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카민색 우리
우영의 눈썹 위로 오목한 홈이 파였다. 한창 붓을 움직이던 그가 캔버스에서 두 발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는 그림을 가만히 노려봤다. 그러다 손볼 부분을 발견하곤 다시 다가갔다.
그림 막바지에는 이렇게 수시로 그림을 뒤에서 봐 줘야 했다. 전시장에 걸어 두었을 때, 그림을 보는 관람객의 시점을 배려하여 완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몰랐는데 사현이 가르쳐 줬다. 우영의 그림은 추상 표현주의의 작품이 아니라 풍경화라서 전체적인 분위기가 한눈에 들어와야 한다고. 덕분에 우영의 그림이 한층 완성도가 높아졌다.
우영이 얼마나 그렇게 그림에 빠져 있었을까. 창밖으로 분홍빛 노을이 밀려올 쯤 똑똑, 누군가가 작업실 문을 두드렸다. 우영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이 집에 제 작업실 문을 두드릴 이는 한 사람뿐이었다.
곧장 붓을 내려놓은 그가 빠르게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누구세요, 묻지도 않고 벌컥 문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우영아⋯⋯.”
가느다란 목소리와 함께 마른 몸이 푹 안겨 왔다.
사현이었다.
일요일 아침. 오전 운동을 마친 그는 우영과 브런치를 먹고, 우영을 재웠다. 그리고 혼자 일도 보고, 매거진도 읽고 하더니 늦은 오후쯤 그의 침대에서 자던 우영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그러더니 우영이 일어날 때까지 깨지 않았다.
우영이 자는 그를 잠시 보다가 작업실로 내려온 지 두 시간째. 드디어 사현이 일어난 것이다.
“잘 잤어요?”
우영이 빙긋 웃으며 사현을 반겼다. 안아 주고 싶은데 손이 엉망이라 그럴 수가 없었다. 사현이 우영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들어가도 돼?”
“그럼요.”
우영이 옆으로 비켜섰다. 조막만 한 얼굴 가득 잠기운을 주렁주렁 매단 사현이 작업실을 가로질렀다. 그러곤 창가에 있는 널찍한 소파에 풀썩 쓰러지듯 누웠다.
그 사이 우영은 작업실 구석에 달린 세면대에다 바쁘게 손을 씻었다. 어찌나 힘차게 씻는지, 하얀 반팔 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뚝이 울룩불룩하게 부풀 정도였다.
손을 씻고, 수건에다 물기까지 닦은 그가 후다닥 사현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소파 아래에 무릎을 꿇고, 안고 싶었던 그를 꽉 껴안았다. 막 이불 속에서 나온 사현은 따끈따끈했다. 피부도 말랑말랑하고, 얼굴이 조금 부어서 뺨도 평소보다 통통했다.
세상에서 우영만, 오로지 우영만 만질 수 있는 순간의 사현이었다. 우영의 입가에 뿌듯한 미소가 걸렸다.
사현은 반쯤 감긴 눈으로 그에게 안겨 있었다. 그러다 매가리 없는 손으로 널찍한 등을 도닥거렸다.
“나 신경 쓰지 말고 일해. 난 너 구경하다 더 잘래.”
“⋯⋯그게 될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죠?”
“그럼 나갈까?”
“아니요. 저는 천재라서 형 신경 쓰면서 그림도 그릴 수 있어요.”
깜찍한 자신감에 사현이 나직이 웃었다. 우영은 한동안 사현을 안고 있다, 그에게 담요도 덮어 주고 쿠션도 안겨 준 후에야 그림 앞으로 돌아갔다.
사현은 모로 누운 채 우영을 구경했다. 우영이 눈앞에서 움직이는 걸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했다. 이 세상에 그와 함께 있구나, 싶어서. 그와 몸을 붙이고 있는 것과는 또 다른 편안함이었다.
우영은 초반엔 사현을 흘끔거리며 의식하더니 이내 그림에 온전히 집중했다. 사현은 나른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집중하는 표정, 작게 인상을 쓴 표정, 입술을 뾰족하게 모았다가 푸는 표정, 아랫입술을 핥는 표정, 그 모든 게 사랑스러웠다.
그때 우영이 검지로 자신의 턱을 긁었다. 그의 손에 묻어 있던 물감이 턱에 그대로 묻어났다. 셸 핑크 물감이었는데, 우영과 참 잘 어울렸다. 특히나 담갈색 곱슬머리와 더더욱 잘 어울렸다.
또 어떤 예쁜 그림을 그리고 있기에 저런 색을 선택했을까. 벌써부터 기대가 됐다.
사현이 머리 아래에 팔을 괴며 중얼거렸다.
“큐피드가 딸기 맛 초콜릿을 묻히고 있는 것 같아.”
그 말에 우영이 퍼뜩 고개를 쳐들었다.
“네? 초콜릿이요? 초콜릿 드시고 싶으세요? 사 올까요?”
“아니.”
“금방 다녀올게요.”
“됐어. 그냥 내 앞에 있어.”
사현이 팔랑팔랑 손을 흔들었다. 우영이 입을 우물거렸다. 사현의 눈치를 몇 번 보던 그는 이내 다시 그림에 집중했다.
사현은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우영을 감상했다. 그러다 손을 길게 뻗어 협탁에 올려진 태블릿을 집었다. 우영에게 쓰라고 사 준 것인데, 거의 만지질 않아서 메일도 사이트도 죄 사현의 계정이 로그인되어 있었다.
사현은 익숙하게 메일로 들어가, PDF 파일을 하나 열었다. 그리고 태블릿용 펜을 들고 무언가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묘하게 연필 소리와 닮은 소음에 우영의 시선이 그에게로 흘러갔다.
“또 일하는 거예요?”
“아니. 일은 아니고. ⋯⋯일인가? 내일 인터뷰여서 질문 미리 보는 거야.”
“인터뷰요?”
“응, 경제지. 미리 대답 작성해서 비서팀한테 보내면, 거기서 컨펌해 줘.”
우영의 눈썹이 위로 아치형을 그리며 올라갔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재미있겠다, 였다. 이전에 네온으로서 한 인터뷰가 퍽 재미있었기 때문에. 본인 인생을 남에게 일방적으로 토로하는데 재미가 없을 리 없었다. 사실 가서도 내내 사현, 그러니까 B 자랑만 하고 왔다.
“어떤 질문인데요?”
손바닥을 앞치마에 벅벅 문질러 닦은 우영이 사현의 옆자리에 엉덩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사현이 다리를 들어 그가 앉을 자리를 만들어 준 후, 그의 허벅지 위에 다리를 올렸다. 그리고 태블릿을 슬쩍 보여 주었다.
HR, 인재 공급, 탄소 중립, 과잉 유동성, 뉴딜 등 알 것 같으나 알 수 없는 단어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와⋯⋯. 진짜 재미없겠다.”
우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다 흡 소리를 내며 입을 다물었다. 본심이 튀어 나가 버리고야 말았다. 그에 사현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맞아. 재미없어. 내가 얼마나 똑똑한가, 얼마나 경제를 잘 이해하고 있나, 앞으로 그룹 경영을 잘해 나갈 수 있을까, 검사하는 거거든. 시험이지, 시험.”
“안 하면 안 되는 거예요?”
“괜찮아. 할 만해. 네 앞에서 보니까 재미있는 것 같기도 하고.”
우영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어 준 사현이 태블릿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고는 또 사각사각 답변을 쓰기 시작했다. 사현이 글을 쓰면 그것을 인식한 태블릿이 알아서 활자를 타이핑했다. 우영이 그런 사현을 빤히 쳐다봤다.
“⋯⋯.”
펜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그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저 화면에 무엇이 떠 있는지 방금 봤음에도 그랬다.
우영이 슬쩍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무언갈 망설이던 그가 넌지시 입을 뗐다.
“형은⋯⋯ 그림 그리고 싶은 생각 없어요?”
“⋯⋯나?”
“네. 되게 잘 그릴 것 같은데⋯⋯.”
우영이 사현을 직시했다. 사현은 분명 잘할 것이다. 못하는 게 없으니까. 그리고 미적 감각이 독보적으로 뛰어나지 않나. 선 하나를 그어도 예술적인 미학이 뚝뚝 흘러넘칠 터였다. 더군다나 B가 그렸다고 하면, 지문 한 번 스쳐도 사겠다는 컬렉터가 줄을 설 게 분명했다.
물론 그가 사장님으로서, 관장님으로서 버는 것보다야 돈벌이는 안 되겠지만 그래도. 우영은 아쉬웠다.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릴 수 있는 작가가 시작도 전에 져 버린 것 같아서.
사현이 태블릿을 가슴에 얹고 음⋯⋯, 하고 목으로 신음했다. 그러다 어깨에 고개를 붙이고는 허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나는 방에 틀어박혀서 그림만 그리면, 죽어 버릴 거야.”
“네?”
“외로워서.”
“⋯⋯.”
“하얀 캔버스한테 잡아먹힐지도 몰라.”
“⋯⋯.”
“삼십 대에 유작을 남기고 자살한 화가로 이름을 날렸을 순 있겠네.”
세상 우울한 소리에 우영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가 사현의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의 손목 안쪽에 나 있는 날카롭고 묵직한 흉터가 만져졌다. 한동안 잊고 있던 것인데, 오늘따라 도드라지게 느껴졌다.
“왜, 왜 그렇게 무서운 소리를 해요⋯⋯.”
이런 말을 듣고 싶어서 한 소리는 아니었다. 그저 순전히 사현의 손끝에서 탄생하는 그림은 어떠한 모습일까 궁금해서 한 말인데. 제가 사현의 상처를 헤집은 건가. 괜한 소리를 했나 후회가 됐다.
시시각각 무너지는 우영의 낯에 사현이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냥 이십 대에 그림을 시작했다면 그랬을 것 같다는 거지. 지금 그렇다는 건 아니고.”
“그래도⋯⋯ 그래도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진짜, 하지 마. 싫어.”
우영이 눈에 부리부리하게 힘을 주고 사현을 노려봤다.
사현의 입술이 삐뚜름히 뒤틀렸다. 묘한 가학성이 올라왔다. 어린아이의 볼록한 볼이나, 살찐 강아지의 통통한 엉덩이를 보면서 느끼는, 깨물어 터트리고 싶은, 그런 가학성.
“왜? 무서워? 내가 죽을까 봐?”
“아니요!”
우영이 빽 소리를 질렀다. 얼마나 극렬하게 부정하는지 소파에서 펄쩍 뛴 덕에 사현의 몸이 출렁거렸다. 사현이 큭큭 웃었다. 그리고 팔로 머리를 괴며 우영을 쳐다봤다.
“우영아, 나 안 죽어. 죽고 싶지 않아. 네가 있잖아. 연락만 안 돼도 찔끔찔끔 우는 너 때문에 출장도 못 가는데, 내가 가긴 어딜 가니?”
“⋯⋯저 찔끔찔끔 운 적 없거든요.”
“그래. 엉엉 울었지.”
사현이 턱을 들썩였다. 며칠 전이 기억나지 않냐며 키득거리기도 했다. 우영의 눈이 가늘게 찢어졌다.
“못됐어, 진짜⋯⋯. 나는 형을 사랑해서, 너무 좋아해서, 걱정돼서, 응? 그래서 운 건데. 그걸로 놀리기나 하고⋯⋯.”
사현의 어깨가 흠칫 굳었다. 그가 슬그머니 우영의 눈치를 봤다.
“뭐야⋯⋯. 그렇게 말하면 내가 개새끼 같잖아. 안 놀릴게. 미안해.”
그가 다리로 우영의 허리를 감아 자신 쪽으로 당겼다. 그러자 우영이 못 이기는 척, 사현의 품으로 스르륵 조심히 쓰러졌다. 사현이 한 팔로 그의 두툼한 어깨를 감싸 안아 다정히 쓰다듬었다.
“우영아. 나는⋯⋯ 갤러리든 회사든 바깥에 나가서 사람과 부딪쳐야 해. 세상에 나 혼자가 아니라는 걸 계속 확인받아야 하고, 바쁘게 움직여야 해. 그래야 했어. 안 그러면 끝없는 구렁텅이로 추락하는 기분이었거든.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죽을까 봐 두렵기도 했어.”
“⋯⋯.”
“그래서 네가 대단해. 혼자서도 그림을 그려 온 게.”
사현이 우영의 복슬복슬한 머리칼로 손을 옮겼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슥슥 빗어 넘겼다. 그러자 우영이 고개를 들고 시선을 맞춰 왔다.
“지금은 안 외롭다는 거죠?”
“응. 그럼. 이렇게 커다란 네가 있는데.”
“그럼 그림 한 번 그려 보면 안 돼요?”
“음⋯⋯. 그래, 뭐⋯⋯. 네가 옆에 있으면 못 그릴 것도 없겠다.”
사현은 썩 성의 없이 대꾸했다. 그냥 대화를 마무리하고자 한 말이었다. 그림은 보고 즐기는 거지, 직접 그리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 봤다. 원래 뭐든 그렇다. 비평과 감상은 쉽다. 허나 창작은 격이 다른 어려움이 있었다.
지금의 사현은 갤러리와 회사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랐다. 취미는 우영과 김밥천국에 마주 앉아 라면을 먹는 것으로도 차고 넘치고. 굳이 뭔가를 더 늘리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해 볼게.”
그렇게 일축한 사현이 다시 태블릿을 드는데 우영이 웬일로 눈치 없이 끈질기게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지금 해 보면 안 돼요?”
“⋯⋯지금?”
“네.”
“⋯⋯이 나이에?”
“에이, 나이가 무슨 상관이에요. 형이 뭐 예순 먹은 것도 아니고. 아니, 예순이나 쉰도 괜찮지. 요즘은 50세 주부가 C언어 배워서 프로그램 개발도 한다고요. 그리고 팔십 대 할머님은 글도 배우신대요. 신문에서 봤어요. 그림이 아무리 어려워 봐야 글 배우기보다 어렵겠어요?”
우영은 적극적으로 사현을 설득했다. 사현이 그림 그리는 걸 꼭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사현이 코로 길게 한숨을 내쉬며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사실 귀찮았다. 매우, 몹시 귀찮았는데. 우영이지 않나. 그가 원한다는데 못 해 줄 것도 없었다.
그래도 차라리 차를 사 달라거나, 땅을 사 달라거나 하는 게 훨씬 들어주기 쉬울 텐데. 애가 좀 이상하단 말이지. 그런 거 다 두고 기껏 부탁하는 게 그림 그려 달라는 거라니.
사현이 입술을 씰룩이며 몸을 일으켰다. 신난 우영이 토끼처럼 소파 밖으로 껑충 튀어 나갔다. 그러고는 팔절 스케치북 하나와 연필을 종류별로 꺼내 놓았다.
“그리고 싶은 거 있어요?”
“어⋯⋯ 모르겠는데. 그리고 싶은 게 있다고 한들 내가 그릴 수 있을 리 없지 않겠니?”
“그럼 쉽게 사과 같은 거 그려 보실래요? 아니면 나무?”
“글쎄⋯⋯.”
“아, 이건 어때요?”
작업실 여기저기 헤집던 우영이 화분을 하나 가져왔다. 특별할 것 없는 생김새의 녹색 잎 사이로 붉은색과 분홍색이 적당히 섞인 색의 꽃 한 송이가 막 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화분에는 ‘동백’이라고 우영이 손수 적은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요즘 창가에다 화분을 줄줄이 놓고 키우는데 개중 하나였다.
우영은 책상에다 화분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요리조리 돌려 사현이 그리기 쉬운 시점을 만들었다.
“⋯⋯그려?”
의자에 앉아 어색하게 연필을 쥔 사현이 우영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의 앞머리가 사르륵 옆으로 넘어갔다. 우영이 드러난 이마에 짧게 키스해 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필이 스케치북 위를 배회했다. 그러다 점을 쿡 찍는다 싶더니 아무것도 그리지 못하고 다시 떨어졌다. 그러다 다른 쪽으로 이동했으나 또 아무것도 그리지 못했다. 사현이 볼 안쪽 살을 꽉꽉 깨물었다. 그러다 울상을 지으며 다시 우영을 올려다봤다.
“동그라미 못 그리겠어.”
지나치게 깜찍한 모습에 우영이 큽, 하고는 숨을 거꾸로 삼켰다. 이러려고 시킨 건 아니었는데. 너무 귀엽다. 허나 티를 냈다간 사현이 연필을 내팽개치고 나가 버릴 게 뻔했다.
우영이 그가 들고 있던 연필을 부드럽게 가져갔다. 그러고는 사현의 등 뒤에 선 채, 한쪽 팔로 책상을 짚고 스케치북에다 동그라미를 그리기 시작했다. 우영의 가슴과 사현의 등이 가볍게 붙었다가 떨어지길 반복했다.
“화분 틀은 제가 잡아 드릴게요. 형은 식물만 그려요.”
“응.”
우영은 오차 하나 없이 단번에 타원을 슥 그려 냈다. 그러더니 투시에 맞게 직선을 죽죽 긋고 작은 타원을 하나 더 그렸다. 그러자 금세 화분이 생겨났다. 사현이 마술을 보는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그것을 쳐다봤다.
“자요.”
우영이 연필을 다시 사현의 손에 들려 주었다. 사현이 연필을 꾹 틀어쥐며 물었다.
“다음엔 뭐 그려?”
“형이 그리고 싶은 거.”
“음⋯⋯. 꽃?”
“좋아요.”
사현은 입을 앙다문 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화분이라는 틀이 생기니 꽃을 틔우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는 걱정보다 쉽게 꽃을 완성했다. 비록 잎이 삐뚤삐뚤하고 줄기도 굵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그 후로 사현은 손이 움직이는 대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잎을 그렸다가 줄기도 그리고, 나뭇잎의 결을 묘사했다가, 색이 진한 줄기에 어설프게 음영도 넣어 보았다.
우영은 맞은편에 앉아 그런 사현을 구경하고 있었다. 펜을 들고 뭔가에 집중하는 사현은 수도 없이 많이 봐 왔다. 바뀐 거라고는 수백만 원짜리 만년필이 몇천 원짜리 연필이 되었다는 것과, 활자가 빼곡한 서류 대신 하얀 스케치북이라는 것뿐인데 매우 새로웠다.
사현은 이십 분 정도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 스케치북 반절이 다채로운 모양의 잎으로 가득 찼을 때, 연필 끄트머리로 아랫입술을 지그시 누르며 인상을 썼다.
“이상해.”
“뭐가 이상해요?”
“이거랑 다르잖아.”
사현이 앞에 놓인 화분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이파리 모양도, 꽃도, 줄기도 다 다르다. 비슷하게 그린다고 그렸는데 전혀 다른 식물이 됐다. 사현의 눈가에 스멀스멀 짜증이 스밀 때였다.
우영이 가벼운 음성으로 말했다.
“다르면 어때서요.”
“⋯⋯.”
“이런 자연물은 형태가 틀려도 괜찮아요. 세상의 식물은 다 다르게 생겼고, 어딘가에는 형이 그린 애랑 똑같이 생긴 게 분명 있을 테니까.”
“⋯⋯.”
“뭐, 없으면 없는 대로 멋진 거죠.”
그 말에 사현의 만면에 차오르던 짜증이 사르르 씻겨 내려갔다.
사현이 다시 연필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슥슥, 연필이 하얀 종이 위를 바쁘게 나돌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림이 완성되었다.
사현이 조심히 연필을 내려놓았다. 그 후 자신이 그린 그림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림은 영 볼품없었다. 투시도 맞지 않았고, 잎의 생김새도 멋대로였다. 기울어지거나 접힌 건 어설프게 따라 그렸다가 괴상한 모양새가 됐다.
그래도 괜찮았다. 이 넓은 세상 어딘가, 이런 모양새의 식물 하나 없겠나. 없으면 없는 대로 괜찮다. 우영이 그랬으니까. 그가 멋지다고 해 주었으니까.
지금은 그냥 제가 그림을 그렸다는 그 성취감 하나로도 충분했다. 미술 치료라는 게 왜 있는지 알 것도 같았다.
“다 했어요?”
우영이 물었다.
“응.”
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영이 의자를 들고 책상을 돌아 사현의 옆에 앉았다. 두 사람의 팔뚝이 딱 맞붙었다. 우영은 사현의 그림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쳐다봤다.
사현은 괜히 수줍어져서 어깨를 안으로 말아야 했다. 제가 우영의 그림을 볼 때마다 그가 몸을 비비 꼬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이게 뭐라고 홀딱 벗고 있는 것처럼 부끄러운지 모르겠다.
사현이 연필 뒤로 자신의 턱 아래를 콕콕콕 찌르는데, 우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형. 이 그림 제가 살래요.”
“싫어. 나는 팔아도 될 그림만 팔아.”
“그럼 그냥 주세요, 선물로.”
뻔뻔한 말에 사현이 헛웃음을 흘렸다. 우영이 뭘 달라고 하는 건 매우 드문 일이다. 아니, 어쩌면 처음일지도. 근데 그 첫 부탁이 집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값비싼 옷가지도 아니고, 여기저기에 걸린 대가의 수억짜리 그림도 아니고, 고작 스케치북에 끄적인 이 하찮은 그림이라니.
사현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그에 우영이 울상을 하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주기 싫어요?”
“얼굴 치워. 너 얼굴로 떼쓰는 거. 그거 되게 치사하다?”
“아, 왜요. 형 첫 그림이잖아요. 내가 가질래요.”
우영이 널찍한 어깨를 흔들며 떼를 썼다. 그 깜찍한 애교에 사현은 끝내 피식 웃고 말았다. 그가 음, 하고 목으로 신음했다. 그러다 연필을 다시 스케치북으로 가져갔다.
“그럼⋯⋯ 잎 하나만 더 그리고.”
그 말에 우영이 와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의 허벅지를 철썩철썩 때리며 웃던 그가 사현의 옆구리에 달라붙었다.
“형, 너무 귀여워요. 뽀뽀할래요. 하게 해 주세요.”
“야, 나 지금 그림 그리는 중이잖아. ⋯⋯볼에 해.”
“네.”
우영이 사현의 볼로 냅다 돌진했다. 그러고는 미끈한 뺨에 꾸우욱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당연히 한 번으로는 만족이 안 되는지라 계속해서 쪽쪽쪽 입술을 쪼아 댔다. 사현은 아이처럼 킥킥거리며 뽀뽀를 받았다.
사현은 잎을 하나만 더 그린다더니 세 개나 더 그렸다. 화분이 한층 더 풍성해졌다.
“너무 멋져요.”
스케치북을 든 우영이 진심으로 감탄했다. 얼마나 진짜처럼 잘 그렸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것을 그린 이가 누구인지, 그 사람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가 중요했다.
우영의 광대가 봉긋 올라갔다. 시원하게 벌어진 입은 예쁜 호선을 그렸다.
“내일 액자 사러 가야겠어요. 제 작업실에 둘래요. 아니, 침실에 둘까요? 아니다. 작업실에 제일 오래 있으니까 여기 둬야겠어요. 저기 저쪽 벽에 걸까 봐요.”
사현은 책상 위로 턱을 괸 채 종알거리는 우영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그래 봐야 하찮은 그림인데,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기뻐하는 그가 참 사랑스러웠다. 반짝반짝 빛이 난다. 너무 예쁘고 아름답고 귀해서, 제 곁에 이렇게 앉아 있는 게 감사할 정도다.
한동안 우영을 보던 사현이 나직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우영아.”
“네.”
“너는 이렇게 사는 게 행복하니?”
“⋯⋯네?”
뜬금없는 질문에 우영이 스케치북을 스르륵 내려놓았다. 어쩐지 부정적으로 느껴지는 질문이라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놀란 토끼 같은 얼굴에 사현이 설핏 웃으며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나는 엄청 행복해서 물은 거야. 너도 그런가, 싶어서.”
“당연히 행복하죠.”
“그렇게 쉽게 말하지 말고. 잘 생각해 봐.”
“⋯⋯.”
“나는 매일 매 순간이 즐거워. 너와 함께 있을 땐 그 자체로, 너와 함께하지 않을 땐 널 만나는 그 순간을 기대하면서 즐겁고 행복해해.”
“형.”
“너도 그래? 나는⋯⋯ 내가 네 행복까지 강탈해서 행복한 건 아닐까 가끔 겁이 나. 너는 나한테 이렇게 많은 걸 주는데, 나는 주는 게 없잖니.”
그 말에 우영이 인상을 썼다. 잘생긴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형이 왜 주는 게 없어요.”
“집, 돈, 옷 그런 물질적인 걸 뜻하는 게 아니야. 감정을 말하는 거지. 너는 정말 온몸이 저릿할 만큼 사랑해 주는데, 나는 그걸 돌려주지 못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네가 지칠까 봐 불안해.”
사현에게 물질적인 건 사랑에 하등 쓸모없었다. 우영이 그런 것을 좋아하면 또 달라지겠지만, 그 역시 먹고사는 문제만 해결되면 뭘 먹는 뭘 입든 수더분하게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그러니 더 걱정이 되었다. 돈 쓰는 건 쉽지만 감정을 쓰는 건 어려워서.
진지한 사현의 낯에 우영이 스케치북을 조심히 덮었다. 그리고 의자를 당겨 사현의 곁에 바짝 붙어 앉아, 지그시 시선을 맞춰 왔다.
“저번에요, 제가 제인 실장님이랑 만났다고 했잖아요. 박태영 때문에.”
“응.”
“그때 제인 실장님이 그러셨어요.”
“뭐라고?”
“저는 형한테 정말 특별하다고.”
“⋯⋯.”
“그 이유를 다섯 가지나 넘게 들면서 말씀하셨어요. 까탈스러운 형이 저를 데리고 사는 것부터, 매일 반지를 끼는 것도, 우리가 이렇게 오래 만나는 것도, 일보다 저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
“형은 저를 진-짜 유난스럽게 사랑하고 있어요. 형 주변 사람들은 다 알아요. 근데 제가 모르겠어요?”
우영이 익살맞게 고개를 뒤틀며 말했다.
“제가 박태영을 질투하고, 걱정하면서 엉엉 운 건 지금 이 행복이 깨질까 봐 무서웠기 때문이에요.”
“⋯⋯.”
“지금이 너무 좋아서. 이런 행복이 믿기질 않아서. 언제고, 누군가고 형을 탐낼까 봐 전전긍긍해요. 예전에 형이 형 납치하라고 했잖아요. 그걸 가끔 진지하게 계획해 보기도 한다니까요.”
사현이 실소했다. 잊고 있던 건데. 그걸 계획까지 하고 있을 줄이야. 납치해 준다면, 그저 감사할 것이다. 온종일 그의 등에 껌딱지처럼 달라붙어 있을 수 있을 테니까.
작게 웃는 사현을 빤히 보던 우영이 그의 손을 두 손으로 조심히 쥐었다. 그리고 매끄러운 흰 손등에다 꾹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저는 형이 제 품에서 악몽도 안 꾸고, 울지도 않고, 잘 자는 게 행복해요. 형이 절 사랑하니까, 절 믿으니까, 절 좋아하니까 그러는 거잖아요.”
“⋯⋯.”
“저는 그렇게 형 사랑을 확인해요.”
“우영아.”
“형이 저를 이유로 행복해하는 게 좋아요.”
“⋯⋯.”
“그럼 저는 더 행복해지거든요.”
우영이 사현의 손바닥에 뺨을 묻었다. 예쁜 부채꼴로 펼쳐진 그의 속눈썹이 느릿하게 팔랑거렸다. 사현이 무언가에 홀린 듯한 눈으로 그것을 쳐다봤다. 곧 우영의 맑은 눈동자에 사현이 담뿍 맺혔다.
“좋아해요, 형.”
“⋯⋯.”
“저를 사랑해 주는 형이 좋아요.”
사현이 입을 벙긋거렸다. 나도. 나도 그래. 그렇게 대답해 주고 싶었는데 목구멍이 꽉 막혀서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더 대단한 말을 해 주고 싶은데, 이런 쪽으로는 어려서 힘들었다.
한동안 답할 말을 고민하던 사현은 참지 못하고 우영을 안고야 말았다. 두 팔을 크게 벌리고 아주 힘껏 안았다. 쿵쾅쿵쾅 거칠게 맥동하는 제 심장을 우영이 알아주길 바라면서.
다행히 우영은 그 마음을 안다는 듯 허리를 마주 안아 왔다. 사현이 그의 단단한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서로를 속속들이 알 만큼 오래 만나 왔는데. 나는 아직도 네가 기적 같다. 이제 네 사랑에 온통 절었는데 아직도 하루하루 네가 스민다. 그게 말도 못 하게 감사하고 소중하다.
그림이 어려웠던 내게.
사랑이 어려웠던 내게.
네가 화분을 대신 그려 준 것처럼.
네가 방대한 사랑을 쏟아 준 것처럼.
그 화분 위에서 내가 꽃을 틔웠던 것처럼.
그 사랑 위에서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처럼.
우리는 완벽한 한 폭의 그림이 될 것이다.
갤러리 비 두 번째 외전 〈完〉
#사현의 인터뷰
Q. 화 그룹으로 직장을 옮긴 후부터 인터뷰에 나서지 않았는데, 이렇게 수락해 줘서 매우 기쁘다.
갤러리 관련 인터뷰라면 열 개고 백 개고 했을 것이다. 거긴 내 멋대로 지껄여도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어서. 근데 회사 일은, 어렵다. 지금도 보라. 저기 비서팀이 죄 몰려와서 나를 감시하고 있지 않나.
Q. 옷차림도 다른 것 같다. 예전에 〈갤러리 비〉의 B로 있을 때와 화 그룹의 백 사장으로 있는 지금, 어느 쪽 스타일이 취향인가?
⋯⋯이거 경제지로 알고 왔는데.
Q. 가벼운 아이스 브레이킹이다.
아무래도 갤러리로 출근할 때 입는 게 취향이긴 하다. 자유로워서.
Q. 사실 뭘 입든 다 잘 어울린다는 거 본인도 알고 있지 않나?
여기서 긍정하면 내일 기사가 많이 날 것 같은데. 안다. 세상에 거울이라는 게 있으니 모를 수가 없다.(웃음)
(중략)
Q. 갤러리 경영 이야기가 나온 김에, 사심을 좀 채우고 싶다. 몇 가지 물어봐도 되나? 아, 지금부터는 B라고 부르겠다.
내가 소장한 그림을 달라는 것만 아니면 괜찮다.
Q. 그런 건 아니니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 사실 본인은 네온 작가의 극렬한 팬이다. 전시란 전시는 다 갔다. 작년에 MoMA에서 한 전시도 갔다.
감사하다.
Q. 네온 작가에 관해 물어봐도 되나?
아니.(웃음) 여태 어떻게 지켜 온 작가인데. 내보일 생각일랑 없다. 기대하지 말라.
Q. 그래도 몇 가지 질문을 해 보겠다. 원치 않으면 대답하지 않아도 좋다.
침묵으로 이루어진 인터뷰가 되어도 괜찮다면.
Q. 네온 작가는 전시 주기가 짧은 편이다. 곧 오픈한다는 세 번째 전시까지는 텀이 조금 있었지만, 첫 번째와 두 번째 전시는 텀이 짧고, 그림 수도 많았다.
작가가 젊어서 그렇다.
Q. 젊다면 얼마나?
그건 이야기해 줄 수 없다. 아무튼 네온 작가는 젊고, 싱그럽다. 관람객에게 사랑을 받을수록 더욱 피어나는 사람이다. 작가 본인도, 그림도. 그래서 작업을 쉬는 날이 거의 없다. 붓을 들고 살고, 가까이 가면 유화 기름 냄새가 난다. 물론 나쁜 냄새는 아니다.
Q. 냄새를 표현하는 표정이 밝다. 아주 좋은 향기가 나는 모양이다.
그렇다.
Q. ⋯⋯끝인가?
끝이다.
Q. 그에 대해서 조금만 더 말해 달라. 추상적이어도 괜찮다.
그가 그리는 그림처럼 쨍하고 명확한 사람이다. 감정적으로 성숙하고, 배울 게 많다.
Q. 젊다고 하지 않았나?
사람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배우는데 나이가 뭐가 중요한가.
Q. 방금 대답은 조금 놀랍다.
왜? 유아독존인 내가 누군가에게 뭘 배운다니 신기한가?(웃음) Q. 부정은 못 하겠다.
네온은 존경할 만한 사람이다. 성숙하고, 멋지고, 아름답다.
Q. 아름다워? 설마 생김새가?
어⋯⋯.
Q. 제발. 상상이라도 하게 해 달라.
매우 아름답다. 얼굴을 공개하지 않는 이유는 그의 얼굴이 작품 감상에 방해가 될 정도로 아름답기 때문이다.
Q. 맙소사. 그 정도인가? 이 인터뷰 이후로 네온의 그림값이 더 뛸 수도 있겠다.
그럴 수도.
Q. 이쯤 되니 의심이 든다. 사실 B가 그를 독점하고 싶은 게 아닌가? 아름다운 거라면 일단 소장하고 보는 걸로 유명하지 않나.
들켰다.(웃음)
Q. B가 작가의 그림이 아니라 작가 자체에 개인적인 견해와 느낌을 덧붙이는 건 처음인 것 같다.
아무래도 네온은 특별하니까.
Q. 어떻게 특별한가?
말할 수 없다.
Q. 아- 조금 알고 나니 더 궁금해졌다. 그를 알고 있는 B가 부럽다. 틀림없이 공개되지 않은 네온의 그림도 독점하고 있겠지.
몇 점 가지고 있다.
Q. B는 정말 복 받은 사람이다.
몰랐는데, 네온을 만나고 그걸 체감하고 있다. 내가 복 받은 사람이라는 걸.
Q. 혹시 네온의 다음 전시 부제를 알 수 있나?
얼마든지. 내가 앞서 말했지 않나. 갤러리 일은 멋대로 지껄여도 된다고.
Q. 뭔가?
〈우리의 밤〉. 〈우리의 밤〉이다.
갤러리 비(Gallery B)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