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7. Knock-out (8/24)

07. Knock-out

늦은 밤의 김밥천국은 늘 그렇듯, 우영과 사현뿐이었다. 아, 사장 아주머니가 끄트머리 테이블에 앉아 드라마 재방송을 보고 있었으나 존재감이 도드라지지 않았다.

오늘의 메뉴는 만두 라면에 돈가스와 오므라이스, 그리고 라볶이였다. 우영은 평소와 달리 수저를 움직이는 속도가 느렸다. 새벽같이 미용실에 들러 염색하고 종일 제대로 먹은 게 없는데도 그랬다.

사현과 있으면 모든 욕구가 무뎌진다. 오감이 오로지 그를 향해서, 뭘 먹든 맛과 향을 제대로 느낄 수가 없었다. 예전엔 안 그랬는데. 제 마음을 깨달은 후부터 심해지더니, 사현에게 고백한 이후로는 오감이 증발한 것과 다름없어졌다.

음식을 깨작거리던 우영이 결국 수저를 내려놓았다. 사현은 고개 한번 들지 않았다. 우영의 상태를 모르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밥알 대신 아랫입술을 씹던 우영이 비스듬히 고개를 뒤틀었다.

“있잖아요, 형. 저 질문 하나 해도 돼요?”

“⋯⋯.”

바지런히 움직이던 사현의 젓가락이 허공에서 굳었다. 그가 눈만 들어 우영을 쳐다봤다. 새초롬한 눈동자에 의심이 가득했다. 그래도 싫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혹 그가 거절을 내놓을까, 우영이 급하게 말문을 텄다.

“예전에, ‘새로운 밤’ 전시 때요. 제 그림 자주 보러 오던 사람 있었잖아요. 나이 지긋하신 여성분.”

사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마 우영이 묘사하는 인물을 되뇌는 것이리라. 기억의 반추는 어렵지 않았다. 사현의 머릿속에 몹시 뚜렷한 흔적을 남긴 사람이었으니까. 얼음이 맺힌 우영의 그림을 보러 일주일에 세 번씩 오던 여자. 수십 분씩 쳐다보던 그 그림을 제발 사 가길, 사 가서 사랑해 주길, 하고 바랐던 여자였다.

“그 사람이 왜.”

사현이 우영을 따라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분, 제 그림 사 갔어요?”

우영의 말에 긴장했던 사현의 어깨가 느슨히 풀어졌다. 걱정과 달리 별것 아닌 질문이었다.

“응. 전시 마지막 날에 사 갔어. 48개월 할부로 사 가긴 했지만, 어쨌든 사 갔어. 할부 안 되는데, 그냥 해 주라고 했어. 그리고 내가 직접 포장도 하고, 그림 보관 방법도 알려 줬어.”

“역시⋯⋯.”

우영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현의 미간이 설핏 좁아졌다.

“뭐가 역시야?”

“많이 좋아하면, 어떻게든 가지고 싶은 거구나, 싶어서요.”

“뭐?”

사현의 얼굴이 희한하게 구겨졌다. 뜬금없이 그게 무슨 개소리냐는 표정이었다. 우영의 금발과, 그의 맑은 눈동자와 묘한 웃음을 띤 입술을 번갈아 보던 사현이 헛숨을 삼켰다.

“그래서. 너 설마 지금 나를 가져 보겠다고,”

끼리릭! 소음 한 줄기가 사현의 말을 가로질렀다. 우영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사현의 입술이 한일자로 굳게 다물렸다. 우영은 아무런 말 없이 사현은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현이 지지 않고 그를 올려다봤다. 뭐, 어쩌자고.

직선으로 부딪힌 두 개의 시선이 융화되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나돌았다. 먼저 눈을 피한 건 우영이었다. 뒤를 돈 그가 정수기로 향했다. 그리고 찬물 두 잔을 떠 와서는 하나는 자신의 앞에, 또 다른 하나는 사현의 앞에다 놨다.

“형. 저 하나 더 물어봐도 돼요?”

“싫다고 하면 안 물을래?”

“그래도 물을 거예요.”

“변했어. 변했어, 서우영. 말 잘 듣던 착한 서우영은 어디 갔나 몰라.”

사현이 부루퉁한 얼굴로 물잔을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가볍게 내리깔린 눈두덩이 발갰다. 우영이 그 예쁜 눈두덩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저랑 잘래요?”

“푸학!”

사현의 입에서 물로 만들어진 폭죽이 터졌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우영의 볼과 턱이 촉촉하게 젖을 정도였다. 그래도 놀라지 않았다. 충분히 예상한 반응이라. 우영이 슥슥 휴지를 뽑아 사현의 손에 들려 줬다. 그리고 한 번 더 뽑아 자신의 얼굴을 닦았다.

“콜록, 콜록. 콜록, 콜-록.”

휴지로 입을 가린 사현이 거칠게 기침했다. 오장육부를 다 쏟아 낼 듯, 둔탁하고 센 기침이었다. 반면에 우영은 이렇다 할 표정 없이 얼굴을 닦고, 큼직하게 잘린 돈가스를 포크로 쿡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간신히 기침을 멈춘 사현이 눈을 한껏 홉떴다. 어떤 미친놈이 같이 자자는 소리를 김밥천국에서 라면 먹다가 해. 사랑 고백도 참 뜬금없었지만, 이번 건 그 이상이었다.

사현이 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우영이 단조로운 음성으로 설명을 덧붙였다.

“그런 뜻으로 자자는 건 아니고요. 아니, 사실 그 뜻을 노리고 한 말은 맞아요. 저는 언제든 환영이거든요.”

우영은 기이할 정도로 표정이 없었다. 꼭 그의 몸뚱어리에 다른 영혼이 깃든 것 같았다. 머리카락이 샛노래서 더 낯설었다. 사현이 축축하게 젖은 휴지를 신경질적으로 던졌다. 휴지와 테이블이 마찰하며 찰팍거리는 소리가 났다.

사현이 상체를 앞으로 잔뜩 내밀고 우영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너 미쳤니? 갑자기 회까닥 돌았어? 그것도 한 번 돈 게 아니라 아주 여러 번, 팽글팽글, 제대로 돌았는데?”

그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바람 소리가 담뿍 묻어 속삭이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한껏 부라린 눈이며, 찡긋거리는 콧잔등에 당황과 분노가 가득했다.

우영이 턱을 괴고 사현을 바라봤다. 바짝 긴장한 사현과 달리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아니, 생각해 보니까 그렇더라고요.”

“무슨 생각? 뭘 생각했는데. 생각하지 마. 머리 굴리지 마. 네가 언제부터 그런 걸 했다고.”

사현이 우다다 속사포처럼 말을 쐈다. 우영이 픽, 알 듯 모를 듯 연한 웃음을 흘렸다. 이토록 당황한 사현이라니.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라 새로웠다. 얼굴은 지엄한 대감 같으면서, 귓바퀴는 새빨갛게 익은 게 귀엽기도 했다.

우영이 자신의 머리를 아무렇게나 쓸어 넘겼다. 사현의 눈동자가 하늘거리는 금발을 따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형은 외롭고. 저는 형을 너-무 좋아하잖아요?”

“그래서?”

“그러니까 저 좀 써먹으라고요. 혼자 밥 먹기 싫을 때 부르고, 혼자 자기 싫을 때 부르고, 술 마실 때 부르고, 외로울 때 부르고, 아플 때 부르고. 그럼 제가 개처럼, 호구처럼 달려갈게요.”

“⋯⋯.”

“사실 호구도 아니죠. 제가 어디 뜯길 돈이 있나요, 잃을 직장이나 집이 있나요. 형이랑 붙어 있으면 좋은 건 전데.”

우영이 그렇지 않냐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현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검은 그림자가 자욱하게 깔린 얼굴로 시시각각 뚱뚱해지고 있는 면발만 쳐다봤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하지만 차마 뱉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맑고 순순하던 애가 스스로 호구가 되겠다는데. 거기다 대고 못된 말을 쏘아 댈 순 없었다.

사현이라고 사랑을 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나이가 몇인데. 첫사랑도 있었고, 아픈 사랑도 있었다. 그래서 지금, 저렇게 말하고 있는 우영의 속이 얼마나 엉망일지, 또 얼마나 간절할지 빤히 보였다.

이럴까 봐. 이럴까 봐 그리 못되게 내친 것인데. 결국엔 이렇게 돼 버렸다. 멀미라도 하듯, 속이 메슥거렸다.

그런 사현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우영의 입술은 쉬지 않았다.

“저 염색한 것도 형이 이탈리아에서 금발 남자 만났다는 소리 듣고 한 거예요.”

사현의 눈썹이 가파른 오르막을 그렸다. 이탈리아. 금발 남자. 그걸 우영이 어떻게 안담. 제 기억에도 희미할 정도로 옛날 일이거늘. ⋯⋯그런 말을 할 사람이야 뻔했다. 애당초 이탈리아에 함께 갔던 사람이 한 명뿐이었으니까.

“⋯⋯제이가 그런 말을 하든? 너한테? 왜?”

“제가 물어봤거든요. 혹시 형 남자 안 만나냐고. 되게 간절하고, 되게 절실한 표정으로 물어봐서 대답 안 할 수가 없으셨을 거예요.”

“그래서. 이탈리아 남자가 되겠다고 금발로 염색을 했어?”

사현이 실소했다. 그 이유로 복슬복슬하고 포근하던 머리칼을 댕강 쳐냈다니. 너무 멍청한 짓인데, 너무 우영다워서 화도 안 났다.

사현의 비아냥 아닌 비아냥에 우영의 만면이 눅눅하게 젖었다.

“혹시 모르잖아요. 형이 저한테 조금이나마 흥미가 동할지도.”

“⋯⋯.”

“뭐, 예상했던 반응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아요.”

“뭐가 나쁘지 않아, 뭐가.”

“덕분에 이렇게 얼떨결에 형이랑 밥 먹고 있잖아요.”

“⋯⋯.”

사현이 볼 안쪽을 세게 깨물었다. 그러잖아도 꾸역꾸역 밀어 넣었던 음식이 단전에 턱 하고 걸리는 게 느껴졌다.

잠깐 숨을 고르던 사현이 마른 입술을 핥았다.

“밥 먹는 게 뭐라고⋯⋯.”

“맞아요. 밥 먹는 게 뭐라고. 그러니까 형은 그냥 밥 먹어요. 나는 밥도 먹고, 형도 좋아할 테니까.”

우영이 씨익 멋들어지게 웃으며 돈가스를 쿡 찍었다. 그리고 그 포크를 사현의 손에 들려줬다. 사현이 그런 우영을 멍하니 쳐다봤다.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꼭 그의 웃음에 들이받히기라도 한 것처럼.

곧 우영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그라들었다. 그런데도 눈앞에 그의 웃음이 어른거렸다. 사현이 포크를 꽈악 세게 움켜쥐었다.

얘가 이런 애가 아니었는데. 갑자기 왜 이렇게 변했지?

말도 잘 하고, 여유롭고, 적극적인 우영이 낯설게 느껴졌다. 데면데면하던 며칠 동안 훌쩍 어른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네가 원래⋯⋯ 이런 성격이었던가?”

분명 처음 만났을 땐 말도 더듬고, 눈도 못 마주치고, 저 넙데데한 어깨를 어떻게든 접어 보겠다고 한껏 웅크린 채 다녔던 것 같은데. 그게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졌다.

우영의 입가에 쌉싸름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니요. 원래 안 이랬죠. 근데 사람이 절실하니까 변하지 않을 수가 없더라고요.”

“⋯⋯.”

사현이 꾹 입을 다물었다. 오랜만에 두통이 올라왔다. 집에 가고 싶었다. 제 침실 서랍에 그득한 알약들이 그리웠다. 입에 한가득 쑤셔 넣고 세상을 등진 채 잠이나 늘어지라 자고 싶었다.

우영이 쥐여 준 포크를 내려놓은 사현이 이마를 쓸어 넘겼다. 식은땀이 묻어났다. 사랑을 쏟아붓는 건 우영인데, 저는 오롯이 쳐내는 처지인데. 왜 제가 이다지도 힘들고 지치는지 모르겠다.

두 사람은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가게를 나왔다. 그러고도 버릇처럼 편의점으로 향했다. 딸기 우유를 마셔야 했으니까. 사현은 편의점에 들어서고 나서야 아차 했다.

우영이 아무렇지 않게 딸기 우유 두 개를 집어 계산까지 했다. 주둥이가 예쁘게 뜯긴 우유가 사현의 앞으로 다가왔다. 머뭇거리던 사현이 께름칙하게 그것을 받았다.

우유를 한 모금씩 홀짝이는 사현과 달리, 우영은 꿀꺽꿀꺽 두툼한 목젖을 움직이며 단번에 우유를 동냈다. 그러고는 우유갑의 옆구리를 눌러 접었다. 버릇이었다. 다 먹은 건 곱게 정리하기. 분리수거도 철저히.

“형.”

“어.”

“원래 제 인생에는 그림밖에 없었거든요?”

“⋯⋯.”

“근데 거기에 형도 추가됐어요. 이제 제 인생은 그림이랑 형, 이렇게 두 개예요.”

우영이 검지와 중지를 하나하나 펼쳐 보였다. 사현이 두 손가락을 응시했다.

길고, 두툼한 손가락. 마디가 툭툭 불거져 있고, 주름이 짙은 손가락. 손등에 비해 조금 하얀 안쪽 피부. 붓과 연필을 많이 쥐어 살짝 휜 중지. 굳은살이 박인 끝 마디. 바짝 깎아서 지금의 시야에선 보이지 않는 손톱.

사현이 다급하게 우유를 마셨다. 이상하게 목이 탔다. 우영이 편의점 쓰레기통에 빈 우유갑을 던져 넣었다.

“저는 두 개 다 완벽하게 가질 때까지 열심히 할 거예요.”

“⋯⋯.”

“진짜, 열심히 할 거예요.”

우영이 다짐하듯 말했다. 사현의 대답일랑 하등 관심 없어 보였다. 아마 사현이 무어라 말을 해도, 그를 막거나 둘러가게 할 수 없을 테였다.

“좋아해요, 형.”

우영이 웃는다. 늘 그렇듯 참, 싱그럽고 예쁘게도 웃는다. 쨍한 가로등 빛이 그의 금발을 따라 일렁거렸다. 눈이 부실 정도였다.

사현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우영아. 사랑이라는 게, 그렇게 인생을 걸 만큼 대단한 게 아니야. 의식주만큼 필수 불가결한 것도 아니지. 그냥 지금 네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한 점처럼 가볍고 하찮은 건데. 나비의 날갯짓 같은 나약한 공격으로도 훌떡 바뀌어 버릴 수 있는 건데.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인생을 제법 경험한 어른으로서 해 주고 싶은 말이었다. 그러나 사현은 침묵을 택했다. 지금 사랑에 눈과 귀가 먹어 버린 우영에겐 들리지 않을 성싶어서.

사현이 딸기 우유를 삼켰다. 혀 위를 나도는 액체가 상한 것처럼 떫었다.

그래도 사현은 그것을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넘겼다.

먹다 보니 단 것도 같았다.

* * *

이젤 앞에 선 우영이 흥얼흥얼 콧노래를 불렀다. 그는 어젯밤부터 이른 새벽이 된 지금까지, 약 다섯 시간째 작업실에 박혀 있었다.

짙은 유화 냄새 너머로 낯선 냄새가 흘러왔다. 염색약 특유의 따끔한 냄새였다. 하루 간격으로 염색을 두 번이나 했더니, 씻어도 씻어도 냄새가 사라지질 않았다.

우영은 하루 만에 검은 머리로 돌아왔다. 사현이 그걸 원했으니까. 돈도 날리고, 시간도 날리고, 하물며 탈색을 감내하느라 아픔도 견뎠지만, 아쉽진 않았다.

아, 머리를 쳐낸 건 아쉬웠다. 그 똑똑한 네이버도 머리카락을 빨리 기르는 법은 모르더라고. 단백질을 많이 먹으라느니, 머리를 자주 감으라느니, 하물며 야한 생각을 많이 하라느니 따위의 조언도 있었는데 그다지 신빙성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아아,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랴. 우영은 그저 좋기만 했다. 사현이 자신을 받아준 것도 아닌데, 뭐가 이리 좋은지 모르겠다.

이래서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소리를 하는구나. 어떻게든 사현을 쟁취하겠다, 언젠가는 가지고 말겠다. 그리 다짐했더니 하루하루가 소중하고 활기찼다.

붓 놀림이 덩달아 신이 났다. 여기저기 튀고, 치대지고, 섞이는 물감들이 그렇게 경쾌할 수 없었다.

얼마나 그림을 그렸을까. 활짝 열린 커튼 너머로 어슴푸레한 아침이 밀려왔다. 높은 빌딩들 사이로 보일 듯 말 듯한 해를 응시하던 우영이 붓을 놓았다. 그러고는 우당탕 온갖 소음을 다 내며 욕실로 뛰쳐 갔다.

우영은 살갗이 빨갛게 달아오를 정도로 거칠게 샤워했다. 혹 유화 냄새가 배어 있을까 봐. 생전 하지 않던 트리트먼트도 두 번이나 했다. 염색약 냄새를 날리기 위해서였다.

허겁지겁 머리를 말리고, 늘 입는 흰색 반팔 티를 껴입으며 거실로 나왔다. 집은 조용했다. 현재 시각 오전 일곱 시 반. 약 삼십 분 후면 출근 준비를 마친 사현이 등장할 테였다.

소파에 거꾸로 걸터앉은 우영이 2층 계단을 집요하게 쳐다봤다. 그렇게 꼬박 삼십 분이 흘렀다. 핸드폰 시각이 일곱 시 오십삼 분을 가리켰을 때였다. 슬리퍼 밑창이 끌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우영의 허리가 꼿꼿하게 곧추섰다. 사현이다, 사현이다, 사현이다.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딸랑딸랑 종을 울렸다. 아직 그의 모습이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은은한 수선화와 바닐라 향이 느껴지는 듯했다. 사랑이라는 게 이렇게 무섭다.

마침내 사현의 발이 나타났다. 동그란 복사뼈와 종아리, 슈트 팬츠 아래로 언뜻언뜻 불거지는 무릎 뼈도 보였다. 우영이 벌떡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의 뒤꿈치가 들썩거리며 바닥을 찧었다.

오늘의 사현은 얼마나 멋지려나. 아침에는 그 작은 얼굴 여기저기에 잠기운이 붙어 있기 일쑨데. 오늘도 그러려나. 살짝 부은 눈이면 좋겠다. 진짜 귀여운데. 타인은 쉽게 볼 수 없는 모습이라 더 애틋한데.

우영이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기대로 몸뚱이를 퉁퉁하게 부풀렸다. 곧 한 손에 넥타이를 쥔 사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 그는 금빛이 은은하게 도는 셔츠에 검은색 슈트를 아래위 세트로 입었다. 거기다 가죽으로 된 손목시계와 얇은 검정 테 안경을 매치했다.

정말이지⋯⋯ 말도 안 되게 멋졌다. 우영이 해사하게 웃으며 손을 올릴 때였다. 그를 발견한 사현의 미간이 역삼각형 모양으로 구겨졌다.

“너⋯⋯ 여기서 뭐 하니?”

“형 기다리죠.”

“나를? 왜?”

“형 배웅하려고요.”

우영이 샐쭉 입꼬리를 한껏 째며 웃었다. 사현의 턱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배웅이라니. 갑자기 무슨 배웅? 나 어디 가나? 아닌데. 나 그냥 갤러리로 출근하는데? 오늘 특별한 일정도 없는데? 근데 쟨 또 왜 반푼이처럼 웃고 있는 건데?

사현은 잘난 머리로도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우영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우영의 동그란 머리통 위로 넓적한 귀가 자라났다. 보기 좋은 골반 뒤로는 퍼덕거리는 꼬리도 보였다.

⋯⋯귀? ⋯⋯꼬리?

사현이 눈을 세게 끔뻑였다. 그제야 우영이 온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잠이 덜 깬 모양이다. 어제 우영이 냅다 쏴 버린 폭격 때문에 밤새 제대로 수면을 취하지 못했으니 환영이 보일 만도 했다.

‘이제 제 인생은 그림이랑 형, 이렇게 두 개예요.’

‘좋아해요, 형.’

그 말을 다시 떠올린 사현이 팩팩 고개를 흔들었다. 관자놀이가 웽웽거리며 울렸다. 그런 사현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영이 빙글빙글 웃으며 사현의 옆에 붙어 섰다. 그에게서 달큼한 샤워 코롱 냄새가 났다. 사현이 사 놓은 것이라 더할 나위 익숙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희한하게 낯설었다.

사현이 알게 모르게 반걸음 옆으로 물러섰다. 그러자 우영이 허리를 굽히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잘 주무셨어요? 오늘은 언제 퇴근해요? 같이 저녁 먹을까요? 점심도 괜찮은데. 제가 갤러리로 갈게요.”

우영이 종알종알 입술을 아래위로, 또 좌우로 바쁘게 움직였다. 사현의 초점이 살짝 옆으로 비켜나갔다.

간신히 지워 냈던 강아지 꼬리가 다시 보였다. 사현의 허벅지만 한 꼬리가 좌우로 바쁘게 퍼덕거리고 있었다. 털이 복슬복슬하게 난 귀도 보였다. 저건 무슨 종(種)이지. 진돗개? 골든 레트리버? 사모예드? 또 뭐가 있더라. 동물에는 전혀 흥미가 없던 터라 우영이 무슨 종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종일 리가 없지. 아, 백사현. 정신 차려. 쟤 인간이야. 개 아니라고. 더군다나 저 덩치면 개보다는 곰이나 늑대에 가깝다.

아니, 그게 다 무슨 상관이야.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안경을 벗은 사현이 손등으로 눈두덩을 세게 짓눌렀다.

“많이 피곤해요?”

대답 없는 사현에 우영이 비스듬히 고개를 흘렸다. 사현이 고개를 내저었다. 어깨가 무겁고, 눈알이 뻑뻑하긴 했으나 이 정도의 피곤은 항상 달고 사는 것이다.

“괜찮아. 너는 또 밤새웠니?”

“네.”

“그래. 피곤하겠네. 어서 자.”

“네.”

우영이 당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현이 무심하게 그를 지나쳤다. 슬리퍼가 끌리며 사박사박 소리가 났다. 그런데 어째 발소리가 두 배다. 맨발의 우영이 사현을 졸졸 따라오고 있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걸음 뒤에서.

사현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복도를 거닐었다. 하지만 우영의 그림자가 자꾸 발등을 스쳐서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뒤를 돈 사현이 뾰족한 눈으로 우영을 올려다봤다.

“왜 따라와. 자라고.”

“형 가시면요.”

우영이 샐쭉 웃으며 말했다.

“⋯⋯.”

사현이 께름칙한 낯으로 현관으로 향했다. 우영이 다시 따라붙었다. 사박사박, 저벅저벅. 묘하게 어우러지는 발소리에 사현이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뭐야. 뭔데. 이건 또 무슨 짓인데. 뭘 원하는 건데. 뭐 때문에 용돈 달라고 아빠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애처럼 구는 건데.

신발장에서 구두를 꺼내던 사현이 멈칫했다. 아, 혹시 정말 돈이 필요한가. 사현이 재킷 주머니를 매만져 지갑의 안위를 확인했다. 그러고는 우영에게 은근히 물었다.

“용돈⋯⋯ 필요하니?”

“용돈이요? 아니요.”

우영은 그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는 얼굴이었다. 사현이 헛숨을 흘렸다. 그래. 물욕이 간장 종지만 한 애가 무슨 용돈이겠어. 콧잔등을 찡긋거린 사현이 미끈한 구두에다 발을 넣었다.

우영이 현관 앞에 바짝 붙어 섰다. 그의 맨 발가락이 차가운 현관 바닥에 닿을 듯 말 듯했다. 우영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늘 맨발이다. 현관 앞에 슬리퍼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음에도 신는 걸 못 봤다.

긴 다리 탓에 운동복 바지가 발목 위로 덜렁 올라가 있다. 미끈하게 뻗은 종아리에 툭 불거진 복사뼈가 눈에 들어왔다. 슈트 입혀 놓고, 검은 양말 신겨 놓으면 참 보기 좋은데. 구두 위로 도드라진 복사뼈가 참 예뻤⋯⋯,

“주차장까지 바래다드릴까요?”

우영이 물었다. 사현이 움칠, 어깨를 떨었다. 자신이 하던 생각을 믿을 수가 없었다. 변태도 아니고 대체 무슨⋯⋯.

“아니. 나 눈도 멀쩡하고 다리도 멀쩡하거든.”

사현이 특유의 무심한 낯을 유지하며 구두끈을 묶었다. 주차장까지 바래다준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오늘의 우영은 참 종잡기가 힘들다.

“에이. 그래도 거기까지 가는데 심심하잖아요.”

우영이 너스레를 떨었다.

“빨리 가면 일 분 만에도 가거든.”

사현이 우영의 배려 아닌 배려를 단호히 내치며 일어났다. “얼른 자라.” 그 말과 함께 도어 록 손잡이를 잡는데, 우영이 운동화에 발을 쑤셔 넣었다. 사현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모양이었다. 들어 놓고 모르는 척하는 거, 사현의 특기였는데.

“⋯⋯.”

사현이 무언가가 얹힌 듯한 얼굴로 우영을 쳐다봤다. 며칠 새 낯짝이 철판을 넘어 벽돌만큼 두꺼워진 우영이 씨익 웃었다.

“가요, 형.”

안타깝게도, 펜트하우스는 전용 엘리베이터가 따로 있다. 1층도 아니고, 사현의 집 앞에서 그를 딱 기다리고 있었다. 우영이 사현 몰래 입술을 삐죽였다. 눈치 없는 엘리베이터 같으니. 앞으로는 사현 몰래 엘리베이터를 1층에 옮겨 놔야겠다는 영악한 생각을 했다.

지하 2층을 누른 사현이 거울을 보며 넥타이를 매기 시작했다. 옷깃을 척척 세우더니 넥타이를 목 뒤로 두르고, 익숙하게 매듭을 만들었다.

그의 옆에 선 우영이 그 일련의 행동들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어찌나 불같은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모른 척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봐서 내 얼굴 뚫리겠니?”

넥타이를 깔끔하게 맨 사현이 거울 속의 우영과 눈을 마주쳤다. 나름대로 비아냥이었는데, 우영은 그저 싱글벙글이다. 예쁘게 휘는 눈에, 시원하게 벌어지는 입술까지. 못된 말을 준비했던 사현이 꾹 입을 다물었다.

엘리베이터의 전광판 숫자가 오늘따라 느리게 움직였다. 묘한 어색함에 사현이 구두 앞코로 바닥을 비볐다. 빨리, 빨리 좀 움직여라. 우영의 집요한 시선에 볼이 다 따끔따끔했다.

엘리베이터가 십 층에 다다랐을 때였다.

“사현이 형.”

우영이 사현을 불렀다. 그의 낮은 음성이 좁은 공간에서 웅웅 메아리쳤다. 사현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의 목소리가 전신을 간지럽히는 것 같았다. 순간 소름이 확 돋았다.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였다.

“어, 왜.”

목울대를 크게 꿀렁인 사현이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이번에는 또 무슨 말을 하려나. 이제 우영이 자신을 부를 때마다 아랫배가 간질간질할 만큼 긴장이 됐다. 평생 긴장이라고는 모르고 살아 왔는데도 그랬다.

“저는 형이 검은색 안경 쓴 것보다 금색 안경 쓴 게 더 좋아요.”

“⋯⋯.”

사현의 얼굴이 삽시간에 허물어졌다. 방금 자신의 귓구멍을 파고든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뭐가 어쩌고 어째? 사현이 서늘한 눈으로 우영을 흘겨봤다.

“너 지금 내 패션에 시비 거는 거야? 일주일에 일곱 번씩 흰 반팔만 입는 네가?”

우영은 가끔 갤러리에 방문할 때가 아니고서야 항상 같은 차림이다. 흰 반팔 티셔츠에, 색이 아주 미묘하게 다른 추리닝 바지. 어제의 우영이 오늘의 우영이고, 곧 내일의 우영이었다. 근데 그런 우영이 감히, 사현의 패션에 감 놔라, 배 놔라 한 것이다.

사현은 뒷목을 잡고 뒤로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놀란 우영이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아니요. 그냥 저는 형이 금테를 쓴 게 더 좋다고요. 형이 안 어울리는 게 뭐가 있겠어요. 물론 민얼굴이 가장 멋있지만요.”

우영이 해사하게 웃었다. 그의 광대가 볼록 올라가며 안경이 들썩였다. 우영의 안경은 오래 쓴 티가 났다. 칠이 여기저기 벗겨지고, 끄트머리가 살짝 어그러져 있었다. 언뜻 봐서는 티가 안 난다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지그시 보고 있으면 눈에 거슬렸다.

아니, 통장에 삼억이 있는 애가 안경 하나를 안 바꾸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이냐고. 삼억 다 끌어안고 죽을 거냐고.

팔짱을 낀 사현이 엘리베이터 벽에 비스듬히 기대섰다.

“⋯⋯너나 안경 좀 바꿔.”

“네. 오늘 바꿀게요.”

우영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먼 옛날에 봤던 우영의 모습이었다. 무슨 말을 해도 네, 예, 그럴게요, 좋아요, 라는 대답만 하던 과거의 우영 말이다. 사현이 입술을 씰기죽거렸다.

“웬일이냐. 네가 내 말을 다 듣고.”

“저 원래 형 말 잘 들어요. 그것만 빼고.”

“⋯⋯.”

그가 말하는 ‘그것’이란 아마 정리를 뜻하는 것일 테다. 마음 정리. 정리했냐고 물어볼 때마다 아니요, 혹은 안 할 거예요, 따위의 대답을 내놓았었지.

사현이 코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우영이 그런 감정을 품게 됐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도 판단이 서질 않았다. 속이 갑갑했다. 물 대신 시멘트라도 마신 느낌이었다.

띵. 마침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사현이 먼저 내리고, 우영이 따라 내렸다. 그가 종알거리며 사현의 발뒤꿈치에 바짝 붙어 섰다.

“저 안경 맞추고, 같이 저녁 먹을까요? 제가 갤러리로 갈게요.”

“싫어.”

지나치게 빠른 부정에 우영의 낯빛이 침울해졌다. 사현의 거절은 항상 맵다. 속이 쓰리고 눈물이 찔끔 났다.

사현은 그런 우영을 모른 체했다. 아, 그냥 오라고 할까. 고작 밥 한 낀데. 너무 싸늘하게 구나, 싶다가도 우영이 괜한 기대를 하면 어쩌나, 싶어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결국 별다른 말을 얹지 않은 사현이 미끈한 차에다 몸을 실었다. 우영이 실망을 털어내지 못한 얼굴로 애써 웃으며 인사했다.

“출근 잘해요, 형. 퇴근하고 봬요.”

“⋯⋯.”

사현은 별다른 말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사이드미러 속의 우영이 빠르게 멀어졌다. 멀뚱히 서서 차의 뒤꽁무니만 보고 있는 게, 그렇게 처량할 수가 없었다.

사현이 운전대를 꽉 세게 말아 쥐었다. 꼭 파렴치한 죄라도 저지른 기분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우영의 마음을 받아줄 순 없었으니까. 괜히 여지를 주는 것보다야 얼른 정리할 수 있도록 돕는 게 나았다.

모퉁이를 돌자 우영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백미러를 확인한 사현이 쓰고 있던 안경을 벗었다.

“이거 한정판인데.”

되게 비싸게 주고 샀는데. 이제 구하려고 해도 못 구하는 건데. 아끼던 건데.

‘저는 형이 금테를 쓴 게 더 좋다고요.’

‘물론 민얼굴이 가장 멋있지만요.’

앞으로는 못 쓸 듯싶었다.

* * *

사현은 제인이 뽑아 준 갤러리 일정을 보고 있었다. 슬슬 우영의 두 번째 전시 일정을 잡아야 하는데. 이번엔 또 얼마나 머리를 조여야 기똥찬 콘셉트가 나올는지. 벌써 골이 띵했다. 더군다나 근래 우영에게 감정의 파도가 몰아치면서 그림이 묘하게 전과 달랐다. 속도도 반의 반절로 뚝 떨어졌고.

정신 차리라고, 아니면 내쫓아 버리겠다고 따끔하게 혼을 내야 하는데. 그게 맞는데. 어째서인지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그 넙데데한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있는 꼴을 보면 가슴이 울렁거리고 목구멍이 떫었다.

감정에 물들다니. 동정에 치우치다니. 저도 늙었나. 아직 창창한 삼십 대인데.

이래서야 원. 계획한 대로 전시가 착착 진행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영이 조금 더 컸으면 좋겠는데. 훨씬 대단해졌으면 좋겠는데. 그럴 수 있는 애인데. 어쩌다 그런 마음에 물들어서⋯⋯.

의자 깊숙이 등을 묻은 사현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오른손에 안착한 만년필이 빙글빙글 고운 호선을 그리며 돌았다.

사실 우영의 마음을 받아주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사현은 오케이, 한 단어만 외치면 되는데 뭐가 어렵겠나. 한집에 살겠다, 밥도 같이 먹고 잠도 같이 잘 수 있겠다, 거기다 일도 같이 하겠다. 연애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환경이었다. 아마 꽤 달콤하고 반짝반짝한 연애가 되겠지.

문제는 그 관계가 길지 않을 거라는 점이었다. 끝 역시 좋게 나지 않으리라. 사현의 수많은 경험에 의하면 분명 그리될 터였다.

공적인 관계가 사적이 되면 나약해진다. 아주 미세한 것으로도 상처를 입고, 그 상처가 곪으면 금세 파멸한다. 여기저기서 폭탄이 터지고, 피가 비처럼 내리고, 살점이 튀겠지.

사현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매우 이기적인 편이었다. 일을 좋아해서 절대 포기하지 않지만, 시도 때도 없이 사지를 갉아먹는 외로움 역시 해갈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상대방의 시간이나 의사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당장 내가 죽을 것 같았으니까. 어쩌면 상대방을 그렇게 사랑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겠다. 사현에게 필요한 건 제 옆에서 몸을 비벼 주고,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고, 사랑한다 말해 줄 ‘인간의 가죽’뿐이었다.

그에게 연인이란 이따금 튀어 오르는 외로운 밤을 함께 맞서 싸워 줄 찰나의 무기나 갑옷,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란 말이다. 그래서 외로울 때에는 불같이 사랑을 나누더라도 일이 생기면 연락을 뚝 끊어 버리기 일쑤였다.

거기다 연인이라고 딱히 특별 대우를 해 주는 것도 아니다. 앞뒤 문맥 없이 치솟았다가 떨어지는 감정 변화나 짜증을 거르지 않았다. 그걸 누가 받아주겠는가. 저도 좆같은 알약이나 씹으며 근근이 버티는데. 그래서 사현은 연인의 화를 방관하고, 방치했다.

싫으면 떠나가라지. 네가 가면 또 다른 누군가가 올 텐데.

잘난 얼굴과 번지르르한 직업과, 통장에 가득한 공(0)들은 사현을 언제나 ‘갑’의 위치에 설 수 있게 만들어 줬다. 그 때문에 이다지도 지랄 맞은 성격이 되어 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우영을 받아준대도, 앞선 만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현 역시 우영이 싫은 건 아니었다. 예쁘지. 키 크지. 젊지. 착하지. 말도 잘 듣지. 떡 벌어진 기골 역시 제 취향이었다. 멀지 않은 과거, 그에게 안겨 잤을 때도 널따란 품이 퍽 괜찮았었다.

가끔 꿈틀거리는 근육이나 내리깔린 눈꺼풀 같은 걸 보면. 형, 형, 하면서 따라다니는 걸 보면. 특유의 싱그러운 웃음을 흩뿌리는 걸 보면. 저도 몸이 동하기도 하고.

연인 놀음을 하기에 우영은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아니, 아주 괜찮은 파트너에 속하지.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우영은 이제껏 경험했던 그 어떤 이보다 순진하고, 맹목적이었으며, 충성도가 높았다. 제가 멋대로 굴리다 버리면, 창창한 그의 앞길이 통째로 허물어질 게 불 보듯 뻔했다. 고작 거절로 저 모양인데 이별 후엔 오죽하랴. 그림은 물론, 식음까지 전폐할지도 몰랐다.

그 꼴을 상상했더니 속이 울렁거렸다. 주인만 알던 개가 길가에 버려진 걸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사현이 비스듬히 턱을 괬다.

“애가 좀 영악하고 못됐으면, 그냥 적당히 놀다가 버리는 건데…….”

너-무 착해서 문제야, 문제.

사현이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멍하니 있으니 자꾸 우영의 생각만 난다. 몸도 찌뿌둥한데 오랜만에 바나 갈까. 가서 여자든, 남자든 아무나 잡고 호텔로 가서 턱 끝으로 땀이 뚝뚝 떨어질 때까지 정사를 나누다 보면 머리가 한결 개운해질 것도 같은데.

그래. 그러고 보니 우영을 집에 들여앉히고 나서는 한 번도 타인의 온기를 접하지 못했다.

사현이 흘깃, 모니터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여섯 시 삼십일 분.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사무실에서 열 시까지 시간을 죽이다 느지막이 나가자. 그동안 일이나 해야지. 그전에 커피 한잔 더 마실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다. 똑똑. 정갈한 노크가 울렸다.

“네, 들어와요.”

사현이 의자에 기댄 채로 눈동자만 굴려 문을 응시했다. 노크의 주인은 제인이었다.

“B.”

“응.”

사현이 목을 울리는 탁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제인이 문을 반쯤 열어 둔 채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업무 끝나셨어요?”

“왜? 오늘 일 있어? 제이 먼저 퇴근해.”

“아니요. 제가 아니라, B에게 일이 있는 것 같은데요.”

“⋯⋯나?”

사현의 눈매가 동그랗게 커졌다. 그가 컴퓨터 바탕화면에 떠 있는 일정표를 확인했다. 혹 잊은 스케줄이 있나 싶어서. 흔치 않은 일이었다. 사현은 늘 제인이 짜 준 스케줄대로 칼 같이 움직였으며, 가끔 바빠서 잊더라도 제인이 미리미리 안내해 주곤 했다.

“아무것도 없는데?”

오늘은 4시 이후로 이렇다 할 일정이 없었다. 사현은 큐레이터 팀과의 미팅 후, 내내 사무실에 박혀 우영과, 우영의 그림과, 우영의 전시만 생각했다.

사현이 의아한 눈빛으로 제인을 쳐다봤다. 무슨 일정이 남았냐는 표정이었다. 그러자 제인이 의뭉스러운 미소를 띠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뒤로 뚜벅뚜벅 익명의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사현이 무심코 자리에서 일어났다. 와이셔츠 깃도 매만지고, 느슨히 풀어 놨던 넥타이도 옥좼다. 당연히 손님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컬렉터나, 작가나, 평론가나. 뭐 그런, 갤러리에 방문하는 게 당연한 사람들 말이다. 이 시간에, 사전 약속 없이 방문하는 건 몹시 드문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는 일도 아니었다.

허나 사현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형.”

방문객은 다름 아닌, 우영이었다.

“너⋯⋯.”

사현이 말을 뱉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대체 우영이 여기 왜.

“저 안경 바꿨어요.”

우영이 특유의 해사한 미소를 만면에 띠웠다. 그의 콧잔등 위에 미끈하게 빠진 안경이 얹혀 있었다. 얇은 검은색 림(Rim)에 프런트는 금색인 안경이었는데, 우영과 매우 잘 어울렸다.

그는 사현이 허락하기도 전에 성큼성큼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우영과 사현을 번갈아 보던 제인이 슬그머니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나간 김에 옷도 샀어요. 그때 형이랑 전시회 전에 갔던 가게에서요. 뭘 어떻게 골라야 할지 몰라서 쭈뼛거렸더니 거기 사장님? 음⋯⋯ 점장님? 아무튼 그분이 추천해 주셨어요.”

우영이 말을 잘 들었으니 칭찬해 달라는 듯, 두 팔을 벌렸다. 그는 도톰한 진녹색 니트에 일자로 빠진 짙은 색의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늘 품이 넉넉한 후드나 맨투맨만 고집하던 평소와는 전혀 다른 차림이었다.

사현의 시선이 우영을 아래위로 분주하게 훑었다. 센스 좋은 대학생 같은 게 제법 괜찮았다. 아니, 몹시 괜찮았다. 특히 살짝 접은 바지 밑단이 그렇게 괜찮았다. 양말까지 한 브랜드에서 산 건지, 익숙한 컬러 매치의 띠가 복사뼈 위에 붙어 있었는데, 정말⋯⋯ 저절로 마른침이 꼴깍 넘어갔다.

사현이 주먹을 꾹 쥐었다가 폈다. 마른침이라니. 미친 거 아닌가. 저도 모르는 새에 발목과 관련한 페티쉬가 생기기라도 한 걸까.

아아, 이건 확실히 욕구 불만이다. 어떻게든 풀어야 했다. 이른 시간이든 아니든. 얼른 우영을 보내고 바나, 술집이나, 하물며 클럽이라도 가야 할 성싶었다.

아니, 저렇게 반짝반짝 빛나는 우영을 봤는데, 다른 인간이 눈에 들어오려나. 잘나가는 모델이나 배우를 앞에 앉혀 놔도 심드렁할 것 같은데. 기대했던 밤이 시작도 전에 망했다.

사현이 털썩, 의자에 앉았다. 맥이 탁 풀렸다. 뼈마디가 노곤하게 뭉그러지는 듯했다. 그러다 번뜩! 무언가가 뇌리를 스쳤다.

아씨. 나 안경 벗고 있는데. 괜히 자기가 한 말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사현이 눈으로 책상 위를 훑었다. 그러다 안경을 차에 두고 내렸음을 깨달았다. 사현이 꾸욱 눈을 세게 감았다가 떴다.

낭패다, 낭패.

만년필을 든 사현이 부러 서류를 뒤적였다. 이미 검토가 끝나서 결재를 완료한 것들이나, 우영에게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나 바빠. 너랑 한가하게 노닥거릴 시간 없어. 그러니까 돌아가. 그러한 기운을 마구마구 뿜어 댔다.

“왜 왔어.”

“형이랑 저녁 먹으려고요.”

“그건 아침에 답을 줬던 것 같은데.”

싸늘한 사현의 말에도 우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귓구멍에 필터라도 생긴 모양이다. 듣고 싶은 말만 듣고, 아닌 건 동그랗게 뭉쳐서 내다 버리는 그런 필터 말이다.

책상 앞까지 다가온 우영이 빙긋,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오늘은 김밥천국 말고 다른 곳 가요. 비싼 곳이요. 제가 살게요. 저 오늘 팔백육십삼만 원이나 썼는데, 생각만큼 속이 울렁거리지 않아요. 돈 욕심이 간장 종지에서 밥그릇 정도로 성장했나 봐요.”

그가 듣기 좋은 음성으로 종알거렸다. 그러나 사현은 찰나조차 고개를 들지 않았다. 마치 우영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이 행동했다.

“나 밥 먹었어.”

“거짓말. 제인 실장님이 아직 안 드셨다던데요.”

그 말에 사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제인이 말했다니. 제 사생활을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해 주다니. 이탈리아에서 만났던 남자에 대해 말한 것도 그렇고. 물론, 대단한 정보도 아니다만⋯⋯. 항상 철두철미하던 제인이 왜. 저 모르게 둘이 편이라도 먹은 건가.

사현이 어금니를 꽉 씹었다가 놨다. 내일 제인에게 꼭 한소리 하겠노라, 다짐했다.

“너랑 먹기 싫다는 뜻이잖아. 대충 좀 알아들어.”

사현이 만년필을 툭 짜증스레 내던졌다. 구겨진 미간에 짜증이 가득했다.

우영이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거절을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다. 그런데도 가슴이 아픈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갈비뼈가 안으로 확 오므라들었다. 오장육부가 조이며 심장이 짓눌렸다. 위액과 뒤섞인 피가 역류하는 듯했다.

“저랑 밥 먹는 게 그렇게 싫어요? 불편해요? 막 얹힐 것 같고 그래요?”

우영의 축축한 음성이 널따란 공간을 허망하게 나돌았다. 사현이 후우 길게 숨을 뽑아냈다. 잠깐 멎었던 두통이 다시금 올라왔다. 책상 서랍 안에 있는 약이 절실했다.

“그럼 편하겠니?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뻔히 아는데. 밥이 목구멍으로 술술 넘어가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냐?”

사현의 말은 늘 그렇듯,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거기다 발음까지 좋아서는 한 음절 음절이 전신 여기저기에 화살처럼 콱콱 박혀 왔다. 우영의 얼굴 위로 우중충한 먹구름이 드리웠다.

“좋아하는 티 안 낼게요.”

그 말에 사현이 코웃음을 쳤다.

“할 수는 있고? 지금도 네 눈에⋯⋯.”

좋아해요, 형. 사랑해요, 형. 그런 말이 득실득실한데. 뒷말은 차마 내놓지 못했다. 자신의 혀가 달큼해지는 듯해서.

대화를 포기한 사현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우영에게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제가 떠나는 게 나았다. 이 시간에 바에 가는 건 처음인데. 사람이 있으려나. 차라리 연락처를 뒤져 볼까. 과거에 만났던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직 남아 있을 것도 같은데.

“나 오늘 늦게 들어가. 너는 바깥에서 밥 먹고 가든가, 집에 가서 먹든가. 아무튼 얼른 들어가서 그림이나 그려.”

사현이 지갑에서 수표 몇 장을 빼내 우영의 손에 들려 줬다. 그러고는 핸드폰을 밝히는데, 우영이 사현의 손목을 잡아챘다. 기껏 들려 준 수표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놔.”

사현이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싫어요.”

낮은 음성이라면 우영도 지지 않았다.

“놔, 새끼야.”

사현이 팔꿈치를 흔들며 손을 빼내려 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큰 우영의 손은 꿈쩍도 않았다. 이제 진짜 짜증이 났다. 그는 우영이 이렇게 정성을 다해 들쑤시지 않아도 충분히 피곤한 삶을 살고 있었다. 내일도 할 일이 산더미란 말이다.

그런데 눈치 없는 우영의 손은 더 옹골차졌다.

“밥이 싫으면 영화 봐요. 그것도 아니면 술을 마시든가. 그것도 싫으면 산책을 하든, 운동을 하든 뭐든 해요.”

사현이 픽, 조소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너 날이 갈수록 뻔뻔해진다?”

이게 이제 내 배려가 당연한 줄 알아. 사현이 눈을 한껏 치켜떴을 때였다.

우우웅, 우우웅. 그의 손에 들린 핸드폰이 진동했다. 사현이 슬쩍 눈동자만 내려 발신인을 확인했다.

[회장님]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름이 떠 있었다.

사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듯, 건조하고 가녀린 낯빛이었다.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낀 우영이 슬쩍 손에서 힘을 풀었다. 사현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탁, 그의 손을 털어 냈다.

사현이 뚜벅뚜벅 창가로 다가갔다. 우영은 어쩔 줄 모르고 멀어지는 그를 목도하고 있었다. 사현이 후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호흡을 멈춘 채,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회장님.”

-어디니.

“저 지금,”

-또 미술관이냐?

사현의 시선이 창밖으로 흩뿌려졌다. 걸걸한 목소리가 귓구멍을 파고드는 순간, 목덜미에 소름이 돋아났다.

미술관이란다. 그렇게 미술관이 아니라 갤러리라 했음에도 제대로 말하는 법이 없다. 사현의 생물학적 아버지이자 화 그룹의 회장인 김명현, 그는 늘 이러했다. 친절하지만, 그 친절이 깊지 않고. 반쪽짜리 아들에게 관심이 있지만, 그 관심 역시 깊지 않았다.

-바쁘니? 저녁은 먹었고?

“⋯⋯조금요. 밥은 먹었습니다.”

-벌써 먹었단 말이야? 이런⋯⋯.

명현의 음성이 미약한 난처에 잠겼다. 사실 난처라기보다는 아니꼬움에 가까웠다. 감히 저한테 보고도 하지 않고 저녁을 먹었냐, 그런 뉘앙스였다. 한 달에 한 번 연락하면 많이 하는 거면서. 사현이 여태 참고 있던 숨을 가늘고 길게 토해 냈다.

“왜 전화하셨어요?”

-오랜만에 너랑 밥이나 한 끼 하려고 했지.

“아⋯⋯. 그러셨어요.”

사현이 마른세수를 했다. 좀 일찍 연락 주시지. 저도 바쁘게 일하는 사회인인데. 대뜸 전화하시면 어떡해요. 그 말이 앞니를 간질였는데, 뱉진 않았다. 늘 할 말은 하고 살아 왔으나 명현에겐 그래선 안 됐다. 어찌 됐든 아버지라 불러야 하는 사람이었고, 이 갤러리의 기둥 하나하나, 벽돌 하나하나를 다 그의 재력으로 쌓았으니 밉보여 봐야 좋을 게 없었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사현은 그 정적 사이에 숨은 뜻을 진즉 알아차렸다. 애당초 명현은 사현의 식사 여부가 중요하지 않았을 터였다.

-집에 잠깐 들러라.

“지금요?”

-그래. 와서 앉아만 있어.

“⋯⋯.”

사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이었다.

-선애 기일도 얼마 안 남았는데. 얼굴은 봐야지. 오는 거로 알고 끊으마.

“⋯⋯.”

들려서는 안 될 이름이 사현의 귓구멍을 할퀴고 사라졌다. 사현이 좀 전보다 훨씬 딱딱하고 차갑게 굳었다.

그는 끊긴 핸드폰을 들고 한참 동안 서 있었다. 그냥 그렇게 죽어 버린 것처럼, 한참이나.

우영이 그런 사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의 얇은 와이셔츠로 갤러리 정원의 쨍한 조명이 스몄다. 마른 몸뚱이가 어슴푸레하게 보였다. 숨은 쉬고 있나. 배도, 가슴도 움직이질 않는데. 거기다 어째 오늘 아침보다 더 마른 것 같다.

보다 못한 우영이 사현을 향해 다가갔다.

“형.”

“집에 가. 나 갈 곳 있어.”

사현이 휙 우영을 스쳐 한쪽에 놓인 에어 드레서로 다가갔다. 우영이 그의 뒤로 바짝 붙어 섰다. 통화 내용을 듣진 못했으나, 분명 보통 일이 아니렷다.

본능적으로 그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민재라는 사람이 가족 모임이라는 명목으로 사현을 찾아 왔던 날. 또 ‘새로운 밤’ 전시에서 민재와 그의 어머니를 만났던 날 말이다.

우영의 입술이 우물우물 무언가를 씹듯 움직였다. 어떤 말을 해야 하나. 가지 말라고 할까. 아니면, 같이 가 주겠다는 주제넘은 말을 해 볼까. 그것도 아니면, 다 내팽개치고 저와 술이나 마시자고, 예쁜 내가 술을 따라 주겠다며 반푼이처럼 웃어 볼까.

우영의 머리가 팽글팽글 바쁘게 굴러갔다. 그쯤, 슈트 재킷을 여민 사현이 초점 없는 눈으로 우영을 지나쳤다. 우영이 무어라 말하려 입을 뗐다. 그러나 사현이 빨랐다.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가. 내쫓아 버리기 전에.”

“⋯⋯.”

사현은 매몰차게 떠났다. 공기 중에 연한 수선화 냄새 한 줌을 남기고. 바닥에 널브러진 수표들이 우영을 비웃듯 노려봤다. 우영이 꾹 주먹을 말아 쥐었다.

또다. 또 그 느낌이다. 정작 내쳐진 건 자신인데, 저가 사현을 버린 듯한 그 느낌 말이다. 아주 더럽고, 추잡하고, 어두운 구렁텅이에 떨어진 사현을 모른 척하고 돌아선 것처럼 꿉꿉한 기분이었다.

* * *

우영은 작업실 문을 활짝 열어 뒀다. 혹 불지도 않는 바람에 닫힐까, 간이 의자 하나를 받쳐 두기도 했다. 그러고는 붓은 움직이되, 모든 신경을 복도에 내놓았다.

벌써 열 시가 넘었는데. 사현은 언제쯤 오려나. 또 술독에 빠졌다가 새벽이나 되어서 오려나. 한 번 마셨다, 하면 끝을 보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집에 잘 찾아오긴 할는지. 어디 쓰러져있는 건 아닌지. 지갑이나 핸드폰을 잃어버린 건 아닌지. 별별 걱정이 다 들었다.

결국 붓을 놓은 우영이 문가에 털썩 주저앉았다. 혹시나 하고 핸드폰을 밝혔는데 역시나. 메시지고 전화고 아무것도 없다.

우영이 몇 시간 동안 끈질기게 보냈던 자신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형, 어디에요?]

[언제 와요?]

[술 마셔요?]

[제가 데리러 갈까요?]

노란 메시지 창 옆에는 1이라는 숫자가 아릿하게 박혀 있었다. 읽지도 않았다는 뜻이다. 우영이 벅벅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흩트렸다. 전화라도 해 볼까. 근데 괜히 했다가 사현이 난처해지면 어쩌나.

잡다한 생각들이 마구 몰아쳤다. 눈앞엔 고주망태가 된 사현,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울고 있는 사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현 등 여러 모습의 사현들이 번갈아 가면서 비명을 질러 댔다.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등신 같은 짝사랑은 마음껏 걱정하지도 못한다. 참견도 못 하고, 연락도 할 수 없었다. 그게 사무치게 억울했다.

한동안 핸드폰을 괴롭히던 우영이 복도로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은은한 조명등만 켜진 복도는 지나칠 정도로 고요했다.

현관에서 기다릴까. 아니면 엘리베이터? 그것도 아니면 건물 앞까지 가 볼까.

우영의 발가락이 꼼지락꼼지락 불안하게 움직였다. 다시 자리로 돌아가 한참 쓸데없는 고민을 이어 가던 그가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익숙한 도어 록 소리가 복도의 차가운 바닥을 타고 흘러왔다.

우영이 허겁지겁 현관으로 달려갔다. 사현이 드디어 온 모양이다. 반가운 마음과 두려운 마음이 마구잡이로 휘몰아쳤다.

현관에서 마주한 사현은 다행히 비틀거림 없이 구두를 벗고 있었다. 우영의 낯빛이 한결 맑게 갰다.

“형. 일찍 오셨네요.”

“⋯⋯.”

사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구두끈을 푸느라 우영에게 줄 관심은 없는 듯했다. 우영은 그의 앞에 주저앉아 대신 신발을 벗겨 주고 싶은 걸 꾹꾹 눌러 참았다. 대신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발이 현관 바닥에 닿을 듯 말 듯했다. 오늘 아침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저녁은요? 드셨어요?”

“⋯⋯.”

사현은 여전히 묵음이다. 우영의 눈썹이 시무룩하게 흘러내렸다.

“이제 대답도 안 해 줄 거예요? 나 되게 걱정했는데.”

그 말에 사현이 헛숨을 삼켰다. 마침내 신발을 벗은 그가 비스듬히 우영을 올려다봤다.

“왜.”

“네?”

“네가 왜 날 걱정해.”

“형?”

“네가 뭔데 날 걱정해.”

“⋯⋯형 울었어요?”

대화가 엇나갔다. 우영의 만면에 충격의 금이 갔다. 쿠쿵, 바닥이 한 뼘쯤 내려앉는 것 같았다. 사현의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거미줄 같은 실핏줄도 올라와 있었다.

사실, 그의 눈이 충혈된 건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다. 피곤에 내몰리면 자주 그랬으니까. 근데 눈가가 붉은 건 처음이었다. 코끝도 분홍빛이다. 입술은 평소보다 더 빨갰다. 반면에 피부는 창백했다. 모든 색을 눈과 입술에만 집중해서 쏟아 넣은 것처럼.

누가 봐도, 어떻게 봐도 운 얼굴이었다. 그냥 뚝뚝 눈물만 떨어트린 게 아니라, 엉엉 온 사력을 다해 운 얼굴이었다. 가슴을 쥐어뜯고, 입술을 깨물며 운 얼굴.

우영이 아랫입술을 세게 씹었다가 놨다. 차라리 술을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어서 들어오지. 어떻게 울고 와. 어디서 울었는데. 길거리에서? 차 안에서? 아니면 당신을 이렇게 만든 그 좆같은 가족들 사이에서?

뭐든 마음이 미어지지 않는 게 없었다. 찰나 상상한 것만으로도 세상이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

사현이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가 아무렇지 않은 척 우영을 앞질렀다.

“울기는 무슨. 나 피곤해. 저리 가.”

“왜 울었어요.”

“안 울었어.”

“울었잖아요.”

우영이 집요하게 사현의 뒤로 따라붙었다. 사현이 울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이성적인 사현이 울었다. 대체 무슨 이유로. 무엇 때문에.

“⋯⋯.”

사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무시를 택한 듯했다. 그가 빠른 걸음으로 현관 복도를 가로지르고 거실까지 나왔다. 이대로면 걱정에 침식하는 우영을 내버려 둔 채, 2층으로 쏠랑 사라져 버릴 듯했다.

우영이 기다란 다리로 성큼성큼 사현을 앞질러 섰다. 사현이 왼쪽으로 움직였다. 우영이 따라갔다. 사현이 다시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우영 역시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야!”

사현이 빽 소리를 질렀다. 그러잖아도 머리통이 펄펄 끓는데. 이 애송이는 왜 눈치 없이 이러는 걸까. 늘 예뻐 보이던 우영의 얼굴이 얄미워 죽을 것 같았다. 지금 같아선 저 높다란 코에다 주먹도 꽂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우영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사현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근 며칠 사이에 사현의 짜증, 신경질, 화, 혐오, 그런 것들에 은근히 적응해 버린 덕분이다.

“왜 울었냐고요.”

우영이 부드럽게 사현의 손목을 감싸 쥐었다. 참으로 가늘다. 웬만한 여자 손목보다 더 가는 것 같다. ⋯⋯사실 거짓말이다. 여자 손목을 쥐어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른다. 사현은 알겠지. 자신의 손목이 두꺼운지, 전 여자 친구의 손목이 두꺼운지. 아, 이건 중요한 게 아니니 일단 넘어가자.

사현이 손을 뒤틀어 우영의 손아귀를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뼈마디도 더럽게 굵은 우영의 손은 매우 옹골찼다. 망치로 내리친들 꿈적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놔.”

“형.”

“놔! 놔, 씨발, 놓으라고! 왜 자꾸 귀찮게 굴어, 왜!”

사현이 쿵쿵 뒤꿈치로 바닥을 찧었다. 목에는 핏대가 섰고, 그러잖아도 붉었던 눈알이 터질 듯 달아올랐다. 소스라치게 놀란 우영이 사현의 손을 놓쳤다. 발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

이렇게나 경기를 일으키며 절 쳐내는 사현이라니. 감히 상상도 해 본 적 없었다. 그래서일까, 염산이라도 삼킨 것처럼 속이 아팠다.

놀란 건 우영만이 아니었다. 삽시간에 창백해진 우영의 얼굴에, 사현이 덩달아 호흡을 꺾어 먹었다. 그가 벅벅 세게 마른세수를 했다.

“내가, 내가 지금 좀⋯⋯. 어? 좀 그래⋯⋯. 제정신 아니야⋯⋯. 방금은 그냥, 어 별 뜻 없이⋯⋯. 어쩌다 튀어나온 말이니까, 잊어.”

사현이 답지 않게 더듬더듬 말을 조각냈다. 우영이 사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당황했구나. 방금의 말이 진심은 아니었구나. 얼떨결에 나온 말이었구나. 그리 생각하니 상처가 금세 아물었다. 사랑이라는 게 이다지도 위대했다.

우영이 다정한 음성으로 물었다.

“또 그 형이라는 사람 만나고 왔어요? 전시회 때 봤던 그 사람들?”

사현이 옆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주제넘지 마.”

“어떻게 주제를 안 넘어요. 형 손목에,”

있는 상처. 아주 많은 시간과 고통이 뭉쳐 있는 그 상처. 그런 게 또 생길까 봐 무서워 죽겠는데. 형이 어느 날부터 2층에서 내려오지 않을까 봐 너무 무서운데.

뒷말을 차마 내뱉지 못한 우영이 입술을 세게 짓씹었다.

사현이 다급하게 소매를 당겼다. 덜렁 드러났던 손목이 옷 속으로 사라졌다. 그가 눈을 잔뜩 홉떴다.

“손목에 뭐.”

“⋯⋯.”

“내 손목에 뭐!”

“아니에요.”

이번엔 우영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매사 어른스럽고, 단단하고, 철두철미한 사현은 이렇게 가끔, 아주 가끔 사지가 토막 난 시체처럼 군다. 이미 죽어 버렸는데, 어쩔 수 없이 걸어 다니는 것처럼. 호흡이 버거운 사람처럼. 참혹한 황무지를 배회하는 마른 나뭇잎처럼 굴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우영은 자신의 무쓸모함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 없었다. 위로해 주고 싶은데. 버팀목이 되어 주고 싶은데. 그럴 수 있는 관계도 아니었고, 위로에 능통하지도 않았다. 사현의 눈에는 그저 덩치 큰 애에 불과할 터였다.

“⋯⋯.”

“⋯⋯.”

잠깐의 정적이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들었다. 먼저 움직인 건 사현이었다. 그가 벌건 눈알로 우영을 스쳐 지나갔다.

우영은 끈질기게 그를 뒤따랐다. 다른 것도 아니고, 울고 들어왔는데 혼자 둘 수 없었다.

“잘 거예요?”

“그래.”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 드릴까요?”

“아니.”

사현은 짧은 단어로 모든 대답을 일갈했다. 그러나 우영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알았다. 지금 사현의 옆에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걸. 그 빈자리가 저로 채워질 수 있을진 모르겠으나, 뭐든 하고 싶었다. 또 뭐든 해 주고 싶었다.

사현의 한쪽 발이 2층으로 향하는 첫 번째 계단을 디뎠을 때였다. 우영이 그의 옷자락을 꾸욱 거머쥐었다. 검지와 엄지로 잡았을 뿐인데, 옷 주름이 등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힘이 셌다. 사현이 팩 우영을 돌아봤다. 우영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나 써먹으라고 했잖아요. 옆에 있어 줄게요.”

사현의 눈살이 확 구겨졌다. 그러잖아도 부글부글 끓던 속이 펑 하고 폭발했다. 정수리 위로 화염이 뿜어지고, 목구멍에서는 독이 발린 비수가 마구 쏟아졌다.

“야.”

“네.”

“귀찮게 하지 말고 꺼져, 좀.”

“⋯⋯.”

“방금 건 진심이야.”

사현이 매몰차게 우영의 손을 쳐냈다. 우영은 늘, 항상, 시도 때도 없이 사랑스럽다. 근데 지금은 아니다. 오늘은 그를 받아줄 여유도, 예뻐해 줄 여유도 없었다. 현재 사현은 충분히 위태로웠고, 어른으로서 또는 형으로서 우영의 마음을 적당히 내쳐 주기가 힘들었다.

사현은 우영이 미처 다시 잡기도 전에 2층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번에는 수선화 냄새도 남기지 않았다. 싸늘한 바람, 그게 다였다.

우두커니 선 우영이 꽉 주먹을 말아 쥐었다.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길지도 않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쓰라릴 정도였다.

평생 혼자였는데, 사현과 있다가 혼자가 되면 그 외로움과 공허함을 헤아리기가 힘들다. 외로워서 춥다는 사현의 말에 지극히 통감할 수 있었다.

우영은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는 계단 끄트머리를 집요하게 바라봤다. 멀지 않은 과거, 사현이 아팠던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올라간 적이 없는 곳이다. 초대받지 않았으니까. 사실, 처음 올라갔던 날도 침투에 가까웠다.

그래, 그랬지. 그랬었지.

근데 뭐.

우영이 판단하기에, 오늘은 침투가 필요한 날이었다. 사현을 지키기 위해선 그게 맞았다. 어쩌면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었던 그때보다 오늘이 더 아픈 날일지도 몰랐다.

제대로 씻기나 할는지. 이불은 덮고 잘는지. 구석에 몸을 옹송그리고 울지나 않을는지. 집에 오기 전에도 보통 서럽게 운 게 아닌 것 같은데, 더 울었다가 탈진이라도 하면 어쩌나. 늦게 발견해서 큰일이라도 나면?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본디 걱정이란 시작은 있되, 끝은 없는 것이다.

우영이 거센 콧김을 내뿜었다. 오늘은 사현에게 어떠한 욕을 듣더라도, 그와의 관계가 걷잡을 수 없이 어그러지더라도, 그의 옆에서 떨어지지 않으리라. 아무도 궁금하지 않은 다짐을 거나하게 했다.

그러나 발이 다짐을 따라 주지 못했다. 자신감 있게 성큼성큼 올라가면 될 것을,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라는 걸 온 세상에 알리듯 쭈뼛쭈뼛 기웃기웃 계단을 올랐다.

마침내 마지막 계단에 올라선 우영이 잠시 숨을 멈췄다. 혹시 사현의 기척을 들을 수 있을까 싶어서. 그러나 이렇다 할 소음이 없었다. 적어도 복도에는 그가 없다는 뜻이다.

안심한 우영이 복도로 들어섰다. 네 개의 방문이 낯선 침입자를 뾰족하게 노려봤다. 우영이 지지 않고 그 눈초리와 맞섰다. 사현이 어디 있으려나. 욕실? 아니면 드레스 룸? 그것도 아니면 침실로 곧장 들어갔나.

그가 한 발, 한 발 조심히 디디며 귀를 곤두세울 때였다.

쿵!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바닥이 연하게 진동하는 걸 봐선 작은 물건이 아닌 것 같았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우영은 망설임 없이 소리가 들린 방 쪽의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열린 문틈으로 섬유와 가죽 특유의 냄새가 확 밀려 왔다. 드레스 룸이었다.

우영의 방만큼이나 커다란 드레스 룸은 어둑했다. 동그랗고 작은 간접 등만 듬성듬성 켜져서 무엇이 쓰러졌는지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현이 형?”

우영이 속삭이듯 사현을 불렀다.

“흐⋯⋯.”

멀지 않은 곳에서 대답 대신 신음 한 자락이 들려왔다. 시계와 커프스단추가 가지런히 진열된 서랍장 뒤로 꿈틀거리는 다리 하나가 보였다. 모로 누워 있는 게, 어떻게 봐도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형!”

우영이 쏜살같이 사현을 향해 달려갔다.

바닥에 주저앉은 사현이 서랍장에 등을 기대고 어깨를 한껏 둥글게 말고 있었다. 그의 가슴팍이 거칠게 들썩였다. 그리고 호흡이 몹시 빨랐다. 꼭 전속력으로 달음박질친 사람처럼.

근데 드레스 룸에서 달리기를 했다고? 아무리 넓은 공간이라 한들, 운동장도 아닌데. 뜀박질을 칠 수 있을 리 없었다.

“형, 왜 그래요?”

우영이 사현의 어깨를 조심히 거머쥐었다. 불규칙한 떨림이 전해졌다. 그러고 보니 아무렇게나 나동그라진 손과 발이 부들부들 경련하고 있었다.

“허윽, 흐읍, 윽⋯⋯.”

숨소리도 이상했다. 사현은 항상 잔잔하게 숨을 내쉰다. 가끔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오긴 하지만, 귀에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감미로이 느껴졌지. 근데 지금은 뭐랄까. 그래, 꼭 공기를 토해 내는 것 같았다. 구역질하는 것 같단 말이다.

“어디, 어디가 아파요?”

우영이 조금 전보다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도 사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의 숨소리에 가로막혀 모든 청력을 닫아 버린 듯했다. 기다리다 못한 우영이 푹 고꾸라진 사현의 고개를 조심히 들어올렸다.

“형.”

“흐우, 흐, 으웁.”

사현의 시선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중구난방으로 나부꼈다. 어슴푸레한 빛이 탁한 눈동자에 흡수되지 못하고 튕겨 나왔다. 우영의 시선이 덩달아 혼란에 물들었다. 보통 일이 아니다. 흔한 몸살이었던 과거와 전혀 달랐다.

사현의 얼굴을 자신의 어깨에 묻게 한 우영이 주머니를 더듬거렸다. 핸드폰을 찾는 거였다. 아무래도 병원에 가야 할 성싶었다.

우영이 막 핸드폰을 꺼냈을 때였다. 파들파들 떨리는 마른 손이 우영의 팔뚝을 툭, 두드렸다.

“저리, 가⋯⋯.”

사현은 곧 죽을 듯 숨을 헐떡이면서도 우영을 밀어냈다. 우영의 눈이 확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아니, 대체 왜 이리 고집을 부리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영이 사현의 턱을 거머쥐었다.

“나 봐요.”

“하아⋯⋯.”

“나 보라고.”

우영의 손에 꽉 힘이 들어갔다. 짓눌린 사현의 턱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센 힘이었다. 흩어졌던 사현의 초점이 간신히 한곳으로 모였다.

“이렇게 죽으려고요?”

“하으, 윽, 하아아⋯⋯.”

“이렇게 죽고 싶어요?”

우영이 낮게 으르댔다. 말끝이 묵직하게 진동하는 게, 제대로 화가 난 음성이었다. 사현이 멍하니 우영을 응시했다. 그의 볼을 타고 맑은 눈물 한 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눈물은 금세 다시 차올랐다. 사현의 눈동자 위로 미약한 파도가 일렁였다. 그런데도 살아 있는 이의 눈 같지가 않았다. 삶에 대한 갈망도, 생기도 없었다. 그 모습이 ‘응. 이렇게 죽으려고.’라고 대답하는 것 같았다.

그걸 코앞에서 목도한 우영의 눈썹이 가파른 내리막을 그렸다.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형. 왜 이래요, 진짜.”

“조금, 있으면 후웁, 괜, 찮아⋯⋯져⋯⋯.”

“안 괜찮아지면요.”

매섭게 사현의 말을 쳐낸 우영이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그러자 사현이 우영의 손등을 덮어 눌렀다.

“비⋯⋯닐.”

“네?”

“비닐, 허으읍⋯⋯, 비닐.”

비닐? 우영의 눈이 설핏 구겨졌다. 갑자기 웬 비닐? 잠깐 멍청하게 굳어 있던 우영이 곧 몸을 일으켰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쓸 데가 있으니 달라고 하겠지. 토라도 하려고 하나.

우영이 바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옷만 가득한 드레스 룸에 비닐이 있을 리 없었다. 우영이 잘근잘근 입술을 씹었다. 사현의 가쁜 호흡이 귓구멍을 둥둥 북처럼 울려 댔다. 주방에는 있을 텐데. 사현을 홀로 둘 수가 없다.

그때, 아주 짧은 지식 하나가 우영의 뇌리를 스쳤다. 밭은 호흡, 식은땀, 손발 경련, 그리고 비닐.

아아, 사현은 지금 과호흡 상태였다. 군대에서 몇 번 본 적 있는데 체력이 부족한 동기 한 명이 이따금 발작처럼 과호흡 증세에 시달렸었다. 그걸 새하얗게 잊고 있었다.

우영이 빠른 걸음으로 사현에게 회귀했다. 사현이 숨을 헐떡이며 우영을 올려다봤다. 왜 텅 빈 손으로 돌아왔냐는 얼굴이었다. 우영이 사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안경을 벗었다.

그 후 사현의 턱을 감싸 쥐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

사현의 입술은 따뜻했다. 상상했던 것만큼 말랑했는데, 상상했던 것만큼 부드럽진 않았다. 얼마나 물어뜯었으면, 각질이 죄 일어나서 거칠기까지 했다. 호흡은 가빴고, 울음에 내몰린 숨은 축축했다.

우영은 잠깐 그의 입술에 홀려 정신을 놓을 뻔했으나, 간신히 이성을 되찾았다. 지금은 첫 키스라는 일생일대의 사건을 감상할 때가 아니었다.

“뭐⋯⋯.”

놀란 사현이 바르작거리며 몸을 뒤틀기 전에, 우영이 사현의 코를 막았다. 그리고 후웁, 입술 틈으로 사현의 숨을 잡아먹었다. 그리고 자신의 호흡을 넘겨줬다. 비닐에 얼굴을 묻고 숨을 쉬는 것보다야 못하겠지만, 어찌 됐든 비상 대처법 중 하나였다.

허나 사현이 그것을 알 리 없었다. 그는 사지를 버둥거리며 우영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꽤 옹골차고 거센 반항이었다. 미간을 찌푸린 우영이 사현의 골반을 자신 쪽으로 바짝 당겼다.

사현이 그대로 주르륵 아래로 미끄러졌다. 우영이 사현 위로 올라탔다. 그대로 자신의 가슴팍을 밀어내는 사현의 두 손을 모아 쥐었다. 무릎으로는 쿵쿵거리며 바닥을 내리치는 다리를 내리눌렀다. 그러는 와중에도 규칙적으로 숨을 빼앗았다가 돌려주길 반복했다.

팔다리가 단단하게 묶인 사현이 흠칫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그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젓기 시작했다. 식은땀에 젖은 앞머리가 둔탁하게 흔들렸다.

우영이 짜증스레 미간을 구겼다. 찰나, 입술을 뗀 그가 묵직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가만히 있어요.”

“흐, 너 미쳤,”

사현이 눈을 부릅뜨고 욕설을 뱉으려 했다. 하지만 마지막 음절이 고스란히 우영에게 먹혔다. 사현의 동공이 확 작아졌다.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온갖 비속어를 폭우처럼 쏟아냈다.

우영은 무감하게 그런 사현의 시선을 받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입술을 떼자마자 주먹이 날아온대도 상관없었다.

두 사람의 입술은 그 후로도 수 분간 붙어 있었다. 맹렬하게 반항하던 사현도 지쳤는지, 사지를 축 늘어트렸다. 덕분에 우영이 편해졌다. 살짝 고개를 뒤튼 그가 원활하게 호흡을 이끌어 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바쁘게 들썩이던 사현의 가슴팍이 잔잔한 파동에 접어들었다.

우영이 마지막으로 후우, 길게 숨을 넘겨주고는 천천히 물러났다. 깊게 맞물려 있던 입술이 떨어지며 촉, 남세스러운 소리가 울렸다.

“하아⋯⋯.”

“하아, 하아⋯⋯.”

두 사람은 잠시간 아무런 말 없이 서로만 응시했다. 우영이 코앞에 있는 사현의 얼굴 여기저기를 눈으로 탐험했다.

가까이서 보니까 더 예쁘다. 어쩜 모공 하나, 잡티 하나 없는 건지. 속눈썹은 또 왜 저리 긴지. 코끝은 구슬처럼 동그랗고, 오목하게 파인 인중은 사랑스러웠다.

거듭된 충격에 말을 잃었던 사현이 두 손으로 힘껏 우영을 밀어냈다. 그리 센 힘은 아니었으나, 우영은 순순히 밀려나 주었다. 괜히 버텼다간 쌍코피가 터질 것 같았다. 어쩌면 사현보다 제가 병원에 가야 할 상황이 생길지도 몰랐다.

사현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고는 우영의 온기가 진득하게 묻어 있는 입술을 벅벅 문질렀다. 불결하거나, 불쾌해서는 아니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아니면 내일까지 우영의 입술 촉감을 되뇌고 또 되뇔 것 같아서 그랬다.

“네가 아주 돌았구나?”

사현이 뾰족하게 말을 쐈다.

“아직 안 돌았어요.”

돌았으면 그대로 형 바지에 손을 쑤셔 넣었겠지. 우영이 뒷말을 묵음으로 처리했다.

사현이 헛숨을 삼켰다. 아픈 사람을 바닥에 눕혀 놓고 입술을 놀린 주제에, 지나치게 뻔뻔했다. 서우영이 진화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진화한다. 곧 만렙을 찍고 제 머리 위에서 우당탕 발을 구르며 놀 것 같았다.

사현이 넋을 빼놓고 있는데, 우영이 싱긋 미소 지었다.

“이제 괜찮죠?”

“⋯⋯.”

사현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찌릿찌릿하던 심장이 편해졌다. 쪼그라드는 듯했던 목구멍도 괜찮아졌고, 속이 메슥거릴 정도로 심각했던 현기증 역시 싹 걷혔다.

사현은 그제야 우영의 행동이 파렴치한 짓이 아니라 일종의 비상 대처였음을 깨달았다. 괜히 민망해진 그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축축한 땀이 묻어 나왔다. 그러고 보니 아직 슈트 차림이다. 얼른 옷을 갈아입고, 씻고, 푹신한 침대에 파묻혀 잠으로 도피하고 싶었다. 눈을 깜빡이는 게 고역일 정도로 힘든 하루였다.

사현이 막 몸을 일으키려 할 때였다. 어느새 안경까지 쓴 우영이 사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요. 병원 가게.”

“병원을 왜 가? 이제 괜찮아.”

“안 괜찮아요. 과호흡은 재발 가능성이 커요. 병원에 가서 치료해야죠. 검사도 하고, 약도 먹고, 주사도 맞고.”

“됐어. 안 가. 락스 냄새 때문에 토할지도 몰라.”

단호한 거절을 내놓은 사현이 꾸역꾸역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우영의 입꼬리가 마뜩잖게 뒤틀렸다. 대체 병원이랑 무슨 원수를 진 건지. 갑자기 락스 냄새는 또 왜 튀어나온 건지. 지구 멸망보다 의사 선생님이 무서운 다섯 살짜리도 저리 굴진 않을 테였다.

“가요. 비닐 찾는 거 보니까 오늘이 처음도 아닌 것 같은데.”

“맞아. 한두 번 있던 일 아니야. 그리고 늘 가만히 있으면 괜찮아졌어. 그러니까 내가 아직 멀쩡히 살아 있겠지. 병원 갈 정도로 심각한 거였으면 진즉 죽었어.”

사현이 슈트 재킷을 벗으며 대꾸했다. 무심하다 못해 무서운 대답이었다.

우영이 대번에 눈을 뾰족하게 치켜떴다. 제가 손을 조오-금 다쳤을 때는 온갖 유난을 다 떨어 놓고, 자기는 쓰러질 정도로 아프면서도 심각한 일이 아니란다. 어이가 없었다. 우영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럼 제가 오늘처럼 계속 뽀, 뽀뽀할 거예요.”

당찬 말에 시계를 풀던 사현이 픽, 바람 가득한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박력 있게 날 깔아뭉개더니 말은 왜 더듬냐?”

“제, 제가 언제 형을 깔아뭉갰어요.”

우영이 억울하다는 듯 눈가를 일그러트렸다. 서랍장에 시계를 넣은 사현이 그곳에 비스듬히 기대섰다.

“그 덩치로 올라탔으면 깔아뭉갠 거지. 나 과호흡이 아니라 질식으로 먼저 죽을 뻔했잖아.”

능청맞은 사현에 우영이 입술을 삐죽였다. 또 놀리는 거지. 그래도 입술까지 부딪쳤는데, 어떻게 저리도 여유로울 수 있나.

저는 심장이 쿵쾅쿵쾅 뛰어서 눈 까뒤집고 기절할 것 같거늘. 맞닿았던 입술의 감촉이 기이할 정도로 생생하거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구는 사현이 얄미웠다.

우영이 홈웨어를 꺼내는 사현의 곁에 바짝 붙어 섰다.

“병원 안 갈 거면 형이 잘 때까지 옆에 있을래요.”

“싫어.”

“그럼 병원에 가든가요.”

“그것도 싫어.”

“둘 중의 하나는 해야 해요. 안 그럼 저 울 거예요.”

팔에 홈웨어를 걸친 사현이 입술을 뒤틀었다.

“⋯⋯가지가지 한다.”

“네. 제가 좀 가지가지 해요. 어디 가지가지만 하겠어요? 아주 여러 가지를 할 생각이에요.”

“⋯⋯.”

사현의 입이 한일자로 다물렸다. 서우영이 삼 분 만에 또 진화했다. 이제는 말장난으로 비꼴 줄도 알아. 조만간 시도 읊겠어. 더 있다간 그림 그리는 작가에서 글 쓰는 작가로 이직이라도 할 기세야.

우영이 사현의 양쪽 어깨를 뒤에서 감싸 쥐었다. 그리고 드레스 룸과 연결된 욕실로 밀었다. 사현이 뒤꿈치에 힘을 주고 버텼으나 속절없었다.

“씻고 와요. 침실에 있을게요.”

“네가 왜 내 침실에,”

“쓰읍.”

우영이 자못 엄하게 혀를 끌었다. 사현이 뒤통수라도 맞은 표정으로 우영을 돌아봤다. 지금 이 상황을 생생하게 겪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사현이 무어라 말하려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우영이 더 빨랐다.

“안 돼요. 오늘은 절대로 혼자 안 재울 거예요.”

“⋯⋯.”

우영이 친히 욕실 문을 열어 줬다. 그러고는 툭, 사현을 밀어 넣었다. 사현이 엉거주춤하게 욕실로 입장했다. 우영이 “뜨거운 물로 씻어요. 오래는 말고. 적당히.”라는 말과 함께 욕실 문을 닫았다.

사현이 닫힌 문을 바보 같은 얼굴로 쳐다봤다. 그러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윗옷을 벗으려는 차였다. 벌컥 문이 열렸다. 소스라치게 놀란 사현이 푸드득 닭이 날갯짓하듯 팔을 휘저었다. 우영이 문틈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또 과호흡 오면 불러요. 냉큼 달려가서 뽀뽀하게.”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다시 문이 닫혔다. 사현은 삼십 초 정도 멀뚱히 서서 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우영의 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침실로 이동한 모양이었다.

비로소 안심한 사현이 주르륵, 녹아내리듯 주저앉았다. 무릎을 세우고, 그 사이에 얼굴을 파묻은 그가 아랫입술을 매만졌다. 자신이 물어뜯은 탓인지, 아니면 여즉 우영의 온기가 묻어 있는 탓인지 후끈한 열이 느껴졌다.

“⋯⋯.”

사현의 귓바퀴가 새빨간 색으로 발광하기 시작했다.

* * *

사현은 씻는 내내 생각했다.

집 나갈까. 호텔 가서 잘까. 그것도 아니면 아주, 아주 일찍 출근하는 셈 치고 갤러리에 갈까. 모두 실행 가능한 선택지였다. 근데, 정말 끔찍할 정도로 귀찮았다. 짜증과 더불어 분노도 일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분명 내 집인데, 대체 왜 우영을 피해서 나가야 하냔 말이다. 그리 생각하니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결국엔 우영이 정복하고 있는 침실에 들어섰다. 오기였다.

일인용 소파에 앉아 있던 우영이 엉덩이를 들썩이며 그를 반겼다. 뭐가 그리 좋은지 빙글빙글 웃고 있는 낯짝이 참으로 예쁜데, 한 대만. 딱 한 대만 쥐어박고 싶었다.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쓴 사현이 애써 그 웃음을 무시하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협탁에 있는 물잔을 쥐었다. 뜨끈한 온기가 손바닥을 통해 잔잔히 흘러왔다. 없던 것인데 생긴 걸 보니 우영이 가져다 놓은 것이리라. 간사하게도, 마음이 조금 수그러들었다.

사현이 물을 홀짝이는데, 우영이 은근히 곁으로 다가왔다. 딴에는 ‘은근히’였으나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 큰 소파를 번쩍 들고 슬금슬금 움직이는데 어찌 모르겠는가.

“⋯⋯.”

저거 배송 왔을 때도 직원 둘이서 낑낑거리며 옮긴 건데. 쟤는 엉거주춤하게 앉은 자세면서도 어떻게 두 손으로 든담.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간에 서커스라도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왜 머리 안 말렸어요.”

“설마 그거로 잔소리 하려고?”

사현의 애교살이 도톰하게 부풀어 올랐다. 가느스름해진 눈에 짜증이 가득했다. 무어라 말하려던 우영이 꾹 입을 다물었다. 왜 머리를 안 말렸느냐. 안 말리고 자면 감기에 걸릴지도 모른다. 더욱이 현재는 몸 상태가 좋지 않으니 꼭 말리고 자야 한다. 그리 말하려 했는데. 어떻게 봐도 잔소리가 맞았다.

모호한 우영의 낯에 사현이 물잔을 내려놓고 풀썩 뒤로 쓰러졌다. 그러고는 꼬물꼬물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그가 뒤집어쓰고 있던 수건이 침대 아래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나 피곤해. 시비 걸지 마.”

“이게 어떻게 시비예요. 잔소리지.”

“그래, 잔소리. 그만해, 좀.”

“잔소리 안 할 테니까 잠깐만 일어나 봐요.”

“싫어.”

“뭐가 또 싫대.”

우영이 떨어진 수건을 주워들었다. 곧 침대 한쪽이 슬쩍 기울었다. 우영이 걸터앉은 거였다. 사현은 그것을 알았으나, 구태여 뒤돌아보지 않았다.

우영은 무음으로 사현을 독촉했다.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들리는 거라곤 숨소리뿐인데, 고막이 터질 것 같았다. 사현이 꽉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결국 이번에도 무력이 등장했다. 우영이 사현의 손목을 쥐어 가볍게 끌어당겼다. 마른 몸뚱이가 훌쩍 끌려왔다. 사현이 눈을 세모꼴로 치켜떴다. 거나하게 욕을 한 바가지 해 주려는데, 머리 위로 수건이 올라왔다.

우영이 조심스레 사현의 머리칼을 털었다. 마음 같아선 드라이기를 가져오고 싶었으나, 그동안 사현이 잠들어 버릴까 봐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우영의 손길은 퍽 보드라웠다. 자그마한 강아지의 털을 말려 주듯, 조심스럽고 섬세했다. 사현이 코로 한숨을 내쉬며 바짝 치솟았던 어깨를 풀어 내렸다.

“아주 애지, 애야.”

우영이 웃음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사현이 훌떡 수건을 헤쳐 냈다.

“지금 누가 누구한테⋯⋯.”

“아이고, 다 말랐다. 다 말랐어. 뽀송뽀송하다. 이제 자면 되겠다.”

사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우영이 그의 발목을 훅 잡아당겼다. 사현이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우영으로 가득 차 있던 시야가 단숨에 천장으로 바뀌었다.

사현이 황망한 낯으로 눈을 끔벅였다. 큰 힘도 아닌데, 저는 왜 이리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건지. 짜증이 나다 못해 신기할 지경이었다.

우영이 이불을 추켜올렸다. 멀뚱히 천장을 보고 있는 사현과 눈이 마주쳤으나, 애써 시선을 돌렸다. 만족할 만큼 사현의 잠자리를 봐준 우영이 소파로 돌아갔다.

그 후로는 정적이었다. 침실 특유의 묵직하고 밀도 높은 정적.

사현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딱히 우영의 존재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둠과 적막. 새벽에 가까워지는 야심한 밤. 그것들이 문제였다. 전신을 짓누르는 피곤과 음울함이 곱절로 부풀었다. 일 분 뒤에 또 부풀고, 이 분 뒤엔 그에 곱절에 곱절로 부풀었다. 그 무게에 짓눌려 숨이 막혔다. 이렇게 있다간 또 과호흡이 올 것 같았다.

사현이 우영의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후우, 후우 조용히 숨을 골랐다.

다시 적막이 도래했다. 좀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적막이었다. 사현은 이러한 고요함에 익숙했다. 반평생을 혼자 살아왔으니까. 아마 우영도 그럴 테였다.

근데 왜 이리 불편하지. 타인과 함께 하는 적막이라 그런가. 사현이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자야지. 얼른 자 버려야지. 최면 아닌 최면을 거는데, 어째 효과가 미미했다.

사현은 한참이나 시간을 죽이고서야 이 께름칙한 불편함의 근저를 알아차렸다. 우영이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집에 왔을 때만 해도 심문하는 형사처럼 굴더니. 지금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왜 아무것도 안 물어?”

사현이 탁하게 잠긴 음성으로 물었다. 허공에 흩뿌려진 질문이 우영에게로 느릿하게 흘러갔다.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있던 우영이 사현을 바라봤다.

“음⋯⋯. 형이 씻는 동안 생각해 봤는데, 저는 그걸 물어볼 권리가 없더라고요.”

“⋯⋯.”

“사실 저는 형을 걱정할 권리도 없고, 잔소리할 권리도 없죠. 뭐, 짝사랑의 뻔뻔함으로 걱정도 하고 잔소리도 하는데⋯⋯. 운 이유까지 묻는 건 좀⋯⋯ 과한 월권인 것 같아서요.”

“⋯⋯.”

사현이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우영이 또 진화했다. 이제는 깊게 생각할 줄도 안다. 다 컸네, 다 컸어. 사현이 슬쩍 몸을 뒤집었다. 연한 조명을 등지고 있는 우영이 보였다. 그의 반질반질한 광대와 높다란 콧날이 반사광을 머금어 흐리게 빛났다.

사현과 눈을 마주친 우영이 보기 좋게 웃었다. 낮에 보든, 밤에 보든 참 싱그러운 웃음이었다.

“그리고 대답하려면 떠올려야 하잖아요.”

“뭘 떠올려?”

“형이 울었던, 울 수밖에 없었던 그 상황이요.”

“⋯⋯.”

“분명 엄청 가슴 아픈 일이었을 텐데. 그걸 말하려면 다시 그때를 떠올려야 하니까. 그러다 형이 또 울면 어떡해요. 그럼 저도 같이 울어 버릴 거예요.”

“⋯⋯.”

“아, 방금 형이 우는 거 상상만 했는데 여기가 막 찌릿했어요.”

우영이 자신의 왼쪽 가슴팍을 슥슥 문질렀다. 사현의 얼굴에 들러붙어 있는 울음의 흔적만으로도 눈앞이 캄캄했는데. 우는 걸 제정신으로 볼 자신이 없었다.

태어나서 살의라고는 전혀 느껴 본 적 없거늘. 사현의 말을 듣고 나면 쇠파이프든, 기름통이든 들고 그를 울게 만든 사람들을 죽이러 야차처럼 배회할 것 같았다.

우영의 얼굴이 뭉크의 「밤의 방랑자」처럼 스산하게 변했다. 그 변화를 고스란히 본 사현이 헛숨을 흘렸다. 뜬금없이 덩치 좋은 보디가드가 생긴 것 같았다.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우영아.”

“네.”

“네가 너 써먹으라고 했잖아.”

“네.”

“오늘 좀 써먹어도 돼?”

“그럼요. 뭐 해 드릴까요. 배고파요? 아니면 우울해요? 노래 불러 줄까요? 저 웃긴 표정도 되게 잘 지어요. 춤은⋯⋯, 어, 안 춰 봐서 모르겠는데, 그래도 최선을 다할게요.”

우영의 엉덩이가 다급하게 들썩거렸다. 사현이 정말 ‘춤추면서 노래해’라고 명령하면 냉큼 일어서 팔다리를 흔들 기세였다.

사현이 이불을 들쳤다. 그리고 툭툭 옆자리를 두드렸다.

“이리 와.”

“⋯⋯네?”

“이리 와서 나 좀 안아 줘.”

“⋯⋯.”

예상치 못한 부탁에 우영의 입매가 단단하게 굳었다. 귀를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혹, 제가 사현보다 먼저 잠이 든 걸까. 그래서 꿈을 꾸는 걸까. 그게 아니고서야 무슨 말만 하면 싫어, 안 해, 라는 대답만 내놓던 사현이 먼저 안아 달라고 할 리 없는데.

그럴 리가.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우영은 끊임없이 의심하면서도 침대로 향하는 발을 멈추지 못했다. 사현의 앞에선 늘 이성보다 본성이 먼저인지라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우영이 쭈뼛쭈뼛 침대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목석처럼 일자로 누웠다. 사현과 한 침대에 눕는 게 처음도 아닌데,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사현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늘 맡던 바닐라나 수선화 냄새와는 조금 달랐다. 사현, 그 자체의 냄새였다.

우영은 바위처럼 딱딱하게 언 채로 콧구멍만 벌름거렸다. 그때, 사현이 툭 우영의 팔뚝을 쳤다.

“내 쪽으로 누워야지.”

“네? 아, 아아⋯⋯ 네.”

“팔 벌려.”

“네.”

우영이 말 잘 듣는 로봇처럼 움직였다. 옆으로 누워 팔을 벌리자 사현이 그 사이로 흘러들어왔다. 감동보다는 떨림이 먼저 느껴졌다. 턱 아래에서 일렁이는 사현의 머리칼에 발가락이 꼼지락꼼지락 난리였다.

사현이 우영의 가슴팍에 이마를 비볐다. 널따란 품이 몹시 괜찮았다. 은은한 샤워 코롱 향도 좋았다. 어색하게 등을 감싼 손도 좋았다. 또 손바닥은 어찌나 큰지. 이불이 필요가 없었다. 쿵쿵쿵, 바쁘게 뛰는 우영의 심장 소리가 백색소음이 됐다.

“잘 자요, 형.”

굿 나잇 인사가 나지막이 흘러왔다.

“응.”

사현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잠이 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깊은 새벽. 잠을 자던 사현이 울기 시작했다. 온 침실이 눅눅하게 젖을 정도로 슬픈 울음이었다.

우영이 그 울음을 힘껏 껴안았다. 그리고 밤새 속삭이고 또 속삭였다.

울지 마요, 형.

울지 마세요.

제발, 울지 마요.

* * *

사방을 암막 커튼으로 꼼꼼히 막아 놓아도 아침의 기운은 쉽게 가려지지 않는다. 더군다나 새벽같이 일어나는 게 몸에 밴 현대의 사회인이라면,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을 번쩍 뜨곤 했다.

사현도 어쩔 수 없는 사회인이었다. 전날 아무리 피곤했더라도, 하물며 과음을 했더라도 여섯 시 전후로 기상했다. 그 버릇은 오늘도 어김없었다.

사현이 천천히 눈을 떴다. 어둑한 침실이 익숙했다. 몇 시지. 오늘 일정은 뭐더라. 어제는 뭐 했지. 그런 평범한 생각들이 차르르 이어졌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어젯밤을 회상하게 됐다. 등신 같던 가족 모임. 더 등신 같은 자신. 그리고 퇴근 아닌 퇴근. 우영. 과호흡. 그런 것들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사현이 슬쩍 눈을 굴렸다. 널따란 가슴팍이 코앞에 있었다. 시선을 올리자 잘생긴 턱과 우뚝 솟은 코끝이 보였다. 우영이었다.

사현이 꿈틀거리며 몸을 뒤틀었다. 그러자 등을 감싸고 있던 손이 한결 느슨해졌다. 우영이 고개를 숙였다. 잠이 덕지덕지 붙은 사현의 눈과 달리 그의 눈은 멀끔했다. 밤새 한숨도 자지 않은 사람 같았다.

“일어났어요?”

“너⋯⋯ 안 잤니?”

“네.”

“왜?”

“또 과호흡 오면 뽀뽀해야 하니까요. 제가 그 기회를 어떻게 놓치겠어요. 눈 부릅뜨고 호시탐탐 노려야죠.”

우영이 씨익, 입술을 가로로 길게 벌리며 웃었다. 사현의 턱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허⋯⋯.”

미친놈. 이게 입술 한번 비볐다고 제정신이 아니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우영이 사현의 허리를 감싸 쥐고는 자신 쪽으로 훅 당겨 안았다. 두 사람의 코끝이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방금 속으로 욕했죠?”

“⋯⋯아니. 감탄했어. 네 철두철미함에.”

“아닌 것 같은데. 눈으로 욕했는데.”

“아니라니까. 감탄이라니까.”

의미 없는 대화가 오고 갔다. 먼저 웃은 건 사현이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이 무슨 바보 같은 짓인가, 싶었다. 그가 세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눈알이 쓰리다. 퉁퉁 부은 눈두덩이 시야 위로 검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사현이 우영의 가슴팍에 얼굴을 쿡 묻었다가 뗐다.

“혹시 나 자면서 울든? 눈이 터질 것 같아.”

“⋯⋯.”

우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충분한 대답이 됐다. 사현이 쌉싸름한 미소를 지었다.

“울었구나.”

하긴, 울지 않은 게 더 이상하다. 눈이 너무 무거워서 계속 뜨고 있기가 힘들 정돈데. 우영이 울지 않았다, 말했으면 혹시 네가 나 때렸니? 라고 물었을지도 몰랐다.

사현이 세게 눈을 깜빡이며 무거운 눈두덩과 싸우고 있는데, 우영이 커다란 손으로 사현의 눈을 가렸다. 뜨끈한 손바닥이 잔잔한 체온을 전달했다.

“아, 출근하기 전에 가라앉을까?”

사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름 사회적 지위가 있는데, 퉁퉁 부은 눈으로 출근하려니 영 께름칙했다. 우영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괜찮아요. 오늘 출근 안 하니까.”

“누가 출근을 안 해? 내가?”

“네. 형이요.”

“내가 왜 출근을 안 해?”

“제가 제인 실장님한테 형 출근 못 한다고 연락했거든요.”

그 말에 사현이 고개를 흔들어 우영의 손을 털어냈다. 출근을 안 하는 건 둘째치고, 제인과 관련해 물어볼 게 아주 많았다. 아니, 따질 게 많은 거지. 사현이 통통하게 부푼 눈을 부라렸다.

“너 제이랑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니?”

“어⋯⋯. 친한 사이라고 해도 되나? 개인적으로 메시지 주고받은 지는 얼마 안 됐어요.”

“그게 언제부터인데?”

“제가 형이 남자도 만나느냐고 물어봤을 때부터요. 그, 어, 금발로 염색했을 때요.”

“대체 왜 그걸 계기로 메시지까지 주고받는 건데?”

사현의 질문은 막힘이 없었다. 우영이 우물우물 말을 녹여 먹었다. 그리 어려운 질문도 아닌데, 잘못한 것도 없는데, 말에 얻어맞는 것 같았다. 사현의 허리를 감싼 우영의 손가락이 꼼지락꼼지락 피아노 치듯 움직였다.

“음⋯⋯. 실장님은 형이랑 제가 잘되기를 바라시는 것 같던데요.”

“왜? 왜 제이가 내 연애를 신경 써? 제이 전-혀 그런 성격 아닌데. 왜지?”

사현은 진실로 당황했다. 제인이 우영과 그런 모종의 계략을 꾸미고 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제인은 <갤러리 비>를 오픈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근 10년을 함께한 파트너다. 사현이 봐 온 그녀는 저의 연애는 물론, 생사에도 크게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우영의 눈동자가 큰 동그라미를 그리며 움직였다. 제인과 나눴던 대화를 반추하는 거였다.

“어⋯⋯. 제인 실장님은 지금 하는 일이 엄청 좋대요.”

“뭐?”

“그림도 좋고, <갤러리 비>라는 권위 있는 직장도 좋고, 형도 좋고, 거기서 일하는 자신도 좋대요. 물론, 연봉도 아주 높고요. 그래서 웬만하면 정년퇴직을 <갤러리 비>에서 하고 싶으시대요.”

“⋯⋯.”

“근데 형이 자꾸 아픈 걸 방치하고, 약을 사료 먹듯이 씹어 먹고, 아무 사람이나 막 만나고 다니고, 밥도 제대로 안 먹고, 잠도 제대로 안 자고, 그러니까, 어⋯⋯. 뭐랬더라. 아! 아주 가느다란 실 위에서 외줄 타기를 하는 것 같대요.”

“⋯⋯.”

“그 얇은 실이 뚝 끊어져 버리면, 그대로 추락해 버릴 거라고 하셨어요. 근데 그러면 안 되잖아요. <갤러리 비>는 형에서 시작해서, 형으로 끝나는 곳인데. 형이 없으면 <갤러리 비>도 없는 거니까.”

“⋯⋯.”

사현의 얼굴이 모호하게 뒤틀렸다. 우영이 그런 사현의 등을 길게 쓸어내렸다. 오목하게 들어간 등줄기가 말도 못 하게 매력적이었다.

“그런데요.”

“⋯⋯.”

“제가 옆에 있으면, 형이 조금 덜 위태로워 보인대요.”

“⋯⋯.”

“그래서 저랑 잘됐으면 좋겠다는 말을 아주아주 고급스럽고, 똑똑하고, 기품 있게 하셨는데. 제가 말주변이 없어서 전달을 좀 유치하게 했네요.”

우영이 민망하다는 듯 어색하게 웃었다. 사현이 그런 우영을 가만히 바라봤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거였다. 우영이 제 눈에만 예뻐 보이는 게 아니구나. 그 칼 같은 제인의 눈에도, 우영은 썩 괜찮은 사람이구나.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구나.

우영이 붉게 달아오른 사현의 눈가를 엄지로 살살 쓰다듬었다. 두 번째 동침이라고 자잘한 스킨십이 퍽 자연스러워졌다.

“아무튼, 형 오늘 일 없어요. 실장님이 다 알아서 하겠다고 하셨으니까, 잘 하시겠죠.”

“⋯⋯.”

“그러니까 저랑 놀아요.”

“⋯⋯.”

“네? 저랑 놀아 줘요.”

우영이 사현의 머리칼에 볼을 비비적거렸다. 사현이 주인의 애교가 귀찮은 고양이처럼 목을 오므렸다.

“뭐 하고 놀 건데?”

사현이 어디 한번 들어나 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우영이 잠깐 딱딱하게 굳었다. 막연히 놀 생각만 했지,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까지는 생각하지 않은 터라. 그의 속눈썹이 팔랑팔랑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다 내놓은 게,

“어⋯⋯. 김밥천국에 라면 먹으러 갈래요?”

라는 뻔하고 재미없는 거였다. 사현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귀찮아. 얼마 만에 쉬는 건데, 바깥엘 나가?”

“그럼 제가 끓여 드릴까요? 저 김밥천국이랑 라면 똑같이 끓일 수 있어요.”

“네가? 웃기고 있네.”

사현이 코웃음을 쳤다. 어디 감히 그 신성한 음식을 흉내 내려고. 우습지도 않았다.

“진짜예요. 사장님한테 배워 왔는데.”

“사장님이 그걸 알려 줬다고? 라면 끓이는 법을? 그거 가게 기밀 아니니?”

사현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에 우영이 턱을 추켜올리며 으스댔다. 꼭 나라를 구한 장군처럼.

“엄청 졸랐죠. 매일 갔어요. 가서 오므라이스에 돈가스 먹으면서 애교도 떨고, 부탁도 하고, 우는 시늉도 하고 그랬어요.”

“왜?”

사현의 낯이 떨떠름하게 일그러졌다. 김밥천국의 라면이 엄청나게 비싼 것도 아니고. 고작 삼사천 원인데. 더군다나 차 타고 서너 시간씩 가야 하는 곳도 아니거늘. 마음먹으면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데. 구태여 그 레시피를 알고 싶었다고? 이해가 안 됐다.

우영이 흐트러진 이불을 끌어당겨 사현의 어깨를 덮었다.

“형이 새벽에 갑자기 라면이 먹고 싶어지면 어떡해요?”

“뭐?”

“물론 김밥천국은 24시간이고, 차 타면 금방 갈 수 있지만. 비가 너-무 오거나, 눈이 너-무 오거나, 것도 아니면 김밥천국 사장님의 개인 사정으로 문을 닫는다거나. 그러면 못 가니까. 그럴 땐, 제가 만들어 줄 수 있으니까.”

사현의 얼굴이 더 해괴하게 구겨졌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우영의 말인즉슨, 자연 재해 상황에서도 라면이 먹고 싶을 때를 대비해 레시피를 배워 왔다는 건데. 그게 타당한 이유가 되나? 물론, 김밥천국의 라면이 그만큼 대단한 음식이긴 하다만.

점점 더 구겨지는 사현의 미간에, 우영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그가 볼록해진 사현의 미간을 검지로 살살 눌러 폈다.

“제가 형한테 해 줄 수 있는 게 그런 거밖에 없더라고요.”

“⋯⋯어?”

“형은⋯⋯ 너무 잘났어. 똑똑하고, 돈도 많고, 멋지고. 그래서 제가 해 줄 수 있는 게 몇 없어요. 그러니까, 그런 거라도 열심히, 잘, 최선을 다해서 해 주려고요.”

“⋯⋯.”

사현이 멍하니 우영을 쳐다봤다. 기분이 이상했다. 속도 좋지 않았다. 갈비뼈가 간질간질하고 뱃속이 달큼한 게. 재채기라도 했다간 꽃봉오리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사현이 우영의 품에서 빠져나와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자 우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따라 일어났다.

“왜요? 어디 아파요? 목말라요? 물 떠올,”

“너, 내가 그렇게 좋니?”

사현의 난데없는 질문에 우영이 꾹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동자가 단숨에 진득해졌다. 잠깐 숨을 고르던 우영이 한 음절, 음절에 넘치는 마음을 꼭꼭 눌러 담았다.

“네. 너무 좋아요. 이제는 그림이 더 좋은지, 형이 더 좋은지 모르겠어요.”

“⋯⋯.”

“아니, 사실 알아요. 형이 더 좋아요. 형 옆에 있으면, 그림 안 그려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우영이 사르르 눈을 휘며 웃었다. 사현이 아랫입술을 꽉 세게 깨물었다. 우영의 웃음은 힘이 세다. 보고 있는 이의 가슴이 아릿해질 정도로 아름답다. 눈이 부실 정도로 예쁘고, 화사하다. 그래서 마주할 때마다 심장이 울렁거렸다.

사현은 비로소 깨달았다. 우영의 감정이 사랑이라는 명사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하다는 걸. 불순물 하나 섞이지 않은 온전한 사랑 그 자체라는 걸.

사현이 이불 속에 숨겨진 손을 말아 쥐었다.

너는 나를 이다지도 열렬히 사랑하는구나. 이렇게나 순수하고, 예쁘게 사랑하는구나.

“우영아.”

사현이 감미로이 우영을 불렀다.

“네, 형.”

우영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네가 나 좀 구해 줄래?”

사현이 물었다.

“네?”

우영이 되물었다.

“나랑 연애하자고.”

너의 그 비대하고 대단한 사랑이라면, 나를, 나를⋯⋯ 이 끔찍한 구렁텅이에서 구원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염치없이 기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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