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 까만 불청객들 (14/24)

12. 까만 불청객들

두툼한 서류 뭉치를 관장실 책상 위에 던진 사현이 푸후,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빼꼼 벌어진 서류 봉투 안으로 하얀 종이들이 사현을 새치름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건 민재가 화 벤처 투자 기업을 불법으로 매각하려 한다는 증거들이다. 활자와 숫자, 그리고 그래프들이 빼곡히 적힌 종이가 자신을 써먹어 달라 우짖어 댔다.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던 사현이 손바닥으로 탁, 봉투 주둥이를 막았다.

오늘, 사현은 지고윤 검사를 만났다. 언젠가 갤러리로 자신을 연행하기 위해 찾아 왔던 그 검사였다. 그때는 명현의 사주로 절 겁주기 위해 왔었는데, 이번에는 사현의 부탁 아닌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만났다. 사실 벌써 네 번째 만남이었다.

은근히 이루어진 첫 만남에서, 지 검사는 사현을 몹시 꺼렸다. 아무래도 명현의 눈 밖에 난 사람이라 여겼겠지. 그게 꼭 틀린 말도 아니었고.

그러나 사현이 흘린 정보를 듣고는 망설이더니, 두 번째 만남은 그쪽에서 주최했다.

지 검사는 야망이 넘치는 여자였다. 무슨 말을 하든, 똑 부러졌고 높은 곳에 앉으려는 갈망이 대단했다. 명현의 명령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도 더 높은 자리에 앉기 위해서일 터였다. 아마 일반 검사인 그녀 위로 더 많은 검사가 명현의 진두지휘 아래에 움직이겠지.

지 검사는 분명 그것이 몹시 불만족스러울 것이다. 똑똑하고 명석한 사람인데, 저보다 많은 것이라곤 나이밖에 없는 부장 검사와 차장 검사들이 얼마나 고리타분하고 아니꼽겠는가. 그들이 싸지른 똥을 치우거나, 잡일만 처리하니 분명 독이 올라와 있을 테였다.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지 검사는 사현의 정보에 혹할 수밖에 없었다. 타 검사들을 뛰어넘고 명현과 직접 대면하여 딜을 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또 사현이 그러하듯, 지 검사 역시 사현을 이용할 생각을 하고 있을 터였다.

허나 상관없다. 이번 공조는 성공만 하면 윈윈(win-win)이니까.

“하아⋯⋯.”

근데 그 공조를 어떠한 방향으로 끌어갈지 아직 정하질 못했다. 민재에게 가장 타격이 되는 방법은 아무런 언질과 예고 없이 바로 뉴스를 때려 버리는 것이다.

그럼 금융 감독원에서 실태 조사에 들어갈 것이고, 사기와 조작 혐의가 밝혀지면 민재는 어떻게든 법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게 구속이든, 아니면 명현의 힘으로 불구속이 되든. 그가 계속해서 화 그룹 계열사의 사장으로 있을 순 없었다.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멀쩡히 길을 걷던 민재가 거꾸로 넘어져서 목이 꺾여 죽는 게 가장 통쾌하겠지만 이렇게 온 세상이 떠들썩할 만큼 치욕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근데, 그렇게 되면. 명현이 가만히 있지 않겠지.

‘집사람을 난처하게 하지 마라.’

‘정확히는, 그 난처가 나에게까지 밀려오게 하지 마라.’

언젠가 원화의 이름이 세간에 오르내릴 때, 명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번 일을 터트리면 ‘집사람’ 대신 ‘내 아들’이라는 단어가 붙어서 전화가 올 게 분명했다. 다음으로는 검찰이 들이닥칠 거고. 이번에는 송치에서 끝나지 않고 구속으로까지 이어질지도 몰랐다.

제가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들이 앞뒤가 착착 맞는 증거와 함께 저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그게 무섭진 않았다. 두렵지도 않았고, 공들여 쌓아 온 것들이 무너진대도 괜찮았다.

다만, 그럼 우영이 혼자 남을 테니까. 또 외로워질 테니까. 나를 걱정하느라 그 예쁜 눈을 축축이 적시고 살 테니까. 그게 싫은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 부분에 영향을 끼칠 줄이야.

사현이 엄지와 검지로 뻑뻑한 눈두덩을 꾹꾹 짓눌렀다. 처음 민재의 말을 엿들었을 땐 그를 엿 먹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저 좋았는데. 지금은 머리가 깨질 듯이 복잡한 게, 차라리 몰랐던 때가 낫다 싶기도 하고.

“어흐⋯⋯.”

사현이 신경질이 담뿍 섞인 신음을 내뱉으며 책상에 이마를 묻었다. 시원하다 못해 시린 책상 온도에 절절 끓던 이마가 한층 식는 듯했다.

아, 모르겠다. 일단 우영이를 좀 봐야겠다. 그 예쁜 얼굴을 보며 숨을 돌려야 빡빡하게 뭉친 머리통이 윤활하게 굴러갈 것 같았다.

사현이 재킷을 뒤져 핸드폰을 찾아냈다. 그리고 우영의 번호를 찾아 터치하려 할 때였다. 화면이 잠깐 까맣게 죽더니 진동과 함께 간결한 이름 하나를 띄웠다.

명현이었다.

사현이 자신도 모르게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괜히 넥타이를 추스르고, 목소리도 가다듬었다. 그 후에야 통화 버튼을 스와이프했다.

“네, 회장님.”

-오늘도 바쁘니?

“어⋯⋯, 아니요.”

사현이 작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가 전화한 목적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아아, 우영을 보려 했는데. 하필 지금 전화를 준단 말인가. 명현과는 참⋯⋯ 너무할 정도로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어찌 됐건 제 몸속에 그의 피가 흐르는데, 이다지도 다를 수 있나, 싶었다.

-저녁 먹자구나.

“⋯⋯네. 어디로 갈까요?”

그러나 사현은 거부할 수 없었다. 명현은 말 한마디로 사현의 인생과 삶을 송두리째 어그러트릴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 * *

명현과 함께하는 식사는 메스껍다. 아무리 비싸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숨죽인 오감 탓에 모래를 씹는 듯했다. 오늘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사현이 맛깔스럽게 구워진 갈비를 질겅질겅 고무처럼 씹었다.

그런 사현을 아는지, 모르는지. 명현은 이 식사가 퍽 기꺼운 듯했다. 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스며 있었다. 거기다 아까부터 지나치게 박혀 오는 시선이라니. 사현은 가능만 하다면 손에 쥔 젓가락으로 그의 눈알을 집어 아래로 내려 주고 싶었다.

끝내 견디다 못한 사현이 수저를 내려놓았다.

“요즘 부름이 잦으시네요.”

“전에도 가끔 같이 저녁 먹지 않았냐.”

“그 가끔이 자주가 되는 것 같아서 불편합니다.”

사현은 굳이 말을 거르지 않았다. 확실히 전달할 필요가 있었다. 사실 말을 돌리고 돌려서 바쁘다, 일이 많다, 몸이 좋지 않다, 따위를 읊어 대도 하등 신경 쓰지 않을 그인지라 다른 변명을 댈 수가 없었다.

버석하니 굳은 사현의 얼굴에 명현 역시 더디게 움직이던 수저를 내려놨다.

“늙으면 말이다. 감정이 자꾸 불쑥불쑥 고개를 쳐들어.”

“⋯⋯.”

“그리고 과거가 곰팡이처럼 나를 좀먹는다. 근데 그 곰팡이가 퀴퀴하고 역겹지 않아. 아주⋯⋯ 향기롭고 달콤한 곰팡이지.”

“⋯⋯.”

“그래서 더 이상 미래가 기대되지 않구나. 과거가 그리워.”

명현의 잔잔한 음성이 테이블 위를 감돌았다. 설핏 미간을 좁힌 사현이 그의 말을 곱씹었다. 과거. 나를 불러 앉혀 놓고 되뇔 수 있는 과거가 뭐가 있지.

저와 명현은 함께한 시간이 거의 없었다. 어린 기억 속에 있는 명현은 검은 슈트를 차려입고 커다란 대문을 나갔다가 들어오는 모습뿐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하나같이 태산 같은 뒷모습이었고.

그와의 ‘과거’, 그것도 향기롭고 달콤한 ‘과거’라 칭해질 사건이 하나도 없단 말이다.

그러다 문득, 일전의 만남에서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선애도 생선 싫어했는데. 너도 싫어하니?’

‘단 것도 좋아하니? 선애처럼?’

그것을 상기하자 주먹이 저절로 안으로 말렸다. 당장이라도 무언가를 휘두르고 부술 것처럼 옹골찬 주먹이었다.

“저를 보면서 엄마라도 떠올린단 말씀이세요?”

“⋯⋯아니라곤 하지 않으마.”

명현이 은근히 시선을 피했다. 그 말에 사현이 헛웃음을 흘렸다. 제 얼굴에 엄마의 얼굴이 남아 있던가. 이제는 인영이 가물가물할 정도로 오래전에 사라진 엄마라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분노만 치밀었다.

사현이 테이블 아래에 숨긴 손목을 벅벅 긁었다. 과거의 고통이 선명하게 들러붙어 있는 그 손목이었다. 한참 피부를 긁던 그가 뾰족하게 벼려진 눈동자로 명현을 노려봤다.

“그러시면 안 되잖아요.”

“⋯⋯.”

“그러실 권리 없잖아요.”

“⋯⋯.”

“저한테⋯⋯ 그런 말 하시면 안 되잖아요.”

“⋯⋯.”

“어떻게 그렇게 뻔뻔하게⋯⋯.”

사현의 음성이 탁하게 무너졌다. 당신이 어떻게 엄마를 그리워해. 엄마가 죽어 가는 걸 한 번도 막은 적 없으면서. 그저 방관하고 또 방관했으면서. 이제 와 엄마를 그리워해? 당신이? 엄마를 그 지옥 같은 집안에 밀어 넣은 당신이?

사현의 눈가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숨이 가빠지고, 단전 저 아래에서부터 뜨끈한 덩어리가 치밀었다. 손목을 긁어 대는 손톱에 힘이 들어갔다.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늘 그렇듯, 슬퍼서가 아니라 분해서. 억울하고, 화가 나서.

“아닙니다. 실언했습니다. 제가 무어라 한들, 들으실 분도 아닌데.”

하지만 참아 냈다. 약한 모습을 타인에게 보여 봐야 좋을 게 없으니까. 알은체도 하지 않던 명현이 갑자기 왜 저를 불러 놓고 선애를 회상하는진 모르겠지만, 사현이 그 과거 놀음에 응해 줄 필요는 없었다.

사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끼이익. 의자가 밀리며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사현이 대충 걸쳐 둔 재킷을 챙겨 들었다.

“아무리 과거가 그리우셔도, 제 앞에서 티 내지 마세요. 저는 과거가 그립지 않거든요. 떠올리기만 해도 역겨운 락스 냄새가 콧구멍을 들쑤셔요.”

“⋯⋯.”

“이만 가 보겠습니다.”

사현이 꾸벅 묵례했다. 그리고 막 문을 여는데,

“사현아.”

명현이 그를 불러 세웠다. 사현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명현이 이토록 절절히, 명확하게 자신을 부른 건 처음이라. 등줄기가 저절로 빳빳하게 곤두섰다.

사현이 뒤를 돌아봐야 하나, 아니면 못 들은 척 나가야 하나 고민하는데, 명현이 다시 입을 뗐다.

“나도 락스 냄새가 싫다.”

그 말에 사현의 숨이 뚝 끊겼다.

“요즘 손발이 저리고 가슴이 답답한데. 병원에도 안 간다. 자꾸 선애가 떠올라서.”

명현이 뱉는 음절, 음절이 사현의 등을 뚫고 갈비뼈를 부수고 심장을 터트렸다. 대체 지금 누구한테 나약한 소리를 하는 건지. 걱정이라도 해 달라는 건지. 아니면 다 늙어서 관심을 바라는 건지.

뭐가 됐든, 명현과는 어울리지 않는 나약함이었다. 사현이 신경질적으로 팩 뒤를 돌아봤다.

“그럼 주치의를 집으로 부르시면 되잖아요.”

“⋯⋯.”

“왜 답지 않게 앓는 소리를 하세요. 그것도 저한테. 사모님이랑 민재 형은 그새 귀라도 먹었대요? 그 사람들한테 징징거리세요. 저는 들어드릴 생각 없어요.”

이렇게 명현에게 쏴붙이는 건 처음이었다. 사실 그와 말을 섞은 일도 손에 꼽는다. 요즘 이상할 정도로 자주 마주하는 거지.

“⋯⋯.”

명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사현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눈매가 평소와 달리 살짝 아래로 처져 있었다. 살아온 세월을 숨길 순 없는지라, 자글자글한 주름이 눈두덩을 짓눌러서 그런 듯했다.

그래서일까. 사현은 괜히 마음이 무거워졌다. 불쌍한 늙은이를 구박 주는 파렴치한 아들이 된 것만 같았다.

“⋯⋯민재 형한테 연락할 테니까 병원 가 보세요.”

나지막이 말한 사현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혹 명현이 저를 다시 불러 세울까, 방정맞을 정도로 빠르게 공간을 벗어났다.

식당 바깥으로 나오자 한층 상쾌한 공기가 몸 여기저기를 파고들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숨이 막혔다. 시멘트라도 들이켠 듯, 폐가 뒤틀리고 기도가 굳었다.

사현이 다급한 손놀림으로 주머니를 뒤적여 핸드폰을 찾아냈다. 그리고 명현과 함께 있는 내내 떠오르던 이름을 꾹꾹꾹 연타했다. 수화기를 귓가에 가져다 대자 뚜르르 뚜르르, 신호음이 들려 왔다. 그러다 그 신호음이 뚝 끊기는 순간, 떨리는 음성으로 우짖었다.

“우영아, 우영아. 나 좀 살려 줘.”

* * *

사현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풀썩 힘없이 주저앉았다. 현관에서 그를 기다리던 우영이 얼른 그를 부축했다. 두 사람은 멀리 갈 것 없이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우영이 소파 턱에 걸쳐져 있던 담요를 집어와 사현을 덮고, 그 채로 그를 껴안았다.

사현이 기다렸다는 듯 필사적으로 우영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의 발긋한 눈가에 우영이 자신이 다 아프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엄지로 살살 문지르자 사현이 아예 손바닥에다 얼굴을 파묻어 왔다. 우영이 그런 사현의 머리칼에 꾹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저녁 내내 연락이 안 되더니. 또 바깥에서 누구를 어떻게 만났기에 이리 난도질이 되어서 왔나. 궁금한 건 많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냐고 캐묻지 않았다. 일단 경련하듯 떨리는 사현을 추스르는 게 우선이었다.

우영이 사현의 등줄기를 토닥였다. 아래위로 다정하게 문지르기도 했다.

와중에도 사현이 더 이상 술이나 약에 기대지 않고 저를 찾는 것이 기뻐서 어이가 없었다. 먼 옛날. 불콰하게 취한 그가 가로등을 보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를 땐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사이였는데. 어느새 이렇게 피부를 맞대고 평온을 공유할 수 있는 사이가 됐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사현을 끌어안은 우영의 팔이 저릿해질 때쯤이었다. 사현이 벅벅벅 손목을 긁었다. 간지러워서 긁는다기보다는 무언가를 헤집고, 파내는 듯한 행위였다.

시뻘건 손목을 본 우영이 그의 팔꿈치를 휙 잡아챘다. 아⋯⋯. 눈이 붉게 충혈된 사현이 짧은 신음을 흘렸다.

“형, 이거 뭐야.”

우영의 동공이 확 수축했다. 가까이서 본 사현의 손목은 훨씬 심각했다. 그저 발갛게 물든 수준이 아니라, 손톱에 살갗이 움푹움푹 파여 피가 비치고 있었다. 어찌나 열심히 긁어 놨는지, 원래 있던 흉터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자꾸, 자꾸 간지러워서⋯⋯.”

사현이 웅얼거리며 잡힌 팔을 빼내려 했다. 아무리 우영이라도 보여 주기 싫은 치부가 존재하는지라. 하지만 우영의 손은 꿈쩍도 않았다.

“누가 간지럽다고 손목을 이렇게 만들어요.”

“⋯⋯잘못했어.”

사현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죄는 자신이 저질러 놓고, 말도 못 하게 처량한 표정이었다. 비 맞은 고양이 같은 얼굴에 정수리 끝까지 솟구쳤던 우영의 분노가 맥없이 고꾸라졌다.

“기다려요. 약 가져올게요.”

우영이 푸욱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헌데, 사현이 세차게 고개를 내저으며 우영의 목을 꽉 껴안았다.

“싫어. 가지 마.”

“금방 올게요.”

“그래도 싫어.”

사현이 몇 시간 만에 다섯 살배기로 퇴화해서 왔다. 우영이 코로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저 예쁜 손목을 갉아 먹고 있는 상처를 그냥 둘 수도 없고. 병원에 가자고 해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거고.

잠시 고민하던 우영이 사현의 허벅지 아래에 손을 받치고 그를 번쩍 들어올렸다. 요즘 잘 먹여서 살이 좀 붙었었는데 그새 영혼이라도 증발한 건지. 어젯밤 침대에서 그를 엎고 뒤집었을 때보다 한결 가벼웠다.

우영은 사현을 안은 채로 자신의 방을 뒤져 구급상자를 찾고, 그를 침대에 앉혀 놓았다. 그것조차 떨어지기 싫어해서 괜찮다, 괜찮다, 말하며 조막만 한 얼굴에 온통 키스해 줬다.

침대 아래에 쪼그리고 앉은 우영은 정성을 다해 연고를 발랐다. 그런데 마땅한 밴드가 없었다. 상처가 제법 크게 나서 일반 밴드로는 갈무리가 안 됐다.

우영이 짜증 섞인 숨을 내뱉으며 사현의 허벅지에 이마를 파묻었다. 어금니가 자꾸 으득으득 갈렸다. 사현이 조금만 평화로워지면, 조금만 여유로워지고 조금만 행복해지면 득달같이 나타나서 그를 헤집어 대는 그의 가족들이 너무나 미웠다.

평생 누군가를 증오하고 원망해 본 적 없는데. 사현이 이렇게 끝없이, 하염없이, 단번에 와르르 무너질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전신이 발기발기 찢겨서 밟히는 기분이었다. 저도 그를 따라 무너지고 으깨지는 듯했다.

우영이 쏟아지는 절망을 고스란히 맞고 있는데, 사현이 뒤통수를 쓰다듬어 왔다. 우영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희미한 미소를 띤 사현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 괜찮아.”

“⋯⋯형.”

“저녁은 먹었어?”

“⋯⋯.”

“너 요즘 내 카드 안 쓰더라. 그래서 네가 밥을 먹는지 안 먹는지 알 수가 없어.”

사현이 종알종알 쓸데없는 말을 이었다. 눈동자는 텅 비어 있는데, 입술은 끊임없이 움직였다. 그 기이한 조화에 우영이 헛숨을 들이켰다. 사랑하는 사람이 망가지는 모습을 코앞에서 지켜보는 기분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하고, 역겹다.

“⋯⋯안 먹었어요.”

그런데도 우영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려 사현의 ‘괜찮은 척하는 연극’에 발맞춰 줄 뿐이었다.

“우리 오랜만에 김밥천국에 라면 먹으러 갈까?”

사현이 엄지로 우영의 광대를 쓰다듬었다. 우영이 그 손을 잡아 손바닥에 꾸우욱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그 전에 약국부터 들러요.”

“뭐 하러.”

“병원까진 바라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약국은 가요. 들어가기 싫으면 제가 혼자 가서 사 올 테니까 바깥에서 기다려요.”

“⋯⋯그래.”

사현이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특하다는 듯 사현의 볼에 짧게 키스한 우영이 그의 셔츠를 벗기고, 자신의 후드를 뒤집어씌웠다. 그 일련의 행동이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자신이 어린아이가 된 듯한 기분에 사현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좀 전과 달리 제법 화사한 웃음이었다.

* * *

“어쩌다 다쳤어?”

김밥천국의 사장 아주머니가 물었다. 그녀의 시선은 사현의 손목에 붙은 큼지막한 밴드에 박혀 있었다. 움칠, 몸을 떤 사현이 어색하게 웃으며 소매를 잡아 내렸다. 우영의 후드가 워낙 큰 덕에 밴드가 쏙 사라졌다.

“형이 좀 칠칠찮아서요. 자꾸 다쳐 오고 그래요.”

우영이 능청맞게 말하며 사현의 앞접시에 콩자반을 올려 뒀다. 사현이 뾰족하게 눈을 흘기며 그것을 입으로 가져갔다.

“아이고⋯⋯. 세상 똑똑하고 야무지게 생겨서는 칠칠찮아? 우영이 네가 고생이 많겠네.”

아주머니가 고생하라며 우영의 팔뚝을 철썩, 맛깔스레 내리쳤다. 잦은 방문에 그녀와 안면을 튼 지는 한참 됐다. 사현은 아직 쭈뼛거리며 어색해했지만, 그녀는 거리낌 없이 말을 걸고, 편식하는 걸 잔소리하고, 달걀부침을 서비스로 주기도 했다.

“야. 누가 누구한테 칠칠찮대.”

사장 아주머니가 멀어지길 기다리던 사현이 조용한 음성으로 따져 물었다. 우영이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 우영의 반응에 사현이 신경질을 일발 장전했다. 우영이 예쁘게 말린 참치 김밥을 얼른 그에게 내밀었다.

사현은 한껏 눈을 부라리면서도 그것을 받아먹었다. 우영이 입술을 말아 물며 웃음을 참았다.

식사는 조용히 이어졌다. 그리고 그릇의 바닥이 보일 때쯤, 사현이 입을 뗐다.

“오늘⋯⋯.”

“네.”

“회장님 만났어.”

단조로운 설명에 우영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다른 가족분들도 같이 만났어요?”

“아니. 회장님이랑 둘이서 저녁 먹었어.”

“둘이서만이요?”

“어.”

우영의 턱 아래에 오돌도돌한 주름이 생겼다. 그가 알기로, 명현은 사현을 이렇게 우울하게 만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비록 사현을 검찰에 넘기긴 했었지만, 그때의 사현은 짜증과 피곤에 물들어 있었지, 슬퍼하진 않았다. 사현을 무너트리는 건 원화나 민재의 역할이었다.

근데 오늘은 그를 만나고 와서 그렇게나 휘청거렸단 말인가.

일그러졌다가 뒤틀리길 반복하는 우영의 안면에 사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회장님도 나이가 들었나. 날 보면 엄마가 생각난대. 그래서 자꾸 불러다가 밥 먹자고 하고, 내가 안 나올까 봐 갤러리 지어 준다고 하고 그랬나 봐.”

“⋯⋯.”

“근데 나는 그게 너무 역겹고, 소름 끼치게 싫네.”

사현이 자크 루이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처럼 붉은 욕조에 몸 담그고 있던 엄마를 발견했을 때.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그녀를 안고 울부짖었을 때. 명현은 무얼 했던가. 내내 보이지 않다가 삐까번쩍한 장례식장 하나 구해다 줬었지.

그리고 아무도 오지 않아 더 넓고, 더 황량하고, 더 우울한 그 장례식장에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었다. 엄마를 완전히 보내고, 손목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 집에 들어선 자신을 보고도 일말의 시선이나 위로도 주지 않았다.

그래 놓고 이제 와 그녀를 그리워한다니. 제 얼굴에서 엄마를 찾다니.

다시 숨통이 콱 하고 막혀 왔다. 사현이 찬물을 들이켜며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그런 사현을 보던 우영이 의자를 앞으로 바짝 당겨 앉았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은근히 말했다.

“음⋯⋯ 형. 그냥 제 생각인데요.”

“응.”

“회장님을 적당히 받아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아요.”

“⋯⋯뭐라고?”

사현이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명현을 받아주라니. 이제껏 우영에게 털어 놓은 과거들이 모조리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제가 어떤 삶을 살아 왔는지, 명현이 그 재앙 같은 삶을 어떻게 방관했는지 알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사현이 입 안 가득 화를 물었을 때였다. 우영이 사현의 손등을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아니, 그 사람이 형한테 몹쓸 짓 한 거 아는데, 그래도요⋯⋯. 대단한 분이시잖아요. 화 그룹 회장님이신데. 사이가 나빠지면 형 갤러리에 피해 가는 거 아녜요?”

“너 이제껏 내 말 귓등으로 들었니? 지금 갤러리가 무슨 상관이야. 우리 엄마가 그 사람 때문에,”

“제 말은, 회장님을 용서하라는 게 아니라요. 그 원망을 조금만 미루면 어떨까, 싶어서요.”

“무슨 뜻이야.”

우영의 말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한 사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우영이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무래도 김밥천국에서 할 이야기가 아닌지라.

“김민재가 불법으로 회사 매각한다는 증거. 어떻게 할지 고민 중이라면서요. 그냥 터트리자니, 회장님이 가만히 안 있을 것 같고. 그렇다고 모르는 척하자니 여태 당해 온 게 분하고. 지금 그런 상황 아니에요?”

“⋯⋯맞아.”

사현이 놀랍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이래저래 비유를 섞어 설명해 주긴 했다만, 우영이 이다지도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뒤늦게 호기심이 동한 사현이 우영을 따라 의자를 바싹 당겨 앉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고.”

“회장님이 그걸 밝히게 하면 되잖아요.”

“⋯⋯뭐?”

사현의 턱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사현이 코웃음을 치며 상체를 뒤로 물렸다. 명현이 민재의 비리를 직접 밝히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제 얼굴에 침 뱉는 행위와 다름이 없는데 그런 짓을 왜 한단 말인가.

그러나 우영은 집요했다. 자기 생각에 확신이 있는 듯했다.

“왜요. 김민재 일 못 한다면서요. 나쁜 짓도 많이 하고. 그거 형만 알진 않을 거 아녜요. 회장님도 알고 있겠죠. 김민재가 바보에 나쁜 놈인 거.”

그 말에 사현의 입술이 삐뚜름히 뒤틀렸다.

“너 대한민국 재벌 중에 똑똑하고 착한 놈이 몇이나 될 것 같니? 죄다 대가리에 든 게 없어. 하나같이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빼먹을까. 그 생각뿐이야. 그런데도 기업이 굴러가는 거? 등신 같은 헤드가 싸지른 똥 치우느라 매일같이 야근하는 직원들 덕분이거든. 다 명문대에서 골라 뽑은, 똑똑하고 성실한 개미들이라서.”

“⋯⋯.”

“그러니까, 김민재 수준의 멍청함이나 비리 정도로는 상류사회에서 방출 사유가 안 된단 말이야.”

나라 팔아먹고도 멀쩡히 떵떵거리며 사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고작 회사 매각 정도로⋯⋯. 사현이 부루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더군다나 김민재가 없으면 화 그룹에 후계자가 없다고.”

그 빈자리를 누가 메꾼단 말인가. 명현에게 자식이라 칭할 수 있는 이는 안타깝게도 민재 하나였다. 혈족 계승에 환장한 한국 기업이 그를 내칠 리 없었다. 민재가 살인을 저지른대도 은폐에 급급할 게 분명했다.

사현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절레절레 머리를 흔드는데, 우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요? 형 있잖아요.”

“⋯⋯어?”

“형은 비리도 없고, 멍청하지도 않잖아요.”

“거기서 갑자기 내가 왜 나오니?”

“아니⋯⋯. 회장님이 김민재 버리면, 형이 후계자 되는 거 아녜요?”

우영이 왜 당연한 걸 묻냐는 낯으로 대꾸했다. 전혀 상상도, 가늠도 해 보지 않은 문장에 사현이 헛숨을 삼켰다. 그래, 우영의 시각에선 그렇게 볼 수도 있지. 근데 아니었다. 이걸 어떻게 이해시켜 줘야 하나, 고민하는 찰나. 우영이 눈치 없이 말을 더했다.

“드라마나 영화 보면 재벌 아들들끼리 싸우고, 이간질하고 그러던데. 형은 왜 안 해요?”

“내가 회사에 관심이 없거든.”

“왜요? 후계자 되면 돈 엄청 많아지는 거 아녜요?”

“돈은 지금도 충분히 많아. 그리고 경영은 재미없어. 삭막하고, 심미적이지도 않고. 나는 예술에 파묻혀 사는 지금이 좋아.”

“하지만,”

“우영아.”

사현이 감미로운 음성으로 우영을 불렀다. 우영이 꾹 입을 다물었다. 사현이 바짝 굳었던 어깨를 느슨히 내렸다. 그리고 조곤조곤 실태를 설명했다.

“나랑 김민재는 틀려. 나는 반쪽짜리 아들이야. 그래서 우리 엄마가 그렇게 죽었고.”

“형이 왜 반쪽짜리 아들이에요. 그럼 김민재도 반쪽짜리 아들이겠네요. 똑같이 회장님 피 반만 이어받았으니까.”

“⋯⋯.”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근데 또 틀린 말이기도 하다. 이 지나친 순수함을 어찌해야 하나. 사현이 잠시 침묵하며 고민했다. 하지만 이렇다 할 비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사실을 이야기해 주기로 했다.

“생물학적으로는 그렇지. 김민재도, 나도 회장님의 유전자가 반씩 섞여 있으니까. 근데 사회적으로는 안 그래. 그쪽은 본처에서 태어난 진짜 아들이고, 나는 따지고 보면⋯⋯ 첩, 응? 첩에서 태어난 서자야. 보는 시각이 달라.”

사현의 입가에 쌉싸름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제 입으로 엄마를 첩이라 칭하다니. 그럴 수 있게 되다니. 시간이 많이 흐르긴 한 모양이다.

사현이 손등으로 뻑뻑한 눈두덩을 문지르는데, 우영이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회장님도 보는 시각이 달라요?”

“⋯⋯어?”

“회장님도 형을 서자로 보냐고요.”

“⋯⋯.”

“아닌 것 같은데.”

우영이 자신의 턱 아래를 문질렀다.

사실 우영은 명현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헌데 최근에 한번 찾아봤다. 그래도 사현의 아버지고, 해를 끼칠 수 있는 위험한 인물이고, 동시에 사현을 보필하는 능력 좋은 조력자이기도 한 명현이 너무 궁금해서 찾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우영이 판단한 명현은 조금 독특한 사람이었다. 그가 본 것이라 봐야 경영 잡지 인터뷰나 알음알음 퍼진 소문들이 다였지만, 어쨌든. 명현은 굉장히 냉철하고, 경제에 눈이 밝고, 맺고 끊음이 확실한 사람이었다.

사현이 누구를 닮았나, 했더니. 명현을 닮았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먼 옛날, 사현을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그 싸늘함과 적당한 무심함, 그리고 이렇다 할 표정이 없는 잘생긴 얼굴까지.

사현은 하얗고 뾰족한 백사다. 가느다랗고 유려한 움직임으로 단번에 목젖을 물어뜯어 숨통을 끊는다. 반면에 명현은 아주 크고 우람한 검은색 뱀이었다. 상대방의 몸뚱이를 둘둘 싸매 엄청난 힘으로 조여 죽이는, 그런 뱀.

그런 사람이 서자를, 사현의 말에 따르면 관심도 없고 걸리적거리며 치부로 여기는 그런 서자를.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갤러리도 번지르르하게 열어 주고, 가끔 찾아오고, 종종 연락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사현의 낯빛이 묘하게 뒤틀렸다. 우영이 옳다구나, 하며 심증을 얹어 갔다.

“진짜 단지 형 어머님이 떠올라서, 그래서 형을 불러다 밥을 먹이고 갤러리도 확장해 준다고요?”

“⋯⋯.”

“형이 아는 회장님이, 그런 분이세요?”

그 질문에 사현의 목울대가 아래위로 크게 꿀렁였다. 답이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다. 아니다. 명현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과거를 그리워할 수 있지. 제 얼굴에 엄마의 모습을 투영할 수도 있지.

근데 방법이 틀렸다. 사현이 아는 명현이라면, 이런저런 말을 붙이지 않고 그저 오라 가라, 명령만 반복했을 테였다. 번거롭게 직접 찾아오지도 않았을 거고, 갤러리 확장이라는 귀찮은 약속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 되짚어 보니 이상하다.

명현이 왜 그랬을까. 왜 제 앞에서 감상적이고 나약한 모습을 보였을까. 그땐 순간의 감정에 휩쓸려 상황을 직시하지 못했었는데. 지금 떠올리니 괴이했다. 사현이 으음, 탁음을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명현에게 어떤 꿍꿍이가 있는 건 확실한 듯했다.

허공을 보며 생각을 정리하던 사현이 고개를 아래로 내리깔고 우영을 쏘아봤다.

“근데 너.”

“네?”

“왜 답지 않게 똑똑하고 분석적이니?”

“형 일이니까 머리 터지게 고민해 봤죠. 별로예요? 저랑 안 어울리죠?”

우영이 민망하다는 듯, 헤벌쭉 웃으며 머리를 긁었다. 사현의 눈이 게슴츠레 가늘어졌다. 그가 슬쩍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무언가를 속삭이려는 것 같았다. 우영이 덩달아 몸을 내밀었다.

“아니. 되게 섹시하다. 우리⋯⋯ 얼른 집에 갈까?”

사현이 바람기가 담뿍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마치 귓바퀴를 깃털로 쓸어내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우영의 등이 뻣뻣하게 굳었다. 네, 가요. 얼른 가요. 그리 말하며 턱을 주억이려는데, 테이블이 우우웅, 우우웅. 진동했다. 사현의 핸드폰이었다.

우영과 사현의 시선이 동시에 핸드폰으로 향했다. 그리고 둘 다 낯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김민재]

영 반갑지 않은 이름이 떠 있었기 때문이다. 사현이 핸드폰을 향해 손을 뻗자, 우영이 먼저 선수를 쳤다. 그의 커다란 손이 텁, 한 입에 핸드폰을 삼켰다.

“받지 마요.”

우영의 눈썹이 팔(八)자 모양으로 일그러졌다. 사현이 민재의 전화를 받는 게 퍽 걱정스러운 듯했다. 아무래도 민재와 마찰이 생겨서 사현이 멀쩡했던 적이 없었으니까. 오늘도 덜덜 떨면서 들어온 걸 간신히 추슬러 놨는데. 하루에 두 번은 너무 많았다.

허나 사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김민재 나한테 전화 잘 안 해. 이유가 있으니까 한 걸 거야. 그냥 시비는 아닐 테니까 괜찮아.”

그가 핸드폰을 돌려 달라는 듯 손바닥을 내밀었다. 우영의 입술이 쭈삣쭈삣 못마땅하게 씰룩거렸다. 기다리다 못한 사현이 톡톡 우영의 손등을 두드렸다. 그제야 우영의 손에서 핸드폰이 나왔다. 찬물을 한 모금 삼킨 사현이 통화 아이콘을 눌렀다.

-야! 네가 왜 아버지랑 밥을 먹어?

사현이 여보세요, 라는 상투적인 말을 뱉기도 전에 민재가 빽 고함을 질렀다. 사현의 미간이 가감 없이 구겨졌다. 하여튼, 예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종자다.

“이유는 회장님께 직접 물어보세요, 형.”

사현의 눈이 직선으로 죽 잡아 째졌다. 어떻게 고작 한마디 주고받은 것으로 이렇게 기분이 더러워질 수 있는지. 신기할 지경이다.

사현은 명현과의 저녁 식사를 일방적으로 끝내고, 우영에게 달려오면서도 민재에게 연락했었다. 회장님 몸이 편찮으신 것 같으니 신경 쓰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지금 어느 식당에 있으니 기사님 좀 불러 달라고.

지금 명현이 쓰러지거나, 아프거나, 죽으면 낭패였다. 사현은 아직 <갤러리 비>를 완전히 손에 넣지 못했다. 화 그룹의 자본을 싹 뽑아내고 사현의 돈을 채워 넣어야 추후 민재가 화 그룹의 회장 자리에 앉고 나서도 나쁜 짓 못 할 테니까. 그때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무슨 이야기 했어?

“그게 왜 궁금한데요? 뭐 회장님이랑 나랑 은밀히 형 뒷말이라도 했을까 봐요?”

-⋯⋯.

“그냥 밥 먹었어요.”

-⋯⋯그냥?

“네.”

-그냥 먹었다고? 아버지랑 밥을?

“그렇다니까요.”

무의미한 대화의 반복에 사현의 입술이 비스듬히 뒤틀렸다. 그러자 우영이 엄지로 사현의 입가를 살살 문질러 왔다. 사현이 씨익 웃으며 우영의 검지에 쪽, 뽀뽀했다.

-⋯⋯.

민재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지나치게 조용해서 사현이 핸드폰을 귀에서 떼고 흘깃 화면을 확인할 정도였다. 혹 소리 소문 없이 통화가 끝났나 싶어서. 하지만 시간은 차곡차곡 계속해서 쌓이고 있었다. 이번엔 사현이 먼저 말문을 텄다.

“회장님은요? 병원 가셨어요?”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야.

그러고는 뚝 전화가 끊겼다. 사현이 황망한 낯으로 핸드폰을 노려봤다.

“뭐야, 이 미친 새끼⋯⋯.”

전화를 했으면 목적이 있어야지. 별 시답잖은 소리만 나불거리더니 냅다 끊어 버렸다. 사현이 핸드폰을 부술 듯 움켜쥐고 이를 가는데, 우영이 덩달아 얼굴을 찌푸렸다.

“아, 형. 욕하지 마요.”

“욕도 언어야. 적정한 순간에 필요할 때 쓰라고 만들어진 거라고.”

“그래도 바깥에선 하지 마요.”

“내 이미지 신경 써 주는 거니?”

“아니요. 너무 섹시하니까. 혹시 누가 반할까 봐.”

우영이 콧잔등을 찡긋거리며 속삭였다. 잠깐 버석하니 굳었던 사현이 킥킥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민재와 말을 섞은 후 기분이 좋은 건 처음이다.

다 우영 덕분이다. 고작 말 몇 마디로 제 기분을 엎었다가 뒤집다니. 참으로 대단한 애송이가 아닐 수 없었다.

* * *

사현은 쨍한 빛을 뿜어내는 핸드폰 액정을 근 삼십 분째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엄지가 [회장님]이라는 단어를 누를 듯 말 듯 허공을 나돌았다.

핸드폰 옆에는 지 검사에게 받은 서류 더미가 잔뜩 쌓여 있었다. 사현은 출근하고서부터 지금까지 종일 민재와 관련한 증거를 보고, 명현의 핸드폰 번호를 봤다가, 또 증거를 보길 반복했다. 와중에도 머릿속에는 우영의 목소리가 뱅글뱅글 끊임없이 돌아갔다.

‘회장님도 형을 서자로 보냐고요.’

‘아닌 것 같은데.’

‘진짜 단지 형 어머님이 떠올라서, 그래서 형을 불러다 밥을 먹이고 갤러리도 확장해 준다고요?’

일리가 있는 가설이었다. 이성으로는 이해도 했고, 해 볼 만하다고 생각도 했는데. 영 께름칙했다.

사현이 일평생 알아 온 명현은⋯⋯ 저를 아들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었다. 대궐 같은 그의 저택에 살 때, 우연하게나마 부딪혀도 알은체하는 법이 없었다. 숱한 복도 장식이나 도우미들을 보듯 흘깃거리는 게 다였다. 그 건조하고 시니컬한 시선에선 아들에 대한 관심이나 흥미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근데, 그런 그가 정말 제 의도대로 움직여 줄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괜히 말을 흘렸다가 저만 피를 보면 어쩐다. 겨우 모은 정보를 쓰기도 전에 쓸모가 없어지면?

“아우⋯⋯.”

사현이 책상 위에다 쿵, 이마를 박았다. 두통이 일었다. 차라리 전시 준비를 하는 게 낫지. 아니면 민재나 원화를 골려 먹을 생각을 하는 게 낫지. 뿌연 안개 같은 명현이 고민의 중심에 서니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사현이 여전히 엎드린 채로, 손만 위로 올려 핸드폰을 끌어왔다. 그리고 메시지 내역으로 들어갔다. 우영과 주고받은 메시지들을 복습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스트레스가 쌓일 때, 서랍에 가득한 알약을 씹어 먹는 것보다 그의 사랑을 되뇌는 게 훨씬 좋다는 걸 얼마 전에 깨달았다.

[사진]

[저 치킨 시켰어요! 양념 하나, 프라이드 하나.]

[형은 점심 뭐 먹었어요?]

[형. 오늘 언제 와요?]

[보고 싶어요.]

[갤러리 놀러 가도 돼요?]

[대답 없으니까 가야지. 지금 출발해야지.]

[바쁘다고요?]

[사진]

[늦었어요. 저 이미 택시예요. 조금 이따가 봐요.]

[커피 마시지 마요.]

[혼나요.]

[비 와요.]

[천둥도 쳐요.]

[데리러 갈까요?]

[왜 나 안 ㄲ깨웠어요.]

[ㅎ혼자 출근하면]

[어떡해요.]

[뽀뽀도 못 했는데.]

[ㅠㅠ]

메시지를 차근차근 읽어 가던 사현이 푸흐흐, 푼수처럼 웃음을 흘렸다. 질퍽질퍽하던 두통이 순식간에 휘발했다. 고작 활자로 기분이 좋아지다니. 제가 연애를 하고 있긴 한 모양이었다.

사현이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메시지 앱을 끄고, 통화목록으로 들어갔다. 무심코 한 행동이었다. 왜 있잖는가. 버릇처럼 핸드폰을 켰다가 끄고, 홈 화면을 옆으로 스와이프하는, 그런 손장난 같은 거.

사현의 통화 목록은 매우 다채로웠다. 같이 사는 우영과는 딱히 통화할 필요가 없는지라 대부분 제인이었고, 큐레이터들도 있었으며, 기자나 지 검사도 있었다. 그러다 눈에 띈 게 민재의 이름이었다. 어제. 김밥천국에서 받았던 그 전화.

‘야! 네가 왜 아버지랑 밥을 먹어?’

‘무슨 이야기 했어?’

그것을 떠올린 사현이 퍼뜩 상체를 일으켰다.

맞아. 조금 이상했지. 그저 비아냥거리는 데에 바빴던 평소와 달리 어딘가 조급해 보였던 목소리. 따지듯 묻는데, 마치 자신이 벼랑에 내몰린 것처럼 목소리는 떨리고 말이 빨랐다.

고작 밥 먹은 게 뭐라고. 제가 명현과 무슨 작당 모의를 한다고.

“⋯⋯.”

민재가 그렇게 과민 반응한 이유가 있을까. 얼마 전에 호텔에서 그가 한 말과 관련이 있을까.

‘아버지가 요즘 이상해. 엄마가 차기 대표직 뽑는 주주 총회 언제 열 거냐고 물어도 대답이 없어. 영감탱이, 노망이라도 든 건지.’

사현의 검지가 톡톡톡 책상을 두드렸다.

화 그룹의 후계자는 대대적으로 민재라고 못 박혀 있다. 이리저리 심어 놓은 정보통에 따르면 매스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대주주들도 그리 여기고 있었다.

근데 그 못을⋯⋯ 명현이 박았던가. 아니면, 대외적으로 드러난 자식이 그뿐이니 모두가 당연히 민재가 차기 후계자일 것이라 여기는 건가.

명현은 대체 무슨 생각일까. 민재를 굵직한 계열사의 사장으로 둔 걸 보면 어느 정도 기업을 물려주겠다는 뜻은 있는 것 같은데. 왜 망설이는 걸까. 아니면, 망설이는 게 아니라 그저 민재를 경영자로 교육하는 한 방법인 걸까. 저와 잦은 만남을 가지는 것도 민재를 자극하기 위한 계략인가.

고민이 이어질수록 답은 멀어졌다. 사현이 비스듬히 턱을 괬다. 다른 정보가 필요하다. 현재 손에 쥔 것만으로는 결론을 도출할 수가 없었다.

사현은 무엇을 하든 대개 운이 좋은 편이긴 하지만, 이번 일도 운에 맡기기엔 조금 겁이 났다. 여태 일구어 놓은 모든 것들이 단숨에 증발해 버릴 수도 있으니까.

길게 한숨을 내쉰 사현이 등을 꼿꼿이 세웠다. 당장 답이 없는 고민은 길게 끌어가 봐야 시간 낭비다. 일단 일부터 하고, 정보통들이 다른 힌트를 얻어 오길 기다려야 했다.

사현이 본격적으로 업무를 시작하기 위해 그득히 쌓인 메일함에 접속했을 때였다. 소란 한 줌이 관장실 문을 타고 흘러왔다. 낯선 소란이었다. <갤러리 비>는 항상 고요하고, 적막했으니까. 사현이 있는 관장실은 더더욱.

가끔, 정말 가끔 이렇게 시끄러워질 때가 있긴 했다. 바로,

“들어가시면 안 된다니까요.”

“한두 번 오는 것도 아닌데, 매번 이렇게 잡아? 내 얼굴 몰라? 너 여기서 계속 일하고 싶으면 나한테 이러면 안 돼.”

원화가 올 때였다. 사현이 아득, 어금니를 갈았다. 이제야 일 좀 해 보려 했는데. 이 타이밍에 등장하다니. 그녀다웠다.

사현이 성큼성큼 문을 향해 걸어가 손잡이를 당겼다. 원화의 모습을 눈에 담기도 전에 그녀의 자욱한 향수 냄새가 콧구멍을 들쑤셨다. 사현이 가감 없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오셨어요?”

원화는 약속이라는 개념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하물며 전화도 하지 않았다. 행여 제가 갤러리에 없으면 어쩌려고. 직접 묻진 않았으나, 제게 먼저 전화를 거는 행위 자체에 자존심이 상하는 듯했다. 이렇게 찾아오는 건 기습 공격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고.

참, 유치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

원화가 사현을 쏘아봤다. 또 무엇에 화가 난 건지, 검은 동공에 분노가 잔뜩 껴 있었다. 그녀가 사현의 어깨를 밀치며 관장실 안으로 침입했다. 사현이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제인에게 괜찮으니 가서 일 보라며 손짓했다. 제인이 떨떠름한 낯으로 등을 돌렸다.

사현이 지옥 불에 떨어진 듯한 얼굴로 문을 닫았다. 원화의 향수 냄새가 목덜미를 야금야금 씹어 댔다.

사현은 늘 그렇듯, 원화가 앉아 있는 소파가 아니라 책상으로 향했다. 허나 이번엔 앉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득히 쌓인 종이 틈에서 붉은 클립으로 묶여 있는 서류를 찾아냈다. 그것을 원화의 앞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마침 잘 오셨네요. 이걸 어디로 보낼까,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원화가 눈만 내려 그것을 바라봤다.

“저번에 망가트리신 작품 복원 비용이에요. 전시가 2주나 미뤄져서, 그에 대한 보상 역시 포함되어 있어요. 지불하지 않으시면 법적 절차 들어갈 테니까 그렇게 아시고요.”

나지막한 음성으로 조곤조곤 이어지는 사현의 말에 원화가 코웃음을 쳤다. 그녀의 핏빛 입술이 얄궂게 뒤틀렸다.

할 말을 마친 사현은 곧장 책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턱을 괸 채 못다 읽은 메일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원화에게는 최대한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다. 그게 정신 건강에 좋기 때문이다. 바늘처럼 코끝을 찔러 대는 역한 향수 냄새에 이미 정신이 반쯤 뭉그러졌지만, 그래도.

원화는 호기로이 들이닥친 것치고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창 너머의 갤러리 정원을 뚫어지라 응시하기만 했다.

원화의 향수 향에 후각이 마비될 때쯤, 그녀가 입술을 달싹였다. 시선은 여전히 정면을 향해 있었다.

“회장님이 홍콩에 갤러리 열어 주기로 하셨다며?”

질문 아닌 질문에 사현의 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어떻게 아세요? 회장님이 말씀하셨을 것 같진 않은데.”

그 역시 컴퓨터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꾸했다.

“그이가 뭘 하는데 내가 모르겠니?”

원화가 살짝 내려온 옆머리를 귀 뒤에 꽂았다.

“⋯⋯.”

사현이 무표정한 얼굴로 볼 안쪽을 잘근거렸다. 명현과 원화는 부부의 관계이긴 하나, 부부의 정을 나누고 있진 않다. 명현이 임신한 선애를 집으로 데리고 들어왔을 때부터 그렇게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다. 어쩌면 그 전부터 데면데면했을 수도 있고.

그러니 명현이 사사건건, 그것도 불륜녀의 서자에게 무엇을 해 주려 한다, 따위의 말을 했을 리 없었다.

근데 원화는 어찌 알았을까. 명현이 하는 일을 하나하나 따로 보고받기라도 하는 걸까. 뭐, 그게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민재가 화 그룹 회장실에 들어가길 바랄 테니 명현의 일에 지극한 관심을 가질 만도 했다.

원화가 사현 쪽으로 느릿하게 고개를 움직였다.

“가면 여기는 정리하니? 영영 안 돌아오는 건 어떠니? 피차 얼굴 보기 껄끄러운 사이에 좋은 기회 같아서.”

그 말에 사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무슨 말을 하러 왔나, 했더니. 제가 이 나라를 떠날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휩싸여 온 모양이었다. 사현이 지그시 원화와 눈을 맞췄다.

“이렇게 불쑥불쑥 찾아오시지만 않으면 좁은 서울 바닥에서도 얼굴 안 보고 살 수 있는데요.”

“⋯⋯시답잖은 말싸움은 말자꾸나. 그래서, 언제 가니?”

“글쎄요. 아직 정해진 게 없어서.”

“최대한 빨리 정리하고,”

“추후 정해지면 알려드릴 테니까 가세요, 이제.”

원화의 말을 뚝 자른 사현이 무심히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고작 말 몇 마디 주고받기 위해 화려하게 치장하고 여기까지 행차한 원화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받아주기도 지치고, 재미도 없고. 저절로 고개가 가로저어졌다.

그 순간이었다.

“야! 내 말 끊지 마!”

원화가 찢어지는 듯한 음성으로 고함을 질렀다. 마치 방금 지옥에서 올라온 마귀가 내지르는 비명 같았다. 내내 무감하던 사현이 어깨를 떨며 놀랄 정도였다.

원화가 벌떡 일어났다. 악이 넘치는 입술을 앙다물고, 주먹을 옴팡지게 움켜쥔 게, 관장실에 불이라도 지를 기세였다.

“이 천박한 새끼가 주제도 모르고 자꾸⋯⋯!”

그녀가 구두로 콱콱 땅을 지르밟으며 사현을 향해 다가왔다. 부릅뜬 눈에 분노가 가득했다. 그 분노는 쉽게 사현에게 옮겨 붙었다. 사현이 신경질 가득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박한 짓은 누가 하고 있는데요? 음성 높이지 마세요. 듣기 좋은 목소리 아니시니까.”

비아냥 가득한 사현의 말에 원화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섰다. 그녀가 휘휘 주위를 둘러봤다. 무엇이라도 부수려는 모양이었다. 허나 안타깝게도, 오늘은 관장실에 이렇다 할 그림이 없었다. 뿌득 이를 간 그녀가 지척에 있는 조각상을 향해 다가갔다.

사현이 짧게 탄식하며 의자에 앉았다. 어쩜 저리도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지.

“저 관장실에 CCTV 달았어요.”

“⋯⋯.”

“누구 때문인지는 아시죠?”

“⋯⋯.”

“이번에 또 그러시면 법적으로 해결할 생각 없고요, 그냥 매스컴에 공개할 거예요.”

“⋯⋯.”

“민재 형한테 자랑스러운 어머니가 되시겠네요.”

원화의 유일한 약점은 민재다. 평생을 민재를 위해 살았고, 앞으로도 그럴 여자였다. 숨 쉬는 것조차 아들에게 폐가 될까, 조심하는 여자. 아들을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는 여자.

아니나 다를까. 원화의 행동이 뚝 멎었다. 씩씩거리며 들썩이던 어깨 역시 움직임이 사라진 걸 보면, 숨 역시 멈춘 듯했다. 반면에 사현은 숨통이 한결 트이는 걸 느꼈다. 역시, 원화의 불행만큼 기꺼운 건 없었다.

사현이 속으로 못된 웃음을 짓는데, 원화가 빙그르르 몸을 돌려 사현을 향해 다가왔다. 책상 앞까지 다가온 그녀가 허리를 숙이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 요즘 남자 끼고 산다며?”

순간, 사현의 동공이 점처럼 작아졌다. 전신의 피가 휘발하는 것 같았다.

“아예 데리고 산다던데. 이름이 뭐더라.”

원화가 흐음, 목으로 신음했다.

사현이 질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 찰나, 빙긋 보기 좋게 웃는 얼굴이 아른거렸다. 형. 사현이 형. 좋아해요. 그가 부르는 제 이름도 들려왔다. 커다란 손과 푸근한 품도 떠올랐다. 그의 감미로운 체온과 향기도 어른거렸다.

사현이 꽉 주먹을 말아 쥐었다.

“⋯⋯닥쳐.”

“서⋯⋯ 뭐였는데.”

“닥치라고.”

“아, 서우영이었나?”

원화의 입이 귀까지 길게 찢어졌다. 흡사 마귀 같은 웃음이었다.

사현은 오장육부가 아래로 와르르 쏟아지는 듯한 공허함과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척추가 부들부들 떨렸다.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뱄고, 손끝은 파르르 경련했다. 시야가 아득하게 멀어지며 귓가에 이명이 몰아쳤다. 가느다란 줄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몸뚱이가 휘청거렸다.

“무슨, 무슨 짓 했어, 당신.”

사현이 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우영이는 건드리면 안 됐다. 거긴 불가침의 영역이다. 고결하고, 고귀한, 저만의 성역이란 말이다. 원화 따위가 입에 올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사현은 지금 당장, 원화의 저 가느다란 목을 비틀고 싶었다. 그녀의 하얀 피부가 시뻘건 피로 점철될 때까지 난도질하고 싶었다. 가녀린 뼈를 부수고, 살덩이를 으깨고 싶었다. 살의를 느낀 적이야 수도 없지만, 이토록 세찬 살의는 처음이었다.

형형하게 날이 선 원화의 눈동자가 그런 사현을 세심히 관찰했다. 창백하게 질린 사현의 꼴이 제법 볼 만했다. 원화는 몹시 오랜만에 기꺼움이라는 감정을 경험했다.

사현에게 약점이 생겼다. 그것도 아주, 아주 치명적인 약점이.

원화가 인자한 낯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내가 무슨 짓을 했다는 건 아니야.”

“근데 왜,”

“그렇다고 무슨 짓을 안 하겠다는 뜻도 아니란다.”

“⋯⋯.”

“앞뒤 분간 없이 달려들면⋯⋯ 네가 아끼는 것에 상처가 생기지 않겠니? 그때 내가 찢은 그림처럼 말이다.”

그녀의 입꼬리가 잘 벼려진 칼처럼 날카로이 위로 솟구쳤다. 그 웃음이 어찌나 기이한지. 사현은 처음으로 원화에게서 두려움을 느꼈다. 제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자연재해나, 귀신이나 괴물 따위를 눈앞에 둔 듯 소름이 돋았다.

원화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마귀 같던 그녀의 얼굴이 온화한 여성으로 되돌아왔다. 그녀가 뒤를 돌아 소파로 향했다. 그리고 손바닥만 한 백을 챙겨 팔꿈치에 걸었다.

“아무래도 홍콩은 한국보다 개방적인 곳이니, 그곳에서 우영이란 아이와 함께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떠니?”

“⋯⋯.”

“그러잖아도 너, 여기에 적이 많지 않니? 그곳에 가서 새 시작해. 더러운 피 씻어 낸다고 생각하면 어떻겠니?”

싱긋. 원화가 웃었다. 보기 좋은 웃음이었다. 기품 있고, 여유로운. ‘사모님’이라는 칭호에 더할 나위 없이 부합했다.

“⋯⋯.”

사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언급한 우영의 이름이 웽웽 귓구멍에 몰아쳐서 정신이 다 혼미했다.

“잘 생각해 보렴. 괜히 이상한 데 관심 두지 말고.”

가벼운 음성으로 대화를 일갈한 원화가 턱을 살짝 위로 올렸다. 그러고는 경쾌한 구두 소리를 내며 관장실을 벗어났다.

곧 달칵, 문이 닫혔다. 원화가 떠났다. 그런데도 그녀의 지독한 향수 냄새는 옅어질 줄을 몰랐다. 아니, 향수 냄새가 아니라 락스 냄새인가.

사현은 그녀가 떠난 후로도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광활할 정도로 넓은 관장실이 몹시 좁게 느껴졌다. 마치 사방이 꽉 막힌 관에 갇혀 있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B. 괜찮으세요?”

원화의 퇴장을 기다리던 제인이 빼꼼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몇 달 전, 원화와의 만남 후에 까무러쳤던 전적이 있는 터라 여간 걱정이 되는 게 아니었다. 다행히 사현은 사지 멀쩡히 서 있었다.

⋯⋯서 있어? 왜 서 있지?

이상한 낌새를 느낀 제인이 관장실 안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사현이 에어 드레서에서 재킷을 챙겼다. 주머니를 더듬으며 차 키의 안위를 확인하기도 했다.

그 모습에 제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디 가시게요?”

“나, 집에. 집에 좀, 다녀올게. 우영이가⋯⋯.”

사현이 어딘가 삐걱거리는 몸짓으로 재킷에 팔을 꿰었다. 팔이 꺾여 잘 들어가지 않자, 욕설을 읊조리며 주머니에서 차 키만 빼냈다. 그리고 재킷은 대충 의자에 던졌다.

“집이요? 우영 씨는 또 왜요? 안 됩니다. 한 시간 뒤에 조경 관리 팀과 미팅 있으신걸요.”

제인이 설핏 미간을 좁혔다. 그가 갑자기 왜 집엘 가려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현이 뚜벅뚜벅 큰 보폭으로 제인에게 다가갔다. 아니, 제인을 지나쳐 문밖으로 나가려 했다. 미팅이 있다는 제인의 말을 전혀 듣지 않은 듯했다.

“B.”

제인이 가볍게 사현의 팔을 쥐었다. 사현이 이상하다. 어쩐지, 원화가 다녀갔는데도 멀쩡하다 했더니. 또 이상하다. 우영을 불러야 하나, 고민하는데 초점 없이 텅 빈 사현의 눈동자가 제인에게 꽂혀 왔다.

“조금만, 조금만 미뤄 줘. 삼십 분만.”

“⋯⋯.”

“아니. 두 시간만 미뤄.”

사현이 어울리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제인이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었다가 놨다.

“⋯⋯네.”

사현이 고맙다는 뜻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어색하기 그지없는 미소였다. 그러더니 부리나케 관장실을 빠져나갔다. 탁탁탁, 멀어지는 발소리가 조급했다.

제인이 그런 사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사현이 뛰는 건 처음 본다. 항상 꼿꼿한 자세로 앞만 응시하며 걷는 그인데. 매사에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잘 없는데. 미팅을 미루는 일 역시 드문데. 분노가 아니라 걱정에 침잠한 얼굴 역시 처음 봤다.

우영이 그에게 대단한 존재이긴 한 모양이었다.

* * *

집에 도착한 사현이 거칠게 현관문을 열었다. 막 정오에 다다른 집은 고요했다. 밤새 그림을 그린 우영이 한창 잠에 빠져 있을 시간이니 그럴 만도 했다. 열두 시가 훌쩍 넘어서야 방금 일어났다고, 점심은 무엇을 먹을 예정이라고, 형은 무엇을 먹냐며 메시지를 보내 올 테였다.

반복되는 일상이다. 항상 그래 왔고, 앞으로도 이어질 일상이었다.

그러니 지금, 우영은 침실에서 자고 있을 것이다. 그걸 알고 있는데, 왜 이리 불안한지 모르겠다. 분명 원화가 무슨 짓을 하지 않았다고 했거늘. 그런데도 일을 미뤄 놓고 집까지 달려와 우영의 안위를 확인하려는 자신이 우스웠다.

그래도 어쩌겠나. 우영이 멀쩡히 있는 걸 제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기도가 뒤틀려 콱 죽어 버릴 것만 같은데.

우영의 침실 앞에 선 사현이 크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천천히, 조심스레 문고리를 돌렸다.

검은 어둠이 사현의 발등을 스쳤다. 그 뒤로 짙은 고요가 밀려왔다. 암막 커튼을 이중으로 덧댄지라 문밖에서는 우영의 안위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컴컴한 칠흑을 바라보던 사현이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시야가 어둠에 적응하자, 가구들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는 곧장 침대로 다가갔다.

“⋯⋯.”

그곳에 우영이 있었다. 반쯤 옆으로 돌아누운 우영이 색색 규칙적인 숨을 내쉬며 잠을 자고 있었다. 사현은 단정하게 감긴 그의 눈과 미약하게 들썩이는 어깨, 나른히 늘어진 그의 손가락, 가볍게 퍼진 머리칼 하나하나를 아주 오랫동안 공들여 관찰했다.

그리고 마침내 결론지을 수 있었다.

내 우영이가 무사해.

이렇게 평화로워.

아직 내 집에, 내 옆에 있어.

그걸 확인하자마자 힘이 쭉 빠졌다. 전신의 피가 발바닥 아래로 콸콸 쏟기는 듯했다. 사현이 침대 아래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까워진 거리에 우영의 숨소리가 한층 크게 들려왔다. 새근새근 이어지는 숨 자락이 어찌나 감동적인지 울컥 환희가 치받았다.

사현이 멍하니 우영을 바라봤다. 도톰한 이불에 파묻혀 세상모르고 자는 그의 모습이 그 어떠한 명화보다 아름답고, 그 어떠한 예술보다 찬란했다.

그가 무언가에 홀린 듯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꾸물꾸물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갔다. 이불을 헤치고, 우영의 품을 강탈했다. 우영의 냄새가 파도처럼 전신을 덮쳤다. 빳빳하게 굳어 있던 어깨가 뙤약볕의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렸다.

희미한 미소를 띤 사현이 막 우영의 가슴팍에 코를 묻었을 때였다. 넙데데한 가슴팍이 꿈틀거린다 싶더니 두꺼운 팔이 한 아름 사현을 껴안아 왔다.

“⋯⋯일찍 오셨네요.”

우영이 묵묵하게 잠긴 음성으로 말했다. 그는 여전히 눈은 감은 채였다. 아직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 못했다. 배려도 모르고 품을 파고드는 고양이 한 마리의 존재감이 너무나 강렬해서,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깬 거였다.

어째서 사현이 이 시간에 집에 있는 건지. 아니면 제가 저녁까지 꼬박 하루를 내리 자 버린 건지. 혹 그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궁금한 건 많았으나 쏟아지는 잠기운을 물리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응.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일찍 왔어.”

사현이 조금 더 깊이 우영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랬어요?”

우영이 푸스스 웃으며 사현의 머리칼에 입을 맞췄다. 그쯤, 우영은 사현에게 무슨 일이, 그러니까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음을 알아차렸다. 그가 잠을 털어내기 위해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그 와중에도 사현의 등줄기를 길게 쓸어내렸다. 버릇처럼 하는 위로였다.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

“진짜?”

“응. 그냥⋯⋯ 갑자기 외로워서. 알잖아. 나 유별난 거.”

“⋯⋯.”

간신히 눈을 뜬 우영이 살짝 일그러진 시야로 사현을 내려다봤다. 그러나 사현은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고집스레 우영의 가슴에 고개를 묻고 있었다.

“더 자. 조금만 있다가 갈게.”

사현이 두 팔로 우영의 허리를 꽉 세게 껴안았다.

“⋯⋯.”

우영은 사현의 모호한 태도가 영 마뜩잖았으나, 이렇다 할 추궁을 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정수리 위로 주룩주룩 끊임없이 잠을 쏟아 부어서 도무지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우영은 금세 다시 잠이 들었다. 사현은 그가 깊은 잠에 빠질 때까지 소리 죽여 호흡했다. 그리고 우영의 몸이 잔잔하게 들썩이기 시작했을 때. 아주 작은 목소리로 우영을 불렀다.

“우영아.”

“⋯⋯.”

우영은 대답이 없었다. 그래도 사현은 계속해서 우영을 불렀다.

“우영아.”

“⋯⋯.”

“⋯⋯우영아.”

어디 가면 안 돼.

계속 내 옆에 있어.

내 옆에 있어 줘, 제발.

나는 이제 너밖에 없어.

아니, 너만 있으면 돼.

* * *

선애의 기일이 다시 돌아왔다. 사현은 1년 전에 그랬듯이, 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나 검은 정장을 찾아 입었다. 우영이 그런 사현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입술을 쭈삣거렸다.

우영은 며칠 전부터 날을 새고 있었다. 사현 어머니의 기일인데 잊으면 안 됐다. 제가 뭐라고 긴장이 되어서 밤새 그림을 그리는 둥 마는 둥 했다.

같이 갈까요? 같이 가도 돼요? 같이 가고 싶어요. 그 말을 하고 싶었는데, 도무지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우영은 부모라는 존재를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는 터라, 선애의 죽음이 사현에게 얼마나 무겁고, 얼마나 날카롭고, 또 얼마나 사무칠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굳이 예를 들자면, 제가 사랑해 마지않는 사현이 세상에서 사라진 느낌이 아닐까.

그저 찰나,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그 고통을 통감하고 나니 더더욱 입술이 떨어지질 않았다.

사현이 저를 사랑하고 있음을 안다. 그 사랑이 아주 비대하고, 깊다는 것 역시 안다. 하지만 이건 결이 달랐다. 말주변도 없고, 사회성도 없고, 관계에 서툰 저가 따라가서 어쭙잖게 위로하고자 나불거렸다가 선을 넘으면 어쩌나. 여전히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상처를 들쑤시면 어쩌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자기야.”

거울을 보며 넥타이를 매던 사현이 우영을 불렀다.

“네!”

우영이 퍼뜩 그의 옆에 섰다. 혹, 사현이 먼저 함께 가자고 말해주나 싶어 기대됐다.

“그렇게 다 죽어 가는 얼굴로 나 걱정할 필요 없어.”

사현이 잔잔한 음성으로 말했다. 깜짝 놀란 우영이 손바닥으로 벅벅 자신의 얼굴을 문댔다. 그렇게까지 티가 났나. 하여튼, 사현은 눈썰미가 너무 좋다.

“저번에도 멀쩡히 돌아왔잖아.”

사현은 조금 핏기가 없고 피곤해 보이기만 할 뿐,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근데 어째서인지, 그게 더 마음이 아팠다.

“그래도⋯⋯ 외롭잖아요.”

눈썹 끝을 축 늘어트린 우영이 사현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작고 마른 몸뚱이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가 사현의 목덜미에 볼을 비볐다.

슬픔도 전염이 되나. 왜 이렇게 우울한지 모르겠다.

사현이 뒤를 돌아 우영의 곱슬한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제 걱정으로 만면을 가득 채운 우영이 몹시 사랑스러웠다.

“일찍 올게.”

“일찍 언제요?”

“저녁 같이 먹자.”

우영이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저녁쯤 온다니. 생각보다 이른 시각이었다. 그런데도 꿉꿉한 기분이 풀리질 않았다. 우영이 사현의 귓불을 조물거렸다. 밤이 되면 다시 만질 수 있는 사현인데도 아쉽고 또 아쉬웠다. 그가 출근하는 날과 크게 다르지도 않은데, 괜히 그랬다.

“알았어요. 운전 조심히 해요.”

“응.”

“핸드폰 차에 두고 내리지 말고.”

“응.”

“도착해서 한 번, 출발할 때 한 번 전화해요. 문자도 괜찮고.”

“그럴게.”

사현이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꼬박꼬박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꽉 뭉쳐 있던 우영의 심사가 한결 느슨히 풀렸다.

“밥도 챙겨 먹고.”

“음⋯⋯.”

마지막 말에 사현의 눈알이 슬쩍 옆으로 굴러갔다. 우영이 그런 사현의 볼을 검지로 톡톡 두드려 다시 자신을 보게 했다.

“거나하게 진수성찬 먹는 것까지는 안 바라니까, 우유라도 사 먹어요. 김밥 같은 거 먹으면 더 좋고.”

“그건 약속 못 하겠다. 괜히 먹었다가 탈 날 것 같아서.”

“⋯⋯.”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잖아도 위가 약한데 꾸역꾸역 먹었다간 탈이 날 게 분명했다. 제가 곁에 없을 때 아픈 사현이라니. 병원을 갈 리도 없고.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운전대에 얼굴을 처박고 있을 텐데.

“그래요, 그럼. 다녀와서 저랑 먹어요.”

“응.”

사현이 그건 어렵지 않다는 듯 긍정했다. 아래위로 움직이는 고개를 따라 차분히 내려온 머리칼이 찰랑거렸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우영이 참지 못하고 사현의 입술을 쪽쪽 쪼아 먹었다.

“아유, 우리 형. 말 잘 들으니까 너무 예쁘네.”

사현이 간지럽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애 취급당하는 게 기분이 좋을 줄이야.

세상에서 가장 아픈 날, 이렇게 웃는 건 처음이라 신기했다. 항상 울분과 분노만 토하다 왔었거늘. 오늘은 잔잔히 엄마와 대화를 나누다가 올 수 있을 것 같았다.

다 우영이 덕분이다.

* * *

[출발했어.]

우영이 두 시간 전에 사현에게서 온 메시지를 재차 확인했다. 집으로 출발했다는 메시지였다. 이쯤이면 돌아올 만도 한데. 어머니를 아주 먼 곳에 모셨나. 아니면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사현의 목적지가 어디였는지 알 수가 없어 시간 가늠이 안 됐다.

작업실에 있던 우영이 핸드폰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또 메시지 함에 들어갔다. 화면에는 여전히 [출발했어.]라는 네 음절만 덜렁 떠 있었다.

우영이 달달달 다리를 떨었다. 저녁으론 뭘 먹이지. 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을 테니 아주 맛있는 걸 먹이고 싶었다. 그렇다고 라면처럼 자극적인 거 말고. 적당히 순하면서도 사현의 입맛에 맞는 음식이 뭐가 있으려나.

우영이 인상까지 쓰며 깊게 고민하는데. 딩동- 초인종이 울렸다.

“⋯⋯.”

초인종이라니. 사현의 집 벨이 울릴 때는 우영이 시킨 배달 음식이 도착했을 때뿐이었다. 우영이 엉거주춤하게 일어났다.

혹 사현이 미리 음식이라도 시켰나? 아니면 제인이 왔나? 그녀라면 먼저 연락을 줬을 텐데. 그게 아니면 택배인가. 가끔 사현이 개인적으로 구매한 미술품이나 옷가지가 배송 오긴 했다. 물론, 항상 미리 언질을 줬으나 오늘은 날이 날이니만큼 잊었을 확률이 높았다.

우영이 인터폰을 켰다. 손바닥보다 작은 화면에 불이 들어왔다. 그 속엔 낯선 남자가 있었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있어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질적이지 않았다. 배달이나 배송을 오는 대부분의 사람이 저러한 차림이었으니까.

“누구세요?”

우영이 물었다.

-아, B 있습니까?

남자가 되물었다. 우영의 눈썹이 한결 느슨해졌다. 사현을 찾아온 사람이구나. 그를 B라 부르는 걸 보니 갤러리와 관련한 사람인 듯했다.

“지금 안 계시는데.”

-아⋯⋯ 없습니까?

“급한 일이세요? 사현이 형, 아니, B한테 전화해 보셨어요?”

-전화를 안 받아서⋯⋯.

남자의 음성이 난처로 물들었다. 우영이 아, 짧은 감탄사를 내놓았다. 그래. 오늘이라면 연락이 안 될 만도 했다. 저에게도 ‘도착했어.’와 ‘출발했어.’ 딱 두 문장만 보냈으니까.

“어⋯⋯. 내일 <갤러리 비>로 찾아가 보실래요?”

-내일은 안 되는데.

“⋯⋯.”

우영이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어쩐다. 오늘은 영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우영이 핸드폰을 밝혔다. 제인에게 연락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래도 저보다는 그녀가 훨씬 적확한 대처를 할 테였다.

우영이 막 제인의 전화번호를 터치하기 직전이었다. 화면 속의 남자가 카메라로 쑤욱 얼굴을 들이밀었다. 가늘게 쪽 잡아 째진 눈이 화면 가득 찼다.

-B한테 전달할 게 있는데, 이것만 주고 가면 되거든요.

“아, 그래요?”

우영의 입술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그거야 뭐,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영이 꾸욱 OPEN 버튼을 눌렀다.

실제로 마주한 남자는 화면에서 보던 것보다 키가 작았다. 왜소하고, 비쩍 말랐으며 광대가 툭 도드라져 있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전달할 게 있다더니. 어찌 빈손이란 말인가.

“어⋯⋯ 전달할 거라는 게⋯⋯.”

의문을 띤 우영이 살짝 고개를 비틀었다.

그 순간, 남자가 현관문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섰다. 갑작스러운 침입이라 막을 틈도 없었다. 당황한 우영이 얼른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우영의 커다란 덩치에 남자가 흠칫 반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더니 의심 어린 눈초리로 물었다.

“누구세요?”

“⋯⋯예?”

우영이 잘못 들었다는 듯 반문했다. 질문의 화자와 청자가 바뀌었다.

“누군데 여기 있어요?”

그러나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눈을 부라렸다. 위치만 아니면 우영이 침입자고, 남자가 이 집의 주인인 것 같았다.

“어⋯⋯. 여기 사는 사람인데요.”

우영이 느릿하게 대답했다.

“B랑 무슨 사인데 여기 살아요?”

“그냥 아는, 아는 사이라서요.”

남자가 뾰족하게 쏘아붙인 질문에 우영이 더듬더듬 답을 내놓았다. 사현과 자신의 관계를 설명할 단어는 많지만, 부러 두루뭉술하게 말했다. 왠지 좋은 사람 같지가 않았다. 밝혀 봐야 좋을 게 없을 것 같달까.

“그림 그려요?”

남자의 시선이 우영의 손으로 흘러갔다. 작업실에서 나온 터라 미처 닦아 내지 못한 유화 물감이 여기저기에 묻어 있었다. 우영이 자신도 모르게 손을 뒤로 숨겼다. 고작 시선일 뿐인데 영 께름칙했다.

“네? 아, 네, 뭐⋯⋯.”

우영의 답은 모호하긴 했지만, 분명 긍정이었다. 남자의 눈이 일순간에 뾰족이 곤두섰다.

“당신이 네온이야?”

“⋯⋯예?”

우영이 흡, 숨을 멈췄다. 이런 질문은 네온으로 살아오면서 처음 받는 거였다. 그의 안색이 순간 하얗게 질렸다. 아무래도 거짓에 능하지 못한지라 당황한 걸 숨길 수가 없었다.

그에 남자의 입술이 삐뚜름히 뒤틀렸다. 우영의 당황은 곧 시인이었다.

“네온 맞구나?”

“⋯⋯아닌데요.”

우영이 뒤늦게 거짓을 말했다. 허나 이미 늦은 시점이었다. 남자의 눈가가 얄궂게 접혔다. 그러고는 친한 친구에게 하듯, 어깨를 튕기며 우영의 팔뚝을 쳤다.

“아니기는. B가 잘해줘?”

“⋯⋯.”

“전시는 몇 개나 하자고 하든? 두 개? 아니면 세 개?”

말이 단숨에 반 토막 났다. 우영의 미간에 짜증이 서렸다. 그러잖아도 오늘은 신경 쓸 게 많은 날이다. 낯선 침입자가 반갑지 않았다.

“저기요. 아니라고요. 오신 용건이나 이야기하세요.”

우영이 쏘아붙이자 남자가 모자챙을 만지작거렸다. 그 와중에도 우영의 어깨너머로 집안을 살펴 댔다. 사현이 정말 집에 없는지 확인하는 듯했다. 우영이 슬쩍 몸을 움직여 그 불쾌한 시선을 차단했다.

남자가 우영을 올려다봤다. 희번덕거리던 전과 달리 퍽 애처로운 눈빛이었다.

“B한테 말 좀 전해줘.”

“무슨 말이요?”

“내가 잘못했다고.”

“⋯⋯.”

“아주 반성하고 있으니까, 그림 좀 그리게 해 달라고.”

그 순간, 우영은 이 남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처음 사현을 만나러 <갤러리 비>에 갔을 때, 사현이 말한 적 있었다.

‘믿을 구석이 있으면 기고만장해지고, 기고만장해지면 버릇이 없어지고, 불만이 생기고, 그 불만을 감히 나한테 토로하고, 그러다 보면 관계가 어그러지고, 끝내는 관계가 파멸하지. 관계의 파멸은 전시의 파멸까지 이어지거든.’

그러니까, 아마도 이 남자는 사현이 저와 만나기 전에 진흙 속에서 찾았을 ‘진주’인 듯했다. ‘가족 없는 고아. 보잘것없는 학벌. 어쭙잖은 실력. 궁핍한 주머니. 활발하지 않은 대인관계. 미술계 경험은 전무’한, 사현이 만들어 낸 또 하나의 ‘진주’ 말이다.

“내 전화를 안 받아. 갤러리로 찾아가도 들어갈 수가 없어. 계속 따라다녀서 접근 금지 명령 받았거든. 억울해서 오해 좀 풀어 보겠다는데, 안 만나 주잖아. 그럼 계속 따라다닐 수밖에 없는 거 아냐? 근데 B가 고소를 해 버려서⋯⋯.”

남자가 일그러진 얼굴로 억울함을 토로했다. 우영이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그런 남자를 응시했다. 전화를 안 받는다고? 사현이 누군가의 전화를 보고도 못 본 척하거나, 무시하는 건 본 적이 없었다. 혹 이 남자의 번호를 차단이라도 해 놓은 것일까.

또, 접근 금지 명령은 무엇인가. 이 남자가 사현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법원이 판결을 내렸단 말 아닌가. 대체 사현에게 무슨 짓을 했길래 그런 처벌을 받았을까. 뭐가 됐든, 사현에게 좋은 영향을 끼칠 사람은 아닌 듯했다.

우영이 꾸욱 주먹을 말아 쥐었다. 판단이 끝났다. 이 남자는 나쁜 사람이다. 여차하면 저 나불거리는 얼굴을 터트려 줄 의사도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눈치가 없었다. 목소리가 점점 더 격양되고, 도드라진 광대는 푸들푸들 떨리기까지 했다. 그는 혼신을 다해 사현을 욕하고, 까 내렸다.

“아니, 씨발. 9할이나 떼 가니까, 어? 그러니까 내가 다른 갤러리랑 컬렉터들한테 눈이 돌아가는 건 당연한 거 아니냐? 너도 알지? B 그 씹새끼가 갑질 존나게 하는 거?”

“⋯⋯.”

“지가 예술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이렇게 그려라, 저렇게 그려라, 나불나불. 나중에는 퀄리티가 떨어져서 못 팔 그림이라고 지랄하고 말이야. 어차피 컬렉터들은 알지도 못하는데 혼자 뭘 그렇게 따지는지, 시팔놈이⋯⋯.”

우영의 얼굴에서 점점 표정이 사라졌다. 듣고 있기가 거북했다. 지금 누구 앞에서 사현을 욕한단 말인가. 손등 위로 핏줄이 도드라졌다. 불끈거리는 주먹을 남자의 보랏빛 입술에다 쑤셔 넣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우영은 그러지 않았다. 생각을 해 보자. 남자는 사현의 핸드폰 번호를 알지만, 통화가 성사된 적이 없다. 사현이 받지 않는 것일 수도 있고, 그를 차단했을 수도 있고, 또는 남자가 잘못된 번호로 전화를 거는 것일 수도 있고.

<갤러리 비>에도 찾아가는 것 같지만, 접근 금지 명령 때문에 사현을 쉽게 만나지 못한다. 아마 갤러리 직원들이 그를 알고 있겠지. 생전 안면이라곤 없는 제 앞에서 이다지도 신랄하게 사현을 비난하는 거로 보아, 직원들에게도 꽤나 행패를 부렸을 것 같았다.

⋯⋯근데 왜 여태 집에는 오지 않았지? 우영은 사현의 집에서 근 이 년을 살았다. 헌데 맹세코 이 남자는 처음 봤다. 그것도 하필 사현이 집을 비운 날, 사현이 가장 나약해지는 날 집으로 찾아 왔다.

우연일까. 우연일 수 있는 상황일까.

“뭘 잘못하셨는데요?”

우영이 덤덤한 얼굴로 물었다.

“뭐?”

나불나불 사현을 욕하던 남자가 되물었다.

“뭘 잘못하셨길래, 그림을 못 그리고 계세요?”

우영이 느릿하게 문장을 풀어 말했다. 남자가 그러지 않았는가. 사현에게 잘못했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아주 반성하고 있다고. 그러니 그림 좀 그리게 해 달라고. 그 말인즉슨, 사현에게 무엇을 잘못했고, 그래서 그림을 못 그리고 있는 상태라는 거였다.

말만 들으면 사현이 그의 손목을 잘라 가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근데 그의 두 팔은 멀쩡했고, 하물며 다리도 두 개 다 붙어 있었다.

뒤늦게 우영의 말을 이해한 남자가 부루퉁히 대답했다.

“그림을 못 그리고 있는 게 아니야. 그림을 못 팔고 있는 거지.”

“왜요?”

“그거야 B가 평론가고 컬렉터고 내 그림이 좆같다며 까고 다니니까 그렇지.”

남자의 눈이 가느스름하게 째졌다. 눈앞에 사현이 있으면 눈빛으로 찔러죽일 기세였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보던 우영이 하, 짧게 숨을 끊어 냈다. 그러고는 건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 그림이 좆같은가 보죠.”

“⋯⋯뭐?”

남자가 턱을 아래로 뻐끔 떨어트렸다. 붕어 같은 얼굴이었다. 우영이 자신의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사현이 올 때가 됐다. 그러잖아도 피곤할 텐데 이 남자와 마주하게 할 순 없었다. 얼른 내쫓아야지, 얼른.

“사현이 형은, 아니, B는 그림으로 거짓말 안 해요. 당신 그림이 정말 별로니까, 당신과의 계약을 끝낸 것뿐일 거예요.”

“너 이 새끼⋯⋯.”

“B가 그랬거든요. 아무리 가치를 올려 팔더라도, 팔 만한 그림을 판다고.”

우영이 먼 옛날, 사현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림이 밀리면, 퀄리티가 엉망진창이 되는 작가들이 있어. 내가 아무리 작품을 뻥 튀겨 판다지만, 팔아도 될 만한 걸 팔고 싶거든. 적어도 상도덕 없는 사기꾼은 되기 싫단 말이야.’

성공이라는 게 그렇다. 과거에는 간절하고, 간절해서 열심히 했어도, 이루고 나면 무감해지고 요행을 바라는 법이다. 이 남자도 그랬겠지.

<갤러리 비>에서 첫 전시를 열고, 처음으로 그림이 팔리고, 첫 정산을 받고. 그 순간은 몹시 행복했을 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두 번째, 세 번째 전시가 이어지면서 그 행복에 무뎌졌겠지.

다른 갤러리의 관장이나 컬렉터들이 은근히 따로 그림을 팔라며 말을 흘렸을 거고, 그럼 사현이 떼어가는 몫이 없어지니 더 많은 돈을 손에 쥘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터였다. 그 후 사현의 갤러리에 전시할 그림과 사현이 잡아 오는 커미션에 더해 독자적으로 뒤로 받은 커미션까지 처리했을 것이다.

허나 아무리 천재적인 작가라도 결국엔 인간의 몸뚱이 속에 갇혀 있다. 그림을 그리는 것도 일종의 노동인데, 그 많은 그림을 그려 낼 순 없었을 터. 질이 떨어지는 건 지극히 당연한 순리였다. 그리고, 눈썰미가 정점에 다다라 있는 사현이 그것을 모를 리 없었겠지.

사현의 성격에 이 남자를 혼내거나 타이르진 않았을 것이다. 그냥 그 자리에서 남자와의 계약을 끝냈을 게 분명했다.

“당신 그림이 팔 수 없을 만큼 엉망이 됐으니까 자연히 안 팔리는 거예요.”

“아니야.”

“왜 아니라고 생각하시는데요?”

“내 그림은 똑같아. 여전히 대단하다고. 내가 컬렉터들이랑 따로 그림 몇 점 거래했다고 B가 뒤에서 일부러 날 엿 먹이는 거야.”

남자는 꼭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자신의 귀로 들었다는 듯 확신에 차 있었다. 우영은 하마터면 방정맞게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사현이 부러 누군가를 엿 먹인다니. 그는 원화와 민재를 제외한 타인에게 손톱만큼의 관심도 없었다.

내일 당장 운석이 떨어져 지구가 멸망한대도, “어디로 떨어진대? 이왕이면 그 사람들이 제일 먼저 죽었으면 좋겠어.” 그리 말할 사람이었다.

“B는 타인에게 관심이 없어요. 뒤에서 누군가를 헐뜯고 모함할 만큼 시간이 남아돌지도 않고요.”

“근데 왜 내 그림이 안 팔려?”

“당신 그림이 정말 후져졌나 보죠.”

“뭐야?”

“아니면 원래 후졌었는데 B의 이름이 붙어서 간신히 팔렸던 거라든가.”

예술계에서 사현의 존재감과 입김은 독보적이다. 우영의 그림이 지금보다 더더욱 뛰어났더라도, 설사 고흐나 미켈란젤로의 환생이었더라도. 사현이 없었으면 지금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을 테였다.

그리고 아마, 저 역시 사현에게 버림받으면 그림의 가치가 추락할 것이다. 더 열심히 그리고, 더 대단해져도, 어쩔 수 없었다. <갤러리 비>의 B가 관심을 가지지 않는 그림. 그것은 예술성은 물론, 투자 가치도 없다는 걸 뜻했으니까.

“⋯⋯.”

남자는 한동안 아무런 말 없이 우영을 노려보기만 했다. 예상 밖의 침묵이었다. 우영이 뱉은 비수들은 아주 무례하고, 파렴치했거늘. 그래서 당장 씹어 먹을 듯 달려들 줄 알았더니 그저 굳어 있기만 했다.

“그러는 넌. 나랑 달라? 그렇게 대단해? 너도 수명 얼마 안 남았어. 결국엔 내 꼴이라고.”

남자가 매우 빠른 속도로 말을 쐈다. 우영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지금 누구랑 누구를 비교하는 건지.

“나는 달라.”

나는 그 사람한테 아주 특별한 존재거든.

우영은 사현의 감정 앞에서 당당했다. 그가 자신을 바라볼 때,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 줄 때, 자신의 품에 안겨 잘 때, 사랑한다며 볼에 키스해 줄 때, 매 순간 그의 사랑을 온몸으로 만끽하고 있었다.

그러니 설사, 훗날 제 그림이 주춤하더라도 사현은 자신을 버리지 않을 터였다. 화가로서가 아니라, 그의 연인으로서 계속해서 함께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또, 우영은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다. 작가로서 사현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붓을 움직이고, 화면을 구상하고, 색을 연구했다.

우영에게 가장 무서운 건, 돈을 못 버는 게 아니라 사현이 제 그림에 실망하는 것이니까. 그저 그림을 내다 파는 것에 급급한 남자와는 전혀 달랐다.

남자가 꾹 입을 다물었다. 흔들림 없는 우영의 눈동자가 얄미웠다. 그의 말마따나 자신과 우영이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아니, 말이 다른 사람이지. 급이 다른 것 같았다. 자신은 하급, 우영은 상급. 그런 도장이 돼지처럼 이마에 쾅 찍힌 것 같았다.

“네가⋯⋯ 나랑 다르다고? 내 그림은 후져?”

남자는 아주⋯⋯ 아주 짜증이 났다. 우영이 이 집에서 사는 것도 그렇다. 저 때는 그저 그런 오피스텔 하나 구해 줬으면서 우영은 옆에 끼고 산단 말이지. 알음알음 들었던 정보로는 전시도 거나하게 열어 줬댔다. 돈은 물론, 정성을 쓴 티가 났다고.

남자가 어금니를 아득 짓씹었다. 가슴속이 부글부글 끓더니 눈앞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사현에게서 시작됐던 분노가 우영에게 옮겨 붙었다. 지금 이 순간은 사현보다 우영이 더 미웠다.

그가 두툼한 점퍼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었다. 딱딱하고 차가운 손잡이가 잡혔다. 누군가에게 받아 온 것인데, 설마 정말 꺼내게 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이건 자신의 탓이 아니었다. 우영이 지나치게 자신을 농락하고, 욕보이지 않았던가. 남자의 동공이 점처럼 작아졌다. 피가 싸늘하게 식었고, 맥박이 느릿해졌다. 사고와 이성이 딱딱하게 굳었다.

“⋯⋯.”

그런 남자를 본 우영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남자에게서 검은 아우라가 뿜어지고 있었다. 아주 음습하고, 차가우며, 질척한 어둠이었다. 마치 장 델비유의 「La mort」 같았다. 움푹 파인 눈두덩과 칙칙하게 죽은 피부가 인간 같지 않았다.

우영의 시선이 남자의 주머니 쪽으로 향했을 때였다.

주머니에서 손을 뺀 남자가 쥐고 있던 걸 우영 쪽으로 세게 휘둘렀다. 쉬이익, 날카로운 것이 공기를 찢으며 우영의 얼굴로 다가왔다.

남자가 휘두른 것은 칼이었다. 과도만 한 크기였으나, 그 날카로움은 제법 대단했다. 놀란 우영이 얼른 고개를 뒤로 뺐다. 하지만 오른쪽 볼이 길게 갈렸다. 따끔거리는 통각이 느껴진다 싶더니 대번에 볼이 후끈해졌다. 뜨겁고 질척한 무언가가 피부를 타고 턱까지 흘러내렸다.

“⋯⋯.”

피다. 피야.

우영이 잠깐 숨을 멈췄다. 이런 살의와 폭력에 노출되는 건 태어나 처음인지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남자는 계속해서 칼을 휘둘렀다. 칼날은 대부분 우영의 얼굴로 날아왔다. 찔러 죽이겠다는 생각이면 목을 긋거나 복부를 노릴 테니 차라리 예측하기 쉬울 텐데 분풀이가 목적인 행패인지라 피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윽!”

이번엔 칼끝이 우영의 턱을 할퀴었다. 따끔한 통각에 우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할 수 있는 거라곤 뒷걸음질을 치는 것뿐이었다. 차라리 주먹을 휘둘렀으면 어떻게든 제압해 볼 텐데. 칼을 들고 설치니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미친놈, 미친놈 말만 들었지, 실제로 마주하니 위압감이 엄청났다.

“진정, 진정하세요.”

우영이 두 손바닥을 내보이며 남자를 말렸다. 멍청한 짓이었다. 불난 집에 기름을 퍼부은 당사자면서 진정하라니. 하지만 할 수 있는 말이 그것뿐이었다. 저를 해치기 위해 칼을 휘두르는 괴한에게 뭐라고 하겠는가.

그리고 당연히, 남자는 조금도 진정하지 않았다. 다만, 옆으로 움직이던 칼을 아래위로 흔들기 시작했다. 좀 전까지는 그저 베이기만 했는데, 저렇게 나부끼는 칼에 찍히면 살점이 움푹 파여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남자가 거센 콧김을 뿜으며 우영에게 다가왔다. 우영이 조금 더 빠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일단 거실로 유인하자. 거기는 복도보다 공간이 넓으니 도망치기도 쉬울 것 같았다. 작업실로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경찰에 신고하면, 그러면 괜찮을 것이다.

모든 건 사현이 돌아오기 전에 끝내야 했다.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를 맞이하고 싶었다. 더는 그 마른 어깨에 짐을 얹어 주고 싶지 않았다.

그때였다.

“으아아아⋯⋯!”

남자가 난데없이 소리를 내지르며 우영을 향해 달음박질쳤다. 기겁한 우영이 곧장 뒤를 돌아 달렸다. 아니, 달리려 했다. 하지만 복도 한쪽에 서 있던 콘솔과 부딪치며 그대로 아래로 고꾸라졌다.

안경이 붕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콘솔 위에 놓여 있던 조각상이 우영을 따라 추락했다. 동그랗게 말린 철사에 비눗방울 형상을 띤 유리가 박힌 조각상이었다.

우영이 쓰러지는 둔탁한 소리 뒤로 챙그랑! 날카로운 굉음이 울렸다. 산산이 조각 난 비눗방울이 우영의 위로 진눈깨비처럼 흩날렸다. 우영이 자신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았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은 남자가 훌떡 우영의 위에 올라탔다. 그렇게 무거운 무게도 아니었는데, 커다란 거인이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듯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내 그림이 후져? 어?”

남자가 두 손으로 칼을 쥐고 그대로 직선으로 내리찍었다. 우영이 옆으로 휙 고개를 꺾었다. 피할 수 있을까. 피하지 못하면 어쩌지. 저 칼이 광대를 뚫거나, 이마를 뚫어 뇌 속 깊숙이 박힌 자신의 모습이 상상됐다. 1초도 안 되는 순간이었는데, 아주 많은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다행히 남자의 칼은 우영의 머리통을 찌르지 못하고 바닥을 내리찍었다. 챙캉! 대리석 바닥과 칼이 마찰하며 괴이한 소리가 났다.

“윽!”

남자가 신음을 흘리며 칼을 놓쳤다. 바닥과 충돌한 칼을 타고 엄청난 진동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손가락 마디마디부터 손목 안에 있는 핏줄까지 파르르 경련할 정도로 거센 진동이었다.

“⋯⋯.”

“⋯⋯.”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남자에게 무기가 없다. 그 말인즉슨, 키도 덩치도 남자의 곱절에 다다르는 우영에게 유리한 상황이 됐다는 거였다. 우영이 남자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남자는 놓친 칼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띡띡띡띡, 띡띡띡띡.

간결한 도어 록 소리가 복도를 가로질렀다. 남자와 우영의 고개가 동시에 현관을 향해 돌아갔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피곤한 낯의 사현이 집 안으로 들어섰다.

“우영아, 나 왔⋯⋯. 뭐야?”

사현이 엎어져 있는 우영과 남자를 쳐다봤다. 세 사람의 시선이 엉망으로 뒤엉켰다. 찰나, 사위가 고요해졌다. 각기 다른 세 개의 묵음이 충돌했다.

가장 먼저 움직인 건 남자였다. 재빠르게 칼을 낚아챈 그가 벌떡 튕기듯 일어나서는 사현을 향해 달려갔다.

근 이 년 만에 보는 사현은 여전히 잘난 얼굴이었다. 아니, 희멀겋고 윤기가 흐르는 게 그때보다 더 좋아 보였다. 잘 차려입은 슈트가 질투 나게 멋졌고, 특유의 무감한 눈빛엔 진절머리가 났다.

자신은 시궁창에 떨어트려 놓고, 혼자 반짝반짝하게 사는 그가 얄미워서 죽을 것 같았다. 사현의 저 가느다란 목을 당장 칼로 후벼 주고 싶었다. 시뻘건 선혈이 그의 얼굴을 뒤덮으면 이 끔찍한 분노가 조금이나마 사그라들 것 같았다. 그때도 제 그림이 별로라고, 팔 수 없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이 씨발 새끼야!”

희번덕거리며 눈을 까뒤집은 남자가 칼을 쳐들었다. 호흡을 멈춘 우영이 그를 따라 몸을 날렸다. 안 돼. 차라리 저를 찌르지. 사현은 안 되는데.

하지만 한 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발이 모자랐다.

칼끝에 있는 사현을 목도한 우영의 눈동자가 버석하니 굳었을 때였다. 사현이 자신 쪽으로 흘러오는 남자의 팔을 감싸 쥐고 그대로 몸을 접었다. 단숨에 무게 중심이 뒤틀린 남자가 사현의 등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한 바퀴 크게 돌아 콰당! 소리와 함께 바닥에 내리꽂혔다.

사현의 업어치기는 그의 작고 마른 몸에서 나왔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빠르고 강력했다. 애꿎은 우영이 움찔 어깨를 떨었을 정도였다.

“컥⋯⋯.”

남자가 구역질 같은 신음을 토해 냈다. 등줄기를 따라 척추가 아릿했다. 가장 먼저 바닥과 마찰했던 꼬리뼈는 과자처럼 와사삭 부서진 것 같았다. 남자의 만면이 분리수거 직전의 알루미늄 캔처럼 구겨졌다. 뒤틀린 입술 사이로 온갖 신음이 쏟아져 나왔다.

사현이 그런 남자의 머리맡에 쪼그려 앉았다.

“너 여기 어떻게 알고 왔니?”

“으윽⋯⋯.”

“어떻게. 알고. 왔냐고.”

사현이 검지로 남자의 이마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나 남자는 사현의 말을 듣지 않았다. 팔을 휘저어 더듬더듬 놓친 칼을 찾았다. 불판 위에서 움직이는 주꾸미 같은 모습에 사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등신 같은 새끼.

나지막이 읊조린 사현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때를 놓치지 않은 남자가 칼을 쥐었다. 허나 잡기만 했을 뿐, 휘두를 시간이 부족했다. 사현이 구두 뒤꿈치로 남자의 손을 콱 짓이겼다. 남자의 다섯 손가락이 단풍잎처럼 쫘악 펴졌다.

“아아악!”

“화가가 칼을 들어? 그러다 손가락이라도 잘리면 어쩌려고? 네가 평생 그림 그릴 생각이 없구나?”

어금니를 꽉 깨문 사현이 발을 좌우로 비틀었다.

“으아아악!”

남자가 찢어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사현의 발은 떨어지지 않았다. 손등이 뭉개지고, 뼈가 우드득거리며 뒤틀렸다. 남자가 밟히지 않은 손으로 사현의 발목이나 종아리를 탁탁탁 때렸다. 그러나 사현은 꿈쩍도 않았다.

수 초간 고통을 감내하던 남자가 눈을 부라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몸을 부딪쳐 사현을 밀어 낼 심산인 듯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현은 남자가 반격할 틈을 주지 않았다.

사현이 부드럽게 몸을 옆으로 돌렸다. 허리가 먼저 돌아가고, 그 반동을 이용해 다리가 길게 움직였다. 그의 검은 재킷이 펄럭거리며 휘날릴 정도로 빠른 몸짓이었다.

그리고 뻑! 남자의 턱주가리가 날아갔다.

“컥!”

남자가 단말마의 신음을 지르며 훌떡 뒤로 넘어졌다. 뒤통수가 쾅 바닥을 찧더니, 그대로 까무러쳤다. 눈꺼풀이 반쯤 감긴 채로 허공을 보는 모습이 기이했다.

사현이 그런 남자를 지그시 내려다봤다. 정말 기절한 게 맞는지. 다시 일어나서 칼을 쥘 수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하는 거였다. 그러고는 칼을 툭 차서 멀찌감치 떨어트려 놨다.

날카롭게 번뜩이는 칼이 대리석 바닥 위로 미끄러지며 쉬이익, 이상한 소리가 났다.

“⋯⋯.”

우영이 그런 사현을 멍하니 바라봤다. 운동을⋯⋯ 했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몸짓으로 보면 격투기나 유도, 혹은 태권도를 오래 배운 것 같았다.

멋있다. 무슨 발차기가 국가대표 같네. 어쩜, 우리 형은 못 하는 게 없어.

그 순간에도 그런 생각을 했다. 우영이 수백 번째로 사현에게 반한 시점이었다.

짜증스레 콧잔등을 찡긋거린 사현이 우영을 쳐다봤다.

“넌 괜찮⋯⋯.”

사현의 말이 마무리되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우영의 얼굴에 길게 그인 붉은 선을 그제야 발견한 탓이다. 사현이 성큼성큼 구두를 신은 채로 복도를 걸었다. 그리고 바닥에 퍼질러 앉아 있는 우영의 볼을 두 손으로 조심히 감싸 쥐었다.

“이게, 이게 뭐야? 어? 이거 왜 이래.”

사현의 검은 눈동자가 우영의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볼을 가로지른 핏줄기와 턱을 할퀸 상처에 숨이 턱 막혀 왔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처럼 아프다 싶더니 온몸이 싸늘하게 식었다. 전신을 나돌던 피가 시시각각으로 증발하는 게 느껴졌다.

“⋯⋯쟤가 그랬어?”

사현이 푹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어⋯⋯ 음⋯⋯.”

우영이 대답을 고사했다. 그렇게 어려운 질문이 아니었으나, 섣불리 긍정했다간 큰일이 날 것 같았다. 그러나 애당초 답을 바라고 물은 질문이 아니었다.

우영의 위에 올라타고 있던 남자. 여기저기 흩뿌려진 몸싸움의 흔적. 남자의 옆에 있던 칼. 모든 정황과 증거가 남자를 범인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사현의 눈썹이 가파른 오르막길을 그렸다.

“죽일까?”

“네?”

“죽이자.”

자문자답한 사현이 다시 남자를 향해 다가갔다. 아니, 남자가 아니라 칼을 향해 다가갔다. 기겁한 우영이 허겁지겁 사현의 소맷자락을 끌어당겼다.

“형! 사람 죽이면 감옥 가요!”

우영의 순진한 걱정에 사현의 입술이 비죽 뒤틀렸다.

“감옥 안 가. 정당방위야.”

“어떻게 정당방위예요. 저 사람 기절했는데.”

“괜찮아. 싸웠다고 하면 되지, 뭐. 쟤 죽이고 내 허벅지랑 팔뚝 좀 쑤시면 돼.”

“⋯⋯뭐라고요?”

우영이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경찰한테는 너무 무서웠어요. 그 사람이 칼을 막 휘둘렀어요. 그래도 살아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필사적으로 몸싸움을 하다 보니 그런, 그런 나쁜 짓을 저지르고 말았어요. 죽을 줄은 몰랐어요. 제가 목을 찌른 줄도 몰랐어요.”

“⋯⋯,”

“그런 상투적인 말 있잖아. 그거 주절주절 읊으면 되고.”

사현이 고저 없는 음성으로 공포와 혼란을 연기했다. 우영이 바보 같은 낯으로 사현을 쳐다봤다. 그의 하얀 얼굴에는 표정이라곤 없었다. 가끔, 아주 가끔 느끼는 거지만 사현에게는 소시오패스적인 면모가 있다. 그럴 때마다 그가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우영이 그를 말릴 만한 문장을 조립하는 사이, 사현은 주변의 장식품을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값비싼 미술품들이 초라하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는 지금 범죄 현장을, 그러니까 앞으로 범죄 현장이 될 곳을 창조하고 있었다.

우영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순간, 교도소에 들어가 있는 사현과 주기적으로 면회 가서 보고 싶었다며 줄줄 눈물을 흘리는 자신의 모습이 상상됐다.

절대로 안 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가 아침에 출근하는 것만으로도 아쉽고, 또 아쉬운데. 그와 함께 식사도 못 하고, 그와 함께 잠도 못 자고, 그의 달큼한 몸을 물고 빨 수도 없다니. 차라리 죽지, 죽어.

우영이 어버버하는 사이, 무표정한 낯의 사현이 칼을 쥐었다. 정말 남자를 찌를 심산인 듯했다.

“안 돼요! 하지 마요!”

우영이 얼른 사현의 팔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사현이 눈을 잔뜩 홉떴다.

“놔.”

“저 괜찮아요. 무슨 이런 거로 사람을 죽이려고 해요.”

“얘는 너 죽이려고 했잖아. 그리고 네가 괜찮아도 나는 안 괜찮아. 그 예쁜 얼굴에 칼자국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사현이 우영의 손을 털어 냈다. 그리고 칼을 바투 쥐었다. 그에 우영이 질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입을 앙 다문 채 사현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 후 최대한, 최대한 불쌍하게 눈가를 일그러트렸다.

“저 아파요.”

“⋯⋯어?”

“얼굴이 막 불타는 것 같아요. 턱도 아프고 쓰라려요. 심장도 엄청 빨리 뛰어요. 놀랐나 봐요.”

그 말에 사현의 손에서 칼이 떨어졌다. 댕그렁! 바닥으로 추락한 칼날이 파르르 경련했다.

사현이 우영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아프다니 차마 만지진 못하겠고, 허공만 쓰다듬었다. 사현의 눈가가 울멍울멍 젖어 들었다.

아프다니. 내 우영이가 아프다니.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아니, 차라리 세상이 무너졌으면 좋겠다 싶었다.

“많이 아파? 따가워? 숨은? 잘 쉬어져? 아니, 아니. 병원 가자, 병원. 얼른.”

사현이 우영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가 다급하게 현관으로 향했다. 남자고 칼이고 모두 상관없어졌다. 우영이 군말 없이 운동화에 발을 꿰었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사현이 바쁘게 우영을 잡아끌었다. 응급실로 가야 하나. 아니면 피부과로 가야 하나. 피가 잔뜩 묻어 있어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육안으로는 알 수가 없었다.

흉이 남으면 어쩌지. 저 아름다운 얼굴에 흉이라니.

개새끼. 개새끼. 개새끼. 어떻게 저 얼굴을 칼로 그을 생각을 했단 말인가. 아, 그냥 죽이고 올걸. 죽였어야 했는데. 예쁜 걸 모르는 것들은 세상에 하등 도움이 안 된다.

사현이 빠득빠득 이를 갈았다. 그런 사현의 뒤통수를 가만히 보던 우영이 걸음을 멈춰 섰다. 사현이 놀란 얼굴로 휙 뒤를 돌아봤다.

“왜? 아파? 걷지도 못하겠어? 구급차 부를까?”

자못 방정맞은 걱정이었다. 우영이 흐리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일단 경찰에 신고부터 해요.”

“병원부터 가야지.”

“신고부터. 구급차도 같이 오라고 하면 되잖아요.”

“⋯⋯.”

사현의 입꼬리가 마뜩잖게 뒤틀렸다. 그에 우영이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넙데데한 어깨를 좌우로 흔들며 생떼를 썼다. 뒤꿈치로 쿵쿵 바닥을 찧기도 했다.

“저 아파요. 걷지도 못할 만큼 아파요. 경찰차랑 구급차랑 같이 불러 줘요.”

“⋯⋯.”

사현의 입이 한일자로 다물렸다. 잠깐 고민하던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재킷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경찰차와 구급차는 빠르게 도착했다. 다만, 구급차가 두 대가 왔어야 했는데 한 대만 온 게 문제였다. 아무래도 볼이 다친 우영보다는 뇌진탕으로 까무러친 남자가 위급했기 때문에 그를 먼저 실어다 옮겼다. 사현은 이게 무슨 개 같은 처사냐며 목소리를 높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경찰이 무뚝뚝한 낯으로 사건의 정황을 물었다.

사현은 스토커처럼 자신을 따라다니던 남자가 있었고, 접근 금지 명령을 받았을 정도로 집요한 악질이었는데, 오늘 자신이 집에 없는 사이 찾아 왔고, 순진한 동거인을 구슬려 문을 열게 했으며 끝내 이 사달이 났노라 설명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었다. 사현은 남자가 아주 치밀하고 극악무도한 사람인 것처럼 말을 꾸몄다. 우영을 죽이려 했고, 자신도 죽이려 했으며 그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무력을 썼다는 말도 덧붙였다.

경찰은 피범벅인 우영의 얼굴에 이렇다 할 의심이나 반문을 하지 않았다. 사현이 언제 끝나냐고, 애 얼굴 안 보이냐고, 당장 병원에 가야 한다고, 치료가 늦어 흉이라도 생기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엄포를 놔서 더 물을 수 없던 것도 있었다.

결국에는 추후 다시 제대로 조사에 임하기로 하고 병원으로 왔다. 거기서도 사현은 온갖 유난을 다 떨며 의사를 귀찮게 했다. 다행히 상처가 깊지 않아 꿰맬 필요가 없다는 말에도 확실하냐며, 그럼 흉터는 안 남냐며, 남으면 어떡할 거냐며, 따지다가도 빙긋 웃으며 혹시 좋은 피부과 아느냐고 여우같이 굴기도 했다.

볼과 턱에 거즈와 밴드를 붙인 우영과 사현이 응급실을 나왔을 땐,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사현이 진한 밤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 우영 역시 그를 따라 바짝 굳어 있던 어깨를 한층 풀어 내렸다. 그리고 서로를 바라봤다.

“괜찮니?”

“괜찮아요?”

동시에 뱉은 말에는 상대방을 향한 걱정이 담뿍 묻어 있었다. 사현이 이상하다는 듯 턱을 안으로 당기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얼굴에 칼자국이 난 게 누군데. 사지 멀쩡한 저한테 괜찮냐고 묻긴 왜 묻는단 말인가. 우영이 팔을 뻗어 흐트러진 사현의 머리칼을 다정하게 쓸어 넘겼다.

“오늘 어머님 기일이었잖아요. 근데 이렇게, 정신없이 하루가 끝나 버렸네요.”

“⋯⋯그건 괜찮아. 나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한 네가 더 걱정이지.”

“저도 괜찮아요.”

“괜찮다고?”

“네. 진짜 괜찮아요. 이제 아프지도 않아요.”

“⋯⋯근데 어째 내가 안 괜찮다? 네 얼굴 보고 있으니까 심장이 벌렁거려. 토할 것 같아.”

우영의 턱에 붙은 밴드 아래로 은근히 배어 나온 피가 보였다. 그의 매끈한 피부를 가르고 들어갔을 칼날이, 찢어진 살이, 터져 나온 피가, 사현에게도 오롯이 느껴졌다. 그래서 자꾸 등줄기에 소름이 돋고, 손이 떨리고, 오금이 저렸다.

우영이 사현을 주차장 구석으로 끌고 왔다. 어둠 속에서 그를 한가득 껴안았다.

“병원에 오래 있었는데. 소독약 냄새는 역하지 않았어요?”

“몰라. 그런 거 느낄 새도 없었어.”

우영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은 사현이 웅얼거렸다. 우영이 이해한다는 듯 사현의 등을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배고프죠?”

“아니. 별로 생각 없어.”

“저는 고픈데. 형이랑 같이 먹으려고 저녁 굶었거든요.”

“그랬어? 밥 먹으러 갈까? 뭐 먹고 싶어?”

사현이 번뜩 얼굴을 쳐들었다. 우영이 굶었다니, 예삿일이 아니었다. 그러잖아도 다쳤는데. 피도 흘렸는데. 아주 거나하게 먹여야 했다. 사현이 발을 동동 구르며 우영의 답을 기다렸다.

우영이 으음, 목울대를 아래위로 움직이며 고민했다. 그러다 떠오른 게 포장마차였다. 오늘 같은 날, 기분은 더러운데 날씨는 좋은 날. 서울답지 않게 공기가 맑은 날. 이런 날에는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 잔 걸쳐 줘야 했다.

“포장마차 가서 소주 마실까요?”

우영은 사현이 당연히 긍정할 거라 예상했다. 그가 퍽 좋아하는 공간이었으니까. 김밥천국만큼 자주 가지는 못 했지만 그래도 종종 술을 마시러, 또 가끔은 그저 저녁을 먹으러 가기도 했다. 비가 오는 날에 간 적도 있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사현이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안 돼. 아까 의사가 술 마시지 말라고 했잖아.”

“에이. 형도 의사 선생님이 커피 마시지 말라고 했어도 커피 마시잖아요.”

“⋯⋯.”

사현의 눈이 새초롬히 가늘어졌다. 아랫입술은 부루퉁히 튀어나왔다. 무어라 반박하고 싶은데, 이렇다 할 반론이 떠오르지 않는 듯했다. 그게 어찌나 귀여운지. 치솟는 간지러움을 참지 못한 우영이 그의 입술을 쪽쪽거리며 빨았다.

그러다 갑자기 확 어깨를 움츠렸다. 턱과 볼의 상처가 벌어지며 찌릿한 통각이 올라왔다.

“윽⋯⋯.”

우영의 짧은 신음에 사현이 눈을 부릅떴다.

“왜? 아파? 응? 아파?”

“조금 따가워요.”

우영이 손등으로 턱에 붙은 밴드를 살살 눌렀다. 병원에서 나올 때까지만 해도 저보다 사현이 더 걱정이라 자신의 상처에 관심을 두지 못했었다. 혹 병원 냄새에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오르진 않을는지, 오늘 어머님은 잘 만나고 왔을는지, 걱정거리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간신히 긴장을 푸니, 이제야 고통이 올라왔다. 당분간 씻을 때 고생깨나 할 것 같았다.

일그러진 우영의 얼굴에 사현이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이 씨발. 이제 키스도 못 하겠네. 하필 턱을 긁어 놔서, 개새끼가⋯⋯.”

남자에 대한 살의가 다시 솟구쳤다. 구급차가 어느 병원으로 갔다고 했더라⋯⋯. 경찰이 지키고 있으려나. 흉악범도 아니고, 미수로 끝났으니 그렇게 열심히 지키고 있진 않을 것 같은데. 잘하면 몰래 가서 목에다 칼을 박아 놓고 올 수 있지 않을까.

사현이 진지하게 고민하는데, 우영이 톡톡 검지로 콧잔등을 두드렸다.

“그런데요, 형.”

“응. 왜? 계속 아파? 진찰 다시 받을래? 아니면 진통제라도 사 올까?”

“아니요. 그게 아니라, 혹시 운동 배웠어요?”

“어? 어어. 대학 다닐 때 조금.”

사현이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배웠는데요?”

“그냥, 태권도랑 권투랑 유도 그런 거.”

그의 대답에 우영이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와. 상상도 못 했어요.”

하긴, 집에 자그마한 GYM을 만들어 놓았을 정도면 운동을 제법 좋아하는 거겠지. 바쁜 평일을 제외하더라도, 주말에는 꼭 GYM을 들르는 그였다. 그래도 그런 전문적인 운동을 배웠을 줄이야. 꿈에도 몰랐다.

놀라움이 가득한 우영의 낯에 사현이 친절히 설명을 덧붙였다.

“집은 좆같지, 속에서 열은 치받지. 그러는 와중에 책상에 앉아서 공부만 하려니까 미칠 것 같더라고. 그래서 이것저것 배워 봤어.”

우영이 허업, 숨을 들이켰다.

“너무⋯⋯.”

“너무?”

“멋있던데요⋯⋯.”

지나치게 순진한 감탄이었다. 이 시간에, 이 상황에, 볼과 턱이 찢어져서 할 말은 아니었다. 사현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너는 그 와중에도 그런 감정을 느꼈니?”

비아냥에 가까운 물음이었다. 허나 우영은 신난 아이처럼 머리를 마구 흔들며 종알거렸다.

“네. 형이 돌려차기를 하는 그 순간이 느리게, 그러니까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어요. 막 넥타이가 이렇게 돌아가고, 재킷은 이렇게 펄럭거리고.”

그가 자신의 목을 한번 짚으며 넥타이를 나타냈다가, 등 뒤로 손을 흔들며 나부끼는 재킷을 표현했다.

“영화의 한 장면 같았어요. 진짜, 너무 멋있었어.”

우영이 동경을 담뿍 담은 얼굴로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게 어찌나⋯⋯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사현의 입가에 미소가 스몄다. 우영은 참, 신기하다. 독특하고, 특별하고, 반짝반짝 빛이 났다. 이런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게 하는 걸 보면 보통 대단한 게 아니었다.

“우영아.”

사현이 나지막이 우영을 불렀다.

“네?”

우영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흘리며 대답했다.

“사랑해.”

뜬금없는 고백이었다. 우영이 바보 같은 얼굴로 눈을 끔뻑거렸다.

“⋯⋯갑자기요?”

“응. 갑자기 네가 너무 사랑스럽네.”

사현이 우영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대로 귓바퀴를 타고 내려와 곧은 목을 매만졌다. 우영이 그 손을 끌어와, 그의 손바닥에다 다치지 않은 볼을 비볐다.

“저도 사랑해요, 형.”

우영이 씨익 입술을 길게 늘이며 웃었다. 그러다 따끔거리는 통각에 코를 찡긋거렸다. 사현이 자욱한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짧으면 몇 주, 길면 몇 달 우영이 아파하는 모습을 봐야 한다 생각했더니 멀미가 다 났다. 잊고 있던 피곤이 폭우처럼 쏟아졌다.

사현이 우영의 손가락에 자신의 손을 얽었다.

“얼른 집에 가자. 오늘 하루가 너무 길다.”

“네!”

우영이 꼬옥 사현의 손을 잡아 쥐었다. 사현이 마주 닿은 손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큼지막하고, 두껍고, 단단하고, 뜨거운 우영의 손은 잡을 때마다 새롭다. 근데 오늘은 유달리 생경하게 느껴졌다.

괴로운 하루였는데. 슬프고, 화도 나고, 무섭기도 한 하루였는데. 이상하게도 행복했다.

그저 우영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그랬다.

신기한 밤이었다.

* * *

경찰서에서 나온 사현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뚜르르, 일정한 신호음이 가더니 곧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형.

“준비 다 했어?”

-네. 근데 안 오셔도 되는데. 진짜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우영이 낮은 음성으로 웅얼거렸다. 이제 막 정오에 가까워지는 시간이라 목소리에 잠기운이 담뿍 묻어 있었다. 그게 몹시⋯⋯ 몹시 귀여웠다. 괜히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던 사현이 부러 엄하게 말했다.

“시끄러워. 내가 설마 네가 혼자 병원도 못 갈까 봐 모시러 가겠니? 치료하는 걸 내 눈으로 봐야 안심을 하겠단 말이야.”

-에이⋯⋯. 약 바르고 밴드 갈고 그러겠죠. 그리고 술 마시면 안 된다, 물 닿지 않게 해라, 그런 말밖에 더하겠어요?

“너 자꾸 그러면 나 커피 마신다. 에스프레소로 진-하게 마실 거야.”

-와. 치사해.

“그러니까 군말 말고 삼십 분 뒤에 나와 있어.”

-네.

우영이 담백하게 대답했다. 만족스러운 답을 끌어 낸 사현이 막 통화를 마치려 할 때였다.

-아, 형!

우영이 우렁차게 사현을 불렀다.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던 사현이 다시 핸드폰을 귀로 가져갔다.

“왜?”

-이왕 오실 거면요.

“응.”

-빨리 오세요.

“왜? 아파?”

-빨리 보고 싶으니까요.

“⋯⋯.”

차로 향하던 사현의 발이 뚝 멈춰 섰다. 그러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허탈함과 행복함이 적절히 섞인 웃음이었다.

“그럴게. 나도 보고 싶으니까.”

사현이 감미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수화기 너머로 큭큭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뭘 하는 건지 쿠당탕, 무언가가 무너지고 쓰러지는 소리도 났다. 아마 우영이 기쁨을 표현하는 특유의 방법이리라. 침대에 쓰러져서 그 기다란 팔다리를 퍼덕거리고 있겠지.

그 모습을 가늠한 사현이 목을 자라처럼 오그렸다가 폈다.

우영의 귀여움은 해롭다. 그래서 자꾸 웃음이 나왔다.

* * *

사현은 홈웨어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단단하게 팔짱을 끼고 허공을 응시하는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오늘 오전, 사건 조사를 위해 들렀던 경찰서에서 뜻밖의 얼굴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수사를 맡은 형사는 덩치 좋은 남자였다. 짧은 머리칼 사이로 듬성듬성 새치가 올라와 있고, 목소리는 걸걸했으며, 퀴퀴한 땀 냄새가 나는. 적당히 직업의식이 있으면서도 업무를 귀찮아하는, 그런 흔한 형사였다.

사현은 형사가 캐묻는 것들을 막힘없이 대답했다. 이미 머릿속에는 시나리오가 다 짜여 있었다. 우영에게도 충분히 교육했고, 남자를 어떠한 범죄자로 만들든, 그리 부당한 처사가 아니었다.

마음 같아선 제 몸에 칼자국이라도 내서 남자의 살인 미수죄를 곱절로 무겁게 해 주고 싶었는데, 우영이 기겁하고 말린 터에 그러질 못했다.

비슷한 질문과 답이 몇 번 오가고, 마침내 사건 조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들을 수 있었다.

‘용의자가 우울증에, 신경과민증에, 앓고 있는 정신 병력이 많았습니다. 근데, 담당의 말로는 근 한 달 정도 약을 안 타 갔답니다. 전화했더니 돈이 없다고 했다고. 그리고 더 좋은 약을 찾았다고 했답니다. 혹시나 하고 약물 검사를 했는데, 양성이 나왔어요. 마약류요. 이에 관해 아시는 거 있습니까?’

‘아니요. 걔가 약을 먹든, 쥐약을 먹든. 내가 알 필요가 있나요?’

‘아, 예, 뭐⋯⋯.’

‘그런 건 안 궁금하고요. 제 집은 어떻게 알았대요? 최근엔 갤러리에도 온 적이 없었고, 제 우편물은 경비원이 따로 받아서 저한테 직접 전달하는데. 일 년 만에 나타나서는 집으로 쳐들어왔어요.’

‘아아, 그래서 저희가 동선을 추적해 봤습니다. 근데 백사현 씨 집에 가기 직전에 누구를 만났더라고요.’

‘누구요?’

‘이 분인데. 아는 얼굴입니까?’

형사가 에이포 용지에 인쇄된 사진 하나를 보여 줬다. 서울에 흔히 널린 야외 주차장 사진이었다. 오래된 CCTV인지라 화질이 좋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서 있는 인영들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 얼굴을 확인한 사현이 헛웃음을 흘렸다.

‘알아요. 아주, 잘 알죠.’

민재였다. 남자의 앞에 서서 잭나이프를 건네주는 이는 확실히 민재가 맞았다.

설마 이번 일에 그들이 연관되어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그저 제게 품은 원한을 삭이지 못한 남자가 틈을 노리다 하필 그날 집에 쳐들어온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구나.

사현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엄지와 검지로 꾹꾹 눌렀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 롤러코스터라도 탄 듯 멀미가 나고 속이 울렁거렸다.

‘제가 이 분 만나 뵙고,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칼은 왜 줬는지 조사해보겠습니다.’

형사가 검지로 쿡쿡 민재의 얼굴을 찍었다. 사현이 으음, 목으로 신음했다. 그러더니 느릿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만나지 마세요. 제가 만나 볼 테니까.’

‘예? 용의자를 직접 만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칼을 전해준 걸 보면,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지도 모릅니다.’

‘괜찮아요. 만나지 마세요.’

‘그게 그렇게 말씀하셔도 저희가 안 가 볼 순 없거든요. 이 정도 사진이면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라서, 공범으로 봐야 합니다.’

형사가 난처를 표했다. 절차라는 게 있고, 법이라는 게 있는데. 사현이 만나서 합의를 하든, 복수를 하든 형사는 그만의 일을 해야 했다.

자못 비장한 형사를 보던 사현이 코웃음을 쳤다.

‘화 그룹 알아요?’

‘예?’

‘화 그룹이요. 꽃 화랑 불 화자 같이 쓰는 그 화 그룹.’

‘아아, 그럼요. 대한민국 사람 중에 화 그룹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 사람 그 그룹 후계자예요.’

‘예?’

‘화 그룹 회장 아들이라고요. 감당하실 수 있으세요? 여기 서장이 나와도 어떻게 못 할 텐데. 설사 이 인간이 사람을 죽였대도, 토막 내서 먹었대도, 등신 같은 한국 법으로는 아무것도 못 한다고요.’

형사는 무례 넘치는 사현의 말에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한참 눈을 끔뻑이더니, 다시 알아보겠다며 급하게 조사를 끝냈다.

그리고 그 소식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명현의 귀에 들어갔을 테였다. 그는 무슨 반응을 보일까. 분명 제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는데, 그의 눈치를 봐야 하는 이 상황이 소름 끼치게 싫었다.

“아아⋯⋯.”

사현이 소파 등받이 뒤로 머리를 젖혔다. 퇴근하고 나서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려니 보통 피로한 게 아니었다. 사현이 꾸욱 눈을 세게 감았을 때였다.

“형. 저 다 씻었어요.”

커다란 손이 사현의 볼을 부드럽게 감싸왔다. 사현이 반짝 눈을 떴다. 머리카락이 촉촉하게 젖은 우영이 자신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볼과 턱에 붙어 있는 기다란 상처가 그 웃음을 따라 연한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이리 와.”

사현이 툭툭 자신의 옆자리를 두드렸다. 우영이 냉큼 그곳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리고 가지고 온 구급상자를 내려놓았다. 사현이 나른한 손놀림으로 구급상자에서 연고와 면봉을 꺼냈다. 피부과 의사가 아침저녁으로 수시로 발라 주라 말했던 연고였다.

사현이 조심히 연고를 발랐다. 가까이서 보니 상처가 더 또렷하고 깊게 다가왔다. 그의 눈썹이 아래로 축 처졌다.

“아파?”

“아니요. 이제 적응해서 괜찮아요.”

“그런 거에 적응하지 마.”

“적응 안 하면 계속 아파야 하잖아요.”

“그냥 아파해. 짜증 내고 어리광 부려.”

“형한테요?”

“그럼 나 말고 누구한테 하려고?”

사현이 면봉 위에다 다시 연고를 짜며 대꾸했다. 우영이 그런 사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사현이 이럴 때마다 몸 어디가 뻥 하고 터질 것 같다. 단숨에 우주로 솟아 버린 듯, 중력이 상실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자신이 구덩이라고. 그래서 제가 주는 사랑을 돌려주지 못할 거라 말했던 사현인데. 요즘엔 이렇게나 맹렬히 사랑을 표현해 주곤 한다. 그 특유의 무감하고 무심한 애정인데, 그게 너무 평화로워서. 너무 일상적이라서. 우영은 딱 죽을 만큼 좋았다.

“웃지 마. 상처 벌어져.”

자꾸 실실 웃는 우영에 사현이 쓰읍, 혀를 끌었다. 그러나 우영은 재채기처럼 솟구치는 웃음을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사현이 그러다 흉터 남으면 가만히 안 둘 거라고 엄포를 놨지만, 그래도 헤실헤실 웃어 댔다.

마침내 연고 바르기가 끝났다. 우영이 고맙다며 사현의 입술을 진하게 빨아 줬다. 그쯤 되니 열한 시가 훌쩍 넘었다. 열한 시, 야식 먹기 좋을 때였다.

“라면 끓여 드릴까요?”

조물조물 사현의 손가락을 가지고 놀던 우영이 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사현이 곧 고개를 주억였다. 치즈를 넣어 달라는 말도 덧붙였다. 우영이 최선을 다해 끓여 보겠다며 우다다 부엌으로 뛰어갔다.

사현이 그를 따라 부엌으로 향했다. 식탁에 앉아 분주하게 움직이는 우영을 구경하는 건 꽤나 즐거운 일이었다. 헌데 어째서인지 오늘은 우영의 모습에 집중이 안 됐다. 형사가 보여 줬던 민재의 사진이 자꾸 눈앞에 아른거렸다.

“⋯⋯.”

검지로 미끈한 식탁을 쓰다듬던 사현이 못다 한 생각에 다시 잠식했다.

민재는 폭력적이다. 화가 많았으며,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아마 평생 오냐오냐 커 온 상류 사회의 후계자 대부분이 그와 비슷한 성향을 띨 테였다. 멱살을 잡는 거야 예삿일이고, 중고등학생 때는 주먹으로 맞은 적도 많았다. 눈에 띄었다고, 같은 공간에 있다고, 주제도 모르고 집안을 거닌다고. 이유도 각양각색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민재에게 맞으니 부아가 치밀었다. 사현이 운동을 배운 이유 중 하나기도 했다. 제대로 한 판 붙는 날에는 아주 코뼈를 부러트려 주려고.

다행히 대학생 때부터는 나와 산 터라, 민재와 주먹다짐을 할 일이 없었다. 마주친다 하더라도 바깥에서 만났고, 나름대로 유명인사인 민재는 원화의 지극한 보필 아래에서 폭력을 숨길 줄도 알게 됐다.

근데. 갑자기 왜. 갑자기 왜, 이런 일을 꾸민 걸까.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자니 걸리는 게 많고, 그래서 타인의 손을 빌리겠다는 건가. 하지만 명분이 없다. 말 그대로 갑자기. ‘현혹의 밤’ 전시 이후로는 마주친 적도 없거늘. 그것도 하필 제가 집에 없던 엄마의 기일에.

⋯⋯설마. 부러 그날을 고른 걸까. 제가 집에 없는 날을 노린 거냔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사현이 흡, 숨을 멈췄다.

“⋯⋯.”

민재는 저를 노린 것이 아니다.

목표는 처음부터 우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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