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에 떨어지면 왜 안 되나요?
도명은 아침부터 직원들로부터 온 원고를 읽느라 바빴다. 회사에 가서 본격적으로 회의하기 전에 내용 숙지라도 해야 했다.
직원들이 브리핑을 해 주겠지만 회의에서 혼자 허둥지둥하는 꼴을 보여 줄 순 없었다. 직원 대부분이 도명이 회사를 세울 때부터 함께했던 창립 멤버라 오래 호흡을 맞춰 와서 그런지 원고에는 커다란 문제는 없었다. 디테일한 부분에 대해서만 회의하면 될 것이다.
오전 11시경에는 도명이 길들여 놓은 식물을 클라이언트가 데려가기로 했다. 그래서 클라이언트가 오기 전에 그동안 적은 식물 일지도 마지막으로 정리해야 했다. 도명은 시원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이 화분 하나에 120만 원이라는 시장 가격을 인정받았다. 한국에서 도명의 화원 말고는 구할 수도 없었다. 해외에서는 뭐 어떻게든 구할 수 있지만 도명의 화원 아이들이 특별한 이유는 그가 이곳에서도 별 탈 없이 자랄 수 있도록 길들여 놨다는 데 있었다.
이 아이가 얼마나 특별한지에 대해서 소비자가 체감할 수 있도록 도명의 가게에서는 아이가 겪었던 모든 일들에 대해서 정리를 해 놨다. 도명의 회사 디자이너만큼은 아니더라도 간단한 그래픽 툴을 다룰 줄 아는 그가 직접 가치를 느낄 수 있도록 소책자까지 만들었다.
아이에 대한 역사, 학술적인 기본 정보와 앞으로의 동거 방향성에 대해서 정리한 소책자였다.
거의 입양 절차 수준의 대화를 한 후 그는 그가 적어도 3년을 길들였던 식물을 다른 집으로 보내게 되는 것이다. 도명이 이래저래 정신없는 아침을 보내고 있을 때 도화가 도명의 가게 앞을 지나갔다. 도명은 도화를 보더니 괜히 멀쩡한 눈을 비벼댔다.
‘설마 저러고 오늘 소개팅에 나올 거 아니지? 내가 지금 정신이 없어서 헛것을 보는 게 분명해.’
***
도화는 회사 일을 끝내자마자 심호흡을 길게 하며 책상 위에 손을 가지런히 얹어 놓았다. 오늘 하루 종일 일에 집중 못 해서 애를 제법 먹었다. 오늘은 자신도 모르게 실수를 할까 봐 마지막 저장 버튼을 누르기 전에 재검수까지 두 번이나 했다.
도화가 시계를 보니 그의 칼퇴근 시간이 15분 빗나가 있었다. 도화는 핸드폰을 보며 아까 12시경에 온 도명의 문자를 괜히 손끝으로 매만졌다.
[회사에서 나오는 시간이 언제입니까? 회사 주소는 어떻게 되고요?]
[왜요?]
[왜긴요. 도화 씨 소개팅 때문에 그렇죠. 오늘 소개팅인 건 알고 있죠?]
[저, 약속을 잊어버리는 사람은 아닙니다.]
[세상에. 오늘 소개팅인 걸 알고 있다고요? 퇴근 시간. 회사 주소. 대 봐요.]
도화는 도명이 이러는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일단 12시경에 도명이 원하는 정보를 적어 줬다. 대체 왜 그러냐고 물어보려다가 문자를 받았을 당시에는 그가 일하는 중임을 깨달았다. 도화는 도명의 반응이 신경 쓰였지만 애써 모른 척하기로 했다.
도화는 회사 밖을 나오는 순간 참았던 질문을 쏟아내리라고 생각했다. 도화가 시간을 보니 2시 15분 정도 되었다. 아까 도명에게는 2시에 끝난다고 답했는데 그렇게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오늘은 토요일이니 맡은 일만 다 처리하면 눈치 안 보고 날 밝을 때 퇴근할 수 있었다. 도화가 서류 가방을 챙기고 있을 때 윤정이 호들갑을 떨며 사무실에 들어왔다.
“정은 씨도 화장실 가면서 혹시 봤어? 사무실 앞에 엄청 잘생기고 스타일 좋은 남자 서 있는 거? 보는 순간 너무 잘생겨서 숨이 막히더라.”
“네 봤어요! 저 그렇게 잘생긴 남자 TV 외에 현실로 처음 본다니까요.”
“우리 고객이었으면 좋겠다! 옷도 보니까 비싸 보이는 거 입고 있던데. 세금 엄청 내게 생겼던데?”
“아, 나도 봤어. 완전 기생오라비처럼 생겼던데? 남자는 좀 투박하게 생겨야 남자다운 거지. 안 그래? 이 대리?”
여자들 대화에 눈치 없이 남자 중년 팀장이 끼어들었다.
“저는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도화가 형식적인 말투로 말하며 빠뜨리고 가는 건 없는지 확인했다. 두 여직원이 여전히 회사 밖의 남자에 대해서 호들갑을 떨고 있을 때 도화가 무뚝뚝한 얼굴로 책상을 두들기며 말했다.
“윤정 씨, 확인해 달라는 거 메일로 체크해서 보내놨습니다.”
“아. 벌써요? 내일까지 해도 되는데요.”
“간단한 일인데 일을 왜 미룹니까.”
“아, 네. 그, 그렇죠. 그나저나 지금 퇴근하세요?”
“네.”
“아, 회사 앞에 남자분 한번 떠보세요. 세무 관리 안 필요하냐고. 이 대리님, 은근히 고객 많잖아요.”
사장이 회사에서 혼자 겉돎에도 불구하고 도화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다. 딱히 도화가 살가운 편은 아닌데 도화를 찾는 고객이 은근히 많은 것이다. 친분 쌓겠다고 쓸데없는 소리 안 하고 일만 정확하게 해서 결과만 보고하는 도화를 다른 의미로 편해하는 사람이 많았다.
“실없는 소리 하지 맙시다.”
도화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가방을 챙기고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마침 두 여직원도 퇴근 준비를 다 마쳤는지 도화와 함께 나섰다.
“이 대리님은 토요일인데 약속 없으세요?”
윤정이 도화에게 질문했다.
“없습니다.”
지나치게 딱 떨어지는 도화의 말에 정은이 빤한 대답 들을 거 왜 쓸데없는 질문 했냐는 듯이 윤정을 팔꿈치로 가볍게 쳤다.
도화가 회사 밖을 나가자마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도명이었다. 도화는 이제야 잠시 회사를 소란스럽게 만든 장본인이 도명임을 깨달았다.
“아, 도명 씨가 여긴 무슨 일로 온 겁니까?”
도명이 도화를 발견하자마자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낮게 한숨을 쉬며 다가왔다. 아침에 잠깐 본 도화의 모습이 헛것이 아니었다.
“저, 도화 씨, 집에 들어가면 갈아입을 옷 있죠? 그렇다고 합시다.”
도명이 도화의 지나치게 화려한 셔츠를 노려보며 말했다. 보라색과 노란색이 번갈아 가며 쐐기 모양으로 가득 차 있는 셔츠였다. 거기다가 나름 비싼 실크 셔츠라고 번들거리기까지 했다. 도화의 셔츠를 보는 도명의 정신이 혼미해졌다.
“아. 그래야 합니까?”
도화가 왜 그래야 하는지 진심으로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게 정말 최선입니까?”
“……네.”
“설마 했는데.”
도명과 도화가 대화를 하고 있자 호기심으로 가득 찬 두 여자가 일부러 걸음을 천천히 걷고 있었다. 조금만 더 걸으면 엘리베이터 앞인데 내딛는 걸음 하나하나가 아쉬웠다.
엘리베이터 층수가 그들이 있는 26층을 향해 거의 다 올라왔다. 도화는 이 와중에 엘리베이터를 놓칠까 봐 조바심이 났다.
“저 도명 씨.”
“네 일단 탑시다.”
윤정과 정은, 도명과 도화 네 사람이 같은 엘리베이터 안에 있었다. 중간에 타는 사람이 많아서 1층까지는 꽤 걸릴 것 같았다.
“도명 씨 대체 회사 앞까지 왜 온 겁니까?”
“안 오게 생겼습니까? 이게 지금 오늘 소개팅하고자 하는 사람의 옷입니까?”
도명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윤정과 정은의 고개가 도화를 향해 획 돌아갔다. 도화는 그들이 자신의 소개팅 소식을 알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가 아무리 중간에 사람이 많이 내렸다 탔다고 해도 유난히 천천히 내려가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기분 탓일 것이다.
“저, 최선을 다한 건데요?”
“최선을 다한 게 문제인 것 같습니다. 평소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 조폭 같은 셔츠는 뭐고, 이 화려한 무늬의 셔츠 위에 새빨간 타이는 뭐하자는 짓입니까? 말해 봐요. 이런 셔츠는 대체 어디서 살 수 있는 겁니까? 전체적으로 옷이 맹독을 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색 조합은 자연계에서만 볼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인간계에서 인간이 걸치고 있을 줄 누가 예측하겠습니까.”
기가 막혀 하는 도명의 입술에서 말이 줄줄 새어 나왔다.
“아, 이거 백화점에서 큰마음 먹고…….”
“무려 백화점 물건입니까?”
도명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도화가 아주 기가 막힌 솜씨로 백화점에서 제일 구린 것을 짚은 것이 틀림없었다.
도명은 도화의 목덜미를 향해 손을 뻗은 후 셔츠 뒷덜미를 뒤집어 깠다. 다행히도 아직 태그가 달려 있었다. 이 요상한 셔츠가 양심도 없이 15만 원이나 했다.
도명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환불할 수 있다! 이 거지같은 셔츠를 환불할 수 있다! 사자마자 태그도 제거 안 하는 도화의 무심한 성격이 이렇게 도움이 되다니. 태그를 제거해도 브랜드에 따라 환불해 주는 곳도 있지만 안 해 주는 곳이 많으니 확실한 것이 좋은 것이다.
도명은 그래도 도화가 소개팅이라고 새 옷을 쇼핑을 한 것 자체에 대해서 기특해해야 하나 싶었다. 아니,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결과적으로는 차라리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나았을 것이다.
“도명 씨의 그 잘난 셔츠는 어디서 샀는데요?”
도화가 울컥하며 물었다.
“일 때문에 태국 출장 갔다가 현지 시장에서 충동 구매했습니다. 소매 쪽 자수 디테일이 특이하고 좋아서요. 핏은 저한테 딱 안 맞아서 집에서 고치고요.”
도명과 도화를 번갈아 보니 시장 물건과 백화점 물건의 느낌 차이가 서로 교류하는 현장을 보는 것 같았다. 두 여자는 웃음을 참으려고 부단히도 애썼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하루 종일 도화의 옷이 매우 신경 쓰였는데 모든 사연을 듣고 나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웃음을 참느라 얼굴만 발갛게 달아오르고 웃음소리는 겨우 새어 나오지 않았다. 얼음 장벽 이 대리의 카리스마는 오늘부로 무너졌다.
“어쩐지…… 해외 물건은 해외 물건이네요.”
도화가 웅얼거리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도화는 ‘근데 왜 이태리에서 온 셔츠 같지……?’라는 말은 자존심상 내뱉을 수가 없었다. 굴욕감이 도화의 온몸을 지배했다.
두 남자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옥신각신하고 있을 때 엘리베이터가 지상 1층에 도착했다. 도화가 내리려고 하자 도명이 그의 손목을 잡았다.
“지하 1층에 차 주차해놨어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시 세팅하고 갑시다.”
“꼭 그래야 합니까?”
“주선자 체면 좀 세워줍시다.”
“내가 창피해요?”
“네. 도화 씨가 두 번 물어봐도 대답은 같습니다.”
도명과 도화의 실랑이 때문에 두 여직원이 내리지도 못하고 서성거리고 있었다. 사실 딱히 내리고 싶지 않았다. 지하 1층에는 볼일이 없지만 볼일을 만들어서라도 이 장면을 계속 구경하고 싶은 것이다.
“아, 저희가 두 분까지 못 나가게 막고 있었네요. 민폐 끼쳐서 죄송합니다.”
잘생긴 남자가 부드럽게 미소 짓자 두 여자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아니에요. 저, 이 대리님 소개팅 잘하고 오세요.”
“파, 파이팅이에요.”
두 여직원은 그제야 내릴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지하 1층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윤정과 정은은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지하 주차장 안, 도화는 도명에게 거슬린 점을 늘어놓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었다. 도화는 내뱉고 싶어서 안달이 난 불만도 혹시라도 누가 들을까 봐 도명의 차 안에 들어오고 나서야 내뱉기 시작했다.
“저기 제가 오늘 남자랑 소개팅하는데 회사 직원들 앞에서 소개팅한다고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제가 남자랑 한다고 했습니까? 당연히 여자 소개시켜 주는 걸로 생각하죠. 그렇게 겁이 많아서 사람들과 대화를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사적인 대화 안 합니다.”
“전혀요?”
“네…….”
도명은 도화의 말에 살짝 놀랐다. 조심성이 지나치게 많다고는 생각했는데 이 정도일지는 몰랐다. 고립시키기 너무 좋은 상대이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면 도명 이상으로 집착이 심할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지배적 성향이 강한 사디스트 앞에서 이렇게 무방비한 표정으로 하다니. 차라리 회사에 달려가서 나 남자가 좋다고 외치는 것이 덜 위험할 것이다. 도명은 괜히 핸들만 만지작거렸다.
“도명 씨, 그래서 우리 앞으로 어떻게?”
“어떻게 하긴요. 아까 말한 것처럼 싹 다 고쳐 입읍시다. 일단 그 셔츠 좀 벗어요. 태그가 남아 있으니 최대한 새것 같은 상태 유지해서 걸쳐만 봤다고 우겨라도 봅시다.”
도명이 도화에게 훅 다가왔다. 그리고는 그의 목덜미에 코를 대고 도화의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저기, 도명 씨?”
“다행히 땀을 흘리거나 그러진 않은 것 같네요.”
“네. 그렇게 땀을 흘리는 편은 아니라서. 샤워도 자주 하고 해서 몸 냄새도 잘 안 나는 편입니다.”
“네 깔끔한 편이네요.”
도명이 뒷좌석에서 옷걸이 하나를 가져왔다. 그리고는 도화를 향해 무심한 말투로 말했다.
“셔츠 벗어요. 주름 완전히 생기기 전에.”
“여, 여기서요?”
도화가 목 끝까지 빨개진 채 말했다. 자신이 게이란 걸 정확히 자각한 고등학생 때 이후부터 대중목욕탕도 안 가는 도화였다. 자각하기 전에는 운동부 탈의실에서 아무렇지 않게 바지까지 훌렁 벗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게 무서워서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우리가 무슨 사이입니까? 누가 보면 제가 바지 벗으라고 하는 줄 알겠습니다.”
“이거 벗으면 계속 러닝셔츠 차림으로 다니라는 겁니까? 아니 그전에 이거 꼭 환불해야 합니까?”
“지금 맹독 품은 사람 같다니까요. 뒷좌석에 제 카디건 있으니까 빌려줄 테니까 어서요.”
“…….”
도화가 아랫입술만 꽉 깨물고 있자 도명이 답답하다는 듯이 카디건을 건네주고는 차에서 내려 뒤돌아섰다.
“됐습니까?”
도화는 우물쭈물하다가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기 시작했다. 도화는 일단 진짜 이거 환불할 정도인가 싶었지만 단호한 도명의 태도에 일단 시키는 대로 하고 있었다. 도화는 셔츠 단추를 다 풀자마자 빠르게 도명의 카디건을 걸치기 시작했다. 갑자기 도명이 뒤돌아설 것 같아 불안했다.
“저, 다 입었습니다.”
도명이 다시 운전석에 앉았다. 그리고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가슴에 무슨 비밀이라도 있습니까? 젖꼭지가 네 개는 된다든지.”
“그럴 리가요.”
도화는 계속 자기 몸에서 도명의 냄새가 나서 기분이 이상해졌다. 고작 카디건 주제에 맨살에 닿는 감촉이 왜 이렇게 부드러운지 알 수 없었다.
‘아, 보슬보슬하고 따뜻하다.’
도명은 도화의 기분 좋은 표정에 피식 웃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온 세상을 강탈당한 표정이었는데 말이다.
“일정이 갑자기 바빠졌습니다. 서두릅시다.”
“정말 옷 다 새로 사는 겁니까?”
“네. 통장에 돈은 많습니까? 월급 들어오고 바람처럼 다 사라진 건 아니죠?”
“반 정도는 있습니다.”
“말일인데요? 다행이네요. 제가 어떻게 성사시킨 소개팅인데, 명품매장 정도는 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도화는 도명의 말에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지갑 속 신용카드를 꽉 쥐었다.
‘이 사람, 대체 일반 직장인 월급이 어느 정도인 줄 알고 월급 반이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일단 회사 대표니까 월급 반이면 본인은 명품으로 채울 수 있는 건가? 한 달에 얼마를 버는 거야?’
도화는 너무 겁을 먹은 나머지 옷을 사러 가는 길 내내 말이 없었다. 머릿속에서 온갖 상황을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도명에게 차를 돌리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30년 만에 온 소개팅인데 그 정도는 해야 하나, 두 갈래 사이에서 생각이 많았다.
그러다가 도화는 도명이 도착한 곳을 보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 명품매장 가는 거 아니었습니까?”
“도화 씨 억대 연봉자였습니까? 남은 월급 반으로 명품매장에서 옷 사고? 그것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명품으로 채울 정도로요?”
“할부로, 카드 할부로 일 년 내내 갚으면 어떻게든 되지는 않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소개팅 하나 때문에 일 년 내내 거지로 살 작정입니까?”
도명이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그제야 도화는 도명에게 놀림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오는 내내 얼마나 많은 고민과 번뇌, 그리고 공포가 있었는데 놀린 거였다니. 도명과 도화가 온 곳은 작은 편집샵들로 가득 찬 거리였다.
“모두가 아는 유명 디자이너들은 아니지만 꽤 실력 좋은 젊은 디자이너들이 직접 디자인하는 옷을 살 수 있는 곳입니다. 가격도 디자이너 브랜드인 것치고는 일반 사람들도 살 만한 가격대입니다. 30만 원 내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해결해봅시다.”
도명은 일단 도화의 취향을 알기 위해 도화가 하는 대로 놔둬 보기로 했다. 도화가 어떤 옷 앞에서 눈을 반짝이며 옷을 들어 올렸다. 그 옷을 쳐다보는 도명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도명이 싸한 표정으로 턱을 손가락으로 두들기며 말했다.
“도화 씨, 용이나 호랑이 좋아합니까?”
도화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화가 들고 있는 티셔츠에는 화려한 용이 그려져 있었다. 도명의 표정이 빠르게 식었다.
아까부터 도화가 고르는 것마다 저런 식이었다. 아주 조폭처럼 보이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 같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괜찮았을 텐데 덩치 좋은 도화가 입으면 백 퍼센트 조폭 옷처럼 보일 것이다.
이 와중에 도명의 회사에서 자잘한 보고로 전화는 오고 아주 난장판이었다. 원래 지금쯤이면 회사에 남아서 회사 일을 찬찬히 볼 생각이었다. 도명의 후배 서윤하고도 사진 편집 가지고 이야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중간에 도화의 회사에 오는 바람에 이런 부산스러운 상태에서 보고를 받고 있었다. 서윤한테는 6시 반에 회사 말고 가게에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원래 오늘은 그렇게 힘든 일정이 아니었는데 묘하게 내내 정신없었다.
도명의 인내심이 점점 거미줄처럼 얇아지고 있었다. 거기다가 시간은 빨리 가고 있었다. 그래도 도화의 취향을 최대한 반영하려고 했는데 이건 시간을 아무리 줘도 답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도화 씨, 오늘 취향 버립시다. 진짜 못 참겠네.”
“저, 잠깐만요. 제 돈이고 제가 입을 옷인데요?”
예상은 했지만 도화가 반항을 해 왔다. 도명은 옷 가게 직원이 봉으로 높은 곳에 있는 옷을 정리하는데 그걸 빼앗아다가 도화의 엉덩이를 때리고 싶었지만 심호흡을 하며 참았다. 도명의 손가락 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도화 씨 이리로 와 봐요. 자, 착하죠? 들고 있는 그 옷은 내려놓고요. 어서.”
도화는 경계심이 어린 표정으로 우물쭈물하며 도명의 앞에 섰다. 그러자 도명이 도화의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직원은 물건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도화의 주머니 속을 점령한 도명의 손이 힘주어 도화의 페니스를 잡았다. 도화가 너무 놀라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도명 씨, 지금 뭐하자는?”
도명이 도화의 페니스가 얼얼해질 정도로 세게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사늘한 말투로 말했다.
“앞으로 5시간 동안 앞으로 제 말에 네, 라고만 답해요. 안 그러면.”
“안 그러면요?”
도화가 떨리는 목소리로 마른 침을 삼키며 겨우 말했다. 도명이 살벌한 표정으로 도화에게 귓속말을 하기 시작했다.
“다들 식사하고 있을 동안, 테이블 밑에서 두 손 묶인 채 입으로만 식사하게 할 테니까. 아, 소개는 해 줄게요. 내가 키우는 백구라고.”
“백구요?!”
도화는 도명의 협박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그렇게까지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도화는 자신도 모르게 얼빠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이 볼일을 보고 시선을 도명과 도화 쪽으로 돌렸을 때는 도명이 친절한 표정으로 도화의 어깨를 툭툭 털어 주고 있었다.
결국 도화는 도명이 골라 준 옷을 입고 그의 차에 탔다. 도화가 도명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이렇게 평범한 옷을 입어도 될까요?”
도화는 짜임이 조금 독특한 흰색 니트에 면 소재의 검은 색 슬랙스를 입고 베이지색 블레이저를 걸치고 있었다. 블레이저는 과장된 부분이 하나도 없어서 오히려 도화의 좋은 체격을 덤덤하게 받쳐 주었다. 그리고 정장 구두가 아닌 스니커즈를 걸치고 있었다.
평소 도명의 스타일과는 달랐다. 도명이 평소 최대한 정석에 맞춰서 클래식하게 입고 다닌다면 도화에게 입혀 준 건 편하면서 따뜻해 보이는 인상에 중점을 맞췄다.
“왜요? 아주 온몸에 야광 물질 발라서 나만 바라보게 해야 직성이 풀립니까? 반딧불이 만들어 드려요?”
“저 정말 괜찮아요?”
“네.”
“제가 말을 잘 못 하니까…….”
“이제, 미용실만 가면 됩니다.”
도명이 도화의 말을 끊었다. 이 소모적이고 쓸데없는 대화를 어서 끊고 싶었다. 그렇다고 도명이 도화에게 그가 얼마나 보기 좋은 사람인지 나열하며 낯간지러운 소리를 할 수도 없었다. 유혹할 상대도 아닌데 그런 대화는 역시 이상했다.
“머리도요?”
“잘 참다가 갑자기 질문 많습니다. 도화 씨 말고 백구라고 소개해 주는 거 원하는 것 같은데요?”
도명의 말에 도화는 입을 꽉 다물었다.
“아참.”
도명이 도화를 향해 가방 참 하나를 건네줬다. 가죽으로 만든 용 모양 가방 참이었다. 크기는 손바닥만 했다.
“오다 줍진 않았고, 제 카드로 긁었습니다.”
“아, 얼마인데요?”
“제 카드로 긁었다는 말 못 알아듣습니까?”
“아.”
도화가 헤실헤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가죽용을 만지작거렸다.
“도대체 용이 왜 좋은지.”
도명이 운전대를 잡으며 낮게 투덜거렸다. 하지만 도화가 기분 좋아하니 됐다고 생각했다.
도명의 차가 점점 상업 지구에서 벗어나더니 주택가로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다.
“이런 데에 정말 미용실이 있어요?”
“네.”
도명은 도화의 말에 짧게 답했다. 도명의 차 안에서는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차 안에는 적당한 긴장감과 적당한 편안함이 오묘하게 공존하고 있었다.
도명은 2층에 커다란 테라스가 있는 건물 주차장에 차를 주차했다. 도화는 이제야 겨우 작은 크기의 미용실 간판을 발견했다. 빨간색 문을 열자 2층으로 연결되는 원목으로 된 계단이 나왔다. 두 사람은 계단을 올라갔다.
“여기 왠지 비쌀 것 같은데요.”
도화가 도명의 소맷자락을 살짝 움켜쥐며 말했다.
“1년 할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도배하려던 분 배포는 어디 갔어요?”
“그만 놀려요. 저 지금까지 28만 5000원 썼어요. 뭐 넘어도 상관은 없지만. 어쨌든 도명 씨가 목표가 30만 원이라고 해서 일단 말씀드리는 거예요.”
“넘은 만큼 다음 달 월세에서 빼 줄게요.”
“아니, 그렇게 해달라는 뜻은 아니고요. 그러지 마세요. 정말요.”
도화가 도명의 말에 당황하고 있을 때 계단의 끝에 다다랐다. 도명이 싱긋 웃으며 가게 문을 열어 주었다.
“아니 뭘 이렇게까지…….”
도화는 뭘 이렇게까지 매너를 지키나 싶어 얼떨떨한 표정으로 가게에 들어섰다. 도화는 대체 도명의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다. 아까는 다들 식사하고 있을 동안, 테이블 밑에서 두 손 묶인 채 입으로만 식사하게 만들겠다고 협박하더니 이제는 귀한 사람 취급이었다.
공간에 들어서자 미용실 내부의 모습이 한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미용실 규모는 꽤 커 보였고 적당히 사람이 차 있었다. 햇빛이 부드럽게 비치는 하얀 색 벽에 원목으로 된 가구나 라탄으로 만들어진 안락의자들이 보였다. 전체적으로 편안하면서 목가적인 분위기였다.
언뜻 보기에는 분위기 좋은 카페나 브런치 메뉴를 파는 곳처럼 보였다. 거울과 거울 간격도 넉넉했고 벽 중간중간에는 부드러운 색상의 그림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미용실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도명을 반가운 표정으로 반겼다.
“도명이 네 얼굴을 이렇게 빨리 볼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머리한 지 얼마 안 됐잖아.”
세영이 자연스럽게 도명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누나 얼굴 보고 싶어서 머리할 일 만들어서 왔죠.”
도명이 살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빈말인 건 알지만 기분은 좋다.”
“빈말이긴요.”
“그만해. 이 게이야.”
세영이 주먹으로 도명의 아랫배를 살짝 치며 말했다. 도화는 이 둘의 대화에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녹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처음엔 도명이 이 여자분을 유혹하는 것 같은 대사에 당황했고 지금은 이 사람이 그가 동성애자임을 알고 있다는 데에 있었다. 이쯤 되면 이 사람의 커밍아웃은 취미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이분은 누구야?”
“이웃사촌이요. 오늘은 제가 머리할 건 아니고 제 이웃사촌 좀 부탁드릴게요.”
도명이 도화의 앞머리를 붙잡고 들어 올리며 말했다. 도화는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이마가 훤히 드러날 때마다 불편했다. 마치 이마에 마음의 역린이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이름이 어떻게 돼요?”
“이도화라고 합니다.”
“도화 씨, 여기로 와요.”
도화는 세영이 안내한 의자에 앉았다. 그의 앞에 나무를 조각해서 만든 테두리가 있는 커다란 거울이 있었다. 도명은 이 장소가 편한 장소인지 직접 커피 머신에서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도화 씨 음료 뭐 먹을래요?”
도명이 도화를 향해 물었다.
“아, 저도 도명 씨랑 같은 거 먹겠습니다.”
도명이 도화가 앉은 경대 앞 선반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내려놓았다. 코끝에 고소한 커피 향이 퍼졌다. 도화는 어색한 표정으로 도명이 내려 준 커피를 두 손으로 감싸 쥐며 호록 마셨다. 세영이 도화의 머리카락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만지작거렸다.
“도화 씨, 머리 어떻게 해드려요?”
“아, 그건 저하고 이야기해요.”
도명이 세영과 도화 사이를 끼어들며 말했다.
“에? 도화 씨 머리인데?”
“도화 씨 괜찮죠?”
“아, 그.”
“도화 씨, 아직 5시간 안 지났는데요?”
도명이 손목시계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도화는 도명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내 그가 그의 말에 무조건 ‘네’라고 대답해야 하는 시간이 아직 안 지났음을 깨달았다. 세영이 기묘한 두 사람의 분위기를 읽고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도화 씨, 정말 괜찮아요?”
“네.”
도화는 괜히 세영이 두 사람과의 관계 사이에 끼어 있느라 난감할까 봐 애써 힘주어 말했다. 도화는 자신이 말끝을 흐리면 세영이 계속 신경 쓸 것 같았다. 도화가 세영을 향해 괜찮다는 듯이 웃었다. 세영은 그런 도화를 보면서 이 사람 참 착하고 순한 사람이구나 싶었다.
도명과 세영이 포트폴리오 사진들을 이리저리 훑어보며 이런저런 대화를 했다. 두 사람 다 너무 세련되어 보였다. 어떻게 하면 자기가 돋보이는지 아주 잘 아는 사람들 같았다.
도화의 어깨가 괜히 좁혀 들어갔다. 도화는 그래도 두 사람이 자기 머리에 어떤 작전을 펼치고 있는지 알고 싶어 청각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하지만 점점 도화의 세상에서는 알 수 없는 단어들이 왔다 갔다 했다. 점점 도화의 집중력은 떨어지고 졸음이 오기 시작했다.
도화의 눈꺼풀이 3분의 1쯤 감겼을 때 도화의 머리카락을 가다듬는 손길에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도화는 머리카락이 사각거리며 잘리는 소리가 처음에는 신경이 쓰이더니 다시 잠이 오기 시작했다.
점점 뒷머리가 짧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목 뒤가 가벼워지고 시원해지는 기분에 오히려 기분이 좋아졌다. 도명은 옆에서 패드로 요즘 핫한 전시회 소식을 검색하고 있었다. 그러다 중간중간 도화가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도명이 도화를 보더니 턱짐을 지며 살짝 미소 지었다.
눈치 빠른 세영이 그런 도화를 흘깃 보더니 넌지시 물었다.
“도명아 도화 씨가 그냥 이웃사촌 맞아?”
“이웃사촌이 아니면요?”
“적어도 연인 후보라든지?”
“저 연인 안 만드는 거 알면서 그런 소리 하네요.”
도명의 말에 세영은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저, 오늘 도명 씨가 사람 소개시켜 주는 날입니다. 그런 사이 아니에요.”
도화가 손을 내저으며 얼굴이 열이 몰린 채로 말했다.
“도화 씨, 제가 벼르는 게 하나 있는데요, 도명 씨 연인 생기는 거예요.”
“그럴 일은 없어요.”
도명이 세영의 눈을 직시하며 말했다.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하니까 내가 손해 보는 공략 걸어야겠다. 앞으로 생길 도명 씨 연인은 제가 계속 공짜로 머리 잘라 줄게요.”
“잠깐만, 정작 나한테는 꼬박꼬박 돈 받고요?”
“그럼. 도명이, 너는 잘생긴 것 말고 예뻐할 구석이 없잖아.”
“예뻐할 구석이 왜 없어요?”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사람 좋은 척하는 그 웃음에 속을 줄을 줄 알아? 너 성격 나빠!”
도화는 두 사람이 말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 정말 친한 사이구나 싶었다. 그러던 중 세영의 가위가 도화의 앞머리에 향했다. 도화는 순간 당황에서 앞머리를 손으로 덮었다.
“왜요?”
세영이 놀라며 가위를 거두었다. 너무 도화의 손이 훅 들어와 그의 손에 상처를 입힐 뻔했다.
“아, 앞머리 자르는 거예요?”
“네.”
세영이 자를 길이만큼 손으로 표시해 줬다. 도화의 앞머리를 아예 안 남겨 둘 심상이었다. 도화가 떨리는 눈으로 도명을 쳐다보았다. 도명이 시계를 가리켰다. 내가 하라는 대로 하라는 말이었다. 도화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도화 씨 싫어요?”
세영의 질문에 도화가 도명과 세영을 빠르게 번갈아 보았다. 의자에 앉은 도화를 내려다보는 도명의 표정이 싸늘하고 단호해 보였다. 도화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손가락을 얽어댔다.
결국 세영이 도명의 등짝을 후려쳤다. 정말 짝 소리가 제대로 났다. 도화는 도명이 맞는 모습이 너무 신기했다. 사디스트가 맞고 있다니!
“와, 방금 성격 엄청 못된 사람 같아. 도화 씨가 싫다고 하잖아.”
하지만 도명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도명이 답답하다는 듯이 도화의 앞머리를 올렸다.
“도화 씨, 봐요. 보기 좋아요? 안 좋아요?”
“그냥, 그런데요.”
“보기 좋은데요. 도화 씨 제가 보기 좋아요.”
도명이 도화의 이마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도화는 이마에 닿는 도명의 손가락 느낌이 너무 좋았다.
“도화 씨, 앞머리 잘라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도화는 자신도 모르게 도명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도명이 네 얼굴로 강요하지 말고. 걸핏하면 얼굴로 해결하려 든단 말이야.”
세영이 도명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도화 씨, 어떻게 잘라 드릴까요?”
“그냥, 도명 씨 말대로 해 주세요. 그냥. 머리카락인걸요. 그냥 순간 당황해서요. 이랬다저랬다 해서 미안합니다.”
세영이 도명과 도화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두 사람 관계가 묘했다. 도명의 태도는 폭력적이었다. 도화는 그런 도명의 태도를 자연스럽게 받아 주고 있었다. 당장 말려야 하는 관계 같았지만 말 그대로 묘했다.
세영이 도화의 앞머리를 싹둑 자르기 시작했다. 도화는 눈썹 바로 위까지 덮고 있던 앞머리가 사라지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도화는 자신의 이마선을 이렇게 선명히 보는 것은 거의 10년 만이었다.
세영의 가게에는 브로우 바나 메이크업도 겸하고 있어서 도화의 눈썹도 정리했다. 그러자 도화의 인상이 한결 시원해 보이고 따뜻해 보였다. 도화의 얼굴에 걸쳐 있던 서늘하고 적막한 느낌이 머리 하나 바꿨다고 지워져 보였다. 도화는 여전히 짧아진 머리가 어색한지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도화 씨는 두상이 예쁩니다. 그걸 왜 덥수룩하게 덮고 다니는지 내내 거슬렸습니다.”
“아. 네.”
도화가 세영을 향해 카드를 내밀었다. 그러자 세영이 웃으면서 말했다.
“저기 우리 가게 VIP 포인트로 해결했으니까 여기 사탕이나 집어 먹고 가요.”
도명이 사탕을 오물거리며 자신의 차에 타는 도화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그런 도명의 시선에 도화가 괜히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대체 왜 그렇게 쳐다보는 겁니까? 본인이 밀어 놓고 이상합니까?”
“기분이 이상합니다.”
“네?”
“지금 제가 도화 씨 쳐다보는데 예식장에 딸 손 놓아 주는 아버지 심경이 뭔지 알 것 같다고 하면 알아듣겠습니까?”
“네?!”
“면사포 살 걸.”
도명은 계속 도화가 못 알아듣는 농담을 하더니 운전석에 앉았다. 도화는 도명이 차에 타자 그도 조수석에 앉았다. 도화는 사이드미러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고등학교 시절에 아무렇게나 밀어댔던 짧은 머리와 달랐다.
컷도 세련됐고 짧게 남긴 앞머리는 귀여웠다.
눈만 조금만 가늘게 떠도 사나운 인상으로 변하는 도화인데 눈을 게슴츠레하게 떠도 사람이 순해 보였다. 앞머리를 짧게 자르면 거울을 볼 때마다 분명 고등학교 시절과 군대에 갔던 20대 초가 생각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들이 생각이 안 나는 건 아닌데 기분이 달랐다.
단순히 같은 짧은 머리라도 세련된 스타일이라는 게 이유는 아닐 것이다. 기분이 좋다거나 나쁘다는 양극단의 감정도 아니었다. 그냥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참 별거 아닌 기분이다.
“이제야 도화 씨 나이처럼 보이네요.”
“그동안은 제 나이보다 많아 보였어요?”
“음, 그렇기도 하고 안 맞는 껍질을 두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도명 씨도 그래요. 전에 그 갈색 머리 말이에요. 저와는 달리 도명 씨는 뭐든 어울리긴 하지만.”
도화가 도명의 검은 머리를 보며 말했다.
“그렇습니까? 저는 역시, 검은색입니까?”
도명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도화는 순간 역시 실례인가 싶었지만 도명의 기분 좋은 표정을 보니 괜한 생각을 했다고 생각했다.
도명의 차가 어느새 익숙한 풍경이 보이는 곳에 도입했다. 그들이 살고 있는 동네였다.
“이제부터, 전쟁입니다. 들어가서 빨리 밥해야 합니다. 도화 씨 때문에 여유가 없어졌으니 도화 씨도 같이 준비해야 합니다.”
“네. 요리 같은 거 잘 못 하지만. 열심히 해 볼게요.”
“주방 보조가 쓸모가 있어야 할 텐데.”
도명의 말에 도화는 별말이 없었다.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자취한 후 사서 먹거나 인스턴트 음식들로 끼니를 때우던 도화였다. 요리를 잘하는 도명에게 혼이 나도 이상할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잘 못 하니 못 도와주겠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도명이 운전하다가 차를 잠깐 멈췄다. 그리고는 별안간 어떤 뒷모습을 향해 자동차 클랙슨을 빵 하고 울렸다. 별안간 나온 도명의 난폭한 행동에 도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지나가는 행인을 상대로 클랙슨을 울리다니. 도화는 그 행인이 도명을 향해 화를 낼까 봐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상대는 반가운 얼굴로 도명의 차를 향해 다가왔다.
“한서윤, 너 그 골목으로 왜 들어가?”
“어? 형. 이 골목 아니야?”
“저 길치가 또.”
도명이 낮게 한숨을 쉬더니 차에 타라고 손짓을 했다. 서윤은 차에 타고도 너무 당당한 얼굴로 ‘저 골목 아니야?’라는 말을 해서 도명의 뒷골을 주무르게 만들었다.
“저번 개업식 때 왔잖아.”
“그냥 사람들 따라 왔지.”
도명은 그런데 왜 기억을 못 하느냐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상대는 한서윤이다. 길을 찾는 것에 대해서 그에게 상식을 갖다 대면 안 된다.
“저기에 카키색 서류 봉투 보이지? 그거 열어 봐. 6월 ‘BISCUIT FOREST’에 실리는 네 사진 들어간 분량이거든. 오늘 회의에서 인쇄 종이 3가지로 압축해서 출력해 놓은 거니까 관심 있으면 우리 편집부하고 이야기해서 같이 최종안 이야기하든가. 난 우리 디자이너한테 결정권 완전히 넘겼으니까 둘이 이야기해 봐.”
도화는 두 사람이 보자마자 너무 본격적으로 일 이야기를 하자 인사할 타이밍을 못 찾고 서성거리다가 두 손을 모으고 앉아만 있었다.
서윤 역시 처음 보는 도화를 향해 누구인지 물어볼 틈도 없이 훅 들어오는 일 이야기에 일단 모르는 얼굴인 도화를 향해 살짝 목 인사만 했다. 그리고는 바로 도명이 말한 서류 봉투에서 출력물들을 꺼냈다.
“와, 역시 형네 회사 종이 질하고 인쇄 품질은 역시 알아 준다니까.”
“자본금 많이 들어갔다. 사무실 건물 원금 갚을 돈으로 출력소에 투자해서 은행 이자하고 원금을 아직도 내고 있어.”
“얼마나 갚아야 하는데?”
“앞으로 3년 더.”
“금방이네.”
“각자 매력이 다른데? 그런데 이거 언제까지 결정해야 해?”
“적어도 다음 주말까지는 연락해 봐. 네가 연락 안 하면 우리 쪽 디자이너가 알아서 결정할 거니까 연락 안 해놓고 나중에 작가 혼 불태우지 마라. 그리고 연말에 신청 고객들하고 회사에서 전시 겸 파티하는 거 알지?”
“사진하고 잡지 안 삽화 전시하는 거?”
“그 명단에 너 끼워, 말아?”
“형, 섭섭하다. 나를 왜 빼?”
“그럼, 우리랑 전속 계약하든가. 농담이고. 그거 기획하는데 요청이 많아서 포스터나 사진만 모아놓은 책자 팔거든. 일단 한 번 만들면 그날 외에도 1년 내내 파니까 언제 나랑 수익금 분배 관련 계약서도 다시 쓰고.”
“돈이다!”
“얼마 안 돼. 우리 쪽도 기존 고객들 주머니 이중으로 터는 거라 마진율 그렇게 높게 책정 못 해서.”
도명은 낮에 처리 못 했던 일을 처리할 생각에 계속 서윤과 이야기하느라 서로 소개시켜 주는 걸 깜빡했다. 도명은 일 이야기를 대충 끝내고 나서야 도화에게 서윤을 소개해 주기 시작했다.
“도화 씨, 이쪽은 제 대학 후배이자 우리 회사 포토그래퍼인 한서윤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이쪽은 내 이웃사촌 도화 씨. 오늘 저녁 식사 초대 손님.”
서윤은 도명이 도화를 향해 오늘 저녁 식사 초대 손님이라고 하자 큰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도화는 뒤통수가 서윤의 시선으로 뜨거움을 느꼈다.
“안녕하세요.”
서윤이 넉살 좋게 도화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뒷좌석에서 갑자기 훅 들어오는 서윤의 손을 도화가 얼떨결에 잡았다.
“아 도명 씨가 낮에 저 때문에 서윤 씨하고 일 처리 못 했나 봐요. 어떻게 해요. 한참 놀 토요일 저녁에 일 때문에 불려 나와서.”
도화의 말에 도명과 서윤이 서로를 번갈아 보았다. 도명이 그런 도화를 향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방금 전까진 우리 회사 협력 업체 대표님이었고 지금은 도화 씨와 똑같이 오늘 저녁 식사 초대 손님입니다.”
도화는 서윤이 소개팅 상대라는 사실을 알자 붙잡고 있는 서윤의 손끝에서 왠지 모르게 찌릿함을 느꼈다. 약간의 어색함은 있었어도 방금 전까지 인사하고 말을 섞는 데 큰 문제는 없었는데 갑자기 손에서는 땀이 나기 시작하고 얼굴에 열이 몰렸다.
***
세 사람은 도명의 가게 안에 들어섰다. 도명이 냉장고에서 전날 간단한 밑 작업을 해둔 재료들을 꺼냈다. 서윤은 테이블에 앉아서 알아서 허브티를 우려서 먹고 있었다.
도화는 햇볕 잘 드는 테이블에 앉은 서윤을 흘깃 보았다. 도명만큼 화려하진 않지만 전체적으로 인상이 서글서글한 것이 보기 좋았다.
예전에 도명이 했던 머리보다 조금 어두운 갈색 머리카락을 하고 있었는데 꽤 어울렸다. 반 곱슬머리는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었고 옷차림도 스트라이프 셔츠에 청바지, 야상 자켓을 걸치고 있었다. 무심한 듯 스타일이 좋아 보였다.
이제야 도화는 도명이 왜 그렇게 자신의 화려한 옷들을 말렸는지 알 것 같았다. 하마터면 혼자만 광대가 될 뻔했다. 도화의 은근한 시선을 느낀 서윤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당황한 도화와는 달리 서윤은 자연스럽게 싱긋 웃었다.
“노닥거리지 말고 너도 일해.”
도명이 서윤을 향해 말했다.
“나 손님 아니었어?”
“손님에도 등급이 있지. 일해.”
“잠깐 이것만 마시고. 형 나 꽤 걸었단 말이야.”
“정류장에서 여기 그다지 멀지 않았을 텐데 뭘 걸어. 아…… 이미 쭉 헤매고 있었구나. 우리 회사에서 네 목에 철새 위치 추적기 달아 주고 싶으시단다.”
서윤은 반쯤 남아 있던 차가운 허브차를 단숨에 들이켜고 도명의 주방에 섰다.
“그런데 나머지 두 사람은 누구야? 하긴 소개팅이니 내가 모르는 사람이겠다.”
“알걸, 그 서점 운영하는 진호 씨 알지? 그분 오시고,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내 단골 프랑스 레스토랑 세프 도건 씨. 도건 씨는 나랑 식사할 때 한 번만 봤으니까 얼굴 잘 기억 안 날수도.”
“도건 씨를 내가 왜 몰라? 그 후 나도 음식이 취향에 맞아서 지인들이랑 몇 번 가서 인사하고 친해져서 간단한 프랑스식 가정식도 배웠는걸. 연애 감정 생길 거면 그 둘한테는 내가 진작 생겼겠지! 이건 거의 그냥 지인 저녁 식사 모임이잖아.”
서윤은 그리 말하고는 도명과 도화를 번갈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나 이 소개팅의 목적이 읽히는데?”
“목적 뭐?”
“이 소개팅 중심 도화 씨 아니야? 우리 세 명 중 한 명이라도 도화 씨 마음에 들어야 하는 거지? 안 그래?”
“맞아. 여우 같은 놈.”
“와 면접이었어. 도화 씨 좋은 점수 잘 부탁드려요~ 저 풍경 좋은 곳 많이 알고 있어요. 잘되면 여행 가이드로 쓰기 딱 좋아요.”
“그런 거 아닙니다. 아, 제가 무슨 평가를…….”
도화는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 채 말꼬리를 늘이다 못해 마지막에는 입술을 앙다물어 버렸다.
“도화 씨 여행 좋아해요?”
“아, 여행이요? 저는 그냥. 음.”
도화는 주로 집에만 있기 때문에 여행에 대해 ‘좋다’ ‘싫다’라고 말할 만한 경험 정보가 없었다. 도화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집돌이야. 주말마다 제발 좀 어디 좀 끌고 가 봐. 아, 얘는 길치니까 길은 도화 씨가 찾아요.”
도명이 도화 대신 대답해 줬다.
“여행 가이드 말고도 확실한 장점 하나 있어요. 저 형보다 훨씬 착해요.”
도명은 서윤을 향해 까분다고 말하려다가 말없이 생선을 다듬었다. 서윤은 분명 도명에게 한소리 들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도명이 말이 없자 저 악마 같은 형이 뭘 잘못 먹었나 싶었다.
“맞아요. 저보다 훨씬 좋은 사람이에요. 도화 씨 생긴 그대로 지켜 줄 놈이에요. 시도 때도 없이 사진 찍힐 각오는 해야겠네요.”
도명의 말에 도화는 오늘 낮의 일들이 생각났다.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도화를 바꿔댔다. 말을 안 들어도 어떻게든 바꿨다. 도화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앞머리를 괜히 만지작거렸다. 도화는 자신을 자기 마음대로 하는 도명의 성격도 이상했지만 말없이 따른 자신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와, 형 나 너무 몰아 주는데? 감사합니다.”
도화는 이 대화들 사이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다가 도명이 시킨 양파 까는 거에만 집중했다.
“도화 씨 양파 다 깠으면…… 와, 양파를 너무 깠네. 도화 씨 양파 깔 줄 모르네요. 음. 이 파슬리 씻은 다음에 잘게 썰어 줘요. 서윤이 넌 파스타면 삶고.”
까다로운 도명이 은근히 경험이 많이 필요한 파스타면 삶는 것을 맡기는 것을 보면 서윤 역시 도명만큼은 아니지만 요리를 꽤 할 줄 안다는 것이었다.
파스타가 익기를 기다리는 서윤의 눈에 도화가 아슬아슬한 손동작으로 파슬리를 써는 것이 보였다. 도명은 역시 우리 백구는 받아먹는 걸 잘하니 그냥 식탁 위에 예쁘게 앉혀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도명이 도화에게 그만하라고 하려는데 도화의 아슬아슬한 모습이 신경 쓰이는 건 그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서윤이 도화에게 다가왔다.
“어, 도화 씨. 손 그렇게 하면 손 베기 딱 좋아요. 거기다가 칼 들고 있는 사람이 왜 그렇게 멍 때리고 있어요? 아 정말 아슬아슬해서 못 봐 주겠네.”
서윤이 도화에게 칼 쥐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부모님하고 살아요?”
“아니요.”
‘그런데 왜 이렇게 주방에서 아무것도 못 해요?’
“저는 자취한 지 5년 됐어요. 그 전부터 엄마 도와서 집안일을 자주 해서 자취해도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어요.”
“아, 서윤 씨도 커밍아웃해서 쫓겨났어요?”
“네? 아니요.”
“서윤 씨는 가족들한테 커밍아웃 안 했어요?”
“했죠. 정체성 깨닫고 1년 만에. 그때가 17살 때였을 거예요. 제가 누나보다 애교 많은 아들이었거든요. 부모님하고 유대감도 남달랐고. 부모님이 많이 놀라시고 겁을 먹긴 하셨죠. 그런데 오히려 애써 씩씩한 척하시더라고요. 그리고 이내 저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셨어요. 누군가 저를 부정하면 저보다 오히려 더 화내 주시고. 제가 지금 자취하는 건 말 그대로 다 큰 아들이라서 독립한 거죠. 다른 집은 자연스럽게 결혼하면서 부모님과 독립하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그럴 일은 없으니까요.”
도화는 서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으로 동화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도화 씨는 잘 안 됐나 보네요. 부모님이 결국 도화 씨를 있는 그대로 못 받아들였어요? 음, 도화 씨 부모님이 쫓아냈어요? 아, 질문이 많았네요. 불편하면 이야기 안 해도 되고요.”
“전 제가 나왔어요. 화가 나서. 부모님한테. 여기까지 할게요.”
도화가 애써 웃으며 말했고 서윤도 자연스럽게 칼질하는 법을 마저 알려 주었다. 마치 어떤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어느 순간부터 이 모든 흐름이 자연스러웠다. 시답지 않은 이야기도 섞고 서로에 대한 가벼운 이야기, 최근 근황 등등.
식사 준비가 거의 끝났을 때쯤, 도명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 통화를 하는 도명의 표정이 좋지는 않았다.
“뭘 그렇게 무리해서 대타를 구하고 그랬어? 그냥 못 오면 못 오는 거지. 알았어.”
도명이 전화를 끊자 서윤이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건 씨 가게에서 주방직원 하나가 실수로 끓는 물 엎어서 응급실 다녀오는 바람에 오늘 못 오게 생겼다는데. 아 도건 씨가 다쳐서 못 오는 건 아니고 그냥 갑자기 일손이 부족해져서. 그래서 자기 지인 한 명 대신 보냈대. 쪽수 맞추려고 했던 거 아니냐고 하던데.”
도명은 갑자기 찝찝한 기분에 휩싸였다. 도명은 서윤이 어떤 사람인지도 알고 진호 씨도 어떤 사람인 줄 안다. 도건 씨도 어떤 사람인 줄 안다. 모두 다 괜찮은 사람들이었다.
서윤은 누구와 연애를 하든지 모든 과정이 자연스럽고 마무리도 좋았다. 마무리가 좋았다고 해서 그들이 밍밍한 연애를 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서윤은 어떠한 열정적이고 소모적인 감정도 자연스럽게 소화를 해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도화를 상처 주지 않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서점을 운영하는 진호 씨는 정서가 안정적이고 어른스러운 사람이었다. 종이와 활자, 그림을 다루는 사람이라 그런지 뭘 해도 진득하게 하고 진지한 구석이 있었다. 그게 지루하다고 느낀다면 지루한 거겠지만 도화 같은 사람에게 안정감을 줄 것 같았다.
마지막, 오늘 못 나오게 된 도건이라는 사람은 뭘 하든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열정이 지나쳐 호흡이 느린 사람한테는 곤란하게 하는 면도 있지만 이도 저도 못하느라 인생을 소비하는 사람한테 좋은 활력이 될 사람이었다. 무엇보다도 도명이 없어도 도화에게 맛있는 것을 잔뜩 먹여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아, 쪽수가 중요한 게 아니었는데.”
도명이 일이 뜻대로 안 되자 스트레스를 받는지 괜히 손으로 옷깃을 빳빳하게 늘렸다. 서윤은 도명이 자기 뜻대로 일이 안 되면 남들보다 더 큰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인 걸 알고 있었다.
“왜 새로운 사람 알고 좋지 뭐.”
“어떤 사람일 줄 알고?”
“그걸 알아 가면 재밌고 좋지 뭐. 안 그래요? 도화 씨?”
“네. 그렇죠.”
“도화 씨, 이놈이거나 진호 씨 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아, 이 형 또 이러네. 도화 씨 마음을 가지고 형이 왜 선을 그어.”
서윤은 도명을 향해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도화의 어깨를 부드럽게 쥐며 속삭였다.
“형을 안 지 얼마나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이해해요.”
“아, 이런 거 역시, 이상한 거죠?”
“네?”
“그러니까 도명 씨가 뭐든 정하고 저는 따라가는 거.”
도화는 ‘아무 위화감 없이.’라는 말은 차마 내뱉지 못하고 목 뒤로 삼켰다. 도화의 말에 서윤은 너무 간단하게 답했다.
“그렇죠.”
서윤이 그렇게 말하니 오늘 하루 머리부터 발끝까지 도명이 하라는 대로 싹 다 바꾼 모습이 보였다. 하루아침에 10년을 고수하던 스타일을 바꿨는데 편했다. 도화는 거부감을 느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거부감을 느껴야 한다! 도화의 표정이 이상하자 서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요? 형이 매번 저런 식이에요? 형이 성격이 세긴 한데 싫다고 하면 그렇다고 뭘 어떻게 하는 형은 아닌데. 뭐 무리한 거 있어요?”
“아, 네 도명 씨가 저한테 뭘 어떻게 한다는 게 아니라.”
“그냥 까불어요. 저 이렇게 만날 까부는데 멀쩡히 걸어 다니잖아요.”
서윤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이성적인 사람이라 개인적인 감정으로 다른 불이익 주는 사람도 아니고. 개인적인 감정이었으면 저 진작 계약 끊겼죠.”
서윤과 도화가 속닥거리며 이야기하자 도명이 말했다.
“무슨 밀담을 그렇게 해? 너 또 내 욕하지?”
“내가 무슨 형 욕을 해.”
도명과 서윤이 가볍게 말을 주고받았다. 음식이 다 돼서 접시를 꺼내서 담고 있을 때 이 모임의 나머지 두 사람이 들어왔다. 각자 도명에게 와인이나 비스킷 같은 걸 선물로 넘기고 식사 자리에 앉았다. 도명이 사람들을 소개시켜 줬다.
“오늘은 저도 건우 씨를 처음 봐서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아 저는 펀드 매니저인 박건우라고 합니다. 음, 취미는 그냥 맛있는 것 먹는 것 정도고요. 여러분처럼 예술적인 일을 하시는 분들 앞에 앉아 있으니 괜히 제가 지루한 사람 같네요.”
도화는 건우의 말에 크게 공감했다. 서윤은 멋진 사진을 찍는 사람이고 진호라는 사람은 그냥 책이 아니라 아트 북을 전문으로 파는 서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더 나아가 그는 직접 예술가들을 찾아서 책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아 저도, 숫자 다루는 일 하고 취미가 맛있는 거.”
도화가 반가운 마음에 말을 꺼내려 하는데 건우의 시선이 이미 다른 사람들을 향하고 있어서 하려던 말이 쏙 들어가 버렸다. 어색한 기운이 도화의 온몸을 지배했다.
서윤과 진호는 이미 알고 있는 사이인 것과 관심 분야가 살짝 겹쳐서 대화가 자연스럽고 풍부했다. 건우 역시 도화와 같은 상황일 텐데 중간중간 대화에 잘 끼어들었다. 도화는 어떤 말을 할까 생각하고 뜸을 들이다가 항상 타이밍을 놓쳤다.
그런 시도를 몇 번 하고 연속적으로 좌절되니 중간부터는 그냥 다른 사람들 말을 듣고 먹기만 했다. 서윤의 시선이 도화에게 고였다. 그리고는 귀엽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도화 씨, 정말 잘 먹네요.”
“아 저, 잘 먹습니다.”
겨우 질문이 들어왔는데 할 말은 겨우 이것뿐이었다. 도화는 이쯤 되니 ‘이 소개팅 망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자신이 참여자가 아니라 관중일 뿐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도명이 한숨을 쉬며 도화에게 감자 샐러드를 건네는 척하며 굳은 어깨 좀 펴라며 어깨를 풀어 줬다.
식사의 후반부에 들어서자 도화는 이제 마음이 편해지기까지 했다. 확실히 아등바등하는 것보다는 포기하니 편했다. 이런 후회가 들긴 했다. 아 연습해 둘 걸!
기회가 왔을 때 내가 원하는 사람을 잡을 수 있도록 이런저런 사람들과 대화를 하는 것을 연습해 둘 걸 그랬다. 이왕 망한 거 식사나 맛있게 하고 같은 동성애자들과 하는 이 대화 자체를 듣는 걸 즐기자고 생각했다.
“도화 씨는 좋아하는 거 뭐예요? 아까부터 너무 우리만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서윤이 갑자기 도화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요?”
“당연히 도화 씨한테 묻는 거죠.”
“밥 먹는 거요.”
“그건 아까부터 알겠어요.”
서윤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리고 여기에 앉아 있는 거요.”
“즐거우니 다행이네요. 쭉 식사만 해서 재미없나 싶었죠.”
“재미있습니다. 그냥 어떤 말들을 해야 할지 몰라서. 제가 쭉 같은 동성애자분들하고 대화를 많이 못 해 봤거든요. 일반 사람들 속에서 계속 들킬까 봐 아등바등하며 살았습니다. 좋아해도 저를 혐오하지 않을 분들과 대화하는 것 자체만으로 그냥 기분이 좋습니다. 이렇게 들어 보니 동성애자들 대화도 참 일반 사람들과 별반 다를 거 없는데 그냥 즐겁네요.”
“도화 씨, 혹시 지금까지 한 번도 연애해 본 적 없어요?”
“네.”
“연애하기 힘들죠. 우린, 일단 마음에 드는 사람 만나서 고백하는 것 자체가 큰 모험인데. 좋아하게 된 사람이 이성애자이면 그것만큼 비극인 게 어디 있겠어요.”
진호가 부끄러워하는 것 같은 도화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도화는 진호를 향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이런 말씀 실례될 수도 있는데 그런 경험도 전혀 없어요?”
건우가 도화를 향해 첫 질문을 했다.
“네.”
도화는 애써 웃었다.
“도화 씨, 꽤 귀엽네요.”
“그럴 리가요. 이렇게 덩치가 큰데요. 징그럽죠.”
건우의 훅 들어오는 낯간지러운 칭찬에 도화가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래서 더 귀여워요.”
***
다들 차까지 마시고 나니 밤 11시가 다 됐다. 밤이 너무 깊어지자 집주인에게 실례가 된다며 다들 자리에서 하나둘 일어났다. 도화는 이쯤 되니 도명에게 미안해졌다. 정말 세 명이나 붙여 줬는데 누구 하나 못 잡다니.
오늘 하루 종일 도명의 시간을 블랙홀처럼 쭉쭉 빨아들인 느낌이었다. 도화가 한숨을 푹 쉬며 접시를 정리하고 있는데 건우가 도화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아, 네.”
“전화번호 좀 주세요.”
“네?”
“전화번호요. 핸드폰 좀 이리 줘 봐요. 제 번호 찍어 드릴게요.”
도화가 얼굴이 새빨개진 채 핸드폰을 내밀었다.
“제 전화 꼭 받아요.”
“아, 네.”
손님들이 가고 난 후에도 도화가 넋을 놓고 앉아 있었다. 도명이 식탁 위를 치우기 시작했다. 도화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도명을 향해 말했다. 어서 칭찬해 달라는 눈빛이었다.
“도명 씨, 저 전화번호 교환했어요.”
“…….”
도명이 도화에 말에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저 대답 없이 접시만 치웠다. 도화는 도명의 뒤를 졸래졸래 쫓으며 그를 도왔다.
“저 설거지는 잘하는데요. 설거지 같이 해요.”
도명이 도화의 말에 옆에 살짝 비켜섰다. 도화가 그릇에 거품을 묻히고 도명이 마무리를 지었다.
“저, 진짜 전화가 오면 뭐라고 해야 하죠?”
“그 사람 마음에 들어요?”
“음, 나쁘지는 않죠. 생긴 것도 깔끔하고 일하는 종류도 대략 비슷하다면 비슷하고.”
“서윤이나 진호 씨는 별로예요?”
“서윤 씨는 정말 좋은 사람 같아요. 왜 같이 있으면 편안하고 사람 기분 좋게 만들어 주는 느낌 있잖아요. 진호 씨도 사려 깊고 진중한 사람 같고.”
“그런데요?”
“좋은 사람들이면 뭐해요? 저한테 그런 감정이 안 생기는 것 같은데.”
“서윤이가 도화 씨랑 다음 약속 잡고 싶어 하는데 도화 씨가 그 사람한테 전화번호 주는 모습 보고 못 잡은 걸 수도 있죠.”
“저, 정말 서윤 씨나 진호 씨 두 분 중 하나랑 만나야 하는 거예요?”
도화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도명에게도 도화의 불편한 심기가 느껴졌다.
“나쁘지 않았다면서요. 제가 도화 씨 마음까지 강요하는 것 같아 불편해요? 그런 건 아닌데.”
“하지만 그분들은 제게 전화번호를 주지 않았는걸요.”
“그 둘에게도 확신이 필요하죠. 모임이야 다음에 또 자연스럽게 만들면 되죠, 짧은 저녁 식사 한 번에 어떻게 사람 마음이 흘러갈지 알아요. 일단 이런 건 인상이 좋았다 느끼는 것만으로 충분해요.”
“그 사람 나쁘지는 않던데요. 저는 도명 씨가 왜 자꾸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네, 알아서 하세요. 제가 이래라저래라 할 입장은 아니죠.”
그 후 도명의 가게에서는 달그락거리는 접시 부딪치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
월요일 아침, 도화는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사람들의 은근한 주목을 받았다. 일단 5년 만에 바뀐 헤어스타일이 첫 번째 원인이었다. 그리고 어제 도명과 고른 블레이저를 입고 왔는데 그것도 은근히 눈에 띄었다. 헤어스타일과 해묵은 외투를 바꾼 것만으로도 사람이 달라 보였다.
도화는 쏟아지는 시선을 애써 모른 척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회사 메일부터 확인했다. 윤정은 도화가 앉아 있는 자리 옆 파티션에 살짝 매달렸다. 도화가 대체 왜 그러냐는 듯 사늘한 시선을 올려보냈다.
“머리하셨네요.”
“네.”
“잘 어울려요.”
“네.”
도화는 더 이상 이어갈 말이 없게 만드는 이런 대답을 상대방이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더 이상 쓸데없는 말 붙이지 말라고 하는 거긴 한데 어제의 소개팅 때 대화 장면이 생각나서 갑자기 속이 불편해졌다.
‘아 저도, 숫자 다루는 일 하고 취미가 맛있는 거.’
도화는 용기 내서 꺼낸 첫마디가 단숨에 꺾이자 바로 용기가 한풀 꺾이는 것을 느꼈었다. 도화는 이쯤 되면 자신한테 끊임없이 질문을 해대는 윤정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윤정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날의 후회가 생각났다.
기회가 있을 때 잡기 위해서 평소에 사람들과 말하는 연습을 많이 할 걸 그랬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리고 도명의 주위에 그가 동성애자이고 사실은 성격이 나쁜 편임을 잘 아는 사람들이 곁에 많이 있는 것을 생각했다.
‘가는 곳마다 자기를 숨기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과 만날 수 있는 기분은 어떤 기분일까?’
도화는 도명이 그런 사람들을 알고 주변 사람들을 만들기 위해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를 했을지 상상하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도명이 도화보다 운이 좋아서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많은 것은 아닐 것이다. 결국은 태도의 문제가 아닌가 싶었다.
‘나 잘못 살았나.’
도화는 순간 이런 생각이 들자 잠시 등골이 싸해졌다.
‘그러고 보니 건우 씨는 처음에는 내 말도 씹더니 왜 갑자기 나한테 관심을 가진 거지?’
서윤이 도화에게 일부러 질문들을 던지기 전에는 건우는 도화에게 시선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대체 어디서 매력을 느낀 거지? 내가 도명 씨가 애써 만든 소개팅을 완전 망쳤다고 생각했는데.’
도화는 윤정 씨가 말을 건 이 짧은 순간 많은 생각들을 했다.
“이 대리님 아침부터 멍 때리는 거 처음 보네요.”
“아. 네.”
“저기, 이 대리님. 소개팅 어떻게 됐어요? 오늘 하고 오신 것 보니까 잘 됐을 것도 같은데?”
“별일 없었습니다.”
‘별일 없긴, 어젯밤 자기 전에 건우 씨한테 문자도 받았다고. 조만간 다시 만나고 싶다는 문자에 답도 해 주고. 아, 자랑하고 싶다. 하지만 내 사생활은 단 한 톨도 노출되면 안 되지.’
도화는 저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누르기 위해 괜히 손으로 턱을 감싸 쥐었다.
‘도화 씨, 이놈이거나 진호 씨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아, 도명 씨, 오늘 아침 내 인사 대충 받은 거 기분 탓인가? 아침부터 서류 보고 있던데 바빠서 그랬겠지. 그럴 리가. 만약 아직까지도 자기 말 안 들은 걸로 화가 난 거면 정말 성격 이상한 사람인 거잖아. 정말 그런 걸로 기분이 상했다고 해도 그 사람 비위 맞추기 위해서 용기 내서 애프터 신청한 건우 씨를 안 만나는 것도 웃긴 일이고.’
“아 저, 이 대리님 어제 뵈었던 그분이요, 도명 씨였나. 어떻게 아는 사람이에요?”
“아, 제가 살고 있는 집, 건물주…….”
‘도명 씨, 소개가 왜 이래. 그래도 계좌번호 말고 전화번호도 알고 있는 사이면 이런 설명은 좀 아닌 거 아닌가.’
“건물주가 소개팅도 해 주고 그래요?”
“건물주이자…… 이웃사촌입니다. 저희 집 바로 아래에 건물주가 살고 있어서.”
“이 대리님이 그래도 이웃하고는 친하게 지내는구나. 하긴 주님 위에 건물주니 이 대리님도 밉보여서 좋을 일은 없겠네요.”
“아, 도명 씨 그렇게 전지전능한 갑은 아닌데요. 월세로 장난칠 만큼 수입이 그게 전부도 아니고.”
‘건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생기는 월수입은 고작 30만 원이라고.’
“그럼 건물주인 것 외에 뭘 먹고 사는데요?”
“화원하고 잡지사 운영합니다.”
“세상에, 그 얼굴로 꽃까지 다뤄요? 잡지사니까 글도 꽤 쓰겠네요. 그렇게 멋진 정장 입고 책상 위에 앉아서 글 쓰고 꽃 만지고. 어쩐지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데 그분한테 좋은 냄새까지 은은하게 나던데. 그게 꽃향기가 몸에 밴 거구나. 전 또 스타일이 너무 좋아서 패션이나 뷰티 쪽 관련 사람인 줄 알았죠.”
‘화원이라고 하니 꽃다발 만드는 거 상상하나. 플로리스트라. 그 얼굴에 꽃까지 만지면 끝내주긴 하겠네. 손가락 끝에 꽃향기가 배어든 채 입가를 부드럽게 만져 주면 꽃향기가 나겠지.’
도화는 자신도 모르게 평소와는 달리 윤정 씨의 말에 줄줄 대답하고 있었다. 하마터면 ‘그 얼굴에 요리까지 잘합니다.’라고 자랑까지 할 뻔했다.
“저, 업무 시간 아닙니까? 잡담이 기네요.”
“죄송해요.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만 할게요. 도명 씨 애인 있어요?”
“그 얼굴에 없겠습니까?”
‘애인은 없겠지만 잠자리 파트너가 몇 명인지 추산도 안 되지. 잠시라도 그런 남자와 사랑이니 뭐니 하려고 했단 말이야? 이래저래 안 될 사람이네. 성격 나쁘고 사생활도 번잡하잖아. 사람 얼굴 뜯어먹고 살 것도 아니고. 내 인생도 어떻게 보면 기구하다. 알에서 깨자마자 본 것이 사디스트라니! 그것도 지나치게 잘생긴 얼굴에 그런 악마 같은 음식을 만드는 사디스트라니! 위험해도 너무 위험했지.’
도화는 도명의 얼굴을 안 보고 있으니 갑자기 저만치 밀려 있던 이성이란 놈들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아, 역시 그렇겠죠.”
“네, 그러니까 제발 일 좀 합시다.”
3시간 연속 일에만 집중하니 도화는 어깨와 목 뒤가 빳빳함을 느꼈다. 담배를 안 피우니 그가 가질 수 있는 휴식시간은 커피를 타서 최대한 천천히 마시는 것뿐이었다. 커피를 타면서 내내 안 보고 있던 휴대폰을 보니 문자가 하나 와 있었다. 건우였다.
[산책 좋아합니까? 아니면 좀 더 신나는 일을 할까요?]
2시간 전에 온 문자인데 자신이 답이 없어서 관심 없다고 오해할까 봐 걱정되었다. 딱히 업무 통화 말고는 핸드폰을 가지고 노는 사람이 아니어서 문자가 온 줄도 몰랐다. 산책이라. 딱히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좋아한다고 답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답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업무 중에는 핸드폰을 잘 안 해서요. 산책 좋아합니다.]
도화가 커피를 거의 다 마실 때쯤 답장이 왔다.
[그러면 업무 중에는 문자 웬만하면 하지 말아야겠네요. 퇴근 후에 한강 둔치에서 산책하는 거 어떻습니까?]
[네, 좋습니다.]
도화는 건우와 서로의 회사 중간지점에서 만나기로 했다.
‘내 삶에서 데이트라니! 한강 야경! 데이트! 평범한 사람들처럼 야경 보며 데이트합시다!’
도화는 낯간지러운 기분이 온몸을 타고 올라왔다. 순간 머리카락 끝까지 부르르 떨리는 기분마저 들었다. 온몸이 갑자기 민들레 홀씨로 가득 찬 기분이었다. 도화는 자신도 모르게 탕비실에서 엉덩이를 흔들었다. 그러지 않으면 이 간지러운 기분을 어쩔 수가 없었다.
도화가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을 때 윤정이 탕비실에 들어왔다. 도화는 엉덩이를 흔들던 자세 그대로 굳어졌다. 도화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탕비실 컵을 급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도화는 더 이상 정리할 것이 없어져 버리자 좌절감마저 들었다. 윤정이 튀어나오려는 광대뼈를 누르며 말했다.
“이 대리님, 소개팅 잘된 거 축하드려요.”
“아, 네.”
도화가 얼굴이 새빨갛게 익은 채로 고개를 푹 숙이며 순순히 답했다.
“그죠? 역시 잘된 거죠? 사무실 들어올 때부터 낯빛이 달라 보였어요!”
윤정이 호들갑을 떨었다.
“네. 그렇습니다…….”
도화는 의기양양하게 두르고 있던 갑옷을 빼앗겨 버린 사람처럼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윤정은 자신도 모르게 도화의 뒷머리를 쓰다듬고 싶어서 손이 간질거렸다.
***
도화는 지하철 승강장에서 자신의 전화벨이 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당연히 건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화를 건 사람은 진영이었다. 하긴 지금쯤이면 진영에게서 전화가 올 때긴 했다.
도화의 유일한 친구인 진영은 한 달에 한 번은 꼭 만나자고 전화가 왔었다. 이쯤 되면 도화 외에도 사람 많은 진영이 그를 잊지 않기 위해 달력에다가 그를 만나는 날을 따로 지정해 놓는 게 분명했다.
“어 왜?”
“왜긴. 저녁이나 한 끼 하자.”
“아 음…….”
“집에 꿀 발라 놓았냐. 내가 자주 부르는 것도 아니고.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제발 좀 그놈의 집에서 나와라.”
“아니 그게.”
“선약 있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 대지 마라.”
갑자기 도화는 온몸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불알 달린 친구가 같은 불알 달린 놈이랑 데이트하러 간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 진짜로 선약 있는데.”
“진짜?”
“그럼 진짜지.”
수화기 너머로 반가워하는 진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화는 그 목소리가 묘하게 거슬렸다.
‘너 정말 나 관리 하냐? 내가 고독사로 죽을까 봐 사회복지사가 친구로 위장해서 관리 중이냐고.’
“어떻게 알게 된 사람이랑 밥을 먹는 거야?”
“새로 알게 된 사람은 무슨. 회사 회식이지.”
“회식? 너 안 나가잖아.”
“사장이 더 이상 용납 안 하겠대. 직원 중 하나가 그건 아니라고 강력하게 이야기해서.”
“그동안 용케 회식 안 끌려나간다 했다. 아 맞다. 너 주인집 남자 괜찮아?”
“그걸 이제야 물어보냐! 친구가 무슨 일을 어떻게 당했을지 알고! 왜 시체에다가 전화 걸지 그랬냐!”
도화가 울컥하며 수화기를 대고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지금 전화 받는 당신은 시체이십니까? 그래서 주인집 남자 어떤데?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그렇게 묻는다면 정말 대답이 애매하네. 뭐부터 썰을 풀어야 할지 정말 모르겠네.’
“……그냥 좋은 이웃사촌이 되었다.”
“것 봐! 다 네 피해망상이었지.”
“아 그래. 끊어라. 차 온다.”
도화는 전화를 끊고 나서도 답답함에 가슴을 퉁퉁 쳤다. 주인집 남자랑 좋은 이웃사촌이 된 것도 사실인데 그렇다고 그가 이상한 사람이 아닌 건 아니란 말이다! 이걸 설명할 수 없는 현실이 답답할 따름이었다.
구로역 근처에서 차 한 대가 도화의 앞에 섰다. 도화는 건우와 막상 둘만 만나려니 어색함이 몰려왔다. 차창이 내려가고 건우의 얼굴이 보였다.
“제가 너무 급하게 부른 건 아니죠? 잠깐 안 봤다고 도화 씨 얼굴이 아른거려서요. 점심 먹는데 자꾸 도화 씨 얼굴이 생각나는 겁니다.”
“아니요. 급하긴요.”
“저 이럴 땐 저도요, 라고 한마디 해 주시면 좋을 텐데.”
“네?”
“저도 보고 싶었다고 해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아, 네. 저도 건우 씨를 보고 싶었습니다.”
도화가 어정쩡한 자세로 건우의 차, 조수석에 앉았다. 건우가 굳이 도화의 안전벨트를 매 주었다. 갑자기 살짝 겹쳐 오는 건우의 몸에 도화의 몸이 굳었다가 그가 멀어지자 이완되었다. 도화는 저도 안전벨트 맬 줄 안다고 하려다가 입술을 다물었다. 왠지 그러면 눈치 없는 사람인 것 같았다.
“저 방금 엎드려서 절 받은 건 아니죠?”
“네?”
“진심이냐고요.”
“제가 마음에 없는 소리는 못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 마음에 없는 소리는 아니었지. 쭉 궁금했으니까. 언제 다시 연락이 오는지, 내가 해야 하는 건지 등등.’
“다행이다~ 혹시 도화 씨가 제가 별로 마음에 안 드는데 거절 못 해서 끌려 나온 건 아닌가 싶어서요.”
“제가 그런 이미지인가요?”
‘나도 모르는 사이 호구 이미지인 거야?’
“독해 보이지는 않죠.”
“아닌데요.”
“아니에요?”
건우가 눈웃음을 치면서 도화의 머리를 문질거렸다. 도화는 기분이 이상했다. 순간 자신이 무시당하는 것 같으면서도 낯간지럽고 복잡했다.
“와. 머리 촉감 적당히 짧아서 까슬까슬한 게 귀엽네요.”
건우가 자신의 손바닥을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저도 모르게 도화 씨 머리 자주 만질 것 같은데, 아 혹시 방금 기분 나빴어요?”
“아 그게.”
“기분 나빴구나! 미안해요!”
도화는 상대방이 너무 미안해하자 차마 그의 면전에 대고 조금은 기분이 나빴다고 할 수 없었다.
“그게 너무 훅 들어와서.”
“미안해요.”
“아니요. 그렇게까지 사과하실 일은 아닙니다. 지나치게 사과하시니까 제가 다 민망해지네요.”
“다른 뜻은 아니고 저도 모르게 도화 씨가 귀여워서요. 주의할게요.”
“저 자꾸 귀엽다고 하시니까 민망해서 제가 들어 주기 힘든데요.”
도화가 차마 건우를 못 보고 괜히 차창 밖을 응시하며 말했다.
“귀여우니까 귀엽다고 하죠. 저, 근데 우리 잘 되면 허락 없이 도화 씨 머리 막 만져도 되죠? 애인 사이면 참기 정말 힘들 것 같은데요. 지금도 사실 도화 씨가 기분 나쁘다니까 못 만지고 겨우 참고 있어요. 뒤통수가 정말 예쁜 동그라미인 거 알아요? 도화 씨는 키에 비해서 머리도 작아서 손바닥에 머리가 착 감기는 느낌도 들고.”
“아, 네. 애인이면 그 정도 스킨십은…….”
“그렇게 말하니까 빨리 도화 씨랑 사귀는 사이 되고 싶네요. 도화 씨 맘껏 예뻐하고 싶은 기분 알아요?”
“아. 예.”
도화는 그가 이런저런 스킨십을 할 거란 생각에 벌써 명치끝이 저려 왔다. 기분이 너무 이상해서 발끝이 자꾸 꼬이는 기분이었다.
“아, 제가 도화 씨 만나기 전에 맛집 수소문해서 샌드위치하고 주스 사 왔어요. 아 역시, 저녁으로는 부실할까요?”
“아니요. 저 뭐든 잘 먹어요. 그나저나 너무 건우 씨 쪽에서만 데이트 준비하신 것 같아서 죄송해서 그러죠.”
“아쉬운 쪽이 더 부지런해야죠. 안 그래요? 그냥 한강 야경 보면서 식사하면 좋은 것 같아서요. 이거 먹고 부실하면 2차로 술집 가서 안주 가득 쌓아 놓고 술 마시자고요.”
도화는 차 안에 있는 내내 건우의 애정 공세를 받느라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드디어 한강에 도착했고 잔디밭 위에 돗자리를 깔아 놓고 풍경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건우가 도화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앉아 있는 간격이 너무 가까워서 조금은 부담스러운 간격이었다. 건우는 그 거리가 신경이 안 쓰이는지 샌드위치 포장을 직접 까서 도화에게 건네주었다. 이쯤 되니 대우가 과해서 부담스러웠다. 매번 고맙다고 인사하는 것도 어색하고 말이다.
“어때요? 샌드위치는 입맛에 맞아요?”
건우가 도화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도화는 맛있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샌드위치는 정말 맛이 좋았지만 도명이 만들어 준 샌드위치보다는 맛이 없었다.
‘그 인간은 정말 음식에 뭘 타는 거지? 애인이 되어 줄 것도 아니면서 입맛만 미슐랭 가이드 급으로 만들어놨네.’
“아, 저 사실은, 샌드위치는 맛있는데 음료가.”
“아 음료는 취향 아니에요?”
“잠깐만요. 편의점 좀 갔다 올게요.”
도화는 그렇게 말하고는 맥주 캔을 사 왔다. 그리고는 맥주를 건우의 눈앞에서 보여 줬다.
“야경엔 술이죠. 주스가 아니라.”
도화의 말에 건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 술 좋아하시는구나. 아 그런데 저는 차 가지고 와서.”
“아 맞다. 죄송해요. 저는 차를 안 가지고 다녀서…… 그런 생각을 자연스럽게 못 했네요.”
도화가 민망함이 가득 담긴 얼굴로 맥주 캔이 든 봉지를 품 안에 안았다.
‘차 가지고 온 사람한테 음주를 권하다니! 너무 몰상식하고 이상한 사람이잖아!’
“저는 도화 씨 먹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부릅니다.”
두 사람은 한강 경치를 보면서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는 일이 비슷해서 그런지 말이 잘 통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도 이야기를 했다.
“저 솔직히 아쉬운데. 샌드위치로 배가 차다니. 도화 씨 의외로 대식가는 아닌가 봐요? 야식 정말 안 당겨요? 저 야식 맛집 리스트까지 다 뽑아놨는데.”
“저 많이 먹게 생겼습니까?”
“체격이 좋으니까요. 에너지도 많이 필요할 줄 알았죠.”
“잘 움직이지는 않아서요. 대식가는 아닌데요.”
“아 그래요…….”
너무 아쉬워하는 건우의 모습에 도화는 괜히 무릎만 움켜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가볍게는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너무 많이 말고요.”
“아 그래요?”
건우가 화색이 도는 얼굴로 말했다.
***
새벽 2시경 건우는 도화의 빈 잔에 술을 부어 주고 있었다. 어느새 그들 옆에는 빈 술병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와- 도화 씨 술 정말 잘 마시네요. 이렇게 마셨는데 어떻게 얼굴색 하나 안 변해요?”
“네, 잘 마시는 편입니다.”
건우가 도화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으니 그의 살갗에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건우는 혹시나 해서 물어봤다.
“술 취해도 얼굴색 하나 안 변하는 사람이 있다던데. 도화 씨는 그런 편은 아닌가 봐요?”
“네. 저는 술 취하면 얼굴이 발갛게 올라옵니다. 홍당무처럼 엄청 빨개집니다.”
“아 그렇구나.”
“저는 솔직히 그날 소개팅 지루했는데. 도화 씨도 지루했는데 사람이 너무 착하니까 대화가 재미있었다고 한 거죠?”
“아 저는 정말로 즐거웠는데요.”
“아 그래요?”
“건우 씨는 안 즐거웠어요?”
“솔직히 두 사람이 너무 본인들만 아는 이야기를 하니까 어떻게든 따라가느라 바빴죠. 두 사람 다 겉으로는 순하게 생겨서는 예술 관련 일을 해서 그런가. 은근히 대가 세 보이더라고요.”
“아 음. 전 잘 모르겠던데.”
“도화 씨는 착하니까. 뭐든 좋게 보려고 했겠죠.”
건우가 도화의 볼을 쓰다듬으며 눈웃음쳤다. 도화는 건우가 그리 말하니까 뭐라 대답할 말은 없어서 가만히 있긴 했는데 여전히 그 둘이 대가 세 보였다는 건 공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사람마다 느끼는 건 다르니까 굳이 건우하고 말씨름을 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 벌써 새벽 2시네요. 우리 내일 출근도 해야 하는데 너무 무리하는 것 같습니다.”
도화가 핸드폰 시계를 응시하며 말했다.
“아 그래요? 도화 씨랑 있으니까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하마터면 밤을 꼴딱 새울 뻔했네요.”
“즐거워서 다행입니다. 제가 서윤 씨처럼 분위기를 좋게 만드는 유형은 아니라서 단둘이 만나면 제가 재미없다고 느낄까 봐 걱정했거든요. 그래서 오히려 긴장도 좀 했고요.”
“아니에요. 아주 즐거웠어요. 보세요. 지금도 아쉬워 죽으려고 하잖아요. 다음에는 주말에 만나는 거 어때요?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계속 같이 있을 수 있게요. 토요일에 볼 수 있을까요?”
“아. 네.”
“중간에 약속 취소해서 주말 내내 시무룩하게 만들지 말아요.”
“저 달리 약속 없어서 그럴 일은 없습니다. 아, 저만큼은 아니더라도 술 한두 잔이라도 마셨으니까 대리 부르셔야겠네요.”
“그렇죠.”
“저는 택시 타고 가겠습니다.”
“아니요. 가는 길에 도화 씨 집 들르면 되죠.”
“너무 저한테만 맞춰 주시면 제가 부담스러워서요.”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읍시다. 사람 너무 매달리게 만들지 말아요.”
“아, 네.”
***
새벽 2시. 도명은 두꺼운 카디건을 걸치고 가게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전등을 들고 와서 미뤄두었던 책을 읽고 있는데 점점 마음에 열이 차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도명은 탁 소리 나게 두꺼운 책을 덮었다.
“몇 시야? 지금? 하, 2시?”
도명은 도화에게 보낼 문자를 빠르게 적었다.
[도화 씨 오늘, 외박하는 겁니까?]
그러다가 이내 문자를 지웠다. 도명이 입으로 내는 바람에 그의 정돈된 앞머리가 흩날렸다.
***
도화는 알람이 울리기 30초 전에 눈을 떴다. 5년간의 습관이란 게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눈을 뜨자마자 밀려오는 피곤함에 다시 눈을 감고 싶었다. 확실히 어젯밤 너무 늦게까지 놀았다.
지금 이 순간 5분만 더 자자는 생각이 들었지만 애써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든지 미루기로 결정한 그 짧은 순간 일이 다 틀어지는 것이다.
도화는 아직 제대로 뜨지도 못하는 눈을 하고 양치질을 최대한 힘주어 했다. 늘어지고 싶은 순간엔 몸을 더욱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어제 손 잡았다. 대리까지 있는데 엄청 과감하게 손이 슬금슬금 타고 넘어왔어. 아, 기분 이상해. 이런 거 한 번 손 잡으면 앞으로는 계속 막 잡히는 건가? 손 빼면 건우 씨 상처받겠지? 나름 손 한 번 잡겠다고 용기 냈을 텐데.’
도화는 양치를 마치고 머리를 감았다. 그리고는 머리를 말리다가 용기 내어 먼저 문자를 보냈다.
[건우 씨, 잘 일어났어요?]
‘으- 이런 거 이상해.’
도화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문자 전송을 하고 핸드폰을 침대 매트리스에 던졌다. 그리고는 낯간지러운 기분을 떨치기 위해 출근 준비를 바삐 하기 시작했다. 외투를 걸치고 신발을 신었다.
그러고 나서 거실 벽시계를 보니 역시나 정확한 시간대였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도명이 가게 앞을 지났다. 도화는 언제나 단정한 도명의 뒷모습에 혀가 내둘러졌다. 매일 보는 장면인데도 그랬다.
“아, 도명 씨. 좋은 아침입니다.”
도명이 도화의 인사를 받지도 않은 채 도화의 옷차림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어제와 옷이 바뀌었고 비누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아침에 들어왔다가 급하게 나가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그러면 도대체 집에 언제 들어온 건가 싶었다.
도화의 눈을 보니 평소보다 졸려 보이긴 하지만 밤을 꼴딱 새운 것 같지도 않았다.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집에 기어들어 오는 도화는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아, 저 사람들이 도명 씨가 골라 준 외투, 잘 어울린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매일 그 외투만 입고 다닐 수는 없어서, 몇 개 더 골라 주실 수 있나요?”
“도화 씨는 제가 한가해 보이나 봐요?”
도명이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
“아뇨. 그럴 리가요. 어디까지나 만약 도명 씨가 시간 난다면.”
“제 말뜻을 못 알아들은 모양인 것 같네요. 뭐 매번 그러기는 하지만, 확실히 좀 지겹네요.”
“아.”
역시 기분 탓이 아니었다. 요 며칠 도명은 도화에게 확실히 싸늘했다. 도화는 이쯤 되면 서러운 기분이 몰려왔다.
“저 그날 이후 계속 도명 씨 태도 거슬립니다.”
“제 태도가요?”
“설마 제가 도명 씨가 고르라는 분을 안 골라서 그렇습니까?”
“도화 씨, 제가 도화 씨 일에 일일이 신경 쓸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뭔가 착각하는 거 아닙니까?”
“안 그러면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건데요! 솔직히 지금…… 도명 씨가 쪼잔해 보이네요!”
도화는 도명에게 항변하는 이 순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무섭긴 무서운지 도명과 거리를 네 발자국이나 유지하고 있었다.
“도화 씨 이 거리가 대화하고자 하는 사람의 거리입니까? 그렇게 사람을 입으로 물고 싶으면 더 가까이 와 봐요. 덩치 아깝게.”
도명이 도화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도명의 도발에 도화가 울컥해서 세 걸음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러자 도명이 도화의 이마를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도화의 이마에서 딱 소리가 제대로 났다. 도화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뒤늦게 이마를 감싸 쥐었다.
“왜 맞았는지 압니까?”
“대들어서요? 도명 씨한테 쪼잔하다고 해서요?”
“내가 도화 씨 돔도 아니고 대들었다고 왜 때립니까?”
“그, 그럼요?”
“멍청한 것도 정도껏이지.”
“네?!”
“도화 씨가 너무 멍청해서 속에서 열불 나서 때린 겁니다.”
“제가 무슨!”
“가요.”
“제가 도명 씨가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똥개인 줄 아십니까?”
“아무한테나 꼬리 흔드는 똥개인 줄은 아나 보네요.”
“네?!”
“가요.”
“저 오늘부로 도명 씨 전화번호 지웁니다!”
도화는 그리 말하고는 씩씩거리며 도명의 가게 앞을 지나갔다. 도명은 도화가 가란다고 가는 똥개가 맞다고 중얼거리며 화분에 물 주던 일을 계속했다.
***
도명이 서윤의 작업실에 들렀다. 서윤이 혁준의 호텔 사진 건으로 SOS 요청을 한 것이다. 도명이 앉아 있는 소파 앞 커피 테이블에는 서윤이 작업한 것들이 늘어져 있었다.
“와. 너무 까다로워! 내 작가로서의 영혼이 돈 앞에서 탈탈 털린 기분이야.”
“혁준 씨 까다롭지.”
도명이 서윤의 작업실 가죽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얄미운 웃음을 실실 흘렀다.
“형 클라이언트라며? 대체 그 빌어먹을 입맛을 어떻게 맞추는 거야?”
“한두 번 만에 통과시키려는 네가 안일한 거 아냐? 상대는 태어난 순간 다이아몬드 수저 문 사람이야. 7살 때부터 부모님 손 잡고 비행기 타고 미술관 구경 다니고 그런 사람이라고.”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데 나 내심 무서워 죽는 줄 알았어.”
서윤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도명의 소매를 붙잡고 본격적으로 하소연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왜? 말도 안 되게 비싼 슈트. 반짝이는 시계에 기죽기라도 한 거야?”
“그럴 리가! Y호텔 사장이라는데! 당연히 그 정도는 걸치고 있겠거니 했지. 그런데 일 이야기 하자면서 날 쳐다보는데 그 눈빛 보는 순간 영혼이 탈탈 털리는 기분 알아? 아주 영혼 탈곡기야. 아주 숨 쉬듯 사람 부려 본 사람 같았다니까. 그리고 일 끝나자마자 표정 싹 바꾸면서 무심하게 나한테 이러는 거야. ‘서윤 씨, 동성애자라면서요?’ 나 그때 꼴사납게 커피 주룩 뱉었잖아. 형이야? 클라이언트한데 뜻밖의 커밍아웃 소식 듣게 한 게?”
도명은 순간 서윤의 눈을 살짝 피하다가 두 손바닥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윤이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도명을 노려보았다.
“걱정 마. 그 사람도 동성애자야.”
“그리고…… 그 사람 형 파트너지?”
“파트너지. 좋은 사업 파트너. 네가 찍은 그 호텔 정원들 내가 기획한 거잖아.”
“형답지 않게 왜 이래. 내가 그 파트너 이야기 한 거 아니란 거 알잖아. 아주 잠깐 보였는데 손목시계 사이로 줄에 묶인 흔적이 있더라고. 사진작가의 눈을 피하려 들어. 이 형이.”
도명은 혁준이 서윤과 미팅을 가지기로 한 전날 밤 SM 플레이를 하며 논 것을 생각하며 눈썹을 움찔거렸다. 플레이를 끝내고 나서야 같이 커피 마시면서 다음 날 서윤과 미팅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매듭이 역시 타이트했나…… 자국 생각보다 오래가네.”
“설마, 설마 했는데…! 난 적어도 그 사람이 게이라면 강공 아니면, 아무리 양보해도 여왕수라고 생각했는데.”
“너 가끔,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것도 혹시 BL 만화인지 뭔지에 나오는 용어야?”
“볼래? 보여 줄게.”
“거기까지. 그때 잠깐 봤는데 너무 취향이 아니었어. 해괴망측하더군.”
“형 놀고 다니는 게 더 해괴망측해! 클라이언트랑 뭐 하고 노는 거야! 세상에. 그 사람이 마조히스트라니! 누가 봐도 그 사람은 굳이 고르면 때리는 쪽 아니야?”
“내 사생활로 너한테 추궁당하는 건 여기까지. 너 소개팅 하던 날 밤 도화 씨한테 정말 관심 없었어?”
“도화 씨, 나 진심으로 관심 있었지. 알지. 나 직업병 있는 거. 나 그렇게 눈빛이 다채로운 사람 좋아하잖아. 나 그 식사하는 짧은 시간. 도화 씨의 희로애락을 다 봤다니까. 그냥 같이 있으면 그 사람이 아무 말 안 해도 즐거울 것 같았지. 나 눈 페티쉬 있는 거 알지? 도화 씨의 눈이 딱 그래. 전체적으로 부리부리해서 군더더기 없는 모양새에 눈동자는 거울 수준이야.”
도명은 서윤의 말에 울컥했다. 서윤을 향해 화를 내려던 도명이 갑자기 손수건을 꺼내 붉어진 코끝을 움켜쥐었다. 설마 했는데 새벽까지 밖에 있느라 감기가 온 모양이었다.
도명이 제일 싫어하는 코감기였다. 코감기는 사람을 추잡하게 만들어서 싫었다. 도명은 자신의 코훌쩍이는 소리에 신경이 메말라갔다. 도명은 이래저래 스트레스가 밀려와 소파 등받이에 목을 뉘었다.
“그런데 왜 도화 씨한테 전화번호를 안 줬어?”
“도화 씨가 나한테 관심 없는 것 같아서.”
“솔직히 그날 도화 씨 자기한테 전화번호만 주면 아무라도 좋았을 것 같은 상태였어.”
“그걸 형이 어떻게 알아?”
“왜 그런 거 알아? 처음의 낭만. 그냥 연애라는 것을 시작할 수 있다는 거 자체에 설레는 기분 말이야. 하루 종일 그런 기분이 도화 씨 얼굴에 올라와 있었다고.”
“와, 형이 그런 말 하니까 엄청 이상하다. 방금 그 말 형이 가슴으로 이해하고 하는 말이야?”
“몰라. 그냥 도화 씨 표정 보니까 그런 거구나 싶었어. 어쨌든 처음엔 유추였고 나중에 말하는 거 보니까 그게 맞더라. 너는 마음에 들었으면 그놈보다 빨리 전화번호 넘겼어야 할 거 아냐.”
“이게 다 형 때문이잖아.”
“내가 뭘?”
“전에 하도 도화 씨한테 나나 진호 씨 둘 중 하나만 고르라고 윽박질러서 나까지 그러면 도화 씨한테 압박감 주는 것 같았거든. 안 그랬으면 그놈이 전화번호를 주든 말든 비집고 들어가서 나도 줬지. 그리고 어쨌든 도화 씨도 그쪽이 좋았으니까 전화번호 받은 거 아냐.”
“도화 씨는 바보야. 자기가 어떤 놈을 고른 줄도 몰라. 넌 보면 몰라? 내내 도화 씨한테 관심 없다가 그놈이 언제 도화 씨한테 관심 가졌는지?”
‘이런 말씀 실례될 수도 있는데 그런 경험도 전혀 없어요?’
‘네.’
“아, 그랬어?”
“너는 내내 도화 씨만 쳐다보느라 정신없었겠지만 난 전체를 지켜보고 있었어. 진호 씨는 대체 왜 왔나 싶더라. 아무한테도 관심 없더라고. 너는 도화 씨만 보고 그놈은 내내 너하고 진호 씨 간 보다가 말더라. 그리고 도화 씨가 동정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갑자기 관심을 확 돌리더라고.”
“아 솔직히 나도 건우 씨 좀 싸했어. 가식적인 제스처가 많더라고.”
도명은 서윤의 말에 복장이 터져서 그의 정강이를 발로 깠다.
“형! 나 마조히스트 아냐! 지금 안 기뻐! 분명히 말하는데 하나도 안 기쁘다고!”
“기쁘라고 때린 거 아냐. 그걸 느꼈는데 내가 곱게 기른 백구를 못 지키고 넘겼어?”
도명이 음산한 표정으로 서윤의 멱살을 잡으며 말했다.
“그냥 자신을 드러내는 데 장벽을 조금 세우는 스타일인가 싶었지. 그게 나쁜 사람이라는 증거는 아니니까. 그리고 백구라니? 설마 도화 씨 말하는 거야?”
“동정에 환장하는 새끼가 왜 이렇게 많아. 그렇게들 자신 없어?”
“형은 동정에 관심 없어?”
“넌 설마 그거에 지대한 관심이 있냐?”
“중요하지는 않지. 오히려 더 조심스러워지지. 내가 상대방에게 상처 줄까 봐. 첫 사람이라면 이왕이면 좋은 사람이어야 하니까.”
“그래. 동정 이전에 상대가 누구냐가 중요하지. 동정이라서 더 좋아지고 싫어지는 게 어디 있어. 동정이라서 갑자기 없던 관심 생기지는 않거든. 첫 데이트부터 술 잔뜩 먹이고 말이야. 하지만 상대는 동네 백구지. 당황했을걸. 생각보다 술 세서.”
도명은 그리 말하며 악마처럼 실실 웃었다. 도화가 도명의 가게에서 술을 마신 날 그의 와인 셀러가 한순간에 반이나 텅텅 비었다. 그러고도 도화는 기분이 조금 솔직해지는 수준에서 끝났다.
도화가 건우와 술을 마셨는지는 직접 보지는 않았으니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까지 늦게 만나서 할 건 술 마시는 것 외에는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주 희미하게 도화의 살 냄새에서 술 냄새가 나기도 했다. 도화가 잘 씻고 다니는 편이라 술 냄새가 거의 다 날아갔지만.
“근데 형, 아닐 수도 있잖아.”
“내가 사람을 착각해?”
서윤은 도명의 거만한 표정에 일단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도명의 안목이 무시할 수준은 아니라서 어떠한 말도 못 하고 있었다.
***
토요일 7시경. 도명은 업무를 보고 가게로 들어오고 있었다. 도명이 평소 주차하는 자리에 눈에 익은 차가 한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눈에 묘하게 익긴 한데 누구의 차인지는 바로 생각나지 않았다.
도명은 이 차를 보는 순간 기분이 확 나빠지는 게 차 주인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겨우 기억이 났다. 그사이 그놈의 이름은 기억이 안 나고 어설프게 생긴 채 반지르르하던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요즘 도화가 만나는 놈이었다.
도명은 말없이 차를 노려보았다. 여러모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 많은 주차공간 중에 하필 집주인의 주차공간을 노리는 것 자체가 글러먹었다고 생각했다. 도명이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채 도화가 살고 있는 2층을 올려다보았다.
2층엔 불이 켜져 있었다. 그리고 뭔가 분주해 보이는 도화의 그림자가 창가에서 아른거렸다. 도명이 미간을 엄지로 주물럭거리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겨우 코감기를 거의 다 잡았다는데 스트레스를 받아서 면역력 저하가 올 것 같았다.
도명이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화분 정리를 하는데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렸다. 도명이 있는 곳은 건물과 건물 사이 골목 쪽이었는데 유리 벽을 세워 온실로 만들어 놓은 곳이었다.
통풍 잘되라고 살짝 열어 놓은 유리 창문 사이에 담배 연기가 새어 나왔다. 도명이 담배를 안 피우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화원의 공기 때문이었다.
도명은 담배를 피우는 사람에게 경고를 하기 위해 온실 쪽 문을 열고 나왔다. 낯이 익은 얼굴이 보였다. 건우가 담배를 피우며 지인과 통화 중이었다. 통화에 열중하는 나머지 도명의 존재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와- 도화 씨 생각보다 술 세더라. 아무리 먹여도 안 취하는 거야. 나 그렇게 술 센 사람 처음 봤어. 아주 환장하겠더라. 그래. 집에 데려다주는데 걸음걸이 하나 안 삐뚤어지는 거야. 손만 겨우 잡았어. 그래도 사람이 순해서 내가 잘해 줄수록 뭐든 거절을 못 하더라고. 연애니 뭐니 한 번도 못 해 봤으니까 앞으로 나랑 하는 게 다 당연한 거고 맞는 거지 뭐. 내가 다 이런다고 하면 아 그렇구나, 할 사람이라니까. 가지고 노는 거 아냐. 우린 그런 가벼운 관계가 아니야. 할 수 있는 만큼 아주 오랫동안 예쁜 사랑 해야지. 요즘 그런 사람 만나기 힘들거든. 그때 봤던 두 사람은 너무 노련해 보이는 게 피곤하겠더라. 일일이 재고 따질 것 같고. 처음엔 도화 씨가 체격도 좋고 그래서 아 쟤는 내가 어떻게 안 되겠다 싶었는데 순한 대형견 스타일이었지. 뭐. 오늘은 꼭 호텔 데려간다. 처음이니까 오늘 한 번에는 안 들어가겠지? 좀 무리시키면 들어가려나? 너무 크다며 울면 완전 귀여울 것 같은데. 아, 도화 씨 내려오겠다. 내가 너무 보고 싶어서 30분 일찍 왔다니까 당황하더라고. 요령 안 피우고 최대한 빨리 내려올 사람이야. 끊어. 도화 씨 봐야 해.”
건우가 콧노래를 부르며 뒤돌아섰을 때 도명이 웃으며 서 있었다. 건우는 순간 도명이 자신의 대화를 들었을까 봐 걱정되었지만 문제 될 게 뭐 있나 싶었다. 그와 연애 취향이 맞는다고 이야기한 것뿐인데. 그리고 잠자리야 요즘 원나잇도 흔한 일인데 애인 될 사이끼리 호텔 데려가는 이야기가 뭔 문제인가 싶었다. 더군다나 도명이 환하게 웃고 있어서 정말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 도명 씨! 아 맞다. 여기 도명 씨 가게죠, 그때 이후로 처음이죠?”
“그렇죠. 여기 화원이에요. 담배 확실히 끄세요.”
“네. 그렇죠. 제가 그런 기본은 압니다.”
건우가 자신이 따로 가지고 다니는 휴대용 재떨이를 흔들며 보여 주었다. 자신은 담배꽁초도 함부로 길에다가 안 버리는 기본이 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홍보하며 웃어 보였다.
“아, 저, 도화 씨 이제 내려올 것 같은데? 만나서 반가웠어요. 아 참, 그때 식사 정말 맛있었어요.”
건우가 도명의 옆을 지나려고 할 때였다. 한순간에 건우의 이마가 까칠한 벽돌 벽에 박혔다. 건우는 순간 머릿속이 핑 돌았다.
“윽! 도, 도명 씨?”
건우가 도명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이상하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도명의 단단한 몸이 건우의 뒤에 바짝 붙었다.
“제가 도명 씨 기분 나쁘게 한 것 있어요?”
“네.”
“담배요? 앞으로 여기서 안 피울게요. 하하, 이런 거에 많이 예민하시네. 아, 화원 소중하죠.”
“뭐 그것도 화나고.”
“하하. 또 뭘. 윽! 왜 이러는지 설명이나 해 주세요. 그래야 사과든 뭐든 할 거 아닙니까?”
“시선 아래로 내리깝시다. 발밑 물웅덩이 보시고.”
건우가 목에 힘을 주고 버티고 있자 도명이 그의 무릎 뒤를 찍어 눌렀다. 그가 신경 써서 입고 온 바지가 흙탕물에 잠겼다.
“제가 가지고 싶었던 게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아끼는 나머지 차마 못 가지는 그런 마음을 상상하실 수 있는지 모르겠네요.”
“네?”
“제가 손이 참 거칠고 더럽거든요. 생긴 건 이렇게나 곱상한데.”
도명이 건우의 뒷목을 잡고 그의 얼굴을 물웅덩이에 가깝게 대게 했다. 그의 코끝이 물웅덩이에 닿아 파동을 일으켰다. 건우는 더러운 물웅덩이에 얼굴이 처박히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도명은 자신이 조금만 더 힘을 주면 건우의 머리를 물웅덩이에 처박히게 할 수 있단 걸 알았지만 그가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재밌어서 히죽거렸다. 건우의 얼굴에 피가 몰려서 새빨갛게 변했다.
“그런데 어떻게 가지겠어요. 안 그래요? 하아… 그런데 나보다도 못한 사람이 그걸 가지려 하네. 양심도 없이.”
“서, 설마. 읍.”
건우가 말을 하려는데 도명이 그의 목덜미를 쥐고 있던 손을 팍 놓아 버려 물을 먹게 했다. 건우가 열이 머리끝까지 뻗쳐서 일어나려 하자 도명의 구둣발이 그의 머리를 지그시 밟았다. 건우가 악을 쓰며 겨우 말을 내뱉었다.
“설마 그거 도화 씨입니까?”
“이제 아네. 내가 왜 화를 내는지.”
“씨발! 그럼 소개팅을 왜 해 줬는데.”
“너 같은 놈이 올 줄 알았나. 적어도 나보다는 좋은 사람이어야 할 거 아닙니까?”
“나 같은 놈이 뭔데!”
“자, 주제를 모르니 이제 거울을 봅시다.”
도명이 건우의 머리채를 잡은 후 그의 얼굴을 물웅덩이에 비추었다.
“이렇게 못생겼는데 어떻게 악역을 맡습니까? 뻔뻔하게 성격도 못되고 못생긴 게 사랑받으려고 하고. 양심이 어디까지 없을 작정입니까?”
“이런 짓을 하는 당신은 성격이 좋아?! 이거 사이코 아냐!”
“이렇게나 성격이 안 좋아도 이 얼굴은 다 용서받습니다. 당신 얼굴은 용서 못 받고요.”
건우는 자신의 옆에 고인 도명의 얼굴을 보며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건우가 무슨 말을 하려는데 도명이 다시 그의 얼굴을 웅덩이에 처박았다.
건우는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 도명을 피해 골목 구석에 앉아 있었다. 도명이 느긋한 움직임으로 건우 앞에 섰다. 도명이 한쪽 입꼬리를 쭉 올리며 건우의 가랑이 사이를 내려다보았다. 도명이 조소했다.
“혹시 작아요? 처음 아니면 못 울릴 정도로?”
“아니야!”
“그런 것 같은데? 도화 씨한테 문자 보냅시다. 헤어지자고.”
“내가 왜!”
도명이 건우의 엉망이 된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
“도화 씨랑 공유나 해 볼까요? 사진 예쁘게 잘 찍혔어요. 봐요.”
도명이 콧노래를 부르며 말했다. 도명이 건우를 향해 핸드폰 화면을 돌리며 건우의 물에 젖은 생쥐 같은 모습을 보여 줬다.
“날 이렇게 만든 널 도화 씨가 정상으로 볼 것 같아?!”
“도화 씨가 내가 이런 사람인 걸 모를 것 같아요? 그냥 저 인간이 취미 생활 중이라고 생각할걸요.”
“도화 씨가 당신이 이런 사람인 걸 안다고?”
건우가 도명의 말을 못 믿겠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도명은 어떠한 표정 변화도 없이 도화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아, 도화 씨. 지금 바쁩니까?”
건우가 도명의 말을 못 믿겠다는 듯이 그의 핸드폰을 빼앗아 들었다. 수화기 건너편에서는 도화의 목소리가 분명히 들렸다. 이 미친놈이 정말 도화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시늉 같은 것이 아니었다.
“아, 네 조금. 도명 씨 용건만 간단히 말해 줄 수 있어요? 도명 씨?”
도명이 멍해 있는 건우에게서 전화를 뺏고 도화와 다시 통화하기 시작했다.
“도화 씨 내려와 볼래요?”
“아, 지금 당장이요?”
도화가 난감해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화는 귀와 어깨 사이에 핸드폰을 끼워 넣고 바지를 올리고 있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죠.”
도명이 전화를 끊었다. 건우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도명을 올려다봤다. 도화 같은 사람이 이런 비정상적인 인간을 이해한다고? 건우의 머리끝에서 더러운 물방울이 뚝 떨어졌다.
도명의 핸드폰 속 모습이 보여 주듯 아주 볼썽사나운 모습일 것이다. 이런 모습을 도화가 보고 잔뜩 실망할 표정을 지을 것을 생각하니 너무 끔찍했다.
“나한테 대체 왜 이러는 거야?”
건우가 아래턱을 덜덜 떨며 말했다.
“도화 씨와 헤어져요.”
“왜, 네가 잘해 보게?”
“적어도, 당신만 아니면 될 것 같습니다. 걱정 말아요. 제가 다른 좋은 놈 소개해 줄 테니까.”
“너 같은 사이코가 소개시켜 주는 놈을 도화 씨가 왜 만나! 먼저 너 같은 놈을 피해야 하는 것 아냐?”
“거참, 나 이런 놈인 거 안다니까 그러네요. 도화 씨는 왜 이렇게 늦게 내려오지?”
도명이 답답하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며 손목시계를 보았다. 건우가 아무리 간을 보아도 도명은 정말 도화가 이 모든 모습을 보길 원하는 사람 같았다. 그의 속이 타들어 갔다.
“도화 씨한테 전화해. 별일 아니었다고. 내려오지 말라고.”
“그나저나 계속 말이 짧네요.”
도명이 건우를 향해 고압적인 시선을 던졌다. 아까처럼 물리적인 제압을 당한 것도 아닌데 온몸이 저절로 바닥에 납작 엎드려지는 느낌이었다. 벌써 그의 폭력을 몸이 먼저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도화가 아래층에 내려와서 도명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헤어질게요. 그러니까 제발.”
“왜요? 지금 시궁창 쥐 같고 참 보기 좋은데요.”
“헤어진다니까!”
건우가 어금니를 깨물며 최대한 소리를 죽인 채 말했다. 도명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미간을 거칠게 구기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약속 어기면 제가 지금보다 더 화가 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겁니다. 기대해요.”
도명이 마지막 ‘기대해요.’라는 말에서 이죽거리면서 말했다. 도명이 천천히 골목에서 나갔다.
“도명 씨, 무슨 일인데요?”
“줄 거 있어서요.”
도명의 말에 도화가 한쪽 눈썹을 슥 올리며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도명과 함께 가게에 들어섰다. 도명은 느긋한 걸음걸이로 부엌 찬장에 다가갔다. 그리고는 쿠키 상자를 꺼내서 도화에게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뭐긴요. 열어 보면 알겠죠.”
사실 도화는 굳이 상자를 안 열어 봐도 그 안에 뭐가 있는지 후각으로 먼저 느끼고 있었다. 도화가 상자를 열어 보니 그 안에는 쿠키가 반쯤 비어 있었다. 뭔가 이상했다. 도명처럼 완벽한 거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가에게 선물 주는 물건을 이렇게 허술한 상태에서 주는 것이 왠지 그답지 않았다.
“음, 먹다 남은 건데요?”
“그래서 기분 나빠요? 너무 맛있게 먹은 나머지 도화 씨도 맛봤으면 해서 주는 건데요?”
도화는 도명을 경계 어린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도명은 그런 도화의 시선에 어이가 없다는 웃음을 지었다.
“설마 쿠키에 독 탔겠습니까? 아니면 먹다 남은 쿠키라서 기분 나쁩니까?”
“아니 그런 것보다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제가 뭘요?”
“우리 바쁘신 대표님께서 저한테 신경 쓰실 일 없다고 하지 않았나요? 어제저녁까지도 그 바쁜 건 유효했던 것 같았는데요.”
도화는 어제저녁 도명의 가게 앞에서 그와 마주쳤을 때 어색해도 참고 인사했는데 그에게 무시당한 것을 떠올렸다.
“도화 씨 삐쳤어요?”
도명이 넉살 좋게 웃으며 말했지만 경계심 어린 도화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도명이 도화에게 한 발자국 바짝 다가가며 입꼬리를 씩 올리며 말했다.
“그나저나 제 전화번호 지우겠다고 하신 분도 여기 있는 것 같은데요?”
“지웠습니다.”
“지운 분이 제가 전화 걸자마자 제 목소리도 안 들렸는데 도명 씨란 말이 바로 나옵니까?”
도화가 답답하다는 듯이 도명을 향해 핸드폰 주소록을 내밀었다. 정말 도명의 전화번호 같은 건 정말 없었다.
“제가 머리가 너무 좋아서 인생이 피곤합니다. 도명 씨 전화번호는 이미 외워 버렸습니다. 어쨌든 지운 건 맞으니까요. 그리고 오해하지 마세요. 저는 번호로 된 건 뭐든 잘 외웁니다. 전화번호 이전에 계좌번호도 이미 외웠는걸요. 확인해 드려요?”
도명이 신기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도화의 입에선 도명의 전화번호, 계좌번호까지 줄줄 나왔다. 그리고는 자신이 도명의 정보들을 외운 건 그가 특별해서가 아니라는 듯 동네에 새겨져 있는 다른 자잘한 번호들까지 줄줄 뱉었다.
도명은 그런 도화가 순수하게 신기했다. 도명은 회사를 운영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숫자를 다루긴 하지만 숫자란 건 도무지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놈의 숫자란 게 저절로 머리에 들어온다고?
도명이 테이블에 걸터앉으며 낱개로 포장된 쿠키 하나를 꺼내서 포장을 뜯었다. 그리고는 벌려진 도화의 입술 사이로 쿠키를 밀어 넣었다. 도화는 짜증을 내면서도 입안에 달콤한 것이 들어가자 못 이기는 척 입술을 열었다.
“어때요? 맛있죠? 제가 사이가 안 좋아진 이웃사촌한테 주고 싶어서 안달이 날 만큼 말이에요.”
“흠. 그, 그렇긴 하네요.”
“가져요. 이제 도화 씨 것입니다.”
“아 그나저나 이 앞에서 건우 씨 못 봤어요? 차는 이 앞에 있는데 건우 씨는 안 보이네요.”
“봤어요. 담배 피우다가 물웅덩이를 밟아서 옷 엉망이 되었다고 신경질 내면서 어딘가로 사라지던데요?”
“옷이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데요?”
“그래 봤자 바지 밑단 젖은 정도겠죠. 물웅덩이에 고꾸라진 것도 아니고.”
도화가 순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도명의 셔츠 소매가 살짝 젖어 있는 것이 보였다. 도화가 도명의 소매를 끌어다가 자신의 코앞에 갖다 댔다. 셔츠는 겉보기에는 깔끔해 보였지만 희미하게 흙냄새가 났다.
“도명 씨답지 않게.”
“원래 화원 일이라는 게 이런 옷 입고 하기엔 적당치가 않은 겁니다. 저니까 하는 거지.”
“그걸 이제 아셨습니까?”
도명이 그러고 보니 자신이 화원 옆문을 열어놓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명이 도화에게 우유가 담긴 컵을 건네주고 온실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다가 커다란 화분들 사이에서 건우가 웅크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도화가 가게 앞을 서성거리며 도명을 부르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 가게 앞에 주차해 놓은 차 안에는 못 들어가고 그렇다고 앞뒤가 뻥 뚫린 골목에 마냥 숨어 있기도 불안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본능적으로 화원 옆문을 통해 가게 안으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화원 안은 크고 작은 식물들로 가득해서 숨기에 좋아 보였다. 일단 가장 가깝기도 하고 말이다.
도명은 건우와 분명 눈을 마주쳤음에도 없는 사람 취급을 하며 원래 목적대로 화원 옆문을 닫고 도화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돌아왔다. 도화가 쿠키를 우유에 적시며 먹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 맞다. 자랑할 것 있는데, 가지고 올라올게요.”
“저 그렇게 한가한 사람 아닙니다. 데이트 약속 있어요.”
“제가 테이블을 여기에 둔 이유가 뭔지 압니까? 여기에 앉아 있으면 가게 안에서부터 가게 밖 상황까지 한 번에 보이거든요.”
도명의 말 그대로였다. 도화가 테이블에 앉아 있으니 도명의 앞마당이 훤히 보였다.
“이 앞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을 편하게 기다리기 딱 좋죠. 건우 씨가 자기 차 두고 어디 갈 일도 없고요. 건우 씨 올 때까지만 저랑 놀아요.”
도명은 그리 말하고는 지하실로 사라졌다. 화분 틈 사이, 건우의 시야에 즐거워서 의자 아래에서 발을 리드미컬하게 흔드는 도화의 다리가 보였다. 이쯤 되면 자신이 뭐 하는 건가 싶었다.
건우는 역시 이 상황에서 숨어야 하고 부끄러워할 사람은 피해자인 자신이 아니라 가해자인 도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자신의 볼썽사나운 모습을 도화에게 보여 주자니 온몸이 떨려왔다. 건우가 갈등하는 사이 도명이 앤티크한 프레임의 전신 거울을 들고 왔다.
“어때요? 이거 예쁘죠?”
“아 자랑하려던 것이 거울이었어요?”
도화가 시시하다는 얼굴을 했다. 도명은 자신이 자랑스러워하는 이 거울을 도화가 잘 볼 수 있게 그가 앉은 곳 건너편에 놨다. 도화는 적극적인 도명의 자랑에 벌써부터 지치는 기분이었다.
도명은 무반응인 도화의 반응에 굴하지 않고 이 프레임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공을 들여야 하는지 설명했다. 도화는 그의 기대에 호응하기 위해 말없이 애써 웃을 뿐이었다.
사실 도명이 이 거울을 도화가 앉은 곳 건너편에 놓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곳에 거울을 놓으면 도화가 거울 하단 부를 응시하는 순간 숨은 건우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게임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도명은 내내 건우에게 이 상황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척을 했지만 그 역시 도화가 자신의 포악성을 아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도화가 도명이 사디스트라는 사실을 아는 것과는 별개로 그가 다른 사람을 협박하고 강제로 굴복시켰다는 사실은 역시 다른 문제였다. 성적 취향이 부합하는 사람이 아닌 일반 사람을 이런 식으로 가지고 노는 것에 도화 역시 크게 놀랄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거기다가 그 사람이 도화가 호감을 가지고 데이트를 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도화 씨는 이런 보기 좋은 물건에는 관심 없어요? 스노우볼을 모아서 어느 정도는 관심 있을 줄 알았는데요.”
“사실 봐봤자 뭐가 보기 좋고 이런 걸 제가 알 리가…… 스노우볼은 왜 보기 좋아하는지 저도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천천히 흘러가는 스노우볼 안 풍경을 보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아 전에 말한 것 같은데, 어쨌든 도명 씨처럼 미학적인 의미로 모으는 건 아닙니다. 도명 씨, 이런 것보다 저 더 궁금한 거 있는데요.”
“뭡니까?”
“요새 저한테 왜 그런 겁니까? 단순히 정말 바빴다느니, 납득 안 되는 이유 말씀하지 말고요. 저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니까요.”
“치졸했다는 도화 씨 표현이 틀리지는 않습니다. 네, 도화 씨가 제가 만나라는 사람을 안 만나서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순순한 도명의 고백에 오히려 도화는 마음이 더욱 불편해졌다. 내내 회피했던 불편한 기분이 다시 명치 위로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도화는 차마 도명을 쳐다보지 못하고 시선을 테이블 상판 위에 고인 채 말했다.
“저, 이런 말씀 기분 나빠 하실 건 알지만, 도명 씨의 월권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 부탁에 애써 소개팅 자리를 만들어 주신 점을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확실히 이렇게 대놓고 들으니 기분이 좋지는 않네요. 도화 씨의 말이 틀리지 않아서 더욱 그렇습니다. 차라리 도화 씨가 멍청하다며 이마에 손가락이나 튕기고 있는 게 마음 편하네요.”
도명이 도화의 건너편에 앉았다. 그리고는 도화의 턱에 손가락을 살짝 얹고는 시선을 맞췄다.
“하지만 조금은 제 마음을 이해해 줄래요?”
“그러니까 정확히 어떤 마음을……?”
“도화 씨가 그랬잖아요. 도화 씨가 사랑해도 겁먹지 않을 그런 사람들을 소개해달라고. 저는 그저 건우 씨가 어떤 사람일지 몰라서 불안했을 뿐이에요. 도화 씨 부탁, 저 정말 진지하게 들어 줬던 거거든요. 도화 씨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말입니다. 이 테이블에 앉아서 제가 아는 사람들을 나열하며 읽지도 못할 내면의 세계들을 계산했습니다. 의미 없는 일이었을 수도 있었겠죠. 사람의 마음이 톱니바퀴이고 그것들을 제가 설계할 수 있다고 믿는 일이라며 혼자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계산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도화 씨가 마음껏 사랑해도 괜찮을 그런 사람을 찾기 위해. 그리고 그날은 당황했어요. 그렇게나 공들였는데. 도화 씨도 잘 알겠지만 저 성격 나쁜 것 알죠?”
도화는 도명의 말을 들으며 간지러운 손가락 끝만 더듬다가 도명의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네. 제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성격이 안 좋습니다. 가장 폭력적이죠.”
도화가 멍한 눈으로 도명의 얼굴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도명 역시 부정은 못 하겠다는 듯이 말없이 웃었다.
“저는 조금이라도 제 마음대로 안 되면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날 밤의 변수가 그날로 안 끝나고 계속 제 주변에서 고장 난 시곗바늘처럼 엇박자로 째깍째깍대는 것 같았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도화 씨는 그걸 방조하는 사람이었고요. 도화 씨 얼굴만 보면 자동반사로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갑자기 왜.”
“제 스트레스가 도화 씨 탓이겠습니까. 못된 제 성격 탓이죠. 그리고 지금은 그걸 인정할 충분한 시간이 흐른 겁니다.”
도명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
도화는 어색한 짧은 추임새를 끝으로 말이 없었다. 도명의 솔직한 말들에 오히려 도화의 얼굴이 더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도화는 어서 화제를 돌리지 않으면 점점 간지러워지는 이 기분에 잠식당할 것 같아 다른 화젯거리를 찾기 위해 뇌를 바삐 움직였다.
“그래도 제가 도명 씨를 만난 이후로 강심장이 된 것 같습니다. 이제 앞으로 어떤 일에도 안 놀랄 자신이 있다니까요.”
“과연 그럴까요?”
도명의 시선이 아주 짧은 순간 건우가 숨어 있는 화분 사이로 흘러 들어갔다가 다시 눈동자를 도화를 향해 돌렸다. 그리고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턱을 괴고 도화를 쳐다보았다. 도화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도명을 쳐다보았다.
“안 그럴 것 같습니까?”
도명이 도화에게 재차 물었다.
“네. 그나저나 건우 씨는 어떻게 된 건지.”
“그러게요.”
도화가 아까보다 좀 더 어두워진 밖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건우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건우는 급하게 핸드폰 배터리를 분리시켰다.
어디선가 달칵거리는 소리가 들려 도화가 귀를 쫑긋거렸다.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의 방향을 찾아서 도화의 시선이 뒤로 가는 순간 도명이 도화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순식간에 도화의 모든 신경이 도명에게로 쏠렸다.
“도화 씨, 데이트 잘 하고 오세요.”
도명이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이 순간만큼은 복잡 미묘한 감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도명 같은 사람이 양심이 찔릴 리가 없었다. 양심의 문제와는 별개로 앞으로 도화가 겪을 일들이 애석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도화는 처음 보는 도명의 슬픈 표정에 더욱 넋을 놓고 그를 쳐다보았다. 도명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도화는 그가 앉아 있던 자리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아 저는 편의점 좀 갔다 오겠습니다. 혹시 건우 씨를 보거든 저한테 연락 좀 해 주겠어요?”
“그래요.”
도화는 도망치듯이 도명의 가게를 나왔다. 도망치지 않으면 화원 안의 공기에 질식당할 것 같았다. 도화가 익숙한 골목을 한 블록 정도 걸었을 때 그제야 자신이 건우에게 전화를 걸려 했음을 깨달았다. 도화가 전화를 걸었지만 상대방의 전화는 여전히 꺼져 있었다. 이상했다.
하지만 머릿속은 온통 도명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마지막까지 도명에게 건우에 대해서 말한 것이 괜히 신경 쓰였다. 도화는 목이 탔다. 집에 들어가서 물을 마시면 될 일이었지만 도화는 굳이 편의점까지 걸어갔다. 어차피 생수는 많이 필요했고 걷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밤이었다.
도화가 나간 도명의 가게 안, 도명은 거울 앞에 앉아서 자신의 모습을 비춘 채 그루밍하고 있었다. 왠지 지금 이 순간 도명은 자신의 어떠한 못생김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가려면 지금 나가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도명이 시선도 제대로 주지 않은 채 화분 뒤에 망부석처럼 굳어진 건우를 향해 말했다. 화원치고 너무 말끔한 도명의 가게 바닥에 흙이 섞여 들어간 물이 고여 있었다. 도명은 지금 이 순간 어서 그를 쫓아내고 가게를 다시 완벽한 상태로 만들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헤어지자고 할 때 최대한 건우 씨답게 처리해요. 도화 씨 안 그래 보여도 은근히 촉은 좋은 편이니까. 촉은 좋은데 언제나 해석을 핀트가 어긋나게 해서 그렇지.”
“앞으로 어떻게 할 겁니까?”
“글쎄요. 언제나 선택은 도화 씨가 하는 겁니다. 저에겐 선택권이 없죠.”
도명의 말에 건우가 헛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도화의 주변을 자기 마음대로 주물럭거려놓고 하는 말이라 어이가 없었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요. 당신이 나와 다른 사람이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도명이 여전히 거울을 보며 중얼거렸다.
***
도화가 편의점에서 작은 병으로 된 생수를 하나 꺼내서 계산하고 있을 때 도화의 전화벨이 울렸다. 건우였다. 도화는 애써 목소리를 높이며 전화를 받았다.
“건우 씨! 갑자기 전화가 안 돼서 걱정했어요. 옷 엉망 됐다면서요.”
“도화 씨.”
건우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저 도화 씨가 도명 씨랑 같이 있는 거 봤습니다.”
건우의 목소리는 어쩐 일인지 화가 나 있었다. 도화는 처음 듣는 건우의 화난 목소리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하지만 애써 태연한 척 통화를 계속했다.
“아, 도명 씨가 쿠키를 챙겨 줘서요. 설마 이상한 오해 하는 거 아니죠? 이웃사촌이니까 그 정도 왕래는 할 수 있잖아요.”
도화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편의점 의자에 앉았다.
“도화 씨, 도명 씨랑 이야기할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압니까?”
건우가 차에 앉아서 도화와 통화를 했다. 엉망이 된 그의 옷 때문에 차 시트까지 질척거리고 구정물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건우는 도화가 도명을 쳐다볼 때의 표정을 생각했다.
도화가 아주 조금만 도명에게서 시선을 떼면 거울에 비친 건우를 발견할 수 있었다. 건우는 도화에게 자신의 불성 사나운 모습을 들킬까 봐 조마조마하다가 나중엔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화가 도명에게서 시선을 뗄 일은 없었다. 건우는 도명이 내뿜는 위압감과 무자비한 구둣발보다 도명을 쳐다보는 도화의 표정에 완전히 굴복당했다.
건우를 쳐다보는 도화의 들뜬 표정은 처음 가 보는 놀이공원에 대한 상상에 불과했다. 겨우 그런 표정을 짓게 만든 걸로 도화를 마음대로 소유할 수 있다고 믿은 자신이 너무 광대 같았다.
도명을 쳐다보는 도화의 표정은 매혹당한 얼굴이었다. 무방비하고 맹목적이었다. 종잇장처럼 심하게 구겨진 그의 자존심이 그의 발끝에서 덜렁거렸다.
“……어떤 표정을 짓는데요?”
도화가 목소리를 굳히며 질문했다. 그의 목소리 끝이 파르르 떨렸다.
“도명 씨 좋아합니까?”
“그럴 리가요. 안 그러면 제가 왜.”
“그러게요. 대체 왜 그랬어요! 지금 사람 가지고 장난질 칩니까!”
건우가 사나운 말투로 도화의 말을 잘라먹었다. 항상 다정했던 그가 내뱉어 대는 날카로운 소리라 도화는 더욱 겁을 먹었다. 도화는 핸드폰을 든 채로 딸꾹질을 시작했다.
“건우 씨. 저는 정말로. 그런 게 아닙니다. 무슨 오해가.”
“도화 씨.”
건우가 밀려오는 화를 겨우 참는 억눌린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네.”
도화가 벌벌 떨며 겨우 답했다.
“지옥에나 떨어져요.”
그 말을 끝으로 통화는 끊겼다. 도화는 통화가 끊어졌다는 걸 알면서도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 봄이 오는 꿈을 꾸고 있었는데 갑자기 발밑에 낭떠러지가 있는 기분이었다.
편의점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는데 다리마저 벌벌 떨렸다. 갑자기 난데없이 이별이 그의 눈앞에 툭 떨어졌다.
패닉 상태에 빠진 도화의 눈앞으로 건우의 차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타인처럼 지나갔다. 건우가 도화를 발견했는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건 건우는 도화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평생 볼 일 없다는 듯이. 도화의 머리 위로 꽃이 졌다.
***
도명은 게임의 소품이었던 거울을 들고 자신이 살고 있는 지하실로 내려갔다. 계단의 끝에는 어둠이 잠겨 있었다. 도명이 설치한 센서 등이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의 머리 위를 차례로 밝혔다. 도명은 거울을 제 자리에 내려놓고 소파에 앉고는 눈을 감았다.
피로감이 그의 온몸을 지배했다. 정신의 피로이리라. 그의 소매도, 바짓단도 구정물로 젖었다.
도명은 눈을 감고 생각했다. 과연 건우가 언제 도화에게 이별을 통보할까? 그다운 이별이란 무엇일까? 도명은 건우를 충분히 안 겪었으니 사람 경험 많은 그에게도 그다운 이별을 정확히 상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다만 확신할 수 있는 한 가지는 그가 다시는 도화와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자존심이 매우 높은 사람이었다. 그는 비정상적인 일을 저지른 도명보다 엉망으로 당한 자신을 도화에게 보여 주는 일을 더욱 두려워했다.
그는 도화에게 절대적인 존재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그의 신사적이고 자신을 낮추는 것 같은 말투에 속아서는 안 된다. 도화의 존재는 그의 존재를 맹목적으로 쫓아야 하는 존재에 불과했다.
얼굴을 보는 순간 종잇장처럼 구겨진 자존심이 먼저 생각나는 상대를 그가 견딜 수가 있을 리가. 그게 도화의 탓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차피 진정한 사랑도 아니었으니 그가 이 모든 장벽을 넘을 이유도 없었다. 이 모든 일들은 자명했다.
도명이 그가 친구와 한 전화 통화 하나로 그 모든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본질적으로 그와 도명이 비슷하기 때문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건우는 갓 태어나 어금니도 안 난 포식자였고 도명은 아주 노련한 포식자란 것뿐이었다.
건우가 씹을 수 있는 건 경험 없는 자들뿐이었겠지만 도명은 도화가 처음이든 아니든 상관없을 만큼 노련할 뿐이었다.
도명이 화가 난 포인트는 그의 도덕성이 아니었다. 그런 보기 좋지 않을 만큼 빈약한 자가 자신이 아까워서 물지도 못하는 것을 홀랑 가져간다는 것에 대한 분노였다. 건우 같은 자가 한입 무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린다. 그가 건우의 때가 타는 것이 싫었다. 아주 조금이라도.
조금만 생각해 보면 도화가 갓 태어난 포식자한테 당할 만큼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도화는 센 척할 필요가 없을 만큼 강한 사람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걸 몰라서 여기저기서 할짝거리는 게 문제일 뿐이었다. 도명은 클럽에서 도화가 자신에게 치근덕대는 사디스트를 한 번에 제압했던 걸 생각하며 실실 쪼갰다.
‘더럽게 치근덕대네.’
도화의 발길질 한 번에 무거운 원목 테이블이 밀리고 상대방은 할 말을 잃고 넋 놓고 있었다.
“역시 과잉보호였나.”
맹하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사납게 돌변해서 급소를 물어 버리는 백구인데. 도명은 자신이 괜한 일을 벌인 건가 싶었다. 백구에게 시간을 조금만 더 줬으면 자연스럽게 상대방의 본질을 알아차리고 알아서 물어 버렸을 텐데.
이제 와 후회가 몰려왔다. 하지만 지나간 일을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랴.
지금 이 순간 도명이 신경 쓰이는 것은 단 하나였다. 결국 그렇게 돌고 돌아가며 애를 썼는데 자신이 도화를 상처 입혔단 사실이었다. 차라리 도화가 도명이 엉망으로 만든 건우를 발견했더라면 이번 게임은 망했다고 생각하면 될 일이었다. 아니, 결국은 건우가 핸드폰 배터리를 분리할 때 도화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돌린 건 게임을 반드시 이기고 싶었던 건가.
“그래도 나는 최선을 다했어.”
도명이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 넘기며 중얼거렸다.
도명은 다시 가게로 올라가서 가게 문을 닫았다. 도명의 가게는 평소보다 완벽하게 소등되어 있었고 창가의 블라인드마저 내렸다.
***
도화는 편의점에서 벗어나 대형마트에서 카트를 끌고 있었다.
“우울할 땐 고기지.”
도화는 일단 삼겹살을 산 후 카트에 쌈 채소를 담았다. 살림 잘하는 도명의 기준에서 보면 경악할 정도로 시들시들한 것을 대충 집어넣었다. 생마늘도 한 움큼 샀다. 쌈장도 가장 작은 걸로 사고 기름장 만들 참기름과 소금도 골랐다.
살 것들을 머릿속으로 나열하는 와중에도 도화의 머릿속에는 건우의 목소리가 울려댔다.
‘지옥에나 떨어져요.’
카트 손잡이를 잡은 도화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그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마트를 누비고 다녔다. 도화는 마지막으로 초록색 소주병을 잔뜩 담았다. 그리고는 장 본 것들을 계산한 후 양손에 두둑이 들고 집 앞으로 왔다.
핸드폰 시계를 보니 밤 9시였다. 도명은 가게에서 이런저런 일을 다 보기 때문에 그가 잠들기 전까지 불이 켜져 있었다. 그런데 도명의 가게가 완전히 닫혀 있었다.
도화는 절망에 잠긴 표정으로 무거운 짐을 일단 도명의 가게 문 앞에 내려놓고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 핸드폰을 물끄러미 보다가 여러 번의 망설임 끝에 이미 외워 버린 도명의 번호를 눌렀다.
도화가 전화를 건 그 시각, 도명은 파자마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운 지 15분 지난 후였다. 참을 수 없는 피로감에 침대에 눕긴 누웠는데 잠은 오지 않았다. 그래서 도명은 전화가 울리자마자 전화를 받을 수 있었다.
“도화 씨?”
“음, 지금 뭐 하세요? 아, 그 전에 저녁은 먹었습니까?”
“이 시간에 저녁 안 먹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 사람 여기 있는데요.”
“도화 씨, 저녁 안 먹었습니까?”
“네. 아니면 도명 씨는 야식 안 먹습니까?”
“몸매 망가집니다.”
“아 그렇구나.”
도화가 시무룩한 말투로 말했다. 도화가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 도명이 막았다.
“일단 기다려 봐요.”
“네.”
“어디 가지 말아요. 잘 기다릴 수 있죠?”
“네.”
“착하네요.”
도명이 그답지 않게 성급한 말투로 말했다. 도명은 파자마를 벗었다. 그러자 관리가 잘된 그의 단단한 몸이 보였다.
도명은 일단 파자마는 침대 위에 올려놓고 속옷만 입은 채로 드레스 룸으로 가서 잘 다려진 하얀 셔츠들 사이에서 셔츠 하나를 꺼내고 검은색 슬랙스도 꺼내 입었다.
그리고는 갈색 가죽 벨트를 맸다. 도명이 마지막 단추 하나까지 단정하게 맸다. 그리고는 거울에 얼굴을 대고는 머리를 단정하게 쓸어 넘겼다. 마지막으로 자신한테 맞춘 스킨을 얼굴과 목덜미에 적셨다.
“이 시간까지 밥을 왜 안 먹어. 대체.”
도명이 투덜거리며 가게에 올라오고 불을 켰다. 도화는 새까맣던 도명의 가게가 레몬 색으로 물들자 반가운 기분에 안을 기웃거렸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도명이 닫힌 가게 문을 열었다. 도명의 호흡이 살짝 가빴다.
“아, 제가 바쁜데 방해한 건 아니죠?”
도화가 그제야 도명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제가 아무리 바쁜들 저녁 거른 사람보다 바쁘겠습니까?”
도화가 장 본 것을 들고 가게 주방에다가 올려놨다. 도명은 도화가 장 본 것들을 꺼내며 훑어보았다. 도명이 인상을 팍 쓴 채 도화에게 가까이 다가오라는 듯이 손짓했다.
도화는 불길한 예감이 강하게 들었지만 눈을 질끈 감은 채 도명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도화가 예상한 대로 도명이 손가락을 튕겨 도화의 이마를 때렸다.
“앞으로 장 볼 거면 저랑 갑시다. 상추 꼴이 이게 뭡니까? 이걸 돈 주고 샀습니까?”
도화는 이쯤 되면 도명이 자기가 때리기 편하라고 앞머리를 벌초한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도명은 그 이후에도 재료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잔소리를 해댔다.
도화는 도명이 상추를 보면서 계속 잔소리를 할 것 같아 그의 공간이 익숙한 듯 개수대 앞에 서서 상추를 씻었다.
도명은 냉장고에서 된장찌개 재료를 꺼내 금세 된장찌개 한 뚝배기를 끓이기 시작했다. 도화의 세계에서는 신기했다. 냉장고에 항상 신선한 재료가 대기 중인 것이 말이다. 테이블 위에는 고기 불판이 놓이고 도명이 끓여 준 된장찌개와 각종 재료들이 보기 좋게 얹혀 있었다.
도화가 살짝 맛보니 기가 막혔다. 간만에 맛보는 집 된장찌개 맛에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도명이 삼겹살 상태를 보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제대로 사 온 게 없습니다.”
“맛있을 것 같은데요. 고기는 웬만하면 다 맛있습니다.”
도화가 도명의 매서운 눈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도명의 가게에 고기 익는 냄새가 무르익었다. 도명이 집게로 바삭하게 잘 익은 삼겹살을 도화의 접시 위에 얹었다. 도화는 그렇지 않아도 너무 배고픈 참이었다. 도화가 쌈을 싸서 입안에 집어넣고는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맛있습니까?”
도화가 볼이 볼록해진 채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마음에 안 드는 것투성이지만 도화가 맛있다고 하니 그제야 도명이 웃었다.
“본인이 사 온 거니 책 잡힐까 봐 거짓말하는 거 아닙니까?”
“아닌데요. 도명 씨는 정말 안 먹습니까? 소주 안주로 삼겹살만 한 것도 없는데요. 아 소주는 별로 안 좋아합니까?”
“취향을 떠나 몸매 망가집니다. 이 시간에 뭘 먹으면. 나이 들수록 몸매 관리는 더 공들여야 어떻게든 그 전 비슷하게나마 관리가 되는 겁니다.”
도화가 도명에게 혼날 것을 각오하고 쌈을 하나 싸서 고기 굽는 도명의 입에 밀어 넣었다. 도명이 단호한 표정을 지었지만 도화가 힘으로 밀어 넣었다. 결국 도명의 입안에 칼로리가 들어갔다.
한 번 굳건하게 지켰던 장벽이 무너지니 천하의 도명도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도명은 도화만큼은 아니지만 결국 같이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하루에 네 끼를 먹다니 도명의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시간에 먹으니 확실히 음식이 달긴 달았다. 도명은 알면 안 될 법칙을 알게 된 것 같아 간담이 서늘했다.
“왜 이 시간까지 데이트 나간 사람이 밥도 안 먹고 있는지 안 물어보시네요.”
“눈치껏 알 것 같은 건 굳이 안 물어보는 게 예의 아닙니까.”
도화가 소주잔을 꺾으며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차였습니다!”
“차인 사람이 왜 웃습니까?”
도명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도명은 자신이 저지른 일 때문인지 오히려 화를 냈다.
“그럼 웁니까?”
“웃는 것보다는 안 이상하죠.”
“한 번 울면 펑펑 울 것 같아서요. 저 지금 너무 무섭거든요.”
도화가 그렁그렁 한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도화의 손끝이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다. 도명의 소멸했던 양심의 털이 슬금슬금 자라는 느낌이었다. 도화가 계속 눈에 힘을 준 채 도명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몸을 살짝 흔들거리면서 말했다.
“저기, 이 정도면 우리 최선을 다한 거 아닙니까?”
도명은 도화의 말이 끝나자마자 단숨에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들었다. 너무 한 번에 알아들어서 신비로울 지경이었다.
“불나방의 기분을 알 것 같습니다. 평생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말입니다.”
도명은 도화의 말에도 아무 말 없이 소주를 단숨에 비웠다. 도명은 왠지 목이 타서 견딜 수가 없었다. 도화의 손이 갑자기 도명의 눈앞에 휙 달려들었다. 그리고 곧이어 빠르게 도화의 손이 도명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도화의 얼굴이 도명의 얼굴에 가까워졌다.
도화의 입술이 도명의 입술 위로 거칠게 문대졌다. 도화가 방금 까드득 깨문 마늘 향이 입안에 확 번졌다. 테크닉이라고는 전혀 없는 입맞춤이었다. 낭만도 없고 뭉툭한 입맞춤이었다.
도명은 이렇게 우아하지 못한 입맞춤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더할 나위 없이 자극적이었다. 도화는 사고를 쳐 놓고 도명을 향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도명 씨, 지옥에 떨어지면 왜 안 되나요?”
도화의 말에 도명은 그의 어깨를 거칠게 밀쳤다. 도화가 자신이 거절당하는 중이라고 생각하는 찰나 그의 등허리가 테이블에 닿았다.
차가운 감촉에 도화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도명이 테이블 위에 올라서서 벨트를 풀었다. 금속이 찰칵거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도명이 자신의 벨트를 도화의 목에 감았다.
“도화 씨, 제가 사랑을 약속드릴 수 없는 것을 이해합니까?”
도화가 도명의 팔뚝을 억세게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목줄 채우겠습니다.”
도화의 목에 가죽 벨트가 조여졌다. 도명이 도화를 향해 더할 나위 없이 환하게 웃으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짧은 순간만큼은 그가 떨어진 곳이 지옥이 아니라 천국에 떨어진 것 같았다.
“내려갈까요?”
도명이 도화의 목에 걸린 가죽 벨트를 정말 도화의 목줄이라도 되는 양 팽팽하게 당기며 말했다. 도화는 도명의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이 순간 고개를 끄덕이면 정말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결정을 번복할 생각은 없었지만 당장 그와 지하실에서 놀 생각을 하니 정신이 아찔해졌다. 도화의 망설임에 도명이 오히려 기특하다는 듯이 도화의 뺨을 흥분으로 젖은 손으로 쓰다듬었다.
“제 말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는 것 같아서 조금은 기특하네요. 네 맞아요. 우리는 아주 야한 놀이를 하러 아래로 내려가는 겁니다.”
도명이 혀를 세워 도화의 귓불을 핥다가 잘근잘근 씹으며 속삭였다. 도화의 귓속이 도명의 입에서 나온 습기로 축축해졌다.
“저… 도명 씨. 어느 정도의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겁니까?”
도화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요? 끝까지 갈까 봐 두렵습니까?”
“네.”
“전에 한 약속 기억합니까? 도화 씨가 스스로 뒤를 만족하면서 가는 모습 보내달라고 했던 것 말입니다.”
도화는 도명의 노골적인 표현들에 온몸이 붉게 달아올랐다. 도화는 기억한다는 말을 내뱉는 것조차 너무 부끄러워서 잠긴 목으로는 침만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도명이 도화의 뺨을 망설임 없이 후려쳤다. 경멸을 담은 차가운 눈동자가 도화의 얼굴에 꽂혔다. 도화는 멍한 얼굴로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밑에 내려가기 전에 기본적인 교육부터 합시다. 어떤 섭이 버릇없이 돔의 질문에 고갯짓으로 대답합니까. 대체 몇 번을 가르쳐야 알아듣죠?”
도명이 자신의 분노를 손가락 끝에 실어 보내며 긴장한 도화의 엉덩이를 세게 움켜쥐었다.
“그게… 나쁜 뜻은 아니고 너무 부끄러워서.”
도화가 벌써부터 울먹거리는 얼굴을 하며 도명을 올려다봤다. 새삼 자신의 위로 올라탄 도명의 무게감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부끄러우면 무례해도 되는 겁니까? 도화 씨는 나를 화나게 하는 게 즐겁습니까?”
“아니요. 그럴 리가…….”
도화의 얼굴 위로 억울하다는 표정이 여실이 드러났다. 도화는 도명이 자신의 진심을 못 알아 줘서 야속하기까지 했다.
“오해가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되기 전에 확실히 합시다.”
“네.”
도화는 머리가 너무 멍한 나머지 순간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급하게 대답했다.
“아래로 내려가면, 도화 씨가 하지 말아야 할 것 세 가지 알려드리겠습니다. 다 제가 반복해서 말한 도화 씨의 문제점들이라 외우는 데는 전혀 어려울 것이 없을 거예요.”
도명의 손바닥이 도화의 쇄골을 누르며 힘주어 말했다. 도화는 긴장감에 주먹을 폈다 쥐는 것을 반복했다. 도화는 자꾸 하얗게 점멸되는 머릿속을 도명의 입술 끝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대답 똑바로 할 것. 방금 그것 때문에 혼났죠?”
“네!”
도화는 도명에게 혼날까 봐 군대 훈련에라도 온 것처럼 목소리에 과하게 힘을 주며 대답했다. 도명은 순간 그런 도화가 귀여워서 견딜 수 없었으나 애써 무너지려는 얼음 같은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래에서 플레이 중 질문하지 말 것.”
“네…….”
두 번째에서는 도화가 말의 끝을 흐렸다. 도명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방금 내뱉었는데 도화의 얼굴을 보니 벌써부터 질문이 하고 싶어 견딜 수 없는 표정이었다.
“마지막으로 저 아래에서는 무조건 복종할 것.”
도화는 겁을 먹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질문이라도 하게 해 주면 덜 겁을 먹을 텐데, 질문이 금지되어 있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도화는 지금 당장 ‘SM은 상호 협의된 플레이라면서!’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질문을 할 수 있어야 자신이 밑에 내려가서 무슨 일까지 해야 하는지 마음의 준비라도 혹은, 오늘은 도저히 안 된다며 거부 의사라도 밝힐 수 있을 텐데. 도화는 애간장이 타서 발만 동동거렸다. 도화는 도명에게 맞을 각오를 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SM은 상호 협의된 플레이라면서요. 뭘 할 건지만 알려 주세요.”
“방금 질문한 거죠? 약간의 거부도 포함된 것 같고.”
도명이 도화의 뺨을 연달아 내리쳤다. 이쯤 되니 도화는 정말 지옥의 입장권을 쥐고 있다는 것이 현실로 다가왔다.
“도화 씨, 벌써 도망가고 싶어요?”
도명이 맞아서 열에 오른 도화의 뺨을 어루만지며 음산하게 속삭였다.
“네.”
도화의 말에 도명이 실망감에 어린 표정으로 그를 내려 보았다.
“하지만, 지금 도망가면 안 되는 거잖아요. 저… 그 정도 감은 있어요.”
도화가 도명의 소매를 양손으로 움켜쥐며 말했다. 도명은 그런 도화의 간절한 손짓에 기분이 좋아졌다.
“도화 씨, 아래로 내려가서 제 앞에서 자위나 하면 되는 겁니다. 제가 도화 씨 수준 모르겠어요?”
“정말…… 그것만 하면 돼요?”
도화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도명을 향해 물었다. 도화는 질문을 해 놓고 아차 싶었다.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는데 날아와야 할 도명의 손바닥은 보이지 않았다. 도화가 조심스럽게 눈을 가늘게 떠 보니 도명이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 또 질문이다. 어떻게, 벌써 얼굴 부어오르기 시작한 것 봐. 딱 이 정도 빨간색이 예쁜데. 살색에 파란색은 안 어울린단 말이지. 그래도 이건 기본인데 훈육은 해야 하는데.’
도명은 고민 끝에 도화의 허벅지 살 안쪽을 후려치는 것으로 처벌을 대처했다. 도화는 도명의 손길에 이상한 열이 올라옴을 느꼈다. 도명은 순간 도화의 허벅지 안쪽 살이 자극에 매우 약함을 느꼈다.
“밑에 내려가서 할 건 수치심을 참는 것뿐입니다. 수치심을 못 넘어서면 맞는 거고요. 하아…….”
‘이 왕초보를 어떻게 하지……?’ 하는 깊은 고뇌가 느껴지는 도명의 한숨에 도화가 민망해하는 얼굴로 작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해했어요…… 정말이에요.”
“내려와요.”
도명이 여전히 깊게 접힌 미간을 펴지 않은 채 도화의 몸 위에서 비켜섰다. 도명은 가게 문을 잠그고 지하실로 내려갔다.
도화가 정말로 따라오는지 안 따라오는지 신경도 안 쓰는 무심한 뒷모습이었다. 도화는 도망가야 한다면 지금 이 순간이라며 눈을 자신의 집으로 이어지는 계단실 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빠르게 멀어지는 도명의 뒷모습에 끙끙대다가 조급한 표정으로 그의 뒤로 쫓았다.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심장이 바닥으로 뚝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도화가 겨우 도명의 지하실에 발을 들여놓으니 도명이 느긋한 자세로 침대 모서리에서 다리 꼬고 앉아 있었다.
“저 바닥 더럽히는 거 정말 싫어합니다. 욕실에서 할 겁니다. 들어가요.”
도명의 말에 도화는 벌써부터 정신이 아찔해졌다. 온갖 이상한 도구들이 가득한 그곳에서의 기억을 더듬으니 날개 뼈가 움찔거렸다.
“들어가요. 두 번 말하는 중입니다.”
도화는 도명에게 혼이 날까 봐 잘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도명의 욕실로 옮겼다. 차라리 도명이 같이 들어왔으면 덜 떨렸을 텐데 도명은 침실에서 뭔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도화는 자신도 모르게 문이 달려서 그나마 가장 안정적이라고 느껴지는 샤워 부스 안에 들어가 있었다.
그래 봤자 걸쇠도 없어서 그를 지켜 줄 것 같지는 않지만. 도화는 평생 비웃었던 고양이가 상자 안에 들어가는 이유에 대해서 깊은 공감을 하고 있었다.
욕실 문이 다시 열리고 도명이 작은 컵과 밧줄을 가지고 들어왔다. 도명은 준비한 것을 나무로 된 스툴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무심한 표정으로 도화가 쭈그리고 앉아 있는 샤워 부스로 걸어 들어왔다.
“원하는 플레이가 있었나 보네요.”
도명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게 아니라.”
도명이 도화에게 시끄럽다는 듯이 손짓을 했고 그의 손에는 어느새 차가운 색감의 샤워기가 잡혀 있었다.
“같은 동성애자 앞에서 옷 벗어 본 적 없죠?”
도명은 자신이 보고 있다고 셔츠조차 못 벗고 있던 도화의 모습을 상기하며 말했다.
“네.”
도화가 긴장감이 어린 표정으로 겨우 말했다.
“그냥 옷 벗기는 것만으로도 도화 씨 몸이 매질로 퉁퉁 부을 것 같으니 준비 운동은 가볍게 합시다.”
도명이 샤워기를 도화의 머리 위에 들어 올렸다. 차가운 물줄기가 도화의 머리를 타고 내려와 그의 온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도화는 몸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가 자신을 은근히 애무하는 것 같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물줄기가 도화의 쇄골을 지나 젖꼭지에서 두 줄기로 갈라져 흘러내렸다. 물에 젖으니 가벼웠던 옷이 진득한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도화 씨. 다음에 저랑 놀 때는 하얀 색 옷만 입읍시다.”
도화는 도명의 말이 순간, 이해가 안 갔지만 일단 배운 대로 대답을 했다.
“네.”
“이제 대답 제법 예쁘게 하네요. 이해는 하고 대답하는 건가요?”
“아니요.”
도명이 흐뭇한 표정으로 샤워 헤드를 도화의 가랑이 사이에 가져다 댔다. 도화의 가랑이 사이로 차가운 물줄기가 쏟아졌다.
도화는 이런 이상야릇한 상황이 처음이라서 그런지 허벅지 안쪽 살 사이로 물줄기가 흐르는 느낌에도 어깨를 웅크렸다. 도명이 남은 한 손으로 젖은 도화의 머리카락을 말아 올렸다. 촉촉한 느낌이 제법 괜찮았다.
도명이 무릎을 굽혀 도화와 시선을 맞추었다. 도명과 도화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말끔했던 도명의 하얀 셔츠에도 물이 튀기 시작했다. 유난을 떠는 도명이 질색할 일이었지만 웬일인지 그는 크게 신경을 안 썼다.
도명이 한기에 벌벌 떨며 살짝 벌려진 도화의 입술 사이로 엄지를 집어넣고 그의 치열을 훑었다. 손가락을 조금 더 깊숙이 밀어 넣자 말캉한 혀가 느껴졌다.
“읏, 우웃.”
“안이 제법 뜨겁네요.”
도명은 도화의 뜨거운 입안을 손가락 끝으로 느끼느라 들고 있는 샤워 헤드를 조금은 방치해 둔 탓에 그의 셔츠 어깨가 물에 보슬보슬 젖기 시작했다. 그의 하얀 셔츠가 젖어 들어가는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정도가 심해져서 그의 탄탄한 가슴에까지 넘나들었다.
도명이 뼈대가 굵은 편이 아니라 그의 몸에서 어떤 단단함을 상상하게 될 줄을 몰랐다.
그의 인상은 언제나 섬세하다는 편이 어울렸지 어떤 묵직한 힘과는 상관없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도명의 셔츠가 투명 비닐처럼 젖어 들어가 몸에 달라붙었고 그렇게 해서 드러난 그의 굴곡진 가슴선을 보니 그의 단단함을 상상하게 됐다.
도화는 자신도 모르게 도명의 반쯤 젖은 몸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도명 역시 그런 도화의 시선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일부러 자신의 몸이 젖어 들어가는 것을 방치한 것이었다. 도화는 이제야 도명이 말한 하얀 옷을 입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깨달았다. 하얀 옷은 물에 젖으면 안쪽 살을 아스라이 비추었다.
도화는 끈적거리는 눈으로 도명의 몸을 훔치며 움찔거리는 손을 애써 주먹 쥐었다. 노골적으로 그의 가슴에 손을 얹고 만져 보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가 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도화의 얼굴은 이미 머릿속 상상으로 빨갛게 익어 있었다.
도명의 무릎 끝이 도화의 가랑이 사이를 눌렀다. 단단한 뼈를 감싼 살덩어리를 통해 도화의 뜨거움이 느껴졌다. 도명이 도화의 부끄러워하는 눈을 응시하며 입꼬리를 이죽거렸다.
“도화 씨, 발정 났습니까?”
“아니요.”
“정말 도화 씨는 나쁜 버릇들이 많습니다. 이런 발정 난 눈과 몸의 열기를 하고선 감히 돔의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겁니까?”
도명이 도화의 턱을 거칠게 쥐고 흔들며 말했다. 도화는 입술을 작게 열며 ‘잘못했습니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바지 안에 손을 집어넣으세요.”
“아. 지금 당장이요?”
도화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도명의 손이 도화의 뺨을 향해 올라갔다. 도화는 자신이 자신도 모르게 질문을 했다는 생각에 심장이 덜컹 내려갔다.
“이 정도 체벌은 도화 씨에게 우습나 봅니다.”
도명은 정말 화가 난 사람처럼 빠른 걸음으로 온갖 도구가 진열된 선반으로 걸어갔다. 혼자 유리로 된 투명한 샤워 부스 안에 남겨진 도화는 커다란 몸을 웅크리며 곁눈질로 도명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도명이 얇은 막대기 끝에 세모꼴로 된 가죽 패치가 달린 것을 가져왔다. 그리고는 도화의 티셔츠를 구둣발로 말아 올렸다. 단단한 가죽과 밑단의 고무 느낌이 도화의 젖꼭지를 아리게 스쳤다.
“읏, 으읏.”
욕실 바닥엔 샤워기가 방치되어 있어 아직도 물이 줄줄 새어 나온 채 잔디 위 스프링클러의 물 돌아가듯 혼자 바닥을 빙빙 돌고 있었다. 도화는 여러 가지 의미로 정신이 사나워졌다. 사나운 물줄기는 예상치 못한 반향으로 흩뿌리고 있고 도명의 손끝에는 무서운 매가 들려 있었다.
그런 와중에 도명의 셔츠는 아까보다 젖어 들어가 그의 단단한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하얀색 셔츠 사이로 그의 살갗이 은은하게 스며들었다. 공포와 야릇한 감정이 이상한 모양새로 뒤엉켜 있었다.
“도화 씨, 손.”
도명의 깔끔하게 떨어지는 말에 도화는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양손을 곱게 포개어 그의 손바닥 위에 얹었다. 도명은 잘 따라오지 못하는 그를 책망하듯 어금니 사이로 그의 손가락 하나를 집어넣고 잘근잘근 씹었다. 눈물이 눈가에 핑 돌 정도로 아팠다.
아파서 뼈마디마저 아릴 정도가 되면 도명의 뭉근한 혀가 손가락을 진득하게 감아왔다. 아픔과 야릇한 감각 사이에서 도화의 턱이 파르르 떨렸다.
도명이 입속에서 도화의 손가락을 빼고 나니 각인처럼 도명의 잇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도명은 그 각인 같은 잇자국을 자랑스럽다는 듯이 쳐다보다가 혀를 세워 맛을 보듯 핥았다.
그러다가 가지런히 모인 도화의 두 손목을 한 손으로 세게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도화의 머리 위로 두 손을 고정시켰다. 두 손이 머리 위로 올라가니 자연스럽게 도화의 가슴이 앞으로 휘어졌다.
도화의 옷은 질척거릴 정도로 젖어 있어서 아까 도명이 구둣발로 밀어 올린 티셔츠가 가슴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도명이 가져온 패들을 손에 들고 자신의 손바닥 위에서 탁탁 쳤다. 공기를 날카롭게 가르는 소리와 살 표면에서 울리는 소리가 매서웠다. 사실 도명이 들고 온 것은 강도만 적당히 해도 뺨을 연달아 맞는 것보다는 가벼운 벌이었다.
도명의 입장애선 도화가 처음이라고 봐 줘도 한참 봐 주고 있는 것이다.
패들이 도화의 가슴을 쓸어 넘겼다. 도화는 겁을 먹은 듯 숨을 옅고 빠르게 쉬었다. 도화의 손이 도명의 손바닥 안에서 빠르게 꼼지락거렸다. 겁을 너무 먹은 나머지 여차하면 저지를 할 기세였다.
“쉬- 할 만할 거예요.”
도명의 말투는 온화했으나 눈빛은 단호하고 절대적이었다.
“도화 씨는 날 실망시킬 건가요?”
“아니요.”
도화가 울먹이며 말했다. 도명이 패들로 도화의 가슴을 연달아 세 번 후려쳤다. 원래 한 대 때리고 패들 가죽 부분으로 살가죽을 부드럽게 쓸어 넘기지만 도화처럼 겁 많은 사람은 그 틈을 더욱 못 견딜 것 같았다.
매섭게 몰아치는 매타작에 도화의 다리가 달달거렸다. 도명의 말대로 못 견딜 만한 통증은 아니었다. 하지만 처음 경험해 보는 자극에 너무 놀라서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왔다.
도화는 패들로 인해 붉게 물들어진 가슴을 하고 도명에게 매달렸다. 도화의 콧날이 도명의 허벅지에 파묻혔다.
“견딜만합니까?”
“아니요.”
도화가 도명에게 애원하듯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얽으며 말했다.
“정말 견딜 수 없다면 당장 바지 안에 손 집어넣고 수음해요.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도명의 명령에 도화는 수치심을 참으며 젖은 바지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손바닥이 페니스에 닿자마자 열기에 홧홧했다. 도화의 고개가 저절로 아래로 떨어졌다. 도명은 그것을 용서할 수 없다는 듯이 턱을 움켜쥐었다.
“도화 씨, 페니스가 바지 표면을 들어 올릴 정도로 흥분해 봐요.”
도화에게는 엄청난 일이겠지만 도명의 입장에서는 아주 감질나는 상황이었다. 도명은 그나마도 도화가 자신 앞에서 바로 바지를 벗을 수 없을 거라는 수준에 맞춘 것이었다. 이마저도 힘들어하니 이 와중에 고문당하는 것은 도화뿐만이 아니었다.
“도명 씨…….”
“내 이름을 부른다고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 익숙해져야 할 겁니다. 도화 씨는 발정 나고 저는 그런 도화 씨를 내려다보는 이 상황에 익숙해져야 우리는 앞으로 더 나아 갈 수 있습니다. 겨우 이게 도화 씨 한계는 아닙니다. 저같이 인내심 좋은 주인을 이용하려 든다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합니까?”
도명의 조근조근한 협박에 도화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바지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손을 집어넣으니 페니스가 내뿜어 대는 열기로 손바닥이 뜨겁고 축축했다. 도화는 부끄러움에 온몸이 바짝바짝 타는 느낌이었다. 벽들에 수없이 많은 눈들이 박혀 있어서 자신만 쳐다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본격적으로 가지고 놀아 봐요. 도화 씨가 자기 몸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봅시다.”
도화는 페니스를 손에 쥐고 손가락을 바짝 조였다. 벌써 손이 자꾸 미끄러지는 게 긴장한 탓도 있었고 페니스가 뜨겁게 달궈져서 쿠퍼 액이 나온 탓도 있었다.
도명은 자꾸 아래로 축축 처지는 도화의 고개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열에 달아오른 도화의 젖은 눈동자와 도명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도화는 순간 심장이 너무 가쁘게 뛰어서 눈을 질끈 감았지만 도명이 그런 그를 질책하듯 귓불을 세게 늘렸다.
“도화 씨는 참 말을 잘 안 듣는 게 천상 마조히스트인가 봅니다. 이게 더욱 격렬하게 괴롭혀 달라고 떼쓰는 게 아니면 뭡니까?”
도화가 젖은 눈을 살짝 열자 즐거워 보이는 도명의 얼굴이 있었다. 젖은 눈을 겨우 뜨는 도화의 눈이 너무 야해 보였다. 도명은 도화의 떨리는 눈꺼풀을 핥고 싶어서 괜히 혀로 자신의 입술만 더듬었다.
대충 보면 도화의 얼굴에서 곱상한 면은 하나도 없어 보이지만 이리 자세히 뜯어 보니 섬세한 부분이 많았다. 도화의 속눈썹은 긴 편은 아니었지만 구둣솔처럼 촘촘히 나 있는 게 제법 보기 좋았다.
“사정할 것 같으면 솔직히 말하세요. 도화 씨가 솔직하지 않으면 손해 보는 쪽은 제가 아니라 도화 씨일 겁니다.”
도명이 스툴에 앉아서 흥분할수록 자꾸 다리를 좁히는 도화의 무릎 사이에 발을 끼워 넣었다.
팽팽한 기 싸움이 도명과 도화의 사이에서 흘러갔다. 본능적으로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기 싫은 도화와 그것을 막고자 하는 도명 사이의 기 싸움이었다. 두 남자의 허벅지가 서로가 주는 힘으로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당겨졌다.
“하아… 하아… 하아…….”
도화가 바지 속에서 페니스를 쥐고 흔들며 터져 나오려는 숨을 삼켰다. 하지만 이미 욕실 안은 뜨겁고 습한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도명은 도화가 얼마큼 흥분했는지 더욱 잘 보기 위해 도화의 허벅지 안쪽에 구둣발을 얹고는 힘주어 벌렸다. 도화는 허벅지 안쪽 힘줄이 팽팽하다 못해 찢기고 있다는 기분마저 들었다.
도화의 페니스 끝에서 나온 점도 높은 것이 비적비적 새어 나오자 바지 옷감의 색이 다르게 물들었다. 도명이 도화의 가랑이 사이, 들어 올라간 옷감의 선단을 엄지 끝으로 지그시 눌렀다.
확실히 묽은 물에 젖은 부분과는 다른 점도와 미적지근한 온도가 야릇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도명은 그 끝에서 손가락으로 작은 원을 그리며 도화의 페니스 끝을 희롱했다.
“읏.”
도명의 손길에 놀라서 도화의 눈동자가 동그란 모양으로 커지다가 부들부들 떨렸다. 도화는 도명의 손길에서 오는 쾌감이 두려우면서도 그가 자신을 더욱 기쁘게 해 주기를 바랐다.
“너무 즐기는 얼굴이라 흥미가 떨어지네.”
도명이 심술이 난 얼굴로 손가락을 치웠다. 그러자 잔뜩 단단해진 도화의 페니스 끝이 옷감을 들어 올린 채로 스프링처럼 아래위로 흔들렸다.
“도화 씨, 제법 달아올랐습니까?”
도명이 도화의 등허리를 쓸어 올리며 속삭였다.
“네. 하아…….”
도명의 질문에 도화는 홀리듯 대답했다. 도명은 도화가 눈물을 머금은 채 맹목적으로 대답하는 모습에 배 속이 뜨겁게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도명은 그런 도화의 모습이 흡족한 듯 혼자 연신 고개를 끄덕이다가 눈금이 세밀하게 새겨진 비커를 도화는 눈앞에 내밀었다.
타일 바닥에 유리가 긁히는 소리가 소름 돋았다.
“원래 돔의 허락 없이 함부로 발정하지 않도록 가르치는 게 기본이긴 합니다만. 도화 씨는 발정하지 않도록 가르치기 위해 발정하는 법부터 가르쳐야겠습니다. 이것 참. 젖먹이도 아니고.”
도명이 도화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다가 입속에 손가락을 욱여넣으며 말했다. 도화는 자신의 입속을 점령한 손가락들에 혀를 본능적으로 뒤로 물리다가 한계를 느꼈다.
결국은 뒤로 물리던 혀를 앞으로 내밀며 도명의 손가락을 핥는 꼴이 되었다. 도명의 깔끔한 손가락이 도화의 타액으로 흥건하게 젖었다. 웬일로 깔끔함을 지독하게 떨어대는 도명이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까지 앞을 실컷 만지게 해 줬으니까 이 시간 이후로 앞을 만지면 혼납니다. 알아들었으면 대답 대신 혀로 내 손가락 바짝 조여요.”
도화는 망설이다가 도명의 눈빛이 매서워 그가 시키는 대로 혀에 힘을 잔뜩 주며 도명의 손가락을 감았다. 도명은 도화가 제법 조여 주는 힘이 센 것이 펠라를 시키면 기가 막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운 시일 내에 펠라하는 법을 가르쳐 줘야겠다는 구체적인 계획마저 들었다. 이 맹한 표정이라니. 여러모로 귀여워 죽겠다.
“바지 내리고 뒤 만져요. 만지는 방법은 제한을 안 둘게요. 앞만 안 만지면 됩니다. 그리고 여기 내가 표시한 눈금 보이죠? 그만큼 정액 채워 놓읍시다. 시간제한도 안 둘게요. 제가 원하는 만큼 채우면 플레이는 끝나는 겁니다. 여러모로 봐 주는 게 참 많죠?”
도명은 설명을 끝내고 도화에게 대답하라는 듯이 그의 입속에 욱여넣은 손가락 마디를 구겼다. 도명의 단단한 손톱이 도화의 여린 혓바닥을 긁었다. 하지만 도화는 울먹울먹한 표정으로 그가 원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도명은 도화의 턱을 살살 긁으면서 인자한 척 사근사근한 눈웃음을 지었다.
“도구는 많으니까 맘껏 써요.”
하지만 도화는 땀만 뻘뻘 흘릴 뿐 도명의 손가락을 조이지 않았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봄날 같았던 그의 얼굴엔 싸한 바람이 불었다.
“왜 대답을 안 하죠?”
도화가 도명의 손가락에 의해 틀어 막힌 입으로 어떻게든 말을 하려고 입술과 혀를 움직였으나 억세게 잡아 오는 도명의 나머지 손에 의해 제지당했다.
“여기서 할 말은 네, 밖에 없어요.”
도화는 도명의 내뿜어 대는 위압감에 눈을 질끈 감으며 도명의 손가락을 세게 감아왔다. 그제야 도명은 굳은 얼굴을 풀며 도화의 입술에서 손가락을 빼냈다.
“일단 지금 참고 있는 것부터 뱉으면 되겠네요. 배려해 준 거예요. 처음 시작이 순조로워야 나머지가 그나마 만만해 보일 테니까요. 자꾸 제가 배려해 주는 것들을 못 알아들어 먹으면 내가 너무 속상하지 않겠어요?”
도명이 도화의 뒷목을 잡고 그의 젖은 바지를 내렸다. 도화는 순식간에 아랫도리가 허전해지는 기분에 어깨를 떨면서도 차마 반항하지 못했다.
“섭으로서 직접 못 하고 돔의 손을 타고 있는 걸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네.”
도화가 발갛게 드러난 자신의 흥분한 페니스를 내려다보며 눈만 빠르게 끔뻑거리며 겨우 대답했다. 지금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도명이 도화의 목에 감긴 가죽 벨트의 끝자락을 잡고 등허리를 무릎으로 눌러 자세를 잡게 했다.
“양에 자신이 있나 봅니다. 이미 흥분했을 때 해결할 생각 못 하고? 아니면 이미 뒤로 가는 거 해 봐서 꽤 자신 있습니까?”
“뒤로… 해 본 적 없습니다.”
“그렇다면 뭐해요?”
도명의 말에 도화는 여전히 얼에 빠져 있으면서도 무릎으로 한두 발짝 자리를 옮겨 비커 입구와 귀두를 맞추었다. 귀두가 유리면에 닿자 그 차가운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도화는 흥분을 꽤 지연시켰던 터라 바로 정액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투명한 비커 벽을 타고 탁한 액체가 진득하게 흘러내렸다.
지금까지는 혼자 자위하면서도 괜히 페니스 끝에 터져 나오는 것이 겸연쩍어 휴지로 빠르게 닦아 내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투명하고 눈금까지 신랄하게 적혀 있는 물건에 정액을 담아내다니. 한 번 사정한 것만으로도 도명이 지정한 양의 3분의 1을 채웠다.
도명은 도화가 밤새 이 욕실에서 어쩔 줄 모르며 허덕이는 걸 상상했지만 생각보다 놀이가 빨리 끝날 것 같아 아쉬웠다. 도명은 다음에는 레벨을 높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도화를 내려다보았다.
“원하는 도구 있습니까?”
“…….”
“도움 없이 자신 있나 보네요.”
“아니요. 뭘 몰라서…….”
도화의 말에 도명은 작은 알약처럼 생긴 바이브레이터와 젤을 도화의 앞에 내려놓았다. 가볍게 뒷구멍을 자극하기에 좋은 도구들이었다. 도화가 처음부터 뒷구멍에 묵직한 무언가를 넣으며 느낄 사람은 아니라는 판단이었다.
그리고는 도화의 목에 있는 가죽 벨트 구멍에 사슬을 잇고 욕실 벽에 고정된 고리에 매달았다. 도화가 마음만 먹으면 풀 수 있을 정도로 느슨한 줄이었지만 목뼈 뒤로 느껴지는 묵직한 쇠사슬의 느낌에 간담이 서늘했다.
도화는 도명의 남다른 성적 취향에 대해서 알게 된 이후로 저녁마다 SM에 대해서 틈틈이 알아봤었다. 그래서 이런 구속 플레이에 대해서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직접 겪어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정말 인간 이하의 대접이라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싶어서 도화는 뒷목이 나무토막처럼 빳빳해지고 눈은 뻑뻑해졌다.
“기분이 유쾌하지 않나 보네요.”
“네.”
도화의 대답에 도명은 고민에 빠진 듯 자신의 뺨을 쓰다듬다가 가져온 밧줄로 도화의 가슴에 팽팽하게 맸다. 그리고는 목줄을 날개 뼈 사이 매듭에 연결했다.
도화의 몸 무게중심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그 압박감이 심해졌다. 순간 숨마저 무의식적으로 간헐적으로 쉬게 할 정도였다. 하지만 압박감이 느껴질수록 가슴 전체 근육이 전체적으로 터질 듯이 조여 오는 느낌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좀 즐거워하네.”
“그게…….”
도화는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듯 변명을 하려 했지만 도명의 눈빛을 보니 이미 모든 것을 들켰다는 걸 알았다.
도명의 손가락이 묶임으로써 팽팽하게 솟아난 도화의 젖꼭지. 회음부와 허벅지 안쪽 근육이 만나는 부분을 차례로 튕겼다. 빠르게 튕겨 낸 거지만 도화는 자극에 부르르 떨렸다.
“앗… 앗. 앗.”
도명이 살짝 만져 주는 것만으로 벌써 도화의 페니스가 반쯤 섰다. 이쯤 되면 도명이 도화의 음란함에 대해서 과소평가한 것이 분명했다. 엉덩이로 당하는 것에 대한 감각을 개발하기도 전에 정액을 질질 쌀 기세였다. 도명은 못마땅한 듯 한쪽 눈썹을 올리며 도화를 쳐다보았다.
“도화 씨, 제가 도와주면 좋겠습니까?”
도화는 도명의 말에 크게 흔들렸다. 그가 자신에게 할 행동들이 두려웠으나 도명의 손길을 받을 때마다 살갗 안쪽까지 달달한 울림이 느껴지는 게 진심으로 싫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조롱 섞인 손짓이라도 좋았다. 그가 자신을 만져 주기만 한다면 말이다.
“네.”
도화가 애써 용기 내서 말했다.
“지나치게 돔에게 의지하려 드네요.”
“…….”
도화는 도명이 자신을 시험한 것인데 답지를 잘못 낸 것 같아 안절부절못했다. 도명은 아주 얇은 회초리를 가져왔다. 너무 얇아서 대가 갈대 굵기 정도 되었다. 길이도 짧아서 겨우 손바닥 두 배 정도 했다.
하지만 탄성이 좋은 편이라 도명이 회초리 끝부분을 잡았다. 손바닥 위에 착지하도록 놓으면 살에 달라붙는 소리가 날카로웠다.
“도와주겠습니다. 대신 어리광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겁니다.”
도화가 그제야 도명에게 잘못했다고 웅얼거리는 말투로 서둘러 말했지만 도명은 단호하게 고갯짓을 했다. 도명이 짧은 회초리를 도화의 엉덩이뼈 부분에 갖다 댔다. 그리고는 볼기 골 사이로 회초리를 밀어 넣고 위아래로 쓸어 넘겼다.
지나치게 얇은 면적에 몰입된 감각에 도화의 상체가 긴장감에 바깥으로 휘었다. 도명은 회초리의 끝부분을 잡고 탄성이 최대치가 되도록 밖으로 휘었다. 그리고는 도화가 오랜 긴장 끝에 잠시 근육을 늘어뜨리는 순간 놓았다.
“흐앗!”
회초리가 도화의 엉덩이 틈 사이로 완벽하게 착 달라붙으며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무딘 감각을 날카롭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도화가 못 견디겠다는 듯이 상체를 들어 올리고 있던 팔꿈치를 반쯤 접었다.
도명은 도화가 무너지든 말든 도화의 볼기 틈을 얼얼한 감각으로 가득 차게 했다. 도화가 팔꿈치로 차가운 타일 바닥을 기며 앞으로 나아갔지만 벽에 고정된 목줄 때문에 더 이상 도망가지 못했다.
“읏… 하아… 앗. 도명 씨. 읏.”
도명은 도화가 바닥에 반쯤 널브러질 때까지 그의 볼기 틈을 홧홧한 감각으로 가득 채웠다. 연달아 자극받은 도화의 애널은 도명의 부드러운 손가락 끝만 닿아도 자지러지게 했다.
도화의 발기한 귀두가 바닥 타일을 긁었다. 수챗구멍에 빨려 들어가는 투명한 물줄기들 사이로 탁한 체액이 퍼졌다. 도명은 도화의 목줄을 쥐고 무너지는 그의 상체를 억지로 일으켰다.
“도화 씨 지금 질질 싸고 있잖아요. 아깝게 뭐 하는 겁니까?”
도명이 안타깝다는 어투로 이죽거리면서 말했고 도화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비커의 차가운 표면에 귀두를 댔다. 놀라고 지친 지금의 상태 같아선 그냥 바닥에 정액을 흘려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진짜 편해지려면 도명이 하라는 대로 비커에 표시된 선까지 정액을 채워 넣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후들후들 떨리는 몸을 억지로 움직이며 작은 비커 하나에 끼워 맞추기 위해서 바르작대니 서러워서 눈물이 펑펑 나왔다. 도화는 꼬리뼈를 흔들며 사정하면서도 화장실 바닥에 눈물도 흩뿌렸다.
도명은 사정을 하면서도 서럽게 우는 도화의 뒤통수를 달래듯 쓰다듬었다. 도화는 순간 이런 일을 시키는 도명이 너무 미워서 그의 손가락을 물어 버렸다. 잇자국이 선명하게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공격을 받은 도명은 신음 하나 내지 않았다. 오히려 흥분을 참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꼬리 끝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나만 합시다. 지금 도화 씨 울면서 화도 내고, 사정도 하고 있어요.”
지금 이 순간에도 도화의 귀두 끝에는 하얀 정액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오고 있었다. 도명이 도화의 앞으로 느긋하게 걸어 나와 상체를 숙여 그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리고는 얼얼한 자신의 손가락을 주물럭거렸다. 아픔을 못 견뎌서 손가락을 만지작거린다기보다 버릇없이 군 개에게 네가 한 짓을 보라는 것 같은 느긋한 움직이었다. 도화는 아직도 서러움 반 분노 반인 상태에서도 잇자국이 선명하게 생긴 도명의 손가락을 보며 움찔거렸다.
사실 도명은 화가 난 척을 하고 있지만 이 와중에도 이 순한 사람이 마음에 들어 흡족한 상태였다. 물어 버리려면 제대로 물지, 겨우 이 정도 깊이의 잇자국이라니.
도명이 너무 원망스러워 무는 순간에도 크게 다칠까 봐 어느 순간부터는 턱에 힘을 푼 악력이었다.
‘아, 너무 예뻐 죽겠는데, 버릇은 한번 잘못 들이면 큰일이고. 이것 참, 난감하네.’
도명이 도화를 어찌할까를 고민하며 턱을 쓰다듬는 동안 도화는 한참 흥분하던 상태도 끝났다. 도화의 바람 빠진 페니스가 공포로 가랑이 사이에서 너덜거리고 있었다.
‘얼굴 부은 것도 이제 다 가라앉았고 그냥 뺨 한 대 세게 올려쳐? 아, 가혹하게 벌주기엔 이렇게 귀여운데.’
도명의 눈앞에는 잔뜩 풀이 죽어서 어깨선이 둥글게 말린 도화가 있었다.
“무서웠어요?”
예상과는 다르게 다정한 도명의 말소리에 도화가 참고 있던 울음을 한꺼번에 터뜨렸다. 이제야 도명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았다.
‘이러면 반칙이지.’
“아직 못 채운 건 알죠?”
도명이 도화의 허벅지 사이에 있는 비커를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마저 채웁시다.”
“네.”
“용서해 주면, 앞으로는 더 착해질 수 있습니까?”
“네.”
“처음이니까. 달래 주는 겁니다. 처음의 특권이니까 딱 지금만 만끽해요.”
도명은 그리 말하고는 계속 눈물을 뚝뚝 흘리는 도화의 뺨을 부드럽게 뭉갰다. 열기와 눈물에 퉁퉁 부은 게 제법 기분이 좋았다.
도명은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를 부르며 도화의 뺨을 뭉개다가 도화가 두 팔로 자신의 목을 감게 했다. 도화는 반쯤 발가벗은 채 도명의 품에 안기자 그에 대한 원망도 서러움도 눈 녹듯 녹아드는 느낌이었다.
“부드럽게 흥분시킬 테니까 긴장 풀고. 할당량은 채워야 하는 거잖아요.”
도명이 도화의 양 볼기에 손을 하나씩 얹은 후 위아래로 흔들며 말했다. 도명의 손길에 다시 발기를 시작한 도화의 페니스가 도명의 슬랙스에 닿았다. 도명이 바이브레이터를 켰다.
도화는 도명의 품 안에서 낯선 진동음에 어깨를 움찔거렸다. 잦아들기 시작했던 공포가 다시 밀려오기 시작했다.
“부드러울 겁니다. 긴장 풀고.”
바이브레이터가 도화의 애널에 닿았다. 자극에 발갛게 부어 있던 애널이 진동을 느끼자 소스라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도명의 손짓에 따라 도화의 애널 구멍이 열렸다 닫히는 것을 반복하며 요동쳤다. 도명은 호들갑을 떠는 도화의 애널에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큰일 났네. 뭐가 이렇게 방정맞습니까.”
도명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도화의 볼기를 팡 때리며 말했다. 도화는 이번에는 자극과 민망함에 애꿎은 입술만 물어뜯었다가 푸는 것을 반복했다. 도화가 제대로 흥분을 하기 시작했는지 도명의 목덜미에 얼굴을 깊숙이 묻고 습한 숨을 내뱉었다.
도명은 바이브레이터를 도화의 뻐끔거리는 애널 입구에 둥근 머리 부분 살짝 집어넣었다. 안쪽까지 묘한 자극이 이어지자 도화가 어쩔 줄 모르고 도명의 품에서 발만 동동거렸다.
“하앗!”
도명은 만족감에 도화의 머리카락을 진득하게 훑었다. 목에는 자신의 벨트를 두르고 터질 것 같은 가슴을 하고 쾌락에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라니.
“잘하고 있어요.”
도명의 칭찬에 도화는 점점 진득하게 밀려오는 바이브레이터의 공포를 겨우 참았다. 당장이라도 안에는 넣지 말아 달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조금만, 아주 조금만 참으면 도명이 자신보고 잘했다고 칭찬해 줄 것 같았다.
도화의 엉덩이뼈가 위아래로 저절로 움직였다. 도명은 도화가 처음 느껴 보는 쾌락에 이 움직임을 참을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일부러 가만히 있으라는 듯 그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휘갈겼다.
그러면 도화는 주먹을 꽉 쥐어가며 조금은 참다가 이내 애달픈 표정으로 발을 동동거리다 엉덩이를 흔들었다. 그 와중에 도명이 다시 사납게 변할까 봐 큰 눈으로 곁눈질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앗 저. 도명 씨.”
도화가 도명의 어깨를 감싸 쥐며 애달픈 목소리 말했다. 도명은 다 안다는 듯이 도화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속삭였다.
“알아요. 갈 것 같잖아요.”
“네. 네.”
도화가 다급한지 다리를 오므리며 연달아 대답했다. 도명이 도화를 품에서 놓아 주었다. 도화는 비커 안에다가 파정하기 시작했다.
***
도화는 오히려 가장 참기 힘든 순간은 플레이할 때보다 끝난 후라는 것을 처음 느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자신의 앞에는 자신의 정액이 찬 비커가 있고 자신은 사람이 아닌 개의 형상으로 도명의 욕실에 매달려 있었다.
도명은 이런 상황에 전혀 민망함이 없는지 여유로운 태도로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도화는 지금 이 순간 자신부터 풀어 줬으면 하는데 도명에게는 주변 정리가 더 중요한 모양이었다. 도화는 얼굴이 새빨갛게 익은 채 턱이 쇄골에 닿을 정도로 푹 숙이고 있었다.
“저, 도명 씨. 저는 언제…… 풀어 주나요? 아, 질문하지 말라고.”
도화가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날아와야 할 도명의 손은 날라 오지 않았고 웃음을 참는 그의 얼굴만 보일 뿐이었다.
“질문을 왜 못 합니까? 플레이 끝났는데.”
“아.”
갑자기 담백해진 분위기에 도화는 더 민망한 기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저, 그래서 저는 언제?”
“아, 그거. 그냥 도화 씨가 지금 풀 수 있는데. 난 또 좋아서 계속 그러고 있는 줄 알았죠.”
“아.”
생각해 보니 두 손이 자유로우니 못 풀 것도 없었다. 목에 있는 건 벨트의 버클만 풀면 되고 가슴 부분을 감싼 것 역시 매듭 하나만 당기면 전체가 풀렸다. 할 수 있었는데 한참을 벌서듯이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
도화는 민망함에 헛기침을 하며 몸에 감싸인 것을 하나둘 푸르기 시작했다. 도명은 웃음을 참느라 볼을 부풀리며 혼자 어설픈 몸짓으로 낑낑대는 도화에게 다가왔다.
원래 플레이가 끝나면 묶은 것들은 혼자 풀 수 있든 못 풀든 도명이 정리해 주는데 도화가 가만히 기다리는 모습이 재밌어서 일부러 그냥 둔 것이었다.
“가만히 있어 봐요.”
도명이 직접 도화를 결박했던 것을 풀어 주기 시작했다.
“아니요. 저도 풀 수…….”
“알아요. 만세 자세 해 보세요.”
“네?”
“옷 이대로 입고 가게요? 다 젖었는데요?”
“옷은 제가 벗을 수…….”
“알아요.”
아는데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지만 도화는 일단 도명이 하라는 대로 두 팔을 위로 벌렸고 도명은 어린아이 옷 갈아입혀 주듯 도화의 셔츠를 벗겨 주었다.
내내 가슴 위까지 말려 있어서 옷이 아니라 아주 두꺼운 노끈 같았다. 위, 아래 완전히 나체가 된 도화는 금세 식었던 몸의 열기가 올라왔다.
“저, 옷… 좀 아무거나 좋으니…….”
도명은 일부러 천천히 걸어가서 도화에게 목욕 가운을 던져 줬다. 보송보송하게 잘 마른 두꺼운 목욕 가운이었다. 몸을 가리니 어색함과 민망한 느낌이 조금 가시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도화의 발밑에는 문제의 정액 비커가 있었다.
‘세상에…… 할당량을 넘었어…… 아 쪽팔려.’
도명이 정리하겠다고 하고 도화의 정액을 화장실 변기에 버리려고 했다.
“앗!”
도화는 순간 울컥했다. 저걸 모으자고 그 말도 안 되는 수모를 당했는데 그냥 변기에 후루룩 버리는 거야?!
“아까워요? 음…… 마실래요?”
“무, 무슨 헛소리를 해요? 그게 무슨 목장에서 갓 짠 아침의 우유도 아니고.”
도화의 비유에 도명은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겨우 참았다.
“그럼, 정자은행에 기증할까요?”
‘대체 무슨 미친 대화를 하고 있는 거야!!’
결국 도화는 아까워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아까워해서 미친 대화를 나누게 됐다며 성큼성큼 도명에게 다가와 자신의 손으로 변기에 정액을 흘려보내고 변기 물을 내렸다. 하지만 역시 묘하게 허무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도화는 계속 도명과 있는 것이 곤욕이었다. 아까의 분위기와는 다른 이 묘하게 일상적인 분위기가 이상한 것이다. 주변은 방금 전 했던 온갓 기이한 행동들의 흔적으로 가득한데 말이다.
“아…… 저 올라가도 되죠? 죄송해요. 같이 치우고 싶은데…….”
“아니요. 청소하는 거야 혼자 해도 상관은 없는데 상은 안 받고 갑니까?”
“상이요?”
“어쨌든 무사히 첫 플레이를 끝냈으면 보상을 받아야 보람 있는 거잖아요? 따지고 보면 무사히도 아니지만 뭐, 처음이니까.”
“보상….”
도화는 보상이라는 말에 뭔지는 모르겠지만 기대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기, 기다릴게요.”
“지쳤을 텐데 거실 티 테이블 아래 바구니에 쿠키 있습니다. 먹고 있어요.”
도명이 욕실을 정리하고 나오니 도화가 얌전히 다리를 모으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는 티 테이블 아래에서 찾아낸 쿠키를 햄스터처럼 오물오물 먹고 있었다. 덩치는 저렇게 좋은데 다리와 손은 언제나 가지런하고 온순하다. 물론 잊을 만하면 돌발행동을 크게 하긴 하지만.
도화는 도명이 욕실에서 나오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도명이 나체의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근육이 보기 좋은 모양으로 자리 잡혀 있었다. 그 모양이 과하지 않아서 단단하게 조여진 몸이 우아하게 느껴졌다.
크게 놀란 도화와는 달리 정작 당사자인 도명의 얼굴은 무심해 보였다. 도명이 무심한 표정에, 보기 좋은 모습이 겹쳐져 사람이 아니라 조각상 같았다.
“아, 음…… 왜 벗고.”
도화는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 채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 와중에 눈길이 자꾸 도명에게로 흘러 들어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궁금해하지 마! 몸 가운데 그것을 궁금해하지 마. 이 와중에 크기 뭐, 이런 거 궁금해하지 말라고!’
도화는 결국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슬금슬금 들어 도명의 몸 중심부를 향해 눈동자를 굴리다가 도명의 목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급히 아래로 떨어뜨렸다.
“바닥에 물 떨어집니다. 도화 씨 달래 주느라고 저도 꽤 젖었거든요. 잊었습니까?”
“아…….”
도화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살짝 묻어 나왔다. 은연중에 이게 도명이 말한 보상인 줄 알았다. 도명은 여유로운 동작으로 머리를 털고 냉수를 한 잔 들이켰다.
“아, 정말, 그런 뜻인 거죠?”
“그럼 무슨 뜻이 있겠습니까? 바닥 젖는 게 싫다는 게 그렇게 이해하기 어렵습니까?”
도명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도화는 이게 도명이 말한 보상이 아니라면 역시 그의 몸을 관음하는 건 실례라고 생각했다. 도화는 나쁜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 눈을 아예 감고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도명은 이상한 노래를 흥얼거리는 도화의 앞으로 터벅터벅 다가왔다. 도화는 자신의 뜨겁게 달아오른 귀를 통해 도명이 자신에게 다가왔음을 깨달았다.
눈만 아주 조금만 뜨면 궁금해했던 도명의 페니스를 볼 수 있기에 유혹은 강렬했다. 도화의 노래는 점점 빨라져 거의 중의 염불 수준이 되었다. 도명은 웃음을 겨우 참으며 염불을 외우는 도화의 이마에 손가락을 튕겼다.
“하여간. 사람이 담백하지 못하고 음흉하네요.”
도화가 아릿한 이마를 감싸며 눈을 살짝 뜨려고 하자 도명이 연달아 손가락을 튕겼다.
“사람이 음흉해서 불안하니, 옷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도명이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고 도화는 그제야 눈을 떴다. 그 짧은 시간, 도명에게 얼마나 이마를 많이 맞았는지 도화의 이마가 빨갛게 부어 있었다. 도화는 이마를 감싼 채 도명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갑자기 억울해지기 시작했다. 자신은 갑자기 여기로 끌려와 자위하는 모습까지 다 보여 줬는데 도명의 페니스를 보는 게 뭐가 문제인가 싶었다. 도화는 억울함에 내장이 꼬이는 기분마저 들어 배를 드러낸 채 발을 굴렀다.
“뭐 합니까?”
어느새 말끔한 모습으로 돌아온 도명이 소파 등받이에 팔꿈치를 걸친 채 도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평소 가게 앞에서 보던 그 완벽한 모습 그대로였다.
“저, 그래서 보상이 뭡니까?”
도명이 드러누운 도화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다리를 꼬고는 도화를 향해 입꼬리를 올리며 속삭이듯 말했다.
“자, 여기 보상이요.”
“네…… 뭐가?”
“도화 씨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봐요.”
도명이 두 팔을 소파 등받이에 걸치며 말했다. 그리고는 그윽한 눈으로 당황한 도화를 응시했다.
‘그럴 거면 옷을 왜 입었어!’
“도명 씨 나르시시즘 장난 아니네요. 도명 씨가 보상입니까? 나 참.”
도화는 울컥하면서도 도명의 얼굴을 홀리듯 쳐다보았다.
“부족합니까? 그럴 리가 있겠어요?”
도화는 도명의 나르시시즘을 지적하고 비난하면서도 그의 살결을 손끝에 담고 싶은 건 참을 수 없었다. 도화는 갑자기 넘치는 침 분비샘에 침을 꿀꺽 삼켰다.
“아, 저 키스해도 됩니까? 아까… 삼겹살 먹을 때 하던 것…… 한 번 더.”
“아, 마늘 향 나던 그거 말입니까?”
“제 첫 키스에 대한 평가가… 마늘 향입니까?”
“네.”
도화는 도명의 말에 민망함이 몰려왔다. 깊은 후회가 밀려왔다. 도명에게 입을 맞춘 건 계획한 것도 아니었고 말 그대로 충동적이었다. 그냥 그 순간 입을 맞추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필 타이밍이 왜 그따위였을까? 아 마늘이라도 안 먹었어야 했는데!’
도명이 눈웃음을 살살 치며 하고 싶으면 오라는 듯 손가락질을 했다. 도화는 도명의 요망한 손가락질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도화가 눈을 질끈 감았다.
모든 얼굴 근육을 입술 끝에 모은 터라 콧등도 쭈글쭈글해지고 광대는 봉긋 솟아 있었다. 동그랗게 모인 채 지나치게 자글자글한 입술 근육이 징그러웠다. 도명은 가까워지는 못생겨진 도화의 얼굴에 얼굴을 찡그렸다.
‘못생겼다! 너무 못생긴 게…… 참 귀엽네.’
도화가 도명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도장 찍듯 콕 찍었다. 아까 같이 삼겹살 구워 먹을 때 했던 입맞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의욕만 넘쳐서 힘으로 꾹 눌러 대는 이상한 입맞춤이었다. 거의 박치기에 가까워서 도명의 입술이 얼얼할 정도였다.
‘분명 키스라고 하지 않았던가?’
도명이 의아하다는 눈으로 도화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도화가 다시 한번 입술을 부딪쳐 왔다. 역시 이번에도 입술 박치기 그 이상은 없었다.
“정말 여기까지 받을 겁니까?”
‘정말 뽀뽀만으로 만족하는 거야?’
“아 그 이상해도 되는 겁니까?”
“네. 원래 오늘 도화 씨가 한 플레이 내용으로는 발 하나 정도 내 주는 게 적합합니다만, 뭐 처음이니까 가입 기념으로 칩시다.”
“아, 저 정말 하고 싶었던 게 있는데 도명 씨의 온몸을 내 줘야 하는 거라.”
“욕심도 참 많습니다. 일단 뭐든 해 봐요.”
도명은 흔쾌히 말했고 도화는 잔뜩 발그레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도화는 온몸이 경직된 채 식은땀마저 흘리기 시작했다. 이쯤 되니 도명은 도화가 무서워질 정도였다. 이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의 머릿속엔 뭐가 있는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았으니.
도화가 팔을 뻗어 도명의 허리를 감쌌다. 그리고는 머리를 도명의 가슴에 밀어 넣었다. 도명은 순식간에 후덥지근해지는 공기에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리고는 도화의 숨 가쁜 입김이 묘하게 퍼지는 기분을 만끽했다. 도명의 손이 셔츠의 첫 단추에 갈 때 도화의 진득한 행동이 멈췄다. 그게 다였다.
도화가 온몸으로 도명을 껴안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가쁜 호흡을 천천히 누그러뜨리기 시작했다. 점점 그의 호흡이 편안해졌다.
“하고 싶은 게 포옹이었습니까?”
“아…… 불편합니까?”
“아니 뭐.”
도명이 낮게 웃으며 도화의 뒷머리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었다.
“그런데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합니까?”
“글쎄요. 일단 하고 싶은 대로 안고 본 거라…….”
도화가 어색함을 겨우 참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화는 벌써 어색한지 거리를 두려고 했고 도명이 그의 어깨를 손으로 감싼 후 끌어당겼다. 도화의 말 그대로였다.
포인트가 서로 어긋나서 그렇지 도화의 말대로 그의 온몸이 필요한 일이었다. 열이 많고 포근한 대형견을 안고 있는 느낌이었다. 도명의 입꼬리가 저절로 귀 쪽으로 퍼지는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원래, 호흡을 맞추기 시작하는 관계에서는 플레이가 끝난 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눠야 합니다. 좋았던 점과 싫었던 점에 대해서 말해 봐요.”
“아…… 반드시 말입니까?”
“왜요? 힘듭니까?”
“네. 많이 민망하네요.”
“그럼 이렇게 안고 있는 것보다 담백하게 떨어져서 이야기할까요?”
“아니요. 얼굴 보면 이야기하기 더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런데 꼭 이야기해야 합니까?”
“네, 도화 씨도 즐기려면 말이죠. 저는 도화 씨가 어떤 이야기를 해도 놀리거나 하지 않으니까 편하게 이야기해 봐요.”
밀려오는 민망함을 참는 도화의 손이 도명의 바지 윗부분을 움켜쥐었다가 놓았다.
“일단 싫었던 건…… 개처럼 매여 있던 거.”
“아쉽네요. 전 꽤 즐거웠는데. 모욕당하는 게 싫은 모양입니다.”
도명이 고민에 빠진 듯 자신의 품 안에 가득 담긴 도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그런 게 좋습니까? 제가 엉망이 되는 게?”
도화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서는 이해가 안 간다는 눈으로 도명을 쳐다보았다.
“단순히 줄에 매여 있는 게 싫다면 간단한 거지만 제 앞에서 엉망이 되는 게 싫다면 곤란한 게 많죠.”
“그게 왜 곤란한 건데요?”
“아니면 내가 충분한 신뢰를 주지 못했나?”
도명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게 왜 신뢰랑…… 관련이 있는 건지 저는 도무지.”
“원래. 이게 그런 겁니다. 서로 자신의 가장 밑바닥을 보여 주는 일이거든요. 그러면서 희열과 안정감을 느끼죠. 살면서 타인에게 내가 인정할 수도 없는 자신의 밑바닥을 보여 줄 수 있는 안정감이라는 걸 이해할 수 있습니까?”
도명이 어서 대답을 해 보라는 듯이 도화의 턱을 살살 긁었다. SM을 하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도명은 도화가 한계에 다다르며 무너지면서도 그의 말을 따르는 것을 좋아했다.
엉망인 상태에서도 눈은 무의식적으로 도명을 쫓고 있었다. 다른 건 하나같이 엉망이어도 그것 하나만은 근성이 좋아서 보상도 주고 한 건데. 도화는 본인이 뭘 잘했는지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아주 조금은요…….”
“조금도 아니고 아주 조금입니까?”
도명이 고개를 가로로 내저으며 혀를 찼다.
“도화 씨는 참 어렵네요. 마조히스트가 아니라고 단정 짓기에는 매질에 지나치게 사정하더군요. 앞으로 함부로 싸는 것 때문에 많이 혼날 것 같은데?”
도명이 도화의 귓불을 손톱 끝으로 짓이기며 이죽거렸다.
“그래도 도명 씨가 마지막엔 다정하게 안아 줬던 건 좋았습니다. 중간쯤에는 너무 화가 나서 당장이라도 치고받고 할까 했는데.”
“세상에 감히 돔을 치고받으려고 했습니까? 섭은 그러면 안 돼요.”
도명이 도화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세게 내리치며 말했다. 도화는 도명이 자신의 말에 크게 화가 났을까 봐 얼얼한 엉덩이에는 신경도 안 쓰이고 도명의 눈빛만 살폈다.
하지만 다행히도 도명은 진심으로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아까 욕실 안에서는 그가 그렇게 무서웠는데 플레이가 끝나니 너무 다정했다.
“제가 지나치게 바보 같은 건지…… 그냥 그거 한 번에 서럽고, 무서웠고, 억울했던 감정이 녹는 게…….”
도화의 말에 도명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도화 씨, 욕실 안에서의 모습이 제 진짜예요. 꽤 여러 번 말했잖아요. 저는 도화 씨가 이 모든 걸 이해하고 이 관계를 받아들인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지금은 연기인 겁니까? 그러니까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기술 같은 것 말입니다.”
도화가 도명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질문했다. 아무리 봐도 지금 모습 역시 진짜 같았다. 기술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감상적인 눈빛이었다. 이런 것까지 연기로 가능하다면 그는 지금쯤 충무로에 가 있어야 했다.
“이 모습 역시 제가 맞습니다. 제가 진짜 배우도 아니고. 하지만…….”
“그럼 됐습니다.”
“도화 씨 혼자 결론 내리고 그러깁니까?”
“제 몸인걸요.”
도화가 딱 잘라 말했다. 막무가내인 말투에 도명은 황당했다.
“뭐가 이렇게 어렵게 시작하고도 불안한 건지.”
도명이 골치 아픈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도화가 도명의 허벅지에 얼굴을 기대고 그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았다.
“저, 집을 나온 날이 2008년 3월 12일이었습니다. 아. 집 나온 날보다 중요한 것이 그날이겠네요. 본격적으로 도망치기 시작한 날이요. 2006년 5월 19일. 첫 도망을 친 곳은 18살의 학교 옥상에서였습니다. 그냥, 별거 아니라면 별거 아닌 일이었습니다. 그냥 단짝 친구한테 고백했거든요. 저는 축구부의 부주장이었고 그 친구는 주장이었습니다. 저는 언제나 그를 받쳐 주는 존재였죠. 그래도 마냥 좋았습니다. 제가 그냥 또래와 달리 여자들한테 무심한 편이거나 눈이 지나치게 높은 줄 알았는데 그 친구와 하는 자잘한 일들 하나하나가 즐겁고, 이상야릇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라커룸에서 같이 옷 갈아입는 것조차 못 할 정도가 됐습니다. 아직도 기억합니다. 고백하기 위해 옥상으로 가는 컴컴한 계단을 오르던 때의 기분을. 솔직히 거절당할 확률 99.5%, 좋은 대답을 들을 확률 0.5%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거 있잖아요. 감정을 꾹꾹 눌러 담고 있다가 별안간 갑자기 터져 버린 사건 같은 감정 말입니다.”
“그런 감정 알죠. 감정이 사건처럼 터지는 것. 차이점이라면 저라면 제 안의 폭력성이고 도화 씨는 아주 풋풋한 연심일 뿐.”
“그 친구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할 정도로 심장이 아주 거세게 뛰기 시작했습니다. 계단을 뛰어 올라가느라 심장이 뛰는 건지, 그에게 거절당할 불행한 운명에 무서워서 심장이 뛰는 건지. 0.5%의 고백에 대한 희망인지. 아니면 마냥 그의 얼굴을 보는 것에 대한 기쁨으로 심장이 뛰는 건지. 지금도 그날의 심장 박동이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지독한 후회인지, 돌아가고 싶은 시간에 대한 미련인지. 알 수가 없게 됐죠. 너무 오랫동안 도망 다녀서. 고작 치기 어린 고백 한 번에 지금까지의 모든 인생으로부터 도망 다닌 제가 한심합니까?”
“솔직한 대답을 원합니까?”
“네.”
“지금, 도화 씨가 고백하고 도망간 나이 때 이곳저곳에서 SM 플레이를 하고 다닌 사람한테 진심 어린 공감을 원하는 건 아니죠?”
“그렇겠네요.”
“하지만, 비웃고 싶은 생각은 안 듭니다. 그런데 고백 후에 도망 다닌 이유가?”
도명은 도화가 별안간 열성적이었던 축구부 활동도 그만두었고, 많은 친구들에게 말없이 전학을 갔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지난번 도명의 가게에서 진영이 한 말이었다.
“이성애자한테 고백했는데 잘 됐을 리가요. 거절은 당연했고 한순간 세상에서 제일 가까웠던 사이였던 사람이 제 손길을 벌레 뿌리치듯 뿌리치며 혐오 어린 시선으로 저를 쳐다봤죠. 한 겹 한 겹 오래 쌓아 올린 감정의 시간들이 순식간에 부정당했습니다. 다음날 학교에 가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 친구가 제 고백을 퍼뜨리는 상상이 저의 머릿속을 헤집었습니다. 내게 호의적이었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돌변해서 저를 물어뜯을까 봐. 내 세상이 어느 날 적의로 가득 찼을까 봐 너무 두려웠습니다.”
“원래 사람들은 그래요. 호의가 공포와 혐오로 바뀌는 건 정말 순식간이죠.”
도명은 자신을 무서워하기 시작하는 부모님과 학교 선생님들의 눈빛을 상기했다. 이용할 땐 그렇게 편해했으면서. 사람 태도가 돌변하는 것은 정말 한순간이었다.
“가출은 왜 했어요?”
“그날 밤 저는 부모님께 전학을 가야 한다고 했죠. 모든 사실을 말하니 부모님은 저보다 공포 어린 표정으로 모든 일을 일사천리로 해결하더군요. 아주 멀리 전학 갔음에도 불안해서 좋아하는 축구도 못했죠. 같은 일을 하면 혹시 예전 팀으로부터 소식이 건너서 들릴까 봐. 눈에 튀는 행동도 하지 못했습니다. 최대한 없는 사람처럼 지냈죠. 그 짧은 순간이 삶에 대한 태도로 굳어지는 건 정말 쉬운 일이더군요. 그리고 어느 날 이 모든 게 잘못됐고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다고 느낀 순간, 가출해 버렸습니다. 못난 일이지만 저만큼 혹은 저보다 겁먹고 전학 준비를 서둘러 했던 부모님에 대한 원망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어리고 겁먹고 있었지만 당신들은 어른으로서 조금이라도 용기를 줬더라면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습니다. 네가 이상한 건 아니라고 한마디만 해 줬더라면 다음날 학교에 갈 용기를 냈을 텐데.”
도화는 그날의 일에 대해서 털어놓은 사람은 도명이 처음이었다. 전학을 급히 가야 했기에 부모님께 같은 남자에게 고백한 사실을 말하긴 했지만 그것을 필요한 이야기만 토막 내서 했을 뿐이다.
감정적인 이야기는 한 톨도 섞지 않았다. 유일하게 남은 친구인 진영에게도 하지 못했다. 이 일은 앞으로도 진영에게서 견고하게 지켜야 할 비밀이었다.
“도명 씨가 처음이에요. 제가 한 선택에 도망가지 않은, 그것도 도명 씨 같이 무지막지한 사람을 상대로 말입니다. 도명 씨에 대한 신뢰감이요? 경험 많은 도명 씨에겐 오늘 일이 참 별거 아니겠지만 저에게는 오늘이 처음으로 도망가지 않은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