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39)

1681109797141.jpg

경계선의 정의

도명은 도화가 가고 난 후 5시간 정도 잠을 잤다. 그리고는 완벽한 모습으로 가게 문을 열었다. 노트북을 켜고 3시간 정도 일을 한 후 화원 안 식물들의 사진을 찍고 있을 때 도명의 회사 직원 혜원이 도착했다.

혜원은 검은색 시스루 블라우스에 검은색 바지. 그리고 카키색 외투를 입고 있었다. 손에는 벌새가 장식으로 얹어진 로즈골드 색 반지를 끼고 있었다.

혜원은 짧게 커트한 검은색 머리를 무심하게 쓸어 넘겼다. 그리고는 숨을 크게 내뱉고는 사진들이 잔뜩 있는 서류철을 도명의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도명은 하얀색 머그잔에 혜원이 좋아하는 헤이즐넛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도명이 간단한 쿠키와 헤이즐넛 커피를 혜원의 앞에 내려놓았다. 커피를 내려놓는 도명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가락에 머물렀다. 그러자 혜원이 손가락을 접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건 탐내지 마세요.”

“제가 뺏겠습니까?”

“그런 적은 없지만 눈빛이 불순했어요.”

“액세서리 취향이 너무 똑같아서 저도 환장하겠네요.”

“그럴 줄 알고. 대표님 것도 샀지요.”

혜원이 도명의 앞에 똑같이 생긴 반지를 내밀었다. 도명의 눈이 까마귀처럼 반짝거렸다.

“너무 똑같은 거 산 거 아닙니까?”

도명이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정확히 이게 가지고 싶었던 거잖아요. 안 그래요?”

“그렇긴 하죠. 그나저나 얼마입니까? 계좌에 넣어 줄게요.”

“제가 무슨 방문 판매 업자 같네요.”

“혜원 씨가 저한테 이것저것 많이 팔긴 했죠.”

도명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혜원은 도명이 내린 커피를 마시며 기분 좋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혜원이 입맛에 맞는 근사한 커피와 쿠키로 반지값을 대신하자고 했지만 도명은 반지값을 제대로 내겠다고 했다.

취향 일치로 같은 액세서리를 하고 다닌 탓에 도명이 커밍아웃 전에는 두 사람이 사귄다는 소문마저 났었다. 도명이 커밍아웃 후에도 그 소문이 100% 잠재워진 건 아니었다. 도명이 말은 동성애자라고 했지만 애인을 사귀는 것을 본 적이 없는 탓이었다.

그렇다고 섹스 파트너들을 보여 주며 커밍아웃을 증명할 수도 없고 난감했다. 위장 결혼이라는 말은 들어 봤어도 사내 연애를 숨기기 위해 위장 커밍아웃을 한다는 말은 어이가 없었다.

“나중에 저 때문에 오해 생겨서 애인이 안 생기는 거라고 뭐라 하지 마세요.”

“대표님이야말로 이성애자로 오해받아서 애인이 안 생기는 건 아니에요?”

“애인은 앞으로도 쭉 안 만듭니다. 그러니 혜원 씨 쪽이 분발하는 게 가망 있어 보이네요.”

도명은 원래 직원들과 이런 사적인 이야기는 안 하는데 너무 오래 일하다 보니 몇몇 직원들과는 어느새 이런 이야기들을 자연스럽게 섞고 있었다.

회사를 세울 때의 어려움과 열정을 공유한 사람들이라 그가 그은 선은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 도명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관계는 아니었지만 이 관계들은 안정적으로 잘 이어나가고 있었다.

“귀걸이는 안 하고 다니시네요?”

혜원이 도명의 희미해져 가는 귀를 뚫은 자국을 매만지며 말했다. 도명의 귓불에서 희미한 덩어리가 만져졌다. 감도가 예민한 부위였지만 만져지는 도명 쪽이나 만지는 혜원도 무미건조해 보였다.

“귀걸이는 역시 다들 눈에 거슬려 하더군요.”

“요즘 남자들도 꽤 하고 다니는데요?”

“제가 상대하는 건 아무래도 꼰대들이다 보니. 저도 돈 앞에서 취향이란 걸 숨기게 되네요.”

아무래도 도명과 계약서를 쓰거나 화원의 고가 희귀식물들을 사는 사람들은 자리를 제법 잡은 중년들이 많았다.

“이렇게 어울리는 모습을 보면 남자 것인지 여자 것인지도 모르면서. 귀걸이는 이상하게 기가 막히게 알아보더군요.”

도명이 벌써 새 반지를 끼워서 혜원에게 자랑하듯 보여 주며 말했다.

“누가 보면 대표님이 귀에 레이스 다는 게 취향인 줄 알겠네요. 그냥 남자가 귀걸이 하고 다니는 게 거슬리는 거 아니에요?”

혜원의 손목에는 은색 남자 손목시계가 걸려 있었다. 정교하게 돌아가는 무브먼트 속 세상이 마음에 들어서 밴드가 두터워도 사 버렸다. 그렇다고 모든 액세서리가 남성용은 아니었고 목에 건 초크 목걸이는 또 여성용이었다. 두 사람은 액세서리 취향이 잘 맞아서 이런 이야기를 자주 나누었다.

“귀 완전히 막혔는데요? 아깝네요. 꽤 고생하셨잖아요. 귀 퉁퉁 부어가며.”

“그러게 말입니다. 다시 뚫고 귀 퉁퉁 붓는 거 참자니 쉽사리 뚫지를 못하겠네요. 일할 때는 빼다 보니 금방 막힐 것 같아서 더욱 다시 뚫기가 힘듭니다.”

두 사람은 사담은 그 정도로 나누고 일 이야기를 시작했다. 혜원은 여러 이국적인 식물 사진들을 도명의 앞에 내밀었다. 다들 하나 같이 매력적이었다. 내년부터 도명이 새로 길들일 식물들이었다. 사진 옆에는 식물에 살고 있는 지역의 정보, 흙 정보 등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도명은 혜원이 준비한 자료를 보다가 곤란한 듯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다 좋은데 열정 과다 아닙니까? 아니면 제가 일 하는 모습이 보기 좋은 겁니까?”

“아, 그렇지 않아도 사무실에서 대표님 화원 규모를 늘려 보는 건 어떤지 말이 나왔어요.”

“왜요?”

“벌써부터 반응이 너무 좋아서요. 우리 잡지 구독자들이 대표님 화원 구경하고 커피나 허브차 마시고 온 후기를 적는데 만족도가 높아요. ‘BISCUIT FOREST’를 공간으로 느낄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고 하더라고요. 사진으로만 보던 식물들을 실제로 볼 수 있고 배치된 우리 회사 서적, 다른 대표님이 보는 책들도 좋대요. 허브차나 커피도 좋고요. 이곳의 분위기를 내는 모든 것들이 좋은 거죠. 한마디로 대표님 취향을 파는 거죠. 다만 실질적으로 수익을 내는 식물 판매는 워낙 고가라 구매하기 힘드니 구경하는 사람들만 늘 것 같으니 아예 기존 콘크리트 층이나 신규 구독자들을 위한 ‘BISCUIT FOREST’ 아틀리에를 만드는 건 어떨까요? 이대로 가다간 여기 관광지 될 것 같아서요. 여기 대표님 작업실로 만든 거잖아요. 대표님도 조만간 피곤해지실 거예요. 하루 종일 고객 응대만 하다가 하루가 가겠죠. 분점 만들어서 잡지하고 책도 정기적으로 오프라인으로 팔고, 차나 쿠키, 케이크 팔아서 추가적인 수익도 내고 구독자들도 만족시키면 좋지 않을까요? 식물 판매도 되면 좋고요.”

“여기서 더 늘릴 공간이 없는데요. 아니, 공간 문제 이전에 지금 제가 다루고 있는 정도가 딱 제 역량입니다.”

“공간 문제는 2호점을 내는 건 어떠세요? 일단은 실험적으로 30평 정도 되는 공간을 계약하고 인테리어 새로 해도 회사 재정 상태 괜찮다고 회계 팀 신 팀장이 그러시는걸요. 여기는 대표님이 일하는 공간이니까 지금처럼 그 기능만 충실히 해야죠. 지금 여기 있는 아이들은 대표님이 다 길들여서 매뉴얼화 되어 있잖아요. 매뉴얼화 된 건 다른 전문가한테 관리를 맡기고요.”

“다른 사람한테 말입니까?”

도명이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반문했다.

“네. 매뉴얼화 되어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번에 새 아이들을 더 많이 보여드리는 거예요.”

“나, 여러분한테 미움 받고 있는 거 아니죠? 혹시 제가 한가해 보이나요?”

도명의 눈이 수북하게 쌓인 자료 더미들로 향했다. 새 ‘BISCUIT FOREST’ 분점 기획안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들 시키지 않아도 너무 열심히 일하는 게 문제였다.

직원들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해 놓은 덕분에 도명의 일이 늘었다. 어쩌면 혜원이 가져온 새 반지도 도명의 정신을 잠시 돌리기 위한 달콤한 케이크 같은 걸지도 몰랐다.

“저는 일단 여기 애들 다른 사람한테 맡기는 건 반대입니다.”

“이쪽 일 전문가는 대표님만 있는 거 아니에요. 대표님이 유능하긴 하지만 경력 면에서만 보면 대표님보다 더 능숙한 분들도 많고요.”

“제가 이런 표현을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마음의 문제입니다.”

“아.”

도명은 자신의 입으로 나온 ‘마음의 문제’라는 말이 수치스러워서 시선을 괜히 창밖으로 돌렸다. 회사 일로 이런 감정적인 결정이라니.

“‘BISCUIT FOREST’ 분점 문제는 일단 회사 건물 안에 20평 정도 애매하게 쓰는 공간 있지 않나요? 거기에 실험적으로 새 화원 만들어서 여러분들이 생각한 거 해 봐요. 그 후에 다시 회의합시다.”

도명은 말을 내뱉은 후에도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혜원은 커피를 마시며 도명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았다. 이윽고 도명이 다시 입술을 열었다.

“네, 역시 일단 거기다가 실험적으로 만듭시다. 혜원 씨도 저 밑에서 꽤 배웠으니 혜원 씨만의 화원을 만드는 건 어때요? 이제 맡겨도 될 것 같은데요. 저는 혜원 씨가 오늘 가져온 기획안 중 3분의 1만 수용하겠습니다. 나머지는 혜원 씨가 직접 관리할 아이들을 선택해서 보고해요. 여기 아이들로 만든 모종들이 있으니 본사로 보낼게요. 잘해 봐요.”

도명의 말에 혜원의 표정에 설렘이 가득했다. 자신만의 화원이라니! 혜원은 벌써부터 구상을 짜는 듯 손가락을 가만있지를 못했다.

“그나저나 다음 출장에도 안 나가세요?”

“네.”

말투는 깔끔했지만 도명은 조금은 섭섭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이런 일들이 안 즐거워요? 새 아이들 만나는 일이요.”

“그렇지는 않아요.”

“그럼요?”

“남겨진 것들이 자꾸 눈에 걸려서 한 달 넘게 못 비우겠네요. 이젠.”

도명이 화원을 둘러보며 말했다.

“나이가 들어가나. 앞으로 만들어갈 것보다 내가 지금까지 만들어 놓은 것들이 더 신경이 쓰입니다. 플로리스트 되겠다는 사람 꾀어서 20대 절반을 타국에서 돌게 해놓고 저는 이제 못 떠나겠다고 하니 얄밉습니까?”

“저는 이제 이런 삶이 아니면 지루해서 못 견딜 것 같아요.”

“모험가 기질이 이렇게 센데 어떻게 남들이 꺾어놓은 꽃으로 평생 일할 생각을 했습니까?”

“그러니까 옷만 잘 차려입고, 그때는 아무것도 없었던 대표님 따라 커리어를 바꿨죠. 다들 미쳤다고 했어요. 지나치게 번드르르한 게 사기꾼이 분명하다. 여자 몸으로 해외로 나도는 건 너무 위험하다. 등등.”

“그랬습니까? 그럴 만도 하네요. 하지만 웬만한 놈들보다 혜원 씨가 기질이 좋았습니다. 다들 너무 별거 없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저, 좋은 파스타 집을 찾았어요. 조금 있으면 저녁인데 오늘은 같이 나가서 먹는 거 어때요?”

혜원의 제안에 도명은 생각에 잠겼다. 보통 도명은 웬만하면 직원들이나 클라이언트와의 저녁 식사는 거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도명은 자꾸 도화의 얼굴이 눈에 밟혔다. 그 풀에 죽은 얼굴이라니. 저녁이라도 잘 먹여서 기 좀 살려놔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 저녁은 이웃사촌과 먹으려고요. 아침에 이웃사촌한테 좀 못되게 굴었거든요. 파스타 집 주소는 공유해 주세요. 이웃사촌에게 물어보고 먹으러 가게요.”

도명은 혜원이 간 후 직원들이 만든 보고서를 다시 꼼꼼하게 읽었다. 30분 간을 집중을 하다가 고개를 들어 시간을 보니 도화가 퇴근할 시간이었다.

[한식을 더 좋아합니까? 양식을 더 좋아합니까?]

[집밥 같은 한식을 더 좋아합니다.]

도명은 기다렸다는 듯이 빠르게 오는 문자에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그렇군요. 퇴근은 했습니까?]

[네. 퇴근했습니다.]

퇴근 역시 했다. 도화는 역시 그의 일상을 한눈에 예측할 수 있어서 좋았다. 도명은 도화와 먹을 한식 메뉴에 대해서 고민했다. 집밥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들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역시 된장찌개인가. 그때 잘 먹긴 했는데. 다른 거 먹이고 싶은데. 최대한 다양한 음식을 먹여 줘야지.’

[오늘 저녁 김치 두부 전골 어떻습니까?]

이번에는 답장이 느렸다. 도명은 일단 냉장고에서 재료들을 하나둘 꺼내기 시작했다. 도화에게 물어보긴 했지만 그는 무조건 좋다고 할 게 빤했다. 도명은 문자 알림음이 울리자마자 핸드폰을 쳐다보았다.

[아, 저 선약이 있어서요.]

‘아침 일로 마음이 안 좋나? 이런 일로 이러면 곤란한데. 백구가 퇴근 후에 약속이 있을 리가 없잖아.’

문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도명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누구와 말입니까? 보통 저녁은 무조건 집에서 혼자 먹었잖아요.]

[진영이하고 밥 먹기로 했습니다. 도명 씨보다 먼저 연락이 와서요.]

‘아, 진영 씨가 있었지.’

도명은 이미 조리대 위에 올려놓은 재료를 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뭔가 혼자 설레발을 친 것 같아서 민망했다. 어차피 식사는 해야 하니 재료들을 다듬으려는데 뭔가 기운이 빠졌다. 기분이 이상했다. 별거 아니라면 별거 아닌데 왠지 백구가 갑자기 자신과 거리를 두는 것 같았다.

단순히 우연히 오늘 진영과 선약이 있는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찝찝한 기분이 자꾸 들었다. 도명은 미간을 찌푸린 채 조리대를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이런 거리를 두라는 건 아닌데. 진짜 말귀 못 알아먹네. 사람 피곤하게 하는 데 뭐 있는 사람이야.’

도명은 도화에게 전화를 하려다가 말았다. 뭔가 도화에게 자신이 질척거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자꾸 이상한 기분이 들어 뭐든 손에 잡히지 않았다. 도명은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은 도화에게 전화를 걸었다. 목소리를 직접 들고 그 목소리 뉘앙스를 확인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아, 네. 도명 씨.”

도화가 애써 조금의 불편한 감정을 숨기며 목소리 톤을 높이는 것이 느껴졌다. 다른 무심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도명이 그 뉘앙스를 모를 리가 없었다. 거기다가 도화처럼 사람 대하는 데 서툰 사람이 귀신같은 도명을 속일 수 있을 리가.

“진영 씨를 만나는 이유가 간단한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서입니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요.”

“무슨 대답이 그렇게 애매해요?”

“진영이 결혼 축하 겸, 하는 식사긴 한데 그렇다고 거창한 식사를 하는 건 아니라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아, 진영 씨 결혼합니까?”

“30이면, 결혼할 나이로 이상하진 않죠.”

“진영 씨만 안 불편하다면 우리 집에서 셋이서 먹는 건 어떻습니까? 친구의 결혼을 축하하는 건데 간단한 가정식 말고 간만에 스테이크라든지.”

“아 그건 좀.”

‘감히 내 말을 끊어 먹어……?’

도명의 이마에 힘줄이 바짝 섰다.

“진영 씨가 불편해합니까?”

‘그럴 리가 없잖아. 그때 보니까 나하고는 다른 의미로 사교성이 좋던데.’

“그놈이야 불편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게 아니라. 제가 불편해서요.”

“도화 씨가 왜요?”

도명의 목소리가 굳어졌다.

“진영이 저 그거……인 거 몰라요. 도명 씨는 또, 저랑 그런 관계는 아니긴 한데 어쨌든. 셋이서 식사하는데 은연중에 이상한 뉘앙스를 풍기면 제가 곤란해서요.”

“진영 씨가 도화 씨가 동성애자인 걸 모른다고요? 참고로 걱정 말아요. 가게에서 혼자 통화하고 있으니까요.”

“저는 도명 씨처럼 그날 이후 여기저기에 커밍아웃하지는 않아서요.”

“제가 본 진영 씨는 아무래도 동성애 커밍아웃은 상관없을 것 같은데요. SM 취향 공개라면 모를까.”

도명은 지금까지 살면서 도화에 비해 수많은 커밍아웃을 해왔다. 그래서 커밍아웃을 했을 때 괜찮은 건지, 아니면 괜찮은 척을 하는 건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진영은 확실히 괜찮아 보였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그 누구보다 담담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 생판 남이 게이인 건 괜찮아도 친한 친구가 게이인 건 안 괜찮을 수도 있지. 그래도 그렇게 오래된 사이면 담판을 내야지. 진영 씨가 받아들 수 있으면 계속 숨기는 것도 섭섭할 텐데. 못 받아들이면 그거대로 인정하고 넘어가야 하는 거 아닌가?’

“남의 친구라고 말 진짜 쉽게 하시네요. 저 이만 끊을게요! 진짜 살 떨려서 통화를 못 하겠네요.”

‘통화도 마음대로 중단해?’

도명은 충격에 빠진 표정으로 핸드폰을 쳐다보았다.

‘이 맹랑한 백구를 어떻게 하지……?’

도명은 사춘기 자식을 다루는 부모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무조건 엄하게 하기엔 더 엇나갈 것 같아서 더 다그치지도 못하겠고 그렇다고 계속 잘해 주기도 애매한 것이 버릇 나빠질까 봐 못 하겠다. 정말 이도 저도 못하겠다. SM의 초짜를 상대로 도명은 깊은 고뇌에 빠졌다.

***

저녁 10시경 도화가 집 앞에 도착했다. 도화의 손에는 아무 상표가 그려진 쇼핑백이 있었고 그 안에는 반찬 통이 들어가 있었다.

도명은 가게 앞 벤치에 앉아 헤드셋을 끼고 음악을 듣고 있었다. 도명의 고막에 평화로운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마냥 평화롭지만은 않았다. 묘한 불편함이 도명의 신경 안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도명의 발끝에 도화의 그림자가 고였다.

“아, 도명 씨!”

도화가 반가운 표정으로 도명의 이름을 불렀다. 도명은 그런 도화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의 반응을 면밀히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도명이 도화의 표정을 보니 어색함을 숨기기 위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 도명을 발견하고 반가워하고 있었다. 도명의 ‘백구 사춘기’설이 지금 이 순간 무색해졌다.

도명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자격지심을 부렸다는 생각에 다른 의미로 불쾌해져 버렸다.

정말 애초에 도화는 오늘 저녁 진영과 약속이 있었던 건데, 도명의 망상이 버섯 포자 퍼지듯이 퍼진 거다. 그렇다면 대체 오늘 저녁 내내 무슨 헛짓거리들로 시간을 채운 건가 싶었다.

‘내가 헛된 추측들로 시간을 채웠다고? 그것도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해맑은 백구를 상대로?’

도화는 자신의 반응과 대조되는 도명의 미지근한 반응에 웃는 표정 그대로 박제되었다. 예상치 못한 상대방의 반응에 어쩔 줄을 모르는 것이다. 어색한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도명 쪽이었다.

“저녁은 잘 먹었습니까?”

“아, 그럭저럭 먹었습니다. 도명 씨는요? 김치 두부 전골 맛있게 먹었습니까?”

“……”

도명은 도화의 말에 잠시 대답이 없었다. 결국 재료를 다 꺼내놓고 하려던 요리를 하지 않았다.

애초에 도명의 집밥 취향은 샐러드에 최소한의 탄수화물이 포함된 식사였다. 다른 사람이 그러하듯 도명 역시 혼자 먹는 식사를 거창하게 차려 먹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김치 두부 전골 같은 뜨겁고 자극적인 양념이 들어간 음식은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또 혼자 식사하기에는 전골 요리는 과했다. 결국 도명은 식사 대신 나초에 과카몰리 소스를 만들어 먹으며 간만에 영화를 보았다.

“네. 잘 먹었습니다.”

“저, 시간 괜찮으세요? 잠깐이면 되는데.”

“무슨 일로 제 시간이 필요한 건데요?”

“이것 좀 맛봐 주시고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건지만 알려 주세요.”

도명이 가게로 들어오라는 듯이 고갯짓을 했다. 도화가 도명의 뒤를 졸래졸래 쫓아왔다.

“저, 그런데 오늘 기분이나 생각 복잡한 일 있었어요?”

“네?”

도명은 도화가 자신의 기분을 한 번에 읽자 당황했다. 기분을 포장하는 데 익숙한 도명이었다. 도명은 걸음을 멈추고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보이나요?”

“네. 왜 그래 보이는지는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요.”

도화가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긁적거리며 말했다.

“제가 복잡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뭐든 계획한 대로 흘러가는데요.”

“저도 그랬던 편인데요. 뭐든 계획한 대로 흘러가는 편이요. 그래도 감정은 다른 의미로 복잡해지던데. 제 경우는요.”

“아, 그렇습니까?”

도명은 도화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안 믿는 표정이네요.”

“솔직히, 도화 씨처럼 충동적인 사람은 제 인생에서도 드뭅니다. 충동적인 사람의 일이 계획한 대로 흘러가긴 힘들죠. 편견입니까?”

“전에는 그랬어요.”

도화는 민망함에 붉어진 얼굴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전에는요?”

“네. 도명 씨를 만나기 전에는.”

“도화 씨 인생이 뒤죽박죽이 된 건 제 탓이라고 돌려 비난하는 겁니까?”

도명의 말에 도화는 두 손은 내저으며 급히 말했다.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요. 그러니까, 뭐든 계획한 대로 흘러간다는 건 어떠한 것에 도전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잖아요. 도명 씨가 그렇다는 뜻은 아니고요. 제 경우에는 그렇다고요. 저는 도명 씨 만나고 이것저것 저답지 않은 일들을 많이 하게 돼서요. 제 입으로 말하니 무슨 변명 같지만 저 도명 씨한테 한 것처럼 그렇게 무례한 사람도 아니고 무리한 일도 안 하는 사람이거든요. 선을 정하면 그 선 밖으로 나간 적도 거의 없고요. 그래서 웬만하면 계획한 대로 인생이 흘러가던 편이었어요. 사람도 잘 안 만나니까 인간관계에 의한 변수도 적고. 아, 그러니까 지금은 음, 뜻대로 안 풀려도 나름 살 만하고. 아니, 정확히는 산다는 느낌 들어요. 제가 말주변이 없어서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전달했는지는 모르겠네요.”

“도화 씨가 제 앞에서만 충동적이라는 편이라는 건 알겠네요. 하지만 그것도 도화 씨 주장이니 진영 씨한테도 물어봐야겠습니다. 도화 씨가 과연 계획적인 사람인지.”

“도명 씨 한정 서, 성적으로 그렇다는 거죠.”

도화의 말끝으로 분위기가 더욱 이상해졌다. 도화는 급히 도명의 주방에 서서 자신이 만든 낙지볶음이 든 반찬 통을 열었다.

“이게 뭡니까?”

“낙지볶음이요.”

“아니. 그걸 몰라서 물어보는 게 아니잖아요.”

“제가 직접 만들었습니다. 도명 씨 따라서요.”

도화가 도명의 손에 젓가락을 들이밀었다. 도명은 도화가 만든 낙지볶음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토막 난 낙지 한 조각을 집어서 입속에 집어넣었다. 먹어 보니 요리 초보자치곤 괜찮았다. 도명이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처음 해 보는데 이 정도면 재능이 없는 편은 아니었다.

“진영이는 먹을 만 하다고는 하는데 저는 만족스럽지 않아서요.”

“부족하긴 하네요.”

“그렇죠? 뭐가 문제일까요?”

“소스 비율이 다른 것 같은데요. 재료들을 볶은 시점도 조금 다른 것 같고.”

도명의 말에 도화는 가방에서 수첩과 볼펜을 꺼냈다.

“왜 요리책 같은 거 보면 있잖아요. 1인분 기준으로 고추장 세 숟가락 등등 이렇게 적어 주잖아요. 그것 좀 알려 주세요.”

“저 그런 식으로 재가면서 안 만드는데요.”

“그러면요?”

“감으로 하는 거죠.”

도명의 말에 도화가 낙담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 보니 도명이 요리 만들 때 뭘 재거나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냥 뭔가를 툭툭 떠다가 섞고 그랬던 것 같았다. 이러면 도화의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진영과 대화를 한 후에도 도화의 머릿속에서는 관계의 유통기한이라는 말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그의 세상에서는 그게 더 와 닿는 표현이었고 현실 같았다.

4개월 후 도화가 이사를 가면 도명의 뜸해질 연락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그가 없어도 괜찮을 생활에 대해서 계획해야 했다. 도화는 예상치 못한 난관에 시무룩한 표정으로 턱을 괬다.

“내일 저녁에 낙지볶음 해 먹어요.”

“그게 그렇게 다시 먹고 싶었습니까? 그게 먹고 싶었으면 저한테 말을 하지 왜 힘들게 혼자 만들고 그랬습니까? 네, 해 먹읍시다.”

도명이 눈웃음치며 도화의 짧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까슬까슬한 느낌이 기분 좋았다.

“저, 도명 씨가 요리 하는 모습 동영상으로 찍어도 됩니까?”

“네? 왜요?”

“도명 씨는 평소대로 요리하고 저는 나중에 동영상 보면서 정량화하려고요. 저 정량화하는 건 잘하니까요.”

“뭘 그렇게까지 해요?”

지나친 도화의 열정에 도명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도명 씨가 언제나 제 밥을 해 줄 수는 없는 거니까요. 그런 민폐를 끼칠 수는 없죠.”

도화의 말에 그의 머리를 쓰다듬는 도명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애매한 말이었다. 걸고 넘어가자니 별말 아니라면 별말 아니고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자니 신경이 쓰이는 말이었다.

“제가 얼마나 자주 이 입에 밥을 넣어 줘야 도화 씨 직성에 풀립니까?”

도명이 장난기 어린 말투로 말했다. 날카로운 본심을 숨기기 위한 가장된 말투였다.

“식사 시간마다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요.”

“끼니때마다 제가 도화 씨 뒤꽁무니를 쫓아가야 합니까? 하루 한 끼로 참읍시다. 음 도화 씨나 저도 개인적인 일들이 있으니까 이틀에 한 끼 정도는 확실히 약속할 수 있겠네요.”

4개월 후에도요? 도화는 이 질문이 목 끝을 지나치게 간질여서 손가락 끝만 어지럽게 얽었다. 도화가 눈을 천천히 깜박이며 도명을 올려다보았다.

“오면서 쭉 생각했는데 역시 같이 식사하는 건 일주일에 한 번이면 좋을 것 같아요.”

“왜요?”

“혹시, 도명 씨 잔혹성 중에 이런 것도 있어요? 실컷 길들인 다음에 방치하는 거요.”

“아니요. 그런 건 없어요. 저는 제가 길들인 것에 대한 애정이 깊어요.”

“도명 씨는 이미 길들인 것을 지루해하나요?”

“아니요. 분명 그런 성향의 돔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저는 그런 성향의 돔은 아니죠.”

“제가 도명 씨가 만족할 만큼 길들면 관계의 유통기한이 길어지나요?”

“네.”

“전 아직도 그 선이 헷갈려요. 도명 씨가 그어 놓은 선 말이에요. 정확히 설명할 수 있어요? 당신의 규칙은 얼마나 정교하죠? 생각해 봤는데 매일 같이 식사하는 건 역시 규칙 위반 아닌가요? 일주일에 한 번 정도가 적당한 거 같아요.”

도화가 다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그게 왜 규칙 위반이죠?”

“그러니까 도명 씨는 연애와 섹스 파트너 사이를 헷갈리지 말라는 거 아닌가요? 매일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서로 상대방의 하루를 탐색하잖아요. 탐색하고 경우에 따라 하루를 바꾸죠. 스케줄을 안 바꾸더라도 신경을 쓰고요. 그러니까 내 일상을 헤집어 놓지도 말고 내 일상을 길들이지도 말아요.”

“비약이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같이 밥 먹는 게 어떻게 연애하는 겁니까? 연애의 범위가 지나치게 넓은 것 아닙니까?”

도명은 애써 침착한 척을 하며 여유로운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의 손은 초조하게 소매를 다듬고 있었다. 일단 도화의 말을 맞받아쳤지만 그의 말에 완벽하게 반박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의 말에 정곡을 찔린 느낌이었다.

“도명 씨는 차갑고 이성적인 사람이라서 겨우 이런 일로 동요 안 하니 제 말을 이해 못 하는 거예요. 저는 저녁때마다 도명 씨 생각을 해요.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섹스 욕구와는 별개로 도명 씨가 생각납니다. 도명 씨의 선이 사적인 공간에 허락 없이 못 들어오는 정도라면 제 선은 이 정도입니다. 제가 도명 씨처럼 감정 분리를 완벽하게 못 해서 이게 제 선이네요.”

“도화 씨. 사람 당황하게 하는 면이 있네요. 사람이 조금이라도 일관성이 있어야 제가 같이 호흡을 맞출 것 아닙니까. 오늘 아침엔 남의 집에 허락도 없이 들어와 놓고 저녁에는 같이 식사하는 게 무리라는 겁니까?”

‘아까 싸한 기분 들었던 게 착각은 아니었네.’

“지금까지 억눌렀던 감정선이 한꺼번에 터져서 제가 여러모로 뒤죽박죽인 건 알아요. 감정들을 혼동하는 걸 수도 있죠. 네 맞아요. 도명 씨가 제가 착각한다고 비난해도 할 말은 없겠네요.”

도화가 조금은 울먹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도화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이 시선을 바닥에만 고정시켰다. 도명이 어떤 반응을 해도 감내하겠다는 태도였다.

“그럴 가능성을 배제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죠.”

“지금까지 저 같은 사람하고는 관계를 가진 적은 없죠?”

“네. 정말 곤란하게 하네요. 밥 같이 먹자고 했다고 별안간 연애하자고 조르는 사람 된 것 같고. 기분이 확실히 유쾌하지는 않습니다.”

“저,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확실히 알겠어요. 도명 씨를 사랑하기 싫습니다. 도명 씨가 아무리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사람이라도요.”

“……네. 그렇군요. 우리가 여러 번 이야기한 주제니 새삼스럽지는 않습니다.”

도명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방금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도명 씨가 저를 길들일 수 있는 건 섹스할 때만입니다. 그리고 이미 길들여 놓은 입맛은 책임지고 가르쳐 주세요.”

도화가 낙지볶음이 들어간 반찬 통의 뚜껑을 닫았다. 계속 직접적인 이야기를 피하려고 애썼는데 결국 이렇게 됐다. 도화가 짐을 챙겨 집으로 올라가려는데 도명이 도화의 손목을 잡았다.

“섹스하고 가요.”

“네?”

“섹스하고 가라고요. 싫습니까?”

“지금요?”

“네.”

“갑자기요?”

“그렇게 갑자기는 아닌데요. 좀 있으면 전에 합의한 대로 플레이하기로 한 주말 아닙니까?”

도화가 도명의 손목에 채워진 손목시계를 봤다. 10시 반 정도 됐다. 1시간 반 후면 주말이었다. 그렇다 해도 도화의 입장에선 갑작스러웠다.

“약속과 다르니 그럼 한 시간 반 후에 할까요? 도화 씨가 사실은 원칙주의자인 건 이제야 확실히 알겠네요.”

“아…… 음.”

도화는 여전히 결정을 못 내리고 뜸을 들였다.

“그럼 12시 되자마자 내려와요. 아, 오늘은 어느 정도는 제대로 삽입합시다. 또 본격적인 플레이 전에 그때 이야기했던 제모도 하고요. 또 삽입하려면 기본적으로 준비할 게 있습니다. 준비하는 법도 알려 줄게요. 엄격하더라도 참아 주세요. 기본적인 것들이니까 몸에 아주 잘 길들어져야 합니다.”

“아, 네.”

도화는 반복되는 도명의 말들에 결국 하겠다고 대답하고 말았다.

도명이 지하실 집에 도착하자 어떤 영화 하나가 정지 화면으로 멈춰 있었다. 도명의 집중에서 유일하게 아무것도 없는 흰 벽이 하나 있었는데 그 벽을 향해 프로젝터가 비치고 있었다.

도명이 이곳에 이사 온 후 유일하게 예전에 그의 이모님이 살고 있던 모습 그대로인 부분이었다. 영화가 고일 흰 벽, 그리고 프로젝터. 성능 좋은 클래식한 오디오. 이 지하 공간은 심미영 할머니가 영화를 보던 장소였다. 지상 1층은 가정집의 반을 잘라서 반은 슈퍼로 쓰고 반은 가정집으로 쓰고 있었다. 영화 보는 것이 취미였던 그녀는 이 모든 장비들을 제대로 된 것으로 샀다.

프로젝터는 비교적 최근 것이었고 오디오는 30년 전에 산 것이었다. 도명은 이모와 지금도 이 자리에 앉아 영화를 보던 것을 음향으로 기억했다. 앉아 있던 소파는 달라졌지만 공간을 가득 채우는 음향만은 변하지 않았다.

이 오디오는 충분히 쓸 만한 것 정도가 아니라 지금도 가치를 충분히 인정받는 것들이었다. 할머니의 라이프 스타일에서 상상할 수 없는 가장 큰 지출이었다. 낡은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그녀가 이런 취미 생활을 매일 밤 누려 왔다는 건 이 동네 사람으로선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도명이 보고 있던 영화 속에서는 한 멋진 중년이 무너지는 배 안에서 눈을 감고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도명은 그 익숙한 장면을 눈에 새겼다. 도명이 소파에 앉아 있으면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투사된 화면이 컸다. 도명은 눈을 감고 소파 등받이에는 몸을 뉘었다. 그의 눈이 깊게 팼다.

‘내 규칙이 허술하다고? 그럴 리가? 규칙이 허술했다면 그동안 했던 관계들 속에서 내가 먼저 그런 걸 느꼈겠지.’

도명의 가슴속에 무언가 얹힌 듯 묵직해졌다.

그러다가 눈을 뜨고 도화와 할 플레이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라텍스 장갑과 관장약. 면도 용품. 적당한 딜도를 이것저것 훑어보기 시작했다.

“반항이 심할까?”

도명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구속구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고민에 빠진 듯 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튼튼한지 가죽끈을 팽팽하게 당겼다.

***

도화는 자신의 집에 들어가자마자 호들갑을 떨며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그냥 도명에게 적당히 자신의 낙지볶음이 어디가 잘못됐는지에 대해서만 들을 생각이었다. 그냥 그럴 생각이었는데 뭔가 일이 커진 것 같았다.

결코 도명에게 자신의 진심 일부라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어쩌다가 그런 소리들을 했는지! 도화는 정신없이 거실 겸 주방을 서성이다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이건 거의 당신의 행동 하나하나에 내가 연애 반응을 일으킨다고 고백한 거나 다름없잖아! 아예 사귀어 달라고 하지 그랬냐!’

도화는 혼자 몸부림을 치다가 바닥에 대자로 뻗어 버렸다. 심호흡을 크게 하는 도화의 볼이 봉긋해지더니 입에서 바람이 훅 불어 나왔다. 그리고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어 버렸다. 잠시 정적, 그리고 마지막 발작이라는 듯이 누운 채로 발을 동동거렸다.

‘하지만 그 인간이 자꾸 날 헷갈리게 하잖아. 아니면 내가 형식적인 친절에 이상한 기대를 하고 있는 거야? 기대라면 무슨 기대? 잘나신 유도명이 나를 특별하게 생각하길 바라는 거야? 아니면 다른 사람이 날 신경 쓰는 것 자체에 기분이 들뜨는 거야 뭐야.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그 사람은 누구에게나 친절해. 내가 아니더라도 이 집에 살고 있으면 누구한테나 그랬을 거야. 정말 가까운데 살고 둘 다 혼자 사니까 같이 식사하자고 충분히 그럴 인간이지.’

도화가 갑자기 누운 채로 기도하듯 합장을 하고는 눈을 감았다.

‘건물주님. 이번에는 선을 잘 지킬게요. 옛날에 했던 실수는 반복하지 않을게요. 그때처럼 들떠서 마음이 새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때는 제가 어렸잖아요. 그러니까 주님보다 높다는 건물주님, 계약 연장 좀 합시다! 꼭 이 집까지 다 가져야 속이 시원하겠냐! 그렇게 근사한 반지하 같지 않은 반지하 집을 가지고 있으면서!’

도화는 문득 자신의 인생이 참으로 기구하다고 생각했다. 어렸을 땐 이성애자를 좋아해서 마음을 이야기 못 했고, 지금은 겨우 같은 동성애자를 만났는데 그는 사랑 같은 건 안 한단다.

제 마음대로 마음이 깊어지기도 전에 정지 경고를 연달아 받아 버렸다. 벌써 두 번째이었다. 그것도 하루 사이에!

도화는 도명이 지금까지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지 일일이 알고 있지는 않지만 이런 기록을 세우는 건 자신이 처음일 거라고 확신했다.

뭔가 축구경기에서 혼자 미쳐 날뛰다가 옐로카드를 받은 느낌이었다. 마지막 카드마저 받으면 안 된다는 경고음이 도화의 머릿속에서 울려댔다. 바로 레드카드를 안 준 도명이 그치고는 자비로웠다고 해야 하나.

도화는 그렇게 한참을 천장만 쳐다보았다. 가슴이 먹먹해서 꼼짝도 하기 싫었다. 그러다 문득 시계를 보니 벌써 30분이 후딱 지나가 있었다. 도명과 플레이를 하기로 한 시간이 한 시간밖에 안 남았다. 그러자 갑자기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삽입한다고 했지. 설마…… 오늘 끝까지 가는 거야?!’

도화가 상반신을 벌떡 일으켜 세우며 경악했다. 도화가 부르르 떨리는 손목과 손등을 쓰다듬었다.

‘아니야. 분명 어느 정도 삽입한다고 했지.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잘못 들은 거면? 그냥 삽입이었나? 어느 정도가 맞나? 어쨌든 어느 정도라고 했다면 끝까지 가는 건 아니겠지.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고!’

도화는 금세 얼굴이 발그레해져선 도명의 페니스를 떠올렸다. 야한 생각과 부끄러운 감정, 두려운 기분이 한꺼번에 파도 밀리듯 밀려왔다.

사람의 여러 감정들을 압출해서 만든 엑기스를 주사기로 맞은 느낌이었다. 머리가 멍하고 몸이 높이 치솟았다가 고꾸라지는 것을 반복하는 기분이었다.

도화는 한참 삽입이라는 말에 몰두하다가 그다음으로 자연스럽게 도명이 관장하는 법을 알려 준다고 했던 게 생각났다. 그러자 삽입을 떠올린 것과는 종류가 조금 다른 경보음이 머릿속에서 시끄럽게 왱왱댔다.

‘관장 그거, 장 청소하는 거 아닌가? 그걸 왜 도명 씨가 알려 줘?! 보여 주기 많이 수치스러운 거 아닌가. 야한 의미로 수치스러운 거 말고. 거기다가 그렇게 깔끔한 양반이 내 장사정을 다 본다고? 해 주다가 나한테 그나마 있던 일말의 정마저 말라비틀어지는 거 아냐? 안 돼 도명 씨가 알려 주기 전에 내가 해 놓고 가야 해! 아직 한 시간 남은 거면 충분해.’

도화는 그 자리를 바로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왔다. 평소 매일 건강한 장 활동을 하는 도화의 집에 관장약 같은 게 구비되어 있을 리가 없었다. 이 늦은 시간에 약국이 열렸을 리는 없고 도화는 일단 비상약이 상비되어 있는 편의점에 희망을 걸기로 했다.

불안한 마음이 들긴 했다. 편의점에서 약을 사 본 적은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관장약이 흔하게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른 대안은 없었다. 관장하는 시간도 있으니 30분 안에 관장약을 공수해 와야 했다.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동네에 있는 편의점들을 최대한 들러야 했다. 도화는 야밤에 전력 질주를 하기 시작했다.

한편 도명은 도화와 할 플레이 준비를 마치고 마음을 차분히 하기 위해서 가게로 올라와서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가게 앞을 전력 질주하는 도화의 모습을 보았다. 가게 앞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도화를 쳐다보는 도명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아. 백구가 플레이를 앞두고 너무 신난 거 아냐? 혈기 왕성하기도 하네. 눈 오는 날 강아지도 아니고 저게 뭐야.’

도명은 손목 위의 시계를 보며, 적당히 뛰어놀고 늦지 않게 도착하기를 바랐다.

***

도명의 시곗바늘이 12시 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도명은 미간을 찌푸리며 가게 앞 벤치에 앉아 자신의 손목시계를 쳐다보았다. 도명은 아까 뛰어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요즘 백구를 기다리느라 이 벤치에 엉덩이 자국이 생길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도명의 얼굴이 점점 싸늘하게 식어갔다. 이렇게 돔을 휘둘러대는 섭은 처음이었다. 초짜 섭을 상대로 능숙한 돔인 자신이 이러고 있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밀려왔다.

그러다가 최근 5년간 너무 능숙한 섭을 상대로만 플레이를 해서 오히려 처음인 도화를 상대로 헤매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백구가 집에 돌아오지를 않는다. 도명의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왜 언제나 불길한 예감은 적중하는 거지? 나도 백구 따라 동네 뛰어다녀야 하는 거야?’

도명은 정말 백구를 찾으러 동네를 어슬렁거리려다가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에 낮게 한숨 쉬며 다시 벤치에 앉았다. 도명은 잠시 고민하다가 도화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상대는 받지 않았다. 도명이 심각한 표정으로 핸드폰 화면을 쳐다보았다. 아주 잠깐이지만 아까 도화가 달려간 게 도망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도망가는 게 특기라는 도화의 말이 자꾸 도명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오늘 하루 종일 날 왜 이렇게 엿 먹이지? 대체 왜 그러나. 나랑 뭘 하고 싶은 건데. 이제 와서 나하고 관계 맺은 걸 후회하는 거야? 목줄 매달아 달라고 달려온 건 그쪽 아니냐고. 아니 이성적으로 자기 집이 여기 있는데 소용없는 도망을 왜 가. 잠깐, 무슨 확대 해석을 그렇게 하고 있어. 그냥 밤 동네 뛰어다니는 게 너무 신나는 것일 수도 있잖아.’

도명은 혼란스러운 머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머리를 뒤로 젖혔다. 도명의 손이 어지럽게 얽혀졌다.

‘하지만 상대는 동네 백구다. 아주 잠깐의 공포를 피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뛰쳐나간 거면? 이게 감히 도망을 가……?’

***

결국 도화는 동네 편의점 다섯 군데나 뒤졌지만 관장약 같은 건 찾을 수 없었다.

‘왜 언제나 불길한 예감은 적중하는 거냐.’

도화는 급히 나가느라 핸드폰도 안 가지고 나왔다. 그래서 지금 시간이 정확히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었다.

마지막 다섯 번째 편의점 벽에 운 좋게 벽시계가 달려 있어서 시간을 알 수 있었다. 그 편의점을 나왔을 때가 11시 50분 정도 됐다. 그렇게까지 시간이 안 흐른 것 같은데 시간이 후딱 지나가 있자 도화의 목덜미가 서늘했다.

‘도명 씨 같은 사람은 약속 시각 어기는 거 많이 싫어하겠지? 그것도 플레이 직전에? 지각한 벌주는 것도 플레이 일부인가?’

겨우 집 앞에 도착한 도화는 지금 12시로부터 15분가량 늦어졌다는 걸 몰랐다. 최선을 다해서 뛰긴 했는데 편의점과 집과의 거리가 꽤 되고 계속 전력으로 뛰어다니느라 그의 발도 많이 느려진 탓이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오르는 도화의 종아리가 터질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최대한 안 늦기 위해 막 뛰었었는데 막상 집으로 오니 앞으로 마주쳐야 할 것들에 대한 생각에 발걸음이 느려졌다.

도화는 계단을 느릿느릿 올라가면서 마음의 다짐을 했다. 그가 관장을 알려 주는 건 싫다고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도명의 집에는 관장약마저 제대로 구비되어 있을 거고 그것을 빌려달라고 할 것이다. 분명한 어조로 관장을 스스로 하고 내려가겠다고 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보면서 강력하게 자기주장을 할 수 있을까? 과연 도명을 이겨 먹을 수 있을까? 도화는 두려움에 간이 콩알만 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힘들어서 후들거리는 다리가 심리적 압박감에 더욱 후들거렸다.

자고로 상대방을 이기려면 상대방처럼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현관문 손잡이를 잡는 도화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도화의 눈썹이 결연하게 위로 쭉 올라갔다.

‘유도명처럼 생각하자. 이기자. 유도명!’

도화가 문을 열고 익숙한 자신의 집에 들어섰다. 그리고는 현관 옆 벽에 걸린 거울 앞에 섰다. 그가 평소에 나가기 전 모습을 체크하는 거울이었다. 도화는 거울 앞에 서서 도명의 선생 같은 말투를 흉내를 내며 말했다.

“나는 유도명, 푸른 심장을 가졌습니다. SM 행성에서 온 외계인이라 인간의 마음 같은 건 하나도 모릅니다. 엉덩이나 대세요. 팡팡 쳐 주게요. 난 이럴 때만 마음을 느낍니다.”

도화가 그렇게 거울 앞에서 혼잣말을 하고 있는데 도화의 등 뒤로 도명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하. 재밌네요.”

도화의 등 뒤로 소름이 쫙 돋았다. 뒤돌아보는 것마저 두려워서 목 뒤가 나무토막처럼 빳빳해졌다. 도화는 현실을 부정하며 자신이 잘 못 들었나 싶어 귀를 툭툭 때렸다.

하지만 거울 속에는 도명이 도화의 식탁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거울을 통해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도화의 눈동자가 확장되더니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도화는 순간 너무 놀라서 다리에 힘이 풀려 현관 앞에서 주저앉아 버렸다. 일단 예상치 못한 사람이 예상치 못한 공간에 있어서 놀랐고 도명이 등장한 타이밍이 공교로웠다. 그리고 도명의 내뿜어 대는 기운이 뭔가 심상치 않았다.

다리가 풀린 도화에게 다가오는 도명의 발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

“아, 저 도명 씨, 혹시 제가 늦었나요?”

도화가 지금, 이 순간 도명이 화가 난 이유로 확실하게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었다.

“18분 정도 늦었습니다.”

도명이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

“그게 도명 씨 기준으로…… 어느 정도 잘못한 일일까요?”

도화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도화가 도명에게 아부하듯 입꼬리를 억지로 올렸다. 하지만 도명도 도화도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도명이 주저앉은 도화의 옆에 같이 앉았다. 도화가 눈동자를 굴려 보니 도명의 옆얼굴이 보였다.

“저는 자비로우니 일단 변명이나 들어 볼까요?”

도명이 도화의 등에 손바닥을 올려놓았다. 관장약을 찾아 내내 뛰어다니느라 도화의 등이 땀으로 흠뻑 젖어 등가죽에 티셔츠가 달라붙었다. 도화의 등을 쓰다듬는 도명의 손바닥이 홧홧했다.

도명은 땀으로 흠뻑 젖은 타인의 티셔츠가 기분 나쁠 만도 한데 오히려 이상야릇한 기분이 올라왔다. 도명은 욕정에 차오르는 눈동자를 천천히 굴리며 도화의 얼어붙은 옆얼굴을 보았다.

“변명해 보라고요.”

“아. 저. 그. 그게.”

너무 긴장해서 그런지 도화는 입술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도화는 고장 난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일단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기에는 부끄러움을 견딜 수가 없었다.

“이 작은 머리로 머리 굴리지 말고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면 되잖아요? 뭐 저한테 숨기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나하고 이 짓 그만두고 싶어? 이제와 그렇다고 하고 싶은 거냐고.’

숨기고 싶은 것? 일단 지금 당장은 그의 앞에서 관장 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는 것 정도였다. 비밀의 개념이라기보다는 쉽게 말하기에는 부끄러웠다는 점이 컸다.

‘아 이것마저 연애 감정인가? 보기 좋은 모습만 보여 주고 싶었으니. 그럼 숨겨야 하는 비밀인 건가?’

숨기고 싶은 것 두 번째, 최대한 장기적으로 끌고 가고 싶은 비밀이었다. 계속 도명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에게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졌다. 그런 마음이 끊임없이 삐죽삐죽 튀어나왔다.

지금 당장은 연인의 개념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미리 마음을 제어하지 않으면 그에게 연인이 되어 주길 갈구하고 싶어질 것이다. 일단 지금 당장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특별해지고 싶다는 것이었다. 하다못해 그의 가장 아끼는 섭이라도 되고 싶었다.

“하하, 제가 도명 씨한테 뭘 숨겨요?”

“그런데 왜, 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들리는 겁니까?”

“그냥. 도명 씨 앞에서 관장하기 싫었어요. 그래서 본격적인 플레이 전에 스스로 관장을 하고 가고 싶었는데 집에는 관장약도 없고 지금은 약국들은 다 닫았잖아요.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동네 편의점들을 뒤지고 다녔습니다. 늦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그게 뜻대로 되지는 않았어요.”

“변명을 들으니 다른 부분에서 화가 나는데요?”

‘뭐, 도망갔다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아, 일부 도망인가?’

“그, 어떤……?”

“돔이 가르쳐 주겠다는 걸 거부를 해요?”

“저도 거부권이 있는 거 아닌가요? 상호 협의라면서요!”

도화의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갔다. 순간 억울한지 도화의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도명이 어금니를 깨물며 감히 언성을 높이며 항의하는 도화의 볼을 늘렸다. 귀여워서 볼을 잡은 게 아니라 정말 강점이 제대로 실렸다. 도화는 뺨 가죽이 얼얼해 앓아대는 소리를 했다.

“아까 사전 협의 볼 때 말했어야죠.”

“아. 그. 저.”

도화는 순간 할 말이 지나치게 많아 오히려 말이 음절로 뚝뚝 끓어졌다. 하고 싶은 말의 병목현상이었다. 이야기를 할 시간은 지나치게 짧고 순간 목 끝에 올라올 말들은 너무 많았다.

“물리지 못합니다. 제가 언제나 말했지 않습니까? 말하라고 할 때 의사 표현 똑바로 하라고요. 기분 좋았던 점. 플레이 중에 꺼려지는 점 등. 아까 분명히 하겠다고 했잖아요? 제가 저번에도 이 문제로 혼내지 않았나요? 섭인 도화 씨 변덕에 돔이 따라가는 법은 없다고.”

“저 도명 씨. 아. 그.”

‘뭐지 이 억울한 기분? 분명 뭔가 잘못됐는데 딱 집어서 말로 안 나온단 말이야. 아. 환장하겠네! 나 지금 뭔가 많이 억울해!’

“하. 아직도 말이 뻔뻔하게 많네요.”

도명이 도화의 뒷덜미를 잡았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도화의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러자 도명이 힘 빼라고 살벌한 표정으로 말했다. 웬만하면 도화를 힘으로 이길 사람은 많이 없었다.

도명을 상대로도 그랬다. 도화가 마음만 먹으면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지금 반항하면 그와의 관계는 끝이라는 공포감 때문이었다.

“나하고 이런 놀이 하기 싫어요?”

“아니요.”

도화가 무릎을 꿇은 채로 울먹거리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저 커다란 덩치가 시무룩해선 찌그러져 있는 모습이라니! 그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저 모습을 독점하고 싶은 돔이 차고 넘칠 것이다.

도명 역시 매번 이 귀여운 모습에 마음이 약해지곤 했지만 오늘은 이 정도 귀여움으로 도명의 단호함이 풀리지 않았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요? 이런 표정을 사랑하는 돔은 참 많긴 한데 나는 정확히 그런 돔은 아니에요.”

도명이 도화의 젖은 눈가와 일그러진 얼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그는 그런 도화의 얼굴에 기뻐하지 않았다. 그저 아무 감흥 없는 얼굴로 도화를 관찰할 뿐이었다.

“그럼 어떤 표정을 사랑하는데요?”

“내게 순종하는 것에서 기쁨을 느껴요. 그래서 너무 흥분되고 기쁜 나머지 울어요. 당신의 감각을 날 서게 하는 고통 자체를 즐겨요. 당신의 인내심이 해내는 것들에 대해서 기뻐서 울어요. 이 말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될 때를 기다리고 있긴 한데 성과가 있으려나.”

“살짝, 사이비 종교 교주가 하는 말 같기도 하고.”

도화의 말에 도명이 피식 웃었다.

“비슷하다고 하면 부정은 못 하겠네요. 그러니까 이런 건 놀이로 하는 거죠. 내려와요. 두 번 말하게 하지 말아요. 당신은 계속 내 인내심의 끝을 연장시키고 있으니까.”

도화가 도명의 지하실로 내려오니 도명이 욕실로 따라오라고 고갯짓을 했다. 도화가 엉거주춤 도명의 뒤를 따라 욕실로 들어왔다. 도명의 손에는 면도날이 하나 들려 있었다. 클래식한 디자인의 면도날이었다.

“뭐 해요? 벗어요.”

도화가 도명의 말대로 옷을 하나하나 벗기 시작했다. 아직도 부끄럽긴 하지만 그전에 그의 앞에서 옷을 벗을 때 보다는 덜 떨렸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

“땀을 많이 흘린 모양이니까 세탁해 줄게요. 저 바구니에 집어넣어요.”

“아니요. 제 빨래는 제가.”

“계속 두 번 말하게 하지 말아요. 저 오늘 기분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니까.”

도명의 말에 도화는 ‘아니 그게, 죄송해서.’라는 말을 하려다가 사늘한 그의 눈빛에 말없이 옷을 벗어서 바구니에 집어넣었다. 도명이 말한 바구니에는 이미 도명이 벗어놓은 그의 옷도 있었다.

두 사람은 입는 옷 스타일이 달라서 누가 봐도 서로 다른 사람이 옷을 벗어서 집어넣은 것처럼 보였다. 다른 두 옷이 엉켜 있는 모습을 보자니 기분이 묘했다.

도화는 물끄러미 바구니 속을 보다가 정신 차리라는 듯이 자신의 뺨을 짝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갑자기 욕실에 울리는 짝 소리에 작업 준비를 하던 도명의 고개를 들어 도화를 쳐다보았다. 도명의 시선에 도화의 얼굴이 새빨갛게 익었다.

“나는 날카로운 걸 들고 있어요. 나를 얼마큼 믿어요?”

“네? 그, 그냥 면도해 주시겠거니.”

‘기분 오싹해지게 갑자기 왜 그런 소리를 하고 그래.’

“완벽하게 구속 도구를 채워서 진행하고 싶은데, 그래도 안 불안할 만큼 날 믿어요?”

도명의 말에 도화는 본능적으로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도화는 아직도 이따금 도명의 꿈을 꾸었다. 꿈의 내용은 디테일은 다르지만 언제나 비슷비슷했다.

도명은 여전히 보슬보슬한 땅에 흙을 팠다. 그는 식물을 가꾸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도화의 꿈속에서 언제나 땅을 고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평범하다면 평범한 꿈이었다. 보통 꿈은 기억하기 힘든데 이 단조롭다면 단조로운 꿈은 언제나 선명한 인상과 함께 아침을 맞이하게 했다.

하지만 삽을 들고 있는 그의 뒷모습이 어딘가 을씨년스러웠다. 그가 언제나 땅에 묻고 있는 무엇인가를 상상하면 꿈속에서도 등골이 오싹해졌다. 을씨년스러운 상상력은 깊어지기 마련이었다.

언제나 을씨년스러운 거에 대한 상상은 밝은 것에 대한 상상보다 아래로 깊이 떨어진다.

그리고 그 와중에 도화가 느끼는 것은 작업하느라 땀에 젖은 그의 목덜미가 섹시하다는 것이었다. 거칠고 힘이 많이 들어가는 작업을 하면서도 그의 작업복은 언제나 완벽한 슈트였다.

구두코가 반짝이는 세련된 구두도 완벽하게 신고 있었다. 그가 삽을 들어 올리는 절정의 순간마다 슈트의 주름이 터질 듯이 팽팽해졌다.

그런 그의 목덜미가 땀에 잔뜩 젖어 있었다. 분명 슈트 안 등줄기에도 땀이 흥건할 것이다. 그는 다양한 종류의 셔츠들을 가지고 있지만 대부분은 흰색에 깔끔한 디자인을 선호했다.

흰 셔츠는 땀에 젖으면 투명해진다. 유생에서 성체로 탈바꿈하려는 풍뎅이의 껍질처럼 투명하고 젖어 있는 그 얇아 보이는 막 안에서 육체가 꿈틀거린다. 분명 밀도는 좋지만 충분히 강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 살갗이 완전히 단단해지기 전에 밀도 좋은 그 살갗을 터지기 직전까지 움켜쥐었다 풀어 주는 것을 반복하고 싶었다. 도화의 주먹이 괜히 빈 허공만 움켜쥐었다 푸는 것을 반복했다.

슈트 입은 그는 언제나 근사하지만 그 순간에는 그의 꽉 조여진 타이를 푸르고 셔츠를 벗기고 싶었다. 그리고 땀에 젖은 등줄기를 핥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조금 유지하다 보면 그를 강간하고 싶어졌다. 구체적으로 삽입이니 뭐니 하는 행위가 생각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를 난잡하게 훑고 싶을 뿐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힘으로 강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도명이 삽이라는 무기를 들고 있다 해도 그렇다.

도화는 언제나 이 난폭한 상상에 놀라서 잠에서 깼다. 살면서 이토록 난폭한 상상이나 감정에 사로잡힌 적은 없었다. 언제나 무언가를 묻고 있는 도명이 무서워서 놀라 잠에서 깨는 것이 아니다. 도화는 자신 안에 내재된 폭력성에 놀라고 혐오스러웠다.

그나마 다행인 건 꿈속에서 도화는 결국 도명을 강간하지 못했다. 도명의 자신만만한 얼굴이 생각났다. 당신이 가진 알량한 육체적 힘은 아무것도 못 한다고. 그의 말을 부정할 수가 없다.

잠깐 도명을 가지고 그를 영원히 잃을 것이다. 그 공포가 그의 육체를 어린아이로 만들어 버린다. 그것은 부드럽고 말랑거리기만 할 뿐 아무 힘도 없다. 도화가 할 수 있는 건 착하게 굴겠다며 최대한 무해한 웃음을 짓는 것뿐이었다.

도명이 들고 있는 작은 면도날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도명은 입술 끝과, 투명한 유리막으로 둘러싼 눈동자가 면도날보다 날카로웠다. 도화는 아직 도명의 세계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속을 숨기는 의뭉스러운 남자였고 그런 그가 자신을 신뢰하냐고 묻는다면 완전히 신뢰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도화의 침묵이 길어진 탓에 도명은 쓴웃음을 지었다. 도명이 욕실 한가운데에 별안간 놓은 바 체어에 도화를 앉혔다. 높이가 높은 바 체어 덕분에 도화를 앉아 있음에도 대략 도명하고 눈높이가 맞았다.

도명이 컵과 솔을 꺼내 들었다. 하얀 비누가 컵 안에 들어가 있었다. 도명이 물을 부으니 부드러워 보이는 거품이 만들어졌다. 도명은 무심한 표정으로 솔로 거품을 휘저었다.

도명이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있는 도화의 턱을 움켜쥐고 추켜올리게 했다. 도명의 엄지손가락이 도화의 턱선을 따라갔다.

“그럼 이대로 합시다.”

도명이 거품이 묻은 솔로 도화의 턱에 거품을 묻혔다. 뭉글거리는 거품이 살갗에 부드럽게 도포되었다. 도화의 눈동자가 도명의 얼굴에 고였다. 도명의 모든 얼굴 근육이 모두 경직되어 있었다.

사람을 많이 대하고 자신의 난폭한 진심을 숨기기 위해 가만히 있어도 눈꼬리는 조금 내려가고 입꼬리는 살짝 위로 향해 있는 그였다.

도화가 보기에는 그는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 아니. 그 이전에는 훈련된 얼굴 근육 모양새라도 잡혀 있었는데 지금은 그마저 지워진 것을 보면 아까의 화에 화가 더 겹쳐진 것 같았다.

이쯤 되니 도화는 차라리 그가 소리라도 지르거나 엉덩이에 매질을 가하기라도 하는 것이 마음에 편했다. 도화는 자잘하게 남아 있는 턱수염을 잘라 주는 그의 손짓은 안 느껴지고 계속 그의 얼굴만 탐색하기 바빴다.

어쩌면 모든 플레이가 끝나고 나서도 그의 얼굴이 풀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초조해졌다.

“도화 씨, 지루해요?”

도명이 도화의 가랑이 사이를 노골적으로 훑어보며 말했다. 도화의 가랑이 사이 페니스는 의기소침에서 잔뜩 늘어져 있었다. 도화는 일단 아니라고 말했다. 그런 도화의 말을 도명이 믿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일단 도화는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지루한 게 아니고 의기소침해 있는 것이니까.

“그냥 미용실 온 것 같고 그래요?”

“계속 화내시니까. 눈치 보여서요. 기분 나쁘셨어요? 제가 구속 플레이를 할 만큼 도명 씨를 신뢰하지 못해서…… 그래서 가뜩이나 화가 나셨는데.”

도화의 말에 도명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왠지 도화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을 믿느냐는 말에 침묵으로 대답한 도화를 굳이 추궁하지는 않았다.

그를 겪을수록 느끼는 거지만 그는 직감이 좋다. 사람들은 보통 도명의 기분을 잘 못 읽는다. 아주 오래된 관계가 아니면 그랬다. 자신이 촉이 좋다고 자랑하던 이도 그랬다. 도명은 그런 도화가 조금은 무서워졌다. 도화가 도명의 감정을 읽는 속도와 정확도가 점점 높아졌다.

“그, 엉덩이라도 맞을까요?”

이번에는 도명의 침묵에 도화가 턱에 거품을 잔뜩 묻힌 채로 물었다. 도명은 여전히 도화를 면도 시키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 플레이를 원해요? 원해서 하는 거라면 하고요.”

‘원할 리가. 아직까지 전에 맞은 걸로 엉덩이가 얼얼한데.’

“아니, 그렇다기보다 도명 씨 화가 조금이라도 풀린다면.”

“위험한 발상이네요. 화가 난 돔을 상대로 화를 풀라고 매질을 권유하고.”

“그, 이제라도 구속 플레이라도 할까요? 원했잖아요.”

뭔가 양상이 이상했다. 지금까지 플레이 중에 이런 분위기가 나온 적은 없었다. 뭔가가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도화 씨.”

도명이 얼굴을 찡그리며 도화의 이름을 부르자 도화의 손이 도명의 손목을 잡았다. 그의 손끝이 간절했다.

“전 도명 씨가 왜 화를 숨기는지 모르겠어요.”

“난 화나지 않았어요. 신뢰의 문제로 화내는 건 옳지 못한 거예요. 신뢰는 일방적인 게 아니니까. 그런 걸로 유치하게 화내지 않아요.”

도명은 언제나 상대방의 숨통을 조여 오는 역할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어딘가 쫓기고 있는 쪽은 도명이었다. 어떤 틀이 도명을 서서히 좁혀 오는 기분이었다.

“난 도화 씨의 입이 불쾌해요.”

“제가 또 무슨 말실수를….”

“무례하잖아요, 언제나.”

도명은 더 이상 면도를 진행할 수 없었다. 도명은 탁 소리 나게 면도칼을 내려놓고 도구들을 모아놓은 캐비닛으로 향했다.

도명은 캐비닛 속 수많은 도구 중 하나를 꺼낸 후 도화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수건으로 대충 도화의 입가에 묻은 거품을 닦아 냈다. 그리고는 도화의 입에 하얀 공이 달린 입마개를 채웠다.

“우리 세이프 워드는 정했어도 행동으로 세이프 워드를 대신하는 건 안 정했죠?”

도명의 질문에 도화의 눈동자만 굴러갔다. 입에 채워진 구속구 때문에 말은 할 수 없었고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하는 걸로 많이 혼났기 때문에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건 애처롭게 눈동자만 굴리는 것뿐이었다.

“지금은 말할 수 없으니까 고개를 끄덕여도 됩니다.”

도명의 허락이 떨어지자 도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라도 정할까요?”

도명이 성격 나쁜 표정을 지었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정할 생각 따윈 없었다. 도화 역시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일단 맹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도명이 입꼬리 끝을 비틀었다.

“이렇게 갑자기요?”

도화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갑작스러운 것 같은데요? 그냥 없이 하죠.”

도명이 상큼한 어투로 말했다. 웃고 있는 도명의 표정에 악의가 가득했다.

“세이프 워드도 없는데 구속 플레이도 정말 할 겁니까?”

“…….”

도화는 다시 망설였다. 도명의 미간이 거칠게 좁혀졌다. 그의 좁혀진 미간에 도화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경솔한 사람.”

도명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도화의 귓속에는 분명히 박혔다. 도명은 도화를 경솔하다며 비난하면서도 아까보다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도명이 도화의 허벅지가 아려 올 정도로 세게 움켜쥐며 주물럭거렸다. 밀려오는 통증에 도화의 다리가 저절로 오므려졌지만 그럴수록 도명은 손톱까지 세우며 도화의 허벅지를 쥐어뜯듯 움켜쥐었다.

“도화 씨의 경솔함을 신뢰할 수 없는데 어쩌죠? 언제나 당신의 경솔함을 저의 자제력으로 메우려고 하고 있잖아요. 제 얼굴 보고 자위해 봐요. 얼빠진 표정 지으면서. 물건 세우면서 내내 잘 생각해 봐요. 세이프 워드 없이 화난 저를 밤새 감당할 수 있는지. 플레이는 아침 해가 뜰 때까지 해봅시다. 그나저나 축 늘어진 게 진짜 보기 흉해 죽겠네.”

도명이 혀를 차면서 도화의 페니스를 쳐다보았다. 도명이 도화의 목을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리고 도화의 시선이 자신의 얼굴에 고이게 했다. 도화가 덜덜 떠는 손으로 자신의 페니스를 잡았다. 축 늘어진 무거운 페니스가 손바닥에 닿자 기분이 이상했다.

하지만 도명의 얼굴을 보니 발기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도명의 허리가 도화의 가랑이 사이에 바짝 닿았다. 그러자 그의 몸의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도화가 페니스를 잡고 있으면 그의 귀두가 도명의 허벅지에 닿을 정도였다.

도화가 손가락으로 페니스를 조이며 위아래로 흔들기 시작했다. 구속구를 찬 도화의 입안에 침이 지나치게 고였다. 도화가 쾌락을 느끼고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도명이 사나운 얼굴로 그의 얼굴을 자신의 얼굴에 고정시켰다.

거친 그의 손길에 도화의 부지런한 손 운동보다 더한 열기가 도화의 페니스에 고였다.

“하아. 하아…….”

구속구 틈 사이로 도화의 뜨거운 숨결이 새어 나왔다. 도화의 턱을 움켜쥐고 있는 도명의 손바닥이 뜨겁고 습해졌다. 도명은 눈을 살짝 감고 도화의 습한 숨결을 느꼈다.

하지만 완전히 눈꺼풀을 닫지는 않았다. 그 슬며시 뜬 눈동자가 너무 야해 도화의 페니스가 더욱 단단해졌다. 도화는 발바닥이 간지러운 느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자위를 하며 묘한 느낌이 감도는 발바닥을 도명의 허벅지에 긁었다.

“뭘 잘했다고 날 만져요?”

도명이 냉정한 손짓으로 자신의 다리를 긁고 있는 도화의 발을 쳐냈다. 그 손짓 한 번에 도화는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도명에 대한 갈망은 뱃가죽 안에서 더욱 타올랐다. 관음 상대를 찾지 못한 도화의 발은 의자의 차가운 금속 다리만 훑을 뿐이었다.

“읏. 음……!”

도화는 구속구를 입에 찬 채로 짐승 같이 헐떡였다. 한껏 달아오른 자신을 칭찬해 달라는 듯이 부끄러움도 모르고 도명을 쳐다보았다.

‘당신을 만지게 해 주세요.’

쿠퍼액으로 젖어 번들거리는 도화의 왼손이 도명의 손등을 훑었다. 도명의 손에 욕정의 냄새가 묻었다. 도명은 야한 냄새를 풍기는 손으로 구속구를 찬 도화의 아랫입술, 떨리는 눈가, 헐떡이는 목울대를 훑었다.

마지막으로 너의 발정 난 냄새를 맡으라는 듯이 도화의 코에 손바닥을 얹었다.

도화는 그렇지 않아도 남들보다 유난히 후각이 예민했다. 도화는 확 들어오는 자신의 발정 냄새에 순간 콧등을 거칠게 구겼다. 도화는 오랫동안 혼자였다. 하지만 혼자인 시간 대비 자위하는 시간은 극히 적었다.

자위 끝에 나온 자신의 정액은 음미할 대상이 아니었다. 빨리 휴지에 싸서 휴지통에 들어가야 할 페니스 끝 찌꺼기일 뿐이었다. 서서히 썩어가는 나무토막 같은 삶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도화는 자신의 발정 냄새에 몸이 더욱 뜨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이게 이 남자의 마법이었다. 모든 썩은 것이 선명한 감각으로 되살아나 향기로워지는 느낌이었다.

“앗, 하아… 하아… 하아….”

도명은 열에 달아오른 도화가 예뻤다. 그제야 도명의 입가가 조금씩 부드럽게 풀렸다. 평소라면 예쁘다고 한마디 해 주는 관대한 보상을 해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관대해지기에는 오늘 하루 동안 부지런히 축적해 온 응어리가 단단했다.

도화의 페니스가 완전히 단단해져선 위아래로 꺼떡였다. 도화는 더 이상 견딜 수는 없다는 듯이 아래턱이 달달 떨렸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차라리 도명이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다면 참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렇게 조금만 몸을 앞으로 당겨도 닿을 거리에 있는 그를 견디기 힘들었다.

도화가 애교를 부리듯이 머리로 도명의 가슴을 쓸었다. 하지만 도명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도화는 조바심에 발끝이 달달 떨려왔다. 도화는 혼자 끙끙 앓아대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도화의 두 다리가 도명의 허리를 감았다. 도화의 발꿈치가 도명의 둔부에 얹어졌다. 도화의 정액이 도명의 단정한 바지를 하얗게 적셨다.

“버릇없긴!”

도명이 도화의 뺨을 손바닥으로 휘갈겼다. 도명에게 맞은 도화의 얼굴이 돌아갈 정도로 매서웠다. 그의 말투와 행동은 거칠었으나 도명의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도명 역시 그가 발정 난 페니스를 그에게 비벼대는 것을 내심 즐기고 있었다.

도화의 페니스가 정액을 토해낼 때마다 도명의 허리를 감싸느라 완전히 벌어진 그의 허벅지 근육이 움찔거리는 것이 보였다.

도화가 숨을 헐떡이며 어리광을 부렸다. 도명에게 맞아서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계속 도명의 가슴에다가 비볐다. 그리고는 고집부리며 도명의 허리를 감싼 다리에 힘을 잔뜩 주었다.

섭의 이런 어리광을 받아 주면 안 된다. 하지만 도명은 그에게 화가 난 와중에도 이 어리광에 살살 녹았다. 그것도 도명처럼 깔끔한 사람의 옷을 정액으로 더럽히는 버릇없는 섭에게 말이다.

하지만 도명은 애써 이성을 바로 잡았다. 허락도 없이 돔의 몸을 만지고 관음하는 섭은 벌을 줘야 한다. 시도 때도 없이 이런 짓을 허용하다가는 돔이 섭을 애타게 하는 당근을 하나 잃는 것일뿐더러, 잘못하다가는 그냥 난잡한 섹스가 되어 버린다.

통제고 뭐도 없이 서로를 물고 빠는 그런 섹스 말이다.

발정 나고 버릇없는 섭에 휘둘러 돔마저 눈이 돌이 가는 경우를 많이 봤다. 도명은 그런 사례들을 보면서 이해할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 이해해 버렸다. 그 기분을 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명은 다시금 이성을 가까스로 잡았다.

이성을 잡은 와중에도 도명은 문득 도화의 시선이 두려웠다. 그의 눈이 자신의 모든 감정을 간파할 것 같았다. 도명은 도화의 눈에 가죽으로 만든 안대를 씌웠다.

도화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구속구가 물린 그의 입술에서 짐승이 낑낑대는 소리가 들렸다.

상대방의 감각을 차단하는 것은 돔들이 많이 이용하는 놀이 중 하나였다. 상대방에 대한 장악력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거나 다른 감각에 날을 더 세우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번처럼 돔이 흔들리는 자신을 숨기기 위해 섭의 눈을 가리는 경우는 이례적이었다. 그것도 이 바닥에서 놀 만큼 논 도명이 말이다.

도명은 도화의 목에도 가죽 벨트를 채웠다. 그리고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도화의 팔을 길이 잘 들여놓은 밧줄로 묶었다. 팔꿈치와 손목을 동시에 결박한 구속법이었다.

도명이 두려움에 떠는 도화를 내려다봤다. 그에게 너무 하드하기만 플레이가 아닌가 싶었다. 그것도 어떤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말아야 할 돔의 자격지심 때문에 멋대로 플레이 강도를 높여 버린 기분이었다.

도명이 도화의 날개뼈를 손가락 끝으로 훑었다. 도명의 손짓 하나에 도화의 페니스가 남아 있던 남은 정액마저 비적비적 뱉어냈다.

“장소를 조금 이동할 거예요.”

도화가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냈다. 도명이 진정하라는 듯이 도화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 말아요. 바로 옆이니까. 마음 같아선 버릇없는 섭 따위 뒷마당에다가 매어 두고 오고 싶지만 내가 목줄 당기는 방향으로 따라와요. 여기에 감각을 집중해요.”

도명이 도화의 긴장한 목덜미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도화가 도명에게 반쯤 기댄 채로 바 의자에서 내려왔다. 발끝에 차갑고 미끄러운 타일이 닿자 긴장감이 더욱 들었다.

분명 도명이 목줄 당기는 방향에 집중해서 따라오라고 했지만 도화가 자꾸 도명에게 기댔다. 도명의 쇄골 뼈 위에 습긴 찬 도화의 코가 얹어졌다. 벌써부터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코를 훌쩍대고 있었다.

도명의 온몸에 자신의 몸에서 빠져나온 온갖 액체를 다 문질러 댈 생각인 모양이었다. 도명은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도화는 목줄 방향 같은 것보다 당신한테 기대서 가는 것이 더 안정적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도명이 그의 목소리를 앗아간 터였다. 말을 못 하니 억울해서 이제는 콧물마저 훌쩍여졌다.

“목줄!”

도명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도화는 끈덕지게 도명의 몸에 달라붙었다.

“말 진짜 더럽게 안 듣네요.”

도명의 말에 도화의 어깨가 크게 움찔거렸다. 자꾸 그를 화나게 하고 싶지 않은데 화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진짜, 말 안 듣는 섭 따위 뒷마당에 매어 두고 올까요? 내가 못 할 것 같아요?”

도명의 협박에 이제야 도화가 도명에게서 떨어졌다. 눈이 안 보이는 상태에서 걸음을 떼는 건 생각보다 무서웠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두려웠다.

역시 도명의 몸에 달라붙어서 이동하는 것이 덜 무서웠다. 하지만 도명이 만에 하나라도 정말 뒷마당에 버리고 올까 봐 도화는 그의 말대로 했다. 도화가 발걸음 수를 유추해 보니 도명의 말대로 장소를 조금 이동한다는 게 맞았다.

도명은 자신의 주방 바 테이블 위에 도화를 눕혔다. 그리고 개수대에 플레이에 필요한 것들을 놓으며 말했다.

“이제 말했던 예민한 부분도 마저 제모하고 관장도 해 봅시다.”

도명은 도화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턱을 쓰다듬었다. 아까는 통제 안 되는 망아지처럼 굴더니 또 이렇게 얌전히 누워 있는 모습을 보니, 플레이의 강도를 조금 높이고 싶어졌다.

제모와 함께 구멍도 늘리는 일을 하는 것이 재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구멍에 무언가를 물려 있는 채로 애무를 하듯 살갗에 스릴을 새겨 주는 것이다.

하지만 갑자기 플레이의 내용을 바꾸니 플레이 순서가 엉키는 것 같았다. 원래는 제모를 완벽하게 해 주고 관장을 시킬 생각이었다. 관장을 해 준 후에는 애널이 잔뜩 예민해지니 삽입을 할 생각이었고 말이다.

도명이 생각에 잠기고 있을 동안 도화는 감각이 차단당한 상태에서 도명의 흔적을 찾아 귀를 쫑긋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도명은 어떠한 분명한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것은 다른 의미의 고통이었다. 도명은 본의 아니게 방치 플레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도화가 구속구에 틀어 막혀서 뭉개진 발음으로 무언가를 말했다. 도명은 그런 도화에게 조용하라는 듯이 엉덩이를 휘갈겼다.

“관장부터 먼저 합시다.”

도명이 명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명의 말에 도화는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도명이 도화를 엎드리게 했다. 도명은 차가운 테이블 바 표면 때문에 오들오들 떠는 도화의 등줄기를 열기가 오른 손바닥으로 꾹꾹 눌렀다.

“관장은 해 봤어요?”

도명의 질문에 도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데 무슨 배짱으로 알아서 준비하겠다고 했어요?”

도명이 도화의 애널 주위를 손가락으로 헤집으면서 조소했다.

“부끄러워요?”

도화가 낑낑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 싫어요?”

도화가 밝아진 표정으로 아까보다 더 빠른 속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건 안 하는 주의라고 했으니 그의 질문에 희망이 생겼다. 하지만 도화의 눈에 안대만 안 쓰여 있다면 그가 지금 짓고 있는 표정에 더욱 낙담을 했을 것이다.

도명이 콧노래를 부르며 은색 양동이 하나를 가져왔다. 그리고는 손에 얇은 라텍스 장갑을 꺼내 꼈다. 얇은 라텍스 장갑이 도명의 손에 제2의 피부처럼 착 달라붙었다. 도명은 전문의라도 되는 양 장갑을 낀 손으로 도화의 회음부를 만지작거렸다.

차가운 고무 감촉이 소름 돋았다. 평생 이런 쪽으로 질환 가까운 것도 겪지 않았던 도화였다. 무엇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도명의 손 감촉이 갑자기 소름 돋는다는 생각뿐이었다.

도명이 장갑을 낀 손으로 커다란 주사기를 꺼내 들었다. 도명이 주사기의 성능을 시험하듯 끝부분을 괜히 밀어 넣어 보았다.

“도화 씨가 주사는 잘 맞는 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도명이 잘 밀봉된 비닐 팩 입구를 가위로 잘랐다. 도화는 금속성 가위가 바닥에 내려지는 소리에 흠칫 떨었다. 비닐 팩 안의 점성이 있는 액체가 도명이 준비한 양동이에 채워졌다.

도명이 자신이 들고 있는 주사기가 얼마나 큰지 자랑하듯 눈이 안 보이는 도화의 엉덩이에 비벼대며 꽂았다. 도화는 순간 자신의 엉덩이에 무언가를 무작정 삽입하려는 건지 놀라 본능적으로 무릎을 세웠다. 도명이 얼굴을 찡그렸다.

“놀랄 때 액션이 크네요. 자제력을 길러야 할 것 같은데요. 이게 도화 씨가 보는 영화들과 달리 도화 씨 몸에 직접 하는 거잖아요. 안 다치면서도 신나게 놀려면 서로 호흡이 잘 맞아야 해요.”

도명이 진정하라는 듯이 움찔거리는 도화의 꼬리뼈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도명이 주사기에 하얀 액체를 집어넣었다. 도명이 주사기 속 액체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는 도화가 얼마나 참을 수 있을지를 상상하며 흥얼거렸다.

“아, 지금은 엉덩이 들어요. 뒤 잘 보이게요. 어서요.”

도화가 또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웅얼거렸다.

“벌써 기본적인 것을 잊어버리면 어떻게 하죠? 하기 싫은 것 이상의 일을 안 당하려면 지금 하기 싫은 걸 참아야 해요.”

도명의 말에 도화가 다시 무릎을 세웠다. 도명은 계속 제대로 엉덩이 올리고 다리를 벌리라고 했다. 도화는 팔이 뒤로 결박당한 상태에서 도명이 말한 것들을 하려니 호흡마저 불편해졌다.

도명이 도화의 엉덩이 사이를 잡아 벌렸다. 도명이 장갑을 낀 손으로 하얀 크림을 바른 후 도화의 애널 주위에도 도포했다.

도명이 주사기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주사기의 뾰족한 끝을 도화의 구멍에 끼워 넣었다. 단단한 플라스틱 주둥이가 애널에 파고들자 도화는 낯선 이물감에 허벅지를 파르르 떨었다.

“힘주지 말아요. 다치기만 합니다. 관장약 넣어 주는 거니까 흘리지 않게 엉덩이 계속 들어요. 흘리면 혼납니다.”

도명이 도화의 애널에 주사기를 꽂은 채로 위를 천천히 눌렀다. 차갑고 낯선 액체가 엉덩이에 가득 들어오자 도화의 호흡이 더욱 애달파졌다. 차라리 전에 관장을 해 봤더라면 덜 무서웠을 텐데. 도화의 엉덩이 안에 낯선 액체가 출렁거리는 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흐앗. 하아.”

도화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더욱 무서웠다. 도명은 같은 행동을 계속 반복했다. 도명은 겁에 질린 도화의 애널 안에 관장약을 망설임 없이 계속 넣었다.

“안이 제법 깊네요. 입보다는 안은 제법 쓸 만할 것 같은데요. 사실 도화 씨 펠라 실력은 많이 실망스러웠잖아요.”

도화의 몸 안이 도명이 넣은 이상한 액체로 가득 찬 것 같았다. 다리를 조금 움직이는 것조차 무서워서 할 수가 없었다. 도명이 다시 주사기 안에 액체를 채우는 소리가 끔찍했다. 벌써 그가 주입한 액체가 넘칠 것 같아 죽을 맛인데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거기다가 자꾸 주사기 입구로 쑤셔지는 애널이 아릿해 왔다. 더욱 무서운 것은 슬슬 배에서 신호가 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도명이 식은땀이 맺힌 도화의 뒷덜미를 손바닥으로 진듯하게 눌렀다.

“여기까지 할까요?”

원하는 대로 들어 주지도 않을 거면서 계속 희망 고문 같은 질문을 해대는 도명이 얄미웠다. 도명이 입에다가 구속구만 안 채워 넣었으면 목덜미를 만지는 도명의 손을 확 물어 버렸을 것이다.

“아. 대답 없는 거 보니까 계속할까요?”

도명의 말에 도화의 배 속이 다른 의미로 애끓었다. 계속하다가 정말 큰일 날 것 같았다. 이번에도 도명이 약 올리는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고 싶지 않았지만 도화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는 어떠한 방어 수단도 없었다.

도화가 고개를 거세게 끄덕였다. 자신은 정말 간절하다는 듯이 발까지 동동거렸다. 그러자 도화의 엉덩이에서 하얀 액체가 꿀렁꿀렁 새어 나왔다. 도명이 혀를 차며 액체가 새는 도화의 애널에 엄지손가락을 얹어 눌렀다.

“원래 이런 건 15분은 해야 하는데, 도화 씨는 초보자니까 한 7분 정도 할까요? 애매하긴 한데.”

도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화에겐 지금 이 순간 7분도 너무 끔찍했다. 마음속 불안감 때문에 당장 화장실로 달려나가고 싶었다.

“아. 15분 채우겠다고요? 도화 씨 근성 있어서 마음에 듭니다.”

도화가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7분, 양보 못 합니다.”

도명의 말에 도화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자세도 불편해서 허벅지와 엉덩이가 저려 왔다. 거기다가 부글거리는 아랫배가 살짝 눌리는 자세라 더욱 참기 힘들었다.

“7분입니다.”

도명은 그 말을 끝으로 라텍스 장갑을 벗고는 소파에 앉았다. 도화는 사형선고 같은 말을 내던진 도명이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발소리에 정신이 더욱 아찔해졌다. 그가 자신을 이런 상태로 만들고 아주 가 버릴 것 같아서 불안했다.

도명은 아까 보다 만 영화를 7분 전으로 돌렸다. 도명은 이미 눈에 익을 대로 익어 버린 장면을 눈에 다시 한번 새기고는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도화가 눈을 뺏긴 채 결박된 공간에 영화 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다.

영화의 엔딩 직전이라 웅장한 오케스트라 음악과 함께 긴박한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너져가는 배 안에서 눈을 감고 피아노를 치는 남자는 7분 전까지만 해도 웃고 있었다. 점잖은 외모에 어울리지 않은 호쾌한 웃음소리가 웅장한 오케스트라 음악과 함께 절묘하게 섞였다.

도화는 지금 온몸의 땀구멍이 열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배 속은 끊임없이 요동치면서 등허리가 배설 욕구로 오싹오싹했다.

도화의 입을 틀어막은 구속 도구 사이는 도화가 흘려대는 침으로 흥건했다. 온몸의 감각을 통제하지 않으면 대형 사고를 칠 것 같은 느낌에 정신은 계속 쫓기고 있는 느낌이었다.

더욱 불안한 것은 도명이 알람 개념으로 영화를 틀어 놓은 건지 모르는 도화는 도명이 영화를 보느라 자신을 잊을까 봐 두려웠다.

극심한 고통 속에 있는 도화는 아직 3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10분은 족히 지난 느낌이었다. 도명에 대한 원망감이 배 속에서 관장약과 함께 부글거리고 있었다.

도화의 머릿속에서 분명 도명은 영화에 빠져 있느라 약속한 시각을 잊은 것이다. 어쩌면 이마저도 그와의 약속 시각을 어긴 것에 대한 벌의 일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약속 시각을 어기면 기분이 어떤지 맛봐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도화는 사실 목소리조차 낼 힘도 정신도 없었지만 애써 큰 소리를 냈다. 하지만 성능 좋은 도명의 오디오에 도화의 목소리는 완벽하게 묻혔다.

이쯤 되니 도명 보고 엿 먹으라는 듯이 안의 내용물을 싸지르고 싶었다. 그래서 이 동네의 미친놈을 상대로 이런 놀이 한 돔에게 커다란 본보기를 보이고 싶었다. 도명처럼 깔끔한 사람이 왜 이런 도박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도화는 아직 사람이었다. 그 수치심을 감당할 수 없어 눈물로 범벅된 얼굴로 끙끙댈 뿐이었다.

7분이 지나자 도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이블로 와 보니 도화의 온몸은 땀에 젖어 있었다.

“잘 참았어요.”

도명이 기특하다는 듯이 도화의 땀에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도명이 도화의 안대를 풀어 주었다. 그리고 팔꿈치와 손목을 묶은 구속도 풀어 주었다.

“가요. 정리하고 나와요. 15분 주겠습니다.”

도화는 변기에 앉아 속을 비우면서 서럽게 울었다. 살면서 이렇게 복잡한 감정을 동시에 느끼면서 하나같이 다 강렬하게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도명의 처사에 서러웠고, 고통을 해소하면서 희열을 느꼈으며 이 와중에 인간으로서 존엄이고 뭐고 도명에게 복수를 했어야 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패배한 빌런처럼 통탄했다.

도명은 도화가 우느라 엉망이 된 얼굴로 욕실에서 나오자 손수건으로 얼굴을 정리해 주며 속삭였다. 이 와중의 그의 손수건에서 그의 향기가 나서 향기에 집중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아직 남았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세이프 워드 쓰겠어요?”

‘그 세이프 워드를 어떻게 써.’

도화는 플레이고 뭐고 이제 그만하고 싶었지만 도명의 세이프 워드라는 말에 입술이 막혀 버렸다. 그런 세이프 워드를 정한 과거의 자신을 한 대 때려 주고 싶을 정도였다.

“누워요. 구속 도구는 다시 채웁시다. 입술 얼얼할 테니 마지막으로 풀어요.”

도화는 다시 터져 나오는 눈물을 손등으로 대충 닦았다. 하지만 눈물이 벌써 비적비적 새어 나왔다. 도화는 다시 아까처럼 결박되었다. 도명이 도화의 입에 공을 물리기 직전에 다시 물었다.

“세이프 워드 정말 안 써요?”

“……네.”

도명은 도화의 눈동자가 반은 넋이 나가서 재차 물었지만 도화의 대답에 그의 입에 구속 도구를 채웠다.

도명은 도화를 테이블에 다시 눕힌 채로 면도칼의 칼등을 도화의 등줄기 모양에 따라 일자로 그었다.

도화는 차갑고 단단하며 얇은 단면이 등줄기에서 느껴지자 그게 본능적으로 면도칼임을 알았다. 순간 너무 놀라 그게 면도칼의 칼등인 것까지는 몰랐다. 도화가 너무 놀라서 그의 상체가 크게 밖으로 휘어졌다.

“쉬- 감각에 집중해요.”

도화는 쫓기는 사람처럼 숨을 가쁘게 쉬기 시작했다. 온몸이 공포로 뒤덮였다. 살갗에 예리한 것에 의해 갈라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심하게 아프지는 않았다.

“놀랄 때마다 이렇게 날뛰면 곤란하다고 했잖아요. 앞으로 더 예민한 곳을 자극해댈 텐데. 갑자기 튀어 오르면 능숙한 저도 실수하지 않겠어요? 혹시 몰라서 연습시킨 건데. 신뢰를 연습한다고 생각해요. 도화 씨가 매일 보는 공포영화 같은 거예요. 감각은 날 서지만 당신은 완벽하게 안전해요. 이 모든 스릴을 즐기기만 하면 돼요.”

도명이 도화의 목덜미에 입술을 뭉개며 속삭였다. 도명은 그러면서 면도칼 등으로 도화의 꼬리뼈 부분을 짓눌렀다. 그리고는 면도칼이 미끄러지면서 차가운 금속이 도화의 엉덩이골 사이로 미끄러지듯이 흘러 들어갔다. 얇은 금속이 도화의 엉덩이골 사이로 파고들었다.

도화는 순간 숨을 크게 들이마셔야 할 정도로 놀랐다. 도화의 신체가 도명의 손짓 하나하나에 부들부들 떨렸다. 하지만 도명의 말대로 아까처럼 갑자기 몸을 튀어 오르게 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턱만 달달거릴 뿐이었다.

도화는 공포심을 입에 물린 하얀 공을 세게 움켜 무는 것으로 겨우 삭였다.

“잘하고 있어요. 호흡 좀 더 정리하고. 점점 흥미로워질 테니까요.”

도명이 거품이 묻은 솔로 도화의 목덜미에 거품을 묻혔다. 날카로운 면도날이 도화의 목덜미를 긁어댔다. 오싹한 기분에 온몸이 소름이 돋았다. 도화의 피부 결에 따라 면도질을 하는 도명의 손짓이 능숙했다.

도명이 소름이 돋아난 도화의 살결을 훑었다. 거품이 조금 묻어난 손으로 지나치게 경직된 몸을 풀어 주듯 가슴을 주물럭거렸다.

“고통에 더 익숙해지면 여기가 퉁퉁 부어오르도록 물고 뜯어 줄게요.”

도명이 도화의 젖꼭지를 손가락으로 늘리다가 다시 부드럽게 뭉개면서 속삭였다. 도명이 거품 묻은 솔을 도화의 엉덩이 사이에 접어 넣었다. 미끈거리는 거품 때문에 다리를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야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이미 한바탕 하고 난 후 정액을 잔뜩 물고 있는 느낌이었다.

“읏… 하.”

도명의 손이 도화의 다리 사이로 가더니 포개져 있던 페니스를 움켜쥐었다. 그러자 도화가 엉덩이를 위로 올리며 앓아대는 소리를 했다. 도명이 거품이 잔뜩 품은 손으로 페니스를 만져 주니 도화의 온몸이 달싹거렸다.

도명이 도화의 엉덩이를 세게 움켜쥐고 흔들다가 손바닥으로 짝 소리 나게 때렸다. 거품으로 뒤덮인 살덩어리가 도명의 손바닥과 만나자 더욱 찰진 감촉이었다.

“안돼요. 뒤로 박히면서 예쁘게 울어야 할 사람이 앞쪽을 더 선호하네요. 엉덩이를 엉망으로 만들어 줄 테니까 더 흥분해 봐요.”

도명이 도화의 엉덩이 살을 거칠게 뭉개고 잡아 뜯으며 속삭였다. 많이 나아졌지만 그에게 전에 맞은 곳이 아려와 자극에 더욱 약했다. 도화는 더 이상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아 페니스를 도명의 식탁 위에 긁어가며 낑낑댔다.

“발정 난 개 같으니. 아, 기분 나빠 하지 말아요. 예쁘다는 뜻이니까.”

도명은 도화의 페니스가 딱딱해지자 그제야 봐 준다는 듯이 면도칼을 다시 들었다.

“움직이지 말아요.”

도명이 도화의 엉덩이 사이를 벌렸다. 그리고 진득한 거품을 쏟아부었다. 도화의 가랑이가 질척거리다 못해 도명의 깔끔한 테이블이 하얀 액체로 가득했다.

도명이 살결의 반향을 가늠하기 위해 손가락으로 도화의 애널 주위를 집요하게 만져냈다. 하얀 거품들 사이로 도화의 빨간 입구가 움찔거렸다.

도명은 그 구멍에 손가락 하나만 한 바이브레이터를 밀어 넣었다. 순식간에 밀어 넣어진 바이브레이터에 도화의 배 속이 압박감에 울려댔다. 도화의 애널이 본능적으로 바이브레이터를 밀어냈다. 도명이 도화의 엉덩이를 세게 내리쳤다.

“꽉 물어요, 버릇없이 뱉지 말고.”

도명이 우악스럽게 바이브레이터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밀어 넣었다. 도명이 엉덩이에 힘을 주라는 듯이 도화의 엉덩이를 세게 움켜쥐었다.

“질질 흘리지 말아요. 질질 흘릴 때마다 구멍에다가 이것저것 박아 넣을 테니까.”

도명은 도화의 애널에 바이브레이터를 밀어 넣은 채로 엉덩이 털을 제모하기 시작했다. 예민한 부분에 날카로운 칼날이 스치는 소리와 감촉이 소름 돋았다.

도화는 도명의 테이블에 엎드려진 채로 어깨를 움찔움찔 떨었다. 도화가 이를 악물며 무서움과 함께 몰려오는 쾌락을 참았다.

“털이 많이 없는 편이네요.”

도명이 개수대에서 면도칼을 씻으며 중얼거렸다.

“알아서 몸 뒤집어요. 테이블 위 좁으니까 떨어지지 않게 조심해가며.”

도명은 그리 말하고는 불안한지 팔짱을 끼며 도화가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테이블은 높고 위가 미끄러워서 더욱 불안했다. 거기다가 도화는 팔은 결박당하고 눈마저 안 보이는 상황이었다.

결국 도명의 도화의 목줄을 잡아 중심을 잡게 했다.

도화는 도명의 손목이 잡히자 그를 껴안았다. 덕분에 도명의 옷이 온통 제모 크림 범벅이었다. 도명의 미간이 거칠게 구겨졌다. 도화가 자세를 겨우 잡아 도화의 귀두를 세게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바이브레이터 스위치를 올렸다.

엉덩이 안에서 흔들리는 바이브레이터에 도화의 온몸이 움찔움찔 떨렸다.

“하읏. 하아. 하아.”

“몸 심하게 떨리네요. 이 상태로 제모할 건데.”

도화가 몸의 흥분을 참지 못하고 허리를 작게 흔들었다. 도명은 그런 도화의 모습을 음미하듯 쳐다보았다. 도명의 손가락이 도화의 음모를 헤집으며 말했다.

“잘 컨트롤해 봐요. 본인 몸 안 다치게.”

도명의 말에 도화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자연스럽게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몸을 어찌하란 말인가. 도화가 애원하듯 도명의 손을 찾았다.

하지만 도명은 일부러 손가락 끝을 잡혀놓고 얄밉게 빼 버렸다. 도명은 유치한 이 행동에서 통쾌함을 느꼈다. 정확히 무엇에 대한 복수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통쾌하다는 느낌일 뿐이었다.

“아직 삽입 상태 불편해요?”

도화가 울며 고개를 끄덕였다.

“편해질 때까지 물면 되겠네.”

도명이 작동 중인 바이브레이터 끈을 잡고 흔들며 악마같이 웃었다. 도명이 면도 거품을 도화의 가랑이 사이에 잔뜩 묻혔다. 면도칼로 도화의 음모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금속이 닿자 도화가 자꾸 떨리는 하체의 충동을 억눌렀다. 하체에 힘을 잔뜩 주자 바이브레이터가 더욱 강하게 물렸다.

“앗. 음. 읏. 읏.”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자꾸 튕기는 하체를 억누르면 더욱 강한 쾌락이 느껴졌다. 하지만 도명의 칼날은 거품을 타고 도화의 피부 표면을 예민하게 긁어댔다. 허리가 주체할 수 없이 떨릴 때마다 칼날이 파고들 거라는 공포에 간담이 서늘했다.

도화는 이 와중에 보지 않아도 자신의 페니스가 제대로 발기하고 있음을 느꼈다. 도명의 칼날이 그의 피부 곡선을 타고 파고들 때마다 도화가 꿀물처럼 정액을 흘러댔다. 서걱거리며 도화의 음모가 깔끔하게 잘려나갔다.

“아, 벨 뻔했네. 도화 씨, 적당히 느껴요.”

도명이 면도칼을 거두며 제대로 짜증을 냈다. 도화는 점점 허리 흔들림을 억누르기가 힘들어졌다. 처음엔 애널에 파고든 바이브레이터가 묵직해서 불쾌한 감정을 더 크게 느꼈는데 이제는 애널 전체가 달아올라서 어쩔 줄 몰랐다.

“이제 좀 작나?”

도명이 면도칼을 내리고 도화의 엉덩이에 꽂힌 바이브레이터를 양옆으로 마구 흔들어가며 말했다.

“아까보다 헐거운 것 같기도 하고.”

도명이 시시하다는 듯이 바이브레이터를 훅 뽑았다. 갑자기 뽑혀나간 바이브레이터 때문에 도화의 몸이 바르작거렸다. 도명이 방금 전 꽂았던 바이브레이터보다 2배 큰 걸 가져와서 젤을 잔뜩 묻혔다. 삽입에 익숙한 사람은 몰라도 도화 같은 초보에게는 조금 버거운 사이즈였다.

도명은 아무런 경고도 없이 도화의 애널에 쑤셔 넣기 시작했다. 도화는 놀랐는지 몸을 잔뜩 움츠리며 근육을 긴장시켰다.

“다리 제대로 벌려요. 안이 이렇게 헐거운데 이걸 못 삼켜요?”

도명이 손바닥에 바이브레이터 끝부분을 밀착시키고 손목에 힘을 주어 눌러댔다. 도화가 더 이상 못 견디겠는지 그의 몸이 자꾸 안쪽으로 말렸다. 점점 도화의 한계가 왔다. 플레이 시간도 길었고 그가 어느 정도로까지 괴롭힐지 알 수 없어 두려움도 극에 달했다.

도명 역시 도화에게 한계가 왔다는 걸 알았다. 도화의 몸이 자꾸 아래로 축축 처지고 있었다. 연속된 긴장감에 지칠 대로 지친 것이다. 그 와중에 가랑이 사이 물건을 위로 향하고 있어서 아이러니했다.

“도화 씨. 이거 삼키고 이쪽만 제모하면 됩니다. 그럼 끝이에요.”

도명이 도화의 회음부를 문지르며 말했다. 도화는 말을 할 수 있다면 정말 그럼 끝이냐고 재차 묻고 싶었다.

“정말 끝이에요. 이거 끝나면 도화 씨를 예뻐해 줄 일만 남은 거예요.”

도명은 도화의 마음을 안다는 듯이 부드럽게 속삭였다. 도화는 그래서 도명이 더 얄미웠다. 매번 이렇게 살랑살랑 빠져나가는 것이 아주 얄미워 죽겠다.

“그러니까 아래에 힘 빼고 넣어 봅시다.”

도화가 도명의 부드러움에 홀려 있을 때 도명이 바이브레이터를 훅 밀어 넣었다.

“흣!!”

도명의 말대로 도화의 애널은 이 바이브레이터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갑자기 들어오는 둔탁한 느낌에 많이 놀라긴 했지만 근육이 상할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도화의 안쪽 모든 살점이 오돌토돌한 바이브레이터 표면을 바짝 물며 전율하고 있었다.

도명은 쾌락에 어깨를 떠는 도화를 눕히고 아랫배를 묵직하게 눌렀다. 가장 안쪽을 면도하는 것이라서 도화가 날뛰면 정말 다치게 할 것 같아서였다.

“읏. 음. 흐앗.”

제모를 하는 도명의 손등 위로 도화의 점도 놓은 정액이 툭툭 흘러내렸다. 도명은 입술을 열어 도화의 귀두를 덮고 빨았다. 마치 급하게 흘러내리는 아이스크림 빨아 먹는 모양새였다. 귀두의 작은 구멍에도 혀를 동그랗게 말아 넣어 강하게 자극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읏! 흐아.”

도화의 다리가 참지 못하고 M자 모양인 상태에서 비틀어졌다. 도화는 더 빨아 달라고 도명에게 애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도명은 마지막 작업에 집중했다. 면도를 끝낸 도명이 도구들을 양동이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땀과 쾌락에 녹진하게 늘어진 도화의 몸을 내려놓았다. 도화의 목줄을 잡고 욕실로 안내한 후 샤워실 안에 집어넣었다. 팔에 감긴 로프는 풀고 입에 물린 구속구도 풀었다. 하지만 안대는 그대로 두었다. 도명이 바이브레이터 스위치를 켜고 샤워기를 틀었다.

샤워 부스 안에서 도화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다행히 도명이 도화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집어넣고 천천히 앉혔다. 바이브레이터의 진동에 도화의 다리가 달달 떨렸다.

“앗. 음. 앗. 앗.”

도화가 차가운 욕실 타일에 몸을 기댄 채로 신음을 내뱉었다. 도명이 도화의 머리 위에 떨어지는 물방울의 온도를 체크했다. 적당히 미지근한 게 괜찮았다.

“정리할 동안 그러고 있어요.”

“도명 씨, 저. 저. 아까 끝이라고.”

도화는 목소리를 찾은 것만으로도 아까보다는 살 것 같았다.

“이건 상인데요. 안대 풀고 싶으면 풀어요. 시간도 도화 씨 마음대로 해요. 나머지 여운 즐기고 샤워까지 다 끝내요. 그리고 샤워 부스 옆 선반에 샤워 가운 걸어놨어요. 그거 걸치고 나와요.”

도명은 그리 말하고는 엉망이 된 자신의 공간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약 3분간의 시간이 지나자 도화가 조심스럽게 안대를 뺐다. 적당한 양의 음모는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사춘기 이후로 언제나 있던 그곳의 털이 없자 기분이 정말 이상했다. 왠지 모를 민망함에 다리가 오므라졌다.

하지만 이내 달달거리며 다리를 벌릴 수밖에 없었다. 손가락 두 개만 한 바이브레이터가 그의 가랑이 사이에서 덜덜 떨리고 있었다. 도화가 조심스럽게 바이브레이터 끝자락을 잡았다.

스위치를 끄고 빼려는데 이게 뭐라고 무서웠다. 도화는 마른 침을 삼키며 바이브레이터를 겨우 뽑았다. 오랜 시간 안을 가득 채우던 그것이 사라지자 도화의 애널이 혼자 뻐끔거리다가 닫혔다.

내내 도화의 안에서 맞물려 있던 바이브레이터가 뜨거웠다. 그 온도가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민망함과 이상한 기분에 도화의 머릿속이 멍했다. 그리고 눈앞이 뻑뻑해져 왔다.

도화가 도명이 말한 가운을 걸치고 나왔을 때는 테이블 위에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핫초코가 올라가 있었다. 온갖 하얀 액체로 난잡했던 테이블 위는 어느새 흔적 하나 없이 깔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모든 것이 꿈 같았다.

도명이 도화에게 다가와 그의 기분을 살피는 듯 그의 귀 뒤를 손바닥으로 쓸어 넘기며 쳐다봤다. 도화는 도명이 타이밍 좋게 타 준 핫초코 같은 건 먹지도 않고 손만 복잡하게 얽었다.

“왜요? 이건 안 좋아해요? 당 보충하고 떨어진 체온 올리기 좋은데요.”

“좋아합니다. 핫초코.”

“그런데. 왜 안 먹어요?”

“그냥. 여러모로 기분이 복잡해서요.”

“기분 복잡할 게 뭐가 있어요. 그냥 섹스한 건데.”

도명이 쿠키를 챙기며 조금은 무심한 말투로 말했다. 쿠키를 손에 든 도명이 도화 쪽으로 등을 돌렸을 땐 도화가 눈물을 펑펑 쏟고 있었다. 도명이 플레이 후에 눈물을 펑펑 쏟는 섭을 처음 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의미로 플레이 후에 울었다.

하지만 도명은 당황한 듯 손에 든 쿠키를 대충 구석에 놓았다. 그리고는 어정쩡한 자세와 도화와의 거리로 말없이 서 있었다. 도명이 보기에도 도화가 울어대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았다. 도화는 애써 울음을 참다가도 또 우는 것을 반복했다.

“도화 씨? 대체 왜 그래요? 플레이가 버거웠어요?”

“것도 그렇고. 억울해서요.”

도화가 가슴을 퉁퉁 치며 별안간 도명을 향해 소리를 빽 질렀다.

“뭐가 그렇게 억울했는데요. 울지 말고 말해 봐요.”

“그걸 한마디 말로 어떻게 표현해요.”

“말로 표현 못 하면 뭐로 표현해요.”

도화가 도명이 그의 앞에 내려놓은 휴지 케이스에서 휴지를 대량으로, 뽁뽁 뽑아서 코를 크게 풀었다.

“종이하고 펜 주세요.”

“뭐 경찰서 와서 고소장 쓰는 겁니까?”

“제가 말로 하면 저 어눌한 거 이용해서 말꼬리 늘어지고 장난치실 거잖아요.”

도화는 정말 진술서를 쓰듯이 머릿속에서 억울한 사건이 일어난 첫 시발점이 되는 타임라인을 되돌렸다. 그래. 도화가 관장약을 찾다가 실패해서 집으로 돌아온 순간부터였다.

그때부터 억울함이 줄줄이 소시지처럼 엮어졌다. 아니, 정확히는 좀 더 그 전이었다. 도명이 당장 플레이하자며 도화를 몰아붙였던 그 순간이었다.

도명은 일단 어떻게 하나를 지켜보자는 심정으로 종이와 펜을 도화의 앞에 내밀었다. 그러면서 마시면서 하라는 듯이 핫초코가 담긴 머그잔을 도화의 앞에 내밀었다.

도화가 그렁그렁 매달린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치며 눈썹을 위로 추켜올렸다. 나름 사나운 표정을 지은 것 같은데 도명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비시시 웃음이 나오게 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도명은 애써 티 내지 않았다.

“이런 달콤한 것으로 제 기분을 조종하지 마세요. 도명 씨 수법은 이제 눈에 다 보이니까.”

도화는 아직도 눈가에 눈물을 달고 있으면서 말투만은 의기양양했다.

“고작 마시면서 하라는 건데 수법이니 뭐니 하는 말이 왜 나옵니까?”

“도명 씨가 만들어 준 음식 먹으면 뭐든 괜찮아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안 됩니다.”

도명이 낮게 한숨 쉬며 손수건으로 도화의 눈물을 닦아 주려고 했다. 그러자 도화가 단호하게 머리를 뒤로 물리며 말했다.

“이거 다 쓸 때까지 도명 씨의 다정함도 금지입니다.”

“네?”

도명은 황당한지 헛웃음마저 나왔다.

“다 쓸 때까지 혼자 놔두세요. 도명 씨 수법들 뻔히 아는데도 또 당하면 억울하니까 잠깐만 저 좀 놔두세요.”

도화는 그의 수법을 뻔히 알면서도 도명에게 당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도화는 상상만 해도 다시 울음이 복받쳐 올라와서 다시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도명에 비해서 자신이 그에게 너무 무력한 것 같았다.

“아니. 뭐가 그렇게 혼자 서러운 게 많아요.”

겨우 울음을 멈추나 했더니 혼자 또 폭풍 눈물을 흘리는 도화를 보며 도명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니 지금은 왜 우나, 그거 하나만 물어봅시다. 뭐. 또 서러운 거 생각났어요?”

“아니요!”

“그러면요?”

“앞으로 서러울 게 생각났어요.”

도명은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싶었다. 언젠가 백구의 정신 해부를 정식으로 해 보고 싶을 정도였다. 백구는 쉬운 것 같다가도 어렵다.

“앞으로 서러울 거 뭐 말입니까?”

“전 도명 씨한테 너무 무력해요.”

“저는 돔이고 도화 씨는 섭이잖아요. 그게 억울하면 어떻게 합니까?”

도명은 그다음 말이 입술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도명은 지금까지 이런 종류의 파트너 관계를 여러 번 맺어 왔다. 사실 지금 도화 같은 사람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때마다 도명은 그게 억울하면 어떻게 합니까. 라는 말 뒤에 한마디를 깔끔하게 더 했다.

‘그걸 즐길 수 없으면 그만둬요.’

하지만 지금은 그다음 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그 말을 내뱉은 후의 도화의 반응을 보는 것이 두려웠다. 도화의 말은 틀렸다. 도화가 도명에게 일방적으로 무력하지 않다.

그게 도명이 오늘 하루 종일 혼란스러운 이유였다. 명료해 보이는 돔과 섭의 관계도 미묘하게 종속이 넘나들었다. 원래 종속이라는 것이 미묘한 구석이 있는 거긴 하지만 이번처럼 돔인 도명이 중심 잡는 일을 헷갈려 본 적은 없었다.

“그게 무슨 너는 학생이고 나는 선생이잖아! 같은 말이에요.”

도화가 어떤 드라마 하나를 떠올리며 말했다. 도명 쪽이 매를 들고 엉덩이를 때리고 있다는 점마저 비슷했다. 다른 점이라면 도명은 때리면서 울고 있지 않다는 점 정도였다.

“그러니까 저하고 뭐하자는 겁니까?”

“저, 이것 좀 쓰게 좀, 거리 좀. 저는 지금 도명 씨랑 대화할 기분이 아니에요.”

졸지에 도명은 자기 집에서 들어오면 안 되는 작은 구역이 생겨 버린 기분이었다. 도화는 사춘기 아들처럼 인상을 팍 쓰며 팔로 종이를 감쌌다.

이쯤 되니 도명은 뭔가 권위를 보여 줘야 할 것 같았지만, 저 툭 건드리면 자신이 알고 있던 백구가 아닌 표정을 지을 도화를 건드리는 게 두려워졌다.

‘아까 플레이할 때는 나한테 안기고 싶어서 안달 났었잖아. 내 순하고 착한 백구 어디 갔어. 언제 머리가 저렇게 커져 버렸지?’

도명은 굳은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소파에 앉았다. 소파에 앉아 있는데 도화가 무언가를 부지런히 써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고소장이라도 쓰려는 모양이었다.

도화가 글씨 쓰는 소리와 함께 간간이 코를 훌쩍여 대는 소리가 들렸다. 도명이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며 발끝을 가볍게 까딱였다. 저래 봤자 하나같이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를 늘어놓을 것이 빤했다.

평소 때처럼 조근조근 말로 타이르면 특유의 순한 얼굴로 올려다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서 날이 서 있던 그의 얼굴도 부드럽게 이완되었다.

도명은 단 것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그의 집 안 곳곳에는 간식들이 종류별로 있었다. 다만 살이 찔까 봐 자제하는 편인데 정신적으로 신경을 많이 쓰거나 체력적으로 좀 지친다 싶을 때는 하나씩 까서 먹었다.

도명은 도화가 앉아 있는 바 테이블 뒤에 있는 작은 냉장고 앞에 서서 아이스크림 하나를 꺼내 먹었다. 도명이 막대 아이스크림을 입에 문 채로 고소장을 쓰고 있는 도화의 뒤통수를 뻔히 쳐다보았다.

“도화 씨.”

“잠깐만 말 시키지 마세요.”

벌써 도화는 A4용지의 반이나 빼곡히 채웠다.

“저 아이스크림 먹을 건데 안 먹을 겁니까? 싫으면 말고요.”

도명의 말에 도화가 반사적으로 막대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있는 도명을 쳐다보았다. 도명이 무언가를 입에 물고 있는 무심한 모습이 야했다.

“아. 먹고 싶어요?”

도명이 입을 바보처럼 벌리고 있는 도화를 향해 피식 웃으며 아이스크림 하나를 더 꺼냈다. 도화가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픽 돌리면서 턱을 괬다.

“생각 없습니다.”

“생각 없는 사람이 눈은 왜 반짝여요?”

“저, 말 시키지 말라니까요. 쓰려던 말 까먹었잖아요.”

도명이 더 이상 도화의 버릇없음을 못 참아 주겠다는 듯이 머리를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고는 도화에게 주려던 아이스크림을 다시 냉동실에 집어넣었다.

도명의 입술에 아이스크림 나무 막대만 남았을 때 도화가 결연한 표정으로 종이를 내밀었다. 종이에 꽉 꽉 눌러쓴 글씨 때문에 종이 뒤까지 오돌토돌해져 있었다.

도화가 코를 훌쩍이며 쓴 것치고는 글씨체는 꽤 정갈했다. 도명에게 도화는 별안간 밤에 동네나 뛰고 오던 백구인데 그가 사실은 차분한 성격이라는 게 글씨체에서 보였다.

글씨 획 하나하나가 자로 잰 듯 일정한 크기였다. 무엇하나 순간적으로 성질 뻗치는 대로 뻗은 획이 없었다. 획 끝마다 힘을 주어 마무리까지 확실한 글씨였다.

“아, 잠깐만요. 제가 그냥 보면서 말할게요.”

도화가 잠긴 목소리를 가다듬으면서 말했다.

“일단 저한테는 허락 없이 집에 들어오지 말라고 하셔놓고.”

“잠깐만요. 설마 아직도 그 일이 불만이에요? 그게 어려워요? 남의 집에 허락 없이 들어오지 말라는 게 말입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그건 제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요?”

“하지만 도명 씨는 왜 제 집에 말도 없이 들어와 있었어요?”

“도화 씨가 갑자기 말없이 사라졌는데 연락도 안 됐으니까요.”

도명이 다리를 꼰 채로 당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도 그랬어요. 도명 씨. 하지만 저는 안 되고 도명 씨는 되네요.”

도화의 말에 도명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그래서요? 앞으로 집을 트고 살자는 말이라도 하고 싶어요?”

“아니요. 도명 씨도 앞으로 그러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네 무슨 말인지는 알겠네요.”

“그리고 관장에 대해서 말하고 싶습니다.”

“도화 씨가 플레이 전에 동의한 내용이죠.”

도명이 동의라는 단어에 힘주어 말했다.

“제가 사실은 동의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잖아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죠? 도화 씨는 분명히 ‘네.’라고 말했습니다.”

“정확히는 관장 플레이 자체보다, 플레이하자는 시점 자체도 갑작스러웠고.”

“갑작스러웠다고요? 제가 분명 주말에 하자고 했잖아요. 제가 무슨 원칙을 어겼다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군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도명 씨는 알고 있었어요. 도명 씨가 플레이를 하자고 할 때는 플레이를 할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플레이를 할 분위기란 것이 대체 뭔데요? 뭐, 제가 도화 씨에게 꽃다발이라도 주며 달콤한 목소리라도 내야 플레이를 할 분위기인 겁니까?”

도명이 빈정거리며 말했다. 한마디로 ‘너 또 다른 섹스랑 헷갈리는 거 아냐?’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화는 도명의 공격에 흔들리지 않았다. 도화가 지면을 가득 채운 건 도명이 자신에게 할 말들에 대한 대응 말들을 적어서였다.

“적어도 제가 도명 씨에게 감정적 선을 그었을 때는 아니죠.”

“제가 도화 씨에게 화풀이를 했다는 겁니까? 도화 씨에게 같이 밥 먹자는 말을 거부당해서? 대체 이 작은 머리로 무슨 망상을 하고 있는 겁니까?”

도명의 기분이 이상했다. 가슴은 어딘가 얹히고 머릿속 혈관들이 마구 뒤엉켜 있는 느낌이었다.

“정확히는 그랬다기보다 제가 도명 씨를 도발했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요? 돔으로써 정복 욕구라든지 그런 것 때문에요. 그러니까 돔으로써 그런 욕구가 드는 게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 제 사적인 영역까지 길들이지 말라는 말에 도발을 당하신 겁니다. 감히 네가?! 네가? 하는 그런 기분 아니었나요?”

급격히 싸늘하게 식은 도명의 입술이 열리기도 전에 도화가 두 손을 방어적으로 올리며 급히 말했다.

“사실 도명 씨가 정확히 왜 그러셨는지는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그런데 입을 아주 잘 놀리고 있네요.”

도명이 어금니를 잘근잘근 씹으면서 말했다.

“확실한 건 평소라면 제가 당장 플레이를 하는 거에 대해서 내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도명 씨답지 않게 몰아붙였다는 겁니다. 도명 씨가 말한 주말에는 적어도 반나절 후. 혹은 일요일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굳이 그렇게 12시 딱 지나자마자 무슨 정치인 명분 싸움하듯이 플레이 시간을 결정해 버리고 제가 우물쭈물하니까 계속 몰아붙였잖아요. 도명 씨는 언제나 무리하게 플레이를 진행시키지 않았는데 무슨 물고기 몰듯이 ‘네’라는 대답을 강요해 놓고 네가 동의한 거 아니냐고 하시면 안 되죠. 제가 도명 씨의 욕구가 남다른 것을 알고 있으면서 도명 씨와 관계를 맺은 건, 그러니까 적어도 도명 씨는 본인의 욕구에 대해서 저를 속이지 않았잖아요. 오히려 다른 사람들은 숨 쉬듯 하는 그런 기만들을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도명 씨를 다른 의미로 신뢰한 것도 있었고요. 또, 도명 씨는 제 어수룩함도 이용한 적 없었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믿고 관계를 맺은 건데 제 어수룩함을 이용하셨잖아요. 도명 씨 정말 몰랐어요? 제가 안 내켜 한다는 걸? 단순히 쑥스러움이 아니란 걸 정말 도명 씨 같은 사람이 몰랐냐고요.”

도화의 투명한 눈동자가 도명의 얼굴을 직시했다. 도명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했지만 자신 없었다. 도화의 눈동자가 도명의 가장된 표피들을 하나하나 벗겨내고 그 속을 들여다볼 것 같았다.

도명은 지금 도화의 눈을 피하고 싶은 자신의 본능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무조건 아니라고 우기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서 무조건 아니라고 우기며 화를 내는 건 더욱 큰 패배였다. 돔의 품격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건 그저 폭군 놀이를 하는 어린애에 불과한 행동이었다.

“네. 인정하겠습니다. 알았습니다. 도화 씨의 어수룩함을 이용했어요.”

도명은 덜 꼴사나운 길을 선택했지만 자신이 꼴사나워지는 건 완전히 피할 수 없었다. 아까 여기서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만 해도 이런 상황은 상상도 하지 않았다. 몰아붙여지는 쪽은 당연히 도화라고 자신만만했다.

순간적인 기분대로 자신이 지금까지 견고히 지켜왔던 원칙들을 가지고 장난질을 쳤다. 그래놓고 상대방에게 공격당할 거라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다니!

도명은 자신이 오만하고 나태했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지나친 익숙함을 경계하라며 다른 사람들에게 잘난 척 떠들어 다녔으면서 말이다.

“그러니까 오늘 플레이의 모든 게 부당했어요.”

도화가 분명한 어조로 도명에게 마지막 선고를 내렸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돌았다. 도화는 종이에 적은 나머지 부분들에 대한 것들은 그냥 접었다. 이미 다른 디테일들에 대해서 열거해가며 비난해 봤자 방금 말을 인정한 사람을 괴롭히며 즐기는 것에 불과했다.

오랜 침묵을 깨고 도명이 무거운 입술을 열었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보상해 주면 되는 겁니까?”

“그렇게 말씀하니까 여기에 0, 몇 개를 그려 넣어야 하나 싶기도 하고.”

도화가 어색함에 볼펜으로 괜히 동그라미만 연달아 그리며 중얼거렸다.

“앞으로 남은 월세 빼 줘요?”

“네? 와- 지금 피해자하고 합의 보러 온 돈 많고 인성 안 좋은 가해자 같네요.”

“대체 어떻게 하라고요?”

“또! 또!”

도명이 도화를 향해 눈동자만 굴렀다. 그러자 도화가 시선을 급하게 내린 채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순한 도화의 표정을 보자 도명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진짜 무서운 사람이네.”

“네? 제가요?”

“보통 사람들은 감정적으로 격할 때 더 멍청해지거든요. 그런데 도화 씨는 반대네요. 그런 사람하고 앞으로 놀 생각하니까 제가 다 긴장됩니다. 돔을 긴장시키는 버릇없는 섭이 어디 있습니까?”

“저, 아까 대체 어떻게 해 주길 바라냐고 하셨는데, 보통은 그냥 미안하다고 해요. 그 말이 진심이라면 그걸로 충분한 순간들도 많고요.”

“고작 그 네 마디로 퉁 치는 게 더 치사해 보여서 그렇습니다.”

“아까 그게 더 약 오르는데요.”

도화가 작은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리듯이 불평했다.

“알았어요. 미안합니다.”

도명이 도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이것 역시 미안하다는 사람 태도가 아닙니까?”

도명이 도화의 머리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아니요. 바람직……한 태도입니다.”

도화가 괜히 도명의 손이 지나간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내일 고기라도 구워 먹을까요? 그거면 미안한 사람의 또 다른 바람직한 사과 자세입니까?”

“아, 그거 받고. 하나 더.”

도화가 도명이 만들어 주는 스테이크를 생각하자 군침 도는 입안을 괜히 옴짝거렸다.

“말해 봐요.”

“저 오늘 플레이 너무 무서웠어요. 그러니까 좋은 의미로도 그랬고 나쁜 의미로도. 도명 씨한테 작은 복수 하고 싶은데요. 복수 당해 주겠어요?”

“왜요? 저 때리게요?”

도명이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사람 못 때립니다. 하지만 도명 씨도 공포란 걸 느끼게 하고 싶습니다.”

도화가 손바닥을 비비며 사악한 웃음을 지었다.

***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후, 도화가 도명을 향해 수상한 검은 상자를 내밀었다.

“도화 씨 꼭 이래야만 합니까? 이게 대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네요.”

“네. 꼭 이래야겠습니다.”

도화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단호하게 끄덕였다. 도명이 팔짱을 낀 채 도화가 내밀은 상자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도명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집게손가락으로 자신의 귀 뒤를 괜히 긁어댔다.

도화가 들고 있는 상자 안에는 그의 공포영화 DVD 30개가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 도화가 도명이 내용물을 알 수 없게 DVD 표지를 하나하나 종이로 싸서 가린 상태였다.

혹시 DVD 표지가 얇은 종이 때문에 안이 비쳐서 보일까 봐 2중으로 감싸는 치밀함까지 보였다. 도명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제가 이런 걸 보면서 비명이라도 지르는 걸 상상하는 겁니까?”

“솔직히 기대하고 있습니다. 공포영화 장인인 제가 엄격히 선별한 DVD들입니다. 각종 공포 테마 별로 대표선수들을 뽑았습니다.”

도명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도화의 머리를 귀엽다는 듯이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 그렇습니까?”

“이렇게 센 척해놓고 나중에 비명이라도 지르면 그 민망함을 어찌하려고 그러세요?”

“도화 씨가 하나 오해하고 있는 게 있는데 저는 이런 걸 혐오하는 거지 무서워하는 건 아닌데요? 그 차이가 뭔지는 알겠어요?”

도명이 특유의 선생 같은 말투로 도화에게 말했다. 도화는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명은 설명하는 것을 포기했다. 어차피 도화가 원하는 반응은 안 나올 것이다.

백번 설명해 봤자 한 번 보여 주는 것만 못 할 것이다. 도화와 도명은 서로 각자의 믿음 속에 있었다. 도화는 벌써부터 득의양양해 보였다. 반면 도명의 표정은 무덤덤해 보였다.

“특히 피나 살점 가지고 장난치는 고어물이나 좀비물이 이 안에 있다면 내일 저녁 스테이크는 취소되는 겁니다. 그런 걸 보고 사흘 동안 야채만 먹었던 것이 기억나네요.”

“그런 거랑 스테이크랑 대체 무슨 상관인데요?”

도화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과 함께 스테이크를 못 먹을까 봐 불안해하는 눈빛을 하고 도명을 쳐다보았다. 도화는 그런 걸 보면서 동시에 밥 먹는 데 아무 지장 없었다.

“뭐랄까. 사람 살점이 그런 식으로 다뤄지는 걸 보자니 사람 살점과 우리가 식재료로 먹는 고깃덩어리하고 차이가 없다고 느껴진달까요. 그런 걸 느낀 후 육식을 어떻게 합니까?”

도화는 도명의 말에 어느 정도는 이해됐지만 말 그대로 어느 정도 이해만 되는 수준이었다. 그냥 보고 스릴만 느끼면 되지, 뭘 그렇게까지 해석하면서 사나 했다.

“사람이 왜 그렇게 복잡하게 살아요?”

“그냥 그렇게 생각되는 겁니다. 일부러 딴죽 걸려는 게 아니라.”

도화는 도명을 이해 못 했지만 뒤늦게나마 도명이 말한 종류의 것들을 빼려고 DVD 포장들을 뒤적거렸다. 복수보다는 스테이크라는 보상이 더 좋았다.

‘젠장! 너무 완벽하게 포장했다! 나도 뭐가 뭔지 전혀 모르겠어. 다 뜯어야 하나?’

도명은 그렇지 않아도 플레이하느라 시간도 늦었는데 도화가 이것들을 준비하는 시간도 기다렸다. 그런데 급하게 DVD를 뒤적거리는 도화의 손짓을 보아하니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히 보였다. 도명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시간은 벌써 새벽 3시 반이었다. 지금 당장 영화를 봐도 정말 해가 뜨는 걸 보게 되겠다 싶은데 또 한 번 도화의 준비 시간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 도명이 피곤한 표정으로 도화의 손 위를 자신의 손을 올리며 말했다.

“그냥 여기서 뽑읍시다. 저는 안 먹어도 도화 씨 건 만들어 줄 테니까.”

“하지만 식사는 같이해야 맛있죠.”

“운에 맡기죠.”

도명은 뽑기도 귀찮은지 도화의 손에 들려 있던 DVD를 자신의 손에 가져갔다.

“이걸로 봅시다.”

“무슨 애써 준비한 뽑기가 이렇게 긴장감도 없고 그래요. 진중하게 뽑아 봐요! 벌벌 떨면서요.”

도화가 도명의 손에서 DVD를 뺏어서 다시 상자 속에 집어넣었다. 도명은 낮게 한숨 쉬며 도화가 보란 듯이 허공에서 손가락을 흔들었다. 명백한 연기에 도화의 아랫입술이 툭 튀어나왔다. 도명은 도화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 긴장하고 있다는 듯이 괜히 호흡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뱉었다.

“얄미우니까, 그만 해요.”

도화의 말에 도명은 연기하는 것을 그만두고 도화가 무릎 위에 올려놓은 상자에서 아까 집었던 것을 다시 집었다. 도명이 DVD를 감싼 종이를 뜯었다. 영화 제목은 간단했다. ‘지하실’. 한국 영화로 보였다.

지하실이라는 깔끔한 타이포그래피가 천천히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이 연출했다. 피로 떡칠한다든지 하는 과한 연출은 없었다. DVD 사진도 심플했다. 제목 그대로 어두워 보이는 지하실 입구가 흑백사진으로 찍혀 있었다.

“아. 다행이다. 스테이크는 먹을 수 있겠네요. 이거 아까 도명 씨가 말한 징그러운 장면은 하나도 안 나와요.”

“네, 그래 보이네요.”

도명이 입꼬리를 살포시 올리며 말했다. 도명은 지금까지 한국 공포영화를 보면서 무서웠던 기억은 딱히 없었다.

많이 보이는 않았지만 두세 번 본 후 안 본 지 꽤 됐다. 한두 번 당하고 나면 읽히는 공포 사운드, 우아하지 못한 연출, 분장 등 이런 것들이 영화를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게 했다.

남은 건 조악함과 보기 안 좋은 것에 대한 불쾌한 기분뿐이었다. 혐오스러운 식재료에 온갖 자극적인 양념들을 두서없이 뿌려 만든 음식을 먹어 본 느낌이었다. 굳이 시간 들여서 할 경험은 아니었다.

“영화관에서 영화 본 지 꽤 되긴 했는데 이런 거 광고하는 거 본 적은 없는데요.”

도명의 말투에서 영화를 무시하는 뉘앙스가 분명히 느껴졌다. 도명은 분명 b급 영화 중의 b급 영화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도화는 일단 복수고 뭐고 도명과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같이 본다는 데 신나 있어서 도명의 그런 뉘앙스 같은 건 그냥 흘러들었다.

“아 이거 상영관을 찾지 못해서 조용히 사라진 독립영화인데 꽤 볼만 했어요. 운 좋게 영화제에서 본 다음 아주 어렵게 구한 DVD입니다. 그런 의미로 한정판 중의 한정판이에요. 이 영화가 저를 가장 오랫동안 오싹오싹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만든 거예요.”

도명의 지하실에 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했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도화의 눈이 생기로 가득 찼다. 한때는 퇴근한 도화의 집에 매일같이 틀어졌던 DVD라서 내용에 대한 흥미 때문은 아니었다. 도명의 집은 영화 보기에 너무 완벽했다.

가로 2.5m 정도 벽을 가득 채우는 영화 화면과 솜털을 오싹하게 세우게 만드는 선명하고 울림이 진한 사운드까지. 분명히 보고 또 본 영화인데도 다르게 느껴졌다. 영화에 집중하고 있는 도명의 고막에 흥분한 도화의 시끄러운 소리가 울려댔다.

“저, 가끔, 아니 도명 씨가 해 줄 수 있을 만큼 여기서 영화 보고 가면 안 됩니까? 네? 네?”

도명은 한참 공포감을 느껴야 할 때 도화의 호들갑에 벌써부터 김이 빠지기 시작했다.

“도화 씨, 공포영화 외에 다른 것도 봅니까?”

“음, 아니요.”

“그럼, 안 돼요.”

도명의 단호한 말에 도화의 어깨가 축 처졌다. 도명이 도화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 감싸 안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도명이 친근감을 내비치자 도화가 언제 한 번 다시 여기서 영화 보고 가게 해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영화 속 분위기는 조용하고 어딘가 싸늘한데 옆에 앉은 사람이 시끄러워서 도명은 웃음마저 터졌다.

“도화 씨, 안 돼요.”

도명이 도화의 콧잔등을 손가락 사이에 넣고 흔들며 말했다.

영화는 공포영화라기보다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이었다. 한 남자가 반지하 집에서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했다. 영화 속 사운드는 단조로웠다. 남자의 뒷모습은 계속 어딘가 무기력했다. 눈빛도 오랫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잤는지 퀭했다.

안쪽으로 말려 들어간 그의 허리와 어깨는 보기만 해도 맥이 탁탁 빠지게 하는 게 있었다. 영화 속 남자도 느리고 사운드는 어딘가 기계음처럼 틱틱거리다가 뚝 뚝 끊어졌다.

해가 지기 시작하고 남자의 반지하 집은 남들보다 더 빨리 어둠을 맞았다. 이 단조로운 영화를 보자니 조용하고 나직한 거를 골똘히 잘 보는 편인 도명에게도 졸음이 찾아왔다. 시간도 늦었는데 보고 있는 것마저 이러니 지금까지도 안 졸았던 게 오히려 이상했다. 도명의 눈이 반쯤 잠길 때 도화의 팔이 도명의 허벅지를 움켜쥐었다.

“이건 졸면 안 돼요. 언제 뭐가 어떻게 나타날지 모른단 말이에요. 멍 때리면 더 놀라요.”

도화가 큰 눈의 흰자위를 빠르게 굴러가며 조심스러운 말투로 속삭였다.

‘백구 네가 더 무서워. 누가 눈 그렇게 굴리래.’

“아, 이거 진짜 인내심 시험하게 하는 면이 있네요.”

도명이 밀려오는 졸음을 참기 힘든지 기지개를 켜려는데 영화 속 어떤 눈과 마주치고 말았다. 집 안의 어둠 속에 어떤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리고는 빠르게 사라졌다. 도명은 기지개를 켠 그 상태에서 그대로 굳어졌다. 도명은 순간 자신이 잘못 봤나 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영화 속에서 밤이 되자 낮의 여러 소리에 섞였던 틱, 틱 대는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리고 잦아들었다. 남자는 멍한 눈으로 주변의 빛이 될 만한 것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 이골이 날 대로 난 모양이었다. 집은 유난히 수납장이 많았는데 그 수납장마다 조명기구들이 나왔다. 그리고는 침대 주변에 조명기구들을 늘여놓기 시작했다.

멀티탭과 멀티탭을 연결해가서 침대 주위에 조명기구를 성처럼 연결했다. 심지어 침대 밑에도 조명기구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남자는 침대 밑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는 존재들과 마주쳤다. 남자는 그 눈동자와 마주치는 게 익숙한지 빠르게 조명기구를 집어넣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집은 낮보다 지금이 더 밝아졌다. 빛이 너무 센 나머지 백색으로 보일 정도였다. 남자는 그 빛 속에서 잠을 잔다. 그런 상태에서 자는데 잠의 질이 좋을 리는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다시 남자의 일상이 시작됐다. 남자는 거의 노트북으로 글만 쓰고 있었다.

“이제 보여요? 그림자 속?”

도화가 무릎을 품 안으로 당기며 손톱을 초조하게 물어뜯었다. 공간에 아예 그림자가 없을 수는 없었다. 어떤 시간대라도 그림자는 생긴다. 공간 속 그림자마다 어떤 존재들이 남자 하나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평화로운 음악을 들으며 계란프라이와 식빵을 구워 먹을 때도 그림자 속 눈동자들이 충혈된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림자 속에 그들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긴장을 풀고 영화를 지루하게 보다가도 갑자기 그들과 마주쳐 버리는 것이다.

영화를 볼수록 점점 정신이 지쳐갔다. 자신을 공포에 떨게 할 존재들을 탐색하다 보면 영화 속 남자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게 되는 것이다.

“와, 도명 씨 진짜 이런 거 잘 보네요. 어떻게 반응 하나 없어요?”

“네. 잘 보는 편입니다.”

도명이 턱을 괸 채 화면 속 움직임들을 하나하나 빠르게 쫓고 있었다.

다시 영화 속 남자의 밤이 찾아왔다. 남자는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남자의 편집증은 전날보다 더 심해졌다. 빛을 만드느라 생기는 그림자 영역조차 참을 수 없어 조명과 조명을 겹쳐 넣었다. 남자는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전력량의 과부화로 정전이 왔다. 그의 지하실에 빛 한 점 없는 완벽한 어둠이 찾아왔다. 남자는 서둘러 불빛을 찾아 핸드폰을 찾았다. 그리고 핸드폰을 켜자마자 자신을 골똘히 쳐다보는 검은 존재들과 마주쳤다. 남자는 검은 존재들에게 그래도 먹힌다.

지하실에서는 비명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들이 남자를 순식간에 먹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남자가 사라진 반지하 방에 부동산 중개인과 어떤 노인이 들어왔다. 부동산 중개인은 이곳에서 사람들이 실종된 사실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노인은 싼 월세에 계약을 하고 노인의 생활이 영화 속에서 시작됐다. 어둠 속에서 눈들이 노인을 쳐다보았다. 그 눈 중에는 어둠에 먹혀 버린 아까 그 남자의 빨갛게 충혈된 눈동자가 번뜩이고 있었다.

그렇게 영화는 끝이 났다.

“안 무서웠어요?”

도화가 도명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도명은 피곤하고 뻑뻑한 눈을 손바닥으로 비볐다.

“뭐, 잘 만든 영화인 것 같긴 합니다. 이상한 특수효과나 분장하느라 헛돈 안 쓰고 조명이나 연출만으로 오싹한 기분이 들게 잘 만들었네요.”

“아. 그런 반응 원했던 건 아닌데.”

도명이 덤덤한 표정으로 영화 평론가같이 사무적으로 말하자 도화가 DVD를 케이스에 집어넣으며 아쉬워했다.

“그냥 보기 안 좋은 이미지에 약하신가 봐요. 다음에 도명 씨한테 복수 할 때는 못난이 인형 같은 거 머리 위로 들이부어야 놀라시려나. 으왁! 이 흉측한 것들. 아름답지 않은 건 무섭군요.”

“아주 오냐 오냐 하니까 까부네요. 도화 씨, 저 그런 이상한 방식으로 따라 하지 마세요. 경고 없이 엉덩이 때릴 겁니다.”

‘나는 유도명, 푸른 심장을 가졌습니다. SM 행성에서 온 외계인이라 인간의 마음 같은 건 하나도 모릅니다. 엉덩이나 대세요. 팡팡 쳐 주게요. 난 이럴 때만 마음을 느낍니다.’

도명이 도화가 자신을 우스꽝스럽게 흉내 내던 다른 것에 대한 앙심까지 더 해서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도명이 결국 얄미움을 못 참고 도화의 볼을 늘리며 어금니를 부득부득 갈았다.

“스테이크는 일요일 저녁에 먹읍시다.”

“아, 오늘은 왜 안돼요?”

“장 봐야 해요. 어떻게 냉장고를 열 때마다 스테이크 고기가 있습니까? 저희 집 냉장고는 마법의 주머니 아닙니다.”

“아. 그런 문제면 오늘 저녁에 같이 장 보고, 아 스케줄 있으시구나.”

“네. 선약 있어서 장 볼 시간이 애매합니다.”

시계를 보니 5시 50분이었다. 도명과 도화는 밤을 완벽하게 꼴딱 샜다는 생각에 참았던 피곤이 급격하게 몰려왔다.

***

도명은 12시에 일어나서 화원을 체크한 후 잘 차려입고 약속 장소에 나갔다. 그냥 정기적인 지인들과의 저녁 식사였다. 괜찮은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고 차까지 마시니 집에 오니 저녁 9시였다.

집으로 들어가기 전 도명의 눈이 도화가 살고 있는 윗집 창가에 머물렀다. 그 창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보고는 집에 들어갔다. 도명은 익숙한 듯 집으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 섰다. 그런데 별안간 어두워 보이는 계단실 입구가 갑자기 오싹하게 느껴졌다.

갑자기 도화가 가져온 DVD 커버 사진이 생각났다. 도명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계단실 불을 켰다. 그러자 노란빛이 들어오면서 분위기 있는 붉은 벽돌 길이 보였다.

계단실을 내려오니 이번에는 컴컴한 집 안이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도명은 어디선가 딱딱 소리가 나는 것 같아 괜히 목덜미를 쓸어 넘겼다. 영화 속 소리들이 다 그런 식이었다.

일상적인 소리들에 묘한 엇박자를 추가해서 기계음처럼 반복시켰다. 바람에 창문이 달칵거리는 소리,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물건이 손톱 끝에 부딪히는 소리, 같은 것들이었다.

도명은 이상한 기분을 환기하기 위해 고개를 양옆으로 풀고는 집 안에 들어왔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고 씻으려는 데 계속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도명의 눈이 벽의 모서리 쪽 어둠을 주시했다. 도명은 자신도 모르게 아예 의자에 앉아서 그늘이 진 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자신의 모습이 비치는 전신 거울을 쳐다봤다. 어둠을 주시하는 자신의 모습이 소름 돋았고 배경에 자연스럽게 깔린 어둠에도 소름 돋았다. 도명은 자신도 모르게 스탠드 조명의 조도를 높이고 있었다.

‘아, 차라리 고어한 걸 뽑을걸. 며칠 속 더부룩하고 야채 먹으면 그만인데.’

도명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

“크! 어떻게 이 명작이 안 무섭냐고.”

도화는 작은 노트북 앞에 쭈그려 앉아 어제 도명과 본 영화를 틀며 스무디를 쪽쪽 빨고 있었다. 등골에 닭살이 오도독 돌았다. 역시 공포영화 볼 때는 오싹한 얼음 음료였다.

도화는 영화를 다 보고 신이 나서 두둠칫 엉덩이를 흔들며 스무디 컵을 휴지통에 버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짧은 머리를 긴 머리인 것처럼 멋들어지게 쓸어 넘기며 혼자 중얼거렸다.

“나는 유도명, 푸른 심장을 가졌습니다. 푸른 심장은 못생긴 걸 무서워합니다. 아름다운 저에 비해서 혐오스럽게 생겼기 때문이죠.”

“제가 제 흉내 그렇게 이상하게 하지 말라고 했죠.”

별안간 들리는 도명의 목소리에 도화가 잔뜩 쪼그라진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밑입니다.”

도명이 신경질적으로 두 집을 잇는 쪽문을 두들기며 말했다.

“도명 씨?”

“네, 접니다. 이 문 열고 들어갑니다.”

“아, 네, 제가 지금 많이 누추하지만 들어오세요.”

도화가 괜히 헐렁한 바지춤을 주섬주섬 급히 올렸다. 도명이 남색 파자마 차림으로 도화의 집 안에 들어섰다. 도명의 얼굴에는 날이 서 있었다. 도화는 찔리는지 두 손을 급히 올리며 말했다.

“다시는 안 합니다. 도명 씨 흉내. 잘못했습니다. 도명 씨 들으라는 건 아니고 그냥 혼자 중얼거린 건데. 아니 그나저나 이 늦은 시간에 웬일이세요.”

도명이 핏기가 가신 얼굴로 도화에게 DVD 하나를 건넸다.

“챙겨갈 거면 잘 챙겨가든가. 왜 하나를 빼놓고 옵니까. 그것도 하필이면 소파 밑에 교묘하게.”

도명은 도화를 눈빛으로 뚫어 버릴 기세로 쳐다보며 말했다. 도명이 들고 있는 DVD에는 얼굴 하얀 여자 귀신이 눈동자를 뒤집어 까고 있었다.

“아, 이렇게 빨리 돌려주실 필요 없는데 감사합니다.”

“빨리 돌려줘야죠. 내가 이런 걸 왜 내 집에 가지고 있습니까? 그리고 이게 정말 마지막이에요?”

“네?”

“안 챙겨 간 DVD가 이게 다냐고 묻는 겁니다.”

“네.”

도화가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로 답했다. 도명은 이 무성의한 대답에 신경질과 의심이 무럭무럭 자람을 느꼈다.

“세어 봐요. 정말 다 가져온 게 맞는지. 지금 당장.”

“아. 음. 네.”

도화는 도명의 날카로운 표정에 자신의 DVD들을 체크했다. 도명이 눈에서 레이저를 뿜을 듯이 쳐다봐서 두 번이나 체크했다.

“정말, 그거 하나 빼먹은 건데요.”

도화는 도명이 가져온 DVD를 제자리에 꽂아놓고 의자에 눌러앉은 도명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쳐다봅니까?”

“아. 음. DVD 갖다 주신 거 감사하고, 또, 음, 안 가세요? 저 이제 자려고 하는데.”

“……도화 씨.”

“네.”

“좋은 거래를 제안하고자 하는데요. 도화 씨가 손해 볼 건 없습니다.”

“그 거래 설명하는 데 오래 걸리나요? 뭐 보험 약관 듣는 것 같이 복잡한 제안이에요? 내일 어차피 볼 텐데 내일 하면 안 돼요?”

“제가 오늘 하루 여기서 자고 가는 대신 한 달 월세 빼 주겠습니다.”

“아. 네? 그런데 왜요?”

“…….”

“왜요?”

“도화 씨가 손해 볼 건 없어 보이는데요.”

“아니, 그걸 말하는 게 아니라. 왜 여기서 자고 가는 건데요?”

도화의 끈질긴 질문에 도명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며 말했다.

“어제 그딴 영화를 보고 도화 씨가 부비트랩처럼 DVD를 설치하고 갔는데 제가 어떻게 혼자 집에 있습니까.”

도명은 애써 싸늘한 기분을 떨치려고 청소기를 돌리다가 소파 밑에서 무언가 걸렸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리 성능 좋은 청소기라도 DVD를 빨아들일 수는 없었다.

결국 도명은 순탄한 청소를 방해하는 물체를 찾기 위해 몸을 굽혔고, 소파 밑 어둠 속에서 DVD속 여자의 하얀 눈과 마주쳤다. 도명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도명은 목 뒤로 급하게 넘어가는 호흡을 애써 정리하며 백구의 사악함에 치를 떨었다.

도화는 순간 도명의 말이 이해 가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명이 무서워서 여기서 자겠다는 상황 자체가 비현실적인 것이다. 하지만 이내 곧 그의 말이 이해가 갔다. 도화는 슬며시 올라가는 입꼬리를 급히 손으로 가렸다.

도명을 놀리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었으나 여기서 그를 놀려 버리면 그가 참을 수 없어 할 것 같아 애써 참았다. 그를 마음껏 놀리다가 그가 여기를 벗어나고 난 후 시간들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아.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습니다.”

도화가 괜히 헛기침을 하며 점잖게 말했다. 하지만 눈 안에 깃든 장난기 가득한 눈은 숨길 수가 없었다. 도명이 도화의 그런 눈빛을 못 읽을 리가 없었다. 도명은 굴욕감에 미간을 찌푸렸다. 도화는 도명의 눈치를 보며 괜히 눈을 피했다.

‘아. 젠장! 놀리고 싶어! 그래 공포영화 장인인 내가 고른 영화인데! 안 무서웠을 리가 없지!’

“아, 음…… 그냥 자고 가세요. 아 월세는 빼 줄 필요는 없고요. 걸핏하면 월세 가지고 거래하시는데 음, 고급호텔도 아니고 하루 자고 30만 원은 과한 것 같습니다.”

도화가 점잖은 말투를 계속 유지했다. 하지만 손가락은 방정맞게 그의 허벅지 위에서 노닐었다.

도명이 한숨을 푹 쉬며 머리를 쓸어 넘기고는 도화를 쏘아보았다. 도화가 도명으로부터 몸도 비스듬히 돌리고 있고 입도 가리고 있지만 광대가 봉긋 솟아 올라와 있었다.

“그런 식으로 고문하지 말고 차라리 놀려요.”

도명은 전쟁에서 패하고 굴욕적인 자세로 전시되고 있는 것 같았다. 적장에게 차라리 목을 베라고 소리치는 영화 속 사람들의 심정이 이해 갔다.

“다른 사람의 공포심을 가지고 놀리는 건 조금 어른스럽지 못한 것 같아서요.”

‘아, 젠장!! 놀리고 싶어!!’

“아. 그만 해요.”

도명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야 도화가 가리고 있던 입꼬리 위에 올라간 손을 치우고 참고 있던 웃음을 터뜨렸다.

“저 다 웃었어요. 여기까지입니다. 정말 여기까지입니다.”

도화가 두 손을 허공에 올리며 말했다.

“정말 다 했습니까?”

“네.”

“계속 이상한 표정 짓지 말고 맘껏 모욕해 봐요. 어디.”

“그렇게 살벌한 표정으로 말하는데 어떻게 그래요. 그리고 복수 할 거잖아요. 플레이할 때.”

“하하.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아. 정말 다 했어요. 그냥 좀 뿌듯하네요.”

“뿌듯해요?”

도명이 고개를 양옆으로 천천히 꺾으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이 반문했다.

“제가 무섭다고 했잖아요! 그냥 내 말이 맞으면 기분 좋잖아요. 그래서 뿌듯하다는 뜻입니다.”

‘도화 씨가 하나 오해하고 있는 게 있는데 저는 이런 걸 혐오하는 거지 무서워하는 건 아닌데요? 그 차이가 뭔지는 알겠어요?’

도화는 도명의 ‘그 차이가 뭔지 알겠어요?’ 하는 선생 같은 말투를 따라 하고 싶었지만 이건 도를 넘는 것 같아 참았다. 도화는 일단 지금은 참고 혼자 있을 때 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아. 네, 인정하죠. 솔직히 볼 때보다는 보고 난 후 더 무서운 영화더군요. 묘하게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면이 있습니다.”

도명의 말에 도화가 잔뜩 반가운 표정으로 허공에 손가락을 흔들었다. 그는 잔뜩 흥분해 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공포영화에 대해서 자신이 느낀 것 그대로 정확히 말하는 상대를 만나니 반가운 것이다.

“그렇죠! 이게 볼 때는 오히려 지루한 기억이 더 센데, 보고 난 후가 더 소름 돋는다니까요. 계속 불현듯 생각나요.”

잔뜩 신이 난 도화의 반응에 자존심 상해 계속 날이 서 있던 도명의 표정이 풀렸다. 저 순수하게 신나 하는 표정을 보고 더 이상 표정을 구기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이쯤 되니 이미 상한 자존심이고 뭐고 도화가 기분 좋으면 그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명이 도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런 도명의 웃음에 도화의 표정이 멍해졌다. 도화가 급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 음, 잠은 어떻게 하죠? 제가 혼자 자는 침대치고 넓은 편이긴 한데, 그래도 도명 씨가 불편하면 제가 바닥에서 자도 되고요.”

“일단 침대를 보죠.”

도화가 도명을 침실로 안내했다. 도화의 침실은 단순히 침실이라기보다는 안에 작은 책상도 있고 DVD장도 있었다.

“들어가기 전에 아, 잠시만요. 음, DVD장 가릴까요?”

“그래 주면 더 좋고요.”

“잠시만 여기 계세요.”

도화가 창고에 뒀던 겨울 커튼을 꺼내서 자신의 DVD장 위를 덮었다. 그리고는 도명에게 들어오라는 듯이 손짓을 했다.

도화는 자신의 침실을 보여 주자니 급격히 밀려오는 민망함에 괜히 뒷목을 긁적거렸다. 도화가 지저분한 편도 아니고 침구 취향도 하얀색으로 지극히 평범했는데도 그랬다.

“아, 저거 나름 호텔 베개입니다. 그 있잖아요. 머리가 푹 잠길 정도로 폭신폭신한 거요.”

도화는 괜히 어색해져서 괜히 베개를 품에 안고 만지작거리며 주절거렸다.

“침대 크기는 혼자 자는 사람치고는 크네요.”

“네. 침대는 큰 게 좋아요. 방도 넓은 편이라서 넣어도 크게 무리가 없어서요.”

도명과 도화가 서로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두 사람 다 그다음 이야기를 진행하기가 왠지 어려웠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두 사람이 동시에 입술을 열었다. 도명이 도화에게 먼저 말하라는 듯이 손짓했다.

“도명 씨만 안 불편하다면…….”

‘도명 씨만 안 불편하다면 같이 자도 괜찮은 사이즈 아니에요?’

도화는 다음 말이 도저히 떨어지지 않았다. 아직까지 도명의 페니스를 삽입하는 섹스는 안 했지만 어쨌든 같이 침대에 눕는 것 이상의 수위로 놀았는데 같은 침대에 누워서 자자는 말이 어려웠다. 도화의 계속되는 침묵에 도명이 입술을 열었다.

“제가 바닥에서 자겠습니다. 늦은 시간에 갑자기 와서 방의 주인을 바닥에서 자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도명 씨 같이 예민한 사람이 바닥에서 자면 제가 불편해서요.”

“도화 씨가 익숙한 침대 놔두고 밑에서 자면 저는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저는 길바닥에서 자도 잘 자는 사람이라.”

“불편합니까? 저랑 같이 자는 게 말입니다. 사람이 옆에 있으면 잘 못 자는 편이라든지.”

“아니요. 제가 그렇게 예민할 리가요.”

“저도 그렇게 예민하진 않습니다.”

“예민하게 생기셨는데.”

“역시 불편합니까? 저 돌려서 말하는 거 피곤해하는데요.”

“정말 안 불편합니다.”

“저도 안 불편합니다.”

“아. 그럼.”

“네.”

“아, 저는 그러면 씻으러 가겠습니다. 아, 도명 씨는 씻으셨어요?”

“네.”

“아. 저는 씻으러 갈 테니까 내 집이라 생각하고 누워 계세요. 아 도명 씨 집이긴 한데.”

“네, 돈 받고 빌려줬으니 지금 이 순간은 도화 씨 집이죠.”

“아. 네.”

도화는 이야기를 할 수록 이상하게 점점 달아오르는 얼굴에 급히 자리를 피했다. 화장실에서 도화는 괜히 칫솔질을 평소보다 빠르게 하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미적거리면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혀서 그렇지 않아도 묘하게 빨간 얼굴이 더욱 빨갛게 달아오를 것 같았다.

도화는 양치를 끝내고 얼굴을 씻고 발도 뽀득뽀득하게 씻었다. 도화의 살에서 흔한 비누 냄새가 났다. 마트에서 대량 구매한 비누였다. 도화는 다 씻고 나니 자신의 침실에 들어가려는데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도명 씨, 저 들어가요.”

도화가 문지방 앞에 서서 도명을 향해 괜히 외쳤다.

“네.”

도명은 이미 도화의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으로 회사에서 보낸 PDF 파일을 체크하고 있었다.

“아, 일하고 있어요?”

도화가 침대 매트리스에 올라가자 한쪽이 기울어졌다. 도명은 도화가 올라간 이후에도 여전히 PDF 파일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결제는 한 거긴 한데 그냥 다시 확인 중이었습니다.”

“아. 역시 일을 철저히 하시네요.”

도화가 PDF 파일을 보고 있는 도명의 어깨 쪽으로 몸을 바짝 기울이며 말했다. 너무 가까워진 도화를 도명이 멀뚱히 쳐다보았다.

“아, 기밀인가요? 그렇다면 죄송해요.”

“기밀은 아닙니다.”

“아, 그런데 저, 불 꺼도 돼요?”

“그럼요. 자려고 누운 건데요. 아. 그런데.”

도명이 말을 하다 말고 도화의 뒷머리를 손바닥으로 감싼 후 자신의 코 쪽으로 끌어당겼다. 도화는 도명이 자신에게 키스하려는 줄 알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도화의 기대와는 달리 도명은 그의 살결 냄새만 맡고 있었다. 도명의 숨결이 도화의 목덜미에 습하게 퍼졌다.

“스킨, 로션은 안 바른 모양이네요. 비누 냄새만 나는데.”

“아. 음. 그러면 안 되나요?”

도명의 손이 도화의 턱을 움켜쥐고 이리저리 돌리며 그의 피부 상태를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스킨이나 로션 같은 거 안 썼어요?”

“아. 네.”

도명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런 도명의 반응에 도화는 괜히 그의 눈치만 살폈다.

“세상 참 불공평하네.”

“네?”

“이렇게 무심한 것 치곤 피부가 꽤 괜찮아서요.”

“이. 그래요?”

도화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너무 긴장 풀지 말아요. 도화 씨 지금 나이가……?”

“30이요.”

“그 나이면 곧, 타고난 것도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아. 네.”

“안 믿네요.”

도명이 도화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도화는 찔리는지 괜히 도명의 눈을 피했다. 도화의 눈앞에 30이 넘어간 도명이 있는데 그의 피부에서 꿀이 떨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도화보다 피부가 더 좋은 연장자가 눈앞에 있는데 도명의 말이 와 닿을 리가 없었다.

도화는 지금까지 대인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딱히 피부나 외모에 크게 신경을 쓴 적이 없었다. 하지만 도명이 그렇게 말하니 갑자기 피부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너무 안 꾸미는 자신을 도명이 내심 싫어하지는 않을까 생각했다. 지나치게 세련된 상대와 관계를 가진다는 건 무심하게 살아온 사람에겐 갑자기 신경 쓸 일이 늘어나는 일이었다.

“아, 저 도명 씨, 그래서 뭘 발라야 하는데요?”

도화의 말에 도명이 손가락 끝으로 도화의 피부 결을 만지작거렸다.

“피부 예민하거나 그렇진 않죠?”

“아, 예민함이요? 무슨 예민함이요?”

도화의 반문에 도명의 웃음이 터졌다. 쓸데없는 걸 물어봤다.

“제가 바르는 거 발라 볼래요? 안 맞는 거 같으면 바꾸면 되니까요. 잠깐 내려갔다 올게요.”

“아, 지금이요?”

“네, 바로 아래인데요. 뭘.”

“아 무서우실 텐데 같이 내려갈까요?”

도화가 진심으로 걱정되는 표정으로 말했다. 도명이 도화의 뒷덜미를 꾹 누르며 말했다.

“그 정도까진 아니에요.”

자신의 반지하 방에서 올라온 도명의 팔뚝에 소름이 오도독 돋아 있었다. 도명은 다시 도화의 침실에 와서 자신의 화장품 가방을 내려놓았다. 도명이 도화보고 자신의 앞에 앉으라는 듯이 매트리스를 툭툭 쳤다.

가방에서 화장품 제품이 나올 줄 알았는데 각종 천연 허브 오일 병들이 나왔다. 도명이 허브 오일 병중에 하나를 골랐다. 그리고는 토너 병 안에 고른 허브 오일을 스포이트로 5~6방울 정도 떨어뜨렸다. 그러자 투명한 토너 위로 노란 띠가 보였다. 도명이 토너 병을 흔들었다.

도화는 이 모든 게 무슨 화학 시험하는 것 같았다. 도명이 방금 만든 기초 화장품을 화장 솜에 적힌 후 도화의 얼굴에 발라 주며 말했다.

“음. 수학여행 온 것 같아요.”

“수학여행이요?”

“여자애들이 이러고…… 놀.”

도화는 말을 하다가 급하게 입술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도명의 눈치를 살폈다.

“지금 우리가 계집애들 같다고 하는 거죠? 아니, 정확히는 제가 그렇다는 거죠?”

“그런 거 아닌데요.”

“아니긴요. 도화 씨 학생 때 운동부 하면서 저 같은 사람 많이 욕했죠? 걸핏하면 이상한 남자다움에 대한 기준에 대해서 설파하면서.”

“진짜,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도명이 도화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짜 학생 때는 아니고 첫 커밍아웃하고 전학 간 후부터는 조금씩 그런 식의 표현을 많이 쓴 것 같네요. 음…… 그러니까 고3 때부터 조금씩 쓴 것 같습니다.”

“왜 첫 커밍아웃 이후에는 그랬는데요?”

“흉내 내려고요.”

“흉내요?”

“이성애자 남자들 흉내 내려고요. 그것도 소위 말하는 상남자 같은, 이성애자들 스테레오 타입 같은 애들 있잖아요.”

“쓸데없는 흉내를 냈네요.”

“그냥 그게 안전하다고 믿었어요.”

도화의 말에 도명이 그의 이마에 손가락을 튕기려고 했다. 도화가 눈을 질끈 감으며 두 손을 머리에 올렸다. 하지만 느껴져야 할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도화가 조심스럽게 눈을 떴을 땐 도명이 도화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그런다고 안전해지진 않아요.”

“네, 그런 것 같네요.”

“정말 그렇다고 생각해요?”

“네. 왜냐하면 반나절 전만 해도 저를 괴롭히던 도명 씨와 이러고 있는 게 너무나도 안전하다고 느껴지니까요.”

“괴롭힌 게 아니라 예뻐한 건데. 물론 어디까지나 도화 씨가 내켜 했다면 말이죠.”

도명이 도화의 얼굴을 정돈해 주는 것을 끝냈다. 도화는 드디어 도명의 몸에서 나는 냄새의 정체를 알았다. 화장품을 직접 만들어서 쓰니 다른 곳에서 이런 냄새를 못 맡았던 것이었다. 도화는 도명에게서 몸의 향기를 훔쳐낸 것 같았다.

솔직히 피부가 좋아지고 이런 건 아직까지는 모르겠고 자신의 몸에서도 도명의 시그니처 향이 나자 탐이 났다. 마치 그의 페로몬을 손 안에 얻은 것 같았다. 도화의 손이 탐욕스럽게 도명이 방금 만든 화장품을 움켜쥐었다. 도명은 그런 도화의 손짓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안 뺏어가요. 가져요.”

“이런 거 비싸요?”

“살 만한 가격대입니다.”

도명이 방금 만든 기초 화장품을 도화에게 건네주었다.

“진짜 그냥 가져도 돼요?”

“네. 이런 거 많아요. 아주 많아요. 혹시 도화 씨에게는 안 맞을 수도 있으니까 두고 봅시다. 보고 다른 거 추천해 줄게요.”

도명의 말에 도화는 도명의 화장품이 자신과도 맞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도화와 도명이 침대에 누웠다. 둘이 같이 불을 끄고 나란히 누워 있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도화의 발가락이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렸다. 도화는 잠버릇이 사나운 편은 아니었지만 도명을 의식하면서 움직이는 것 하나하나 조심했다.

도화는 숨소리조차 선명하게 들리는 것 같아 조바심을 냈다.

“도화 씨, 숨은 대체 왜 참습니까?”

“아, 음. 그냥 제 숨소리가 도명 씨에게 시끄러울 것 같아서요.”

“숨소리조차 거슬려하면 남의 집에서 잠을 자면 안 되죠.”

“하지만, 지금 제 숨소리 이상한 거 다 재고 계시잖아요.”

“그거야 이상하게 숨 쉬고 있으니까요. 도화 씨 숨넘어갈 것 같아요. 그냥 편하게 쉬고 있으면 신경도 안 쓰죠.”

“아. 네. 제대로 쉬어 볼게요.”

도화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숨을 쉬는데 평생 숨 쉬던 그 박자가 갑자기 헷갈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의식하지 않던 숨소리를 의식하자니 박자가 이상해졌다.

“저, 도화 씨? 숨 쉬는 법 까먹었습니까?”

“그럴 리가요.”

결국 도명이 웃음이 터졌다. 도명의 웃음에 도화의 얼굴이 새빨갛게 익었다. 그 후로부터 30분이 지났다. 30분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말도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 다 잠들지 않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도명이 도화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도화 씨.”

“네.”

“…….”

“말씀하세요.”

“오늘 일은 비밀입니다.”

“네. 저 비밀 잘 지켜요.”

“착하네요.”

***

도화의 감은 눈 위로 따사로운 햇살이 내려앉았다. 도화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뒤에서 누군가 안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히 마지막에 잠들기 직전에는 두 사람 다 정자세로 반듯하게 누워 있었는데 도명이 잠결에 도화를 안고 잔 모양이었다.

도화의 등에 도명의 가슴팍이 닿았다. 도화는 순간 너무 기분 좋아서 오그라든 날갯죽지를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이내 하체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도화는 엉덩이뼈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느낌에 척추를 곧추세웠다.

도명이 잠자는 와중에도 발기를 하고 있었다. 포개진 몸 때문에 도명의 페니스가 도화의 엉덩이골 사이에 아슬아슬한 간격으로 떨어져 있었다.

‘도명 씨, 사춘기도 아닌데 아침부터 건강하네…….’

잠이 덜 깬 와중에도 도화의 얼굴이 빨갛게 익었다. 도화는 난감한 표정으로 허리를 움찔거렸다. 그때 도명이 눈을 떴다.

“도화 씨 일어났습니까?”

도명이 살짝 잠긴 목소리로 도화의 귓가에서 말했다. 도명의 목소리에서 그가 잠에서 완전히 깨지 않았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답지 않게 뭔가 나른한 기운이 섞여 있었다.

“아. 네.”

“도명 씨도 일어나 버리고 말았네요.”

“몇 시입니까?”

“아. 8시네요.”

도화가 협탁 위 전자시계로 눈동자를 굴리며 답했다.

“늦잠이네요.”

도명이 도화의 목덜미 뒤에서 낮은 한숨을 쉬었다. 매일 새벽마다 일어나는 사람이니까 그의 기준으로는 늦잠이 맞았다.

“아. 네. 그런데 주말이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도화 씨 아침으로 뭐 먹고 싶습니까? 샌드위치? 가벼운 가정식? 토스트?”

“아…… 아침이요?”

‘지금 당신 몸 상태가 아침 메뉴보다 다른 게 더 중요한 것 같은데? 본인 몸인데 자기가 발기 한 것도 모르는 거야?’

도화는 도명의 지나치게 여상한 말투를 이해를 못 하겠는지 눈동자가 흔들렸다.

“왜요? 이왕 같이 있는 김에 식사 메뉴 물어보는 건데 그것도 안 됩니까? 도화 씨랑 밥 먹으려면 예약해야 합니까? 사람이 지나치게 꽉 막혔네요.”

‘꽉 막힌 건 당신이 아침부터 발기해서 땀으로 막힌 내 땀구멍이지!’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도화는 더 이상 다음 말을 이어 나갈 수 없었다. 도명의 발기 사실을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나올 분위기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왜 말하다 말아요? 뭐가 문제인데요?”

“아, 샌드위치가 좋다고요.”

“크루아상 빵으로 만든 샌드위치가 좋습니까? 식빵이 좋습니까?”

‘뭐가 먹고 싶긴! 당신을 먹고 싶다고!’

“아. 저는 정말 아무거나 좋은데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러지 말고 뭐가 먹고 싶은지 확실하게 말해 봐요.”

도화가 여러 가지 의미로 열이 뻗쳐서 고개를 확 돌리려는데 도명이 도화의 고개를 손바닥으로 누르며 말했다.

“뒤돌아보지 말아요. 저 지금 막 일어나서 못생겼으니까. 대답이나 해요. 크루아상? 식빵?”

‘못생기긴! 저번에 보니까 잘생긴 사람은 그냥 어떤 상황에서도 잘생겼던데! 이 사람이 또 사람 성질 긁네. 내 얼굴 볼 때마다 무슨 생각하는지 정말 알고 싶네.’

“크루아상이요.”

“알겠습니다. 햄 잔뜩 넣어서 만들어 줄게요. 햄 좋아합니까?”

“네.”

‘햄 말고 다른 걸 먹고 싶다니까!’

도명이 도화의 머리끝까지 이불을 끌어 올려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머리가 뻗친 곳은 없는지 머리 상태를 점검했다.

“저 다 씻고 나올 때까지 이 상태로 더 자요.”

도명이 도화의 머리맡에 알람을 30분 후에 올리도록 설정하면서 말했다. 도화가 얼굴을 빼꼼 내밀려고 하자 도명이 이불째로 도화의 머리를 꾹 눌렀다.

“정확히 그 상태에서 자요.”

도화는 도명이 침대에서 벗어나고 1분 정도 되자 다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도명이 도화의 욕실에서 씻는지 물소리가 들렸다. 도화는 이미 아침의 엄청난 상황 때문에 잠이 확 달아난 지 오래였다.

도화가 까치발을 하고 욕실로 걸어갔다. 도명이 샤워하는 모양이었다. 쏟아지는 물이 바닥을 치고 하수구로 흘러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소리 와중에 도명이 자위하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했지만 귀를 쫑긋거릴수록 묘하게 흘러나오는 신음 소리와 살덩어리를 어루만지는 소리가 들렸다. 도화는 욕실 문 앞에서 쭈그려 앉아 귀를 틀어막다가 다시 살며시 귀를 틀어막은 손가락 사이를 폈다.

그리고 다시 귀를 틀어막고 피는 것을 반복했다.

도명이 샤워를 마치고 젖은 머리를 털면서 욕실에서 나왔을 땐 도화가 식탁에 앉아서 멍 때리고 있었다. 도화의 눈은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저, 도명 씨.”

“더 자라니까요. 도화 씨처럼 말 안 듣는 섭은 진짜 처음입니다. 뭐 플레이 중인 것도 아니니까 그냥 넘어갑니다.”

‘막 샤워하고 나온 모습 너무 야해. 머리카락에서 떨어지는 물 야해. 젠장, 공격하고 싶어. 이런 사나운 생각이라니!’

도명이 도화의 빨개진 귓바퀴를 조금 세게 잡아당기며 이죽거렸다.

“대체 언제부터 저를 관음한 겁니까?”

“……저 펠라 연습 많이 필요한 거 아닙니까? 전에 너무 형편없었다고 하셨으니까.”

도화가 고개를 푹 숙이며 천천히 말했다. 그러자 도명이 도화의 머리카락을 헝클이면서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침 식사도 하기 전에 무리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침 식사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도화가 답답함에 머리카락 사이를 손가락으로 마구 헤집으며 괴로워했다.

***

도명의 가게, 식탁 위에 앉은 도화의 표정이 미묘했다. 도명은 평소처럼 그루밍이 잘 된 상태로 도화의 식탁 위에 노란색 접시를 내려놓았다. 노란 접시 위에는 황금색으로 잘 구워진 크루아상과 그 사이에 아삭거리는 야채와 햄이 차곡차곡 쌓아 올라가 있었다. 잘 구워진 빵에서 식욕을 자극하는 버터 냄새가 났다.

도명이 도화의 앞에 우유가 가득 담긴 컵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도화의 표정은 어딘가 뾰로통했다. 웃긴 건 뾰로통한 와중에도 좋은 음식 냄새에 그의 코가 벌름거리고 있었다.

도명은 정성을 들인 음식 앞에 놓고 표정 안 좋은 사람을 별로 안 좋아했다. 도명이 도화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하여간 발정 나선.”

도명이 혀를 차며 말했다. 도명의 말에 도화의 얼굴이 빨갛게 익었다.

“갑자기 발정이니 뭐니 하는 말이 왜 나옵니까? 뜬금없이 말입니다.”

“뜬금없기는요. 뻔히 속이 보이는데 시치미 떼는 겁니까? 갑자기 제 앞에서 셔츠 하나 못 갈아입어서 뒤돌아 서 있으라고 하던 시절이 그립네요. 벌써부터 이렇게 빨갛게 익어 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정말 그런 거 아닙니다.”

“아니긴요.”

“아닙니다.”

도화의 목소리가 커졌다.

“네, 도화 씨 말이 맞다고 칩시다.”

도명은 도화와 더 이상 말다툼할 가치가 없다는 듯이 자신이 만든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자기가 만들었지만 맛있었다.

크루아상을 잘하는 집에서 사 온 크루아상은 그 자체로도 맛있었지만 도명이 적당히 버터를 더 두르고 오븐에 넣고 데워서 겉은 바삭하고 안은 부드러운 풍미가 있었다. 그 사이에 신선한 채소와 소스에 적당히 절인 햄이 가득 들어 있으니 맛이 없을 수가 없었다.

도명이 식사나 하라는 듯이 샌드위치 접시를 도화의 앞에 더 내밀었다. 그러자 도화는 여전히 좋지 않은 표정으로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무는데 도화의 얼굴이 오븐에 녹는 버터처럼 녹아들었다. 도화는 식사를 하는 내내 말없이 샌드위치를 먹어 치웠다. 그리고는 우유를 마시면서 도명을 향해 말했다.

“도명 씨가 그렇게 모든 걸 알지는 못합니다. 제 마음속을 다 알 거라는 그 믿음이 참, 오만하네요.”

“아, 그렇습니까? 식사 끝나고 도화 씨 입에 달콤한 막대 하나 물리려고 했는데, 그러지 말아야겠습니다.”

“…….”

“그, 아까는 정말 그런 게 아니었는데, 지금은…… 조금 그러고 싶네요.”

마지막 우유 한 모금을 마시는 도화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거렸다. 그리고는 도명의 반응을 살피며 두 손을 모으고 앉았다.

“다 먹었습니까?”

“네.”

도화가 빈 접시와 우유 컵을 자신의 머리 위에서 뒤집어 털어 보였다.

“완벽하네요.”

도명이 완벽하게 깨끗한 식기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간단한 아침 식사라서 설거지해야 할 건 우유 잔 두 개와 접시 두 개뿐이었다. 샌드위치를 만드는 과정에서 생긴 다른 설거짓거리들은 도명이 만드는 중간중간 깨끗이 정리한 후였다.

“아, 설거지는 제가 할까요?”

“제가 해야 빠르고 마음 편합니다. 해야 할 설거지 양도 애매하고.”

도화는 도명이 주방을 정리하는 동안 그가 보는 그림책을 꺼내서 보았다. 주방에서 들려오는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묘하게 평화로웠다. 솔직히 뭐가 좋은 그림인지 몰라서 그냥 보고만 있었다. 그저 드는 생각은 색이 참 예쁘다, 정도였다.

“이번에 우리가 계약 고려 중인 작가 그림인데 어때요?”

도명이 손의 물기를 닦으며 그림책을 보는 도화의 등 뒤에 서며 물었다.

“일러스트레이터하고도 같이 일해요? 원예 잡지 같은 거 아니었어요? 그때 봤던 서윤 씨 같은 포토그래퍼하고만 일하는 줄 알았어요.”

“매체를 다양하게 쓰고 있죠. 있는 그대로를 관찰할 수 있는 사진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고 이런 일러스트레이터의 해석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고요. 사실 사진 자체도 포토그래퍼마다 자신만의 개성이 있어서 엄연히 말하면 완벽하게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건 아니긴 하지만 어쨌든, 기획마다 매체 선택을 다르게 해요. 이 작가는 주관적 해석이 너무 세서 호불호가 많이 갈려서 고민 중입니다. 대신 느낌은 한 번에 강하게 다가오는 점이 좋아서 아직까지 고민 중입니다.”

“아, 저 이런 건 전혀 몰라서.”

도화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별거 없는데. 그냥 보고 있으면 기분 좋으면 되는 겁니다.”

“아, 음. 그냥 색이 참 매력적이라는 생각은 듭니다.”

“그렇죠? 선인장의 꽃을 그려 달라고 요청할 생각인데 어울릴 것 같죠? 화려하고 열정적인 것에 어울리는 작가입니다.”

도명이 그렇게 말하며 도화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은근하게 도화의 귓바퀴를 검지와 엄지 사이에 집어넣고 뭉근하게 비볐다.

“도화 씨 땀을, 좀 흘렸네요. 일광욕이 과했나?”

“네, 조금 덥네요.”

“통 창이 많아서 그럴 겁니다. 여기는 식물들한테 모든 게 맞춰져서 햇볕에 드는 날에 지나치게 뜨겁죠. 잠깐만 사람에게 맞춰 봅시다.”

도명이 창가로 다가가 블라인드를 내리기 시작했다. 하얀 벽면이 하얗게 빛나고 있다고 느낄 정도로 쨍했던 공간이 천천히 암청색으로 변했다. 블라인드가 좌르륵거리며 내려가는 소리에 도화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입안에 침이 고이는 것을 느꼈다. 도명이 가게의 현관문을 닫았다. 그 찰칵거리는 소리가 도명이 바지 버클을 푸는 소리 같았다. 도화의 뺨이 흥분감과 부끄러움에 발갛게 익으며 시선을 괜히 바닥에 고였다. 그리고는 괜히 의미 없이 바닥 타일의 수를 셌다.

“아직 좀 덥죠?”

“네.”

“얼굴까지 익었네.”

도명이 도화의 뺨에 손바닥을 갖다 대며 여상스러운 말투로 중얼거렸다. 도명이 뒷마당으로 향해 있는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앞마당의 일부 환기창도 열었다. 그러자 공간 안에 자연 바람이 살랑살랑 불었다.

“이제 단 거 먹읍시다.”

“네.”

“그렇게 그게 좋습니까? 왜 이렇게 순해요?”

도명이 도화를 향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도화는 아무 말도 없었다. 도명이 주방으로 향하고 냉장고에서 막대 아이스크림을 가져왔다.

“바닐라, 초코, 딸기 중에 골라 봐요.”

도화는 순간 뭔가 자신이 상상한 것과 상황이 다르게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단 도명의 질문에 얼떨결에 답했다.

“바닐라요.”

‘잠깐, 설마, 지금 아이스크림 먹자는 거 아니지?!’

도화의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렸다.

‘아니, 아이스크림 먹는 건데 가게 문까지 왜 닫았어.’

도명이 아이스크림 포장을 뜯어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도화에게 이리 오라는 듯이 손짓했다. 도화는 혼란스러웠지만 일단 도명이 오라는 대로 왔다.

“자 먹어요. 달 거예요.”

“저기요. 도명 씨.”

도화의 표정이 이상한 모양새로 구겨졌다.

“지금…… 일부러 그러는 거죠?”

“뭐가요?”

도명이 시치미를 떼며 막대 아이스크림을 쪽쪽 빨며 말했다. 도명의 입술에 연유로 만든 하얀 아이스크림이 묻어 나왔다. 도명이 도화에게 정말 안 먹을 거냐는 듯이 손가락 사이에서 아이스크림 막대를 끼워 넣고 나른하게 흔들었다.

“제가 도명 씨를 바, 밝히는 게 그렇게 재밌어요?”

“조금요.”

“네?!”

도명의 말에 도화가 경악했다. 뻔뻔스러운 인간 같으니.

“말 그대로 조금요. 그것보다 마지막 주말이잖아요. 또 바로 전날 플레이했고, 오늘은 좀 평화롭게 지나가고 싶은데요.”

“펠라를 하는데…… 평화롭지 않을 건 또 뭔데요?”

“가르쳐 주는 건 엄격하게 해야죠. 전 거칠게 가르쳐 주는 거 좋아해요. 그런 거랑 평화로운 건 좀 거리가 있지 않나요?”

도명이 도화의 턱밑을 간질이며 속삭였다. 도명의 발이 도화의 허벅지 위에 올라갔다. 그의 구둣발이 도화의 허벅지 위를 쓰다듬다가 눌렀다. 도화는 도명의 발짓에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었다.

‘잠깐, 어라, 나 왜 나도 모르게 무릎 꿇고 있어?! 지금도 뭔가 엄격한데? 뭐가 평화로운 주말이야!’

“이거 꽤 맛있는데? 진짜 안 먹어요?”

도명이 혀끝으로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말했다. 도명의 살짝 말린 혀끝에 하얗게 녹은 아이스크림이 고였다. 도명이 멍한 표정의 도화를 내려다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도명은 자신의 가랑이 사이에 아이스크림을 놓았다.

“먹어요.”

도명의 말투가 명령어처럼 뚝 떨어졌다. 도화는 머뭇거리다가 도명이 다리 사이에 얼굴을 집어넣고 아이스크림을 빨아 먹었다. 천천히 녹아내리기 시작한 아이스크림이 지독하게 달고 진득했다. 도화의 뜨거운 혀에 아이스크림이 진득한 모양새로 녹아내렸다.

도명은 자기 것까지 하나 더 까서 입안에 물고 있었다. 살짝 덥기 시작한 날씨에 어울리는 달콤한 디저트였다. 하지만 시원해지기는커녕 몸이 애매한 온도로 데워지는 기분이었다. 도화의 목 뒤는 여전히 땀이 맺혀 있었다.

“맛있죠? 아이스박스 들고 제과점에서 잔뜩 산 아이스크림입니다. 가게에서 수제로 만들었대요.”

도명의 질문에 도화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명이 귀엽다는 듯이 도화의 귓바퀴에 검지를 밀어 넣고 문질거렸다. 도명의 다리 사이에서 도화가 고개를 처박고 아이스크림을 빠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두 사람이 구강성교를 하고 있다고 확신할 것이다.

“저 그런데 우리 아이스크림 왜 이러고 먹고 있죠? 음, 꼭 이러고 먹여야 해요? 왜 아이스크림을 도명 씨의 다리 사이에서…….”

도화가 입술에 진득한 아이스크림을 묻히며 말했다.

“그게, 조금 더 즐거우니까요. 아, 도화 씨 아이스크림 바닥에 흐릅니다. 신경 쓰세요.”

도명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도화는 도명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혀를 내밀어 흘러내리는 아이스크림을 입안에 가득 담았다. 순식간에 입안에 아이스크림이 4분의 1이나 들어갔다. 도화의 입가에서 넘치는 하얀 아이스크림을 도명이 엄지로 훔치고는 자신의 입가로 가져갔다.

도화는 아이스크림 나무 막대만 앙상하게 남은 후에야 도명의 다리 사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내일 저녁에 먹을 스테이크 재료 장 볼 건데 관심 있으면 도화 씨도 가겠습니까?”

“아. 네.”

도화는 도명의 차에 타고 마트로 향했다. 도명에게 음식 재료 고르는 법에 대해서 배우다가 도화의 발걸음이 아이스크림 코너에서 멈췄다. 아이스크림이 세일 중이었다. 본격적으로 더워지기 전에, 그것도 도명의 차가 있을 때 잔뜩 사고 싶었다. 도화가 아이스크림 냉장고에 달라붙어 있는데 도명이 멈춰 섰다. 그리고는 아이스크림 중 하나를 가리키며 넌지시 말했다.

“저게 도화 씨 입술 크기에 딱 맞을 것 같은데요.”

도명의 말에 도화가 얼굴이 새빨갛게 익었다. 도화가 깜짝 놀라서 카트 옆에 선 도명을 쳐다보았다. 정작 성희롱을 한 쪽은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도명의 한 마디에 졸지에 마트에서 각양각색 딜도 고르는 기분이 되었다.

“우리 그런 거 고르는 거 아닙니다.”

“아, 그렇습니까?”

“정말 아닙니다.”

도화가 도명이 뒤를 쫓으며 항의했지만 도명은 마냥 웃으며 카트를 밀 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