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 현혹의 밤 (13/24)

11. 현혹의 밤

우영의 두 번째 전시 역시 밤에 오픈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그의 그림은 밤에 봐야 감상이 짙어지기 때문이다.

전시회 준비는 늘 그렇듯, 눈 돌릴 새 없이 바빴다. 사현은 새벽같이 나갔다가 다음 날 새벽이 되어서 퇴근하길 반복했고, 우영 역시 하나 남은 그림을 완성해야 한다는 조급함에 밥 먹는 것도 잊고 붓을 움직여야 했다.

그렇게 며칠 보냈더니 금세 전시회 날이 도래했다.

우영이 고막을 두드리는 알람에 찌뿌듯한 몸을 뒤틀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부스스하게 뒤엉킨 머리카락을 마구 쓸어 넘겼다. 어제 간신히 마지막 그림을 보내고 그대로 엎어져 자 버려서 손 여기저기에 물감이 낭자한 상태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미리 좀 그릴걸. 사현이랑 덜 놀걸. 그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먼 옛날, 방학 숙제로 나온 일기의 한 달 치를 하루 만에 쓰던 그 느낌이었다.

우영이 최대한 불쌍한 얼굴을 하고, 그림 하나만 덜 보내면 안 되겠냐, 넌지시 말했을 때도 단칼에 거절당했다. 아무리 연인이라지만,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지만, 일에 있어서 사현은 지나치게 냉철했다. 언제는 제 그림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고 하더니.

“우으윽⋯⋯.”

우영이 사지를 아래위로 길게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어째 운동을 빡세게 한 날보다 몸이 더 고단했다. 목을 좌우로 돌리며 뭉친 근육을 푸는데, 이불 속에 파묻힌 핸드폰이 띠리링, 간결한 음을 질렀다.

우영이 얼른 핸드폰을 쥐었다. 제게 연락할 이는 한 사람밖에 없었다.

[일어났니?]

역시나 사현이었다.

[네!]

우영이 빠른 손놀림으로 긍정을 보냈다. 또 금방 띠리링, 알람이 울렸다.

[나 곧 도착하니까, 씻고 기다려.]

[네!]

똑같은 답을 보낸 우영이 잠시 멀뚱히 서 있었다. 혹 사현에게 또 다른 메시지가 올까 봐. 허나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우영이 조심히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티셔츠를 벗으며 후다닥 욕실로 향했다.

오늘은 두 번째 전시 오픈 날이다. 그러니 평소보다 더 열심히, 더 깔끔히, 더 오래 씻어야 했다.

화장대 위에 걸터앉은 사현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우영의 머리를 만졌다. 우영이 헤실헤실 웃으며 그를 쳐다봤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두 사람은 몹시 낭만적인 자세를 하고 있었다. 사현이 화장대에 앉아 있고, 그 아래 의자에 앉은 우영이 사현의 다리 사이에 있었다. 우영이 그대로 얼굴을 앞으로 들이밀면 곧장 사현의 가슴팍이었다. 딱 로맨스 영화에서 보던 그 자세란 말이다.

더군다나 올려다보는 사현은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닌지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우영이 가만가만 사현의 무릎을 쓰다듬었다. 드라이기의 후끈한 바람이 귓바퀴를 스칠 때마다 비죽비죽 웃음이 올라왔다. 결국은 참지 못하고 빗질하는 사현의 손목 안쪽에다 쪽쪽쪽 입술을 쏟아 부었다.

짜증스레 미간을 구긴 사현이 손목을 털어냈다. 그러나 우영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사현의 팔꿈치를 감싸 쥐고 더 맹렬히 입술을 비벼 댔다.

“그만해.”

사현이 자못 낮은 음성으로 경고했다.

“싫어요.”

허나 우영은 뭐가 그리 좋은지 방긋거리기만 할 뿐, 입술 폭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만하라니까.”

“싫어.”

우영이 한 발 더 나가 고개를 쳐들고 쪼오옥 입술을 빨았다. 살짝 벌어진 틈으로 혀를 깊숙이 넣어 달큼한 입 안을 맛보기도 했다. 사현이 못 말린다는 듯 코를 찡긋거리며 웃는데, 우영의 눈빛이 싸하게 가라앉았다. 그가 찹찹 입맛을 다셨다.

“⋯⋯또 커피 마셨죠.”

그 말에 사현의 어깨가 옆으로 한껏 벌어졌다.

“아, 아니?”

“마셨는데.”

우영이 살짝 고개를 뒤틀며 쪼오옥 다시 입술을 부딪쳤다. 이번엔 전보다 혀를 더 깊숙이 섞었다. 그러자 한층 진한 커피 맛이 느껴졌다.

“커피 맛 나는데.”

우영이 냉철한 형사처럼 사현을 응시했다. 담갈색 눈동자에 의심과 원망이 드글드글 끼어있었다. 사현이 슬그머니 시선을 옆으로 흘렸다.

“안⋯⋯ 마셨다니까.”

“내가 커피 마시지 말라고 했죠.”

“⋯⋯아 뭐, 하, 한 모금 마셨어.”

사현이 뒤늦게 진실을 토로했다. 흥, 우영이 콧방귀를 꼈다. 대신 사현의 양 볼을 부여잡고 진-하게 입을 맞췄다. 작은 치열을 훑고, 혀를 얽고, 입천장을 살살 긁어내렸다. 그러고는 춥, 낯간지러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아닌데, 한 모금 아닌데.”

우영답지 않게 날카로웠다. 사현이 꾹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착 내리깔린 사현의 속눈썹에 우영이 으음, 목으로 신음했다.

“커피 마시지 말라니까요. 의사 선생님이 마시지 말라고 했잖아요. 제인 실장님한테도 말했는데. 커피 주지 말라고.”

“내가 이래서 병원을 안 가. 뭐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게 많은지. 안 그러니?”

“쓰읍. 말 돌리지 말고요. 어디서 마셨어요?”

“일은 바쁘고, 잠은 못 자서 피곤하고, 사지가 축축 처지잖아. 그러면 머리가 안 움직여. 그럴 땐 진한 카페인이 최고거든. 머리가 굴러가야 네 전시를 꾸리지. 내가 어쭙잖게 일 안 한다고 했,”

“일주일 동안 라면 먹지 마요. 벌이야.”

“⋯⋯.”

사현의 입이 한일자로 다물렸다. 억울함과 원망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사현이 위이잉 시끄럽게 울던 드라이기를 꺼 버렸다.

“아니, 내가 마약이라도 했니? 코카인이 아니라 카페인 먹었다고. 카페인. 고작 커피 좀 마신 거 가지고 뭐 그렇게 유난을 떨어.”

“어떻게 유난을 안 떨어요. 형이 아픈데. 형은 내가 감기 걸려서 끙끙 앓는데 아이스크림 퍼먹고 있어도 아무 말 안 할 거예요? 손 다쳐서 피 질질 흘리는데, 약도 안 바르고 붕대도 안 감고 다녀도 아무런 말 안 할 건가?”

“⋯⋯그거랑 그거는 다르지.”

“뭐가 다른데요.”

“그냥⋯⋯ 달라.”

처음이었다. 사현의 말문이 막힌 건. 혼나는 쪽은 항상 우영이었는데, 이렇게 호되게 혼쭐이 나니 서럽기까지 했다.

침울한 사현의 낯에 우영이 솟구치는 웃음을 삼켰다. 귀여워라. 전시 오픈이고 뭐고 사현을 홀딱 벗겨다 쪽쪽 빨아먹고 싶었다.

잠깐 울상이던 사현이 곧 다시 우영의 머리를 만져 주기 시작했다. 곱슬한 머리를 멀끔히 정리하고, 왁스를 바르더니 우영의 눈을 가린 채 스프레이도 뿌렸다.

사현이 양 손바닥으로 우영의 구레나룻을 꾸욱 눌러 내렸다. 스타일링이 끝났다는 뜻이었다. 우영이 사현 너머로 거울을 보기 위해 상체를 옆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사현이 검지로 우영의 턱을 자신 쪽으로 끌어왔다.

“일주일은 너무 길어.”

“네?”

“라면 금지 말이야. 일주일은 길다고.”

“⋯⋯.”

“오늘만 봐줘. 커피 안 마실게. 나 요즘 스트레스 엄청 받아. 오늘 전시 오픈 끝나면 김밥천국 가려고 했는데⋯⋯. 치즈 두 장 추가해서 먹으려고 했는데⋯⋯.”

사현이 다시 생각해도 억울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숙제를 다 못 끝내서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보지 못하게 된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입을 앙 다문 탓에 하얀 볼이 탐스럽게 솟았다.

그 얼굴을 멍하니 보고 있던 우영이 끝내는 참지 못하고 사현의 엉덩이를 쥐었다. 그 후 자신 쪽으로 세게 끌어당겼다. 사현이 그대로 미끄러져 우영의 허벅지 위에 안착했다. 놀라서 버둥거리며 몸을 휘젓자, 우영이 자신의 단단한 팔로 꽉 안아 가뒀다.

“왜? 뭐?”

옴짝달싹할 수 없어진 사현이 한껏 눈을 부라렸다. 라면도 금지해 놓고 뭘 더 바라냐는 눈빛이었다. 우영이 그와 눈을 맞추며 씨익 웃었다.

“좋아해요, 형.”

“어?”

“사랑한다고요.”

“갑자기?”

“네. 갑자기 막 사랑이 샘솟네요.”

우영이 쪽쪽 사현의 뺨에 입술을 눌렀다. 그로 모자라 이마며 콧잔등에도 사랑을 퍼부어 댔다. 그 간지러운 설렘에 사현이 어깨를 뒤틀며 킥킥거렸다.

우영의 뽀뽀는 점점 더 진해졌다. 종국엔 사현의 상체가 뒤로 밀려서 거울에 뒤통수가 닿기 직전이었다. 거기다 쥐도 새도 모르게 윗도리를 파고든 우영의 손이 야릇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반대쪽 손은 바지춤을 들쑤셨다. 그의 손가락 끝이 살이 많은 엉덩이를 콱콱 신나게 주물러 댔다.

“잠깐만, 잠깐만.”

사현이 힘껏 우영을 밀어냈다. 둔부 아래로 두툼하고 뜨거운 우영의 성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 무엇 때문에 발기한 건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왜요. 한 시간 정도는 괜찮아요. 슈트도 다 빼놨어요. 입고 나가기만 하면 돼.”

우영이 사현의 목을 삭삭 핥으며 말했다.

“그게 아니라, 아우⋯⋯ 좀 내려놔 봐.”

눈썹을 잔뜩 찌푸린 사현이 툭툭 우영의 팔뚝을 두드렸다. 그러나 물러설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으득, 이를 간 사현이 우영의 귓불을 콱 깨물어 버렸다.

우영이 짧은 신음을 지르며 떨어져 나갔다. 귀를 감싸 쥐고 원망의 눈으로 사현을 보는 게, 제법 아픈 모양이었다. 그러나 사현은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고 우영의 허벅지 위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쏠랑 바깥으로 나가 버렸다.

우영이 허망한 낯으로 귀를 문질렀다. 혹시 화났나. 제가 너무 변태 같아서? 요즘 바빠서 제대로 키스한 적도 손에 꼽는지라 잠깐 이성을 놨다.

우영이 걱정에 걱정을 쌓고 있는데, 예상외로 사현이 금세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네모난 상자가 들려 있었다. 한눈에 보기도 아주 귀한 게 들어 있을 것 같았다. 그만큼 두껍고 묵직했으며 고급스러운 상자였다.

“자.”

“뭐예요? 시계에요?”

“응.”

우영이 신난 얼굴로 그것을 받았다.

본래 시계라는 것에 손톱만큼의 관심도 없었는데, 사현이 이래저래 설명도 하고 추천도 해 주고, 가끔 차려입을 때마다 빌려도 줘서 관심이 생긴 터였다. 그렇다고 수천만 원에서 억까지 다다르는 시계를 살 생각일랑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사현이 시계를 빌려주면 기분이 좋았다. 주제에 맞지 않는 부였으나, 어쨌든 비싸고 좋은 거니까.

달칵 상자를 열자 눈에 부실 정도로 반짝이는 시계가 드러났다. 은빛 바디에 베젤은 검은색이고, 인덱스는 은은한 푸른빛인 시계였다. 그의 드레스 룸에서 보지 못한 디자인인데. 그새 또 하나 샀나.

“와⋯⋯. 되게 멋있게 생겼다. 근데 형이 평소에 차는 것보다 크네요? 무거울 것 같은데⋯⋯. 이것도 그거, 한정판? 아무튼, 조심히 쓰고 드레스 룸에 가져다 둘게요.”

우영이 시계를 조심히 손목에 둘렀다. 차갑고 묵직한 질감에 비실 웃음이 샜다. 비싼 게 좋긴 좋아. 우영이 요리조리 손목을 돌리며 시계를 관찰하는데, 사현이 그의 머리칼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한정판 맞고. 드레스 룸에 가져다 둘 필요는 없어. 네 거거든.”

“⋯⋯네?”

우영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손목에 찬 시계와 사현을 번갈아 봤다. 기쁨보다는 얼떨떨함의 지분이 큰 표정에 사현이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그리고 우영과 지그시 눈을 맞췄다.

“두 번째 전시 축하해, 우영아.”

“⋯⋯.”

“좋아해.”

“⋯⋯.”

“사랑도 하고.”

감미로이 속삭이는 사현의 목소리에 우영이 멍하니 넋을 놨다. 그러다 꽉 아랫입술을 겹쳐 물었다. 그러지 않고는 너무 좋아서 엉엉 어린애처럼 울어 버릴 것만 같았다.

“저도요. 저도 사랑해요, 형.”

우영이 두 팔로 한 아름 사현을 껴안았다. 사현의 체온과 체취가 파도처럼 흘러왔다. 거기에 빠져 죽고 싶었다. 그렇게만 죽을 수 있다면, 못 할 게 없었다.

정말로. 뭐든지 할 수 있었다.

* * *

<갤러리 비> 앞에 선 우영이 크게 심호흡했다. 평소보다 더 거대해 보이는 갤러리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번지르르한 차에서 내리는 사람도 있었고, 무어가 그리 할 말이 많은지 갤러리 밖에서 수다를 떠는 사람도 있었다.

우영이 가만히 그들을 바라봤다. 모두 자신의 그림을 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라 생각하니 수줍었다.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듯 어깨가 으쓱 올라가기도 했다. 그래서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은데, 괜히 넥타이를 매만졌다.

크게 심호흡한 그가 갤러리 안으로 들어갔다. 막 현관을 지나는데, 네모난 무언가가 시선을 끌었다. 작은 입간판이었다.

NEON 특별 展

The second night

‘현혹의 밤’

멋들어지게 디자인된 폰트가 입장객들을 반겼다. 그것을 가만히 보던 우영이 주섬주섬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카메라 앱을 켜 찰칵 사진을 찍었다. 그러고 보니 건물 외벽에 현수막도 크게 걸려 있었는데. 집에 갈 때 잊지 말고 찍어야겠다.

우영이 찍힌 사진을 확인하며 조금 더 가까이서 찍어야 하나, 아니면 멀리서 찍어야 하나, 고민하던 차.

“우영 씨, 왔어요?”

제인이 다가왔다. 우영의 눈썹이 반가움에 한껏 위로 솟구쳤다.

“실장님, 오랜만이에요.”

“그러네요. 저나 우영 씨나 각자 전시 준비한다고 바빠서 몇 주 못 봤네요.”

제인이 설핏 웃으며 반가움에 동조했다. 그녀가 뒤로 한 발 물러서며 우영을 아래위로 훑었다. 우영이 보란 듯이 가슴을 펴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제인이 역시, 라는 듯 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도 멋지시네요. B 패션 센스가 확실히 탁월해요. 자신이랑 전혀 다른 체형의 우영 씨를 이렇게 멋지게 꾸미는 거 보면.”

오늘 우영은 고급 명품 로고가 은은히 패턴화되어 있는 흰 와이셔츠에 차콜색 슈트를 입었다. 거기다 검은색 넥타이를 맸는데, 붉은 자수가 길게 박혀 있었다. 덕분에 자칫하면 심심할 수 있던 착장이 센스 넘치는 코디로 바뀌었다.

낡은 안경에 펑퍼짐한 후드만 입고 다니던 우영이 이다지도 세련되게 변하다니.

제인은 짝짝 손뼉이라도 치고 싶은 심경이었다. 키 크고 잘생긴 사람이 옷도 잘 입으면 그 효과는 엄청났다. 모든 요소에 심미를 추구하는 사현이 우영을 옆에 끼고 다니는 게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제인의 칭찬에 우영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그렇죠? 사현이 형 진짜 못 하는 게 없어요. 엊그제 같이 옷 사러 갔는데, 저는 뭐가 뭔지 몰라서 눈만 꿈뻑이고 있었거든요? 근데 사현이 형은 제대로 보지도 않고 턱턱 고르더라고요. 그게 귀신같이 저한테 맞았어요. 거기다 이거 와이셔츠랑 넥타이랑 슈트랑 다 다른 브랜드예요. 그런데도 엄청 잘 어울리죠? 진짜 신기해요.”

신난 우영이 종알종알 사현을 찬탄했다. 제인 당신도 예뻐요, 라는 말을 해 줬어야 했는데. 푼수처럼 사현의 자랑을 하고야 말았다. 비로소 그것을 깨달은 우영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아, 실장님은 늘 그렇듯 멋지시네요.”

그가 뒤늦게 슬쩍 엄지를 쳐들었다. 엎드려 절 받기와 다름없는 우영의 행동에 제인이 피식 실소했다. 사현이 항상 말하지만, 우영은 참 독특한 사람이다. 서툰 게 귀엽고, 순진한 게 사랑스럽고, 그래서 그 모든 게 매력이 되는, 이상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고마워요. 이제 들어갈까요?”

제인이 안쪽으로 팔을 뻗었다. 우영이 그녀를 따라 갤러리 안으로 들어섰다.

안쪽은 바깥과 달리 관람객의 밀도가 높았다. 여기저기서 우영의 이름이, 그러니까 네온이라는 호칭이 들려왔다. 듣지 말아야지, 듣지 말아야지 하는데 신이 창조해 놓은 인간의 귀는 열었다가 닫을 수 있는 게 아닌지라 속속들이 귓구멍을 파고들어 왔다.

다행히 나쁜 말은 아니었다. 작년부터 기대했다느니, 기대한 만큼 좋았다느니, 어떤 그림을 샀다느니, 또는 살 거라느니, 자기는 무슨 그림이 가장 좋았는데 안타깝게도 이미 팔렸다느니 등등의 말들이었다.

가끔 비밀에 부쳐진 네온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대화도 있었다. 네온이 여자라느니, 아니 붓 터치를 보면 남자라느니, 여린 감성으로 보면 나이가 어릴 것 같다느니, 아니 감성이 풍부하니 나이가 아주 많을 거라느니 따위의 쓸데없는 추론들이 여기저기 나돌았다.

우영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제 정체를 아는 사람이 있을 리 없지만 저절로 그리됐다.

두 사람은 곧 전시회 입구에 도착했다.

‘현혹의 밤’

검은 가벽에 하얀 글씨가 정갈하게 박혀 있었다. 그 아래로 반은 거짓이고 반은 진실인 네온의 약력과 전시 콘셉트,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것을 물끄러미 보던 우영이 전시회장 안으로 발을 들였다. 벽 하나를 길게 돌아 들어가자 순식간에 검은 어둠이 우영을 집어삼켰다.

이번 전시는 ‘새로운 밤’ 전시와 달리 어두웠다. 전시장의 조명을 최대한 낮춰 놓고, 그림에만 쨍한 조명을 때렸다. 그래서 꼭 영화관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사현이 말하길, 어둑한 밤. 침대에 누워 창밖을 바라보는 듯한 분위기를 형성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분위기가 한층 가라앉아 있었다. 그렇다고 지루하거나 심심하다는 건 아니고. 모두 말없이 그림만 감상했다. 마치 잠들기 전에 고단했던 하루를 정리하는 것처럼. 혹은 격렬한 사랑을 나눈 후에 일렁이는 눈으로 연인을 바라보는 것처럼. 고요하게 그림과 둘만의 대화를 나눴다.

전시장 안에는 적당히 묵직한 클래식이 흘렀다. 베이스 음이 진하던 ‘새로운 밤’의 배경음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안 따라오셔도 돼요. 조용히 보고 갈게요.”

우영이 자신의 뒤에 바짝 붙어선 제인에게 말했다. 제인의 입매가 떨떠름히 굳었다.

“그래도⋯⋯.”

“사고 안 쳐요. 사현이 형 봐도 아는 척 안 할 거예요. 그러기로 약속했거든요.”

우영이 조용하지만 힘 있는 음성으로 말했다. 제인이 곤란함에 눈가를 일그러트렸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 발 물러섰다. 작가가 자신의 전시를 관람하는데, 감시자가 있는 게 이상하긴 했다. 비록 사현의 신신당부가 있었으나 우영이 됐다는데 어쩌겠는가.

“그럼 다 보고 연락 주세요.”

고개를 살짝 까딱인 제인이 천천히 뒤를 돌았다. 멀어지는 그녀를 잠시간 바라보던 우영이 다시 그림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로소 그림과 저, 둘만 남았다.

우영은 그림 하나하나를 아주 공들여 감상했다.

그릴 때 보는 그림과 전시장에 걸려 있는 그림은 완전히 다른 느낌을 준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게⋯⋯ 열 살까지 키우다 잃어버린 아이를 성인이 되어서 다시 찾은 부모의 마음이랄까. 표현이 어려운데, 아무튼 그런 기분이었다.

전시장의 반 정도를 돌았을 때, 우영은 소리 없이 감탄을 머금었다. 제 그림임에도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를 깨달은 탓이다.

자신의 그림에 사현의 능력이 얹혔기 때문이었다. 그가 만든 전시장의 인테리어와, 조명과, 음악이 한데 얽혀 우영의 그림만을 위한 세상을 일구고 있었다.

우영이 크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두운 벽. 그림을 비추는 금빛 조명. 귓바퀴를 주무르는 듯한 음악. 그리고 발치를 스치는 붉은 빛.

첫 전시에서 네온사인을 이용했던 것처럼, 사현은 이번에도 빛을 썼다. 다만 전과 달리 훨씬 미약하고, 또 어느 방면에선 강렬한 빛이었다. 기다란 직선 형태의 붉은 조명이 바닥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작품 감상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뭉근히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붉게 일렁이는 그림자가 ‘현혹의 밤’이라는 콘셉트에 더할 나위 없이 맞물렸다.

그리고 여타 전시장과 달리 바닥이 폭신했다. 대부분의 전시장은 나무나 대리석 바닥을 추구한다. 어느 작품을 걸어 놔도 무난하게 융화되기 때문이다. 헌데 이번 전시는 두꺼운 카펫을 전체에 깔아놓았다. 그래서일까. 정말 집에서 그림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현은 그저 그림을 내놓는 전시가 아니라, 기승전결과 무드가 있는 전시를 만든다. 또 다른 모습의 창작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것을 눈치채고 나니 그림을 감상하는 속도가 반절로 뚝 줄었다. 또 어디에, 어느 곳에 사현의 특출난 능력이 묻어 있을지 몰라 눈에 불을 켜게 됐다.

그렇게 우영이 메인 전시 홀로 다가가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툭 우영의 등을 두드렸다. 손가락으로 가볍게 건드린 듯한 타격감이었다. 우영이 휙 뒤를 돌았다. 그의 눈에 불안이 서렸다. 설마 사현이 또 대학 교수를 초대했나 싶어서.

“작가, 아니 우영 씨.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우영에게 알은체를 한 사람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이였다. 다행히 교수만큼 께름칙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딱 그만큼 불편한 사람이었다.

“어⋯⋯. 박⋯⋯가영 팀장님?”

붉은색 립스틱을 칠한 가영이었다.

“어, 어어, 안녕⋯⋯하세요.”

우영이 더듬거리며 꾸벅 묵례했다. 가영이 빙긋 웃으며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왔다. 우영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가 발목에 접근 제한선이 걸려서 간신히 멈췄다.

“전시 정말 잘 봤어요. 저 초대장 받았을 때부터 기대하고 있었거든요. 어제는 설레서 잠도 못 잤다니까요. 저 작가님, 아니 아니, 네온 작가님 그림 정말 좋아해요.”

우영이 정체를 숨기고 있음을 아는 가영이 얼른 말을 고쳤다. 그러나 우영은 그런 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녀가 말한 ‘초대장’이라는 단어가 눈앞을 까맣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 초대⋯⋯ 초대받으셨구나.”

누가 보냈지. 사현이 보냈나. ⋯⋯사현이 보냈겠지. 왜 보냈지? 뭐⋯⋯ 다른 곳도 아니고 한호 자동차에서 문화마케팅 팀장이나 되는 사람이니까 당연히 보냈겠지. 저번 전시도 왔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그녀가 오는 게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그렇지, 굳이? 전 연인에게?

머리로는 사현을 이해했는데, 가슴은 그러지 못했다. 갑자기 속이 매웠다. 발바닥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일직선으로 열이 솟구쳤다.

“저 두 번째 섹터 맨 마지막 그림, 「비 오는 바다」. 그거 샀어요. 오묘하게 넘실거리는 바다와 어둑한 하늘, 아래위로 은은하게 깔린 형광 빛이 어찌나 예쁜지.”

“아, 그러셨구나⋯⋯.”

“그것 말고도 사고 싶은 게 많았는데, 이미 팔렸다고 하더라고요.”

가영이 아쉽다는 듯 콧잔등을 구기며 웃었다. 사실 한 점도 월급쟁이 수준에 엄청 무리해서 산 거라며, 그래도 후회는 없다며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우영이 종알거리는 가영을 멍하니 바라봤다.

저번 만남 때도 느꼈지만, 그녀는 참⋯⋯ 멋지다. 슈트를 정갈하게 입는 제인과 달리 어딘가 느슨하고 루즈한 핏을 선호했는데, 마른 몸과 몹시 잘 어울렸다. 오늘 입은 자줏빛 슈트 역시 그랬다.

“오늘 산 건 침실에 걸어 둘 거예요. 잠들기 전에 보면 좋을 것 같아서요.”

“예⋯⋯. 감사해요.”

우영이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아유, 제가 감사하죠. 덕분에 훌륭한 그림을 살 수 있었던 걸요. 사실 투자가 아니라 감상을 목적으로 그림을 산 건 이번이 처음이거든요. 네온 작가님 그림은 소유욕을 자극하는 그런, 매력이 있어요. 뭐 신진이라 그런 것도 있고, 아직 개수가 많이 나오지 않아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것도 다 작품이 좋으니까 있는 일 아니겠어요?”

가영은 붙임성이 좋았다.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상대방을 칭찬할 줄도 알았고, 적당히 말이 많아서 대화의 공백이 생기질 않았다. 우영이 무례도 잊고, 가영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사랑스러운 여자다. 웃는 모습은 예뻤고, 똑똑하고, 능력도 있고. 저 정도쯤 되니 사현과 만날 수 있던 거겠지. 두 사람은 많이 사랑했을까. 지금의 우리처럼 열정적으로 불타올랐을까. 주제넘은 상상과 못난 열등감이 스멀스멀 우영의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그때, 가영이 흘깃 우영의 손을 내려다봤다.

“손은 다 나으셨어요?”

“네. 사현이 형이⋯⋯ 많이 도와 줘서요.”

우영이 손을 얼른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숨길 것도 없는데, 그녀의 시선이 닿는 게 불쾌했다. 시선이 불쾌하다니.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감정이었다.

손바닥이 따끔거린다. 먼 옛날. 질투에 눈이 멀어 엘리베이터에서 손바닥에 자해 아닌 자해를 했을 때도 통각을 느끼지 못했는데. 그 고통이 이제야 밀려오나 보다.

가영의 눈썹이 살짝 위로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형이라는 호칭에 놀란 듯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가 말하는 ‘형’이 사현을 향해 있다는 것에 놀란 듯했다.

“B랑 많이 친하신가 봐요. B가 작가랑 형 동생 할 만큼 친한 건 못 봤는데. 우영 씨 그림이 진짜 좋은가 보다.”

“⋯⋯.”

우영이 볼 안쪽을 지그시 깨물었다. 짜증이 났다. 당신이 사현에 대해서 뭘, 얼마나 아느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의 말로는 잠깐, 아주 잠깐 만났다던데. 그와 함께 근 2년을 함께 산 내가 더 많이 알지. 왜 아는 척이냐고 버럭 화를 내고 싶었다.

그리고 형이 좋아하는 건 내 그림이 아니라, 나 자체라고, 내가 그린 건 뭐든 좋아한다고, 오늘도 사랑한다고 해 주었다고, 정정해 주고 싶었다.

우영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뜨며 분노를 삼켰다. 질투라는 게 이런 거구나. 어째 사랑보다 위험한 감정인 것 같았다.

우영이 대충 대화를 마무리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을 때였다. 커다란 그림자 하나가 가영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키가 크고, 미남형의 남자였다. 남자가 가영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췄다.

“씁, 바깥에서 이러지 말랬지. 아, 우영 씨. 이쪽은 제 남자 친구.”

가영이 탁탁 남자의 가슴팍을 밀어내며 그를 소개했다.

“아⋯⋯, 아아⋯⋯. 남자⋯⋯친구시구나.”

우영이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남자가 빙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가영이가 저번 주부터 종알종알 이 전시 이야기만 하더라고요. 무슨 전시인가, 엄청 궁금했는데. 그럴 만했네요. 정말 잘 봤습니다.”

“예.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영이 어정쩡한 자세로 그의 손을 맞잡았다. 갑자기 등장한 불청객에, 아니, 손님에 모든 감정이 휘발해 버렸다. 정수리를 뜨끈하게 만들던 열도 대번에 가라앉았다.

가영이 남자의 옆구리에 바짝 붙어 섰다.

“저희 이번 가을에 결혼하거든요. 오늘 산 그림, 부부 침실에 걸어 둘 거예요.”

“와⋯⋯, 결혼 축하드립니다.”

우영이 진심을 담뿍 담아 말했다. 주머니에 쑤셔 넣었던 손까지 빼내 짝짝 손뼉도 쳤다. 정말, 진심으로 하는 축하였다. 제가 뭐라고 후련하기까지 했다.

가영이 고맙다며 수줍게 웃었다.

“다음에, 기회 되면 우리 회사랑 꼭 콜라보 한번 해 주세요. 그때 그렇게 흐지부지되어서 얼마나 아쉬웠다고요. 저도, 팀원들도, 회사도 엄청 기대했었는데. 제가 계약 진짜 잘 봐드릴게요. 우영 씨가 원하는 거 다 들어줄 수 있어요. 페이도 왕창, 응? 저번보다 그림 가격도, 이름값도 오르셨으니까 그에 맞게, 뭔지 알죠? 그러니까,”

“네. 사현이 형 통해서 연락 드릴게요. 꼭 한번 같이 해요.”

우영이 씨익 시원하게 웃으며 긍정했다. 너무 쉽게 나온 대답에 가영이 턱을 살짝 뒤로 뺐다. 혹시 몰라서 던진 낚싯줄에 대어가 걸렸다.

“⋯⋯어머, 정말요?”

“네.”

“저 이거 기억할 겁니다, 우영 씨. <갤러리 비>에 전화하고, 메일 보내고, 찾아와서 독촉할 거예요. 큐레이터분들 귀찮게 할 거라고요.”

그녀의 협박 아닌 협박에 우영이 큭큭, 어깨를 떨었다. 재차 고개를 끄덕여 주자 가영이 짧은 탄성을 지르며 뒤꿈치를 들썩였다.

가영과의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그녀를 보던 우영이 손으로 벅벅 얼굴을 문댔다.

커다란 혹 하나가 떨어져 나간 것 같았다. 사실 사현과 가영은 먼 과거에 진즉 끝난 사이인데.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완결까지 맺어 버린 거지만, 후련한 걸 어쩌겠나.

이상한 이유로 신난 우영이 전시장 여기저기를 쏘다녔다. 제법 친한 사이가 된 큐레이터와 도슨트에게 소곤소곤 인사도 하고, 주머니에 넣어 온 작은 초콜릿도 은근히 넘겨줬다. 전시 오픈 날엔 당이 뚝뚝 떨어진다던 한 큐레이터의 말을 기억하고 챙겨온 거였다. 물론, 사현에게는 비밀이다.

우영은 한 시간이 꼬박 지나서야 메인 홀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리고,

“와⋯⋯.”

턱을 뚝 아래로 떨어트리며 감탄했다. 우영뿐만이 아니었다. 메인홀에 들어오는 사람마다 “와⋯⋯.” 우영과 똑같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새로운 밤’ 전시 때에는 메인 홀에 따로 테마를 두지 않았었다. 그저 광활한 공간에 그 공간을 가득 채울 정도로 커다란 그림을 걸어놓음으로써 관람객들의 집중을 끌어당겼다면, 이번엔 언뜻 스치듯 봐도 이곳이 전시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메인 홀은 두 파트로 극명하게 나뉘었다. 한쪽에는 많은 사건이 있었던 「나무 부두」가 걸려있었다. 새까맣던 벽이 진한 남색으로 옅어지면서 분위기가 한층 가볍게 변했다. 또, 손톱만 한 전구 수백 개가 천장에서부터 내려왔는데 천천히 아래위로 일렁이는 게, 꼭 은하수 같았다. 공기 맑은 시골에서나 볼 수 있는 별 무리 같기도 했다.

조명 뒤로는 푸른 나뭇잎이 자유로이 엉켜 있었다. 벽을 가득 메운 나무들이 편안한 청량함을 내뿜었다. 어쩐지 어디선가 풀 냄새가 나더라니. 숲을 통째로 전시장 안으로 들여놓았을 줄이야.

덕분에 「나무 부두」는 또 다른 의미로 숨을 쉬고 있었다. 그림 속의 세상이 바깥으로 뻗어 오는 느낌이랄까. 그림이 입체가 되었다. 3점 투시로 길게 빠진 나무 부두를 따라 그림 안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우영은 한참이나 입구에 서 있었다. 그림을 보는 게 아니라, 그림이 걸린 전시장을 감상하느라 넋을 뺐다. 그러다 누군가가 짜증스레 어깨를 치고 가는 덕에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우영이 천천히 「나무 부두」를 향해 다가갔다. 숲 내음이 진해졌다. 서울에서는 쉽게 맡지 못하는 냄새였다. 그걸 더할 나위 없이 도시적인 전시장 안에서 느끼다니. 사현은 제 연인이지만, 참으로 먼 사람이다.

“제일 좋아하는 그림이라고 하더니⋯⋯. 너무 티 나게 신경 쓴 거 아닌가.”

우영이 아무도 듣지 못할 만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렇게나 사현의 사랑이 명확하고 뚜렷하게 느껴질 때면,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황홀했다.

관람객은 모르겠지. <갤러리 비>의 B가 이 그림을 너무 좋아해서, 이 그림을 그린 나를 너무 좋아해서, 다른 그림들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보듬을 받았다는 걸 절대 모르겠지.

우영이 큼지막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소리죽여 웃었다.

좋다. 좋아서 죽을 것 같다.

사현에게 받는 사랑은 아주 특별하고, 대단했다.

우영이 주머니를 더듬거렸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카메라 앱을 켜기도 전에 관두기로 했다. 아무리 비싸고 좋은 카메라라 한들, 이 자욱한 숲 냄새와 압도적인 사현의 사랑이 담길 리는 없었으니까. 눈으로, 몸으로, 마음으로 느끼기로 했다.

오랫동안 「나무 부두」 앞에 서 있던 우영이 천천히 뒤를 돌았다. 바로 맞은편 벽에는 이번 전시의 메인 그림이 걸려 있었다.

전시 며칠 전, 우영의 고집으로 메인에 서게 된 「흐르는 새벽」이었다.

우영의 전시를 사랑하는 한 평론가는 「흐르는 새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약 이 주 전, <갤러리 비>에서 초대장 하나가 왔다. <갤러리 비> 특유의 묵직한 로고가 먹박으로 박힌 초대장이었다. 그것을 쥔 순간, 필자는 떨리는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은근히 돌던 소문의 실체를 확인할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빳빳한 초대장에는 네온(NEON) 작가의 두 번째 전시가 열린다는, <갤러리 비>의 아트 딜러이자 관장인 B의 친필 엽서가 들어 있었다. 소문이 사실이라니! 너무 좋은 나머지 그 자리에서 쿵쿵 방정맞게 발을 굴렀다.

그리고 지난 10일, <갤러리 비>의 제1 전시관에서 네온 작가의 두 번째 전시가 열렸다. 아마 필자뿐만 아니라 많은 애호가와 컬렉터가 오랫동안 기다리고, 고대하던 전시가 아닐까 싶다.

(중략)

이번 전시 콘셉트는 ‘현혹의 밤’이다. 현혹의 밤이라. 이 얼마나 노골적이고 진득한 이름인가. 네온과 더할 나위 없이 맞아 떨어지는 콘셉트였다. 어떤 작가든 간에 최대의 매력을 뽑아 내는, 콘셉트의 귀재라 불리는 B의 손에서 탄생한 전시다웠다.

모든 관람객은 검은 가벽을 돌아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작품과 공간이 뿜어내는 분위기에 현혹된다. 어두운 벽, 농홍하게 일렁이는 붉은 빛, 느리게 움직이는 클래식. 오로지 현혹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중략)

점점 대단해지는 작품에 발길을 떼지 못하는데, 경외를 한껏 담은 탄성들이 귓가를 간질였다. 메인 홀을 코앞에 둔 지점이었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또 네온이라는 천재적인 작가가 무슨 걸작을 탄생시켜 놓았기에, 또 B라는 천재적인 매니지먼트가 무슨 시공간을 탄생시켜 놓았기에, 조용히 관람하던 사람들이 솟구치는 탄성을 무심결에 내뱉고 말았는지 너무나 궁금했다.

(중략)

「나무 부두」는 모든 이가 찾던 유토피아를 명확하게 시각화한 작품이 아닌가 싶다. 풍경화의 정점에 있으면서도 네온 작가의 매력을 잃지 않은, 몹시 신기한 작품이었다.

(중략)

대단했던 「나무 부두」의 관람을 끝내고 뒤를 도는 순간, 필자는 그저 단어로 명명하고 있던 ‘현혹’이 어떠한 감정을 묘사하는 것인지 손발이 저릿할 정도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이번 전시의 메인 작품인 「흐르는 새벽」이 관람객을 현혹하고 있었다.

「흐르는 새벽」은 제목처럼 깊은 새벽의 밤을 묘사한 작품이다. 다만, 대개 바깥 풍경이었던 전작들과 달리 이번엔 실내 풍경이다. 창틀이 없는 커다란 창이 화면의 가장 뒷부분을 벽처럼 채우고 있다. 그 창을 통해 작가 특유의 형광기가 섞인 오묘한 푸른빛이 쏟아진다.

그 빛 아래에는 사람으로 추정되는 피사체가 길게 옆으로 누워 있는데, 뒷모습이라 정체를 알 수 없다.

「흐르는 새벽」은 네온 작가의 기존 작품들과는 조금 다르다. 세상에 알려진 그의 작 중, 인간의 형상을 띤 것은 하나도 없었는데, 「흐르는 새벽」의 화면 가운데에는 사람이 누워 있다.

인간만큼 관람객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요소는 없다. 인간이기에 인간에게 끌리는 것은 본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깊숙이 그림 속으로 끌려갈 수 있었다.

피사체는 빛을 등지고 있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주 어두운 색으로 덧칠되어 있다. 그는 하얀 이불을 허리춤까지 덮고 있는데, 빛이 투과될 정도로 얇은 재질이다.

필자는 그림을 마주하는 순간, 피사체가 남자일까, 여자일까, 라는 일차원적인 의문이 들었다. 머리카락이 짧고 어깨가 제법 직각으로 꺾인 게, 여자 같지는 않았다. 그럼 남자냐, 그것도 아니었다. 허리부터 발목까지 이어지는 선이 유려하고 가늘었다.

작가가 부러 피사체를 중성적으로 표현한 건지, 아니면 피사체 자체가 중성적인 외형을 가지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없다. 아마 작가와 피사체, 둘만 알고 있겠지.

피사체는 잠이 든 것 같다. 네온 작가 특유의 공기의 흐름이나 바람이 느껴지지 않는 게, 아주 깊은 잠에 빠진 듯했다.

그런데 독특한 이질감이 들었다. 빛이 부드러이 쏟아지는 게 아니라, 산산이 조각나서 비수처럼 내리꽂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름모 형태로 일구어진 수십 개의 빛 조각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허나 모순적이게도, 그 속에 있는 피사체는 무덤덤해 보였다. 어쩌면 빛으로부터 발발하는 고통에 통달한 것일 수도 있겠다. 느슨한 곡선으로 뻗은 등줄기가 고요히 아픔을 피력하고 있었다.

「흐르는 새벽」을 마주하고 있으면 말로 형용하기 힘든 아우라가 전신을 휘감는다. 순수한 것 같지만, 그 순수에서 비롯된 욕정과 피사체를 탐닉하는 시선이 붓 터치 사이사이에 묻어있다.

규칙 없이 구겨진 시트와, 나신인 듯한 피사체로 말미암아, 작가와 피사체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공유하고 있을 것 같다. 그래서 관람객은 작가의 시선을 빌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림 속의 피사체를 사랑하게 됐다.

필자 역시 그랬다. 피사체의 신체를 이루고 있는 곡선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빛을 반사하는 피부가 어찌나 매끄러운지. 차분하게 가라앉아 새벽빛을 흡수하는 머리칼이 어찌나 부드러운지. 이불 아래로 슬쩍 드러난 뒤꿈치가 어찌나 탐스러운지.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최고의 미학은 사랑이라더니. ‘현혹의 밤’ 전시가 ‘새로운 밤’ 전시와 사뭇 다른 분위기를 내뿜는 이유가, 작가가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라는 걸 「흐르는 새벽」을 마주한 모든 이가 알 수 있었다.

(후략)]

우영이 「흐르는 새벽」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흐르는 새벽」의 양옆에는 길고 가벼운 재질의 커튼이 은근히 흩날리고 있었는데, 덕분에 그림 속의 침실에 소리 없이 침범한 듯한 감상을 느낄 수 있었다.

사현은 이 그림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의 침실에 걸린 커튼과 똑같은 커튼을 설치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평소라면 이 작품의 어느 부분이 유독 좋았노라. 하나하나 꼬집어 칭찬해 줬을 텐데.

「흐르는 새벽」만 이렇다 할 피드백을 받지 못했다. 난데없이 자신의 알몸뚱이를 전시해 놨으니 수치심을 느낀 걸까.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전시하지 말 걸 그랬다.

근데 또, 별다른 말 없이 메인 작으로 내놓은 걸 보면 괜찮나 싶기도 하고. 사현은 그의 말마따나 어쭙잖게 일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우영은 그림을 바라보며, 사현을 생각했다. 사위에 설치된 크고 작은 사물로 사현의 기분과 의중을 파악하려 했다. 그렇게 수십 분을 서 있을 때였다.

“이거지? 이게 이번 전시에서 B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이라면서?”

익숙한 이름이 귓구멍을 꿰뚫었다. 흠칫 어깨를 떤 우영이 천천히, 최대한 천천히 등을 돌렸다. ‘알은체하지 말 것.’ 사현이 신신당부한 명령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맞은편. 「나무 부두」 앞에 사현이 있었다. 그의 옆엔 나이가 지긋한 노년 신사도 있었다.

우영의 발이 앞으로 나갔다가 뒤로 돌아오길 반복했다. 다가가고 싶다. 두 시간 전에 집에서 입술을 비볐는데도 그가 보고 싶었다. 어떤 사람을 만나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 어떤 표정인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결국 사현에 대한 갈망을 참지 못한 우영이 많은 인파 사이에 숨어 조용히 그를 향해 다가갔다.

사현은 여유로운 미소를 띤 채 신사를 상대했다. 자신이 「나무 부두」라는 작품을 왜 좋아하는지 열거하면서, 중간중간 신사의 의견을 묻거나 동의를 구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림의 주인이 따로 있다는 말로 대화의 마침표를 찍었다.

사현의 옆자리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그의 옆에 서고자 눈치를 봤다. 멀찌감치서 그 꼴을 보던 우영이 입술을 비죽였다.

내 자린데. 찰나라도 그의 곁에 타인이 있는 게 소름 끼치게 싫었다. 얼마나 있어야 그의 옆에 당당히 서서 자신이 네온임을 밝힐 수 있을까. 푸욱, 한숨이 올라왔다.

이번에는 우영만큼이나 덩치가 좋은 남자가 사현의 옆에 섰다. 무심코 남자를 관찰하던 우영이 버석하니 굳었다. 그를 코앞에 둔 사현 역시 같은 표정이었다.

“이 그림이야? 어머니가 손댄 그림이?”

민재였다.

“⋯⋯또 왔어요?”

사현이 얼굴만 봐도 지친다는 듯, 손등으로 눈두덩을 꾸욱 눌렀다가 뗐다. 그런 사현의 반응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민재가 턱 아래를 쓰다듬으며 흐음, 목으로 신음했다.

“역시 어머니 손길이 묻어서 그런지, 개중에 이게 가장 낫다. 고마운 줄 알아. 어머니 덕분에 심심하던 그림이 한결 살아났잖아.”

그가 자못 진중한 얼굴로 그림을 살폈다. 그에 사현이 헛숨을 흘렸다. 「나무 부두」가 엉망진창이 되었었다는 사실은 우영과 자신 그리고 제인을 제외하고는 몇몇 큐레이터들밖에 몰랐다. 근데 그걸 민재가 알고 있다는 건, 원화가 신나서 떠들었다는 건데.

세상에, 당신은 어떻게 이다지도 유치하고 치졸한가.

사현이 쯧, 짧게 혀를 찼다. 민재를 노려보던 그가 슬쩍 옆으로 시선을 흘렸다. 혹 원화가 같이 왔나 싶어서. 다행히, 그 어느 곳에서도 그녀의 독한 향수 냄새가 느껴지지 않았다.

사현이 다시 민재를 바라봤다. 그리고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이 빌어먹을 새끼를 기품 있게 엿 먹이고, 전시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쫓아낼 수 있을까.

사현은 민재의 등장을 전혀 예상치 못했다. 이따금 전시 오픈 때 와서 속을 벅벅 긁어 대긴 했으나, 흔한 일은 아니었다. 회장님이 억지로 보내는 게 아닌 이상, 민재는 이곳에 오는 걸 극히 꺼렸다. 그런데 대체 왜 왔지. 정말 원화가 갈기갈기 찢어 놓은 그림을 구경하러 오기라도 했단 말인가.

사현이 엄지손톱으로 검지를 꾹꾹 누르며 고민하는데, 긴 생머리의 여자가 민재의 팔뚝에 철썩 달라붙었다.

“오빠!”

난데없는 등장인물에 사현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좁혔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민재가 원화가 아닌 타인과 함께 온 건 처음인지라 무슨 꿍꿍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머, 어머. 진짜 B네.”

여자가 무례도 모르고 사현 쪽으로 얼굴을 쑥 들이밀었다. 사현이 가감 없이 눈썹을 구기며 불쾌를 표했다. 하지만 끼리끼리 논다고, 여자는 사현의 반응을 하등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잘 아는 사이라고 했지?”

민재가 여자의 허리를 껴안으며 전장에서 돌아온 장군처럼 뿌듯하게 미소 지었다.

“와, 오빠 진짜 대단하다.”

여자가 민재에게 동조하며 새빨간 입술을 옆으로 길게 쨌다. 두 사람이 키득거리며 알아들을 수 없는, 아니 알아듣고 싶지 않은 대화를 속닥거렸다.

그 꼴을 참고 참던 사현이 치미는 구역질에 뒤를 돌았을 때였다. 민재가 사현의 손목을 함부로 잡아챘다.

“어디 가?”

사현이 경기를 일으키듯 파드득 민재의 손을 털어냈다.

“저 바쁩니다. 놀 거면 다른 곳 가서 노세요. 왜 어울리지도 않게 갤러리에서 데이트를 하지?”

마지막 문장은 마치 혼잣말 같았다. 그러나 충분히 큰 목소리였다. 민재의 눈썹 위로 진한 홈이 파였다. 여자의 허리를 놓은 그가 성큼, 한 발자국 다가왔다. 그러고는 허리를 숙이고 사현의 귓가에 속삭였다.

“쟤 HW 증권 셋째 딸이야. 네가 추천해 주는 그림 하나 사고 싶다니까 데리고 한 바퀴 돌아 줘.”

“⋯⋯.”

사현이 꾹 입술을 겹쳐 물었다.

HW 증권이라. 국내 3대 증권사 중 하나였다. 근데 거기 셋째 딸이 왜 민재와⋯⋯. 아아, 그래. 정 기자에게 들었었다. 둘이 곧 약혼한다지. 그다지 쓸모없는 정보라 기억에서 삭제해 버렸다. 핏줄만 잘 타고난 두 멍청이가 결혼하는 걸 제가 기억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건 그렇고, 하여튼 미친놈. 자기랑 나랑 무슨 사인데 약혼녀를 여기에 데리고 온단 말인가. 더군다나 저 뻔뻔한 부탁 좀 보라지. 제가 무어라 입을 털 줄 알고. 등신 같은 새끼.

사현이 민재의 어깨너머로 쓸데없이 수줍게 웃고 있는 여자를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민재를 쳐다봤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싫은데요.”

단호하면서도 심드렁한 대답에 민재가 목을 앞으로 쑥 뺐다.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듯했다.

“⋯⋯뭐라고?”

“싫다고요. 말했잖아요. 바쁘다고.”

사현이 가까운 거리가 못내 역하다는 듯 민재의 어깨를 툭 밀어냈다. 그리 센 힘이 아니었음에도 벙찐 민재가 엉거주춤하게 뒤로 밀려났다. 잠깐 멍청하게 눈을 꿈뻑이던 그의 만면이 삽시간에 오색무주로 물들었다.

“야!”

민재가 목청 좋게 고함을 질렀다. 전시회를 은은히 메우고 있던 클래식이 단숨에 휘발할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관람객들이 불편을 담뿍 담아 민재를 노려봤다. 사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개해. 교양이라곤 없어. 그나마 그를 중재하던 원화조차 없으니 아주 엉망진창이었다.

“너 이 새끼, 내가 강원도 일도 덮어 줬는데.”

뒤늦게 타인의 눈치를 본 민재가 낮은 음성으로 으르댔다. 사현이 코웃음을 쳤다.

“덮긴 뭘 덮어요. 뉴스에 났고, 검찰에 송치됐고, 압수돼서 세금으로 다 나갔는데. 그런 건 보통 덮다, 가 아니라 밝혀졌다, 또는 해결됐다, 라고 표현하죠.”

사현이 조곤조곤 민재의 말을 비판했다. 민재가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사현의 얼굴만큼이나 커다란 주먹이 불끈거리며 경련했다. 저 주먹에 한 대 맞으면 대번에 광대가 내려앉겠지. 그러나 사현은 겁먹지 않았다. 손목도 그었는데 고작 폭력을 두려워하려고.

거기다 아무리 경우가 없고, 사고도 더딘 인간이라지만 이런 곳에서 주먹을 휘두를 리 없었다. 사위에 깔린 기자가 몇인데. 폭력 사건은 민재의 아버지도, 그러니까 화 그룹의 회장도 말끔하게 막을 순 없을 테였다.

사현이 부들거리는 민재를 가볍게 지나쳤다.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민재는 멍청하다. 말로 하는 싸움에는 안쓰러울 정도로 뒤떨어졌다. 저 언어 능력으로 회사를 경영한다니. 화 그룹의 미래에 심심한 조의를 표하는 바이다.

사현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민재의 약혼녀 앞이었다. 그녀의 귓바퀴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민재의 교양 없는 고함에 수치를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적잖이 눈치도 있고, 상황파악을 할 줄 아는 여자 같았다.

사현이 코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영의 두 번째 전시인데. 제가 또 소란을 만들어 버렸다. 집으로 돌아가면 그의 얼굴을 어찌 본다. 「나무 부두」에 이어서 사과를 몇 번이나 하는 건지. 그리고 앞으로 또 얼마나 해야 할는지. 벌써 속이 아릿했다.

“그림 다 팔렸습니다. 구매하실 수 있는 게 없어요. 제가 김민재 씨를 위해서 그림을 따로 빼 놓을 만큼 친한 사이가 아니라서요.”

“아, 오, 오빠가 늦게 가도 살 수 있다고 했는데⋯⋯.”

“없습니다. 한 점도 안 남았어요. 네온 작가 그림은 일 년 후에 경매장에서 찾아보세요. 그때쯤 컬렉터들이 많이 내놓을 겁니다.”

그럼. 일방적으로 말을 전한 사현이 간단히 묵례한 후, 뒤를 돌았다. 그러나 두 걸음을 채 떼지 않고 다시 여자에게로 돌아갔다.

“아, 잠시만.”

사현이 짧게 양해를 구하고 그녀의 귓가로 다가갔다. 여자가 살짝 고개를 숙이고 사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사현이 나긋한 음성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약혼하지 마세요.”

“⋯⋯네?”

“저 새끼 빡 대가리예요. 그래도 그쪽은 그림 사러 올 정도의 지식은 있는 거 같은데. 쟤는 모네랑 르누아르도 구분 못 하는 등신이거든요.”

“⋯⋯.”

여자의 얼굴이 오묘하게 뒤틀렸다. 콧잔등에 미약한 혐오가 서려 있는 게, 사현의 말이 제대로 먹힌 듯했다. 사현이 비릿하게 웃으며 두 사람 사이에서 빠져나왔다.

잠시 민재를 응시하던 여자가 말없이 등을 돌렸다. 갑작스러운 퇴장에 놀란 민재가 헐레벌떡 그녀를 뒤따라갔다. 사현은 출구 쪽으로 멀어지는 두 사람에게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았다.

우영이 그런 사현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는 사현이 민재와 홀로 싸우는 동안 한 발자국도 다가가지 못했다. 민재가 저를 알아보고 이러쿵저러쿵 말을 얹었다간 소문나기 일쑤일 듯해서. 그게 사현을 더 난처하게 만들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다행히, 전시는 별다른 파장 없이 이어졌다. 사현은 계속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고, 그림을 소개했다. 우영은 그 모습이 못내 아팠다. 그 많은 혐오와 미움을 어떻게 저리도 덤덤하게 견뎌 내는 걸까.

알맹이 없이 웃고 있는 사현 탓에 목구멍이 떫었다.

두어 시간이 지나자 관람객이 반절로 줄었다. 인파를 피해 잠시 전시장을 나온 사현이 크게 심호흡했다. 와중에도 알은체를 하는 사람들에게 빙긋 웃어 주는 걸 잊지 않았다.

그는 잰걸음으로 복도 구석에 기어들어 갔다. 어둑한 그림자가 몸을 반쯤 가렸을 때, 신경질 섞인 손놀림으로 넥타이를 풀고, 뭉쳐 있던 고단을 길게 토해 냈다.

일 년에 수십 번씩 있는 전시다. 오픈 전시 역시 몇 번씩이나 하는 일인데. 어째 그 피로함은 적응이 안 됐다. 긴장이 풀림과 동시에, 전시를 준비하면서 쌓아 뒀던 피곤이 터진 댐처럼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복도 벽에 기댄 사현이 뻑뻑한 눈두덩을 문질렀다. 그러면서 주머니를 더듬어 핸드폰을 꺼냈다. 전시 잘 봤다는 메시지 수십 개가 잠금 화면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기자의 메일도 있었고, 지인들의 부재중 전화도 있었다.

사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메시지들을 쭉쭉 아래로 내렸다. 제가 찾는 메시지는 이게 아니었다. 그는 손가락을 아래위로 한참 움직이고서야 찾던 걸 발견할 수 있었다.

[형. 오늘 같이 들어갈까요?]

[기다릴게요.]

[주차장에서 기다리려고 했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요ㅠㅠ.]

[제인 실장님이 관장실에서 기다리래요. 여기 있을게요!]

[형. 탕비실에 쿠키 있던데 먹어도 돼요?]

[저 배고파요.]

[하나만 먹을게요.]

[아니, 두 개.]

활자 하나하나를 정독한 사현의 입꼬리가 비죽 위로 올라갔다. 아유, 우리 애송이 배고프구나. 하긴 떨린다고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했지.

사현이 메시지가 온 시각을 확인했다. 첫 메시지는 한 시간 전이었고, 마지막 메시지는 팔 분 전이었다. 우영이 한 시간을 넘게 기다렸다는 뜻이다.

사현이 으음, 목으로 신음했다. 관람객도 빠질 만큼 빠졌고, 평론가와 기자들도 적당히 만났고, 불청객인 민재는 진즉 사라졌으니 제가 할 일은 다한 것 같은데.

오랜만에 우영과 좋은 곳에 가서 외식이나 할까. 기념적인 날이니 집이 아니라 호텔에서 자도 좋을 듯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눈꺼풀이 저절로 사르르 풀렸다. 우영과 함께 욕조에 몸을 담그고, 룸서비스를 잔뜩 시켜서 와인과 함께 먹으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마무리가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오늘 네 그림이 얼마나 멋졌는지, 어떤 찬사를 들었는지 하나하나 말해 줘야지. 또, 낯부끄러움에 차마 전하지 못한 「흐르는 새벽」의 감상도 잊지 말고 들려줘야지.

그런 달콤한 계획을 세웠다.

[십 분 뒤 주차장.]

사현이 토독토독 메시지를 보내며 복도에서 나왔다. 큐레이터들에게 뒷정리를 맡기고 이르게 퇴근할 생각이었다. 전송 버튼을 누른 사현이 빙긋 미소 지으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때, 검은 그림자 하나가 구두 위를 스쳤다. 사현이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일순, 숨이 뚝 하고 멎었다.

“⋯⋯회장님?”

명현이 서 있었다.

사현의 동공이 좌우로 바쁘게 경련했다. 눈꺼풀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인지 몽중인지 구분하려 노력했다. 허나 아무리 봐도 명현이 맞았다. 사현의 입이 한일자로 꾹 다물렸다.

가장 처음 든 생각은, ‘왜 왔지’였다. 명현은 여태 한 번도 사현을 직접 찾아온 적이 없다. 비서를 대신 보내거나, 민재와 원화를 대신 보내거나, 또는 전화로 사현을 호출하곤 했다.

근데 왜, 갑자기 왜, 연락도 없이 왜.

“내가 너무 늦게 왔니?”

명현이 사현을 향해 다가오며 물었다. 낮은 음성이 웬일로 보드라웠다. 사현이 “아니, 아니요.” 그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아, 방금 넥타이를 풀었는데. 재킷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욱여넣은 넥타이가 목에 걸린 가시처럼 불편했다.

그러게 연락 좀 하고 오지. 내가 없었으면 어쩌려고. 또 전화해서 ‘갤러리에 왔더니 네가 없구나. 언제 오니?’ 그런 말로 스케줄을 어그러트리려고.

“네 갤러리는 오랜만에 오는구나. 구경 좀 시켜 주련?”

명현이 참으로 능청맞게 사현을 도슨트로 써먹겠노라, 통보했다. 사현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거절할 권리는 없었다. 아무리 제 이름, 아니 선애의 성을 따라 지은 <갤러리 비>지만 그 근간에는 명현의 돈이 있었다.

사현이 전시장 입구 쪽으로 팔을 뻗었다. 명현이 사람 좋게 웃으며 그 에스코트를 받았다.

사현이 흘끔흘끔 명현을 살폈다. 이렇게 명현과 나란히 걷는 건 처음이다. 가끔 그가 식사자리에 불러도, 어떻게든 늦게 가고, 어떻게든 일찍 나왔던지라 그가 서 있는 모습을 본 지도 까마득했다.

명현은 나이에 맞지 않게 항상 새까만 머리칼을 유지한다. 피부도 좋아서 일흔이 넘은 나이를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주름 하나 없이 깔끔한 슈트와 은근한 향수 냄새로 노년의 기품을 한껏 뿜어내는 사람이었다.

기골도 장대하다. 사현보다 머리 하나는 큰 게, 우영과 비슷한 키였다. 어깨가 떡 벌어져 있고 등도 곧았다. 시선은 항상 바르게 앞을 향했고, 굳게 다물린 입은 가벼이 움직이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사현은 명현이 어려웠다. 빈틈이 넘치는 민재와 분노의 끓는점이 낮은 원화에게 대하듯, 말을 쏴붙일 수가 없었다.

어찌 됐든 아버지라고. 그것도 권위와 돈이 넘치는 아버지라 자꾸 눈치를 보게 됐다. 언젠가처럼, 그는 마음만 먹으면 온갖 비리로 자신을 감옥에 처넣을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피곤해 보인다.”

사현이 중얼중얼 기계처럼 그림을 설명하는데, 명현이 뚝 말을 잘랐다. 사현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일하는 사회인이 다 그렇죠. 화 그룹 직원들도 저랑 비슷한 몰골일 겁니다.”

사현 딴에는 농이라고 한 거였다. 이런 농담은 명현 또래의, 그러니까 명현처럼 직원을 데리고 있는 ‘회장’들이 좋아했으니까.

헌데 사현의 예상과 달리 명현의 미간이 마뜩잖게 구겨졌다.

“네가 한낮 직원 나부랭이들과 같은 몰골이면 안 되지. 너는 내 아들인데.”

“⋯⋯듣는 귀가 많아요. 말조심하세요.”

사현이 참담하다는 듯 엄지와 중지를 넓게 펼쳐 양쪽 관자놀이를 눌렀다. 민재로도 충분했는데, 명현까지 거들지 말아 줬으면 했다. 오늘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영의 전시⋯⋯,

아⋯⋯. 우영에게 주차장으로 내려오라 했는데. 명현의 등장이 너무 뜻밖이라 까맣게 잊어버렸다. 사현이 재킷을 더듬거렸다. 무음으로 둔 터라 우영이 답장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보나 마나 ‘십 분 후’라는 전제를 무시하고 부리나케 주차장으로 향했을 게 뻔했다. 기다릴 텐데. 배고프다고 했는데. 우리 애송이, 잠은 안 자도 배고픈 건 못 참는데.

사현이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어떻게 해야 명현을 일찍 보낼 수 있을까, 고민하는 거였다. 그때, 명현이 먼저 선수를 쳤다.

“저녁은 어쩔 생각이냐?”

“약속 있습니다.”

“중요한 약속이니?”

“네.”

사현이 단호하게 거절을 내놓았다. 다른 날이면 울며 겨자 먹기로 응했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저에게도, 우영에게도 특별한 날이란 말이다. 꼭 그와 함께 저녁을 먹고 그의 품에 기대 바빴던 근래를 투덜거리며 잠들고 싶었다.

명현과 불편하게 식사하고, 쓰라린 위를 부여잡으며 변기에다 헛구역질을 할 생각일랑 추호도 없었다.

“취소해라.”

명현이 사현보다도 단호하게 명령했다. 사현이 실소했다.

“회장님. 저도 스케줄이라는 게 있어요. 회장님 눈에는 별 볼 일 없는 갤러리지만, 직원도 있고, 신경 써야 할 비즈니스 파트너도 있어요. 근데 항상 이렇게 막무가내로,”

“갤러리는 하나만 할 거냐?”

“⋯⋯예?”

다른 곳으로 튄 대화 주제에 사현이 높은음으로 반문했다. 명현이 잔잔한 시선으로 전시장을 두리번거렸다. 제법 괜찮게 꾸며 놨다만, 항상 최고의 최고만 고집하는 명현의 성에 차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가 검지로 턱 아래를 문질렀다.

“이왕 하는 거, 제주도에도 하나 열면 어떠냐. 요즘엔 접근성보다 주위 환경과 경관이 더 중요해. 쌍팔년도도 아니고. 접근성은 더 이상 상업에서 최우선으로 둬야 할 요소가 아니지 않냐.”

“⋯⋯.”

“아니면 홍콩은 어떠냐. 예술 쪽이라면 아시아에서는 홍콩이 제일인데. 내가 좀 알아봤다. 네 갤러리가 아무리 뛰어나도 그쪽 시장에서 오고 가는 돈은 한국이랑 차원이 달라. 요즘 세상에 나라 안에서만 최고인 거,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

사현의 머리가 팽글팽글 빠르게 굴러갔다. 명현이 저런 이야기를 내놓는 이유가 자신이 가늠하는 그 이유가 맞는지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제주도가 좋다고 하면. 홍콩이 좋다고 하면. 그곳에다 갤러리를 지어 주기라도 할 것처럼 말하고 있지 않은가. 피로에 지쳐 늘어졌던 심장이 펄떡펄떡 힘차게 뛰기 시작했다.

“중요한 약속이냐?”

명현이 좀 전과 같은 질문을 거듭했다. 사현이 주먹을 쥐었다가 풀기를 반복했다. 잠시 묵음을 유지하던 그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어디로 가실 건데요?”

* * *

오늘의 명현은 조금, 아니 많이 이상했다. 등신 같은 가족 모임이라는 명목으로 불러도 무엇 하나 질문하는 법이 없었는데. 오늘은 원화도 민재도 없이 둘이서만 식사를 이어 갔다.

간단한 경제 근황, 회사 관련 일, 갤러리 재정 관련 등 삭막한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사현은 그게 차라리 편했다. 아버지인 명현과 식사하는 게 아니라, 비즈니스 파트너와 미팅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식사는 적당한 빠르기로 이어졌다. 메뉴는 유명한 호텔의 한정식 코스였는데, 대화가 끊길 때쯤이면 눈치 좋게 다음 음식이 턱턱 나와 주어서 좋았다.

드디어 모든 식사가 끝나고, 디저트가 나올 차례였다. 깔끔한 한복을 입은 직원이 빈 그릇을 거둬 갔다. 그때, 명현의 눈가가 슬쩍 휘었다.

“선애도 생선 싫어했는데. 너도 싫어하니?”

“⋯⋯.”

사현이 명현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앞접시들을 바라봤다. 손바닥만 한 일인용 신선로와 한 조각씩 놓인 전, 한우 등심구이, 백김치, 떡갈비 등은 한 점씩이라도 먹었는데 한 마리가 통째로 구워져 나온 보리굴비는 건드리지도 않았다.

“네. 싫어해요.”

사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언젠가 우영과 포장마차에서 고등어구이를 맛있게 먹었지만, 그건 거기 사장님이 요리를 잘했고, 우영이 손수 고등어 가시를 발라 줬고, 얼큰하게 술에 취한 상황 등등 많은 요소가 합쳐져서 먹었던 거지. 이런 자리에서 먹을 만큼 생선과 친해진 건 아니었다.

다만, 명현의 입에서 어머니의 이름이 나온 게 소름 끼치게 싫었다. 그가 어머니의 취향을 기억하고 있는 것 역시 싫었다.

“단 것도 좋아하니? 선애처럼?”

명현이 눈치 없이 선애의 이야기를 이어 갔다.

“네. 좋아해요. 케이크랑 초콜릿 같은 거요.”

“그래? 선애도 케이크 참 좋아했어. 너는 모르겠지만, 그때는 파르페라는 게 유행이었는데, 그걸 진짜 좋아했다. 하루는 종류별로 다 시켜 줬더니 좋다고 울기까지 했다니까. 위도 작은 여자가 그걸 다 먹겠다고 꾸역꾸역 먹는데⋯⋯. 참⋯⋯ 예뻤어. 순진하고.”

명현이 먼 과거를 떠올리며 웃었다. 사현은 그 웃음에 동조해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불만을 표하지도 않았다. 네가 뭔데, 네가 어떻게, 네가 감히 어머니와의 추억을 되뇌는 거냐고 바락바락 소리치고 악을 질러도 엄마는 살아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또, 명현에게는 빼먹을 수 있는 게 많았다. 갤러리도 몇 개 더 지어 주겠다 하지 않는가. 그게 그만의 속죄 방법이든 뭐든. 사현은 받을 생각이었다.

과거의 아픔과 미래의 성공. 사현은 그것을 이성적으로 저울질할 수 있는 냉철한 어른이었다.

식사는 모호하게 끝났다. 사현은 그래도 아랫사람이라고, 명현이 차에 타는 것까지 배웅했다. 명현은 무어가 그리 좋은지 껄껄 웃으며 다음을 기약하고는 전담 기사와 함께 떠났다.

멀어지는 세단을 보던 사현이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하고 있던 탓에 뻐근하게 뭉친 목을 천천히 뒤로 넘겼다. 새까만 서울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호텔 이름이 번듯하게 박힌 전광판도 보였다.

여기 라운지 괜찮은데. 우영을 불러다 술이나 한잔 할까. 유명한 파티셰가 만든 케이크와 초콜릿도 파는데. 안주로 시켜 주면 좋아하지 않을까. 그가 케이크 한 판을 작살내는 걸 보고 있으면 이 갑갑한 마음이 시원하게 뚫릴 것 같았다.

사현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몇 시간 전, 명현과 함께 호텔로 오는 길에 일이 생겼다고, 함께 저녁을 하지 못할 것 같다고, 미안하다고 우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우영은 괜찮다고, 집에 있을 테니 천천히 오라고 답을 해 주었다.

우영의 번호를 터치한 사현이 으음, 목울대를 일렁였다. 뭐라고 그를 꾀어낼까, 고민하는 거였다.

메시지 창에 우영아, 라는 단어를 입력한 사현이 툭툭 구두 앞코로 땅을 두드릴 때였다. 미끈한 스포츠카가 호텔 정문 앞에 섰다. 그곳에서 익숙한 인영 하나가 내렸다.

몇 시간 전, 전시장에서 봤던 민재였다.

민재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히죽거리며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사현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민재의 동선을 좇았다. 함께 온 사람이 없다. 갤러리에서 봤던 약혼녀는 어디 내버려 두고. 그새 파혼이라도 했나. 아니, 그러기엔 좀 전까지 함께 있던 명현이 몹시 평온했다.

사실 민재가 호텔에 올 일이야 많았다. 좀 모자라긴 해도 어쨌든 화 그룹 계열사의 사장이었고, 가진 게 많은 덕에 들러붙는 친구도 많았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색욕이 넘치며 음탕하게 노는 건 물론, 마약에도 손을 댄다고 했다.

분명 사현이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특출난 증거를 잡아 민재의 난잡한 사생활을 까발릴 거면 모를까. 헌데 지금은 그럴 시기가 아니다. 명현이 두 번째 갤러리 오픈을 약속했다. 그러니 제주도든 홍콩이든 그 갤러리의 터가 정해지고, 시공이 완료되고, 오픈할 때까지는 민재를 건드려선 안 됐다.

그런데 왜. 왜 이렇게 궁금하지. 왜 이렇게 민재를 쫓아가고 싶지. 왜 이다지도 호기심이 동하지.

민재가 호텔 안으로 사라지기 직전, 사현은 자신의 촉을 한번 믿어 보기로 했다. 그가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우영과의 만남을 삼십 분 정도 미뤄야겠다.

* * *

사현은 예상과 달리 한 시간이 훌쩍 넘게 호텔에 있었다. 정확히는 민재가 술잔을 기울이는 VIP 라운지의 대각선 뒷자리에.

등신 같은 민재는 바깥에서 하면 안 되는 이야기를 바깥에서 하면서도 목소리를 죽일 줄 몰랐다. 마치 해외에 나와 있는 듯, 아무도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 우매한 인간 같았다.

덕분에 아주 많은 걸 들었다. 돈을 그렇게 썼음에도 전혀 알지 못했던 정보들이었다.

민재는 얼큰히 술에 취하면서 옆자리에 앉은 여성의 가슴에 얼굴을 비벼 댔다. 더 이상 습득할 수 있는 정보가 없다고 판단한 사현이 느린 걸음으로 라운지에서 빠져나왔다.

엘리베이터에 오른 그가 주먹을 세게 쥐었다가 폈다. 운 좋게 얻어걸린 정보에 엔도르핀이 팽글팽글 빠르게 전신을 내달렸다. 광대에 발긋한 열도 올랐다.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긴 사현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미뤄 뒀던 메시지를 보냈다.

[자니?]

우영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 답은 엘리베이터가 1층에 다다르기도 전에 왔다.

[아니요.]

때마침 땡,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만면 가득 미소를 만개한 사현이 곧장 우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은 세 번이 채 가기 전에 끊겼다.

-형. 볼일 끝났어요?

사현이 여보세요, 라고 하기도 전에 우영이 우다다 질문을 쐈다.

“응. 저녁은 먹었어?”

-네. 짜장면 시켜 먹었어요.

그 말에 사현이 푸흐, 웃음을 흘렸다. 신나게 짜장면을 먹는 우영을 상상했더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아,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니. 아쉬워라. 짜장면 먹는 건 못 본 지 좀 됐는데.

사현이 홀을 가로질러 프런트 데스크로 향했다.

“그것만 먹었어?”

-아니요. 탕수육이랑 군만두도 시켰어요. 탕수육은 대(大)자.

“잘했어.”

-형은요? 저녁 먹었어요?

“뭐 대충⋯⋯.”

-대충이 뭐예요. 제대로 안 먹었죠? 또 깨작깨작, 응? 그렇게 먹었죠?

“⋯⋯넌 안 피곤하니?”

-아, 말 돌리지 말고요.

이제 우영은 사현이 넌지시 돌리는 말머리를 누구보다 빠르게 알아차릴 수 있게 됐다. 사현이 킥킥 소리 죽여 웃었다. 그리고 프런트를 향해 ‘스위트 룸. 1박.’이라며 벙긋벙긋 말했다.

눈치 좋은 직원이 태블릿을 보여 주며 어떠한 스위트 룸이 남았고, 무엇이 좋은지 조용한 음성으로 설명했다. 사현의 눈동자가 좌우로 바쁘게 움직였다. 전망이 좋은 룸, 욕실이 넓은 룸, 개인 수영장이 딸린 룸, 거실이 특화된 룸 등 종류가 많았다.

사현의 검지가 톡톡, 거실이 특화된 룸을 찍었다. 전망이라 봐야 집에서 보는 것과 무어가 그리 다르겠나. 어차피 같은 서울인데.

“그래서, 안 피곤하냐고. 쌩쌩해?”

사현이 재킷을 뒤져 지갑을 꺼냈다. 그러나 한 손으로 카드를 빼내려니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귀와 어깨로 핸드폰을 고정하고, 카드를 빼내는데.

-제가 뭐가 피곤해요. 형이 피곤하지. 형 오면 같이 자려고 기다리고 있어요.

“⋯⋯.”

-언제 와요? 보고 싶어요.

듣기 좋은 저음이 귓구멍을 간질였다. 사현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수화기를 통해 듣는 우영의 음성은 또 다른 매력이 있다. 뭐랄까. 바람 소리가 잔뜩 배어 있어서 평소보다 거칠고 자욱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랫도리가 단숨에 묵직해졌다.

“우영아.”

-네.

“택시 타고 로윈스 호텔로 와.”

사현이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카드를 빼 직원에게 내밀었다. 직원이 공손하게 두 손으로 카드를 가져갔다.

-어⋯⋯. 네, 금방 갈게요.

짧은 대답 뒤로 우당탕 바쁘게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늦은 시각에 난데없이 호텔로 오라는데, 왜요? 이 시간에요? 뭐 하러요? 따위의 질문은 하지 않는다. 그게 참으로 우영다웠다.

“삼십 분이면 올 거야. 로비에 있을 테니까, 도착하면 전화해.”

-네!

그렇게 전화가 끊겼다. 때마침 직원이 결제가 완료됐다며 카드와 영수증을 내밀었다. 사현이 연하게 미소 지으며 그것을 받았다. 호수와 카드 키를 전달받고, 간단한 설명을 들었다.

사현이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뒤를 도는데, 핸드폰이 반짝이며 켜졌다. 우영의 이름이 떠 있었다. 고개를 갸웃, 뒤튼 사현이 녹색 통화 버튼을 왼쪽으로 스와이프했다.

“어, 우영아.”

-형.

아까와 달리 진지한 음성이었다. 사현이 덩달아 목덜미를 굳혔다.

“왜. 무슨 일 있어?”

-있잖아요.

“응.”

-그 호텔 좋은 곳이죠? 비싸고 번쩍번쩍하고. 그럼 예쁘게 하고 가야 해요?

“⋯⋯.”

로비로 향하던 사현의 발걸음이 뚝 멎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드레스 룸에 달려가 의상을 고민하는 우영이 상상됐다. 보나 마나 호텔에는 발도 들여 본 적 없을 텐데. 김밥천국 가듯 후드를 입어도 되나, 아니면 슈트를 차려입어야 하나, 고민했겠지.

사현이 입가를 더듬었다. 그러나 치미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우영은 참⋯⋯ 뜬금없는 곳에서 사랑스럽다.

“푸흐⋯⋯. 아니. 너는 거적때기를 걸쳐도 예쁘니까 그냥 나와.”

-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렌즈는 끼고 갈게요!

“그래.”

전화가 다시 끊겼다. 우영의 이름이 깜빡깜빡 점멸하는 화면을 보던 사현이 빙그르르 뒤를 돌았다. 그리고 직원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1박 말고, 2박이요.”

내 저 사랑스러운 애송이를 하루만 물고 빨아서는 성이 안 풀릴 듯하니, 이틀은 꼬박 품에 안고 있어야겠다.

잠깐 눈썹을 들썩이던 직원이 빙긋 웃으며 카드를 거둬 갔다. 그가 숙박을 연장하는 사이, 사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전화번호 하나를 찾았다. 분명 그때 연락처를 받아 뒀는데. 뭐라고 저장해 놨더라⋯⋯.

심각한 표정으로 주소록을 훑던 사현이 곧 원하던 이름을 발견했다. 망설임 없이 통화 버튼을 누른 그가 핸드폰을 귀로 가져갔다.

“검사님. 안녕하셨어요? 저 <갤러리 비>의 백사현입니다. 저번에 특정 경제 범죄 가중 처벌법으로 검찰에 송치됐던. 기억하시죠?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다음 주에 커피 한잔 할까요?”

* * *

택시에서 내린 우영이 장대한 호텔을 올려다봤다. 호오오,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수백 개의 전구가 가지런히 매달려있는 커다란 정문이 몹시 화려했다.

편히 와도 된다는 사현의 말에 후드를 입고 왔는데. 그러지 말걸. 이런 곳은 제집처럼 드나드는 사현에게나 편한 곳이지 저에게는 딴 세상이다. 그걸 몇 번 경험했으면서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미어캣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우영이 쭈뼛쭈뼛 어색하게 정문을 통과했다.

늦은 시각의 호텔 로비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덕분에 그러잖아도 넓은 로비가 공허할 정도로 크게 다가왔다.

우영의 운동화가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갔다가, 또 옆으로 갔다. 사현이 로비에 있겠다고 했는데. 아무리 사람이 없기로서니, 웬만한 운동장보다 넓은 이곳에서 그를 어떻게 찾는담.

우영이 후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을 때였다.

“우영아!”

익숙한 목소리가 뒤통수 너머로 울렸다. 우영이 얼른 등을 돌렸다. 사현이 멀리서 다가오고 있었다. 낯선 곳에서 만나는 익숙한 얼굴이 어찌나 반가운지. 씨익, 입술을 짼 우영이 기다란 다리로 휘적휘적 사현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어쩐 일로 사현이 더 빨랐다. 후다닥 날다람쥐처럼 뛰어온 그가 우영의 품에 폭삭 안겼다.

“⋯⋯형?”

놀란 우영이 헙, 숨을 멈췄다. 허나 그것도 잠깐. 얼른 사현의 볼을 쥐어 얼굴을 살폈다. 또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서. 전화할 땐 별다른 낌새를 느끼지 못했는데.

다행히 사현의 얼굴엔 이렇다 할 슬픔이나 괴로움이 보이지 않았다. 조막만 한 얼굴 가득 말간 미소가 떠 있었다.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미소였다.

우영이 걸치고 있던 집업 후드를 벗어 사현의 머리 위에 씌웠다. 아무래도 사현은 유명한 사람이었고, 저와 호텔에서 이러고 있는 걸 누가 보기라도 하면 괜한 소문이 돌 테였다. 사현이 저 때문에 곤란해지는 건 죽었다가 깨어나도 싫었다.

그런 우영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현은 말랑한 볼을 우영의 가슴팍에 마구 비비며 애교를 떨어 댔다.

“미안해.”

“뭐가요?”

“오늘 같은 날 혼자 짜장면이나 먹게 해서.”

“짜장면 맛있었는데⋯⋯.”

우영이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짜장면이 ‘짜장면이나’라고 폄하되는 걸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거기다 탕수육도 먹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최고의 식사였다.

“내가 싫어. 오늘 좋은 곳에 데리고 가서 저녁 먹으려고 했단 말이야.”

“바쁜 일 생겼다면서요. 어쩔 수 없죠.”

“아⋯⋯. 어쩔 수 없는 게 싫으니까 그렇지.”

눈썹 끝을 뚝 아래로 떨어트린 사현이 되뇌어도 짜증이 난다는 듯 거센 콧김을 뿜었다. 우영이 그 모습이 못내 귀여워 사현의 코끝을 엄지로 살살 문질렀다.

과거 연인들은 일이 바빠 헤어졌다고 하더니, 저는 일 때문에 못 만나는 게 싫단다. 같이 살면서, 고작 밥 한 끼 함께하지 못한 거로 이다지도 아쉬워하다니.

우영은 당장 이 자리에서 사현의 온몸에 뽀뽀를 해 주고 싶었다. 그래도 장소가 장소인지라 뒤꿈치를 내리누르며 참아냈다.

“진짜 괜찮아요. 근데 호텔은 왜 오라고 했어요?”

그 말에 사현이 번뜩 고개를 쳐들었다.

“우리 여기서 잘 거야. 오늘도, 내일도.”

사현의 얼굴에 자르르 윤기가 흘렀다. 반면에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우영은 눈만 끔뻑거렸다.

사현은 호텔 룸의 문이 열리자마자 맹렬히 입술을 부딪쳐 왔다. 한 뼘이 넘게 나는 키 차이 탓에 고개를 바짝 쳐들고 있으면서도 허겁지겁 재킷을 벗고, 바지 버클을 끌었다.

대충 옷을 벗어 던진 그가 우영의 목덜미에 팔을 두르고 어떻게든 더 가까워지겠다고 온몸을 바르작거렸다.

잠깐 당황했던 우영도 옳다구나, 하며 사현의 허리를 껴안았다. 그런데도 사현이 밀어붙이는 기세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종국엔 우영의 등이 벽에 쿵, 부딪힐 정도였다.

제법 큰소리에 놀란 사현이 고개를 뒤로 물리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금까지 비벼지던 입술이 새빨간 체리처럼 붉어져 있었다.

“아파?”

미약하게 쇳소리가 묻은 목소리가 말도 못 하게 섹시했다. 우영이 손을 조금 더 내려 사현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아니요. 근데 여기가 아파요.”

그가 제 아랫도리를 사현의 골반께에 문질렀다. 두툼하고 뜨거운 부피감에 사현이 샐쭉 입술을 잡아 쨌다. 그러고는 바짝 붙어 있던 몸을 떨어트렸다. 우영이 의아하게 그를 쳐다보는데, 그가 쑥 아래로 사라졌다.

“⋯⋯형?”

무릎을 꿇고 앉은 사현이 빠른 손놀림으로 우영의 청바지 버클을 풀었다. 그 후 말릴 새도 없이 검은색 드로어즈를 내려 버렸다. 놀란 우영이 다리를 오므리는데, 그런다고 이미 발기할 대로 발기한 성기가 숨겨질 리 없었다.

사현이 퉁, 하고 볼을 때리는 우영의 성기를 사랑스럽게 바라봤다. 언제 마주해도 위용 넘치는 성기에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마른 입술을 핥은 사현이 우영을 닮아 잘생긴 귀두 끝에 쪽, 뽀뽀했다.

“그, 그런 거 안 해도 돼요.”

우영의 손이 허공을 마구 나돌았다. 사현의 머리를 떼어내자니 너무 버릇이 없는 것 같고. 몸을 빼내자니 뒤가 벽이라 물러날 수가 없었다.

“왜? 너도 나 막 물고 빨잖아. 오늘은 내가 좀 물고 빨고 싶어서 그래.”

사현이 야하게 눈을 휘며 우영을 올려다봤다. 그에 우영의 목울대가 아래위로 크게 움직였다. 뒤통수가 찌릿하다 싶더니 성기가 더 크게 부풀었다. 마치 살아 있는 듯 꺼떡거리는 성기가 그렇게 부끄러울 수 없었다.

“얘는 내가 빠는 게 좋은 모양인데?”

사현이 우영의 성기 뿌리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러고는 우영과 눈을 마주한 상태에서 천천히 귀두를 머금기 시작했다. 우영이 흡, 숨을 말아 먹었다.

사현은 입 안이 좁다. 키스할 때나 이따금 이렇게 자신의 성기를 삼켜 줄 때마다 느끼는 건데, 입 안 자체가 좁고 뜨거웠다. 혀는 축축하고 말랑했으며 치열은 고르고 작지만, 그래서 간지러웠다.

“으우⋯⋯.”

사현이 꼴사나운 신음을 흘렸다. 고작 귀두만 머금었을 뿐인데 입 안이 가득 찼다. 마음 같아선 저 올곧은 뿌리까지 죄다 집어삼키고 쭉쭉 빨고 싶거늘. 우영이 제 것을 그렇게 빨아 줄 때마다 등줄기가 다 선득할 정도로 좋았는데. 그 쾌락을 알려 주고 싶으나 우영의 것이 지나치게 비대한지라 불가능했다.

사현이 아쉬운 마음에 입술을 오물거리며 고개를 앞으로 움직였다. 조금이라도 더 머금어보려는 심산이었다. 단단한 귀두가 목젖을 쿡, 짓이겼다.

“쿨럭⋯⋯.”

사현이 우영의 것을 문 채로 둔탁하게 기침했다. 얄궂게도, 그게 묘한 자극이 된지라 우영의 속눈썹이 크게 휘청거렸다.

사현은 노련하게 입을 움직였다. 차마 혀가 닿지 않은 기둥과 고환이 섭섭해할까, 고개를 옆으로 돌려 기둥만 빨기도 하고, 동그랗게 올라붙은 고환을 삭삭 핥기도 했다.

“하아⋯⋯. 아, 형⋯⋯ 좋아요⋯⋯.”

우영이 사현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사랑해 마지않는 귓불을 주무르기도 했다.

사현은 턱이 뻐근해질 때까지 우영의 것을 물고 빨았다. 우둘두둘하게 도드라진 핏줄도 잘근거리고, 귀두 끄트머리에 혀를 쑤시기도 했다.

십 분이 훌쩍 지났을 땐, 우영의 커다란 성기가 타액으로 젖어서 반질반질하게 빛났다. 그쯤, 우영이 사현의 겨드랑이 아래에 손을 넣어 위로 쑥 끌어당겼다.

다시 입술이 맞물렸다. 곧장 벌어진 입술 사이로 축축한 혀가 부끄러움 없이 넘나들었다. 사현이 낑낑거리며 우영의 목을 끌어당겼다. 보다 못한 우영이 그의 허벅지 아래를 받치고 마른 몸뚱이를 번쩍 들어올렸다. 그리고 성큼성큼 룸 안으로 발을 들였다.

우영이 급한 대로 가까운 소파에 사현을 내려놨다. 집 소파와 달리 부들부들한 재질에 딱딱한 소파였다. 이곳에서 거사를 치렀다간 사현의 무릎이 남아나질 않을 것 같았다.

재차 매달려오는 사현의 어깨를 은근히 아래로 내리누른 우영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침대를 찾는 거였다. 자연히 주위 풍경이 눈에 들어오게 됐다.

널찍한 거실. 하얀 대리석 테이블. 고급스러운 소파와 평범한 모양이나 기품 있는 조명등. 높은 천장 아래로 장엄히 매달려 있는 샹들리에. 사현의 집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대단한 곳이었다. 우영이 동그랗게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

“어, 와⋯⋯. 형 여기 정말 좋네요.”

“하⋯⋯. 네가 감히 나를 앞에 두고 다른 걸 감상해?”

사현이 코웃음 치며 우영의 멱살을 끌어당겼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이곳이 베르사유 궁전이든, 쓰레기장이든 신경이 쓰이질 않아야 했다. 사현이 신경질적으로 우영의 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 아릿한 통각에 우영이 푸흐흐, 웃음을 흘렸다.

“여기서 하면 형 무릎 아파요. 쓸리면 까질 것 같은데.”

우영이 보란 듯이 손바닥으로 소파를 꾹꾹 눌러 보였다. 힘주어 눌러도 깊이 파이지 않는 게, 영 별로였다. 벽 한쪽에 난 복도를 본 우영이 고개를 휙 뒤로 젖혔다. 저기가 침실인 것 같은데. 아무래도 이동하는 게 좋,

“괜찮아. 서서 하면 되지. 거기까지 갈 만큼 내가 여유롭지가 않아서.”

사현이 우영의 생각을 뚝 가로지르며 일갈했다. 우영이 하, 짧게 실소했다. 저를 서서 받아 내겠다니. 제가 들어가기만 해도 해롱해롱 정신을 못 차리는 주제에. 이 방자한 생각을 어찌 고쳐 준다?

“그래요, 그럼.”

우영이 훌떡 윗도리를 벗어 소파 아래로 떨어트렸다. 그리고 민첩한 재규어처럼 사현의 위에 올라탔다. 그의 셔츠를 옆으로 벌려 내고 탐스럽게 솟은 유두에 입술을 묻었다.

그 간지러운 쾌락에 사현이 킥킥거리며 우영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사현의 골반을 바투 쥔 우영이 허리를 앞으로 쿠욱, 힘차게 박아 넣었다. 배 속 깊은 곳을 찌르는 삽입에 사현의 동그란 엉덩이가 파르르 떨렸다. 그 채로 허리를 좌우로 뒤틀며 조금 더 깊이 들어갔다. 성난 황소 같은 삽입에 소파 팔걸이를 쥐고 서 있던 사현이 앞으로 풀썩 쓰러지려 했다.

우영의 입가에 못된 미소가 걸렸다.

“서 있겠다면, 후으, 서요.”

“아흐, 응, 아! 우, 우영아⋯⋯ 잠, 깐만⋯⋯.”

“응? 서 있을 수 있다며.”

우영이 더욱 거칠게 허리를 움직였다. 사현의 다리는 진즉 제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다. 우영이 그의 하체를 들어 올려 성기를 제멋대로 쑥쑥 넣었다가 뺐다. 그러잖아도 앙상한 사현의 다리가 힘없이 나풀거렸다.

소파에 거꾸로 머리를 처박은 사현이 곧 죽을 것처럼 신음을 흘려 댔다. 뒤집힌 머리칼이 팔랑팔랑 둔탁하게 움직였다. 정체 모를 액체가 사타구니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게 공중에 뜬 발가락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형. 무릎에 힘 줘요.”

우영이 자못 다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얄미울 정도로 세차게 허리를 움직이면서 할 말은 아니었다. 사현이 고개를 돌리고 그렁그렁하게 젖은 눈망울로 우영을 노려봤다.

그와 눈을 맞춘 우영이 씨익 멋들어지게 웃었다. 사현이 짜증스레 눈썹을 어그러트렸다. 웃어? 지금? 네가? 감히? 그런 낯이었다.

그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은 우영이 팽팽하게 펴진 사현의 뒷구멍을 엄지로 짓눌렀다. 바짝 깎은 손톱 끝이 이미 한껏 벌어진 구멍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려 했다.

화들짝 놀란 사현이 팔을 뒤로 보내 휘적휘적 우영을 만류했다. 지금도 충분히 배가 터질 것 같다. 뒷구멍은 화끈거리고, 아래가 빠질 듯했다. 여기서 우영의 손가락이 또 들어오면 그대로 까무러칠지도 몰랐다.

“으응! 하, 하지 마, 그거.”

허나 우영의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섹스만 하면 독불장군이 되는 우영에 사현은 딱 죽을 맛이었다.

우영이 그대로 손을 내려 사현의 고환을 움켜쥐었다. 손가락으로는 성기의 뿌리를 거머쥐었다. 음모 하나 없이 말랑하고 쫀득한 살덩이는 한 번 손에 쥐면 도무지 놓기가 싫었다.

그새 두 번이나 정액을 싸지른 사현의 성기는 힘을 잃고 축 처져 있었다. 덕분에 사타구니며 구멍이며 엉덩이며 온통 축축했다. 살이 붙었다가 떨어질 때마다 철퍽철퍽 음란한 소리가 울렸다.

“하응, 아, 아! 우영아⋯⋯, 좋아, 응? 좋아⋯⋯.”

사현이 솜이 잔뜩 들어서 딱딱한 쿠션을 마구 쥐어뜯었다. 콱콱 세차게 후벼 파이는 전립선에 모골이 송연했다. 사현은 자신이 절정에 다다른다는 자각도 없이 줄줄 정액을 흘려 댔다. 우영과 연인이 되고 난 후부터는 아랫도리가 마를 일이 없다.

“하아, 형⋯⋯. 사현이, 윽, 형⋯⋯.”

그쯤, 우영의 허리 짓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물론 거세지기도 했다. 사현의 탱글탱글한 엉덩이가 그의 골반에 짓눌려 납작하게 짜부라졌다.

그리고 끝내, 사현이 무너졌다. 휘청거리던 무릎이 훅 꺾이더니 그대로 소파로 고꾸라졌다. 어떻게든 팔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키려는데, 우영이 사현의 등을 꾹 아래로 짓눌렀다. 덕분에 엉덩이만 하늘로 쳐든 꼴사나운 자세가 됐다.

“쉬⋯⋯. 가만히 있어요, 가만히.”

우영이 사현을 달래며 소파 아래에 널브러진 후드를 끌어와 사현의 무릎 아래에 깔았다. 사현이 눈을 부릅떴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우영이 귀두 삿갓이 걸릴 때까지 성기를 빼냈다가 그대로 쿠우욱, 깊은 내벽을 뭉갰다. 그 큰 소파가 끼긱거리며 밀릴 정도로 거센 삽입이었다.

“흐익⋯⋯.”

폭력적인 쾌감에 사현이 등을 동그랗게 말았다. 전립선에서 발발한 오르가슴이 단숨에 사지 끝에 다다랐다. 아랫배가 시큰거리고, 심장이 뛰었다. 척추는 간질거리다 못해 따끔거렸다.

“후우⋯⋯. 형⋯⋯.”

우영이 땀으로 반질거리는 사현의 등줄기에 꾹꾹 입술을 내렸다. 그러면서 삽입이 더 깊어졌다. 사현의 발가락이 꽉 오므라들었다가 부채처럼 활짝 펴졌다.

그만, 그만 들어 와. 배가 터질 것 같아. 제발.

하고 싶은 말은 많았는데 숨이 꺽꺽 뒤틀려서 음절 하나조차 내뱉지 못했다. 그런 사현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영은 앞뒤로 성기를 넣었다가 빼며 사현의 귓불을 잘근잘근 씹어 댔다.

그의 거친 숨소리가 귓구멍을 넘어 고막을 간질였다. 어찌나 야한 숨소리인지. 이따금 사현이 형, 사랑해요, 등과 같은 말이 섞이면 오줌이라도 지릴 것 같았다.

우영의 허리 짓이 집요해졌다. 깊은 곳만 노려서 퍽퍽 빠르게 치댔다. 절정이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읏, 으응⋯⋯.”

입술을 꼭 겹쳐 문 사현이 괴롭힘 같은 쾌락을 감내하려 애썼다. 그때, 우영이 사현의 턱을 거머쥐고 자신을 보게 했다. 절정에 다다르는 모양이었다.

근래 우영은 꼭 사정 전에 눈을 마주하려 했다. 하지만 지금의 사현은 그 버릇을 충족시켜 줄 여유가 없었다. 그의 두꺼운 성기에 짓눌린 전립선이 아릿하다. 콱콱 쑤셔지는 배 속은 찌르르 울렸다. 눈앞이 번쩍거리는 게, 찰나 정신을 놓으면 당장이라도 눈이 까뒤집힐 것 같았다.

사현이 쿠션에 이마를 비비며 우영의 손을 털어냈다. 우영의 한쪽 눈썹이 못마땅하게 뒤틀렸다. 어금니를 지그시 깨문 그가 사현의 양쪽 오금을 감싸 쥐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휙, 반 바퀴를 돌려 버렸다.

“아, 히윽!”

사현이 비명 같은 신음을 내지르며 고개를 뒤로 꺾었다. 직선으로 뻗은 속눈썹이 파들파들 떨렸다. 그의 눈가를 타고 맑은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륵 흘렀다. 우영이 그것을 혀로 삭삭 핥아 먹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명령하듯 말했다.

“나 봐요.”

“아⋯⋯, 흑, 우영⋯⋯아⋯⋯.”

“나 봐, 얼른.”

우영이 엄지로 바짝 곧추선 사현의 유두를 짓이기듯 비벼 댔다. 검지와 엄지로 꾹 눌러 꼬집기도 했다. 사현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우영을 바라봤다.

축축이 젖은 속눈썹. 붉게 달아오른 눈꼬리. 그렁그렁 눈물이 채인 눈. 일렁이는 눈동자.

“힘, 힘들어⋯⋯. 우영아, 나 힘들어, 응?”

사현이 울먹거리며 말했다. 그것을 마주한 우영이 하, 짧게 숨을 끊어 냈다. 이렇게 생긴 얼굴로, 이런 표정을 짓다니. 신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현을 이리 고혹적으로 만들었나. 별 같잖은 의문이 다 들었다.

우영이 사현을 껴안으며 성기를 깊숙이 욱여넣었다. 그리고 참던 파정을 시작했다. 불끈거리며 박동하는 성기에 사현이 꽉 눈을 짓이기듯 감았다. 그의 마른 몸뚱이가 지진이라도 난 듯 잘게 떨렸다. 우영이 괜찮다는 듯 그의 관자놀이에 꾹꾹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형.”

우영이 절절 끓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훌쩍, 코를 먹은 사현이 그의 너른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평소엔 이렇게나 다정하고 보드라우면서. 섹스만 하면 야차같이 돌변하는 우영에 아직 적응하지 못했다.

그래도 뭐⋯⋯. 영 나쁘지만은 않았다. 저도 정신이 쏙 빠질 만큼의 쾌락을 느꼈으니까. 이제 우영이 아닌 타인과의 관계에 만족할 수 없을 듯했다.

괜찮다. 앞으로도 우영과, 계속해서 우영과 이리 살을 비비고 입술을 섞으면 되지. 일 년 후에도, 십 년 후에도, 또 그보다 더 훗날에도.

“응⋯⋯. 나도, 사랑해.”

사현이 우영의 볼에 나른히 입을 맞췄다.

문득 깨달았는데 연인과의 미래를 상상하게 된 건 처음이었다.

그 처음이 우영이라서 좋았다.

“형. 오늘 기분 엄청 좋아 보여요.”

뜨거운 물로 오래 씻고 나온 우영과 사현은 전투적으로 룸서비스를 시켰다. 헐떡거리며 땀을 잔뜩 쏟았더니 몹시 허기가 진 상태였다. 이것저것 끌리는 대로 모두 시키자 거실 중앙 테이블이 각종 음식으로 가득 찼다.

와인 잔에 와인을 넘칠 듯 따른 사현이 그것을 물처럼 꿀꺽꿀꺽 삼켰다. 우영과 함께 있으니 마음이 편한 건지, 아니면 그의 식욕을 닮아 가기라도 하는 건지. 샐러드 조금에 쌀국수 반 그릇, 파스타 반 그릇, 스테이크 반 덩이나 먹었는데 우영의 몫으로 시킨 감자튀김에까지 포크가 향했다.

그런 사현을 물끄러미 보던 우영이 말했다. 기분이 좋아 보인다고. 감자튀김을 오물거리던 사현이 고개를 갸웃 옆으로 흘렸다.

“내가?”

“네. 제 전시 오픈이 잘 끝나서는 아닌 것 같은데.”

우영이 술기운이 연하게 올라 뜨끈한 사현의 볼에 쪽쪽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음⋯⋯.”

사현이 우영의 팔뚝에 볼을 비볐다. 보들보들한 샤워 가운 너머로 단단한 근육질의 팔이 느껴졌다. 아, 질질 쌀 정도로 몸을 흔든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욕정할 것 같았다.

“바쁜 일이라는 게 좋은 일이었어요?”

우영이 얼른 말하라는 듯, 사현의 귓불을 조물거렸다. 씻으면서도 물고 빤 덕에 분홍빛으로 달아올라 있는 귓불이 그렇게 귀여울 수 없었다.

“뭐⋯⋯ 그것도 좋은 일이긴 하지. 회장님이 <갤러리 비>를 제주도나 홍콩에도 오픈해 주겠대.”

경사를 말하기에는 너무나 심드렁한 음성이었다. 덕분에 그의 말을 곱씹던 우영이 곱절로 놀랐다.

“정말요? 홍콩요? 와, 저는 해외에 한 번도 나가 본 적 없는데. 형은 회사, 어 회사라고 해도 되나? 아무튼 해외에 회사를 세우네요!”

우영이 기특하다는 듯 사현을 끌어안고 부둥부둥 몸을 뒤틀었다. 그 낯간지러운 스킨십에 사현이 푸흐흐, 웃음을 흘렸다. 이렇게 온몸으로 우영에게 안겨 있으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충만함이 차올랐다.

“근데 그것‘도’ 좋은 일이라고 했잖아요. 뭐가 또 있어요?”

사현의 만면에 쫍쫍 입술을 퍼붓던 우영이 번뜩 고개를 쳐들었다. 사현이 으음, 목으로 신음했다. 우영에게 알려 줘도 될는지 고민하는 거였다. 비밀 보장에 문제가 생길까 걱정한다기보다는, 그의 순수함에 악을 끼칠까 봐 걱정되어서.

“뭔데요. 말해 줘요. 네?”

우영이 자못 애처로운 얼굴로 사현을 졸랐다. 도르륵 눈을 굴리던 사현이 느릿하게 상체를 일으켰다. 우영이 덩달아 바른 자세로 소파에 앉았다.

“너 김민재 알지?”

“네.”

“내가 오늘 저녁을 회장님이랑 이 호텔에서 먹었거든?”

“네.”

“회장님 배웅하고 너한테 전화를 하려고 하는데, 김민재가 호텔로 들어오더라고.”

사현이 그 순간을 떠올리며 눈을 게슴츠레하게 좁혔다. 반면에 우영의 눈은 커졌다.

그래서, 민재를 봐서. 설마 또 시비가 붙었나. 혹 민재가 사현을 폭행하기라도 했나. 그의 눈동자가 분주하게 사현의 사지를 훑었다. 정사 중에도, 씻는 중에도 이렇다 할 상처는 보지 못 했는데.

걱정에 흠뻑 젖은 우영의 얼굴에 사현이 그의 아랫입술을 엄지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나만 본 거야. 김민재는 내가 있는지도 몰랐어.”

“⋯⋯그게 좋은 일이에요?”

“푸하, 그건 별일 아니지. 아무튼, 걔가 호텔로 들어가는데 왠지 따라가고 싶더라고.”

“그래서 따라갔어요?”

“어. 내가 좀⋯⋯ 촉이 좋거든.”

민재를 따라간 것과 촉이 좋은 것의 상관관계를 찾지 못한 우영이 눈썹을 구겼다. 그의 의문을 해소하고자, 사현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김민재는 여기 위층에 있는 VIP 라운지에서 친구이자 바이어인 사람들이랑 술을 마셨어. 나는 그 대각선 뒷자리에 앉아 있었고. 거기서 뭘 좀 들었어. 아주 질 좋은, 아니, 질 나쁜 정본데.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아.”

사현이 와인으로 손을 뻗었다. 거칠게 넘실거리는 붉은 액체가 매혹적이었다.

“무슨 정보인데요?”

“음⋯⋯.”

“말해 줘요. 궁금해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요. 어차피 형 말고는 말 섞는 사람도 없어요.”

우영이 입꼬리를 축 늘어트리며 졸랐다. 사현이 옆으로 돌아앉아 우영을 쳐다봤다. 우영이 입을 앙다물며 그 시선을 마주했다. 제 딴에는 믿음직스럽고 신용 있는 표정을 짓는 중인 것 같았다. 그 모습이 못내 귀여워 사현이 킥킥 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우영이 “아, 빨리요.”라며 그 넙데데한 어깨를 좌우로 흔들었다.

“김민재가 회사를 판대.”

“회사요? 무슨 회사요?”

“김민재가 화 그룹 계열사인 ‘화 벤처 투자’라는 회사에 사장으로 있거든?”

“네.”

“그 회사를 판대. 다른 말로는 매각.”

“⋯⋯왜요? 회사가 잘 안 되나?”

“아니. 김민재가 사장으로 앉고 조금 주춤거리긴 했는데, 그래도 기반이 단단해서 흔들리지 않는 회사야. 똑똑한 직원들이 많아서 김민재가 싸질러 놓은 똥을 잘 치우거든.”

“근데 왜 팔아요?”

“회사를 싸게 팔아서, 이윤을 남기려고.”

우영의 눈동자가 좌우로 느릿하게 움직였다. 회사를 싸게 파는데 이윤이 남는다는 소리가 영 이상한 모양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우영이 다시 의문을 제기했다.

“자기가 사장으로 있는 회사를 싸게 팔아요?”

“응. 원래 가격보다 싸게 팔면, 싸게 사는 사람이 이득이겠지?”

“네.”

“그렇게 남는 돈을 김민재랑 싸게 산 사람이랑 반반 나누는 거야. 아무리 사장직에 있어도, 회삿돈이 다 자기 건 아니거든? 결국은 월급쟁이고, 거기서 장난쳐서 뽑아먹을 수 있는 돈 역시 한계가 있어.”

추가된 사현의 설명에도 우영의 오묘한 표정은 사라지질 않았다. 전혀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사현이 들고 있던 와인을 단숨에 삼키고 빈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자. 비유를 해 줄게. 김민재한테 건물이 하나 있다고 하자.”

“네.”

“그 건물 안에는 집 네 개가 있어. 네 개 다 월세를 백만 원씩 받아.”

“와 한 달에 사백만 원이나 벌겠네요.”

“그렇지. 근데 김민재는 그 사백만 원이 너무 적게 느껴지는 거야. 그래서 고민을 해. 월세를 올릴까? 그럼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거든. 근데, 네 집 다 월세를 올리자니 눈치가 좀 보여. 주위 건물들은 월세를 안 올리니까.”

“그래서요?”

“그래서 두 집만 올려. 백오십만 원으로.”

“그럼 다른 두 집에는요?”

“다른 두 집이랑은 이미 이야기가 된 거야. 그 두 집은 김민재한테 먹을 것도 주고, 도움도 주고, 음식물 쓰레기 처리도 대신 해 주고, 뭐 그랬던 거지.”

“아⋯⋯.”

우영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반응을 살피던 사현이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자 그렇게 두 집만 올려서 총소득이 오백만 원으로 올랐어. 그러다 또 돈이 고파서 두 집만 월세를 이백만 원으로 올리고, 이백오십만 원으로 올리고, 삼백만 원까지 올리는 거지.”

“나쁜 짓이네요.”

“그게 김민재가 지금껏 벤처 투자 회사로 해 온 짓이야. 조작하고, 떼먹고, 후려치고. 자기한테 뇌물 주고 그런 인간들 건 크게 튀겨 주고, 밀어 주고. 그런 식으로.”

“그럼 몰래 빼돌린 돈이 많을 텐데, 왜 회사를 팔아요?”

우영은 답지 않게 질문이 많았다.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지라. 제대로 알고 싶었다. 저번에도 사현이 정보를 얻었다며 기자와 통화하고는 검찰에 끌려가지 않았던가. 이번에는 그런 일이 없어야 했다.

우영의 질문에 사현이 라운지에서 들었던 말을 되뇌었다. 술에 취한 민재가 중얼중얼 불평하던 목소리가 선연했다.

‘아버지가 요즘 이상해. 엄마가 차기 대표직 뽑는 주주총회 언제 열 거냐고 물어도 대답이 없어. 영감탱이 노망이라도 든 건지.’

‘혹시 모르잖아. 나도 먹고살 구멍은 마련해 놔야지. 엄마 비자금 창고도 백사현 그 새끼가 터 버려서 쥐뿔도 안 남았다고.’

‘경영, 그거 씨발 좆도 재미없어. 크게 한탕 해서 펑펑 쓰다가 뒤질 거야. 아침마다 출근하는 거 얼마나 좆같은지 아냐?’

갈수록 고양되는 음성이 소름 끼치게 듣기 싫었다. 타인보다 뭐든 더 쥐고 태어났으면 써먹을 줄 알아야지. 자기 파멸로 걸어가는 게, 딱 민재의 종말다웠다.

“아, 이게 자기 건물인 줄 알았는데, 알고 봤더니 실소유주는 아빠였던 거지.”

“⋯⋯.”

“그걸 깨닫고 나니까 조급해지거든. 이 월세를 언제까지 받아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끝까지 나한테 소유권을 안 넘겨주는 아빠가 밉고.”

“⋯⋯.”

“이걸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번뜩 좋은 생각이 났어. 월세만 받으면 끽해 봐야 천만 원을 버는데. 건물을 통째로 팔면 백억이 생기는 거야.”

사현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마치 민재의 탐욕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 우영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그런 우영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현은 신나서 다음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김민재는 아빠 몰래 건물을 팔아 버리려고 해. 아빠한테는 건물이 아주 많고, 이거 하나쯤이야 팔아 버려도 크게 타격이 있을 것 같진 않거든.”

“⋯⋯.”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준비는 하지.”

“무슨 준비요?”

“일부러 건물의 가치를 하락시키는 거야. 주변에 음식물 쓰레기장이 있는 것처럼, 혐오 시설이 있는 것처럼 서류를 조작하는 거지. 사실 건물 자체는 전과 다름이 없는데, 싸게 팔아버릴 수 있도록.”

“싸게 팔면 손해잖아요.”

“그렇지. 근데 그건 그냥⋯⋯ 아빠랑 금융 감독원에 보여 주기 위한 하나의 서류일 뿐이거든. 원래 백억짜리였던 건물이 주변 상황으로 인해서 이십억으로 떨어졌다. 근데 누가 이십오억에 사겠다고 해서, 당장 팔아 버렸다. 결국 이득이다. 그렇게 명분을 만드는 거지.”

“⋯⋯.”

“그리고 그 건물을 싸게 산 사람이랑, 자기랑 그 이윤을 나누는 거야. 칠십오억의 이윤이 생겼으니까, 너 반. 나 반. 그렇게 떼어먹는 거지.”

우영이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한결 쉬워진 설명에 이해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헌데 어찌 가늠하던 것보다 스케일이 작다. 칠십오억이라니. 제가 전시회만 한 번 열어도 사현의 수중에 수십억이 떨어지는데. 민재는 회사를 팔아서 고작 칠십억을 챙긴다니. 이상했다.

우영이 와인을 따르는 사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런데요, 형.”

“응.”

“저한테는 칠십오억이 엄청 큰돈이지만, 형이나 민재라는 사람한테는 그렇게 큰돈이 아니지 않아요?”

“건물로 비유해서 그 돈인 거야.”

사현의 대답에 우영의 턱이 안으로 말려 들어갔다. 건물로 비유해서 칠십억이라니. 그럼 비유가 아니라 현실은 얼마란 말인가.

와인 잔을 든 사현이 소파에 깊숙이 등을 묻었다. 그의 시선이 테이블 모서리를 무의미하게 응시했다.

“김민재는 이번에 벤처 투자 회사를 팔아서,”

“팔아서?”

“일조 칠백억을 챙길 거야.”

상상도 못한 액수에 기겁한 우영이 허업,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조요? 억 다음 단위인 그 조요? 억이 만 개가 있어야 하는 그 조요?”

우영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묻고 또 물었다. 조는 뉴스에서도 쉬이 들어 보지 못한 단위였다. 사현이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우영의 질문에 긍정했다.

우영이 사현을 따라 소파 깊숙이 등을 묻으며 헛웃음을 흘렸다.

“⋯⋯회사를 팔 만도 하네요.”

누구나 혹할 만한 금액이다. 이십억을 위해 로또에 전 재산을 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조 단위라면, 그까짓 범죄 얼마든지 저지를 수 있지 않을까. 우영이 뿌연 안개처럼 탁한 민재의 심경을 가늠했다. 문득, 사현이 피식 조소했다.

“그렇지. 그 새끼는 대가리가 비어서 그저 당장 돈이 많으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못 하는 거야.”

“⋯⋯.”

우영의 입이 한일자로 다물렸다. 비아냥과 악의로 가득 찬 사현의 모습은 아직 적응하지 못했다. 라면을 좋아하고, 고등어 가시도 바를 줄 모르고, 병원을 무서워하는, 그런 아이 같은 사람인데. ‘그’ 가족과 연관된 일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우영이 손가락으로 토독, 토도독 자신의 무릎을 두드리며 사현을 쳐다봤다. 사현은 그런 우영의 시선을 느끼지 못한 건지, 아니면 느끼면서도 무시하는 건지 여전히 테이블 어귀만 응시하고 있었다.

우영이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사현이 가지고 있는 과거의 고통을 보듬어 줄 수도, 해결해 줄 수도 없다. 그럴 수 있을 만큼 깊은 관계가 되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영영, 영원히 그럴 수 없을 것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볼 안쪽을 씹던 우영이 엉덩이를 들고 사현의 옆에 착 달라붙어 앉았다. 그제야 허공에서 시선을 거둔 사현이 우영에게 기댔다.

“근데요, 형.”

“응.”

“기업이 그렇게 비싸요? 막 조⋯⋯ 단위가 나올 만큼?”

“무슨 기업이냐에 따라 다르지. 근데 화 기업의 계열사잖아. 대기업이 왜 대기업인데.”

“으음⋯⋯.”

우영이 혀 위로 ‘대기업’이라는 단어를 굴렸다. 대기업이라서 비싸게 팔린다는 건가. 뭐 얼마나 대단한 회사길래. 제가 느끼기엔 사현의 <갤러리 비>가 곱절에 곱절은 더 대단했다.

심각하다 못해 심오한 우영의 낯에 사현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하긴, ‘조’라는 것은 보통 사람이라면 평생 입에 몇 번 올려 볼 일이 없는 단위였고. 우영은 그 보통 사람보다 더욱 좁은 세상에서 살아 왔으니 전혀 가늠하지 못할 만도 했다.

“너 <갤러리 비>에서 일하는 직원이 몇 명인 줄 아니?”

사현이 홀짝 와인을 머금으며 물었다. 이제 고작 한 병 비웠을 뿐인데, 종일 긴장한 상태에, 명현에게 시달리고, 민재의 뒤를 쫓고, 우영과 질펀히 섹스까지 했더니 노곤하게 술기운이 올라왔다. 우영의 의문을 얼른 해결해 주고 자는 게 좋을 듯했다.

뜬금없는 질문에 우영의 머리통이 팽글팽글 빠르게 굴러갔다. <갤러리 비>의 직원이라. 낯익은 얼굴들이 우수수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대충 손가락을 꼽아 보는데, 헤아리기가 쉽지 않았다.

“글⋯⋯ 쎄요?”

“62명이야.”

“와⋯⋯ 엄청 많네요? 큐레이터 누나, 아니 큐레이터 팀이랑 고객 지원 팀만 알아서 그렇게 많은 줄은 몰랐어요.”

우영이 신기하다는 듯 눈썹을 한껏 위로 추켜올렸다. 사현이 한쪽 입꼬리를 씰룩였다.

62명은 절대 많은 숫자가 아니다. 사현이 아주 많은 일을 하기도 하고, 웬만한 대기업 월급의 두 배를 줘도 아깝지 않을 만큼 뛰어난 직원만 뽑으니 적은 수로도 원활하게 굴러가는 거지. 예술의 전당이나 국립 현대 미술관의 직원 수는 200명이 훌쩍 넘었고, 세종 문화 회관은 500명에 다다랐다.

우영이 놀라움에 젖어 있는 틈에, 사현이 무심히 문장 하나를 던졌다.

“근데 화 그룹은 직원이 32만 명이야. 당장 내일 100명이나 1000명이 더 늘 수도 있고.”

“아⋯⋯.”

“⋯⋯.”

“오⋯⋯ 오오⋯⋯.”

우영은 비로소 ‘대’ 자가 붙는 기업의 비대함과 ‘조’ 단위가 붙는 금액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일하는 회사를 싸게 팔아넘기려 하다니. 민재가 몹시 나쁜 사람처럼 느껴졌다. 물론, 그전에도 사현을 막 대해서 좋은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진 않았다.

우영이 주제넘게 심각한 얼굴로 있는데 사현이 꾸물꾸물 그의 허벅지 위로 올라왔다. 우영이 익숙하게 사현의 허리를 감싸 그를 받쳤다.

“자. 이제 네 차례야.”

“저요? 뭐요? 저 뭐 잘못했어요?”

갑작스러운 타깃의 전환에 우영이 지레 겁을 집어먹었다. 민재 다음으로 자신의 차례라니. 제가 뭘 잘못했던가. 오늘 있었던 일을 빠르게 반추해 갔다. 허나 걸리는 게 없었다. 짜장면을 곱빼기로 시켜 먹은 게 걸렸나. 역시 탕수육 대자는 너무 과했나. 그런 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사현이 중지와 검지로 우영의 코끝을 가볍게 튕겼다.

“그림 말이야. 「흐르는 새벽」.”

“아⋯⋯.”

“그거 배달오고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아니?”

“형인 거 눈치챘어요?”

우영이 능청맞게 되물었다. 사현이 어이없다는 듯 하,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걸 어떻게 몰라. 네가 그렇게 그릴 수 있는 게 나밖에 없잖니? 그리고 아주 심미적인 나체랑 유려한 실루엣이 딱 나였어.”

사현이 우영보다 능청맞게 대꾸했다. 우영이 못 말린다는 듯 사현의 어깨에 이마를 파묻고 큭큭거리며 웃었다.

“형 그린 거 맞아요. 제가 새벽마다 형 잘 자는지 보러 2층에 올라가잖아요.”

“응.”

“이불도 다시 덮어 주고, 괜히 머리도 쓸어 주고, 숨소리도 들어 보고, 커튼도 뒤적거리고, 그러다 작업실로 내려오거든요? 그러면 형 모습이 눈앞에 막 아른거려요. 제가 뭘 그리고 있었는지, 뭘 그려야 하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

“⋯⋯.”

“그래서 하루는 다 밀어 두고 형이 자는 모습을 그렸어요. 그러고 나니까 조금 덜하더라고요.”

우영이 더 세게 사현의 허리를 껴안았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웅얼거렸다.

“병이에요, 병. 형을 안 그리면 다른 그림을 못 그리는 병.”

그 말에 사현이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화려한 샹들리에가 번쩍이며 사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현이 그것을 몽롱한 눈동자로 마주했다.

제가 뮤즈가 되다니. 그것도 우영에게 뮤즈가 되다니.

황홀함에 젖어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데 순간, 장면 하나가 사현의 머릿속을 휙 가로질렀다. 그가 우영의 양쪽 귓바퀴를 감싸 쥐고 그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너⋯⋯ 설마⋯⋯ 작업실에 뒤집어 놓은 캔버스. 그거 다 내 그림이니?”

“⋯⋯.”

사현의 질문에 우영이 되려 입을 꾹 다물었다. 절대 말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돋보였으나, 이미 흡 하고 숨을 멈춘 걸 사현이 눈치챈 후였다.

사현이 얼떨떨한 낯으로 중얼거렸다.

“맞구나, 내 그림.”

“어⋯⋯ 「흐르는 새벽」처럼 적나라하고 야한 건 몇 안 돼요.”

우영이 냉큼 변명을 내놓았다. 그러나 사현은 이미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뒤집힌 캔버스가 몇 개더라. 적어도 열 개는 족히 되어 보이던데. 그게 다 제 그림이라니. 엉덩이가 저절로 들썩였다. 호텔이고 뭐고, 당장 집에 뛰어가서 그것들을 감상하고 싶었다.

“보여 줘. 보고 싶어.”

“부끄러운데.”

“알몸뚱이로 사람들 앞에 전시됐던 피사체가 여기 있는데, 왜 네가 부끄러워해?”

“그냥⋯⋯ 사람들한테 보여 주고, 팔고, 그러려고 그린 게 아니라서⋯⋯ 남한테 보여 주기가 좀⋯⋯.”

우영이 사현과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고꾸라트렸다. 그에 사현의 입매가 삐뚜름히 뒤틀렸다. 그가 우영의 턱을 억척스레 잡아 올려 강제로 눈을 맞췄다.

“내가 남이야?”

“아이, 그런 뜻이 아니라요. 그, 어, 뭐라고 해야 하나, 음⋯⋯.”

“뭐.”

“자위⋯⋯.”

“어?”

“자위하는 모습을 엄마한테 들킨 것 같은, 그런 느낌이라고요. 아니면 밤에 혼자 몰래 쓰던 일기장이 까발려진 것 같기도 하고. 알몸으로 광장 한복판에 서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 정확히 무어라 말은 못 하겠는데 아무튼 그런 느낌이에요. 되게 수치스럽고 부끄럽고 그래요.”

두서없이 진심을 털어놓는 우영의 광대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사현에게 보여 주지 못할 게 무어가 있겠냐마는. 정말 부끄러웠다.

구도를 설계하고, 심미를 중점에 두고, 감상 포인트를 만들고, 점이고 선이고 면이고, 덩어리감이고 질감이고 투시고, 그런 기초적인 그림의 요소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린 것들이라. 그저 자꾸 흘러넘치는 사현을 어디에든 묻히고 담아 두려 그린 거란 말이다.

사실 「흐르는 새벽」도 내놓기 전까지 얼마나 고치고 또 고쳤는지 모른다. 훤히 드러난 사현의 엉덩이 위로 이불을 덧그리며 혼자 홧홧하게 얼굴을 붉혔었는데. 아무에게도 말 못 할 비밀이었다.

“그러니까 안 돼요. 절대.”

우영이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히 일갈했다. 사현의 눈썹이 실망으로 축 처졌다.

“이제 자러 가요. 아니면 또 할 거야.”

우영이 위협적으로 사현의 볼기 한쪽을 움켜쥐었다. 그 굳건한 기세에 사현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잠시 우영을 바라보던 사현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영이 얼른 그를 안아 들고 욕실로 향했다. 양치만 시키고, 곧장 침대로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우영의 품에 안긴 사현의 눈은 날카로이 번쩍이고 있었다.

오늘만 날인가. 앞으로 살살 꼬드겨서 하나씩 내놓게 하면 되지. 사현이 실망을 연기하는 낯빛 아래로 영악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 * *

오늘도 어김없이 일찍 일어난 사현은 호텔 테라스의 선 베드에 앉아 밀린 메일을 확인했다. 종일 우영과 함께 호텔에서 뒹굴 예정이라 얼른 일을 처리해야 했다. 어제 그를 혼자 둔 죄를 나름대로 속죄하는 거였다.

업무의 끝이 보일 때쯤, 제인이 우영의 두 번째 전시 평론과 주요 기사 몇 개를 뽑아 줬다. 역시나, 하나같이 입을 모아 우영의 천재성을 칭찬하고 있었다. 사현은 그것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솟구치는 입꼬리를 막을 수가 없었다.

우리 애송이. 날이 갈수록 그림이 늘어.

사현이 뿌듯한 미소를 띤 채 활자를 정독하고 있는데, 두툼한 무게가 어깨 위로 얹혔다. 까치집 머리에 눈을 반도 못 뜬 우영이었다. 그가 사현의 귓불 아래에 코를 묻고 웅얼거렸다.

“일어났는데⋯⋯.”

“응.”

“형이 없어서⋯⋯.”

“응.”

“놀랐잖아요⋯⋯.”

“그랬어?”

“네⋯⋯.”

사현이 나지막이 웃으며 우영을 마주 안았다. 우영은 대체로 밤에 활동하고, 낮에는 잔다. 정오쯤 간신히 일어나 사현과 점심을 먹고 나면 그제야 본격적인 하루가 시작됐다.

사현이 흘끔 핸드폰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정오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으응, 내 사랑스러운 곱슬머리. 오늘은 더 부풀었네.”

사현이 폭신폭신하게 부푼 우영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젠가 금발로 염색하며 머리를 짧게 자르기도 했던 우영은 그 후로 항상 사현이 좋아하는 스타일을 유지했다. 적당히 곱슬곱슬하면서도 덥수룩하지는 않은 게, 딱 사현의 취향이었다.

“보기 싫어요? 씻고 올까요?”

사현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은 우영이 난처한 낯으로 물었다.

“아니. 여기 보디 워시 냄새 별로야. 네 냄새가 좋아.”

사현이 우영을 따라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며 말했다.

우영에게선 말로 형용하기 힘든 푸근한 냄새가 난다. 폭신한 곰 인형에서 날 법한 냄새 같기도 하고, 큼지막한 대형견에게서 나는 고소한 냄새 같기도 하고, 아무튼 아주 좋은 냄새였다. 그와 연인이 되고 난 후로 항상 품에 안겨 잠들었더니 이제는 이 냄새 없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저도 형 냄새 좋아해요.”

우영이 지지 않겠다는 듯 킁킁거리며 사현의 냄새를 들이켰다. 향수 냄새는 증발했으나, 미약하게 남은 바닐라 향. 그리고 눅눅한 수선화 향. 거기에 덧대어진 사현의 체취. 너무 좋아서 마구 들이켜다가 질식으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

“⋯⋯.”

얼마나 그렇게 서로의 냄새만 마시고 있었을까. 몸을 맞붙이고 있자 자연히 분위기가 척척해졌다. 사현이 우영의 귓바퀴를 꾹꾹 누르듯 매만졌다. 우영은 사현의 샤워 가운을 해치고 매끈한 배를 쓰다듬었다.

당연한 수순으로 입술이 겹쳐졌다. 고개가 옆으로 돌아가고 혀가 질척하게 엉켰다. 사현이 다급하게 우영의 옷을 벗겨 냈다. 우영 역시 사현의 가운을 아래로 잡아당겼다. 사현의 하얀 나신이 정오의 쨍한 햇볕에 드러났을 때였다.

문득, 우영이 쑥 얼굴을 뒤로 뺐다. 순식간에 허전해진 품에 사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는데, 우영이 쿠당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테라스를 나가 버렸다.

“어디가?”

사현이 평소보다 한 음 높은 음성으로 물었다. 지금 우영의 모습은 뭐랄까. 그래, 화재경보기가 울려서 대피하는 사람 같았다. 그만큼 다급했다.

“렌즈 끼러요!”

우영이 테라스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지금?”

사현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저는 형이 잘 안 보인단 말이에요. 억울해.”

우영이 진심으로 가슴이 아프다는 듯 눈썹을 축 늘어트렸다. 그러고는 다시 쏙 사라져 버렸다. 가슴팍이 다 헤쳐진 채로 홀로 남은 사현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요즘 라섹은 회복 기간이 얼마나 되나. 전시 끝난 김에 안과나 다녀오라 할까. 아, 그럼 안경 쓴 모습을 더 이상 보지 못하겠구나. 아침마다 안경을 찾으며 눈을 찌푸리는 모습도 엄청 섹시한데. 그렇다고 이렇게 섹스 때마다 렌즈를 끼러 가게 둘 수도 없고.

사현이 흐음, 콧소리를 내며 고민했다. 그 고민은 우영이 쿵쿵 뒤꿈치를 구르며 달려올 때까지 계속됐다.

정수리에 떠 있던 해가 사선으로 넘어갈 때까지 우영과 사현은 몸을 섞었다. 그 후, 샤워가운을 넓게 펼쳐 담요처럼 덮고 멍하니 정사의 여운을 즐겼다.

“낮에 섹스 하는 건 되게 오랜만인 것 같다.”

우영의 가슴팍을 베개 삼아 누운 사현이 오랜만에 쾌청한 서울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영이 피식 웃으며 사현의 머리칼을 살살 쓸어 넘겼다.

“평일이고 주말이고 형이 낮에 집에 있던 적이 없으니까요.”

“⋯⋯그래. 내가 좀 바빴지.”

사현이 정신없이 바빴던 최근 한 달을 되뇌며 눈살을 찌푸렸다. 전시를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니고. 일을 몰아서 하는 타입도 아닌데, 왜 이렇게 항상 바쁜지 모르겠다.

그간의 일들을 떠올렸더니 두통이 올라왔다. 사현이 질끈 눈을 감았다가 뜨며 상념을 털어 냈다. 그러고는 새치름히 우영을 올려다봤다.

“다음에는 갤러리에서 해 볼까?”

“네? 뭘요?”

“섹스 말이야.”

“⋯⋯.”

“스릴 있겠다. 관장실이나, 탕비실이나⋯⋯, 아, 미팅 룸도 좋을 것 같아.”

사현이 자못 천진한 목소리로 종알거렸다. 덕분에 애꿎은 우영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우영이 자신의 머리칼을 벅벅 아무렇게나 헝클였다. 사현이 이렇게 뻔뻔하게 나올 때마다 아주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저는 싫어요.”

“왜? 이제 나랑 섹스 하는 게 싫어? 이만큼 비볐으면 충분하다 이거야?”

“아우⋯⋯ 왜 그래요, 진짜.”

능글맞은 사현의 말에 우영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어찌나 얄미운지. 그렇다고 뭘 어떻게 하지는 못하겠고, 아쉬운 대로 사현의 턱 언저리를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로 모자라 목덜미나 쇄골을 깨물기도 했다.

그러다 제풀에 지친 우영이 사현의 위로 철퍼덕 쓰러졌다. 자신의 아래에 깔린 마른 몸뚱이가 지나치게 사랑스러웠다. 이제는 무슨 짓을 저질러도 미워할 수가 없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저는 형이랑 그거 막, 그거 하고 있으면 아무 생각도 못 한단 말이에요. 세상이 형으로 좁아지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조심도 못 할 거고, 남한테 보이면⋯⋯ 너무⋯⋯ 부끄럽고⋯⋯. 형은 엄청 대단하고 높은 사람인데 그런 거⋯⋯, 어, 그런 거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우영이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는 듯, 목을 움츠리며 몸을 떨었다. 그런 우영이 못내 귀여운 사현이 우영의 구릿빛 피부에다 쪽쪽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애송이 주제에 제 걱정은 또 어찌나 하는지.

사현은 요즘, 몰래 커피를 마시려다가도 우영의 걱정 어린 얼굴이 떠오르면 한숨과 함께 잔을 내려놓게 됐다. 혹 그가 걱정할까, 밥도 챙겨 먹어야 했고 달고 살던 우울증이나 공황장애 약 대신 비타민이나 영양제를 먹었다.

다, 우영 때문이다. 덕분이라고 하는 게 맞을 수도 있고.

“그래, 그럼. 네가 여유롭게 섹스 할 수 있어지면, 그때 하자.”

“안 한다고요!”

우영이 빽 소리를 질렀다. 사현이 킥킥 어린아이처럼 눈을 일그러트리며 웃었다. 그렇게 한바탕 실없는 장난을 치다가, 잠깐 정적이 내려앉았다. 우영도 사현도 별다른 말 없이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서로의 숨결에 집중했다.

그게 신기하리만큼 안온하고, 평화로웠으며, 또 행복했다.

사현이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대화를 나누는 것도 아니고,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는 것도 아니고, 이렇다 할 행위를 하는 것도 아닌데. 그저 살을 마주 대고 있는 것만으로도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행복하다니. 제가 이런 행복에 공감하고 통감하는 날이 오다니. 곱씹을 때마다 신기했다.

그럴수록 우영이 사랑스러워졌고, 그러면 더 행복해졌다. 경이로운 순환의 반복이었다.

“자기야.”

흘러가는 구름을 구경하던 사현이 나지막이 우영을 불렀다. 우영이 대답 대신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이번 전시 끝나면, 여행 갈까?”

“여행이요?”

“어. 어차피 집에서도 둘이 있긴 한데, 그래도 바깥에 나와서 이러고 있으니까 좋네. 여행지는 더 좋겠지.”

“어디로요?”

“음⋯⋯. 파리나 뉴욕? 파리엔 루브르가 있고, 뉴욕엔 MoMA(뉴욕 현대 미술관)가 있으니까. 어디든 예술이 많은 곳으로 가자. 너한테도 좋은 귀감이 되지 않겠어?”

루브르에서, 또 MoMA나 메트로폴리탄에서 대가들의 작품을 넋 놓고 감상하는 우영이 보고 싶었다. 그 영향으로 그 역시 한층 진화할 터였다.

우영 자신은 모르는 듯하지만, 그의 그림은 변화가 빨랐다. 아, 변화가 아니라 발전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다.

아무튼, 꿉꿉한 반지하 방에서 그리던 그림과 요즘 그리는 그림은 전혀 다르다. 완성도나 퀄리티가 차이가 나는 게 아니라, 그림에 자신감이 붙었단 말이다. 그래서 훨씬 더 넓고 깊은 폭의 작품을 아주 힘찬 붓질로 단숨에 그려 냈다.

뭐, 제가 사다 준 수천만 원짜리 화구들도 그 발전에 한몫하는 것 같다만.

“⋯⋯.”

헌데 우영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사현이 우영의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쓸어 올렸다.

“왜 대답이 없어? 싫어? 아니면 복작복작한 관광지는 취향이 아니야? 뭐 리조트나 바다, 이쪽이 취향이니?”

“저는 다 좋아요.”

우영이 느릿하게 답을 내놓았다. 그마저도 돌멩이를 씹은 듯한 표정으로 간신히 한 대꾸였다. 사현이 살포시 눈살을 구겼다. 갑자기 아래로 푹 꺼진 우영의 감정 변화에 덩달아 휩쓸렸다.

“다 좋은 표정이 아닌데?”

“그냥⋯⋯ 얼떨떨해서요.”

“응?”

우영이 사현의 위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옆으로 몸을 뉜 후, 사현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뉴욕이고, 파리고. 저한테는 우주랑 다름없는 곳이거든요.”

“그게 무슨 말이야.”

사현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턱을 안으로 말았다. 우영이 음, 목으로 탁음을 냈다.

“달이나 태양도 존재한다는 건 알지만 가깝게 느껴지진 않잖아요. 엄청 막연하고, 멀고, 내가 갈 수 없는 미지의 세계. 그래서 신비롭게 느껴지잖아요.”

“⋯⋯.”

“저한테 파리의 루브르나 뉴욕의 MoMA는 그런 곳이거든요.”

“⋯⋯.”

“근데 형이 그렇게 쉽게, 오늘 밤에 김밥천국 갈래? 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쉽게 말하니까,”

“말하니까?”

“내가 참⋯⋯ 복이 많구나 싶어서요.”

사현의 미간이 더 깊게 구겨졌다. 결론이 희한하게 났다. 뉴욕은 꿈도 못 꾼 삶을 살아 왔는데 갑자기 복이 많다니. 사현이 콧잔등을 찡긋거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무슨 그런 노친네 같은 소리를 해?”

“진짜 그렇게 느껴져요. 저는 뭐 하나 타고난 게 없었거든요. 일반적으로, 웬만하면 다 가지고 있는 가족도 없었고, 숫기가 없어서 친구도 없었고, 그렇다고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고. 돈이야 당연히 없었고.”

“⋯⋯우영아.”

“저한테 있는 건 그림이 다였어요. 근데 그것도 제가 뛰어나게 잘 그리고, 주위에서 잘한다고 칭찬해 주고, 그렇게 만들어진 이상적인 특기나 취미가 아니라. 그냥⋯⋯, 그냥⋯⋯.”

우영이 잠깐 말을 더듬으며 단어를 골랐다. 그러다 끝내는 적합한 단어를 찾지 못했다. ‘그냥’. 그보다 더 좋은 표현이 없었다.

우영이 사현의 볼에 손을 얹었다. 작은 머리통이 한 손에 다 들어왔다.

“저한테는 시간이 엄청 무거웠거든요. 그 무거운 시간이,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찰나라도 가벼워져서. 그래서 계속 그리고 또 그린 건데. 그걸로 형도 만나고, 형 덕분에 돈도 벌고, 이렇게 멋진 호텔도 와 보고, 나중엔 뉴욕도 간다니.”

“⋯⋯.”

“저는 진짜 복이 많은 거예요.”

우영이 입술을 가로로 벌리며 헤벌쭉 웃었다. 허나 사현은 그를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그래, 제 비극적인 삶만큼이나 우영 역시 그와 비등한 수준의 삭막한 삶을 살아왔는데. 제 아픔이 더 쓰라리다고 차마 가늠하고 보듬질 못했다.

“⋯⋯.”

사현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영만 쳐다보고 있는데, 우영이 사현의 허리를 감싸 쥐고 훅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자신의 입술 자국으로 울긋불긋한 사현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물론 가장 큰 복은 형이 나를 사랑한다는 거고요.”

“⋯⋯.”

“나를 사랑해 줘서 고마워요, 형.”

“⋯⋯.”

“형이 이 세상에서 나를 사랑해 준 첫 번째 사람이에요.”

그 단조로운 감사 인사에, 사현은 숨이 턱 막히는 걸 느꼈다.

대체 너는 언제부터 외로웠기에, 얼마나 외로웠기에 그런 말을 하면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걸까. 얼마나 외로움에 무뎌졌으면 이리도 담담하게 열거할 수 있나.

사현은 우영의 뭉툭한 외로움이 사무치게 아파서, 자신이 대신 울 것만 같았다.

아니, 대신 울어 줄 수만 있다면, 그리 해 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어서. 그걸 바라지 않을 우영을 알아서. 대신 힘껏 그를 껴안아 주기만 했다.

“우영아.”

“네.”

“사랑해.”

“⋯⋯.”

“내일도, 모레도. 계속 사랑해.”

앞으로는 그가 외롭지 않았으면 했다. 내가 그 구렁텅이 같은 외로움을 채워 줄 수 있길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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