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새로운 밤
우영이 언급한 ‘아는 곳’은 사현에게도 익숙한 식당이었다. 아아, 눈에는 익숙하나 입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김밥천국. 한국인이라면 오가며 볼 수밖에 없는 식당이었다.
강남 끄트머리에 위치한 김밥천국은 주차할 곳도 없었다. 그래서 한참을 돌다 그냥 길가에 주차했다. 불법주차 딱지라도 붙으면 사만 원 주고 라면을 먹는 것과 진배없었다. 시간이 시간이라 단속이 뜰 리는 없다만.
눈이 쨍할 정도로 밝은 주홍색 간판을 올려다보던 사현이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쓸어 올렸다.
“얼른 와요.”
벌써 가게 안에 들어선 우영이 그를 향해 손짓했다. 사현이 한숨과 함께 발을 뗐다. 서우영 때문에 정말⋯⋯ 별 경험을 다 한다.
식당 안엔 손님이 하나도 없었다. 앞치마를 두른 아주머니가 의자에 걸터앉아 드라마 재방송을 보고 있었다. 구석 테이블에 자리 잡은 우영이 수저통 위에 놓인 메뉴판 겸, 계산서를 들었다.
사현이 빠끔 입을 벌리고 메뉴판을 응시했다. 대체 메뉴가 몇 개인지. 이 많은 걸 저 아주머니 홀로 한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B도 드세요.”
우영이 라면과 김밥을 체크했다. 그러고는 사현을 쳐다봤다.
“글쎄⋯⋯.”
의자에 깊숙이 기대 테이블과 멀어진 사현이 께름칙하게 말했다.
“오늘 뭐 드셨어요?”
“어⋯⋯. 커피? 그리고 네가 준 스무디. 속이 안 좋아서 식욕이 없었어.”
“종일 아무것도 안 드셨단 말이잖아요. 뭐든 드세요.”
“⋯⋯.”
사현은 침묵했다. 아마 부정에 가까운 침묵일 것이다. 그래도 우영은 멋대로 체크 개수를 늘렸다. 치즈 라면과 참치 김밥. 아마 사현의 입맛에 맞을 터였다.
경쾌한 음성으로 주문한 우영이 부지런히 수저를 꺼냈다. 사현의 수저는 휴지를 곱게 접어 그 위에 올려 두기까지 했다. 그 꼴을 보던 사현이 헛웃음을 흘렸다.
음식은 금방 나왔다. 매콤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우영은 사현이 먼저 수저를 들 때까지 기다렸다. 사현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과 함께 숟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후룹, 한 입 뜨는데.
“하아⋯⋯.”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목구멍부터 위장까지 뜨끈하게 저는 느낌이 꼭 사우나에 들어앉은 기분이었다. 몇 번 국물을 떠먹던 사현이 젓가락도 들었다. 가끔 김밥이나 단무지도 집어 먹으면서 야무지게 식사를 이어 갔다.
그런 사현을 보던 우영이 알 듯 모를 듯한 웃음을 지으며 뒤늦게 수저를 쥐었다.
식사는 조용했다. 새벽의 강남은 고요했고, 아주머니가 틀어 놓은 이름 모를 드라마만 사부작사부작 거슬리지 않는 소음을 만들어 냈다.
사현은 웬일로 한 그릇을 싹 비웠다. 비록 참치 김밥은 좀 남았지만, 그건 우영이 먹어치웠다. 찬물로 입을 헹군 사현이 어깨를 느슨하게 늘어트렸다. 만족감이 서린 얼굴이었다.
“내가 라면을 좋아하긴 하나 봐. 집에 좀 사 둬야겠다.”
그 말에 우영이 푸흐흐 웃음을 흘렸다.
“그러지 말고, 여기 자주 와요.”
“⋯⋯자주?”
“네. 돈가스도 맛있고, 라볶이도 맛있고, 오므라이스도 맛있어요.”
돈가스. 라볶이. 오므라이스. 모두 사현이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우영의 어깨너머 벽에 붙은 메뉴판을 보던 사현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나는 바깥에서 혼자 밥 먹는 거 싫어.”
“왜 혼자 먹어요? 저 있잖아요.”
그 말에 사현의 눈이 잠깐 커졌다가 원래대로 돌아갔다. 우영은 정말 의아하다는 얼굴이었다. 내가 있는데 왜 혼자 먹어? 당연히 같이 먹는 거 아니야? 그런 의미를 띤.
그게 어찌나 천진하고 순수한지. 차마 부정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사현이 냅킨을 돌돌 김밥처럼 말았다.
“⋯⋯그래. 자주 오자.”
오랜만에 잘 먹은 덕인가. 배 속이 뜨끈했다.
* * *
전시회 준비는 느리게 진행됐다. 모든 그림의 리터치가 끝났고, 일정도 잡혔다. 그러나 콘셉트가 정해지질 않았다. 사실, 몇 번 정해졌는데 사현이 죄다 엎었다. 큐레이터 팀이 밤새 머리를 싸매 내놓은 아이디어들도 댕강 참수하길 몇 번째였다.
덕분에 사현의 심사가 좋지 않았다. 사현은 뾰족뾰족 고슴도치처럼 곤두서서는 눈을 부라리며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녔다. 덕분에 우영도 은근히 그의 눈치를 봐야 했다. 함께하는 시간이 하루에 한 시간도 채 안 되지만, 그래도 한집에 사는 동거인이었으니까.
새벽 두 시쯤 된 시간이었다. 아침 여덟 시면 칼같이 출근하는 사현은 한창 자고 있을 때였고, 그림 그리던 우영은 치미는 배고픔을 해갈하기 위해 냉장고에 쟁여 둔 배달 음식을 꺼내 먹을 때였다.
작업실에서 나온 우영이 살금살금 복도를 걸었다. 이 널따란 집에 저가 팔 벌려 뛰기를 하며 걸어도 위층에 있는 사현에겐 들리지 않겠지만, 그냥. 혹시라도. 정말 만에 하나라도 그가 깨지 않길 바랐다.
헌데 거실에 사현이 있었다.
“어⋯⋯.”
우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값비싼 소파를 두고, 낮은 대리석 테이블 앞에 아빠 다리를 하고 앉은 그의 낯이 심상치 않았다. 노트북과 태블릿을 줄지어 놓고 기합이라도 주는 모양새였다. 거기다 옆에 쌓인 컵라면 그릇 두 개를 보아하니, 한두 시간 앉아 있던 게 아닌 듯했다.
“B.”
우영이 사현에게 다가갔다.
“어, 왜.”
사현이 무심하게 대꾸했다.
“여태까지 안 주무셨어요?”
“어어.”
사현의 대답엔 성의가 없었다. 그런 사현에게 익숙한 우영이 슬쩍 모니터를 훔쳐봤다. 그곳엔 자신의 그림과 전시장 스케치업(SketchUp, 3D 모델링 프로그램)이 떠 있었다. 아마 콘셉트와 인테리어를 고민하는 것이리라.
우영이 슬쩍 컵라면 쓰레기들을 치웠다.
요즘 사현은 라면을 아주 달고 산다. 못해도 이틀에 한 번은 먹는 것 같아 걱정까지 됐다. 며칠 전에는 편의점에 있는 라면이란 라면을 다 털어서 질질 짐짝처럼 끌고 왔다. 그땐 어찌나 놀랐는지. 지금도 찬장에는 각양각색의 라면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무슨 라면을 이리 먹나, 싶다가도 아무것도 안 먹는 것보단 낫나, 싶기도 하고. 우영이 코로 한숨을 내쉬며 막 뒤를 돌았을 때였다. 사현이 우영을 불러 세웠다.
“자기야.”
“네?”
“너 하고 싶은 인테리어 없어?”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우영의 만면 가득 난처가 떠올랐다.
“저요? 어⋯⋯. 그런 거 잘 몰라서⋯⋯.”
“그래도 명색에 그림 그리는 사람인데. 네 전시회를 상상은 해 봤을 거 아냐.”
나의 전시회. 서우영의 전시회. 왜 상상해 보지 않았겠는가. 누구든 한 번쯤은 할 터였다. 근데 언제부터더라. 대학을 나오고 나서는 딱히 떠올려 본 적이 없었다.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해 그린 그림이 아니었던지라.
우영에게 그림은 밥 먹는 것처럼 당연한 것. 괴로울 정도로 야멸차게 쏟아지는 시간을 함께 감내해 줄 동반자이자 반려자. 제가 버리지 않는 한, 평생 제 곁을 지켜 줄 유일한 존재였다.
“그냥⋯⋯ 하얀 벽에 걸린 것만 상상해 봐서⋯⋯.”
우영이 어정뜨게 미소 지었다.
“진짜? 진짜 그게 다라고?”
사현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우영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중죄라도 저지른 행색이었다.
“그림은 눈이 따끔할 정도로 톡톡 튀게 그리면서⋯⋯.”
사현이 심보 나쁜 할머니처럼 눈을 흘겼다. 우영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 가끔, 사현의 말은 칭찬인지 욕인지 구분이 안 됐다.
우영에게 얻을 게 없음을 깨달은 사현이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쓰레기를 버리러 가던 우영이 아, 짧은 감탄사를 내놓았다.
“저⋯⋯ 방금 그림 하나 완성했는데. 봐 주실래요?”
그 말에 사현이 안광을 번뜩이며 튕기듯 일어났다.
사현은 우영이 손수 작업실 문을 열어 줄 때까지 먼저 들이닥치는 법이 없었다. 최소한의 존중이었다. 그림이 얼마나 완성됐냐, 쪼지도 않았다. 어차피 전시회를 일굴 수 있을 만큼의 그림이 있으니, 서너 점만 더 그리랬다. 그 덕에 우영은 평화로이, 마음껏 그림을 작업할 수 있었고.
언젠가 우영이 감시한다고 이사까지 시켜 놓고 왜 보질 않냐, 물었더니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자극을 받고 있을 거랬다.
실로 그랬다. 우영은 지금 이 공간이 사현의 집임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가. 꼭 도서관이나 독서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영이 큼큼 괜히 목을 가다듬으며 도어 록에 지문을 댔다. 띠리릭,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사현이 기다렸다는 듯 작업실 안으로 들어섰다.
유화 특유의 메케한 냄새가 전속력으로 돌진해 왔다. 그 냄새를 무심하게 꿰뚫은 사현이 이젤에 걸린 그림 앞에 섰다. 무려 100호짜리 크기였다. 거짓 조금 보태면 사현의 키만큼이나 큰 그림.
“⋯⋯.”
사현이 진중한 얼굴로 그림을 바라봤다. 우영의 그림은 늘 명확하다. 도대체 무엇을 그렸는지 알아차리기 힘든 요즘 작가들과 달리 한눈에 주제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번 작품은 서울의 야경을 그려 놓았다. 아니, 야경이라 뭉뚱그리긴 그렇고, 달, 다리, 한강. 그리고 그 한강에 비친 도시의 불야성이 쿡쿡 찍힌 듯한 붓 터치로 완성되어 있었다.
말로만 들으면 참으로 흔한 그림이구나, 할 수 있겠지만 우영 특유의 색감에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독특한 구조가 섞이면 묘한 분위기를 뿜어낸다.
온갖 다채로운 형광색이 넘실거리는 한강이, 뭐랄까⋯⋯. 마치 3차원이나 4차원에 있을 또 다른 지구의 풍경 같달까.
사현은 아주 오랫동안 그림을 들여다봤다. 길어지는 감상에 괜스레 붓을 정리하던 우영이 더듬더듬 형편없는 말솜씨로 그림을 포장하려 했다.
“지, 집에서 한강이 보이잖아요⋯⋯. 근데 생각해 보니까 제가 한강을 이렇게 위에서 올려다본 적이 한 번도 없더라고요⋯⋯. 이게 그냥 보는 거랑 시야가 다르니까 도시 야경이 물에,”
“쉿.”
사현이 아주 짧은 제스처로 우영의 말을 싹둑 잘랐다. 그 기세에 짓눌린 우영이 호치키스로 찍힌 것처럼 입을 딱 다물었다.
사현은 그 후로도 긴 시간 동안 감상만 했다. 멀뚱히 서 있는 우영의 무릎이 아파 올 정도였다.
“자기야.”
사현이 드디어 입을 뗐다. 우영이 차려 자세로 곧추섰다. 이따위 그림을 그려 놨냐고 혼나면 어쩌나. 지레 겁을 집어먹은 상태였다.
“네?”
“너 형광색 왜 쓰니?”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바짝 긴장했던 우영의 어깨가 한층 늘어졌다. 저가 언제부터 형광색을 썼더라. 아마⋯⋯ 보육원에서 나왔을 때부터일 것이다. 그러니까 정확히 스무 살,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였다.
“제집이 반지하 방이잖아요. 집이 어두우니까 다른 색은 잘 안 보이더라고요.”
“더 자세히 말해봐.”
“저는 햇볕이든, 가로등이든, 반사광이든⋯⋯ 빛을 그리는 게 좋아요. 근데 집 형광등이 오래돼서 흐릿하고 어두컴컴하거든요. 아무리 밝은색을 써도 쨍하게 번지는 빛 표현이 잘 안 됐어요. 물론, 바깥에서 보면 괜찮은데⋯⋯ 어차피 저 혼자 그리고, 저 혼자 보고, 계속 집 안에만 있는 그림이라⋯⋯.”
“그래서?”
“그⋯⋯ 학교 회화실 뒤지면 선배님들이 쓰다 남은 물감이 여기저기 처박혀 있거든요. 거기서 엄청 오래된 포스터컬러를 발견했는데. 레몬옐로, 마젠타, 로즈핑크 이런 것밖에 없었어요. 그림에서는 잘 안 쓰이는 색이라 항상 남는 색이잖아요.”
“⋯⋯.”
“이걸로 그리면 집에서도 잘 보이고, 다들 안 쓰거나 버리는 색이니까 주워 쓰면 물감 값도 아끼겠다 싶어서⋯⋯.”
“⋯⋯.”
“저희 과 교수님은 너무 싼 티 난다고 싫어하셨지만⋯⋯.”
우영이 말끝을 흐리며 음울하게 미소 지었다. 그 말에 그림에 코를 처박고 있던 사현이 휙 우영을 돌아봤다. 홉뜬 눈에 비아냥이 가득했다.
“네 그림이 싼 티 난다던?”
“네. 되게 싫어하셨어요.”
자글자글하게 주름진 눈가, 콧방울이 뚱뚱하고 정수리가 텅 빈 머리숱, 반팔 와이셔츠에 낡은 청바지를 고집하던 교수를 떠올린 우영이 목을 움츠렸다. 발표 때마다 우영의 차례가 오면 짜증을 숨기지 않았던 교수였다.
“안목 없는 교수네.”
“예?”
“그러니까 그 등신 같은 학교에서 교수나 하고 있는 거겠지만.”
사현이 흥, 짧게 코웃음을 쳤다. 우영의 그림이 얼마까지 치솟을 줄 알고. 미술계는 돈과 인맥, 그리고 안목이 다다. 큐레이터나 아트 딜러에게는 안목만큼 중요한 것도 없었다.
그리고 사현은 안목이 몹시, 몹시 뛰어난 편이었다. 그런 사현이 우영의 그림을 명명했을 때. 그의 그림은 논란이 일고, 이슈가 되고, 임팩트가 크며, 결국엔 돈을 끌어올, 그런 그림이었다.
사현이 다시 그림을 바라봤다. 혀끝이 자꾸 입천장을 긁는다. 꼭 식사 직전의 맹수처럼 허기가 졌다. 위가 비어서는 아니었고, 또 다른 욕심 때문이었다.
아, 이 그림 가지고 싶다. 내 눈이 닿는 곳에 걸어 두고 싶다. 그런 욕심 말이다.
이건 내놓지 말고 꿀꺽해 버릴까. 사현이 잠깐 못된 생각을 할 때였다.
번뜩! 좋은 아이디어가 뇌리를 스쳤다. 그렇게 감감무소식이던 전시 콘셉트가 떠오른 것이다. 사현의 눈꺼풀이 빠르게 깜빡였다.
전시의 주제, 분위기, 조명, 인테리어가 마구 몰아쳤다. 적당히 번잡하게 흐르는 음악 소리. 북적이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움직이는 동선. 그리고 그 동선이 가장 오래 멈추어 있을 하나의 그림까지.
사현이 자신의 아랫입술을 쓰다듬었다.
“자기야.”
“네.”
“이거 하나 더 그릴 수 있어? 시리즈로. 몇 개 더 그려도 좋고. 구도 다르게, 색감 다르게. 밤, 야경, 그런 거로. 굳이 한강이 아니라도 돼. 그래도 서울이면 좋겠는데.”
“시리즈요?”
“어. 크기는 작고 크든 상관없는데, 하나는 200호짜리로 제대로 뽑아 보자. 캔버스는 주문 제작해 줄게.”
“어⋯⋯. 네. 가능은 한데,”
“오케이.”
사현은 가능하다는 말만 접수했다. 그래서 우영은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이미지를 눈에 익히기 위해 여러 군데를 돌아다녀야 한다, 그렇게 큰 캔버스에는 그려 본 적이 없어서 시행착오가 있을 것이다 등의 변명을 내놓지 못했다.
제대로 하지 못해 그를 실망하게 하면 어쩌나, 걱정하는 찰나.
“잘했어. 멋진 그림이야.”
사현이 슥슥 우영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작은 키를 아우르기 위해 발뒤꿈치까지 들고. 퍽 정성스러운 칭찬이었다.
우영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사현을 내려다봤다. 사현은 웃고 있었다. 만족의 미소였다. 그 미소를 마주한 우영이 설핏 입꼬리를 올렸다.
사르르. 봄 햇살을 맞은 눈처럼 모든 걱정이 녹아내렸다.
* * *
콘셉트가 정해진 전시 준비는 착착 바쁘게 진행됐다. 사현 역시 바빠졌다. 어찌나 일찍 나갔다가, 어찌나 늦게 들어오는지. 살아 있긴 하나, 밥은 먹고 사나, 잠은 자나, 싶은 나날들의 반복이었다.
덩달아 우영의 마음도 급했다. 붓 놀림이 빨라졌다. 그렇다고 절대 대충 그리진 않았다.
가끔 밥 먹는 것도 까먹어서 사현에게 혼이 났다. 우영이 사현의 카드를 쓰면 늘 문자가 가는데, 때에 맞춰 문자가 가지 않으면 전화해서 ‘밥 먹어.’ 한마디만 툭 던진 후 끊곤 했다.
우영이 그리는 그림은 완성하는 족족 갤러리로 이동됐다. 이따금 사현이 갤러리에 들러서 전시장을 살펴보아라, 넌지시 말했지만 그림 그리느라 정신이 없어서 가지도 못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현인데.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지. 제가 간다고 한들, 꿔다 놓은 보릿자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닐 터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우영이 마침내 마지막 그림을 완성했을 땐, 겨울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전시회가 일주일 남은 시점이기도 했다.
갤러리에서 나온 직원들이 마지막 그림을 고이 모셔 갔다. 텅 빈 작업실을 보던 우영이 윗도리를 훌떡 벗으며 욕실로 향했다. 꼼꼼히 씻고 카페에 들러 사현 몫의 커피를 산 후, <갤러리 비>에 갈 계획이었다.
오랜만에 그를 볼 거라 생각하니 흥얼흥얼 콧노래가 나왔다.
* * *
저녁 열 시가 다 되어 가는 <갤러리 비>는 조용했다. 우영의 전시가 열릴 1층, 제1전시실 앞에는 하얀 커튼이 처져 안을 들여다볼 수 없게 되어 있는지라 그 적막감이 더 크게 다가왔다.
우영이 바쁜 걸음으로 어둠을 가로질렀다. 커튼을 열어젖히자 홀과 달리 북적북적한 소음이 들려왔다. 뚝딱뚝딱 망치질 소리, 끼리릭 끼리릭 무언가가 돌아가는 소리가 공사장을 떠올리게 했다.
아직 완전하지 못한 전시장에선 페인트 냄새, 나무 냄새, 연한 먼지 냄새 등등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었다. 고정되지 못한 조명이 중구난방으로 달려 있고, 바닥은 오염 방지를 위해 비닐이 깔려 있었으며, 벽에는 작품 이름이 적힌 포스트잇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우영에게도 익숙한 풍경이었다. 대학생 시절, 교내 전시를 할 때도 허접하지만 비슷한 순서와 방식으로 진행됐으니까. 다만, 벽이⋯⋯ 좀 이상했다.
대부분의 전시장 벽은 하얀색이거나 검은색이다. 그래야 작품을 온전히 관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따금 채도가 높은 색을 쓰긴 하지만, 부분 부분에 넣어서 시선의 환기를 유도할 때만 쓰인다.
근데 우영의 전시장은 그렇지 않았다. 형형색색의 형광등이, 그러니까 네온사인이 달린 게⋯⋯ 참으로 천박하고 싸 보였다.
우영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끔벅였다. 이게 뭐야. 놀이동산도 아니고. 클럽도 아니고. 술집도 아니고. 내 첫 전시가⋯⋯ 이따위 분위기라니⋯⋯. 우영은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기대했던 전시가 통째로 폭발이라도 하는 듯했다.
저 멀리, 태블릿을 든 사현이 큐레이터들에게 무어라무어라 지시하고 있었다.
눈썹을 비죽 올린 우영이 거센 콧김을 뿜으며 성큼성큼 그를 향해 다가갔다.
우영을 먼저 발견한 건 사현이 아니라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큐레이터들이었다. 얼굴 가득 미소를 만개한 그들이 소녀팬들처럼 우영을 둘러쌌다.
“어머어머, 네온 작가님. 저희 마지막 그림 봤어요.”
“진짜 너무 아름다워요. 장난 아니야. 이게 풍경화 같으면서도 팝아트 같고, 완전 인상주의 같은데 또 엄청 모더니즘답고⋯⋯.”
“맞아요. 이건 어떠한 미술 사조다, 설명할 수가 없어. 그냥 작가님 이름 따서 네온 사조라고 새로 만들어야 한다고요.”
“제가 감히 예상하건대, 사모님들 서로 사 가겠다고 한바탕 하실 거예요. 진짜로.”
“저 대출 받아서 사고 싶을 정도예요. 집 대신 작가님 그림에 몸을 묻고 싶어요.”
왁자지껄한 소음은 듣기 민망할 수준의 칭찬이었다. 우영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평소라면 푼수 같은 웃음을 지으며 몸을 비비 꼬았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우영이 잡다한 것이 올려진 간이 테이블에 커피를 내려놨다. 혹 찬바람에 식을까, 헐레벌떡 온 탓에 아직 따뜻한 커피였다.
“B. 저랑⋯⋯ 얘기 좀 해요.”
태블릿을 들여다보던 사현이 살포시 눈살을 구겼다. 우영의 목소리는 매우 낮은 편에 속한다. 그걸 은연중에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선연히 느끼는 건 처음이었다. 항상 말끝을 흐리거나, 나긋하거나, 희미한 웃음을 띤 채 말하기 때문이다.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한 사현이 큐레이터들을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다들 수고했어요. 퇴근해.”
“네? 벌써요?”
“왜? 싫어요?”
“아니요!”
급작스러운 퇴근 명령에 놀랐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망치를 두드리던 인부들도 싹 사라졌다. 전시장 안에는 금세 우영과 사현, 둘만 남았다.
사현이 우영이 사 온 커피 중 카페 모카를 집어 들었다. 한 모금 머금자 발끝까지 떨어졌던 당이 단숨에 채워졌다. 사현이 나른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뭐가 불만이야?”
사현이 커피를 홀짝이며 물었다. 단번에 속내가 꿰뚫린 우영이 흠칫거렸다.
“제가, 제가 전시회에 이러쿵저러쿵 말을 얹어도, 되나요?”
“그럼 네 전시회에, 너 말고 누가 이러쿵저러쿵해?”
“⋯⋯그, 전시회 콘셉트가 뭐예요?”
우영은 불만을 표할 때도 정중했다. ⋯⋯아니, 그냥 방법을 모르는 건가. 내내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가 전시회 오픈 세 시간 전에 와서 싫어, 마음에 안 들어, 안 해. 세 문장으로 모든 걸 작살내는 여타 작가들과는 달랐다.
우영의 질문에 사현이 그의 소맷자락을 끌고 전시회 입구로 향했다. 그곳엔 ‘NEON’이라는 이름이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고, 그 아래에는 우영의 것이 아니라, 네온의 것인 약력이 간단히 쓰여 있었다. 그리고 반대편엔 ‘새로운 밤’이라는 활자가 붙어 있었다. 쨍한 조명을 받고 있는 그 문장을, 우영은 꽤 오랫동안 응시했다.
‘새로운 밤’
새로운 밤이라⋯⋯. 곱씹으면 독특하긴 하다만, 한 번에 가슴 깊은 곳까지 파고드는 문장은 아니었다.
“이리 와.”
사현이 다시 우영을 잡아끌었다. 우영은 군말 없이 그를 따랐다. 두 사람은 아무것도 없는 벽을 바라보며, 마치 작품을 감상하듯 느긋하게 걸었다.
한참 머뭇거리던 우영이 찔끔, 불만을 내놓았다.
“저는 <갤러리 비>다운 전시를 기대했어요. 인사동이나 홍대에 널린, 무늬만 전시인 그런 조잡한 공간 말고요.”
“그러니까, 클래식 음악이 나오고 하얀 벽에 금빛 조명이 내리쬐는 그런 전시회?”
사현은 우영이 그리던 전시를 참으로 쉽게 묘사했다. 그의 말마따나, 우영은 막연히 <갤러리 비> 특유의 고급스럽고, 격식 있는 전시회를 상상했었다. SNS가 유행하면서 너도나도 사진을 찍기 위해 가는 뒤틀린 상업 공간이 아니라, 그림과 예술을 전시하고 심미를 나누는 공간을 바랐단 말이다.
그런데 네온사인이라니. 제 이름이 네온이라고 네온사인을 설치하는, 그런 일차원적이고 사현답지 못한 콘셉트라니. 이건 아니었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사현이 피식, 조소했다. 분명 조소였다.
“자기야. <갤러리 비>니까, 여기 걸어 놓으면 컬렉터들이 개떼같이 몰려와서 네 그림을 사 갈 것 같니?”
“⋯⋯.”
우영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개떼처럼 몰려와 그림을 사 간다’라. 그래,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제 첫 그림이 육천만 원에 팔렸으니까. 사현이 앞으로는 그것보다 더 높은 가격으로 팔아 준다고 했으니까. 그리고 이곳은 명성이 드높은 <갤러리 비>니까.
온갖 고상을 다 떨며 전시해 놓으면, 순식간에 솔드 아웃 되는 줄 알았다.
사현의 걸음이 멈춰 섰다. 벽에는 「3시」라 적힌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그림은 의식주처럼 필수품이 아니야.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소모품도 아니지.”
“⋯⋯.”
“명품 백 하나를 삼백만 원 주고 사는 건 그럴 수 있지만, 뭘 그렸는지도 모를 캔버스를 삼백만 원 주고 사는 건 이상한 일이거든. 삼백이 뭐야. 삼십도 아깝지.”
“⋯⋯.”
“아직 한국은 그래. 어쩌면 세계가 그럴 수도 있고.”
우영은 그의 말에 쉽게 공감할 수 있었다. 그림을 가족처럼 여기고 사는 저도, 당장 배가 고프고 입을 게 없는데 그림을 살 리 없었다. 하물며 돈을 좀 벌고, 알아주는 명품들을 전신에 걸치고 있어도 그림 한 점을 수백만 원씩 주고 사진 않을 것 같았다.
“자, 그럼 생각을 해 보자.”
사현이 마치 초등학생에게 설명하듯, 친절하게 단어를 이어 붙였다.
“<갤러리 비>에서는 일 년에 스무 개가 넘는 전시가 돌아가. 제1 전시관부터 제6 전시관까지 빠듯하게 돌리면 삼십 개도 가능하지.”
“⋯⋯.”
“전시 회당 작품이 서른 개라고 치자. 그럼 일 년에 작품이 몇 개나 나오니?”
우영의 손가락이 꼼실거렸다. 삼십 곱하기 삼십. 어렵지 않은 계산이었다.
“구백 개요.”
“그래. 구백 개야. 뭐⋯⋯ 잘 안 팔리는 공예, 설치, 미디어, 조각 같은 건 제외하고. 주로 거래되는 평면 회화만 해도 육백 개 정도거든?”
“네.”
“그게 다 팔릴 것 같니?”
“⋯⋯.”
“여기는 마트가 아니야. 백화점도 아니지. 마감 시간이 됐다고, 작년에 나온 거라고 떨이로 세일해서 팔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야.”
사현의 발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영이 한층 어두운 낯빛으로 그를 따라 걸었다.
일 년에 구백 개의 작품이 쏟아진다. <갤러리 비>에서 전시할 정도면 알아주는 작가들일 것이다. 엄청난 대가의 작품도 많겠지. 그들의 작품을 보기 위해 우영도 숱하게 이곳을 방문했었으니까.
그들과 같은 공간에 제 그림이 걸린다니.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영광과 감동보다 부담감과 부끄러움이 먼저 올라왔다.
우영이 침울에 물들어 가는데, 사현이 뒤를 돌아 그를 바라봤다.
“근데, 자기야.”
“네.”
“나는 네 그림 다 팔 거야.”
“⋯⋯.”
“두 번째 전시도, 세 번째 전시도. 다 팔 거야.”
그의 말엔 흔들림이 없었다. 미래에 있을 일임에도 불구하고,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어제 있었던 일을 반추하듯이 또렷하기까지 했다.
우영이 바지춤에 손바닥을 문질렀다. 배어 나온 땀을 닦기 위함이었다. 사현의 말은 몹시 힘이 세다. 신의 계시 같기도 하고, 또 다른 세계의 법 같기도 하다. 그래서 듣고 있으면 아, 그렇겠구나. 아, 그리 되겠구나. 아, 그렇고말고. 그런 절대적인 믿음이 생겼다.
“그러려면 네가 바라는 그 지루하고 고상한 전시회론 턱도 없어.”
사현이 생각만 해도 따분하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우영이 하지만, 하고 힘없는 반론을 준비했을 때였다.
“어⋯⋯.”
전시장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꼭 해가 뜬 것처럼. 눈을 크게 뜬 우영이 창밖을 살폈다. 밖은 여전히 검은 밤이었다. <갤러리 비>의 정원을 뜨문뜨문 밝힌 금빛 조명등만 반짝이고 있었다.
우영이 전시장 안으로 눈을 돌렸다. 네온사인이 꺼지고, 얼기설기 자리 잡은 조명이 켜져 있었다. 우영이 상상하던 전시장 특유의 백색등이었다. 사현도, 저도 건드린 게 없는데 왜⋯⋯.
“조명이⋯⋯ 고장 났나 봐요.”
우영이 검지로 천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얼이 빠져 있는지. 사현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아직 미완성인 전시장이라, 우영이 의도를 이해하지 못할 만도 했다.
“이것 봐.”
태블릿으로 동영상 하나를 켠 사현이 그것을 우영에게 내밀었다.
우영의 전시회를 3D로 만든 것이다. 전시의 시작부터 끝까지, VR처럼 관람객의 시야와 동선을 따라 제작한 하나의 시안이었다. 우영은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동영상을 응시했다.
“어때?”
영상이 끝났을 때, 사현이 자신 있게 물었다. 큐레이터 팀과 마케팅 팀, 그 누구도 감탄하지 않은 사람이 없던 시안이다. 우영 역시 그랬다. 그가 눈썹을 마구 들썩이며 동영상을 다시 재생시켰다.
“와⋯⋯. 어, 그러니까, 와⋯⋯. 꼭 다른 차원으로 가는 것 같네요.”
“네가 생각하는 조악한 전시회랑은 거리가 멀지?”
“네, 네. 너무 멋있어요.”
만면에 얼떨떨한 환희를 띤 우영이 감탄했다.
사현이 벽 위로 은은하게 뿜어지는 형광 빛에다 손을 집어넣었다. 그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삽시간에 빛에 물들어 축축해졌다.
어두운 밤에 번쩍이는 네온사인은 저마다 여기 좀 봐 달라, 비명을 지르는 것 같지만, 이렇게 순백의 벽과 만나면 활기찬 어린아이 같다. 우영의 그림은 그 천박함과 순수함의 간극에 있는, 새로운 빛이었다.
“갤러리는 박물관이나 미술관과는 달라. 걔들은 유물을 지키는 거대한 성벽 같은 느낌이잖아. 근데 갤러리는 상업적인 성격을 훨씬 많이 띤단 말이야. 여타 카페나 레스토랑처럼 개방되어 있고, 돈이 오고 가지.”
“⋯⋯.”
“그래서 갤러리는 세련되고, 유행을 선도하는 느낌이어야 해. 그럼 젊은 애들이 귀신같이 알고 오거든. 다, 미래의 고객들이지. 나이 많은 사람만 들락날락하면 갤러리의 이미지가 너무 고전화 되어 버려. 트렌디한 갤러리라는 이미지를 창조해야 해. 그러면서도 적당히 고지식해야 하기도 하지. 아주 비싼 돈이 오고 가니까.”
어려운 말이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기도 했다. 그래도 사현이 그렇다니까, 그런 것 같았다. 지금은 사현이 팥으로 메주를 쑤긴 개뿔, ‘사실 지구는 둥글지 않아. 평면도 아니고, 네모도 아니고, 세모야.’라고 해도 ‘그렇군요.’ 할 수 있었다.
“새로운 밤 전시는 더할 나위 없이 갤러리다우면서, 특별할 거야.”
“네. 그럴 것 같아요.”
우영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B 멋대로 하세요. 전시장을 씹어 먹든, 불을 지르든. 저는 뭐든 찬성하겠습니다. 그런 말이 혀끝에서 춤을 췄다.
“정말 특별할 거예요.”
이어지는 우영의 긍정에 사현이 어깨로 툭, 그의 팔뚝을 쳤다.
“내가 나 어쭙잖게 일 안 한댔지.”
익살맞은 음성엔 장난기가 가득했다. 안심에서 피어오른 장난기였다. 아무리 사현이라도, 불만 가득한 우영의 얼굴에 심장이 철렁했던지라. 늘 나사 하나 없는 것처럼 웃던 우영이 그러니 더 놀랐었다. 근데 이렇게 이해하고 공감해 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우영이 눈을 곱게 접으며 웃는 사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B.”
“어.”
“저는 전생에 무슨 착한 일을 했길래 B를 만났을까요?”
몹시 낯간지러운 소리였다. 사현이 그만두라는 듯 팔랑팔랑 손을 휘저었다. 감사 인사는 통장에 돈이 입금되고 나서 들어도 늦지 않았다.
“됐어. 소름 끼치니까 그런 말 하지 마.”
괜히 따갑게 대꾸한 사현이 뚜벅뚜벅 번잡한 전시장을 가로질렀다.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근데 어째 발소리가 하나다. 사현이 빙그르르 뒤를 돌았다.
태블릿을 든 우영이 또 동영상을 보고 있었다. 바뀌는 화면에 따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시안과 현실을 비교하기도 했다. 동그란 안경 너머의 눈빛이 진득하다.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직선으로 시선을 내리꽂는 모습이 제법⋯⋯ 프로 같기도 하고.
사현의 입술을 타고 비죽비죽 웃음이 올라왔다. 그러다 결국 참지 못하고 푸흐흐 바깥으로 흘려 버렸다. 우영이 의아한 눈빛으로 사현을 바라봤다.
“왜 웃으세요?”
“새삼 기특해서.”
“네?”
“네가 뭔가를 싫다고 말하는 게 처음이잖아.”
“⋯⋯.”
“애가 줏대도 없고, 멍하고, 말도 잘 못하고, 소심하고. 어디서 사기당하기 딱 좋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제 일이라고 할 말은 하는 걸 보니 다행이기도 하고⋯⋯.”
사현이 우영의 머리칼을 마구 흩트렸다. 복슬복슬한 곱슬머리라 강아지를 쓰다듬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제 집에 가자. 종일 서 있었더니 다리 아프다.”
사현이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 등을 돌렸다. 태블릿을 소중하게 끌어안은 우영이 냉큼 따라붙었다. 그리고 흘끔흘끔 사현의 옆모습을 훔쳐봤다. 이대로 집에 들어가면, 짧은 인사와 함께 각자의 방으로 헤어질 텐데. 아쉬웠다.
“어⋯⋯, B.”
“응.”
“김밥천국에 라면 먹으러 가실래요? 오늘은 제가 쏠게요.”
우영의 제안에 사현의 눈이 가늘게 좁아 들었다. 우영의 통장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 뻔히 아는데. 매번 커피를 사 오는 것으로 모자라 이제는 밥까지 사겠단다. ⋯⋯귀여운 놈.
흐음, 목으로 신음한 사현이 한쪽 눈썹을 들썩였다.
“그럼 나 제일 비싼 만두 라면 먹는다?”
“네.”
우영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현이 입맛을 다셨다. 뜨끈한 라면 국물과 탱글탱글한 면발을 떠올렸더니 잊고 있던 허기가 올라왔다. 집에서 끓여 먹는 건 김밥천국에서 먹는 맛이 안 난단 말이지. 특별한 비법이라도 있는 걸까.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는데, 우영이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B. 그거 아세요?”
“뭐?”
“김밥천국에 라면 토핑 추가돼요. 오백 원 더 주면 만두 라면에 치즈 추가할 수 있어요.”
“⋯⋯뭐야. 장난하지 마.”
“진짜예요. 떡도 추가돼요.”
사현이 허업, 헛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동그랗게 뜨인 눈매에 어찌나 놀라움이 가득한지. 고작 라면 토핑인데, 거나한 세상의 이치라도 깨달은 사람 같았다.
사현은 눈을 부릅뜬 채로 데구루루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다 하는 말이,
“햄 추가도 돼? 스팸이나 소시지 같은 거.”
였다. 우영이 웃음을 터트리며 사장님에게 물어보겠노라, 대답했다.
갤러리를 나오자 선선한 밤공기가 이마를 스쳤다.
새로운 밤.
그게 뭔지 알 것 같았다.
* * *
전시회 개막일이 이틀 남은 시점이었다. 하지만 사실상 오픈은 내일이었다. 개인 관람 겸 언론 관계자 관람, 그러니까 VIP만 따로 초청한 관람 행사가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우영은 어제부터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잠도 못 이루었다. 그래서 붕 뜬 시간을 그림을 그리며 보냈다. 마지막 그림이 <갤러리 비>로 배달된 후, 사현이 앞으로 일주일은 휴가이니 작업실엔 발도 들이지 말라 엄포를 놨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자꾸 그리고 싶은 게 떠오르는데 어쩌나.
사현은 아침마다 작업실에서 나오는 저가 못마땅한 듯했으나 딱히 말을 얹진 않았다. 지치면 알아서 쉬겠지, 하며 내버려 두는 것 같았다.
새벽 늦게까지 그림을 그리던 우영은 작업실 소파에서 쪽잠을 잤다. 자려고 한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그리됐다. 정오쯤 일어나서는 헐레벌떡 세탁소로 향했다. 이틀 전에 맡겨 둔 슈트를 찾아오기 위해서였다.
제인을 따라 경매에 갔던 날. 그 날 입었던 슈트였다. 우영이 비닐을 씌운 슈트를 뿌듯하게 바라봤다. 일 년에 한 번만 입어도 좋은데, 벌써 두 번째로 입을 일이 생겼다. 흥얼흥얼 절로 콧노래가 흘렀다. 혹시 몰라서 어제 운동도 좀 했는데. 가슴 근육과 팔 근육이 지끈지끈하게 땅기는 통각이 나쁘지 않았다.
옷걸이를 뒤로 멘 우영이 막 집 도어 록에 손을 올렸을 때였다. 띠리릭. 짧은 음과 함께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사현이었다.
“어, B. 이 시간에 왜⋯⋯.”
우영의 광대에 봉긋, 반가움이 차올랐다. 난데없이 등장한 큰 덩치에 눈썹을 들썩이던 사현이 서류 봉투 하나를 들어 보였다.
“놓고 간 게 있어서.”
“저 시키지. 집까지 오셨어요?”
“이걸 왜 너한테 시켜? 네가 내 비서야, 아니면 하인이야?”
사현이 콧잔등을 구겼다. 선의를 건넸다가 꾸지람을 들은 우영이 어깨를 오그렸다. 그 모습이 어찌나 청승맞은지. 사현이 아무렇게나 내려온 우영의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너는 내 파트너야. ‘을’이 아니고.”
“⋯⋯네.”
파트너. 그것 참 좋은 어감을 가진 단어다. 우영이 그의 말을 곱씹으며 히죽 웃는데, 문에 기대선 사현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는 넌. 어디 다녀와?”
“옷 찾으러요. 내일 입고 갈 거 드라이클리닝 맡겼었거든요.”
우영이 칼 주름이 바짝 선 슈트를 흔들었다. 사현이 게슴츠레하게 눈을 떴다.
“그거 경매 때 입었던 옷 아니야?”
“네, 맞아요.”
우영이 기억해 줘서 기쁘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나 사현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못했다.
“그걸 또 입게?”
“네.”
우영이 뭐가 문제냐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정말 멋진 슈트였다. 마음 같아선 종일 입고 싶었다. 근데 차마 닳을까 봐, 입어 보지도 못했다. 요즘 잘 먹어서 몸이 좀 커졌는데, 맞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하던 참이었다. 조심히 입어 보고 세탁소에서 해 준 그대로 걸어 놔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집에 왔다.
사현이 우영의 손에 들린 슈트를 채 갔다. 그리고 문 안으로 대충 던져 넣었다. 우영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다행히 그대로 떨어져서 구겨진 부분은 없는 듯했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우영이 여자 주인공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지는 남자 주인공처럼 집안으로 뛰쳐들어가려 했다.
“따라와.”
사현이 우영의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그리 센 힘이 아니었음에도 우영은 그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문이 닫힌다. 그 틈으로 보이는 슈트가 이렇게 나를 버리는 거냐고 울부짖는 것 같았다. 우영이 아련한 눈빛으로 슈트를 바라봤다.
사현이 우영을 끌고 온 곳은 명품샵이었다. 번쩍번쩍한 인테리어에, 푹신하고 보드라운 카펫. 불쾌하지 않은 섬유 냄새 위로 흐르는 은은한 선율. 벽 한쪽을 채운 큼지막한 그림. 옷가게라기보다는 또 하나의 전시장 같은 공간이었다.
그 묵직한 분위기에 짓눌린 우영이 숨을 안으로 말아 먹었다. 반면에 사현은 제집처럼 성큼성큼 매장을 가로질렀다. 그의 뒤로 매장 직원 셋이 따라붙었다. 제법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걸 보아하니, 사현이 자주 오는 곳인 듯했다.
“B, 이번 시즌 제품은 저번에 오셨던 이후로 더 들어온 게 없는데요.”
그중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여자 점장이 난처하다는 듯 눈썹을 팔(八)자로 구겼다. 사현이 가지런하게 걸린 슈트 재킷들을 들추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 말고, 저기 키 큰 애요.”
졸지에 ‘키 큰 애’가 된 우영이 몰아치는 시선들을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아, 점장이 짧게 감탄했다. 그러더니 뒤에 선 직원들에게 무어라무어라 명령했다. 그러자 그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사현이 눈에 걸리는 재킷을 툭툭 집어 남자 직원의 팔에 얹었다.
“당장 내일 입을 거라 슈트 맞출 시간이 없어서 왔어요.”
“내일 전시회 오픈 행사에서 입으시게요?”
“네. 전시장이 어두워서 클래식한 거 말고, 패턴이 좀 들어간 거로 봤으면 좋겠는데.”
그 후로 그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주고받았다. 우영은 이따금 사현이 옷을 대 보는 마네킹 역할에 충실했다.
사현이 디자인을 고르면, 직원들은 눈대중으로 우영과 맞는 사이즈를 찾아 왔다. 그중 반은 장대한 우영의 덩치를 따라가지 못해서 나머지 반만 살아남았다. 사현은 그 슈트들과 어울릴 만한 구두도 쏙쏙 골라냈다.
“입고 와.”
삼십 분 정도 분주하게 돌아다녔을까. 사현이 우영을 보며 피팅 룸을 가리켰다. 우영이 얼떨떨한 낯으로 직원이 내민 와이셔츠를 받아들었다. 손가락에 감기는 천이 사각사각 기분 좋게 부서졌다.
“애가 아직 서툴러서 그런데, 피팅 좀 도와 줄래요?”
사현이 남자 직원에게 부탁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남자 직원이 빙긋 웃으며 피팅 룸 문을 열었다.
“저, 저 혼자 할 수 있어요.”
우영이 다급하게 사현을 바라봤다. 어린애도 아니고. 엄청나게 특이한 옷도 아니고. 손가락만 달려 있으면 얼마든지 입을 수 있는데. 시중을 받을 필요는 없었다.
“내가 시간이 없어. 전시회 리플릿 검토하러 가 봐야 한단 말이야. 빨리 다녀와.”
사현이 손목시계를 보며 미약하게 짜증이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우영이 입을 딱 다물고 바쁘게 피팅 룸으로 들어갔다. 타인에게 맨몸을 보이는 것보다 사현의 짜증이 더 무서웠다.
큼지막한 쇼핑백을 다섯 개나 든 우영이 허옇게 질린 얼굴로 집에 들어섰다. 짐을 곱게 바닥에 놓아두고 소파에 쓰러지듯 엎어졌다. 사현은 바쁘다며 집 앞에 내려 주더니 휙 사라져 버렸다.
“하아⋯⋯.”
고작 한 시간 반 외출했을 뿐인데 열여덟 시간 동안 쉬지 않고 그림을 그린 것처럼 진이 빠졌다. 한참 멍하니 있던 우영이 고개를 돌려 유명 명품 로고가 멋들어지게 박힌 쇼핑백을 바라봤다. 그리고 여태 현관에 졸도해 있는 헌 슈트로 시선을 옮겼다.
제 팔자에 슈트가 하나도 아니고 두 벌이나 생겼다.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비싼 것으로 두 벌. 타이와 구두, 그리고 셔츠는 덤이다.
근데 어째 기쁘지가 않다. 무엇 하나 제 돈으로 산 게 없어서 그런 걸까. 우영의 얼굴이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그때, 주머니가 우웅 진동했다.
우영이 허겁지겁 핸드폰을 꺼냈다. 제게 연락 올 이라곤 사현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사현의 이름과 함께 자그마한 메시지가 떠 있었다.
[괜히 옷 들춰보지 말고, 걸어놓기만 해.]
[그리고 일찍 자.]
그다지 웃긴 메시지도 아니었거늘, 우영이 히죽 바보같이 웃었다. 그가 토독토독 아직 적응하지 못한 키보드를 서툴게 두드렸다. 만들어지는 활자를 따라 입술이 벙긋벙긋 함께 움직였다.
[네. B는 언제 오세요?]
답은 금방 왔다. 늘 그렇듯, 매우 짧은 답이었다.
[늦게.]
우영이 입술을 삐죽였다. 늦는구나. 오늘은 더 못 보겠네. [네, 알겠어요.] 마침표까지 꾹꾹 눌러서 메시지를 보낸 우영이 길게 기지개를 켰다. 아마 답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가 핸드폰을 소파에 내려놓으려 할 때였다. 우웅, 다시 진동이 울렸다.
[아, 밥 먹고 자.]
우영의 입가에 비싯 미소가 피어났다. 몇 안 되는 활자를 세 번이나 읽었다. 그리고 쭉쭉 메시지 창을 위로 올려 여태껏 사현과 주고받은 메시지를 복습했다. 금세 십 분이 지났다.
우영이 흐으읍,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몸을 일으켰다. 옷 걸어 두기. 밥 먹기. 일찍 자기. 사현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서였다.
* * *
다들 한 번씩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소풍 가기 전날. 아니면 여행가기 전날. 설레느라 새벽까지 뜬 눈으로 있던 경험. 그래서 정작 일어나야 할 시간에 비척비척 침대를 뒹굴던 경험.
헌데 우영은 그보다 더했다. 애당초 행사가 저녁에 시작되기에 창밖으로 해가 떠오르는 걸 보면서도 그는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사현이 사 준 핸드폰은 알람이 아주 쩌렁쩌렁해서 깨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안일한 생각을 하며 곯아떨어졌다.
“자기야.”
“⋯⋯.”
“자기야.”
“⋯⋯.”
“서우영.”
“⋯⋯.”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몸이 흔들렸다. 서울에 이런 지진이라니. 이럴 땐 얼른 책상 아래로 들어가야 하는데. 근데 책상이 어디 있더라. 아, 내 방에 책상 없지. 우영이 잠결에 어디선가 들었던 지진 대피 요령을 떠올렸다.
“야, 서우영!”
그러다 쩌렁쩌렁한 고함이 귓구멍을 후려치는 순간, 번쩍 눈을 떴다. 눈앞엔 호랑이처럼 무서운 얼굴을 한 사현이 있었다. 아직 수면에 잠긴 뇌가 현실과 몽중의 구분을 힘겨워했다.
“어⋯⋯. B?”
사현이 왜 제 방에 있지. 그는 자신의 공간을 철저히 구분하는 만큼, 우영의 공간에도 절대 발을 들이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이 이사 온 첫날 집을 소개해 준 이후로 처음이었다.
“내가 일찍 자라고 했지? 전화는 왜 안 받아?”
“⋯⋯.”
“내가 보모도 아니고. 바빠 죽겠는데 너 깨우러 여기까지 와야 하니?”
사현이 자못 음산한 목소리로 우영을 꾸짖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우영이 벌떡 일어났다.
“며, 몇 시예요?”
“네 시.”
그 말에 우영이 까치집이 된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전시 오픈 시간은 일곱 시. 그렇게 늦은 시간은 아니었다. 그래도 원래 일어나려 했던 시간은 두 시였는데. 일찍 가서 전시회도 둘러보고, 큐레이터 팀이랑 이야기도 나누고, 그러려 했는데. 다 어그러졌다.
“씻고 와.”
사현이 툭툭 우영의 등을 두드렸다. 우영이 “네!” 고함치듯 대답하며 후다닥 욕실로 향했다.
“렌즈도 끼고 나와!”
사현이 그런 우영의 등 뒤로 소리쳤다.
우영이 씻는 동안 사현은 슈트를 꺼내고, 2층에서 왁스를 비롯한 이것저것을 들고 왔다. 그리고 욕실에서 나오는 우영을 낚아챘다. 그대로 그는 몹시 능숙한 손길로 우영을 꾸미기 시작했다. 곱슬머리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드라이를 하고, 왁스도 발랐다.
우영이 거울 너머로 분주한 사현을 구경했다. 정말 B는 못 하는 게 없구나. 신기하다 못해 경이로웠다.
“이런 거 안 해도 되는데⋯⋯. 어차피 저 아무도 모르잖아요.”
네온은 아무런 정보도 공개되지 않은, 신비주의 콘셉트의 작가다. 실명도, 이름도, 하물며 성별도 없다. 그래서 오늘, 우영은 주인공이지만 주인공이 아니었다. 그저 한 명의 관람객으로 참가할 뿐이었다. 고급 슈트를 새로이 사고, 머리를 만지며 꾸밀 필요가 없단 말이다.
사현이 툭, 우영의 코끝을 건드렸다.
“네가 알잖아.”
“⋯⋯.”
“나도 알고.”
“⋯⋯.”
“이 전시회는 네 전시회야. 그러니까 멋있게 하고 가.”
사현이 거울 너머로 우영과 눈을 맞췄다. 잠깐 멍하니 굳어 있던 우영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전시회. 아무도 몰라서 조금 섭섭했는데. B가 안다니 세상 사람들이 다 몰라도 상관없어졌다.
우영이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러자 사현이 쓰읍, 혀를 끌며 어깨를 내리눌렀다. 한참 조물조물 머리칼을 만지던 그가 우영의 눈을 손으로 가리고 스프레이를 뿌렸다. 새큼한 스프레이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사현이 마지막으로 우영의 여기저기를 살피며 말했다.
“주의사항 읊어 봐.”
그 말에 우영이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잘 훈련된 로봇처럼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첫째, B에게 아는 척하지 않기. 둘째, 네온임을 티 내지 않기. 셋째, 멍청하게 서 있지 말기. 넷째, 누가 물으면 공부하는 학생이라고 대답하기.”
몇 번이나 되뇌었던 주의사항이다. 며칠 전부터 사현이 눈을 부라리며 단속한 탓에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가장 중요한 건?”
“가장 중요한 건⋯⋯ 누가 그림에 대해 안 좋은 소리를 해도 못 들은 척하기. 그건 콜렉터가 그림을 독점하기 위해 거짓말하는 거니까. B의 안목이 틀릴 리 없으니까. 전시장에 걸린 네온의 그림은 모두 멋진 그림이니까.”
“좋아.”
사현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화장대 구석에 두었던 손바닥만 한 박스를 가지고 왔다. 우영도 알 만큼 유명한 브랜드의 시계였다. 미끈한 은색 바디에 연한 하늘빛이 감도는 시계.
“이거 차.”
사현이 시계를 내밀었다. 눈을 크게 뜬 우영이 두 손을 마구 흔들었다.
“괜찮아요. 이거는 너무 비싸잖아요. 자꾸 B한테 받기만 해서⋯⋯.”
“누가 준대? 이거 내 거야. 한정판이라 다시 사지도 못 해. 곱게 차고 곱게 다시 가져와.”
사현이 무슨 그런 소리를 하냐며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싫다며 거절하는 우영에, 사현은 손수 그의 손목에다 시계를 채웠다. 뼈대가 굵은 우영의 손목과 참 잘 어울리는 시계였다. 사현이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우영이 물끄러미 시계를 내려다봤다. 시계는 무거웠다. 이런 걸 종일 차고 있으면 손목이 빠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런데도 그 무게가 나쁘지 않았다. 차가운 온도도, 매끈한 질감도 좋았다. 괜히 어깨가 위로 치솟았다.
사현이 그런 우영의 팔뚝을 툭 쳤다.
“다음 전시회엔 네가 네 돈으로 산 시계 차. 이런 거 열 개는 살 수 있을 만큼 돈 벌어다 줄 테니까.”
그 말에 잠깐 버석하니 굳었던 우영이 고개를 주억였다.
“⋯⋯네.”
하루에도 몇 번씩 느끼는 거지만, 사현은 정말 멋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좋았다.
자꾸, 좋아졌다.
* * *
오늘의 <갤러리 비>는 평소와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입구로 향하는 오르막부터 사람이 북적북적했다. 줄줄이 늘어선 차가 어찌나 번쩍번쩍한지. 갤러리가 아니라 호텔 같았다.
안면을 튼 큐레이터가 말하길, 밤에 오픈 행사를 하는 건 처음이랬다. 보통은 오후 한두 시쯤에 하니까. 하지만 전시회 주제가 ‘새로운 밤’이기도 하고, 작가 특색이 밤에 두드러져서 밤에 하게 됐댔다. 그래서 꼭 일이 아니라 클럽에 놀러 가는 것 같다며 꺄르르 웃었는데.
클럽이라. 우영이 무심결에 넥타이를 끌었다가 다시 옥좼다. 타이를 맬 줄 몰라 사현이 묶어 준 대로 걸치고 온 거였다. 흐트러지면 낭패였다.
갤러리가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쿵쿵쿵 거칠게 뛰었다. 자꾸 목이 마르고, 시선이 요동쳤다.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어떻게 봐도 수상한 모양새였다. 그것을 퍼뜩 깨닫고 앞만 직시했다.
행사가 시작된 지 삼십 분가량이 지난 갤러리의 로비는 그다지 붐비지 않았다. 아마 대부분 전시장 안에 있으리라.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우영이 빙그르르 몸을 돌리며 사위를 훑었다. 며칠 전에도 왔었는데, 그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낯설었다.
사현은 우영에게 삼십 분에서 한 시간 정도, 적당히 늦게 올 것을 명령했다. 쓸데없이 일찍 와서 어색하게 여기저기를 헤집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런데도 우영은 자꾸 옆으로 새는 시선을 막을 수가 없었다.
사현은 어디 있을까. 누구와 대화하고 있을까. 우영이 큰 키를 이용해 멀찌감치 있는 제1 전시실, 즉 네온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을 공간을 살펴보려 했다. 그때,
“우영 씨.”
익숙한 음성이 그를 막아섰다. 자색 슈트를 입은 제인이었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우영이 꾸벅 허리 숙여 인사했다. 제인이 덩달아 가볍게 묵례했다. 그러더니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전시 축하드려요, 작가님.”
혹여 누가 들을까, 작게 흘러온 축하 인사에 우영이 빙긋 웃었다.
“고맙습니다.”
함께한 시간이 많아질수록 느끼는 거지만, 제인은 참 친절한 사람이다. 딱딱하고 냉소적이었던 첫인상과는 사뭇 달랐다. 뭣 모르는 우영이 귀찮을 만도 한데 언제나 평이하고 나직한 음성으로 설명해 주는 것도 그렇고, 이렇게 먼저 와서 인사해 주는 것도 그렇고. 일할 때는 또 칼 같은데, 섬세하기도 하고. 여러 면에서 사현에게 참 잘 어울리는 비서였다.
다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 제인이 무례하지 않은 선에서 우영을 위아래로 훑었다.
“B 작품이죠?”
“뭐가요?”
“오늘 우영 씨 스타일이요.”
“어⋯⋯. 그렇게 티 나요?”
“네. 멋지네요.”
우영이 쑥스럽다는 듯 콧잔등을 긁었다. 멋지다는 칭찬은 들어도 들어도 수줍다. 사현과 함께 갔던 명품 샵의 직원들도 멋지다고 해 줬는데. 입에 발린 소리임을 알지만 좋은 건 좋은 거였다.
그런 우영을 바라보던 제인의 눈가가 살짝 일그러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B랑 많이 친해지셨나 봐요.”
“⋯⋯저요? 제가 B랑요? 어⋯⋯. 글쎄요⋯⋯.”
우영이 모호한 낯으로 고개를 뒤틀었다. 친해졌다, 라. 우영이 판단하기에 자신과 사현은 아직 ‘아는 사이’에 불과했다. 무언가 조금, 아주 조금 달라진 것 같긴 한데 말로 형용하기 힘들었다. 제 협소한 인맥에 ‘아는 사이’를 넘어선 이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음⋯⋯. 그래도 파트너라고 해 줬으니까 친해진 건가. 우영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고 있으니 제인이 슬쩍 말을 얹었다.
“보통 B는 작가가 거지꼴을 하고 오든, 홀딱 벗고 오든 그다지 신경 쓰지 않으시거든요.”
“하지만 저번에도 실장님한테 저 맡기셨잖아요.”
“그러니까요. 그땐 저한테 맡기셨었는데.”
“⋯⋯.”
그 말에 우영이 눈을 부릅떴다. 그러게. 그땐 제인이 왔었지. 우영이 비로소 과거와 달라진 점을 깨달았다. 가슴께가 크게 부풀었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무언가가 몽글몽글하게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우영이 커다란 손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슥슥 문질렀다.
“바쁜 와중에 왜 집엘 들르겠다 하셨었는지, 이제 알겠네요.”
제인이 붉은 입술을 당기며 미소 지었다. 우영이 그녀를 따라 웃었다.
제인이 우영을 전시실로 이끌었다. 우영이 볼 안쪽을 잘근거리며 그녀를 뒤따랐다.
우영의 전시는 여타 전시들과 달리 입구가 매우 좁았다. 건장한 성인 남성, 그러니까 우영이 간신히 고개를 숙이지 않고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보통 전시장은 아치형 문으로 이루어져 있거나, 그저 뻥 뚫려 있거나, 아니면 바깥의 빛을 차단하기 위해 미로처럼 좌우로 몇 번 꺾어 들어간다. 그런 면에서 새로운 밤 전시는 입구부터 아주 독특했다.
좁은 입구는 길기까지 하다. 대략 스무 걸음 정도 걸어야 끝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인간을 위한 터널 같은 모양새였다.
터널 안은 각양각색의 형광 빛이 쏟아졌다. 벽과 벽 사이에 숨은 네온사인이 기묘하게 일렁이는데, 우영은 이 부분을 시안으로 봤을 때, 사현과 큐레이터 팀이 만든 또 하나의 예술이라 생각했다.
덕분에 우영의 전시는 평면 미술임과 동시에 설치 미술이 됐다.
입구를 걷고 있으면 그 신기함에 저절로 웃음이 차오른다. 앨리스가 떨어진 구덩이 같기도 하고, SF영화에서 나오는 외계 우주선에 오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렇든, 저렇든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길임은 확실했다.
터널의 끝엔 여닫이문이 하나 있다. 손잡이 없이 밀어서 여는 것이었는데, 그 문틈으로 미약한 음악이 흘러왔다. 우영의 목울대가 아래위로 거칠게 움직였다. 이 문을 열면 무엇이 절 기다리고 있으려나, 기대가 마구 팽창했다.
우영은 다른 관람객들이 그랬듯, 마른침을 삼키며 문을 열었다. 이마 위로 은은한 형광 빛이 떨어졌다. 터널만큼 쨍한 빛은 아니었고, 나른한 오후 햇살과 닮은 연한 빛이었다.
매끈한 나무 바닥, 일정한 간격을 가지고 뜨문뜨문 걸린 그림, 베이스 음이 묵직한 음악, 그림을 내리쬐는 스포트라이트 등등의 모든 요소가 ‘전시회’라 칭하기에 부끄러움이 없었다.
며칠 전 우영이 봤던 미완성의 전시장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여기저기 네온사인이 조악하게 나와 있을 줄 알았는데, 사현은 똑똑하게도 벽의 높낮이를 이용해 그것을 숨겨 놨다. 관람객이 볼 수 있는 건 바닥 아래에서 또는 천장에서 희미하게 뿜어지는 형광이 다다.
우영이 빠끔 입을 벌린 채 전시장을 훑어봤다. 사람들이 들어찬 전시회는 생동감이 넘쳤다. 그 누구도 입을 꾹 닫은 채 기하학적인 그림을 이해하는 척, 진중함을 연기하고 있지 않았다. 모두 입가에 웃음을 띤 채 그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림의 색, 주제, 분위기 등이 다양한 단어로 피어올랐다. 기자나 평론가로 보이는 사람들은 조용히 사진을 찍어 댔고, 여기저기 흩뿌려진 도슨트와 큐레이터들의 입술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아⋯⋯.”
우영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씹었다. 아무도 저를 모르는데. 저는 여기에 없는 사람인데. 그런데도 이곳의 주인공은 더할 나위 없이 자신이었다.
감히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벅차올랐다. 목젖이 뜨끈해졌다. 주책없이 눈알이 홧홧해져서 질끈 눈을 감았다가 떠야 했다.
반지하 방에 처박혀 있던 그림이 타인의 시선 아래에서 반짝이고 있으니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저만 보고 저만 아는 그림이었는데. 그래서 죽어 있던 그림이었는데. 남이 봐 줌으로써 살아나는 듯했다.
제인은 우영이 전시실을 둘러보는 동안 별달리 말을 걸지 않았다. 그가 오롯이 감상하고, 경험하고, 감동할 수 있도록 방목했다. 사현이 그러라 명령했으니까. 사실, 사고 치지 않도록 옆에 붙어 감시하라는 뉘앙스가 더 세긴 했다.
우영은 그림 하나하나를 아주 오랫동안 바라봤다. 다 제 손이 탄생시킨 것인데, 이렇게 멋지게 걸려 있으니 낯설고 새로웠다. 주변 사람들이 무어라무어라 그림을 평가했는데,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꼭 얇은 막이 자신과 그림을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우영은 긴 시간을 들여 전시를 관람했다. 마침내 마지막 그림 앞에 섰을 때였다.
전시장이 환하게 밝아졌다. 네온사인 특유의 빛이 싹 걷히고 하얀 빛만 들어찼다. 사람들이 저마다의 감탄사를 내놓았다.
일정한 시간마다 바뀌는 조명은 사현이 의도한 것이다. 사람들의 발걸음을 잡아 두기 위해서. 그림은 주변 환경에 몹시 민감하다. 벽의 색, 함께 배치된 가구, 조명 등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했다. 뭉그러진 빛 아래에서 그림을 보다, 환한 빛에 드러난 그림을 보면 또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작가의 붓 터치가 훨씬 세세하게 보이고, 특유의 색감이 도드라지며 그걸 보고 있는 관람객의 시야와 감정 역시 달라졌다. 그럼 자연히 발걸음이 다시 뒤를 도는 것이다. 놓친 게 있을 것 같다는 불안감. 더 많은 걸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이 동시에 몰아쳤다.
아니나 다를까. 우영과 함께 마지막 그림에 서 있던 사람들이 그림을 거슬러 가기 시작했다. 뒤바뀐 흐름을 목도한 우영이 씨익, 입꼬리를 당겼다.
역시, 사현은 멋있다. 어떻게 이런 걸 생각하고 예상해서 현실로 만들어 낼 수 있을까.
뒤늦게 사현을 떠올린 우영이 뒤꿈치를 들썩였다. 그림에 홀려 여기까지 오면서도 사현의 머리털 하나 보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제인도 어느샌가 사라졌다. 중후반쯤, 누군가를 만났던가, 일하러 간댔나. 무어라 하긴 했는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우영이 조심조심 사람들 사이를 헤쳤다. 분명 어딘가에 사현이 있을 텐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평균 키인 그라 쉽게 발견할 수 없었다.
메인 홀에 들어선 우영이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쉴 때였다.
“젊은 애들이나 좋아하는 색이 이렇게 매력적인 줄 몰랐어. B 덕에 좋은 걸 알아 가네.”
익숙한 이름이 귓구멍을 파고든 건.
우영이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신사 한 명과 그렇게 찾던 사현이 있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사현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우영이 꾹 주먹을 말아 쥐었다. 사현에게 다가가지 않기 위해서였다. 아는 척하지 않기. 사현이 주의하라 몇 번이나 언급하던 것이다. 괜히 들쑤셨다가 저가 네온인 게 밝혀지면 큰일이었다.
우영은 멀찌감치에서 신사와 사현을 뒤쫓았다. 그 두 사람은 아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장내가 시끄러운 탓에 모두 들리진 않았으나 무엇을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사현은 관객을 부드럽게 작품 안으로 끌어들였다. 달달 외운 지식을 읊는 도슨트와 달리, 그는 되묻기를 많이 했다. 노골적으로 그림의 구매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어떤 것 같습니까? 무엇을 그렸을까요? 아, 하늘이요? 그럼 노을일까요? 오, 해가 뜨는 걸 그렸을 수도 있겠네요. 맞아요. 구름 사이에 걸린 해는 일몰보다는 일출이 어울리네요. 역시 그림 보는 눈이 있으시네요, 등등.
사현이 질문할 때마다 관람객은 그림을 보고 또 본다. 그렇게 그림을 이해하고, 정을 붙이고, 자신만이 이 그림을 오롯이 감상할 수 있을 것 같고, 끝내는 사랑에 빠지게 됐다.
사현이 말하길, 풍경화는 고리타분하지만, 스테디셀러랬다. 고리타분하고 클래식하기 때문에 스테디셀러일 수 있댔다. 뜻을 알 수 없는 기하학무늬에 추상성이 요동치는 현대 미술과 달리 누구든 쉽게 접근하고 간단히 감상평을 내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이 쉬워지면 사랑하기도 쉬워진다. 사현은 그걸 알았다. 짐작한 대로, 신사가 그림 한 점을 찍으며 가격을 물었다. 그러자 사현이 눈썹을 살짝 어그러트렸다.
“어쩌죠, 회장님. 아쉽게도 이번 전시는 이미 솔드 아웃입니다.”
“저런⋯⋯. 내가 그림에 홀려서 미쳐 구매를 생각하지 못했네⋯⋯. 감상하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을 썼어.”
신사가 낭패라는 듯 입맛을 다셨다.
“송구합니다.”
사현이 덩달아 아쉬운 얼굴을 해 보였다. 어딘가 가면 같은 표정이었다. 신사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괜찮네. 그림에 빠져서 돈 쓰는 걸 잊은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 뭐, 원래 그림이란 게 돌고 돌아서 비싸게 사는 맛 아니겠나.”
그가 껄껄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그러자 사현이 살짝 허리를 숙이고 큰 비밀이라도 전하듯 속삭였다.
“내년에 두 번째 전시회가 있을 예정입니다.”
“오, 그래?”
“네. 그때는 제가 몰래 회장님에게만⋯⋯.”
신사와 사현이 멀어졌다. 우영이 그들을 따라 발을 옮겼다.
멀리서 보는 사현은 평소와 조금 달랐다. 옆 사람이 수시로 바뀌고, 가끔은 여러 사람에 둘러싸이고, 평론가나 기자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특유의 꼿꼿한 자세로 조곤조곤 되받아쳤다.
조명 아래에 있으니 그의 하얀 피부가 더욱 도드라졌다. 기다란 속눈썹 아래에 드리우는 그림자가 매력적이다. 달싹이는 입술은 무슨 단어를 내뱉든 크게 벌어지는 법이 없다. 이따금 웃을 때마다 봉긋 솟아오르는 광대가 찬란했다.
우영은 사현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모두 자신의 그림을 감상하고 있는데, 저만 사현을 감상하고 있었다.
참 좋은 전시였다.
* * *
한참 전시장을 나돌던 우영이 출구로 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림도 충분히 구경했고, 사현도 충분히 구경했고. 이만 집에 가도 될 성싶었다. 가서 씻고, 사현이 집에 오면 거나하게 라면을 끓여 바치겠노라 계획을 세운 상태였다. 네이버는 모르는 게 없으니 김밥천국 라면 레시피를 검색하면 알려 주지 않을까.
우영이 핸드폰으로 레시피를 뒤적이며 출구로 향할 때였다.
“서우영?”
누군가가 그를 부른 것은. 우영이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교수님?”
익숙한 얼굴이 서 있었다. 한 손에 샴페인 플롯을 든, 교수였다. 대학 시절 하루를 멀다고 마주했던 회화과 교수. 언젠가 제 그림이 너무 싼 티 난다며, 못된 말을 일삼았던 그 교수. 눈을 동그랗게 뜬 우영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
안 본 지 얼마나 됐지. 2년? 3년? 그다지 긴 시간도 아닌데, 교수는 많이 변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늙었다는 말이 맞겠다.
키도 좀 작아진 것 같고, 볼록 튀어나온 배를 제외한 팔다리, 그리고 볼이 홀쭉하게 얇아져 있었다. 어딘가 펑퍼짐한 슈트도 그다지 본새가 나지 않았다. 다만, 눈매는 여전히 가늘게 째져 있었다. 우영의 어깨가 속절없이 움츠러들었다.
“어떻, 어떻게⋯⋯.”
우영이 말을 더듬었다. 저 사람에게 초대장이 갔나? 그만큼 대단한 사람이었나? 안 본 사이에 저명한 평론가가 되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돈을 왕창 쓰는 애호가나 컬렉터가 됐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버석하니 굳어 있는 우영 대신, 교수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이야.”
“⋯⋯네.”
우영이 께름칙한 티를 숨기지 못한 채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작고, 마르고, 주름이 많고, 딱딱한 손이었다. 기분이 묘했다. 교수의 손을 잡는 건 대학 생활 4년, 군대를 포함해 6년이라는 시간 동안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까.
“어떻게 오셨⋯⋯어요?”
“초대장이 와서.”
“초대장이요?”
우영이 눈을 가늘게 찢었다. 정말 안 본 새 유명한 사람이라도 된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위가 시큰거렸다. 속된 말로 배알이 꼴린 것이다.
“나는, 우영이 네가 이렇게 성공할 줄 알았다. 나는 알았어.”
교수가 잔주름이 가득한 눈을 휘며 말했다. 우영은 하마터면 ‘지랄하네.’라며 입에 잘 담지도 않는 욕을 지껄일 뻔했다.
교수는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없는 척을 하는 건지 썩 반가운 표정을 지속했다. 그가 붕붕 우영의 손을 흔들었다.
“첫 전시가 <갤러리 비>라니. 허, 참. 우리 학교에서 이런 인재가 났어.”
“아⋯⋯, 네⋯⋯.”
살풋 미간을 좁힌 우영이 은근히 교수를 구석으로 몰았다. 그와 나누는 대화가 타인의 귀에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아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교수로 인해 제 전시회가 어그러지는 건, 사현의 의도가 무너지는 건 끔찍하리만큼 싫었다.
교수를 벽 쪽에 가두고, 커다란 키를 이용해 그를 가리고 선 우영이 코로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조용히 퇴장해 주려나, 고민하는데 교수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근데 이름이 네온이 뭐냐? 약력에 우리 학교도 없더만. 모름지기 한국 작가면 이름이랑 대학교가 쓰여 있어야지. 괜히 겉멋만 들어서는⋯⋯.”
교수가 못마땅하다는 듯 눈을 흘겼다. 쿰쿰한 입 냄새에 우영이 볼 안쪽을 세게 깨물었다. 사현의 집에 들어선 이후로 만났던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멋졌는데. 사현도, 제인도, 큐레이터 팀도, 고객 지원 팀도. 모두 예술계에 몸담고 있음이 가감 없이 드러날 정도로 멋졌단 말이다. 근데 이 세계에 오래 있었을 교수는 왜 이럴까. 흐르지 못해 썩은 물 같았다.
“아⋯⋯. 그게⋯⋯. 어쩌다 보니⋯⋯.”
우영이 검지로 목 칼라를 당겼다. 숨이 막혔다. 회화 수업 당시의 상황이 마구 몰아쳤다. 교수의 비아냥 섞인 말과 웃는 동기들, 자꾸 수그러드는 자신의 고개, 콧구멍을 찌르는 역한 유화 기름 냄새. 그 모든 게 숨통을 옥죄었다. 그런데도 나불거리는 교수의 입은 쉼이 없었다.
“프랑스는 또 언제 갔어? 네 소식은 전혀 듣질 못했구나. 다른 애들은 종종 들러서 인사도 하고, 요즘 하는 일도 알려 주고, 선물도 가져오고 그러던데.”
“아, 네⋯⋯.”
“그래도 내가 교수니까 그림 한 점은 사 가야겠지? 아, 뭐 네가 선물해 준다면 굳이 거절은 안 하마.”
교수가 관리되지 못해 삐죽삐죽 모나게 자란 눈썹을 들썩였다. 어찌나 탐욕 가득한 얼굴인지. 그가 든 샴페인이 출렁거렸다. 일렁거리는 액체. 톡톡 튀는 탄산. 그것을 보고 있자 멀미라도 하듯, 속이 메슥거렸다. 우영이 손톱으로 손바닥을 꾹꾹 짓누를 때였다.
“이거 어쩌죠. 팔 그림이 없는데.”
익숙한 음성이 우영과 교수 사이를 가로지르고 들어왔다. 사현이었다. 화들짝 놀란 우영이 자신도 모르게 교수를 등 뒤로 숨겼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자신의 치부를 덮으려 했나. 아무래도 반짝반짝한 사현에게 드러내기엔, 너무 못난지라.
그러자 사현이 우영의 팔꿈치를 쥐고 휙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 센 힘도 아니었는데, 우영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의 옆에 섰다.
사현이 부드럽게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눈과 입술이 휘는데, 우영이 숱하게 봐 왔던 그의 미소와는 사뭇 달랐다.
“물론 선물할 그림도 없습니다. 방금 선호 그룹 회장님도 빈손으로 가셨거든요.”
사현이 참으로 안타깝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교수가 그런 사현과 우영을 번갈아 쳐다봤다. 무례하게 대화를 가르고 나타난 남자가 도대체 누군지 알 수 없어서. 그 눈빛을 읽은 사현이 손을 내밀었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안녕하세요, <갤러리 비> 관장 백사현입니다.”
교수의 입술 끝이 움칠, 아래로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아무래도 그림 관련 일을 하면서 사현의 이름을 모를 순 없는지라. 나이가 무색하게도, 혀뿌리가 바짝 말랐다. 척추가 곧추서고 아랫배가 간지러웠다. 긴장이었다.
사현은 한눈에 보기에도 어렸다. 미끈한 얼굴은 고생 한번 없이 귀하게만 자라 온 듯했다. 그런데도 말로 형용하기 힘든 분위기가 스멀스멀 뿜어졌다.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까.
그래, 뱀 같았다. 소리 없이 다가오는 백사. 하얀 몸뚱어리에 붉은 눈을 번뜩이는 뱀.
교수가 한 박자 늦게 사현의 손을 쥐었다. 사현의 차가운 손에 솜털이 다 곤두섰다.
“⋯⋯아, 백사현 씨. 반갑네. 나는 우영이 교수요. 근데⋯⋯ 우영이 그림이 전부 팔렸단 말이오?”
“예. 서우영 작가님 그림이 오죽 부-티가 나야죠. 컬렉터들도, 애호가들도 반응이 뜨겁네요. 그림 보는 눈이 조금, 아주 조금이라도 있다면 소장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그림 아닙니까.”
“⋯⋯.”
“돈 많으신 분들이 서로 가져가겠다고 난리라, 이참에 두 번째 전시까지 계약해 달라고 작가님께 비는 중입니다.”
사현의 말은 듣기가 영 불편했다. 노골적인 자랑 때문이 아니라, 어조 때문에. 문장은 친절하나, 싸우자는 것처럼 들렸다. 교수가 비스듬히 입술을 올렸다.
“우영이 그림이 학부생 때부터 유별나긴 했지요.”
사현이 냉큼 말을 쐈다.
“유별난 게 아니라 특별한 거죠.”
형체 없는 전류가 사위를 감싸는 듯했다. 어찌나 찌릿찌릿하고 따끔따끔한지. 근데 두 사람은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다. 애꿎은 우영만 구두 뒤꿈치로 바닥을 짓이겨야 했다.
참다못한 우영이 두 사람 사이를 끊어냈다.
“B. 제가 교수님 바래다드리고 올게요.”
그 말에 사현의 눈이 뾰족하게 벼려졌다.
“⋯⋯우영 씨가? 왜?”
몇 음절 안 되는 문장인데. 아주 많은 뜻이 숨어 있었다. 네가 왜? 저 새끼는 다리가 없어? 어디가 불편해? 뭔데 네가 바래다주기까지 해야 하는데? 그런 불평, 불만 그리고 아니꼬움 말이다.
그 적의를 선연히 느낀 교수가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됐다. 그⋯⋯ 나중에 학교나 한번 들러라. 차도 한잔 하고, 후배들한테 좋은 귀감도 되고.”
“네.”
“이만 가마.”
교수가 반쯤 남았던 샴페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빈 플롯을 사현에게 내밀었다. 마치 점원이나 웨이터에게 치우라 명령하는 것처럼.
“⋯⋯.”
사현의 한쪽 눈썹이 가파른 사선을 그리며 위로 올라갔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야. 옅은 당황과 진한 분노가 꿈틀거렸다. 우영이 얼른 팔을 뻗어 빈 플롯을 받았다. 교수는 툭, 우영의 팔뚝을 두드리더니 팔자걸음을 뽐내며 인파 사이로 사라졌다.
완전히 떠난 교수를 확인한 우영이 사현을 바깥으로 끌어냈다. 아무래도 시선이 많으니, 로비로 나가는 게 좋을 듯해서.
로비 구석에 선 사현이 양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네 교수. 되게 옹졸하게 생겼어. 「아들을 먹어치우는 사투르누스」의 사투르누스 같아.”
그가 뿌득뿌득 이를 갈았다.
우영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혀로 입천장을 긁었다. 대체 왜, 사현은 제 교수에게 이다지도 무례하게 구는 걸까. 비록 제 입으로 ‘저는 싸가지가 없다’는 말을 밥 먹듯이 하는 그이지만, 제인이나 큐레이터들에게, 또 김밥천국의 사장 아주머니에게 하는 걸 봐선 그렇게 예의가 없는 편도 아니었다. 할 말을 해야 할 때, 그것을 원색으로 전할 뿐이지.
그러니 지금 이 상황은 몹시 희한하고 얄궂었다. 제 교수와 오늘, 이 시점이 첫 만남임이 확실한데. 사현은 왜 저리 화를 낼까. 그러다 번뜩 한 가지 가설이 뇌리를 스쳤다.
“설마⋯⋯ B가 교수님 초대한 거예요?”
“어. 한 방 먹여 주고 싶어서. 감히 누구 그림 보고 싼 티가 난대?”
사현이 곱씹어도 화가 난다는 듯 씨근덕거렸다. 부릅뜬 눈을 따라 기다란 속눈썹이 직선으로 곤두서 있었다. 꼭 화난 고슴도치 같았다.
“⋯⋯.”
우영이 그런 사현을 묘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러니까⋯⋯ 사현은 몇 년 전에 교수가 제 그림을 ‘싼 티 난다’고 평한 것 때문에 이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구태여 교수의 이름과 주소를 알아내 초대장까지 보내서. 우영이 성공한 모습을 보여 주려고. 네 판단이 틀렸노라 알려 주려고.
우영이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러지 않고는 전시장이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박장대소할 것 같았다.
“그래서, 갈 거야?”
사현이 우영의 손에 들린 플롯을 빼앗아 인포메이션 데스크에 아무렇게나 올려 뒀다. 우영이 고개를 갸웃 옆으로 흘렸다.
“어딜요?”
“쟤가 그 등신 같은 학교 오랬잖아, 방금.”
“아⋯⋯.”
“안 갈 거지? 가지 마. 나, 네가 저 민머리 교수 또 만나는 거 싫어.”
“그렇게 싫으세요?”
“어. 저 새끼 분명 너 앞에 앉혀 두고 지가 키웠다느니, 떡잎부터 알아봤다느니, 별별 잡소리를 해 댈 텐데.”
“⋯⋯.”
“어디 내가 키운 걸 쏠랑 채 가려고.”
사현이 이미 사라지고 없는 교수의 흔적을 눈알을 부라리며 노려봤다. 와중에 교수가 정말 우영을 포대자루에 담아 훔쳐갈지도 모른다는 듯, 우영의 소맷자락을 움켜쥐고 있었다. 우영이 힘이 잔뜩 들어간 그의 손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문득, 사현이 애처로운 눈으로 우영을 올려다봤다.
“가지 마. 내가 아이스크림 사 줄게.”
그 말에 우영이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네. 안 갈게요.”
“착해.”
발뒤꿈치를 든 사현이 우영의 귓바퀴부터 목 아래까지 쓰다듬었다. 평소라면 복슬복슬한 머리를 헤집어 놨을 텐데. 오늘은 왁스에 스프레이까지 뿌려 놓은 터라 그럴 수가 없었다. 꼭 예쁜 작품을 헝클이는 기분이라.
자신이 꾸며 놓은 우영을 감상하던 사현이 살짝 흐트러진 넥타이를 정리해 줬다. 그의 키에 맞춰 구부정하게 등을 굽힌 우영이 지금에서야 깨달았다는 듯 작게 속삭였다.
“근데 아는 척 하지 말라면서요.”
“이제 괜찮아. 기자랑 평론가들 다 갔어.”
“교수는요? 불러도 되는 거예요? 그다지 입이 무거우신 분은 아닌데.”
“괜찮아. 그 교수, 온갖 곳에서 입 털고 다녀서 기자들이 전화도 안 받는다더라. 조만간 고흐랑 친구라고 말하고 다니겠던데.”
넥타이를 바로잡은 사현이 우영의 재킷을 탁탁 아래로 잡아당기며 주름을 헤쳤다. 어깨는 넓고, 팔다리는 길쭉한 우영이라 슈트가 아주 잘 어울렸다. 그냥 작가만 시키기엔 아쉽단 말이지. 차라리 얼굴을 밝혀서 색다른 마케팅을 할 걸 그랬나.
“참⋯⋯ 누가 꾸며 놨는지. 예쁘다, 너.”
사현이 살포시 눈을 접으며 말했다. 맨들맨들한 광대가 동그랗게 솟고, 붉은 입술이 고운 호선을 그렸다. 우영이 코웃음을 쳤다. 누가 누구한테⋯⋯.
“B는 그런 말 할 자격 없어요.”
“왜? 내가 예쁜 걸 얼마나 좋아하는데. 심미와 탐미만큼 인간에게 이로운 건 없어.”
사현이 인정할 수 없다는 듯, 새초롬히 눈을 치켜떴다.
“하지만, 저보다 B가 훨씬 더 예쁜걸요.”
우영이 샐쭉 웃으며 거짓 하나 없는 감탄을 내놓았을 무렵이었다.
“백사현.”
묵직한 저음이 뒤통수를 후려쳤다. 사현이 삽시간에 굳었다. 누가 위에서 찬물을 부은 것처럼 표정이 씻겨 내려갔다. 그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우영의 시선도 사현 너머의 누군가에게로 향했다.
그였다. 언젠가 <갤러리 비> 로비에서 만났던 남자. 아버지와 가족을 운운했던 남자. 사현이 술을 마시게 했던 남자.
사현을⋯⋯
외롭게 했던 남자.
우영이 본능적으로 사현을 자신의 등 뒤로 빼냈다. 그러나 사현이 따라 주지 않았다. 그 자리에 돌덩이처럼 굳어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그대로 콱 죽어 버린 것 같기도 했다.
우영이 조금 더 세게 사현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사현이 가볍게 우영의 손을 털어 냈다. 그리고 후우, 짧고 굵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셨어요, 형.”
사현은 이렇다 할 표정이 없었다. 잘 빚은 도자기 인형 같은 모양새였다.
“응, 왔지.”
남자가 귀찮다는 듯, 대충 팔을 흔들었다. 사현이 그런 남자의 주위를 바쁘게 훑었다. 혹 다른 이가 있을까 살피는 거였다. 아니나 다를까, 남자의 뒤에서 자그마한 여자가 등장했다.
“어머니도 오셨어.”
남자가 여자의 어깨를 다정히 감싸 안았다. 나이가 제법 있는 여자였다. 대충 뭉뚱그리자면 우영의 엄마뻘. 혹은 사현의 엄마뻘. 나이답지 않게 채도가 높은 붉은 입술, 깨끗한 피부, 전문가의 손길이 묻은 머리칼, 어깨에 곱게 얹힌 밍크코트와 먼지 한 톨 없는 구두. 손가락에 주렁주렁 꿰인 보석 반지. 척 봐도 엄청난 집안의 사람이었다.
사현이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눈꺼풀 한번 깜빡이지 않고, 물끄러미. 꼭 노려보는 것 같았다. 그러자 여자의 입술이 비죽, 마뜩잖게 뒤틀렸다.
“너는 인사도 안 하니?”
“⋯⋯안녕하셨어요.”
사현이 무뚝뚝한 어투로 말했다.
“안녕하겠니? 이 천박한 갤러리에 와 있는데?”
여자의 말에 사현보다도 우영이 먼저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그럼 인사 안 하냐고 묻긴 왜 물었는데? 입 다물고 있을 땐 기품이 철철 넘치던 사람이, 이다지도 노골적인 적의를 내뿜다니. 그것도 사현에게. 이해할 수 없었다.
“눈이 썩는 것 같구나. 누구처럼 썩어서 푹 파일 지경이야.”
여자가 뾰족하게 날이 선 음성으로 비난을 덧붙였다. 사현이 어금니를 세게 짓씹었다. 관자놀이가 볼록 올라왔다. 얼굴은 하얗게 질렸는데, 눈알만 새빨갛게 충혈됐다.
우영은 그렇게 동요하는 사현은 처음 봤다. 그나마 가장 화를 낸 게 방금 제 교수를 만났을 때였다. 하지만 그것은 여유 넘치는 비아냥에 가까웠고, 지금은 곧 터질 정도로 새빨간 분노였다. 주름 하나 없는 슈트 재킷 너머의 마른 몸이 어찌나 떨리는지. 우영은 그를 낚아채 이 자리에서 도망가고 싶었다. 그러지 않으면 사현이 와르르 무너져 버릴 것 같았다.
“뒤가 네온 작가?”
남자의 시선이 우영을 향해 흘러왔다. 사현이 한 발 옆으로 이동해 가려지지도 않는 우영을 가리고 섰다.
“그냥, 공부하는 학생이에요.”
“이제 교사 노릇도 해?”
남자가 별꼴을 다 보겠다는 듯 콧잔등을 찡그렸다. 다행히 예전에 봤던 우영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안경도 없고, 옷차림도 전혀 다르니 그럴 만도 했다.
사현은 남자의 질문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진실이든, 거짓이든 우영과 그들이 얽히지 않았으면 했다.
“뭐 하러 오셨어요.”
사현이 고저 없는 음성으로 물었다. 가늘게 빠진 여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질문은 올 때마다 하는구나.”
“오실 때마다 눈이 썩으시는 것 같다면서, 계속 오시는 게 의아해서요.”
“안 가면 회장님이 성을 내시는데 어쩌니.”
“여전히 회장님 그림자 아래에 사시나 봐요. 뭐든 좀 생산적인 일을 하세요. 그렇게 꽃같이 살지 마시고.”
꽃이라는 싱그러운 단어가 속해 있기엔 영 아름답지 못한 문장이었다. 그림자와 꽃. 여자가 사현의 말을 되뇌는데, 사현이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 꽃이 아니라 조환가.”
“⋯⋯뭐?”
여자의 음성이 대번에 높게 튀었다. 남자의 미간에도 깊은 홈이 파였다. 그러나 사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들의 혐오와 미움에 익숙한 것처럼 보였다.
“집에서 노시니까 회장님이 자꾸 나가라 나가라 성화죠. 시대가 어느 땐데 사모님이라는 직업에 만족하고 사세요?”
“너,”
“아, 요즘은 민재 형 어머니로 사시죠? 조만간 본인 이름도 까먹으시겠어요.”
사현이 한껏 이죽거렸다. 그답지 않은 짓이었다. 꼭 핸들 없는 불도저 같았다. 불콰하게 취한 것 같기도 했다. 우영이 불안한 눈으로 사현의 뒷모습을 훔쳐봤다.
여자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부르르 떨었다. 그러더니 눈을 희번덕거리며 으르댔다.
“이 더러운 창녀 자식이 감히 누구 아들 이름을 입에 올려.”
“저도 올리기 싫어요. 민재 형, 민재 형. 말할 때마다 혀에 곰팡이가 피는 것 같아. 그러니까 그만 나타나세요.”
“여기 불 질러 버리기 전에 그 입 닥쳐. 너한테 남은 거 이 갤러리 하나잖니. 내가 말 몇 마디만 하면, 여기도 우리 민재 거 되는 거야. 너는 비렁뱅이로 돌아가는 거고.”
여자는 신기할 정도로 조곤조곤하게 욕지거릴 퍼부었다. 음성이 커지지 않는 게 용할 정도였다. 그녀는 고운 입술을 끊임없이 움직이면서도 기민하게 주위를 살폈다. 꼭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볼까, 걱정하는 것처럼. 불결한 입방아에 제 이름이 오르내릴까, 조심하는 것처럼.
“더러운 새끼. 역겨운 새끼. 지옥 불에 떨어질 새끼.”
무언가에 홀린 듯 주절주절 저주를 읊던 그녀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저 혼자 열을 내고 있음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그녀가 바짝 곤두섰던 어깨를 느슨하게 풀어 내렸다. 그러고는 슬쩍 눈을 내리깔며 옆으로 몸을 돌렸다. 「퐁파두르 부인」의 귀부인처럼 순식간에 우아하고 기품 넘치는 모습이 됐다.
“회장님이 그림 한 점 사 오라셨다. 네가 굶어 죽을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셔.”
“그러실 거 없다고 전해 주세요. 이미 다 팔렸거든요.”
여자가 코웃음을 쳤다.
“하⋯⋯. 이따위 전시장에 걸린 그림이 다 팔렸단 말이니?”
사현이 덩달아 조소했다.
“천박이라뇨. 내로라하는 분들이 앞다퉈 사 가셨는데요. 사모님껜 예술적 안목이 전-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 자꾸 확인시켜 주지 않으셔도 돼요.”
그 말에 여자가 기껏 추슬렀던 분노를 휙 까뒤집어 보였다.
“더러운 놈! 네 엄마가 몸 팔아서 지은 갤러리를 사람들한테 보여 주면 안 부끄럽니? 나라면 머리 박고 죽을 텐데.”
“제가 누구 좋으라고 죽나요. 설사 저는 죽어도 <갤러리 비>는 계속 남아 있을 거예요.”
“우습지도 않구나.”
“교양 모임에서 그림 이야기만 나오면 그렇게 짜증을 내신다면서요? 그러지 마세요. 모름지기 최고의 교양은 예술인데. 교양 없다는 소리, 질리지도 않으세요?”
“⋯⋯너 내 뒷조사하니?”
“설마요. 쟤가 그분들이랑 좀, 친해서. 사모님 뒷말이 자꾸 들려오네요. 마음 좀 곱게 펴고 사세요. 주름살만 펴지 마시고.”
“너, 이⋯⋯!”
“그런다고 떠난 회장님 마음이 다시 돌아올는지는 모르겠지만.”
사현이 빙긋 웃으며 그녀의 정수리 한가운데를 퍽! 말로 된 도끼로 내리찍었다. 여자는 화가 나는 걸 넘어서서 숨이 막히는 듯했다. 흐웁, 흐웁, 거칠게 심호흡하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 꼴을 본 남자, 그러니까 민재가 사현의 멱살을 우악스럽게 틀어쥐었다.
“사현아, 동생아. 말 가려서 해.”
폭력성 짙은 행위와 달리 조곤조곤한 음성이었다. 그 어미에 그 아들다웠다. 그러나 사현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는 목이 조이면서도 비소를 잃지 않았다.
“내 이름 입에 올리지 마요. 형 부르라고 지은 이름 아니니까. 아, 혹시 형도 내 이름 부를 때마다 혀에 곰팡이가 피는 것 같아요? 그럼 자주 불러요. 그러다 혀가 썩으면 더 바랄 게 없겠네.”
뿌득, 이를 간 민재가 주먹을 쳐들었을 때였다. 우영이 민재의 손을 세게 잡아당기며 사현을 휙 뒤로 빼냈다. 덕분에 민재의 주먹이 죄 없는 허공만 후려갈겼다.
“넌 뭐야?”
민재가 우영을 부리부리한 눈으로 노려봤다. 우영도 지지 않고 맞붙었다. 사현이 한 발, 우영의 뒤에서 나왔다.
“여기서 치고받고 싸우게요? 화 그룹 장남이? 소문이 얼마나 빠른지 알면서? 결국, 처맞는 건 형이 될 텐데요?”
그 말에 민재의 눈동자가 데구루루 옆으로 굴러갔다. 그의 시선을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피어올랐다. 어디에 있든 눈이 가는 <갤러리 비>의 관장 B, 거기에 멀끔한 남자 둘, 돈 냄새가 풀풀 풍기는 사모님. 그것만으로도 흥미로운데, 뜨문뜨문 욕설과 높은 음성이 오고 가니 어느 누가 관심을 가지지 않으랴.
민재가 거친 콧김을 내뿜으며 물러났다. 사현이 피곤하다는 듯, 손등으로 눈두덩을 꾹 눌렀다가 뗐다.
“가세요. 회장님께서 두 분이 오셨냐고 물어보면, 왔다고 전해드릴 테니까.”
“⋯⋯너, 나중에 봐.”
“됐다, 민재야. 더러운 것이랑 말 섞지 마. 처음부터 이딴 곳, 오는 게 아니었다.”
두 사람은 씩씩거리며 사현을 노려보다가, 자꾸 모이는 시선에 어쩔 수 없이 뒤를 돌았다. 또각또각. 여자의 날카로운 구두 소리가 시끄러운 장내를 날카롭게 할퀴었다.
사현은 그들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나 우영은 그가 떨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의 재킷 끄트머리를 꽉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천을 통해 바들바들 떨리는 사현의 몸이 세세히 느껴졌다.
우영은 아무런 말 없이 사현을 가리고 서 있었다. 수 분이 지나자 괴롭게 박혀 있던 사람들의 눈알이 천천히 흩어졌다. 우영이 뒤를 돌아 사현을 내려다봤다. 푹 수그러든 고개가 그와 어울리지 않았다.
“자기야.”
사현이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우영을 불렀다.
“미안한데⋯⋯ 나 사무실에 좀⋯⋯ 데려다줄래?”
“네.”
우영의 대답은 언제나 긍정이다. 사현이 설핏 웃으며 걸음을 뗐을 때였다. 큼지막하고 따뜻한 무언가가 어깨에 얹혔다. 우영의 재킷이었다. 사현이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우영이 재킷 채로 사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마치 민재가 여자의 어깨를 껴안았던 것처럼.
“로비가 조금 춥네요.”
“무슨 소리야. 난방을 얼마나 세게 틀었는데.”
“아닌데. 추워요. 되게 추워요, 지금.”
우영이 능청맞게 거짓을 말했다. 사현이 흐리멍덩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사현은 사무실 문이 열리자마자 허겁지겁 안으로 뛰쳐 들어갔다. 검고 적막한 사무실이 그를 한입에 집어삼켰다. 우영이 얼른 그를 뒤따랐다.
사현은 책상 서랍에서 조그마한 약통을 찾아냈다. 그것을 손바닥 위에 와르르 털더니 그대로 입에 집어넣었다. 대충 눈대중으로 봐도 열댓 개는 되어 보였다.
“⋯⋯B?”
놀란 우영이 어쩔 줄 모르고 눈을 끔뻑였다. 무슨 약을 저렇게 사료 먹듯이⋯⋯. 아니, 일단 물부터⋯⋯. 근데 물이 어디 있지⋯⋯. 그가 허둥지둥 주위를 살피는데, 사현이 쓴 알약을 으적으적 씹어 먹었다. 참으로 무감한 낯이었다. 마치 항상 있는 일이라는 것처럼.
탕비실로 향하려던 우영이 우두커니 서서 그를 쳐다봤다. 우영이 충격받은 걸 아는지, 모르는지 사현은 다시 한번 약을 삼켰다. 텅 빈 허공을 응시하며 우물우물 턱을 움직였다.
금세 약을 넘긴 사현이 또다시 약 뚜껑을 열었다. 보다 못한 우영이 약통을 빼앗았다. 가만두면 한 통을 전부 먹어치울 듯했다. 뭔진 모르겠으나, 영양제나 비타민도 이렇게 먹으면 몸에 좋지 않을 테였다.
“뭐 드시는 거예요?”
우영이 알아보기 힘든 영어가 휘갈겨진 약통을 훑었다. 허나 영어에는 까막눈인지라, 도통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어⋯⋯ 몰라.”
사현이 어딘가 몽롱한 얼굴로 대꾸했다. 모른다니. 그답지 않은 말이었다. 오늘의 사현은 조금 이상하다. 아니, 그 남자와 여자를 만났을 때부터 이상했다.
“모른다고요?”
우영이 심문하듯 재차 물었다. 사현이 의자 깊숙이 등을 묻고 몸을 늘어트렸다.
“그냥 약이야.”
“그러니까, 그냥 약이 무슨 약인데요?”
“우울증. 공황장애. 뭐 그럴 때 먹는 흔한 약.”
사현이 귀찮다는 듯 성의 없이 대꾸했다. 우영이 꽈악, 세게 약병을 움켜쥐었다. 우울증. 공황장애. 결코 흔한 거라 표현되어선 안 되는 것들이었다.
“⋯⋯그게 어떻게 흔한 약이에요?”
“나한텐 흔해.”
사현이 보란 듯이 서랍을 열어 보였다. 그곳엔 우영이 쥐고 있는 것과 똑같은 생김새의 약통이 가득했다.
우영이 하, 짧게 숨을 끊어 냈다.
사현의 손목에 엉겨 붙어 있던, 그리고 아마 여전히 붙어 있을 흉터가 떠올랐다. 그리고 창녀라느니, 더럽다느니 불쾌한 소리를 서슴없이 하던 여자와 그녀가 언급하던 회장님 등등도 떠올랐다.
‘대체 B한테는 무슨 사연이 있는 거예요?’
‘그 사람들은 B를 왜 그렇게 미워하죠?’
‘또 B는 왜 그렇게 날이 서 있어요?’
‘⋯⋯내가 어떻게 하면 당신을 위로할 수 있을까요?’
우영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지만 차마 내뱉지 못했다. 저와 사현은 그 정도로 ‘아는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과거보다 조금 깊어지긴 했으나 아직 파트너, 혹은 갑과 을의 관계, 또는 고용주와 노동자 정도에 불과했다.
“자기야.”
툭, 툭툭 서랍을 때리듯 닫은 사현이 우영을 불렀다. 우영이 책상 위에 하얀 약통을 내려놓으며 그를 쳐다봤다.
“네.”
“전시 다 봤으면 먼저 집에 가.”
“B는요?”
“나는 늦게 들어갈 거야.”
사현이 여태 어깨에 얹혀 있던 우영의 재킷을 빼 그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우영은 그것을 받지 않았다.
“왜 늦으시는데요?”
“내가 그걸 너한테 일일이 보고할 필요는,”
“술 마시러 가실 거예요?”
“⋯⋯.”
사현의 입술이 한일자로 다물렸다. 우영의 말이 맞는 모양이었다. 우영이 재킷을 받아 팔을 꿰었다.
“저도 같이 가요.”
“하아⋯⋯. 됐어. 내가 왜 너랑 술을 마셔.”
사현이 손을 휘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막 우영을 지나쳐 가려는데, 그가 슬쩍 막아섰다.
“저 오늘 엄청 행복한 날이었어요. B 덕분에 죽어 있던 제 그림이 살아났거든요.”
“⋯⋯.”
“그 보답으로 예-에-쁜 제가 술 사 드릴게요.”
“⋯⋯.”
“그러니까 같이 가요.”
우영이 거절하지 말라는 듯, 한 음절 한 음절 힘주어 말했다. 살포시 접힌 눈가가 참 싱그럽다. ‘행복’이라는 찬란한 단어를 입에 올리기에 모자람 없는 표정이었다.
그런 우영을 응시하던 사현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사현이 데리고 온 곳은 서울 야경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고급 바였다. 천장이 뾰족하게 솟은 형태의 건물이었는데, 꼭 역사 깊은 성당에 들어와 있는 듯했다. 널찍한 간격으로 놓인 테이블과 의자엔 사람들이 듬성듬성 섬처럼 앉아 있었다.
사현은 어둑한 실내를 아무렇지 않게 가로질렀다. 자주 오는 곳인 모양이다. 반면 우영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온갖 촌티는 다 냈다.
어쩔 수 없었다. 갈빛과 주홍빛 그리고 금빛이 섞인 조명이 지나치게 다채로웠다. 아릿하게 번지는 수백 개의 색 이름을 모두 명명할 수 있을 때까지 쳐다보고 싶었다.
사현은 창가의 구석진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우영도 냉큼 그의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하필 오늘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후드나 걸치고 다니는 평소였다면, 이런 곳에 오기 조금 부끄러웠을 테니까. 저는 괜찮아도 사현의 세련된 이미지에 분명 스크래치가 났을 터였다.
곧 부드러운 인상의 점원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B. 늘 드시는 대로 준비해 드릴까요?”
그 말에 사현이 흐음, 목으로 신음했다. 우영을 빤히 보던 그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메뉴부터 줘요.”
“네.”
점원이 들고 온 메뉴판을 사현과 우영 앞에 각각 하나씩 내려놓았다. 우영이 눈썹을 들썩이며 메뉴판을 넘겼다. 사현이 자주 오는 곳이면 분명 맛있는 걸 잔뜩 팔리라, 기대하면서.
“⋯⋯.”
하지만 우영의 얼굴은 한 장을 채 넘기기도 전에 버석하니 굳어야 했다. 스낵, 칵테일, 와인 등으로 분류된 메뉴는 놀랍게도, 우영이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반 이상은 이름을 읽을 수조차 없었다. 거기다 메뉴 옆에 붙은 숫자가 이상했다. 100, 140, 280, 320 등이었는데, 아무리 봐도 원화 같지 않았다.
설마 칵테일 한 잔에 백 원이려고. 그럼 뒤에 0이 두 개 더 붙어 만 원인가, 싶었는데. 랍스터와 새우가 어쩌고저쩌고하는 요리가 220, 그러니까 2만2천 원일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22만 원이라는 뜻인데⋯⋯.
우영이 메뉴판에다 얼굴을 처박을 듯 고개를 수그렸다. 저와 사현이 칵테일을 한 잔씩 주문하고, 스낵 두엇을 시키면 적어도 이삼십은 깨진다. 오늘 사현을 보아하니 취할 때까지 마실 듯한데. 그럼 얼마가 나가려나.
우영이 잘근잘근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통장에 있는 돈을 모두 쓰는 건 상관없었다. 어차피 사현이 벌어다 준 돈이니까. 저는 반지하 방을 벗어나, 호화로운 집에서 밥걱정 없이 마음껏 그림을 그리고, 멋진 전시를 한 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다만 걱정이 되는 건, 행여나 부족할까 봐. 그럼 어쩌지. 제가 사겠노라며 따라오기까지 했는데. 사현이 계산하게 하고 싶진 않았다.
사현은 비스듬히 턱을 괸 채 시시각각 변하는 우영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메뉴판을 넘길 때마다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우영의 귓바퀴에 헛웃음이 다 나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척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저 어린놈은 저가 정말 술을 얻어먹을 생각인 줄 아는 걸까. 그것도 풋내기가 사기엔 과하게 비싼 이곳에서? 벗겨 먹기로 작정한 파렴치한도 아니고?
“자기야.”
“네, 네?”
“나 네 돈으로 술 마실 생각 없어.”
“그래도 오늘은 제가⋯⋯.”
“됐다니까. 네 전 재산 탈탈 털어서 술값을 낸대도 내가 별로 기쁘지가 않거든? 오히려 코 묻은 애 돈 뺏어다가 노름하는 기분이라고.”
사현의 말에 우영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산다니 응당 기뻐해야 맞는데. 한시름 덜었다며 어깨를 풀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사현에게 술 한잔 사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럽고, 미웠다.
“나는 위스키 마실 거야. 너는 뭐 마실래?”
사현이 아무렇지 않게 메뉴판을 넘기며 물었다. 우영이 바쁘게 메뉴판을 훑었다. 수십 가지의 칵테일 종류가 그의 간택을 받고자 기다렸으나, 우영이 찾는 건 딱 하나였다. 싼 거, 제일 싼 거. 그래 봐야 삼사만 원이 훌쩍 넘을 테지만, 그래도.
사현은 그런 우영의 의중까지 단번에 꿰뚫어 봤다. 하는 꼴이 답답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사현이 우영의 손에서 메뉴판을 빼앗아 탁, 덮었다.
“너 가리는 거 없지?”
“어⋯⋯. 네⋯⋯.”
“그럼 그냥 내가 시키는 거 먹어.”
“하지만,”
반박하려는 우영에 사현이 쓰읍, 어린아이를 혼내듯 엄한 표정으로 혀를 끌었다. 우영의 입술이 딱 다물렸다. 팔랑팔랑 메뉴판을 넘기던 사현이 스낵 부분에서 멈춰 섰다.
“저녁은 먹었니?”
“아니요. 긴장해서.”
“배 많이 고프겠네.”
우영은 긍정도, 부정도 못 한 채로 데굴데굴 눈알만 굴렸다. 고프다고 하면 밥 먹이는 것을 일과처럼 챙기는 사현이 분명 이것저것 시킬 게 뻔했다. 그럼 엄청난 금액이 나올 텐데. 잠깐 고민하던 우영이 고개를 내저으려 할 때였다.
사현이 가볍게 손을 들어 점원을 불렀다. 자그마한 종이와 펜을 든 점원이 연한 미소를 띤 채 다가왔다. 사현이 고저 없는 음성으로 주문을 시작했다.
“립 아이 스테이크 하나, 아니 두 개. 미디움 레어로 주시고.”
“네.”
“모듬 치즈 플레이트도. 하몽이랑 콜드 컷도 추가해서요. 그리고 그⋯⋯ 블루치즈는 빼 주세요. 냄새가 너무 나.”
“네.”
“또⋯⋯ 혹시 런치 메뉴 지금 주문할 수 있나요? 배 채울 수 있을 만한 거로.”
“아⋯⋯. 현재 가능한 건 이쪽 페이지의 뉴욕 스테이크 햄버거와 트러플 감자튀김입니다.”
“둘 다 주세요.”
우영은 사현과 점원의 대화를 따라 메뉴판을 뒤졌다. 줄줄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현의 주문에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대체 무슨 햄버거가 오만육천 원이나 한단 말인가! 감자튀김은 왜 또 삼만 원인데? 이해할 수 없었다. 흔한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 가게에서 감자튀김을 삼만 원어치 시키면 포대자루에 담아 줄 터였다.
“술은 일단 마시던 거로 마실게요.”
“네. 그렇게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점원은 사현이 주문한 메뉴를 다시 한번 되묻더니 꾸벅 허리를 숙이고 떠났다. 우영은 태풍에 집이 홀라당 날아간 듯한 얼굴로 메뉴판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현이 소파 깊숙이 등을 기댔다.
“여기 랍스터도 괜찮은데. 술이랑은 별로 안 어울려. 다음에 와서 먹자.”
“⋯⋯네.”
우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사현이 다음을 기약해 줬다. 그땐 꼭 자신이 사고 말리라, 그날을 위해 잠도 자지 않고 그림만 그리리라, 다짐했다.
두 사람은 메뉴가 나올 때까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우영은 냅킨만 돌돌 말았다가 펴며 손장난을 했다. 중간중간 사현의 눈치를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현은 물끄러미 창밖만 응시하고 있었다. 뭐 그리 볼 게 있나, 우영이 그를 따라 창밖을 두리번거렸으나 딱히 특별한 건 찾지 못했다. 사현의 집 창밖으로 보는 것과 비슷한 서울 풍경이었다. 널찍한 한강 뒤로 빌딩 숲이 즐비한 그런 풍경 말이다.
사현은 아마⋯⋯ 야경이 아니라 다른 걸 보고 있을 것이다. 갤러리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한다거나.
우영이 무슨 말을 꺼내야 하나, 팽글팽글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데 메뉴가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테이블이 차는 건 금방이었다.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스테이크에 우영이 꼴깍 침을 삼켰다. 예전에 경매가 끝나고 사현이 사 준 스테이크가 어찌나 맛있었는지 종종 떠오르곤 했다.
막 나이프를 쑤시려는데, 눈앞의 접시가 휙 사라졌다. 우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거 먹어.”
사현이 자신의 스테이크 접시를 내려놓았다. 고기가 한입 크기로 가지런히 잘려져 있었다. 나이프 질을 잘하지 못하는 우영을 위해 손수 잘라 준 것이다.
핏물이 흐르는 고깃덩이를 바라보던 우영이 축 어깨를 늘어트렸다.
“제가 괜히 따라왔나 봐요⋯⋯.”
그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뒤늦게 자신의 몫을 자르던 사현이 눈썹을 들썩였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저 때문에 메뉴도 엄청 주문하시고, 고기도 잘라 주시고⋯⋯. 귀찮게⋯⋯.”
밥도 챙겨 줘야 해. 고기도 잘라 줘야 해. 술 마시러 왔는데 햄버거도 시켜 줘야 해. 어쩌면 사현이 절 미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없던 애가 생긴 기분이 아닐까. 그것도 188짜리 슈퍼 자이언트 베이비.
사현이 어딘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우영을 바라봤다. 애가 자존감이 없는 건지. 눈치를 심하게 보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무엇 하나 제게 밉보이고 싶지 않은 건지.
커다란 덩치에 수백만 원짜리 슈트를 걸치고, 가만히 있으면 싸늘할 정도로 차가운 얼굴을 갖고 있으면서. 그런 걱정을 하고 있단 말이지.
하여튼, 귀여운 놈.
사현이 지문 하나 없이 매끈한 샷잔을 들어 보였다. 우영이 의아한 눈으로 그 잔을 응시했다. 그러자 사현이 까딱까딱, 잔을 흔들었다.
“술 따라 준다며.”
“⋯⋯.”
“예쁘게 웃으면서 따라 봐.”
그 말에 눈꺼풀을 끔뻑이던 우영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사현은 우영이 꼴꼴 술을 따르자마자 단숨에 삼켰다. 그리고 곧장 다시 잔을 내밀었다. 우영이 재차 술을 따랐다. 사현은 그마저도 한 번에 넘겼다. 또 들이밀어지는 빈 잔에 우영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
사현은 기껏 시켜 놓은 안주에 시선 한 줌 주지 않았다. 약도 물 한 모금 없이 먹더니. 아주 몸에 안 좋은 것만 골라서 한다.
우영이 술을 따르는 대신 사현이 잘라 준 고기를 꾹 찍어 내밀었다.
“안주도 좀 드세요.”
“뭐?”
“이거 드시면 따라 드릴게요.”
“⋯⋯별 잔소리를 다 한다.”
사현이 어쩔 수 없이 고기를 받아 물었다. 우영은 그가 고기를 질겅질겅 씹어 넘기고 나서야 술을 따랐다.
사현은 그게 퍽 나쁘지 않았다. 특별한 대화도 없는데, 편안했다. 혼자 술잔을 기울이고 있으면 발바닥부터 야금야금 절 씹어 먹던 외로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왠지 오늘은 술기운이 일찍 오를 듯했다. 사현이 슈트 재킷을 벗어 빈 의자에 걸쳤다. 소매도 돌돌 말아 걷었다.
“나 오늘 많이 마실 거니까, 집에 알아서 데려가라.”
“네. 고이 모셔다 놓을게요.”
우영이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현은 저보다 한참 작고 말랐으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를 업은 채로 집까지 걸어갈 자신도 있었다.
사현은 열심히 술을 동냈다. 이따금 우영이 내미는 안주도 꿀떡꿀떡 잘 받아먹었다. 사현의 광대에 발긋한 열이 올라왔다. 어둑한 실내조명 아래에서도 보일 정도였다. 눈을 깜빡이는 간격이 길어졌고, 입술을 오물거리는 속도도 느려졌다.
“근데요, B. 진짜 오늘 제 그림이 다 팔렸어요?”
사현을 데려가야 한다는 사명감에 주스만 홀짝이던 우영이 물었다.
“응.”
사현이 짧게 긍정했다.
“왜. 얼마 벌었는지 궁금하니?”
“아니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신기해서요. 역시 B가 대단하긴 하구나 싶어서⋯⋯.”
“내가?”
“네. 제 그림이 막, 엄청난 그림이 아니잖아요. 근데 하루 만에, 그것도 몇 시간 만에 팔린 거니까. 그건 전부 B 덕분이고. B가 멋지게 전시회를 열어 주셔서, 그래서 가능한 일이니까⋯⋯.”
우영이 볼품없는 말주변으로 횡설수설 사현을 찬탄했다. 사현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테이블로 바짝 다가온 그가 비스듬히 턱을 괬다. 가까워진 거리에 그 특유의 바닐라 냄새와 연한 술 냄새가 우영의 코끝을 스쳤다. 주스 잔을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나른하게 풀린 사현의 눈매가 우영을 직시했다.
“오늘 전시장에 있던 사람들 기억하니?”
“어⋯⋯. 아뇨, 다는 아니고⋯⋯. 그냥 많았다는 것만?”
“그래. 많은 사람. 그중 10%는 놀러 온 사람이야. 그림에 관심도 없고, 뜻도 없는데 주변 사람이 간다기에 온 거지. 또 10%는 타 미술관이나 갤러리 관장 혹은 큐레이터들. 또 10%는 기자랑 평론가. 또 10%는 미술 애호가들이지. 그림을 그림 자체로 보는 사람들.”
“⋯⋯.”
“나머지 60%는 컬렉터야. 그러니까 투자자들. 그림을 그림으로 안 보고 돈으로 보는 사람들이지.”
“⋯⋯.”
“컬렉터는 그림을 득달같이 사 가. 첫 전시회만큼 그림을 싸게 살 수 있는 기회가 없거든. 경매장에서 사면 그림 가격이 곱절이고, 두 번째 전시나 세 번째 전시에서는 더 뛰어 있을 테니까.”
“되팔아서 돈을 벌려고 그림을 사는 거예요?”
“음⋯⋯. 대부분 그런데, 단지 투자가 아니더라도 그림은 아주 많은 쓰임새가 있어. 첫 번째, 돈세탁용. 두 번째, 뇌물용. 세 번째, 상속세 등의 세금 면제용.”
사현이 손가락을 하나하나 펴며 설명했다. 우영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상상도 못 한 이유기도 했다.
“그렇게 별별 이유로 그림을 싹쓸이하는 컬렉터들 때문에 애호가들도 마음이 덩달아 바빠져. 충분히 감상하고, 어디에 걸어 두면 좋겠다, 생각하고 사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없어. 그래서 일단 사고 보는 거야.”
“⋯⋯.”
“그렇게 각기 다른 이유로 사다 보니 솔드 아웃이 된 거지.”
“⋯⋯.”
“네 그림이 다 팔린 게 내 덕일까. 아니면 그냥 예술계 특유의 기이한 시장 원리가 작용한 걸까?”
사현이 검지와 엄지로 꾹꾹 자신의 눈두덩을 짓누르며 물었다. 단조롭게 이어지는 그의 말은 어딘가 건조했다. 꼭 교육에 열의라곤 없는 교사의 수업을 듣고 있는 듯했다.
우영은 대답할 수 없었다. 사현이 논하는 예술계는 퍽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 전시가 조악한 돈 놀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현의 안목을 믿기 때문에 그림을 사 가는 것일 테니까. 그 말을 어찌 전하나, 고민하는데 사현이 다시 입을 뗐다.
“슬프니? 대한민국 그림판이 엉망진창이라서?”
“어⋯⋯. 음⋯⋯.”
그 질문은 앞선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우영은 ‘대한민국 그림판’을 경험해 본 적이 없으니까. 사현의 말이 맞대도, 저는 그런 걸 슬퍼할 만큼 권리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현실을 안타까워할 만큼 예술계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란 말이다. 그냥 골방에 박혀서 주야장천 그림만 그리던 풋내기 그림쟁이에 불과했다.
“잘 모르겠어요.”
우영이 한참 고민하다 내놓은 답은 썩 별로였다. 사현이 가늘게 웃음을 흘렸다.
“왜 웃으세요?”
“네 나이다운 대답이라. 귀엽다.”
그가 빈 잔을 내밀었다. 우영이 얼른 잔에 술을 채웠다.
“그러는 B는 어떻게 생각하시는데요? 슬퍼요?”
“나? 나는 좋지.”
“그림이 돈이라서요?”
“글쎄⋯⋯. 그것 때문에 좋은 게⋯⋯ 맞겠지?”
내가 왜 그림을 좋아하게 됐더라⋯⋯. 어쩌다 예술계에 몸을 담그게 됐더라⋯⋯. 어떻게 시작하고, 여기까지 왔더라⋯⋯.
사현은 까마득한 과거를 반추하다 말기로 했다. 되뇔 만큼 괜찮은 과거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작고 마른 등 하나가 떠올랐으나 우영이 따라 준 술과 함께 목구멍 저 뒤편으로 꿀떡 넘겨 버렸다.
우영은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술을 따랐다. 조금 거짓을 보태 우영의 허벅지만 하던 술병이 깔끔이 동났다. 그런데도 사현은 술 한 병을 더 시켰다. 우영은 구태여 그를 말리지 않았다. 오늘은 그가 취할 만한 날이라 생각했다. 아무래도 본 게 있으니 그저 묵묵히 술만 따랐다.
정체 모를 남자와 여자에 관해서도 묻지 않았다. 언뜻 봐도 곯아 터진 상처인데. 구태여 그것을 헤집고 싶지 않았다. 제가 알 필요도 없었고, 사현 역시 가르쳐 주지 않을 터였다.
우영이 우물우물 감자튀김을 씹었다. 막 술 한 잔을 비운 사현은 반쯤 뭉그러진 시선으로 야경만 바라보고 있었다. 우영이 슬쩍 그를 불렀다.
“B.”
“응.”
“왜 제 그림이에요?”
“무슨 소리야?”
“저 말고도 신인 작가가 엄청 많잖아요. 그중에서 돈 없고, 인맥 없고, 경력도 없는 작가들이 많을 텐데,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옛날부터 궁금했던 것이다. 사현이 ‘가족 없는 고아. 보잘것없는 학벌. 어쭙잖은 실력. 궁핍한 주머니. 활발하지 않은 대인관계. 미술계 경험은 전무’라는 독특한 이력을 원했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런 사람이 ‘다루기 쉽고, 말도 잘 듣고, 간절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도 왜 하필 자신일까.
예술계에서 그런 이력을 가진 이는 많다. 아주아주, 많다. 열 명 중 대여섯 명 정도가 그럴 터였다. 그림은 그리나, 그림으로 먹고살 순 없는 사람들. 바깥과 단절된 사람들.
사현이 으음, 목으로 신음했다. 잠깐 고민하던 그가 느지막이 입을 뗐다.
“네 그림은⋯⋯ 평화로워.”
“평화롭다고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우영이 예상한 말은 시장성이 있다든가, 그럴싸한 말 몇 마디를 덧붙여 좋은 그림으로 속이기 쉽다거나, 정도였다.
그런데 평화롭다니. 우영이 판단하기에, 자신의 그림은 절대 평화와 가깝지 않았다. 고즈넉한 풍경도 아니고. 은은하고 잔잔한 색감을 쓰는 것도 아니다. 그저 요란하고 천박한 형광 색이 펄떡이는 유별난 그림인데.
사현이 얼음이 동동 뜬 찬물을 꿀꺽꿀꺽 삼켰다. 자꾸만 안으로 말리는 혀를 펴기 위함이었다.
“내가 말한 평화는 물이 흐르고, 달이 뜨고, 숲이 우거지는 그런 평화가 아니라, 보기 거스름이 없다는 거야.”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음⋯⋯ 현대 미술은 너무 많은 걸 담고 있어. 시대, 사상, 정치, 종교, 환경, 물질주의, 또는 반물질주의, 자본주의 등등.”
“⋯⋯.”
“그리고 그런 사상을 담은 그림이, 혹은 그런 사상을 부정하는 그림이 높은 가치로 추켜올려지지. 근데 나는 그런 거 싫어.”
콧잔등을 찌푸린 사현이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었다. 그림을 그 자체로 보지 않고, 그림에 투영된 작가의 생각과 사상을 추론하고, 갑론을박을 벌이고, 그런 것에 질렸다. 또한, 그러한 그림들은 이미 나올 만큼 나왔다.
사현이 미적지근한 술로 목을 축였다.
“바쁜 세상이잖니. 그만큼 아픈 세상이고.”
“⋯⋯.”
“으레 말하는 현대 미술 말고, 지금. 이 순간에 필요한 그림은 예뻐야 해. 심미적이고, 안정적이며 위로를 줘야 하지.”
사현이 허공을 응시하며 우영의 그림을 떠올렸다. 그러다 오늘 한 기자에게 들었던 질문이 생각났다. 혹시 네온 작가가 필로폰이나 헤로인을 하느냐고 물었었지. 어찌나 어이가 없던지. 근데 또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싶고. 실제로는 아이스크림 따위나 좋아하는 앤데.
입가에 연한 미소를 띤 사현이 말을 덧붙였다.
“그런 방면에서 네 그림은 아주, 독보적이야. 장엄한 환경 그 자체인데, 시골처럼 고리타분하진 않거든. 어딘가 현대적이지. 독특한 색감 때문에.”
“⋯⋯.”
“환상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환영 같기도 하고. 사실과 상상 간극에 있잖아. 그 경계를 넘나드는 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다.”
“⋯⋯.”
“네 그림 좋아. 보면 볼수록.”
사현이 자신의 어깨에 볼을 묻은 채 느슨히 풀린 동공으로 우영을 바라봤다. 우영은 멍청한 표정이었다. 입을 뻐끔 벌리고 있는 꼴이 술 한잔 마시지 않았으면서 취한 모양새였다.
우영이 자신의 무릎을 피아노 치듯 두드렸다. 사현의 칭찬이라니. 이토록 원색의 칭찬은 처음이었다. 이따금 잘했어, 착해, 정도의 칭찬을 듣긴 했으나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
그게 어찌나 좋은지. 광대가 자꾸 씰룩였다. 허리는 비비 꼬였고, 구두 안에 숨겨진 발가락은 꼼지락꼼지락 난리였다.
잠시간 기쁨을 추스르던 우영이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처음 만났을 때 저한테 어쭙잖은 실력이라고 하셨잖아요.”
사현의 한쪽 눈썹이 비죽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그러더니 테이블에 바짝 기대서는,
“그래야 내 말을 잘 들을 테니까.”
라고 바람기가 가득 담긴 음성으로 속삭였다. 발긋한 볼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우영이 헙, 숨을 멈췄다. 사현의 말 때문이 아니라, 확 가까워진 거리에 놀란 거였다. 그가 코앞까지 다가온 사현의 얼굴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처음부터 잘났다는 걸 알려 주면 건방져지잖아.”
사현이 킥킥,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종알거렸다. 우영은 사현의 말을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어려운 단어가 섞여 있지 않은데도 그랬다.
그의 기다란 속눈썹, 연하게 풀린 속쌍꺼풀, 바의 흐릿한 조명을 담은 담갈색 눈동자, 동그란 코끝, 붉은 입술을 보느라 뇌가 끼긱끼긱 더디게 굴러갔다.
가끔 생각하는 거지만, 사현은 정말 뱀 같다. 예쁜데 똑똑하고, 낭창하기까지 한 하얀 뱀.
우영의 목울대가 아래위로 바쁘게 움직였다. 출처 모를 갈증이 일었다.
“⋯⋯근데 왜 인제 와서 그런 말을 하세요?”
“그냥⋯⋯.”
“그냥요?”
“너는⋯⋯ 다 알아도 말 잘 들을 것 같아서.”
사현이 샐쭉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러더니 우영의 손등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말 잘 들어. 그럼 계속 예뻐해 줄게.”
사현의 손가락이 우영의 손등부터 손끝까지 훑었다. 그러곤 미련 없이 떨어졌다. 그 손은 곧장 술잔을 쥐었다.
“⋯⋯.”
우영이 테이블 아래로 손을 미끄러트렸다. 반대편 손으로 어둠 속에 숨어든 손등을 감쌌다. 그와 닿았던 살갗이 지글지글 끓는 듯했다.
* * *
사현은 두어 걸음 바르게 걷다가, 또 두어 걸음 비틀비틀 걸었다. 쌀쌀한 날씨인데도 와이셔츠 하나만 입고 컴컴한 자정의 거리를 배회했다. 그의 넥타이와 슈트 재킷을 쥔 우영은 딱 한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그를 뒤쫓았다. 넘어지려 하면 언제든 잡아 줄 수 있어야 했으니까.
사현은 집에 가자는 말에도, 택시를 타자는 말에도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어떻게 하고 싶냐 물으니 별다른 대꾸 없이 계속 걷기만 했다. 가끔 가로등 아래에 서서 후으읍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기도 했다.
그의 입에서 연한 입김이 새어 나올 때마다 우영은 생각했다. 사현이 조용히 비명을 내지르는 것 같다고. 그래서 그만 집에 가자고 그를 막아설 수가 없었다.
사현은 오랫동안 길을 걸었다. 모든 사람이 떠나 까맣게 죽은 빌딩 숲을 걷고, 또 걸었다. 우영이 행여나 구겨질까, 조심히 들고 있던 사현의 재킷을 반대 손으로 옮겨 쥐었다.
사현은 대체 이런 날을 얼마나 반복했을까. 저번에, 불콰하게 취해서 들어 온 그날도 이렇게 정처 없이 걷다가 온 걸까.
그리 생각했더니 가슴께가 저릿했다. 저는 사현을 동정할 권리가 없음에도 그랬다.
그때. 한참 걷던 사현의 구둣발이 문득 멈춰 섰다. 하얀 빛이 뿜어지는 네모난 물체 앞에서였다. 인형 뽑기 기계였다. 편의점 앞이나, 술집 앞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헌데 그 기계는 뜬금없는 길목에 홀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사현이 무언가에 홀린 듯 기계로 다가갔다. 그리고 툭, 유리에 이마를 묻었다. 우영도 그의 옆에 섰다.
백색등 아래에 각양각색의 인형이 누워 있었다. 거꾸로 처박힌 것도 있고, 옆으로 누운 것도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캐릭터도 있었고, 얼굴이 익숙한 캐릭터도 있었다. 근데 묘하게 눈코입이 엇나간 게, 조잡했다. 우영은 금세 흥미를 잃었다. 그러나 사현은 아닌 모양이다.
“자기야.”
“네.”
“너 이거 할 줄 알아?”
“어⋯⋯. 해 본 적 없는데⋯⋯.”
우영의 말에 사현이 히잉, 실망했다. ‘히잉’이라니. 우영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분명 통통한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고 있는 사현에게서 나온 탄성이었다.
사현이 기계를 요리조리 살폈다. 깨알 같은 글씨로 쓰인 작동법을 두세 번 소리 내어 읽기도 했다. 그러다 지폐 구멍을 발견했다. 그 위엔 손바닥만 한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1,000원 1회
5,000원 6회
10,000원 12회]
사현이 더듬더듬 가슴팍을 매만졌다. 아마 지갑을 찾고 있는 것이리라. 그것을 눈치챈 우영이 사현의 재킷에서 지갑을 찾아 줬다. 사현이 샐쭉 웃으며 고맙다고 인사를 전했다. 그러더니 지갑에서 하얀 지폐 하나를 꺼냈다. 10만 원짜리 수표였다. 우영이 헉, 헛숨을 삼켰다.
“B, 그건⋯⋯.”
우영이 미처 막기도 전에, 성능 좋은 기계가 수표를 꿀떡 집어먹었다. 우영이 허망한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10만 원이면 대체 몇 번인가. 못 해도 백이십 번이지 않은가.
사현은 여기 있는 인형을 다 뽑으려는 생각일까, 걱정하는데, 다행히 기계가 베에- 돈을 뱉어 냈다. 소화할 수 없는 지폐인 듯했다.
“이잉⋯⋯.”
사현이 침통한 얼굴로 기계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러더니 다시 수표를 넣으려 했다. 우영이 얼른 자신의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사현의 손에서 수표를 빼내고, 대신 만 원짜리 한 장을 쥐여 줬다. 사현이 고개를 쳐들고 우영을 바라봤다.
“수표는 얘가 인식을 못 하나 봐요. 그걸로 해 보세요.”
우영의 말에 사현이 만 원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우웅, 기계가 잠깐 진동하더니 곧 발랄한 음악을 쿵짝쿵짝 흘려 댔다. 사현의 얼굴에 웃음이 만개했다. 꼭 놀이동산에 온 어린아이 같은 얼굴이었다.
사현이 어색하게 조이스틱을 움직였다. 그러더니 영 어정쩡한 곳에서 빨간색 버튼을 콱 눌렀다. 인형의 발끝을 스친 갈고리가 공기만 한 움큼 쥔 채 복귀했다.
사현의 눈에 부릅 힘이 들어갔다. 발뒤꿈치를 든 그가 다시 조이스틱을 움직였다. 결과는 물론 실패였다. 그래도 이번엔 머리를 제대로 잡아 인형이 들썩이긴 했다.
조이스틱이 더 힘있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현은 유리를 뚫고 들어갈 것처럼 얼굴을 가져다 댔다. 갈고리가 여러 곳을 헤집었다. 술에 얼큰히 취한 사현은 하나만 공략하는 게 아니라 이것저것 전부 한 번씩 건드렸다. 열두 번의 기회가 모두 날아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띠롱띠롱 요란한 노래를 뿜던 기계가 뚝 죽었다.
“줘.”
사현이 우영을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우영이 자신의 지갑을 뒤져 만 원짜리를 찾아냈다. 사현은 그걸 쏠랑 채서 기계에 갖다 바쳤다. 기계가 다시 신명 나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사현은 또 열두 번의 기회를 모두 날렸다. 우영이 준비했던 오천 원짜리를 내밀었다. 더 이상 만 원짜리가 없었다. 통장을 만든 이후론 현금을 전혀 쓰지 않았더니 지갑이 얇디얇았다.
사현은 그 오천 원마저 날렸다. 그 후 또 당당하게 우영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꼭 도박에 빠진 자의 눈이었다. 우영이 눈썹을 어그러트렸다.
“미안해요, B.”
그가 텅 빈 지갑의 배를 갈라 보였다. 사현이 자신의 지갑을 뒤적였으나 하얀 수표만 가득할 뿐, 파랗고 노란 지폐는 보이지 않았다.
사현이 털썩 기계 앞에 주저앉았다. 세상을 다 잃은 표정이었다.
“짜증 나.”
우영이 어쩔 줄 모르고 그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주변에 돈 빼낼 ATM기가 없나, 아니면 편의점이라도. 열심히 두리번거리는데, 그 흔한 편의점 하나 보이지 않았다.
“너무 짜증 나.”
사현이 재차 신경질을 냈다. 무릎을 모으고 그사이에 얼굴을 파묻기까지 했다. 장난감을 빼앗겨 심통 난 애 같았다. 우영이 그런 사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우영은 어렴풋이 알았다. 지금 사현을 괴롭히는 짜증이 인형 뽑기에서 발화한 게 아니라는 걸. 그래서 뭐든 하고 싶었다. 뭐든 해 주고 싶었다.
우영이 사현의 재킷을 그의 어깨에 덮어 줬다. 그리고 지갑과 주머니를 뒤져 오백 원짜리 두 개를 찾아냈다. 기계가 다시 요란한 소리를 냈다.
우영은 사현이 이만오천 원어치의 실패를 거듭하는 동안 본 게 많았다. 어떻게 집으면 딸려오고, 어디를 집어야 갈고리에 꿰이는지 등. 그 정보를 추합해 신중히 조이스틱을 놀렸다.
그리고 성공했다. 인형 하나를 구출하는 것에. 우영이 그것을 탈탈 털었다. 조물조물 주물러 말랑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래 봐야 조악한 질이라 볼품없었지만.
“B.”
우영이 인형으로 사현의 팔뚝을 톡톡 두드렸다. 사현이 빼꼼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 어떻게⋯⋯.”
저는 수십 번이나 했음에도 하나를 못 뽑았거늘. 우영은 어찌 단 한 번만에 뽑았을까. 믿을 수가 없었다.
“제가 손으로 하는 건 웬만하면 다 잘해요.”
우영이 뿌듯하게 웃으며 인형을 내밀었다. 사현이 인형을 받았다. 보라색의 통통하고 보드라운⋯⋯ 보드라운⋯⋯ 뭐지, 이게. 그가 눈썹을 팔(八)자로 구겼다.
“이게 뭐야. 가지야, 고구마야.”
“어⋯⋯ 글쎄요⋯⋯.”
“너무 못생겼잖아.”
“미안해요. 다른 건 뽑기가 힘들어서⋯⋯.”
우영이 민망하다는 듯 뒷덜미를 긁적였다. 인형은 정말 심각할 정도로 못생겼다. 삼각형인지 타원인지 모를 몸통에 크기가 제각각인 팔다리가 달려 있다. 코는 동그랬고, 눈과 입은 삐뚜름하게 수 놓여 있었다. 누가 옴팡지게 깔고 앉아 퍼진 고구마 같은 모양새였다. 어쩌면 자유분방하게 자란 가지일 수도 있고.
그래도 제법 말랑했다. 인형 특유의 질감이 나쁘지 않았다. 인형의 손과 발을 조몰락거리던 사현이 샐쭉 웃었다. 이게 얼마 만에 만져 보는 인형인지 모르겠다.
“⋯⋯좋아요?”
우영이 슬쩍 물었다.
“응. 좋아.”
사현이 망설임 없이 긍정을 내놓았다. 덕분에 우영의 입가에도 웃음꽃이 폈다.
“그럼 이제 집에 가요.”
우영이 그를 채근했다. 너무 늦었다. 쌀쌀한 밤에 오래 나와 있기도 했고. 이러다 사현이 크게 아플까 걱정이었다. 그러나 사현은 인형과 눈싸움을 하느라 우영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얼른.”
우영이 그의 팔꿈치를 잡았다. 그 힘에 사현이 끌려가듯 일어났다. 우영이 사현의 옷가지를 정리해 줬다. 그 후 택시를 잡아 주소를 부르고 집 앞에 도착해 값을 지불하는 내내, 사현은 인형에게서 눈을 뗄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