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와의 저녁 식사
도명에게 엉덩이를 맞은 후 다음 날 저녁, 퇴근한 도화는 옷 갈아입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도화의 집 안은 적막했다. 도화는 어느 순간부터 집에 도착하자마자 기계적으로 공포영화 DVD 틀던 것을 잊었다.
그래서 간만에 집 안에 적막감이 돎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이 윙윙대서 이상함을 못 느꼈다.
도화는 멍하니 있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도화는 자신의 뺨을 손바닥으로 두 번 두들기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도화의 집 창고, 그러니까 도명의 공간과 이어지는 계단실이 있는 곳에서 쿵쿵 소리가 들렸다.
“하하…… 또 꿈을 꾸는 건가. 오자마자 뻗기라도 한 거야 뭐야.”
도화는 냉장고에서 맥주 캔을 꺼냈다. 아직 저녁도 먹지 않았는데 빈속에 맥주부터 들이켤 생각인 것이다. 잠시 적막이 흐르나 싶더니 쿵쿵거리는 소리가 다시 울렸다. 도화는 뺨을 손가락으로 길게 늘였다. 통증이 느껴졌다.
도화는 방금 딴 캔 맥주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채 식탁 위에 올려놓고 창고 쪽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쿵쿵.
도화가 최대한 조심스럽게 계단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지만 성인 남성의 체중을 실은 그의 발꿈치 끝에 나무가 살짝 뒤틀리면서 끼익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도화 씨.”
바닥 아래에서 도명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도화 씨, 거기 있는 거 압니다.”
“무, 무슨 일이시죠?”
“별건 아니고 식사하셨습니까?”
“식사요……?”
도명은 머리 위에서 울리는 도화의 떨리는 목소리에 계단 판 위에 서서 웃었다. 고작 식사하자는 건데 저렇게 긴장할 건 또 뭔가.
“네. 어려운 질문 아니잖습니까. 식사했느냐고요.”
“아직입니다.”
“잘됐네요. 내려와요.”
도화가 도명과 같이 식사를 하겠다고 대답하지도 않았는데 바닥 아래에서 깔끔하게 떨어지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명령 같은 단호함이 묻어 나왔다. 도화가 거절할 틈도 없이 도명이 할 말을 하고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도명의 발걸음이 점점 멀어지자 도화는 얼떨결에 계단실 쪽문을 열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오늘도 깔끔하게 정리된 도명의 갈색 머리카락과 세미 정장을 입은 뒷모습이 보였다.
“아 저…….”
‘역시 우리가 같이 식사할 사이는 아니지.’
“도화 씨 설마 채식주의자거나 그런 건 아니죠?”
“아닙니다.”
“잘됐네요. 채끝살로 스테이크 만들 거거든요. 야채도 구울 건데 야채 가리는 거 있어요?”
“딱히 가리는 음식은 없습니다.”
“골고루 잘 먹고 착하네요.”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대화에 도화가 도명과 저녁 식사를 하는 건 기정사실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저 문 말입니다. 제 쪽에선 오늘 자물쇠를 달아 놨습니다. 도화 씨도 거슬리면 달아요.”
“아, 네.”
어느새 도화는 도명의 가게 안에 있는 커다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테이블 근처 아일랜드형 주방에서는 도명이 카키색 앞치마를 한 채 밑 준비한 재료들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구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도화는 두 무릎이 닿도록 다리를 바짝 모으고 무릎 위에 두 손을 올려놓았다. 착한 어린이가 음식을 기다리는 것 같은 모습에 도명이 피식 웃었다.
“같이 저녁을 먹자고 하실 줄을 몰랐습니다. 어제, 불쾌한 일을 겪어서 더욱 말입니다.”
“제가 불쾌할 만한 일이었단 걸 알아서 다행입니다.”
“아, 네.”
도명의 말에 도화는 테이블 상판의 클래식한 타일 무늬를 훑기만 했다.
“불쾌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같이 식사해야 하지 않겠어요?”
“아. 꼭 그렇게 노력하실 필요는…….”
도화는 도명이 참 피곤하게 산다고 생각했다. 불쾌한 관계는 할 수 있다면 모른 척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
“우리 이 앞에서 거의 매일 볼 수밖에 없는 사이에요. 남은 6개월 길다고 하면 긴 기간인데? 안 그래요?”
“짧다면 짧은 기간이기도 하죠.”
“사람에 따라 그렇죠. 9년 5개월의 시간이 있었는데 정든 사람의 장례식에도 못 올 만큼 거리를 좁히지 못한 사람에게는 확실히 별 것 아닌 시간이겠네요.”
도명의 말에 도화는 순간 숨이 턱 막혀 왔다. 도화가 고개를 들어 도명을 보니 고기를 그릴 위에 올리고 있는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고기가 적당히 잘 달궈진 쇠 표면에 닿자 기가 막히게 좋은 냄새가 가게 전체에 퍼졌다. 딱히 아직까진 크게 배도 고프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배 속이 울렁거릴 정도였다.
“가족도 아닌데 찾아가는 게 이상해서…… 고작 세입자가 이상하잖아요.”
“장례식장에는 가족이 아닌 사람도 많이 와요. 그냥 도화 씨 마음인 거죠. 장례식장에 올 정도로 마음이 닿은 건 아닌 겁니다. 도화 씨는 참 묘합니다. 이모님 장례식 올 정도로 정이 들진 않았는데 왜 그렇게 화를 냈어요? 제가 이곳을 갈아엎을 때마다 말입니다.”
“저도 제가 주제넘었다는 건 압니다.”
“도화 씨를 탓하려는 게 아니라 순수한 호기심입니다.”
“…….”
도명의 질문에 도화는 답이 없었다. 도화가 대답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본인도 모르는 답에 답을 할 수는 없으니까. 도명이 두꺼운 고기의 모서리까지 세워가며 꼼꼼하게 고기를 익혔다. 그리고 잘 다듬은 야채도 고기 육수가 살짝 새어 나온 버터에 굽기 시작했다.
가게 안이 황홀한 냄새로 가득했다. 그릴 옆에는 와인을 졸여서 만든 소스가 냄비 안에서 보글거리고 있었다.
“진짜 뭐라 하는 거 아닌데.”
도명이 금색 테두리가 둘린 하얗고 커다란 접시에 잘 구운 고깃덩어리를 올려놓으며 풀이 죽은 도화를 응시했다. 시선이 느껴지자 도화가 얼떨결에 도명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도명이 도화를 향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도명 씨는 왜 할머니 살아생전 안 찾아왔어요?”
“이모님은 주기적으로 만났습니다. 다만 이곳에서 안 만났을 뿐이지.”
“여기선 왜…… 낡고 투박해서 안 예쁜 벽돌 건물이라서요?”
도화의 말에 도명은 그가 자신을 어떤 이미지로 보고 있는지 알 것 같아 피식 웃었다. 도화의 머릿속에서 도명은 아주 예쁜 거에 환장한 놈인 거다.
“설마, 그런 이유겠습니까? 그저 굳이 올 이유가 없었을 뿐입니다.”
도명이 요리를 하다 말고 창밖 풍경을 응시했다. 할머니의 슈퍼는 허물어졌지만 이 가게 안에서 보이는 건너편 풍경은 여전했다. 저 건너편 풍경까지는 도명이 바꾸지 못한다.
도명의 기억 하나가 올라왔다. 피 흘리는 개를 들고 있는 19살의 도명이 가게 건너편에 서 있었다. 도명이 들고 있는 개의 몰골은 아주 흉측했다. 두툼한 뱃가죽 아래 내장까지 살짝 튀어나와 있었다. 죽은 피로 가득한 축 늘어진 가죽 덩어리였다.
그런 개를 들고 있는 도명의 교복 역시 엉망이었다. 하얀 교복 셔츠에 개의 핏물이 배어 들어가 있었다.
도명은 오래된 기억을 소환하는 것을 그만두고 하고 있던 요리에 집중했다. 안에는 육즙을 가득 품고 있어서 누르면 고기의 핏물이 살짝 올라왔다.
“미디움 레어로 했는데 혹시 그런 거 못 먹습니까? 핏물 뚝뚝 떨어지는 거 말입니다.”
“아니요. 저는 주는 대로 다 잘 먹었습니다.”
도화의 말이 떨어지자 도명은 플레이팅을 시작했다. 잘 구워진 고기를 놓고 잘 구운 채소들을 보기 좋게 얹었다. 그리고 그 위에 소스로 서명을 하듯 그림을 그리고 싱그러운 허브와 블루베리를 고기 위에 얹었다. 고급 레스토랑에서나 볼 법한 제대로 된 요리였다.
도명은 도화가 앉아 있는 테이블 위에 잘 닦은 와인 잔 한 쌍과 스테이크가 담긴 접시, 자주색으로 물든 피클, 황금색의 구운 마늘과 각종 향신료가 담긴 올리브오일에 적신 바게트를 올려놨다. 그리고 와인 병 하나를 가져와 도화의 잔에 먼저 채워 주었다.
도화는 너무 제대로 된 음식이 나오자 이런 대접을 받아도 되나 싶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황홀한 음식 냄새에 도화는 저절로 침이 삼켜졌다.
“도화 씨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네요.”
“잘 먹겠습니다.”
도화는 조심스럽게 나이프로 고기를 썰어 입안에 집어넣었다. 입안에 버터에 섞인 고기 풍미와 옅게 배어 나오는 허브향이 산뜻했다. 도화는 차마 친하지 않은 도명 앞에서 맛있다는 탄성을 내뱉지는 못하고 식탁 아래에서 발만 동동거렸다.
하지만 눈치 빠른 도명이 도화의 여러 가지 몸짓을 못 읽을 리가 없다.
맛있어하는 도화의 표정을 보자 도명은 그제야 자신의 앞에 놓은 스테이크를 먹기 시작했다. 도화는 너무 맛있어서 어느 순간부터는 크게 썰어서 입안에 욱여넣기 시작했다.
도명은 자신이 해 준 음식을 저렇게 먹는 것을 좋아한다. 너무 먹는 것에 몰두한 나머지 어느 순간부터는 체면 신경 안 쓰고 무아지경으로 먹는 것 말이다.
“제가 같은 동성애자를 만나면 꼭 물어보는 게 하나 있습니다. 언제 자신이 남자를 좋아하는 것을 알게 됐는지 꼭 물어봅니다. 다들 비슷하다면 비슷한데 물어보게 되더군요. 도화 씨는 언제 알게 되었습니까?”
“아, 저는 고등학교 때쯤에요.”
“저는 도화 씨보다 일렀습니다. 한 중학생 때쯤? 솔직히 도화 씨에게 질문은 언제냐고 하긴 했는데 이런 게 정확히 언제라고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면이 있긴 합니다. 서서히 무르익다가 어느 순간 확신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도화 씨도 그런 순간이 있었습니까?”
도명의 말에 도화는 고기를 입안에 가득 넣고 씹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도명은 자신의 스테이크 3분의 1 정도를 썰어서 그의 접시에 덜어 주었다. 도화는 다람쥐처럼 무아지경으로 먹느라 도명이 자신의 것을 건네주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냥, 그 아이의 즐거워하는 눈빛을 마주친 그 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짧은 순간 이후에는 쭉 고통이었습니다.”
도화는 그렇게 말한 이후 더 이상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졌다. 그래서 도명에게 질문을 넘겼다.
“도명 씨도 괴로웠겠네요. 같은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안 이후에 말입니다.”
“저는 의외로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습니다. 정확히는 신경 쓸 틈이 없었다가 정확하겠네요.”
“왜요? 왜 신경 쓸 틈이 없었습니까? 같은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보다 더 두려웠던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네, 제 사디스트 성향 말입니다.”
“아.”
도화는 어색한 추임새를 끝으로 말이 없었다. 도화는 밀려오는 어색함을 참느라 피클을 한꺼번에 세 개씩 포크로 찍어 입안에 욱여넣었고 도명은 그런 도화의 반응을 보며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같은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보다 그게 더 무서웠다고 하면 도화 씨가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도화 씨 머릿속에서 저는 타고난 악마일 텐데 말입니다. 뭐, 타고난 악마는 맞을지도요.”
“그, SM 그거는 언제 처음 하셨는데요?”
“고등학교 2학년 2학기 때쯤에 했습니다. 방과 후 교실에서.”
도명의 입에서 터져 나온 엄청난 말에 도화는 바쁜 포크질을 멈췄다. 도화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그런 엄청난 걸 학생 때부터 했다는 사실도 놀라운데 장소도 너무 파격적이었다.
“궁금합니까?”
“아, 아니요. 아니 궁금하긴 한데 듣기 무섭기도 하고.”
“그렇게 무서운 이야기는 아닌데요.”
도명이 도화의 비어 있는 와인 잔에 와인을 담아 주며 속삭였다.
“뭐, 듣기 싫으면 말고요.”
“듣기 싫긴 한데…….”
“싫긴 한데요?”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네요. 아 이런 빌어먹을 호기심.”
도화가 이마에 손을 짚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도명은 이야기가 생각보다 길다고 운을 띄웠다.
“제 입으로 말하기 부끄럽긴 한데, 저 학교 다닐 때 별명이 거울 왕자였습니다. 제가 남녀 학생, 전교 통틀어서 가장 거울을 많이 보던 학생이었죠. 확실히 그 나잇대치고도 외양에 집착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별명이 붙은 게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닌데 너무 낯부끄러운 별명이라 그다지 좋아하진 않았습니다. 남학생들이 저를 많이 거슬려했죠. 또래 남자애들 하곤 묘하게 달랐거든요. 뭐 그렇다고 대놓고 괴롭히진 못했습니다. 하루 종일 외양을 꾸미는 것 치곤 공부도 꽤 잘했고 규칙 참 좋아하고. 부모님도 같은 교사라서 선생님들이 꽤 신경 써 주는 학생이었거든요. 제가 무서웠다기보다는 그냥 건드리면 성가신 놈이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거기다가 학생회장이라서 학교생활 피곤하게 만들려면 만들 수도 있었고 여러모로 성가셨죠.”
“와, 거울 왕자에 학생회장…….”
도화는 도명의 학창시절이 너무 인터넷 소설 속 주인공 같아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런 도화의 웃음에 도명 역시 기분 나빠하지 않고 따라 웃었다.
“도화 씨가 무슨 말 하고 싶은지 알겠으니까 거기까지요. 저도 민망하니까요. 어쨌든 그러고 얼마 후 거울 왕자라는 별명은 차라리 괜찮은 별명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죠. 반에서 어떤 놈이 저를 거울 왕자 말고 거울 게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거든요. 왜 있잖아요. 자신을 가꿀 줄도 모르는 덜 떨어지는 남자애들이 자기보다 잘 가꾸는 남자를 기생오라비라든가 그런 건 남자답지 않다느니 지껄이는 거 있잖아요. 더 최악은 저런 꾸미기를 좋아하는 유별난 애들은 게이일 거라고 어림짐작하는 거.”
도화는 도명의 말에 약간의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도화 역시도 진영에게 도명의 뒷말을 하며 그에게 기생오라비 비슷한 단어를 썼던 것 같았다.
사실 그가 보기 좋은 외양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거슬렸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의 모든 것이 위험해 보였고 거슬렸을 뿐이었다. 도화는 애써 웃으며 도명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제가 게이인 것도 사실이고 또래 남자들보다 외모에 관심이 많았던 것도 사실인데 그렇다고 그것이 보편적인 게이의 특성인 건 아니잖아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도화 씨는 잘 알 거라고 봅니다. 게이라고 다 똑같은 모습과 특성을 보이는 건 아니잖아요.”
“네 그렇죠. 이런저런 사람이 있는 거죠. 그래서요? 다른 사람들에게도 게이라고 놀림 받았나요?”
도명과 도화는 여러모로 많이 다른 사람이지만 도화가 그에게 감정이입 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도화는 커밍아웃의 공포에 대해서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상대방은 별생각 없는 단순 놀림이었다고 해도 거울 게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도명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을 것이다.
“그가 그러니 그만큼 덜 떨어진 몇 명이 따라 하긴 하더군요. 그러던 어느 날 제가 목격하고 만 겁니다. 그가 제 사물함을 따고 제 물건의 냄새를 맡으며 물건을 반쯤 세우고 있는 걸 말입니다.”
“아…….”
“지금 생각해 보니 조금은 너그러운 마음이 들긴 합니다. 무서웠겠죠. 같은 남자인데 저만 보면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게.”
“그럼 그도 게이였던 겁니까?”
“그럴 수도 있고 타고난 육체적 성과 반대의 성적 정체성을 가진 것일 수도 있고요. 남자들은 저를 여러모로 거슬려했지만 여자들한테는 꾸준히 인기가 좋았거든요. 어쨌든 딱히 그의 마음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중요한 건 그저, 본인의 마음이 혼란스럽다고 화풀이를 당한 게 못마땅했습니다.”
도명의 마지막 고기 조각을 입안에 넣고 송곳니로 질근질근 씹었다.
“저는 그의 손 안에 있는 제 체육복을 뺏은 후 보는 앞에서 쓰레기통에 처박았습니다. 경멸 어린 시선과 함께 말이죠.”
도명의 ‘경멸 어린 시선.’이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도화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도화는 손가락 두 개만 한 나이프 손잡이를 놓쳐서 바닥에 떨어뜨렸다. 나이프가 커다란 소리를 내며 충돌하자 도명은 바로 괜찮다는 시선을 보낸 후 새 나이프를 가져왔다.
도명은 날카롭지 않은 손잡이 부분을 도화를 향해 돌려서 건네줬다. 도화는 표정관리가 되지 않았다. 자꾸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저, 그, 무서웠을 겁니다. 친구를 보고 그런 기분이 드는 게 말입니다. 그렇다고 그를 두둔하는 건 아닌데 그냥 그렇다고요.”
도화의 말에 도명은 그를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았다. 도명은 도화가 언제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알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도화 씨는 좋아했던 그 친구를 미워했습니까?”
“네?”
“도화 씨에게 그런 이상한 마음이 들게 만들었다며 그 친구를 미워했냐고요.”
“아니요. 그냥 미안했습니다. 내 마음을 알면 얼마나…… 기분이 더러울까. 그런 생각만 들었습니다.”
“그렇군요.”
도명은 손끝을 모은 후 도화를 향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도명은 자신의 고기를 3분의 1이나 도화에게 줬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속이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그 후는요? 계속, 같은 교실을 써야 했던 거 아닙니까? 도명 씨와 제가 남은 5개월 동안 위아래 층에서 지내야 하는 것처럼.”
“저한테 그런 장면을 들키고 나니 본능을 숨길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가 저를 밀치고 강제로 입을 맞추려 하더군요. 표정이 얼마나 추접스러울 정도로 간절하던지. 저를 조롱하며 오만하고 느긋했던 척하는 모습과는 매우 달랐습니다.”
도명은 그의 표정을 기억한다. 간절함에 벌겋게 충혈된 눈동자, 젖은 눈가. 확장된 동공, 상기된 피부. 피부에 부딪히던 거친 숨. 섣불리 나온 혀의 돌기. 그 모든 디테일 하나하나 선명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그 녀석의 얼굴과 이름은 기억 안 났다. 전체보다 더 두드러지는 작은 부분들만 기이하게 엉켜 있었다.
“그의 가랑이를 찼습니다. 그리고 중심부를 감싸며 신음 소리를 내뱉고 있던 그를 놔두고 책상에 걸터앉아서 간절한 그를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실내화를 벗고 양말을 벗었습니다. 신음을 흘리는 그의 코끝에 발을 얹었습니다. 그리고 말했죠. 그렇게 나를 핥고 싶으면 발가락이나 핥으라고.”
“그래서 도명 씨의 말대로 하던가요?”
“바로는 아니고. 알량한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려고 애를 쓰긴 했죠.”
도명이 턱을 높이 치며 들며 나른한 말투로 말했다. 그가 목을 치켜들자 우아하게 뻗은 목선이 도드라졌다.
“저는 성감대가 잘 발달한 편입니다. 신체적 접촉 없이 심리적 원인만으로도 오르가슴을 잘 느끼고 육체적으로도 섬세한 부분 하나하나 아주 잘 느낍니다. 가령 손가락 끝이라든가 발가락 끝만 잘 핥아 줘도 좋은 표정을 지을 수 있습니다.”
도명의 말에 도화의 얼굴이 새빨갛게 익었다. 도화는 괜히 와인 잔이 45도 이상 기울 정도로 남은 와인을 한 번에 탈탈 털어 넣었다. 도화의 혀끝이 와인 잔의 모서리를 괜히 긁었다. 순진한 도화의 반응에 도명이 싱글거렸다.
“그에게도 그 사실을 알려 줬죠. 그러더니 벌벌 떨며 혀를 세워 제 발끝에 혀를 갖다 대는 겁니다. 처음에는 힘들어하더니 나중에는 엄지발가락을 입안에 넣고 쪽 소리 나게 빨더니 게걸스럽게 발가락 하나하나를 먹어 들어가더군요. 그의 타액이 난잡하게 발을 적셨습니다. 솔직히 유쾌하지만은 않았지만 느낀 대로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그를 내려다보았습니다. 그가 제 발목을 부여잡으며 허락도 안 했는데 감히 종아리를 어루만지더군요.”
‘도명아, 하아, 너에게선 너무 좋은 냄새가 나. 넌 발에서조차 너무 좋은 냄새가 나. 다른 놈들이랑 달라. 넌 다른 놈들이랑 달라. 내가 이상한 게 아니야. 네가 너무 특별한 거야.’
“하아…… 감히 말입니다.”
도명이 경멸 어린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와인 잔의 목 부분을 손가락 끝으로 긁어댔다.
‘그런데 넌 다른 놈들이랑 같아. 나는 특별하지만 넌 아니야.’
‘도명아. 네가 좋아.’
‘넌 기질이 아주 나빠. 인내심도 없고 조급하면서 사납지. 넌 이 이상 나를 만질 자격이 없어. 넌 내 발이나 핥는 게 주제에 맞는 거야.’
‘내가 달라질게. 도명아.’
‘하, 이 개새끼가 이 와중에 발기까지 했네. 넌 진짜 저급하고 더럽구나.’
‘네 탓이야! 네가 이상한 표정을 지었잖아! 이 남자나 후리는 남창 새끼야!’
“아주 잠깐 사이에 그는 금세 날 것의 표정을 짓고 저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여전히 모든 것은 제 탓이었죠. 도화 씨.”
“아, 네. 네.”
“도화 씨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발가락을 핥는 것만으로도 발기를 했다면 그는 정말 그 정도로도 충분했던 것 아닙니까? 그 이상을 받을 가치가 있었을까요? 마치 제게 맡겨 놓은 것을 달라는 식으로 떼를 쓰더군요.”
도화는 처진 눈을 하고 불분명한 발음으로 중얼거렸다.
“저라면…… 만지게 해 주지 않았어도 기뻤을 겁니다. 곁에서 볼 수만 있게 해 준다면 계속 그에게 무해한 존재인 척…….”
“도화 씨는 그렇군요.”
도명이 도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도명은 도화의 구레나룻 부분을 계속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그가 발기까지 해서 벌을 주지 않으면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가방엔 30센티 플라스틱 자가 하나 있었고 그의 바지를 내리게 하고 발기한 성기를 내리쳤습니다. 그런데 그 천박한 놈이 때리면 때릴수록 하얗고 질척한 액체를 질질 흘리는 겁니다. 투명한 자가 탁한 체액으로 물들수록 세게 때렸습니다. 그러면 그는 울면서도 계속 정액을 흘려 대더군요. 매질로 성기가 발갛게 붓고 나서야 그 새끼가 제 탓을 그만두고 제게 사과를 하더군요. 뭐, 여기까지입니다. 제 얘기는. 이야기가 너무 길어서 지루했습니까?”
“아, 아니요.”
그 후 도화는 계속 말이 없었다. 어색한 분위기가 계속 흘렸다. 도명은 도화가 소스까지 긁어먹은 그릇을 치우고 허브차를 내왔다.
“이제 가볍고 편안한 이야기를 할까요? 즐거운 이야기를 합시다. 도화 씨 좋아하는 거라든지 잘하는 거라든지 말입니다.”
“좋아하는 것 말입니까……?”
“네, 도화 씨는 참 어떤 질문이든 어렵게 받아들이네요.”
“좋아하는 것은… 스노우볼을 모읍니다.”
도화의 입에서 공포영화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정확히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스노우볼이요? 도화 씨 생각보다 낭만적인 구석이 있네요.”
“그냥…… 천천히 흘러가고 정지된 시간을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그 느리고 반복되는 풍경을 보면 좋은 순간을 잡아 둘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말도 안 되는 기분이 듭니다.”
그렇게 말하는 도화의 머릿속에 어떤 시간 속에 머물러 있었다. 도명은 이어지는 도화의 침묵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누군가 도화의 바짝 깎은 머리를 쓰다듬는다. 도화에게 달려와서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그의 머리를 조금은 거칠게 쓸어 넘기는 그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연신 그는 도화가 최고라고 속삭였다. 도화는 부끄러워서 차마 그를 쳐다보지는 못했지만 그의 눈 속에 자신이 가득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도화 씨, 시간은 보관만 하고 그 속에 갇혀 있지는 말아요.”
“아, 네.”
도명의 한 마디에 도화는 얼떨결에 알았다고 대답하고 말았다. 그가 얼마나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아느냐고 까칠하게 쏘아붙일 수도 있었지만 딱히 반박할 말은 생각나지 않았다.
“잘하는 건…… 도망가는 것 정도이겠네요.”
“그거는 참 나쁜 버릇이네요.”
도명이 눈썹을 찡그리며 도화를 향해 싸늘한 시선을 던졌다.
“도명 씨, 제가 도명 씨에 대해서 오해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제가 남들과 다른 것처럼 도명 씨가 저와 다를 뿐이라는 것도 이성적으로는 이해합니다.”
“그런데요?”
“그런데 저는 도명 씨가 베푼 호의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도명 씨와 친해지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이유를 알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정확한 이유나 들어봅시다.”
“진영이 말입니다. 남자애치고 덩치가 작아서 전학 간 곳에서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아이들이 전시하듯 그를 교실 한가운데 세워 놓고 뺨을 후려치고 배를 주먹으로 치며 시시덕거렸습니다.”
“제가 하는 건 그런 종류의 폭력과 다르긴 합니다만 일단은 계속 들어 보죠. 사실 제 첫 경험이 저에게도 딱히 유쾌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때는 상대방에 대한 경멸로 매질을 했으니까요.”
“네, 압니다. 정확히 이해는 못 하고 있지만 얼핏 어딘가 다르다는 것도. 그러니까 저는 그 아이들과 도명 씨가 같다는 걸 말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저는 전학 간 이유도 좋지 못했고 또 그 당시에는 별로 친하지 않았던 진영이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못 참겠더군요. 그래서 진영을 세워 놓고 때리는 그놈에게 달려들어 주먹의 살가죽과 뼈가 얼얼해지도록 때렸습니다. 제 주먹 몇 대에 나가떨어지는 별것도 아닌 놈이 그렇게 매일 진영을 세워 놓고 같잖은 힘을 과시했다는 것이 어이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알고 보니 학교에서 주먹 꽤나 쓴다는 놈이더군요.”
“아, 그래서 진영 씨가 주먹으로는 제가 도화 씨를 못 이긴다고 했던 거군요.”
“사실 그때 기분이 좋았어야 했던 거 아닙니까? 폭력을 쓰고 있긴 한데 동급생을 구하는 일이었고 또, 상대는 질이 나빴습니다. 그리고 그 또래 남자아이들은 유난히 폭력에 열광하죠. 폭력을 우상시했고 저를 비난하기는커녕 마치 경기 보듯이 열광했습니다.”
“그런데 도화 씨는 기분이 안 좋았습니까?”
“네, 조금도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제가 때려눕힌 놈이 잘 나갔던 일진이었던지라 그때부터 매일 주먹질을 하게 됐습니다. 저는 가만히 있고 싶은데 주변이 저를 가만히 두지를 않았습니다. 즐겁지도 않은 일을 매일 하려니까 고통스러웠습니다. 또래의 추켜세움도 솔직히 구역질이 났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그냥 맞았습니다. 때리는 것보다 확실히 마음이 편하더군요. 도명 씨 저는 그런 이유로 도명 씨를 본질적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도명 씨가 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폭력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폭력의 본질은 비슷하지 않습니까. 기분 나쁘라고 하는 말이거나 도명 씨를 비난하려고 하는 말은 아닌데……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도명 씨처럼 잘 전달하는 편은 아니라서…….”
도화는 긴 앞머리를 괜히 더욱 내려뜨렸다. 차마 도명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네 도화 씨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도화 씨가 저를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저라고 제 모든 사람에게 완벽한 이해를 받는 건 아니거든요. 기분 나쁘지 않았으니까 걱정 마세요.”
“식사는 감사했습니다. 정말 너무 맛있었습니다.”
“잘 먹었다니 기분이 좋네요.”
“저, 이만…….”
“네 올라가서 푹 쉬세요.”
도화는 도명을 향해 어정쩡한 자세로 인사를 한 후 후다닥 위로 올라갔다. 혼자 남겨진 도명은 차를 천천히 마시며 생각했다.
사람들은 갖가지 첫 경험들에 대해서 미사 어구를 붙이고 찬양을 한다.
하지만 모든 첫 경험이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니다. 도명은 자신의 첫 경험 상대의 얼굴도 이름을 기억 못 했다. 어떤 첫 경험은 생각보다 대수롭지 않았다.
도명은 아직 온기가 남은 차를 한꺼번에 들이켜며 생각했다. 도화가 1년이라도 일찍 태어나서 도명의 후배로라도 들어올 수 있는 나이가 되고 도명과 같은 동네에서 태어나 같은 학군에 배정되었다면 같은 학교를 다녔을 것이다.
만약 도화가 도명의 얼굴도 이름도 기억도 안 나는 그였다면 발가락 끝이 아니라 그가 원한다면 허벅다리도 내 주고 셔츠를 벗었을 것이다.
그리고 도화가 좋아해서 미안하고 흥분해서 미안하다고 울며 그의 가랑이 사이를 눈물로 적혔다면 그의 모든 것을 맛보게 해 줬을 것이다. 모든 것이 가정이었지만 도명은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도화처럼 착하고 순한 아이였다면 그 시절의 도명은 그의 모든 것을 내 줬을 텐데.
***
도명의 대학 동창회가 한창이었다. 같은 기수가 아니더라도 같은 시기에 대학을 다닌 선후배들이 뭉뚱그려서 모인 자리였다.
도명도 참석하기로 했는데 클라이언트와의 미팅이 늦어진 탓에 아직 동창회 장소에 도착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동기들은 한창 무르익은 동창회를 즐기고 있었다.
“서윤아, 도명이 오기로 하지 않았냐?”
서글서글한 인상의 서윤은 도명의 동기들이자 선배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다.
“도명 형이요? 그러게 안 보이네요. 잠깐 전화 좀 해 보고요.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별말 없었는데?”
“오늘 아침에도 도명이 봤냐?”
“너희 학교 다닐 때도 은근히 붙어 다니더니 사회에 나가서도 붙어 있냐? 참. 묘한 조합이란 말이야. 둘이 참, 안 맞아 보이는데 말이야.”
서윤은 그의 말에 그저 웃기만 했다. 사실 둘이 붙어 다니게 된 것은 우연히 게이 바에서 보게 된 것이 계기였다. 다른 사람들하고는 못하는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다 보니 편한 탓에 붙어 다녔다.
“아직도 연락하고 친한 것도 사실인데, 학교 다닐 때처럼 붙어 다니는 것까진 아니고요. 오늘 아침에 도명 형네 회사에서 미팅 있었어요. 저 도명 형네 회사랑 분기마다 계약하잖아요.”
“도명이랑 같이 일해? 힘들지 않아? 예전에 팀 과제 해서 아는데 도명이 걔 얄짤 없잖아. 그 새끼 진짜 독하잖아. 나 어느 순간 정신 차리고 보니까 팀 없이 혼자 공중에 떠 있는 거야. 나 군대 가기 전이라고 그렇게 이해해달라고 가슴으로 호소했는데! 군대! 군대에 간다잖아. 같은 사내새끼가 그 애통한 마음을 모르냐고!”
“도명 형, 그냥 넘어가는 거 없죠. 근데 형이 자기 몫만 제대로 했어도 도명 형이 안 그러죠. 그렇지 않아도 성질 많이 죽이고 사는 형인데.”
서윤이 능청스럽게 말했고 도명을 욕했던 그가 뭐라 한마디 하려고 하는 찰나 서윤이 도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 왜 아직 안 와?”
“야, 너! 선배한테!”
“형, 도명 형 지금 도착했다는데요. 클라이언트 미팅이 생각보다 늘어졌대요. 우리 찾는데 데리고 올게요.”
서윤은 그렇게 말하고는 어수선한 자리를 빠져나왔다. 서윤은 마음에 안 드는 자리를 빠져나온 후 입구에서 담배 한 대를 태웠다. 그때 도명의 차가 모임이 있는 가게 앞에 섰다. 서윤은 도명의 차를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도명은 주차를 하고 나와서 서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섰다. 서윤이 섭섭하다는 얼굴을 했고 도명은 여전히 거리를 둔 채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내 옷에 담배 냄새 밴다. 더 멀리 가.”
“형! 나한테도 좀 다정하게 웃어 줘라. 다른 사람 앞에선 그러면서.”
“이상하게 너만 보면 내가 웃음이 싹 사라져. 표정관리 왜 이렇게 안 되냐.”
서윤은 도명의 차가운 말에도 뭐가 그렇게 웃긴지 실실 웃어댔다. 얼핏 보면 두 사람 사이가 냉랭한 것 같지만 서윤을 대하는 도명의 표정이 편해 보였다.
“좀 있다 들어가. 석진 형 기억해?”
“누구?”
“별사람 아냐. 그냥 별사람 아닌 사람이 지금쯤 형하고 내 욕하고 있을 테니까 나랑 시답잖은 아무 이야기 하다가 들어가.”
“시답잖은 이야기? 마침 하나 있긴 해.”
도명의 말에 서윤이 팔짱을 끼고 도명을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서윤은 지금 도명의 입에서 나올 이야기가 시답잖은 이야기가 아닐 거란 거에 머리카락 한 움큼을 걸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는 내가 왜 사디스트인지 이해가 가냐?”
“형 변태인 걸 내가 어떻게 이해해? 우리 환생을 노려 보자. 이번 생은 아냐.”
서윤이 도명을 향해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말했다. 노골적인 비난에 도명은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그런데 어떻게 나랑 계속 지내는 건데?”
“내가 형이랑 잘 거야?! 우리 사이에 그런 질문 하지 마. 무섭다.”
도명은 서윤이 약간 언성이 높이자 그의 발등을 지그시 밟았다. 용케 지금까지 안 들키고 사회생활 잘 한다 싶었다.
“하긴 같이 잘 거 아니면 무슨 상관이냐.”
“나랑 자고 싶으면 지금 말해. 미리 도망가게.”
“까분다.”
도명이 서윤을 향해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상대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거 형 20대 초반 고민 아냐? 누구보다 풍요로운 성생활을 하고 있는 중에 왜 갑자기?”
“아니, 같이 자자는 것도 아닌데 누가 나한테 딱 선을 긋더라.”
“우와. 선 긋는 건 형 전문인데 선 긋기를 당했어?”
서윤이 재밌어 죽겠다는 듯이 웃음을 실실 흘렸다. 서윤은 피고 있던 담배를 반만 피우다가 비벼 껐다.
“그래. 그것도 좀, 아니 많이 아주 많이 헐렁헐렁한 사람한테.”
“상대는 이성애자야?”
“동성애자. 내가 사디스트인 걸 알고 선 긋더라.”
“어쩌다 사디스트인 걸 들켰대?”
“들킨 사연도 아주 길고 어이가 없다. 다 말하긴 입 아파서 안 할 거야.”
“나 지금 아주 이해가 안 가는 게 하나 있어. 형답지 않게 왜 그렇게 신경 쓰는데? 상대방이 선을 그었으면 미련 한 톨도 남기고 안고 바로 뒤돌아서는 게 형 아니야?”
“상대방이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면서 선 그으면서 한 이야기가 너무 내 취향이라서. 이건 거의 선 그은 게 아니라 선 안으로 들어오라고 부채질한 수준이라서.”
“아니 뭐라고 했기에?”
“그 긴 말을 요약하자면 자기는 사람을 때리느니 맞는 게 차라리 마음 편한 사람이라고.”
“음…… 상대방은 M이야? 아니지. 맞는 게 마음 편하다고 했지 기분 좋다는 건 아니니까. 상대방이 M이라면 형이 고민을 왜 하겠어. 이미 둘이 침대 위일 텐데. 나 왠지 형 요약이 형 마음 가는 대로 한 악마의 편집이 있다고 느껴지는 건 착각이야?”
서윤의 말에 도명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악마의 편집이 없다곤 말 못 하겠네.”
***
도화는 집에 들어가기 전 편의점에 들렀다. 간단한 샌드위치와 음료 하나를 고르고 편의점 창가 테이블에 걸터앉아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샌드위치 식빵의 표면이 살짝 푸석한 느낌이 감도는 것 같아 입안이 텁텁했다.
그렇다면 빵 사이에 있는 햄과 신선한 오이의 식감을 기대하며 이를 더욱 깊숙이 집어넣었다. 하지만 햄의 식감은 육즙이 흘러나오는 두꺼운 진짜 고기 풍미만도 못했고 오이는 충분히 아삭거리지 않았다. 양상추 역시 살짝 흐물흐물해서 먹는 즐거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도화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음식이 아니라 사료다. 어떻게든 살기 위한 최소한의 열량을 채우겠다고 배 속으로 욱여넣는 모양새였다. 도화는 억지로 두세 입 먹다가 도저히 먹지 못 하겠는지 반이나 남은 샌드위치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음료수를 입안에 탈탈 털어 넣었다.
전에 도명의 가게에서 먹었던 스테이크가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이 근처에 스테이크 프랜차이즈가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뭐든 고기를 먹는 곳은 혼자 가기에 적당하지 않다. 하지만 도저히 편의점 음식으론 오늘 저녁을 때울 수가 없었다.
도화는 결국 편의점 건너편에 있는 스테이크 하우스에 갔다. 혼자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도화뿐이었다. 그래도 1차 관문은 넘었다.
도화는 직원의 ‘몇 분이세요?’라는 질문이 들어올 때 민망함을 참고 아무렇지 않은 척 혼자 왔다고 하고 최대한 구석지고 작은 테이블에 앉았다.
도화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직원이 건네주는 메뉴판을 펼쳤다. 이곳도 그렇게 비싼 브랜드는 아닌데 한 끼 식사를 때우기 위해 3만 원 중반에서 4만 원을 쓰는 것은 거창했다.
스테이크 가격의 시세를 모르고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가격에 놀란 것보다는 그저 한 끼 식사에 이런 사치를 부리는 것이 어색할 뿐이었다.
어려운 1차 관문을 넘은 것이 아까워서라도 기어코 먹어야겠다. 스테이크를! 도화는 도명이 구워 준 부위 이름을 기억하려고 이마를 더듬었다.
“여기 채끝살로 구운 건 없어요?”
“이 메뉴입니다.”
직원이 도화가 보고 있던 메뉴판 페이지를 한 장 넘기며 말했다. 메뉴판에는 45,000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와, 비싼 것도 먹였네…….’
도화는 이쯤 되니 도명에게 꽤 좋은 대접을 받았다는 생각에 미안해지기까지 했다. 더군다나 와인까지 따던데. 도화는 사지도 않을 거면서 와인 가격이 적힌 페이지를 뒤적거리다가 다시 덮었다. 점점 그날의 식사를 하려니 한 끼에 쓸 돈이 눈 덩어리처럼 불어난다.
“이걸로 주세요.”
적정 굽기 등 주문을 마치고 나니 혼자 레스토랑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더욱 어색해졌다. 그래서 괜히 잘 하지도 않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그마저도 금방 질렀다. 매번 실패하는 것을 왜 매번 하는지 모르겠다.
도화가 주위를 둘러보니 이런 곳에서 혼자 앉은 자신을 신경 쓰는 사람은 본인밖에 없는 듯했다. 사람들이 이따금 혼자 앉은 도화를 쳐다보긴 했지만 같이 온 사람들이랑 대화를 하느라 관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도화는 이쯤 되니 자신이 주위 시선을 신경 쓰는 게 부질없어 보였다.
설사 사람들이 도화를 보고 수군거린들 도화의 인생이 무슨 영향을 받을까.
도화는 스테이크가 나올 때까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이 상황에서 결국 생각나는 사람은 도명이었다. 애초에 도명이 해 준 스테이크 맛을 생각하곤 이곳에 온 것이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도화는 아무리 생각해도 도명의 욕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는 성감대가 잘 발달한 편입니다. 신체적 접촉 없이 심리적 원인만으로도 오르가슴을 잘 느끼고 육체적으로도 섬세한 부분 하나하나 아주 잘 느낍니다. 가령 손가락 끝이라든가 발가락 끝만 잘 핥아 줘도 좋은 표정을 지을 수 있습니다.’
도명의 말이 생각났다.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졌다. 좋은 표정이란 건 대체 뭘까. 아마 이상야릇한 그런 표정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도명은 줄곧 온화한 성품인 척을 했지만 도화가 포인트를 헛짚어서 그렇지 도명의 본질을 짧은 기간 동안 잘 꿰뚫어 본 것이다.
도명은 사람들을 잘 다루기 때문에 그의 날것의 본성을 잘 숨기는 편이었다. 그래서 눈치가 좋은 사람도 도명의 진짜 성질을 알기까지는 적어도 6개월 이상이 걸린다.
하지만 도화는 육식동물을 보고 감각의 날을 세우는 초식동물처럼 1개월이 채 안 되는 시간 만에 도명이 남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상하다. 도화가 진영에 비해 촉이 좋은 편이긴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도명은 차갑고 자기 통제가 강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놈의 좋은 표정이란 걸, 이상야릇한 표정이란 걸 짓는다고? 그것도 잘? 도화는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도화는 아랫입술을 손톱으로 뜯으며 그가 동원할 수 있는 상상력을 다 끌어다 모았다. 하지만 역시 도화의 상상력은 빈약했다.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잖아. 그러니까 더 궁금하네. 잠깐, 무슨 미친 생각을 하는 거야.’
도화는 짝 소리 나게 자신의 뺨을 내리쳤다. 그의 뺨에 선명하게 그의 손바닥 자국이 남을 정도였다. 뺨이 얼얼했다. 하지만 생각에 잠겨 있느라 통증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때리면서 흥분한다는 거 아냐.’
‘신체적 접촉 없이 심리적 원인만으로도 오르가슴을 잘 느낍니다.’
‘그 말의 의미는 벗고 몸을 부대끼는 노골적인 섹스를 안 해도 느낄 수 있단 말이잖아. 그러니까 사람을 때리고 괴롭히면서…… 상대방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느낀다는 거고. 그렇다면 그날 내 엉덩이를 때리면서도……? 아니지. 정작 서 버린 건 나잖아. 엉덩이가 만져졌다는 이유 하나로 말이야. 차라리 자위기구라도 사서 욕구를 풀지 그게 무슨 짓이야! 당장 성인용품 사이트 회원 가입하자! 차라리 그게 덜 추잡하지. 그전에 게이 동영상이나 보자. 그나저나 도명 씨는 날 때리면서도 아무런 반응도 없었지. 그러니까 그건 그냥 말 그대로 벌준 거지. 훈육 같은 거야. 그래 말투도 계속 나한테 선생질하는 말투잖아. 그러고 보니 기분 나쁘네! 내가 자기 학생이야 뭐야.’
도화의 머릿속에서 도명이 ‘잘했어요.’ ‘착하네요.’ ‘버릇이 나쁘네요.’ ‘심호흡하고 차분하게 말해 봐요.’ ‘어려워요?’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울려댔다. 도화의 주먹 쥔 손이 테이블 상판을 내리쳤다.
도화는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니 충분히 거슬렸을 만도 한데 왜 그 당시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지 황당했다.
‘어디까지 생각했더라. 그래. 그러니까 나랑 했던 건 그냥 말 그대로 벌준 거지. 아니, 그러면 때리면서 흥분한다는 건, 벌준 거랑 뭐가 다른 거야? 으아아아아……! 어떻게 된 인간인 건지 전혀 모르겠어!’
도화는 생각의 뫼비우스 띠 안에 가두어진 기분에 관자놀이를 반복적으로 긁적거리다가 테이블에 엎어져 버렸다.
‘그런데 저는 도명 씨가 베푼 호의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도명 씨와 친해지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 맞다. 나 선 그었지. 그런데 왜 그 이상한 인간 생각하고 있는 거야?’
도화가 생각의 늪에 빠져 있을 때 주문한 스테이크가 나왔다. 불에 익힌 고기 냄새는 언제 맡아도 좋았다. 도화는 기대에 가득 찬 표정으로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그리고 언제 복잡한 생각을 했냐는 듯이 입꼬리를 올리며 고기를 썰었다.
‘45,000원짜리 한 끼!’
고대하던 고기를 씹고 있는 도화의 표정이 이상했다.
‘어라……? 이게 아닌데.’
***
주말 아침, 도화는 시리얼을 우유에 말았다. 그리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기계적으로 숟가락질을 하고 턱 운동을 하는데 현관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일요일 아침부터 누군가 하며 문을 여는데 아침부터 산뜻한 옷차림의 도명이 서 있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은 편한 옷을 입고 있었다. 품이 살짝 넉넉한 흰 셔츠에 회색 카디건을 걸치고 면바지를 걸치고 있었다.
“아……!”
마음의 준비도 없이 무방비한 상태에서 도명의 얼굴을 마주하자 도화의 얼굴이 멍청해졌다.
“도화 씨가 선 그은 건 알고 있으니까 제 얼굴 보자마자 그런 이상한 추임새를 넣지 맙시다.”
“아, 네. 무슨 일로? 이번 달 집세 입금했는데요.”
“네. 입금 확인했습니다.”
“아, 식사……요?”
도화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자신의 희망 사항을 이야기해 버렸다. 도화는 아차 싶어서 입술을 급히 다물었다. 하지만 식사 이야기를 하면서 순간 크게 반짝이던 도화의 눈빛을 본 도명이 그의 마음을 못 알아챌 리가 없었다.
“설마 저랑 식사 원합니까?”
“그럴 리가요. 하자고 하면 거절할 겁니다.”
‘아, 헨젤 씨, 자꾸 이러면 근사한 과자 집 하나 만들어서 유인하고 싶잖아.’
“식사 초대는 아니고, 일전에 말한 뒷마당에 있는 창고 철거 말입니다. 안의 물건 좀 치워 주겠어요?”
“아, 네.”
도화가 슬리퍼를 대충 신으며 도명의 뒤를 쫓았다. 그러고 보면 매일 보던 공포영화 DVD가 집 안에 없단 걸 지금까지 잊었다는 게 신기했다.
“혹시 집 안에 창고 부족해요?”
도명은 그러고 보니 그때 도화의 집 안은 휑해 보일 정도로 물건이 없었는데 따로 물건을 집 밖에다가 왜 보관했어야 했는지 의아했다.
“아니요.”
도명은 그럼 왜 밖에다 뒀냐고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자신이 계속 물어보면 도화가 잘못해서 집주인이 추궁하고 있다고 느낄 것 같았다.
도화와 도명은 뒷마당 창고에 같이 들어섰다. 도명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서 있을 뿐 별말이 없었다. 도화는 좁고 어두운 공간에 둘이 같이 서 있으니 괜히 긴장감이 들었다.
그가 도화의 상상처럼 연쇄살인범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설명할 수는 없지만 다른 종류의 긴장감이었다. 창고 안에는 사람 얼굴만 한 아주 작은 창 하나만 있어서 빛 한 줄기만 겨우 들어오고 있었다.
“오전인데도 여기만 안이 너무 어둡네요.”
도명이 짐을 살펴보느라고 허리를 숙이고 있는 도화의 등 뒤에서 혼잣말을 했다. 그리고는 도화를 향해 한 발자국 바싹 다가왔다. 도화는 순간 너무 놀라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긴장한 도화의 등 근육이 크게 움찔거리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도명은 괜히 도화의 등짝에 손바닥을 얹고 손끝에 힘을 주어 꾹 눌렀다. 그 상태에서 도명이 까치발을 세우자 도명의 하체와 도화의 엉덩이가 아슬아슬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도화의 턱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아, 저, 도명 씨?”
도명은 원래 하려던 대로 조그만 창고의 천장에 달린 알전구를 켰다. 요즘엔 보기 힘든 예전 방식이었다. 갓등도 없이 투박하게 빼놓은 전기선에 전구 하나만 달려 있고 스위치 역시 벽에 따로 뽑아 나온 게 아니라 전구 옆에 바로 매달려 있었다.
안이 환하게 밝혀지고 전구의 스위치가 바로 자신의 머리 위에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도화는 자신이 도명을 오해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선 안 넘습니다.”
도명이 살짝 화가 난 말투로 말했다. 도화는 도명이 자꾸 자신을 오해해서 화가 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도명은 도화가 자신을 향해 선을 그은 사실 자체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짜증 나기 시작했다.
“저는 이상한 오해 하나도 안 했습니다. 그냥 도명 씨 이름 불러 본 겁니다.”
“아, 네 그렇다 칩시다.”
“진짜예요.”
“자꾸 그러면 과자 집 만듭니다.”
“네?”
“그냥 문득 쿠키 굽고 싶다고요.”
“와, 쿠키도 만들 줄 아세요?”
도화가 진심으로 감탄을 하며 도명을 올려다보았다. 도명은 나쁜 생각을 하는 것을 멈추기 위해 관자놀이를 누르며 화제 전환을 했다. 사실 도명은 쿠키까지 구울 줄은 모르는데 이쯤 되면 정말 쿠키까지 구워야 하나 싶었다.
“짐은 여기 있는 상자 다섯 개 맞습니까?”
“네.”
“한꺼번에 옮기기 힘들겠네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도명이 선반에 놓인 상자 두 개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상자는 크기에 비해서 제법 묵직했다. 안에 뭐가 들었기에 이렇게 무겁나 싶을 정도였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이러면 제가 너무 미안해서.”
도화가 다급하게 도명이 들고 있던 상자를 가져가다가 손이 미끄러졌다. 상자는 바닥을 향해 추락했고 안의 내용물이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DVD 앞면을 장식한 무서운 이미지들이 어두운 창고 바닥에 낙엽처럼 켜켜이 쌓였다.
창고 안을 사람 얼굴만 한 작은 창과 노란 알전구 하나로 구석구석 밝히기 어려운 탓에 그림자 진 이미지들이 더 끔찍해 보였다. 도화는 그런 것들을 보고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 얼굴로 바닥에 엎질러진 DVD들을 정리했다.
“하하, 빨리 정리할게요.”
“……이게 다 뭡니까?”
“뭐긴요. 영화 DVD들이죠.”
도화가 그리 말하며 무심코 도명을 올려다봤는데 도명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도명의 어깨는 그답지 않게 안으로 잔뜩 굽어 있었고 가슴은 푹 꺼져 있었다. 도화가 자세히 보니 손끝마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도명은 너무 놀란 나머지 비명도 못 지르고 있었다.
“도명 씨……?”
“빨리 치워요.”
도명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더니 급기야 창고 밖으로 나갔다. 도화가 대충 상자에 엎질러진 DVD들을 담고 창고에서 나와 보니 도명은 여전히 충격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손목을 문지르고 있었다.
도화는 그런 도명의 반응이 전혀 예상치 못한 거라서 당혹스러웠지만 애써 티를 내지 않으면 상자 다섯 개를 차곡차곡 쌓아서 내놨다.
“설마, 상자 다섯 개 전부 그런 DVD들입니까?”
“네.”
“하나도 빠짐 없이요?”
“네.”
도화가 계속되는 도명의 질문에도 불구하고 뭐가 이상하냐는 듯이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도명은 생각해 보니 기이할 정도로 싹 다 비워진 도화네 집 책장이 생각났다.
그렇게 텅 빈 채로 벽 한 면을 가득 채운 채 서 있는 용도 모를 책장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용도를 알 것 같은 것이다. 도명은 순간 소름이 돋아서 머리카락까지 쭈뼛 설 정도였다.
“아, 그런 취향이었어요?”
“질문을 하시는 말투가 굉장히 이상하시네요.”
도화는 자신의 DVD를 향한 진영의 평소 반응을 보면 사람들이 자신의 컬렉션을 어떻게 보는지는 알고는 있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도명이 저런 반응을 보이니 울컥하는 기분이 올라왔다.
“사람이 공포영화 좀 즐겨 볼 수 있죠.”
“그냥 좀 즐겨 보는 수준이 아니잖습니까?”
“저, 도명 씨, 겨우 이게 무섭습니까?”
도화는 도명을 향해 얼굴이 반쯤 갈린 남자가 있는 DVD 앞면을 흔들며 말했다.
“무섭다기보다는 흉측하지 않습니까. 도화 씨, 정신 사나우니까 그것 좀 그만 흔들어요.”
도명은 정말 구역질이 올라오는 듯 입을 손으로 가리며 중얼거렸다.
“남의 취미 가지고 이러기입니까.”
“실례를 저지를 생각은 아니었는데 너무 악취미라서요.”
“제가요, 다른 사람한테 그런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은 없는데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도명 씨가 그럴 말 할 입장은 아니죠.”
“제가 뭘 말입니까?”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면서 느끼시는 분이 지금 그런 표정을 짓는 건 이상하잖습니까.”
“저기요. 도화 씨. 제가 여전히 연쇄살인범 뭐 그런 걸로 보이세요?”
도명은 너무 정신적 충격이 큰 상태에서 도화에게 황당한 소리마저 듣자 언성이 올라갔다.
“그건 아닌데. 어쨌든 도명 씨는…….”
“제가 살아 있는 걸 토막 내며 발기라도 하는 줄 아십니까?”
도명이 도화를 향해 한 발자국 다가오며 음산하게 속삭였다. 그리고는 도화에게 DVD 좀 눈앞에서 치우라며 히스테릭한 손짓을 해댔다. 도화는 그가 저렇게 빠른 동작을 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언제나 그의 모든 동작 하나하나에는 여유와 오만이 진득하게 묻어 나왔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불쾌감을 숨길 여유조차 없어 보였다.
“아니. 그렇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도명 씨는 사람을 직접 때리고 괴롭히기까지 하면서 고작 보기만 하는 저를 너무 이상한 취급 하시니까 그게 억울해서.”
“저는 그냥 예쁘게 우는 얼굴이 좋고 순종적인 모습에 기쁜 겁니다. 때려 봤자 살이 예쁜 빨간색으로 물드는 것 정도를 좋아하고요. 참고로 여기서 예쁜 빨간색은 절대 피가 아닙니다. 저는 피 보는 걸 아주 질색합니다.”
“저 도명 씨, 그러니까 그런 도명 씨에게 제가 왜 제 취미를 비난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요.”
“일단 비난했다고 보기보다는 놀랐다고 하는 게 정확합니다. 네, 순간 말투도 부적절했습니다. 어쨌든 계속 말하는데 저는 상대방도 원하는 것을 합니다. 상대방만 저의 욕망에 맞추는 게 아닙니다. 저 역시 상대방의 욕망에 반응해 줘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저 영화들 속사람들은 완벽한 피해자인 거 아닙니까. 그것도 보상도 없고 어떠한 안전장치 없는 극단의 공포를 겪고 또 심지어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죽는 거 아닙니까. 그런 걸 보고 어떻게 기쁨이나 즐거움을 느낍니까?”
“도명 씨, 잠깐만요. 어쨌든 저는 보기만 하는 거고 도명 씨는 직접 하잖아요. 그리고 저도 이걸 보며 막 기쁘거나 즐겁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대체 왜 보는 겁니까?”
“그냥 보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짜릿하다고 할까요. 짜릿한데 그러면서 동시에 저는 완벽하게 안전하고. 잠깐만요, 제가 왜 도명 씨한테 제 취미 생활을 변명하듯 말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도명 씨 취향도 만만치 않게, 아니 사실 그 이상으로 이상하면서 그, 그 눈 뭡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도명 씨가!”
“그 다른 사람은 몰라도, 라는 표현 좀 그만 쓰시죠. 저 역시 아주 거슬립니다.”
도명과 도화는 서로 본인이 할 말만 하다가 얼굴이 새빨갛게 익기까지 했다. 감정이 극단으로 치달았을 때 도명은 어수선한 마음을 정리하듯 옷깃을 매만지며 말했다.
“제가 순간 너무 놀라서 본의 아니게 도화 씨 취향을 존중하지 못했다면 미안합니다.”
“네. 그러니까 저도 도명 씨를 그렇게까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그런 오해는 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두 사람은 논쟁을 정리하고 뒤돌아섰다.
***
도명이 일단 사과를 하긴 했지만 도화는 그날 저녁까지도 묘하게 분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변태 주인집 남자한테 내가 이상한 취급당한 거냐고?”
그러다가 도명이 소리도 못 지른 채 공포에 질린 얼굴로 파르르 떠는 모습이 생각났다. 도화는 그 모습이 묘하게 고소했다.
“아 그러니까 이거고 저거고 뭐가 다른 건데! 뭐가 그렇게 복잡해!”
도명은 저녁 시간이 되자 식사 준비를 하다가 고기를 다시 냉동실에 집어넣었다. 낮에 봤던 DVD 표지들이 생각나 고기만 봐도 속이 메스꺼웠다.
결국 오늘 하루만큼은 본의 아니게 채소와 두부만 먹으면서 채식주의자가 되어 버렸다.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도화의 취미에 대한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
솔직히 묘하게 곰 같은 도화의 투박한 느낌은 완전히 도명의 취향은 아니었다. 도명은 역시 세련된 것을 좋아했다. 뭐든 갈고 닦고 다듬어야 맛이었다. 그런데 도화를 보라. 아주 투박하고 푸석푸석하다.
첫인상 역시 최악이었다. 한마디로 앞뒤 재지 않고 드잡이나 하는 안하무인이었다.
그런데 알면 알수록 천성이 그렇게 순할 수가 없다. 주는 밥도 예쁘게 잘 먹고, 버릇없이 굴다가도 착한 자세로 앉아 있다. 너무 처음에 사나운 곰 같은 이미지라서 그의 순한 천성이 더욱 반전 매력으로 다가왔다.
사람은 누구나 공격성을 조금씩 가지고 있다. 그런데 도화는 그렇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악취미라니! 무분별하고 난잡한 폭력과 공포를 즐기다니! 그 순한 인상을 하고 말이다. 도명은 포크질을 멈추고 머리를 쓸어 넘겼다.
도명은 괜히 포크로 그릇 바닥만 찔러댔다. 충격을 받은 도명의 눈 밑은 퍼렇게 변해 있었다.
‘대체 왜…… 그런 흉측한…… 왜 그런 동네 백구 같은 얼굴을 하고 그런 걸 즐기는 거지? 그것도 다섯 박스나. 많기도 하네. 우리 백구가 왜 그럴까.’
도명은 도화를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흔들다가 불현듯 그가 한 말이 생각났다.
‘그냥 보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짜릿하다고 할까요. 짜릿한데 그러면서 동시에 저는 완벽하게 안전하고.’
“아…….”
도명은 어떤 깨달음을 얻은 듯 포크 끝을 느긋하게 휘저으며 웃었다.
***
도화의 발길이 도명의 화원에 다다랐다. 여전히 이 화려하고 이국적인 식물들이 뿜어내는 기운들이 도화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도화는 노골적으로 욕망을 드러낸 이것들이 불편했다.
원래 식물들은 고요하고 평화로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곳의 식물들은 그 어떤 육식동물들보다 욕망이 가득해 보였다.
화원 한구석에서 누군가 삽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도화가 다가가니 도명이 인공적으로 만든 화단에 땅을 파고 있었다. 삽 끝이 바닥에 닿자 부드러운 흙과는 다른 퉁퉁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게의 타일 마감 선보다 약 1.8m 내려간 이 화단은 뿌리가 깊은 나무들을 심기 위해 인공적으로 낮춘 지면 부분에 콘크리트를 들이부어서 틀을 만든 것이다.
도명은 삽의 금속과 콘크리트가 긁히는 소리가 들리자 굽혔던 허리를 폈다. 그리고는 거친 일을 하느라 흐트러진 자신을 그루밍했다.
도명이 자신을 구경하는 도화를 향해 뒤돌아서며 미소 지었다.
“어때요? 흙 속이 포근해 보이죠?”
처음에는 무슨 헛소리인가 싶었지만 가만히 보니 그런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입자가 고운 흙 사이에 공기가 자연스럽게 스며 들어가 있었고 적절한 습도로 촉촉해 보이기도 했다. 마치 잘 구워진 카스텔라 빵의 단면 같았다.
“네.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도화 씨.”
“네.”
“안에 들어가요.”
“네?”
“안에 들어가서 무릎 꿇고 있어요.”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겁니까?”
도화가 반항하자 도명이 미간을 거칠게 구기더니 삽으로 바닥을 쿵쿵 내리쳤다.
“어서요. 포근해 보인다면서요.”
“아니 정확히는 그런 것 같다고…….”
“확신이 안 들면 안에 들어가 보면 알겠네요.”
도화는 여전히 도명의 명령이 하나도 이해 안 갔지만 그의 얼굴을 보니 더 이상 반항할 의지도 의구심도 들지 않았다. 도화는 도명의 말대로 그가 들어가기 알맞은 크기로 파 놓은 구덩이 안에 들어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제야 일그러진 도명의 얼굴이 온화하게 피어났다.
“도화 씨의 자세가 마음에 듭니다. 계속 그 자세 유지하세요. 당신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말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는데요?”
도화가 겁을 잔뜩 먹은 표정으로 구덩이 속에서 도명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도화 씨. 지금 이 순간 어떠한 질문도 아무 의미 없는 겁니다.”
“어째서요?”
“당신은 그저 내가 하라는 대로 하면 되는 거니까요. 질문은 의미가 없죠.”
“도명 씨, 무섭습니다.”
도화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도명은 그런 도화가 아주 귀엽다는 듯이 입꼬리를 부들부들 떨며 도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순종적으로 굴면 당신은 완벽하게 안전할 겁니다.”
“만약 제가 순종적이지 않으면요? 그것만이라도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포르말린 용액으로 가득한 유리병 안에 담아 둘 겁니다. 뭐, 그것도 도화 씨에게는 나쁘지는 않습니다. 그곳 안에 있으면 시간의 흐름에 상처받을 일은 없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안전할 겁니다. 더할 나위 없이 완전한 세계입니다. 단점이라면 지루하달까. 원래 안전한 것은 지루한 법이지요.”
도명의 등 뒤에는 도화의 몸만 한 커다란 유리구가 놓여 있었다.
“……당신에게 순종하면요?”
“그것 또한 안전하지요. 난 이 세계의 신이니까. 신의 사랑을 받는데 안전하지 않을 리가 없지요.”
“둘 다 안전하다면 제가 왜 포르말린 속에 담겨야 합니까?”
“전 질문이 많은 것을 참 싫어하는데 도화 씨는 새처럼 재잘대는 것이 참 귀엽습니다.”
“도명 씨, 둘 다 안전하다면 제가 왜…….”
도화는 도명에게서 질문에 대한 답을 못 들어서 답답했다. 도화의 조바심이 난 표정에 도명이 웃으며 말했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아…….”
도화가 구덩이 안에서 도명의 화원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도명이 정말 이 세계의 신이라도 된 듯 그의 손에 닿는 것들은 모두 울창하고 화려한 형형색색의 색들로 자신의 몸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도화는 생각했다.
나도 저들처럼 싱그러워질 수 있을까? 줄곧 생각했다. 나는 사무실 안에서 숫자를 치는 기계가 아니다. 그게 내 인생 전부일 리는 없다.
“도명 씨, 말대로 하겠습니다.”
“그래요. 착하네요.”
도화의 말이 떨어지자 도명은 파낸 흙을 다시 구덩이 안에 밀어 넣기 시작했다. 흙이 점점 도화의 몸을 감싸왔다. 처음에는 허벅지까지 쌓인 흙이 이제는 가슴을 덮었다. 점점 감당할 수 없는 공포로 몸이 떨려왔다.
이대로 그가 자신을 기만하며 머리끝까지 흙을 덮지는 않을까. 하지만 도명에게 질문을 할 수는 없었다. 그가 의문을 가지지 말라고 했다. 도명이 뿌려대는 흙이 도화의 어깨까지 올라왔다. 너무 무서워서 턱이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려왔다.
당장이라도 그만해 달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목소리를 내는 순간 도명이 도화를 끄집어내어 포르말린 속에 집어넣을 것 같았다. 도화는 눈물샘이 금방이라도 넘칠 듯이 가득 찼다.
그 순간 도명의 삽이 멈췄다.
도명은 자신의 화원에 도화를 묻고 기분 좋은 콧노래를 부르며 화원 어딘가로 사라졌다. 도화는 불안했다. 도명의 콧노래가 아주 멀어져 사그라질까 봐. 다행히 도명의 콧노래는 도화의 귓가에 아스라이 머물러 있었다.
도명은 물 조리개를 가져와 도화의 머리 위에 뿌렸다. 그리고는 물에 젖은 도화가 아주 예쁘다는 듯이 젖어서 질척거리는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도명의 손가락이 도화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도명의 손바닥은 따뜻했다. 도화는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극한의 공포 끝에 다가온 그의 조그마한 온기에 가슴이 벅차서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도명의 손가락이 도화의 뜨거운 눈물로 흠뻑 젖혀졌다.
“하아…… 너무 예쁘네.”
도명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하지만 아까 화냈을 때 미간을 찌푸렸던 것과는 명백히 다른 느낌이었다. 그의 눈썹 끝에서 고조된 흥분감이 느껴졌다. 그의 뺨은 붉은 온기로 달아올랐고 도화를 쓰다듬는 손끝은 기쁨과 환희로 떨리고 있었다.
“하아…… 하아……!”
도화는 거친 숨과 함께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온몸은 식은땀으로 가득했다. 도화는 얼굴을 쓰다듬으며 그사이 토막 난 꿈들을 연결하려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많은 꿈의 내용들은 휘발성 물질이라도 되는 양 날아가 버렸다.
도화의 뇌 주름 겉면에 남은 것은 땅을 파는 도명의 뒷모습과 자신이 땅에 묻혔다는 것. 투명한 기포가 올라오는 포르말린 용액의 기분 나쁜 부글거림뿐이었다.
***
평소처럼 정확한 시간대에 퇴근 준비를 하던 도화를 사장이 불러 세웠다.
“도화 씨 이야기 좀 합시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따로 조그만 사장실에까지 불려갔다. 도화는 사장의 용건을 듣기 전부터 불길한 예감에 괜히 소매만 만지작거렸다.
“나 도화 씨가 얼마나 성실하고 능력 있는지 알아. 5년 동안 지각, 결근 한 번 없고 일로 잔 실수하는 것도 없고.”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근데 말이야. 도화 씨는 다 좋은데.”
사장은 난감한 듯 손으로 양쪽 눈썹을 밀어 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다른 직원들하고 좀 친해지면 안 돼? 다들 같이 해를 넘긴 것이 몇 번인데.”
“제가 업무상 의사소통에 무슨 실수를 했습니까?”
“아니, 아니. 그 이야기가 아니잖아.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 일할 때는 대충 말해도 척척 알아들으면서.”
사장은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억누르는 듯 경련을 일으키는 입가를 손가락으로 눌러댔다. 사장의 표정에 도화의 긴장감으로 굳은 얼굴이 더욱 굳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차라리 업무 실수라면 같은 실수를 반복 안 하면 그만이었다. 도화가 어쩔 줄 몰라 입술을 꾹 다물고 멀뚱히 서 있자 사장은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이번에는 회식 참가해. 무슨 일이 있어도 참가하란 말이야.”
“……네.”
여전히 어쩔 줄 몰라 도화의 표정이 굳어 있자 사장은 도화의 어깨를 격려하듯 쓰다듬었다.
“도화 씨 완벽한 거 알아, 딱 그것만 고치면 도화 씨만 한 직원이 어디 있어.”
“네. 노력하겠습니다.”
“그래 노력해 봐.”
도화는 들고 있던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멀뚱히 서 있었다. 다른 직원들은 자연스럽게 모여 이런저런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 이 대리님 웬일로 퇴근 안 하고 있으세요? 오늘 잔무도 없잖아요.”
“회식하려고요.”
“정말로요? 대리님이요?”
윤정은 도화의 말에 크게 놀라 했다. 그런 윤정의 말에 도화는 씁쓸한 표정을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추슬렀다. 그러잖아도 아침의 꿈 때문에 하루 종일 기분 이상한데 하지도 않던 회식 참가까지 하게 생겼다.
“네.”
도화는 이런저런 꼬리를 안 붙이고 딱 떨어지는 말투로 말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생각해 보니 갑자기 사장이 왜 이러나 싶었다.
지금까지 용케 회식에도 참가 안 할 수 있었던 건 사장이 도화의 불참을 특별히 꼬투리 잡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심 그 점을 마음에 안 들어 한다는 것을 종종 느껴지긴 했어도 지금까지는 딱히 이 일로 문제까지 될 건 없었다.
살면서 꼰대소리 듣는 걸 제일 싫어하는 사장이 초반에 자기는 회식 같은 걸로 차별하는 사람 아니라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닌 탓이 컸다.
거기다가 어쨌든 도화처럼 회사에 있는 동안 일에 완벽하게 집중하고 차질 없게 하는 직원은 드물어서 그런 걸로 트러블 일으키고 싶지도 않았기도 했다. 도화는 갑작스러운 사장의 심경 변화에 혼란스러웠다.
“우리 지금 메뉴 정하는데 이 대리님은 의견 없으세요?”
“네.”
무표정한 얼굴로 단답형으로 떨어지는 도화의 대답에 직장 동료들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저럴 거면 회식에는 왜 참가하겠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도화는 직장 내에서 소심하다기보다 얼음처럼 차가운 인상의 사람이었다. 일 이야기 외에 시답잖은 말을 섞으려 들면 싸늘한 눈길과 말투로 응징을 가하는 사람, 그런 이미지였다.
그런 사람이 업무 외에 조금이라도 사적인 영역으로 들어온다는 건 그 존재만으로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
도화는 회식 자리에서 잔에 술 채워 주는 대로 마셨다. 그게 최대한 도화가 이 자리 분위기에 맞춰 주는 거였다. 딱히 새롭거나 흥미 있는 주제는 없었다. 그냥 반복되는 업무에 대한 노고, 비슷한 사람 사는 이야기가 오고 가는 정도였다.
“와- 이 대리님 술 세네요.”
“그러게, 와- 주는 대로 술이 끝도 없이 들어가네.”
“네. 센 편입니다.”
도화에게 질문만 던지면 짧게 떨어지는 통에 이제는 도화에게 질문하기 껄끄러워질 정도였다.
“이 대리 남자들끼리 담배나 태우러 가자.”
“담배 안 피웁니다.”
“정말? 끊은 거야? 아니면 원래 안 피우던 거야?”
“애초에 담배를 배운 적 없습니다.”
“우리가 담배 피우고 싶어서 피우는 게 아니야. 사회생활 하다 보면 담배 태우면서 속에 있는 말 자연스럽게 하면서 친해지는 게 있는 거거든.”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운 채 자리를 지키고 있는 도화의 정수리를 쳐다보는 그의 눈동자가 묘하게 위압적이었다. 도화는 껄끄러운 기분을 억누르고자 의자 모서리를 꽉 쥐었다.
“건강에 안 좋아서 배우고 싶지 않습니다.”
“……여기 왜 왔어? 대체?”
“……담배는 안 피우고 옆에만 있겠습니다.”
도화의 말에 그는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회식을 하는 가게 건물 뒤편에서 남자 셋이 머리를 맞대고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도화는 살짝 거리를 둔 채 멀뚱히 서 있었다. 묘하게 벌 받고 있는 느낌이었다.
도화는 급격하게 피로감이 몰려왔다. 거리를 뒀지만 매캐한 담배 연기는 미세한 바람을 타고 도화의 기관지로 들어갔다. 숨을 참아 보지만 한계가 있었다.
“도화 씨, 학교 다닐 때 친구 없었지? 막 공부만 했지. 동아리 같은 거 가입도 안 하고?”
그가 하는 모든 추측이 다 엇나갔다. 도화는 공부보다는 동아리 활동에 더 열을 올렸고 친구도 많았다. 공부는 그저 평균이었고 수학만 유난히 잘했다.
유난히 남자애들은 도화를 좋아했다. 물론 연애 상대로서가 아니라 친구로서. 대충 이발기로 동그란 두상 그대로 밀어 버린 털털한 까까머리에 이상적인 큰 키와 남자다운 몸. 좋은 운동신경.
까칠함이라곤 전혀 없는 둔하고 둥글둥글한 성격. 이 모든 것이 또래 남자애들을 끌었다. 그는 수더분해 편하면서 동시에 남자들이 되고 싶은 이상적인 몸과 유망한 축구팀의 부주장이라는 우상의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동아리 했었습니다.”
“진짜요? 어떤 거요?”
20대 중반을 갓 넘긴 동료가 도화를 향해 호기심 잔뜩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축구부 했었습니다.”
“하긴 도화 씨가 몸은 좋아 보여.”
허락도 없이 이들이 담배 연기를 풀풀 뿜어대며 도화의 몸 이곳저곳을 주물럭거렸다. 도화는 이 모든 것이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축구를 했었다 하니 10년 전 일인데도 그의 허벅지가 탄탄한지 보기 위해 어떤 손이 허벅지 안쪽까지 주물럭거렸다. 도화의 불쾌감이 머리끝까지 치달았다.
예민한 부분이 갑자기 만져져서 성적으로 흥분되냐고? 아니, 그저 남은 건 당혹감과 불쾌감뿐이었다. 도화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손목을 악 소리 나게 부여잡았다. 도화가 그를 노려보자 그는 손을 거두며 투덜대기 시작했다.
“같은 남자끼리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 계집애야?”
“남자 손길이니까 더 기분 나쁘죠. 같은 남자끼리 이러지 마세요. 소름 돋게. 안 그렇습니까?”
이럴 때면 남자 이성애자의 언어를 빌려야 한다. 그래야 안전하게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도화가 여자였어도 그럴 것이다. 사회생활에서 언제나 잘 먹히는 건 남자 이성애자의 언어다. 모든 남자 이성애자의 언어가 나쁜 건 아니다.
하지만 도화에겐 그들의 언어가 대부분 공격적이라고 느꼈다. 사소한 말꼬리 하나하나가 목 끝에서 껄끄러웠다.
“하긴, 이왕 만져지는 거 윤정 씨면 감사하지.”
도화는 갑자기 튀어나오는 직장 동료의 이름에 당혹스러웠다. 딱히 그녀가 도화와 연애 분위기를 타는 사이도 아니었다. 아니 그런 사이였어도 이상했다.
“윤정 씨 예쁘지. 마음도 크고.”
그는 마음이 크다면서 가슴에 손을 올리고 흔드는 흉내를 내고는 담배 연기를 깊숙이 흡입했다. 그리고는 도화를 향해 웃으라는 듯 눈길을 줬다.
“저는 윤정 씨보다 정은 씨가 더. 왜 잘 웃잖아요. 마음 크기도 중요하긴 한데 윤정 씨는 너무 안 웃어서 뭐랄까 여자 같지 않달까? 아닌가, 마음의 크기가 역시.”
평소 소심한 성격의 도화보다 어린 동료가 이 대화에 얼씨구나 하고 거들었다. 여자와 말도 제대로 섞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저런 말을 하자 도화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직장 여자 동료의 품평회가 일어나자 도화는 여러모로 당혹스러웠다.
다들 한마디씩 하다가 도화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어서 너도 이 이야기에 거들어 보라는 듯이 말이다.
“…….”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를 하라고?’
갑자기 안 좋은 기억들이 떠올랐다. 사소하다면 사소한 기억들이었다. 남자들이 모여서 여자들을 안주 삼아 떠들다가 가만히 있는 도화가 결국엔 남자도 아니라는 식의 공격을 받는 상황 말이다. 앞으로 이어질 대화가 빤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의 대화에 동참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도화의 인생에서 여자들은 개인적으로 부딪칠 일도 없는 사람들이고 그들의 사정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하지만 이런 대화는 역시 저급해서 끼기 싫다. 말리는 것까지는 못 하더라도 그렇게까지는 역시 싫었다.
“저는 아무 생각 없는데요.”
“아직 결혼도 안 한 한창 나잇대의 이 대리가 아무 생각이 없으면 어떻게 해? 마누라 있고 딸도 있는 내가 이러는데.”
‘아니 그러니까.’
도화는 혐오 어린 시선을 숨기려고 앞머리를 끌어내렸다. 놀랍게도 그는 지갑에 딸과 아내 사진이 있는 소위 말하는 좋은 아버지였다. 도화는 그래서 더욱 혼란스러웠다.
사람이라는 게 그냥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이렇게 딱 떨어지지가 않는다. 사람의 인격은 다면체이다. 상대에 따라 보여 주고 싶은 방향을 돌린다. 그런데 마음 편하자고 한 면으로 상대를 전부 설명받고 싶고 보증받고 싶은 것이다.
남자들끼리 담배 피우는 시간을 끝내고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동료들이 안주 삼아 이야기하던 그녀들은 나란히 붙어서 남은 안주를 먹고 있었다. 이들은 다시 사심 없는 직장 동료가 되어서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이어갔다. 그들은 더할 나위 없이 무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도화는 이 모든 상황이 이상했다. 도화는 동성애자이다. 그렇다고 같이 일하는 모든 남자 동료들을 가지고 품평회를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이성이면 동료를 동료로 보는 게 당연한 것이 아닌 듯했다.
다들 2차를 간다느니 하고 있는데 도화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피로감에 눈꺼풀이 뻑뻑했다. 차라리 사무실에 남아서 일을 하는 편이 덜 피곤할 것 같았다. 도화는 1차를 끝으로 자리를 빠져나왔다. 물끄러미 다음 회식 장소로 이동하는 동료들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안전하지가 않다.’
자꾸 그런 생각이 든다. 도화는 그들과 대화 하는 내내 아슬아슬했다. 동성애 성향을 들키지 않으려고 대수롭지 않은 대화에도 두세 번의 검열을 거친다. 그리고 그들의 언어를 사용한다.
그런데 그들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불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이 공격당하는 것 같았고 그리고 원해서 사용하는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상처 입힌다. 도화는 공격을 받은 짐승이라도 되는 양 목덜미를 괜히 수시로 문질거렸다.
그리고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주인집 남자가 어떤 의미로는 안전하지 않을까? 적어도 그와 이야기할 때는 자신을 숨기고 검열할 일도 없었다. 오히려 검열은 도화 쪽에서 도명을 향해 더 치열하게 했었다.
노골적인 비난도 많았다. 그의 근원적인 정신세계에 대한 노골적인 거부 반응.
그런데 그는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가 있는 건가. 어떻게 그렇게 두려움 없이 많은 관계들을 맺어 왔고 또 어떻게 그렇게 흔들림도 없는가.
도화는 사람들이 떠나고 난 제자리에 혼자 남아서 생각에 잠기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유도명이 안전한 영역이라니! 그 사디스트가?
도화는 헛웃음을 한두 번 짓다가 편의점에 들러서 맥주를 더 샀다. 도명이 차라리 안전하다는 헛생각이 드는 걸 보니 차라리 더 취한 채 잠드는 편이 좋은 것 같았다.
***
도명은 잡지에 들어갈 원고를 작성하느라 밤늦게까지 가게 안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수시로 창밖을 보았다. 그동안 도화는 언제나 같은 시간대에 도명의 가게 앞을 지나왔다. 그러던 사람이 안 들어오니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백구가 갑자기 안 들어오네.”
도명은 노트북을 덮고 가게 앞 벤치에 앉아서 허브차를 마셨다. 그러면서 도화에 대한 생각을 했다.
일단은 겁이 아주 많은 사람이니 그냥 이런저런 조언 해 주는 친한 형 정도의 역할로 다가가자는 생각을 했다. 그가 스릴을 즐기는 점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볼까도 싶었지만 이런 것을 그런 식으로 하는 건 여러모로 위험했다.
당장 도화를 침대를 엎어놓고 성적 욕구를 안 푼다고 큰일 날 사람도 아니었다. 또 마음에 든다고 조바심으로 일을 진행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도명은 허브차를 반쯤 마시다가 손목시계를 보았다. 저녁 10시였다.
“백구가 늦네.”
도명이 이쯤 되면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하고 생각할 때 도화가 터덜터덜한 발걸음을 하고 도명의 가게 앞을 천천히 지나갔다. 앞만 보는 경주마처럼 걷고 있는 터라 도명이 두꺼운 카디건을 입고 가게 앞에 앉아 있는데 보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도화의 손에는 검은 비닐봉지가 대충 걸려 있었다. 도명은 말없이 도화를 쳐다보기만 했다. 자신이 앉아 있다는 것을 못 알아채도 상관없었다. 흥미 있는 대상을 관찰하는 것은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상대방이 자신을 얼마나 신경 쓰냐는 중요치가 않았다. 중요한 건 자신이 어떤 대상을 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도화는 도명의 가게 앞을 그냥 지나려다가 커다란 은색 화분 하나를 발견했다. 도명이 내일 분갈이를 하려고 준비해놓은 화분들이었다. 다른 화분들은 고만고만한 크기였는데 유독 하나만 너무 커다래서 신기했다. 도화는 화분을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그 안을 골똘히 쳐다보았다.
‘크기가. 내가 심어질 수도 있을 것 같아. 내가 몸만 잘 구기면.’
도화는 대체 자기가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면서도 계속 화분의 내경을 가늠하고 있었다.
도명은 도화가 화분을 골똘히 보다가 머리까지 반쯤 박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도명은 마시다 만 허브차를 벤치 위에 내려놓고 도화의 목덜미를 잡았다.
“도화 씨, 여기다 토하면 안 됩니다.”
도화는 갑자기 보이는 도명의 얼굴에 화들짝 놀란 얼굴을 하다가 이내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
“제가 오늘 술을 마시긴 했습니다.”
“네, 술 냄새가 나네요.”
“그런데 토할 정도로 마시지는 않았습니다. 주량이 꽤 되거든요.”
“그렇습니까?”
“화분이 정말 크네요.”
도화의 말에 도명은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습니까? 그게 신기해서 구경 중이었습니까?”
“아, 저 오늘 도명 씨가 꿈에서 나왔습니다.”
갑자기 훅 들어오는 도화의 말에 도명은 살짝 움츠러든 발끝은 피고는 애써 태연한 얼굴을 했다.
“좋은 꿈이었으면 좋겠네요.”
“도명 씨가 나오는데 어떻게 좋은 꿈이겠습니까?”
“어떤 꿈이었는데요?”
“도명 씨가 저를 땅에 묻고 있었습니다.”
“도화 씨의 저에 대한 인상은 정말 꾸준하네요.”
도명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 도명의 표정을 도화가 빤히 쳐다보았다. 그것도 술에 취해 살짝 벌게진 얼굴을 하고 말이다. 도명은 그런 도화의 벌게진 뺨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도화가 눈을 감고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도화의 떨림이 도명의 손 안에 선명하게 전해졌다.
도명은 떨림의 뉘앙스가 살짝 묘하다고 느꼈다. 도화의 목덜미가 소름이 돋는 듯 살 표면이 오도독 돌면서도 감은 눈의 떨림은 달콤해 보였다.
도화는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도명의 눈을 피하고는 화분의 테두리를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이 화분, 절 심기에 좋아 보이네요.”
“제가 도화 씨를 심기 위해 이 화분을 준비라도 했다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또 저의 망상이겠죠.”
“도화 씨 피곤할 텐데 들어가서 자요.”
“저랑 2차 하시겠습니까?”
“네?”
도화가 도명의 앞에 맥주를 흔들어 보였다. 도명은 도화가 이러는 이유에 대해서 가늠하기 위해 소맷자락을 매만지며 눈을 가늘게 떴다.
“아, 싫으시구나.”
“아니요. 그냥 도화 씨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라서 놀랐을 뿐입니다. 이웃사촌끼리 못 할 건 없죠. 안주는 제 쪽에서 준비해서 올라가겠습니다.”
***
도화는 자신의 방을 어수선하게 돌아다녔다.
“내가 지금 누굴 집에 들인 거야!”
도화가 직장 동료들에게 자신이 술이 세다고 한 건 허풍도 거짓말도 아니었다. 그는 마신 맥주의 빈 병들 수치고는 크게 취하지 않았다. 아주 안 취했다고도 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이상한 결정을 내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면 밤공기에 누구 술이라도 탔거나! 도화는 혼자 잠자리처럼 제자리를 돌다가 걸음을 뚝 멈췄다.
‘그래서 이제 와서 뭘 어쩔 건데. 그냥 같이 한두 잔 마시면 되는 거지.’
도화는 흥분이 조금 진정되자 침대 매트리스 끝자락에 앉아서 시선을 멍하니 던지다가 도명이 올라올 때 저 공포영화 DVD들을 보면 또 기겁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화는 여름 침구를 꺼내서 DVD로 가득한 책장을 덮었다. 그리고 맥주잔을 준비했다. 오히려 손님을 초대한 도화 쪽에서는 할 것이 없었다.
도화는 의자에 앉아 두근두근 대는 심장 고동소리를 들으며 얌전히 앉아 있었다. 고작 같은 남자가 내 집에 오는 건데 왜 이렇게 긴장되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준비할 게 있다면 그것을 하느라 정신이라도 돌릴 수 있을 텐데. 도화가 부산스럽게 집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명의 가게에서 식사할 때 보니까 테이블 위에 보기 좋게 꽃까지 올라와 있던데. 자신의 식탁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도화는 보기 좋은 물건을 찾기 위해 눈동자를 굴러댔다. 하지만 도화의 집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다. 그나마 보기 좋은 건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흐르는 스노우볼밖에 없었다. 도화는 스노우볼 하나를 골라서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올려놓았다.
‘테이블은 이렇게 꾸미는 건가……?’
***
도명은 주방에서 야채와 소시지를 볶다가 잠시 불을 끄고 싱크대 상판 위에 두 손을 올려놨다. 묘하게 정신이 번잡스러웠다. 이러다 그답지 않게 야채가 물러질 정도로 익힌다거나 아니면 설익게 할 것 같았다. 도명은 일부러 손가락을 천천히 탁탁 두들기며 서 있었다.
‘지금 백구가 날 집에 초대한 거야? 그것도 이 시간에? 술을 마시자고? 본인은 반쯤 취해 있고? 술버릇인가? 아니지, 아까 눈 보니까 그렇게 취해 있지도 않던데.’
도명은 손끝에 남은 도화의 떨림을 상기했다. 확실히 묘했던 것 같은데.
‘상대는 동네 백구다. 어떤 이상한 발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지. 자신이 땅에 암매장당하는 무서운 꿈을 꾼 나머지 공포의 상대인 나와 어떤 결판을 지어야 한다는 상상을 할 수도 있지. 아니면 내가 새로운 공포영화 DVD라든가. 예측할 수도 없는 그런 살아 있는 공포. 일단 백구 하는 걸 봐야 아나.’
도명은 혼란스러운 듯 머리를 쓸어 넘기다가 하다만 요리를 마무리 지었다. 접시에 보기 좋게 담아 계단실로 걸음을 옮겼다. 계단 중간에서 고개를 들어 보니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 문을 보자니 기분이 묘했다. 도명은 사람 좋은 미소를 한두 번 연습하고는 남은 계단을 올라갔다.
도화가 도명의 얼굴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서 있었다. 도화가 땀으로 흥건해진 손바닥을 바지에 닦았다.
“아, 여기에.”
도화가 앉으라는 듯이 의자를 뺐다. 도명이 안주를 내려놓고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꼰 채 도화가 하는 모습을 느긋한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누가 보면 이 공간의 주인이 도명인 것 같았다. 엄연히 말하면 그렇기도 하지만.
“도화 씨.”
“아, 네.”
“좀 앉아요. 어수선하잖아요.”
“아 그렇죠.”
도화가 그제야 기립 자세에서 벗어나서 의자에 앉았다. 도화는 여전히 손님을 초대해 놓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눈동자만 굴려댔다.
“어떻게. 그사이 술이 더 깼네. 그러니까 더 긴장하잖아요. 나는 괜찮은데 도화 씨는 설마 후회하는 거 아니죠? 표정 좀 풉시다. 누가 보면 사단장 놀러 온 줄 알겠습니다.”
“네? 아 그러니까 제가 집에 손님 초대한 지가 꽤 돼서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서. 도명 씨야 손님 초대에 익숙하니까 대수롭진 않겠지만 말입니다.”
“그냥 맛있게 식사하면 되는 겁니다. 시답잖은 이야기나 하고.”
“아 그렇죠.”
도명이 맛보라는 듯이 야채와 함께 소스에 절인 소시지를 포크로 찍어 도화의 입 앞에 내밀었다.
“맛봐 주세요.”
도화는 왜 굳이 자기도 손이 있는데 도명의 손에 있는 걸 먹어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도명은 단호한 표정으로 소시지를 앞으로 더 밀어 넣었다.
도화는 얼떨결에 입을 벌리고 그가 먹여 주는 소시지를 입안에 집어넣었다. 도명의 포크가 도화의 아랫입술을 지그시 누르다가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그 포크를 자신의 입안에 집어넣고 혀로 훑었다.
도화의 입안에서는 달짝지근한 소스와 함께 탱탱한 소시지 육즙이 배어 나왔다. 역시 그가 해 주는 음식은 다 맛있다.
“이번엔 저도 자신이 좀 없네요. 평소 실력이 아니라서. 사실 긴장한 건 도화 씨뿐만이 아니라서요.”
“네?”
“저도 사람인데 긴장하지 않겠습니까? 선 그었던 분이 선 안으로 갑자기 들어오라 하면.”
도명의 말에 도화는 민망한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아…… 그 이상한 의미로 초대한 건 아닙니다. 그건 확실히 오해입니다.”
“그럼요. 그냥 이웃사촌인데 잘 지내 보자는 거죠. 안 그래요?”
“네. 물론 그렇죠.”
도화가 도명의 술잔에 맥주를 채웠다. 도명 역시 도화의 술잔에 맥주를 채웠다.
“어제 제가 도화 씨를 묻어서 속상해서 술 마신 겁니까?”
도명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요. 그냥 회식이라서.”
“아, 회식.”
“도명 씨네 회사에서도 회식합니까? 바보 같은 질문이었습니까? 당연히 있나…….”
“자주는 아니고 연말에 한 번 정도 합니다.”
“겨우, 그 정도만요?”
도화가 부럽다는 듯이 말했다. 이 순간만큼은 도명의 회사로 직장을 옮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음, 엄밀히 말하면 그 외에는 이건 회식은 아닌데 회사일 많아서 다 같이 밤샐 때는 제가 야식 만들어 주는 정도? 일이라는 게 즐거운 순 없지만 할 수만 있다면 조금이라도 기분 좋은 상태에서 해야 하니까요. 도화 씨는 회식이 싫은 모양이네요.”
도명의 말에 도화의 시선이 무심코 바닥을 맴돌았다. 문득 도명에게 오늘 겪었던 일들을 다 쏟아내고 싶었다.
“말해 봐요. 제가 도화 씨 회사 사람도 아닌데, 이야기해도 문제 될 건 없죠.”
“아 그게.”
도화는 도명에게 오늘 회식에서 겪었던 일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가 느꼈던 불쾌감, 두려움. 소외감. 외로움. 도화가 도명이 어쩌면 소위 말하는 평범하다는 이 사람들보다 안전하다고 느낀 부분만 빼고 다 말했다.
도명은 두서없이 쏟아지는 도화의 이야기들, 교차하는 감정들을 말없이 듣기만 했다. 도명은 그저 안쓰럽다는 듯이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도화는 그 손길이 싫지 않았다.
도화는 도명이 자신의 화려한 인간관계 기술을 늘어놓을 줄 알았다. 살짝 그런 조언을 기대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 편이 더 좋았다. 도명은 그저 그가 느낀 경멸에 대해서 깊이 공감할 뿐이었다.
“도명 씨는 사회생활을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그렇게…….”
“도화 씨는 착하고 또 우직하죠. 그리고 나는 그들보다 더한 악마고. 또 뻔뻔해서요?”
“저는 지금 진지한데요.”
“제가 농담하는 것 같습니까?”
“저는 그렇게…….”
“그렇게는 못 하겠죠. 도화 씨와 저는 다른 사람인데.”
“그래서 제가 한심합니까?”
“그럴 리가요. 아까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뻔뻔하다고. 그래서 저는 제가 악마이면서도 도화 씨 같은 사람을 좋아합니다. 물론. 좋은 이웃사촌으로서.”
도명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풀이 죽은 도화의 정수리를 이상야릇한 손길로 원을 그리며 어루만졌다.
“왜요? 이용하기 좋아서요?”
“제가 사람을 이용하는 데 재주도 좋고 죄책감 역시 없는 편이긴 한데 도화 씨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 억울하네요. 가만히 잘 생각해 보세요. 저는 오히려 계속 이해해 주고 쭉 퍼 주기만 한 것 같은데?”
도명이 마지막 남은 소시지를 도화의 살짝 벌려진 입술 안에 밀어 넣으며 말했다. 도화는 입안에 단 것이 들어오자 경계심 없이 입술을 벌렸다.
“왜요?”
도화가 입안에 든 소시지를 다람쥐처럼 오물거리면서 경계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글쎄요. 제가 도화 씨 한정 호구도 아니고. 이것 참.”
“아…….”
도화는 도명의 말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바쁘게 입만 오물거리다가 덜 씹은 소시지 덩어리를 목구멍으로 삼켰다. 그리고 갑자기 차를 내 와야 예의라며 주방에 섰다.
맥주 마시다가 커피라니! 묘하게 이상한 조합이지만 도명은 그냥 도화가 하는 대로 가만히 내버려 뒀다.
도화가 차를 준비하는 동안 도명은 도화의 집 창가에 서서 그의 스노우볼들을 구경했다. 그러다 두서없이 놓인 그것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줄을 맞추고 주제별로 재정리해서 순서도 바꿔 놓았다.
“그런 거 보면 막 참을 수가 없어요? 정리하지 못하면 머리카락이 쭈뼛 선다거나. 뭐 이런 느낌이에요?”
커피를 타서 도명의 등 뒤에 서 있던 도화가 그런 도명의 모습을 보고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도명은 도화의 질문에 답하지도 못하고 그의 스노우볼을 정리하는 데 정신이 없었다. 도화는 답답한지 계속 말 없는 도명의 등 뒤에다가 질문을 던졌다.
“살면서 어수선해지는 것이 얼마나 많은데 그때마다 그렇게 다 정리해요?”
집요하게 반복되는 질문에 그제야 도명이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습관 되면 어려울 건 없는데요?”
“자기 물건은 그렇다 치지만 다른 사람 것까지 신경 쓰면 끝이 없잖아요.”
“다른 사람 물건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참고 못 참고의 문제가 아니라 신경이 써지지 않습니다.”
“음 전혀요? 예외 상황도 없이?”
‘저기, 그렇다는 사람이 내 스노우볼을 왜 정리하는 건데……? 어디 어떻게 변명하나 들어나 보자.’
“예외 상황이요? 음…… 제가 길들일 사람의 것이면, 조금 신경 쓰는 것 같습니다.”
도명은 도화의 질문들에 대답을 하다가 스노우볼을 정리하는 손길을 멈췄다. 도명이 되돌아보니 얼음조각처럼 굳은 채 딸꾹질까지 하는 도화가 서 있었다. 순간 도명의 표정이 싸하게 굳었다. 그러다가 입꼬리를 쭉 올리며 말했다.
“아, 들켰네.”
“아 저 밤이 깊었네요, 이제 둘 다 내일을 준비해야 하지 않겠어요?”
도화가 시선을 피하며 식기들을 급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명백한 회피 동작에 도명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도화가 정리할 식기도 얼마 없었다. 고작 맥주잔 두 개뿐이었다.
도화가 도명이 들고 온 접시마저 싱크대에 집어넣고 있을 때 도명이 도화의 뒤에 바짝 서서 그의 손목을 잡았다. 도화는 갑자기 도명에게 뒤에서 안긴 꼴이 되었다.
도명이 뒤에 서 있자 그의 옷에서 나는 섬유 유연제 향이 도화의 코에 훅 들어왔다. 독신 남자에게서 어떻게 이렇게 항상 좋은 냄새가 나는 건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건 제 겁니다.”
도명이 도화의 귓가에서 속삭였다. 도명에게 잡힌 도화의 손목이 파르르 떨렸다.
“아, 음. 깨끗이 씻어서 돌려 드리려고…….”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남이 제 물건 뒷마무리하는 거 안 좋아합니다. 미덥지 않아서.”
“아. 그렇군요.”
‘성격 엄청 피곤하네.’
도화가 도명과 거리를 두려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지만 물러날 틈이 없어서 허리만 싱크대 상판에 걸려 바깥으로 휘었다. 도화는 어서 그의 접시를 돌려줘야 도명이 물러날 것 같아서 접시를 도명 쪽으로 내밀었다.
도화가 소스까지 박박 긁어먹어서 소스가 얼마 없었지만 그릇에 아예 소스가 없을 수는 없었다. 도명의 카디건에 적갈색 소스가 묻어 나왔다. 도명은 난감한 표정으로 엉망이 된 카디건을 보았다.
“앗, 죄송합니다. 세탁해…….”
도화는 세탁을 해 주겠다고 하려다가 방금 전 도명이 남이 자신의 물건을 뒷마무리하는 것을 안 좋아한다는 말이 생각나 입을 급히 다물었다. 이도 저도 못 하고 도화는 난감한 듯 도명의 엉망이 된 카디건을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도명은 낮게 한숨을 쉬고는 도화가 자신의 접시마저 깨트릴까 봐 그의 손에서 접시를 뺏어 들어 싱크대 위에 얹었다.
“도화 씨, 울 소재는 어떻게 세탁해야 하는지 알고는 있어요?”
‘울이면 뭐, 다르게 해야 해? 그냥 세탁기에 돌리는 거 아니야?’
“아. 그럼 세탁소에 맡기겠습니다.”
도명이 도화의 앞머리를 쓸어 넘기다가 움켜쥐었다. 앞머리가 꽤 긴 편이라 손에 쥐고 흔들기 딱 좋았다. 앞머리를 쓸어 넘기자 보기 좋은 이마가 나왔다. 비율도 좋을뿐더러 살짝 튀어나온 모양이 예쁘고 귀여웠다.
‘확 잘라 버리면 좋을 텐데.’
도명의 눈길이 자연스럽게 주방에 걸려 있는 가위로 흘러 들어갔다. 하지만 멋대로 가위를 집어 들고 남의 머리를 자를 수 없는 일. 이 결심은 나중으로 미뤄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일을 간단하게 처리합시다.”
“가, 간단하게요?”
“저는 이런 불쾌한 일을 당하면 돈으로 보상받는 것보다 상대방 벌주는 것을 선호합니다.”
도명의 말에 도화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거렸다.
“저는 돈으로 보상해 주고 싶은데요. 그럼 세탁비고 뭐고 이 카디건 얼마입니까? 아예 이거 그대로 사 줄게요. 나랑 내일이라도 당장 백화점 갑시다!”
도화가 의기양양한 말투로 소리쳤다.
‘이 변태 새끼야! 너 또 내 엉덩이 때리고 싶어서 그러는 거잖아.’
도화는 자신도 모르게 엉덩이를 두 손으로 가리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도화의 반응에 도명이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30만 원 정도 하죠.”
‘어쩐지 유난히 보송보송하고 부드럽더라! 비싼 걸 너무 아무렇게나 입고 다니네! 이런 건 뭐 결혼식 이럴 때 한 번 꺼내 입고 그러는 거 아닌가.’
“…….”
도명의 입에서 나온 금액에 놀란 도화가 순간 말을 잃었다.
“3초.”
“네?”
“3초만 벌 받읍시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순간 3초면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화가 고민하는 듯 눈동자를 굴리자 도명이 살살 웃으면서 그의 옆구리를 간질이며 하자고 속삭였다. 도화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1초당 10만 원으로 통치자는 건데 이만한 시급은 없었다. 이걸 황제 노역이라고 하던가.
하지만 이 어마어마한 시급보다 도화를 홀린 것은 가까이 다가온 그의 얼굴이었다. 역시 얼굴은 잘생기고 봐야 한다. 거기다가 온갖 좋은 냄새가 그의 정신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도화는 얼떨결에 멍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명이 도화의 어깨를 밀치고 식탁에 눕혔다. 그리고는 입꼬리를 사악하게 올리면서 도화의 턱을 세게 움켜쥐었다. 도화는 순간 악마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젠장, 속았다! 도화의 품 안에서 느껴진 도명의 부드러운 미소와 조금은 애교 섞인 목소리에 완전히 속아 버렸다.
“아픕니다.”
“네. 네?”
도화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도명이 송곳니를 드러냈고 도화의 귓불을 송곳니로 있는 힘껏 물어 버렸다.
“으악!!”
도화의 입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저절로 나왔다. 너무 놀란 그의 심장박동수가 급속도로 올라갔다. 척추가 찌릿찌릿 울릴 정도로 극심한 아픔 속에서 얼얼한 도화의 귓불을 핥는 도명의 뭉근한 혀가 느껴졌다.
아픈 와중에 기분이 기묘해졌다.
도명은 약속대로 미련 없이 도화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도명이 식탁 위에 눕혀진 도화를 내려다보았다. 도화의 눈가는 그 잠깐 사이에 붉게 물들어 있었다. 도화는 얼얼한 귀를 한 손으로 감싸 쥐며 놀란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입술을 살짝 벌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도명은 그런 도화의 목을 감싸고 엄지로 목젖 부분을 지그시 누르고 활짝 웃었다. 아이같이 순수한 웃음이었다. 이점이 지독하다면 지독한 부분이었다.
“쉬- 도화 씨, 진정해요. 무서운 부분은 다 끝났어요.”
“그런데, 왜 제 목을 감싸고 있는 건데요?”
“이러고 있으면 당신의 떨림이 온연히 느껴지거든요.”
“이러는 게 즐거워요?”
“네.”
망설임 없이 깔끔하게 떨어지는 도명의 대답에 도화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도화 씨는 안 즐거웠어요?”
“이런 게 즐거울 리가 없잖아요.”
도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빠르게 말했다. 도명은 도화가 항변하는 와중에도 자신의 잇자국이 예쁘게 박힌 도화의 귓불을 이리저리 구경했다.
자신이 생각한 대로 예쁘게 박힌 것 같았다. 도명은 이 자국이 적어도 3일은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느끼는 건데, 도화 씨는 참 경솔해요.”
“제가 뭘……? 도명 씨 집 침입한 거요? 택배 훔쳐본 거요? 카디건 망친 거요?”
‘이것 봐, 자기가 봐도 나한테 잘못한 거 많잖아.’
“그것도 있고 여러모로. 도화 씨 잘 생각해 봐요. 정말 안 즐거웠어요?”
“도명 씨가 같은 걸 계속 물어봐도 제 대답은 똑같습니다.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이것 봐. 사람이 참 경솔하다니까. 도화 씨.”
“그, 그거! 좀 하지 마세요. 별거 아니라면 별거 아니어서 계속 참고 있었는데 왜 자꾸 제 이름 부르고 뜸을 들여요. 제 이름으로 밥 짓는 것도 아니고! 남의 신경 바짝 태워 먹을 일 있냐고요!”
“아, 별말 하려던 건 아니고, 잘 자라고요.”
도명이 손을 살짝 흔들며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접시와 포크를 챙겨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도화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도명의 뒤통수를 향해 외쳤다. 도화는 약이 바짝 오른 듯 입술을 말아 올리며 성난 이를 드러냈다.
“내 말이요! 별말 아닌데. 왜 뜸을 들여요! 뭔가 중요한 이야기 할 것처럼.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 맞죠?”
도화의 외침에 도명은 그저 하하 웃었다.
“일부러 그랬던 거 맞네! 아니, 웃지만 말고 대답을 해요! 일부러인지 아닌지! 그냥 나쁜 습관인 건지! 그거 습관이면 꼭 고쳐요!”
도명은 가게에 내려와서 설거지를 하면서 중얼거렸다.
“습관은 무슨, 당연히 일부러 그러는 거죠.”
도화는 자신이 뜸을 들일 때마다 저절로 나오는 도화의 표정이 생각나 악당처럼 웃었다. 그 자신의 입술만 쳐다보는 집요한 눈길과 움찔거리는 반응이라니. 여러 번 해도 질리지가 않았다.
***
도화는 주인집 남자가 사라지자 그제야 다리에 힘이 풀렸음을 느꼈다.
도화는 자기 전 번잡한 정신을 식히기 위해 샤워를 시작했다. 도화는 옷을 다 벗고 거울에 물린 귓불을 갖다 댔다. 도명의 잇자국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손으로 조심스럽게 만져 보니 아직도 열이 몰려 있고 시큰거리는 게 진짜 작정하고 문 게 분명했다. 도화는 분해서 주먹을 불끈 쥐고 제자리에서 동동 굴렀다. 그리고는 벽에 몸을 기댄 채 너덜너덜한 정신으로 중얼거렸다.
‘젠장, 얼굴에 낚였어. 그 와중에 애교는 함정 아니야?’
‘합시다. 도화 씨 합시다. 하자. 도화야.’
‘사디스트라며! 사디스트들은 원래 무섭고 사늘한 표정만 지을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위압적이고! 협박하고! 그 사근사근한 목소리 뭐냐고.’
봄이 본격적으로 다가오고 있는 계절이지만 아직 찬물로 샤워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었다. 하지만 도화는 찬물로 샤워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이 흥분된 기분이 가시지 않을 것 같았다.
도화가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으려는데 새 속옷이 없었다. 너덜너덜한 정신으로 샤워 준비를 했던 게 화근이었다. 어차피 혼자 사는 집 맨몸으로 화장실 밖을 나가도 문제 될 건 없었다.
도화는 화장실 구석에 있는 세탁기에 옷을 집어넣다가 자신의 팬티가 기분 나쁠 정도로 축축하게 젖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투명하고 미끈미끈한 액체로 팬티가 축축했다.
‘이것 봐. 사람이 참 경솔하다니까.’
도명의 목소리가 도화의 귓가에서 윙윙댔다. 도화는 지금 정신이 너무 아찔했다. 자신의 팬티를 보는 도화의 손이 덜덜 떨렸다. 도명이 이사를 오고 난 이후로 도화의 공포가 끝나지 않는다.
***
도화가 적극적으로 도명을 피해 다닌 지 3일째였다. 도명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매일 꼭두새벽마다 출근했고 또 밤에는 늦게 들어왔다. 회사 근처 카페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3일 만에 책 한 권을 다 읽을 정도였다.
도명의 가게 문이 닫힌 시각 11시, 집에 들어온 도화의 눈 밑은 피로감으로 시꺼멓게 변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도망을 끝내기 위해 도명과 정면승부를 할 용기가 들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뭘 위한 정면승부인지도 모르겠다. 뭘 위한 도망인지도 모르겠다. 도화는 피곤한 얼굴로 침대에 누웠다.
“빌어먹을 인간. 그렇게 늦게 자는데 새벽부터 일어나서 가게 열고. 사람이 왜 그렇게 부지런하게 살고 지랄이야. 어떻게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냐고!”
도화는 그렇게 욕쟁이 할머니처럼 도명을 욕하며 잠들었다. 그리고 도화가 다시 눈을 떴을 땐 탁상시계가 가리킨 숫자를 부정했다.
시곗바늘이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도명이 일어나서 식물들 상태를 체크한 후 가게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을 시간이었다. 도화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그러다 대충 양복을 걸치고 현관문 앞에 섰다. 도화는 나갈 채비를 마치고 심호흡을 하고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아래층 상황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상체를 최대한 뺀 후 주위를 살폈다.
현관문에서 몇 걸음 안 가서 바로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이어지기 때문에 이곳에서 몸만 빼도 아래의 상황이 어느 정도는 보였다.
역시 칼 같은 인간, 도명은 역시 일어나 있었다. 요즘 날씨가 좋아져서인지 부쩍 가게 앞 벤치에 자주 앉아 있었다. 오늘은 밖에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었다.
‘소름 돋는 인간! 이 꼭두새벽부터 머리 옷 다 완벽하게 세팅되어 있는 것 봐.’
도명이 갑자기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도화는 몸을 날려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왔다. 소름이 돋았다. 짐승의 촉도 아니고 자기가 도명을 지켜보고 있는 건 어찌 알았는지 모르겠다.
‘무서워! 정수리에 눈 달렸냐고!’
도화는 벌벌 떨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현관문 밖으로 몸을 뺐다. 그사이 도명이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도명의 가게 앞을 안 지나고 밖을 나갈 수 있는 방법은 뒷마당밖에 없었다. 도화는 도명이 없을 때 계단을 후다닥 내려간 후 계단 옆 울타리를 넘어서 뒷마당으로 갔다.
그사이 뒷마당 풍경이 조금 변해 있었다. 정말 뒷마당에서 채소 재배를 할 생각인지 각종 모종이 뒷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담장 주변에 적당한 높이의 턱을 만들어서 흙을 담아 두었다.
용도가 애매한 뒷문은 이제 안 쓰기로 한 모양이었다. 대문 앞부분까지 화단이 조성되어 있었다. 이제 막 나기 시작한 푸릇푸릇한 싹들이 제법 귀여웠지만 도화 입장에서는 부비트랩과 다름없었다.
도화는 화단 끝자락을 구둣발로 밟고 낮은 담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겨우 1.5m 되는 뒷마당 담장은 낮았지만 모종들이 심겨 있는 흙을 아예 안 밟고 넘어갈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도화는 긴 팔다리를 뻗어 보았지만 역시 역부족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지랄인가 싶었다.
도화는 조심스럽게 모종과 모종 사이 빈 곳을 찾아 발을 디뎠다. 발끝에 닿은 흙의 느낌이 폭신했다. 도화의 구두가 보드라운 흙에 파묻혔다.
“남의 화단 밟지 맙시다. 상식 아닙니까.”
뒤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도명의 목소리에 도화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줄 알았다. 도화는 당황하다가 도명의 모종을 제대로 밟아 버렸다. 도화의 구둣발에 막 싹을 틔운 모종이 동전처럼 납작 해졌다.
도명의 탄식이 깊게 퍼졌다. 도명이 짜증 섞인 손길로 도화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도명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모종들을 살펴보다가 현실을 인정해야 했다.
‘아이들이 죽었다. 회생불능이다. 아주 완벽하게 밟아 버렸다.’
도명은 찌그러진 모종들을 파내고는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아침부터 스트레스가 팍 몰려왔다. 도명은 사건의 원흉인 도화를 지긋이 노려봤다.
“아, 저. 그…….”
“따라와요.”
“아. 그.”
도명이 도화의 귓바퀴를 잡고 늘렸다. 도명이 손끝에 힘을 잔뜩 주고 음산한 표정으로 말했다.
“끌려갈 겁니까? 제 발로 보기 좋게 올 겁니까?”
“제 발로 가겠습니다.”
도명의 가게 안에서는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는지 좋은 냄새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도화는 기분 좋은 표정을 짓고 있다가 도명의 눈치를 살피며 두 손을 모으고 표정을 굳혔다. 도명은 침울한 표정으로 찌그러진 모종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자신에게 일어난 불행을 완전히 못 받아들이고 있었다. 도화는 도명이 자신에게 또 벌을 줄 것 같아서 겁을 잔뜩 먹고 있었다.
“도화 씨.”
“네, 네.”
“벌 받아야겠죠?”
“아…… 엉덩이를 맞는다거나… 아픈 다른 거를….”
도화는 괜히 도명의 잇자국이 사라져가는 귓바퀴가 시큰거렸다.
“제가, 그런 즐거운 일을 할 기분이 아닙니다.”
‘그래요. 당신한텐 그게 즐거운 일이겠죠. 이제 적응해야 하는데 적응이 안 되네.’
도명이 도화의 눈앞에 찌그러진 모종을 내밀었다.
“벽 보고 애들 굽어진 것만큼 찌그러져 있어요.”
“네?”
도화는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진지한 도명의 얼굴을 보니 잘못 들은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출근하려면 최소 몇 시에 출발해야 합니까?”
“앞으로…… 40분 정도요?”
‘왠지 솔직하게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하지만 거짓말할 수는 없잖아.’
“벽 보고 무릎 꿇으세요.”
“저, 도명 씨.”
도화가 도명을 향해 손바닥을 내보이며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도명은 정말 화가 난 듯 눈빛이 흉흉했고 관자놀이는 실룩거리고 있었다.
“도화 씨는 양심이 없습니까? 상식도 없고 양심마저 없네요.”
도화는 도명의 비난에 할 말을 잃고 우물쭈물하며 벽에 섰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도명의 눈치를 살폈지만 역시 도명은 진심인 듯했다.
“몸 더 구겨요.”
도명은 계속 ‘더’라는 말을 반복했다. 도명의 명령대로 하다 보니 도화는 등 근육이 뻐근하게 땅겨 올 정도로 구겨져 있었다. 그제야 도명은 만족한 듯 볼일을 보러 갔다.
도화는 대체 언제까지 이래야 하나 불안했지만 아까 도명이 출근해야 할 시간을 물어보는 것을 상기하며 불안한 마음을 애써 눌렀다.
도명은 주방에 서서 보글보글 끓는 무언가에 코코넛 밀크를 부었다. 좋은 냄새가 주방에 퍼졌다.
도화는 처음 맡아 보는 좋은 음식 냄새에 굼벵이처럼 구부리고 있던 허리를 살짝 폈다. 그러자 도명이 탁 소리 나게 국자를 접시에 내려놓았다. 도화는 타이밍이 공교로웠던 건지 아니면 도명이 화가 난 건지 헷갈려 어정쩡한 자세로 굳어 있을 때 도명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몇 분이나 지났다고 자세가 풀어집니까?”
‘정말 뒤통수에 눈 있는 거냐고!’
도화는 시무룩한 얼굴로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다시 접었다. 허리 근육이 다시 뻐근해졌다. 무릎 꿇고 가만히 쭈그려 있는 건데 5분이 넘어서자 생각보다 힘들었다.
등 근육은 물론 온몸이 자잘한 통증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도화는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언제까지 해야 하냐고 물어보고 싶은 것을 참았다.
도명은 냄비를 데우고 있는 불을 약하게 내린 후 냉수를 담은 컵과 함께 의자에 앉았다. 그의 손에는 불은 언제 끌지 기다리는 듯 작은 타이머가 들려 있었다. 도명이 싸늘한 눈길로 쭈그려져 있는 도화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요 며칠 저 피해 다녔습니까?”
“…….”
“대답 안 합니까?”
도명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리자 도화는 우물쭈물하며 겨우 입술을 열었다.
“네.”
“왜요?”
“…….”
도화는 도명의 질문에 대답하기 너무 무서웠다.
“도화 씨.”
“…….”
도명이 미간을 거칠게 구기며 이를 악다물었다.
“계약관계도 아닌데 진짜 확 교육시킬 수 없고. 질문에 대답할 기회 15초 주겠습니다.”
도명이 탁자를 손가락을 초 단위로 두들기기 시작했다. 도화는 압박감에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도명의 손가락이 탁자를 14번 두들겼을 때 도화가 목 뒤의 식은땀을 손으로 훔치며 말했다.
“무서워서요. 도명 씨가…….”
“도화 씨는 학습 능력이 정말 없습니까? 저는 상대방 동의 없이 아무 짓도 하지 않습니다. 이 말을 몇 번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이 말을 녹음해서 도화 씨 얼굴 볼 때마다 인사 대신 틀어 줘야 알아먹겠습니까?”
“저를 지금 혼내고 있는 건…….”
“하기 싫다고 하셨다면 제가 설마 억지로 때려서 무릎 꿇리겠습니까? 그냥 무릎 꿇으라니까 무릎 꿇고 있는 거잖아요.”
도명의 말에 도화는 억울한 게 많은지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양심이 없다느니. 뭐니 하시면서 온갖 압박감을 주셨잖아요.”
“무릎 꿇는 게 그렇게 싫었으면 돈으로 모종값을 배상하면 될 일이죠? 안 그래요?”
“모종 얼마인데요?”
“제가 느끼는 가치는 그 정도는 아닌데 어쨌든 시장경제에서는 많이 받아 봤자 8천 원 정도 하겠네요.”
도화는 도명의 말에 100%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는 납득이 갔다.
‘그러게 왜 시키는 대로 무릎 꿇고 있는 거야. 미친 거냐고.’
도화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도명이 시킨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제 그만 하면 됐다는 도명의 말이 없으면 이 자세를 풀 용기가 나지 않았다.
“도화 씨. 제 플러팅이 불쾌했습니까?”
“…….”
도명의 말에 도화의 눈이 그렁그렁해졌다. 그런 도화를 쳐다보는 도명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미안합니다. 저 같은 사디스트가 도화 씨 같은 사람을 가지고 그런 생각을 해서.”
도명의 말이 끝나자 그가 맞춘 타이머가 삐빅대며 울려댔다. 도명은 다 된 풋팟퐁커리를 접시에 담았다.
“자세 풀고 밥이나 먹고 출근해요. 혼자 먹기엔 많습니다.”
도화는 잔뜩 의기소침한 상태로 테이블에 앉았다. 계속 도명의 말이 도화의 머릿속을 울렸다.
‘미안합니다. 저 같은 사디스트가 도화 씨 같은 사람을 가지고 그런 생각을 해서.’
그가 싸늘한 말투로 그런 말을 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분이 울렁대고 있었다. 뭔가 명치가 시큰한 것이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도명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도화를 향해 손수건을 내밀었다.
평소라면 직접 눈물을 닦아 주며 도화의 열이 많은 뺨이라도 슬쩍 만져 볼 요량이었겠지만 이런 식의 플러팅은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 먹을 때 눈물 흘리면 간이 안 맞아서 안 됩니다.”
도화는 민망해서 억지로 입꼬리를 울리며 도명이 내민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았다.
“카레는 안 좋아합니까?”
도화는 도명이 해 준 음식을 남기는 걸 싫어한다는 걸 기억하며 볼이 볼록해지도록 커리를 입안에 넣었다. 카레는 카레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게살의 감칠맛과 함께 혀를 부드럽게 감싸는 것이 기분 좋은 맛이었다.
도명은 같이 식사를 하면서 사람을 알아 가는 것을 좋아했다. 대화하기 가장 좋은 땐 맛있는 걸 함께 먹을 때였다. 그런 도명이 말없이 식사만 하고 있었다. 식기가 부딪치는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음식 씹는 소리만 울려댔다. 접시가 깔끔하게 비워지고 도명이 도화에게 물을 떠다 줬다.
“도화 씨 다시 사과하죠. 저 같은 사디스트가 도화 씨에게 관심을 가져서 많이 무서웠을 겁니다. 제가 제 기분에만 사로잡혀서 일반적인 사람 입장 같은 건 충분히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
‘갑자기 사과를 왜 하는데.’
“도화 씨가 월세를 밀리지 않는 이상 제가 따로 도화 씨, 아니 6개월 씨를 부를 일은 없을 겁니다.”
“6개월 씨요?”
“내일이면 5개월 씨겠네요.”
“그러니까, 그게 무슨.”
“저는 안 그래 보여도 명사를 기억하는 데 꽤 애를 써야 하는 편입니다. 추상적인 거나 맥락적인 건 쉬운데.”
“도명 씨, 그러니까 무슨 말을 하는 건데요.”
“일로 전문 용어를 외워야 할 것도 많은데 앞으로 볼 일 없는 사람 이름 같은 건 금방 지워 버립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무섭게 해서 미안해요.”
도명이 도화를 향해 고개까지 제대로 숙여 가며 사과를 했다. 도화는 자신에게 무슨 일어난 건가 싶어 그대로 굳어졌다. 충격에 눈앞마저 흐릿해졌다. 도화는 지금껏 자신에게 일어날 수없이 많은 위험한 상황들을 상상했지만 이건 없었다.
“…….”
도화는 멍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터덜터덜 걸어서 도명의 가게 문을 잡는데 울컥하는 기분이 올라왔다.
‘이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지금까지 한껏 휘둘리게 해놓고! 갑자기 손 터는 게 어디 있냐고!’
“저기요.”
“네.”
“다음 달 월세는 곱게 받아 낼 수 없을 겁니다.”
“네?”
“내 집 앞에서 매일 기다리든지 협박을 하든지. 알아서 받아 내세요.”
“6개월 씨. 지금 뭐하자는 겁니까?”
“6개월 씨?! 얼어 죽을 6개월 씨! 내 이름 다 외워놓고 이제 와서 명사를 기억하기 힘든 머리니 뭐니 하면 아 그렇구나! 이름을 못 외우는구나! 하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내 집 계약 기간은 기가 막히게 기억하네!”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도명이 황당해서 헛웃음을 연달아 지었다.
“저, 그, 고기! 오늘 밤은 고기가 먹고 싶습니다.”
“이봐요. 저한테 저녁 맡겨놨습니까?”
“암튼 먹고 싶습니다!”
이쯤 되니 고상 떠는 도명의 입에서 후다닥 나가는 도화의 뒤통수를 향해 목청껏 ‘야!’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렇게 동네 백구가 날뛰며 도명의 가게를 휩쓸고 간 후 도명은 아직 후폭풍에 시달리고 있었다.
“와…… 또라이 백구.”
***
도화는 퇴근 후 바로 집으로 안 가고 회사 근처 카페에서 따뜻한 아메리카노 하나를 시켜서 자리에 앉았다. 이곳에서 오래 시간을 끌 생각은 없었다. 그저 따뜻한 커피를 성급하게 마시지 않을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도화는 지금 도명이 자신과 함께할 식사 준비를 하고 있을지 알 수 없었고, 혹은 그 반대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일단은 그가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가정하에 마음의 방향성에 대해서 결정해야 했다.
도명은 참 묘한 사람이었다. 극도로 위험해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너무나도 다정하다. 그의 손길을 받으면 그가 얼마나 무언가를 돌보는 데 익숙한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일반적인 사람 이상으로 섬세한 손길을 가지고 있었다. 카메라 렌즈 같은 차가운 눈동자. 다정하고 따뜻한 손길. 그는 이 두 개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악마일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그 중간 어딘가겠지.”
도화가 중얼거렸다. 이건 거의 본능이었다. 사람에 대해서 정의 내리고자 하는 욕구. 인간관계는 원래 소모적인데 자꾸 편한 길을 찾으려고 한다.
‘사람은 직접 겪어 봐야 아는 거 아냐?’
도화는 살면서 진영이의 말에 대해서 이렇게 진지하게 생각하게 될 줄을 몰랐다.
‘하지만 위험해도 보통 위험한 사람이 아니잖아. 그가 선을 완벽하게 그었을 때 감사하다며 물러났어야지. 왜 울컥해선!’
‘6개월 씨.’
도화는 자신을 개월 수로 세던 도명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방금 전 그때 울컥했던 일을 후회했으면서 그의 목소리가 생각나자 다시 머리에 열이 뻗쳤다. 도화는 커피를 두세 모금 더 들이켰다. 도화는 도명이 자신에게 사과를 하던 상황에 대해서 곱씹었다.
‘무섭다며 울어서 당황했나? 그런 거 좋아하는 사람 아닌가? 역시 사람이 울면 기분이 이상해지는 건 어쩔 수 없나? 하긴 사디스트든 뭐든 결국은 사람이잖아. 그래서 좋아하는 울음이란 건 뭐지? 생각해 보면 사람이 우는 이유도 다양하긴 하지. 진짜 이 나이 먹고 창피하게 그 남자 앞에서 울기나 하고 말이야.’
도화는 이 생각을 하는 순간 그의 코끝에 도명의 손수건 냄새가 느껴졌다.
‘나 왜 운 거지? 아 맞다. 무서워서 울었지. 뭐가 무서워서? 그가 한 행동에 흥분한 게 무서웠지. 나. 그에게 그대로 끌려가는데 아무런 저항도 못 할 것 같은 기분이었지.’
‘도명 씨도 괴로웠겠네요. 같은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안 이후에 말입니다.’
‘저는 의외로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습니다. 정확히는 신경 쓸 틈이 없었다가 정확하겠네요.’
‘왜요? 왜 신경 쓸 틈이 없었습니까? 같은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보다 더 두려웠던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네, 제 사디스트 성향 말입니다.’
도화는 얼핏 도명의 기분을 알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 그는 그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전혀 신경 쓰이지 않고 있었다.
도명에게 결투장 던지듯 저녁 약속을 강요해 놓고서 도명의 얼굴을 보는 것이 무서웠다. 오늘 밤 도명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의 세계의 발을 디디는 것을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도화는 얼굴을 쓸어 넘기며 커피를 연달아 두 모금 마셨다. 하지만 냉수를 마시는 것과는 달리 커피는 묘한 갈증을 더 일으켰다.
***
도화의 회사 직원들이 퇴근 후 회사 앞 카페에 들어섰다. 도화와 같은 카페였다. 도화가 앉아 있는 곳은 카페 가장 구석 자리였고 빼곡하게 집어넣은 테이블의 불편함을 못 느끼도록 파티션이 놓여 있었다.
도화의 동료들은 도화가 혼자 앉아 있는 옆 테이블에 앉았다. 도화는 동료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파티션 너머 옆자리에 앉은 이들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하지만 굳이 아는 척 인사를 하지 않았다. 도화의 커피는 한 다섯 모금 정도 들이켜면 사라질 양이었다. 도화는 이것만 마시고 집으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동료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도화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회식 때 이 대리님 갑자기 왜 참석하신 거예요?”
“아. 그거 사실 하준 씨가 사장님한테 이 대리 그러는 거 경우가 아닌 것 같다고 말했거든. 그날 못 봤어? 평소처럼 얄밉게 칼같이 퇴근 준비하는데 사장실에 불러나가는 거?”
“사장님이 하준 씨의 말을 그렇게 잘 들어 준다고요?”
“하준 씨의 말이 중요하겠어? 하준 씨 기분 맞추는 것보다 이왕이면 일 잘하는 이 대리 성미 안 건드리려고 하지.”
“이 대리님이 사장님 입장에서 흠이 없긴 하죠. 회식 이런 거 참가 안 해서 지각 한 번 없는 줄 알았는데 회식 다음 날에도 칼 같은 자세로 앉아 있는 거 보고 그냥 이런 사람이구나, 했어요.”
“흠이 왜 없어! 팀워크가 안 되는데!”
“에이, 개인적인 관계는 몰라도 같이 일하면서 여기서 이 대리님 덕 안 본 사람 있어요? 다들 그런 경험 없어요? 컨디션 저조할 때 이 대리님이 실수 체크해 줘서 한 번이라도 사장님한테 덜 깨졌잖아요. 전 신입 때 이 대리님 덕분에 회사 생활 무사히 버텼는데요.”
“윤정 씨 이 대리 좋아해? 왜 자꾸 역성들어? 나이도 얼마 차이 안 나겠다. 연애하기 딱 맞잖아.”
“아니에요. 전 좀 수다스러운 편 좋아해요. 이 대리님 같이 있으면 숨 막히게 하는 구석 있잖아요. 그냥 객관적으로 그렇다는 거죠. 직장 동료로서는 어떤 면에선 깔끔하고 좋다는 거죠. 어쨌든 하준 씨의 말을 사장님이 왜요?”
“왜기는. 사장님도 내심 이 대리 그 점이 마음에 안 든다 싶었는데 제삼자가 말하니까 그렇지! 하고 이 대리 부른 거지. 나 하준 씨, 왜 울컥해서 사장님한테 이 대리 칼퇴근 뭐라 했는지 안다. 하준 씨 소심하잖아. 사장님이 갑작스럽게 회식 잡아서 겨우 들어온 소개팅 자리 회식 가느라 못 나간 거야. 그런데 이 대리가 그날도 어김없이 회식 불참하고 가는 거지.”
“그게 이 대리님하고 무슨 상관인데요?”
“뭐긴. 그냥 얄미운 거지. 우린 뭐 항상 회식 가고 싶어? 그냥 업무의 연장이다 생각하고 가는 거지.”
“그냥 사장님한테 못 간다고 하지. 하준 씨 이 대리님 앞에선 꼼짝도 못 하면서.”
“그러니까, 하준 씨가 이 대리랑 같아? 직급도 다르고 일하는 능력도 다르고. 사장의 신뢰가 다르잖아. 하준 씨는 좀 어리바리한 면이 있잖아.”
이들의 대화가 끝나갈 때쯤 도화의 커피도 바닥을 보였다. 타이밍이 공교로워서 일어서기 난감했지만 이들의 수다가 언제 끝날지 모를 일이었다.
맨 구석 자리에 있던 도화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다들 도화의 얼굴을 보자 얼빠진 얼굴을 했다. 도화는 무표정한 얼굴로 가벼운 목 인사를 하고 카페를 나섰다.
도화가 카페 카운터에서 식기를 반납하고 있을 때 윤정이 도화를 급하게 붙잡았다.
“무슨 일입니까?”
“무슨 일이긴요. 그게, 기분 나쁘셨을까 봐.”
“아.”
도화의 무미건조한 반응에 윤정은 그를 답답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반응이 그게 다예요?”
“그럼,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합니까?”
“음. 그게, 화를 내시고 따져도…… 달게 받으려고 쫓아온 건데요.”
“대표로 제 화를 받으러 온 겁니까? 그게 대체 무슨 계산법인지 이해가 안 가네요. 일단은 윤정 씨한테는 화낼 일은 없는데요. 아니, 다른 분들한테도 화나지 않았습니다.”
“왜 화가 안 나요?”
“이런 이야기 하면 윤정 씨가 저한테 화를 낼 것 같은데. 하고 싶지는 않네요.”
“해 봐요. 화 안 낼 테니까요.”
“애초에 기대도 관심도 없었는데 이런저런 감정이 생길 일도 없죠. 일에만 문제없으면 됩니다.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해 매일 아침 보는 사람들 아닙니까.”
도화는 그렇게 말하고는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역시 인간관계에서 가장 덜 복잡하고 안전한 건 무관심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 완벽한 안전이 지겨웠다.
도화는 버스 정류장 앞에 서서 괜히 그런 말을 했나 싶기도 했다.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걸로 이런 저린 뒷말들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트러블이 일어날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자신이 한 말은 전하지 말라고 해야 하나 싶었다. 도화는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익숙한 버스에 타고 창가에 얼굴을 기댔다. 오늘은 운 좋게 앉아서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도화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몸도 머릿속도 엿가락처럼 늘어질 시간인데 이상하게 정신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래도 이성애자들의 제국보다 도명 씨의 세계가 더 안전하겠지. 적어도 더 이상 이방인은 아니겠지. 오늘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도명 씨는 내가 그의 가게 안에 들어서는 걸 내심 반기겠지. 어서 와요. 여기는 당신이 게이여도 난 놀라지 않아요. 내가 당신을 더 놀라게 만들 테니까.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예뻐해 줄게요. 어서 와요. 엉덩이 좀 맞읍시다. 하하, 빌어먹을…….’
도화는 집으로 가는 골목에 들어서는 순간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긴장이 되었다. 익숙하다 못해 뇌에 주름으로 박힌 풍경인데 풍기는 공기가 다르게 느껴졌다.
가로등의 등불이 갑자기 유난히 노랗고 빠르게 깜빡이는 것 같았다. 땅바닥도 평소보다 울퉁불퉁한 것 같았다.
오늘 이렇게 많은 생각을 했는데 도명의 가게에서 고기 익히는 냄새가 안 나면 허무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고기 익는 냄새가 나면……? 도화는 이쯤 되어 자신이 결정 내리기를 포기했다.
오늘 도명의 가게 앞을 지나가는데 고기 익는 냄새가 나면 그냥 들어가는 거고 아니면 마는 거다. 결국 결정은 도명이 하는 것이었다.
도화의 시야에 도명의 가게가 보이기도 전에 그의 코가 먼저 반응을 해왔다. 전에 맡은 고기 굽는 냄새랑 묘하게 달랐지만 어쨌든 고기 굽는 냄새였다. 도화는 좋아하는 사탕을 살살 녹여 먹는 아이처럼 걸음을 더욱 느리게 했다. 도화는 일부러 편의점에 들러서 맥주를 잔뜩 샀다.
도화의 시야에 도명의 가게가 보였고 안에는 식물의 녹색과 레몬색의 불빛이 가득 찬 실내가 보였다. 도명은 앞치마를 하고 무언가를 썰고 있었다. 도화는 마른 침을 삼키며 묵직한 손잡이를 잡았다. 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순간 현기증이 마저 났다. 도화가 손과 팔에 힘을 꽉 쥐고 문을 여는 순간 황홀한 냄새가 그의 온몸을 감쌌다. 문 바깥에서 났던 냄새와는 농도 자체가 달랐다. 문이 열리자 도명이 도화를 향해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그리고는 살짝 무심한 표정을 짓고는 앉으라는 듯이 고갯짓을 했다.
도명은 주방에서 손을 바쁘게 움직이다가 단정한 머리를 괜히 쓸어 넘겼다. 그는 오늘 깔끔한 흰 셔츠에 발목이 보이는 검은색 8부 바지를 입었다. 도화는 테이블에 앉아서 고개를 얌전히 아래로 내리면서도 도명의 복사뼈를 응시했다.
“도화 씨.”
“네.”
“몰래 그런 시선 던지면 제가 오늘 하루 종일 하고 있던 이상한 생각에 힘을 실어 주는 겁니다.”
“……이상한 생각이란 게…….”
“제가 계속 도화 씨에게 플러팅을 해도 된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
도화는 도명의 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침묵은 긍정입니다. 맞습니까?”
“……네.”
도명과 얼마 대화를 안 했는데도 도화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긴장감이라는 기류가 그의 목을 물리적으로 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도명은 아무렇지 않은 척 칼질을 하다가 결국 칼을 놓아 버렸다. 그리고는 깊게 한숨을 쉬며 혼잣말을 했다.
“하…… 오늘 재료 최상급으로 샀는데. 고기는 물론 야채까지 말입니다.”
“아. 고맙습니다.”
“고마워하라는 게 아니라 기분이 이상해서 오늘도 본 실력 안 나오게 생겼습니다.”
도명이 요리하다 말고 뒤돌아서서 도화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지금 도화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오늘도 도화는 착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다리를 얌전히 모으고 그 무릎 위에 살포시 손을 올려놓고 시선은 살짝 아래로 하고 있었다. 착하고 순한 얼굴에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또라이 백구 아주 요망하네. 금세 또 얌전한 척하고 있는 것 봐봐.’
도명은 아까부터 울려대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요리에 집중했다. 도명은 스테이크를 다 굽고 접시에 담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티본스테이크입니다. 저번하고 다른 부위긴 한데, 그냥 다양하게 이것저것 먹여 주고 싶었습니다.”
도명이 와인을 한 병 꺼내오자 도화가 주섬주섬 맥주를 꺼냈다.
“와인은 싫어요?”
“그게, 비쌀 것 같아서.”
“도화 씨 입으로 들어가는 건데 제가 와인을 아까워하겠습니까?”
“그거 한 병 가지고는 안 되니까 하는 말이죠.”
“한 병으로 안 되면요? 대체 얼마나 마시려고 그러는 겁니까?”
“그냥, 정신이 살짝 알딸딸해질 정도로요. 제가 또 술이 꽤 센 편이라서 한 병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무슨 뇌에 마취제 투여할 작정입니까?”
도명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도화는 그의 농담에도 웃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도화 씨, 제가 그렇게 무섭습니까?”
도명이 도화의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속삭였다.
“네 무섭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도명 씨보다 저 자신이 더 무섭네요.”
도명은 도화가 한 말의 의미에 대해서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도명은 와인 셀러에서 와인을 두세 병 가져와 얹으며 이 정도면 만족하냐고 물었다.
식사가 시작되고 도화는 고기 한 점 먹을 때마다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취하려고 작정을 한 사람 같았다. 도명은 도화의 잔에 와인을 채워 주기 바빴다.
“너무 취하지는 말아요. 저 술주정뱅이 말은 그렇게 귀담아듣는 편은 아닙니다.”
“왜요. 술주정뱅이 말이 더 진심일 수도 있는데요. 신경 써야 할 것들을 지워 버리잖아요. 남는 건 본심뿐이죠.”
“진심에도 무게가 있는 겁니다. 맨정신으로는 말 못 할 결심 역시 신뢰할 만한 건 아니죠.”
도명의 말에 도화는 자신의 뺨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손바닥에 살짝 열에 들뜬 뺨이 느껴졌다.
도화는 호흡을 천천히 내뱉었다. 마음속 말을 할 생각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이쯤 되니 도명에 대한 원망이 올라왔다. 이런저런 생각할 틈도 없이 차라리 몰아붙여 주면 덜 겁날 텐데. 비겁한 감정이지만 그런 감정이 들어왔다.
“도명 씨는 생각보다 조심스럽네요.”
“어떤 맥락에서 조심스럽다는 건지 듣고 싶네요.”
“생각보다 덜 적극적이랄까.”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요?”
“제가 그렇게까지 매력적인 편은…… 아닌가요?”
도명은 도화가 쉬운 이야기를 참 어렵게 한다고 생각했다. 도명은 낮게 웃었다. 도화의 마지막 한마디에 그의 머릿속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였다.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있는데 마조히스트는 수동적이라기보다 능동적인 성향입니다. 타인에게 온몸을 내던진다는 건 어떤 면에서는 사디스트의 욕망보다 더 강렬하고 능동적인 행동이죠. 왜 그런지 이해가 가나요?”
“……타인을 믿는다는 것에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인가요?”
“이것 참, 채점해 주기 애매한 답지네요.”
도화는 고민에 빠진 듯 미간을 구기면서도 입술은 부지런히 오물거렸다. 도명은 오물거리며 고기를 씹는 도화의 볼을 만지작거렸다. 다람쥐 같아서 귀여웠다.
“제가 도화 씨를 이렇게 만지는 것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요?”
“솔직히 싫지는 않습니다.”
도화가 눈을 살며시 감으며 말했다. 도명의 손바닥은 적당히 열기와 올라와서 기분이 좋았다. 기분 좋은 도화의 표정에 도명은 마음속 불안이 꿈틀댔다. 혹시 도화가 자신의 다정한 면에만 이끌리고 있는 건 아닌가.
도명은 파트너에게 다정한 편이었다. 도명의 다정함은 포악했던 밤에 대한 상이였다. 집중하고 싶은 관계에 충분히 집중할 수 있게 다른 건 그를 괴롭히지 않도록 완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기술이었다.
마음이 아예 담기지 않은 기술은 아니었지만 이런 잔기술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는 오만함과 사악함에 무게가 실려야 했다.
자신은 자신의 악마성에 대해서 반의반도 보여 주지 않았는데. 도명은 자신의 손길을 받으며 편안해 보이는 도화의 표정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도화는 잔 속의 와인을 한 번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는 살짝 알딸딸한 정신으로 도명을 향해 말했다. 도화는 술을 마시고 차마 도명의 얼굴을 못 보겠는지 눈을 질끈 감으며 외쳤다.
“저, 도명 씨와 그런…… 관계를 맺고 싶습니다.”
도화는 그의 인생에서 몇 안 되는 가장 큰 용기를 끄집어냈다. 하지만 용기를 내게 한 상대방은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식사를 할 뿐이었다.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울렸다.
“저, 도명 씨?”
도화가 안달 난 표정으로 도명을 불렀지만 그는 자신의 입술 위에 손가락을 얹고는 작은 바람 소리를 내었다. 이건 도화가 상상한 상황이 아니었다. 자신이 이런 이야기를 하면 도명은 당연히 ‘Yes!’라고 외쳐야 했다.
도화가 말을 거둘까 봐 성급해하며 말이다.
“도화 씨는 지금까지 성 경험이 전혀 없죠?”
“네.”
도명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천천히 두들겼다. 그리고는 도화를 지그시 쳐다보며 물었다.
“구체적으로 어디까지 없습니까?”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입니까?”
“그럼요. 저보단 도화 씨에게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조금의 허세도 덧붙이지 말고 말해 봐요. 입맞춤은 해 봤습니까? 조금 더 가볍게 손을 야릇한 뉘앙스로 잡아 본 적은요?”
“입을 맞춰 보았습니다. 반 여자애랑. 정확히는 당했다고 봐야…….”
도화의 대답에 도명은 답답하다는 듯이 점잖은 미간을 구겼다.
“남자 동성애자가 여자애하고 입을 맞춘 게 경험에 해당되는 이야기입니까?”
“없는 것 같네요.”
도화의 대답을 끝으로 도명은 또 말이 없었다. 도화가 불쾌한 감정을 억누른 말투로 말했다.
“무슨 경력직 뽑습니까? 별안간 면접 보는 기분이네요.”
“일단은 기본적인 성 경험은 경험하고 나서 저하고 이런 이야기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사람이 참, 무모하네요.”
“아, 정말 경력직 뽑는 겁니까?”
도화가 불쾌감을 숨기지 못하고 비아냥거렸다. 지금이라도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다. 창피하고 모욕적이었다. 도명은 도화의 구겨진 미간을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피며 말했다.
“아니면, 제가 알려드릴까요?”
“…….”
도화는 도명의 제안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그의 망설임과 질문들에 이미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그렇다고 아니라고 하기에는 도화에게 도명 이외의 남자는 없었다.
이쯤 되니 그의 자존심이 더욱 밑바닥으로 꺼지고 있었다. 그를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끌어들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알려 달라 하면 이번에는 알려 주는 겁니까? 저와 이리저리 줄다리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도화 씨, 제 반응에 상처 입었습니까?”
도명이 무신경한 말투로 말했다. 질문의 내용과 말투가 서로 맞지 않았다. 도명의 시선 끝이 고기를 썰고 있는 날카로운 나이프 끝에 맺혔다. 도화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도명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저는 도화 씨 안에 마조히스트 기질이 분명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확고하게 있지도 않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도화 씨의 몸을 하나하나 개발해가는 건 부담도 있고 정성도 꽤 들어가야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꽤 즐거운 일입니다.”
도명은 분명한 어조로 말을 이어가다가 마지막 문장을 말할 때는 입꼬리를 쭉 올리며 속삭이듯 말했다. 자신을 쳐다보는 도명의 악마적인 표정에 도화는 순간 포크를 떨어뜨렸다. 항상 카메라 렌즈 같은 그의 눈이 욕망으로 번들거릴 때 느껴지는 소름은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자신도 같은 고기를 먹고 있지만 피가 뚝뚝 떨어지는 두꺼운 고기 조각이 도명의 입속에 홀랑 삼켜지는 광경이 묘하게 공포를 자아내게 만들었다. 도명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혼자 콧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콧노래를 뚝 멈추고 도화를 응시했다.
“제가 도화 씨의 성 경험의 처음과 끝을 다 다루면 도화 씨는 완벽한 마조히스트가 될 수 있습니다. 의심할 여지가 없이 말입니다.”
“자신감이 지나치게 넘치시네요.”
도화가 입꼬리를 살짝 비틀며 말했다. 도명은 눈꼬리가 휘어지게 웃었다.
“아닐 것 같습니까?”
“사람에겐 천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요. 천성. 앞으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 천성에 관한 것입니다.”
도명의 눈길이 도화의 완벽하게 빈 접시에 머물렀다. 도화는 식사를 끝낸 터였다. 천천히 먹고 소식하는 도명의 접시에는 아직 조금 고기가 남았지만 도명은 미련 없이 접시들을 싱크대에 집어넣었다.
“저랑 달콤한 디저트 정도는 먹을 시간은 되죠?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아 코스로 준비했습니다. 장을 보는데 파일 좀 확인해 달라고 직원들이 독촉 전화를 할 지경이었다니까요.”
도명이 도화를 향해 살살 녹는 미소를 지었다. 내가 준비한 디저트를 안 먹고 가면 매우 서운할 것이라는 애교가 섞여 있었다.
“네, 그럴 시간은 됩니다.”
“착하네요.”
도명이 조각 케이크와 홍차를 내왔다. 이게 케이크인지 보석인지 모를 돔 모양의 체리 색 케이크가 도화의 눈앞에 있었다. 그리고 투박한 질감의 비스킷도 보기 좋은 접시에 놓여 담겼다.
“설마 직접 만든 겁니까?”
“애석하게도 이런 것까진 못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제과점에서 사 온 겁니다. 저는 맛있는 곳에 대한 리스트를 꽤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원하면 공유해 줄게요.”
도명이 도화의 귓바퀴를 손가락 사이에 집어넣고 비비적대며 속삭였다. 도화는 도명의 손가락 끝, 작은 접촉과 바람 소리가 살짝 들어간 그의 목소리에 기분이 묘해졌다.
항상 맞은편에 앉아 있던 도명이 도화의 옆자리에 앉았다. 도화는 기묘한 인력이 작용하는 거리에 앉은 도명의 신체가 자꾸 신경 쓰였다. 도명이 잘생긴 얼굴을 도화 쪽으로 슬며시 기울였다.
그리고는 나른한 표정으로 한쪽 뺨을 손바닥에 걸쳤다.
“저희 부모님은 두 분 다 교사셨습니다.”
‘아 그래서 말투가 그따위였구나.’
도화의 머릿속에서 도명의 ‘착하네요.’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울려댔다. 불쾌감이 드는 것과 동시에 사람 속을 울렁이게 만들었다. 뭔가 교묘한 우위를 점하고 있는 그 말투.
“그래서 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또래의 아이들보다 더 많은 성숙함과 도덕성을 요구받았습니다. 부모님이 두 분 다 교사니까요.”
“그래서 부모님이 강박적일 정도로 엄격하셨습니까?”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저는 유난히 섬세한 편이었고 어른들의 시선을 잘 읽었죠. 사실 섬세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사실 꽤나 눈치가 빠르잖아요? 어떨 땐 어른들 이상입니다. 아이들은 사랑받기 위해 자신의 온 세계를 바치잖아요. 그걸 약삭빠른 어른이 어떻게 이기겠어요. 저의 섬세함은 눈치를 키우는 데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고 유난히 부모님의 애를 먹여서 남들보다 많은 관심을 받았습니다. 그게 애정에 대한 집착을 유난히 강하게 만들었을 겁니다. 저에게는 여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솔직히 어느 날 갑자기 부모님의 관심이 그 작고 여린 계집애한테 가는 게 이해도 안 가고 납득도 안 갔죠. 뭐. 동생이 생긴 흔한 아이의 반응이기도 하죠. 그래도 세상이 착한 아이를 원하니까 여동생을 잘 돌봤습니다. 예상대로 부모님은 기뻐하셨습니다. 역시 우리 도명이, 하면서 자랑하고 다녔죠.”
“도명 씨는 그런 아주 오래된 감정들 하나하나가 다 기억납니까?”
“보통 어릴 때의 감정 같은 건 제 나이쯤 되면 잊어버리는데 저는 그 지점이 그렇게 강렬했나 봅니다. 지금도 이렇게 선명하게 기억나요.”
도명의 감긴 눈꺼풀 안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도화는 자신도 모르게 그런 도명의 표정을 감상했다. 도명은 익숙한 동화를 읊어 주듯 자연스럽게 말들을 내뱉어갔다.
“저는 그때부터 어렴풋이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를 가지려면 나 하나만 잘해서 되는 게 아니구나. 관계들을 장악해야 하는구나.”
도명의 꿈꾸듯 감긴 눈 사이의 틈이 열렸다. 그의 안광이 날카롭게 빛난 채 도화의 옆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도화는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그의 소름 돋는 시선을 느꼈다.
도화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도화가 눈에 띄게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그 선명한 떨림을 도명 역시 느꼈을 것이다.
“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줄곧 반장 선거에서 진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누구보다 반장을 해야만 하는 동기가 강했으니까요. 신임을 얻기 위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상종하기 싫은 애들하고도 잘 지냈습니다. 노력을 아끼지 않았죠. 어느 순간부터 반장이 아닌 유도명은 부모님이 어색해할 지경이 됐습니다. 그런데 점점 머리가 커지고 어머니의 세계와 제 세계가 분리되어 갔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어머니의 기쁨이 오롯이 제 기쁨이 되었습니다. 중독되는 마약의 원리는 별거 아닙니다. 기쁨의 순간들을 이 뇌가 계속 기억하는 게 문제죠.”
도명이 그리 말하며 도화의 목덜미를 뱀처럼 휘감았다 손을 거두었다. 도화는 순식간에 사그라진 오싹하고 기분 좋은 감각에 마른 침을 삼켰다.
“어느 순간부터는 당연하다는 듯이 기대했던 기쁨이 내게 오지 않으면 박탈감을 느끼면서 큰 분노를 느끼게 되는 겁니다. 점점 본질이었던 기쁨보다는 분노가 나를 지배하죠. 세상은 생각보다 뜻대로 되는 게 아니더군요. 대다수의 아이들은 동급생인 저를 따랐지만 모두가 저를 따를 수는 없는 거죠. 그게 참 당연한 세상의 이치인데 이미 집착이 된 기쁨은 도를 넘었습니다. 저를 따르지 않는 그 아이를 따르게 하기 위해 복잡한 아이들의 관계를 계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 참, 이제는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애인데. 아이들에 대한 정보로 빼곡한 노트는 항상 제 서랍 안쪽에 깊숙이 들어가 있었죠. 그 노트를 비밀 일기처럼 서랍 안쪽에 넣은 건 은연중에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안 것일 수도요.”
***
‘도명아, 이게 뭐니?’
어린 도명이 방 안에 들어서자 아연실색한 도명의 어머니가 그의 노트를 들고 있었다.
‘남의 일기장을 왜 보세요?’
‘이게 일기니? 소름 돋아. 대체 네 작은 머릿속엔 뭐가 있는 거야?’
‘지금껏 좋아했잖아요. 교사 부모님에게 어울리는 완벽한 아이를 원하셔서 그렇게 자랐잖아요. 저는 부모님의 자랑이잖아요. 줄곧……!’
어린 도명이 활짝 웃으며 말했고 그의 어머니는 도명의 뺨을 내리쳤다. 도명은 아직도 그때의 배신감에 치를 떨고 있었다. 그분들이 원하는 대로 그분들의 기쁨대로 자랐을 뿐인데. 이제 와서 태도전환 하는 것 같았다.
***
“잠깐 이야기가 샜습니다. 그리고 그 중간과정이 애매한데 어느 순간부터는 저의 지배력에 대한 집착이 성적인 곳에까지 옮겨 갔습니다. SM을 하는 순간 반장 놀이 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기쁨이 밀려왔죠. 거부할 수 없는 욕구였습니다. 도화 씨, 천성은 그런 겁니다. 살면서 어떤 이야기를 만나냐에 따라 크기가 작았던 어느 기질이 아주 비대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도화 씨의 작고 작은 마조히스트의 기질 역시 커질 수 있는 거죠. 제가 도화 씨에게 가르쳐 줄 성 경험이 그저 기쁜 부분을 만져 주고 즐거움을 알려 주는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저는 즐거움의 방향성을 바꿀 겁니다. 방향성이란 정말 한 끝 차이로 종국에는 전혀 다른 곳으로 오게 할 수 있는 겁니다.”
도명은 생각했다. 도화의 두 손을 결박한다. 도화의 페니스 앞에는 수치가 적혀진 비커가 놓여 있을 것이다. 도화의 페니스는 절대 만져 주지 않는다. 도화의 뒷구멍에 온갖 자극을 범벅한다.
성감대를 찾아서 그곳에 집중적으로 물리적인 고통을 준다. 고통과 쾌락을 헷갈리게 말이다. 도화는 도명이 정한 비커 안 수치까지 정액이 차오를 정도로 교육을 계속 받는다.
“나한테 성교육을 받겠어요?”
도명이 웃음을 겨우 참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광대뼈는 이미 봉긋하게 솟아 올라와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도화가 말이 없었다.
“이제 알겠어요? 당신이 얼마나 위험한 재촉을 하고 있는 건지? 저까지 안달 나게 왜 그래요?”
도명이 도화의 아랫입술을 만지작거리다가 살짝 벌렸다. 그리고는 다디단 조각 케이크를 그의 입안에 넣었다. 도화의 입술에 붉은 크림이 범벅이 되었다.
“저는…… 그러니까…….”
도화의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도명이 창가의 블라인드를 내리기 시작했다. 도명은 가게 현관문마저 안쪽에서 걸어 잠갔다. 그것만으로 도화는 완벽한 밀실에 갇힌 느낌을 받았다. 정말 완벽하게 이 위험한 남자와 단둘이 있는 것이다.
“저는 도화 씨를 원하지만 성급하게 굴지는 않을게요. 그리고 지금 SM의 기본 개념 알려 줄게요.”
도명이 포크로 케이크를 잘라 도화의 머리 위보다 조금 위로 올렸다. 도화가 고개를 들고 혀를 있는 힘껏 내밀면 케이크를 먹을 수 있는 거리였다.
“도화 씨가 이 케이크에 아주 환장한다고 가정하고 합시다.”
“네?”
“당신은 이 케이크를 너무 먹고 싶은 거예요. 음, 일종의 연극 중이라고 생각하고 해 봐요.”
“아, 네.”
“혀 내밀어 봐요. 최선을 다해서.”
도화는 도명이 자신을 너무 빤히 내려다보고 있어서 혀를 내밀 수가 없었다. 그러면 자신의 얼굴이 너무 흉해 보일 것 같았다.
“도화 씨, 지금 내 말이 우스워요?”
“그게 아니라. 못생겨…… 보일까 봐.”
도화의 말에 도명은 그가 귀여워서 작게 웃었다.
“저는 엉망이 되는 얼굴을 좋아해요. 어서.”
도화가 어물거리다가 혀를 길게 뽑았다. 혀끝이 뭉뚝하고 젖어 있는 것이 귀여웠다. 확인해 보니 높이가 적당했다.
“도화 씨는 이게 너무 먹고 싶은데 제가 안 된다고 하고 있는 겁니다.”
“네?”
“질문 그만. 짜증 나니까.”
도명이 도화의 턱을 세게 쥐고 움켜쥐며 다그쳤다. 방금 전까지 봄바람처럼 살랑살랑 웃다가 갑자기 저러니 긴장감이 돌았다.
“일단은 저는 말로 ‘안 돼.’라고 제재를 가할 겁니다. 도화 씨가 착한 아이라면 여기서 말을 듣겠지만 착한 아이라도 이 케이크를 너무 좋아하잖아요.”
“아, 네.”
도화는 도명의 눈치를 살피다가 혀끝을 내밀었다. 그러자 갑자기 도명이 도화의 뺨을 내리쳤다. 순간 도화는 이게 뭔가 싶었다.
“이게 대체 무슨……!”
도화가 반항을 하자 도명이 뺨을 더 세게 내리쳤다.
“도명 씨!”
도명의 손이 다시 매섭게 날라 왔다. 이게 반복되자 도화는 자신도 모르게 울먹울먹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사이 그의 뺨이 붉게 부어 있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럽고 억울한 감정이 멍울져 있었다. 그의 가슴이 빠르게 부풀어 올랐다가 오그라들었다.
“이게 2단계 제재입니다. 도화 씨 잘못했단 걸 인정합니까?”
“저는 이게 뭐하자는 건지.”
“잘못을 모르네요. 그럼 이게 3단계 제재입니다. 짐승도 아닌데 사람 말로 해도 못 알아듣고 가볍게 때리는 걸로는 정신을 못 차리잖아요.”
도명이 무릎뼈로 도화의 사타구니를 눌렀다. 도화는 갑자기 페니스가 눌리자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도명은 무너지는 도화의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어때요? 고통스럽습니까?”
“도명 씨, 이제 그만. 앗. 제발.”
도명이 더욱 세게 그의 페니스를 눌렀다. 도화가 고통스러운 듯 다리를 X자로 꼬며 바들거렸다.
“이 고통을 끝내는 방법을 알려드릴까요?”
도화는 도명의 말에 제대로 대답도 못 하고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도명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놈의 고개만 끄덕이는 버릇은 잊을 만하면 나오는군요.”
“네. 알려 주세요.”
“지금 이 고통을 순종적으로 참는 겁니다. 순종하는 상대에게 제재를 왜 가합니까? 이해했습니까?”
“네.”
“10 셉니다. 그때까지 착한 자세로 참습니다.”
도명이 천천히 숫자를 셌다. 도화의 눈물이 그의 허벅지를 적시었다. 사실 눈물이 날 만큼 악 소리 나게 아픈 건 아니었다. 무섭고 서러운 탓이 컸다.
이 와중에 드는 생각은 저 케이크는 기가 막히게 맛있었지만 이런 일을 당할 만큼 맛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저 케이크는 비유란 건 알아도 그런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래서 더 억울했다.
‘저놈의 케이크 때문에!’
도명이 숫자를 다 세고 무릎을 치웠다. 그제야 도화는 은연중에 참고 있던 숨을 몰아쉬었다.
“연극은 이제 끝났습니다.”
도명은 이 말을 끝내자마자 다시 다정한 얼굴로 돌아와서 도화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고 눈물을 훔쳐 주었다. 그리고는 울고 있는 도화의 입안에 계속 못 먹게 했던 케이크를 밀어 넣었다.
“싫습니다!”
도화가 울분이 찬 소리로 외쳤다.
“사실을 안 싫잖아요. 아까는 맛있게 먹었으면서.”
“……지금은 싫어졌습니다. 내가 왜 이런 대접을.”
도화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서러운 감정이 쉽사리 빠져나가지 않았다.
“아, 어떡하지, 겨우 이 정도로 토라져서. 자. 아.”
도명은 도화의 입술에 힘이 살짝 풀어지자 그 안에 케이크를 밀어 넣었다. 도화는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역시 케이크는 달달했다. 순간 달달하게 녹는 도화의 표정에 도명이 웃음을 못 참았다.
“역시 좋아하잖아요.”
“그런 것을 참을 정도로 맛있지는…….”
“이 케이크는 일종의 상징입니다.”
“압니다. 아는데…… 그냥 그렇다는 겁니다.”
“정말입니까? 그럼 얼마나 이해했는지 질문하겠습니다. 훈육과 케이크 중 어떤 것이 플레이의 보상입니까?”
“당연히 케이크가…….”
도화의 말에 도명이 아니라고 눈치를 줬다. 대놓고 떠다 주는 답에도 도화는 이해가 안 가 입술만 바보같이 벌리고 있었다.
“왜 훈육이 보상입니까?”
“당신이 마조히스트니까.”
“아…….”
“케이크는 뭘까요?”
“……미끼요?”
“어떻게 이렇게 한 번을 못 맞출까? 명분입니다. 놀이를 시작하기 위해 억지로 끼워 맞춘 어설픈 퍼즐 같은 겁니다.”
‘아, 이걸 이해 못 해서 내내 케이크가 거슬린 거였어. 화만 나고.’
“아…….”
“계속 그렇게 멍청한 추임새만 넣을 겁니까?”
도명의 말에 도화의 얼굴이 새빨갛게 익었다.
“도화 씨, 어떤 사람들한테는 간단한 SM 플레이 한 번만으로도 큰 트라우마가 남습니다. 제 망설임의 원인은 도화 씨가 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마지막 찌꺼기 같은 양심입니다. 도화 씨.”
“아, 네.”
“입 맞추세요.”
도명이 앞머리를 까며 도화를 향해 오만한 말투로 말했다.
“네? 왜, 왜요?”
“겨우 참았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도화 씨를 상대로 얼렁뚱땅 넘어가고 싶었습니다. 당신은 결코 그 인내심을 상상할 수 없을 겁니다.”
“아 그러니까 칭찬해 달라는…….”
“네, 그런 겁니다.”
도화는 우물쭈물하다가 쪽 소리 나게 도명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뒤를 사사삭 물러났다. 도명이 도화를 향해 배시시 웃었다. 도화는 민망한 감정이 훅 밀려와서 참을 수가 없었다. 오싹한 와중에 달달한 기분이 들었다.
도명이 가게 책상 서랍을 열었다. 여러 개의 명함집이 있었는데 그중 한 분류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서 도화에게 내밀었다.
“그러니까 이게 뭡니까?”
“도화 씨가 저에게서 도망갈 수 있는 마지막 티켓 같은 겁니다. 지금까지 그 흔한 게이 바 한 번 안 가 봤다는 게 신기할 따름입니다.”
“아, 게이 바…… 도명 씨, 제 고백은 거절인 겁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나저나 제 전화번호는 저장했습니까?”
도명의 질문에 도화는 얼음이 되어 버렸다.
“참나, 집세 넣을 제 계좌번호는 아는데 제 전화번호가 없습니까? 사람이 아주 차갑습니다.”
도명은 도화의 핸드폰을 뺏어 들어 자신의 전화번호를 찍었다. 도화는 도명의 전화번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자신의 전화번호부에 누군가가 새로 찍힌 건 오래간만이었다.
“확실히 첫 경험이 SM인 건 시작치곤 꽤 세죠. 저한테 문자 보내세요. 거기, 간판이 찍힌 사진을 문자로 보내면 도화 씨가 잠시, 혹은 아주 날아가 버렸다고 생각하겠습니다. 그때는 이웃사촌으로서 성 상담 정도는 해드리죠. 꽤 유용할 겁니다. 그 반대의 결정이라면 도화 씨가 자위하는 영상을 찍어서 저한테 보내세요. 물론 저는 탑이니까 제 상대역인 도화 씨는 물건 만지지 말고 뒤를 만지작거리면서 가야 합니다. 당신이 완벽한 바텀인 걸 증명하세요. 그럼 우리는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는 겁니다.”
도명의 말에 도화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렀다가 빨갛게 되기를 반복했다.
“그런 민망한 걸 어떻게 보냅니까?”
“수치심도 상대방을 즐겁게 하는 플레이 중 하나입니다. 그 정도 수치심도 못 참는데 저랑 플레이를 어떻게 시작합니까?”
***
다음 날 아침 도명은 출근하려는 도화를 붙잡아 세웠다. 도화가 언제나 같은 곳을 같은 경로로 가면서도 여유 시간을 두고 출발한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의 패턴을 분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도명은 언제부터인가 도화가 자신의 가게 앞을 지나갈 때마다 손목시계를 보았다. 7시 10분이었다. 1분의 오차도 없었다. 오늘도 제시간에 나왔으니 여유 시간 20분 정도를 뒀을 것이다.
도화는 정말 시계 같은 사람이었다. 반면에 도명 역시 꽤 부지런한 편이긴 했지만 그의 일과는 매일 달랐다. 그래서 도명이 잠들기 전마다 해야 할 일은 하루 일과에 대한 계획표를 짜는 일이었다.
“도화 씨 잠깐만 저 좀 도와주세요. 한 10분 정도요?”
“아, 네.”
도명이 도화를 데리고 자신의 지하실 집 안으로 들어섰다. 도명의 말끔한 집이 평소보다 조금 어수선했는데 도명의 옷들이 침대 위에 늘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옷 좀 골라 주세요.”
“제가요?”
도화가 조금 황당하다는 듯이 자신을 가리키며 반문했다. 살면서 도명이 자신에게 옷에 대해서 물어볼 날이 있을 줄은 몰랐다. 도화는 긴장한 듯 쭈뼛거리며 섰다. 머릿속에서는 계속 자신이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만 했다. 도명이 긴장한 도화를 눈치채고 작게 웃었다.
“그냥 둘 중 하나만 고르면 돼요.”
“아. 네.”
도명이 슈트, 셔츠, 넥타이, 심지어 양말, 시계까지 다 맞춰놓은 두 세트를 도화에게 내밀었다. 두 가지 다 도명에게 어울렸다. 다만 두 옷의 분위기가 달랐다. 하나는 감청색의 칼 같은 이미지의 슈트였고 하나는 브라운 계열의 따뜻하고 다정다감해 보이는 옷이었다.
“음. 도명 씨는 아무거나 입어도 잘 어울리지 않을까요? 최고의 패션 아이템은 얼굴이라고 사람들이 그러던데.”
도화는 도명에게 잘생겼다고 칭찬하는 것 같아 괜히 민망해졌다. 도화의 살짝 웅얼거리는 말투에도 도명이 잘생겼다고 해 줘서 고맙다며 능청스럽게 응했다.
“그냥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둘 중 하나만 골라 봐요, 도화 씨 취향인 걸로.”
“아, 취향은 이쪽인데…….”
도화가 도명의 브라운 계열 슈트를 가리켰다. 그리고는 더 할 말이 있는지 아랫입술을 깨물다가 풀었다가를 반복했다.
“도명 씨에게 어울리는 건 이쪽인데요. 제가 패션에 대해서 잘 모르긴 하지만요.”
도명은 도화의 말에 밤의 깊은 바다 같은 색의 재킷을 걸쳤다. 도화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도명에게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단단한 모양새로 잘 빠진 짙푸른 악마 같았다. 도명이 도화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정말 어울려요?”
“네.”
도화가 얼빠진 표정으로 답했다. 도명이 낮게 웃으며 슈트에 어울리는 은색 시계도 손목에 걸쳤다.
“저, 머리는 매번 염색하는 거예요?”
도화가 도명의 머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밝은 갈색 머리가 햇빛에 만날 때는 그 가장자리가 마치 금빛으로 빛나는 것 같은 머리 색이었다. 세련되고 예쁜 머리 색이었다.
“그럼요. 제가 외국인도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이런 머리 색이었겠어요?”
도화는 뿌리 끝까지 완벽하게 갈색인 머리가 신기했다.
“그러니까, 원래는 검은색인 거죠?”
“그럼요.”
도명은 도화가 자꾸 당연한 걸 묻자 그를 귀엽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도화의 시선이 여전히 도명의 머리끝에 가 있었다.
“아. 원래 검은색…….”
“네, 검은색 중에서도 유난히 짙은 검은색이었죠.”
“아, 이런 거에 문외한인 제가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도명 씨 원래 머리 색이 그 옷에 잘 어울릴 것 같은데요. 아 역시 옷 하나에 머리 색까지 바꾸는 건 좀 그렇죠?”
“검은 게 취향이에요? 도화 씨?”
“아니 제 취향은 역시 저 갈색 슈트 쪽인데…… 취향과는 별개로 그게 원래 도명 씨 모습 같습니다. 물론 제가 도명 씨를 안 지도 얼마 안 됐고 패션에 대해서도 잘 모르지만요.”
도화의 말에 도명은 말없이 전신 거울 속 자신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말이 없는 도명의 반응에 도화는 자신이 말실수를 했나 싶어 내심 안절부절못했다. 자신도 모르게 도명에겐 차가운 이미지가 어울린다고 말한 건가 싶었다.
그렇다고 이런 일로 사과하기도 애매했다. 도화는 어색한 분위기를 없애고자 화제를 돌리기 시작했다.
“오늘 무슨 중요한 일이 있나 보죠?”
“네, 오늘 여동생 결혼식이 있습니다.”
“아, 그래서 이렇게 신경 쓰셨군요. 기분이 이상하시겠어요.”
“도화 씨는 형제가 어떻게 돼요?”
“아, 외동이에요.”
“부모님께 커밍아웃은 했어요?”
“네.”
의외에 대답에 도명은 살짝 놀랐다. 저 소심한 성격에 절대로 말 못 할 줄 알았다.
“받아들이던가요? 그것도 외동아들인데?”
도명의 질문에 도화는 쓴웃음을 지었다. 도명은 도화에게 더 이상 곤란한 질문을 안 하기로 했다.
“바쁜 사람 시간을 제가 많이 빼앗은 것 같네요.”
“아니요. 아직 여유 시간 5분 정도는. 도명 씨는 부모님께 커밍아웃했어요?”
“네.”
도명의 대답이 간결하고 확실한 어조로 떨어졌다. 도화는 생각했다. 커밍아웃 후에도 가족 행사에 참가하는 걸 보면 그는 가족을 이해시키는 데 성공한 모양이라고 말이다.
“사람들, 대부분의 취향은 역시 이 슈트겠죠? 더군다나 가족 행사인데.”
도명이 브라운 계열의 슈트를 들며 말했다.
“네. 그런데.”
“그런데. 다른 슈트가 저다운 거고요?”
“아, 저는…….”
“맞아요. 이게 저다운 거죠. 조언 고마워요. 도화 씨. 어서 출근해요. 도화 씨답지 않게 늦겠네.”
도명이 도화의 앞머리를 들춘 후 짧게 입 맞추며 말했다.
***
도명이 결혼식장에 도착했다. 그는 남청색 슈트를 입고 짙은 검은색으로 염색한 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의 머리 위로 햇빛이 비치면 검은색 안에 있는 짙은 푸른 기운이 일렁이는 것 같은 머리 색이었다.
좁은 면적의 차가운 은색 액세서리가 그의 살갗을 휘감고 있었고 가늘고 검은 넥타이가 그의 목을 엄격하고 조이고 있었다.
멀리서 화사한 한복을 입고 있는 모친과 정장을 입고 있는 부친이 보였다. 도명이 그들에게 다가갔다. 도명의 가죽 가방 속 봉투에는 축의금으로 준비한 백만 원 수표 3장이 들어 있었다.
“도명아 왔구나.”
도명의 모친이 그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입꼬리를 억지로 올리고 있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도명은 모친에게 축의금을 건넸다.
조금 멀리 있는 부친은 하객들과 덕담을 주고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정확히는 정신이 없다기보다 도명을 모른 척하고 있었다. 모친은 멀리 앉은 곳에서 하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는 사돈에게 자신의 아들을 소개했다.
“어머, 아드님이 너무 훤칠하시네요. 우리 며느리도 예쁜데 남매가 둘 다 인물이 좋네요. 아드님이 해외에서 사업하느라 바쁘다면서요. 상견례 때 못 봐서 섭섭했어요.”
도명이 일 때문에 해외에 나가는 일이 많긴 한데 대부분 국내에 있었다. 하나뿐인 여동생 상견례에 못 올 정도로 바쁜 사람은 아니었다. 도명은 모친을 흘깃 쳐다보더니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저도 아쉬웠습니다. 오늘도 겨우 비행기를 타고 왔습니다. 우리 도희 잘 부탁드립니다.”
사돈 되는 집과 간단한 인사 후에 도명이 모친을 쳐다보며 말했다.
“우리 도희 어디 있어요? 그렇지 않아도 섭섭해할 텐데. 외국 가 있는 오빠가 상견례 때도 안 나타나서.”
도명의 말에 모친의 얼굴이 잠시 새하얗게 변했다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신부대기실을 가리켰다. 잠시 걷다가 모친이 도명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넌 여전히…… 그대로니?”
“그럼요. 사람 천성 어디 가겠어요?”
도명이 활짝 웃으며 답했다. 별문제 아니라는 듯 무심한 말투였다.
“아 참 저 이모님이 물려주신 건물에 가게 열었어요. 오셔서 차 한잔하세요.”
“그래.”
“이 말 처음 하는 거 아닌데요? 예전에 전화상으로도 했잖아요.”
“미안하구나. 내가 너무 바빠서 잊었다.”
“어머니, 저와 거리를 두고 싶으시면 직접 말을 하세요. 어머니를 괴롭히고 싶지 않아요. 이 말은 진심이에요.”
도명이 모친의 두 팔을 잡고 그녀의 눈을 응시하며 속삭였다. 그러자 모친 역시 도명의 팔을 부여잡으며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내가 어떻게 아들을 손에서 놓을 수가 있니?”
“내가 달라질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시간만 주어진다면? 시간은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아요.”
“……그래서 놓아달라고? 너를?”
“나 말고 어머니가 조금이라도 행복할 방법을 말해 봐요. 저 줄곧 착한 아들이었잖아요.”
“도명아, 나는 그저 네가 사람을 해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도도는 내가 일부러 그렇게 만든 거 아니에요.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요? 내가 얼마나 도도를 사랑했는지 알잖아요. 저는 지금도 이따금 도도 생각을 해요.”
모친은 도명이 키우던 강아지의 피로 흠뻑 젖은 그의 교복 셔츠를 빨며 밤새 숨죽여 울었었다. 도명은 그런 모친의 공포 섞인 울음소리를 여전히 선명하게 기억했다.
“알아.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해 줬잖니. 몇 번이나.”
“어머니가 못 알아듣는 것 같으니까 계속 말해 주는 거예요.”
모친과 도명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 멀리서 도명을 부르는 도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도희가 신부대기실 의자에서 벗어나서 도명에게 달려들었다. 커다란 하얀 꽃 같은 여동생을 안은 도명이 다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너는 참, 왈가닥도 아니고 드레스 입고 뛰어다니고 말이야.”
도명의 모친이 주변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하지만 오빠 얼굴을 너무 오래간만에 보는걸. 한 5년 만이잖아! 무슨 대단한 사업을 하기에 얼굴 보기가 힘들어! 세상에, 사장이라고 하더니 그사이 없던 카리스마 생긴 것 봐.”
도희가 도명의 모습을 이리저리 훑으며 말했다.
“사람 막 악독하게 부려 먹는 거 아니야?”
“아니야.”
“오빠, 이거 거의 가출이야. 엄마, 오빠 언제 독립했지?”
“대학 입학할 때 자취방 얻어서 나갔지.”
“그래. 그때 나 사실 황당했어. 지방대학 입학한 것도 아니고 인 서울 갔으면서 자취가 왜 필요해. 우리가 서울 사는데! 나는 내심 오빠가 집 안에서 답답했었나 싶었다니까.”
“오빠도 어른이잖니.”
“세상에. 우리 거울 왕자. 점점 잘생겨지는 거 봐.”
“그 별명 그만. 그것 좀 그만 좀 말하자. 식은땀 난다. 어머니, 얘는 왜 아직도 우리 학창 시절 이야기를 꺼내고 그래요. 우리가 나이가 몇 살인데.”
“엄마, 오빠 막 점잔 떨며 어머니라고 하는 거 봐. 징그럽지 않아? 오빠. 여자친구는? 옆에 여자친구 데리고 오면 더 좋았잖아!”
도희가 도명의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어수선하게 굴었다.
“없어.”
“눈이 너무 높은 거 아니야?”
“도희야 오빠, 독신주의자래. 그만 괴롭혀.”
“진짜? 엄마는 괜찮아?”
“자식 마음대로 되니?”
“세상에. 엄마 너무 시원스러운 거 아니야?”
도명은 동생 도희와 반쯤 진실을 숨긴 채 밀린 대화를 하고 신부대기실에서 사진을 같이 찍었다. 도희에게는 도명이 동성애자인 것도, 사디스트인 것도 비밀이었다. 언제나 밝고 명랑한 그녀는 집안의 기쁨이었다.
도희와 도명은 여느 오누이치곤 꽤 다정했다. 도명은 도희에게 정말 좋은 오빠였다. 도명은 밤이 늦으면 마중 나왔고 도희에게 공부도 곧장 잘 가르쳐 줬다. 도명의 모친이 바쁘면 집 안에서 밥을 차리고 여동생 교복까지 다려서 방에 걸어 두었던 도명이었다.
여동생에게 시도 때도 없이 심부름시키고 집 안에서 온갖 유치한 행동을 하며 노는 다른 오빠들 같지 않았다.
한 살 차이였기 때문에 학교도 같이 다녔다. 도희가 반에서 왕따를 당하는 것 같은 기미가 보이자 그 일 역시 도명이 해결했다. 도명은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도 없는 완벽한 오빠였다.
도희는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오빠가 자신의 집에서 동급생 남학생을 괴롭히며 흥분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도희의 방 건너편에서 재갈을 강하게 물린 남학생이 도명의 페니스에 꿰뚫리며 침대 시트를 눈물로 적시고 있었다.
도명은 엉망이 된 남학생의 두 손을 결박해서 자신의 옷장에 집어넣고 결박한 손을 옷을 거는 봉에다가 고정시켰다. 그리고는 탁 소리 나게 옷장을 걸어 잠갔다.
내내 도명을 위해 뭐든 했던 그가 문틈에서 본 건 실망하고 화가 난 도명의 표정이었다. 도명은 거울을 보며 숨을 고른 후 흥분하느라 엉망이 된 자신을 그루밍한 후에 멀끔한 모습으로 거실에 나갔다.
도명은 냉장고에서 과일을 꺼내 보기 좋은 모양으로 깎았다. 집에 있는 과자도 포장지를 뜯어서 예쁜 그릇에 담았다. 그리고는 간식 쟁반을 들고 여동생 문 앞에 서서 노크를 했다.
그리고는 방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 도희에게 과일을 건네주며 같이 웃으며 영화를 봤다. 코미디 영화였다.
‘내용 모르겠으니까 처음부터 다시 돌려 봐.’
‘오빠 친구는? 이거 너무 웃긴데 같이 보자.’
‘같이 공부하다가 지루해서 자더라고. 자꾸 진도를 못 따라오는데 뭘 가르칠 맛이 안 나더라. 한심해. 늘 못 따라온다니까.’
‘오빠 수준에 맞추면 안 되지. 오빠는 전교에서 노는데. 하여간 오빠 은근 재수 없다니까.’
남매가 코미디 영화를 보며 자지러지게 웃는 동안 도명의 상대 남학생은 옷장 속에 갇힌 채 엉덩이 사이에서 도명의 정액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그는 다음날 체육관에서 정액을 흘려 도명의 옷에 뿌연 자국이 생긴 것이 사라질 정도로 핥은 후에 매질을 당했다.
***
도명은 결혼식이 끝난 후 간만에 클럽에 왔다. 클럽에 익숙한 얼굴 몇 명이 보여서 홀 가운데에 있는 소파에 걸터앉았다. 도명과 같이 앉아 있는 두 명은 모두 사디스트들이었다.
“오늘 도명 씨 스타일 장난 아니네요. 푸른 악마가 따로 없네요. 솔직히 도명 씨 하면 갈색 머리 외에는 상상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검은 머리 완전 섹시해 보여요. 무자비해 보이고. 마조들이 아주 훅 가겠어.”
“누군가, 이게 잘 어울릴 거라고 해서 바꿨습니다. 이편이 더 저답다고 하더군요.”
“누가요?”
“이웃사촌이요.”
“그 이웃사촌 눈썰미 좋네요.”
“눈썰미가 좋은 편 같기도 하고 어쩔 땐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묘한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남자?”
“네, 남자요. 그것도 크고 귀여운 남자요.”
도명은 술 대신 소다수를 마시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온통 보이는 것은 어둠에 묻힌 사람들의 왁자지껄함뿐이었다. 도명은 소파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어두운 공간 쿵쿵거리는 음악이 조금은 심란했던 마음을 가라앉혀 주는 것 같았다.
“도명 씨, 저쪽 봐요. 저쪽 오늘 여기 처음인 것 같지 않아요? 완전 뉴 페이스인데?”
도명은 그가 말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눈에도 보기에도 긴장된 몸짓을 하고 바 테이블에 앉아 있는 덩치 좋고 키 큰 남자가 보였다. 도명은 집중할수록 익숙한 얼굴에 표정을 굳혔다.
‘백구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도명은 자신의 핸드폰 메시지를 확인했다. 하지만 도화에게 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도명은 생각에 잠긴 채 손에 든 잔을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도명이 도화에게 시간을 준 이유는 결국엔 그가 자신에게 돌아올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대방에게 충분한 선택권을 주고 충분한 시간을 줬다는 뉘앙스를 풍겨야 나중에 뒤탈이 없었다.
도명이 보기에 도화는 오래간만에 느끼는 선명한 자극에 정신을 못 차리는 것처럼 보였다. 안 그렇다면 도화처럼 경계심 많고 SM이라는 말에 대형 기획사 이름으로 먼저 떠올리는 바닐라가 자신과 SM 파트너를 맺자고 할 리가 없었다.
“우리 처음 여기 왔을 때 생각나게 하네. 동정일까요? 나이는 동정일 나이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도명 씨가 보기엔 어때요?”
“그가 동정인지 아닌지가 뭐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왜긴. 처음인 상대는 뭘 해도 바들바들 떠는 게 아주 귀엽다고. 도명 씨는 동정이 취향이 아니에요?”
“동정이든 뭐든, 중요한 것은 사람 자체가 얼마나 마음에 드느냐 아니겠어요?”
“다가가서 말 걸고 올게요.”
그가 일어서자 도명이 그의 발을 발로 꾹 눌렀다. 순간 두 사디스트의 기 싸움이 팽팽했다.
“뭡니까?”
“제가 아는 사람입니다. 제가 여길 소개해 줬고요. 또. 그가 여기 있다는 건 마조히스트가 되기 싫다는 거고요.”
“그가 마조히스트가 아닌 게 뭐가 중요해요? 내 마음에 드느냐가 중요하지. 도명 씨 조건 까다롭기로 유명하던데 소문이 헛소문은 아니었네요. 우리가 도덕책 읽을 부류는 아니잖아요.”
그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코웃음을 친 채 말했다. 너무 빡빡하게 구는 도명이 답답하다는 식이었다. 도명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의 허벅지를 발로 꾹꾹 내리눌렀다. 같은 사디스트한테 기선제압을 안 당하기 위해 그가 애썼다. 도명의 눈빛이 그를 사납게 내리눌렀다.
팽팽한 긴장감에 사람들의 시선이 묘하게 그들에게 갔다. 그렇지 않아도 그들은 이곳에서 유명했다. 사디스트들로. 그래서 이곳의 고객들은 마조히스트가 아니면 그들과 말을 함부로 섞지를 않았다.
“도명 씨?”
도화는 작은 소란에 시선이 갔고 그 중심에서 도명을 발견했다. 도화는 낯선 곳에서 아는 얼굴을 발견하자 일단은 반가운 표정으로 도명을 향해 다가갔다.
“도화 씨, 문자 잊은 모양입니다.”
도명이 도화를 향해 핸드폰을 흔들며 날카롭게 말했다.
“아, 도명 씨 머리 염색했네요.”
도화가 살짝 얼빠진 표정으로 도명을 쳐다보며 말했다. 자신이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정말 기가 막히게 어울렸다. 지나가는 그 누구라도 그를 한 번쯤은 쳐다볼 만큼 매혹적이었다.
도화는 그를 넋을 잃고 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도명이 누군가를 내리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매서운 표정을 하고 말이다. 도화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도명과 그와 싸우고 있는 남자를 번갈아 보였다.
‘아, 이 남자는 마조히스트인가? 대접이 왜 이래.’
“지금 그게 중요해요? 문자 잊었냐고 물었잖아요.”
“아…… 여기 간판 사진 찍어서 보내달라고 했던 거요?”
“네.”
“잊은 게 아니고 미룬 건데요.”
“뭐, 시식하러 온 겁니까?”
“음 엄연히 틀린 말은 아닌데 표현이 조금 그러네요.”
“도화 씨, 저 놀고 있는데 방해 말고 가서 놀아요.”
“아. 네.”
도명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도화를 쳐다보자 그는 어색한 걸음으로 뒤로 물러났다.
도화는 바에 앉은 후 적당히 병맥주를 아무거나 시켰다. 도화의 심장이 벌렁거리고 있었다. 검은 머리를 한 도명의 모습에 묘하게 놀랐고 그의 거친 모습에 놀랐다.
‘와 아무리 클럽이라도 한복판에서 플레이를…….’
도화는 바 의자에 앉아서 이것저것 검색하기 시작했다. 워낙 큰 키라 구부린 그의 허리가 더욱 구부정해 보였다. 도화는 ‘SM 파트너’라고 검색했다. 한 번에 여러 명이 될 수도 있다는 소리에 새삼 기분이 이상했다. 도명은 대체 몇 명과 그런 관계를 맺고 있는지 궁금했다.
도명과 그렇고 그런 사이는 아니지만 상대가 여러 명인 남자와 노는 일은 솔직히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하긴 잘생겼으니 그런 상대를 만드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도화는 괜히 뒷목을 쓸어 넘겼다.
하긴 그러니까 거리낌 없이 자신에게 동정이나 떼고 선택하라고 하는 것이다. 마음에 드는 상대에게 다른 사람과 자고 오라니. 역시 갑자기 기분이 복잡해졌다. 정말 섹스만을 하기 위해 맺는 계약관계라는 게 새삼 느껴졌다.
그렇다면 그의 다정함에 달달함을 느끼는 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
도화는 갑자기 정신이 명료해지기 시작했다. 도화가 슬쩍 도명이 앉은 쪽을 쳐다보니 도명과 살벌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던 그들은 목을 축이면서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 플레이는 아닌가. 싸우고 있던 거였나? 왜?’
“뭐가 그렇게 심각해요?”
도화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낯선 남자가 느끼한 눈빛을 하고 그의 옆에 앉았다.
“그냥. 개인적인 일로요.”
“애인 일이에요?”
“아니요. 절대.”
도화의 대답에 낯선 남자는 웃었다.
“애인 있어요? 이런 데 처음이죠?”
“애인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런 데 처음 아닌데요.”
도화는 괜히 이곳이 처음이라고 하면 허락도 없이 옆에 앉은 낯선 남자에게 기가 밀리는 기분이라 일단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상대방은 도화의 말을 그다지 믿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에이 처음 같은데. 뭘. 솔직히 말해 봐요. 이름이?”
“이도화라고 합니다.”
“도화 씨, 저쪽은 그만 쳐다봐요. 당신이 마조히스트가 아니라면 말이에요.”
“네?”
“저 사람들 사디스트들이에요. 저기 남청색 슈트 입은 유난히 잘생긴 남자, 당신이 관심 있어 하는 사람 말이에요. 특히 조심하세요. 이 동네 사디스트 중 가장 유명하니까.”
상대방의 말에 도화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저 사람이 내 이웃사촌입니다.’
“설마 마조히스트는 아니죠? 그래서 관심 두는 거라면 할 말 없고요.”
“아…… 일단 지금은 아닐걸요?”
“무슨 대답이 그래요. 그렇게 저 남자가 마음에 들어요? 바닐라가 마조히스트가 되고 싶을 정도로? 얼굴 그렇게 밝히다가는 큰일 나는데? 남자는 얼굴보다 인성이에요.”
낯선 남자의 말에 도화의 눈길이 도명과 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 확실히 도명이 정말 잘생긴 편이긴 했다. 낯선 남자가 못생긴 편은 아니지만 도명과 비교하니 갑자기 시시해졌다. 그냥 아무 감흥이 일어나지 않는 나쁘지 않은 얼굴 정도였다.
“도화 씨는 어쩐 일로 여기 놀러 왔어요?”
“그냥이요.”
“여기 그냥 놀러 오는 사람 어디 있어요? 말로는 그냥 술 마시러 왔다면서 다들 외로움 덜려고 오는 거지. 저도 그런 사람이고. 도화 씨는 어느 쪽이에요? 바텀? 탑?”
“일단은 바텀으로 치려고요.”
“네? 아직 자기 성향도 몰라요? 남자랑 한 번이라도 자 보긴 한 거예요?”
***
시간이 지나고 클럽의 계단실 한구석에서 도화가 한 손으로 낯선 남자의 머리채를 붙잡고 있었다.
“저, 저기 도화 씨?! 이것 좀 놔 봐요.”
낯선 남자는 불성 사나운 모습으로 머리를 부여잡으며 소리치고 있었다. 남자가 발버둥을 쳤지만 도화의 팔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왜 갑자기 입술을 들이밀고 그래요, 이상한 얼굴로.”
도화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남자의 얼굴을 상기하며 진절머리를 쳤다.
“아니. 그러려고 따라온 거 아니에요?!”
“아닌데요.”
“그럼, 여기 대체 왜 온 건데요!”
“동정 떼러 오긴 했습니다.”
“도화 씨 이거 놔요. 알았어요. 천천히 할 테니까!”
“아니요. 아무것도 하지 말아요. 더 이상 다가오면 주먹 날아갈 겁니다.”
“네?!”
도화가 주먹을 꽉 쥐고 남자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남자는 저 주먹에 맞으면 정말 큰일 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조용히 두 손을 올렸다.
도화가 다시 클럽 중앙 홀로 와 보니 도명이 여전히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까 있었던 일행들과 그대로였다. 도화는 비틀거리며 도명의 옆에 풀썩 앉았다.
피로감이 급격하게 밀려왔다. 아까와 같은 상황이 벌써 세 번째였다. 살면서 몸에 대해서 성스럽게 생각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막상 노골적인 스킨십을 해 오는 상대방들을 보니 거부감이 올라왔다.
“도화 씨, 딴 데 가서 놀아요.”
도명의 말에도 도화는 그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확실히 그는 잘생겼다. 독보적으로 잘생겼다. 이쯤 되니 자신이 얼굴을 엄청 밝히는 유형인가 싶었다. 갑자기 자괴감이 몰려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나 그런 남자였어?!’
“여기 도화 씨가 놀 물이 아니에요.”
도명이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도명 씨, 집에 언제 가요?”
“한 20분쯤 더 놀다가 가려고요. 왜요?”
“이웃사촌인데 같이 들어가려고요. 그게 효율적이잖아요.”
“아, 둘이 이웃사촌이에요?”
아까 도명과 싸우던 사디스트 성향의 남자가 도화에게 크게 관심을 가지며 물었다.
“네.”
“둘이 친한가 보네요.”
“아주 약간요?”
도화가 아까 도명과 싸우던 남자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남자가 도화를 향해 씨익 웃었다. 도명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남자가 손을 뻗어 도화의 앞머리를 쓸어 넘겨 주려고 했다.
도명이 못 참고 발이 나가려는 순간 도화의 다리가 먼저 나갔다. 도화의 발끝이 소파 사이에 있는 테이블 모서리에 얹어지더니 남자를 향해 쫙 밀었다. 원목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는 유리가 얹혀 있어서 무게가 꽤 나가는 테이블이었다. 하지만 도화는 가볍게 테이블을 밀었고 남자의 배가 테이블에 밀려 눌렀다. 남자는 순간 얼이 빠진 얼굴로 도화를 쳐다보았다.
“더럽게 치근덕대네.”
도화가 울화가 치미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남자의 아까 행동 하나 때문에 이 정도로 화가 났다기보다 아까부터 참고 있던 화가 터진 것이다. 도명 역시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도화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뭐가 그렇게 웃기는지 얼굴이 새빨갛게 익도록 웃어댔다.
“도명 씨는 뭐가 그렇게 웃겨요? 전 심각한데.”
“그럼 이게 안 웃깁니까? 집이나 갑시다.”
도명이 가방을 챙기며 도화의 손목을 잡고 클럽을 나왔다. 도명은 자신이 주차해 놓은 차를 찾아 문을 열었다.
“아, 직접 운전하려고요? 음주운전은 하면 안 됩니다.”
“도화 씨.”
“네.”
“가까이 다가와 봐요.”
“왜요?”
도화가 새삼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도명과 거리를 두었다. 그러자 도명이 답답하다는 듯이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자 힘이 센 도화가 도명 쪽으로 딸려 들어왔다.
도명은 순간 희열을 느꼈다. 반항하려면 충분히 반항할 수 있는데 자신 앞에서만 순둥이였다. 도명이 도화의 머리를 잡고 자신의 목덜미에 코를 묻게 했다. 도명의 페로몬이 도화의 콧속에 깊이 스며들었다.
“제 냄새 잘 맡아 봐요. 술 냄새가 나요?”
“아, 아니요.”
도화의 얼굴이 새빨갛게 익은 채 웅얼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저 술 한 모금도 안 마셨습니다. 이제 운전해도 됩니까?”
“네.”
***
새벽 2시, 두 남자는 적당히 텅 빈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도명이 도화를 흘깃 쳐다보며 물었다.
“그래서 간은 잘 봤습니까?”
도명의 질문에 도화는 말없이 한숨을 쉬며 괜히 창밖만 쳐다보았다.
“버릇이 안 좋네요. 사람이 질문하는데 대답도 안 하고.”
“사실. 소개시켜 준 곳, 마음에 안 듭니다.”
“왜요?”
“그냥…….”
“말 흐리지 맙시다. 안 좋아하는 버릇입니다.”
“남자들 질이 안 좋습니다.”
“질이 안 좋아요? 어떤 의미의 질을 말하는 겁니까? 게이 바 중에서 가장 관리도 잘 되어 있고 오는 사람들도 괜찮은 사람 꽤 많은데요?”
“그냥…….”
“말 흐리지 말라고 했죠.”
“다들 너무 치근덕대니까. 방금 처음 봤는데 말입니다.”
도화는 여전히 운전대를 잡은 도명에게 시선을 제대로 던지지 않으며 말했다.
“다들 그런 의미로 갑니다. 동정 떼러 간 거 아닙니까?”
“그렇긴 한데. 막상 하려니까 기분이 썩 좋지 않아서요.”
“설마 겁이 났습니까? 그런 사람이 저하고는 SM 플레이를 할 수 있고요?”
“겁먹은 거하고는 다릅니다. 그냥 기분이 별로였습니다. 다들 나를 너무 쉽게 보는 것 같고.”
도명은 도화의 말에 갑자기 기분이 복잡해졌다. 지금 도화가 하는 말들을 보니 그가 정말 자신과 함께할 수 있는 유형의 사람인지 확신이 안 들었다.
“도화 씨, 그래서 대체 뭘 하고 싶은 건데요?”
도명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아무나하고 자는 건 역시 아닌 것 같습니다. 동정 떼는 게 무슨 병 치료 같은 것도 아니고. 제 나이가 30살이긴 하지만, 역시 이런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거기에 저도 포함되어 있습니까?”
“도명 씨는 아무나하고 잡니까?”
도화의 시선이 괜히 손톱을 쥐어뜯는 자신의 손끝에 갔다.
“나름의 기준이 있죠.”
“그 기준이 뭔데요?”
“일단 잠자리 성향이 맞아야 합니다. 그건 아주 기본적인 전제입니다. 그리고 저도 취향이라는 게 있으니 취향이 맞아야 하죠.”
“저는 도명 씨의 기준에 맞나요?”
“네. 도화 씨는 제 취향입니다. 그리고 도화 씨가 마조히스트라는 확신이 든다면 오늘 당장이라도 집에 들어가자마자 같이 침대에서 놀 수 있죠.”
도명의 말에 도화는 기분이 이상야릇해졌다. 도명이 지금 당장 차를 세우고 귀를 물어뜯으며 성감대를 건드리면 그는 아무 반항도 못 할 것 같았다.
“제가 정말 취향이긴 합니까? 제가 아무것도 몰라서 쉬운 상대라서 그런 건 아니고요?”
“그게 무서운 겁니까? 당신이 누군가에게 쉬운 상대일까 봐?”
도명의 말에 도화는 살짝 울먹울먹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대답도 똑바로 ‘네’라고 하라고 했죠. 하아…… 그것도 운전하는 사람 상대로 고개를 끄덕이면 제가 앞을 보라는 겁니까? 말라는 겁니까?”
도명은 결국 길가에 차를 세웠다. 그러자 도화가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도화는 이상하게 자신의 얼굴을 도명에게 보여 줄 수 없었다.
“도화 씨 왜 그래요?”
“그냥, 10년 동안 게이로서 아무것도 안 해 본 저에게 화가 나서요. 저는 그냥 아무나인 상태가 싫습니다.”
“도화 씨가 원하는 게 설마 연인 같은 겁니까?”
도화는 갑자기 훅 들어오는 도명의 직접적인 질문에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짐과 동시에 속이 울렁거렸다. 도화는 고개를 숙인 채로 앞이마를 엄지로 문질렀다.
“그 설마라는 표현이 거슬리네요. 마치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을 이야기하는 것 같잖아요.”
도화의 말에 도명은 좌석에 몸을 깊숙이 뉘었다. 도명의 깊게 구겨진 미간과 입 사이로 새어 나오는 한숨이 도화의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마치 알 수 없는 잘못으로 선생님한테 혼나는 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불편하고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서 억울한 감정이 도화의 목 끝 언저리를 뱅뱅 돌았다.
“도화 씨, 제가 좋습니까? 사랑이라도 해요?”
“우리가 그런 낯간지러운 감정을 이야기할 정도의 시간을 가지지는 않았잖아요.”
도화의 미간이 좁혀진 채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도명이 흘깃 도화는 쳐다보니 옆 좌석에 심술 난 어린아이가 앉아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요?”
“적어도…….”
도화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마른 침만 연신 삼켰다.
“도화 씨가 애입니까? 자기감정도 똑바로 말 못 하고?”
사실 지금 이 상황에서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것은 도화뿐만이 아니었다. 도명의 말끝이 송곳처럼 날카로워졌다. 도명 역시 정신의 여유가 없었다.
“어른이고 애고, 도명 씨는 사람이 자기감정을 제대로 말 못 할 상황에 대해서 이해 못 해요? 오히려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그런 일들을 더 많이 겪습니다. 애는 단순할 수라도 있잖아요. 혹은 그런 척하거나. 그렇게 매번 비아냥거리는 도명 씨의 공감 능력 역시 좋은 편은 아니에요.”
도화는 도명이 자신을 윽박지른 것에 대한 불만을 터뜨렸다. 그의 눈가가 살짝 붉게 물들었다. 눈물이 나올 정도는 아니었지만 서러운 감정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뭐가 이렇게 돌아가려고 해요.”
도명이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억누르며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도명 씨에 대한 감정에 대해서 말하기에는 지금은 너무 섣부르고 저는 그냥, 알고 싶습니다. 우리가 앞으로도 그런 감정을 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지에 대해서. 도명 씨가 이야기한 취향에 맞는다는 말 안에 이런 것이 포함되어 있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잠자리를 하는 사람과 사랑을 하지 않습니다.”
도명의 입에서 깔끔한 답이 나왔다. 도화는 너무 깔끔한 나머지 헛웃음마저 나올 정도였다. 적어도 아주 조금의 틈을 두고 말이 튀어나올 줄 알았다. 기계적이라고 느껴질 정도의 반응 속도였다. 사람의 감정을 쓰다듬는 형식상의 틈도 없었다.
도화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헛웃음을 연달아 지었다. 그리고는 이내 잔뜩 가라앉은 표정으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정말, 도명 씨는 제가 이해하려고 틈을 좁히면 저 멀리 가 있네요. 어떻게 이해 못 할 말들이 끝도 없이 나와요?”
“설명해 줘요? 아니면 설명조차 들을 기분이 아니에요?”
“설명을 들으면 제가 이해나 할 수 있는 건가요?”
“그건 도화 씨 재량이죠. 일단 도화 씨 얼굴이나 봅시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아야 제가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을 하죠.”
“보여 주기 싫어요, 아니 정확히는 당신의 얼굴이 보기 싫어요.”
“제 얼굴이 왜 보기 싫은데요?”
“날 한심하게 쳐다보고 있을 거 아니에요. 끝도 없이 설명이 필요한 덜 떨어진 한심한 학생. 제가 댁한테 그런 사람이잖아요.”
도화의 말에 도명이 도화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처음에는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넘기다가 그의 손가락 끝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도명의 손톱이 도화의 여린 두피를 긁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에 잔뜩 쥐고 들어 올렸다. 순간 도화의 입에서 작은 비명이 터져 나오면서 도명의 얼굴이 보였다.
“이 얼굴이 당신을 한심해하는 얼굴로 보여요? 눈 감지 말고 똑바로 봐요. 헛소리 좀 그만 늘어놓고. 지겨워 죽겠네.”
도화가 뻑뻑한 눈을 겨우 뜨며 도명을 쳐다보았다. 그의 내내 무심했던 말투와는 달리 그의 얼굴 역시 도화처럼 입가가 침울하게 뒤틀려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가 도화가 그러하듯 공허해 보였다. 사람이 말투는 가장 할 수 있어도 눈동자의 감정은 숨길 수 없었다.
“일단 도화 씨는 제 설명을 들을 상태는 아니네요.”
“해 봐요. 일단 뭐든 설명해 봐요. 당신이란 사람은 왜 사람을 침대에 끌어들이면서 사랑을 할 수 없다고 단언하는지.”
도화는 ‘날 지금까지 유혹하며 가지고 놀며 재미있었어요?’라고 덧붙이려다가 말을 목 끝으로 겨우 삼켰다. 말은 삼켰지만 도화는 도명에 대한 원망을 숨길 수가 없었다. 딱히 그를 비난하려고 마음먹은 것도 아닌데 말끝의 어조가 날카롭게 나오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가 자신을 왜 유혹했는지, 왜 여기까지 비참하게 질질 끌고 왔는지 원망스러웠다.
여기까지 끌고 왔는데 사랑을 할 가능성조차 없다고 단언하는 그가 미웠다. 도화가 도명을 사랑하는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그가 미웠다. 그를 사랑하는지에 대해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미 그에게 매혹당한 건 기정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일단 저는 SM 외의 섹스를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네.”
도화가 영혼 없는 말투로 그의 설명에 추임새를 넣었다. 그에게 설명해 보라고 하고 있지만 사실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를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도명 역시 그런 도화의 심경을 알고 있었다. 도화가 설명을 들을 마음도 없으면서 도명에게 설명을 해달라고 하니 설명을 하고는 있는데 상대방이 이해할 거라는 기대는 없었다. 도명은 매뉴얼을 읽듯이 무미건조한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전에도 말했지만 SM 플레이는 일종의 연극 같은 겁니다. 마음속 깊숙이 있는 지독한 욕망을 토해내는 연극 같은 거예요. 서로 합의한 대본이 있는 그런. 그런데 감정이 있는 상대와 연극을 해 버리면 그건 연극이 아닌 겁니다. 지독한 감정은 연극 위에서나 아름답지 현실로 넘어올 때는 아주 현실적인 비극이 되는 겁니다.”
도명의 손이 어느 순간 훅 들어와 도화의 목을 조였다. 손끝에 힘이 제법 들어갔다. 그러자 도화의 동공이 심하게 떨려왔다.
“내가 당신이 숨 쉬는 모든 순간마다 모든 것을 통제하려 들 겁니다. 당신은, 숨 쉬는 모든 순간마다 모든 것을 제게 의지하려 들 겁니다. 사디스트와 몸뿐만 아니라 사랑을 나눈다는 건 그런 의미에요. 멀쩡했던 두 사람을 불구로 만드는 일이죠.”
“내가…… 그걸 감당할 수 있다고 하면 가능해요? 단순 취향인 것 이상의 관계 말입니다.”
“여기, 미친놈은 따로 있었네. 아니면, 방금 전의 내 말 자체를 안 믿는 거거나.”
“그러겠다는 게 아니라, 그냥. 질문이에요.”
“그냥 질문이어야 할 텐데.”
도명이 도화를 향해 혀를 차며 말했다. 도명의 한심하다는 표정에 도화가 울컥해서 그의 어깨를 밀치고 내리눌렀다. 도명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움직일 수 없는 최선을 다한 악력으로 말이다. 도화는 빠르고 강했다.
도화의 시선이 어둠에 묻힌 푸른 바다 같은 도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지금 이 순간 도화는 도명을 관음적인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화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나름 호기롭게 말했다.
“이봐요, 안 하는 것과 못하는 것의 차이를 좀 아세요.”
“왜요? 저보다 힘세니까 저 먹게요?”
도명이 먹어 보라는 듯이 목덜미를 옆으로 늘리며 조롱했다. 도화는 도명의 살짝 드러난 목덜미만으로도 얼굴이 새빨갛게 익었다.
“그, 그러겠다는 게 아니라 나는 당신에게 완전히 종속될 만큼 나약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 그걸 보여 주려고…….”
“뭐, 이 잘난 악력으로 뿌리치면 이미 종속된 마음도 뿌리칠 수 있답니까?”
도명의 말에 도화는 그를 내리누르고 있던 팔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 맥 빠진 표정으로 자동차 유리창에 얼굴을 기댔다. 도화의 표정뿐만 아니라 어깨까지 시무룩하게 내려갔다. 도화가 도명에게 넌지시 질문했다.
“집착이 심한 편입니까?”
“상대가 무생물이건 생물이건, 내 건 하나하나 내 식으로 바꿔야 성미가 풀리는 사람이긴 하죠. 애정의 정도가 심할수록 그렇습니다.”
도명이 살짝 짜증 섞인 말투로 도화 때문에 눌린 뒷머리를 정리하며 말했다. 도화는 그런 도명을 보며 저놈의 머리를 아주 헝클어뜨리고 싶어 흘겨보았다. 그런 심술 맞은 욕구를 반영하듯 도화의 손가락이 끝이 움찔거렸다.
“그래서 당신이 정말로 망친 게 있어요?”
“도화 씨, 원래 있던 성질을 바꾸는 것 자체가 무언가를 망치는 겁니다. 더군다나 영혼이 있는 것일수록 말이죠. 그래서 언제나 진짜 가지고 싶은 것을 못 가져요. 어쩌면 영원히 못 가질지도 모르죠.”
“진짜 가지고 싶은 게 뭔데요?”
“…….”
“왜 말을 안 해요? 설령 좋아하는 사람이.”
도명은 도화를 흘깃 쳐다본 후 운전대를 잡았다. 하지만 질문을 기다리는 도화의 눈길이 집요했다.
“좋은 사람이 탐이 납니다. 내가 가지기에는 염치없다고 느낄 만큼 말입니다. 더할 나이 없이 순수한. 뭐 그런 거 있잖아요.”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진짜 악마 같네요. 뭐 순수한 영혼 이런 거 수집이라도 합니까?”
도명은 도화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웃지 말아요. 진짜 같으니까.”
“그럼 도화 씨는 도화 씨의 말이 안 웃깁니까?”
“하나도 안 웃깁니다.”
“지금 악마랑 드라이브하고 있는데 안 무서워요? 당신을 어디로 데려갈지 모르는데?”
“그래 봤자 집 아니에요?”
“그렇긴 합니다.”
도화는 도명이 그답지 않게 계속 실없는 농담을 하자 결국 같이 웃어 버렸다. 도화는 자신이 새벽공기에 어이없이 취해 버린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도명의 말대로 악마와 같이 드라이브를 하면서 허파에 바람 빠진 것처럼 웃고 있으니 말이다.
“만약 아주 만약에 말입니다.”
“만약이라는 말을 너무 많이 붙이면 진실이 되어 버리는 거 압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사랑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사랑할 겁니까? 어디까지나 도명 씨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 말입니다.”
“난 사디스트지. 사이코패스가 아니에요. 내가 망쳐 버린 걸 보면서 제가 받을 상처는 생각 안 합니까? 왜 내가 감당해야 할 건 계속 고려 안 하는지 모르겠네요. 마치 상대만 모든 걸 일방적으로 감당할 것처럼 말이에요.”
“도명 씨도 상처받습니까?”
도명은 도화의 질문에 황당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말했다.
“저를 칼로 한번 찔러 보세요. 피가 나나 안 나나.”
“농담이라도 그런 무서운 소리 하지 마세요.”
“피가 날 건 알아서 다행입니다.”
도명의 차가 집 앞에 도착했다. 도명은 바로 집에 들어가지 않고 집 앞 벤치에 걸터앉았다.
“안 들어가세요?”
도화가 계단에 올라가다 말고 도명을 향해 물었다. 도명은 도화에게 어서 올라가는 듯이 손짓만 했다.
“새벽 공기가 너무 좋아서 잠깐 맡다가 갑니다. 사색 방해 말고 빨리 올라가기나 해요.”
도명의 말에 도화가 꾸벅 인사를 한 후 계단을 올라갔다. 도명은 눈을 감고 도화가 문 안으로 사라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 후에도 도명은 여전히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우리 백구가 완전히 가는구나. 마지막으로 백구 엉덩이라도 자연스럽게 한 번 툭 때려 보기라도 할걸.’
***
다음 날 아침, 6시 반경 도명이 가게 벤치 앞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평소보다 일찍 출근 준비를 마친 도화가 도명의 가게 앞에 우뚝 섰다. 어제 평소와는 다르게 늦게까지 놀아서 피곤할 법도 한데 출근 시간 지키는 데는 정말 칼 같았다.
“도화 씨 잘 잤어요?”
“아니요.”
도화가 도명의 옆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는 다리를 꼬고 앉은 도명의 허벅다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쳤다. 도명은 이게 대체 뭐 하자는 건가 싶었다.
“좀 여기 누우면 안 돼요?”
“집 놔두고 여기에 왜요? 집에서 누워 있으려고 월세 내는 거 아닙니까?”
“이웃사촌끼리 왜 그렇게 빡빡하게 굴어요? 세입자가 건방지게 집주인 무릎 베고 자면 안 돼요?”
‘우리 백구가 언제부터 이렇게 넉살이 좋아졌지? 밤새 다른 악마한테 영혼 먹힌 거 아니야?’
도명이 꼬고 있던 다리를 풀자 도화가 그의 허벅지 위로 머리를 뉘었다. 그리고는 정말 잠을 자려고 온 사람처럼 눈을 감고 말이 없었다. 도명 역시 굳이 도화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저 손에 든 커피를 천천히 마시고 있었다. 오늘은 바람이 아주 천천히 불고 있었다. 아니면 바람은 안 그런데 기분 탓인가?
“도명 씨.”
“말해요.”
“…….”
“사람이 불렀으면 말을 해야죠.”
“어때요? 아주 조금이라도 똥줄 탔어요?”
“지금 복수한 거예요?”
“네.”
도화의 말에 도명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도명 씨, 저 소개팅 해 주세요. 정말 괜찮은 사람들로. 제가 사랑해도 겁먹지 않을 그런 사람들 말이에요. 그래서 제가 생각해야 할 건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나, 안 사랑하나’만 생각할 수 있게요.”
도화의 말에 도명은 그의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다가 짧게 대답했다.
“그래요.”
“5분 후에 깨워 주세요. 출근해야 하니까.”
“5분이라, 짧네요.”
도명은 자신의 무릎 위에 도화를 눕힌 채로 시계를 맞추고 눈을 감았다. 이 순간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초조하게 세고 싶지 않았다. 어느 순간 알람 소리가 들리면 그냥 끝인 거다. 손끝에 아스라이 도화의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도화는 도명이 참으로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적당한 거리를 두면 그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사람이었고 거리를 좁히는 순간 악마가 된다.
그는 관상용 봄이었다. 더 이상 나긋한 봄을 자극하면 안 된다. 아무리 좋은 냄새가 나도 참아야 하는 것이다.
***
그 후부터 3일이 지났다. 퇴근 시간 때에 버스 좌석에 앉아서 가리라고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앉아서 가고 있었다. 도화가 자리에 앉자마자 문자가 왔다. 도명에게서 온 문자였다.
[도화 씨, 토요일 저녁 시간 괜찮아요?]
[네.]
[소개팅 잡아놨습니다. 서로 너무 부담스럽지 않게 도화 씨 포함 총 네 명이서 하는 소개팅입니다. 저희 가게에서 자연스럽게 저녁 식사하는 형식으로 할 겁니다. 괜찮습니까?]
[네.]
도화는 도명에게 간단하게 문자를 보내고 버스 밖을 보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동안 이상한 꿈을 꾼 것 같았다. 매력적인 악마에게 근사한 저녁 식사에 초대받고 놀다가 눈을 떠 보니 익숙한 천장만 보이는 느낌이었다.
악마는 사라지고 없다. 그게 참 다행이면서도 익숙한 그 천장이 야속했다.
그날 저녁 도화는 도명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사실 도화는 여전히 그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해하고 또 이해해도 언제나 이해할 수 없는 지점을 만났다.
<2권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