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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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이라는 구덩이

도명의 반지하 집에도 햇볕은 들어오고 있었다. 

집 주변을 감싼 지대를 1.5m 정도 파고 커다란 천창을 침대를 놓은 곳에 달아 놨다.

이렇게 하니 반지하치곤 햇볕이 잘 들어왔는데 사생활이 옆 건물에 노출되는 게 신경 쓰였다. 사람들이 자주 내려다보거나 하지는 않지만 신경 쓰였다.

그래서 지대를 판 곳에 키 큰 나무들이 있는 정원을 하나 조성해 놨다. 

이렇게 하니 조금 과장을 보태서 말하면 녹음이 우거진 숲속에서 잠이 깨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7개월 동안만 지낼 곳이라 하지만 햇볕 안 들어오는 집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가게 인테리어도 그렇고 지하 공간 구조까지 일부 바꾸고 나니 돈이 꽤 들었지만 집을 사려고 모아 놓은 돈으로 메웠다. 갑작스럽게 품 안으로 들어온 유산으로 자기 명의의 집이 생겼으니 이래저래 욕심낼 수 있었다. 

할머니가 깔끔하게 상속세까지 계산해서 남기신 걸 보면 대단하신 양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계는 아침 7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도명의 침실에는 발가벗은 혁준이 침대에 묶여 있었다. 도명은 주머니칼로 남자의 팔을 묶은 매듭을 툭툭 끊었다. 혁준을 결박했던 매듭이 끊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손은 여전히 침대 기둥에 매여 있는 모양새였다.

도명이 세탁실에 가서 어제 바닥을 기느라 엉망이 된 그의 옷을 꺼내왔다. 도명은 옷에 표시되어 있는 세탁법으로 옷을 빨았다. 그래도 불안해서 옷이 상했는지 안 상했는지 꼼꼼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도명 역시 평소에 정장을 자주 입는 편이라 가지고 있는 세탁기도 다리미도 준전문가급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혁준이 입고 온 옷은 함부로 세탁하기에 겁이 나는 옷이었다.

“하여간 다루기 까다로운 것만 입고 다니네.”

옷을 다루는 것에 익숙한 도명도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도명은 옷을 들어 올리며 이대로 쓰레기통에 버릴까 하는 생각에 쓰레기통에 눈이 돌아갔다. 그가 이 비싸 보이는 옷을 버린다 해도 혁준은 전혀 신경도 안 쓸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도명은 귀찮은 걸 선택했다. 단순히 이 옷이 위아래 다해서 700만 원은 충분히 넘어갈 거라는 이유에서는 아니었다. 플레이 후에는 섭을 완벽히 보살펴야만 했다. 그래야 다음에도 섭이 완벽히 몸과 영혼을 맡긴다.

도명은 고민을 하다가 옷감을 검색하고 다리미 적정 온도를 맞춘 후 옷을 다리기 시작했다. 잘 다려진 옷을 잘 접어 잠든 혁준의 머리맡에 올려놓았다. 도명이 남자가 누워 있는 침대 머리맡에 앉았다.

멍투성이인 그의 몸을 이리저리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다가 서랍에서 약 상자를 가지고 와 치료를 했다. 밤새 혹사당한 혁준은 도명의 손길에 몸을 바르르 떨었지만 일어날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도명은 혁준이 늦게 일어날 것 같아 간단하게 허기를 때울 생각이었다. 바나나와 견과류, 꿀을 조금 넣고 믹서에 갈기 시작했다. 조용하던 집 안에 금속음이 들리자 침상에 누워 있는 혁준의 상체가 바르르 떨렸다.

도명은 한쪽 눈썹을 위로 올리며 일부러 이미 다 갈아진 주스를 더욱 요란하게 갈았다. 그리고는 남자의 조용한 떨림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혁준은 요란한 믹서 소리에도 계속 일어나질 못했다. 

도명은 임시로 허기를 달래 줄 주스를 마시고 남은 주스는 컵에 잘 담아 넣었다. 혁준이 깨면 먹일 생각인 것이다. 도명이 노트북을 꺼내 한참 일을 하고 있을 때 혁준이 일어났다.

“일어났어요?”

다정한 도명의 물음에 막 잠에서 깬 혁준이 멍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플레이가 끝났다고 했나요?”

도명의 말에 혁준은 온몸을 굳혔다. 그리고는 자신이 감히 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명이 혁준에게 다가왔다.

“혁준 씨.”

도명이 혁준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 혁준은 무릎을 꿇고 살짝 부어오른 뺨을 본능적으로 감싸다가 급히 손을 내렸다. 그리고는 깊이 반성한다는 듯이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막 자다 깨서 긴장감을 잊은 게 큰 실수였다.

“네.”

“사람이 아무리 시간이 지났다 하더라도 기본을 잊으면 안 되는 겁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잘못했습니다.”

“혁준 씨. 실망시키지 말아요. 오래된 관계라고 영원하다고 착각하면 안 되죠.”

도명이 그리 말하고는 혁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기며 싸늘하게 속삭였다. 그리고는 싸늘했던 말투를 능숙하게 거두고는 경쾌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일어났으면 식사부터 합시다.”

도명의 손길이 부어오른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리고는 굳은 승모근을 엄지로 쿡쿡 누르다가 말했다.

“플레이 끝났습니다. 식사는 편히 해야 합니다. 체합니다.”

도명의 말이 끝나자 혁준은 자세를 풀었다. 그리고는 아까의 긴장 상태는 온데간데없이 잊고 도명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옆에 자신이 입고 온 옷이 완벽하게 세탁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아, 세탁한 겁니까? 번거롭지 않았어요?”

“당연히 번거로웠습니다. 세탁소 갈 뻔했다니까요. 그러면서 다음에는 그런 플레이는 빼자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아, 전 좋은데요? 저 그런 지저분한 바닥 처음 굴러 봤어요. 거기다가 질척거리는 차가운 눈으로 덮인 바닥이라니. 옷은 번거로우면 그냥 버려도 상관없는데.”

혁준이 셔츠와 바지를 갈아입기 시작했다. 어제의 멀끔한 청년이 된 그는 슬리퍼를 신고 도명의 뒤를 졸래졸래 쫓았다.

“진짜? 앞으로 안 할 거예요?”

“또 하고 싶어요?”

“네.”

“그럼 옷 좀 세탁기로 막 돌릴 수 있는 것 좀 입고 옵시다.”

“버리라는 말은 정말 빈말 아닌데요.”

“저는 돔으로서 당신을 완벽히 돌봐 주고 책임져야 합니다.”

“세탁기에 막 돌릴 수 있는 거란 게 대체 뭔데요?”

혁준의 말에 도명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말 순수하고 진지하게 묻는 얼굴에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하다가 포기해 버렸다. 그에게 할 말은 ‘그냥 제가 잘 하겠습니다.’라는 말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몸은 좀 어때요? 플레이가 과했나요? 어제 많이 버거워하던데.”

도명이 위층의 가게에 있는 조리대의 3분의 1밖에 안 되는 간이 조리대 앞에 섰다.

“그래 보였습니까?”

“네. 어리광이 지나쳤습니다. 안 통하는 거 뻔히 아는 사람이 그러니까 실망감이 크게 들더군요.”

도명의 말에 혁준은 살짝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그가 화가 난 것 같아 간담이 서늘해졌다.

“저는 언제나 한결같은 사람이 좋습니다. 차라리 세이프 워드를 쓰세요. 안 통할 어리광 부리지 말고요. 아시겠습니까?”

“네.”

진지한 눈빛으로 대답을 잘 하는 혁준의 얼굴을 보자 도명이 살짝 웃었다. 그러자 혁준은 언제 혼났냐는 듯이 도명의 어깨에 얼굴을 걸치며 말했다.

“옷에서 도명 씨 좋은 냄새가 납니다. 그리고 주방에도 맛있는 냄새가 나고요.”

“대단한 건 아니고 그냥 토스트를 할 겁니다.”

도명의 말에 혁준은 바 의자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는 도명의 뒷모습을 구경했다. 어쩌면 저렇게 홈웨어도 섹시할 수가 있나 싶었다.

너무 타이트하지 않게 도명의 몸 선에 맞춰 재봉된 셔츠와 면바지가 그의 탄탄하면서 잘 들어간 허리와 봉긋한 엉덩이를 천박하지 않게 드러내고 있었다. 노골적이지 않아 관음하기 좋은 모습이었다.

“지금 도명 씨가 걸친 게 가게에서 맞춘 옷이 아니라니.”

혁준이 도명의 뒤태를 노골적으로 훑어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왜요. 제가 직접 고치고 재봉한다니 주인에 대한 환상이 깨집니까?”

도명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하며 토스트 플레이팅을 마쳤다. 간단한 토스트일 뿐인데 색감도 그렇고 각도 딱 잡힌 게 고급 음식 같았다. 지금 혁준이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있는 게 자연스러워 보일 정도니 말 다 했다. 도명은 토스트와 함께 아침에 미리 갈아 놓은 바나나 주스까지 내왔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재주가 많을 수 있어요? 다들 명품 옷으로 알고 있지 않아요? 진짜 명품 옷 입고 있는 저도 문득문득 속아요. 홈메이드라니.”

“취향은 까다롭고 돈은 충분치 않으니 부지런히 배우고 익혀서 최대한 누리고 사는 겁니다. 우리 도련님이 그걸 아시려나.”

혁준은 토스트를 입에 넣으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도명은 혁준이 맛있어한다는 걸 확인하고 빙그레 웃었다.

“도명 씨 섭 중에 고백한 사람 참 많았죠. 플레이는 가차 없지만 플레이가 끝나고 나면 이렇게 잘생긴 남자가 다정하게 보살펴 주고 맛있는 걸 입안에 넣어 주는데 누가 안 넘어가겠어요?”

혁준의 말에 도명은 난감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혁준 씨는 넘어가지 말아 주세요. 새 섭 구하기도 이제 귀찮습니다. 길들이면 정리해야만 하는 모든 상황들이요. 솔직히 조금 지칩니다. 뭔가를 길들인다는 건 많은 시간과 관심이 필요한데 말입니다. 정성을 다했는데 떠나보내는 건 직업만으로도 충분하잖아요.”

도명은 화원의 식물들을 생각하며 말했다. 도명의 화원에 있는 식물들은 대부분 비행기 타고 건너온 낯선 식물들이 많았다.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미지의 식물들을 화원에 들이는 것은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허가를 위한 서류 준비 등 한국으로 데려오는 것 자체도 힘들었지만 데려오고 나서도 정성이 꽤 들어갔다. 낯선 환경에 온 그들이 시들지 않도록 길들이는 건 많은 노력과 공부가 필요했다. 

정성을 다해도 원하는 결과가 안 나올 때도 있었다. 그래서 도명의 화원에 있는 식물들은 꽤 고가였다.

애초에 동네 장사가 목적도 아니었다. 이곳은 알아서 찾아오는 클라이언트들을 만나기 위한 곳이었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지만 도명의 클라이언트들은 다들 꽤 돈이 많았다. 혁준도 도명의 클라이언트 중 하나였다.

“걱정 말아요. 그 사람들 마음이 살짝 이해 간다는 거지. 제가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도명 씨 같은 사람이랑 연애하면 망가지기에 십상이죠. 섭에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사람이지만. 다들 그걸 왜 모르나 모르겠어요.”

혁준이 그리 말하는 사이 문자가 하나 왔다.

“아, 소휘 누님인데 같이 바다나 보러 가자고 하는데 어때요? 오래간만에 에세머들끼리 바람 좀 쐬고 오는 건? 이런저런 정보도 공유하고요.”

“오늘 갑자기 말입니까?”

도명의 표정이 난감해 보였다. 그런 도명의 표정에 혁준이 아쉬움이 잔뜩 남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 이틀 전에 출판사 마감 아니었어요? 오늘 화원 예약 손님 있어요?”

“그런 건 아닙니다. 별거 아니라면 별거 아닌데 택배 올 게 있습니다.”

“택배요?”

“네. 승마 채찍들을 샀습니다. 금속으로 된 재갈도 샀고요. 오늘 배송될 텐데요.”

도명이 택배 회사에서 온 문자를 다시 확인하며 말했다.

“아, 그거 혹시?”

“네 플레이 때 쓸 겁니다. 이게 실제 말한테 쓰던 거라서 저도 연구 좀 해 보고요.”

도명의 말에 혁준이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몸에 무리가 가니 연속으로 플레이는 안 하는 거 알죠?”

“……압니다.”

혁준이 살짝 실망감이 어린 표정을 짓다가 생각에 잠겼다. 혁준의 시선은 여전히 미련이 남은 듯 바다로 놀러 가자는 문자에 고여 있었다.

“택배는 가게 앞 특정 장소에 잘 놓아 달라 하고 바다 구경하고 와서 다 같이 구경하는 건 어떻습니까? 모두 관심 많을 텐데 말입니다. 다들 일정들이 안 맞아서 이렇게 딱 시간 나기도 힘든데요.”

“……택배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요?”

“요즘 세상에 누가 남의 택배에 함부로 손을 댑니까? 못 배워먹은 것도 아니고.”

“네. 그러죠. 그렇지 않아도 화원 관리에, 이틀 전 잡지사 마감에 휴식이 필요하던 차였습니다.”

도명의 말에 혁준은 기분이 더 좋아졌다.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남은 주스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예쁘게 도명이 해 준 음식을 다 먹고는 그를 향해 지긋한 눈빛을 보냈다. 그리고는 발끝으로 도명의 허벅다리를 훑으며 말했다.

“저, 도명 씨의 섭으로서 특별할 취급 받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요.”

“뭡니까? 할 수 있는 거면 해드리겠습니다.”

“당연히 할 수 있죠. 잡지사 대표인데. 전화 한 통으로 가능할 것 같은데요. 이번에 출간된 잡지 첫 출력물 저한테 챙겨 주세요. 모으고 있거든요. BISCUIT FOREST. 그런데 그냥 모으기엔 시시해서요.”

“저희 잡지 모으는 게 정말 혁준 씨한테 가치 있는 일입니까?”

“창간호부터 못 모은 게 한이 될 정도로요? 출력 퀄리티나 특이한 종이 질. 특별한 제본 방식, 안에 들어가는 예술 작품 같은 사진. 삽화. 편집 디자인. 훌륭한 기획. 광고 페이지가 없는 점 등 때문에 모으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잡지 한 권에 3만 원, 잡지치곤 꽤나 고가죠. 솔직히 3만 원이 왜 고가인 건지 체감은 안 되지만 어쨌든 시장 기준으로요. 그나마도 확정된 수요 이상으로 안 뽑아서 어떤 건 구매자들끼리 웃돈 붙여서 거래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점이 오히려 이건 모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모양입니다. 굳이 원예에 관심이 없어도 모으는 사람 많습니다. ‘아름답고 매력적이다’라는 이유로 말이죠.”

혁준이 ‘아름답고 매력적이다.’라는 말을 하며 도명을 훑어보았다.

“아 참, 그 포토그래퍼 한서윤 씨 소개도 해 주고요. 저희 호텔 이번에 리뉴얼 한 거 홍보 사진 맡기고 싶습니다. 호텔 안에 도명 씨가 기획한 가든도 있어서 콘셉트 읽는 데 그렇게 헤맬 것 같지도 않고요. 그냥 평소처럼 하면 될 것 같은데요. 여러모로 일을 맡기고 싶습니다.”

“네, 서윤이 전화번호 넘겨드리죠. 처음 출간된 것 역시 혁준 씨 앞으로 챙겨 드리겠습니다. 정성스럽게 포장해서 말이죠. 갑자기 이런 대화 하니 새삼 당신이 제 클라이언트라는 것이 확 와 닿네요.”

도명의 말에 혁준이 얄밉게 웃었다. 도명은 혁준의 볼과 귓불을 부드럽게 주물럭거렸다. 혁준이 도명의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며 속삭였다.

“그런데 한서윤 씨가 제일 괜찮던데 왜 다른 포토그래퍼도 씁니까?”

혁준의 말에 도명은 쓴웃음을 지었다.

“저도 전속으로 쓰고 싶은데 그 친구가 소처럼 매이는 게 싫다고 해서요. 저도 스케줄 잡는데 아주 난감합니다.”

“노멀이겠죠?”

“아니요. 게이입니다.”

“그럼 굴복시키세요. 원하면 가져야죠.”

“네? 아. 서윤이 에세머는 아니고 바닐라입니다.”

“자 봤습니까?”

“아니요.”

도명이 생각만 해도 이상하다는 듯 알딸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도명의 표정에도 혁준이 막무가내로 말했다.

“잠자리 성향은 까 봐야 아는 거 아닙니까? 본인이 가진 클라이언트 중 가장 돈 많고 영향력 있는 클라이언트를 발가벗기고 굴복시킨 사람이 난색을 표하니까 이상하네요.”

혁준이 자화자찬을 했지만 그의 말이 딱히 틀린 것도 아니었다. 거기다가 말하는 사람도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말해서 그 누구도 그의 말에 부정은 못 할 것이다.

“그놈은 절대로 에세머가 될 성향이 아니에요. 저와 영원히 침대에서 만날 일 없는 사람입니다.”

도명이 혁준을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

도화는 웬일로 도명의 가게가 닫혀 있자 의아했다. 동네 장사가 목적이 아니라서 언제 닫혀 있어도 이상할 일이 없는 가게였지만 최근 가게가 오픈하고 나서 이렇게 대낮부터 닫혀 있는 적은 이번이 처음이라서 당황스러웠다.

거기다가 사람들이 가장 여유 넘치는 토요일 장사를 포기하다니. 하필이면 도명이 밤중에 남자를 지하실로 끌고 간 날 다음날이라서 이 변화가 소름 돋았다.

도화는 침을 꿀꺽 삼키며 화원 주위를 돌았다. 안에는 인기척 하나 없었다. 도화는 그렇게 화원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테라스에 있는 벤치 밑에 상자가 하나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도화 앞으로 온 소포를 택배 기사분들이 2층까지 올라가기 싫어서 슈퍼 앞에 맡기고 간 적이 많았다. 그래서 슈퍼가 사라진 후에도 습관적으로 여기에 놨나 싶어 도명의 택배를 이리저리 확인해 봤다.

마침 도화도 물건을 시킨 것이 있어서 그것이 더욱 자기 택배 같았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운송장을 확인해 보니 도명의 것이었다.

“아 맞다, 그놈 이름이 유도명이었지.”

매일 주인집 남자라고 불러서 그를 처음 만난 날 들은 그 이름이 이제야 상기되었다. 도화는 호기심에 차마 택배를 뜯어 보지는 못하고 흔들어 보았다.

택배를 흔들자 안에서는 잘그락거리는 금속 소리가 울렸다. 도화는 머리카락이 곤두설 정도로 일순간 소름이 쫙 돌았다. 소름이 너무 돋은 나머지 손에 든 택배까지 떨어뜨려 버렸다.

“금속 소리……?”

도화는 마른 침을 삼키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이건 위험한 물건이야!’

도화는 이 택배의 정체를 당장 알지 못하면 오늘도 불면증에 시달릴 거라는 생각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상상하고 있었다.

‘뜯어서 살짝 볼까……?’

도화는 한참을 택배를 골똘히 쳐다보았다. 정말 위험한 물건을 들고 있는 사람처럼 손도 떨리고 심장도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다른 사람의 일에 참견한 적이 없었다. 애초에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손가락 하나 얹은 적도 없으니 실례되는 일도 한 적 없었다.

그런 그에게 자기 것이 아닌 것이 분명한 택배를 훔쳐보는 일은 아주 심장 떨리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달그락거리는 쇳소리가 들리는 이 물건을 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오늘 밤 또 온갖 상상의 나래들을 펼치며 괴로워할 게 뻔했다.

도화는 택배 안을 훔쳐보기로 결심을 하고 마른 침을 삼킨 후 겁을 잔뜩 먹은 커다란 눈으로 주변을 이리저리 훑어보기 시작했다. 다행히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집 주변 골목에 CCTV가 하나 있지만 도명이 굳이 취미 삼아 매일 CCTV를 구경할 리는 없었다.

도둑이 들든 뭐든 이 골목에서 불미스러운 사고가 일어나야 확인해 보는 게 CCTV가 아닌가. 훔쳐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택배 안만 확인하자는 건데 무슨 큰일인 건가 싶었다. 도화는 눈을 질끈 감고 심호흡 후 자기 자신에게 세뇌를 시키기 시작했다.

‘이 택배를 내 것인 줄 알고 들고 올라가는 거다. 나는 정말 그런 줄 알고 있다. 나는 너무 털털해서 운송장도 확인 안 하고 그냥 습관적으로 내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도화는 자연스럽게 택배를 들고 자신의 집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최대한 뻔뻔한 얼굴을 했다. 그 자리에서 뜯어 보는 방법도 있지만 언제 어디서 도명이 나타날지 몰랐다. 그리고 택배를 티 안 나게 뜯어 보려면 고도의 집중력과 도구들이 필요했다.

도화는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현관문을 잠그고 거의 안 쓰는 식탁 위에 택배를 올려놨다. 그리고는 커터 칼을 가져와서 밀봉한 테이프 모서리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그리고 최대한 테이프의 접착 면이 안 상하게 살살 떼기 시작했다.

다행히 안에는 고급스러운 물건이 있는지 상자 자체가 일부만 종이 상자가 아니라 코팅된 것이라 이 정밀한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고작 테이프 하나 제거하는데 외과 수술 같은 긴장감과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드디어 도화는 상자 안을 살짝 엿볼 수 있는 만큼 테이프를 반쯤 뗐다. 그리고 상자가 최대한 안 구겨지게 모서리를 들어 올렸다.

안에는 살짝 낡아 있는 각종 채찍들과 정체를 알 수 없는 금속 링이 들어 있었다. 금속 링은 한 고리를 매개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게 승마용품인지 모르는 도화는 상자 안에 가득한 채찍들에 소름이 오도독 돋았다.

이 각종 채찍이라니! 누가 살면서 채찍을 이렇게 많이 구매하겠는가. 지하실에 길들일 짐승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니, 채찍으로 사람이 아닌 짐승을 때려도 이상했다. 

연약한 동물을 학대하는 것을 시작으로 연쇄살인을 시작하는 일도 많으니까. 도화의 도명에 대한 의심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대체 이 인간 뭐 하는 새끼야?”

도화는 충격에 빠진 채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가 몰래 훔쳐본 택배 상자에서 수상한 물건이 나오자 남의 택배를 건드렸다는 죄책감도 들지 않았다. 어떤 비리를 캐기 위해 그 사람의 책상을 뒤지는 사람의 심리처럼 나쁜 건 수상하기 짝이 없는 그 사람이었다.

도화는 그러다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님을 깨달았다. 어서 상자를 다시 잘 밀봉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제자리에 갖다 놔야 했다. 도화는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 섬세한 손길로 상자를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밀봉하고 급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원래 택배가 있었던 도명의 가게 앞 벤치 아래에 상자를 놓고 있는데 그의 등 뒤로 자동차가 골목으로 진입하는 소리가 들렸다.

도화는 허리를 굽힌 채로 그대로 굳어졌다. 도화가 살짝 눈동자를 굴렸을 때 그의 뇌리에 깊게 박혔던 은색 자동차 하나가 도명의 가게 앞에 섰다. 어젯밤 도명의 지하실로 끌려갔던 남자가 타고 온, 보닛 위에 우아하게 내려앉은 은색 새가 있는 그 차였다.

도화는 이 차가 그 차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도화가 이 차를 목격했을 때는 날도 저문 뒤였고 진눈깨비도 내리고 있었지만 슈퍼카는 실루엣만으로도 그 존재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법이었다.

거기다가 여기가 강남 한복판도 아니고 이런 작은 동네에서 슈퍼카를 두 번이나 연달아 본다고? 저 차는 분명 어젯밤 도명의 희생자가 끌고 온 차였다.

도화는 이 짧은 순간 아주 많은 고민을 했다. 저 차 안에 탄 사람이 누구든 간에 내리기 전에 빨리 이 자리를 뜰 것인가. 자연스럽게 이대로 서 있을까를 말이다.

도화가 돌처럼 굳어진 채 고민하고 있는 사이 차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도화는 이 순간 어떠한 의심도 남기지 않고 도망가기에는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 역시 슈퍼카야! 안 그래 요셉아? 같은 해변도로도 뷰가 달라 보이잖아. 뷰가!”

도화의 등 뒤로 목소리에 힘이 넘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누님. 우리 열심히 돈 벌어서!”

파이팅 넘치는 요셉이라는 남자의 말을 소휘가 끊었다. 소휘는 심지 깊은 표정으로 고개를 양옆으로 저으며 요셉의 어깨를 세게 부여잡았다.

“아가, 우리는 아무리 개처럼 일해도 이번 생은 글렀어. 현실을 직시해야지. 저건 저 금수저 새끼의 인생이지 우리의 것은 아니야. 어리석고 소모적인 상상은 하지 말자. 우리의 삶도 충분히 원더풀해.”

소휘의 말에 요셉은 굳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대화에 슈퍼카의 주인인 혁준은 소휘가 자신을 가리킨 ‘새끼……’라는 말을 곱씹고 있었다.

“떠들지만 말고 각자 짐 좀 듭시다.”

도명이 양손 가득 장 본 것들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혁준은 도명의 말이 끝나자마자 짐 꾸러미 하나를 들었고 요셉이 달려와서 양손 가득 짐을 무리하게 들며 말했다.

“누님 것도 제가 들겠습니다.”

요셉이 머슴처럼 짐을 들고 있을 때 소휘는 허리에 손을 올려놓고 새로 연 도명의 가게 외벽을 훑어보며 외쳤다.

“크! 가게 예쁘네! 우리 도명이만큼 아주 잘 빠졌어. 그렇게 밤낮으로 홈메이드를 하며 개미처럼 살더니 우리 도명이 자기 가게와 자가 집이라니! 비록 이놈도 상속남이지만 이놈은 참 열심히 살았으니까 괜찮아.”

소휘가 도명의 가게를 훑어보다가 본인이 감동에 찬 얼굴로 도명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러다가 도명의 잘 정돈된 머리를 헝클이려고 손을 들었는데 도명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뒤로 살짝 물러나며 말했다.

“머리 건드리지 마세요. 몇 번을 말합니까.”

“까칠하긴! 요셉아, 얘네 둘 너무 깍쟁이 같지 않니? 씨발. 귀여워.”

“누님이 너무 여러모로 무심한 겁니다.”

도명이 경계 어린 표정으로 여전히 거리를 두며 말했다. 이 두 돔의 신경전이 벌어질 때마다 난감한 건 혁준과 요셉이었다.

이렇게 도명이 같이 온 일행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 도화는 슬며시 발을 떼기 시작했다. 아무도 자신을 신경 안 쓰는 것 같았다. 그때 도명이 도화의 뒤통수를 향해 말했다.

“도화 씨 웬일이세요?”

도명이 햇빛 아래에서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의 표정은 너무나 무고해 보였고 온화해 보였다. 도저히 채찍을 모을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아…… 음. 택배가 온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 예정대로 택배가 온 모양이네요.”

마음속 한구석에 내심 걱정하고 있던 택배 소식에 도명이 반가워했고 도명의 뒤에 서 있던 세 명도 방긋 웃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그건가 봐!’ 하며 각기 다른 톤으로 속삭이기 시작했다.

혁준은 낮게 웃으며 ‘그건가 보네.’라고 했고 소휘는 ‘그거네! 그거야!!’라고 허리에 두 손을 올리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요셉은 ‘앗! 그거네.’ 하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도명이 미소 지으며 도화에게 다가왔고 그는 속으로 벌벌 떨었다. 도화는 일부러 큰 눈을 크게 부릅뜨고 눈썹을 위로 올리며 무서운 사람인 척했다. 그런 도화의 표정을 보며 도명은 ‘얜 왜 이렇게 나만 보면 짖어. 점점 심해지네.’라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웃는 얼굴로 다가왔다.

“제 택배 챙겨 주시고 계셨던 건가요?”

“아니요.”

칼처럼 떨어지는 도화의 대답에 도명은 한쪽 눈썹을 올렸다.

“그럼요?”

“네?”

“제 택배 챙겨 주고 있던 거 아니면 뭐 하고 계셨던 건데요?”

“아, 이거 제 거예요!”

도화는 원래 ‘원래 제 택배가 그 전부터 여기로 와서 제 것인지 확인 중이었어요.’라고 말하려고 했던 거였는데 너무 긴장한 나머지 말을 너무 줄여 버린 것이다.

둘 사이에 이상한 침묵이 흘렸다. 도화는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서야 자신이 말을 이상하게 내뱉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화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도화가 횡설수설하는 동안 도명은 자신의 팔꿈치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들기며 인내심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도명의 손가락은 정확히 초를 세는 분침처럼 딱딱거리며 움직였다.

“저기, 도화 씨.”

“네, 네.”

“심호흡하고 침착하게 이야기해 보시겠어요?”

“네? 아. 네.”

어느새 도화는 담임선생님 앞 학생처럼 가지런히 서서 천천히 심호흡을 한 후 입술을 열었다. 그는 여전히 긴장감이 어린 표정으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원래 제 택배가 그 전부터 여기로 와서 제 것인지 확인 중이었어요.”

“네 잘했습니다.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도명이 도화가 이번에는 말을 제대로 하자 칭찬을 덧붙였다. 그리고는 자기 택배를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도화가 얌전히 도명의 손 위에 택배를 올려놓았다. 도명은 드디어 택배가 자신의 손안에 들어오자 심신이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도화 씨.”

“네.”

“좋은 주말 보내세요.”

“네, 네. 도명 씨도 좋은 주말…… 보내시고요.”

“네. 이렇게 살갑게 인사하니 참 좋네요.”

그렇게 도화는 어기적거리며 서 있는 동안 도명의 뒤로 나머지 세 명이 몰려들더니 도명의 손 위에 올려 있던 택배를 가져가기 시작했다. 도명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여러분 주세요. 좋은 말 할 때 주세요.”

도명이 얼굴에 웃음기를 지운 채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도명의 뒤로 혁준이 뒤따라 들어가다 도화를 위아래로 내려다보았다. 고급 정장을 입은 혁준의 표정은 무표정이었지만 도화로 하여금 어떤 위압감이 들게 했다.

그래서 도화는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가 어제와 같은 옷을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제 도명의 지하실로 끌려 들어간 사람이라고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가 평소 풍기고 다니는 분위기도 분위기지만 오히려 어제와 같은 정장을 입고 있다는 사실이 도화를 더 헷갈리게 했다. 분명 엉망이어야 할 옷이 너무나도 말끔했기 때문이었다.

도명은 다사다난했던 택배 돌려받기를 마치고 가게 안 바에 앉아서 택배를 이리저리 보고 있었다.

“저 남자 누구예요?”

“누구요?”

도명은 택배의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생각에 잠겨 있느라 바로 혁준의 질문의 맥을 못 잡았다.

“아까 도명 씨랑 대화했던 남자요.”

“아, 위층 세입자요.”

“아. 세입자. 전세?”

“월세요.”

“아. 월세군요. 그래서.”

도명의 말에 혁준은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여전히 도명은 택배 상자만 골똘히 쳐다보고 있었다. 도명은 택배 상자의 테이프 모서리가 들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처음엔 그러려니 하다가 테이프를 뜯는데 접착 면의 끈적임이 묘했다.

마치 누가 뜯었다가 다시 그대로 붙인 것처럼 말이다. 이것 역시 접착력이 약한 테이프라고 생각하며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려다가 나머지 반을 뜯는데 확실히 뜯는 느낌이 달랐다.

도명이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손바닥으로 탁자를 짚으며 손가락을 탁탁 튕겼다. 도화가 평소에도 이상한 점이 많아서 오늘도 역시 이상한 사람이구나 싶었는데 아까의 행동이 급격히 수상하게 여겨졌다.

‘원래 제 택배가 그 전부터 여기로 와서 제 것인지 확인 중이었어요.’

그래,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섬세하게 뜯은 것을 복구한 이 흔적은 뭐냔 말이다. 실수로 자기 것인 줄 알고 들고 갔다 뜯었다 치자. 그런데 실수로 뜯었다면 테이프가 이 정도로 멀쩡할 리가 없었다.

“지금, 남의 택배 일부러 뜯어 본 거야?”

도명이 불쾌감에 얼룩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도명은 자신의 성벽을 남들에게 굳이 말하고 다니는 편은 아니었다. SM에 대해서 모르는 바닐라들한테 일일이 설명하고 다닐 필요는 없었다.

관계가 무르익으면 상대가 바닐라라고 하더라도 굳이 먼저 말하지는 않아도 상대방이 그의 성벽에 대해서 어떤 뉘앙스를 받은 상태면 비밀로 하지는 않았다.

성관계가 아니더라도 그의 지배적인 중심 성향은 사람을 대하는 습관들 곳곳에 묻어 나왔다. 그의 몸에 밴 배려도 온화한 인상도 그의 성향을 완전히 숨기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를 오래 겪은 사람이라면 그의 남다른 성향에 대한 냄새를 은연중에 맡았다.

본인들이 가진 세계가 전부 일반적이라고 믿는 남들은 이해하기 힘든 이 성벽에 대해서 비밀로 하다가 열심히 한 장 한 장 쌓아 올린 관계에서 괜한 의심을 받기는 싫었다.

공들인 관계라 해도 끝내 이해받지 못하고 틀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면 앞으로도 굳이 공들여 쌓아 올릴 관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뿐이었다. 그가 비록 소수 중의 소수라고 할지라도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많았다. 서로 아쉬울 일은 없었다.

도명은 자신의 택배를 공들여 엿본 도화의 처분에 대해서 생각했다. 앞으로 일주일이 지나면 그와의 인간관계는 5개월이 남았다. 집주인과 세입자와의 관계란 것이 이렇게도 요상했다. 숫자로 인간관계의 농도를 정확히 잴 수 있다니.

그의 인생에서 도화는 과연 가치 있는 인간일까? 지금까지는 확실히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그저 무사히 남은 일수를 채우고 적당히 웃는 얼굴로 헤어지면 그만이었다.

헤어지는 순간 도화가 애써 웃고 있어도 (어쩌면 시종일관으로 적대적인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표정이 안 좋을 확률 또한 높지만) 마음속 불만은 그대로 잔여물처럼 남아 있을 것이다.

도명은 굳이 그런 도화의 마음을 풀어 줄 이유도 열정도 없었다. 도명은 유난히 겁이 많은 커다란 그의 눈을 생각했다. 이 이상 자신에게 무례한 일은 못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5개월 치 인간에게 감정 소모를 하지 말자.’

도명은 낮게 한숨을 쉬며 어쩌다 보니 모두가 기다린 택배를 다 뜯고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택배를 내려놓는 도명의 표정이 좋지 않자 혁준이 물었다.

“왜요? 물건이 기대 이하입니까? 꽤 퀄리티는 좋은 것 같은데요?”

혁준의 테이블 위의 물건들을 이리저리 훑어보며 말했다.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런 건 아닌데 표정이 왜 그래요?”

혁준의 질문에 도명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더 이상 감정 소모를 하지 말자고 결심한 그의 얼굴엔 여전히 불쾌감이 잔뜩 묻어 나와 있었다.

“윗집 남자가 이거 뜯어 본 모양인데요?”

도명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모두들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모두들 도명이 겪은 무례한 일에 놀란 듯했다.

“대체 왜요?”

요셉이 놀라서 동그랗게 변한 눈으로 도명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글쎄요. 대체 왜일까요? 미움 받고 있는 건 알고 있었는데요.”

“아니, 사람 때리는 거 좋아하는 것 빼고는 예의 바르고 다정한 우리 도명이를 누가 미워해?”

“그렇죠. 도명 씨 미움받기 힘든 타입이죠.”

혁준은 그의 클라이언트이기 때문에 도명의 좋은 평판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도명은 지배적인 성향에 비해서 인간관계에 있어서 모든 걸 완만하게 처리 잘했다. 무례한 상대방이 머쓱해질 정도로 말이다.

“아마도 제가 이 집 상속받고 9년 5개월 동안 살던 집에서 이사하게 돼서요?”

도명은 처음 그에게 문을 열어 준 그 순간부터 경계심 잔뜩 어린 그의 얼굴을 상기했다.

“월세인데 꽤 오래 살았네. 얼굴 보니까 아직 우리처럼 30대는 아닌 것 같지?”

“20대 후반 정도 되지 않았을까요? 20대를 전부 이 집에서 지낸 거네. 섭섭할 만도 하네. 그렇다고 도명 씨한테 이런 실례를 저질러도 되는 건 아니지. 사정은 딱하지만. 아니 근데 이게 분풀이치곤 묘한데? 분풀이라면 택배가 망가진다거나 아니면 숨긴다든가. 왜 그런 소심한 복수들 있잖아.”

소휘의 말에 다들 할 말을 잃었다. 다들 도명을 동시에 쳐다보았다. 그리고 각기 다른 말투로 한 말의 내용은 이것이었다.

-도명 씨, 스토킹 당하고 있는 거 아냐?-

도명이 아니라고 손을 내저었지만 이들은 도명을 위아래로 관음하듯 훑어보았다. 도명이 이들에 의해 시선으로 희롱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명은 이들의 이런 노골적인 시선에도 불쾌하지 않았다.

도명은 시선을 끄는 것을 좋아했다. 더 많은 벌레들을 이용하기 위해 더욱 매력적인 꽃을 피우는 식물들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는 아름다워지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만드는 잡지가 그러하듯 뭐든 일단은 매력적이어야 내면의 이야기를 할 기회가 주어진다고 생각하는 주의였다. 그런 그의 가치관은 세상에서 꽤나 잘 통했다.

“그건 아닙니다.”

계속 이어지는 지인들의 시선에 도명이 재차 말했다. 하지만 그의 지인들은 의심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사람의 시선을 보면 알 수 있죠. 싫어하고 있어요. 분명히.”

도명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다뤄 본 사람이었다. 그는 그런 것에 유달리 유능했다. 그런 그가 그렇게 느끼고 있다면 틀릴 리가 없었다. 택배 사건은 다시 미궁에 빠졌다. 하지만 사람들은 마음속 한구석에 ‘잘 빠진 도명 씨가 스토킹 당하고 있다.’라는 가설을 놓지 않고 있었다.

“아니면 가난해서? 가난해서 도명 씨 택배 보고 탐이 난 거지. 혹시 돈 되는 물건일까 봐. 이상하게 도명 씨가 가지고 다니는 건 다 좋아 보이잖아?”

혁준의 말에 다들 그를 쳐다보았다.

“가난?”

“바지가 하나밖에 없어서 무릎 부분이 늘어날 정도로 입고 있던데요?”

“……”

혁준의 말에 다들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상한 분위기에 혁준의 표정이 멍청해졌다.

“쟤는 참 익숙해질 만하면 저렇게 한 방씩 날리네.”

역시 이럴 때 돌직구를 날린 사람은 소휘였다.

“왜요? 뭐가요?”

“홈웨어가 다 그렇지 뭐. 여긴 윗집 남자 집 앞이니까. 홈웨어 입고 돌아다니는 거라도 이상하진 않잖아.”

“아니, 옷이 많은데 바지 하나가 저렇게 엉망이 될 정도로 입고 다닌다고요?”

혁준은 그렇게 말하고는 도명에게 구원 요청하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도명은 그저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도명은 그게 이해가 가면 안 된다.

언제나 그의 완벽한 홈웨어를 봐왔으니까 말이다. 쓸데없는 구김 하나 없는 옷들이 옷장 안에 줄지어 걸려 있었다. 그런데 도명 역시 무릎 늘어난 바지가 이상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음, 그러니까 이건 익숙함의 문제가 더 크지.”

항상 모든 일을 막무가내로 밀고 나갈 것 같은 소휘는 은근히 조곤조곤 설명을 잘했다. 그래서 그를 이해시키는 건 거의 소휘 몫이었다.

“익숙함이요?”

“아무리 바지가 많아도 말이야, 딱 하나 왠지 모르게 기가 막히게 편한 게 있단 말이야. 뭐랄까 그런 게 있어! 이 말로 설명되기 이전에 무의식과 영혼으로 와 닿는 걸 말로 설명하자니 참으로 곤혹스럽네! 디자인이 묘하게 마음 편하고 딱히 내 몸에만 맞춰서 제작된 것도 아닌데 너무 편한 거지. 그런 만만한 녀석이 있어. 참고로 중요한 건 만만해야 해! 너무 마음에 든 나머지 옷이 망가지는 게 조금이라도 신경 쓰이면 그건 진정한 홈웨어가 아니야. 어쨌든 그런 이유들로 계속 입다 보니 내 몸에도 점점 잘 맞아지는 거야. 그럼 더더욱 편해지는 거지. 무릎이 나온다 해도 계속 입을 수밖에 없어! 내 생활이 깃든 그 옷을 말이야.”

소휘의 설명에 옆에서 요셉이 말없이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역시 삶의 조그만 진리들을 하나하나 잘 아는 내 누님이 최고였다.

“도명 씨도 있어요? 무릎 늘어난 홈웨어?”

혁준이 도명을 향해 물었다.

“없습니다.”

도명의 말에 소휘는 말없이 고개를 절레 흔들었다. 이 둘은 어떻게 이렇게 딱딱 끊어가며 사는지 신기하기만 했다.

“단 한 개도 없어?”

“네. 그런 게 생길 만하면 바로 새로 길들일 바지를 준비하니까요.”

“재는 정말 길들임 마니아네. 하다못해 이제는 바지마저 길들이네. 혁준아 조심해라. 너 너무 길들어지면 새로 길들일 파트너 준비할 애야.”

“하하, 그런가요?”

소휘의 말에 혁준은 여유롭게 웃을 뿐이었다.

“어머, 자신감 넘치네.”

“도명 씨는 그냥 본인이 느슨해지는 게 질색일 뿐이에요. 본인이 섭을 망가뜨릴까 봐 언제나 자신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거라고요.”

“그런데 진짜 너희들 그렇게 오래 침대에서 놀았는데도 사귀지를 않네.”

도명과 혁준은 파트너한 지 5년 되었다. 처음에는 그냥 섹스 파트너로 시작해서 나중에는 감정까지 나누는 경우가 은근히 흔했다. SM은 단순히 몸만 종속되는 게 아니라 그 정신까지 종속된다. 그러다 보니 마음까지 상대방에게 묶이는 경우가 흔했다.

소휘와 요셉은 섹스 파트너로 만나 현재 지금 커플링까지 끼고 있는 상태였다. 서로의 이니셜이 새겨져 있는 심플한 디자인의 은반지인데 가락지 안쪽 면에는 S와 M이 새겨져 있는 게 특이한 점이었다.

이 둘이 커플링에 S와 M을 새긴 걸 자랑할 때 아웃팅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냐고 혁준이 호들갑을 떨었었다. 이 네 사람은 같은 성벽을 공유하고 있으면서도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지점이 있었다.

하지만 서로의 다른 점은 그들이 더 이상 이 모임을 지속하지 않을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그들은 남들과 다르다는 점에 이골이 난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게 이 정도 다름은 그다지 큰 문제는 아니었다.

“저희도 누님하고 요셉 씨가 신기합니다. 어떻게 같이 플레이하는 하는 사람과 사귈 수가 있어요? 플레이 외의 감정이 섞일 수 있는데 말입니다.”

도명이 소휘를 향해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플레이 외의 감정이 섞이는 게 뭐 어때서? 이것도 결국 관계인데.”

“BDSM은 자칫 실수하면 상대방을 크게 상처 입히잖아요. 우리는 사람이고 당연히 감정은 완전히 통제가 안 되는데 어떻게 그런 위험한 상태에서 플레이를 할 수가 있는지 신기합니다.”

“난! 미숙한 너희들과 달리 감정을 잘 조절하거든!”

소휘가 위풍당당하게 외쳤다. 혁준이 소휘를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는 요셉을 향해 속삭였다. 물론 혁준의 속삭임이 소휘의 귀에도 선명하게 들렸다.

“요셉 씨, 누님이 플레이 외의 일로 화풀이 안 해요?”

혁준의 질문에 요셉은 완강하게 고개를 저어야 하는데 눈동자를 불안하게 소휘를 향해 굴리더니 말없이 파스스 웃을 뿐이었다. 요셉의 반응에 도명과 혁준은 경악을 했다.

“누님! 요셉이 반응 보니 아닌데요? 위험하게 그러지 말아요.”

혁준의 지적에 소휘는 요셉을 흘겨보더니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아가.”

“네. 누님.”

“내가 그래, 조금 감정 실어 플레이를 할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어쨌든 그래서 위험한 상황을 만들디?”

“아닙니다. 누님은 너무 완벽하죠.”

“다들 들었지? 이 정도면 조절하는 거야.”

“이 논쟁은 매번 같은 내용으로 시작하고 끝나는 것 같네요.”

도명의 말에 다들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이 지겨운 논쟁을 끝으로 도명의 새 도구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가게 전면 창에 블라인드가 쳐지고 변태들의 눈빛이 옹기종기 모여서 반짝였다.

실제 말들이 쓰던 것이라 고급 가죽이 꽤 길이 잘 들어 있었다. 손에 착착 감기는 것이 모두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아 맞다. 도명 씨, 그나저나 이것들 아무것도 모르는 바닐라들이 판단하기에 많이 수상하지 않아요? 괜찮아요?”

요셉의 질문에 도명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본인이 뭘 어쩌겠어요?”

***

도명이 출근하는 도화를 불러 세웠다. 그동안은 도화가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간단한 눈인사도 생략하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도명이 갑자기 도화의 이름을 선명하게 부르는 순간 도화는 간담이 서늘했다.

도화는 경계심이 잔뜩 어린 표정을 숨기지도 못하고 쭈뼛쭈뼛 도명의 앞에 섰다. 도명과 도화 사이에는 적어도 네 걸음의 간격이 존재했다. 대화하기 위해 서 있는 사람이 취할 거리가 아니었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도명을 보며 도화는 생각했다. 이 동네 사람들은 아무도 도명이 얼마나 수상한 본능을 가지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도화는 왠지 모르게 고독한 싸움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도화는 도명의 앞에 서자 어깨가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도화 씨.”

자신의 이름을 낮게 부르는 도명의 목소리에 그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도화는 이게 너무 싫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뜸을 들였다. 이 별거 아닌 뜸 들임이 얼마나 많은 긴장감이 들게 하는지 모를 것이다.

“지금 출근하느라 바쁜 사람 붙들고 계신 겁니다.”

도화는 자꾸 움츠러드는 용기를 겨우 끄집어내어 말했다.

“보셨죠?”

주어가 빠진 도명의 질문에 도화는 크게 놀랐다.

“저, 정확히 뭘요?”

“뭐가 있겠어요?”

“……저는 도명 씨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저는 남은 시간 도화 씨와 잘 지내고 싶습니다. 앞으로 서로 불편해질 일은 더 이상 하지 말아요.”

“아니 그러니까 도대체 뭘!”

도화가 오히려 화를 내며 오리발을 내밀었다. 무조건 목소리 크고 우기는 사람이 이긴다고 생각했다. 분명 택배의 밀봉 상태는 완벽하게 복구했다. 들켰을 리가 없었다. 아니면. 다른 걸 본 일? 당신이 지하실로 사람을 짐승처럼 끌고 간 걸 봤냐고 물어보는 것일까?

도화의 머릿속이 엉킨 실로 가득한 것처럼 복잡해졌다. 그의 공포의 감정은 점점 정체를 알 수 없는 모양새로 변해 가고 있었다.

“화내시는 거 보니까, 잘못된 일이란 건 아시는 모양입니다. 도화 씨, 우리 남은 시간 많다면 많아요. 잘합시다.”

도명이 도화의 살짝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해 주며 속삭였다. 도화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도화가 도명을 향해 정식으로 사과를 하지는 않았지만 저 고집 센 남자가 이 정도 반응을 보인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대화가 통해서 다행입니다. 아 참 그리고 저, 이층집 말입니다. 건축도면하고 비교해 볼 생각인데 실측 좀 하겠습니다. 공간에 대한 계획 좀 미리 짜 놓게요. 인테리어 업체하고도 미리 이야기하면 나중에 편하고요.”

할머니의 슈퍼를 다 털어 버리고 지하실까지 공사하더니 도화가 나가면 저 윗집도 싹 다 바꿔 버릴 생각인 모양이었다. 도화는 그가 바꾸는 것을 참 좋아한다며 속으로 비아냥거렸다.

“……제 집을요?”

“아니죠. 제 집을요.”

도명이 정정하자 도화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도화의 표정에는 싫다는 감정이 역력했다. 그렇다고 도명한테 안 된다고 말할 명분도 없었다.

“불편하시면 집에 안 계실 때 조용히 하고 갈게요.”

‘내가 없는 사이 집에 무슨 짓을 하고 갈 줄 알고! 감시 카메라라도 설치하고 가는 거 아냐? 대체 내가 어디까지 뭘 봤는지 알고 있는 거야? 아니면 내가 어딘가에 자신의 비밀을 말하고 다닐까 봐 감시하려는 거 아냐?’

“아니요. 저 있을 때 합시다. 어쨌든 제가 현재 돈 내고 임대하면서 개인적인 생활을 하는 공간인데 생판 남이 훑어보고 다닌다는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아서요.”

“네, 알겠습니다. 도화 씨가 편한 방법으로 해요.”

“네. 시간은 내일모레. 저 퇴근 후에…….”

“네.”

도화가 할 말을 다 하고 싹 돌았다. 그때 도명이 도화의 이름을 다시 나지막하게 불렀다.

“도화 씨.”

“또, 왜요?”

“즐거운 하루 되세요.”

도명이 눈꼬리를 휘며 다정하게 도화를 향해 말했다. 도화는 대충 고개 인사만 하고 서둘러 출근을 했다.

딱히 시간이 늦은 건 아니었다. 그는 매일 같은 곳으로 출근하면서도 여유 시간을 갖고 출근을 했다. 그는 그런 이유로 입사 후 단 한 번도 늦은 적이 없었다. 그런 도화가 지금 걸음을 빨리하는 건 이상하게 저 남자만 보면 도망가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어서였다.

‘그나저나 저녁 시간에 저 위험한 남자와 단둘이 있어야 한다고?!’

도화는 그 생각에 심장이 쿵 내려앉아 서두르던 걸음을 급히 멈춰 섰다. 그러다 언제나 같은 시각 탔던 버스를 눈앞에서 놓쳐 버렸다. 그의 일상이 아주 미묘한 각도로 빗나가기 시작하며 다른 궤도로 서서히 진입하고 있었다.

***

도화는 주인집 남자 도명이 자신의 집으로 쳐들어온다는 통보를 받은 이후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이럴 때 그가 전화할 수 있는 사람은 진영이뿐이었다.

“웬일이야. 네가 먼저 날 만나자고 하고.”

도화의 만나자는 말에 진영이 보인 반응은 이것이었다. 이런 반응이니 자신이 너무한 건가 싶었다. 사실 도화가 진영에게 먼저 전화 안 하는 이유는 나름의 배려라면 배려고 소심함이기도 했다.

진영은 도화 말고도 친구가 아주 많았다. 별의별 사람이 다 그의 친구였다. 그는 언제나 모임 속에 있어서 도화가 자기만을 위해 그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기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진영이 시간이 빌 때 넌지시 도화에게 전화를 했고 도화는 맘 편하게 오늘은 자신 외에 만날 사람이 없겠거니 하며 만나왔었다.

“내일 저녁 시간 안 돼?”

“안 돼도 되게 해야지. 뭐 먹으러 갈 건데? 메뉴 중요하다.”

기대에 가득 찬 진영의 목소리에 도화는 왠지 양심이 찔렀다. 나름의 배려라고 한 것이 배려가 아니라 무심함이었던 모양이었다.

“우리…… 집에서 삼겹살 먹을래?”

“……너희 집?”

진영의 목소리가 급격하게 내려갔다. 그의 목소리에서 너희 집은 가고 싶지 않다는 감정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응.”

“굳이?”

“응. 반드시! 꼭.”

“……내가 이해가 되게 설명을 좀 잘해 봐.”

“내일 저녁 주인집 남자가 우리 집 실측하러 온대.”

“그게 왜?”

“……주인집 남자랑 단둘이 있기 무서워.”

도화는 결국 하고 싶지 않았던 말을 내뱉고는 얼굴을 손으로 푹 가렸다. 진영은 분명히 도화가 느끼고 있는 공포를 망상 취급할 것이 뻔했다. 덩치는 깡패 같으면서 고작 그 곱상한 아랫집 남자랑 단둘이 있는 게 무서워 지원요청이라니! 도화 자신이 봐도 자기 꼴이 우스웠다.

“네가 혼자 사는 여자도 아니고. 주인집 남자랑 네 방에서 단둘이 있는 게 무섭다고?”

“그래. 그렇다니까.”

그렇게 말하는 도화의 얼굴이 점점 더 새빨갛게 익었다. 자신보다 체구도 작고 여리게 보이는 녀석에게 도움 요청이라니!

“너…… 뭔가 알고 있냐?”

“뭐를?”

“응? 아니. 그냥 주인집 남자랑 단둘이 있는 게 무서운 이유가 있을 것 아냐.”

진영의 질문에 도화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동안 진영이 도화의 의심을 너무 공포영화를 많이 봐서 생긴 정신병 취급을 해서 그 누구한테도 이야기 못 하고 끙끙 앓아 왔었다.

“나, 본 게 너무 많아! 주인집 남자가 어떤 남자를 지하실로 끌고 가는 것도 봤고! 주인집 남자 앞으로 온 택배를 봤는데 그 안에 이상한 채찍들과 가죽 제품이 가득 찬 걸 봤어. 그런 거 고문 도구 아니냐고. 이번엔 내 기분 탓이 아니야. 내가 직접 다 봤다고!”

도화의 말에 수화기 너머에선 어떤 말도 없었다. 그리고 침묵을 깨고 짧은 한마디가 돌아왔다.

“정말……?”

“그래! 그런데 그런 남자와 내가 단둘이 있어야 한다고!”

“뭔가 오해가 있겠지? 아니면 네가 의심이 너무 깊은 나머지…….”

진영이 나머지 말을 다 잇지 않아도 다시 그를 정신병 취급하는 게 느껴졌다. 도화는 화장실 변기에 앉아 머리를 감싸안으며 끙끙 앓아댔다. 도화의 신음에 진영은 침묵을 지켰다.

“원래 위험한 사람은 더욱더 정상적으로 보여! 범죄자 얼굴에 범죄자라고 낙인찍혀 있지 않다고!”

“그렇지.”

진영이 도화의 말에 동조를 했지만 그의 살짝 과장된 뉘앙스를 보아하니 상대방 기분을 생각해서 거짓 동조를 하고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몰라도 도화는 알았다. 그가 몇 년 친구던가.

“네가 내 말을 안 믿어도 상관없어. 그냥 내일 저녁 나랑 같이 있어 주면 돼. 저녁 내내 같이 있을 필요도 없어. 그 남자가 실측한다고 올 때, 그때까지만.”

“알았어. 그게 뭐 어렵겠어. 그런데 한 가지만 부탁하자. 네 방의 공포영화 DVD들 좀 치워라. 나 옛날에 네 방 들어갔다가 3일은 악몽을 꿨어. 나 그런 거 많이 약하다.”

“알았어.”

도화는 퇴근하자마자 벽 한 면을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은 공포영화 DVD들을 상자 다섯 개에다가 차곡차곡 담았다. 그리고 방 한구석에 밀어 넣다가 진영이 우연히 상자를 열어 보다가 노발대발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만에 집에 왔다고 그 너구리 같은 녀석이 여기저기 뒤질 것이 뻔했다. 뒤지다가 이 상자를 발견하고 놀라 자빠지게 해서 다시는 남의 집 살림 이리저리 훑어보는 버릇을 없애고 싶기도 했지만 꾹 참았다.

애초에 진영을 이 집에 들이는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할머니가 슈퍼 안에 진열하지 못했던 물건들을 보관하던 창고로 옮겼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이 창고는 텅텅 비었다.

창고 선반에 첫 번째 상자 하나를 내려놓고 도화가 두 번째 상자를 들고 계단을 내려왔을 때 도명이 한 손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든 채 마당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뜻하지 않게 눈이 마주치자 표정이 굳었다. 역시 표정을 먼저 부드럽게 이완시킨 건 조금 더 정신적으로 여유 있는 도명 쪽이었다.

“무거워 보이는데 제 도움은, 필요 없죠?”

도명의 말에 도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명은 일 보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그리고는 여전히 커피를 마시며 텅 빈 뒷마당을 응시하고 있었다. 도화가 두 번째 상자를 내려놓으며 도명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는지 도화를 향해 말했다.

“저는 도화 씨처럼 남의 물건 훔쳐보지 않습니다.”

도명의 말에 도화는 움찔거렸다. 도화의 성대 끝에 어떤 말이 튀어나오려는 걸 겨우 막았다. ‘대체 채찍은 왜 구매한 겁니까?’ 이 직접적인 질문을 하는 순간 공포영화 속 한 장면처럼 도명이 그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싸늘하고 소름 듣는 웃음을 지으며 그를 응시할 것 같았다.

붉은 입술이 귀에 걸리고 흰자가 검은 눈동자를 집어삼키는 그 얼굴이 저절로 생각나 도화는 호기심을 겨우 눌렀다. 호기심은 언제나 주인공들을 공포의 상황으로 몰고 간 후 완전히 집어삼킨다. 그냥 지나갈 수도 있었는데 굳이 어둠의 한 자락을 들춰낸다.

도화는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아주 조금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연 여인이 그러했듯이 인간에게 호기심은 독이다. 특히 도화처럼 평온한 세상을 원하는 자에게는 말이다.

도화는 입술을 꾹 다물고 남은 상자를 하나 더 가져왔다. 여전히 도명은 어둠 속에 서 있었다. 도화는 그가 이 아무것도 할 것도, 볼 것도 없는 텅 빈 마당에서 뭐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단순히 커피를 마시며 여운을 즐기기에는 이 뒷마당 풍경은 삭막했다.

오직 애매한 높이의 붉은 벽돌 담만이 있을 뿐이었다. 여유를 즐기며 커피 마시기에는 도화의 가게 앞 벤치가 더욱 적격이었다.

“도화 씨.”

또다. 그의 이름을 부르고 침묵을 그사이에 집어넣는 것. 도화는 이 별것 아닌 것이 너무 싫어서 이 침묵을 깨고 소리라도 지를 뻔했다.

“그나저나 뭔지 모를 물건, 언제까지 거기에 둘 생각입니까?”

“왜요?”

“그 창고 철거할 겁니다.”

“하.”

도화가 자신도 모르게 기가 찬다는 듯이 한숨을 쳤다.

“왜요?”

도명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바꾸는 걸 너무 좋아하셔서요. 여기 온 후 그대로 두는 게 대체 뭡니까?”

“그게 왜 도화 씨가 화낼 일이죠?”

도명이 도화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는 도화의 얼굴에 바짝 다가오고는 살짝 혀를 찼다.

“화가 정말 많이 났네요.”

도명은 그렇게 말하고는 주먹 쥔 채 부들부들 떨리는 도화의 주먹을 흘겨봤다. 사람은 화가 나면 본능적으로 주먹이 먼저 나간다. 하지만 도화의 주먹은 허공에서 혼자 파르르 떨릴 뿐이었다.

도명이 여기서 그를 더욱 자극한다고 해도 그는 이 이상 못 나간다는 확신이 들었다. 도명은 이런 도화의 반응들을 보며 생각했다.

‘사람 참, 온순하네. 평생 사람 한 번 문 적 없는 대형견 보는 기분이네.’

사람들이 도명에 대해서 가장 많이 하는 오해는 그가 길들기 힘든 것들을 길들이는 과정 자체를 즐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인내의 과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도명은 천성이 순한 것을 좋아했다. 천성이 순한 것은 도명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혁준이 지적한 도화의 무릎 늘어난 트레이닝복이 보였다. 도화는 집에 도착하면 항상 저것을 입었다.

도명은 그것을 단단하게 조여 주고 싶어졌다. 트레이닝복뿐만 아니라 그 어떤 것이든. 그의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옷의 핏도, 어딘가 빠져나간 것 같은 멍청한 표정도 단단하게 조여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도명은 혼자 난감하다는 웃음을 지었다. 우선 이성애자일 확률이 현저히 높은 데다 바닐라를 상대로 잠깐이지만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철거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름답지 않네요. 그냥 동네 미장이 불러다 주먹구구식으로 만들었고 기능도 참 애매하고요. 여기다가 텃밭을 하나 만들 겁니다. 지금은 뭘 심을까 고민 중이었고요. 그리고 요즘 저만의 공간이 생겨서 들떠 있기도 한 탓도 있을 겁니다.”

“아주 잠깐 놓을 겁니다. 아주 잠깐이요.”

“제가 치워달라면 바로 치워 줄 수 있을 만큼이요?”

도화는 도명이 이야기한 바로 치워 줄 수 있는 만큼이 언제인지는 몰랐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내일 하루만 쓸 건데 그때가 언제인지는 몰라도 곤란할 건 없었다. 도명은 대화가 잘 됐다는 듯 활짝 웃고는 지하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도화는 도명이 사라진 지하실 입구를 한참을 쳐다보았다.

***

진영은 간만에 와 보는 도화의 자취방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와. 어떻게 그렇게 오래 산 집인데 살림살이가 이렇게 휑하냐. 너도 무소유, 미니멀 라이프 뭐 이런 책 읽기라도 하는 거야?”

진영은 식탁 위 의자에 앉았다. 도화는 진영에게 줄 믹스 커피를 타기 위해 주방에 섰다. 도화의 주방 살림은 간소했다. 식기류는 1인 식구에 맞춰서 접시 몇 개, 밥그릇 하나, 국그릇 하나 이런 식이었다. 

도화가 찬장을 여니 믹스 커피 상자만 딱 하나 있었다. 도화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진영에게 항변하듯 말했다.

“물건 많았어.”

“그 많다는 물건 지금 다 어디로 놀러 가셨는데요?”

“저 아래. 뒷마당 창고에 가 있지.”

“왜 옮겼어?”

“네가 옮기라며. 안 그러면 안 온다며.”

“아…… 그 많은 물건이 공포영화 DVD들이냐?”

진영은 도화의 말에 다른 의미로 소름이 돋았다. 고작 DVD들 하나 옮겼다고 집이 이렇게 휑하다고? 그나마 도화의 집에 있는 감성적인 물건은 창가에 줄지어 놓은 스노우볼들뿐이었다.

“주인집 남자 온다며? 나 때문이 아니더라도 정리는 미리 해야지.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오해받기에 십상이다.”

“고작 DVD 가지고 뭘?”

“그치? 고작 DVD이긴 한데 너무~ 많은 게 문제지. 적당히 많아야지. 공포영화 박물관이지. 거의. 각 나라 별로도 있잖아. 너. 하도 봐서 적어도 4개 국어 하는 거 너무 웃겨. 그것도 음침한 단어 위주로 너무 유창해서 놀랐잖아.”

“그런 거 봐도 주인집 남자 눈 하나 깜짝 안 해. 장담한다.”

두 사람이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현관문에서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도화가 그렇게 경계하는 도명이었다. 도명은 나름 다른 사람 집 방문이라면 방문이라고 노란 빵 봉투와 커피를 들고 있었다. 그러다가 진영을 발견하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 친구분 있는 줄 알았으면 더 챙겨 오는 건데요.”

“괜찮습니다. 도화가 안 먹으면 되죠.”

진영은 넉살 좋게 말하며 도화보다 반갑게 도명을 맞이했다.

“와, 이 좋은 냄새 뭐예요?”

“빵 구웠습니다.”

도명의 말에 도화의 귀가 쫑긋거렸다. 그와 처음 만날 날 먹은 그 빵 맛이 생각나 입안에 침이 저절로 고였다. 이 파블로프의 개 같은 상태라니!

“그리고 커피 가져왔는데…… 이미 먹고들 있네요.”

도명의 말에 진영은 도화의 커피잔에 자신의 남은 커피를 부었다. 표정이 거의 쓰레기를 버리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도명의 손에서 커피를 받아들었다.

“와 냄새. 너무 좋아요.”

“제가 커피 잘 내립니다.”

도명이 진영의 앞에서 넉살 좋게 자기 자랑을 했다.

“아 그때 가게에 커피 머신 있는 거 봤어요. 와, 진짜 맛있네요. 직접 내리시는 거예요?”

“네.”

“그런 거 비싸지 않아요? 기계 하나에 천만 원이나 가기도 한다고 들었는데.”

“얼마인지는 몰라요. 선물 받아서.”

“우와. 그런 걸 선물 받아요?”

“가게 오픈한다니까 화원이라서 화환이나 화분 보내기도 그렇다고 보냈어요.”

“둘이 엄청 친한가 보네요.”

“네. 친한 편이죠. 아 여기서 자고 가기도 했는데.”

도명의 말에 진영이 슬그머니 도명의 옆에 서더니 속삭였다.

“애인?”

“……비슷한 거요.”

도명 역시 진영의 귓가에서 속삭였다. 혼자 멀뚱히 서 있는 도화만 아니면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고 좋았다.

“아 맞다. 우리 삼겹살 구워 먹을 건데? 저녁은 드셨어요?”

“아직이요. 실측 끝나고 먹어야죠.”

“딱이네! 우리랑 같이 먹어요.”

“저도 눈치는 있어요.”

도명이 도화를 가리키며 말했다.

“빨리 실측하고 가시죠.”

도화의 퉁명스러운 말투에 도명이 그것 보라는 듯이 진영을 향해 웃었다. 도명의 손에는 건축도면이 들려 있었다. 지하층. 도명의 가게가 있는 지상 1층, 도화가 살고 있는 2층. 총 세 장이었다.

도명은 품 안에서 레이저 측정기를 꺼냈다. 그가 버튼을 누르자 레이저의 빨간 점이 벽 끝에 닿았고 측정기에는 수치가 정확하게 찍혀 나왔다. 도명은 수치를 확인 후 깔끔하게 프린터 된 도면 위에 새 수치를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진영은 도명의 레이저 측정기를 구경하며 신기해했다. 도화는 진영이 도명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을 가만두었다. 도화가 부자연스럽게 도명이 자신의 집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감시하는 것보다 아무 생각 없는 진영이 본의 아니게 감시하는 게 더 자연스러웠다.

여러모로 진영을 부른 것은 잘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화는 식탁에 앉아 기다리는 일 외에 할 일이 없었다. 도명이 가져온 빵을 물끄러미 보았다. 진영이 아직 맛을 보지 않은 빵이었다. 그러다 문득 진영이 아직 안 먹고 있을 때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식탁 위에 포장된 종이 채로 올려놓은 것이 보였다. 먹고 싶었다.

하지만 도명이 같은 공간에 있는데 그가 가져온 것을 아주 행복하다는 표정으로 먹고 있는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정말 쓸데없는 자존심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런 마음이 든 건 어쩔 수 없었다.

도화는 먹고 싶은 빵도 못 먹고 도명이 여분으로 출력해 온 도면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9년 5개월 동안 이 집에서 살았다. 그러면서 이 집 아랫부분에 대해선 전혀 모르고 살았다. 그저 신기했다. 아래층들은 이렇게 생겼구나 싶었다.

그러다가 이 집이 원래 단독주택으로 지하부터 2층까지 연결된 계단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화는 이곳에 살면서 계단실의 존재를 깨달은 적이 없었다. 도면을 골똘히 보니 자신이 창고로 쓰고 있는 곳임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살면서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본 적이 없었다. 도화는 도명이 살고 있는 곳과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이 직통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소름 돋았다. 도화가 도면에서 눈을 못 떼고 있을 때 그의 머리 위에서 도명의 목소리가 울렸다.

“도화 씨는 뭐가 그렇게 신기해요?”

“네, 네?”

별것 아닌 질문에 도화는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냥 집이 이렇게 생겼구나 싶어서요.”

“여기 이 계단실 말이에요.”

도명이 도면을 손가락을 툭툭 두들겼다. 도화는 그의 손짓 하나하나에 심하게 신경이 쓰였다.

“저기 있는 가로로 긴 창고죠?”

“네, 그런 것 같네요.”

“근데, 막혀 있던데? 맞죠?”

“네, 이사 올 때도 그냥 바닥만 있었죠.”

“네, 그렇군요.”

도명은 그 말만 남기고 자신이 가져온 도면들을 정리해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도화는 도명이 가자마자 도명이 말한 창고 쪽으로 갔다. 쪽마루가 깔린 익숙한 창고 바닥이 보였다. 발끝으로 두들겨 보았는데 견고했다.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야 근데 생각해 보니, 도명 씨, 집주인이니까 키가 있을 거고 원하는 대로 여기 들락날락할 수 있는 거 아냐? 굳이 스케줄까지 거하게 잡고 말이야. 여자 혼자 사는 집을 남자 혼자 와서 둘러보고 오는 것도 아니고 실례될 게 있나. 그냥 대충 이야기하고 둘러보고 오면 되지. 보면 볼수록 예의가 바르다니까.”

도화는 도명의 팬인 진영을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집 키 못 받았을 거야.”

“무슨 소리야?”

“할머니도 없었으니까. 여기 집 키. 내가 너무 오래 아무 문제 없이 살아서 중간에 키 한 번 잃어버리시고 난 후 여기 건 따로 복사 안 하셨어. 그러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키가 유일하지.”

도화는 진영과 삼겹살을 구워 먹은 후 뒷정리를 했다. 그러고 나서 침대에 누워서 잠이 들었다.

손이 많이 가는 삼겹살을 준비하고 설거지를 하고 집 청소 좀 했더니 잠이 솔솔 왔다. 그렇게 오래간만에 푹 자고 있는데 창고 바닥에서 쿵쿵 소리가 들렸다. 잠에서 깰 정도로 반복되는 소음이었다.

도화는 눈을 부스스하게 뜨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걸음을 옮길수록 이 소음은 창고에서 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도화가 침을 꿀꺽 삼키며 가까이 다가가니 소리의 진원지가 더욱 정확하게 짙어졌다. 소리는 창고 끝부분 낮은 2단 장 아래에서 나고 있었다.

쿵! 쿵!

도화가 걸음을 우뚝 서서 귀를 바닥에 대었을 때 밑에서부터 도명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도화 씨 깨 버렸네. 나름 조용히 했는데.”

***

“으하악!”

도화가 비명을 지르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자신은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도화는 얼빠진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온통 어둠뿐이었지만 아주 희미한 불빛이 주는 실루엣과 익숙한 기류를 보니 자신의 침실이 분명했다. 도화가 땀으로 얼룩진 얼굴을 쓸어 넘겼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난 후 주인집 남자가 자신의 집에 쳐들어온 것이 꿈임을 인지했다.

도화는 다시 누우려다가 찝찝한 기분에 자리에서 일어나 도명의 목소리가 들렸던 창고 쪽으로 걸어갔다. 도화는 창고로 걸어가면서도 생각했다. 그래, 꿈이 분명했다. 하지만 창고를 확인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창고 문을 열자 정적 속에 끼익하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그가 그동안 수없이 많이 봤던 공포영화에서 많이 등장하는 그 소리다. 도화가 창고 불을 켰다. 역시나 창고는 원래 있던 모습 그대로였다.

이 말끔하게 잘 깔린 나무 마룻바닥이 뚫리거나 할 일은 없었다. 근데 왜 이렇게 싸한 기분이 드는 걸까.

도화는 꿈속에서 소리의 진원지였던 낮은 2단 장 아래를 훑어보았다. 나무 마루에 아주 미세하게 실금 3줄이 가 있었다. 도화는 장을 치우고 나서야 깨달았다.

마루에 손잡이 같은 것이 있었다. 튀어나온 손잡이가 아니라 마루의 일부분을 안으로 파서 손가락을 끼워 넣을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도화가 틈에다가 손가락을 집어넣고 열었다. 그러자 두 개의 나무판이 열리고 그 아래로 어둠 속에 묻힌 계단이 펼쳐져 있었다.

도화는 이제야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그가 처음 이사 온 날 주인집 할머니가 집이 연결되어 있는 게 찝찝하면 막으라며 이곳을 알려 주었다. 그때 도화가 한 건 대충 잘 안 쓰는 남은 가구를 위에다 막아놓은 게 전부였다.

사실 도화 쪽에서 불안해할 것도 없었다. 불안해야 할 쪽은 오히려 혼자 사는 힘없는 노인에다 가진 거 많은 주인집 할머니 쪽이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이런 작은 가구로 막아놓고 이 문의 존재를 기억에서 아예 지워 버린 것이다.

도화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가벼운 2단 장이 이 구멍을 막고 있다는 것이 불안했다. 그래서 아닌 밤중에 나무로 만들어진 무거운 서랍장을 옮겨서 그 위에 얹어 놨다. 그리고는 쿵쿵거리는 심장을 손바닥으로 누르며 잠을 청하려고 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미친 자는 누구인가? 어쩌면 진영의 말이 맞는 건가. 오랫동안 혼자 이 집에 살면서 같은 시간대에 공포영화 DVD를 틀고 지냈다. 뇌에 망상이 서서히 이끼처럼 번졌을 수도 있다. 

그래, 멀쩡하고 선량한 사람을 연쇄살인범 취급하는 걸 수도 있다. 하지만, 도화 본인이 본 건 무엇이란 말인가? 남자를 지하실로 네발로 기어서 들어가게 한 것. 고문 도구를 구입한 것. 등등.

도화는 이대로 가다간 자신이 정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어떤 결단이 필요했다.

***

도명은 생각보다 바쁜 사람이었다. 가게 안은 언제나 다양한 사람들이 바쁘게 오고 갔다. 오는 목적도 다양한 것 같았다. 도명의 클라이언트들, 혹은 그가 하는 사업에 관계된 사람들과의 미팅, 혹은 개인적인 친목 모임 등 사람이 마르는 법이 없었다.

그에 비해 가게 문은 생각보다 수시로 잠겨 있었다. 도명은 손님이 언제 올지 알고 있기에 문을 잠그고 볼일을 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도화는 창문을 통해 주인집 남자가 가게 문을 닫고 그의 검은색 차를 끌고 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도화는 모든 망상과 혼란을 오늘 정리하기로 했다. 오늘 딱 하루 과감한 탐사를 하고 그의 대한 의심이 합리적인 사고였는지 아니면 망상이었는지 결론 내리기로 했다.

도화는 도명이 가게를 빠져나가자마자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종이 책을 뱃가죽에 두르고 테이프로 칭칭 감았다. 덕분에 움직임이 깡통 로봇처럼 되어서 우스꽝스러워졌지만 안전이 중요했다. 그리고 호신용으로 준비한 야구 방망이 양 끝에 끈을 매달아 어깨에 멨다.

그리고 사진을 찍을 때 배터리가 충분한지 핸드폰을 체크 한 뒤 뒷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손전등 하나도 준비했다. 뒤에서 급습을 당할 수도 있으니 헬멧도 썼다. 최소한 둔기로 머리를 맞고 바로 기절하지는 않으리라.

그리고 자신이 왔다 갔다는 흔적은 남기지 않기 위해 운동화에 비닐도 씌웠다.

도화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창고 안 미지의 장소 앞에 우뚝 섰다. 9년 5개월 동안 내가 살고 있는 아래층에 대해 궁금해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이 모든 풍경이 바뀌고 나서야 아래층으로 내려가다니, 도화는 자신도 어이가 없어서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왜 공포영화 속에서 굳이 딱 봐도 위험해 보이는 곳에 발을 디디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백번 이해 간다. 자신의 지척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가 도사리고 있으면 서서히 정신이 미쳐 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용기나 진취성이라곤 하나도 없는 도화가 미지로 가득한 계단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며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계단은 쓰는 사람이 없는 것치곤 말끔했다. 생각보다 계단 안 풍경이 음침하지도 않았다. 바로 아래층에 있지만 단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았던 도명의 가게 안 내부가 보였다. 식물들이지만 자기주장이 세고 사나워 보였다.

누가 식물들이 평화와 안식의 상징이라고 했던가. 아무것도 없는 붉은 벽을 지나 갑자기 정글 비슷한 풍경이 나오자 기분이 묘했다. 그때 바람 소리가 들리고 식물들이 잎사귀를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마치 낯선 침입자를 향해 웅성웅성 대는 것 같았다. 도명이 위에 설치된 작은 환기창들을 열고 가서 가게 안은 내부치고 미세한 실바람이 불고 있었다.

도화는 이 식물들이 사그락거리는 소리가 왠지 모르게 소름 돋았다. 어떤 식물 잎사귀에는 위에 공작새 깃털 문양 같은 무늬가 있어서 마치 수많은 눈을 연상하게 했다. 도화는 이 조용한 목격자들의 눈을 피해서 도명이 살고 있는 지하실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다행히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도화의 손바닥에 스며들고 달칵하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온 지하실 내부의 모습은 반지하치고는 꽤 쾌적하고 근사했다. 후면부에 보이는 작은 숲이 있었고 많지는 않지만 천창을 통해 햇빛이 자연스럽게 도명의 공간을 비추고 있었다. 방 한가운데는 남자 혼자 쓰기에는 커다란 침대가 놓여 있었다.

잘 관리된 새하얀 시트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한쪽 벽면에는 간단한 조리와 식사, 간단한 업무를 보는 바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침대 옆에는 캐러멜 색의 빈티지 가죽 소파가 놓여 있었다. 그 옆 책장 상단부에는 식물에 대한 여러 전문 서적들이 빼곡히 줄지어 있었다.

하단부에는 그가 취미로 읽는 여러 분야의 책이 도서관처럼 정리 태그와 함께 꽂혀 있었다. 전체적으로 질서가 잡혀 있지만 지극히 감성적인 공간이었다.

도화는 도명의 집 인테리어를 구경하러 온 것은 아닌지라 뭔가 허무했다. 진영의 말 그대로였다. 방만 보면 수상해 보이는 것은 도화 쪽이었다. 공포영화 DVD만 빼면 최소한의 물건만 가지고 있는 도화의 방이 더욱 삭막하고 을씨년스러웠다.

“아 맞다.”

도화는 문득 자신의 방을 떠올리다가 아직도 뒷마당 창고에 자신의 DVD들이 있음을 깨달았다.

진영이 집에 가고 바로 원래 있던 책장에 꽂아놓을 생각이었는데 깜빡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잊어버린 결심을 기억할 때가 아니었다. 이왕 여기까지 몰래 온 김에 한 점 의혹도 남김없이 이 집의 비밀에 대해서 파헤쳐야 했다.

도화는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책장을 보며 엉뚱한 상상을 하고 말았다. 보통 비밀의 벽 같은 건 책들 중 하나를 빼면 열리는 걸 미디어를 통해서 많이 봤다. 그다지 믿는 건 아니지만 일단 손이 먼저 갔다. 도화는 책을 조금씩 꺼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무슨 상상을 한 거야, 도대체.’

도화는 혼자 쪽팔려하며 얼굴이 새빨갛게 익었다. 도화는 이 깔끔한 사람이 자신이 책을 하나씩 꺼내 본 흔적을 알아챌까 봐 꼼꼼하게 표면을 정리했다.

책장을 따라가다 보니 끝나가는 지점에 떡하니 있는 슬라이딩 도어가 나왔다. 슬라이딩 도어 하드웨어가 노출된 채 벽 상단에 떡하니 달려 있었다. 도화가 문을 옆으로 밀자 기가 막히게 정리된 셔츠들과 정장 바지. 그리고 니트 등의 옷이 질서 있게 펼쳐졌다.

“와, 이 변태 새끼.”

너무 완벽하게 정리된 옷들을 보니 도화의 입에서 저런 말이 저절로 나왔다. 옷을 다리면서 음악을 듣는지 콘솔 위에 레코드플레이어가 놓여 있었다. 도화가 도명의 드레스 룸에서 찾은 건 그가 옷 관리를 기가 막히게 한다는 점이었다.

드레스 룸도 소득이 없자 이번에는 간이 주방과 바가 있는 곳으로 갔다. 신기한 스툴이 있어서 도화는 자신도 모르게 앉아 버렸다. 엉덩이를 대고 허리를 이리저리 돌려 보다가 바 의자에 앉아서 도명의 집 풍경을 관찰했다.

이곳에 앉으니 방의 전체 풍경이 한눈에 잘 보였다. 청소는 잘 돼 있지만 도화에 비해서 이런저런 물건이 많았다. 취미도 많고 여러 분야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도화는 멍하니 도명의 집을 구경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주방 끝에 있는 문을 열었다.

이쪽도 하드웨어가 노출된 슬라이딩 도어를 설치했다. 고개를 빠끔히 내밀어 보니 고급스러운 타일로 장식된 커다란 욕실이 보였다.

‘여기도 소득이 없네.’

도화가 그렇게 생각하고 자리를 뜨려고 하는데 욕실 반대편의 광경을 보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온갖 고문 도구로 보이는 것들이 선반 위에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한쪽 벽면에는 수갑이 고정되어 있었다. 욕실에 더러운 물이 고이는 게 싫은지 바닥 곳곳에는 배수 구멍들이 정교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도화는 충격을 받은 채 그대로 굳어 있었다. 도화는 덜덜 떨면서도 공포의 현장으로 깊숙이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욕실 끝에는 철제로 된 은색 장이 하나 있었다. 장을 열어보니 이곳도 여러 도구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이곳에 사람 시체가 없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도화가 충격에 빠진 채 멍 때리다가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찾기 시작했다.

***

도명은 잡지사 미팅 때문에 자신의 잡지사로 향하고 있었다. 나름 개성 강한 아티스트들이 모여 있는 아뜰리에 같은 곳이라 대표인 그는 필요한 일이 아니면 자신이 소유하고 있다고 해도 잘 찾아가지 않았다.

직원들이 도명의 시선을 신경 쓰느라 충분히 자신의 생각에 집중 못 하는 것은 비효율적이었다.

도명 입장에서는 이들이 자기가 맡은 일을 해서 제때 보고만 하면 됐다. 그 과정에서 누가 출근을 늦게 하고 누가 야근을 더 많이 하며 사무실에 앉아 있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언제나 중요한 건 결과물이었다.

도명 역시 출판사를 매일 왔다 갔다 하기에는 화원 일과 잡지의 원고를 작성하느라 바쁘기도 했다. 도원의 화원은 클라이언트와 식물을 만나게 하는 곳이자 원고 작성을 위한 스튜디오이기도 했다.

오늘은 전 달에 기획했던 일의 1차 결과물들을 회의하기 위해 출판사로 향했다. 회의하기 위해 직원들을 화원으로 부르기도 했지만 오늘은 도명 쪽에서 움직이는 게 효율적이었다.

예정에 없던 추가 자료나 전체 회사 상황을 보고 받으려면 이들이 자료들을 다 가지고 오는 것보다 도명 하나만 움직이는 게 여러 사람이 편했다.

도명이 출발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도명은 블루투스로 연결된 이어셋으로 통화를 하기 시작했다.

“네, 출발했습니다. 회의에 늦지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대표님 벌써 출발하셨어요?”

상대방의 목소리가 난감함으로 물들었다.

“네. 회의에 늦지 않으려면 출발했어야 정상이잖아요.”

도명의 말에 상대방은 더욱 난감해했다.

“이번에 두순 씨하고 한서윤 씨가 비행기를 놓쳐서 오지 못했는데 괜찮으세요? 한꺼번에 보고 받아서 일 처리하시잖아요.”

“어쩐 일로 두순 씨가 비행기를 놓쳐요? 시간관념 확실한 사람인데.”

“서윤 씨가 사진 더 찍겠다고 야간에 산 루이스 포토시를 돌아다니다가 길을 잃어서요. 서윤 씨 찾겠다고 두순 씨가 밤새 돌아다니다가 아침에 겨우 서윤 씨를 찾긴 찾았는데 비행기는 놓쳤대요.”

“아, 그 길치가 또.”

도명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데리고 온 사람이라 도명이 오히려 매번 그를 찾으러 다니느라 고생하는 직원들에게 미안해질 정도였다.

“그래서 언제 도착한대요?”

“오늘 저녁 늦게 도착할 것 같은데요.”

“회의 내일로 미룹시다.”

“미리 말씀드려야 했는데 죄송해요. 한국 시각으로 새벽이라 전화도 미리 못 줬대요. 저희도 한참 회의 준비하는데 방금 들었어요.”

“아닙니다. 그렇게 많이 오지도 않았습니다. 일정 빠듯하지 않으니 오늘은 내일 있을 회의 전에 다들 한숨 돌립시다.”

도명은 결국 차를 돌려 집으로 향했다. 덕분에 오늘 하루는 애매하게 비고 내일 하루가 좀 빠듯하게 돌아갈 것 같았다. 도명은 묘하게 컨트롤 안 되는 서윤을 생각하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도명의 인생에서 그나마 가장 큰 변수는 서윤인 듯했다.

도명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드레스 룸 문을 열고 코트를 벗어 깔끔하게 걸었다. 그리고는 소파에 걸터앉았다. 갑자기 번잡스러웠던 시간이 텅 비어 버렸다.

“아, 한서윤.”

도명은 그답지 않게 꽉 조여진 넥타이를 살짝 풀고 소파에 늘어졌다. 소파에 누워서 멍하니 천장을 약 1분간 보다가 본의 아니게 생긴 여유 시간을 독서 시간으로 채우기로 했다. 도명은 소파 옆 책장에서 자신이 읽고 있던 책을 꺼내려다가 멈칫했다.

도명은 물건 정리를 너무 잘하다 못해 강박적으로 하는 사람인데 그의 정리 철학은 ‘무조건 반듯하게’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그가 정한 규칙이었다. 그가 생활하는 데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돌아가게 하는 것이 중요했다.

도명의 책 정리 습관 중 하나는 항상 현재 읽고 있는 책은 자신이 정한 제 자리에 놓되 집어넣고 뒤로 살짝 빼는 것이다. 잠시 참고용으로 본 책은 끝까지 밀어 넣었다. 도명은 자신이 정한 규칙을 공들여 습관화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일일이 이 모든 것들을 신경 쓸 수가 있냐고 신기해했다. 하지만 어떤 행동을 공들여서 반복하며 일정 시간을 들이면 그건 무의식의 영역이 된다.

그가 바쁜 와중에도,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도 그는 언제나 이 규칙을 지켰다. 이곳은 그가 만든 물리학 법칙이 돌아가는 그만의 작은 세계였다.

도명은 모든 책이 완벽하게 들어간 책장을 보면서 뭔가 어긋남을 느꼈다. 그가 익숙하게 손을 뻗으면 살짝 삐죽 튀어나온 그것이 손끝에 부드럽게 걸려야 했다.

도명은 싸한 느낌에 주변 공간을 둘러보았다. 자신만의 공간에서 느껴지는 낯선 기류가 불쾌했다. 도명은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의 공간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별다른 건 없었다. 그러다 자신의 바 체어가 엉뚱한 방향으로 돌려져 있음을 깨달았다.

도명이 이 의자에 앉을 땐 언제나 일을 하거나 간단한 간식 정도만 먹을 때이기 때문에 크게 돌려져 있을 일은 없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약 30도 각도로 돌려질 뿐이었다. 그런데 누군가 이 의자에 앉아서 이곳의 풍경을 구경했다.

도명이라면 그럴 리가 없었다. 누구보다 익숙한 이 공간을 물끄러미 쳐다볼 일은 없었다. 이 의자에 앉을 때는 언제나 이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는 것들에 집중했다. 손님이 왔을 때 빼고는 이렇게 180도로 의자를 돌려 본 일이 없었다.

도명의 싸한 기분은 점점 농도가 짙어졌다. 누군가 자신 몰래 이곳에 들어왔다. 도명은 또 다른 흔적을 찾아서 눈길을 돌렸다. 자신의 욕실 앞 매트에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올이 굵은 퍼로 된 거라 밟으면 털의 숨이 그 모양대로 죽어 있다.

그런데 이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원래 모양대로 뽀송하게 올라왔다.

도명은 그것을 보고 누군가 자신의 집에 침입했고 심지어 왔다 간 지 얼마 안 됐다는 것을 알게 되자 더욱 소름이 돋았다. 아니, 아직 이곳에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매트에 찍힌 발자국 모양 방향이 들어간 적은 있어도 나온 적은 없는 것으로 보였다.

도명은 턱짐을 지고 생각에 잠겼다. 가장 안전한 방법은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다.

하지만 도명의 신고 내용을 믿을까? 살짝 빼놨던 책이 들어가 있고 의자의 등받이 방향이 이상하다는 것이나 매트에 희미하게 남은 발자국(이마저도 시간이 조금 지나면 사라질 것이다)에 대해서 말한들 그 무신경한 공권력이 믿어 줄까? 도명은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 시선을 안다.

‘어떻게 그런 것 하나하나 신경 쓰고 살아요? 그것도 일종의 강박증 같은 정신병 아닌가?’

이쯤 되니 신고하기 편하게 자신이 물건을 싹 다 뒤집어 놔야 하나 하는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다. 도명은 일단 자신의 신변의 안전을 위해 주방으로 갔다. 그리고 식칼 하나를 쥐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사람의 급소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정당방어가 성립되는 조건들까지 되뇌었다. 도명은 최대한 많은 상황들을 시뮬레이션했다. 그가 가장 피해 보지 않을 수많은 상황들 말이다.

그리고 욕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욕실에서는 아주 미세한 물소리만 들릴 뿐 조용했다. 그가 알고 있던 풍경 그대로였다. 그러다가 그의 눈에 은색 캐비닛 문이 살짝 열려 있음을 깨달았다. 자신이 도구들을 정리해 놓는 장이었다.

도명은 목을 양옆으로 살짝 풀고 캐비닛으로 뚜벅뚜벅 다가갔다. 살짝 열린 문틈에 눈에 익은 청색 옷감이 보였다. 눈에 익어도 너무 익었다. 바지 끝단으로 보이는 천 조각에는 하얀색 줄이 세 개 그어져 있었다. 도명의 머릿속에 누군가가 생각났다.

세입자 남자가 매일 입고 돌아다니던 그 무릎 늘어난 트레이닝복. 그의 긴장감은 순식간에 풀렸다. 그렇다고 그의 기분이 나아진 것은 전혀 아니었다. 불쾌한 감정이 덕지덕지 그의 온몸에 달라붙었다.

도명이 싸늘한 눈을 하고 캐비닛 문을 열었다. 철제문이 열리는 소리가 끼익하고 음산하게 울렸다.

“으하아하아앗!!”

도화의 우스꽝스러운 비명이 욕실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하지만 그의 앞에 선 도명은 웃음기를 싹 지운 얼굴로 한쪽 눈썹만 쓸어 올릴 뿐이었다. 도화는 도명의 SM 도구들과 각양각색의 바이브레이터 사이에 엉켜서 큰 눈을 하고 벌벌 떨고 있었다.

도화는 너무 놀라서 회심의 방어 도구로 준비한 야구 방망이마저 바닥에 떨어뜨렸다. 야구 방망이가 바닥에 허무하게 바닥에 구르는 소리가 들렸고 도화의 눈앞에는 식칼을 손에 든 도명이 있었다.

도화에게 도명은 썩 다정한 인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어떤 불쾌한 상황 속에서도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 점이 어떤 면에서는 더 무섭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같이 싸늘하게 식은 도명의 얼굴은 처음이었다. 도명이 인상을 쓰며 갈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리고는 도화를 향해 말했다.

“도화 씨, 제가요. 매일 성격 좋은 척 웃고는 있는데 사실은 저는 버릇없는 걸 남들보다 유난히 못 참아요. 도화 씨는 제가 참을 수 없는 선을 두 번이나 넘었어요. 더군다나 두 번째는 용서받을 수 없는 선이고요.”

도명이 손에 든 날이 선 식칼을 도화의 목젖 부분에서 돌리며 속삭였다.

“자, 잘못했습니다.”

도화가 입을 열자 목에 파고든 칼끝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잘못을 비는 도화를 쳐다보는 도명의 얼굴이 싸늘했다.

“이유나 압시다. 나한테 자꾸 버릇없이 구는 이유.”

도명의 말이 살인자가 사람을 죽이기 전 묻는 질문 같았다. 도명의 질문에 도화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도명에게 이유를 말하는 순간 그의 눈이 지금보다 더욱 흉악하게 돌변할 것 같았다.

도화가 벌벌 떨기만 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자 도명은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잔머리는 대체 왜 굴려요? 사람이 이유를 묻는데.”

“이, 일단 그 칼부터 치우시고…….”

“당신이 나한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내가 가진 가장 믿을 만한 걸 치워요?”

“네? 제가 무슨 짓을 하겠어요?!”

남의 집에 쳐들어와 놓고 도화가 그렇게 이야기하자 도명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도화 씨 지금 남의 집에 쳐들어왔어요. 그것도 무장을 하고 말이죠.”

그렇게 말하는 도명의 눈길이 타일 바닥에 혼자 구르고 있는 야구 방망이로 흘렀다.

“이, 이건 도명 씨가 절 해칠까 봐.”

도화와 대화 할수록 도명의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는 말들만 흘러나왔다.

“내 질문이 어려워요? 왜 남의 집에 무단 침입을 했냐고 묻잖아요.”

“당신이 너무 수상한 사람이잖아요!”

거듭되는 도명의 압박에 결국 도화가 소리치고 말았다. 도명은 도화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 상황만 아니면 웃음이 터질 정도로 도화의 모습은 우스꽝스러웠다.

허리에는 뭔가 둘러맸는지 묵직하고 빳빳해 보이는 뭔가가 옷 아래 보였고 머리에는 빨간 헬멧을 쓰고 발에는 샤워 캡이 씌워져 있었다.

그가 등장한 장소도 그렇고 모습도 그렇고 역시 수상한 쪽은 도화였다. 

어이없다는 도명의 시선에 도화는 자신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요상한 모습에 각종 가죽 제품과 바이브레이터 속에서 엉켜 있는 자신은 누가 봐도 이상했다.

“말할 테니까 제발 그 칼 좀 치워 주세요.”

“당신이 나한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내가 가진 가장 믿을 만한 걸 치우냐는 말도 어려웠어요?”

이들의 대화가 계속 도돌이표를 찍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각자의 입장에서 서로에게 양보할 것은 그 아무것도 없었다. 긴장되는 대치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도명은 도화의 핸드폰을 뺏어 도화의 현재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

갑자기 터지는 핸드폰 플래시에 도화는 인상을 찌푸리며 얼굴을 가리려고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도명은 도화의 사진을 자신의 메일로 보냈다.

도명은 바닥에 뒹굴고 있는 야구 방망이를 발끝으로 밀어 도화로부터 멀찍이 떨어뜨려 놨다. 욕실 바닥에 야구 방망이가 뒹구는 소리가 울리더니 욕실 모서리에 퉁 하고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사진은 왜……?”

“경찰에 신고해야죠. 당신이 내 집에 무단 침입했다는 증거요.”

“경찰에 신고하실 수 있으세요?”

도화는 일련의 상황들이 점점 자신의 예상에서 어긋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못할 건 또 뭡니까?”

“그러니까 당신도 경찰이 여기 오면 저보다 더 곤란한 것 아닙니까?”

“아까부터 알 수 없는 헛소리 하는 것 좀 그만둘래요?”

“이 현장을 사람들한테 들켜도 상관없다고요?”

“그러니까 그게 왜 제게 곤란한데요?”

“그거야 도명 씨가 여기서 무슨 나쁜 짓을…….”

“나쁜 짓이요? 다 큰 성인이 합의된 섹스를 하는 게 뭐가 문제인데요?”

“섹스요?”

“네, 섹스요.”

도명이 식칼을 도화의 목울대에서 턱 끝으로 들어 올리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도화는 여전히 머릿속 퍼즐들이 맞춰지지 않고 있었다.

도명은 이 와중에 도화를 놀리고 싶어 도화의 아래에 깔려 있는 수많은 바이브레이터들 중 하나의 스위치를 켜서 도화에게 가랑이 사이에 던졌다.

그러자 성기 모양을 한 분홍색 바이브레이터 윗부분이 아래위로 꿈틀거리며 도화의 가랑이 사이에서 진동했다.

도화는 그 바이브레이터의 징그러운 움직임에 얼굴이 하얗게 변색되었다. 도화가 무섭게 꿈틀대는 바이브레이터를 피하려고 움찔거리자 도명이 도화의 턱밑에 칼끝을 더욱 바짝 밀어붙였다.

섣불리 움직이면 다칠 거라는 무언의 압박에 도화는 가랑이 사이에서 날뛰는 바이브레이터를 참아야 했다.

살면서 그 흔한 섹스토이 하나 안 사 본 도화는 그것이 낯설고 징그럽게 느껴졌다. 그런 와중에도 그의 가랑이가 아주 조금씩 뜨거워지고 있어서 황당했다. 엉덩이뼈가 바르르 떨리고 척추에 한기가 도는 이 극한의 공포 속에서도 느끼다니. 미친 것이 분명했다.

“당신은 이곳이 뭐 하는 곳으로 알고 있기에 제가 곤란하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이 모든 이상한 장면 속에서도 도명은 무덤덤한 어투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당신이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아니 그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납치라든지…….”

도화의 말에 내내 웃음기 없던 도명의 얼굴에 웃음이 터졌다. 그런 도명의 웃음에 도화의 표정이 더욱 멍해졌다. 여전히 도화의 가랑이 사이에서는 바이브레이터가 파닥거리고 있었다.

“이봐요. 도화 씨. 제가 그런 부류였다면 당신을 발견하는 순간 찔러 죽이고 바로 이 바닥에서 당신의 시체를 처리하고 있지 않겠어요? 당신이 이곳에 스스로 들어왔기에 제가 당신을 납치하거나 회유하는 장면도 이 세상 어디에도 찍히지 않았을 텐데요. 실랑이할 필요도 없이 바로 푹. 너무 간단하잖아요.”

도명이 도화의 목덜미에 칼을 밀어 넣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도명의 말에 도화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도화가 눈알을 굴리며 주변을 다시 둘러보았다. 여전히 그의 눈에는 흉흉한 장면들이 펼쳐져 있었고 도명은 칼을 능숙하게 손에 쥐고 돌리고 있었다.

요리가 취미인 그에게 칼을 쥐고 다루는 것은 아주 익숙한 일이었다.

“진짜. 어이가 없네. 왜 자꾸 본인이 피해자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겁니까? 여러모로 피해자는 저인데요?”

“그럼 대체 여긴 뭔데요?”

“정말 학습 능력이라곤 전혀 없는 덜떨어진 인간이네. 아까 말했잖아요. 섹스하는 곳이라고.”

도명은 도화의 경계심도 어느 정도 누그러지고 그의 몸에도 힘이 풀린 것이 보여서 그의 목 언저리에서 식칼을 거두었다. 그제야 도화는 징그러운 바이브레이터를 가랑이 사이에서 치울 수 있었다. 바이브레이터가 치워진 후에도 살갗 아래 묘한 느낌이 울려댔다.

도명은 여전히 칼을 손에서 놓지는 않았다. 도화가 겉으로 보이는 적개심에 비례해서 공격성이 높은 편은 아닌 점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온순한 것들도 궁지에 몰리면 공격적으로 변하는 법이었다.

도화가 혼란스러워 보일 때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처리해야 했다. 경찰이 올 때까지 그를 여기에 비교적 안정적인 상태로 묶어두며 시간을 끌든지 그를 내보내고 이곳을 다시 그만의 공간으로 만들든지 해야 했다.

“저 아직도 못 들었어요. 당신이 내 집에 쳐들어온 이유 말입니다.”

“당신이 위험한 사람인 줄 알았어요. 그 진눈깨비가 오던 날 봤어요. 당신이 어떤 남자를 이 집 뒷마당에서 짐승처럼 끌고 가는 모습을요. 당신의 수상한 택배 또한 본 것을 알고 있겠죠.”

그날 도화가 도명의 택배에서 본 것은 새 발의 피였다. 이곳에 와 보니 도명에겐 그런 가죽 채찍 같은 것이 아주 많았다. 가죽 채찍뿐만 아니라 정체를 알 수 없는 여러 도구들 또한 많았다. 도구들 하나하나가 도화의 눈에 정상적으로 보이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도명은 도화가 봤다는 것이 뭔지 유추했다. 그리고 생각났다. 그의 파트너인 혁준과 뒷마당에서부터 플레이를 했던 것이 말이다. 그제야 사건이 어디서부터 꼬인 건지 감이 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제가 위험한 사람인 줄 알고 직접 저의 수상한 정체를 파헤치려고 무단 침입을 했다는 말인가요?”

도명의 정리에 도화가 얼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 탐정영화 이런 거 좋아해요?”

도명이 도화를 향해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물었다. 도명이 여전히 칼을 쥔 채로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도명이 자신의 캐비닛에 그만 구겨져 있고 나오라는 듯이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도화가 도명의 눈치를 살피더니 어기적거리며 도명의 캐비닛에서 나왔다.

좁은 곳에서 나오자 온몸이 삐거덕거렸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긴장을 풀 수는 없었다.

“보는 것만 좋아해요. 안전한 방 안에서 보는 것만.”

도명이 따라오라는 듯이 다시 고갯짓을 하고 도화는 어기적거리며 도명의 뒤를 따랐다.

“커피? 홍차?”

욕실에서 나오자 도명이 대뜸 도화에게 그리 묻자 그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차를 권하는 그의 심경의 변화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아니면 다른 거요?”

도화가 말이 없자 도명이 어서 아무거나 말하라는 듯이 인상을 썼다. 도명의 위압적인 표정에서 느껴지는 무언의 압박에 도화는 일단 아무 생각 없이 ‘커피.’라고 대답했다.

도명이 부엌 앞에 섰고 물이 끓을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도명이 도화를 말없이 지그시 쳐다봤다. 그러다가 무신경한 눈을 하고 도화의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도화는 도명이 핸드폰을 만지자 자신이 빼앗긴 핸드폰이 생각났다.

“저, 커피보다 제 핸드폰 좀 주시겠어요?”

도화의 요청에 도명은 의외로 쉽게 그의 핸드폰을 던지며 건네주었다. 도화는 가까스로 도명이 던진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도명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핸드폰이 있는 소파 위 커피 테이블 위에 다가갔다.

도명은 소파에 앉아 도화와는 상관없는 다른 일을 보는 것처럼 112에 문자로 신고를 했다. 주거침입이라는 글자와 함께 그의 주소지를 정확하게 적어 보냈다. 그리고 전화로는 웬만하면 연락하지 말아야 하는 상황이라는 메시지까지 보냈다.

“저, 물 끓었어요.”

도화가 도명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도명이 도화를 빤히 바라보았다. 도명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도화가 당황하며 말했다.

“제가 직접 할까요?”

“아뇨. 제가 하죠.”

도명이 여유로운 걸음으로 다시 바 테이블이 있는 부엌으로 향했고 식칼을 다시 제자리에 꽂아 넣었다. 그러자 도화는 우물쭈물하다가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저, 이만 가 볼게요. 여기서 편하게 커피 마시고 있는 것도 이상하고…….”

도화의 말에 도명의 미간이 좁혀지다가 이내 굳은 표정을 자연스럽게 풀고는 말했다.

“오해는 다 풀렸나 모르겠네요.”

“…….”

“다시는 이런 불상사가 없도록 할 수 있을 때 오해를 다 풀어야 하지 않겠어요?”

“저는 아직도 그런 곳이 어떻게 단순히 섹……스하는 곳이란 건지 전혀 모르겠어요.”

도화는 친하지도 않은 사람 앞에서, 더군다나 극도로 어색하게 된 사람 앞에서 ‘섹스’라는 말은 쉽게 내뱉을 수 없어서 망설이다가 겨우 어렵게 입 밖으로 꺼냈다.

“SM 몰라요?”

“대형 소속사요?”

돌아오는 도화의 대답에 도명은 입마저 벌어졌다.

“저랑 지금 말장난하자는 거예요? 도화 씨는 이 상황이 만만해요?”

“SM…… 아.”

도화는 이제야 자신이 아주 어렴풋하게 알고 있는 것이 생각났다. 정말 SM이란 단어의 겉만 아주 살짝 알고 있는 수준이었다. 도명의 질문에 소속사가 먼저 생각 날 정도로 그의 인생에서 접점이라곤 전혀 없는 단어였다.

도화는 이제야 도명이 말한 섹스의 의미가 아주 조금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도구들을 직접 보니 더욱 ‘섹스’와 연결이 안 돼 혼란이 가중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제가 저의 성생활에 대해서 도화 씨에게 이런저런 설명을 하기에도 기분이 좋지 않으니까 모르겠으면 거기 앉아서 핸드폰으로 검색이라도 해 보든가요.”

도명이 도화의 앞에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도화는 도명의 말대로 핸드폰으로 SM을 검색하기 시작했고 도명은 언짢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아주 대략적인 개념을 검색한 도화가 도명을 쳐다보더니 입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러니까 도명 씨는…….”

“S요.”

짧고 굵게 돌아오는 대답에 도화는 소름이 돋는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런 도화의 반응에 도명은 이놈의 경찰은 언제 오는지 핸드폰만 꽉 쥐었다.

“사람이 고통스러워하는 게 즐거워요……?”

도화는 도명이 사람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즐긴다는 점에서 그가 사이코패스와 뭐가 정확히 어떻게 다른지 몰랐다. 역시 이 사람은 파면 팔수록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게 어떻게 섹스가 될 수가 있어요? 그런 도명 씨에게 맞춰 주는 사람이 있다고요? 협박이나 뭐 그런 거 없이요?”

“M이란 부분은 안 보입니까?”

도명의 말에 도화는 마조히스트가 다른 의미로 더욱 이해가 안 가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너무 노골적인 취향 비난에 도명의 미간을 풀릴 줄 몰랐다. 그는 이 불쾌한 시간이 언제 끝날지 몰라 바닥을 발끝으로 툭툭 치며 팔짱을 꼈다.

“진눈깨비 오던 날 제가 봤던 사람은……?”

“제 섹스 파트너죠.”

“설마, 그때 그 무릎 꿇었던 사람이 동의한 거라고요?”

“네.”

도화는 그의 세계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세계가 훅 들어와 혼란스러운 듯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때 도명에게 경찰로부터 문자가 왔다.

[괜찮으신가요? 집 앞까지 거의 다 왔습니다.]

[네. 아직까지는 괜찮습니다.]

“아, 바빠 보이시는데 이만 올라가겠습니다.”

“커피가 입맛에 안 맞나 보네요?”

도명이 도화에게 안도감을 주려고 일부러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커피를 천천히 들이마셨다.

“지금 커피가 입맛에 맞고 안 맞는지가 중요한가요. 아무리 맛있는 걸 갖다 주신들…….”

도화는 말을 하다가 갑자기 싸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불쾌한 일을 당해서 당장 나가라고 윽박질러도 모자랄 지경인데 그가 오히려 자꾸 도화를 붙잡아 두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저.”

“네.

“저 지금 이상하게 싸한 기분이…….”

“거의 다 왔대요.”

“누가요?”

“경찰이요.”

“경찰이…… 왜?”

도화의 말에 도명이 헛웃음을 지었다.

“주거침입 하셨잖아요.”

“이 모든 게 오해니…… 그냥 넘어가기로 하신 거 아닌가요?”

경찰이라는 말에 도화의 턱밑이 덜덜 떨렸다. 도화는 평생 법을 잘 지키고 살았다. 무단 횡단조차 한 적 없었다. 그런데 지금 경찰이 자신을 잡으러 오고 있다고?

“제가 넘어가겠다고 한 적 있나요?”

도명이 싸늘한 표정으로 놀라서 반쯤 일어선 도화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진짜, 사람 두 번 말하게 하는 재주가 탁월하네요. 제가 버릇없는 거 유난히 못 참는다고 말했잖아요. 도화 씨가 제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선을 넘었다고요.”

지금 이 순간 도화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일단 당장 도망가야 하나? 도망간다 한들 뭐가 달라질까? 도화는 지금 이 순간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주거 침입죄는 형량이 어떻게 되나? 경찰서 한 번 들락날락하면 직장은 역시 잘리나? 도화의 상상 속 어느 것 하나 만만해 보이는 것은 없었다. 역시 호기심은 판도라에게도 도화에게도 독이었다.

“커피 마저 마셔요. 도화 씨. 지금 도망간들 얼마나 도망갈 수 있겠어요?”

“자, 잘못했습니다.”

결국 도화가 할 수 있는 것은 도명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비는 것밖에 없었다.

“정말 잘못했다고 생각하세요?”

도화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는 간절함이 가득했다.

“저기요. 성인이면 똑바로 ‘네.’라고 대답하세요.”

“네.”

“도화 씨.”

도명이 도화의 이름을 부르고 뜸을 들였다. 도화는 그가 들인 뜸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도명이 도화의 턱을 감싸 쥐었다.

“사람이 정말 잘못했다고 생각하면 벌을 받으면 되는 거예요.”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도화 씨가 제 택배 훔쳐보았을 때 제가 용서를 했잖아요. 그죠?”

“네.”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

“제 관대함을 더 큰 무례함으로 갚았잖아요.”

도명이 도화의 목덜미를 손으로 쓰다듬다가 목 뒤를 힘주어 꾹꾹 눌렀다. 도화는 도명이 주는 위압감에 숨이 막힐 정도였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 다 문밖의 사람이 경찰임을 알았다. 도화는 더욱 간절하게 도명의 바짓단을 붙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명의 싸늘한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그, 그러면 그에 합당한 다른 벌을 받겠습니다. 도명 씨에게 직접 벌을 받겠습니다.”

“도화 씨 지금 감당할 수 있는 말을 하는 거예요?”

도명의 입꼬리 끝이 쭉 올라간 채 그 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갑자기 밀려오는 흥분을 겨우 참는 표정이었다. 도화는 그런 도명의 표정을 보자 소름이 돋았다. 도명의 말대로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말을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긴 했다.

하지만 문 앞에서 쿵쿵 울리는 경찰들의 노크 소리들을 들으니 다른 생각은 정지되고 당장의 위기만 모면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도화는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의 표정을 하고 고개를 조심스럽게 끄덕거렸다.

“대답할 때 고개 그딴 식으로 끄덕이지 말라고 했잖아요.”

“네.”

“아무 일 없다는 것처럼 커피 마저 들어요. 저 제가 해 준 음식 남기는 거 싫어해요.”

도명이 도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의 머리 위에서 속삭였다.

“네.”

도화는 얼빠진 얼굴을 하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커피잔을 쥐었다. 그러는 사이 도명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휴, 망신당하러 갈 시간이네요. 누구 덕분에.”

“죄, 죄송합니다.”

도명이 경찰들하고 대화를 하는 사이 도화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커피를 들이마셨다.

“친구가 장난이 심해서. 장난을 치지 말아야 할 것을 가지고 장난을 쳤어요. 죄송합니다.”

도명이 경찰들을 향해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도화가 그의 친구인데 그를 놀라게 하기 위해 집에 숨어들어서 강도가 든 것처럼 꾸며 놓아서 오해해서 그런 신고를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도명이 신고를 하고 상황이 점점 커지니까 나와서 사과하던 중이라고 덧붙였다. 도화는 소파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경찰 중 한 명이 도화를 향해 소리쳤다.

“요즘 세상이 얼마나 흉흉한데 그런 장난을 칩니까! 다 큰 성인이 말이야!”

“죄송합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도명 역시 본의 아니게 폐를 끼쳤다며 사과를 했다. 그렇게 경찰들이 화가 난 채 가 버리고 도화는 도명과 단둘이 남았다. 도명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안도의 한숨을 쉬는 도화만 쳐다볼 뿐 별말이 없었다. 하지만 도화는 이내 자신에게 닥친 문제가 아직도 남아 있음을 깨달았다.

“저, 그러니까…… 저는 어떻게 벌을 받아야…….”

“아픈 거 잘 참아요?”

“네? 아 그.”

도화의 손이 땀으로 얼룩진 채 서로 얽혀 들어가다가 미끄러졌다. 도명의 눈은 도화를 관찰하느라 꿈틀대고 있었다. 그러다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하긴, 제가 벌준다고 위법할 지경까지 벌줄 수 있겠어요? 이건 엄연히 말하면 도화 씨가 동의한 상황도 아닌데. 살면서 엉덩이 맞아 본 적 있어요? 어렸을 때 부모님한테라도.”

그렇게 말하는 도명의 눈길이 은근슬쩍 도화의 엉덩이로 향했다.

“아주 어릴 때는 맞았습니다.”

도화는 운동하던 시절에 선배들한테 엎드려뻗쳐 상태에서 엉덩이가 파랗게 변할 정도로 몽둥이로 맞은 게 생각났지만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손바닥으로 엉덩이 10대 맞는 건 어때요? 충분히 할 만할 텐데요? 안 그래요? 도화 씨 잘못에 비해서 매우 관대한 처사이기도 하고요.”

도명의 말 그대로였다. 그 정도로 자신이 빨간 줄 긋는 걸 막을 수 있다면 충분히 할 만했다.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어서요. 바 상판에 두 손 올리고요.”

도명의 명에 도화는 엉거주춤하며 일어섰다. 막상 엉덩이를 맞으려니 이상한 기분에 손가락 끝이 오그라들었다. 도명은 계속 신경에 거슬리는 것을 말했다.

“저기 허리에 그건 대체 뭡니까? 깁스도 아니고. 빼요.”

도화는 트레이닝복 지퍼를 내리고 테이프로 돌돌 싸맸던 종이 책들을 뺐다.

“왜 이러고 있던 겁니까?”

“칼에 찔릴까 봐…….”

“설마, 그 칼 휘두르는 사람은 저고요?”

“네.”

도명이 황당하다는 듯이 웃었고 도화는 민망함에 얼굴이 발갛게 익었다. 도명은 어서 엉덩이 맞을 자세를 취하라는 듯이 고갯짓을 했다. 도화가 자세를 취하자 도명이 도화에게 다가가 머리채를 쥐어 잡고 바 테이블 바닥에 짓이기며 말했다. 도화의 입술이 차가운 대리석에 쓸리며 뭉개졌다.

“손바닥으로 10대 맞아 봤자 아프면 얼마나 아프겠어요? 저 안의 도구를 쓰면 모를까. 그죠?”

“…….”

“그러니까 이건 아프라고 때리는 것보단 수치심을 느끼라고 때리는 거예요. 다 큰 성인이 어린애도 구분할 줄 아는 잘못을 해서 엉덩이를 맞고 있으면 수치심을 느껴야죠?”

도명은 손가락으로 도화의 두피 속을 파헤치며 속삭였다. 방금 전까지 거칠었던 그의 손가락 끝이 꽤나 미묘하게 그를 안을 훑었다. 도화는 온몸을 뒤덮는 위압감 속에서 기분이 이상해졌다.

“도화 씨.”

“네.”

잠긴 목으로 겨우 대답하는 도화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려왔다.

“지금 벌을 받으면서 느껴야 할 게 뭐라고 가르쳤죠?”

“수치심이요.”

도화의 온순한 대답에 도명은 잘했다는 듯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도명은 도화의 뒤에 서서 그의 허리춤을 한쪽 팔로 감쌌다. 그러자 도화가 어깻죽지가 움찔거리며 화들짝 놀라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도명은 도화가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화들짝 놀라는 것이 귀여워서 피식 웃음을 흘렸다. 뭐 얼마나 대단한 걸 한다고 이리 표정이 심각해지는지. 

도명은 그저 도화가 엉덩이를 더 뒤로 쭉 빼도록 자세를 교정해 주려고 했을 뿐이었다. 말로 설명해 봤자 긴장한 상태의 도화가 바로 알아들을 리가 없으니까.

“저, 저. 그.”

도화는 허리가 갑자기 감싸지자 이 행동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느라 그의 머릿속이 엉켰다. 도명은 당황한 도화를 내려다보면서도 별거 아니라는 듯이 행동했다. 도명이 도화의 허리를 감싼 채로 뒤로 쭉 뺐다.

도화는 여전히 도명의 밑에서 상황을 읽기 위해서 분주히 눈동자를 굴러대고 있었다. 도명은 도화의 헐렁한 트레이닝복 허리 부분을 붙잡고 최대한 위로 쫙 올렸다.

그제야 헐렁한 트레이닝복 바지에 숨겨져 있던 도화의 엉덩이 라인이 보였다.

도화의 엉덩이와 허벅지는 생각보다 보기 좋았다. 하루의 반을 앉아서 컴퓨터 화면 속 숫자를 정리하는 일을 하고 퇴근 후에는 DVD 시청하는 게 전부인 그이기에 도명처럼 관리된 몸은 아니었다.

하지만 기본적인 몸의 비율도 좋았고 근육량도 천부적인 몸이었다.

도명은 도화의 엉덩이를 내려다보며 혀 차는 소리를 냈다. 도명은 좋은 것을 가지고 있을수록 더욱더 윤을 내고 관리하며 길들여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데 관리를 안 하는 도화가 한심했다.

도화는 등 뒤에서 들리는 도명의 혀 차는 소리에 귀가 쫑긋거렸다. 극도로 긴장된 상태에서 상대방에게 등을 내보이고 있는 도화는 그가 내는 모든 소리의 의미를 쫓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도명은 계속 도화의 몸을 탐색했다. 상대방을 효과적으로 굴복시키고 길들이기 위해서 탐색이라는 과정은 건축에서 땅을 다지는 과정과도 같았다. 도명이 도화의 둔부를 쓰다듬었다. 모양은 파악했으니 이제는 살의 점도를 파악하기 위해 힘을 주어 둔부를 꾹꾹 눌러댔다.

“저, 잠깐, 잠깐만요!”

도화가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채 다급하게 외쳤다. 그의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 안 했어요. 설마 이제 와서 하기 싫다는 건 아니죠?”

도화의 머리 위로 도명의 고압적인 목소리가 울렸다.

“그런 건 아닌데, 때릴 거면 바로 때리시지 왜 엉덩이 그, 요상하게 만지시는 건데요.”

“그나저나 수치심을 느껴야 하는 사람이 목소리가 제법 크네요?”

도명이 도화의 머리채를 잡고 힘주어 누르며 그를 질책했다. 도명의 질책에 도화는 끙끙거리다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는 최대한 목소리를 조심스럽게 뽑아냈다.

“그게 아니라 자꾸 이러시면 곤란한 건 제가 아니라 도명 씨 쪽인데요.”

“들어나 봅시다. 이번에도 대체 왜 제가 곤란한 건지.”

“저도 남자고 도명 씨도 남자라서 이렇게 만져도 아무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인데요…….”

도화는 다음 말을 차마 잇지 못하고 테이블 위에 올라간 주먹만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도명은 인내심 있게 도화를 기다렸다. 그리고는 도화가 하는 모든 몸의 언어를 관찰했다. 대체 도명이 얼마나 대단한 걸 했다고 그의 목덜미에는 솜털까지 쭈뼛 서 있었다.

도화는 생각을 마친 뒤 중대한 말을 한다는 듯이 눈썹에 힘을 주었다.

“저 게이거든요. 그러니까 그렇게 만지시다가 제가 서 버리기라도 하면 기분 더러운 건 도명 씨 쪽인데 곤란하시지 않겠어요?”

“아이고, 그러셨습니까?”

도명이 내뱉은 말과는 달리 아주 무미건조한 말투와 표정을 지으며 두 손을 올렸다. 명백한 조롱에 도화가 울컥해서 상체를 일으켜 세워 도명을 노려보았다. 도명과 도화의 눈이 마주쳤다.

사실 도명은 티는 안 냈지만 그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에 놀라기는 했다.

확률상으로도 그랬고 왠지 모르게 도화는 이성애자가 아니면 이상할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동성애자다운 것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도화는 그래 보였다.

도화가 풍기는 성적인 뉘앙스 탓이라기보다는 그가 사회가 그어놓은 선을 넘을 수 없는 사람처럼 보인 탓이 컸다.

“지금 제가 허튼 농담 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도화는 이쯤 되면 확 가열하게 발기라도 해서 용맹한 동성애자임을 드러내야겠다는 오기마저 들었다. 도화는 30년 인생 두 번째 커밍아웃을 주인집 남자에게 하게 될 줄을 몰랐다.

도화가 도명에게 난데없는 커밍아웃을 하게 된 데에는 상대방도 만만치 않은 변태임이 작용했는데 자신이 변태임을 드러내는데 뭐가 문제인가 싶었다. 그래서 그에게 커밍아웃을 하긴 했는데 자신의 일생일대의 두 번째 커밍아웃을 들은 상대방 반응이 영 시큰둥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도명의 포커페이스 탓이 컸다.

“아니요. 설마 도화 씨가 이런 걸로, 그것도 이런 상황에 농담하겠어요? 그냥 아 그렇구나. 싶을 뿐입니다.”

“동성애자 이상하지 않아요?”

도화는 도명을 향해 그리 말하다가 한 가지 깨달음이 머릿속을 강타했다. 도명의 섹스 파트너라는 사람 남자였다. 여자가 기가 막힌 슈트 빨을 내세우며 그날 도명의 뒷마당에 들어온 게 아니라면 말이다.

“설마.”

“네, 저도 동성애자입니다. 설마 지금 깨달으셨습니까?”

도화는 도명을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거의 동물원을 처음 가 본 어린애가 그림책으로만 봤던 동물을 보는 눈빛이었다.

“뭡니까? 이 불경한 눈빛은? 엉덩이 때리는 횟수 늘리고 싶게 만들지 마세요.”

“아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너무 신기해서.”

“동성애자가 동성애자를 신기해합니까?”

도명이 한쪽 눈썹을 올린 채 입꼬리를 실룩댔다. 아무것도 모르는 도화는 데리고 제대로 된 플레이를 할 생각은 1%도 없었지만 정말 플레이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겨우 엉덩이 10대 때리는 거다. 엄연히 말하면 플레이도 아니었다. 그런데 뭐가 이리 진행이 어려운 건지 당혹스러웠다.

“아 그러니까 살면서 동족을 처음 보는 그 느낌 상상이 돼요?”

“뭐 상상씩이나 필요합니까. 제가 아는 동성애자가 어디 한둘인 줄 아십니까?”

도명의 말을 들은 도화의 입이 쩍 벌어졌다.

“한둘이 아니라고요?”

“네.”

짤막하게 떨어지는 도명의 대답에 도화가 더욱 흥분하는 것이 보였다. 순간 도명은 우쭐한 기분마저 들었다. 하지만 도명은 이 유치한 감정을 누르기 위해 올라가는 입꼬리를 겨우 내렸다.

‘이게 무슨 초등학생 나는 이거 있다는 식의 자랑도 아니고. 나 참.’

“몇 명이요?”

“게이만 포함해서 말입니까?”

“게이만 포함……이라는 말은 그 외에 다른 성소수자들도 많이 알고 있다는 뜻입니까?”

“네.”

“우와, 그래서 게이만 포함해서 몇 명 알고 있는데요?”

도화의 질문에 도명은 자신의 지인들을 생각하며 손가락을 접어 들어갔다. 도명의 열 손가락이 전부 접혀 들어가려 하자 도화의 눈이 점점 커졌다. 도명은 지인들을 세는 것을 그만두었다.

‘이 대화에 말려들면 안 돼. 나 이 사람 지금 혼내는 중이라고. 그만하자. 이러다 나까지 해맑아지겠네.’

도명은 애써 포커페이스를 찾고 미간마저 일부러 좁혀 들어갔다. 그러고는 도화를 사납게 노려보며 말했다.

“저기요. 우리 하던 거 있지 않았습니까?”

“아…….”

도화는 급격하게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어색한 동작으로 다시 바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려놨다.

“제가 아까 자세 고쳐 줬잖아요? 기억합니까?”

“아, 네.”

도화는 민망한 표정을 지은 후 엉덩이를 최대한 뒤로 뺐다. 도명이 다시 도화의 뒤로 섰다. 그러던 중 도화는 다시 도명에게 궁금한 것이 생각났다.

“그래서 아는 게이가 몇 명이라는 건지? 정확히 게이 때리는 걸 좋아하는 거예요? 사람 때리는 걸 좋아하는 거예요?”

‘이 얼빠진 질문에 대답하다간 끝이 없겠다.’

도명은 도화의 질문에 대답도 하지 않고 짝 소리 나게 도화의 등짝을 휘갈겼다. 경고의 의미로 때린 것이기에 등짝이 제법 홧홧했다. 도명은 맘 같아선 허리춤에 있는 가죽 벨트를 푸르고 등짝을 휘갈기고 싶었지만 참았다.

도화는 엄연히 말하면 동의를 하고 매를 맞고 있는 것이 아니므로 최소한의 선이라도 지켜야 했다.

도화는 입술을 꽉 다물고 두 손을 가슴 부분에 고이 모았다. 그리고는 긴장되는지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도화는 자신이 게이라서 때리는 즐거움이 더 가중되냐는 질문도 차마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와중에 궁금하긴 했다.

도명이 도화의 둔부를 손바닥으로 쓸어 올렸다. 손맛을 미리 가늠하기 위한 전희 같은 것이었다.

도화는 도명의 손길에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 당장은 매질에 대한 고통보다 도명의 손길에 자신이 느낄까 봐 겁이 났다. 살면서 처음으로 엉덩이의 예민한 부분이 만져진 것이다. 타인의 손길을 못 받아 본 것이 무려 30년이었다.

“설마 지금 즐거운 거 아니죠?”

“그럴 리가요.”

“그렇죠. 그러면 안 되는 겁니다.”

“네. 그럴 리가요.”

도화는 찔리는 마음에 괜히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도화의 말이 끝나자마자 도명의 손바닥이 그의 볼기를 내리쳤다. 근육 깊숙한 곳까지 둔탁하게 울릴 정도로 손이 매서웠다.

“……!”

‘안 아플 거라고 했잖아! 손바닥으로 맞아 봤자 아프면 얼마나 아프겠냐고 했잖아.’

도화는 순간 너무 당황해서 온몸이 빳빳하게 굳을 정도였다. 도화가 당황해서 눈만 깜빡거리는 사이 두 번째 매질이 이어졌다. 그리고 지체 없이 세 번째 매질을 했다. 도명은 엉덩이에 매질하는 것이 절도 있고 능숙해 보였다.

“자, 잠깐.”

도화가 다리를 동동거렸다. 하지만 도명은 경고하듯 도명의 목덜미를 세게 두르고 엇갈린 도화의 다리 사이에 발을 비집어 넣어 억지로 벌리게 했다.

“도화 씨, 심호흡합시다.”

도명은 어이가 없었다. 겨우 손바닥으로 세 대 맞고 무너지다니. 최근 플레이에 익숙한 파트너하고만 해서 더욱 황당했다. SM이 처음인 상대하고 처음 해 보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매끄럽지 못함이 당황스러웠다.

이 와중에도 도화는 눈가에 눈물이 핑 돈 채 도명의 말처럼 애써 호흡을 느리게 내뱉고 있었다.

‘지금 겨우 이게 호흡 정리할 일이냐고.’

“몇 대 남았는지는 아십니까?”

도명이 겨우 세 대 맞고 이러냐고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도화는 도명의 질문을 정말 말 그대로 알아들었다.

“8대 남았습니다.”

“8대요? 도화 씨가 8대 남았다고 했습니다.”

도명의 말이 끝나자 이제야 도화는 자신이 무슨 말실수를 했는지 깨달았다. 뒤늦게 7대라고 울부짖었지만 도명은 인정사정이 없었다. 도명이 발버둥 치는 도화를 위에서 힘으로 눌렀다. 기본적으로 힘의 차이가 있어도 위에서 아래를 누르면 아래에 있는 사람은 그를 이길 답이 없었다.

더군다나 도명처럼 사람을 능숙하게 내리눌러 본 사람을 상대로 말이다.

그런데 도명의 머리가 살짝 흩뜨려질 정도로 도화의 발버둥이 만만치 않았다. 도명은 상대방을 심리적으로는 물론 육체적으로도 휘어잡고 제지하는 데 능숙했지만 그냥 힘이 센 것에는 노련미도 기술도 다 소용없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느꼈다.

‘무슨 힘이 황소 새끼도 아니고.’

“도화 씨 약속했잖아요. 방금 숫자를 잘못 센 것도 제가 아니라 도화 씨입니다. 아닙니까?”

“……네.”

도명의 말에 다시 도화가 얌전해졌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놀랍도록 얌전해진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아픕니까?”

도명의 말에 도화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참아야 하는 상황이죠?”

이번에는 도화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합시다. 그리고 대답 그따위로 하지 말라고 했죠. 몇 번을 말하게 합니까.”

도명이 울화가 치밀어서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말했다.

“네.”

‘이 사람은 다루기가 쉬운 거야? 어려운 거야? 말을 잘 듣는데 학습 효과 왜 이따위야. 어떻게 가르치고 가르쳐도 제자리인 거지?’

도명은 흘러나온 머리를 쓸어 넘기며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는 바들바들 떠는 도화의 엉덩이를 최대한 힘주어 때리기 시작했다. 때리는 도명의 손바닥이 빨갛게 달아오를 정도였다.

도화는 일정한 강도와 속도로 엉덩이를 맞자 온몸에 식은땀마저 송골송골 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도명의 손바닥이 다가오는 느낌이 오면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 정도였다.

“흐앗!”

“겨우 이거 맞으면서 우는 소리입니까?”

도명에게 중간에 제발 봐 달라고 하려다가 겨우 참았다. 도화는 눈을 질끈 감고 호흡을 옅게 하며 이 고통의 시간이 어서 지나가길 바랐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이상야릇한 기분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너무 맞느라 둔부가 발갛게 달아오른 건지 기분이 정말 이상한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도명이 마지막 손 매를 날리고 갈무리하듯 손바닥을 도화의 볼기에 지그시 눌렀다. 살짝 부은 뜨거운 엉덩이 살에 느껴지는 타인의 뜨거운 손바닥 감촉에 도화는 순간 엉덩이를 부르르 떨었다. 가랑이 사이도 조금 뜨거웠다.

도화가 떨리는 눈으로 자신의 가랑이 사이를 쳐다보았다. 도명이 도화의 바지를 바짝 끌어 올리고 있어서 볼록한 자신의 앞섬이 보였다. 도화는 엉덩이가 따갑고 뜨거운 감각도 순간 못 느낄 만큼 당황했다. 수치심이 도화의 온몸을 감쌌다.

“도화 씨.”

도명이 도화의 이름을 부르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네, 네!”

자신이 살짝 발기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은 도화는 도명의 의미심장해 보이는 목소리에 심하게 긴장했다. 도명의 손이 도화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수고했습니다.”

“아, 네.”

매질이 끝나자 도명은 내내 단단히 동여 잡고 있던 도화의 바지를 놓았다. 그러나 도화가 완전히 발기하지도 않았을뿐더러 트레이닝복은 헐렁해서 그가 발기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 너무 다행이라 도화는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저, 이제는 정말 올라가 봐도 되겠죠.”

“네. 그러세요. 아 잠시만요.”

도명은 그리 말하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도명이 사라지고 도화는 두 손을 모은 채 어색하게 서 있었다. 그의 넓은 어깨가 M자를 그리며 오그라들어 있었다. 오히려 엉덩이 매질을 당하고 있었던 순간보다 끝나고 나니 도명이 말한 수치심이 진하게 몰려왔다.

차라리 아플 거라고 생각하고 각오하며 맞았으면 놀라지도 않았을 텐데 생각보다 아파서 정신이 너무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맞을 때는 크게 수치심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도화는 민망한 가운데 도명의 집 한가운데 멍하니 서 있는 그 민망한 기분을 회피하기 위해 커다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댔다. 그러다가 자신이 먹다 남은 도명이 끓여 준 커피가 보였다. 3분의 1쯤 남은 차게 식은 커피를 응시하다가 도명의 말이 생각났다.

‘저 제가 해 준 음식 남기는 거 싫어해요.’

도화가 남은 커피를 급하게 들이켰다. 지금은 이미 차갑게 식은지라 한꺼번에 들이키는 건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그때 도명이 무언가를 들고 나왔다. 그러다 커피를 입안에 탈탈 털어 넣고 있는 도화와 눈이 마주쳤다.

도명은 도화를 멀뚱히 보다가 이내 입꼬리를 진득하게 올렸다. 그가 자신이 해 준 음식을 남기는 걸 싫어하는 말을 신경 썼다는 게 흡족했다.

도화는 순간 자신이 커피에 환장한 인간처럼 보여서 민망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이거 받아요.”

“이게…… 아.”

어느새 도화의 손에는 딜도 하나가 들려 있었다. 도화는 손을 달달 떨며 대체 이걸 왜 주는지 설명하라며 눈을 크게 뜨고 도명을 쳐다보았다. 도명은 턱 짓으로 도화의 가랑이 사이를 가리켰다.

“거기 섰잖아요. 돌아가서 자위 필요하지 않아요?”

도명이 아무 반응도 없어서 못 알아챘다고 생각했는데 이리 딜도까지 챙겨 주니 할 말을 잃어버렸다.

“아닌데요.”

도화는 일단 우겨 보기로 했다. 도명은 도화의 말을 없는 말 치부하며 물었다.

“탑, 바텀, 아니면 둘 다?”

도명은 도화에게 더 잘 맞는 자위 용품을 소개해 주려고 도화의 성향을 구체적으로 묻기 시작했다.

“몰라요.”

“그걸 왜 몰라요?”

‘왜 모르긴, 남자랑 자 본 적도 없고, 굳이 생각해 본 적도 없으니까!’

지금 이 순간 도화는 비참한 기분마저 들었다.

“저, 왜 도명 씨랑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아 맞다. 도화 씨, 오늘 게이 처음 본다고 그랬죠. 아, 네 그래요.”

‘내 사정 이해하지 마. 눈물 나올 것 같으니까.’

도화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기만 하자 도명이 욕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페니스 자체를 자극하는 것도 챙겨 줄까요? 아니면 손으로 직접 푸는 걸 선호해요? 자위는 해 봤을 거 아니에요?”

“저 도명 씨랑 이런 이야기 하는 거 불편한데요. 우리 안 친하잖아요. 저 좀 제발 제 집으로 올라가게 해 주시겠어요. 제발요.”

도화가 급기야 울먹울먹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도명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화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멍한 얼굴로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도대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싶었다. 그렇게 한참을 멍 때리고 있는데 손 안의 감각에 묵직한 것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건 대체 왜 들고 온 거야.”

도화의 손에는 도명이 챙겨 준 딜도가 들려 있었다.

“으아아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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