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4. 빨간색 발광 (4/24)

04. 빨간색 발광

우영의 전시회는 금세 유명세를 탔다. 고리타분하지 않은 그러면서도 전시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전시회는 남녀노소 누구든 좋아했으니까.

처음은 평론가와 기자들에 의해 광고가 퍼져 나갔다. 그중 한 평론가의 글은 분에 겨운 찬사를 담뿍 담고 있었다. 우영은 헤벌쭉 입을 째며 그걸 열댓 번이나 봤다.

[지난 31일, <갤러리 비>에서 신진 작가의 전시가 있었다. 아트 옥션 제38회 미술품 경매에서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았던 네온(NEON) 작가의 전시였다.

(중략)

‘새로운 밤’ 전시는 인테리어부터 분위기, 동선, 전시의 기승전결까지. 최근에 들렀던 그 어느 전시보다 짜임새 있었고, 완벽했다.

역시, <갤러리 비>구나. 그런 뻔한 말이 절로 터져 나왔다.

(중략)

눈을 따끔하게 만들던 형광 색에 적응할 때쯤, 모퉁이를 돌면 큼지막한 공간과 함께 메인 그림이 나타난다. 컬렉터와 애호가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은 작품. 바로 「P3001」이다.

「P3001」은 폭격 같은 아우름을 뽐낸다. 크기부터 색감까지 무엇하나 내가 이곳의 주인공이자 왕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왼쪽 위에 남산 타워가 그려진 이 그림은 관람객이 잘 아는 풍경이다. 한강과 불야성, 그리고 검푸른 하늘은 잘 알다 못해 식상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네온 작가가 그린 서울은 새로웠다. 마치 한강 한중간에 서서 서울을 바라보는 듯했다. 또는 바다 위에 지어진 도시를 보는 듯한 기분도 느낄 수 있다.

어슴푸레한 물 색, 그리고 도시 뒤로 희미하게 터오는 농홍한 해로 말미암으면, 작가는 깊은 새벽녘을 그린 것 같다. 그 고요한 시간에 드문드문 들어와 있는 레몬색 조명이 형광으로 산란한다. 한강에 비친 빛은 새벽 특유의 푸름과 섞여 오묘한 주홍빛이다. 아아, 이토록 매력적인 형광이라니!

압도적인 크기, 현실 같으면서도 환상적인 이 작품은 프레임(액자)이 없어 벽을 뚫고 생긴 또 다른 세상 같다.

접근 저지선을 넘어 한 발만, 딱 한 발만 디디면 작가가 바라보는 환상 세계를 침범하고, 염탐하고, 또 여행할 수 있을 거라는 상상과 함께 실로 들어가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발끝이 자꾸 저지선 언저리를 맴도는 덕분에 직원의 뾰족한 눈초리를 받아야 했다.

제목도 눈을 사로잡는다. 「P3001」. 모두 한글로 이루어진 다른 작들과는 사뭇 다른 제목이다. 제목에 관한 해설은 그 어느 곳에도 없었다. 도슨트도 작가가 따로 밝히지 않았다며 알려 주지 않았다.

맙소사. 그 말을 들으니 더 매력적으로 보였다. 본명도, 이름도, 나이도 하물며 성별로 밝히지 않은 작가가 이제는 제목의 뜻도 숨긴다. 그런데 얄궂은 게, 그게 얄미우면서도 날갯죽지가 바르르 떨릴 정도로 멋졌다.

가지고 싶다. 필자의 공간에 걸어 두고 제목의 의미를 유추할 수 있을 때까지 눈싸움을 하고 싶은 그림이었다.

(후략)]

제인이 말하길, 링크로 첨부해 준 평론 말고도 아주 많은 기사와 글이 올라왔다고 했다. 아트 레이더 아시아(Art Radar asia), 레드박스 리뷰(Redbox Review) 등의 예술 전문 블로그에도 올라왔댔는데, 죄다 영어라 차마 읽지 못했다.

우영은 사흘 밤낮 포털 사이트에 ‘네온’, ‘네온 전시’, ‘갤러리 비 전시’, ‘새로운 밤 전시’ 등을 검색하고 또 검색하며 팔푼이처럼 웃었다. 쏟아지는 활자들이 하나같이 칭찬을 담고 있는지라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시 오픈 후 일주일이 흘렀을까. 그때부턴 블로그가 아주 큰 역할을 해 줬다. 사현의 갤러리는 플래시를 터트리지 않는 한, 얼마든지 사진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전시, 데이트, 가 볼 만한 곳 등의 검색어를 타면 늘 <갤러리 비>. 즉, 우영의 전시가 걸렸다. 하물며 맛집을 검색해도 [<갤러리 비> 갔다가 파스타 맛집~] 등으로 걸릴 정도였다.

다음으론 SNS가 난리였다. 아무래도 입구가 독특하다 보니, 인증 샷이 대거 올라갔고, 커플들이 많이 왔다. 또 미술 관련 학과에서 교수님이 과제를 내서 왔다느니, 맘카페에서 아이들이 너무 좋아한다는 후기를 보고 왔다느니 등의 이유도 있었다.

전시장은 인산인해였다. 학생도, 엄마 손을 잡은 아이들도 많이 왔다. 물론, 애호가들도 많았다. 덕분에 근래 사현의 기분이 아주 좋았다. 아무렴 열심히 일구어 놓은 전시장에 사람이 북적이는데 어찌 뿌듯하지 않겠는가.

예술은 국한되면 빛을 잃는다. 소위 말하는 ‘그들만의 전시’가 되면 안 됐다. 나이 지긋하고 돈 많은 이들만 들락거리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밤’은 몹시 성공한 전시였다.

전시가 후반에 다다르면서, 사현은 또 다른 의미로 바빠졌다. 그림 배송을 준비해야 했고, 구매자들과 엄청난 돈이 오고 갔고, 함께 동봉해 보낼 전시 리플릿, 작품 보증서, 관련 기사, 계산서 등을 준비해야 했다. 해외 컬렉터에게 보내는 건 곱절로 신경 써야 했고.

덕분에 우영은 사현을 근 일주일째 보지 못했다. 그 역시 열띤 성화에 신나 집에 박혀 그림만 그리긴 했으나, 문득문득 사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서 전시의 끝이 얼마 남지 않은 날. 큐레이터 팀에게 감사 인사도 전할 겸, 전시도 재차 둘러볼 겸 우영은 <갤러리 비>로 향했다. 가는 길에 그는 압구정에 있는 유명 베이커리에 들러 케이크와 마카롱, 빵 몇 종류를 샀다.

말이 몇 종류지, 다 사고 나니 종이 가방이 세 개나 됐다. 십만 원이 훌쩍 넘는 돈도 나갔다. 그런데도 전혀 아깝지 않았다. 사현이 단 걸 좋아했으니까. 비록 라면만큼 지대한 관심을 끌진 못하겠지만, 뭐든 그가 먹는 걸 상상하면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우영이 사현의 오피스 문을 똑똑 노크했다. 그러나 건너편에선 답이 없었다. 우영이 한 발 뒤로 물러서 복도 끝을 바라봤다. 제인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간 멀뚱히 서 있던 우영이 조심히 문을 열고 빼꼼 고개를 쑤셔 넣었다.

“B, 저 왔어요.”

은근히 목소리도 흘려 봤는데, 여전히 답은 없었다. 우영이 데구루루 눈알을 굴렸다. 분명 들린다고 메시지를 넣었는데. 그러라, 허락도 받았는데. 일이 바빴나. 미팅 중인가. 아니면, 저의 방문을 잊었나.

암울한 생각에 우영의 낯빛이 어두워질 때쯤이었다. 커다란 소파 위에 누운 사현이 눈에 들어왔다. 옹송그린 몸뚱이. 나른하게 감은 눈. 살짝 벌어진 입술. 연하게 들썩이는 어깨.

“⋯⋯.”

우영이 저도 모르게 흡, 숨을 멈췄다. 사현이 낮잠을 자고 있었다. 아마 달콤한 낮잠이라기보단 피곤에 짓눌려 쓰러지듯 잠든 것일 테지만, 보는 이의 시각에선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살살 문을 닫은 우영이 조용히 그의 공간을 침범했다. 사현에게 가까워질수록 사현 특유의 냄새가 났다. 흐릿한 바닐라 냄새. 우영이 소리 없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우영은 종이 가방을 테이블 위에 조심히 올려 두고 코트를 벗었다. 그리고 혹 사현이 깰까, 매우 느린 동작으로 그의 위로 코트를 덮었다. 전시회 전날, 사현이 직접 사 준 옷 중 하나였다. 우영의 품에 맞춰 산 옷이라 사현을 덮으니 거의 이불 수준이었다.

코트를 펴 사현의 발끝까지 덮은 우영이 코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커피 사 왔는데.”

“⋯⋯.”

“다 식겠네.”

그건 좀 아쉽다. 괜히 입맛을 다신 우영이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맞은편에 소파 하나가 더 있지만, 그곳은 너무 먼지라. 잠든 사현을 가까이서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대체 사현이 자는 모습을 왜 가까이서 보려 하냐, 물으면 대답할 말이 없다만 그냥. 그러고 싶었다. 아무래도 그가 자는 모습은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닌지라.

먼 옛날. 술에 취해 들어온 그가 소파에 쓰러져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 달라고 한 이후론 처음이었다. 대개 사현은 퇴근하자마자 쏠랑 2층으로 올라가 버리곤 했으니까.

“⋯⋯.”

우영은 사현이 자는 모습을 가만히 훔쳐봤다. 구경일 수도 있고, 감상일 수도 있고. 또 어쩌면 관음이라는 못된 짓일 수도 있고.

이따금 우물거리는 그의 하얀 볼이 어찌나 곰살맞은지. 꿈틀거리는 속눈썹과 색색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연한 숨소리가 어찌나 평화로운지.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동공을 붙박이장처럼 사현에게 박아 놓고 있으려니 그가 으음, 잔잔한 목 울림과 함께 몸을 뒤틀었다. 우영이 눈을 부릅뜬 채 호흡을 멈췄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어깨가 바짝 위로 올라붙었다.

다행히 사현은 깨지 않았다. 볼 아래로 팔을 괴고, 반대쪽 팔을 소파 아래로 느슨히 떨어트리기만 했을 뿐이다. 사현이 여전히 몽중이라는 걸 깨달은 우영이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문득, 떨어진 그의 손목이 눈에 들어왔다. 하얗고 마른 손목에 움푹하게 파인 흉터가 들러붙어 있었다. 평소엔 번쩍번쩍한 시계가 가리고 있어 보이지 않는데. 그러고 보니 테이블 한 귀퉁이에 값비싼 시계가 널브러져 있다. 사현이 신경질적으로 풀어 던지는 모습이 눈에 빤했다.

우영이 가볍게 사현의 손목을 쥐었다. 그리고 엄지로 살살 흉터를 쓸어 봤다. 오돌토돌한 질감이 느껴졌다. 하얗고 보드라운 사현의 몸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 아아, 뾰족한 성격과는 썩 어울리는 흉터기도 했다.

그래도 없었으면 좋았을 텐데. 흉터 그 자체가 아니라, 이 흉터에 얽혀 있을 긴 사연과 많은 아픔이 없었으면 좋았을 텐데.

흉터를 지그시 보던 우영이 사현의 손목을 코트 안으로 숨겼다. 아니, 코트 안으로 밀어 넣으려 할 때였다.

똑똑.

간결한 노크 소리가 울렸다.

우영이 파드득 어깨를 떨었다. 꼭 도둑질하다 현장에서 잡힌 범인 같은 행색이었다. 어쩌지. 어쩌지. 갈피를 잡지 못한 우영이 하릴없이 엉덩이만 들썩이는데, 미처 대답도 전에 문이 열렸다.

“어⋯⋯. 작가님?”

익숙한 얼굴이었다. 갤러리스트 또는 큐레이터. 그것도 아니면 학예사라 불리는 사람.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자주 봤던 여자였다. 급하게 일어난 우영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안녕,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큐레이터가 싱긋 웃으며 인사를 전했다.

“B는 안 계시나요?”

사무실의 주인을 찾는 물음에 우영이 저도 모르게 뒤로 숨겼던 사현을 슬쩍 드러냈다.

“주무시는데⋯⋯. 깨울까요?”

급한 거예요? 되묻는 목소리에 마뜩잖음이 잔뜩 껴 있었다. 우영은 큐레이터의 방문이 썩 달갑지 않았다. 보나 마나 사현에게 일을 시키기 위해 왔을 텐데. 이렇게 처량한 모습으로 지쳐 잠든 그가 불쌍하지도 않냐! 따지고 싶을 지경이었다.

큐레이터의 입술이 어색하게 뒤틀렸다. 제 일을 하러 왔을 뿐인데, 파렴치한이라도 된 기분이라. 지금 우영은 뭐랄까, 그래. 사현을 깨우면 당장 울어 버릴 것 같았다.

“뭐⋯⋯ 내일 보고 드려도 되는 거긴 한데⋯⋯.”

큐레이터가 슬쩍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우영의 낯빛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흉포한 용에게서 고귀한 공주님이라도 지켜 낸 듯 어깨가 으쓱거렸다.

그때였다.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우영의 뒷덜미를 뱀처럼 넘어왔다.

“괜찮아요. 뭔데.”

한쪽 눈만 간신히 뜬 사현이 비척비척 소파에서 일어났다. 큐레이터와 우영의 얼굴이 대번에 뒤바뀌었다. 큐레이터가 또각또각 경쾌한 구두 소리를 내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눈썹 끝을 축 늘어트린 우영이 옆으로 비켜섰다.

큐레이터가 맞은편 소파에 앉아 태블릿을 밝혔다. 우영의 코트를 걷어 낸 사현이 테이블 위를 훑어 시계를 찼다. 그리고 미적지근하게 식은 테이크아웃 잔을 들었다.

“이거, 내 거?”

그가 흘깃 눈만 들어 우영을 쳐다봤다.

“네.”

우영이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였다. 사현이 커피를 홀짝이며 큐레이터를 향해 가볍게 턱짓했다. 보고를 시작하란 뜻이었다.

그러자 큐레이터가 어딘가 의뭉스러운 눈빛으로 우영을 쳐다봤다. 우영은 그것을 꾸지람으로 느꼈다. 갤러리 일인데 굳이 상관없는 네가 이 자리에 꼭, 눈치 없이, 껴 있어야겠냐는 그런 꾸지람 말이다.

우영이 어물쩍거리며 등을 돌리려 할 때였다. 사현이 그의 손목을 쥐어 가볍게 아래로 끌어당겼다.

“너도 앉아. 정신 사납게 서 있지 말고. 사무실에 나무가 자란 것 같잖아.”

사현의 불평에 큐레이터가 나지막이 웃음을 터트렸다. 우영이 냉큼 사현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정신이 사납든, 나무가 됐든, 사현의 옆에 있게 되니 그저 좋았다.

우영이 자신의 몫으로 사 온 커피를 큐레이터 앞에 놨다. 큐레이터가 인사 대신 눈짓으로 감사를 전했다. 커피를 한 모금 넘긴 그녀가 태블릿을 사현의 앞으로 내밀었다.

번지르르한 건물 이미지가 떠올랐다. 미끈하게 빠진 자동차 몇 대도 보였고. 근데 건물이 묘하게 곡선이 많은 게, 자동차 판매장인지 미술관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생김새였다.

“한호 자동차가 잠실에 모터 스튜디오를 오픈한답니다. 서울, 사람, 자동차, 그리고 예술의 융합을 모토로 내건 문화 사업인데, 잠실을 시작으로 전 세계에 오픈할 계획인가 봐요. 원하는 이미지는,”

“뻔하지 뭐. 젊음. 열정. 도전. 다양성. 그런 거.”

“네. 용기도 추가요.”

“걔들은 대기업 마케팅 팀이라면서 어째 발전이 없대?”

“항상 먹히는 거니까요. 젊음, 좋잖아요. 그래서 오픈 기념 첫 시즌 콜라보를 네온 작가님과 하고 싶은가 본데, 메일도 연락처도 전혀 공개된 게 없으니 우리 쪽으로 연락이 왔습니다.”

“으음⋯⋯.”

사현이 나른하게 눈을 깜빡였다.

현대 기업은 문화, 예술과 친해야 한다. 그래서 기업 갤러리도 늘고 있고, 문화 페스티벌도 주기적으로 연다. 기업체 이미지를 위해 문화를 마케팅의 일종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런 문화 마케팅을 한호 자동차가 한다, 라. 한호라 하면 명실상부 한국의 최고 기업 중 하나였다. 자동차뿐만 아니라 전자, 건설, 은행 등 없는 게 없다.

사현이 각양각색의 이유로 기업이 주최하는 문화 페스티벌에 도움을 준 적은 많았다. 그럼 감사 표시로 후원도 많이 들어오고, 홍보 효과도 크기 때문에 질 떨어지는 사업이 아니고서야 웬만하면 수락하는 편이었다.

근데 이건 <갤러리 비>, 그러니까 사현을 원하는 게 아니다. 그저 네온 작가로 향하는 매개체의 한 수단으로 연락해 온 것이었다. 못된 심술이 비죽 치솟았다.

잠깐 고민하던 사현이 우영을 쳐다봤다. 난데없는 로또 소식에 좋아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럼 어른답지 않게 모난 소리가 튀어나갈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는데. 우영의 표정은 썩 밝지만은 않았다.

어쩐지 사현은 그게 나쁘지 않았다. 그가 우영이 사 온 종이 가방을 뒤적여 마카롱 하나를 꺼냈다. 포장을 뜯으며 큐레이터에게 물었다.

“연락 온 거 더 있어요?”

“네. 내년 유월에 코엑스에서 열릴 서울 아트 페어에서 부스 낼 생각 없느냐고 초청 연락이 왔어요. <갤러리 비>가 참여한다면 가장 메인 부스를 무료로 주겠답니다. 조건은 네온 작가님 작품 세 점 이상 포함이고요.”

마카롱을 입에 넣던 사현이 하, 짧게 웃음을 끊었다. 어째 보고받는 이가 저가 아니라 우영이 된 것 같다. 뭐, 제가 주워 키운 놈이 잘됐으니 일단 기뻐하는 게 맞겠지. 사현이 우물우물 마카롱을 씹으며 우영을 바라봤다.

“뭐 하고 싶니?”

“네? 저요?”

딴 세상 이야기를 듣듯, 멍하니 있던 우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현이 또 다른 마카롱을 집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와르르 모아 큐레이터 앞으로 밀었다. “가져가서 큐레이터 팀이랑 나눠 먹어요.” 그 말에 큐레이터가 냉큼 그것들을 챙겼다.

“네가 하고 싶은 거 해.”

“⋯⋯.”

분에 맞지 않는 선택권에 우영은 쉽게 답을 내놓지 못했다. 한호 자동차가 어쩌구, 아트 페어가 저쩌구. 모두 귀에 익을 만큼 대단한 단어들이었지만 영 실감 나게 다가오지 않았다.

우영이 우물쭈물하고 있으니, 큐레이터가 태블릿과 마카롱을 들고 일어났다.

“그럼 내일 다시 올게요, B.”

“응. 가 봐요.”

사현이 대충 손을 휘저으며 인사했다. 그런 사현에 익숙한 큐레이터가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널따란 공간에 정적이 들어찼다. 우영은 잘생긴 미간을 한껏 찌푸린 채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었고, 사현은 그런 우영을 기다리며 마카롱과 커피의 조화를 즐겼다.

길게 뻗은 손가락으로 무릎을 두드리던 우영이 별안간 눈을 치켜떴다.

“그런 걸 하면, B랑 떨어져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사현이 우영의 말을 이해하려는 듯 새초롬히 입술을 모았다. ‘떨어져 있어야 한다’라⋯⋯. 아직 부모의 품을 떼지 못한 어린아이나 할 법한 생각이었다.

사현이 쩝, 짧게 입맛을 다셨다. 단 걸 먹었더니 자연히 매콤한 라면 국물이 당겼다. 퇴근하고 오랜만에 김밥천국이나 갈까. 요즘 바빠서 통 라면을 못 먹었다.

“떨어져 있기는 무슨. 너 나랑 전시 세 개 할 때까진 내 집에서 못 나가. 다른 일을 하더라도 퇴근은 내 집으로 해야 해.”

“그게 아니라⋯⋯.”

“아트 페어는 조금 더 생각해 보자. 거기 도떼기시장 같아서 안 가고 싶어. 한호 자동차랑 하는 프로젝트는 길어 봐야 한두 달이니까 할 만할 거야. 다음 전시회까지 스케줄 조절은 알아서 하고.”

사현이 이만 대화를 끝내겠다는 듯,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자 우영이 커다란 손바닥으로 사현의 허벅지를 눌렀다. 그렇게 세게 누른 것도 아닌데 어찌나 위협적인지. 하마터면 사현은 뒤로 발라당 고꾸라질 뻔했다. 때때로 느끼는 거지만, 우영은 자신의 덩치가 얼마나 사납게 큰지 전혀 자각하고 있지 못하는 듯하다.

“못해요.”

“뭘?”

일을, 아니면 스케줄 관리를?

아까부터 모호한 우영의 대답에 사현이 설핏 눈살을 구겼다. 그러잖아도 할 일이 많아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잠도 부족하고, 으슬으슬 뼈마디를 쑤셔 오는 추위도 밉다. 그런 와중에 우영의 스케줄을 직접 관리해 줄 만큼 사현은 여유롭지도, 너그럽지도 않았다.

평소라면 혹 제 심기를 거스를까, 알아서 갈무리했을 우영인데. 오늘은 왜⋯⋯ 까지 생각했을 무렵이었다.

“저는 B 집에서 그림 그리는 게 좋아요. 다른 건 하고 싶지 않아요.”

“⋯⋯.”

사현의 눈 코 입이 몬드리안의 그림처럼 네모 모양으로 굳었다. 피카소의 「우는 여인」처럼 뒤죽박죽 엉킨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사현을 쳐다보는 우영의 눈빛이 꼭 나를 버리지 말라 우짖는 강아지 같았다. 사현이 옆으로 돌아앉아 우영을 지그시 응시했다.

“너 혹시 한호가 뭐 하는 회산지 모르니?”

“알아요, 유명한 글로벌 기업이잖아요.”

“근데 거기랑 일을 안 한다고?”

“네.”

우영은 답지 않게 단호했다. 사현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목덜미를 긁었다. 그의 무딘 손톱을 따라 빨간 줄이 생겨났다.

“왜? 혹시 돈이 안 될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한호만큼 돈 썩어나는 기업이 없어. 아마 오륙 억은 그냥 벌 수,”

“돈은 상관없어요. 말했잖아요. 그냥 B 집에서 그림 그리는 게 좋다고. 다른 건 관심 없어요.”

“⋯⋯.”

반복되는 우영의 거절에 사현의 입이 한일자로 굳게 다물렸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그게 무슨 멍청한 개 소리니. 아무리 돈 욕심이 없고, 성공 욕심도 없기로서니. 제 발로 굴러들어온 복을 왜 마다하냔 말이다. 목구멍에서 역류한 말들이 앞니를 간질여 댔다.

근데 희한하지. 왠지 우영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둔할 정도로 우직하고, 착해빠졌고, 반칙이라곤 모르는 애니까. 그저 그림이 좋은 애니까. 돈이고 명예고 다 집어던지고 제가 만들어 준 작업실에 틀어박혀 있는 게 정말 행복할 수 있는 애니까.

묘하게 입술이 간지러웠다. 사현이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잠깐 묵음을 이어 가던 그가 괜히 질문 하나를 던졌다.

“내가 하라고 해도 안 할 거야?”

가까운 거리라 우영의 숨이 뚝 끊기는 게 선연히 느껴졌다. 사현은 그게 기꺼웠다. 순진무구한 아이를 괴롭히는 꼴불견 동네 백수라도 된 것 같았다.

사현이 우영의 곁에 바짝 붙어 앉았다.

“확실히 좋은 기회야. 네가 말했던 것처럼 글로벌 기업이니까. 아주 많은 사람이 너를 알게 되겠지. <갤러리 비>에서 백날 리플릿을 돌리고, 기사를 올리고, 평론가들을 구워삶아도 한호에서 한 방 빵 터트려 주면 바로 수직 상승이야.”

“⋯⋯.”

“네 다음 전시 작품들은 두 배 가격으로 팔 생각이었는데. 어쩌면 네 배, 다섯 배가 될지도 몰라.”

“⋯⋯.”

“그래도 안 할래? 나는 했으면 좋겠는데.”

사현이 사르르, 보기 좋게 눈을 휘었다.

반 장난으로 던진 말이긴 하다만, 거짓은 아니었다. 분명 엄청난 홍보 효과가 될 것이다. 한호가 또 다른 마케팅을 시작하고 그 메인으로 네온이, 즉 우영이 서게 되면 TV, SNS, 뉴스 하물며 해외 매스컴도 숱하게 탈 수 있을 테였다.

그럼 자연히 그림 값이 치솟고, 사현이 버는 돈 역시 뛴다. 어찌 됐든 지금 우영은 사현의 손안에 있는 작가니까.

친절한 불도저 같은 사현의 주장에 우영이 어버버 말을 씹었다. 언젠가 포장마차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때의 어리숙함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저, 저는 그런 거 못 해요. 사람 만나고⋯⋯ 회의하고⋯⋯ 여태까지는 B가 다 해 주셨으니까⋯⋯ 간신히, 어영부영 한 거지. 저는 그림밖에 그릴 줄 모르는데⋯⋯.”

“그래서 안 한다고?”

“B가 같이 가 주시면 할게요. B가 옆에 있으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사현의 입이 꾹 다물렸다. 반면에 동공은 크게 열렸다.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뱃속이 울렁거렸다. 멀미하듯 메슥거리기도 했다. 사현이 엄지로 커피 컵을 짓눌렀다. 종이컵의 주둥이가 오목하게 우그러졌다.

“내가?”

“네. 그, 어, 매니저처럼요.”

덧붙여지는 말에 사현의 표정이 씻겨 내려갔다.

“⋯⋯지금 나를 네 매니저로 써먹겠단 말이야?”

나를? 이 백사현을? <갤러리 비>의 관장인 B를? 매니저로? 곧 살인이라도 할 듯한 사현의 얼굴에 우영이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아니요. 그 뜻이 아니라. 어⋯⋯ 아, 보호자처럼요.”

“⋯⋯.”

“돈은 다 가져가셔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그 일도 B 덕분에 들어온 일이고, 잘되면 저도 다음 전시에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테니까⋯⋯.”

변명인지 진심인지 모를 말에 사현이 콧잔등을 찡그렸다. 그 모습에 혹 심기가 상했나, 지레 겁을 집어먹은 우영이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었다.

“그, 그냥 해 본 말이에요. 아무래도 B의 시간을 고작 오륙 억으로 사는 건 안 될 말이죠?”

하, 하, 하. 뚝뚝 끊기는 웃음이 그렇게 어색할 수 없었다. 삼사만 원으로도 벌벌 떨었던 지가 언젠데, 오륙 억을 ‘고작’이라 표현하는 것도 그랬다. 사현이 가늘게 뜬 눈으로 우영을 주시했다. 그 눈빛에 뭉개진 우영이 고개를 아래로 수그렸다.

“혼자 해 볼게요. 잘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열심히는 할 수 있어요.”

그가 자못 당차게 말했다. 두려움과 용기가 규칙 없이 얽힌 눈동자가 참으로 하찮았다. 사현이 헛웃음을 삼켰다. 그가 고저 없는 음성으로 우영을 불렀다.

“자기야.”

“네.”

“요즘 세상에 잘 못 하면서 열심히만 하는 거. 그거 민폐다?”

“⋯⋯.”

우영은 때때로 너무 그 나이대로 보일 때가 있다. 젊고, 열정적이고, 근데 또 순진하고.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매력일 수도 있지만, 꼴불견일 수도 있었다.

사현은 굳이 따지자면⋯⋯,

“근데 네가 바깥에 나가서 민폐나 끼치고 다니면, 내 얼굴이 뭐가 되겠니? 아직 너는 ‘네온’ 그 자체가 아니라 ‘B가 발견한 네온 작가’인데.”

“⋯⋯.”

“그러니까 매니저. 그거 내가 해 줄게.”

전자였다. 본 성격이라면 절대 이럴 리 없는데, 이상하게 우영의 앞에선 자꾸 너그러워졌다. 애가 어딘가 좀 찡하고 불쌍해서 그런가. 아니면 답답할 정도로 착해서 그런가.

사현의 말에 우영이 눈을 깜빡였다. 끔뻑, 끔-뻑. 바보처럼 움직이는 눈꺼풀이 잘생긴 얼굴과 너무할 정도로 어울리지 않았다.

“정말요?”

“그래.”

“어⋯⋯, 그럼 저 열심히 할게요. 돈도 다 드릴,”

“돈은 됐고, 대신 나 배고프니까 오늘 저녁 네가 사. 나 라면 먹고 싶어.”

“그걸로 된다고요?”

“어. 네 말대로 고작 오륙억인데, 뭐.”

“그, 그럼 치즈 추가해 드세요!”

참치 김밥도 먹어요, 우리! 우영이 낮은 목소리를 한껏 끌어올리며 말했다.

사현은 라면에 온갖 토핑을 추가해서 먹는 걸 좋아했다. 한마디로 럭셔리 라면이다. 사실 주인아주머니가 그렇게는 안 된다고 했는데, 우영이 싱글싱글 웃으며 한참 아주머니와 실랑이 아닌 실랑이를 하더니 결국 럭셔리 라면을 만들어 왔다.

두 사람은 광대가 봉긋 솟을 정도로 진한 미소를 지으며 사무실을 나섰다. 사현은 라면에 대한 기대 때문에. 우영은 사현과 함께할 또 다른 명분이 생겨서.

김밥천국에 가기 위해 로비로 나와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 우영이 무심코 제1 전시관에 시선을 던졌다. 폐장 시간이라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전시 끝이 다가오니 좀 시들해졌나, 걱정하는 차에 사현이 툭 팔꿈치를 쳤다.

“보고 갈래?”

“아니요. 괜찮아요.”

“왜. 보고 가. 다음 주에 배송 보내면, 다시는 못 볼 그림들이야.”

그 말에 우영의 눈썹이 직선으로 펴졌다. 다시는 못 볼 그림. 그래, 언젠가 사현이 그림과 이별하는 것에 익숙해지라 했었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경매장에서 팔린 그림도 못 본 지 한참 됐는데 그리워하지도 않았다. 이별했다는 걸 자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시를 준비하느라 정신없던 게 한몫하기도 했다.

근데 이번엔 하나가 아니라, 수십 점과 동시에 이별해야 한다. 그의 말마따나 다시는 못 볼 그림이다. 작업실을 가득 메우고 있던 그림이 갤러리로 이동됐을 때도 이상한 기분이었는데 이제는 영영 못 본다니. 가슴이 울렁거렸다. 오장육부가 증발한 것처럼 속이 허하게 느껴졌다.

“그럼 잠깐만 보고 가요.”

우영이 전시장을 향해 발을 틀었다. 사현이 느린 걸음으로 그를 따라 걸었다.

우영은 작품 하나하나를 뚫어지라 응시하며 고요히 이별을 나눴다. 그림을 구매하여 주인이 된 사람과 그림의 창조주로서의 주인은 전혀 다르다. 우영은 그림을 감상하는 게 아니라 붓 터치 하나하나에 묻어 있는 시간을 되뇌었다.

몇몇 그림은 반지하 방에 박혀 곰팡이와 동거하며 그린 것이고, 또 몇몇 그림은 사현의 지극한 돌봄 아래에서 그린 것이다. 짧으면 사흘, 길면 한 달씩 잡고 있던 그림인데. 눈이 빠지겠다, 싶을 정도로 보고 또 보던 그림인데. 이제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이 그림을 그릴 땐 엄청 더웠지. 이걸 그릴 땐 형광등이 고장 나서 바깥에 나가 그렸다. 아아, 이건 태풍이 왔을 때 굴러온 돌에 창문이 깨져서 고생할 때 그렸던 그림이고. 어, 이건 사현의 집에서 처음 완성한 그림인데. 확실히 좋은 물감이라 때깔이 다르네.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자기야.”

사현이 우영을 불렀다. 수 분 전, 우영을 앞질러 사라졌던 사현은 메인 홀에 있었다. 그가 손수 발주를 넣어 만든 200호짜리 작품 앞이었다.

“네.”

우영이 그의 옆에 섰다.

“이거 제목 뜻이 뭐야?”

「P3001」. 아주 많은 이들이 궁금해하고, 유추하고, 상상했으나 끝내는 이렇다 할 답을 찾지 못한 제목이다. 때로는 의뭉이 작품의 질을 높여 주기도 한다만. 사현은 그것에 썩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쪽이었다. 물어봐야지, 물어봐야지, 하면서 지금까지 미뤄 버렸다.

“어⋯⋯ 별 뜻 없는데.”

우영이 목덜미를 긁적였다. 그러잖아도 여러 기사와 평론들이 ‘P3001’이라는 제목에 지극한 관심을 보여서 어찌나 민망했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뭔데.”

“펜트하우스 3001호요.”

“어?”

난데없는 펜트하우스의 등장에 사현이 살풋 눈을 구겼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제목이었다.

“그 펜트하우스가 설마 내 집이야?”

“네.”

“왜 제목을 그렇게 지었어?”

한강 한가운데서 바라보는 새벽의 서울. 어쩌면 또 다른 차원의 서울. 펜트하우스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풍경이었다. 설마 펜트하우스에서 보는 서울을 그린 걸까. 그렇다고 하기엔, 내려다보는 시점도 아니다. 사현의 집에서 볼 수 있는 풍경과 완전히 달랐다.

사현이 그림과 자신의 집을 겹치며 유추하는데, 우영이 빙긋 웃으며 답을 내놓았다.

“B 집에서 그렸기 때문에 나올 수 있던 그림이니까요.”

우영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잖아도 두툼한 그의 흉곽이 더욱 크게 부풀었다.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뜬 그가 나지막이 입술을 달싹였다.

“B 집에 있으면요. 꼭 캔버스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

“하얗고, 깨끗하고, 크고, 질 좋은 캔버스요.”

“⋯⋯.”

“그래서 뭐든 그릴 수 있어요. 뭐든 그리고 싶어요.”

우영이 눈을 휘며 웃었다. 당시의 기분을 상기하듯, 손끝을 꿈틀거리기도 했다. 풍선이나 솜사탕을 눈앞에 둔 아이 같은 표정이었다.

사현이 그런 우영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쩐지 광대에 열이 몰렸다. 아랫입술도 간지러웠다. 실오라기라도 묻었나, 문질러 볼 정도였다.

「P3001」. 신진 작가의 머리에서 나온 것치고는 제법 괜찮은 제목이라고, 사현은 남몰래 생각했다.

“사실 이렇게 큰 캔버스에 그림 그리는 건 처음이었거든요.”

우영에게 사현의 집은 정말 완벽한 환경이다. 오롯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만들어 놓은 공간이니 당연한 말이지만, 늘 열악한 환경만 골라서 살아온 우영에겐 천국과 다름없었다.

평화로운 도시, 막 일출을 시작하는 도시는 부유한 출발을 뜻한다. 부유한 출발. 새로운 세상. 또 다른 차원. 그래서 우영은 이 그림에게 사현의 집을 암시하는 제목을 붙여 줬다.

“B의 집이어서 그릴 수 있던 그림인데. 그렇다고 제목을 ‘B의 펜트하우스’나 ‘B의 집’ 같은 거로 붙이면 너무 티 나잖아요. 그래서 나름, 음, 돌려 지은 거예요. 근데 사람들이 굉장히 심오한 뜻이 있다고 생각하더라고요. 얻어걸린 거죠.”

우영이 멋쩍게 웃었다. 사현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별 뜻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 그저 스쳐 가는 관람객에겐 분명 별 뜻 없는 제목일 터였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 정도로 허무한 뜻이기도 했고.

하지만 우영과 사현에겐 퍽 뜻깊은 제목임이 분명했다.

잠시간 「P3001」을 감상하던 두 사람이 느긋하게 발을 옮겼다. 전시장 출구가 보일 무렵이었다. 사현이 우영의 소맷자락을 꾹꾹 잡아당겼다. 우영이 사현을 쳐다봤다. 사현은 허공을 가로질러 멀찌감치 떨어진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우영의 눈동자가 자연히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텅 빈 전시장 귀퉁이에 구부정한 인영 하나가 서 있었다. 우영이 가늘게 눈을 좁혔다. 나이가 제법 있어 보이는 여자였다. 대충 가늠하면 쉰 후반에서 예순 초반 정도. 드문드문 자란 새치를 염색해서 가리진 않았으나, 곱게 빗어 넘긴 머리에 깔끔하지만 썩 비싸 보이지 않는 차림새에, 조금 낡은 신발을 신고 있었다.

그녀는 독특한 분위기를 내뿜었다. 연한 주름 탓에 살짝 아래로 처진 눈가. 가볍게 다물린 입술. 분명 인간의 얼굴인데 조용한 자연을 보고 있는 듯, 고즈넉한 기운이 맴돌았다.

“일주일에 세 번씩 네 그림을 보러 오는 사람이야. 저 그림 앞에서 유독 오래 서 있고.”

“정말요?”

우영이 놀라움에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 나이가 지긋한 사람이 자신의 속 시끄러운 그림을 마음에 들어 할 거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던 터라.

그녀가 보고 있는 그림은 한겨울, 오목하게 파인 도랑에 살얼음이 껴 있는 풍경을 우영의 시각에서 그린 것이었다. 얼음과 맞닥뜨린 햇살이 무너지며 어슴푸레하게 반짝이는 장면. 겨울의 시린 바람에 바짝 말라 버린 잔디가 얼음 사이에 맺혀 있고, 그 속의 동글동글한 돌들이 그림을 올려다보는 장면이었다.

캔버스가 큰 것도 아니고, 그저 그런 사이즈에 그저 그런 풍경이라 귀퉁이에 자리 잡게 된 그림인데. 무엇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응. 나도 몰랐는데 도슨트가 말해 주더라고.”

“신기⋯⋯하네요.”

“그렇지? 고작 그림 한 장이 뭐라고 저렇게 매일같이 들를까. 행색을 보아하니 네 그림을 살 만큼의 돈도 없는 것 같은데.”

“⋯⋯.”

우영이 입술을 잘근거렸다. ‘고작 그림 한 장’, ‘행색’, ‘그림을 살 만큼 돈이 없는’. 사현의 문장이 이상하게 거슬렸다. 무엇 하나 틀린 말이 없는데. 사현에게서 비슷한 말을 수도 없이 들어왔건만. 왜 기분이 벽지에 핀 곰팡이처럼 꿉꿉할까.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자존심이라도 생긴 걸까. 한호라는 큰 회사에서 찾아 준다고 거만해지기라도 했냐는 말이다. 우영이 손톱으로 손바닥을 꾹꾹 쑤시는데, 사현이 우영에게 기대섰다. 꼭 벽에 기대는 듯한 몸짓이었다.

사현 특유의 냄새가 우영을 덮쳤다. 수선화와 바닐라가 섞인 냄새. 언제 맡아도 주책없이 콧구멍을 벌름거리게 됐다. 그때, 사현이 나지막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도 저 그림 사 갔으면 좋겠다. 저 사람한테 팔고 싶어.”

“네? 이미 팔린 그림 아니에요?”

“응. 팔렸지.”

사현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 우영이 살풋 눈살을 구겼다. 사현이 그게 뭐가 대수냐는 듯 대꾸했다.

“저 사람이 사겠다고 하면, 저 사람한테 팔 거야.”

“그렇게 약속 어겨도 돼요? 아니, 약속이 아니라 계약인데⋯⋯.”

“괜찮아. 저 그림은 애호가가 아니라 컬렉터가 샀거든. 네 다음 전시 때 먼저 셀렉트 할 기회를 주겠다고 하면 아무 말 안 할 거야. 컬렉터한테 저건 그림이 아니라,”

“투자니까요.”

“그래.”

사현은 대화하는 내내 여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꼭 여자를 넘어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 것처럼. 또는, 어떠한 흔적을 찾는 사람처럼. 그저 관람객을 보는 눈빛이라 하기엔 너무 깊고, 짙었다.

“근데 B도 투자하는 사람이잖아요. B한테는 저 사람이 사 가나, 콜랙터가 사 가나 똑같은데, 왜 구태여 저 사람한테 팔고 싶은 건데요?”

우영이 살짝 접힌 사현의 옷깃을 펴며 물었다. 사현이 듣기 좋은 음성으로 조곤조곤 말했다.

“저 사람한테 가면, 네 그림이 엄청 사랑받을 것 같거든.”

“사랑이요?”

“응. 모름지기 그림이란 누가 봐 주고, 사랑해 주고 그래야지. 예쁜 그림이 부잣집 창고에만 박혀 있는 건 너무 가슴 아프잖냐.”

사현이 고개를 들고 우영과 눈을 맞췄다. 그러고는 곱게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 순간, 주기적으로 바뀌는 전시장 조명이 환하게 켜졌다.

사현은 따스한 오후 햇살을 만끽하는 강아지 같은 얼굴이었다. 눈 아래에 도톰한 애교살이 올라오고, 붉은 입술이 고운 호선을 그리며 언뜻 드러난 하얀 치아에, 전시장의 조명을 받아 반짝이는 눈동자가 우영의 시야에 콱 틀어박혔다.

“특히 네 그림이 창고에 처박혀 있으면, 더 아플 것 같단 말이야.”

“⋯⋯.”

“네 그림이 사랑받았으면 좋겠어.”

우영은 벼락과 같은 감정이 제 정수리 위로 몰아치는 걸 느꼈다. 꼭 폭격 같았다.

“⋯⋯.”

생전 처음 경험하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혀왔다. 동공이 점처럼 작아졌다가 단숨에 프라이팬만큼이나 커졌다. 심장이 누군가가 세게 움켜쥔 것처럼 쪼그라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팽창했다. 꽉 억눌려 있던 피가 사지 끝으로 달음박질쳤다. 전신이 삽시간에 터질듯 뜨거워졌다.

그런 우영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현은 종알종알 답지 않게 말이 많았다.

내일이 전시 마지막인데.

그 전에 사겠다고 해야 할 텐데.

할인한다고 말해 볼까?

무이자 할부도 된다고 하면 사지 않을까?

내가 직접 포장해서 보내 줘야지.

어디에 걸 건지도 물어봐야지.

직사광선이 센 곳에 두면 안 되는데. 그림 보관법은 알려나. 혹시 모르니까 큐레이터한테 알려 주라 해야겠다.

사현은 몹시 신나 보였다. 전시를 준비하는 긴 시간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허나 우영은 그 즐거움에 공감해 주지 못했다. 그의 목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음성은 입력이 됐으나 뜻을 인지하지 못했다.

당황스러운 감정이었다. 어찌나 얼떨떨한지 혀가 다 떫었다. 팔뚝엔 소름이 돋았고, 발바닥과 손바닥이 간지러웠다. 이유 모를 긴장인가. 아니면, 심정지라도 왔나. 저도 모르는 새 병이라도 났나. 이 정도면 생사가 왔다 갔다 하는 수준인 듯한데. 당장 응급실에 가야 하는 거 아닌가.

갑작스러운 혼돈에 파묻힌 우영이 뒤꿈치를 들썩일 때였다. 메아리 없는 대화에 사현이 의아한 낯으로 고개를 돌렸다. 결 좋은 머리칼이 차르르 흩어졌다. 동시에 향수 냄새가 느릿하게 일렁거렸다.

“왜 대답이 없어?”

우영은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한 채 무자비한 2차 폭격을 고스란히 맞았다. 피해는 엄청났다. 이번에는 발아래에 구멍이 뚫린 느낌이었다. 우영의 몸뚱이가 와르르 무너지듯 아래로 추락했다.

“자기야?”

사현의 입술이 달싹인다. 붉은 입술 사이로 축축한 혀가 슬쩍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어찌나 빠르게 사라졌는지. 얄미울 정도였다. 우영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서우영?”

아, 이게 무슨 감정인지 깨달았다.

이건 사랑이었다.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감정이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평생 반 불자처럼 살아왔던 자신의 아랫도리가 지끈거렸기 때문이다.

“우영아?”

사현이 야릇한 눈빛으로 저를 홀린 것도 아니고. 헐벗고 춤을 춘 것도 아니고. 엉덩이를 허벅지에 비벼 댄 것도 아니고. 단지 말 몇 마디 했을 뿐인데. 콧구멍을 들쑤시는 향기와 찰나처럼 사라졌던 혀에 발정하다니. 사랑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영의 심장이 새빨간 색으로 발광하기 시작했다.

그 어떤 물감으로도 흉내 낼 수 없는, 고결하고 완전한 빨간색 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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