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프의 백구
수요일 저녁, 도화가 버스에서 내려 동네 입구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때 익숙한 차가 도화의 앞에서 멈췄다. 검은색 자동차의 유리가 내려가고 도명의 얼굴이 보였다.
“타요.”
“바로 앞인데요.”
“바로 앞이라도.”
도명의 고갯짓에 도화는 우물쭈물하다가 조수석에 앉았다. 도화는 도명과 첫 플레이를 한 후 단둘이 있는 것이 급격히 어색해졌다.
뭔가 심리적으로는 전보다 더 가까워진 것 같은데 막상 같이 있자니 분위기는 이상한 떨림으로 매끄럽지 못했다. 도명의 시선이 도화가 들고 있는 편의점 비닐 봉투에 머물렀다.
“설마 그게 저녁입니까?”
“네.”
도화는 괜히 민망함에 편의점 로고가 박힌 비닐을 몸 뒤로 밀어 넣었다. 도화가 항상 먹던 삼각 김밥과 인스턴트 국이 봉지 안에 있었는데 왠지 도명의 기준에선 못마땅할 것이 분명했다. 도화는 본능적으로 그런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혼나요.”
그리고 그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네?”
“자꾸 대충 먹으면 혼난다고요.”
“아, 전 할 줄 아는 요리가 없어서요.”
“간단한 것부터 시도해 보는 게 어때요? 계란 프라이라든지 마트에서 반 조리된 식품을 사서 익히기만 한다든지요.”
“네.”
도화는 솔직히 매번 그렇게 하기 귀찮았지만 일단 대답을 했다. 하루아침에 오랜 습관이 바뀔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 그러겠다고 하면 도명의 잔소리가 이어질 것 같았다. 그런 도화의 생각을 도명이 못 알아챌 리가 없었다.
“거짓말해도 혼나요. 자꾸 혼낼 명분 만들지 말아요. 저는 가뜩이나 혼내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먹이 던지지 맙시다.”
“아, 거짓말은 아닌데요. 다만 매일 빠짐없이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저랑 저녁 시간대가 맞으면 일단 내려와서 먹어요. 어차피 차리는 밥상. 수저 하나 더 놓는 거니까. 대략 저랑 저녁 시간대 맞는 것 같은데요.”
도명은 대부분 집에서 밥을 해 먹었다. 도화 역시 저녁에 따로 약속이 있는 경우가 드물었다. 도명이 따로 지인들과 저녁 약속이 있지 않은 이상 그는 언제나 집에서 밥을 해 먹었다.
지인들과의 저녁 식사마저도 도명의 집에서 해 먹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런 식사에 도화를 억지로 매번 낄 수 없으니 그건 열외로 두고 이건 거의 일주일에 저녁만 네 번 이상 와서 먹으라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아, 그러면 제가 너무 죄송해서.”
도화는 도명에게 얻어먹는 것도 한두 번이지 매일 빈대처럼 얻어먹을 낯짝은 없었다.
“거의 매일 제 얼굴 맞대고 밥 먹기 불편하다고 돌려서 말하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다만 그러면 제가 너무 도명 씨 식탁에 들러붙은 빈대 같아서.”
거리가 짧았던지라 도명의 차가 어느새 가게 앞에 도착했다.
“얻어먹는 데다가 제가 제발 저희 집에서 한 끼 식사해 달라고 애원까지 하게 만드네요.”
도명이 도화의 차 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도화는 ‘아니 뭘 차 문까지……’라고 중얼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도화는 얼마 전까지 욕실에 개처럼 묶어놓고 구둣발로 밀고 누르고 했던 사람이 숨 쉬듯 매너를 부리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도명은 도화의 손에 들린 편의점 음식을 뺏더니 휴지통에 버렸다. 미리 쇼핑을 하고 왔는지 뒷자석에서 쇼핑백을 꺼냈다. 자신의 식량이 별안간 쓰레기통에 들어간 도화가 경악스러운 얼굴을 했지만 도명은 태연한 얼굴로 따라 들어오라는 듯 손가락질을 했다.
도화는 일단 도명의 가게 안에 들어섰다. 도명은 쇼핑백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냉장고 안에서 재료를 하나둘씩 꺼내 들었다.
“낙지볶음 할 겁니다. 미안하면 옆에서 거들어요. 솔직히 별 도움은 안 되겠지만. 자기 입으로 들어가는 게 어떻게 만들어지는 건지 조금씩이라도 배워둡시다.”
도명은 그리 말했지만 사실 도화에게 큰 기대가 없었다. 진심으로 도화가 요리를 능숙하게 하게 되는 것을 바라지도 않았다. 순수하게는 정말 도화 입에 자신이 만든 음식이 들어가는 게 즐거워서였고 불손한 의도로는 도화가 그가 없는 생활의 부재를 크게 느끼길 바랐다. 도화와 도명은 위아래 층에 살다 보니 도명이 그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끼어들기 좋았다.
도명은 앞치마를 두른 도화를 멀뚱히 쳐다보다가 가게 블라인드와 문을 닫았다. 도화는 도명의 행동에 긴장감으로 등 근육이 굳어졌다. 도명이 저럴 때마다 정상적인 일이 일어난 적이 없었다.
도화는 현관문이 굳게 닫히고 블라인드가 내려가는 소리만으로도 파블로프의 개처럼 피부 표면 아래로 묘한 흥분감이 감도는 것을 느꼈다.
도화는 묘한 흥분감을 감추기 위해 괜히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사람처럼 얼굴 근육을 자연스럽게 풀려고 노력했다.
“도화 씨가 진짜 신경 써야 할 게 뭔지 압니까?”
“뭔데요……?”
“일단, 도화 씨가 많이 모르는 사람이라 언제 제대로 된 SM 플레이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도화 씨가 크게 무리하지 않는 수준에서 틈나는 대로 이런저런 연습을 해 봐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도명은 도화에게 ‘어떻게 생각합니까?’라고 건의하듯 말했지만 표정과 몸짓은 어서 내가 원하는 대답을 해 보라는 듯 위압감이 있었다.
“크게 무리하지는 않는 한이면.”
“일단 앞으로는 제가 옷 벗자고 하면 벗을 수 있죠?”
도명이 가까이 다가오라는 듯 손짓했다. 도화는 겁은 나지만 일단은 하라는 대로 도명의 앞에 섰다. 부쩍 가까워진 거리에 벌써부터 목 끝이 뜨거웠다.
“외투 벗고 무릎 꿇어요. 그리고 손 뒤로 깍지 끼고요.”
“저…… 도명 씨, 그러니까 저 밥 준다고 오라고 한 거 아니었나요? 그리고, 연습이니까 저, 질문 할 수 있는 겁니까?”
도화는 밥으로 유인당한 것 같아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어렸을 때 돈가스 사 준다고 해서 따라갔다가 정신 차려 보니 포경수술대 위에 올라갔던 것 비슷한 기분이었다.
도화는 이 와중에도 도명이 뺨을 내리칠까 봐 그의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벌써 도화는 도명의 행동 하나하나를 몸으로 기억하기 시작했다. 도명은 자신의 손목을 쥐고 있는 도화의 손을 풀게 하고 대신 깍지를 꼈다.
도화가 도명의 손목을 불안한 모양새로 잡고 있는 것보다 훨씬 안정적으로 보였다.
“걱정 말아요. 밥도 먹을 거고, 지금은 연습 중이니 질문도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 뭘 할 건지…… 간단하게 이야기해 주실 수 있어요? 웬만하면 하자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냥, 말없이 이것저것 시키시면 너무 무섭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해 주세요.”
“저도 아직 구체적으로 계획은 안 짰지만 흠……”
도명은 생각에 잠기면서도 중지로 도화의 땀에 젖은 손바닥을 살살 간질였다. 도화는 묘한 기분에 발가락만 꼼지락거렸다. 도명은 생각을 마치고 긴장하고 있는 도화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쓸어 넘겼다.
“일단, 도화 씨가 옷을 벗게 하고 앞치마만 입게 할 겁니다. 그 외에는 없습니다. 그 상태로 같이 요리하고 맛있게 식사하면 됩니다. 오늘은 옷은 제가 벗겨 줄게요. 다음엔 스스로 벗어요.”
“아……”
“그 반응은 싫다는 거예요? 좋다는 거예요?”
“많이 부끄러운데요.”
“싫다는 뜻입니까?”
도명이 실망감에 가득 찬 목소리로 되물었다. 도화는 도명의 반응에 식은땀을 흘렀다. 안 그러려고 해도 자꾸 있지도 않은 가상의 비교 대상이 그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자꾸 자신이 도명의 골치 아픈 학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명의 인내심의 깊이를 모르니 불안해지는 것이다.
그의 파트너들은 옷 하나 벗는 것으로 도명을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화는 전에 벗고 자위까지 했으니 못할 건 아니라고 애써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어렵지만 하겠습니다. 아니, 어렵지 않습니다.”
‘사실, 아직 어렵지…….’
“그리고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이번 주말에 할 플레이에 대해서 의논합시다.”
“그때도 옷은…….”
“당연히 벗어야죠. 아. 이번 주말 오기 전에 꼭 가르치고 넘어가야 할 게 있습니다. 아무래도 도화 씨가 이번 주에도 저를 만족시켜 주지 못할 것은 빤하니 펠라라도 익혀 둬야 하는 거 아닙니까?”
도화는 펠라라는 말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도화가 크게 당황한 듯 빠르게 눈을 끔뻑이자 도명이 정신 차리라는 듯 그의 머리를 손 안에 가두고 고정시켰다. 도명은 도화의 도피 행동을 억지로 그의 얼굴을 고정시켜 시선을 마주하게 함으로써 막았다.
“이번 주 토요일 전까지 도화 씨가 가능할 때 언제라도 좋습니다.”
도화를 대하는 도명의 화법은 언제나 이랬다. 상대방은 선택권이 많은 것처럼 느껴져서 그가 던져 준 선택들에 몰입하느라 도명이 제시한 예시 외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게 됐다.
“그 말은 오늘 바로 배울 필요는 없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죠.”
도화는 도명의 말에 일단은 안심을 했다. 당장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갑자기 호흡이 조금은 편해졌다.
“토요일이 시작되는 12시 전까지만 배웁시다. 어디까지나 도화 씨가 원하는 시간에 말이죠.”
도명은 분명 도망가는 것이 습관인 도화가 자정이 되기 전 헐레벌떡 그를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미루고 미루다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간대에 올 것이다. 도명이 바라는 것은 도화가 언제 펠라를 배울까를 생각하며 내내 그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이었다.
도명은 자신의 얼굴을 보자마자 도화가 반사적으로 야한 표정을 지을 걸 생각하자 벌써부터 명치가 울렁거렸다. 그 갈구하면서도 겁먹을 표정이라니! 그 복잡하고 미묘한 표정이 질릴 리가 없었다.
“너무 미루지는 말아요. 정확히는 제가 자정 전까지 도화 씨 입안에다가 사정하는 거니까. 도화 씨가 저에게 오는 시간이 기준이 아닙니다. 참고로 약속 어기면 체벌 있습니다. 이 체벌은 도화 씨와 상의하지 않습니다. 제 마음이니까 여러모로 제 기분을 신경 많이 쓰셔야 할 겁니다.”
도명은 잘 해내라는 듯이 얼빠진 도화의 뺨을 손바닥으로 두 번 두들겼다. 벌써부터 못된 생각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도화의 어설픈 혀 놀림으로 사정할 도명이 아니었다.
도명은 벌써부터 일부러 버틸 만큼 버터서 도화가 귀엽게 구는 것만큼 괴롭힐 생각까지 들었다.
이도화라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 줄 때는 어떻게 하는지가 궁금했다. 왠지 요령 좋게 애교를 부릴 것 같지는 않았다.
“왜 벌써부터 울먹거려요.”
“제, 제가 언제요?”
“벌써 세상 무너진 표정이잖아요.”
“아닌데요.”
도화는 자존심이 상하는 듯 또 우기기 시작했다.
“도화 씨, 그렇게 나랑 야한 거 하는 게 싫습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야한 건…… 좋아요.”
도화가 목소리를 최대한 줄이며 말했다. 하지만 도명의 귓가에는 야한 게 좋다는 도화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이쯤 되니 펠라를 가지고 괴롭힘을 당한 건 도화뿐만이 아닌 듯했다.
도명은 미래의 즐거움을 위해 인내심을 다 잡듯 손끝에 힘을 주고 도화의 옆머리를 쓸어 넘겼다. 도명은 당장이라도 도화를 무릎 꿇리고 그의 열이 몰린 입술에다가 자신의 사타구니를 끈덕지게 비비고 싶었다.
“외투 벗고 무릎 꿇어요. 그리고 손 뒤로 깍지 낍시다.”
그제야 도화는 외투를 벗어 식탁 의자 등받이에 걸어 두었다. 그리고는 도명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손을 뒤로 보냈다. 긴장감에 괜히 등 뒤로 보낸 손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도명이 도화의 넥타이를 풀고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었다. 역시 그의 앞에서 옷을 벗는 건 여전히 부끄러웠다.
도명은 벗겨놓은 도화의 셔츠를 그의 외투와 함께 포갰다. 그리고는 주방에서 가위를 가져왔다. 도명은 긴장된 도화의 표정에 움직이면 다친다는 듯이 도화의 어깨를 힘주어 눌렀다.
“자세 유지해요. 그냥 옷을 이 상태에서 자르려는 겁니다. 도화 씨 다치는 거 싫습니다.”
‘싫다는 사람이 왜 걸핏하면 날 왜 때리려 들어! 이 미친놈아! 네가 원하는 게 대체 뭐야!’
“옷이…… 다 망가지는데요.”
“이 옷 도화 씨한테 잘 안 어울립니다. 안 어울리는데 이 옷 참 좋아하더군요.”
도명이 벼르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도명의 가위질에서는 망설임이 없었다. 도명은 도화가 입고 있는 러닝셔츠, 팔 끼우는 고리 부분과 옆 부분을 사각사각 잘라냈다. 날카로운 가위 날이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치한 채 도화의 살갗을 스쳤다.
“그렇다고…… 이렇게 못 입을 정도로 만들어 놓으면.”
도명이 고갯짓으로 아까부터 식탁 위에 올라가 있는 쇼핑백을 가리켰다. 도화는 자신의 물건이 아니니 크게 신경 안 썼는데 자세히 보니 옷 가게 로고 같았다.
“오늘 미팅 끝나고 옷 가게 지나가는데 딱 도화 씨 옷이더라고요. 충동구매했어요.”
‘이 미친놈아, 가위 들고 그런 엄청 다정한 표정 짓지 마. 다른 의미로 무서워!’
“엉덩이 들어요. 다치니까 움직이지는 말고.”
“그냥… 제가 평범하게 벗으면 안 될까요?”
“안 돼요.”
도명은 더 이상 도화의 말이 들어갈 틈도 주지 않고 답했다. 그리고는 콧노래를 부르며 도화의 바지를 절개하기 시작했다. 옷에 대한 이해가 높은 사람이라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절개가 되는지 알고 있었다. 도명의 가위질이 계속될수록 벌어진 옷들 사이로 도화의 살이 드러났다.
자세를 유지하느라 도화의 허벅지가 터질 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엉덩이를 앉지도 완전히 서 있지도 않은 각도로 들고 있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도명은 도화의 뒷목을 잡고 그의 이마를 바닥에 닿게 했다. 그러자 도화 입장에서는 너덜너덜해진 바짓단 사이로 엉덩이 살이 더 환하게 드러나 민망했지만 자세 유지하기는 더 편했다.
도명이 벌어진 도화의 바지 천 사이를 잡고 뜯기 시작했다. 그러자 별다른 힘을 주지 않아도 옷이 깔끔하게 떨어져 나갔다.
순식간에 도화는 브리프만 걸친 채 엉덩이를 높이 들고 도명의 가게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도화는 연습치고는 너무 난이도가 있다고 생각하며 손톱으로 바닥을 긁어 댔다.
도명의 손이 도화의 브리프에 갔다. 그리고 그의 몸에 걸쳐진 마지막 남은 천 조각마저 조각냈다.
“확실히, 도화 씨는 옷을 입었을 때보다 벗었을 때 보기 좋습니다.”
도명이 발가벗겨진 도화를 내려다보며 눈꼬리가 휘어지게 웃었다. 도명이 도화의 머리맡에 앞치마를 내려놓았다.
“이제 식사 준비합시다.”
도화는 자신이 걸칠 수 있는 유일한 천 조각인 앞치마를 둘렀다. 하지만 역시나 도화의 도드라진 쇄골이나 가슴선은 가려 주진 못했다.
더욱 민망한 부분은 전혀 보호받지 못하는 뒷모습이었다. 앞치마 리본이 도화의 엉덩이 뒤에서 팔랑거렸다.
도화는 넓은 어깨에 비해서 골반은 조금 좁아서 앙증맞은 엉덩이를 가지고 있었다. 도명은 도화의 뒷모습을 흘깃 보고는 그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탁 소리 나게 치고 싶었지만 애써 담백한 표정을 지었다.
도화는 재료를 씻는 간단한 일을 했다. 도명은 도화가 칼질하는 것도 못마땅해해서 대부분의 시간은 도명의 옆에 서서 눈요기가 되어 주는 게 일이었다.
도화는 알몸에 멀뚱히 서 있으려니 더 곤혹스러웠다. 큰 의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앞치마 끝자락을 늘려 몸을 조금이라도 더 가리고자 노력했다.
“가만히 서 있지만 말고. 간 좀 봐요.”
도명이 여상한 말투로 자글자글 끓고 있는 낙지볶음을 조금 떠다 도화의 입에 갖다 댔다. 도화가 국자에 입술을 조심스럽게 갖다 댔음에도 뜨거움이 느껴졌다. 그러자 도명이 자신의 손가락 끝에 소스를 묻혀 도화의 혀에 갖다 댔다. 화끈하면서도 끝에 달짝지근한 맛이 살짝 감돌았다.
도화는 맛있다는 듯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밥도 다 됐으니까 밥그릇 가져다가 밥 떠 놓으세요. 수저도 예쁘게 놓고요.”
도명이 착하다는 듯이 도명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귀엽게 툭툭 두들기며 말했다. 도화는 갑작스럽게 훅 들어오는 도명의 손짓에 놀랐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도명이 건네주는 밥그릇을 받아 들었다.
밥솥 안의 밥알들을 주걱으로 헤집는데 그의 얼굴이 갓 지어진 밥알들이 내뿜는 수증기로 홧홧했다. 그냥 따뜻한 집밥 냄새인데 이 와중에 자꾸 야한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도화가 떨리는 손에 힘을 주며 최대한 야무지게 밥을 꾹꾹 눌러 담았다. 도명이 도화의 옆을 지나가다가 그가 담은 밥 두 공기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밥알 그렇게 심하게 압축하지 말아요. 그리고 저는 이렇게 많이 안 먹습니다. 도화 씨는 이대로 괜찮습니다. 많이 먹어요.”
도명이 도화의 뒤에 서서 껴안으며 손등 위에 손을 얹고 그가 뜬 밥을 반이나 덜었다. 도화는 도명이 훅 덜어낸 밥의 양에 놀랐다.
“겨우 이 정도 먹습니까?”
“살쪄요.”
“밥 좀 먹는다고 살 안 쪄요.”
“잔소리 말고, 앞으로 제 밥은 이 정도입니다. 기억하세요.”
도명이 건방지다는 듯이 도화의 콧등을 손으로 누르며 말했다.
“저, 도명 씨, 본인은 저한테 밥 문제로 뭐라고 하면서 제 말은 왜 잔소리 취급하시는 건지. 솔직히 황당합니다.”
도화가 허리춤에 손을 올린 채 제법 강한 어조로 도명에게 항의했다.
“그 차림으로 그렇게 제법 사납게 따지면 저 여러모로 못 참습니다.”
도명의 한 마디에 도화는 금세 의기소침한 자세로 돌아와 또 부질없이 짧은 앞치마를 최대한 끌어 내렸다. 도명은 내내 천 조각 하나에 의존하며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재미있어서 견딜 수 없었다.
“도화 씨 그렇게 얌전한 모습 보니까 여장시켜도 재밌을 것 같네요.”
“설마, 방금 그 말 진심은 아니죠? 악취미입니다. 어울릴 리가 없잖습니까. 이 얼굴에. 이 덩치에.”
“어울려서 입히는 거겠습니까? 입기 싫어서 발악하는 도화 씨 구경하는 게 재미죠.”
도명이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웃으며 숟가락을 들었다. 상상만 해도 빵 터지고 즐거운 모양이었다.
“도명 씨는 생긴 것은…… 멀쩡한데.”
“멀쩡한 정도 아니고, 잘생겼는데.”
도명이 뻔뻔한 얼굴로 한쪽 눈썹을 위로 올리며 단정 지어 말했다. 도화는 고집부리고 입술에 힘을 주어 ‘멀쩡한데.’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도명이 자신을 너무 잘생긴 얼굴로 지그시 쳐다봐서 결국엔 ‘잘생겼는데’라고 바꿨다.
“여러모로 변태 같습니다. 대체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지.”
도화는 새삼 앞치마 한 장 두르고 식탁에 앉아 있자니 자괴감이 몰려왔다. 그 와중에 낙지볶음은 목구멍으로 잘도 넘어가서 자괴감이 두 배로 짙어졌다. 더군다나 앞에 앉아 있는 남자는 너무 멀쩡히 세미 정장을 입고 있어서 더욱 그랬다.
“도명 씨랑 있으니… 이게 참, 그냥 저녁 식사라는 게 여러모로, 아 지적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머릿속은 또 멍하고.”
도화는 지금 자신의 기분을 제대로 설명도 못 하고 말들을 어수선하게 겨우 이어갔다.
“기분이 딱히 싫지는 않다는 게 가장 큰 문제 아닙니까?”
도명이 이 와중에 얄밉게도 정곡을 찔렸다. 그래서 도화는 여러모로 할 말은 참 많은데 말 한마디도 제대로 내뱉을 수 없는 이상한 저녁 식사였다.
식사가 끝나고 도명이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몇 번 같이 설거지했다고 벌써 나란히 서서 일을 나누는 호흡이 익숙해졌다. 자신의 살림도 아닌데 도명이 어디에 어떤 그릇을 어떻게 정리하는지 알게 됐다.
도명은 도화가 식기를 정리하는 것이 눈에는 안 찼지만 일단 도화가 하는 것을 가만히 보다가 고쳐 주었다. 도화가 자신의 공간에서 자신의 규칙을 익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도화는 도명과 같이 잘 말린 천으로 식기를 닦으면서 말했다.
“저, 이 그릇들 아끼는 겁니까?”
“네.”
“이런 건 어디서 사는 건데요?”
“여기저기서. 충동적으로요. 일단 도화 씨가 들고 있는 그건 프랑스 출장 갔다가 프리마켓에서 샀습니다.”
“안 그렇게 생기셨는데 충동적으로 뭘 많이 사네요. 제 옷도 그렇고…….”
도화는 고마운 마음을 어설프게 표현했다. 도화는 그의 아버지가 감정을 표현에 인색한 사람이라서 고마움이나 좋은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는 법을 집안에서 배우지 못했다. 지금도 이렇게 마음이 간질거리는데 대놓고 고맙다고 하면 마음의 간지러움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저처럼 생긴 건 뭔데요?”
“뭐랄까. 뭐든 계획적으로 할 것 같습니다. 심지어 화장실 가는 것조차 스케줄 표에 있을 것 같습니다.”
“대략적으로 계획을 좋아하긴 합니다. 물론 화장실은 제 몸이 원할 때 갑니다.”
도명이 방금 자신을 놀린 거냐고 작게 투정 부리듯 쏘아보았다. 도화는 그런 도명의 시선에도 작게 웃었다. 그를 놀리는 것을 작게나마 성공한 것에 대한 기쁨이었다. 그리고 그와 조금씩 친해졌다는 것에 대한 기쁨이기도 했다.
“계획을 좋아하기는 하는데 무언가에 빠지는 건 계획할 수 없죠.”
“도명 씨는 보통 무언가에 빠지는데요?”
“아름답고 감각을 깨우게 하는 건 뭐든지.”
“도명 씨 통장 괜찮아요?”
“다행히 아직까진 괜찮네요. 홀려서 이것저것 사는 것 치곤 말입니다. 중학교 때 길을 걷다가 로즈골드 색의 반지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홀리듯 껴 보았는데 제 손가락에도 딱 들어가고 어울렸죠. 문제라면 여자 것이라는 게 문제였죠.”
“도명 씨라면 그런 것 신경 안 쓰고 샀을 것 같네요.”
도화가 도명을 향해 여상한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눈빛은 그에 대한 동경을 가득 담고 있었다. 다른 사람 신경 안 쓰고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 도화는 그것이 도명이 악마라도 좋은 이유 중 하나임을 깨달았다.
“옆에 있던 친구가 제가 반지를 끼고 구경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남자 새끼가 그런 걸 끼워 보고 있다고 놀리더군요. 순간 저는 무슨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그 반지를 손에서 급히 빼고 다시 가판대 위에 내려놓았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세상이 조금 변하고 보니 그때의 행동이 참 우스웠다. 더군다나 요즘은 남자 여자 디자인이 모호해지고 있어서 더욱 그랬다.
아직 충분하지는 않지만 도명이 반지를 끼워 보던 시절에 비하면 숨통이 조금 틔는 기분이었다. 싸울 각오 없이 좋아하는 것을 몸에 걸쳐 볼 수 있다는 건 삶의 축복 중 하나였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내가 옳았다는 것을 강하게 깨달을 때가 있다. 역시 그때의 내가 옳았다. 내가 그 반지를 원하면 그것은 그저 남성의 것도 여성의 것도 아닌 내 것일 뿐이었는데.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도망갔다는 게 억울했다.
“도명 씨도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까?”
“네, 그런 시절이 있었네요.”
“그래서 지금도 로즈골드 색 액세서리 보면 반짝이는 것을 만난 까마귀처럼 정신을 못 차립니다. 제가 그렇게 뒤끝이 깁니다. 도화 씨.”
도명이 도화를 향해 눈꼬리를 휘며 말했다. 휘어진 눈꼬리 안의 눈동자가 집념으로 번들거리는 것이 도화를 향한 애교 섞인 협박이었다.
“뒤끝이라면 저도 만만치는 않습니다.”
도화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의 표정이 단단하게 굳은 게 평소 때 같은 귀여운 호기는 아니었다. 도화는 이것만은 도명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부모님에게 화가 난 뒤끝이 10년째였다. 메모지에 간단한 말 한마디만 남겼다. ‘나는 남자가 좋아요.’ 상대방의 상상력만 자극하는 애매모호한 메시지였다.
극단적으로는 부모님이 도화가 남자가 생겨서 그 발정을 참을 수가 없어서 나갔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럴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도화는 자신이 느낀 혼란과 두려움, 서운한 것들을 털어놓은 적도 없었다. 어차피 이성애자인 그들은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도화의 부모님은 은연중에 도화가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다시 남자에 대한 연애 감정을 품을까 봐 노심초사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반대로 문제는 그가 한참 꿈꿔야 하는 20살에 연애 감정이 이미 말라 버렸다는 것이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즐거움을 느껴야 할 신경이 죽어 버려 썩은 나무토막 같은 감정선을 어떻게든 활성화해 보고자 무의식이 노력한 건 공포영화를 보는 것이었다. 그 정도 강렬한 자극이 아니면 아무것도 안 느껴질 정도로 그의 사람에 대한 감정은 썩은 나무토막 수준이었다.
“그렇습니까?”
“네, 제 뒤끝은 더 만만치 않은 게…… 도명 씨는 원하는 것을 말하는 데 익숙하겠지만 저는 끙끙 앓다가 결국엔 미제사건으로 만드는 게 특기입니다. 물론 자랑은 아닙니다.”
“제가 도화 씨 뒤 끝에 당하기 전에 연습시켜야겠네요. 정리가 끝났으니 원하는 것을 말하는 것 연습하러 갑시다.”
도명이 도화의 팔목을 잡아끌어 자신과 마주 보게 했다. 그리고는 두 팔을 도화의 허리에 감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도화는 딸꾹질을 시작했다. 도화는 자꾸 터져 나오는 딸꾹질을 참기 위해 입을 손으로 가렸다.
도명은 도화가 놀란 것은 알고 있지만 태연한 태도로 도화의 앞치마 뒤에 있는 매듭을 풀었다. 도화의 몸을 그나마 가려 주던 것이 사라지자 도화는 본능적으로 손바닥으로 앞부터 가렸다.
“벌써부터 발기했다 한들 놀라지 않으니 손 좀 치워요. 제가 가져올 의자에 앉아요. 도화 씨가 즐거워할 부분부터 찾읍시다.”
도명이 창고에서 의자 하나를 꺼냈다. 도명이 빨간색 철제 의자를 화원 한가운데 놓았다. 녹음이 우거진 작은 숲 같은 곳에 덩그러니 놓인 빨간 의자가 강렬해 보였다. 빨간색과 녹색 계열은 보색이라 더욱 그러했다. 위험한 느낌과 동시에 매혹적인 색채였다.
“아, 그러니까…….”
“저번에는 저나 도화 씨나 충동적으로 일을 벌였으니, 이제부터라도 차근차근 해 봅시다. 도화 씨 성감대 알아보는 것부터 할 거예요. 별 건 없고 손끝으로 검사하듯 하나하나 더듬어 볼 겁니다. 도화 씨를 기쁘게 하는 것이 뭔지 알아보는 거예요.”
“아.”
도명이 굳어 버린 도화의 손목을 잡고 의자에 끌었다. 힘을 별로 주지도 않았는데 도화는 쉽게 딸려왔다. 애초에 거부할 의사 같은 건 없었다. 단지 발 디디는데 용기가 필요했을 뿐. 하나의 솜털 정도 부족한 용기를 도명이 그의 손목을 잡고 끌어감으로써 채웠을 뿐이었다.
의자에 앉으니 금속으로 만든 의자라 엉덩이가 순간 얼얼하다고 느낄 정도로 차가웠다. 도화의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도명이 차가운 감각에 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도화의 몸에 온기가 돌도록 손바닥으로 그의 등허리를 연신 쓸어 넘겼다.
“조금 한기가 돌아도 참아요. 온도가 너무 미적지근하면 감각 역시 느슨해집니다.”
도명의 말에 도화가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도화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이제 도화 씨 감각을 깨워 볼까요? 두렵습니까?”
“네. 두렵네요. 심장이 너무 빨리 뛰는데, 도망갈 수가 없네요.”
“왜 도망갈 수 없습니까? 도화 씨의 다리가 부러진 것도 아니고, 제가 협박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요.”
도명이 라벤더 오일을 도화의 목덜미에 적셨다. 향기에 날 선 정신을 환기하니 마음에 조금은 여유가 생기는 것 같았다. 도화가 숨을 쉴 때마다 오일에 적셔진 피부가 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사실은 싫지 않으니까…….”
도화는 말을 이어가다가 차마 말을 못 하고 입술을 다물었다. 그리고 다시 용기 내어 입술을 열었다.
“사실은 싫지 않으니까 도망갈 수가 없는 겁니다.”
도명은 도화가 기특했다. 도명의 입술이 그의 떨리는 눈꺼풀 위로 내려앉았다. 그러자 그의 얇은 피부 표면 아래 눈동자 떨림이 진동이 되어 그대로 느껴졌다.
도명이 스탠드 조명을 가져와 도화의 옆에 세웠다. 그리고는 전등 갓 부분을 도화의 몸을 향해 비췄다. 그리고는 가게의 모든 조명을 껐다.
도명의 화원은 식물들로 울창해서 조금만 어두워도 공간의 깊이를 알기 어려웠다. 그런 깊이를 알 수 없는 공간 속에서 오로지 빛이 비추고 있는 건 발가벗은 채로 빨간 의자에 앉아 있는 도화의 모습이었다.
“이러고 있으니까 제가 범인 같고 취조당하는 것 같습니다. 너무…… 저한테 모든 것이…….”
누구라도 이런 주목이 편할 리는 없겠지만 도화는 특히나 불편했다. 그는 언제나 적당히 주변부로 물러나 있던 사람이었다. 지금은 홀로 무대 위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시선이 너무 자신에게만 몰리는 느낌에 현기증마저 일었다. 이건 다른 의미의 고문이 아닌가 싶었다. 의자에 앉자마자 느껴졌던 으슬으슬한 한기는 더 이상 안 느껴지고 민망함으로 온몸에 열기가 차올랐다.
도명이 나무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각종 오일들이 투명한 병에 담겨 있었다. 도화가 자세히 보니 도명이 도화의 맞은편에 끌고 온 의자 옆에는 수첩과 볼펜이 있었다. 도화의 반응 하나하나 메모할 작정인 것이다.
“부끄러운 기분을 즐겨 봐요. 이 기분 자체를 즐기면 제 시선만으로 사정할 수 있으니까.”
도명이 도화의 뜨거운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감아 오며 말했다. 색이 아주 매력적인 뱀이 목을 감아 오는 기분이었다. 분명 소름 돋지만 떨치기는 싫었다.
“도화 씨는 오늘 아주 보기 좋으니까 걱정 말아요.”
“저, 정말 보기 좋아요?”
도화는 도명같이 완벽하게 생기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을 보기 좋다고 하니까 얼떨떨했다. 그가 말도 안 되는 농담을 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도명이 도화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도화의 발을 만지작거렸다. 언제나 도화가 도명을 올려다봤는데 그를 내려다보는 풍경이 낯설었다.
도화가 무릎을 가슴 쪽으로 끌어당기며 어쩔 줄 몰라 하자 도명이 도화의 발목을 끌어다 바닥에 내려놨다. 그리고는 바닥에 분필로 도화의 발바닥 모양을 따라 그렸다. 그가 그린 발 모양에 맞춰 발을 놓으니 다리가 벌려졌다.
“제가 아무리 기분 좋게 만들어도 이 반경 내에서 움직이지 말아요. 물론 도화 씨가 지키지 못해도 체벌은 없습니다. 다만 지키면 제가 도화 씨가 많이 기특할 것 같네요. 그뿐이에요.”
도명이 손바닥에 오일을 적혔다. 그들의 머리를 비추는 한 줄기 노란 전구 빛이 도명의 손바닥 위에서 흘러내렸다. 도화는 눈을 감았다. 평소라면 도명이 못하게 했겠지만 오늘은 강제로 도화의 눈을 뜨게 하지 않았다.
도명의 손가락이 도화의 귓속 주름을 파고들었다. 그러다가 점점 귓바퀴로 손가락의 흐름을 돌렸다. 적당한 압박감으로 피부를 눌러대는 게 묘한 기분이 감돌았다. 그의 손이 두꺼운 귓불에 가자 더욱 진득해졌다. 두툼한 살덩어리를 누르는 감각이 기분 좋았다.
이건 그런대로 발끝에 힘만 주면 참을 만했다. 도명이 은근히 시도 때도 없이 귀를 이런 식으로 만져댔으니까.
“읏… 음…….”
도화는 익숙한 감각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신도 모르게 나직한 노랫소리 같은 신음이 옅게 새어 나왔다.
“벌써 느끼기 시작하네요. 여긴 자주 만져 줬던 것 같은데. 그때마다 느끼고 있었어요? 사실은 식사하는 와중에도 발기했잖아요. 내가 모를 것 같았어요?”
도명의 말에 도화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사실 도화는 식사를 하면서도 발기를 하고 있었다.
당장 사정할 만큼 참을 수 없는 발기는 아니었지만 내내 아랫도리가 묘한 온도로 뜨거웠었다. 삽입을 할 수 있을 만큼 단단하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발기하고 있었다.
“……”
도화가 대답을 거부하듯 고개를 45도로 꺾으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긍정의 침묵이네요.”
도명의 손이 그의 턱선을 따라가다가 목울대를 살포시 누르고 뒷덜미를 힘주어 쓰다듬었다.
“목에 살짝 힘주어서 누를 거니까 너무 겁먹지는 말아요. 이런 거 즐기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SM 플레이 중에서도 가장 다루기 까다롭고 위험한 욕구입니다. 저같이 각종 플레이에 능숙한 사람도 긴장하는 겁니다.”
도명이 두 손으로 도화의 딱딱하게 굳은 승모근을 풀어 준 다음 목을 감싼 손에 힘을 서서히 주기 시작했다.
“기분 나빠지기 시작하면 제 몸에 손을 얹어요.”
처음에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묘한 압박감이 주는 긴장감이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도명의 손에 힘이 점점 들어갈수록 두려움이 지나쳐 기분이 나빠질 수준이 되어 버렸다.
도화는 목에 도명의 손가락 자국이 희미한 빨간색으로 생길 때쯤에 도화가 도명의 바지춤을 잡았다. 도명은 도화가 신호를 보내자마자 손을 바로 놨다.
“어때요?”
도명은 은연중에 대충 물었다. 사실 도화는 진짜 마조히스트인지도 애매한데 이런 극단의 감각을 좋아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일단 형식적인 확인 수준이라서 도명의 시선은 도화의 말을 듣기도 전에 그의 유두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모르겠어요.”
“‘모르겠어요.’입니까?”
도명이 의외라는 듯이 되물었다. 도명의 표정이 순간 난감해졌다.
“네.”
“‘싫다’가 아니고요?”
“아, 방금 전은 싫었습니다. 숨이 안 쉬어지기 시작해서…….”
‘당연하지. 손자국 생길 정도면 기도가 본격적으로 눌리기 시작하는 건데.’
처음에는 약한 자극으로 시작해서 점점 강한 자극을 원하는 게 사람의 욕구가 가는 필연적인 방향성이었다. 호기와 욕구만 가득한 어설픈 돔을 만났다가는 정말 큰일날 사람이었다.
도명은 이쯤 되면 모른 척할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다 역시 섭의 성향은 피한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라서 도화를 더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의 가랑이 사이를 보니 귀를 만졌을 때보다 페니스가 더 부풀어 있었다.
도명은 얼굴에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당혹스러운 감정이 추슬러지지 않았다. 도명이 미간을 찌푸린 채 도화의 코에 손을 얹었다. 그러다가 이내 손을 거뒀다.
이런저런 극단의 플레이 역시 많이 해 본 도명이지만 웬일인지 도화를 상대로는 그런 위험한 플레이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방금 도화가 느낀 부분은 그다지 발전시키고 싶지 않은 감각이었다.
도명은 차례대로 도화의 몸을 자극했다. 유두는 살짝 스치기만 해도 도화의 입에서 비음이 새어 나왔다. 손바닥으로 그의 사타구니 사이를 진득하게 문지르다가 오목한 배꼽에 손가락을 걸어 넣고 눌렀다. 그러자 도화의 페니스가 쿠퍼 액을 내보내며 위아래로 흔들렸다.
“중간에 싸고 싶으면 그냥 싸요. 애쓰지 말고.”
“하아… 하아… 앗. 앗.”
“싸든 안 싸든 언제 얼마큼 흥분하는지 한 눈에 보이니까.”
“유두를 만져 주는 건 어떻습니까?”
“조, 좋습니다.”
“아까 만져 준 감도는 어땠어요?”
“네?”
“만족했습니까? 아니면 아쉬웠습니까?”
“…….”
“침묵으로 긍정을 표현하는 건 아주 위험한 행동입니다. 제가 당신의 ‘싫다.’라는 표현을 좋다고 잘못 해석해도 괜찮습니까?”
“……아쉬웠습니다.”
“강도를 점점 올려 볼 테니까 아까처럼 못 견디겠으면 절 잡아요.”
“네.”
도명이 도화의 유두를 원을 그리게 크게 쓰다듬다가 젖꼭지를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그리고는 손가락 사이의 힘을 천천히 늘리며 잡아당겼다.
“앗!”
도화의 살갗이 빨갛게 일어날 정도로 도명의 손끝 힘이 제법 매서워졌다. 도화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지만 그가 그만둬 주기를 바라지 않았다.
도명이 도화의 유두를 세게 집은 채로 살가죽을 최대한 늘리고 나서야 도화가 도명의 허벅지를 잡았다. 이쯤 되면 당장 이번 주에 유두가 빨갛게 퉁퉁 부을 때까지 유두 클립을 써도 될 정도였다.
“복종하는 교육을 제대로 마치면 제법 울리며 즐길 수 있겠네요.”
도명이 도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도화는 여러모로 제법 강한 자극을 좋아했다. 저렇게 순한 얼굴을 하고 원하는 욕구는 제법 매서웠다. 도명이 도화의 음모를 손가락으로 헤집었다. 그리고는 허벅지 안쪽 살을 세게 움켜쥐었다.
“으앗.”
도화는 페니스를 직접 만지는 것보다 허벅지 안쪽 살을 만지는 것에 더 예민하게 굴었다. 도화가 젖은 눈으로 도명을 쳐다보았다. 도화의 손이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도명의 손목을 잡고 은근슬쩍 자신의 사타구니로 끌었다.
“페니스 만져 줘요?”
“네.”
“싫습니다.”
“네?”
예상치 못한 반응이 나오자 도화는 당황했다. 도명이 자신을 상대로 유치한 장난을 치는 것 같았다. 도화는 표정관리가 되지 않았다.
“엉덩이로 제대로 된 물건을 삼키는 것을 배울 때까지 페니스는 직접 만족시켜 주지 않을 겁니다.”
“그… 왜….”
“먼저 뒷구멍으로 느끼는 것부터 배웁시다.”
도명의 말에 도화는 빠르게 눈만 끔뻑이다가 자신의 허벅지만 움켜쥐었다. 더 이상 조르기도 민망한 내용이라 조를 수도 없는데 다리는 계속 야릇한 감각으로 덜덜 떨리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도명이 희망 고문을 하듯 도화의 음모를 손톱으로 긁으면서 물었다.
“대중목욕탕 같은 곳 갑니까?”
“아니요.”
“그러면 음모를 미는 것은 어떻습니까? 도화 씨 취향에 맞을 것 같은데.”
“그게 왜… 제 취향에……?”
도화는 네 취향을 왜 자기한테 전가하냐는 듯이 도명을 쳐다보았다.
“예리한 칼날이 도화 씨의 예민한 살결을 스치고 지나가는 감각을 즐길 것 같은데요.”
“아…….”
도화는 도명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물론 다치게는 안 하죠.”
“제모…… 많이 해 보셨어요?”
“네.”
깔끔하게 떨어지는 도명의 대답에 도화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명의 시선에 도화의 발에 갔다. 도화의 발이 도명이 그린 선 안에 가 있었다. 도명은 마지막으로 도화의 발바닥을 야릇하게 만지작거렸다.
도명의 손이 완전히 도화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미련 없이 오일 병들을 정리하고 상자를 닫는 걸 보니 확실히 그랬다. 도화는 도명이 이 의자에 앉으라고 할 때만 해도 싫었는데 지금은 이 시간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복종 훈련도 제법 잘 익힐 것 같네요. 예뻐 죽겠네요. 이렇게 안 때려도 말 잘 듣는데 왜 때렸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도명이 도화의 볼을 뭉개며 말했다. 도화는 도명의 칭찬에 가슴이 펑 터질 것 같아 말없이 입꼬리 끝에 힘을 주고 앉아 있었다.
“취향 파악은 끝났으니 이제 옷 걸쳐요.”
“아 저, 그런데 저 메모지는 저를 긴장시키려고 한… 장치 같은 거였습니까?”
도화가 도명의 빈 메모지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자 도명이 웃었다.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왜……?”
“어딜 만져도 다 좋아하는데 뭘 적습니까?”
도명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고 도화는 괜한 걸 물었다는 듯이 시선을 급하게 돌렸다. 도명이 도화의 앞에 쇼핑백을 건네주었다. 도화는 기대감에 가득 찼다. 심플한 실루엣의 남색 로브 코트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하얀색 셔츠, 단단한 색의 청바지였다.
“와, 많이도 샀네요.”
도화가 괜히 민망함에 한마디 했다.
“하나만 사 주면 이상하게 섞어서 입고 다닐 것 같아서요.”
도명이 도화의 패션 센스에 고개를 가로저어가며 말했다. 도화는 도명의 지적에도 마냥 기분 좋았다.
“아 안에는 속옷이 없는데요. 도명 씨가 제 속옷….”
“그냥 입어요.”
“새 옷에 그, 그 정액…….”
도화는 찔끔찔끔 흘린 정액으로 미끄러운 페니스를 누르며 말했다. 도명 앞이라 제대로 풀지도 못한 그의 페니스는 여전히 애매한 강도로 서 있었다.
“새 옷은 바로 그냥 입는 게 아니라 어차피 한 번 빨아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새 옷은 그렇게 개시해야 맛이죠.”
결국 도명의 말대로 속옷 없이 새 옷을 걸쳤다. 도명이 자신이 입고 온 옷을 엉망으로 만들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새 옷을 개시할 수밖에 없었다. 러닝셔츠 없이 입어서 아슬아슬한 수위로 하얀 셔츠에 유두 색이 비쳤다. 도명은 그런 도화의 차림을 즐기는 것 같았다.
“아…… 하루 종일 농락당하는 것 같아요. 저는 그냥 밥 한 끼 먹으러 왔을 뿐인데……”
도명이 자괴감과 억울함에 빠진 도화에게 허브차를 내 줬다.
“마지막으로 세이프 워드 하나만 정하고 헤어집시다.”
“세이프 워드요?”
“네. 말 그대로 도화 씨 안전을 위한 말을 정하는 겁니다. 도화 씨가 플레이를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을 때 쓰는 겁니다. 도화 씨가 기억하기 좋고 짧아야 말하기 편하겠죠.”
“그 말을 하면 정말 하던 것을 멈춰 주나요?”
“네, 다만 남용하지 맙시다. 정말 도화 씨 한계가 왔다고 생각할 때 써야 합니다. 양치기 소년 교훈 알죠?”
도화는 생각에 잠겼다. 세이프 워드를 정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플레이할 때의 상황과 적당히 섞이지 말아야 했다. 특이점이 있으면서, 쉬운 말이라. 당장 답을 내놓기 어려운 일이었다. 도화는 도명이 내 준 허브차를 반이나 마실 때까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도명은 인내심 있게 그가 생각에 빠지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다. 너무 답답한 나머지 중간에 이런저런 조언을 늘어 놓는 것도 하지 않았다.
도화는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다가 한 가지 말이 도화의 머릿속을 강하게 스쳐 지나갔다.
“도명 씨…… 아 저. 사랑합니다.”
“네?”
표정을 잘 숨기는 도명도 순간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도명의 얼굴이 긴장감으로 굳어졌다.
“아, 세이프 워드요. 사랑합니다, 가 좋을 듯해서요.”
도화가 손을 급하게 내두르며 그가 한 오해의 소지를 잘라내기 위해 노력했다.
“어째서요?”
“일단 일전에 도명 씨가 한 말들을 보면 그 말이 도명 씨의 욕망에 찬물 끼얹기 가장 좋은 말 같고.”
도화가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도명을 쳐다보았다.
“네 맞습니다.”
도명은 자신의 눈치를 보는 도화에게 답을 주었다. 그가 확답을 주지 않으면 도화가 그의 눈치를 보느라 다음 말을 이어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제 입장에서는…… 그러니까 제가 세이프 워드란 걸 사용할 때가 플레이가 제가 더 이상 견디기 힘들 정도로 심한 상황인 거잖아요. 나한테 이런 심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 더 이상 헌신하면 안 된다는 걸 자각하기에도 좋은 말 같아서요. 음, 별로인가요?”
도화가 도명의 표정을 보니 그의 표정이 여전히 굳어 있었다.
“별로면 도명 씨가 정해도 전 상관없어요. 열심히 연습하고 외우겠습니다.”
“아니요. 너무 이상적이라서 놀랐을 뿐입니다. 이런 세이프 워드는 또 처음인데 도화 씨가 내놓은 이유가 또 너무 반박할 여지가 없네요.”
***
도화는 도명과 헤어진 후 곧바로 씻기 시작했다. 머리 위로 찬물을 끼얹어도 멍한 상태는 계속되었다. 편한 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침대에 가지런한 자세로 눕는데 꽤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잠은 오지 않았다.
도화는 억지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 못 느끼고 있었던 심장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북소리 같은 심장 소리에 억지로 감고 있던 눈이 번쩍 떠졌다.
도화는 이불을 움켜쥐고 앉았다. 생각해 보니 도명이 시간을 충분히 준 것 같은 뉘앙스를 풍겼지만 그에게 구강성교를 배우기로 한 기한이 겨우 3일밖에 되지 않았다. 도화는 머리를 박박 긁기 시작했다. 벌써부터 이상한 기분을 견딜 수 없었다.
‘저는 성감대가 잘 발단된 편입니다. 신체적 접촉 없이 심리적 원인만으로도 오르가슴을 잘 느끼고 육체적으로도 섬세한 부분 하나하나 아주 잘 느낍니다. 가령 손가락 끝이라든가 발가락 끝만 잘 핥아 줘도 좋은 표정을 지을 수 있습니다.’
예전에 했던 도명의 말이 생각났다. 도명이 흥분해서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을 보고 싶어졌다. 그가 무방비한 모습으로 호흡을 흩뜨리는 그런 모습이 궁금했다. 도명은 언제나 완벽한 조각상처럼 단단하고 깔끔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단단한 조각상의 표면에 금을 내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 도화는 도명이 왜 그렇게 자신을 괴롭히는지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자신 앞에서 무아지경이 되는 사람을 관음하는 기분을 한 자락 상상했다.
도화는 도명의 바지를 내리고 그의 가장 예민한 부위를 물고 늘어지는 상상을 했다. 상상만 해도 어색한 기분에 온몸이 굳었다. 하지만 굳은 근육 안쪽은 뜨거운 느낌으로 부글거렸다.
도화는 두 손으로 열이 오른 얼굴을 감았다. 민망한 와중에 이왕 해야 할 것, 잘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도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노트북을 켰다. 노트북 안에는 공포영화 DVD가 들어가 있었다. 한동안 노트북 안에서 돌아가지 않은 DVD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도화는 케이스를 어디다 박아 두었는지 찾기 위해 책상 위를 더듬거렸다. 책상 한구석에 밀려난 케이스에 차갑게 식은 DVD를 넣었다. 그리고 DVD장에 넣었다.
그러고 보니 귀가 후에 기계적으로 보던 공포영화를 안 본 지 오래되었다. 하지만 금단 증상 같은 것은 없었다. 원래부터 이런 것은 필요 없던 사람처럼 말이다. 아주 오래된 습관이 별안간 중단되었는데 금단 증상 하나 없다는 게 신기했다.
도화는 펠라 잘하는 법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게시물 몇 개를 정독하고 있는데 그때 도화의 핸드폰이 울렸다. 익숙한 번호였다. 번호를 보는 순간 바로 도명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 도명 씨, 왜 이 이 시간에……?”
“전화 바로 받는 거 보니 안 자고 있었네요. 실례될 거 무릅쓰고 했는데. 역시나 깨어 있군요.”
도화의 눈이 벽시계를 향했고 시간은 새벽 한 시였다. 새벽 한 시에 들려오는 도명의 목소리는 묘하게 살 떨리게 하는 면이 있었다. 단순히 목소리만 들었을 뿐인데 살갗 아래가 부르르 떨렸다.
“평소 몇 시에 자요?”
“늦어도…… 10시에는 잡니다.”
도화는 별거 아닌 대답에도 목소리가 낮게 잠겨오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지금은 새벽 한 시네요.”
도화는 도명의 말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도화는 마른 침만 꿀꺽 삼키고 아무 말도 없었다.
얼핏 듣기에는 별 것 아닌 말처럼 들렸지만 조금만 곱씹어도 그의 말이 아주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도명에게 무언가 간파당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도명은 도화가 마른 침을 삼키는 그 희미한 소리를 들으며 입꼬리를 사악하게 올렸다.
“도화 씨.”
도명이 도화의 이름을 부르고 뜸을 들였다. 한동안 이름을 부르고 뜸을 들이는 이 행동을 안 하나 했더니 또 이 짓이었다.
“네.”
“자요.”
“아. 네.”
그럼 그렇지. 역시 별말 아니었다. 도화는 더 이상 도명의 이 사악한 수법에 안 말려들겠다고 다짐했다.
‘이런 수법 이제 너무 써먹어서 다 간파했다 이거야!’
도화가 급격히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도명에게 ‘도명 씨도 잘 자요.’라고 말하려는 순간 시간의 틈새를 뚫고 그가 한마디 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요.”
“네? 무, 무슨 쓸데없는 짓이요?”
도화는 괜히 목소리 끝에 힘을 잔뜩 주고 뻗대며 말했다. 도화 본인은 모른다. 그가 이렇게 목 끝에 힘을 줄 때마다 진실을 고백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을.
도화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은 굳이 복잡한 분석이 필요 없었다. 수화기 건너편에 도명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새벽 시간에 낮게 퍼지는 도명의 웃음소리가 얄미우면서도 나지막했다.
“예습하지 말고 바로 자요.”
“무슨 예습이요?”
“뭐겠어요? 내가 알려 줄 테니까 이상한 인터넷 글 보지 맙시다.”
도화는 자신도 모르게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순간 소름이 오도독 돌았다. 순간 집주인인 도명이 자신이 회사에 있는 시간을 틈타 집에 이상한 카메라를 설치한 것은 아닐까 싶었다. 아니면 뒤돌아보면 도명이 이 집의 어둠 속에 서 있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도화는 도명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알게 된 이후로 두 집을 잇는 그 작은 쪽문을 잠가두지 않았다.
도명 쪽에서는 전에 자물쇠를 달았으니 불안하면 도화 쪽에서도 달라고 했었는데 딱히 그러지는 않았다. 도명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의 집에 들어올 수 있다는 의미였다.
도화가 이빨을 딱딱거리며 뒤를 돌아봤지만 보이는 건 어둠밖에 없었다. 도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땀으로 얼룩진 뒷목을 쓸어 넘겼다. 그리고는 오른손을 들고 흔들면서 말했다.
“저 지금, 뭘 흔들고 있습니까?”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아……”
잠시 정적이 흐르고 도명은 도화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
“저 세입자 집에 불법 카메라 설치하는 사람 아닙니다. 그냥 도화 씨 행동 패턴이 너무 빤합니다. 사람이 뭐가 그렇게 알기 쉽습니까?”
도화는 자괴감에 머리를 감싸고 이마를 책상에 박았다.
“잡시다.”
“네.”
“착하네요.”
도화는 도명과 새벽 전화 통화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다가 3분 후에 이불을 걷어찼다.
***
목요일 저녁. 회사를 나서는 도화의 핸드폰으로 도명에게 문자가 왔다.
[도화 씨, 오늘 회사에서 저녁 늦게까지 일할 예정입니다. 저 없어도 저녁 잘 챙겨 먹어요.]
문자를 보는 도화의 표정이 묘했다. 처음에는 실망했으나 이렇게 매일 서로의 일정을 보고 할 사람이 생겼다는 게 기분이 묘했다.
도화에게 그동안 친구 진영이 있었지만 이렇게 평범한 일상을 일일이 보고 하지는 않았다. 전부터 진영과 평범한 일상을 나누었다고 해도 지금 도화가 겪고 있는 기분과는 또 다를 것이다.
도화는 작게 미소 지었다. 그와 일상을 공유하는 접점이 점점 넓어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네.]
도화는 처음에는 장문의 문자를 쓰다가 짧게 답했다. 아침에는 도명과 눈이 마주쳤는데 도망치듯이 대충 고개를 꾸벅하고는 달려 나왔었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눈동자가 자연스럽게 도명의 바지 사이로 흘러 들어갈 것 같았다. 하루 종일 음란하게 펠라 생각만 하는 꼴이라니!
도명이 도화에게 할 말이 있는지 다가오자 그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했다. 회사에 늦었다고 비명을 지르듯 말하고 달려 나왔는데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 보니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다.
도명이 도화의 회사 출근 시간을 알고 있는데 늦었다니. 평소 때처럼 같은 시간대에 나와 놓고. 황당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오랜 습관인지라 반사적으로 발길이 편의점으로 돌려졌으나 이번에는 마트로 향했다. 간단한 것부터 시도해 보라는 도명의 말이 생각났다.
손은 자연스럽게 라면 쪽으로 갔으나 신선 식품이 있는 쪽으로 갔다. 진공 포장된 국을 사고 양념 된 고기를 샀다. 처음엔 간단하게 살 생각이었는데 어느새 장바구니를 가득 채웠다.
집에 들어와서 냉장고를 열었다. 맥주와 음료만 있는 그의 냉장고는 편의점 음료 코너 같았다. 온갖 신선 식품들로 가득 채워진 도명의 냉장고와 달랐다. 냉장고 종류 자체도 달랐다.
도명의 냉장고는 양문 도어로 혼자 사는 남자치고는 크기가 컸다. 먹는 양도 많지 않으면서 어떻게 유통기간이 짧은 신선 식품들로 냉장고가 꽉 찰 수 있는지 불가사의했다.
반면에 도화의 냉장고는 가정용 냉장고치고는 조금 작았다. 돈이 없던 대학교 때 중고로 급하게 산 작은 냉장고는 지금도 잘 돌아가고 있었다.
도화가 장 본 것을 냉장고 안에 집어넣으니 냉장고가 꽉 찼다. 어떻게든 끼워 넣은 재료들로 냉장고 안이 숨 막혀 보였다.
도화가 장바구니를 가득 채워서 장을 봤다 해도 이 정도면 음식을 매일 해 먹기에는 냉장고가 너무 작은 건 아닌가 싶었다. 어쩌면 도화의 식생활이 이 냉장고 크기에 맞춰진 건 아닌가 싶었다.
갑자기 10년 이상을 잔 고장 없이 잘 버틴 냉장고가 원망스러워졌다. 중간에 고장이라도 났으면 욕심내서 좀 더 큰 냉장고라도 샀을 텐데. 그 후에는 큰 냉장고 안이 허전해 이런저런 음식을 채워 넣었을 것이다.
도화는 식탁 의자에 앉아 새로 살 냉장고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한 번에 소비하기에는 부담스러웠지만 5개월 할부로 끊으면 제법 근사한 냉장고를 욕심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이 이번 년 끝자락에 이사 가야 한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알아본다는 게 요즘 너무 많은 일들이 생겨서 잊고 지내고 있었다.
냉장고가 당장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이왕이면 이사 갈 때 새 냉장고를 설치하는 것이 이사 기분 내기 좋아 보여 당장 냉장고를 바꿀 의욕이 확 줄어들었다. 도화의 생각 흐름이 어느새 냉장고에서 이사문제로 바뀌었다.
‘나 진짜 이사 가나……? 앞으로 약 5개월 하고도 2주 남았네. 냉장고가 급한 게 아니라 빨리 전셋집 알아보러 다녀야 하는데. 모은 돈은 8천 정도 되고. 은행 대출 가능한 금액도 상담받아야 가능한 전셋집 수준도 가늠할 수 있겠네. 역시 8천 가지고는 이 집 같은 쾌적한 수준의 전셋집을 구하긴 힘들 거야. 집 크기도 그렇고 채광환경도 그렇고. 막무가내로 가출한 것치고는 정말 쾌적한 상태로 살았네. 전 집주인 할머니가 이 정도면 적선한 수준 아닌가. 보증금도 거의 안 받고. 그런데, 장례식에도 안 갔네. 나.’
도화는 새삼 밀려오는 미안함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냉장고 크기로부터 시작한 생각의 연쇄에 도화는 멍하니 의자에만 앉아 있다가 핸드폰을 들어 도명에게 문자를 썼다.
[도명 씨 저, 정말 이사 가요?]
이런 문자를 적으니 새삼 그와 자신 사이가 기본적으로 집주인과 세입자라는 사실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도화는 애써 적은 문자를 차마 보내지는 못하고 핸드폰을 뒤집었다.
도화는 자신이 도명에게 무언가를 조르는 어린애처럼 느껴졌다. 이미 도명이 이사를 가라고 못 박아 넣은 이야기이고 인테리어 공사 계획까지 다 짜놓은 모양인데 여러모로 도명을 곤란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이런 사이가 되기 전이잖아. 아니 그전에, 이런 사이란 게 뭐지?’
도화는 잠깐 든 이 생각을 회피하고 싶어졌다. 도화의 머릿속은 다시 이사문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나를 내보내는 이유가 본인이 여기서 살고 싶어서 그러는 거잖아. 그럼 지금 도명 씨가 살고 있는 반지하 집은? 난 반지하도 괜찮은데. 거기다가 도명 씨가 구조 변경해서 반지하치곤 거기 햇볕도 잘 들어오잖아. 구조 안 좋은 어설픈 지상 집보다는 훨씬 좋지. 집이 너무 예쁘고 관리 상태가 좋으니까 최소한의 양심으로 월세 60은 줘야겠지? 아니 그전에 반전세는 안 되나? 은행 대출 얹어서 전세로 계약하면 더 좋고. 혹시 모르니까 자연스럽게 물어볼까? 밑져야 본전 아닌가? 얼굴에 철판 깔고 일단 물어나 보자.’
도화는 이런 이야기는 문자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고 도명이 여유로울 때 물어보기로 했다.
참, 세상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지금 살고 있는 익숙한 집에 대한 미련뿐이었는데 지금은 도명과 떨어져서 살 게 싫어서 잔머리 굴리고 있는 모습이 간사하게 느껴졌다.
도화는 혼자서는 아무 결정도 못 내릴 일로 고민하는 것을 멈추고 주방에 섰다. 오래 쓴 주방치고는 깔끔했다. 자주 쓰지 않아서 어딘가 망가질 확률도 줄어든 것이다.
도화는 고기를 익히고 밥 위에 덮밥처럼 얹었다. 그리고 인스턴트 국의 건더기 빈약함을 장 봐 온 두부와 파를 썰어 넣음으로써 보완했다. 나름 최대한 있어 보이려고 덮밥 위에 깨도 뿌렸다.
소스가 보기 안 좋게 흘러넘친 건 키친타월로 하얀 접시 모서리를 닦아 정리했다. 그리고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봤던 것처럼 먹지도 않지만 괜히 푸릇푸릇한 파슬리를 접시 한구석에 나무처럼 심어 넣었다.
도화는 결과물을 향해 제법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는 식탁 위에서 각을 잡고 사진을 찍었다.
좋은 사진 솜씨는 아니었지만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는 도화의 기준에선 만족스러운 사진이 나오자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음식 사진을 도명에게 보냈다.
[나름 최선을 다해서 밥을 해먹고 있습니다.]
도화는 밥을 먹는 중간중간에 도명에게 문자가 오는지 핸드폰을 기웃거렸다. 하지만 도명에게서 답장은 없었다. 방금 한 음식이라 도명이 해 준 음식만큼은 아니었지만 먹을 만했다.
그가 평소에 먹는 식사 질에 비하면 확실히 괜찮은 수준이었다. 새삼 먹는 즐거움이라는 게 느껴지는 식사였다. 다만 초반에 신이 났던 것에 비해 도명이 아무 반응이 없자 김이 살짝 빠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역시나 언제나 정석대로 해 먹는 도명 입장에서는 별 것 아닌가 싶었다.
‘자랑이 너무 하찮았나.’
도화가 깨끗하게 비워진 접시를 치우고 설거지를 하는데 문자가 왔다. 도화는 끼고 있던 고무장갑이 손가락에 달라붙어 늘어져도 성급하게 당기며 고무장갑을 뺐다.
그의 손에는 약간의 물기가 묻어 있어서 핸드폰을 만지기에는 적절치는 않았지만 일단 핸드폰의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핸드폰 액정화면에 하얀 거품이 이는 물기가 어지럽게 맺혔다.
도화의 기대와는 달리 광고 문자였다. 도화는 실망감에 어깨가 축 처졌다.
‘음식을 데워서 먹어놓고 대체 무슨 반응을 기대하는 거냐. 누가 보면 혼자 코스 요리라도 한 줄 알겠네.’
도화가 자조 섞인 웃음을 지으며 핸드폰을 식탁 위에 내려놓는데 도명에게서 문자가 왔다.
[착하네요.]
달랑 네 마디 말에 도화의 입꼬리가 헤벌쭉 올라갔다.
“이놈의 교사 말투.”
도화가 입으로는 도명의 말투를 생각하며 불만을 터뜨렸지만 표정만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도화는 이제야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 오늘 하루를 마무리 지으려는데 문자가 하나 더 왔다.
도화가 보낸 고기덮밥 사진 한구석에 심겨 있는 파슬리 사진이 확대된 채 잘려서 왔다.
[이건 뭡니까? 대체?]
도명의 문자에 도화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식탁 의자에 쭈그려 앉아 자신이 보낸 사진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이상한 건가? 싶어 도화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도화는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 손가락만 타닥거리다가 문자를 보냈다.
[파슬리…….]
도명이 파슬리가 뭔지 몰라서 물어본 게 아니란 걸 알면서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일단 이렇게 적었다.
[식목일 특집입니까? 음식에다가 왜 나무를 심어요.]
‘하지만 레스토랑에서 자주 이러던걸! 내가 무슨 잘못을 그렇게 했어!’
도화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억울한 표정으로 도명의 문자를 곱씹고 있을 때 도명의 마지막 문자가 왔다.
[진짜 귀여워 죽겠네.]
‘파슬리가 귀엽다는 거겠지.’
도화는 괜히 빨개진 얼굴로 비틀비틀 식탁에서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