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동그란 직선(1)
우영은 라면을 먹는 내내 면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몰랐다. 갑작스레 깨달아 버린 자신의 감정에 시비를 거느라 머리가 복작복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믿을 수가 없었다.
진짜?
진짜 내가 B를 좋아한다고?
그저 선망과 동경이 아니라, 더할 나위 없이 확실한 사랑이라고?
영화나 드라마를 즐기는 편도 아니라서 사랑이 뭔지도 모르는 주제에, 사랑을 한다고 할 수 있나? 더군다나 남자를?
물론, B는 남녀노소를 떠나서, 좌로 보나 우로 보나 어마어마하게 매력적인 사람이다. 잘난 외모에, 멋진 패션 센스에, 돈도 많고, 일하고 있는 분야에서도 독보적이다. 하루에 한 끼만 간신히 먹던 저도 B 덕분에…….
아아, 이런 칭찬은 내일 아침까지 할 수 있을 듯하니 더 꼽지 말기로 하자.
아무튼, B는 누구든 홀릴 수 있을 만큼 멋진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러므로 저가 B를 사랑하는 걸까.
안 보면 보고 싶고. 곁에 두고 싶고. 만지고 싶고. 그런 사랑이 확실하냔 말이다.
차근차근 짚어 보자. B를 보지 않으면, 보고 싶었나? 음⋯⋯. 그가 늦게 들어올 때마다 괜히 현관을 살피고, 혹 들어왔나 2층의 기척에 귀 기울이고, 언제 오냐. 늦게 오냐. 귀찮게 메시지를 보냈던 기억이 있긴 하다.
“⋯⋯.”
아니야, 아니야. 이걸로는 확신할 수 없으니 더 생각해 보자.
어⋯⋯ 곁에 두고 싶었나? 글쎄.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자주 했다. 그게 사사로운 외로움 때문인지. 아니면 꼭 B였어야만 했는진 모르겠다. 제 주변엔 사람이 너무할 정도로 없었으니까.
마지막으로, 그를 만지고 싶나? 아아. 다른 건 몰라도 그건 확실한 것 같다. 엄한 상상을 한 것도 아니고 고작 입술을 보고 발기까지 했으니.
우영이 퉁퉁 불은 라면을 뒤적이며 푸욱,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전투적으로 젓가락을 움직이던 사현이 가늘게 눈을 쨌다.
“뭐야, 너. 왜 안 먹어. 어디 아파?”
식욕이 없는 우영이라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어디가 크게 아픈가. 속이 아예 뒤집혔나? 위염이나 식중독인가? 요 며칠 바빠서 그가 뭘 먹는지 신경 쓰지 못했는데. 이상한 걸 주워 먹기라도 한 걸까?
“자기야. 너 아프면 안 돼.”
슬슬 내년 전시를 준비해야 하는 우영인데. 벌써 여기저기서 관심이 빗발치는데. 커미션도 할 생각이었는데. 한호 자동차 건은 또 어쩌지.
일정을 되뇌는 사현의 눈동자가 좌우로 바쁘게 움직였다. 그걸 본 우영이 후웁,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있잖아요, B.”
“어.”
“지금 저 걱정하시는 거예요?”
괜히 한번 물어보고 싶었다. 그의 대답에 저가 어떤 반응을 할지 궁금해서. ‘내가 네 걱정을 왜 해?’라는 대답이 들려오면 분명 실망할 것이고, ‘응, 걱정하지.’라는 대답이 들려오면⋯⋯. 상상한 것만으로도 발가락이 꼼지락거렸다. 발가락이 신발을 뚫고 나오면 안 될 텐데. 등신 같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사현의 입술이 벌어졌다. 우영이 눈을 부릅뜬 채 집중했다.
“그럼, 걱정하지.”
“⋯⋯.”
우영이 기척 없이 숨을 멈췄다가 풀었다. 기대하던 답을 들었는데 날아갈 듯 기쁘지 않았다.
“왜요?”
“뭐라고?”
추궁 같은 질문에 사현이 턱을 안으로 당겼다. 본능적인 거리낌이었다. 우영이 급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왜 걱정하냐니. 당연히 좋은 파트너로서, 혹은 고용주로서 근로자를 걱정하는 거겠지. 다른 게 있을 리 없었다. 그걸 구태여 사현의 입으로 확인받고 싶지 않았다.
감정과 사고가 휙휙 멋대로 요동친다.
“아니, 아녜요. 저 안 아파요. 제가 몸뚱이 하나는 제대로 타고 났거든요. 바깥에서 흙 퍼먹어도 별 탈 없을 걸요.”
“그러니까. 내가 아는 너는 그런 앤데 지금 안색이 영 시궁창이잖아. 어떻게 걱정을 안 해?”
사현의 말에 우영이 설핏 웃음을 흘렸다. 시궁창 같은 안색이라니. 하긴, 이틀 연달아 굶었을 때도 이만큼이나 심란하진 않았던 것 같다.
“진짜 괜찮아요. 잠깐 딴생각 했어요.”
우영이 보란 듯이 단무지를 와삭와삭 맛있게 씹었다. 그러나 뾰족한 사현의 눈매는 풀릴 줄 몰랐다.
“그것도 이상하다. 네가 밥을 앞에 두고 딴생각이라니.”
“아, 어⋯⋯ 오늘따라 돈가스 김밥도 땡겨서요. 시킬까 말까 고민했어요.”
그림 그릴 때 말고는 썩 윤활하게 굴러가지 않는 머리통이 간신히 답을 짜냈다. 참으로 유치한 답이었다. 우영이 단무지를 우물거리며 사현의 눈치를 봤다.
“뭐야, 그런 거였어? 내가 시켜 줄게.”
짧게 헛웃음을 흘린 사현이 손을 들어 김밥을 주문했다.
허나 우영은 정작 김밥이 나오고서도 제대로 식사하지 못했다. 사현을 구경하느라 눈알이 핑핑 돌았기 때문이다. 야무지게 밥까지 말아 먹는 사현이 어찌나 진귀한지, 멸종 동물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면발을 당기는 입술. 씰룩거리는 볼. 오물거리며 움직이는 턱. 제법 빠른 속도로 먹는데 국물 하나 튀지 않는 깔끔함. 그 와중에도 참치 김밥에 박힌 깻잎은 쏙쏙 골라내는 것 좀 보라지. 또, 또 와중에 젓가락질이 올바른 것 좀 보라지.
사람이 너무 귀여운 것도 문제다. 별것이 다 매력인 것도 문제다. 저렇게 생겨 먹은 것도. 콧구멍이 달큼할 정도로 좋은 향을 뿜는 것도.
그러니까 이 모든 문제의 시발점은 사현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편의점에 들렀다. 김밥천국 바로 옆에 있는 편의점에서 딸기 우유를 사 먹는 게 당연한 수순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사현이 우유는 자신이 사겠다며 킥킥거렸다. 우영이 어정쩡하게 따라 웃었다.
딸기 우유를 입에 문 사현은 기분이 좋은지 흥얼흥얼 콧노래를 불렀다. 우영의 얼굴이 여전히 밋밋한 직선을 그리고 있었으나 작가 특유의 사색이려니, 치부했다.
우영이 자동차로 향하는 사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가볍게 들썩이는 머리칼이 찬란하다. 언뜻 드러난 목덜미는 반짝이고, 보일 듯 말 듯한 귓바퀴가 참 예쁜 선홍색이다. 어둑한 밤거리에서 혼자 햇살을 내리쬐고 있는 듯했다. 아마 자신의 눈에만 이리 보이는 거겠지.
곰곰이 되짚어 보면 제법 오래된 감정인 것 같다. 다만 깨닫기를 벼락처럼 깨달았을 뿐. 한참 전부터 스멀스멀 자신을 삼켜 가고 있었는데 우매할 정도로 무딘 터라 인지하지 못한 걸지도 몰랐다.
댐이 차오르고, 차오르고, 또 차오르는데 전혀 모르고 있다가, 펑! 하고 터지고서야 범람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뭐. 감정을 깨달았는데, 뭐. 어쩔 건데. 고백이라도 할 거야?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당신 입술을 보고 발정했다고?
그 말을 죄다 토해 냈다간 사현이 저를 내칠지도 몰랐다. 그럼 다시 그 좁고 갑갑한, 마치 관처럼 느껴지는 반지하 방으로 돌아가야 하겠지. 다시는 사현의 저 말간 얼굴을 구경조차 하지 못할 테였다.
그건 싫다. 근데 또 이렇게 모호한 관계로 있고 싶지도 않다. 그러다 사현에게 여자 친구라도 생겨 버리면? 벽에 머리를 처박고 죽을 테였다. 아니면 물감을 목구멍에 털어 넣고 형광색을 토하며 죽거나. 아무튼 억울해서 죽을 게 분명했다.
사람 마음이 얄궂은 게, 좋아한다고 땅땅 판결을 내리고 나니 그 감정이 곱절로 팽창했다. 당장 가지고 싶다. 저 자그마한 몸뚱이를 껴안고 싶었고, 보드라워 보이는 볼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우영이 가슴이 두툼해질 정도로 숨을 들이마셨다가 후우, 내뱉었다. 딸기 우유를 단숨에 들이켠 그가 와작 우유갑을 구겼다.
……이렇게 된 거 무조건 직진이야. 아주 들이박을 수 있는 대로 들이박아 보리라. 우영은 젊은이 특유의 패기로 밀고 나가기로 했다.
풋내기 사랑엔 중간이 없다. 망설임도 없었다. 연애는, 사랑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순서도 모르면서, 그저 불타오르기만 했다.
“B.”
“어, 왜?”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뭐?”
주머니를 뒤져 차 키를 꺼내던 사현이 버석하게 굳었다.
‘형’. 그다지 반가운 단어는 아니었다. 그에게 형이란 칭호와 관련된 이는 민재뿐이었으니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어금니가 빠득빠득 갈리는 사람이었다.
우영이 굳어 있는 사현 옆으로 바짝 붙어 섰다.
“형이라고 부르라고 하셨잖아요.”
“내가? 너한테?”
“네.”
“언제?”
“술 마시고 오셨을 때요. 엄청 오래전에.”
사현이 가느스름하게 눈살을 좁혔다. ‘엄청 오래전’이라는 과거를 유추하는 듯했다. 잠깐 고민하던 사현이 이렇다 할 표정 없이 차에 올라탔다. 우영이 후다닥 조수석에 엉덩이를 붙이며 나불거렸다.
“제가 자꾸 B라고 부르니까 집에서도 일하는 기분이라고 싫다 하셨는데.”
“내가 그러든?”
“네.”
사현이 살짝 턱을 뒤틀었다. 전혀 기억이 없다. 그렇다고 우영이 거짓말을 할 애는 아니고. 그가 B라고 부를 때마다 집에서도 일하는 기분이었나. 사실 집에서도 대개 일을 하고 있으므로 그가 부르는 호칭이 거슬렸을 리 없었다.
근데 왜 그런 말을 했지. 저도 모르는 무의식이 그리 여겼나. 사현이 께름칙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혀끝에 달달한 딸기 우유 맛이 맴돌았다.
“나를⋯⋯ 꼭 형이라고 부르고 싶니?”
“네.”
우영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사현이 무감한 낯으로 그를 바라봤다. 잠깐의 적막을 견뎌내는 우영의 심장이 쿵쾅쿵쾅 거칠게 발광했다. 부디 그가 부정을 내놓지 않길 바랐다. 다른 것도 아니고, 고작 ‘형’이라는 호칭부터 부정당하면 앞으로의 길이 몹시 험난할 것 같았다.
그런 우영을 알았을까. 사현이 우유갑을 살살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러든가, 그럼.”
허무할 정도로 쉬운 허락이었다. 지금 사현은 우영이 자신을 뭐라고 부르든, 딸기 우유를 끝장내는 게 더 중요한 듯했다.
그러나 우영은 마냥 좋았다. 그가 한껏 눈을 휘며 빙긋 웃었다.
“네, 사현이 형.”
그 말에 우유를 입으로 가져가던 사현의 행동이 뚝 멎었다.
‘사현이 형’이라니. 전혀 예상치 못한 호칭이었다. 간결하고 쉬운, ‘형’이라는 음절 하나만 떠올렸던 터라.
사현이 딱 한 모금 남은 우유를 삼키고 주둥이를 접었다.
“사현이 형 말고, 그냥 형이라고 불러. 누가 낯간지럽게 이름까지 붙여서 형이라 그래.”
“저는 그래요, 사현이 형.”
“야.”
“왜요, 사현이 형?”
“그냥 형이라고 부르라고.”
“싫어요, 사현이 형.”
우영이 빙글빙글 웃으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만면에 장난기가 담뿍 올라와 있었다. 사현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겠다는 고집도 보였다. 사현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게 이제 뻗댈 줄도 아네?”
“제가 그런가요, 사현이 형?”
한마디도 지지 않는 우영에 사현의 한쪽 눈가가 살짝 어그러졌다. 식사 내내 멍 때리던 애가 갑자기 왜 구렁이처럼 능글맞아졌지. 우영은 능글맞음과 썩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순진하고 담백한 게 좋은데.
사현이 코끝을 찡긋거리며 시동을 걸었다.
“⋯⋯됐다. 집이나 가자.”
“네, 사현이 형.”
우영이 우렁차게 대답하며 안전띠를 맸다. 그러고는 무릎 위에 두 손을 곱게 포개 놓고, 또 싱글싱글 웃어 댔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눈가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웃음이 사라질 줄 모른다.
무어라 한소리 하려던 사현이 입을 다물었다.
어린애가 저리 싱그럽게 웃으니 도무지 미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웃는 얼굴에 침 뱉는 거, 못하는 성격이 아니었는데.
하여튼, 예전부터 느끼는 거지만 저는 예쁜 것에 너무 나약하다.
길게 한숨을 내쉰 사현이 차를 출발시켰다.
* * *
“하아, 하아⋯⋯.”
사현의 집 1층 끝방에는 자그마한 짐(GYM)이 있다. 런닝머신과 근력 운동을 할 수 있는 간단한 기구와 덤벨들이 있는 짐. 평일이 바쁜 사현은 주말에만 간간이 이 방을 이용하고, 대부분은 우영이 들어앉아 있었다.
팔굽혀펴기를 하던 우영이 팔뚝이 터질 듯할 때쯤에야 일어섰다. 씩씩 거칠게 새어 나오는 호흡에 가슴팍이 마구 들썩였다. 그가 한쪽 벽에 자리한 거울을 보며 왼쪽 오른쪽으로 몸을 뒤틀었다.
근육이 좀 늘었나? 가슴이랑 팔뚝은 확실히 는 것 같은데. 복근은?
우영이 훌러덩 땀에 젖은 윗도리를 벗었다. 제법 오돌도돌한 복근이 드러났다. 하루에 한 시간씩 빡세게 운동한 보람이 있었다. 밥도 단백질이 그득한 메뉴로 시켜 먹는다.
모두 사현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였다. 사현은 예쁜 걸 좋아하니까. 제가 더 예뻐지면 한 번 볼 걸 두 번 봐 줄 테니까.
현재까진 사현을 형으로 부르게 된 것 말고는 딱히 달라진 게 없다. 사실 워낙 바쁜 사현이라 얼굴 보기도 쉽지가 않았다. 말만 같은 집에 사는 거지. 이건 뭐⋯⋯. 운동을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보여 줄 수나 있을는지 모르겠다.
푸욱 한숨을 내쉰 우영이 짐을 나왔다. 복도 특유의 냉기가 전신을 감쌌다. 어여 씻고, 저녁 먹고, 그림 그려야지. 오늘도 그리고 싶은 게 한가득이었다.
사현은 오늘도 바깥에서 저녁을 먹고 오려나. 아니, 챙겨 먹긴 하려나. 또 그 시커먼 커피 같은 거로 밥을 대신하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됐다. 우영이 사현에게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핸드폰을 밝히며 거실을 지나칠 때였다.
“운동했니?”
익숙한 음성이 관자놀이를 꿰뚫었다. 헙, 숨을 멈춘 우영이 귀신이라도 본 듯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피곤에 뒤덮인 사현이 소파에 늘어져 있었다.
우영이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가슴을 가렸다. 넙데데한 등이 구부정하게 말렸다. 그래도 덕분에 복근은 오돌도돌하게 도드라졌다.
“어, 언제 오셨어요?”
우영은 등신같이 말까지 더듬었다. 아아, 보란 듯이 어깨를 폈어야지! 다른 누구도 아니고 사현에게 보여 주고자 만든 몸인데! 우영이 뒤늦게 몸을 폈다. 땀에 젖어 반질반질한 가슴팍이 훤히 드러났다.
“삼 분 전쯤?”
사현이 무감하게 대답하며 우영의 가슴을 응시했다. 탄탄하고 두툼하게 갈라진 근육이 제법 괜찮았다. 하, 볼 때마다 아쉽단 말이지. 저 얼굴과 몸뚱이를 대놓고 밀고 나갔으면 또 다른 마케팅이 됐을 텐데.
예술계 작가 최초로 아이돌 버금가는 팬덤을 거느렸을지도 모른다. 팬들이 집 앞이나 갤러리 앞에서 네온을 외치겠지. 그럼 저가 매니저 겸, 경호원 겸, 저 커다란 덩치를 지켜야 할지도 몰랐다. 괴이한 상황을 상상한 사현이 푸흡, 웃음을 흘렸다.
“왜 웃으세요?”
“아냐, 그냥.”
사현이 실없는 웃음을 유지한 채 슈트 재킷을 벗었다. 하얀 와이셔츠 아래로 우영과 달리 일자로 쭉 뻗은 팔뚝이 드러났다.
우영이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날개뼈도 툭 불거져 있었지. 허리는 얼마나 얇으려나. 가슴은? 어깨는? 가느다란 목덜미에서 등으로 뻗어가는 선은 어떤 생김새려나.
그러고 보니 사현의 나신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저는 이래저래 예상치 못하게 보여 줬는데. 괜히 억울했다. 우영이 구겨 쥐고 있던 티셔츠를 어깨에 둘러멨다. 그런다고 가려질 가슴이 아닌데도 그랬다.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어. 네 그림 배송이 다 끝났거든. 이번 주말에는 아무 데도 안 나가고 침대에만 박혀 있을 거야.”
쿠션을 껴안은 사현이 금방이라도 잠들 듯 반쯤 눈을 감았다. 그 좋던 피부가 푸석해 보였다. 우영의 눈썹이 아래로 축 처졌다. 며칠 굶은 강아지라도 본 듯 가슴이 찡했다.
“저녁은 드셨어요?”
“아니. 생각 없어.”
사현이 성의 없이 손을 휘저었다. 우영의 얼굴이 대번에 심각해졌다. 보나 마나 점심도 대충 먹었을 텐데 저녁도 거르겠다고.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저 찜닭 시켜 먹으려고 했는데. 사현이 형도 드세요. 당면에 계란찜도 추가해 드릴게요.”
우영은 이제 사현이 좋아할 만한 메뉴에 통달했다. 함께 먹은 끼니가 몇 번인데. 물론 반 이상은 김밥천국 라면이었지만, 아무튼 그의 취향을 파악하기엔 부족함 없는 경험들이었다.
“⋯⋯.”
그런데 어째 사현의 표정이 묘하다. 메뉴가 마음에 안 드나, 다른 메뉴를 꺼내 볼까 우영이 고민하는 찰나였다.
“소시지도 추가해 줘.”
사현이 굳건한 음성으로 명령하듯 말했다. 우영이 웃지 않기 위해 아랫입술을 지그시 씹었다가 놨다.
“네. 콜라는요?”
“좋아.”
사현이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영이 덩달아 턱을 주억였다.
“네. 그럼 시켜 놓고 씻을 테니까 혹시 오면 받아주세요.”
“응.”
사현이 말 잘 듣는 어린아이처럼 대답했다. 소파 아래로 떨어진 그의 발이 동동 바닥을 두드렸다. 당면과 소시지가 들어간 찜닭이 몹시 기대되는 모양이었다.
우영이 거센 콧김을 내뿜으며 뒤를 돌았다. 손끝이 움찔움찔 난리였다.
어쩌지. 귀엽다.
너무 귀여워.
진짜 너무, 너무 귀여워.
다행히 찜닭은 맛있었다. 당면은 쫄깃했고, 소시지는 탱글탱글했다. 적당한 크기로 잘려 온 순살 역시 야들야들했다. 덕분에 사현은 웬일로 밥 한 공기를 뚝딱 비웠다.
우영이 뿌듯한 얼굴로 끝내지 못한 식사를 이었다. 제 몫으론 두 공기를 시킨 터라 아직 식사가 한창이었다.
사현은 콜라를 홀짝이며 우영을 구경했다. 언제 봐도 참 복스럽게 먹는 우영은 구경하는 맛이 났다. 어떻게 저리 큰 닭 덩어리가 한입에 들어가지. 그것도 무리 없이 오물오물 잘도 씹는다. 영상으로 촬영해서 미디어 아트로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림은, 그리고 있어?”
사현이 물었다. 우영이 씹던 음식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네. 근데 예전만큼 속도가 안 나요. 그때는 어차피 아무도 안 보는 그림이고, 멋대로 그려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손 움직이는 대로 휘둘렀는데. 지금은⋯⋯.”
“부담스러워? 사람들이 실망할까 봐?”
“음⋯⋯. 굳이 따지자면, 형이 실망할까 봐요.”
사현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실망이라니. 그런 기색이라곤 티끌만큼도 보인 적이 없었다.
우영은 말을 잘 들었고, 반항도 하지 않았고, 가타부타 쓸데없이 고집이나 자존심을 내세우지도 않았다. 갑자기 나사 두어 개가 빠져서 크게 사고를 치지 않는 한 사현이 우영에게 실망하고, 그를 버리는 일은 없을 터였다.
“⋯⋯내가? 실망?”
우영이 숟가락 가득 밥을 푸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형 마음에 드는 그림이면, 누구든 좋아할 테니까. 저는 형한테만 잘 보이면 돼요.”
“⋯⋯.”
“그러니까 마음에 안 드시면 꼭 말해 주세요.”
“⋯⋯.”
“형 어쭙잖게 일 안 하시잖아요.”
특별할 거 없는 음성이었다. 마치 당연한 정의나 이치를 말하는 것 같은, 그런 평이함. 근데 사현은 난데없이 뒤통수라도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아니,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은 기분에 더 가깝겠다. 아무튼, 얼떨떨했다.
사현이 우영의 잔에다 콜라를 따랐다.
“자기야.”
“네?”
“너 어디서 말 예쁘게 하는 법 배우니?”
사현은 입에 발린 칭찬을 늘 듣고 산다. 어느 한 분야에서 정점을 찍었으니,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셀 수도 없었다. 가끔은 너무 노골적이고 천박해서 칭찬이 단전에서 얹힐 정도다. 근데 우영이 내뱉는 것들은 지나치게 순백이라 정수리가 다 띵했다.
우영이 푸스스 연하게 미소 지었다.
“제가요? 에이. 저 말주변 없는 거 잘 아시잖아요. 처음 만났던 날엔 저한테 멍청하냐고 물어보셨으면서.”
“내가⋯⋯ 그랬던가?”
사현의 눈동자가 왼쪽 아래로 데구루루 굴러갔다.
우영과 처음 만났던 날이 언제더라. 그때 어땠더라. 무슨 말을 했었더라. 아아, 주황색 포장마차에서 우동을 먹고 있었지. 흐리멍덩한 동공에, 빠끔 벌어진 입술로 똑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꽤나 못되게 말을 쐈던 기억이 있었다.
‘등신 같은 질문 계속할래?’
‘……너 좀 멍청하니?’
‘혹시 취했니?’
음⋯⋯. 내 첫인상 되게 별로였겠구나. 이렇게 착한 앤 줄 알았으면 좀 나긋하게 대해 줄걸. 그런다고 관계가 크게 달라지진 않았을 테지만. 사현이 무심하게 후회할 때였다.
“아니면 형한테 예뻐 보이고 싶나 보죠.”
우영이 어깨를 으쓱이며 익살맞게 웃었다. 사현이 그런 우영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그러자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콜라를 마신다. 와중에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사현이 큼큼, 까끌까끌한 목을 가다듬었다. 철부지 어린애 같던 우영이 어제는 능구렁이가 됐다가, 지금은 또 여우가 됐다. 휙휙 변하는 우영이 찝찝하게 낯설었다.
생각하는 게 훤히 들여다보이던 그였는데. 탁해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기분인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게 묘하게 기분이 나쁘면서도, 설렜다.
* * *
다음 날 오후. 거실 한가운데에 선 우영이 기민하게 오감을 곤두세웠다. 사현은 어제 말했던 대로, 내내 침실에 머물렀다. 아마 쌓였던 피로를 잠으로 해소하고 있으리라.
근 반년을 함께 살며 지켜본 결과, 사현은 일이 없는 주말을 대부분 잠으로 때웠다. 그래도 중간중간 일어나서 밥을 같이 먹고, 운동하고, 거실에 퍼질러 앉아 다음 주 스케줄을 정리하곤 했었는데. 그러면 우영은 스케치를 한다는 명목으로 그의 옆에 앉아 스케치북에 그림을 끄적이곤 했다.
그래서 오늘도 그럴 수 있으리라. 시답잖은 대화를 시도해 보리라. 그러다 느낌이 좋으면 함께 산책가거나 외식하는 것도 좋으리라.
……그렇게 핑크빛 상상을 펼쳤는데.
어째 너무 조용했다. 혹시 쥐도 새도 모르게 나갔나, 싶어서 신발장을 들춰봤다. 빈틈없이 빽빽한 게, 나간 건 아닌 듯했다. 그럼 진짜 여태 자나. 어제 저녁을 먹고 헤어진 지 벌써 열네 시간이 지났는데. 배도 안 고픈가.
거실을 배회하던 우영이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밝혔다.
[사현이 형. 점심 안 드세요?]
전송 버튼을 누르고 일 분이 지났다. 오 분이 지나고, 십 분도 지났다. 그러나 답장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아우⋯⋯.”
우영이 벅벅 마구잡이로 머리칼을 헝클였다. 2층에 올라가 보고 싶다. 사현이 무얼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까무러치기 직전이었다. 1층이 이리 넓으니 2층도 넓을 텐데. 침실 말고 또 뭐가 있으려나. 드레스 룸과 서재? 욕실? 또?
하나하나 다 파헤쳐 보고 싶었다. 진귀한 보물을 눈앞에 두고 만지지 못하는 것처럼 애가 달았다.
허나 2층은 불가침의 영역이다. 사현이 발을 들이지 말라 했으니 우영은 그의 공간을 침범할 권리가 없었다. 멋대로 드나들었다간 사현이 특유의 뾰족한 성질머리로 꾸짖을 게 뻔했다.
그에게 밉보이고 싶지 않았다. 밉보여서도 안 됐고. 저는 단어만으로도 아릿한 첫사랑 중이고, 더군다나 짝사랑이었으니까. 사현이 절실했다.
그 후로도 한참을 더 멀뚱히 서 있던 우영이 자욱한 한숨과 함께 작업실로 향했다.
제인에게 전화가 온 건 창밖으로 까무잡잡한 어둠이 밀려올 무렵이었다. 붓을 놓고 손에 묻은 물감을 앞치마에 아무렇게나 문질러 닦은 우영이 전화를 받았다.
“네, 실장님.”
-우영 씨, B 집에 계시죠?
“어⋯⋯ 네. 아마⋯⋯도?”
-전화를 안 받으시는데, 위층에 올라가 봐 주실래요?
“제가요?”
-네. 제가 지금 그림 배송 문제 때문에 공항이라 갈 수가 없어서요. 비행기가 연착돼서 다음 비행기로 보내야 할 것 같은데, B 컨펌이 필요하거든요.
순간, 우영의 눈이 번뜩였다. 이게 무슨 횡재인가. 아주 합법적으로 2층에 올라갈 수 있는 명분이 생겼다. 우영이 허리춤에 묶인 앞치마 매듭을 쭉쭉 신나게 풀었다.
“정말, 어쩔 수 없네요. 제가 가서 깨우는 수밖엔.”
우영이 방정맞은 걸음으로 작업실을 나섰다.
처음 발을 딛는 2층은 감동적이었다. 계단을 오르자마자 복도 가득 사현의 향이 물씬 풍겨 왔기 때문이다. 우영이 흐으읍, 주책맞게 냄새를 들이켰다. 방금까지 유화 기름의 텁텁한 악취만 맡고 있어서 그런가. 콧구멍이 달콤할 정도로 좋은 냄새에 입이 헤벌쭉 찢어졌다.
2층 복도는 1층과 달리 어둑했다. 은은한 조명등을 따라 띄엄띄엄 그림이 걸려 있었는데, 탁한 색감이 주를 이뤘다. 그리고 고요했다. 공기가 바닥에 착 가라앉아 있었다.
우영이 저도 모르게 뒤꿈치를 들었다. 그리고 사현의 침실을 찾기 시작했다. 복도를 따라 난 문은 총 네 개였다. 우영은 문을 하나씩 차근차근 열지 않고 곧장 끄트머리 방으로 향했다. 사현이라면 분명 끝방에 터를 잡고 있을 것 같았다.
그가 똑똑 간결하게 문을 두드렸다. 그 후 건너편의 인기척을 염탐했다.
“⋯⋯.”
허나 메아리가 없었다. 적막 그 자체였다.
“사현이 형. 안에 있어요?”
우영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사현을 찾았다. 이번에도 고요가 되돌아왔다.
이 방이 아닌가? 아니면 집에 없나? 근데 왜 메시지에 답도 안 하고 전화도 안 받지? 잠깐 망설이던 우영이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다행히 문고리는 큰 소음 없이 매끄럽게 돌아갔다. 도둑질하러 온 것도 아닌데 뭐가 이렇게 떨리고 긴장되는지 모르겠다.
한 뼘 정도 열린 문틈으로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우영은 사현이 보일러를 세게 틀었으리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커튼을 쳐 놔 어둑한 방 안에 어렴풋이 침대가 보였다. 다행히 침실을 제대로 찾은 모양이었다.
우영이 허리와 턱만 쑥 앞으로 내밀었다. 침대 위로 완만한 동산이 솟아 있긴 한데, 그게 사현인지 괴한인지 혹은 외계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우영이 쭈뼛쭈뼛 앞으로 이동했다. 거리가 가까워지니 규칙적으로 들썩이는 파동이 보였다. 이불 밖으로 빼꼼 드러난 작은 머리통도 보였다.
“사현이 형.”
우영이 소곤소곤 사현을 불렀다. 그를 깨우기 위해 왔으면서, 지나치게 조용한 음성이었다. 그것을 뒤늦게 깨달은 우영이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형. 사현이 형.”
이번엔 큰 목소리가 튀어나갔다. 고요하게 잠든 침실을 마구잡이로 깨부수는 듯한 죄악감이 들었으나 어쨌든 사현을 깨워야 했다.
그런데도 사현은 대답이 없었다. 원래 이렇게 깊게 잠을 자나. 대체 알람은 어떻게 듣고 새벽같이 일어나는 건지. 우영이 이불 위로 손을 얹어 사현으로 추정되는 덩어리를 살살 흔들었다.
이상함을 느낀 건 이불 너머로 뜨끈한 온도가 느껴졌을 때였다. 색색, 그저 잠을 자는 것치곤 가쁜 숨소리도 들려왔다. 자면서 뜀박질이라도 친 게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로 밭은 숨소리였다.
우영이 무례도 모르고 휙 이불을 들쳤다. 아니나 다를까. 축축하게 젖은 사현이 드러났다. 어둠 속에서도 발갛게 익은 광대가 또렷하게 보였다. 아무리 의학적 지식이 전무하더라도 그가 지금 정상이 아닌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형?”
일순 당황한 우영이 멍청한 낯으로 사현을 바라봤다. 그렇게 멍하니 있어선 안 됐는데. 얼른 뭐든 해야 했는데. 사람을 다루는 데 젬병인 그가 아픈 사람을 다루는 법을 알 리 없었다.
어버버, 입술만 떨던 우영이 사현의 이마를 쓸어 넘겼다. 손바닥 가득 축축한 땀이 묻어나왔다. 차가운 손에 사현이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가 폈다.
“형. 일어나 봐요. 많이 아파요? 어디가 어떻게 아파요?”
“⋯⋯.”
“눈 좀 떠 봐요. 구급차 부를까요?”
대답 없는 사현에 우영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사현이 형!” 마지막 외침은 귀가 아플 정도로 쩌렁쩌렁했다. 결국 소음을 이기지 못한 사현이 웅크리듯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시끄⋯⋯러워. 골 울려.”
“괜찮아요?”
“괜찮아. 그러니까 나가.”
푹 젖은 음성으로 우영을 내친 사현이 꾸물꾸물 몸을 돌렸다. 우영의 걱정 가득한 시선이 사현의 뒷모습을 쿡쿡 쑤셨다.
“병원 가요.”
“싫어.”
“싫다니. 애도 아니고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엄청 아파 보이는데.”
“싫다고. 소독약 냄새 싫어. 락스 냄새 같잖아.”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나가. 콜록, 괜찮⋯⋯으니까.”
얼씨구. 기침도 한다. 우영이 사현의 몸을 좌우로 훑었다. 여차하면 둘러업고 병원으로 뛰어갈 의향도 차고 넘쳤다. 그런 우영의 심산을 알았을까. 사현이 이불을 방패처럼 뒤집어썼다. 우영이 무슨 짓을 해도 절대 침대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고집이 철옹성 같았다.
침대에 걸터앉은 우영이 아랫입술을 물어뜯는데, 바지 주머니가 진동했다. 제인이었다. 우영이 종종걸음으로 침실을 나왔다.
-우영 씨, B는요?
“어, 그⋯⋯ 실장님. 사현이 형이, 아니 B가 많이 아파요. 열도 펄펄 끓고 땀도 많이 흘리고⋯⋯.”
-아. ⋯⋯아아, 그럴 때네요.
“그럴 때라니⋯⋯.”
제인의 말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한 우영이 미간을 구겼다.
-꼭 반년에 한 번씩 아프시거든요. 못 일어날 만큼 대차게 앓으시죠.
“⋯⋯꼭이요?”
-네. 몸 막 쓰시잖아요. 자야 할 때 안 자고, 먹어야 할 때 안 먹고. 스트레스 많이 받으시고, 커피 달고 사시고. 거기다 편식은 또 오죽 심한가요.
제인이 참으로 무감하게 사현의 생활 패턴을 비난했다. 우영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현이 엉망으로 살긴 하지. 물론, 그만큼 돈을 많이 벌겠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이로서는 몹시 아니꼬운 패턴이었다.
“그럼 어쩌죠? 되게 아파 보이는데.”
-음⋯⋯ 이쪽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해야겠네요. 우영 씨는 B 간호 좀 해 주실래요?
“간호요?”
-네. 약국에서 감기 몸살 약 사서 드리고, 이불 덮어 주세요. 밥도 먹이면 좋은데, 아마 안 드시려고 할 거예요.
“⋯⋯그게 다예요?”
-네. 병원 가는 것도 싫어하셔서. 그냥 이틀 푹 쉬게 두세요.
제인은 사현의 비보에도 전혀 타격이 없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반년마다 꼭 한 번씩 있는 일인 듯했다.
우영의 입술이 마뜩잖게 뒤틀렸다. 제인이 미웠다. 병원도 안 갈 거고, 밥도 안 먹을 테니 대충 약이나 사서 먹여라, 이건데. 어찌 그러고 말 수 있단 말인가.
“⋯⋯.”
우영이 침묵을 유지하고 있으니 제인이 바쁘게 말을 덧붙였다.
-우영 씨. 제가 좀 바빠서.
“아아, 네. 들어가세요.”
우영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다 꾸벅 묵례했다. 제인은 미련 없이 통화를 종료했다.
우영은 핸드폰을 든 채 멀뚱히 복도에 서 있었다. 그러다 번뜩 정신을 차렸다. 사현을 저렇게 둘 수 없었다.
우영이 쿵쿵쿵 2층에서 뛰어 내려와 지갑을 챙겼다.
일단 약을 사고, 죽도 좀 사고, ⋯⋯비타민도 좀 살까? 과일은? 아아, 유자차도. 단 걸 좋아하니까 케이크도 사 볼까. 아무것도 안 먹는 것보단 뭐라도 먹는 게 좋지 않을까. 그리고 또⋯⋯.
두 손 가득 바리바리 짐을 싸든 우영이 우당탕 집으로 들어섰다. 바쁘게 냉장고를 채우고, 포장해 온 죽을 뜯었다. 뜨끈한 김과 함께 고소한 냄새가 올라왔다. 삼계죽을 샀는데, 잘 먹을는지 모르겠다.
우영이 서툰 손놀림으로 죽을 옮겨 담았다. 장조림과 김치 등도 반찬 그릇에 옮겼다. 그대로 들고 가려다 아, 멍청한 감탄사와 함께 약과 물도 챙겼다.
2층은 여전히 고요했다. 사현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 버린 건 아닐까. 기겁한 우영이 바삐 침실로 들어섰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침실 문을 열자마자 둔탁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침대 맡 조명등을 밝힌 우영이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일인용 소파를 힘으로 뿌득뿌득 끌고 왔다.
찢어지는 소음의 연속에 사현이 짜증스레 눈을 떴다.
“뭐야, 너.”
“약 사 왔어요.”
“내가 여기 올라오지, 콜록, 말랬지⋯⋯.”
“실장님이 형 아프다고 들여다보랬어요.”
우영이 능청맞게 제인을 방패로 세웠다. 협탁에 트레이를 올려두니 사현이 또 꾸물꾸물 등을 돌린다.
“됐어. 가져가서 너 먹어.”
우영의 눈이 뾰족하게 벼려졌다. 충분히 예상한 상황이었는데도 영 달갑지 않았다.
“드세요. 그래야 약도 먹죠. 그 후에 다시 자요.”
“안 먹어.”
“안 먹으면 계속 아파요.”
“계속 아플 거야.”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먹어야 얼른 낫죠.”
“싫어. 얼른 안 나아도 돼.”
“⋯⋯.”
우영이 헛숨을 흘렸다. 아니, 늘 어른 같던 사람이 오늘은 왜 심통 난 일곱 살이 됐어.
침실 가득 정적이 차올랐다. 무음의 대치였다. 먼저 공격을 가한 건 우영이었다. 항상 패배하는 쪽이었으나 오늘은 그럴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우영이 훌떡 이불을 걷어냈다. 사현이 무어라 고함을 내지르기도 전에 그의 양쪽 겨드랑이 안으로 팔을 넣어 쑥 위로 올렸다. 아무리 성인 남성이라 한들, 우영의 무지막지한 힘을 이길 순 없었다. 사현은 눈 깜짝할 새에 앉은 자세가 됐다.
“⋯⋯죽을래?”
사현이 실핏줄이 거미줄처럼 올라온 눈으로 우영을 노려봤다. 허나 우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에게 미움을 받든, 욕을 얻어먹든. 일단 그를 살리고 보는 게 우선이었다.
우영이 트레이를 자신의 무릎 위로 옮겼다. 그리고 따뜻한 물과 찬물을 반반 섞어 미지근하게 만든 물을 사현의 입술 아래로 가져다 댔다.
“목부터 축여요.”
“야. 내가 안 먹는다고 했지. 이게 예쁘다고 오냐오냐했더니⋯⋯.”
“조금만 먹어요. 많이 먹으라고 안 해요. 이거 먹고, 약 먹으면 케이크 줄게요. 제가 케이크도 사 왔어요.”
“내가 애야?”
“애 맞잖아요. 지금 하는 행동만 보면 딱 주사 맞기 싫어서 떼쓰는 어린앤데.”
날이 잔뜩 선 사현의 비아냥에도 우영은 물러서지 않았다. 물 먹이는 걸 포기한 그가 이번엔 죽을 떴다. 후우, 걱정을 가득 담아 바람을 불었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사위로 퍼져 나갔다. 적당히 식었다 싶을 때쯤 수저를 사현의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앙 다물린 사현의 입술은 떨어질 줄 몰랐다. 우영이 눈을 부릅떴다.
“아니, 내가 주사를 놓겠대. 팔에 링거를 끼우겠대. 그냥 밥 먹고 약 먹으라는 게 단데 뭐가 그렇게 싫어요.”
그가 제법 엄한 표정으로 사현을 꾸짖었다. 꼭 어린 아들을 혼내는 아빠 같은 얼굴이었다.
“⋯⋯.”
사현이 벅벅 세게 마른세수를 했다. 와중에도 우영의 숟가락은 굳건히 사현의 목구멍을 노리고 있었다. 사현이 그 숟가락을 물끄러미 노려봤다.
저것이 자신의 속으로 들어온다 생각하니 신물이 울컥울컥 올라왔다. 아마 소화하지 못할 것이다. 죽이 아니라, 우영의 배려와 보살핌을 소화하지 못할 것이다. 우영 특유의 말갛고 뽀얀 정에 온몸에 두드러기가 돋아나는 듯했다.
사현이 우영의 팔꿈치를 밀어냈다. 난폭하게 식사를 종용하던 숟가락이 멀어졌다.
“나는 혼자인 게 편해.”
“⋯⋯.”
“혼자 있으면 너처럼 밥 먹어라, 약 먹어라 잔소리하는 사람이 없잖아.”
그 말에 우영의 입술이 마뜩잖게 뒤틀렸다.
거짓말. 외롭다고 했으면서. 너무 외로워서 무섭고 쓸쓸하다고 했으면서. 가끔은 한여름에도 춥다고 했으면서. 우영은 사현이 했던 말을 잊지 않았다. 설사 그가 잊었더라도, 자신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우영이 죽을 다시 펐다. 사현을 기다리느라 차갑게 식었던 죽이 다시 뜨끈해졌다.
“그럼 오늘부터 혼자 말고 둘인 거에 적응해요.”
“⋯⋯.”
“저는 앞으로도 형한테 밥 먹어라, 약 먹어라 잔소리할 거거든요.”
우영은 답지 않게 고집이 셌다. 문제는, 사현의 고집 역시 어디 가서 뒤지지 않는다는 거였다. 사현이 눈을 치켜떴다. 물러나지 않으면 그 어떤 상스러운 말이라도 불사하겠다는 다짐이 갈색 눈동자 속에서 바글바글 끓고 있었다.
그 시선과 맞서 싸우던 우영이 한숨과 함께 수저를 내려놓았다. 자신의 승리를 예감한 사현이 다시 이불 속으로 침식하려 할 때였다.
우영이 흐트러진 사현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타인의 땀이 찝찝하지도 않은지, 만면 어디에도 불쾌함이라곤 없었다. 그로 모자라 열꽃을 가늠하듯, 잠시간 머무르기도 했다.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열을 느낀 우영의 미간에 주름이 꼈다. 눈썹 끝은 비탈길을 그렸고, 입술은 삐딱하게 뒤틀렸다. 꼭 화난 얼굴 같았다. 사현은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이었다. 아마 우영 자신도 익숙하지 않은 얼굴일 터였다.
우영이 다시 수저를 들었다. 벌써 네 번째였다.
“먹어요. 안 먹으면 나 여기 계속 있을 거예요. 내일까지 있을 거야. 그림도 안 그리고, 십 분에 한 번씩 밥 먹으라고 노래 부를 거예요. 저 노래 되게 못해요. 형 아마 한숨도 못 잘 걸요.”
자못 음산한 목소리로 하는 말치고는 몹시 귀여운 협박이었다. 더할 나위 없이 우영다웠다. 사현이 참지 못하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치미는 열기와 달리 얼음장처럼 꽝꽝 얼어 있던 분위기가 단숨에 허물어졌다.
사현이 침대 프레임에 깊숙이 기댔다. 까끌까끌한 목구멍에 말을 조합하는 게 고역이었다.
“네가 잔소리하는 거에 적응해 버리면, 다음은 어쩌니.”
“네?”
“다음에 아플 때, 그때 네가 없으면, 그럼 어쩌냔 말이야.”
우영의 입이 뻐끔, 바보처럼 벌어졌다. 사현이 설마 그런 걱정을 할 리라곤 전혀 상상치 못했던 터라.
우영이 볼 안쪽을 지그시 씹었다가 놨다. 생각도 전에 툭 혀끝까지 튀어나온 말이 있었다. 이런 말을 제 주제에, 저와 사현처럼 깊지도, 얕지도 않은 어정쩡한 관계에 해도 될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저는 깊으니까. 진심이니까. 적어도 거짓은 아니니 해도 되지 않을까.
“⋯⋯계속 있을게요.”
“⋯⋯.”
“그때도 있을게요.”
“⋯⋯.”
“저 갈 데도 없어요. 천애 고아에, 돈도 없고, 학벌도 별로고, 말도 잘 못하고, 할 줄 아는 건 그림 그리는 거밖에 없잖아요.”
우영은 엉망진창인 자신의 처지를 담담하게 나열했다. 듣고 있는 사현의 양심이 콕콕 찔릴 정도였다. 언젠가 먼 옛날. 그의 상황을 쓸데없이 낱낱이 까발렸던 적이 있는지라.
그러나 정작 우영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가 턱짓으로 식사를 종용했다.
“그러니까 죽 먹어요.”
“⋯⋯.”
“약까지 먹으면,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 줄게요.”
우영은 목소리가 좋았다. 지금까지 숱하게 대화를 나눴으면서 이렇게 또렷이 자각하는 건 처음인 듯했다. 굵직하고 낮은 음성인데, 갑갑하지 않다. 감미로우면서 묵직한 게, 지척에서 들으니 더 매력적이었다.
흔들림 없는 우영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사현이 천천히 입을 벌렸다. 우영의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가 첫 숟갈을 삼키는 게 그렇게 감동적이고 기적 같을 수 없었다.
사현은 착실하게 죽을 받아먹었다. 야금야금 장조림도 먹고, 홀짝홀짝 물도 마셨다. 죽이 반쯤 사라졌을 때, 사현이 더는 못 먹겠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는 원래 입이 짧았으니까. 이만하면 우영의 예상을 훨씬 웃도는 식사였다.
약까지 먹은 사현이 양치를 하는 동안, 우영은 1층에 내려가 식기를 정리하고 왔다. 케이크를 들고 올까, 하다가 일단은 재우는 게 우선일 것 같아 말았다.
가볍게 샤워까지 하고 나온 사현이 우영이 바꿔 놓은 시트 위로 몸을 던졌다. 산뜻한 환경에 절로 만족의 한숨이 올라왔다. 저를 돌봐 주는 이가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불을 끌어 올려 준 우영이 소파에 막 엉덩이를 붙일 때였다. 사현이 옆으로 몸을 돌렸다. 내내 벽만 보고 눕더니 웬일로 우영을 보고 누웠다.
“우영아.”
“네.”
“네가 고아에 돈도 없고 학벌이 별로여도 괜찮아.”
문맥을 잡기 힘든 말에 우영의 눈꺼풀이 빠르게 깜빡였다. 그러자 사현이 사르르 눈을 곱게 접으며 미소 지었다.
“예쁘잖아.”
찰나와 같은 정적 후, 두 사람이 동시에 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어둑한 침실 위로 튀어 오르는 웃음들이 소담한 불꽃놀이 같았다.
사현은 금세 잠이 들었다. 그래도 밥 먹고 약도 먹었다고 안색이 한결 편해 보였다. 소파 팔걸이에 턱을 괸 우영은 눈 깜빡일 때를 제외하곤 모든 시간을 사현에게 쏟아 부었다.
잠을 자는 사현은 미동조차 없었다. 이불을 차거나 뒤척이지도 않았다. 코를 골지도 않았고, 이를 갈지도 않았다. 바르게 누워서는 색색 부지런히 숨만 쉬어 댔다.
그런데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가 자는 걸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그때와 지금의 마음가짐이 달라서일까. 엄청나게 신비로운 다큐멘터리나, 잔잔하지만 짜임새 있는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뽀얀 볼과 붉은 입술, 기다란 속눈썹을 보고 또 보면서 우영은 자신의 감정을 거듭 확인했다. 확인은 곧 확신이 됐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가슴팍이 찡할 정도로 느끼는 건 처음이었다.
우영이 요술에 홀린 아이 같은 얼굴로 사현의 통통한 입술을 응시했다. 그러잖아도 새빨갛던 입술이 열 기운에 더 붉어져 있었다. 툭 건드리면 검지에 붉은색이 묻어나오지 않을까. 그 색은 사현이 사 준 고급 물감보다 훨씬 예쁜 색을 가지고 있을 테였다.
우영의 상체가 점점 사현에게로 이끌려갔다. 저 입술을 더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희미한 주름을 관찰하고 싶다. 어렴풋이 새어 나오는 숨결이 무슨 빛깔을 띠고 있는지도 알고 싶었다.
그렇게 우영의 코끝이 사현의 볼에 닿기 직전이었다.
사현의 입술이 뾰족하게 솟아올랐다가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 덕에 간신히 정신을 차린 우영이 후다닥 뒤로 물러섰다. 헛숨을 잔뜩 삼키며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미친놈. 미친놈. 미친놈!
그의 안면이 오색무주로 발씬거렸다. 솥뚜껑 같은 손으로 뺨을 철썩철썩 내려치기도 했다. 그러다 언뜻 보라색 덩어리와 눈이 마주쳤다.
사현과 멋진 바에서 술을 마셨던 날, 자신이 뽑아 줬던 가지, 아니, 고구마. 아니, 가지? 아무튼, 그 인형이었다.
“어⋯⋯.”
우영이 반가움에 침대 맡에 있던 인형을 덥석 집어 들었다. 못생긴 얼굴이 여전했다.
너 여기 있었구나. 사현에게 뽑아 준 이후로 한 번을 보지 못해서 버렸겠거니, 생각했었는데. 설마설마 침실에 자리를 잡고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우영이 검지와 중지로 가지의 코를 퉁 튕겼다.
“부럽네.”
너는 형이 자는 모습을 매일 볼 수 있겠구나. 그저 자는 모습 말고도 아주 많은 걸 볼 수 있겠지. 그가 자기 전에 무엇을 하는지. 아침에 눈을 뜨면 어떤 모습인지. 혹, 늦은 밤에 메시지를 주고받거나 통화하는 사람은 없는지.
분명 사현 정도면 여자든 남자든 다가오는 사람이 많을 텐데. 저처럼 보잘것없는 놈은 찰나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멋지고 예쁜 사람들일 게 분명했다.
그리 생각했더니 심술이 일어 이번엔 더 세게 코를 쳤다. 가지가 푸르르 경련했다.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조금, 아주 조금 마음이 풀렸다.
한참 가지를 조몰락거리던 우영이 그것을 원래 자리에 조심히 내려놓았다. 그 후 다시 사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형?”
그런데 어째 사현의 상태가 사뭇 달랐다. 평온하던 얼굴이 한껏 구겨져 있었다. 멀끔했던 이마에도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혔다. 다홍빛이던 입술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 입술이 가늘게 달싹였다.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듯했다.
우영이 침대에 한쪽 무릎을 올리고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사현의 입술 위로 귀를 가져다 대자 조각난 단어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추⋯⋯워.”
우영이 곧장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보일러를 높여야 하나. 컨트롤러가 어디 있지. 아니면 이불을 가져올까. 여유분은 이미 썼으니 1층으로 가 제 것을 가져와야 할 듯싶은데.
우영의 머리가 팽글팽글 빠르게 돌아갔다. 허나 등신 같은 몸뚱이는 선뜻 움직이지 못하고 움찔거리기만 했다.
그때였다. 차갑고 보드라운 것이 손목을 뱀처럼 얽어 왔다. 사현의 손이었다. 그 손은 우영의 손목을 타고 팔꿈치까지 올라왔다. 반팔을 입은 탓에 훤히 드러난 팔뚝이 속절없이 그에게 얽매였다. 사현의 눈이 가느스름하게 떠졌다.
“너.”
“형?”
“따뜻⋯⋯하네.”
그 말과 함께 멱살이 잡혀 확 아래로 끌려갔다. 우억! 우영이 둔탁한 비명을 내지르며 침대 위로 엎어졌다. 무게를 한쪽 팔로 지탱하고 있었던 터라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우영은 와중에도 제 장대한 몸뚱이가 사현을 짓누르는 걸 방지하기 위해 옆으로 몸을 돌렸다. 안경이 공중으로 날아갔다. 투닥탁. 저 멀리서 안경의 추락이 들려왔다.
“⋯⋯.”
허공으로 팔을 뻗고, 허리는 아치형으로 구부리고, 발가락을 부채처럼 편 채로 침대에 눕게 된 우영이 그대로 굳었다. 찬바람에 마른 동태 꼴이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확 오므라든 우영의 동공이 천천히 옆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코앞에서 살랑이는 머리칼을 발견하는 순간, 오장육부가 멈췄다.
사현이 코앞에 있었다. 아니, 이건 코앞이라 묘사하기도 아까웠다. 사현이 제 가슴팍에 이마를 묻고 있었다. 그의 후끈한 온도가 천 하나를 두고 맞닿은 피부를 통해 가감 없이 흘러들어왔다.
우영의 몸뚱이가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심장이 강력하게 펌프질을 하며 피를 사지 끝으로 보냈다. 난로처럼 뜨끈하게 달아오른 우영에 사현이 꼬물꼬물 안으로 더 파고 들어왔다. 이제는 아예 한쪽 팔로 우영의 허리를 껴안고, 반대 손으론 티셔츠를 구겨 쥐기까지 했다.
사현의 숨소리가 목젖 언저리에서 흩어졌다. 우영이 만세 하는 자세로 딱딱하게 굳었다. 어찌나 놀랐던지. 확 좁아진 기도 탓에 공기가 턱턱 끊겨 들어왔다.
그런 우영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현은 금세 다시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가지런히 감긴 그의 눈을 내려다보던 우영이 말을 더듬었다.
“그⋯⋯ 어⋯⋯. 저, 형⋯⋯.”
“⋯⋯.”
“이, 이, 이걸 놓지 않으면 제가 일어날 수가 없어요.”
“⋯⋯.”
“그럼 이, 이대로 같이 자야 할지도 몰라요.”
“⋯⋯.”
“물론 옷을 벗으면 되긴 하지만. 그건 좀 번거롭네요.”
“⋯⋯.”
“그러니까 그냥, 음⋯⋯, 네. 그냥 이렇게 있을⋯⋯게요.”
마지막 문장은 모기보다 목소리가 작았다. 아무도 듣지 않길 바라는 혼잣말에 가까웠다. 우영은 와중에도 팔을 나뭇가지처럼 뻗고 있었다. 타인과 이런 자세로 누워 있는 건, 그것도 침대에 누워 있는 건 처음이라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그때, 사현의 입술이 달싹였다.
“⋯⋯추워.”
“어, 아, 네.”
우영이 냉큼 그를 끌어안았다. 저보다 한참 작은 몸이 품 안으로 쏙 들어왔다. 얼떨결이었다. 결코 이럴 의도는 없었다. ⋯⋯아니, 사실 사심이 조금 아주 조금, 손톱만큼 섞여 있었다.
뭐⋯⋯ 내가 엉큼한 생각을 가지고 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사현이 끌어당기니까. 나도 모르게, 어? 어쩔 수 없이 이리된 건데. 누가 돌을 던지겠나.
혼자 발을 저리고, 혼자 변명하던 우영은 당당해지기로 했다.
우영이 턱을 내려 자신의 가슴팍에 볼을 묻은 사현을 쳐다봤다. 복작복작하던 머리가 순식간에 텅 비었다. 남은 거라곤 진달래색 같은 감정뿐이었다.
와 씨. 죽겠다.
너무 좋아서 죽겠다.
그래도 지금 당장 죽지는 말아야지. 이 순간을 조금만 더 만끽하다 죽어야지.
빙긋 미소 지은 우영이 꽉 사현을 껴안았다.
멋지다 못해 황홀한 밤이었다.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