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2. 세피아색 뿔테 (20/24)

02. 세피아색 뿔테

주말 아침. 아니, 막 오후로 넘어가기 직전의 오전. 느지막이 눈을 뜬 사현은 곧장 운동 방에 처박혔다. 그곳에서 화창한 서울을 내려다보며 러닝도 뛰고, 웨이트 트레이닝도 했다.

사현은 평일에 전혀 운동을 하지 못하는 만큼, 주말에 공들여 운동을 하는 편이었다. 턱 끝에서 땀이 뚝뚝 떨어지고, 티셔츠가 등에 철썩 달라붙을 때쯤, 부엌으로 나왔다. 그리고 역겨운 맛의 단백질셰이크를 꾸역꾸역 삼킨 후, 욕실로 들어갔다.

뺨이 발긋해질 정도로 뜨거운 물로 샤워한 사현은 거실 소파에 멍하니 늘어져 있었다. 몸을 혹사하고 나면 이렇게 정신이 붕 뜨곤 한다. 일로 인한 피로와는 조금 다른 느낌의 피로였다.

수북이 쌓인 아트 매거진을 뒤적거리던 그가 벌떡 일어났다. 졸린다. 아무래도 낮잠을 자야 할 것 같았다. 주말이면 모름지기 잠이지.

본인의 침실에 도착한 사현은 두툼한 이불 위로 풀썩 몸을 날렸다. 그러자 이불 속에서 윽, 하고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사현이 비싯 웃으며 이불을 더 짓눌렀다.

이불 틈에서 커다란 손이 나왔다. 그러고는 사현을 잡아 이불 속으로 쑥 당겼다. 사현이 맥없이 그의 손아귀로 끌려갔다.

“운동했어요?”

어둠 속의 우영이 낮게 잠긴 음성으로 물었다.

“응.”

사현이 꾸물꾸물 우영의 품을 파고들며 대꾸했다. 우영이 그의 목덜미에 코를 비볐다. 보디 워시 냄새가 담뿍 밀려왔다.

“못 봤네. 아쉽다……. 내가 형 땀 다 빨아 줄 수 있었는데…….”

“안 돼.”

“치…….”

우영은 당연히 거절당할 것을 거절당하고도 못마땅한지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그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빨지도 못하게 하나 싶었다. 섹스 중엔 그가 흘리는 눈물, 땀, 하물며 정액까지 제가 다 빨아 먹는데.

우영은 또 한바탕 개소리로 그를 이겨 먹어 볼까, 하다가 말기로 했다. 다음 주 주말에는 아예 운동 방에서 그를 기다리리라, 다짐만 했다.

“더 잘 거예요?”

“응. 두 시간만 더 자자.”

우영을 안은 사현이 눈을 감았다. 주말은 우영도 게을러진다. 지금은 원래 그가 한창 잘 시간이기도 하다. 덕분에 두 사람은 주말이면 으레 반나절 이상을 침대에서 뒹굴거렸다.

섹스도 하고, 입술이 불어 터지라 키스를 하기도 하고, 소곤소곤 쓸데없는 대화를 하기도 하고, 그냥 가만히 눈을 맞추고 있기도 했다. 그러다 누구 한 명이 먼저 잠들면, 상대방도 기다렸다는 듯 잠이 들었다.

지금도 그랬다. 사현의 목젖을 쪽쪽거리던 우영이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그의 풍성한 곱슬머리를 만지작거리던 사현 역시 까무룩, 잠들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주말의 시작이었다.

사현과 우영은 노을이 질 무렵에야 침대에서 나왔다. 우영이 또 은근슬쩍 아랫도리를 허벅지에 비비자 사현이 질겁하며 탈출했다.

“그만 좀 해. 내 엉덩이에 습진 생길 것 같아.”

라며 괴상한 소리를 하기도 했다. 우영은 어깨를 으쓱거리는 것으로 깔끔하게 욕정을 접었다. 어차피 곧 밤인데 그때 하면 되지, 하는 팔자 좋은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후드 티에 추리닝 바지를 입고, 똑같은 디자인의 롱 패딩을 걸친 채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김밥천국에 가기 위해서였다.

토요일 저녁은 김밥천국. 암묵적으로 정해진 룰이었다. 사현이 가장 기대하는 날이었으며, 우영도 좋아하는 날이었다. 사현과 바깥에서 데이트하는 거였으니까.

캡 모자를 푹 눌러쓴 사현이 운전석에 올라탔다. 우영은 조수석에 타 안전띠를 꼭 맸다.

사실 김밥천국이야 어디에든 있어서 가까운 곳은 구태여 차를 탈 필요가 없지만, 두 사람이 항상 가는 곳은 거리가 꽤 있었다. 일전에 우영에게 라면 레시피를 가르쳐 주었던, 그 김밥천국에 가는 거였다.

사현은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핸들을 돌렸다. 우영은 그런 사현의 옆모습을 보며 흐뭇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나 오늘 라면 많이 먹을 거야.”

빨간 신호에 차가 멈춰 섰을 때 사현이 힘주어 말했다. 앙칼진 다람쥐의 통보였다.

“그래요.”

우영이 너그럽게 허락했다. 누가 들으면 라면을 네 봉지쯤 먹으려나, 하겠지만 사현은 입이 짧다. 하나를 맛있게 먹어 치우고, 욕심내어 두 개째를 시켜 봐야 한두 입 먹고는 물린 표정을 지을 게 뻔했다. 돈가스나 치즈김밥 같은 걸 함께 시키면 하나조차 다 못 먹기도 했다.

그래서 우영은 저 말이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그저 귀여워 보일 뿐. 제가 돈 많이 벌어서 포장마차에서 메뉴 다섯 개씩 시켜 먹겠다고 말했을 때 사현이 이런 기분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곧 차가 김밥천국 근처의 주차장에 도착했다. 서늘한 추위에 우영과 사현은 팔뚝을 찰싹 붙이고 종종걸음으로 식당에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저희 왔어요.”

우영은 문을 엶과 동시에 사장님에게 꾸벅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사현은 그의 인사를 등에 업고 까딱 묵례만 했다.

“어, 왔어?”

사장님이 건조하게 두 사람을 반겼다. 그녀는 딱딱하게 굳은 입매며 무심한 눈길이며, 어쩐지 일할 때의 사현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김밥을 싸던 그녀는 아무 데나 앉으라며 뒤를 향해 턱짓했다.

회사들이 빼곡한 강남 한복판에 있는 김밥천국은 주말에 오히려 손님이 없었다. 그래서 우영과 사현이 주말에 찾아오는 것이고.

“떡라면.”

사현은 자리에 앉자마자 메뉴부터 말했다. 우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 메뉴판의 떡라면 칸에 체크 표시를 했다.

“치즈도 추가할까요?”

“응.”

우영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치즈 추가에도 표시했다.

“김밥은요?”

“계란말이김밥.”

“또 먹고 싶은 거 없어요?”

“없어. 다음 라면은 다 먹을 때 시킬래. 지금 시키면 불잖아.”

“그래요.”

우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이 먹을 걸 표시하기 시작했다. 돈가스, 고구마돈가스, 오므라이스, 소고기김밥, 김치볶음밥과 유부우동 옆에 볼펜이 꾹꾹 눌러 쓰였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체크 표시를 멍하니 보던 사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우리 큐레이터팀에 수정 씨라고 있거든.”

“알아요. 갈색 머리 누나.”

“누나 말고.”

“아, 갈색 머리 큐레이터님.”

“수정 씨가 그러더라. 너 먹방했어도 다달이 수억씩 벌었을 거래. 일전에 미팅 끝나고 중식당 갔을 때, 네가 짜장면 두 그릇이랑 볶음밥, 짬뽕, 탕수육이랑 깐쇼새우 대짜까지 먹어 치운 게 엄청 인상 깊었나 봐.”

먹방. 어쩐지 사현과 이질적인 단어에 우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먹방이 뭔지는 안다. 한마디로 먹는 방송. 카메라 앞에서 음식을 맛있게 먹고, 그 모습을 시청자들이 보는 것. 대리 만족이나 메뉴 참고를 위해 볼 때도 있고, 그저 유흥으로 볼 때도 있고.

연예인만큼이나 유명하며, 인기도 많고, 돈도 많이 번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본 기억이 났다.

헌데 우영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여태까지는 사현이 추천해 준 미술 다큐멘터리를 봤다. 최근에는 신문 보기와 영어 공부를 하며, 나머지 시간에는 온통 그림과 사현뿐이라 다른 무언갈 볼 새가 없었다.

그때 사장님이 메뉴판을 가져갔다. 수두룩한 체크 표시에 그녀가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우영이 맛있게 해 달라며 씨익 웃고는 다시 사현을 쳐다봤다.

“형은요? 형은 어떻게 생각하는데요?”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했어. 너 먹는 거 보고 있으면 좀, 홀리는 기분이거든. 넋 놓고 보게 된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신기할 만큼 많이 먹는데, 또 깔끔히 먹잖아. 분명 셀링 포인트가 있긴 하지.”

“…….”

“그러면서 수정 씨가 먹방하는 남자들을 보여 줬는데 걔들 얼굴이 진짜…… 엉망진창이더라고?”

“푸하- 뭐라고요? 엉망진창요? 어떻게 사람 얼굴 보고 엉망진창이라고 할 수 있어요?”

우영이 자신의 허벅지를 두드리며 웃었다. 거름망일랑 없는 사현의 말본새가 몹시 웃겼다.

“진짜 엉망진창인 걸 어떡해? 밥을 무슨…… 짐승처럼 먹어. 나는 평생 미(美)만, 아름다움만 쫓아온 사람이야. 그런 건 돈을 준대도 보고 있을 수가 없다고.”

사현이 쓸데없이 진지한 얼굴로 대꾸했다. 굳은 표정에 농담도 장난기도 없었다. 우영이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못 말려, 진짜.”

“아무튼 그걸 보고 나니까 네가 하면 독보적으로 잘나가겠구나 싶더라. 깔끔하게 먹지, 예쁘게 생겼지, 어리기까지 하지.”

“으음……. 해 볼까요?”

우영이 슬쩍 물었다. 아직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사현이 보고 싶다면 못할 게 뭐 있겠나. 카메라 켜 두고 밥 먹는 게 어려우면 얼마나 어렵다고.

근데 사현이 단칼에 거부했다.

“싫어.”

“왜요? 잘 할 것 같다면서요.”

“네 얼굴 팔리는 게 싫어. 네가 유명해지는 것도 싫어.”

“아?”

“물론 네가 네온으로 유명해지는 건 좋아. 환영할 일이지. 근데 서우영으로 유명해지는 건 싫어. 나는 네가 계속 내 집에 얹혀사는, 나만 아는 잘생긴 연하 남친이었으면 좋겠거든.”

“…….”

우영이 눈을 크게 떴다. 잘생긴 눈썹이 한껏 위로 치켜 올라갔다.

때마침 사장님이 우동과 라면을 두 사람 앞에 턱턱 내려놓고 갔다. 곧 김밥 두 줄도 나왔다. “돈가스는 금방 나와.”라고 말한 그녀가 후다닥 주방으로 향했다.

사현이 빙긋 웃으며 젓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라면 위에 보들보들하게 올라간 치즈를 살살 풀기 시작했다. 우영이 뒤늦게 퍼드득 정신을 차렸다. 그가 수줍은 소년처럼 어깨를 안으로 말며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뭐야……. 완전 박력 넘치네요, 형…….”

“……방금 내가 한 말, 미친놈이나 할 법한 말이었는데 그게 좋니?”

“네. 좋아요.”

“네가 성공하지 않고 계속 내 밑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뜻인데? 되게 강압적이고 고압적인데? 남편이 와이프한테 했으면 이혼 사유도 될 수 있는 말일걸?”

사현이 면발을 후후 불며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든 말든 우영은 꽃받침을 한 채 싱글벙글 웃어 댔다.

“제가 좋으면 됐죠.”

“……그래. 네가 좋으면 됐지. 밥 먹어.”

“네.”

우영이 히죽거리며 김밥 두 개를 한입에 집어넣었다. 빵빵하게 부푼 볼이 또 귀여워 사현은 피식 웃고야 말았다.

식사를 마친 우영과 사현은 바로 옆에 있는 편의점에서 딸기우유를 샀다. 빨대까지 꽂고 우유를 쪽쪽 빨며 나온 그들은 소화도 시킬 겸 근처를 걷기로 했다. 서늘한 바람이 귓바퀴를 할퀴었으나 뜨거운 국물을 먹었더니 맞설 만했다.

사현은 기분이 좋았다. 주말이고, 라면도 맛있게 먹었고, 입안을 씻어 내는 딸기우유는 새콤달콤하고, 우영과 찰싹 붙어서 어둑한 길거리를 걷고 있으니 좋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사현이 좋다면 그저 좋은 우영이야 말할 필요도 없이 들뜬 상태였고.

두 사람은 남들은 모를 말을 속닥거리며 걸었다. 가끔 고등학생처럼 키득거리기도 하고, 진지한 얼굴로 무언가를 토론하기도 했고, 시선을 맞춘 채 조용히 사랑을 속삭이기도 했다.

마침 버스 정류장 곁의 쓰레기통이 나타났다. 우영은 텅 빈 우유갑을 네모 모양으로 접어 버렸다. 두 모금쯤 남은 사현의 것도 제가 먹어 치우고는 버렸다.

두 사람은 그만 차로 돌아가려 했다. 사현이 집으로 가는 길에 케이크를 사러 호텔에 들리자 해서 우영의 광대가 봉긋 올라간 참이었다.

우영이 사현의 식사를 신경 쓰듯 사현 역시 우영의 식사를 지극히 신경 썼다. 보통은 한 끼에 사만 원씩 하는 도시락을 시켜 주고, 이따금 시간 여유가 있으면 맛집에서 직접 음식을 포장해서 갖다주기도 한다.

그리고 후식 역시 공을 들였다. 우영이 모 아이스크림 프랜차이즈에서 나오는 패밀리 사이즈를 앉은자리에서 먹어 치우기 때문이다. 케이크 한 판도 뚝딱 사라지고, 쿠키도 낱개가 아니라 통으로 사라졌다.

그래서 이렇게 주말에 시간이 있을 때 아이스크림 가게와 빵집, 호텔 베이커리 등을 순회하며 온갖 것을 사곤 했다. 호텔에 남아 있는 홀 케이크를 전부 쓸어 와도 다음 주 이 시간쯤 되면 싹 사라질 터였다.

“저 딸기케이크요. 딸기케이크가 좋아요.”

애교 떨 듯 사현의 팔을 끌어안은 우영이 말했다.

“알아. 치즈케이크도 좋아하고, 망고케이크도 좋아하고, 초콜릿케이크, 쉬폰케이크……. 그냥 밀가루라면 다 좋아하잖아, 너.”

“그건 그런데 요즘은 딸기케이크가 제일 좋아요.”

우영이 샐쭉 웃으며 말했다. 그 천진한 얼굴이 어찌나 귀여운지. 사현이 참지 못하고 그의 아랫입술을 쭙 빨았다가 놨다.

“내가 다 사 줄게. 빵집도 사 줄 수 있어.”

“알아요. 완전 멋있어.”

이번엔 우영이 사현의 입술을 쪽쪽 쪼아 먹었다. 케이크 사는 데 십만 원을 쓰든, 백만 원을 쓰든 그게 사현에게 돈이겠느냐마는 그래도 저를 위해 다 사 주겠다는 연인의 말이 좋지 않을 리 없었다.

두 사람이 코끝을 맞대고 키득거리는데, 우영의 시선이 사현 너머의 어딘가에 박혔다.

“어…….”

직장인이 죄 빠져 어둑한 골목. 자그마한 가게 하나가 은은한 금빛을 내뿜고 있었다. 크게 특별할 거 없는 빛이었다. 아담한 레스토랑이나 카페에서 쓸 법한 빛. 그런데도 우영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가게 앞에 작은 입간판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산들 갤러리’

“저기 갤러리가 있었네요.”

우영의 말에 사현이 뒤를 돌아봤다. 그의 눈에도 흥미가 차올랐다.

“그러게.”

“구경 갈까요?”

“좋아.”

두 사람은 곧장 갤러리로 직진했다. 갤러리는 보통 여섯 시 전후로 문을 닫는데, 이 작은 갤러리는 여덟 시가 훌쩍 넘은 이 시간에도 불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한쪽 벽이 통창이라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 너머로 사장인지 알바생인지 모를 여자가 구석에 책을 들고 앉아 있었다. 공간은 몇 평 되지 않았고, 희멀건 벽에는 크고 작은 그림이 오밀조밀 자리했다.

들어가도 되나……. 우영이 머뭇거리는 사이, 사현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우영이 얼른 그를 뒤따랐다. 문에 달린 작은 종이 딸랑, 하고 울렸다. 그러자 의자에 앉아 있던 여자가 벌떡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저희 구경 좀 하려고요.”

우영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에 여자가 빙긋 웃으며 얼마든지 보세요, 하더니 다시 의자에 앉아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끊긴 그녀의 관심 덕에 우영과 사현은 한결 편하게 그림을 감상할 수 있었다.

「무한한 시간」

하얀 벽에 검은 폰트가 가지런히 붙어 있었다. 두 사람은 전시 콘셉트를 가볍게 읽고 지나쳤다.

그들은 이렇다 할 말 없이 그림을 훑어보았다. 거리를 돌아다니다 갤러리가 보이면 일단 들어오고 보는지라 함께 그림을 관람하는 것에 익숙했다.

그러다 여자와 거리가 꽤 멀어졌을 무렵, 우영이 소곤소곤 물었다.

“어때요?”

“조악해.”

사현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무미건조한 눈으로 그림을 쳐다보는데, 우영은 자신에게 쏘아진 비판이 아니었음에도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러나 사현은 거기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비난에 가까웠다.

“이런 걸 전시하겠다고 걸어 놓은 작가의 자신감이 신기할 정도야.”

“……못됐어, 진짜.”

“조악한 걸 조악하다 하지 뭐라고 하니. 자기가 뭘 그려야 하는지 모르는 작가야. 교수가 과제를 내 줘서 어쩔 수 없이 그린 대학생 그림 같아.”

“와……. 너무 무서운 말이에요. 근데 그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서 더 무서워…….”

“평가가 무서우면 그림을 방구석에 처박아 두면 돼. 욕을 먹겠다고 자처한 건 이걸 걸어 놓은 작가 본인이지.”

사현이 콧잔등을 찡그렸다. 이런 걸 그림이라고 감상하고 있는 시간이 아까웠다. 얼른 집에 가서 우영의 그림으로 눈을 씻어야겠다. 침실 복도에 걸어 둔 사현의 ‘최애’ 그림들과도 오랜만에 진득이 눈 맞춤을 해야겠다 생각했다.

만면에 혐오가 가득한 사현의 얼굴을 보던 우영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일전에도 이런 적이 있다.

둘이서 멋진 레스토랑에서 브런치를 먹고 있었다. 프렌치토스트를 무려 사만 원이나 받고 파는 곳이었는데, 음식이 훌륭했다. 김밥천국에서 나오는 음식을 제외하곤 입맛이 아주 까다로운 사현이 다음에 또 오자는 말을 할 정도였다.

그 레스토랑 한쪽 벽면에 커다란 그림이 걸려 있었다. 무엇을 그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색감의 조화와 벽을 가득 메운 크기가 퍽 멋진 그림이었다.

우영이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저 그림 예쁘지 않아요?’

그러자 사현이 본인의 베이컨을 우영의 접시에 옮기며 대답했다.

‘쓰레기 같은데.’

‘…….’

‘저런 걸 돈 주고 사서 걸어 놨다니. 인테리어 업자인지 사장인지 예술적 안목이 개와 다름이 없나 봐.’

‘…….’

‘뭐, 괜찮아. 음식만 맛있으면 됐지.’

그 평가에 우영은 맛있게 먹던 음식이 식도에서 꽉 뭉치는 걸 느꼈다. 추후 제 그림이 사현에게 저런 평가를 받으면 어쩌나 며칠 전전긍긍했지.

우영이 당시를 떠올리며 부르르 어깨를 떠는데 사현이 반대쪽 끝에 있던 그림을 가리키며 말했다.

“근데 저건 괜찮네.”

그 말에 우영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그곳엔 뻔한 그림이 걸려 있었다. 분홍빛과 파란빛이 섞인 하늘. 뭉게뭉게 핀 구름. 우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그림을 향해 다가갔다. 대체 뭐가 괜찮다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근데 가까이 가서야 알았다. 확실히 이전에 본 그림과는 달랐다.

작가는 하늘을 그리면서 붓질을 전부 세로로만 했다.

으레 하늘이라고 하면 가로로 붓질을 한다. 해가 뜨고 지면서 변하는 색이 가로의 형태이니까. 머릿속에 형상화하는 구름도 대부분 가로로 길고 말이다.

그러나 이 그림은 세로로 하늘을 표현해 놓았다. 구름 역시 세로 붓질로 딱딱 끊어 묘사했는데 물감을 두껍게 발라서, 그게 이질적이면서도 묘하게 부드러워 보였다. 평범하고 무난한데 특별했다. 신기한 그림이었다.

물론 가장 신기한 사실은 사현이 먼 거리에서 이것을 한눈에 알아봤다는 거였다.

“어…… 와……. 진짜 다르긴 하네요. 갑자기 형이 〈갤러리 비〉의 B라는 게 실감 났어요.”

“언제는 내가 B가 아니었니?”

“나한테 형은 B가 아니라 사현이 형이니까.”

우영이 찡긋 윙크했다. 사현이 실소했다. 우영이 그의 허리를 감싸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재차 그림을 바라봤다. 사현이 괜찮다고 해서 그런가, 그림이 더욱 멋져 보였다.

“예쁜 그림이에요. 같은 작가 거 같지 않네요.”

“얼떨결에 얻어걸린 그림이라서 그래. 이것저것 그리다 하나가 유달리, 독보적으로, 의도치 않게 잘 나온 그림.”

“본인도 알까요? 이 그림이 예쁘다는 걸.”

“글쎄.”

사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알 바냐는 표정이었다.

“…….”

우영이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제 직감으로는, 본인도 잘 그린 그림이라는 걸 알고 있을 것 같다. 다른 그림은 꾸역꾸역 오랫동안 잡고 있었다는 게 붓질에서 티가 나는데, 이건 순식간에 그린 듯했다. 그리면서 즐거워한 게 보인달까.

“형.”

“다 봤으면 가자.”

“이거…… 제가 살까요?”

“……뭐?”

“형이 괜찮다니까 되게 예뻐 보이고, 멋져 보이고 그렇네요. 사서 제 방에 걸어 둘까 봐요. 제 방엔 아직 그림이 하나도 없잖아요.”

“…….”

“그림을 돈 주고 사는 건 처음인데. 되게 신기한 기분이네요.”

우영이 샐쭉 웃으며 말했다.

“…….”

사현은 무어라 말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이런 그림에 돈 쓰는 거 아니다, 라고 말해 주고 싶었는데 그건 제 기준에서야 그렇고, 우영은 아니었다.

그의 말마따나 ‘처음 사는’ 그림이지 않나.

우영이 또래에 비해 아주 많은 돈을 벌긴 하지만, 그렇다고 처음부터 십억짜리 그림을 사겠나, 백억짜리 그림을 사겠나.

원래 이렇게 하나하나 시작하는 거다. 벽이 허전해 보여서 이만 원짜리 프린트된 그림을 샀다가, 우연히 지나가는 길에 보게 된 무명작가의 꽃 그림을 오만 원 주고 샀다가, 또 나중에 십만 원짜리를 샀다가.

그 십만 원짜리를 벽에 걸어 두고 계속해서 보며 정을 붙이고, 나중엔 거금 오십만 원을 들여 사서 어쩐지 예술인이 된 기분에, 문화를 향유하는 지식인이 된 듯 흐뭇해하기도 하고.

그렇게 하나하나 사고, 하나하나 사랑에 빠지고, 하나하나 예술에 물드는 것이다.

생각을 마친 사현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

우영이 또 성장할 모양이다.

* * *

일요일 아침. 우영은 사현의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허전함을 느끼고는 황야처럼 넓은 침대를 더듬었다. 사현을 찾는 거였다.

허나 손에 걸리는 거라곤 사그락거리는 이불뿐이었다.

운동하러 갔나, 아니면 씻나. 나 몰래 커피 마시는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인상을 찌푸리는데 문소리가 나더니 곧 익숙한 냄새가 느껴졌다. 사현 특유의 바닐라 향이었다. 향수와 보디로션 냄새 그리고 그의 체취가 섞인, 그 어느 곳에서도 맡을 수 없는 그의 향.

우영이 손을 휘적거려 그를 찾았다. 곧 사현이 손끝에 걸려 왔다. 그의 허리를 끌어당겨 품에 안으려는데 사현이 귓가에 나직이 속삭여 왔다.

“자기야.”

“네…….”

“나 갤러리에 일이 있어서 먼저 가 있을게.”

오늘 우영은 사현과 함께 〈갤러리 비〉에 가기로 했다. 우영의 전시 콘셉트 미팅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급한 게 아니어서 두어 시간 정도로 빠르게 해치우고 데이트를 할 예정이었다.

근데 먼저 가겠다니.

무거운 눈두덩을 간신히 올려 찔끔 눈을 뜬 우영이 사현을 바라봤다. 그는 화 그룹에 출근할 때와 달리 느슨한 슈트 차림이었다. 넥타이 없이, 헐렁하고 보드라운 질감의 와이셔츠에 어깨선이 또렷이 잡히지 않은 코트를 입고 있었다.

우영이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더할 나위 없이 B다운, 틀에 박혀 있지 않고 세련되고 멋진 사현.

“으응…… 왜요. 같이 가……. 금방, 금방 준비할게요…….”

우영이 입술을 비죽 내밀며 웅얼거렸다. 그러자 사현이 그 입에다 쪽쪽 키스해 주며 타일렀다.

“더 자고 조금 이따 와. 늦게 잤잖아, 너.”

오후에 점심 같이 먹자. 그에 우영이 네-에……, 하고 말을 늘렸다. 그 모습이 못내 귀여워 사현은 그의 이마에도 꾹 입술 도장을 찍었다.

“나 차 가지고 가니까 택시 타고 오고.”

“네…….”

우영이 손가락만 들어 인사했다. 사현이 구겨진 이불을 펴 커다란 몸을 덮어 주었다. 그 후 침실을 나섰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우영이 다시 까무룩 잠에 잠겼다.

우영은 두 시간 후에야 눈을 떴다. 그는 텅 빈 침실을 보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널찍한 창문으로 쏟아지는 빛에 까치집이 된 자신의 머리가 그림자로 비쳤다. 우영이 그것을 벅벅 쓸어 넘기며 크게 하품했다. 팔을 위로 힘껏 뻗어 기지개를 켜기도 했다.

그러다 눈을 홉뜨며 침대에서 튕기듯 나왔다.

“형 보러 가야지.”

〈갤러리 비〉에 있는 사현. 오랜만에 보는 거라 벌써부터 설렜다.

우영은 늘 그랬듯, 베이커리를 탈탈 털어 두 손 무겁게 갤러리에 도착했다. 멋지게 선 〈갤러리 비〉의 건물이 우영을 반겼다. 선글라스를 쓴 우영이 고개를 들어 건물을 올려다봤다.

언제와도 참, 멋진 곳이다. 꾸준히 와도 올 때마다 새롭다.

사현에게 명함을 받고 처음 왔을 땐 정말 넋을 빼놓고 봤었지. 물론 요즘도 종종 멍하니 쳐다볼 때가 있다. 이렇게 근사한 곳에서 제가 전시를 했다니. 앞으로도 할 거라니. 아직도 꿈만 같다.

다- 사현이 만들어 준 꿈이다.

우영이 히죽 웃으며 갤러리로 들어섰다. 내부는 여전히 번지르르하고 깨끗했으며 고고했다. 묘한 위압감이 느껴지는데, 그래서 들어간 것만으로도 선택받은 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전에는, 그러니까 네온이 아니라 관람객이었을 땐, 괜히 쭈뼛쭈뼛 못 올 곳에 오기라도 한 것처럼 눈알을 굴렸다. 사현의 명함 한 장 쥐고 와서도 녹슨 로봇처럼 굴었지. 안내 데스크에서 말도 더듬었다.

근데 지금은 어엿한 작가가 되어서, 직원들과 안면도 트고 인사도 하고 그런다.

우영은 그게 말도 못 하게 좋았다. 제가 사회인이 된 것 같고, 어른인 것 같고, 성공한 것 같고, 그랬다.

그걸 사현에게 말했더니 ‘넌 아직 애야. 애니까 그런 걸 느끼는 거지.’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림에 찌들어서 갤러리까지 오는 게 귀찮고 번거로울 때가 되면 진정 어른이 되는 거라는, 이해하지 못할 말도 했다.

아니, 이렇게 멋지고 대단한 곳에 오는 게 왜 싫나. 저는 머리가 백발이 되어서도 〈갤러리 비〉에서 부르면 영광으로 여기며 달려올 터였다.

“안녕하세요.”

우영이 안내 데스크를 지키고 선 직원들에게 인사했다. 그러자 직원들이 빙긋 웃으며 그를 반겼다.

“오셨어요, 작가님.”

“네. 사람이 많네요. 주말이라 그런가.”

“아무래도 그렇죠. 바로 B 만나러 가실 거죠?”

“큐레이터팀 잠깐 들러서 인사하고요. 아, 이거 드세요.”

우영이 종이 가방 하나를 데스크에 내려놓았다. 반가운 기색을 숨기지 못한 직원들이 잘 먹겠다며 인사했다.

우영이 뿌듯하게 웃었다. 뭘 살지 모르겠을 땐 모름지기 음식이 최고다. 특히나 직장인에게 커피와 간식만큼 좋은 게 없었다. 입이 까다로운 사현도 잘 먹을 만큼 고급 베이커리의 디저트라면 더할 나위 없고.

“작가님, 저희 다음 전시 너무 기대하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우영이 씨익 웃었다. 누군가에게는 기대가 부담일 수도 있겠지만 우영에게는 응원과 같았다. 평생 무명으로 살다 제 그림을 기대해 주고 기다려 주는 사람이 생겼는데 좋지 않을 리 없었다.

우영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갤러리를 순회했다. 주말인데도 직원들이 제법 나와 있었다. 우영은 그들과 살갑게 인사하며 간식을 내밀었다. 다 제 전시를 위해 힘써 주는 사람이다. 잘 보여서 나쁠 게 없었다.

그의 마지막 목적지는 관장실이었다. 그가 제인 몫의 종이 가방을 달랑거리며 복도를 걷는데 어째 제인이 보이지 않았다. 우영이 목을 긁적였다. 그녀가 자리를 비우는 경우가 거의 없는지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저라면 허락 없이 사현의 관장실에 막 들어갈 수 있었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래도 되는 사람이지만, 하물며 그의 침실도 수시로 들락날락하지만, 쉽사리 발을 뗄 수가 없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갤러리 비〉의 관장실인데. 그런 무례는 범하고 싶지 않았다.

제인의 책상 한 편에 종이 가방을 내려놓은 우영이 핸드폰을 찾아 들었다. 사현에게 전화를 걸기 위함이었다. 아니, 일 때문에 먼저 갔다고 했으니 전화는 조금 그런가. 메시지를 남길까.

선글라스를 벗은 우영이 핸드폰과 꽉 닫힌 관장실 문을 번갈아 보며 고민하는 중에 때마침 문이 열렸다. 문을 밀고 있는 손이 가장 먼저 보였다. 뼈가 가늘고 손목에는 팔찌도 걸려 있었다. 제인의 손이었다.

제인은 문을 반쯤 연 채 바로 나오지 않고 안을 향해 무어라 말했다. 아마 사현과 대화하는 것이라. 내용은 알 수 없었다. 대충 가늠하기로는 계약서 이야기인 것 같았다.

우영이 기다란 다리로 성큼성큼 문을 향해 다가갔다.

“실장님.”

“아, 우영 씨.”

제인이 문을 닫으며 관장실 밖으로 나왔다. 그 찰나, 우영은 관장실 안을 훔쳐봤다.

사현이 소파 상석에 비스듬히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아침에 봤던 차림 그대로였고, 코트만 없었다. 기특하게도 그의 앞에는 커피 대신 이름 모를 차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가로로 긴 소파에 누가 앉아 있었는데, 젊은 남자였다.

척 보기에도 어린 티가 났다. 많이 쳐줘 봐야 이십 대 후반. 호리호리한 몸인데 무릎이 쑥 나온 것으로 보아 키가 큰 듯했다. 남자는 두툼한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무거워서 콧잔등이 눌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두툼한 안경테였다.

양손을 꼭 맞잡은 그는 사현을 향해 상체를 한껏 숙이고 있었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소파 등받이에 깊숙이 등을 묻은 사현이 무어라 말을 했고, 남자는 말 잘 듣는 개처럼 꼬박꼬박 고개를 주억였다. 그리고 그가 다시금 입을 떼는 순간, 문이 닫혔다.

우영이 꽉 다물린 문을 노려봤다. 그는 본능적으로 어떠한 경계심을 느꼈다. 사현이 낯선 남성과 있는 걸 보는 게 처음이 아님에도 그랬다.

그는 사회인이고, 하루에도 수십 명씩 만나고 대화한다. 백화점에서 쇼핑하다 누가 알은체를 한 적도 많았다. 때로는 여성이었고, 때로는 남성이었다. 또 나이가 지긋한 이도 있었으나 사현과 동년배일 때도 있었다.

허나 그들을 보며 가시를 세우진 않았다. 발이 넓은 사현이 너무 어른 같고 멋져서 속으로 감탄이나 하고 있었지.

근데 저 관장실에 있는 이름 모를 새끼는 딱 2초. 2초 봤는데 왜 이렇게 신경질이 나는지 모를 일이었다.

우영이 한참 문을 노려보는데 제인이 복도를 돌아 본인의 자리로 향했다. 우영이 얼른 그녀를 뒤따르며 캐물었다.

“누구예요?”

“아, B가 새로 찾은 신진 작가예요.”

“무슨, 무슨⋯⋯ 작가요?”

“신진, 그러니까 신인 작가요. 〈갤러리 비〉에서 전시를 열지 말지 이야기 중이에요.”

우영은 심장이 발바닥까지 쿵, 하고 떨어지는 걸 느꼈다. 순간 눈앞이 아찔했다.

신진 작가. 갤러리 비. 전시.

그래. 〈갤러리 비〉는 신진 발굴에 굉장히 공격적이었다. 우영도 그 기회로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게 된 것이고.

허나 수년 전 우영이 이곳에서 처음 전시를 했던 이후로, 또 다른 신진 작가는 없었다. 작가 발굴을 접은 건 아니고, 그럴 틈이 없었다는 게 맞겠다. 사현이 가족사 때문에, 우영 때문에, 화 그룹이라는 새로운 직장 때문에 정신없이 바빴으니까.

사현을 바쁘게 만들던 모든 요소가 안정기로 접어든 지금, 〈갤러리 비〉는 또 다른 신진 작가를 물색하고 있었다.

한국 예술계를 넘어, 세계를 놀라게 할, 혜성처럼 등장한 신인. 언젠가 우영이 〈갤러리 비〉의 명성을 등에 업고 반짝였던 것처럼.

“⋯⋯.”

우영이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반가운 일이다. 골방에서 싸구려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던 제게 내려왔던 기적이 다른 이에게도 내려진다는데. 반갑지 않을 게 뭐가 있나.

근데 기분이 더러웠다. 저 이후로는 신진 작가가 없을 거라고 방자한 생각이라도 한 모양이다.

우영이 자신의 입가와 뺨을 마구 문댔다.

아니, 아니, 전시고 뭐고 다 그렇다 치고. 저 작가를 보려고 일찍 왔다고? 침실에서 자는 저를 두고? 언제는 자는 제 모습이 귀엽다며 귓불도 빨아 줘 놓고? 오늘은 저 이름 모를 말라깽이를 만나려고 절 두고 출근했다고?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우영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들고 있던 선글라스가 반으로 우둑, 분질러졌다. 속에서 불이 치솟았다. 사현과 연인 관계가 되고 이런 세피아(sepia, 어두운 갈색) 같은, 썩은 나무 밑동 같은 감정을 느끼는 건 처음이었다.

그때 제인이 우영의 가슴을 뒤집는 말을 덧붙였다.

“이야기가 길어지시네요. 우영 씨 미팅을 조금 미뤄야겠는데, 괜찮으세요?”

“왜요?”

“네?”

“길어질 게 있어요? 저 작가는 〈갤러리 비〉에서 전시하기 싫대요?”

우영은 또 다른 이유로 짜증이 일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게 뭐 있어? 사현이 형이 하자면 하는 거고, 말라면 마는 거지. 우리 형이 한국 미술계에서 어떤 사람인데. 뭘 꼬치꼬치 캐물어. 지가 뭔데. 감히.

험상궂은 우영의 표정에 고개를 갸웃거린 제인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럴 리가요. 별일 아니에요. 그냥 궁금한 게 많아 보이던데요.”

“궁금한 거요?”

“네.”

“그걸⋯⋯ 형이 다 대답해 주고 있는 거예요?”

“네?”

제인이 대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냐는 듯 되물었다. 우영이 도리도리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아니에요⋯⋯.”

우영의 아랫입술이 두툼하게 도드라졌다. 눈썹은 아래로 한껏 처져 시무룩한 티가 났다.

그러든 말든 제인은 우영이 가져다 둔 베이커리 가방을 뒤적이고 있었다. 센스 좋은 우영은 언젠가 그가 사 준 아몬드휘낭시에가 맛있다고 언질 했던 이후로 그것을 꼭 한두 개씩 끼워 사 오곤 했다.

역시, ‘그’ B가 끼고도는 데는 이유가 있는 거지.

제인이 아몬드가 콕콕 박힌 휘낭시에를 쥐어 포장을 뜯는데, 똥 마려운 개처럼 뒤꿈치를 들썩이던 우영이 넌지시 물어 왔다.

“저 지금⋯⋯ 못, 들어가겠죠?”

“관장실에요? 아무래도 일 중이시니까, 잠시만 기다리실래요?”

아이를 타이르는 듯한 거절에 가뜩이나 컴컴했던 우영의 낯이 아예 새까맣게 타 버렸다.

사현에게 뒷전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니, 좆같았다. 아주 끔찍했다. 평생 몇 번 입에 담아 보지 않은 질퍽한 비속어가 입천장을 박박 긁어 댔다.

씨-발.

우영이 눈을 꾹 감았다가 뜨는데 제인이 그를 뒤돌아보며 빙긋 미소 지었다.

“우영 씨, 잘 먹을게요.”

“⋯⋯네.”

우영이 그녀를 따라 웃었다.

어딘가 뒤틀린 웃음이었다.

* * *

관장실 앞 소파에 앉은 우영이 한 시간쯤 다리를 달달 떨었을 때, 관장실의 묵직한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우영이 벌떡 튕기듯 일어났다.

먼저 나온 건 뿔테였다. 그를 뒤따라 사현이 나왔다. 뿔테가 사현을 향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아주 정수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였다. 볼품없고 비루하던 본인에게 로또 번호를 알려 준 이인데 절을 해도 모자랐다.

“B, 좋은 기회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

문에 기대선 사현은 손을 흔드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무표정한 낯에 이제 그만 꺼지라는 뉘앙스가 가득했다. 그러나 뿔테는 주제도 모르고 사현에게 한 발 다가오며 꼬치꼬치 캐물었다.

“다, 다음엔 언제 오면 될까요?”

“그건 나랑 말고, 저쪽에 제이랑 이야기해.”

“아, 네. 알겠습니다. 가 보겠습니다.”

뿔테가 재차 인사했다. 그리고 뒤를 돌려는데, “어, 잠깐.” 사현이 그를 잡아챘다. 하얗고 곧은 손이 꾀죄죄해 보이는 옷감을 잡는 순간, 우영의 미간이 한껏 구겨졌다.

“여기, 우리 네온 작가. 누군지 알지?”

사현이 빙긋 웃으며 우영을 소개했다. 우리라는 호칭도 그렇고, 길게 소개하지 않고 누군지 알지, 라고 되묻는 것도 제법 방정맞았다.

뿔테는 사현의 기대에 부응하는 반응을 해 주었다.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고, 콧구멍은 벌름거렸으며, 입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그가 우영에게로 후다닥 다가왔다.

“어, 와, 정말요? 네온 작가님이세요? 와- 작가님을 뵐 줄이야. 정말 영광이에요. 안 그래도 오면서 혹시나 작가님이 계시진 않을까 기대했거든요. 요즘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작가시잖아요. 저 〈새로운 밤〉 때부터 작가님 완전-”

“예. 반갑습니다. 근데 제가 미팅이 있어서.”

우영은 뿔테보다 고작 5cm 정도 크면서 고개를 슬쩍 들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퍽 무례한 어투와 몸짓이었는데 뿔테는 그저 좋다고 웃어 댔다.

“아, 아아, 네. 바쁘시겠죠. 그래도 정말, 와, 정말 존경합니다. 그림만큼 멋지시네요.”

그는 그 후로도 세 번쯤 꾸벅꾸벅 인사를 하고는 복도를 걸어갔다. 멀어지는 멀대를 쳐다보던 우영이 사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누구예요?”

“아, 신진 작가.”

사현이 우영의 옷소매를 쥐고 관장실 안으로 당겼다. 그러나 우영이 움직이지 않았다. 사현이 뿔테의 옷자락을 쥐었던 게 상기되어 짜증이 곱절로 늘었다.

“⋯⋯그게 다예요?”

“그럼? 아, 이름? 이름이 뭐더라. 무슨 영이었는데.”

“⋯⋯영으로 끝나요? 이름이? 저처럼?”

“어. 근데 네 이름만큼 예쁘진 않아.”

그러니까 내가 기억을 못 하지. 사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일말의 흥미도, 관심도 없는 게 느껴지는 말투였으나 우영은 그것을 인지할 만큼 온전한 정신이 아니었다.

우영이 제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뿔테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자연히 옛날, 〈갤러리 비〉에 쭈뼛쭈뼛 들어서던 제 모습이 떠올랐다. 당시에 사현이 했던 말도 떠올랐다.

‘가족 없는 고아. 보잘것없는 학벌. 어쭙잖은 실력. 궁핍한 주머니. 활발하지 않은 대인 관계. 미술계 경험은 전무.’

‘⋯⋯.’

‘그런 애들이 다루기 쉬워. 말도 잘 듣고. 내 멋대로 주무르기도 좋거든. 걔들은 간절하잖아. 지금 자기가 간절하듯이 말이야.’

‘⋯⋯.’

‘믿을 구석이 있으면 기고만장해지고, 기고만장해지면 버릇이 없어지고, 불만이 생기고, 그 불만을 ‘감히’ 나에게 토로하고, 그러다 보면 관계가 어그러지고, 끝내는 관계가 파멸하지. 관계의 파멸은 전시의 파멸까지 이어지거든.’

그걸 상기했더니 갑자기 뿔테가 덜 미워졌다. 사현에게 그는 그저 돈을 벌어다 줄, 잔잔하고 고요하게 흘러가던 미술계에 파동이 될 주먹만 한 돌멩이, 그 정도에 불과한 존재이다.

저야 사현의 마음에 쏙 드는 외모와 지고지순한 성격으로 그의 애정을 받아 내는 데에 성공했지만, 뿔테는 안 될 것이다. 사현이 맡아 온 이전의 신진 작가처럼, 잠깐 반짝였다가 사라지거나 혹은 다른 갤러리에 빌붙어 살겠지.

제 자리를 넘볼 수는 없을 것이고, 그래야만 했다.

우영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그리고 사현의 허리를 감싸며 관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문이 닫히고, 공간에 오롯이 둘만 남는 순간, 사현의 표정이 해사하게 풀어졌다. 바짝 다가온 그가 우영의 골반을 쓰다듬으며 종알거렸다.

“오래 기다렸어? 더 자고 천천히 오라고 할 걸 그랬다. 안 피곤해? 미팅 끝나면 그냥 집에 갈까?”

메말라 있던 그의 눈동자에 생기가 몽글몽글 차올랐다. 그 변화를 지척에서 목도한 우영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고야 말았다.

질투를 하기엔, 분노하고 짜증을 표출하기엔, 그런 치졸한 감정을 내보이기엔, 사현이 너무 아름답다.

너무, 대단하게, 싱그럽고 예술적이다.

사현의 손을 쥔 우영이 그의 손등에 꾹꾹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그의 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좋아서 반푼이처럼 웃기도 했다.

“하나도 안 피곤해요. 형은요? 일찍 일어났잖아요.”

“그래도 회사 출근할 때보다 두 시간이나 더 잤어. 괜찮아.”

이제 미팅 갈까? 사현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신진 작가와의 면담이 예상보다 길어져서 뒤의 일정이 다 밀리게 생겼다. 사현이 못마땅하다는 듯 눈썹을 구기는데 우영이 그의 양 뺨을 쥐어 눈을 맞췄다.

“기특하게 커피 대신 차 마셨네요?”

그 말에 사현이 흘끔 뒤를 돌아봤다. 테이블 위, 다 식어 빠진 녹차가 놓여 있었다. 사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우영을 바라봤다.

“응. 어제 커피 마셨다고 혼났잖아.”

“그럼 오늘은 잘했다고 뽀뽀해 줘야지.”

우영이 사현의 입술 전체를 쭙 빨았다가 놨다. 사현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우영이 웃는 사현의 만면에다 뽀뽀를 퍼부었다. 그러다 사현이 그의 목덜미에 팔을 두르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입술 사이로 혀를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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