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붉은 화실
하나의 계절이 지나가고, 후끈한 여름이 왔다. 우영의 두 번째 전시가 가까워졌다는 뜻이었다. 덕분에 우영과 사현 모두가 바빴다. 우영은 사현의 조언으로 완성도가 조금 모자란 그림들을 리터치했고, 전시의 구색을 갖추기 위해 작업 속도에 박차를 가해야 했다.
사현 역시 우영의 전시를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콘셉트를 정해야 했고, 그밖에 인테리어, 팸플릿, 홍보 등등 신경 쓸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래도 두 사람의 연애는 식을 줄 몰랐다. 바쁘다고 연락을 소홀히 하거나, 함께 식사하는 시간을 줄이지 않았다. 물론 대부분은 우영이 자신의 시간을 할애해 갤러리로 찾아가고 저녁엔 사현과 노닥거리다 그가 잠든 밤에 그림을 그렸으나, 불만은 없었다.
“너 왜 그림 다 안 보내?”
사현이 웅얼웅얼 탁하게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방금 우영과 거나한 정사를 마치고, 나신으로 우영의 위에 엎어져 있었다. 긴 하루를 보내고, 우영과 내일이 없는 것처럼 몸을 섞고 나면 눈앞이 가물가물했다. 당장 죽을 것 같긴 한데, 그래도 덕분에 잠은 깊게 잤다.
“⋯⋯네?”
사현의 매끈한 등줄기를 쓰다듬던 우영이 버석하니 굳었다. 그것을 선연히 느낀 사현이 소리 없이 웃었다.
자주 생각하는 거지만, 우영은 기분이나 감정을 전혀 숨기질 못했다. 사회생활 하려면 이렇게 물렁물렁하게 행동하면 안 되는데, 싶다가도 어차피 제가 데리고 살 거 다 무슨 소용인가. 귀여우면 됐지, 싶기도 했다.
“그림. 다 안 보내고 있잖아. 갤러리로 배달 온 거 보니까 몇 점 비던데. 어디다 빼돌려?”
“어⋯⋯. 아닌, 데⋯⋯.”
우영이 슬그머니 사현의 등에서 손을 내렸다. 그러고는 데구루루 눈알을 굴렸다. 어떻게 봐도 켕기는 구석이 있는 얼굴이었다. 가당치도 않은 발뺌에 사현이 흐음, 목으로 신음했다.
우영을 의심하는 건 아니다. 그는 저 몰래 컬렉터를 따로 두고 그림을 빼돌릴 만큼의 인맥도 없었고, 욕심도 없었다. 다만 궁금한 것이다. 왜 그려 놓은 그림을 공개하지 않으려 할까.
실패작일 수도 있겠지만, 그건 우영이 아니라 사현이 판단할 몫이었다. 상업성이 있다면, 네온의 명성에 금 가지 않을 수준이라면 팔아도 됐다. 저명한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도 미완성작이 수백 점이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진⋯⋯짜 아니에요.”
“혼날래?”
“⋯⋯.”
음산한 사현의 목소리에 우영이 아랫입술을 말아 먹었다. 대체 사현이 그걸 어떻게 안걸까. 혹, 저 모르는 사이 작업실에 CCTV라도 달아 놨나. 아니면 어마어마한 감으로 대충 찔러 본 걸까. 이렇든, 저렇든 우영이 피해 갈 구멍은 없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우영이 사현의 귓불을 살살 주무르며 물었다. 나름대로 애교였다. 제 거짓을 유하게 넘어가 달라는 애교. 그러나 사현이 고개를 흔들어 그의 손을 털어 냈다.
“한 달 전에는 코발트그린이랑, 페르시안 블루를 옷에 덕지덕지 묻히고 다니더니. 오늘 갤러리로 배송 온 거에는 그 물감 쓴 그림이 하나도 없던데.”
“⋯⋯.”
“그 전 달에는 오로라 핑크가 묻어 있었는데. 그것도 없었고.”
“⋯⋯.”
우영이 와, 순수하게 감탄했다. 사현의 눈썰미가 좋은 거야 당연히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느끼는 건 또 처음이라 새롭고, 더 놀라웠다.
“형 진짜 대단하다. 그걸 어떻게 기억해요?”
“같잖은 아부로 넘어가려 하지 마.”
“⋯⋯.”
우영이 꾹 입을 다물었다. 그가 물끄러미 사현을 바라봤다. 사현은 이렇다 할 표정이 없었다. 화가 난 걸까. 어쨌든 거짓말을 한 것이니 분명 유쾌한 기분은 아닐 터였다. 볼 안쪽을 잘근거리던 우영이 결국 실토했다.
“팔고 싶지 않은 그림이라 그랬어요.”
“왜 팔기 싫은데?”
“그냥⋯⋯ 제가 가지고 싶은 그림이라서요. 멋대로 숨겨서 죄송해요.”
“⋯⋯.”
사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가지고 싶은 그림이라.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작가가 자신의 그림을 소장하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었고. 근데 우영은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간간이 진행했던 커미션도 완성되는 순간 휙휙 칼같이 배송 보냈단 말이다.
사현이 이유를 가늠하는 사이, 제 발 저린 우영이 다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형이 보내라면 보낼게요.”
“됐어. 작가가 자기 그림 소장하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고.”
“진짜요?”
“그래. 대신 그만큼 손 빠르게 놀려서 그림 개수는 채워야지.”
사현이 우영의 코를 앙 물었다가 놨다. 제법 옹골찬 공격이었다. 아릿한 고통에 우영이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형 이럴 때 보면 진짜 악덕 고용주 같아요.”
“몰랐어? 나 되게 나빠.”
사현이 한쪽 입꼬리를 틀어 올리며 비릿하게 웃었다. 우영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사현의 얼굴 위로 뾰족한 고양이 얼굴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과거였으면 겁을 집어먹었을 텐데, 사현이 편해지긴 편해진 모양이었다.
“열심히 그리고 있어요. 요즘 그림이 잘 그려지거든요.”
우영이 사현의 이마를 쓸어 올렸다. 하얗고 적당히 봉긋한 이마가 말도 못 하게 예뻤다. 결국 참지 못하고 쪽 입술을 붙였다가 뗐다. 사현의 눈꺼풀이 감겼다가 뜨였다. 그게 또 예뻐서 눈가에도 입술을 눌렀다.
간지러운 입맞춤에 사현은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그러다 보니 저절로 잠이 몰려왔다. 아아⋯⋯ 이렇게 자 버리면 또 금세 내일이 올 텐데. 내일도 바쁜데. 출근하기 싫다.
사념이 부정적으로 흘러갔다. 짜증 어린 표정을 한 사현이 우영의 가슴팍에 이마를 비볐다. 그런 사현을 훤히 꿰뚫어 본 우영이 그를 옆으로 뉘고, 이불을 끌어당겼다.
“피곤하죠?”
“응.”
“얼른 자요. 제가 내일 깨워 드릴게요.”
“⋯⋯응.”
사현이 꼬물꼬물 우영의 품을 파고들었다. 우영이 익숙하게 그를 껴안았다. 사현의 냄새가 폐부에 가득 찼다. 적당히 따뜻한 체온도 좋았고, 말랑하면서도 단단한 촉감도 좋았다. 우영이 사현의 어깨를 가만가만 토닥였다.
“잘 자요.”
“너도.”
“사랑해요.”
사현이 눈을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래.”
그의 대답은 반 박자 늦게 흘러나왔다. 우영이 고백하면, 늘 그랬다.
우영은 사현의 공백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사현은 고민하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이 고백에 화답할 수 있을 만큼 커다랗고 뚜렷한지. 그렇게 고민하다가 그래, 라고 단조로이 대답하는 거였다.
누군가는 일방적인 사랑이, 돌아오지 않는 사랑이 기분 나쁘지 않냐고, 힘들지 않냐고 물을 것이다. 허나 우영은 그 질문에 단호히 부정을 내놓을 수 있었다.
사현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보면 언젠가는 긍정해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우영은 사현이 깊게 잠들 때까지 그의 등을 토닥거렸다. 그리고 사현의 숨소리가 차분히 가라앉을 때쯤, ‘우리 고구마’를 저 대신 그의 옆자리에 두고, 옷가지를 챙긴 후 침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싶은 게 많았다. 사현과 함께 있으면 손가락이 꿈틀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얼른 붓을 쥐어야 했다. 물감을 짜서 캔버스에 발라야 했다. 상상하는 장면을 실체화시키고 싶어 죽을 것만 같았다.
뮤즈(Muse, 예술가들에게 영감과 재능을 불어넣는 예술의 신)가 뭔가 했더니, 사현 같은 사람을 두고 한 소리가 틀림없었다.
* * *
우영은 동이 틀 때쯤 다시 2층에 올라왔다. 그러고는 ‘우리 고구마’를 치우고, 내내 사현의 곁에 있던 것처럼 몸을 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맡의 알람이 세차게 울어 댈 준비를 했다. 우영이 손을 뻗어 미리 알람을 해지했다. 요란하고 날카로운 소리로 사현의 아침을 깨부수고 싶지 않았다.
여섯 시 반이 된 순간, 우영이 사현의 머리칼을 살살 쓸어 올렸다.
“형. 일어나요.”
“⋯⋯응.”
사현은 아침잠이 많지 않다. 철두철미한 그에게 늦잠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눈살을 찌푸리던 사현이 곧 눈을 떴다. 우영이 흐릿한 그의 시선을 마주하며 빙긋 웃었다.
우영을 바라보던 사현이 코를 찡긋거렸다. 우영에게서 익숙한 냄새가 흘러왔기 때문이다.
“너 또 밤새 그림 그렸지.”
“물감 냄새 많이 나요? 씻고 올까요?”
“아니. 괜찮아.”
사현이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근데 그림 너무 많이 그리는 거 아냐?”
“아, 몇 시간 전에 고용주님이 빨리 그려야 물량 맞출 수 있다고 엄포를 놓으셨거든요.”
“⋯⋯엄포까지는 아니었거든.”
게슴츠레 눈을 뜬 사현이 잘못된 정보를 정정했다. 우영이 큭큭거리며 사현을 일으켰다. 더 지체하다간 출근하지 말라며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을지도 몰랐다.
“얼른 씻고 와요. 제가 머리 말려 줄게요.”
“알았어.”
사현이 길게 기지개를 켰다. 그러고는 비척비척 욕실로 향했다. 우영이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사현은 자신이 지금 나신이라는 걸 자각하고 있을까. 움직일 때마다 탱글탱글 움직이는 엉덩이에 꿀꺽 마른침이 넘어갔다. 제 입술 자국이 가득한 허벅지나 종아리, 그리고 복사뼈는 또 얼마나 예쁜지.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우영은 사현이 욕실 문을 닫는 그 순간, 고개까지 한껏 빼고 주책맞게 사현의 나신을 시선으로 탐했다. 그리고 사현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그새 뻐근해진 아랫도리를 느끼며 이불에다 얼굴을 처박았다.
어젯밤에도 잔뜩 했는데. 사현이 더는 힘들어서 못 한다며 밀어낼 때까지 몸을 흔들었단 말이다. 근데 왜 또. 몇 시간이나 지났다고.
우영이 꾹 주먹을 말아 쥐었다. 얼른 사현을 보내고 그림을 그려야겠다. 끝없이 샘솟는 이 욕구를 그림으로라도 해갈해야 했다.
* * *
미팅 룸을 나오는 사현의 발걸음이 몹시 가벼웠다. 곧 점심시간이기 때문이다. 오늘 점심은 간만에 우영과 김밥천국에 가기로 했다. 요즘 일도 일이고, 붙어먹느라 정신없어서 외식 한번 못했는데. 근래 채우지 못한 라면 할당량을 모두 채울 생각이었다.
다음 스케줄까지 시간이 조금 비니 식사 후, 한적한 카페에 가서 커피와 케이크를 왕창 시켜 먹어도 좋을 것 같았다. 카페에 있는 케이크를 종류별로 모두 사서 저는 한입씩 맛만 봐도, 나머지는 우영이 먹어 주겠지. 달콤한 것들을 입 안 가득 채우고 행복해할 우영의 모습을 상상했더니 혀가 다 간지러웠다.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던 사현이 막 관장실에 다다랐을 때였다. 제인이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사현이 갸웃 고개를 뒤틀었다.
제인은 예의가 바르고 상사를 존중할 줄 알았지만, 왔다 갔다 할 때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할 만큼 거추장스러운 짓은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 말인즉슨, 손님이 왔다는 뜻이다. 그녀가 굳이 일어나 예를 표할 정도로 중요한 손님이.
사현이 들고 있던 태블릿을 팔꿈치와 허리 사이에 끼고 넥타이를 정리했다. 손목을 뒤집어 시계가 흉터를 제대로 가리고 있는지도 확인했다.
그리고 막 제인의 앞에 섰을 때, 사현은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다. 그녀의 안색이 묘하게 좋지 않았다. 꼭 상한 음식을 씹은 듯 떫은 얼굴이랄까.
“왜 그래?”
사현이 물었다.
“그게⋯⋯.”
제인의 눈이 살짝 어그러졌다.
“뭔데 그래?”
사현이 덩달아 눈살을 찌푸렸다.
“사모님 와 계세요.”
그 말에 사현이 헛숨을 잔뜩 삼켰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방문객에 머리털이 다 쭈뼛 섰다. 사현이 제자리에서 뒤꿈치를 들썩이며 관장실 문을 쳐다봤다. 하루에도 몇 번씩 왔다 갔다 하는 공간인데. 제 침실보다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인데. 원화가 있다 생각하니 지옥으로 향하는 문처럼 느껴졌다. 문틈 사이로 시뻘건 화염이 새어 나오는 것도 같았다.
사현이 제인에게 쥐고 있던 태블릿을 내밀었다. 제인이 비장한 얼굴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전장에 나가는 장군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괜히 어깨를 한번 좁혔다가 편 사현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자욱한 향수 냄새가 해일처럼 밀려왔다. 사지를 마구 할퀴는 것 같은 독한 향수 냄새였다. 저번 ‘새로운 밤’ 전시 때는 이렇게나 독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부러 불쾌할 정도로 뿌린 걸까. 가감 없는 적의에 사현 역시 구겨지는 만면을 숨기지 않았다.
원화는 꼿꼿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곱게 빗어 올린 머리카락과 반지르르한 핑크빛 원피스, 두툼한 진주 귀걸이가 참으로 그녀다웠다.
사현이 크게 사무실을 한번 훑었다. 혹 그녀의 아들인 민재가 같이 왔나 싶어서. 하지만 웬일로 그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항상 거머리처럼 옆에 붙여 놓더니. 오늘은 떼어 놓고 온 모양이었다. 민재의 가드가 필요 없다고 생각한 걸까, 아니면 고상한 어머니라는 이미지를 버리고 싶지 않았던 걸까.
“어쩐 일로 오셨어요?”
사현은 부러 소파가 아닌 책상 의자에 앉았다. 당신과 상종조차 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표현이었다.
“내가 왜 왔는지는 네가 제일 잘 알지 않니?”
원화 역시 사현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유리 너머로 보이는 갤러리 정원만 뚫어지라 응시했다. 기이한 대화였다.
“글쎄요. 이유가 뭐가 됐든, 연락도 없이 오신 건 매우 무례하네요.”
“진즉 왔어야 했는데, 회장님이 못 나가게 하셔서 어쩔 수 없었다.”
고저 없는 음성들에는 온갖 비아냥과 날카로움이 숨어있었다. 사현이 픽, 실소했다. 조선 시대도 아니고. 남편이 못 나가게 했다고 고분고분 처박혀 있는 꼴이라니. 그 지독한 성격이면 어떻게든 저를 찾아와 호되게 짓밟아 주고 싶었을 텐데 용케 여태껏 버티고 있었구나, 싶었다.
사현이 어떻게 대꾸해야 원화의 속을 더 박박 긁어 놓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 원화가 먼저 입을 뗐다.
“너는 차 한잔 안 내오니?”
“마련해 놓은 차가 워낙 싸구려라서요. 입에 안 맞으실 거예요.”
사현이 단호하게 말했다. 마치 그녀가 할 거절을 대신해 주는 듯한 뉘앙스였다. 하지만 그래 봐야, ‘이곳에는 네가 마실 차가 없다’는 뜻이었다. 아니, 그보단 ‘당신에게는 그 싸구려 차라도 주고 싶지 않다’는 게 맞겠다.
그것을 알아채지 못할 리 없는 원화가 립스틱이 곱게 발린 입술을 비죽 뒤틀었다. 사현은 똑똑하고 영악하다. 멍청했던 선애의 배에서 나온 자식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겉과 달리 속은 명현을 닮았기 때문이겠지.
그래서 더 짜증이 났고, 더 죽이고 싶었다. 마음 같아선 어미를 빼닮은 저 하얀 목을 콱 꺾어다가 곱게 잘라서 이 등신 같은 갤러리 한가운데에 걸어 두고 모두가 보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원화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기품 있는 지성인이었으니까. 잠시 숨을 고른 그녀가 나지막한 음성으로 물었다. 시선은 여전히 정면을 향해 있었다.
“네가 나 신고했다면서?”
“제가요? 뭘요?”
사현이 이미 결재가 끝난 서류를 훑으며 무심히 대꾸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는 듯, 과장스레 음성을 높였다.
“아⋯⋯, 아아. 강원도 고성이었나, 거기요? 뉴스에서 봤어요. 마음고생 좀 하셨겠던데.”
능청맞다 못해 얄미운 말에 참다못한 원화가 잔뜩 벼려진 눈으로 사현을 노려봤다. 손에 총이나 칼이 들려 있었다면 당장 사현을 난도질할 기세였다.
“너 이렇게 날 들쑤셔서 얻는 게 뭐니? 내가 마음먹으면 이깟 갤러리 하나 없애는 거 일도 아니야. 여태 어미 없는 고아가 불쌍해서 봐주고 있,”
“사모님이 아니라 회장님이 마음을 먹으셔야겠죠.”
사현이 무슨 그런 멍청한 소리를 하냐는 듯 조소했다. 혼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어디서 그런 같잖은 협박을 해. 입만 놀리는 게 부끄럽지도 않은 모양이지.
그는 표정만으로도 아주 많은 비아냥을 쏟아 냈다. 원화가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귀에 달려있던 진주 귀걸이가 파르르 경련했다.
사현은 무감히 생각했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Jan Vermeer)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늙어서 악에 치받으면 저런 얼굴이 아닐까, 하고.
사현이 만년필을 든 채 비스듬히 턱을 괬다.
“그러게 왜 어울리지도 않게 그림을 사고파세요. 하시던 대로 금이나 보석을 모으시지.”
“⋯⋯.”
“비자금 창고에서 모작으로 만들어진 그림이 세 점이나 나왔다면서요? 부끄러우셔서 어째요?”
사현이 킥킥, 소리죽여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원화가 주름 하나 없이 뻗어 있던 치마를 세게 움켜쥐었다. 원화는 사현의 상대가 안 됐다. 순진하고 타인과의 마찰에는 서툴면서도 누군가의 핍박과 구박에는 익숙했던 선애야 원화의 기에 눌려 고개를 수그렸지만, 사현은 아니었다.
사현은 평생 가시밭길을 걸으며 살아왔다. 어떻게 해야 살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엄마를 구할 수 있을지, 또 때로는 어떻게 해야 엄마와 같이 죽을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그리고 엄마가 죽고 나서는 매일 복수만 꿈꿔 왔다. 더군다나 평론가들과 씨름하는 직업을 가졌는데, 이까짓 말장난쯤이야 일주일 내내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원화는 아니었다. 그녀의 인생에 적, 아니 적이라는 단어는 너무 과장됐다. 뭐가 좋을까. 아, 그래. 눈엣가시 정도가 적당하겠다. 아무튼, 손가락에 박힌 가시 같은 존재라곤 선애가 다였던지라 이러한 다툼에는 썩 노련하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다. 여기까지 오면서 원화도 칼자루 하나 정도는 쥐고 왔다.
원화가 소파 깊숙이 등을 묻었다. 그리고 턱을 살짝 들어 올린 후, 사현을 깔보듯 내려다보았다.
“얼마 전에 검사 하나 왔다갔다면서? 아니, 이렇게 말하면 안 되지. 얼마 전에 검찰에 송치됐다면서? 뭐더라, 특정 경제⋯⋯범죄 가중? 아니 가중 범죄 처벌법이랬나?”
“⋯⋯.”
사현의 입이 처음으로 꾹 다물렸다. 원화가 모를 거라 생각하진 않았는데, 이렇게 직설적으로 들으니 유쾌하지 않았다.
“그거 다른 여편네들이 알면 아주 재밌겠다. 그렇지? 돈 많고 시간 많은 인간들, 천박하게 입 놀리는 건 또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잖니.”
원화는 단단히 굳은 사현의 얼굴이 못내 즐거웠다. 드디어 제대로 한 방 먹인 것 같아서 가슴이 다 떨렸다. 어쩌면 사현이 제 발아래에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허나 사현은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잠깐 침묵하던 그가 검지로 만년필 옆구리를 슥슥 문질렀다.
“사모님 고성에 육백억 있으셨다면서요?”
난데없는 질문에 원화의 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잠시 잊고 있던 사건이 울컥 정수리까지 솟구쳤다. 명현 몰래 그 큰돈을 모으고 감추느라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던가. 근데 단숨에 사라졌다. 그런 허탈함은 난생처음 겪어 봤다. 하물며 명현이 임신한 선애를 집에 데리고 왔을 때도 그만큼 충격이 크진 않았다.
“그래. 네 덕에 반이 압수됐어. 내가 그거 모으느라 얼마나,”
“나름 화 그룹 사모님인데, 스케일이 너무 적으신 거 아니에요?”
“뭐라고?”
원화가 귓불을 매만졌다. 방금 들은 말을 믿을 수가 없어서였다. 뭐가⋯⋯ 적어? 원화가 턱을 뻐끔 벌리고 사현을 쳐다봤다. 그 시선을 곧장 마주한 사현이 설핏 미소 지었다. 잠깐 눈을 좁혔던 그가 떠오르는 정보들을 줄줄이 나열했다.
“지호 물산 회장님 비자금 창고에는 앤디 워홀의 「무하마드 알리」랑 김우환의 「우주」 그리고 치마부에의 「예수」가 있어요. 한국 항공 사장님 비자금 창고에는 박세근의 「공기놀이하는 아이들」과 제프 쿤스의 「토끼」가 있고요. TK 그룹 전무님 창고에는 데이비드 호크니의 「자화상」과 백자대호(白磁大壺)도 있는데. 아주 잘빠졌어요. 아, 이렇게 말하면 뭔지 모르시나?”
사진이라도 띄워 드려야 하는데. 사현이 혼잣말인 양 중얼거렸다. 원화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하얗게 분칠한 얼굴 위로 그 붉음이 뚜렷이 드러날 정도였다. 그 모습에 사현이 꾹 웃음을 삼켰다.
돈 많고 권력 많은 인간의 약점은 참으로 뻔하다. 그들의 무식함을 들춰내는 것. 너 이거 잘 모르지? 라는 뉘앙스로 살살 긁어 주면 대번에 버럭 화를 내곤 했다. 원화도 그저 그런 상류층 중 한 명이었고.
사현이 의자에서 일어나며 흘끔 시계를 살폈다. 점심시간이 십 분이나 지나 있었다. 곧 우영이 올 텐데. 그녀와 맞닥뜨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만 이 무의미한 대화를 끝내야 했다.
“제 말의 요지는, 사모님이 모으신 일이억짜리 그림이 참⋯⋯ 볼품없고 비루했으니 국가에 반환됐다고 슬퍼하실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사현은 한 문장을 말할 때마다 원화를 향해 다가갔다. 뚜벅뚜벅. 그의 정갈한 구두 발소리가 적막한 공간을 울렸다.
“저는 정보로 먹고 살아요. 가끔은 그 정보를 제가 손수 만들어서 회장님, 사모님들에게 드리기도 하죠.”
“⋯⋯.”
“소문내 보세요.”
“⋯⋯.”
“그게 소문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원화는 도끼로 이마를 내려 찍힌 사람처럼 멍하니 사현을 쳐다봤다. 그 모습에서 사현은 못된 희열을 느꼈다. 저 고운 얼굴에 균열이 갈 때마다 좋아서 미치겠다. 락스에 얼굴을 처박던 우리 엄마만큼만, 딱 그만큼만 부서지고 깨졌으면 더 바랄 게 없겠는데.
사현이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수표 몇 장을 꺼내 원화의 치마 위에 곱게 올려놨다.
“육백억이나 잃으셨는데. 제가 차비 정도는 드려야겠죠?”
은근한 조롱은 덤이었다.
원화가 뿌득뿌득 이를 갈았다. 진주 귀걸이가 곧 떨어질 것처럼 세차게 흔들렸다. 사현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스몄다.
“앞으로는 같잖은 말씨름할 거면 오지 마세요. 제가 많이 바쁘거든요.”
“너⋯⋯, 너⋯⋯.”
“차라리 총이나 칼을 들고 오시는 게 빠를 거예요.”
그럼 조심히 가세요. 사현이 대충 고개를 까닥이며 등을 돌렸다. 원화의 저주 어린 시선이 뒤통수를 꿰뚫는 듯했다. 하지만 사현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얼른 이 공간에서, 원화의 시선에서, 그녀의 향수 냄새에서, 그녀의 증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마침내 사현이 관장실 밖으로 나왔다. 문을 닫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다. 원화와 한 공간에서 같은 시야를 공유하고, 공기를 나누고, 말을 섞는 것만으로도 체력 소모가 대단했다.
사현이 그대로 주저앉으려 하는 순간이었다.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팔꿈치를 감싸 쥐었다.
“형.”
우영이었다.
“너⋯⋯ 언제, 언제 왔어?”
놀란 사현이 말을 더듬었다. 우영이 그런 사현을 잡고 모퉁이 너머에 있는 탕비실로 끌고 왔다. 아무래도 사현은 이 갤러리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었으니까. 그의 약한 모습이 소문이라도 나면 분명 좋지 않을 테였다.
“괜찮아요?”
우영이 사현의 몸 여기저기를 살피며 물었다. 만면에 걱정과 근심이 가득했다. 사현이 그런 우영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우영의 걱정은 하루에도 몇 번씩 있는 일인데, 왜 경험할 때마다 이렇게나 새로운지 모르겠다.
사현이 우영의 볼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럼. 괜찮지. 내가 안 괜찮을 게 뭐가 있어.”
“⋯⋯.”
사현은 늘 그렇듯, 전혀 괜찮지 않은 얼굴로 괜찮노라 말했다. 우영은 그것이 몹시 못마땅했으나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 나한테 기대요. 내가 안아 줄게요. 그런 입에 발린 말로 사현에게 위로와 안식을 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넌 언제 왔어?”
사현이 물었다. 우영의 눈알이 좌우로 바쁘게 움직였다. 한참 전부터 관장실 앞에 서 있었는데, 사실대로 고하면 사현이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음⋯⋯ 한⋯⋯ 십오 분 전에?”
우영이 대충 어정쩡한 시간을 읊었다. 허나 이미 늦은 시점이었다. 머뭇거리는 그 틈에, 사현은 이미 우영의 생각을 훤히 꿰뚫어 봤다.
“들었니?”
“⋯⋯네.”
“나 되게 못됐지?”
“못됐으면 어때요. 저는 형이 착하든, 못됐든. 그런 거 상관없어요.”
우영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사현이 헛숨을 삼켰다. 우영의 맹목적인 사랑에 치일 때마다 기도가 확 조여들었다. 질식하는 기분. 진흙 속에 묻히는 기분. 동시에 넓고 광활한 사막 한가운데에 떨어진 기분. 설명하기 힘든 감정들이 우수수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졌다.
간신히 막힌 숨구멍을 뚫은 사현이 우영의 옷깃을 살짝 쓰다듬었다. 오늘 우영은 시원한 린넨 셔츠에 검은색 와이드 팬츠를 입었다. 왼쪽 셔츠 포켓에 살짝 꽂혀 있는 선글라스는 제 것이다. 드레스 룸을 뒤진 모양이었다.
“예쁘게 하고 왔네.”
우영은 이제 제법 자신을 꾸밀 줄 알았다. 렌즈 끼는 법이 서툴러서 토끼처럼 눈이 새빨갰던 적도 있었는데. 요즘은 거울도 보지 않고 낄 줄 안다. 머리도 만질 줄 알고, 아이템을 추가하거나, 색에 포인트를 주는 것도 몇 번 알려 주면 곧잘 했다.
지금 우영은 잘나가는 디자인 회사에서 일하는 직장인 같았다. 그것도 인기 많고, 성격 좋고, 일도 잘할 것 같은 그런 이상향의 직장인.
“네. 오랜만에 김밥천국 가는 거니까 신경 좀 썼죠.”
사현의 칭찬에 우영이 치명적인 배우처럼 이마를 쓸어 올리며 씨익 멋들어지게 미소 지었다. 사현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우영은 참 신기한 능력을 갖췄다. 알록달록 그림을 그려 내는 것도 충분히 신기하거늘. 말 몇 마디로 지옥에 처박혀 있던 제 기분을 평지로 끄집어 올렸다.
“배고프죠? 얼른 가요.”
우영이 조심스레 사현의 손목을 잡아 쥐었다.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사현이 손목을 빼내고, 대신 손가락을 얽었다. 두 개의 손바닥이 착 그립감 좋게 붙었다.
“응. 얼른 가자. 오늘따라 갤러리에 있기가 싫네.”
두통이 올라왔다. 원화의 향수 냄새가 머릿속 깊은 곳까지 침투한 모양이었다.
사현과 우영은 점심을 길게 즐겼다. 김밥천국에서 코스 요리처럼 식사하고, 사현이 종종 찾는 베이커리에 들러 빵과 디저트를 한 아름 샀다. 사실 사현은 서울 근교의 조용한 카페에서 뙤약볕을 만끽하며 늘어져 있고 싶었지만 우영이 주전부리를 꼭 큐레이터 팀에게 전해 줘야 한다며 떼를 써서 어쩔 수가 없었다.
갤러리 지하 주차장에 주차를 완료한 사현이 짜증스레 시동을 껐다.
“나 우리 직원들 월급 엄청 많이 줘. 웬만한 대기업 연봉 훌쩍 넘을 정도로 준다고.”
“알아요. 제인 실장님이 정년퇴직을 <갤러리 비>에서 하고 싶다 하셨을 정도면 말 다 했죠, 뭐.”
우영이 뒷자리에 그득한 베이커리 종이 가방을 챙기며 대꾸했다. 사현이 마뜩잖은 눈으로 그것을 쳐다봤다.
“그러니까. 우리 큐레이터 팀, 이런 거 먹고 싶을 때 얼마든지 사 먹을 수 있을 만큼 돈 번단 말이야. 근데 네가 왜 내 갤러리 직원들 간식을 챙기는데?”
“형한테나 형 갤러리 직원이죠. 저한테는 늘 베풀어 주시고, 잘해 주시는 직장 동료? 아니다, 음⋯⋯ 사업상 파트너? 거래처? 뭐 그런 거니까.”
두 손 가득 주렁주렁 종이 가방을 매단 우영이 차에서 내렸다. 사현이 부루퉁한 얼굴로 그를 따라 내렸다.
갤러리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탄 우영은 수북한 빵과 마카롱, 조각 케이크들을 내려다보며 ‘이건 고객 지원 팀 누나들, 이건 큐레이터 팀 누나들, 이건 작품 관리 팀 누나들⋯⋯’ 하고 중얼거렸다. 바로 옆에 사현이 서 있다는 걸 홀라당 까먹어 버린 듯했다.
사현의 눈썹 위로 오목한 홈이 파였다. 누나, 누나, 그것도 누나‘들’. 분명 그렇게 부르지 말라 경고했던 것 같은데. 사현이 우영을 꾸짖으려 입을 뗐을 때였다.
땡. 엘리베이터의 경쾌한 알람이 사현의 말을 댕강 참수시켰다. 우영과 함께 점심을 먹으며 오르막을 그리던 기분이 단숨에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그런 사현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영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다닥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사현은 갤러리 여기저기를 쑤시며 예수처럼 빵을 나누어 주는 우영을 집요하게 따라다녔다. 우영의 발길이 다다르는 곳마다 작은 소란이 피어났다.
어머, 작가님. 세상에, 작가님. 누군가는 손뼉을 쳤고, 누군가는 함박웃음을 띄웠다. 고작 밀가루 덩어리를 주고받는 것치고는 대단한 환영과 감사였다.
우영은 그 환영과 감사에 웃음을 아끼지 않았다. 입매가 시원하게 벌어지고, 눈이 사르르 휘는. 사현이 좋아해 마지않는 그 웃음을 마구 흩뿌리고 다녔다.
마침내 우영의 두 손이 텅 비었다. 관장실로 돌아가는 길. 우영이 눈치 없이 사현을 보여 미소 지었다. 나 잘했죠? 기특하죠? 칭찬해 줄 거죠? 그런 기대를 한껏 담은 낯이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사현이 비스듬히 우영을 올려다봤다.
“자기야.”
“네?”
“내가 누나라는 호칭 쓰지 말랬지.”
“어⋯⋯. 그랬죠, 아니 그랬던⋯⋯가? 기억이 잘⋯⋯.”
우영이 더듬더듬 답을 회피했다. 허공에 던진 시선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중구난방으로 흔들렸다. 사현이 하, 짧게 웃음을 끊어 냈다. 이게 지금 누구 앞에서⋯⋯. 사현이 우영의 잘생긴 턱을 톡톡 두드렸다.
“<갤러리 비>는 독재 체제야. 내 마음에 안 드는 건,”
“아웃이죠.”
“그래. 너 자꾸 그렇게 내 말 안 들으면 너 대신 다른 신진 작가 찾는 수가 있어.”
사현이 자못 무서운 얼굴로 경고했다. 웬만하면 이렇게 치사한 말은 하지 않으려 했는데. 하지만 이번엔 적당한 충격이 필요했다. 그래야 다시는 제 말을 거역하지 못할,
“푸흡.”
예상치 못한 우영의 웃음소리에 사현의 사고가 뚝 끊겼다. 사현이 눈을 부릅떴다.
“웃니? 웃은 거야? 지금 이 상황이 웃겨?”
“⋯⋯아니요.”
우영이 얼른 웃음을 지워 냈다. 그러고는 지극히 반성하고 있다는 듯, 고개를 수그렸다. 그러나 광대에 어렴풋이 남아 있는 웃음의 여운은 지우지 못했다.
“왜 웃어? 내 말이 웃겨?”
관장실 앞에 선 사현이 눈을 한껏 부라렸다. 제대로 화가 난 듯했다. 우영이 벅벅 마른세수를 했다. 그런데도 치솟는 웃음이 갈무리가 안 됐다.
“아니⋯⋯. 그냥⋯⋯ 형이⋯⋯ 하는 게⋯⋯ 좋아서요.”
우영이 웅얼거렸다.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무어라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문장이 뭉개졌다. 간신히 단어 하나를 포착한 사현이 까딱 고개를 기울였다.
“⋯⋯좋다고? 뭐가 좋아?”
내가 너 대신 다른 작가 찾는다는데. 그게 좋아? 혼란에 빠진 사현의 낯이 점점 일그러지고 있는데, 우영이 쑥 얼굴을 들이밀어 왔다.
“형 지금 질투하는 거잖아요.”
우영은 사현이 왜 ‘누나’라는 호칭을 그렇게나 싫어하는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부러 그런 것이다. 베이커리에서 빵을 살 때만 해도 순수한 호의였으나, 갤러리로 돌아오는 내내 불퉁한 사현이 너무 귀여워서 장난을 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엘리베이터에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누나라는 소리에 구두 뒤꿈치로 바닥을 내리찍던 사현. 사람들과 만날 때마다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제 볼을 할퀴던 사현. 말을 듣지 않으면 내쫓아 버리겠다면서 뾰족하게 말을 쏘는 사현.
정말이지⋯⋯ 지나칠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질투?”
“네.”
“누가? 내가?”
“네.”
“내가 질투를 했다고?”
사현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턱을 안으로 당겼다. 질투라니. 일평생 몇 번 입에 담아 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질투. 사랑하는 사이에서 상대방이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걸 지나치게 시기하는 것. 사전적 의미를 되뇌던 사현이 픽, 코웃음을 쳤다.
“우영아. 네가 아직 어려서 질투라는 게 뭔지 모르는 모양인데, 내 나이쯤 되면 그런 감정에 무뎌져. 더군다나 나는 원래부터 감정에 예민한 사람이 아니거든?”
인생 다 산 늙은이처럼 구는 사현에 우영이 흐음, 목울대를 꿀렁였다. 그가 사현을 향해 한 발 가까이 다가갔다.
“형 제가 누나들한테 누나라고 부르는 거 싫으시잖아요.”
“어, 싫어.”
“누나들한테 주전부리 챙겨 주는 것도 싫으시고요.”
“어, 싫어.”
“왜요?”
“⋯⋯그냥 싫어. 너무 싫어.”
“그게 질투예요.”
“⋯⋯.”
너무나 단호한 우영의 결론에 사현이 꾹 입을 다물었다. 그게 질투라고? 어째서 그게 질투지? 왜? 그냥 싫은 걸 싫다고 했을 뿐이잖아. 내가 아는 질투는 아주 유치하고, 간사하고, 쓸데없는 감정인데. 내가 지금 그걸 하고 있다고?
사현이 무어라 반론을 제시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을 때였다. 또각또각 규칙적인 구두 소리가 들렸다. 제인이 오는 소리였다. 사현이 허겁지겁 관장실 문을 열고 우영을 쑤셔 넣었다. 이런 모습을 타인에게 보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사현에게 밀린 우영이 뒷걸음질 쳐 관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당황한 사현이 못내 귀여웠다. 라면 맛을 처음 알았을 때처럼, 바싹 구운 고등어 맛을 처음 알았을 때처럼, 질투라는 감정을 처음 안 사현이 어떠한 반응을 보일지 몹시 기대가 됐다.
꼼꼼히 문을 닫은 사현이 잠시 숨을 죽이고 바깥의 동태를 살폈다. 그는 제인의 기척이 사그라들었을 때쯤, 우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사현이 허업, 숨을 멈췄다. 사무실 한쪽 귀퉁이에 세워 뒀던 우영의 그림이 갈기갈기 찢겨 있었기 때문이다.
사현이 나라 잃은 표정으로 그림을 향해 다가갔다.
그림은 처참했다. 반은 캔버스 나무틀에 간당간당히 붙어 있었고, 또 반은 넝마가 되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흡사 짐승이 물어뜯은 모양새였다.
“이게 왜⋯⋯.”
우영 역시 넋을 잃고 그림을, 아니 그림이었던 쓰레기를 바라봤다.
며칠 전에 갤러리로 보냈던 그림이다. 사이즈도 그렇고, 시간을 쏟은 것도 그렇고. 전시의 메인 작품은 아니었지만, 준 메인 정도로 걸 거라 자못 정성을 들인 그림이었다. 근데 이리되다니. 분노보다는 허탈함이 먼저 들었다.
“⋯⋯.”
사현이 울멍거리는 눈망울로 찢어진 캔버스 조각을 들었다. 우영 특유의 붓 터치로 묘사한 부두가 그려진 부분이었다.
「나무 부두」라는 제목의 이 그림은 일몰 순간의 호수와 나무 부두를 그린 그림이다. 분홍빛, 주홍빛과 연한 다홍빛, 그리고 조금 탁한 푸른빛이 모여 비가 온 후, 특유의 축축한 하늘과 호수를 묘사했다.
나무 부두 위에는 의자 하나가 가만히 서 있다. 묘하게 한쪽으로 기운 의자는 누군가가 서툰 솜씨로 투박하게 만든 모습이다. 그게 눅눅한 호수 풍경과 기가 막히게 어울렸다.
의자에는 카키색의 담요가 느슨하게 걸려 있었는데, 굵은 붓 터치로 인해 두껍고 보드라워 보였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의자에 앉아 일몰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의자는 약하게 삐걱거리고, 머리칼 사이사이를 스치는 바람은 느긋하고, 뺨을 어루만지는 노을은 적당히 따뜻했다. 어두워질수록 기온이 내려가겠지만, 담요를 두르면 몇 시간은 더 풍경을 감상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그림이었다.
사현이 이번 전시에서 가장 좋아하는 그림이었다.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푸근하고 여유로운 감정을 전달하는 그림은 너무나 오랜만이라 설레기까지 했다.
오늘 우영과 만나기 전, 뜯어보고 또 뜯어보기 위해 부러 수장고에서 꺼내온 것이다. 열심히 감상해서 붓 터치부터 묘사, 분위기와 아우름까지 하나하나 집어 주고 싶었다.
네 그림을 보며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 어떻게 감탄했으며 이 그림이 얼마나 서정적이었는지 알려 주면 우영이 그 넓은 어깨를 뒤틀며 부끄러워하겠지.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여울까. 그런 상상을 했다.
근데, 이렇게 된 거다. 감탄은커녕 위로를 하게 생겼다. 아니, 사과를 해야겠지.
사현이 두 손으로 얼굴을 세게 문질렀다. 이건 전적으로 자신의 잘못이다. 작가가 그림을 믿고 맡겨줬는데. 이따위로 관리하다니. 부끄러움에 얼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사현이 발치에 흩뿌려진 수표를 바라봤다. 몇 시간 전, 원화에게 줬던 그 수표였다. 옆에는 자신의 만년필도 떨어져 있었다. 펜촉이 살짝 우그러진 게, 그림을 난도질한 흉기가 무엇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도 설마, 설마 아니겠지. 설마 이토록 무식하고 파렴치한 짓을 하지는 않았겠지.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사람인데, 아무리 밑바닥이라도 이런 짓을 저지르진 않았겠지. 이토록 아름다운 무형물에 칼질을 할 만큼 대가리가 비진 않았겠지.
“형.”
심상찮은 분위기에 우영이 나지막이 사현을 불렀다. 그의 주위로 와르르 몰려드는 어둠이 선연히 느껴졌다. 팔뚝이 시릴 정도로 시커먼 어둠이었다.
우영이 조심히 사현의 손을 거머쥐었다. 그러지 않으면 사현이 검은 구렁텅이로 나동그라지듯 밀려들어갈지도 몰랐다. 제 그림이 망가진 것도 문제지만, 사현이 망가지는 건 더 큰 문제였다.
하지만 사현은 우영의 손을 털어냈다. 어금니를 짓씹은 그가 성큼성큼 문밖으로 향했다.
제인은 자신의 자리에서 립스틱을 바르고 있었다. 가볍게 내리깔린 속눈썹에 평온이 깃든 게, 관장실 안의 참혹한 살인 사건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제이.”
사현의 부름에 제인이 “네, B.”라고 짧게 대답하며 립스틱 뚜껑을 닫았다. 달칵, 간결한 소음이 울렸다.
“나 나가고 관장실에 들어간 사람 있어?”
“아니요. 사모님 후로 아무도 없었는데요. 점심때는 문단속하고 나갔고요. 경보 울린 기록도 없어요.”
제인이 흘깃 모니터를 확인했다. 지원 팀과 큐레이터 팀에게 메일이 왔다는 알람 말고 특별한 건 없었다. 그녀가 무슨 일이냐는 듯 눈썹을 올렸다.
사현이 막 입술을 뗐을 때, 제인아 아!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러더니 서랍장 가장 아래 칸에 마련된 작은 금고에서 손바닥만 한 종이 하나를 꺼냈다. 사현이 가늘게 눈을 좁혔다. 그를 따라왔던 우영 역시 고개를 앞으로 내밀었다.
“이거 사모님이 전해 주라셨어요.”
사현이 종이를 낚아챘다. 0이 수두룩한 종이였다.
[자기앞 수표, 한국은행, ₩100,000,000, (금 일억 원정)]
사현의 눈동자가 좌우로 바쁘게 움직였다. 그리 많지도 않은 활자를 읽고 또 읽었다.
“우와, 수표네요? 0도 엄청 많아요.”
우영이 눈치 없이 감탄했다. 그러든 말든, 사현은 딱 까무러치기 직전이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등줄기가 선득했다.
“다른 말은 안 했고?”
“어⋯⋯, 그림 값이라고 하셨는데요. 그 정도면 충분할 거라고.”
“⋯⋯뭐?”
“근데 사모님이 그림을 사 가셨어요? 그분이? <갤러리 비>에서? 무슨 그림 사 가셨어요?”
제인이 생각할수록 이상하다는 듯 질문에 질문을 이었다. 그녀의 말에 사현이 다시 수표를 바라봤다. 일억. 일억. 고작 일억. 십억도, 백억도 아니고, 고작 일억.
그의 손에 들린 빳빳한 종이가 파르르 경련했다. 조금 더 힘을 주자 콰드득 일그러지더니 단숨에 탁구공처럼 돌돌 말렸다. 사현이 그것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씨발.”
그가 질펀한 비속어를 지껄이며 구둣발로 콱콱 수표를 짓밟았다. 설마 했는데 정말 원화가 한 짓이 맞는 모양이었다.
사현은 정수리까지 차오르는 분노를 어떻게 갈무리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여태 그 역겨운 모자 때문에 화가 난 적이야 많지만, 이토록 분노하는 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사현에게 밟힌 수표가 납작해졌다. 그러나 사현은 발길질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수표가 원화라도 되는 것처럼 있는 힘껏, 최대한 난폭하게 폭력을 휘둘렀다.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제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토록 감정적인 사현은 근 십 년 동안 그를 보필하며 본 적이 없었다.
우영이 관장실을 향해 눈짓했다. 어떠한 사건이 발생했으니 직접 눈으로 확인하라는 뜻이었다. 제인이 바쁘게 관장실로 향했다.
우영이 사현을 진정시키기 위해 그의 볼을 감싸 쥐었다.
“형. 너무 신경 쓰지 마요. 일억이면 뭐⋯⋯ 그냥 팔았다고 생각해도,”
“이게 어떻게 판 거랑 같아!”
사현이 빽 소리를 지르며 눈을 부라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맑던 그의 눈알에 거미줄 같은 실핏줄이 잔뜩 올라와 있었다.
“내가 아무리 돈 때문에 그림을 판다지만, 이런 취급당하는 건 용납이 안 돼. 그것도 우영이 네 그림인데⋯⋯!”
사현이 우영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화로 가득하던 만면이 어느새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우영이 코로 한숨을 내쉬었다.
“금방 다시 그릴 수 있어요. 한 번 그렸던 거니까 더 잘 그릴 수 있을 거예요. 전시 전까지 완성할,”
“그게 똑같이 그린다고 똑같은 게 되니?”
“최대한 똑같이 그릴게요.”
“그런 말이 아니야. 물론, 네가 그린 거야 뭐든 아름답겠지만 완전히 다르다고. 프린트 아트도 가격이 천차만별인데. 네가 직접 그린 건 오죽할까.”
같은 작가가, 같은 시기에, 같은 물감으로 똑같이 그린 그림도 완전히 다른 평가를 받는 게 예술계다. 물론, 우영이 다시 그린 그림이 훨씬 대단할 수도 있겠지만, 이미 망가진 저 「나무 부두」도 충분히 대단하고 완벽했단 말이다. 그게 망가졌으니, 말도 못 하게 참담했다.
사현에겐 그림이 세상이고 나라였다. 이 끔찍한 인생의 유일한 도피처이자, 마음 기댈 곳이었는데. 그저 돈벌이 수단이 아니란 말이다.
사현이 딱딱딱 이를 부딪쳤다. 너무 분노하니 몸이 다 떨렸다.
그때, 제인이 관장실에서 나왔다. 그녀 역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늘 무표정했던 평소와는 전혀 다른 낯이었다.
“B, 이거 고소해야 해요. 제대로 계약서도 안 쓰고 그림을 저렇게 만들어 놓은 건 분명 법적으로 문제가 있어요. 거기다 우영 씨 그림이 고작 일억이라니요. 법무 팀에 연락 넣어 볼게요.”
제인이 씨근덕거리며 다가왔다. 그녀가 “아무리 경우가 없고 무식해도 그렇지. 어떻게 그림을⋯⋯. 사이코패스도 아니고⋯⋯.”라고 중얼거리며 핸드폰을 찾았다.
“제가 지금 경찰에 신고를,”
“됐어.”
사현이 구겨진 수표를 내려다보며 황망히 말했다.
“네?”
제인이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잠깐 침묵하던 그녀가 곧 사현의 의중을 파악한 듯 눈을 반짝였다.
“법적으로가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보복하시려고요? 그럼 정 기자님께 연락할까요?”
잔뜩 상기된 제인의 말에 사현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언젠가 명현과 나누었던 통화가 떠올랐다.
‘집사람을 난처하게 하지 마.’
‘정확히는, 그 난처가 나에게까지 밀려오게 하지 마라.’
명현의 독특한 저음이 귓가에 웽웽 몰아쳤다.
마음 같아선 원화를 사회적으로, 또는 신체적으로 망가트리고 싶지만 그럼 명현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였다. 원화를 아내로서 사랑하든, 사랑하지 않든, 어쨌든 그녀는 ‘화 그룹’의 안주인이었으니까. 그녀에게 흙탕물이 튀면 명현이 귀찮아졌다.
그러니 사현이 또 원화를 건드리면, 이번엔 명현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 저번에는 검찰에 나들이를 다녀오는 것으로 경고를 끝냈다만, 이번엔 정말 <갤러리 비>를 없애 버릴 수도 있었다.
그 말인즉슨, 원화가 우영의 그림을 저렇게 끔찍하게 살해했어도 사현이 복수할 방법이 없다는 뜻이었다. 제가 아무리 돈이 많고 잘나가는 사회인이라지만, 대기업 회장과 견줄 바는 아니었다.
사현이 흐트러진 앞머리를 아무렇게나 쓸어 올렸다. 머리가 차게 식었다. 누군가가 얼음장 같은 물을 정수리 위로 콸콸 쏟아붓는 것 같았다.
“작품 보존 관리팀이랑 컨서베이터(conservator) 불러. 복구할 수 있는 만큼 해 보라고 해. 돈이든, 시간이든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어. 전시 오픈 일을 미뤄야 한다면 미뤄. 난 저 그림 무조건 전시할 거야.”
제인이 여러 번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들고 뛰쳐나갔다.
멀어지는 그녀의 모습을 보던 사현이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원화가 가만히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만, 그 피해가 우영에게 갈 줄은 몰랐다.
정확히는 예상하지 못한 거다. 늘 저 혼자만 생각하고, 가늠하면 됐으니까. 항상 전쟁터에 혼자 나가고, 피해도 혼자 입었고, 피도 혼자 흘렸다. 근데 어쩌다 보니 그 전쟁에 우영도 끌어들이게 됐다.
되뇔수록 짜증이 났다. 신경질, 분노, 화, 역정, 억울함, 노여움, 슬픔, 분통, 안타까움, 미안함, 죄책감.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동시다발적으로 솟구쳤다.
찢긴 그림이 자꾸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 순간. 속이 답답해진다 싶더니, 삽시간에 기도가 확 좁아 들었다. 심장이 쿵, 쿵, 쿵 거세게 뛰었다. 숨이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거꾸로 역류했다.
“허으윽⋯⋯.”
가슴팍을 움켜쥔 사현이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형?”
놀란 우영이 사현의 어깨를 감쌌다.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또 과호흡 왔어요? 비닐 찾아올까요?”
“흐윽, 큽⋯⋯.”
사현이 우영의 팔뚝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러잖아도 하얀 손이 창백하게 질릴 정도로 간절한 손짓이었다. 우영이 그 손 위로 자신의 손을 덮었을 때였다.
사현의 마른 몸이 힘없이 무너졌다.
“형!”
우영의 공허한 외침이 가늘게 이어지던 정신을 뚝 잘라 냈다.
* * *
병실 간이의자에 앉은 우영이 코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현이 쓰러진 지 벌써 네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도 눈을 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우영은 사현을 곧장 병원으로 데리고 왔다. 까무러친 사현에 놀란 마음 반, 걱정 반이었는데 조금, 아주 조금, 손톱만큼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 덕에 그를 병원까지 데리고 올 수 있었으니까.
우영은 오늘을 기회 삼아 사현의 몸을 샅샅이 검사했다. 언젠가 저가 손바닥을 다쳤을 때 사현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때는 온갖 유난을 떠는 사현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상황이 바뀌고 나니 십분 이해하는 바였다.
사현의 손등에 꽂힌 링거 바늘을 보던 우영이 자신의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마른 살가죽을 뚫고 들어간 바늘에 애꿎은 제 어금니가 다 시렸다.
사현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한 번 아플 때마다 눈도 제대로 못 뜰 만큼 앓고, 식은땀을 자주 흘리고, 섭취하는 음식물은 적고, 잠을 깊이 자지 않으며, 과호흡 증세까지 있으니 당연히 정상은 아니리라 가늠하긴 했다만. 하얀 가운을 입고 무테안경을 쓴 의사가 무감각한 표정으로 줄줄이 병을 읊어 대니 눈앞이 다 아찔했다.
사현에겐 위염이 있댄다. 소화 불량도 있고, 수면 장애도 있으며, 우울증 증세도 있다고 했다. 과호흡 등을 비롯한 증상은 스트레스성인데, 쉽게 말해 화병(火病)이라고 했다.
화병은 신체화 장애, 감정 부전 장애, 범불안장애, 공황(恐慌)장애, 강박장애 등을 의심해 볼 수 있는데 그건 일어나서 제대로 검사를 해 봐야 한단다.
마지막으로 의사는 대부분 화병 환자는 중년이 많은데, 어쩌다 이렇게 젊은 사람이 화병과 과호흡 때문에 기절까지 해서 실려 왔냐며 쯧쯧 혀를 찼다. 그 말에 우영은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다.
사현이 ‘현대 사회인의 지극히 평범하고 흔한’ 수준의 스트레스를 감내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특출 날 줄이야. 어쩌면 알고 있었는데, 아닐 거라 외면한 걸지도 모른다. 사현의 상처를 보듬어 주기엔, 저는 너무 어리고 능력도 없었으니까.
“형이 힘든 거 아는데. 힘들 수밖에 없는 거 아는데.”
“⋯⋯.”
“그래도 좀 덜 힘들었으면 좋겠어요.”
우영이 사현의 앞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미적지근한 온도가 느껴졌다. 두어 시간 전만 해도 후끈했는데, 드디어 약 기운이 도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한 시간이 더 흘렀다. 간호사가 납작하게 쪼그라든 링거를 회수해 갔다. 바늘이 꽂혀 있던 사현의 손등에 붉은 점 같은 상처가 남았다. 우영이 후다닥 약국에 뛰어가 엄지손톱만 한 키즈 밴드를 사 왔다. 사현을 닮은 고양이가 그려진 동그란 밴드였다.
조심히 밴드를 붙인 우영이 그것을 살살 문질렀다. 고양이와 사현이 잘 어울려서 괜히 실없이 웃음이 났다. 그때,
“너는 애인이 까무러쳤는데, 웃음이 나오니?”
텁텁하게 잠긴 목소리가 우영의 웃음을 꾸짖었다. 가느스름하게 눈을 뜬 사현이 우영을 쳐다보고 있었다. 우영이 벌떡 일어났다.
“일어났어요? 좀 어때요? 나 보여요? 내가 누군지 알겠어요?”
우영의 눈동자에 감격과 걱정이 그렁그렁하게 차올랐다. 꼭 뇌사 상태였던 연인이 기적적으로 깨어나 감동한 사람 같았다.
사현이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우영의 걱정을 받는 건 꽤 괜찮은 기분이다. 버릇되면 안 되는데. 나중엔 아프지도 않으면서 아픈 척을 할지도 모르겠다.
“나 얼마나 누워 있었어?”
사현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딱딱하고, 거칠고, 소독약 냄새가 진동하는 병원 침대가 말도 못하게 불쾌했다.
“어⋯⋯ 다섯 시간 좀 넘은 것 같아요.”
우영이 사현의 등을 받치고 그의 기상을 도왔다.
“뭐? 다섯 시간? 나 오후에 미팅 있었는데.”
사현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핸드폰을 찾았다. 그 모습에 우영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아니, 방금까지 쓰러져서 있던 사람이 일어나자마자 일할 걸 찾는다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영이 옷걸이에 걸려 있던 사현의 재킷에서 핸드폰을 꺼내 자신의 뒷주머니에 쑤욱 쑤셔 넣었다. 너무나 당당한 도둑질에 사현이 멀뚱히 우영을 쳐다봤다.
“⋯⋯뭐 하니, 너?”
“오늘은 일하는 거 금지예요.”
“뭐?”
“아니, 이번 주 내내 금지예요.”
“네가 뭔데?”
“저요? 저 서우영이요.”
“네 이름을 물은 게 아니잖,”
“그리고 형 애인. 어리고, 잘생겼고, 형 야금야금 떼어먹는 애인.”
우영이 씨이익, 입술을 길게 째며 웃었다. 턱 아래에 붙인 꽃받침은 덤이었다. 그 미소가 어찌나 익살맞은지. 사현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꾹 입을 다물었다.
우영이 사현의 옆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마른 어깨를 감싸 안았다. 언뜻 보면 아픈 연인을 위로하는 거였으나, 사실 혹 사현이 병원에서 뛰쳐나갈까, 잡아 두는 거였다.
“제인 실장님한테 전화했어요. 형한테 휴가가 좀 필요하다고.”
“휴가는 무슨. 나 <갤러리 비> 오픈하고 한 번도 휴가 간 적 없어.”
사현이 외계 언어라도 들은 것처럼 턱을 안으로 당기며 불편을 표했다. 휴가라니. 그런 건 생각해 본 적도, 바란 적도 없었다. 너무 이질적인 단어라 혀가 다 껄끄러웠다.
“그러니까요. 이제 쉴 때도 됐어요.”
우영이 넓은 손바닥으로 사현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나른한 음성이 꼭 백설 공주를 꼬시는 마녀 같았다. 그러나 사현은 순진한 백설 공주가 아니었다. 그가 어깨를 튕겨 우영의 손을 털어냈다.
“안 돼. 네 전시 준비해야 해. 그거 말고도 엊그제 전시 끝나서 배송 보낼 게 산더미야.”
“배송쯤이야 제인 실장님이 혼자서도 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제 전시는 이 주 미루는 게 좋겠대요.”
“누가?”
“큐레이터 누나, 아니 큐레이터⋯⋯팀이요.”
‘누나’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사현의 눈이 확 가늘어졌다. 우영이 얼른 말을 정정했다.
“망가진 「나무 부두」 복원하려면 적어도 그 정도는 필요하댔어요. 의도한 바가 아니지만, 어쨌든 2주의 시간이 비었으니까, 그 정도는 쉬어도 괜찮다고도 하셨어요.”
“그래도 안 돼. 내가 처리하는 일이 몇 갠데.”
사현이 우영의 엉덩이 쪽으로 손을 뻗었다. 자신의 핸드폰을 쟁취하기 위해서였다. 우영이 얼른 그 손을 잡아채 손가락을 얽었다. 사현의 손끝이 움찔, 경련했다. 우영이 그의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거 큐레이터 팀이 다 할 수 있대요. <갤러리 비>에서 일한 지 근 십 년이 다 됐는데, 그 정도도 못할 것 같냐고, B 그렇게 안 봤는데 자기들 무시하는 거냐고, 다른 갤러리 관장들은 갤러리에 잘 오지도 않는데 B는 왜 그렇게 꼬박꼬박 출근하냐고 불만을 토하셨어요.”
“⋯⋯.”
“이번에 출근하면 노조 꾸릴 거라고 하시던데. 띠 매고 제대로 시위할 거니까 각오하라고⋯⋯.”
우영이 마치 연극을 하듯 과장된 어투로 말했다. ‘각오’라는 단어를 표현할 때는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기도 했다.
“이 주까지는 바라지도 않아요. 삼 일이라도 쉬어요. 저랑 같이 놀면서.”
“⋯⋯.”
“늦잠도 자고, 야식도 먹고, 종일 누워서 TV도 보고, 산책도 가고. 포장마차에 잔치국수도 먹으러 가요. 또⋯⋯ 영화관도 갈까요? 가서 팝콘 먹어요. 아, 요즘 영화관에서는 떡볶이랑 핫도그도 판대요. 형은 먹어 봤어요? 형 떡볶이 좋아하잖아요.”
우영이 종알종알 같잖은 계획을 열거했다. 그 모습에 사현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출근을 열성적으로 막아서는 그가 못내 귀여웠다. 어찌나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콧구멍을 들쑤시는 락스 냄새가 역겹지 않을 정도였다.
우영의 팔뚝에 머리를 기댄 사현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우영과 함께 있으면 자꾸 과거가 무뎌졌다. 계속, 계속 무뎌지다가 잊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랬으면 좋겠다.
* * *
검사를 더 받아야 한다는 우영의 간곡한 주장에도 사현은 부득부득 병원에서 퇴원했다. 소독약 냄새에 회까닥 미쳐 버리는 꼴을 보고 싶은 게 아니라면 입 다물라는 그의 말에 우영은 차마 더 붙잡을 수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사현은 곧장 뜨거운 물로 샤워부터 했다. 몸 여기저기에 곰팡이처럼 들러붙은 락스 냄새를 당장 털어내야 했다.
씻고 나왔더니 나무 트레이를 든 우영이 음산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트레이에는 희멀건 죽과 소담한 밑반찬, 그리고 두툼한 약봉지가 있었다. 얼굴이 저절로 구겨지는 환자 전용 세트였다.
사현이 못 본 척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우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따라붙었다.
“의사 선생님이 제발 밥 좀 제때 챙겨 먹으래요. 커피도 그만 마시고. 맵고 짠 것도 당분간 먹지 말랬어요.”
우영 특유의 잔소리가 사현의 귓바퀴를 박박 긁어 댔다. 사현이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일하는 사회인더러 커피를 끊으라니. 라면이라는 엄청난 식품이 있는데, 맵고 짠 걸 먹지 말라니. 커피와 라면을 독점하려는 의사들의 빌어먹을 농간임이 틀림없었다.
침실에 들어선 사현이 침대 베개에 기대 ‘고구마’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협탁을 뒤져 태블릿을 꺼냈다. 아니, 꺼내려 했을 때였다.
“쓰읍.”
트레이를 내려놓은 우영이 사현의 손을 막아섰다.
“뭐?”
사현이 적반하장으로 눈을 홉떴다.
“일하려고 그러죠? 안 돼, 안 돼.”
우영은 지지 않았다. 태블릿을 쏙 빼다가 멀찌감치에 있는 소파로 던졌다. 사현이 허망하게 나동그라진 태블릿을 쳐다봤다.
“메일 확인만 할게!”
“쓰으읍. 안 된다니까요.”
우영이 다시 혀를 끌었다. 사현이 고구마 인형을 옆으로 치우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태블릿을 가져오기 위함이었다.
“금방 해. 컨서베이터가 「나무 부두」 어떻게 복원할 건지 스케줄이랑 예산 보내 놨을 거야. 큐레이터 팀이 인테리어 미팅한 것도 보내 놨을 거고. 그거 컨펌 해 줘야,”
“쓰으으읍. 안 돼. 혼나요.”
우영이 사현의 경로를 몸으로 막아섰다. 그 말에 사현이 허, 짧게 웃음을 끊어 냈다.
“네가 날 어떻게 혼낼 건데?”
사현의 시선에 깔봄이 가득했다. 애송이 주제에. 누가 누구를 혼낸다고. 몸을 살짝 비튼 사현이 우영을 지나치려 할 때였다. 허벅지 뒤쪽으로 손이 들어오더니 그대로 훅 다리가 당겼다. 무게 중심을 잃은 사현이 휘청거리며 침대로 쓰러졌다.
우영이 민첩한 몸놀림으로 사현의 위로 올라탔다. 그리고 쪼옵,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가 놨다. 놀란 얼굴로 두어 번 눈을 깜빡이던 사현이 픽, 실소했다.
“이게 혼내는 거야?”
“아니요. 이건 경고 사격.”
“그럼 다음 사격은 실탄이야?”
“네. 이걸로 제대로 혼낼 거예요.”
우영이 사현의 손을 끌어 자신의 아랫도리에 가져다 댔다.
“⋯⋯.”
사현의 만면 가득 떠 있던 조소가 단숨에 사그라들었다. 발기하지 않았음에도 두툼한 부피감이 선연히 느껴졌다. 이제 익숙해질 만도 한데, 마주할 때마다 놀라운 크기였다.
“형, 세 번쯤 하면 정신 못 차리고 자잖아요. 일할 생각일랑 손톱만큼도 안 나게 해 줄 거야, 내가.”
사현의 코끝에 자신의 코를 댄 우영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꿀꺽, 사현의 목울대가 아래위로 거칠게 꿀렁거렸다.
우영의 눈동자에 거짓은 없었다. 장난기가 근저에 깔려 있긴 했으나 시행할 생각이 차고 넘치는 듯했다. 그런 우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눈썹 이렇게 만들고 ‘형 지켜 주고 싶단 말이에요.’라고 하던 내 귀여운 애인은 어디 갔나 몰라.”
양손 검지로 눈썹 끝을 내린 사현이 낮은 음성을 흉내 냈다. 언젠가 브런치 레스토랑에서 섹스 타령을 했을 때 우영의 반응을 따라하는 거였다.
“그 귀여운 애인이 조금 컸어요.”
우영이 히죽거리며 말했다. 그러면서 쪽쪽 사현의 볼과 관자놀이에 입을 맞췄다. 사현이 연한 웃음을 흘렸다. 우영의 시선이 휘어지는 사현의 입술을 따라 움직였다. 그 시선에 사랑이 가득했다. 따뜻하게 흘러오는 체온도, 은은한 체취도, 허리와 팔을 쓸어내리는 손길에도 사랑이 담뿍 묻어 있었다. 사현은 그가 뿜어내는 사랑에 푹 절었다.
우영의 감정은 항상 명확하고 강렬하다. 하물며 제 그림을 대상으로 끔찍한 사건이 발생한 지금조차 원망이라곤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로지 맹목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뿐이었다.
그래서,
“우영아.”
“네.”
“미안해.”
“네?”
너무나 미안했다.
원화가 그림을 훼손할 수 있다는 건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그 성깔에 그런 치욕을 당했는데, 조용히 돌아가는 게 더 이상했다. 그림 훼손은 물론, 갤러리에 불도 지를 수 있는 여자였다.
그런데 등신같이 먼저 나와 버리고 만 것이다. 아니, 사실 도망친 거지. 갤러리를 완전히 떠날 때까지 감시하고 있어야 했는데. 당장이라도 그녀의 향수 냄새에, 혐오에, 미움에 질식해 죽어 버릴 것 같아서 헐레벌떡 뛰쳐나와 버렸다.
그래서, 그래서 사현 대신에 우영의 그림이 살해당한 것이다.
뭐 하나 사현의 잘못이 아닌 게 없었다. 우영의 그림을 관장실에 꺼내 놓은 것도, 그림과 원화를 한 공간에 방치한 것도, 원화를 갤러리에 오게 만든 것도. 어쩌면 원화와 제가 얽혀있는 것부터가 잘못일지도 모르지.
사현의 눈가가 아프게 어그러졌다. 다른 것도 아니고 그림을 지키지 못하다니. 이건 그저 그렇게 넘어가면 안 될 일이었다. 고작 사과로 될 일이 아니란 말이다.
근데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사건의 원인인 주제에 위로를 건네는 것도 이상하고. 예상 그림 값보다 훨씬 많은 돈을 쳐 준다 한들, 우영의 참담한 심경이 갈무리 될지 확신할 수 없었다.
“정말 미안해. 네 그림 지키지 못해서.”
담담하지만 충분히 절절한 사과였다.
우영이 가만히 사현을 내려다봤다. 이런 표정의 사현은 처음이다. 항상 당당한 사람이었는데. 그게 잘 어울리는 사람인데. 타인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사죄하는 꼴이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영이 사현의 머리칼을 살살 쓸어 넘겼다. 손가락 사이로 차르르 흩어지는 머리카락이 참으로 보드라웠다.
“괜찮아요.”
우영 역시 담담하게 답을 내놓았다. 그의 딴에는 사현의 죄책감을 덜어 주기 위해 한 말이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사현의 얼굴이 알루미늄 캔처럼 잔뜩 구겨졌다.
“뭐가 괜찮아. 넌 화도 안 나니? 네 그림이 그렇게 됐는데? 왜 이렇게 평온해?”
“어⋯⋯. 화가 났었는데, 형이 쓰러지니까 다 상관없어졌어요. 말했잖아요. 나한테는 이제 그림보다 형이 더 소중하다고.”
우영이 사현의 귓불을 검지와 엄지로 조몰락거렸다. 저라고 공들여 그린 그림이 넝마가 됐는데, 기분이 좋겠는가. 다만 제 기분과, 그림과, 사현을 경중에 붙였을 때, 사현이 독보적인 일위라 그런 거지.
우영이 사현의 목덜미에 코를 파묻고 흐으읍,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사현 특유의 수선화 냄새가 났다. 아파서일까, 오늘따라 그 냄새가 연하게 느껴졌다. 그게 아쉬워서 코끝이 눌릴 정도로 얼굴을 비벼 댔다.
“그림이 어떻게 돼도 상관없어요. 형만 있으면 얼마든지 또 그릴 수 있는데요, 뭐. 그러니까 아프지 마요. 제발.”
“⋯⋯.”
“저 진짜 너무 놀라서 같이 기절할 뻔했다고요.”
탁하게 웅얼거리는 우영의 한탄에 사현이 소리 없이 웃음을 흘렸다. 그가 우영의 놀란 마음을 달래듯 곱슬곱슬하게 부푼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사현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우영의 묵직한 무게감에 위로를 받는다. 더할 나위 없이 안전한 공간에서 보호받는 듯한 기분이었다. 우영과 함께 있으면 늘 이러했다.
덕분에 우걱우걱 사료 먹듯 씹던 약도 안 먹은 지 한참 됐다. 담배를 달고 사는 애연가처럼 시도 때도 없이 약을 삼켰었는데.
밥도 전보다 잘 챙겨 먹었고, 수면 시간도⋯⋯ 음⋯⋯ 차마 늘었다고 하진 못하겠으나 질 좋은 잠을 자긴 했다. 우영의 말마따나 세 번쯤 하면 정신 못 차리고 잠에 빠졌으니까. 또, 귀가 찢어지는 듯한 알람과 작별한 지도 좀 됐다. 우영이 아침마다 좋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저를 깨워 줬다.
덕분에 사현은 요즘 지금까지 살아 왔던 날 중, 손에 꼽을 정도로 안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만큼 저가 우영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알고 있었으나, 동시에 몰랐던 사실이기도 했다. 우영이 조용히 제 삶에 자리 잡고 있단 건 느끼고 있었는데. 이다지도 속속들이 파고 들어왔을 줄이야.
“우영아.”
사현이 나지막이 우영을 불렀다.
“네.”
여전히 사현의 위에 엎어져 있는 우영이 대답했다.
“섹스 할까?”
“⋯⋯네?”
난데없는 섹스 타령에 우영이 번쩍 얼굴을 쳐들었다. 몇 분 전에 제가 아랫도리로 혼내느니 마느니, 질 낮은 농을 하긴 했다만 말 그대로 농이었다.
“아니요, 아니요. 형 오늘 쓰러졌는데, 무슨⋯⋯. 안 돼요. 얼른 자요. 아니, 약 먹고 자야지.”
우영이 주절주절 변명을 덧붙이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자 사현이 우영의 목을 껴안고 훅 아래로 끌어당겼다.
“우억⋯⋯.”
우영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무너졌다.
“하자. 나 하고 싶어. 네 말대로 나 세 번 하면 정신 못 차리고 자잖아.”
“그건 그런데⋯⋯.”
“수면제 먹는 대신 섹스 한다고 생각하면 돼.”
사현이 타당하면서도 타당하지 않은 가설을 제시했다. 우영의 입술이 씰룩씰룩 움직였다. 고민하는 것이다. 이성은 그의 말에 신빙성이 없다는 사실을 파악했으나, 본능은 그래, 전혀 말이 안 되는 소리는 아니지, 라며 그 말을 믿고 싶어했다.
결국 승리는 본능이 했다. 사현이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홈웨어 단추를 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영이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아랫입술을 핥았다. 갈증과 식욕이 동시에 일었다. 영악한 색욕이 오감을 잡아먹고 있었다.
“아이, 참⋯⋯. 형 밥 먹어야 하는데.”
우영이 훌떡 윗도리를 벗어 던졌다.
“죽 식는데⋯⋯.”
다음으로는 바지를 쑥 내렸다.
“약도 먹어야 하는데⋯⋯.”
그러고는 사현의 사타구니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말과 행동이 완전히 따로 노는 우영에 사현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우영이 그를 따라 웃으며 천천히 다가왔다.
우영이 손가락 사이에 걸리는 유두를 꽈악 잡아 비틀었다.
“으응⋯⋯.”
아래위로 움직이던 사현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신음을 흘렸다. 어깨가 한쪽으로 살짝 기울어지며 도드라지는 쇄골이 그렇게 섹시할 수가 없었다.
“하아⋯⋯.”
우영이 아찔한 한숨을 토해 냈다. 사현은 야하다. 제 골반 위에 앉아 허리를 흔드는 것도, 제가 하도 물고 빨아서 평소보다 붉어진 유두도, 민둥민둥해서 소년의 것 같은 주제에 바짝 솟은 성기도, 땀에 젖어 무겁게 팔랑거리는 앞머리도, 반쯤 눈을 감고 배 속에 들어찬 성기를 느끼는 표정도, 가늘게 흘리는 신음도. 무엇 하나 야하지 않은 게 없었다.
물론, 가장 야한 것은 우영이 유두를 꼬집거나 성기를 만질 때마다 수축하는 뒷구멍이다.
“아, 흐응, 윽, 아!”
사현은 자신이 아래위로 몸을 들썩이면서, 우영의 것이 배 속 깊은 곳을 찌를 때마다 벼락이라도 맞은 듯 부르르 몸을 떨어 댔다. 그럼 뒷구멍이 확 조이며 경련하는데, 어찌나 자극적인지. 우영은 눈앞이 다 까맣게 죽는 것 같았다.
“아⋯⋯. 형 너무 좋아요⋯⋯.”
우영이 사현의 양쪽 둔부를 꽉 세게 움켜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터져나갈 듯 탱글거리는 엉덩이가 말도 못 하게 귀여웠다. 한 시간 정도는 빨아야 하는데. 오늘은 섹스를 길게 이어 갈 수 없는 날이라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다.
사현이 몸을 내리는 순간, 살짝 미간을 좁힌 우영이 허리를 위로 쳐올렸다. 사현의 목이 휙 뒤로 꺾였다.
“아흑! 아아⋯⋯ 나도, 나도 좋아⋯⋯.”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흔들렸다. 주름을 잔뜩 벌린 기둥과, 턱턱 회음부를 치는 고환과, 전립선을 납작하게 긁고 지나가는 귀두와 배 속이 다 저릿저릿할 정도로 거센 힘이 정말⋯⋯ 끝내줬다.
우영은 학습력이 좋다. 처음 섹스를 할 때만 해도 손놀림이며 허리 짓이며 서툴기 그지없었는데. 지금은 귀신같이 사현이 느끼는 부분들만 콱콱 쑤셔 줬다. 관찰력도 뛰어나서 어디를 어떻게 만져 주면 좋아하는지까지 파악했다. 이제는 사현의 몸을 사현보다 잘 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현은 정신없이 몸을 움직였다. 연하게 올라온 그의 일자 복근이 도드라졌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우영이 그 움직임에 맞춰 허리를 쳐올렸다. 그러면서 사현의 성기를 아래위로 힘주어 흔들었다.
엄지로는 요도를 짓누르듯 문지르고, 이따금 고환을 주물럭거리거나, 기둥을 검지와 엄지로 조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사현의 내벽이 꿈틀거리며 요동쳤다. 자극에 시시각각 반응하는 게 참 사랑스러웠다.
사현이 입술을 겹쳐 물었다. 동시다발적으로 치솟는 쾌락을 감내하기가 힘들었다. 아랫배가 시큰거리고 등줄기에 땀이 배는 게, 절정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잠, 잠깐만. 잠깐만 놔 봐. 읏, 쌀 것 같, 으응, 아⋯⋯.”
“후우, 후⋯⋯.”
“흣! 아응, 읏, 하지⋯⋯ 말라니까!”
사현이 우영의 손을 털어내려 했다. 하지만 우영은 꿋꿋이 버텼다. 오히려 사현을 놀리듯이 손바닥 전체를 이용해 성기를 흔들었다. 손톱으로 귀두를 긁듯이 훑기도 했다. 그리고 조금 아프다 싶을 정도로 성기를 움켜쥐며 허리를 쳐올리는 순간, 사현이 자라처럼 목을 오그렸다.
“아흐윽⋯⋯.”
사현의 성기가 사출을 준비하며 불끈거렸다. 그때를 놓치지 않은 우영이 사현의 골반을 아래로 누르며 그의 깊은 곳을 꾸우욱 짓이겼다. 그 어마어마한 쾌감에 사현은 눈 뒤집고 까무러치기 직전이었다.
“⋯⋯.”
사현이 뻐끔 입을 벌린 채, 신음 한 자락 흘리지 못하고 절정에 다다랐다. 그의 엉덩이와 허벅지가 부르르 떨렸다. 우영의 손이 뜨거운 탁액으로 축축이 젖었다.
우영 역시 바짝 오므라드는 내벽에 윽, 짧은 신음을 흘리며 오르가슴의 정점에 이르렀다.
사현이 몽롱한 시선으로 우영을 내려다봤다. 우영의 오돌도돌한 복근과 오목하게 파인 배꼽에 자신이 싸지른 정액이 고여 있었다.
“이씨⋯⋯.”
사현의 눈썹이 억울하게 일그러졌다. 더 할 수 있었는데. 좋았는데. 마지막에 우영이 성기를 놔주기만 했더라도 수 분은 더 절정의 목전에서 허리를 흔들 수 있었는데.
“내가 하지 말랬지.”
사현이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우영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비싯, 웃기만 했다. 약이 바짝 오른 사현이 다시 허리를 움직이려 할 때였다. 우영이 사현의 골반을 움켜쥐고 쑤욱 성기를 빼냈다.
“으응⋯⋯.”
사현이 어깨를 올리며 신음했다. 꽉 차 있던 뒷구멍이 순식간에 텅 비었다. 괴이한 상실감과 허탈함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우영이 그대로 사현을 자신의 위로 눕혔다. 그러고는 발갛게 익은 엉덩이를 토닥거렸다.
“인제 그만해요. 두 번이면 됐어.”
“⋯⋯그만하자고? 네가 웬일이냐?”
사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영이 답 없이 미소만 지었다. 아무리 사현과 하는 섹스가 좋다지만, 평소처럼 세 번이나 할 순 없었다. 사현의 체력을 최대한 지켜 주는 선에서 끝내야 했다. 지금은 쌩쌩해 보여도, 어찌 됐든 아픈 사람이었으니까.
웃는 우영을 가만히 보던 사현이 말을 말자는 듯, 우영의 가슴에 볼을 묻었다. 탄탄하고 두툼한 가슴팍이, 비싸게 주고 산 자신의 구스 베개보다 훨씬 안락하고 편안했다.
“얼른 자요.”
우영이 사현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볼 일 다 봤다고 재우는 거니?”
눈을 게슴츠레 뜬 사현이 부러 뾰족하게 말했다.
“그런 거 아닌 거 알면서.”
이제 그의 신경질이나 짜증에 완전히 적응한 우영이 성의 없이 말을 받아쳤다. 대신 붉어진 눈가를 엄지로 살살 문질러 줬다. 그러면 언제 그랬냐는 듯 나른히 눈을 감는 사현임을 알았다.
아니나 다를까. 우영의 손바닥에 볼을 비비던 사현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잠이 고픈 고양이 같은 모습이었다. 우영이 사현의 이마에 꾸욱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잘 자요.”
“응.”
“사랑해요.”
“⋯⋯그래.”
사현의 의식이 점점 아래로 가라앉았다.
우영이 네가 있어서 이제는 외롭지 않아. 춥지 않아.
그 말을 해 주고 싶었는데, 잠이 쏟아져서 하지 못했다. 대신 그를 힘껏 껴안고 가슴을 붙였다. 쿵쿵쿵 세차게 뛰는 심장을 그가 알아주길 바랐다.
사현이 눈을 뜬 건 늦은 새벽 무렵이었다. 어쩌면 이른 새벽일 수도 있고. 은은한 불빛을 내뿜는 전자시계가 새벽 세 시를 가리켰다. 우영과 정사를 나누고, 저녁 여덟 시쯤 잠들었으니 슬슬 잠에서 깰 만도 했다.
사현이 양쪽으로 팔을 뻗어 이불을 헤쳤다. 우영의 존재가 곁에 없는 걸 눈을 뜨자마자 알았으나, 그래도 혹시나 하고 찾아본 거였다.
역시나 걸리는 게 없다. 사현이 아쉬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 시간이면 우영이 한창 그림을 그릴 때라는 걸 알고 있는데. 괜히 가슴 한구석이 휑했다.
‘고구마’를 껴안은 사현이 더 잘까, 아니면 일어나 볼까. 그런 고민을 하며 데구루루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다 시야에 들어온 게 단단히 닫힌 문이었다. 문틈으로는 아무런 소음도 들려오지 않았다.
우영은 무얼 하나. 예상대로 그림을 그리고 있나. 아니면 아래층에서 자나.
궁금했으나 몸을 일으키고 싶진 않았다. 그냥 우영이 뿅, 하고 나타나서 저를 안아 주면 좋겠다는, 그런 등신 같은 생각만 했다. 사현답지 않은 생각이었다.
“나타나라, 서우영.”
베개에 한쪽 볼을 파묻은 사현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나타나라, 나타나. 중얼거림은 곧 주문이 됐다.
그때였다. 뚜벅뚜벅. 누군가가 복도를 거니는 소리가 났다. 슬리퍼 끌리는 소리가 아니라, 맨발로 바닥을 밟는 소리였다. 이 집에 맨발로 다니는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곧 달칵 문이 열렸다. 사현의 예상대로, 우영이었다.
“⋯⋯.”
사현이 잠깐 숨을 멈췄다. 뭐지. 어떻게 나타난 거지. 저한테 초능력이라도 있나. 아니면 우영에게 초능력이 있나. 아직 잠을 털어 내지 못한 정신이 시답잖은 의심을 했다.
우영이 가물가물한 어둠을 헤치며 다가왔다. 침대 맡까지 온 그가 흐트러진 이불을 추슬러 올렸다. 그러다 말똥말똥 눈을 뜨고 있는 사현을 발견했다.
“어⋯⋯. 일어났어요? 왜 벌써 일어났어요?”
“일찍 잤으니까.”
“더 자요. 세 시밖에 안 됐어요.”
우영이 사현의 앞머리를 살살 쓸어 올렸다. 그 보드라운 스킨십에 사현이 설핏 미소 지었다. 나른하게 흘러오는 물감 냄새가 참 좋았다. 역시 그림을 그리고 있던 게 맞는 모양이었다.
“이리 와. 너도 누워.”
사현이 기껏 우영이 다져 놓은 이불을 훌떡 걷으며 옆자리를 두드렸다. 그러자 우영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그림 그려야죠.”
“자러 온 거 아니야?”
“아니에요. 형 잘 자나 확인하러 온 거예요.”
우영이 다시 이불을 추슬렀다. 우영이 등장하면서 멀찌감치로 밀려난 ‘고구마’도 가져와 옆자리에 곱게 눕혔다. 사현이 그런 우영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우영이 방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한 일련의 행동들이 지나치게 익숙했다. 꼭⋯⋯ 매일 하는 것처럼. 어린 자식의 방을 수시로 들여다보고 이불을 도닥여 주는 부모처럼 자연스러웠다.
사현이 ‘고구마’의 통통한 손을 꽉꽉 주물렀다.
“자주 이랬니?”
“네?”
“매일 새벽마다 그림 그리다 말고 내가 잘 자는지 확인하러 왔었냐고.”
“⋯⋯네.”
우영의 입에서 긍정이 나오는 순간, 사현은 누군가가 주먹으로 명치를 세게 때린 듯한 타격감을 받았다. 입천장이 떫었다. 눈알은 뻑뻑했고, 심장이 쿵, 쿵, 쿵, 빠르진 않으나 아주 세고 강하게 뛰었다.
간신히 마른침을 삼킨 사현이 질문을 마저 이었다.
“왜?”
“그냥⋯⋯ 여러 가지 이유로.”
“그러니까, 여러 가지 이유 뭐.”
길어질 듯한 대화에 우영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잠시 고민했다.
“어⋯⋯ 형이 이불 안 덮고 잘까 봐. 추울까 봐, 아니면 더울까 봐. 악몽 꿀까 봐. 일어났는데 외로울까 봐. 자다 말고 내가 보고 싶을까 봐. 아니면⋯⋯ 또 울까 봐.”
우영이 나열한 이유에는 사현이 예상한 것도 있었고, 예상하지 못한 것도 있었다. 뭐가 됐든, 가슴 깊은 곳이 찌르르 울리는 건 여전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사현이 우영의 가슴팍에 툭 이마를 묻었다. 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에 놀란 우영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허나 그것도 찰나였다. 그가 두 팔로 사현을 꽉 껴안았다.
“나쁜 꿈 꿨어요?”
“아니. 그냥⋯⋯.”
사현이 말끝을 흐렸다. 우영은 더 캐묻지 않았다.
‘그냥.’
그 짧은 단어로도 충분했다.
* * *
핫초코를 든 사현이 소파에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이른 아침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덕분에 그 강렬한 해도 힘을 못 쓰고 구름 사이에 갇혔다. 온 집안 창문으로 쏟아지던 햇살이 사라졌기 때문인지, 자꾸 어깨가 아래로 처졌다.
근데 나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오늘은 출근하지 않고 종일 집에 있을 거니까. 바깥에 비가 쏟아지든, 우박이 떨어지든, 태풍이 불든. 사현이 알 바가 아니었다.
이 휴가 아닌 휴가가 이어진 지도 벌써 나흘째였다. 사현은 그 나흘 내내 바깥과 연락을 끊고 칩거 중이다. 휴가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무엇 하나 사현의 의도로 이루어진 게 없었으나 썩 나쁘지 않았다.
첫날은 우영이 숨겨 버린 핸드폰을 찾기 위해 온 집안을 들쑤셨다. 그러나 변기에 넣고 내리기라도 한 건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내놓지 않으면 크게 화를 낼 거라고 엄포를 놓기도 했는데, 우영은 꿈쩍도 않았다.
그래서 노트북과 태블릿을 이용하는 꼼수도 썼지만, 우영이 귀신같이 눈치챈 덕에 그것도 다 빼앗겼다. <갤러리 비>가 잘 돌아가고 있는지, 그림 배송은 끝났는지, 「나무 부두」 복원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우영이 갤러리에 피치 못할 일이 있으면 제인이 자신에게 연락을 주기로 했다는데, 그래도 영 찝찝했다. 원래 휴가란 떠나기 전에 일을 마무리 짓고 가는 거 아닌가. 이다지도 자의가 아닌 휴가라니. 허나 나흘쯤 되니 그것도 이제 다 상관없어졌다.
어찌 됐든 사현도 인간의 몸뚱이를 가진 터라 평소보다 늦게 일어나고, 낮잠도 자고, 밀린 아트 매거진을 읽고, 멍하니 허공을 보며 시간을 죽이는 게 편했다. 항상 복작거리며 두통을 유발하던 머릿속이 텅 빈 것이 바보가 된 기분이긴 했으나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사현이 홀짝이던 핫초코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새 미적지근하게 식은 게, 오 분 전과 맛이 달랐다. 그때, 커다란 그림자 하나가 머그 위로 드리웠다.
“다 마셨어요?”
우영이었다. 내내 작업실에 있다가 나온 그의 손에 물감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붉은 계열의 색들이 낭자해 있는 게 작업실에서 사람 하나 토막 낸 듯한 손이었다.
“아니.”
사현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배불러요? 아니면 물렸어요?”
“식어서 맛이 없어.”
그 말에 우영이 반쯤 남은 핫초코를 단숨에 들이켰다. 꿀꺽꿀꺽 그의 도톰한 목젖이 아래위로 움직였다. 사현이 어딘가 몽롱한 눈동자로 그것을 바라봤다.
“다시 해 줄게요.”
우영이 빈 머그를 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사현이 소파 깊숙이 등을 기댔다.
“이번엔 녹차.”
“네.”
커피포트에 물을 올린 우영이 찬장에서 녹차를 꺼냈다. 원래 사현의 집에는 커피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차가 그득했다. 큐레이터 누나들이 그림 그릴 때 마시면 좋다고 차를 선물로 줬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사현에게 비밀이다.
우영이 막 녹차 티백을 뜯으려 할 때였다. 사현이 말을 바꿨다.
“아니다, 홍차.”
“알았어요.”
우영이 녹차를 가져다 두고, 홍차를 가져왔다. 그것을 뜯으려는데, 사현이 또 말을 바꿨다.
“아니야, 아니야. 히비스커스로 줘.”
“히비스커스가 그 빨간 차 맞죠?”
우영은 아무런 불만 없이 홍차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히비스커스를 찾는데,
“아닌가⋯⋯. 그냥 핫초코 마실까?”
사현이 줏대 없이 또 메뉴를 바꿨다. 눈썹을 찌푸린 우영이 의아한 눈으로 사현을 쳐다봤다. 사현은 뭐가 그렇게 기꺼운지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뒤늦게 사현의 시답잖은 장난임을 눈치챈 우영이 실소했다. ‘사현’의 ‘시답잖은’ ‘장난’이라니. 한 문장에 올려놓기 영 껄끄러운 단어들이었다.
“그럼 그냥 제가 타는 거 드세요.”
우영이 그를 따라 푸스스 웃으며 생강차를 꺼냈다. 사현의 어린 입맛에 맞지 않을 게 뻔했지만, 그래도 위에 좋다는데. 억지로라도 먹여야지. 음⋯⋯ 아니, 맛없으면 절대로 안 먹을 텐데. 달달하게 꿀을 좀 타 볼까.
우영은 차 하나를 타면서 온갖 부산을 다 떨었다. 컵을 꺼내고, 찬장을 여닫고, 냉장고를 열었다. 소파 등받이에 팔을 괸 사현이 그런 우영을 즐겁게 구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영이 따뜻한 생강차를 가져왔다. 톡 쏘는 생강 특유의 향에 사현이 코를 찡그렸다. 그러자 우영이 “위에 좋대요. 맛없어도 먹어요.”라며 부드럽게 강요했다.
잠깐 그를 노려본 사현이 입술만 살짝 축였다. 쌉싸름하면서도 달콤한 게, 가늠했던 것만큼 맛이 엉망이진 않았다.
홀짝홀짝 차를 들이켜는 사현에 우영이 기특하다는 듯, 이마에 쪽 키스를 해 왔다.
사현이 코앞에 있는 우영을 가만히 바라봤다. 정확히는 그의 턱 끝에 묻어 있는 카민 색의 물감을. 우영은 그림을 그렇게 깔끔하게 그리는 편이 아니었다. 붓 터치가 지저분하다는 게 아니라, 손이나 팔뚝, 또는 이렇게 턱 끝에 물감을 묻히기 일쑤였다.
대체 어떻게, 그림을 그리기에. 어떤 자세로 고민하길래. 생각해 보니 그가 그림 그리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늘 결과물만 봤지. 그러자 문득, 그 모습이 궁금해졌다.
사현이 엄지로 우영의 턱 끝에 묻은 물감을 닦아 냈다.
“자기야.”
“네.”
“나 너 그림 그리는 거 봐도 돼?”
“⋯⋯네?”
“부담스러우면 말고.”
사현은 우영이 싫다면 강요할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림을 그리는 건 아주 예민하고 섬세해야 하는 일이니까. 어쩌면 집보다 안온하고, 침실보다 개인적일 그의 작업실을 침범할 의사는 없었다.
하지만 궁금했다. 자신이 모르는 우영의 모습에 갈증이 일었다. 혹 그가 허락해 준다면, 보고 싶었다.
“어⋯⋯.”
우영의 눈동자가 좌우로 바쁘게 굴러다녔다. 잠깐 고민하던 그가 입을 뗐다.
“그럼 오 분, 아니 십 분만 기다려요!”
그렇게 소리친 우영이 쿠당탕 요란하게 작업실로 뛰어갔다. 사현이 멀어지는 우영을 보며 생강차를 홀짝였다.
차가 아까보다 단 것 같았다.
“아직?”
작업실 문 앞에 선 사현이 지루함에 좌우로 몸을 흔들었다. 우영은 십 분이라더니 벌써 십오 분째 감감무소식이었다. 굳게 닫힌 문 너머로 우당탕 쿠당탕 요란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잠시만요! 다 됐어요!”
우영이 우렁차게 소리쳤다. 그 와중에도 무언가를 때려 부수는 듯한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사현이 픽 짧은 웃음을 흘렸다. 한집에 살면서 볼꼴 못 볼 꼴 다 봤는데, 무엇을 저리도 정리하는 건지. 좀 더러우면 어때서. 종일 그림만 그리는 화가의 작업실이 깨끗한 게 더 이상하지 않은가.
기다리다 지친 사현이 벽에 기대섰을 무렵이었다. 띠리릭. 도어 록이 해제되면서 문이 열렸다.
“드, 들어오세요.”
우영이 옆으로 비켜서며 길을 만들었다. 어정쩡한 미소를 만든 입매가 부르르 떨렸다. 그 모습에 사현이 으음, 목으로 신음했다.
“내가 들어가는 게 불편하면 안 들어갈게.”
“아니요! 하나도 안 불편한데요!”
“안 불편하기는⋯⋯. 그렇게 치워 놓고.”
“그냥⋯⋯ 너무 더러우면 저에 대한 호감도가 떨어질까 봐요.”
영 낯선 단어에 사현이 푸핫, 웃음을 터트렸다. 호감도라니. 대체 그런 말은 어디서 주워들은 건지. 사현이 우영의 머리칼을 마구 흩트렸다. 하여튼, 귀여운 놈.
작업실 안으로 들어가자 복도와는 사뭇 다른 냄새와 분위기가 훅 밀려왔다. 고작 문 하나 통과했을 뿐인데 다른 차원으로 넘어온 것 같았다.
사현이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꼿꼿이 폈다. 어깨는 절로 벌어졌고, 턱은 안으로 당겼다. 그리고 맹수 같은 눈으로 여기저기 산란한 캔버스들을 바라봤다.
안타깝게도, 구경할 것은 몇 되지 않았다. 두 번째 전시가 코앞이라 대부분이 갤러리로 배달된 상태였다.
사현이 사위를 크게 훑었다. 자신이 직접 리모델링하고, 가구를 채워 놓고, 화구들을 뒀는데. 제가 만들어 준 작업실인데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몹시 오랜만에 들어온 것이니 그럴 만도 했다. 먼 옛날, 전시 콘셉트가 떠오르지 않아 골머리를 썩이고 있을 때, 우영이 그림 하나를 완성했다며 보겠냐고 물어서 들어왔던 때가 마지막이었다. ‘새로운 밤’이라는 콘셉트가 여기서 나왔었지.
“꼭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의 「붉은 화실」 같네.”
테이블 위를 벌겋게 물들인 물감을 보던 사현이 말했다. 우영은 그의 몸뚱이만큼 커다란 테이블 전체를 팔레트로 쓰고 있었다. 어쩐지 손부터 팔꿈치까지 물감을 묻히고 다니더라니. 묻지 않을 수가 없는 스케일의 팔레트다.
“제가 좀⋯⋯ 네, 그림 그릴 때 캔버스만 봐서⋯⋯. 테이블 비싼 거죠? 제가 나중에 똑같은 거로 하나 사 놓을게요. 아니, 처음엔 조심조심했는데. 정신 차리니까 이렇게 됐더라고요.”
사현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우영이 얼른 변명을 내놓았다. 닦아 보려 했는데, 하루 이틀 쌓인 게 아닌지라 닦이질 않았다. 그에 사현이 코웃음을 쳤다.
“뭘 사 놔. 됐어. 현대 미술 같고 좋네. 너 한 쉰 살쯤 됐을 때 특별전 열면 거기다 전시해도 되겠다.”
장난기가 묻은 말이었으나 비아냥은 아니었다. 추후 우영이 더더욱 유명해지면, 이 테이블에다 N 하나만 써서 팔아도 수억을 호가할 테였다.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팔레트와 빈센트 반 고흐의 팔레트가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느긋하게 작업실을 둘러보던 사현이 공간 가운데에 자리 잡은 이젤로 다가갔다. 이젤에는 완성 막바지에 다다른 캔버스가 걸려 있었다. 대충 눈대중으로 보아하니 50x180 사이즈. 우영이 즐겨 그리는 대중적인 캔버스와는 사뭇 다른 크기였다. 우영의 키만큼이나 가로로 길게 뻗은 게 독특했다.
“⋯⋯.”
사현은 아무런 말 없이 그림을 감상했다. 완성 전의 그림을 보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캔버스가 달라진 만큼, 그림 역시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여태까지의 우영의 그림은 강렬한 색채를 가졌지만, 어딘가 편안한 기운을 내뿜었다. 「덩굴 담장」도 그랬고, 「3시」나 「P3001」, 「나무 부두」 등이 그랬다. 보고 있으면 그림에 홀려 푹 빠져드는, 그런 그림이었단 말이다.
근데 이것은⋯⋯ 조금 달랐다.
왼쪽 귀퉁이에 달이 떠 있다. 사현이 다섯 손가락을 쫙 펼치면 얼추 맞을 정도의 크기였다. 근데 그 달이 붉다. 여태 우영의 그림에 등장했던 달은 뭉근한 노란빛이었는데. 때론 미약하게 형광기가 산란하는 레몬색이기도 했고.
헌데 붉은색이라니. 어두운 구름 사이에 묻힌 붉은 달은 그리 큰 크기가 아님에도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내뿜었다. 검은 반점들이 얼룩덜룩 묻어 있고, 테두리는 묘하게 금빛인 것이 소름 끼치게 아름다웠다.
달 주위의 하늘은 농홍한 보랏빛과 청록빛, 또 분홍빛이 섞여 있다. 오른쪽으로 갈수록 어두워졌는데 남색이 됐다가 결국엔 완전한 어둠이 됐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천천히 부유하는 구름 역시 그 색을 닮아 있었다.
달 아래에는 도시가 길게 뻗어 있다. 큰 건물도 있었지만, 달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존재감이 없는 건 아니다. 우영 특유의 색감이 도시 곳곳에 찍혀서 눈을 즐겁게 했다.
영혼이 깃든 그림은 현실적이든 추상적이든, 묘사가 거칠든 세세하든, 지그시 바라보고 있으면 살아서 움직인다. 우영은 빛으로 그 생동감을 주는 화가였고. 이번 그림도 그랬다.
가만히 보고 있으니 붉게 타오르는 달이 점점 다가왔다. 그것은 곧 도시를 잡아먹고 캔버스 밖으로 나오려는 듯 꿈틀거렸다. 그림 속의 세상뿐만 아니라 이 세계까지 한입에 삼켜 버릴 것 같아 묘하게 긴장이 되는 그림이었다.
아마 원화가 망가트린 그림 때문에 치솟은 분노를 이렇게 표현한 거겠지.
한참 그림을 보던 사현이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우영의 볼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별다른 말 없이 구석에 있는 일인용 소파에 가 앉았다.
“⋯⋯.”
우영이 그런 사현을 멀뚱히 바라봤다. 소파에 비스듬히 다리를 꼬고 앉은 사현 역시 우영을 응시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런 말 없이 시선만 마주하고 있었다.
사현의 한쪽 눈썹이 비죽 위로 올라갔다.
“뭐 해? 안 그리고.”
“뭐⋯⋯ 해 주실 말 없어요?”
“무슨 말?”
“음⋯⋯ 어디가 부족하다거나, 이상하다거나, 그런 거요.”
우영의 손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그림을 가리켰다가 그림 속의 달을 가리켰다가 옷자락을 줄줄 잡아 늘이길 반복했다. 꼭 잘못한 것도 없는데 교무실에 끌려온 남학생 같았다.
사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내가 네 선생이니?”
“어⋯⋯ 그건 아니죠. 그래도 형이 조언해 주면 더 좋은 그림이 나올 테니까,”
“너 이제 엄연한 프로 화가야. 대학생 아니고.”
“⋯⋯.”
“줏대를 가져. 누가 뭐라 하든, 네 그림은 네가 그리는 거야. 타인의 의견이나 조언은 귓등으로도 듣지 마.”
“그래도⋯⋯.”
우영은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는 사현이 못내 섭섭했다. 아무렴 <갤러리 비>의 B인데. 그가 조언 한두 마디만 해 줘도 그림의 질이 달라질 텐데. 저를 지나치게 강하고 자립적으로 키우는 사현이 조금 얄미웠다.
얼굴이 시시각각 뒤틀리는 우영에 사현이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도대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 척하려 해도 해 줄 수가 없다.
“우영아.”
“네.”
“나 네 그림 좋아해.”
“⋯⋯.”
“어쩌면 네가 그려서 좋은 걸지도 모르지.”
“⋯⋯.”
“이제는 네가 발로 그림을 그려 와도 좋아할까 봐 조금 무섭다. 그러니까 나한테 객관적인 시각을 바라지 마.”
사현이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사실 사현은 그림에 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객관적이고 냉철했다. 어쩌면 엄마가 살아 돌아와서 갑자기 그림을 그리겠다 해도 ‘엄마. 이건 아니지. 이걸 어떻게 돈 주고 팔아?’라며 독한 말을 쏴붙일지도 몰랐다.
근데 왜일까. 우영에겐 그럴 수가 없었다. 물론, 그럴 필요가 없을 만큼 대단한 그림을 그리긴 했지만, 앞서 한 말마따나 그가 발로 그림을 그려 와도 ‘⋯⋯이거 괜찮은데?’ 그런 등신 같은 생각을 할 것 같았다.
“⋯⋯.”
우영이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제가 발로 그림을 그려 가도 좋아할 거라니. 객관적인 시각을 기대하지 말라니. 그 말은 꼭⋯⋯ 제가 사현에게 몹시, 몹시 특별한 사람이라도 된 것 같잖은가.
그리 생각하니 비죽 입꼬리가 주책맞게 위로 솟구쳤다. 어깨가 안으로 말리고, 몸이 참을 수 없이 간지러웠다. 어찌나 좋은지 제자리에서 마구 발을 구르고 싶었다.
이게 연애구나. 이게 연애야. 내가 연애를 하고 있구나. 그것도 사현과 연애하고 있어.
요즘 매일, 매 순간 통감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곱씹을 때마다 너무 좋아서 죽을 것 같았다. 진짜 눈 한번 잘못 감으면 반푼이처럼 웃으며 죽어 버릴지도 몰랐다.
수줍은 색시처럼 몸을 비비 꼬는 우영에 사현이 킥킥거리며 어깨를 떨었다. 저 커다란 덩치가 왜 이리 귀여운지 모르겠다.
허리를 뒤틀던 우영이 참지 못하고 사현에게 다가가 쭈우웁, 입술을 세게 빨았다가 놨다. 순간 입술이 통째로 뽑히는 줄 알았지만 사현은 그저 눈만 사르르 휘었다.
그 모습에 쪽쪽 몇 번 더 입을 맞춘 우영이 뒤늦게야 그림 앞으로 돌아갔다.
“이, 이제 그릴게요.”
“응.”
우영은 큼큼, 흠흠 요란하게 몸을 풀더니 어딘가 어정쩡한 폼으로 붓을 쥐었다. 와중에도 흘깃흘깃 사현의 눈치를 봤다. 사현은 그런 우영과 눈을 마주칠 때마다 빙긋 웃어 줬다.
쭈뼛쭈뼛 붓을 움직이던 우영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자신의 페이스를 찾았다. 그의 손이 팔레트로 향했다가, 캔버스로 향했다가, 또 가끔은 오일이 뒤섞인 통에 빠지기도 했다. 그 움직임을 따라 붉은 계열의 물감들이 캔버스 위로 줄지어 정렬했다.
그림을 그리는 우영은 신기하리만큼 표정이 없었다. 그저 미간이 살짝 올라올 정도로 연하게 인상을 구긴 것 말고는 입술도 달싹이지 않았다. 눈을 깜박이는 속도도 매우 느려졌다. 그렇다고 처음 보는 얼굴은 아니었다.
저 표정. 어디서 본 적이 있는데. 어디서 봤더라⋯⋯. 게슴츠레 눈을 좁힌 사현이 기억을 반추했다. 그러면서도 우영을 관람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옆으로 선 우영의 하얀 반팔 티셔츠 아래로 불룩하게 도드라진 날개뼈가 보였다. 드넓은 등 위에 붙은 두툼하고 커다란 날개뼈가 수컷의 매력을 한껏 뿜어 댔다. 거기다 고작 붓을 움직일 뿐인데 봉긋하게 솟았다가 내려가는 가슴 근육이 참⋯⋯.
또, 싸구려 추리닝 바지 너머로 보이는 엉덩이가 몹시 동그랗고 탐스러웠다. 그 아래로는 기다란 다리가 곧게 뻗어 있고, 양말이나 홈 슬리퍼를 취급하지 않는 발은 맨발이다. 덕분에 사현은 자신이 좋아하는 우영의 복사뼈를 실컷 감상할 수 있었다.
점점 ‘그림 그리는 우영’을 구경하는 건지, 아니면 그저 ‘우영 그 자체’를 구경하는 건지 경계가 모호해질 때쯤이었다. 우영이 다 써서 쭈글쭈글해진 물감을 한 손으로 꽈악 세게 눌렀다. 그러자 그것이 마지막 비명처럼 주르륵 물감을 토해 냈다.
“⋯⋯.”
사현이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저게 뭐라고 섹시하지? 아니, 아니. 미끈한 구릿빛의 팔 근육이 불끈거리며 도드라지는데 섹시하지 않을 리 없지. 저런 피사체를 두고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게 더 죄악이다.
그 순간. 사현은 묘하게 뒤틀린 우영의 무표정을 어디서 봤는지 번뜩 상기해 냈다.
아아, 섹스 할 때. 제 위에서 맹렬히 허리를 흔들 때. 그때 저런 표정이었다.
그걸 깨닫고 나니 전신에 소름이 두드러기처럼 돋아났다. 그리고 우영이 그리고 있는 달만큼이나 붉은 열이 아랫도리에 들러붙는 걸 느꼈다.
사현이 코로 후끈한 숨을 토해 냈다. 멀쩡히 그림 그리고 있는 애를 보며 발정하다니. 미친 게 틀림없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뜬 사현이 그림에 집중하려 눈을 돌렸다. 그러나 우영의 콧대가 어찌나 높은지. 자꾸 시야에 걸려 왔다. 그러다 보니 안경 너머로 아직 어린 티가 남아 있는 눈매를 보게 되고, 도독한 입술을 보게 되고, 모 하나 없이 쭉 뻗은 턱선과 탐스러운 목울대까지 보게 됐다.
결국 사현은 입까지 뻐끔 벌린 채 우영을 구경했다. 어쩌면 관음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꼬박 한 시간을 있었다.
그쯤 되니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림도 아니고 인간을 한 시간이나 보고 있다니. 아닐 거라, 아직은 아닐 거라, 설마 그렇지 않을 거라 피하던 감정들이 소나기처럼 와르르 쏟아졌다.
“자기야.”
사현이 감미로운 음성으로 우영을 불렀다.
“네?”
우영이 붓을 든 채로 사현을 쳐다봤다.
“우영아.”
사현이 재차 우영을 불렀다.
“네, 형.”
우영이 다시금 대꾸했다.
“어쩌지.”
“네?”
“네가 계속 나한테 스며.”
“⋯⋯네?”
“사랑한다고.”
그렇게 피하고 밀어내던 감정이 결국 사현을 집어삼켰다. 눈이 아플 정도로 강렬하고 통렬한 붉은색 감정이었다.
* * *
사현의 예기치 못한 휴가가 끝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우영과 사현은 알몸뚱이로 소파에 누워 있었다. 사현이 퇴근해서 넥타이를 푸는 모습에 발정한 우영이 냅다 달려드는 바람에 거실에서 일을 치렀기 때문이다.
“보고 싶었어요.”
우영이 사현의 엉덩이를 조몰락거리며 속삭였다. 사현이 피식 실소했다. 고작 한나절 떨어져 있었는데, 누가 보면 일주일쯤 못 본 줄 알겠다. 그래도 우영의 그리움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항상 점심을 같이 먹었었는데. 오늘은 일이 바빠 점심 먹을 시간도 없었다. 그래서 아침부터 지금까지 꼬박 한나절을 못 봤다.
“나도 보고 싶었어.”
사현이 우영의 턱을 쓰다듬으며 동조했다. 눈 돌아가게 바쁜데, 가끔 숨 돌릴 틈이 날 때마다 우영의 잘생긴 얼굴이 어찌나 아른거리던지.
“잘 있었어? 그동안 아무 일 없었고? 사지는 멀쩡하고?”
우영의 볼을 부여잡은 사현이 한껏 과장된 음성으로 캐물었다. 우영의 팔다리를 더듬기도 했다. 그 방정맞은 행동이 사현과 정말⋯⋯ 끔찍하리만큼 어울리지 않았다. 큭큭거리던 우영이 사현을 얼싸안고 몸을 마구 흔들었다.
두 사람은 간간이 입술을 부딪치고, 시선을 마주하며 시간을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현의 눈이 가물가물 감기기 시작했다. 종일 바쁘게 보낸 데다가 우영의 넘치는 정력까지 받아줬더니 보통 피곤한 게 아니었다.
우영이 머리맡에 널브러진 자신의 후드를 넓게 펼쳐 사현의 위로 덮었다. 그렇게 사현이 깊은 수면에 빠지려 할 때였다.
어디선가 전자 알람이 울렸다. 짧게 끊기는 게, 전화는 아니었다. 우영은 사현이 그 소리를 듣지 못하길 바랐다. 하지만 바람과 달리, 사현이 번뜩 고개를 쳐들었다. 그가 소파 아래로 팔을 뻗어 재킷을 집어 왔다. 그러고는 더듬더듬 핸드폰을 찾기 시작했다.
“그냥 자요.”
우영이 불퉁하게 말했다.
“메일 왔어.”
“무시해요.”
“안 돼.”
단호하게 대답한 사현이 결국 핸드폰을 찾아냈다. 핸드폰 화면의 어스름한 빛이 사현의 콧잔등을 스쳤다.
“누구예요? 왜 예의 없이 이 시간에 메일을 보낸대요?”
“급한 일인가 보지.”
대수롭지 않아 하는 사현에 우영이 입을 삐죽거렸다. 일 좀 줄이라고 했는데. 의사 선생님이 스트레스 받으면 안 된다고 했는데. 강제 휴가를 마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워커 홀릭이다.
일이 중요해요, 내가 중요해요.
그 유치한 말이 앞니를 두드려 댔지만 실로 입 밖에 내놓았다간 사현이 다 썩은 얼굴로 벌레 보듯 할까 봐, 참고 또 참는 중이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메일을 보던 사현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와 가슴팍을 붙이고 있던 우영도 선연히 느껴질 정도로 큰 들숨이었다. 우영이 마른 입술을 핥았다. 또 무슨 일이 터진 건가, 싶어서.
“우영아. 네 그림. 「나무 부두」 말이야.”
“네.”
“복원 완료됐대.”
사현의 광대에 봉긋, 기쁨이 차올랐다. 우영도 그를 따라 광대를 동그랗게 올렸다.
“정말요? 벌써?”
“어. 내가 짜증을 좀⋯⋯ 많이 냈거든.”
사현이 민망하다는 듯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그래도 덕분에 2주로 예상했던 복원 작업이 일주일 하고도 나흘 만에 끝났으니 후회는 없었다. 보너스를 두둑이 얹어 주면 직원들도 크게 불만을 토하진 않으리라. 그리고 우영의 전시가 끝나면 단체로 휴가 한번 보내지 뭐.
핸드폰을 세게 쥔 사현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복원 작업이 일찍 끝난 게 실로 좋았다.
우영이 만면 가득 미소가 핀 사현의 머리칼을 슥슥 쓰다듬었다. 갤러리에 문제가 발생했다는 메일이 아니니, 사현이 나갈 일은 없을 것 같아 안심이 됐,
“나 잠깐만 갤러리 갔다가 올게.”
사현이 우영의 가슴팍을 밀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뭐라고요?”
덩달아 상체를 일으킨 우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대로 완성됐는지 봐야겠어. 전시가 코앞인데 내일 확인하면 늦어.”
“아니, 내일까지 12분 남았는데 늦기는 뭐가 늦어요.”
우영이 사현의 핸드폰 위에 뜬 시각을 흘끔 확인했다. 11시 48분. 다시 갤러리로 출근하기에는 심히 늦은 시각이었다. 우영이 두툼한 팔로 사현의 허리를 껴안았다.
“가지 마요. 내일 보면 되지. 내가 일찍 깨워 줄게요. 새벽같이 깨워 줄게.”
그가 사현의 유두를 쫍쫍 빨며 웅얼거렸다. 흠칫 몸을 떤 사현이 성벽처럼 넙데데한 우영의 어깨를 마구 밀어냈다.
“금방 다녀올게. 한 시간. 아니, 두 시간.”
사현의 손가락엔 어느새 셔츠가 걸려 있었다. 우영이 어떻게 막아선다 한들, 소용없을 것 같았다. 우영이 후우우, 자욱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제 주제에 사현의 고집을 어찌 이기랴.
“그럼 같이 가요.”
“너도?”
“제 그림인데, 저도 봐야죠. 리터치 할 부분이 생길 수도 있잖아요.”
우영이 자못 그럴듯한 이유를 내놓았다. 사현이 으음, 목으로 신음했다. 대답은 금세 나왔다.
“그래. 가자.”
그의 허락에 우영이 실실 웃으며 옷을 껴입었다. 대번에 기분이 좋아졌다. 아닌 밤중에 데이트가 아닌가. 그것도 아무도 없는 <갤러리 비>에서 데이트.
설렘에 목덜미가 다 간지러웠다.
* * *
컴컴하게 불이 꺼진 <갤러리 비>에 처음 오는 건 아니었다. 가끔 사현의 퇴근이 늦으면 그를 데리러 오곤 했었다. 그러나 여전히, 올 때마다 새로웠다.
뭐라고 해야 하나.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것 같기도 하고. 침범하면 안 될 구역에 들어온 듯 배덕감도 조금 들고. 아무나 발을 들이지 못하는 곳을 거닐고 있다는 것에 뿌듯하기도 하고. 수많은 그림을 홀로 독점한 듯 마음이 풍족하기도 했다.
“빨리 와.”
사현은 열심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우영과 달리 앞만 보고 직진했다. 덕분에 수장고에 금세 다다랐다.
수장고는 우영도 고작 두 번째로 방문하는 곳이다. 이제는 먼 옛날, 네온(NEON)이라는 작가명이 정해졌을 때, 그림에 쓰인 이니셜을 바꾸러 왔었다. 그 후로는 올 기회가 없었는데.
공기조차 부유를 멈춘 수장고는 고요했다. 이따금 환풍기가 돌아가는 소리만 흐릿하게 들려왔다. 조명 역시 극히 제한되어 비밀스럽고 귀한 곳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뭐, 실로 비밀스럽고 귀한 곳이긴 했다.
우영의 눈이 반짝반짝하게 빛났다. 이곳에 얼마나 대단한 그림들이 숨 쉬고 있는지, 보물을 캐듯 하나하나 세심하게 보고 싶었다. 허나 좌우로는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는 사현 탓에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사현은 수장고 깊숙한 지점의 어느 곳에서 멈췄다. 은은한 금빛을 내리쬐고 있는 「나무 부두」 앞에서였다.
사현도, 우영도 그림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우영은 전과 똑같은 그림에 감탄하는 거였고, 사현은 혹 다른 점이 있나 기를 쓰고 그림을 뜯어보는 거였다.
차라리 잘 벼려진 칼로 갈가리 찢어 놨으면 복구나 쉽지. 하필 만년필 촉으로 긁어 놔서 우둘두둘해진 부분을 기워 맞추느라 시간이 곱절로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전과 같은 느낌이 나지 않았다.
물론,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컨서베이터에게 맡겼으니 언뜻 보기엔 똑같았다. 허나 우영 특유의 거칠면서도 묵직한 붓 터치가 반감되어 있었다. 그 탓에 호수 특유의 꿉꿉함도, 서늘한 바람 냄새도 한풀 꺾여 버렸다.
사현이 참담한 낯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달라.”
“와⋯⋯. 완전 똑같네요.”
우영이 사현과 전혀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사현이 귀를 의심한다는 눈으로 우영을 쳐다봤다. 그러자 우영이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제 눈에는 똑같은데⋯⋯.”
“다르다고. 여기, 의자랑 담요가 맞닿은 부분이랑. 여기, 나무가 비치는 호수 부분이랑. 또 여기, 나무 부두의 세 번째 옹이가 다르잖아.”
“⋯⋯.”
우영이 차마 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만 벙긋거렸다. 사실 지적을 듣고도 무엇이 다른지 알 수가 없었다. 우영의 붓 터치는 대부분 즉흥적이었고, 때에 따라 달라졌기 때문이다.
근데 사현은 그걸 어떻게 아는 걸까. 역시 <갤러리 비>의 B다웠다. 갤러리 명성이 괜히 쌓인 건 아니구나. 우영이 소리 없이 감탄했다.
사현은 끊임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짜증스레 마른세수를 하거나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기도 했다. 보다 못한 우영이 넌지시 입을 뗐다.
“제가 좀⋯⋯ 손대 볼까요?”
“그럴래?”
사현이 기다렸다는 듯 옆으로 밀려 있던 카트를 끌고 왔다. 그곳엔 우영이 쓰는 물감과 붓 등의 화구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우영이 입술 끝에 꾹 힘을 줬다. 아무래도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늦어질 듯했다.
“왜 웃어요?”
우영이 붓을 쥔 지 두 시간이 다 되어 갈 무렵이었다. 곁에 앉아 있던 사현이 자꾸 빙글빙글 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예쁘게 휘어지는 저 입술을 쪽쪽 빨고 싶어서.
“역시 네가 손대니까 그림이 살아난다, 싶어서.”
사현이 방금 우영의 붓이 지나가 반짝이는 물감을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봤다. 그는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우영이 헛숨을 삼켰다.
“그게 그렇게 예쁘게 웃을 일이에요?”
“응. 이 그림 내가 이번 전시에서 제일 좋아하는 거라니까. 안 팔고 싶을 정도야. 누가 가격 물어보면 아, 이미 팔린 그림이라서요, 라고 거짓말하고 싶은. 그래 놓고 밤에 몰래 와서 훔쳐다가 집으로 가져가고 싶은. 그런 느낌 뭔지 아니?”
비스듬히 턱을 괸 사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럼 안 팔면 되잖아요.”
우영이 옐로우 오커에 코발트블루를 섞으며 대꾸했다.
“안 돼. 이건 공공 기관에 팔 거거든. 그럼 우리 엄마처럼 돈은 없는데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봐 주겠지. 이런 건 많은 사람이 보고, 많이 사랑해 줘야 해. 내 사랑이 아무리 크다 한들, 수백, 수천 명이 주는 사랑만 할까.”
사현이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러자 바쁘게 움직이던 우영의 붓이 뚝 멈췄다.
“왜?”
사현이 어여 붓을 움직이라는 듯 톡톡 책상을 두드렸다. 그러나 우영의 손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사현이 뒤늦게 우영의 얼굴을 쳐다봤다. 한참 전부터 저를 보고 있었던 건지, 시선이 딱 맞아떨어졌다.
“형.”
“응.”
“이번 전시 메인 그림, 제가 골라도 돼요?”
난데없는 소리에 사현이 턱을 안으로 당기며 눈살을 구겼다.
“이미 정해 놨는데?”
“못 바꿔요?”
“뭔데?”
“어⋯⋯.”
“작업실에 뒤집혀 있던 캔버스 중에 하나야?”
사현이 살짝 옆으로 고개를 흘렸다. 며칠 전, 우영의 작업실에서 봤던 뒤집힌 캔버스들이 떠올랐다. 벽 한 귀퉁이에 줄지어 있는 게 꽤 많은 양이었으나 부러 모른 척했다. 아마 소장하고 싶어서 갤러리로 보내지 않았다던 그 그림들이리라 가늠만 했을 뿐.
“⋯⋯네.”
우영이 머리를 아래위로 움직였다. 사현의 눈이 가늘게 좁아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갑자기 왜?”
“음⋯⋯ 형 말 듣고 나니까 그 그림도⋯⋯ 많은 사람한테 사랑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
“사랑받을 거예요. 제가 정말, 열심히 그린 그림이거든요.”
우영이 확신한다는 듯 붓을 세게 쥐어 보였다. 그가 말하는 ‘그림’을 전혀 가늠하지 못한 사현이 살포시 눈썹을 구겼다. 무슨 그림인지 말하라는 무언의 종용이기도 했다.
허나 우영은 무슨 꿍꿍이인지 빙긋 웃고만 있었다.
“⋯⋯그래. 그렇게 해.”
사현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영이 저리 싱그럽게 웃으면, 무슨 요구든 간에 들어주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