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2)
집 도어 록을 연 사현이 부러 쾅 문을 세게 닫았다. 그러고는 집 안으로 들어서지 않고 현관에 멀뚱히 서 있었다. 그가 속으로 하나, 둘, 셋 숫자를 셌다.
그 숫자가 다섯에 다다르는 순간,
“형! 왔어요?”
우영이 미끄러지듯 복도 모서리를 돌아 나타났다. 턱 끝에 오로라 핑크색 물감을 묻힌 우영. 하얀 반팔을 입은 우영. 맨발의 우영. 사현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씹었다.
아아, 나의 사랑스럽고 청량한 안식처.
“일찍 오셨네요! 밥은요? 바로 라면 끓일까요?”
우영이 부엌 쪽을 가리켰다. 사현이 그런 우영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러다 감미로운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곱씹었다.
“우영아.”
“네?”
“우영아.”
“네, 형.”
“우영아.”
“⋯⋯.”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한 우영의 낯이 대번에 그늘졌다. 오늘 명현을 만나러 간다 하더니. 또 무슨 일이 있던 걸까. 우영이 눈알을 뱅글뱅글 굴리며 사현의 사지를 확인했다. 검사는 물론, 칼을 쥔 괴한도 보냈던 사람들이다. 뭔 짓을 어떻게 했을지 몰랐다.
이렇다 할 상처를 찾지 못한 우영이 심각한 얼굴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형.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아니면 기분이 안 좋아요?”
걱정이 넘실거리는 우영의 눈동자에 사현이 담겼다. 그걸 본 사현이 참지 못하고 그의 너른 가슴팍으로 뛰쳐 들었다. 놀란 우영이 잠깐 흠칫, 몸을 떨었다가 곧 사현의 등을 껴안았다.
“무슨 일 있었어요? 무섭게 왜 그래요.”
“나도 무섭다.”
“뭐가요? 뭐가 무서운데요?”
우영이 사현의 볼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사현이 그와 잔잔히 시선을 맞췄다.
“네가 너무 좋아서 무서워. 끊임없이 좋아져.”
“⋯⋯형.”
“네가 그랬었지. 어제보다 오늘 더 좋아한다고. 내일은 더 좋아할 거라고. 지금 내가 그래.”
“⋯⋯.”
“어제도 네가 미치게 좋았는데, 오늘은 더 좋아. 네 말마따나 내일은 더 좋아지겠지. 그게 무서워.”
“⋯⋯.”
“다 상관없어졌어. 다 필요 없어졌어. 그냥 너만 있으면, 네 옆에만 있으면 다 괜찮을 것 같아.”
사현이 우영의 손바닥에 볼을 비볐다. 우영의 눈이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사현은 사랑에는 서툰데, 사랑의 표현은 저돌적이다. 순간순간의 감정에 몹시 진실했고, 그 찰나를 꼭 표현하고 감탄해서 우영에게 전달해 주곤 했다.
그럴 때마다 딱 죽을 것 같다. 갈비뼈가 안으로 움츠러들고, 호흡이 끊기고, 당장이라도 천사들이 넘실거리는 천국으로 곤두박질칠 듯했다.
“저도요.”
우영이 사현의 머리칼에 꾸욱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저도 좋아해요. 사랑해요. 어제보다 오늘 더. 내일은 더더욱.”
그 말에 사현이 치받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우영의 입술을 향해 달려들었다. 우영이 기다렸다는 듯, 사현의 뒤통수를 거머쥐고 혀를 욱여넣었다.
“아, 으응, 너무, 읏! 너무 깊, 아, 우영아⋯⋯.”
엎드려 있는 사현이 잡을 것 없는 현관 벽을 손톱으로 북북 긁어 댔다. 자꾸 깊어지는 삽입이 괴롭다. 이미 벌어질 대로 벌어진 뒷구멍이 빠듯한데. 금방이라도 툭 터져 버릴 것 같은데. 우영은 도무지 만족을 몰랐다. 엉덩이가 납작하게 짓눌리고 그의 고환이 제 회음부에 부딪혀 뭉개지는데도 삽입을 멈추지 않았다.
“하아⋯⋯. 형, 좋아해요⋯⋯.”
우영이 사현의 날개뼈를 삭삭 핥으며 읊조렸다. 그러나 사현은 그의 고백을 되뇌고, 감동할 상태가 아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우영의 성기는 받아들일 때마다 새롭다. 두툼한 부피가 버겁고, 둥그렇고 단단한 귀두는 흉포했다. 혹시 성기가 매일 자라는 게 아닐까. 이러다 그의 멀대 같은 키만큼이나 자라면 어쩌나. 별 등신 같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잠, 잠깐, 만, 아흣! 응, 아!”
그 와중에도 전립선을 콱콱 쑤시는 공격에 눈앞이 희끄무레하게 번졌다. 척추가 파르르 떨리고, 허벅지는 부들부들 경련했다. 안으로 말린 발가락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우영이 발견하면 귀엽다며 한동안 쪽쪽 빨아 댈 게 분명했다.
벽에 쿵, 이마를 박은 사현이 질끈 눈을 감았다.
남세스럽게 현관에서 이게 무슨 짓인지. 제가 먼저 덤비기는 했다만, 차갑고 딱딱한 현관에서 삽입까지 갈 줄은 몰랐다. 아랫도리가 휑해졌을 때쯤, 우영에게 소파로 가든, 네 침실로 가든, 어디로든 가자고 했는데 우영이 이미 정신을 놓은 상태라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그래서 이 황량한 현관에서 알궁둥이를 까고 섹스를 하게 됐다. 이럴 줄 알았으면 거실에서 덤빌걸. 사현이 우영의 움직임에 맞춰 쿵, 쿵, 쿵 벽에다 이마를 찧으며 후회할 때였다.
“무슨 생각 해요.”
등줄기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낮은 음성이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사현이 헉, 숨을 말아 먹었다. 그렇게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다름이 아니라, 섹스 중의 우영은 조금, 아주 조금 무섭기 때문이다.
“아, 아무 생각 안 했어.”
사현이 다급하게 변명을 내놓았다.
“거짓말.”
허나 단칼에 부정당했다. 우영이 그대로 쑥, 사현을 자신 쪽으로 잡아당겼다.
“어, 어어⋯⋯.”
사현이 속절없이 끌려갔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우영의 성기를 피해 보고자 벽에 철썩 들러붙어 있던 거였는데. 망했다. 망했어.
엉덩이가 그대로 우영의 골반에 부딪혔다. 말랑한 허벅지가 짜부라지고, 우영의 성기가 단전 아래까지 치고 들어왔다. 사현이 신음 한 가닥 흘리지 못하고 입술만 뻐끔거렸다.
“흑⋯⋯.”
배 속이 저릿저릿하다. 크게 벌어진 구멍이 괴롭다. 제대로 긁힌 전립선은 찌릿했고, 모골은 송연했으며, 요의라도 온 듯 아랫배가 시큰거렸다.
어금니를 꾸욱 짓씹은 우영이 허리를 좌우로 뒤틀며 조금 더 깊게 삽입했다. 사현이 돌멩이라도 얹힌 듯 막혀 오는 숨을 컥컥, 구역질하듯 토해 냈다.
우영이 사현의 귓불을 쭉 빨았다가 놨다.
“내 생각만 해요. 네? 다른 생각하지 마요.”
“아흑, 읏, 응, 아흐윽.”
“그거 되게 짜증 나⋯⋯.”
“알았, 으읏, 아! 흐으, 알았으니까, 으응, 아!”
우영은 덩치에 맞게 힘이 좋다. 손바닥도 엄청 커서, 골반을 휘어잡고 사현의 몸 전체를 위로 쑥쑥 멋대로 올렸다가 내렸다. 철벅철벅. 살과 살이 접합하며 찰진 소리가 났다.
사현이 손톱으로 벅벅 바닥을 긁었다. 우영의 움직임이 끝을 모르고 격해졌다. 못 다 벗은 와이셔츠가 등줄기를 타고 줄줄 흘러내리더니, 끝내는 사현의 뒤통수를 덮어 버렸다. 그걸 본 우영이 사현을 훌떡 뒤집었다. 그러고는 솜씨 좋게 셔츠를 벗겨 냈다.
휑한 서늘함에 사현이 우영에게 매달렸다. 우영이 사현의 등을 감싸 쥐고 그를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으으응⋯⋯.”
움직이면서 잠깐 빠졌던 성기가 다시 깊숙이 자리를 잡았다. 가장 예민한 부분이 부우욱 세게 긁혔다. 그 순간 사현이 파르르 몸을 떨며 픽, 맥없이 정액을 사출했다. 우영의 하얀 티셔츠 위로 미끄덩한 탁액이 뿌려졌다. 괜히 부끄러워진 사현이 우영의 목덜미에다 얼굴을 파묻었다.
그걸 낱낱이 목도한 우영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섹스 중의 사현은 매우 귀엽다. 전혀 그러지 않을 것 같으면서, 뒷구멍을 빨리는 걸 쑥스러워했고, 먼저 절정에 다다르는 걸 부끄러워했다.
아래위로 꿀렁이며 웃음을 표하는 우영의 목젖에 사현이 번뜩 얼굴을 쳐들었다. 세모꼴로 째진 눈에 짜증과 수치가 가득했다. 그 모습도 마냥 귀여운 우영이 참지 못하고 사현의 입술을 쪽쪽 새 부리처럼 쪼아 먹었다. 그러나 몇 번 빨기도 전에 텁, 얼굴이 잡혔다.
“비켜.”
사현이 서늘한 음성으로 명령했다. 우영의 눈썹이 대번에 아래로 뚝 떨어졌다.
“화났어요?”
“안 났어.”
어딘가 시린 분위기에 우영이 쭈뼛쭈뼛 물러났다. 사현의 뒤를 가득 채우고 있던 성기가 매끄럽게 빠져나왔다. 그마저도 자극적이라 사현이 자라처럼 목을 오그렸다가 폈다.
마지막으로 귀두가 퐁, 깜찍한 소리를 내며 빠져나왔다. 벌름거리는 뒷구멍으로 현관의 찬 기운이 스며들었다. 설핏 미간을 구긴 사현이 우영의 가슴팍을 아래로 내리눌렀다. 우영이 별다른 반항 없이 그의 손길에 밀려 뒤로 넘어갔다.
그 위에 올라탄 사현이 우영의 성기를 자신의 구멍에다 맞췄다. 우영이 헙, 헛숨을 삼켰다. 사현이 직접 움직이려는 모양이었다.
⋯⋯설레라.
우영이 치받는 웃음을 숨기지 못하고 반푼이처럼 웃었다. 그런 우영의 코를 가볍게 튕긴 사현이 천천히 몸을 내리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우영의 것을 물고 있었던 터라 말랑하게 풀어진 구멍이 야금야금 성기를 삼켜 갔다.
“아흐, 응⋯⋯.”
사현이 훅 고개를 앞으로 숙였다. 그 움직임을 따라 결 좋은 앞머리가 차르르 쏟아졌다. 우영이 손가락으로 빗을 만들어 그것을 위로 쓸어 넘겼다. 고통과 쾌락에 점철된 사현의 얼굴이 드러났다.
분홍빛으로 물든 눈가. 주름진 미간. 딸기처럼 빨갛게 충혈된 입술. 그걸 올려다보고 있자니 꿀꺽, 저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우영의 성기를 모두 삼킨 사현이 아래위로 몸을 들썩였다. 한 손은 우둘두둘한 우영의 복근을 짚고, 나머지 한 손은 두툼하고 단단한 우영의 가슴팍을 짚어 몸을 지탱했다.
“아, 형⋯⋯. 좋아요⋯⋯.”
우영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사현이 움직일 때마다 우물거리며 성기를 씹는 구멍에 혀가 바짝바짝 메말랐다. 옴팡지게 기둥을 조이는 내벽이, 귀두를 쥐어짜는 듯한 깊은 곳이, 뿌리를 잘근거리는 주름이 우영을 절정으로 이끌어 갔다.
“응, 아! 하응, 읏⋯⋯.”
사현의 움직임이 점차 빨라졌다. 불끈거리며 맥동하는 우영의 성기가 말도 못 하게 사랑스러웠다. 사현이 몽롱한 눈동자로 우영을 내려다봤다.
쾌락에 일그러진 우영의 얼굴이 어떠한 예술보다 아름답다. 평소와 달리 오르막길을 그리고 있는 진한 눈썹. 아득 겹쳐 문 어금니는 어찌나 세게 씹었는지 육안으로도 보인다. 제 골반을 바투 쥔 손가락은 단단했고, 입술 새로 터져 나온 숨결은 후끈했다.
상체를 조금 더 아래로 숙인 사현이 재게 허리를 움직였다. 우영이 그새 다시 발기한 사현의 성기를 움켜쥐고 가볍게 아래위로 흔들었다.
“아으, 응, 아, 좋아⋯⋯. 우영아, 흣, 좋아⋯⋯.”
“하아, 형⋯⋯. 조금만, 조금만 더 빠르게요, 윽.”
우영이 위로 허리를 쳐올렸다. 찰박찰박 살끼리 맞물리고 비벼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추후에는 참다못한 우영이 사현을 바닥에 깔아뭉개고 퍽퍽, 신랄하게 성기를 욱여넣었다가 뺐다.
그리고 마침내, 절정이 찾아 왔다. 쑥 성기를 빼낸 우영이 사현의 사타구니에다가 정액을 싸질렀다. 사현 역시 우영의 아랫배에다가 탁액을 줄줄 쏟아냈다.
힘없이 널브러진 사현이 색색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눈앞이 뱅글뱅글 돌 정도로 힘이 부쳤다. 명현과의 만남을 앞에 두고 종일 긴장한 터라 체력 소모가 곱절이었다.
사현이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고된 사지를 추스르고 있는데, 우영이 그의 무릎 아래와 허리 뒤를 잡아 번쩍 들어올렸다. 들리고, 안기고, 업히는 것에 적응한 사현이 익숙하게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우영이 그런 사현의 귓불을 쭉 빨았다가 놨다.
“제 침대 가서 마저 해요.”
그 말에 사현의 낯빛에 당황이 스몄다.
“⋯⋯마저? 그 ‘마저’가 얼만큼인데?”
“어⋯⋯. 글쎄요.”
우영이 콧잔등을 찡긋거리며 횟수를 가늠했다. 사현이 헛웃음을 흘렸다. 우영이 걸을 때마다 쥐도 새도 모르게 다시 발기한 그의 성기가 꼬리뼈를 쿡쿡 찔러 댔다.
“그래. 하고 싶은 만큼 해라, 해.”
사현이 모든 걸 포기하고 몸을 늘어트렸다. 우영이 “정말요?”라며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는 쿵쿵쿵, 뒤꿈치를 거세게 구르며 침실로 향했다.
깊은 새벽, 나체로 우영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던 사현이 반짝 눈을 떴다. 오래 이어진 정사에 언제,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가물가물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그가 고개를 쳐들었다. 잘생긴 우영의 턱이 바로 위에 있었다. 꼬물꼬물 몸을 일으킨 사현이 우영의 위로 몸을 겹쳤다.
“음⋯⋯.”
우영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사현이 흡, 숨을 멈췄다. 다행히 우영은 깨지 않고 다시 깊이 잠들었다. 그 와중에도 버릇처럼 사현의 허리와 등을 감싸 안았다. 이불을 끌어당겨 어깨를 덮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일련의 행동에 사현이 소리 죽여 미소 지었다.
사현이 어슴푸레한 새벽을 받아 은은히 빛나는 우영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봤다. 느슨하게 풀린 눈 코 입이 그렇게 평화로울 수 없었다.
아름다운 나의 우영이. 순수하고 고결한 나의 우영이.
그러다 아직 다 낫지 못한 볼과 턱의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 밴드도, 연고도 바를 필요가 없을 만큼 아물었으나, 그래도 여전히 뚜렷하게 남아 있는 상처였다.
사현이 침울한 얼굴로 그것을 살살 쓰다듬었다. 미끈한 주위 피부와 달리, 오돌도돌한 질감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잘생긴 이마와 우뚝 솟은 코를 보고 있으니 금세 또 괜찮아졌다.
“⋯⋯.”
우영아. 아무리 너라도, 이리 어여쁜 너라 하더라도. 너를 지키기 위해 내가 갤러리를 버릴 수 있을까. 사랑해 마지않는 그림들을 뒷전으로 넘길 수 있을까.
사실 안 될 거라 생각했다.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 엄마의 웃음이 묻어 있는 몇 안 되는 매개체라 버릴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근데 어째 손톱만큼도 아쉽지가 않았다.
사현이 우영의 이마에 꾹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한 손에는 우영을, 또 다른 한 손에는 갤러리를 쥐고 있었다. 둘 중 하나를 놓으면 텅 빈 한 손은 어찌하나 두려워했거늘.
우영을 두 손으로 쥘 수 있으니 다 괜찮을 것 같았다.
* * *
우영은 오늘도 정오가 가까워지는 시간에 일어났다. 졸린 눈을 하고 침실에서 나와 곧장 운동을 시작했다. 턱 끝에 땀이 뚝뚝 떨어질 만큼 거나하게 운동을 하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콸콸 쏟아지는 온수에 감동하고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며 늦은 점심을 주문했다.
옷을 입고 작업실에 들어가 그림 그릴 준비를 끝낼 때쯤이면 점심이 도착한다. 오늘 점심은 뚝배기 불고기와 제육 덮밥 그리고 우동으로 ‘가볍게’ 해결하기로 했다.
나름대로 열심히 세팅한 음식 사진을 찍고, 그것을 곧장 사현에게 보낸다. 첨부하는 메시지는 대개 같다. 오늘 점심은 이거예요. 맛있어요. 형은 점심 뭐 먹었어요. 커피 마시지 마요. 그런 거.
답은 기다리지 않았다. 갤러리 안에서의 사현이, 그러니까 B로서의 사현이 얼마나 바쁜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퇴근하면 품에 안겨 점심은 뭘 먹었고, 커피 대신 무엇을 마셨고, 오늘 갤러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노라, 그 예쁜 입술을 종알거리며 다 말해 줄 테니까 괜찮았다.
그 어여쁜 장면을 상상한 우영이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한 손으로 얼굴을 벅벅 긁었다가 입술을 깨물었다가 별 난리를 다 쳤다. 그러다 밥이 식을 때쯤에서야 정신을 차렸다.
우영이 거실 테이블 앞에 바짝 붙어 앉았다. 원래 식탁에서 먹었었는데, 혼자 식사하는 걸 못마땅히 여긴 사현이 특별한 미션을 내렸다.
밥 먹으면서 미술 다큐멘터리 보기.
TV 속에는 사현이 따로 즐겨 찾기 해 둔 다큐멘터리가 수두룩했다. 다큐멘터리라니. 전혀 본 적이 없어서 처음엔 어색했는데. 그래도 요즘엔 편히 앉아 전 세계를 여행하는 기분이라서, 또 대가의 미술을 속속들이 탐험하는 기분이라서 즐겨 보고 있었다.
오늘은 대가가 아니라 현대에 흩뿌려져 있는 디자인과 그 디자인을 창조한 디자이너들의 이야기를 볼 차례였다.
TV를 켠 우영이 제법 익숙하게 메뉴를 찾아 들어갔다. 그리고 막 재생을 누르려는데, 낯익은 얼굴이 메뉴 너머의 화면을 가득 메웠다.
“⋯⋯형?”
우영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저거⋯⋯ 사현이 형인 것 같은데⋯⋯.
우영은 순간, 사현이 TV로 영상 통화라도 건 줄 알았다. 허나 그러기에는 그의 모습이 너무 낯설었다. 자신을 바라볼 땐 눈 코 입이 살랑살랑 풀려 있는데, 화면 속 사현은 딱딱하게 로봇 같은 미소만 띤 채였다. 거기다 오늘 아침 출근할 때 입었던 옷과도 전혀 달랐다.
한참이나 보고서야 뉴스 화면인 것을 깨달았다. TV 메뉴를 아래로 내린 우영이 바보 같은 얼굴로 화면을 응시했다. 사현이 대단하고, 유명한 건 진즉부터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 대문짝만 하게 TV에 나올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때, 무덤덤한 사현 아래로 파란 창이 떠올랐다.
[속보. 화 벤처 투자 경영권, 갤러리 운영 중인 B모 씨에게 넘어가.]
[화 그룹 차기 후계 자리에 변동 기미.]
우영이 턱을 아래로 뻐끔, 떨어트렸다. 덩달아 쥐고 있던 숟가락 역시 댕그렁 떨어졌다.
* * *
우영의 두 번째 전시인 ‘현혹의 밤’이 후반에 다다랐다. 슬슬 배송을 준비해야 할 때였다. 덕분에 사현이 바빠졌다. 아니, 갤러리 전체가 바빴다. 전시 끝이 가까워지면서 발걸음을 미루고 미루던 관람객들이 우르르 밀어닥쳤기 때문이다.
사람이 많으면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는다.
전시장에 커피를 들고 들어가는 사람. 그걸 쏟아 버리는 사람. 그림의 질감이 궁금하다며 만져 보는 사람. 물감이 두꺼운 게 신기하다며 손톱으로 긁 어보는 사람. 그림 위로 플래시를 터트리며 사진을 찍는 사람. 넘어지면서 장식품을 훼손하는 사람. 그림이 팔렸으면 팔렸다고, 비싸면 비싸다고 도슨트나 직원에게 욕지거리를 퍼붓는 사람까지. 셀 수도 없었다.
대부분은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닌지라 매뉴얼대로 처리하면 되지만, 그림이 훼손되는 경우에는 일이 많아졌다. 얼른 작품을 떼어다가 컨서베이터에게 맡겨야 하기 때문이다.
일정이 뒤틀려서 배송이 늦어지면 고객이 의심한다. 혹, 작품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니냐. 흠이 난 게 아니냐. 복제품을 보낸 게 아니냐. 이것저것 따져 댔다.
오늘 신고가 들어온 작품은 「나무 부두」였다. 전시 오픈 전부터 탈이 많았던 아이인데, 관람객 하나가 손을 대서 기웠던 캔버스 한 부분이 뜯겼단다. 그 소식을 들은 사현은 그 자리에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왜 하필 이번 전시에서 두 번째로 비싼 그림을! 왜 하필 이번 전시에서 제가 가장 사랑하는 그림을! 왜 하필 원화가 손댔던 그림을!
사현이 으득으득 이를 갈며 일정과 배송 리스트를 재정비했다.
그렇게 정오가 훌쩍 넘었을 때쯤 핸드폰이 진동했다. 점심 먹는다는 우영의 메시지였다. 사현은 일곱 개가 훌쩍 넘는 메시지를 보며 헤실헤실 수 분 동안 웃었다.
그러다 다시 일에 집중했을 즈음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울렸다. 사현이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네, 들어와요.”라고 대답했다. 방문자는 제인이었다. 그녀를 흘깃 본 사현이 말 대신 눈썹을 들썩임으로써 무슨 일이냐 물었다. 제인이 어딘가 께름칙한 낯으로 관장실에 들어섰다.
“저⋯⋯ B.”
“응.”
“뉴스 보셔야겠는데요.”
“뉴스? 무슨 뉴스?”
“그게⋯⋯ 좀⋯⋯ 제가 무어라 말씀을 드리기가⋯⋯.”
제인의 낯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자못 심각한 얼굴에 사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인이 동요하는 일은 거의 없는지라.
“왜? 드디어 세계가 멸망이라도 한대?”
다 상관없어. 나는 우리 우영이만 살리면 돼. 사현이 킥킥거리며 포털 사이트로 들어갔다. 메인 화면에 떠오르는 인기 검색어와 뉴스 대서특필이 시선을 확 사로잡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단어는 ‘갤러리 비’였다. 사현의 갤러리가 몹시 유명한 장소이긴 했으나, 뉴스에, 그러니까 문화와 예술 면이 아니라 경제면에 뜬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사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한 자 한 자 곱씹어서, 천천히 뉴스를 읽어갔다. 그런데도 자신이 보고 있는 게 현실인지 믿을 수가 없었다.
‘화 벤처 투자’, ‘김 회장의 독단적 결단’, ‘주주 반발’, ‘숨겨진 서자’, ‘갤러리 비’, ‘B’, ‘백모 씨’, ‘김민재 사장’, ‘묵묵부답’ 등의 단어가 눈알을 시리게 만들었다.
잠시 굳어 있던 사현이 질끈 눈을 감았다.
“하⋯⋯.”
명현이 일을 냈다. 설마 진짜 하려나 싶었는데. 진짜, 실행해 버렸다. 아니, 아무리 제가 해 달라고 엄포를 놨어도 언제 어떻게 실행할 거라는 연락은 줬어야지. 이렇게 일언반구 언질도 없이 일을 처리해 버리면 저는 어쩐단 말인가.
“정말 그쪽 사장으로 가시는 거예요? 그럼 <갤러리 비>는요?”
사현의 반응을 가만히 지켜보던 제인이 불안한 낯으로 캐물었다. 매사 무감한 그녀가 저리 구니 사현 역시 얼굴이 묘하게 뒤틀렸다.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던 사현이 곧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안 가.”
⋯⋯아직은. 차마 뒷말은 뱉을 수 없었지만. 어정쩡하면서도 명확한 사현의 대답에 제인이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정정 보도 낼까요?”
“어⋯⋯ 아니. 내가 회장님이랑 거래한 게 있어. 이렇게 멋대로 진행하실 줄은 몰랐지만.”
그 말에 제인이 턱을 안으로 당겼다. 어딘가 모호한 반응이 영 미심쩍은 듯했다.
사현이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슬쩍 눈을 돌렸다. 괴롭다. 사현은 <갤러리 비>에서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무엇하나 제 손길과 정성이 들어가지 않은 게 없어서, 시초가 저라서, 제 이름값으로 오고가는 돈이 아주 많았다.
근데 그런 자신이 갤러리를 뒤로하고 화 그룹으로 넘어가 버리면 <갤러리 비>가 추락하는 거야 불 보듯 뻔했다. 물론, 곤두박질치지는 않겠지만 지금처럼 성황하진 않을 터였다. 그리고 그 피해는 자신이 고심해서 뽑아 놓은 큐레이터들과 직원, 그리고 제인이 감내해야 하겠지.
나쁜 짓인 걸 안다. 못된 짓인 것도 알았다. 아주 파렴치하고 치사한 배신이다.
하지만 이러지 않으면 내 우영이가 위험한데. 어쩐단 말인가. 나름대로 방안을 생각하고 있으니 어떻게든 길이 보일 테였다. 그때까지만 함구하자. 그때까지만.
사현은 답지 않게 문제와 갈등을 뒤로 미뤄 버렸다. 지금은 자신이 갤러리를 떠나야 한다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미어져서 무언가를 계획하고 해결할 여유가 없었다.
어딘가 못마땅한 눈빛으로 사현을 응시하던 제인이 알겠노라,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막 뒤를 돌아 나가려는데, 바깥쪽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이 씨발 새끼야.”
민재였다. 흐트러진 머리칼과 아무렇게나 풀린 넥타이가 그가 얼마나 헐레벌떡 이곳에 왔는지 가늠할 수 있게 했다. 천박한 비속어에 사현과 제인이 동시에 얼굴을 구겼다.
만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민재가 쾅쾅 발을 구르며 화난 오랑우탄처럼 다가왔다. 사현은 그런 민재를 무감한 표정으로 목도하고 있었다.
“너, 무슨 수작이야.”
민재가 쾅! 책상을 내리쳤다. 커다란 손바닥과 책상이 마찰하며 요란한 소음이 울려 퍼졌다. 사현이 가감 없이 불쾌를 표했다. 어쩜, 만날 때마다 점점 더 몰상식해지는 것 같다.
살짝 옆으로 몸을 기울여 민재의 그림자에서 벗어난 사현이 제인에게 말했다.
“제이, 경찰에 신고해. 살인 사주한 용의자가 <갤러리 비>에 있다고.”
그 말에 제인이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들고 관장실을 나갔다.
민재가 끅끅 괴이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사현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우악스러운 아귀힘에 사현의 상체가 훅 위로 들려 왔다. 가까워진 거리에 그의 후끈한 콧바람이 볼을 간질였다. 사현이 음식물쓰레기라도 씹은 듯 인상을 썼다. 그러고는 제인에게 한 가지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그 범인이 또 나를 죽이려 한다고도 말해. 그럼 살인 미수가 하나 더 추가되겠네.”
“이 새끼가⋯⋯.”
멱살이 잡힌 와중에도 얄미운 말만 해 대는 사현에, 민재가 옹골차게 말린 주먹을 쳐들었다. 사현은 자신의 콧잔등을 노리는 주먹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민재는 무술을 제대로 배우지 않았다. 그러니까, 주야장천 헬스만 해 대며 몸과 힘만 키웠을 뿐이란 말이다. 그에게 맞고, 밀쳐지는 건 십수 년 전에 끝났다. 이제 와서 그의 폭력이 두려울 리 없었다.
그러한 사현의 반응에 민재가 하, 짧게 웃음을 끊어 냈다. 지나치게 평온한 상대방에 덩달아 몸이 차게 식었다.
“신고해 봐야 내가 잡혀 들어갈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 내가 누군데, 고작 그까짓 일로?”
민재가 사현의 멱살을 던지듯 놨다. 마른 몸이 붕, 뒤로 날아갔다. 의자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밀렸다. 사현이 신경질적인 낯으로 구겨진 넥타이를 풀어냈다. 그리고 특유의 무감한 눈동자로 민재를 쳐다봤다.
“네가 누군데?”
“뭐?”
“네가 누구냐고. 너 이제 화 그룹 후계자 아니야. 방금 본 기사, 그새 까먹었어?”
“⋯⋯.”
민재의 입술이 꿈틀 경련했다. 사현은 그의 얼굴에 실금이 번져 가는 게 말도 못 하게 기뻤다. 사현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허나 민재에겐 더할 나위 없이 뚜렷하게 들릴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 이제 아무것도 아니야. 회장님이 너 버렸다고. 등신이야? 그 정도 상황 파악도 못 해?”
“⋯⋯.”
“그렇게 머리가 안 굴러가니까 버려지지.”
“⋯⋯.”
민재는 언어를 모르는 반푼이처럼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사현의 말은 얄미울 정도로 적나라했는데, 와닿지 않았다. 믿을 수 없었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눈조차 끔벅이지 않고 사현의 말을 되씹던 민재가 으드득 이를 갈았다. 그의 눈동자에 형형한 노기가 서렸다.
“너, 너 지금 형한테 어디서 말을 까?”
“와 이 순간에 그걸 따지겠다고? 진짜 등신인가.”
사현의 입가에 비아냥이 담뿍 담겼다.
“반쪽짜리 주제에 어디서⋯⋯!”
붉으락푸르락해진 민재가 잠깐 거두었던 주먹을 다시 내질렀다. 목표는 사현의 광대였다. 아니, 얼굴이 조막만 하니 어디를 때려도 코피가 터지고 이가 나갈 테였다.
그러나 민재의 주먹은 허공만을 후려쳤다. 사현이 슬쩍 고개를 비틀어 피하더니, 곧게 뻗은 민재의 팔꿈치를 꽈악 움켜쥐고 그대로 뒤로 꺾었다.
“악!”
민재의 손등이 그의 등에 철썩 붙었다. 힘이 잔뜩 들어갔던 어깨가 사선으로 기울더니 우드득, 뼈가 뒤틀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렇다고 부러진 건 아니고, 며칠 뻐근하고 신경 쓰일 수준에서 그쳤다.
“아으윽!”
적나라한 신음에 사현은 푸흐흐, 웃는 것으로 화답했다. 누군가가 떠올랐다. 언젠가 자신이 반쪽짜리라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했을 때, 그 누군가는 이런 대답을 했었지.
“누가 그러더라. 나나, 너나 회장님 피 반만 섞인 건 똑같다고. 내가 반쪽짜리면, 너도 반쪽짜리야. 아니, 회장님 머리는 물려받지 못했으니 반도 안 되겠네.”
사현이 감미로운 음성으로 조곤조곤 민재를 깎아내렸다.
“이 개새끼야. 안 놔?”
이마부터 목까지 시뻘겋게 달아오른 민재가 파드득파드득 작살에 꽂힌 물고기처럼 몸을 뒤틀었다. 사현이 손에 조금 더 힘을 실었다.
민재가 허억, 고통에 찬 숨을 말아먹었다. 그러더니 입을 앙다물고 신음을 참기 시작했다.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악을 쓰는 거였다. 수 초 동안 뻣뻣하게 굳어 있던 그가 으드득 말을 짓씹었다.
“아버지가 너 같은 불륜녀 자식새끼한테 회사를 줄 리 없어.”
너무나 익숙해서, 익숙하다 못해 지루한 욕설에 사현이 조소했다. 어쩜 민재는 욕조차 다채롭지 못하다.
“지금 주고 계시잖아. 그거 보고 여기까지 냅다 달려온 거 아니야?”
“⋯⋯.”
“버림받은 기분이 어때? 누군가를 잃은 기분이 어때? 가지고 있던 걸 다 빼앗긴 기분이 어때?”
사현이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묻고 또 물었다. 한이 잔뜩 실린 문장이 유리 조각처럼 부서지더니 민재의 고막을 마구잡이로 난도질했다.
그러나 민재는 무시했다. 저는 버림받지 않았다. 잃은 것도 없다. 빼앗긴 것도 없다. 아직은, 적어도 아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되돌릴 수 있었다.
민재가 몸을 확 앞으로 숙였다. 그의 등에 밀린 사현이 두어 발자국 뒤로 밀려났다. 간신히 사현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민재가 얼굴을 구긴 채 어깨를 빙글빙글 돌렸다.
“뭐라는 거야, 창녀 새끼가. 네가 아직 대한민국을 잘 모르는구나? 이거 밝혀지면 회사 주가 좆창 나. 주주 할배 새끼들도 난리일 거고. 직원도, 대중도 난리겠지.”
“⋯⋯우리 엄마 그렇게 칭하지 마.”
사현이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민재를 노려봤다. 그러나 민재는 이죽거리며 “창녀, 창녀, 창녀!”를 외쳐 댔다. 어금니를 겹쳐 문 사현이 손을 뒤로 뻗었다. 미끈한 크리스털 명패가 잡혀 왔다.
이걸로 저 꼴사나운 얼굴을 내려치면, 민재가 죽을까. 죽어 줄까. 이왕이면 아주 잔인하고 아프게 죽었으면 좋겠는데.
그래. 머리부터 치지 말고, 무릎부터 때려서 다리를 못 쓰게 만들자. 그다음엔 설설 바닥을 기는 민재를 비웃어 주고, 손가락과 발가락을 부수고, 뼈마디를 짓이기고, 갈비뼈를 으스러트려 주자. 그러면 조금은, 아주 조금은 이 분이 풀릴 것도 같았다.
사현이 명패를 들어올렸다. 잘빠진 크리스털 명패에는 [관장 백 사 현]이라는 활자가 또박또박 바르게 박혀 있었다.
“뭐, 뭐. 그걸로 치게?”
난데없이 등장한 둔탁한 흉기에 민재가 흠칫 뒷걸음질을 쳤다.
사현이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제법 광기가 득실거리는 게 위협적인 미소였다. 민재가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사현이 아무리 저보다 작고 말랐더라도, 저런 명패로 얻어맞으면 틀림없이 어디 한 군데는 부러질 테였다.
우물쭈물하던 민재가 아쉬운 대로 간이 조명등이라도 움켜쥐려 했을 때였다. 사현이 명패를 곧추세우더니 콱! 자신의 이마를 찧었다.
“⋯⋯뭐 하냐, 너?”
민재가 바보 같은 얼굴로 자해하는 사현을 바라봤다. 그러나 사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한 번 더 뻑! 이마를 찧었다.
모서리에 찍힌 이마가 손가락만큼 찢어진다 싶더니, 곧 시뻘건 피가 주르륵 쏟아졌다. 관자놀이와 콧잔등을 타고 흐른 그것이 금세 사현의 얼굴을 뒤덮었다. 몹시 괴이한 광경이었다.
사현이 고개를 흔들어 턱 끝에 대롱대롱 맺힌 핏방울을 털어 냈다. 검은 바닥 위로 더 검은 핏자국이 후두둑 흩뿌려졌다. 몇 방울은 민재의 구두 앞코에 안착했다.
“미친, 미친 새끼.”
민재가 말을 더듬었다. 폭력에 의한 상처와 자해에 의한 상처는 그 충격이 남다르다. 거기다 얄미울 정도로 이성적이던 사현이 저리 구니 실로 무서워졌다. 항상 죽어라, 죽어라, 바라긴 했는데 제 앞에서 머리가 터져 죽은 모습을 상상했더니 영 께름칙했다.
경련하듯 몸을 떤 민재가 관장실을 벗어나려 했다. 회사고 후계자고, 일단 저 미친놈과 떨어질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본능적인 직감이었다.
그때였다.
“야.”
사현이 나지막이 민재를 불렀다. 흠칫 어깨를 떤 민재가 사현을 바라봤다. 그 순간, 무언가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왔다. 마치 패스하듯 고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온 건 다름 아닌 명패였다. 사현의 피가 묻은, 크리스털 명패.
얼떨결에 그것을 받은 민재가 눈썹을 뒤틀었다. 이걸 왜 제게 주나, 싶어서. 그가 자신의 손에 들린 명패와 사현을 번갈아 봤다.
“미안.”
사현이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며 사과했다. 피 때문에 한쪽 눈살이 일그러졌다. 진득거리는 만면이 찝찝해 죽을 것 같았다.
“어?”
민재가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백사현이 사과를 하다니. 다른 이도 아니고, 차가운 피를 가졌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백사현이, 백사 같은 백사현이 사과를 하다니. 분명 제대로 들었음에도 믿을 수가 없었다.
사현이 한 발자국 민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 애인이, 내가 감방 가는 게 싫대.”
“뭐라고?”
“그러니까 네가 대신 가라.”
“그게 무슨 개 같은 소리야?”
사현의 말을 손톱만큼도 이해하지 못한 민재가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렸을 때였다. 벌컥, 관장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이어 익숙한 복장의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경찰이었다.
사위가 단숨에 정적에 휩싸였다. 상황을 파악하는 경찰도, 어리둥절한 민재도, 데굴데굴 눈알만 굴려댔다. 경찰이 민재가 들고 있는 명패, 그러니까 흉기와 피를 뒤집어쓴 사현을 번갈아 봤다. 그 시선에 민재는 비로소 사현이 말한 바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아니야. 이 미친 새끼가 자기 머리를,”
“아아⋯⋯.”
민재가 다급하게 변명을, 아니 진실을 토로하는데 사현이 가녀린 신음을 흘리며 옆으로 쓰러졌다. 기겁한 경찰들이 얼른 사현을 부축했다. 사현이 흐릿하게 풀린 눈동자로 이마를 부여잡았다.
“어지러워요. 피를⋯⋯ 너무 많이 흘렸나⋯⋯ 봐요.”
부러 질질 끄는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듣는 이가 다 가슴 아플 정도로 절절한 음성이었다. 경찰들이 분주해졌다. 구급차 불러. 지혈할 거 가져와. 백사현 씨, 눈 뜨세요. 정신 차리세요. 저 보입니까? 등등의 소란이 와르르 쏟아졌다.
그리고 민재는,
“김민재 씨. 당신을 폭행, 살인 미수, 살인 교사 혐의로 긴급 체포합니다.”
그 자리에서 체포당했다. 손목에 채워지는 은빛 수갑이 그의 얼빠진 표정과 그렇게 잘 어울릴 수 없었다.
구급차에서 내린 사현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뚜르르, 신호음이 이어졌다. 그 단조로운 알람을 들으며 쩝쩝 입맛을 다셨다. 상처를 꿰매기 위해 주사한 마취제에 입 안이 떨떠름했다.
-형.
마침내 신호음이 끊기고, 듣기 좋은 음성이 흘러왔다. 우영이었다.
“우영아.”
-저 전화했었는데. 많이 바빴어요?
“어, 좀.”
-뉴스에서 형이 화 벤처 투자에 사장으로,
“나 이십 분 뒤에 도착하거든?”
-⋯⋯지금, 지금요? 벌써 퇴근하세요? 이제 네 신데?
“어. 금방 갈 테니까 집 문 잠그고, 누가 와도 열어 주지 마.”
-왜요? 그때 집에 왔던 그 남자 감옥에서 탈출했대요?
“아니. 그냥, 내가 불안해서.”
-⋯⋯네. 그럴게요.
“응. 조금만 기다려.”
-네.
긍정을 받아낸 사현이 핸드폰을 귀에서 떼며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시동을 거는데, 번뜩 무언가가 떠올랐다. 통화는 아직 끊기지 않은 상태였다. 우영은 사현이 전화를 끊기 전에 먼저 끊는 법이 없었다. 지금도 핸드폰을 귀에 착 붙이고 통화가 끊기길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사현이 시동 버튼을 누르며 다시 입을 뗐다.
“우영아.”
-네.
“집에 청심환 같은 거 있니?”
-청⋯⋯심환이요? 그 긴장할 때 먹는 약 말씀하시는 거예요? 없을 텐데. 사 놓을까요? 근데 형 뭐 중요한 일 있어요? 청심환은 갑자기 왜⋯⋯.
“내가 먹을 건 아니고, 네가 먹어야 할 것 같아서.”
사현이 백미러로 자신의 몰골을 관찰했다. 이마에 큼지막하게 붙은 붕대와 밴드. 물티슈로 열심히 닦아 냈음에도 여기저기 묻어 있는 핏자국. 셔츠 옷깃을 담뿍 적신 피. 꼴이 영 엉망이었다.
-네?
맥락 없는 말에 우영이 한 음 높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사현이 검지로 밴드 테이프 부분을 매만졌다. 눈썹을 들썩일 때마다 들러붙는 테이프에 짜증이 났다.
“아니야. 됐어. 내가 사 갈 테니까, 너는⋯⋯ 어, 마음 좀 추스르고 있어.”
-마음을 추슬러요? 왜요?
“그⋯⋯ 어⋯⋯ 내가 좀⋯⋯.”
-좀?
“아냐. 집에 가서 말해 줄게. 끊어.”
차마 진실을 말하지 못한 사현이 통화를 종료했다. 그러고는 운전대 위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이 씨. 잘 안 보이게 배나 허벅지를 찍을 걸 그랬나⋯⋯.”
진짜 까무러칠 듯 놀랄 텐데. 제가 그의 턱과 볼에 난 칼자국을 발견했을 때처럼. 저 역시 한 번의 경험이 있는지라 우영이 얼마나 놀랄지, 얼마나 상처받고 가슴 아파할지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다.
더군다나 자해라는 걸 알면⋯⋯ 진짜 화낼 텐데. 그가 화를 내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나, 제법 겁이 났다. 이따금 섹스 할 때 낮은 음성으로 소유욕을 으르대는 걸 떠올린 사현이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애가 순해서 그렇지, 화나면 장난 아닐 것이다. 호랑이처럼 고함을 치려나. 아니면 입을 겹쳐 물고 눈으로 욕을 하려나. 그것도 아니면 손 들고 벌서라고 하려나. 엉덩이를 호되게 때려 주려나.
⋯⋯헌데 그 모습이 또 섹시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 저도 참 미친놈이다.
도리도리 머리를 흔든 사현이 재차 핸드폰을 매만졌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는, 핸즈 프리로 바꾼 후 차를 출발시켰다.
-어, 사현이냐.
곧 걸걸한 목소리가 차내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명현이었다.
“미리 언질을 주고 터트리셨어야죠.”
늘 그렇듯, 사현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깜짝 이벤트였는데. 그래야 네가 실망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다.
명현의 말끝에 은근한 웃음이 묻어났다. 반면 사현의 미간엔 신경질이 스몄다. 미리 알았으면 제 얼굴을 이리 만들지 않고도 민재에게 해를 가할 수 있는 현명한 방법을 고안해 냈을 터였다.
“말장난할 기분 아닙니다. 김민재가 갤러리로 찾아와서 행패를 부렸다고요. 귀한 게 얼마나 많은 곳인데요.”
-그래서, 그 귀한 것들은 지켜 냈니?
“네. 대신 회장님 건 지키지 못했어요.”
-그게 무슨 말이냐?
“김민재 폭행 및 살인 미수 현행범으로 체포됐습니다. 제 갤러리에서요.”
-⋯⋯.
정적이 흘렀다. 들리는 거라곤 기계 특유의 미약한 잡음뿐이었다. 그 정적이 불편이나 화를 뜻하는 건지, 아니면 일차원적인 당황인지는 구분할 수 없었다. 명현은 속을 꿰뚫어 보기 어려운 사람이었으니까.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 있는 지금은 더더욱.
“김민재를 꺼내든, 거기 처박아 두든. 회장님 선택이시겠죠. 어떤 선택을 어떻게 하실지, 기대할게요.”
-⋯⋯그래. 내일은 회사에 들러라.
“내일은 안 됩니다. 그 사람 달래 줘야 하거든요. 제가 좀 다쳐서 많이 놀랄 거예요. 모레 찾아뵐게요.”
-다치다니? 어딜 다쳐?
명현의 음성에 파동이 많아졌다. 그러나 사현은 사사건건 그의 의문을 풀어 줄 여유가 없었다. 놀란 우영이, 일그러진 우영이 눈앞에 아른거려 신호도 구분이 안 될 지경이었다.
“모레 직접 보세요. 끊습니다.”
사현이 통화를 종료했다. 떫은 입맛을 다시던 그가 운전대를 세게 움켜쥐었다. 우영을 마주할 생각을 하니 먹은 것도 없는데, 거하게 얹힌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 * *
“⋯⋯.”
사현을 마주한 우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신난 낯으로 현관에서 사현을 마중하던 그가 싸늘하게 굳어 버렸다. 표정이라곤 없는 얼굴이 낯설었다. 우영은 대개 웃음을 띠고 있는지라.
사현이 손가락으로 빗을 만들어 앞머리를 앞으로 내렸다. 그런다고 가려질 상처와 밴드가 아니었음에도 그랬다.
정적이 자꾸만 쌓여 갔다. 그 정적이 사현의 정수리와 어깨를 짓누르고 심장을 압살했다. 끝내는 압박감을 견디지 못한 사현이 주머니를 뒤져 작은 플라스틱 통 하나를 꺼냈다.
“그⋯⋯ 어, 내가 청심환, 청심환 사 왔는데⋯⋯ 이거부터 먹을, 먹을래? 그럼 가슴이 좀 덜 아프지 않을⋯⋯까?”
“⋯⋯.”
그런데도 우영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사현의 이마만 뚫어지라 응시했다. 그 눈빛이 어찌나 집요하고 또 집요한지. 사현은 뒤를 돌아 현관문을 열고 나가 버리고 싶었다. 우영의 앞에서 이런 감정이 드는 건 처음이었다.
사현이 교장실에 불려온 소년처럼 쭈뼛거리고 있는데, 드디어 우영이 입을 열었다.
“어쩌다 그랬어요.”
“어, 어어, 어⋯⋯. 그게⋯⋯.”
사실 사현은 집으로 오면서 아주 많은 상황을 예측했다. 화를 내는 우영. 우는 우영. 복수하러 가겠다며 주먹을 움켜쥐는 우영. 예상 질문도 나열했다. 어쩌다 그랬는지 묻겠지. 누가 그랬냐고 묻겠지. 아프진 않냐고, 병원에서는 뭐라고 했냐고, 흉터는 안 남냐고. 우영이 다쳤을 때, 제가 물었던 질문을 반복할 거라 생각하고 그에 맞는 답변도 준비했다.
헌데 어째서인지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김민재가 찾아 왔는데, 쫓아내려고 하다 보니 이리됐다. 엄마를 천박한 말로 까 내리는 바람에 이성이 날아갔다, 등등. 아프고 슬픈 얼굴로 사실을 토로하면 되는데 왜 이리 어려운지 모르겠다.
“어쩌다가, 그랬냐고.”
우영이 한 발자국 사현에게 다가왔다. 그의 커다란 그림자가 사현을 한입에 집어삼켰다. 사현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 뉴스, 내가 화 벤처 투자 사장이 된다는 뉴스, 그거 보고 김민재가 갤러리에 찾아 왔었어.”
“그 사람이 그랬어요?”
“아니⋯⋯.”
“그럼요?”
“내가⋯⋯.”
사현이 말을 마치지 못하고 꿀꺽, 단어를 먹었다. 우영의 눈이 가늘어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형이 뭐요?”
“내가⋯⋯ 그랬어.”
“⋯⋯.”
“그러니까⋯⋯ 내가 내 이마를 찍었⋯⋯다고.”
사현이 두 손으로 허공을 움켜쥐고 자신의 이마를 내리치는 행동을 흉내 냈다. 우영의 눈매가 비죽 위로 솟구쳤다. 다른 사람이 그에게 상해를 입혔다는 것만으로도 눈이 까뒤집힐 것 같은데. 자기가 자기 손으로 직접 그랬단다. 우영은 기도부터 오장육부까지 비비 뒤틀려서 죽기 직전이었다.
우영이 벅벅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더할 나위 없이 이성적인 사람이 자해했다는데, 이상하진 않았다. 언젠가 괴한이 집으로 쳐들어왔던 날, 그래서 제가 다친 날. 남자를 죽이고 자신의 허벅지를 찌르면 정당방위가 될 거라 했던 사현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아마 비슷한 상황이었겠지. 후계에서 밀려났다는 걸 안 민재가 나긋하게 자초지종을 캐물었겠는가. 또 온갖 천박한 말을 지껄이며 사현의 멱살을 흔들었겠지.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사현은 자신의 피를 내어주고, 민재를 큰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을 테였다.
하지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 조막만 한 얼굴에 상처 낼 때가 어디 있다고 저리 큰 상처를 달고 왔어. 저 작은 몸뚱이를 나도는 피가 얼마나 된다고 그걸 흘리고 다녀. 우영이 어금니를 꾸욱 세게 씹었다가 놨다.
“그렇게 이마를 찍는 순간에, 내 생각은 안 났어요?”
“났어⋯⋯.”
“그런데도 그랬어요? 형한테 나는 뭐예요, 대체?”
“미안.”
사현 딴에는 정말 우영을 위해서 그런 거였다. 그를 위해 갤러리를 버릴 결심을 했고, 그를 위해 명현과 손잡았다. 모든 정성을 다해 우영을 쥐고 있으려고, 다른 걸 다 놓았단 말이다.
하지만 변명임을 안다. 통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상처를 보는 우영의 심경이 어떠할지 통감하고 있었으니까.
순순히 죄를 인정하는 사현에 우영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한참 사현을 응시하던 그가 아무런 말 없이 뒤를 돌았다. 커다랗고 두꺼운 등은 항상 포근하고 따뜻했는데. 오늘은 참으로 매몰찼다.
어쩔 줄 모르고 손가락만 꼼질거리던 사현이 다급하게 우영을 불렀다.
“우영아.”
“왜요.”
우영이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대꾸했다.
“나 아파.”
“⋯⋯.”
우영의 걸음이 뚝 멈춰 섰다. 사현이 헐레벌떡 구두를 벗어 던지고 우영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고는 셔츠 깃을 비죽 빼 보였다.
“여기, 이거 보여? 여기가 이렇게 다 젖을 만큼 피가 콸콸 났어.”
“⋯⋯.”
“엄청 크게 찢어져서, 엄청 많이 꿰맸어. 지금도 어지러운 것 같아. 피를 얼마나 흘렸는지, 배도 고파. 우영이 네가 라면 끓여 주면 진짜, 진짜 잘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픈 것도 좀 괜찮아질 것 같은데⋯⋯.”
사현이 어울리지 않게 더듬거리며 단어를 쏟아냈다. 애처로운 얼굴은 덤이었다. 아래로 처진 눈꼬리와 서러움이 담뿍 담긴 눈동자가 유약하고 가냘팠다. 우영이 그 모습을 무시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가 질끈 눈을 감았다가 뜨며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하아⋯⋯. 형 되게 밉다.”
“사랑해.”
“진짜, 너무 미워.”
“사랑해, 우영아.”
사현이 냅다 우영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런 사현을 방관하던 우영이 푸욱, 한숨을 내쉬며 그를 마주 껴안았다. 어째 단 한 번도 사현을 이긴 적이 없다. 그런데도 억울하거나 분하지 않으니 큰일이었다.
우영이 끓여 준 라면으로 거나하게 식사한 사현은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상처에 물이 닿으면 안 되는지라, 우영이 그와 동행했다. 사실 혼자서는 못 씻겠다고, 구급대원이 물 닿으면 큰일 난다고 했다며 온갖 유난을 다 떨었다.
우영은 별다른 말 없이 사현의 목욕 시중을 들었다. 몸을 다 닦고, 이제는 머리를 감겨 주는 중이었다.
“온도 괜찮아요?”
“응. 좋아.”
욕조 턱에 기댄 사현이 나른한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칼을 조심히 빗어 넘기는 우영의 손길이 참 좋았다.
우영이 사현의 이마와 머리칼의 경계선에 손을 얹고, 거품을 씻어 냈다.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설핏 미간까지 찌푸린 게 제법 진지했다. 사현은 그 얼굴을 야금야금 훔쳐보며 사심을 채웠다. 그림 그릴 때나 볼 수 있는 표정인데.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마냥 좋았다.
뒷마무리를 마친 우영이 수건으로 머리칼을 꼭꼭 눌렀다. 그러다 꾸역꾸역 모른 척하고 있던 밴드와 눈이 마주쳤다. 꽤 두꺼운 밴드 위로 피가 배어 나온 게, 제 볼과 턱을 할퀴었던 칼자국보다 깊은 상처 같았다.
우영의 검지가 그 주위를 느리게 배회했다. 이질적인 밴드가 사현의 멀끔한 이마와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았다. 우영이 코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프지 좀 마요.”
“응.”
“다치지도 말고, 울지도 마요.”
“응.”
사현이 얼른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몸뚱이도, 마음도 넝마짝이라 가능할진 모르겠지만, 우영이 아프지 말라 했으니 최대한 노력할 것이다.
우영이 또 한숨을 거듭했다. 가슴이 허하고 머리가 텅 빈 것처럼 공허한 게, 한순간에 전 재산을 잃은 듯한 상실감이 들었다. 아니, 차라리 돈을 잃었다면 이다지도 황망하진 않을 것이다.
“형이 일찍 퇴근한다고 아무것도 모르고 허허실실 웃고만 있던 내가 얼마나 한심한지 알아요?”
“미안.”
사현은 오늘따라 대답이 빠르고 짧았다. 괜히 구구절절 변명을 덧붙여 봐야 우영의 마음을 추스르는 데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우영이 잠시 천장을 바라보며 숨을 골랐다. 그러다 넌지시 물었다.
“상처 봐도 돼요?”
“아니.”
이번 답 역시 단칼에 나왔다.
“⋯⋯.”
우영의 입이 비죽 못마땅하게 뒤틀렸다. 사현이 그런 우영의 볼과 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직 괴한이 휘둘렀던 칼에 베인 상처가 연하게 남아 있는 곳이었다.
“보지 마. 보면 가슴 아파. 심장에 쿡 박혀서 잠도 안 와.”
우영이 사현의 손을 낚아챘다. 그리고 물에 젖어 축축한 손바닥에다 입술을 묻었다.
“그걸 알면서, 그런 상처를 달고 왔어요?”
“⋯⋯미안.”
“보고 싶어요. 보면 슬플 것 같긴 한데, 그래도 형이 얼마나 다쳤는지 알아야겠어요.”
우영이 어울리지 않게 고집을 부렸다. 사현이 으음, 탁음을 내며 고민했다. 그러다 고개를 주억였다. 허락이었다. 저 역시 우영이 다쳐 오면 상처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못 견딜 것 같아서.
우영이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처럼 신중한 표정으로 밴드를 떼어 냈다. 사현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무너지는 그의 표정을 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
우영은 현관에서 사현을 처음 마주했을 때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제 상처는 잘 벼려진 칼에 베여 길고 깔끔하게 찢어졌었는데. 사현의 상처는 ‘찢어졌다’기보다는 ‘터졌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깨끗하고 보드랍던 피부가 울룩불룩하게 우그러져 있고, 의료용 실이 그것을 기워 맞추고 있었다. 연고와 피가 마구 엉겨 상처를 제대로 관찰할 수 없는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우영이 볼 안쪽 살을 짓이기듯 깨물었다. 보통 상처가 아닐 것이라 가늠은 했다만, 직접 눈으로 보니 머리는 물론, 날갯죽지까지 후끈해졌다.
한참 상처를 들여다보던 우영이 다시 밴드를 꼼꼼히 붙였다. 사현이 그제야 반짝 눈을 떴다. 난도질당한 이마와 달리 여전히 맑고 예쁜 눈동자가 드러났다. 우영이 그의 콧잔등에다 꾹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병원엔 혼자 갔어요?”
“아니. 구급차.”
“⋯⋯구급차에서 응급 처치만 하고 바로 왔단 말이에요?”
“응. 대충 꿰매 달라고 했어. 김민재가 현행범으로 잡혀갔거든.”
“그거랑 형이 제대로 된 치료를 안 받은 거랑 무슨 상관이에요?”
“아들이라면 껌뻑 죽는 그 새끼 엄마가 가만히 있겠니? 또 너한테 해코지하면 어떡해? 그래서 얼른 집에 온 거야.”
“아니, 그래도 그렇지. 병원도 안 들렀다가 오면 어떡해요.”
“할 건 다 했어. 소독하고, 꿰매고, 밴드 붙이고. 그거 말고 또 뭐가 있다고.”
사현이 몹시 상투적인 음성으로 말했다. 타인의 것도 아니고 자신의 피부를 기웠으면서 지나치게 무심했다. 우영의 만면이 일그러진 건 당연지사였다.
“⋯⋯.”
싸늘하게 내려앉는 우영의 시선에 사현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의 입꼬리가 어색한 호선을 그렸다.
“⋯⋯내일이라도 병원 갈까? 같이 가 줄 거지?”
“갔다가 피부과도 들러요. 저 가던 곳이요. 이제 안 가도 돼서 좋아했는데. 환자랑 보호자랑 바뀌어서 가게 생겼네요.”
우영이 조곤조곤 사현을 비꼬았다. 그런데도 사현은 그저 좋다고 빙긋 웃기만 했다. 병원이고 뭐고, 우영과 종일 비비적거릴 걸 생각했더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피부과 마치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글쎄요.”
“아, 왜. 가자. 응? 내가 맛있는 거 사 줄게.”
사현이 우영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떼를 썼다. 그저 천진한 모습에 우영이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항상 이성적이고 예민한 사람이. 자기 자신과 관련된 것에는 몰상식하고, 무디고, 천진하다. 그의 연인인 우영에게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괴롭고 답답한 버릇들이었다.
“하아⋯⋯. 네, 그러든가요.”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다지도 사랑하는데.
* * *
사현은 우영에게 당분간 호텔에서 머물 것을 명령했다. 언젠가 우영의 두 번째 전시 오픈이 끝나고 이틀간 머물렀던 그 호텔이었다. 집에서 그런 일이 있었기도 하니, 다른 곳에 머무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결제는 현금으로 했고, 머무는 곳은 제인을 비롯한 여타 최측근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우영은 간단히 크로키 북과 연필, 지우개 등만 챙겼다. 혹 답답해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휴가 같다며 좋아했다. 각양각색의 룸서비스를 시켜 먹을 수 있는 게 한몫 단단히 한 것 같았다. 사현 역시 출근하지 않고 호텔에서 일을 처리했다.
그리고 오전 열 시. 사현은 아직 한밤중인 우영을 두고 명현을 만나러 왔다.
명현은 사현의 이마에 대문짝만하게 붙은 밴드를 보고 가감 없이 인상을 찌푸렸다.
“민재가 그랬냐.”
“아뇨. 제가 혼자 쇼한 거예요.”
사현이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소파에 앉았다. 저번에 한번 와 봤다고 그새 익숙해지기라도 한 건지. 푹신한 소파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명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쇼라니?”
“제가 제 이마 찍었다고요. 그걸 김민재한테 떠넘겨서 현행범으로 처넣었고요.”
“⋯⋯그래도 그렇지 얼굴에다가 상처를 남기냐. 앞으로 카메라 앞에 설 일이 얼마나 많은데.”
“흉터 하나 남기는 것도 나쁘지 않죠. 그냥 서자는 후레자식이지만, 그 앞에 ‘학대당한’이 붙으면 분위기가 조금 달라지지 않겠어요?”
사현이 소파에 깊숙이 등을 묻고 다리를 꼬았다. 건방지기 짝이 없는 대답에, 건방지기 짝이 없는 자세였다. 그러나 명현은 그것을 일일이 지적하지 않았다. 다른 무엇보다 사현의 이마에 붙은 것이 신경 쓰였다.
“얼굴에 흉터 남기지 마라. 선애가 안 좋아할 거야. 네가 자기를 쏙 빼닮았다고 얼마나 예뻐했었는데.”
“⋯⋯제 앞에서 어머니 언급하지 말라고, 불편하다고 말씀드렸었는데요.”
사현의 눈이 가로로 길게 째졌다. 자신의 앞에 놓인 뜨거운 차를 명현에게 던지는 하극상이라도 저지를 기세였다. 그도 그럴 게, 명현의 입에서 선애의 이름이 나오는 것이 소름 끼치게 싫었다. 독기가 가득한 사현의 시선에 명현 역시 만면에서 표정이 씻겨 내려갔다.
“내가 왜, 그러면 안 되냐. 내가 왜 선애 이야기를 하면 안 되냔 말이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선애는 가난을 싫어했어.”
“뭐라고요?”
난데없는 말에 사현이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명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특히 네가 가난하게 살아야 할까 봐 몹시 무서워했었다. 평생 못 먹고, 못 입고 자라 와서 그게 얼마나 춥고 외로운 건지 안다고 했지. 운 좋게 잘난 집에서 태어난 나는 모르는 두려움이었어⋯⋯.”
그가 걸걸하지만 잔잔한 음성으로 조곤조곤 과거의 먼지를 털어 내기 시작했다.
* * *
명현의 이야기는 그와 선애가 만나기 전부터, 만난 후 그리고 그녀가 죽은 훗날까지 크고 넓은 범위를 아울렀다.
젊은 시절, 명현의 세계에 사랑이라는 건 아주 하찮고, 쓸모없는 것이었다. 돈도 안 되면서 일을 방해하는 같잖은 감정놀음. 생산성도 없으며, 유치하기까지 한 것.
그래서 딱히 환상을 가지거나 바란 적이 없었다.
명현은 으레 대기업 후계가 그러하듯, 부모가 짝지어 준 여자를 만났고, 결혼도 했다. 그게 원화였다.
원화는 아름다웠고, 기품 있었다. 당시의 ‘사모님’이라는 직업에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여자였다. 말도 많이 없었고, 남자가 하는 일에 조언을 얹지도 않았다. 항상 집에 있었으며, 가끔 또래의 사모들과 다과 모임을 가지는 게 다였다.
명현은 그녀에게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물론 흥미도 없었다. 그는 한창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는 대한민국 경제에 올라타 회사를 키우는 것에만 사력을 쏟았다.
대충 가늠하기로서니, 원화 역시 그것을 썩 좋아하는 것 같았다. 명현의 성공. 화 그룹의 성공. 그것은 곧 그녀의 성공과 직결했으니까. 그러다 철저한 계획 아래에 민재를 낳았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가정이었다. 돈이 많고, 평화롭고, 단단한 가정. 여타 상류층의 부부처럼 재산으로 싸우지도 않았고, 이성 문제도 없었다.
명현이 선애를 만나기 전까진 그랬다. 원화의 본가가 망하기 전까진 그랬다.
두 사건은 그 어떠한 예고와 기미 없이 돌풍처럼 몰아쳤다.
명현이 다 쓰러져 가는 공장에서 선애를 만났고, 첫눈에 반해 만남을 이어 갔다.
하등 쓸모없는 것이라 여기던 사랑이었는데. 그 사랑으로 세상이 달라졌다. 꿉꿉한 도시 공기가 달콤해졌고, 딱딱한 아스팔트 바닥은 꽃밭이 됐다. 흘러가는 시간이 아쉬운 건 난생처음이었다.
그리고 그즈음, 원화의 집이 망했다. 경제가 역동하던 시기였다. 망할 수 없는 기업이 망하고, 성공할 수 없는 노동자가 단숨에 상류로 솟구치던 때였다.
당시의 원화는 몹시 괴로워했다. 집. 외모. 지성. 무엇하나 하자가 없는 완벽한 여자였는데. 가장 큰 주춧돌이었던 집이 무너졌으니 인생이 흔들리는 듯한 공포를 느꼈을 터였다. 그래서 명현이 자신을 버리면 어쩌나, 전전긍긍이었다.
허나 명현은 원화를 내치지 않았다. 주위에서 원화가 쓸모없는 패가 되었으니 버리라 조언했지만, 그냥. 사람이 사람을 버리는 건 안 되는 일이라 생각했다.
사실 과거의 명현이었다면, 그러니까 선애를 만나기 전의 명현이었다면 원화를 내쳤을 것이다. 회사에 이득이 되니 전략적으로 한 결혼이다. 그런데 그녀의 배경이 무너졌으니 더는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 버리자. 새로운 카드를 찾자. 그런 생각을 했겠지.
그러나 선애가 명현을 바꾸었다. 돈만 좇던 경주마에서 인간으로 진화한 것이다.
명현은 원화가 안쓰러웠고, 충분히 회복할 때까지 시간을 주기로 했다.
그쯤 원화는 명현의 외도를 알아차렸다. 그래도 무어라 하지 않았다. 법적 부부라는 권력만으로는 명현을 옭아매기 힘들었으니까. 괜히 들먹였다가는, 위자료를 거나하게 줄 테니 이혼해 달라는 소리나 들을 게 뻔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품에 안은 갓난쟁이를, 그러니까 민재를 화 그룹의 주인으로 만들어야 했다. 제가 잃은 모든 것들을 민재가 대신 이루어서, 저를 과거의 그 ‘완벽한 원화’로 돌려놔야 했다.
명현과 원화는 서로 나돌기 시작했다. 명현은 선애에게 집중했고, 원화는 명현 몰래 비자금을 만들거나, 아랫사람을 구슬려 불법적인 루트로 돈을 빼돌리거나, 등신 같은 사기꾼의 말에 속아 별 볼 일 없는 회사에 왕창 투자했다가 크게 잃기를 반복했다. 그녀가 한 짓 때문에 화 그룹이 좋지 않은 일로 경제면에 나기도 일쑤였다.
하지만 명현은 그 역시 눈감아 주었다. 일종의 방황이라 생각했다. 사실 그녀에게 신경 쓸 만큼의 여유가 없었던 것도 있었다. 선애가 임신 소식을 알려 왔기 때문이다.
명현은 그 사실을 원화에게 통보했다. 예상외로, 원화는 별다른 불만 없이 고개를 주억였다. 어떤 여자를 어떻게 만나든 상관없으니 자신과 법적으로 부부의 관계만 유지해 달라고 했다. 이혼만 하지 않는다면, 뭐든 눈감아 주겠노라 분명 그리 말했었다.
등신 같은 명현은 그 말을 믿었고.
그렇게 선애가 집으로 들어왔다.
그 후, 당신이 알고 있는 증오와 신파가 시작됐다.
그동안 명현은 뭘 했냐고? 원화와 싸웠다.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이혼하자고 했다. 매스컴에 기사를 어떻게 흘려도 좋다. 나는 본처를 두고 바람 난 파렴치한이 맞으니 얼마든지 더럽히고 욕하라 했다.
다만, 선애는 안 됐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피해자였다. 그저 저의 알량한 이기심에, 지극한 사랑에 휩쓸린 여자일 뿐이란 말이다.
명현은 원화가 보이는 일련의 행동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자신을 사랑했다면, 단 한 순간이라도 그런 적이 있다면 수긍했을 것이다. 온갖 패악을 다 감당할 자신도 있었다.
허나 아니지 않은가. 자신이 그랬듯, 원화 역시 자신을 하나의 도구로 봤다. 그러니 명현이 타인을 사랑하든 말든, 원화가 이리도 분노하며 선애를 괴롭힐 필요가 없단 말이다.
원화는 그저 자존심이 상한 듯했다. 반반한 얼굴과 달리 말도 어눌하고, 멍청하고, 출신도 뭐 같은 선애가 통렬히도 싫은 모양이었다.
명현은 나름대로 노력했다. 선애의 거처를 따로 마련해 보기도 하고, 원화를 추슬러 보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순간, 회사에 일이 터졌다. 화 그룹 전체가 휘청거릴 만큼 큰일이었다.
명현은 바빴다. 이리저리 다니며 피곤과 스트레스를 쇠똥구리처럼 굴리고 또 굴렸다. 자연히 집에 들르는 빈도가 줄었다. 그래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통화로, 비서의 보고로 확인하는 선애의 안위가 나쁘지 않았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명현은 선애가 락스에 얼굴을 처넣어서 실명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선애는 많이 힘들어했다. 명현이 어떻게 어르고 달래고 사랑해 줘도, 차도가 없었다. 이미 돌아올 길을 잃은 사람처럼 굴었다. 그나마 생기가 돌 때가 있었는데, 바로 어린 사현을 품에 안고 있을 때였다.
그녀는 흐리멍덩한 시선으로 사현이 어디가 어떻게 예쁜지, 무엇이 사랑스러운지, 이제 제법 컸는데도 아직 손과 발이 작다며, 저를 닮지 않고 명현을 닮아 학교 성적이 좋다며,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게 기특한데 또 안쓰럽다며 종알종알 말을 이었다.
명현은 그런 선애를 보며 열심히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가 보기에도 사현은 썩 괜찮은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잘 키우면 퍽 멋지게 성장할 것 같았다.
선애는 부탁했다. 사현을 풍족히 살게 해 달라고. 이 예쁜 얼굴을, 잘난 머리를 썩히지 않고 마음껏 펼치며 살게 해 달라고. 명현은 그녀의 마른 손을 쥐고 그러겠노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선애의 부탁은 날이 갈수록 늘어갔다.
그녀는 원화가 무섭다고 했다. 명현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원화의 머리에 붙은 뿔이 점점 더 두껍고 뾰족하게 자란다고 했다. 어제는 사현의 식사에도 락스를 넣었다고 했다.
그러니 자신을 버려 달라고 했다. 원화가 위기감을 느끼지 않도록, 자신을 보듬어 주지 말라고 했다. 사랑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사현에게도 다가오지 말라고 했다.
이전에는 무언가를 해 달라는 부탁만 했었는데. 그때부터는 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밖에 없었다. 명현은 이 집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살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이미 이성의 범주를 벗어난 선애는 절대로 안 된다고 까무러칠 듯 비명을 질러 댔다. 이 집에 있어야 가난하지 않다고 했다. 이만큼 커다란 집이어야 사현이 행복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명현이 이보다 큰 집에서, 이보다 비싼 집에서 편히 살게 해 주겠노라 설득했지만 먹히지 않았다. 빛을 잃은 그녀의 눈동자는 탁하고, 어두웠으며 몹시 메말라 있었다.
그리고 비로소, 명현은 선애가 완전히 무너졌다는 걸 깨달았다.
선애가 죽었다.
사현이 덩달아 죽겠다고 손목을 그었다.
선애가 죽고, 명현이 뭘 했냐고? 글쎄. 명현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세상 전체가 멈춘 것 같았다. 호수에 잠긴 것처럼 귓구멍이 웅웅 울렸고, 초점을 잡지 못한 시선이 중구난방으로 나부꼈다.
배경이 규칙 없이 바뀌었다. 선애가 죽은 욕조맡일 때도 있었고, 비서가 선애를 안치할 자리를 알아 왔다고 말해 그곳에 가 보기도 했고, 중요한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해외 바이어도 만났고, 원화를 욕하고 원망하기도 했고, 사지가 흐물흐물하게 녹을 정도로 술을 마시기도 했다.
당시의 명현은 슬픔도 맹렬하게 울부짖지 못하는 등신이었다.
장례식장에는 가지 않았다. 사현을 볼 낯이 없어서.
부끄러웠다. 세상 모든 걸 가진 자신이. 명예와 권력을 두 손 가득 쥔 자신이 그 마르고 작은 여자 하나를 지켜 내지 못했다는 게.
그리고 명현은 지금도 여전히 수치스럽고 부끄럽다.
사현의 앞에만 서면 책상 아래로 기어들어 가 숨고 싶었다.
그런데도 사현이 보고 싶었다. 선애의 얼굴을 쏙 빼닮아서는 표독스러운 표정을 짓는 게, 저를 노려보는 게 너무 기특해서.
마치 무너졌던 선애가 다시 일어난 것 같아서.
* * *
“내가 우습고 같잖지? 선애가 자기를 보듬지 말라고 했다고, 너에게 무관심을 표하라 했다고 곧이곧대로 말을 들었다는 게 말이다.”
“⋯⋯.”
“당시의 나는 어렸다. 나이가 어린 게 아니라, 감정에 어렸어. 오로지 선애를 통해서만 배우고 익혀서, 그 사람이 무너지고 나니 사고가 제대로 굴러가질 않더라.”
“⋯⋯.”
“뭐가 됐든 선애가 해 달라는 건 다 해 주고 싶었다. 그러면 모두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어. 안일했지. 멍청했고.”
명현이 과거를 되뇌며 쌉싸름하게 웃었다. 그의 검지가 소파의 팔 받침대를 아스라이 문질렀다.
“⋯⋯.”
사현은 입을 꾹 다문 채 명현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가 근 한 시간 동안 털어놓는 말들을 듣는 내내 한 생각이라곤 ‘지랄하네’였다.
결국 모든 게 그의 실수이고, 고집이고, 잘못이었다. 어쨌든 그의 의도가 그게 아니었대도 엄마는 그의 그릇된 판단에 치여 아팠고, 울었고, 끝내는 죽었다.
그래서 그를 믿을 수가 없었다. 제가 아무리 어렸다고 한들, 바보도 아니고. 명현이 알게 모르게 엄마를 돌보고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헌데 왜 명현의 표정은 저리도 진실 되었나. 어찌하여 엄마의 죽음을 운운하며 죄책감을 가지나. 사현이 아는 명현은 뻔뻔하고, 차갑고, 무심한 사람인데.
사현이 꾹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말한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또 믿고 싶기도 했다. 엄마가 조금이라도 더 사랑받았으면 해서. 창백한 그녀의 옆을 지키고 있는 명현의 모습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서.
한참 명현을 응시하던 사현은 결국 적절한 말을 찾지 못했다. 대신 불모지처럼 마른 목구멍에 뜨거운 차를 쑤셔 넣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침묵을 부유했다. 사현이 바늘로 콕콕 쑤시는 것처럼 따끔거리는 이마를 매만질 때였다.
명현이 으음, 목을 가다듬었다. 차를 연거푸 마시기도 했고, 두꺼운 시계를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사현이 그런 명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쓸데없는 행위가 많아졌다는 건, 불편한 이야기를 할 거라는 전조였다.
답지 않게 수 분간 머뭇거리던 명현이 느지막이 입을 열었다.
“원화 한번 만나 보는 게 어떠니.”
“⋯⋯뭐라고요?”
사현이 눈을 크게 떴다. 너무 어이가 없는 말이라 자신이 제대로 들었는지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다. 구구절절 변명하면서 온갖 불쌍한 척은 다 해 놓고. 뒤로 이은 말이 이따위라니. 사현의 낯이 해괴하게 뒤틀렸다. 명현이 그의 혐오 어린 시선을 슬쩍 피했다.
“너한테 사과하고 싶다더라.”
“그럴 리가요.”
사현이 대번에 비아냥을 내놓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원화의 사과라니. 우습지도 않았다. 분명 사과하겠다고 와서는 뺨을 올려붙이겠지. 아아,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제인에게 전화해 갤러리 경비를 삼엄히 하라 말해야겠다. 우영의 그림을 다시 잃을 생각일랑 추호도 없었다.
명현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 아마 진심은 아닐 게다. 민재를 빼내 달라는 걸 내가 거절했거든. 민재가 나 몰래 회사를 팔려고 했다는 게 괘씸해서 빼내 줄 생각이 없다고 했다. 자기 위치도 모르고 행패를 부리고 다니는 것도 더 이상 못 봐주겠다고 했고. 그러니 널 만나고 싶다고 하더구나.”
“그 여자가 무슨 짓 할 줄 알고 절 찾아오는 걸 방관하세요?”
“그저 나처럼 우매하고, 나이 든 사람일 뿐이다. 그 사람이 너한테 무슨 해를 가할 수 있겠니.”
그 말에 사현의 입술이 삐뚜름히 뒤틀렸다. 아무래도 명현은 여태 원화와 헛살아 온 모양이다. 우매하고 나이 들었다니, 원화는 그런 형용사로 폄하될 사람이 아니었다. 훨씬 지독하고 못된 사람이다.
사현이 좌우로 머리를 흔들었다. 그 하얗고 예쁜 얼굴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싫다고 전해 주세요.”
“한번 만나 봐라.”
“제가 왜요.”
“불쌍한 사람이잖니.”
명현의 마지막 문장이 사현의 뒤통수를 세게 후려쳤다. 사현은 찰나, 숨통이 확 조이는 걸 느꼈다. 자칫 방심했다간 과호흡으로 눈 뒤집고 까무러칠 것 같았다.
의식적으로 숨을 잡았다가 풀길 반복하던 사현이 명현을 노려봤다.
“너무 이기적이신 거 아니세요? 온 문제의 시발점이시면서, 주제넘은 선의까지 종용하시게요?”
“사현아.”
“지긋지긋하고 역겹습니다, 회장님.”
사현이 더 이상 대화를 이어 가기 싫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짜증 나고 무쓸모한 말을 주고받을 줄 알았으면 그냥 우영의 품에 안겨 게으름이나 피울 걸 그랬다.
사현이 거친 콧김을 뿜으며 뒤를 돈 순간이었다.
“원화와 이혼할 거다.”
사현의 구두가 뚝 멈춰 섰다. 명현이 엄지로 찻잔 주둥이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을 덧붙였다.
“다만, 야멸차게 버리고 싶지는 않아. 네 말마따나 모든 문제의 시발점이 나잖니. 그 사람도 피해자야. 모든 가해는 내가 했다.”
“⋯⋯그런데 왜 제가 그 가해의 찌꺼기를 대신 치워 드려야 합니까. 저도 피해자인데요. 양심이 있으시면 저한테 용서하라 말하지 마세요.”
“그런 말 한 적 없다.”
“그게 그 말이죠.”
“궁금하지 않니?”
“네?”
사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뒤를 돌았다. 명현은 차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렁이는 차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건지, 아니면 그 너머의 다른 것을 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원화는 자존심이 세.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그래도 될 만한 환경에서 자라 왔거든.”
“⋯⋯.”
“근데 그 사람이 너한테 사죄한다고 하지 않니.”
명현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 있었다. 순수한 웃음인지, 조소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연한 미소였다.
“그 사람 정수리를 내려다볼 기회를 주는 게다. 흔한 기회는 아니지.”
“⋯⋯.”
사현의 손끝이 움칠, 경련했다. 원화의 정수리를 내려다볼 기회. 실로 혹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혹할 말을 명현이 했다는 게 놀라웠다.
“나는 널 실망시키지 않을 거다, 사현아.”
평온하나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였다. 사현이 엄지손톱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긁었다. 자꾸 마음이 약해졌다. 명현과 관련한 감정이라곤 온통 검었는데. 구질구질한 그의 변명이 역겹기 그지없었는데.
근래 반복됐던 여러 일과, 우영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과, 자꾸 회상되는 과거가 사현을 지치게 했다. 그래서일까. 꼭 묻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남세스러워서 쉽사리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잠깐 주춤거리던 사현이 마른 입술을 핥으며 호흡을 골랐다.
“회장님.”
“왜.”
“저 사랑하세요?”
“뭐?”
명현이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아무래도 사현의 입에서 나왔다기엔 지나치게 서정적인 질문이라. 무형물에 두들겨 맞은 듯한 명현의 반응에 사현이 고저 없는 음성으로 조곤조곤 다시 물었다.
“아들로서, 저를 사랑하세요? 아끼고 보듬어 주고 싶은 그런 감정 말이에요. 가지고 계시냐고요.”
덧붙여진 설명에 명현은 그제야 질문을 이해했다. 그가 으음, 목울대를 일렁이며 고민했다. 아들로서의 사랑이라. 그건 선애를 사랑하는 감정과는 조금 다른 계열 같았다.
“솔직히 말하면 잘 모르겠다. 내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경험한 건 선애 하나뿐이어서.”
명현은 그 말을 던져 놓고 조금 더 고민했다. 턱을 쓰다듬거나 눈썹 뼈를 매만지며 생각을 정리하던 그가 떠오른 것들을 차례로 나열했다.
“네가 다친 꼴을 보니 열이 뻗친다. 네 갤러리가 잘되면 기분이 좋고. 네가 똑똑하고 야무져서 뿌듯하다. 내가 같잖은 패악으로 너를 마음대로 불러냈다가, 또 검찰에 보냈다가, 별별 짓을 다 하는데 눈 하나 꿈쩍도 하지 않는 걸 보면 기특하기도 하다.”
“⋯⋯.”
“이걸로는 부족하니?”
명현이 되묻는 질문에 얕게 들썩이던 사현의 가슴팍이 잠깐 움직임을 멈췄다. 갈비뼈 안쪽이 욱신거렸다. 파도 위를 방황하는 것처럼 배 속이 울렁거리기도 했다. 목젖이 따끔따끔하고, 눈알이 뜨거웠다.
사현이 명현을 집요하게 바라봤다. 명현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받아 냈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눈동자 두 개가 직선으로 맞닿았다. 그리고 그 시선이 막 섞이려는 무렵, 사현이 등을 돌렸다.
“⋯⋯가 볼게요.”
명현은 그런 사현을 잡지 않았다. 미묘하게 흐트러진 사현의 표정에서 제법 많은 감정을 읽어냈기 때문이다. 당황, 놀람, 의아함, 그리고 모호한 안도. 또는 연약한 환희.
명현의 대답이 그가 말한 ‘사랑’에 부합한 모양이었다.
사현이 막 회장실을 나서기 직전이었다. 명현이 미적지근하게 식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흘리듯 물었다.
“갤러리는 언제 정리할 거냐.”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사현의 목덜미가 흠칫 경련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러고 보니 피로 점철된 자신의 명패는 어찌 됐으려나. 경찰이 증거품으로 가져갔으려나. 뭐, 더는 필요 없으니 구태여 찾을 필요는 없겠지.
크리스털 명패에 적힌 [관장 백 사 현]이라는 글씨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조만간요.”
답지 않게 말을 우물거린 사현이 문을 열었다. 탁하게 흘러들어오는 바깥 공기에 눈이 시렸다.
* * *
사현은 그날 저녁, 우영과 함께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대충 배달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하고는 소파에 앉아 TV를 봤다. 사실 둘 다 딱히 TV를 즐기는 편이 아니라서 채널을 돌리고 돌리다 별 볼 일 없는 버라이어티 쇼에서 멈췄다.
사실 대개 뉴스를 봤었는데, 이번엔 부러 보지 않았다.
폭행으로 구속된 화 그룹의 전 후계자에 관한 뉴스. 혜성처럼 등장한 사현의 존재, 화 그룹의 서자, 명현의 불륜, 그의 불륜 상대, 명현의 죄와 잘못 태어난 사현의 존재에 갑론을박을 벌이는 시민. 없어진 간통죄를 다시 만들자는 정치인까지.
온갖 입들이 사현을 씹어 대서 진절머리가 났다.
우영이 사현의 귓불을 조물거렸다. 버릇이자 습관으로 굳어 버린 행동이었다. 사현은 그런 우영의 가슴팍에 기대 무심하게 TV 화면을 응시했다. 잔잔하게 흘러오는 우영의 심장 박동이 그렇게 편안할 수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사현이 문득 턱을 위로 올리고 우영을 쳐다봤다.
“자기야.”
“네.”
“오늘 낮에 어디 갔었어? 나 회장님 만나고 호텔 돌아왔을 때 없었잖아.”
“아래층에 헬스장 있더라고요. 운동했어요.”
우영이 단조로이 대꾸했다. 높낮음도 거의 없고, 떨림도 없는 음성이었다.
사현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운동했다고 하기엔, 아주 깔끔한 몰골이었는데. 우영은 보통 전신이 땀에 흠뻑 젖을 정도로 격렬하게 운동한다. 헌데 오늘 낮, 사현보다 늦게 호텔 룸으로 돌아온 그는 멀끔한 차림에 보송보송한 얼굴이었다.
그 말인즉슨, 우영은 헬스장에 가지 않았고 지금 자신에게 거짓을 고하고 있다는 걸 뜻했다.
“⋯⋯.”
사현이 이걸 캐물을까, 말까 고민했다. 평소 성격이라면 어디 감히, 누구 앞에서 거짓을 말하는 거냐고 역정을 냈을 텐데. 우영이 저리 능청맞게 구니 진짜 그런가, 싶기도 하고. 설사 거짓이라도 이유가 있으니 숨기는 거겠지, 싶었다.
사랑이 참 많은 변명이 되어 준다.
우영은 뚫어지라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혹여 거짓말이 들킬까, 애써 눈을 피하는 모양새였다. 그걸 눈치채지 못할 리 없는 사현이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조금 놀려 볼까. 아니면 모른 척 넘어갈까.
사현이 즐거운 고민을 하는데, 딩동. 초인종 소리가 집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냉큼 일어나려는 우영을 만류한 사현이 직접 몸을 일으켜 인터폰으로 다가갔다.
화면 속에 있는 사람은,
“⋯⋯.”
파랗게 질린 원화였다.
사현은 어떠한 말이나 행동을 취하지 않고 인터폰을 뚫어지라 바라보기만 했다. 기다리다 못한 우영이 그를 뒤따라 인터폰 앞에 섰다. 그리고 화면 속의 인영을 보며 꾹 입술을 겹쳐 물었다.
“형의 가족 아닌 가족분들은 형을 하루라도 안 보면 입 안에 가시가 돋나 봐요.”
우영과 어울리지 않는 비아냥에 사현이 실소했다.
“그러게. 내가 그렇게⋯⋯ 좋은가⋯⋯.”
그가 느릿하게 대답하며 원화를 살폈다. 썩 화질이 좋지 않은 화면 속의 원화는 창백하기만 할 뿐, 곱게 빗어 넘긴 머리며 귀와 목에 주렁주렁 단 액세서리며 입술을 한 치의 틈 없이 채우고 있는 붉은 립스틱까지. 평소와 전혀 다름이 없었다.
“문 열어 줄 거예요?”
우영이 사현의 어깨에 턱을 비비며 물었다.
“응. 저 여자가 나한테 사과하러 온다고 해서 집에 온 거거든.”
사현이 우영의 복슬복슬한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근데 왜 안 열어요?”
“저기 세워 두고 싶어서.”
“⋯⋯.”
“기분 뭐 같겠지? 나한테 사과하려고 온 것만으로도 주먹이 부들부들 떨릴 텐데. 문 앞에서 치욕을 기다리는 게 얼마나 짜증 나겠어.”
높낮이 없이 무심한 사현의 음성에 우영이 헛숨을 삼켰다. 열어 줄까, 말까 고민하는 게 아니었다니. 모욕감을 주기 위해 시간을 허비하는 거였다니. 사현이 이럴 때마다 조금 낯설다. 무섭기도 하고. 또 이 사람이 제 사람이라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그리고⋯⋯ 이렇게 자랄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 안쓰럽기도 하고.
우영이 사현을 뒤에서 부드럽게 껴안았다.
“형 진짜 나빠요.”
“그래?”
“네.”
“그래서 싫어?”
“아니요. 좋아요. 저는 형이 뭘 하든 좋아요.”
우영이 사현의 귓불을 가볍게 깨물었다가 놨다. 사현이 간지럽다며 킥킥거렸다. 분위기가 간지러운 봄바람처럼 살랑살랑 흘러가려는 찰나, 딩동. 초인종이 다시 울렸다.
사현이 신경질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잠깐 핸드폰을 확인하고 꾸우욱, OPEN 버튼을 할퀴듯 짓눌렀다.
사현은 원화를 집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문을 열어 주고, 서늘한 현관에 서 있는 걸 방치했다.
“⋯⋯.”
원화는 말 없이 물끄러미 사현만 바라봤다. 그의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는 우영에게는 시선 한 줌 주지 않고, 오로지 사현만 응시했다.
어찌나 집요한 눈빛인지, 우영은 자신이 그 시선을 받고 있는 것도 아닌데 볼이 다 따끔따끔했다. 이제 막 아물어 가는 사현의 이마 상처가 다시 터지는 건 아닐까, 별 바보 같은 걱정이 다 될 정도였다.
의미 없는 정적이 수 분을 잡아먹었다. 기다리다 못한 사현이 먼저 입을 뗐다.
“왜 아무 말도 안 하세요.”
“⋯⋯.”
“준비해 오신 말씀하세요.”
사현의 턱은 평소보다 하늘을 향해 있었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원화를 깔보기 위해서였다. 원화가 무슨 말을 할지 몹시 기대가 됐다. 오랜만에 설렐 정도였다. 꼭 기대하던 영화를 보러 극장에 들어선 것 같은, 세 시간을 꼬박 기다리던 놀이기구에서 제 차례가 온 것 같은, 1등이 확정된 시험 성적표를 기다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
허나 원화는 쉽게 말문을 열지 않았다. 꼿꼿하게 곧추선 채로 돌이 되어 버린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그게 묘하게 소름이 끼쳤다. 인간이 아닌데, 인간의 형상을 띠고 있는 무언가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드디어 원화가 입술을 달싹였다.
“민재, 빼 주련?”
다섯 음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다섯 음절. 하물며 조사도 생략된 문장이었다. 부탁하는 처지면서, 아니 빌러 온 처지면서 성의도 없고, 진정성도 없고, 예의도 없었다.
잠깐 굳었던 사현이 큭큭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그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원화인데. 제가 너무 많은 걸 바란 모양이다.
“싫은, 데요?”
사현이 원화의 어조를 흉내 내며 이죽거렸다.
“김민재가 하필 이마를 이렇게 만들어 놔서요. 용서해 보려고 했는데, 거울 볼 때마다, 유리에 비친 제 얼굴을 볼 때마다 부아가 치미네요.”
능청맞은 연기에 원화가 핸드백 손잡이를 꽈악 움켜쥐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민재에게 들어서 낱낱이 알고 있는데 저렇게 뻔뻔히 거짓을 토하다니. 영악하고 간사했다.
“그거 네가 덮어씌운 거라고 민재가,”
”재판까지 갈 거예요. 뭐, 제 이마 깬 처벌은 얼마 안 나오겠지만, 아시다시피 걔가 싸질러 놓은 똥이 많잖아요. 뺑소니 3건. 성폭행 8건. 폭행 12건. 살인 미수 2건. 사기 22건. 그리고 살인 교사 1건. 또 뇌물 청탁에 탈세에⋯⋯. 담당 검사가 못해도 이십오 년은 나올 거라던데.”
사현이 민재의 죄를 막힘없이 줄줄 읊었다. 수십, 수백 번을 본 자료다. 외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원화가 저지른 죄들도 빠짐없이 외우고 있다. 모자를 함께 감옥에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그림이리라.
원화가 발랄하게 조잘거리는 사현을 노려봤다. 사현이 지지 않고 그 시선을 받아 냈다. 뭐, 어쩌라고. 그렇게 노려본다고 내가 겁이라도 먹을까 봐? 그런 표정이었다.
원화의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현 상황의 우위가 누구에게 기울어있는지 너무나 잘 파악하고 있었다.
“내가 잘못했다. 우리 민재 그런 곳에 있을 애 아니야. 지금도 식사가 입에 안 맞다며 힘들어해. 조만간 화 그룹 회장실에 들어갈 애야. 그렇게 하찮은 곳에 발 들이면 안 되는 애란 말이다.”
원화가 눈을 부릅뜬 채 말했다. 꼭 연극 무대에 처음 올라간 신인 배우가 로봇처럼 또박또박 대사를 지껄이는 듯한 어투였다. 사현이 피식 실소했다.
“그 새끼는 거기 들어가서 하는 게 밥투정이에요?”
어떻게 빠져 나가야 하나, 어떻게 복수해야 하나, 계략을 꾸미는 게 아니고 엄마한테 밥이 맛없다고 징징거린다니. 멍청해서 제 상대가 될 만한 인간이 아니라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얄밉게 빈정거리는 사현의 말에 우영이 큽, 덩달아 웃음을 삼켰다. 죄수복을 입은 민재가 밥투정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사현을 지극히 괴롭히던 사람이라, 그 꼴이 된 게 몹시 통쾌했다.
만면 가득 비웃음을 띤 두 사람에 원화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요동쳤다. 천박한 출신에, 더 천박한 핏줄의 잡놈들이 제 아들을 욕보이는 게 소름 끼치게 싫었다.
가방을 움켜쥔 원화의 손이 파들파들 진동했다. 자존심을 구기고 등신 같은 사과를 거듭해야 하나. 아니면 다 때려치우고 뒤돌아 나가 버릴까.
돈만 주면 협박이든 살인이든 해 주겠다고, 시켜만 달라고 비는 놈들이 줄을 선다. 그들에게 맡기면, 이 개 같은 상황을 말끔히 끝낼 수 있지 않을까.
원화가 나쁜 생각을 거듭하고 있는데, 사현이 한 발자국 다가왔다. 그가 자신보다 조금 작은 원화와 눈을 맞추며 허리를 숙였다.
“근데 누가, 어디에 들어간다고요? 김민재가 회장실에요? 아닐 텐데. 잘못 알고 계시는 거 아녜요? 아, 혹시 말씀하시는 회장실이 화 그룹 회장실이 아닌가? 그럼 제가 오해했네요. 뭐 조그마한 식당이라도 할 생각이신가 봐요.”
사현의 하얀 광대에는 장난이 담뿍 올라와 있었다. 이 상황이 지옥보다 끔찍한 원화와 달리, 그는 즐거워 보였다.
즐겁다니.
즐겁다니.
즐겁다니!
원화는 더 이상 이 모멸감을 견딜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등신 같은 선애의 아들인 사현이 자신을 이리 취급하는 걸 두고 보기가 힘들었다.
“창녀 자식이 어딜 감히⋯⋯!”
원화가 쥐고 있던 가죽 백을 사현의 얼굴을 향해 휘둘렀다. 수천만 원짜리 명품 가방은 퍽 괜찮은 무기다. 단단하게 각이 잡힌 모서리. 빡빡하고 질긴 가죽. 묵직한 무게감. 적어도 상처 하나는, 피 한 방울은 볼 수 있길 기대했다.
커다란 가방이 부웅, 허공을 갈랐다. 사현은 그것을 보고도 피하지 않았다. 그 대신 기겁한 우영이 가방을 텁, 커다란 손으로 막아 냈다.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휙 뒤로 밀었다. 그다지 위협적인 힘도 아니었다. 더도 덜도 말고 사현을 폭력 안에서 구해내는 게 목적이었던 터라.
허나 작고 마른 데다가, 높은 힐까지 신고 있는 원화는 밀리는 가방에 휩쓸려 휘청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현관문에 기댄 그녀가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그러고는 잠깐 숨을 고르더니,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우영을 노려봤다.
저 눈엣가시. 민재가 알아서 처리하겠대서 믿고 놔뒀거늘. 사지 멀쩡하게 서 있는 걸 보니 울화가 치밀었다.
순간, 사현이 눈을 부릅떴다. 그가 음산한 목소리로 으르댔다.
“지금 눈깔을 어디로 돌리는 거예요. 빡치게.”
사현이 우영을 방으로 보내지 않고 제 뒤에 세워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에게도 무너지는 원화를 구경할 권리가 있으니까. 「나무 부두」라는 그림을 살해한 죄. 우영의 얼굴에 상처를 낸 새끼의 어미인 죄. 그것을 보상받게 하기 위함이었다. 악한 자가 벌을 받는 걸 보고 통쾌함을 느끼게 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저따위 시선에 노출되는 걸 목도하고 있을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가 이번엔 두 걸음 원화에게로 다가갔다. 보드라운 홈 슬리퍼가 현관을 디뎠으나 상관하지 않았다. 현관 조명을 등진 사현의 그림자가 원화를 천천히 삼켜갔다.
“그리고 뭐? 창녀? 우리 엄마 창녀 아니야. 엄마는 적어도 회장님이랑 사랑이라는 걸 했어요.”
“⋯⋯뭐?”
“근데 당신은 뭐 했어? 당신은 배신당한 것처럼, 세상 모든 상처를 다 받은 비련의 여자 주인공처럼 굴 권한이 없어. 회장님이랑 당신이 했던 건 그저 하나의 계약이었거든. 회사 간에, 개인 간에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이루어졌다가 파기되는 그런 계약에 불과했다고.”
“⋯⋯.”
“근데 우리 엄마는 회장님이랑 사랑을 했어. 회장님이 그러더라고. 엄마랑 같이 있으면 시간 가는 게 아까웠대. 이 콘크리트 도시가 꽃밭 같았대.”
“⋯⋯.”
“그때 기억을 잊을 수가 없어서 나라도 잡고 있고 싶대. 나를 보고 있으면 엄마가 떠오른다고 했어. 회장님은 아직도 과거의 꽃밭에서, 우리 엄마랑 웃던 그 시절을 그리워해. 거기에 당신은 없어.”
“⋯⋯.”
“처음부터 없었지. 왜? 그럴 수 없던 사람이니까.”
“⋯⋯.”
“당신들은 부부지만 부부가 아니었잖아. 서로의 배경을 이용해 먹기 위해서, 더 많은 돈을 쓸어 담기 위해서 결혼이라는 계약을 한 거지.”
원화의 얼굴에서 색이 증발하기 시작했다. 동공은 흐리멍덩하게 풀렸고, 붉게 칠한 립스틱은 보기 싫게 번졌으며, 뺨을 연하게 물들이고 있던 분노 역시 사라졌다.
사현이 멈추지 않고 그녀를 몰아붙였다.
“머리 똑바로 굴려. 아무것도 가진 거 없는 사람, 그거 이제 나 아니고 당신이야. 회장님이 버렸잖아. 집은 애저녁에 망했고. 그나마 김민재가 동아줄이었는데, 썩었지. 제대로.”
분명 나긋나긋한 음성이었다. 속삭이듯 말해서 목소리가 크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파급력이 대단했다. 우영은 당사자도 아니었는데 어깨가 안으로 말렸다. 발가락이 꼼지락거리며 땅을 팠다.
아주 먼 옛날, 사현이 고아에 보잘것없는 학벌을 운운하며 조곤조곤 자신을 평가했던 때가 떠올랐다. 그건 정말 친절한 편에 속했구나. 이제야 깨달았다.
그리고 당사자인 원화는 숨이 다 막혔다. 사현이 뱉은 문장과 단어들이 냉철하고 날카롭게 폐부를 들쑤셨다. 그녀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아래로 무너졌다. 끝내는 사현의 발치에 무릎을 곱게 접고, 머리를 조아렸다.
“내가, 내가 사과하마.”
비로소 제대로 된 사죄가 시작되는 듯했다.
사현은 무감한 낯으로 원화의 정수리를 내려다봤다. 그녀의 정수리는 상상했던 것만큼이나 특별하지 않았다. 두껍고 날카로운 악마의 뿔이나 마귀의 귀가 솟아 있을 거라고 믿었는데. 그저 평범한 인간의 머리통이었다. 그래서일까. 썩 유쾌하지 않았다.
언젠가 원화를 제 앞에 무릎 꿇리겠노라. 사죄를 받아 내고, 용서를 빌게 하겠노라, 그걸 바라며 악착같이 살아 왔거늘. 당연히 기쁘고, 웃음이 절로 나고, 제자리에서 발을 구르고 싶을 정도로 좋을 줄 알았는데. 이다지도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을 줄이야. 허탈할 지경이었다.
이렇다 할 반응이 없는 사현에 원화가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봤다. 그녀의 눈동자는 마치 인형의 것처럼 삭막했다.
“그러니 그 자리는 넘보지 마. 애당초 네 것이 아니잖니. 우리 민재 거다. 태초부터 그 자리를 위해 태어난 애야.”
“그건 당신 생각이고. 김민재는 멍청한 것도 그렇고, 성격도 그렇고 무슨 일을 하든 말아먹을 새끼야. 사실 당신도 그거 알고 있잖아. 그래서 그렇게 전전긍긍 물가에 내놓은 애 보듯 따라다니는 거잖아.”
“⋯⋯아니, 아니야. 우리 민재는 특별해.”
“⋯⋯.”
원화는 보기 껄끄러울 정도로 고집이 셌다. 꼭 허황한 신을 찬양하는 열렬한 신도처럼, 어떠한 모순과 과학적 증거가 나와도 무시하는 우매한 신도처럼 굴었다.
“내가, 내가 이렇게 빌잖니. 그만 용서해라.”
원화는 용서도 참 그녀답게 요구했다. 꼭 명령하는 것 같았다. 사과가 아니라 무릎을 꿇었으니 민재의 고소를 취하해 달라는 거래를 하러 온 모양이었다.
사현이 나른한 손짓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당신 무릎, 나한테는 아무런 가치도 없어.”
“⋯⋯.”
“당신의 사죄가 나한테 뭘 줄 수 있는데? 죽은 엄마가 되돌아오나? 아니면 천 원짜리 하나라도 떨어지나? 이건 그냥, 그냥 시간 낭비야.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설핏 미간을 구긴 사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마치 자신에게 되묻는 듯한 어투였다. 어딘가 쌉싸름하고 자조적인 말에 우영이 그의 팔뚝을 살살 쓰다듬었다. 마음 같아선 껴안고 온 얼굴에다 키스를 해 주고 싶은데, 그럴 상황이 아니라서 하지 못했다.
원화가 사현의 말을 곱씹었다. 가치 없는 무릎. 쓸모없는 사죄. 결론은 금방 났다. 사현은 자신의 사죄를, 아니 치욕을 받아줄 생각이 없다. 그저 저를 농락하고 희롱하기 위해 방문을 허용한 것이다.
거기까지 가늠하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솟구쳤다. 눈앞에 있는 사현의 희멀건한 발을 칼로 마구 난도질하고 싶었다. 피가 튀고, 살점이 찢어지고, 근육이 도려지고, 뼈가 부서질 때까지 그를 괴롭히고 싶었다.
원화가 벌떡 튕기듯 일어났다. 그러고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하며 숨을 골랐다. 그녀의 낯에는 표정이 없었다. 기이한 서늘함과 광기만이 꿈틀거리며 흘러나왔다.
불길한 징조를 포착한 우영이 사현을 뒤로 끌어당기려 했다. 허나 원화가 조금 더 빨랐다. 그녀가 사현의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 움푹 파인 흉터가 남아 있는 그 손목이었다.
“네 갤러리를 무너트릴 거다. 불을 지르든, 밀어버리든 뭐든 할 거야.”
“⋯⋯.”
“네 더러운 동성애자 애인도 가만두지 않을 거다. 이번엔 틀림없이 목에다 칼을 찔러 넣으라고 명령하마.”
“⋯⋯.”
“네가 소중히 여기는 거, 다 빼앗을 거야. 이 집도, 돈도, 차도. 네가 경제적으로든, 인격적으로든 완전히 비렁뱅이가 될 때까지 내가 피를 토하며 저주할 거다.”
원화의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연약해서가 아니라, 힘이 지나치게 잔뜩 실려 있어서 그랬다. 정말 어떻게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이 뱉은 말을 지키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우영은 평생 저런 말투는 듣도 보도 못했다. 저렇게 새카만 경멸이나 혐오 역시 처음 봤다. 그런데 사현은 참 익숙해 보였다.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우영은 그 모습이 못내 안쓰러웠다. 그는 평생을 이런 미움 속에 잠겨 살아 왔구나, 싶어서.
사현을 갈아 마실 듯 노려보던 원화가 그의 손목을 던지듯 놨다. 그 후 그대로 문을 열었다. 띠리릭, 눈치 없는 도어 록이 쓸데없이 맑은 전자음을 내뱉었다.
그리고 원화는 그대로 그 자리에서 바윗덩이처럼 굳어야 했다.
“안녕하세요, 이원화 씨.”
문밖에 마른 여자가 서 있었다. 정확히는, 마른 여자와 덩치 좋은 남자 셋이. 언뜻 봐도 일반인은 아니었다. 여자가 원화 너머에 있는 사현에게 눈짓으로 인사했다. 원화가 께름칙한 표정으로 그 시선을 따라갔다. 사현은 방문자를 예상하였다는 듯,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이게 무슨, 누구기에, 대체 왜, 아주 많은 의문이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랐다. 원화가 또 무슨 개수작을 부리는 거냐고 고함을 치려 할 때였다. 낯선 여자가 원화의 손을 부드럽게, 하지만 옹골차게 거머쥐었다.
“저는 서울 중앙 지검에서 나온 지고윤 검사라고 합니다. 이원화 씨, 당신을 편법 증여, 세금 탈루, 비자금 횡령, 협박 및 폭행, 뇌물 공여, 아유⋯⋯ 참 바쁘게도 사셨네. 아무튼 등등으로 긴급 체포합니다. 나머지는 가서 이야기하시죠.”
“⋯⋯무슨 개소리야. 놔.”
원화의 눈과 입술이 해괴하게 뒤틀렸다. 뻐끔 입을 벌린 멍청한 얼굴이 그녀와 어울리면서도 어울리지 않았다.
굳건히 버티고 선 원화에 고윤이 남자들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자 그들이 원화의 양쪽 팔을 우악스럽게 잡아챘다. 정말 더도 덜도 말고 딱 잡혀가는, 혹은 끌려가는 모양새였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원화가 사지를 마구 흔들었다.
“뭐, 뭐야. 뭐야! 아아악! 놔! 놔, 이 천박한 것들!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손을 대!”
부릅 뜨인 그녀의 눈알에 핏줄이 섰다. 몸부림도 심해졌다. 펄떡거리는 다리가 땅에서 뜰 정도였다. 그럴수록 그녀를 옥죈 남자들의 팔에 더더욱 힘이 들어갔다.
“누군지 자-알 알고 있습니다. 이원화 씨.”
지윤이 심드렁하게 원화의 악소리를 받아쳤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듣는 소리가 ‘내가 누군 줄 아냐!’였다. 어쩜, 재벌들은 태어날 때부터 그 대사가 입력되어 나오는 모양이다.
남자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원화를 질질 끌고 나갔다. 현관 턱에 걸린 그녀의 구두 한 짝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반질반질하게 빛나는 게 척 봐도 비싸 보이는데 덩그러니 넘어져 있으니 아주 볼품없었다.
“놔아아악!”
원화는 목청이 터지라고 비명을 질러 댔다. 항상 단정하게 유지하던 머리칼이 흐트러지는데도, 깔끔하게 바른 매니큐어가 떨어졌는데도, 고운 옷이 구겨지는데도 격렬한 몸부림을 멈추지 않았다.
과거라면 고고한 척, 제 발로 가겠노라고, 기품 없이 이러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이번에 잡혀 가면 순순히 나오지 못할 거라는 걸 예상하기라도 한 듯했다.
질질 끌려간 원화가 막 엘리베이터에 올랐을 때였다.
“지 검사님. 잠시만요.”
사현이 낮은 음성으로 고윤을 불러 세웠다. 고윤이 무슨 일이냐는 듯, 눈썹을 들썩였다. 사현이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그의 손에는 원화의 구두 한 짝이 들려 있었다.
모두가 의아한 눈빛으로 그 구두를 바라보았다. 지금 상황에, 구두를 챙겨 주다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원수지간인 사현이 그런 행동을 하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혹 저 구두로 얼굴을 내리찍기라도 하려나. 아니면 던지거나 내팽개치려나. 그런 예상을 하는데, 사현이 원화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발목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원화가 흠칫 몸을 떨었다. 난데없는 친절이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사현이 그 잠깐 사이 미쳐 버린 게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였다.
타인이 경악하든 말든, 사현은 부드러운 손길로 원화의 발에 구두를 신겼다. 꼭 신데렐라의 구두를 찾아 주는 왕자님 같은 모습이었다.
구두를 신긴 사현이 그녀의 발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하얗고 작은 발은 그 흔한 굳은살 하나 없었다. 발만 보면 이십 대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고운 발이었다.
엄마의 발은 어땠더라. 그러고 보니 제대로 본 적이 없다. 그래서 기억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당신만 아니었다면, 당장 엄마를 찾아가서 엄마 발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니 보여 달라고 애처럼 떼를 쓸 수 있었을 텐데.
원화가 엄마를 미워할 수밖에 없었음을 이해한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까지 미워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조금만 적당히 미워하지. 엄마가 버텨 낼 수 있을 정도만. 미치지 않을 정도만 미워하지. 그러면 내가 당신을 구렁텅이로 밀어 버리고, 흙으로 덮어 버릴 지금의 이 상황이 도래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사현이 원화의 발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당신 아들도 이렇게 개처럼 끌려갔어요. 근데 당신도 똑같이 끌려가네요. 누가 모자 아니랄까 봐 참, 닮으셨어요.”
“⋯⋯.”
원화가 아랫입술을 말아먹었다. 개처럼 끌려간 아들. 내 아들 민재. 그를 떠올리자 가슴이 아렸다. 속이 메스껍고, 눈알이 따끔따끔했다.
다시 분노한 원화가 남자들의 손길을 벗어나기 위해 몸을 펄떡거렸을 때였다. 사현이 벌떡 일어나 원화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무것도 하지 마.”
“⋯⋯뭐?”
“당신이 졌어.”
“⋯⋯.”
“엎을 수 없는 결과야.”
사현이 뱉는 음절들이 원화의 미간에 콱콱 박혀 들었다. 원화가 머리통이 통째로 터진 사람처럼 눈과 입을 크게 벌렸다. 사현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원화를 구석으로 몰고, 또 몰았다.
“억울해하세요. 분해서 욕하고, 괴로워서 잠도 못 자고, 고통스러워하면서 우세요.”
“⋯⋯.”
“내가 그랬으니까.”
“⋯⋯.”
“이제 당신 차례야.”
그 말을 끝으로 사현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눈치 좋은 고윤이 까닥, 고갯짓으로 인사를 전하고는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을 눌렀다. 그 덕에 원화는 무어라 받아칠 기회조차 강탈당했다. 그녀의 허망한 시선이 엘리베이터 문에 댕강 잘렸다. 남은 거라곤 오물처럼 진득한 그녀의 향수 냄새뿐이었다.
잠시 닫힌 문을 쳐다보던 사현이 뒤를 돌았다. 그러고는 집으로 들어와 문을 닫고, 더러워진 홈 슬리퍼를 벗고, 새것을 꺼내 신었다. 그 일련의 행동에 군더더기라곤 없었다.
“벌써 저녁 먹을 때네. 먹고 싶은 거 있니?”
사현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잔잔했고, 저녁 메뉴를 고민하는 표정 역시 평온했다.
“⋯⋯괜, 괜찮아요?”
우영이 넌지시 물었다.
“안 괜찮을 건 또 뭐야. 내가 저번처럼 이마를 깬 것도 아니고.”
사현이 우영의 허리춤에 팔을 둘렀다. 우영은 버릇처럼 그의 어깨를 감싸면서도 전전긍긍 걱정을 토해냈다.
“근데 갤러리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저 사람 진짜 불 지를 것 같은데. 저렇게 잡혀갔어도 다른 사람 시킬 수도 있는 거잖아요.”
“괜찮아.”
“뭐가 괜찮아요. 저렇게 진심으로 협박을 하는데. 제가 제인 실장님한테 연락할까요?”
야단법석인 우영에 복도를 가로지르던 사현이 뚝 걸음을 멈췄다. 우영이 덩달아 멈춰 섰다. 그의 예쁜 눈동자가 염려와 걱정에 눅눅히 젖어 있었다.
사현이 엄지로 우영의 눈가를 살살 쓰다듬었다.
“내 갤러리는 안전해.”
“⋯⋯.”
“그리고 너도, 안전해.”
“⋯⋯.”
“아무도 다치지 않아. 내가 다 지킬 거야.”
더 이상은 그 어느 것도 잃지 않아. 사현이 단호히 말했다. 이상할 정도로 자신감 넘치는 그의 말에 우영은 더 이상 캐묻지 못했다.
그래도 믿을 수 있었다. 사현이 그렇다고 했으니, 그리될 것이다.
늘 그랬듯이 말이다.
* * *
우영은 다음 날이 되어서야 사현의 자신감의 출처를 알 수 있었다. 세상이 시끌벅적했다. 정확히는 TV와 뉴스가 시끄러웠다.
[화 그룹 회장 부인 이원화 씨, <갤러리 비>의 관장 백모 씨 집에서 행패 부리다 현장에서 송치.]
[이원화 씨. 검사ㆍ판사 청탁 혐의로 입건. 검사윤리강령 18조 위법.]
[폭력, 사기, 탈세 등으로 수감 중인 화 벤처 투자 김민재 전 사장의 형량 낮추기 위해 수차례 뇌물 및 접대.]
[이원화 씨가 저지른 과거 비자금과 탈세 등의 위법 행위가 다시 수면 위로.]
[이원화 씨의 비자금과 탈세, 법적 처벌 없었다. 누리꾼 분노.]
[이원화 씨 모든 혐의 부인.]
[이원화 씨 검사에게 폭언 퍼붓는 동영상 유출로 파문.]
[이원화 씨 모든 죄는 자신이 아니라 서자인 <갤러리 비>의 관장 백모 씨가 지었다 주장. 검찰 측은 증거 불충분으로 조사 종료.]
[<갤러리 비>의 관장 백모 씨. 무고죄와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수 있으나 하지 않겠다, 의사 밝혀. 누리꾼의 동정과 관심 집중.]
[화 그룹 김명현 회장 기자 회견, 아내의 죄에 송구하다. 죗값 달게 받기를 설득 중.]
[<속보> 화 그룹 김명현 회장, 이원화 씨에게 이혼 요구. 소송도 불사하겠다 발표.]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뉴스에 우영은 종일 멍하니 입을 벌린 채 TV만 보고 있었다. 저와 전혀 상관없는 사건들인데, 또 완전히 그렇지만도 않아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따금 등장하는 사현의 이름에 어깨를 움찔움찔 떨기도 했다.
그렇게 눈이 뻑뻑하게 마를 때까지 아나운서와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어느새 뉘엿뉘엿 해가 졌다. 사현이 퇴근할 때가 됐다는 뜻이다.
우영은 잘 훈련된 로봇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사현을 마중할 준비를 했다. 그래 봐야 별거 없었다. 평소라면 물감 냄새를 털어내기 위해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었겠지만, 오늘은 작업실에 발조차 들이지 않아서 그럴 필요가 없었다.
주차장이라는 사현의 메시지가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어 록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오셨어요?”
우영이 싱그럽게 웃으며 그를 반겼다.
“응.”
사현이 짧게 대꾸하며 구두를 벗었다. 힘없이 풀린 눈꺼풀에 피곤이 잔뜩 올라가 있었다. 갤러리로 무례하게 찾아온 기자들이며, 의뭉스러운 시선을 보내는 직원들이며, 그림을 보러 온 건지 사현을 보러 온 건지 모를 관람객에, 끝없이 들어오는 전화와 메일까지. 하루가 엉망진창이었다.
사현이 막 홈 슬리퍼에 발을 꿰었을 때, 우영이 두 팔을 벌렸다. 그러자 사현이 당연하다는 듯 그의 품으로 빨려 들어갔다. 넓고 단단하고, 또 따뜻한 품에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던 고난이 빠른 속도로 녹아내렸다.
“피곤하죠.”
“말을 너무 많이 해서 목이 다 쉬었어.”
“오늘은 일찍 자요. 재워 줄게요.”
“응. 그래야겠다.”
사현이 우영의 가슴팍에 이마를 비볐다. 다 아물지 못한 상처가 따끔거렸으나 하등 상관없었다. 지금은 무엇보다 우영이 고팠다.
우영이 부드럽게 사현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러다 재킷도 벗겨 주고, 갑갑하게 목을 옥죄고 있는 넥타이도 풀어 줬다. 사현은 익숙하게 우영의 시중을 받았다.
우영이 사현의 셔츠 단추를 풀 무렵이었다. 사현이 나지막이 우영을 불렀다.
“우영아.”
“네.”
“나 갤러리 관둘 거야.”
“⋯⋯.”
우영의 손이 뚝 움직임을 멈췄다. 지금까지의 수많은 사건과 기미로 예상한 일이었으나, 그의 입으로 들으니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갤러리 비>의 B가 <갤러리 비>에 없다니. 이게 무슨 괴이한 일인가. 팥 없는 찐빵도 이렇게나 허황하진 않으리라.
<갤러리 비>는 우영 역시 애정이 남달랐다. 사현과 연이 닿지 않았을 때, 그저 관람객으로 방문했을 때에는 그 위용과 아름다움을 동경했었다. 첫 전시를 열기 위해 드나들었을 때는 꿈을 이루어 주는 매개체이자 화려한 데뷔 무대였고, 그 이후로는 사현과의 사랑을 쌓고, 직원들과의 정을 쌓은 또 하나의 집이었다.
근데 그곳에 사현이 없다니. 오장육부가 증발한 것처럼 속이 허했다.
“왜요? 왜 관둬요?”
우영이 만면 가득 아쉬움과 의아함을 덕지덕지 묻힌 채 물었다.
“회장님이 관두래.”
“형 남 말 안 듣잖아요.”
쓸데없이 단호한 우영의 말에 사현이 푸흐흐 웃음을 흘렸다. 그가 고개를 주억이며 긍정했다.
“그렇지. 근데⋯⋯ 이번엔 들을 수밖에 없었어.”
“회장님이 갤러리 제주도랑 홍콩에도 열어 준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근데 갑자기 왜 관두래요?”
“음⋯⋯. 서로가 원하는 걸 하나씩 교환했거든.”
우영은 뭘 어떻게 교환했냐고 묻고 싶었으나, 설명해 줄 의사가 없는 듯해 구태여 캐묻지 않았다. 그가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단추를 마저 풀어 갔다.
“형한테 <갤러리 비>는 아주, 아주 소중한 거잖아요. 회장님이 그거보다 더 소중한 걸 주겠대요?”
“응. 나한테 아주 소중한 게 생겼거든.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걸 지키고 싶어.”
“⋯⋯.”
우영의 입술 끝이 꾸욱 볼을 파고들었다가 나왔다. 대충 가늠이 되긴 하는데, 아니길 바랐다. 그가 갤러리를 버리는 이유가 저라면, 정말 제가 그 이유라면⋯⋯ 아주 무거운 죄책감이 찾아올 것 같았다. 사현의 삶과 인생을 송두리째 부순 파렴치한이 된 기분이랄까.
사현이 다시 우영의 품을 파고들었다. 두 팔로 허리를 한 아름 껴안고, 그의 왼쪽 가슴 위에 귀를 댔다. 쿵, 쿵, 쿵 일정하게 맥동하는 우영의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그렇게 경이롭고 찬란했다.
“조금 허탈하긴 한데, 막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슬프고 괴롭진 않아.”
사현이 웅얼거리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영이 그런 사현을 마주 껴안았다. 그러자 사현이 고개를 들고 눈을 맞춰 왔다. 한 뼘이 채 안 되는 거리에서 시선이 얽혔다. 서로의 눈동자에 서로가 가득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마주하는 것인데,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풍만한 감정이 벅차올랐다.
“난⋯⋯ 나는 이제 너만 있으면 돼, 우영아.”
사현이 우영의 볼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어딘가 서글프면서도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런 사현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우영이 빙긋 미소 지었다.
“저도요, 형.”
그가 사현의 뺨에 경건히 입을 맞췄다.
저도 형만 있으면 돼요. 형만 제 품에 있으면, 세상이 무너진대도 무섭지 않아요.
근데 형이 나 때문에 무언갈 잃어야 한다면, 그건 싫어요.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