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마크 로스코, 「Untitled」
사현의 앞에 따끈따끈한 라면이 놓였다. 꼬불꼬불한 면발에, 새빨간 국물. 가운데에 놓인 반숙의 달걀. 적당한 크기로 썰린 파. 보기에는 부족함 없는 라면이었다.
새치름하게 라면을 노려보던 사현이 젓가락을 들었다. 곧 면발이 그의 입술 틈으로 호로록, 밀려들어갔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우영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어때요?”
“⋯⋯.”
사현은 쉽게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충분히 씹고, 맛을 느꼈다. 우영이 오물거리는 그의 입술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이윽고 사현의 목젖이 꿀꺽 아래위로 움직였다. 우영의 상체가 비스듬히 앞으로 기울었다.
사현이 예민한 평론가처럼 휴지로 입을 눌러 닦았다.
“잘 끓였고, 물도 맞췄고, 면도 적당히 익었고. 뭐, 이만하면 비슷해.”
“⋯⋯비슷하다고요? 똑같은 게 아니라?”
그 말에 우영의 낯빛이 실망으로 물들었다. 연습을 몇 번이나 했는데. 똑같은 게 아니라 비슷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사현이 이번엔 숟가락을 들었다. 그러고는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어제부터 지금까지 제대로 먹은 게 없어 허기가 졌다.
“레시피가 같아도 똑같을 순 없지.”
“왜요?”
“불이 다르잖아.”
“⋯⋯아.”
우영이 멍청한 감탄사를 내놓았다. 그러고는 흘깃, 부엌의 인덕션을 쳐다봤다. 사현의 집은 미끈하고 반질반질한 인덕션이다. 그것도 거의 쓰지 않아 새것인. 그에 비해 김밥천국은 불이 활활 타오르는 가스레인지를 썼다.
허망한 우영의 낯에 사현이 콧잔등을 찡그렸다.
“내가 편식을 거하게 해서 그렇지, 아주 미식가인 사람이야.”
“왜 아니겠어요.”
우영이 아랫입술을 삐죽였다. 어쩜, 완벽하지. 뭐 하나 모자란 게 없어. 돈도 잘 벌고, 똑똑하고, 잘생겼는데 미식가이기까지 해.
채소만 조금 더 먹으면 더할 나위 없을 텐데. 콩도 좀 먹고, 시금치도 먹고, 나물도 먹고, 멸치도 먹고, 등 푸른 생선도 먹고. 그럼 훨씬, 훨씬 더 좋으랴만.
막 면을 입으로 넣으려던 사현이 눈을 뾰족하게 치켜떴다. 그러나 위협적이진 않았다. 아직 그의 눈두덩에 울음의 여파가 퉁퉁하게 들러붙어 있는지라. 젖살이 빠지지 않은 4살짜리가 노려보는 것 같았다.
“비꼬니?”
“아니요.”
“눈으로 욕한 것 같은데, 방금.”
“아니라니까요. 감탄이었어요.”
이른 아침, 침실에서 있었던 대화가 화자만 바꾸어 반복됐다. 이번에 먼저 웃은 건 우영이었다. 사현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면발을 빨아 당겼다.
우영이 그의 앞으로 찬물을 밀며 물었다.
“그럼 집 인덕션을 가스레인지로 바꿀까요?”
“⋯⋯진심이야?”
“네. 저 돈 많잖아요. 그거 바꾸는데 일억이 들겠어요, 이억이 들겠어요.”
“음⋯⋯ 돈 벌어서 옷을 사는 것도 아니고, 차를 사는 것도 아니고, 집을 사는 것도 아니고. 라면 맛을 위해서 가스레인지를 사겠다고?”
“네. 업소용이라도 집에 설치할 수 있겠죠?”
우영이 기대된다는 듯 두 손을 깍지 껴 턱 아래에 받쳤다. 피터팬이 오길 기다리는 웬디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 우영을 보던 사현이 그릇에다 얼굴을 처박았다.
“내가 너랑 이런 이야기를 진지하게 하고 있다는 걸 믿을 수가 없다.”
이토록 생산성 없고, 무의미하며, 쓸데없는 대화라니.
그 후로는 정적이었다. 사현은 열심히 라면을 먹었고, 우영은 그런 사현을 최선을 다해 구경했다. 면이 모두 사라졌을 때쯤이었다. 우영이 드르륵 의자를 밀며 일어났다.
“밥 드릴까요?”
“응.”
우영은 즉석 밥 하나를 금세 돌려 왔다. 뜨끈뜨끈한 김과 함께 고소한 냄새가 느껴졌다. 사현이 밥의 반을 떠서 라면 그릇에다 풍덩 담갔다. 그리고 두어 숟갈 퍼먹고서야 홀로 식사 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영의 앞에는 그릇은커녕, 물잔조차 없었다.
“넌 왜 안 먹어?”
“저 속이 울렁거려서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요.”
“왜? 어디 아파?”
사현의 얼굴이 대번에 심각해졌다. 우영에게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음’이란 몹시 큰 병이기 때문이다.
“아니요. 형이 저한테 미사일 날렸잖아요. 너무 놀라서 속이 울렁거려요.”
우영이 알맹이 없이 가면 같은 미소를 지었다. 사현의 숟가락이 허공에서 뚝 멈췄다. 우영이 말한 미사일이란, 두어 시간 전. 사현이 침실에서 했던 말을 뜻하는 것일 테다. ‘네가 나 좀 구해 줄래?’와 ‘나랑 연애하자고.’라는 말 말이다.
우영은 그 말을 듣고 한참 동안 멍하니 있더니 난데없이 라면을 끓이겠다고 쿠당탕 침실을 빠져나갔다. 팔다리가 같이 움직였었지. 머리도 좌우로 꺼떡거렸고. 그 모습을 상기한 사현이 손등에다 턱을 괬다.
“그래. 미사일 날렸지. 네 반응을 보아하니 제대로 먹혔고. 근데 왜 반응이 없어?”
“어⋯⋯.”
“거절이야? 내가 너 깠다고, 너도 날 까는 거야?”
그 말에 우영의 눈이 굴러떨어질 듯 커졌다. 그가 손을 퍼덕퍼덕 빠르게 흔들었다.
“그럴 리가요. 그냥⋯⋯ 너무 얼떨떨해서요. 제가 형을 짝사랑해 오면서, 연애하는 건 상상을 안 해 봤더라고요?”
나름대로 변명이라고 한 소린데, 사현의 얼굴이 뾰족하게 벼려졌다.
“아, 그러니까 네 말은 충분히 상상하고, 가늠해 보고, 시뮬레이션도 해 보고, 시나리오도 써보고, 책도 쓰고, 그러다 기회가 되면 영화도 찍고, 뭐 그러다 사귀자는 뜻이야?”
“아니요⋯⋯.”
우영이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면서도 이렇다 할 대답을 내놓진 않는다. 사현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어쩌자고?”
“음⋯⋯.”
우영의 검지가 톡톡톡 식탁을 두드렸다. 눈알은 데구루루 바쁘게 굴러갔다. 의자 아래에 있는 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자전거 타듯 움직였다. 산만하기 그지없는 행동이었다.
사현이 숟가락을 내저었다.
“됐다.”
그는 이대로 대화를 끝내려 했다. 이럴 시간에 식사를 마무리하고 잠이나 더 자는 게 이로울 것 같았다. 서늘하게 식은 사현의 얼굴에 우영이 급하게 엉덩이를 들썩였다.
“뭐가 됐어요. 설마 연애하자는 말을 철회하신 건 아니죠?”
“글쎄.”
사현이 심드렁하게 말하며 수저로 라면 국물을 떴다. 그러자 우영이 그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해요. 해요, 연애. 당장 해요.”
우영이 따발총처럼 말을 쏟아냈다.
“⋯⋯그러든가.”
마찬가지로 무심하게 대답한 사현이 우영의 손을 털어냈다. 그러고는 잠깐 멈췄던 식사를 이어갔다. 그런 그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스미고 있었다.
“그림은 잘 그리고 있니?”
소파에 앉아 딸기 우유를 쪽쪽 빨아 마시던 사현이 물었다. 우영은 기특하게도, 라면에 이어 후식까지 준비해 놨다. 김밥천국 옆 편의점에서 사 먹던 그 딸기 우유였다.
“네. 근데 오늘은 쉬려고요. 형이 쉬니까.”
소파 아래에 앉아 쿠션을 쥐어뜯던 우영이 대꾸했다.
“그래. 가끔 쉬는 것도 나쁘지 않지.”
사현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그 후로는 정적이 이어졌다. 사현이 앞니로 빨대를 잘근잘근 씹었다. 또 무슨 말을 하지. 어떤 주제를 꺼내 볼까, 고민하는데 이번엔 우영이 말문을 텄다.
“형은 쉴 때 뭐 하세요?”
“자.”
“아, 그렇죠. 맞아요. 내내 주무시지.”
우영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와 함께 주말을 보낸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등신 같은 걸 물었다. 사현의 주말은 항상 잠, 늦은 식사, 일, 가벼운 운동, 그리고 또 잠. 그게 다였는데.
정적이 다시 자리를 비집고 들었다.
그때, 쪼로롭! 빨대가 우유갑의 바닥을 긁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우영이 흘깃, 고개를 돌려 소파 위의 사현을 쳐다봤다. 사현이 우유를 흔들며 남은 양을 가늠하고 있었다. 그러다 우유갑을 소파에 내려놓는 순간, 우영이 벌떡 일어났다.
“다 드셨으면 버릴까요?”
“그래 줄래?”
“네.”
빈 우유갑을 든 우영이 기다란 다리로 성큼성큼 부엌을 향해 갔다. 우유갑을 한 번 헹구고, 반듯한 네모로 꾹꾹 눌러 접고, 분리수거통에 던져 넣었다. 그러고는 다시 정적의 굴레로 돌아왔다.
사현이 코를 찡긋거렸다. 어찌나 조용한지. 집에 있지도 않은 시계 소리가 째깍째깍 들려왔다. 혼자 있을 때도 이런 정적을 느껴본 적이 없는데.
“우리 같이 있으면 보통 무슨 이야기 했었지?”
사현이 벅벅 눈두덩을 문지르며 물었다.
“글쎄요⋯⋯.”
우영이 과거를 반추하며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사현과 함께 있으면 무슨 이야길 했더라. 가끔 웃기도 하고, 장난도 치고 그랬던 것 같은데.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대화가 모호하게 끝났다. 부리나케 고요가 찾아 왔다. 두 사람은 꾹 입을 다문 채 꺼진 TV만 응시하고 있었다. 이따금 입술이 달싹이긴 했으나, 문장을 만들어 내진 못했다.
정적에, 정적에, 정적이었다. 사이사이엔 어색함과, 왠지 모를 부끄러움과, 간질간질한 설렘 따위가 두더지처럼 빼꼼 고개를 쳐들었다가 사라졌다.
사현이 눈을 세게 감았다가 떴다. 대체 자면서 얼마나 운 건지 아직도 눈알이 건조했다.
“네 말마따나, 시뮬레이션이 어느 정도는 필요했던 것 같아.”
“역시⋯⋯ 그렇죠?”
사현의 말에 우영이 긍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연애를 시작하긴 했는데, 막상 하려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이 서질 않았다.
사현이 분주하게 과거의 만남들을 되새겼다. 그러나 떠오르는 거라곤 밥 아니면 술 마시기. 그리고 곧장 호텔행. 또는 일이 먼저냐, 내가 먼저냐 고함을 지르는 상대방의 모습뿐이었다.
거실 여기저기를 들쑤시던 사현의 시선이 우영의 뒤통수에 가 박혔다. 짧은 머리칼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복슬복슬할 때가 좋았는데. 대체 얼마나 더 있어야 예전처럼 돌아올는지. 그래도 잘생긴 귓바퀴와 곧게 뻗은 뒷덜미가 훤히 보이는 건 나쁘지 않았다. 사현이 쩝 마른 입맛을 다셨다.
“우영아.”
“네?”
“우리 좀 붙어 앉을까?”
“어⋯⋯ 그럴까요?”
잠시 쭈뼛거리던 우영이 슬그머니 소파 위로 엉덩이를 올렸다. 그마저도 사현과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사현이 눈초리로 그의 옆구리를 쿡쿡 들쑤셨다. 우영이 꾸물꾸물 반 뼘씩 사현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이 가까워졌다. 팔뚝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였다.
허나 정적은 여전했다. 째깍거리는 환청 대신 서로의 숨소리가 들린다는 게 다르긴 했지만, 어쨌든 대화는 없었다.
우영이 TV 화면에 비치는 사현의 모습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사현은 특유의 무표정으로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어디에도 연애를 시작하는 이의 설렘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사현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거였으나, 우영은 그 미세함을 포착할 정도로 눈썰미가 좋지 못했다. 사현의 연기가 너무 노련한 탓도 있었다. 그래서 괜히 안달이 났다.
“형.”
“어.”
“우리 오늘부터 1일인 거죠?”
우영의 낮은 음성에는 긴장이 가득했다. 사현이 헛웃음을 흘렸다. ‘오늘부터 1일.’ 그러한 문장이 여태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니. 놀라웠다.
“와. 그 대사 십 년 만에 듣는다.”
“저는 생전 처음 해 봐요.”
“⋯⋯.”
어딘가 부루퉁한 우영의 말에 사현이 꾹 입을 다물었다. 제 발 저리는 것이다. 과거를 헤쳐 봐야 좋은 게 없었으니까. 우영은 아무것도 없어 문제지만, 사현은 지나치게 많아 문제였다. 그 문제의 무게를 따지면, 물론 사현이 압승이다.
“그래. 오늘부터 1일이야.”
사현이 고저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우영의 입술이 대번에 헤벌쭉 벌어졌다. 광대는 위로 바짝 붙어 올랐고, 눈은 곱게 접히며 초승달을 그렸다. 우영이 사현의 곁에 바짝 붙어 앉았다. 닿을 듯 말 듯했던 팔뚝이 철썩 붙었다.
사현이 그런 우영을 가만히 쳐다봤다.
“좋니?”
“네.”
우영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말만으로는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기가 부족했는지,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기도 했다. 나른하게 내려온 그의 앞머리가 팔랑팔랑 춤을 췄다.
너무 좋아요. 진짜 좋아요. 행복해요. 날아갈 것 같아요. 그런 말이 우영의 머리 위로 비눗방울처럼 퐁퐁 샘솟고 있었다.
그 모습에 사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나도 좋은 것 같아.”
* * *
평소보다 좁게 느껴지는 침대에 우영이 한껏 미간을 구겼다. 뜨끈하고 묵직한 무언가가 한쪽 가슴팍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반대편이 막혀 있어 실패했다.
딱딱한 쿠션감도 그렇고, 발등을 스치는 이불이 없는 것도 그렇고. 꼭 침대가 아니라 소파 같네. 그리 생각하던 우영이 번쩍 눈을 떴다.
자신의 방과 달리 높다란 천장이 보였다. 기하학 형태로 만들어진 커다란 조명도 보였다. 확실히 침실은 아니었다. 그리고 제 품에 안겨 있는 이 무게감. 이 온도. 이 촉감. 턱을 가볍게 스치는 머리카락. 그리고 규칙적인 숨소리.
곧게 뻗어 있던 우영의 눈썹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품 안에 있는 것의 정체를 깨달은 탓이다.
우영이 자신의 가슴팍에 반쯤 걸쳐져 있는 사현을 추슬러 안았다. 그러고는 아예 몸 위로 훌떡 올려놨다. 혹시라도 사현이 소파 아래로 떨어지면 안 되니까.
난데없는 움직임에 사현의 눈가가 살포시 구겨졌다. 우영이 흡, 숨을 멈췄다. 다행히 사현은 금세 다시 평온해졌다. 우영이 그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담요라도 가져오고 싶은데, 그럼 깰 것 같아 움직일 수가 없었다.
“⋯⋯.”
근데 어쩌다 이리됐지.
‘오늘부터 1일’이라는 못을 땅땅 박은 후에는 그냥 눈 마주치면 웃고, 아니면 멍하니 있다가, 단발성의 대화가 떠오르면 입을 움직였다가 또 멍하니 있길 반복했다.
그러다 사현이 먼저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어제 그 난리를 떨어 놓고도 새벽같이 일어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 후, 그를 소파에 눕히고 자는 얼굴을 구경했는데. 그러다 저도 까무룩 잠이 든 모양이었다. 행여 사현이 아플까, 밤새 뜬 눈으로 있었으니까.
우영이 고개를 접고 사현을 내려다봤다. 길게 뻗은 속눈썹과 동그란 코끝이 보였다. 아쉽게도 입술은 보일 듯 말 듯했다. 그래도 깊게 파인 홈웨어 덕에 목덜미가 훤히 보였다. 옷이 조금만 더 내려가면 맨 어깨도 보일 것 같았다.
“⋯⋯.”
우영이 눈알로 사현의 체크무늬 홈웨어를 마구 헤집었다. 잘하면 쇄골도 드러날 성싶은데. 몸을 뒤집어 사현을 아래에 둬 볼까. 그리고 실수인 척 단추 하나만 풀어도⋯⋯ 라는 나쁜 생각을 할 때였다.
사현의 눈꺼풀이 꿈틀거렸다. 곧 잠기운에 침잠해 흐리멍덩한 눈동자가 드러났다. 우영이 아무것도 모르는 척 착한 미소를 지었다.
“잘 잤어요?”
사현이 눈만 올려 우영을 확인했다. 꿈뻑꿈뻑 눈꺼풀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상체를 조금 든 그가 주위를 크게 훑으며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더니 다시 풀썩 우영의 위로 엎어졌다.
“응⋯⋯. 몇 시야?”
우영이 소파 아래에 있던 핸드폰을 낚아채 시간을 확인했다.
“어⋯⋯ 여섯 시 조금 넘었어요.”
“벌써? 아, 내 휴가⋯⋯.”
그가 우영의 가슴팍에 콩콩 이마를 찧었다. 잠으로 보낸 하루가 몹시 억울한 듯했다. 우영이 그런 사현의 두 볼을 가볍게 감싸 쥐었다.
“이제 여섯 신데요, 뭐. 시간 남았으니까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맛있는 거 뭐?”
“제가 아는 맛집 있거든요.”
“김밥천국?”
“아니요, 거기보다 더 맛있는 곳이에요.”
“거짓말하지 마.”
사현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새치름하게 쨌다.
“진짠데. 가요. 형도 좋아할 거예요.”
우영이 빙글빙글 웃으며 사현을 일으켰다.
* * *
사현이 소매를 둘둘 말아 올렸다. 2층에 있는 드레스 룸까지 올라가기가 귀찮아서 대충 우영의 후드를 입고 나왔더니 손가락이 옷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거기다 목은 또 어찌나 파였는지 쇄골 앞부분이 다 드러났다. 꼭 맨몸에다 이불을 걸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런데도 나쁘지 않았다. 늘 완벽하게 슈트 업한 상태로 나오다 이렇게 입고 나오니 방탕한 일탈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반대쪽 소매까지 접어 올린 사현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우영이 데리고 온 곳은 주황색 비닐을 뒤집어쓴 포장마차였다. 언젠가 사현 역시 와 봤던 곳이다. 우영과 처음 만났던 그 포장마차. 비록 오 분 앉아 있다 떠났지만.
이곳은 어렴풋이 남아 있는 기억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작은 의자. 파란색 플라스틱 테이블. 바람이 불 때마다 펄럭거리는 주홍 비닐. 띄엄띄엄 앉은 손님들. 그리고 묘하게 꿉꿉한 기름 냄새.
사현의 취향은 아니었다. 김밥천국도 그렇게 번지르르한 내관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으나, 적어도 깔끔하긴 했다.
그런데 여기는 바닥이 바닥이 아니다. 그러니까 보도블록이란 뜻이다. 길바닥에 앉아 음식을 먹는 것과 무어가 다른가. 거기다 쌩쌩 지나가는 차 소리가 가감 없이 들려오고, 가끔 바람이 세게 불면 바깥 공기가 포장마차 안을 후욱 쓸고 나갔다.
미세 먼지와 매연, 그리고 기름 찌든 내와 함께하는 식사라니. 사현의 인생에 이제껏 없었고, 다시 없을 상황이었다.
시시각각 구겨지는 사현의 얼굴을 보던 우영이 조심히 물었다.
“별로예요?”
“⋯⋯무슨 반응을 원하는지 말해 주면, 그렇게 반응해 줄게.”
사현이 나름대로 배려를 내놓았다. 우영이 시무룩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이 환경을 좋아할 거라 생각하진 않았으나, 실제로 보고 나니 이상하게 목구멍이 쌉싸름했다. 그냥 나가자고 할까,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사장 할머니가 투박하게 썰린 당근과 오이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학생, 오랜만에 왔네.”
“네. 잘 계셨죠?”
“나야 뭐 똑같지. 오늘도 우동 줘? 두 개?”
누빔 조끼를 입은 할머니가 검지와 중지 두 개를 들어 보였다. 어⋯⋯ 목젖을 꿀렁이던 우영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오늘은 그거 말고 비싼 거로 많이 시킬 거예요.”
“아이고야. 웬일로다가?”
“저 돈 많이 벌었거든요. 형 뭐 드실래요?”
우영이 씨익 웃었다. 그가 사현을 보며 한 귀퉁이에 붙은 메뉴판을 가리켰다. 사현이 메뉴판 한 번, 할머니 한 번 쳐다봤다. 그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손짓했다. 대충 알아서 시키라는 것 같았다. 우영이 기다렸다는 듯이 메뉴를 읊었다.
“치즈 계란말이랑, 스팸 구이랑, 대합탕이랑, 해물파전이랑, 감자전이랑, 두루치기 주세요.”
사실 이곳으로 오는 길에 이미 메뉴 선정을 마친 상태였다. 수백 번도 더 드나들었던 곳의 메뉴를 모를 리도 없고. 사현의 입맛은 뻔하고.
“진짜 돈 많이 벌었나벼?”
할머니가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자글자글 주름져 있던 눈가가 팽팽하게 펴질 정도였다. 우영이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현의 꾸지람으로 명품샵에서 팔백육십삼만 원을 긁었을 때도 이토록 기쁘진 않았는데. 포장마차에서 메뉴 여섯 개를 시키고 나니 아, 제 통장에 삼억이 있구나, 그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 그리고 소주 한 병도 주세요.”
우영이 빙긋 웃으며 메뉴를 추가했다.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멀어졌다. 우영이 사현의 앞에 수저를 놓는데, 팔짱을 낀 사현이 눈을 세모꼴로 떴다.
“라면은 왜 안 시켜?”
“점심에 드셨잖아요.”
“그래서? 라면도 TPO가 있어.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 먹냐에 따라 맛이 다르다고. 아까는 점심. 지금은 저녁. 아까는 집. 지금은 포장마차. 아까는 속이 허한 상황. 지금은 배가 고픈 상황.”
그 말에 우영이 멍청한 얼굴로 뻐끔 입을 벌렸다. 사현이 턱짓했다. 얼른 시키라는 뜻이었다. 우영이 슬쩍 오른손을 올렸다.
“⋯⋯사장님. 여기 라면도 하나 주세요.”
우영이 네 번째 소주병을 땄다. 병뚜껑의 이음새가 따다닥하며 뜯어지는 소리가 그렇게 경쾌할 수 없었다. 자신의 잔을 채우고, 사현의 잔도 채웠다. 정작 잔을 받는 사현은 우영이 술을 따르는지, 독을 따르는지 관심이 없는 듯했지만.
“천천히 먹어요.”
우영이 소주를 홀짝이며 말했다.
“너무 맛있어.”
술 기운이 올라 볼이 붉어진 사현이 잔치국수를 후루룹 빨아 당겼다. 그는 이미 라면 하나를 작살내고, 국수로 타깃을 옮긴 상태였다. 중간중간에 케첩이 듬뿍 올라간 달걀말이도 먹고, 파전도 먹었다.
답지 않게 왕성한 사현의 식사량에 우영이 뿌듯하게 웃었다. 혹시라도, 정말 혹시라도 입맛에 안 맞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한참 국수를 조지던 사현이 차가운 소주를 들이켰다. 그의 미간이 만족스레 구겨졌다. 크으⋯⋯. 어울리지 않는 감탄사는 덤이었다. 우영이 큭큭거리며 그의 빈 잔에다 재차 술을 채웠다.
여기서 처음 사현을 만났을 땐 이런 사이가 되리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이러고 있다니. 새삼 감회가 새로웠다.
“형. 저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나는 이제 네가 뭘 물어본다고 하면 무섭다?”
“그럼 묻지 말까요?”
“아니. 물어봐.”
사현은 기분이 좋았다. 알딸딸하게 술기운도 올라왔고, 음식은 맛있고, 새로운 환경에, 편안한 옷차림에, 술을 따라주는 예에-쁜 우영까지. 완벽한 술자리였다. 우영의 질문 몇 개를 받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다. 우리 애송이가 또 뭐가 궁금해서 이러실까.
우영이 말을 떼기 전, 술잔을 비웠다.
“우리 이제 사귀잖아요.”
“응, 그렇지.”
사현이 어렵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귀는 사이는, 서로 좋아하니까 이루어질 수 있는 관계잖아요.”
“응, 그렇지.”
“저는 형 좋아하거든요. 아니, 사랑하죠.”
“응, 알지.”
“그럼 형도 저 사랑해요?”
“⋯⋯.”
뻐끔뻐끔 움직이던 사현의 입이 한일자로 딱 닫혔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사실 어렴풋이 예상하였는데, 아니길 바랐다. 왜냐하면,
“어⋯⋯.”
사현의 감정은 냉큼 긍정이 나올 정도로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현의 젓가락이 어쩔 줄 모르고 국수를 휘저었다. 면발들이 젓가락에 휘말려 뱅글뱅글 돌았다.
뭐라고 하지. 그냥 사랑한다고 해 줄까. 나쁜 거짓말도 아니고,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데. 거기다 이미 사귀기로 땅땅 결론 내 버렸지 않은가.
사현이 급하게 답을 고르는데, 우영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아니어도 괜찮아요. 물론 사랑한다고 해 줬으면 훨씬 기뻤겠지만.”
“괜찮다고?”
“네. 예상했거든요.”
사현이 뒤통수를 맞은 사람처럼 넋을 잃고 우영을 쳐다봤다. 울고불고할 줄 알았더니 괜찮단다. 예상도 했단다. 우영답지 않았다. 그새 또 자라기라도 한 걸까.
사현이 어쩔 줄 모르고 입술만 달싹이는데, 우영이 잔을 내밀었다. 사현이 얼떨결에 잔을 부딪쳤다. 쨍.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두 사람이 술을 동시에 목구멍으로 넘겼다. 술잔을 먼저 내려놓은 건 우영이었다.
“형은 아직 모르는 거예요.”
“뭘 몰라?”
“절 사랑한다는 거요.”
“내가⋯⋯ 널 사랑하는 걸 모른다고? 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지금 널 사랑하고 있는데, 그걸 자각하지 못했다, 그 뜻이니?”
사현이 검지로 자신을 가리켰다가 우영을 가리켰다가 다시 자신을 가리켰다.
“네.”
우영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현의 얼굴이 희한하게 뒤틀렸다. 이건 또 무슨 자신감이람. 술에 취하기라도 했나. 저 덩치에 고작 두 병으로? 얼굴이 붉은 것도 아닌데? 티가 안 나는 체질인가. 그러고 보니 그때 시청에서 고백했을 때도 저렇게 멀쩡한 얼굴이었지.
사현이 슬쩍, ‘혹시 너 취했니?’라고 물어보려 할 때였다. 우영이 먼저 입을 뗐다.
“형은 저 만나기 전까지 형이 라면 좋아하는지도 몰랐잖아요.”
“어어⋯⋯. 그랬지⋯⋯.”
“그것처럼, 형은 이미 절 사랑하고 있는데. 그걸 아직 모를 뿐이에요.”
확신에 찬 음성에 사현이 혀로 입천장을 긁었다. 우영이 긍정적이라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는지, 아니면 그렇게라도 믿고 싶어 하는 걸 불쌍하게 여겨야 하는지 분간이 안 됐다.
“그래, 뭐⋯⋯. 그럴 수도 있지.”
사현이 자신의 잔에다 술을 따랐다. 조그마한 잔 안에 파도가 넘실거렸다. 그 파도가 코앞까지 밀려왔다가 멀어졌다.
사랑. 사랑이라. 그건 그렇게 특별한 감정이 아니다. 숱하게 겪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테였다. 그러니 자신이 우영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을 자각하지 못할 리 없었다. 근데 또 아주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았다.
지금껏 해 왔던 사랑은 우영의 ‘사랑’처럼 맹목적이지도, 저돌적이지도, 순수하지도 않았으니까.
어쩌면. 어쩌면 지금까지의 사랑이, 사랑이 아니었던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네 병이었던 소주병이 여섯 병이 됐다. 사현의 눈꺼풀이 느슨하게 늘어졌다. 늘 바른 자세를 유지하던 허리도 구부정하게 말렸다. 우영이 그의 앞으로 물잔을 내밀었다. 사현이 싫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우영이 “먹어요. 술만 마시면 내일 숙취 심해요.”라며 사현을 꾸짖듯 타일렀다.
사현이 퉁퉁하게 아랫입술을 내밀며 물잔을 들었다. 그러잖아도 붉던 입술이 체리처럼 무르익어 있었다. 우영이 못 본 척 눈을 내리깔았다. 저도 술기운이 올라오는 모양이다. 자꾸 사현의 가느다란 목이나, 붉은 입술이나, 발갛게 익은 귓바퀴에 시선이 가는 걸 보면.
그때, 할머니가 오늘 너희 테이블이 최고 매출이라며 고등어구이를 턱, 놓고 가셨다. 우영과 사현이 고맙다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우영이 젓가락을 전투적으로 쳐들었다. 그러고는 능숙하게 슥슥 고등어를 분해했다. 잔가시가 딸려 나오고 곧 큰 가시도 뽑혔다. 사현이 마술 보는 어린아이 같은 얼굴로 그것을 구경했다.
“와. 너 가시 엄청 잘 바른다.”
“손으로 하는 건 웬만하면 다 잘한다니까요.”
“맞아, 맞아. 너 그때 우리 고구마도 뽑아 줬었지.”
“‘우리 고구마’요?”
우영이 살풋 눈살을 구겼다. ‘우리 고구마’라니. 집에 고구마가 있던가. 고추장도, 김치도 없는 집에 고구마가 있을 리 없는데. 그런 생각을 하다 사현의 침대 맡에 있는 보라색 덩어리 인형을 상기했다.
“아, 인형이요?”
“어엉. 그거 계속 보면 되-게 귀엽게 생겼다? 그리고 배가 진짜 말랑말랑해.”
“다음에 보면 또 뽑아 줄게요.”
“그래!”
사현이 신난다는 듯 숟가락을 흔들었다. 그 인형이 몹시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우영이 그의 손을 잡아 고정한 후, 숟가락 위에다 두툼한 고등어 살을 올렸다. 사현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나 비린 거 안 먹어.”
“안 비려요. 먹어 봐요.”
“비려. 세상에 안 비린 물고기는 없어.”
“내가 언제 형한테 맛없는 거 먹인 적 있어요? 나 믿고 먹어 봐요.”
“개뿔. 너 맨날 시금치 먹어라, 콩 먹어라 잔소리하잖아.”
“아, 이건 그런 게 아니라니까.”
우영이 쓰읍, 엄한 얼굴로 혀를 끌었다. 사현이 억울해 죽겠다는 듯 울상을 했다. 그러나 우영은 물러서지 않았다. 사현이 질끈 눈을 감은 채 수저를 입으로 가져갔다.
입 안에 고등어가 들어왔다. 생선을 먹다니. 근 십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현이 턱을 위아래로 움직이며 생선 살을 씹었다.
비려. 비릴 거야. 당연히 비리겠지. 물고긴데. 생선인데. 바다에서 살았던 앤데. 당연히 비려⋯⋯.
“어⋯⋯.”
사현이 눈을 크게 떴다. 입 안에 있던 고등어 살은 어느새 사라진 상태였다. 혹 그가 뱉을까, 그의 턱 아래에 손바닥을 받치고 있던 우영이 빙긋 웃으며 손을 거뒀다.
“괜찮죠? 고소하고 촉촉하고. 여기 사장님이 요리를 엄청 잘하시거든요.”
“진짜 괜찮네?”
그 말에 우영이 또 큼지막한 살 하나를 골라 사현의 숟가락에 얹어 줬다. 소주 한 잔을 삼킨 사현이 살을 쏙 입에 넣었다. 우물거리는 볼에 행복이 가득했다. 우영의 얼굴에도 덩달아 행복이 차올랐다.
보라. 사현은 자신이 좋아하고 있음에도 그걸 자각하지 못한 게 참으로 많다. 아마 감정 역시 그럴 테였다. 우영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유와 근거를 열거할 순 없지만, 어쨌든 그랬다.
고등어의 반쪽이 사라졌을 때쯤, 소주 한 병이 또 비었다. 사현이 번쩍 손을 쳐들었다. 우영이 슬쩍 그의 손을 잡아 내렸다.
“우리 인제 그만 마실까요?”
“왜? 고등어 남았잖아. 그리고 나 오늘 기분 엄청 좋아. 이렇게 기분 좋게 술 마신 적이 언젠지 모르겠어. 그러니 더 마셔야 해.”
“형 아프잖아요.”
“내가? 내가 어디가 아파?”
사현이 놀란 낯으로 자신의 사지를 살폈다. 혹시 어디에 상처라도 났나, 아니면 고등어에 홀린 사이에 괴한이 다리 하나를 잘라가기라도 했나, 싶어서. 그러다 문득 우영이 말하는 ‘아픔’이 그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어제 그거? 그거는 몸이 아픈 게 아니고, 여기. 가슴 속이 아파서 그런 거야. 신체적인 게 아니라 심적인 거라고.”
사현이 툭툭 자신의 가슴팍을 두드렸다.
“그래도⋯⋯.”
“근데 너 과호흡 대처법은 어떻게 알아?”
사현이 능숙하게 말을 돌렸다. 우영이 게슴츠레하게 사현을 노려봤으나,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우영이 한숨과 함께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군대에 있을 때, 동기가 가끔 그랬어요. 그래서 알아요.”
“걔 인공호흡도 해 주고 그랬어? 나 깔아뭉갰던 것처럼 그렇게 올라타서?”
“아니요! 걔는 규칙적으로 약도 먹고, 비닐 같은 걸 들고 다녔어요. 어쩌다 훈련 중에 그게 와서, 의무실에 데리고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비상 대처법을 들었고요.”
우영이 손과 고개를 내저으며 힘껏 부정했다. 사현이 흐음, 목으로 신음하며 새로 나온 소주의 뚜껑을 땄다.
“그래서. 걔 죽었어?”
“안 죽었어요. 우울증이었나, 심신 미약이었나, 아니면 둘 다였나. 아무튼 위태위태하다가 일찍 제대했어요. 잘 기억은 안 나요.”
“그래? 군대에서 별걸 다 배웠네.”
“원래 군대에 있으면, 쓸모 있는 듯 없는 걸 많이 배우잖아요. 그 중 하나죠, 뭐.”
“또 뭘 배웠는데?”
“어⋯⋯ 삽질하는 거. 윗사람 눈치 보는 거. 또⋯⋯ 체력도 늘었고, 이상한 전투법도 배웠고, 아, 운전도 배웠어요.”
“이상한 전투법이 뭐야?”
“으음⋯⋯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데. 왜 있잖아요, 그⋯⋯ 어, 형은 군대 안 갔어요?”
“응.”
사현이 고등어를 난도질하며 턱을 주억였다. 우영의 고개가 비스듬히 옆으로 기울었다. 군대를 안 갔다고? 신체 멀쩡한데 왜? 집에 돈이 많아서 여차여차 면제를 받았나? 그것도 아니면 우울증, 공황 장애 그걸로? 요즘에는 그걸로 면제 안 되는데.
많은 의문이 동시다발적으로 솟구쳤다. 복잡해지는 우영의 얼굴에 사현이 픽 짧은 웃음을 흘렸다.
“부모 없으면 군대 안 가도 되잖아.”
“아⋯⋯.”
예상치 못한 말에 우영이 공허한 탄성을 내뱉었다. 부모가 없다고? 그럼 가족 모임이라든가, 형이라든가. 그건 뭐람. 또 다른 의문이 생겼으나 물어볼 순 없었다. 오랜만에 기분이 좋은 사현인데. 그걸 망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사현이 또 다른 화두를 던졌다.
“너도 없잖아. 근데 넌 왜 갔어?”
“밥 주잖아요.”
“⋯⋯.”
“잘 곳도 주고.”
“⋯⋯.”
“푼돈이긴 하지만 돈도 주니까. 그래서 학교 남자애들 갈 때 자원입대했어요.”
사현이 헛숨을 삼켰다. 밥 주고 잘 곳 줘서 군대에 자원입대했다니. 너무 신파라 드라마에서도 나오지 않을 이야기였다. 촌스러워서 어이가 없을 정도다. 그런데 우영의 사정을 뻔히 알고 있으니 그저 안쓰럽기만 했다.
사현이 우영의 잔에다 술을 따랐다. 우영이 그걸 훌떡 단번에 삼켰다. 사현이 큼지막한 고등어 살을 집어 그에게 내밀었다. 우영이 샐쭉 웃으며 그것을 받아먹었다.
“그때는 보육원에서 막 나왔을 때라 미래가 없었거든요. 무섭고, 막막하고, 외롭고 그랬어요. 나이가 들면서 조금 나아지긴 했는데, 말 그대로 조금, 손톱만큼 나아졌죠. 아니, 적응했다고 해야 하나. 무뎌졌다고 해야 하나.”
“⋯⋯.”
“아무튼 미래가 없는 삶. 꿈이 없는 삶이었어요. 아, 하물며 돈도 없었어.”
“⋯⋯.”
“근데 형이 짜잔-하고 기적처럼 나타나서 저한테 밥도 주고, 집도 주고, 돈도 주고, 미래도 주고, 꿈도 줬어요.”
“⋯⋯.”
“제가 어떻게 형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우영이 사현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사현이 그런 우영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저 철없는 애송인 줄 알았는데. 철까지 들었으면 더 서글플 뻔했다.
사현이 술잔을 기울이는 우영의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자기야.”
“네.”
“내가 아직 사랑은 듬뿍 못 줘도, 돈은 듬뿍 줄 수 있어.”
그 말에 우영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더할 나위 없이 사현다운 위로였다. 우영의 입가에 연한 장난기가 스몄다.
“얼마나 주실 수 있는데요?”
“요즘 로또 맞으면 얼마 주니?”
“어⋯⋯. 글쎄요. 한 십오억? 이십억 주나?”
“그래? 얼마 안 하는구나? 그 정돈 줄 수 있어. 너는 이제 내 애인이니까.”
“⋯⋯.”
“언제든 필요하면 말해.”
아닌 밤중에 우영에게 당첨이 확정된 로또가 생겼다. 잠깐 버석하니 굳었던 우영이 손을 뒤집어 사현의 손가락과 자신의 손가락을 얽었다. 이 사랑스러운 사람을 어찌한담.
“되게⋯⋯.”
“되게?”
“멋진 말이네요.”
“그래? 너무 속물적이고 계산적이라고 싫어할 줄 알았는데?”
사현이 뜻밖이라는 듯 눈썹을 들썩였다. 이제껏 만났던 연인들에게 돈을 준 적은 많았다. 등신 같은 말에 모르는 척 속아 준 적도 있었고, 제발 먹고 떨어지라며 준 적도 있었다.
근데 이런 반응은 처음이다. 저렇게 사랑 가득한 눈망울이라니. 우영의 돈 욕심은 간장 종지만 했는데. 그새 세숫대야 정도로 큰 걸까.
사현에 데굴데굴 머리를 굴리는데, 우영이 엄지로 그의 손목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사실 우영은 십오억이고 이십억이고 아무 상관없었다. 사현이 말한 ‘너는 이제 내 애인이니까’, 그 말이 사무치게 좋아서 뭐가 어떻게 돼도 다 괜찮았다.
“아무나 할 수 없는 말이고, 아무나 들을 수 없는 말이잖아요.”
우영이 싱그럽게 웃는다. 그 웃음을 정면에서 마주한 사현이 우영에게 잡히지 않은 손으로 심장께를 더듬었다. 가슴 한 편이 뻐근하다. 뱃속이 간질간질하고, 목구멍이 홧홧했다.
“⋯⋯.”
이게 뭐지. 왜 이러지.
사현은 한참을 고민하고서야 깨달았다. 자신이 ‘사랑’이라는 감정에 한 걸음 가까워졌음을.
* * *
사현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집에 들어섰다. 술기운에 눈앞이 가물가물했다. 운동화를 벗는데, 시야가 기울더니 상체가 훅 앞으로 쏟아졌다. 어쩔 줄 모르고 팔을 휘적거리자 우영이 팔꿈치를 잡아챘다.
“조심해요, 형.”
“어어⋯⋯.”
사현이 엉거주춤하게 중심을 잡았다. 간신히 운동화를 벗고, 복도 벽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우영이 그런 사현의 뒤를 바짝 붙어 따라왔다.
현관 복도를 반쯤 지나쳤을 때였다. 사현이 멋대로 움직이는 다리를 이기지 못하고 풀썩 엎어졌다. 우영이 얼른 그의 허리를 감쌌으나 발이 엉켜 함께 넘어졌다. 그 역시 적잖이 술을 마신 터라 평소보다 몸이 둔했다. 우당탕. 바닥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으⋯⋯.”
“아우⋯⋯.”
두 사람의 각기 다른 신음이 연하게 흘러왔다. 바닥에 찧은 무릎과 팔꿈치가 찌릿찌릿했다. 먼저 몸을 추스른 건 우영이었다. 사현은 널브러진 채로 꿈틀거리기만 했다.
“형. 괜찮아요?”
우영이 사현을 추슬러 벽에 기대게 했다. 그런데 어째 매가리가 없다. 아래로 푹 고꾸라진 목이 좌우로 규칙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커다란 후드가 얼굴을 온통 뒤덮고 있어 무슨 표정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우영이 가만가만 사현의 팔뚝을 매만졌다.
“형?”
“⋯⋯.”
“형 자요?”
“⋯⋯.”
대답이 없다. 우영이 사현을 둘러메려 했다. 얼른 2층에 데려다주고, 자신도 잘 생각이었다. 잠복하고 있던 술기운이 역류하면서 슬슬 두통이 올라왔다.
그때, 사현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헤실헤실, 방긋방긋, 그런 묘사가 아쉽지 않을 정도로 해맑게. 눈이 어찌나 곱게 접혀 있는지, 눈동자가 보이지 않았다. 이토록 순진하게 웃는 사현은 처음 봤다.
“우영아.”
“⋯⋯네.”
“나 지금 기분 되게 좋다.”
“⋯⋯.”
사현을 가만히 보던 우영이 그를 따라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살짝 흐트러진 사현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드라이조차 하지 않은 그의 생머리는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닌지라 봐도 봐도 또 보고 싶었다.
“저도 좋아요. 형이랑 같이 술 마셔서.”
“그래?”
킥킥 어린아이처럼 웃은 사현이 우영의 목덜미를 껴안고 바짝 몸을 붙였다. 나무에 매달리는 코알라 같은 모습이었다. 예고 없는 접촉에 놀란 우영이 뻣뻣하게 굳었다. 심장이 펄떡펄떡 난리였다. 어찌나 세차게 뛰는지 갈비뼈가 다 진동했다.
그런 우영을 눈곱만큼도 배려하지 않은 사현이 우영의 목덜미에다 뜨끈한 볼을 비벼 댔다.
“혀, 형. 일어나 봐요. 올라가서, 억!”
우영이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려 했을 때였다. 사현이 훅 우영의 목을 끌어당겼다. 우영의 몸이 엎어졌다. 하마터면 그대로 사현을 깔아뭉갤 뻔했는데, 간신히 몸을 고정했다. 그마저도 한쪽 손은 바닥을, 반대 손은 사현의 뒤에 있는 벽을 짚은 어정쩡한 자세였다.
“⋯⋯형?”
기겁한 우영이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합, 숨을 멈췄다. 사현이 코앞에 있었다. 그저 ‘가까이에 있다’는 비유가 아니라, 정말 코끝이 닿을 듯 말 듯했다.
“⋯⋯.”
“⋯⋯.”
조금 다른 박자를 가진 두 개의 숨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뭐 그리 긴박한 움직임이었다고, 두 사람 다 숨이 가팔랐다.
누구도 눈을 깜박이지 않았다. 이따금 경련하는 눈동자에는 서로가 가득했다. 그 속으로 점점 빠져들어 갔다. 이제는 눈동자 바깥에 있는 게 자신인지, 아니면 그 속에서 일렁이는 게 자신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새벽 특유의 적막이 두 사람을 조금씩 삼켜 갔다. 자욱한 술기운은 덤이었다. 온 세상이 흐릿하게 번져갈 때였다.
탁, 현관 센서 등이 꺼졌다. 그나마 서로를 비춰 주던 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 어슴푸레한 인영만 볼 수 있었다. 그런데도 반질반질한 눈동자는 더할 나위 없이 뚜렷하게 보였다.
그게 방아쇠가 됐다. 두 사람이 허겁지겁 입을 맞췄다. 충돌에 가까운 키스였다. 사현은 우영의 목덜미를 힘껏 껴안았고, 우영은 사현의 뒤통수를 감싸 쥐었다.
공교롭게도, 가장 먼저 느낀 건 자욱한 술 냄새였다. 두 사람이 동시에 픽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잠깐이었다. 사현이 우영의 아랫입술을 쪽, 쪼옥 빨기 시작했다. 놀란 우영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사현이 괜찮다는 듯 우영의 귓바퀴를 부드럽게 주물렀다. 우영은 어제, 인공호흡을 받던 사현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제대로 된 첫 키스이니 그럴 만도 했다.
리드는 사현이 해 갔다. 시작은 프렌치 키스였다.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지길 반복했다. 가끔은 윗입술만 빨았다가, 또 가끔은 아랫입술만 빨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바짝 곤두섰던 우영의 어깨가 느슨하게 내려왔다. 그것을 귀신같이 알아차린 사현이 슬쩍 혀를 넣었다가 뺐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우영이 질끈 눈을 감는 게 보였다. 사현이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그가 엄지로 우영의 턱선을 뭉근히 매만졌다. 그러자 우영의 입이 조금 더 벌어졌다. 사현이 냉큼 그 틈으로 혀를 집어넣었다.
우영의 혀는 우영을 닮아 크고, 통통하고, 뜨거웠다. 그의 입속을 휘젓던 사현이 살짝 고개를 뒤틀었다. 본격적으로 입술을 섞어 볼 심산이었다.
사현이 우영의 혀를 살살 핥았다. 넓은 부분을 빨기도 하고, 혀끝을 세워 입천장을 긁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움찔거리는 우영이 말도 못 하게 귀여웠다.
한참 우영의 입 안을 탐하던 사현이 후웁, 숨을 한가득 들이켰다. 우영의 혀가 사현의 입안으로 휩쓸려 들어왔다. 사현이 조금 더 몸을 붙였다. 그 후 입 안에 들어찬 혀를 쪽쪽 빨아 당겼다. 혀 아래를 핥기도 하고, 뿌리가 아릿할 정도로 잘근거리기도 했다.
우영의 도드라진 목울대가 아래위로 거칠게 꿀렁거렸다. 그럼 우영의 냄새가 담뿍 묻은 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현이 으음, 목으로 신음했다. 그에 벽을 짚은 우영의 손등 위로 핏줄이 울룩불룩하게 올라왔다.
마침내 두 사람이 떨어졌을 땐, 입술이 얼얼했다. 매운 거라도 먹은 것처럼 화끈거리기도 했다.
“아⋯⋯.”
반쯤 넋을 잃은 우영이 의미 모를 탁음을 내뱉었다. 사현이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소곤소곤 물었다.
“별로야?”
“와⋯⋯. 아니요. 너무, 너무 좋아요. 이렇게 좋은 건 줄 알았으면 어제 인공호흡 할 때 실수인 척, 해 볼 걸 그랬어요.”
손톱만큼의 거짓도 없는 우영의 대답에 사현이 킥킥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우영은 항상 솔직하다. 그가 그리는 그림만큼 원색적이고 뚜렷했다. 밀고 당기는 요령도 모르고, 오로지 좋아요, 좋아요, 당신이 좋아요, 만 반복하는 게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 없었다.
사현이 몸을 뒤틀었다. 우영과 벽 사이에 끼어 불편하게 접힌 다리를 빼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우영이 허리를 꽈악 억세게 잡았다.
“한 번 더 해요.”
“어? 그래. 근데 잠깐,”
……만, 나 다리가 불편해서. 라는 뒷말은 내뱉지 못했다. 우영이 다급하게 사현의 입술을 삼켜 버렸기 때문이다. 어찌나 거칠게 들이박았는지. 사현의 뒤통수가 쾅! 벽에 부딪혔다. 우영의 손이 감싸고 있지 않았다면 뇌진탕이 왔을지도 몰랐다.
아니, 근데 얘 손은 어쩌고. 지금 뒤통수를 감싼 손이 오른손인가, 왼손인가. 놀란 사현이 우영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리는데, 도무지 틈이 없었다. 뒤쪽엔 벽, 앞쪽엔 벽과 다름없는 우영이라 바르작거리기도 힘들었다.
“우영아⋯⋯, 으응, 우영⋯⋯.”
사현이 탁탁 우영의 어깨를 두드렸다. 허나 우영은 모르는 척을 하는 건지, 아니면 입술에 홀라당 혼이 뺏겨 모르는 건지 전혀 반응이 없었다.
이번에는 우영의 혀가 먼저 사현의 입 안으로 침투했다. 그러고는 사현이 했던 그대로, 혀를 빨거나 입천장을 긁었다. 가끔은 치열을 훑기도 했다. 또 가끔은 이러다 혀가 뽑히면 어쩌나 무서울 정도로 세게 빨아 당기기도 했다.
우영이 고개를 비틀며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그와 벽 사이에 끼인 사현이 납작하게 찌부러질 정도였다. 결국 마른 몸뚱이가 버티지 못하고 주르륵 무너졌다.
우영이 기다렸다는 듯 사현의 허리를 아래로 끌어내렸다. 사현이 순식간에 바닥에 눕혀졌다. 우영이 미끈한 몸놀림으로 그의 위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맹렬하게 사현의 입 안을 탐했다. 목구멍이 확 조여들 정도로 깊게 혀를 욱여넣기도 했다.
흡사 짐승 같은 키스였다. 어젯밤, 드레스 룸에서 있었던 행위와는 전혀 달랐다.
사현이 가쁘게 가슴을 들썩였다. 자신은 간간이 숨 쉴 틈을 줬는데, 우영은 요령이라곤 없이 그저 내몰기 바빴다. 갈무리하지 못한 타액이 혀 사이를 질척하게 적셨다. 미처 삼키지 못해 입 밖으로 나올라치면 우영이 샅샅이 핥아 먹었다.
저돌적인 우영에 당황하던 사현이 이내 옳다구나, 하며 양 허벅지로 우영의 골반께를 감쌌다. 오랜만에 땀 좀 빼려나. 이렇게 된 거 한번에 끝까지 쭉 가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지. 기대와 동시에 아랫도리가 뻐근해졌다.
아마 우영도 그럴 것이다. 몸이 달 수밖에 없을 정도로 질척한 키스였다.
아니나 다를까, 후드 안으로 커다란 손이 쑥 들어왔다. 그건 일종의 신호였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자는 신호. 사현이 기껍게 손을 아래로 내렸다. 우영의 바지 버클을 풀기 위해서였다.
사현의 검지가 그의 바지에 닿았다. 그리고 엄지와 중지를 이용해 버클을 풀려 하는데, 몸을 짓누르고 있던 무게가 증발했다. 틈 없이 맞물려 있던 입술 역시 떨어졌다.
“하아, 하아⋯⋯. 왜?”
사현이 밭은 숨을 고르며 우영을 올려다봤다. 키 차이가 큰 탓에 항상 그를 올려다봤지만 제 위에 올라탄 우영을 올려다보는 건 또 다른 느낌이다. 앞으로 쏟긴 앞머리 사이로 번뜩이는 눈동자가 뭐랄까⋯⋯. 그래, 섹시했다.
“⋯⋯.”
우영은 대답이 없었다. 사현의 후드 속을 파고들어 허리춤까지 올라왔던 손이 소리 없이 빠져 나갔다. 사현이 의아한 눈으로 우영을 응시했다. 그러다 슬쩍 우영의 아랫도리로 시선을 내렸을 때였다. 우영이 벌떡 일어났다.
“자, 자야겠어요.”
“엉?”
“늦었잖아요.”
“⋯⋯어엉?”
사현이 바보 같은 얼굴로 우영을 쳐다봤다. 귀를 의심하게 되는 말이었다. 잔다고? 그것도 시간이 늦었으니까 잔다고? 입 맞추다 말고? 그렇게 질척하게 입술을 비비고 몸을 문지르다가, 갑자기 잔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말도, 넋도 잃은 사현이 멍하니 있자, 우영이 꾸벅, 쓸데없이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였다.
“머,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어디를 들어가?”
“제 방에요.”
“지금?”
“네.”
“⋯⋯.”
“안녕히 주무세요.”
우영이 사현의 이마에 꾸욱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그러고는 미처 잡을 새도 없이, 후다닥 복도 모서리를 돌아 사라져 버렸다. 쿵쿵쿵, 뒤꿈치가 바닥을 찧는 소리에 뒤이어 쾅! 문 닫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복도 바닥에 누워 있던 사현이 좀비처럼 삐걱삐걱 상체를 일으켰다. 휑한 공기가 전신을 쓸고 지나갔다. 그러잖아도 넓은 집이 더 넓게 다가왔다. 우영의 흔적이라곤 먼지 한 톨 없었다. 바로 침대에 엎어져 자기라도 하는 건지, 인기척조차 들리지 않았다.
“뭐야⋯⋯. 진짜야? 진짜 자러 갔다고?”
사현이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알딸딸하던 술기운이 단숨에 증발했다.
아니, 어떻게. 방금 만나기 시작한 연인이. 그것도 창창한 젊은 남자 둘이. 같은 집에 사는데. 거기다 술까지 먹고 들어왔는데. 그렇게 진득하게 혀를 섞어 놓고. 따로 자느냐고. 이게 말이 되냐고.
사현이 손바닥에 푹 얼굴을 파묻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가르쳐야 하는 건지. 눈앞이 다 캄캄했다.
* * *
아침 일곱 시 정각. 우영의 핸드폰이 방정맞게 울었다. 똑바로 누워 두 손을 단전에 곱게 모으고 있던 우영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길게 기지개를 켠 후, 욕실로 들어갔다.
세 번째 샤워였다. 어제, 복도에서 사현과 헤어진 직후 찬물로 한 시간 내내 씻었고, 동이 트기 직전에 또 씻었고, 그리고 지금까지 해서 총 세 번째 샤워.
우영은 긴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술을 제법 많이 마셨는데도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이유야 뻔했다. 아랫도리에 붙은 불이 가라앉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사현 때문에 발정한 게 처음은 아니었다. 그전에도 꾸준히 욕실에 틀어박혀 제 오른손의 도움을 받았으니까.
근데 어제는 좀 남달랐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정신과 이성이 줄어드는 게 선연히 느껴졌다. 찰나 방심했다간 눈 까뒤집고 사현에게 달려들었을지도 몰랐다. 아마 며칠 굶은 맹수처럼 그를 핥아 먹고, 깨물어 먹고, 씹어 먹고, 녹여 먹었겠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어제가 1일이었는데. 고작 1일. 못해도 세 자리는 채우고 그런⋯⋯ 그런 행위를 해야지. 1일 때부터 그런 짓을 하면 사현이 자신을 정말 짐승으로 볼까 봐 여간 두려운 게 아니었다.
그래도 키스는 정말 좋았지. 이가 부러져라 박박 세게 양치를 하던 우영이 히죽거리며 웃었다.
사현의 입술은 말랑했다. 인공호흡 할 때 느꼈던 감촉과는 전혀 달랐다. 훨씬 매끈했고, 뜨거웠으며, 자극적이었다. 조금 질 낮은 표현이긴 하나, 맛있었다. 작은 혀가 여태 맛보았던 그 어떠한 음식보다 황홀하게 입맛을 돋웠다.
그 맛에 홀려 정신 차리니 사현의 윗도리에 손을 쑤셔 넣고 있었지. 그걸 자각하는 순간 얼마나 송구스럽고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사귄 지 첫날부터 무슨⋯⋯. 그럼 안 되지. 안 돼.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 우영이 퉤, 거품을 뱉었다.
멀끔하게 씻은 우영은 일곱 시 반이 되는 순간 거실 소파에 나와 앉았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곧장 보이는 곳이었다.
사현은 일어났으려나. 어제 술을 많이 마셨는데, 숙취는 없으려나. 밤새 잠도 안 자고, 그림도 안 그렸는데 편의점이나 들를걸. 숙취 해소제라도 먹이고 출근시켜야 하는데. 같이 나가서 사 먹일까.
우영의 한쪽 다리가 달달달 떨렸다. 그런 짓을 해 놓고 사현을 마주하려니 심장이 벌렁벌렁 난리였다.
그렇게 이십 분이 지났을 무렵, 위층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사현이었다. 우영이 부리나케 일어나 그를 반겼다.
“형.”
“⋯⋯어. 일어났니?”
슈트 차림의 사현이 흘깃, 우영을 보더니 한 박자 늦게 인사를 던졌다.
“네. 일찍 일어나셨네요.”
“버릇이라서. 요즘엔 늦잠 자는 것도 마음대로 안 돼.”
사현이 무심히 대답하며 우영을 스쳐 지나갔다. 우영이 사현의 뒤에 바짝 따라붙으며 흘끔흘끔 그의 낯빛을 살폈다. 한숨도 못 잔 우영과 달리 사현은 크게 다른 점이 없었다. 꼭 어제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설마 진짜 기억 못하나? 하긴 그러고 보니 과거에 불콰하게 취해서 왔을 때도 형이라고 부르라 했으면서, 다음 날 기억하지 못했었지.
우영이 입술을 잘근거렸다. 이걸 다행이라 여겨야 하는지, 아쉽게 생각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는 너도 일찍 일어났네.”
사현이 어젯밤, 두 사람이 뒹굴던 현관 복도를 굳은 얼굴로 가로지르며 말했다.
“저는 안 잤어요. 혹시 자다가 형 배웅 못 할까 봐.”
우영이 애써 장난스레 대답했다. 그 말에 사현이 시니컬하게 웃었다. 신발장에 도착한 그가 신중하게 신발을 골랐다.
그의 뒤에 선 우영이 몸을 좌우로 흔들며 입술을 달싹였다. 꼭 오줌 마려운 개 같았다. 뭐든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안달이 났다.
그러다 간신히 생각해 낸 게,
“숙취는 없어요?”
였다. 퍽 괜찮은 질문이었다. 억지스럽지도 않고, 분위기가 얼지도 않았고.
“어. 괜찮아. 네가 어제 물 엄청 먹였잖아.”
사현이 먼지 한 톨 올라가 있지 않은 구두를 꺼내며 대답했다. 그 말에 우영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사현이 어제 일을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도 왜 아무 말을 하지 않지. 혹시 집에 와서부터 필름이 끊긴 건가.
우영이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는 사이, 사현이 구두를 신었다. 그러더니 “갈게.”라며 참으로 담백하고 단조로운 인사를 전해 왔다.
“⋯⋯네.”
우영이 어색하게 웃었다. 곧 사현이 문고리를 쥐었다. 그러고는 우영이 무어라 말할 새도 없이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띠리릭. 눈치 없는 도어 록이 해맑은 전자음을 냈다. 신경질이 날 정도로 듣기 싫은 소리였다.
우영은 닫힌 문 앞에 멀뚱히 서 있었다. 아무런 일이 없는데, 아무런 일이 없어서 슬펐다. 아아, 좀 밝게 인사할걸. 잘 다녀오라며 애교라도 떨어 볼 걸 그랬나.
복도와 현관의 경계에 선 그의 발가락이 꼼지락꼼지락 움직였다. 이제 방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도무지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가 푸우욱, 사력을 다해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삑삑삑, 삑삑삑.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났다. 사현이었다. 우영이 눈을 댕그랗게 떴다.
“뭐 두고 가셨어요?”
“어.”
“뭐요? 제가 가져올게요.”
“이리 와 봐.”
“저요?”
우영이 검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럼 여기 너 말고 누가 또 있어.”
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영이 스니커즈를 슬리퍼처럼 구겨 신고 사현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은 사현이 우영의 티셔츠 목 부분에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걸었다. 그리고 자신 쪽으로 훅, 세게 끌어당겼다.
무방비한 상태로 있던 우영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었다. 그대로 쪽, 입술이 빨렸다.
“이걸 잊었네.”
“⋯⋯.”
“갔다 올게. 저녁에 봐.”
“⋯⋯.”
싱긋, 예쁘게 웃은 사현이 문을 닫았다. 띠리릭. 아까와 똑같은 전자음이 울렸다. 분명 하등 다르지 않은 소리인데. 이제껏 들었던 그 어떠한 소리보다 맑고 경쾌했다. 천국의 종소리가 이런 걸까, 싶었다.
우영은 한참 동안 현관문 앞에 서 있었다. 그러다 무릎이 아파 올 때쯤, 뒤를 돌아 거실로 달려갔다. 그가 소파에 직선으로 엎어졌다. 흡사 나무가 쓰러지는 듯한 모습이었다.
쿠션에 얼굴을 처박은 우영이 주먹과 발끝으로 소파를 마구 두드렸다.
어떡해, 어떡해, 어떡해!
너무 좋아, 너무 좋아, 너무 좋아!
* * *
우영은 오전 내내 뭐에 홀린 것처럼 그림만 그렸다. 붓이 춤을 추듯 움직였다.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았다. 이틀 전에는 사현을 간호한다고 자지 않고, 어제는 술을 그렇게 마시고도 자지 않았는데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숙취도 없었다. 배도 고프지 않았다.
이게 바로 그 대단한 사랑의 힘인가 보다.
우영은 조증이라도 온 사람처럼 피식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가끔은 치솟는 감정을 갈무리할 수가 없어 이젤 앞에 쪼그려 앉아 한참을 큭큭거리기도 했다.
그러다 오전이 훌떡 지나고, 핸드폰 시계가 AM에서 PM으로 바뀌는 순간. 티셔츠를 벗으며 작업실을 뛰쳐나갔다.
오늘도 양손 무겁게 먹을 걸 챙긴 우영이 <갤러리 비>에 들어섰다. 익숙한 얼굴의 직원들과 큐레이터들이 육성으로 또는 고갯짓으로 인사를 전해 왔다. 우영은 그들의 손에 베이커리에서 털어 온 쿠키나 마카롱 따위를 하나씩 들려 줬다.
간단히 안부를 물은 뒤 곧장 사현의 사무실로 향했다. 이제는 익숙하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작품이 걸려 있는 길을 지났다. 커다란 문을 통과하자 바쁘게 타이핑 중인 제인이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우영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제인이 빙긋 웃으며 그를 반겼다.
“오셨어요, 우영 씨. B는 안에 계세요.”
그녀가 당연하게 사현의 방을 가리켰다. 이른 오전, 우영이 오늘 사현의 점심 스케줄이 어떻게 되냐고 물어봤을 때부터 그의 방문을 예상했던 터라.
“네. 이거는 실장님 거.”
우영이 제인 몫의 커피를 그녀의 책상 위에 조심히 올렸다. 제인이 “잘 먹을게요.”라며 담백하게 감사 인사를 했다. 그리고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는데, 어째 우영이 고목처럼 앞에 서서 움직이질 않았다.
제인이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봤다. 무슨 볼일이 더 남았냐는 표정이었다. 그러자 우영이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와서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혹 말이 새어 나갈까, 조심하는 모양새였다. 제인이 덩달아 목을 숙였다.
마른 입술을 핥은 우영이 더듬더듬 입을 뗐다.
“저⋯⋯.”
“네.”
“사현이 형이랑⋯⋯.”
“네.”
“그, 그렇게 됐어요.”
“⋯⋯네?”
제인이 비스듬히 고개를 뒤틀었다. 주어와 목적어가 있긴 한데, 알아들을 순 없는 문장이었다. 우영이 깨금발로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왔다.
“사현이 형이랑요⋯⋯.”
“네.”
“사귄다고요.”
“⋯⋯네?”
“어제부터 1일. 오늘은 2일.”
우영이 광대를 봉긋하게 올리며 헤벌쭉 웃었다. 수줍게 펼친 손가락 두 개는 덤이었다. 제인이 그런 우영을 묘한 눈동자로 응시했다. 두 사람의 관계 발전을 바라긴 했다만, 이렇게 이를 줄은 몰랐는데.
“감사합니다. 다 실장님 덕분이에요.”
“⋯⋯아뇨. 제가 한 게 뭐 있다고.”
“에이, 많이 도와주셨죠. 염치없지만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우영이 또 꾸벅 허리를 숙였다. 제인이 덩달아 고개를 주억이며 흐릿하게 미소 지었다.
우영이 뒤를 돌았다. 사현에게로 가기 위해서였다.
“우영 씨. 잠시만요.”
제인이 그런 우영을 불러 세웠다.
사현은 전시를 앞둔 그림을 보고 있었다.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의 「무제, 1970」라는 작품이었다. 「피로 그린 그림」이라고도 불리는 이것은 널따란 캔버스가 온통 붉은색으로 강렬하게 물들어 있었다.
「무제」는 마크 로스코가 생을 마감하기 전에 남긴 마지막 작품이다. 그는 이 그림을 그리고, 동맥을 끊고 자살했다.
항간에는 로스코가 극심했던 우울증의 고통을 이겨 내고자 이것을 그렸다고도 하고, 고통을 탈피하는 처절한 방법으로 죽음을 선택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그렸다고도 한다.
물론, 사현은 전적으로 후자의 가설을 믿었다. 그는 이 그림을 완성하고 죽을 생각을 하며 행복했을 것이다. 도피만큼 완벽한 해결 방법은 없으니까.
이번에 뉴욕에서 건너온 작품인데, 귀한 것이라 어디다 어떻게 전시를 할지 여간 고민되는 게 아니었다.
“⋯⋯.”
사현이 피곤한 낯으로 자신의 이마를 문질렀다. 두통이 인다. 아침에만 해도 없던 숙취가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한창 점심때인데, 무언갈 먹고 싶지도 않았다. 갈증도 일었으나 물로 해갈할 수 있는 갈증이 아니었다.
사현이 신경질적으로 시계를 매만졌다. 등신 같은 명품 시계는 값어치가 비쌀수록 무거워진다. 그렇다고 기능성으로 사자니 심미적으로 끔찍했다.
안 차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만. 애당초 시간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흉물스러운 흉터를 가리기 위해서 차는 거라 그럴 수도 없었다.
잠깐 숨을 고르던 사현이 다시 그림에 집중했을 때였다. 똑똑. 정갈한 노크 소리가 울렸다.
“들어와요.”
사현이 그림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제인이나 큐레이터 중 한 명이리라 예상했다.
“형.”
근데 어째 목소리가 지나치게 익숙하다. 그리고 몹시 낮았다. 사현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아니나 다를까. 우영이 서 있었다.
“너⋯⋯.”
“점심 안 먹었죠? 제가 커피랑 샌드위치 사 왔어요. 햄치즈로.”
우영이 묵직한 종이 가방을 흔들며 웃었다. 잠시 멍하니 있던 사현이 그를 따라 웃었다. 자꾸 갈증이 인다 했더니. 우영이, 저렇게 예쁘게 웃는 우영이 목말랐던 모양이다.
우영이 테이블 위에 사 온 것들을 줄지어 나열했다. 숙취 해소제 한 병. 숙취에 좋은 블루베리 스무디 하나. 햄과 치즈, 그리고 마요네즈가 듬뿍 든 샌드위치에 시럽을 많이 넣은 커피까지. 오로지 사현을 위한 풀코스였다.
그것을 본 사현이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얘 귀여운 짓 하는 것 좀 봐. 자꾸 웃음이 헤퍼진다.
“일단 이거부터 드세요.”
사현의 곁으로 다가온 우영이 숙취 해소제의 뚜껑을 까 내밀었다. 사현이 그것을 받아 입에 가져가려 했다. 근데 두 볼이 잡혔다. 그리고 촙,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사현의 동공이 확 움츠러들었다.
허나 그게 다가 아니었다. 살짝 고개를 돌린 우영이 아랫입술 한 번, 윗입술을 한 번 빨더니 슬쩍 혀까지 내밀었다가 물러났다.
“뭐, 뭐야⋯⋯.”
“뭐가요?”
우영이 아무렇지 않게 말을 받아쳤다. 그러고는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무심하게 테이블로 돌아가 샌드위치 포장을 뜯었다. 사현은 숙취 해소제를 든 채 우두커니 굳어 있었다.
우영이 그런 사현을 향해 까딱 고갯짓을 했다.
“와서 먹어요.”
“⋯⋯.”
“형?”
“⋯⋯.”
“뭐야. 설마 뽀뽀했다고 그래요? 우리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하는 거 아니었어요?”
“⋯⋯.”
“나 그러려고 온 건데.”
우영이 히죽거리며 웃었다. 지나치게 뻔뻔한 웃음이었다. 웬만해선 동요하지 않는 사현이 당황할 정도였다. 아침에만 해도 뽀뽀 한 번에 부끄러워한 그였는데. 그새 또 자라기라도 한 걸까. 애 자라는 거 순식간이라더니 이렇게 빠르구나.
사현이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며 숙취 해소제를 삼켰다. 그러자 우영이 빈 병을 앗아 가고, 스무디를 들려 줬다. 사현이 빙긋 웃으며 스무디를 쪽쪽 빨았다. 우영이 그런 사현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무난하게 스무디를 먹어치운 사현이 테이블에 앉아 샌드위치를 들었다. 그런데 어째 우영의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너는 안 먹어?”
“저는 집 가서 먹으면 돼요. 형 밥만 챙겨 주고 바로 갈 거라서.”
“왜? 바빠?”
사현이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며 물었다. 그 말에 우영이 푸흐, 웃음을 터트렸다.
“바쁘죠. 저 다음 전시 반년도 안 남았잖아요.”
바쁘냐니. 고용주이자, 파트너이자, 매니저이자, 멘토인 사현이 물어선 안 될 질문이었다. 아니, 안 될 건 없지만 조금 이상했다. 늘 철두철미한 사현이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구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아 그랬지.”
사현이 검지로 볼을 긁으며 대꾸했다. 우영이 씨익 웃으며 사현의 옆에 찰싹 붙어 앉았다. 그러자 사현 특유의 냄새가 넘실넘실 흘러왔다. 언제 맡아도 좋은 냄새였다.
“왜요. 더 있다 갈까요?”
“아니, 그 뜻으로 말한 거 아니거든.”
“맞는 거 같은데요?”
우영이 능글맞게 말을 받아쳤다. 사현이 코를 찡긋거리며 샌드위치를 한가득 베어 물었다. 볼이 통통하게 부풀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참다못한 우영이 사현의 볼에다 쪽쪽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사현은 새치름하게 눈을 치켜뜨면서도 그런 우영을 막지 않았다.
우영이 두 팔로 사현을 한 아름 껴안았다. 그리고 마른 어깨에 볼을 비볐다.
“아아⋯⋯. 진짜 좋아해요, 형.”
“알아. 네가 나 좋아하는 거.”
“어제보다 오늘 더 좋아해요. 그것도 아세요?”
“⋯⋯그건 지금 알았네.”
사현이 연하게 미소 지었다. 우영이 내일은 더 좋아질 거라며 속삭였다. 그 말에 사현이 먹던 샌드위치를 내려놓았다. 그 후 커피로 입을 헹궜다.
“벌써 다 먹었어요?”
우영이 반이 채 사라지지 않은 샌드위치를 허망하게 쳐다봤다.
“아니. 덜 먹었어.”
사현이 부정했다. 우영이 “근데 왜⋯⋯,”라며 말을 뗐을 때였다. 사현이 그의 턱을 부드럽게 거머쥐고 입을 맞췄다. 우영이 흠칫 어깨를 떨며 굳었다. 하지만 찰나였다. 곧 사현의 허리와 뒤통수를 감싸 쥐고 깊숙이 입을 맞췄다.
키스는 오래 이어졌다. 어젯밤만큼 뜨겁고 격정적이진 않았으나, 충분히 감미로웠다. 우영이 잠깐 눈을 떴다. 사현의 뒤로 벽에 박혀 있는 <갤러리 비>의 로고가 보였다.
여섯 개의 점. 점자로 만들어진 B. 눈으로 하는 일이 가장 많은 갤러리의 로고가 점자라. 분명 거나한 사연이 얽혀 있을 것이라 예상은 했다만⋯⋯.
우영이 관장실에 들어오기 전, 제인과 나눴던 대화를 상기했다.
‘이번 주 토요일이요.’
‘네.’
‘B 어머님 기일이세요.’
‘아⋯⋯.’
‘잘 부탁드려요. 많이 힘들어하시거든요.’
우영이 다시 눈을 감고 사현의 입술에 집중했다.
뭐가 됐든, 당신이 힘들지 않았으면, 울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내가 당신의 상처를 어루만져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 * *
우영이 기다리면서도 기다리지 않던 주말이 왔다. 주제넘게 긴장한 우영은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몇 시간 후면 연인이 괴로움과 슬픔 안에서 몸부림칠 게 뻔한데, 잠이 올 리 없었다.
거기다 감정에 무딘 제인이 ‘많이’라는 부사까지 붙여 가며 힘들어할 거라 조언하지 않았던가. 멀지 않은 과거, 사현이 끙끙 앓을 때도 ‘아아, 그럴 때네요.’라는 무감한 소리를 내놓던 그녀인데.
작업실 문을 활짝 열어 놓은 우영이 바깥으로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냥 2층에 올라가서 형 오늘 어머님 기일이라면서요? 같이 있어 드릴까요? 아니면 뭐라도 할까요? 그렇게 물어보면 될 걸 어째 발도, 입도 떨어지질 않았다.
사현은 제게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사람이나, 사현에게 저는 그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닌지라. 괜히 그의 상처를 헤집었다가 미움을 사긴 싫었다.
우영의 붓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새벽 네 시.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시리다. 물감이 섞이는 소리도 크게 들리는 시간이었다. 오늘따라 정적이 무겁다고 느낄 무렵, 인기척이 들렸다. 우영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미약하게 끌리는 슬리퍼 소리. 사현이다.
곧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우영이 기다렸다는 듯 뒤를 돌았다. 하얀 와이셔츠에 검은 슈트를 차려입은 사현이 서 있었다. 그답지 않게 목 끝까지 동여맨 넥타이와 칙칙한 검은색 양말이 어떠한 곳에, 어떠한 마음으로 가는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형.”
“그림 그려? 열심이네.”
사현이 흐릿하게 웃었다.
“⋯⋯네. 형은, 어디 가시나 봐요.”
우영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어. 일이 있어서.”
사현이 어른 특유의 거짓 미소를 지었다. 우영이 꽉 어금니를 짓씹었다. 사현이 거짓말을 한다. 누가 봐도 ‘일’하러 나가는 차림새와 낯빛이 아닌데. 숨기고 싶은 걸까. 아니면 말해 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걸까. ⋯⋯후자면 좀 슬픈데.
“늦게 오세요?”
우영은 한 발 물러서기로 했다. 연인 사이긴 하나, 감정적으로 을인 상태다. 캐묻거나 따질 권력이 제게는 없었다.
“응. 많이 늦을 거야. 기다리지 말라고.”
사현이 작업실 안으로 들어섰다. 곧장 우영의 앞까지 다가온 그가 두 팔을 벌려 우영을 껴안았다. 말이 껴안은 거지, 한 뼘이나 나는 키 차이 탓에 안긴 것과 별다르지 않았다.
붓을 내려놓은 우영이 사현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최대한 다정하고 따스하게 그를 쓰다듬으려 노력했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이런 것뿐이었다.
사현이 우영의 가슴팍에 이마를 묻었다.
“밥 챙겨 먹고. 너무 그림만 그리지 말고. 잠도 자.”
“네.”
우영이 사현의 머리칼에 입을 맞췄다. 빙긋 웃은 사현이 우영의 품에서 떨어져 나왔다. 우영이 아쉽게 그를 놓아 줬다.
“갔다 올게.”
단조로이 인사를 전한 사현이 멀어졌다. 우영이 잘근잘근 입술을 씹었다. 혼자 보내기 싫다. 보내고 싶지 않다. 하지만 제가 뭐라고. 아니, 그래도 어떻게 혼자 보내. 지금도 저런 얼굴인데. 당장이라도 죽어 버릴 것 같은 얼굴인데.
머릿속에서 수많은 자아가 충돌했다. 끝내는 걱정이 승리했다. 우영이 막 작업실을 나서는 사현을 불러 세웠다.
“형.”
“어?”
“⋯⋯같이 가 드릴까요?”
우영의 물음에 사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니.”
“그럼 배웅해 드릴게요.”
“그것도 괜찮아.”
“⋯⋯.”
“오늘은, 그냥⋯⋯. 그냥 괜찮아. 그림 마저 그려.”
바스러질 듯한 미소를 띤 사현이 “나 간다.”라는 인사와 함께 팔랑,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우영은 그렇게 맥없이 사현을 보냈다.
* * *
자정이 가까워졌다. 사현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꾸역꾸역 그림 하나를 완성한 우영은 자는 둥 마는 둥 침대를 뒹굴다 결국 참지 못하고 거실로 나왔다.
소파에 기대 누운 그가 멍하니 천장을 응시했다. 한 손에는 핸드폰을 쥔 채였다. 사현에게 전화하고 싶다. 언제 오느냐고 묻고 싶다. 괜찮은 거냐고, 혹시 내가 필요하진 않냐고 물어보고 싶다.
하지만 우영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요즘 어른인 척, 다 자란 척, 여유로운 척하곤 있으나, 여전히 관계라는 건 어려웠다. 특히 사현과의 관계는 곱절에 곱절로 어려웠다.
그래서 괜히 건드렸다가, 찔러 봤다가, 어쭙잖게 위로한다고 설쳤다가 그를 더 아프게 하면 어쩌나 몸을 사리는 중이었다.
우영이 푸욱 한숨을 내쉬며 옆으로 돌아앉았을 때였다. 삑삑삑, 삑삑삑. 띠리릭. 도어 록이 풀리는 소리가 났다. 우영이 튕기듯 일어나 쿵쿵쿵 현관을 향해 내달렸다.
“형! 왔어요?”
우영이 빽 소리를 지르듯 사현을 반겼다. 눈치 없이 밝은 목소리였다. 근데 사현이 반가워서, 생각보다 이른 시간에 와 준 그가 너무 고마워서 기쁨을 숨길 수가 없었다.
“기다리지 말고 자라니까.”
사현이 구두를 벗으며 말했다. 그의 음성은 잔잔했다. 울음의 습기가 껴 있지도 않았고, 과호흡이 왔을 때처럼 헐떡이지도 않았다.
“저 원래 이 시간에 안 자잖아요.”
우영이 부지런히 사현을 관찰하며 대꾸했다.
“자랑이다.”
사현이 픽 웃으며 구두를 신발장에 집어넣었다. 우영이 그를 따라 알맹이 없는 웃음을 지었다.
사현은 조금 피곤한 얼굴이었다. 새벽 네 시에 나가 자정까지 바깥에 있었으니 당연했다. 그가 넥타이를 풀며 집으로 들어섰다.
“밥은 먹었어? 내가 핸드폰을 계속 차에 둬서, 메시지 확인을 못 했네.”
“먹었어요. 형이 먹으라고 했잖아요. 저 잠도 잤어요.”
우영이 반은 거짓이고, 반은 진실인 말을 능청스레 읊었다. 밥은 시켜 놓고 세 숟가락 정도 먹었으나 어쨌든 먹은 거였고, 잠은 오 분 정도 자긴 했으나 어쨌든 잔 거였다.
“잘했어.”
사현이 툭툭 우영의 허리춤을 두드렸다.
“형은요? 형은 밥 먹었어요?”
“어⋯⋯. 아니. 근데 별로 생각 없어.”
그 말에 우영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가 폈다. 스무 시간 동안 아무것도 안 먹었단 말인가.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차마 그럼 지금이라도 먹어요, 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목구멍이 모래 같을 텐데 뭘 먹든 넘어가겠는가.
생각해 내. 그의 입에 음식물이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내. 우영이 팽글팽글 머리를 굴렸다. 그러다 번뜩 좋은 생각이 났다.
“형.”
“응?”
“와인⋯⋯ 마실래요?”
“와인? 소주가 아니라 와인?”
“네. 오늘은 형한테 맞추고 싶어서요.”
“네가 언제는 나한테 안 맞췄니.”
사현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는 우영의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잘생긴 얼굴이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 울상인데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보나마나 제인이 언질을 줬겠지. 우영은 종일 저를 걱정했을 테고.
그러니 예전처럼 ‘됐어. 귀찮게 하지 말고 꺼져.’ 따위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럼 조금만 마실까.”
“씻고 오세요. 제가 금방 준비할게요!”
“응. 부탁해.”
우영의 손등을 가볍게 쓸어 준 사현이 느리게 2층 계단으로 향했다.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우영이 눈을 부릅떴다. 자신은 그의 연인으로서, 사현의 우울함을 최선을 다해 없애 줄 의무가 있었다.
지갑을 챙긴 우영이 우당탕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우영은 아쉬운 대로 편의점을 탈탈 털어 왔다. 스트링 치즈도 사고, 세척 과일도 사고, 파스타 맛의 컵라면도 샀다. 와인이야 부엌 한 귀퉁이에 있는 와인 셀러에 그득히 쌓여 있는지라 따로 사지 않았다.
우영이 술상을 제법 번지르르하게 차렸을 때쯤, 사현이 축축이 젖은 머리로 나타났다. 우영이 그런 사현을 꾸짖으며 마른 수건을 가져와 손수 그의 머리를 말렸다.
사현이 킥킥 웃으며 와인 잔을 들었다. 우영은 쓸데없이 진지한 얼굴로 사현의 머리를 말려 주고, 그의 맞은편이 아닌 옆에 자리를 잡았다. 간간이 팔뚝이 스칠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보랏빛 액체가 넘실거리는 와인 잔 두 개가 짧게 부딪쳤다가 떨어졌다. 사현은 우영의 걱정과 달리 안주를 이것저것, 제법 꾸준히 집어 먹었다.
“오늘도 안 물어볼 거야?”
한참 허기를 채우던 사현이 넌지시 물었다.
“음⋯⋯ 고민 중이에요.”
우영이 어색하게 와인 잔을 돌리며 대답했다. 와인 잔은 참 얇게 생겼다. 작고 단단한 소주잔과 달리 잘못 들었다간 그대로 파사삭 부서져 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조심, 또 조심하게 됐다.
“왜 고민해? 그때의 너는 나한테 피고용인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아니잖아.”
사현이 자신의 빈 잔에다 와인을 채우며 재차 물었다. 우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죠. 이제는 월권이 아니죠. 저한테 물어볼 권리가 생겼으니까. 근데, 그래도. 형이 아픈 기억을 되뇌는 건 여전히 싫어요.”
“⋯⋯.”
“오늘이 아니라도 괜찮으니까. 오늘은 그냥⋯⋯. 그냥, 이렇게 형 맛있는 거 먹이고 재울래요.”
그 말에 사현의 입가에 초승달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가끔 아니, 자주 생각하는 거지만. 자신이 그 등신 같은 대학교의 졸업 전시회에서 우영을 발견한 건, 그를 집까지 데리고 들어온 건, 그의 감정을 수락해 준 건 정말 잘한 일이다.
그러니까, 속에 담긴 이야기를 하며 아픔을 털어놓는 것도 나쁜 일이 아닐 것 같았다.
사현이 와인을 단숨에 삼켰다. 그리고 멍하니 허공을 쳐다봤다. 어깨가 작고 마른 뒷모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우리 엄마는 다른 사람들한텐 나쁜 여자였고, 나한테는⋯⋯ 좋은 엄마였어.”
* * *
엄마는 가난했다. 그 시절에 부유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마는, 어쨌든 가난한 집안이 유독 가난할 때 태어났다. 그리고 그 암담한 시절은 여자가 살기엔 그다지 평화롭지 않았다.
엄마의 부모는 세 명의 자식을 낳았다. 첫째는 아들이었고, 둘째 역시 아들이었고, 셋째는 딸인 엄마였다.
모두가 예상하다시피, 엄마는 고등학교만 간신히 졸업하고 곧장 사회인이 됐다. 능력 없이 빚만 많은 부모를 부양해야 했고, 어정쩡한 머리를 가진 오빠들을 대학교에 보내야 했다.
‘설마 그렇게 옛날 세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구태여 ‘그렇게’라는 형용사를 붙이지 않아도 그럴 수 있는 사회였다. 본디 가난하면 발전이 늦다. 너절한 사상이 계속해서 되풀이되는 것이다. ‘현대’라 칭할 수 있는 이 시기에도 엄마의 가정과 비슷한 가구가 없진 않을 테였다.
아무튼, 엄마는 자신이 선택한 것도 아닌, 그 등신 같은 가족을 위해 할 일 못 할 일 구분 없이 다 했다. 명확히 들어 본 적은 없지만, 분명 그랬을 터다.
근데 어린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뭐 그리 많았겠는가. 식당, 공장, 청소, 식당, 공장, 청소. 가끔은 화장품 외판원도 하고, 공사판에서 밥도 나르고, 그렇게 재미없고 힘들게 살았겠지.
그래도 다행히 붉은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골목길에 들어서진 않았다. 왜냐하면 엄마는⋯⋯ 조금 답답할 정도로 착하고, 순하고, 한국 특유의 유교 사상에 찌든 사람이었으니까.
그건 나쁜 짓이다. 그렇게 살면 나중에 남편이 싫어할 것이다. 시집은 가야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근데 불행히도, 엄마는 예쁘기까지 했다. 타고난 팔자와 달리 너무 예뻤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똑똑한 머리도 아니고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여자는 예쁘면 안 됐다. 인생 살기가 힘드니까. 모든 시간이 위협으로 다가올 테니까. 그땐, 그런 시절이었다.
식당 뒷문 앞에 쪼그려 앉아 설거지를 해도, 공장에서 시커먼 작업복을 입고 부품을 넣었다가 빼도, 화장실에서 마스크를 쓴 채 물걸레질을 해도 남자들이 다가왔다.
하나같이 돼먹지 못한 놈들이었다. 엄마는 예쁜데, 멍청해서. 그래서 만만한 여자였으니까. 이것 역시 상세히 듣지는 못했지만 뻔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에게 한 줄기 빛이 내린다.
그날의 공장은 평소와 조금 달랐다. 아주아주 높은 사람이 방문한다고 했다. 하청 업체 중에서도 하청 업체인 공장에, 대기업 사장이 친히 방문해서 사진을 찍는댔다. 그 이유는 모른다. 이야길 전해 준 엄마가 그것을 까먹어 버렸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유명인이라며 얼굴 한번 보겠다, 또는 눈에 한번 들어보겠다고 야단법석을 떨었으나 엄마는 그러지 않았다. 대기업 사장이라. 그런 건 TV 드라마에서나 접한 거였다. 그마저도 엉덩이 붙이고 있을 시간이 없어 잘 보지도 못했다. 아무튼, 엄마에게 ‘그’는 별나라 사람이었다.
근데 우연히 ‘그’의 눈에 띈 거다. 띌 수밖에 없었다. 공장 반장놈이 엄마가 예쁘다며, 잘 입혀서 사진에 세워 두면 보기 좋을 거라며 윗선에다 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마는 얼떨결에 펑퍼짐한 여성 정장을 차려입고 ‘그’의 옆에 서서 사진을 찍게 됐다. 그 사진은 사현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멍한 표정의 엄마와 빙긋 사람 좋게 웃고 있는 ‘그’가 나란히 서 있는 사진.
그리고 다들 예상했다시피, ‘그’는 엄마에게 첫눈에 반했다는 같잖은 말로 매일같이 찾아 왔다. 바쁜 날에는 엄마의 몸뚱이만큼 커다란 꽃다발을 대신 보내기도 했다.
‘그’는 이제껏 숱하게 경험했던 남자들과 전혀 달랐다. 이름을 멋대로 부르던 그들과 달리 뒤에 꼭 ‘씨’를 붙여 불러 줬다. 낮은 목소리가 선애 씨, 선애 씨, 하고 부르면 엄마의 광대가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손톱 아래에 때가 잔뜩 낀 남자들과 달리 항상 바짝 깎아 깨끗한 손톱이 좋았다. 매번 깔끔하고 멋지게 입은 정장도. 반질반질한 구두도. 은은하게 나는 향수 냄새도. 훌떡 넘겨 무스를 바른 머리카락도. 커다란 키도 좋았다.
늘 자기 말만 하던 남자들과 달리 ‘그’는 선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선애 씨는 무엇을 좋아하나요. 선애 씨는 취미가 뭔가요. 선애 씨가 좋아하는 남성은 어떤 모습인가요. 선애 씨가 좋아하는 스파게티 먹으러 갈까요? 아니면 파르페 어때요?
그러니 어찌 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엄마와 ‘그’는 사랑을 시작했고, 연인이 됐다.
그렇게 일 년이 훌쩍 지났을 때, 엄마의 배 속에 사현이 피어났다. 이를 어쩌나.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그런 걱정을 하던 차, ‘그’는 자신과 함께 서울로 가자고, 다 책임지겠다고, 우리 행복하게 살자고, 엄마의 딱딱하고 거친 손을 쥐고 청혼 아닌 청혼을 했다.
엄마는 아주 예쁜 꿈을 꿨다. 자신을 딸로만 여기지, 가족으로는 여기지 않던 이들을 벗어나, 사랑하는 이와 백년해로하는 꿈. 풍족하고 여유로워 모든 이가 자신을 부러워하는 꿈. ‘선애년’이 아니라 ‘사모님’으로 불리는 꿈 말이다.
그리고 엄마는 큼지막하게 부푼 배로 서울에 와서야, 그의 집에 들어서서야, ‘그’에게 아내. 반려자. 마누라. 와이프. 집사람. 그런 것으로 명명될 수 있는 사람이 이미 있음을 알았다.
엄마는 피해자임과 동시에 가해자가 됐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이 엄마 모르게 발발하고, 절정에 이르렀다. 그 이후로는 사지가 아프고 몸이 쑤시던 삶에서 탈피해, 사지는 편하지만 속이 아픈 삶을 살게 됐다.
원화는, 그러니까 ‘그’의 부인은 엄마를 몹시 미워했다. 남편이 바깥에 나가 애까지 만들어 왔는데, 그걸로 모자라 한집에 사니 어찌 밉지 않겠는가.
엄마는 원화의 분노와 원망을 이해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죄인이 된 거였지만, 어쨌든 죄인이었다.
엄마는 원화를 감당해 내야 했다. 아니면 나가야 하는데, 또 식당과 공장을 번갈아 가며 배 속의 아이를 키울 순 없었다. 태어나서 꾼 꿈이라곤 결혼과 출산뿐이었는데. 결혼은 물 건너갔으니 아이라도 지키고 싶었다.
그래서 엄마는 버텼다. 심심찮게 음식에 락스를 넣는 원화를, 그런 원화를 모른 척하는 ‘그’를, 송곳 같은 타인의 시선을 버텼다.
대단한 엄마는 끝내 사현을 출산했다. 사현은 기대했던 것보다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이제껏 겪어 온 그 모든 괴로움과 외로움이 단숨에 증발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게 있었으니. 이제 원화가 괴롭힐 수 있는 사람이 하나 더 생겼다는 거였다.
엄마는 괴로워했다. 사현이 어떻게 될까 봐 무서워서 잠도 자지 못했다. 자신이 자는 새에 원화가 아이를 칼로 난도질해 버릴 것 같았다. 락스 냄새가 역겨워 화장실도 가지 못했다. 그래서 이따금, 침대 위에서 실례해 버릴 때도 있었다.
사현이 자랄수록 엄마는 지쳐 갔다. 꼭 증발하는 것 같았다. 타인의 시선에 활활 타서 휘발하는 것 같기도 했다. 사현은 아직 머리가 다 크지 못했음에도 그 시절의 엄마를 기억하고 있었다.
버티는 것에도 지친 그녀가 가족에게 연락했다. 마지막 동아줄이었다. 하지만 모두 죽은 건지, 이민을 간 건지 연락이 닿지 않았다. 아마 더는 필요 없어진 그녀를 가족에서 내친 것이리라.
그리고 어느 날, 엄마는 욕조에 락스를 풀어 놓고 거기다 얼굴을 처박았다. 금붕어라도 된 것처럼 고개를 흔들고 입술을 뻐끔거렸다.
그때 뭐라고 했더라. 락스 냄새가 자꾸 나서 살 수가 없으니, 그 냄새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익숙해지면 안 날 거라고 했던가. 사실 이건 락스가 아니라 머리를 맑게 해 주는 소독약이라고 했던가. 중얼중얼 끊임없이 말했는데, 잘 기억이 안 난다.
엄마는 그렇게 실명했다. 오감도 무뎌졌다. 그녀의 세상에 남은 건 없었다. 한 줄기 빛 같았던 ‘그’가 손톱만큼의 빛조차 남기지 않고 모두 앗아가 버려서 어둠밖에 남지 않았다. 그쯤 되니 하루는 사현을 사랑하고, 다음 날은 사현을 잊길 반복했다.
예쁜 엄마가 사라졌다. 이제 ‘아름다운 선애’는 ‘그냥 선애’가 되어 버렸다. 아니, 아픈 선애. 독한 선애. 미친 선애. 찢어 죽일 선애. 그런 게 됐다.
미미하게나마 유지되던 ‘그’의 관심 역시 사라졌다. 이제 그녀의 곁에 있는 거라곤 막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사현뿐이었다.
사현은 최선을 다해 그녀를 돌봤다. 심심찮게 아픈 그녀 때문에 하루걸러 한 번씩 병원에 다녔다. 이제 소독약 냄새라면 치가 떨렸다. 의사의 하얀 가운도 싫었고, 아픈 사람들이 더 아픈 얼굴로 나다니는 병원도 싫었다.
그래도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엄마를 이 지옥 같은 집에서 꺼낼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현이 막 수능 준비를 시작했을 때였다.
엄마가 손목을 그었다. 대체 어디서 구했는지, 숨기고 숨겨 놓은 락스를 찾아다가 그걸 욕조에 잔뜩 풀어 놓았다. 어쩌면 락스가 아니라 죽음을 찾아 낸 걸지도 몰랐다. 엄마는 락스에 얼굴을 쑤셔 넣는 거로 모자랐던지, 몸 전체를 담그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엄마의 예쁜 모습이었다. 창백한 피부와 시뻘겋게 물든 락스가 그렇게 잘 어울릴 수 없었다. 또, 행복해 보였다. 자신을 좀 먹어 가던 바퀴벌레들을 다 떼어 버리고 비로소 자유로워진 것 같았다.
엄마를 가장 먼저 발견한 사현은 망설임 없이 그녀를 따라 손목을 그었다. 한 번으로는 피가 철철 나지 않아서 긋고 또 그었다.
있는 거라곤 엄마뿐인 작은 인생이었는데. 엄마가 사라졌으니 살 필요가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엄마가 버터지 못한 이 집안을 사현 혼자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사현은 살았다.
죽은 건 엄마 하나였다.
* * *
사현이 툭 우영의 팔뚝에 머리를 기댔다. 우영이 팔을 뒤로 뻗어 사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우영은 사현의 짧지 않은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 줬다. 섣부르게 위로하지도 않았고, 공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따금 사현의 손등이나 손목, 팔을 가만가만 매만져 주기만 했다.
“<갤러리 비> 로고가 점자잖아.”
“네.”
“우리 엄마가 그림 되게 좋아했거든.”
“아⋯⋯. 그래서 형 안목이 그렇게 탁월하구나.”
진지한 우영의 말에 사현이 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어쩜 저런 말을 저렇게나 진심으로 할 수가 있지. 사현이 우영의 품을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아니야. 우리 엄마 안목은 아주 저렴했어.”
“정말요?”
“어. 엄마가 그 집안 돈 쓰는 걸 엄청 싫어했거든? 사실 싫어한 게 아니라 눈치 보여서 못 쓴 거겠지만, 아무튼. 그래서 엄마랑 지하철도 자주 타고, 버스도 타고, 걷기도 많이 했는데. 서울에는 생각보다 많은 예술 작품이 길바닥에 널려 있어.”
“알아요. 1%의 법.”
“오, 우리 애송이. 그런 것도 알아?”
사현이 기특하다는 듯 우영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이제 제법 복슬복슬하게 자란 머리는 만질 맛이 났다. 우영이 씨익 입술을 째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예진흥법이잖아요. 일정 규모 이상의 건축물을 지을 땐 건축 비용의 1%를 회화, 조각, 공예 등의 미술 장식에 사용하여야 한다.”
우영이 아나운서처럼 또박또박 말했다. 언젠가 시험을 치기 위해 외운 것인데, 그게 여태 머릿속에 남아 있을 줄은 몰랐다. 다행이지. 사현이 저를 영 멍청이로 보진 않을 것 같으니. 우영의 만면 가득 뿌듯함이 차올랐다.
사현이 고개를 주억였다.
“맞아. 그래서 빌딩 앞마다 끔찍하게 생긴 조각상이나, 조잡한 정원이 꼭 하나씩 있지.”
“⋯⋯.”
“근데 엄마는 그런 것도 좋아했어. 가끔은 지하철 벽에 걸린 그림을 종일 본 적도 있었고, 입장료가 무료거나 천 원, 이천 원인 전시회도 갔었어.”
사현이 지하도에 걸린 그림을 감상하던 작은 등을 떠올렸다. 그 지겨움에 사현이 비비 몸을 꼬면, 싱긋 웃으며 손을 잡아 줬었지.
‘사현아. 이것 봐. 어쩜, 이 사람은 해바라기를 이렇게나 예쁘게 그렸네. 이 화가 눈에는 해바라기가 이렇게 보이나 봐.’
‘사현아. 엄마는 꽃이 좋아.’
‘하지만 꽃은 금방 시들잖니? 근데 그림 속에 있는 꽃은 계속 그대로야. 하늘도, 해도, 바람도, 봄도.’
‘그래서 엄마는 그림이 좋아. 예쁜 그림은 더 좋아.’
‘예쁜 그림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져.’
잔잔한 음성이 아직도 또렷했다.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는 입술도, 엄마 특유의 향기도.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뜬 사현이 우영을 올려다봤다. 우영이 그와 지그시 시선을 맞췄다.
“근데 엄마가 눈을 잃고 나니까, 그림을 못 보잖아. 그게 그렇게⋯⋯ 가슴이 아프더라고. 엄마가 유일하게 좋아하던 거였는데.”
“⋯⋯.”
“그래서 <갤러리 비>를 지었어. 내가 점자로 된 그림까지는 만들지 못하지만, 그래도 로고는 점자로 만들어 놨는데. 하늘에 있을 엄마가 한 번쯤은 와 주지 않을까 싶어서.”
“⋯⋯.”
“그때 지하철에서 봤던 해바라기 그림보다 훨씬 예쁜 그림이 많은데. 내가 부러 예쁜 그림만 골라서 전시하는데. 그러니까 한 번만 와서 봐 주면 좋겠다, 싶어서.”
우영이 붉어지는 사현의 눈가를 살살 쓸었다. 그래서 예쁜 그림을 좋아하는구나. 언젠가 사현이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림은 예뻐야 해. 심미적이고, 안정적이며 위로를 줘야 하지.’
예술에서 의미를 찾기 급급한 요즘 시대에 그런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었구나. 비로소 이해가 됐다.
“내가 너처럼 순진한 애 꼬셔다가 9:1이라는 말 같지도 않은 계약하면서, 왜 그렇게 악착같이 돈을 모으는지 아니?”
“⋯⋯글쎄요.”
“정보를 사는 거야. 그 사람들을 지옥으로 떨어트릴 수 있는 정보.”
사현이 멀지 않은 훗날을 상상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집안이 몰락하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볼 것이다. 새벽마다 자는 사현을 깨워 엉엉 서럽게 울던 엄마가 아직 선했다. ‘사현아. 엄마 좀 구해 줘.’ ‘사현아, 제발.’ ‘사현아, 엄마 힘들어.’ 덜덜 떨리던 목소리는 떠올릴 때마다 목덜미에 소름이 돋아났다.
사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존재만으로도 그녀를 고통스럽게 하는 파렴치한임과 동시에 구원자였다.
순식간에 독기로 차오른 사현에, 우영이 입술을 꼭 말아 물었다가 놨다. 낯선 얼굴이다. 무표정한 사현의 얼굴은 자주 봤지만, 이렇게 분노가 넘실거리는 모습은 흔치 않았다.
우영이 사현 쪽으로 몸을 돌려 앉았다.
“복수는 상관없는데, 형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형이 또 울까 봐, 저는 그게 무서워요.”
그 말에 사현의 눈썹이 마뜩잖게 구겨졌다.
“나 안 울어.”
“⋯⋯.”
“아⋯⋯. 그러기엔 네가 본 게 너무 많구나?”
그가 킥킥 자조적인 웃음을 내뱉었다. 우영이 그를 따라 헛웃음을 흘렸다. 그가 사현의 잔에 와인을 따랐다. 그 후 자신의 잔에도 따랐다. 곧 두 개의 잔이 뎅그렁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술을 한 모금 넘긴 사현이 쩝쩝 입맛을 다셨다.
“내가 우는 건, 아파서가 아니야. 슬퍼서도 아니고. 나 오늘도 안 울었어.”
“⋯⋯.”
“나는 분하고 억울해서 울어.”
“⋯⋯.”
“슬퍼서 우는 건 스무 살 때 끝냈어.”
사현은 이상할 정도로 표정이 없었다. 꼭 슬픔에 통달한 사람처럼 굴었다. 그래서 우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분하고 억울한 것도 슬픈 건데. 하지만 사현이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라 한다면, 그리 생각하게 두고 싶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현의 눈이 가물가물하게 풀어졌다. 미뤄 뒀던 잠이 쏟아지는 모양이었다.
“늦었어요. 자러 가요.”
우영이 그를 추슬러 욕실로 보냈다. 양치를 시키고, 침실까지 에스코트했다. 사현은 웬일로 군말 없이 우영의 보살핌을 받았다.
우영이 도톰한 이불을 탁탁 펼쳐 사현의 위로 덮었다. 그러고는 당연하게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사현의 미간이 마뜩잖게 구겨졌다.
“왜 거기 있어. 이리 올라와.”
그가 툭툭 옆자리를 두드렸다. 우영은 거절하지 않고 사현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주책맞게 신이 나서는 사현의 목 아래에 팔베개도 해 주고, 이마에다 뽀뽀도 해 줬다.
“잘 자요, 형. 오늘 저랑 대화해 줘서 고마워요. 울지 않은 것도 고맙고.”
그 말에 사현의 눈가가 묘하게 굳었다.
우영은 참 신기하다. 요즘 그의 삶이 저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걸 느낄 때가 참 많다. 근데 지치지도 않고, 무심한 저에게 불만을 토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행복해 보였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 역시 저처럼 사랑에 결핍되어 살아 왔는데. 아니, 따지고 보면 저는 엄마에 대한 기억이라도 있지. 우영은 그조차도 전무했다. 그런데 어떻게 저리도 열성적으로, 또 순수하게 사랑할 수 있냔 말이다.
“너도 혼자 자랐는데, 왜 이렇게 나랑 다르지?”
“뭐가요?”
“사랑하는 거 말이야.”
“⋯⋯.”
“나는 받는 것도 헐떡이는데, 너는 주면서도 행복해하잖아.”
사현의 질문에 우영이 으음, 목으로 신음했다. 쉽지 않은 질문이었는데, 답은 어렵지 않게 나왔다.
“저는 미워할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
“형은 증오랑 슬픔과 싸워야 했지만, 저는 외로움이랑만 싸우면 됐거든요. 그래서 사랑을 주든, 받든. 옆에 사람이 있기만 해도 행복해요.”
“⋯⋯.”
“그리고 제가 형을 많이, 아주 많이 사랑하잖아요.”
“⋯⋯.”
“매일 주고 또 줘도 넘칠 만큼 사랑해요.”
우영이 싱그럽게 웃는다. 그가 웃으면, 사위가 순식간에 봄이 됐다. 귓바퀴에, 턱 아래에, 팔꿈치에, 날개뼈에 끈질기게 들러붙어 있던 외로움이 일순간에 증발했다.
사현이 우영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네가 주는 사랑을 돌려줄 자신이 없어.”
“⋯⋯.”
“나는 그냥⋯⋯ 구덩이거든. 아주 깊고, 큰 구덩이야. 받아도 받아도 채워지질 않아. 그래서 너를 좀먹으면 어쩌지.”
“좀먹어도 괜찮아요. 저 되-게 커서 좀먹는 거 가지고는 티도 안 날걸요.”
우영이 큰 비밀을 이야기하듯, 소곤소곤 말했다. 사현이 코웃음을 쳤다. 우영이 자꾸 능글맞아진다. 그런데 그게 싫지 않으니 큰일이다. 사현이 꼬물꼬물 우영의 품을 파고들었다.
단단한 가슴팍이 좋다. 쿵쿵쿵, 세차게 뛰는 심장 박동도 좋았고, 자신을 한 아름 껴안고 있는 두툼한 팔도 좋았다. 후끈할 정도로 높은 체온은 두말할 것도 없이 좋았다.
길었던 하루가 드디어 끝이 보였다.
“잘 자, 우영아.”
나는 오늘 네 덕에 잘 잘 수 있을 것 같으니, 너도 잘 잤으면 좋겠어.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 사현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