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1)
사현이 눈을 부릅떴다. 갤러리로 찾아온 원화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 요즘 남자 끼고 산다며?’
‘아예 데리고 산다던데. 이름이 뭐더라.’
‘아, 서우영이었나?’
우영의 이름을 읊조리는 그녀의 모습이 생생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뭐라고 했더라. 사현이 과거를 반추하며 미간을 좁혔다. 당시 원화의 향수 냄새가 어렴풋이 코끝을 스치는 듯했다.
‘내가 무슨 짓을 했다는 건 아니야.’
‘그렇다고 무슨 짓을 안 하겠다는 뜻도 아니란다.’
‘앞뒤 분간 없이 달려들면⋯⋯ 네가 아끼는 것에 상처가 생기지 않겠니? 그때 내가 찢은 그림처럼 말이다.’
그래, 그런 말을 했었지. 헌데 그 후로 잠잠했다. 거짓 조금 보태어 서로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를 만큼 관심이 없었단 말이다.
근래 사현의 삶은 오롯이 우영이었다. 그래서 <갤러리 비>를 만든 이래 처음으로 일도 소홀히 하고 있었다. 우영과 붙어먹는 게 더 중요해서. 그 말인즉슨, 원화와 민재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일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설마 제가 검사와 함께 민재의 뒤를 캐는 걸 알아차렸나. 지 검사가 분명 흔적 남지 않게 조심히 행동했다고 했는데. 뭐, 그렇다고 해도 정보야 얼마든지 흘러나갈 수 있었다.
아무리 원화와 민재가 멍청하고 우둔하다 한들, 그들의 주위에는 똑똑한 인간들이 가득했으니까. 원화와 민재는 돈이 아주, 아주 많지 않은가. 그럼 저절로 권력과 인간이 쥐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런저런 루트로 사현이 어떠한 자료를, 어떻게 습득했으며, 그것을 어떤 방법으로 쓰려 하는지까지 알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하지만 왜 저를 두고 우영을 건드리나. 어차피 타인의 손을 빌릴 거. 갤러리로 곧장 찾아와 제 목을 쑤셨으면 편했을 텐데. 왜 우영인가.
「나무 부두」가 찢어졌을 때도 정수리가 후끈거릴 정도로 화가 났었다만, 이번에는 전혀 색이 다른 분노가 일었다.
와⋯⋯ 이거 너무⋯⋯
“빡치는데?”
사현이 잘근잘근 씹힌 듯한 음성으로 읊조렸다.
“네?”
막 슬라이스 치즈를 까던 우영이 되물었다. 사현이 얼른 웃음 가면을 뒤집어썼다.
“아무것도 아니야.”
“⋯⋯.”
고개를 갸웃, 뒤튼 우영이 다시 요리에 집중했다. 넓고 두툼한 그의 등을 보던 사현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자기야. 나 전화 한 통만 하고 올게.”
“어, 네. 오래 걸려요? 그럼 면 나중에 넣게요.”
“아니. 금방 와.”
우영의 볼에 짧게 입을 맞춘 사현이 핸드폰을 들고 부엌을 나섰다.
거실 창문 앞에 선 사현이 핸드폰 화면을 밝혔다.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간, 거기다가 주말. 누군가에게, 그것도 친하지 않은 타인에게 전화하기에는 몹시 께름칙한 때였다. 허나 사현은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태라. 우영의 얼굴에 붙은 밴드를 보고 있으면 기도가 뒤틀려서. 그 상처가 오롯이 저 때문이라 생각하니 땅에 머리 처박고 죽고 싶은 심경이라. 거스를 게 하나도 없었다.
원하는 번호를 찾아 낸 사현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뚜르르, 뚜르르, 일정하게 울리는 신호음에 맞춰 심장이 쾅쾅쾅 거세게 뛰었다. 그가 후읍,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신호음은 길게 이어졌다. 아, 자는 건가. 사현이 입술을 잘근거리며 핸드폰을 내려놓으려 할 때였다. 신호음이 뚝 끊기고, 걸걸한 음성이 들려왔다.
-네가 웬일이냐? 전화를 다 하고?
명현이었다.
“회장님. 내일 시간 되세요?”
-이 시간에 전화해서 그게 무슨 소리냐.
사현이 번뜩이는 서울 야경을 대차게 노려봤다.
원화와 민재는, 우영을 미끼로 삼으면, 그 순진한 아이에게 위협을 가하면, 제가 기겁하며 도망갈 줄 알았을까. 얼른 이 나라를 떠야겠다, 싶어서 홍콩으로 나를 줄 알았냔 말이다.
멍청하긴. 아무리 원수지간이라 한들, 오래 봐 왔으면 상대방의 성향을 어느 정도 파악했어야지. 다 대가리에 뭘 집어넣고 사는 건지.
“저 좀 보시죠. 제가 회사로 갈게요.”
내가 이 개새끼들을, 제대로 한번 잡아야겠다.
* * *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운 사현이 운전대에 이마를 박았다. 뇌가 절절 끓듯이 화가 나서 명현과 약속을 잡긴 했다만. 여기까지 와 놓고도 확신이 안 섰다.
괜히 민재와 원화를 건드렸다가, 명현이 화를 내면 어쩌나. 아니, 당연히 화를 내겠지. 어디 네 주제에 자신의 가족에게 흙탕물을 튀기려 하냐, 노염을 지르겠지.
그러다 제 갤러리까지 불똥이 튀면 어쩌지. 창창하고 반짝반짝하게 빛나는 우영의 앞길에 해가 되면 어쩌지. 저만 바라보고 있는 제인은? 큐레이터 팀은? 직원들은?
많은 생각이 태풍처럼 휘몰아쳤다. 단전에 돌멩이가 걸린 듯, 갑갑했다. 두통도 올라왔다.
사현이 조수석에 놓인 서류 봉투를 바라봤다. 평생 모아 온 정보들이다. 원화가 운영 중인 어린이 재단의 비리, 민재가 저지른 굵직한 범법 행위, 그 밖에 자잘하면서도 큰 범죄들.
명현이 이 중 몇 개를 알고 있을는지, 또 몇 개를 침묵해 줬을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제가 쥔 패가 조커로 그의 명치를 찌르길 바라야 했다.
그리고 아마, 사현이 쥔 패는 조커가 맞을 것이다. 항상 그래 왔다. 무슨 일을 하든 그에겐 운이 따랐고, 웬만하면 성공했다.
근데 왜 이렇게 무섭지. 왜 이렇게 두렵고, 오한이 들지.
사현이 질끈 눈을 감았다.
명현은 무섭다. 무서운 사람이다. 엄마가 그렇게 죽어 갈 때, 그러다 결국 죽어 버렸을 때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사람이다. 어린 저에게 웃어 준 적도, 머리를 쓰다듬어 준 적도 없는 사람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
그래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저를 박살 내 버릴 수 있는 사람.
⋯⋯아. 그냥 취소할까. 급한 일이 생겼다고 내빼 버릴까.
사현이 꽉꽉 어금니를 눌러 씹으며 불안과 싸우고 있을 때였다. 우우웅. 재킷 주머니가 진동했다. 사현이 께름칙하게 핸드폰을 꺼냈다. 혹 명현인가, 섣불리 겁을 집어먹은 거였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예쁜 얼굴이 화면 가득 떠 있었다. 우영이었다.
[형. 이거 봐요.]
[형 좋아하는 오소리 라면 새로운 맛 나왔대요.]
[그래서 다섯 봉지나 샀어요.]
[당연히 맛있겠죠? 대기업에서 만든 거니까?]
[오늘 일찍 오시면 제가 끓여드릴게요!]
우영이 씨익 웃으며 라면 봉지를 들고 있었다. 배경을 보아하니 마트에 간 듯했다.
그는 요즘 장 보는 걸 즐긴다. 평생 마트에서 삼만 원 이상 써 본 적이 없는데. 십만 원씩 써도 아무렇지 않은 게 너무 신기하단다. 그래 봐야 가서 사는 거라곤 라면, 햇반, 김치, 딸기 우유 그런 게 다였다.
사현이 화면 속 우영의 볼을 엄지로 살살 쓰다듬었다. 하얀 밴드가 철썩 붙어 있는 게 못내 가슴이 아팠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보는 건데도 이 아픔에는 무뎌지질 않는다.
사현이 핸드폰을 꽉 세게 움켜쥐었다.
씨발. 될 대로 되라지. 명현이 막는다면 한 번에 다 터트려 버리고, 우영이 데리고 잠적하지 뭐.
거센 콧김을 내뿜은 사현이 서류 봉투를 들고 차에서 내렸다.
화 그룹의 회장실은 그 명성에 맞게 위용이 대단했다. 희미하게 바람이 느껴질 정도로 넓었고, 천장은 높았으며 창 역시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아 있었다.
사현도 익히 아는 저명 작가의 그림과 조각상들이 드문드문 놓여 기품을 더했고, 한쪽 벽에는 각양각색의 표창들과 대통령의 성명이 새겨진 훈장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 뒤로는 제법 손때가 묻은 서적들이 모여 벽을 이루고 있었는데, 명현의 지성을 가감 없이 전달했다.
그리고 공간 한가운데에 용맹함을 내뿜으며 서 있는 호랑이 금상이 그렇게 위압적일 수 없었다.
소파에 앉은 사현의 앞에 비서가 새까만 커피 한 잔을 내려놓았다. 사현이 그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왜? 독이라도 탔을까 봐?”
상석 소파에 앉은 명현이 고저 없는 음성으로 물었다. 비아냥도 아니었고, 장난도 아니었다. 정말 사현이 그리 여기는 걸까 봐 묻는 거였다.
“아니요. 제가 커피를 못 마셔서요.”
사현이 알 듯 모를 듯, 연한 미소를 지었다. 커피 잔 위로 예쁜 얼굴 하나가 동동 떠 있었다. 그래서 도무지 마실 수가 없었다.
“커피를 못 마셔? 왜?”
“위가 안 좋습니다.”
“선애도 나도 위가 아픈 적은 없는데⋯⋯.”
명현이 입으로 가져가던 커피를 내려놓았다. 그의 미간이 설핏 좁아져 있었다. 부모에게 없는 질병이 사현에게 있는 게 몹시 이상한 모양이었다.
“스트레스성이에요.”
사현이 엄지로 찻잔 주둥이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러고 보니 커피를 마시지 않은 지 한참 됐다. 처음에만 해도 우영 몰래 숨어 마셨는데. 요즘에는 정말 입에도 대지 않는다. 우영이 다치고 나니 그의 마음을 알겠더라고.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면 마음이 얼마나 미어지는지.
그래서 아프지 않기로 했다. 제가 아프면 우영은 더 아파할 테니까.
“그깟 갤러리 하나 경영하는 게 뭐 그리 힘든 일이라고 스트레스까지 받아?”
명현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그에 사현이 시니컬하게 웃었다.
“일 때문에 생긴 건 아니고요. 사모님이랑 민재 형 때문에 생겼어요. 도무지 저를 가만히 두지들 않으셔서요.”
“⋯⋯.”
명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가 소파 깊숙이 등을 기댔다. 부정적인 자세였다. 앞으로 네가 할 말에 일말의 흥미도, 관심도 없다는 자세.
“그래서, 뭐 때문에 왔냐.”
명현이 물었다. 사현이 옆자리에 뒀던 서류 봉투를 명현의 앞에 내려놓았다. 명현이 이것이 무엇이냐, 눈으로 물었다.
“보세요.”
사현이 친히 봉투에서 서류를 꺼냈다. 그리고 클립으로 나뉜 부분을 집어 일렬로 펼쳤다. 손깍지를 낀 명현이 수많은 활자를 천천히 읽어 갔다.
명현이 서류를 읽는 데에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사현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종이들이 사각사각 넘어가는 소리가 칼이 갈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마침내 명현이 마지막 서류에서 눈을 뗐다. 사현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가 무슨 반응을 보이냐에 따라 향후 계획이 결정될 것이다. 명현을 협박하느냐, 아니면 명현을 회유하느냐. 그 계획 말이다.
잠깐 침묵하던 명현이 곧 천천히 입을 뗐다.
“많이도 모았구나. 애썼겠어.”
“하⋯⋯.”
사현의 어깨가 탁 아래로 떨어졌다. 맥이 풀릴 정도로 성의 없는 반응이었다. 사현이 후읍,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준비했던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보셨겠지만, 사모님과 김민재 아래로 딸린 범죄가 한두 개가 아닙니다. 비자금 횡령, 허위공문서 작성, 특정 경제 범죄 가중 처벌법 위반, 외환 관리법 위반, 공정 거래법 위반, 부동산 불법 매각, 편법 증여, 세금 탈루, 회계 사기, 골프 접대, 성 접대, 뇌물 공여, 그리고 음주 운전, 부하 직원 폭행, 성폭행, 성희롱은 뭐 셀 수가 없네요.”
“그래서? 이게 문제가 될 거라고 가지고 온 거냐?”
명현은 여전히 심드렁했다. 그의 앞에 놓인 서류들은 그저 원화와 민재가 저지른 일들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 적절한 증거들까지 포함된 것이란 말이다. 그런데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예. 문제가 될 거라고 봅니다. 화 그룹의 썩은 발가락이 되겠죠. 그리고 그 썩은 발가락이 근저를 흔들고, 결국엔 몸뚱이까지 썩게 할 겁니다.”
“⋯⋯.”
명현의 검지가 톡톡톡, 소파 팔걸이를 두드렸다. 사현이 크게 가슴을 펼쳤다. 그리고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명현을 응시했다.
“그러니 회장님이 직접 잘라 내세요.”
“뭘?”
“김민재. 쳐내시라고요.”
사현의 굳건한 음성이 명현의 미간에 직선으로 가 박혔다.
명현의 눈이 가늘어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난데없이 아들을 쳐내라는 말에 당황한 것 같았다. 어쩌면 화가 난 것일 수도 있고.
명현이 무어라 입을 떼기 전에, 사현이 먼저 선수를 쳤다. 그가 소파 끄트머리에 걸터앉으며 명현과 더 가까워졌다.
“김민재 화 벤처 투자 매각 준비 중인 거 아셨어요?”
“⋯⋯뭐?”
“매각이요. 이야기 다 끝났던데.”
사현이 부러 심드렁하게 말했다. 너는 이것도 모르냐, 남들은 다 알던데. 그런 뉘앙스를 풍겨 주는 건 상대방의 분노를 한 층 더 높일 수 있는 효과가 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지금 벤처 투자 쪽이 좋지 않아서 매각도 안 된다. 그리고 파는 것보다는 안고 있다가 성장시키는 게 나아. 자본이 튼튼해서 흔들리지 않는 회사다.”
아니나 다를까, 명현의 말이 조금 빨라졌다. 소파 끝에 앉아 있던 사현이 안쪽으로 엉덩이를 깊숙이 밀어 넣었다. 반면에 명현의 상체가 조금 앞으로 나왔다.
사현은 속으로 고요한 환희를 지르고 있었다. 명현이 모른다. 그가 모르는 정보다. 그 말인즉슨, 이 판이 사현의 승리 쪽으로 조금, 아주 조금 기울었다는 걸 뜻했다.
“금융 감독원이 고위험 수준으로 판단했던데요. 그래서 아주, 헐값에 넘어갈 예정이던데.”
“⋯⋯그 정보는 틀린 것 같다만.”
명현이 뒤늦게 여유를 연기했다. 기다란 다리를 반대쪽으로 꼬기도 했다. 하지만 그를 닮아 눈썰미가 좋은 사현에겐 통하지 않는 수였다. 사현이 시원하게 깐 자신의 이마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김민재가 해외 투자사랑 손잡고, 싸게 매각해서 차액을 반으로 나눌 생각이에요.”
“민재가 회사를 팔아? 나 몰래? 책임질 수 있는 발언이냐.”
“네. 증거, 녹취, 회계 조작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근데 왜 여기에 없냐?”
명현이 검지로 툭툭 서류 더미를 찍었다. 수많은 범죄의 나열 중, 회사 매각과 관련한 건 없었다. 그게 못내 괘씸했다. 적의 본거지를 치러 오면서, 졸개들만 보내다니.
“그건 제가 따로 쓸 무기라서요. 회장님이 김민재를 안 쳐내면, 그때 터트릴 무기요.”
“그게 무기가 된다고 생각하냐?”
“예. 동요하고 계시잖아요. 회장님이 아니면 제가 터트릴 겁니다. 거기 적힌 거 다요. 절 어떻게 하셔도 상관없어요. 그날. 엄마가 락스에 잠겨 죽은 그날. 저도 이미 죽었거든요.”
“⋯⋯.”
“이번에도 사건 만드셔서 검찰에 넘기실 거예요? 괜찮아요. 거기도 몇 번 가 보니까 적응되더라고요. 뭐, 감방도 그렇겠죠.”
사현의 낯엔 지나칠 정도로 표정이 없었다. 명현의 입꼬리가 비죽 뒤틀렸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사현이 무릎 위에 올려둔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무섭다. 명현이 자신을 정말 검찰에 넘겨 버릴까 봐. 헤어날 수 없는 덫을 설치해 징역을 살게 할까 봐. 감옥이 무서운 건 아니었다. 그동안 볼 수 없을 우영에 대한 그리움이 무서운 거지.
바위처럼 굳은 사현을 보던 명현이 커피 잔을 들었다. 적당히 따뜻하게 식은 게,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왜 오늘이냐. 여태 꾸역꾸역 받아치고 살더니, 왜 갑자기 나를 찾아온 거야?”
사현의 동공이 크게 휘청거렸다. 그의 말마따나, 평생 참고 받아치고 꿈틀거리기만 했는데. 갑자기 이렇게 찾아온 이유. 갑자기 칼을 빼든 이유.
항상, 스물네 시간 머리 귀퉁이를 맴돌고 있는 잘생긴 얼굴 때문에. 허나 그 말을 할 순 없었다. 냉철한 명현을 설득시킬 만한, 객관적이고 또렷한 이유가 필요했다.
하지만 다른 변명이 생각나지 않았다. 어떠한 순간이든, 우영의 존재를 가리고, 숨기고, 지우고 싶지 않았다.
사현의 눈꺼풀이 아래로 내리깔렸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건드려서요.”
“⋯⋯사랑하는 사람?”
“네.”
사현이 볼 안쪽 살을 지그시 깨물었다. 명현의 앞에서 이런 서정적인 감정을 운운할 줄이야. 분명 마이너스 요소가 될 것이다. 냉혈한인 명현이 이런 감정을 용납할 리 없었다.
“웃기면 웃으셔도 돼요. 지금 이 말을 하고 있는 저도 제가 이상하니까요.”
사현이 피식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명현이 그런 사현의 옆얼굴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그래, 그러고 보니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한껏 뾰족하게 날이 서서는 스치기만 해도 베일 것처럼 굴더니. 지금은 표정이 제법 다채로웠다. 분노하고 화를 내는 모습도 훨씬 강렬한 붉은색을 띠었다.
명현이 연달아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 사랑. 그것만큼 설득력 있는 것도 없지.”
“⋯⋯예?”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사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명현을 쳐다봤다. 정작 명현은 참으로 무감했다. 응당한 이치에 공감한다는 표정이었다.
사현이 어쩔 줄 모르고 입술만 옴질거리는데, 명현이 꼰 다리를 풀고, 양 무릎 위에 팔꿈치를 올리며 상체를 들이밀었다. 사현의 말에 몹시 흥미가 있는 듯했다.
“뭐, 민재가 그 사람한테 칼이라도 휘두르든?”
“예.”
“⋯⋯.”
찰나, 명현의 눈가에 난처가 서렸다. 그저 무슨 짓을 했느냐, 라는 걸 묻기 위해 한 질문인데. 이리 단호한 긍정이 나올 줄은 몰랐다. 사현이 차게 식은 낯으로 음절 하나하나를 꽉꽉 짓씹었다.
“칼을 휘둘렀어요. 그래서 요 며칠 내내 병원만 다니네요.”
“⋯⋯.”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아요.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만큼이나 슬퍼요. 그에 상응하는 만큼 화도 나고요.”
처음, 우영의 얼굴에 난 칼자국을 발견했을 때를 떠올린 사현이 어금니를 세게 깨물었다. 피 칠갑을 한 얼굴에 어찌나 놀랐던지. 바닥이 푹 꺼지고 깊은 구렁텅이로 나동그라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사위가 파도를 만난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고, 짓이겨지는 것 같았다.
명현이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낀 반지를 쓰다듬었다.
“너는? 너는 탈세 안 하냐.”
그가 능숙하게 말을 돌렸다.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질문에 사현이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민재의 청문회에 제 범죄 이력이 거론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질문을 받았으니, 답을 해야 했다.
“예. 안 합니다.”
“왜 안 하냐.”
“탈세해 봐야 얼마나 된다고요. 그까짓 푼돈으로 시끄러워지고, 귀찮아지고, 제 갤러리 명예에 흠가는 거 싫습니다.”
사현은 나름대로 갤러리를 운영하는 데에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기업이 이미지를 신경 쓰는 것처럼, 갤러리 역시 그래야 했다. 아니, 훨씬 더 하지. 예술과 문화를 사고파는 곳인데.
더군다나 고객들은 자신이 예술을 소비한다는 기품에 취해 쓸데없는 것을 아주 많이 따졌다. 그래서 <갤러리 비>는 청렴하고, 순수하면서도 화려해야 했다. 탈세처럼 하찮은 흙탕물이 튀어서는 안 됐다.
명현의 목울대가 아래위로 느릿하게 움직였다.
“조작은? 그림 같은 거야 부르는 게 값 아니냐. 네 위치면 그 조작이 어려운 것도 아닐 텐데.”
“조작은 합니다. 근데 사기는 아닙니다. 그 가격으로 팔아도 될 만큼 제대로 된 그림만 파니까요. 제가 손댄 그림 가격이 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비자금은?”
“관심 없어요. 회장님 덕분에 돈이 모자란 적이 없으니까요. 그쪽으론 흥미가 안 생기네요. 제 곳간 채우는 것보다, 제 갤러리가 풍족해지는 게 더 좋습니다.”
“직원들은 어떠냐?”
“예?”
“네 갤러리 직원들 말이야.”
“똑똑한 사람들입니다.”
“아니. 걔들이 널 어떻게 생각하냐고.”
줄줄이 이어지는 질문에 사현이 눈썹 뼈를 문질렀다. 갑자기 갤러리에 관심을 보이는 명현이 이상했다. 설마, 민재를 끌어내리려 했다고 제 갤러리를 칠 생각인가. 공중분해라도 하려고? 사현이 구두 뒤꿈치로 바닥을 지르밟았다.
“뭐, 흔한 상사라 생각하겠죠. 싸가지 없고, 일 많이 시키고, 말 붙이기 어려운 상사요. 그래도 이직이나 퇴사는 거의 없습니다. 돈을 많이 주거든요.”
“돈만 많이 줘서는 사람 잡기 힘들어. 요즘 애들 말로 뭐라더라⋯⋯. Work 뭐였는데. 아, 그래. 워라벨. 그게 중요하지.”
명현이 검지로 허공을 가르며 말했다. 난데없는 경영 수업에 사현이 헛숨을 삼켰다. 미술관과 갤러리도 구분해 주지 않는 명현이 제 직원들에게 관심 가지는 게 못내 불쾌했다. 계약서상 갑과 을의 관계이긴 하나, 어찌 됐든 제 식구들이었다.
“다 전문가들이에요. 자기 하는 일에 프라이드도 있고, 자긍심도 높습니다. 뭐, 바쁜 일 끝나면 휴가도 두둑이 주고요. 근데 제 직원한테 관심이 있으신지는 몰랐네요.”
못마땅함이 한껏 묻은 사현의 말에 명현은 대답 대신 묘한 미소만 띠었다. 그가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갤리리 경영은 어떠냐.”
“경영이라고 할 것까지 있나요. 작은 갤러린데요.”
“아시아에서 3위 안에 드는 갤러리지 않냐. 향후 발전 가능성은 1위라지. 작은 갤러리라 칭하는 건 겸손이냐? 아니면 네 갤러리 상황도 제대로 모르는 무지(無知)냐?”
“⋯⋯제 갤러리 조사하셨어요?”
“글쎄다.”
명현이 모호한 답을 흘렸다. 여태 곧이곧대로 대답한 사현이 우스워지는 순간이었다.
“조사하셨나 보네요. 근데 왜 물으세요.”
사현의 눈꼬리가 가파른 오르막을 그렸다. 명현이 으음, 목으로 신음했다. 그러더니 비스듬히 몸을 한쪽으로 기울이고, 턱을 괬다. 살짝 내리깔린 눈이 나른하게 사현을 응시했다.
“내가 민재를 쳐내면, 그 후는 어쩌냐.”
“예?”
“‘화’는 누가 이끌어 가냔 말이다.”
“왜 그런 소릴 하세요. 아직 정정하시면서.”
“내일도 정정하리라는 보장이 없는 나이지 않니.”
“⋯⋯.”
사현의 입이 한일자로 다물렸다. 나이가 많아 당장 내일 중병에 걸릴 수도,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을 저리 담담한 음성으로 하니 듣는 처지가 여간 난처한 게 아니었다.
잠시 고민하던 사현이 담담하게 해결책을 내놓았다.
“친족 경영에 고집 놓으시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한국만 핏줄에 난리지, 해외에는 전문 CEO를 고용하거나, 능력 좋은 임원에게 일임하는 일도 많아요. 21세기에 혈연 운운하는 거, 너무 품위 없지 않나요.”
“내가 뭣 하러 그래야 하냐?”
“그 누구든, 머저리 같은 김민재보다야 잘 이끌어 갈 테니까요.”
사현이 비아냥이 한껏 담긴 음성으로 말했다. 잘생겼으나,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민재의 얼굴을 떠올리던 사현이 명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 거국적으로, 멀리 보시고 회사 발전을 위해서 김민재를,”
“너는 어떠냐?”
명현이 사현의 말을 잘랐다. 사현이 머리를 슬쩍 옆으로 기울였다.
“⋯⋯예? 뭐가 말입니까?”
“후계자 말이다.”
고저 없는 명현의 말에 사현의 호흡이 뚝 끊겼다.
잠깐 진공 상태에 있던 사현이 크게 가슴팍을 들썩였다. 색색, 항상 들이마시고 내쉬는 호흡이 껄끄럽게 느껴졌다. 사현의 눈동자가 분주하게 명현을 훑었다. 그의 안면 어딘가에 붙어 있을 장난이나 조롱 혹은 거짓을 찾는 거였다.
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씀이세요?”
“나한테 농담을 바라냐?”
“아니요, 아니요. 그건 아닌데⋯⋯. 얼토당토않습니다. 저는 경영 전공도 아니고, 실무 경험도 없어요.”
“네 말마따나 21세기인데. 전공이 무슨 상관이냐.”
“회장님.”
“조그마한 구멍가게 경영하는 거랑 큰 기업 경영하는 거, 그렇게 큰 차이 없다. 너 정도면 나쁘지 않지. 네 갤러리, 십 년 동안 한 번도 적자나 하락세인 적 없잖으냐.”
“⋯⋯.”
사현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경영을 쉽게 취급하는 명현이 이상했다. 제 갤러리가 십 년 동안 주춤한 적조차 없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건 더 이상했다.
가만히 명현을 보던 사현이 슬쩍 시선을 돌렸다. 진심일 리 없다. 떠보는 게 분명하다. 넘어가면 안 됐다.
“관심 없습니다. 저는 그림이 좋아요.”
“내 자리에 앉으면, 좋아하는 걸 업으로 삼지 않고도 늘 곁에 둘 수 있어.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싫습니다.”
자꾸 이상한 방향으로 빠지는 대화의 흐름에 사현의 입술이 께름칙하게 뒤틀렸다. 명현이 낯설다. 물론, 항상 낯설고 어려웠지만, 지금은 전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아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난처하게 했다고 자신을 검찰에 고발했던 이가, 이제는 자기 뒤를 이어 회장의 자리에 앉으란다.
⋯⋯노망이라도 난 건가. 건강해 보이는데, 정신적인 문제라 겉으로는 티가 안 나나. 그러고 보니 호텔에서 식사했던 날, 몸이 안 좋다고 했었지. 그런데 병원에 가기가 싫다고. 그런 말을 했었다.
사현이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나, 고민하는데 명현이 소파 등받이에 털썩 기댔다.
“그럼 나도 싫다.”
“예?”
“나는 앞뒤 꽉 막힌 옛날 사람이야. 내 자식이 아닌 타인이 이 회사를 물려받는 거, 싫다. 네가 안 한다니, 어쩔 수 없이 민재에게 줘야 하지 않겠냐.”
“⋯⋯.”
“아무리 등신 같은 자식이라도, 피 뒤집어쓰고 회사 물려받는 꼴을 볼 순 없으니 네가 가져온 이것들도 흔적 없이 묻어야겠지.”
“⋯⋯.”
“민재가 여기 앉으면, 네 갤러리가 여전히 성황할 수 있을지 궁금하구나.”
퍽 치사한 말이었다. 동시에 염치없는 말이기도 했다. 사현의 눈초리가 뾰족하게 벼려졌다. 그가 꽉 주먹을 말아 쥐었다.
“저한테서 어머니 앗아 가셨잖아요. 아버지라는 역할도 앗아 가셨고요. 가족이라는 달콤한 건 태초부터 준 적도 없으시죠. 그러니 그림은 뺏지 마세요. 갤러리로 협박도 하지 마세요. 당장 여기 불 지르고 싶어지니까.”
사현이 바글바글 끓는 심정을 짓씹듯 토로했다. 마치 말로 총을 쏘는 것 같았다. 허나 그 총알을 받아 내는 명현은 참으로 무심했다. 그가 턱을 살짝 안으로 당기고 특유의 삼백안으로 사현을 직시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며.”
“⋯⋯여기서 그 사람 이야기가 왜 나옵니까.”
사현이 눈을 희번덕거렸다. 감히 어디서, 누구를 입에 올린단 말인가. 그 누구든 쉽게, 가볍게, 또 편하게 우영을 언급해선 안 됐다. 사현의 안광이 형형하게 빛났다. 그러나 명현은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방자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고요히 기꺼워하고 있었다.
“그 사람 복수하러 온 거 아니냐. 그것 때문에 네가 그리도 싫어하는 이 회사에, 내 앞에 앉아 있는 거 아니냔 말이다.”
“⋯⋯.”
“그럼 뭐든 걸어야지. 포기해야지. 악착같이 덤벼야지.”
“⋯⋯.”
사현의 표정이 얄궂게 뒤틀렸다. 지금의 명현이 기이했다. 뭐랄까. 꼭 운동선수의 기력을 북돋우는 열렬한 감독 같달까. 이 상황에 어울리지도 않았고, 그의 성격과 맞지도 않았다.
그때, 명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처럼 되지는 말아야지.”
“⋯⋯예?”
읊조리듯 흘린 말을 제대로 낚아채지 못한 사현이 되물었다. 하지만 명현은 쌉싸래한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잠시 침묵하던 사현이 끊겼던 반발을 이어갔다.
“서자라고 임원들과 주주들의 반발이 심할 겁니다. 주가도 하락할 거고요.”
“잠깐이야. 그까짓 반발, 하락. 일 년에 수십 번도 더 있는 일이다. 내가 그런 걸 겁낼 것 같으냐?”
“회장님. 저 백 씨예요. 회장님과 같은 김 씨가 아니라요. 성 갈라는 말씀하실 거면,”
“뭐 어떠냐. 요즘은 엄마 성 따르는 자식도 많다더라. 안 그래도 김 씨는 너무 흔했어. 여기저기 다 김 회장, 김 사장이야.”
그 말에 사현이 코웃음을 쳤다. 방금까지는 자기가 꽉 막힌 옛날 사람이라더니. 이제는 또 요즘을 운운한다.
“앞뒤 태세가 맞지 않으십니다, 회장님.”
“내가 좀 그렇다. 이해해라.”
뻔뻔하기까지. 사현이 해괴한 낯으로 명현을 바라봤다. 범람하는 혼란 탓에 정신이 다 몽롱했다.
사현이 데굴데굴 눈알을 굴리며 상황을 정리하는 사이, 명현은 소파 옆에 있던 인터폰을 들고 비서에게 차를 새로이 주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서가 김이 폴폴 나는 차를 내려놓았다. 명현이 그 일련의 행동들을 보며 말했다.
“나는 안다. 네가 이 회장실에 앉을 때쯤에는 ‘화’가 그 어느 때보다 정점에 서 있을 거라는 걸.”
“⋯⋯망상이 과하세요.”
“그게 망상인지 아닌지, 나는 한 번 해 보려고 해. 그러니 너도 해 보아라.”
사현이 다시 꾹 입을 다물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명확히 자각하고 있는 걸까. 사현은 명현의 의도를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수 초 간 고민하던 사현의 눈매가 새치름히 가늘어졌다. 그가 자못 가볍게 고개를 주억였다.
“좋아요. 후계자든, 회장이든 해 볼게요.”
예상보다 쉽게 나온 긍정에 명현의 눈썹이 살짝 위로 올라갔다. 그가 그럼 앞으로 잘해 보자는, 기대가 크다는, 그런 상투적인 말을 하려 입술을 달싹였을 때였다. 사현이 조건을 덧붙였다.
“대신 이혼하세요.”
“⋯⋯뭐?”
“김민재를 화 벤처 투자 사장에서 끌어내리시고, 그 자리 저 주세요. 다른 계열사는 안 돼요. 꼭, 벤처 투자였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내가 그 새끼를 쫓아냈다는 우월감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 그래야 그 새끼가 나에게 밀려났다는 패배감에 몸부림칠 테니까.
사현은 명현의 반응이 어떠하든, 아랑곳하지 않고 빠르게 말을 쐈다. 사실 명현이 들어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진심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위해서였다.
명현은 이렇다 할 말도, 표정도 없었다. 사현이 부러 한 톤 높은 음성으로 종알거렸다.
“아, 그리고 그때 저한테 보내셨던 검사 기억하시죠? 그 검사 승진 좀 시켜 주세요. 이래저래 부탁하면서 아버지 이름 많이 써먹었거든요. 제가 아직 대한민국 검사를 이리저리 굴릴 만큼 재력이 넘치진 않아서요.”
“⋯⋯.”
“그래도 똑똑하고 욕심 많은 검사던데. 여타 다른 남자 검사들처럼 추잡한 짓도 안 할 것 같고요. 옆에 두고 써먹으시면 앞으로 많은 도움이,”
“⋯⋯네가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한층 낮아진 명현의 음성에 사현이 흡, 숨을 말아먹었다. ⋯⋯제가 방금 그를 아버지라 불렀던가. 대체 왜? 과거를 회상하다 보니 헷갈리기라도 했나. 사현은 자신이 저질러 놓고도 그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요만할 때는 아버지, 아버지, 그러더니. 머리 좀 크고 나서는 꼬박꼬박 회장님이라고 불러 댔지.”
명현이 손바닥을 옆으로 올려 조그마한 아이의 키를 가늠했다. 사현이 초등학생 저학년 시절의 이야기였다. 사현은 제대로 기억하지도 못하는 그때. 사실, 또렷이 기억하고 있으나 애써 부정하고 있는 그때.
당시에만 해도 사현은 명현이 꽤 좋았다. 선애가 제법 멀쩡했고, 그녀가 찬탄하는 명현은 멋진 남자였으니까. 비록 아버지로서의 역할은 영 엉망이었지만, 동경하는 이상향으로 삼기에는 더할 나위 없었다.
하지만 명현이 그걸 망쳐 버렸지. 락스에 잠겨 죽은 엄마를 모른 척함으로써. 그 죄를 자기 자신에게도, 원화와 민재에게도 묻지 않음으로써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부정했지.
“실수예요. 회장님, 저한테 한 번도 아버지셨던 적 없습니다. 어머니 죽인 원수셨지요.”
“⋯⋯그랬니?”
원망 가득한 사현의 말에 명현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사현이 찻잔을 들었다. 새카만 커피와 달리 포근한 냄새를 풍기는 차는 맛이 좋았다. 몇 번 차를 홀짝이던 사현이 게으른 고양이처럼 소파에 등을 기댔다.
“아버지라 불리시는 게 좋으세요?”
“그래. 슬하에 자식이라곤 둘뿐인데, 그중 하나가 생판 남처럼 구니 섭섭하다. 나이가 드니 더 그래.”
“그럼 이번에 김민재 쳐내시고 아버지 역할, 제대로 해 보세요. 제가 잘 보고 판단해서 앞으로 아버지라 불러 드릴지, 회장님으로 불러 드릴지 결정할게요.”
건방지기 짝이 없는 사현의 말에 잠깐 침묵하던 명현이 곧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널따란 회장실이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거나한 박장대소였다. 한참 웃던 그가 자신의 이마를 쓸어 올렸다.
“나는 네가 그렇게 되바라진 게 좋다. 내 아들이면, 그 정도는 되어야지.”
“⋯⋯별걸 다 좋아하시네요.”
사현이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흘끔, 손목시계의 시간을 확인했다. 저녁때가 다 되었다. 우영이 일찍 오면 라면 끓여 준다고 했는데. 그러니 자신에겐 일찍 가야 할 의무가 있었다.
사현이 명현의 앞에 흩뿌려진 서류들을 정리했다.
“제 의견은 다 전달했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벌써? 저녁 먹고 가거라.”
명현이 급하게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아니요. 그 사람이 기다려서요.”
사현이 단칼에 명현의 제안을 쳐냈다. 제게 우영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 언제부턴가 당연히 그리되었다.
“⋯⋯그래, 그럼 가야지.”
명현은 어쩐 일로 순순히 물러났다. 그저 아쉬운 시선으로 사현의 옆얼굴을, 선애와 꼭 닮은 그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빠른 몸짓으로 짐 정리를 마친 사현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러고는 특유의 바른 걸음걸이로 회장실 문을 향해 갔다.
비스듬히 턱을 괸 채, 멀어지는 사현을 보던 명현이 특유의 저음으로 말했다.
“네가 말한 그 검사. 자리 하나 주마. 그리고 내 옆에 두지 말고 네 옆에 둬. 이제 네 사람도 쌓아야지.”
“⋯⋯.”
“민재도 내 알아서 처리하마.”
그 말에 사현의 발걸음이 뚝 멎었다. 그가 살짝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명현의 시야에서 그의 콧대가 보일 듯 말 듯한 각도였다.
“이혼은요?”
“⋯⋯.”
명현은 쉬이 답을 내놓지 못했다. 결국 침묵이 답을 대신했다. 사현이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까맣게 윤기가 흐르는 회장실의 문이 이상하게⋯⋯ 이상하게 탐스러웠다. 제 관장실 문보다 두껍고 기품 있는 문이 참, 매력적이었다.
“회장님이 앞으로 하시는 일, 기대할 겁니다. 기대에 못 미치면 실망할 거고요.”
“실망하지 않을 게다. 그러잖아도 거슬리는 게 많았거든.”
“⋯⋯.”
“그러니 너도 날 실망하게 하지 말거라.”
“⋯⋯갈게요.”
대화를 뭉뚱그려 마무리한 사현이 회장실을 나갔다. 달칵. 문이 닫혔다.
사현이 사라진 허공을 응시하던 명현이 옆에 놓인 수화기를 들었다. 곧 무슨 일이시냐는 비서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 황 검사장이랑 저녁 같이할까 하는데. 약속 좀 잡아 주겠나.”
명현이 검지로 소파 팔걸이를 쓰다듬었다. 차갑고 미끈한 가죽이 느껴졌다.
사현이 제게 기대한다고 했다. 처음이었다.
그러니 그 기대에 응당 부응해 줘야지.
<4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