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9. 복사뼈(1) (10/24)

09. 복사뼈(1)

어째 몸이 서늘하다. 분명 잠들 때만 해도 뜨끈뜨끈한 게 전신을 감싸고 있어 좋았는데. 사현이 눈을 뜨지 않은 채로 옆자리를 더듬었다. 근데 만져지는 게 없다. 우영이 보통 덩치도 아니고, 이 정도 훑었으면 걸려오는 게 맞거늘.

그러니까, 우영이 지금 제 곁에 없다는 거다.

사현이 번쩍 눈을 떴다. 아니나 다를까. 널따란 침대엔 자신 홀로였다.

뭐야. 이제 깨워 주지도 않아? 자기 혼자 홀라당 내려가 버렸어? 그런 생각으로 협탁에 올려진 시계를 확인했는데, 이제 막 새벽 6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화장실 갔나?

가볍게 기지개를 켠 사현이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침실 밖 복도는 조용했다. 욕실에도 기척이 없었다. 자기 방에 가서 자는 건가.

사현이 덥수룩하게 뜬 머리를 아무렇게나 흩트리며 1층으로 내려갔다. 거실에도, 부엌에도 우영은 없었다. 다음으로는 작업실에 들렀다. 똑똑, 노크했으나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침실 문도 열어 봤다. 헌데 멀끔하게 정리된 침대는 누운 흔적조차 없었다.

갸웃, 고개를 뒤튼 사현이 나가려는데, 희미한 물소리가 들려왔다. 욕실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아니, 얘는 무슨 새벽 댓바람부터 샤워를 해. 출근도 안 하는 놈이. 그것도 주말에.

욕실로 다가간 사현이 막 우영을 부르려 했을 때였다.

“우영아. 씻,”

“후우⋯⋯ 사현이 형⋯⋯.”

우영의 음성이 들려왔다. 사현은 순간, 우영에게 투시 능력이 있어 자신을 보지 않고서도 제 존재를 알아차린 줄 알았다. 근데 조금 이상하다. 입을 꾹 다문 사현이 욕실 문에 귀를 가져다 댔다. 콸콸 쏟아지는 물소리 사이에 우영의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아, 형⋯⋯. 읏, 하아⋯⋯.”

“⋯⋯.”

“사현이, 형⋯⋯.”

이건 목소리라기보다는 신음에 가까운 것 같은데. 사현은 우영이 지금 하고 있는 게 어떠한 행위인지 금세 알아차렸다. 멀쩡한 남성이라면 모를 수 없는 거였다.

팔짱을 낀 사현은 그 후로 한참을 욕실 앞에 서 있었다. 우영이 제 이름을 절절하고 간절하게 부르는 걸 들으며. 그러다 신음이 멎었을 때, 이렇다 할 표정 없이 뒤를 돌았다.

우영은 6시 2분 전에 침실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게 사현을 껴안고 잠깐 눈을 붙였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땐 11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우영과 사현은 일요일이니만큼 늦은 아침으로 브런치를 먹기로 했다. 사현이 청담동에 맛있는 곳이 있다며 운전대를 잡았다.

오랜만의 외식에 우영은 언젠가 사현의 잔소리로 샀던 옷을 빼입었다. 렌즈도 끼고, 서투른 손놀림으로 머리도 만졌다. 그 모습에 사현이 오늘 예쁘다며 툭툭 허리를 두드려 줬다. 우영이 빙글빙글 웃었다.

한껏 차려입은 우영과 달리 사현은 우영의 후드를 껴입었다. 포장마차에 갈 때 입었던 것이 퍽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저런 평범한 후드도 사현이 입으면 특별해진다. 메이커도 없는 것인데, 사현과 함께 갔던 비싼 옷가게에서 파는 옷 같았다. 거기다 손등을 죄 덮는 소매가 얼마나 귀여운지. 보지 않은 사람은 감히 상상도 못 할 터였다.

또, 흔치 않은 청바지 차림. 두 번 접은 바짓단. 하얀 발목 양말. 베이지색 운동화. 대학생이라고 봐도 무방한 모습이었다. 우영은 사현이 운전하는 내내 그의 옆모습을 흘끔거렸다. 그리고 입술을 물어뜯으며 웃음을 참았다.

진짜 너무 좋아서 죽을 것 같다.

사현이 데리고 온 레스토랑은 나무가 콘셉트였다. 여기저기 즐비한 식물과 꽃 때문에 마치 정원에서 식사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사현은 당연하게 홀로 메뉴를 시켰다. 우영은 그가 뭘 주문하든, 맛있게 먹을 수 있었으니까. 사실 영어가 태반인 메뉴판을 이해할 수도 없었다.

우영은 그게 좋았다. 포장마차나 김밥천국에선 자신이 메뉴를 도맡아 시키는데, 이렇게 번지르르한 곳에선 사현이 도맡아 시킨다. 참 조화롭지 않은가. 별것이 다 운명처럼 느껴졌다.

먼저 나온 청포도 에이드와 유자 에이드를 마시고 있으니 곧 음식들이 하나하나 등장했다. 사과와 리코타 치즈를 올린 샐러드, 맥 앤 치즈 파니니, 베이컨 에그 베네딕트, 아보카도 에그 베네딕트, 벌꿀이 올라간 프렌치토스트 등이 테이블을 꽉 채웠다. 먹는 양이 남다른 우영을 위해 넉넉히 시킨 거였다.

우영이 거센 콧김을 내뿜으며 포크를 움직였다. 음식들은 천상의 맛이었다. 비슷해 보이는데, 같은 맛이 하나도 없었다. 어떤 건 새콤하고, 어떤 건 시큼한데, 이건 또 달고, 저건 또 보드랍다. 싱싱한 맛도 있었고, 달큼한 맛도 있었다.

우영은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며 접시를 하나하나 비워 갔다. 사현은 느릿하게 포크를 움직이더니 얼마 먹지도 않고 식사를 끝냈다. 그러고는 나이프 질이 서툰 우영을 위해 소시지나 토스트 따위를 썰어 줬다.

그렇게 식사가 끝이 보일 때쯤이었다. 사현이 비스듬히 턱을 괬다.

“우영아.”

“네?”

“너 건강하지?”

“그럼요. 저 밥도 잘 먹고, 운동도 매일 해요.”

우영이 보란 듯이 어깨를 크게 펼쳤다. 널따란 가슴팍이 훤히 드러났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위협적인 상체가, 도톰한 니트 아래로 드러나는 가슴선이 참⋯⋯ 사현의 취향이다.

쟤는 얼굴도 예쁜데 몸도 예뻐. 그거 쉽지 않은 일인데. 그래서 그런가. 이왕이면 벗은 것도 보고 싶단 말이지.

사현이 반대 손으로 턱을 옮겼다.

“근데 왜 나한테 섹스 하자는 소리를 안 해?”

“푸학⋯⋯.”

예상치 못한 낯부끄러운 소리에 우영이 씹던 음식물을 분사했다. 재빠르게 입을 막아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못 볼 꼴을 보일 뻔했다. 우영이 콜록콜록, 둔탁하게 기침하자 사현이 티슈를 내밀었다. 정작 말을 던진 건 본인이면서, 상당히 무감한 표정이었다.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 그래?”

“콜록, 콜록.”

“아니면, 게이는 처음이라 살 맞대기가 좀 찝찝해?”

“아니, 아니, 아니⋯⋯. 형은 무슨 아침부터 그, 그런 소리를 해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우영이 두 손을 바쁘게 내저었다. 그에 사현이 픽 조소했다. 지는 아침부터 남 이름 부르면서 자위해 놓고. 저는 고작 몇 마디 했을 뿐인데 유난은⋯⋯.

“그러면? 밤에 촛불 켜 놓고 은근히 이야기할까? 그때는 안 부끄러워할래?”

사현이 조곤조곤 듣기 좋은 목소리로 비아냥거렸다. 덕분에 우영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이제는 펑, 하고 터져도 하등 이상할 게 없었다.

“우, 우리 사귄 지 일주일도 안 됐잖아요. 어, 어떻게 벌써 그런 걸 해요.”

“⋯⋯섹스를 날짜 세어 가면서 하니? 뭐 사귄 지 열흘 땐 손 잡고, 한 달 땐 뽀뽀하고, 반년 땐 웃통 까고, 일 년쯤 되어야 섹스할 거야? 그게 네 계획이니? 근데 용케 키스는 했다?”

와다다 쏟아지는 수치에 우영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마침 커피가 나왔다. 사현이 여유롭게 커피를 머금었다. 시럽 듬뿍 넣어 달랬는데 쓰다. 콧잔등을 찡긋거린 그가 못다 한 말을 덧붙였다.

“섹스는 사귀기 전에도 할 수 있는 거야. 가끔은 사귀자는 고백 대신이 될 수도 있는 거고.”

사현은 ‘섹스’라는 단어에 부끄러움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듯했다. 애꿎게도 듣는 우영의 귓바퀴가 점점 붉어졌다. 사현의 말이 인두가 되어 귀를 지졌다.

“그거는⋯⋯ 형이 어른이니까 그런 거고요⋯⋯. 저는 형을 아껴, 아껴 주고 싶단 말이에요.”

우영이 다 죽어 가는 음성으로 읊조렸다. 그 말에 사현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저가 스무 살짜리 숫총각도 아니고. 아껴 주긴 무슨. 대체 우영이 절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네가 뭔데 날 아껴?”

“그냥, 저는 그러고 싶었어요.”

“나는 널 그런 쪽으로 아낄 생각이 전혀 없는데.”

사현의 저돌적인 말에 우영이 쿨럭, 기침했다. 좋은 말인가? 나쁜 말인가? 모르겠다. 당황한 사고가 매끄럽지 않게 굴러갔다.

사현이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긴장한 우영이 마른 침을 삼켰다.

“너는 네 손으로 성기를 자극하여 성적 쾌락을 얻는 행위를 주기적으로 하겠지만, 나는 그걸 내 손으로 직접 할 나이가 지났거든?”

“아⋯⋯, 형⋯⋯. 제발⋯⋯. 왜 그래요⋯⋯. 제가 뭐 잘못했어요?”

“그래서 현재의 내 연인인 네가 좀 도와 줬으면 좋겠는데. 아니면 나 나쁜 짓 한다?”

“나쁜 짓이요? 무슨 나쁜 짓이요?”

“뭐⋯⋯. 찰나의 바람이라든가, 외도라든가, 천박한 말로는 오입질이라고도 하는, 그런 짓.”

바람을 피우겠노라, 말하는 사람치고 사현은 지나치게 당당했다. 우영의 얼굴이 울상이 됐다. 맑은 눈동자가 금세 축축해졌다. 사귄 지 일주일 만에 사랑해 마지않는 연인이 바람을 피우겠단다.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왜 그렇게 못되게 말을 해요.”

“그럼 네가 해 주면 되잖아.”

“그래도⋯⋯.”

“아, 진짜. 섹스 하자고 매달리는 건 또 처음이네.”

사현은 답답했다. 우영이 제 이름을 부르며 무슨 짓을 하는지 뻔히 아는 판에, 에둘러 말하는 것도 짜증이 났다. 미성년자도 아니고, 불륜도 아니고, 멀쩡한 인간들끼리 멀쩡하게 사귀는데 섹스리스라는 게 말이 되냐고.

신경질 가득한 사현의 낯에 우영이 후으읍,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래요. 해요.”

“정말? 오늘?”

“오, 오늘요?”

“그럼?”

우영의 입술이 우물우물 망설임을 씹었다.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 뒤꿈치를 동동거리고 있는데, 바람, 외도, 오입질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있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우영이 당차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좋아요. 오늘 해요.”

드디어 나온 만족스러운 대답에, 사현이 씨익 미소 지었다.

그는 몰랐다. 지금 이 순간을, 피눈물을 흘리며 후회하게 될 미래를.

* * *

사현은 샤워 가운 차림으로 침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가 무심하게 모바일 뉴스의 시답잖은 기사를 훑었다. 그렇게 오 분이 지났다. 십 분이 지나고, 삼십 분이 지났다.

“아⋯⋯.”

사현이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대고 천장을 응시했다. 자신은 2층 욕실에서, 우영은 1층 욕실에서 씻고 제 침실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우영이 나타나질 않았다.

우리 애송이는 샤워하다 죽었나. 아니면 첫 경험이라고 때라도 미는 건가. 그것도 아니면 섹스가 무서워 도망갔나.

사현의 검지가 톡톡톡, 소파 팔걸이를 두드렸다. 그러다 시간의 앞자리가 바뀌었을 때, 참지 못하고 일어났다.

1층으로 내려간 그는 곧장 욕실로 향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어렴풋한 물소리가 들려왔다. 사현이 똑똑 노크했다.

“우영아.”

“⋯⋯.”

“서우영!”

“네, 네!”

문 너머로 우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빼꼼, 한 뼘보다 작게 문이 열렸다. 머리칼이 축축하게 젖은 우영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사현이 허탈하게 웃었다.

“살아 있었구나? 나는 네가 하도 안 나와서 변기 물에 쓸려 내려간 줄 알았다?”

“어⋯⋯, 그⋯⋯.”

“왜 안 나와. 다 씻었으면 나와.”

사현이 바깥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그런데 우영은 미동조차 없었다. 평소라면, 네! 우렁찬 대답과 함께 사현의 말에 복종했을 텐데. 사현의 미간이 마뜩잖게 구겨졌다. 우영이 흘끔흘끔 그의 눈치를 보며 말을 더듬었다.

“그게요⋯⋯.”

“뭐.”

“그러니까⋯⋯.”

“아, 자기야. 짜증나게 하지 말고 빨리 말해.”

“바, 발기한 게 안 죽어요.”

“⋯⋯뭐?”

사현이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뭐가⋯⋯ 안 죽어? 귀를 의심하게 되는 말이었다. 경악 어린 사현의 낯에 우영의 시선이 아래로 뚝 추락했다.

“형이랑 그, 그거 하는 거 상상만 했는데도 발기해서⋯⋯. 변태 같으니까 좀 가라앉으면 올라가려고 했는데⋯⋯. 이게 도무지⋯⋯ 죽질, 않아서⋯⋯.”

우영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눈망울이 일렁일렁, 입꼬리는 아래로 늘어져 있고, 속눈썹은 한껏 깔려 있었다. 그런 우영을 보던 사현이 손바닥을 내밀며 외쳤다.

“손.”

“네?”

“손.”

두어 번 눈을 꿈뻑이던 우영이 말 잘 듣는 개처럼 사현의 손바닥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놨다. 사현이 그의 손을 이끌어 자신의 아랫도리에 가져다 댔다.

우영의 턱이 아래로 뻐끔 떨어졌다.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살덩어리가 만져졌다. 손바닥이 뜨끈할 정도의 열은 덤이었다. 우영의 숨이 뚝 끊겼다.

“이것 봐. 나도 발기했어.”

“⋯⋯.”

“너만 나 좋아하니? 나도 너만큼은 아니지만, 어쨌든 너 좋아해. 일하다가도 네 생각하고, 그림 보는데 그 위에 네 얼굴 떠오르고, 회의하다 말고 서우영 얘는 밥 먹었나, 그런 생각 한다고.”

“⋯⋯.”

“섹스 전에 발기하는 거야 지극히 당연한 건데 그걸 왜 부끄러워 하, 으헉!”

순간 사현이 훅, 욕실 안으로 끌려갔다. 발이 붕 뜰 정도로 거센 힘이었다. 그리고 곧장 입술이 맞닿았다. 놀란 사현이 버둥거렸으나 하찮은 반항이었다. 단단한 손이 허리를 꽈악 움켜쥐고 있어 도무지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우영이 반대 손으로 사현의 턱 아래를 눌렀다. 사현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그 틈으로 혀를 욱여넣었다. 두툼한 혀가 입 안을 크게 핥자 빡빡하게 굳어 있던 사현의 어깨가 사르르 녹았다.

사현이 지지 않고 우영의 목덜미에 팔을 둘렀다. 두 사람의 입술이 더욱 깊숙이 얽혔다. 똑같은 치약 맛이 타액을 타고 넘나들었다. 그게 왠지 모르게 우스워 사현이 킥킥 웃는데 우영은 웃지 않았다.

그는 사현의 머리를 터트려 버리겠다는 듯 입술을 들이박아 댔다. 사현은 흔쾌히 그에 부응했다. 혀를 섞고, 입술을 비볐다.

언젠가처럼 아랫입술이 아려 올 때쯤, 사현이 툭툭 우영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아⋯⋯.”

우영이 진한 신음 한줄기를 내뱉으며 떨어져 나갔다. 부딪쳤던 코와 턱이 붉게 익어 있었다. 사현이 나른하게 웃으며 그의 코를 엄지로 슥슥 문질렀다.

“첫 섹스를 변기 옆에서 하고 싶은 건 아니지?”

사현의 말에 우영이 무언가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현이 착하다는 듯,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그 후, 바깥으로 향하려는데, 우영이 사현의 허리를 덜렁 잡아챘다. 사현의 몸뚱이가 쑥 들려 올라갔다. 꼭 인형 뽑기 기계의 갈고리에 잡힌 모양새였다.

당황한 사현이 사지를 펄떡거리기도 전에, 두 사람은 우영의 침대에 당도했다. 애당초 계획했던 건 사현의 침실이었으나 거기까지 가기는 너무 멀었다.

그대로 사현의 위에 올라탄 우영이 이마와 볼 그리고 콧잔등에 꾹꾹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사랑해요, 형.”

“그래. 나도 좋아해.”

시선을 마주한 두 사람이 연하게 미소 지었다. 사현의 아랫입술을 쭉 빨았다가 놓은 우영이 긴장한 얼굴로 속삭였다.

“이거⋯⋯ 벗겨도 돼요?”

그의 검지에 사현의 가운이 걸렸다. 사현이 피식 웃으며 허리춤에 묶인 끈을 잡아당겼다. 보드라운 가운이 그대로 주르륵 미끄러지며 사현의 나신이 드러났다.

우영이 헛숨으로 가슴팍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사현의 몸은 상상했던 거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이따금 얇은 셔츠 아래로 흘깃흘깃 훔쳐보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예쁠 줄이야.

사현은 말랐다. 근데 그게 완전히 깡말랐다는 건 아니고, 집에 운동 기구를 마련해 둘 정도로 몸매에 신경을 쓰는 타입이라, 미끈한 근육이 보기 좋게 수납되어 있었다.

목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선은 유려한 곡선이고, 쇄골은 쭉 뻗어서 옴푹 들어가 있다. 잡티 하나 없이 하얀 피부는 손으로 누르면 누르는 대로 벌겋게 자국이 남을 것 같았다. 가슴은 오일이라도 바른 것처럼 반질거렸다. 그리고 그사이에 볼록 솟아 있는 유두가⋯⋯. 유두가⋯⋯.

“아⋯⋯.”

우영이 꽉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분홍색 유두라니. 설마 설마 했는데, 진짜 분홍색 유두라니. 이런 게 세상에 존재했다니. 우영의 손가락이 허공을 더듬었다. 만져 보고 싶은데, 그래도 되나, 저렇게 대단한 걸 내가 만져도 되냔 말이다.

사현은 그런 우영을 즐겁게 구경했다. 시시각각 허물어졌다가, 굳었다가, 감격에 흘러내리는 우영의 얼굴이 그렇게 귀여울 수 없었다. 연인이 제 나신을 보며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라도 감상하듯 황홀해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기분은 썩 괜찮다.

“만져 봐. 그래야 나도 널 만지지.”

사현이 우영의 손을 이끌어 자신의 가슴팍 위에 올려놨다. 우영이 움찔 몸을 떨었다. 잠깐 굳어 있던 그의 손가락이 사현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으음⋯⋯.”

사현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우영의 손은 거친 편이다. 붓만 잡고 살아 온 화가라 하기엔, 조각하는 작가들만큼이나 딱딱하고 까칠했다. 그게 살결을 스치자 어깨가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한참 가슴 주위를 배회하던 우영의 손가락이 유륜에서 멈췄다. 그가 흘깃 사현의 눈치를 봤다. 짧게 한숨을 내쉰 사현이 손을 내밀어 우영의 가슴을 꽉 세게 주물렀다.

“아!”

애무라기보다는 꼬집음에 가까운 손길이었다. 우영이 황당하다는 듯 사현을 보자, 사현이 비스듬히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웃었다. 시답잖은 장난인 모양이다. 우영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러고는 엄지로 꾸욱 사현의 유두를 짓눌렀다. 찌릿한 느낌에 사현이 나른히 눈을 감았다.

그때부터 우영의 손놀림이 한층 과감해졌다. 유두를 살살 어루만지기도 하고, 판판한 가슴살을 모아 쥐기도 하고, 검지와 엄지로 유두를 잡아당겼다가 놓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유두가 조금씩 섰다. 사현의 미간이나 눈가도 일그러졌다. 그게 어찌나 야한지. 뒷골이 다 뻐근하게 당겼다. 몇 번이고 마른 침을 삼키던 우영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형.”

“응?”

“빨아 봐도 돼요?”

그 말에 사현이 피식 웃었다. 대충 분위기 보고 입술을 처박으면 되지. 우영은 하나하나 다 물어볼 생각인 듯했다. 귀찮은데, 그 모습이 퍽 귀여워서 응해 주기로 했다.

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우영의 눈이 번뜩였다. 그가 크게 입을 벌렸다. 사현의 유두뿐만 아니라, 가슴을 통째로 삼켜 버릴 수 있을 만큼이나 크게.

“아⋯⋯!”

우영은 유두와 유륜, 그 주위의 가슴살까지 한가득 삼키고는 쭉쭉 힘 좋게 빨아 댔다. 머리를 가볍게 뒤로 젖힌 사현이 우영의 귓불을 주물렀다.

음식 먹을 때도 느꼈지만, 참⋯⋯ 잘 먹어. 뭐든.

사현은 우영이 자신의 가슴을 애무하는 동안 그의 등을 쓸어내리거나, 아래위로 거칠게 움직이는 목울대를 쓰다듬거나, 무릎으로 단단하게 부푼 그의 성기를 은근히 눌러 댔다.

그렇게 오 분이 지나고, 십 분이 흘렀다. 사현의 광대에 발간 열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쾌감에 의한 건 아니었고, 굳이 말하자면 고통 때문이었다.

우영은 덩치만큼이나 빠는 힘이 셌다. 가끔은 유두를 씹어 먹겠다는 듯 이를 세워 깨물거나 잡아당기기도 했다. 나오는 것도 없는데 뭘 그리 열심히 빠는지.

입술을 잘근거리며 참고 또 참던 사현이 결국엔 우영의 어깨를 밀어냈다. 처음엔 밀리지도 않았다. 그래서 두툼한 팔뚝을 탁탁탁 세게 때리고서야 우영을 떨쳐 낼 수 있었다.

와 씨, 가슴 뜯기는 줄 알았네.

사현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다보며 억울함을 삼켰다.

하지만 우영은 그렇게 빨아 놓고도 부족한지 아쉬운 티를 숨기지 못했다. 입술 사이로 붉은 혀가 빼꼼 나와 있었다. 그가 몽롱한 눈동자로 사현의 유두를 바라봤다. 분명 처음엔 분홍색이었는데. 지금은 다홍색이다. 거기다 동그랗게 부푼 게 정말이지⋯⋯ 탐스러웠다.

“통통해졌어요.”

우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유두를 검지로 탁, 튕겼다. 순간 사현의 허리가 크게 들썩거렸다.

“으응!”

직선으로 쭉 뻗어 올라가는 신음은 덤이었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우영이 바보 같은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사현은 숨 쉬는 것도 잊고 버석하니 굳어 있었다.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사현이었다. 이불로 가슴을 가린 그가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그, 그렇게 빨아 놓고 만지면 어떡해!”

어찌나 호된 목소리인지. 우영은 순간 자신이 중죄라도 저지른 줄 알았다. 그러다 화끈거리는 사현의 볼을 보고서야 그가 부끄러워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씨익 입술을 옆으로 짼 우영이 확 이불을 잡아당겼다. 사현이 순식간에 다시 나신이 됐다. 놀란 사현이 이불을 찾아 팔을 휘적거리는데, 우영이 그의 팔을 한 손으로 모아 쥐고 유두를 핥았다.

“읏⋯⋯. 우영아! 하지, 마⋯⋯!”

사현의 목이 확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우영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눈으로 사현의 반응을 살피며 혀끝으로 유두를 누르거나, 혓바닥 전체로 핥아 올렸다.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사현이 질끈 눈을 감았다. 이렇게까지 질기고 집요하게 가슴을 애무당하는 건 처음이다. 보통은 얼른얼른 삽입 단계로 넘어가고 싶어 했으니까. 그래서 간질간질하고 찌릿찌릿한 쾌락에는 면역이 없었다.

그 때문일까. 아랫도리가 꺼떡거리며 비상을 외쳐 댔다. 조루도 아니고, 숫총각도 아니고. 유두를 빨리다 절정에 다다르고 싶진 않았다. 더군다나 애송이인 우영 앞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있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우영이 입술을 새 부리처럼 내밀어 유두를 쪼오옵, 세게 빨아 당기는 순간, 사현은 속절없이 쾌락에 함락당하고야 말았다. 요의처럼 아랫배가 시큰거리더니 곧 뜨끈한 게 성기 밖으로 터져 나왔다.

“아응, 흑⋯⋯.”

시트를 구겨 쥔 사현이 파르르 몸을 떨었다. 젠장, 젠장, 젠장. 내 유두가 이렇게 예민한 신체 기관이었다니. 삼십이 년 평생 처음 깨달았다. 앞으로 옷에 스칠 때마다 발기할까 봐 걱정이 될 정도였다.

사현이 우영에게 잡힌 손을 푸드득 털어 냈다. 신경질 가득한 손놀림에 정신 놓고 그의 유두를 빨던 우영이 눈을 댕그랗게 떴다.

“⋯⋯형?”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 자신이 큰 실수를 했나 싶어서.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는데, 어째 무릎이 축축했다.

우영이 무심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아직 완전히 벗기지 못한 샤워 가운 아래로 희멀겋고 끈적한 액체가 흩뿌려져 있었다. 익숙한 액체였다. 제 것이 터질 듯 발기한 상태긴 한데, 아직 절정에 다다르지는 않았다. 그 말인즉슨 이게 사현의⋯⋯.

우영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사현을 쳐다봤다. 사현이 여전히 허공을 노려보며 종알거렸다.

“내, 내가 요즘 성욕을 너무 방치해서 그래. 절대 조루는 아니다?”

그 말에 우영이 푸흐흐 웃음을 흘렸다. 다행히 비웃음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저보다 훨씬 경험이 많은 사현이라 만족하지 못하면 어쩌나, 저만 신나서 헐떡이다 끝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더 빨면 화낼 거죠?”

우영이 검지로 살살 사현의 유두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유두 끝에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움찔거리는 사현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이 짓을 관둘 수가 없었다.

“오늘 치는 끝났어. 나중에 더 빨아.”

사현이 베개로 가슴팍을 가렸다. 우영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물러났다. 그래도 아직 좋은 게 많이 남았으니 괜찮았다. 그가 사현의 다리를 벌리고 아래로 내려갔다.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막 가운을 치우려는데, 벌떡 일어난 사현이 그의 손을 막아섰다.

“아, 잠깐만. 내가 말 안 한 게 있는데.”

“뭐요?”

“그⋯⋯. 나.”

“네.”

“내가 그게⋯⋯.”

“네.”

“그⋯⋯. 아우, 그냥 봐.”

말을 조각내고 또 조각내던 사현이 에라 모르겠다, 라는 표정으로 풀썩 뒤로 넘어갔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우영이 크리스마스 선물을 풀어 보는 어린아이 같은 얼굴로 가운을 치웠다.

“⋯⋯.”

그리고 딱딱하게 굳었다.

방금 절정에 다다라 촉촉하게 젖어 있는 사현의 성기는⋯⋯ 성기는⋯⋯ 너무 깔끔했다. 그러니까, 음모가 없었다. 맨둥맨둥하고 탱글탱글한 게 예쁜 소시지 같은 생김새였다.

넋 빠진 우영의 얼굴에 사현이 손등으로 눈두덩을 가렸다.

“내가 원래 털이 잘 안 나. 아니, 아예 안 나. 거기도 안 나. 근데 여자들은 그걸, 좀 싫어하더라고. 그래서 자연히 남자도 만나게 됐어.”

그가 어울리지 않게 주절주절 사설을 늘어놨다. 우영이 그런 사현의 팔을 휙 위로 들었다. 매끈하고 보드라워 보이는 겨드랑이가 드러났다. 그러고 보니 팔다리도 하얗기만 하고 털이라곤 없었다.

우영은 동물이나 실험체를 관찰하듯 사현의 몸뚱이 여기저기를 탐험했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툭, 사현의 성기를 건드렸다. 손바닥보다 작은 것이 흔들리며 반갑게 인사를 전해 왔다.

결론은 금방 났다. 우영이 생각하기에 사현은,

“형.”

“왜. 너도 싫어? 털 없는 거?”

“형은⋯⋯.”

“⋯⋯.”

“진짜 요정이 아닐까요?”

……요정이다. 확신할 수 있었다.

“⋯⋯뭐?”

너무나 뜬금없는 말에 사현이 멍청한 얼굴로 우영을 쳐다봤다. 뭐라고? 요정? 그 작고, 날개 달려 있고, 지팡이 들고 다니면서 뾰로롱거리는 그 요정? 사현의 눈가가 께름칙하게 뒤틀렸다.

가끔 우영의 사고를 헤아리기가 힘들다. 원래 천재적인 작가들이 다 그렇지만, 우영은 그렇지 않게 생겨서 그럴 때가 있다. 지금처럼 말이다.

우영이 상체를 깊숙이 숙이고 사현의 성기를 관찰했다. 새로운 유전자를 발견한 과학자 같은 얼굴이었다.

“어떻게 여기 털이 없어요? 얼굴도 이렇게 예쁘고, 몸은 하얗고, 유두는 분홍색인데, 여기에 털도 없어.”

“⋯⋯.”

“요정이 아니고서야 이럴 수가 없어요.”

사현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뭐야, 무서워. 얘 지금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사현이 이걸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나, 고민하는데 우영이 사현의 허벅지 아래를 거머쥐고 들어올렸다. 사현의 하체가 위로 솟아올랐다.

“이것도 빨아도 돼요?”

우영이 물었다.

“⋯⋯그래라.”

사현이 맥 빠진 음성으로 허락했다. 그는 반쯤 우영을 포기했다. 애초의 계획은 서툰 우영을 적당히 놀려 주다가 어른의 노련함으로 그를 가지고 노는 거였는데. 너무 중구난방으로 튀는 섹스라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우영이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둔 듯, 찹찹 입맛을 다시더니 한 입에 사현의 것을 삼켰다. 입 안이 넓어 뿌리까지 단숨에 들어갔다. 후끈한 내벽에 사현이 고개를 뒤틀었다. 허벅지 근육이 바짝 솟아올랐다.

우영은 유두를 빨 때만큼이나 열성적으로 성기를 애무했다. 사실 말이 애무지, 받는 쪽보다 하는 쪽이 만족스러운 행위였다.

“으응, 아⋯⋯. 흣, 아응!”

츕츕, 쪼옥, 쪽, 듣기 민망한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우영은 입을 조이며 기둥을 훑기도 하고, 귀두만 쪽쪽 빨기도 했다. 또 가끔은 동글동글한 고환을 통째로 입에 물기도 했다.

사귄 지 일주일도 안 됐는데 왜 그런 말을 하냐며 얼굴을 붉히던 우영은, 발기가 죽지 않는다며 욕실에서 나오지 않던 우영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방금 사정했던 사현의 성기가 금세 다시 단단해졌다. 그로 모자라 또 절정에 이르려 했다.

“아, 우영아. 우영아, 그만⋯⋯.”

사현이 우영의 머리를 밀어냈다. 하지만 그는 떨어지지 않았다. 며칠 굶은 것처럼 귀두를 빠느라 정신이 없었다.

“흐응, 아! 우영아, 제발⋯⋯.”

사현의 눈가가 괴롭게 일그러졌다. 죽어도 우영의 입에 싸고 싶진 않았다. 그건 너무⋯⋯ 더럽고 불결하니까. 가끔 자신의 정액을 먹어 달라는 파트너들이 있었는데, 사현은 그게 끔찍하리만큼 싫었다.

‘네 배설물을 내가 왜?’

그리 말하면 열에 아홉은 기분 나쁜 티를 숨기지 못했다. 근데 싫은 걸 어쩐단 말인가. 사현 역시 그것을 강요할 생각도, 부탁할 생각도 없었다.

그러니 제발, 제발 좀 떨어져 주면 좋겠는데.

사현이 조금 더 세게, 더 빠르게 우영의 어깨를 두드렸다. 허나 우영은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건지, 모든 의사소통을 상실한 야차처럼 굴었다.

“아흐, 응, 으응, 아! 우영⋯⋯아. 흣!”

그리고 뿌리에서부터 귀두 끝까지 한 번에 쭉 빨리는 순간, 사현이 휙 뒤로 고개를 쳐들며 두 번째 절정에 다다랐다. 뒤늦게 사현의 상태를 눈치챈 우영이 슬쩍 고개를 물렸다.

혀 위로 텁텁하고 쌉싸름한 액체가 넘실거린다. 사현의 정액이었다. 잠깐 혀를 굴리며 맛을 가늠하던 우영이 꿀꺽, 그것을 삼켰다.

그 광경을 오롯이 목도한 사현이 헛웃음을 흘렸다. 쟤 지금 내 정액 먹었어. 먹으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먹었다고.

“하아⋯⋯.”

사현이 길고 자욱한 한숨을 내뱉었다. 우영이 자신의 정액을 삼켰다는 충격과 별개로 사지가 축 늘어졌다. 사정을 두 번이나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직 삽입도 안 했는데, 벌써 지치다니. 사현의 고고한 자존심이 와르르 무너졌다.

그런 사현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영은 몇 번이고 입맛을 다시며 웃고 있었다. 사현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절정에 다다르게 한 것이 그렇게 뿌듯할 수 없었다.

잠깐 숨을 고르던 사현이 툭 우영의 가슴을 밀었다.

“비켜.”

“왜, 왜요? 싫었어요? 별로였어요?”

우영의 머리 위에 우중충한 먹구름이 드리웠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러니까 나와 봐, 좀.”

사현이 대충 대답하며 손을 휘휘 저었다. 우영이 어쩔 수 없이 사현의 다리를 놓아줬다. 그리고 침대 구석으로 비켜 누웠다.

사현이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쓸어 넘겼다. 그 후, 우영의 허리 위에 훌쩍 올라탔다. 엉덩이 아래로 큼지막하게 발기한 우영의 성기가 느껴졌다.

“⋯⋯형?”

예상치 못한 상황에 우영의 속눈썹이 위로 바짝 올라붙었다. 지금 이게 무슨⋯⋯.

엉덩이를 꾸물꾸물 움직여 아래로 내려간 사현이 우영의 홈웨어 팬츠를 쑥 아래로 내렸다. 그러자 퉁, 하고 거대한 덩어리 하나가 튀어 올랐다.

“⋯⋯.”

사현이 잠깐 숨을 멈췄다.

뭐야. 뭐야, 이건. 이거 고추 아닌데. 구렁이 같은데. 아니면 좀 많이 익은 바게트인가.

우영의 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추리닝 바지 아래로 언뜻언뜻 드러나는 실루엣과 가끔 껴안고 있으면 느껴지는 부피감을 말미암아, 그의 성기가 작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근데 이건 좀 너무하잖아.

아니, 이걸 쥐고 자위할 수 있다고? 제 손으론 다 감쌀 수도 없을 것 같은데. 뭐, 솥뚜껑만 한 우영의 손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

놀란 사고가 중구난방으로 널을 뛰었다. 숨 쉬는 것도 잊을 정도니 오죽하겠는가.

시퍼렇게 질린 사현의 얼굴에 우영이 덩달아 겁을 집어먹었다.

“형 거랑 비교하면 너무 못생겼죠⋯⋯. 그, 그래도 깨끗이 씻었는데.”

“⋯⋯못생겼다고? 이게?”

두껍고 꼿꼿하게 선 기둥. 반들반들한 삿갓 모양의 귀두. 적당한 음모. 거기다 탱글탱글한 고환까지. 절대 못생긴 성기는 아니었다. 딱 주인 얼굴을 닮아 정석으로 잘생긴 성기지.

사현이 네 손가락으로 기둥을 감싸 쥐고, 엄지로 귀두를 문질렀다. 손바닥 가득 차는 부피감에 꿀꺽, 마른침이 넘어갔다.

“윽.”

우영이 짧은 신음을 흘리며 질끈 눈을 감았다. 타인이 자신의 성기를 만지는 건 처음이다. 그것도 사현이, 무슨 진귀한 생명체 보듯 뚫어지라 보면서 만지고 있으니 부끄러워서 죽고 싶었다.

“야, 너 진짜⋯⋯ 크다⋯⋯.”

사현이 부드럽게, 하지만 약하지 않게 우영의 것을 아래위로 흔들었다. 그러자 우영의 성기 위로 울룩불룩하게 핏줄이 곤두섰다.

와, 더 커졌어. 한국에 이런 좆이 있다니. 사현이 소리 없이 감탄했다.

“좋은⋯⋯ 거죠?”

“그럼. 좋은 거지. 세상에 작은 성기만큼 쓸모없는 게 없다고.”

사현이 진지하게 말했다. 그 말에 우영이 푸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하지만 웃음도 잠깐이었다. 사현이 하압, 크게 입을 벌려 우영의 귀두를 삼키는 순간,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가 시뻘겋게 불타올랐다.

“흣, 아⋯⋯. 형⋯⋯.”

우영이 애타게 사현을 불렀다. 그만하라는 뜻은 아니었고, 그냥 저절로 그리 됐다. 그가 사현의 눈가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러자 사현이 사르르 눈을 휘며 웃는다. 미치게 야한 미소였다.

사현은 입 안을 터질 듯 메우는 우영의 것이 몹시 버거웠으나 그래도 꾸준히 고개를 움직였다. 우영의 첫 경험인데, 충분히 즐기게 해 주고 싶었다. 그래야 다음이 있고, 또 다음이 있을 테니까. 이렇게 잘생긴 성기를 썩히는 건 국가적인 낭비란 말이다.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린 사현이 두툼한 기둥을 잘근잘근 약하게 씹었다.

“후우⋯⋯. 와⋯⋯, 형 너무 읏, 좋아요⋯⋯.”

우영이 황홀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사현이 그의 것을 문 채로 킥킥거리며 웃었다.

사현은 귀두를 물고 빨거나, 혀만 내어 우영의 것을 핥았다. 마음 같아선 목구멍이 막힐 정도로 그의 것을 머금어 주고 싶은데, 보통 크기도 아니고. 그랬다간 멋없이 헛구역질할 게 분명했다. 침과 콧물도 흘릴 테고. 썩 보기 좋은 몰골은 아닐 것이다.

연애를 일이 년 했으면 모를까. 지금은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나중에, 나중에 해 줘야지. 사현이 아무도 몰래 다짐했다.

사현은 오랫동안 우영의 성기를 빨고, 핥고, 머금었다. 근데 조금씩 더 커지기만 할 뿐, 절정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입술이 찢어질 것 같은데. 입 안이 터질 것 같은데. 혀가 뻣뻣하게 굳은 것처럼 아픈데.

결국 먼저 나가떨어진 건 사현이었다. 앞으로 쏟긴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밭은 숨을 고르고 있는데, 우영이 엄지로 퉁퉁하게 부푼 사현의 아랫입술을 꾹 눌렀다.

“예뻐요, 형. 사랑해요.”

검은 눈동자에 사랑이 바글바글 끓는다. 사현이 실소했다. 도대체가⋯⋯ 고백할 때마다 저렇게 사랑을 쏟아내는데, 마르지 않는 게, 지치지 않는 게 신기했다.

“⋯⋯알아.”

단조로이 대꾸한 사현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우영의 허리 위에 앉았다. 우영이 그의 골반을 받쳐 쥐었다. 그의 만면에 다음은 또 얼마나 대단한 게 있냐는 기대가 서려 있었다.

사현이 검지와 중지를 우영의 입 앞에 내밀었다. 우영이 이게 뭐냐는 표정으로 눈을 끔뻑였다.

“젤이 없잖아. 이래서 2층에서 하려고 한 건데.”

“젤이요?”

우영은 젤이 대체 어디에, 왜 필요하냐는 표정이었다. 사현이 답답한 마음에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놀란 우영이 당장이라도 일어날 듯 상체를 들썩였다.

“제, 제가 얼른 가서 가지고 올까요? 2층에 있어요? 형 침실에?”

“됐어. 섹스 하다가 침대 벗어나는 거, 되게 별로다? 팍 식는다고. 이거나 빨아 봐.”

사현이 손가락을 흔들었다. 잠깐 머뭇거리던 우영이 그것을 삼켰다. 역시나 입 안이 커서 손가락 두 개쯤이야 가뿐하게 삼켰다. 금세 적응한 우영은 사현의 유두를 빨 때처럼 좋다고 쪽쪽 빨아 댔다. 손가락 마디마디를 핥아 올리고, 손끝을 잘근거리고, 물갈퀴처럼 생긴 손의 이음새까지 남김없이 빨았다.

얼마 후, 사현이 축축하게 젖은 손을 빼냈다. 우영의 혀가 아쉽다는 듯 따라 나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사현이 그대로 뒤를 돌아 엎드렸다. 발랑 까진 엉덩이가 우영의 시야에 훤히 드러나는 민망한 자세였다. 하지만 사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건 뭐랄까. 그래, 일종의 눈요기 서비스다.

우영의 무릎에 가슴을 붙이고 엉덩이를 추켜올린 사현이 젖은 손가락으로 뒷구멍을 매만졌다. 오랜만이라 그런가. 제 손가락임에도 등줄기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

우영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보나마나 넋을 놓고 있겠지. 사현이 소리 없이 웃었다.

주름을 매만지던 사현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중지 한 마디가 무리 없이 안으로 들어왔다. 헌데 이물감이 심했다. 사현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래도 한 마디를 더 욱여넣었다. 적어도 세 개는 무리 없이 들어가야 우영의 것을 받을 수 있을 테였다.

그때였다. 우영의 낮은 음성이 엉덩이를 타고 거슬러 올라왔다.

“형.”

“으읏, 왜.”

“그⋯⋯ 설마 형 거기에⋯⋯ 제 걸 넣는 거예요?”

“하⋯⋯. 진짜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구나.”

사현이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만 뒤로 돌렸다. 버석하게 굳은 우영이 보였다. 분명 황홀해 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 밖의 얼굴이었다.

우영이 사현의 허리와 골반을 감싸 훌떡 몸을 뒤집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직선으로 마주했다.

“우리 섹스 하지 말까요?”

우영이 컴컴한 얼굴로 말했다.

“뭐? 갑자기 왜?”

날벼락을 맞은 사현이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우영이 사현의 허리를 쓰다듬으며 우물우물 읊조렸다.

“제 거가 형 거기에 들어가면⋯⋯ 형 죽을지도 몰라요⋯⋯. 아니, 죽진 않더라도 되게 아프고 크게 다칠 것 같은데⋯⋯. 형 병원 가는 것도 싫어하잖아요.”

“⋯⋯.”

“그깟 욕정이 뭐라고⋯⋯. 저는 형이 아픈 거 싫어요. 진짜 너무, 너무 끔찍하게 싫어요. 아프지 마세요.”

“하아⋯⋯.”

사현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우영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가슴속이 간질간질했다. 혀가 자꾸 안으로 말렸다.

이 사랑스러운 생명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새벽녘부터 제 이름을 부르며 자위할 정도로 욕정에 목말랐으면서, 제가 아플 것 같으니 하지 말잔다.

그건 입에 발린 말도 아니었고, 같잖은 배려도 아니었다. 우영은 정말 진심으로 제가 아픈 게 싫은 것이다. 사현이 우영의 볼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자기야. 우영아.”

“네.”

“인간의 몸은 생각보다 아주 많은 걸 할 수 있어.”

“그래도⋯⋯.”

“그리고, 내가 하고 싶어.”

“⋯⋯.”

“아프고 괴로운 거였으면 너한테 하자고 안 했지. 브런치 먹다 말고 섹스 타령을 했겠니?”

“⋯⋯.”

“하자. 나 하고 싶어.”

사현이 발딱 서 있는 자신의 성기를 우영의 허리춤에 문질렀다. 축축하게 젖은 선단이 달팽이처럼 미끈한 길을 만들었다.

우영의 광대가 붉게 달아올랐다. 사현의 하얀 나신과, 제가 빨아서 탱탱하게 솟아오른 유두와, 발기한 성기를 보고 있자니 눈앞이 아찔했다.

그래, 하자. 사현이 하고 싶다잖아. 그가 바라는 건 못 들어줄 게 없었다.

우영이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거, 거기가 젖어야 하는 거예요?”

“축축하고 부드러워져야 해. 그래야 네 게 들어와도 안 아파.”

“그럼 제가 빨까요?”

“뭐?”

“거기요. 제가 빨면,”

“야 무슨, 그런⋯⋯ 그런 소리를 해.”

사현의 낯이 알루미늄 캔처럼 구겨졌다. 거기를⋯⋯ 뒷구멍을⋯⋯ 빤다니. 한 번도 없던 일이다. 상상도 해 본 적 없었다. 앞서 말했듯, 사현은 불결한 짓을 쾌감으로 느낄 성격이 아니었다.

“더럽잖아.”

사현이 음식물 쓰레기라도 삼킨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우영이 그를 따라 얼굴을 찌푸렸다. 도무지 사현의 사상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뭐가 더러워요. 하나도 안 더러워요.”

그 당당함에 당황한 사현이 벙긋벙긋 입을 움직이는데, 우영이 그대로 사현을 뒤엎었다. 눈 깜짝할 새에 사현이 아래, 우영이 위가 됐다. 그리고 쩌억, 엉덩이가 벌어졌다. 은밀한 골을 스치는 우영의 콧바람에 사현이 퍼덕퍼덕 다급하게 팔을 휘저었다.

“우영아. 우영아, 안, 하으응!”

우영의 후끈한 입술이 그대로 주름과 맞물렸다. 사현의 동공이 확 작아졌다. 믿을 수 없는 자극이었다. 손가락이나 성기를 넣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훨씬 뜨겁고, 습윤하고, 야했다.

우영은 몇 번이나 해 왔던 일인 양 능숙하게 혀를 놀렸다. 사실 무언갈 핥고 빠는 것에 얼마나 큰 능력과 재주가 필요하겠느냐마는. 그의 혀가 주름을 샅샅이 핥고, 펼 때마다 사현은 까무러치기 직전이었다.

“아흐, 읏, 응, 아! 우영⋯⋯아. 하으응⋯⋯.”

이불에 이마를 묻은 사현이 부르르 엉덩이를 떨었다. 우영은 혀마저도 힘이 셌다. 단단하게 닫힌 주름을 파헤치고는 쑤욱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깊게 핥으면 핥을수록 그의 앞니나 아랫니가 주름을 긁어 댔다.

우영이 입을 더 크게 벌리고 혀를 깊이 쑤셔 넣었다. 혹 사현이 도망갈까, 팔로 허벅지를 말아 쥐고는 쭙쭙, 아주 옴팡지게 빨아댔다.

사현이 벅벅 애꿎은 이불을 잡아 뜯었다. 언뜻 내려다본 제 아래가 또 사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만큼 자극적이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좋았다. 뇌가 말랑말랑해지는 것 같았다. 분명 불결하고 비위생적인 일인데. 이제껏 몰랐다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아흐윽, 응, 아아⋯⋯.”

사현의 신음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우영은 사현의 뒷구멍이 젤리처럼 흐물흐물하게 녹을 때까지 혀를 멈추지 않았다. 못해도 이십 분은 빨아 댄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우영의 입술이 추우웁, 듣기 민망한 소리와 함께 떨어져 나갔다. 척척하게 젖은 사현의 뒷구멍이 벌름거리며 붉은 속살이 보였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우영이 그것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여태까지 빨았는데, 보고 있으니 또 빨고 싶었다. 그런 우영을 눈치챈 사현이 얼른 몸을 뒤집었다.

“그만해.”

사현이 마치 떼쓰는 강아지를 훈계하듯, 손바닥을 내보이며 말했다. 우영이 아쉽게 아랫입술을 핥았다.

“누워.”

사현의 명령에 우영이 느릿하게 침대에 누웠다. 그 위로 올라탄 사현이 자신의 뒷구멍에다 검지를 집어넣었다. 구멍이 그것을 포옥, 부드럽게 먹어치웠다. 우영이 신나게 빨아 댄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사현이 중지까지 집어넣으며 눈썹을 찌푸리는데, 그걸 보던 우영이 넌지시 물었다.

“제가 할까요?”

“아니!”

사현이 눈을 부릅뜨며 그의 호의를 거절했다. 또 무슨 짓을 어떻게 할 줄 알고. 손가락 쑤시다 다시 혀를 집어넣으면, 오늘의 섹스는 거기서 끝이었다.

이글거리는 우영의 눈동자에 마음이 급해진 사현이 대충 구멍을 풀었다. 그 후, 꺼떡거리는 우영의 성기를 거머쥐고 그 위로 천천히 엉덩이를 내렸다.

“아윽.”

원래 부피라는 게, 보는 것보다 쥐었을 때 훨씬 큰 법이다. 근데 그걸 삼키는 건 훨씬 훨씬 크고 버겁다. 우영의 혀 놀림에 축축이 젖었던 등줄기가 단숨에 건조해졌다.

“윽⋯⋯.”

우영 역시 짧은 신음을 흘렸다. 귀두가 확 조이는 게, 입 안이 다 말랐다. 하지만 차마 조이지 말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사현의 얼굴이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형. 많이 아파요?”

우영이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사현의 볼을 쓰다듬었다. 사현이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어 우영의 손을 털어 냈다.

“후우⋯⋯. 거기 말고, 가슴이나 좀 빨아 봐.”

그 말에 우영이 냉큼 사현의 가슴을 빨았다. 반쯤 발기가 죽은 사현의 성기도 아래위로 슥슥 흔들어 줬다. 그 손놀림에 단단하게 뭉쳤던 사현의 승모근과 어깨가 살짝 아래로 내려앉았다.

“하으으⋯⋯, 읏.”

“하아⋯⋯.”

두 사람의 신음에는 쾌락이 거의 섞여 있지 않았다. 사현의 구멍은 몹시 천천히 우영의 것을 삼켰다. 그럴수록 이물감과 버거움이 커졌다. 배 속이 팽팽하게 벌어지는 듯했다. 오장육부가 죄다 위로 밀리는 것 같았다. 우영의 것은 커도, 커도, 너무 컸다.

우영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현의 안이 어찌나 좁은지, 누가 두 손으로 성기를 걸레처럼 비틀어 짜는 것 같았다. 상상하던 섹스와는 전혀 달랐지만, 그래도 입을 앙다물고 버텨 냈다. 저도 아픈데, 사현은 오죽하겠나.

수 분이 흐르고, 마침내 사현의 구멍 속으로 우영의 성기가 모두 사라졌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어깨에 이마와 턱을 묻은 채 고통을 내쉬었다. 잠시 굳어 있던 사현이 허리를 들썩였다. 허나 미미한 움직임이었다. 허리고 아랫배고, 너무 뻐근하고 아파서 움직일 엄두가 안 났다.

울상을 한 사현이 눅눅한 음성으로 말했다.

“못⋯⋯ 움직이겠어.”

“네?”

“네가 움직여 봐. 살살, 천천히 뺐다가 넣는 거야.”

“아, 네.”

우영이 사현의 양쪽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느릿하게 올렸다가, 더 느릿하게 아래로 내렸다. 그럴 때마다 사현의 구멍이 꿈틀거렸는데, 처음 삽입할 때와는 전혀 다른 조임이 느껴졌다. 분명 쾌감이었다. 오르가슴이라고도 하는 그 느낌 말이다.

어금니를 세게 씹은 우영이 손을 움직이는 속도를 조금, 아주 조금 올렸다. 그렇게 얼마나 왕복했을까. 사현의 구멍이 훨씬 부드러워졌다. 숨을 고른 사현이 우영의 귀에 속삭였다.

“흐으, 움직이다 보면 살짝 도톰하게 나와 있는 부분 있거든? 거기가 전립선인데. 거기를 노려야, 아으응!”

“여기요?”

사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우영이 삽입할 때부터 알아챈 지점을 향해 성기를 푸욱 깊게 찔러 넣었다.

“아⋯⋯ 아아⋯⋯.”

사현의 고개가 휙 뒤로 넘어갔다. 이렇게나 간단히, 금방 찾아 낼 줄이야. 폭격 같은 쾌감이 내리쳤다. 오랜만에 자극당하는 전립선이 찌릿찌릿했다. 척추가 아릿할 정도였다.

“와, 형⋯⋯.”

우영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눈을 크게 떴다. 사현이 언질 준 전립선을 긁는 순간, 내벽이 확 조이더니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말랑해졌다. 처음에는 그의 뒷구멍에 씹힌 성기가 그대로 똑 잘릴 것 같더니. 지금은 뜨끈하고 부드럽게 수축하는 내벽에 이성이 똑 잘릴 것 같다.

“으응, 그, 그렇게 움직⋯⋯이면 돼.”

붉어진 눈두덩을 한 사현이 말했다. 우영이 코로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꿈틀거리는 사현의 내벽을 따라 정신이 깜빡깜빡 점멸했다. 사현의 낯에도 고통이 희미해졌고. 이제부터는 꿈에 그리던, 그런 섹스를 해도 되는 걸까.

우영이 사현의 눈치를 보며 느릿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흐읏, 응, 아! 아아, 우영아⋯⋯.”

“하아⋯⋯. 네, 형.”

“좋, 아⋯⋯. 거기, 좋아⋯⋯.”

사현이 우영의 목을 껴안았다. 그리고 그의 목덜미에 후끈거리는 이마를 비볐다. 우영이 질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가끔, 아주 가끔 사현이 이렇게 애처럼 굴 때마다 온몸이 간지러웠다. 보드라운 깃털에 둘러싸인 것 같기도 하고, 벌레가 몸을 타고 기어오르는 것처럼 소름이 돋기도 했다.

말주변이 없어 제대로 묘사하기가 어렵다만, 어쨌든 좋아 죽겠다는 뜻이다.

“으응, 읏, 응, 흡, 아아⋯⋯.”

열에 달뜬 사현의 신음이 우영의 귓바퀴를 녹였다. 우영이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사현의 얼굴, 체온, 신음, 구멍 등 그의 존재 자체가 응축된 리비도인데. 이렇게 느긋하게 움직이고 있으니 감질이 나 죽겠다.

사현의 등허리를 쓰다듬던 우영이 참지 못하고 그를 침대에 눕혔다. 놀란 사현이 무어라 하기도 전에, 그의 다리를 양옆으로 쩍 벌리고 살짝 빠진 성기를 퍽! 쑤셔 넣었다.

“흐잇!”

사현의 발가락이 동그랗게 안으로 말렸다. 우영의 귀두가 거칠게 전립선을 긁고 들어온 것만으로도 눈이 뒤집힐 판인데 배 속 깊은 곳을 후려 맞으니 아주 전신이 녹는 것 같았다. 사현의 성기가 크게 박동하더니 픽, 맥없이 정액을 싸질렀다.

광대가 대번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또, 또 이렇게 절정에 다다르다니. 제 몸이 이다지도 쾌락에 나약했다니.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 그리고 신기함이 동시다발적으로 올라왔다.

사현이 멀건 천장을 보며 무너진 자아를 추스르고 있는데, 시야에 우영의 예쁜 얼굴이 드리웠다.

근데 어째 우영의 눈이 좀 이상했다. 평소엔 맑고 또렷한 눈동자가 흐리멍덩했다. 초점도 엇나가 있고, 눈꺼풀도 느슨하게 풀려 있었다. 꼭 약이라도 빤 것 같은, 아니면 술에 취한 것 같은 얼굴이었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사현이 우영을 부르기 위해 입을 벌리는데, 그 안으로 우영의 혀가 쏟아졌다.

“우음, 응⋯⋯.”

우연인지, 의도인지 사현의 입을 효과적으로 틀어막은 우영은 그때부터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사현의 한쪽 어깨를 지그시 내리누르며 거칠게 허리를 움직였다. 눅진하게 풀린 사현의 구멍 속으로 우람한 성기가 빠르게 들어갔다 나오길 반복했다.

“아욱, 읏, 응, 우응⋯⋯.”

사현의 속눈썹이 깜빡깜빡 빠르게 움직였다. 빠듯하게 벌어진 내벽을 긁어 대는 성기가 버거웠다. 고통이 버거운 게 아니라, 폭우처럼 쏟아지는 쾌락이 버거웠다. 방금의 사정으로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내벽과 전립선이 자비 없이 콱콱 짓눌리고, 긁히고, 할퀴어졌다.

뱃가죽이 뚫리는 것 같았다. 전신의 땀구멍이 열렸다가 닫히는 게 지나칠 정도로 선연히 느껴졌다. 그 거대한 쾌락을 감당하지 못한 사현이 우영의 어깨와 팔뚝을 마구 긁어 댔다.

하지만 우영은,

“후우⋯⋯, 형⋯⋯. 사현이 형⋯⋯.”

“흐응, 응, 아으응⋯⋯.”

“아⋯⋯. 형 여기 진짜 좋아요⋯⋯.”

“우읏, 흡, 우영, 아흑, 너무 깊, 으응!”

“따뜻하고, 좁아⋯⋯, 윽.”

따위의 유치한 감상만 줄줄이 읊어 댔다. 사현이 눈을 부릅뜨고 우영을 노려봤다. 그는 머리 한쪽이 날아간 사람처럼 굴었다. 진짜 저 몰래 약이라도 빤 게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였다.

살이 닿았다가 떨어지며 찰박찰박 민망한 소리가 울렸다. 그사이에는 사현의 억눌린 신음과 우영의 거친 호흡, 그리고 그가 내뱉는 단조로운 찬탄들이 섞여 있었다.

삽입은 점점 더 깊어졌다. 미처 들어오지 못했던 우영의 뿌리가 은근히 구멍 안을 침범했다. 그럴 때마다 그의 골반에 눌린 사현의 허벅지 뒤쪽이나 엉덩이가 납작해졌다.

사현이 사지를 힘껏 버둥거렸다. 이토록 깊은 삽입은 쾌락보다 고문에 가까웠다. 간신히 우영의 입술에서 헤어 나온 사현이 더듬더듬 신음 섞인 불평을 내뱉었다.

“너무, 흐윽, 너무 깊⋯⋯다고. 으읏⋯⋯.”

“후우, 읏, 형⋯⋯. 사현이 형⋯⋯.”

그러나 우영은 사현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사현의 목덜미에 코를 욱여넣고 스읍스읍, 짐승처럼 사현의 냄새를 들이켜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와중에도 그의 두툼하고 묵직한 고환이 턱턱 꼬리뼈를 쳐 댔다.

사현의 눈썹이 매섭게 오르막을 그렸다. 그가 우영의 단단한 가슴을 쾅쾅 주먹으로 내리쳤다.

“야! 구역질할 것 같다고!”

비명 같은 고함에 우영이 그제야 움직임을 멈췄다. 콧잔등이 살포시 구겨진 게 허리 짓을 멈춘 것이 상당히 못마땅한 듯했다.

“에이⋯⋯. 아닌데⋯⋯.”

“뭐가 아니야!”

“이렇게 눌러 줄 때마다,”

“하으응!”

“형 여기가, 부들부들 떨리는걸요.”

우영의 성기가 단전 바로 아래까지 파고들었다. 지나치게 친절한 예시였다. 그의 말마따나 확 수축했다가 이완되며 잘게 경련하는 뒷구멍을 사현 자신도 선연히 느낄 수 있었다.

우영의 입가에 비죽 웃음이 스몄다. 그 꼴이 어찌나 얄미운지. 사현이 발로 우영의 어깨를 밀어냈다.

“배가 터질 것 같으니까 그렇지! 아프다고!”

어딘가 뾰로통한 사현의 신경질에 우영이 그의 발목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리고 복사뼈에 쪽쪽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너무 좋은 건 아니고요?”

“너⋯⋯.”

“이것 봐요.”

우영이 발목을 쥐지 않은 손으로 사현의 성기를 감쌌다. 엄지로 슥슥 귀두를 문지르자 축축한 점액이 묻어났다. 사현은 우영이 뒤를 쑤실 때마다 이렇게 질펀한 액체를 싸질렀다. 그러면서 싫다니, 깊다니, 아프다니. 웃기지도 않았다.

“마, 만지지 마.”

사현이 우영의 손을 쳐냈다. 그러나 커다란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싫은데.”

우영이 사현의 복사뼈를 날름날름 핥으며 이죽거렸다. 그 얼굴이 어찌나 낯선지. 사현이 넋을 잃고 멍하니 우영을 쳐다봤다. 우영이 그런 사현의 이마와 볼에 쪽쪽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형. 좋아해요.”

“가, 갑자기 웬 고백이야.”

“좋아해요, 진짜.”

우영이 사현이 허리를 감싸 번쩍 몸을 들어올렸다. 그대로 뒤로 밀자, 사현이 침대 헤드와 우영 사이에 갇혔다.

“너 뭐 하려고⋯⋯.”

붉게 달아올랐던 사현의 볼이 순식간에 하얘졌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우영의 양쪽 무릎이 허벅지를 벌리고, 아래를 단단히 고정했다.

사현이 공포 영화라도 보듯, 겁에 질려 아래를 내려다봤다. 반쯤 빠진 우영의 성기와 눈치 없이 바짝 서 있는 자신의 성기가 보였다. 그 낯부끄러운 광경을 허망하게 내려다보고 있는데, 우영이 쾅! 그대로 성기를 처박았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사현이 휙 뒤로 넘어갔다. 그의 뒤통수가 텅, 침대 헤드에 부딪혔다. 하지만 고통일랑 하등 느껴지지 않았다. 배 속이 저릿했다. 골반과 꼬리뼈는 전기라도 통하는 것처럼 찌릿찌릿했고, 아랫배와 고환이 시큰거리는 게 또 절정에 다다르려 했다.

사현이 아랫입술을 씹으며 절정을 참는데, 우영이 그의 뒤통수를 다정하게 감싸 쥐며 속삭였다.

“어어, 조심해요.”

“네가 그렇게 움직이지만 않, 흐잇!”

우영은 사현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지 않았다. 콱콱 성기를 넣었다가 빼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현이 질끈 눈을 감았다. 머릿속이 지글지글 끓었다. 큼지막하고 두툼한 귀두가 구멍 깊은 곳을 짓칠 때마다 허벅지가 다 파르르 떨렸다.

우영은 찰나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사현의 귓불을 빨다가 목덜미를 핥기도 하고, 엄지로 예민해진 유두를 짓누르거나, 활짝 펴진 주름을 신기한 듯 매만지기도 했다. 무엇 하나 자극적이지 않은 게 없었다.

“아흐, 응, 으응, 우영, 우영아⋯⋯. 좋아. 힉! 아, 흐으⋯⋯.”

“하아, 하아⋯⋯. 형⋯⋯.”

사현이 손을 위로 올려 침대 프레임을 움켜쥐었다. 그러지 않고는 우영의 아랫도리에 휘말려 두루마리 휴지처럼 돌돌 말릴 것 같았다. 무슨 소리냐고? 나도 모르겠다, 시팔.

그때, 우영이 사현의 내벽을 입구부터 깊은 곳까지 부욱, 직선으로 긁으며 단번에 들어왔다. 사현이 하압,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갈비뼈가 부풀면서 아래가 확 움츠러들었다. 우영이 윽, 어금니를 짓씹었다.

“아, 형. 그렇게 조이면,”

“아 씨발, 너무 좋⋯⋯, 흐읏, 응! 아⋯⋯.”

사현이 목을 쳐들고 우영을 바라보며 부들부들 떠는데, 난데없이 배 속이 뜨끈해졌다. 내벽이 축축하게 젖는 느낌이었다.

“큭!”

우영이 사정한 거였다. 전혀 기미도 없더니 갑자기.

사현이 의아한 눈으로 아래를 살폈다. 혹 우영이 사정한 게 아니라 제 뒷구멍이 터진 게 아닐까, 싶어서. 그쪽이 더 확률이 높았다. 우영의 것은 여전히 크고 빠듯하게 뒤를 채우고 있었으니까. 방금 사정했는데, 그럴 리가 없었다.

그때, 우영이 사현의 목을 잘근잘근 깨물며 속삭였다.

“하아⋯⋯. 왜 갑자기 욕을 하고 그래요.”

“뭐? 네 그 커다란 게 뒤를 막 들쑤시는데 어떻게 욕을 안 해?”

“그래도 하지 마세요. 형이 너무 섹시해서 제가 싸 버렸잖아요.”

우영이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다는 듯 눈을 어그러트렸다. 쾌감에 달뜬 사현의 얼굴이라니. 벙긋 무방비하게 벌어진 붉은 입술과 느슨히 풀린 눈꺼풀과 그의 눈동자에 박힌 제 얼굴이 너무 좋아서, 그 얼굴로 욕을 지껄이는 게 정말 말도 못 하게 좋아서. 절정에 다다른다는 자각도 없이 정액을 싸질러 버렸다.

“허⋯⋯. 아무튼 쌌으면 됐지. 나와.”

사현이 툭툭 우영의 팔뚝을 두드렸다. 우영이 싼 게 맞다니 다행이었다. 이 나이에 뒷구멍에다 약을 바를 필요는 없을 듯하니. 그러고 보니 콘돔도 안 했다. 이 뒤처리를 어찌한담.

오늘의 섹스는 무엇 하나 사현의 계획을 따라주는 것이 없었다. 원래 계획은 서툰 우영을 은근히 놀려 주다 느릿하게 섹스한 후, 노곤히 잠드는 거였는데.

사현이 규칙 없이 생각을 열거하고 있는데, 우영이 갸웃 고개를 뒤틀었다.

“왜요?”

“왜요, 라니.”

“더 해요. 형은 세 번이나 쌌잖아요. 저도 세 번 쌀래요.”

“⋯⋯.”

사현의 낯이 떨떠름하게 뒤틀렸다.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기브 앤 테이크가 확실했다고? 오늘 낯설다, 너. 이상해. 무서우니까 그러지 마. 하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우영의 표정이 너무, 너무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한 번 한 것만으로도 배 속이 저릿저릿한데. 앞으로 두 번을 더 하겠다고. 눈앞이 깜깜했다. 배가 터질 것 같다, 배가 터질 것 같다, 우는소리를 하긴 했으나 지금은 진심으로 겁이 났다. 저 두껍고 단단한 덩어리가 계속해서 뒤를 헤집으면 정말 응급실에 실려 갈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사현이 필사적으로 우영을 밀어냈다.

“내일, 내일 다시 해.”

“내일은 내일 치를 해야죠.”

우영이 무릎걸음으로 뒤로 물러서며 사현의 골반을 아래로 내렸다. 사현이 풀썩 침대로 눕게 됐다. 우영이 그대로 사현의 엉덩이를 벌리고 조금 빠졌던 성기를 다시 욱여넣었다. 녹진하게 풀어진 뒷구멍이 냉큼 그의 것을 받아 물었다. 사현의 턱이 위로 쳐들렸다.

내일 치라니. 무슨 빚도 아니고. 빚쟁이처럼 매일매일 수금이라도 하겠다는 걸까. 돈 대신 섹스로? 그렇게 생각했더니 모골이 송연해졌다. 생전 금전 관련 문제는 없었거늘. 부채에 시달리는 듯한 압박감과 부담감에 목구멍이 쓰렸다.

하지만 그마저도 입 안으로 쏟아지는 우영의 혀에 금세 사라졌다.

사현이 아무렇게나 구겨진 이불을 마구 쥐어뜯었다. 벌름거리는 뒷구멍을 헤집는 혀에 눈앞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속이 더부룩한 게, 멀미를 하는 건지. 아니면 우영이 싸지른 정액이 탈이라도 난 건지.

우영의 섹스는 지나치게 친절했다. 뒤가 아프다느니, 쓰라리다느니 하면 그대로 쑥 성기를 빼내곤 사현의 몸을 뒤집었다. 그러고는 둔부를 양쪽으로 쩍 갈라내고 붉은 구멍을 관찰했다.

문제는 그저 다치진 않았는지, 어디가 터지진 않았는지만 보면 될 것을, 꼭 다른 짓을 한다는 거였다. 예를 들면 손가락을 넣고 전립선만 집요하게 문지른다거나, 또는 지금처럼,

“아응, 아⋯⋯, 흐으, 읏, 으응⋯⋯.”

혀를 곧추세워 안을 휘젓는다거나.

벌름거리는 구멍이 주책맞게 우영의 혀를 빨아 당겼다. 가끔 주름을 삭삭 핥기라도 하면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며 더 큰 자극을 졸라 댔다. 모두 사현의 의도를 벗어난 행동이었다.

침대 위에 널브러진 사현이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막 섹스를 시작할 때만 해도 두껍게 쳐 놓은 암막 커튼 아래로 빛이 스몄는데. 지금은 온전히 어둠이었다.

대체 몇 시간이나 몸을 흔든 건지. 아니, 우영에게 잡혀 흔들린 건지. 그동안 몇 번이나 쌌더라. 아랫도리가 축 늘어진 채 뚝뚝 무른 눈물만 쏟아내는 걸 보니 진즉 한계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우영, 아⋯⋯. 그만⋯⋯. 응? 그만⋯⋯.”

사현이 팔을 뒤로 뻗어 우영의 어깨를 밀어냈다. 하지만 우영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니 어느 샌가부터 우영은 사현의 말에 반응이 없었다. 고의로 무시한다기보다는 정말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와중에도 아프다는 소리는 칼같이 인지하고 이렇게 고문 같은 애무를 해 댔다.

사현이 무어라 하든, 자신이 만족할 만큼 혀를 놀린 우영이 다시금 성기를 맞춰 왔다. 모든 반항과 거부를 상실한 사현이 몸에 힘을 쭉 뺐다. 덕분에 우영의 귀두가 폭 부드럽게 삼켜졌다. 내벽 깊은 곳에 맺혀 있던 정액이 삐직삐직 구멍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우영이 짙은 한숨을 내쉬며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사현의 안은 정말이지 대단하다. 뜨겁고 좁은데, 앙칼지다. 그러다가도 가끔은 부드럽고, 미끌거렸다. 그 매력에 도무지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어디 구멍만 대단하랴. 매끈하면서도 탄탄한 나신과, 땀에 푹 젖어 둔탁하게 흔들리는 머리칼과, 평소에는 볼 수 없는 퍼진 얼굴이, 연하게 부푼 눈두덩이 사무치게 좋았다.

어금니를 꽉 문 우영이 빠르게 허리를 움직였다. 철퍽철퍽, 철벅철벅, 착착. 축축하게 젖은 살들이 붙었다가 떨어지는 소리가 야했다. 벌겋게 달아오른 허벅지와 엉덩이가 쓰라리기도 했다.

“아으, 흐, 으응, 응⋯⋯ 좋아. 우영아⋯⋯. 좋아⋯⋯.”

사현이 우영의 어깨에 이마를 문질렀다.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우영은 학습력이 좋다. 삽입이 반복될수록 허리 짓이 묘하게 달라졌는데, 전립선만 긁어 누른다거나, 허리를 좌우로 움직이며 깊은 곳을 짓누른다거나, 부러 애꿎은 곳을 살살 문지르다가 짜증을 내려 하면 아무 말도 못 하게 좋아하는 곳을 콱콱 처박아 주기도 했다.

“흐읏, 응, 아, 아, 하으응⋯⋯.”

“하아, 형. 좋아해요. 네? 좋아해요⋯⋯.”

우영이 절절한 고백을 부르며 사현의 손목을 씹었다. 옴폭 파인 흉터는 혀를 내어 핥기도 했다. 사현이 몽롱한 눈동자로 그것을 응시했다.

전신에 우영의 잇자국이 없는 곳이 없었다. 우영은 두 번 정도 사정한 후부터 이상할 정도로 사현의 몸을 씹어 댔다. 흔히 입술 자국을 남겨 놓는 목덜미나 가슴팍뿐만 아니라, 어깻죽지나 팔뚝, 배꼽 아래와 복사뼈, 종아리에도 입술을 비볐다.

그만 좀 씹어. 내가 육포냐. 네 식욕이 엄청나다는 거, 원래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증명하지 않아도 돼. 그 말이 혀끝에서 살랑거렸으나 구태여 뱉진 않았다. 말해 봐야 들어 처먹지도 않을 거, 말할 체력이라도 아끼는 게 나았다.

우리의 섹스가, 아니 우영의 섹스가 쉽게 끝나지 않을 듯하니.

그리고 실로, 사현은 늦은 새벽. 까무룩 기절하듯 잠이 들고서야 올가미 같은 섹스의 늪에서 도망칠 수 있었다.

* * *

“사현이 형.”

침대에 걸터앉은 우영이 이불 속에서 사현을 캐냈다. 웅크린 사현이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벌써 일곱 시가 다 되어 가는데. 술을 마셔도 여섯 시만 되면 벌떡벌떡 일어나던 사람이 오늘은 영 깨어날 기미가 없었다.

우영의 커다랗고 뜨거운 손이 사현의 앞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 하지만 사현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처연하게 감긴 속눈썹이 꼭 인형 같았다.

우영이 사현의 옆에 천천히 몸을 뉘었다. 그리고 매끈한 사현의 어깨에다 꾹꾹 입술을 눌렀다. 아침부터 껴안는 사현의 나신이라니. 너무 좋아서 숨이 다 막혔다.

“형. 일어나요.”

“⋯⋯.”

“사현이 형.”

“⋯⋯.”

우영이 소곤소곤 속삭이듯 말했다. 사현을 깨우기 위해 왔으나, 그가 깨지 않길 바랐다. 그의 평화를 부수고 싶지 않았다. 출근이고 뭐고, 이렇게 늘어지라 자다가 늦은 오전에 저와 여유로이 아침을 먹고, 또 껴안고 뒹굴었으면 좋겠다.

사현을 꼭 안고 있던 우영이 넌지시 입술을 달싹였다.

“사현아.”

“⋯⋯.”

사현은 대답이 없었다. 홀로 신난 우영이 사현의 귓바퀴를 핥듯 감미로이 속삭였다.

“좋아해, 사현아.”

“⋯⋯혼난다.”

탁한 음성에 우영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사현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우영이 킥킥거리며 그의 아랫입술을 빨았다가 놨다.

“일어났어요?”

“응. 몇 시야?”

“일곱 시요.”

“아⋯⋯. 벌써?”

사현의 음성에 미약한 짜증이 묻어났다. 잠이 모자란 모양이었다. 고집스레 눈을 감고 있는 걸 봐선, 그 좋아하는 일도 오늘은 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우영이 멀찌감치 있던 이불을 끌어와 사현을 감싸고, 그 채로 그를 품에 안았다.

“일어나야죠. 출근 시간 다 됐어요.”

말과 행동이 완전히 따로 놀았다. 사현이 피식 웃으며 우영의 가슴팍에 파고들었다. 우영이 사르르 눈을 휘며 사현을 조금 더 세게 보듬어 안았다. 작고 말랑한 사현, 아침이라 무방비한 사현, 이렇게 안고 있어도 미운 소리를 하지 않는 사현, 당연하다는 듯 제 품을 파고드는 사현이 말도 못 하게 좋았다.

“제인 실장님한테 형 오늘 출근 못 한다고 연락할까요?”

“음⋯⋯.”

“제가 할게요. 금방 답장 오실 거예요.”

“안 돼. 저번 주에 너무 놀았어. 이번 주에 중요한 이벤트도 많고, 뉴욕에서 작품들도 들어온단 말이야.”

사현이 살포시 미간을 좁히며 스케줄을 정리했다. 그가 우영의 머리칼을 가만가만 쓸어 넘겼다. 반듯한 이마가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근데 묘하게 이상한 기분이 든다. 자신은 부스스한 몰골에, 텁텁하게 잠긴 목소린데. 우영은 상당히 멀끔했다. 눈도 반짝반짝하고. 평소 자고 일어나면 비죽비죽 곤두선 머리칼에 퉁퉁 부은 눈두덩을 한 채 느릿하게 거실로 나왔던 것 같은데. 거기다 은근히 나는 린시드 오일 냄새까지.

“너 안 잤어?”

“네.”

“안 자고 그림 그렸어? 밤새?”

“네.”

단호한 긍정에 사현의 입술이 해괴하게 뒤틀렸다. 첫 섹스를 장대하게 끝내자마자, 잠도 안 자고 그림만 그렸다고? 설마⋯⋯.

“뭐⋯⋯ 첫 섹스에 대한 환희를 그림으로 표현하기라도 한 거야?”

“⋯⋯.”

우영이 꾹 입을 다물었다. 좌우로 흔들리는 눈알을 보아하니, 사현의 가늠이 맞는 듯했다. 사현의 만면에서 대번에 잠기운이 사라졌다.

“진짜?”

“⋯⋯.”

“나 볼래.”

“아, 싫어요. 아직 미완성이니까 나중에 보세요. 형 출근하면 마저 그릴 거예요.”

사현이 일어나려 몸을 들썩이자 우영이 팔에 잔뜩 힘을 주고 그를 옭아맸다. 사현이 그대로 이불 더미에 푹 처박혔다. 뭐 얼마나 활기찬 움직임이었다고 전신이 찌르르했다.

사현은 그제야 치열하고, 힘겨웠던 어젯밤을 상기했다. 어쩐지 눈꺼풀이 심하게 무겁더라니. 뼈마디가 쑤시더라니. 목구멍이 따갑더라니. 입술과 유두가 아릿하더라니. 뒤가 화끈거리고 엉덩이와 사타구니가 당기더라니.

자각하지 못하고 있던 통각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사현이 마른세수를 했다.

“야.”

“네?”

“세 번만 한다며.”

“⋯⋯.”

“세 번만 한다며! 너 어제 몇 번 했어? 나 자고도 더 했지? 어? 뒤가 쓰리잖아! 이 짐승 같은 애송이가⋯⋯.”

사현이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우영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우영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나름대로 거짓을 위한 준비였으나, 안타깝게도 사현은 그 미약한 움직임을 놓칠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저 세, 세 번밖에 안 했어요.”

“이제 나한테 거짓말도 하니, 너?”

“⋯⋯아니요. 사실 많이 했어요. 근데 몇 번이나 했는진 잘 모르겠어요. 기억이 안 나서⋯⋯.”

울상을 한 우영이 더듬더듬 진실을 토해 냈다. 분명 세 번을 넘긴 건 알겠는데, 그 이후로는 기억이 희미했다. 뇌리에 남아 있는 거라곤 등줄기를 가로지르는 쾌감과 사현의 달뜬 얼굴, 감미로운 신음, 하얀 나신, 손에 감기는 말랑한 살결. 뭐 그런 게 다였다.

사실 그게 전부이지 않은가, 싶다만. 무슨 말을 했었는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따위는 전혀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았다.

우영이 민망함에 사현의 머리칼에다 볼을 묻었다. 정말 짐승이 된 것 같아 부끄러웠다.

“됐다, 됐어. 나와. 씻으러 가게.”

사현이 툭툭 우영을 밀어냈다. 찝찝하지 않은 걸 보니 우영이 어느 정도 몸을 닦아 주긴 한 것 같으나 배 속에 든 게 문제였다. 우영이 밤새 싸지른 정액 말이다. 얼른 빼내지 않으면 크게 탈이 날 것이다.

죄인과 다름없는 우영은 별다른 말 없이 사현이 침대에서 일어나는 걸 도왔다.

하지만 사현은 바닥을 딛고 서자마자 풀썩 아래로 주저앉아야 했다. 골반 아래로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우영이 얼른 허리를 쥐어 올리지 않았다면 거하게 무릎을 찧었을 것이다.

사현이 헛웃음을 흘렸다. 다리가 풀릴 정도로 섹스하다니. 한창 방탕하게 놀던 스무 살 때도 이런 적은 없었거늘. 제가 그새 늙은 건지, 아니면 우영이 대단한 건지 모르겠다.

뾰족한 눈으로 우영을 흘겨본 사현이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그리고 탁, 우영의 손을 내쳤다.

“나 씻을 동안 손 들고 벌 서라, 너.”

“⋯⋯네.”

우영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현이 욕실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던 우영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벌 설 곳을 찾는 것이다. 대충 침대 아래에 꿇어앉을까, 생각하는데 욕실에서 악! 비명이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우영이 후다닥 욕실로 달려갔다.

“형. 왜 그래요?”

“너⋯⋯ 너, 이⋯⋯.”

사현이 거울 속으로 우영을 한껏 노려봤다. 우영은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만 끔뻑거렸다. 그 모습에 사현은 머리 뚜껑이 열린다는 말이 어떠한 기분인지 절실히 통감할 수 있었다.

“야. 사람 몸을 이렇게 난도질해 놓으면 어떡해! 나 출근 어떻게 하라고?”

“아⋯⋯.”

우영이 그제야 이유를 알겠다는 듯 뻐끔 턱을 벌렸다. 사현의 전신이 울긋불긋했다. 턱부터 발끝까지 온통 우영의 입술 자국이었다. 몇몇은 손가락 사이에도 들러붙어 있었다.

처음 거울과 마주한 사현은 자신이 밤새 피부병이라도 걸린 줄 알았다. 알레르기나, 두드러기 같은 거 말이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다지도 불그죽죽한 몸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헌데 드문드문 떠오르는 것이다. 우영이 잘근거리던 제 손목이, 어깨가, 목덜미가, 허벅지가. 그걸 상기하자 저절로 비명이 솟구쳤다.

“너 이런 쪽으로 페티쉬 있니?”

사현이 뾰족한 시선으로 우영을 들쑤셨다. 우영이 어물어물 말을 말아 먹었다. 어떠한 대답을 내놓아야 사현의 노여움을 조금이라도 덜 살 수 있을까, 고민하는 거였다.

그러다 그냥 솔직히 말하기로 했다. 저질러 놓은 일이 있는데 이러쿵저러쿵 말을 얹어 봐야 긁어 부스럼일 것 같아서.

“네⋯⋯. 아무래도 저 변태인 것 같아요.”

“⋯⋯.”

“그⋯⋯ 전부터 형 보고 있으면 막 이가 간지럽고, 목마르고 그랬어요. 형 귓불이 말랑말랑한 조랭이떡처럼 보이거든요.”

“조, 조랭이, 뭐?”

“귓불만 그런 게 아니고⋯⋯ 동그란 복사뼈는 체리 같고, 분홍색 뒤꿈치는 복숭아 같고, 뾰족한 팔꿈치는 방금 깐 바나나 같고. 그래서⋯⋯ 빨고 싶고 깨물고 싶고⋯⋯.”

“⋯⋯.”

주절주절 한탄처럼 이어지는 우영의 말에 사현의 눈동자가 바쁘게 굴러갔다. 거울 너머로 자신의 귓불을 바라봤다. 조랭이⋯⋯떡. 조랭이떡이 뭐더라. 설마 팥죽에 올라가는 그 하얗고 동그란 떡을 말하는 건가.

체리랑 복숭아랑 바나나는 또 뭔가. 꼭 종합 과일 선물세트가 된 기분이었다. 왠지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오한도 들었다. 사현이 두 손으로 자신의 팔뚝을 감싸 쥐었다.

우영이 그런 사현에게로 다가갔다. 커다란 덩치가 어찌나 위협적인지. 사현은 하마터면 연인에 대한 예의도 없이 뒷걸음질을 칠 뻔했다.

“물론 이상한 거 아는데요⋯⋯. 근데 어제는 제가 꼭 술에 취한 것처럼 정신이 없어서⋯⋯. 오, 오늘 병원 가 볼게요. 근데 무슨 병원 가야 하지⋯⋯.”

“⋯⋯.”

“죄송해요. 어쩌죠? 후, 후시딘 발라 볼까요? 아니면 밴드 붙일까요? 아 밴드로 가리기엔 너무 많네요⋯⋯.”

우영이 붉은 반점이 넘실거리는 사현의 어깨를 슥슥 부드럽게 쓸었다. 그 얼굴이 어찌나 음울한지. 사현은 차마 못된 말을 뱉을 수가 없었다.

“됐어. 목 폴라 입고 가면 돼.”

“아프진 않아요?”

“안 아파. 나 씻게 나가.”

사현이 우영을 밖으로 등 떠밀었다. 우영은 ‘진짜 혼자 씻을 수 있어요?’, ‘도와 줄까요?’ 등등의 걱정을 쏟아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물러났다.

문을 꼭 잠근 사현이 허망한 낯으로 거울을 바라봤다. 그새 우영이 남겨 놓은 자국이 더 짙어진 것 같았다.

아⋯⋯. 이 꼴로 출근을 어떻게 한담. 사현이 변기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현은 아주 오랜만에 목 폴라를 입었다. 니트 재질의 목 폴라를 입기엔 조금 더운 날씨긴 하나, 턱까지 번진 우영의 입술 자국을 가리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직원들이 피부병이라도 걸린 줄 알고 스멀스멀 피할지도 몰랐다. 눈치 좋은 제인은 얄궂은 미소를 띤 채 절 쳐다보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진저리가 쳐졌다. 현관 거울 앞에 선 사현이 턱을 추켜올렸다. 목폴라 위로 불긋한 자국이 보였다가 사라짐을 반복했다.

“하아⋯⋯.”

일단 미팅은 다 미뤄야겠어. 사무실에 처박혀서 처리할 수 있는 것만 하고, 일찍 퇴근해야 할 듯싶었다. 한참이나 거울을 들여다보던 사현이 홱 뒤를 돌아봤다. 그곳엔 넙데데한 어깨를 한껏 웅크린 우영이 흘끔흘끔 제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리 와.”

사현이 가볍게 손을 까딱거렸다. 우영이 냉큼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사현이 그를 향해 볼을 내밀었다.

“뽀뽀.”

“⋯⋯네?”

“뽀뽀. 나 출근하잖아.”

“출근할 때는 입술에 해야죠⋯⋯.”

우영이 눈치 없이 반론을 제기했다. 사현이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 와중에도 입술 타령이라니. ⋯⋯귀여운 놈. 사현이 우영의 뒷덜미를 감싸 쥐고 쪽 입술을 삼켰다가 놨다. 우영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스몄다.

그의 머리를 헝클어 준 사현이 신발장 문을 열었다. 구두를 꺼내고, 발을 욱여넣는데⋯⋯.

“⋯⋯.”

욱여⋯⋯넣는데⋯⋯. 구두 위로 덩그러니 드러난 발등이 이상했다. 복사뼈도 이상했다. 사현이 발을 흔들어 훅 구두를 털어냈다. 짤뚱한 페이크 삭스 위로 울긋불긋한 자국이 잔뜩 들러붙어 있었다.

‘동그란 복사뼈는 체리 같고, 분홍색 뒤꿈치는 복숭아 같고.’

이른 아침, 우영이 한 말이 떠올랐다. 그래, 조랭이떡만 씹었겠는가. 체리와 복숭아도 씹었겠지.

물론 저도 우영의 복사뼈를 훔쳐보며 마른침을 삼켰었다만. 그건 예쁘고 아름다운 것을 보며 심미적인 탐스러움을 느꼈던 거지, 씹어 먹고 싶은 식욕을 느꼈던 건 아니었다.

사현이 이마를 짚으며 신음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발인데, 긴 양말을 신으면 간단히 해결될 일인데. 왜 이리 진이 빠지는지 모르겠다.

사현이 현관 복도에 털썩 주저앉았다. 놀란 우영이 덩달아 그의 옆에 퍼질러 앉았다.

“왜요? 어디 아파요? 병원 갈까요? 아니면 약 사 올까요?”

“아니⋯⋯.”

사현이 우영의 어깨에 툭 머리를 기댔다. 그러고는 주머니를 더듬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최근 통화 목록을 뒤져 우영 다음으로 많은 지분을 차지한 번호를 눌렀다. 뚜르르, 뚜르르 단조로운 신호음이 네 번쯤 울렸다.

-네, B.

“제이.”

-네, 말씀하세요.

“나 오늘 출근 안 할래.”

-어디 아프세요?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좀⋯⋯ 그래⋯⋯.”

-⋯⋯.

“사실 개한테 물렸어.”

-⋯⋯네? 개요?

“아무튼, 그래서 안 가. 못 가.”

-⋯⋯

제인은 말이 없었다. 정말 열이 펄펄 끓어서 연락이 불가능할 경우를 제외하고, 사현이 출근을 마다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근데 이렇게 갑자기, 이런 목소리로, 뚜렷한 이유도 없이 출근을 안 하겠다니. 제인이 말을 잃을 만도 했다.

그 정적에 괜히 다급해진 사현이 얼른 말을 더했다.

“급한 건 메일로 보내. 바로 처리해 줄 테니까. 미팅은 미루고,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정리하겠습니다.

“응. 고마워, 제이.”

-네. 쉬세요.

통화는 금방 끝났다. 사현은 제인의 이런 점이 좋았다. 무엇을 하든, 무어라 하든 이유를 되묻지 않는다. 대부분 긍정과 수긍이고 가끔 반론을 제기할 땐 타당한 가설과 이유가 붙었다. 사현이 제인을 오래 곁에 두는 이유였다.

그가 핸드폰을 켠 김에 메일함을 확인하고 있는데, 우영이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형 오늘 출근 안 해요?”

“어. 누구 때문에. 이 꼴로 밖에 나갔다간 온갖 소문이 다 날걸. <갤러리 비>의 B가 피부병에 걸렸다느니, 알레르기가 심하다느니, 아토피라느니. 뭐가 됐든, 내 이미지와는 전혀 부합하지 않는 거니까 사전에 차단하는 게 좋지.”

“그럼 오늘 종일 저랑 데이트하는 거예요?”

그 말에 사현의 입술이 떨떠름히 뒤틀렸다.

“내가 쉰다고 너도 쉬면 안 되지. 첫 경험에 대한 환희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중이었다며. 완성해야지.”

사현이 복도 뒤쪽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우영의 얼굴이 대번에 우울해졌다. 사현과 종일 함께 있게 된 것 같아 신이 났는데. 그를 밖에 두고 작업실에 처박혀 있어야 한다니. 말도 못 하게 아쉬웠다.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우영이 뒤를 돌았다. 그러자 사현이 우영의 무릎을 턱 막았다.

“어디 가?”

“그림 그리라면서요.”

“나 잘 건데.”

“⋯⋯그래서요?”

“나 재워 주고 그려야지. 네 방에서 잘 거란 말이야.”

“⋯⋯.”

너무나 당당하고 뻔뻔한 사현의 말에 우영이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곧 허헝, 바보처럼 웃었다.

“그럴까요?”

* * *

그림을 그릴 땐 시간이 곱절에 곱절로 빨리 흘러간다. 한창 붓을 놀리던 우영이 시간을 확인했을 때는 오후가 훌쩍 넘어가 있었다. 놀란 우영이 후다닥 욕실로 뛰쳐들어갔다. 허겁지겁 샤워를 하며 유화 냄새를 털어 내고 부엌으로 향했다. 라면을 끓이기 위해서였다.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잠만 잔 사현이니, 지금쯤이면 분명 배가 고플 터였다. 그를 깨워다 라면을 대령하면 예쁘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 않을까. 철딱서니 없는 기대에 엉덩이가 씰룩거렸다.

라면이 완성되고, 우영이 쿵쿵쿵 뒤꿈치를 구르며 침실로 뛰었다. 사현은 불은 라면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니 얼른 깨워 얼른 식탁에 앉혀야 했다.

만면 가득 웃음을 띤 우영이 문고리를 쥐었다. 살짝 문을 열었는데, 예상외로 쨍한 햇볕이 스며 왔다. 기상한 사현이 암막 커튼을 거둔 모양이었다.

우영이 반갑게 그를 부르려 할 때였다. 사현의 음성이 빨랐다.

“그래서요. GPS 안 움직이는 거 확인했어요?”

그는 누군가와 통화 중인 듯했다. 우영이 조심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 사현은 우영을 등진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기 전에 껴입은 우영의 후드 아래로 맨다리가 훤히 드러나 있다. 괜한 쑥스러움에 우영이 코를 찡긋거렸다.

“어딘데요? 강원도 고성? 멀리도 숨겨 놨네.”

“⋯⋯.”

“국세청에는 신고 넣었어요?”

“⋯⋯.”

“네. 기다릴 거 뭐 있어요. 바로 터트려요. 기사는 확실하게 써 줄 거죠? 나는 뉴스도 좋은데. 아주 시끌벅적하고 요란했으면 좋겠거든.”

우영은 알아듣기 힘든 통화였다. 뭐, 언제고 그의 통화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던가. 대수롭지 않게 여긴 우영이 사현의 뒤로 가 살그미 그를 껴안았다.

사현이 흘깃 뒤를 돌아보며 연하게 미소 지었다. 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오랜만에 잠을 많이 자서인지, 준비하던 일이 잘 돼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좋으니 우영도 그저 좋았다.

“네. 네. 잘 부탁해요, 정 기자님. 곧 뵈어요. 네. 들어가세요.”

통화를 종료한 사현이 침대 위로 핸드폰을 던졌다. 우영이 기다렸다는 듯 사현의 허리를 껴안고 좌우로 몸을 들썩였다. 사현의 마른 몸이 덩달아 춤추듯 흔들렸다.

“일어나셨어요?”

“응. 오랜만에 잘 잤어.”

“제가 라면 끓여 놨어요.”

“라면?”

우영의 가슴팍에 머리를 비비던 사현이 살포시 눈살을 구겼다. 어제 종일 섹스하고, 그 여파로 출근도 못 했는데. 오후까지 늘어지게 자다가, 눈뜨자마자 먹는 라면이라니⋯⋯. 보통의 일상과는 전혀 달랐다.

“너 때문에 게을러지는 것 같아. 몸이 살찌는 기분. 손가락이 둔해지고 오감이 무뎌지는 기분. 그런 기분 알아?”

“어⋯⋯. 제가 살이 잘 안 찌는 체질이라⋯⋯. 별로라는 뜻이에요?”

“아니. 좋아. 난 몸뚱이가 쓸데없이 예민해서, 소화도 잘 못 하고 탈도 자주 나거든. 이 기회에 살 좀 찌지 뭐.”

사현이 우영의 양 뺨을 거머쥐고 쪽쪽쪽 키스를 퍼부었다. 킥킥거리며 그를 받아 내던 우영이 사현의 뒤통수를 감싸고 깊숙이 입술을 겹쳤다.

아무래도 분 라면을 먹어야 할 듯싶었다.

다행히 사현은 불은 라면도 맛있게 먹어 주었다. 조그마한 입으로 열심히 면을 빨아 당기고, 고춧가루를 넣어 맵싸한 국물도 호롭호롭 떠먹었다. 김밥천국 사장님에게 아양을 떨어 얻어 온 단무지 역시 그 역할을 톡톡히 했다.

사현의 맞은편에 앉은 우영은 자신의 몫을 진즉 먹어 치우고 꽃받침을 한 채 사현의 식사를 구경, 아니, 감상했다. 사현과 함께하는 시간은 경험하면 할수록 좋아졌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좋고, 아마 내일은 더 좋아질 테였다.

“물 드릴까요?”

“응.”

우영이 얼른 일어나 찬물을 떠 왔다. 일어난 김에 냉장고에서 딸기 우유도 꺼내왔다. 사현이 기특하다는 듯 우영을 눈으로 칭찬했다.

우유 주둥이까지 까 준 우영이 상체를 식탁 앞으로 쑥 내밀었다.

“형.”

“응.”

“아까 누구랑 통화한 거예요?”

뜬금없는 우영의 질문에 사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네가 그런 게 왜 궁금하냐는 표정이었다.

“아니 뭐⋯⋯. 제인 실장님이나 큐레이터 누나들은 아닌 것 같길래⋯⋯.”

“누나? 너 우리 큐레이터 팀한테 누나라고 부르니?”

귀에 거슬리는 호칭에 사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질문과 엇나간 답에 우영이 데구루루 눈을 굴렸다. 어째 예감이 좋지 않다. 또 사현에게 거나하게 혼날 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 우영이 께름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뭐라고 불러요?”

“갤러리가 학교니? 아니면 동아리야? 왜 누나라고 불러? 이름 뒤에 큐레이터님, 이렇게 붙여 부르면 되잖아. 나이 많은 작가들은 김큐, 박큐, 정큐 이렇게 부르기도 해.”

“에이 그건 너무 딱딱하고 정 없잖아요.”

느슨한 우영의 대답에 사현이 탁 젓가락을 내려놨다. 그의 뾰족한 시선이 우영의 미간을 직선으로 꿰뚫었다.

“네가 왜 큐레이터랑 정을 나눠야 하는데?”

“어⋯⋯. 앞으로도 같이⋯⋯ 일 할 사람들이니까?”

“네가 무슨 큐레이터랑 일을 해. 일은 내가 하지.”

“그건 그렇죠. 그래도 형 보러 갈 때마다 부딪치니까, 알음알음 얼굴도 익히고 인사도 전하고, 그러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요.”

우영의 변명 아닌 변명에 사현의 눈썹이 파도처럼 꿈틀거렸다. 저 예쁜 얼굴로 누나, 누나하며 갤러리를 돌아다녔을 우영을 생각하니 명치가 후끈해졌다. 뜨거운 돌멩이라도 삼킨 기분이었다. 사현이 식탁 아래로 내린 손을 말아 쥐었다가 펴는 걸 반복했다.

짧게 심호흡한 그가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아무튼 누나라고 부르지 마. 걸리기만 해, 아주.”

“⋯⋯네. 근데 누나들이 괜찮다고 했는데.”

“내가 싫으면 싫은 거지. 내 갤러리에서 내 마음에 안 드는 건 있을 수 없어. 바로 퇴출이야. 그림이든, 문화든, 사람이든, 호칭이든.”

그 말에 우영의 얼굴이 해괴하게 뒤틀렸다. 방금 사현이 뱉은 문장에서 사현 자신을 칭하는 ‘내’라는 단어가 몇 번이나 있었는지 곱씹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독재예요?”

“어. 독재야. <갤러리 비>에 민주주의는 없어.”

사현이 젓가락을 바투 쥐고 허공을 쉬익 반으로 갈랐다.

우영이 입술을 씰룩였다. 유아독존. 독불장군. 순 자기 멋대로야. 물론, 사현은 무엇이든 자기 멋대로 할 수 있는 권력과 타당한 지식, 재력 등을 가졌다만, 그래도 그렇지⋯⋯.

그러나 우영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뭐랄까. 사현이 밉지가 않았다. 하얀 볼을 씰룩거리며 눈을 부라리는 모습이 조그마한 고양이가 그르렁거리는 것 같아서 찐하게 뽀뽀나 해 주고 싶었다.

미친 거지. 미친 거야. 우영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실소했다. 그러자 사현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대번에 꽂혀 왔다.

“왜 웃니?”

“잘 어울려서요.”

“뭐가 잘 어울려?”

“형이 독재하는 거요.”

“⋯⋯비꼬냐?”

“아니요. 저는 누구보다 형한테 복종할 자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우영이 킥킥거리며 경례를 해 보였다. “사랑해요.” 익살맞게 웃으며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애교를 차마 쳐내지 못한 사현이 피식 웃으며 단무지를 집었다.

우영이 비스듬히 턱을 괴고 끊겼던 질문을 다시 이어 갔다.

“그래서 아까 전화한 사람은 누군데요.”

“⋯⋯기자.”

“기자요? 평론가 같은 거?”

“아니. 사회, 정치 관련 쓰는 기자.”

“그런 기자랑 연락을 왜 해요? 형 국회의원 나가게요?”

전혀 예상치 못한 단어의 등장에 사현이 푸흐흐 웃음을 터트렸다. 우영은 순수하다. 그래서 엉뚱하고 귀엽다.

“아니. 화 그룹 비자금 창고를 찾았어. 정확히는 화 그룹 사모님인 이원화 여사의 개인 비자금 창고.”

“⋯⋯비자금이요?”

“그래.”

“그게 뭔데요?”

멍청한 질문에 사현이 헛숨을 삼켰다. 맞아. 우영은 순수하면서도 조금 모자란 아이였는데. 그걸 잊고 있었다.

“쉽게 말하면 꿍쳐 둔 돈이야. 세금 추적이 안 되도록 불법으로 꿍쳐 둔 돈. 종류는 외화 현찰, 금, 도자기, 그림, 뭐 그런 거고. 나중에 재산 물려줄 때 상속세를 탈세하려고 모아 둔 것도 있고, 뇌물로 쓰려고 세탁한 것도 있고. 이해되니?”

“음⋯⋯. 잘 모르겠어요. 근데 제가 구태여 이해할 필요는 없죠. 그래서요. 화 그룹 사모님 비자금인데 왜 형이 기자랑 통화를 해요? 그거 막아 주려고요?”

“내가 미쳤니? 막아 주게? 내가 그 창고 알아내려고 돈을 얼마나 퍼부었는데. 당연히 신고해야지.”

사현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뒤틀렸다. 그 모습을 보던 우영이 혀로 자신의 입천장을 긁었다. 평소와 다른 사현이 낯설다. 영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우영의 검지가 식탁 끄트머리를 꾹꾹 짓눌렀다.

“비자금. 그거면 화 그룹이 망해요? 그 사람들 다 경찰서에 잡혀가고, 감옥 가고 그래요?”

“망하진 않지. 감옥도 안 가. 휘청거리지도 않을걸. 주식이야 약간 주춤하겠지만, 그 역시 금방 회복될 거야.”

“근데 왜⋯⋯.”

“이게 터지면 그 여자가 엄청, 엄-청 빡칠 것 같거든. 수십 년 동안 아득바득 모아 놓은 게 탈탈 털릴 테니까.”

“⋯⋯.”

“그냥⋯⋯ 엿 먹이는 거지. 흙탕물 한번 튀겨 보는, 조잡한 복수야.”

사현이 상상만 해도 통쾌하다는 듯 목젖을 꿀렁이며 웃었다. 반면에 우영의 낯빛은 컴컴해졌다. 고작 화나게 하려고, 신고를 했다고?

사현답지 않았다. 뭐든 철두철미한 그가. 완벽한 아웃풋이 아니면 시도하지 않는 그가. 고작 엿 먹이는 것으로, 흙탕물 튀기는 정도로 위험을 감수하다니.

전부터 느끼지만 사현은 가족과 연루된 것엔 지나치게 아둔하고 감정적이었다. 물론, 그런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그러한 사연이 얽혀 있는데, 누가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 있겠는가.

다만 걱정이 되는 것이다. 혹 사현이 다칠까 봐. 그 흙탕물이 애꿎은 사현에게 튈까 봐.

우영의 불안한 시선이 폭우처럼 쏟아졌다. 딸기 우유를 들던 사현이 고개를 갸웃 뒤틀었다.

“왜 그렇게 봐?”

“걱정돼서요. 형이 다칠까 봐.”

“좀 다치면 어때. 이미 넝마짝이라서 티도 안 나.”

대수롭지 않다는 어투였다. 실없는 복수로 팔다리를 잃어도 괜찮다는 표정이었다. 무감하고 무심한 얼굴이 얄미웠다.

우영이 볼 안쪽을 세게 깨물었다. 그 힘을 이기지 못한 입 안이 툭 터져 비릿한 맛이 목구멍을 적셨다.

그럼 나는 어떡해요.

형이 다치면, 나는 죽을지도 모르는데.

* * *

다음 날 저녁, 우영과 사현은 TV 앞 소파에 앉았다. 커다란 TV 화면에 아나운서의 딱딱한 얼굴이 가득 차 있었다.

아홉 시 무렵 들어온 사현은 옷조차 갈아입지 않고 곧장 TV를 틀었다. 그 후, 그림 그리던 우영을 빼액 소리 질러 불러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헐레벌떡 뛰어나온 우영에게, 사현이 탁탁 옆자리를 두드렸다.

우영이 엉거주춤하게 앉자마자, 사현이 그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아, 좋다. 집에 애인 있으니까 좋네.”

어리둥절한 우영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현은 태평한 선비 같은 말만 해 댔다. 우영은 멀뚱히 눈만 끔뻑거리며 사현을 따라 TV를 봤다.

사현이 튼 TV 프로그램은 특별하지 않았다. 매일 저녁이면 볼 수 있는 아홉 시 뉴스였다.

-안녕하십니까, HBS 아홉 시 뉴스입니다.

반듯하게 차려입은 아나운서가 단조로이 방송의 시작을 알렸다. 사현이 눈을 부릅떴다. 우영이 덩달아 흐트러진 안경을 고쳐 썼다.

흔히 볼 수 있는 뉴스가 이어지고 또 이어졌다. 경제가 어떻다느니, 출산율이 또 떨어졌다느니, 공무원 시험이 날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느니. 이런 게 왜 뉴스거리인가, 싶을 정도로 당연하고 지리한 내용이었다.

이따금 동글동글한 초등학생이나 조그마한 동물들이 나와서 분위기를 환기해 주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사현은 크게 하품하며 지루한 티를 숨기지 못했다. 우영이 그런 사현의 눈가를 살살 쓰다듬었다.

시민의 신고로 새끼 고양이가 좁은 하수구에서 구조되었다는 뉴스가 지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검찰이 <화 그룹> 김명현 회장의 부인이자, 현 <어린이 행복 재단> 이사인 이원화 씨 에게 탈세 혐의로 구속 영장을 청구했습니다.

사현이 목이 빠지라 기다리던 뉴스가 시작됐다.

뉴스는 특별하지도, 심각하지도 않았다. 아나운서는 특유의 고저 없는 목소리로 탈세, 비자금, 육백억 원, 강원도 고성 등의 단어를 나열했다. 익명의 신고라는 말로 시작한 뉴스는 검찰 조사로 흘러 시민들에게 뭇매를 맞고 있다는 문장으로 끝났다.

화면에는 화 그룹 빌딩의 전경이나 가지런히 쌓인 금덩이들, 살벌한 보안 시설, 곱게 포장된 그림이나 도자기들이 잡혔다. 가끔은 한 여자 사진이 나오기도 했다. 우영에게도 익숙한 사람이었다.

‘새로운 밤’ 전시에 왔던 여자다. 「퐁파두르 부인」의 귀부인 같다고 생각했던, 고운 입술로 온갖 나쁜 말을 쏟아내던 그 여자였다.

뉴스는 기다린 게 아쉬울 정도로 금방 끝났다. 고작 삼 분 남짓이었다. 사현은 그동안 숨조차 허투루 쉬지 않았다.

“아, 뭐야, 되게 짧네. 한 시간 내내 해 주지.”

사현이 짜증스레 소파 쿠션을 아래로 밀어 떨어트렸다. 우영이 헛웃음을 삼키며 그것을 다시 주워 올렸다.

“그래도 마지막 뉴스였잖아요. 이만하면 흙탕물만 튀긴 수준이 아닌데요?”

“⋯⋯그래? 그렇지? 내가 다리 하나는 부러트린 것 같지?”

금세 기분이 좋아진 사현이 씨익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우영이 그를 따라 웃었다. 사현이 그런 우영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시선은 그를 향해 있었으나 다른 걸 바라보고 있었다.

이를테면 ‘이원화 씨’에게 내몰리는 쇠약한 어머니와 어린 자신이라든가, 조문객이라곤 없던 어머니의 화려하면서도 빈곤한 장례식장이라든가, 분명 제 발로 나왔음에도 쫓겨나는 것 같았던 독립이라든가.

우영이 깊은 과거로 빠진 사현을 살살 현재로 끌어냈다.

“화 그룹은 엄청 큰 회사잖아요. 그럼 돈이 되게 많을 텐데, 왜 금이나 도자기 같은 걸 저렇게 몰래 모을까요? 고작 세금 내기가 싫어서 저런 창고를 짓고 경호원을 써요? 그 돈이 더 나가겠다.”

우영다운 질문이었다. 사현이 킥킥거리며 우영의 턱을 쓰다듬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천 원짜리 껌을 오천 원 주고 사지는 않거든.”

“그게 무슨 말이에요?”

“돈이 많아도 세금은 아깝다고. 내가 열심히 백억을 모았는데. 아들한테도 물려주고, 노후자금으로도 쓰고, 나한테 도움 될 사람들한테 찔러도 주고, 혹시 나쁜 일 생기면 윗사람한테 로비도 하고. 그렇게 쓰려 했는데, 무형의 국가가 갑자기 삼십억을 빼앗아가려 하면, 빡치지.”

“아⋯⋯.”

“서민들이야 기백만 원씩 세금을 낸다만, 재벌들은 수백억씩 내거든. 네 말마따나 저렇게 창고 짓고, 경호원 쓰는 게 훨씬 싸.”

우영이 아아, 탁음을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내는 세금의 단위가 다르겠구나. 수백억을 세금으로 낸다, 라. 저는 통장에 있는 이억으로도 엄청난 부자가 된 것 같은데. 그에 백 배인 수백억을 세금으로 내는 건 어떤 기분일까. 아마 썩 기껍진 않을 터였다.

어딘가 납득이 된다는 우영의 낯에 사현이 검지로 그의 코를 튕겼다.

“이해하지 마. 나도 돈 많이 버는데, 탈세는 안 해. 재벌도, 나도 적당히 썩었고 적당히 정의로운 대한민국에 사는 덕분에 돈 긁어모으는 건데. 세금 정도는 꼬박꼬박 내 줘야지.”

그 말에 우영이 사현의 양 볼을 감싸 쥐고 쪽, 입술을 붙였다가 뗐다. 어쩜 사현은 별게 다 사랑스럽다.

“근데 형은 저기에 저런 창고가 있는 걸 어떻게 아셨어요? 강원도 고성까지 갔다 왔어요?”

“내가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

“그럼요?”

“재벌들이 탐낼 만큼 비싼 그림이 한국으로 들어왔다? 그럼 내 귀에 들어오게 되어 있거든.”

“그거로 그 많은 정보를 알아 낼 수가 있어요?”

“그림에 관심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여자가 뜬금없이 수십억짜리 그림을 샀어. 근데 선물할 것도 아니래. 게다가 그림뿐만 아니라 도자기나 금도 모은다더라고. 그럼 백이면 백, 돈세탁용이라는 소리야. 거기까지 알고 나니까, 아, 이거 잘 이용하면 엿 먹일 수 있겠는데 싶었지.”

“⋯⋯.”

“그래서 그 여자한테 배송되기 전에 그림에다 GPS 달았어. 일전에 네 그림 작업해 줬던 컨서베이터(conservator)가 그 그림 담당이었거든.”

“⋯⋯GPS를요? 그림에다가요?”

우영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어떻게 그림에다가 GPS를 단단 말인가. 수십, 수백억짜리 가치의 그림이라면 보통 귀한 게 아닐 텐데. 거기다 GPS를 달았다고?

“응. 캔버스 뒤쪽 고정대를 파서 숨겨 놨어. 어찌 됐든 대가의 작품을 훼손하는 거니까 아주, 아주 나쁜 짓인데. 나는 원래 못됐으니까 괜찮아.”

사현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우영이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대체 뭐가 괜찮다는 건지⋯⋯. 조금 아는 사이이던 때나, 연인인 지금이나 사현의 생각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우리 엿 먹인 기념으로 김밥천국에 라면 먹으러 갈까?”

사현이 눈을 반짝이며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우영이 허탈하게 웃으며 그를 따라 일어났다.

* * *

사현은 블루베리 스무디로 점심을 해결했다. 우영의 손바닥만큼이나 커다란 컵 사이즈로 먹었더니 밥 생각이 나질 않았다.

생전 스무디 종류에는 입을 댄 적 없는데. 이따금 우영이 사 오는 덕에 요즘엔 카페에 가도 커피 대신 스무디를 먹곤 했다. 가끔 직원들과 함께 갈 땐 스무디의 알록달록한 색이 괜히 민망했다. 그래도 스무디를 포기하지 않았다. 입 안 가득 차오르는 새큼달큼함이 우영과 꼭 닮아서.

사현은 흥얼흥얼 알 수 없는 콧노래를 부르며 서류를 보고 있었다. 오늘의 예상 퇴근 시간은 여섯 시 사십 분. 일찍 가서 우영과 저녁을 먹을 생각이었다.

좋은 곳에 데리고 가야지. 이제 양식도 먹을 만큼 먹었고. 한정식을 먹으러 가 볼까. 아니면 호텔 뷔페에 갈까. 과연 우영이 얼마나 많은 양을 먹을 수 있을지 궁금한데. 접시를 차곡차곡 쌓아 가는 걸 보고 있으면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를 듯했다.

사현이 활자를 읽는 둥 둥 마는 둥 하며 우영을 떠올리고 있는데, 우우웅 핸드폰이 진동했다. 사현이 흘깃 화면을 쳐다봤다.

[형. 점심 먹었어요?]

우영이었다. 사현이 핸드폰을 코앞으로 가져왔다. 메시지는 끊임없이 왔다.

[저는 아까 배달시킨 게 이제 왔어요.]

[ㅠㅠ]

[사진]

[그래도 양이 많아서 좋아요.]

햄버거 사진이 함께 왔다. 흔한 프랜차이즈 햄버거였다. 큼지막한 햄버거 두 개에 감자튀김에 부리토에, 치킨 너겟 한 상자, 거기다 콜라까지. 알차게도 시켰다.

우영의 네 입이면 햄버거 하나가 뚝딱 사라지겠지. 아아⋯⋯ 먹는 거 보고 싶다. 앞에 앉혀 두고 배부르다, 더 이상 못 먹겠다, 손을 내저을 때까지 먹이고 싶었다.

멍하니 우영이 먹는 모습을 상상하던 사현이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배달시킨 게 이제 왔다고? 그가 빠르게 화면을 터치해 메시지 함으로 들어갔다. 카드 결제 문자가 온 게 한 시간하고도 이십 분 전이었다. 근데 이제 왔단 말인가. 그것도 햄버거가. 명색이 패스트푸드가.

아니, 배달이 그렇게 늦게 오면 어떡해. 그 긴 시간 내내 애가 쫄쫄 굶고 있었지 않은가. 그림 그리는 게 얼마나 체력 소모가 큰데. 한 시간 이십 분이나 굶기다니.

사현은 당장 햄버거 가게에 전화해서 진상 고객처럼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우영에게 어디서 시켰느냐, 답을 쓰는데 우우웅 다시 핸드폰이 진동했다.

이번엔 우영이 아니었다.

“⋯⋯.”

[회장님]이라는 세 글자가 명치에 쿡쿡 박혀 왔다. 사현이 후으읍,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심장이 멈추는 게 느껴졌다. 금방까지 생동감 넘치던 오감이 뚝 끊겼다.

통화 버튼을 누른 사현이 핸드폰을 귀로 가져갔다.

“네, 회장,”

-너냐?

“⋯⋯주어랑 목적어가 빠졌는데요, 회장님.”

-네가 강원도 건드렸냐?

“무슨 말씀이신지, 전혀, 모르겠네요.”

사현의 눈꺼풀이 느슨하게 풀렸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직선으로 응시하는 눈동자가 참으로 건조했다.

-사현아.

늙은이 주제에 몹시 감미로운 음성이 사현을 불렀다. 그러나 사현은 그저 불쾌하기만 했다. 한 사극 영화의 주인공은 돼먹지 않은 말을 들었을 때 귀를 씻던데. 그 짓 한번 해 볼까. 별 시답잖은 생각이 다 들었다.

“네.”

사현이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시선이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자꾸 나돌았다. 그러다 눈에 걸린 게 희멀건 서류였다. 그것을 손톱으로 꾹꾹 눌렀다. 반달 자국이 연달아 줄을 이었다.

회장은, 그러니까 명현은 잠시 말이 없었다. 전화를 걸어 놓고 말이 없다니. 이유야 뻔했다. 그리 길지 않은 침묵이었으나 사현은 아주 무거운 압박을 느꼈다. 반달이 더 깊어졌다.

-내가 언제까지 봐줘야 하냐.

“뭘 봐주셨는데요.”

-너 내 아들이잖니. 내가 아들로 대하고 있잖니. 근데 너는 왜 나를 아비로 대하지 않냐.

“⋯⋯.”

지속해서 이어지던 반달 자국이 뚝 멈췄다. 사현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이번엔 반달이 그의 손바닥에 묻어났다.

아비라. 아버지라. 그래. 내 아버지이지. 생물학적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아버지가 맞다. 하지만 어머니의 죽음을 방관한 원수이기도 했다. 경중을 따지자면, 후자가 훨씬 크고 무거웠다.

사현이 거짓을 말해야 하나, 진실을 말해야 하나 고민하는 차 명현이 말을 이었다.

-집사람을 난처하게 하지 마.

“⋯⋯.”

-정확히는, 그 난처가 나에게까지 밀려오게 하지 마라.

사현이 소리 없이 웃었다. 그래, 웬일로 당신이 가족을 걱정하나 했다. 구렁이 같은 늙은이. 야비한 늙은이.

그 말인즉슨, 그에게까지 피해가 가지 않으면 그 ‘집사람’을 얼마든지 난처하게 하고, 괴롭히고, 무너트려도 된다는 걸까. 예를 들면, 식사마다 락스를 넣는다거나, 온갖 더러운 말로 음해한다거나 말이다.

-그 정도 계산은 할 줄 알지? 너 똑똑하잖느냐.

“⋯⋯.”

-아니면, 부러 계산하지 않은 게냐.

“이유가 그렇게 중요한가요. 늘 결과만 보시면서. 답지 않으시네요.”

-후자구나.

명현은 똑똑하다. 썩 똑똑하지 못했던 어머니의 배 속에서 태어난 사현이 영특한 건 모두 명현의 덕이었다. 어쩌면 덕이 아니라 탓일 수도 있고. 멍청했다면 그저 명현의 부유에 기대어 허허실실 살았을 텐데.

-오늘 밤은 고생 좀 해라.

사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고생하라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게 무슨.”

하지만 되묻기도 전에 전화가 뚝 끊겼다. 사현이 깜빡깜빡 점멸을 반복하는 화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고생. 고생이라, 분명 반길 단어는 아니었다. 무슨 고생을 말하는 것일까.

사현이 명현의 의중을 가늠하려 머리를 굴리는데, 출처 모를 소란이 느껴졌다. 소란이라니. 갤러리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아이, 잠깐이면 되는데.”

“약속도 잡지 않고, 이렇게 막무가내로 오시는 거. 몹시 무례한 행동입니다.”

하나는 제인의 목소리였고, 다른 하나는 낯선 목소리였다. 사현이 느릿하게 의자에서 일어났다. 고생하라는 게 이런 뜻이었구나. 발끝에서부터 짜증이 치밀었다.

널따란 사무실을 가로지른 사현이 벌컥 문을 열었다. 답지 않게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 제인과 지나치게 마른 여자가 서 있었다. 귀가 훤히 드러날 정도로 짧게 자른 머리, 단정하긴 하나 적당히 느슨한 슈트 차림. 화장기 없는 얼굴. 허나, 날카로이 번뜩이는 눈동자.

예상했던 그 직업에 딱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시죠?”

“어머, 안녕하세요. 서울 중앙 지검에서 나온 지고윤입니다.”

검사가 익살맞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사현은 그것을 보고도 잡지 않았다. 그녀는 무시에 익숙한 듯 아무렇지 않게 빈손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백사현 씨. 당신을 특정 경제 범죄 가중 처벌법 위반으로 체포⋯⋯.”

“⋯⋯.”

“아무래도 사회적 위치가 있으신 분이니까, 뒤는 대충 생략하고. 저랑 같이 좀 가셔야겠어요. 무슨 말인지 아시죠?”

그 순간, 사현이 한 생각은 하나였다.

아, 우영이랑 저녁 먹으려고 했는데. 못 먹겠네.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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