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검은색 밤
사현은 바쁘게 굴러가던 회사 일이 한가해졌다고 했다. 무슨 프로젝트가 끝났고, 주가가 12%나 올랐고, 고지식하던 화 그룹의 경영 방식이 공격적이고 화려해졌다며 사현의 경영을 칭찬하는 기사가 쏟아졌다.
직원의 뼈가 갈린다느니, 사장으로 있는 사현의 성격이 모났다느니, 갤러리에 집중하느라 경영이 엉망진창이라느니, 숨겨진 애인과 동거 중인데 그 애인이 강남 유흥가에서 일하던 질 낮은 이라느니 등의 부정적인 기사도 드문드문 등장했다.
그러나 몇 시간 후. 화 그룹의 연봉이 여타 대기업보다 몇 프로가 높으며, 바쁜 프로젝트가 끝나면 유급 휴가가 며칠씩 주어진다, 사내 분위기가 수평적이다, 직원 복지로 쓰는 돈이 수백억이라는 기사가 났다.
마지막으로 숨겨진 애인에 관해 쓴 기자는 그 기사 이후로 다른 기사가 업데이트 되지 않았다.
아무튼, 바쁜 일이 끝나고 사현은 갤러리 일에 전보다 시간을 많이 할애할 수 있게 됐다.
좋은 타이밍이었다. 사현은 그간 신경 쓰지 못했던 갤러리의 VIP들과 소통하고, 우영의 전시회도 준비하고, 이름의 마지막 글자가 영인 뿔테의 전시도 준비할 수 있었다.
물론 우영과 함께하는 시간도 늘어났다. 우영의 일을 하는 거였으니까.
덕분에 우영은 온종일 싱글벙글이었다. 사현과 함께 집에 있는 것도 까무러치게 좋았는데, 같이 갤러리로 출근하고 같이 퇴근하니 천국과 다름없었다. 덕분에 요즘 그가 그리는 그림엔 온갖 따뜻한 색이 철철 흘러넘쳤다.
그러나 그 행복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우영의 전시보다 태영, 그러니까 그 이름이 영으로 끝나는 뿔테 놈의 전시가 몇 달 앞섰다. 그래서 사현은 우영보다 그 뿔테의 전시에 집중하고 있었다.
우영이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동안 사현 혼자 태영을 만날 때도 있었고, 가끔은 그놈과 늦은 시간까지 갤러리에 함께 있기도 했다.
그게 끔찍이도 싫었지만 우영은 노력했다. 제 등신 같은 질투심을 사현에게 보이지 않으려. 어른스러운 그에 걸맞은 어른스러운 애인이 되려. 다른 것도 아니고 〈갤러리 비〉의 B로서 일하는 그를 존중하려.
그러나 어린 마음은, 성장하지 못한 마음은, 사현과 관련한 것에서는 항상 어리숙한 마음은, 우영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토요일 밤, 우영과 사현은 늘 그랬듯 김밥천국에 자리를 잡았다. 봄이 오면서 명품관의 옷이 싹 바뀐 터라 백화점에 들렀다가 온 참이었다. 우영은 명품관에서 오천만 원치 옷을 사 놓고 저녁으로 김밥천국을 먹는 건 본인들뿐일 거라고 웃었다.
이제 우영은 사현을 따라다니며 본인의 것도 이것저것 고를 줄 안다. 물론 계산은 백 프로 사현이 하지만, 일단 본인의 것을 직접 고른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성장이었다. 성공률도 높았다. 계산 전, 별로인 것은 사현이 솎아 내기 때문이다.
우영은 기분이 좋았다. 제가 쇼핑으로 기분이 좋아 봐야 마트에서 장을 이십만 원치 봐 왔을 때가 다였는데. 또 한 단계 성장해 사현에게 어울리는 연인이 된 것 같아서 뿌듯했다.
두 사람은 비슷한 메뉴로 식사했다. 라면, 밥, 돈가스. 그렇게 한창 배를 채우는데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사현의 핸드폰이 바라락 대차게 울었다.
[박태영]
화면에 뜬 세 글자를 본 우영이 우뚝 굳었다. 그와 달리 사현은 느긋하게 라면 국물을 한 번 퍼 먹은 후, 핸드폰을 들었다. 미간이 좁아진 게 성스러운 라면 식사를 방해받은 게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왜.”
“⋯⋯.”
“그래.”
“⋯⋯.”
“아니. 그 사이즈는 메인 작으로 걸기 작다고 했잖아.”
“⋯⋯.”
“응.”
“⋯⋯.”
“그런 건 나 말고 제이한테 전화해.”
사현은 여보세요, 라든가, 끊는다, 와 같은 전화 예절을 하등 지키지 않았다. 그러고는 상대방이 말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뚝 하고 종료 버튼을 눌러 버렸다. 그러더니 핸드폰을 아무렇게나 내려놓고는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우영만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마치 누가 머리 위로 시멘트라도 쏟아부은 것처럼.
그러고 있으니 김밥을 집던 사현이 눈썹을 위로 올리며 물었다.
“자기야, 배불러?”
벌써? 네가? 어디 아픈 거 아니니? 돌도 씹어 먹는 애가 왜 그러고 있니? 걱정과 의문이 점철된 낯에 우영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얼마 먹지도 않았는데 속이 더부룩했다. 박태영이라는 세 글자가 식도를 꽉 메워서 그랬다.
허나 그걸 곧이곧대로 사현에게 말할 순 없었다.
우영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배 안 불러요.”
“근데 왜 안 먹어?”
“어⋯⋯. 참치, 참치김밥을 하나 더 시킬까 하고.”
“응, 그랬어? 내가 시킬게. 사장님.”
사현은 사장님에게 참치김밥을 주문했다. 우영의 드넓은 위장을 걱정해 두 줄을 시켰다. 그리고 나 잘했지, 하는 표정으로 우영을 보며 웃었다.
우영이 그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속이 어떻든 간에 사현의 미소를 보면 다른 건 다 흐려지고야 만다.
식욕을 되찾은 우영이 다시 식사에 집중할 때였다. 사현의 핸드폰이 또 바라락, 울렸다. 이번에는 메시지였다. 녹색의 메시지 창 위로 [박태영] 같은 이름이 떠 있었다.
우영이 수저를 꽉 움켜쥐었다. 저 눈치 없는 새끼가 진짜⋯⋯. 우리 형 식사하는데 자꾸 연락하고 지랄이야. 핸드폰을 부숴 버릴까 보다. 물론 형 거 말고 저 놈팡이 거.
어금니를 꾹 눌러 씹던 우영이 오므라이스를 숟가락으로 퍽퍽 난도질하며 물었다.
“그 사람은 어때요?”
“누구?”
“그 신진 작가라는 사람이요.”
“아, 태영이?”
우영의 고개가 번쩍 쳐들렸다. ⋯⋯태영이? 태영이라고? 성을 떼고 불러? 왜? 굳이 왜?
머리 위로 천둥이 치는 것 같았다. 대체 언제부터 그놈이 태영이가 된 건가. 어째서 그렇게 친해진 건가?
이 주 전 그에게 작업실 겸 오피스텔을 얻어 준 이후로? 아니면 그의 이전 그림을 리터치하기 위해 〈갤러리 비〉로 불렀을 때 이후로? 그도 아니면 일주일 전 그놈의 전시를 구상한다고 밤늦게 퇴근했던 날 이후로?
물론, 사현이 누군가를 성까지 붙여 꼬박꼬박 부르는 건 드문 일이었다. 우영은 그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제 첫 호칭이 ‘자기야’였는데 오죽할까.
그래도 이제 ‘자기야’는 괜찮았다. 우영이 그 호칭을 남에게 쓰는 게 싫다고 했더니 사현이 그날로 단박에 ‘자기야’를 끊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의 입에서 나오는 ‘자기야’에 속한 이는 세상에 우영, 하나였다.
사현은 본디 말을 싹수없이 하지만 호칭은 다정하려 노력하는 편이었다. 큐레이터들에게 꼬박꼬박 이름을 불러 주고, 제인을 제이라고 살갑게 부르는 것만 봐도 그랬다.
그러니 박태영을 태영이라고 부르는 게 이상한 건 아니다. 그를 특별 대우하는 것도 아니었고. 근데 우영은 그걸 명확히 구분할 정도로 이성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사현은 음, 하며 잠시 태영에 관해 생각했다. ‘그 사람 어때요?’라는 질문을 들었으니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허나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사현은 태영을 사람이라기보다는 작가로 정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 착해. 말 잘 듣고.”
“그게 다예요?”
“그럼 뭐가 또 있니?”
“그냥, 뭐, 특징이나 짜증 나는 점이나 그런 거⋯⋯.”
“말이 조금 많긴 한데, 못 참을 정도는 아니야. 그 나이대에는 다 그렇거든.”
우영의 입이 한일자로 다물렸다. 착해. 말 잘 듣고. 다 우영에게 한 말이었다. 그 나이대라고 통칭하는 것도 그랬다. 아. 괜히 물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차, 사현이 원치 않은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그림은 괜찮아. 단조롭긴 한데, 걸어 두기 좋은 그림이거든. 해가 잘 드는 거실이나 안방에 걸어 두면 분위기가 사는 그림이야.”
“⋯⋯.”
“그렇다고 백발 노인네가 그린 것처럼 단조롭다는 건 아니고, 젊은 애가 그린 티가 나. 그게 매력이지.”
사현의 말에 우영은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를 칭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칭찬에 젊음이 끼어 있는 것도 싫었다. 그냥 다 싫었다.
그렇다고 태영의 그림이 엉망이길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럼 사현의 명성에 누가 될 테니까. 그래도 저보다는 잘나지 않았으면 했다. 사현의 입에서 칭찬보다는 욕이 더 많이 나오길 바랐다.
‘제 그림이 나아요, 그놈 그림이 나아요?’라는 말이 혀끝에서 달랑거렸으나 우영은 꾸역꾸역 눌러 내렸다.
속이 답답했다. 얹힌 것 같았다.
생전 처음이었다. 밥이 얹힌 건.
* * *
오전에 화 그룹에 들렀다가 일찍 퇴근한 사현은 곧장 갤러리 근처의 오피스텔로 향했다. 태영의 그림을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애가 성실해서 꼬박꼬박 그림을 완성해 내고는 있는데 그래도 감시는 해야 했다.
이전이었다면, 그러니까 우영과 만나기 전이었다면 태영 역시 제집에 있었을 것이다. 지금 우영이 쓰고 있는 작업실에 자리를 잡았겠지. 여태 사현이 키운 신진 작가는 다 그렇게 곁에 두고 감시 겸 감금을 해 왔으니까.
그러나 이미 우영이 똬리를 튼 공간에 감히 다른 이를 들일 수가 없었다. 해서 태영에게 다른 공간을 내주었다.
사현으로서는 귀찮은 일이었다. 화 그룹과 갤러리만 왔다 갔다 해도 정신이 없을 판에 다른 공간이 하나 더 추가되니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다.
[점심 먹었어?]
오피스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은 사현이 우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후 두 시. 평소라면 그가 자는 시간이었겠지만, 요즘 잠이 줄었다. 흔히 이 시간에 일어나 있고는 했다.
전시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나? 밥도 깨작깨작 먹는 것 같은데. 예전에는 한 끼에 도시락을 두세 개씩 해치우더니, 요즘은 하나 먹고는 만다. 그러다 그림이나 건강에 지장이 생기면 어쩌나. 전시 일정이야 얼마든지 미룰 수 있다고 말해 주려다 그것도 부담이 될 것 같아 그만뒀다.
사현이 심각한 낯으로 핸드폰 모서리를 두드리는데 엘리베이터가 띵- 소리와 함께 목적지에 도착했다.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사현이 뚜벅뚜벅 구두 소리를 내며 복도를 걸었다. 그리고 ‘2703호’라 적힌 문 앞에 도착했다.
그가 막 도어 록으로 손을 뻗는데. 띠리릭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오셨어요?”
“⋯⋯너 그리라는 그림은 안 그리고 현관문에 귀만 대고 있니?”
사현이 떨떠름한 낯으로 물었다. 하얀 반팔 티셔츠에 앞치마를 하고 있던 태영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여기 방음이 잘 안 돼요. 복도 소리가 다 들리거든요.”
“⋯⋯그래서. 집을 옮겨 달란 소리야?”
“아뇨. B 발소리가 잘 들린다는 뜻이었어요. B 발소리가 되게 특이하거든요. 또박또박 걷는다고 해야 하나. 엄청 바르고 정갈한 느낌?”
“무슨 소리니, 그게.”
사현은 대충 그의 말을 받아치며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섰다. 방 두 개에 널찍한 거실이 있는 오피스텔은 아파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사현의 집에 비하면 골방 수준이었다. 하지만 태영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이런 집에는 처음 살아 본다며, 제 평생 이렇게 깨끗한 집에서 살 줄은 몰랐다며 방정맞은 리액션을 보였다.
“이거 신으세요.”
태영이 사현의 발치에 실내용 슬리퍼를 내려놓았다. 정작 본인은 맨발이면서.
“⋯⋯.”
어쩐지 익숙한 상황에 사현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우영이 보고 싶었다. 슬쩍 핸드폰을 확인하자 아직 그에게서 답장이 없었다.
쩝, 마른 입맛을 다신 사현이 거실로 들어섰다. 줄줄이 늘어선 그림이 보였다. 버릇처럼 팔짱을 낀 그가 그림을 뜯어보았다. 멀리서 봤다가, 가까이서 봤다가, 노려보기도 하고, 형광등을 켰다가 끄기도 했다.
태영은 그런 사현의 뒤에서 초조하게 입술만 씹고 있었다. 손자국이 덕지덕지 난 뿔테를 만지고 또 만졌다. 그러다 길어지는 침묵을 참지 못하고 사현의 곁으로 다가갔다.
“커피 드릴까요? 제가 그림 그릴 때마다 스틱 커피 마신다니까 제인 실장님이 커피 머신 사 주셨어요. 엄청 신기해요. 캐러멜마키아토도 돼요.”
“나 커피 안 마셔.”
“왜요? 못 드시는 거예요?”
“아니. 좋아해. 없어서 못 마셔.”
“근데 왜 안 드세요?”
“마시면 혼나.”
“⋯⋯누구한테요? 부모님한테요?”
“뭐, 그거랑 비슷한 사람한테.”
사현이 어깨 한쪽을 으쓱거렸다. 부모, 그런 것보다 훨씬 중요한 사람이다. 사현은 우영이 싫어하는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제 건강 생각해서 싫어하는 건데. 그 예쁜 마음을 걷어차고 싶은 생각일랑 손톱만큼도 없었다.
카페인이 몸을 나도는 순간의 기분을 상상하던 사현이 아랫입술을 슬쩍 핥았다. 태영이 빼꼼 나왔다가 들어가는 그의 붉은 혀를 멍하니 쳐다봤다. 그러다 파드득 몸을 떨며 정신을 차렸다.
“근데요, B.”
“응.”
“네온 작가님도 이렇게 오피스텔 얻어 주셨어요?”
“아니. 네온은 내 집에 있었어.”
지금도 있고. 내 침실에서 자는 중이지. 사현은 뒷말을 숨겼다. 그건 구태여 알릴 필요가 없는 정보라.
“와, 정말요? B 집에요? 부럽다⋯⋯.”
태영이 흘끔 사현을 곁눈질했다. 근데 저는 왜 여기 있나요, 라는 의문이 가득했다. 사현은 그 시선을 눈치챘으나 굳이 대답해 주지 않았다.
허나 태영은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궁금함이 더 큰 건지 꾸역꾸역 캐물어 왔다.
“이전에 다른 작가도 다 B 집에 있었던 거예요?”
“그랬지.”
“근데 저는 왜-”
“이제 집에 낯선 이 들이기 싫어서.”
“⋯⋯.”
태영의 낯빛이 시무룩하게 가라앉았다. 그 꼴을 본 사현이 코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리고, 젊은 건 그다지 반갑지 않다. 매사에 감정적인 것도 싫다. 일하는 와중에 본인의 기분을 수면 밖으로 드러내는 것도, 그걸 봐주는 것도 귀찮다. 정말이지 사현의 취향이 아니었다.
눈치껏 알아서 하고,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는, 사회생활에 닳을 대로 닳은 이가 좋았다.
사현이 입매를 삐뚜름히 뒤틀었다. 그리고 구석에 세워져 있던 그림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저 그림은 전시 못 해.”
“어, 왜, 왜요?”
“붓 터치가 엉망이잖아. 다른 그림에 비해 퀄리티가 너무 떨어져. 그림이라곤 하등 모르는 문외한이 봐도 저게 엉망이라는 건 알겠다. 아무리 마음이 급하대도 붓까지 날리면 안 되지. 난 엉망인 그림은 안 팔아.”
“리, 리터치해 볼게요.”
“버려. 미련 갖지 말고.”
“⋯⋯.”
“따로 팔려는 개수작 부리지도 말고. 다음 전시 때 걸어야지 생각하지도 말고. 저게 세상에 공개돼 봤자 가뜩이나 미미한 네 이름에 흙탕물이나 튀길 뿐이야. 버려.”
태영이 입을 꾹 다물었다. 두툼한 뿔테 너머의 눈동자에 우울함, 슬픔, 짜증, 그리고 미약한 반항심이 넘실거렸다. 사현이 말을 덧붙이려 할 때였다. 우웅, 그의 주머니가 진동했다. 그가 얼른 핸드폰을 꺼냈다. 우영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저 이제 ㅇ일어낫서요.]
[형은 어디에요? 회사?]
[밥 먹겄어요?]
[곰돌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모티콘]
깜찍한 곰돌이를 본 사현의 입술이 대번에 예쁜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그가 토독토독 답장을 찍어 보냈다.
[밖이야.]
[점심 같이 먹자. 먹고 싶은 거 있어?]
전송 버튼을 누른 사현이 곧장 뒤를 돌았다.
“나 간다.”
매몰찬 이별 통보에 태영이 눈을 크게 떴다.
“버, 벌써 가세요?”
“어. 그림 봤잖아.”
그대로 현관으로 온 사현이 먼지 한 톨 없이 미끈한 구두에 발을 넣었다.
태영이 자신의 목을 벅벅 긁으며 입을 뻐끔거렸다. 사현과 헤어지기 아쉬웠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사현이 그런 존재였다.
너무 특별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감히 올려다볼 수도 없는 그런 사람이라 말을 섞고 한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남들보다 우월한 이가 된 듯한 기분까지 들었다.
“시, 식사는 하셨어요?”
“아니.”
“그럼 저랑 같이-”
“같이 먹을 사람 있어.”
태영은 단칼에 거절당했다. 그가 손톱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꾹꾹 짓눌렀다. 조급했다. 그와 점심을 함께할 이름 모를 이에게 사현의 곁을 강탈당하는 듯한 기분까지 들었다.
사현이 막 현관의 문손잡이를 쥐었을 때 태영은 맨발로 현관까지 나갔다.
“누구랑요? 큐레이터 선생님들이면 저도 같이 가면 안 돼요?”
도를 넘는 말에 사현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정말 큐레이터들과 식사 약속을 잡아 놨어도 기분이 더러웠을 터였다. 그런데 우영과 함께하기로 한 점심에 타인이 낀다 생각하니 기분이 곱절로 더러웠다.
그가 날카로운 말을 일발 장전했을 때였다.
문득, 정말 문득, 우영에게 또래 친구가 없는 게 생각났다.
그는 항상 혼자다. 제가 없으면 정말 오롯이 혼자다. 저야 회사에 가고, 갤러리에 가며 친하든 친하지 않든, 인간과 만나 소통한다. 그러나 우영은 한 달에 한두 번 갤러리를 방문할 때를 제외하곤 늘 집에 혼자 있었다.
티를 안 내서 그렇지, 제가 퇴근해서 집에 갈 때까지 종일 한 마디도 하지 않은 날이 비일비재했다.
그걸 깨닫자 갑자기 엄청 난 슬픔이 몰려왔다. 우리 애, 나이답지 않게 의젓하고 어른스러워서 그렇지. 손도 많이 타고 외로움도 많이 타는 앤데. 제가 퇴근만 하면 붙어서 안 떨어지는 앤데.
“⋯⋯.”
사현이 고개를 반쯤 돌려 태영을 쳐다봤다. 생김새가 아주 잘생긴 건 아니지만, 그래도 우영의 옆에 붙여 두기 나쁠 정도로 엉망진창은 아니다. 평소 입는 사복이 영 못 봐 줄 꼴이긴 하다만, 전시가 끝나고 돈을 쥐게 되면 뭐든 사 입긴 할 것이다. 우영이 행색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이도 아니고.
어쨌거나 우영의 또래고, 더군다나 둘 다 그림을 그린다. 집에서 하얀 반팔에 맨발인 것도 똑같다. 어쩌면 잘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잖아도 며칠 전, 우영이 태영에 대해 물었지. 아무래도 또래이다 보니 관심이 생겼던 걸까.
사현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가 놨다. 우영에게 제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생기는 건 싫지만, 그렇다고 그를 고립시킬 생각은 없었다. 제가 뒷전이 될 리 없다는 믿음도 있었고.
생각을 마친 사현이 태영에게 명령했다.
“너, 옷 입어.”
“예?”
“같이 가게 옷 입어. 깨끗한 거로 입어.”
“아, 네! 오 분, 아니 삼 분만 기다려 주세요!”
“그 끔찍한 안경도 어떻게 좀 하고.”
“네!”
태영이 우당탕 쿠당탕 요란하게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손목시계를 흘끔 확인한 사현이 핸드폰을 들었다. 우영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저 당근케이크 먹고 싶ㅍ어요!]
그것을 본 사현이 피식 웃었다. 누가 애 아니랄까 봐 눈 뜨자마자 케이크가 먹고 싶으시단다. 내 자기가 먹고 싶다는데, 사 줘야지.
사현은 후식으로 케이크가 맛있게 나오는 식당 리스트를 머릿속으로 추렸다. 그리고 개중 몇 곳의 오너에게 메시지를 넣었다.
오늘 후식으로 당근케이크 되냐고.
* * *
우영은 옷을 멋지게 차려입었다. 사현이 오라고 한 레스토랑이 고급 식당이었기 때문이다. 평일 한낮에, 한적한 레스토랑에서 그와 둘이 오순도순 식사할 생각을 하며 샤워 내내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리고 사현이 좋아하는, 옷 위로 가슴 라인이 은근히 드러나는 니트를 입기 앞서 팔 굽혀 펴기도 3세트 했다.
주차장에 미끈한 차를 댄 우영이 차 키를 달랑거리며 식당에 들어섰다. 인상 좋은 직원이 가볍게 묵례하며 그를 반겼다.
“안녕하십니까. 예약하셨거나, 일행이 있으십니까?”
“백사현이나 B 이름으로 예약되어 있을 거예요.”
“아, 서우영 님 되십니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직원이 왼손으로 복도를 가리켰다. 우영이 그를 따라 발을 옮겼다. 그러면서 머리도 슥슥 넘기고, 포인트로 맨 스카프도 손질하고, 코트 안으로 말려 들어간 소매도 빼고, 팔목을 털어 시계도 정리하고, 큼큼 목도 가다듬었다.
사현과 한집에 살며 매일 보고, 하물며 섹스도 하고, 그의 침실에서 그와 함께 잠까지 잔다. 그런데 이렇게 바깥에서 보는 건 아직도 설레고 긴장이 됐다. 그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이것저것 신경 쓰게 된다고 해야 하나.
그럼 눈썰미 좋은 사현이 지나가는 말로라도 오늘 예쁘게 하고 왔네, 라고 해 준다. 그걸 듣는 제 기분이 어떨지는 그 누구도 가늠하지 못할 것이다.
비로소 직원의 발이 멈추었다. 복도 끝에 있는 룸 앞에서였다. 문고리를 쥔 직원이 문을 열기 직전, 우영에게 넌지시 말했다.
“당근케이크는 식사 시작 전에 가져다드릴까요, 식사 후에 가져다드릴까요?”
그 말에 우영의 얼굴이 화창하게 폈다. 당근케이크. 분명 사현이 언질을 한 것이다. 그의 광대가 봉긋하게 솟아올랐다. 사현의 다정한 사랑에 질식해 죽을 것만 같았다.
“바로요. 지금 바로.”
“네, 그럼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빙긋 웃은 직원이 문을 열었다. 우영은 문이 다 열리기도 전에 룸 안으로 발부터 뻗었다. 1초라도 빨리 사현을 보고 싶었다. 그의 뺨에 뽀뽀하고, 결핍된 반나절을 충전하고, 그의 달큰한 바닐라 냄새를 들이마시고, 사랑을 속삭이고 싶었다.
허나.
“어, 안녕하세요, 작가님. 오랜만에 뵙네요. 박태영입니다.”
낯선 목소리가 쓸데없이 살갑게 인사해 오는 순간. 그 낯선 목소리의 주인이 사현의 곁에 앉아 있는 순간. 분명 제 것인 사현의 옆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꼴을 보는 순간. 모든 계획과 감정이 우그러졌다.
“왔어, 작가님? 앉아.”
사현이 빙긋 웃으며 우영을 반겼다.
우영은 그 인사를 받지도 못한 채, 그저 멀뚱히 서 있었다. 앉으라니. 어디? 맞은편에? 왜? 항상 둘이 오면 얼굴을 마주 보고 앉긴 했지만 지금처럼 누군가가 껴 있다면 사현의 옆자리는 항상 우영의 것이었다. 오롯이 그가 독점했단 말이다.
우영이 태영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태영을 보는 건 그날, 사현의 관장실에서 처음 본 이후 처음이었다.
태영은 이미지가 사뭇 달라졌다. 콧잔등을 묵직하게 짓누르던 뿔테는 어디 뒀는지 보이지 않았고, 주름이 조금 지긴 했으나 멀끔한 와이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근육 없이 마른 몸이라 그게 멋지다는 느낌으로 다가오진 않았지만 어쨌든, 사현의 관장실 앞에서 봤던 모습과 비교하면 전혀 달랐다.
그게 우영의 마음에 들 리 없었다. 사현의 재력과 센스에 물들어 변한 제 과거와 마주한 기분이었다.
저도 저렇게 볼품없고 초라했을까. 그래서 사현이 저를 동정했나. 혹시 지금 태영도 동정하고 있을까.
우영의 낯이 시시각각 컴컴해지는데, 사현이 고개를 비스듬히 꺾으며 물어 왔다.
“왜 그래. 여기 마음에 안 들어? 다른 곳 갈까? 저번에 왔을 때 잘 먹어서 여기로 고른 건데.”
“아니요. 괜찮아요. 여기 꽃등심 맛있잖아요.”
우영이 한 박자 늦게 웃으며 사현의 맞은편 의자를 빼냈다. 곁에 서 있던 직원이 우영의 코트를 받아 갔다. 바른 자세로 의자에 앉은 우영이 냅킨을 펼쳤다.
사현이 그런 우영을 보며 씨익 웃었다. 낮에 보니 더 잘생겼다. 적당히 두께감 있는 니트 너머로 도드라진 우영의 널찍한 어깨와 봉긋한 가슴 근육에 입천장이 바짝 말랐다.
한참 우영을 감상하던 사현이 뒤늦게 직원의 존재를 인식했다. 그리고 익숙하게 메뉴를 주문하기 시작했다.
“저번에 먹었던 거로 주세요. 작가님 건 꽃등심 두 덩이, 미디엄으로 구워 주고 가니시로는 감자, 양파, 아스파라거스, 방울토마토, 파프리카, 가지로.”
“네.”
“제 건 미디엄 레어로, 가니시는 셰프가 알 거예요. 그대로 해 달라고 하고 여기, 이쪽은⋯⋯.”
사현의 시선이 태영에게로 향했다. 태영이 얼른 말했다.
“저는 아무거나 다 잘 먹어요.”
“그럼 나랑 같은 거로, 굽기는 미디엄 웰던. 그리고 당근케이크 잊지 말고요.”
“네, B. 당근케이크와 함께 전채 요리부터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직원이 묵례하고는 룸을 나섰다. 테이블 위로 턱을 괸 사현이 우영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우영도 사현을 응시했다. 두 시선이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사현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떠 있고, 우영의 입매는 단단하게 굳어 있어서 그랬다.
그렇게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려 있는 사이, 태영이 와인 잔에 담긴 물을 어색하게 홀짝이며 물었다.
“두 분 엄청 친하신가 봐요.”
그 말에 우영과 사현의 시선이 태영에게로 향했다.
“친하지, 그럼.”
사현이 일말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에 우영이 태영을 보며 미소 지었다. 사현의 입에서 ‘친하다’라는 말은 쉽게 나올 수 있는 게 아니다. 헌데 나는 그 특권을 이토록 아무렇지 않게 누릴 정도로 그와 친한 사이이다. 그것을 뽐내는 미소였다.
그런데 태영이 샐쭉 입을 벌리며 마주 웃었다. 아무래도 우영이 누군가를 이겨 먹으려고, 자랑하려고, 깔보듯 미소 짓는 건 처음이라 태영이 단단히 오해한 듯했다.
태영이 고개를 숙이고 사현을 보며 물었다.
“저도 〈갤러리 비〉에서 전시하고 나면 B랑 친해질 수 있을까요?”
“글쎄. 너 하기 나름이지.”
“저 진짜 열심히 할 거예요.”
“제발, 그래라.”
사현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다지 감흥 없는 대화였음에도 우영은 짜증이 났다. 뭘 하기 나름이야. 네가 아무리 날고 기고 해 봐라. 제 자리는 죽어도 넘보지 못할 테다.
우영이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말아 쥐는데 사현이 뒤늦게 태영을 소개했다.
“아, 이쪽은 박태영 작가. 두 달 뒤에 〈갤러리 비〉에서 데뷔전 할 거야. 작가 이름은 아직 안 정했고.”
“안녕하세요, 작가님.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우영이 까딱 고갯짓했다. 아주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은 것뿐인데 묘한 귀찮음을 느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긴 적은 많았지만 귀찮게 여긴 건 처음이었다.
우영이 코로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긁적이는데, 호기심 많은 태영이 또 말을 걸어왔다.
“네온 작가님 성함은 어떻게-”
“안 돼.”
우영이 대답하기도 전에 사현이 질문을 쳐 냈다. 그에 태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제 이름은 말씀하셨잖아요.”
“너랑 네온이랑 같니? 쟤가 캔버스에다 손바닥 하나만 찍어도 사 가겠다는 컬렉터가 수백 명이야. 반면에 너는?”
“B 진짜 못됐어요⋯⋯.”
“참아.”
시무룩한 태영의 목소리에도 사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태영의 말에 대답해 주면서도 우영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햇살 아래의 우영은 보기 쉬운 게 아니라서 볼 수 있을 때 양껏 봐 둬야 했다.
그렇게 누군가에게는 어색하나, 또 누군가에게는 어색하지 않은 시간이 십 분쯤 흘렀을 때, 사현이 설핏 미간을 구기며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케이크가 안 오네. 배 많이 고프지?”
“괜찮아요. 형은 안 고파요?”
“오전에 회사에서 아침 먹었어.”
“아, 맞다. 오늘 조찬 미팅 있었죠. 어땠어요?”
“어떻고 말고 할 게 어딨어. 항시 짜증 나지. 굳이 밥 먹으면서 미팅할 필요가 있냐고.”
“그러게요. 형 원래 아침도 안 먹는데. 괜히 삼십 분이나 일찍 일어나고. 형이 사장님인데 하지 말자고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안 그래도 열심히 피력 중이야. 식사 내내 기분 좆같다는 티를 냈어.”
사현이 나 잘했지, 라는 표정으로 우영을 보며 웃었다. 우영이 그를 따라 웃었다.
태영은 그런 두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평생 만날 거라 생각지 못한 두 사람이 코앞에 있으니 자꾸 넋이 빠졌다. 그들이 제가 알 수 없는 대화를 하든, 예상외로 매우 친근해 보이든, 서로의 스케줄과 식사 버릇까지 알고 있는 괴상한 관계든,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곧 주문한 음식과 함께 우영 몫의 당근케이크도 나왔다. 둥그런 한 판이 통째로 우영의 앞에 놓였고, 사현과 태영의 앞에는 한 조각씩 놓였다.
우영은 커다란 샐러드 포크로 케이크를 밥 푸듯 퍼먹었다. 태영은 또 다른 충격에 무례도 모르고 우영을 쳐다봐야 했다. 사현이 그런 우영을 본인이 키우는 강아지가 식사하는 걸 보듯 흐뭇하게 보는 것도 충격적이었다.
조금 더 지나서는 스테이크가 나왔다. 이번에도 역시 우영의 앞에만 커다란 접시 두 개가 놓였다. 하나는 반질반질 윤기가 나는 고기가 두 덩이 있는 접시였고, 또 하나는 온갖 가니시가 산더미처럼 쌓인 접시였다.
우영이 본인의 앞에 놓인 접시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손대지 않고,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사현이 그런 우영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리 줘.”
우영은 기다렸다는 듯 고기 접시를 사현에게 건네주었다. 본인의 접시를 뒤로 민 사현은 우영의 고기를 썰기 시작했다. 능숙한 칼질에 두툼한 고기가 육즙을 줄줄 흘리며 조각났다.
사현은 고기를 모두 조각내어 다시 우영에게 접시를 돌려주었다.
“고마워요, 형.”
우영이 신난 얼굴로 고기를 입으로 가져갔다. 사현은 그가 고기를 씹고, 목으로 넘기는 것까지 본 후에야 본인의 고기를 썰기 시작했다.
“⋯⋯.”
태영이 입을 뻐끔 벌렸다. 제가 정의하고 있던 ‘B’의 모습과 ‘사현이 형’의 모습이 너무 달라서 멀미가 다 올라왔다.
B는 원래 저렇게 작가에게 친절한가? 저한테는 저렇게 다정하지도, 친절하지도 않은데. 아무래도 그 대단한 네온 작가이니 특별 취급을 하는 걸까? 다 큰 남자의 고기까지 대신 썰어 줄 정도로 아끼는 작가, 뭐 그런 건가?
태영의 눈동자가 의문과 놀라움으로 터져 나가기 직전에 우영이 넌지시 설명했다.
“아, 제가 고기 썰 줄을 몰라서 형이 대신해 줘요.”
“모르는 건 아니지. 못 하게 하는 거야, 내가. 얘가 예전에 손 다친 적이 있거든.”
언젠가 우영의 손바닥을 흥건히 적셨던 피를 떠올린 사현이 목을 움츠렸다. 우영이 애도 아니고, 스테이크 칼이 매우 날카로운 것도 아니고, 고작 고기를 썰다가 손을 다칠 일이 얼마나 되겠느냐마는. 그래도 사현은 지금까지도 우영의 고기를 손수 썰어 주었다.
걱정되는 마음도 있고, 우영이 제 손을 보며 입맛을 다시는 것도 귀엽고, 매번 썰어 주는데 매번 고맙다고 말해 주는 것도 깜찍하고 등등의 이유가 겹쳐서.
“아⋯⋯ 그렇구나⋯⋯.”
태영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본인 앞에 놓인 고깃덩이를 바라봤다. 맛있겠다. 배도 고팠다. 그런데도 선뜻 손이 안 갔다. 그 역시 고기를 자를 줄 몰랐기 때문이다. 허나 그걸 말할 순 없었다.
태영이 어색하게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그리고 사현의 손짓을 상기하며 엉거주춤하게 따라 하기 시작했다. 헌데 어째서인지 고기가 썰리지 않고 칼에 짓뭉개졌다. 몸도 비비 꼬였다. 거기다 안경을 쓰지 않아 시야가 흐린 터라 얼굴이 자꾸 고기 앞으로 다가갔다.
태영의 광대에 불그스름한 부끄러움이 차오르기 시작했을 때였다. 사현이 검지 끝으로 태영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반대로 쥐었잖아. 포크를 왼손에, 나이프를 오른손에 쥐어야지.”
“아, 네!”
“검지로 나이프 등을 눌러.”
“이렇게요?”
“그래. 포크로는 고기가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하고.”
태영은 사현의 지시를 따라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칼질을 하자, 신기하게도 고기가 부드럽게 썰렸다. 태영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앉은 채로 꾸벅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B.”
“이제 먹어.”
“네!”
우렁차게 대답한 태영이 손수 썬 고기를 입으로 가져갔다. 입안에서 물 풍선처럼 터지는 육즙에 눈이 다 번쩍 뜨였다. 음식을 꼭꼭 씹어 삼킨 태영이 맛있다는 말을 하려 사현을 보는데, 사현의 시선은 이미 우영에게로 넘어가 있었다.
“맛있어? 굽기는 어때?”
“좋아요.”
“오늘 관자도 들어왔대. 버터랑 허브랑 같이 구우면 맛있을 거야. 그것도 시켜 줄까?”
“네. 파스타는요? 형 여기 파스타 좋아하잖아요.”
“어어, 그것도 하나 더 시키지, 뭐.”
태영이 살갑게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을 빤히 쳐다봤다.
“⋯⋯.”
이상하지. 기분이 나빴다.
대화에 끼지 못해서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저를 왕따 시키는 듯해서 기분이 나쁜 것도 아니었고. 그런 것보다 훨씬 더 진득한 기분 나쁨이었다.
사실 태영은 이 자리가 그저 감사했다. 그래야만 하는 위치였고. 대단한 두 사람과 눈이 튀어나올 듯 비싼 음식을 먹고 있는데, 두 사람이 식사하기로 한 자리에 제가 부득부득 졸라 낀 건데 오죽할까. 우영과 사현이 저를 없는 이 취급해도 뻔뻔하게 식사하고 갈 수 있었다. 기분 나쁠 게 하등 없다는 뜻이다.
근데 왜 이렇게 진창에 처박힌 듯 찝찝하고 좆같을까. 태영은 한참 동안 고민했지만 끝내 답을 찾지 못했다.
우영은 열심히 식사했다. 음식이 맛있어서나 배가 고파서였다기보다는 사현에게 걱정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 반, 태영에게 여유로워 보이고 싶은 마음 반 때문이었다. 여기서 깨작거리면 지는 거라고 생각했다. 유치한 생각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얼른 식사를 끝내고 사현과 둘이 있고 싶었다. 저 불청객을 쫓아내고 둘이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든, 집에서 몸을 비비든, 아무튼 둘만 있고 싶었다.
우영이 급하게 음식을 먹어 치우는데 사현의 핸드폰이 울렸다.
사현은 양해를 구하는 예의 따위 없이 곧장 전화를 받았다. 회사에서 온 듯한 전화였다. 우영과 태영의 시선이 사현에게 박혔다. 그는 옅은 짜증과 함께 통화를 이어 나갔다.
우영의 얼굴이 한결 밝게 갰다. 이 자리가 곧 파투 나겠구나, 싶어서. 반면 태영의 얼굴은 어둑해졌다. 이 자리를 마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반된 시선 안에서, 사현이 드디어 통화를 끝냈다. 그는 고민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회사 들어가 봐야 하니까 둘이 마저 먹어.”
그 말에 우영도 태영도 버석하니 굳었다. 예상치 못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사현은 슈트 재킷을 가지고 나가면서 우영의 옆에 카드를 내려놓았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더 시켜 먹고.”
이따 집에서 봐. 우영에게만 들릴 만한 목소리로 속삭인 사현이 그의 귓바퀴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 후 바쁜 걸음으로 룸을 나섰다. 훅 밀려왔던 사현의 냄새가 삽시간에 사라졌다.
우영과 태영만 남는 데에는 일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
“⋯⋯.”
어색한 정적이 차올랐다. 사현이 있을 때도 그다지 수다스럽진 않았는데, 그 존재가 주는 부피감이 컸던 터라 상실감이 대단했다.
그때 타이밍 좋게 노크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디저트가 들어왔다.
우영이 짧게 심호흡했다. 이것만 먹어 치우면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 있다. 그가 바닐라아이스크림 위에 덮인 초콜릿을 숟가락으로 푹 찌르는데, 엉덩이를 가만히 두지 못하고 들썩거리던 태영이 넌지시 물어 왔다.
“네온 작가님은 B랑 많이 친하신가 봐요. 카드도 맡기고 갈 정도라니⋯⋯.”
“아⋯⋯. 그런 편이죠. 같이 전시를 여러 번 했으니까.”
우영은 능청맞게 거짓을 말했다. 사실 카드는 친하고 말고의 척도가 아니었다. 사현은 본인의 사람에게, 그러니까 직원에게 돈을 쓰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으니까. 큐레이터팀이 회식을 하거나 화 그룹의 비서팀이 회식을 해도 본인의 카드를 주는 거로 알고 있었다.
허나 그걸 굳이 태영에게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으리라.
“그래도 다른 작가님들보다 훨씬 친하신 것 같던데요. 뭔가⋯⋯ B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랑 네온 작가님을 대할 때랑 다른 것 같아요.”
그 말에 우영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타인이 보기에도 그게 티가 나는구나, 싶어서 기분이 좋아졌다. 갑자기 태영이 괜찮아 보였다. 저와 사현의 관계를 그렇게 정의해 주는 걸 보니 주제도 모르고 우리 사이에 엉덩이를 부득부득 들이밀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우영이 전시 준비는 잘되고 있냐고 묻기 위해 입을 뗐을 때였다. 테이블 위로 턱을 괸 태영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저도 언젠가는 B를 형이라고 부를 수 있겠죠?”
“⋯⋯.”
우영이 딱딱하게 굳었다. 형이라니, 형이라니! 감히 그 호칭을 넘보다니. 주먹이 꽉 쥐어졌다. 그의 손아귀에 잡힌 가녀린 디저트 스푼이 부르르 경련했다.
우영은 ‘개소리하지 마! 너 따위는 우리 사현이 형을 형이라고 부를 수 없어!’라는 청소년 드라마 주인공의 대사를 빽 질러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네온’이라는 제 품위를 생각해서 그리고 사현의 친한 동생이라는 위치를 생각해서 꾹 눌러 내렸다.
점잖게. 어른스럽게. 사현에게 어울리는 연인이 되어야지.
식기를 내려놓은 우영이 잔잔한 눈동자로 태영을 응시했다.
“어렵지 않을까요. 형이 원래 일하면서 만난 사람이랑 친해지는 편이 아니어서.”
“근데 작가님은 일하면서 친해지셨잖아요.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라는 뜻이네요?”
“그건⋯⋯ 우리가 같이 겪은 게 많아서⋯⋯.”
“저도 앞으로 많은 걸 겪으면 되죠. 이제 첫 번째 전시고, 계약상으로는 세 번째 전시까지 〈갤러리 비〉에서 해야 하니까 적어도 삼 년은 B랑 함께 할 거 아니에요.”
우영이 뿌득 이를 갈았다. 이 씨발 놈이 진짜⋯⋯. 왜 자꾸 사현과 친해지겠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됐다.
아니, 사실 이해는 됐다.
객관적으로 봐도 너무 멋진 사람이지 않나. 능력 좋지, 잘생겼지, 냄새도 좋고, 옷도 잘 입고, 돈도 많은데, 〈갤러리 비〉의 관장에 화 그룹 사장이지, 거기다 싸가지 없으면서도 은근히 다정하고, 드문드문 귀엽기까지 하니 누구든 그의 관심을 얻고자 발악할 만했다. 허나 싫은 건 싫은 거였다.
사현은 제 것이다. 적어도 형과 동생이라는 관계에 한에서는, 연인이라는 특별한 관계에 한해서는 제가 독점하고 싶었다.
태영은 여태 사현이 키우고 버린, 키우고 보낸, 키우고 단절된, 그런 수많은 신진 작가 중 하나로 남아야 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 정도에서 끝나야 했다.
“B랑 친해지고 싶어요. 같은 공간에 있고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제가 막 성장하는 기분이잖아요. 괜히 그림도 더 잘 그려지는 것 같고. 네온 작가님도 처음에 B랑 작업하실 때 이런 기분이셨어요?”
“그랬죠. 지금도 그래요. 형한테 칭찬 받고 싶고, 밉보이고 싶지 않고, 떨어지기 싫고, 형이 언제 퇴근하나 궁금해하고.”
“아, 맞다. 네온 작가님은 B 집에서 그림 그리셨다면서요? 그럼 B를 매일 봤겠네요. 같이 집에서 밥도 먹고 그랬어요? B 집은 어때요? 완전 멋있죠? 저도 B 집에 가 보고 싶은데⋯⋯. 이제 낯선 사람 들이는 게 싫어서 안 그런다고 하시더라고요⋯⋯.”
우울한 태영의 말에 우영의 눈썹이 들썩였다. 그의 기를 누를 건수를 포착한 거였다.
“B 집 좋아요. 펜트하우스인데 서울이랑 한강이 다 내려다보여요. 넓고, 방도 많고, 냄새도 좋고. 복도에 비싼 그림들도 잔뜩 걸려 있고.”
“와 역시-”
“침대가 진짜 푹신해요. 특히 B 침실에 있는 침대가 좋아요. 거기 인형도 있는데 그건, 아, 이건 말하면 안 되겠다.”
못생긴 고구마 인형을 떠올린 우영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건 사현과 저만이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어디서 어떻게 뽑았고, 당시의 날씨가 어떠했고, 우리가 어떤 감정이었는지 누구에게도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
못된 우영의 심보를 알아차렸을까. 태영의 얼굴이 한층 서늘하게 식었다. 그가 아이스크림을 쿡쿡 찍었다. 나약한 얼음덩어리가 속절없이 조각났다. 태영이 아이스크림으로 뒤범벅된 숟가락을 쭙, 자못 경박스레 빨아 먹었다.
“작가님 괜찮으시면 말 놓으세요. 아까 B가 가르쳐 줬는데, 저보다 두 살 많으시다고 하던데요.”
“⋯⋯.”
태영이 레프트 훅을 날렸다. 그 펀치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우영의 낯에 쩌저적 금이 갔다. ⋯⋯나보다 어려? 동갑도 아니고, 어려? 두 살이나?
갑자기 짜증이 확 치솟았다. 제가 사현을 속속들이 얼마나 알고 있든, 그와 공유한 시간이 얼마나 길든, 나이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라 진 기분이었다. 사실⋯⋯ 진 게 맞지.
사현이 어린 남자를 좋아하는지는 모른다. 아니, 제게 이따금 네가 어려서, 애 같아서, 강아지 같아서, 귀여워, 예뻐, 그런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어린 걸 좋아하는 것 같다.
누가 나이 많은 남자를 좋아하겠나. 모름지기 남자라 하면 어릴수록 싱그럽고 보기 좋지. 세상에 나이가 많아도 멋진 남자는 세련되고 고풍스러운 사현이 유일할 것이다.
테이블 아래의 우영의 다리가 덜덜덜 떨렸다. 제가 태영에 비해 무엇 하나 꿀리는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이는 너무 큰 패배였다.
그가 눈을 꾹 감았다가 뜨는데 승리를 예감한 태영이 테이블 위로 팔짱을 끼고, 상체를 앞으로 숙여 왔다. 그리고 조곤조곤 라이트 훅을 날렸다.
“B는 네온 작가님이랑 제가 친해졌으면 하는 것 같던데요.”
“⋯⋯형이요?”
“네.”
“그럴 리가⋯⋯ 없는데.”
우영이 어금니를 꾹 짓씹었다. 우리 형, 내가 큐레이터 누나들이랑 하하 호호 웃고 있어도 질투하는데, 이 정체 모를 놈팡이와 친해지라고 했다고? 그것도 제게 말한 게 아니라, 이놈한테 그 말을 했다고?
“아니요, 그러셨어요. 작가님 오시기 전에. 친구가 됐으면 좋겠다고.”
덧붙여진 태영의 말에 우영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왜? 왜 친해져야 하는데? 왜 그랬으면 좋겠는데?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혹시 제가 귀찮아졌나? 매일 집에 처박혀서 오매불망 사현만 기다리니까 부담스럽나? 친구도 만나고 바깥으로 나돌며 본인을 덜 귀찮게 해 주길 바라는 걸까? 그래서 둘이 식사하는 자리에 저 낯선 놈을 끌고 와서 앉혀 둔 걸까?
혹, 그도 아니면 사현이 태영에게 어떠한⋯⋯ 관심이 있나? 작가로서가 아니라 남성으로서, 성적으로 흥미가 있는 건가? 그렇다고 여태 키워 온 저를 버리긴 아깝고, 그래서 둘 다 가지려는 속셈일까?
오른쪽 옆구리엔 저를 끼고, 왼쪽 옆구리엔 태영을 끼고? 그럼 앞으로 밥도 셋이 같이 먹고, 섹스도 셋이 같이- 까지 생각하던 우영은 하마터면 구역질을 할 뻔했다.
사현의 그 예쁜 몸에 제가 아닌 누군가가 입술을 비비는 걸 상상했더니 세상이 멸망하는 것보다 절망적이었다.
우영이 태영의 펀치에 그로기 상태에 빠져 있는데, 태영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저야 작가님이랑 친해지면 너무 영광인데. 작가님은 어떠세요?”
“⋯⋯.”
“혹시 별로면 B한테 제가 불편하다고 말씀 좀 해 주세요. 아무래도 저보다 훨씬 허물없는 사이이신 것 같으니까.”
“⋯⋯.”
“그래도 전 네온 작가님 좋아요. 앞으로도 자주 뵀으면 좋겠어요. 그림에 대해서도, B에 대해서도 많이 배울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우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더할 나위 없는 참패였다. 그런 우영을 보며 얄밉게 웃던 태영의 눈에 문득, 그의 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들어왔다.
매끈한 은색 반지. 별다른 장식 없이 민무늬인 게 우영의 잘생긴 손과 잘 어울렸다.
태영의 눈이 가느스름하게 좁아졌다.
반지가 익숙한데⋯⋯. 어디서 봤더라⋯⋯.
* * *
사현은 평소보다 늦게 주차장에 들어섰다. 갑자기 터진 일은 항상 수습이 힘들다. 덕분에 딱 싫어하는 야근을 해 버렸다. 밤은 오롯이 우영과 함께 보내는 시간인데. 기다리고 있을 텐데.
차를 주차한 사현이 피곤 섞인 한숨을 내쉬며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가는데 우우웅, 핸드폰이 울렸다. 사현이 얼른 안주머니에서 폰을 꺼냈다. 당연히 우영인 줄 알고.
헌데 태영이었다.
[그림 리터치 좀 해 봤어요!]
메시지와 함께 사진이 떠올랐다. 몇 시간 전, 사현이 버리라고 한 그 그림이었다. 신경 거슬리는 고집에 사현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아니, 버리라니까⋯⋯.”
말을 안 들어. 짜증 나게⋯⋯. 우리 우영이는 뭐 한 번 말하면 딴지를 건 적이 없는데. 지금만큼이나 머리가 커서도 일언반구 덧붙이질 않았다. 근데 얘는⋯⋯.
사현은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이런 같잖은 고집을 받아 줄 만큼 너그럽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그가 우영과의 메시지 함에 들어갔다. 레스토랑에 다 와 간다는 우영의 메시지 이후로 연락이 하나도 없었다.
평소라면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부리나케 언제 오냐, 보고 싶다, 기다리고 있다, 같은 깜찍한 메시지를 와르르 보내왔을 텐데. 오늘은 핸드폰이 조용했다. 귀찮은 태영의 연락만 줄줄이 이어지고 있었다.
점심에 태영과 만난 건 어땠냐고 물어보고 싶은데. 태영에게서 이렇게 메시지가 오는 걸 보면 둘이 일찍 헤어졌나. 우영은 낮잠이라도 자는 걸까. 아무래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걸 좋아하는 편이 아니니 피곤할 수도 있겠다.
“으⋯⋯.”
쑥쑥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숫자를 보던 사현이 목을 뒤틀었다. 피곤하다.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우영의 품에 안겨 자고 싶었다. 은은한 유화 냄새가 섞인 그의 체취를 맡으며 자면 꿈도 꾸지 않을 것이다.
마침내 엘리베이터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사현이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다급하게 도어 록을 열고 들어갔다. 우당탕 쿠당탕 왁자지껄하게 저를 반겨 줄 곱슬머리의 연하 남친을 기대하면서.
그런데 사현을 맞이한 건 새카만 어둠이었다.
“⋯⋯.”
올라갈 준비를 하던 사현의 입꼬리가 축 내려앉았다. 역시 자는 모양이다. 우영이 낮잠을 자는 건 드문 일이긴 하지만 아주 없는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럴 때마다 퇴근하는 저를 위해 간접등을 여기저기 켜 두고 잤는데. 오늘은 그럴 정신도 없이 곯아떨어진 걸까. 하긴 근래 전시를 준비하며 그림 그리느라 바빴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사현은 자연스럽게 우영의 변호를 대신하며 1층 복도로 접어들었다. 우영의 방과 작업실이 있는 복도였다. 작업실은 불이 꺼져 있었고, 침실에 있나 싶었더니 그 역시 인기척이 없었다. 멀끔히 정리된 이불로 보아 낮에 일어난 이후로 엉덩이 한 번 붙이지 않은 듯했다.
“뭐야⋯⋯. 또 내 침실에서 자는구나?”
2층으로 향하는 사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우영이 어디에 있는지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는 슈트 재킷을 벗으며 빠르게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서재와 드레스 룸을 건너뛴 채 곧장 침실로 향했다.
사현은 그다지 조심스럽지 않게 침실 문을 열었다.
“우영아, 여기 있어?”
깨우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한 목소리였다. 사랑스러운 애인이 저를 방정맞게 맞이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우영의 존재를 미처 인지하기도 전에, 큼지막한 손바닥이 허리를 감싸 왔다. 거센 아귀힘에 사현이 그대로 훅 이끌려 갔다. 어찌나 센 힘인지 머리칼이 다 팔랑, 흩날렸다.
놀란 사현이 헛숨을 마시려는 찰나, 거친 호흡과 입술이 맞물렸다.
“읍⋯⋯.”
사현이 들고 있던 재킷이 툭 떨어졌다. 놀랐다. 번뜩이는 안광만 환각처럼 본 것 같은데, 눈 한 번 깜빡였더니 키스를 하고 있으니 놀라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기겁하고 까무러칠 정도는 아니었다. 제게 달려들 이라고는 세상에 우영밖에 없었으니까. 더군다나 겹쳐진 입술이며 후끈한 콧김, 허리를 감싼 단단한 손바닥, 은근히 나는 유화 기름 냄새까지. 어둠 속의 괴한은 온몸으로 자신이 우영임을 어필하고 있었다.
다만, 낯선 게 있다면 쌉싸름한 알코올 향이었다.
우영은 술을 잘 마시나 즐기는 편은 아니다. 물론 좋아하긴 한다. 첫 만남도 포장마차였지 않나. 그러나 제가 없는 곳에서, 제게 말도 없이 혼자 마시는 일은 그와 동거한 이래로 단 한 번도 없었다.
사현은 우영의 혀가 끌고 온 술 내음에 설핏 인상을 썼다. 우영이 술을 마신 건 괜찮았다. 근데 그가 술을 마셨다는 걸 제가 모르고 있었다는 게 짜증이 났다.
우영과 관련해서는 옹졸하고 연약한 마음에 스크래치가 났다.
거칠게 비벼지는 입술이 아렸다. 높다란 콧대가 맞닿아 납작해지며 숨쉬기가 힘들었다. 사현이 두 손으로 우영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그러나 우영은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손길이 거슬린다는 듯 몸을 뒤틀더니 사현을 벽으로 밀어붙였다. 그 후 사현의 양팔을 꽉 짓눌렀다.
“으응⋯⋯.”
엄청난 힘이었다. 짐승 같았다. 그러나 사현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원래 키스든 섹스든, 힘이 넘치는 우영이라서. 그와 이런 식으로 몸을 붙인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현은 궁금했다. 대체 우영이 제게 일언반구 말도 없이 술을 마신 이유가 뭔지, 누구와 언제 어디서 마셨는지 알고 싶었다.
사현이 몸을 바르작거렸다. 허나 우영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우영은 사현이 몸부림칠수록 더욱 깊숙이 혀를 욱여넣었다. 종국엔 입안이 그의 통통한 혀로 가득 찰 정도였다. 입술은 또 어찌나 세차게 빨아 당기는지. 입가가 다 얼얼했다.
“우, 흐으⋯⋯, 우영아, 잠깐, 아⋯⋯.”
사현이 턱을 안으로 말며 우영의 입술을 피했다. 허나 우영은 끈질기게 따라와 사현의 입술을 물었다. 그로 모자라 묵직하게 발기한 아래를 사현의 골반께에 문지르기도 했다.
우영의 씩씩거리는 숨이 피부에 닿았다. 홧홧한 입김과, 몸을 바투 쥔 손바닥의 뜨거운 열기도 느껴졌다. 그걸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으니 사현도 점점 이성이 흐려졌다.
원래 이렇게 씻지도 않고, 급작스럽게, 발정 난 짐승처럼 시작하는 섹스는 영 취향이 아니었는데. 어린 애인과 살다 보니 이런 것에도 적응해 버렸다. 아니, 좋아졌다고 말하는 게 맞겠다.
사현이 우영을 향해 고개를 들이밀며 자신의 넥타이를 슥슥 풀었다. 그리고 그것을 바닥에 떨어트리는데, 우영이 와이셔츠의 네 번째와 다섯 번째 단추 사이에 손가락을 욱여넣더니 그대로 우드득, 옷을 뜯어 버렸다.
우악스러운 힘을 버티기에 단추는 너무나 나약했다. 매끈한 바닥 위로 길 잃은 단추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질겁한 사현이 벽으로 몸을 바짝 붙이며 물러섰다. 덕분에 우영과 엉켜 있던 입술이 츕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야! 너-”
“사 줄게.”
“사 줄게-에?”
사현이 눈을 치켜떴다. 이놈이 내가 지금 셔츠가 아까워서 뭐라고 하는 줄 아나. 그리고 사 줄게? 사-줄-게? 계좌에 백억도 없는 애송이가 누구한테 뭘 사 준다는 건지. 반말은⋯⋯ 뭐, 섹시하니까 봐줄 수 있었다.
사현이 우영에게 한 소리를 해 주려 입을 떼는데, 그 찰나를 놓치지 않은 우영이 다시금 입술을 물어 왔다. 그러고는 사현의 셔츠를 벗겨 냈다. 마른 어깨를 스치는 찬 공기에 사현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러든 말든, 우영은 손바닥으로 사현의 허리부터 가슴 아래까지 크게 쓰다듬었다. 그로 모자라 엄지로 뾰족하게 선 사현의 유두를 꾸욱 꾹 짓누르기도 했다.
“으응⋯⋯.”
사현이 작게 내뱉은 신음은 그대로 우영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살살 유두를 매만지던 그가 돌연 엄지와 검지로 알갱이를 쭉 잡아당겼다. 사현아 아! 소리를 내며 몸을 움츠렸다. 그러자 우영이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그는 사현의 턱선을 핥아 나갔다. 혓바닥을 넓게 펼쳐서 잘생긴 턱선을 따라 핥자 사현의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우영은 그 변화를 또렷이 인지하며 사현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목젖 아래를 쭙 세게 빨았다가 놨다.
“하아⋯⋯. 너 술 마셨어?”
사현이 우영의 복슬복슬한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우영이 흠칫 굳었다. 그러다 사현의 쇄골 가운데부터 턱끝까지 주욱 핥아 올리며 긍정했다.
“응.”
“왜?”
“⋯⋯그냥.”
짧게 일축한 우영은 더는 질문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사현의 허리를 답삭 쥐더니 그대로 침대로 자리를 옮겼다. 푹신하고 보드라운 침대 위로 사현의 결 좋은 머리칼이 흩어졌다.
우영이 그의 다리를 타고 슬금슬금 위로 기어 올라왔다. 그러고는 매우 익숙한 손길로 사현의 바지 버클을 풀어 헤쳤다. 팔꿈치 안쪽으로 셔츠를 걸친 사현이 우영의 손을 막았다.
“자기야, 잠시만. 나 온종일 밖에 있었어. 일단 씻고⋯⋯.”
“괜찮아.”
“내가 안 괜찮아.”
“형도 괜찮아.”
그 말에 사현이 눈을 끔뻑였다. ⋯⋯얘가 그냥 술을 마신 정도가 아니라, 취했나?
취한 우영은 사현에게도 낯선 것이었다. 보통 사현이 먼저 취하기도 했고, 우영이 취할 때까지 마시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한두 번 보긴 했는데, 지금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사현이 마른침을 삼켰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뭐라고 해야 하나⋯⋯ 들어오면 안 되는 곳에 들어온 듯한⋯⋯ 그래, 호랑이 굴에 제 발로 들어온 우매한 인간이 된 것 같았다.
“우영아.”
“응.”
우영은 꼬박꼬박 대답하면서도 착실히 사현의 옷을 벗겨 갔다. 주름이 예쁘게 선 바지가 침대 아래로 사라졌다. 우영은 곧장 사현의 드로어즈도 벗겼다.
반쯤 발기한 사현의 성기가 드러났다. 빛 한 점 없는 공간이라 부끄럽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사현은 모든 걸 포기하고 몸을 축 늘어트렸다. 우리 힘 좋고 혈기 왕성한 연하 애인의 술버릇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섹스라면, 그깟 거 못 할 것도 없었다.
사현이 팔을 휘저어 침대 옆 협탁을 찾았다. 그리고 손가락 끝으로 서랍을 당겨 열었다. 러브젤과 콘돔을 꺼내기 위해서였다. 근데 다리가 벌어졌다. 그리고 뜨겁고 두툼하고 단단한 무언가가 가랑이 사이에 닿았다.
사현의 얼굴이 일순간에 하얗게 질렸다. 기겁한 그가 훌떡 상체를 일으키는데, 우영이 널찍한 손으로 사현의 명치를 콱 내리눌렀다. 사현이 다시 침대에 처박혔다.
우영은 그렇게 사현을 억누른 채 성기를 엉덩이 사이에 비볐다. 마른 구멍이 귀두와 마찰하며 따끔거렸다. 사현이 다급하게 우영을 밀어냈다.
“어어, 우영아, 안 돼, 안-⋯⋯.”
그러나 우영은 자비가 없었다. 그대로 꾸욱 힘을 주어 메마른 구멍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현의 눈이 번쩍 뜨였다.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숨이 목구멍에 턱 걸렸다. 어둠만 가득하던 시야가 새빨갛게 변했다.
“큭⋯⋯ 우영, 흐, 아⋯⋯.”
사현이 우영의 팔뚝을 벅벅 긁었다. 아플 만도 한데, 우영은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불도저 같았다. 사현의 구멍을 파헤치라는 명령어가 입력된 불도저.
두툼한 귀두가 꽉 다물린 주름을 파고, 짓이겼다. 그러나 마른 구멍은 쉽게 그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둔부에 힘이 들어가며 더욱 옹골차게 반항했다.
“씨발⋯⋯.”
우영이 작게 욕설을 읊조렸다. 사현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우영이 욕을 하다니. 정말 드문 일이었다. 얘가 진짜 무슨 일이 있었나. 아니면 그저 술버릇인 건가.
사현이 잠깐, 아주 잠깐 멍하니 넋을 놓는데, 우영은 그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주름이 흐트러진 사이, 엉덩이가 거센 아귀힘에 쫙 벌어진다 싶더니 단단한 귀두가 쑥 비집고 들어왔다.
“윽⋯⋯.”
사현이 목을 자라처럼 오그렸다. 눈물이 절로 핑- 고였다. 무섭고, 억울하고, 우영이 밉고 그랬다. 뒤가 찢어지는 듯한, 아니 이미 찢어진 듯한 고통에 사현의 눈가가 고통스레 일그러졌다.
그가 우영을 노려보는데, 우영이 허리를 숙이며 그의 뺨을 크게 핥았다. 진짜 개 같은 짓이었다.
그러면서 삽입이 조금 더 깊어졌다. 끄트머리만 걸쳤던 귀두가 삿갓의 끝까지 쑥 들어왔다.
“아흐⋯⋯.”
고통에 관통당한 사현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우영의 것은 크다. 정말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크다. 사현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만져도 봤고, 빨아도 봤고, 뒤로 받기까지 했는데 그걸 모를 리가.
근데 이렇게 선연히, 아무런 윤활제 없이 받는 건 처음이라 그 크기가 평소보다 곱절로 크게 느껴졌다. 오죽하면 이 새끼 좆에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꼬챙이에 끼인 듯 뻣뻣하게 굳은 사현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우영이 어깨와 머리를 한 번에 감싸 왔다. 그러고는 성기에 체중을 싣기 시작했다.
“안, 안 돼. 큭, 안 돼⋯⋯.”
사현이 사지를 마구 버둥거렸다. 양손으로 우영의 가슴팍을 마구 밀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우영은 사현의 고통을,
“돼.”
라는 한 마디로 무시하더니 꾸우욱 성기를 욱여넣었다.
“흐⋯⋯.”
사현이 파르르 몸을 떨었다. 생경한 고통이 낯설다. 일평생 고통을 영위하며 살아왔는데, 근 몇 년은 우영이 그것을 다 막아 주어서, 보듬어 주어서 아픔일랑 모르고 살았다. 그래서 지금 이 고통이 매우 버겁고 날카롭게 다가왔다.
네가 내 아픔 다 가져가 놓고, 정작 네가 날 아프게 하면 어떡해.
사현의 눈가를 타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둠 속에서도 그것을 본 우영이 뜨끈한 눈물을 삭삭 핥아 먹었다.
사현이 그런 우영의 목덜미를 잡아 자신 쪽으로 훅 끌어당겼다. 그리고 눅눅히 젖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영아, 나 아파. 응? 아파⋯⋯.”
절절한 음성에 우영의 몸이 우뚝 굳었다. 드디어 사현의 간곡한 목소리가 그의 귓구멍을 뚫은 모양이었다. 우영이 손바닥으로 사현의 앞머리를 크게 쓸어 넘기며 시선을 맞춰 왔다.
“⋯⋯아파?”
“응.”
“형, 아파?”
“그래. 그러니까 천천- 아흑!”
우영은 조심스럽지 않은 몸짓으로 몸을 물렸다. 꽉 맞물려 있던 뒤가 쩝, 소리를 내며 분리되었다. 사현이 끙, 앓으며 자신의 엉덩이를 더듬었다. 화끈거리고 따가운 뒤가 말도 못 하게 수치스러웠다.
수치의 종착지는 당연히 분노였다.
씨발, 내가 퇴근하자마자 애인한테 뒤 뚫려서 엉덩이를 부여잡아야겠냐고. 내가, 이 내가! 사현의 눈이 세모꼴로 치켜뜨였다. 그가 빽 짜증을 쏘았다.
“이게 진짜 예쁘다고 오냐오냐해 주니까- 으악!”
말을 마치기도 전에 몸이 훅 반으로 접혔다. 우영이 사현의 무릎 뒤를 쥐고 그대로 쭉 밀어 올린 거였다. 덕분에 사현의 무릎이 그의 양쪽 귀 옆에 자리했다. 허리가 당기고 고통에 쪼그라든 성기가 턱 언저리에서 달랑거렸다.
사현의 광대에 불그스름한 열이 올랐다. 이건 또 다른 수치였다.
“너 오늘 진짜 왜 이래!”
사현이 몸을 뒤틀었다. 저 예쁘장한 머리통에 꿀밤이라도 먹여야겠다 싶어서 주먹을 흔들기도 했다. 허나 접힌 몸으로는 우영에게 해코지를 할 수 없었다. 하는 것이라 봐야 그의 곱슬한 머리칼을 잡아당기는 것뿐.
근데 그마저도 저 소중한 머리털이 빠질까 봐, 사랑해 마지않는 그가 아플까 봐 힘껏 당기지도 못했다.
분하고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에 사현은 찔끔찔끔 눈물을 흘렸다. 남이었다면 복수하겠다는 마음으로 이를 갈았을 텐데. 우영이, 하필 우영이 이러니 그냥 너무 서러웠다. 이번엔 또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 마음에 겁도 났다.
헌데.
“으응!”
우영이 사현의 가랑이 사이로 냅다 얼굴을 처박았다. 그의 우뚝 선 콧대가 고환 사이에 푹 파묻히고, 통통한 입술은 주름과 맞물렸다.
홧홧하고 지끈거리던 구멍 위로 비벼지는 입술에 사현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 새끼가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이랬다 저랬다 멋대로⋯⋯. 아무리 술에 취했다지만 이건 진짜⋯⋯.
사현이 뿌득 이를 갈았다. 그러나 잇새로 나오는 거라곤 연한 신음뿐이었다.
“아흐, 읏, 응⋯⋯.”
우영은 온 정성을 다해 사현의 뒤를 핥았다. 애무라기보다는 달래는, 마치 연고를 바르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혀를 뾰족하게 세워 주름 한가운데를 파내기도 했다. 그의 후끈한 콧김이 고환을 간질였다.
우영을 밀어내던 사현의 손이 입으로 향했다. 그는 자신의 검지 옆구리를 문 채 신음을 삼켰다.
밀어내야 하는데, 좋았다. 우영의 혀가 닿자 실로 고통이 줄어드는 듯했다. 휘몰아치는 통각에 놀라 굳었던 몸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이미 우영의 손에, 혀에 길들 대로 길든 몸이라 금세 좋다고 성기가 꺼덕거렸다.
우영은 끈질기게 사현의 뒤를 핥았다. 말랑하게 풀어진 구멍 속으로 혀를 쑥 집어넣고는 남세스럽게 움직이기도 했다.
“흣, 아응⋯⋯.”
사현은 기도하는 것처럼 손을 모은 채 간헐적으로 몸을 떨었다. 우영의 코끝에 뭉개지는 고환과, 후끈한 입김이 퍼지는 회음부와, 어둠 속에서도 느껴지는 진득한 시선에 사현의 눈동자가 몽롱하게 풀어졌다. 오죽하면 수 분 전 제 뒤를 파고들었던 성기가 그리워질 정도였다.
우영은 구멍이 풀어지다 못해 아릴 때까지 핥고 빨았다. 뒷구멍이 그의 타액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그러다 쪼오옥, 소리와 함께 구멍을 세게 빨며 입을 뗐다.
“흐⋯⋯.”
사현의 허벅지가 푸르르 떨렸다. 그에 우영이 빙긋, 예쁘게 웃으며 그의 허벅지에다 뺨을 묻었다. 매끄러운 살결이 뺨에 닿는 느낌이 참 좋았다.
“형, 좋아?”
우영이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속삭이듯 물었다. 그의 입술이 달싹일 때마다 반짝였다. 캄캄한 시야에서도 그게 사현의 눈동자를 할퀴었다.
“아, 응⋯⋯ 좋아⋯⋯.”
“고추도 만져 줄까?”
“⋯⋯응.”
사현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순순히 나온 긍정에 우영이 작게 웃었다.
그가 사현의 입술을 쭉 빨았다. 그리고 털 하나 없이 ‘요정’ 같은 성기를 머금기 위해 물러나는데, 사현이 그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그 후 멀어지는 우영의 입술을 당겨 쪽쪽 다시금 입술을 붙였다가 뗐다.
여전히 술 냄새가 났다. 근데 전만큼 불쾌하거나 의문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저도 취하는 기분이었다.
우영의 입술을 양껏 빤 사현이 이제 됐다는 듯 몸을 축 늘어트렸다. 우영이 그의 다리를 아래로 내렸다. 그 후 우뚝 선 성기를 한입에 먹어 치웠다.
우영은 지나치게 오래 사현의 성기를 붙잡고 늘어졌다. 이미 뒷구멍을 줄줄 빨린 사현이 금세 절정에 다다랐음에도 놓지 않고 뿌리부터 귀두까지 한입에 넣은 채로 쭉쭉 빨아 댔다.
사현으로서는 쾌감이 절정에 다다라 내려오질 않으니 좋다기보다는 버거웠다. 그가 제 아래에 얼굴을 처박은 우영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이제, 이제 됐어. 아으응, 우영아! 이제 됐⋯⋯, 아!”
우영이 목구멍 깊숙이 귀두를 삼켰다. 그 어느 곳보다 뜨겁게 성기를 조여 오는 감각에 사현의 다리가 쭉 펴졌다. 우영의 붉은 혀 위에 정액을 싸지른 지 몇 분 되지 않았는데 또 아랫배가 시큰거렸다. 요의와 닮은 감각이었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사현이 우영을 마구 밀어냈다. 그러나 우영은 고집스레, 정말 ‘고집’스레 사현의 것을 물고 늘어졌다. 그쯤, 사현은 우영에게 이 행위가 애무와 섹스가 아니라 다른 어떠한 것임을 알아차렸다.
이를테면 분노 표출 같은⋯⋯.
사현이 이 괴상한 섹스의 근본을 고민하는데, 우영이 쭈우웁 성기를 빨아 당겼다.
“아흑⋯⋯.”
사현이 목을 움츠리며 몸을 떨었다. 귀두 끝에서부터 뜨끈한 물줄기가 쭉 쏘아졌다. 그것은 정체를 확인할 겨를도 없이 전부 우영의 목구멍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우영의 어깨를 움켜쥔 사현은 한동안 몸을 경련했다. 귓가에 삐-하고 이명이 몰아쳤다. 등줄기가 찌릿찌릿했다. 머리털이 다 쭈뼛 곤두서는 것 같았다. 고환이 단단하게 뭉쳤다. 그의 눈가를 타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런데, 우영은 계속해서 사현의 것을 빨아 댔다. 사현이 우영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만, 그만⋯⋯.”
“후우⋯⋯.”
“야! 그만하라고!”
사현의 고함에도 우영은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누가 그를 제 가랑이 사이에 붙여 두고 못질이라도 한 것 같았다. 사현은 검은 천장을 보며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다 눈을 부릅떴다. 그가 길게,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우영의 머리칼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우영이 흠칫, 하더니 고개를 들고 눈을 맞춰 왔다. 그래도 사현의 성기 반절은 여전히 그의 입속에 들어가 있었다.
“그만하고 들어와. 이제 들어와도 돼. 어? 우영아, 얼른⋯⋯.”
사현이 다리를 벌리며 은근히 속삭였다. 발뒤꿈치로 우영의 등을 쓰다듬기도 했다. 그에 우영의 목울대가 아래위로 거칠게 꿀렁거렸다. 그것을 본 사현이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네가 그래 봐야 내 손바닥 안이지, 싶은 마음에서였다.
“⋯⋯.”
무언갈 고민하던 우영이 천천히 입을 물렸다. 안으로 말려 들어갔던 그의 입술이 성기의 기둥을 쓸며 밖으로 미끄러졌다. 후끈한 입안에 들어가 있던 성기가 나오면서 찬 공기와 마찰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귀두가 쪼옵 소리를 내며 입 밖으로 나왔다.
“하아⋯⋯.”
사현은 그 모든 과정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보고 있었다. 목덜미가 서늘할 정도로 야한 장면이었다.
우영은 잠시 입맛을 다셨다. 입안에 가득 찬 사현의 맛을 되새김질하는 거였다. 그러면서 사현의 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거나하게 취해 놓고도 그 일련의 동작이 매우 자연스럽고 익숙했다.
“우영아, 빨리⋯⋯.”
사현이 엉덩이를 들어 우영의 허벅지 위에 안착했다. 그리고 다리를 조금 더 벌렸다. 우영이 사현의 정액이 묻은 자신의 아랫입술을 핥으며 구멍 위로 성기를 맞췄다. 전에 삽입했을 때와 달리 부드럽게 녹은 구멍이 귀두 끝을 야무지게 물어 왔다.
사현도, 우영도 짙은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그리고 우영이 삽입하려는 그 순간.
우우웅, 핸드폰이 울렸다.
진동의 시발점은 침대 아래에 떨어진 사현의 핸드폰이었다. 화면이 밝아지며 새까만 침실에 빛이 차올랐다.
[박태영]
세 글자가 먼 거리에서도 기이하리만큼 또렷이 망막에 박혀 왔다. 사현에게도, 우영에게도 그다지 반갑지 않은 이름이었다.
사현은 전화를 받을 생각이 없었다. 제인이나 회사 비서팀이었으면 또 모를까. 그래도 전화를 끄긴 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눈치 없이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걸 게 뻔해서.
“우영아, 잠깐만.”
사현이 우영의 어깨를 밀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 순간, 우영이 골반을 바투 쥐더니 쭈우욱 성기를 쑤셔 넣었다.
“아흐윽!”
몸을 곧추세운 사현이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우영이 무지막지한 힘으로 밀고 들어오긴 했으나 그의 성기가 워낙 큰 탓에 반 정도 들어오고는 뚝 멈췄다.
하지만 사현에게는 그것도 엄청난 충격이었다. 배 속에 두툼한 말뚝이 처박힌 느낌이었다. 오죽하면 끅끅거리며 숨이 다 뒤틀렸다.
귀신이라도 본 듯 희멀겋게 질린 사현이 우영의 어깨를 쥐었다. 그의 아랫입술이 덜덜 떨렸다.
“우, 우영아, 큭, 천, 천천히, 잠깐만, 천천히⋯⋯.”
“빨리 들어오라며.”
우영이 사현을 꾸짖듯 으르댔다. 네가 그래 놓고 왜 말을 바꾸냐는 투였다. 사현은 어이가 없었다. 누가 들으면 그래, 본인이 빨리 들어오라고 해 놓고 이제 와서? 라며 우영의 편을 들 수도 있겠지만, 그게 아니었다.
사현은 이미 수백 번도 넘게 우영과 몸을 섞어 온 사이다. 그들에게 ‘빨리’는 상대방의 컨디션이고 뭐고 일단 냅다 쑤셔 넣고 보라는 뜻이 아니었다. 지금 기분이 좋으니까, 애가 달았으니까 얼른 다음 단계로 넘어가자. 그런 뜻이었지.
이쯤 되니 사현은 우영이 무언가가 뒤틀렸다는 걸 또렷이 인지했다. 문제는 그 뒤틀림의 근저가 무엇인지 전혀 가늠이 안 된다는 거였다. 일단 우영이 무언가에 짜증을 내고 분노하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무슨 일이 터져도 늘 헤실헤실 속없이 웃는 놈이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사현이 무어라 말하려 입을 떼는데 우영이 곧장 입을 맞춰 왔다. 그리고 사현을 꽉 움켜쥔 채 부득부득 성기를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흐윽⋯⋯. 우영아⋯⋯.”
고개를 돌려 우영의 입술을 피한 사현이 애타게 그를 불렀다. 그러나 우영은 대답 대신 사현의 입술만 집요하게 따라다녔다. 이윽고 우영의 것이 모두 사현의 안으로 들어갔다.
“하아⋯⋯.”
사현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우영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뜨며 신음했다. 성기를 조여 무는 뒷구멍에 뒤통수가 다 뜨끈해졌다. 사현은 아랫입술을 겹쳐 문 채 꾸역꾸역 고통을 삼키고 있었다.
구역질이 올라왔다. 배 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래도 우영이 공들여 빨아 준 덕에 처음만큼 아프지 않았다. 곧 그가 좋은 곳을 힘 좋게 퍽퍽 처박아 줄 걸 알아서, 그렇게 되면 고통일랑 흔적도 없이 휘발할 걸 알아서 참을 만했다.
우영의 것이 천천히 물러났다. 한결 여유로워진 배 속에 사현이 후우, 하고 숨을 내뱉는 순간, 콱! 우영의 것이 내벽을 힘차게 긁으며 들어왔다. 부욱 긁힌 전립선에 사현의 고개가 위로 쳐들렸다.
“아⋯⋯.”
사현의 속눈썹이 바짝 곤두섰다. 호흡을 멈추자 목선이 도드라졌다. 우영이 곧은 목선을 따라 쪽쪽 입술을 내렸다. 그러면서 사현이 느끼는 지점을 콱콱 짓이겼다. 일평생 몸을 섞은 이라고는 사현이 다인지라 의도하지 않아도 성기가 알아서 그쪽을 후벼 팠다.
“아으응⋯⋯. 아⋯⋯ 좋아⋯⋯.”
사현의 얼굴이 대번에 말랑하게 풀어졌다. 뻣뻣하게 굳었던 사지도 축 늘어졌다. 보드라운 허벅지가 우영의 허리를 감쌌다. 우영이 그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달뜬 신음을 흘리는 사현의 입술을 물고 빨았다.
그 와중에도 핸드폰 진동은 계속해서 울려 댔다. 어째서인지, 그럴수록 우영의 몸짓은 거칠어졌다. 사현의 정신도 덩달아 흐트러졌다. 웅웅 울리는 게 핸드폰인지 제 정신인지 아니면 뒷구멍인지 구분이 안 됐다.
사현이 우영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신음했다. 그러자 우영이 그의 등을 껴안으며 성기를 길게 빼냈다가 푸욱 박아 넣었다. 퍽퍽 처박는 것에 비해 약한 힘이었으나 깊이가 엄청 났다. 헉, 하고 숨이 거꾸로 말릴 정도였다.
사현이 우영의 등을 죽 긁어내렸다.
“우영, 아⋯⋯. 너무 깊, 흐으, 깊어⋯⋯.”
“응.”
“배가 터질 것 같⋯⋯.”
“응.”
우영은 대답 해 놓고도 성기를 물려 주지 않았다. 오히려 배 속 깊이 처박힌 것을 검지만큼 뺐다가 넣으며 빠르게 치댔다. 사현의 얼굴에 발갛게 열이 차올랐다. 쑥쑥 긁히는 전립선과 팽팽하게 팽창한 내벽, 동그랗게 벌어진 주름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또 아랫배가 시큰거렸다. 쉼 없이 몰아치는 쾌감에 성기가 체통 없이 찔끔찔끔 애액을 쏟아 냈다.
우영은 사현을 힘껏 안은 채 계속해서 허리를 움직였다. 살과 살이 맞닿으며 찰박찰박 소리가 침실을 울렸다.
“흐윽⋯⋯.”
사현은 오금에 힘을 바짝 주고 발가락을 안으로 만 채 사정을 참아 냈다. 우영과 함께 가기 위해서였다. 자연히 내벽이 움츠러들며 우영의 것이 꽉 조였다.
“후⋯⋯.”
우영의 짙은 눈썹이 오르막을 그리며 올라갔다. 좆이 터질 것 같다. 뜨겁고 축축하고 쫀쫀하게 조여 오는 뒷구멍에 머리털이 다 쭈뼛 섰다. 등줄기가 서늘한 게 소름이 돋아났다.
우영이 커다란 손으로 사현의 엉덩이를 터트릴 듯 움켜쥐었다. 그리고 마른 목과 어깨를 아플 정도로 씹으며 몸짓을 더욱 빨리했다.
“아, 응, 흣, 아!”
“하아⋯⋯, 형⋯⋯.”
우영이 사현의 엉덩이를 자신의 하체로 쭉 끌어 올렸다. 그의 두툼한 팔뚝이 울룩불룩하게 도드라졌다. 은밀한 부위가 한 치의 틈 없이 맞물렸다. 우영의 음모가 사현의 엉덩이 사이에 마구 비벼졌다.
“흑⋯⋯.”
단전 아래까지 처박힌 성기에 사현이 호흡을 멈췄다. 그의 몸이 파드득 떨리더니 덜덜덜 가늘게 경련했다. 잔뜩 발기해서 우영의 복근을 찌르던 성기에서 묽은 탁액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배 속 깊은 곳에서도 뜨겁고 질척한 게 퍼졌다.
“큭⋯⋯.”
우영은 정액을 토해 내면서도 사현의 엉덩이를 밀었다가 당기길 반복했다. 덕분에 정액이 안에 고이지 못하고 두툼한 성기 기둥에 쓸려 구멍 밖으로 삐직삐직 새어 나왔다. 그 남세스러우면서도 음란한 감각에 사현이 재차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아, 읏, 하아⋯⋯.”
사현이 가쁜 숨을 내뱉었다. 저는 그냥 잡혀서 흔들리기만 하는데 뭐가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땀방울이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간질거리는 감각에 사현이 그것을 손등으로 닦아 내려는데, 우영이 혓바닥을 넓게 펼쳐 목을 핥아 올렸다.
“그걸 왜 먹, 하아⋯⋯. 됐다⋯⋯.”
사현은 한 소리 해 주려다 말았다. 그가 축 늘어졌다. 그리고 거꾸로 뒤집힌 시야로 창문을 응시하는데 우영이 이번엔 가슴팍을 줄줄 빨아 왔다. 지극히 남자라서, 거기다 우영처럼 근육을 두툼하게 키우는 스타일도 아니어서 빨 것도 없는데 매번 섹스 때마다 이렇게 물고 늘어지곤 했다.
유두가 분홍색에다가 통통해서 ‘아기 팥알’ 같다나. 대체 그게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음모 없는 제 성기 보고 요정 같다고 감탄하는 놈이라서 그러려니 했다.
어쨌든 우영이 하루가 멀다고 물고 빠는 덕에 사현은 유두가 지나치게 민감해졌다. 특히 지금처럼 우영이 입술 전체로는 유륜을 빨고, 이 사이로는 유두를 끼운 채 잘근거리면 허리가 들썩거렸다.
“으응⋯⋯.”
간질간질하면서도 자극적인 쾌감에 사현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러고 있으니 배 속에 박혀 있던 우영의 성기가 다시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사현이 코로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다리를 벌렸다.
이 섹스가 한 번으로 끝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일전에, 딱 한 번. 불콰하게 취한 우영이 황소처럼 흥분해서는 제 가랑이를 반으로 쪼갤 뻔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와 지금의 분위기가 묘하게 다르긴 한데, 아무튼 이 섹스가 쉽게 끝나진 않는 건 확실했다.
헌데 우영이 돌연 성기를 쭉 뽑아냈다. 뻡, 소리와 함께 꽉 아물려 있던 살덩이가 사라졌다. 갑작스러운 상실감에 놀란 사현이 아래를 내려다보려는데, 몸이 훅 뒤집혔다. 그리고 엉덩이가 사과처럼 반처럼 쪼개지더니, 우람한 성기가 단번에 끝까지 쑤셔 박혔다.
“아⋯⋯. 우영아, 그만⋯⋯.”
우영의 아래에 깔린 사현이 작은 목소리로 애원했다. 맥없이 늘어져서 제대로 엎드리지도 못하는데, 우영은 마구잡이로 그를 깔아뭉갠 채 허리를 쳐올렸다. 온갖 액체로 점철된 아래가 마찰하며 철벅철벅, 찰박찰박, 쩍쩍, 야한 소리를 냈다.
저와 우영이 내뱉은 후끈한 숨결로 침실이 다 축축하게 젖은 것 같았다.
사현이 침대 시트를 꽉 움켜쥐었다.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가 붉어지길 반복했다. 말랑하고 녹진해진 내벽을 쾅쾅 때려 박는 성기에 두개골이 송연해졌다.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돋았다. 땀에 흠뻑 젖은 몸이 더우면서도 서늘했다.
“아, 으응, 하윽, 읏, 아!”
벌써 몇 시간째인지 모르겠다. 널찍한 창문을 가득 메우고 있던 어둠이 사라지고 새파란 빛이 차오르고 있었다. 사현이 눈물이 울멍울멍 차올라 흐린 시야로 그것을 바라봤다.
우영의 골반에 얻어맞은 엉덩이가 따끔거렸다. 절정이랄 것 없이 우영이 처박으면 처박는 대로 질질 정액을 싸지르는 성기도 아렸다. 우영에게 씹히고 주물리고 만져진 몸 여기저기도 아팠다. 언뜻 보이는 팔뚝과 가슴팍이 온통 잇자국이었다. 우영이 이를 박아 넣은 어깨뼈도 시큰거렸다.
그 와중에도 미치겠는 건, 그가 거칠게 드나드는 구멍은 그저 좋아 죽겠다는 거였다.
사현의 눈꺼풀이 파르르 경련했다. 그때 우영의 몸짓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퍽, 퍽, 퍽, 배 속을 사납게 짓뭉개는 성기에 사현이 입을 뻐끔 벌렸다. 그의 입가를 타고 타액이 흘러내렸다. 우영의 힘을 이기지 못한 몸이 둥글게 말렸다.
그러다 엉덩이가 납작해질 정도로 삽입이 깊어지는 순간.
“아으응!”
“하아⋯⋯.”
우영이 네 번째 정액을 사현의 몸속에 싸질렀다. 사현이 파드득, 간헐적으로 경련하며 묽은 정액을 흘렸다. 전신의 근육이 수축했다. 귓구멍에 이명이 찼고, 갈퀴처럼 구부러진 발은 이불을 북북 긁어 댔다.
침대에 얼굴을 묻은 사현이 눈물을 찔끔찔끔 짜냈다. 씨발, 다음 생에는 어린놈 안 만나야지. 좆도 적당히 큰 놈으로 만나야지. 그 생각을 오늘만 여덟 번째 하고 있었다.
우영은 멋대로 사현의 뒤를 드나들며 후희를 즐기더니 또 쑥, 하고 조심 없이 성기를 빼냈다.
“흣⋯⋯.”
사현의 등줄기가 꿈틀거리며 경련했다. 허리를 숙인 우영이 동그스름하게 솟은 엉덩이에 혀를 가져다 댔다. 그리고 그대로 등을 타고 쭈욱 올라와 사현의 목덜미와 귓불을 빨았다. 그 후 다시 엉덩이로 내려갔다.
뻐끔거리는 구멍이 혼탁한 우영의 눈동자에 비쳤다. 벌어진 틈 사이로 우영이 수차례 싸지른 정액이 울컥울컥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영이 엄지로 뻐끔거리는 구멍을 마구 비볐다.
“말랑해⋯⋯.”
“아흑! 하, 하지 마, 하지 마⋯⋯.”
화들짝 놀란 사현이 앞으로 기어갔다. 그러자 우영의 고개가 비스듬히 옆으로 꺾였다. 그의 낯이 차게 식었다. 사현은 뒤돌아보지 않았음에도 우영의 기분이 저층으로 떨어지는 걸 느꼈다. 꼭 맹수의 눈치를 보는 초식 동물처럼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우영의 사현의 종아리를 틀어쥐었다. 손이 어찌나 큰지, 늘씬한 종아리가 그의 한 손에 다 잡혔다. 그리고 그대로 쭉 끌려갔다. 사현의 손톱이 이불을 함께 끌고 갔다.
엉덩이 사이로 곧장 귀두가 맞물려 왔다. 사현이 다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우영아, 얼굴, 얼굴 보고 싶어.”
“⋯⋯.”
“얼굴 보자, 얼굴. 응?”
사현이 답지 않게 다정히 우영을 타일렀다. 평소였으면 자기야, 너 미쳤니? 뭐 하는 짓이야. 하지 마. 됐어. 그만. 등등의 고압적인 말로 그를 거부했겠지만 침대 위에서는 불가능했다. 이 좁은 공간 안에서만은, 사현이 우영보다 약자였다.
우영의 몸이 우뚝 굳었다. 사현이 자신의 종아리를 쥔 그의 손을 조심히 떼어 냈다. 그리고 천천히, 도망갈 생각일랑 없다는 듯이, 아주 천천히 몸을 돌렸다.
다행히 사현은 급습 없이 우영과 마주 볼 수 있었다. 그런데도 우영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사현이 우영의 팔뚝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불 켜 줘. 네 얼굴이 잘 안 보여.”
“⋯⋯.”
우영은 군말 없이 협탁으로 손을 뻗어 조명을 켰다. 내내 어둑했던 침실이 한층 밝아졌다. 사현이 코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영은 섹스 중에도 말을 잘 듣는다. 가장 중요한 하지 마, 그만해, 라는 말이 완전히 무시되어서 그렇지, 다른 건 말만 하면 곧장 들어주었다. 특히 여기 만져 줘, 거기 빨아 줘 같은 건 심각하게 잘 들었다.
사현이 우영의 뺨을 쓰다듬었다. 우영이 상체를 숙이고 가까이 다가왔다. 사현이 푹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
우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의 뺨을 매만지던 사현의 손을 잡아 손목부터 손바닥까지 죽 핥아 올렸을 뿐이다. 사현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취한 상태냐.”
“응.”
“너 정신 차리면 일주일 동안 각방이야. 내 침실에 출입 금지라고.”
그 말에 우영이 우뚝 굳었다. 사현의 입꼬리가 얄밉게 올라갔다. 그래, 다른 건 아니라도 이런 건 먹힐 줄 알았지. 사현이 그러니 비키라고 말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는데, 우영이 고저 없는 음성으로 읊조렸다.
“안 돼. 그럼 사현이가 외로워해.”
“⋯⋯.”
이번엔 사현이 우뚝 굳었다. 반면 심장은 거칠게 펄떡거렸다. 사현이 우영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두 사람의 시선이 충돌했다. 먼저 맥이 풀린 건 사현이었다. 그가 손등으로 눈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아⋯⋯. 진짜, 미워하지도 못하겠다⋯⋯.”
“내가 미워?”
“아니. 아니, 우영아. 네가 너무⋯⋯ 좋아⋯⋯.”
너무 사랑스러워. 사현이 복근에 힘을 주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우영의 입술로 다가갔다.
“키스하고 싶어.”
속삭이듯 흘러온 말에 우영이 사현의 뒤통수를 쥐고는 입술을 맞물렸다.
사현은 이제 눈조차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신음인지 비명인지 모를 것을 내지른 목구멍과 끊임없이 눈물을 흘린 눈가가 따끔거렸다. 벌어진 다리도 뻣뻣했다.
사현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만하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꽉 막힌 목구멍은 음절 하나 제대로 만들어 내지 못했다. 퉁퉁 부은 눈꺼풀이 깜빡깜빡 느릿하게 움직였다.
잠이 왔다. 사방에 낭자한 우영의 냄새에 몸이 자꾸만 축 늘어졌다. 사현에게 우영은 안정, 안식, 평온 그 자체인지라.
근데 까무룩 잠들려고만 하면 우영이 귀신같이 알고 콱, 하고 성기를 쳐올렸다. 그럼 사현은 움찔움찔 몸을 떨며 눈을 번쩍 떠야 했다. 자극에 쓸데없이 부지런한 성기가 또 사정을 준비했다.
“아흐⋯⋯.”
사현이 옅게 신음하며 허리를 뒤틀었다. 이제 절정이 괴로웠다. 맥없이 묽은 액만 주륵주륵 흘리는 성기가 두렵기도 했다.
허나 우영은 사현의 처지 따위 봐주지 않았다. 사현의 한쪽 다리를 어깨에 걸치고 마른 허벅지를 자신의 몸 쪽으로 끌어당긴 채 쿠욱, 쿡, 쿡, 성기를 치받아 댔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자극에 사현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다 우영이 난데없이 사현의 성기를 아래위로 슥슥 매만져 왔다. 예상치 못한 자극에 사현이 매가리 없이 피핏, 정액을 갈겼다.
“아으응⋯⋯.”
사현의 엉덩이가 안으로 모였다. 우영의 성기를 자극하고자 함은 아니었고 사정의 여운으로 절로 그리됐다. 그러나 우영은 그것으로 크게 자극 받은 모양이었다. 사현의 몸을 단단히 움켜쥐더니 좁아진 내벽 사이를 부득부득 밀고 들어왔다. 그러고는 제멋대로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아! 우영아, 잠깐만, 흣, 잠깐, 만!”
사현이 우영을 열심히 밀어냈다. 그러나 우영은 이까지 겹쳐 문 채 더욱 힘차게 사현의 뒤를 들쑤셨다. 덕분에 사현의 성기는 방금 사정하고도 죽지 못하고 곤두선 채 있어야 했다. 우영이 그것을 쭉쭉 잡아당기듯 문질렀다.
“힉⋯⋯.”
사현의 허리가 뒤로 꺾였다. 목도 넘어갔고, 눈은 부릅뜨였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뭐라고 해야 하나. 그래, 요의가 느껴졌다.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 밤새도록 우영에게 시달리며 눈물과 땀, 정액을 쪽쪽 빨렸는데, 요의가 느껴지는 게 이상했다.
“우영아, 나 화장, 흑, 실, 화장, 아⋯⋯.”
사현이 탁탁 우영의 가슴을 두드렸다. 다리를 마구 버둥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몸을 뒤틀어도 우영의 품을 빠져나갈 순 없었다.
그의 낯이 창백하게 질렸다. 나이가 몇인데. 술에 취한 것도 아니고, 오롯이 맨정신으로 침대 위에서 오줌을 누게 생겼다.
사현은 아랫입술을 겹쳐 문 채 어떻게든 참아 보려고 했다. 허나 우영의 것이 배 속 깊이 처박히는 순간. 뜨겁고 질척한 우영의 정액이 내벽을 축축하게 적시는 순간.
“흐윽⋯⋯.”
“큭⋯⋯.”
투명한 액체를 쭉쭉 싸지르고야 말았다. 소변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뜨거웠다. 그리고 마치 정액을 싸는 듯한 쾌감이 느껴졌다. 물줄기가 직선으로 쭉 뻗어 나갔다. 어찌나 힘찬 물줄기인지 우영의 턱에 부딪혀 그의 얼굴을 적실 정도였다.
사현은 그게 말도 못 하게 수치스럽고 부끄러웠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전신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밤 그가 경험했던 그 어떠한 사정보다 짙은 쾌감이 그를 집어삼켰다.
“⋯⋯.”
우영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가 얼굴에 튄 액체를 손바닥으로 쭉 닦아 냈다. 반질반질해진 손바닥과 바보처럼 풀어진 사현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그러더니 돌연 씩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예뻐, 형.”
그 말에 사현이 헛웃음을 흘렸다. 미친 변태 놈아. 내가 널 잘못 키운 게 아닌가 이제 와 걱정이 된다. 그나저나 호칭이 형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반말인 것으로 보아 우영의 정신이 절반 정도만 돌아온 것 같았다.
사현의 고개가 스르륵 옆으로 넘어갔다. 예쁘다고 하든 못생겼다고 하든, 받아칠 정신이 없었다.
머리에 달린 스위치가 딸깍딸깍 켜졌다가 꺼지길 반복했다. 근데 꺼진 시간이 더 길었다. 눈꺼풀이 기이하리만큼 무거웠다. 가늘게나마 눈을 뜨고 있는 게 힘들 정도였다.
사현은 몰려오는 피곤과 수면욕을 밀어내지 않았다.
이만하면 많이 버텼지. 우영이 무엇에 화가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이렇게까지 했으면 연인으로서 제 할 일은 다 한 게 아닌가 싶었다.
사현이 눈을 감았다. 속눈썹에 아롱아롱 맺혀 있던 눈물이 모여 떨어졌다. 눈가를 타고 흐르는 것을 우영이 얼른 핥아 먹었다. 그러고는 허스키한 음성으로 사현을 불렀다.
“형.”
“⋯⋯응.”
“사현아.”
“⋯⋯응.”
“너 내 거 맞지?”
“⋯⋯응, 맞지.”
사현이 한 박자씩 늦게 대답했다. 질문을 이해하고 대답하는 건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그런데도 우영은 나직이 웃으며 사현의 관자놀이에 꾹꾹 입술 도장을 찍었다. 그러면서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어디 가면 안 돼.”
“⋯⋯응.”
“나 버리면 안 돼.”
“⋯⋯응.”
“다른 새끼 예뻐해도 안 돼.”
“⋯⋯으응.”
꼬박꼬박 대답해 주던 사현은 이내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머릿속에 우영의 마지막 말이 탁하게 번졌다. 다른 새끼 예뻐할 필요가 뭐 있어. 세상에 예쁜 게 너 하난데⋯⋯. 그 말을 해 주고 싶었는데. 너무 피곤해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 * *
사현은 신문지에 둘러싸인 듯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몸이 버석했다. 근육은 지끈거렸고, 겨드랑이 안쪽이나 어깻죽지, 목젖, 귓불, 종아리, 유두 등 따끔거리면 안 되는 곳이 따끔거리기도 했다. 거기다 아주 무겁고 거대한 무게가 몸을 온통 짓누르고 있었다.
사현이 설핏 미간을 구겼다. 잇새로 끙, 하고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눈앞엔 익숙한 전경이 펼쳐졌다. 침실이었다. 암막 커튼을 치지 않아서 한낮의 해가 쨍하게 쏟아졌는데, 협탁 전등이 우두커니 켜져 있었다. 사현이 흐릿한 눈으로 그것을 응시했다.
“⋯⋯.”
그러고 있으니 뒤늦게 어젯밤 기억이 몰려왔다. 아니, 몇 시간 전이라고 해야 맞겠다. 아무튼 그것을 상기하자 뒤가 몹시 불편해졌다. 혹사당한 기억 탓인가, 했는데 실제로 뒤가 불편했다. 뭐가 박혀 있는 것 같은데⋯⋯.
사현이 몸을 꿈틀거렸다. 그러자 저를 껴안고 있던 두툼한 팔뚝이 안으로 확 움츠러들었다. 그러면서 뒷구멍에 꽂힌 큼지막한 살덩이가 크게 요동쳤다. 우영의 성기였다.
“윽⋯⋯.”
사현이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잠시 부르르 몸을 떨던 그가 허리를 비틀어 보았다.
몸속에 박힌 우영의 성기가 어지간해선 떨어질 것 같지 않다. 뒷구멍과 얽힌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빼냈다간 오장육부가 다 딸려 나갈 듯한, 그런 비이성적인 공포가 몰려왔다.
“와, 미치겠네⋯⋯.”
사현이 고개를 안으로 말며 한탄했다. 제가 인종 구분 없이 다양한 이와 각양각색의 밤을 겪어 왔지만, 이렇게 넣은 채로 눈을 뜨는 건 처음이었다. 가장 많은 밤을 함께 보내 온 우영과도 이런 적이 없었다.
섹스 후에 축 늘어져 있으면 알아서 씻겨 주고 닦아 주고 로션도 발라 주고 뽀뽀도 해 주고 이불로 잘 싸다가 재워 주기까지 했으니 이런 상황이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사현은 잠시 고민했다. 이 상태를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지. 그러나 답이 떠오르질 않았다. 우영을 깨우면 해결될 일이지만, 오히려 눈이 빙글 돌아서는 좆을 들쑤실지도 모를 일이지 않나. 함부로 깨울 수 없었다. 제가 움직일수록 더욱 조여드는 팔뚝만 봐도 그랬다.
허나 그렇다고 이대로 있을 수도 없었다.
사현은 너무, 너무 씻고 싶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딱딱하게 뭉친 근육을 풀고 싶었다. 그 후 부족한 잠을 보충하고, 마사지라도 받으러 갈까. 아, 우영이 전신을 육포처럼 씹어 놔서 남에게 보일 순 없겠다. 그랬다간 화 그룹의 백 사장이 역겨운 피부병을 앓고 있다더라, 하는 루머가 돌 터였다.
“으⋯⋯.”
내가 피부에 돈을 얼마나 들이는데. 서우영 이 새끼가⋯⋯.
짜증스레 눈을 감았다가 뜬 사현이 손을 뒤로 보냈다. 그리고 우영의 아랫배를 뒤로 밀며, 자신의 허리는 앞으로 당겼다. 뒤에 깊숙이 박혀 있던 성기가 조금씩 조금씩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흐⋯⋯.”
그렇게 큰 움직임도 아니었는데 사현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힘들었다. 뒤가 빠질 것 같았다. 그런 와중에도 행여 우영이 잠에서 깰까 눈치를 봐야 했다.
사현은 뿔이 났다. 잘생긴 눈썹이 예민하게 치켜 올라갔다. 마음 같아서는 곤히 자는 우영의 뺨을 후려쳐 주고 싶었다. 물론 그러고 싶다는 거지 진짜 손찌검을 할 생각은 없었다.
저 예쁜 걸 어떻게 때리나. 머릿속으로 상상이나 하는 거지. 예쁘고 귀한 건 잘 보존해야 한다. 그게 그림이든, 사람이든.
사현은 우영을 엎어 놓고 엉덩이를 흠씬 때려 주는 상상을 하며 성기를 빼냈다. 그리고 마침내 둥그런 귀두가 촉촉한 소리와 함께 완전히 빠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내벽에 담뿍 고여 있던 정액이 벌어진 구멍 틈으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사현이 파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기도 잠시, 슬쩍 우영을 뒤돌아봤다. 우영은 여전히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뜨끈한 곳에 파묻혀 있던 성기가 서늘해진 게 기분이 나쁜지 설핏 인상을 구기긴 했으나 잠시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사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침대 아래에 발을 딛는 순간, 세상이 푹 꺼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발뒤꿈치부터 목 끝까지 전신의 뼈란 뼈는 다 지끈거렸다. 거기다 발바닥에 밟히는 와이셔츠 단추라니.
‘사 줄게.’
그 말이 떠올랐다. 으득, 이를 간 사현이 우영을 노려봤다. 주먹이 말렸다. 꿀밤이라도 한 대 놔 주고 싶었다.
허나 우영을 보는 순간. 곤히 잠든 얼굴을 보는 순간. 입술을 살짝 벌리고 고른 숨을 색색 내쉬는 그 퍼머넌트 옐로우 같은 장면을 보는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하아⋯⋯.”
사현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우영의 머리칼을 다정하게 쓸어 넘겨 주었다. 그로 모자라 이불을 올려 주고, 단정하게 생긴 이마에다 입술 도장까지 꾹 찍어 준 후에야 욕실로 향했다.
사현이 고되고 길었던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우영은 잠에서 깬 상태였다. 까치집이 된 머리로 침대에 퍼질러 앉아, 손으로는 고구마 인형을 짜부라트리고 있었다. 시선은 침실 구석의 허공에 멍하니 두었다.
샤워 가운을 입은 사현이 부러 문을 쾅, 세게 닫았다. 그러자 우영의 고개가 퍼뜩 사현 쪽으로 흘러왔다. 잠에 취한 건지 술에 취한 건지 분간할 수 없는 혼탁한 눈동자에 사현이 담겼다.
“어⋯⋯ 형?”
“⋯⋯.”
“형, 일찍 일어났네요.”
우영이 배시시 미소를 띠었다. 그 해맑은 웃음에, 사현은 뒤통수라도 세게 맞은 듯 멍해졌다. 느낌이 좋지 않다. 나사 하나 빠진 듯 순진한 미소가 평소와 다름이 없지 않나.
지금 이 순간. 우리가 그 혼돈의 밤을 보내고 다시 마주하는 이 순간. 저렇게 순진한 미소를 지어선 안 됐다.
사현이 엄지와 중지로 자신의 양쪽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너 설마⋯⋯ 어제 기억 안 나?”
“어⋯⋯제요?”
“그래, 어제. 술 처마시고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나냐고.”
“어⋯⋯.”
“⋯⋯.”
침묵이 길어졌다. 우영의 예쁜 눈동자가 좌우로 바쁘게 굴러다녔다. 초가 째깍째깍 흘러갈수록 사현은 금방이라도 눈을 뒤집고 까무러칠 듯한 짜증을 느꼈다. 뇌가 부글부글 끓었다. 그 열감에 눈알이 줄줄 녹아내릴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사현의 눈치를 보던 우영이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진실을 고백했다.
“⋯⋯네. 안 나는 것 같아요. 제가 무슨 실수했어요?”
우영의 뒷머리를 긁적였다. 고개를 안으로 말고 슬쩍 눈치를 보는 게, 아돌포 기아드의 「The Ship’s Boy」에 나오는 소년 같은 모습이었다. 사현은 순간 눈앞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야!”
그가 빽 고함을 쳤다. 우영의 너부죽한 어깨가 움찔 떨렸다. 사현이 씩씩 거친 숨을 내쉬며 침대로 다가갔다. 그 와중에 몇 걸음 걸었다고 가랑이 사이와 허리가 지끈거려서 또 분노가 솟구쳤다. 발에 차이는 셔츠 단추들도 그 분노에 한몫했다.
사현은 오랜만에, 화가 났다. 으레 짜증은 냈지만 화를 내는 건 매우 오랜만이었다.
그가 긴 시간 동안 저를 험하게 탐했다는 것에 화가 난 건 아니었다. 그 긴 시간을, 저와 함께한 시간을 기억하지 못했다는 것에 화가 나는 거였다.
네가 감히, 우리가 공유한 시간을 잊어. 네가 시작해 놓은 그 기나긴 밤을, 네가 잊어. 그렇게 말갛고 순진한 얼굴로 나를 기만해.
우영의 앞에 선 사현이 부득 이를 갈았다. 날이 잔뜩 벼려진 분노에 우영이 고개를 떨구었다.
사현이 시무룩한 뒤통수를 내려다봤다. 그러다 돌연, 구겨진 미간을 펴고 초연한 얼굴로 그를 불렀다.
“우영아.”
“네?”
“이것 봐. 나 피부병 걸렸나 봐.”
사현이 훌떡 샤워 가운을 풀어 헤치고 팔꿈치까지 내렸다. 번뜩 고개를 쳐든 우영이 사현이 나신을 쳐다봤다. 온통 울긋불긋한 피부가 보였다. 대부분 새빨갰고, 몇몇 개는 멍처럼 검푸르기도 했다. 가끔 손가락처럼 긴 타원형의 정체 모를 자국도 있었다. 뾰족하게 도드라진 쇄골에는 잇자국 같은 것이 잔뜩 났다.
밤새 짐승에게 물어뜯긴 꼴이었다. 정말 피부병 같기도 했다. 우영이 사현의 허리께를 조심히 쓰다듬었다. 그의 얼굴이 대번에 절망과 공포, 걱정으로 침잠했다.
“왜, 왜 이런 거예요?”
“서우영이라는 188cm짜리 벼룩이 물어뜯었어.”
“⋯⋯.”
“밤새.”
“⋯⋯.”
“하물며 잘 때도 좆을 쑤셔 넣고 잤다니까. 근데 기억도 못 하는 거 있지.”
“⋯⋯.”
“내가 이 오만방자한 벼룩을 어떻게 해야 할 것 같니?”
사현의 말이 단어 단어 이어질 때마다 우영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런데도 꾹 다물린 입이 벌어질 기미가 없었다. 사현이 친히 설명해 주었으나 여전히 어젯밤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얼빠진 얼굴이 누군가에게 기억이라도 강탈당한 듯한 꼴이었다.
사현이 조심히 침대에 걸터앉았다. 몸 상태가 엉망이라 서 있는 것도 힘에 부쳤다.
“어제 술은 왜 그렇게 마셨어?”
“어, 그게⋯⋯.”
우영이 입을 벙긋거렸다. 그의 손에서 고구마가 데구루루 굴러떨어졌다.
어젯밤, 제가 무슨 생각으로, 무슨 정신으로 사현을 물고 뜯었는지는 기억이 안 났다. 허나 어디서 어쩌다 술을 마셨는지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태영 때문이었고, 부끄러운 질투 때문이었다. 속에 치받는 열을 어떻게 갈무리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사현과 자주 가던 바에서 독한 양주를 두 병이나 비웠다.
근데 분위기상, 여기서 태영의 이름을 언급하며 치졸한 질투심을 드러내면 안 될 듯했다. 긁어 부스럼일 게 뻔하다. 사현은 그딴 유치한 감정으로 저를 이렇게 만든 거냐고 분기탱천하겠지.
사현이 태영을 마음먹고 꼬신 것도 아니고, 태영이 대놓고 본인이 사현을 좋아하니 넌 꺼져라, 라고 경고한 것도 아니고, 다 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한 건데. 너무 부끄러워서 말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사현이 이래서 어린놈이랑은 도무지 연애를 못 하겠다며 저를 내칠지도 몰랐다.
우영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입술만 우물거리는데, 사현이 한쪽 눈썹을 비죽 올리며 그를 내몰았다.
“말 안 해?”
“그냥⋯⋯. 그냥 마셨어요.”
좌로 보나 우로 보나 거짓말이었다. 아홉 살짜리가 거짓말을 해도 이보다는 성의 있고 논리적일 것이다.
사현은 진심으로 기분이 나빴다. 그가 기억을 못 하는 것도, 그가 제게 무언가를 숨기는 것도 처음이라 그랬다. 갑자기 우영이 매우 멀게 느껴졌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는데. 비밀 같은 건 만들 수도, 만들 필요도 없는 사이였는데.
엄청난 배신감이 느껴졌다. 무섭고 두렵기도 했다. 우영이 없으면 안 되는데. 제 삶에서 그가 사라지면 안 되는데. 우영이 변하는 것 같아서, 이렇게 조금씩 변하다 언젠가는 저를 버리고 떠날 것 같아서 소름 끼치게 무서웠다.
사현은 더 이상 우영을 달래고도, 재촉하고도 싶지 않았다. 그냥, 그냥 지금은 너무 피곤했다. 사현이 한 손으로 느리게 마른세수를 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가.”
“형⋯⋯.”
“나가라고.”
나직한 통보에 우영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지, 집에서 나가요? 저 쫓겨나는 거예요? 잘못했어요, 형⋯⋯.”
그가 얼른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두 손을 공손하게 모았다. 조슈아 레이놀즈의 「어린 사무엘」에 나오는 소년 같은 모습이었다. 퍽 애처로운 모습이었지만 사현 역시 지나치게 놀랐다.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너 내 집에서 나가고 싶어? 우리 가족이라며? 무슨 가족이 집을 나가?”
“아니요. 싫어요. 저 할아버지 될 때까지 여기서 살 거예요.”
우영이 팩팩 고개를 내저었다. 그에 바짝 긴장했던 사현의 어깨가 축 내려앉았다. 잠깐 놀랐다고 피로가 곱절로 짙어졌다. 찰나 정신을 놓으면 그대로 엎어져서 잠들 것 같았다. 사현이 맥없이 손을 휘저었다.
“하아⋯⋯. 나가서 밥을 먹든 그림을 그리든 해. 난 자야겠으니까.”
“재워⋯⋯ 줄까요?”
“아니.”
사현이 단칼에 거절했다. 우영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꾸물거렸다. 그에 이불 속을 파고들던 사현이 한숨처럼 말했다.
“내가 나갈까?”
“아니요, 아니요!”
우영이 튕기듯 일어났다. 그러고는 침실 문으로 향하며 다섯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주춤거리는 걸음이 ‘나 좀 잡아 주세요.’ 소리치고 있었다. 허나 사현은 몸을 돌려 누웠다. 그리고 이불을 뺨까지 덮어썼다.
“⋯⋯.”
우영이 그런 사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다 세상이 무너지는 걸 목격한 인간처럼 절망적인 낯으로 침실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