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우리의 밤
우영은 곱게 슈트를 차려입은 채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기다란 다리를 느슨하게 꼰 그가 손목시계를 매만졌다. 네 번째 전시 축하 선물로 사현이 준 거였다. 이제 시계쯤이야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말했는데도 굳이 선물을 주고 싶다며 손목에 걸어 줬다.
은빛이던 저번 시계와 달리 묵직한 금빛 시계가 퍽 멋졌다. 헌데 어째서인지, 그 시계를 내려다보는 우영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묘하게 서늘한 것이 평소에 보기 힘든 얼굴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띡띡띡, 띡띡띡띡, 도어 록 눌리는 소리가 났다. 우영이 느긋하게 몸을 일으켜 현관으로 다가갔다. 사현이 헐레벌떡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자기야! 미안해!”
작은 몸이 바람 냄새를 담뿍 묻힌 채로 우영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만면 가득 미안함을 띤 그가 어쩔 줄 모르고 동동 발을 굴렀다.
“너무 늦었지? 내가 진짜 빨리 오려고 했는데, 응? 미팅이 길어져서⋯⋯. 막 화도 내고, 신경질도 내고 그랬는데⋯⋯. 인간들이 제이보다 더 냉혈한이야. 눈 하나 깜짝 안 해.”
사현이 변명을 속사포처럼 내뱉었다. 뭐 그리 대단한 죄를 지었다고 눈이 그렁그렁했다.
사현이 화 그룹에 들어간 지 일 년하고도 삼 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그는 조금 어려졌다. 일하는 것도 그렇고, 성격도 그렇고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 우영의 앞에서만 이렇게 칭얼거리고 몸을 비비 꼬고 발을 들썩였다.
우영이 사현의 이마를 살살 쓸어 넘겼다. 흉측했던 상처는 우영의 지극한 관심 덕에 연한 흉터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하얗고 매끈한 이마에 또 손가락 끝이 간지러워졌다. 넘치는 사현을 어딘가에 묻히고 싶었다.
“저 혼자 가도 되는데.”
우영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혼자는 무슨. 저는 아직 사현 없이는 바깥이 무서운 애송이다. 그래도, 저 때문에 헐레벌떡 달려온 사현에게 미안해서 괜히 한번 말해 본 거였다. 일종의 예의지, 예의.
그러자 사현이 우영의 허리를 꽈아악 세게 껴안았다. 컥 소리가 절로 날 정도로 옴팡진 힘이었다.
“내가 싫어서 그래. 너 걔들이 칭찬해 주고 잘해 주고 그러면 좋다고 웃을 거잖아. 이번엔 또 몇 명의 누나랑 형을 만들어 오려고?”
사현이 앙칼진 고양이처럼 눈을 홉떴다.
오늘은 과거 불발됐던 한호 자동차와의 미팅이 있는 날이었다. 그땐 사람이 많은 게 무섭다느니, 자신이 없다느니, 온갖 변명으로 거절해 놓고는 가영에게 난데없이 같이하자고 했단다. 그 후로 회사를 옮기게 된 사현이 바쁜지라 흐지부지 미루고 있었는데, 결국 오늘 만나게 됐다.
약속 시각은 다섯 시. 미팅을 하기엔 늦은 시각이었으나 사현이 어떻게든 일찍 퇴근해서 같이 가겠노라 고집을 피운 덕에 그리 잡혔다. 그리고 우영은 그게 아주, 아주 좋았다. 아무래도 저 혼자 가는 것보다 사현과 함께 가는 게 훨씬 편안하니 말이다.
“에이⋯⋯. 저한테 형은 사현이 형뿐이에요.”
우영이 실실 웃으며 사현의 이마에 입술을 비볐다. 아아, 바닐라 냄새. 이렇게 해가 떠 있을 때 그와 함께하는 게 대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모두가 예상하다시피, 화 그룹으로 넘어간 사현은 아주 아주 바빴다. 그나마 요즘은 업무도 익히고, 회사 실정도 파악하고, 직원들과 안면을 트면서 일에 요령이 생겨 망정이지. 처음 일 년은 일에 치이고, 명현의 감시에 치이고, 주말엔 갤러리 일에 치여서 다 죽어 가는 사람처럼 굴었다.
우영은 불만이 열기구의 풍선만큼이나 부풀었으나 감히 무어라 하지 못했다. 제가 갤러리를 놓지 말라 부탁한 것이기 때문에. 저렇게 바쁠 줄 알았으면 그냥 관두라고 할까, 싶다가도. 주말에 그를 따라 <갤러리 비>에 나가 그가 그림 앞에 서 있는 걸 보면 너무 좋아서 까무러칠 것 같았다.
우영에게 사현은 아직 <갤러리 비>의 B였다.
“그래서? 누나는? 누나는 만드시겠다?”
사현이 우영의 아랫도리를 살살 문지르며 캐물었다. 우영의 등이 뻣뻣하게 곤두섰다. 머리가 싸하게 식고, 아래가 대번에 묵직해졌다. 기둥은 두툼해지고, 고환이 뻣뻣하게 올라붙었다.
“⋯⋯이미 늦었는데. 오늘 미팅 취소할까요?”
그리고 침대로 가요. 욕실도 좋고, 소파도 좋아요. 우영이 지지 않고 사현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으르대는 음성은 덤이었다. 그와 질펀하게 몸 섞은 지가 언제더라. 까마득하다. 며칠 못 만진 엉덩이가 전보다 조금 작아진 것 같아 적잖이 짜증이 났다.
“안 돼. 오늘도 간신히 시간 낸 거란 말이야. 변명 만들 기력도 없다, 이제.”
사현이 항복의 뜻으로 두 손을 들었다. 우영이 아쉽다는 듯 사현의 손바닥과 손끝에다 쪽쪽 입을 맞췄다.
“근데 자기 오늘 되게 예쁘다.”
사현이 맥락 없이 우영을 칭찬했다. 감색 캐시미어 니트에 블레이저 재킷을 입은 게 기가 막혔다. 사현은 우영이 얇은 티셔츠나 니트를 입는 걸 좋아했다. 그의 두툼하고 단단한 가슴 근육이 여실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현이 찹찹 입맛을 다시며 우영의 가슴골을 훔쳐보는데, 우영이 새초롬히 재킷으로 앞을 여몄다.
“저랑 섹스 할 거 아니면 그렇게 보지 말아 주실래요. 흥분되거든요.”
그렇게 말을 톡 쏴붙이더니 흥, 하며 구두에 발을 꿰었다. 넙데데한 등을 보던 사현이 킥킥거리며 그를 따라나섰다.
“우리 얼른 끝내 버리고 와서 같이 씻자. 알았지?”
“몰라요.”
“아, 왜! 같이 씻자!”
사현의 해맑은 음성이 현관을 웅웅 울렸다.
* * *
미팅은 즐거웠다. 먼 옛날 경험했듯이, 처음부터 끝까지 우영을 칭찬하는 말만 주야장천 주고받았다. 가영을 비롯한 팀원들이 우영의 그림이 얼마나 멋진지, 얼마나 아름답고, 어떻게 한국 미술사에 한 획을 그었는지 말하면 사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는 더 대단해질 거라며 자랑했다.
우영은 이게 직장인의 미팅인가, 싶었는데 사현이 말하길. 어차피 계약서 검토는 끝났고. 조건이 나쁘지 않고. 이력에도 도움이 될 것 같고. 하지만 어느 정도 튕겨 주는 맛이 있어야 한다며 냉큼 도장을 찍지 않고 친분을 쌓는 척, 간을 보는 거라고 했다.
우영은 그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제가 뭘 알겠는가. 사현의 말이 다 맞겠지. 나름대로 개인 전시를 네 번이나 했으나 사회생활은 여전히 어려웠다.
미팅이 끝난 후, 두 사람은 곧장 침대로 갈 태세였던 수 시간 전과 달리 허기진 배를 감싸고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배고픈 상태로 몸을 섞는들, 오래가지 못한다. 오늘은 오랜만이니만큼 서로를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먼저 배를 빵빵하게 채워 둬야 물고 빨 체력도 생기는 것이다.
번지르르한 레스토랑은 사현과 우영이 이따금 오는 곳이었다. 고기가 맛있었고, 와인 종류가 많았고, 테이블이 띄엄띄엄 있어서 적당히 프라이버시를 지킬 수 있었다.
사실 사현이 넌지시 김밥천국을 제안했으나 우영이 거절했다. 오늘 멋지게 입은 김에 좋은 곳에서 밥을 먹자는 주장이었다. 자신이 사겠다는 깜찍한 말도 했다. 사현은 뭐가 됐든 우영과 함께하기만 하면 됐기 때문에 곧장 차를 돌렸다.
“그리고 싶은 건 정했니?”
사현이 우영 몫의 고기를 썰며 물었다. 줄줄 흐르는 핏물을 보며 침을 삼키던 우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자동차 관련 다큐멘터리도 보고요, 카페에 앉아서 지나다니는 차도 보고요, 제인 실장님이랑 큐레이터 누나들이랑 박람회도 다녀왔어요. 한호 자동차에서 카탈로그랑 이미지도 많이 보내 주셨고요.”
“그래서?”
“이번에 한호에서 새로 나오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엄청 예쁘더라고요. 헤드라이트는 음⋯⋯ 눈 같은 느낌이잖아요. 그걸 접합시켜서 가 보려고요. 김 팀장님은 「P3001」처럼 서울 도심을 배경으로 해 줬으면 좋겠대요.”
제법 상세한 우영의 설명에 사현이 으음, 목으로 신음했다.
서울의 불야성을 질주하는 번뜩이는 헤드라이트. 우영의 색감이 묻은 풍경이 어느 정도 상상이 갔다. 분명 멋진 작품이 탄생할 것이다. 늘 그래 왔으니까.
“얼른 보고 싶네.”
사현이 우영의 앞에 일정하게 썰린 고기를 내려놓았다. 우영이 열심히 할 거라며 고기를 쿠욱 찍었다.
사현과 이것저것 하도 열심히 먹으러 다녀서 이제 선호하는 스테이크 굽기도 생겼고, 함께 곁들이길 좋아하는 채소 종류도 생겼는데 칼질은 여전히 할 줄 모른다. 항상 사현이 잘라 주기 때문이다.
그가 저를 위해 고기를 썰어 주는 걸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나이프와 포크를 쥐고 고기를 슥슥 자르는 모습은 정말⋯⋯ 아찔할 정도로 섹시하다.
“형은요? 오늘 월차 낸 거예요? 아니다, 반차라고 하나?”
“반차? 내가?”
사현이 헛웃음을 흘렸다. 반차. 월차. 휴가. 사현은 그런 것에 연연할 위치가 아니었다. 쉬고 싶으면 쉰다. 놀고 싶으면 놀고. 그래도 됐다. 명현 역시 그런 것에 대해 무어라 말을 얹을 사람이 아니었다. 일만 완벽히 하면 격주로 회사에 나가도 별 말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사현의 성격이 워낙 집요한지라 일을 끝까지 물고 넘어져서 문제였다.
그래도 지금은 나은 편이다. <갤러리 비>에 있을 땐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웠다. 눈뜰 때부터 감을 때까지 온통 일 생각이었다. 헌데 요즘은 어떻게 해야 이 지루한 일을 얼른 끝내고 우영의 얼굴을 볼 수 있나, 그 생각뿐이다.
“나는 그런 거 필요 없는 사람이야.”
사현이 와인을 홀짝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우영이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모든 이의 선망이자 이상향의 위치에 있는 사현이 그렇게 멋질 수 없었다.
며칠 전 기사에서도 봤다. 화 그룹의 주가가 올랐다느니, 화 벤처 투자에서 투자한 스타트업 회사가 몇 배로 상승해서 국외 지사까지 준비 중이라느니. 그게 오롯이 사현의 힘이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사현의 능력이 전혀 미치지 않았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멋져, 멋져. 내 애인 너무 멋져. 돈도 많은데 능력도 좋아. 얼굴은 뭐 루브르에서 조각상이 사라졌다고 잡아갈 수준이지.
사현이라는 늪에 걸어 들어간 우영이 익사를 자처하고 있을 때였다. 비스듬히 턱을 괸 사현이 느릿하게 입을 뗐다.
“그래서 말인데, 우영아.”
“네.”
“우리 휴가 갈까.”
“휴가요?”
“응. 나 화 그룹 들어가고 제대로 쉰 적이 한 번도 없잖아. 일 년 반 죽자고 일했으면 휴가 갈 때도 됐어. 너도 전시 끝냈겠다, 나도 얼마 전에 큰 건 하나 끝냈거든. 그리고 5월이지. 날씨는 좋은데, 휴가철은 아닌. 딱 좋은 타이밍 아니니.”
사현이 포크로 고기를 툭툭 굴렸다. 흥미 없는 실타래를 굴리는 고양이 같은 모습이었다. 몇 개나 먹었다고 벌써 입맛이 떨어진 모양이다. 우영이 제 몫의 고기 중 큰 것을 찍어 그의 입 앞으로 내밀었다.
사현이 별다른 반항 없이 그것을 받아 물었다. 배가 부르든, 입이 떫든 우영이 주는 건 일단 받아먹고 봤다. 우영이 기특하다는 듯, 사현의 손등을 가볍게 쓰다듬고는 물러났다.
“어디로요?”
“비밀이야.”
“뭐야. 이미 다 생각해 뒀구나?”
이제 사현의 머릿속을 어느 정도 꿰뚫어 볼 수 있게 된 우영이 피식 웃었다. 또 무슨 꿍꿍인지. 뭐, 어디가 됐든 괜찮을 것이다. 사현과 함께라면 불구덩이라도 꽃밭이 될 테니까.
근데 궁금하긴 했다. 저번처럼 호텔에서 룸서비스를 먹으며 호의호식하려나. 아니면 바다라도 가려나. 우영의 발이 의자 밑에서 춤을 추고 있는데, 사현이 넌지시 힌트를 흘렸다.
“응. 비행기도 끊어 놨어.”
“⋯⋯저 비행기 타요?”
우영이 헙, 헛숨을 들이마셨다. 비행기라니! 비행기라니! 그의 눈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커다래졌다. 비행기는 한 번도 못 타 봤다. 국내 여행도 수학여행이나 졸업여행으로 간 게 다였다. 당장에 오늘 먹을 것도 없는 삶이었던지라 떠나고 싶다는 생각도 못 했다.
여권도 먼 과거, 사현과 첫 전시를 준비할 때. 언젠가 필요할 일이 있을 거라며 만들어 두라 해서 만든 거였다. 그 이후로 꺼내 본 적이 없어서 여권이 노란색인지 파란색인지도 가물가물했다.
⋯⋯한국 여권이면 한국어로 쓰여 있나? 해외로 가는 거니까 세계 공용어인 영어가 쓰여 있나? 내 여권인데 내가 못 읽으면 어쩌지? 우영이 멍청한 걱정을 거듭했다.
“응. 너 비행기 타.”
사현이 심드렁하게 사실을 재차 확인시켜줬다. 이번 기회에 재벌 애인을 둔 기분이 어떠한 건지 톡톡히 알려줄 생각이었다.
우영이 어깨를 오므렸다가 펴며 오두방정을 떨었다.
“와⋯⋯. 저 내일 옷 사러 가야겠어요.”
“그래라.”
“캐, 캐리어도 없는데.”
“그것도 사.”
“카메라, 카메라도 살까요?”
“그러든지.”
“근데 저 외국어 하나도 못 하는데 어쩌죠?”
“내가 항상 옆에 있을 테니까 괜찮아.”
사현은 와인을 홀짝이며 기대에 찬 우영의 말을 하나하나 대꾸해 줬다. 소풍을 앞둔 어린아이처럼 신난 우영이 그저 귀여웠다. 그의 캐러멜 빛 광대가 동그랗게 솟아 있는 게, 그곳에다 찐하게 입술을 비비고 싶었다. 음⋯⋯ 다른 걸 비벼도 좋고.
사현이 순진하게 웃고 있는 우영을 보며 엄한 상상을 했다. 그러고 있으니 아랫도리가 저절로 뻐근해졌다.
얼른 먹고 집에 가야겠다.
사현이 놓았던 포크를 다시금 들었다.
* * *
우영은 공항의 퍼스트 클래스 전용 프리미엄 체크인 카운터에서 티켓을 받고서야 목적지가 뉴욕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뉴욕! 뉴욕이라니! 분명 대단한 곳에 갈 것이라, 가늠하긴 했다만 뉴욕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상업, 금융, 무역은 물론 예술과 문화까지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서 있는 도시. 누구든 간에 죽기 전에 한 번은 가 봐야지, 선망하는 도시. 가 본 적은 없지만 어떤 생김새인지 그릴 수 있을 만큼 생생한 이상향의 도시. 온갖 예술과 영화의 배경이자 원천인 도시.
우영이 ‘NEW YORK’라 적힌 티켓을 엄지로 살살 쓰다듬었다. 그러고도 부족해서 티켓 안으로 들어갈 듯 한껏 고개를 처박고 있는데, 사현이 그의 팔뚝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자기야, 공항은 와 봤니?”
“아니요. 제가 공항 올 일이 뭐 있어요.”
“그럼 라운지 갈래? 아니면 구경삼아 한 바퀴 돌래? 일부러 일찍 와서 두 시간쯤 시간 있어.”
사현이 흘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금빛에 묵직한 바디. 우영의 것과 같은 디자인의 시계였다. 우영이 아랫입술을 우물거리며 고민했다. 그러다 거센 콧김을 내뿜었다.
“한 바퀴 돌고, 라운지도 가요.”
“그래.”
사현이 고개를 까딱하며 체크인 카운터를 벗어났다. 우영이 얼른 그의 뒤로 따라붙었다.
“근데 라운지가 뭐예요?”
그답게 순진한 질문을 하며.
우영은 한껏 신난 얼굴로 면세점을 돌아다녔다. 가격이 원화로 달리지 않고 달러로 달린 게, 벌써 외국에 온 기분이었다. 그런 우영에게 사현은 카드만 넘겨줬다.
사현은 우영과 달리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명품의 천국, 패션의 중심인 뉴욕에 가는데 뭣 하러 면세점에서 시간을 낭비하겠나. 그저 우영의 유흥에 맞춰주는 거였다.
신나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우영이 기껏 골라 온 것은 유명 브랜드의 초콜릿 한 통이었다. 그마저도 “형이 좋아할 거 같아서요. 비행기 안에서 같이 먹어요.”라며 웃었다. 사현은 하마터면 사람들이 북적이는 면세점 한가운데에서 우영의 입술을 줄줄 빨 뻔했다.
그리고 라운지에서 잠깐 쉬다가(사현만 쉬고 우영은 라운지를 통째로 씹어 먹겠다는 듯 음식을 퍼 날랐다), 비행기에 탔다. 퍼스트 클래스는 보딩 순서도, 줄을 서는 곳도 달랐다. 사현이 우왕좌왕 눈알을 굴리는 우영을 끌어다 곧장 비행기에 실었다.
“와, 형. 호텔 같아요.”
고요한 기내에 우영이 속닥거렸다. 사현이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침도, 저녁도 아닌 어정쩡한 평일의 낮 시간. 퍼스트 클래스는 우영과 사현을 제외하곤 탑승객이 하나도 없었다.
두 명의 승무원이 사현과 우영의 곁에 각각 붙어 수발을 들었다. 수납장을 설명하고, 겉옷을 받아주고, 웰컴 드링크와 따뜻한 물수건을 가져다줬다. 자리에 앉은 사현이 물수건으로 슥슥 손을 닦는데, 어쩐지 볼이 따끔따끔했다.
사현이 무심코 시선을 돌렸다. 우영이 자신의 자리를 내버려 두고 제 옆에 멀뚱히 서 있었다. 입매가 굳게 닫힌 게 심통 난 얼굴이었다.
“왜? 자리가 마음에 안 들어? 일부러 창가 자리로 줬는데.”
사현은 우영이 방방 뛰며 좋아할 줄 알았다. 창밖으로 펼쳐진 하늘에 눈을 못 뗄 거라 생각했거늘. 어째서 저런 표정이지.
“왜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어요? 가까이 못 가요? 이렇게 열네 시간을 어떻게 가요.”
우영이 짜증스레 의자를 매만졌다. 아무리 가림막을 내리고, 의자 끄트머리로 몸을 붙여도 사현과의 거리는 가까워지지 않았다. 딱 붙어 앉아 어깨를 부딪치고, 팔뚝이 마주 닿고, 손도 잡고, 가끔 몰래 입술도 비빌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건 뭐, 같은 집에 살면서 침대는 따로 쓰는 꼴이었다.
사현이 뒤늦게 그와 자신의 거리를 살폈다.
“음⋯⋯. 그 생각을 못 했네.”
사현의 만면에 낭패가 스쳤다. 그에게 비행기란 응당 퍼스트 클래스뿐이었다. 가끔 퍼스트 클래스가 존재하지 않는 노선이 있으면 비즈니스를 탔지만, 썩 선호하지 않았다.
물론, 이코노미는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다. 닭장처럼 좁은 공간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서, 옆 인간이 내뿜는 이산화탄소로 호흡할 거라 생각하면 구역질이 다 나왔다.
근데 이렇게 우영과 떨어져 갈 줄 알았다면 이코노미 한 줄을 빌릴 걸 그랬다. 그럼 그의 어깨에 기대어 영화도 보고, 시시덕거리고, 밥도 먹여 주고, 그랬을 텐데.
미처 예상치 못한 문제에 사현이 턱을 쓰다듬는데, 친절한 얼굴의 승무원이 곧 비행기가 이륙한다며 자리에 앉기를 부탁했다. 우영이 어쩔 수 없이, 위치는 옆자리나 거리는 옆자리가 아닌 자리에 착석했다. 그 얼굴이 어찌나 침통하고 우울한지 풀죽은 강아지 같았다.
사현이 호출 버튼을 눌러 승무원을 불렀다. 곧 멀끔한 차림새의 승무원이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라며 나타났다. 사현이 앞뒤 설명 없이 냅다 목적을 쐈다.
“혹시 좌석 다운그레이드 되나요?”
“네?”
“비즈니스석으로 이동할 수 있냐고요.”
“⋯⋯고객님, 지금 퍼스트 클래스에 계시는데, 그보다 한 단계 낮은 좌석인 비즈니스로 가고 싶다는 말씀이 맞으실까요?”
승무원이 귀를 의심하며 재차 물었다. 혹 사현이 좌석 등급을 잘못 정의하고 있을까, 말을 풀어 주기도 했다.
“네.”
사현이 간결히 턱을 주억였다. 승무원의 얼굴 가득 난처가 차올랐다. 이코노미와 비즈니스석의 가격 차이는 엄청나다. 비즈니스와 퍼스트 클래스석의 차이는 더 엄청나다. 더군다나 가까운 곳으로 향하는 비행기도 아니고, 무려 뉴욕인데. 퍼스트 클래스를 담당하면서 돈 많은 사람이야 수도 없이 봐 왔지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어, 아⋯⋯. 혹시 이유를 여쭤 봐도 될까요? 불편하신 점이 있다면 저희가 보완하겠,”
“제가 분리 불안이 있어서요.”
“예?”
“제가 분리 불안이 있다고요. 저기, 저 사람이랑 떨어지면 불안해서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고, 속 메슥거리고, 식은땀 나고 그래요. 근데 퍼스트 클래스가 넓은 걸 깜빡했네요. 이렇게 가다간 혼절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비즈니스 좌석 남아 있는지 알아봐 주실래요?”
사현이 몹시 무감한 얼굴로 우영을 가리켰다. 승무원의 입가가 꿈틀 아래로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분리 불안이라는 병이 있다기엔, 지나치게 강해 보이는데. 눈빛이 형형한 게 호랑이도 뒷걸음질 치겠거늘. 더군다나 분리 불안은 어린아이나 강아지에게나 있는 증세가 아니던가.
승무원은 반박할 말이 아주 많았으나 직업 정신으로 간신히 말을 삼켰다. 그리고 빙긋 보기 좋은 미소를 지었다.
“고객님. 저희 항공사에는 더블베드 사이즈의 스위트 퍼스트 클래스가 따로 있습니다. 기내 가장 뒤쪽에 있는 좌석인데, 팔걸이와 가림막을 없애고 좌석을 붙일 수 있게 되어 있답니다. 마침 비어 있는데, 그리로 옮길 수 있도록 도와 드릴까요?”
그녀는 참으로 괜찮은 대안을 내놓았다. 더블베드. 잠자코 대화를 듣고 있던 우영의 낯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열네 시간 동안 사현과 함께 누워 하늘을 유영하다니. 꿈만 같았다.
사현 역시 놀랍다는 듯 눈썹을 들썩였다. 이렇게 기특한 좌석이 있을 줄이야. 다음부터는 비서에게 ‘스위트’ 퍼스트 클래스로 끊으라고 말해야겠다.
“좋아요. 부탁드릴게요.”
사현이 옷가지를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영이 냉큼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뒷자리로 향하는 발걸음이 방정맞을 정도로 신나 있었다.
활주로를 가로지르는 비행기가 심하게 흔들렸다. 우영은 무섭지도 않은지 창에다 이마를 처박고 바깥을 구경했다.
사현이 그런 우영의 뒤통수를 보며 아쉽게 입맛을 다셨다. 너무 빠르다고, 흔들린다고, 이러다 떨어지면 어쩌냐고 무서워하길 바랐거늘. 그러면서 제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길 바랐거늘. 안타깝게도 우영에게 고소 공포증은 없는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행기가 구름에 둘러싸였다. 흔들림이 사라지고 안전띠 지시등이 꺼졌다. 골반을 답답하게 짓누르던 안전띠를 푼 사현은 승무원을 호출해 신문과 매거진을 전달받았다. 빼곡하게 적힌 활자를 아무 생각 없이 읽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질릴 만큼 구름을 구경한 우영이 마침내 사현에게도 관심을 보였다.
“형. 구름이 엄청 가까워요.”
“응.”
“진짜 솜사탕 같아요.”
“그래?”
“땅에서 보는 색이랑 비슷한데 다르네요. 엄청 맑은 하늘색이에요. 새로 산 팔레트에 세룰리안블루를 짜서 오일 한 방울 안 묻히고 발라 놓은 것 같아요. 아⋯⋯ 그림 그리고 싶다.”
우영의 손가락 끝이 꼬물꼬물 움직였다. 사현이 그 손을 잡아 손끝에 쪽쪽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그러고 보니 바빠서 우영이 그림 그리는 걸 구경하지 못한 지도 꽤 됐다.
아쉬워라. 그의 작업실을 제 사장실 옆으로 옮겨 볼까. 그런 얄궂은 생각이 들었다. 근데 실로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같이 출근하고, 같이 점심 먹고, 가끔 시간 비면 그를 구경하다가, 퇴근도 같이하면 일이 즐거워질 텐데.
사현이 우영의 손을 조물조물 매만지며 고민하는데, 똑똑 노크가 울렸다.
“식사 메뉴 드리겠습니다.”
승무원이 두 개의 메뉴판을 내밀었다. 사현은 그 두 개를 모두 혼자 받았다. 우영은 훑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렇게 고급스럽고 비싼 곳은 늘, 항상, 무조건 사현이 담당했다. 우영은 여전히 봐도 잘 모른다. 먹는 것만 세상 잘했다.
사현은 우영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잔뜩 골랐다. 곁들일 와인과 후식도 잊지 않고 주문했다. 금세 다시 나타난 승무원이 군더더기 없는 손길로 착착 테이블을 펼치고, 테이블보를 깔았다. 곧 음식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저 앉아서 받아먹기만 하기에는 심각할 정도로 많은 가짓수였다.
사현은 메인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배가 부르다며 수저를 놨다. 아무리 비싼 음식이라고 해도, 결국엔 기내식이다. 지상에서 셰프가 방금 해서 내놓은 음식과 비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사현의 머릿속엔 조금 이따 시켜 먹을 라면 생각뿐이었다.
“형. 이거 진짜 맛있어요.”
그러나 우영은 코스의 처음부터 끝까지 한껏 감탄하며 모두 먹어치웠다. 그로 모자라 사현의 것까지 삭삭 비웠다. 라운지에서 먹었던 건 진즉 소화한 모양이었다.
사현은 그나마 입에 맞는 와인을 홀짝이며 우영이 먹는 것을 구경했다. 이따금 그가 먹여주는 것을 날름날름 받아먹기도 했다.
식사를 마치고는 화장실에서 함께 양치질을 했다. 퍼스트 클래스 어메니티에 포함된 잠옷으로 갈아입어도 봤다. 팔다리가 워낙 긴 우영은 손목과 발목이 덜렁 나왔다.
그게 어찌나 귀여운지, 사현이 찰칵찰칵 사진을 찍었다. 민망해하던 우영이 에라 모르겠다며 한껏 포즈를 취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커플 잠옷은 맞춘 적이 없다. 대부분 기절하듯 잠들 때까지 섹스하고 알몸으로 자기 때문이다. 떠오른 김에 뉴욕에서 멋진 커플 잠옷을 사자며 시시덕거렸다.
자리로 돌아오자 승무원이 의자를 침대로 만들어 놨다. 폭신한 매트가 깔리고, 그 위에 제법 괜찮은 질감의 이불과 베개가 놓여 있었다.
우영과 사현은 문을 꼼꼼히 닫고, 조명을 낮추고, 곧장 서로의 품을 파고들었다. 사위가 막힌 침대라 그런지 집보다 안락하게 느껴졌다.
아, 이게 얼마 만에 경험하는 평온함인지. 이번 휴가를 준비하면서 사현도, 우영도 꽤 바빴다. 2주나 되는 휴가이기 때문에 사현은 아주 많은 일을 미리 처리해야 했고, 우영 역시 한호 자동차에 보낼 스케치나 <갤러리 비>에서 잡아 온 커미션을 완성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둘 다 묵직하게 늘어지는 눈꺼풀을 참기가 힘들었다.
우영이 사현의 허리를 가만가만 쓸어내렸다. 사현 역시 우영의 등을 토닥였다. 서로의 치열한 일상을 위로하고 안정을 바란다는 뜻이었다.
“하늘 위에서 형이랑 껴안고 자다니. 천국에 온 걸까요.”
우영이 사현의 이마에 입술을 묻은 채 웅얼거렸다. 사현이 실소했다.
“천국. 그래, 이런 천국이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다.”
세상 그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우리 둘만의 공간. 일도 타인도 다 내팽개치고 새로운 땅으로 떠나는 길. 이런 게 천국이 아니라면 무어가 천국이겠는가.
사현의 정신이 가물가물 한창 흐려질 때였다. 우영이 갑자기 번뜩 눈을 떴다.
“천국보다 더 좋은 게 생각났어요.”
“⋯⋯뭔데?”
사현이 잠기운에 흠뻑 잠긴 음성으로 물었다.
“신혼여행이요.”
“⋯⋯.”
“우리 지금 꼭 신혼여행 가는 것 같아요.”
두둥실 떠오른 우영의 목소리에 사현이 잠깐 숨을 멈췄다.
“신혼⋯⋯여행?”
“네. 신혼여행.”
“너 나랑 결혼하고 싶니?”
사현이 묘하게 뾰족한 음성으로 물었다. 우영이 턱을 안으로 당기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형은 하기 싫어요?”
잠이 단숨에 휘발했다. 전신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던 행복 역시 사라져 버렸다. 철렁 내려앉은 심장이 잘근잘근 밟히는 듯했다.
“글쎄. 거기까지는 생각 안 해 봤는데.”
사현이 눈을 게슴츠레 뜨며 중얼거렸다. 우영이 어금니를 꾸욱 씹었다가 놨다.
“왜요? 저는 형이랑 내일은 뭐 할까, 모레는 뭐 할까, 일주일 뒤엔 뭐 할까, 일 년 뒤엔, 십 년 뒤엔, 그런 상상하는 거 되게 좋아하는데.”
꼭 유치원생처럼 종알거리는 우영에 사현이 푸흐, 짧은 웃음을 흘렸다.
“그게 무슨 결혼이야. 그냥 연애하는 거지.”
“형이랑 나랑 십 년, 이십 년, 그러다 평생 같이 살면 그게 결혼이죠.”
“우영아, 그건 결혼이 아니야.”
사현이 자못 단호히 선을 그었다. 아무래도 그가 보고 자라온 결혼은 무엇 하나 좋은 게 없었던지라 그 단어가 전혀 반갑지 않았다. 설사 상대가 우영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허나 안타깝게도, 우영은 사현과 전혀 다른 생각인 듯했다.
“형은 저랑 결혼하기 싫어요?”
“음⋯⋯.”
“⋯⋯지금 고민하는 거예요?”
우영이 눈을 부릅떴다. 설마 사현이 이리 나올 줄 몰랐다. 당연히 평생 함께하는 꿈을 꿀 줄 알았는데. 저만 그랬나 보다. 저만 개나리처럼 화창한 미래를 꿈꿨나 보다.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런 우영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현은 정말 진지하고, 깊이 있게 고민했다.
“아무래도 좀⋯⋯ 생각할 게 많지. 한국은 동성 결혼이 허용되지 않으니까 해외에 나가야 할 거고. 거기서도 그냥 우리 결혼할 거야, 시켜 줘. 그런다고 되는 게 아니라 비자 신청하고, 그 나라 가서 시민권 따고, 서류 작성하고,”
“아이,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저는 그렇게 거나한 거 안 바라요. 그냥 형이 앞으로도 나랑 같이 살고 싶으면 그걸로도 충분하다고요.”
우영이 짙은 눈빛으로 사현과 눈을 맞추고, 부러 또박또박 말했다. 사현이 머리를 비스듬히 옆으로 흘렸다. 우영이 정의하고 있는 ‘결혼’은 사현이 정의하고 있는 ‘결혼’과 전혀 다른 것 같았다.
“그런 거라면, 응. 당연하지.”
“그럼 됐어요.”
“근데 그거랑 결혼이랑은 달라.”
사현이 지루한 이론을 설명하려는 늙은 교수처럼 입술을 달싹였다. 우영이 듣기 싫다는 듯, 사현의 뒤통수를 자신의 가슴팍으로 끌어왔다. 그리고 조금 급하게 그의 등을 토닥거렸다.
“알았어요, 알았어.”
“진짜 결혼은,”
“자요, 얼른. 일어나서 라면 먹어야죠.”
“맞아. 나 라면 먹어야 해. 잊지 말고 깨워.”
“네.”
사현에게 라면이란 일종의 만병통치약이다. 여태껏 그는 각양각색의 분식집과 포장마차의 라면을 접수했다. 가끔 ‘신상 라면’이라도 나오면 편의점에서 그걸 싹 털어 온다. 구하기 힘든 건 인터넷을 뒤져서라도 산다.
이번 여행에서 제일 기대하면 좋을 게 뭐냐고 물었더니 사현은 비행기 안에서 먹는 라면이라고 했다. 뉴욕에 가는데, 비행기에서 먹는 라면을 제일 기대하다니. 그게 너무 사현다워서 자그마한 얼굴에다가 온통 뽀뽀를 해 줬었다.
그때를 떠올린 우영이 사현의 이마와 뺨에 쪽쪽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그러다가 가지런히 눈을 감은 그를 따라 잠에 빠져들 무렵이었다.
“우영아.”
사현의 음성이 잔잔히 흘러왔다.
“⋯⋯네.”
우영이 반 박자 늦게 대답했다. 사현이 그런 우영의 목울대를 코끝으로 문지르며 읊조렸다.
“사랑해.”
“⋯⋯.”
“내일도 사랑해.”
“⋯⋯.”
“모레도 사랑해. 일 년 뒤에도, 십 년 뒤에도 사랑해.”
“⋯⋯.”
“그쯤이야 얼마든지 약속할 수 있어.”
“⋯⋯.”
우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울컥 치받은 감동이 목구멍을 틀어막아서 소리를 만들어 낼 수가 없었다. 대신 사현을 힘껏 끌어안았다.
이번 여행은 서울에서 함께하던 시간과는 조금 다른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 사뭇 다른 감정과 함께.
* * *
비행기에서 주는 라면에다 밥까지 말아 먹은 사현은 빵빵하게 부은 얼굴로 뉴욕에 도착했다. 아직 잠기운을 다 털어 내지 못해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는데, 그 얼굴이 어찌나 귀엽던지. 우영은 새로 산 카메라로 그 모습을 찍다가 한소리 거나하게 얻어먹었다.
낄낄거리기도 잠시, 곧 우영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생전 처음 외국인과 말을 섞게 됐기 때문이다. 덩치 좋은 흑인 입국 심사원이 우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이 어찌나 무서운지. 우영은 제 차례가 될 때까지 마른침을 꼬박 백 번은 더 삼켰다.
사현이 ‘걔들도 피곤해서 꼬치꼬치 안 캐물어. 그냥 웃어. 예쁘고 잘생긴 건 영어보다 더 효과적인 공용어니까. 너는 예쁘고, 순진하게 생겼으니까 얼굴 좀 구경하다가 보내 줄 거야.’라고 하긴 했는데. 그래도 긴장감은 가시지 않았다.
이윽고 우영의 차례가 왔다. 사현은 옆줄에 서 있었다. 그와 잠시 눈을 맞춘 우영이 삐거덕거리는 몸짓으로 직원 앞에다 여권과 사현이 대신 작성해 준 입국 신고서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몹시 숙달된 손놀림으로 컴퓨터와 카메라를 보고 여권을 휙휙 넘겼다. 그동안 우영은 속으로 travel, travel, travel만 주야장천 반복하고 있었다.
그때, 직원이 우영을 빤히 쳐다봤다. 우영이 그녀와 눈을 맞추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최대한 예쁘고, 착하게 웃었다.
“Are you a model?”
그녀가 물었다. 우영은 순간 심장이 멈추는 걸 느꼈다. 사현이 알려 준 질문은 이게 아니었는데. What's the purpose of your visit?(방문한 목적이 무엇입니까?)나, How long are you going to stay?(얼마나 머무를 예정입니까?)였는데.
예상 답안지에 없는 질문에 우영이 어쩔 줄 모르고 데구루루 눈알을 굴렸다. 모델. 모델이라니. 갑자기 모델이 왜 나왔지. 설마 패션모델이나 슈퍼모델의 그 모델일 리는 없고. 무슨 뜻일까. 어떤 모델의 폭탄을 가지고 있냐는 뜻일까.
우영이 자신의 편협한 영어 지식을 해치며 고민하는데, 직원이 무어라 신나서 말했다. 앞선 질문보다 훨씬 빠르고, 훨씬 긴 문장이었다. 그나마 전 질문에서는 모델이라는 단어를 캐치했었거늘. 이번엔 한 단어도 알아듣지 못했다.
우영이 어쩔 줄 모르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데, 입국 심사를 마친 사현이 지나가면서 슬쩍 몇 마디를 던졌다. 그 역시 직원만큼이나 빠르고 긴 문장이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자 입국 심사원이 깔깔 방정맞게 웃더니 또 무어라 중얼거리며 우영의 여권에 쾅 도장을 찍고는 여권을 넘겨줬다. 우영이 땡⋯⋯큐, 라고 말하며 빙긋 웃었다. 그러자 직원이 “Have a nice trip!”이라고 말했다.
그 문장은 간신히 알아들은 우영이 여러 번 고개를 주억이며 입국 심사대를 벗어났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사현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른 다가간 우영이 그를 꽉 껴안았다.
“아, 형. 저 다리 풀렸어요. 진짜 거짓말 아니고 첫 전시 오픈할 때만큼이나 떨렸어요.”
“잘했어.”
사현이 다정하게 우영의 허리를 토닥거렸다.
“이제 끝난 거예요?”
우영이 사현의 어깨에 이마를 비비며 물었다.
“응. 짐 찾고, 예약해 놓은 렌트카 받아서 맨해튼으로 갈 거야.”
그 말에 우영이 푸우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 끝났다니. 쿵쾅거리던 심장이 잔잔해졌다. 우영이 한결 밝은 표정으로 컨테이너 벨트를 타고 흘러오는 캐리어를 쏙쏙 골라냈다.
두 사람은 공항 안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하나씩 사 물었다. 우영이 날이 날이니만큼 오늘은 커피를 허용해 주겠다고 해서 사현은 눈을 번뜩이며 샷까지 야무지게 추가했다.
사현은 지도 한번 보지 않고 렌트카 업체로 향했다. 그는 뉴욕에 몹시 익숙한 것 같았다. 넌지시 물어 보니 잠시 유학 생활을 한 적이 있단다. 그 후로도 <갤러리 비> 일로 자주 왔고.
우영은 렌트카 직원과 능통하게 영어를 주고받는 사현을 헤, 입까지 벌리고 구경했다. 사현이 영어를 쓰는 모습은 처음 본다. 분명 멋질 것이라 예상하긴 했다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수십 분 전, 라면 먹고 얼굴이 퉁퉁 부었을 때만 해도 그저 귀여운 고양이 같았는데. 지금은 또 완연한 어른이다.
여러 가지 문서를 작성한 사현이 차 키를 받아 뒤를 돌았다. 우영이 캐리어를 끌고 그의 옆에 바짝 붙어 섰다.
“근데요, 형.”
“응.”
“아까 그 입국 심사원이요.”
“응.”
“저한테 뭐라고 한 거예요?”
“아, 너 혹시 모델이냐고. 자기가 한국 드라마를 즐겨 보는데, 거기 나오는 사람처럼 생겨서 물어본 거래.”
“⋯⋯드라마요?”
“어. 연예인이냐고. 잘생겼다는 뜻이야.”
“아⋯⋯.”
우영이 그제야 이해하겠다는 듯 입을 벌린 채 크게 고개를 주억였다. 그녀가 말한 모델이 그 모델이 맞았구나. 괜히 쫄았다.
“근데 형이 뭐라고 했길래 웃어요?”
“네 영어 실력이 네 얼굴만큼 잘생기지 못했으니 그만 난처하게 하고 보내 달라고.”
사현이 주차된 렌트카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그에 그를 졸졸 따라가던 우영이 우뚝 멈춰 섰다.
“제가 지금 기분이 나빠야 할까요? 아니면 잘생겼다니까 일단 좋아해야 하나?”
참으로 시답잖은 고민을 진지하게 하는 우영이다. 사현이 킥킥 웃었다.
“보통은 기분 나빠하지. 근데 너는 그냥 좋아해. 지구 반대편에 사는 사람이 널 보자마자 잘생겼다고 느꼈다는 거니까. 영어? 그거 다 쓸모없다. 잘생긴 게 최고야. 특히 너만큼 잘생겼으면 0개 국어라도 괜찮아. 잘생긴 게 더 대단한 거거든. 영어는 노력으로 되는데, 잘생긴 건 노력으로 안 돼.”
사현은 그 짧은 순간에 ‘잘생겼다’라는 말을 무려 다섯 번이나 했다. 그걸 듣고 있자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현이 저를 예뻐하는 건 체감할 때마다 좋아죽을 것 같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부모에게 이리 어여쁘게 낳아 줘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전하고 싶을 정도였다. 금세 기분이 좋아진 우영이 히죽거리며 사현의 옆에 발맞춰 섰다.
사현이, 아니, 아마 사현의 비서가 예약했을 차는 아주 화려했다. 무려 노란색 스포츠카였다. 우영이 놀라움을 함뿍 집어삼켰다.
서울에 있는 사현의 차도 충분히 멋지지만, 이 노란색 스포츠카와는 전혀 다르다. 서울에서 타던 검은색 외제 차는 미끈하게 빠져 묵직한 고급스러움을 내뿜었었다. 헌데 이건 화려한 고급스러움이었다. 그저 서 있기만 해도 모두의 시선이 집중될 만한, 그런 차.
우영은 자신이 새로운 땅에 왔다는 걸 비로소 실감했다.
“우와, 이거 뚜껑도 열려요?”
우영이 어깨를 좌우로 움직이며 차를 살폈다.
“그럴걸. 근데 열 생각 없어.”
사현은 뒷좌석에다 짐을 실으며 심드렁히 대답했다.
“왜요?”
“여기 뉴욕은,”
“뉴욕은?”
“냄새나. 더럽고.”
사현이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진다는 듯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그러고는 쏠랑 운전석에 타 버렸다.
“⋯⋯.”
우영이 멍청한 얼굴로 차창 너머의 사현을 쳐다봤다. 그다지 로맨틱하지는 않은 여행의 시작이었다.
우영은 차에 타자마자 금세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 번뜩이는 계기판, 고급스러운 좌석, 뭉근히 풍기는 가죽 냄새. 제 평생 꿈도 꾸지 못했던 스포츠카에 타 보다니. 그것도 뉴욕에서. 믿을 수가 없었다.
우영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안전띠를 찾아 맸다. 내비게이션을 만지작거리던 사현이 룸미러로 흘끔, 그런 우영을 살폈다.
사실 이렇게 눈이 아플 정도로 번쩍거리는 차는 사현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 차를 예약한 이유는 그래도 첫 여행인데 조금 특별했으면 싶어서, 우영의 나잇대라면 이런 차를 좋아할 것 같아서였다. 다행히 제대로 먹힌 모양이다.
“좋니?”
“네.”
“서울 가면 하나 사 줄까?”
사현의 질문에는 높낮음이 거의 없었다. 수십억짜리 차를 사 주겠다고 하면서, 저리도 무감하다니. 차라리 ‘김밥천국에 라면 먹으러 갈래?’가 훨씬 생동감 넘쳤다.
몇 번 눈을 끔뻑이던 우영이 턱을 안으로 당기며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요. 형은 농담을 좀 농담처럼 할 필요가 있어요.”
“농담 아닌데. 근데 나도 당장은 안 돼. 이 브랜드는 주문 제작이라서 한국까지 배송 오는데 제법 시간이 걸릴 거야. 아, 뉴욕에는 시승 행사가 많으니까 날짜 맞으면 들러 보자.”
“아니, 정말 필요 없어요.”
“왜?”
시동을 건 사현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 옆으로 꺾었다. 사 달라는 것도 아니고, 얼마를 보태라는 것도 아니고, 친히 주문까지 해서 바치겠다는데 필요 없다며 거절하는 우영이 이상했다.
“제 주제에 무슨, 무슨 이런 차예요.”
“네 주제가 어때서?”
“어⋯⋯. 돈 욕심이 간장 종지에서 간신히 밥그릇으로 성장한 주제?”
“그러면서 통장에는 삼십억이 들어 있는 주제?”
사현이 픽, 조소했다. 허를 찔린 우영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의 말마따나, 우영의 통장에는 삼십억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 있었다. 사현이 현금을 왕창 쥐여 준 건 아니었고, 두 번째 전시와 세 번째 전시에서 그림을 판 돈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아, 사현이 9:1이던 비율을 4:6으로 올려 주기도 했다.
어디 그뿐이랴. 가끔 들어오는 커미션이나 한호 자동차와의 콜라보로 받은 계약금 역시 어마어마했다. 근데 그렇게 돈이 들어와도 어디 쓸 줄을 알아야 말이지.
끽해 봐야 짬뽕을 먹어야 하나, 짜장면을 먹어야 하나, 고민하지 않고 둘 다 시킨다는 것. 마트에서 장 볼 때 가격을 보지 않는다는 것. 주마다 화방에 가 수십만 원어치의 화구를 산다는 것. 그때 말고 우영이 돈을 쓰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아, 가끔 사현이 쇼핑갈 때 따라가서 그가 추천하는 걸 사긴 했다. 사실 그마저도 대부분 사현이 사 준다. 그래서 우영의 통장은 자꾸 ‘0’이 늘어 갔다. 이제는 그게 돈인지, 그저 숫자인지 실감조차 안 났다.
아무튼 우영은 현재의 삶에 손톱만큼의 부족함도 느끼지 못했다.
“형. 저는 지금도 충분해요. 너무 좋아요. 차는 정말 분에 겨워서,”
“너 아까부터 주제에, 분에, 그러는데 그거 되게 거슬려. 알아?”
사현이 자못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핸들을 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네 분이 어떤데? 연봉 십억이 훌쩍 넘는 네 분이 뭐가 어때서?”
“⋯⋯.”
“애인이 대기업 후계라 집도 주고, 차도 사 주고 싶어 하는 네 분이 어때서?”
“⋯⋯화났어요?”
우영이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사현에게서 뿜어지는 뾰족한 기운이 온몸을 콕콕 찔러 댔다. 사현이 화가 난 건 알겠다. 근데 그 이유는 모르겠다.
분에, 주제에. 그게 뭐. 틀린 말도 아니지 않은가. 우영은 고아 주제에, 학벌도 별로인 주제에, 숫기도 없는 주제에 등등. 주제로 폄하될 수 있는 게 아주아주 많은 사람이었다.
근데 사현은 왜 저리도 화를 내는 걸까. 오랜만에 보는 그의 분노에 우영이 어쩔 줄 모르고 사현의 눈치를 봤다. 그에 사현이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핸들에 이마를 묻은 그가 머리만 살짝 돌려 우영을 바라봤다.
“우영아.”
“네.”
“나는 네가 풍요롭게 살았으면 좋겠어.”
“지금도 충분히 풍요로운걸요. 저 머리부터 발끝까지 입은 게 얼만데요. 거기다 지금 뉴욕에 있고, 여기까지 퍼스트 클래스 타고 왔어요. 아까 인터넷 쳐 보니까 가격이 이천만 원이나 하던데.”
그 말에 사현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럴 때 보면 우영은 아직도 소년 같다. 커다란 덩치에, 단단한 근육에, 이제 저 없이도 <갤러리 비>에 잘 드나들고, 낯선 이도 무서워하지 않아서 이만하면 다 컸겠거니, 생각했는데.
“그런 물질적인 풍요가 아니라. 네가 네 자신을 높게 평가했으면 좋겠다고.”
“⋯⋯.”
“내가 주는 차를 받지 않아도 괜찮아. 근데 그 이유가 분에 겨워서는 아니었으면 좋겠어. 다른 이유도 많잖아. 관리하기가 귀찮아서. 주차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 지나치게 눈에 띄어서.”
“⋯⋯.”
“그러니까 앞으로는 아무리 비싼 걸 받더라도, 아무리 좋은 기회가 오더라도 분에 겹다는 생각은 하지 마.”
“⋯⋯.”
“내가⋯⋯ 마음이 안 좋아서 그래.”
사현이 우영의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우영은 사현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차내를 잔잔히 부유하는 그의 음성이 너무 감미로워서, 그가 저를 사랑하는 게 생생히 느껴져서, 고작 말버릇 하나에도 대신 상처받고 씁쓸해하는 그가 고마워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형.”
“응.”
“안 그럴게요.”
“정말?”
“네. 근데 한 번만 더 쓸래요.”
“뭐?”
사현이 귀를 의심한다는 듯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우영이 어리긴 해도 학습은 잘했는데. 틀린 걸 알려주면 바로 고쳤고, 잘한 걸 칭찬하면 더 잘했다. 근데 왜⋯⋯.
우영이 손을 뒤집어 사현과 손가락을 얽었다. 열 개의 손가락이 틈 없이 맞물리고, 손바닥이 딱 달라붙었다.
“형은 저한테 정말 분에 겨운 사람이에요.”
듣기 좋은 음성이 사현의 귓바퀴를 간질였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나, 긴장했던 게 우스워지는 순간이었다. 사현이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우영이 그런 사현의 이마와 볼에 쪽쪽 키스했다. 마지막으로는 통통한 입술을 춥, 빨았다가 놨다.
“좋아해요.”
“⋯⋯.”
“정말 좋아해요.”
“⋯⋯나도.”
사현이 우영의 뺨을 살살 매만졌다. 사르르 눈을 휘며 웃는 우영이 청량한 여름 하늘보다도 싱그러웠다. 제게 대체 무슨 행운이 있기에 이렇게 크고 묵직한 사랑이 찾아온 건지. 행복에 겨워 죽을 것만 같았다.
한참 시선을 맞추고 있던 사현이 액셀에 발을 올렸다.
“그럼 우리 이제 출발할까?”
“네.”
우영이 씨익 웃으며 바르게 앉았다. 사현이 능숙하게 주차장에서 차를 빼냈다. 짙게 진동하는 엔진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그 새로움이 나쁘지 않았다.
그들이 탄 노란색 스포츠카가 막 도로로 진입하려 할 때였다. 갑자기 사현이 콱 브레이크를 지르밟았다.
“아.”
그러고는 짤막한 신음을 내뱉었다. 우영이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왜요?”
“저거.”
사현이 뒷좌석으로 손을 휘적거렸다. 우영이 눈치껏 줄줄이 쌓인 짐 속에서 쇼핑백 하나를 집었다. 이런 게 있었나. 언제부터 있었지. 제가 모든 짐을 들고 왔는데. 우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것을 앞좌석으로 가져왔다.
사현이 쇼핑백 안에서 둥그런 물체 두 개를 꺼냈다. 선글라스 통이었다. 하나는 자신의 허벅지 위에, 또 하나는 우영에게 내밀었다. 우영이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들었다.
“갑자기 웬 선글라스예요?”
“여행 온 분위기 내야지.”
사현이 착착 선글라스 다리를 펴며 말했다. 그의 것은 연하게 푸른빛이 도는 선글라스였고, 우영의 것은 연하게 분홍빛이 도는 선글라스였다. 우영이 어색한 폼으로 선글라스를 썼다. 눈앞이 한층 진해졌다. 근데 희한하게 사물은 더 또렷해졌다.
“예쁘네.”
사현이 칭찬했다. 우영의 오뚝한 코 위에 걸쳐진 선글라스가 기가 막혔다. 표정을 알 수 없어 신비로워 보였고, 살짝 벌어진 입술은 어딘가 나른한 분위기를 뿜었다.
우영이 룸 미러로 자신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고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사현이 고른 것이 제게 어울리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런 우영의 뒤통수를 가볍게 쓰다듬은 사현이 차를 출발시키려 했다. 그러다 또 무언가가 떠올랐다는 듯 짧게 신음하더니 라디오를 틀었다. 시끄럽게 느껴질 정도로 빠른 영어가 폭우처럼 쏟아졌다. 사현이 진지한 표정으로 쿡쿡쿡 채널 버튼을 연타했다.
배경음이 발랄한 광고, 진지한 음성의 뉴스, 여자와 남자의 목소리가 마구 뒤섞인 오락 채널이 바쁘게 지나갔다. 그러다 베이스 음이 진한 노래가 흘러나오는 곳에서 멈췄다. 좋은 음색의 가수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멋지게 노래를 불렀다.
비싼 차라 그런가. 노래에 따라 좌석이 경련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주 질 좋은 헤드폰을 끼고 있는 느낌이었다.
우영의 발이 까딱까딱 리듬을 탔다. 음악에 관해선 전혀 모르지만, 그래도 신은 났다.
마침내 사현이 제대로 액셀을 밟았다. 자동차가 날쌔게 앞으로 뻗어갔다. 우영이 시트 깊숙이 몸을 묻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하늘이 화창했다. 저 멀리 맨해튼 특유의 빌딩 숲이 보였다. 미디어로만 접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창문에 찰싹 달라붙은 우영이 조금씩 가까워지는 도시를 뚫어지라 응시했다. 내가 미국에, 뉴욕에 있다니. 체감하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우영은 눈이 뻑뻑해질 때까지 맨해튼을 보고 있었다. 그쯤 차가 신호에 걸려 멈춰 섰다. 무심코 사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언제부터 저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모를 사현과 눈이 딱 마주쳤다. 그의 동그란 선글라스에 한껏 신난 제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좋아?”
사현이 물었다.
“네.”
우영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좋아.”
사현이 그 말에 동의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씨익 입을 째며 웃었다. 완벽한 여행의 시작이었다.
* * *
“되게 호텔처럼 안 생겼네요. 뉴욕 트렌드인가⋯⋯.”
목적지에 도착했다며 깜빡거리는 내비게이션에 우영이 창문 너머로 고개를 쳐들었다. 높다란 빌딩이 그런 우영을 내려다봤다. 뉴욕 특유의 붉은 벽돌로 지어진 빌딩이었다. 여기저기에 오래된 시간이 묻어있는 게, 뉴욕의 먼지와 생기를 동시에 흡수한 것 같았다.
근데 어째 호텔 같지가 않았다. 간판도 없고, 붉은 카펫도 없었다. 우영이 가 본 호텔이라곤 먼 옛날 두 번째 전시를 마치고 사현과 함께 갔던 로윈스 호텔이 다였지만, 그래도 호텔이 대개 어떤 생김새를 가지고 있는지 정도는 알았다.
호텔에 가기 전에 다른 곳에 들르는 걸까. 아니면 화려한 속을 숨기고 있는 콘셉트의 호텔인가. 우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사현이 길가에 차를 댔다. 주차장도 딱히 없고, 지하 주차장은 더더욱 없는 오래된 도시 뉴욕에서 스트릿 파킹은 일상이었다.
“호텔 아니야. 맨해튼 호텔들은 다 오래돼서 감성이 후져. 더럽고. 욕실은 진짜⋯⋯ 엉망진창이야.”
사현이 안전띠를 풀며 말했다. 우영이 그를 따라 띠를 풀고, 짐을 챙겼다.
“그럼요? 우리 어디서 자요?”
“펜트하우스 빌렸어. 시공한 지 일 년 안 됐대.”
“⋯⋯아.”
우영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제가 잠시 사현의 재력을 잊었다. 차에서 내린 사현이 다 으스러져 가는 주차 요금기를 툭툭 익숙하게 두드렸다. 버튼들이 어찌나 더러운지. 구겨지는 미간을 참기가 힘들었다.
그런 사현에, 우영이 얼른 뒷좌석 가방을 뒤져 물티슈를 꺼내왔다. 이상한 곳에서 칠칠찮은 사현이라 물티슈는 필수였다. 그것을 받아든 사현이 벅벅 손가락을 힘껏 문질러 닦았다.
그동안 우영은 짐을 꺼내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낯선 도시를 구경했다. 노란 택시. 빼곡한 빌딩. 그리고 각양각색의 피부 톤과 머리카락들이 몹시 신기했다.
“자기야.”
“네.”
“이리 와.”
사현이 입구를 향해 머리를 까딱였다. 캐리어를 양손에 낀 우영이 그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우영은 사현과 만나면서 아주, 아주 많은 것들을 경험했다. 비싼 밥에, 좋은 옷에, 엄청난 자동차, 그밖에 고급스러운 문화와 예술까지. 그래서 이제 웬만해서는 더 놀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이건⋯⋯, 이건 정말이지⋯⋯.
사현이 빌린 펜트하우스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펼쳐졌다. 복도도, 문도 없었다. 덕분에 우영은 마음의 준비도 하기 전에 엄청난 풍경과 맞닥트려야 했다.
가장 먼저 시야를 꽉 채운 건 맨해튼 전경이었다. 사실 우영은 도시 풍경에 몹시 무감했다. 어떤 명소에서 서울의 야경을 내려다본대도 사현의 집에 비하면 시시한 수준이었다. 거기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내 보니 질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사현의 집도 창이 크고 넓으나, 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통유리는 아니었다. 헌데 이곳은 등지고 있는 엘리베이터를 제외한 삼면이 모두 유리였다. 이제 막 노을이 지기 시작하는 붉은빛 하늘 아래로 한쪽엔 맨해튼 도시가 내려다보였고 한쪽엔 센트럴파크가 보였다. 또 다른 한쪽에는 브루클린 브리지가 장대하게 펼쳐져 있었다.
창가에는 널찍한 소파가 듬성듬성 놓여 있고, 반대쪽에는 의자가 무려 열 개나 딸린 다이닝 테이블이 있었다. 조금의 거짓도 보태지 않고, 침대보다 큰 테이블이었다.
테이블 뒤로는 운동장만 한 테라스도 보였다. 푸른색 식물이 동그랗게 사위를 두르고, 그 가운데에 하얀 소파와 검은 테이블이 있었다. 테이블 아래로는 진짜인지 그래픽일지 모를 전기 벽난로도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무려, 무려 수영장이 있었다. 옥상에 설치한 수영장이라니. 반질반질한 차콜색 대리석 사이로 새파란 수영장이 잔잔히 넘실거렸다. 그 주위로는 빈백과 선 베드가 일렬로 줄을 서 있었다.
분명 사현의 집도 엄청 화려하고 고급스러운데,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미국 스케일인가. 변기도 크다던 그 미국의 스케일. 그런 유치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괜찮네.”
넋을 잃고 그 자리에서 굳어 버린 우영과 달리, 무심히 중얼거린 사현은 선글라스를 벗으며 털썩 소파에 앉았다. 오랜만의 비행에 운전까지 더해지니 몸이 찌뿌듯했다. 거기다 완전히 반대인 시차를 극복할 생각까지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우스 키퍼가 밥도 해 준다던데, 하지 말라고 했어. 나가서 먹으려고. 배고프지? 바로 나갈까?”
사현이 물었다. 한참 눈알만 데구루루 굴리던 우영이 쭈뼛쭈뼛 그의 옆에 가 앉았다. 엘리베이터에 오를 때만 해도 첫 끼로는 뭘 먹을까. 역시 ‘미국’ 하면 햄버거지. 배가 많이 고프니 종류별로 다 시켜서 먹어야지.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형.”
“응.”
“이런 곳은 하루에 얼, 얼마예요?”
“몰라.”
“⋯⋯모른다고요?”
“설마 내가 얼만지 따져보고 렌트했겠니?”
사현이 심드렁히 대답하며 우영에게 머리를 기댔다. 우영은 어이가 없어 말을 잃은 상태로도 팔을 뒤로 뻗어 사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가격을 모른다, 라. 그래, 아마 제인만큼이나 일을 잘한다는 새 비서가 좋은 펜트하우스만 골라 리스트 업을 쭉 해 줬을 것이다. 그럼 사현은 턱을 괸 채 그것들을 살피다 손가락으로 쿡 찍으며 이거, 라고 했을 게 뻔했다. 그러니 1박에 얼마인지 알 리가.
우영이 사현 몰래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여태 신발을 신고 있음을 깨달았다. 혹시 펜트하우스의 화려함에 취해 신발장을 놓쳤나, 싶어 뒤를 돌아봤는데 엘리베이터 앞엔 아무것도 없었다. 사현 역시 하얀 운동화를 신고 있었고.
그래, 이런 게 미국 문화지. 신발장이 있는 게 더 이상한 거지.
무엇 하나 새롭지 않은 게 없었다. 우영이 뻐끔 입을 벌린 채 창밖을 응시했다. 서울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신기했다. TV로 보는 것과 실제로 마주하는 맨해튼은 괴리가 엄청났다.
“그 무슨 타워더라. 뉴욕에서 제일 유명한 타워였는데. 전망 좋은 빌딩⋯⋯.”
우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록펠러.”
사현이 대신 대꾸했다.
“아, 네! 저 거기 꼭 가 보고 싶었거든요? 근데 안 가도 될 것 같아요. 어디든 여기보다 못할 거예요.”
“응. 여기가 나아. 거기, 전망대 말고는 휑해. 아무것도 없어. 있는 거라곤 조악한 기념품 숍이랑 드글드글한 인간들뿐이야.”
사현이 먼 과거의 기억을 되뇌며 눈을 가늘게 떴다. 뉴욕의 명소라 온갖 인종들이 다 몰리는 곳. 전망대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두 시간이나 기다렸던 기억이 있었다. ⋯⋯끔찍하지.
“형도 가 봤어요?”
우영이 놀랍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붐비는 관광지에 서 있는 사현이라니. 호러 영화에 뜬금없이 등장하는 러브 라인처럼 기이했다.
“어. 어릴 때.”
“와, 형도 그런 곳 가는구나.”
“내가 가고 싶어서 갔겠니. 유학 중일 때 만나던 여자 친구가 하도⋯⋯.”
사현이 말을 다 잇지 못하고 꾹 입을 다물었다.
“⋯⋯.”
우영도 덩달아 입을 다물었다.
진한 정적이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사현의 시선이 어쩔 줄 모르고 좌우로 휘몰아쳤다. 반면, 우영의 시선은 사현의 볼에 콱 쑤셔 박혀서는 움직일 줄 몰랐다.
느슨히 늘어져 있던 사현이 허리를 바짝 세웠다.
“그냥, 그냥, 친구였어. 같은 과 다니던 친구.”
참으로 성의 없는 변명에 우영이 코웃음을 쳤다.
“형 이런 쪽으로 거짓말 되게 못하는 거 알아요?”
“⋯⋯아니, 몰랐는데.”
이런 쪽으로 거짓을 말할 필요가 없는 삶을 살아 온 터라.
누가 감히 사현의 과거를 캐묻고, 질투하겠는가. 그랬다가는 사현이 웬 등신 다 보겠다며 미련 없이 뒤돌아섰을 게 뻔했다. 제가 어린 나이도 아니고. 이 얼굴에, 이 재력에, 이 직업에 만났던 이가 없었다면 그게 더 큰 문제지.
그래서 사현은 늘 당당했다. 지나간 인연들이 과거를 물으면 무심히, 대충 대답해 줬다. 물론, 상대의 과거에는 손톱만큼의 관심도 없었다.
근데 왜일까. 왜 우영의 앞에서는 파렴치한이 된 기분일까. 사현이 안절부절못하며 우영의 눈치를 보는데, 우영이 비죽 한쪽 입술을 뒤틀었다.
“형 엄청 다정하다. 그런 곳 싫어하면서, 여자 친구가 가자고 하면 가 주는구나.”
제가 아닌 타인과 함께 있는 사현이라니. 그것도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사현은 외로움에 짓눌려 살았고, 그래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드문드문 느낄 때마다 눈앞이 다 빙글 돌았다.
“⋯⋯자기야.”
사현이 우영의 뺨을 쓰다듬었다. 아니, 쓰다듬으려 했다. 허나 우영이 그의 손목을 잡아 아래로 내리누르면서 불발됐다.
“저는 형이 저한테만 다정한 줄 알았어요.”
우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영아.”
“나만 특별한 줄 알았는데.”
우영의 눈꼬리가 아래로 추욱 내려앉았다. 사현이 갈비뼈가 크게 부풀 정도로 헛숨을 들이마셨다. 슬퍼하는 우영을 보니 기도가 확 쪼그라들었다.
“우영아. 네가 제일 특별해. 아니, 너만 특별해. 나 걔들 이름도, 얼굴도 기억 안 나. 다 지나간 시간이야. 내가 기억하는 건 너 처음 만났을 때. 네가 나한테 고백했을 때. 너랑 처음 김밥천국 갔을 때. 너랑 처음 섹스 했을 때. 네 첫 전시, 두 번째 전시, 나만을 위해 열어 줬던 전시. 그런 것뿐이야. 하물며 내가 어제 뭘 먹었는지는 기억 안 나는데, 네가 어제 점심으로 산채 비빔밥이랑 잔치국수 시켜 먹었다는 건 알아.”
사현이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아주 빠르고, 정확하고, 간절한 문장들이었다. 우영을 따라 아래로 처진 눈매가 그렇게 처연할 수 없었다. 그가 제 진심 좀 알아달라는 듯 우영의 손을 꽉꽉 쥐었다가 놓길 반복했다.
우영이 그런 사현을 가만히 쳐다봤다. 사현의 붉은 입술이 움찔움찔 앞으로 나왔다가 들어갔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은데. 괜히 말을 얹었다가 긁어 부스럼일까 고민하는 듯했다.
“그거 엄청⋯⋯.”
마침내 우영이 입을 뗐다. 사현이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고 우영에게 집중했다.
“감동적이네요.”
“어?”
“화 안 났어요. 그냥 투정 부려 본 거예요. 형한테 제가 처음이 아니라도 괜찮아요. 제 처음이 형이니까요. 그게 얼마나 황홀한 건지 형이 모른다는 게 조금 안타깝네요.”
우영이 씨익 입을 가로로 한껏 찢으며 웃었다. 그의 엄지가 사현의 턱 아래를 살살 쓰다듬었다. 사현이 바보 같은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근데 형이 그렇게 말해 주니까, 일단 기분은 좋네. 저는 형이 절 사랑하는 걸 느낄 때마다 행복해서 죽을 것 같아요.”
우영이 사현의 뺨에 입을 맞췄다. 콧잔등과 턱에도 꾹꾹 도장 찍듯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사실 사현은 감정 표현을 자주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숨기는 것도 아니다. 부러 표현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밥은 먹었는지 잠은 잘 자는지 궁금해하고, 좋은 걸 선물해 주고, 예쁜 걸 보여 준다. 그럼 우영은 그의 행동과 눈빛에 숨어 있는 사랑을 찾아 먹었고. 그것으로도 충분히 기뻤다.
근데 이렇게 말로 들을 때면 또 다른 행복이 찾아온다. 마음으로만 느끼는 게 아니라, 이성으로도 느낄 수 있는 그의 사랑이랄까.
“⋯⋯지금 나 놀린 거니?”
사현이 허망한 낯으로 우영을 쳐다봤다. 우영이 킥킥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게 웃었다.
흐트러진 이성을 다시 모으는 데 한참이 걸렸다. 이 요망한 애송이. 옛날에는 기합이 잔뜩 들어가서 무슨 말을 해도 네, 네, 하더니. 요즘은 놀려먹을 줄도 안다.
사현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포악한 레서판다처럼 우영에게 달려들었다. 우영이 벌러덩 뒤로 넘어갔다. 와중에도 혹 사현이 다칠까, 그의 허리를 두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혼난다, 너.”
낮게 으르댄 사현이 말과 달리 우영의 아랫입술을 쭉 빨았다가 놨다. 미처 웃음을 못다 삼킨 우영이 지지 않겠다는 듯 사현의 입술을 통째로 물었다.
장난스레 시작했던 입맞춤은 금세 진한 키스가 됐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뜨끈한 혀와 축축한 타액이 마구 넘나들었다. 비행기 안에서도 몇 번 입술을 붙이긴 했지만, 그래도 공공장소라 깊숙이 혀를 섞진 못했다.
두 사람은 근 20시간 동안 결핍됐던 서로의 숨을 탐하기 위해 열심히 혀를 움직였다. 입술이 세게 비벼지고, 이따금 치아가 따닥거리며 부딪쳤다.
불규칙하게 뒤섞인 호흡이 턱 끝까지 차올랐을 때쯤, 우영이 사현의 바지 뒤로 쑥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동그란 엉덩이를 꽉 움켜쥐었다. 그러자 움찔 몸을 떤 사현이 고개를 쳐들었다.
“하아⋯⋯ 계속해? 배 안 고프겠어?”
섹스 한번 하면 기본이 세 시간이다. 지금부터 세 시간이면, 꽤 늦은 시각일 테였다. 우영이 혀를 내어 사현의 침으로 축축한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어⋯⋯. 저 햄버거 먹고 싶은데. 그땐 가게들이 다 문 닫을까요?”
“그럴 리가.”
뉴욕은 24시간 환한 도시니까, 조금 늦어도 괜찮아.
씨익 웃은 사현이 우영의 입술을 향해 다시 돌진했다.
“아, 으응⋯⋯, 읏, 우, 우영아⋯⋯. 그만⋯⋯. 응? 아흐⋯⋯.”
거꾸로 뒤집힌 사현이 파들파들 몸을 떨었다. 알궁둥이를 하늘로 쳐들고, 성기를 곧추세우고 있는 모습이 더는 부끄럽지 않았다. 우영과 하루 이틀 몸을 섞는 것도 아니고. 일주일에 일곱 번은 꼬박하는데, 여태 부끄러우면 그게 더 이상했다.
하지만 여전히 적응하지 못한 게 있다.
“아, 씨⋯⋯발⋯⋯, 아⋯⋯. 너무 좋, 으응, 좋아⋯⋯.”
바로 뒷구멍을 쭉쭉 빨아 주는 우영의 혀다. 사현이 잘 잡히지도 않는 소파를 힘껏 쥐어뜯었다. 츕츕, 습윤한 소리가 귓바퀴를 간지럽힌다. 뭐 그리 맛있다고 뒤를 샅샅이 핥는 혀에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돋아났다.
열과 성을 다해 주름을 핥던 우영이 엉덩이를 양쪽으로 짜 갈랐다. 찬 기운이 골을 스침과 동시에, 구멍이 뻐끔 엄지손톱만큼 벌어졌다. 우영의 다음 행동을 예상한 사현이 흐읍, 숨을 멈췄다. 아니나 다를까, 뜨겁고 통통한 우영의 혀가 쑤욱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히윽!”
사현이 이마를 소파에 처박았다. 발가락이 꼼지락꼼지락 난리였다. 수치스러워서 죽을 것 같은데, 또 죽을 만큼 좋다.
우영의 탱글탱글한 입술이 주름을 마구 비볐다. 끈적한 타액과 혀가 구멍 속을 휘저을 때마다 온몸의 피가 바깥으로 뿜어졌다가, 다시 심장으로 폭포처럼 밀려왔다.
덩달아 흥분한 우영이 사현의 엉덩이를 힘껏 주물렀다. 하얀 엉덩이는 쥐면 쥐는 대로 창백하게 질렸다가 금세 시뻘건 손자국을 드러냈다. 그게 어찌나 예쁜지.
우영은 뒷구멍과 한껏 입을 섞다가도 잘 익은 복숭아 같은 엉덩이와 눈이 마주치면 참지 못하고 볼기를 삭삭 핥았다.
“흐응, 읏, 아⋯⋯. 우영아⋯⋯.”
그 감미로우면서도 천박한 쾌락에 사현이 질끈 눈을 감았다. 우영의 색욕은 그의 왕성한 식욕과 닮았다. 배가 부를 때까지 사현을 물고 빨고, 또 머금어야 물러났다. 그 전에는 욕을 하고, 떼를 쓰고, 울고, 발길질해도 물러나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우영이 주름을 쭈우웁, 세게 빨아 당기는 순간.
“아흐윽!”
사현은 참지 못하고 픽 정액을 싸질렀다. 하얗고 진득한 액체가 아래를 축축이 적셨다. 그것을 놓칠 리 없는 우영이 사현의 무릎 양쪽을 쑥 자신 쪽으로 당겼다. 무릎으로 서 있던 사현이 철퍼덕 엎어졌다. 어째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우영아?”
아니나 다를까. 사현을 제대로 눕혀놓은 우영이 본격적으로 찹찹 입맛을 다셨다. 햄버거가 먹고 싶다더니. 지금은 사현의 뒷구멍이 더 먹고 싶은가 보다.
작고 동그란 사현의 고환이 사타구니 사이로 볼록 올라왔다. 정액에 젖어 반짝이는 게, 바다 깊은 곳에 숨어 사는 진주 같은 모양새였다. 우영이 그것을 뚫어지라 바라보며 사현의 허벅지를 모아 쥐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얼굴을 처박았다.
“아앙⋯⋯.”
사현이 앙탈 같은 신음을 흘렸다. 내뱉어 놓고도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허나 우영의 혀가 할짝할짝 가랑이 사이를 핥고 있으니 그 수치도 금세 사라졌다.
우영은 코가 높다. 굴곡 없이 오뚝하고, 끝은 적당히 동그랗다. 그건 눈으로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근데 그걸 다리 사이로 느끼고 있으려니 허벅지가 다 푸들푸들 떨렸다. 가끔 그가 후끈한 숨을 흘릴 땐 차라리 까무러치고 싶을 정도의 간지러움이 전신을 쓸어내렸다.
우영은 그렇게 한참 동안 사현의 뒷구멍을 빨았다. 주름을 짓이기듯 핥고, 입술을 비비고, 구멍 안을 쑤셨다. 이따금 그의 이가 주름을 할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사현은 방금 뭍으로 끌려 나온 물고기처럼 퍼드득거리며 몸을 떨었다.
“우영⋯⋯, 아⋯⋯. 그만⋯⋯.”
재차 절정에 이르고, 축 늘어진 사현이 엉덩이를 꿈틀거릴 때였다. 마침내 우영이 떨어져 나갔다. 축축하게 젖은 살갗 위로 서늘한 바람이 감돌았다.
우영이 자신의 윗도리를 벗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젤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거였다. 허나 이 고급스러운 펜트하우스에, 그것도 거실에, 끈적이는 점성의 액체가 있을 리 없었다. 부엌이나 욕실이면 또 모를까.
우영이 아쉬운 대로 자신의 검지를 쭉쭉 빨고 있을 때였다. 사현이 몸을 훌떡 뒤집더니 자신의 무릎 아래를 손으로 받치고 냅다 가랑이를 벌렸다. 붉게 익은 구멍이 훤히 드러났다.
“풀, 풀 필요 없어. 얼른 들어와.”
“그래도,”
“빨리. 어? 빨리, 우영아⋯⋯.”
울상을 한 사현이 애처로이 우영을 불렀다. 우영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여태까지 사현을 실컷 물고 빨았는데. 또 갈증이 일었다. 사현을 동그랗게 말아서 통째로 입 안에 넣고 굴릴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우영이 후우, 자신의 앞머리를 불어 올렸다. 그 후 곧장 귀두를 사현의 구멍에 맞췄다. 녹진하게 풀린 주름이 뻐끔거리며 성기를 반겼다. 우영이 조금 더 힘을 주자 그대로 귀두가 쑥 밀려들어갔다.
“아⋯⋯.”
사현이 지그시 눈을 감으며 허리를 뒤틀었다. 뜨겁고, 단단하고, 두툼한 선단에 머리끝까지 풍족해졌다. 우영의 입과 혀도 좋지만, 그와는 전혀 다른 매력을 가진 성기다. 받을 때마다 꼴깍꼴깍 침이 넘어갔다.
우영은 흘끔흘끔 사현을 살피면서 천천히, 몹시 천천히 성기를 밀어 넣었다. 진한 애무로 근육이 느슨해졌다고는 하지만, 제 것이 과하게 큰지라 사현이 자주 버거워했다. 아니나 다를까, 반쯤 들어가고 나니 사현의 몸이 눈에 띄게 뻣뻣해졌다.
우영이 사현의 허벅지를 부드럽게 주물렀다. 오늘은 제대로 사랑해 주지도 못했는데 홀로 발딱 선 유두를 엄지로 살살 짓이기기도 했다. 그러자 축 늘어져 있던 사현의 성기가 단단해지더니, 내벽이 꿈틀거리며 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흐으, 읏, 응⋯⋯.”
사현이 입술을 말아 물고 우영의 팔뚝을 쥐어뜯었다. 우영이 그런 사현의 손을 떼 자신의 목 뒤로 둘렀다. 그리고 성기를 쿠우욱 쑤셔 넣으며 사현의 등을 껴안았다.
“아, 아아⋯⋯.”
배 속 깊은 곳을 짓뭉개는 성기에 사현의 고개가 휙 뒤로 넘어갔다. 배가 터질 것 같다. 납작해진 전립선에 배꼽 아래가 시큰거리고, 척추는 찌릿했다.
“하아⋯⋯. 형⋯⋯. 여기, 형 뒤, 진짜 너무 좋아요⋯⋯.”
우영이 짙은 숨을 내뱉으며 사현의 턱을 따라 쪽쪽 입술을 내렸다. 성기를 옴팡지게 조이는 내벽에 눈앞이 새빨갰다. 뜨겁고, 촉촉하고, 적당히 굴곡진 게 환장할 노릇이었다.
우영은 사현의 어깨에 이마를 묻은 채 그가 자신의 성기에 적응하기를 기다렸다. 마음 같아서는 이 예쁜 다리를 쩍 벌려 퍽퍽 좆대로 처박고 싶으나, 그랬다간 내일의 섹스가 없을 테니까.
언제 한번 술 마시고 취해서 발정 난 개처럼 그를 탐했던 적이 있는데, 다음 날 사현은 출근도 못 했다.
그가 거친 섹스도 나쁘지 않았노라, 언젠가 이벤트처럼 또 하자고 해 주긴 했다만. 그 후 일주일은 사현의 몸에 손도 못 댔다. 사현이 앉았다가 일어설 때마다 끙끙 앓았기 때문이다. 뒷구멍도 시뻘겋게 부어서는, 말은 안 해도 아주 불편한 것 같았다.
그것을 계기로 우영은 인내를 배웠다. 그래서 지금도 끈질기게 기다리는 중이다. 준비를 마친 사현이 먼저 허리를 들썩여 줄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얼마나 있었을까. 사현의 손이 우영의 등을 훑고 내려가 탄탄한 엉덩이를 긁듯 움켜쥐었다.
“움직⋯⋯ 여도 돼.”
허스키한 음성이 아지랑이처럼 우영의 뇌리에 스몄다. 우영이 기다렸다는 듯 훅 허리를 뒤로 물렸다. 그리고 느리지만 깊숙이 성기를 쳐올렸다.
“아흐윽⋯⋯.”
사현이 자라처럼 목을 오그렸다. 그리 오랜만도 아닌데 뒷구멍이 지나치게 예민했다. 굵고 우람한 우영의 성기가, 기둥 위로 도드라진 핏줄이, 미끈한 귀두 끝이 세세히 느껴졌다.
우영은 한참 동안 몸을 딱 붙인 채 부드럽게 허리를 움직였다. 천천히 나갔다가, 깊숙이 들어오는 걸 반복했다. 감미로운 쾌감이 이성을 조금씩 조금씩 녹여 갔다.
사현은 안달이 났다. 우영이 거칠게 콱콱 뒤를 후벼 주면 이렇지 않은데. 훨씬 거세고, 세찬 파도 같은 오르가슴인데. 너무 좋아서 시야가 가물가물해지는데.
“빨리, 응? 우영아, 빨리. 이렇게 말고, 세게 해 줘. 세게.”
사현이 우영에게 눌린 채로 불편하게 골반을 들썩였다. 그에, 우영의 안광이 번뜩였다.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영이 벌떡 몸을 일으켜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 후, 자신의 허벅지 위로 사현의 골반을 끌어왔다. 익숙한 자세에 사현이 꼴깍 침을 삼켰다. 쾌락에 허기진 눈동자가 우영과 자신의 접합 부분을 집요히 응시했다.
우영의 성기가 뒤로 훅 빠져나갔다. 그와 함께 뒷구멍의 주름이 딸려 나가며 동그랗게 부풀었다. 우영이 그것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꿈틀거리며 성기를 씹어 대는 뒷구멍이 탐욕스러웠다.
아득, 어금니를 깨문 우영이 퍽! 성기를 처넣었다. 사현의 통통한 엉덩이와 허벅지가 납작해질 정도로 세고, 깊은 삽입이었다.
“하으응, 아⋯⋯, 힉⋯⋯.”
전립선을 제대로 얻어맞은 사현의 가슴팍이 위로 붕 떠올랐다. 우영이 넓적한 손바닥으로 그 가슴팍을 내리눌렀다. 자연히 사현의 하체가 위로 솟구쳤다. 뭐 얼마나 치댔다고 벌써 벌겋게 익은 엉덩이가 드러났다. 우영이 거센 콧김을 내뿜으며 콱콱 성기를 들쑤시기 시작했다.
“흐익, 아, 아, 흣, 으응⋯⋯.”
“하아, 하⋯⋯.”
널따란 펜트하우스에 질척한 신음이 차올랐다. 찰박찰박, 살과 살이 붙었다가 떨어지는 소리는 덤이었다.
두 사람은 신나게 몸을 흔들었다. 고환이 꼴사납게 덜렁거리고, 흥분한 혀가 입 밖으로 아무렇게나 나돌고, 땀방울이 턱 끝에 매달리고,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저 본능에 충실한 행위였다. 간간이 주고받는 사랑 고백 말고는 이렇다 할 대화도 없었다. 그런데도 좋았다. 서로의 체온과 냄새, 맞물리는 시선, 겹쳐지는 입술이 사무치게 좋아서 도무지 그만둘 수가 없었다.
우영이 사현의 팔을 당겨 그를 일으켜 앉혔다. 소파 등받이에 기대게 하고, 한쪽 다리를 쥐어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 벌름거리는 구멍에다 쿠우욱, 성기를 내리찍었다.
“으응! 아, 흐읏, 아응⋯⋯.”
깊은 삽입이었다. 누워서 우영을 받으면 일자로 쭉 가르고 들어오는데. 이렇게 앉아서 받으면 그의 성기가 윗배를 찔러 댔다. 두꺼운 우영의 기둥뿌리가 전립선 주변을 꽈아악 눌러 벌렸다. 생경한 자극이었다. 눈가를 어그러트린 사현이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며 우영을 밀어내려 했다.
“잠, 잠깐, 만⋯⋯. 너무 깊, 아흐, 읏, 깊어, 깊어, 우영아⋯⋯.”
물론, 시답잖은 반항이었다. 우영이 한 손으로 사현의 두 손목을 모아 쥐어 뒤로 휙 넘겨 버렸다. 팔이 꺾이며 사현의 가슴이 앞으로 올라왔다. 볼록하게 기립한 유두가 부들부들 경련하고 있었다. 하얀 가슴팍 가운데가 붉게 물들어 있는 게, 꼭 벚꽃 같았다.
우영이 허리를 숙여 그것을 크게 베어 물었다. 주변 가슴살이 다 빨려 들어갈 정도였다. 그렇게 쭉쭉 가슴을 빨던 그가 앞니와 아랫니를 이용해 유두를 잡아당겼다. 사현이 비명 같은 신음을 흘리며 자지러졌다.
“깊은 거 좋아하잖아요. 명치까지 쑤셔 주는 거 좋아하면서.”
우영이 비릿하게 웃으며 사현의 목울대를 잘근거렸다. 사현이 목을 뒤로 젖힐 때마다 도드라지는 게 어찌나 탐스러운지. 마음 같아선 뜯어먹고 싶었다. 허기가 진다. 참기 힘들 정도로 배가 고팠다.
사현의 만면을 물고 빨던 우영이 이번엔 귓구멍에다 혀를 쑤셔 넣었다. 그러면서도 콱콱 쳐올리는 성기는 멈출 줄 몰랐다.
“아, 하앙, 읏, 응, 아! 좋아⋯⋯. 좋아, 우영아⋯⋯.”
반쯤 감긴 사현의 속눈썹이 파르르 경련했다. 눈앞이 흐려졌다가, 또렷해졌다가, 더 심하게 흐려졌다. 아랫배가 시큰거리는 게 요의가 올라왔다. 또 절정이 가까워졌다는 뜻이었다.
나 가. 나 갈 것 같아. 우영아, 나 좀⋯⋯. 사현이 두서없이 종알거렸다. 신음에 흠뻑 물들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섹스 중의 사현을 누구보다 잘 아는 우영은 용케 그의 뜻을 알아들었다.
우영이 조금 더 바짝 몸을 붙였다. 고환이 사현의 회음부에 눌릴 정도로 깊게 성기를 처박고, 좌우로 뭉근히 허리를 돌렸다.
“히윽⋯⋯. 아, 아아⋯⋯.”
입을 크게 벌린 사현이 끅끅 숨을 뒤틀었다. 그와 동시에 성기가 말간 액체를 주르륵, 주룩, 내보냈다. 우영이 그 정액을 모아다가 사현의 귀두를 엄지로 꾹꾹 누르듯 문질렀다.
“방금, 방금 갔, 흐아앙⋯⋯.”
사현이 좌우로 몸을 뒤틀며 우영의 손길에서 탈출하고자 했다. 하지만 어림없었다. 성기를 더 세게 잡히기만 했다. 방금 절정에 다다라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귀두가 마구 비벼졌다.
“⋯⋯.”
사현은 이제 신음은커녕, 숨조차 내쉴 수가 없었다. 다리가 쭉 펴지고, 발가락이 단풍잎처럼 벌어졌다. 귓가에 이명이 몰아친다. 우영이 핥아 대는 귓구멍을 통해 아이스크림처럼 녹은 뇌가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지금 당장 죽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다.
사현이 뻐끔뻐끔 입술만 간신히 움직이는데, 우영이 거칠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 성기를 빨래 짜듯 조이는 뒷구멍을 더는 견디기가 힘들었다.
한껏 좁아진 내벽을 억척스레 가르고 들어간 우영이 가장 깊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참고 참던 절정을 싸질렀다.
“하아⋯⋯.”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뜬 우영이 사현의 턱을 잘근잘근 약하게 깨물었다. 그는 뜨끈한 정액을 잔뜩 쏟아 내는 와중에도 아래위로 성기를 넣었다가 뺐다. 사현은 간헐적으로 몸을 떨어 댈 뿐, 여전히 신음 한 음절 내뱉지 못했다.
사현의 안에 한 방울도 남김없이 쏟아 낸 우영이 천천히 빠져나갔다. 그가 사현의 팔뚝을 가만가만 주물렀다.
“형, 숨 쉬어요.”
그에, 사현이 명령이 입력된 로봇처럼 후으읍, 숨을 들이마셨다가 구역질하듯 토해 냈다. 뻣뻣하게 곤두섰던 척추도 한결 느슨히 굽었다. 얼굴이 붉게 익은 사현이 색색 가쁜 숨을 흘렸다. 그게 또 예뻐서, 우영이 그의 입술을 못살게 굴었다.
“너는 어째⋯⋯ 날이 갈수록 기술이 는다⋯⋯.”
옆으로 풀썩 늘어진 사현이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칭찬이죠?”
사현의 뺨을 쓰다듬던 우영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사현이 코웃음 치며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가 숨을 몰아쉬며 바닥난 체력을 추스를 동안, 우영은 사현의 귓불을 깨물고, 어깨를 핥고, 유두를 만지작거렸다.
익숙한 후희였다. 우영은 섹스가 끝나고도 한참 동안 사현을 주물러 댔다.
그러다 보면,
“한 번 더 할까요?”
항상 이 말을 한다. 사현은 때로는 야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또 때로는,
“아니. 이대로 또 하면 내일 오후까지 내리 잘 것 같아.”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를 들며 거절한다. 우영의 만면에 실망이 스몄다. 그렇게 격렬히 흔들었어도 부족한 모양이었다. 사현이 우영의 어깨너머로 기하학적인 조명을 응시했다.
아, 모두가 원하는 연하 남친인데. 나는 그의 젊음이 가끔 버겁다. 그가 내 나이가 되어서도 여전히 이리 불타오를까, 걱정도 된다.
“⋯⋯알았어요. 씻으러 가요.”
입을 삐죽인 우영이 사현을 번쩍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욕실을 찾기 시작했다. 사현이 가물가물한 시야로 그를 바라봤다.
그래도 여전히 말은 잘 들어서 다행이라고, 아무도 모르게 생각했다.
* * *
격렬한 섹스에 지친 사현은 몹시 느릿하게 움직였다. 꼭 게으른 거북이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 사현에 익숙한 우영이 물기도 닦아 주고, 머리도 말려 줬다.
그 후, 제 캐리어에서 후드를 찾아 껴입고 사현의 옷을 찾기 위해 그의 캐리어를 열었는데. 하마터면 까무러칠 뻔했다.
“⋯⋯형. 여기 장사하러 왔어요?”
사현의 캐리어엔 생필품이 아니라 라면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국물류, 볶음류, 매운 거, 스파게티, 짜장, 비빔면까지. 없는 게 없었다.
“내가 찾아봤는데, 수출되는 라면이랑 국내에 유통되는 라면이랑 조금 다르대. 스프랑 후레이크 같은 거 말이야.”
“⋯⋯그래서 이걸 다 가져왔다고요?”
“어. 혹시 미국 라면이 입에 안 맞으면 어쩌니.”
욕실 앞 화장대에 기대앉은 사현이 말했다. 우영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매사에 꼼꼼한 사현은 라면에 관해서는 더더욱 철두철미해진다. 라면이 좋아요, 제가 좋아요? 라는 유치한 질문을 해야 할 때가 머지않은 듯했다.
“그럼 옷은요? 옷이 없는데?”
우영이 라면을 뒤적거리며 캐리어 안을 헤집었다. 산더미 같은 라면 봉지 사이에 걸려 오는 거라곤 포장도 뜯지 않은 새 속옷, 사현이 즐겨 바르는 보디로션과 향수, 기초 화장품이 다였다. 아, 빳빳한 달러 뭉치가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기도 했다.
헌데 옷이 없었다. 그 흔한 흰 티셔츠나, 바지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옷을 왜 가져와. 여기서 사면 되지. 한국에 안 들어오는 아이템이 깔리고 깔렸는데.”
사현이 우영이 가져다준 찬물을 홀짝이며 말했다. 그의 하얀 발이 까딱까딱 의미 없이 움직였다.
“⋯⋯.”
우영이 뻐끔 턱을 떨어트렸다. 사현의 드레스 룸은 사현의 침실보다도 크다. 옷, 구두, 시계, 없는 게 없었다. 빨래 걷듯, 팔을 한 아름 벌려 안아다가 그대로 캐리어에 쑤셔 넣었어도 한 달은 차고 넘치게 입었을 테였다.
근데 또 산다니. 살 거라고 옷을 하나도 가져오지 않았다니. 그러면서 라면은 오십 봉지나 가져오다니.
어쩐지, 우영이 온갖 요란을 떨며 캐리어를 싸는데 심드렁히 구경만 하더라니. 다른 때라면 이걸 챙겨라, 저건 필요 없으니 챙기지 마라, 여권 확인해라 등등의 조언을 늘어놓았을 텐데. 자기는 여타 생필품은 하등 괘념치 않고 라면 챙길 생각만 하고 있었구나.
“지금은, 지금은 뭐 입으려고요? 그러고 나가게요?”
우영이 샤워 가운만 대충 걸쳐 훤히 드러난 사현의 가슴팍을 향해 턱짓했다. 그러자 사현이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며 우영에게로 다가왔다. 우영이 제 코앞에서 멈춰선 사현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사현이 그와 시선을 맞추며 사르르 눈을 휘었다.
그의 의도를 가늠하지 못한 우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사현이 훅 아래로 꺼지더니 우영의 후드 속으로 냅다 머리를 쑤셔 넣었다. 품이 넉넉한데다가 사현이 워낙 마른 터라 곧 그의 머리가 쑥 목 위로 올라왔다.
“네 거 있잖아.”
“⋯⋯.”
“나는 삼백만 원짜리 명품 후드보다 네 후드가 좋더라.”
사현이 킥킥거리며 우영의 허리를 껴안았다. 그리고 후으읍,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방금 같이 샤워했는데 묘하게 자신과는 다른 체향이 난다. 우영의 체취, 우영의 냄새. 사현이 기분 좋은 미소를 띤 채 그 냄새를 탐했다.
그런 사현을 멍하니 쳐다보던 우영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참⋯⋯ 시도 때도 없이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우영이 후드에서 팔을 쑥쑥 빼내고 옷을 돌렸다. 그리고 사현의 팔을 끼워 넣은 뒤 그대로 빠져나왔다. 그러자 큰 후드가 오롯이 사현의 것이 됐다.
사현이 소매를 돌돌 말고 후드 끈을 팽팽하게 조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우영의 옷을 뺏어 입는 터라 그 일련의 행동들이 몹시 익숙했다.
우영이 사현의 양 뺨을 움켜쥐고 쪽 입술을 붙였다가 뗐다. 그러고는 자신의 캐리어를 뒤지기 시작했다. 사현이 입을 만한 바지를 찾는 거였다.
우영은 사현이 자신을 당연히 뉴욕의 대표적인 햄버거 가게로 데려갈 줄 알았다. 왜, 있잖는가. 얼마 전에 한국에도 들어온 그 흔들고 흔드는 햄버거 가게 말이다. 근데 사현이 데리고 온 곳은 영 낯선 곳이었다.
빨간색 타일과 흰색 타일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햄버거 가게는 늦은 시간에도 제법 사람이 많았다. 들어가자마자 전속력으로 돌진해 오는 기름 냄새에 우영이 눈을 반짝였다.
붉은 간판에 흰 조명으로 쓰인 영어는 우영도 읽을 수 있을 만큼 간단했다. 다섯 남자. 공동 창업자가 다섯인가. 우영이 무심히 생각하며 주문대 앞에 선 사현의 뒤에 찰싹 달라붙었다.
사현은 주문을 아주 오래 했다. 흔히 아는 치즈 버거나 베이컨 버거 뒤로 머시룸이 어떻고, 피클이 어떻고, 케첩에 마요네즈가 어떻고, 주문이 줄줄 이어졌다.
우영은 귀를 쫑긋 세우고 사현의 말에 집중했으나 피클을 넣었다는 건지, 뺐다는 건지, 아니면 튀겼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어련히 알아서 잘 시켰겠거니, 했다.
사현이 계산을 마치자 점원이 우영의 손바닥만큼이나 커다란 음료수 컵을 내밀었다. 빈 컵이었다. 사현이 그것을 당연하게 우영에게 전달했다. 우영이 신난 얼굴로 컵을 받았다. 음료수야 사현의 도움이 없어도 받아먹을 수 있었다. 한국에도 흔히 있는 셀프 음료니까.
……근데,
“⋯⋯.”
미국의 음료 시스템은 조금, 아니 많이 달랐다.
붉은색 기계 앞에 선 우영이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음료 기계에는 컴퓨터 모니터만큼 커다란 화면이 붙어 있었는데, 그곳엔 스무 개에 다다르는 음료 메이커가 떠 있었다. 반은 눈에 익는 콜라나 환타 같은 거였고, 또 반은 생전 처음 보는 거였다.
그냥 터치하고 컵 가져다 대면 되는 간단한 기계였는데 무엇을 골라야 할지 쉽게 판단이 서질 않았다.
사현이 말하길, 콜라가 생수보다 싼 나라라더니 이렇게나 많은 종류의 음료가 있을 줄이야. 우영이 쭈뼛거리며 고민하고 있으니 뒤에서 지켜보던 사현이 쿡쿡 모니터를 눌렀다. 콜라 다음으로 있는 메뉴였다.
“다 비슷비슷한 맛인데, 그래도 궁금하면 전부 먹어 봐. 다 사 줄 테니까.”
그 말에 우영이 연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사현이 내놓는 결론은 항상 명쾌하고 확실하다. 고민이 단숨에 해갈됐다.
두 사람은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빨대를 문 우영이 낯선 음료 맛에 미간을 찌푸렸다가 눈썹을 올리길 반복하는 사이, 주문한 햄버거가 나왔다.
넓적한 쟁반에 햄버거가 무려 네 개였다. 하나는 사현의 몫이고, 나머지는 전부 우영의 것이다. 그 밖에 녹은 치즈가 담뿍 올라간 감자튀김과 밀크셰이크도 있었다.
햄버거는⋯⋯ 천국의 맛이었다. 입 안 가득 차는 부피감. 축축한 육즙. 고소한 치즈. 달달 볶아 숨죽은 채소와 환상적인 소스. 우영은 두꺼운 햄버거 하나를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나는 쉑쉑보다 여기가 좋아. 훨씬 짜고, 기름도 많고, 몸에 안 좋은 맛이거든. 미국스럽지.”
사현이 우영의 것에 비해 얇은 햄버거를 야금야금 베어 물며 말했다. 피클도 빼고, 버섯도 빼고, 토마토까지 뺀 햄버거가 딱 사현의 취향이었다.
우영이 킥킥거리며 밀크셰이크를 빨았다. 몸에 안 좋은 맛이란, 사현의 입맛에 딱 맞다는 말이다. 세상 미식가면서 그 특출 난 미뢰로 라면과 햄버거, 돈가스, 떡볶이를 즐기는 그가 참 신기했다.
식사는 즐거웠다. 사실 햄버거가 아무리 특출 나게 맛있대도 결국엔 십 불짜리 햄버거다. 하지만 늦은 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수다를 떠는 외국인들, 낯선 장소. 창밖으로 펼쳐진 화려한 뉴욕. 그리고 눈앞에 앉아 있는 사현.
그것으로도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저녁이 됐다.
“형.”
금세 햄버거 두 개를 삼킨 우영이 나지막이 사현을 불렀다. 진즉 식사를 끝내고 우영이 먹는 모습을 감상하던 사현이 눈썹을 들썩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감사해요. 이런 곳에 데려와 주셔서.”
“⋯⋯뉴욕 와서 한 거라곤 햄버거 삼십 불어치 먹은 게 단데. 감사 인사가 너무 이른 거 아니니?”
사현의 입매가 떨떠름히 뒤틀렸다. 이제 시작인데. 내일부터 이 주 동안 미국에 있는 온갖 예술과 건축, 문화를 다 보여 줄 생각인데. 벌써 감사 인사를 들으니 영 아니꼬웠다.
“저는 그런 것보다 형이랑 여기 있는 게 제일 좋아요. 아무도 우리를 모르고, 내일 아침에 형이 출근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야식도 같이 먹고 있잖아요. 이런 오늘이 이 주 내내 반복될 거고요. 내일은 오늘보다 더 대단한 걸 보여주시겠죠? 말로만 듣던 MoMA도 갈 거고, 메트로폴리탄도 갈 거고. 아무리 흔한 전시라도 형이랑 가면 엄청 특별해질 텐데. 그 멋진 갤러리들을 형이랑 가다니. 너무 좋아서 죽을 것 같아요.”
우영이 상상만 해도 설레는 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면서 쪽쪽 밀크셰이크를 빨아먹는 모습이 정말이지,
“너는 가끔⋯⋯ 지나치게 사랑스러워, 우영아.”
사랑스러웠다.
우영이 싱그럽게 눈을 휘며 웃었다. 사현이 좋아하는 웃음이었다. 눈을 마주한 두 사람이 킥킥거리며 밀크셰이크를 빨았다. 혀 위로 넘실거리는 단맛이 황홀했다.
첫 여행의, 완벽한 첫날 밤이었다.
* * *
두 사람은 걱정보다 이르게 시차 적응을 마쳤다. 첫날 비행에, 운전에, 격렬한 섹스에 지칠 대로 지쳐서 기절하듯 잤더니 다음날 저절로 아침에 눈이 번쩍 떠졌다. 사실 우영이야 원래가 야행성이라 적응이랄 것도 없었다.
사현은 일어나자마자 게슴츠레 뜬 눈으로 라면을 끓여 먹었다. 우영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는데, 사현이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캐리어 더미에서 햇반과 김치를 꺼내 왔다. 우영은 무엇 하나 철두철미하지 않은 게 없는 사현에게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다.
식사를 마친 사현은 천장이 높고, 햇볕이 짱짱하게 들어오는 브런치 레스토랑에 우영을 데리고 갔다. 우영은 사현이 시켜준 음식들을 신나게 먹어치웠다. 사현은 늘 그렇듯, 그릇을 싹싹 비우는 우영을 기껍게 감상했고. 그의 앞에 놓인 건 패션푸르츠 에이드가 다였다.
그러고는 집에 가는 길에 그 유명한 ‘5번 가’에서 쇼핑을 했다. 많이 돌아다니지도 않았다. 유명 명품 숍에 들어가 한 바퀴 크게 훑기만 했다. 근데 우영과 사현의 손에 들린 쇼핑백이 무려 열두 개였다.
허나 우영은 놀라지 않았다. 사현이 차를 가게 앞에 세웠을 때부터 충분히 예상한 것이었다. 서울에서도 한 번 쇼핑 가면 늘 이 정도는 사 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가격표가 달러로 표기되어 있어서 돈의 액수가 크게 와닿지 않았다. 아, 이 니트는 이천백이십 원이구나. 운동화는 칠천팔백 원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편했다.
그 후 둘은 펜트하우스에서 낮잠으로 두 시간을 보낸 뒤 고대하고 고대하던 MoMA(뉴욕 현대 미술관)로 왔다.
뉴욕 현대 미술관은 그다지 미술관처럼 생기지 않았다. 익히 아는 <루브르>나 <오르세 미술관>은 언뜻 봐도 와, 저기 엄청난 예술이 잠들어 있겠구나, 싶은 기운을 마구 내뿜거늘. <뉴욕 현대 미술관>, 즉 MoMA는 그렇지 않았다.
하얀 외벽에 간결한 간판, 손자국 하나 없는 큰 유리창, 높은 건물. 박물관보다는 잘나가는 벤처 기업의 본사 같은 느낌이었다. 굳이 따지면, 사과 모양 메이커를 가진 전자제품 회사의 건물과 비슷했다.
그만큼 깔끔했고, 군더더기 없었다. <갤러리 비>와는 묘하게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사현이 건물을 구경하느라 정신없는 우영을 안으로 이끌었다.
MoMA의 실내는 몹시 컸다. 여기저기 사람이 모여 북적거리는 게, 하나의 광장 같았다. 사현이 표를 끊는 동안 우영은 입을 헤벌쭉 벌린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바닥은 차콜색이고 벽은 흰색인 메인 홀에는 작품이라곤 없었다. 건물의 첫인상과 마찬가지로 잘나가는 회사에 들어온 것 같았다. 나쁘게 말하면 삭막했고, 좋게 말하면 깔끔했다.
하지만 묘하게 설렜다.
그림이 많이 몰려 있는 곳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어떠한 느낌이 있다. 켜켜이 쌓인 물감 냄새. 그 위로 뿌린 보존액과 소독약 냄새. 도서관에 들어온 듯 종이 냄새가 나기도 하고, 쨍한 조명에 눈꺼풀이 간질거리기도 했다.
더군다나 이곳에 있는 그림의 주인이 어디 보통 대단한가. 고흐, 피카소, 잭슨 폴록, 앙리 마티스, 살바도르 달리, 몬드리안, 프리다 칼로, 앤디 워홀⋯⋯. 셀 수가 없었다. 그들의 그림이 한 공간에 모두 모여 있으니 장엄한 기운이 넘실거릴 만도 했다.
우영과 사현은 조용히 전시를 관람했다. 여타 다른 연인들처럼 껴안고 속삭이며 그림에 관해 토론하는 게 아니라, 팔뚝이 스칠 듯 말 듯한 거리를 유지하며 오롯이 그림에 집중했다. 그만큼 그림을 대하는 자세가 진지했다.
종종 우영이 그림에 관해 질문하면, 사현은 듣기 좋은 음성으로 조곤조곤 도슨트를 자처했다. <갤러리 비>의 B를 도슨트로 써먹은 건 명현 이후로 우영이 마지막이 될 테였다.
우영은 이따금 사현을 훔쳐보다가, 대가의 작품에 푹 빠졌다가, 또 사현을 훔쳐보길 반복했다. 그림 앞에 선 사현은 언제 봐도 멋지다. 예전만큼 자주 볼 수도 없어서 귀하디귀하다.
그림을 감상할 때의 사현은 무표정인데, 평소의 그 무신경한 표정과는 미묘하게 달랐다. 집중해서 살짝 튀어나온 윗입술과 자주 깜빡이지 않는 눈꺼풀이 대리석 조각 같은 아름다움을 뽐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영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사위가 황홀한 그림의 연속이다. 옆에는 사현이 서 있고 눈앞에는 교과서에서나 보던 작품이 떡하니 걸려 있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무려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
우영이 무언가에 홀린 듯 넋을 빼고 그림을 쳐다봤다. 보고 있는데, 분명 눈으로 보고 있는데도 믿을 수가 없었다.
고흐 특유의 붓 터치가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린다. 전혀 비슷하지 않은 색들이 강강술래 하듯 움직이는데, 동화 속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필촉이 소용돌이친다. 그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면, 고흐가 「별이 빛나는 밤에」를 그리던 그 순간을 함께 경험할 수 있다.
그저 경험만 하랴. ‘색깔의 귀재’라 불리는 그의 경이로운 감각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말도 안 되게 비현실적인 풍경인데, 보고 있으면 온몸으로 현실이라는 걸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우영과 사현은 한동안 아무런 말 없이 그림만 응시했다. 사현은 이곳에 수십 번도 더 왔지만, 여전히 진지하게 그림을 감상했다. 우영이 그를 따라 고흐에 푹 빠져 있을 때였다.
“너도 이래?”
사현이 그림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네?”
“고흐는 세상이 이렇게 보였다잖아. 색깔이 춤을 추고, 자기한테 말을 걸었대.”
“⋯⋯.”
“너도 그래? 네가 보는 세상은, 네 그림처럼 햇살에서 형광빛이 번져? 나뭇잎에 투과되는 빛이 그렇게 예쁜 형광 연두색이야? 타오르는 노을은 찬란한 형광 주홍색이고?”
사현이 우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곤 좋아하는 가수 앞에 선 소녀팬처럼 종알종알 질문을 던졌다. 우영이 피식 웃으며 사현의 귓바퀴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아니요. 똑같아요. 아스팔트로 뒤덮인 도시. 인공적인 나무와 화단. 무표정의 사람들. 까무잡잡한 하늘. 제 눈에 비치는 세상은 그림만큼이나 눈부시지 않아요.”
“⋯⋯.”
담담한 우영의 말에 사현이 꾹 입을 다물었다.
하긴, 우영이 여태 어떻게 살아 왔는데. 밑바닥이라는 밑바닥은 죄다 경험하지 않았나. 그런 그의 눈에 세상이 그토록 찬란해 보일 리 없었다. 온통 흙밭에 먼지 구덩이겠지.
사현이 쌉싸름한 미소를 띠었다. 현재가 너무 행복해서, 가끔 과거를 잊고 한다. 눅눅하게 젖은 저의 과거는 물론, 우영의 과거까지도. 이상하게 우울해졌다. 과거의 흔적이라곤 남김없이 털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끈질기게 발뒤꿈치에 붙어 있는가 보다.
그런 사현의 생각을 꿰뚫어 본 걸까. 우영이 사현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 안았다. 그리고 다시 그림을 바라봤다.
“저는 그림 속에 제 이상향을 재창조한 거예요.”
“⋯⋯.”
“진짜 세상은 너무⋯⋯ 어두웠으니까요.”
“⋯⋯.”
“반지하 방에는 햇빛이 안 들었고, 조명 안에는 죽은 벌레가 득실거려서 불을 켜도 어두웠어요. 근데 이상하게 밤에는 밝았어요. 창가에 가로등이 있었는데, 빛이 직선으로 떨어져서 불을 켤 필요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자연히 낮에는 자고, 밤에는 그림을 그리게 된 거예요.”
그렇게 옛날도, 그렇다고 최근도 아니다. 근데 다시 돌아가라고 한다면 자신 없었다. 좁고 퀴퀴한 곳에서 예전만큼 그림에 매달릴 수 있을는지. 사현을 보지 않고도 붓을 쥘 수 있을는지.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하루 벌고 하루 먹는 인생에 내쫓기다가 아무도 모르게 죽음을 맞이하겠지. 사현을 만나지 않았다면 여전히 그리 살고 있을 것이고. 어쩌면 진즉 지쳐서 캔버스와 화구를 죄 내다 버렸을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상상한 우영이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사현이 무슨 일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영을 바라봤다.
“근데 말하다 보니까 생각이 바뀌었어요.”
우영이 나지막이 말했다.
“어? 바뀌었다고?”
“네. 요즘에는⋯⋯ 제 세상도 고흐가 보는 세상만큼이나 아름답게 보여요.”
우영이 눈과 입을 한껏 휘며 웃었다. 사현이 좋아하는 그 특유의 예쁜 미소였다.
“저는 이제 꿈도 있고, 원하는 화구를 마음껏 살 수 있을 만큼의 돈도 있고, 비록 제 집은 아니지만 아주아주 멋진 집에서 살고 있고, 뉴욕으로 2주나 여행 올 만큼의 여유도 있잖아요. 당연히 세상이 다채롭고 아름답죠.”
“⋯⋯.”
“물론, 제일 아름다운 건 <갤러리 비>의 B가. <화 그룹>의 백 사장님이. 백사현이 제 애인이라는 거고요.”
우영이 킥킥 장난스럽게 웃으며 사현의 관자놀이에 쪽 입술을 붙였다가 뗐다. 사현이 그런 우영의 품으로 느릿하게 흘러 들어갔다. 그의 체온 안에서 그의 냄새를 맡고 있으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네가 나 때문에 행복하다는 걸 들을 때마다 얼마나 기쁜지 몰라.”
“그래요? 앞으로 자주 말해 줄게요.”
우영이 사현의 머리칼에 볼을 비볐다. 사현이 조금 더 바짝 우영에게 엉겨 붙었다. 단단하고 두툼한 가슴팍이 선연히 느껴졌다.
아, 다 벗겨 놓고 코를 파묻으면 좋으련만. 탱글탱글한 그의 가슴이 몹시 그리웠다. 조물거리는 맛이 있는데. 어젯밤에도 실컷 주무르며 잤거늘, 벌써 금단 현상이 올라왔다.
사현이 우영의 허리를 껴안고 고흐의 그림 앞을 벗어났다. 봐도 봐도 보고 싶은 그림이나, 한 작품 앞에 오랫동안 터를 잡고 있는 건 관람 예의가 아니므로.
“저녁에 좋은 곳 가서 와인 마실까? 너 좋아하는 스테이크랑 브루스케타 시켜줄게.”
다음 전시장으로 이동하던 중, 사현이 물었다. 뉴욕에는 멋진 루프톱 바가 많다. 거기서 맛있는 음식과 감미로운 와인을 곁들이면 퍽 낭만적이리라. 사현이 머릿속으로 루프톱 바 목록을 정리하고 있는데, 우영이 예상치 못한 말을 했다.
“좋은 곳이요? 저 아는 데 있는데.”
사현의 눈썹이 갈매기 모양으로 올라갔다.
“아는 곳이 있다고? 여기에? 뉴욕? 맨해튼에?”
“네.”
“어디?”
순간, 사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 우영이 제가 아닌 다른 사람과 이런 곳에 와서 데이트했을까 봐. 있지도 않은 사람에, 있지도 않은 일이었는데 일순 머리끝까지 질투가 솟구쳤다.
“우리 펜트하우스요.”
그 말에 사현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가 묵음으로 자신을 비난했다. 어째 우영과 연인 관계를 이어 갈수록 감정이 예민해지는 기분이다. 유치해지고, 치졸해지고, 사악해졌다. 그러다가도 한없이 좋고, 좋고 또 좋으니 하루가 아주 다이내믹했다.
“장 봐서 테라스에서 마셔요. 야경 끝내주잖아요.”
“그래도 전문 루프톱 바랑은 또 다른 느낌일 텐데.”
“하지만 펜트하우스에서는 남 시선 신경 쓰지 않고 뽀뽀할 수 있는걸요.”
“미국은 바깥에서 섹스만 안 하면 상관없어.”
“그것도 할 것 같아서 그러죠.”
“⋯⋯.”
사현이 잠깐 침묵했다. 그러더니 곧 동의한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MoMA 관람은 무릎이 아플 정도로 오래 이어졌다. 워낙 전시장이 큰 데다가 사람이 붐비니 정신이 없었다. 와중에도 우영은 눈을 부릅뜨고 그림을 감상했다. 제가 언제 다시 뉴욕에 오겠나 싶어서.
아무리 돈도, 여유도 있다지만, 집 앞 김밥천국도 아니고 비행기로 왕복 서른 시간인 곳을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할 순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관람이 끝났다. 우영이 저도 모르게 바짝 올리고 있던 승모근을 느슨히 풀었다. 눈알이 뻑뻑한 게 짙은 피로가 올라왔다. 그런데도 기분은 좋았다. 평생 제 눈으로 볼 수 있을 거라 감히 상상도 못 했던 그림들을 봤으니까.
“막, 손이 간지러워요. 붓 쥐고 싶어서.”
1층으로 내려가는 길, 우영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이렇게 좋은 걸 잔뜩 보고 나면 거기서 받은 유의미한 영향과 감동을 제 손으로 다시 창조하고 싶었다.
“그림 그리고 싶어?”
살짝 고개를 옆으로 흘린 사현이 물었다. 결 좋은 그의 머리칼이 차르르 흘러내렸다. 그 아래로 와이셔츠 칼라가 사그락거리며 부서졌다.
사현은 전시 중반쯤, 덥다며 덧입고 있던 니트를 벗었다. 안에는 얇은 셔츠 하나였는데, 우영이 단연 좋아하는 그의 옷차림이었다. 그 후로는 그림 한 번, 사현의 날개뼈나 허리 한 번, 또 그림 한 번 번갈아 보느라 눈이 빠지는 줄 알았다.
우영이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하얀 셔츠로 투과되는 빛. 그 안에 은근히 보이는 허리선과 팔뚝 선. 반듯하고 깔끔한 칼라 위로 솟은 매끄러운 목. 또 사현이 범람한다.
순간 현기증이 나서 눈을 세게 감았다가 떴다. 고흐와 피카소의 그림이 있는 곳에서 발정하다니. 있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네. 근데 당장 그릴 순 없으니까, 돌아갈 때까지 이 기분을 잘 기억해 둬야겠어요. 아니면 귀국하기 하루 전날. 그때 또 오면 안 돼요? 여기서 펜트하우스까지 멀어요?”
우영이 사력을 다해 아무렇지 않은 척을 연기했다. 그러자 사현의 입매가 익살맞게 뒤틀렸다.
“뭐 하러 귀국을 기다려.”
“그럼요? 여기도 화방이 있어요? 하긴, 없는 게 이상하겠네요. 저 거기 가 봐도 돼요?”
우영의 눈이 대번에 반짝였다. ‘뉴욕의 화방’이라. 세상에, 음절 하나하나 멋지지 않은 게 없었다.
“데려다줄게. 내일 가 볼까?”
사현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미국의 화방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도 우영이 가고 싶어 하니 데려다줄 수 있었다.
“네!”
우영이 좋아 죽겠다는 듯 함박웃음을 틔웠다. 사현이 우영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복슬복슬하고 보드라운 머리칼이 사현의 손을 한입에 삼켰다. 우영은 구부정히 등을 굽힌 채 그가 자신의 머리칼을 더 편히 쓰다듬을 수 있도록 도왔다.
“근데 꼭 내일까지 안 기다려도 되는데.”
“네?”
“저기 저 하얀 거. 캔버스 아니니?”
사현이 턱짓으로 1층 홀을 가리켰다. 우영이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그의 말마따나 널따란 홀에 일정한 크기의 캔버스 수십 개가 줄지어 서 있었다. 그것도 연필 자국 하나 없는 새 캔버스. 분명 입장할 때는 없던 것이다.
우영이 무언가에 홀린 듯 캔버스를 향해 다가갔다. 검은 이젤에 놓인 캔버스들 뒤로 여러 가지 화구들이 놓여 있었다. 크레파스 같은 기초적인 것부터 색연필, 콩테, 파스텔, 수채화 물감, 유화 물감, 아크릴, 스프레이, 등등의 전문가용까지 규칙 없이 뒤엉켜 있었다.
그 앞엔 조막만 한 손으로 페인트용 붓을 휘두르는 어린아이도 있었고, 콩테로 무언갈 열심히 표현하고 있는 할머니도 있었으며, 서툰 솜씨로 서로의 모습을 그리는 연인도 있었다. 하나의 개방된 그림 놀이터 같은 광경이었다.
일종의 이벤트인가. 아니면 익명의 작가가 구상한 참여형 작품인가. 뭐가 됐든 붓질에 목마른 우영에겐 퍽 근사한 상황이었다.
우영이 사현을 쳐다봤다. 그림을 그려도 되겠냐는 물음 대신이었다. 사현이 얼마든지, 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영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우영은 아주 빠른 손놀림으로 화구 더미에서 쓸 만한 것들을 골라냈다. 그렇게 값비싼 물감과 붓은 아니었지만, 돼지털(사현의 표현이다) 같은 붓으로 그림을 그린 적도 있는데 그에 비하면 명품에 가까웠다.
그는 유화 물감 여덟 개와 붓 하나, 그리고 린시드 오일통 등을 가져왔다. 그 후, 캔버스 위에 바이올렛 그레이를 쭉 짜더니 옆으로 빠르게 펴 바르기 시작했다.
사현은 그런 우영의 뒤에 한 발자국 떨어져 서 있었다. 행여 우영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사현의 눈동자는 그림을 그리는 우영만큼이나 빠르게 움직였다. 우영이 칠하는 캔버스도 봐야 했고, 그가 든 붓도 봐야 했고, 그림에 집중한 우영의 얼굴도 봐야 했다. 그림 그리는 모습을 보는 건 오랜만이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나가던 관람객 역시 우영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우영은 한 시간 정도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그의 그림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땐, 수십 명의 사람이 고요히 우영의 그림에 집중하고 있었다.
마침내 우영이 붓을 내려놓았다. 그의 앞엔 손바닥 두 개를 합친 크기의 캔버스가 알록달록하게 물들어 있었다.
우영이 그린 것은 일종의 숲이었다. 연보랏빛과 푸른빛이 일렁이는 하늘 아래에 많은 나무가 쭉쭉 뻗어 있었는데, 평소의 그림과 조금 달랐다. 우영은 독특한 색감을 사용하는 작가지, 사물이나 풍경 자체를 뒤틀진 않는다. 서울은 서울처럼, 나무는 나무처럼, 자동차는 자동차처럼 그린다는 말이다.
근데 이번 그림은 그렇지 않았다. 나무가 세모 모양이다. 네모도 있었고, 타원도 있었으며, 기하학적인 모양도 있었다. 나뭇잎도 제각각이었다. 흔히 아는 나뭇잎도 있는가 하면, 롤리팝처럼 동그란 나뭇잎도 있었고, 점으로 표현된 것도 있었으며, 솔잎처럼 비죽비죽 솟은 것도 있었다.
묘사만 들으니 유치한가? 마치 유치원생이 그린 엉망진창의 그림을 상상하는가?
틀렸다. 무엇이든 우영이 그리면 그것은 예술이 되고, 새로운 기준이자 또 하나의 파라곤(paragon, 모범)이 된다.
지그시 응시하고 있으면 나뭇잎이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어린아이의 웃음소리와도 닮았고,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와도 닮았다. 나뭇잎은 다 다른 맛이 난다. 달콤하기도 하고, 새큼하기도 하다.
아마도 우영은, 오늘의 감상을 그림으로 표현한 게 아닌가 싶다. 역사를 뒤흔든 각양각색의 대가들을 나무로 나타내고, 그들의 특색을 나뭇잎으로 그려 넣은 것이다. 허나 타인은 모를 것이다. 그와 오늘 하루를 함께 보낸 사현만 해석할 수 있는 그림이었다.
우영은 한 발자국 떨어져서 그림을 살폈다. 아무리 단시간에, 빠르게 그린 것이라지만 어쨌든 사현이 보고 있으니 대충 마무리하고 싶진 않았다.
이리저리 그림을 손보던 우영이 해맑은 낯으로 사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덩치가 좋은 여성이 우영의 앞을 막아섰다. 키가 어찌나 큰지, 우영의 시야가 다 가려질 정도였다.
“Excuse me.”
그녀가 말을 걸었다. 녹색 눈동자가 정확히 우영을 향해 있었다.
우영이 흡, 숨을 말아먹었다. 이제 뉴욕 생활 이틀 차. 영어는 아직 멀고, 멀고 또 먼 언어다. 괴물이라도 마주친 듯, 등줄기가 섬뜩했다. 우영이 데굴데굴 눈을 굴리며 사현을 찾았다.
허나 우영이 그러든 말든, 여자는 어딘가 상기된 음성으로 와다다 말을 쏴붙였다. 어찌나 빠르게 말하는지, 우영은 짧은 단어 하나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과도하게 삼킨 영어 탓에 속이 메슥거린다 싶을 때, 여자가 뱉은 단어 하나를 잡아냈다.
NEON. 네온.
우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언급한 네온이 자신을 뜻하는 게 맞는지 묻고 싶었으나 꽉 다물린 입술은 열리질 않았다.
“Hi, Anna.”
그 순간, 사현이 구원자처럼 우영과 여자 사이를 가르고 들어왔다. 우영이 참고 있던 숨을 토해 냈다. 저보다 한참 작은 사현의 등이 아주 단단하고 강한 벙커처럼 느껴졌다.
여자가 사현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그러더니 곧 비명 같은 감탄을 질렀다.
“Oh, My, God! B?”
우영과 사현, 그리고 안나는 MoMA의 야외 정원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늘과 햇볕이 적절히 섞여 들어오면서 복작거리는 사람들과 한 발 떨어진 곳이 썩 괜찮았다. 졸졸 흐르는 물줄기와 듬성듬성 놓인 조각상도 마음에 들었다.
우영은 카페 라테를 쪽쪽 빨며 정원을 구경했다. 속으로 하는 생각일랑, 그래도 <갤러리 비>의 정원이 훨씬 예쁘다는 거였다. 우리 사현이 형은 마음만 먹으면 MoMA보다 훨씬 대단한 미술관 만들 수 있는데. 돈도 엄-청 많고, 능력도 되-게 좋은데. 라고 의미 없는 질투도 한번 해 봤다.
그동안 사현은 맞은편에 앉은 사람과, 그러니까 우영이 네온임을 단번에 알아봤던 안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우영이 방금 완성한 「무제」의 그림이 놓여 있었다.
사현은 안나와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라고 했다. 현재 MoMA의 부관장으로 있는 그녀는 네온의 그림에 아주 관심이 많단다. 실제로 <갤러리 비>에 우영의 초청 전시를 여러 번 문의했고, 긍정적으로 진행 중이었다.
물론 우영은 몰랐던 사실이다. 제 일과 관련한 것들은 늘, 항상 사현이 결정했으니까. 그래도 제가 MoMA에서 전시할 기회를 얻다니. 감히 상상조차 해 보지 않았던 터라 놀라긴 했다.
사현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사이 안나의 말을 번역해 줬다. 그녀가, 또 이곳 사람들이 우영의 그림을 얼마나 감탄스럽게 봤는지.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 하물며 MoMA 직원 몇몇은 우영의 세 번째, 네 번째 전시를 보기 위해 한국에 오기까지 했었단다.
안나는 최근 홍콩 옥션 경매에서 우영의 「단풍 담장」이라는 작품을 구매했다며, 너무 아름답다고 칭찬에 칭찬을 거듭했다. 우영이 어색하게 웃으며 그 칭찬에 화답했다.
「단풍 담장」은 사현과 만나기 전에 그렸던 그림이다. 그와 함께 갔던 첫 경매에서 6천만 원에 팔렸던 그 그림 말이다. 그게 돌고 돌아 MoMA의 부관장 손에 들어가다니. 우영은 그거 얼마 주고 샀냐고 물어보고 싶었으나 차마 영어로 질문할 자신이 없어 말았다.
“자기야.”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사현이 비로소 우영을 바라봐줬다.
“네?”
“안나가 이 작품 사고 싶대.”
우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걸요? 산다고요? 왜요?”
“너무 좋대. 꼭 사서 자기 오피스 입구에 걸어 놓고 싶대. 완전 어-썸하고 큐-트해서 방문객들이 다 좋아할 거래.”
사현이 안나 특유의 말투를 흉내 내며 말했다. 미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그 말투였다.
우영이 콧잔등을 찡그렸다. 방금 완성한 이 그림은 돈 주고 팔기엔 좀, 뭐랄까, 좀, 찝찝했다. 물론 대충 그린 그림은 아니다. 그래도 팔 수는 없었다. 여태 돈 주고 판 그림들은 다 열심히, 정성 들여 그렸단 말이다.
왜냐하면 제 그림과 사현의 이름이 항상 함께 거론되니까. <갤러리 비>의 B가 좋아하는 그림, 그가 발굴한 최고의 신진 작가, 역시 B의 안목, 그런 설명이 덧붙으니까.
“팔기엔 조금 그렇지⋯⋯ 않나요?”
우영이 흘깃 안나의 눈치를 보며 속삭였다.
“왜?”
“그냥⋯⋯, 음⋯⋯. 사기 치는 기분이에요.”
그 말에 사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 박장대소하던 그가 우영의 말을 안나에게 전달했다. 그러자 안나도 사현처럼 깔깔거렸다. 우영이 찝찝한 낯으로 두 사람을 쳐다봤다. 혹시 저를 놀리는 건가 싶어서.
“자기야, 이게 어떻게 사기야.”
“하지만 제가 원래 파는 그림보다 완성도도 떨어지고, 들인 정성도 부족한걸요.”
“괜찮아.”
“그래도,”
“우영아.”
“네.”
“충분히 멋있어. 예뻐. 네 그림은 예쁘지 않은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
“사실 내 사무실에 두고 싶은데, 안나 오피스에 걸어 두면 홍보로 좋을 것 같아서 팔려는 거야.”
사현이 테이블 아래로 우영의 손등을 엄지로 살살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어찌나 믿음직스러운지. 우영이 턱을 주억이며 그렇겠노라 말했다. 이러다 사현이 제가 코 푼 휴지를 팔겠노라 해도 그러라며 쓰레기통을 털어 줄지도 모르겠다.
“아, 그리고 네가 여기까지 온 김에, 전시 이야기를 좀 하고 싶다는데.”
“⋯⋯지금요?”
“응. 전시장도 둘러보고, 우리 갤러리랑 협업할 이쪽 큐레이터 팀도 보고.”
사현의 눈알이 반질반질하게 빛났다. 광대에는 윤이 흘렀고, 만면엔 생기가 가득했다. <갤러리 비>에서 큐레이터들과 미팅할 때의 그 모습이었다.
그 얼굴을 가만히 보던 우영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영과 사현이 MoMA에서 나왔을 땐 온 세상이 검었다. 저녁 시간도 훨씬 지나 길거리에 사람이 없었다. 우영이 부루퉁한 표정으로 노란 스포츠카에 올라탔다. 시동을 걸던 사현이 운전대에 손을 올린 채 우영을 빤히 쳐다봤다.
“왜요.”
우영이 사현의 시선에 따끔거리는 볼을 벅벅 문지르며 물었다.
“왜 삐졌어?”
사현이 물었다. 우영의 눈썹이 확 구겨졌다.
“안 삐졌어요.”
“삐졌는데.”
“안 삐졌다니까요.”
“안 삐졌기는. 이게 앞 유리 뚫고 나갈 만큼 튀어나왔는데.”
사현이 우영의 아랫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움찔, 어깨를 떤 우영이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 덕분에 그의 볼이 앞으로 볼록하게 튀어나왔다. 아주 야금야금 씹어 먹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 얼굴이었다.
잠시 침묵하며 정면만 응시하던 우영이 팩, 원망스러운 눈으로 사현을 쳐다봤다.
“형 이러려고 여기 온 거죠?”
“무슨 말이야?”
“그 안나라는 사람 만나려고 온 거잖아요. 홀에 캔버스 두는 참여 전시 있는 것도 미리 알고 있었죠? 담당자가 안나였으니까, 그 사람이 저 발견할 수 있도록 거기서 그림 그리게 한 거잖아요.”
속사포로 쏟아진 우영의 추론에 사현이 으음, 목으로 신음했다. 그러더니 하는 말이,
“⋯⋯똑똑한데?”
였다. 우영이 하, 짧게 조소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저 형이랑 있는 게 좋아서, 형이랑 데이트한다고 헤벌쭉 웃고 있었네요. 형은 일하러 온 건데.”
“⋯⋯.”
“짜증 나. 너무 짜증 나요. 진짜, 너무⋯⋯. 나보다 일이 우선인 걸 느낄 때마다 막, 머리에서 쥐 나는 기분이에요. 얹힌 것처럼 속이 답답하고 심장이 벌렁거린다고요.”
우영이 다시 생각해도 분하다는 듯 꽈아악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의 손등 위로 올록볼록한 핏줄이 올라왔다. 눈썹은 오르막을 그리고 있고, 입술은 퉁퉁하게 부풀어 있고, 항상 순한 분위기를 유지하던 눈매가 부리부리하게 곤두서 있었다.
사현이 혀를 내어 자신의 아랫입술을 핥았다.
“아, 어쩌지.”
“뭐가요.”
“미안해해야 하는데, 지금 네가 너무 귀여워서 그런 감정이 안 들어.”
사현이 손을 꼼지락거렸다. 손가락이 우영을 만지고, 움켜쥐고 싶다고 난리였다. 그 말에 우영이 눈을 가늘게 떴다가 새치름히 턱을 들어올렸다.
“그럼 귀여워라도 하시든가요.”
“⋯⋯그럴까?”
사현이 기다렸다는 듯 안전띠를 풀었다. 그리고 우영의 허벅지 위로 꼬물꼬물 기어갔다. 우영은 여전히 화난 얼굴을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사현의 등을 받쳐 안았다. 좁은 차내에 마구 엉킨 다리를 풀어 자신의 허리 양옆으로 척척 정리해 주기도 했다.
사현이 그런 우영의 양 볼을 부드럽게 거머쥐었다. 그리고 쪽쪽 새처럼 입술을 쪼아 먹었다. 우영은 그런 사현의 스킨십에 응해 주지 않고 조각상처럼 가만히 굳어 있기만 했다. 나름대로 토라졌다고 시위하는 거였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사현은 그 모습에 더 맹렬한 사랑스러움을 느꼈다. 이가 다 간지럽다. 아주 우영을 씹어 먹고 싶었다.
사현이 촉촉한 혀로 우영의 입술을 살살 핥았다. 꼭 우유를 핥아 먹는 고양이처럼. 이따금 우영의 귓불을 주무르거나 목덜미를 쓰다듬거나, 깔고 앉은 허벅지를 엉덩이로 은근히 비비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우영의 속눈썹이 크게 휘청거렸다.
“삐지지 마.”
사현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화가 나는 걸 어떡해요.”
우영이 애써 눈을 피하며 툴툴거렸다. 그 모습이 또 귀여워서, 사현이 엄지로 우영의 광대를 살살 쓰다듬었다.
“내 일 하러 온 거 아니야. 네 일 하러 온 거지.”
“⋯⋯.”
“네 작품이 여기 걸려서 전 세계가 감탄하는 걸 보고 싶어. 네가 얼마나 대단한지, 네 그림이 얼마나 멋진지 길가는 사람 붙잡고 쩌렁쩌렁 소리치고 싶은데, 그걸 못하니까 이렇게라도 해야겠단 말이야.”
“⋯⋯.”
“내가 너무 욕심 부렸니?”
우영의 눈동자가 아래로 떨어졌다. 저를 위해 그랬단다. 그럼 기분이 봄빛에 녹는 눈처럼 사르르 풀어져야 하는데 어째 더 더러워졌다. 사현은 더할 나위 없이 어른이거늘, 저는 여전히 어린 애송이였다. 철없이 행동한 것 같아 부끄러웠다.
언제쯤 그를 따라잡을 수 있나. 언제쯤 그를 보듬고, 이해하는 너그러운 어른이 될 수 있나.
우영의 자아가 심연을 뚫고 추락하는데, 사현이 검지로 우영의 턱을 추켜올렸다.
“사실 욕심 맞아. 근데 그냥 네가 이해해.”
“뭐라고요?”
“네 그림이 너무 대단한 건 네 죄지, 내 죄가 아니잖아?”
능청맞게 말한 사현이 우영에게 답삭 안겼다. 그리고 우영의 통통하고 단단한 가슴을 조물거렸다. 하루의 피로가 단숨에 증발하는 것 같았다.
“우영아. 나는 네가 더 잘났으면 좋겠어.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
“너도 그렇지 않아? 내가 방구석에서 빌빌대는 것보다야 <갤러리 비>에 B로서 있는 게, 화 그룹의 사장으로 있는 게 좋지 않아?”
사현이 우영에게 기댄 채, 눈만 들어 물었다. 우영이 그런 사현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사실대로 말해도 돼요?”
“응.”
“옛날엔 그랬거든요? 형이 일하는 게 멋지고, 형이 뭘 했는데 얼마나 흑자를 봤다느니, 주식이 올랐다느니, 그런 뉴스 보는 게 자랑스러웠는데⋯⋯.”
“그랬는데?”
“지금은 형이 아무것도 안 했으면 좋겠어요.”
“⋯⋯.”
사현이 설핏 눈살을 구겼다. 아무것도 안 했으면 좋겠다니. 갤러리도 나가지 말고, 일도 하지 말라는 건가. 그럼 종일 집에서 멍 때리고 있으라고? 상상만으로도 뼈가 굳는 것 같았다. 여태 일하는 모습 보기 좋다더니 갑자기 왜.
사현이 우영의 목울대를 바라보며 고민하는데, 우영이 그의 턱을 부드럽게 들어올렸다.
“아무것도 안 하고 제 옆에 붙어 있으면 좋겠어요.”
“⋯⋯.”
“종일 물고 빨게.”
“⋯⋯뭐?”
“보고 싶을 때 보고, 뽀뽀하고 싶을 때 뽀뽀하고⋯⋯. 그럼 오늘처럼 짜증 날 일도 없을 거고, 형이 출근하는 거 보면서 아쉬울 필요도 없을 거고, 행여 형이 야근할까 봐, 출장 갈까 봐, 나 몰래 커피 마실까 봐, 일 때문에 바빠서 내 생각일랑 손톱만큼도 안 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일도 없을 거고⋯⋯.”
우영의 걱정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말은 어눌한데, 사현을 응시하는 눈동자는 야차 같았다. 이글거리는 시선이 당장이라도 사현을 뜯어먹을 듯했다. 사현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 네가 한 말에⋯⋯.”
“네.”
“발기하면 좀 변태 같니?”
사현이 쥐도 새도 모르게 불룩해진 자신의 아랫도리를 흘끔 내려다봤다. 일 분 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 박혀 있는 건 갑갑할 거라 생각했는데. 우영의 곁에 있다면 제법⋯⋯ 괜찮을 것 같았다.
종일 물고 빤다니. 그럼 24시간 옷 입을 필요가 없겠지. 해 뜰 때까지 몸을 섞다가 늦은 오후에 눈을 뜨고, 이불 속을 헤엄치다가, 시선이 맞으면 또 몸을 섞고, 때늦은 끼니를 먹고, 시트를 둘둘 만 채 우영이 그림 그리는 걸 구경하고, 그러다 그의 섹시한 뒷모습에 발정해 달려들고, 같이 씻고, 함께 저녁을 먹고, 새벽 늦게까지 서로를 바라보는 그런 삶.
상상만 해도 헤벌쭉 웃음이 솟구쳤다. 그래, 이만하면 일도 할 만큼 했지. 돈이야 썩어 나고, 아까운 것이라곤 시간뿐인데. 다 때려치우고 우영의 옆구리에 붙어사는 게 가장 성공한 삶이 아닐까.
“⋯⋯발기했다고요? 좋단 말이에요? 징그러운 게 아니라? 가끔 형을 제 작업실에 묶어 두고 싶다는 생각도 하는데요? 미친놈 같지 않아요?”
우영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뒤틀었다. 뭐 하나 범죄가 아닌 게 없거늘, 그걸 듣고 발기하다니. 사현의 취향이 그런 쪽이던가. 부드러운 섹스도, 격정적인 섹스도 좋아하는 터라 판단하기가 힘들었다.
우영이 진지하게 고민하는데, 사현이 우영의 뺨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나는 네가 뭘 하든 좋아. 나를 버리지만 않으면 돼. 나를 떠나거나, 내게 무관심해지거나, 내가 귀찮아지거나, 내 존재가 짜증 나거나, 그런 거만 아니면 다 좋아.”
“⋯⋯.”
“근데 하물며 나랑 종일 같이 있고 싶어서 나를 묶어 두겠다니. 두 팔 벌리고 환영할 일이지.”
사현이 듣기 좋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그의 동공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어둑한 밤인데도 반질반질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참으로 신기했다.
“제가⋯⋯ 형을 버린다니요. 왜 그런 생각을 해요.”
우영이 눅눅하게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현을 버린다니. 사현과 헤어진다니. 찰나 상상만 했는데도 돌멩이를 삼킨 듯 속이 무거웠다.
사현이 흐리게 웃었다.
“내가 너무 행복한가 봐. 옛날에는 현재의 불행에 집중해서 미래의 불행 같은 건 가늠조차 안 했거든?”
“⋯⋯.”
“근데 요즘엔 지금 이 행복을 놓치면 어쩌나, 잃으면 어쩌나 좀 무섭네. 복에 겨운 거지.”
그의 지나친 걱정에 우영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제가 무엇을 어떻게 확인시켜 주든, 해갈될 수 있는 걱정이 아닌 듯해서.
우영의 세상은 오롯이 사현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아마 사현도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저런 걱정을 한다니. 우영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차라리 내일 세상이 멸망하면 어쩌나, 걱정해요. 뭐 그렇게 쓸데없는 걱정을 해요.”
“그럴까?”
사현이 나지막이 웃으며 우영의 입술을 쪼오옵, 세게 빨았다. 그러고는 운전석으로 돌아갔다. 안전띠를 매고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키는 행동에 군더더기라곤 없었다.
우영이 께름칙한 낯으로 그를 따라 안전띠를 맸다.
차는 매끄럽게 도로 위를 달렸다. 낮과 달리 한결 여유로워진 도로가 묘하게 적적했다.
차가 신호에 막혀 멈춰 섰을 때였다. 사현이 우영을 쳐다봤다. 우영 역시 사현을 바라봤다.
“말 나온 김에, 언젠가 꼭 나 납치해서 가둬 줘. 아, 그전에 미리 말해 주고. 내 재산 다 네 명의로 이전시키게.”
“그런 말 진지하게 하지 마요.”
“진지한 말이니까 진지하게 들어. 납치는 괜찮은데, 좁은 집에서 맛없는 거 먹으면서 살기는 싫단 말이야. 알았지? 꼭 미리 말해라. 부동산이랑 주식이랑 처리할 게 한두 개가 아니야.”
쓸데없이 계획적이고 철두철미한 사현에 우영이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저렇게 말하는데 진짜 납치해 버릴까 보다. 종일 제 침대에 묶어 두고 살이 다 내릴 때까지 쪽쪽 빨아먹어야지. 그 후에 열심히 먹여서, 살을 찌우고 또 빨아먹어야지. 하지 말라고 발길질을 해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엉엉 울면 흐르는 눈물도 내가 다 먹어 버려야지.
우영이 흐으음, 목으로 신음했다.
사현의 납치.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 * *
우영과 사현은 집으로 향하기 전, 리커(Liquor)샵에 들렀다. 와인을 사기 위해서였다. 리커샵은 술의 백화점 또는 술로 가득 찬 도서관 같았다. 맥주부터 시작해서 양주, 위스키, 와인, 보드카. 없는 게 없었다. 익숙한 패키지의 소주도 있었다.
사현은 가게 주인과 길게 대화를 나누더니 위스키 한 병에 와인을 무려 여섯 병이나 샀다. 우영이 뭘 그렇게 많이 사느냐고 물었는데, 앞으로 2주 동안 먹으려면 이것도 부족하다며 진열대 앞을 서성였다.
그 후에는 마트에 들렀다. 안줏거리와 간단한 식료품을 사기 위해서였다. 서울에서도 장 보는 걸 즐기는 우영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한국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분위기가 몹시 새로웠다.
미국 마트의 첫인상을 말하자면, 모든 게 다 컸다. 과자도, 음료수도, 빵도, 고기도. 생전 본 적 없는 크기의 페트병도 봤다. 콜라였는데, 조금의 거짓을 보태어 사현의 허리통보다 굵은 것 같았다. 그밖에 감자 칩 종류도 엄청 많았고, 초콜릿 샌드라든가, 시리얼 역시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다양했다.
우영은 신이 났다. 처음 보는 거라면 뭐든 주의 깊게 들여다보고, 관심을 가지고, 사현에게 물어봤다. 사현은 아무리 시답잖은 질문이라도 조곤조곤 친절하게 설명해 줬다. 그러다가도 우영이 80센트짜리나 1불짜리 식품을 가져오면 먹을 생각일랑 꿈도 꾸지 말라며 돌려보냈다.
큼지막한 카트는 금방 두둑이 차올랐다. 각양각색의 치즈와 과자는 물론. 체리와 사과, 딸기와 바나나, 아보카도 등도 샀다. 레몬은 색이 예쁘다는 이유로 다섯 개나 샀다. 어떻게든 먹겠지, 뭐.
카트를 밀다 보니 꽃도 팔길래, 그곳에서 분홍색 장미도 좀 샀다. 사현과 꽃이 함께 있는 모습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침대 맡에 두고, 잠을 자는 그와 꽃을 한 시야에 보고 싶었다. 사진 찍어 놨다가 돌아가면 캔버스에 옮겨 그려야지. 혼자만의 계획도 세웠다.
한국 음식도 종종 보였다. 즉석 떡볶이라든지, 익숙한 브랜드의 만두라든지. 그것도 하나씩 샀다. 둘 다 사현이 좋아하는 메뉴니까.
고기도 사고 싶었는데, 사현이 여기서 가장 비싼 걸 사도 뉴욕 전문 스테이크 집에서 먹는 것보다 맛이 없다고 해서 말았다. 대신 햄과 소시지를 조금 샀다.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코너는 당연히 라면 코너였다. 라면은 한국의 주식인 줄 알았는데. 미국에서도 꽤 즐기는 모양이었다. 한국, 중국, 일본, 태국, 베트남 등등. 세상의 모든 라면이 줄지어 서 있었다.
사현은 그림을 품평할 때처럼 진중하게 라면을 골라 담았다. 우영은 카트에 기댄 채 그런 사현을 구경했다. 진지한 표정의 사현은 언제나 멋있다. 설사 한국 돈으로 팔백 원짜리 라면을 고르고 있어도 그렇다.
“그러고 보니 형이랑 장 보는 건 처음이네요.”
우영이 사현의 손이 닿지 않는, 진열대 가장 위층의 라면을 꺼내 주며 말했다. 사현이 멀뚱히 눈을 끔뻑였다.
“그런가?”
“네. 쇼핑은 자주 했는데, 마트는 처음이에요.”
여태 쇼핑은 엄청나게 했다. 우영은 자동차나 집을 사지 않고도 일억이라는 돈을 하루 만에 쓸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사현이 그것을 아주 능청맞게 쓴다는 것에도 놀랐고.
하지만 마트에 온 적은 없었다. 사현은 굳이 번거로이 재료를 사서, 어쭙잖은 실력으로 요리할 바에는 전문 셰프가 한 요리를 먹자는 주의였다.
가끔 라면을 잔뜩 가져오긴 하는데, 언젠가 듣기론 사는 게 아니라 라면 만드는 회사 임원이랑 알음알음 아는 사이라 직통으로 받는단다. 가끔은 아직 시판 전인 라면을 가져와서 마치 신상 명품 슈트라도 산 듯 자랑하기도 했다.
사현이 자신의 입맛에 맞을 듯한 라면 수십 개를 카트 위로 와르르 쏟아 부었다. 그러더니 뿌듯한 얼굴로 카트를 밀었다. 우영이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그를 뒤쫓았다. 그러고는 사현의 등을 이불처럼 껴안은 채로 카트 손잡이 양쪽을 쥐었다.
사현이 턱을 위로 쳐들고 우영을 바라봤다. 보송보송한 그의 앞머리가 옆으로 사르륵 흐르며 동그란 이마가 드러났다. 우영이 그 위로 쪽 입술을 붙였다가 뗐다. 사현이 수줍게 웃었다.
두 사람은 느린 걸음으로 마트를 돌았다. 아이스크림도 사고, 냉동 라자냐도 사고, 콘돔도 샀다. 향 별로, 모양 별로, 신기하다 싶은 건 다 샀다. 음흉한 변태들처럼 킥킥거리며 콘돔을 쓸어 담는 둘을 누가 봤으면 신고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마트 놀이도 막바지에 다다랐다. 우영이 전자레인지 팝콘이 먹고 싶다고 고집을 부려 코너를 돌고 돌아 사러 왔다. 사현이 몇 에비뉴 내려가면 팝콘 전문점이 있다며, 솔티 캐러멜과 피넛 버터, 치즈 맛까지 판다고 말렸음에도 우영은 꼭 한 개에 1불 하는 싸구려 팝콘이어야 한다고 했다. 미국 영화 주인공들이 그렇게 맛있게 먹는다나.
사현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면서도 그를 더 만류하지 않았다. 우영이 먹고 싶다는데. 뭔들 못 사 주겠나.
두 사람은 마트 안에서 장장 세 시간을 있었다. 종국엔 카트가 터질 것 같아 몇 개를 솎아 내기도 했다. 그리고 계산대로 향하는 길. 사현이 자신의 손과 꽉 맞물려 있는 우영의 손을 내려다봤다.
아, 나 지금 뉴욕에 있지. 뉴욕에서 우영이와 함께 장을 보고 있지. 이렇게 바짝 붙은 채로 손까지 잡고. 조금 전까지 아무렇지 않던 것이 갑작스레 아주 크게 다가왔다.
“이러고 있으니까 꼭 신혼 같네, 우리.”
사현이 지나가듯,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우영이 눈을 크게 떴다.
“결혼을 그렇게 싫어하는 형 입에서 지금 신혼이라는 단어가 나온 거예요?”
사실 우영은 마트에 들어섰을 때부터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결혼이라면 치를 떠는 사현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런데 사현이 이리 말하니 놀랍고 또 놀라웠다.
“그러게. 이틀 만에 그렇게 됐네.”
사현이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찰나, 엄마와 명현, 명현과 원화의 얼굴이 스쳐 갔다. 휘휘 머리를 흔들어 얼른 그것을 털어 냈다.
“너는 참 대단해. 나를 이렇게 쉽게, 손바닥 뒤집듯 바꾸는 걸 보면.”
셀프 계산대 앞에 선 사현이 카트 안의 물건을 위로 올리며 무심히 감탄했다. 우영으로부터 발발한 변화. 하도 자주 있는 일이라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우영이 그런 사현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제가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곤 평생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가끔 사현이 저렇게 말할 때마다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다.
이런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 사현도 참 대단하다는 걸 그는 자각하고 있을까. 아마 모를 것이다. 집에 가면 이야기해 줘야지.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당신이 나로 변화할 때마다 감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충만함을 느낀다고. 진심을 꼭꼭 담아 이야기해 줘야지.
우영이 아무도 몰래 다짐했다.
* * *
우영이 능숙하게 술자리를 세팅하는 동안, 사현은 제인과 통화를 나누었다.
오늘 MoMA에서 무엇을 봤고, 예상 전시장 규모는 어떠했으며, 안나는 무슨 콘셉트를 원하고, 잠깐 만나 봤던 큐레이터의 첫인상이 나쁘지 않았다, 일을 허투루 할 스타일은 아닌 듯했다, 등등. 우영의 전시와 관련한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통화가 삼십 분을 넘어섰을 때쯤, 우영은 술자리 세팅을 마쳤다. 저도, 사현도 술을 자주 즐겼기에 이런 안주상이야 뚝딱뚝딱 금방 만들 수 있었다. 사실 사현은 라면만 끓여 줘도 곧잘 먹었다.
우영이 한 손엔 와인을, 또 한 손엔 와인 잔 두 개를 거꾸로 들고 테라스로 나왔다. 흘끔 그를 본 사현이 내일 다시 통화하겠다며 핸드폰을 죽였다. 그러고는 와인 잔에 와인을 따르고 한 잔은 제 앞에, 또 한 잔은 우영에게 건네줬다.
“짠.”
“짠.”
두 개의 와인 잔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일렁이는 보랏빛 술이 몽환적이었다.
두 사람은 기껍게 음식과 술을 즐겼다. 사위로 장대하게 펼쳐진 맨해튼 야경이 기가 막혔다. 밤공기는 조금 쌀쌀하다 싶을 정도였는데, 아래로 전기 모닥불이 있어 괜찮았다. 이따금 앞머리를 스치는 밤바람은 술기운에 후끈해진 볼을 식히기에 더할 나위 없이 안성맞춤이었다.
우영과 사현은 이렇다 할 대화가 없었다. 연인 사이가 된 지 벌써 수년. 온갖 일을 다 겪어서 더는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없고, 하물며 같이 살기까지 하니 더 나눌 이야기가 없었다. 그래서일까. 대화도 좋지만 침묵도 편했다. 종종 부딪치는 시선만으로도 충분히 서로의 감정을 가늠하고, 기분을 파악할 수 있었다.
홀짝 와인을 머금은 사현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찰나 검어진 눈앞에 맨해튼의 화려한 야경이 잔상처럼 남았다가 사라졌다.
그렇게 와인 두 병이 비었을 때였다. 사현이 우영의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우영이 그런 사현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청포도를 입으로 가져갔다.
“왜 아무것도 안 해?”
사현이 물었다. 난데없는 질문이었다. 요의를 파악하지 못한 우영이 과육을 씹다 말고 턱을 앞으로 쭉 뺐다. 사현이 몸을 틀어 아예 우영을 바라보고 앉았다.
“우리 좋은 바 두고 여기서 먹는 거. 키스하고 섹스하기 위해서 아니었어?”
사현이 살랑살랑 요염하게 웃었다. 우영이 피식, 실소했다. 사현이 이렇게 색욕을 밝힐 때마다 정신이 다 혼미해진다. 대번에 아랫도리가 묵직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꿀꺽, 청포도를 삼킨 우영이 사현의 허리를 낚아채 자신의 무릎 위로 올렸다. 사현이 기다렸다는 듯 우영의 입술로 다가왔다. 우영은 허겁지겁 그의 통통한 입술을 집어삼켰다. 사현이 그의 목 뒤로 팔을 두르자 우영이 고개를 옆으로 틀고 더 깊숙이 입을 맞춰 왔다. 사현도 지지 않고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다.
입술이 거칠게 비벼졌다. 두 사람 다 이가 닿으려나, 싶기 무섭게 크게 입을 벌렸다. 혀가 곧장 서로의 입 안으로 돌격했다. 말랑한 살덩이와 끈적한 타액이 게걸스레 섞였다. 사현은 우영의 혀를 쪽쪽 빨았고, 우영은 그런 사현의 입 안을 제 집인 양 휘젓고 다녔다.
청포도의 달큼한 맛과 와인의 쌉싸래한 맛이 마구 뒤섞였다. 나쁘지 않은 맛이었다.
“으응⋯⋯.”
입천장을 세게 긁어내리는 우영의 혀끝에 사현이 어깨를 파르르 떨며 신음했다. 그 소리에 우영의 눈썹에 힘이 들어갔다. 우영이 더 맹렬히 사현의 입 안을 탐했다. 그 힘을 이기지 못한 사현의 고개가 자꾸 뒤로 밀렸다.
우영이 짜증 섞인 낯빛으로 입술을 거뒀다. 그러고는 사현의 골반을 단단히 거머쥐고, 그대로 그를 소파 위로 눕혔다. 베이지색 소파 위로 사현의 머리칼이 민들레 씨처럼 흩어졌다. 우영이 훌쩍 사현의 위로 올라탔다. 사현이 팔을 한껏 벌린 채 우영의 목을 껴안았다.
곧 다시 입술이 겹쳐졌다. 이번엔 우영이 아무리 입술을 핥고, 깨물고, 짓눌러도 사현은 멀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입술이 화끈거리며 아릴 정도로 오래 입을 맞췄다.
얽히는 혀가 슬슬 쓰라릴 때쯤, 우영이 사현의 윗도리 안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적당히 단단하고 미끈한 배를 쓰다듬던 손가락이 유두까지 빠르게 직진했다.
“아읏.”
바짝 곤두선 유두를 짓누르는 우영의 엄지에 사현이 슬쩍 허리를 뒤틀었다. 실내도, 그렇다고 완전히 바깥도 아닌 곳에서 이런 스킨십을 하는 건 처음이라 등줄기가 묘하게 서늘했다.
사현이 우영에게 하체를 바짝 붙였다. 바지 너머로 두툼하게 발기한 그의 성기가 느껴졌다. 단단하고, 뜨겁고, 커다란 성기를 상상하자 목구멍이 확 조여들었다.
우영이 본격적인 행위를 위해 사현의 옷을 들추려다 멈칫했다. 바깥이 쌀쌀한데. 혹여 그가 감기에라도 걸리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더군다나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부끄럽지는 않다만 타인이 사현의 나신을 보는 게 소름 끼치게 싫었다.
판단을 끝낸 우영이 사현을 안아 들려 할 때였다. 사현이 머리를 비스듬히 옆으로 기울이고 우영을 나른히 응시했다.
“오늘의 소감이 어때?”
“좋아요.”
우영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사현과 같은 곳에서 같은 걸 보고만 있어도 좋아죽을 것 같다. 근데 하물며 입술을 섞고, 몸을 만지고, 앞으로 더한 짓을 할 건데, 좋지 않을 리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우영의 대꾸에 사현이 목젖을 일렁이며 웃었다.
“아니. 지금 여기 나랑 있는 게 좋은 거 말고.”
“그럼요?”
“아까 안나가 그랬잖아. 직원들이 네 전시 보러 한국에 왔었다고.”
“아⋯⋯.”
우영이 녹색 눈동자를 가진 안나를 떠올리며 뻐끔 입을 벌렸다. 근데, 그게 뭐. 지금 이 순간에 그녀의 등장은 썩 달갑지 않았다. 지끈거리는 아랫도리가 훨씬 급했다.
그런 우영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현은 비실비실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옛날에, 시청 앞에서 네가 나한테 고백했을 때 말이야. 그때 내가 했던 말 기억나?”
“사랑하지 말라고 했던 거요?”
“⋯⋯.”
“아니면 이제 시작인데 그따위 알량한 감정 품어서 어쩌겠냐고 했던 거요?”
우영이 막힘없이 줄줄 과거를 내뱉었다. 사현이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런 대답을 원한 게 아니었는데. 자그마한 공 하나 던졌을 뿐인데 폭격으로 앙갚음을 당했다.
“내 말은, 전 세계 사람들이 네 그림을 보기 위해 한국에 오게 하라고 했던 거 기억하냔 뜻이었어. MoMA 직원들이 네 전시를 보러 한국에 왔다니까.”
사현이 당황한 낯으로 급히 와인 잔을 쥐었다. 애써 모르는 척, 아닌 척하고 있지만 사실 사현은 그를 밀어내고 밀어냈던 과거의 언젠가를 사무치게 후회하고 있었다.
이렇게 좋은 줄 알았으면 그가 고백했을 때 냉큼 좋다고 할 걸, 하는 후회도 됐고, 분명 상처받았을 텐데. 아팠을 텐데. 그렇게 나쁘게 굴지 말 걸 하는 후회도 됐다.
처지를 바꾸어서, 제가 우영에게 없는 사람 취급을 받았다면, 감정을 부정당했다면, 그 슬픔과 침통을 어찌 갈무리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우영이 그걸 오롯이 다 삼켰다는 게, 더군다나 제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게 참으로 슬펐다.
“흐음⋯⋯. 그런 뜻이었구나.”
우영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그런 건⋯⋯ 좀⋯⋯ 잊어.”
사현이 출렁거리는 와인을 단번에 삼켰다. 제법 비싼 와인이거늘 목구멍을 넘어가는 액체가 텁텁했다.
“잊을 수 있어야 잊죠. 저 그날 형이 그렇게 말했을 때,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고요.”
우영이 과거를 떠올리는 듯, 콧잔등을 구기며 사현의 빈 잔에 와인을 따랐다.
아랫입술을 겹쳐 문 사현이 잠시 침묵을 끌어 갔다. 그게 꼭 거나하게 사고 친 고양이가 자존심은 있어서 애교는 못 부리겠고 캣 타워 꼭대기에 올라가 흘끔흘끔 주인 눈치만 보는 모습 같았다.
“⋯⋯.”
사현이 침통한 얼굴로 재차 와인을 삼켰다. 우영이 잊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만, 그렇다고 저리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이걸 어찌하나, 고민하는데. 우영이 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저한테 미안해요?”
그가 물었다. 광대가 동그랗게 솟아 있는 게 장난기가 득실거리는 얼굴이었다. 그런데도 사현은 저를 놀리는 거냐, 화를 내지도, 그렇다고 그 장난에 동조해 주지도 못했다. 할 말이라곤 사과뿐이었다.
“응. 미안해.”
사현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개를 고꾸라트리고, 풀이 죽은 게 그와 영 어울리지 않았다. 우영이 사현의 귓불을 살살 주물렀다.
“그럼 사랑한다고 해 주세요.”
“⋯⋯.”
“많이, 아주 많이 해 주세요. 저는 짝사랑 할 때 많이 했잖아요. 그러니까 이번엔 형이 해 주세요.”
우영이 사현의 손등에 쪽, 입을 맞췄다. 그로 모자라 손바닥과 손끝에도 쪽쪽 입을 맞췄다. 분명 행동은 다정하기 그지없었는데, 손가락 사이사이로 비치는 우영의 눈빛은 꼭 먹이를 주시하는 맹수 같았다.
사현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고는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사랑해.”
“다시 말해 주세요.”
“사랑해, 우영아.”
“다시.”
“사랑해.”
사현은 우영이 원하는 만큼 고백을 거듭하고 또 거듭했다. 혀가 바짝 마를 때쯤에야 우영이 씨익 웃어 보였다. 그 미소에 홀린 사현이 다시금 사랑한다고, 정말 사랑한다고 온 마음을 다해 고백했다.
그러자 우영이 칭찬하듯, 사현의 입술을 물어 삼켰다.
* * *
막 해가 뜨기 시작하는 센트럴파크는 풀 냄새가 자욱했다. 신발 밑창으로 밟히는 흙은 사그락사그락 듣기 좋은 소리를 내며 으스러졌고, 적당히 차가운 공기는 상쾌했다. 높은 나무 위로 보이는 맨해튼의 빌딩들은 조깅에 좋은 페이스메이커였다.
우영과 사현은 이른 아침 운동을 나왔다. 우영이야 워낙 운동을 좋아했고, 사현도 몸 쓰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지라 곧잘 달렸다.
그렇게 한 시간쯤 뛰었을까.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가슴이 묵직하게 굳었고, 호흡이 뚝뚝 끊겨 들어왔다. 허벅지 근육이 파르르 경련하는 게 선연히 느껴졌다.
사현이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대충 훔쳤다. 그러자 우영이 챙겨온 스포츠 타월로 그의 얼굴을 살살 닦아 냈다.
“잠깐 쉴까요?”
우영도 밭은 호흡을 내뱉고 있었지만, 사현만큼 거칠지는 않았다. 밤새 섹스 할 때부터 엄청난 체력임을 알고는 있었으나, 이 정도일 줄이야. 사현이 우영을 괴물 보듯 쳐다봤다.
“아니. 지금 쉬면 더 힘들어. 좀 걷자.”
사현이 젖은 앞머리를 아무렇게나 쓸어 올렸다. 우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옆에서 보폭을 맞췄다. 사현이 후우, 후우, 일정하게 호흡하려 부러 어깨를 들썩였다.
우영은 뭐가 그리 좋은지 숨을 헐떡이는 사현을 보며 방글방글 웃어 댔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얄미웠다.
“체력은 타고났니? 너 집에서 헬스만 하지, 다른 운동은 안 하잖아. 근데 어떻게 한 시간을 내리 뛰고도 힘든 기색이 없어?”
후우웁,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은 사현이 물었다.
“어⋯⋯. 글쎄요. 그런 생각은 안 해봤는데.”
우영이 흐음, 목으로 신음했다. 타고난 체력이라. 그런가. 그러고 보니 한창 공사판에서 구를 때도 몸이 힘들다는 생각은 안 했던 것 같다. 군대에서도 체력 단련은 늘 1등이었고. 제가 체력이 좋구나. 우영은 그것을 평생 처음 깨달았다.
“형도 체력 좋잖아요.”
“맞아. 나도 나쁘지 않아. 근데 너랑 하는 섹스는 그렇게 따라가기가 힘들다?”
“에이. 그런 쪽으론 모자란 것보다야 낫죠.”
우영이 능청맞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현의 눈이 가늘어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너무 맞는 말이라 무어라 반박할 게 없었다. 섹스하다 말고 지쳐서 자는 우영을 상상했더니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있으면 안 되는 일이고. 연인 사이에 섹스가 얼마나 중요한데.
“하긴, 너 서른 시간 내내 그림 그리기도 하지.”
“네. 가끔.”
“마음만 먹으면 섹스도 서른 시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니?”
“당연하죠.”
우영이 단호히 긍정했다. 다른 건 모르겠으나 그건 확신할 수 있었다. 사실 사현이 힘들어하니까, 아니면 섹스 도중에 기절하듯 자 버리니까 때맞춰 멈추는 거지. 사실 서른 시간은 무슨, 사흘 내내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중간중간 짧게나마 잠도 재우고, 간단하지만 칼로리는 높은 음식만 골라 먹이면 영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 않을까. 우영이 사현이 알면 기겁할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타고 났네. 타고 났어.”
사현이 의미 없이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열심히 운동으로 기른 체력과 타고난 체력은 전혀 다르다. 더군다나 우영은 운동도 열심히 한다. 사현과 비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래요?”
우영이 빙긋 웃었다. 자신의 체력이 좋든, 나쁘든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미소였다. 날 때부터 체력이 좋았으니 약한 게 어떤 기분인지 전혀 모를 것이다. 아마 앞으로도 그렇겠지.
사현이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제 평생 섹스 중에 우영을 가지고 놀 날이 올는지 모르겠다. 첫 섹스도 양껏 놀리다 잡아먹으려 했는데. 이쪽이 되려 엉덩이가 얼얼할 만큼 호되게 당했었지. 당시를 떠올리자 괜히 둔부와 꼬리뼈가 찌릿했다. 사현이 아무도 몰래 슥슥 엉덩이를 매만질 때였다.
“그러고 보면 저는 참 타고 난 게 많아요. 형이 좋아하는 제 얼굴도, 키도, 덩치도, 그리고 체력도. 제 부모님 유전자가 훌륭했나 봐요.”
우영이 쌉싸래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사현이 그를 따라 흐릿하게 웃었다. 그의 말마따나 물려 준 유전자는 입이 떡 벌어질 만큼 훌륭한데, 왜 우영을 버렸을까.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자연히 조그마한 오지랖 역시 생겨났다.
“우영아.”
“네.”
“너는, 엄마 아빠 안 보고 싶어?”
“⋯⋯.”
찰나, 규칙적으로 이어지던 우영의 발걸음이 멈췄다가 다시 이어졌다. 짧은 순간이었으나 그와 나란히 걷던 사현이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사현이 흘끔흘끔 우영의 낯을 살폈다. 예상외로 우영은 무감한 표정이었다. 슬픔도 분노도 보이지 않았다. 사현이 우영의 팔뚝부터 팔꿈치까지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네가 원한다면 찾아 줄 수 있어.”
“⋯⋯.”
“시간이 좀 걸리긴 하겠지만, 영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사현에겐 능력과 돈이 있다. 검사부터 검은 조직까지 인맥 역시 다채롭다. 그러니 우영의 부모를 찾는 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살아 있으면 살아 있는 대로, 죽었으면 죽은 대로 그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을 테였다.
“⋯⋯잠깐 앉을까요?”
한참 침묵하던 우영이 센트럴 파크 특유의 녹색 의자를 가리켰다. 사현이 그러자며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우영은 그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고는 다시 정적이었다. 이따금 조깅하는 사람들이 헉헉거리며 지나갔다. 다람쥐가 나무 위로 사라지기도 했고, 울타리 너머로 자동차 경적이 울리기도 했다.
그 백색 소음을 얼마나 듣고 있었을까. 서늘한 아침 바람에 땀에 젖었던 앞머리가 보송보송하게 말랐을 즈음, 우영이 드디어 입을 뗐다.
“옛날에요. 그러니까 음, 교복 입고 학교 다닐 때. 그때는 저를 버린 부모님이, 저를 혼자 둔 부모님이, 남한텐 다 있는 가족을 앗아 간 부모님이 엄청 궁금하고, 원망스럽고 그랬거든요?”
“⋯⋯.”
“근데 보육원 나오고, 대학교에 들어가고, 세상이랑 맞닥트리면서는 그런 생각할 정신이 없었어요. 당장 먹고 살기 급급했으니까. 원망도 사치였어요.”
“⋯⋯.”
“그리고⋯⋯ 먹고 살기 바쁜 세상에 적응할 때쯤 형을 만났고요.”
사현과의 첫 만남을 떠올린 우영이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그가 벤치 등받이 깊숙이 몸을 묻고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사실 그 후로는 부모님 생각 거의 안 했어요. 그분들을 원망하거나 그리워하지 않아도 제 삶은 형이 있으므로 충분히 풍족했으니까요.”
“⋯⋯.”
“지금도 그래요. 그 사람들을 찾는다 한들, 제가 뭘 하겠어요. 할 말도 없고, 그다지 보고 싶지도 않아요. 그냥 제 얼굴 어딘가에 그 사람들의 흔적이 있겠거니, 싶은 게 다예요.”
“⋯⋯.”
“아시잖아요. 저 숫기 없는 거. 결국엔 낯선 사람들이에요. 불편할 게 뻔해요.”
만약 만난다면 어떤 모습이려나. 아마 조용한 카페나 식당에 앉아 어색하게 얼굴을 마주하고 있겠지. 함께한 시간이 없으니 공유할 대화거리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나를 왜 버렸냐, 물을 자신도 없었다. 돈이 없었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계획한 자식이 아니었다, 등등 무슨 변명이든 상처가 아닐 수 없으리라.
애써 무시하고, 덮어서 무감해진 통각을 다시 헤집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렇게 사현과 시간을 보내고, 둘만의 행복을 창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우영이 사현을 보며 씨익 보기 좋게 웃었다.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저한테는 원래부터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사람들이에요.”
“⋯⋯그럴게.”
사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 인간의 인생에 부모라는 건 참 중요한 존재지만, 또 크고 나면 아주 그렇지도 않다. 사현은 부모에게 온통 부정적인 영향만 받았고, 우영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음에도 올곧게 잘 자랐다.
그래서 사현은 굳이 우영을 설득하지 않았다. 혹여 부모를 찾아 줬더니 그들과 함께 살겠다고 떠나면 어쩌나. 그런 이기적인 불안도 들었다.
사현이 우영의 손을 꼭 잡아 쥐었다.
“베이글 사 줄까? 여기 주변에 맛있게 잘하는 집 있는데. 거기 아이스크림도 맛있어. 잔뜩 사다가 집에 가서 샤워하고 먹자.”
사현 특유의 위로다. 손 잡아 주기. 맛있는 거 사 주기. 가끔은 안아도 주고, 뽀뽀도 해 준다. 그게 어찌나 좋은지. 사현에게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좋아요!”
우영이 신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유명 베이글 집은 가게는 아주 좁은데, 사람들이 많았다. 빵부터 토핑에 굽기까지. 주문해야 할 것도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사람은 점점 더 쌓여 갔다. 사현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이야 당연지사였다.
두 사람은 수십 분이 지나서야 간신히 주문할 수 있었다. 사현은 기다린 시간을 보상받겠다는 듯, 전투적으로 주문했다. 플레인 베이글, 어니언 베이글, 갈릭 베이글, 시나몬 베이글 등에 토핑도 온갖 종류의 크림치즈와 아보카도, 샐러드, 연어 등등 한 가득 시켰다. 커피와 라떼, 아이스크림 역시 추가했다.
점원이 음식이 준비되면 이름을 불러 주겠노라 했다. 사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계산을 마쳤다.
우영과 사현은 벽에 바짝 붙어 섰다. 타인과 원치 않는 스킨십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우영이 은근히 사현을 자신의 뒤로 밀어 넣었다. 꼭 왕을 지키는 기사 같은 얼굴이었다. 사현이 킥킥거리며 우영의 넙데데한 등 뒤에 숨었다.
그러나 사람은 끊임없이 들어왔다. 이러다 가게가 뻥 하고 터져 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자기야.”
사현이 작은 목소리로 우영을 불렀다.
“네.”
그것을 귀신같이 들은 우영이 눈썹을 올리며 대답했다.
“답답하지? 먼저 나가 있을래? 내가 받아서 갈게. 여기 앞에 벤치 있으니까 거기 앉아 있어.”
“어⋯⋯.”
예상치 못한 제안에 우영이 긴 신음을 뽑아냈다. 아니요. 제가 받아 갈게요. 라는 말이 혀끝까지 밀려 나왔는데, 뱉진 않았다.
분명 점원이 영어로 어쩌고저쩌고 말하며 주문한 사람을 찾을 텐데. 이 번잡함 속에서 그 영어를 캐치해 베이글을 받아올 자신이 없었다. 행여 남의 것을 가지고 나오기라도 하면 부끄러워서 죽을지도 몰랐다. 더군다나 저처럼 커다란 덩치가 좁은 가게 안에 버티고 있는 것도 매너가 아닌 듯했다.
잠깐 고민하던 우영이 알겠다며 가게를 나섰다.
우영은 사현의 말마따나 베이글 가게 앞의 벤치에 앉았다. 선선한 바람이 머리칼을 쓸고 지나가자 저절로 느슨한 한숨이 올라왔다. 후끈하고 좁은 가게가 답답하긴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우영은 뉴욕의 높다란 빌딩을 훑어보며 오늘의 계획을 다시금 곱씹었다. 베이글 사서, 집에 가 씻고, 베이글을 먹고, 낮잠 한두 시간 자다가, 메트로폴리탄에 간다. 그곳에서 저녁까지 있다가 센트럴 파크가 내려다보이는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사현이 피곤하지 않으면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도 보자고 했다.
우영이 대사가 모두 영어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걱정했지만, 라이언 킹이나 위키드, 알라딘 같은 걸 보면 이해하기가 그렇게 어렵지도 않을 거라고 했다. 그가 그렇다면 그렇겠지.
우영이 핸드폰을 꺼내 라이언 킹을 검색했다. 줄거리 정도는 알아 가면 좋을 듯해서. 워낙 삭막하게 살아 온 인생이라 모두가 한 번쯤은 본 애니메이션도 우영에겐 썩 낯설었다.
그가 심바가 동물의 왕국에서 쫓겨난 부분을 읽으며 눈썹을 아래로 늘어트릴 즈음이었다. 누군가가 우영의 옆에 앉았다. 바로 옆은 아니었고, 세 뼘쯤 떨어진 거리에.
우영은 당연히 사현인 줄 알았다. 반가운 얼굴로 얼른 고개를 들었는데,
“Hello?”
영 낯선 남자가 앉아 있었다. 깊은 눈두덩과 적당히 태운 피부, 그리고 파란색 눈동자가 매력적인 남자였다. 그 역시 운동을 하다 온 건지 머리칼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는데 꼭 수영장에서 갓 나온 모델 같았다. 그만큼 잘생겼고, 언뜻 보기에도 몸이 좋았다.
우영이 아랫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외국인이다. 영어다. 그 두 가지만으로 괴물이라도 앞에 둔 것처럼 긴장이 됐다.
“Are you here to eat bagels?”
그리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다. ‘베이글’이라는 단어가 귓구멍에 탁 박혀 왔다. 아마 베이글 먹으러 왔냐는 질문이리라. 우영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미국 특유의 눈썹 파도를 타더니 무어라 무어라 신나게 말을 이었다. 대충 가늠하기로서니, 여기 베이글이 맛있다. 자기도 자주 온다. 뭐 그런 뜻인 것 같았다. 아닐 수도 있고.
우영은 웃고만 있었다. 며칠 전 입국 심사를 받을 때 사현이 예쁘게 웃으라 한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게 이 남자에게도 통할는지 모르겠지만, 적당히 웃어 줬으니 인제 그만 지껄이고 눈앞에서 사라져 줬으면 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남자가 은근히 한 뼘 정도 가까이 다가왔다. 그에게선 이상한 냄새가 났다. 향수 냄새 같은데,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우영이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달큼하면서도 청량한 사현의 냄새가 그리웠다.
남자는 끊임없이 말했다. 우영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도 뭐가 그리 할 말이 많은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사현이 미국은 길 가다 재채기만 해도 삼십 분 동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신기한 나라라고 하긴 했는데.
뭐라더라. Bless you부터 시작해서는 감기는 아니니? 근데 어디서 왔니. 뭐 하러 가니. 나는 어디 가는 중이야. 너 여기 자주 와 봤니. 여기 주변에 무슨 가게 있는데 가 봤니. 거기 맛있어. 사실 나는 그 음식점에 특별한 기억이 있어 등등으로 이어진댔다. 그게 가능한가, 싶었는데 정말 그럴 줄이야.
우영이 광대가 저릴 정도로 웃고 있는데, 어째 남자가 자꾸 가까워졌다. 우영이 무릎 위에 올려 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 대충 웃음으로 때우는 것도 한계가 있지. 우영이 몸을 일으키려 했다. 사현에게 가기 위해서였다.
그 순간. 남자가 우영의 허벅지를 텁, 쥐었다. 부술 듯 움켜쥔 건 아니었고, 은근히 매만지는 게 몹시 불쾌한 손길이었다. 말은 통하지 않으나 대번에 뜻을 알아차릴 수 있는 행위였다.
우영이 데구루루 눈알을 굴리며 고민했다. 이걸 엎어 쳐도 되나. 그럼 폭행으로 경찰이 오겠지. 사현이라면 금방 해결해 줄 테지만 괜히 그를 귀찮게 하는 게 아닐까. 오늘 일정을 어그러트리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됐다.
우영은 대충 웃음으로 상황을 무마하기로 했다. 제 허벅지가 안타깝긴 하지만, 뭐 닳는 것도 아니고. 그리 판단했다.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남자의 손을 떼어내려 할 때였다. 가로로 선 검은 핸드폰 하나가 우영과 남자의 사이를 쑥 가로지르고 들어왔다. 그것은 남자의 손목을 패대기치듯 옆으로 밀어 냈다. 핸드폰의 주인은 험악한 표정의 사현이었다.
“형.”
우영이 구원자라도 마중하듯 만면을 환하게 펴며 그를 반겼다.
잠깐 우영을 살핀 사현이 호랑이 같은 눈으로 남자를 노려봤다. 남자가 사현과 우영을 번갈아 봤다. 그러더니 곧 두 손바닥을 내보이며 진정하라는 제스처를 해 보였다.
남자는 미안하다며, 애인이 있는지 몰랐다며, 직접적인 플러팅에도 우영은 아무런 거부를 하지 않았다며 은근히 우영에게 죄를 떠넘겼다. 그러면서 빙글빙글 웃는 게 정말이지 아니꼬웠다. 사현의 눈썹 위로 오목한 홈이 파였다.
“이게 처돌았나⋯⋯.”
사현이 낮은 목소리로 욕을 짓씹었다. 분명히 한국어였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그 문장에 담긴 분노를 선연히 느낄 수 있었다. 심상찮은 기운에 남자가 쭈뼛쭈뼛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현이 그의 앞으로 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남자가 움찔 어깨를 떨며 고개를 뒤로 뺐다. 자신에 비하면 키도 작고, 마른 동양인 주제에 내뿜는 기가 대단했다.
사현은 그리 크지 않은 음성으로, 하지만 또렷이 남자를 향해 말했다. 매우 빠른 문장이라 우영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파랗게 질리는 남자의 낯을 보아하니 좋은 말은 아닌 듯했다.
남자는 한동안 사현에게 말로 흠씬 얻어맞았다. 정말 얻어맞았다는 말로밖에는 설명이 안 됐다. 우영은 사현이 내뱉는 언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으나 그에 담긴 분노와 노여움, 저주는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게 베이글 봉투가 아니라 칼이나 총이었으면 남자의 얼굴을 냅다 갈겨 버렸을 게 분명했다.
Sorry, Sorry. 남자는 거듭 사과했다. 그러더니 빠른 걸음으로 거리를 벗어났다.
사현이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으득 이를 갈았다.
“씨발⋯⋯. 별 같잖은 놈이⋯⋯.”
그가 쥔 베이글 봉투가 콰드득 구겨졌다. 우영이 그의 눈치를 보며 넌지시 봉투를 빼냈다. 제 소중한 베이글이 온통 눌려 못 먹게 되면 조금 슬플 것 같았다.
“형. 화났어요?”
우영이 사현의 팔꿈치를 살살 쓰다듬었다. 남자의 의도가 그런 줄 알았으면 웃는 게 아니었는데. 꿈에도 몰랐다. 한국은 길거리에 게이가 널리지 않았으니까. 가끔 여자가 다가와도 그들은 한국어를 쓰는지라 사현이 알기 전에 우영의 선에서 거절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은 그러지 못했다. 그럴 수가 없었다. 뭘 알아들어야 말이지. 우영이 볼 안쪽을 잘근거렸다. 이유 모를 죄책감이 올라왔다.
사현이 팔을 뒤틀어 우영의 손을 털어 냈다. 우영이 숨을 말아먹었다. 사현의 기분이 완전히 어그러진 것 같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허나 걱정을 이어 가기도 전에, 사현이 손을 잡아 왔다. 손가락이 얽히고 손바닥이 마주 닿았다.
“어. 났는데, 너 때문에 난 건 아니야.”
사현이 남자가 사라진 허공을 직시하며 말했다.
“네가 알고 그런 것도 아니고. 너는 잘못한 거 없어. 저 새끼가 주제도 모르고 널 넘본 게 문제지.”
사현이 다시 생각해도 화가 난다는 듯 낮게 으르댔다. 우영이 그런 사현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운동할 때도 익지 않았던 그의 볼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입술은 조금 벌어져 있었고, 그 틈으로 씨근덕거리는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게 어째서인지⋯⋯ 이상하게⋯⋯ 귀여웠다. 등줄기가 찌르르한 게, 그의 구멍에 성기를 쑤셔 넣고 흔들 때와 비슷한 쾌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우영이 사현 몰래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당장 그를 움켜쥐고, 만지고, 주무르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선 안 되지.
“근데 뭐라고 한 거예요?”
그가 애써 말을 돌렸다. 와중에도 사현의 손을 조물조물 주물러댔다.
“나 돈 많다고.”
“네?”
사현의 대답에 우영이 높은음으로 반문했다. 돈이 많다고? 미국에선 그 말이 자랑이 아니라 협박으로 쓰이나. 특이한 문화네. 우영이 일종의 문화 충격을 경험하며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사현이 말을 덧붙였다.
“돈이 엄청 많아서 네가 믿고 설치는 그 얼굴 싹 다 갈아 놔도 감옥 안 갈 수 있다고.”
“아⋯⋯.”
“한 번만 더 눈에 띄면 눈알 파다가 입에 물려 줄 거라고.”
“⋯⋯.”
그래서 중간에 남자가 입술을 말아먹었구나. 우영이 이제야 이해한다는 듯 아, 짧은 감탄을 흘렸다. 허나 사현의 협박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베이글 사이에 네 눈알 넣어 먹고 싶지 않으면 당장 꺼지라고도 했어.”
“⋯⋯.”
우영은 하마터면 사현의 손을 놓고 뒷걸음질을 칠 뻔했다.
사현은 가끔, 아주 가끔 무섭다. 저 말이 같잖은 허황이 아니라서 더 무섭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방금 뱉은 말을 정성을 다해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남자의 파란색 눈알이 토핑으로 들어간 베이글을 떠올린 우영이 있는 대로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 우영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현은 특유의 무감한 낯으로 우영의 손을 잡아끌었다.
“집에 가자. 배고프지? 베이글 식으면 맛없어.”
아무렇지 않게 베이글의 안위를 걱정하는 그에 우영도 결국 샐쭉 웃었다. 저에게만 친절하고 다정한 사현이 좋았다. 타인에게 눈알을 파 버리겠다고 한들, 제 알 바인가, 싶었다.
* * *
우영과 사현은 메트로폴리탄에서 무려 6시간을 있었다. 세계 3대 박물관에 들며 330만 점의 그림이 있다더니. 그다지 흥미가 돋지 않는 유물, 서적, 보석 등을 죄다 건너뛰고 오로지 미술에만 집중했는데도 끝이 나질 않았다. 종국엔 내내 서 있던 무릎과 치켜뜨고 있던 눈이 뻑뻑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사현은 내일이나 이틀 뒤에 다시 오자고 했다. 이 밖에도 구겐하임과 누 갤러리, 워싱턴 DC의 국립미술관 등 갈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여행을 2주나 잡은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영은 건조한 눈두덩을 벅벅 문지르며 그러자고 했다. 언제 또 올지 모르는데. 이 그림들을 대충 감상하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은 숙소에 가 꼭 껴안은 채로 무의미하게 한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저 걷고, 감상만 했을 뿐인데 짙은 피곤이 몰려왔다. 그래도 이따금 눈을 맞추고, 입술을 비비니 다시 활력이 솟았다.
그리고 저녁을 먹으러 가기 전에, 쇼핑을 크게 한바탕했다. 말 그대로 한바탕이었다. 둘이서 들 수 있는 정도의 양이 아니라서 펜트하우스로 딜리버리를 부탁했을 정도였다.
새 옷을 빼입고 기분이 좋아진 사현은 룰루랄라 레스토랑으로 차를 돌렸다. 그가 좋아하니 우영 역시 신이 났다. 저녁을 아주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사현이 데리고 온 레스토랑은 당연히 멋졌다. 무려 60층에 있는 레스토랑이었는데, 펜트하우스에서 보는 야경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펜트하우스는 맨해튼 속에 앉아 도시를 보는 것이라면, 레스토랑은 한 발 멀리 떨어져서 맨해튼 전경을 내려다보는 느낌이었다. 이렇든 저렇든 멋진 야경이었다.
풍경으로 유명한 레스토랑은 맨해튼을 오롯이 감상하기 위해 실내가 어둑했다. 주렁주렁 내려온 샹들리에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왔고, 테이블마다 비치된 조명등 역시 음식과 상대방의 얼굴만 밝힐 수준이었다.
그래서일까. 묘하게 고요하고 적막했다. 테이블의 거리가 멀어서인지 타인의 목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 대신 은은한 바이올린 선율만이 들려 왔다. 딱, 사현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식당이었다.
사현은 메뉴판을 받자마자 코스 요리 두 개와 우영이 좋아할 만한 음식들을 추가로 줄줄이 주문했다. 직원은 손바닥만 한 종이에 사현이 말한 것을 열심히 적고는 선호하는 조리법을 물었다. 사현은 그 역시 능통하게 대답했다.
우영이 사랑이 담뿍 담긴 눈으로 그런 사현을 바라봤다. 영어로 말하는 사현은 볼 때마다 신기하고, 신비롭고, 멋지다. 저런 사람이 제 연인이라니. 언제든 껴안고, 입 맞출 수 있다니. 내일도, 모레도 이 눈부신 도시에서 함께할 거라니. 너무 좋아서 까무러칠 것 같았다.
음식은 금세 나왔다. 송로 버섯 수프, 대게와 치즈가 곁들여진 샐러드, 바질과 함께 볶은 가리비, 티본 스테이크, 안심 스테이크, 살짝 튀긴 양파가 올라간 햄버거 등등.
직원이 흘끔흘끔 테이블을 관찰하다가 한 디쉬가 끝나면 적당한 타이밍에 새 요리를 가져다주는 게 몹시 괜찮았다. 물론 맛도 있었다. 우영은 신나게 음식을 먹어치웠다. 비스듬히 턱을 괸 사현이 뿌듯한 낯으로 그의 식사를 감상했다.
우영이 방금 나온 스테이크로 손을 뻗었을 때였다.
“B?”
누군가가 사현을 불렀다. 오랜만에 듣는 호칭에 사현이 무심코 뒤를 돌아봤다. 우영의 시선 역시 그를 따라 움직였다.
화려한 금발에 녹색 눈동자를 가진 백인이 서 있었다. 우영이 설마 저 사람이 사현을 불렀나, 싶어 눈을 게슴츠레 뜨는데,
“브랜트?”
사현이 자못 놀란 얼굴로 알은체를 했다. 자신이 가늠하던 사람이 맞음을 확인한 브랜트가 만면에 반가움을 띤 채 테이블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게 사현을 껴안고 양 볼에 쪽, 쪽 입을 맞췄다. 흔한 비쥬였으나, 우영의 눈에는 질펀한 뽀뽀로 투영됐다.
우영이 들고 있던 포크를 덜그덕, 접시 위로 떨어트렸다. 그러나 사현도, 브랜트도 우영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이게 얼마만이야, B.”
브랜트가 우영만큼이나 큼지막한 손으로 사현의 팔뚝을 마구 쓰다듬었다.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외국인의 외형을 하고도 한국어를 곧잘 했다. 덕분에 우영은 원치 않게 그들의 대화를 듣고,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듣지 못했으면 좋았을 것을.
“그러게. 그때 이탈리아 비엔날레(biennale)에서 보고 처음이네.”
사현 역시 반가운 모양인지 목소리가 한층 올라가 있었다. 이탈리아. 묘하게 기시감이 드는 단어에 우영이 설핏 눈살을 구겼다. 이탈리아. 이탈리아. 이탈리아. 해외여행이라곤 이번 뉴욕이 처음인 저에게 왜 이탈리아가 익숙할까.
우영의 검지로 테이블을 톡톡톡 두드리며 고민했다. 생각이 날 듯 말 듯 애를 태우는데, 브랜트가 사현의 볼과 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B는 그동안 더 아름다워졌구나.”
“그래? 알아봐 주니 고맙네. 관리 열심히 하거든.”
퍽 느끼한 말이었다. 놀라운 건, 사현이 그 말에 웃으며 동조해 줬다는 거였다. 평소 성격이라면 웃기지 마, 징그럽게 굴지 말고 꺼져. 뭐 그런 말을 했을 텐데.
그 순간, 우영의 뇌리에 제인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언젠가 제가 사현이 남자도 만나느냐 물었을 때. 그때 해 준 대답이었다.
‘이탈리아였는데. 일정 끝나고 펍에 갔다가 우연히 봤어요.’
‘사현이 형이 남자랑 같이 있는 거요? 이탈리아 남자랑?’
‘이탈리아인인 건 모르겠는데, 금발에 녹색 눈동자이긴 했죠. 우영 씨 말대로 손도 잡고, 그러던데. 긴 만남은 아니었을 거예요. 그 후로 B가 그와 연락하는 건 본 적이 없거든요.’
설마. 설마. 설마. 그 남자라고? 그 금발에 녹색 눈동자 남자가 이 남자라고?
우영이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남자를 훑었다. 허나 제인에게 들은 정보가 터무니없이 적은 터라 확신할 수 없었다.
“이쪽 아가는 누구?”
그때, 브랜트의 눈이 우영으로 향했다. 청량하게 반짝이는 녹색 눈동자가 신비로웠다. 우영이 어색하게 웃자, 사현이 대신 그를 소개했다.
“내 남자 친구.”
지나치게 노골적인 소개였다. 우영이 기겁하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응당 기뻐야 했는데, 당황스러움이 먼저였다. 타인에게 단 한 번도 그의 연인으로서 소개된 적 없던지라. 사현이 <갤러리 비>의 B로서 있을 때도 조심 또 조심했거늘. 지금은 그보다 훨씬 큰 기업을 이끌고 있으면서 저리 말하는 게 의아했다.
아무리 해외라지만⋯⋯ 이미 길거리에서 손도 잡고 뽀뽀도 했지만⋯⋯ 말로 표현하니 완전히 다르게 다가왔다.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기사라도 내면 어쩌려고. 저 브랜트라는 사람이 소문이라도 내면 어쩌려고. 걱정이 지나치게 팽창했다.
“아니, 학생입니다. B한테 그림, 아니, 전시, 아니, 어, 아무튼 예술 관련해서 배우는⋯⋯ 학생이요.”
우영이 허둥지둥 바쁘게 둘러댔다. 사현과 브랜트의 미간이 동시에 구겨졌다. 사현은 거짓을 말하는 우영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눈이었고, 브랜트는 다른 대답이 나온 것을 의아하게 여기는 듯했다. 브랜트가 묘한 기류가 흐르는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브랜트는 눈치가 좋았다. 그 역시 예술계에서 그림을 사고파는 일을 했고, 그러다 보니 사현처럼 눈치와 상황 파악에는 통달한 상태였다.
입가에 장난스런 웃음을 띤 브랜트가 우영의 옆자리에 냅다 엉덩이를 붙였다. 가까워진 거리에 우영이 흠칫 몸을 떨었으나 브랜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상체를 쭉 들이밀었다.
“학생? 대학원생이야? 아니면 설마 학부생? 으응, 그래서 이렇게 어리구나. 어쩜 피부 봐. 반들반들 윤이 나네. 근데 그럼 B랑 몇 살 차이야?”
“얼마 차이 안 나거든.”
사현이 자리에 앉으며 우영의 대답을 가로챘다. 그 말에 브랜트가 탱글탱글한 어린 남자만큼 좋은 게 없다며 질 낮게 킥킥댔다. 덕분에 사현의 얼굴이 콰득 구겨졌다.
“넌 왜 여기 있어?”
“식당에 밥 먹으러 오지, 뭐 하러 왔겠어.”
“그럼 동행이 있을 거 아냐. 왜 여기, 이 테이블에 퍼질러 앉냐고.”
“으응, 애인이랑 왔는데 보시다시피 물 맞았어. 그래서 오 분 전부터 솔로.”
브랜트가 보란 듯이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부러 유분이 많은 왁스를 바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그의 옷깃과 가슴팍이 연하게 얼룩져 있었다. 브랜트는 방금 연인과 헤어졌으면서도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이었다.
우영이 그런 브랜트를 빤히 쳐다봤다. 잘생겼다. 브랜트는 백인이어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참 잘생긴 얼굴이었다. TV에서 보여 주던 외국 로맨스 영화의 남자 주인공처럼 생겼다.
이런 사람과 사현이⋯⋯ 그렇고, 그런⋯⋯ 사이였으려나. 근데 또 사현이 아무렇지 않게 저를 남자친구라 소개한 걸 보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갈팡질팡하던 우영이 참지 못하고 궁금증을 문장으로 내놓았다.
“B는 어떻게 알게 되셨어요?”
“오우, 목소리 되게 좋다.”
“⋯⋯.”
“아, 나 컬렉터. 그림 사고파는. 근데 그냥 컬렉터는 아니고. 돈 많은 분들한테 그림 소개해 주고 수수료 받는, 그런 거.”
“아⋯⋯.”
“한국은 원래 좋아했어. 그래서 말도 배웠고.”
“아아⋯⋯.”
“사실 거짓말이야. 한국 재벌들이 그림 잘 모르면서 돈은 잘 쓰거든. 내가 대충 영어 섞어가면서 구슬리면 돈 잘 내. 백인에게 친절하기도 하고.”
브랜트는 묻지도 않은 말을 줄줄이 쏟아 냈다. 우영이 어스름히 웃으며 대충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의 문장 사이에 사현의 이름이 끼지 않은 걸 보니 사현과 크게 인연이 있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왜 있잖는가. 사현으로 인해 그림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사현을 보러 한국에 가곤 한다, 사현에게서 한국어를 배웠다. 그런 거.
불안하게 메슥거리던 심장이 대번에 고요해졌다. 우영이 한결 느슨해진 표정으로 브랜트를 쳐다봤다.
브랜트는 말로 먹고사는 사람답게 말을 곧잘 했다. 언뜻 가영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우영은 때로는 웃기도 하고, 때로는 한껏 집중한 얼굴로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가 말하는 경영, 투자와 관련한 예술 세계와 해외 시장, 재벌들이 좋아하는 그림체 같은 건 쉽게 들을 수 있는 게 아닌지라.
반짝반짝 순진하게 빛나는 우영의 동공을 바라보던 브랜트가 사현을 불렀다.
“B.”
“뭐.”
애꿎은 와인 잔을 세게 쥐었다가 풀고, 또 세게 쥐길 반복하던 사현이 부루퉁히 대꾸했다.
“나 이 아가 번호 따도 돼?”
브랜트가 씨이익 웃으며 물었다.
“⋯⋯미쳤니?”
사현의 낯에서 표정이 쓸려 갔다. 그가 쥐고 있는 와인 잔이 금방이라도 깨질 듯 파르르 경련했다. 조금 더 수가 틀리면 잔을 그대로 브랜트의 얼굴에 갈아 버릴 기세였다. 우영은 그런 사현의 표정을 꽤 많이 봐 왔다.
「나무 부두」가 찢어졌을 때. 괴한이 제 볼에 상처를 냈을 때. 그리고 오늘 아침, 제가 베이글 가게 앞에서 한 남자에게 플러팅 당했을 때. 그때 봤던 얼굴이었다.
허나 브랜트는 눈치 없는 척을 하며 의자를 끌어 우영의 곁에 찰싹 달라붙었다.
“왜. 딸래. 아가, 핸드폰 번호 알려 줄래?”
브랜트가 빙긋 사람 좋게 웃었다. 난데없는 번호 타령에 우영이 눈을 끔뻑였다. 물론, 알려 주고 싶은 마음일랑 손톱만큼도 없었다. 제 핸드폰에 뜨는 이름은 사현 하나면 차고 넘쳤다.
근데 얄궂은 마음이 비죽 고개를 쳐들었다. 얼굴을 있는 대로 구기고 있는 사현의 반응이 썩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아랫배가 찌르르한 게 비틀린 쾌감이 올라왔다.
조금, 아주 조금만 놀리면 안 되나. 제 주제에 사현을 골려 먹겠다니. 미친 소리인데, 오늘따라 실행하고 싶었다. 아침에 만났던 남자에겐 눈알을 파다가 베이글 사이에 넣어 주겠다고 했는데. 브랜트에게는 무슨 욕을 하려나.
우영이 보기 좋은 미소를 띠며 브랜트를 바라봤다.
“드릴까요? 그럼 지금처럼 재미있는 이야기 많이 해 주실 거예요?”
“Oh, sweetie. 당연하지. 나 다음 달에 한국 가는데. 만날래?”
“정말요? 한국에 오세요?”
“응. 아가 쇼핑 좋아하니? 먹는 건 뭐 좋아해? strawberry cake 같은 거 좋아하게 생겼는데.”
“쇼핑, 어, 쇼핑 좋아해요. 케이크도 좋아해요.”
“그래? 잘됐다. 나도 쇼핑 좋아해. 같이 갈까?”
두 사람은 뭐가 그렇게 신이 나는지 눈까지 마주하고 시시덕거렸다. 사현의 이마에 불룩 핏줄이 올라온 거야 당연지사였다. 우영이 제가 아닌 이와 마주 보고 웃다니.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질 만큼 분기탱천할 일이었다.
“⋯⋯야.”
참다못한 사현이 낮은 음성으로 으르댔다. 우영과 브랜트의 시선이 동시에 사현에게로 향했다. 그가 부른 ‘야’가 누구에게 향한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너 꺼져.”
사현이 브랜트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왜 그래? 오 분만. 아가 번호만 따고 갈게.”
브랜트가 어깨와 눈썹을 함께 으쓱거렸다. 사현이 꽉 어금니를 세게 씹었다. 관자놀이가 들썩이는 게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
“서우영.”
“네?”
“일어나.”
사현이 명령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옆 의자에 걸린 재킷을 들었다. 심상찮은 분위기에 뒤늦게 아차, 한 우영이 끼이익 의자를 뒤로 뺐을 때였다. 브랜트가 절레절레 턱을 가로저었다.
“B. 아가 아직 식사 안 끝났어. 왜 그렇게 매너 없이 굴지? B답지 않아.”
우영이 눈을 크게 떴다. 브랜트의 입에다 차게 식은 고깃덩이를 마구 욱여넣고 싶었다. 닥쳐, 닥쳐, 닥쳐 좀.
사현이 물끄러미 브랜트를 응시했다. 히죽거리며 웃고 있는 게, 참 잘생긴 얼굴인데도 정이 안 갔다. 예쁜데, 예쁘지 않다. 독특한 경험이었다.
“우영아.”
사현이 브랜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우영을 불렀다.
“네, 네.”
우영이 얼른 대답했다.
“밥 덜 먹었니?”
“아니요! 다 먹었어요.”
우영이 보란 듯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브랜트가 아쉬움을 감추지 못한 눈으로 우영을 훑었다. 그 시선에 천박한 욕정이 가득했다. 떡 벌어진 덩치와 달리 순진하고, 어리고, 잘생긴 남자는 쉽게 만날 수 있는 행운이 아닌지라.
근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B의 것이니 건드리기가 어려워졌다. 하룻밤이라도 어떻게 좀 비벼 보면 좋겠거늘. 언제 장난에 동조했냐는 듯 지레 겁을 집어먹고 흘끔흘끔 눈치를 살피는 우영을 보아하니, 사현이 제대로 우위를 독점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브랜트가 우영을 조금 더 구슬려 볼까, 아니면 사현을 놀려 볼까, 짓궂은 고민을 이어 가는데. 사현이 나지막이 브랜트의 이름을 읊조렸다.
“브랜트.”
“응?”
“그림으로 돈 벌어먹고 싶으면 쪼갤 때 안 쪼갤 때 구분은 해야지.”
“⋯⋯.”
“감히 어딜 보고 처웃는 거야.”
사현에겐 참으로 신기한 능력이 있다. 언성을 높이지도 않고, 상스러운 말로 문장을 점철하지 않아도 아주 매섭고 서늘하게 타인을 혼낼 수 있는 능력. 감미로운 목소리로 또박또박 읊조리는데 파급력이 대단했다.
우영은 그의 꾸지람이 자신에게로 향한 것도 아닌데 넙데데한 어깨를 접지 못해 발을 굴러야 했다. 브랜트야 오죽하겠나. 내내 호선을 그리고 있던 그의 입술이 일자로 딱 다물렸다. 그는 사현의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에게는 브랜트의 밥줄을 단번에 끊어 버릴 수 있는 인맥과 능력이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B. 장난인 거 알지?”
브랜트가 씨익 어색하게 웃으며 상황을 수습하려 했다. 그러나 그딴 말이 사현에게 통할 리 없었다. 사현의 입술이 비릿하게 뒤틀렸다.
“모르겠는데.”
“왜 그래, B. 고작 이런 일로,”
“고작?”
사현이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가 폈다. 고작이라고? 고작? 이건 ‘고작’이라는 단어로 폄하될 일이 아닌데. 기분이 더 나빠졌다. 아주 시궁창에서 뱅글뱅글 구른 것 같았다.
“글쎄. 나한텐 고작, 이 아니라서.”
뾰족한 시선으로 브랜트의 미간을 꿰뚫던 사현이 휙 뒤를 돌았다. 브랜트가 바보 같은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어, 아, 안녕히 계세요.”
우영은 와중에도 예의가 발랐다. 브랜트를 향해 꾸벅 허리를 숙인 그가 헐레벌떡 사현을 뒤쫓았다. 그가 막 사현의 옆에 당도하기 직전이었다. 사현이 빙그르르 뒤를 돌며 브랜트를 불렀다.
“아, 브랜트.”
“어?”
“올겨울에 서울에서 아트 페어 있는 거 알지? 라인업 괜찮던데. 올 거니?”
뜬금없는 말이었다. 눈썹을 크게 올렸다가 내린 브랜트가 잘게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 클라이언트들이 거기 나오는 그림들 가져와 달라고 벌써부터 난리야. 정성화 「나비」, 제이미 제시 「A cloudy day」에 마르크 샤갈 것도 나온다고 소문이,”
“안 오는 게 좋을걸.”
“⋯⋯.”
“아마, 안 오는 게 좋을 거야.”
사현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네가 방금 말한 것들 내가 다 사 버릴 거라느니. 아무도 너에게는 그림을 팔지 않을 거라느니. 또는 더 이상 네게 그림을 주문할 고객이 없을 거라느니. 셋 중 하나겠지. 무엇 하나 브랜트에게 좋은 게 없었다.
브랜트의 동공이 좌우로 바쁘게 경련했다. 찰나의 장난으로 업을 잃게 생겼다. 이걸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사현은 잡을 새도 없이 레스토랑을 나가 버렸다. 남은 건 난도질당한 붉은 고깃덩이뿐이었다.
펜트하우스로 돌아오는 길. 사현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우영이 넌지시 이런저런 시답잖은 말을 붙여 봤으나 사현은 응, 아니, 글쎄, 라는 세 단어로 모든 답을 일갈했다.
우영이 차창 밖으로 맨해튼 야경을 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견디다 못한 그의 입술이 피를 비추기 직전, 펜트하우스에 도착했다.
작은 조명등 하나 켜지 않은 집은 어두웠다. 커다란 창으로 맨해튼의 불빛이 스며 왔으나,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적막하고 무거웠다.
사현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다섯 걸음을 채 걷기 전에 뚝 멈춰 섰다. 그를 뒤따라가던 우영 역시 멈춰 섰다. 우영이 목을 푹 아래로 고꾸라트렸다. 드디어 때가 온 모양이다. 제가 혼날 때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사현이 뒤를 돌아 우영을 직시했다. 어둠 속에서도 번뜩이는 눈동자가 잔뜩 날이 서 있었다.
“너, 내가 애인이라고 소개하는 게 쪽팔리니?”
그 질문에 우영이 헛숨을 담뿍 집어삼켰다. 감히 상상도 해 보지 않은 것이다. 제가 사현을 부끄러워하다니. 그럴 리가. <갤러리 비>의 B가 내 연인이라고, 화 그룹의 백사현 사장이 내 애인이라고, 매일 아침마다 창문 열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인데.
우영이 두 손을 내젓다 못해 고개까지 도리도리 가로저었다. 당장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부정이었다.
“아니요. 그럴 리가요. 저는 그냥, 형이 걱정돼서⋯⋯. 형이 동성애자라느니, 게이라느니⋯⋯ 그런 말 듣는 게 싫어서⋯⋯. 사람들이 욕할 테니까⋯⋯.”
“내가 등신이야? 그런 말 해도 될 때, 안 될 때도 구분 못 할 것처럼 보여?”
“⋯⋯아니요.”
우영이 침통한 낯으로 재차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사현이 그렇게 허술한 사람이 아닌데. 제 주제에 생각이 너무 많았다. 우영의 눈썹이 뚝 아래로 떨어졌다. 입꼬리도 처졌다. 어깨도 내려앉았다.
사현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우영이 브랜트와 시시덕거리던 꼴을 떠올리니 오장육부가 다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눈알은 뜨거웠고, 머리통은 부글부글 끓었다. 그가 한 발자국 우영을 향해 다가갔다.
“아니면, 날 가지고 노는 게 재미있든? 내가 동요하는 게 즐거웠냐는 말이야.”
“⋯⋯.”
찰나, 우영의 호흡이 뚝 끊겼다. 거기다 반쯤 허물어진 표정에 잘근거리는 입술이라니. 속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모습에 사현이 픽, 하고 실소했다.
“재미있었구나.”
“⋯⋯형.”
“가끔은 네가 거짓말에 소질이 없는 게 참⋯⋯ 싫어.”
사현이 쌉싸름한 미소를 띤 채 읊조렸다. 우영이 조금 영악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제 앞에서야 얼마든지 순진하고, 순수해도 괜찮지만 바깥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으니까.
근데 오늘의 영악은, 좀, 섭섭하다. 제 마음이 어떨 줄 알고 그런 장난을 쳤을까. 오늘 아침에 있던 일만 해도 눈앞이 시뻘겋게 물들거늘. 우영은 제가 화내고, 분노하는 게 재밌던 걸까.
그래, 뭐. 그럴 수도 있지. 제가 화내는 걸 보며 감정을 확인했을 수도 있지. 우영은 어리니까. 전 연인들도 질투를 유발하겠다며 같잖은 쇼를 자주 했었다. 그러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아니. 이해할 수 있나? 허물어지는 제 마음일랑 하등 신경 쓰지 않는 게 아닌 이상 그럴 수가 있나? 냉철한 이성과 분노한 심장이 마구 충돌했다. 두통이 올 지경이었다.
점점 일그러지는 사현의 낯에 우영이 한껏 겁을 집어먹었다. 싫다니. 그런 말은 제가 그를 짝사랑할 때도 듣지 못했다.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졌다. 전신의 피가 차게 식고, 척추가 뻣뻣하게 굳었다. 덜덜 떨리는 허벅지와 무릎이 칠십 먹은 노인 같았다.
“싫어요? 제가요?”
“⋯⋯.”
“형.”
“⋯⋯.”
사현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저 우영의 얼굴 어딘가를 텅 빈 시선으로 응시하기만 했다. 우영이 사현의 팔꿈치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잘못했어요. 저 미워하지 마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잠깐, 잠깐 뭐에 홀린 것처럼⋯⋯. 그냥, 어, 형은 항상 어른스럽고, 이성적이고⋯⋯ 그런데⋯⋯. 저 때문에 화내고 짜증 내고 그러는 게 좋아서, 그래서 그랬어요. 되게 바보 같은 거 아는데⋯⋯, 어, 네⋯⋯. 죄송해요.”
당황한 말이 중구난방으로 나부꼈다. 덜덜 떨리는 음성은 무게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일까. 단어들이 사현의 귓바퀴에 앉지 못하고 허공에 흩뿌려졌다. 우영의 만면이 점차 눅눅해졌다.
이대로 관계가 끝나 버릴까, 전전긍긍이었다. 사현이 없는 제 삶이라니. 끔찍했다. 몇 시간 전의 저를 때려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
사현이 숨을 크게 마셨다가 내뱉었다. 생각을 정리하고, 이성을 다잡기 위해서였다. 좋아서 그랬다지 않은가. 내가⋯⋯ 화내는 게 좋았⋯⋯.
순간 브랜트와 눈을 맞추며 웃는 우영의 모습이 다시 뇌리를 스쳤다. 백인 남자에게 허벅지를 내어주고 있는 우영의 모습도 떠올랐다. 진정이 안 된다. 이렇게 뜨거운 울분은 원화와 민재가 눈앞에서 사라진 이래로 처음이었다.
으득, 이를 간 사현이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벗어.”
그가 묵직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네?”
우영이 잘못 들었다는 듯 고개를 앞으로 내밀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랑 당장 떡 쳐야겠으니까 벗으라고.”
“아, 어, 네.”
재차 이어진 사현의 말에 우영이 명령이 입력된 로봇처럼 옷을 벗기 시작했다. 사현이 직접 골라 준 니트를 훌떡 벗어 던지고 곧장 바지 버클을 풀었다. 부끄러움이나 수치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떡 치고 싶다는데, 열심히 떡 치면 되는 것이다. 사현의 화가 풀릴 수 있다면 뭐든 못할 게 없었다.
우영이 빠른 속도로 알몸뚱이가 되어 가는 동안 사현은 저벅저벅 부엌으로 향했다. 와인 셀러에서 와인을 꺼내 주둥이째로 입에 물었다. 꿀꺽꿀꺽, 거칠게 움직이는 목울대에 짜증이 가득했다.
모든 옷가지를 벗은 우영이 마지막으로 브리프를 내리려 할 때쯤, 사현이 와인 병을 든 채로 그를 스쳐 지나갔다. “침실로 와.”라는 말과 함께.
우영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팬티를 벗고 가야 하나, 아니면 가서 벗어야 하나, 그런 등신 같은 고민을 했다. 잠시 머리를 굴리다 후자를 택하기로 했다. 성기를 덜렁거리며 침실에 들어서는 건 볼썽사나울 것 같아서.
사현은 침대 앞에 서서 와인을 물처럼 마시고 있었다. 와인 병 안의 술이 꿀렁거리며 사현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게 보였다. 우영이 쭈뼛쭈뼛 그의 옆에 가 섰다. 이제 어찌해야 하나, 눈알만 굴리고 있는데 사현이 고갯짓으로 침대를 가리켰다.
우영이 침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침대에 올라가란 뜻이겠지. 근데 올라가면 앉아야 하나. 아니면 누워야 하나. 보통 사현이 먼저 눕고 제가 그 위에 올라타는데. 오늘은 좀 다르겠지. 긴장하니 쓸데없는 생각이 많아졌다.
우영이 어쩔 줄 모르고 있으니 사현이 하, 짧게 웃음을 끊어 냈다.
“서서 자니?”
“네? 아, 아니요.”
“아니면 나랑 섹스 하기 싫어?”
“그럴 리가요.”
“그것도 아니면, 반항이야? 내가 별 같잖은 거로 짜증 내서 좆같아?”
사현이 뾰족하게 벼려진 목소리로 우영의 가슴팍을 후벼 팠다. 덩달아 화가 날 정도로 모진 말이었다. 그가 화난 이유가 ‘같잖은’ 게 아님을 안다. 제가 잘못한 것도 안다. 우영은 이 상황이 도래한 모든 이유가 저 때문임을 파악하고 있었다.
다만, 사현이 저렇게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내는 건 이해가 안 됐다. 그런 게 아닌 걸 알면서.
우영이 무어라 말하려 입술을 달싹였는데, 사현이 와인을 쥐지 않은 손으로 우영의 팔꿈치를 잡아당겼다. 방심하고 있던 우영이 그 힘을 따라 몸을 돌리는 순간, 사현의 발이 우영의 아킬레스건을 찼다. 퍽, 하고 축구공처럼 걷어찬 건 아니고 밀어낸 것에 가까웠다.
그렇게 센 힘도 아니었는데 장대한 기골의 우영이 속절없이 침대 위로 무너졌다. 순식간에 시야가 뒤집힌 그가 바보 같은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사현이 저 가느다란 다리와 작은 발로 저를 무너트렸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어, 와, 형, 진짜 운동 잘 하는구나.”
분위기에 맞지 않는 감탄이 차마 갈무리하기도 전에 튀어 나갔다.
“이 상황에 그런 소리가 나오니?”
사현이 어이없다는 듯 조소했다. 마지막으로 와인을 콸콸 목구멍에 쏟아 부은 그가 병을 협탁에 올려 두고 침대 위로 올라왔다. 정확히는 우영의 골반 위에. 우영이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그렇게 많은 스킨십을 해 왔거늘. 여전히 닿을 때마다 긴장됐다.
사현은 느릿한 몸짓으로 옷을 벗었다. 와이셔츠 단추를 푸는 하얀 손이 어둠 속에서 창백하게 빛났다. 곧 우영이 사랑해 마지않는 가느다란 목선이 드러났다. 옴푹 파인 쇄골 아래로 적당히 단단하면서, 모아 쥐면 부드러운 가슴도 드러났다. 제가 하도 물고 빨아서 분홍색에서 연지색으로 진해진 유두는 안타깝게도 잘 보이지 않았다.
상의 탈의를 마친 사현이 다시금 와인 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우영이 무언가에 홀린 듯 그 모습을 바라봤다. 설 것 같은데. 아니, 사실 이미 섰는데. 이 분위기에 발기하면 된통 혼날 듯했다. 티가 나려나. 그래도 탄성 좋은 팬티 덕에 티가 덜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때, 사현이 예고 없이 쑥 우영의 팬티를 내려 버렸다. 두툼하고 기다란 성기가 퉁, 위로 튀어 올랐다. 한껏 발기한 성기에 사현이 헛웃음을 흘렸다. 와중에도 건강한 걸 기특해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화를 내야 하는 건지.
사현이 후우, 자신의 앞머리를 불어 올렸다. 그러고는 바지와 브리프를 한 번에 훌훌 털어 침대 밖으로 던졌다. 우영과 달리 사현의 것은 발기하지 않은 채 축 늘어져 있었다. 분홍빛에, 말랑말랑하고, 고환은 통통하고, 귀두는 반질반질하고, 털 하나 없이 말끔한 성기.
우영이 그의 성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문득 그것이 입술 앞으로 쑥 들이밀어 졌다.
“빨아.”
사현이 말, 아니 명령했다. 우영은 거리낌 없이 냉큼 입을 벌렸다. 곧 입 안으로 쫀득쫀득한 살덩이가 들어왔다.
“하아⋯⋯.”
뜨끈한 우영의 입속에 사현이 나른하게 눈을 감았다. 우영은 사현의 것을 문 채 흘끔 그의 눈치를 봤다. 마음 같아서는 평소처럼 쪽쪽 빨고, 핥고 싶은데 그래도 될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저 가만히 머금고만 있으니 사현이 우영의 어깨를 아래로 누르며 엉덩이를 살짝 위로 띄웠다. 그러더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응⋯⋯.”
사현의 잇새로 뭉근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기둥에 비벼지는 혀, 귀두에 부딪히는 오돌도돌한 입천장, 이따금 닿아오는 이. 무엇 하나 자극적이지 않은 게 없었다. 거기다 제 것을 물고 저를 올려다보는 우영의 예쁜 얼굴이라니. 머리끝까지 솟구쳤던 화가 물에 잠긴 솜사탕처럼 단숨에 녹아내렸다.
사현이 으득 어금니를 짓씹었다. 아니, 이렇게 넘어가선 안 된다. 제가 화가 났다는 걸 제대로 인지시키고,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 했다.
그런 사현의 다짐을 알았을까. 때마침 우영이 입술을 동그랗게 모아 성기의 뿌리를 조였다.
“흑!”
사현의 어깨가 바짝 위로 솟구쳤다. 사과 같은 엉덩이 두 쪽이 모이고, 허벅지에 근육이 도드라졌다. 판판한 배 위로는 십일 모양의 복근이 올라왔다가 사라짐을 반복했다.
사현은 미간을 조금 찌푸리긴 했지만 우영을 말리거나 떼어내지 않았다. 그것을 무언의 허락으로 넘겨짚은 우영이 고개를 내밀고 성기를 조금 더 깊숙이 머금었다. 그러고는 쭈우웁, 세게 빨아 당겼다.
“으으응⋯⋯.”
사현이 목을 휙 뒤로 젖혔다. 처음 입 안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말랑말랑한 찹쌀떡 같던 성기가 제법 단단해졌다. 우영은 어떻게 빨아야, 어떻게 혀를 놀려야 사현이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먹어치우는 사현의 몸뚱이인데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우영이 혀끝에 힘을 주고 사현의 귀두를 짓누르듯 핥았다. 기둥은 쭙쭙 빨다가 아프지 않게 잘근거렸다. 그의 고환이 턱에 닿을 정도로 깊숙이 삼키기도 했다. 허나 모자랐다. 목구멍이 꽉 찰 정도로 사현을 먹고 싶었다.
우영은 그 욕구를 곧장 실행에 옮겼다. 커다란 손으로 사현의 엉덩이를 움켜쥐고 얼굴을 앞으로 내미는데. 찰싹, 사현이 우영의 팔뚝을 내리쳤다.
“어딜 만지는 거야.”
“⋯⋯.”
우영의 눈이 울멍울멍 젖어 들었다. 사현의 낯은 엄했다. 죽 찢어진 눈에 짜증이 가득했다. 비로소 이것이 벌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우영이 아쉬운 대로 사현의 무릎 옆 시트를 움켜쥐었다.
“하아, 응, 으읏, 아⋯⋯.”
사현은 우영의 입 속을 마음껏 유린했다. 우영이 호흡할 때마다 꿀렁거리는 입 속에 등줄기가 오싹했다. 금세 아랫배가 시큰거렸다. 절정이 임박했다는 뜻이다. 사현은 구태여 성기를 물리지 않고 그대로 우영의 입 속에 사정했다.
“아, 아아⋯⋯.”
가느다란 허리가 달달달 경련했다. 발가락이 달팽이 눈처럼 움츠러들었다가 다시 펴졌다. 눈꺼풀은 팔랑거렸고, 입술은 살짝 벌어진 채 후끈한 숨을 토해 냈다.
우영은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그것을 감상하며 사현의 정액을 꿀꺽 삼켰다. 걸쭉하고 쌉싸름한 액체는 참으로 훌륭한 맛이었다.
우영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사현의 귀두만 노려 빨며 정액을 짜냈다. 사현의 눈가가 잔뜩 일그러졌다. 들릴 듯 말 듯 욕을 읊조린 그가 휙 성기를 빼 버렸다. 아쉬운 마음에 혀가 빼꼼 배웅을 나갔다.
더 빨고 싶다. 사현의 눈가가 발갛게 붉어지고, 그만하라고 머리카락을 잡아당길 때까지 빨고 싶다. 성기는 물론, 말랑말랑한 고환과 매끈한 회음부, 그리고 귀여운 뒷구멍까지 죄 빨고 싶다.
우영이 노골적으로 쩝쩝 입맛을 다시는데, 사현은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고는 전보다 우람해진 우영의 성기 위로 엉덩이를 맞추는 것이다.
우영의 눈이 부릅 크게 떠졌다.
“⋯⋯형? 바로 넣게요?”
“⋯⋯.”
“안 돼요. 아플 거예요.”
“시끄러워.”
“하지 마요. 제가 젤 가지고 올게요.”
형. 제발. 거듭된 우영의 만류에도 사현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단단하게 곧추선 우영의 귀두 위로 건조하기 짝이 없는 주름이 짓눌리기 시작했다. 사현의 눈가가 아프게 어그러졌다. 어금니를 악문 게 육안으로도 보였다. 그만큼 아프다는 뜻이겠지.
“형.”
보다 못한 우영이 사현의 골반을 거머쥐었다. 그러자 사현이 우영의 손을 세게 쳐냈다.
“만지지 말라고!”
그의 눈알에 거미줄 같은 핏발이 섰다. 씩씩거리는 숨에는 신경질과 고통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었다. 꼭 심통 난 사춘기 소년 같았다.
“⋯⋯.”
우영이 꽉 주먹을 움켜쥐었다. 덩달아 짜증이 났다. 짜증이라. 그런 감정과 친하지 않은데. 그 단어가 아닌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었다.
사현은 독특한 버릇이 있다.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분노하면 그것을 밖으로 표출하지 않고 제 몸뚱이나 정신을 갉아먹곤 했다. 손목에 자해를 한다거나, 폭음을 한다거나, 무슨 효과가 있는지 모를 알약을 으적으적 씹어 먹는다거나,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잔다거나, 지금처럼 아플 걸 뻔히 알면서도 아집을 부린다거나.
그걸 목도할 때마다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우영의 속을 깨부수곤 했다. 그래도 원화와 민재가 사라진 이래론 보지 못했는데. 또다. 또 이렇다. 제가 곁에 있는데도 사현은 저를 써먹지 않았다.
그에게 저는 여전히 어린 아이일까. 그의 상처를 보듬어 줄 수 없고, 그의 화를 받아줄 수 없는 철부지일까. 그리 생각하니 자괴감과 섭섭함이 동시에 치솟았다. 그래서 꾸역꾸역 성기를 삼키는 사현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흐으으⋯⋯.”
우영의 성기가 반 정도 사라졌을 때쯤, 사현이 억누르고 또 억누르던 고통 한줄기를 토해 냈다. 이마에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혔다. 다리가 덜덜 떨렸다.
그 모습에 우영이 자신의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가 놨다.
“벌 받을 사람은 난데, 왜 형이 아파해요.”
“시⋯⋯끄러워.”
“그렇게 아픈 게 좋아요? 아프면 스트레스가 풀려요? 화가 가라앉아요?”
“시끄럽, 다고!”
사현이 날카로이 고함을 내질렀다. 그러고는 고집스레 엉덩이를 내렸다. 우영의 것은 크다. 그가 공을 들여 수십 분간 애무해 주고, 풀어 줘도 막상 들어오기 시작하면 전신이 굳곤 했다. 그런데 이렇게 막무가내로 집어넣으니 그 고통이 곱절이었다.
그래도 사현은 멈추지 않았다. 어떻게든 이 행위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야 성이 풀릴 것 같았다. 등신 같은 생각인데, 실로 그러한 믿음이 있었다.
“아으, 윽⋯⋯.”
사현의 일그러진 낯에 아픔이 넘실거렸다. 표정을 숨기지 못할 정도로 힘들다는 뜻이겠지. 그걸 코앞에서 목도하고 있는 우영의 마음이 시시각각 허물어졌다.
우영의 것이 손가락 두 마디쯤 남았을 때였다. 기어코 한계에 다다른 사현이 잠깐 움직임을 멈춘 채 색색 숨을 골랐다. 그러다 다시 허리를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우영의 입술이 비죽 못되게 뒤틀렸다.
“못 봐주겠네, 진짜.”
“뭐?”
“아픈 게 좋아요?”
“어?”
“아픈 게 좋으면 내가 해 줄게요. 형이 원하는데, 내가 뭔들 못 해 주겠어요.”
우영의 말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한 사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라고 물으려 했다. 허나 우영이 사현의 골반을 움켜쥐고 휙 몸을 뒤집는 바람에 목소리가 역류했다.
순식간에 사현이 아래에, 우영이 위에 위치하게 됐다. 몇 번 눈을 깜빡이던 사현이 확 얼굴을 구겼다.
“비켜. 왜 멋대로,”
“시끄러워요.”
“뭐라고?”
사현이 잘못 들었다는 듯 반문했다. 대사가 바뀐 것 같은데.
“시끄럽다고.”
우영의 얼굴이 싸늘하게 얼어 있었다. 쉽게 보지 못하는 표정이다. 그는 항상 웃는 낯이니까. 그림을 그릴 때도 진지한 얼굴이지, 이렇게 시린 냉기가 뿜어지진 않았다.
“너⋯⋯.”
사현이 다리를 버둥거리며 우영의 품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그러나 우영이 한 손으로 사현의 무릎 아래를 꽈악 움켜쥐는 바람에 불발됐다. 이번엔 두 팔로 그의 가슴팍을 밀어 냈다. 이까짓 거 얼마든지 빠져나올 수 있었다. 헌데 이번엔 두 팔목이 잡혔다.
우영의 커다란 손바닥이 사현의 가느다란 팔목을 결박했다. 그로 모자라 머리 위로 올리고 그대로 내리눌렀다. 피가 통하지 않아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센 힘이었다. 사현은 순식간에 옴짝달싹할 수 없는 신세가 됐다.
사현의 눈가에 당황이 서렸다. 우영이 이렇게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거기다 어딘가 화가 난 듯한 우영이 이상했다. 왜 네가 화가 나. 지금 화를 낼 사람이 누군데.
사현이 우영을 비난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을 때였다. 격렬한 움직임에 귀두만 남기고 빠져 나갔던 우영의 것이 쿠우욱, 단숨에 뿌리 끝까지 쑤셔 박혔다.
“아흐윽!”
엄청난 고통이었다. 순간 배가 뚫리는 줄 알았다. 뒤가 찢어진 것처럼 화끈거렸고, 한계치로 벌어진 내벽은 쓰라렸다. 머리를 뒤로 젖힌 사현이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제가 꾸역꾸역 엉덩이를 내릴 때와는 차원이 다른 고통에 숨이 다 뒤틀렸다.
그런데도 우영은 멈추지 않았다. 꽉 다물린 뒷구멍에서 억지로 성기를 뺀 다음, 다시금 콱 처박았다.
“으⋯⋯.”
사현의 숨이 깔딱깔딱 가쁘게 넘어갔다. 눈앞이 흐리게 번졌다. 아픔으로 말미암은 생리적 눈물이었다. 사지가 파들파들 떨렸다. 누구보다 고통에 익숙하다고 자신했는데. 이렇게 직접적이고 원초적인 통각은 너무 오랜만이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우영은 사현을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긴장해서 수축할 대로 수축한 뒷구멍을 쑤시는 게 그 역시 결코 좋지 않을 텐데, 멈추지 않고 퍽퍽 세차게 허리를 움직였다.
그의 사타구니에 얻어맞는 사현의 엉덩이가 시뻘겋게 물들었다. 덜렁거리는 고환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고, 배 속은 칼로 난도질당하는 것 같았으며, 무엇보다 가슴이 아팠다.
우영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제가 화를 내는 것에 질렸나. 이제 달래 주기도 귀찮나. 쌓아 두던 화를 터트리는 걸까. 그렇게 순하던 애가 갑자기 야차처럼 구는 것이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끝내 사현의 눈가에서 눈물이 굴러 떨어졌다. 우영이 퍽퍽 치받을 때마다 결박당한 손끝이 움찔움찔 떨렸다.
“아파, 아파⋯⋯.”
“하아⋯⋯.”
“너무 아프, 아, 우영아⋯⋯.”
사현이 애처로운 눈으로 우영을 올려다봤다. 몇 분 전, 화난 호랑이 같던 기세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우영이 하, 조소했다. 이렇게 고통에 나약하면서. 아픈 거 싫어하면서. 곁에 있는 사람이 떠나는 걸 무서워하면서. 왜 그렇게 자신을 내몰지 못해 안달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던 환경이었음을 알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제법 시간이 흘렀지 않은가. 컴컴한 과거를 떨쳐내지 못하는 사현이 답답했다.
우영이 사현의 손을 놓아줬다. 사현이 허겁지겁 우영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길게 한숨을 내쉰 우영이 사현의 등을 꽉 감싸 안았다.
“오늘 일은 내가 잘못했어요. 하지만 그거랑, 형이 자해하는 거랑은 전혀 다른 문제예요.”
“아흐⋯⋯.”
“아직도 아프고 싶어요? 아픈 게 좋아요?”
“아니, 아니⋯⋯. 안 좋아, 흐윽, 하나도, 안, 좋아⋯⋯.”
사현이 코를 훌쩍이며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그런 사현을 내려다보던 우영이 조심히 성기를 빼냈다. 목석처럼 단단했던 사현의 몸이 한결 늘어졌다. 우영이 가만가만 그의 등줄기를 쓸어내렸다.
“맞아요. 아픈 건 좋은 게 아녜요. 그러니까 다시는 아프려고 하지 마요. 내 앞에선 더더욱 안 돼요.”
“응, 흐, 알았, 어⋯⋯.”
사현은 오랫동안 울었다.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그가 얼굴을 파묻고 있는 목덜미가 축축이 젖을 정도였다. 우영은 그의 눈가에 키스해 주고, 팔뚝을 주물러 주고, 머리칼을 쓸어 주며 그를 달랬다.
“쉬⋯⋯. 그만 울어요.”
거듭된 우영의 보듬음에 가쁘게 들썩이던 사현의 가슴팍이 잔잔해졌다. 그가 우영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우영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고 있었다.
사현의 눈동자가 우영의 얼굴 여기저기를 훑고 지나갔다. 수려하게 생긴 눈과 오뚝한 코, 도독한 입술, 반질반질하고 단단한 피부를 보고 있으니 다시 화가 났다.
이 예쁜 걸 브랜트 그 새끼가 봤어. 이 예쁜 얼굴로 내가 아닌 다른 남자에게 웃어 줬어. 사현이 으득 이를 갈았다.
“이 씨발, 넌 내 건데⋯⋯. 내 건데, 내 거⋯⋯.”
소유욕과 질투로 점철된 사현의 만면이 구겨졌다. 그걸 코앞에서 본 우영이 웃음을 억눌렀다. 끝을 모르고 사랑스러워지는 사현은 가끔 무섭기까지 하다.
“맞아요. 나 형 거예요.”
“⋯⋯.”
“나는 형밖에 없어요. 형뿐이에요. 내가 미안해요.”
우영이 사현을 직시한 채 또박또박 말했다. 사현이 눈을 홉떴다. 갑자기 또 심술이 차오르는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용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온몸을 짓누르고 있는 우영의 무게와, 아직 화끈거리는 뒷구멍의 잔상이 오래 남아서 쉽사리 짜증을 낼 수 없었다.
“⋯⋯이번 한 번만 봐주는 거야.”
사현이 어딘가 부루퉁한 음성으로 말했다. 우영이 푸흐흐, 옅게 웃음을 흘렸다.
“고마워요, 형.”
사현의 이마에 꾹 입술을 눌렀다가 뗀 우영이 느릿하게 사현의 위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스르륵 이불을 끌어와 사현을 덮었다. 그에 사현이 한쪽 눈썹을 비죽 위로 올렸다.
“왜?”
“네?”
“자게?”
“어⋯⋯ 네.”
“하던 건 마저 해야지.”
“⋯⋯.”
우영이 벙긋 입을 벌렸다. 귀를 의심하게 되는 말이었다. 한바탕 울어서 눈가고 코끝이고 죄다 새빨간 주제에 호기롭기도 하지. 그가 사현의 볼을 살살 문질렀다.
“하지만 아플 텐데요.”
“괜찮아. 그래도 할래.”
“⋯⋯.”
우영의 눈이 게슴츠레 가늘어졌다. 제가 꾸짖은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아픈 게 괜찮단다. 평소엔 세상 철두철미하고 똑소리 나는 사람이 왜 이리 아둔하게 굴까.
우영이 그를 혼내기 위해 다시금 입을 뗐을 때였다. 사현이 얼른 변명을 덧붙였다.
“아픈 게 좋아서 그러는 거 아니야. 그냥⋯⋯ 너와의 섹스가 고통으로 마침표를 찍는 게 싫어서 그래.”
그의 검지가 꾹꾹 우영의 가슴을 눌렀다. 탄탄하고 두툼한 가슴은 언제 봐도 탐스럽다. 그 위로 길게 뻗어 있는 쇄골은 두껍고 깊다. 사현이 거기다 볼을 비볐다.
“하기 싫어? 아직 화났어?”
애교가 잔뜩 껴서 살랑거리는 목소리였다. 더군다나 처연하게 올려다보는 눈매라니. 우영이 한 손으로 벅벅 세게 얼굴을 문댔다. 이런 쪽으로 사현을 이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럴 리가요.”
우영이 이불 속에서 사현의 엉덩이를 꽉 움켜쥐었다. 사현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킥킥거리며 웃었다. 우영이 그 입술을 한입에 집어삼켰다.
우영은 금세 ‘다정한 우영’으로 돌아왔다. 몸 여기저기를 빠는 혀는 달콤했고, 피부를 쓸어내리는 손은 보드라웠다. 그는 늘 그렇듯, 정성을 다해 사현의 뒤를 핥아 줬다. 쓸릴 대로 쓸려 벌겋게 부은 주름이 어찌나 안쓰러운지. 눈꼬리가 아래로 처졌다.
내가 미쳤지. 미쳤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가 사현의 뒤를 이렇게 만들어 놨어. 당장 머리 박고 죽고 싶었다.
“꼭⋯⋯ 해야겠어요?”
사현의 고환에 쪽쪽 키스하던 우영이 물었다. 사현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영이 코로 길게 한숨을 내쉬며 협탁에서 젤을 꺼냈다.
곧 질척하게 젖은 우영의 성기가 사현의 구멍 위에 맞춰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사현의 속을 파고들었다.
“아으응⋯⋯.”
사현이 가볍게 눈을 감았다. 우영이 그의 눈꺼풀에 쪽 키스했다.
삽입은 매우 느리게 행해졌다. 우영은 손톱만큼 넣어 놓고 사현의 안위를 살폈다. 혹 가랑이가 찢어지진 않았나, 배가 뚫리진 않았나, 고통에 미간을 찌푸리고 있진 않은가, 전전긍긍이었다.
사현은 우영의 그런 걱정이 좋았다. 아프게 뒤를 후벼 파던 수십 분 전의 우영은 홀라당 까먹어 버릴 정도로 좋았다. 사현이 우영의 목을 한 아름 껴안았다. 그 후 복근에 힘을 주고 엉덩이를 위로 올려 단숨에 우영의 것을 삼켜 버렸다.
“흐읏!”
“아⋯⋯.”
두 사람의 만면이 쾌감으로 일그러졌다. 꿈틀거리는 사현의 뒷구멍이 좋다고 우영의 성기를 빨아 댔다. 우영의 성기는 그것에 화답하듯 불끈거리며 요동쳤다.
“안, 안 아파요?”
육욕에 잠깐 이성을 놨던 우영이 뒤늦게 걱정을 내놓았다. 사현이 나지막이 웃었다.
“안 아파.”
“진짜요?”
“응.”
그러니까, 얼른 쑤셔 줘. 사현이 낮은 목소리로 우영의 귓가에 속삭였다. 우영의 시야가 새빨갛게 물드는 순간이었다.
“아, 흐, 으응, 아!”
우영의 위에 올라탄 사현이 리드미컬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그럴 때마다 젤, 땀, 정액, 정체 모를 애액으로 난잡하게 젖은 아래에서 찌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 형⋯⋯. 너무 좋아요⋯⋯.”
진짜, 너무, 좋아. 우영이 사현의 가슴을 꽉꽉 세게 잡아 주무르며 말했다. 그러다 그의 검지와 중지 사이에 유두가 걸려 꼬집히는 순간, 사현이 맥없이 픽, 정액을 싸질렀다. 오감이 지나치게 곤두섰다. 이제는 부유하는 공기에도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몇 번째 절정이지. 다섯 번째인가, 여섯 번째인가. 가물가물한 정신이 기초적인 셈도 힘들어했다. 우영의 말마따나, 세 번이면 정신 못 차리고 자는데 그 상한선을 훨씬 넘은 터라 체력이 모자랐다.
우영의 복근 위에 팔을 짚은 사현이 색색 숨을 고르는데, 그 찰나를 기다리지 못한 우영이 위로 허리를 치받았다. 그의 두툼하고 단단한 귀두가 전립선을 세차게 긁으며 배 속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왔다.
“흐잇⋯⋯!”
땀에 젖은 사현의 머리칼이 팔랑거리며 뒤로 넘어갔다. 잠깐 수그러들었던 성기가 대번에 하늘로 곧추섰다. 우영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사현의 골반을 꽉 거머쥔 채 퍽퍽 허리를 쳐올렸다.
“아, 흐, 아, 으응, 앗, 앙!”
질끈 눈을 감은 사현이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었다. 쾌감이 지나치다. 전신의 핏줄과 근육이 죄다 녹아내리는 것 같다. 허벅지는 부들부들 경련했고, 발가락은 한껏 움츠러들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절정에 다다른 지 얼마나 됐다고 성기 끝에서 탁한 액체가 퐁퐁 솟아올랐다. 헌데 뒷구멍은 좋다고 우영의 것을 오물오물 씹어 댔다.
우영이 으득, 어금니를 짓씹었다. 부족하다. 마음껏 사현의 뒤를 들쑤시고 있는데도 모자랐다. 결국 벌떡 상체를 일으킨 그가 그대로 사현을 밀어트렸다. 그리고 가느다란 허벅지를 쫙 찢은 후, 꾸우욱 성기를 쑤셔 박았다.
“흐윽⋯⋯.”
“하아, 형⋯⋯.”
우영이 목을 자라처럼 오그리고 고개를 숙인 사현의 입술을 꾸역꾸역 찾아 물었다.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살살 핥아 주자 뻐끔 입이 벌어졌다. 그 틈으로 혀를 한껏 욱여넣은 채 퍽퍽 그의 엉덩이를 뭉갰다.
덕분에 사현은 그만하라는, 혹은 천천히 해 달라는 말을 내뱉지 못했다. 신음조차 우영의 목구멍으로 죄 빨려 들어갔다.
우영의 움직임이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사현은 그가 얼른 절정에 다다르길 바랐다. 잔뜩 두들겨 맞은 배 속이 욱신욱신했다. 옴팡지게 긁힌 전립선은 찌릿찌릿하게 아렸고, 엉덩이와 사타구니는 쓰라렸다.
“아, 형, 형⋯⋯.”
“아응, 읏, 흐, 아! 하으, 우영⋯⋯아⋯⋯.”
사위가 마구 흔들렸다. 이러다 천장이 무너지는 건 아닌지, 땅이 꺼지는 건 아닌지 등신 같은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리고 마침내, 배 속에 뜨끈한 것이 터졌다. 안도한 사현이 그를 따라 줄줄 정액을 흘림과 동시에 팔다리를 축 늘어트렸다. 우영은 사정하면서도 느릿하게 성기를 넣었다가 뺐다. 그 움직임을 따라 난잡한 액체들이 구멍 틈을 삐직삐직 비집고 새어 나왔다.
한참 동안 후희를 즐기던 우영이 드디어 물러났다. 뒷구멍이 텅 빈 공허함에 사현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우영이 그런 사현의 입술을 한가득 삼키고 못살게 굴었다. 그로 모자라 귓불도 깨물고, 목덜미도 빨고, 턱끝도 핥았다.
사현이 매가리 없는 손으로 그런 우영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나⋯⋯.”
“네.”
“씻고 싶은⋯⋯데⋯⋯.”
“네.”
“그럴 체력이, 없어⋯⋯.”
말하는 것도 힘겹다. 사현의 눈꺼풀은 이미 파업을 선언하고 셔터를 반쯤 내린 상태였다. 우영이 피식 웃으며 그의 이마에 입술로 꾸욱 도장을 찍었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응⋯⋯. 고마워⋯⋯.”
흐릿하게 웃은 사현이 고개를 한쪽으로 늘어트렸다. 땀에 젖은 머리칼이 그 움직임을 따라 둔탁하게 흩어졌다. 그 모습이 뭐라고 그렇게 예쁘고 섹시했다.
우영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잘 자요.”
“응⋯⋯. 너도.”
“사랑해요.”
“응⋯⋯. 나도.”
졸린 와중에도 꼬박꼬박 흘러나오는 대답에 우영이 꽉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사현이 사랑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두 팔로 그를 한 아름 껴안았다. 사현이 익숙하게 그의 품에 볼을 비볐다.
비로소 두 사람다운 밤이었다.
* * *
이른 새벽부터 비가 왔다. 전면이 창인 집의 좋은 점이자 나쁜 점은, 빗소리가 지나치게 생생히 다가온다는 거다. 그 백색 소음을 이기지 못한 우영이 눈을 떴다.
처음에는 의미 없이 눈꺼풀을 움직이며 정신을 다잡았다. 여기가 어디지. 아아, 아직 뉴욕에 있구나. 몇 시지. 창밖이 온통 흐려서 시간 가늠이 어렵다. 뭐, 아침이면 어떻고 오후면 어떤가. 저도, 사현도 이렇다 할 일정이 없는데. 할 일이라곤 ‘함께 있기’가 전부인 여행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우영이 품 안에 있는 작은 몸을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그러자 사현이 잠결에 더 찰싹 달라붙어 왔다. 허벅지가 닿고, 팔이 엉켰다.
어제 정신없이 섹스하고, 허겁지겁 씻고 바로 자 버렸더니 둘 다 여즉 알몸뚱이다. 그 덕에 미끈하고 보드라운 피부와 따끈따끈한 체온이 여실히 느껴졌다.
“몇⋯⋯ 시야.”
사현이 낮게 잠긴 음성으로 물었다. 우영의 꿈틀거림에 덩달아 깬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눈을 뜬 건 아니었고, 금방이라도 다시 잠들 수 있을 정도로 미약하게 깬 상태였다.
“글쎄요.”
우영이 성의 없이 대꾸하며 이불을 추슬렀다. 비가 와서 그런가. 뉴욕에 와서 맞은 그 어느 아침보다 기온이 낮았다. 그래도 두꺼운 이불이 푸근해서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조금 더 세게 끌어안았다. 상대방의 숨소리가 귓가를 잔잔히 울렸다. 타닥타닥 창문에 부딪혀 미끄러지는 빗소리는 덤이다.
우영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는 사현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저는 아침에 일어나면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머리가 중구난방으로 뻗치는데. 사현은 곱게 자서 그런가, 밤새 몰래 드라이라도 한 것처럼 멀끔하다.
그 아래로 가느다랗게 뻗은 목덜미는 한 폭의 명화처럼 환상적이다. 이불 아래로 언뜻 보이는 어깨는 모 하나 없는 예쁜 동그라미다. 그 광경이 새삼 또 좋아서 콧잔등을 찡긋거리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추워?”
사현이 눈을 감은 채로 물었다.
“아니요.”
우영이 대답했다.
“근데 왜 몸을 떨어?”
“갑자기 형이 너무 좋아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너도 참⋯⋯ 유난이다⋯⋯.”
사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우영이 휘어지는 그의 입가에 쪽쪽 잘게 입을 맞췄다.
“아픈 곳은 없어요?”
“그냥, 뒤랑⋯⋯ 허리⋯⋯ 조금.”
“약 사 올까요? 연고랑 진통제 같은 거.”
“사 올 순 있고?”
“음⋯⋯ 아니요.”
둘 다 동시에 푸흐흐 웃음을 흘렸다.
그 후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대화가 오고 갔다. 아침 메뉴라든가, 오늘은 무엇을 하고 놀 거라든가, 어제 미처 다 먹지 못한 레스토랑의 햄버거가 아른거린다든가, 일주일 정도 남은 여행이 아쉽다든가, 다음 여행지는 어디로 갈 거라든가. 평화로운 대화였다.
그러다 예고 없이 정적이 도래했다. 우영과 사현은 그 정적을 편안히 즐겼다. 빗소리가 충분히 좋은 배경음이 되어 줬다.
사현이 창문에 맺혔다가 사라지는 빗방울을 멍하니 응시했다. 멍하다니, 그런 형용사와 친한 사이가 아니었는데. 우영과 있으면 자꾸 넋이 빠진다. 머리를 텅 비우고 있는 게 편할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바쁘고 정신없는 경영, 오감을 곤두세워야 하는 갤러리. 서울에 있으면 참 많은 것을 걱정하고 사는데, 이렇게 있으니 다 상관없어졌다.
한참 멍하니 있던 사현이 무심코 우영을 바라봤다. 너무 조용해서 다시 잠들었나, 싶었는데. 우영은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사르르 예쁘게 웃으며 손을 잡아 왔다.
손바닥이 붙고, 손가락이 엉켰다. 아주 익숙한 스킨십이었다. 사현이 맞물린 두 개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정확히는 얽힌 약지를. 민둥민둥한 약지를. 묘하게 허전해 보이는 약지를.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툭 튀어나오는 소리를 그대로 뱉어 버렸다.
“우영아.”
“네.”
“우리 결혼할까?”
“⋯⋯네?”
우영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그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방금 자신이 들은 소리를 믿을 수 없었다. 괜히 민망해진 사현이 슬쩍 눈을 내리깔았다.
“뭐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결혼 말고. 평생 잘 보지도 않던 친인척들 다 모아다가 돈 낭비, 시간 낭비하는 결혼식도 말고.”
“⋯⋯.”
“우리 둘이 반지 나눠 끼고 평생을 함께하겠노라.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옆에 있겠노라. 영원히 당신만 사랑하겠노라. 약속하는 그런 거. 유치하고 바보 같은 그런⋯⋯ 결혼 말이야.”
“⋯⋯.”
“그런 거 할까?”
우영을 따라 몸을 일으킨 사현이 그의 손등을 살살 문질렀다. 그렇게 치를 떨던 결혼을 자신의 입으로 나불거리고 있는 게 퍽 낯간지러운 듯했다.
“⋯⋯.”
우영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프러포즈도 아니고, 그렇다고 프러포즈가 아닌 것만도 아닌 걸 이다지도 뜬금없이 받았으니 놀랄 만도 했다.
수 초간 적막이 흘렀다. 사현의 입술이 마뜩잖게 뒤틀렸다. 냉큼 네! 라고 대답할 줄 알았는데. 아무런 말도 없는 우영에 덜컥 겁이 났다.
“싫어? 내가 비행기에서 너 깠다고 너도 나 까는 거야?”
사현이 부러 뾰족하게 말을 쐈다. 한 성깔 하는 고슴도치 같았다. 그런데도 우영은 쉬이 답을 내놓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드디어 우영의 목울대가 아래위로 크게 움직였다.
“왜요?”
“어?”
“며칠 전까지만 해도 싫어하셨잖아요. 근데 갑자기 왜요?”
제법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사현이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 채로 잠시 고민하던 그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짧게 대꾸했다.
“그냥⋯⋯.”
“그냥이라고요?”
“그냥,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좋아서.”
“⋯⋯.”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데, 너랑 있다는 이유만으로 좋은 게 신기해서. 아침에 평화롭게 눈뜨고, 시답잖은 이야기 나누고, 손잡고, 뽀뽀하고, 그런 게 좋아서.”
“⋯⋯.”
“지금 이 순간이 내일도 내일모레도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 싶어서.”
사현이 특유의 감미로운 어투로 말했다. 우영의 만면이 사랑으로 축축이 젖었다. 사현에게 이러한 고백을 받은 사람은 세상에 저 하나일 것이다. 아마 앞으로도 저뿐이겠지.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만족감과 성취감, 그리고 황홀함이 벅차올랐다. 우영이 사현의 곁에 조금 더 바짝 붙어 앉았다. 사현은 턱을 살짝 안으로 당겼으나 멀어지진 않았다.
“사실 나한테 따뜻한 색은 네가 그려 준 「당신의 밤」처럼 퍼머넌트 옐로우 같은 거였거든? 그만큼 밝아야 온기를 느낄 수 있었어. 근데 오늘 창문 밖으로 펼쳐진 회색 도시가 이상하게⋯⋯ 따뜻해 보이더라고.”
“⋯⋯.”
“먹구름 탓에 해도 없고, 건물은 안개가 죄 뒤덮고 있는 세상이 따뜻해 보이는 건 네가 내 옆에 있기 때문이겠지.”
사현은 자신이 우영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그 사랑으로 인해 제가 얼마나 큰 행복 속에서 사는지 조곤조곤 꼽아 갔다. 그 어투엔 옅은 수줍음이 배어 있었으나, 확신에 차 있었다.
“결혼, 그거 되게 귀찮고 쓸모없는 건데. 좋을 게 없는데. 내가 아는 결혼은 그런데.”
“⋯⋯.”
“너랑 하면 다를 것 같아.”
“⋯⋯.”
“때로는 어제처럼 싸우고, 화도 내겠지만 찰나일 거야. 그 계기로 우리는 지금보다 더 단단하고 깊어지겠지. 확신할 수 있어.”
우영은 넋을 잃고 그의 고백에 푹 빠져들었다. 사현이 뱉어 내는 음절들이 꽃송이처럼 피어났다. 흩날리는 꽃잎은 심장을 간질였다. 머리 위로는 고흐의 「꽃 피는 아몬드 나무」가 드리우고, 무릎 아래로는 모네의 「아르장퇴유, 모네의 정원」이 넘실거리는 세상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사현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우영과 눈을 맞췄다. 반들반들하게 빛나는 그의 눈동자에 온통 우영이 가득했다.
“내가 더 잘해 줄게.”
“형.”
“지금보다 더 사랑해 줄게.”
“⋯⋯.”
“나랑 결혼하자, 우영아.”
사현의 말끝에 마침표가 붙는 순간, 우영이 질끈 눈을 감았다가 떴다. 하마터면 꼴사납게 눈물을 줄줄 흘릴 뻔했다. 허나 간신히 참아 냈다. 더는 사현의 앞에서 어린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대답은?”
우영이 치받는 감동을 추스르는데, 그 찰나도 기다리지 못한 사현이 답을 채근했다.
“어⋯⋯ 잠시만요.”
어중간하게 답을 넘긴 우영이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그로 모자라 우당탕 온갖 소음을 다 내며 침실을 나가 버렸다. 순식간에 홀로 남은 사현의 눈 코 입이 멍청하게 풀어졌다.
뭐야. 나 차였어? 서우영이 지금 나 찬 거야? 결혼 결혼 그렇게 노래를 부르더니, 날 찼어?
뒤늦게 분노한 사현이 우영을 쫓아가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는데, 우영이 헐레벌떡 침실로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손바닥보다 작은 상자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가 그것을 불쑥 사현에게 내밀었다. 사현이 얼떨결에 상자를 받았다. 단단한 질감의 상자에는 익숙한 명품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며칠 전, 우영과 함께 갔던 매장의 것이었다.
“이거⋯⋯ 설마 반지니?”
사현이 놀란 눈으로 우영을 올려다봤다. 우영이 여러 번 고개를 주억이며 사현의 옆에 걸터앉았다.
사현이 얼른 케이스를 열었다. 그곳엔 미끈한 디자인의 반지 두 개가 들어 있었다. 큰 보석이 박힌 것도 아니고, 이렇다 할 장식도 없는 백금 반지였다. 그래서 사현의 취향이었다.
“나중에 형 자면 몰래 끼워 보려고, 그리고 혼자 좋아하려고, 그래서 산 건데⋯⋯.”
“언제 샀어?”
“며칠 전에 형이랑 쇼핑 갔을 때요. 형이 탈의실에 슈트 입어 보러 들어갔을 때, 매장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봤는데 예뻐서⋯⋯.”
“⋯⋯.”
사현은 아무런 말 없이 반지를 뚫어지라 응시했다. 똑같이 생긴 반지가 두 개일 뿐인데.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의 반응을 살피던 우영이 손가락을 마구 꼼지락거렸다. 혹 사현의 취향이 아닌가 싶어서. 사현은 시계, 선글라스, 안경, 넥타이핀 등 많은 액세서리를 효과적으로 착용했으나 반지는 끼지 않았다. 언젠가 지나가듯이 물었는데, 손가락에 무언가가 걸리적거리는 게 싫다고 했다. 그래서 커플링이라는 건 입에도 올려 본 적 없었다.
이 반지를 산 건,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사현에게 줄 생각도 없었다. 그저 혼자 간직하려고 했다.
“싼 거 아니에요. 되게 비싸게 주고 샀어요. 물론,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거로 맞춰도 돼요.”
우영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제 딴에는 큰돈을 지출한 거지만, 사현에겐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뭐 하나라도 더 어필하고 싶었다. 뭐랄까. 지금이 아니라면 죽을 때까지 그와 커플링을 할 기회가 없을 것 같달까.
사현이 두 개의 반지 중 작은 것을 빼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왼쪽 약지에 끼웠다. 딱 맞았다. 헐렁거리지도 않았고, 기분 나쁘게 조이지도 않았다. 하얗고 가느다란 그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피아노 치듯 움직였다.
“사이즈는 어떻게 알고 샀어?”
사현이 반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물었다.
“형 약지랑 제 새끼손가락이랑 비슷하거든요. 손잡은 게 몇 번인데. 물고 빤 적도 많고. 설마 그 정도도 모를까 봐요.”
우영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사현이 픽, 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자주 손을 잡고, 물고 빨았다 한들 손가락 둘레는 쉽게 알 수 있는 게 아닌데. 별 능력이 다 있는 우영이다.
“예쁘네.”
사현이 나지막이 감탄했다. 우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요?”
“응. 예뻐.”
사현이 반지에 혼이 팔린 틈에, 우영이 남은 반지를 얼른 제 손에 끼웠다. 저의 왼손 약지와 사현의 왼손 약지에 같은 반지가 걸렸다. 숱하게 상상했던 건데, 그 상상보다 훨씬 거대한 감동이 밀려왔다. 좋다. 좋아죽을 것 같다.
우영이 사현의 손을 꼬옥 잡아 쥐었다.
“자, 반지 나눠 꼈어요. 이제 해요.”
“뭘?”
“결혼요.”
단호한 우영의 말에 사현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지금?”
“네. 지금 당장.”
“⋯⋯어떻게?”
사현이 가늘게 눈을 좁혔다. 제가 먼저 결혼 이야기를 꺼내긴 했으나 세부적인 사항은 계획하지 않았다. 아무리 법적인 효력이 없고, 지인도 초대하지 않는 결혼식이라지만 그래도 구색은 맞춰야 하지 않나. 턱시도도 입고, 예쁜 공간도 빌려서 해야지. 이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하는 게 아니라.
그런 사현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영이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허리도 바르게 세우고, 널따란 어깨도 한껏 펼쳤다. 그러고는 맥락 없이 중후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랑 백사현 군은 신랑 서우영 군을 남편으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껴 주겠습니까?”
“⋯⋯.”
사현의 눈꺼풀이 깜빡, 깜빡, 깜-빡 하고 움직였다. 그러다 참지 못하고 푸흐흐 웃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세상에, 무슨 결혼식이 이따위란 말인가. 그가 이불에 얼굴을 처박고 끅끅거리며 웃자 우영의 귓바퀴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우영이 사현의 양쪽 팔뚝을 거머쥐고 그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아, 웃지 마요.”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알몸뚱이로 그 말을 그렇게 진지하게 해.”
방금 일어나서 머리카락은 둥그렇게 부풀어 있고, 가슴팍은 훤히 내놓은 채로 하는 결혼은 듣도 보도 못했다.
“이따 저녁에 레스토랑이라도 하나 빌려서,”
“안 돼요. 못 기다려요. 당장 해요. 당장 하고 싶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웃지 마요. 지금 제 인생에서 엄청 중요한 순간이니까.”
우영의 손에 꽈악 힘이 들어갔다. 눈을 한껏 부라리는 게, 진심인 모양이었다. 사현은 그래도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킥킥거렸다. 그러다 우영의 엄한 눈빛에 입술을 말아 물었다.
“알았어, 알았어. 안 웃을게.”
“그럼 다시 할게요. 웃지 마요. 웃으면 혼나요.”
“응.”
사현이 간결히 고개를 주억였다. 우영이 다시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사현의 양손을 잡은 채, 앞서 했던 말과 같은 말을 반복했다.
“신랑 백사현 군은 신랑 서우영 군을 남편으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껴 주겠습니까?”
“네. 물론이죠.”
사현이 싱그럽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우영이 헤벌쭉 푼수처럼 따라 웃었다.
“이제 형도 저한테 물어봐요.”
“꼭 그래야 해?”
“네.”
사현이 코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우영이 얼른 하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사현이 입술 끝에 꾹 힘을 줬다가 풀었다. 그래, 저렇게 바라는데 고작 말 몇 마디 못 해 주겠나, 싶었다.
“신랑 서우영 군은 신랑 백사현 군을 남편으로 맞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사랑하고, 검은 머리가 파 뿌리처럼 하얗게 질릴 때까지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네!”
우영이 침실이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우렁차게 대답했다. 꼭 군기가 바짝 든 곰 같았다. 사현이 또 킥킥거리며 웃으려다가 눈을 부릅뜨는 우영에 간신히 삼켜 냈다. 우영이 사현의 이마에 콩, 자신의 이마를 박았다.
“이것으로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두 사람은 마지막 문장을 나누어 말했다. 이로써 주례도, 축복하는 이도 없는 결혼식이 끝났다. 그러나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어쩌지⋯⋯. 너무 좋아요⋯⋯.”
우영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의 눈망울에 짙은 행복과 감동이 마구 넘실거리고 있었다.
“나도 좋아.”
사현이 그의 입술에 짧게 키스했다. 그러자 우영이 사현의 양 뺨을 감싸 쥔 채 깊숙이 입을 맞춰 왔다. 사현이 기다렸다는 듯 우영의 목 뒤로 팔을 둘렀다.
두 사람은 입술이 얼얼하게 아플 때가 되어서야 떨어졌다. 우영은 그로도 부족한지 사현의 조막만 한 얼굴 위로 온통 뽀뽀를 쏟아 부었다. 온 세상을 적시는 비보다 세찬 뽀뽀 세례였다.
사현이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그 숱한 사랑들을 받아 냈다.
형.
응.
우리 이제 가족이에요.
⋯⋯가족?
네. 가족이요.
⋯⋯좋네. 가족.
저도 좋아요.
비는 그 후로도 한참 동안 내렸다. 하늘은 어두웠고, 도시는 추웠다. 그러나 사현의 세상은 눈이 부실 정도로 쨍한 노란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