 혁준과 다른 사람이 치즈와 사퀴테리에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도명은 그곳이 익숙한 듯 빈자리에 앉아 그들과 함께 와인을 마셨다. 그러면서 그들이 먹고 있는 것에 대해 늘어놓기도 하고 시답지 않은 가십거리에 대해서 떠들었다.
그들이 그러는 사이 도명이 고개를 욕조, 물속에 처박혔던 그 남자가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등장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들 사이에 앉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빵에 사퀴테리를 얹어 입안에 밀어 넣었다. 남자가 도명을 향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브레스 컨트롤은 도명 씨만 한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조금이라도 마음속 흔들림이 있으면 그런 완벽한 브레스 컨트롤을 하지 못하죠.”
남자가 조금은 집착 어린 눈으로 도명을 지긋하게 쳐다보았다. 도명은 난감한 표정으로 혁준을 쳐다보았다.
“혹여 지나가는 마음속으로라도 도명 씨를 독점하려 들지 말아요. 내 돔이니까.”
도명은 혁준의 말에 두 손을 들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난 그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아, 그렇죠. 그 누구도 도명 씨를 독점할 수는 없죠. 음, 그냥 순간 말이 조금 이상하게 나왔다고 생각해 주세요.”
“여기 있는 사람들 다들 알고 있겠지만 저는 브레스 컨트롤에 가장 흥분합니다. 그것도 최대한 제 한계치에 가까울수록 좋아하죠.”
남자의 말에 혁준은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쪽도 참, 살기 힘들겠어요. 좋은 돔을 찾는 건 꽤 모험적인 거니까요. 특히 브레스 컨트롤을 주로 즐긴다면 정말 위험한 마약이죠. 안 그래요?”
혁준의 말에 남자도 인정한다는 듯이 와인을 들이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명 씨의 비결은 뭐죠?”
“무슨 비결 말입니까?”
“그렇게 흔들림 없이 완벽한 플레이를 할 수 있는 비결 말입니다. 자기 확신? 도명 씨는 자신의 욕망을 알게 된 것에 대해서 후회한 적이 없을 것 같네요.”
“먼저 민수 씨는 어떻습니까? 그런 욕망을 알게 된 것에 대해서 후회합니까?”
“지금까지 후회가 아주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글쎄요, 저는 이 맛을 모르고 산다고 생각하면 그게 더 아찔하네요. 도명 씨는요?”
“글쎄요, 하지만 어떤 욕망은 필연적이니까요. 피해 갈 수 없으니, 그냥 즐겨야죠.”
“피해 갈 수 있다면 피할 겁니까?”
“그럴 수 있다면.”
“왜요? 이렇게나 재능 있고 욕망이 넘치는 삶인데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도명은 자신도 알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
수요일 저녁, 도화는 도명의 가게 앞을 지나가면서 가게 안에 사람이 잔뜩 있는 걸 보고 걸음을 우뚝 멈췄다.
도화의 손에는 편의점에서 산 삼각 김밥 3개와 콜라가 투명한 봉투 안에 담겨 있었다.
최근 요리 연습을 한다고 손수 잘 해 먹고 살다가 며칠 해 보고 급격하게 피로해졌다.
방금 한 집밥을 먹는 것은 삶의 질을 풍요롭게 해 주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역시 매일 하는 건 무리였다. 그리고 도화가 재능이 아주 없는 편은 아니었지만 역시 도명만큼 맛있게 하는 것은 무리였다.
도명의 가게 안에는 전골냄비가 가운데 놓여 있었고 주변에는 정갈한 반찬들이 놓여 있었다. 환기하기 위해서 열어 놓은 창을 통해 맛있는 음식 냄새가 새어 나왔다.
가게 안에서는 도명이 SM을 하는 지인들과 모임을 가지고 있었다. 이 모임은 전에 혁준의 집에서 한 것과는 달리 모여서 직접 플레이를 하는 것은 아니고 그냥 사는 이야기에 SM 이야기를 향기로운 소스처럼 얹어 이야기하는 모임이었다.
“내가 그래서 민수 씨한테 도명 씨를 소개한 걸 후회했다니까요.”
“지금 혁준 씨 돔을 그 사람한테 뺏길까 봐 두려워하고 있는 거예요?”
요셉이 혁준을 향해 입꼬리를 살살 올리며 물었다. 요셉의 말에 소휘도 혁준을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제가 도명 씨를 독점하겠다는 게 아니라 상대방이 그런 기분을 드러내니까 기분이 유쾌하지 않다 이거죠.”
“도명이는 어떻게 하지? 이렇게 인기 많아서.”
소휘가 전골에 야채를 넣는 도명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다들 혁준 씨 말의 요지를 알아듣고도 놀리려고 못 알아듣는 척하는 거죠? 적당히 놀려요.”
“정말 혁준이 너는 도명 씨를 독점하고 싶은 그런 기분이 들 때 없어? 연인이니 뭐니 하는 그런 거 아니더라도 말이야.”
요셉과 소휘가 약혼반지를 낀 손을 서로 얽으며 말했다. 그러자 도명과 혁준, 두 사람 다 말도 안 된다는 소리 한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으며 웃었다.
“아, 도명 씨, 인기 정말 많네.”
“누님, 그만 놀리라고 했죠.”
도명이 소휘를 향해 다시 힘주어 말했고 소휘는 그게 아니라는 듯이 손을 내저으며 가게 창가를 가리켰다.
사람들의 눈이 소휘의 손끝에 따라가 보니 도화가 도명의 가게 창에 매달려 있었다.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도명을 동시에 쳐다보며 말했다.
“도명 씨, 그 스토커야!”
“그, 스토커군요.”
“스토커예요. 형.”
세 사람의 확신 찬 말투에 도명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도명이 잠깐 머뭇거리자 요셉은 기억 안 나냐는 듯이 소포 상자를 손으로 그리고 부연 설명을 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스토커는 아닙니다. 여러분.”
“스토커가 아니긴! 저 갈망하는 표정을 봐!”
“그건, 제가 아니라 이 음식일 걸요.”
도명이 전골의 내용물을 담은 그릇을 도화를 향해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도화가 도명이 그릇을 든 반향에 따라 고개를 따라 움직였다.
도화의 움직임에 도명은 확신에 든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도화의 손에 들린 편의점 로고가 찍힌 봉투가 보였다. 도명의 미간이 거칠게 좁혀졌다.
‘한동안 착하게 잘 해 먹는 것 같더니.’
“우리 도명이가 언제부터 그렇게 순진해진 거야!”
도명이 도화의 부실한 저녁 식사거리에 신경 쓰는 사이 소휘가 답답하다는 듯이 소리를 쳤다.
“아니요. 진짜 이게 먹고 싶어서가 맞아요.”
“형은 형이 얼마나 잘생긴지 몰라서 그래요.”
요셉이 말했다. 분위기가 이쯤 되니 도명은 도화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 여러분, 도화 씨는 제, 섭입니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도화 씨는 이 음식에 관심 있는 게 맞아요.”
도명의 말이 끝나자마자 침묵이 흘렀다.
도명은 말하고 나니 도화를 이들에게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것이 곤란하다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특히 혁준에게 그러했다. 도명은 혁준과의 관계에서 언제나 완벽한 돔이었다.
그런데 최근 도명은 도화와의 관계에서 그를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했다.
인정하긴 싫지만 오히려 돔인 그가 도화에게 휘둘린 점이 더 큰 것 같았다. 그것도 초짜를 상대로 말이다. 하지만 도명은 이 와중에 도화가 오늘 편의점 음식이나 먹고 있어야 한다는 것 또한 신경 쓰였다.
“저 스토커가 아니, 사람이 도명이 네 섭이라고?! 대체 그사이에 무슨 일들이 있었던 거야?”
소휘가 너무 황당한 나머지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도명은 이마를 긁적이다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에게 주목한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아니. 이럴 게 아니라 잡아 와! 요셉아! 저분한테 직접 들어야겠어. 어쩌다 우리 도명이와 그런 관계가 됐는지.”
“네?!”
창밖에서 도화가 묘하게 점점 자신에게 주목되는 분위기에 뒷걸음질을 쳤다. 자신도 모르게 너무 노골적으로 가게 안을 뚫어지게 쳐다본 모양이었다.
“어서, 지금 자기 집으로 올라가려고 하고 있잖아.”
“정말로요?”
소휘의 황당한 명령에 당황한 요셉이 어정쩡한 자세로 섰다.
그리고는 고개만 휙휙 돌리며 소휘와 도망가려는 도화를 번갈아 보았다. 소휘가 절도 있는 동작으로 사냥개에게 명령하듯이 손동작을 했다.
요셉이 크게 흔들리는 눈동자로 도명을 쳐다보았다. 도명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얼굴을 손바닥으로 감싸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사냥감처럼 잡아 오지 말고 와서 식사나 하자고 말하고 와요. 아니, 이럴 게 아니라 제가 갈게요.”
도명이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 같은 요셉의 가슴팍에 팔을 올리며 말했다. 도명이 가게 앞을 나왔을 땐 도화가 이미 자신의 집으로 가는 계단을 반쯤 올라간 후였다.
“저기, 도화 씨 저녁 같이할래요?”
뒤통수에서 울리는 도명의 목소리에 도화가 바삐 올라가던 계단 위에서 멈칫했다.
“식사요?”
“네.”
“아, 도명 씨는 이미 다른 사람들과 식사 중이었잖아요.”
“도화 씨만 괜찮다면 제 지인들과 함께 말입니다.”
“저분들은 괜찮데요? 생판 모르는 제가 껴도?”
“그게 오히려 문제인데, 저분들이 도화 씨와 함께 식사를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는 게 문제죠.”
“저하고요? 왜요?”
“네, 도화 씨 와요. 정확히는 식사가 아니라 질문할 것들이 많은 모양인데요.”
“저한테 물어볼 게 왜 많은데요?”
“그거야, 도화 씨가 제 새로운 섭이라서 그럴 겁니다.”
도명의 말에 도화가 놀라서 계단을 두 계단씩 후다닥 내려오며 도명의 옷깃을 잡았다. 도화의 얼굴은 부끄러움과 도명에 대한 분노로 발갛게 달아 올라와 있었다.
“네?! 제가 이상한 변태란 걸 생판 모르는 사람들한테 맘대로 커밍아웃을 해 버렸다고요? 본인이 커밍아웃이 취미라고 저까지 강제 커밍아웃시키는 법이 어디 있어요!”
“아, 그게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저 사람들이 자꾸 도화 씨를 제 스토커라고 말해서요. 아니라고 해도 도통 믿지를 않아서.”
“차라리 스토커가 낫죠! 아니, 잠깐 아닌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제가 왜 도명 씨 스토커인데요?!”
“그거야, 이 모든 일의 발단은 도화 씨가 제 소포를 마음대로 뜯어 본 순간 일어난 거 아닌가요?”
도명이 골치 아픈 듯 자꾸 주름지는 미간을 엄지와 검지로 주물럭거리며 중얼거렸다.
“비약이 너무 심한 거 아닌가요? 남의 소포 뜯어 보는 게 그렇게까지 엄청난 나비효과를 일으킨다고요?”
“남의 소포를 뜯는 건 확실히 엄청난 일이죠. 아직까지 반성이 없는 게 아주 괘씸하네요.”
도명이 도화의 이마에 손가락을 세게 튕겼다. 도화가 이마를 감싸며 앓는 소리를 냈다. 도명이 도화에게 그가 왜 지금 가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스토커로 낙인찍혔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이 모임이 어떤 종류의 사람들로 모인 건지도 설명했다. 설명을 듣고 나니 도화는 더욱 당황했다.
“아, 여러모로. 너무 긴장되는데요. 이쪽 선배님들이라는 거잖아요! 그리고 지금 제 이미지 너무 별로잖아요.”
“도화 씨가 불편하면 억지로 모임에 참석하게 할 순 없죠. 제가 말을 잘 해놓겠습니다. 아참, 그리고 누가 식사 그렇게 대충 하라고 했습니까?”
도명이 낮게 한숨을 쉬며 도화의 손에 들린 편의점 로고가 찍힌 비닐봉지를 쏘아 보며 말했다.
“최근 이틀간은 정말 제대로 잘 해 먹었어요. 사람이 어떻게 매일 그렇게 차려 먹을 수가 있는 거죠?”
“일단 집에 들어가고 음식 덜어서 올려 드릴게요. 그거 먹어요.”
그렇게 도화와 도명이 계단 앞에서 헤어지려고 할 때 요셉이 벽 너머에서 울먹울먹한 표정으로 도화를 쳐다보았다. 요셉은 도화와 눈이 마주치자 작게 인사를 했다. 그러자 도화도 얼떨결에 요셉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요셉 씨, 거기서 뭘 하는 겁니까?”
“아, 몰래 엿들으려고 했던 건 아니고 도명 씨가 너무 오랫동안 안 돌아와서요.”
“네, 바로 갑니다.”
“아, 저기 저분은 결국 식사에 참석 안 하시는 건가요?”
요셉이 도화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부담을 줬다.
“아, 저는 익숙한 분들끼리 있는데 괜히 분위기 어색해질까 봐. 초대는 감사합니다.”
“저, 괜찮다면 같이 식사하면 안 될까요? 웬만하면 그래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딱 봐도 소휘에게 명령을 받은 것 같은 요셉의 태도에 도명이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도명이 요셉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는 도화에게 무리한 요구는 그만하라고 못을 박았다.
요셉은 도명이 주는 압박에 도화를 설득하는 것을 포기했다. 요셉이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말했다.
“아,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순식간에 풀이 죽은 요셉의 어깨에 도화는 묘한 죄책감을 느꼈다. 갑자기 다시 계단을 오르는 도화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결국 그들에게 등을 돌렸다. 도화의 걸음이 조금씩 멀어지려고 하는 그때 요셉이 도명을 향해 말했다.
“혁준 씨도 안 그런 척하지만 많이 궁금한 모양이던데요.”
“혁준 씨가 말입니까?”
도명은 의무적으로 요셉의 말에 반응했다. 알맹이가 없는 말투였다.
“네, 당연히 궁금하죠. 혁준 씨도 도명 씨 섭인데요.”
요셉의 마지막 말이 도화의 귓구멍에 진득하게 파고들었다. 도화의 머릿속에서 ‘혁준 씨도 도명 씨 섭인데요.’라는 말이 메아리쳤다. 도화의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아, 저 도명 씨 지금 먹고 있는 게 전골 요리죠? 무슨 전골 요리인데요?”
“모츠나베입니다. 음, 쉽게 말하면 일본식 곱창전골입니다. 왜요?”
“조금 생각해 보니, 전골은 역시, 혼자 덜어서 먹으면 맛이 덜하지 않을까요?”
“꼭 그렇진 않습니다. 집에서 냄비에 넣고 데우면 비슷할 텐데요.”
“아, 그렇죠.”
도화가 핑계가 안 통하자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물러났다. 그때 요셉이 도명을 향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도명 씨가 뭘 모르네요. 전골 요리는 다 같이 먹어서 맛있는 겁니다. 안 그래요?”
“네, 그렇죠.”
도화가 요셉의 말에 반가워하며 맞장구쳤다.
“다 같이 먹으면 뭐가 달라지는데요? 대체.”
도명이 인간미 없는 말투로 요셉을 향해 말했다.
“도명 씨는 몰라도 우리는 알아요. 안 그래요?”
“네. 도명 씨는 그런 거 몰라도 우리는 알고 있죠.”
도명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분명 도화가 낯선 사람들과 식사하는 것을 꺼려 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아니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라는 것을 지금 깨달았다.
도화가 전골 국물과 건더기를 후루룩 마시는 모습을 모두가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도화는 그들의 시선을 분명 느끼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 전골을 맛보는 즐거움에 취해 있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도명의 또 다른 SM 파트너인 혁준을 보고 기가 죽었었는데 지금은 음식이 주는 기쁨에 취해 잠시 잊고 있었다.
“와, 정말 잘 먹네요.”
“도명이, 말 인정. 아까 도명이 말고 우리가 먹고 있던 음식 보고 있었던 게 분명해.”
소휘가 도화의 앞 접시에 전골을 퍼 나르며 말했다.
“제가 너무 보기 안 좋게 먹고 있나요?”
도화는 이제야 입가를 닦으며 자신에게 쏠린 시선들을 향해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다가 가장 신경 쓰이는 사람인 혁준에서 시선을 멈췄다.
“아니요. 보기 좋습니다. 만들어 준 사람이 기분 좋아질 먹는 사람의 반응이랄까요.”
혁준이 도화를 향해 말했다. 도화는 자신도 모르게 혁준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도명과 같이 세련된 사람이었다. 단순히 그가 걸치고 있는 게 모두 다 비싼 것들이라는 사실 외에도 도화의 기를 죽게 만들기 충분한 사람이었다.
사람을 대하는 것에 능숙했고 표정에는 여유도 넘쳤다.
사실 도화는 섭이라하고 하면 자신의 건너편에 앉아 있는 귀여운 스타일의 요셉 같을 거라 생각했다. 도명의 섭이라고 소개를 받긴 했는데 같이 있으면 있을수록 그가 그런 욕망을 가진 사람이라는 게 실감 나지 않았다.
“아, 혁준 씨는 정말 돔이 아니에요?”
“나, 이 반응, 많이 봤어.”
혁준이 지겹다는 듯이 요셉을 향해 중얼거렸다. 그러자 요셉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정확히, 혁준이는 마조히스트 기질이 조금 더 세지? 섭의 기질도 확실히 있지만 말이야. 하지만 역시 마조 기질 쪽 아닌가.”
“애매하게 섞였죠.”
혁준이 소휘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도화는 마조니 섭 기질이니 뭐가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자신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다른 건 모르겠고 저는 완벽함에 매료되는 편이라는 게 정확한 것 같네요.”
혁준이 도명을 훑어보며 말했다.
“저, 실례되는 질문이지만 도명 씨 택배는 왜 훔쳐본 거죠?”
소휘가 도화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리고는 비난하려는 게 아니라는 듯 최대한 표정을 부드럽게 지었다.
“아. 그거요.”
도화는 도명을 처음 만난 날 도명을 보고 했던 수많은 착각과 망상에 대해서 말했다. 말이 이어질수록 도화의 표정이 새빨갛게 익었다. 창피했지만 도화는 조목조목 이야기를 잘 했다.
“아무리 그래도 남의 택배를 훔쳐보는 건 역시 잘못된 거죠.”
도화가 이 말을 마지막으로 조금은 긴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도명을 빼고 사람들은 도화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웃음을 참느라 애쓰는 것이 보였다.
도화는 이야기를 끝내고 다시 전골을 입안에 밀어 넣기 시작했다. 민망하기도 하고 전골이 맛있었기 때문이었다.
“뭐 어때요. 혼났으면 됐죠. 도명 씨가 분명 혼냈을 텐데요.”
소휘가 약간의 야한 뉘앙스를 풍기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거기까지요. 조금만 더 하면 성희롱입니다.”
도명이 소휘의 건들거리는 손가락을 접게 하며 말했다.
“근데, 난 혁준이를 본 순간 참 도명인 자기랑 비슷한 분위기의 사람과 어울려 논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도화 씨 같은 타입은 좀 의외인걸.”
“도화 씨 같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데요?”
도명이 한쪽 눈썹을 올리며 말했다.
“왜, 있잖아. 너희 둘처럼 고상 떨고 새침 떠는 타입은 아닌 느낌?”
소휘가 도명과 혁준을 하나둘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도명과 혁준의 얼굴이 둘 다 묘하게 뚱해 보였다.
“도화 씨는 안 그런 척하려고 하지만 감정 표현이 정말 다채로울 거야. 이런 유형은 솔직히 도명이 네가 싫어하는 줄 알았지.”
“제가요?”
“응, 너는 모르겠지만 너는 도화 씨 같은 사람과 파트너 관계를 맺은 적이 없잖아. 있다 해도, 오래가진 못했잖아. 정확히는 상대방이 지쳐서 나가떨어졌다고 해야 하나.”
소휘의 말에 순간, 도화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도화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숟가락을 쥐는 손끝이 살짝 떨렸다가 꽉 힘을 주었다.
“아, 그래요?”
도화가 소휘를 향해 되물었다. 도명이 하는 것처럼 표정을 최대한 무미건조하게 지었지만 소휘의 눈에는 그의 마음의 동요가 한눈에 보였다.
지금 이 순간 소휘는 그가 도명에게 이미 깊이 빠져 있음을 알았다. 소휘의 눈동자가 도명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도명이 넌 언제나 완벽하지? 안 그래? 상대가 누구든.”
“네. 그렇죠. 상대가 누구든.”
도명이 소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눈꼬리를 부드럽게 휘었다. 도명이 얼른 가면을 썼지만 소휘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소휘는 알 수 있었다.
도명이 방어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5년 동안 이어졌던 이 견고한 관계들이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휘는 이 모임을 좋아했다. 그녀는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좋아하는 인간관계가 변하는 것은 싫었다.
매번 혁준과 도명의 관계가 자신과 요셉의 관계 같지 않다고 부추기긴 했지만 완벽하게 진심은 아니었다. 그저 SM 파트너들이 맺을 수 있는 여러 관계에 대한 토론 같은 성격이 더 셌다.
도명과 혁준은 완벽한 호흡을 가지는 있는 SM 파트너였고 이런 관계는 마치 결혼 관계처럼 오래갔다.
“내가 아까 말한 민수 씨가 많이 까다로운 상대거든. 아무래도 욕구가 위험하니까. 이해는 가지. 하지만 도명 씨는 그 사람의 욕망도 잘 맞췄으니까, 상대가 누구든 잘 맞추겠지. 도화 씨는 어때요? 도명 씨와 잘 맞아요?”
혁준이 도화를 향해 질문했다.
“그러니까 잘 맞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도화가 머리를 긁적이며 눈치를 살폈다.
“아. 도화 씨는 어떤 간단한 질문이든 어렵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어요.”
도명이 혁준과 도화의 대화 사이에 끼어들었다.
“도명 씨가 도화 씨를 잘 만족시켜 주냐는 뜻입니다.”
“아, 그러니까 설마, 섹스…에 대해서 묻는 질문입니까?”
도화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오늘 처음 만난 상대인데 지금 섹스 라이프에 대해서 묻는 건가 싶었다. 도화가 먹고 있던 메로구이 조각을 삼키다 말고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질문을 한 혁준과 마찬가지로 질문의 수위에 비해 사람들의 표정이 담백했다. 마치 오늘의 날씨에 대해서 떠드는 사람들 같았다.
“당연히 그걸 물어보는 거죠. 섹스 파트너끼리 만족시킬 게 그것 말고 뭐가 있겠어요. 아, 저 두 분은 좀 특수합니다. 섹스 파트너로 만나서 지금은 약혼까지 한 사이니까요.”
“아, 이게 그렇게도 되는 건가요?”
도화의 눈동자가 반짝거리며 소휘와 요셉을 번갈아 보았다.
“이쪽도 아무래도 인간관계다 보니 다양한 형태의 관계가 있죠.”
“도명 씨와 혁준 씨는……?”
도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관계가 좀 복잡한데.”
혁준이 손가락을 테이블 위에서 튕기며 운을 띄었다. 도화의 얼굴이 긴장감으로 물들었다.
‘뭐가 복잡한데! 난 깔끔하게 그냥 섹스 파트너란 말이야!’
“비즈니스 파트너이자 섹스 파트너죠. 그래서 우리 사이는 일상과 잠자리의 균형을 잡는 게 아주 중요해요, 아직까지는 저는 완벽하다고 느끼는데 도명 씨는 어때요?”
혁준이 도명에게 고개를 돌리느라 도화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작게 쉬는 것을 보지 못했다. 도명은 혁준에게 자신도 그렇게 느낀다고 말했다. 혁준이 도명의 말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도명 씨만 한 균형감각을 가진 사람은 드무니까요. 대화가 많이 돌아가고 있는 느낌인데 그래서 도화 씨는 만족해요? 도명 씨와의 관계에서 말이에요.”
혁준의 질문에 무심한 척 빈 접시를 정리하고 있던 도명의 귀가 도화의 쪽으로 기울였다.
“아, 저는…… 다 좋아서. 도명 씨와 하는 거라면 다. 다만.”
“다만?”
“다만, 서운한 감정이 많이 들어서요.”
“서운한 감정이요?”
“지나치게 엄격하달까요……. 아 물론 제가 이런 건 잘 몰라서 도명 씨가 잘못했다는 건 아니고요.”
“도화 씨.”
도명이 도화를 향해 미간을 구긴 채 쳐다보았다. 도화의 말이 플레이와 연애 감정의 경계를 흐리는 것 같아 불안했다. 그것도 이런 쪽으로 눈치가 빠른 사람들 앞에서 말이다.
“아, 네, 네!”
도화가 긴장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복종 교육 다시 기초부터 차근차근 합시다. 아직 개념이 안 잡힌 것 같네요.”
“네.”
잠시지만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해졌다.
“형이 그러니까! 서운하죠! 보상이 부족했던 거 아닙니까.”
“그래! 이런 게 처음이고 도화 씨처럼 감정이 풍부한 사람은 너무 몰아붙이기만 하면 안 돼. 너, 너무 잘하는 사람하고만 해서 기준이 너무 높은 거 아냐? 모두가 혁준 씨처럼 프로 변태가 아냐!”
“잠깐, 누님 누가 프로 변태입니까?”
요셉과 소휘가 도화의 편을 들며 도명을 몰아붙였다. 이쯤 되니까 도명도 억울한 감정이 들었다.
“그렇게 몰아붙이지 않았어요. 요즘 몸에서 사리 나올 정도라니까요.”
“아니에요. 제가 다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도화가 당황해서 이 난장판에 끼어들자 분위기는 더욱 난장판이 되었다.
아까의 난장판은 대충 정리되고 도명이 식기를 정리하고 있었다. 평소 때처럼 도화가 같이 테이블을 정리하는데 도명이 가만히 있으라고 해서 혁준과 가에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소휘와 요셉은 가게 앞 테라스에 나와서 노래를 부르고 있어서 도화가 대화할 사람은 혁준밖에 없었다.
도화도 어느새 이들의 분위기에 동화가 되어서 그와 SM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도화는 도명이 혁준을 상대로 바이브레이터가 아닌 성기 삽입하는 섹스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 저 물어볼 게 있는데요.”
“네, 물어보세요.”
“아, 저 그러니까, 저도 SM 레벨이 오르면 도명 씨가 그 삽입 섹스를 해 주나요? 저는 계속 도구 가지고만 해서요.”
“레벨이요……? 아. SM 경험 정도요. 어쨌든, 그게 레벨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네?”
혁준의 반응에 오히려 당황한 건 먼저 질문한 도화 쪽이었다. 혁준이 이상한 시선으로 도화를 쳐다보았다.
“아, 그러니까, 제가 너무…… 아니에요. 제 질문 잊어버려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엄청 이상한 질문해 버린 것 같은데요. 으아아아, 잊어요.”
“원하면 말하지 그래요? 도명 씨 상대방 욕구 잘 맞춰 주는 편인데요.”
‘그걸 어떻게 대놓고 말해요.’
도화는 도명에게 ‘저도 혁준 씨처럼 그 삽입 섹스 해요!’라고 조르는 걸 생각하니, 생각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혼자 얼굴이 빨개지는 도화를 보며 혁준이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도화가 도명을 대하는 뉘앙스가 이상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도명과 끝난 그의 전 파트너들의 얼굴들이 머릿속에서 지나갔다.
“저, 도화 씨, 도명 씨하고는 잘 맞아요? 형식상의 질문은 아니에요. 그러니까 솔직히 말해 봐요.”
“어떻게 사람과 사람 사이가 완벽하게 맞아요. 그것도 도명 씨하고 저는 아주 다른 유형의 사람인데요. 그런데 대부분은 잘 맞는 것 같은데요.”
“도화 씨가 참고만 있는 건 없어요?”
“네?”
혁준의 질문에 순간 도화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눈동자만 굴려댔다. 그의 질문을 듣는 순간 가슴부터 탁 막혀 버린 기분이었다.
“사람 관계란 것이 그래요. 참고만 있는다고 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그저 시간 벌기일 뿐이죠.”
도화를 향한 혁준의 말이 어딘가 의미심장했다.
“혁준 씨는 도명 씨하고 관계가 오래됐죠?”
“5년 됐죠.”
“와.”
도화는 자신도 모르게 부러움이 잔뜩 담긴 감탄사를 내뱉었다.
도명과 도화의 관계는 이제 처음 만날 날 기준으로는 2개월 중반쯤 됐고 파트너 관계를 맺은 지는 약 3주를 채워가고 있었다. 도화의 입장에서 혁준과 도명의 관계가 가진 시간은 어마무시해 보였다.
“굉장히 오래됐네요, 한 사람을 5년이나 만나는 게 생각보다 힘들잖아요.”
“음, 가벼운 시간은 아니죠. 그래도 그렇게 엄청난 시간은 아닌 게 중간에 전 애인이 있었거든요. 5년 동안 한두 명쯤 되겠네요. 결국엔 도명 씨와 가장 잘 맞아서 이러고 있지만요. 애인은 솔직히 지루하더라고요. 혹은 상대방이 제 성향 맞춰 준다고 하다가 포인트를 잘못 맞춘다거나. 아 정말 코미디가 따로 없었죠. 상대방이 그럴수록 오히려 정떨어지고 그랬어요.”
“도명 씨가 괜찮다고 했어요? 그, 혁준 씨 애인 있는 거요.”
“……저 도화 씨, 도명 씨가 이런 개념들에 대해서 안 알려 줘요? 우리가 애인 뭐 이런 건 아닌데 도명 씨 허락이 왜 필요하죠?”
“아. 그러니까. 음.”
“물론, 관계 조율은 필요하죠.”
“어떤 조율이요?”
“나나 도명 씨나 솔직히 상관은 없지만 상대방에 대한 배려로 SM 파트너 관계는 임시로 끊었죠.”
“아. 그러니까 일반적인 관계랑 정확히 어떻게 다르단 건지……?”
도화가 뒷목을 긁적이며 말했다.
“다른 점은 다시 돌아와도 바람난 전 애인 받아 주는 것처럼 감정적으로 복잡하지 않다는 거죠.”
“아 도명 씨는 다시 돌아온 파트너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 주는군요.”
도화는 여전히 자신이 이상한 SM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네, 하지만 되돌릴 수 없는 게 있어요. 도명 씨는 자신을 사랑했던 사람이 되돌아오는 것은 받아 준 적 없죠.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습니다.”
혁준은 도화에게 명심하라는 듯이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는 웃으며 여상스러운 말투로 도명이 준비한 후식을 먹으러 가자고 말했다. 도화는 그의 말에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입꼬리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