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4. 퍼머넌트 옐로우색 체온 (22/24)

04. 퍼머넌트 옐로우색 체온

냉전 체제. 다른 말로는 콜드 워(Cold-war). 우영이 얼마 전에 신문에서 읽은 단어였다. 무력에 의하지 않고 외교·선전에 의하여 신경전을 펼치는 상태. 그러니까 치고받고 싸우는 건 아닌데 은근한 신경전이 이어지는, 그런 상태.

우영과 사현은 현재 냉전 중이었다. 거칠게 말다툼을 하거나 서로를 완벽히 무시하는 건 아닌데 계속해서 싸우고 있다. 우영은 온몸으로 사과하고 잘못을 빌고 사현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는데, 이 냉전 체제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현이 눈 한 번 깜빡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갤러리 비〉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우영이 오늘 아침을 떠올리며 푹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아침 사현은 제가 깨우는 소리가 아니라, 알람 소리에 일어나서 출근 준비를 했다. 2층 출입을 금지당한 우영은 계단을 서성거리며 그가 내려오길 기다렸다. 그러다 사현이 나타나 미리 데워 둔 양배추즙을 내밀었다.

그럼 사현은 우영을 빤히 보다 군말 없이 양배추즙을 마신다.

이전에는 맛없다고 툴툴거렸으면서. 미간을 설핏 구긴 채 단번에 즙을 삼키는 게 말도 못 하게 아쉽고 슬펐다. 그러고는 휑-하니 뽀뽀 한번 없이 출근해 버린다. 그런 그의 목덜미에는 사흘 전 우영이 남긴 입술 자국이 또렷이 남아 있다.

우영은 그가 밤새 잘 자는지, 깨진 않는지, 악몽을 꾸진 않는지, 추위를 타진 않는지, 외로워하진 않는지, 회사는 어떤지, 또 짜증은 안 냈는지, 입술이 트진 않았는지, 커피를 마신 건 아닌지 궁금한 게 삼백 개쯤 됐지만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사현이 입을 열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그런 방식으로 냉전 상태다. 쓸데없으나 필요한 대화, 그러니까 일상을 공유하고 안부를 주고받는 대화를 하지 않고, 스킨십도 하지 않는다.

우영은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벽에 머리를 처박아 봤는데 그래도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가 사현을 어떻게 대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가늠하기로서니 정말 지독하게 그를 내몰았구나 싶어서 접시 물에 코 박고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푹 한숨을 내쉰 우영이 머리칼을 크게 쓸어 넘겼다. 그리고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갤러리에 들어섰다. 온통 미(美)로 가득 찬 이 공간에 오면서 기분이 구렸던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오늘은 머리 위로 우중충한 먹구름이 끼었다.

우영은 곧장 큐레이터팀으로 향했다. 오늘은 전시 관련 미팅이 아니고 다른 기업과 협업하는 프로젝트 관련 미팅이라 영 활력이 없었다. 이건 말 그대로 ‘일’인지라.

그림이야 제 마음대로 그리면 되는데 기업과 함께하면 상의하고 검사를 맡아야 했다. 컨펌이 날 때까지 계속해서 시안을 만들어야 한단 말이다.

쓸데없이 웃는 얼굴로 인사해야 하고, 안부 인사도 주고받아야 하고, 말을 직설적으로 할 수도 없고. 아무튼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람을 피곤하게 했다. 이런 걸 하루에 몇 번씩도 하는 사현이 존경스러울 따름이었다.

우영은 검지로 미간 사이를 문지르며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잠을 제대로 못 잤더니 피곤했다. 몸이 늘어지고 다리가 무거운 건 제게 흔한 일이 아닌데. 사현과의 관계에 온 신경을 쏟고 있어서 몸도, 그림도, 정신도 아주 너절해지는 중이었다.

엘리베이터 숫자가 올라가는 걸 보던 우영이 코트 주머니 속의 핸드폰을 꾹꾹 쥐었다가 폈다. 사현에게 메시지를 하고 싶은데, 답이 오지 않으면 슬퍼서 엉엉 울어 버릴 것 같아 참고 있었다.

우영이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마침 엘리베이터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우영이 곧장 밖으로 발을 디뎠을 때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기다리던 이와 딱 맞닥트렸다.

우영은 무심코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하며 옆으로 비껴가려 했다. 근데 서 있던 이가 “어⋯⋯.”하고 알은체를 해 왔다. 우영이 시선을 들었다. 아는 사람, 이를테면 큐레이터나 직원인 줄 알고.

근데.

“⋯⋯.”

태영이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우영의 미간이 속절없이 구겨졌다. 그와의 만남이 불쾌해서는 아니었다.

⋯⋯아니긴 개뿔. 사실 맞았다. 아무래도 제가 사현과 냉전 체제를 갖게 된 근저가 그니까. 당연히 미웠다.

우영이 본인도 모르게 한 걸음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다 얼른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태영을 직시하는데 어째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태영도 그런 기분을 느끼는 건지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이렇게 만나면 안 되는데. 낭패다.’ 뭐 그런 문장이 그의 얼굴에 쓰여 있었다.

그렇게 수 초의 정적 후 우영이 느릿하게 입을 뗐다.

“머리하셨네요.”

태영은 파마를 했다. 직모라 보기 안쓰럽게 축 처져 있던 머리칼이 복슬복슬하게 솟아 있었다. 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컬이 작고 드셌다. 흔히 말하는 아줌마 파마 같았다. 그다지 스타일리시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아, 네⋯⋯.”

태영이 시선을 피하며 대꾸했다. 아랫입술을 꽉 깨문 그가 코트 자락을 매만졌다. 그 덕에 우영은 태영의 행색을 전체적으로 보게 됐다.

태영은 니트 위에 코트를 입고 있었다. 니트는 보풀이 잔뜩 일었고, 어디 구석에 처박혀 있던 건지 주름도 잔뜩이었다. 코트 역시 주름져 있었다. 완연한 봄에 접어든 요즘 날씨에 조금 덥겠다 싶을 정도로 두껍기도 했다.

목에 스포츠 타월인지 수건인지 분간이 안 되는 천을 스카프처럼 맸다. 게다가 손목에는 은색 체인의 손목시계를 차고 있었는데, 줄을 안 조인 건지 손등까지 축 처진 상태였다. 흔히 아는 명품 메이커의 시계였는데, 메이커 철자의 알파벳이 하나 없었다.

우영이 자신의 볼 안쪽 살을 지그시 깨물었다.

태영의 모습은 볼품없었다. 조악하고 허접했다. 그러나 우습진 않았다. 우영은 사람의 옷이나 스타일을 보며 비웃는 무뢰한이 아니었으니까. 막 사현의 명함을 받고 〈갤러리 비〉에 들어섰던 수 년 전 제 모습과 무어가 그리 다르겠나 싶기도 했고.

다만 놀라웠고 짜증도 났다. 그가 누구를 염두에 두고 옷을 입었는지, 무슨 생각으로 이 꼴로 〈갤러리 비〉에 나타났는지 어렵지 않게 가늠되었기 때문이다.

태영은 묘하게 며칠 전 우영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현과 셋이서 당근케이크를 먹었던 그 날 우영의 모습 말이다.

거기까지 눈치채고 나니 과거의 제 행동이 떠올랐다. 언젠가 사현이 금발의 남자를 만났다는 정보에 머리를 냅다 염색했지.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당시에는 진지했다. 어떻게 해야 사현이 볼품없는 저에게 눈길 한번 줄까 머리 터질 때까지 고민하다가 저지른 일이었으니까.

아마 태영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본인이 따라 한 피사체가 훨씬 멀끔하고 멋진 모습으로 눈앞에 서 있는 지금. 감히 말로 다 할 수 없는 패배감과 수치심을 느끼고 있으리라.

문제는, 저도 기분이 나쁘다는 거였다. 태영의 현재 모습은 그가 본격적으로 사현의 환심을 사 보겠다는 뜻과 일맥상통했으니까.

우영의 눈이 가늘어지는데 태영이 쓸데없는 말을 했다.

“오, 오늘 오실 줄 몰랐는데.”

우영은 그 문장도 기분이 나빴다. 누가 보면 제가 오면 안 되는 곳에 온 줄 알 것이다. 더군다나 말하는 어조가 마치 태영이 이곳의 주인인 것처럼, 우영이 이곳의 손님인 것처럼 느껴지지 않나.

〈갤러리 비〉에 발 들인 지 한 달도 안 된 애송이가, 대체 누구를 맞이하는 건지.

“성진 그룹이랑 미팅이 있어서요.”

“그룹이랑요? 큐레이터팀이 아니고요? 근데 왜 여기⋯⋯.”

“네온 팀이 여기 있잖아요. 사현이 형이 제 전담 팀을 만들어 줘서, 콜라보나 외주 미팅도 여기서 해요.”

“아⋯⋯.”

태영이 짧게 감탄했다. 그러더니 보일 듯 말 듯하게 입술을 삐죽였다. 우영이, 네온이 특별 취급을 받는 게 영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우영은 그것도 기가 찼다. 사현과 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면서. 제 그림이 한 점에 얼마에 팔리는데, 아직 개인전 한 번 못 연 풋내기 작가가. 방자했다.

일전에 사현이 절 보면서 이런 감정을 느꼈을까, 싶었다. 그가 제 마음을 거절한 게 이해가 됐다. 그랬다가도 용케 저를 받아 주고 옆자리를 내주었구나 싶어서 감사하기도 했다.

“태영 씨도 미팅하러 오셨나 봐요?”

“아니요. 오늘 미팅은 없는데, 어⋯⋯ 사현이⋯⋯ 혀, 형이랑 저녁 약속이 있어서 미리 와서 기다리는 거예요.”

형. 힘들게 끄집어낸 듯한 단어였다. 보나 마나 사현의 동의 없이 멋대로 부르고 다니는 게 뻔했다. 우영은 그 얼토당토않은 수작에 분노하지 않았다. 사실 일주일 전이었다면 분노했을 텐데 사현의 걱정으로 온 감정이 쏠린 지금, 그저 미약한 짜증만 일었다.

우영이 기다란 다리로 태영에게 성큼, 다가갔다. 저보다 조금 작은 태영이라 저절로 눈을 내리깔게 됐다.

우영은 입꼬리를 당겨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연극하듯 손목시계를 확인한 후 마치 어른처럼, 아니, 사현처럼 나긋한 음성으로 물었다.

“지금 오후 두 시인데, 벌써부터 기다리는 거예요?”

“네. 갤러리 구경도 할 겸⋯⋯.”

“전시할 그림은 다 완성됐나 봐요.”

“아, 그건 아직⋯⋯.”

혹시나 싶어 찔러봤는데 예상 그대로의 대답이 나왔다. 우영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쏘고야 말았다.

이게 차이점이다. 저는 붉은색 감정을 온통 뒤집어쓴 후, 어떻게든 사현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기를 쓰고 아등바등했는데. 태영은 사랑하는 사현이 아니라, 사현을 사랑하는 ‘본인’을 중심에 두고 있었다.

넌 안 돼.

고개를 비스듬히 꺾은 우영이 조곤조곤 말했다.

“사현이 형. 어쭙잖게 일하는 거, 시간 낭비하는 거. 진짜 싫어하는데. 마감까지 그림 다 못 그리면 계약 불이행으로 고소할지도 몰라요.”

“⋯⋯.”

“그러니까 사현이 형한테 여기서 계속 기다렸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행여 그걸로 형이 감동할 거란 생각도 하지 말고.”

우리 형이 귀찮은 거 아주 질색하거든. 말을 마친 우영이 그럼, 하고는 뒤를 돌았다. 레스토랑에서는 완패했지만 이번엔 제가 이긴 것 같았다. 분명 제 승리였다.

입술이 꼼질꼼질 움직였다. 잠깐 방심했다간 와르르 웃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얼른 이 자리를 벗어나야지.

우영이 걸음을 재촉했다. 어쩐지 오늘 미팅이 즐거워질 것 같았다. 그가 막 복도 모퉁이를 돌기 직전이었다. 태영이 그의 뒤통수에다 대고 손오공의 곤봉처럼 말을 길게 늘렸다.

“근-데요, 네온 작가님. 제가 오늘 저녁에 사현이 형 만나는 거 모르셨나 봐요.”

뭉툭하나 힘센 곤봉이 우영의 등을 꿰뚫고 명치로 튀어나왔다. 그 일격에 하마터면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

아, 씨발⋯⋯.

우영이 입 모양으로 욕설을 읊조렸다. 속에서 화가 부글부글 치솟았다.

내가 섹스를 밤새도록 해서 사현이 형이 화난 것뿐이거든! 우리 아직 사귀는 중이거든! 사현이 형이 나보고 가족이랬거든! 등등의 말을 와다다 쏴 주고 싶었으나 참아 냈다.

제법 머리가 큰 우영은 바깥에서 할 말 못 할 말 정도는 구분할 줄 알았다.

무표정한 가면을 뒤집어쓴 우영이 천천히 뒤를 돌았다. 그리고 태영을 보며 여유롭게 말했다.

“형이 일하는 스케줄을 제가 다 알진 않죠. 그래 봐야 일일 텐데.”

* * *

“일인데, 그래 봐야 일일 텐데, 진짜 미치겠어요.”

“⋯⋯.”

“형이 설마⋯⋯ 박태영 씨한테 관심을 가진다거나 그러진 않겠죠? 아니, 관심이 있으니까 데리고 온 거긴 한데, 그 관심이 막, 저에 대한 관심처럼, 어, 뭔지 아시죠? 흥미, 뭐 그런 것보다 조금 상위에 있는 감정 있잖아요. 그런 걸 느끼는 건 아니겠죠?”

“⋯⋯.”

“그 새끼, 아니 박태영 씨 그림이 완전 대박 나서 〈갤러리 비〉에 박태영 전담 팀이 생기면 어쩌죠? 형이 그놈이랑 같이 해외도 나가고 인터뷰도 하고 그러다가 나중엔 집에 들이고 같이 살고⋯⋯. 그러진 않겠죠? 이미 제가 사는데? 형은 제가 나무처럼 크다고 했거든요. 집이 아주 꽉 찬 것 같다고. 그러니까 굳이 걔를 집에 들이진 않겠죠?”

끊임없이 이어지던 우영의 걱정이 마침내 끝이 났다. 얼마나 길게 주절거렸는지, 그의 앞에 놓여 있던 콜라의 탄산이 다 죽었을 정도였다.

우영이 얼음이 죄 녹아 밍밍해진 콜라를 꿀꺽꿀꺽 들이켰다. 그리고 그것을 탁, 테이블에 놓았을 때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이가 노트북 자판을 두들기던 손을 멈췄다. 매니큐어가 예쁘게 발린 손이 홍차 잔을 들었다.

제인이었다.

그녀는 퇴근길에 다 죽어 가는 우영을 보고 예의상 안부를 물었다가, 이렇게 잡혀 오게 됐다. 몹시 귀찮지만, 그래도 상사의 연인이라 매몰차게 거절할 수가 없었다.

차를 홀짝인 제인이 나긋한 음성으로 입을 뗐다.

“일단.”

“네.”

“우영 씨가 걱정하는 게 B의 감정인가요, 아니면 태영 씨가 작가로서 네온보다 성공하는 건가요?”

“어⋯⋯. 정확히는 박태영 씨가 저보다 성공해서 B가 관심을 가질까 봐 걱정이에요.”

“박태영 씨가 네온보다 성공하는 그 자체는 상관이 없어요?”

“어⋯⋯. 그것도 질투가 날 것 같긴 해요.”

“그럼 박태영 씨를 망하게 하고 싶어요?”

“아니요, 아니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 사람이 다치거나 죽거나, 뭐 그런 걸 바라진 않아요.”

우영이 팩팩 고개를 저었다. 제인이 실소를 삼켰다. 참, 마음씨 고운 이가 아닐 수 없다. 그녀가 노트북을 덮었다. 그리고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삼자의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그리고 B를 오래 봐 왔던 이로서 말씀드리자면, 우영 씨가 왜 그런 걱정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네?”

“B는 태영 씨가 미켈란젤로나 다 빈치에 버금가는 거장이 되어도 그 사람을 사랑하진 않을 거예요.”

“정말요? 그래도 미켈란젤로는 좀, 심각하게 대단하지 않나요?”

“그림과 작가를 따로 볼 줄 아시는 분이거든요. 뭐, 우영 씨한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지만 보통은 그래요.”

그 말에 우영이 입을 꾹 다물었다. 제인의 말이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만약 사현과 미켈란젤로가 나란히 서 있다면, 저 역시 경악스런 얼굴로 미켈란젤로를 쳐다볼 것 같은데. 그 누구든 그럴 텐데. 제인은 어떻게 저런 확신을 하는 걸까.

의문 가득한 우영의 낯에 제인이 음, 하고 목으로 신음했다. 그러더니 곧 우영의 시야에 딱 맞는 예시를 찾아냈다.

“김팔화 작가님 아세요?”

“네. 알죠. 한국 풍경화의 거장.”

“B가 그분 그림을 굉장히 좋아하세요. 개인 수장고에도 5점이나 보유 중이고,”

“집 거실에도 걸려 있죠.”

“네. 근데 김팔화 작가님은 끔찍이 싫어하세요.”

“시, 싫어해요?”

“네. 매우 무례하고, 우악스럽고, 시간 약속도 안 지키고, 언사는 괴팍하고 생김새도 음, 남의 얼굴 보고 이런 말 하면 조금 그렇지만, B의 표현을 빌리자면 골룸 같거든요.”

“아⋯⋯.”

“그거랑 같아요. B가 태영 씨를 좋아하려면, 태영 씨 그림과는 별개로 그분 자체가 아름다워야 해요. 미적으로는 당연하고, B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 성격과 인품도 갖춰야 하죠.”

“⋯⋯.”

“그래도 여전히 태영 씨가 걱정돼요?”

우영은 고민했다. 제가 감히 남의 외모를 판단하긴 뭣하다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태영은 잘생긴 남성이 아니었다. 사현쯤은 되어야 잘생겼다고 표현할 수 있지. 만약 잘생긴 얼굴이라 하더라도 온갖 미에 둘러싸여 사는 사현의 눈에 차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태영이 어떻게 아등바등해도 사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겠구나 싶어서. 우영의 입꼬리가 은근슬쩍 올라가는데 그의 표정 변화를 보던 제인이 피식 실소했다.

우영은 제법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어리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고, 굳이 표현하자면 귀엽다. 감정 하나에 휘둘리는 게 순진해 보이고, 그 감정이 오롯이 한 사람에게만 향해 있는 것도 깜찍하다.

제인이 잔에 찍힌 립스틱 자국을 닦아 내며 말했다.

“우영 씨는 확실히 특별해요.”

“⋯⋯제가요? 왜요? 좋은 쪽으로 특별한 거죠?”

“그럼요. 일단 B가 1년 이상 만난 연인이 우영 씨가 처음이고. 시계 외에는 액세서리를 하지 않는 분이 반지를 매일 끼고 다니는 것도 처음이고. 일보다 연인을 앞에 두는 것도 처음인 걸요.”

“하지만⋯⋯ 박태영 씨랑 처음 만난 날 저랑 약속을 한 시간이나 미룬 걸요⋯⋯.”

“고작 한 시간이었잖아요.”

고작. 우영은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 시간이든 세 시간이든 어쨌거나 제가 뒤로 밀렸지 않나. 그 사실이 중요했다.

복잡해진 우영의 낯에 제인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우영은 본인이 얼마나 큰 특혜를 받고 있는지, 얼마나 지대한 사랑 속에서 살고 있는지 모르는 듯했다.

“B는 일하실 때 연인과 일주일씩 연락을 안 할 때도 있어요.”

“⋯⋯일주일이나요? 일주일? 맙소사. 저는 형이 일주일이나 연락 두절되면 죽어 버릴지도 몰라요.”

“더 길 때도 있어요. 그 외모와 재력을 가졌음에도 차이는 게 당연할 지경으로 일을 가장 중요시하시죠. 근데 그것에 대해 반기를 들면, 그냥 그대로 아웃이에요.”

“⋯⋯.”

“근데 우영 씨에게는 그러지 않죠. 오죽하면 그날, B와 태영 씨가 처음 만났던 날 태영 씨가 저한테 B가 원래 저렇게 말이 빠르냐고 물어봤다니까요?”

제인이 다시 생각해도 우습다는 듯 입을 벌리며 웃었다. 우영이 바깥에서 기다리는데, 태영은 눈치 없이 계속해서 질문하고, 그렇다고 닥치고 꺼져! 소리를 지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자니 또 다른 신진을 구하기 번거롭고.

사현이 얼마나 짜증이 났을지 뻔했다. 그 후에도 종종 태영이 말이 너무 많다며 미간을 구기는 것만 봐도 태영은 사현의 환심을 사기에 글렀다.

“또, 누군가를 데리고 사시는 것도 처음이시죠.”

“저 이전에 다른 신진 작가들도 처음엔 형 집에서 살았잖아요?”

“그건 사는 게 아니죠.”

“⋯⋯.”

“구태여 정의하자면 감금, 감시와 비슷하지.”

그 말에 우영이 먼 과거를 되뇌었다. 하긴, 그때만 해도 사현이 다른 갤러리나 컬렉터들과 연락하는 거 아니냐고 가시를 세웠다. 밥도 사 주고 물감도 사 주고 했지만 그게 데리고 산다고 표현하기는 어려웠다. 제인의 말마따나 가둬 놓고 일을 시키는 것과 비슷했지.

우영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제인이 대화를 마무리하기 위해 입을 뗐다.

“그러니 B에게 가서 솔직히 말씀하세요.”

“소, 솔직히요?”

“네. ‘형이 박태영이랑 사적으로 만난 것도 아니고, 박태영한테 웃어 준 것도 아니고, 박태영이랑 잔 것도 아니고, 박태영이랑 아-무것도 한 게 없지만 나는 불안해요.’라고요.”

제인이 아주 점잖게 이죽거렸다. 그 말에 우영의 낯이 줄줄 흘러내렸다. 제인이 몇 마디 더 했다간 아이처럼 엉엉 울어 버릴 기세였다. 보라. 역시 어른들의 시각에서 제 고민은 하찮고 어린 것이다.

“제가⋯⋯ 한심하세요?”

“아뇨. 우영 씨 나이면 응당 경험할 감정이긴 하죠. 비록 이전의 연인들은 B에게 그 속내를 털어놓았다가 그 자리에서 차였지만.”

“⋯⋯근데 솔직히 말하라고 하셨잖아요.”

“네. 우영 씨가 이전 분들과 달리 특별하니까요.”

우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인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어찌 됐든 내쳐지거나 쫓겨나지만 않으면 됐다.

“그럼 솔직히 말할게요. 근데 혼나겠죠? 여태 그딴 거로 고민했냐고, 그동안 그림은 잘 그렸냐고. 엄청 혼날 것 같은데⋯⋯.”

그 말에 제인이 자신의 턱 아래를 문질렀다. 그녀의 귀에 길게 늘어진 귀걸이가 찰랑찰랑 부드럽게 움직였다.

“음⋯⋯. 아마 귀엽게 여기시지 않을까 싶은데요.”

우영의 입꼬리가 대번에 위로 올라갔다. 갑자기 자신감이 생겼다. 귀엽게 여겨 준다니. 그럼 더할 나위 없었다. 이렇게 된 거 아주 불쌍하고 측은하게 말해야겠다. 내가 형을 너무 좋아해서, 형밖에 없어서, 형이 혹시 날 버릴까 봐. 그렇게 칭얼거리면 쯧쯧 혀를 차면서도 머리를 쓰다듬어 줄 것 같았다.

만면 가득 웃음을 띤 우영이 감사하다며 고개를 꾸벅 숙일 때였다. 제인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우영을 불렀다.

“우영 씨.”

“네.”

“제가 앞으로를 위해서 몇 마디 더 해 드려도 될까요?”

그에 우영이 허리를 꼿꼿이 폈다. 턱을 안으로 당기고 면접 보러 온 취준생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그럼요.”

제인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쏘았다. 우영의 세상에 지진을 일으킬 정도로 충격적인 말이었다.

“〈갤러리 비〉에서 데뷔한 신진 작가 열에 열은 B를 좋아해요.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전부.”

“⋯⋯.”

“잘생겼고 돈 많고 성숙하고 박식한 데다가 본인이 업으로 삼은 예술계에서 왕처럼 군림하고⋯⋯.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어린 청년들이 좋아하지 않을 수 없죠. B도 그걸 알아요. 적당히 영악하게 써먹으실 줄도 알고요.”

“⋯⋯.”

“그러니 앞으로도 지금과 같은 상황을 계속 맞닥트리실 거예요. B가 백발의 노인이 되어 남성으로서의 매력을 완전히 상실할 때까지 계속. 근데 그때마다 이렇게 구실 건 아니죠?”

우영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삼키고 또 삼켰다. 태영만 어떻게 처리하면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새삼 제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과 만나고 있는지 자각했다.

막 연애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내가 B와 사귀는구나, 하고 발을 동동 굴렀는데. 아무래도 함께한 시간이 오래되면서 그 특별함에 무뎌졌다.

이렇게 살면 안 되겠구나. 호시탐탐 그를 노리는 인간들이 이렇게 많은데 안일하게 작업실에 처박혀 그림만 그렸다. 양배추즙이나 데워 줘서 뭘 어쩌겠다고.

우영이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그러다 넌지시 물었다.

“그럼 형은 여태 그 신진 작가들을 받아⋯⋯줬어요?”

받아 줬을까. 나는 처음 고백하자마자 된통 차였는데 그들은 쉽게 사현의 옆자리를 꿰찼을까. 기분이 다시 우중충해졌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널을 뛰는 기분에 멀미가 다 났다. 어둡고 조용하게 살아온 인생이라 중2 때도 이렇진 않았거늘. 요즘 아주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우영이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쉬는데 제인이 테이블 위로 턱을 괸 채 창밖을 가는 눈으로 응시했다.

“받아 준다기보다는⋯⋯ pick up 하죠. 햄버거 가게에서 햄버거를 받는 것처럼. 옷 가게에 걸린 옷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처럼. 아주 쉽고 가볍게. 한두 번 만나기 괜찮으면 Okay, 아니면 No.”

우영이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부정도 긍정도 아닌 모호한 대답이었지만, 어쨌거나 그들 중 몇몇이 사현과 만났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가슴이 조금 쓰라리긴 하나 괜찮다. 과거는 과거다. 현재에는 제가 있었다. 중요한 건 과거로 사라진 이들과 제가 다르냐, 다르지 않냐였다.

“그럼 저도 햄버거인가요? 픽업된 햄버거?”

“앞서 말했듯, 우영 씨는 B가 데리고 살고 계시잖아요. 햄버거를 데리고 살진 않죠.”

심드렁한 제인의 대꾸에 우영이 후우,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제인이 의자 등받이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녀의 눈가에 피곤이 스며 있었다.

“더 궁금한 거 있어요?”

“아니요, 아니요. 충분해요.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우영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러다 쾅, 하고 테이블에다 이마를 박았다. 세게 박은 것 같은데, 아프지도 않은지 손으로 벅벅 문지르곤 만다. 제인이 헛웃음을 흘렸다.

“앞으로 이런 문제가 생기면 B한테 바로바로 말하세요. ‘자기야’가 싫다는 말을 하셨을 때처럼. B가 곧장 그 피드백을 수용했잖아요. 이번에도 불편하고 신경 쓰이는 점을 이야기하면 들어주실 거예요. 우영 씨를 매우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네.”

우영이 씩 입꼬리를 올렸다.

‘우영 씨를 매우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 문장이 몹시 마음에 들었다.

* * *

사현은 피곤한 얼굴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요 며칠 우영과 데면데면한 사이를 이어 가느라 여간 괴로운 게 아니었다. 덕분에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자서 얼굴이 푸석푸석했다. 거기다 오늘 만난 태영은 또 무슨 말이 그리 많은지, 귓구멍이 다 아렸다.

사현이 엘리베이터 내부에 달린 거울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이 엉망이다. 목도 칼칼하고 눈도 따갑다.

“이제 서우영 없으면 못 사는 몸이 됐어⋯⋯.”

백사현. 꼴이 이게 뭐냐. 사현이 짜증스레 넥타이를 끌어 내렸다. 그러다 쿵, 하고 머리를 박았다.

이 메마르고 괴로운 시간을 얼마나 더 이어 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 괘씸한 애송이가 도무지 속내를 안 털어놓는단 말이지. 미안하네, 사랑하네 종알거리면서도. 말없이 나가는 저를 보며 엎어져 엉엉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정작 중요한 그날, 왜 그렇게 술을 마셨는지는 털어놓질 않았다.

보나 마나 혼자 꽁기꽁기 상상하다 폭탄도 날리고 전쟁도 냈다가 세계 멸망까지 상상했을 게 뻔한데. 그 이유가 뭔지 알아야 제가 전쟁을 수습하든가 하지. 입을 떼지 않으니 제아무리 사현이라도 방도가 없었다.

사현이 미끈한 구두 뒤꿈치로 탁탁탁 바닥을 두드렸다. 그때 엘리베이터가 띵 소리를 내며 꼭대기 층에 다다랐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사현이 느린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우영을 마주할 거라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 예쁜 얼굴을 상상하면서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사현이 도어 록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의 지문을 인식한 도어 록이 곧장 띠리릭, 하고 열렸다. 사현이 막 문고리를 잡아 여는데 힘을 주기도 전에 문이 휙 밀렸다. 그리고 익숙한 냄새가, 커다란 그림자가 단숨에 사현을 덮쳤다.

“형, 왔어요? 보고 싶었어요. 정말,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요.”

팔을 크게 벌린 우영이 사현을 껴안았다. 매서운 힘에 사현이 속절없이 그의 품으로 끌려갔다. 얼굴이 곧장 우영의 가슴팍에 파묻혔다.

“어⋯⋯.”

사현이 바보 같은 표정으로 눈을 끔뻑였다. 그러다 퍼드득 몸을 떨며 그를 밀어냈다.

“뭐야, 너. 왜 이래?”

“저 형한테 할 말 있어요. 들어와요.”

사현의 손목을 잡아챈 우영이 집안으로 훅 끌어당겼다. 사현이 맥없이 팔랑거렸다. 그에 반쯤 들리다시피 한 그는 곧 소파에 안착했다. 소파 테이블에는 하얀 김이 폴폴 올라오는 액체가 놓여 있었다. 냄새로 보아 커피였다.

“커피네.”

“오늘 한 잔만 마시세요.”

“뇌물이니?”

“네.”

카펫 위에 꿇어앉은 우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질구레한 변명 없이 냅다 긍정하는 게 오랜만에 그다웠다. 사현이 피식 웃으며 코트를 벗었다. 우영이 냉큼 그것을 받아다 곱게 반으로 접어 소파에 걸쳐 놓았다. 그리고 다시 사현의 발치에 꿇어앉았다.

사현이 다리를 꼬며 커피를 집었다. 코끝을 은은히 스치는 단내를 보아 우영이 시럽도 두둑이 넣은 것 같았다.

사현의 광대가 봉긋 올라갔다. 이 얼마 만에 마시는 커피인지. 그러잖아도 며칠 우영과 냉전을 이어 가며 커피와 술이 몹시 고팠다. 그래도 그와 약속한 게 있으니 참았는데. 참길 잘했다. 이 커피를 마시는 데에 하등 부끄럼이 없지 않나.

“그래, 할 말이 뭔데.”

“그게요, 형.”

“응.”

“제가 그날 술을 왜 마셨냐면⋯⋯.”

“응.”

“화가 나서 그랬어요.”

“뭐가.”

“형이 저 말고 다른 사람한테 관심 갖는 것 같아서요.”

“⋯⋯내가?”

커피를 홀짝이던 사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우영을 내려다봤다. 얘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람. 저는 우영을 만난 이후로 그 누구에게도 흥미를 가진 적이 없었다.

하물며 함께 영화를 보러 가서도 우영의 옆모습이나 감상하고 있었는데, 다른 인간에게 흥미를 가졌을 리가. 제가 대체 누구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건가.

일그러진 사현의 낯에 우영이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그게, 형이 진짜 그랬다는 건 아니고요, 저 혼자 그렇게 상상한 거예요. 형이 그, 태영⋯⋯. 박태영 작가를 뽑아서 전시도 열어 주고, 집도 주고, 밥도 주고, 그러는 게 너무 불안했어요.”

“⋯⋯.”

“저는 박태영 작가가 싫어요. 아니, 이게 또 엄청 싫다는 건 아니고요, 조금 미워요. 근데 그 사람이 저한테 나쁜 짓을 한 건 아니거든요? 그냥 저 혼자 미워하는 거예요.”

“⋯⋯.”

“그래서 말할 수가 없었어요. 박태영 작가한테 잘해 주지 말라고. 저한테 했던 것처럼 다정하지 말라고. 저를 뒷전으로 두지 말라고. 막 칭얼거리고 짜증 내고 싶었는데, 그럼 안 되잖아요. 형은 일을 좋아하니까.”

“⋯⋯.”

“저도 형 일하는 거 좋아해요. 진짜로. 멋있고, 뿌듯하고, 자랑스럽고 그래요. 그러니까 이 감정이, 이 짜증이 저도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근데 형은 오죽하겠어요. 그래서 차마 말할 수가 없었어요.”

“⋯⋯.”

“제가 형한테 햄버거일까 봐 무서워요. 저는 형이랑 헤어지고 싶지 않은데⋯⋯. 햄버거 말고 가족 하고 싶은데⋯⋯.”

“⋯⋯.”

“술 마시고 행패 부려서 죄송해요. 지금까지 숨겨서 죄송해요. 벌 내리면 받을게요. 저 벌서는 거 잘해요. 내일 아침까지 손 들고 있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2층 올라갈 수 있게 해 주시면 안 돼요?”

“⋯⋯.”

“형이랑 뽀뽀하고 싶어요. 안고 싶어요. 오늘도 너무 보고 싶었어요. 왜 늦게 들어오냐고 연락하고 싶었어요. 점심은 뭐 드셨어요? 일은 어땠어요? 누가 또 짜증 나게 하진 않았어요? 어제 잠은 잘 잤어요?”

와다다 이어지는 우영의 말에 사현은 커피 잔을 두 손으로 잡아야 했다. 딱따구리 같은 그의 말이 잔을 깨트릴 것만 같아서. 눈을 꾹 감았다가 뜬 그가 우영을 지그시 바라봤다.

“자기야.”

“네?”

“네 말이 너무 중구난방이라 이해하기가 힘들어.”

사현의 말에 우영이 두 손으로 벅벅 마른세수를 했다. 사현이 그의 앞머리를 다정하게 쓸어 넘겨 주었다. 애가 오죽 답답했으면 구역질하듯 말을 했을까 싶고. 그 감정이 하찮든 하찮지 않든, 사현은 들어 주고 보듬어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네가 태영이를 싫어하는 건-”

사현이 조곤조곤 말하는데 우영이 퍼뜩 얼굴을 쳐들었다.

“태영이라고 안 부르시면 안 돼요? 너무 다정해요.”

“그래. 박태영을 싫어하는 이유부터 말해 줄래? 걔가 그냥 네 옆을 지나갔다는 이유로 싫어하는 건 아닐 거 아니니?”

“이걸 제가⋯⋯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요⋯⋯. 아니, 저는 형 애인이잖아요. 그러니까 말해도 되는 것 같아요.”

“⋯⋯.”

“박태영이 형 좋아해요.”

우영이 비장하게 말했다. 저 사채 썼어요라든가, 성전환 수술을 하고 싶어요라든가, 사실 애가 둘 있어요라든가, 뭐 그런 엄청난 사실을 말할 때나 어울릴 법한 말이었다. 사현의 시각으로 봤을 때 태영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건 그다지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걔가 날 좋아하는 게 무슨 상관인데?”

“그게, 어⋯⋯, 그러니까⋯⋯. 저한텐 상관있어요. 누가 형을 좋아하는 게 싫다고요.”

“회사에도 몇 명 있는데.”

“아아⋯⋯.”

우영이 가녀린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 엎어졌다. 또 있대. 박태영 하나로도 토할 것 같은데 몇 명이나 더 있대. 진짜 어쩌면 좋아.

우영이 카펫을 쥐어뜯으며 울분을 삼키는데 커피를 든 사현이 소파에서 죽 미끄러져 내려와 그의 곁에 앉았다. 우영이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사현의 허벅지 위에 얼굴을 묻었다.

“그 사람들은 괜찮아요. 제가 모르는 사람들이잖아요. 근데 박태영은⋯⋯ 진짜 싫어요.”

“뭐가 싫은데.”

우영이 눈을 부릅떴다. 그러고는 여태 있었던 일을 낱낱이 일러바쳤다. 그가 제게 무슨 말을 했는지, 오만방자하게 뒤에서 사현을 형이라고 부른 것 하며, 묘하게 제 신경을 들쑤시던 어투와, 저를 따라 한 듯한 머리 모양과 옷차림새까지.

치사한 짓이었지만 뭐 어떤가. 우영은 지금 피를 토할 만큼 신경질이 난 상태였다. 제 평생 이렇게 빡치는 건 처음이었다.

한창 서러움과 짜증을 토로하던 우영이 흡, 하고 축축한 숨을 들이켰다. 그에 잠자코 듣던 사현의 눈썹이 매섭게 치솟았다. 그가 우영의 양쪽 뺨을 쥐고 눈을 맞추려 했다. 그러나 우영이 목에 힘을 주고 버텼다.

“우영아? 고개 들어 봐.”

“흐⋯⋯. 싫어요⋯⋯.”

“너⋯⋯ 울어?”

사현이 헛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갑자기 공기가 뻣뻣이 굳는 듯한 환촉이 느껴졌다. 그가 다급하게 우영을 끌어안았다. 우영이가 운다. 사현은 아주 커다란 공포를 느꼈다.

비록 제가 어른일지라도 감정에 한해서는 저보다 훨씬 어른 같던 우영이다. 헌데 이렇게 우니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그가 여태 보통 마음고생을 한 게 아니구나 싶기도 하고. 그걸 모르고 밀어낸 제가 밉기도 하고. 후회도 되고.

사현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허둥지둥하는데 우영이 그의 허리를 꽉 껴안으며 웅얼거렸다.

“저는 진짜 형밖에 없어요⋯⋯. 형만 있으면 돼요⋯⋯. 우윽, 형이 저만 사랑해 줬으면 좋겠어요⋯⋯.”

“난 너만 사랑해, 우영아.”

“알아요⋯⋯. 아는데⋯⋯, 자꾸, 그래서⋯⋯. 죄송해요⋯⋯.”

“뭐가 죄송해. 고개 들어 봐. 얼굴 좀 보자. 응?”

사현이 우영의 뒤통수를 살살 쓰다듬으며 그를 달랬다. 다정한 음성에 우물쭈물하던 우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발갛게 열이 오른 눈가와 눈물이 아롱아롱 맺힌 속눈썹, 얼마나 물어뜯었으면 체리처럼 새빨갛게 퉁퉁 부은 입술이 드러났다.

사현이 엄지로 그의 눈가에 고인 눈물을 살살 닦아 냈다. 그리고 입술에 쪽쪽 뽀뽀했다. 며칠 만에 마주하는 우영의 입술이 말도 못 하게 좋았다. 촉촉하고 통통하고. 분위기만 이 꼴이 아니었다면 그냥 밤새도록 줄줄 빨고 싶을 정도였다.

마른침과 함께 욕구를 삼킨 사현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예쁜 거 좋아하잖니.”

“⋯⋯.”

“그래서 널 좋아하는 거고.”

“⋯⋯.”

“근데 걔는 안 예뻐.”

“안, 안 그래도 제인 실장님이 그 말씀을 하긴 하셨어요.”

예상치 못한 말에 사현이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너 제이한테 갔다 왔어?”

“네. 이걸 형한테 말해도 될지, 안 될지 알 수가 없어서⋯⋯. 괜히 말했다가 형이 귀찮다고, 이래서 애새끼랑 만나는 건 불편하다고 할까 봐⋯⋯. 그럼 안 되니까⋯⋯. 실장님이 형 제일 잘 아는 사람이라서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뭐라던?”

“가서 솔직하게 말하라고⋯⋯. 형이 절 귀여워할 거라고요⋯⋯.”

그 말에 사현이 키득키득 웃었다. 제인다운 대답이었다. 실로 제 심정을 꿰뚫은 말이기도 했고. 사현이 그새 다시 눈물로 젖은 우영의 눈가를 살살 닦아 냈다. 우영이 그의 손등을 잡아 뺨을 묻었다.

커다란 덩치가 잔뜩 구겨져서는 온몸으로 제 애정을 갈구하는 게 매우 사랑스러웠다.

“그래, 우영아. 너 지금 되게 귀여워. 어쩜 우는 것도 귀엽네.”

우영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가 울멍울멍한 눈으로 사현을 쳐다봤다.

“정말요?”

“응.”

“⋯⋯다행이에요.”

우영은 입술을 우물우물하더니 다시 울음을 터트리며 사현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사현이 옅은 미소를 흘리며 그의 등을 쓰다듬었다.

우영은 한참 동안 울었다. 그간의 서러움을 모두 토해 내겠다는 듯이. 중간중간에 “뽀뽀하고 싶어요. 뽀뽀할래요.”라든가, “머리 만져 주세요.”라든가, “형 냄새 너무 좋아요.”라든가, 귀여운 소리를 하기도 했다.

사현은 느긋하게 커피를 홀짝이며 울분인지 애교인지 모를 우영의 행동을 받아 주고 있었다. 참, 키우는 맛이 있는 놈이 아닐 수 없었다.

콧잔등이 붉어질 정도로 울던 우영이 드디어 정신을 다잡았다. 그래도 불안한지, 사현을 껴안고 그의 어깨에 뺨을 비벼 댔다. 결 좋은 곱슬머리가 사현의 귓불과 목덜미를 간질였다.

사현은 우영의 손을 다정하게 만져 주었다. 굵직하게 마디가 도드라진 손가락도 쓰다듬고, 항상 단정한 손톱 끝도 꾹꾹 눌러 보았다.

“오늘은 왜 그 사람이랑 저녁 먹은 거예요?”

훌쩍 울음의 여운을 삼킨 우영이 물었다. 사현이 다 마신 커피 잔을 아쉽게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배고프대서. 맛있고 비싼 게 먹고 싶대서.”

“왜, 왜 그런 걸 형이 들어줘요? 그냥 돈만 줘도 되잖아요. 아니면 제인 실장님도 계시는데⋯⋯.”

“네 생각나서 그랬어.”

사현이 우영의 잘생긴 턱선을 쓰다듬었다. 아름다운 얼굴을 응시하는 시선이 어쩐지 울적해 보였다.

“너에게도 그런 시간이, 배고프고 외롭던 시간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

“아무래도 네 또래라 그런가 봐.”

“형⋯⋯.”

“그렇다고 가서 잘해 주거나 하진 않았어. 만나자마자 후회했다니까. 박태영은 네가 아닌데 말이야. 그 시간에 널 만나러 왔어야 했는데. 미안해.”

“아니에요. 사과하지 마세요.”

우영이 사현의 뺨에 꾹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이번엔 사현이 그의 품에 얼굴을 기댔다. 그리고 먼 허공을 응시했다.

“우영아, 나한텐 네가 이렇게 커. 그냥 지나가는 젊은 남자애가 다 너처럼 느껴져. 괜히 친절하게 대해 주고 걱정하게 돼. 마치 딸 가진 부모가 세상 모든 딸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처럼 말이야.”

“⋯⋯.”

“별생각 없이 그런 건데, 너로서는 짜증이 났을 만해. 나도 네가 내 또래 남자한테 잘해 줄 거라 생각하면 진짜 토할 것 같거든.”

“⋯⋯.”

“앞으로는 안 그럴게. 미안해.”

사현이 재차 사과했다. 우영의 얼굴이 또 눅눅해졌다. 그는 사현의 사과가 얼마나 귀한지 알고 있었다.

애당초 뭘 잘못하질 않는 사람이다. 자존심도 강하고, 누구에게든 사과할 필요가 없을 만큼 높은 자리에 우뚝 서 있는 사람인데. 일 분 사이에 제게 사과를 두 번이나 했다.

제가 사현에게 정말 특별한 사람이구나. 그걸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우영이 사현의 허리를 쥐고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부드러우나 센 힘에 사현의 몸이 우영의 허벅지 위에 안착했다. 사현은 익숙하게 우영의 품에 안겼다. 그러고는 우영의 곱슬머리에 손가락을 넣어 살살 빗어 넘겼다.

우영의 냄새, 체취, 풍성한 머리칼. 며칠 못 느꼈다고 금단 증세가 왔었다. 조금 과장해서 손도 떨렸다. 골초가 담배를 끊은 것처럼 말이다.

사현이 그간 결핍되었던 우영을 채우며 속삭였다.

“내가 어떻게 해 줄까? 걔 전시하지 말까?”

“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그럼 형 명성에 금이 가잖아요.”

“전시 하나 어그러트리는 거 일도 아니야. 나한테 피해 없어. 그럼 깡패 몇 고용해서 패 줄까?”

“아니요. 저 때문에 박태영, 그 사람이 아프거나 불행해지는 것도 싫어요.”

“⋯⋯.”

“죄송해요⋯⋯. 이도 저도 아니어서⋯⋯.”

우영은 다시 시무룩해졌다. 저도 사현처럼 매사에 냉철하면 좋겠다. 감정을 떠나서 일을 일로만 보고, 성숙해지면 좋겠다. 그래도 이제 제법 의젓하게 사회생활은 하는데. 사랑은, 사현은 여전히 어렵고 애가 탄다.

우영이 푹 한숨을 내쉬는데 사현이 그의 귓바퀴를 주무르며 대안을 내놓았다.

“최대한 안 만나는 쪽으로 스케줄 짜 볼게. 나 대신 제인이나 큐레이터 보내면 돼.”

“네.”

“문자 메시지나 통화는, 원래도 잘 안 받아. 그래도 네가 싫으면-”

“그건 괜찮아요. 일이잖아요. 일이니까 괜찮아요. 형이 저만 좋아한다는 걸 아니까, 정말 괜찮아요. 그건 제가 적응할게요.”

우영이 사현의 어깨에 이마를 묻으며 웅얼거렸다. 사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기특한 소리였다.

“그래. 그럼 이제 다 됐니? 더 하고 싶은 말 있어?”

“아니요. 없어요. 완벽해요.”

우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로소 질질 끌어오던 냉전 체제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사현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그러더니 우영의 뒤통수를 감싸 쥐고 확 끌어당겼다.

“그럼 섹스나 하자.”

내일부터 주말이니까.

그리고 재워 줘. 퍼머넌트 옐로우 같은 네 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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