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당신의 밤
일주일 동안 기사가 끊임없이 쏟아졌다. 기자들은 점점 더 많은 정보를 캐냈고, 뉴스는 그것을 앞다투어 보도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정보로 허무맹랑한 소문을 창출하고, 비난을 씹어 댔다.
[특집. <갤러리 비>의 B. 그는 누구인가.]
[(데일리 포토) 갤러리로 출근하는 백사현 관장. 이마의 상처는 화 벤처 투자 전 사장인 김민재 씨의 일방적인 폭행으로 알려져⋯⋯.]
[화 그룹 가사 도우미 취재- 백 씨는 어렸을 때부터 서자라는 이유로 잦은 폭행을 당했다. 몸 여기저기에 멍과 상처를 달고 다니기 일쑤.]
[초미의 관심사. 김명현 회장의 불륜 상대이자 백사현 관장의 모(母)인 그녀는 누구?]
[백사현 관장의 어머니인 백모 씨.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로 알려져 충격.]
[화 그룹 주치의 취재- 질투에 눈이 먼 이원화 씨가 백 씨 모자에게 수차례 락스 먹여⋯⋯.]
[화 그룹 차기 후계자에 변동 조짐. 김명현 회장, 백사현 관장 앞으로 주식 대거 양도.]
[백사현 관장 단숨에 화 그룹 대주주로⋯⋯. 재산 수조로 추정.]
[백사현 관장. 화 벤처 투자 사장으로 위임.]
[화 그룹 김명현 회장, 이원화 씨와 이혼 합의됐다. 좋지 않은 일로 입방아에 오르게 된 화 그룹 직원들에게 죄송하다며 기자회견.]
[백사현 관장 이슈에 <갤러리 비> 덩달아 이슈의 중심으로. 현재 진행 중인 <네온>작가의 ‘현혹의 밤’ 전시에 관람객 몰려. 갤러리 측, 전시 연장하기로⋯⋯.]
[법원, 김명현 회장-이원화 씨에게 위자료 이백억 원 지급하라 판결. 이원화 씨 측, 이백억은 너무 적다. 일조 원 지급 요구했으나 기각.]
[김명현 회장, 아내를 사랑해 주지 못한 자신의 죄를 통감하며 법원의 판결 겸허히 받아들이겠다.]
[청주 여자 교도소에 수감 중인 이원화 씨, 심신 미약 주장하며 항소.]
[법원, 이원화 씨의 항소 기각.]
[김민재 전 사장, 교도소에서 폭력 행사하여 현재 독방에 수감 중.]
[백사현 사장. 다음 주부터 화 벤처 투자로 출근. 전문가들, 화 벤처 투자는 잠시 거쳐 가는 것일 뿐. 곧 본사로 발령 날 확률 높아.]
[(데일리 포토) 오늘 <갤러리 비>로 마지막 출근하는 백사현 관장.]
⋮
갤러리의 미팅 룸 앞에 선 사현이 자욱한 한숨을 내뱉었다.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수시로 한숨을 내쉰 터라 목이 다 건조했다. 머리가 띵할 정도로 차가운 물 한잔 마시면 좋으랴만. 그 물조차 소화하지 못하고 체할 것 같아 말았다.
사현은 괜히 핸드폰을 켰다가 죽이고, 넥타이를 매만지고, 이마를 쓸고, 목을 가다듬으며 시간을 끌었다.
“⋯⋯미팅 미룰까요?”
그런 사현의 옆을 지키고 있던 제인이 넌지시 물었다. 움찔 몸을 떤 사현이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며 문을 열었다.
열린 문틈으로 꿉꿉한 정적과 함께 수많은 시선이 쏟아졌다. 사현은 날카로운 가시에 살갗이 찔리는 듯한 통각을 느꼈다. 아마 민망함과 송구함, 죄책감이 뒤섞여 만들어낸 환촉이리라.
사현이 룸 한가운데에 있는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제인은 그의 뒤를 지키고 섰다.
사현은 아기새처럼 자신을 보고 있는 직원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 누구도 쉽게 입을 떼지 않았다. 다들 죄지은 것처럼 희멀건 테이블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모든 문제의 시발점은 사현이었는데, 왜 직원들이 정수리를 보이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다들 모여 줘서 고마워요.”
사현이 느지막이 입을 뗐다. 그 말에 직원들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모여 줘서 고맙다니. 사현이 저렇게 입에 발린 말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간단한 인사도 거추장스럽다며 생략하기 일쑤인 상사였으면서. 헌데 어째서인지, 그런 사현에 다들 기분이 울적해졌다.
사현은 간신히 말문을 터 놓고도 쉽게 뒷말을 이어 가지 못했다. 머릿속에는 시놉시스가 줄줄이 펼쳐져 있었는데, 목구멍이 꽉 막혀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정적이 쌓이고 또 쌓였다.
끝내, 참다못한 큐레이터 팀의 팀장인 성아가 입을 열었다.
“B, 정말 <갤러리 비> 관두세요?”
참으로 단도직입적인 질문이었다. 누구의 직원 아니랄까 봐. 빙빙 둘러가는 법이라곤 없었다. 사현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가 놨다.
“어⋯⋯ 다들 기사로 접해서 알고 있겠지만, 내가 화 그룹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땅땅, 결론을 짓는 사현의 말에 모두가 동시에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사현이 정말 <갤러리 비>를 떠나는 모양이었다. 그럼 이제 어쩐다. <갤러리 비>에서 B의 위치와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데. 그가 없으면, 갤러리 자체가 무의미했다.
하루아침에 실업자 신세가 된 직원들이 저마다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그들을 낱낱이 살펴보던 사현이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내가 화 그룹 서자인 건, 주기적으로 와서 행패를 부리던 사모님과 형으로 인해 가늠하고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근데 이렇게 가게 될 줄은 몰랐겠지요. 갑작스레 정해진 거라 미리 알리지 못한 점,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
“어⋯⋯ 당장 다음 주부터 그쪽으로 출근해야 해서, 관장 자리가 빌 겁니다. 하지만 그게 <갤러리 비>의 몰락을 뜻하는 건 아니에요. 이 갤러리는 계속해서 운영될 거고, 많은 작가의 작품을 소개할 겁니다. 여러분들 역시 계속 이곳에 있어 주면 좋겠어요.”
“B가 없잖아요. 몰락이 아니라고 하셨지만, 당장이 아닐 뿐이지 점점 나빠질 텐데요. 이 갤러리에 B가 있으므로 붙는 어드밴티지가 많다는 거 알고 계시잖아요. 최근 며칠 동안 앞으로 <갤러리 비>와 작업하지 않겠다는 작가들의 전화를 몇 통이나 받았는지 아세요?”
성아가 평소보다 빠르게 말을 쐈다. 눈이 형형하게 번쩍이는 게, 보통 화가 난 것이 아닌 듯했다. 사현이 그녀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예. 압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을 좀 해 봤는데⋯⋯, 이 해결 방안이 완벽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최악은 막는 방법이 아닌가 싶어 여러분의 의견을 구하고자 합니다.”
그 말에 직원들이 허리를 꼿꼿이 폈다. 최악을 막는 방법. 그게 부디 대단하고 효과적이길 바랐다.
사현이 잠시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빈 관장 자리에,”
“⋯⋯.”
“내가 다시 취임하고자 합니다.”
“⋯⋯네?”
성아를 비롯한 직원들이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다들 뻐끔 턱을 떨어트린 채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현이 특유의 무감한 음성으로 말을 덧붙였다.
“사실, 내가 계속 관장 자리에 앉아 있는 게 너무 뻔뻔한 일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근데 성아 씨 말마따나 날 보고 따라오는 작가, 애호가, 컬렉터가 너무 많아요. 그들이 한 번에 빠지면 갤러리 여기저기에 구멍이 날 겁니다. 당장 다음 분기 전시 오픈이 어려워질지도 모르지요.”
“⋯⋯.”
“그건 안 되는 일이니까, 나는 계속 이 <갤러리 비>의 관장 자리에 남아 있을 겁니다. 허나 언젠가 여러분이 말했던 것처럼, 자주 출근하지 않는 관장의 역할에 충실할 생각이에요.”
그의 말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한 직원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핏 눈살을 찌푸린 사현이 손을 까딱이며 설명했다.
“왜 있잖아. 취미로 갤러리 오픈한 재벌들이 한 달에 한 번 갤러리에 들러서 큐레이터들 괴롭히고, 직원들한테 히스테리 부리고, 그런 거. 그런 거 하려고.”
“⋯⋯네?”
“일종의⋯⋯ 바지 사장 같은 거지.”
사현이 장난스레 킥킥거렸다. 여전히 어벙한 얼굴을 한 직원들의 심신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했다. 혼자 웃던 사현이 문득 입꼬리를 아래로 늘어트렸다.
“그리고⋯⋯ 네온 작가가 내가 B로서 갤러리에 있어 주지 않으면, 앞으로 그림을 안 그리겠다고 하더라고⋯⋯.”
그가 의자 팔걸이에 비스듬히 턱을 괴고 어젯밤을 되뇌었다.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각, 우영의 품에 잠겨 잠들기 직전이었다. 갑자기 우영이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자못 침통한 낯으로 말했다.
‘있잖아요, 형. 제가 생각해 봤는데요. 저는 그림 앞에 있는 형이 좋아요. 그 모습을 동경하고, 그 모습에 반했어요. 근데 형이 그걸 관두면⋯⋯ 여전히 형이 멋져 보일까요? 모르겠어요.’
그 말에 심장이 어찌나 철렁하던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잠이 대번에 증발했다. 기겁한 사현이 그를 따라 일어나자 우영이 조금 더 심각해진 얼굴로 부정적인 미래를 줄줄이 내놓았다.
‘앞으로 붓질할 때마다 형이 <갤러리 비>의 B로서 있던 때가 떠오를 텐데. 그게 아쉽고 그리워서 그림을 못 그리면 어쩌죠?’
‘트라우마가 될 것 같아요. 트라우마 때문에 그림 관두는 작가가 그렇게 많다던데. 그게 제가 될 줄은 몰랐네요.’
‘이참에 저도 형 따라서 그림 관두고 경영을 배워 볼까요? 한 십 년 열심히 공부하면 화 그룹에 입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수능부터 다시 봐야겠어요.’
그 말에 사현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그러니 나에 대한 사랑을 꺼트리지 말라고. 붓을 놓지 말라고. 그런 건 생각조차 하지 말라고 구구절절 빌어야 했다.
언젠가 그가 제게 서투른 사랑을 고백했을 때, 계속 그렇게 마음을 보이면 네가 전처럼 예뻐 보이지 않을 거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것이 우영에게 어떤 상처를 남겼을지 제대로 통감한 밤이었다.
사현이 콧잔등을 찡긋거리며 과거를 되짚고 있는데, 직원들이 눈을 댕그랗게 떴다.
“네온 작가님이 그림을 안 그리신다고요?”
“절대 안 돼요. 저희 네온 작가님 세 번째 전시 구상 벌써 들어갔다고요.”
“그럼요. 거기다 네온 작가님이 한호 자동차랑 콜라보 하시겠다고 말씀까지 하셨던데. 그쪽에서 엄청 기대하고 있어요. 임시 계약서 보내 왔는데 계약금이 장난 아니에요. 진짜, 대박, 이라고요.”
“뉴욕 MoMA에서도 네온 작가님 작품 전시할 수 있겠냐고 연락 왔어요. 무려 개인전을 열어 주겠대요. 이거 한국인 최초라고요. 근데 네온 작가님이 그림을 안 그리면 어떡해요. 그럼 다른 갤러리가 그 기회 낚아채 갈 텐데. 저 배 아파서 죽을지도 몰라요.”
오늘 미팅이 시작되고 가장 활발한 순간이었다. 여기저기서 걱정과 난처가 튀어 올랐다. 다들 어찌나 전전긍긍인지 제자리에서 엉덩이를 들썩이고,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어 댔다.
사현이 단숨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린 미팅 룸을 허망하게 바라봤다.
“자기들⋯⋯ 나보다 네온 작가가 더 중요하구나?”
내가 관둘 것 같을 땐 그저 조용하더니. 사현이 입술을 삐죽였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성아가 샐쭉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아니, 뭐⋯⋯. B나 네온 작가님이나 우리 갤러리에 아주 많은 도움이 되는 건 똑같지요. 어떻게 우위를 나누겠어요.”
그녀가 사르르 눈을 휘며 아첨했다. 사현이 코웃음을 쳤다.
우영이 누나 누나, 하며 여기저기 들쑤신 보람이 있나 보다. 다들 우영을 아끼는 걸 보니. 그게 뭐라고 괜히 뿌듯했다. 말도 제대로 못 하던 애가, 이제 사회성도 제법이다. 기특하니 집에 가서 엉덩이 두드려 주겠노라, 다짐했다.
사현이 짝, 가볍게 손뼉을 쳤다.
“아무튼, 딱히 불만들이 없는 것 같으니 내가 계속 관장 자리에 있겠습니다.”
“네.”
“좋아요.”
“가장 좋은 방법 같네요.”
직원들이 고개를 주억이며 동의했다. 사현이 깍지 낀 손을 테이블 위에 올리고 상체를 조금 숙였다.
“대신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이 늘어날 겁니다. 아무래도 내가 전처럼 많은 일을 처리할 수 없을 테니까요. 물론, 그런 만큼 연봉 협상도 새로 할 겁니다.”
“⋯⋯.”
“아주 높은 금액을 불러도 좋아요. 기사 봐서 알지? 나 돈 되게 많아. 이제 재벌이거든.”
농인지 진심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말에 직원들이 모호한 미소를 띠었다. 그래도 어찌 됐든 연봉이 올라가는 건 진실인 듯하니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앞으로 화 그룹의 네임 밸류를 이용해 <갤러리 비>를 더 고급화하고자 합니다. 대대적으로 화 그룹이 후원한다고 마케팅할 거예요. 예산도 늘어날 거고, 여태 돈 쓰는 게 무서워서 못했던 기획들 다 하게 해 줄 겁니다.”
그 말에 다들 환호성을 내질렀다. 연봉을 올려 주겠다고 할 때도 나오지 않았던 환호였다. 사현이 그런 직원들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나는 여러분들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만 뽑았고, 모았으니까. 그래서 <갤러리 비>가 계속해서 지금처럼 정상에 서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아요.”
사현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하면 미팅을 끝내도 될 것 같았다.
“자, 그럼 이만 일 하러 가세요. 마케팅 팀은 내가 계속 관장 자리에 있을 거라고 보도하고, 큐레이터 팀은 다음 달까지 크레이티브한 기획안 잔뜩 빼서 올려요. 지원 팀은 네온 작가 작품 배송 일정 정리해서 메일로 쏘고.”
줄줄이 이어지는 사현의 지시에 직원들이 다이어리와 핸드폰 메모장을 꺼내 들었다. 그들의 눈동자에 생기가 요동치고 있었다.
“근 한 달 정도는 내가 바빠서 제대로 봐 주지 못할 겁니다. 나도 그쪽 일에 적응하고, 정리하려면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여러분 역시 내가 없는 공백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그 정도는 우리가 한 단계 발전하기 위한 머무름이라 생각합시다.”
“⋯⋯.”
“실수, 괜찮아요. 실패도 괜찮습니다.”
“⋯⋯.”
“이번만 봐주는 거야. 그러니까 뭐든 해서 한 달 뒤에 다시 봅시다.”
사현의 마지막 말에 각양각색의 긍정들이 튀어나왔다. 곧 직원들이 우르르 일어나 미팅 룸을 벗어났다.
텅 빈 미팅 룸에서 사현이 넥타이를 느슨히 풀며 숨을 돌리고 있는데, 제인이 다가왔다.
“수고하셨어요, B.”
“응. 제이는 어쩔래? 계속 갤러리에 있을 거야? 아니면 나랑 같이 화 그룹으로 갈래? 비서 팀장 시켜 줄게. 아니면 뭐 임원 자리라도 하나 줄 수 있어.”
“아니요. 저는 이곳이 좋아요.”
제인은 부드럽게 사현의 제안을 거절했다. 사현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인은 저만큼이나 갤러리와 예술에 애정이 가득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때, 제인의 재킷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그녀가 전시 관련 택배가 도착했다며 먼저 미팅 룸을 나섰다. 널따란 공간에 사현이 홀로 남았다.
“⋯⋯.”
잠깐 호흡을 가다듬던 사현이 미팅 룸을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검지로 테이블을 쓸며 이곳에서 보냈던 시간을 되뇌었다.
항상 덥게 느껴지던 공간이다. 각자의 창의를 쏟아내고, 토론하고, 감탄하고, 심미를 나누고, 예술을 경외하느라 다들 볼에 발갛게 열이 올라 있었다. 누구 하나 아름다운 것을 찬미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일이 즐거웠고, 성과는 드높았다.
모두가 <갤러리 비>는 B의, 즉 사현의 손에서 탄생했고 그의 안목을 발판 삼아 최고의 자리에 올랐노라 말하지만, 사현은 그것이 아님을 알았다.
제가 고르고 골라서 뽑은 큐레이터들의 능력이 뛰어나서. 제인의 서포트와 조언이 완벽했기 때문에. 직원들이 갤러리를 아껴 주었으므로. 모두 예술을 존경하고, 작품을 사랑했기에. 그래서 현재의 <갤러리 비>가 있을 수 있었다.
그러니 저 하나가 자리를 비운다고 해서, 이 갤러리가 무너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갤러리 비>는 여전히 <갤러리 비>였고, 사현은 앞으로도 이곳의 관장으로 남아 있을 테였다.
문 앞에 선 사현이 흐으읍,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아쉬운 손길로 문을 열었다.
그가 나가고 미팅 룸의 문이 탁, 닫혔다. 사위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그렇게 사현의 마지막 아닌 마지막 출근이 끝났다.
사현은 ‘현혹의 밤’ 전시장에 들렀다. 미팅이 끝나자마자 바로 집으로 가려다가, 괜히 아쉬운 마음이 들어 발걸음을 돌린 거였다.
마감 시간이 다 된 전시장은 한가했다. 움직이는 거라곤 귓바퀴를 부드럽게 간질이는 클래식 음악뿐이었다.
사현은 가지런히 걸린 그림들을 하나하나 공들여 감상했다. 어떻게 하면 우영의 그림이 조금이라도 더 돋보일 수 있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면서 수십, 수백 번씩 들락날락한 전시장인데. 묘하게 낯설었다.
진짜 마지막도 아니거늘, 왜 이렇게 우울한지 모르겠다. 오랜만에 우영과 포장마차라도 갈까, 그런 생각을 하던 차였다. 그의 발걸음이 뚝 멈춰 섰다. 「흐르는 새벽」 앞에서였다.
푸른빛이 넘실거리는 그림을 바라보던 사현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제 몸뚱이보다 커다란 작품을 온전히 감상하기 위해선 조금 거리를 두어야 했다.
그림을 찬찬히 훑어보던 사현의 눈동자가 그림 속 피사체의 어깨에 박혔다. 동그랗고 미끈한 어깨가 몹시 탐스럽게 표현되어 있었다.
사현이 자신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제 어깨가 저렇게 생겼던가. 주의 깊게 들여다보질 않아서 생김새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집에 가면 거울을 유심히 봐야겠다.
사현은 자신의 육체이나, 자신의 육체 같지 않은 것을 오랫동안 보고 있었다. 우영의 눈에 보이는 제 모습이 이러한가 싶어서 신기했다. 특히, 달빛에 물들어 푸른색인 귓불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어떻게 해야 귓불이 조랭이떡처럼 보이나 싶어서. 사현이 고개를 좌우로 까딱였다. 나중에는 허리까지 굽히고 그림을 요리조리 살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자신의 복사뼈에서 우영이 말한 복숭아가 보일 듯 말 듯할 무렵이었다. 누군가가 사현의 허리를 부드럽게 안아 왔다. 예고 없는 스킨십에 놀란 사현이 흠칫 어깨를 떨며 뒤를 돌았다.
“형.”
멀끔하게 슈트를 차려입은 우영이었다. 사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영이? 너 왜 여기 있어?”
그와는 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아까 미팅 룸을 벗어나며 곧 집으로 가겠노라 메시지도 넣었었다. 우영 역시 알겠노라고 대꾸했었고. 근데 왜 여기⋯⋯.
“무슨 일 있어? 설마 누가 집으로 찾아 왔든? 아니면 어디 아파?”
지레 겁을 집어먹은 사현이 우영의 팔뚝을 쓰다듬으며 그의 몸 여기저기를 살폈다. 올 사람이 없는데. 모두 치워 버렸는데. 그래도 세상이 워낙 흉흉한지라, 공기도 더럽고 날씨도 제멋대로인지라, 바람 불면 날아갈까, 손대면 부서질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188의 장대한 우영이 들으면 민망함에 몸서리칠 걱정이었으나, 사현은 실로 그런 게 걱정이 됐다.
“아니요. 그냥 형 보고 싶어서 마중 왔어요.”
우영이 사현의 볼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 말에 사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전화하지. 그럼 얼른 갔을 텐데.”
슬쩍 주위를 두리번거린 사현이 조심히 우영의 손목을 감싸 쥐었다. 전이라면 꿈도 못 꿀 스킨십인데. 관람객이 없기 때문인지, 아니면 갤러리에서 한 발 멀어졌기 때문인지, 무섭지 않았다. 우영과 닿아 있다는 게 그저 좋기만 했다.
그런 사현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우영이 손목을 비틀어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그러고는 다시 손을 마주 잡았다. 손바닥이 한 치의 틈 없이 딱 달라붙고, 손가락이 얼기설기 얽혔다.
“⋯⋯.”
몇 번 눈을 끔뻑이던 사현이 배시시 눈을 휘며 웃었다. 그게 어찌나 아름다운지. 우영은 하마터면 그대로 입술을 들이박을 뻔했다.
허나 참아 냈다. 아무리 인기척이 없기로서니 사현은 사회적인 위치가 대단했고, 이 갤러리 안에서는 더욱 대단한 사람이었으니까. 사실 이렇게 손 잡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다. 뭐, 그렇다고 손을 뗄 생각일랑 없었다.
“왜 여기 있어요?”
우영이 사현을 따라 「흐르는 새벽」을 쳐다보며 물었다. 사실 우영은 수십 분 전부터 사현의 뒤를 밟고 있었다. 오자마자 아는 척을 하려 했는데, 제 그림을 보는 사현이 신기해서 눈을 떼지 못했다.
되뇌어 보니 그가 제 그림을 감상하는 모습을 몇 번 본 적이 없었다. 대개 갤러리의 관장이자 아트 디렉터로서 그림을 대하는 것만 봤다. 이토록 오롯이 제 그림을 ‘감상’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우영은 자신의 그림을 감상하는 사현을 감상했다.
무표정 같은데, 눈썹과 눈꼬리가 희미하게 느슨해진 얼굴이 참⋯⋯ 어여뻤다. 살짝 벌어졌다가, 다물렸다가, 다시 벌어지는 입술도.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가, 두 걸음 뒤로 물러서는 그 행동도. 가끔 자신의 귓불을 쓰다듬거나, 이마에 붙은 밴드를 만지작거리는 손가락도. 숨을 내쉴 때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어깨와 가슴까지. 하나하나 사무치게 좋았다.
그가 보고 있는 게 제 그림이라는 게 가장 좋았다. 아니 사실, 저를 사랑해서, 저가 무엇을 그려도 객관적인 판단을 하지 못할 거라던 그가 가장 좋았다.
그러다 사현이 「흐르는 새벽」 앞에 멈춰 섰다. 그는 새치름히 눈살을 구기고 그림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좌우로 까딱이다가, 종국에는 허리까지 휘며 요리조리 그림을 살폈다. 그게 너무 귀여워서 참지 못하고 알은체를 한 거였다.
“음⋯⋯. 앞으로 한 달 동안은 갤러리 못 나올 테니까. 나 갤러리 오픈하고 한 달이나 출근 안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거든. 그때, 네가 나한테 강제로 휴가 줬을 때. 그때가 가장 오래 쉰 거였어.”
“⋯⋯.”
“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올 수 있는데, 그래도. 그래도 기분이 좀⋯⋯ 그러네. 그래서 둘러보고 있었어. 너 안 왔으면 전시장 다 돌고 화장실까지 둘러봤을지도 몰라.”
사현이 소리 죽여 웃었다. 우영이 그를 따라 웃었다. 자못 서글픈 웃음이었다. 사현이 갤러리를 떠나는 게 아쉬웠다. 물론, 제 같잖은 고집으로 그가 완전히 떠나는 것은 막았지만, 여전히 싫었다. 사현이 오롯이 <갤러리 비>의 B가 아닌 것 같아서.
“저녁 안 먹었지? 오늘 포장마차 갈까? 아니면 자기 예쁘게 입은 김에 엄청 비싼 거 먹으러 갈까? 스테이크? 너 고기 잘 먹잖아.”
사현이 특유의 감미로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종알종알 움직이는 입술이 발랄했다. 우영과 단둘이서 함께하는 시간은 항상 즐거우니까. 소주잔을 부딪치든, 와인 잔을 마주 대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그저 눈만 맞추고 있든, 다 좋았다.
우영이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었다.
“저 갈 곳 있어요. 그래서 예쁘게 입은 거예요.”
“그래? 어디? 또 너만의 맛집이 있어?”
사현의 맑은 눈동자가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김밥천국도 그렇고, 주홍색 포장마차도 그렇고, 우영을 따라간 곳 중 맛있지 않은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또 무슨 대단한 음식을 소개해 주려고 예쁘게 입기까지 했나, 기대가 됐다. 순식간에 배가 고파졌다.
사현이 미지의 음식을 가늠하며 찹찹 입맛을 다시고 있는데, 우영이 재차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먹는 거 아니에요.”
“그럼?”
사현이 눈에 띄게 실망한 낯으로 되물었다. 우영이 그런 사현을 달래듯 마주 쥔 손을 조물거렸다.
“따라오면 알아요.”
그가 부드럽게 사현을 끌어당겼다.
“너, 어디 가?”
잠자코 우영을 따라가던 사현이 우뚝 걸음을 멈춰 섰다. 우영이 향하는 방향이 조금 이상했기 때문이다. 우영은 갤러리 깊숙한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곳엔 주차장도 없었고, 출입구도 없었다.
“아이, 그냥 따라와요. 제가 형을 이상한 곳에 데리고 가겠어요?”
우영이 다시금 사현의 손을 잡아당겼다. 사현이 콧잔등을 찡그렸다. 물론 우영이 ‘이상한 곳’에 자신을 데리고 간다 한들, 응당 따라갈 것이다. 허나 목적지를 숨기는 게 께름칙했다. 항상 지나칠 정도로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던 그였기에.
“⋯⋯.”
하지만 사현은 묻지 않았다. 그가 숨기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그럼 숨겨 주면 되는 것이다.
우영의 발은 성큼성큼 거침없이 움직였다. 꼭 수십 번도 넘게 이 길을 들락날락했던 사람 같았다.
물론, 우영이 갤러리에 자주 들르긴 했다. 그러나 한정된 공간만 방문했다. 이를테면 관장실이나, 주차장 같은 곳 말이다. 때때로 전시장이나, 수장고, 큐레이터 팀이 머무르는 사무실, 인포메이션 데스크에 들르긴 했지만 잠깐이었다.
그렇게 오 분을 꼬박 걸었을 때. 사현은 우영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대충 눈치챌 수 있었다.
“너 8 전시실 가니?”
제8 전시실은 <갤러리 비>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있고, 가장 작은 전시실이다. 작은 전시장도 나름의 맛이 있을 듯해 만들어 둔 곳인데. 아무래도 위치나 규모가 <갤러리 비>의 명성에 맞지 않는지라, 작가들 역시 반기질 않아서 비어 있기 일쑤였다.
그래서 지금은 창고 대신으로 쓴다. 여분의 조명, 벽에 상처가 생겼을 때 바르는 페인트, 인테리어 공사 때 쓰는 비닐, 청소 도구 등이 굴러다닌다. 사실 사현도 들어가지 않은 지 한참 되어서 정확히 어땠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네.”
우영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사현의 입술 끝에 꾸욱 힘이 들어갔다. 거길 왜 가는데. 설마 집 두고 거기서 섹스 하자는 것도 아닐 거고. 혹 직원들과 송별 파티라도 준비한 걸까.
아⋯⋯. 그런 거⋯⋯ 정말⋯⋯ 딱⋯⋯ 질색인데⋯⋯. 그래도 웃어 줘야겠지. 놀란 척도 해야겠지. 언제 이런 걸 다 준비했냐고, 입에 발린 말도 해야겠지.
저는 다 필요 없는데. 그저 우영과 둘이서 단란한 저녁을 보내고 싶은데.
“⋯⋯왜? 거길 왜 가는데?”
“따라와 보면 알아요.”
우영이 자신 있게 말했다. 사현이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가볍게 팔랑이는 머리칼이 이제야 보였다. 만면 가득 웃음을 띠고 있어서 동그랗게 올라온 광대도, 평소보다 보폭이 큰 것도.
과거였다면 무슨 꿍꿍이가 있다는 걸 금세 눈치챘을 텐데. 저도 참 사랑에 눈이 먼 모양이다. 저리 티를 내는데 몰랐다니.
사현이 우영 몰래 볼 안쪽을 잘근잘근 씹었다. 나름대로 표정을 푸는 것이다. 놀란 척, 기쁜 척을 해야 하니까. 마음 같아선 ‘나 다 필요 없어. 그냥 마음만 받는다고 제이한테 전하라고 할게. 우리 그냥 포장마차 가서 잔치국수에 소주나 마시자.’라며 징징거리고 싶었다.
사현이 감정적이고 감성적일 수 있는 건 그림과 우영, 딱 두 가지 요소뿐이다. 다른 건 죽든 말든, 불에 타든 증발을 하든, 하등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끝끝내, 사현은 전시장 앞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제8 전시장]
딱딱한 돋움체로 쓰인 활자가 사현을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사현이 소리 없이 숨을 고르고 있는데, 우영이 슬쩍 손을 놓았다. 사현의 눈이 대번에 구겨졌다. 사람들 앞이라고 손을 놓는 건가. 이해는 한다만 그가 저를 먼저 놓은 건 처음이라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이거 봐요.”
그때, 우영이 뜬금없이 벽을 가리켰다. 보통 작가 약력이나, 전시 콘셉트를 소개하는 글을 써 두는 곳이었다. 사현이 그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곳엔,
서우영 특별 展
-
‘당신의 밤’
이라는 활자가 적혀 있었다.
사현이 몇 안 되는 단어를 뚫어지라 바라봤다. 서우영 특별 전시라니. 그런 건 듣도 보도 못했다. <갤러리 비>에서 일어나는 일 중 사현이 모르는 게 있을 리 없었다. 그러면 안 됐고. 더군다나 우영의 전시를 모른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눈을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헌데 이건 분명 우영의 전시가 맞았다. 하얀 벽에 검은 글씨, 익숙한 폰트, 완벽한 자간, 명확한 단어. 사현의 전시 버릇이 그대로 드러나는 스타일이었다.
혹 제가 준비해 놓고 기억을 잃었나. 민재 앞에서 명패로 이마를 찍었을 때, 수개월의 기억이 휘발해 버렸나. 근데 왜 우영의 이름을 써 놨지? 머리가 이상할 때라 네온과 우영을 헷갈렸나. 하지만 큐레이터들은 뭐 하느라 말리지도 않았단 말인가?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할 때였다.
“제 세 번째 전시예요. 아니다, 서우영으로는 처음이니까 제 첫 전시예요.”
우영이 눈치 없이 신나서 말했다.
“⋯⋯네 전시가 맞다고? 어떻게 내가 모르는 네 전시가 있을 수 있어?”
사현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떨떠름한 낯으로 우영을 쳐다봤다. 그러자 우영이 씨익 가로로 입술을 길게 째며 웃었다.
“제가 형 모르게 준비했으니까요.”
“⋯⋯.”
우영 딴에는 깜짝 이벤트라고 준비한 듯했다. 허나 사현은 웃거나 놀랄 기분이 아니었다. 제가 모르는 우영이 일이라니. 머리가 통째로 음식물 쓰레기통에 처박힌 듯 기분이 더러웠다.
“내가 그걸 왜 몰랐어야 했는데?”
“어, 음⋯⋯ 놀라게⋯⋯ 해 드리고 싶어서요.”
뒤늦게 사현의 기분을 알아차린 우영이 우물우물 말을 녹여 먹었다. 턱이 안으로 말리고, 넙데데한 어깨가 아래로 내려앉았다. 비 맞은 레트리버 같은 모습에 사현의 눈이 가늘어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무슨 생각으로 여기다 네 이름을 써 놨니?”
“이건 형만을 위한 전시거든요. 아무도 몰라요.”
“아무도 모른다고?”
“아, 제인 실장님이랑 큐레이터 누나들 몇몇은 알아요. 도와 주셨거든요. 저 혼자 할 수가 없어서⋯⋯.”
우영이 샐쭉, 민망하다는 듯 웃었다. 덕분에 큐레이터에게 저와 사현의 관계를 밝혀야 했지만. 근데 그녀들은 놀라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미 알고 있는데 그걸 구태여 말하는 이유가 뭐냐는 표정이었다.
사현이 우영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러니까, 일종의 이벤트라는 거지. 나만을 위한. 남들이 반지를 주고, 좋은 곳에서 식사를 하고, 노래를 불러 주듯, 우영이 저를 위해 전시를 열어 준 것이다.
그러고 보니 원화를 피해 호텔에 머무르던 때, 헬스장은 근처에도 가지 않아 놓고 운동 다녀왔다며 거짓말을 했었지. 아마 갤러리에 들렀던 모양이다. 그 후로도 제가 명현에게 불려갔다가, 기자를 만났다가, 증인으로 재판에 나가느라 바빴으니 우영이 나도는 걸 몰랐을 만도 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사현이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그래, 서프라이즈 좋지. 그래서, 들어가면 돼?”
“네.”
“기대해? 아니면 하지 마?”
“어⋯⋯. 조금, 조금만 기대해요.”
“알았어.”
사현이 우영의 턱 끝에 쪽 입술을 붙였다가 뗐다. 그리고 사위가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전시실로 발을 들였다.
사현을 반긴 풍경은 그가 기억하고 있는 제8 전시실과는 사뭇 달랐다. 꿉꿉한 먼지 냄새나, 관리되지 못한 대리석의 돌 냄새가 아니라, 청량한 냄새가 났다. 쓸고 닦고, 환기를 시켜서 깨끗한 공기가 실내를 가득 채운 듯한 냄새였다.
그 향이 전신을 덮침과 동시에, 아주 많은 그림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하얀 벽에 걸려서 쨍한 조명을 내리쬐는 그림들이 오로지 사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현이 헛숨을 삼켰다. 갈비뼈가 둥글게 부풀 정도로 큰 숨이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제8 전시실은 작다. 하지만 그게 서울에 즐비한, 보증금 천에 월세 오십짜리 원룸만 하다는 건 아니다. 광활할 정도로 넓은 타 전시실에 비해 작다는 거지, 제법 크기가 됐다. 그런데 그 공간을 우영의 그림이 남김없이 채우고 있었다.
“이렇게,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는데.”
사현이 말을 절었다. 사실 저를 위한 전시라기에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그의 그림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전시’라 명명될 만큼의 개수를 기대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저를 형상화하는 몇 점이 덩그러니 걸려 있을 줄 알았거늘.
이건⋯⋯ 말 그대로 전시였다. 그것도 꽤 멋진.
“나름 골라서 온 거예요. 형한테 보여 주기 민망한 건 뺐어요.”
놀란 사현의 모습에 우영이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제인이 그랬다. 사현이 놀라기만 해도 아주 성공한 거라고. 세계를 돌아다니며 온갖 전시를 다 본 사현은 웬만해서는 만족하는 법이 없다고 했다. 루브르나 메트로폴리탄에 가서도 자질구레한 쓰레기들을 왜 이리 공들여 쟁여 둔 거냐고 툴툴거렸단다.
그런데 지금, 사현이 놀랐다. 우영은 최근 이 이벤트를 준비하느라 고생했던, 혹 사현이 눈치챌까 전전긍긍했던 그 시간을 모두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
잠시 굳었던 사현의 눈동자가 이내 반짝이기 시작했다. 우영의 그림이 이리도 많다니! 꼭 보물섬이라도 발견한 기분이었다. 그가 경건한 마음으로 첫 그림 앞에 섰다.
“제목은 다 못 붙였어요. 뭔가, 음, 「P3001」이나, 「흐르는 새벽」처럼 멋지게 짓고 싶은데 시간이 없어서요. 차차 지을게요.”
사현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예술계에서 제목은 그다지 중요치 않았다. 마르셀 뒤샹의 「샘」처럼 제목이 아주 중요한 의미를 띠면 모를까. 그저 「무제」라 불리는 대가의 작품이 셀 수도 없었다.
지금 사현에게 중요한 건, 그림마다 함뿍 담겨 있는 우영의 사랑이었다.
근데 어째 첫 그림이 조금⋯⋯ 이상했다.
“뱀? 웬 뱀이야?”
하얀 천 위에 더 하얀 뱀이 뾰족한 눈으로 사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은빛 비늘과 검붉은 눈빛이 보는 것만으로도 등줄기를 서늘하게 했다. 그런데도 아름다웠다. 둘둘 말아서 똬리를 틀고 있는 미끈한 몸뚱어리와 형광기가 살짝 섞인 눈동자가 매력적이었다.
사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 제가 우영과 뱀을 맞닥트린 적이 있나 싶어서. 헌데 제 기억 속엔 없었다.
“형 첫인상이에요.”
“내 첫인상? 내가 뱀 같았어?”
“네. 하얗고 날카롭게 생겨서는 못된 말로 제 목을 막 콱콱 물어뜯었잖아요.”
우영이 아주 먼 옛날, 포장마차에서 홀로 우동과 소주를 먹던 때를 떠올렸다. 늘 그렇듯, 그게 하루의 첫 끼이자 마지막 끼니였지. 구석진 곳에 앉아 한창 식사하고 있는데, 낯선 이가 맞은편에 앉았었다. 태어나서 본 사람 중에 가장 잘생긴 사람이었다.
첫 마디가 뭐였더라. 아, ‘안녕.’이었다. 다음 말은 ‘생각해 봤니?’였고. 전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제가 어버버하고 있으니 연락 달라며 명함을 던져 주곤 가 버렸지.
다음 날, <갤러리 비>에서 만난 사현은 훨씬 날카롭고 매서웠다. 고저 없는 음성으로 우영의 비루한 삶을 낱낱이 까발려 댔다. 정말, 예쁜데 못된 백사였다.
사현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흐응, 백사 같았어? 나쁘지 않네. 그러고 보니 우리 큐레이터 팀한테 독사 같다는 말을 종종 들었던 것 같아.”
그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큰 감흥 없이 다음 그림으로 넘어갔다. 이어지는 몇 점은 사현과의 추억이 담긴 장소와 관련된 스케치들이었다. 수십 개의 패들이 솟구치던 경매장, 스테이크가 맛있던 레스토랑, 유난히 추웠던 자정의 시청 앞 같은 곳 말이다.
그 후부터는 언뜻언뜻 사현이 등장했다. 대부분 찰나의 장면을 담아 낸 스케치나, 색연필 화였다. 스케치북에서 막 뜯어 낸 듯했다.
붉은 액체가 넘실거리는 와인 잔을 든 사현의 손과, 소파에 쪼그려 앉아 아트 매거진으로 추정되는 것을 읽고 있는 사현의 옆모습도 있었다.
그밖에도 지그시 감고 있는 눈만 그린 스케치라든가, 귓바퀴와 입술도 있었다. 와이셔츠 소매, 헐겁게 묶인 넥타이, 대충 풀어 테이블에 올려 둔 시계와 안경까지.
침실 전등 밑에 뒤돌아 앉아 있는 ‘우리 고구마’ 앞에선 푸흐흐 방정맞게 웃음을 흘려야 했다. 우영 특유의 색감을 고스란히 반사하고 있는 고구마가 쓸데없이 편안하고 안온한 분위기를 내뿜었다.
사현은 이 전시를 관람하는 게 몹시 즐거웠다. 우영이 저의 부분부분을 모두 사랑하고 있구나. 그것을 온몸이 저릿할 정도로 느낄 수 있었다.
“많이도 그렸다. 언제 이 많은 걸 다 그렸어. 그래 놓고도 용케 ‘현혹의 밤’ 전시를 다 채웠네.”
사현이 우영의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우영이 그의 등을 껴안으며 미소 지었다.
“여기 있는 그림들은 그린 게 아니에요. 뭔가, 다른 느낌인데⋯⋯.”
우영이 입술 끝에 꾹 힘을 준 채 말을 골랐다. 허나 이렇다 할 표현을 찾지 못했다. 차라리 그림으로 표현하라면 하겠는데 말로 하려니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때, 우영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덩달아 멈춰 선 사현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옛날에, 제가 스민다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첫 고백이었을 것이다. 우영이 그림 그리는 모습을 구경하다, 그가 자신에게 스밀 대로 스민 것을 깨닫고 고백했었다.
갑작스러운 고백에 놀란 우영이 멍하게 눈을 끔뻑였었지. 그러다 들고 있던 붓을 떨어트리고, 물감이 사방에 튀든 말든 달려와서는 저를 한가득 껴안았었다. 고맙다고 울먹이는 게 참⋯⋯ 귀여웠는데.
사현이 당시를 떠올리며 흐뭇하게 미소 짓는데, 우영이 짐짓 낮은 음성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저는 형이 넘쳐요.”
“⋯⋯.”
“그래서 범람하는 형을 어디든 묻히고, 칠해야 숨통이 트여요.”
듣도 보도 못한 고백이었다. 사랑한다, 좋아한다, 없으면 못 살겠다, 그런 흔한 말로는 감히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절절한 고백이었다.
사현이 여태 본 그림들을 찬찬히 되뇌었다. 그래, 제가 알던 우영의 그림과 묘하게 다르다 했더니. 하나같이 다급하게, 캔버스든 종이든, 연필이든 물감이든, 손 닿는 대로 그린 것들이었다. 살해당해 죽기 직전인 피해자가 남긴 다잉 메시지처럼 절박하게 그려 놓았다.
“안 그리면⋯⋯ 어⋯⋯ 넘치는 형을 잃어버리는 기분이에요. 아쉽고, 아깝고 그래요.”
“⋯⋯.”
“시간이랑 체력만 되면, 일주일 아니, 한 달 내내 형만 그리고 싶어요.”
우영이 상상만 해도 황홀하다는 듯 웃었다. 종일 사현을 그리는 삶이라니. 그럴 수만 있다면 제 그림을 보고, 감탄하고, 돈을 지불하는 관람객들이 없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
사현이 아무런 말 없이 우영을 껴안았다. 그의 사랑은 마주할 때마다 놀라웠다. 우영이 그런 사현의 머리칼에 꾹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두 사람은 아무런 말 없이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전시를 마저 관람했다. 사현은 최대한 열심히, 열과 성을 다해서 작품을 감상하고 그것을 우영에게 전달하려 노력했다. 우영은 그럴 때마다 수줍게 웃기도 하고, 종알거리는 사현의 아랫입술을 빨았다가 놓기도 했다.
그러던 사현이 한 그림 앞에 멈춰 섰다. 캔버스 속의 야경이 눈에 익었기 때문이다. 제 집 창문 밖으로 보이는 서울 풍경이었다. 우영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P3001」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사현이 물끄러미 그림을 응시했다. 언뜻 봐도 제 손이나 발 또는 인영이 보이던 타 그림들과 달리 이 그림에서는 제 모습을 단번에 찾을 수가 없었다.
한참 그림을 들여다보던 사현이 아,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타오르는 불야성 위에 자신이 있었다.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저가 창에 어렴풋이 비쳤다.
즉, 우영은 사현을 반사한 창이 비추는 야경을 그린 것이다. 붓 터치가 뭉그러져 쉽게 알아볼 수 없었으나 분명 그가 맞았다. 사현의 한쪽 눈썹이 비죽 위로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혹시 ‘새로운 밤’ 전시나 ‘현혹의 밤’ 전시에도 내가 있는 그림이 있었어? 「흐르는 새벽」처럼 대놓고 나 그린 거 말고 이거처럼 은근히 그린 거.”
설마 제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는 없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만약 그렇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림을 다시 찾아오고 싶었다.
예고 없던 질문에 우영의 목울대가 아래위로 꿀렁거렸다. 잠깐 탁음을 내며 머뭇거리던 그가 숨겨 두었던 사실을 털어놨다.
“사실 제 그림에는 예전부터 형이 있었어요. 첫 전시 할 때부터요.”
“무슨 소리야? 어디에? 어디에 있었는데? 왜 몰랐지? 내가 어떻게 모를 수 있지?”
사현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홉떴다. 자존심이 단단히 상한 듯했다. 우영이 얼른 그림 끄트머리를 가리켰다.
“이거요.”
그가 가리킨 것은 ‘N’이었다. 우영의, 아니, 네온의 사인인 N. 사현이 그림 앞으로 쑤욱 얼굴을 들이밀었다. 엄지손톱만 한 N의 어느 부분에 자신이 숨어 있는지 궁금해서.
“이게 뭔데?”
“저 이거 형 날개뼈 보고 그린 거예요.”
“⋯⋯뭐?”
“하얀색 와이셔츠 너머로 보이는 날개뼈요.”
“⋯⋯.”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사현의 고개가 비스듬히 옆으로 기울었다. 와이셔츠. 날개뼈. 그리고 N. 단어들이 섞이지 못하고 따로 놀았다. 일그러진 그의 낯에 우영이 말을 덧붙였다.
“처음 수장고 들어가서 S를 N으로 바꾸던 날. 어떻게 그려야 하나, 고민하는데 다섯 걸음쯤 떨어져 있던 형이 보이더라고요.”
“⋯⋯.”
“그때 형 셔츠 너머로 날개뼈가 올라갔다가 내려갔어요.”
“⋯⋯그래서?”
“뭐긴요. 형 날개뼈가 너무 예뻐서 그거 따다 그렸다는 거죠.”
“⋯⋯.”
명확한 우영의 설명에도 어딘가 께름칙한 사현의 얼굴은 풀리질 않았다. 우영이 사현의 곁에 조금 더 붙어 섰다. 그러고는 커다란 손바닥으로 사현의 등을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형 와이셔츠 입고 있을 때, 얼마나 섹시한지 알아요? 여기 날개뼈랑, 쭉 미끄러지는 허리랑, 가끔 가슴선도 보이고, 여기, 이렇게 도드라진 팔꿈치도 진짜 예뻐요.”
그는 문장을 끊을 때마다 그 부분을 은근히 매만졌다. 야릇한 손길이긴 했으나 그래 봐야 옅은 스킨십일 뿐인데. 꼭 애무받는 기분이었다.
“⋯⋯.”
사현의 호흡이 뚝 끊겼다. 가끔, 우영의 목소리가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낮아질 때가 있다. 그 음성이 잔잔한 파동이 되어 피부에 스미고, 곧 심장을 움켜쥐었다.
사현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미약한 쾌감이 전신을 스치고 지나갔다. 누가 누구한테 섹시하다고 하는 건지. 우영은 제가 아직 그를 어린 애송이로 보고 있는 줄 아는 모양이다. 잘 여물은 수컷의 기운을 이렇게나 풍겨 내면서.
사현이 자꾸 우영에게로 끌려가는 시선을 애써 그림으로 잡아당겼다. 하얗게 새겨진 N이 전과 달라 보였다. 그래, 그러고 보니 늘 흰색으로 그렸지. 그게 하얀 와이셔츠 때문이었다니, 상상도 못 했다.
앞으로 우영의 그림을 볼 때마다 떠오르겠지. 그림이 아니라 사인만 보면 어쩌나, 걱정이 될 정도였다. 이번 N은 조금 옆으로 기울었네. 더 진하네. 힘이 들어갔네. 그런 쓸데없는 관찰이나 하고 있을 것 같았다.
사현이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며 걸음을 재촉했다. 다음 그림은 멀리서 존재를 확인했을 때부터 기대가 됐던 그림이다. 독보적인 크기에, 독보적인 완성도를 피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꾸 흘깃흘깃 눈이 가려는 걸 참고 또 참아냈다.
그리고 드디어 그 그림과 마주했다.
「당신의 밤」
유일하게 제목이 붙은 작품이었다.
「당신의 밤」의 구도는 사현에게도 익숙했다. 침대가 있고, 그곳에 사현이 누워있는 게, 「흐르는 새벽」과 거의 똑같았다. 창을 통해서 빛이 들어오고, 사현이 그 빛 속에서 잠을 자고 있는 모습 역시 그랬다.
헌데 느낌은 전혀 달랐다. 푸른색이 날카로이 부서지던 「흐르는 새벽」과 달리 「당신의 밤」은 따뜻한 노란빛이 밖으로 터져 나왔다. 주홍색, 복숭아색, 해바라기색들이 조화로이 뒤섞여 캔버스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굳이 묘사하자면 구스타프 클림트의 색감과 닮아 있었다. 프레데릭 레이턴의 「타오르는 6월」이 떠오르기도 했다. 적당히 채도가 낮아서 눈이 따끔거리거나, 시야가 불편하지 않은, 아주 아름다운 온색의 집합이었다.
기대보다 훨씬, 훨씬 대단한 작품에 사현이 뻐끔 턱을 떨어트렸다.
「당신의 밤」 속의 사현은 화면을 등지고 있는 게 아니라, 정면을 향해 누워 있었다. 따스한 빛에 감겨 눈 코 입이 살짝 번진 상태였으나, 어떠한 표정으로, 어떠한 기분으로, 어떤 꿈을 꾸고 있을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게, 그림 속의 사현은 참으로 편안해 보였다. 지그시 감긴 눈, 보드라운 호선을 그린 눈썹, 갈매기 형태로 가볍게 다물린 입술, 살짝 발긋한 볼, 자연스레 흐트러진 머리칼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평화보다 평화로웠다.
사지를 편안히 늘어트린 그는 한쪽 팔을 침대 밖으로 뚝 떨어트린 상태였다. 아무것도 쥐지 않고, 느슨히 풀린 다섯 손가락이 그가 얼마나 무방비한 상태로 잠들어 있는지를 여실히 알려 주었다. 손을 뻗으면, 주홍빛을 따라 그 손을 마주 쥘 수 있을 것 같은 환상이 들었다.
사현이 주먹을 세게 쥐었다가 풀었다. 이다지도 찬란한 그림을 공개하지 않았다는 아쉬움과, 그 아름다움을 자신이 독점하고 있다는 우월감이 동시에 솟구쳤다. 생전 처음 경험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상하게⋯⋯ 눈시울이 뜨끈해졌다.
“내가⋯⋯ 이렇게 자니?”
사현이 혼잣말처럼 물었다.
“네.”
우영이 간결히, 허나 단호하게 말했다. 매일같이 보는 그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거짓일 리 없었다.
“이렇게나⋯⋯ 편안하게 잔다고?”
“네. 새벽에 깨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우영이 다시 생각해도 기특하다는 듯 사현의 관자놀이에 쪽, 입을 맞췄다.
그러는 와중에도 사현은 그림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편히 잔단다. 과거에는 일에 내몰려서 까무러치듯 잤는데. 사현 딴에는 그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러지 않고는 수면제를 한 움큼이나 삼켜야 했다. 그 여파로 다음 날은 끔찍한 두통에 시달려야 했고.
근데 약도, 술도 하지 않고도 이리 편히 잔단다. 잠든 당사자이니 잘 알고 있는 사실인데, 전혀 몰랐던 것처럼 새로웠다.
봄 여름 가을 겨울 할 것 없이 사현에게 밤은 항상 추운 시간이었다. 발바닥이 뜨거울 정도로 난방을 해도 외로움에서 발발한 추위는 갈무리가 안 됐다. 그런데 요즘은 알몸뚱이로 자도 추운 걸 모른다. 난방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바깥이 여름인지 겨울인지도 신경 쓰지 않는다.
“⋯⋯네가 저렇게 퍼머넌트 옐로우 같은 색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으니까 그렇지.”
우영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품과, 체온과, 따뜻한 시선이 있기 때문이다.
더는 혼자가 아니다. 매일 밤 저를 안아 주는 사람이 있다. 밤을 지켜 주고, 보듬어 주는 사람이 있다. 세상 그 누구보다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내가 넘친다는 사람. 이렇게 수십 시간을 들여 물감을 바르고 발라서 형상화해도 모자라다는 사람이.
사현은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그림을 보고 또 봤다. 우영의 시선을 통해 보는 제 모습이 궁금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이제 그가 보는 모습이 자신 그 자체였으니까.
이토록 안온하고 따뜻할 수 있다니. 몸이 저릴 정도로 통감하고 있음에도 믿기 어려웠다.
우영은 사현을 따라 그림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 침묵이 길다. 우영이 무심코 사현을 쳐다봤다. 순간, 심장이 발바닥까지 철렁 내려앉았다.
“⋯⋯형?”
“⋯⋯.”
“형, 왜 울어요.”
사현이 울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이를 아득 문 채, 동그란 눈물을 뚝뚝 떨어트려 댔다. 기겁한 우영이 사현의 볼을 조심히 감싸 쥐었다. 대체 언제부터 울고 있었던 건지 볼이 축축했다.
“형,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흐으⋯⋯.”
“응? 왜 울어요?”
거듭된 우영의 추궁에도 사현은 그저 울기만 했다. 우영은 대번에 그 울음에 물들었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눈물이라는 건 참 적응이 어렵다. 타인의 눈물에도 괜히 기분이 뒤숭숭한데. 늘 이성적이고 차가운 사현이 울면 세상이 무너지는 듯했다.
“형⋯⋯. 울지 마요. 제발⋯⋯.”
“흐윽, 으⋯⋯.”
“아⋯⋯. 계속 울면 저도 같이 울 거예요.”
우영의 눈가가 고통스레 일그러졌다. 대체 갑자기 왜 울음을 터트린 건지 모르겠다. 혹 쥐도 새도 모르게 원화나 민재가 나타났나, 싶어서 전시장을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허나 오롯이 사현과 저, 둘뿐이었다.
우영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애만 끓이는데, 사현이 자신의 볼을 거머쥔 우영의 손을 감쌌다.
“좋아서, 그래⋯⋯. 좋아서⋯⋯.”
“⋯⋯.”
“네가 너무 좋아서⋯⋯. 고마워서⋯⋯. 전시가 너무 멋져서⋯⋯. 그래서 그래⋯⋯.”
「당신의 밤」을 보고 있으니 우영과 함께한 수많은 밤이 폭우처럼 와르르 쏟아졌다. 당시의 냄새와, 부유하는 공기와, 나누었던 대화와, 얽혔던 몸과, 맞닿은 시선들이 사현을 터트릴 듯 옥죄었다.
사현은 여태 모든 색의 중심에서 일하면서도 홀로 흑색이었다. 사위가 다채로운 색들의 향연인데, 저만 검었다.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것도, 자신은 가질 수 없는 색이라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사실 「흐르는 새벽」의 그 시린 파란색도 분에 겨운 색이었다.
그런데 그런 제게, 우영이 이리도 어여쁘고 따스한 색을 쏟아 부었다. 그 색에 젖고, 또 젖다 보니 이제 흑색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사현은 온전한 노란색이 됐다. 때로는 붉은색이 됐다가 또 때로는 청량한 여름 하늘보다 드높은 푸른색이 되기도 했다.
그게 어찌나 감동적인지, 어찌나 좋은지.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우영이 사현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좋아서 운다니. 전혀 예상치 못한 이유라 뒤통수라도 맞은 듯, 정신이 멍했다. 그러다 두 팔을 벌려 사현을 꽉 껴안았다.
“사랑해요, 형.”
“흐으⋯⋯. 우영아⋯⋯.”
“정말 사랑해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우영은 사현의 귓가에 끊임없이 사랑을 속삭였다. 그럴수록 품에 안긴 사현이 그림 속의 사현처럼 주홍빛으로 물들어 가는 것 같았다.
우영은 저만 사현으로 인해 변화한 줄 알았다. 사실 진화에 가까웠다. 하루에 한 끼 먹으며 컴컴한 반지하 방에서 그림 그리던 저를 구해 준 게 사현이었고, 세상이 놀랄 만큼 멋진 전시를 열어 준 것도 사현이었고, 돈 따위 생각하지 말고 꿈만 꾸라고 해 준 것도 사현이었고, 통렬할 정도로 붉은색의 사랑을 알려 준 것도 사현이었다.
그래서 받기만 했다고 생각했는데. 사현 역시 저로 인해 많은 것이 바뀌었나 보다.
그게 말도 못 하게 뿌듯하고, 기뻤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로 인해 안온해지고 편안해진다는 건, 오로지 내 품에서만 그 안식을 경험한다는 건, 가늠하는 것보다 훨씬 대단한 기분이다.
우영은 다짐했다. 앞으로 그 어떠한 날도, 그가 전처럼 검은 밤 속에서 홀로 잠들게 하지 않겠노라고.
우영이 조금 더 세게 사현을 껴안았다. 그리고 눈물에 젖은 그의 눈가에다 꾹 입을 맞췄다.
앞으로 나와 함께할 「당신의 밤」이 춥지 않기를 바라며.
늘 따뜻한 색으로 물들어 있기를 바라며.
<갤러리 비>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