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길한 징조들
도화의 삶은 너무나도 견고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언제나 같은 시간대, 같은 풍경들을 보면서 하루를 보냈다. 2층에 있는 집에서 내려오면 낡은 동네 슈퍼가 보였다.
주인집 할머니가 운영하는 슈퍼인데 안은 언제나 조금 어두워 보였다.
이 익숙한 거리에서 조금 나가면 나오는, 낮에도 안이 오렌지빛으로 환하게 보이는 화려한 상점들과는 달라 보였다. 자동문은커녕 유리로 된 강화 도어도 아니었다.
옆으로 밀면 찌걱거리며 열리는 미닫이문이었다. 미닫이문 알루미늄 테두리가 조금 일그러진 탓이었다. 상점 안 선반에는 여러 가지 물건들이 가득 쌓여 있었고 물건들의 회전율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애초에 이 주변 일대가 상가라기보다는 주택들이 주로 있는 곳이었고 주택들의 밀집도도 그렇게 높지 않았다. 여기서 조금 나가면 화려한 상점들이 있는 탓도 컸다. 굳이 주택들밖에 없어 보이는 이곳으로 물건을 사러 올 일은 많이 없었다. 아는 사람만 찾아오는 그런 슈퍼였다.
그래서 그런지 할머니가 부지런히 라면 봉지에 쌓인 먼지를 털어야만 했던 때도 있었다. 그래도 무심코 유통기한 지난 물건을 여기서 사는 일은 없었다.
이 지하를 포함한 2층짜리 적갈색 벽돌 건물 전체가 본인 건물이라 폐업 신고 없이 버티는 모양이었다.
도화가 살고 있는 2층에 있는 집은 크기와 환경에 비해서 월세가 많이 쌌다. 볕도 잘 들었고 건물도 튼튼했다. 수도관도 말썽을 부린 적이 없었다.
현관문을 열고 나오면 적당한 크기의 개인 앞마당이 있었고 부엌 겸 거실이 있었다. 그리고 침실로 쓰는 방 하나, 옷 방으로 쓰는 작은 방, 욕조까지는 없어도 샤워기가 달린 화장실이 있었다. 이런 조건으로 월세가 30만 원인 건 정말 행운이었다.
이 집으로 이사 온 건 대학생 때였다. 그리고 도화의 나이가 30살이 될 때까지 주인집 할머니는 월세를 올린 적이 없었다.
도화가 집세만큼이나 주인집 할머니에 대해서 좋게 생각하는 이유는 오랫동안 집으로 엮인 사이 임에도 불구하고 도화에 대해서 아무것도 묻지도, 참견하지도 않는다는 점이었다.
도화가 일을 나가기 위해서 계단을 내려오면 주인집 할머니의 슈퍼를 지나가야만 했다.
도화가 주인집 할머니를 향해 무뚝뚝한 눈인사만 하고 지나가도 그녀는 도화의 넉넉지 않은 넉살에 대해서 타박하지도 않았고 지나치게 단조로운 그의 일상을 묻지도 않았다.
애인은 왜 계속 없는지, 친구는 왜 그렇게 없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도화에게 그것은 아주 큰 배려를 받는 느낌이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것은 도화에게 정말 중요한 문제였다.
도화는 그날도 정해진 시간에 퇴근을 하면서 불 꺼진 슈퍼를 보며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시간을 스노우볼 안에 가두고 같은 시간을 돌리는 것처럼 항상 비슷한 풍경이 느리게 돌아가고 있었다.
저녁이면 낡은 슈퍼 유리창에 노란불이 스며들었고 의자에 느릿하게 앉아 있는 주인집 할머니가 TV를 보는 장면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불이 꺼져 있었다. 도화는 할머니 연세가 있으니 괜히 을씨년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거의 10년 가까이 본 사이지만 딱히 개인적인 대화를 하는 사이는 아니었기에 어디 가시면 간다고 말씀하시는 분은 아니었다.
할머니는 도화와는 달리 일 년에 서너 번은 가족 모임에 나가시는 것 같았고 할머니를 친척들이 가게이자 집 앞까지 데려다주시곤 했다.
할머니가 도화에게 가족 모임이라고 직접 언급은 안 하셨지만 그녀를 데려다주는 사람들의 분위기나 연령대, 생김새를 보면 가족 모임에 갔다 온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었다.
도화는 이번에도 그럴 거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괜히 오늘은 유난히 불 꺼진 가게 분위기가 싸늘했다. 도화는 슈퍼 문을 두들기려다 한참을 망설이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도화는 계단을 올라가면서 싸한 기분에 계속 목덜미만 쓸어 넘겼다.
그리고는 습관적으로 DVD를 아무거나 꺼내서 노트북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입고 있는 품이 조금 넓은 정장을 옷걸이에 걸고 티셔츠와 익숙한 트레이닝 바지를 꺼냈다.
갈아입을 옷을 준비하는 동안 DVD가 돌아가고 노트북에 연결된 성능 좋은 오디오를 통해 공포영화의 음산한 소리가 방 안에 퍼지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 조용히 퍼지는 조용한 오르골 소리와 바람 소리가 방 안으로 퍼졌다. 그제야 목덜미에 솜털이 조금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영화를 틀었지만 굳이 보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집 안 책장에 가득 쌓인 DVD들은 이미 여러 번 본 것들이었고 레퍼토리를 다 외웠을 정도였다.
도화는 화장실에 들어가 간단한 샤워를 했다. 샤워하다가 물을 잠시 잠글 때면 DVD 속 음산한 효과음들이 나지막하게 들렸다.
도화는 싸한 느낌에 어깨를 움츠리면서도 딱히 배경음처럼 깔아 놓은 DVD를 끌 생각은 들지 않았다.
도화는 샤워를 마치고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몸을 하고서 거실에 나왔다. 거실에 나오니 음산한 영화 속 효과음이 더욱 잘 들렸다. 그는 대충 몸을 말리고 꺼내놓은 목이 늘어난 티셔츠와 트레이닝복을 걸쳤다.
물기를 대충 말린 탓에 티셔츠 등 부분이 살짝 젖었다. 그리고는 냉장고에서 맥주와 오징어를 꺼내서 침대 위에 걸터앉아서 틀어놓은 공포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거실에 TV가 있지만 그는 침대에 앉아 불을 다 끄고 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했다. 노트북이라 화면이 그다지 크지 않다는 것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냥 이 방 안이 그의 온 우주인 것처럼 앉아서 불을 끄고 공포영화를 보는 것이 그의 하루의 마지막이었다.
여자의 비명 소리가 도화의 머릿속에서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보고 또 본 영화라 딱히 끝이 궁금하지도 않고 공포의 절정에 대한 자극도 둔해졌다.
도화는 그대로 공포영화를 틀어놓고 자다가 잠이 들었다. 그날 밤 할머니를 태운 그녀의 친척 차가 가게 앞으로 오는지 신경 쓰다가 잠이 든 것 같았다. 일단은 도화가 잠들기 전까지 할머니의 가게 앞에 차가 미끄러져 들어오는 소리는 못 들은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도화는 출근 준비를 했다. 그리고 평소와 똑같이 가게 앞으로 자연스럽게 나 있는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웬일로 부지런한 할머니가 슈퍼를 열지 않았다. 싸한 감각은 어젯밤보다 더욱 깊어졌다.
도화는 가게 앞에 서서 낡은 문을 두드렸다. 살짝 휘어진 철 프레임과 유리가 작은 충돌에도 요란스러운 소리를 냈지만 안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도화는 고민 끝에 문을 열어 보려 했지만 안은 단단하게 잠겨 있었다.
도화는 할머니 전화번호를 눌렀다. 그런데 수화기 건너편에서는 할머니 목소리가 아닌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 톤이 온화했다. 하지만 뭔가 말투가 칼 같은 면이 있었다.
“누구시죠?”
“그쪽이야말로 누구시죠?”
“심미영 할머니 조카입니다.”
“아…… 네.”
“대답했으니 제가 다시 질문해도 되죠? 누구시죠?”
수화기 건너편에 있는 남자의 질문에 도화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할머니와 오래 알고 지내긴 했지만 특별히 사이가 돈독하지도 않았다. 대답을 괜히 끌게 됐지만 결국 도화의 입술 끝에서 나올 말은 하나였다.
“할머니네 집 세입자입니다.”
“아, 네. 무슨 일이시죠?”
“그게, 가게 문이 닫혀 있어서요. 아무래도 연세가 있으시다 보니까.”
“이모를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할머니는 괜찮으시죠?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오지랖을 부렸습니다.”
“괜한 오지랖은 아니신 게 지금 병원입니다.”
수화기 건너편 남자의 목소리는 병환을 앞둔 이모를 둔 남자치고는 침착해 보였다. 그래서 애써 불길한 생각은 지우고 말했다.
“큰 병은 아니시죠?”
“장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럼 해야 할 일이 많아서 끊겠습니다.”
남자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도화는 순간 살짝 얼이 나가 버렸다. 워낙 노령의 할머니라서 이런 순간이 올 거라고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일상 속의 누군가가 죽었다는 것이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도화는 딱히 할머니와 사이가 돈독하지도 않았으면서 할머니가 앉아 있던 비닐 장판이 덮인 평상에 앉아 하늘을 보고 있었다. 도화는 파란 하늘 속에서 천천히 흘러가는 하얀 구름을 쳐다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이렇게 날씨 좋은 날에도 누군가가 죽는구나.’
날씨 좋은 날이라고 사람이 안 죽을 리가 없다. 도화는 이성적으로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그게 참 이상했다. 이렇게 좋은 날, 사람이 죽다니.
할머니가 돌아가셨어도 도화는 회사에 지각을 하지 않지 않았다. 평소보다 5분 늦게 도착했을 뿐이었다. 평소에 적어도 10분 전에 도착해서 책상에 앉아 있기에 할머니가 돌아가셨음에도 그의 일상에는 변화가 없었다.
기분이 이상하긴 했다. 그리고 시간이 좀 지나니 이런저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주인집 할머니가 돌아가셨으니 앞으로 살고 있는 집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최악의 경우 조만간 이사를 갈 준비를 해야 할 수도 있었다.
그러다가 수화기 너머의 남자의 태도가 심히 거슬렸다. 이모가 돌아가셨음에도 침착했던 그 수화기 너머 목소리가 묘하게 야속했다. 딱히 도화가 그녀의 가족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수화기 너머 목소리 톤이 부드럽고 온화해서 더욱 기묘해 보였다.
도화는 얼굴을 직접 맞대고 만나보지도 않은 남자가 야속해졌다. 도화는 일단은 장례식에는 가야 하나 싶어서 다시 주인집 할머니의 전화번호를 누르려다가 말았다. 그럴 자격이 되나 싶었다. 그냥 세입자였을 뿐인데. 할머니 집에서 아주 오래 산 그냥 세입자.
조문한다 해도 그녀의 가족들한테 ‘아, 세입자입니다.’라는 말 외에 다른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색한 분위기가 절로 상상되고 심한 오지랖을 부리는 것 같았다.
도화는 책상 위를 장식한 스노우볼을 손끝으로 꾹 눌렀다. 손끝에 닿은 얇은 유리의 감각이 견고해 보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긴 했나 보다. 그 후로 낡은 슈퍼의 시간은 영원히 멈춘 것 같았다. 그 앞을 매일 지나가는데 이제 나는 건 먼지 냄새뿐인 것 같았다.
그렇게 도화가 시간이 멈춘 슈퍼를 지나가길 한 달째, 사람들이 슈퍼를 철거하러 온 듯했다. 인부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낡은 선팅지를 벗겨내기도 하고 유리창을 부수기 시작했다.
도화는 이 장면이 자신이 본 공포영화 속 어떤 장면보다도 폭력적으로 보였다. 할머니가 살았던 집을 그대로 둘 생각을 하는 사람은 그녀의 친척 중 아무도 없었나 보다.
도화는 이러다가 자신 역시 이 집에서, 이 동네에서 철거당할 거라는 공포에 휩싸였다. 도화는 어깨를 움츠린 채 아무것도 못 느끼는 사람인 것처럼 계단으로 터벅터벅 올라갔다. 그리고 DVD 볼륨을 최대로 높인 채 공포영화를 봤다. 그래야 저 아래에서 공사를 하는 소리가 안 들릴 것 같았다.
공포영화 속 소리와 공사하는 소리가 서로 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사는 곧 멈췄다.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대에 공사를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제 남은 소리는 도화가 최대한으로 소리를 높이 키운 공포영화의 음산한 소리뿐이었다.
공사 소리는 멎었지만 도화는 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도화의 심장이 심하게 쿵쿵 뛰기 시작했다. 지독하게 우울하고 위태로운 밤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붉은색 벽돌 건물에는 유리 파편이 박히기 시작했다. 건물의 하중을 지지하기 위한 구조 벽만 남기고 세련된 흑색 금속 테두리가 달린 유리들이 꿰어 맞춰졌다.
저런 것들을 소위 말하는 잘나가는 거리 상점들에서 많이 봤다. 하지만 이 거리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도화의 미간이 이 모든 것이 꼴사납다는 듯이 구겨졌다.
남은 건 최소한의 적갈색 벽돌뿐이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차가운 격자 금속과 유리로 가득 채워졌다.
일하는 인부들 사이에 잘 차려입은 남자가 하나 서 있었다. 어수선한 공사 현장이었기 때문에 남자의 깔끔함은 더욱 눈에 띄었다. 햇볕이 스며들기 좋은 갈색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올린 것이 보였다.
도화는 그 남자와 눈을 마주치는 것이 본능적으로 싫었다. 도화는 마치 집 안에 급한 볼일이 있는 사람처럼 재빨리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도화가 샤워를 마치고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고 있을 때 누군가 그의 집 문을 두드렸다. 도화는 본능적으로 문밖의 남자가 적임을 깨달았다.
도화는 집에 아무도 없는 척을 하려다가 이게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도화는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역시나 아래에서 살짝 봤던 갈색 머리의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도화를 향해 눈꼬리를 부드럽게 휘며 웃었다.
“안녕하세요.”
“네.”
도화의 입에서 나온 말이 짧고 무뚝뚝했다. 노골적인 적대감에도 도화의 맞은편에 서 있는 남자는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클래식한 더블브레스트 코트에 살짝 주름이 세워진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신발은 올라오면서 닦았는지 먼지투성이 현장에 있었던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말끔하게 구두코가 빛나고 있었다. 거기다가 뱀처럼 가느다란 넥타이가 그의 목을 단단하게 조이듯 매여 있었다.
“전에 통화했던 것 같은데요? 제 목소리 낯선가요?”
“아……!”
도화는 주인집 할머니의 부고 소식을 담담하게 알리던 남자의 특유의 목소리 톤이 생각났다.
“안녕하세요. 유도명이라고 합니다.”
도명이 도화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도명이 악수를 하고자 도화에게 다가오자 향수 냄새가 아닌 깔끔한 비누 냄새와 함께 희미하게 풀냄새가 났다. 도화는 마지못해 손을 내밀고 종국에는 손을 잡아 뺐다.
“이건 그동안 공사 소리 때문에 스트레스받으셨을 것 같아서요.”
도명이 도화에게 좋은 냄새가 나는 빵과 커피를 내밀었다. 그러면서 도화를 향해 넌지시 웃으며 직접 굽고 로스팅한 원두로 내린 커피라고 넉살 좋게 속삭였다.
도명이 건넨 종이봉투 안에서 후각을 자극하는 버터 냄새와 커피 냄새가 새어 나왔다. 불청객이 지독하게 달콤한 것들을 들고 왔다. 도화는 무심한 척 그가 건넨 것을 받았다.
“저와 할 말은 이것뿐인가요?”
“이 집 계약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왔습니다.”
도화는 그의 말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동안 그가 느낀 불쾌감을 잔뜩 담아 다른 집을 곧 알아보겠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그가 오랫동안 살았던 이 골목의 풍경이라도 지켜야 하나 고민되었다.
“일단 이모님과는 계약 기간이 7개월 남았네요.”
도명이 들고 온 서류를 다시 한번 뒤적이며 말했다.
“보통 매년 계약을 연장했습니다. 당연하다는 듯이요. 전 지금까지 월세 한 번 밀린 적도 없습니다. 무려 9년 5개월 동안이나요. 아, 월세 올리시려고요? 얼마나요? 잠깐만요. 그전에 당신이 이 모든 일을 대리할 자격은 확실히 있나요?”
도화는 자신의 입에서 자동으로 나오는 말들을 들으며 자신이 아직 이곳을 떠날 마음은 없는 것을 깨달았다. 도화는 자신의 절박함에 화가 났다.
“일단은 제가 이 집을 이모님으로부터 유산으로 물려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제가 집주인인 거죠. 어때요? 이제는 이런 대화를 나눌 자격이 되나요?”
“네…… 그러네요.”
도화는 도명의 말에 할 말이 없었다. 주인집 할머니에게 따로 묻지는 않았지만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애초에 결혼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자세히 대화를 나눠 본 적은 없기에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남들 다 하는 결혼을 하지 않는 특별한 이유 같은 건 없어 보였다. 그냥 할 필요도, 확신도 없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9년 5개월 동안 매일 빠짐없이 보는 그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런 그녀가 도명이라는 남자에게 집을 넘겨주었다. 도화가 주인집 할머니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곱씹어 보는 편은 아니었지만 집을 물려줄 정도면 적어도 9년 5개월이라는 시간 안에서 도명의 얼굴이 조금이라도 본 듯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도화의 마음 한구석에서 그가 이 집을 물려받을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드라마 속에서 보던 이상한 친척 무리들이 저절로 생각났다. 평소에는 할머니에게 관심도 없다가 그녀가 죽자마자 뱀처럼 사악하게 다가와 재산이나 가로채는 그런 친척 무리들.
도화의 머릿속에서 도명은 그 비열한 친척 무리들 중에서 가장 발이 빠른 사람일 뿐이었다.
도화의 눈앞에 서 있는 남자, 도명은 스쳐 지나가며 봤더라도 기억에 남기 좋은 사람이었다. 일단 본인을 정제하고 꾸밀 줄 알았고 본판도 좋았다. 가만히 있어도 보기 좋을 얼굴을 더 보기 좋게 윤을 냈으니 눈이 안 돌아갈 수 없었다.
남자들이 질투 섞인 시선으로 자주 말하는 ‘기생오라비’ 같은 남자였다.
거기다가 도화는 동성애자였으니 다른 이성애자 남자들에 비해 잘생긴 남자에게 눈길이 더 갔다. 일단 지나치게 멀끔한 도명은 도화의 취향은 아니었지만 일단 잘생기면 기억에 남는 법이다.
두 사람은 키는 엇비슷했으나 타고난 체형은 도화 쪽이 더 건실해 보였다. 도화가 회사에 갈 때마다 입고 다니는 그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품이 넓은 그 정장만 아니면 그가 하루 종일 앉아서 숫자와 영수증 같은 걸 다루는 일을 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평소 순하기만 하던 도화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면 사람들은 은근히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곤 했다.
하지만 도화의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자연스럽게 도화를 내려다보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당신이 지금 느끼는 적대감이라든지 기분 같은 것은 나와 아무 상관 없다는 듯, 그저 절대적인 위치에서 관찰하기만 하는 눈동자 움직임이었다.
이제는 도명이 도화가 살고 있는 집의 집주인이라는 더 유리한 위치 때문인 것도 있지만 그는 그냥 이 모든 게 자연스러운 사람 같았다.
“성함이…….”
도명이 서류를 응시하며 도화의 이름을 찾았다.
“이도화 씨네요. 혹시나 했는데 꽃 화(花)네요.”
“그게 뭐요.”
도화는 이제 도명이 집주인이라는 것을 안 이후로 계속 시선을 내리깔다가 도명의 마지막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최근에는 그런 일이 잘 없지만 도화는 유년시절에 이것 때문에 놀림을 많이 받았었다.
“다른 뜻은 아니고…… 네, 다른 뜻은 없습니다. 일단 월세를 올릴 생각은 없습니다. 이모님이 도화 씨에게 약속하신 거니 남은 7개월 동안은 집을 비워 달라는 소리 하기도 마음이 좋지 않고요.”
도명의 말에 도화는 날카로워졌던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하지만 ‘남은 7개월 동안’이라는 말이 묘하게 신경 쓰였다. 도화가 도명의 거슬리는 말을 곱씹기도 전에 도명이 정중한 어투로 말했다.
“하지만 7개월 후에는 비워 주셔야겠습니다. 언제나 자동으로 계약 연장을 하셨기에 미리 말씀 안 드리면 도화 씨가 나중에 난감하실 것 같아서요.”
“적은 월세가 신경 쓰이시면 올리셔도.”
“금액이 문제가 아니라 월세 안 놓을 겁니다. 제가 여기에 들어와서 살 겁니다.”
도명의 말에 도화는 완전히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건 협상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하긴 당장 방 빼달라고 하는 것보다는 나은 건가 싶었다. 7개월이면 집 구하러 다닐 시간도 충분했다. 도화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서 있었다.
“이곳에 정이 많이 드신 것 같네요. 일이 이렇게 되어서 유감입니다.”
도명이 도화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도명의 시선에 도화는 괜히 자존심이 상했다.
“그럴 리가요. 제 집도 아닌걸요. 평생 월세로 살 것도 아니고요. 이번엔 전세로 옮겨야죠.”
도명이 도화를 여전히 빤히 쳐다보다가 속아 준다는 듯이 시선을 돌렸다.
“제가 쉬는 데 방해가 되었습니다.”
“네.”
도화는 도명이 보는 눈앞에서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았다. 철문인 탓도 있지만 불편한 대화가 드디어 끝났다는 생각에 도화가 서둘러 닫은 탓도 있었다.
도명은 어서 사라지라는 듯이 시간의 틈 없어 닫힌 문 앞에서 황당하다는 듯이 웃었다. 문 여는 순간부터 까칠하더니 마지막까지 까칠했다. 하지만 도명은 도화의 불친절한 접객 태도에도 기분이 상한 것 같지는 않았다. 정확히는 도화의 태도 같은 건 딱히 상관없었다.
도명이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도화는 아무렇지 않은 척 도명이 건넨 빵과 커피를 식탁 위에 내려놓고 노트북을 펼쳤다. 그리고는 열심히 다른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아까 도명에게 이번에는 전세로 옮기겠다는 말은 그와 자존심 싸움을 하느라 허언을 한 것은 아니었다. 집세가 꾸준히 나갔지만 비교적 소액이었고 도화는 기본적으로 체력도 좋았고 성실했다.
그는 대학교 다닐 때도 언제나 일을 했고 졸업하고 나서도 바로 일을 시작했다. 거기다가 사람들을 만나느라 돈 쓸 일도 거의 없었다.
그가 만나는 사람은 그의 오래된 친구인 진영 외에는 딱히 없었다. 그마저도 자주 만나지 않았다. 진영이 전화를 걸어 만나자 하면 거절하지 않는 정도였다.
딱히 쇼핑을 즐기지도 않았다. 그가 돈을 쓰는 것은 새로 나온 공포영화 DVD를 사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넉넉하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모은 목돈에다가 은행 대출을 조금 끼면 전세를 구할 수 있었다. 혼자 살기 때문에 그렇게 큰 집을 구할 필요도 없으니 할 만했다. 지금 검색해 보니 대충 전세를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평생 살 생각은 아니었잖아.”
그렇게 중얼거리는 도화의 목소리가 조금은 씁쓸해 보였다. 그렇게 40분 정도 검색을 하다가 허기가 밀려왔다. 냉장고를 뒤져도 먹을 것은 딱히 없었다. 장을 봐야 하는 타이밍인 것이다.
도화는 보통 이럴 때면 바로 아래층 주인집 슈퍼로 내려가 통조림이나 라면, 냉동식품 같은 인스턴트 음식 같은 것을 사 가지고 올라왔다. 주인집 할머니는 왜 매일 그렇게 부실하게 먹느냐는 말도 안 했다.
어느 순간부터 안 팔던 신선한 야채나 두부, 같은 것을 슈퍼 앞 가판대에 올려놓을 뿐이었다.
도화는 일단 당장 아랫집 새 주인집 남자와 마주치는 것이 불편했고 장 볼 여력도 안 났다. 그러던 중 도명이 가지고 온 빵이 눈에 보였다.
도화는 그제야 아까부터 계속 고소한 버터 향이 나던 그 종이봉투를 열어 보았다. 살짝 황금빛이 도는 갈색 빵 3개가 들어 있었다. 도화는 도명에 대한 불쾌감과는 별개로 그 모양새를 보고 날 서 있던 기분이 살짝 녹아들었다.
손에 쥐니 딱 손바닥에 움켜쥐기 좋은 크기였다. 위에는 잘 볶은 깨가 뿌려져 있었다. 도화는 빵을 한입 베어 물었다. 그러자 부드러운 식감과 함께 달콤한 팥 앙금이 입안으로 배어 들어왔다.
팥 앙금 밑에는 쫄깃한 찰떡이 깔려 있었고 그 밑에 부드러운 크림이 얇게 발라져 있었다. 표정이 녹아내릴 정도로 달콤했다.
도화는 평소에 팥 앙금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에게 팥 앙금은 너무 달았다. 하지만 도명이 들고 온 빵 속 팥 앙금은 양이 적당해서 기분 좋은 달콤함만 안겨 주었다.
도화는 기분이 좋아졌지만 왠지 이 순간 빵을 먹으면서 웃어 버리면 그 사악한 남자에게 무릎을 꿇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올라가는 입꼬리 끝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는 빵과 함께 가져온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커피 맛은 너무 세지 않았다. 적당한 쓴맛과 고소한 맛이 올라오면서 혀끝에 감돌고 있던 팥 앙금의 단맛을 깔끔하게 정리해 주었다.
도화는 결국 남자가 트로이 목마처럼 들여놓은 음식 앞에서 웃어 버렸다. 도화는 패배감에 한 입 베어 물은 빵을 손에 쥔 채로 고개를 숙여 버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 밑에 빵집 생기려나 보다.
‘아 젠장…… 성공하겠는데……? 아 젠장!’
요즘 음식 맛만 좋으면 자리가 안 좋아도 SNS로 홍보 잘해서 성공하는 작은 가게들 사례를 많이 봤다. 거기다가 사장이 저 정도로 잘생겼으면 홍보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
어느덧 도화의 아랫집, 가게의 인테리어 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 공사하던 내, 외부 마감재들도 다 정리되었다.
전기도 들어왔고 창가에는 세련된 펜던트 등이 달렸고 외부 벽에는 벽 등이 달려서 벽을 밝혀 주고 있었다. 밖에 깔고 있던 데크도 완성되었다.
그리고 간판도 설치하러 왔는지 아침부터 작은 트럭이 하나 와 있었다. 도화는 불과 두 달 만에 너무도 많이 바뀐 일상의 풍경에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진짜 흔적조차 없네.”
도화가 아침 출근길에 발걸음을 멈추고 혼잣말을 하고 있을 때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도명이었다.
도명은 잘 다려진 하얀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고 카키색 앞치마를 매고 있었다. 도명은 도화와 눈이 마주치자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인사를 했다. 도화는 상대방이 인사를 하니 마냥 씹을 수는 없어서 고개만 작게 끄덕였다.
그리고는 도명의 옆을 지나가려는데 도화를 향해 도명이 뭔가 맛있는 보이는 것을 내밀었다.
“개업 떡 대신 드리는 샌드위치이자, 같은 동네 주민이 된 기념으로 돌리고 있는 겁니다.”
“……”
도화가 경계심이 어린 눈초리로 도명이 내민 음식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도명이 황당하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 근처 사는 분이면 다 돌렸습니다. 동네 분이라면 아무나 다 주는 겁니다.”
도명이 고갯짓으로 아이스박스를 가리켰다. 아이스박스에는 예쁘게 포장한 샌드위치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빵집 엽니까?”
“네?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도화가 의외라는 듯이 목소리 끝을 살짝 올렸다. 그러자 도명은 도화의 심중을 읽은 것처럼 살짝 웃음기를 참으며 말했다.
“어제 드린 빵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도명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입꼬리를 슬며시 올렸다. 도화는 도명의 이런 태도가 묘하게 거슬렸다.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은 오만방자한 미소.
“…….”
“다행입니다.”
도화는 도명에게 대충 인사를 하고는 출근을 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숫자로 가득한 액셀 화면을 보다가 뻐근해지는 눈과 뒷목을 엄지로 주물럭거리며 일어섰다. 그리고 탕비실로 가서 인스턴트커피를 타 마시면서 생각했다.
‘그래서 빵집 아니면 뭐 하는 곳인데……? 요즘 어디든 있다는 카페인가.’
그러다가 도명이 쥐여 준 샌드위치가 생각났다. 샌드위치를 감싼 갈색 종이를 여니 기분 좋은 냄새가 났다. 크루아상 사이에 처음 보는 얇게 저민 햄, 토마토와 양상추가 들어가 있었고 소스가 뿌려져 있었다.
도화는 본능적으로 침을 꿀꺽 삼키고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그러자 바삭한 크루아상 껍질이 입안에서 부서지면서 버터 향이 입안에 퍼지더니 그다음에는 야채가 아삭거리며 입안에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짭조름한 햄이 입안을 고기 맛으로 가득 차게 했다.
‘빵집이어야 하는데…….’
도화의 도명에 대한 첫인상은 여전히 나쁜데 입이 너무 달았다. 그리고 계속 거슬리는 게 하나 있는데 그놈의 넥타이는 왜 항상 그렇게 꽉 조여 매냐는 것이었다. 그 전에 봤을 때도 그랬고 오늘 아침에도 그랬다.
와이셔츠 옷깃에 살짝 주름이 잡힐 정도로 꽉 조여 맨 넥타이라니! 그런 차림은 하루 종일 앉아서 종이나 넘기고 컴퓨터 화면만 노려보는 도화에게도 답답했다.
퇴근 후 도화는 완성된 도명의 가게를 볼 수 있었다. 오래된 벽돌과 금속, 차가운 유리로 만들어진 가게 안에는 녹음이 우거져 있었다.
간판 크기는 작았다. 이곳에 가게가 새로 열렸다는 것을 알릴 생각은 그다지 없는지 건물 모퉁이에 작은 LED 간판이 들어와 있었다. 간판에는 ‘BISCUIT FOREST’라고 적혀 있었다. 도명이 연다는 가게는 꽃집인 모양이었다.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그 안에 있는 식물들은 익숙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주는 게 아니라 마치 낯선 미지의 숲속에라도 와 있는 것처럼 공격적이고 낯선 모양새였다. 색도 녹색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잎사귀 군데군데 붉은색, 선홍색, 남색, 보라색 등도 섞여 있었다.
어떤 잎은 지나치게 컸고 어떤 잎은 너무 작았다. 어떤 것은 물속에 있었고 어떤 것은 뿌리를 감쌀 흙 한 톨 없이 공중에 박쥐들처럼 군락을 이루며 매달려 있었다. 벽 한구석에는 식물 표본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유리로 된 실험도구 같은 것이 늘어져 있었다. 실험도구 옆에는 각종 책들이 강박적인 모양새로 꽂혀 있었다.
그리고 따로 마련된 작은 온실 안에는 아파 보이는 식물들이 줄지어 놓여 있는 것이 기괴했다. 식물을 팔아야 하는 꽃집으로서는 좋지 않은 영업 전략이었다. 꽃집에는 항상 싱그러운 식물들만 놓여 있어야 했다.
한가운데는 커다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동시에 16명은 족히 앉을, 영화 속에서만 보던 거대한 식탁 테이블이었다. 그 커다란 테이블 한가운데 도명이 앉아서 노트북 화면을 보고 있었다.
노트북 옆에는 두꺼운 인쇄물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 건너편에는 두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표정들이 꽤나 심각했다. 도명은 눈꼬리까지 휘어가며 웃으며 말했지만 그의 말을 듣고 있는 두 사람은 심각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적다가 무언가 말을 길게 늘어놓았다. 그러자 도명 역시 어떤 말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도명 앞의 두 사람은 조금 지친 표정이었다. 도명 앞에 앉은 여자가 이마를 감싸며 낮게 한숨을 쉬더니 도명을 향해 웃으며 뭐라고 말하자 도명이 차와 쿠키를 내왔다. 그러자 여자는 노곤하게 녹는 표정을 짓다가 가져온 인쇄물을 정리했다.
도화가 꽃집 앞에 서서 창틀 너머 세상을 보는데 일을 마친 도명의 고개가 문득 창밖을 향했다. 그리고는 도화를 보자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도화는 살짝 당황하다가 고개 인사를 하고 이층집을 향해 조금 빠른 걸음으로 올라갔다.
도화는 공포영화를 튼 채 맥주 한 캔과 함께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영화에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친구 진영과 메신저로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주인집 남자 뭔가 싸해. 소름 돋아.]
[정확히 어떤 점이?]
[일단 목소리로 부드럽고 웃고 있는데 눈동자가 유리알 같아. 왜 있잖아, 카메라 속 렌즈 같은 그럼 느낌? 관찰당하는 느낌이야. 표정은 웃고 있는데 감정이 느껴지질 않는다니까.]
[아, 그렇구나……?]
진영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도화가 한 발 뺐다.
[그래. 눈빛은 내 개인적인 느낌이라 치고. 그 주인집 남자 꽃집 하는데 꽃집 분위기가 엄청 이상해.]
[어떻게? 이상한데?]
[꽃집인데 막 식물 표본도 가득하고, 마치 연구실처럼 비커 같은 것도 있고! 꽃집인데 아픈 식물도 많고. 울창하게 잘 자란 식물들은 말이야, 생전 처음 보는 것들이라니까.]
[주인집 남자가 유전자 변이 실험이라도 하고 있다는 거야……?]
[아니 그렇다기보다…… 그, 뭐라더라. 화이트칼라 사이코패스 같은 거 아닐까?]
[……식물을 막 메스 같은 걸로 난도질하며 희열을 느낀다던?]
[그건 아닌데! 그리고 옷 입는 것도 보는 사람이 다 숨 막히게 입고, 음식은 이상할 정도로 맛있다니까. 너무 맛있어. 근데 빵집 차린 게 아니야.]
[너, 그 남자가 주인집 할머니 부고와 함께 등장했다며…….]
[아 그러네, 할머니 왜 갑자기 돌아가신 거지……? 나이가 많으시긴 했는데 정정하셨다고!]
[아니, 그게 아니라 주인집 남자에 대한 첫인상도 안 좋은 데다가 너 평소에 공포영화도 지나치게 많이 보니까 네가 과민반응하는 거 아닐까? 아직 많이 겪어 보지도 않았잖아. 사람은 직접 부딪치며 겪어 봐야 아는 거야.]
[겪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람이 있어.]
[너, 네 방 사진 좀 나한테 찍어서 보내 봐라.]
[왜?]
[일단 보내 봐.]
도화는 진영의 말대로 자신의 방을 찍어 보냈다. 그리고 전송을 했다.
[보이냐…….]
[뭐가?]
[객관적으로 네 방을 보라고.]
진영의 말에 도화는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의 방 사진을 훑어봤다. 어두운 조명 아래 벽 한구석에 가득 쌓인 공포영화 DVD는 섬뜩한 표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기괴했다. 이런 걸로 대리만족을 느끼는 연쇄 살인마의 방 같았다.
[이게 뭐……? 뭐?!]
[딱 연쇄 살인마 방 아니냐…… 근데 널 겪어 보면 너만큼 바보 같은 놈도 없지. 내가 네 방 사진만 봤으면 너랑 말 섞지도 않아. 그러니까 일단 사람은 겪어 보고 판단하자.]
진영의 말에 도화는 그의 말대로 자신이 이상하게 과민반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
도화는 진영에게서 간만에 연락을 받았다. 축구경기 표를 얻었으니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도화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알았다고 했다. 진영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도화가 거절하기도 애매하게 만남을 당일 통보했다.
도화의 주말은 언제나 비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다른 변명 같은 건 통하지도 않았다. 한 번은 다른 이와 약속이 있다고 거짓말도 해 본 적도 있었다. 그러면 수화기 건너편에서 진영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진짜? 누구? 친구? 가족? 아니면 회사 사람들하고 주말에도 만날 만큼 가까워진 거야?]
이런 식으로 어수선하게 질문을 해댔다. 그 쏟아지는 질문 속에서 도화는 결국 알리바이를 대지 못하고 항복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진영을 속여 넘기기에는 그는 도화에 대해서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도화의 주변에 CCTV가 없어도 진영은 도화가 무슨 요일 몇 시 경에 어떤 모습으로 있을지 정확히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도화의 일상이 반복되는 탓도 있지만 진영은 그만큼 도화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었다.
도화는 매트리스 위에 대(大)자로 누워서 숨만 겨우 쉬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지막 반항으로 진영을 향해 문자를 보냈다.
[아, 일요일 주말에 나가야 한다니!]
도화가 진영을 향해 불평을 해댔고 곧이어 문자가 왔다.
[너 축구 좋아했잖아.]
[그래, 좋아하는 게 아니라 좋아했었지!]
[나 밑에서 기다리고 있어.]
[우리 집으로 올라오지. 왜 밑에서 기다려?]
[너희 집 무서워…….]
진영이 유난을 떠는 것은 아니었다. 벽 한쪽을 가득 채운 DVD와 낮은 조도의 방 안은 한낮에도 음침한 구석이 있었다.
[갑자기 부른 거니까 나도 바로 못 나가. 집 앞에 도착해 놓고 통보하듯이 전화 거는 법이 어디 있어.]
도화의 마지막 문자에 진영이 답답함을 못 견디고 전화를 했다.
[야! 그냥 옷 갈아입고 재킷 걸치는 건데 얼마나 오래 걸리려고!]
[샤워할 거야. 몸에서 이상한 냄새 나.]
[대충 나와. 내가 네 여자친구냐. 갑자기 왜 이미지 관리야.]
[수원까지 가는데 최소한 사람 몰골로 나와야 할 것 아냐.]
[알았어. 최대한 빨리 나와라.]
그렇게 진영과의 두 번째 통화가 끝나고 도화는 매트리스에 그냥 누워 버렸다. 그리고 음악을 틀고 눈을 감았다. 이동 시간을 계산하니 여유 시간은 2시간이나 있었다. 밑에서 진영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도화는 그에게 소심한 복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정확한 예측이지만 그가 언제나 이 시간에 혼자 있을 거라는 굳건한 믿음이 묘하게 얄미웠다. 그리고 그놈의 축구경기는 왜 항상 자기하고만 가는지 모르겠다. 도화는 정확히 음악 다섯 곡만 듣고 일어나서 천천히 나갈 준비를 하기로 했다.
진영은 도화를 기다리면서 어느새 도명의 가게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아직 날씨가 쌀쌀했다. 심심한데 손을 재킷 밖으로 내놓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기에는 손이 너무 시렸다. 그러니 구경할 거라고는 바로 눈앞에 있는 도명의 화원뿐이었다.
사실 진영은 심심하지 않더라도 도명의 가게를 구경하고 있었을 것이다. 일단 오래된 구멍가게의 흔적조차 없이 확 바뀐 풍경이 신기했다. 이곳만 보면 가로수길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잘 꾸며져 있었다.
일단 테라스에 발을 들여놓으니 이국적인 내부가 보였다. 진영은 어느새 창에 매달려 안을 구경하고 있었다. 유리에 진영의 뿌연 입김이 서렸다. 그러자 안에서 일을 하고 있던 도명이 문을 열었다.
“들어와서 구경하시죠.”
도명의 말에 진영이 쭈뼛거리며 서서 말했다.
“아 그게…….”
“그냥 구경만 하시고 가도 정말 상관없습니다. 추위를 피하셔도 상관없고요.”
도명이 연 문틈 사이에서 바깥 날씨와 대조되는 따뜻한 기류가 솔솔 풍겨왔다. 결국 진영은 따뜻한 남쪽 나라 같은 그 경계선을 자연스럽게 넘어 버렸다. 진영은 살 것 같다는 표정으로 도명의 화원 안에 섰다.
이 한겨울에 녹음이 우거지고 훈훈한 공기가 퐁퐁 솟아나다니. 무릉도원이 따로 없었다.
“아, 저 사실 윗집에 사는 도화의 친구인데 기다리던 와중이라…….”
진영의 말에 도명은 살짝 멈칫했다. 도명이 진영을 들인 건 자신의 공간에 큰 흥미를 느껴서였다. 그가 당장 가게의 매상에 도움이 될지 안 될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다가오는 사람 내치지는 않는 게 그의 인간관계 방식이었다.
“아, 그래요? 그럼 여기 앉아서 기다리면 도화 씨가 나오는 모습을 잘 볼 수 있겠네요.”
도명이 의자를 빼 주며 말했다, 진영은 자동으로 쫄쫄거리며 도명이 빼 준 의자에 앉았다.
“혹시 허브차 드세요?”
“아니요. 차까지 대접받으면 제가 죄송해서.”
“마침 저도 차 마시면서 복잡한 머리 좀 식히려고 하던 참이었어요. 말벗이 있으면 좋죠.”
“그러면 실례하겠습니다.”
“허브차? 아니면 무난하게 커피도 있고요.”
“뭐든 마시려고 했던 것 주세요. 허브차는 잘 몰라서.”
“아, 그래요? 그럼 여기 와서 구경하실래요?”
도명이 진영을 향해 손짓했다. 진영이 도명을 향해 다가가자 그가 열어놓은 찬장 안에는 한쪽 칸이 유리병으로 가득했다.
고급스러운 무늬가 새겨진 비슷한 유리병 안에 잘 말린 식물들이 있었고 로즈골드 색 금속으로 된 뚜껑으로 밀봉되어 있었다.
“마음에 드시는 것 골라서 냄새 맡아 보세요.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도화 씨 친구분 시간 여유가 있는 만큼 말입니다.”
도명이 아일랜드 형 간이 식탁에 앉아서 오늘 배송된 그림책을 천천히 훑어보며 말했다.
진영이 꿀단지를 뒤지는 곰처럼 자신의 재산들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리고 있는 건 신경도 안 쓴다는 듯이 시선은 아름다운 그림으로 가득한 그림책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도명의 찬장을 올려다보는 진영의 눈빛이 신세계를 본 어린아이처럼 반짝거렸다.
“여유 많습니다. 도화가 저에 대한 마지막 반항을 하느라고 일부러 시간 끌며 나갈 준비 하고 있을 거예요.”
“도화 씨가 친구분께 왜 반항하는 겁니까?”
도명은 도화가 자신에게만 까칠한 것은 아니구나 하며 작게 웃었다.
“오늘 축구 보러 가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미적거리는 걸 보면 여전히 어떤 마음이 남았나 봅니다. 도화를 재촉할 생각은 없지만 말을 안 하니 제가 은근히 떠보는 거죠. 싫어할 걸 알면서도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어서요.”
진영이 보라색, 빨간색, 노란색 병 세 개를 고른 후 뚜껑을 열며 도명의 질문에 답했다. 진영이 허브차 뚜껑을 열자 기분 좋은 향기가 공기 중에 퍼졌다.
“미련이요?”
“아, 지금 모습 보면 상상할 수 없겠지만 고등학교 때까지 축구 했었거든요. 나름 전국대회까지 단골로 나가던 유명한 팀 부주장이었는데 돌연 모두 그만둬 버렸어요. 아무도 그 이유는 모르죠. 딱히 부상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갑자기 모든 걸 탁 놔 버리고 사라졌어요. 말 그대로 모든 걸 놔 버렸죠. 좋아하던 축구도, 그 많던 친구들도, 햇볕 아래에서의 삶도.”
“그런데 친구분은 도화 씨가 안 놓았네요.”
“저도 놓고 갔어요. 뭐 놓고 가도 될 만큼 어설프게 친했기 때문에 딱히 섭섭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후에는 우연이 겹친 거예요.”
“우연이요?”
“네. 우연. 도화가 갑자기 전학 갈 때 저희 집도 아버지 직장 때문에 전학 갔거든요. 그리고 도화가 도망간 학교 복도에서 딱 마주친 거죠. 그 전에는 딱히 절친한 친구는 아니고 친구의 친구 정도였는데 둘밖에 안 남은 겁니다. 그 순간 기준으로 이 세상에서 만날 수 있는 친구가 딱 두 명! 그리고 도화가 운동부 출신이다 보니까 덩치가 작은 저를 괴롭히는 애들 많이 정리했죠. 지금은 만날 사무실 아니면 집에만 있어서 허여멀겋게 변했지만. 아 어쩌죠? 이거 세 개 다 좋은데요?”
진영이 자신이 골라놓은 병을 가리키며 말했다. 도명이 진영을 빤히 바라보았다. 진영은 그런 도명의 시선에 당황하며 말했다.
“아, 이거 다 해달라는 건 아니고요. 이 중 골라달라는 건데요.”
“블렌딩해서 드릴게요. 이거 세 개 적절한 비율로 섞어서. 제가 맛있는 비율을 알아요.”
“아니, 정말 그런 의미는 아니었는데.”
“압니다. 다만 두 분이 친구라고 하기엔 성격이 너무 달라서 저도 모르게 빤히 쳐다보았네요.”
도명의 말에 진영이 의자에 걸터앉으며 되레 질문했다. 그리고는 곱살 맞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도화는 어떤 사람처럼 보이는데요?”
도명이 진영의 질문에 난감한 웃음을 지었다.
“경계심이 많죠. 마치…….”
도명이 말을 잇지 못하고 진영의 눈치를 살피더니 머쓱하게 웃었다.
“마치 뭐요? 제가 도화 친구긴 한데 말 안 옮길 테니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본 지 얼마 안 되는 사람을 이렇게 표현하긴 조금 그렇긴 한데, 그것도 친구분 앞에서 말입니다.”
“일단 기본 예의를 다 차리셨으니까 본심은요?”
“왜 강아지 중에 눈 큰 강아지 있잖아요. 아 그래요. 치와와. 치와와가 맹렬히 짖어대는 느낌입니다.”
“치와와요?”
진영이 도명의 말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말꼬리 끝을 올렸다.
“네. 치와와요. 작고 겁 많아서 더 크게 짖어대는 그런 느낌이던데. 물지도 못할 거면서 짖기만 하는?”
“에이. 키하고 뼈 골대가 있는데. 오히려 치와와 과는 저죠. 눈 부리부리하게 큰 것 말고는 전혀 모르겠는데요. 도화가 눈 부리부리해서 오히려 기가 장난 아니게 세 보일 텐데요. 도화가 그쪽, 그러니까.”
“유도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도명 씨 한 대 치면 큰일 날걸요.”
어떻게 보면 초면에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들을 해대는 진영을 보며 도명은 다른 의미로 그가 마음에 들었다. 저런 솔직한 사람은 적어도 뒷말은 없었다. 도명은 차라리 이런 사람들을 편해했다.
호불호가 갈리지만 진영의 주위는 도명과 다른 의미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가요?”
진영의 말에도 도명이 여유롭게 웃으며 찻잔은 꺼내고 뜨거운 물을 데웠다. 도명의 반응에 진영은 그의 몸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도명의 몸은 균형 잡혀 있었고 단단해 보였으나 타고난 운동 체질인 도화를 이길 것 같지는 않았다.
“안…… 그럴 것 같아요?”
“애초에 도화 씨가 사람을 칠 수 있는 그런 사람이라면 말이죠. 안 그래요?”
“……그렇죠. 애초에 도화가 사람을 함부로 때리는 사람은 아니죠. 그리고 도명 씨는 주님보다 위에 있는 건물주잖아요.”
“제가 건물주가 아니더라도 세상은 참 복잡 미묘해서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죠.”
“아 맞다. 여기 슈퍼 할머니가 도명 씨를 아끼셨나 봐요. 유산을 떡 하니 주시고.”
“아꼈다기보다는 안쓰러워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저를 유일하게 안쓰러워하셨죠.”
“도명 씨는 그게 좋았어요? 싫었어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안쓰러워하던 그 점 말이에요.”
진영의 말에 도명은 턱짐을 지며 생각에 잠겼다.
“글쎄요. 좋았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음, 하지만 역시 좋았던 게 조금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자주 찾아뵈었나요?”
“이곳에 처음 맡겨졌을 때는 제가 아주 힘든 시기였습니다. 어쩌다 보니 힘든 시기에만 오다 보니 관성이 생기더군요. 그래서 더 이상 힘들지 않은 후부터는 찾아오지 않게 됐습니다. 이모님을 만나더라도 이곳 말고 다른 곳에서 만났습니다. 주로 여기엔 먹을 것들을 보냈습니다. 맛있는 곳을 발견하면 사서 보내거나 직접 해서 보내거나 했습니다.”
“저, 그런데 부모님은……? 아, 죄송합니다. 초면에 너무 개인적인 것을 물어봤네요. 불편하면 이야기 안 하셔도 됩니다.”
“아니요. 불편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부모님은 지금도 잘 살고 계십니다. 다만 이모님이 그 많은 조카들 중에서 절 유독 신경 쓰신 건 가족들과 고립되었기 때문입니다.”
“아, 가족들이 이민이라도……?”
진영의 질문에 도명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도명은 잘 우려진 차를 진영의 앞에 내밀며 속삭였다.
“제가 특이한 성벽들을 가지고 있거든요. 들어도 상관없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진영은 갑자기 훅 들어오는 도명의 얼굴에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동성애자입니다.”
도명은 그리 말하고는 진영의 반응을 살폈다. 진영은 놀란 듯 잠깐 굳어 있다가 눈만 끔뻑였다.
“아, 저는 여자가 좋습니다. 이성애자입니다.”
진영의 말에 도명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네, 그렇겠죠. 동성애자보다는 훨씬 높은 확률로요.”
도명의 반응에 진영은 약간 얼이 빠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우와, 커밍아웃 엄청 쉽게 하시네요. 와 씨, 깜짝 놀랐네. 순간 농담 아닌가 할 정도로요.”
“농담 아닙니다.”
“이게 원래 이렇게 쉬운 건가요? 처음 보는 사람한테 훅 말할 정도로요?”
“쉽진 않죠. 그런데 초면에 무례할 정도로 어려운 질문들을 해대는 진영 씨 보니까 문득 놀리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설마 게이라고 집에서 쫓겨난 겁니까?”
“뭐, 일정 부분요. 그나저나 도화 씨한테 말할 건가요?”
“아, 역시 곤란하시겠죠?”
진영이 난감한 표정으로 얼굴을 쓸어 넘겼다.
“말하고 싶으세요?”
“도명 씨가 싫다면 제가 떠들고 다닐 권리가 없긴 하죠.”
“뭐, 진영 씨 말대로 주님 위에 건물주라고, 말해도 제가 큰 손해 볼 건 없습니다. 못된 심보지만 도화 씨가 께름칙하다고 빨리 이사가 주면 감사하죠. 저는 아침에 일어나면 침대 위로 햇볕이 떨어져야 하는 사람인데 지금 이모님이 약속한 계약 기간 끝날 때까지 이 아래 지하방에서 자고 있거든요. 당장 쫓아내긴 조금 그래서 참고 있었습니다. 2층도 나중에 공사 진행하려면 실측도 해야 하는데 도화 씨가 워낙 까칠해서 건물 평면도만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도화가 도명 씨가 게이라고 하면 도망이라도 갈 사람처럼 보이세요?”
“일단 지금까지 제가 느낀 도화 씨는 첫인상이나 선입견이 아주 크게 작용하는 사람 같던데요? 제 오판인가요?”
“오판은 아닌데 그렇다고 도망갈…….”
“아, 아쉽네요. 그렇다면 남은 7개월 동안이라도 덜 부딪치게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매일 적어도 두 번 마주칠 사람인데요. 그렇지 않아도 도화 씨 저한테 아주 사납습니다.”
“아, 네. 그런데 도화가 그렇게 도명 씨를 싫어하는 티를 냅니까?”
“네.”
도명이 망설임 없이 단정 지어 말하자 진영이 다 민망해져 허허 웃었다. 도명은 상관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는 조금 장난 어린 어투로 ‘제가 주님 위 건물주입니다.’라고 중얼거렸다.
진영은 민망함에 화원을 둘러보다가 도화가 이야기한 화원 한쪽 면에서 아픈 식물들을 발견했다.
“아, 그런데 저 식물들은 어쩌다 저렇게?”
“아 저거요? 의뢰를 받습니다. 정성 들여서 키우다가, 애들이 아픈데 이유는 모르겠고. 그렇다고 그대로 보낼 수도 없는 그런 애들이 여기로 옵니다. 저는 이유를 찾아서 살려서 보내고요.”
“와, 식물 의사 뭐, 그런 겁니까?”
“음…… 비슷한 개념입니다. 그런데 열에 둘은 실패합니다. 이미 때가 늦은 경우도 많아서요.”
“무슨 수의사처럼 식물도 병원? 어쨌든 그런 곳에 보내고. 쟤들 엄청 고가인가 봅니다.”
“그렇기도 합니다만 주로 기억에 관련된 경우가 많습니다.”
“기억이요?”
“네. 기억 말입니다. 예를 들면 이 로즈메리는 의뢰하신 분의 아드님이 남기고 간 화분입니다. 경제적인 가치로는 작은 화분 기준으로 하나에 이천 원에서 오천 원 정도 하죠. 운 좋으면 천 원에 살 수도 있고요. 그러니까 이 아이는 다시 사기에는 비싸서 이곳에 온 것은 아니죠. 아들이 갑작스럽게 병으로 죽고 창가에 남은 건 그가 키우던 로즈메리뿐이라고 하시더군요. 이런 식물에 크게 관심이 없던 아들이 어느 순간부터 사 와서 너무 정성스럽게 키운 거라 더 기억이 선명하다고 합니다. 워낙 흔한 거라서 정성만 다하면 매년 봄마다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들이 죽고 난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와도 좋은 소식이 없는 아이죠.”
진영은 안타까운 소식에 마시고 있던 머그잔을 내려놓고 작은 로즈메리 앞에 앉아 쭈그렸다. 그리고는 그렁그렁 한 눈으로 도명을 올려다보았다. 도명은 진영이 참 재밌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두 친구가 이리 유형이 다를까 신기할 따름이었다.
“선생님, 가망이 있을까요?”
갑자기 진영이 도명을 부르는 호칭이 달라졌다. 진영의 머릿속에서 도명은 이미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 선생님이었다.
“네. 그런데 혹시 몰라서 확답은 안 드렸습니다. 같은 이유로 로즈메리가 가진 뜻도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차마 말씀드리기 어렵더군요.”
“뜻이 뭔데요?”
“‘기억, 당신의 존재로 나를 소생시킨다.’입니다.”
도명에 말에 진영은 로즈메리 화분을 붙잡고 울 기세였다. 그리고는 도명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꼭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진영이 그렇게 도명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고 있을 때 외출 준비를 마친 도화가 도명의 가게 문 사이에 얼굴을 빼꼼 내밀고 말했다.
“야 거기서 왜 그러고 있어! 미친놈아!”
“도화야! 선생님은 정말 좋은 분이셔! 그만 으르렁대란 말이야! 허브차도 기가 막히게 맛있어.”
“미친놈아, 그게 무슨 말이야. 나와! 나 여기 건물주랑 안 친해서 못 들어오니까 네가 나오라고!”
진영은 노골적으로 ‘저 건물주랑 안 친하다.’라고 말하는 도화를 보니 평소에 그를 어떻게 대하는지 한눈에 보여서 한숨이 나왔다. 진영은 도명을 향해 넉살 좋은 웃음을 짓고는 인사를 하고 나왔다.
진영이 오래간만에 아직도 할부를 갚고 있는 차를 끌고 나왔다. 도화가 조수석에 앉으며 불만과 호기심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대체 무릎을 왜 꿇고 있었던 건데.”
진영은 목적지를 찍고 운전대를 잡기 시작했다. 진영은 목적지로 출발할 준비가 끝나자 비로소 도화의 질문에 답하기 시작했다.
“응? 내가 무릎 꿇고 있었어?”
“그래. 바짓가랑이 붙잡고 애원하고 있던데?”
도화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고 진영은 그제야 그때의 상황을 곱씹기 시작했다.
“아 별건, 아니고.”
“무릎 꿇었던 게 별거 아니라고? 아 역시 주인집 남자 이상해. 보통 사람이 갑자기 무릎을 꿇으면 당황하거든. 그런데 표정이 전혀 당황하지 않더라. 사람을 아래로 내리깔아 보는 것에 익숙한 사람인 것 같아.”
다시 시작되는 도화의 도명에 대한 험담에 그의 눈치를 살피더니 손가락으로 핸들을 탁탁 두들기다 말을 꺼냈다.
“저기, 말 섞어 보니까 좋은 일 하시는 분이더라. 내가 무릎 꿇은 건 진짜 별거 아니고 그냥 그 좋은 일 잘 하시라고 말하다 보니 감정이 격해진 거지. 직접 대화해 보니 성격 좋아 보이시던데. 내가 초면에 무례한 질문도 꽤 많이 했는데 불편한 기색 없이 다 받아 주고 말이야. 웬만한 사람보다 성격 완만하더라. 사람 대하는 데 여유도 있어 보이고. 네 말만 들었을 땐 뭐랄까 엄청 차갑고 거리감 느껴지게 만드는 사람 같았는데 나랑 같은 과더라.”
“너랑?!”
도화가 진영을 향해 말이 안 된다는 듯이 소리쳤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진영과 도명은 딱 봐도 아주 달라 보이는 사람이었다. 일단 생김새도 그랬지만 입고 있는 옷만 봐도 성격 차이가 두드러지게 보였다.
지금 이 순간 도명은 얼룩 하나 없는 흰 셔츠에 잘 다려진 베이지색 면바지를 입고 화분을 옮기고 있었고 진영은 노란색 기모 후드 티에 청바지를 입고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아 그러니까 유형이 다른데 같은 성격?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암튼 그래.”
“아냐. 아냐. 절대 아냐.”
도화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진영 역시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내가 너보다 아랫집 남자에 대해서 잘 알게 됐을걸. 널 기다리던 그 순간부터 난 널 앞질렀다고.”
“자랑 안 해도 네가 나보다 사교성이 좋은 건 알고 있거든.”
“자랑이 아니라. 어차피 다 같이 사는 세상인데 좋은 면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사람이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는데 너는 너무 나쁜 면만 골똘히 보잖아.”
“다 같이 사는 세상은 무슨. 딱 7개월 치 인간관계야. 그 후엔 이사 간다고. 어떠한 협상의 여지도 없이 나가라고 하던걸.”
“에이 사람 일 어떻게 알아. 그런 걸로 치면 난 패키지여행 혼자 갔다가 만난 사람들과 아직도 연락하고 다음 여행도 같이 짜고 있는데.”
“자랑 안 해도 네가 사교성이 나보다 훨씬~ 좋은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너 사람 좋은 면만 보다가 어떻게 됐어?”
“내가 뭘?”
이어지는 진영의 대답에 도화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진영은 그런 그의 표정에 멍청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저 배알도 없어 보이는 표정이라니. 그 표정을 지켜보는 도화의 부아가 치밀었다.
“어떻게 그사이에 잊어버릴 수가 있냐. 좋은 사람이라더니 너 최근에 사기당했잖아. 그거 아니면 너 이 차 할부가 아니라 일시불로 냈겠지.”
“아 맞다.”
“아 맞다?”
도화가 기가 찬다는 듯이 언성을 높였다. 그리고는 명치끝이 답답해지는 느낌에 말을 빠르게 내뱉기 시작했다.
“내가 그때 분명 그 사람 이상하다고 했어? 안 했어?”
“했지.”
“그래! 다행히 그건 기억나네. 앞으로는 조심해. 솔직히 내가 부정적인 거 인정하는데 너는 또 너무 긍정적이야. 그것도 문제라면 문제다. 다시 곱씹어 봐도 황당하네. 뭐, 잊어?”
도화의 반응에 진영은 표정을 살짝 굳히더니 그답지 않게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했다.
“내가 억울해서 잊었다.”
“그건 또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억울하면 끝까지 쫓아가서 응징해야지.”
도화는 진영의 말이 이해가 안 가 목소리 끝과 함께 한쪽 눈썹 끝을 올렸다. 그러면서 그는 흥분한 듯 허공에 주먹을 꽉 쥐고 씩씩대고 있었다.
진영은 반대로 도화의 ‘끝까지 찾아가서 응징한다’는 말에 헛웃음을 지었다. 도화에 대한 도명의 표현대로였다. 작고 귀여운 치와와라는 말은 여전히 공감되지 않지만 사람을 물어 본 적도 없고 물 패기도 없으면서 맹렬히 짖어대기만 한다는 표현은 정확했다.
“그 사람 하나 때문에 내가 만나는 사람들마다 경계하고 즐겁게 지낼 수 없게 된다는 점이 더 억울해. 내 입장이나 가치관에선 말이야. 앞으로 만날 나쁜 사람들보다 혹은 그만큼 좋은 사람들도 많을 텐데. 딱 돈만 버렸다 치는 거야.”
도화는 진영의 말에 말없이 차창에 기대서 앙상한 가로수들을 쳐다보았다. 그의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어떠한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도 그렇게 살면 평생 당하기만 한다고 충고할까 하다가도 자기 사는 모습을 생각하면 충고할 입장이 되나 싶었다.
그렇다고 그의 말이 맞는다고 인정하기엔 그래도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도화는 입술을 꾹 다물고 미간에 주름을 얕게 만든 채 차창에 고개를 삐딱하게 기댔다.
그렇게 말없이 도로 위에 있다가 도화가 진영의 눈치를 살짝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근데 이번만큼 촉이 강하게 온 적은 없거든. 그 사람 뭔가 싸해. 정확히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어서 나도 답답하다.”
“…….”
주말이라 그런지 도로에 차가 꽤 차 있었다. 하필이면 진영이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 자동차 유리 앞 풍경도 답답해서 속을 더 갑갑하게 만들었다.
“안 믿는구나. 전혀. 넌 어떻게 10년 넘은 친구보다 방금 만난 사람 말을 더 신뢰하냐.”
“일단 네가 이상하다고 말했던 것 중에 하나 틀린 건 알게 됐어.”
“뭐?”
“아파 보이는 식물 많은 수상한 화원 이야기. 나도 봤거든. 가게 창가에 있는 아픈 식물들로 가득한 유리 온실 말이야.”
진영은 도명이 화원에서 하는 일중 하나를 설명했다. 그러자 도화가 잠시 할 말을 잃은 것을 보았다. 진영은 기세를 몰아서 도명이 단기적으로 수익성이 좋은 꽃다발을 팔지 않는 이유도 이야기해 줬다.
“아름답기만 한 건 소용이 없대. 앞으로 이어지는 날들을 함께하며 보살펴 줄 수 있는 것들이 의미가 있는 거래. 이 화원 너무 낭만적이지 않냐.”
“…….”
진영이 곱살 맞게 웃으며 팔꿈치로 뚱한 도화의 팔을 툭툭 건드렸다. 도화는 창밖을 보며 살짝 기가 죽은 표정을 짓다가도 말을 거칠게 내뱉었다.
“운전대나 똑바로 잡아.”
“하여간 덩치는 좋은 것이 삐죽이가 따로 없네.”
“삐죽이가 안 되려고 삐죽이가 되는 게 뭔지 네가 알겠냐.”
도화는 진영이 들을세라 웅얼거리며 말했다.
“야 근데 같은 남자가 봐도 주인집 남자 진짜 잘생겼더라. 막 TV에 나오는 사람 같아. 스타일도 세련되어 보이고. 직업이 디자이너나 패션 쪽이라고 해도 믿겠어.”
“게이세요? 사내새끼 잘생긴 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사내새끼한테 그렇게 섬세하고 좋은 냄새 나는 거 난 오히려 소름 돋던데.”
도화의 코끝에 맨 처음 도명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맡은 그 냄새가 희미하게 맴돌았다. 지금은 있지도 않은 향기를 기억이 불러낸 것이다.
“뭘 그렇게 까대냐. 잘생긴 건 잘생긴 거지.”
“네 취향이냐? 10년 넘은 친구 말 같은 건 귓등으로만 들을 정도로 그쪽에 그렇게 꽂혔으면 사귀든가요. 나는 당신의 커밍아웃을 지지까지는 안 해도 비난은 안 할게. 수정 씨한테는 내가 잘 말할게. 남자친구가 딴 여자, 아니 남자한테 눈길을 준다고.”
도화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손톱 끝을 튕기다가 능청스럽게 손바닥을 펴고 가슴에 얹으며 말했다. 진영은 도화의 도발에도 발끈하지 않고 도화를 빤히 바라보다가 운전 중이라는 것을 상기하며 급히 정면을 향했다.
“그런 생각 안 들어? 전혀?”
“남자를 상대로 그런 생각 들고 할 게 어디 있어? 잘생겼든 그렇지 않든 사내새끼는 사내새끼지.”
두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에 그들의 시야에 경기장이 보였다.
“다 왔다.”
“와, 이 주말에 왜 다들 기어들 나온 거야. 뭐 좋은 거 있다고.”
도화가 조수석 안전벨트를 풀며 투덜거렸다. 그의 말대로 경기장 앞에는 사람들이 개미 떼처럼 우글우글했다. 근처에 조각공원이 있어서 나들이로 온 사람들도 많았다. 진영은 계속 삐딱 선을 타는 도화가 얄미워서 차에서 내리자마자 정강이를 차 버렸다.
“아오 삐딱이! 수정이하고 올 걸. 이 날씨 좋은 날 이런 놈하고 왜 있는 거냐. 내가 병신이지!”
축구장 앞에는 사람이 많았다. 아직 예선 경기임에도 줄을 조금 서야 했다. 경기 내용보다 나들이 목적으로 나온 사람들 역시 많아 보였다.
도화와 진영은 겨우 경기장 안에 들어와 지정된 좌석에 앉을 수 있었다. 도화는 자리에 앉자마자 핸드폰으로 이런저런 사회면 기사를 보고 있었다.
도화가 고개를 조금만 들면 넓게 펼쳐진 초록색 경기장이 보일 텐데 도화는 강박적으로 핸드폰 화면만 보고 있었다. 평소 핸드폰을 잘 안만지는 사람인데 오늘은 유독 심했다.
도화는 어떤 생각이 올라오는 것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부지런히 정신을 딴 곳으로 돌렸다. 발끝을 아무리 부지런히 움직여도 생각은 저 수면 아래로 잠겼다. 의미 없이 누른 인터넷 기사의 글씨 같은 건 사실 눈에 안 보인 지 오래였다. 초조함에 손가락만 부지런히 움직였다.
곧 시작할 듯 선수들은 구장에 나와서 몸을 풀고 있었다. 이윽고 경기가 본격적으로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도화는 여전히 핸드폰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이 사각형 안의 세상은 그의 시선을 돌리는 데 실패했다. 안개가 낀 것도 아닌데 눈동자 앞이 뿌옇다.
도화는 핸드폰만 보며 시위하는 것을 그만두고 아버지한테 억지로 끌려 나온 아들처럼 점퍼 지퍼를 인중까지 바짝 올리고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의 엉덩이뼈는 좌석 끝자락에 겨우 걸쳐져 있었다. 열심히 경기를 보던 진영은 그런 도화를 보자 맥이 탁 풀려 버렸다.
사실 도화가 평소에도 조금 투덜대는 면이 있지만 오늘 유난히 그의 삐딱 선이 심했다. 겉으로는 안 그래 보여도 진영이 하자는 거면 거절도 못 할 정도로 순한 녀석이다. 오늘도 이렇게 싫어하면서도 순순히 나온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도화야…….”
진영은 여전히 그가 왜 그 좋아하던 축구도, 친구들도 모두 놔 버리고 떠났는지 말하지 않았다.
억지로 질문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스스로 숨 내뱉듯 말해 주길 바랐다. 시간은 충분히 흘렀다고 생각했는데 도화에겐 충분한 시간이 아니었나 보다. 진영은 슬슬 지치기 시작했다.
“왜?”
진영의 시선에 도화가 부리부리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서서 응원하던 진영이 내려다보니 그는 어딘가 혼란스러워 보였다. 호기로운 척 다리를 쫙 벌리고 앉아 있지만 상념에 빠진 듯 그의 어깨를 동그랗게 움츠러들어 있었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건 분명 지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을 보니 악당인 건 자신 쪽 같았다. 자신을 가만히 내려다보는 진영의 시선에 도화는 불안한 듯 눈동자를 아래로 내리깔았다.
역시 조바심에 그를 괴롭히는 건 자신 쪽 같았다. 진영이 도화를 향해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다. 그렇게 심심하면 치킨 먹을까?”
“치킨 좋지. 맥주도.”
도화는 입꼬리를 쭉 올리며 말했다.
“그래라. 감자튀김도 먹자. 네가 다 먹어라. 다 먹어.”
진영이 도화의 머리를 헝클이며 말했다. 도화는 볼이 볼록해지도록 치킨을 입안에 구겨 넣었다. 그리고는 진영이 들으라는 듯 과장된 감탄사를 내뱉으며 맥주를 들이켰다. 그러다가 남은 닭 다리뼈를 입에 문 채 오물거리며 생각했다.
‘그 일은 정말 큰일이었을까? 사실은 사소한 일이 아니었을까?’
사실 이 질문은 아주 오래전부터 하던 질문이었다. 잊고 살 만하면 문득 튀어나와 버려 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튀어나오는 그 질문을 모른 척하는 건 꽤 익숙해졌다. 그런데 오늘은 아무리 애써 눌러도 끊임없이 튀어나오는 질문이었다.
진영과 헤어지고 도화는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돌아오는 내내 시답지 않은 일들을 말하며 수다를 떨 때는 괜찮은 것 같았다. 하지만 이렇게 혼자 남으니 무거운 돌로 가슴을 짓누르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여전히 그의 머릿속은 질문 속에 갇혀 있었다.
‘그 일은 정말 큰일이었을까? 사실은 사소한 일이 아니었을까?’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이 질문 속에 갇혀 있다 보니 몸을 눕힌 공간 전체가 돌아가며 눈앞이 핑 돌았다.
도화가 고통스러운 듯 두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 넘겼다. 그가 지금까지 수없이 많이 본 공포영화 속 상황들보다 질문에 갇힌 이 상황이 끔찍했다.
‘사실은 사소한 일이었어. 너 대체 왜 도망간 거니?’
어떤 목소리가 도화를 짓눌렀다.
도화는 고통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리며 발끝으로 침대 시트를 찍어 눌렀다. 명백한 조롱 섞인 목소리에 도화는 숨을 옅고 빠르게 쉬기 시작했다.
도화는 30분 내내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다가 빗소리가 들리자 조금씩 안정을 찾았다.
낮에는 화창했지만 밤이 되자 비가 갑자기 내리기 시작하는 게 변덕스럽기 짝이 없었다. 비가 온다면 날씨가 쌀쌀해서 당연히 눈 형태로 내릴 줄 알았다.
도화가 창문을 열어 손을 뻗어 보니 살얼음이 그의 손위에서 녹았다. 진눈깨비였다.
비도 아니고 눈도 아닌 이상한 상태. 이도 저도 아닌 주제에 소리는 또 어찌나 요란하던지. 천장을 두들기는 소리가 제법 매서웠다. 그래도 창문을 여니 서늘한 감촉에 살 것 같았다.
도화가 창가에 매달려 있을 때 집 뒷문으로 고급 승용차 하나가 미끄러지듯이 들어왔다. 가게 앞면이 있는 쪽은 언제나 도화가 도명과 만나는 곳이었다. 도화가 1층으로 연결된 계단으로 내려가면 도달하는 그곳 말이다.
그 반대편에는 마당과 함께 또 하나의 촌스러운 청색 철제 대문이 있었는데 주로 주인집 할머니가 거기에 잡동사니들을 놓았던 탓에 잘 쓰지 않는 대문이었다.
이 청색 대문이 나 있는 쪽은 인적이 드물었다. 이 인적 드문 곳에 주차된 차는 보닛 위에 은색 새가 내려앉은, 한눈에 보기에도 아주 비싼 차였다.
차에서 고급 슈트를 입은 남자가 내렸다. 도명은 손님이 올 걸 알았는지 오래된 성문 같은 그 대문을 열어놓고 나와 있었다. 도명은 감색 우산을 들고 정장 바지에 손을 집어넣고 서 있었다. 손님을 마중 나온 도명의 태도가 어디가 모르게 고압적이었다. 비가 내리고 있어 시야가 밝지 않았지만 사람의 자세란 어떤 기류를 내뿜는 법이었다.
도명이 남자를 향해 짧고 절도 있게 턱짓을 했다. 그러자 남자가 들고 있던 우산을 내려놓았다. 옆에 우산을 씌워 줄 사람을 세워놓아도 이상해 보이지 않을 부유해 보이는 남자는 질척거리는 진눈깨비를 그대로 맞고 서 있었다. 우산을 내려놓게 만든 도명은 여전히 깔끔한 차림새로 서 있을 뿐이었다.
도화는 그 뒤로 이어지는 장면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남자가 진눈깨비로 질척해진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도명의 구둣발에 입을 맞추었다. 그제야 도명은 들어오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남자가 일어서려고 하자 도명이 그의 허벅지를 구둣발로 내리눌렀다.
남자는 도명이 원하는 것을 바로 알아들었다. 남자가 땅에 엎드렸고 도명이 바지 벨트를 풀었다. 그리고는 남자의 목에 벨트를 개 목걸이 채우듯 채웠다.
도명이 남자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따라 들어오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남자는 그의 이런 취급에 익숙한 듯 네발로 기어갔다. 도명이 개처럼 끌고 간 남자는 도명이 임시로 살고 있는 집 지하실 어둠에 먹혀 버렸다.
도화는 이 모든 비현실적인 상황에 놀라서 입만 벌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자신이 이 엄청난 장면을 봤다는 걸 도명에게 들킬까 봐 창문 옆 벽에 급히 숨었다. 도화의 안색이 잿빛으로 변하다가 이내 하얗게 질렸다. 그러다가 진눈깨비가 내리는 소리만 들리고 나서야 제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이게 뭐야?!’
도화는 엄청난 장면을 본 탓에 심장이 쿵쿵쿵 뛰었다. 심장 소리가 마치 북소리 같아 고막까지 둥둥둥 울린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도화는 침대에 누운 후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렸다. 자꾸 안 좋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도명에 의해 지하실로 끌려간 남자가 자신이 누워 있는 이 공간 바로 아래에서 학대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서기 시작했다.
한 번 시작된 상상은 브레이크를 모르는 법이었다. 도화의 상상 속에선 어느새 도명이 남자의 시체를 벽 속에 넣고 시멘트를 자루 채로 들이붓고 있었다.
상상 속의 도명은 바짓단 끝에 묻는 조금의 시멘트 가루가 더 신경 쓰일 뿐 자신의 집에 시체가 있다는 것은 거슬려하지 않고 있었다.
처음 도명과 제대로 마주 본 날 먼지 뿌연 공사 현장에서 나왔음에도 반짝이던 구두코가 저절로 생각났다. 공사 현장에서 도화의 집까지는 불과 3.5m 높이의 계단만이 있었다.
그는 그 짧은 거리를 이동하는데도 자신이 있던 곳의 흔적 같은 건 단 하나도 묻히지 않았다. 도화가 공사 현장에 서 있던 도명의 뒷모습을 목격하지 않았다면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몰랐을 터였다.
결벽증 있는 화이트칼라 사이코패스! 평소에도 깔끔하고 섬세하니 범죄의 흔적 같은 것은 남기지 않을 것이다. 도화는 화원 한쪽 구석 벽에 잘 정리된 책들과 잘 관리된 도구들이 생각났다.
화원은 물건이 지나치게 많은 곳이었다. 그것도 너저분해지기 쉬운 물건들 말이다.
그런데 도명의 화원은 어떤 규칙이 존재했고 그 규칙에 의해 공간 전체가 단정해 보였다. 이것 또한 도화가 도명의 수상함을 설득력 있게 설명 못 하듯 설명할 수 없었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아마 도명은 자신의 공간에 있는 물건 하나만 건드려도 알아차릴 것이다.
도화가 수없이 많이 본 영화 속 장면들이 생각났다. 위험한 사람들은 여러 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크게 유형을 나눌 수 있었다. 위험한 사람의 유형 중 하나는 지나치게 매력적이라는 것이다.
도명은 사람들을 유혹하기 위해 잘 가꾼 외모에 고상한 스타일을 유지하는 것이다. 누구라도 그가 사회가 생각하는 상식을 깨는 더럽고 추잡한 일은 하지 않을 거라고 믿게끔 말이다.
도명에게서 났던 그 산뜻하면서 살짝 알싸한 풀 냄새와 섞여 나오던 비누 냄새. 도화가 화장품 가게를 들락날락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일반 가게에서 구할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도화는 후각이 예민한 편이었다. 그래서 출근길에 스치는 사람들의 온갖 화장품, 혹은 향수 냄새. 샴푸 냄새들을 맡아왔다.
지금까지 도명에게서 난 냄새를 맡은 적은 없었다. 그것은 일종의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영역표시를 위한 그만의 냄새였다.
거기다가 음식은 위험할 정도로 맛이 있었다. 그는 좋은 외양과 부드러운 미소. 온화하고 매력적인 말투, 악의 없어 보이는 몸에 밴 친절로 사람을 무장해제시켜 버린다. 그리고 방심하면 사람들을 먹어치워 버리는 것이다.
도화는 덜덜 떠는 손으로 경찰서 번호를 눌렀다. 하지만 미처 통화버튼을 누르지는 못했다. 전화해 봤자 자신만 이상한 사람이 될 것이 뻔했다.
이 건물에는 골목 외에는 CCTV 같은 것은 없었고 경찰이 와서 들어 줄 건 평소 주인집 남자를 험담하던 세입자 남자의 증언밖에 없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무릎 꿇고 질척한 바닥을 네발로 기어가던 피해자의 태도를 보면 그는 아주 큰 약점을 잡힌 것이 틀림이 없었다.
도화가 용기를 내어 전화를 해서 경찰들을 설득하고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을 지하실을 급습한다 해도 피해자는 도명과 함께 자신을 미친놈 취급할 게 뻔했다.
아니면 피해자는 지하실의 비밀 공간에 갇혀 있어 평온한 일상을 연기하는 도명만 발견할 수도 있었다.
거기다가 도명은 최근 대대적인 인테리어 공사를 하지 않았던가. 가게 공사를 핑계로 비밀 공간을 만들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그가 영화 속에서 많이 보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남은 건 그의 위험한 정체를 밝히려 했던 도화가 도명의 표적이 되는 것이다.
대학교 입학 이후로 가족과도 자연스럽게 연을 끊은, 관계들로부터 고립된 남자. 회사는 다니지만 직장 동료들과 직장 밖에서 따로 만난 적도 없었다.
방 안에는 음울한 DVD가 가득하니 정신적으로 아픈 사람인 것이 분명하다고 사람들은 떠들어댈 것이다.
그러니 그런 그가 비관적인 선택을 해서 갑자기 사라졌다고 한들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꾸준히 교류하고 있던 사람은 친구 진영이 정도인데. 그는 분명 바보같이 이런 말이나 할 것이다.
‘그 주인집 남자는 정말 좋은 사람입니다.’
도화의 가정들이 이 정도로까지 가지치기를 하자 그는 이런 공포감마저 들었다.
‘나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내가 이 모든 장면들을 목격했다는 걸 주인집 남자가 보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자 머리끝까지 소름이 쫙 돋았다. 자신을 감정 없는 눈으로 관찰하던 그 카메라 렌즈 같은 눈동자가 생각났다. 도화는 밤새 벌벌 떨다가 새벽에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