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려. 가만히 있어.
시간은 흘러서 시계 시침이 저녁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도화는 도명의 가게 앞마당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 커피와 함께 스릴러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그가 보는 자극적인 공포영화에 비하면 섬뜩하게 놀라는 장면은 없었다. 하지만 섬세한 장면 연출과 감각적인 색감이 잔잔하게 보는 맛이 있었다. 무채색에 살짝 감도는 붉은색 혹은 한색이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도화는 슬슬 잠이 밀려오기 시작했지만 일부러 두 편을 더 연달아 봤다. 하지만 그 후에도 도명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일이 많은가.’
12시가 다 돼서야 도화는 도명을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고 잠이 들었다. 쉽사리 잠들지 않았지만 내일 출근을 해야 하기에 억지로 잠을 청했다.
도화가 눈을 떠 보니 시계가 새벽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제 대략 12시에 잠이 들었으니 5시간밖에 자지 않았다. 그는 평균적으로 7시간을 자는 편이었으니 피곤해야 했다.
너무 일찍 눈을 떴다는 생각에 다시 베개에 머리를 뉘었지만 역시 정신이 너무 말똥말똥했다. 도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 씻었다.
출근 시간까지 약 2시간 남았다. 도화는 거실 창가에 가서 창문을 열었다. 고개를 빼고 내려다보니 도명의 차가 주차해 있었다. 새벽 5시면 도명이 바삐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시간인데 도명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도명의 차는 보여서 다행이었다. 그가 무사히 집에 왔다는 증거니까.
도화는 문득 도명이 펠라를 배우러 오라고 한 시간이 13시간밖에 안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출근하고 퇴근하고 나면 시간이 더 촉박해진다. 도화는 여기서 회피해 버리면 시간이 그의 목을 조여 올 것을 알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 해 버리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강한 결심이 들 때는 드물었다.
[도명 씨, 저 지금 시간이 남아서요. 저 지금 그거 배우면 안 될까요? 펠라요.]
도화는 차마 음성으로 도명과 대화할 용기가 나지 않아 문자를 보냈다. 도명은 답장이 없었다.
도화는 손톱 끝을 초조하게 물어뜯었다. 도화는 눈을 감고 음악을 3곡 정도 들었다. 도명이 하루 종일 핸드폰 화면을 쳐다보고 사는 사람도 아니고 아직 메시지를 발견 못 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정해놓은 음악을 다 들었는데 도명은 여전히 답장이 없었다. 도화는 앞머리를 초조하게 쓸어 넘겼다. 갑자기 행동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다리가 달달 떨려왔다.
도화는 옷을 대충 걸치고 도명의 가게 앞에 섰다. 지금쯤 열려 있어야 할 도명의 가게는 굳게 닫혀 있었다. 도화는 도명에 대한 궁금함에 조바심이 났다. 도화는 망설인 끝에 도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시간, 도명은 파자마 바지만 입은 채 잠을 자고 있었다. 도명이 잠든 침대 머리맡에서 그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도명은 어제 새벽 2시까지 직원들과 마감을 보고 3시쯤 가게에 왔다.
지금 이대로 잠들면 도저히 평소처럼 4시 반에 일어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새벽에 보던 아침 화원 일을 보고 4시를 조금 넘겼을 때 잠이 들었다. 도명은 아주 요란한 알람을 오전 11시에 맞춰 놨다.
도명도 사람인지라 극도로 피곤함을 못 견디고 파자마도 바지만 걸치고 잠들었다. 간만에 고무줄이 너무 헐렁해서 어느 순간부터 구석에 자리하고 있던 길이 많이 든 바지를 입었다.
이제 버려야겠다고 두어 번 결심했는데 이상하게 입지도 않는데 버리지 못하는, 그의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너저분한 바지였다.
그의 집 안에서 가장 그답지 않은 물건이었다. 언제나 옷으로 몸의 긴장감을 유지하던 그였기에 지금 이 순간만큼은 조금의 긴장감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극도의 긴장을 유지한 지 5시간째고 집에 와서도 화원 관리에 조금의 소홀함이 없도록 없는 집중력을 한 시간가량 몰아넣었다. 간만에 씻는 것도 대충 씻었다. 스킨 케어고 뭐고 고양이 세수를 했다. 그리고 침대에 등을 기대자마자 곯아떨어졌다.
도명이 깊이 잠든 이 순간 도화는 두 차례 전화를 더 했다. 하지만 상대는 반응이 없었다.
도화는 신경이 쓰여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쨌든 집에는 들어온 것 같으니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도화는 어제 사놨던 식빵에 잼을 발라 먹다가 문득 시선이 창고 문에 갔다.
도화는 남은 식빵 조각을 한입에 구겨 넣었다. 그리고 우유도 단숨에 들이켰다. 급히 먹은 탓에 도화의 입가가 너저분해졌다. 그의 입가를 자세히 훑어보면 그가 방금 전 무엇을 먹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도화의 시선이 두 집을 잇는 창고 문에 가 있었다. 도화는 쭈그려 앉아 문을 건드려 봤다. 그러자 문은 조금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도화는 그 작은 문 앞에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
‘나 지금 도명 씨네 집 들어가면 저번처럼 주거침입인가? 하지만 이렇게 열어놓은 거면 와도 된다는 거 아닌가.’
도화는 애써 자기 좋을 대로 해석했다. 그도 은연중에 자신이 너무 자기 좋을 대로 해석했다는 것을 아는지 계단 판을 밟는 발걸음이 조심스러웠다.
도화가 도명의 집 안에 들어왔을 때 도명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도화는 그가 깊이 잠들어 있다는 걸을 알고 다시 뒷걸음질을 쳤다. 저렇게 달게 자는 사람 깨워서 구강성교를 가르쳐달라고 조르는 꼴이 민망했다.
하지만 이내 도화는 홀리듯 도명의 침대 머리맡으로 다가왔다.
도명의 발가벗은 어깨가 이불 위로 솟아 올라와 있었다. 도명이 피곤함에 몸을 구긴 터라 도드라진 쇄골이 오목했다. 도명의 머리 위로 햇살이 어지럽게 난사됐다.
도화는 도명이 앞머리를 자연스럽게 내린 모습을 처음 보았다. 이마 위를 어지럽게 덮고 있는 머리카락이 부드러워 보였다. 감은 눈꺼풀 위로 그의 가지런하고 진한 속눈썹이 보였다.
적당히 혈색 도는 입술은 무방비하게 열려 있었고 피곤한지 살짝 핏기가 가신 눈 밑과 뺨이 고색창연해 보였다. 도명이 이렇게 늘어져 있는 표정을 하고 있는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느슨한 표정도 나쁘지 않았다.
도화는 자신도 모르게 도명의 침대 머리맡에 쭈그려 앉아 도명이 자는 모습을 넋 놓고 구경했다. 도명의 침대 끝자락에는 세탁하지 않은 셔츠가 걸쳐 있었다.
도화는 이 모든 게 신기했다. 도화의 손끝이 도명의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머리를 만져 보려다가 손을 거두었다. 그가 깰 것 같아 두려웠다.
‘근사한 옷 때문이 아니라 잘생긴 사람은 그냥 잘생긴 거구나. 눈 감고 숨만 쉬고 있어도 잘생긴 삶을 사는 느낌은 어떨까?’
도화가 홀리듯 도명의 코끝에 손을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 대고 있을 때 도명이 눈을 떴다. 도화는 놀라서 그대로 굳어졌다. 처음엔 흐릿했던 도명의 눈동자가 점점 예리해졌다.
“도화 씨가 여기 왜 있습니까?”
도명의 목소리에 날이 잔뜩 서 있었다.
“아, 저, 그게. 항상 같은 시간에 일어나는 도명 씨가 화원에 없어서 걱정돼서요. 또. 문도 열려 있어서 그게……!”
도명이 미간을 거칠게 구겼다. 그의 모든 표정에 짜증이 깊게 배어 있었다.
“사람 진짜 무례하네.”
도명의 짜증이 깊게 밴 혼잣말에 도화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도명 씨가 전화도 안 받고 문자도… 안 보시고. 그냥 걱정 돼서. 나쁜 뜻은.”
도명은 여전히 굳은 얼굴을 풀지 않은 채 시끄러우니까 입 다물라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도화는 그런 도명의 차가운 태도에 기가 금방 죽어 어깨를 움츠린 채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도명은 도화의 말을 확인하듯 자신의 핸드폰을 확인했다. 몇 통의 부재중 통화와 문자가 하나 와 있었다.
[도명 씨, 저 지금 시간이 남아서요. 저 지금 그거 배우면 안 될까요? 펠라요.]
도명은 문자를 읽은 후 낮게 한숨을 푹 쉬었다.
“아, 저 이렇게 피곤하신 상태인 줄 알았으면 이런 문자 안 보냈을 거예요. 저 지금 안 배워도.”
“기다려요. 시간은 도화 씨가 정하라고 한 건 저니까.”
도명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 저 이 상태에서 그, 배워도 괜찮. 뭐든 도명 씨가 편한…… 걸로.”
“기다려요.”
“저, 도명 씨. 저, 저는!”
도명의 입에서 짧은 욕이 나왔다. 도화는 놀라서 토끼 눈이 되었다.
“진짜 사람 짜증 나게 하는데 뭐 있네요.”
도화는 도명의 비수 같은 말과 차가운 눈동자,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겨우 억누르는 주름진 미간이 너무 무서웠다. 도화는 말없이 무릎 위에 올린 손을 떨다가 주먹을 꽉 쥐었다.
도명은 드레스룸에 들어와서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마구 헝클어진 자신의 모습을 보자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참을 수가 없어서 도명은 탁 소리 나게 쥐고 있던 빗을 내려놓았다.
드레스룸 안 전신 거울로 뒷모습을 보니 더 가관이었다. 엉덩이가 불성 사납게 흘러내리는 것 같은 바지라니. 고무줄이 너무 느슨한 나머지 엉덩이골이 아슬아슬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도명은 바지를 벗어 쓰레기통에 탁 소리 나게 던져 넣었다.
‘진짜 너저분하네. 도화 씨는 대체 이런 너저분한 모습은 얼마나 보고 있었던 거야?’
도화는 도명의 드레스 룸 안에서 들리는 거친 소리들에 긴장된 몸을 더욱 움츠렸다. 도화의 귀는 온통 도명이 들어가 있는 드레스 룸 안에서 나는 소리에 집중되어 있었다. 도화는 서러운 감정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도명은 상대방을 길들이기 위해서 분노를 가장하거나 작은 분노를 더욱 끌어올려 이야기할 때가 자주 있었다. 도화는 도명의 그런 점들을 잘 간파하고 있었다.
이성적으로 추론했다기보다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가 사실은 그렇게까지 화가 난 게 아니다. 무대 위 감정들을 끌어올리기 위해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것들을 모두 은연중에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가 진심으로 기분이 불편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불편해 보였다.
정확히 어떤 부분에서 그렇게 화가 났는지 알 수 없어 무섭고 서럽기만 했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도화는 도명이 누워 있는 폭신한 침대 위에 올라가 그의 바지를 내리고 만족시키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갓 깨어난 그를 기쁘게 하는 건 달콤한 상상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화가 잔뜩 난 도명이었다.
‘그냥 잠투정 같은 걸 거야…… 졸릴 때 누가 건드리면 짜증 나잖아.’
도화는 애써 그렇게 상상하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투정 같은 것이 아니다. 잘 알고 있는데 자꾸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서운해하지 마. 내가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집에 들어온 거잖아. 내가 무조건 잘못한 거야.’
도화는 도명의 눈치를 지나치게 보다가 그 끝자락에서는 서운한 마음마저 올라왔다. 그런 서운한 마음을 달래 보려고 했다. 하지만 역시 서운했다.
도명이 드레스 룸에서 나왔다. 그는 어느새 완벽한 슈트 차림에 포마드 머리를 하고 나왔다. 하얀 셔츠에 그의 군더더기 없는 허리 라인을 보여 주는 베스트까지 제대로 받치고 나왔다.
단단한 검은 색 슈트가 가장 보기 좋은 실루엣으로 그의 몸을 감쌌다. 그의 옷장을 가득 채운 슈트들은 그의 몸이 어떻게 하면 돋보이는지 잘 알고 있었다.
도화는 그런 도명의 모습이 순간 넋이 나갈 정도로 멋있었지만 왜 굳이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도명은 평소보다 옷차림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도명이 여동생의 결혼식에 갔을 때보다 힘을 약간 뺀 수준이었다.
도화가 도명의 페니스를 빨기에는 아까 그 헐렁한 바지를 내리는 편이 더 빠르고 편했다. 약간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도명을 쳐다보는 건 정말 색다른 기분이었다.
그래서 도명의 침대 머리맡에서 불편한 자세로 쭈그려 앉아 보고 있었음에도 15분이 훌쩍 지났음을 몰랐다. 도화가 지금 보는 근사한 도명은 언제나 보던 도명의 모습이었다.
그가 잘 생기고 완벽하다는 사실은 너무나 기정사실이라서 새삼 감동하기에는 익숙함이 더 컸다.
하지만 도화가 이해하지 못한 건 돔이 가져야 하는 아우라였다. 당장 외출할 것도 아닌데 가장 완벽한 모습으로 차려입고 도화를 교육시켜야 하는 건 그가 돔으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품위였다.
도명은 이렇게 힘주어 차려입으니 아까의 불쾌한 기분이 아주 조금은 가시기 시작했다. 도명은 마지막으로 목을 감싼 넥타이가 똑바로 채워져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넥타이 매듭 부분을 움켜쥐었다.
다시 도화 앞에 나타난 도명의 손에는 실크로 된 스카프가 들려 있었다. 이 스카프로 도화의 목을 감싼 다음 그에게 페니스를 빠는 법을 가르칠 때 목줄처럼 쓸 것이다.
보통 이런 부드러운 것보다 가죽 벨트를 선호했으나 도화가 곧 출근해야 하니 자국이 안 남을 것을 선택한 것이다. 도명이 스카프 양 끝을 잡고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도명이 도화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아침에 별안간 당했던 불쾌한 감각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가장 무방비했던 상태에서 갑자기 당한 거라 이 기분이 완전히 진정되기까지는 그에 상응하는 폭력성으로 보상받아야 진정이 될 것 같았다.
도명이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침대 매트리스에 걸쳐 앉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도화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도명은 도화의 푹 숙어진 정수리를 보면서 생각했다. 저러고 있는 건 반성하고 있다는 뜻일까? 아니면 내가 예상하지 못하는 다른 감정인 걸까?
도명은 자신이 오히려 아무 말 안 하고 있으면 도화가 더 조바심 나고 숨 막혀 할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괜히 손목시계만 쳐다보았다. 몇 분을 괴롭혀 줄까?
도명이 말없이 무릎 꿇고 고개 숙인 도화를 쳐다본 지 3분이 지났다. 도명은 말없이 도화의 턱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끝에서 특유의 허브 향이 났다.
도화는 익숙한 향에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고 음미했다. 코끝이 여러 가지 자극으로 시렸다. 서러운 감정을 억누르느라 코끝이 시리기도 했고 이제는 익숙해지기 시작한 그의 향기에도 시렸다.
도화는 도명에게 질문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내가 당신의 공간에 허락 없이 들어선 게 그렇게까지 화가 나는 일이에요? 그래요. 내가 잘못 했단 건 알아요. 그래서 우리 사이의 간격은 정확히 어느 정도인데요?’
하지만 질문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화가 난 그에게 함부로 질문을 해서는 안 되는 건 그동안 충분히 교육받았다.
도명에게 질문을 할 분위기가 아니라는 이유 말고도 너무 설익은 시기에 터뜨리는 질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도화는 자신의 몸이 터질 것 같은 답답함의 압력을 겨우 몸 안에 가두고 있을 뿐이었다.
도화의 턱 끝을 매만지던 도명의 손이 도화의 입술 사이를 가르기 시작했다. 도화는 자신이 힘주어 다물고 있는 이 입술이 열리면 본격적인 펠라 행위의 시작임을 알고 있었다.
분명히 도명의 페니스를 빠는 법은 배우고 싶어서 이곳에 내려온 건데 이상한 저항감이 도화의 턱 끝에 감돌았다.
도명이 기분 안 좋듯 도화 역시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죄책감과 서러움이 어지럽게 뒤섞여 만든 우울감이 그의 온몸을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순식간에 도화의 온몸을 지배하는 우울감은 열성적인 기운의 성적인 행동을 원하지 않았다. 이 우울한 기분을 중화시키기 위해 30분이라도 더 자고 어떻게든 몸을 일으켜서 회사에 가는 게 지금 도화가 할 수 있는 행동의 최선이었다.
도명은 끈질기게 도화의 입술을 갈랐다. 나중에는 도명은 손톱마저 세우고 도화의 입술을 힘주어 찌르고 있었다. 도명이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도화의 입술에서 피가 나올 것 같았다.
도명은 힘을 잔뜩 주고 있는 도화의 입술을 쥐어뜯고 싶은 난폭한 감정을 겨우 억누르고 그의 뺨을 감싸며 속삭였다.
“하, 오늘 대체 왜 그래요?”
도명의 목소리는 주의를 깊게 기울이지 않아도 분노를 겨우 억누르는 기색이 염력 했다.
“저…….”
도화가 갈라진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도화는 다음에 나올 말을 내뱉는 것을 두려워하는 듯 손끝을 부들부들 떨었다.
“오늘 저녁으로 미루면 안 될까요? 말을 바꿔서 죄송합니다.”
도명은 순간 납득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는 듯이 도화 쪽으로 머리를 기울였다. 도화는 눈을 질끈 감으며 겨우 말을 내뱉었다. 시선 아래 보이는 도명의 단단한 색의 슈트 자락이 그를 짓밟을 제복처럼 느껴졌다.
그제야 도화는 도명이 왜 거추장스럽게 옷을 갈아입고 왔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옷감은 부드러웠지만 이건 무력을 알리는 갑옷이나 다름없었다.
도명은 함부로 선을 넘은 도화를 단죄하기 위해서 옷을 갈아입은 것이다. 도명은 손목에 찬 은색 시계를 풀기 시작했다.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소름 돋았다.
“무섭습니다.”
도화가 떨림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급히 말했다.
“정확히 뭐가요?”
도명이 차가운 목소리로 질문했다.
“화가 난 도명 씨에게 그걸…… 배우는 게 무섭습니다. 화가 나지 않은 도명 씨에게 배우고 싶습니다. 도명 씨에게 다정함을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화가 나지 않은 도명 씨에게 배우고 싶습니다. 지금 일로 화가 났다면 다른 벌을 받겠습니다.”
“도화 씨, 말은 제가 지금 지나치게 감정적이라는 말입니까?”
도명은 도화의 말이 거슬려서 견딜 수 없었다. 돔으로써 그가 가장 듣기 싫은 말이었다. 감정으로 플레이를 하는 것. 위험한 놀이를 할수록 절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욕망은 난잡해도 난잡하게 놀지 않을 것. 그게 도명이 가진 중요한 가치관 중 하나였다.
“다른 벌이라면 무엇을 말입니까?”
도명이 도화를 향해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엉덩이를 맞는다든지…….”
“설마, 손바닥을 맞는 것처럼 귀여운 체벌을 생각하고 잔머리를 굴리는 건 아니죠? 도화 씨, 지금 손바닥으로 놀 그런 수준은 아니잖아요? 또한, 귀여워해 줄 기분도 아니고. 어떻게 생각해요?”
“네, 도명 씨의 말이 맞습니다.”
도화는 마음의 준비는 안 됐지만 일단 도명이 원하는 답을 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욕실 가서 도화 씨의 수준에 맞는 매 가져와요.”
도화의 말이 떨어지자 도화는 얼굴을 최대한 가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부터 울음을 참느라 엉망이 된 얼굴을 보여 줄 수는 없었다.
도화가 욕실에 들어가고 도명은 생각에 잠겼다. 자꾸 도화의 말이 거슬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이 감정적이라는 말만큼 도명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건 없었다. 새벽까지 긴장을 늦출 새도 없이 일하느라 그렇지 않아도 날카로운 얼굴이 더욱 히스테릭해졌다.
‘왜 하필, 지금이지?’
도명은 눈동자를 굴려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도화의 지적이 틀리지는 않았다. 그는 지금 다분히 감정적이었다. 도명은 관자놀이를 누르며 심호흡을 했다.
욕실로 들어가던 도화의 뒷모습이 생각났다. 그의 온몸은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미 잔뜩 겁을 먹고 있는 상대를 더욱 궁지로 몰아넣는 건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가 몇 시간 후면 출근해야 하는 상대면 더욱. 엉덩이만 적당히 때리고 올려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도명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화가 겁을 먹을 때마다 플레이 내용을 바꾸면 앞으로 안정적으로 플레이를 할 수가 없다. 상대방을 심하게 다치게 할 수 있는 위험한 플레이를 하는 중에 내용을 바꾸는 거라면 모를까.
도명이 지금 하던 것을 멈춰야 할 정도로 잘못한 게 있다면 감정적인 상태라는 것이다. 플레이 중에 감정적으로 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도명은 원래 폭력에 감화되기 쉬운 사람이었으니까. 도명은 심호흡을 천천히 하기 시작했다. 불쾌한 감정을 조금 지우고 생각해 보니 쭈그려 앉아 자신을 구경하던 도화의 표정이 꽤 귀여웠던 것 같기도 했다.
도화가 가늘고 긴 매를 하나 들고 와 도명의 손바닥 위에 올려놨다. 꽤 단단하고 탄성이 좋은 것이 조금만 맞아도 상대방을 보기 좋게 울리기 충분한 물건이었다. 도명이 도화를 쳐다보았다.
도명은 이미 도화를 제압했다. 그러니 더 이상의 분노는 없었다. 상대방의 잘못된 행동을 교정할 만큼의 적당한 벌만 주면 됐다.
“엎드려요. 아프면 반사적으로 손을 엉덩이에 올리기 좋으니까 손을 가슴에 포개요. 손 위치 잘 지켜요. 손가락뼈 잘못 맞으면 엉덩이보다 더 크게 다칩니다. 이건 도화 씨를 위한 규칙입니다. 도화 씨를 위한 규칙은 더 잘 기억하고 지켜야 합니다.”
도화는 도명의 말대로 상체를 도명이 자고 있던 침대 매트리스 위에 포갰다. 그리고 두 손을 가슴에 모았다. 도명의 손이 도화의 바지에 갔다. 고무줄 바지라 벗기기 수월했다.
망설임 없이 엉덩이를 까는 도명의 손짓에 도화는 흠칫 떨었다.
도명이 도화의 등줄기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손끝이 제법 부드러웠다. 도명은 불필요한 긴장은 하지 말라는 듯이 그 후에도 도화의 등을 계속 쓸었다.
“세이프 워드 기억합니까?”
“네.”
“도화 씨가 원하면 이 모든 행위를 중단할 수 있습니다.”
“네.”
“이제 제법 대답하는 버릇이 잘 들었네요. 그리고 펠라는 지금 배워야 합니다. 제가 도화 씨 마음 바뀔 때마다 따라야 하는 사람입니까? 돔이 섭에게 휘둘리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도화 씨는 오늘 여러모로 무례하게 군 겁니다. 매는 도화 씨가 펠라를 배우고 싶은 마음이 들 때까지 맞습니다. 제법 아픈 걸로 골라왔군요. 한 대 맞고 항복해도 뭐라 하지 않을 테니까 도화 씨 컨디션 되는 대로 합시다.”
도명의 말에 도화는 흠칫 떨었다. 도명은 단호한 손짓으로 도화의 구부정하게 솟아오른 등을 고정했다. 도명이 매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읏!”
매가 도화의 엉덩이에 닿자 그의 살이 부르르 떨렸다. 근육 깊숙한 곳까지 아릿한 기분이 올라왔다. 도명은 도화가 매의 강도에 놀라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연달아 매를 휘둘렀다.
다섯 대쯤 되자 도화는 온몸에 식은땀마저 나기 시작했다.
도화의 엉덩이가 벌써부터 빨갛게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제법 아플 만도 한데 도화는 계속 고집을 부렸다. 도명은 간격을 좁힌 도화의 허벅지 사이에 발을 집어넣고 벌리게 했다.
도명은 도화의 성기 발기 상태를 보았다. 도화의 성기는 약간 발기한 상태였다. 하지만 도화는 귓불만 야릇하게 만져 줘도 발기하는 사람이었다.
이 정도 발기 상태는 그가 이 매를 즐기느라 참고 있다는 건 아니었다. 도명은 도화가 왜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는지 알 수 없었다.
“더 이상 맞으면 의자에 앉을 때마다 통증을 느끼기 시작할 겁니다. 아직도 배울 생각이 없습니까?”
“네…….”
도화는 도명이 다시 매를 드는 소리에 본능적으로 허리를 비틀면서도 고집을 부렸다. 도명이 발로 도화의 허리를 누르며 말했다.
“아무리 아파도 가만히 있어요. 갑자기 몸 돌리면 제가 의도하지 않은 곳을 맞습니다. 제가 의도하지 않은 곳이란 도화 씨가 정말 다칠 곳을 의미합니다. 이것 역시 도화 씨를 위한 규칙이니 몸에 새겨요.”
도명은 안 되겠는지 도화의 등허리에 앉았다. 도명의 엉덩이가 도화의 등허리에서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리고는 다시 매질을 시작했다. 도명이 같은 곳을 때리는 것을 피하려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도명이 연달아 15대를 때린 후 숨을 골랐다. 도화의 엉덩이가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매질이 멈추었는데도 도화의 발끝이 경련하고 있었다.
도명은 이쯤 되면 도화가 그를 향해 어떤 시위를 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세이프 워드 잊었습니까?”
“……아니요.”
매를 참느라 도화의 머리카락이 온통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도화의 숨소리마저 거칠었다. 도명의 손이 뜨겁게 달아오른 도화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읏……!”
매로 때린 것도 아닌데 부드러운 살과 살이 닿은 감촉만으로 도화의 입에서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화가 난 건 나뿐만이 아니었네. 그런 겁니까? 무단침입자 씨?”
“…….”
도화가 대답이 없자 도명이 그의 엉덩이골 사이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문질거렸다. 야릇한 자극에 도화의 엉덩이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도명은 도화의 야릇한 감각을 억지로 깨워서 괴롭히기 시작했다. 흥분하고 싶지 않을 때 상대방을 흥분시키는 것도 사람을 괴롭히는 방법 중 하나였다.
“대답하는 버릇 공들여 교육시켰다 했더니.”
도명은 급격한 피로감에 얼굴을 쓸어 넘겼다.
“그냥 저를 기쁘게 할 최소한의 기술을 가르쳐 주려고 한 건데 아침부터 플레이가 꽤 격해지겠네요. 도화 씨가 오해하는 게 하나 있는데 그동안 제가 도화 씨에게 무르게 군 건 제가 좋은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도화 씨가 순하고 착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도화 씨가 지금 저에게 착한 사람 같습니까?”
“아닙니다.”
“지금 제가 원하는 대답을 해 준 겁니까? 진심입니까?”
도명이 도화의 젖은 머리카락을 잡고 고개를 억지로 들어 올리게 하며 물었다. 도화의 얼굴은 아주 엉망이었다. 고통을 참느라 일그러진 얼굴에는 땀과 눈물이 가득했다.
“울지만 말고 말해 봐요. 진심입니까? 비위 맞춰 주는 겁니까?”
“진심입니다.”
“그런데 왜 저한테 화를 내고 있는 겁니까? 화낼 사람은 나인데, 혼자 기분 풀고 애써 잘해 주려는 사람한테 왜 이딴 식으로 나오는지 어디 한번 말해 봐요. 진짜 몸에서 사리 나오겠네.”
“제가 잘못했단 거 압니다.”
“아는 사람 태도가 이따위입니까?”
도명이 도화의 부어오른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거칠게 움켜쥐고 흔들며 굳게 닫힌 입 사이로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런데 너무 제 마음을 안 알아주니까 서운해서.”
“내가 뭘 안 알아 줬는데요?”
“나쁜 생각 안 했어요. 나쁜 생각으로 도명 씨 집에 멋대로 들어온 거 아닙니다. 정말, 걱정돼서, 항상 나오던 사람이 안 오니까.”
“제가 도화 씨를 그냥 좀도둑 취급했다는 이야기입니까?”
“정말 해 끼칠 생각 없었습니다. 도명 씨, 잘 자고 있는 거 보고는 쉬는 거 방해 안 하려고 했습니다.”
“방해 안 했다고요?”
도명이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침에 이상한 느낌에 눈 뜨자마자 보이는 도화의 얼굴에 티는 안 냈지만 기겁할 뻔했다. 깊게 잠든 잠이 확 깼다.
“정말 방해 안 하려고 했는데, 잠자는 얼굴이 너무 잘생겨서……”
도명은 도화의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라 더욱 머리가 멍해졌다.
도명은 지금 이 순간 도화가 자신에게 아첨을 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하려 하는 건지 보기 위해 그의 얼굴을 살폈다. 도화의 맹한 얼굴을 보니 전략적으로 아첨할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결국 나오는 것 헛웃음뿐이었다.
“왜 그렇게 웃어요?”
도화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도명을 올려다보았다. 언제나 자기 입으로 뻔뻔하게 자신의 외모를 뽐내던 그였다. 도화가 보기에 도명의 웃음이 묘했다.
자만심에서 나오는 웃음도 아니었고, 마냥 기분 좋아서 웃는 웃음도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의 색은 언제나 분명했다. 하지만 도명이 이렇게 갈팡질팡하는 웃음은 처음이었다.
도명은 그냥 순간 웃음이 나와서 웃었을 뿐인데 왜 웃었냐고 물으니 도명답지 않게 말문이 막혔다. 이렇게 연달아 말문이 막히는 건 처음이었다.
도명은 자신이 잘생겼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래 보이라고 남들보다 유난히 청소년 시절부터 외모에 공을 들였다.
오히려 이렇게 공을 들였는데 잘생기지 않았다고 하면 화가 날 판이었다. 그런데 도화의 말이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왜 이렇게 어이가 없는지 도명 본인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다 했습니까?”
“네, 일단은…….”
도명은 말없이 도화의 정수리부터 뒤통수를 어루만졌다.
“그래서요?”
“네?”
“그래서 저한테 원하는 게 뭡니까?”
“구체적으로 원하는 게 있다기보다는 그저 제 마음만 알아 줬으면 해서. 화도 풀어 주고.”
“화는 알아서 풀었습니다. 아까 몸에서 사리 나오겠다는 말 못 들었습니까? 애써 겁먹지 말라고 등도 부드럽게 쓸어 넘겨 주고 그랬는데. 도화 씨야말로 제 마음 하나도 몰라 주네요.”
“아…….”
도화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도화의 손이 슬그머니 도명의 허벅지 위로 올라갔다. 도화의 손끝을 따라 도명의 바지가 부드럽게 주름졌다.
도화의 손끝에는 약간의 야릇함을 담고 있었지만 부드러운 분위기가 더 강했다. 도화는 뺨을 도명의 허벅지에 기댄 채 그의 체온을 느끼고 있었다.
도명은 허벅지 위에 도화의 뺨이 느껴지자 몸에 미적지근한 온도보다 조금 높은 온도로 몸이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음을 느꼈다. 도화의 귓바퀴 안을 헤집는 도명의 손가락 끝이 진득했다.
지금 이 순간 바지 버클을 푸르고 페니스를 꺼내면 도화의 입은 자연스럽게 열릴 것이다. 페니스 끝의 뜨거운 열기를 찾아 옅은 콧김을 내뿜으며 야릇한 체향을 느끼고, 더욱 강한 자극을 찾아 귀두 끝을 입술로 감쌀 것이다.
모든 과정이 호흡처럼 자연스러울 것이다. 도화가 바라는 것은 오직 자신의 무해했던 마음을 알아 달라는 것뿐이었다.
도명은 도화를 적당히 달래고 분위기가 좋을 때 페니스를 기쁘게 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싶었다. 그러다 어떤 깨달음이 도명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잠깐, 무해하긴! 선을 훅 넘어 놓고서. 어디서 이런 무해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거야.’
도명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도화의 귓불을 늘렸다. 깜빡 속을 뻔했다. 이마저도 곱씹어 보자면 자신의 무례함을 너그럽게 넘어가 달라고 투정 부리는 것이 아닌가.
그래, 무해한 마음이고 뭐고 투정 그 이상도 이하가 아니다. 왜 자신과 거리를 두냐고 도화가 투정을 부리는 것이다. 마음대로 한달음에 거리를 좁혀 놓고 자신의 마음을 못 알아 준다고 화는 내는 건 부당한 요구였다.
도명은 문득 깨달았다. 도화의 마음의 속도가 지나치게 빨랐다. 도화의 섣부른 속도에 도명 자신마저 말려들면 안 되었다. 이런 관계의 초짜한테 노련한 도명 쪽이 홀랑 넘어가 버릴 뻔했다. 나른하게 퍼졌던 도명의 머릿속에서 적신호가 왱왱 울려댔다.
“도화 씨, 제가 이런 파트너 관계를 좋아하는 이유가 뭔지 압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이유 중 하나는 설익은 연정, 혹은 지나치게 농익은 연정보다 유통기한이 길다는 점입니다. 몸을 가장 깊숙이 섞고도 이렇게 유통기간이 긴 관계는 드뭅니다. 물건이 아닌 사람과의 관계는 확실히 소모적입니다. 그 어떤 차가운 사람도 인간관계 사이에선 지치죠. 저 역시 지칩니다.”
도명의 시선이 자신의 무릎 위에 얼굴을 눕힌 도화의 얼굴을 향하지 않고 저 먼 바닥에 고정되었다.
“도화 씨.”
도명이 또 도화의 이름을 부르고 시의 행을 시간의 틈으로 표현하듯 다음 말에 뜸을 들였다. 익숙한 상황이 또 도화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무서웠다. 도화는 목소리가 잠겨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음에도 ‘네.’라는 짧은 대답조차 못 했다.
“선을 지켜요. 우리 관계의 유통기간이 짧아집니다.”
도명의 말에 도화는 부드럽게 감았던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크게 흔들렸다. 도화의 마음은 그의 말에 내려앉았지만 어떠한 반박도 할 수 없었다.
도명은 이 관계를 시작하기 전에 도화에게 충분히 설명했다. 도화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했다. 어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도화 씨 말이 무슨 이야기인지도 알겠어요. 하지만 다음엔 그러지 말아요. 저는 도화 씨에게 모든 걸 보여 줄 마음은 없어요. 저는 제가 보여 주고 싶은 모습만 보여 줄 겁니다. 그러니 연락을 안 받건, 우리 공간을 잇는 그 문이 열려 있건 제 허락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발을 디디지 말아요.”
“네.”
나른한 열기로 흐물거리던 핫케이크가 갑자기 냉동실에 처박힌 것처럼 둘 사이의 공기가 급변했다.
“지금 배우고 싶지 않으면 하지 말아요.”
도명이 도화의 손목을 단호하게 쥐며 말했다. 도명 역시 사람인지라 도화에게 사탕발림을 하고 싶었다. 일단 도화에게 자신의 페니스를 빨게 하고 방금 그은 선을 그으면 됐다.
경고는 그 후에 해도 늦지 않았다. 그 미묘한 차이를 도화가 알아차릴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도명의 신념에 맞지 않았다. 없는 일을 지어내는 것은 물론이고 지독한 마음을 없다고 하며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 눈앞의 이득에 취해 마음의 순서를 바꾸어 말하지 않는다.
그것 또한 거짓말이다. 도명과 건우의 근본은 같았다. 하지만 그 근본의 악랄함을 선의로 포장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도명이 건우를 하급 짐승처럼 다룬 명분이었다. 자신이 도화를 가져도 되는 마지막 명분. 남들이 그의 신념을 그럴듯한 궤변이나 변명 같은 거라 해도 상관없었다. 자기 혐오에 빠지지 않을 수만 있다면.
도명은 마음을 갈무리하듯 두 손을 쫙 펴고 서로 맞대었다. 그리고는 이제 출근 준비를 하라는 듯이 도화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때 도화가 도명의 손가락을 하나하나를 진득하게 빨았다.
“배우고 싶어요. 지금이요.”
“진심입니까?”
“네.”
“저는 도화 씨의 진심이 의심스럽습니다. 이런 것을 배울 기분으로 보이지 않아요.”
“저는 이런 관계가 처음입니다. 헷갈릴 수도 있잖아요. 도명 씨, 저는 도명 씨 앞에서 뭐든 처음이잖아요. 실수 한 번 했다고 이렇게 내치지 말아요.”
도화가 도명에게 잔혹하게 굴지 말라는 듯이 애원하는 투로 말했다.
“도화 씨가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 방을 나간다 해도 이 관계는 끝나지 않아요. 도화 씨 지금 이 순간의 결정은 말 그대로 지금 이 순간에만 유효한 겁니다.”
“……”
“하아, 숨 좀 돌리고 다음에 오라고요.”
“도명 씨 역시 제가 서투르단 걸 이해하고 시작한 관계 아닙니까?”
“제가 마치 도화 씨에게 주기로 약속한 사탕이라도 빼앗은 악당 같네요.”
도명이 애원하는 도화의 입속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도화가 도명의 손목을 잡고 최대한 정성을 다해서 그의 손가락을 빨기 시작했다.
“입술 벌려 봐요. 얼마큼 입안이 깊은지 봅시다.”
도화가 도명의 말대로 입술을 벌렸다. 붉은 안이 색정적이었다. 도명은 손가락 마지막 마디까지 도화의 입속에 집어넣고 휘저었다. 도명이 손가락을 도화의 입속 깊숙이 밀어 넣자 그가 불편해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구역질이 나기 시작하면서 불편해지기 시작할 겁니다. 이 느낌을 얼마나 잘 참는지에 따라 도화 씨가 얼마나 착한지 판단할 겁니다.”
도명이 아까 드레스 룸에서 가지고 온 실크 스카프를 도화의 목에 감았다. 입안에 감도는 이물감과 목을 바짝 감싸는 느낌에 속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도명은 목을 당겨오는 힘도 그의 입안을 헤집는 손가락의 단호함도 풀지 않았다. 도화의 입안에 침이 흥건해지기 시작했다.
“펠라를 할 때 착하게 굴어요. 그나마 제 난폭한 욕구를 잠재우기 가장 쉬운 방법이니까요.”
도명이 아까부터 천천히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페니스를 꺼냈다. 페니스 크기가 제법 묵직했다.
도화는 막상 시작하려니 긴장감에 입안에서 흥건해지기 시작한 침을 급히 삼켰다. 당장 도명의 페니스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겠다. 온몸에 피가 거꾸로 빠르게 도는 듯 정신이 아찔했다.
도명이 도화의 목을 감은 스카프 끝을 세게 당겼다. 그러자 도화의 얼굴이 도명의 가랑이 사이로 고꾸라졌다. 도화의 콧속에 욕정의 냄새가 흥건하게 느껴졌다.
낯설고 강렬한 수컷 냄새에 순간 거부감이 들었다. 그의 평소 몸에서 나는 냄새처럼 마냥 산뜻하고 향기롭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내 묘한 느낌에 온몸에 미열이 돌았다. 도화가 낯설고 묘한 느낌에 숨을 참았다. 하지만 이내 허파가 당겨오고 숨을 한꺼번에 내뱉었다. 도화의 콧김이 닿을수록 도명의 페니스는 점점 단단해졌다.
“전에는 보고 싶어 안달이 나더니 왜 막상 대놓고 보여 주니 보지도 못 합니까?”
도명이 입꼬리를 한쪽으로 끌어 올리며 말했다. 도화는 도명에 말에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그의 눈앞에 크고 단단해진 도명의 페니스가 있었다.
도화는 자신에게도 달려 있는 페니스인데 도명의 페니스를 보고 왜 이렇게 겁이 나고 흥분되는지 알 수 없었다.
“뭐해요? 맛 안 봅니까?”
도명이 도화의 혓바닥을 손가락 끝으로 누르며 말했다. 도화는 바들바들 떨며 입술을 열었다. 도명의 열이 오른 귀두를 살짝 무는데 벌써부터 입술 끝이 화끈거렸다.
“입술에 힘주어 빨아 봐요.”
도화가 입술에 힘을 주어 도명의 귀두를 빨기 시작했다. 저번에도 느낀 거지만 도화는 빠는 힘이 셌다. 그냥 도화는 모든 면에서 힘이 센 것 같았다.
도화가 도명의 귀두를 문 채 빨기 시작하자 도명은 자신도 모르게 도화의 어깨를 세게 움켜쥐며 척추를 곧추세웠다. 도명의 미간이 깊게 접혔다.
도화의 눈동자가 도명의 표정을 보기 위해 위로 올라갔다. 도명은 기분 좋은 표정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살짝 느끼는 도명의 표정에 도화의 마음이 성급해졌다.
도화는 최선을 다해서 입술 끝으로 도명의 탄성 좋은 고무 같은 페니스를 눌러댔다.
도화는 도명의 귀두가 순간 4분의 1 정도로 눌릴 정도로 강하게 물고 늘어졌다. 도화는 처음 맛보는 맛있는 것을 발견하고 물고 늘어지는 개 같았다.
순간 정신을 아찔하게 만들 정도로 강한 힘에 도명은 애써 발끝으로 털이 풍성한 카펫을 훑었다.
도화는 도명의 느끼는 표정으로 보상을 받고 싶어 도명의 페니스를 물고 늘어지면서도 틈틈이 도명을 올려다보았다.
도명의 숨소리가 조금은 가빠지는 건 귀로 들리는데 목소리로는 정확히 안 들리니 눈으로 재차 그를 확인하는 것이다.
“뭐해요? 계속해요. 이게 정말 최선이에요?”
도명이 일부러 열에 살짝 들뜬 표정을 건조하게 굳히며 도화를 자극했다. 아까의 피곤함으로 고색창연했던 그의 얼굴에 붉은 기가 스며들어와 있었다. 하지만 표정만은 절제되어 있었다.
서서히 달아올라 와 있으면서도 전부를 내 주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있었다.
도명의 귀두는 도화가 하도 물고 빨아서 피부 표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도명은 피부 깊숙한 곳까지 아릿해져 와 허벅지와 엉덩이에 힘을 바짝 주었다.
허리가 지나치게 흔들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벌써부터 천박하게 허리를 흔들면 안 된다. 도명이 열에 달아오른 표정으로 도화를 내려다보았다.
육체의 감각이 푹푹 늘어질 정도로 피곤한 와중에 느껴지는 강렬한 자극은 정신을 자꾸 위로 고양시켰다.
도명의 귀두 끝에서 쿠퍼액이 새어 나오면서 비릿한 맛이 감돌았다. 혀에 퍼지는 낯선 맛에 도화가 본능적으로 입술을 떼려고 했다. 하지만 도명이 도화의 뒷머리를 힘주어 눌렀다.
도화는 쿠퍼액이 계속 끝도 없이 새어 나와 자신이 입안을 가득 메울까 봐 두려워졌다. 도화의 입안이 자신의 침과 다른 농도의 액체로 인해 이물감이 돌았다.
“여기 끝까지 넣어 봅시다.”
도명이 음모가 나 있는 페니스 끝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도화는 도명의 명령에 머릿속에 하얗게 변했다. 도명의 페니스는 길이도 굵기도 꽤 됐다. 과연 도화가 최선을 다해도 입안에 다 들어갈지 의문이었다.
“목에 힘 빼고 제가 끄는 대로 따라와요, 그리고 입술 끝에는 힘을 계속 줘요.”
도명이 도화의 목에 건 실크 스카프 끝자락을 천천히 당겼다. 처음에는 도명의 말처럼 그가 이끄는 대로 따랐다. 도화의 얼굴이 점점 도명의 사타구니의 쪽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도화는 점점 입안을 가득히 침범해 오는 도명의 페니스에 숨을 어떻게 쉬어야 할지 몰라 벌써부터 허파가 당겨왔다. 몸이 불편해지기 시작하자 도화가 목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도화 씨가 힘으로 버티면 저도 힘으로 밀어붙입니다.”
도명이 발가락 끝으로 도화의 배꼽 언저리를 적당한 힘으로 밀며 말했다. 많이 거친 힘은 아니었지만 도화의 복부가 저항감으로 단단해질 정도의 폭력이었다.
도화는 숨이 막히고 턱이 얼얼하다고 하소연하고 싶었지만 도명의 페니스로 입술이 단단히 막혀 컥컥대는 소리만 냈다. 아직 더 삼켜야 할 도명의 페니스가 3분의 1이나 남았다는 것이 두려웠다.
뻑뻑한 도화의 눈에서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도화의 눈가가 마를 날이 없었다.
도명은 달의 인력처럼 도화를 끌어당기는 것을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는 그의 호흡을 정리해 주고 딱딱하게 굳은 턱 근육을 풀어 주었다.
도명의 페니스가 큰 편이긴 했지만 못 삼킬 정도까지는 아닌데 벌써부터 긴장감으로 그의 벌어진 턱이 삐거덕대고 있었다.
“하아… 하아…….”
완전히 다물지 못하는 도화의 턱 언저리에서 타액이 끈적끈적한 점도로 바닥에 떨어졌다. 도명은 자신의 보송보송한 카펫을 젖히는 도화의 타액을 발가락 끝으로 뭉갰다. 그리고는 도화에게 들으라는 듯이 혀 차는 소리를 냈다.
“진짜 뭘 넣는 것에는 재능이 없네요. 기분 좋은 척하는 데도 한계가 있지.”
도명이 도화의 엉덩이를 발등으로 툭 치며 말했다. 도화는 잔뜩 시무룩해져서는 얼굴을 푹 숙였다.
“먹기는 예쁘게 잘 먹는데. 쯧. 이건 왜 못 먹어요? 먹으라고 깠는데.”
도명이 도화의 굳은 뺨에 단단한 페니스를 툭툭 튕기며 조롱했다. 도화는 도명의 신랄한 말들에 겨우 마르기 시작했던 눈가가 다시 촉촉해지기 시작했다.
“재능이 없으면 연습이라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도명이 어서 연습을 시작하라는 듯이 도화의 아랫입술에 타액으로 끈적거리는 귀두를 뭉근하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도화는 다시 긴장된 표정으로 입술을 열고 도명의 페니스를 최대한 삼켰다. 아까보다는 제법 삼켰지만 도명의 페니스가 목구멍을 아슬아슬하게 건드리는 통해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도화의 볼이 계속 동그랗게 부풀어 올랐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도명이 스카프 끝자락을 잡고 도화의 머리를 앞뒤로 흔들었다. 도명의 페니스가 뒤로 빠질 땐 살 것 같다가 갑자기 안으로 훅 들어올 때는 눈앞이 뿌옇게 흔들렸다.
“입술에 힘을 왜 풉니까?”
도화의 머리 위로 도명의 질책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도화는 최선을 다해도 계속 들려오는 도명의 불만족스러운 음성에 서러움이 복받쳤다. 도화가 자신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듯이 도명의 소맷자락을 움켜쥐었다.
“칭찬받고 싶으면 입술에 힘을 더 줘요.”
도화는 여러 가지 압박감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입술 끝에 힘을 바짝 주었다. 그러자 내내 불만족스러웠던 도명의 표정이 달달해졌다.
도화가 잘하고 있다는 듯이 그의 뒷머리를 도명이 움켜쥐었다. 두피까지 도명의 손가락 끝 피부가 느껴졌다. 머리를 쥐고 있는 악력이 그를 질책할 때만큼 셌지만 뉘앙스는 달랐다.
너 때문에 야릇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고 도명의 손끝이 속삭이는 것 같았다.
“하아. 하아…….”
도명의 호흡이 도화의 정수리에 닿았다.
“더 강하게 빨아요. 다정한 표정 지어 줄 테니까.”
도명의 말에 도화는 그렇지 않아도 얼얼한 턱과 입술에 힘을 주었다. 순간 도명의 입술이 크게 벌려질 정도로 강한 자극이 그의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도화가 지나치게 열정적이었다. 너무 강하기만 한 건 통증만 줄 뿐 야릇한 기분을 주지 못한다. 도명이 도화의 턱을 들어 올려 올려다보게 하고 속삭였다.
“제가 도화 씨를 다루는 방법을 알려 줄게요. 저는 언제나 도화 씨가 정신을 못 차리도록 강하게 몰아붙여요. 그리고는 더 이상 못 견디겠다 싶을 때 달콤하게 쓰다듬습니다.”
도명이 도화의 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도화의 표정이 나른하게 변했다.
“그리고는 그 감각에 안심하고 나른한 표정을 지을 때 다시 몰아붙이죠.”
도명의 발끝이 도화의 귀두를 세게 눌렀다. 도화가 앓아대는 소리를 내며 엉덩이를 부르르 떨었다.
“이걸 반복하는 거죠. 아주 간단한 거예요. 저는 도화 씨를 다루는 방법을 대놓고 알려 줬지만 이것 봐요. 도화 씨는 헤어 나올 수가 없잖아요.”
도명이 도화의 젖은 눈가를 손가락 끝으로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그런데 사람은 다 비슷해요. 나도 사람이고.”
도명이 자신의 페니스를 벌려진 입에 다시 물리며 말했다. 도명이 입꼬리를 진득하게 울렸다.
“할 수 있다면 어디 한번 나를 입술 하나로 다뤄 보든가.”
***
“어때요? 나를 다룬 것 같아요?”
도명이 바지 버클을 다시 채우며 물었다. 도화는 단호하게 잠긴 그의 바지를 보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기회를 더 주면…….”
“하지만, 도화 씨 출근 시간 다 됐네요. 그것도 10분 안에 준비해야 할 것 같은데요.”
도명이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아.”
도화는 더 이상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단실 문은 안 잠급니다.”
도명의 말에 도화의 표정이 순간 밝아졌다. 그런 도화의 표정에 도명은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건 일종의 시험 같은 겁니다. 저는 무례한 사람을 싫어합니다. 도화 씨는 천성은 어떨지 몰라도 언제나 무례하고요. 그 무례함을 고칠 수 있는지 두고 보는 겁니다. 음, 일종의 강아지한테 하는 훈련 있잖아요. 사료 그릇을 앞에 두고 ‘기다려. 먹지 마.’라고 외치는 훈련 같은 거라고 보면 되겠네요.”
***
도화는 언제나 그랬듯 일정한 시간에 일을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엉덩이와 허벅지가 아려왔다.
도명에게 매 맞은 것이 꽤 무리한 모양이었다. 아침부터 그러더니 지금까지도 아파 왔다. 도명이 연고를 챙겨 줄 땐 그가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도화가 틀린 모양이었다.
도명이 도화의 뒤통수에다 대고 연달아 제대로 바르라고 했는데 피부가 아릿하게 땅겨 오는 걸 보니 역시 아침에 제대로 바를 걸 그랬다. 출근 준비에 정신이 없어서 대충 넘어간 것이 화근이었다.
도화는 회사 화장실 변기에 앉아 가방에 대충 구겨 넣은 연고를 꺼냈다. 진짜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아프다니, 무리한 게 맞았구나 싶었다. 도명의 페니스를 빨던 턱도 아직도 뻑뻑했다.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결국 도명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도명이 사정을 하긴 했는데 ‘노력이 가상해서 싸 준다.’ 정도 느낌이었다.
이쯤 되니 이게 뭐 하는 건가 싶었다. 도화는 자괴감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얼굴을 보면 똑같이 행동할 것이 빤했다. 도명이 선사해 주는 처음으로 맛보는 감각들은 하나같이 신선했다.
‘세이프 워드 잘못 설정한 것 같아.’
분명 도화는 어느 순간부터 도명의 매질을 못 견디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이프 워드를 말할 수 없었다. 도명에게 ‘사랑한다.’라는 말을 하는 것이 한계 이상의 매질을 당하는 것보다 무서웠다.
이제라도 세이프 워드를 바꾸자고 하려다가 그 이유를 도명에게 설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것을 상상만 해도 식은땀이 나고 심장이 조여지는 기분이었다. 이래저래 진퇴양난이었다.
도화는 혼자 패닉 상태에 빠졌다가 계속 화장실 변기에 앉아 있을 수는 없다며 멍한 정신을 억지로 끌어올렸다. 도화가 바지를 내리고 엉덩이에 연고를 바르기 시작했다.
팔을 뒤로 뻗어 엉덩이 구석구석에 연고를 바르는데 모양새가 영 좋지 않았다.
하지만 도화는 오늘도 필연적으로 도명을 볼 텐데 조금이라도 걸음을 이상하게 하면 자신의 말을 안 들었다고 그가 한소리 할 게 분명했다. 도화가 엉덩이를 까고 있을 때 도명에게서 문자가 왔다.
[한식을 더 좋아합니까? 양식을 더 좋아합니까?]
도화는 좁은 화장실 안에서 도명의 문자가 오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고작 문자인데 심장이 곤두박질쳤다.
[집밥 같은 한식을 더 좋아합니다.]
도화는 까 내려진 바지도 제대로 올리지 못한 채 문자를 급하게 보냈다.
[그렇군요. 퇴근은 했습니까?]
[네. 퇴근했습니다.]
그 후로 도명의 문자는 없었다. 도화는 빨갛게 부어오른 엉덩이에 연고를 치덕치덕 바른 후 바지를 올렸다. 그리고 그사이에 진영에게서 전화가 왔다. 도화는 다시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급하게 버클을 잠갔다.
“어. 왜?”
“반응 까칠한 것 봐.”
“화장실이라서 그래.”
“나 수정이하고 결혼해. 상견례도 무사히 끝냈고 날짜도 잡혔어. 5월 19일. 너희 집으로 청첩장을 보내긴 했는데 너한테만은 직접 전화해서 알려 주고 싶어서.”
절친한 친구의 결혼 소식은 기분을 묘하게 만드는 면이 있었다.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긴 했다.
도화는 마음 한구석에서는 묘하게 섭섭한 마음이 들었지만 일단은 기쁜 말투로 축하의 뜻을 전했다. 수화기 건너편으로 쑥스러움 가득한 진영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결혼하려니 좋긴 좋은 모양이었다.
“아, 오늘 너 시간 어때? 축하주라도 마시자. 아 바쁜가. 너 여기저기서 축하해 줄 거고 또 결혼 준비도 해야 하니까.”
진영의 시간을 묻는 도화의 말투가 조심스러웠다.
“아, 오늘은 같이 밥 먹기에는 조금……”
“아 역시 바쁘구나. 오늘을 또 누굴 만나냐?”
도화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말했다. 도화가 화장실에서 나와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아니 그게 아니라 오늘은 결혼 전에 요리 연습 좀 하려고 했지. 맛없는 음식을 안주 삼기는 좀 그렇잖아.”
“아, 마침 나도 요리 연습이 필요했는데. 같이 할래?”
“네가 요리 연습?”
진영이 진심으로 놀라는 듯했다.
“왜 난 하면 안 돼?”
“아니, 나야 좋지. 넌 언제나 형편없는 음식들을 먹으니까.”
도화는 진영과 그의 집 앞 마트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사이 도명에게서 문자가 하나 와 있었다.
[오늘 저녁 김치 두부 전골 어떻습니까?]
도화는 이제야 진영과 통화 전 받았던 도명의 문자 의미들을 깨달았다. 도화는 난감함에 손바닥으로 이마를 비볐다. 빤한 질문들이었는데 그걸 왜 간파 못 했는지 자신이 한심했다.
오히려 도명 쪽에선 당연히 오늘 저녁 같이 먹는다는 가정하에 메뉴 정하려고 한 질문들이었는데. 마치 같이 먹을 것처럼 대답도 꼬박꼬박 잘 했다. 상대방이 오해했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 저 선약이 있어서요.]
도명이야 시크한 사람이니 신경 안 쓸 것 같기도 하고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을 거절당했으니 무안해할 것도 같았다.
[누구와 말입니까? 보통 저녁은 무조건 집에서 혼자 먹었잖아요.]
‘아, 진영이뿐만 아니라 도명 씨에게도 난 같이 밥 먹을 사람 없는 사람이구나.’
도화는 잔뜩 굳은 표정으로 도명의 문자를 응시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던 사실인데 갑자기 자존심이 상해 도화의 아랫입술이 툭 튀어나왔다.
[진영이하고 밥 먹기로 했습니다. 도명 씨보다 먼저 연락이 와서요.]
그 이후로 도명은 답이 없었다. 도화는 왠지 마음이 불편해서 계속 소맷자락만 만지작거렸다. 도명이 반응이 없으니 더욱 신경 쓰였다. 하지만 이내 진영과의 약속에 집중하기로 했다.
사실 도화는 자신이 없어도 진영이 요리 연습을 하는 데 문제없으니 그와의 갑작스러운 약속을 취소해도 됐었다. 하지만 오늘은 도명이 아닌 진영과의 약속이 더 끌렸다.
도화는 가방 속 새 스케줄 표를 생각하며 가방을 움켜쥐었다. 도화는 진영이 사는 아파트로 가는 버스를 검색했다. 그때 도명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 네. 도명 씨.”
도화는 애써 조금은 불편한 감정을 숨기며 목소리 톤을 높였다.
“진영 씨를 만나는 이유가 간단한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서입니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요.”
도화는 도명의 질문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해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했다.
“무슨 대답이 그렇게 애매해요?”
“진영이 결혼 축하 겸, 하는 식사긴 한데 그렇다고 거창한 식사를 하는 건 아니라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도명과 통화 하는 사이 도화가 타기로 한 버스가 그의 앞을 허무하게 지나갔다. 도화의 입에서 아쉬워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도화는 아쉬움에 발만 동동 구르다가 이미 지나간 버스를 아쉬워하지 않기로 했다. 도화는 다시 도명과의 통화에 집중했다.
“아, 진영 씨 결혼합니까?”
“30이면, 결혼할 나이로 이상하진 않죠.”
도화의 말 뉘앙스가 씁쓸해 보였다. 딱히 결혼 자체가 부럽기보다는 일반적인 이야기의 틀 안에 자신이 속해 있지 않다는 게 씁쓸했다.
“진영 씨만 안 불편하다면 우리 집에서 셋이서 먹는 건 어떻습니까? 친구의 결혼을 축하하는 건데 간단한 가정식 말고 간만에 스테이크라든지.”
“아 그건 좀.”
도화가 도명의 말을 어렵게 끊었다. 도명의 말을 끊으려니 날이 그렇게까지 덥지도 않은데 도화의 셔츠 등 부분이 축축해졌다.
“진영 씨가 불편해합니까?”
“그놈이야 불편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게 아니라. 제가 불편해서요.”
“도화 씨가 왜요?”
도명의 목소리가 굳어졌다.
“진영이 저 그거……인 거 몰라요. 도명 씨는 또, 저랑 그런 관계는 아니긴 한데 어쨌든. 셋이서 식사하는데 은연중에 이상한 뉘앙스를 풍기면 제가 곤란해서요.”
‘당신처럼 야한 사람과 마주 앉아 식사를 하는데 어떻게 이상한 뉘앙스를 안 풍길 수가 있냐고.’
도화가 목소리를 낮추는 건 물론이고 사람 많은 버스 정류장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진영 씨가 도화 씨가 동성애자인 걸 모른다고요? 참고로 걱정 말아요. 가게에서 혼자 통화하고 있으니까요.”
“저는 도명 씨처럼 그날 이후 여기저기에 커밍아웃하지는 않아서요.”
“제가 본 진영 씨는 아무래도 동성애 커밍아웃은 상관없을 것 같은데요. SM 취향 공개라면 모를까.”
“남의 친구라고 말 진짜 쉽게 하시네요. 저 이만 끊을게요! 진짜 살 떨려서 통화를 못 하겠네요.”
도화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왔다. 도화는 드디어 원하던 버스를 탔다.
***
도화는 진영과 장을 본 후에 장 본 재료들을 식탁에 올려놨다. 35평대 아파트는 적당히 살기 좋아 보였고 평면과 분위기는 약간 무미건조해 보였다.
도화는 온갖 감각으로 가득한 도명의 공간을 일상으로 접하다 보니 이제는 이런 일반적인 기준도 무미건조하게 느껴졌다. 진영은 부모님과 같이 살아. 총 세 식구가 사는 곳인데도 그렇다.
도명의 공간은 향기도, 시각도, 미각도, 청각도 모두 풍부했다.
작은 미니어처 박물관처럼 이런저런 신기하고 아름다운 물건도 많았고 햇빛이 잔뜩 들어와 그 햇빛이 드리우는 각도에 따라 시간별 공간 분위기가 달라졌다.
공간의 주인은 질 좋은 허브차와 향신료를 각종 유리병에 밀봉했다가 때에 따라 열기를 반복했고 이따금 원두도 볶았다. 속도가 빠른 음악이 없어도 모든 감각이 깨어나는 공간이었다.
“어머니는?”
“친구들하고 놀러 나가셨어.”
“넌 왜 갑자기 요리를 배우냐?”
“요리뿐만 아니라 새삼 집안일도 다시 배우고 있다.”
“애처가가 되겠다는 거냐?”
“애처가는 무슨, 다 큰 어른이 어떻게 제 몸 하나 추스를 줄 모르냐고 실망할까 봐. 최소한의 사람의 구색을 맞추는 거지. 너도 최소한의 사람의 구색을 맞추려고 요리 배우는 거냐?”
“그런 거지. 뭐.”
도화는 진영의 말에 대충 대답하고 아까 퇴근하기 전에 짰던 스케줄 표를 훑어보았다. 진영이 도화가 심각한 표정으로 보고 있는 스케줄 표를 뺏어서 구경하기 시작했다. 스케줄 표에는 앞으로 익힐 요리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된장찌개. 도명이 해 준 꽃게 들어간 맛 특이한 카레. 스테이크. 낙지볶음. 샌드위치. 일단 이번 달 목표는 이것이었다. 도화의 음식 배우기 스케줄 표는 5개월쯤 가서 끝나 있었다.
다음 달부터 배울 음식은 안 정해져 있었고 한 달에 5개씩은 완벽하게 정복하겠다는 의지가 돋보였다.
“넌 뭘 해도 뭐가 그렇게 본격적이냐? 5개월 후 무슨 요리 대회 나가냐?”
“그, 그냥. 이사 가기 전에 새 기분 내기 좋잖아. 요리 마스터가 되어 집에서 좋은 냄새 풍기면 갑자기 다른 삶을 사는 것 같고.”
“아 맞다. 너도 그때쯤 이면 계약 끝나서 이사 가지. 도명 씨는 진짜 계약 연장 안 해 준대?”
“안 해 주겠지.”
“처음보다는 좀 친해진 거 아냐? 답이 달라질 수도 있잖아.”
“음 그래도 안 해 줄 것 같은데.”
“물어는 봤냐? 물어보지. 밑져야 본전인데.”
진영의 질문에 도화는 괜히 눈을 슬며시 피했다.
“그 정도로 친한 건 아냐?”
“응, 그 정도로 친한 건 아냐.”
“그런데, 도명 씨 스카프는 왜 하고 있냐?”
진영의 말에 도화는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목을 쳐다보았다. 아침에 도명이 도화에게 매 준 스카프가 그대로였다. 도화가 경황이 없어서 하루 종일 매고 다닌 모양이었다.
어쩐지 하루 종일 도명의 냄새가 희미하게 난다고 생각했다. 진영은 도화를 놀라게 해놓고서는 시선은 미리 알아놓은 레시피를 읽고 있었다. 도화는 순간 얼음이 되어 눈동자를 빠르게 굴렀다.
‘도명 씨 것이 아니라고 할까? 그런데 이게 어떻게 도명 씨 것인 줄 알고 있는 거지? 어설프게 거짓말했다가 의심만 증폭시키는 건 아닐까? 일단 아무렇지 않은 척 떠볼까?’
“와- 신기하다. 이게 도명 씨 것인 줄 어떻게 알았어?”
“그거야 너는 원래 스카프가 없으니까. 그것도 네 주변에서 저런 스타일의 스카프를 매고 다닐만한 사람은 도명 씨뿐이잖아. 너 설마 도명 씨 때려서 스카프 아이템처럼 주운 건 아니지?”
진영이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아냐! 나 주먹 함부로 안 쓰는 거 알면서.”
“알지.”
다행히도 도화가 매고 있는 도명의 스카프에 대한 화제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두 사람은 각자 요리 연습할 재료를 다듬기 시작했다. 시간이 좀 지나자 도화가 진영을 흘깃 쳐다보며 넌지시 말했다.
“부럽다.”
“뭐가?”
“넌 이제 유통기한이 보장된 인간관계를 가진 거잖아.”
“무슨 소리야?”
“결혼 말이야.”
“아. 그런데 결혼이 뭐가 유통기한이 보장됐어? 헤어지기 복잡한 서류 관계일 뿐이지. 음… 아이 가지면 서류 관계 이상으로 헤어지기 힘든 건 건 맞네. 어쨌든 모든 관계는 만들기 나름이야. 완벽히 보장된 관계가 어디 있어? 그나저나 넌 유통기한을 세면서 사람을 만나?”
진영이 도화의 말이 거슬리는지 마늘을 까고 있는 분주한 움직임을 멈추었다.
“세려고 세는 게 아니라, 유통기한이 느껴질 때가 있지.”
도화는 오늘 아침 회사로 출근 하는 버스 안에서 도명이 말한 유통기한을 느꼈다. 도명과 도화가 물리적으로 억지로 연결이 안 되었더라면 이미 끝난 사이였을 것이다.
도명은 도화가 없어도 충분히 여러모로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었고 도화는 도명이 께름칙했으니 진작 이어질 사이가 아니었다. 매일 아침 볼 사이였기에 말도 안 되는 접점이 생겼다.
하지만 이 접점이 견고해 보이지 않았다. 도명은 여전히 도화가 없어도 잘 살 사람이니 이사 가고 나면 연락하는 주기가 서서히 늘어질 것이다.
도화는 도망가는 게 버릇인 사람이니 매일 도명의 위 지점으로 강제 소환되어야 하는 상황이 아닌 이상 이 불명확한 관계를 회피할 것이다.
그러니 도명과 도화의 유통기한은 집에 대한 계약 기간이 끝나는 4개월이었다. 중간에 특별한 사건이 없는 이상 무 자르듯 완벽하게 관계가 끝나지는 않겠지만 유통기한 지난 식품이 그러하듯이 관계는 서서히 끝을 향해 달려갈 것이다.
“아, 요즘은 무슨 말인지 알겠다. 있잖아. 도화야. 나 사실 너한테 서운한 거 말해도 돼?”
“응 말해 봐.”
“나한테 거리를 왜 둬?”
“응?”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모든 걸 말할 필요는 없다는 거 알아. 그래도 네가 설정한 거리가 너무 먼 거 아냐? 우리 시간에 비해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내가 결혼하면 너 나한테서 멀어질 거라는 기분 들게 하는 건 좀 그런 거 아냐?”
“내가 왜 네가 결혼하면 멀어져?”
도화가 진영의 머릿속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목소리 끝을 높였다.
“넌 언제나 먼저 선을 그으니까. 언제나 먼저 전화하고 만나자는 쪽도 나고. 오늘은 예외. 기뻤어. 어쨌든 너는 언제나 내 말이 떨어져야 하잖아. 내 쪽에서 신경을 끊으면 넌 아무것도 안 할 것 같아. 내가 결혼하면 아무래도 예전보다 덜 널 생각하게 될 거야. 서로 다른 인생을 살아온 두 사람이 하루의 시작과 끝을 보내는 일이니까 한동안 좋은 일로도 나쁜 일로도 정신이 없을 거야. 내가 조금이라도 전보다 너한테 무신경해지는 순간 관계의 유통기한이란 것이 지나기 시작할 거야.”
“그거야. 너는 나 외에도 사람이 많고. 선택지가 많은 너를 내가 피곤하게 할까 봐. 네 쪽에서 전화가 와야 마음이 편했어.”
“왜 그런 생각을 해?”
“그거야, 우리 관계가 불공평하니까. 내가 그런 식으로 네 마음을 확인하고 싶어질 만도 하잖아.”
“무슨 불공평?”
“아까도 이야기했잖아. 너는 선택지가 많고 나는 선택지가 너 하나야. 그러는 너는 왜 일정한 주기마다 날 찾는 거야? 마치 내가 관리 대상인 것처럼.”
“나한테 널 찾는 주기 같은 게 있다고?”
“한 달에 한 번. 한 달이 다 되어 가는 시기에 넌 나에게 연락을 해. 마치 스케줄 표에 기계적으로 나를 만나는 기간을 정해두는 것처럼 말이야. 인간관계를 설계하는 거지. 그게 무조건 나쁘다는 건 아닌데 뭐랄까 기분이 좋지는 않아.”
“한 달에 한 번이라고? 그렇다면 내가 너를 만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주기가 그랬던 거야. 그런 계산 같은 게 아니야. 난 인간관계의 유통기한이라는 말보다 그게 더 와 닿아. 상대방을 느끼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주기란 것이 있다는 거에.”
“난 정확히 무슨 차이인 줄 모르겠다. 유통기한과 견딜 수 없는 주기니 뭐니 하는 말 사이에. 말장난 같기도 하고.”
“음, ‘유통기한’은 머리로 계산하는 거고 ‘견딜 수 없는 주기’라는 건 어쩔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을 줘 버린 거지. 그나저나 유통기한이니 뭐니 하는 이상한 말은 네가 지은 거야? 누가 알려 준 거야?”
“그냥 들은 거. 우연히 라디오에서.”
“그 말 지은 사람 엄청 겁쟁이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