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충동과 충돌
우영이 작업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퍼질러 앉았다. 붓은 바닥을 나뒹굴고, 캔버스는 스케치를 얼룩처럼 묻힌 채 멈춰 있었다.
“아우…….”
그가 벅벅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였다. 도무지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누군가는 그림 그리는데 머리가 왜 필요하냐는 질문을 할 수도 있겠지만, 작품 하나를 완성하려면 정수리에 쥐가 날 때까지 뇌를 괴롭혀야 했다.
허나 오늘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머리통이 딴생각으로 가득 차서 그림을 집어넣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한호 자동차와의 두 번째 미팅이 당장 다음 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아, 안 한다고 할걸. 내 주제에 어떻게 한호 자동차와 콜라보를 하냐고, 못 한다고 드러누울걸. 늦은 후회가 눈앞을 컴컴하게 물들였다.
우영이 스르륵 옆으로 쓰러졌다. 찬 바닥에 팔뚝과 볼이 시렸다. 옆구리가 짓눌린 안경이 멋대로 삐뚤어졌다.
우영은 한참을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처량한 모습으로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폭신한 소파도 있는데,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손을 다친 후, 일주일이 흘렀다. 지나치게 건강한 몸뚱이는 금세 새살을 만들더니 곧 딱지가 올라왔다. 걱정이 가득하던 사현도 빠르게 아무는 속도에 곧 관심을 끊었다. 하루에 한 번, 출근하기 전에 손 검사를 할 뿐이었다.
아아……. 절호의 기회였는데. 진짜 혼자서는 못 씻겠다고 우는소리라도 해 볼 걸 그랬나. 어정쩡하게 시간을 다 날려 버렸다.
우영이 밤을 준비하는 창밖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윙윙 규칙적인 소음이 울렸다. 나무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핸드폰이 진동하는 거였다.
우영이 벌떡 일어났다. 이 시간에 전화를 걸 사람이라면 사현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검은 화면에 [사현이 형]이 동동 떠 있었다. 우영이 녹색 버튼을 마구 연타했다.
“네, 형!”
-자기야. 왜 메시지가 안 와?
“네? 무슨 메시지요?”
-왜 카드 결제 메시지가 안 오냐고. 밥 안 먹었어?
“어……, 네…….”
-지금 다섯 신데 한 끼도 안 먹었단 말이야?
“그, 어, 그림에 너무 집중하다 보니…….”
우영이 거짓을 더듬거리다 꾹 입을 다물었다. 자꾸 거짓말이 는다. 이러면 안 되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현에겐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도리도리 머리를 흔든 우영이 다시 입을 뗐다.
“아니, 사실…… 그림이 너무 안 그려져서 멍 때리고 있었어요. 머리가 안 굴러가요. 짜증도 나고, 화도 나고, 답답하고…….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는데…….”
-…….
사현은 대답이 없었다. 우영이 한숨을 내쉬며 목덜미를 긁적였다. 실망했을까. 공장처럼 그림을 찍어 내도 모자랄 판에 멍이나 때리고 있다니. 분명 실망했을 터였다. 어쩌면 너는 여기까지인 것 같다고, 더 클 그릇이 안 되는 것 같다며 저를 내칠지도 몰랐다.
우영이 파스스 잿가루가 되어 흩어지고 있는데, 잔잔한 음성이 흘러왔다.
-너 소주 좋아하니, 맥주 좋아하니?
“네? 어…… 소주?”
-기다려.
그러고는 미처 대답할 새도 없이 뚝 전화가 끊겼다. 우영이 멍청한 낯으로 핸드폰을 쳐다봤다.
우영은 무딘 직감으로도 사현이 술을 사 오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뜨끈뜨끈한 물로 거하게 샤워하고, 새로 산 티셔츠도 꺼내 입었다. 그 후, 현관이 보이는 소파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목이 빠지라고 사현을 기다렸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도어 록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우영이 주인을 기다리던 개처럼 우다다 현관을 향해 달려갔다.
“형, 오셨어요?”
“이것 좀 받아.”
사현이 척 봐도 무거워 보이는 종이 가방과 비닐 두어 개를 내밀었다. 그의 하얀 손이 무게에 짓눌려 벌겋게 익어 있었다. 우영이 냉큼 그것들을 받았다.
“야! 왼손으로 받아!”
사현이 눈을 부라렸다. 우영이 아직 완전히 낫지 못한 오른손으로 봉투들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 네.”
우영이 얼른 손을 바꿨다. 사현이 신발을 벗고 신발장을 정리하는 동안 우영은 부엌으로 와 물건을 나열했다. 봉투엔 온갖 게 다 들어 있었다. 익숙한 녹색병도 보였고, 소주이긴 하나 소주로 보이지 않는 고급 증류식 소주도 있었다.
안주는 사현이 좋아하는 식당의 갈비찜과 호텔 케이크, 그리고 잡다한 치즈나 나초 따위가 있었다. 그리고 없으면 안 될 라면도 보였다. 파와 청양고추까지 사 온 걸 보니 얼큰하게 먹고 싶은 모양이었다.
우영이 상기된 얼굴로 테이블 위에 수저를 놨다. 그러자 코트를 벗던 사현이 우영을 말렸다.
“거기 말고, 저기, 저기서 먹자. 오늘은 좀 퍼질러 앉고 싶어.”
그가 거실의 낮은 테이블을 가리켰다. 우영이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옷 갈아입고 온다.”
우영의 팔뚝을 가볍게 친 사현이 2층으로 사라졌다. 그가 홈웨어로 갈아입고 올 동안 우영은 갈비찜을 접시에 옮겨 담고, 라면 물을 올리고, 술잔을 꺼냈다.
이렇게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는 건 대학 OT 이후로 처음이라 신이 났다. 그때는 선배들의 같잖은 군기와 어색함에 치여 제대로 즐기지도 못했는데. 오늘은 좀 다르려나.
사현은 거의 모든 차림이 끝나고, 라면이 포슬포슬하게 익었을 때쯤 나타났다.
테이블을 크게 훑은 사현이 생수통 하나를 들고 소파 앞에 앉았다. 곧 라면 냄비를 든 우영이 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능숙한 손길로 소주 뚜껑을 딴 사현이 우영을 향해 주둥이를 들이밀었다. 우영이 두 손으로 잔을 들고 그의 술을 받았다.
사현과의 술자리가 처음은 아니었으나 이렇게 함께 먹는 건 처음이었다. 첫 전시를 끝내고 가졌던 술자리는 주변 환경이 너무 색다른데다가 사현이 얼큰히 취해서 술을 제대로 마시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은 다르다. 오늘은 오롯이 우영을 위해 만들어진 자리였으니 취해도 괜찮을 듯했다. 아니, 아니지. 그러다 냅다 고백을 싸질러 버리기라도 하면 어째. 그건 안 될 말이었다. 조금, 아주 조금만 마셔야지. 우영이 남몰래 다짐했다.
“너 술 잘 마시지?”
사현이 물었다. 마음먹고 마시면 한 궤짝은 뚝딱 먹어치울 것 같은데. 아무래도 우영이 보통 덩치가 아닌지라 술이 부족하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잘 마신다는 기준이 뭔데요?”
이번엔 우영이 사현의 잔에다 술을 따르며 물었다. 사현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우영이 술을 좋아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처음 만났던 날도 우동 한 그릇에 소주 한 병을 비우고 있지 않았던가.
“소주 세 병 먹으면 취하니, 네 병 먹으면 취하니?”
사현이 다시 물었다. 음, 목으로 신음하던 우영이 썩 명쾌하지 않은 답을 내놓았다.
“두 병까지밖에 안 마셔 봤어요.”
“왜? 취하는 게 싫어서? 안 취할 거면 술을 왜 마셔?”
“어…… 못 먹었다는 게 더 가깝겠네요. 소주 한 병이면 컵라면 하나 가격이라…….”
우영이 민망하다는 듯 어색하게 웃었다. 사현의 입술이 비스듬히 틀어졌다. 아아, 우영이 궁핍하게 살아 왔다는 걸 잠시 잊었다. 오랜만에 자각해서일까. 이상하게 마음이 찡했다. 동정이라 하기엔 무거운 감정이었다.
“그럼 오늘 알아 봐.”
사현이 잔을 들었다. 우영이 샐쭉 웃으며 그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쳤다.
짠.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말이 많지 않은 술자리였다. 우영은 애당초 말주변이 없었고, 사현은 일할 때가 아니고서야 잡담을 늘어놓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래서 안주가 맛있다거나 물 혹은 휴지 따위를 찾는 대화 말고는 이렇다 할 게 없었다. 그런데도 불편하지 않았다.
사현은 소주 네 병이 동났을 때부터 광대에 발긋한 열이 올랐다. 입술은 통통해졌고, 눈꺼풀은 약간 느슨해졌다. 저번에 바에서 마실 땐 어둑어둑해서 제대로 못 봤는데. 이렇게 훤한 곳에서 보니 느릿하게 깜빡일 때마다 팔랑거리는 속눈썹도 훔쳐볼 수 있었다.
우영은 연한 미소를 띤 채 술잔을 기울였다. 아직 여유로운 상태였다.
“이번 주는 쉬어.”
막 술을 넘긴 사현이 말했다. 갑작스러운 휴직 권고에 우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너 한 번도 못 쉬었잖아. 바깥에 나가서 산책도 하고, 뭐…… 여행이라도 다녀오든가.”
“…….”
휴가. 직장인이라면 환호성을 내지를 제안이었다. 허나 우영은 그렇지 못했다. 아랫입술이 불룩 모나게 튀어나왔다. 여행이라니. 그럼 그동안 사현을 못 보지 않는가. 같이 가 줄 것도 아니면서…….
갑갑한 마음에 술을 삼켰다. 어딘가 뒤틀린 우영의 얼굴에 사현이 흘깃 그의 눈치를 봤다.
“너무 짧아? 그럼 다음 주까지 쉬어도 괜찮아. 한호랑 미팅은 내가 미뤄,”
“그것 때문인 것 같아요.”
“어?”
“한호 자동차랑 일하기로 한 거요. 그게 자꾸 신경 쓰여요.”
“왜? 아무것도 안 떠올라? 아니면 그때 만난 팀원들이 별로였어?”
우영은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사현의 눈가가 장난스럽게 일그러졌다.
“가영이 때문에 그래? 야. 나 연애 안 한다니까?”
“그건 모르는 일이죠……. 사람 마음이 맘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가영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박가영 팀장, 박 팀장 뭐 좋은 호칭 많잖아요.”
부루퉁한 우영의 말에 사현이 푸흐흐 웃음을 터트렸다. 우영이 왜 이리 제 과거 관계에 연연하는지 모르겠다. 지나간 인연은 말 그대로 지나간 인연일 뿐인데.
가영과는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하게 헤어졌다. 하필 둘 다 일에 미쳐 있을 때 만나서, 제대로 데이트를 한 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아무래도 전 연인이라 이걸 알은체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긴 했다만. 그게 다였다.
근데 갑작스러운 그녀의 등장에 저도 아니고 우영이 흔들리니 이상하다 못해 신기했다. 얘가 느끼는 감정이 뭐지. 아끼는 형을 빼앗긴 질투인가. 아니면, 저를 돌봐 주던 직장 사수에게 새로운 후배가 생겼을 때의 섭섭함인가.
사현이 검지로 톡톡톡 테이블을 두드렸다. 우영이 그런 사현의 잔에 다시 술을 채워 넣었다. 어느새 소주 한 병이 또 비었다. 우영이 새 술을 따려 하는데, 사현이 그것을 채가 자신이 땄다.
우영의 입술이 씰룩 위로 치솟았다. 이제 다 나은 손을 걱정해 주는 그에 대번에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아주 미친놈이 따로 없다.
우영이 큼큼 목을 가다듬으며 입술 끝을 눌러 내렸다.
“뭐, 사실 그것 때문이 아니라…… 제가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림 그리는 걸? 그 정도로 그림이 어려워졌어?”
사현이 자못 심각한 음성으로 물었다. 우영이 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부담스러워서요. 저는 이제껏 형 뒤에 숨어 있었잖아요. 아무도 제가 네온인 줄 몰랐고, 관객들도 저에게 직접 칭찬이나 비난을 하지 않았으니까. 근데 그때, 한호 자동차에 갔을 땐 사람들이 다 절 쳐다보고 있었어요. 막 눈알 여러 개가 번쩍번쩍…….”
“…….”
“그리고 다 맞춰 준다는 것도 싫었어요. 그만큼 대단한 걸 뽑아 낼 거지? 라고 협박하는 것 같아서.”
안경을 벗은 우영이 비련의 주인공처럼 손바닥에다 푹 얼굴을 파묻었다. 넓고 두꺼운 어깨가 순식간에 가녀려졌다.
“저한테…… 그런 능력이 있을까요?”
우영이 슬쩍 눈을 들었다가 흐으읍,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다시 얼굴을 묻었다.
엄청난 공격이었다. 술에 취해 감정적으로 예민해진 사현이 눈썹을 축 아래로 떨어트렸다.
우리 애송이. 생전 처음 하는 사회생활에 마음고생이 심하구나. 집에 있으면 하얀 종이 위에 서 있는 것 같다던 애가 이제는 붓을 못 쥐어. 조금 둔하긴 해도 순수한 애였는데. 가슴께가 찡했다.
우영의 음울한 정수리를 바라보던 사현이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우당탕 2층으로 사라졌다. 일순간에 혼자 남은 우영이 멍청한 얼굴로 사현의 빈자리를 응시했다.
뭐야, 뭔데. 어디 갔어. 나 아직 할 말 많은데.
여차하면 닭똥 같은 눈물까지 뚝뚝 떨어트리려 준비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한호와, 또 가영과 헤어지고 싶어서. 사현과 가영이 죽을 때까지 다시는 만나지 않았으면 해서. 첫사랑에 직진 중인 우영에겐 명성이고 돈이고, 평판이고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뭐라도 할 수 있었고, 뭐라도 하고 싶었다. 근데 사현이 사라졌다.
우영이 ‘2층에 올라가 볼까. 그의 침대 아래에 퍼질러 앉아 우는 것도 효과가 좋을 것 같은데……’ 라는 영악한 생각을 할 때였다.
또 우당탕 소리가 나더니 지갑을 든 사현이 나타났다.
“일어나.”
“뭐 사 오시게요? 안주? 이번에도 떡볶이? 제가 가서 사 올게요.”
우영이 엉거주춤하게 엉덩이를 뗐다. 또 떡볶이를 찾는 건가 싶었다. 오늘은 그래도 늦은 저녁쯤이니 문을 연 떡볶이 전문점이 있을 것 같았다. 치즈도 추가하고 당면도 추가해서 와야지. 아아, 소시지도 잊으면 안 돼.
그런 계획을 세우는데, 사현이 손을 마구 흔들며 우영을 재촉했다.
“갑자기 떡볶이는 웬 떡볶이야. 빨리 일어나.”
안경을 챙긴 우영이 얼떨결에 그를 따라 일어났다. 사현은 곧장 현관으로 향했다. 그러더니 운동화에 발을 꿰었다. 우영 역시 운동화를 신었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건물 밖으로까지 나왔다. 서늘한 바람이 훅 가슴팍으로 돌진해 왔다. 술기운이 증발했다.
도로변에 선 사현이 택시를 잡았다. 문을 연 그가 고개를 까딱였다. 우영이 주춤거리자, 사현이 그를 막무가내로 욱여넣었다. 그 후 택시에 오른 사현이 기사에게 목적지를 밝혔다.
“시청 가 주세요.”
그 말에 택시 기사와 우영이 동시에 눈을 크게 떴다. 먼저 정신을 차린 건 기사였다. 그가 곧 차를 출발시켰다. 아직 사현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 우영이 고개를 갸웃 비틀었다.
“시청을 왜…….”
술 먹다 말고 갑자기 시청에 간다고? 이 시간에? 불 다 꺼졌을 텐데. 도대체 사현이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뜬금없는 행동을 하는 게 처음은 아니었으나 이번은 좀 유별났다.
“가 보면 알아.”
사현이 씨익 입술 끝을 올렸다.
* * *
늦은 밤의 시청은 한산하다 못해 황량했다. 싸늘하게 몰아치는 바람에 팔뚝에 소름이 다 돋아났다. 외계 행성에 떨어진 것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우영과 달리 사현은 앞만 보고 직진했다. 우영의 다리가 한 뼘은 더 긴데, 쫓아가는 게 버겁게 느껴질 정도였다.
널따란 잔디밭을 가로지른 사현은 곧장 본청으로 향했다.
우영이 안경을 벗었다가 다시 꼈다. 간혹 뉴스를 통해서나 보던 시청이 눈앞에 있다. 와 볼 거라 생각지도 못한 곳인데 술 먹다 끌려올 줄이야. 지금 이게 현실인지, 몽중인지 구분이 안 됐다. 그래서 사현 몰래 은근히 볼을 꼬집었다. 술기운 탓에 남의 거죽을 모아 쥐는 듯한 느낌만 났다. 더 아리송해졌다.
“빨리 안 와?”
자꾸 뒤처지는 우영의 걸음에 사현이 신경질 섞인 음성을 내질렀다. 후읍, 숨을 들이켠 우영이 다리를 바쁘게 놀려 그를 따라잡았다.
새 청사이자 본청인 건물은 한밤인데도 반질반질하게 빛났다. 유려한 곡선을 자랑하는 건물은 앞에 서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건물이 제 쪽으로 쏟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옛 시청과는 너무할 정도로 따로 노는 디자인이었으나 한국의 고위 공무원들이 하는 짓이 대개 그러하니 크게 실망하진 않았다. 분명 멋진 디자인이 많았을 텐데, 결정권을 쥔 노친네가 제멋대로 애먼 디자인에 도장을 찍었으리라.
우영이 입술을 씰기죽거리며 청사를 노려보듯 하고 있는데, 사현이 성큼성큼 정문을 향해 다가갔다. 건물 안이 새까맣게 죽어 있는 것이 분명 누구의 방문도 허용하지 않거늘. 걸음걸이만 봐선 문을 깨고 들어갈 기세였다.
“어어…….”
기겁한 우영이 막 문에 닿기 직전의 사현을 잡아챘다.
“형. 여기 깨면 경찰에 잡혀가요.”
“뭐?”
“서울 시청 정문 깬 정도면 뉴스에도 날걸요. <갤러리 비>의 B가 술 먹고 시청 문 깼다는 건 좀, 너무, 어, 그렇지 않나요? 유명 갤러리 관장 백모 씨라고 뜰 텐데. 세상 사람이 다 알 거예요.”
우영이 진지하게 사현을 말렸다. 사현이 턱을 삐딱하게 뒤튼 채 코웃음을 쳤다. 얘가 날 뭐로 보고……. 볼에 발긋한 열이 오르긴 했지만, 말 그대로 열이 오른 정도였다. 무엇이 하늘이고 무엇이 땅인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불콰하게 취한 게 아니란 말이다.
“누가 시청 문 깬대? 설마 저 문 깨자고 술 마시다 택시 타고 여기까지 왔을까 봐? 내가 미쳤니?”
사현이 짜증스레 우영의 손을 털어냈다.
“그럼 왜 왔어요?”
우영이 정말 모르겠다는 눈으로 사현을 쳐다봤다.
“그냥 따라와, 좀. 내가 너한테 나쁜 짓 시킨 적 있어? 뭐 훔쳐 와라, 깨라, 부숴라 그런 거 안 시키니까 겁먹지 말고.”
사현이 우영의 소맷자락을 쥐고 질질 끌어당겼다. 우영이 조그마한 그의 뒤통수를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어쩌면 저는, 사현이 무언가를 훔쳐 와라 혹은 깨라, 부숴라 등을 명령해도 충실히 이행할 것 같았다. 미쳤지, 미쳤어. 아주 단단히 돌았어, 서우영.
두 사람은 끝내 정문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숨을 내쉴 때마다 정문 유리에 하얀 김이 서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우영은 사현이 당최 여기서 무엇을 하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사람도 없고, 건물 문은 닫혔고, 하물며 불도 꺼져 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범죄를 저지르기 좋은 환경이었다.
“더 가까이 붙어.”
“……더요?”
“어.”
유리문에 코가 닿을 듯 말 듯할 정도로 붙은 사현이 말했다. 일그러지는 낯짝을 숨기지 못한 우영이 어정쩡하게 허리를 숙였다. 좀 붙었다고 경보 울리는 거 아니야? 경찰이나 군대가 와서 총 들이밀면 어쩌나. 태산처럼 쌓여 가는 우영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현은 문 안에 귀한 것이라도 있는 듯 눈을 떼지 않았다.
우영이 한숨을 내쉬며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저기, 가운데에, 아니 조금 왼쪽 벽 위에 봐봐.”
“벽이요?”
우영이 데구루루 눈알을 굴리며 사현이 말하는 곳을 찾았다. 그리고 안경이 유리에 닿을 때쯤, 그가 가리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
벽에는 익숙한 그림이 걸려 있었다. 에드가르 드가의 「발레 연습」이나, 앙리 마티스의 「이카루스」처럼 유명해서 익숙한 게 아니라, 제 그림이어서 익숙한 거였다.
「P3001」. 그 그림이다.
우영이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유리에 이마를 처박을 기세로 전진했다. 사현이 발뒤꿈치를 들고 그의 이마와 유리 사이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나 우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눈을 부릅떴다.
서울 시청에. 그것도 현관에. 방문객이 가장 처음 맞닥트리는 로비에. 내 그림이.
우영은 어둠 사이에 숨은 저 그림이 제 그림이 맞는지 보고 또 봤다. 사현은 그가 만족할 때까지 옆에 가만히 서서 기다려 줬다.
우영은 눈알이 뻐근해질 때쯤에야 문에서 떨어져 나왔다. 사현이 저릿한 손을 탈탈 허공에 털었다.
“저게 왜…… 여기 걸려 있어요?”
우영이 물었다.
“누가 사 가서 걸어 놨으니까 저기 걸려 있겠지.”
사현이 무심하게 대꾸했다.
“형이 건 거예요? 기부, 기증, 뭐 그런 거?”
우영이 다시 물었다.
“내가? 아니.”
사현이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었다.
“그럼요?”
“공무원님이 사다가 걸었지.”
“공무원이요? 공무원은…… 월급이 적지 않나요?”
순진하기 그지없는 질문에 사현이 짧은 웃음을 흘렸다.
“그렇지. ‘새로운 밤’ 전시에서 가장 비쌌던 작품을 공무원이 사긴 쉽지 않지. 근데 공무원이 다 박봉이겠니. 장ㆍ차관 급으로 올라가면 어마어마하게 벌거든.”
“…….”
사현의 말엔 거짓이 묻어 있지 않았다. 그래, 어차피 누군가는 사 갔을 그림인데 누가 구태여 기증이라는 손해를 봐 가면서 여기다 걸어 놨을까. 우영이 가느다랗게 실눈을 뜬 채 다시 그림을 살폈다. 혹 소유자가 적혀 있을까, 싶어서.
그런 우영을 훤히 꿰뚫어 본 사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네 그림이 환해서 좋으시다더라. 거기다 서울 풍경이고, 크기도 장엄하니 크고. 확 튀는 색감까지. 서울 시청 로비에, 한국인은 물론 외국인도 관광으로 오는 이곳에 걸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그림 아니니.”
우영이 고개를 주억이며 수긍했다. 사현이 그려 보라 해서 그린 그림인데. 그는 이 그림이 이곳에 걸릴 거라는 걸 알고 있었을까.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서울 시청에서 로비에 걸 그림을 찾고 있다더라. 어떠한 분위기에, 어떠한 요소가 들어간 그림을 원한다더라. 그 정도의 정보는 진즉 입수하고 있었을 게 분명했다.
우영이 안경을 추켜올렸다. 차가운 물에 샤워라도 한 듯 정신이 멀끔해졌다.
“근데 절 왜 여기 데려오셨어요? 저거 보여 주려고요?”
“응.”
“굳이 이 시간에요?”
“어. 한 시간이라도 일찍 알려 주고 싶었어. 네 그림이 그만큼 대단하다고. 서울 한중간에 떡하니 걸려 있을 만큼 멋지다고. 그러니까 자신감을 가지라고.”
사현의 입꼬리가 크게 호선을 그렸다. 가로등 빛이 비쳐 반짝이는 그의 눈동자가 말도 못 하게 아름다웠다.
“…….”
우영이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이 사람은 내가 무슨 감정을 품고 있는지 알고 이다지도 예쁜 말만 쏟아 내는 걸까. 그 말에 흠씬 두드려 맞은 내가 얼마나 너절한 상태인지 알까. 머리가 으깨지고, 곤죽이 되어서 앞뒤 분간 없이 냅다 들이박고 싶은 마음을, 저 통통한 입술을 쪽쪽 빨아먹고 싶은 이 마음을 감히 가늠이나 하냔 말이다.
우영이 흐읍,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를 들쑤시자 제정신이 조금, 아주 조금 돌아왔다.
“……제가 한호 자동차랑 일 안 할까 봐 이러시는 거예요?”
“뭐, 하면 좋지만 네가 싫다는데 어쩌겠니. 그건 상관없어. 그림이 어려워진다니까 기분 좀 풀어 주려고 했지. 한호는 앞으로 네가 쌓아 갈 수많은 이력 중 하나일 뿐이야. 그거 한두 개 빠진다고 네 작가 인생 안 망해.”
사현이 어깨를 으쓱이며 뒤를 돌았다. 이만 돌아가려는 모양이었다. 우영이 그의 보폭에 발맞춰 걸었다.
“한호에서 돈 많이 준다면서요. 근데 인제 와서 안 한다고 하면 손해가,”
“야. 누가 너한테 돈 걱정하랬어?”
걸음을 멈춘 사현이 도끼눈을 뜨고 우영을 노려봤다. 그가 검지로 우영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너 통장에 있는 돈. 그거 오늘 안에 다 쓰고 오라면 쓸 수 있어?”
난데없는 말에 우영이 눈을 크게 떴다. 3억에 달하는 돈을 하루 만에 다 쓰라고? 로또에 맞는대도 그런 짓은 하지 않을 터였다. 당장 내일 지구가 멸망하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살날이 얼마나 많은데.
“아니요. 그 큰돈을 어떻게 하루 만에 다 써요? 앞으로 십 년은 먹고살 수 있는 돈인데.”
“왜. 내 차 같은 거 하나 사면 금방이야.”
“별로 안 사고 싶어요. 저 바깥에 잘 안 나가는 거 아시잖아요.”
“그럼 옷이나 구두를 사.”
“그것도 필요 없는데요.”
“아니면 입이 떡 벌어지게 비싸고 맛있는 걸 먹든가. 너 먹는 거 좋아하잖아.”
“저는 형이랑 김밥천국에서 라면 먹는 게 좋아요.”
우영은 웬일로 말 한번 더듬지 않고 따박따박 사현의 말에 반기를 들었다. 사현이 절레절레 느리게 머리를 흔들었다.
“……너는 딱 그 그릇이야.”
“네?”
우영이 턱을 안으로 당기며 미간을 구겼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욕인가. 보통 배포가 작다는 뜻으로 쓰이니 욕이 맞겠지. 우영의 눈썹 끝이 아래로 추락했다. 조금 서러웠다. 사현이 싫어질 정도는 아니고. 정말 조금. 그가 말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모르고 좋아한 건 아니었으니까.
시시각각 허물어지는 우영의 얼굴을 응시하던 사현이 쯧, 짧게 혀를 찼다.
“네 돈 욕심이 간장 종지만 하다고.”
“그……렇게 작진 않을……걸요?”
“작아.”
“네.”
우영은 순순히 긍정했다. 저가 아무리 반론을 펼쳐 봐야, 신발 한 켤레에 오백만 원씩 턱턱 주고 사는 사현에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간장 종지일 게 분명했다.
“네가 그림을 그리든, 그림과 관련된 일을 하든, 돈 생각은 하지 마.”
“……어떻게 돈 생각을 안 해요. 제 그릇이 아무리 간장 종지라도 먹고는 살아야죠.”
세상에 돈 생각 않고 일하는 이가 몇이나 되겠나. ‘일을 왜 하십니까’라고 물으면 ‘돈 벌려고요. 다른 이유는 없어요. 돈 많으면 일을 왜 하겠어요’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지. 우영은 떠오르는 불만이 많았으나 구태여 입 밖으로 뱉지 않았다.
그런 우영을 물끄러미 보던 사현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MoMA(뉴욕 현대 미술관)에 있는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보기 위해 일 년에 몇 명이나 뉴욕으로 갈 것 같아?”
“어…… 잘 모르겠어요.”
“등신 같은 타임 스퀘어에 인증 샷 찍으러 가는 사람들 정도는 될걸.”
우영이 사현 몰래 눈을 굴렸다. 사실 MoMA가 어디 붙어 있는지 모른다.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다만, 고흐의 작품이 있어 이름만 간신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MoMA가 뉴욕에 있나요? 타임 스퀘어랑 가깝나 봐요. 그리 물었다간 사현이 쓰레기 보듯 할까 봐 함구했다.
“루브르에 있는 다 빈치의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파리에 가는 사람은? 에펠탑을 보러 가는 사람만큼 많겠지.”
“⋯⋯.”
“바티칸 미술관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 그러니까 「천지창조」를 보기 위해 이탈리아에 가는 사람은? 피자 먹으러 가는 사람 정도는 될 거야.”
“아…….”
그쯤, 우영은 사현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차렸다. 사현이 크게 주위를 둘러봤다. 우영이 그를 따라 봤다.
두 사람은 어느새 광장의 끄트머리에 서 있었다. 오른쪽엔 덕수궁 입구가 보였고, 반대쪽엔 높다란 빌딩들이 보였다. 멀찌감치 남산 타워도 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서울, 그 자체의 풍경이었다.
“예술이라는 건 생각보다 아주 많은 가치를 창출해. 그저 그림을 사고, 되팔아 돈을 버는 걸 넘어서서, 건축물이나 문화처럼 관광의 중심이 되거든.”
“…….”
“꿈을 크게 가져. 네 그림을 보러 전 세계 사람들이 한국으로 오게 만들란 말이야.”
사현의 목소리는 잔잔하나 힘이 셌다. 한 음절 음절이 가슴팍에 콱콱 박혀 왔다. 저에게 보금자리를 주고, 기회를 주고, 전시도 주고, 돈까지 준 사현이 이제는 꿈도 준다. 멋지다 못해 경이로웠다.
사현이 우영의 손목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돈과 가격. 이득, 손해. 흑자, 적자. 그런 거는 내가 잴게. 매니저? 그것도 해 줄게. 너는 꿈 꿔.”
“…….”
“그리고 언젠가, 너랑 내가 파트너로서의 관계가 깨지면. 그때 네온이라는 대가가 서우영 너라는 걸 밝혀도 좋아.”
그 말에 직선으로 상승하던 우영의 기분이 댕강 참수됐다. 깨지다니. 그 말인즉슨, 지금의 관계가 끝난단 말인가. 그의 집에 살면서, 같이 밥 먹고, 술 마시고, 또 가끔은 조언도 얻고 간호도 해주는, 이 관계가 끝난다니.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저는 형이랑 헤어지고 싶지 않은걸요. 계속 <갤러리 비>의 네온으로, 형이 만들어 준 네온으로 살 거예요.”
우영이 다짐하듯 굳건히 말했다. 사현이 가소롭다는 듯 어깨를 뒤틀었다.
“네가 내가 품을 수 없을 만큼 커지면, 내가 아득바득 기를 쓰며 붙잡아도 떠나게 될걸.”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아니긴. 내가 안다니까.”
“아니요. 형은 아무것도 몰라요. 진짜. 하나도 몰라.”
우영이 꽈악 주먹을 말아 쥐었다. 손등 위로 울룩불룩한 핏줄이 도드라졌다.
모든 걸 아는 사현이 딱 하나 모르는 게 있었다. 그걸 여태 잘 숨겨 왔는데. 앞으로도 당분간은 숨겨 볼 생각이었는데.
어느덧 자정을 넘어선 밤. 연하게 목젖을 간질이는 알코올 향. 잠든 도시. 아무도 없는 공간. 서늘한 바람. 그리고 저를 아끼지만, 특별한 애정을 주지만, 절대 넘을 수 없는 선을 그어놓는 사현.
그 모든 게 우영을 낭떠러지로 내몰았다. 이 절벽 아래에는 가시덤불이 있을까. 아니면 차갑고 딱딱한 아스팔트 바닥이려나. 또는 뼈가 시릴 정도로 찬 심연이려나.
그것도 아니면, 보드랍고 따뜻한 사현의 품이려나.
우영이 사현을 향해 한 발자국 다가갔다. 밤을 빼다 박은 그의 검은 그림자가 한 입에 사현을 삼켰다.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감지한 사현이 본능적으로 주춤,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려 했다. 그러나 우영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사현의 양쪽 손목을 부드럽게, 하지만 단단하게 움켜쥐었다.
“제가 뭐 하나 알려드릴까요?”
“뭐야. 왜 목소리를 깔고 그러냐. 무섭게.”
“…….”
우영의 미끈한 눈동자에 사현의 얼굴이 스며들었다. 사현이 우영의 양쪽 눈동자를 번갈아 쳐다봤다. 우영은 유려하고 모나지 않은 곡선이 뭉쳐진 사람이었는데. 지금의 우영은 투박한 직선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낯설다. 낯선 우영의 모습이다. 그걸 체감하고 있는 현재가 썩 유쾌하지 못했다.
사현이 아무렇지 않은 척 손목을 비틀어 빼내려 했다.
“설마 벌써 컬렉터가 따로 거래하자고 연락 왔냐? 직접 계약하면 갤러리에 수수료 안 줘도 된다고 하든? 하기만 해. 그날로 나랑 끝,”
“저 형 좋아해요.”
“⋯⋯어?”
사현의 눈이 완벽한 타원을 그렸다. 아랫입술은 뻐끔 아래로 떨어졌고, 속눈썹은 직선으로 뻣뻣하게 굳었다. 초콜릿처럼 달콤한 색의 눈동자는 얼어붙은 듯 움직임이 없었다.
싸늘한 바람이 두 사람의 귓바퀴를 거칠게 할퀴었다. 이따금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가 천둥처럼 요란하게 들렸다. 기이한 적막이었다.
간신히 정신을 다잡은 사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나도 너 좋아해. 좋은 동생이자, 파트너로서. 그런 흔하고 치사한, 어른의 거짓말로 상황을 무마하려 입술을 달싹일 때였다.
우영이 사현의 손목을 훅 자신의 쪽으로 잡아당겼다. 사현의 마른 몸뚱이가 쏟아지듯 끌려갔다. 우영의 콧바람이 이마 위에서 흩어질 만큼 가까운 거리가 됐다.
사현이 자신도 모르게 호흡을 멈췄다. 덩달아 머리도 멈췄다. 움직이는 거라곤 눈치 없이 쿵쾅거리는 심장뿐이었다.
“형으로 좋아하는 거 말고요.”
“…….”
“파트너로서 좋아하는 거 말고요.”
“…….”
“사랑. 그거 해요, 저.”
마침내 심장도 멈췄다.
* * *
우영의 손이 거칠게 움직였다. 물감을 주렁주렁 매단 붓이 캔버스에 닿을 때마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났다. 평생 듣던 소린데 지금은 어찌나 듣기 싫은지. 목덜미에 오소소 소름이 다 돋아났다.
어금니를 악물고 손을 움직이던 우영이 참지 못하고 붓을 내던졌다. 죄 없는 붓이 대리석 바닥 위로 타닥, 탁 튀어 올랐다. 그 길을 따라 붉은 물감이 보기 싫게 흔적을 남겼다. 꼭 달팽이의 점액 같은 생김새였다.
널브러진 붓이 우영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왜 가만히 있는 나에게 화풀이를 하느냐고 짜증이라도 내는 것 같았다.
“씨발…….”
우영이 어울리지 않게 질펀한 욕을 읊조렸다. 신경질 섞인 손놀림으로 안경을 벗은 그가 눈두덩을 문질렀다.
화풀이라. 그래. 저는 지금 화풀이 중인 게 맞다. 가슴팍이 부글부글 끓었고, 눈앞은 벌겋게 익었다. 그래서 무엇이 붉은색인지, 무엇이 노란색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갑작스레 색맹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사흘 전, 사현과 시청에 갔던 그 날 이후로 내내 이 꼴이다.
당시를 떠올린 우영이 질끈 눈을 짓이기듯 감았다.
* * *
차디찬 바람이 사현과 우영의 사이를 엉망으로 헝클어 놓았다. 귓바퀴가 찌릿하게 아릴 때쯤, 사현이 입을 열었다.
“하지 마.”
사현은 늘 구구절절 말을 덧붙이는 법이 없다. 우선순위와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을 아주 명확하게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 간단하고 매정한 세 음절에 우영이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뭐라고요?”
“하지 말라고. 사랑.”
사현이 무정한 말을 반복했다. 그건 거절이 아니었다. 거부였다.
우영은 잘 벼려진 칼날이 자신의 가슴팍을 들쑤시는 듯한 통각을 느꼈다. 정수리부터 발바닥까지 뻥 뚫린 것 같은 공허함도 몰려왔다.
사실 받아주리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과 같은 감정일 거란 어리석은 바람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적당히 타일러 줄 줄 알았다. 최근의 사현은 자신에게 깨나 다정했고, 친절했으니까.
변명이야 많지 않은가. 나에게 너는 좋은 동생이라느니, 같은 감정이 아니라 미안하다느니, 그것도 아니면 너무 바빠서 연애고 사랑이고 할 시간이 없다느니. 그런 입에 발린 말. 그 역시 상처이긴 하겠지만, 지금에 비하면 연하고 얕은 상해만을 남겼을 테였다.
‘하지 마.’ 그 세 음절이 우영의 단전에 녹은 껌처럼 달라붙었다.
시시각각 허물어지는 우영의 얼굴을 보던 사현이 손을 돌렸다. 이제는 사현이 우영의 팔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자기야. 너 이제 시작이야. 근데 그런 알량한 감정을 품어서 뭐 어쩌겠다고.”
“지금 알량한 감정이라고 했어요?”
우영이 눈을 부릅 치켜떴다. 가슴이 후벼지는 듯했던 고통이 순식간에 분노로 모습을 바꾸었다. 그런 우영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사현이 미련 없이 손을 놓았다. 우영의 손이 툭, 허벅지로 추락했다. 싸늘한 밤바람이 손바닥을 마구 할퀴는 듯했다.
“못 들은 거로 해 줄 테니까 정리해라.”
사현이 휙 뒤를 돌았다. 그러고는 뚜벅뚜벅 큰 도로변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우영은 멀어지는 사현을 우두커니 목도하고 있었다.
사현의 뒷모습을 본 적은 많다. 그는 늘 우영을 내버려 두고 가거나, 가라고 떠밀었다. 근데 이렇게…… 이렇게 버려진 감정이 드는 건 처음이었다. 언제나 남겨진 신세가 되고서도 자신이 사현을 버린 듯했었지.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오늘은 더할 나위 없이 우영이 사현에게 버림받은 거였다.
우영은 땅에 박히기라도 한 듯,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바람에 후려 맞으며 그의 말만 곱씹고 또 곱씹었다.
하지 마. 알량한 감정. 못 들은 거로. 정리해.
항상 감미롭다 생각했던 그의 목소리가 귓구멍을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사현이 점점 더 멀어졌다. 작고 마른 몸이 뚜벅뚜벅 거침없이 어둠을 가로질렀다. 그의 뒤로 황망한 도시의 불야성이 산란했다. 그 불빛이 그대로 그를 꿀꺽 삼켜 버릴 것 같았다. 그런데도 우영은 그를 따라갈 수도, 잡을 수도 없었다.
‘알량한 감정.’
그 단어의 구렁텅이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우영은 두 발 잘린 짐승과 다르지 않았다.
우영의 눈이 사현을 잃어버리기 직전이었다. 탁. 짜증스레 발걸음을 멈춘 사현이 빙그르르 뒤를 돌았다. 멀리서도 그의 형형한 눈빛이 우영의 미간에 직선으로 박혀 왔다.
“왜 안 와.”
“…….”
“얼른 와. 집에 가게.”
사현의 독촉에도 우영은 움직일 줄을 몰랐다. 큼지막한 덩치를 자랑하며 꼿꼿하게 서 있었다. 사현의 눈썹이 뾰족하게 곧추섰다.
“뭐, 그렇게 서서 반항이라도 하는 거야? 네가 애니?”
“…….”
“화나게 하지 말고 어여 와.”
억세게 말려 있던 우영의 주먹이 탁 풀렸다. 사현이 화가 났단다. ……정말 화가 난 게 맞을까? 짜증은 아니고? 귀찮은 건 아니고? 제 주제에 그를 화나게 만들 수 있나? 우영의 자존감이 와르르 무너지고 있었다.
사현이 특유의 냉소적인 눈빛으로 우영을 쳐다봤다. 우영이 어쩔 수 없이 발을 뗐다. 말도 못 하게 비참하다. 인생에서 첫 패배를 경험한 다섯 살짜리가 된 기분이었다. ‘네가 애니?’ 늘 그렇듯, 사현의 말은 무엇 하나 틀린 게 없었다.
저는 애다. 그의 사랑을 갈구하는, 어린애.
* * *
하얀 캔버스 앞에 선 우영은 꼭 벌 받는 죄인의 얼굴이었다. 여태까지 살아오며 거절이야 수도 없이 겪었지만, 사랑 고백을 거절당하는 건 처음이라. 아니, 사랑 자체가 처음이라 그 격통이 곱절에 곱절이었다.
푸욱,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쉰 우영이 소파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내동댕이쳐진 붓이 여전히 우영을 노려보고 있었다. 우영이 붓이 흘린 핏자국을 무감한 눈으로 응시했다.
그때였다. 나무 테이블 위에 있던 핸드폰이 바라락, 바라락, 시끄럽게 진동했다. 우영이 튕기듯 일어났다. 저에게 전화를 걸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사현의 이름이 떠 있었다. 용건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아마 식사를 결제했다는 메시지가 종일 하나도 가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크게 숨을 들이마신 우영이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너 왜 밥 안 먹어.
쭈뼛거림이 가득한 우영의 목소리와 달리, 사현의 음성은 곧고 또렷했다. 꼭 빚 독촉하는 사람 같았다. 며칠 전 우영의 고백은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다.
우영이 자신의 눈두덩을 거칠게 문질렀다. 목구멍이 썼다.
“입맛이 없어서요.”
-네가 언제부터 입맛이 있고 없고를 따져 가면서 밥 먹었다고? 얼른 먹어.
“저도 입맛 따지거든요. 항상 입맛이 있는 상태라서 잘 먹은 거지. 오늘은 입맛이 없어요. 하나도 없어요. 0%예요. 제로라고요, 제로.”
우영이 웅얼웅얼 말을 짓이겼다. 당신은 괜찮을지 몰라도 나는 하등 괜찮지 않다는, 그러니 그걸 좀 알아달라는 철없는 외침이었다.
-먹으라고 했어.
그러나 사현은 늘 그랬듯, 차가웠다. 우영의 앙탈 같은 한탄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우영이 볼 안쪽을 세게 깨물었다. 오늘 종일 씹고 씹고 또 씹었더니 내벽이 너덜너덜했다. 그런데도 전혀 아프지 않았다.
스피커 너머로 연하게 바람 소리가 났다. 명령을 마친 사현이 통화를 종료하려는 듯했다. 우영이 다급하게 입술을 뗐다.
“형은 저녁 먹었어요?”
-……아니.
“형은 왜 안 먹어요? 그러다 또 아프면 어쩌려고. 퇴근 언제 해요? 같이 먹어요.”
우영이 와다다 말을 쐈다. 사실 마음 같아선 저도 화난 티를 내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며칠 내내 사현을 털끝 하나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사람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겠는데. 화는 사치였다.
건너편이 고요했다. 우영이 살짝 핸드폰을 들어 혹 통화가 끊긴 건 아닌지 확인했다. 다행히 통화 시간이 차근차근 올라가고 있었다.
한참 정적을 이어 가던 사현이 느릿하게 말했다.
-……정리 다 했니?
“아니요.”
우영이 대번에 부정을 내놓았다. 고집에 아집이 잔뜩 뒤섞인 대답이었다. 철옹성같이 견고하기까지 했다.
정리. 정리라. 그가 말하는 정리가 집 정리나 문서 정리 같은 거면 얼마나 좋을까. 그건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그게 정리한다고 이불처럼 차곡차곡 정리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우영이 부루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혼자 먹어.
사현은 우영이 잡기도 전에 뚝, 전화를 끊어 버렸다. 우영이 허망한 낯으로 핸드폰 화면을 쳐다봤다. 사현의 이름이 깜빡깜빡 점멸을 반복하더니 이내 검게 물들었다. 자신의 멍청한 표정이 그대로 비쳤다.
“……허.”
우영이 꽈악, 핸드폰을 부술 듯 움켜쥐었다.
내가 밥 먹나 봐라. 절대 안 먹어. 형이 와서 내 앞에 딱 앉아 있지 않는 이상 안 먹어. 안 먹는다고. 원체 건강한 몸이라 웬만큼 굶어서는 아프지도 않다. 이번 기회에 한번 영양실조로 까무러쳐 보리라.
우영이 뿌득, 이를 갈았다.
* * *
얼음장 같은 물로 샤워한 우영이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썼다. 턱이 덜덜 떨릴 정도로 찬물이었는데, 그렇게 춥진 않았다. 오랜 반지하 생활 내내 찬물로 씻어 와서 적응한 건지, 아니면 단전에서 솟구치는 열기에 차가운 걸 느끼지 못하는 건지 구분이 안 됐다.
우영이 손자국 하나 없이 깨끗한 거울을 지그시 쳐다봤다. 축축하게 젖은 머리카락. 습기를 가득 머금어 미끈해 보이는 피부. 우뚝 선 콧날. 그렇게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눈매. 보기 좋은 붉은색 입술. 거울 끝이 가득 찰 정도로 커다란 키에, 떡 벌어진 어깨. 요즘 잘 먹고 잘 자고, 운동도 열심히 해서 가슴 근육도 통통하니 잘 붙었다.
근데…… 좀 못생겼나? 그래서 사현이 저를 그리 매정하게 쳐냈나? 그러고 보니 귓불이 너무 위로 붙은 것 같기도 하고. 요즘 젊은 남자 트렌드는 가느다란 턱선인데. 그와 달리 자신의 턱은 좀 각진 것도 같고. 피부도 우유처럼 새하얗지 않고.
그래도 어디 가서 못생겼단 말은 안 들어 봤는데. 사현도 저에게 예쁘다, 예쁘다 하지 않았는가.
“근데 왜 싫다는 거야.”
우영이 볼멘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남자라서 그렇겠지. 그때 본 박가영 팀장님. 엄청 예쁘던데. 되게 똑똑할 거고. 거기다 좋은 냄새도 나고, 옷도 반질반질한 게 비싸 보이던데. 그런 사람이랑 만나다가 저랑 만날 생각을 하면 소름이 끼칠 만도 하겠다.
사회적으로 완벽히 성공한 그녀에 반해,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고. 손도 솥뚜껑만 한데다가 어깨는 사현의 곱절이니 짐승처럼 느껴지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우영이 옛날 만화의 가녀린 여자 주인공처럼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훌쩍훌쩍 울며 온갖 청승을 다 떨고 싶었다. 이별이나 실연과 관련된 음악을 들을 때마다 코웃음을 쳤었는데.
네가 생각나서 소주 한잔했다느니, 널 떠올리며 이별 노래를 부른다느니,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잔다느니. 그런 지질한 가사에 공감하게 될 줄이야.
‘정리 다 했니?’
‘그럼 혼자 먹어.’
사현의 싸늘한 음성이 되풀이되고, 또 되풀이됐다.
우영은 한참 동안 욕실에 처박혀 있었다. 그러다 도박으로 전 재산을 탕진한 사람의 몰골로 나왔을 때, 막 복도로 들어서는 사현과 마주쳤다.
“어…….”
우영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뚝 멈춰 섰다. 그러나 사현은 넋 빠진 우영을 흘깃 보고는 곧장 부엌 식탁으로 향했다. 그의 손에는 갈비찜 전문 식당의 로고가 박힌 종이 가방이 들려있었다.
사현이 무표정한 얼굴로 포장을 풀었다. 간장 양념 특유의 냄새가 집 안 가득 퍼졌다. 우영이 욕실 앞 빨래통에 수건을 던졌다. 그리고 쥐고 있던 흰색 반팔티를 입으며 성큼성큼 사현을 향해 다가갔다.
그냥, 당연하게 걸음이 이끌렸다. 주인을 반기는 개 같기도 했고, 힘센 S극에 끌려가는 작은 N극 같기도 했다.
“오셨어요.”
“어.”
“일찍 오셨네요. 웬일로.”
“그래.”
삭막하다 못해 바스러질 듯 건조한 대화였다. 사현은 찰나조차 우영을 바라봐 주지 않았다. 반면에 우영은 사현의 볼을 뚫어야 하는 사명감이 있는 사람처럼 사현을 응시했다. 흔한 기미나 여드름 하나 없는 그의 피부가 말도 못 하게 신기했다.
“밥 먹어.”
식사 준비를 마친 사현이 명령했다.
우영이 식탁 위의 음식들을 훑었다. 갈비찜에 공깃밥 두 개. 숟가락은 하나. 젓가락도 하나. 그 어디에도 사현의 몫은 없었다. 우영의 입매가 직선을 그렸다. 빼꼼 고개를 들었던 입맛이 심연 저 아래로 추락했다.
“……안 먹는다니까요.”
“네가 국회의원이니? 단식으로 시위하게?”
참다못한 사현이 콰직 얼굴을 구겼다. 날카로운 음성에 분노와 짜증, 신경질이 잔뜩 억눌려 있었다. 우영이 어금니를 꾸욱 씹었다가 놨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의자에 앉아 수저를 들었다.
“형도 밥 아직 안 먹었죠? 같이 먹어요.”
“……내 밥을 왜 네가 신경 써?”
“형도 제 밥 신경 쓰시잖아요.”
“그거랑 그거는 다르지.”
“뭐가 다른지는 모르겠지만, 형이 그렇다니까 그런 줄 알게요. 그래도 같이 먹어요. 식으면 맛없어요.”
빙긋 웃은 우영이 공깃밥 하나를 사현의 앞에 놓았다. 그 후, 나무젓가락을 예쁘게 갈라 그에게 내밀었다. 평소보다 어두운 눈동자로 그것을 보던 사현이 입술을 달싹였다.
“정리 다 했어?”
“아니요. 안 했어요.”
“그럼 혼자 먹어.”
단호하게 일갈한 사현이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우영이 벌떡 일어났다. 그의 무릎에 밀린 의자가 드르륵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제가 밥 먹다가 형을 어떻게 하겠어요? 왜 그래요. 고작 밥 먹는 것 가지고.”
우영이 사현의 뒤통수에다 말을 쐈다. 그 와중에도 뒤통수는 왜 저리 작고 어여쁜지. 환장할 노릇이다.
사현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순간 관자놀이가 띵했다. 발화를 앞두고 있던 명치 깊은 곳에 기름이 부어졌다. 눈앞의 사물이 시소를 탄 듯 삐뚜름했다.
사현이 후으읍, 숨을 한가득 들이마시며 뒤를 돌았다.
“그러니까. ‘고작’ 밥 먹는 것 가지고.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이라곤 ‘고작’ 밥 먹은 것뿐인데, 너한테 왜 그런 감정이 생겼니?”
그의 목소리는 뚝배기에 든 찌개처럼 바글바글 끓고 있었다. 섣불리 입을 얹었다간 데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우영은 물러섬을 몰랐다. 이미 전신에 화상을 입은 상태라, 그깟 혀를 데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우영이 젓가락을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밥 같이 먹어서 생긴 거 아니에요. 굳이 따지면, 밥 먹는 형이 너무 멋져서 그런 거죠.”
“뭐?”
“그냥 다 멋지고 좋아요. 일하는 모습도 좋고, 제 밥 챙겨 주시는 것도 좋고, 바르게 걷는 뒷모습도 좋아요. 운전 잘하는 것도 좋고, 옷 멋지게 입는 것도 좋고, 커피에 시럽 많이 타서 마시는 것도 좋고, 형한테 나는 냄새도 좋고, 잘생긴 얼굴이야 당연히 좋고, 하물며 참치 김밥에 깻잎 빼는 것도 좋아 죽겠는데 어떡해요.”
“…….”
“지금 이렇게 못된 말을 듣고 있는데도 형이랑 같이 있다고 심장이 엄청 뛰어요. 입 크게 벌리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다고요.”
“…….”
“‘고작’ 밥 같이 먹어서 생긴 ‘알량한’ 감정이 아니란 말이에요.”
엄청난 속도로, 엄청난 분량의 말을 와다다 쏟아낸 우영이 씩씩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사현은 그때 깨달았다. 우영의 말마따나, 그의 감정이 ‘알량한’ 것이 아님을. 우영의 저런 모습은 처음 봤다. 붓을 쥐고 있을 때도 저렇게 이글거리는 눈빛은 아니었는데. 대체 무엇이 그를 저리 만들었을까.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하나. 풋내기 애송이 주제에, 열정이 불도저처럼 차고 넘치는 그를 어찌해야 하냔 말이다.
사현이 피곤한 낯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는데, 우영이 눈치 없이 말을 더했다.
“저 정리할 생각 없어요.”
“그럼 계속 혼자 먹어야겠네.”
사현은 늘 그렇듯,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허나 이번엔 우영도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그가 꾹 주먹을 말아 쥐었다.
“정리 못 해요. 안 할 거예요.”
“야. 서우영.”
“형이 너무 좋아요. 진짜 너무너무 좋아요.”
“내 말 잘 듣겠다며. 시키는 건 뭐든 하겠다며? 근데 왜 이번엔 네 멋대로야?”
“…….”
우영의 입이 딱 다물렸다. 누가 그의 입술을 모아 쥐고 호치키스로 콱콱 찍어 버린 것 같았다. 그래, 그런 말을 했었지. 사현은 똑똑하고 논리적인 것으로 모자라 기억력까지 좋다.
우영이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데, 사현이 두 손으로 식탁을 짚고, 허리를 숙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렸다.
“너 오늘 그림 얼마나 그렸어?”
우영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설마 이런 질문을 받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우영의 시선이 그대로 아래로 고꾸라졌다. 최근 며칠은 진도를 거의 못 나갔다.
“……그냥, 좀…… 그렸어요.”
“그냥, 좀. 그게 네 고용주이자, 상사인 나한테 할 말이니?”
“…….”
우영이 아랫입술을 삐죽였다. 언제는 파트너라 해 놓고 오늘은 고용주이자 상사란다. 그만큼 사현과 멀어진 것 같아 입이 텁텁했다. 목젖이 돌멩이가 된 듯 아프게 꿀렁거렸다.
그러나 사현은 그런 우영을 봐주지 않았다. 이미 무너져 가는 성벽에다 미사일을 마구 퍼부어 댔다.
“왜 못 그렸는데? 매일 열네 시간씩 꼬박꼬박 작업실에 들어앉아 있던 네가. 요즘은 왜 그렇게 못 하는데? 어디 아프니? 아니면 우울해? 그럼 차라리 병원엘 가. 휴가를 달라고 하든가. 그것도 아니면 돈이 모자라? 아무리 생각해도 비율이 좆같니? 그러면 돈을 더 달라고 해.”
“……형.”
“근데 그런 이유 아니잖아.”
사현이 내뱉은 음절들이 우영의 명치에 차곡차곡 쌓였다. 우영도 알았다. 감정에 내몰려 맡은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게 얼마나 바보 같고, 무능력한 건지. 절대 어쭙잖게 일하지 않는 사현에겐 더더욱 한심해 보일 테였다.
그래. 다른 건 몰라도 그림은 그렸어야 했는데. 첫사랑에 심취해 현실을 방치해 버렸다.
사현이 목이 반쯤 잘려 허덕이는 우영을 내려다봤다. 그가 나긋한 음성으로 우영을 불렀다.
“자기야.”
“…….”
“우영아.”
“……네.”
“나는 말 잘 듣는 서우영이 좋아.”
“…….”
“그래서 네가 앞으로도 내 말을 잘 들었으면 좋겠어.”
“형.”
“그렇지 않으면, 네가 전처럼 예쁘지 않을 것 같거든.”
쿵. 심장이 발아래로 떨어졌다. 누가 눈썹 끝과 입꼬리를 억척스레 움켜쥐고 아래로 마구 잡아당기는 듯했다. 팔다리가 뚝뚝 조각나 바닥으로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우영의 예쁜 얼굴이, 아니 예뻤던 얼굴이 슬픔에 침잠했다.
“내가…… 그렇게 싫어요?”
문장 끄트머리가 파르르 경련했다. 사현이 그런 우영을 달래듯, 금세 복슬복슬해진 머리를 쓰다듬었다. 입가엔 희미한 미소까지 띠었다. 심통 난 어린이를 달래는 유치원 선생님 같은 얼굴이었다.
“누가 너 싫대?”
“근데 왜…….”
“네가 싫지 않은 거랑, 네 그 알량하지 않은 감정이랑 같아? 동일 선상에 둘 수 있는 감정이냐고.”
우영은 또 한 번 말을 잃었다. 맞다. 전혀 다른 감정이다. 그와 저의 감정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컸다.
우영이 미끄러지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사현을 올려다봤다. 맑은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었다.
“짝사랑도 안 돼요?”
“짝사랑이 하고 싶었으면, 말을 하지 말았어야지.”
촌철살인이었다. 우영은 하마터면 가슴팍을 움켜쥐고 그대로 까무러칠 뻔했다. 그래. 명백히 자신의 실수다. 당시의 분위기와, 다정하게 선을 긋는 사현의 행동과, 술기운이 창조한 등신 같은 실수.
우영의 얼굴이 뭉크의 그림처럼 탁하게 번졌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럼 옛날처럼 사현과 함께 밥을 먹고, 메시지로 안부를 묻고, 김밥천국에 라면을 먹으러 갔을 텐데.
“먹고, 일찍 자.”
사현이 가볍게 우영의 볼을 매만졌다. 그를 닮아 차갑고, 그러면서도 보드라운 손끝이 잡기도 전에 떠나갔다. 덩달아 사현 역시 멀어졌다.
“…….”
식탁에 혼자 남은 우영이 그새 미적지근하게 식은 음식을 쳐다봤다. 평소라면 머리 위로 폭탄이 떨어져도 모를 정도로 바쁘게 숟가락을 움직였을 텐데. 오늘은 정말이지⋯⋯ 입맛이 없었다. 그래도 사현이 먹으랬으니까 먹어야겠지. 일찍 자라고 했으니까 일찍 자야지.
정리하라는 그 명령은 이행할 수 없지만, 이런 거라도 해야지.
우영이 눅눅하게 젖은 얼굴로 수저를 들었다. 혀 위를 나뒹구는 밥 알갱이가 플라스틱 같았다.
* * *
“하아…….”
침대에 걸터앉은 우영이 탁한 숨을 토해 냈다. 손안에 들어찬 살덩이가 터질 것처럼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도 아래위로 흔들 때마다 무럭무럭 자라났다. 어찌나 끊임없이 커지는지. 제 것인데도 낯설 지경이었다.
“후…….”
우영이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자위라니. 보육원에서 독립한 이후로는 먹고 사는 게 바빠 까맣게 잊고 있던 짓인데. 사현에 대한 제 마음을 깨닫고 나서는 하루에 한 번씩, 아니 사실 두세 번씩 꼭 이렇게 욕정을 빼 줘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울컥 사현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발정하기 때문이다.
내내 집에 혼자 있어서 다행이지. 출퇴근하는 삶이었다면 보통 난처한 게 아니었을 테다.
우영의 손이 빨라졌다. 오늘 아침, 출근하는 사현이 무엇을 입고 있었더라.
아, 평소와 달리 아주 얇은 재질의 니트를 입었다. 보들보들해 보이고, 품이 넉넉한 니트였다. 그래서 움직일 때마다 그의 가슴선이나 날개뼈가 고스란히 드러났었지. 구두에다 발을 꿰는 그의 등줄기에 오돌도돌한 척추뼈가 솟아났을 땐 눈앞이 아찔했다.
목이 깊게 파인 것도 아닌데, 허리를 숙이니 쇄골부터 그보다 더 깊은 곳까지도 보였다. 언뜻 유두도 봤던 것 같은데. 움푹 들어간 쇄골이 너무 치명타여서, 미처 거기까진 관찰하지 못했다.
그의 유두는 어떻게 생겼을까. 입술을 닮아 새빨간 색이려나. 그것도 아니면 진달래처럼 연한 분홍빛이려나.
“윽…….”
고작 상상일 뿐인데 귀두가 뻣뻣해지고 아랫배가 시큰거렸다. 핏줄이 울룩불룩하게 올라왔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우영이 성기의 뿌리부터 끝까지 크게 슥슥, 슥슥 왕복했다.
아, 백사현. 대체 어쩌자고 그렇게 예쁘게 생긴 건지. 곱게 뚝 떨어진 팔뚝 선하며, 도드라진 날개뼈와 일자로 쭉 뻗은 종아리는 또 왜 그리 야한지. 입술은 지나치게 통통해서 말을 하거나 무언가를 먹는 것일 뿐인데도 엄한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섹스할 땐 어떤 모습이려나. 신음은 어떻게 흘리려나. 절정일 땐 어떤 표정일까. 어디를 만져 주면 좋아할까. 그의 성기는 어떻게 생겼을까. 그도 자위라는 걸 할까. 아니, 그는 완연한 어른이니 그보다는 다른 사람과…….
“…….”
거기까지 생각하자 절정에 치달아 있던 성기가 삽시간에 수그러들었다. 타인과 섹스하는 사현의 모습을 상상해 버렸기 때문이다.
“아, 씨발…….”
기분이 시궁창에 처박혔다. 아드득. 저절로 어금니가 갈렸다. 저에겐 질투할 권리가 없음에도 그랬다.
……사실 그게 제일 짜증 났다.
* * *
제인이 오랜만에 사현의 집에 들렀다. 우영이 커미션으로 작업했던 그림이 팔려서, 그 영수증을 가져다주기 위해서였다. 제인은 그림 하나가 팔릴 때마다 우영과 만나 영수증에 관해 설명해 줬다. ‘새로운 밤’ 전시로 돈이 들어왔을 때, 사현에게 영수증 같은 거 필요 없노라, 했다가 이 사달이 났다.
제인은 그림이 누구에게 어떻게 팔렸으며, 프레임 가격은 얼마로 책정되었고, 배송비로는 얼마를 썼으며, 총수입은 얼마에 우영의 몫은 이만큼이다, 라는 구구절절한 설명을 친절하게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사현의 지시란다.
우영은 제인이 오기 전에 밖에 나가 커피를 사 왔다. 제 몫으론 초코 라테를 샀고, 제인의 몫으론 콜드브루 바닐라 라테를 샀다. 이따금 <갤러리 비>에 갈 때, 커피를 사 가면 항상 적당히 단 커피를 고르기에 비슷한 것으로 산 거였다. 큐레이터들의 취향을 모두 알진 못하지만, 사현의 최측근인 그녀의 취향은 눈여겨봤다.
잘 보여서 나쁠 거 없잖는가. 또 모르지. 그녀가 사현에게 제 이야기를 좋게 해 줄는지도.
제인은 늘 그렇듯, 깔끔한 슈트 차림이었다. 오늘은 보라색 같기도 하고, 군청색 같기도 한 색의 슈트를 입었다. 느슨하게 두 개쯤 단추를 푼 블라우스가 그녀와 참 잘 어울렸다.
우영이 싱긋 웃으며 제인을 반겼다.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우영 씨.”
제인이 사회성 가득한 미소를 띤 채 집안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은 곧장 작업실로 향했다.
서류철에서 종이 몇 장을 꺼낸 제인이 조곤조곤 돈의 흐름을 설명했다. 우영은 무릎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규칙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반은 알아듣지 못했다. 제인이 부러 쉬운 단어만 골라 말하는데도 그랬다. 알아들은 거라곤 제게 입금될 금액이 팔백오십만 원이라는 사실뿐이었다.
그래도 티 내지 않았다. 자신이 무식한 게 사현의 귀에 들어갔다간 대학교를 다시 다니게 될지도 몰랐다.
말을 마친 제인이 이만 일어나 보겠다며 만남을 끝내려 했다. 차가울 정도로 빠른 퇴장이었다. 우영이 그녀를 따라 일어났다. 제인은 기다란 복도를 걸으며 찰나조차 우영을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녀의 엄지손톱만 한 진주 귀걸이가 바쁘게 달랑거렸다.
우영이 아랫입술을 빨았다가 놓았다. 제인에게 물어볼 게 있는데. 며칠 전부터 벼르던 질문인데.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은 혀가 도통 움직이질 않았다.
끝내는 제인이 구두에 발을 꿰었다.
“그럼 나중에 봐요, 우영 씨.”
마지막 인사도 했다. 그녀가 막 현관의 문고리를 쥐었을 때였다.
“그⋯⋯ 실장님. 저 궁금한 거 있는데요.”
우영이 다급하게 그녀를 잡았다. 제인이 가벼운 몸놀림으로 등을 돌렸다. 살짝 고개를 옆으로 넘긴 그녀가 우영의 질문을 기다렸다.
우영이 머리를 쳐들었다가, 수그렸다가, 삐딱하게 뒤틀길 반복했다. 안으로 말린 손가락이 꼼질꼼질 손바닥을 들쑤셔댔다.
“저⋯⋯, 어⋯⋯ 있잖아요⋯⋯.”
“네.”
“혹시⋯⋯.”
“네.”
“혹시, 사현이 형이요.”
“네.”
“남자를⋯⋯. 아니, 남자랑.”
“네.”
“만난 적이 있나요?”
“⋯⋯네?”
“그게 그냥 만난 게 아니고요, 막 손도 잡고, 뭐⋯⋯ 그러면서 만난 거요.”
“⋯⋯.”
제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웬만하면 표정의 변화가 없는 그녀가 놀랄 정도로 뜬금없고, 난데없었으며, 문맥도 없는 질문이었다. 당연히 영수증과 관련된 질문일 거라 예상했는데. 사현의 연애에 관해, 더군다나 성 지향에 관해 묻다니.
“아니,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요. 왜 예술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럴, 그럴 수도 있다는, 시, 신문 기사를 봐서요.”
우영이 더듬더듬 같잖은 변명을 덧붙였다.
제인의 눈동자가 그런 우영의 얼굴 여기저기를 바쁘게 나돌아 다녔다. 힘없이 아래로 내리깔린 속눈썹. 붉게 상기된 눈가. 까칠해 보이는 광대. 하도 물어뜯어서 각질이 일어난 입술. 조금 갸름해진 턱선. 축 처진 어깨.
사현의 집에 들어온 이후론 날마다 얼굴이 좋아지더니. 언젠가 사현이 우영의 피부가 꼭 잘 깐 맥반석 달걀 같다며 흘리듯 말한 것도 기억하거늘. 지금은 서울역에서 며칠 노숙한 사람의 몰골이었다.
제인의 머리가 팽글팽글 바쁘게 굴러갔다. 그러고 보니 사현도 비슷한 꼴이었다. 허옇게 질려 가뜩이나 하얀 얼굴에 색이 하나도 없었다. 일이 바빠서 피곤하겠거니, 아니면 벌써 또 된통 앓을 때가 됐나,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러한 질문을 하는 우영이야 뻔했다. 사현에게 관심이, 그러니까 이성적인 관심이 생겼기 때문이겠지. 좋지 않은 얼굴이 단번에 이해됐다. 사현이 어디 보통 성격인가. 비집고 갈 틈이 손톱만큼도 보이지 않을 터였다.
그런데 우영이야 그렇다 해도, 사현은 왜 피죽도 못 얻어먹은 낯이지.
아, 아아. 우영이 자신의 마음을 날름 뱉어 버렸구나. 그래서 사현이 일이 끝나고도 괜히 사무실에서 미적거리는구나. 집에 들어가서 우영과 마주치면, 몹시 껄끄러우니까.
제인은 수 초 만에 두 사람의 관계와 현태를 파악했다. 그러고는 잠시 고민했다. 우영에게 긍정을 줘야 할지, 부정을 줘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제인의 구두코가 톡톡, 톡, 바닥을 두드렸다. 우영은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제인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음⋯⋯. 탁음을 이어 가던 제인이 입술을 뗐다.
“확실하진 않은데. 본 적은 있어요.”
그녀가 모호한 긍정을 내놓았다.
사현에게 변화가 있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대부분의 변화는 위험을 몰고 오지만, 우영이 일으키는 변화는 썩 괜찮을 듯했다. 기분 좋은 봄바람처럼 살랑거리고, 펑펑 쏟아지는 눈송이처럼 포근하지 않을까. 제인이 곁에서 봐 왔던 우영은 그런 사람이었다.
“정말요?”
우영의 눈썹이 고운 아치를 그리며 올라갔다. 푹 가라앉아 있던 눈동자에 ‘기대’라는 돛단배가 넘실넘실 떠 있었다.
“네. 이탈리아였는데. 일정 끝나고 펍에 갔다가 우연히 봤어요.”
“사현이 형이 남자랑 같이 있는 거요? 이탈리아 남자랑?”
“이탈리아인인 건 모르겠는데, 금발에 녹색 눈동자이긴 했죠. 우영 씨 말대로 손도 잡고, 그러던데. 긴 만남은 아니었을 거예요. 그 후로 B가 그와 연락하는 건 본 적이 없거든요.”
“아⋯⋯. 금발에 녹색 눈동자⋯⋯.”
잠깐 상기됐던 우영의 낯빛이 금세 다시 검어졌다. 이건 뭐. 남자를 만난다곤 하나, 그 남자의 범주에 자신은 포함되지 않았다. 우영이 눈치 없이 덥수룩하게 부풀어 있는 자신의 머리칼을 마구 헝클였다.
비통한 우영의 얼굴을 살피던 제인이 넌지시 말을 얹었다.
“아마 B가 먼저 말을 건 건 아닐 거예요. B는 어디서든, 항상 사람이 꼬이거든요. 그리고 웬만하면 받아주는 성격이고요. ⋯⋯외로움을 많이 타시잖아요.”
그 말에 우영이 눈을 번뜩였다.
그래. 사현은 외로운 사람이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혼자 자는 걸 싫어했고, 혼자 밥 먹는 것도 싫어했다. 그래서 남자든, 외국인이든 오는 사람은 안 막는단다. 그만큼 타인의 온기가 고픈 거겠지.
우영이 꽈악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근데 왜 나는 안 받아줘?
* * *
만면에 피곤을 덕지덕지 붙인 사현이 느릿하게 집에 들어섰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 어둑한 복도 끝으로 보이는 거실에는 은은한 무드 등만 켜져 있었다. 우영은 자나. 아직 잘 시간 아닌데.
사현이 재킷을 벗으며 복도를 걸었다. 혹 우영이 깰까, 뒤꿈치를 최대한 가볍게 들고 바닥을 지르밟았다.
원래 사현은 걸을 때 주위를 훑어보는 성격이 아니었다. 낯선 거리도 아니고, 집 거실을 지나칠 때는 더더욱. 복도에서부터 거실까지 빠르게 가로지른 그가 2층으로 올라가는 첫 번째 계단에 막 발을 올렸을 때였다.
“오셨어요.”
묵직한 저음이 밀도 높게 뭉쳐 있던 어둠을 갈랐다. 사현의 어깨가 움찔 위로 튕겼다. 반대로 심장은 바닥 저 아래로 추락했다. 그가 음성을 따라 휙 고개를 돌렸다. 우영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사현이 동그랗게 얹혀 있던 숨을 풍선처럼 터트렸다.
“어후⋯⋯. 야, 넌 애가 왜 인기척도 없이⋯⋯.”
사현이 놀란 가슴을 슥슥 문지르다 말고 버석하니 굳었다. 우영이, 정확히는 우영의 머리가 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사현의 얼굴에 붙어 있던 피곤이 증발했다. 대신 당황과 혼란이 치덕치덕 엉겨 붙었다.
우영이 빙긋 예쁘게 웃으며 사현을 향해 다가왔다. 사현이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다 벽에 쿵, 팔꿈치를 찧었다.
“안 아파요?”
우영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가 널따란 손바닥으로 사현의 팔꿈치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사현은 너무 놀란 탓에 그의 손길을 쳐내지도 못했다.
“너⋯⋯.”
“늦으셨네요. 밥은 먹었어요?”
“머리 꼴이 왜 그래?”
대화가 마주 닿지 못하고 겉돌았다. 그럴 만도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검었던 우영의 머리칼이 샛노랗게 변해 있었으니까. 아니, 그렇게 천박한 노란색은 아니고, 저걸 뭐라고 해야 하나. 아, 그래, 금발. 금발이었다.
어찌나 밝은지. 어둠 속에서도 찰랑거리는 게 꼭 반딧불이 지나가고 남은 잔상 같았다. 거기다 무슨 짓을 한 건지 머리칼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꿈뻑, 꿈뻑. 눈꺼풀을 움직이던 사현이 눈을 부릅 치켜떴다. 그가 계단을 한 칸 올라갔다. 그러고는 냅다 우영의 머리채를 잡았다. 넣기만 하면 손이 사라질 정도로 수북하게 떠 있던 머리카락이 반으로 줄었다.
“뭐야. 다 어디 갔어. 그 복슬복슬한 털 뭉치 같은 거 다 어디 갔어?”
사현이 황망한 얼굴로 캐물었다. 와중에도 우영의 머리칼을 헤집는 손은 멈추질 않았다. 마치 간식으로 받은 솜사탕을 씻으려 물에 넣었다가, 녹아 사라지자 당황한 너구리 같았다.
우영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기분 전환 겸 잘라 봤어요.”
“왜?”
“기분 전환 겸이라니까요.”
“그러니까 무슨 기분 전환을 머리를 자르는 거로 해?”
사현이 한껏 눈을 부라렸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믿던 친우에게 배신이라도 당한 기분이었다.
“제가 기분 전환으로 할 수 있는 게 몇 없잖아요.”
“없긴 왜 없어. 술 마셔. 여행을 가든가. 아니면 내가 돈 줬잖아. 그거로 쇼핑해! 하루에 오천만 원씩 긁어 봐. 그거만큼 효과적인 기분 전환이 없다?”
“제 돈 욕심이 간장 종지만 해서, 그런 거로는 기분 전환이 안 될 것 같았어요.”
우영은 답지 않게 꼬박꼬박 사현의 말에 토를 달았다. 대꾸할 말을 상실한 사현이 우물우물 입술만 씹어 댔다. 그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그러나 별다른 딴지를 생각해 내지 못했다.
“아씨⋯⋯.”
사현의 만면 가득 신경질이 서렸다. 그가 우영의 두 볼을 한 움큼 거머쥐었다.
“다시 길러.”
“왜요?”
“나는 복슬복슬한 게 더 좋단 말이야.”
사현이 울상을 해 보였다. 우영의 풍성한 머리칼이 있던 자리를 아련하게 쳐다보기도 했다. 그런 사현에 우영이 양쪽 눈썹을 한껏 추어올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이라.
“⋯⋯진짜요? 그 머리가 더 좋다고요?”
“그래! 뭐, 네 얼굴에 뭐든 안 어울리겠느냐마는. 그래도 전이 더 예쁘단 말이야!”
사현이 분해서 미치겠다는 듯, 쾅쾅 발을 굴렀다. 나무로 만들어진 계단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울려 댔다. 굉음에 깜짝 놀란 우영이 사현의 허리를 살짝 들어 계단 아래에 내려놨다. 사현은 그러든 말든 우영의 머리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빨리 길러. 당장 길러.”
“그게 기르라고 독촉한다고 빨리 기나요.”
“그래도 빨리 길러.”
사현은 막무가내였다. 그는 정말 가끔, 꼭 이렇게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보여 준다. 다른 사람은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아마 함께 사는 우영만 볼 수 있는 특권이리라. 그리 생각했더니 비죽, 눈치 없이 웃음이 솟구쳤다.
사현의 눈꼬리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왜 웃어?”
“형이랑 이렇게 있는 게 좋아서요.”
우영이 보란 듯이 사현이 허리에 얹혀 있는 손을 꼼지락거렸다. 놀란 사현이 뒤늦게 몸을 뒤틀었다. 우영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우영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커다란 손이 사현의 골반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아프진 않았지만, 위압감은 거대했다. 사현이 자신도 모르게 사지를 축 늘어트렸다. 반대로 척추는 뻣뻣하게 섰다.
우영의 덩치가 웬만한 곰만 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그에게 잡혀 있으니 이상할 정도로 새롭고 낯설었다.
옷 너머로 느껴지는 손이⋯⋯ 지나치게 크다. 손바닥은 뜨겁고, 손끝은 뭉툭한 쇳덩이처럼 단단했다. 사현의 목울대가 아래에서 위로 크게 꿀렁거렸다.
“형.”
우영이 나지막이 사현을 불렀다.
“⋯⋯어?”
사현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가까운 거리. 자욱하게 내려앉은 어둠. 낮은 목소리. 허리를 움켜쥔 그의 손. 그 모든 요소에 눌려 정신이 다 혼미했다.
우영의 입술이 좌우로 벌어졌다. 사현이 그의 입술에 모든 신경을 쏟아 부었다. 무슨 말을 하려나. 또 그때처럼 사랑한다 고백이라도 하려나, 싶었는데.
“김밥천국에 라면 먹으러 갈래요? 저 아직 밥 안 먹었는데.”
“⋯⋯.”
허탈하다 못해 맥이 빠지는 말이었다. 그런 사현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영은 헤실헤실 참으로 싱그럽게 웃어 댔다. 사현이 하, 짧게 웃음을 끊어 냈다. 미약한 짜증이 솟구쳤는데, 또 너무 우영다운 말이라 화도 낼 수가 없었다. 대꾸할 말은 하나뿐이었다.
“⋯⋯그러든가.”
사현의 긍정에 우영의 얼굴이 환하게 갰다. 머리카락만으로도 충분히 밝았는데, 이제는 아주 반짝반짝 빛이 났다. 우영이 조심히 사현의 허리에서 손을 뗐다. 그러더니 휙 뒤를 돌아 뛰어갔다.
“그럼 저 렌즈만 끼고 올게요!”
“무슨 라면 먹으러 가는데 렌즈를 껴?”
사현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턱을 삐뚜름하게 뒤틀었다. 막 거실 모퉁이를 돌던 우영이 빼꼼 고개만 내민 채 대답했다.
“형한테 잘 보여야 하니까요!”
그러더니 우당탕 자신의 방으로 달려갔다. 방금까지는 야생에서 뛰놀던 곰 같더니. 지금은 그냥 외식에 신난 중학생이다.
순식간에 홀로 남은 사현이 우영이 사라진 허공을 멍하니 쳐다봤다.
형한테 잘 보여야 하니까요.
형한테 잘 보여야 하니까요.
형한테 잘 보여야 하니까요.
그 문장이 귓바퀴를 따라 오르락내리락 야단법석을 떨었다.
“아 씨⋯⋯.”
사현이 광대와 콧잔등이 붉게 익을 정도로 벅벅 세게 마른세수를 했다.
귀엽다. 너무 귀엽다.
이러면 안 되는데.
진짜 귀엽다. 서우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