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뉴트럴 그레이색 관계
우영은 〈갤러리 비〉에 있는 사현의 관장실, 책상 옆 1인용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기다란 다리를 꼬고 한 손엔 작은 스케치북을, 반대 손에는 길게 깎은 연필을 들고 사각사각 스케치를 했다.
요즘 기분이 좋다. 사현과 화해한 이후 그리고 싶은 게 끊임없이 샘솟아서 손이 바빴다.
늦은 오후의 햇볕이 스케치북 위로 쨍하게 내려앉았다. 여름에 가까워진 햇살은 날카롭다. 그게 하얀 스케치북과 닿으면 빛이 깨져서 뭉근하게 퍼지는데, 우영은 그게 참 좋았다. 그러면서도 밤에 그림을 그리는 버릇은 못 고쳤지만, 어쩌면 그래서 이 순간이 더 좋은 걸지도 모르겠다.
오늘 오전에는 콜라보를 계획해 오던 기업과 미팅이 있었다. 미팅은 몇 시간 만에 끝났고, 계약 조율만 하면 되는데 우영이 딱히 그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어서 관장실로 피신 왔다.
대신 사현이 그 자리에 있었다. 언젠가 그가 말했던 ‘돈과 가격. 이득, 손해. 흑자, 적자. 그런 거는 내가 잴게. 매니저? 그것도 해 줄게. 너는 꿈 꿔.’를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계약을 마무리하고 나면, 둘이서 소소히 축하라도 할 겸 김밥천국에 가기로 했다. 그 후에 시외에 있는 카페에 가서 여유도 부리고, 밤에는 둘이 자주 가는 호텔 라운지에서 술도 마실 것이다.
다리를 꼰 우영의 발끝이 까딱까딱 움직였다. 반질반질한 구두에 반사된 빛이 그의 이마 위를 스쳤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한창 그림을 그리던 우영이 으음, 하며 팔 받침대 위로 턱을 괬다. 그러면서 사현의 관장실을 둘러보았다.
사현이 화 그룹으로 출근하게 되면서 사람이 있는 시간보다 비어 있는 시간이 더 많아진 관장실이 어쩐지 외로워 보였다. 그래도 [관장 백 사 현]이라 적힌 크리스털 명패는 여전히 멋졌다. 책상 맞은편 벽에 큼지막하게 걸려 있는 제 그림도 뿌듯했고.
우영은 관장실을 찬찬히 훑으며 이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되뇌었다.
가장 처음, 사현의 명함을 쥔 제가 쭈뼛쭈뼛 들어서던 것도, 길쭉한 소파에 누워 낮잠을 자던 사현을 훔쳐보던 것도, 그와 그림과 전시에 관해 토론하던 것도, 제 그림이 찢어졌던 것도, 사현이 가슴을 움켜쥐고 기절한 것도, 모든 일이 끝나고 남몰래 키스하던 것도, 둘만의 사랑을 속삭이던 것도.
돌이켜 보니 참 많은 일이 있었다. 기쁜 일만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그래도 흉터가 된 일은 없었다. 당시에 났던 상처는 모두 아물었고, 그 아픔이 있었기에 지금의 사현과 제가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앞으로도 그렇겠지. 아주 많은 일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크게 두렵진 않았다. 저와 사현이 함께라면 못할 게 뭐 있겠나.
씨익 미소 지은 우영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삼십 분 정도 있으면 미팅이 끝날 것이다. 그럼 사현과 데이트할 수 있다.
만면 가득 행복을 채운 우영이 다시 스케치북으로 고개를 내릴 때였다. 관장실 문이 벌컥 열렸다. 우영의 입꼬리가 대번에 올라갔다. 사현이 온 줄 알았기 때문이다.
헌데 예상외의 인물이 서 있었다.
“작가님이 그랬죠?”
무례하게 문을 박차고 들어온 남성의 머리칼이 곱슬곱슬했다. 그새 파마가 한결 풀린 태영이었다.
우영이 설핏 눈을 가늘게 떴다. 이곳은 저렇게 아무나, 막 들어와서는 안 되는 곳인데 제인은 뭘 하고⋯⋯, 까지 생각하다 그녀가 현재 사현의 옆에 있음을 상기했다.
즉, 태영을 이곳에서 쫓아낼 수 있는 사람은 저뿐이라는 뜻이었다.
스케치북을 덮은 우영이 몸을 일으켰다. 그 찰나를 기다리지 못한 태영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가까워진 거리에 씩씩거리는 그의 숨결이 가감 없이 느껴졌다. 우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타인의 불쾌감을 피부로 느끼는 건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작가님이 사현이 형한테 뭐라고 한 거죠? 내 욕 했어요? 없는 말 지어낸 건 아니에요?”
“박태영 씨.”
“뭐라고 했길래 형이 내 전화도 안 받고, 날 안 만나 주냐고!”
그 역시 오만방자한 말이었다. 태영에게 사현은 상사지, 전화 걸면 받고 만나 달라 하면 만나 주는 친구가 아니었다. 사현이 우영이 떠오른다며 몇 번 오냐오냐해 준 걸 매우 난감하게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주머니에 손을 꽂은 우영이 차가운 시선으로 태영을 내려다봤다.
“사현이 형은 박태영 씨가 만나고 싶다고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작가님이 아니었으면 만날 수 있었어요. 당신이 중간에서 이간질한 거잖아.”
원색적인 분노 표출에 우영이 자신의 눈썹을 긁적였다. 이간질. 사현에게 태영은 이간질해서 사이가 멀어지고 말 것도 없는 사이였다. 그가 여태 받아 온 사현의 특혜는, 사현의 관심은 그저 저의 또래이기 때문에, 단지 그 이유로 받아 온 것인데. 태영은 그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깨우쳐 줘야 할까. 어떻게 가르쳐 줘야, 사현에게 목매지 않을까. 자기 분수를 알까.
잠시 고민하던 우영이 태영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맞아요. 내가 했어요. 당신이 싫으니까 밥도 같이 먹어 주지 말고 연락도 받지 말라고 했어.”
“이 씨발⋯⋯.”
“⋯⋯씨발?”
우영의 낯이 대번에 차게 식었다. 그가 위협적으로 태영에게 다가갔다. 저보다 훨씬 거대한 우영의 덩치에 겁먹은 태영이 본능적으로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우영이 저음으로 으르댔다.
“어디 감히 형 관장실에서 욕을 해.”
“⋯⋯.”
그에 태영이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눈가가 잔뜩 구겨진 게 한 소리 들은 게 못내 분한 듯했다. 허나 우영도 분했다. 저를 미워하고 시기하는 건 이해한다만 그 분노가 사현에게 튀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사현의 공간에, 그가 함부로 지껄인 욕설이 나도는 것도 싫었다.
여기가 어떤 곳인데 양아치처럼 들어와서 소리를 빽빽 질러대나, 같잖은 애송이가. 저도 이곳에 들어올 때마다 송구하고 감사하거늘.
“그래. 내가 형한테 네 욕 했어. 아주 신랄하게 했어.”
“당신⋯⋯.”
“그렇다고 행여라도 형한테 싫은 기색 보이지 마. 가서 징징거리지도 마. 우리 형 바빠. 그런 거 들어 주고 있을 시간 없어. 그렇다고 제인 실장님이나 큐레이터들을 불편하게 해서도 안 돼.”
“⋯⋯.”
“그냥 시키면 시키는 대로, 납작 엎드려서 주어진 기회나 감사하게 받아.”
말을 마친 우영이 현재 태영이 서 있는 곳과 문과의 거리를 가늠했다. 바깥으로 내보내야 하는데. 들어서 옮길 수 있으려나. 발버둥 치다가 값비싼 예술품에 흠집이라도 내면 큰일이었다.
그가 볼 안쪽 살을 지그시 씹는데 태영이 눈을 부라리며 우영을 노려봤다.
“왜요? 내가 가서 사현이 형한테 사실대로 말하면 형이 작가님 미워할까 봐 그러는 거죠?”
예상치 못한 말에 우영은 속절없이 웃음을 터트려야 했다. 푸하, 하고 박장대소했다. 너무 웃긴 말이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눈꼬리에 눈물이 찔끔 고였을 때쯤, 태영의 얼굴이 치미는 모욕감으로 시뻘겋게 달아올랐을 때쯤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형은 나 안 미워해.”
“그건 당신 생각이고. 사현이 형 생각은 다를 수도 있지.”
“⋯⋯.”
우영의 한쪽 입꼬리가 비죽 뒤틀렸다. 우리 가족이고, 부부인데.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말도 모르나.
신문에서 봤다. 신혼부부가 줄어 가고 있다고. 그런 세상에서 우리는 반지를 나누어 꼈고, 영원히 사랑하기로 맹세했고, 가족이 되었다. 법적으로는 완연한 남남이지만 저도 사현도 하등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함께할 것이다.
그러니 태영의 말이 우스울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만지작거린 우영이 코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잔잔한 음성으로 태영을 짓밟았다.
“내가 사현이 형한테 당신 전시하지 말라고 할 수도 있어요. 그럼 형은 당장 오늘 밤에 그 일을 때려치울 거야.”
“당신이 뭔데-”
“나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에요. 형이 갤러리를 포기하고 화 그룹으로 출근하는 것도 나 지키려고 그랬던 거거든.”
“⋯⋯.”
“형한테 〈갤러리 비〉는 목숨 같은 건데, 그걸 버렸어. 내가 더 소중해져서. 그러니까 당신 전시 어그러트리는 거? 그건 일도 아니지.”
“⋯⋯.”
“그러니까 나한테 잘 보여요. 괜히 객기 부리지 말고.”
우영이 검지로 태영의 가슴팍을 툭툭 두드렸다. 화나라고 한 짓이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태영이 제게 주먹이라도 날리길 바랐다. 그럼 그대로 아웃일 테니까. 사현이 그것을 명분 삼아 아주 당연하고 매몰차게 그를 버릴 테니까.
허나 안타깝게도 태영은 주먹만 꽉 말아 쥘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우영의 덩치를 이길 자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다시금 손목시계를 확인한 우영이 빙긋, 다정하게 웃으며 태영을 바라봤다.
“형 올 시간 다 됐네. 이만 나가 줄래요? 형은 자기 허락 없이 아무나 관장실에 들어오는 거 싫어해. 이미 밉보였는데, 더 밉보일 필요 없잖아요?”
“⋯⋯.”
입을 꾹 다문 태영이 우영을 노려봤다. 순순히 제 발로 관장실에서 나갈 생각일랑 없는 듯했다.
우영이 자신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폭력은 안 되는데. 손에 상처라도 났다간 된통 혼날 게 분명했다. 그럼 팔꿈치로 쳐야 하나. 아니, 나중에 태영이 바깥에 나가서 괜히 입을 털었다간 사현이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질 것이다. 차라리 제가 맞았으면 맞았지.
우영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중에 문이 벌컥 열렸다.
“우영아, 미안해. 많이 기다렸지.”
사현이었다.
우영과 태영의 시선이 동시에 문으로 향했다. 문고리를 쥔 사현이 바짝 붙어 선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말간 얼굴을 온통 구겼다. 그가 성큼성큼 관장실을 가로질렀다. 그러고는 우영을 등지고 섰다. 마치 우영을 지키는 보디가드처럼.
“박태영. 넌 왜 여기 있어? 오늘 오는 날도 아니잖아. 그림은 다 그렸어?”
“아, 저, 그게⋯⋯.”
태영이 손을 공손히 모았다. 그러고는 어깨를 접고, 턱을 안으로 말며,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보면 우영이 태영에게 손찌검이라도 한 줄 알 터였다. 아랫입술을 비죽 내민 그가 억눌린 음성으로 말했다.
“사현이 형. 네온 작가님이 저한테요-”
“⋯⋯네가 왜 날 형이라고 부르니?”
사현이 날카롭게 되물었다. 그는 진심으로 불쾌해했다. 그에 태영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우영은 웃지 않기 위해 입술을 꾹 말아 물어야 했다. 제가 백 번 천 번 말하는 것보다야 사현이 이렇게 한마디 해 주는 게 태영의 주제 파악에 더 효과적일 것이다. 그리고 못된 마음이나, 조금, 아주 조금 통쾌하기도 했다.
봐 봐. 사현이 형은 아무나 부르는 호칭이 아니라니까.
하지만 태영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콧잔등을 구긴 채 반발했다.
“하지만⋯⋯ 네온 작가님은 그렇게 부르잖아요.”
“그건 얘잖아. 얘는 그래도 돼.”
사현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태영이 어쩌다 자신과 우영을 동일 선상에 놓게 된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제가 그렇게 잘해 줬나, 하기엔 딱히 아닌데. 만나서 다른 이야기를 한 적도 없었다. 온통 그림과 관련해서 잔소리만 늘어놓았지.
“⋯⋯.”
자꾸만 선을 긋는 사현에 태영의 눈가가 어그러졌다.
“진짜⋯⋯ 너무해요. 너무해요, B.”
이제는 사현에게 화살을 돌리는 태영에 우영이 미간을 구겼다. 그가 앞으로 나가려는데 사현이 그를 막아섰다. 그리고 아주 나긋한 목소리로 태영의 가슴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뭐가 너무해? 내가 너한테 욕했니?”
“B⋯⋯.”
“아니면 인격 모독이라도 했어? 널 착취하고 노예처럼 부렸어? 길바닥에서 구르던 놈 데려다 집도 주고 밥도 주고 전시도 열어 주는데, 뭐가 너무해?”
“⋯⋯이렇게, 이렇게 네온 작가님이랑 저랑 차별하시는 거. 불공평하다고요. 그게 너무하다고요!”
태영이 빽 소리를 질렀다. 귓구멍을 괴롭히는 소음에 사현이 고개를 비틀며 인상을 썼다. 이런 고함은 원화 이후로 오랜만에 듣는 것이다. 그간 그 누구도 사현에게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어느 누가 감히. 방자하게. 그것도 이곳, 관장실에서 제게 소리를 지르겠나.
사현은 진심으로 화가 났다. 용납할 수 없는 만용이었다. 그가 태영에게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갔다. 키도 몸집도 태영보다 조금 작은 사현이었으나 그 기백이 대단했다. 태영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쳐 놓고도 사현을 대차게 노려보는 눈은 거두지 않았다.
사현이 그 눈알을 뽑아 버릴 듯한 낯으로 으르댔다.
“야. 세상 어느 회사든, 어느 사회 집단이든 들어온 지 겨우 한 달 된 신입이랑, 같이 일한 지 몇 년 된 경력직이랑 같은 취급하지 않아.”
“⋯⋯.”
“더군다나 신입인 네가 번 돈은 마이너스 삼 억인데, 경력직인 얘가 번 돈은 삼백 억일 때. 차별이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니니?”
사현의 말은 한 문장 한 문장 크리티컬이었다. 우영은 태영의 머리 위로 붉은 글씨의 HP가 줄줄이 닳아 없어지는 환각을 보았다. 그게 얼마나 통쾌한지. 입술이 자꾸 위로 솟구쳐서 힘주어 참아야 했다.
사현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다시는 싹이 움트지 못하게 제대로 밟아 주겠다는 듯 태영을 혼냈다.
“불평, 불만도 권력이 있어야 하는 거야.”
“⋯⋯.”
“〈갤러리 비〉는 독재 체제야. 여기선 내 권력이 제일 세거든. 그래서 내 마음대로 해. 그리고 나는, 네 불평과 불만을 들어 줄 생각도, 시간도 없어.”
“⋯⋯.”
“그게 싫고, 불공평하다고 생각되면 나가.”
사현이 관장실 문을 가리켰다. 태영이 얼빠진 얼굴로 그의 손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여태 너한테 쏟은 돈도 안 받을 테니까 얼마든지 가도 돼.”
“⋯⋯.”
“대신 한국에서 그림으로 먹고살 생각은 하지 말고.”
“⋯⋯.”
“어디 가서 입 털어 봐야 기사 한 줄 안 날 테니까 등신 같은 생각도 하지 말고.”
말을 마친 사현이 느슨하게 팔짱을 꼈다. 태영의 낯 위로 불그죽죽한 줄이 그어졌다. 수치와 부끄러움, 분노, 억울함 등이 마구 뒤섞인 낯이었다.
“제가, 이런 소리를 듣고⋯⋯ 어떻게 그림을 그려요.”
“못 그려? 그럼 너한텐 그림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는 모양이지.”
“⋯⋯.”
태영의 입이 꾹 다물렸다. 감정과 기분, 컨디션에 따라 그림을 그리고 마는 것. 그런 건 그래도 되는 작가, 그러니까 그림 한 점이 몇 억에 팔려서 배를 곯지 않는 작가나 가능한 것이다. 태영처럼 그림 한 점에 기껏해야 십만 원 받는 이는 그저 주야장천 붓질을 해야 했다.
그리고 아마 〈갤러리 비〉에서 전시를 열지 못하게 된다면, 죽을 때까지 그 궁핍하고 지질한 생활을 이어 가야 할 게 뻔했다.
태영은 알고 있었다. 이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여기서 부득부득 버텨 봐야 제가 건질 수 있는 것도, 이길 확률도 없다는 걸.
점점 변화하는 태영의 낯빛을 보던 사현이 목을 비스듬히 꺾으며 물었다.
“전시할 거야, 말 거야?”
“할⋯⋯ 할 거예요.”
“그럼 집에 가서 그림이나 그려. 손가락이 뒤틀릴 때까지 그려.”
“⋯⋯네.”
“지금 네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생각해. 자존심, 동경, 감정, 청춘- 그딴 거 백 원도 안 돼. 부득부득 잡고 있지 말고 버려.”
태영이 삐걱삐걱 고개를 끄덕였다. 사현과 우영을 번갈아 보던 그가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그러고는 어깨가 축 늘어져서는 관장실을 나섰다. 마침내 불청객이 퇴장하는 순간이었다.
사현이 닫힌 문을 보며 목을 움츠렸다가 폈다. 가뜩이나 계약 조율 때문에 말을 많이 해서 목이 까끌거리는데, 쓸데없이 열을 내 버렸다. 사현이 눈을 마구 문지르며 뒤를 돌았다.
“아우⋯⋯. 어린애는 귀찮아.”
무심코 한탄하던 그가 흠칫 굳었다. 우영이 저를 빤히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한테 한 소리 아니니까 또 헛물켜지 말고.”
“저 어린애 아닌데요. 박태영보다 두 살이나 많다고요.”
우영이 몹시 당차게 말했다. 그 말에 사현이 옅은 웃음을 흘렸다. 그래. 우영도 이제 삼십 대다. 성격도 외형도 전과 크게 달라지진 않았으나 분위기가 달라졌다. 한층 성숙해졌다고 해야 하나. 농익었다는 야릇한 말도 잘 어울렸다.
눈빛이 차분해졌고, 표정도 웬만해선 크게 변화가 없다. 물론 제 앞에서야 여전히 방정맞은 애다만, 바깥에선 제법 어른 행세를 하고 다녔다. 이전엔 후드가 잘 어울렸는데 요즘은 니트와 셔츠가 잘 어울리기도 했다.
사현이 우영의 머리칼을 크게 쓰다듬었다. 우영이 얼른 허리를 숙이고 그의 손길을 받았다.
“그래. 너도 꽤 컸지.”
“이제 어른 같죠?”
“컸다고 자랑하는 거야? 귀여워라⋯⋯.”
그래 봐야 질투하면서 엉엉 우는 애송이가⋯⋯. 사현이 우영의 양쪽 뺨을 쥐고 조몰락거렸다. 우영이 씨익 웃었다. 잘생긴 입매가 시원하게 벌어졌다. 사현이 고개를 옆으로 꺾어 그의 아랫입술을 쪽 빨았다가 놨다. 우영이 또 좋다고 히죽댔다. 그러다 서서히 웃음을 사그라트렸다.
“박태영이 또 형 귀찮게 하진 않겠죠?”
“안 그럴걸. 저런 애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게 이전으로 돌아가는 거거든. 꿈도 돈도 없는 어두운 과거가 얼마나 괴로운지 알고 있으니까, 이제 너한테도 시비 안 걸 거야.”
그 말에 우영이 다시 웃음꽃을 틔웠다. 싱그러운 웃음을 가만히 보던 사현이 우영의 가슴팍에 푹 얼굴을 묻었다. 우영이 늘어진 그의 손을 쥐어 손가락을 얽었다. 같은 반지를 낀 약지 두 개가 부드럽게 엉켰다.
사현이 우영의 냄새를 크게 들이마셨다. 폐부 가득 들어차는 그의 체취에 전신이 노곤해졌다. 잊고 있던 허기도 올라왔다.
“나 배고파. 라면 먹고 싶어.”
“김밥천국 가요.”
“응⋯⋯. 오 분만 있다가.”
“네.”
우영이 사현을 두 팔로 꼭 껴안았다. 두툼하고 단단한 팔에 마치 이불에 쌓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영아.”
“네.”
“좋아해.”
사현의 입가에 미소가 스몄다. 치열했던 일과가 모두 끝나고 마주하는 연인의 체온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평화롭고 안온하다. 이제는 없으면 안 될 체취와 체온이었다.
“저도요. 저도 많이 좋아해요, 형.”
사현의 머리칼 위로 입술이 내려앉았다. 사현이 빙긋 입꼬리를 올렸다.
아아, 나의 사랑스럽고 청량한 안식처. 얼른 어른이 되고 싶은 마음이야 이해한다만, 그래도 천천히 자라 주길. 계속해서 내 곁에 있어 주길. 네 세상에 오롯이 나만 떠 있고 싶은 못된 욕심을 이해해 주길.
사현이 그의 허리를 힘껏 껴안았다.
* * *
한 달 후. 〈갤러리 비〉에서 태영의 전시가 열렸다. 우영은 멋지게 슈트를 입고 전시 오픈회에 참석했다. 태영을 보기 위해서는 아니었고, 알음알음 얼굴을 튼 컬렉터나 한 차례 일을 같이 한 대기업 직원들과 인사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주목적은 사현을 보는 거였지만.
갤러리 앞에 선 우영이 건물 외벽에 묵직하게 늘어진 현수막을 응시했다.
박태윤 특별 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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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온: 바람이 없고 따뜻함’
“⋯⋯박태윤.”
평범하나 예쁜 이름이었다. 사현이 중성적인 이름을 원했고, 지극히 한국적인 그림이라 영어를 쓰지 않길 바랐다고 들었다. 태영은 군말 없이 사현이 추천해 주는 이름을 쓰기로 했다고. 싫다고 노발대발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며 사현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태영의 그림은 평화롭고, 나른하고, 따뜻한 분위기가 대부분이었다. 도대체가 우영이 봐 온 태영의 성격과는 하등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었는데, 그런 그림만 줄줄 그려 내는 게 신기했다.
하긴, 뭐. 저도 얼굴에 형광색 물감을 묻히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돈 없어서 남이 쓰고 남은 물감을 줍다 보니 형광색을 쓰게 된 건데. 태영도 그런 그림체가 자리 잡은 이유가 있지 않겠나 싶었다.
우영은 여유롭게 〈갤러리 비〉에 들어섰다. 미끈한 대리석 바닥과 구두 밑창이 뚜벅뚜벅 마찰하는 소리가 참 좋았다.
그는 가장 먼저 제인과 인사했다. 제인은 가벼운 미소와 함께 인사를 받아 주었다. 우영은 이제 그녀 없이도 혼자 전시장을 잘 돌아다녔다. 본인의 전시도 아니었고, 그간 오픈 전시에 참여한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이제 제법 이 분야에서 일하는 전문가 같았다.
우영은 자유롭게 이곳저곳을 들쑤셨다. 오랜만에 가영도 만나 반갑게 인사했고, 뉴욕 MoMA에서 온 큐레이터가 있기에 어색하게 영어로 인사를 건네 보기도 했다. 아직 한참 모자라지만 그래도 짧게 대화했다는 게 뿌듯해서 혼자 웃었다.
그리고 사현이 멋지게 짜 놓은 전시를 관람했다. 천천히, 그림 주변에 깃든 그의 손길을 느끼면서. 제가 태영을 싫어하고 말고를 떠나 전시는 멋졌고, 그림은 아름다웠다.
질투는 나지 않았다. 그래도 경각심은 가지게 됐다. 더 열심히 그려야지. 더 멋지게 그려야지. 더 부지런한 작가가 되어야지. 사현의 곁에 서 있기에 부끄럽지 않아야지.
그런 결심을 하다, 인파 사이를 쭈뼛쭈뼛 나돌고 있는 태영을 발견했다. 고개와 시선이 중구난방으로 튀는 데다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게 금방이라도 쓰러질 기세였다. 우영은 어쩐지 그가 안쓰러워졌다. 〈새로운 밤〉 전시 때의 제 모습이 생각나기도 했고.
잠시 고민하던 우영이 성큼성큼 그를 향해 갔다. 그리고 그의 뒤에 서서 작게 속삭였다.
“안녕하세요.”
“어! 아! 저요? 어어⋯⋯ 작가님이시구나. 아, 네, 안녕하세요.”
“전시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작가님.”
놀란 기색이던 태영은 곧 어색하게 웃으며 꾸벅 인사했다. 우영이 눈을 휘며 웃었다.
“그림 멋지네요. 잘 팔릴 거예요.”
“⋯⋯정말요?”
“네. 진심으로. 사현이 형이 선택한 그림이 별로일 리 없으니까.”
우영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사현은 실패하지 않는다. 특히나 예술계에서는 늘 성공하고, 늘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늘 존경받는다. 그러니 태영의 그림도 분명 성공할 터였다.
“⋯⋯.”
태영이 그런 우영을 가만히 바라봤다. 전시회 특유의 핀 조명 아래에 서 있는 우영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단단하고, 싱그럽고, 멋지고, 여유로웠다. 막 사회생활에 발 들인 태영의 눈에는 더욱 그랬다. 감히 손도 뻗을 수 없을 만큼 먼 곳에 있는 이였다.
마치 사현 같은 사람. 저와는 다른 종족인, 그 대단한 사현과 같은 종(種).
이렇게 보고 있으니, 제가 얼마나 먼 사람을 질투하고 따라잡고 싶어서 떼를 썼던지가 생각나서 부끄러워졌다.
태영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저⋯⋯ 이전에는⋯⋯ 죄송했습니다.”
“⋯⋯.”
“제가 너무 신이 났었나 봐요. 이런 기회도, 관심도 처음이라서. 네온 작가님처럼 되고 싶었고, 그걸 이상한 방향으로 표출했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예상치 못한 진심 어린 사과에 우영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너무⋯⋯ 갑자기 철이 든 거 아닌가. 그가 턱을 긁적이는데 태영이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고는 몹시 간곡한 목소리로 읍소했다.
“그러니까 B한테 말 좀 잘 해 주세요. 세 번째 전시 끝날 때까지 허튼짓 안 하고 그림만 그릴 테니까, 너무, 너무 미워하진 말아 달라고. 저는 앞으로도 〈갤러리 비〉에서 전시하고 싶단 말이에요⋯⋯.”
그 말에 우영이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그럼 그렇지. 바라는 게 있던 거지. 실제로 이렇게 멋진 전시가 열리니까 그제야 안달이 난 것이다. 이 멋진 날을, 주인공이 오롯이 본인인 날을, 사현이 만들어 준 이 거대한 환상을 잃고 싶지 않은 거지.
우영은 뭐라고 대답해 줄까, 고민했다. 그거야 너 하기 나름이지, 하고 비웃어 줄까. 아니면 아직 어린애니까 봐줄까. 생각하다 후자를 선택했다. 괜히 속을 긁어 놨다간 사현이나 큐레이터들이 귀찮아질 수도 있으니까.
우영이 자신의 귓불을 죽죽 아래로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 사현이 형은 누굴 잘 미워하질 않아요.”
“네?”
“그렇게 타인한테 관심이 없거든요. 밉다, 좋다, 감정을 가질 만큼 깊은 생각 자체를 안 해요. 귀찮다, 짜증 난다, 그 수준이지. 그것도 하루 지나면 잊어버려요. 일이 워낙 많으니까.”
“⋯⋯.”
“그래서 갤러리도 회사도 다들 형 성격 더러운 줄 알면서 같이 일하는 거예요. 그 순간의 화를 질질 끌고 가지 않으니까. 그냥 잠깐 버티면 그만이거든요.”
“⋯⋯.”
“지금도 그냥 가서 예의 바르게 인사하면 응, 왔니, 하고 대꾸해 줄 걸요.”
“⋯⋯정말요?”
“네.”
태영의 낯빛이 환해졌다. 눈썹과 입꼬리가 동시에 위로 솟구쳤다. 그것을 보는 우영의 기분도 덩달아 좋아졌다. 나쁘게 대하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영이 꾸벅 재차 허리를 숙였다. 이전에는 사죄였다면 이번에는 감사였다.
“감사합니다.”
그는 부모님에게 용돈을 받은 초등학생처럼 신난 얼굴로 뒤를 돌았다. 곧장 사현에게 가서 알은체라도 할 생각인 듯했다. 그렇게 두 걸음 앞으로 튀어 나가던 그가 무슨 연유에서인지 다시 우영에게 돌아왔다. 그러고는 슬쩍 물었다.
“근데 저, B한테 가서 인사해도 돼요?”
“예?”
우영이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그러자 태영이 손으로 자신의 재킷 끄트머리를 꾸깃꾸깃 접으며 웅얼거렸다.
“그냥⋯⋯ 네온 작가님한테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아서⋯⋯.”
그가 우영의 약지에 자리 잡은 은빛 반지를 흘끔 봤다. 그 시선에 놀란 우영이 손을 뒤로 슬쩍 숨겼다. 그러다 설마 이놈이 소문을 내겠나, 싶어 다시 빼냈다. 사실 보라고 끼고 다닌 거긴 한데. 사현도 ‘너랑 만나는 거 소문나면 어쩔 거냐고? 인정하지, 뭐. 아예 너랑 결혼했다고 기자 회견도 할까?’라고 심드렁하게 대답하기 일쑤였지 않나.
“인사 정도는, 뭐.”
우영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그에 태영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또 꾸벅 허리를 숙인 그가 인파 사이로 바쁘게 사라지려 했다. 우영이 다급히 그를 잡아 말렸다.
“지금 하지 말고, 오픈 파티 끝나면. 관람객들 사라지면 그때 가서 인사해요. 괜히 말 돌 수 있으니까.”
그 말에 태영이 아, 하더니 사현과는 반대쪽으로 향했다. 이내 혼자 남은 우영이 아무도 몰래 작게 웃었다. 그러고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툭툭 두드렸다.
“⋯⋯나 방금 되-게 어른스러웠어. 이따 밤에 형한테 자랑해야지.”
어쩐지 신이 난 우영이 고개를 까닥이며 시선을 돌리는데 저 멀리 있는 사현이 시야에 딱 들어왔다. 우영은 생각할 것도 없이 그쪽으로 직진, 직진, 직진했다.
그에게 향하는 발걸음이 늘 그랬듯, 경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