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01. 라일락색 하루 (19/24)

01. 라일락색 하루

엘리베이터가 띵- 하고 청량한 소리를 내며 멈췄다. 그러고는 소음 하나 없이 스르륵 문이 열렸다. 그 사이로 키가 크고 어깨가 떡 벌어진 남성이 나타났다. 가장 먼저 잘생긴 얼굴이 눈에 들어왔고, 그 후로는 복슬복슬한 머리칼이 보였다.

도톰한 맨투맨에 검은 롱 코트를 입은 그는 고급 브랜드의 로고가 수놓인 머플러를 목에 걸치고 있었다. 신발은 납작한 캔버스 슈즈였는데, 머플러와 같은 브랜드에서 같은 시즌에 나온 것으로 색과 로고 패턴이 같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신발과 머플러를 맞춘 게 패션 센스가 꽤 좋은 듯했다.

코트 주머니에 람보르기니 로고가 박힌 차 키 끝이 비죽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재력도 출중한 듯하고, 양손 가득 커피와 유명 제과점의 종이 가방을 든 것으로 보아 손님으로서의 센스도 훌륭한 것 같았다.

남자든 여자든 절로 시선이 가는 사람이었다. 젊음 특유의 싱그러움이 뿜어져 나왔다. 어딘가 예술적인 분위기도 느껴졌다.

비록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낀 반지가 샘솟던 흥미를 푸시시 죽게 만들었지만.

그의 존재를 인지한 비서 두 명이 눈썹을 들썩였다. 그들이 등진 벽에는 ‘화 그룹’이라는 활자가 매끈한 디자인으로 붙어 있었다. 비서진이 의자에서 일어나며 빙긋, 웃었다.

“어서 오세요, 작가님. 밖이 춥죠?”

적당히 친절하고 살가운 인사에 우영이 입을 시원하게 벌리며 웃었다.

“안녕하세요. 네. 오랜만에 밖에 나왔더니 더 추운 것 같아요.”

그가 비서진의 책상에 간식거리를 내려놓았다.

“이거 드세요. 성 비서님은 아이스, 박 비서님은 따뜻한 거 맞죠? 한 분은 안 보이시네……. 빵은 많이 사 왔어요. 부속실 팀원분들 다 드실 수 있을 만큼.”

성 비서가 종이 가방 안을 흘끔 살폈다. 색색의 마카롱에 카눌레, 퀸아망 등 작은데 비싼 것들이 그득히 들어차 있었다. 그녀가 감사의 뜻으로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잘 먹을게요. 근데 사장님이 아직 안 오셨는데, 어쩌죠? 미팅이 안 끝나서요. 오늘 조금 길어지네요.”

“음……. 기분 안 좋겠네요.”

뿔이 잔뜩 났겠구나. 우영이 턱 아래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눈썹을 어그러트린 성 비서가 긍정의 의미로 턱을 주억였다.

미팅이 길어진다는 뜻은, 제 보스의 기분이 바닥에 내리꽂힌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했다. 시간을 허투루 허비하는 법이 없는 그였다. 그런 그가 일을 정해진 시간 내에 끝내지 못한다는 말은, 일이 만족할 만큼 완벽하게 마무리되지 않았다는 거였으니까.

그래도 오늘은 괜찮았다. 이 잘생긴 청년이라면 제 까다로운 보스의 기분이 순식간에 상향 곡선으로 바뀔 터였다.

“형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릴까요?”

우영이 사장실 앞, 대기 좌석을 가리키며 물었다. 대기업 아니랄까 봐 대기 좌석도 값비싸 보이는 소파가 놓여 있었다. 그에 비서진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와 손을 동시에 가로저었다.

“아니요, 아니요.”

귀한 몸이신 그를 복도에 방치했다간 보스의 그 백사처럼 하얀 얼굴이 온통 구겨질 게 뻔했다. ‘너희들 미쳤니?’라는 뜻이 담긴 표정으로 노려보겠지.

성 비서가 얼른 안내 데스크를 돌아 나왔다. 그리고 사장실 문을 열어 직접 우영을 안내했다. 우영이 여유롭게 그녀를 뒤따랐다.

널찍한 사장실이 나타났다. 뒤쪽으로 뻥 트인 통창으로는 서울 테헤란로의 전경이 훤히 들어왔고, 그 앞에 묵직하나 깔끔한 흰색 대리석 책상이 있었다. 책상 앞에 가지런히 놓인 크리스털 명패가 보였다.

[사장 백 사 현]

그것을 본 우영이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었다.

햇볕이 닿지 않아 은은한 조명등을 켜 둔 한쪽 벽에는 네온의 〈밤〉 시리즈 중 하나가 큼지막하게 걸려 있었다. 반대쪽에는 성인 남성만큼이나 커다란, 미끈하고 날카로운 모양새의 조각품이 자리했다.

바닥은 카펫 대신 미묘한 문양의 타일이 깔려 있었으며, 소파는 여느 사장실, 회장실과 다르게 동그란 조약돌 모양이었다. 그 밖에도 심플한 생김새이지만 가격은 심플하지 못한 조명이 드문드문 서서 은은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갤러리 비〉에 있는 사현의 관장실과는 다르면서도 비슷했다.

오랜만에 오는 사장실에 우영이 눈썹을 올렸다가 내렸다. 사장실 담뿍 담긴 사현의 냄새를 크게 들이마셨다. 수선화 냄새. 근데 집에서 맡는 것과는 다르다. 은근히 향수 냄새가 섞여 있었다. 종이 냄새도 나고.

우영은 멋대로 사장실 여기저기를 쏘다녔다. 전에 왔을 땐 없던 미술품을 감상하기도 하고, 책상에 가지런히 놓인 사현의 만년필을 들어 보기도 했다. 자질구레한 것일랑 없는 깔끔한 책상에 그림을 그리는 본인의 사진이 놓여 있는 걸 보고 히죽 웃기도 했다.

퍽 무례한 행동이었으나 성 비서는 그를 만류하지 않았다. 제 보스는 저 잘생긴 남자가 불장난을 하다 사장실을 홀라당 태워 먹어도 ‘재미있었니?’라고 웃으며 물어볼 이였으니까.

그녀가 콜라 한 캔과 얼음이 담긴 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사장실 구경을 끝낸 우영이 소파에 앉았다.

“형 저 온 거 알아요?”

“아뇨. 모르십니다. 전화 주셨을 때부터 계속 미팅 중이셔서요.”

“그럼 형이 문 열고 들어올 때까지 말하지 말아 주세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성 비서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데, 우영이 들고 있던 묵직한 종이 가방을 내려놓으며 또 물었다.

“형 점심은요?”

“아직이십니다.”

“비서님들은요?”

“저희도 아직……. 사장님이 언제 오실지 몰라서요.”

“형 들어오면, 식사하고 오세요.”

“감사합니다, 작가님.”

성 비서가 진심을 듬뿍 담아 인사하고는 사장실을 나갔다. 혼자 남은 우영이 머플러를 풀어 소파 팔걸이에 걸쳐 놓았다. 그리고 딸깍, 콜라 캔을 땄다.

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문이 열리고 늘씬한 몸매에 고급스러운 슈트를 차려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미팅에 갈 때만 해도 하고 있던 넥타이를 어디다 버리고 온 건지 노타이 차림이었다. 명품 구두로 뚜벅뚜벅 걷는 발걸음에 짜증이 가득했다.

“오셨어요, 사장님.”

비서진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사현이 대충 손을 휘저어 그들의 인사를 받아쳤다.

말간 얼굴이 험상궂었다. 저 고운 얼굴로 험상궂기도 힘든데, 사현은 그걸 참 쉽게 해냈다. 쉽게 해내다 못해 하루에도 서너 번씩 저런 표정을 짓곤 했다.

예상한 얼굴에 데스크를 지키던 비서들이 허리를 꼿꼿이 폈다. 사현의 뒤로 그를 따라 미팅에 참석했던 다른 비서가 초췌한 얼굴로 걸어오고 있었다. 몇 시간 새에 볼이 홀쭉해졌다. 미팅에서 사현이 얼마나 분기탱천했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안내 데스크에 태블릿을 던지듯 내려놓은 사현이 후우, 심호흡했다. 그러다 화를 참지 못하고 데스크를 쾅, 내리쳤다. 옹골차게 말린 그의 왼손 약지에는 수십 분 전 사장실에 들어갔던 이와 같은 디자인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TF팀이 뭐 저따위야? 누가 저런 등신들만 모았어? 아니, 애당초 저런 등신들이 내 회사에 들어왔다는 게 말이 안 돼. 인사 팀장 당장 올라오라고 하세요.”

사현이 버릇처럼 목을 매만졌다. 그러나 넥타이를 진즉 풀어 버린 터라 잡히는 게 없었다. 그게 또 짜증이 났다. 목을 옥죄는 것도 없는데 목이 조이는 느낌이라.

갤러리 때는 그래도 좋아하는 일이니까 입에서 쌍욕 나올 일은 거의 없었다. 진상이 있긴 했지만 그건 갤러리 잘못도, 큐레이터들의 잘못도 아니었다. 반면 회사는 직원이 진상이었다. 덕분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러잖아도 예민한 신경이 아주 고슴도치처럼 비죽비죽 곤두섰다.

하얀 광대가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사현이 씩씩 거칠게 숨을 내쉬는데, 어째 비서진들의 눈길이 심상치 않았다. 그녀들의 시선이 사현이 등지고 선 사장실 문에 박혀 있었다.

사현이 흘끔 사장실 문을 흘겼다.

“누구 왔어요?”

“아, 그게……. 네. 손님이 와 계십니다.”

성 비서가 사현이 던진 태블릿을 거두며 대꾸했다. 그 말에 사현의 한쪽 눈썹이 비죽 위로 올라갔다.

누가 감히. 주인도 없는 공간에. 대뜸 화부터 났지만 간신히 억눌렀다.

제 비서들은 바보가 아니다. 항상 손님을 밖에서 대기시켰는데, 굳이 사장실 안까지 들여놨다는 건 그만큼 중요한 인물이라는 뜻이었다. 사현이 주머니를 더듬거렸다. 넥타이를 찾는 거였다. 허나 얻다 버리고 온 건지 잡히는 게 없었다. 그때, 그와 함께 미팅에 동행했던 비서가 챙겨 놓은 넥타이를 내밀었다.

사현이 그것을 목에 거는데 비서가 넌지시 그를 말렸다.

“굳이 타이를 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사장님.”

“…….”

사현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중요한 손님인데 타이를 하지 말라니. 이상했다. 그러나 사현은 굳이 되묻지 않고, 넥타이를 둘둘 감아 슈트 재킷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그리고 사장실 문에다 노크했다. 제 공간에 들어서면서 노크하는 게 또 짜증이 나서 머리털이 쭈뼛 섰다. 안에 있는 게 누구든 반겨 주진 못할 것 같았다.

사현이 벌컥 문을 열었다. 그러자 안에 있던 손님이 불쑥 몸을 들이밀어 왔다.

“기다렸어요, 형.”

매력적인 곱슬머리가 팔랑거렸다. 익숙한 체취가 코끝을 스쳤다.

“……우영이?”

잠깐 굳었던 사현의 낯이 삽시간에 화창하게 갰다. 우영이 그를 마주하고는 빙긋 웃었다. 선한 얼굴이 곱게 휘어졌다.

사현이 무언가에 홀린 듯 그에게 다가가 섰다. 우영이 사현의 팔꿈치를 가볍게 쥐었다. 사현의 입가에 미소가 스몄다.

“언제 왔어? 많이 기다렸니?”

목소리가 나긋하게 흘러갔다. 방금 누구 하나를 죽일 것처럼 바글바글 끓던 분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말간 얼굴이 마치 천사 같았다.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되는 이중성에 비서진이 헛숨을 삼켰다.

“아니요. 금방 왔어요.”

사현이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사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비서 하나가 헐레벌떡 다가와 물었다.

“저, 사장님. 부르시라던 인사 팀장님은…….”

“됐어요. 나중에.”

“네.”

비서가 냉큼 한 발 물러났다. 그리고 손수 사장실 문을 닫아 주었다. 사현과 우영이 사라졌다. 비서진은 한동안 숨을 죽이고 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삼 분쯤 지났을 때, 성 비서가 짝 손뼉을 쳤다.

“우리도 밥 먹으러 가죠.”

사현의 뒤에 선 우영이 익숙하게 그의 슈트 재킷을 벗겼다. 그리고 옷걸이에 곱게 걸었다. 소파에 앉은 사현의 시선이 우영을 따라 움직였다.

“왜 연락도 안 하고 왔어?”

“형 좋으라고.”

우영이 익살맞게 광대를 올리며 웃었다. 사현이 피식 입꼬리 한쪽을 뺐다.

“……귀엽기는.”

기다란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온 우영이 사현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 후 사현의 어깨를 감쌌다. 사현이 기다렸다는 듯 우영의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그러다 흠칫하며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짧은 시침이 숫자 2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너 잘 시간 아니야?”

“오전에 조금 잤어요.”

사현이 걱정스러운 낯으로 우영을 올려다봤다. ‘조금’ 잤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림 그리는 게 얼마나 체력 소모가 심한데.

밤에 그림을 그리는 우영은 보통 오후 서너 시까지 곯아떨어진다. 근데 그런 애가 이 시간에 나와 있으니 영 신경이 쓰였다.

“오 분만 있다가 가. 아니, 주변에 호텔 잡아 줄까? 거기서 잘래? 내가 퇴근하고 데리러 갈게.”

사현이 테이블에 올려 둔 핸드폰을 향해 손을 뻗었다. 우영이 그의 손목을 쥐어 입으로 끌어왔다. 그리고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에 쪽쪽 입술을 쪼았다.

“나보다는 형이 자야 할 것 같은데요.”

그 말에 사현이 입을 꾹 다물었다. 우영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요즘 사현은 바쁘다. 뭐, 언제고 바쁘지 않은 적이 있었느냐마는 근래엔 특히나 더 바쁘다. 회사 일에, 갤러리 일에, 제 전시회까지 신경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을 잘 못 잔다. 많이 자 봐야 서너 시간인데, 그마저도 뒤척이곤 했다.

지금도 흰자위 위로 실핏줄이 도드라져 보였다. 항상 윤기가 나던 입술도 푸석했고, 내내 신경을 곧추세운 눈가도 밉게 벼려져 있었다.

우영이 사현의 양쪽 뺨에 짧게 입을 맞췄다.

“형, 낮잠 좀 자야겠다. 비서님이 다음 일정 없다던데. 조금 자요.”

“괜찮은데…….”

“이리 와요.”

우영이 소파 끄트머리로 이동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튼실한 허벅지를 툭툭 두드렸다. 사현이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여기서…… 자라고?”

“뭐 어때요. 누가 들어온다고. 삼십 분만 자요.”

“…….”

사현은 갈등했다. 삼사십 분 자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하지만 그래도 직장인데 싶었다. 사현이 머뭇거리자 우영이 그의 손목을 잡아 자신 쪽으로 이끌었다.

“형 갤러리에서는 소파에서 낮잠도 자고 그랬잖아요.”

“……그랬지.”

거기는 제집과 다름없는 곳이라 틈나면 퍼질러 자고, 밥도 먹고 그랬다. 그리 생각하니 여기서도 못할 건 없지, 싶었다. 사현이 어색하게 몸을 뉘었다. 우영이 그의 머리를 받아 자신의 허벅지에 올렸다. 그러나 사현은 쉽게 편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이리 뒤척이고 저리 뒤척였다.

그때 몸 위로 크고 따뜻한 게 내려앉았다. 우영의 코트였다.

익숙한 냄새가 밀려오자 사현의 전신에 힘이 쭉 빠졌다. 눈꺼풀이 대번에 무거워졌다. 우영이 그런 사현을 내려다보며 볼을 조심히 매만졌다.

그 손길을 가만히 느끼고 있던 사현이 속삭이듯 말했다.

“머리 만지고 싶어.”

그에 우영이 훈련이 잘된 강아지처럼 냅다 머리를 들이밀었다. 사현이 키득키득 웃으며 그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숱 많은 머리 사이로 손이 푹 파묻혔다. 복슬복슬하고 보드랍고 만질 때마다 샴푸 냄새가 뭉게뭉게 올라오는 게 참 좋았다.

사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미는데, 우영이 그의 입술에 쪽 뽀뽀했다. 사현이 슬쩍 입을 벌렸다. 뽀뽀로 끝내지 말라는 뜻이었다.

우영이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입술을 겹쳐 물었다. 그러나 키스는 시작도 전에 끝이 났다. 사현의 입안에 혀를 빼꼼 넣었던 우영이 휙 고개를 뒤로 물린 거였다. 그를 마중 나가던 사현의 혀가 정착지를 찾지 못하고 움찔거렸다.

“왜?”

“커피 마셨어요?”

우영이 한층 가라앉은 얼굴로 물었다. 사현의 고개가 흠칫 안으로 말렸다. 우영을 향해 있던 눈동자가 슬금슬금 도망을 갔다. 코트를 올려 코와 입을 가리기도 했다.

“……미안.”

“…….”

“너무…… 피곤하고, 짜증도 나고, 그래서……. 오늘 처음 마신 거야. 저번에 너랑 카페 가서 마신 이후로 한 번도 안 마셨어.”

“…….”

“진짜야. 너한테 거짓말 안 해.”

안쓰러울 만큼 구구절절 이어지는 변명에 우영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사현은 예민하다. 특히 이렇게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때는 수시로 속이 뒤집어졌다. 그래서 우영이 전과 달리 커피나 라면 같은 걸 못 먹게 했다. 사현은 그걸 퍽 잘 지켜 왔고.

그런 사람이 꾸역꾸역 마셨다는 건 정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는 뜻이었다. 미팅 중에 양주를 마실 순 없으니 커피로 대신한 것이리라.

우영이 사현의 눈가를 살살 쓰다듬었다.

“약은요? 약도 먹은 건…… 아니죠?”

그의 서랍마다 한가득 들어 있던 약통이 떠올랐다. 요즘엔 입에도 안 댄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조금 불안했다.

다행히, 사현이 도리도리 고개를 내저었다.

“약? 아니. 나한테 있지도 않아.”

“그럼 됐어요. 오늘은 봐줄게요.”

“응, 고마워.”

사현이 우영을 향해 팔을 벌렸다.

그럼 뽀뽀마저 해 줘.

잠이 안 온다고 투덜거리던 사현은 금세 잠이 들었다. 우영은 얌전히 다리를 내어 준 채, 종이 가방에서 손바닥보다 조금 큰 스케치북과 2B 연필을 꺼냈다. 그리고 사각사각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주제는 없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사현의 내리감긴 눈꺼풀도 그렸다가, 창밖으로 보이는 빌딩의 윤곽선을 잡아 보다, 예술적인 곡선을 그리며 꺾인 조명등을 묘사하다, 끝내 다시 사현으로 되돌아왔다.

코트 위로 가볍게 얹힌 그의 손가락이 참 예뻤다. 어쩜 손등 위로 사선을 그리며 번지는 빛조차도 아름다웠다. 그러다 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새삼 좋아서 입술을 지그시 말아 물기도 했다.

그렇게 사현을 그리고 또 그리던 우영이 손목시계를 흘끔 쳐다봤다. 그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사현은 여전히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다.

더 재우고 싶은데. 그랬다간 퇴근이 늦어질지도 몰랐다. 그건 안 되는데.

잠시 고민하던 우영이 소파 아래에 내려 둔 종이 가방과 눈이 마주쳤다. 그것을 보고는 사현을 깨우기로 했다. 허리를 숙인 그가 사현의 관자놀이에 입술을 묻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감미롭게 그를 불렀다.

“형. 일어나요.”

“…….”

고요했던 사현의 눈꺼풀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이내 우영이 사랑해 마지않는 눈동자가 나타났다. 잠기운에 취해 흐리멍덩한 게 쓸데없이 귀여웠다. 침실에 있는 ‘고구마’ 인형과 묘하게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우영이 피식 웃으며 사현의 눈가에 쪽쪽 입술 도장을 찍었다. 사현의 눈동자가 점점 맑아지기 시작했다. 그가 잠긴 음성으로 물었다.

“몇 시야?”

“한 시간 지났어요.”

“많이 잤네.”

사현이 손등으로 눈두덩을 벅벅 문질렀다. 금세 붉어지는 살갗에 우영이 부드럽게 그의 손을 밀어냈다. 그리고 엄지로 피부를 살살 쓸어 주었다. 사현이 길게 기지개를 켰다. 그러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스케치북과 연필을 발견했다.

“그림 그렸어?”

“네. 그냥 이것저것 스케치요. 별 건 없어요.”

“봐도 되니?”

“당연하죠. 형은 매번 묻더라.”

“네 그림을 존중하니까. 함부로 보고 싶지 않아.”

사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허벅지가 자유로워진 우영이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사현의 뺨에 짧게 키스한 후, 사장실 구석에 놓인 티 테이블에서 물을 따라 왔다. 사현이 그것을 받아 느릿하게 홀짝였다.

그런 사현을 잠시 보던 우영이 이번엔 종이 가방을 들고 사장실을 나섰다. 어딜 간 건지 오 분 정도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동안 사현은 잠을 완전히 털어 내지 못한 눈으로 우영의 스케치북을 구경했다.

곧 우영이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큼지막한 도시락이 들려 있었다. 탕비실에 있는 전자레인지를 쓰고 온 모양이었다. 우영은 테이블 위에 늦은 점심을 차리기 시작했다. 스케치북 구경을 마친 사현은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 멍하니 있었다.

이내 상차림을 마친 우영이 사현의 옆에 앉았다.

“밥 먹어요.”

“응.”

사현이 느릿하게 테이블을 향해 다가갔다. 방금 일어나서 딱히 배가 고프진 않은데. 우영이 먹으라면 먹어야 했다.

오늘의 메뉴는 돈가스였다. 소스에 푹 절은 경양식 돈가스. 그리고 뜨끈하고 걸쭉한 양송이수프와 주먹보다 작은 밥. 양배추를 채 썬 샐러드도 있었는데 그건 못 본 척했다. 또 새우튀김과 고구마크로켓도 있었다.

비싸고 고급스러운 건 아니었으나 사현의 입맛에 딱 맞는 음식들이었다. 음식을 보자 잊고 있던 허기가 올라왔다.

우영이 그의 손에 나무젓가락을 들려 주었다.

“샐러드부터 먹어요. 일부러 양배추 많이 달라고 했어요. 위에 좋대.”

“……응.”

사현은 싫었지만, 굳이 반기를 들지 않았다. 그 몰래 커피 마시는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아야 했다. 사현은 우영이 시키는 대로 샐러드를 집어 먹었다. 처음엔 조금만 먹다가 나중엔 그냥 한 젓가락에 집어 통째로 입에 넣어 버렸다. 우영이 기특하다는 듯 웃었다.

“근데 왜 자기 건 없어?”

먹기 좋게 손질된 돈가스를 먹던 사현이 물었다.

“저는 집 가서 먹으면 돼요. 형 재우고 밥 먹이러 온 거예요.”

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밥 먹는 것만큼 좋아하는 게 없는 놈이 밥을 건너뛸 리 없고. 알아서 잘 찾아 먹겠지 싶었다.

사현은 느리게, 그러나 꾸준히 식사를 이어 갔다. 그러다 돈가스가 몇 점 남지 않았을 때 흘깃, 우영의 눈치를 봤다. 밥을 다 먹으면 우영이 갈 텐데. 벌써부터 아쉬웠다.

잠시 고민하던 사현은 이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나 오늘 반차 쓸까?”

“아니요. 저 이제 집 갈 거예요.”

우영이 단칼에 거절했다. 사현의 시무룩하게 웅얼거렸다.

“지금 같이 가면 되잖아.”

“일 끝내고 와요. 집에 가도 계속 일할 거면서.”

“그래도……. 네가 여기까지 왔는데…….”

“곧 주말이잖아요. 그때 놀아요. 저도 그림 미리미리 열심히 그려 둘 테니까.”

우영이 사현의 허리를 도닥거리며 그를 달랬다. 제가 그 대단한 사현을 달래고 있다니. 아직도 신기하다. 제게 어리광을 부리는 사현도 신기하고. 그만큼 특별한 사이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좋기도 했다. 이전에 뉴욕에서 둘만의 아담한 결혼식을 올린 후 일 년이나 흘렀는데 아직도 새삼스레 좋았다.

사현은 마지못해 식사를 끝냈다. 우영은 부지런히 뒷정리까지 해 주고는 코트를 들었다.

“갈게요.”

“벌써?”

“뭐가 벌써예요. 두 시간하고도 반이나 있었는데. 내가 형 시간 너무 뺏은 거 아닌가 몰라.”

“뺏기는 뭘 뺏어…….”

“사랑해요. 조금 이따 봐요.”

우영이 사현의 뺨에 꾹 입술을 눌렀다. 그러고도 모자라서 보드라운 양 뺨을 가볍게 거머쥐고 입술을 통째로 쪽쪽 빨기도 했다. 그 후에 사장실을 나섰다.

사현은 멀어지는 그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문을 연 우영은 손을 한 번 더 팔랑팔랑 흔들어 주고는 사라졌다.

사현이 입을 꾹 다물었다. 우영과 헤어지는 건 익숙하지 않다. 물론 매일 아침 출근할 때마다 헤어지긴 하지만 그게 이별로 느껴지진 않는데. 이렇게 바깥에서 헤어지면 기분이 묘했다.

갑자기 세상이 넓게 느껴지고, 혼자가 된 것 같고, 팔뚝이 으슬으슬하고, 흉터 진 손목이 간지럽고 그랬다. 하루에 반 이상을 보내는 사장실이 매우 공허하고 스산하게 느껴졌다.

구구절절 말했지만, 아무튼 결론은 싫다는 거다. 짜증이 날 정도로 싫었다.

사장이고 관장이고 다 때려치우고 우영의 뒤만 졸졸 쫓아다니며 매니저나 하고 싶었다. 무엇을 위해 예쁜 애인을 집에 두고 바깥을 나도나. 제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종국엔 사회 활동에 대한 회의감까지 들었다.

그때 사현의 시선에 무언가가 걸렸다. 소파 팔걸이에 놓인 우영의 머플러였다.

“어…….”

머플러 두고 갔네. 사현의 눈썹이 올라갔다.

“…….”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던 그가 머플러를 낚아챘다. 그리고 자신의 목에 둘둘 감았다. 우영의 냄새가 났다.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 * *

작업실 테이블에 올려 둔 우영의 핸드폰이 반짝였다. 우영이 손등으로 안경을 추켜올리며 핸드폰을 흘끔거렸다. 화면에 사현의 메시지가 떠 있었다.

[엘리베이터.]

그 말에 우영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망설임 없이 붓을 내려놓고, 앞치마도 훌떡 벗어 던진 그가 작업실을 뛰쳐나갔다. 그리고 복도를 가로질러 곧장 욕실부터 들어가려는데, 도어 록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꿈치에 힘을 주고 몸을 멈춘 우영이 빙그르르 반 바퀴 돌아 현관으로 향했다. 사현이 들어오고 있었다. 슈트 위로 반질반질하니 비싼 티가 나는 코트를 입고 있는 그가 참 멋있었다.

“왔어요?”

우영이 반푼이처럼 웃는데, 사현이 그에게 머플러를 내밀었다. 오후에 우영이 사장실에 두고 갔던 그 머플러였다. 사현은 일하는 내내, 또 운전하는 내내 그것을 메고 있었으면서 마치 오다 주운 것처럼 심드렁하게 말했다.

“머플러 두고 갔더라.”

우영이 고개를 한쪽으로 비스듬히 꺾었다.

“일부러 두고 온 건데. 형이 좋아할 것 같아서.”

그 말에 사현은 뒤통수라도 세게 맞은 듯 넋이 빠졌다. 상상도 못 한 이유였다. 잊고 간 게 아니라 두고 간 거였다니. 그건 제가 여기다 코를 박으며 좋아할 걸, 따뜻한 사장실에서도 굳이 목에 둘둘 감고 있을 걸 예상했다는 소리였다.

사현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것도 몰라요, 저것도 몰라요, 형이 해 주세요.

이것도 좋아요, 저것도 좋아요, 형이면 다 좋아요.

그렇게 순진하던 애가 지금은 이렇게 컸다. 물론 그게 싫진 않지만, 이렇게 이따금 그의 성장을 느낄 때마다 놀라운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여우 새끼 다 됐네.”

사현의 중얼거림에 우영이 씨익 입을 가로로 째며 웃었다. 알아서 칭찬으로 걸러 들은 모양이었다.

사현이 구두를 벗고 집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우영이 자신의 옷에다 손바닥을 벅벅 문질러 닦았다. 사현을 안고 싶은데 그에게 물감을 묻힐 순 없어서. 손을 씻고 그를 반기려 했는데 그럴 틈이 없었다.

그런 우영을 안 사현이 슬쩍 팔을 벌렸다.

“괜찮아.”

그 허락에 우영이 와락 그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집에 온 주인을 반기는 레트리버 같았다. 사현이 큭큭거리며 그를 마주 안았다. 우영은 성장했지만 강아지처럼 구는 건 여전하다. 여전히 사랑스럽고 귀엽다.

사현이 우영의 머리칼을 크게 쓰다듬었다. 우영이 그의 목에 얼굴을 욱여넣었다.

“보고 싶었어요. 오후에 잠깐 보니까 더 보고 싶어지더라고요.”

“나도.”

“나도 보고 싶었어, 라고 해 주세요.”

“……나도 보고 싶었어, 우영아.”

순순히 흘러온 사랑에 우영이 양팔로 꽉 사현을 껴안았다. 어찌나 힘껏 안았는지 사현의 뒤꿈치가 바닥에서 뜰 정도였다. 그런 무식한 힘에 적응한 사현은 얌전히 그에게 안겨 있었다.

사랑하는 연인의 품에서 아이가 되는 건 퍽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두 사람은 오 분 정도 안고 있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반나절 이별로 발생한 결핍을 이렇게 서로를 껴안고 채우는 것. 가끔은 포옹 대신 키스도 하고, 키스 대신 섹스도 하고 그랬다.

“잠은 좀 잤니?”

사현이 우영의 두툼한 등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우영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갑자기 그림이 너무 그리고 싶어서 여태 그림 그렸어요.”

사현을 보고 왔지 않나. 그럼 그림을 그리는 게 당연했다. 차를 주차할 때부터 손가락이 어찌나 간질간질하던지. 집에 오자마자 윗도리만 벗어 던지고 붓부터 들었다.

“피곤하겠다.”

“괜찮아요. 저 체력 좋잖아요.”

우영이 보란 듯이 팔을 안으로 접었다. 집에서 항상 입는 하얀 반팔 위로 두툼한 팔 근육이 도드라졌다. 같잖은 근육 자랑에 사현이 웃음을 흘렸다. 귀엽기는…….

“밥은?”

“빵 먹었어요.”

“…….”

사현의 눈이 대번에 가늘어졌다. 우영이 빵 쪼가리로 끼니를 때운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에 우영이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많이 먹었어요.”

“빵을 많이 먹어 봐야-”

“샌드위치 두 개랑 잠봉뵈르 두 개랑 크림빵, 크루아상, 밤식빵 그리고 우유 두 팩…….”

줄줄이 이어지는 메뉴에 사현이 입을 뻐끔 벌렸다. 그래 그 정도 먹었으면 식사가 맞겠구나, 싶었다. 툭툭 우영의 팔뚝을 두드려 준 사현이 2층 계단으로 향했다. 가면서 코트를 벗으니 그를 뒤따라온 우영이 그것을 받아다 자신의 팔에 걸쳤다. 지고지순한 현모양처가 가장을 모시는 것 같았다.

그게 나쁘지 않았다. 입가에 작은 미소를 걸친 사현이 슈트 재킷까지 벗어 우영에게 넘겨주었다.

드레스 룸에 들어선 사현은 셔츠 단추를 풀었다. 우영은 사현의 코트와 재킷을 살폈다. 세탁을 맡겨야 하는지, 아니면 스타일러에 넣기만 하면 될지 판단해야 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옷에 하등 지식이 없어서 뭐가 뭔지 몰랐다. 집에 오면 옷걸이에다 옷을 거는 게 다였지. 나갈 땐 그대로 다시 껴입었고. 근데 사현의 곁에 붙어 있다 보니 자연히 눈썰미가 생겼다.

우영은 코트는 스타일러에 넣고, 재킷은 따로 빼 두었다. 등과 팔 안쪽에 주름이 진 게 세탁소에 맡겨야 할 것 같아서. 크게 보일 정도는 아니었는데, 사현이 아무나도 아니고. 〈갤러리 비〉의 B인데. ‘화 그룹’의 사장님인데. 주름진 슈트를 입게 할 순 없었다.

옷 정리를 마친 우영이 뒤를 돌았다. 사현의 셔츠도 받기 위해서였다. 근데 옷장에 기댄 사현이 우영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셔츠를 죄 풀어 헤쳐 미끈한 가슴팍과 납작한 배를 내놓은 채로.

“…….”

우영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잠깐 숨을 멈추고 있던 그가 이내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저녁, 저녁 안 먹었죠? 뭐 시켜 먹을까요? 아니면 나가서 먹을까요?”

우영은 주절주절 말하면서도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더 정리할 것도 없이 가지런히 걸린 사현의 와이셔츠를 더듬더듬 매만지기도 했다. 어딘가 긴장한 듯한 그의 옆모습을 빤히 보던 사현이 나긋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우영아.”

“네?”

우영이 퍼뜩 사현을 돌아봤다. 갈색 눈동자에 무언가에 대한 기대와 긴장이 가득했다. 여기서 사현이 가서 그림이나 그려, 라고 하면 나라 잃은 사람처럼 그 자리에 주저앉기라도 할 기세였다.

뭐, 그 모습도 꽤 깜찍하긴 할 것 같다만…….

사현이 욕실을 향해 머리를 까딱였다.

“같이 씻을-”

“좋아요.”

“-까?”

사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우영이 대답했다. 그러더니 훌러덩 옷을 벗으며 다가왔다. 그로 모자라 사현이 벗다 만 셔츠까지 손수 벗겨 주었다. 다급한 손놀림에 사현이 키득키득 웃었다.

우영과 사현은 욕조에 따끈한 물을 받고 그 안에 앉아 있었다. 우영은 욕조 벽에 기대고, 사현은 그런 우영의 가슴에 반쯤 눕다시피 앉았다.

방금 짧으나 격렬한 정사를 마친 두 사람의 광대가 발긋했다. 우영은 사현의 가랑이 사이에다 두 번이나 정액을 싸 놓고도 부족한지 뼈가 도드라진 뒷목을 쪽쪽 빨아 댔다. 가끔은 귓바퀴나 조랭이떡 같은 귓불을 잘근거리기도 했다.

“그만 빨아. 나 사탕 아니다.”

사현은 그에게 몸을 내어 준 채 태블릿을 들고 있었다. 회사 일은 끝냈지만 갤러리 일이 남아 있는지라.

“사탕보다 맛있는데.”

우영이 혀를 넓게 펼쳐 사현의 목 아래부터 머리카락이 있는 위까지 쭈욱 핥아 올렸다. 간질간질한 기분에 사현이 목을 움츠렸다가 폈다. 그러나 우영을 밀어내진 않았다.

두둑이 쌓인 메일을 차근차근 훑어보던 사현이 욕조 너머로 팔을 휘적거렸다. 와인을 찾는 거였다. 그러자 센스 좋은 우영이 와인을 집어 사현의 손가락 사이에 넣어 주었다.

그러면서 넌지시 걱정을 비쳤다.

“형 오늘 커피 마셔서 술 마시면 안 되는데.”

“괜찮아.”

사현은 마치 남 일처럼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러고는 찰랑이는 와인을 홀짝였다. 그에 우영의 눈초리가 세모꼴이 됐다. 그가 손을 앞으로 보내 제가 물고 빨아서 통통해진 사현의 유두를 꼬집었다.

“아!”

전신에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찌릿한 감각에 사현이 몸을 파드득 떨었다. 욕조 물이 거칠게 출렁거렸다. 태블릿 끄트머리가 물에 들어갔다가 나왔고, 와인 반이 촤르륵 쏟아졌다.

눈을 부릅뜬 사현이 우영을 대차게 노려봤다.

“자기야. 너 미쳤니?”

“형 걱정은 나만 하지, 나만. 짜증 나요.”

“……하.”

사현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했다. 그가 와인을 욕조 턱에 내려놓았다.

“원래 내 걱정은 아무도, 단 한 명도 안 했어. 근데 네가 지금 차고 넘치게 하고 있잖아. 그걸로 충분해.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 테니까 입 다물고, 예쁘게, 인형처럼 있어, 좀. 나 쉬는 중이잖니.”

이게 이제 뻗대다 못해 짜증도 내고 말이야……. 사현이 우영의 턱을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설핏 미간을 구긴 채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우영이 꼬집은 유두가 지끈거려서.

그냥 꼬집혔어도 아팠을 텐데, 조금 전까지 우영이 줄줄 물고 빨아서 예민해진 상태라 그 충격이 어마어마했다. 사실 아팠다기보다는 아랫도리가 들썩거렸다는 표현이 맞지만, 자존심상 그걸 인정할 순 없었다.

일그러진 사현의 낯에 우영이 뒤늦게 그의 눈치를 봤다. 턱을 안으로 당기고 눈을 착 내리깔았다.

“많이 아파요? 빨아 줄까요?”

“……네가 빨면 아픈 게 사라지니?”

“또 모르죠.”

우영의 뻔뻔한 말에 사현이 재차 실소했다. 하여튼 여우 새끼. 쯧, 혀를 찬 그가 원래 자세로 돌아갔다. 우영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커다란 손바닥으로 물을 퍼 사현의 동그란 어깨에 끼얹어 주었다.

사현은 곧 다시 일에 집중했다. 줄줄이 올라온 콘셉트 제안서를 뚫어지라 보며 괜찮은 걸 골라냈다.

우영의 세 번째 전시다. 첫 전시인 〈새로운 밤〉과 두 번째 전시인 〈현혹의 밤〉 이후 국내에서 따로 전시회를 연 적이 없었다.

〈당신의 밤〉은 오로지 사현만이 관람객으로 있었던 비공식 전시라 그것을 포함할 순 없었다. 작년 겨울에 뉴욕에서 전시를 하긴 했으나 〈새로운 밤〉과 〈현혹의 밤〉 전시를 그대로 옮겨 간 거여서, 그 역시 세 번째 전시라 칭하기 힘들었다.

뉴욕 전시회로 네온의 명성과 인기는 더욱 높아졌다. 오죽하면 〈갤러리 비〉에 네온 담당 팀이 따로 꾸려질 정도였다. 원래도 작가별로 담당 직원이 있긴 했으나 그건 해당 작가의 전시 때나 있는 일시적인 팀이지 아예 따로 부서를 만든 건 처음이었다.

그러다 작년. 우영은 제인과 사현의 동석 아래에 해외 유명 아트 매거진과 인터뷰를 할 기회가 있었다. 따로 얼굴을 공개하지 않고 그림과 인터뷰만 나가는 거였다.

거기서 우영은 〈갤러리 비〉가 아닌 다른 곳과 작업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고 못 박았다. 이전에 한호 자동차와의 콜라보도 〈갤러리 비〉가 아니었다면 진행하지 않았을 거라고 해 버렸다.

그 덕에 〈갤러리 비〉는 네온의 매니지먼트 역할까지 하게 됐다. 모든 문의가 갤러리로 오기 때문이다.

물론 네온의 작품과 전시를 독점하고, 여러 콜라보를 주최하며 벌어들이는 돈이 수백억이다. 하지만 이전에 〈갤러리 비〉가 발굴했던 신진들과 비교하면 분명 엄청난 특혜였다.

우영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그걸 매우 뿌듯하고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에 사현의 어깨는 더욱 무거워졌다. 그가 〈갤러리 비〉를, 그리고 저를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지 재차 상기했기 때문이다.

오랜만의 국내 전시인데 대충 하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세 번째 전시이다. 우영의 그림과 그림체가 이미지로 ‘소모’됐다는 말이다. 어떻게 새롭게 만들어 내도 관람객들은 익숙함을 느낄 것이다.

다 빈치의 「모나리자」와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를 봤을 때 가장 먼저, 아름다움이 아니라 익숙함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허나 우영의 세 번째 전시회에 오는 관람객은 이전보다 더 멋지고 화려한 것들을 기대하고 있을 터였다.

사현은 그 기대에 실망을 안겨 주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영의 전시이니까.

마침내 제안서를 모두 훑어본 사현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우영을 바라봤다.

“너는 이거 다 봤니?”

“네. 엊그제도 갤러리 갔었어요. 미팅하러.”

“마음에 드는 건 없었고?”

“어……. 아직 잘 모르겠어요. 제가 주제를 잡고 그림을 그리는 것도 아니고, 매번 그리고 싶은 걸 그리는데 콘셉트라는 게 있을 리가…….”

우영이 사현의 이마에 쪽쪽 키스했다. 곰살맞은 스킨십에 미소 지은 사현이 우영의 코끝을 아프지 않게 튕겼다.

“그거야 스토리를 어떻게 짜냐 나름이지.”

“그 스토리는 형이 세상에서 제-일 잘 짜잖아요. 저는 그림만 그릴 줄 아는 바보라고요.”

‘세상에서 제일’. ‘바보’. 유치하지만 유치해서 우영다운 말에 사현이 피식 웃었다. 그림 한 점이 오억에서 십억에 팔리는 놈 중에 저런 말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아마 세상에 우영 하나이리라.

하여튼 귀여워. 아주 귀여운 놈이야.

“그래. 세상에서 제일 잘하는 내가 생각해 볼게.”

급한 것도 아니고. 다음 전시까지 반년 가까이 남았으니 차근차근 생각해 봐야겠다. 사현이 욕조 턱에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간당간당하게 올려진 그것을 우영이 다시 집어 욕조 아래에 두었다.

사현은 꼭 이렇게 일을 두 번씩 하게 한다. 회사 일이나, 갤러리 일엔 철두철미하면서, 자질구레한 일엔 영 신경을 쓰지 못했다. 아니,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예를 들어, 세탁소에 맡길 슈트 재킷 주머니에 지갑을 둔다거나, 물컵을 테이블 끝에 아슬아슬하게 올려 둬서 결국 깨 먹는다거나, 차 키를 매일 다른 곳에 둔다거나, 방에 불을 안 끄고 다닌다거나, 소파 쿠션을 옆구리에 끼고 침실까지 올라간다거나 등.

함께 동거하는 이라면 치를 떨며 싫어할 요소이나, 얄궂게도 우영은 그게 나쁘지 않았다. 제가 사현을 보살펴 주는 기분이라 뿌듯하기까지 했다. 무엇 하나 완벽하지 않은 게 없는 그라서 이렇게나마 뭘 할 수 있다는 게 그저 좋았다.

사현의 어깨에 꾹꾹 입술 도장을 찍던 우영이 욕실 한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시침이 10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섹스를 오래 한 모양이다.

우영이 사현의 옆구리를 쥐고 바르게 앉혔다.

“형 잘 시간 다 됐다. 그만 나가요.”

“조금 더 있을래.”

사현이 우영의 가슴 위로 축 늘어졌다. 따끈따끈한 물에, 단단하면서도 보드라운 우영의 몸에, 은근히 올라온 술기운에. 가능만 하다면 아예 여기서 자고 싶었다.

그러나 우영이 그걸 허락할 리 없었다.

“손가락이 쪼글쪼글하잖아요. 일어나요. 욕조에 너무 오래 있는 것도 안 좋아.”

“…….”

“일어나라고 했어요. 이러다 현기증 나면 어쩌려고 그래요.”

“진짜…… 잔소리 대박이야, 너…….”

사현이 새치름한 눈으로 우영을 노려봤다. 제법 뾰족한 눈길이었음에도 우영의 낯엔 균열조차 일지 않았다. 사현이 어금니를 꾹 짓씹었다. 얄미워 죽겠다. 근데 저 예쁜 얼굴로 종알거리니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가 없었다.

무의미한 눈싸움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때 우영이 강수를 두었다.

“지금 나가면 컵라면 작은 거 먹게 해 줄게요. 햄이랑 치즈 넣어서 계란말이도 해 줄게.”

“…….”

그 말에 사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러잖아도 도드라진 쇄골이 더욱 오목하게 파였다. 물 위로 손가락이 올라왔다 내려가기를 반복했다.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던 그가 슬쩍 물었다.

“국물도 먹어도 돼?”

“네.”

“……지금 나가.”

사현이 벌떡 일어났다. 우영이 덜렁 드러난 사현의 복숭앗빛 엉덩이에 입을 맞추며 킥킥거렸다.

라면에 밥도 한 숟갈 넣어 화려한 식사를 끝낸 사현은 양치 후, 신문을 뒤적이더니 금세 잠들었다. 우영은 그가 깊이 잠들 때까지 그를 안고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색색 규칙적으로 흘러오는 사현의 숨소리가 그렇게 평화로울 수 없었다.

한동안 사현의 잠든 얼굴을 감상하던 우영이 손을 길게 뻗어 간접등의 밝기를 최소한으로 낮췄다. 아예 꺼 버리는 게 수면에 더 좋긴 하겠지만, 행여 사현이 새벽에 잠깐 눈을 떴다가 못된 과거에 사로잡힐까 켜 두는 거였다.

우영이 사현의 머리칼에 조심히 키스했다. 그리고 아쉽게 몸을 일으켰다. 제가 있던 자리에는 못생긴 고구마 인형을 넣어 두고, 이불을 꼼꼼히 덮어 주었다. 그 후 사현이 보던 신문을 접어 옆구리에 꼈다.

마지막으로 사현의 얼굴을 한 번 더 살핀 그는 뒤꿈치를 한껏 들고 조용히 침실을 나왔다.

그렇게 사현의 침실 문이 닫히는 순간. 우영의 하루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우영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2층에서 내려왔다. 곧장 주방으로 향한 그가 냉장고를 뒤적거렸다. 사현이 매주 저를 위해 손수 주문하는 호텔 도시락을 전자레인지에 데우고, 닭가슴살도 한 팩 꺼냈다. 사현에게 계란말이를 해 주고 남은 햄도 대충 썰어 구웠다.

식사 준비를 끝낸 우영이 널찍한 식탁에 앉았다. 그리고 신문을 보며 밥을 먹기 시작했다.

사현의 신문을 훔쳐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별다른 이유가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갑자기 공부에 늦바람이 든 것도 아니고, 까맣게 모르고 살던 세상에 관심이 생긴 것도 아니다. 그저 사현과 조금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였다.

사현은 가끔, 아니 자주, 회사 일 때문에 화를 낸다. 갤러리 일은 그래도 알음알음 보고 배운 게 있으니 그가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이해가 되는데, 회사 일은 전혀 이해가 안 됐다. 듣고 추임새라도 넣어 줄 수 있으면 좋으랴만 그의 감정을 달래 주는 게 다여서 아쉬웠다.

그래서 이렇게나마 공부 아닌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우영은 심각한 얼굴로 깨알 같은 글씨를 읽어 갔다. 그러다 돌연 인상을 쓰며 안경을 올렸다.

“테이프링이 뭐야? 아, 테이퍼링…….”

우영이 핸드폰으로 단어를 검색했다. 화면 가득 활자가 쏟아졌다. 근데 설명을 봐도 이해가 어려워서 세 번쯤 다시 읽어야 했다. 끝은 항상 그렇듯, 감탄으로 났다.

“형은 이걸 어떻게 다 알고 이해하지……. 진짜 똑똑해. 어른 같다. 멋있어…….”

혼자 설레고 수줍어하던 우영이 닭가슴살을 크게 베어 물었다.

그렇게 신문과 함께 식사를 마치고 나면 설거지를 한다. 일주일에 두어 번씩 청소해 주는 분이 오긴 하지만 그래도 우영은 이렇게 꼬박꼬박 설거지를 했다.

사현은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하다가, 도통 말을 들어 먹지 않는 우영에게 마음대로 하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러다 손이라도 다치면 뒤지게 혼날 줄 알라며 엄포를 놓기도 했다.

그렇게 설거지를 마치면 아이스크림 한 통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 영어를 공부했다. 이건 본인 스스로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에 하는 거였다. 예술계는 다른 어떠한 분야보다 나라 간의 장벽이 없다. 그래서 영어가 매우 일상적으로 사용됐다.

사현은 물론, 제인과 큐레이터들도 영어를 아주 잘했으며 전시 관련 용어도 영어가 많았다. 우영은 그들과 능통하게 대화하고 싶었다.

물론 제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있어도 사현이 알아서 다 해 주겠지만, 나이가 더 들어서도 멍하니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지금이야 사현이 절 귀엽게 봐 주지. 나이가 마흔이 되어서도 귀엽게 봐 줄진 모를 일이었다.

저를 귀찮아하거나, 제 일을 언제까지 봐줘야 하냐며 짜증을 내거나, 넌 대체 머리통에 든 게 뭐냐고 꾸짖으면 어쩌나. 그러다 최후에 저를 버리기라도 하면…….

그럼 안 된다. 저는 사현의 곁에 평생 붙어 있고 싶었다.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가 좋아해 주는 제 예쁜 얼굴이 먹히는 동안에는 ‘귀여운 놈’으로 살다가, 나이가 들어서는 젠틀하고 똑똑한 남자로서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우영은 삼십 분 정도 진득하게 공부했다. 누구는 고작 그걸 공부라고 한 거냐며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그림과 사현이 아닌 무언가에 삼십 분 이상 집중하는 건 우영에게 아주 아주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매일 삼십 분씩 공부하는 거, 결코 쉽지 않다. 사현도 기특하게 여겨 줬다. 그러니 남들이 뭐라고 하든 알 바 아니다.

그 후엔 텅 빈 아이스크림 통을 버리고, 운동 방에 들어가서 열심히 운동한다. 인터넷 동영상을 보며 새로운 운동도 해 보고, 늘 하던 루틴도 반복한다. 그리고 티셔츠가 땀에 흠뻑 젖으면 차가운 물로 호탕하게 샤워하고, 거울을 보며 외모를 점검한다.

사현이 좋아라 하는 곱슬머리를 크게 쓸어 넘기고, 가슴 근육도 찰싹찰싹 때려 보고, 얼굴에 살이 붙진 않았는지 확인한다.

그 후 머리를 말리고, 늘 입는 하얀색 반팔 티셔츠를 입으면 비로소 그림을 그릴 시간이다.

작업실 앞에서 크게 심호흡한 우영이 띠리릭, 도어 록을 열고 들어갔다.

우영은 정신없이 그림을 그렸다. 시간의 흐름도 잊을 정도로 붓과 캔버스에 푹 빠져 있었다. 슬럼프처럼 사치스러운 건 우영에게 찾아오지 않았다. 일평생을 궁핍하게 그려 오다, 질 좋은 캔버스와 물감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게 아직도 신이 나서 손이 멈추질 않았다.

거기다 사람들이, 사현이 제 그림을 좋아해 주지 않나. 덤으로 통장에 돈도 두둑이 쌓이고. 우영은 지금 세상 누구보다 행복했다.

좋아하는 일로 밥 벌어 먹고사는 것. 좋아하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하는 것.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마구 붓을 휘두르다 보면 핸드폰이 울린다. 사현이 일어나야 할 시간에 맞춰 둔 알람이었다.

“어, 벌써…….”

뺨에 샙 그린색 물감을 묻힌 우영이 퍼뜩 얼굴을 들었다. 널찍한 창 너머로 붉은 해가 뭉근히 떠오르고 있었다.

우영은 욕실에서 손을 뽀득뽀득 씻었다. 방금 일어난 사현에게 물감을 묻힐 순 없어서 팔꿈치까지 열심히 닦았다. 그리고 살금살금 2층을 향해 올라갔다.

침실 속 사현은 여전히 잠든 채였다. 이불이 조금 흐트러져 있긴 했으나 가볍게 뒤척인 정도였다. 머리카락이 여전히 보들보들한 것으로 보아 땀을 흘리거나 악몽을 꾼 것 같지도 않았다.

“확실히 섹스하면 잘 잔단 말이야…….”

피곤해 보여서 그냥 재우면 이리 뒤척, 저리 뒤척, 가끔은 우영을 찾아 새벽 늦게 작업실로 내려오기까지 한다. 근데 섹스 두어 번이면 밤새 한 번도 깨지 않고 잘 잤다.

이것 참, 뿌듯해야 하는 건지…….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띤 우영이 사현의 곁에 누워 있던 고구마를 집어 침대 아래로 대충 내던졌다. 그리고 사현의 곁에 조심히 몸을 뉘었다. 마치 밤새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던 것처럼.

사현은 잠결에도 우영의 품을 인지한 건지 꾸물꾸물 가슴으로 흘러 들어왔다. 우영은 커다란 손으로 그의 등을 감싼 채 잠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사현이 조금이라도 더 잤으면, 싶어서.

십 분쯤 지났을 때, 사현의 머리칼을 살살 쓸어 넘기기 시작했다. 그러다 사현의 뺨에 키스하고, 허리를 지분거리고, 엉덩이를 주무르며 성가시게 굴었다.

“으음…….”

사현의 미간에 슬슬 주름이 지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우영의 손길을 벗어나려 몸을 뒤척이기에, 그를 잡아다 더 꽉 껴안았다. 그 후 겁도 없이 그의 앞섶으로 손을 집어넣는데.

“나 일어났어…….”

사현이 잠긴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우영이 아쉽게 손을 빼냈다.

“잘 잤어요?”

“그런 것 같아.”

사현이 느지막이 눈을 떴다. 늘 예민하게 곤두서 있던 눈동자가 흐리멍덩한 게 귀여워서 그의 눈가에다 입술을 마구 비벼 댔다.

“형 너무 잘생겼어요……. 너무 예뻐요…….”

사현은 그 유난스러운 애정을 가만히 받아 내고 있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애인에게 잘생겼다, 예쁘다, 귀엽다, 사랑한다, 쪽쪽쪽 등의 사랑을 받는 건 퍽 기분 좋은 일이라서.

그렇게 한바탕 우영의 애정 공세가 끝난 후에야 사현은 침대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가 기지개를 켜며 욕실로 향하는데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있던 우영이 물었다.

“아침은요?”

“안 먹을래. 속 더부룩해.”

그 말에 우영이 입술을 꾹 겹쳐 물었다. 그것 봐. 뭐 좀 잘못 먹이면 금방 티가 난다니까. 사현과 연애하는 건 아주 예민하고 고집스럽고 까다로운 고양이를 키우는 것과 같다.

근데 뭐 어쩌겠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예쁘니 열심히 모시고 살아야지.

“양배추즙 데워 둘게요.”

“먹기 싫은데…….”

“쓰으읍.”

우영이 혀를 끌었다. 사현은 입술을 삐죽이며 욕실로 들어갔다. 저래 놓고도 코앞에 내밀면 ‘너무 싫지만 그래도 네가 주니 어쩔 수 없이 먹는다’는 표정으로 마셔 줄 터였다. 그 표정도 귀여워서 매일 기대하는 순간 중 하나였다.

물소리가 나는 걸 확인한 우영은 1층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위에 좋대서 한가득 쟁여 둔 양배추즙을 데우고, 그 밖에도 사현이 먹는 영양제를 개수 맞춰 나열했다.

그러고 조금 있으면 셔츠 차림의 사현이 재킷과 넥타이를 들고 내려온다. 우영은 그를 따라다니며 영양제와 양배추즙을 먹인다.

“너 무슨 고3 키우는 엄마 같아.”

막 영양제 한 알을 삼킨 사현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넥타이를 매며 말했다.

“그런 정성으로 형을 돌보고 있죠.”

우영이 사현의 칼라 뒤쪽을 정리했다.

“안 귀찮니?”

“형은 제 전시회 준비할 때 귀찮아요? 바닥부터 조명까지 다 형이 컨펌하잖아요. 배송도 하나하나 다 살피면서. 그거 되-게 번거롭고 귀찮을 것 같은데.”

“아니. 그거랑 이거랑 같아?”

“다를 건 또 뭐야. 형은 제 그림이 좋아서 그러는 거고, 저는 형이 좋아서 이러는 거고.”

“…….”

사현이 입을 꾹 다물었다. 개소리는 개소리로 받아쳐야 하는데. 못하는 게 없는 제가 개소리에는 영 재능이 없어서 이겨 먹기가 힘들었다. 예전에는 싸우면 팔 할은 이겼는데, 요즘은 반 정도 간신히 이기는 것 같다.

애가 너무 똑똑하고 능청맞아졌어.

사현이 눈을 가늘게 뜨며 양배추즙을 마셨다. 구정물 같은 맛에 목구멍이 썩는 듯했다. 그러나 다 비우지 않으면 바짓가랑이를 잡고 질질 늘어질 우영을 알아서 꾸역꾸역 삼켜 냈다.

사현은 텅 빈 컵을 검사 맡고서야 구두를 신을 수 있었다. 우영이 칭찬의 의미로 그의 입안에 무가당 딸기 설탕을 넣어 주었다. 그 후 그에게 코트를 입혔다. 밖이 추우니 목도리도 칭칭 감아 주고 싶은데, 사현은 갑갑한 걸 좋아하지 않아서 기껏 둘러 줘도 엘리베이터 안에서 다 풀어 버리곤 했다.

“잘 다녀와요.”

“응. 뽀뽀해 줘.”

사현이 팔을 벌리며 말했다. 우영이 기다렸다는 듯 그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통통한 입술에 쪽쪽 키스했다. 어제 낮에만 해도 입술이 까끌까끌하더니, 밤새 잘 먹고 잘 잤다고 그새 말랑말랑해졌다.

그게 어찌나 뿌듯하고 감사한지.

우영이 입술 새로 혀를 비죽 내밀었다. 그럼 사현이 목을 끌어안으며 그 혀를 쭙 빨아 당겼다. 우영은 딸기 향이 가득한 사현의 입안을 양껏 빨아 먹었다. 사현 역시 우영의 혀를 냠냠 먹어 치웠다.

두 사람은 아침에 나누기에는 조금 남세스러울 정도로 진하게 키스했다. 그러다 입술이 떨어지고, 우영이 사현을 온몸으로 껴안았다.

“내일부터 주말이네요.”

“응.”

“우리 이틀 내내 떨어지지 말고 있어요.”

“응.”

“보고 싶을 거예요.”

“나도.”

사현이 널찍한 등을 도닥거렸다. 헤어지려니 아쉽다. 그래도 그의 말마따나 내일부터 주말이니 온종일 붙어 있을 수 있었다. 섹스도 잔뜩 하고, 삼시 세끼 같이 먹고, 그가 그림 그리는 걸 구경하고, 매시간마다 사랑을 속삭여야지.

두 사람은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떨어졌다. 우영이 사현의 뺨을 다정히 쓰다듬었다. 사현이 그런 우영의 손목에 꾹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그 후에 질질 늘어지는 발걸음을 추슬러 집을 나섰다.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고, 띠리릭- 도어 록이 잠겼다.

우영은 그가 사라지고 난 후에도 한동안 현관에 멀거니 서 있었다. 혹시나 사현이 무언가를 두고 가서 다시 올까 봐. 아니, 다시 오길 바라면서.

그러나 오 분쯤 기다려도 사현은 나타나지 않았다. 우영이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고는 이런저런 간식거리를 챙겨 작업실로 돌아갔다.

우영은 오전 10시까지 마저 그림을 그렸다. 그쯤 되면 눈이 가물가물 감긴다. 잘 시간이 됐다는 뜻이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그림을 더 그려 보려다 이내 포기했다. 잠을 줄이면서 그린 그림은 볼품없다. 우영은 고통과 괴로움을 동력으로 그림을 탄생시키는 작가가 아니었다. 활기차고, 행복했을 때 그림이 가장 좋게 나왔다.

언젠가 쏟아지는 잠을 밀어내며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사현이 해 준 말이었다. 왜 잠까지 줄여 가며 작품을 망치냐고.

그 말을 듣고 난 이후로는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땐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그게 제 그림을 좋아해 주는 이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우영은 욕실에 가 손을 씻고 양치를 했다. 그리고 방으로 가서 암막 커튼을 치고 침대에 풀썩 엎어졌다. 사현의 침실에서 잘까, 싶은데 일어나 2층까지 올라가기가 귀찮았다.

우영은 꾸물꾸물 몸을 뒤틀어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핸드폰을 밝혔다. 사현에게 메시지를 보내기 위함이었다. 토독토독 자판을 누르는 손가락이 전과 달리 빠르고 정확했다.

[사현이 형]

[저 이제 자요]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요!]

[안뇽♥]

[곰돌이가 뽀뽀하는 이모티콘]

[곰돌이가 손 흔드는 이모티콘]

[곰돌이가 엉덩이 흔드는 이모티콘]

폴더 폰을 들고 다니던 우영은 이제 이모티콘도 쓸 줄 안다. 하물며 이 곰돌이 이모티콘은 제가 직접 산 것이다. 큐레이터 누나가 가르쳐 주었다.

막 배웠을 땐 신나서 사현에게 이모티콘을 사십 개쯤 보냈는데, 정신 사납다고 혼이 났다. 그 후로는 세 개에서 다섯 개 사이로 보내려고 노력했다. 세상에 귀여운 이모티콘이 너무 많아서 고를 때마다 미간에 힘을 주게 됐다.

우영은 핸드폰을 빤히 보며 답을 기다렸다. 십 분 정도 기다리다가, 답이 오지 않으면 그냥 잘 생각이었다. 사현은 바쁜 사람이니까. 따박따박 답이 오지 않는다고 실망하거나 서운해하지 않았다.

근데, 운 좋게도 답이 오 분 만에 왔다.

[엉덩이는 왜 흔들어.]

[상상되게.]

메시지를 두 번 반복해 읽은 우영이 히죽 웃었다. 주름 하나 없는 슈트를 멋지게 차려입은 사현이, 고급스러운 사장실에서 다리를 꼬고 서류를 보다, 제 메시지에 답을 보내는 장면이 상상됐다.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있다가 피식 작게 웃었겠지.

“으……. 너무 멋있어.”

우영이 얼굴을 수그리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다 다시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답장을 뭐라고 보내나, 어떻게 보내야 그가 제 생각을 조금 더 해 줄까, 고민하는데 사현에게서 또 다른 메시지가 왔다.

[잘 자, 우영아.]

“…….”

우영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저 짧은 문장이 어쩜 이리 좋은지. 제게 국한된 다정함인 걸 알아서 더 좋았다. 귀찮은 메시지 폭격에도 꼬박꼬박 읽어 주고, 답해 주고, 잘 자라고도 해 주고.

모두 사현이 저를 사랑한다는 증거였다.

“너무 좋아…….”

우영이 이불을 둘둘 말아 껴안았다. 그리고 포근하고 보드라운 그곳에다 얼굴을 콱 처박았다. 그렇게 질식할 때까지 행복을 삼키다, 잠든다는 자각도 없이 까무룩 잠이 들었다.

비로소 우영의 하루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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