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2. 조금 아는 사이 (2/24)

02. 조금 아는 사이

슈트를 입는 건 처음이었다. 슈트는 몹시 특별하거나 중요한 날 입는 거니까. 우영에겐 여태껏 ‘특별한 날’도 ‘중요한 날’도 없었다.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니 온몸을 감싸는 셔츠가 낯선 게 당연했다. 보드라우면서도 시원한 질감이 신기하다. 팔뚝도 끼고, 허벅지도 조이는데 그 불편함이 나쁘지 않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거울 속의 제 모습을 보던 우영이 문득 수줍게 웃었다. 슈트 입은 자신이라니. 출처 모를 뿌듯함이 올라왔다. 꼭 성공한 사회인이 된 것 같아서. 지금 있는 이 집도, 슈트도 뭐 하나 제 능력으로 가진 건 없지만 그냥 기분이 그러했다.

큼큼, 목을 가다듬은 우영이 이래저래 몸을 돌리며 모델 같은 포즈를 취했다. 괜히 넥타이도 만져 보고 소매도 더듬었다. 며칠 전 제인과 함께 슈트를 맞추며 입었던 때와는 또 달랐다. 두 번 입었다고 그새 적응이라도 한 모양이다.

우영이 한참 자신의 모습에 빠져들어 있는데, 똑똑. 간결한 노크가 울렸다. 어깨까지 떨며 놀란 우영이 네! 우렁차게 대답했다. 문이 열리고, 제인이 고개를 내밀었다.

“나가셔야 합니다.”

“아, 네!”

우영이 거울 옆에 놔뒀던 안경을 낚아채며 침실을 나섰다. 무심코 그것을 쓰려다 잠깐 멈칫했다.

“제인.”

“네.”

“저 시간 괜찮으면 잠깐만 어디 들렀다가 가도 돼요?”

우영이 씨익 한껏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 * *

경매장은 왁자지껄했다. VIP 경매라기에 고상한 분들이 모여 말 한마디 없이 패들(경매 번호판)만 들어 올릴 거라 생각했거늘. 뜻밖의 광경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놀라운 점은 온갖 언어가 들린다는 거였다. 해석은 못 하지만 저건 영어구나, 저건 일본언데, 어, 저 사람은 중국어를 쓰네, 정도는 구별할 줄 알았다.

새삼 사현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아직 그를 보진 못했지만, 이곳 어딘가에서 가장 지대한 관심을 받으며 태풍의 눈처럼 서 있을 게 분명했다.

제인이 경매 도록과 간단한 음료를 우영에게 내밀었다. 오늘 그녀의 임무는 우영을 감시하고 보살피는 거였다. 사현이 ‘냇가에 내놓은 어린애보다 불안하니 잘 봐’라고 명령했다.

우영이 허리를 꾸벅 숙이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 와중에도 눈동자는 데굴데굴 바쁘게 굴러갔다. 사현을 찾는 거였다.

“B는요?”

끝내 사현을 발견하지 못한 우영이 제인에게 물었다. 제인이 샴페인을 홀짝이며 대답했다.

“한창 바쁘실 겁니다. 미술계는 인맥으로 좌지우지되는 곳이라, 이런 곳에 올 때면 최대한 많은 분과 대화를 나누시거든요. 정보 수집도 하고, 동시에 우영 씨 그림을 은근히 홍보하기도 하고요.”

“아⋯⋯.”

우영이 아쉽게 탄식했다. 무심코 안경을 추켜올리려다 콧잔등에 아무것도 없어 얼른 손을 내려놓았다.

우영은 경매장에 오기 전, 안경점에 들렀다. 렌즈를 사기 위해서였다. 제인이 렌즈는 가볍고 얇아야 한다며 추천해 주는 것으로 샀는데, 눈에 뭘 넣는 건 생전 처음이라 눈알도 뻑뻑하고 따가웠다.

‘자기 이렇게 보니까 되게 예쁘게 생겼다.’

혹 그 말을 다시 들을 수 있을까 기대했는데 오늘은 틀린 모양이다.

-잠시 후 4시부터 경매가 시작됩니다. 응찰자분들은 모두 착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마치 AI가 읊는 듯한 방송이 나왔다. 규칙 없이 흩뿌려져 있던 사람들이 한곳으로 우르르 몰려가기 시작했다. 우영도 제인을 따라 발을 옮겼다.

널따란 홀에 검은 단상이 놓여 있고 그 아래에 일정한 간격으로 의자가 깔려 있었다. 돈 많은 부호가 앉기엔 조금 허술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간단한 철제 의자였다. 한쪽에는 전화기를 쥔 사람들이 전화 응찰 참여를 준비하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크고 작은 웅성거림이 들려 왔다.

쉽게 말하면, 정돈된 도떼기시장이었다. 차려입은 슈트가 아까울 정도였다.

우영이 코를 찡긋거렸다. 오페라하우스처럼 삐까번쩍한 곳에서 이루어질 것이라 상상해 왔는데. 적어도 수천. 많으면 수백억 원이 왔다 갔다 하니 그게 더 맞지 않겠는가.

우영과 제인은 뒤에서 세 번째 줄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의 앞엔 스무 줄 정도가 있었는데, 빈자리 하나 없이 빽빽했다.

우영이 허리를 한껏 펴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사현을 찾을 수 있을까, 싶어서. 허나 사람들이 어찌나 옹기종기 붙어 있는지, 그의 동그란 뒤통수를 발견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우영 씨 그림은 뒤에서 네 번째예요. 보통 신진은 어정쩡한 초중반 순서에 자리하는데, 아무래도 B가 내놓은 거라 후반에 있어요. 좋은 순서죠.”

제인이 경매 도록을 펼쳐 우영의 그림을 가리켰다. 우영이 눈썹을 들썩이며 도록을 살폈다. 제 그림을 인쇄 매체로 만나니 기분이 또 새로웠다. ‘네온(NEON)’이라 적힌 이름이 어찌나 낯선지 엄지로 슥슥 문질러 봤다.

“그래요?”

“네. 경매도 기승전결이 있어요. 앞부분은 빠르게 지나가고 뒷부분에 가열되거든요. 분위기가 달아오르면 가격도 높아지는 법이죠. 앞에 큼지막한 작품 하나가 비싸게 나가면, 뒤의 작품들도 상대적으로 가격이 오르는 경향이 있어요.”

우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도록을 차르륵 훑었다. 언뜻언뜻 눈에 띄는 그림 몇 개는 교과서에서 보던 작가의 작품이었다. 우영이 헛숨을 삼켰다. 이런 대가들 사이에 제 그림이 끼어있다니.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웠다.

“제, 제 그림이 팔리긴 할까요?”

“그럼요. B가 내놓은 거잖아요. 저도 사고 싶은걸요.”

제인이 자못 익살맞게 웃으며 말했다. 우영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머리를 하나로 높게 당겨 묶은 여자가 마이크 앞에 섰다. 경매사인 듯했다. 그녀의 옆으로 두 사람이 앉았다. 보조 경매사들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아트 옥션의 제38회 미술품 경매. 지금 시작합니다. 1번부터 21번까지의 응찰 자격을 말씀드립니다. 국공립 미술관 및 박물관, 문화 체육부에 등록된⋯⋯.

경매가 시작됐다. 웅성거리던 소음이 일제히 가라앉았다. 우영도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았다. 잠깐의 설명이 끝나고 커다란 스크린에 사진 하나가 떠올랐다. 파란색이 인상적인 그림이었다. 그 옆으로는 KRW, USD, JPY, CNY 등 각종 화폐 단위가 나열되어 있었다.

-첫 번째 경매품입니다. 김성호 작가의 「태평」, 이천만 원부터 백만 원씩 호가합니다.

경매사의 손짓을 따라 여기저기서 패들이 올라왔다. 그에 따라 스크린에 적힌 숫자들도 마구잡이로 요동쳤다.

-이천만 원.

-이천백만 원.

-이천이백만 원.

-이천삼백, 이천사백만 원.

-이천오백, 이천오백 나왔습니다.

뻐끔, 입을 벌린 우영이 무언가에 홀린 듯 그것을 구경했다. 이천만 원이면 공사판에서 몇 시간을 뛰어야 하는 거야⋯⋯. 시답잖은 생각을 하다 머리가 아파 와 말았다.

-전화, 이천육백.

-이천칠백 받았습니다.

-이천칠백. ⋯⋯이천칠백오십 여쭤 봅니다.

-이천칠백오십, 현재 최고가 이천칠백오십입니다.

-이천팔백 확인합니다. 이천팔백 있습니까? 이천팔백 나왔습니다. 이천구백 있습니까?

-⋯⋯.

-마무리하겠습니다. 이천팔백. 이천팔백. 이천팔백만 원.

-김성호 작가의 「태평」, 이천팔백만 원에 낙찰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다음 경매품⋯⋯.

탕, 경매봉이 경쾌한 소리를 만들었다. 짧은 박수 소리가 지나가고 바로 다음 미술품 경매가 시작됐다.

경매는 빠르게 흘러갔다. 휙휙 바뀌는 숫자만 구경해도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우영의 그림까지 오는 데에는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우영의 바로 앞 그림은 십오억을 시작가로 십팔억이라는 가격에 낙찰됐다.

화면에 우영의 그림이 떠올랐다. 우영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다리가 덜덜 떨렸다. 옆에 앉은 제인 역시 허리를 꼿꼿이 폈다.

-마흔여섯 번째 경매품입니다. <갤러리 비>의 B께서 오랜만에 경매장에 그림을 내놓으셨네요.

경매사가 앞줄 어딘가로 시선을 던지며 미소 지었다. 아마 사현이 앉아 있는 자리이리라.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갤러리 비>? B? 백사현? 누구 그림인데? 그러한 소음이 우영의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우영은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함에도 고개를 숙여야 했다.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프랑스에서 사흘 전에 들어온, 독특한 색감이 인상적인 그림입니다. 네온 작가의 「단풍 담장」, 오백만 원부터 오십만 원씩 호가합니다.

경매사가 말을 마치자마자 패들이 공격적으로 솟구쳤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시작가에 모두 눈독을 들이는 듯했다.

-오백오십, 육백, 육백오십, 칠백, 칠백오십, 팔백, 팔백오십⋯⋯.

그녀의 말이 이어짐에도 패들은 요지부동이었다. 아예 내려가질 않았다. 경매사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만 원씩 호가합니다.

-구백, 천, 천백, 천이백. 전화 천삼백, 천사백, 천오백⋯⋯ 이천만 원.

-이백만 원씩 호가합니다.

-이천이백, 이천사백, 이천육백, 이천팔백, 삼천.

-사백만 원씩 호가합니다.

-삼천사백. 삼천팔백. 사천이백. 사천⋯⋯.

우영이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지 않고는 비명을 지를 것 같았다. 오백만 원이었던 그림이 일 분 만에 사천만 원까지 치솟았는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온 패들은 이제 겨우 반이 줄었다.

제 그림이 사천만 원을 넘다니. 사백, 아니 사십도 감사할 판에. 우영은 까무러치기 직전이었다.

그 후로도 가격은 끊임없이 올라갔다.

-오천팔백. 오천팔백 나왔습니다. 오천구백 없습니까?

-오천구백. 오천구백 여쭙습니다.

-오천구백 나왔습니다. 육천. 육천 기다려 봅니다.

-전화에서 오천구백오십 나왔습니다.

-육천. 육천만 원 계십니까?

-현재가 오천구백오십입니다.

-⋯⋯육천! 육천 나왔습니다.

-경매 마무리합니다. 육천만. 육천만. 육천만 원!

-축하드립니다. 네온 작가의 「단풍 담장」 육천만 원에 낙찰되었습니다.

탕! 경매봉 소리와 함께 우영이 질끈 눈을 감았다. 세게 움켜 쥔 주먹을 부르르 떨고 있으니 제인이 진정하라는 듯 톡톡 손등을 두드렸다.

처음, 아니 두 번째로 사현과 만났던 날. 그의 사무실에서 그가 분명 그랬다.

‘나는 네 첫 그림을 육천만 원에 팔 거야.’

그저 저를 꾀기 위한 말장난이라 생각했거늘, 진짜 육천만 원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얼떨떨하다 못해 사지가 저릿저릿했다. 볼에 소름이 돋아 벅벅 얼굴을 문댔다.

“이게⋯⋯ 말이, 말이⋯⋯ 돼요?”

우영이 더듬더듬 단어를 조각냈다. 제인이 이해한다는 듯 싱긋 웃었다.

“B가 신인 작품을 경매에 내놓았다는 건 일종의 방아쇠예요. 새로운 대가가 탄생할 겁니다. 당연히 그림 가격이 치솟겠지요. 그러니 지금 여기서 사면 당신의 투자는 당첨이 확정된 복권과 다름없습니다. 그런 방아쇠요.”

“아⋯⋯.”

“B 손을 거친 그림의 가격이 떨어지는 일은 거의 없어요. 작가가 그림을 더 이상 그리지 않으면 희소가치 때문에 가격이 상승하고, 작가가 그림을 많이 그리면 대중화가 되었다고 가격이 또 상승하죠. B는 어떤 이유가 됐든, 그것을 서사로 만들어서 그림에 이어붙이는 능력이 탁월한 사람이에요.”

“⋯⋯.”

“물론 그림을 보는 안목 역시 말할 것도 없죠. B를 미워하는 평론가가 아닌 이상, 전 세계 평론가들이 그의 안목에 긍정하거든요.”

“허⋯⋯.”

“그러니까 지금 우영 씨 그림을 구매하는 사람은 돈을 얼마나 쓰던,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역시 B⋯⋯. 멋지네요.”

우영의 만면 가득 감탄과 경외가 차올랐다. 사현이 대단한 건데 왜 제가 뿌듯한 건진 모를 일이다. 한껏 들떠 공중으로 날아오르기 직전인 우영을 보던 제인이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무섭기도 하죠.”

“네?”

“무서운 분이에요, B. 너무 동경하진 마세요.”

제인이 가늘게 눈을 째며 미소 지었다. 단번에 알아듣기 힘든 말에 우영이 갸우뚱, 고개를 꺾었다. 그러나 제인은 다른 말이 없었다. 잠깐 그녀를 응시하던 우영이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머릿속엔 그녀의 음성이 웽웽 모기처럼 울려 댔다.

‘무서운 분이에요, B.’

대체 무슨 뜻일까.

* * *

모든 경매가 끝나고, 바깥으로 나오자 진한 노을이 우영을 반겼다. 그가 좋아하는 형광 보라색과 남색이 섞인 예쁜 하늘이었다. 핸드폰을 꺼내든 우영이 그것을 카메라로 담았다. 사현이 사 준 핸드폰은 화질도 기가 막혔다.

우영이 사현과의 대화창에다 노을 사진을 전송했다.

[오늘 너무 멋있었어요, B.]

비록 사현을 보진 못했으나 분명 멋있었을 터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은 우영이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걸음을 옮겼다.

제인이 택시 타고 가라며 만 원짜리 두 장을 쥐여 줬지만 오늘은 걷고 싶었다. 노을도 예쁘고, 기분도 좋고. 집에 가서 뜨끈한 물로 샤워한 후에 밤새도록 그림을 그릴 생각이었다.

온갖 외제차로 붐비던 경매장과 멀어지니 주말이라 한산한 테헤란로가 나왔다. 슈트를 입고 걷는 테헤란로라. 괜히 어깨가 올라갔다.

삼 분 정도 걷던 우영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혹 사현에게 답이 왔나 싶어서였다. 그러나 아직 읽지도 않았다. 하긴, 바쁘겠지. 여전히 경매장에 있으려나.

우영이 아쉽게 입맛을 다시며 눈을 비볐다. 눈동자에 철썩 달라붙은 렌즈가 쓰라렸다. 이만 택시를 탈까, 그런 고민을 하던 차, 길목에 차 한 대가 섰다.

“⋯⋯B?”

사현의 차였다. 우영이 고개를 쭉 내밀고 차를 쳐다보는데, 창문이 내려갔다. 운전대를 쥔 사현이 나타났다. 광대를 볼록하게 올린 우영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집에 가시는 길이에요?”

“응. 타.”

사현이 고개를 까딱였다. 우영이 냉큼 차에 올라탔다. 사현의 바닐라 냄새가 온몸을 덮쳐 왔다. 그게 말도 못 하게 좋았다. 콧구멍을 벌름거리고 있는데, 사현이 핸들에 이마를 묻은 채 시선을 던져 왔다.

그의 입가에 연한 미소가 걸려 있다. 보는 이도 기분이 좋아지는 미소였다.

“자기야.”

“네?”

“우리 오늘 저녁은 외식할까?”

그 말에 우영이 뒤꿈치를 들썩였다.

“네!”

어린아이처럼 우렁찬 대답에 사현이 푸흐, 웃음을 흘리며 액셀을 밟았다. 두 사람을 태운 차가 부드럽게 테헤란로를 가로질렀다.

* * *

사현이 우영을 데리고 온 레스토랑은 한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은은하게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테이블마다 이름 모를 꽃이 꽂혀 있고, 모두 나이프와 포크로 식사하는. 우영은 평생 꿈도 꾸지 못한 장소였다.

애피타이저로 나온 샐러드를 섞던 사현이 물끄러미 우영을 바라봤다. 슈트를 입고 있으니 제법 어른처럼 보인다. 평소엔 덩치 큰 중학생 같더니.

“렌즈 꼈니?”

“네.”

“예쁘다.”

사현이 무감하게 감탄했다. ‘예쁘다’처럼 보드라운 말을 내뱉기엔 조금 삭막한 음성이었다. 그렇다고 거짓은 아니었다. 다만 종일 시달린 터라 정성 들여 감정을 표현하기가 귀찮았을 뿐이다.

입꼬리를 올려 웃는 것도,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해 주는 것도, 궁금하지도 않은 안부를 묻는 것도. 오늘 치를 초과했다. 몸은 힘들지 않은데, 입가가 뻐근했다.

“감사합니다.”

허나 우영은 늘 그렇듯, 불만을 몰랐다. 하찮은 것을 던져 줘도 진심으로 감사할 줄 알았다.

“머리도 잘랐네.”

사현이 레드 와인이 찰랑이는 잔을 들며 말했다.

“네. 제인 실장님이 엄청 비싸 보이는 미용실에 데려다주셨어요.”

우영이 훤히 드러난 이마를 어색하게 문질렀다. 매번 눈을 찌를 때까지 무식하게 기르다 이발소에 갔었는데. 지금처럼 뒷덜미가 서늘할 정도로 쳐내니 모골이 다 송연했다.

“잘 어울려.”

사현의 칭찬에 우영이 어깨를 들썩였다. 상큼한 드레싱으로 버무려진 샐러드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었다. 칭찬에 면역력이 없어 그런가. 사현의 단조로운 말에도 입술을 씰룩이게 됐다.

언젠가 사현이 너는 숨도 참 고르게 쉰다, 따위의 칭찬을 해도 광대를 붉힐 판이었다.

샐러드가 바닥을 보일 때쯤, 메인 요리가 하나하나씩 등장했다. 바닷가재 비스크와 송로버섯이 들어간 크림 파스타, 미디엄 레어로 익힌 꽃등심, 보드라운 안심 스테이크까지. 테이블이 꽉 찼다. 우영이 입맛을 다시며 포크를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응.”

우영의 포크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당연 두툼한 고깃덩이였다. 갈색빛으로 구워진 게 어찌나 맛깔나 보이는지. 일단 고기를 푹 찍었다. 그리고 반대 손으로 나이프를 들었다. 직각으로 나이프를 곧추세운 우영이 그것으로 고기를 자르기, 아니 찌르기 시작했다. 접시를 긁어 대는 나이프 소리가 요란했다. 식사라기보다는 난도질에 가까운 행위였다.

사현의 눈살이 마뜩잖게 구겨졌다. 그러나 우영의 칼질은 눈치 없이 계속됐다.

“이리 줘.”

보다 못한 사현이 검지를 까딱였다.

“네?”

단번에 알아듣지 못한 우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달라고, 접시.”

사현이 턱짓으로 스테이크 접시를 가리켰다. 그제야 이해한 우영이 묵직한 접시를 사현의 앞에 내려놓았다. 더할 나위 없이 바른 자세로 포크와 나이프를 든 사현이 서걱서걱 고기를 썰었다. 그리 힘을 들이는 것도 아닌데 두툼한 고기가 가지런하게 조각났다.

동그랗게 입술을 모은 우영이 소리 죽여 감탄했다.

“경매는 어땠어? 재밌던?”

사현이 고기를 썰며 물었다. 우영이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엄청 신기했어요. 가명으로 그림 내놓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고, 그리고 어⋯⋯ 아! 내가 정말 대단한 사람과 일을 하게 되었구나, 로또 맞았구나, 대박이구나. 그런 생각도 했어요.”

가감 없이 전해지는 들뜸에 사현이 설핏 웃음을 흘렸다. 우영은 무표정하면 냉기가 철철 흐르는 얼굴이다. 오늘은 렌즈도 끼고, 슈트까지 입고 있어 더 했다. 그런데도 속절없이 해맑으니 따라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현이 스테이크 접시를 다시 우영의 앞에 놓아 줬다. 우영이 고맙다며 꾸벅 허리를 숙이더니 열심히 식기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현은 그가 먹는 모습을 구경하며 와인을 홀짝였다. 아직 애도 없거늘,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다는 말에 공감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사현은 입이 짧은 터라 일인분만 시켜도 남기기 일쑤였는데, 우영과 함께 식사하게 된 이후로는 뭐든 넉넉하게 시킬 수 있게 됐다. 몇 개를 시켜도 늘 말끔하게 비우니 여러 음식을 맛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스테이크를 조각내던 사현이 아, 짧은 감탄사와 함께 재킷 안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무언가를 꺼냈다.

“자.”

통장이었다. 우영의 눈썹이 가파른 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슈트를 맞추던 날, 제인과 함께 가서 만든 통장이었다. 수익이 입금될 계좌를 알려 달라기에 아직 통장이 없다고 했더니 사현이 경악하며 은행에 끌고 가다시피 했었다. 통장도, 카드도 제인이 추후 따로 주겠다고 해서 그러라 했는데.

우영이 빳빳한 통장의 첫 장을 열었다. ‘서우영’이라 인쇄된 활자가 눈에 들어왔다. 엄지로 제 이름을 슥슥 문질러 봤다. 아랫배가 간질간질했다.

“오늘 치 미리 넣어 놨어. 확인해 봐.”

“아⋯⋯.”

사현의 말에 우영이 휙 첫 장을 넘겼다.

[스마트 뱅킹, 백사현, 6,000,000, 잔액 W6,001,000.]

우영의 눈꺼풀이 깜빡깜빡 바쁘게 움직였다.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처음 통장을 만들 때 넣었던 천원까지 포함하면 육백만천 원. 육백만천 원이 내 통장에⋯⋯.

“유, 육백만 원이네요?”

“응. 백 원도 안 뺐어.”

사현의 눈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경매 수수료를 제하면 육천만 원에서 기백만 원이 빠지지만, 거기까진 계산하지 않았다. 평소 성격대로라면 1원 단위까지 칼같이 쳐냈겠으나, 우영은 귀여우니까. 충성도도 높고, 순진하고, 감사할 줄 아니까.

오늘도 보라. 제게 예뻐 보이겠다고 렌즈까지 낀 걸 보면 참⋯⋯ 안 좋게 보려야 안 좋게 볼 수가 없었다. 본디 예쁜 게 예쁜 짓을 하면 인생 살기가 수월해지는 법이다.

“정말⋯⋯ 감사해요, B.”

우영은 숫자에서 도통 눈을 뗄 줄을 몰랐다. 쌍꺼풀이 곱절로 진해졌다. 눈썹은 아래위로 씰룩씰룩, 감동하지 못해 난리가 났다.

사현이 포크로 접시를 두드렸다. 카랑카랑한 소리에 우영이 번쩍 머리를 쳐들었다.

“통장 넣고 밥부터 먹어.”

“네!”

망설임 없이 통장을 옆으로 치운 우영이 열심히 포크를 움직였다. 그런 우영을 보던 사현이 반쯤 남아 있던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월요일부터 바로 전시 준비 들어갈 거야.”

“전시요?”

“응. 갤러리에 들러야 할 일도 많아질 거야. 가벽 설치랑 조명 설치, 전반적인 인테리어, 관람객 동선, 작품 배치랑 팸플릿. 할 게 많아. 뭐, 네가 온다고 해서 네 의견이 반영되는 건 아닌데. 그래도⋯⋯.”

“괜찮아요. 당연히 B가 저보다 잘 아시고, 잘 하실 텐데요.”

“⋯⋯.”

사현의 입이 한일자로 굳게 다물렸다. 우영의 믿음은 남세스러울 정도로 맹목적이다. 반항이나 불평보다야 낫지만, 경험할 때마다 발목이나 팔꿈치와 같은 곳이 뻑적지근했다. 순진한 애 데려다가 사기 치는 것 같아서.

“저 그림 진짜 열심히 그릴 거예요. B 말도 잘 들을 거예요.”

입가에 하얀 크림소스를 묻힌 우영이 대뜸 다짐했다. 사현이 코웃음을 치며 냅킨을 그에게 내밀었다. 우영이 턱을 빼고 고개를 갸웃거리길래 손수 입가를 닦아 줬다. 우영의 광대가 선홍빛으로 달아올랐다.

냅킨을 아무렇게나 구긴 사현이 테이블 위로 턱을 괬다. 술기운이 올라 나른해진 그의 눈동자에 우영이 담겼다.

“말 잘 들을 거라는 그 마음. 변치 않길 바란다. 아니면 내가 나쁜 짓 할 거거든.”

“네.”

우영은 늘 그랬듯, 부정을 몰랐다. 사현이 헛숨을 삼켰다. 나름 협박이었는데, 저리 발랄한 대답이라니. 나중에 너 죽고 싶어? 그리 말해도 죽으라 하시면 죽을게요, 라고 대답할까 봐 제가 다 겁이 났다.

절레절레 머리를 흔든 사현이 빈 잔에 와인을 따랐다. 적빛 액체가 부드럽게 넘실거렸다.

* * *

택시를 탄 우영이 핸드폰을 밝혔다. 제인의 메시지가 떠 있었다. 내용은 없고, 링크 하나가 첨부되어 있었다.

경매가 끝난 후, 네온의 그림에 평론가들과 컬렉터들의 지대한 관심이 쏟아졌다고 했다. 공개된 그림은 한 점밖에 없었으나 위탁자가 B였고, 시작가의 12배 가격으로 낙찰된 만큼 큰 이슈가 됐단다.

우영이 링크를 터치했다.

[지난 주말, 강남의 뮤지엄 스페이스에서 아트 옥션의 제38회 예술품 경매가 있었다.]

평론은 간결하고 일차원적인 정보로 시작했다. 우영이 엄지를 슥, 아래에서 위로 밀어 올렸다. 눈에 익은 그림이 나타났다. 경매의 첫 시작을 알렸던 작품이었다.

[첫 경매품이었던 김성호의 「태평」은 김성호 특유의 푸른 색채가 파도처럼 넘실거리며 다가오는⋯⋯.]

우영의 엄지가 휙휙 빠르게 움직였다. 작품 하나를 집요하게 다루는 평론이 아니라, 경매 전체를 간단히 아우르는 평론이었다. 끊임없이 움직이던 우영의 엄지가 멈춰 섰다. 액정 가득 제 그림이 떠올랐을 때였다.

[이번 경매에서 가장 주목받은 작품은 16억에 낙찰된 정수환의 「구름」도, 18억 5천만 원에 낙찰된 이인혜의 「생명의 여신」도 아닌, 네온(NEON)의 「단풍 담장」이었다.

네온의 「단풍 담장」은 <갤러리 비>의 ‘B’가 위탁자로 나서면서 프리뷰(preview, 경매 출품작을 경매 전에 감상하고 확인할 수 있는 전시회)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오백만 원으로 시작한 경매는 열두 배인 육천만 원에 다다르고서야 주인을 만났다.

「단풍 담장」은 지극히 현실적인 세계에 비현실적인 색감을 불러와 오묘한 분위기를 뿜어 낸다. 네온이라는 독특한 이름답게 형광 물감을 즐겨 사용하는데, 고급화 전략에 나선 신진들이 채도가 낮은 색을 뭉뚱그려 사용하는 것과는 확연히 상반된다. ‘천박한’ 색으로 명명되는 형광을 사용하여 예술 동향에 역행하는 방식으로 컬렉터들과 애호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고전적인 서양미술과 팝아트의 간극에 있는 「단풍 담장」은 다른 세계와 통하는 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기나긴 탐험 끝에 현실과 환상의 접점을 발견한 작가가 캔버스로 그곳을 쾅! 내리찍어 통째로 훔쳐온 듯하다.

네온은 프랑스에서 휴가를 보내던 B가 리크위르(Riquewihr)의 작은 갤러리에서 우연히 발견한 신진 작가다. 첫눈에 네온에게 반한 B는 그 자리에서 모든 그림을 구매했다고 한다. 「단풍 담장」은 그중 하나이며, 다른 그림들은 공개할 의사가 없다고 밝혀 많은 애호가가 아쉬운 탄식을 흘렸다.

그러나 너무 실망하지 말라.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갤러리 비>에서 네온(NEON)의 기획 전시를 준비 중이며 올해 오픈 예정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B가 한국 미술에 또 어떠한 획을 그을지, 열렬히 기대하는 바이다.]

우영은 짤막한 평론을 세 번이나 연달아 읽었다. 제 그림이 이렇게 칭찬받고 찬탄받는 건 처음이라 믿을 수가 없었다. 핸드폰을 죽인 우영이 눈두덩을 꾹꾹 짓눌렀다.

“프랑스가 중요했구나⋯⋯. 이름도 바꾸길 잘한 것 같고⋯⋯.”

우영이 혀를 내둘렀다. 역시, 사현의 말은 뭐 하나 틀린 게 없다.

그가 멍한 눈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창밖을 응시했다. 높은 빌딩 숲이 휙휙 지나갔다. 그걸 보다 퍼드득 어깨를 떨며 다시 평론을 읽었다.

제 그림에 대한 첫 칭찬이라 곱씹고, 또 되씹어도 새로웠다. 우영이 핸드폰 안으로 들어가겠다는 듯 고개를 처박았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택시가 멈춰 섰다. 허나 우영의 머리통은 들릴 줄을 몰랐다.

백미러로 우영을 살피던 택시 기사가 나지막이 그를 독촉했다.

“학생. 다 왔어요.”

“아, 네! 여기요.”

우영이 반질반질한 새 카드를 내밀었다. 제 이름이 영문으로 적힌 카드였다. 사현이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은 그의 카드로 쓰라 말했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제 통장에 육백만 원이 들어 있는데, 만 원이 조금 넘는 택시비쯤이야 별거 아니었다.

영수증과 카드를 대충 주머니에 쑤셔 넣은 우영이 짧은 인사말과 함께 택시에서 내렸다. 쨍한 햇볕이 눈을 괴롭혔다. 우영이 눈살을 구기며 고개를 들었다.

오늘따라 더욱 웅장하게 느껴지는 <갤러리 비>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현의 관장실은 그래도 한 번 와 봤다고 꽤 익숙했다. 널찍한 소파에 자리 잡은 우영이 주위를 둘러봤다. 몇 주 전에 왔을 때와 비교해 전혀 달라진 게 없다. 그마저도 사현다웠다.

우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느릿한 걸음걸이로 관장실을 구경했다. 조명등도 켜 보고, 수억 원을 호가할 듯한 조각상도 요리조리 뜯어봤다. [관장 백 사 현]이라 적힌 크리스털 명패를 쓸어봤다가 손자국이 나서 옷으로 벅벅 문질러 닦기도 했다.

그러다 발견한 게 책상 귀퉁이에 가지런히 쌓인 서류들이었다. 전시 기획서, 작품 체크리스트, 마케팅 관련 등 모두 사현의 결재를 기다리는 서류들이었다. 우영이 알아볼 수 있는 건 몇 없었다. 딱 하나 눈에 띄는 게 있다면 하단에 찍힌 <갤러리 비>의 로고였다.

<갤러리 비>의 로고는 약간 독특하다. 보통 박물관, 미술관, 갤러리의 로고는 건물 외관이나 이름에서 따와 디자인한다. 한눈에 이게 무엇을 뜻하는 이미지구나, 판단할 수 있단 말이다. 그러나 <갤러리 비>의 로고는 모호했다. 굳이 따지자면 추상 미술에 가까웠다.

점이 세 개씩 세로로 두 줄 놓여 있다. 왼쪽 세 개 중 위에서 두 개는 다른 점들에 비해 크기가 곱절로 크다. 그중 첫 번째 점에는 잭슨 폴록의 작품처럼 물감이 거칠게 튀어 있었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우영이 로고를 뚫어지라 바라봤다. 이게 뭘 뜻하는 걸까. 사현이 아무런 의미 없이 디자인했을 리 없는데. 어디서 본 것도 같거늘.

우영의 허리가 점점 더 아래로 굽었다. 그렇게 책상에 이마를 처박기 직전,

“그렇게 봐도 어디 가서 팔 만한 정보는 없을 텐데.”

사현의 음성이 들려 왔다. 우영이 벌떡 몸을 세웠다. 사현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우영의 입가에 금세 웃음이 뱄다.

“오셨어요?”

반가움 가득한 인사에 뾰족하던 사현의 시선이 한층 누그러들었다. 우영이 무언가를 캐내려 책상을 뒤진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다. 현장에서 적발된 범인이 저리 해맑을 순 없을 테니까.

“뭘 그렇게 보니?”

“아⋯⋯. 로고요.”

“로고?”

“네. <갤러리 비> 로고.”

우영이 살짝 흐트러진 서류를 바르게 정리했다. 그러고는 책상을 돌아 나와 소파로 향했다. 세 걸음쯤 뗐을 때, 답이 번뜩 떠올랐다.

점 여섯 개. 그중 큼지막한 두 점. 우영이 짝 손뼉을 쳤다.

“아! 점자! 점자 맞죠? 점자로 알파벳 B가 저 모양인데.”

사현의 눈이 가늘게 좁아졌다.

“⋯⋯별걸 다 아네.”

“진짜 점자예요?”

우영이 희한하다는 듯 눈썹을 어그러트렸다.

“응. 점자 맞아.”

사현이 긍정했다. 우영이 흐음, 목으로 신음했다. 점자가 맞다니, 뜻을 가늠하기가 더 힘들어졌다.

갤러리는 그 무엇보다 눈으로 하는 일이 많은 곳이다. 그런데 로고가 점자라니. 대체 어떠한 뜻이 숨어 있는 걸까. 혹, 뜻이 아니라 기억이 숨어 있는 걸까. 사현만 아는 시간 같은 거 말이다. 그의 손목에 붙은 못된 흉터와도 관련이 있을까.

우영은 소파를 앞에 두고도 앉지 않았다. 생각의 늪에 빠져 자신이 무엇을 하던 중이었는지도 까먹었기 때문이다. 사현이 툭툭 그의 팔뚝을 건드리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곧 제인이 진하게 내린 커피와 얼음이 동동 뜬 콜라를 가져왔다. 콜라는 우영의 몫이었다. 사현이 커피 위로 시럽을 쏟아 부었다.

“궁금해?”

“⋯⋯궁금하다고 하면 알려 주실 거예요?”

“아니.”

사현이 킥킥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커피 잔을 들었다. 우영이 입을 삐죽였다. 진짜 가르쳐주기 싫은 건지, 아니면 장난인지 구분이 어렵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똑똑, 노크 소리가 울렸다. 사현이 몸을 일으켰다. 우영이 덩달아 일어났다. 손님이라도 오나, 했는데 사현이 태블릿을 챙기며 나갈 준비를 했다. 그가 멀뚱히 서 있는 우영에게 따라오라며 손짓했다.

사현을 따라 도착한 곳은 널따란 미팅 룸이었다. 간단한 다과와 유명 프랜차이즈 카페의 커피가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리고 여섯 명의 낯선 얼굴들. 그들은 사현이 들어오자마자 일제히 허리 굽혀 인사했다. 얼떨결에 함께 인사를 받은 우영이 엉거주춤한 포즈로 목을 구겼다.

“이분이 네온 작가님이세요.”

사현이 간단하게 우영을 소개했다. 공간에 있는 이들은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이가 여성이었는데, 어찌나 반짝반짝한 눈으로 우영을 쳐다보는지, 하마터면 도망칠 뻔했다.

“이름만큼 세련되게 생겼지?”

사현이 나지막이 웃으며 우영을 쳐다봤다. 모든 이들이 여러 번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이쪽은 우리 갤러리스트(Gallerist) 팀. 편하게 큐레이터라고 불러도 되고.”

사현이 이번엔 우영에게 직원들을 소개했다. 우영이 꾸벅 한 번 더 허리를 굽혔다. 짝짝짝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사현이 미팅 룸 한가운데의 의자에 착석했다. 우영은 그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열댓 개의 눈알이 우영을 졸졸 따라다녔다.

우영이 볼 안쪽을 씹었다. 이렇게 지대한 관심을 받을 줄 알았으면 옷 좀 챙겨 입고 올걸. 덜렁 후드 하나 걸친 차림새가 부끄러웠다.

“전시회는 우리가 처음. 밥 먹고 그림만 그리신 분이라 이쪽 룰은 잘 몰라요. 그래도 우리가 프로니까 괜찮겠죠?”

“예!”

“그럼요.”

“아유, 그냥 계시기만 해도 오늘 미팅 밤새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여기저기서 긍정이 튀어 올랐다. 마지막 말에는 모든 이가 와르르 웃음을 쏟아냈다. 사현도 크게 웃었다.

안경을 벗은 우영은 누가 봐도 감탄할 만한 외모다. 근데 그의 외모 칭찬에 왜 자신이 뿌듯한지 모르겠다. 잘 키워 놓은 애가 칭찬받으면 이런 기분이려나. 사현이 무심코 우영의 머리를 쓸어 넘기려다 꾹 주먹을 쥐어 참아 냈다.

“오늘은 전시 제목, 전시 콘셉트, 예상 규모, 타깃 관람객, 그림 셀렉트까지 전반적인 부분을 아울러 정리할 겁니다.”

사현이 미팅의 시작을 알림과 동시에 모든 이들의 손이 바빠졌다. 전면 스크린에 우영의 그림이 뜨고, 누구는 노트북, 또 누구는 태블릿을 두드렸다. 포스트잇이 화려하게 달린 다이어리를 정리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현이 슬쩍 자신의 태블릿을 옆으로 밀어 우영과 공유했다. 우영이 방긋 웃으며 의자를 사현의 옆에 바짝 붙였다.

온갖 전문 용어들이 쏟아졌다. 우영과 어울릴 만한 전시는 아주 먼 과거부터 현대의 것까지 모두 언급됐다. 전시 콘셉트와 제목이 정해지는 데에 가장 오랜 시간을 할애했다. 그러나 이렇다 할 결과가 창출되지 않았다.

우영이 사현의 손목시계를 슬쩍 훔쳐봤다. 벌써 네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그 누구도 피곤해하지 않았다. 광대에 열을 채우고 창의를 토해 내느라 바빴다. 대단한 열정이었다. 물론, 우영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 역할에 충실했다.

미팅은 뉘엿뉘엿 날이 저물 때쯤에야 끝났다. 사현이 뻑뻑한 눈두덩을 꾹꾹 세게 눌렀다.

“다음 미팅은 디자인 팀이랑 인테리어 팀까지 같이 봅시다. 오늘 정해진 콘셉트를 바탕으로 대략적인 포스터랑 리플릿 견본, 인테리어 축소 모형 준비해 주세요. 화이트 버전 하나, 블랙 버전 하나로. 아, 마케팅 팀한테 SNS 마케팅 전략도 준비해 달라고 전해 줘요.”

“B. 작품 가격은요? 그래야 예산도 가늠을⋯⋯.”

“그건 내가 작가님과 따로 정해 알려 주겠습니다.”

사현이 미팅의 끝을 알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고했습니다. 제이에게 카드 맡겨 놨으니 어디 비싼 곳 가서 제 돈 탈탈 털어 먹고 퇴근하세요. 앞으로 바쁠 테니까.”

그의 말에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직원 한 명이 번쩍 손을 쳐들었다. 사현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관장님은 같이 안 가세요?”

“아, 나는 네온 작가님과 먹을 거라.”

명백한 거절에 사람들이 아쉬운 티를 숨기지 못했다.

“그럼 네온 작가님도 같이 드시면 안 되나요?”

다른 직원 하나가 명쾌한 방안을 제시했다. 시선이 우영에게로 쏠렸다. 우영이 초짜 작가가 깎은 조각상처럼 기이하게 뒤틀렸다. 이러한 관심은 낯설다 못해 괴롭다. 저보다 한참 작은 사현의 뒤로 숨고 싶을 지경이었다.

아마 함께 밥을 먹으면 시선으로 모자라 온갖 질문까지 받게 되겠지. 생각만 해도 등줄기에 소름이 돋아났다.

“아, 음⋯⋯ 저는⋯⋯ B와 먹겠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우영이 쭈뼛쭈뼛 말을 더듬었다. 여기저기서 아쉬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미술계에서 신진 작가를 만나는 일은 흔치 않다. 젊고 잘생긴 신진 작가는 더더욱 없다. 숨소리 하나만 놓쳐도 이마에 핏줄을 세우는 나이 지긋한 작가가 대부분인 이 업계에서 우영의 등장은 참으로 신선했다. 미팅에 직접 참석하는 것도 신기한데,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는 작가라니.

우영이 애절한 눈빛으로 사현을 쳐다봤다. 이만 자신을 여기서 구해 달라는 뜻이었다. 사현이 코를 찡긋거리며 웃음을 참았다.

하여튼, 귀엽다니까.

미팅을 끝낸 후, 사현은 일이 조금 남았다며 우영에게 먼저 집에 들어갈 것을 권했다. 그러나 우영은 기다리겠다며 자리를 지켰다. 사현이 그럼 저녁 메뉴나 찾아보라고 소일거리를 던져 줘 두어 시간쯤이야 금세 지나갔다.

“가자.”

포털 사이트에 ‘저녁 메뉴’를 검색한 우영이 찜닭과 중식을 두고 고민하고 있을 때, 사현이 재킷을 챙기며 일어났다. 우영이 그를 바짝 뒤따랐다.

“뭐 먹을지 정했어?”

엘리베이터에 오른 사현이 넥타이를 풀며 물었다.

“찜닭이랑 중식이요. 찜닭은 순살로 시킬 수 있고요, 만두랑 소시지, 당면도 추가된대요. 중식은 어⋯⋯ 웬만한 메뉴는 다 있어요. B는 게살볶음밥이랑 탕수육 좋아하실 것 같아요.”

우영이 첫 PT를 컨펌받는 신입 사원처럼 긴장한 얼굴로 답했다. 사현이 흐응, 코로 숨을 내뱉었다. 찜닭과 중식이라. 둘 다 나쁘지 않았다. 그냥 둘 다 먹을까. 우영이 있으니 음식물이 남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텐데.

그 사이 엘리베이터가 로비에 다다르고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이 바깥으로 발을 내디뎠다. 사현이 우영을 보며 두 메뉴 다 좋다고 입술을 달싹였을 때였다.

“왜 이제 나와.”

낮은 음성이 사현과 우영의 사이를 파고든 건.

사현의 낯이 순식간에 차게 식었다. 우영의 시선이 목소리를 따라갔다. 그곳엔 우영만큼이나 키가 큰 남자가 서 있었다.

뾰족한 눈매에 삼백안이 인상적인 얼굴이었다. 그 아래로는 얄쌍한 코와 두꺼운 입술이 받쳐 줘 퍽 조화로웠다. 그리고 몸에 딱 붙게 입은 쓰리피스 슈트는 그가 아주 전문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아마 실로 그럴 터였다.

“일이 많아? 퇴근이 늦네?”

남자가 자못 친근하게 말했다. 사현과 안면이 있는 사이인 듯했다. 근데 왠지 모르게 적대감이 풍겼다. 남자와 사현에게서 스멀스멀 냉기가 흘러나왔다. 단숨에 얼어붙은 공기가 어찌나 불편한지 애꿎은 우영의 어깨가 결릴 정도였다.

“여기까지 웬일이에요.”

사현이 고저 없는 어조로 물으며 남자를 지나쳤다. 방문의 이유를 물었으나 전혀 관심 없다는 투였다. 우영이 그들의 눈치를 보며 사현의 뒤에 바짝 붙어 섰다.

묘한 사현의 무시에 남자의 미간이 한껏 구겨졌다.

“매달 10일. 가족 모임이잖아.”

“아. 그래요?”

우영이 귀를 쫑긋 세우고 그들의 대화를 경청했다. 가족 모임이라. 남자와 사현이 가족인 걸까. 근데 사현은 가족이라는 단어에 어째 저리 무감한가.

남자가 사현과 발맞춰 걸으며 따라붙었다. 그저 나란히 걷는 것일 뿐인데 위협적이었다.

“아버지가 너 안 올 거 뻔하다고 데리고 오라시더라.”

“⋯⋯.”

“그래서 내가 직접 왔어. 이 등신, 같은, 갤러리, 까지.”

남자가 부러 말을 툭툭 끊었다. 그러나 사현은 여전히 답이 없었다. 그저 고집스러울 정도로 전방만 주시했다. 남자의 눈썹이 거칠게 꿈틀거렸다.

잠시 사현을 노려보던 그가 재킷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사현이 부릅 눈을 홉떴다. 덩달아 우영도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어떤 정신 나간 인간이 갤러리 안에서 담배를 꼬나문단 말인가.

정갈하게 움직이던 사현의 발이 뚝 멈춰 섰다. 덩달아 우영과 남자도 멈췄다.

“형, 미쳤어요?”

사현이 으르대듯 말했다. 우영의 얼굴에 경악이 잠깐 스치고 지나갔다. 형이라고? 형? 형젠데 이렇게 날이 선 분위기를 풍긴단 말인가. 아니, 애당초 손톱만큼도 닮질 않았는데 가족이라니. 이상했다.

“미쳤냐고? 내가? 아니?”

남자가 부러 과장스레 말끝을 올렸다. 명백한 비아냥이었다. 그 와중에도 사현을 위협하듯 지포 라이터의 뚜껑을 틱틱 열었다가 닫았다. 사현의 주먹이 부르르 경련했다.

“여기 내 갤러리예요. 왜 굳이 여기까지 와서,”

“여기가 네 갤러리라고? 아닐걸. 잘 생각해 봐.”

“⋯⋯.”

사현이 아랫입술을 세게 짓씹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빠르게 뛰었다. 턱이 떨리고, 누가 머리털을 억척스레 잡아당기는 듯, 두통도 일었다.

이런 짜증과 이만큼의 분노는 쉽게 경험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현은 애당초 감정이라는 것에 그리 민감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이다지도 흥분시키는 건 본가와 본가에 관련된 인간들뿐이었다.

사현이 크게 심호흡하며 이마를 쓸어 올리고 우영을 바라봤다.

“먼저 가.”

“저요?”

우영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검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사현이 눈짓으로 긍정했다.

“하지만⋯⋯.”

“괜찮아. 가. 가서 밥 먹어.”

사현이 부드럽게 우영의 팔뚝을 밀어냈다. 우영의 장대한 덩치가 밀리기엔 연약한 힘이었다. 그런데도 우영은 어쩔 수 없이 발을 떼야 했다. 괜히 뻗댔다간 사현이 크게 화를 낼 듯했기 때문이다.

갤러리를 나서는 내내 우영은 몇 번이고 뒤를 돌아봤다. 남자와 사현이 곧 죽일 듯 서로를 보며 무어라무어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먼 거리라 소리가 끊겨 들렸다.

“아버지가⋯⋯ 그러니까⋯⋯.”

“언제까지⋯⋯ 더 이상⋯⋯.”

갤러리를 나온 우영이 다시 로비를 쳐다봤다. 두 사람은 그새 지하 주차장으로 간 건지 보이질 않았다. 마른 입맛을 다신 우영이 느릿하게 뒤를 돌았다.

떠밀려 나온 건 자신인데, 꼭 사현을 불구덩이에 버리고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 * *

핸드폰 시계가 투박하게 새벽 두 시를 알렸다. 거실 소파에 앉은 우영이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벌써 수십 번째 켰다 끄는 핸드폰 화면을 다시 밝혔다.

사현이 여태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리 일이 바빠도 자정이 지나기 전에는 들어왔었는데.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우영의 검지가 톡톡톡 분주하게 무릎을 더듬었다.

남자와 사현. 보통 험악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형제는 아닌 것 같고, 혹 그가 말했던 ‘형’이 친형을 뜻하는 게 아닌 걸까. 그럼 가족 모임은 대체 뭐란 말인가. 생각하고 곱씹을수록 점점 더 구렁텅이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우영이 사현과의 메시지 창을 켰다.

[B, 저는 저녁 먹었어요. B는요?]

[B, 언제 와요?]

[B,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B, 저 먼저 잘까요?]

사현은 다섯 시간 전에 보낸 메시지도 아직 확인하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응, 그래, 아니 정도의 답은 왔어야 했다. 찾으러 가 볼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짚이는 장소가 하나도 없었다. 여전히 사현과의 관계는 어정쩡히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그렇게 새벽 세 시에 가까워졌을 무렵이었다. 도어 록 소리가 들린 건. 우영이 부리나케 현관으로 향했다. 다행히 사지 멀쩡해 보이는 사현이 비척비척 집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B.”

우영이 묵직하게 잠긴 목소리로 사현을 불렀다. 구두를 벗던 사현이 고개를 들었다. 몽롱하게 풀린 눈동자와 발갛게 익은 광대가 대번에 눈에 띄었다. 구두를 벗기는 손가락도 휘적휘적 허공을 나돈다.

“술 드셨어요?”

우영이 망설임 없이 사현의 발치에 쪼그려 앉았다. 그러고는 조심히 그의 구두를 벗겨 냈다.

“으응.”

벽에 기댄 사현이 느릿하게 대답했다. 평소와 달리 늘어지는 목소리에 술기운이 가득했다. 드디어 구두에서 탈출한 사현이 벽에 손을 대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곧 넘어질 듯한 몸놀림이었다. 우영이 안절부절못하며 그를 뒤따랐다.

“얼마나 드셨길래⋯⋯.”

“너는 술을 세면서 먹니?”

사현이 뾰족하게 대꾸하며 재킷을 벗어 바닥에 떨어트렸다. 갤러리를 나설 때만 해도 목에 걸려 있던 타이는 어디에 버리고 온 건지 보이질 않았다.

우영이 떨어진 재킷을 주워 곱게 반으로 접었다. 불콰하게 취한 것 같으니 바로 자려나. 그래도 양치는 하라고 주제넘은 잔소리를 해 볼까.

우영이 그런 생각을 하는데, 긴 현관 복도를 지난 사현이 몸을 돌려 부엌으로 향했다. 물을 찾는 건가 싶어 재빠르게 물잔을 대령했다. 그러나 사현이 멈춰선 곳은 와인이 그득한 와인 셀러 앞이었다. 그가 손닿는 대로 와인 두 병을 꺼내 들었다.

“술 마시게요? 이미 많이 드신 것 같은데.”

우영이 넌지시 그를 말렸다. 그러나 사현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찬장을 열어 와인 잔을 꺼내던 그가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우영을 응시했다.

“너도 마실래?”

“⋯⋯.”

“너도 마셔.”

질문이었으나 질문이 아니었다. 사현이 와인 잔 두 개를 테이블 위로 툭툭 던지듯 놨다. 기겁한 우영이 손을 뻗어 잔을 잡지 않았으면 죄다 산산조각이 났을 터다.

“B.”

우영이 묵직하게 가라앉은 저음으로 사현을 불렀다. 정신 좀 차리라는 뜻이었는데 사현은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구두도 벗지 못하던 손놀림으로 용케 와인을 딴 사현이 잔에다 콸콸 술을 쏟아 부었다. 그러고는 그것을 물처럼 단숨에 삼켜 버렸다. 입을 쩍 벌린 우영이 사현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무슨 일 있었어요?”

우영이 물었다.

“안주가 없네.”

사현이 대답했다. 아까부터 맞물리지 못하고 헛도는 대화가 참으로 무의미했다. 비틀비틀 일어난 사현이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러나 늘 텅 비어 있던 냉장고가 오늘이라고 먹을 걸 품고 있을 리 없었다.

사현이 웅얼웅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씹더니 허망한 낯으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꼭 나라 잃은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드디어 우영을 올곧게 봐 줬다.

“자기야.”

“네.”

“나 떡볶이 먹고 싶다.”

“⋯⋯네?”

“떡볶이.”

우영의 자신의 귓불을 아래로 쭉쭉 잡아당겼다. 자신이 바르게 들은 게 맞나, 의심하는 거였다.

떡볶이? 갑자기? 이 시간에? 새벽 세 신데? 왜?

우영이 맹한 낯으로 눈만 꿈뻑이고 있으니 사현의 미간이 가늘게 좁아졌다.

“나, 떡볶이, 먹고, 싶다.”

그러고는 턱을 아래로 당기더니 새초롬한 눈빛으로 우영을 올려다봤다. 풍성한 속눈썹이 팔랑팔랑. 술에 익어 붉어진 눈가. 와인을 머금어 촉촉한 입술. 답은 정해져 있었다. 우영이 슬그머니 의자에서 엉덩이를 뗐다.

“사, 사 올까요?”

그 말에 사현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우영이 덩달아 고개를 주억였다. 사현이 자신의 가슴팍을 더듬었다. 헌데 어째 잡히는 게 없다. 네모난 지갑이 여기 있어야 하는데⋯⋯. 코를 훌쩍이며 지갑을 찾고 있으니 우영이 옆자리에 걸쳐 놨던 사현의 재킷에서 지갑을 찾아 건넸다.

사현이 거기 있었냐며 킥킥거렸다. 지갑을 뒤적여 카드 다섯 개를 꺼낸 그가 그것을 몽땅 우영의 손에 쥐여 줬다. 고작 떡볶이 심부름을 시키면서 무슨 카드를 다섯 개씩이나. 그러나 우영은 군말 않고 받았다. 이미 얼큰하게 취한 그에게 이성을 들이 대 봐야 먹히지 않을 듯해서.

카드를 주머니에 쑤셔 넣은 우영이 찬물을 가득 따라 사현의 앞에 내려놓았다.

“저 금방 올 테니까, 술 더 마시지 말고 물 마시면서 기다려요.”

“⋯⋯.”

“알았죠?”

“⋯⋯.”

사현은 대답이 없었다. 몽롱하게 흩어진 눈동자로 우영을 바라보기만 했다. 부정인지 긍정인지 알 수가 없다. 우영이 테이블을 똑똑 두드렸다.

“B.”

“알았어-어.”

사현이 마지못해 대꾸했다. 잠시 그를 내려다보던 우영이 빠른 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빨리 다녀와야지. 진짜 최대한 빨리. 사현이 허튼짓하기 전에, 빨리.

천지 분간 못 하는 어린애를 혼자 집에 두고 떠나는 부모의 마음이었다.

편의점 봉투를 쥔 우영이 집에 들어섰을 때, 사현은 용케 자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술잔도 그대로고, 변한 건 내용물이 반으로 준 물잔뿐이다. 우영이 무심코 아이고 잘했어요, 하며 그의 뒤통수를 쓰다듬으려다 참아 냈다.

“떡볶이?”

의자 위로 올린 무릎 사이에 턱을 괴고 있던 사현이 우영의 손목에 걸린 비닐봉지를 아련하게 바라봤다. 우영이 봉지를 탈탈 털자 각양각색의 주전부리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매운맛 떡볶이. 까르보나라맛 떡볶이. 면 사리가 들어간 라볶이. 닥치는 대로 사 왔다. 떡볶이 이외에도 사현의 입맛이겠다, 싶은 것까지 죄다 집어 왔다. 스트링 치즈에 초콜릿에 바닐라 아이스크림까지.

“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시간에 떡볶이를 살 곳이 편의점밖에 없어서⋯⋯. 이거 먹고 계시면 금방 해 드릴게요.”

우영이 손수 초콜릿을 까 사현의 손에 들려 줬다. 사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초콜릿 귀퉁이를 깨물었다. 와인 맛이 남아 쌉싸름하던 혀가 순식간에 달콤해졌다.

커피포트에 물을 올린 우영이 떡볶이들을 사현의 앞에 나열했다. 이 중에서 뭘 먹겠냐는 질문이었다. 마치 작품을 품평하듯, 떡볶이를 하나하나 노려보던 그가 라볶이를 선택했다.

우영이 빠른 손놀림으로 라볶이를 만들었다. 만들었다고 하긴 했으나 물을 넣고 재료를 넣어 전자레인지에 돌린 게 다였다. 오 분 만에 라볶이가 만들어졌다. 포크를 든 우영이 그것을 사현에게 대령했다.

그쯤엔 사현의 눈이 반쯤 감겨 있었다. 눈동자도 가물가물, 초점을 잃어 무엇을 보고 있는 건지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우영이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이 주말도 아닌데. 늘 철두철미하던 사현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리도 술을 마셨나. 물어봐도 답해 주지 않을 것 같아 말았다.

사현이 포크로 떡 하나를 꾹 찔렀다. 그걸 입에 가져가더니 세상 느릿하게 씹었다. 꼭 먹기 싫은데 억지로 먹는 듯한 모양새였다. 그래도 포크질이 멈추진 않았다. 이따금 와인을 머금으며 부지런히 배를 채웠다. 사현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입도 짧으면서. 저녁을 안 먹었나.

“B. 저녁 안 먹었어요?”

“⋯⋯.”

“가족들이랑 저녁 먹으러 간 거 아니었어요?”

사현은 묻는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지그시 우영을 주시하기만 했다. 덕분에 우영은 속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B. 대답 좀,”

“B 말고, 형 해 봐. 너 때문에 집에서도 일하는 기분이잖아.”

“⋯⋯.”

대화가 또 이상한 곳으로 튀었다. 우영의 한쪽 눈썹이 위로 치솟았다가 아래로 내려왔다. 난데없는 떡볶이 타령에 이어 이제는 난데없는 형 타령이다.

“사현이 형. 해 봐.”

“⋯⋯.”

“빨리. 형이라고 해 봐-아.”

사현이 주먹 아래로 통통 테이블을 두드렸다. 떼쓰는 초등학생 같았다. 늘 어른스럽던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인데, 직접 보고 있으니 또 잘 어울렸다. 우영이 눈을 세게 비볐다. 저는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거늘, 함께 취한 기분이었다.

마른 입술을 핥은 우영이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형.”

“그렇지. 잘했어. 착해.”

사현은 뭐가 그렇게 재미난지 짝짝 손뼉까지 치며 좋아했다. 그로 모자라 우영의 옆자리에 앉더니 슥슥 뒤통수를 쓰다듬어 주기까지 했다.

사현은 그 후로도 몇 번이나 형이라 불러 보라며 채근했다. 우영은 그가 원하는 대로 꼬박꼬박 형이라 발음해 줬다. 그 과정에서 딱히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정말 어떠한 음절을 발음한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내일 술이 깬 사현은 지금의 상황을 기억하지 못할 듯해서. 괜히 형이란 호칭에 정 붙였다가 상처받긴 싫었다.

사현은 그 와중에도 술을 마셨다. 큼지막한 병이 벌써 반이나 줄었다. 우영이 슬그머니 와인을 뒤로 밀었다. 그러나 그것을 귀신같이 알아챈 사현이 병 주둥이를 낚아채 품에 숨겼다. 세모꼴로 변한 눈이 어디 감히 내 것을 탐내느냐, 꾸짖고 있었다.

우영이 그런 사현을 가만히 응시했다. 사현도 지지 않고 눈을 맞춰 왔다. 담갈색 눈동자에 우영이 맺혔다.

“형.”

“어.”

“예뻐요.”

다분히 충동적인 말이었다. 술 냄새를 폴폴 풍기면서도 말간 사현이 참으로 예뻤다. 어차피 그는 내일 이 상황을 기억하지 못할 듯싶고. 그래서 재채기처럼 나오는 감탄사를 굳이 막지 않았다.

“⋯⋯.”

사현의 입이 한일자로 다물렸다. 그래서 색색 몰아쉬는 그의 숨소리가 더 크게 다가왔다.

사현이 우영의 팔뚝에 턱을 기댔다. 그러곤 우영의 안경 브릿지에 검지를 걸더니 안경을 부드럽게 벗겨 냈다. 두꺼운 안경알에 가려져 있던 우영의 눈이 드러났다.

두 시선이 훨씬 가까운 거리에서, 훨씬 생동감 넘치게 마주 닿았다.

사현이 느릿하게 입술을 움직이며 속삭였다.

“우영아.”

“⋯⋯.”

“너도 예뻐.”

“⋯⋯.”

“에밀 무니에르가 그린 큐피트 같아.”

우영은 잠시 숨 쉬는 방법을 잊어야 했다. 처음이었다. 사현에게 이름을 불린 건. 딱히 그에게 이름으로 불리고 싶다,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그래서 더 충격적인 걸지도 모르겠다.

거기다 이어진 말까지. 그에게 듣는 예쁘다는 말이 왜 이리 감미로울까. 고작 세 글자 주제에 가슴을 쿡쿡 후벼 팠다.

정말 그의 눈엔 제가 예쁠까. 내가 그를 바라볼 때 느끼는 그 어여쁜 감정을 똑같이 느끼고 있을까. 궁금한 건 많았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사현이 와인의 주둥이를 입에 물고는 꿀꺽꿀꺽 술을 삼켰다. 우영은 크게 일렁이는 그의 울대를 걱정스레 쳐다봤다. 아무래도 내일 단단히 탈이 날 것 같았다.

사현이 와인을 내려놓았다. 그의 통통한 입술과 병이 떨어지며 뽁, 축축한 마찰음이 울렸다. 우영이 괜히 마른침을 삼켰다.

쩝쩝 입맛을 다시던 사현이 다시 우영의 팔뚝에 머리를 기댔다. 단단하고 커다란 게 쿠션 대용으로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은은하게 풍기는 바디 워시 냄새도 좋았고, 이마 위로 떨어지는 우영의 시선도 좋았던 것 같다. 그냥⋯⋯ 타인의 존재감 자체가 좋았다.

“형.”

우영이 사현을 불렀다.

“응.”

사현이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잠들기 직전이었다. 정신은 한참 전부터 혼미한 상태였다.

우영이 사현의 뒤로 팔을 뻗어 의자 등받이를 움켜쥐었다. 덕분에 사현은 더 편히 그의 품에 기댈 수 있게 됐다. 넓고 따스한 품이 참으로 안락했다.

“그,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해. 해. 괜찮아.”

“⋯⋯진짜요?”

“어어. 뭔데, 뭔데-에.”

사현이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손을 휘저었다. 대충 들어주고 이만 자러 갈 생각이었다. 희미하게 남아 있는 의식이 지금 자지 않으면 세상이 멸망할 거라 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목구멍을 타고 역류하는 술기운이 역했다.

“오늘 술 마신 거, 그 형이라는 사람 때문이에요?”

그 말에 사현의 숨이 잠깐 뚝 끊어졌다.

“⋯⋯.”

정적이 흘렀다. 몽롱했던 사현의 눈동자가 날카로이 굳었다. 입술을 핥은 그가 우영의 품에서 헤쳐 나왔다. 우영의 가슴팍이 대번에 차게 식었다.

사현이 흐트러진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겼다.

“아니.”

“그 사람 때문이 아니란 거예요, 아니면 제가 질문하면 안 된다는 말이에요?

“⋯⋯.”

사현의 눈이 설핏 일그러졌다. 우영은 오늘따라 답지 않게 말이 많았다. 늘 싱글벙글하던 얼굴에 표정이 없는 것도 그와 어울리지 않았다. 사현이 얼마 남지 않은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둘 다. 둘 다야.”

“⋯⋯.”

“늦었다. 자라.”

사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끼이익, 의자가 밀리며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우영이 그런 사현의 옆모습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손바닥 뒤집듯, 단숨에 바뀐 분위기가 참 시렸다. 팔뚝이 으슬으슬할 정도였다.

‘저 원래 이 시간에 잘 안 자요.’ 우영은 그 말이 혀끝에서 맴돌았으나 굳이 뱉진 않았다. 너무 유치한 것 같아서. 그래서 멀어지는 사현을 그저 목도하고 있을 때였다.

부엌을 벗어나던 사현이 기우뚱, 옆으로 무너졌다. 놀란 우영이 후다닥 몸을 날려 그의 허리를 잡아챘다. 집에 들어올 때부터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취한 상태였는데. 그 후로 와인 한 병을 꼬박 더 마셨으니 눈앞이 뱅글뱅글 돌 테였다.

“2층까지 부축해 줄게요.”

“됐어.”

“부축, 해 줄게요.”

“됐다고.”

사현이 세모꼴이 된 눈으로 우영을 물리쳤다. 우영은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아까, <갤러리 비>에서 밀쳐지듯 나왔을 때와 비슷했다. 유쾌하지 않은 기분이었다. 흉통이 확 조이듯 갑갑하기도 했다.

사현은 오뚝이처럼 흔들리며 거실을 가로질렀다. 항상 바른 자세를 유지하던 그였는데. 휘청이는 뒷모습에 목구멍이 쌉싸래했다.

그때였다. 사현이 널찍한 소파에 쓰러지듯 누웠다. 털썩. 제법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우영이 자욱한 한숨을 내쉬며 그를 향해 다가갔다. 사현은 눈을 감고 있었다. 까무러치듯 잠이 든 건지, 아니면 울렁거리는 눈앞을 추스르는 건지, 분간이 안 됐다.

우영이 조용히 소파 아래에 쪼그려 앉았다. 그의 검은 그림자가 사현의 얼굴을 집어삼켰다. 그런데도 사현은 미동이 없었다.

“B. 들어가서 자요.”

“⋯⋯.”

“못 일어나겠으면 제가 안아서,”

“싫어.”

이 고집불통! 우영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그래, 뭐. 소파에서 잔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제 반지하 집처럼 엄청나게 춥거나 더운 것도 아니고. 자다가 깨면 어련히 알아서 올라가리라. 저 없을 때도 혼자 잘 살아 왔던 사람인데. 이런 걱정은 좀 남세스러웠다.

마른 입맛을 다신 우영이 몸을 일으켰다. 그림이나 더 그리다 잘 생각이었다. 그때, 작고 뜨끈한 무언가가 우영의 손목을 탁 잡아챘다. 우영이 흡, 호흡을 멈췄다.

“우영아.”

눅눅하게 잠긴 음성이 우영을 불렀다. 우영이 무언가에 홀린 듯, 몸을 돌렸다. 사현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네.”

“나 잘 때까지만 여기 있어라.”

“⋯⋯.”

“내가 못되게 굴어서 미안해. 근데 잠깐만 있어 줘.”

우영이 검지로 자신의 미간을 긁었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사현답지 않았다. 사현은 어른스럽다. 우영이 만났던 그 누구보다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근데 고작 질문 하나에 이다지도 흔들리다니. 그게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그 형이라는 남자가 사현에게 매우 중요한 사람인 것 같아서.

사현이 우영의 손목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길어지는 우영의 침묵을 거절로 해석한 듯했다.

“내가 내일⋯⋯ 맛있는 거 사 줄게⋯⋯. 그러니까⋯⋯ 잠깐만⋯⋯, 어?”

그 말에 우영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 사람은 저를 대체 뭐로 보는 건지. 근데 또 마음이 사르르 풀리니 문제다. 내일, 맛있는 걸 사 준단다. 그 맛있는 걸 같이 먹어 주려나.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소파에 걸터앉았다.

“네. 여기 있을게요.”

“응. 고마워⋯⋯.”

우영이 긍정을 표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현은 손목을 놓아주지 않았다. 놓으면 떠나 버릴까, 전전긍긍하는 듯했다. 그래서 우영은 가만히 손목을 내어주고 있었다. 딱히 나쁘지 않은 느낌이라 뺄 생각도 없었다.

그렇게 잠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우영아.”

사현이 재차 우영을 불렀다. 우영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가 자고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큼큼 목을 가다듬은 우영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네.”

“너는 안 무섭니?”

“뭐가요?”

“혼자인 거.”

“⋯⋯혼자인, 거요?”

“응. 외롭잖아. 무섭고. 쓸쓸하고. 나는 한여름에도 추워. 공기가 막 나를⋯⋯ 할퀴는 기분이야.”

“⋯⋯.”

우영은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저가 이런 말을 들어도 되는 관계인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가족 이야기에 그렇게 민감했던 사람이, 저에겐 묻지도 말라 했던 사람이, 뜬금없이 외로움을 토로한다. 근데 그 외로움이 어찌나 사무치는지 여름에도 춥단다.

우영의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날 때부터 혼자라서, 잘 모르겠어요.”

외로움. 그것을 감지하지 못한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혼자인 게 익숙하고, 혼자인 게 당연한 삶이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혼자가 아닐 때를 상상하는 것도 힘이 들었다.

가끔, 그 반지하 집이 저를 잡아먹는 악몽을 꾸긴 했지만, 다행히 악몽에서 그쳤다.

아무튼 늘 혼자였던 터라 지금 사현과 함께하는 이 시간이 우영은 굉장히 특이하고, 또 특별했다.

사현이 게슴츠레 뜬 눈으로 우영을 바라봤다. 그러다 나지막이 읊조렸다.

“⋯⋯멋있네.”

“뭐가 멋있어요.”

“멋있어. 어른 같고.”

우영의 눈썹이 살짝 어그러졌다. 늘 어른스럽던 사현이, 늘 아이 취급하던 저에게 그런 말을 하니 기분이 묘했다.

그 후로는 대화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현의 숨소리가 한층 규칙적으로 가라앉았다. 집이 조용해졌다. 날씨도 맑은 탓에 창문을 두드리는 비나 바람도 없었다.

그런데도 썩 평화롭지 못한 밤이라고, 우영은 생각했다.

* * *

다음 날, 사현은 웬일로 아침 일찍 출근하지 않았다. 우영이 물을 마시러 나왔을 때, 그는 초췌한 얼굴로 조리대에 기대 있었다. 텅 빈 물잔이 곁에 있는 걸 봐선 해장을 물로 대신 한 모양이었다.

방금 침대에서 나온 듯 부스스한 행색에, 희멀건 안색에, 흐리멍덩한 눈동자까지. 누가 봐도 숙취에 찌든 모습이었다.

“안녕하세요.”

우영이 꾸벅 묵례했다. 사현이 가늘게 눈을 떴다.

“너 웬일로 벌써 일어났어?”

“⋯⋯어쩌다 보니요.”

사실 우영은 자지 않았다. 여태껏 그림을 그렸다. 사현의 손목에 있는 흉터, 형이지만 형이 아닌 남자, 가족. 그리고 외로움. 이따금 추울 정도로 외롭다는 그가 도무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저가 뭐라고, 어디 제 주제에 사현을 걱정하는 건지. 아무도 바라지 않는 오지랖임을 알지만 머리를 비우기가 쉽지 않았다.

만면을 일그러트린 사현이 잔을 가지고 정수기로 다가갔다. 우영이 그런 사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제 일 기억하려나. 못 하겠지. 엄청 취했으니까. 볼 안쪽을 잘근거리던 우영이 사현을 불렀다.

“B.”

“어.”

“⋯⋯.”

사현의 답은 단조로웠다. 우영이 미약하게 입술을 삐죽였다. 형이라 부르라고 안 하네. 역시, 기억하지 못 하는 모양이다. 그게 괜히 아쉬웠다.

“왜?”

단숨에 물을 반이나 비운 사현이 되물었다. 우영이 느린 걸음으로 사현을 향해 다가갔다.

“라면 끓여 드릴까요? 해장하셔야죠.”

“라면? 집에 그런 거 없어.”

“제가 어제 사 왔어요. 떡볶이 사면서.”

“됐어. 나 라면 안 좋아해.”

“아닌데. 라면 좋아하시는데.”

“⋯⋯그걸 자기가 어떻게 알아?”

사현이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제가 싫다는데, 단호하게 아니라 말하는 우영이 신기했다. 우영이 사현의 물잔을 받아 그가 먹다 남긴 물을 입으로 가져갔다. 꿀꺽꿀꺽, 도드라진 목울대가 거칠게 움직였다. 사현이 그것을 미디어 예술이라도 보듯, 집요하게 응시했다.

물잔을 비운 우영이 아랫입술에 묻은 물을 핥았다. 빨간 혀가 살짝 드러났다가 쏙 들어갔다.

“밥 먹을 때마다 라면 사리나 당면 사리를 쏙쏙 골라 드시니까요.”

“⋯⋯내가 그러든?”

“네.”

사현이 께름칙한 낯으로 턱 아래를 긁었다. 저가 라면을 좋아한다니. 손수 끓여 먹거나, 찾아 먹은 적은 없는데. 우영이 너무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니 진짜 그런가, 싶었다.

그러고 보니 라면이 들어간 음식을 자주 먹긴 했던 것 같다. 김치찌개와 부대찌개가 있으면, 면이 있는 부대찌개를. 떡볶이와 라볶이가 있으면 라볶이를.

아, 나 라면 좋아했구나. 그걸 삼십사 년 평생 처음 깨달았다. 새삼 자신의 입맛을 인지한 사현이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우영이 고개를 숙이고 사현과 눈을 맞췄다. 큼지막한 덩치가 구부러지며 사현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해장이니까 매운 거로 끓일까요?”

“어?”

“매운 라면이요.”

“어⋯⋯, 아니. 나 곧 나갈 거야. 너 먹어.”

“⋯⋯.”

사현이 특유의 무감한 얼굴로 우영의 그림자를 벗어났다. 우영이 산책을 불허당한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사현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때, 부엌을 막 벗어나던 그가 빙그르르 등을 돌렸다.

“아니다, 아니다. 자기는 그림 그려야 하니까 라면 말고 밥 시켜 먹어. 알았지?”

“⋯⋯네.”

우영이 애매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저게 걱정인지, 아니면 고용주로서의 적당한 관심인지 모르겠다. 물론, 후자임을 알지만 꾸역꾸역 전자이길 바랐다. 나는 당신의 외로움이 신경 쓰여서 잠도 못 잤는데. 불공평하지 않은가.

코로 긴 한숨을 내쉰 우영이 저와 사현의 입술이 닿았던 물잔을 씻었다. 뽀득뽀득, 유리가 마찰하는 소리에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도 같았다.

인간관계는 어렵다. 친구는 무슨, 말 붙일 가족조차 없던 우영에겐 곱절로 어려웠다. 도대체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신경 쓰이는 걸 어찌 매일, 매시간 하는 걸까. 대학 시절, 친구가 많았던 과대를 떠올린 우영이 부르르 어깨를 떨 때였다.

“아, 우영아.”

손바닥만 한 얼굴이 팔뚝 너머로 불쑥 튀어나왔다. 어찌나 놀랐는지. 우영은 하마터면 컵을 천장으로 날릴 뻔했다.

“네?”

“일곱 시까지 갤러리로 와.”

“네.”

우영이 손등으로 안경을 추켜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 잘 듣는 로봇처럼 뚝딱 나온 대답에 사현이 어금니를 꾹 씹었다가 놨다.

“⋯⋯이유 안 물어봐?”

“어⋯⋯. 왜요?”

우영은 딱히 이유가 궁금하지 않았다. 사현이 뭘 시키든 거부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도 구태여 묻는 건, 사현이 그걸 바라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 우영을 빤히 꿰뚫어 본 사현이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정말, 여러 번 느끼는 거지만 어디서 사기당하기 딱 좋은 성격이다.

“그림 리터치 해야 해. 네 이니셜 지우고, 네온 이름 넣어야 하거든. 꽤 늦게까지 해야 할 테니까 낮잠 좀 자고 와.”

“아아⋯⋯. 네.”

“그리고 올 때 모자 쓰고 마스크도 써. 얼굴 드러내 봐야 좋을 거 없으니까. 점심쯤 제이가 가져다줄 거야.”

“네, 그럴게요.”

끝없이 이어지는 ‘네’ 소리에 사현이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우영의 긍정은 아주 튼튼하다. 뭐랄까. 별의별 공격에도 꿈쩍 않을 것 같달까. 맹목적이고, 믿음이 가득하다. 그래서 듣고 있으면 묘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아, 얘가 날 이토록 믿고 있구나 싶어서.

사실 저를 믿는 작가가 처음은 아니었다. 목숨 줄을 쥐고 있는 게 저인지라, 대부분의 신진 작가들은 웬만하면 싫은 소리 못하고 긍정만 했다. 근데 왜 우영은 다르게 느껴질까. 애가 어리고 순진해서 그런가.

“그래, 그럼. 밤에 보자.”

사현이 툭 우영의 어깻죽지를 쳤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부엌을 나섰다. 씻고, 준비하고 나가면 열한 시나 되어야 갤러리에 도착할 거라 마음이 바빴다.

홀로 남은 우영이 물기를 탈탈 턴 물잔을 건조대에 올렸다.

밥 먹고, 낮잠 자고, 모자 쓰고, 일곱 시까지 갤러리에.

사현이 명령한 걸 되뇌는데, 문득 숨이 멈췄다.

“어⋯⋯.”

방금 사현이 저를 ‘우영아’라고 불렀다.

* * *

전신을 검은색으로 떡칠한 우영이 갤러리에 들어섰다. 소리 소문 없이 찾아온 가을이 야금야금 더위를 좀먹어 가는데, 가파른 언덕을 올라 <갤러리 비>에 도착하니 땀이 절로 났다.

무심코 모자를 벗고 머리를 쓸어 넘기던 우영이 허겁지겁 다시 모자를 눌러썼다. 그리고 혹 누군가가 저를 봤을까, 주위를 둘러봤다. 밀회를 나누러 가는 유명 연예인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전시가 끝난 시간의 갤러리는 어둡고, 조용했다. 관람객은 물론, 인포메이션 센터에도 직원이 없었다. 홀 가운데에 멀뚱히 선 우영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사현이 제인이 데리러 나올 거라고 했는데. 언제쯤 오려나, 가늠할 때였다.

“왔어요, 우영 씨?”

라벤더색 슈트를 입은 제인이 비상구에서 나타났다. 우영이 싱글싱글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이거⋯⋯.”

그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제인에게 내밀었다. 유명 프랜차이즈 카페의 로고가 박힌 컵 캐리어에 음료가 네 잔 들어 있었다. 제인이 어머, 짧은 감탄사와 함께 그것을 받아들었다.

“고마워요.”

“B랑 실장님 거요. 그리고 또 다른 분들이 있을지도 몰라서⋯⋯. 아, B 거는 블루베리 스무디예요. 어제 과음하셨거든요. 숙취에 블루베리가 좋대요.”

우영이 굳이 사현의 것을 콕 찍었다. 애당초 그를 위해 사 온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 제대로 해장도 하지 않았을 텐데. 검색해 보니 블루베리가 숙취에 좋단다.

저라면 감히 언감생심 꿈도 못 꿀 가격의 커피였다. 커피 네 잔 샀는데 이틀치 식비가 나갔다. 그래도 하등 아깝지 않았다.

사현은 싸구려 커피를 마시지 않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늘 저에게 좋은 것만 주니까. 그래서 저도 그에게 좋은 걸 주고 싶었다. 언젠가 큐레이터들과 회의할 때, 그가 홀짝이던 커피 브랜드를 기억해 뒀다가 사 온 거였다.

제인이 우영과 커피를 번갈아 쳐다봤다.

“우영 씨는 참⋯⋯ 특이해요.”

“네?”

“지금껏 B와 일했던 신진 작가 중에, 이런 거 사 온 사람은 우영 씨가 처음이거든요.”

제인이 비상구를 향해 걸으며 말했다. 그녀를 따라 발을 뗀 우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요?”

“네. 그 사람들은 B에게서 뭐라도 더 빼먹으려고 혈안이었지, 뭐 하나 사 온 적이 없어요.”

지나간 사람들을 반추한 제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 역시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사현은 권력도, 돈도 많은 사람이었으니까. 굳이 베풀어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우영은 확실히 다르다. 사현이 ‘걔는 좀⋯⋯ 특이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이유가 있었다.

“왜요? 저는 B 덕분에 좋은 곳에서 살고, 삼시 세끼도 먹고, 통장에 육백만 원이나 있는데. 이런 거 매일 사다 드릴 수도 있어요.”

눈을 동그랗게 뜬 우영이 종알종알 말했다. 제인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우영은 정말, 특이하다.

지하 깊숙한 곳에 있는 수장고(박물관, 미술관에서 작품과 유물을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한 창고)는 조금 서늘하고, 아주 넓었다. 그 널따란 공간을 수많은 그림과 조형물이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우영은 곧 침이라도 떨어트릴 듯한 얼굴로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렸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저 그림은⋯⋯! 아니, 저 그림은⋯⋯! 아니아니, 저 그림도⋯⋯? 라는 만화 같은 감탄사가 절로 솟구쳤다.

<갤러리 비>가 대단하다는 건 누구보다 통감하고 있었으나, 이렇게 내장 깊은 곳까지 샅샅이 훑으니 아주 뼈를 묻고 싶었다.

“우영 씨?”

자꾸만 늘어지는 우영의 걸음걸이에 제인이 슬쩍 재촉했다. 움찔 어깨를 떤 우영이 후다닥 그녀의 뒤로 따라붙었다. 그 와중에도 데구루루 염탐하듯 굴러가는 눈알은 막을 수가 없었다. 그 모습에 제인이 쿡쿡 목으로 웃었다.

“신기하죠? 저도 처음 왔을 때 눈 돌아가는 줄 알았어요.”

“네⋯⋯. 정말, 멋지네요⋯⋯.”

“한국에서는 찾기 힘들 수준의 최신 수장고예요. 자연 재해를 대비하기 위해서 콘크리트로 두르고, 적당한 공기층을 둔 다음에 만들어졌어요. 조명등은 퇴색 방지 램프고, 벽은 조습 보드예요. 온도는 항상 18에서 20℃를 유지하고, 습도는 45%에서 66% 사이를 유지하죠.”

제인이 마치 박물관 도슨트처럼 설명했다. 우영이 호오, 호오, 연신 감탄을 머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저 멀리 큰 홀이 나타났다. 지금까지와 달리 쨍한 빛이 내리쬐고, 넓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꼭 병원 수술방 같은 풍경이었다. 그 빛의 한가운데에 사현과 이름 모를 직원 한 명이 서 있었다.

하얀 와이셔츠만 입은 사현은 조금 피곤해 보였다. 눈가에 미약한 짜증이 묻어 있는 게, 아직 숙취를 털어내지 못한 듯했다.

그때, 제인이 살짝 뒤를 돌아 속삭였다.

“아무래도 갤러리의 재산이 담겨 있는 곳이라 이곳에선 B가 좀 많이, 예민하세요. 그러니까 웬만하면 건드리지 마세요.”

“네.”

우영이 명심하겠다는 듯, 자못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덩달아 고개를 주억인 제인이 성큼성큼 사현을 향해 다가갔다.

“B. 우영 씨가 커피 사 왔어요. 입구에 두고 왔습니다.”

“어? 어. 알았어.”

사현이 대충 대꾸했다. 그러더니 우영을 보지도 않고 손을 흔들었다.

“자기야, 이리 와.”

우영이 헐레벌떡 사현의 옆에 붙어 섰다. 그의 앞엔 열 점 정도 되는 우영의 그림이 예쁘게 놓여 있었다. 사현이 그중 하나를 골랐다. 그러자 하얀 장갑을 낀 제인과 또 다른 직원이 그것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다섯 점만 리터치 할 거야. 그 정도 견본만 만들어 주면 나머지는 우리 컨서베이터(conservator, 회화나 조각 등 미술품의 보존 · 수복을 하는 전문가)가 감쪽같이 따라 해 줄 거고. 보전 복원 쪽으로는 알아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안녕하세요, 네온 작가님.”

컨서베이터가 빙긋 웃으며 인사했다. 우영이 어색한 표정으로 꾸벅 묵례했다. 사현이 테이블 앞에 딸린 의자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우영이 눈치껏 그곳에 앉았다.

그림 옆에는 반지하 방에서 쓰던 물감과 같은 브랜드의 것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천장에는 우영의 수정을 촬영하는 카메라가 달려 있었고, 컨서베이터는 돋보기를 통해 우영이 리터치할 부분을 관찰했다.

우영은 그제야 오늘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을 상기했다. 서우영의 S를 지우고, 네온의 이름을 그리기 위해서였다. 진지한 낯으로 붓을 고르고 있는데, 사현이 그의 앞으로 태블릿을 내밀었다.

“큐레이터 팀이 디자인 몇 개 뽑았어. 뭐가 좋은지 골라 봐.”

태블릿엔 ‘NEON’이라는 활자가 여러 가지 폰트로 쓰여 있었다. 멋들어진 필기체도 있었고, 투박한 고딕체도 있었다. 우영이 화면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그냥 대충 N을 휘갈기면 될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닌 모양이다.

우영은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S를 지우고 색을 덮었을 때까지도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우영을 재촉하지 않았다. 수장고에 정적이 가득 찼다. 이따금 환풍기나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만 들렸다.

우영이 흘끔 눈을 들어 사현을 쳐다봤다. 팔짱을 낀 사현은 우영이 다음으로 수정할 그림을 고르느라 바빴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얇은 셔츠 너머로 날개뼈가 드러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우영이 무언가에 홀린 듯 그것을 쳐다봤다. 그러다 연한 미소와 함께 붓을 고쳐 들었다. 곧 그림 모서리에 ‘N’이라는 활자가 박혔다.

때마침 사현이 다가왔다. 그가 하얀 물감으로 쓰인 N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저 N은 우영이 그림에 쓰는 붓 터치와는 사뭇 달랐다. 굵직하고 힘있게 내리꽂히지 않고 가늘었다. 직선이 아니라 곡선으로 만들어진 N은 꼭 춤을 추는 듯한 모양새였다.

“⋯⋯볼드(Bold)하게 쓸 줄 알았더니?”

“벼, 별로예요?”

“별로일 리가. 네 그림에 네가 쓴 건데.”

사현이 우영의 머리칼을 가볍게 헝클였다. 우영은 히죽 솟구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당신 날개뼈를 보고 썼어요. 얌체같이 그 말은 쏙 숨겼다.

* * *

리터치가 끝났을 땐 자정이 훌쩍 넘어 있었다. 주차장으로 나온 사현이 미적지근해진 블루베리 스무디를 쭙쭙, 쭈우웁, 단숨에 반이나 마셨다. 우영이 그 모습을 뿌듯하게 바라봤다.

사현은 차에 타기 전에 스무디를 싹 비웠다. 빈 컵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그가 차에 올라탔다. 우영이 익숙하게 조수석에 엉덩이를 붙였다. 곧 부드럽게 시동이 걸렸다.

“있잖아요, B.”

“어.”

“배 안 고프세요?”

“글쎄.”

사현이 액셀을 지르밟으며 대꾸했다. 우영이 부루퉁한 얼굴로 안경을 추켜올렸다. 고프면 고프고 아니면 아닌 거지. 늘 칼 같고 철두철미한 사현은, 먹는 것에는 줏대가 없었다.

“저는 고픈데.”

“그래? 뭐 사 갈래? 근데 이 시간에 연 곳이 있으려나.”

사현이 핸들을 돌리며 차내 시계를 흘깃, 살폈다. 새벽 두 시 삼십일 분. 외식하기엔 몹시 늦은 시간이었다. 그래도 뭐, 배달의 천국인 한국에 24시간 배달되는 가게가 없을까.

“아니면 배달해 먹어. 뭐든 있겠지.”

사현이 무심하게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러자 우영이 입술 끝에 꾹 힘을 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라면 먹고 싶어요.”

“라면? 오늘 내내 라면 타령이네. 집에 있다며? 그거 먹어.”

“아니요, 바깥에서 먹고 가요. 저 며칠 내내 집에만 있었잖아요. 나온 김에 바깥 공기 좀 쐬게.”

“이 시간에 라면을 어디서 사 먹어?”

“저 아는 곳 있는데.”

우영이 씨익 입꼬리를 길게 째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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