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01. 하얀 뱀 (1/24)

01. 하얀 뱀

어둑한 도로변에 위치한 포장마차는 우영이 자주 들르는 장소였다. 주황색 바람막이를 전신에 뒤집어쓴 이곳은 으레 포장마차라고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 틀에 완벽히 부합했다.

소주 한 병에 이천오백 원, 어묵 몇 개가 둥둥 떠다니는 우동은 이천 원, 기본 안주로 내어주는 투박한 당근과 오이는 무료. 가끔 주인 할머니의 기분이 좋으면 불어터진 떡볶이나 질긴 홍합탕을 서비스로 받아먹을 수도 있었다.

그 모든 게 우영을 단골로 이끌었다. 스무 살 대학 신입생 때부터 지금까지 약 8년 내내 제집처럼 드나드는 곳이었다. 문지방이 없어서 다행이지, 있었으면 납작하게 닳았을 터다.

오늘은 평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 배가 고프다 못해 곯았고, 잠도 오지 않았고, 그런 와중에도 술은 먹고 싶었고, 내일이 오는 게 두렵고. 굳이 다른 걸 찾자면…… 음, 그래. 날씨가 좋았다.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간질여 오는 여름의 밤바람이 웬일로 청량했다.

우영은 늘 그렇듯, 소주 한 병에 우동 하나를 시켰다. 그리고 샐쭉 웃으며 ‘당근 많이 주세요, 사장님’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런 우영이 익숙한 할머니는 주문한 것을 금세 뚝딱뚝딱 만들어 내왔다.

콧잔등을 짓누르고 있던 안경을 내려놓은 우영이 우동 국물 한 숟갈을 떠먹었다. 그리고 바로 소주 한 잔을 넘겼다. 쌉싸름한 액체가 식도를 뜨끈하게 데웠다. 어묵 하나까지 집어 먹은 우영이 후드 주머니에서 우편 봉투를 꺼냈다.

포장마차로 나오는 길에 주운 봉투였다. 아니, 주운 거라고 하면 이상한가. 아무튼 제 반지하 집의 녹슨 현관문에 끼어 있었다.

끄트머리가 따끔따끔할 정도로 각진 네모. 손바닥만 한 크기. 하얀색 봉투. 겉면엔 멋들어진 먹박이 한 글자 한 글자 쿡쿡 장엄하게 박혀 있었다.

그러니까, <갤러리 비>. 익숙한 이름이지만 동시에 더할 나위 없이 낯선 이름이기도 했다. 상투적인 정보를 나열해 보자면,

‘갤러리 비.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위치.

매일 10:30 – 18:00, 매주 월요일 휴무.’

쯤 되겠다. 그밖에 <갤러리 비>의 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을 덧붙이자면, 한국의 대표 갤러리로 손꼽힌다는 것. 세계적인 아트 매거진인 『스튜디오 인터내셔널』이 ‘신진 미술가를 발굴하고 육성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며 찬탄을 아끼지 않은 갤러리라는 것. 현대의 미술 사조를 창작하고, 미술계에 새로운 경향을 주도하는 곳이라는 것 정도.

즉, 예술계에 종사한다면 모를 수 없는 곳이었다.

우영이 갸웃, 고개를 뒤틀었다. 근데 그리 대단한 곳에서 제게 편지가 오다니, 대체 왜. 혹 홍보 팸플릿인가. 하지만 저는 갤러리 회원도 아니거니와, 이런 걸 받을 만큼 작품을 구매하지도 않았는데. 아니면 잘못 왔나.

우영이 빙그르르 봉투를 돌렸다. 봉투 자체에 인쇄된 갤러리 비의 주소는 있지만, 받는 이는 공백이었다.

입술을 잘근거리던 우영이 손톱으로 틱틱, 봉투 입구를 긁었다. 굳건하게 닫혀 있던 봉투가 딱 소리를 내며 열렸다. 내용물을 꺼내던 우영이 잠깐 행동을 멈추고 술 한 잔을 들이켰다.

내용물은 편지보다는 엽서에 가까웠다. 활자는 간결하다 못해 황당했고.

[GALLERY B에서 전시회를 여실 신진 작가님을 모십니다.

‘서우영’ 님과 좋은 인연으로 이어지길 간절히 바랍니다.]

“…….”

우영의 목울대가 아래위로 거칠게 요동쳤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곳에 적힌 ‘서우영’이라는 이름이 제 이름 ‘서우영’이 맞는지 의심하는 거였다. 앞서 말했듯, 받는 이가 없었으니까.

우영이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저와 동명이인인 사람에게 가야 할 것이 잘못 온 건 아닐까. 그것도 아니면, 신종 사기 방법인가. 요즘 별별 사기들이 판을 친다던데.

우영은 오 분 남짓한 시간 동안 수십 번이나 편지를 엎었다가 뒤집었다.

그 대단한 갤러리에서 이렇게 고전적인 컨택이라니. 더군다나 그 컨택을 제게 하다니. 믿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영은 대학 졸업 후 그림과 관련한 활동이 거의 없었다. 이 흑백의 삶에 그림이라도 그리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 붓을 움직이고는 있지만, 지금 먹는 이 우동을 사는 돈은 그림이 아니라 간헐적으로 하는 막노동에서 나왔다.

근데 이 시기에, 어디서, 어떻게 절 알고 엽서를 보낸 걸까.

“……아무래도 사기가 맞는 것 같지.”

연락처도 없고. 괜히 여기저기 들쑤셨다가 납치당해서 장기라도 팔리면. 무연고자라 찾아 줄 이도 없는데. 엄한 생각에 부르르 어깨를 떤 우영이 봉투를 내려놓고 우동에 코를 박았다. 그런데도 시선은 얼룩 하나 없는 엽서에 박혀 떨어질 줄을 몰랐다.

희망. 그 희망의 손을 잡고 오는 기대. 그건 몹시도 질기고, 힘이 셌다.

우영이 우동 그릇을 멀끔하게 비웠을 때였다. 누군가가 허락 없이 우영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놀란 우영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안녕.”

낯선 남자가 빙긋 웃으며 인사했다. 하얀 얼굴에 마른 몸. 쌍꺼풀은 없지만 큼지막한 눈매. 작위적이지 않게 붉은 입술. 주름 하나 없는 흰색 라운드 티에 체크무늬가 연하게 들어간 슈트 재킷, 그리고 세트로 보이는 슈트 팬츠까지. 보기 좋게 꼰 다리 아래로는 발목뼈가 숭덩 드러나 있었는데, 꼭 복숭아 같은 모양새였다.

묘하게 서늘한 표정만 아니면 햇살에 잔뜩 젖은 르누아르의 작품이 떠오르는 남자였다. 멋진 남자다. 세련됐고, 돈도 많아 보이고, 능력도 좋아 보였다.

“⋯⋯.”

안경을 집어쓴 우영이 남자를 뚫어지라 응시했다. 곰곰이 생각해 봐도 저의 좁은 인맥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다. 하물며 오가다 마주친 적도 없는 것 같다. 이렇게 반짝반짝한 사람을 잊을 리 없으니까.

우영의 동공이 좌우로 바쁘게 움직였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낯선 이는 기다려 주지 않았다.

“생각해 봤니?”

감미로운 음성이 물었다. 우영이 쥐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무릎 위에 손을 올렸다. 당당한 반말과 망설임 없는 질문에 눌려 저절로 그리됐다.

“무슨…… 생각이요?”

“그거.”

낯선 이가 턱 끝으로 엽서를 가리켰다. 움찔 어깨를 떤 우영이 그것을 텁, 손으로 덮었다. 그의 큼지막한 손에 엽서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네?”

“전시회 말이야.”

우영의 동공이 또 한 번 경련했다. 엽서를 보낸 사람인가. 그러지 않고서야 내용을 알 리 없으니. 그럼 <갤러리 비>에서 나온 사람이란 말인가.

“어, 늦은 질문 같은데 누구신지…….”

말끝이 자꾸 뭉그러졌다. 분명 덩치는 우영이 곱절은 더 큰데, 왠지 모르게 조심하게 됐다. 꼭 학주 선생님이나 교수 같은 어려운 인물을 눈앞에 두고 있는 기분이었다.

낯선 이가 상체를 숙이며 포장마차 테이블에 팔을 얹었다. 그러다 흠칫 놀라며 팔을 뗐다. 불결한 것에 닿았다는 듯, 매끈한 미간이 가감 없이 좁아졌다.

“B라고 불러.”

“……B요?”

“응.”

우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B라고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다. 사람이라고 해도 되나. 얼굴은 모르나 어딘가에 존재하는 건 알고 있는, 연예인이라 하기엔 뭐하고 공인이라고 하기엔 더더욱 뭐한, 아무튼 그런 사람이 있었다.

“<갤러리 비>의 그 B요?”

“응.”

“그러니까 백사현……님? 아니, 씨? 아무튼, 그 사람이라고요?”

“응.”

“진짜요?”

“응.”

“진짜 <갤러리 비>의 백사현이에요?”

“응.”

“어……. <갤러리 비>의 아트 딜러인 백사현,”

“등신 같은 질문 계속할래?”

거듭 이어지는 우영의 질문에 친절히 고개를 끄덕이던 사현이 눈가를 어그러트렸다. 그러나 우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백사현. <갤러리 비>의 대표이자 아트 딜러(Art Dealer). 미술계에서는 통칭 ‘B’라고 불린다. 한국 대표 대기업 중 하나인 ‘그룹 화(火ㆍ花)’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한국에서, 어쩌면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갤러리를 운영하는 자였다.

그리 대단한 사람이 왜. 쥐뿔 볼 것도, 능력도 없는 제게.

우영이 머릿속에 휘몰아치는 단어를 조합하지 못하고 어버버 거리자, 사현이 흘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내가 시간이 없거든? 우리 본론만 간단히 하자.”

“네? 무슨 본론⋯⋯.”

“늦었지만 말 놓을게. 내가 원래 싸가지도 없고, 위아래도 없어서. 음, 자기는 나보다 어리니까 뒤에 건 해당 안 되겠다.”

“아…….”

“욕해도 돼. 물론, 앞에서 말고 뒤에서.”

사현이 농이라는 듯 가볍게 웃었다. 눈이 곱게 접히고, 입술은 예쁜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우영이 헛숨을 삼켰다. 예쁘다니, 우로 보나 좌로 보나 남자인 생물체에게 그런 묘사는 해 본 적이 없는데.

“그래서 답은?”

사현이 물었다. 우영의 눈썹이 들썩였다.

“무슨 답…….”

“……너 좀 멍청하니?”

사현의 얼굴에서 일순간에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말을 가릴 줄 몰랐다. 초면인데 첫인상 따위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우영은 어쩐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제가 멍청한가. 그래, 똑똑하진 않으니 멍청한 게 맞는 것 같다. 실로 그런 모자란 생각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전시회. 할 거냐고. 내 갤러리에서.”

사현이 검지로 콕콕 테이블을 찍으며 말을 끊었다.

“사기 아니에요?”

우영이 안경을 추켜올리며 물었다. 나름대로 허를 찌른답시고 한 질문이었다. 사현이 하, 헛웃음을 흘렸다. 비아냥과 비웃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너 돈 많아? 내가, 굳이, 여기까지 와서 사기를 칠 만큼?”

“……아니요.”

우영이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먹는 게 오늘 첫 낀데요. 그건 차마 말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처음 본 이에게 털어 놓기엔 꽤 민망하고 부끄러운 사실인지라.

“그리고 내가 사기 칠 사람으로 보이니?”

사현이 다시 물었다. 미끈하고, 말랑하게 생겼는데 또 어느 방면에선 시린 분위기를 풍기는 그의 얼굴이 쑥 다가왔다. 꼭 뱀 같은 움직임이었다. 우영이 시선을 바닥으로 고꾸라트렸다.

“……아니요.”

그러고는 이번에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근데 왜 물어?”

“그러게요.”

넙데데한 우영의 어깨가 축 처졌다. 제가 진짜 멍청한가 보다. 이십팔 년 평생 그것을 처음 깨닫는다. 그런 우영을 지그시 보고 있던 사현이 코끝을 찡긋거렸다. 그러고는 간신히 한 잔쯤 남은 소주병을 흔들었다.

“혹시 취했니?”

“아니요.”

우영은 이번에도 부정을 내놓았다. 다른 말은 할 줄 모르는 바보 같았다. 사현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얇은 라운드 티 아래로 보이는 그의 가슴팍이 도톰하게 부풀었다가 꺼졌다.

사현은 여기까지 찾아온 보람도 없이, 이쯤에서 만남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반응이 좀 느린 아이겠거니, 싶어서. 이런 부류의 인간에겐 충분히 시간을 주는 게 나았다. 그러지 않고서는 제 속이 답답해 까무러칠지도 몰랐다.

“생각 있으면 이거 들고 갤러리로 찾아와.”

사현이 반질반질한 검은색 명함 케이스에서 명함 한 장을 꺼냈다. 우영이 그것을 내려다봤다. 하얀색 명함에는 B라는 이름과 아트 딜러라는 직함, 전화번호, 메일, <갤러리 비>의 주소 따위가 적혀 있었다.

“진짜 저한테 전시를…….”

한참 명함을 쳐다보던 우영이 입술을 달싹이며 고개를 들었을 때, 사현은 이미 도로에 세워진 유명 브랜드의 자동차로 향하고 있었다. 뚜벅뚜벅 걷는 모습도 어긋남 하나 없이 바르다.

우영이 쩝, 입맛을 다셨다. 붙잡기는커녕, 잘 가라는 인사조차 할 틈을 주지 않다니. 매몰찼다.

사현은 금세 사라졌다. 그래도 우영은 그가 사라진 도로변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뒤늦게 짜증이 났다. 나보고 멍청하대. 처음 만난 사람한테 그게 할 말이야? 말랑말랑해 보이는 그의 볼을 콱 꼬집어 주고 싶었다.

우영이 얼마 남지 않은 술을 나발로 입에 물었다.

* * *

<갤러리 비>는 조금 독특하다. 그 위상에 평범하다면 오히려 이상하겠지만, 아무튼 확실히 독특했다. 그래서 독보적이고.

<갤러리 비>는 번화가에 자리 잡고 있으나 지하철역에서는 멀었다. 그렇다고 버스를 타기엔 두 정거장에 불과한지라 좀 애매했다. 배차 간격이 이십 분을 웃도는 버스라면 더욱 애매해진다.

거기다 꽤 높은 오르막 위에 우뚝 서 있다. 차 없는 젊은이들이 가려면 땀 몇 방울 정도는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자차가 있는 사람들은 별 고민 없이 갈 수 있다.

아마 철저한 의도 아래에 선정한 위치일 것이다. 젊은 대지의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으나, 쉽게 드나드는 이는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기성세대, 혹은 그림에 지극한 관심이 있는 애호가들 정도.

그러니까, 돈이 많으면 가기 쉽고 돈이 없으면 몸이 고단한 곳이란 말이다.

그리고 우영은 철저히 후자에 속했다.

“하아, 하아…….”

오랜 시간을 들여 갤러리 앞에 당도한 우영이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안경을 빼고 콧잔등에 맺힌 땀도 닦아 냈다. 궂은일을 많이 하다 보니 체력 하나는 자신 있었는데.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산과 같은 오르막을 걷는 건 아무래도 힘들었다.

자못 오래 호흡을 고르던 우영이 천천히 허리를 폈다. 크다 못해 웅장하기까지 한 <갤러리 비>가 우영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올 때마다 느끼지만, <갤러리 비>는 지나치게 크다. 내로라하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콱콱 짓밟고 올라설 만큼.

미술관은 대체로 위로는 짧고, 옆으로 넓게 만든다. 그래야 온전히 작품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좁은 공간은 좁은 생각을 가져오니 창의력의 시초인 미술관은 웬만하면 크게 만들었다.

<갤러리 비> 역시 가로로 길었다. 높이로는 4층밖에 되지 않으나 해발 높이와 크기가 워낙 커 높다란 빌딩을 눈앞에 둔 것처럼 느껴졌다.

꼭대기 층과 지붕은 나선형의 조형물이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모양새지만 아래 세 층은 날카로울 정도로 딱 떨어진 사각 형태의 유리가 주상절리처럼 다닥다닥 달라붙어 있다. 거기다 문 앞에는 고대 그리스풍의 큼지막한 열주(列柱, colonnade)들이 쿡쿡 박혀 있다. 다소 권위적인 이미지였다.

허나 밤이 오면 모든 구조물 틈에서 은은한 금빛이 새어 나온다. 낮과는 퍽 상반되는 이미지가 연출되는 것이다. 유동적임과 동시에 배타적이다. 잘 나가는 대기업 건물 같기도 하고, 유서 깊은 신전 같기도 했다.

새로우면서도 근엄한 공간에 발을 디디는 것만으로도 선택받은 자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멀뚱히 갤러리를 올려다보던 우영이 볼 안쪽을 씹었다. 쿵쾅쿵쾅 뛰는 심장이 오르막을 올랐기 때문인지, 아니면 사현과의 만남을 앞두고 있기 때문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그날, 사현이 그렇게 떠나고 나서. 우영은 낡은 매트리스에 누워 밤새도록 고민했다. 이것이 사기일까, 아닐까. 기회일까, 아닐까. 그 잘난 얼굴로 사기를 치고 다니는 못된 사람이면 어쩌나. 아니다. 조금 싸가지가 없긴 하지만 그런 사람으론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엎치락뒤치락하다 동이 틀 때쯤에야 결론을 내렸다.

그래. 이건 일생일대의 기회다. <갤러리 비>에서 전시만 하면, 앞으로 남은 인생은 탄탄대로였다. 더는 포장마차에서 우동 한 그릇에 만족하지 않아도 된다. 제육볶음에 계란말이에 골뱅이무침까지 시킬 수 있단 말이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 우영이 힘차게 발을 뗐다.

갤러리 안은 조금 차갑다 싶을 정도로 시원했다. 에어컨 바람이 축축한 이마를 날카로이 베고 지나갔다. 그래도 춥진 않았다. 미술관이 너무 춥거나 더우면 관람객을 쫓아내기 때문이다. 이런 방면에서 <갤러리 비>는 항상 완벽했다.

우영이 기다란 다리를 휘적휘적 움직여 인포메이션 센터로 다가갔다. 머리를 곱게 빗어 넘긴 여자가 우영을 지그시 바라봤다.

“안녕하세요. 무슨 전시를 관람하러 오셨나요?”

그녀가 물었다. 한쪽에 세워져 있던 태블릿을 끌어와 현재 진행 중인 전시 목록을 보여 주기도 했다. 우영이 주머니를 뒤적여 그새 끄트머리가 살짝 뭉그러진 명함 하나를 꺼내 보였다.

“백사현, 그러니까 B 만나러 왔는데요.”

우영의 말에 직원의 눈썹이 아래위로 들썩였다. 그녀가 설핏 눈을 접으며 예의 있게 우영의 손에서 명함을 빼 갔다. 그러더니 마치 대가의 도자기를 품평하듯 요리조리 살폈다. 곧 명함이 다시 우영의 손으로 건너왔다.

“네, 관장님 명함 맞네요. 근데 지금 외출 중이시라. 혹 괜찮으면 잠깐 기다리시겠어요? 삼십 분 정도 후에 들어오실 겁니다.”

“아……. 네.”

우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돌렸다. 시간이 빈 김에 갤러리나 둘러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직원이 헐레벌떡 인포메이션 바를 돌아와 우영의 앞에 섰다. 갤러리 어귀에 난 복도를 가리키는 걸 보아하니 기다리는 장소가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우영이 엉거주춤하게 허리를 굽히며 직원의 성의를 거절했다.

“저는 전시회를 좀 둘러보고 싶은데.”

“아. 작품이라면 가시는 길에도 많습니다.”

허나 직원은 강경했다. 거절에 서툰 우영이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뒤따랐다.

복도 끝에는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관람객으로 왔던 우영이 숱하게 탔던 엘리베이터는 아니고, 아마 직원 전용쯤 되는 듯했다. 아니면 사현 전용이거나.

직원은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하나뿐인 버튼을 누르더니 꾸벅 허리를 숙이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같이 타지 않는다는 뜻 같았다. 당황한 우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디로 가는 건가요?”

“길만 따라가시면 됩니다.”

“무슨 길…….”

우영이 미처 질문을 끝마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 반질반질한 엘리베이터 문에 우영의 얼빠진 얼굴이 비쳤다. 길이라. 보통 건물 안에 있는 복도를 길이라 칭하나?

그가 관자놀이를 긁적이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팅, 청량한 음과 함께 멈춰 섰다. 그리고 문이 열리는 순간,

“와…….”

우영은 감탄을 숨길 수 없었다.

말 그대로 길이었다. 바닥은 고운 흙이 깔려 있었고 사위로는 꽃과 풀이 즐비했다. 간간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조형물과 허공에 떠 있는 듯한 그림들도 있었다. 천장 모서리부터 따사로운 금빛이 쏟아졌다. 가히 듣도 보도 못한 전시 수준이다. 혼자 보는 게 아쉬워 뒤꿈치가 들썩일 정도였다.

“이걸…… 전시를 안 하고…….”

왜 이런 데에다 숨겨 놨대. 우영이 절레절레 머리를 저으며 발을 내디뎠다. 바스러지는 흙을 예상했는데, 어째 바닥이 탄탄했다. 우영은 발아래를 한참이나 내려다보고서야 흙 위로 얇은 유리 바닥이 깔린 걸 알아챘다.

하긴, 저번에 만난 사현의 구두에서 흙 알갱이 따위를 본 기억이 없다. 갤러리 관장이 흙이 낭자한 신발로 전시장에 들어서는 것도 말이 안 됐다.

우영은 기다시피 천천히, 또 느긋하게 발을 옮겼다. 제목과 작가조차 기명되지 않은 작품들을 구경하느라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한데 어째 익숙한 분위기의 작품이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언젠가 만난 적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우영이 삐뚜름히 고개를 흘렸다. 저명 작가의 것인가. 뭐, 이런 곳에 설치되어 있을 정도면 당연히 저명하긴 할 텐데. 왜 작가 명을 표시해 놓지 않았지.

뒷짐까지 지고 작품을 감상하던 우영은 길의 끝에 다다르고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자동문이 앞에 있었다. 뒤를 돌아봤다. 혹 사현이 올까 싶어서. 그러나 엘리베이터는 침묵하고 있었다.

우영이 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진한 녹색 슈트를 차려입은 여자가 우영을 향해 다가왔다. 붉다고 표현하면 조금 모자라고, 시뻘겋다고 표현하는 게 어울리는 입술과 짧게 친 머리, 그리고 검은색 태슬이 달린 큼지막한 귀걸이를 한 여자였다.

“어서 오세요. 저는 B의 수행 비서인 제인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저는,”

“서우영 님이시죠. B께서 지금 주차장에 도착하셨다니 오 분 이내로 들어오실 겁니다. 따라오시죠.”

제인이 우영을 깊숙한 곳으로 안내했다. 앞서 건너온 길과 달리 평범한 사무실 풍경이 펼쳐졌다. 아, 평범하다고 하면 너무 수준 떨어지고 돈 자-알 버는 회사에나 있을 법한 사무실이었다. 조금 이상한 게 있다면 책상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 아마 제인의 것이리라.

사현의 오피스는 지금껏 건너왔던 그 어느 문보다 넓은 문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공간 역시 그랬다. 천장도 넓고, 한 면은 통으로 유리였다. 창밖으로는 <갤러리 비>의 널따란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오피스엔 검은색 데스크와 책장 두 개, 정체 모를 조형물 하나, 길쭉한 풍등 모양새의 조명 그리고 보드라워 보이는 소파와 테이블 세트 하나가 다였다. 넓은 공간이 민망해할 수준의 적은 가구들이었다. 근데 또 묘하게 잘 어울리는 게, 대충 가져다 둔 건 아닌 모양이다.

[관장 백 사 현]

데스크 위엔 크리스털 명패가 놓여 있었다. 우영이 몇 안 되는 활자를 곱씹어 읽었다.

“어…… 비서……님?”

우영이 어색하게 제인을 불렀다.

“실장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제인이 테이블에 붉은색의 히비스커스 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우영이 손을 가로로 세워 어깨에 가져다 댔다.

“실장님. B가 키는 요-만하고, 얼굴은 하-얗고, 입술은 빨-간 그 사람 맞나요?”

“네. 맞습니다.”

“……확실히 사기는 아니네.”

우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사기요?”

제인이 물었다.

“아, <갤러리 비>에서 편지가 왔었는데 그걸 보고 사기라고 생각했거든요. 제가 그렇게 인지도가 있는 작가가 아니라서……. 근데 여기까지 오고 보니 사기는 아닐 것 같네요.”

우영의 답에 제인이 살짝 눈을 어그러트렸다.

“음……. 또 모르죠.”

이상한 대답이었다.

“네?”

우영이 되물었다. 하지만 제인은 싱긋, 웃음으로 답을 대신하곤 뒤를 돌았다. 그녀가 문고리에 손을 대기 직전, 먼저 문이 열렸다. 사현이었다. 우영이 벌떡 일어났다.

“B. 손님 와 계세요.”

제인이 한 발자국 옆으로 물러서며 말했다.

“응. 들었어.”

피곤한 낯의 사현이 목을 돌리며 오피스에 들어섰다. 처연한 선을 그리고 있는 눈가가 불그스름한 게 잠을 못 잤거나, 울었거나. 우영은 어쩐지 그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가까운 거리가 아니라서 잘 보이지 않음에도 그랬다.

“제이, 나 커피 좀 내려 줄래. 진하게. 시럽도 많이 넣어 줘.”

사현이 눈을 비비며 부탁했다. 퍽 어린아이 같은 행동이었다.

“네.”

제인이 까딱 묵례하고는 오피스에서 사라졌다. 이제 이 넓은 공간에 존재하는 건 사현과 우영, 둘뿐이었다.

사현이 예의 그 바른 자세로 우영을 향해 다가갔다. 우영이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금세 우영의 앞에 당도한 그가 지그시 우영을 올려다봤다. 우영도 그를 내려다봤다. 짙은 정적이 두 사람 사이를 맴돌았다.

우영의 눈동자가 사현의 얼굴 위를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잘 빚은 조각처럼 감상하게 되는 얼굴이라. 퍽 무례한 짓이었으나 사현은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그가 통통한 아랫입술을 핥으며 우영에게 말했다.

“앉아. 자기 키가 너무 커서 목이 다 아프다.”

“아, 네!”

우영이 냉큼 소파에 앉았다. 그러고는 허리까지 꼿꼿이 편 채 싱글벙글 웃는 낯으로 사현을 쳐다봤다. 구릿빛 광대가 도톰하니 솟아올랐다.

사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 꼴을 뭐라고 묘사해야 하나⋯⋯. 음, 아. 그래. 꼭 주인의 퇴근을 기다린 개 같았다. 펄럭펄럭 허벅지만 한 꼬리를 흔드는 듯한 환영이 어렴풋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코를 찡긋거린 사현이 상석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오늘 얇은 옷감에 품이 넉넉한 슈트 재킷을 입었다. 그래서 그가 움직일 때마다 팔랑팔랑 춤을 추는 옷자락에서 좋은 냄새가 났다. 수선화와 바닐라가 섞인 향이었다.

우영이 소리 없이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그의 냄새를 훔쳐 먹었다. 그 사이 제인이 진하게 내린 커피를 내려놓고 떠났다.

“그래. 생각해 봤어?”

사현이 커피 잔을 들며 물었다. 우영이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시하고 싶습니다. 꼭, 하고 싶습니다.”

무릎 위로 주먹을 올린 우영이 군기가 바짝 든 이등병처럼 대답했다. 아까는 개 같더니. 사현이 픽, 실소했다.

“잘 생각했어. 그려 놓은 그림은 몇 점이나 되지?”

“세어 보지는 않았는데, 삼사십 점 될 거예요.”

사현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질이 좀 떨어지거나 보관 상태가 엉망인 것 몇 개를 쳐내도 넉넉한 수다. 그 정도면 전시의 구색을 갖출 수 있으리라.

사현이 머릿속으로 작품을 정리하는데, 우영이 낡은 백팩에서 두꺼운 책 하나를 꺼냈다. 그것은 곧장 사현의 앞으로 들이밀어졌다. 사현이 이게 무엇이냐고 눈으로 물었다.

“제가 포트폴리오를 따로 준비하지 못해서, 대학 졸작 도록을 가지고 왔는데……. 이거라도 보실래요?”

이런 자리에서 작가 대부분은 공들여 만든 포트폴리오를 가져온다. 그러나 우영은 그림을 찍을 카메라도, 그것을 책으로 만들어 인쇄할 돈도 없었다.

A3 사이즈, 전체 칼라, 내지는 아트지 100g, 50p 이상. 그렇게 몇 부 인쇄하면 십만 원이 훌쩍 넘는다. 당장 한 끼가 아쉬운 판에 그런 건 사치였다. 그나마 있는 게 대학 졸업 전시회 때 동기들과 돈을 모아 만든 도록이었다.

“이걸 왜 가지고 왔는데?”

사현이 물었다. 그는 도록에 손도 대지 않고 잠깐 쳐다만 봤다. 일말의 흥미도 없는 시선이었다.

“제 그림을 모르실 것 같아서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고저 없이 이어진 질문에 우영이 검지로 자신의 무릎을 꾹꾹 짓눌렀다.

“그거야…… 저는 좋은 학교를 나온 것도 아니고, 내놓을 만한 이력도 없고, 집안이 엄청 좋은 것도 아니고. 그래서 제 그림을 본 적이 없으실 테니까…….”

자신이 없다 못해 가녀리기까지 한 우영의 말에 사현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우영을 오래, 또 많이 본 건 아니지만 그가 사회 경험이 전무한 애송이인 건 잘 알겠다. 사현이 톡톡 우영 앞의 테이블을 두드렸다.

“자기야.”

“네.”

“며칠 전에 꿈을 꿨는데.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서울 끄트머리에 사는 28살 서우영이라는 애가 어-마어마하게 천재라고 꼭 섭외하라시더라.”

“진짜요?”

우영이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짜겠니?”

사현의 만면에 잠깐 혐오가 스쳤다. 비로소 그의 말이 농 아닌 농임을 깨달은 우영이 볼 안쪽을 세게 씹었다. 오늘 내내 물고 괴롭혀서 울퉁불퉁하게 모난 내벽이 아프다고 농성을 벌였다.

첫 만남 때부터 느낀 거지만, 사현은 조금 나쁜 사람 같다.

일그러지는 우영의 얼굴에 사현이 비스듬히 턱을 괬다. 얼굴 찌푸릴 줄도 아네. 마냥 맹-한 애라 생각했더니. 화내는 모습이 궁금하다면 변탠가. 사현이 쌉싸래한 커피 한 모금과 함께 기묘한 욕구를 삼켰다.

“자기야. 내가 그림도 안 보고 전시를 열까 봐? 신진 작가든 경력 작가든 제발 자기 그림 한번 봐 달라고 난리라 귀가 아플 지경인데, 어떤 그림을 그리는지도 모르는 너를 여기 앉혀 놨다고? 내가 일을 운으로 하는 사람처럼 보이니?”

“아니요.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닌데…….”

우영이 눈을 아래로 툭 떨어트렸다. 조곤조곤한 음성인데도 호되게 혼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티 나게 시무룩해진 우영을 보던 사현이 달큼한 한마디를 던졌다.

“나 네 그림 알아. 그 도록에 들어 있는 그림들도 다 봤고. 나는 「3시」가 마음에 들더라.”

“…….”

우영이 이번엔 다른 느낌으로 눈을 크게 떴다. 우영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도록에 실린 그림들은 졸업 전시회를 제외하곤 단 한 번도 공개한 적이 없다. 아니, 공개할 곳이 없었다는 게 맞겠다. 근데 그걸 사현이 어찌 봤단 말인가. 혹, 3년 전의 졸업 전시회를 보기라도 했단 말인가.

“설마 제 졸업 전시회에 오셨어요?”

“응. 자기 보러 간 건 아니고, 나랑 일할 애 찾으러. 그러다 그 일할 애가 자기가 된 거고.”

사현이 먼 과거를 반추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우영이 다니던 대학교의 졸업 전시회는 참으로 조잡하고, 난잡하고, 정체성도 없었다. 한마디로 엉망진창. 그다지 그림에 재능도 없고, 흥미도 없는 학생들이 그린 작품이 수두룩했다.

물론 이해하는 바이다. 그림으로 밥 벌어먹는 건 로또만큼이나 힘든 일이니까. 디자인부터 3D까지 학원 다니느라 바빠 죽겠는데, 졸전에 참여하지 않으면 졸업을 시켜 주지 않는다 하고. 그래서 대충 휘갈기듯 그렸겠지.

그중에 눈에 띈 게 우영의 그림이었다. 나이답지 않은 노련함, 꽉 찬 밀도, 힘찬 붓 터치. 그런 것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사현은 곧장 우영을 찾지 않고 기다렸다. 우영이 푹 익기를. 뙤약볕에 둔 김치처럼 익다 못해 쉬어 버리기를. 그때쯤이면 어차피 버려진 것이라 누가 주워 간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그럼 요리하기가 쉬워지니까.

……설사 요리하다가 망쳐도, 그래서 쓰레기통에 처박아도 하등 아깝지 않으니까.

“그런 전시회까지 다니세요?”

우영의 질문 끝이 가파른 사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갤러리 비>가 신진 작가를 발굴하는데 독보적인 재능이 있는 건 알았지만, 그 신진 작가들을 이리 손수 발로 뛰며 찾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흔히 신진 작가들이 성공적으로 데뷔하는 건 말도 안 되게 운이 좋거나, 집이 억 소리 나는 부자라 인맥을 남용하든가. 둘 중 하나였다. 실력은 그다음 순이었다.

“나는 자기 같은 사람 좋아해.”

사현이 씨익 웃으며 읊조렸다.

“조, 좋아해요? 저 같은 사람을요?”

좋아해. 그 얼마나 낭만적이고 간지러운 말인가. 우영의 볼이 루벤스가 그린 딸의 초상처럼 선홍빛으로 물들었다.

그 모습에 사현이 코끝을 찡긋거렸다. 순수는 대부분 고결한 것으로 포장되지만, 그 앞에 ‘너무’라는 부사가 붙으면 가치가 추락한다. ‘답답’이라는 단어와 동일 선상에 서는 것이다.

“자기야. 내가 나 싸가지 없다고 말한 거 기억하니?”

“네.”

“그러니까 그냥 개가 짖나 보다, 하고 들어. 상처받지 말고.”

“네.”

우영은 사현의 친절한 경고에도 별다른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았다. 내가 <갤러리 비>에서 전시를! 머릿속에 있는 생각은 그뿐이었다.

“내 갤러리에서 첫 전시회를 여는 신진 작가들은 대부분 자기랑 비슷해.”

“어떤 부분이요?”

“가족 없는 고아. 보잘것없는 학벌. 어쭙잖은 실력. 궁핍한 주머니. 활발하지 않은 대인 관계. 미술계 경험은 전무.”

사현의 음성이 우영의 정수리를 도끼처럼 콱콱 내리찍었다. 난데없는 폭격에 우영은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사현의 말에는 뭐 하나 틀린 정보가 없었다. 그러나 때로는 거짓에 말미암은 비난보다 현실 그 자체가 더 아픈 법이다.

“⋯⋯.”

우영이 마른침을 삼켰다. 화를 내야 하는지 아니면 울어야 하는지 분간이 안 됐다.

“그런 애들이 다루기 쉬워. 말도 잘 듣고. 내 멋대로 주무르기도 좋거든. 걔들은 간절하잖아. 지금 자기가 간절하듯이 말이야.”

“⋯⋯.”

“믿을 구석이 있으면 기고만장해지고, 기고만장해지면 버릇이 없어지고, 불만이 생기고, 그 불만을 ‘감히’ 나에게 토로하고, 그러다 보면 관계가 어그러지고, 끝내는 관계가 파멸하지. 관계의 파멸은 전시의 파멸까지 이어지거든.”

우영이 사현의 말을 곰곰이 되씹었다. 버릇없는 신진이라. 그의 말대로 누가 ‘감히’ 사현에게 불평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미술계에서, 그것도 신진에게는 사현의 말이 절대적이었다. 그가 인터뷰에서 한번 언급만 해도 그림 값이 곱절로 뛴단 말이다.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사현이 그것을 썩 달갑게 여기지 않는 것도 이해가 안 됐다. 꼭 이미 그러한 일이 있었다는 것 같잖은가.

잠깐 정적을 끌어가던 우영이 느지막이 입을 뗐다.

“전시회가 어그러지는 게 무서우신 거면,”

“무서워해? 내가? 아니지. 귀찮은 거지.”

“네. 그게 귀찮으시면서 왜 신진을 고집하세요? 물론, 저 같은 놈한테는 절호의 기회지만, 성격도 좋고 그림도 잘 팔리는 작가가 없는 것도 아니잖아요. 꼭 신진이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처럼 들려요.”

우영의 눈썹 위로 깊은 홈이 파였다. 지금까지 그가 한 말 중에 가장 길고 또렷했다. 사현이 의외라는 듯 입꼬리를 씰룩였다. 등신이나 멍청이, 둘 중 하나인 줄 알았는데 그래도 생각은 할 줄 아는 애였네.

사현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옆으로 가 봐.”

그가 우영의 팔뚝을 툭툭 밀어 옮기고 그의 지척에 엉덩이를 붙였다. 확 가까워진 거리에 놀란 우영이 숨을 말아먹었다. 보드라운 바닐라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사현이 제게 어떠한 수치를 줬는지 홀라당 까먹어 버릴 정도로 향기로운 냄새였다.

“자기야.”

“⋯⋯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네.”

사현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우영이 덩달아 허리를 숙였다. 퍽 비밀스러운 일을 도모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두 쌍의 눈동자가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에서 뒤엉켰다. 우영의 목젖이 바짝 말라 오그라들었다. 그걸 추후에도 모를 사현이 나른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나는 네 그림을 아주 비싸게 팔 거야.”

“⋯⋯.”

“물론, <갤러리 비>에서 전시한 작가니 그림 값이 어지간히 올라가긴 하겠지.”

“⋯⋯.”

“근데 그저 그런 정도가 아니라 네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훌쩍 넘을 정도로 비싸게 팔 거야.”

“⋯⋯.”

“기본적인 시장 이치에다 못된 방법을 조금 섞어서. 그 못된 방법을 잘 쓰려면 자기 같은 애들이 있어야 해. 미술계에 혜성같이 등장한 천재, 그런 느낌으로.”

사현이 만면 가득 장난기를 띄웠다. 익살맞은 게 꼭 친구를 놀리는 아홉 살짜리 애 같았다. 우영이 턱을 아래로 당기며 물었다.

“못된 방법이 뭔데요?”

“그건 차차 알려 줄게. 아무튼, 이런저런 손을 써서 네 그림을 비싸게 팔 거야.”

“⋯⋯.”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유명하게 만들어 줄게. 돈 걱정도 없애 줄게. 편히 살게 해 줄게.”

낯간지러울 정도로 설레는 말이었다. 프러포즈하는 사람이나 할 법한 말이랄까. 그리고 그 대사는 몹시 효과적이었다. 우영이 귀신에 홀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현이라면 정말 제 인생을 홀라당 뒤집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사현이 이만하면 됐다는 듯 우영의 손등을 짧게 두드렸다. 그러고는 소파에 깊숙이 기댔다. 그가 길게 숨을 뿜어냈다. 그의 숨자락에 특유의 간지러운 냄새와 커피 향이 섞여 났다.

우영은 그런 사현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꼭⋯⋯ 뱀 같다. 미끈한 하얀색 뱀. 보드라운 외형과 달리 차갑고 틈이 없다. 잘못 건드렸다간 독이 뚝뚝 흐르는 이빨에 물어뜯길 것 같달까. 어째 사람이 뱀 같을 수가 있는지. 사현은 참 신기했다.

사현이 고개만 비스듬히 기울여 우영과 시선을 맞췄다.

“왜 그렇게 봐?”

“끝이에요?”

“그럼?”

“제가 뭘 해야 하는지. 전시는 언제부터 언제까지인지. 아무것도 알려 주신 게 없잖아요.”

“내가 다 알아서 할 거야.”

사현은 단호하고 간결하게 우영의 모든 의문을 밀어버렸다. 우영이 눈을 끔뻑였다. 자신이 다 알아서 하겠다니, 참으로 본새 났다. 사현은 아트 매거진에서 기사 몇 줄로 접하던 것보다 훨씬 멋지고, 멋지고 또 멋졌다.

우영이 사현을 보며 감탄하는 사이 그가 무언가를 잊었다는 듯 아, 짧게 신음했다.

“수익 배분은 9:1이야.”

“그렇게나 많이요?”

우영의 눈썹이 아래위로 바쁘게 들썩였다. 어찌나 놀랐는지 자리에서 펄쩍 뛸 뻔했다. 9:1이라니. 그건 듣도 보도 못한 비율이었다.

발랄한 우영의 반응에 사현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많아?”

“네. 저한테 9씩이나 주면 B는 너무,”

“하아, 자기야. 네가 1이지. 내가 9고.”

사현이 정신 차리라는 듯, 우영의 얼굴 앞에다 딱딱 손을 튕겼다. 흉터 하나 없이 일자로 곧게 뻗은 그의 손가락이 우영의 기쁨을 댕강 참수시켰다. 우영의 눈가가 어그러졌다. 그것 역시 듣도 보도 못한 비율이었다.

“제가 1이라고요?”

“응. 쉽게 말해 십만 원 벌면, 나는 구만 원. 너는 만 원.”

사현이 마치 어린아이에게 설명하듯 조곤조곤 말했다. 우영의 미간에 근심이 내려앉았다. 뭐야. 진짜 사기였어. 제인이 ‘또 모르죠’라고 하는 이유가 있었어.

“돈 걱정 없애 주신다면서요. 만 원으로는 밥 두 끼밖에 못 먹는데요.”

우영이 입술을 부루퉁히 내밀고 불만을 토해 냈다. 감히 누가 사현에게 불평하겠는가, 라고 생각한 지 오 분도 안 된 시점이었다.

사현이 픽, 웃음을 흘렸다. 우영의 이런 반응을 빤히 내다보고 있었던 터라.

“차근차근 설명해 줄게. 작품가 책정하는 방법은 아니?”

“네. 학교에서 배웠어요.”

“그 등신 같은 학교도 뭔가를 가르치긴 하는구나? 그래, 그럼 네가 10호짜리 그림을 판다면, 얼마가 적당할 것 같아? 캔버스 값, 물감 값, 액자 값, 작가 창작비에 나한테 줘야 할 전시장 대관비, 리플릿 등등을 포함한 홍보비까지 포함해서 말이야.”

우영이 끙, 앓는 소리를 냈다. 분명 배우긴 배웠는데, 수년 전이라 가물가물했다. 제 그림을 판매할 수 있는 제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터라.

꽤 오래 고민하던 우영이 더듬더듬 답을 내놓았다.

“사, 사십만 원?”

“보통 신진의 작품 경우에는 칠십에서 팔십 사이야.”

“아⋯⋯.”

우영이 의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나랑 9:1로 나누면 네 손에는 정말 쥐꼬리만 한 돈이 떨어지겠지.”

“네. 그래도 캔버스 값은 나오겠네요.”

지독할 정도로 긍정적인 우영의 말에 사현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귀엽다니까, 진짜. 사현이 다리를 반대쪽으로 꼬며 말했다.

“맞아. 근데 나는 네 첫 그림을 육천만 원에 팔 거야.”

“아, 네에. ⋯⋯네?”

무심코 대답하던 우영이 경악에 물들어 눈을 크게 떴다. 어찌나 크게 떴는지 혹 눈알이 떨어지는 건 아닐까, 턱 아래에 손을 가져다 대야 할 것 같았다.

그런 우영의 반응까지 예상한 사현이 무감하게 말을 이어갔다.

“육천만 원에서 네 몫은 얼마나 될 것 같니?”

“어⋯⋯ 음, 어⋯⋯.”

우영의 입술이 바쁘게 오물거렸다. 눈동자는 천장을 향하고, 손가락 끝은 움찔움찔 경련했다. 어떠한 숫자 하나가 떠오르긴 하는데, 믿을 수가 없었다.

“유, 육백이요.”

“그래. 한 점에 육백. 물론, 캔버스가 커지면 가격도 그에 비례해서 올라가겠지.”

“⋯⋯진짜 육백이에요?”

육백. 그것도 그림 하나에 육백. 집에 있는 마흔 개의 그림 중 반만 팔린다 하더라도, 육백 곱하기 이십. 그러면 일억이천⋯⋯. 우영은 숨이 턱 막히는 걸 느꼈다. 그 와중에도 심장이 쿵쾅쿵쾅 어찌나 세차게 뛰는지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했다.

육백만 해도 일 년은 밥을 굶지 않고 살 수 있을 텐데 일억이천이면 이사도 가고, 물감도 잔뜩 사고, 공사판에서 구를 필요도 없고⋯⋯.

턱을 뚝 떨어트린 우영이 금빛 상상을 펼쳤다. 사현이 그런 우영을 보며 킥킥거렸다.

“내가 칠십만 원짜리 그림을 육천만 원에 팔아 주는 거니까, 9:1도 나쁘지 않지?”

“네. 네. 그럼요.”

긍정이 정해진 물음이었다. 사현이 왜 저와 같은 신진을 원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림 하나에 육백이라면 9:1이든 뭐든 아무런 불만 없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일 테니까. 사현이 커피를 타 오라고 해도, 발 좀 씻겨 달라 해도, 아니 그의 발등에 입도 맞출 수 있었다.

“하나 더 알려 줄까?”

나른한 표정의 사현이 또 다른 낚싯바늘 하나를 던졌다. 성공의 허기에 이성을 잃은 우영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사현이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고는 고혹적인 고양이처럼 우영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첫 전시회 이후, 네 그림 가격은 계속 올라갈 거야. 두 번째 전시는 세 배. 세 번째 전시는 다섯 배.”

“⋯⋯.”

우영이 사현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그림 값이 세 배든 다섯 배든. 그가 저와 세 번이나 전시를 함께하겠다는 말이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기쁨과 함께 동경심도 차올랐다. 그의 명령이라면 불구덩이도 뛰어들 수 있을 듯했다.

“그림 하나가 일억이 될지, 아니면 십억이 될지, 그것도 아니면 백억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

우영의 사고가 단절됐다. 십억 이상이 되고 나니 계산조차 어려웠다. 집에 가는 길에 몰래 계산기를 두드려 봐야겠다.

사현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이제는 그의 숨소리가 볼을 간질일 정도였다. 우영이 꽉 주먹을 움켜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만큼이나 세게. 남자가 코앞에 있는 게 뭐 그리 긴장된다고. 그저 조금 멋지고, 예쁘고, 잘생겼을 뿐인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근데 사실, 나는 알아.”

그가 우영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감미롭고 치명적인지. 우영은 뱀에게 귓불이 잡아 뜯기는 것 같았다.

* * *

집으로 돌아온 우영이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공사판에서 뒹군 것도 아닌데 기력이 하나도 없었다. 한번 엎어지고 나니 손 하나 까딱하기 싫었다.

“하아⋯⋯.”

너무 좋은 일을, 너무 급작스레 만나니 기쁘기보다는 얼떨떨했다. 로또 맞은 기분이 이런 건가. 하물며 로또는 제 돈 주고 사는 거기라도 하지. 이건 계기도, 이유도, 노력도 없이 가진 기회라 기분이 묘했다.

얼룩덜룩한 천장을 올려다보던 우영이 몸을 뒤집었다. 헤어지기 전, 사현이 했던 말이 메아리처럼 몰려왔다.

‘나랑 같이 전시할 거야?’

‘그럼요.’

‘내가 분명 못된 방법도 포함되어 있다고 했어. 그것도 감당할 수 있겠니?’

‘네.’

우영은 그의 달콤한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어차피 썩어 가는 그림들이다. 사현이 한 개에 십만 원씩 줄게, 팔아. 그리 말했어도 남김없이 팔아 버렸을지도 몰랐다.

“어후우⋯⋯.”

우영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돈이 뭐라고. 아니, 돈이 다지. 그게 없어서 이 모양 이 꼴로 살고 있지 않은가. 이걸 놓치면 평생 이리 지질하게 살아갈 터였다. 연애도 못 하고, 결혼도 언감생심 꿈조차 못 꾸겠지.

하지만 일억이천인데. 사현의 말에 따르면 두 번째 전시, 세 번째 전시도 한다던데. 대충 뭉뚱그려 잡아도 일억은 들어올 것이다. 그럼 땅 밑이 아니라 땅 위에 있는 집에 전세로 들어갈 수도 있고, 삼 시 세 끼 밥도 챙겨 먹고, 그림도 더 많이 그릴 수 있고⋯⋯.

거기까지 생각하던 우영이 발등으로 탕탕 매트리스를 내리쳤다.

좋다. 좋아 죽겠다.

우영은 다짐했다. 사현이 시키는 건 뭐든 하겠노라고. 이 비루한 한 몸. 오롯이 그에게 바치겠노라고.

* * *

파란색 용달 트럭에 올라탄 우영이 운전사에게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오늘은 이사하는 날이었다. 그새 돈을 벌어서 이사하는 건 아니고, 사현이 명령했기 때문이다.

‘내일 네 집으로 이삿짐센터가 갈 거야.’

‘저 이사해요?’

‘응. 내가 감시할 수 있는 곳으로.’

‘감시라니⋯⋯.’

감시를 목적으로 한 이사였다. 그래서 우영은 주소 한 줄 받지 못했다.

이른 아침 들이닥친 직원들은 정확히 두 분류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림만 챙기는 사람. 살림살이를 챙기는 사람. 전자는 <갤러리 비>에서 나온 듯했고, 후자는 사현이 말한 이삿짐센터에서 나온 듯했다.

트럭도 따로 움직였다. 곱게 포장된 그림은 사방이 꽉 막힌 탑차가, 우영과 살림살이는 낡은 용달 트럭이 옮겼다.

모두 어찌나 바쁘게 움직이는지, 우영은 그저 멀뚱히 서 있기만 했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평소 생활 패턴과 달리 아침 일찍 일어났더니 피곤했다. 퀴퀴한 내가 나는 낡은 트럭의 에어컨 바람을 정통으로 맞고 있으니 멀미도 올라와서 아예 자려고 눈을 감았다.

이동 거리는 길었다. 꾸벅꾸벅 졸았다가 깨길 반복했는데도 여전히 달리는 중이었다. 늘 교통 혼잡인 서울이라 더했다.

점심 직전에야 차가 멈췄다. 우영이 미세하게 부은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

까마득한 높이의 빌딩에 입을 떡 벌렸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빌딩이 반짝반짝하게 빛났다. 설마 이곳에서 살란 말인가. 감시라기에 음습한 창고에 갇혀 그림만 그릴 줄 알았는데, 이건 또 무슨 난데없는 호강인가.

우영이 멍청하게 굳어 있는 동안 이삿짐센터 직원들은 부지런하게 짐을 나르기 시작했다. 그림을 실었던 탑차가 보이지 않는 걸 보니 다른 곳으로 간 모양이다. 아마 미술관 수장고나 창고로 향했겠지.

우영이 얼떨떨한 낯으로 직원을 따라 발을 뗐다.

빌딩 안은 딱 예상했던 것만큼 호화스럽고 넓었다. 경비만 우두커니 앉아 있는 홀임에도 에어컨이 빵빵했다. 엘리베이터도 그랬다. 거짓 조금 보태면 우영의 낡은 원룸만큼이나 큰 엘리베이터는 이삿짐을 나르는 데도 문제없었다.

엘리베이터는 주춤거림 없이 곧장 꼭대기 층으로 향했다. 조금 설레었던 우영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번지르르한 건물 외관에 어마어마한 집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상상은 했다만, 펜트하우스로 간다고? 서울 중심에, 멀찍이 한강도 보이는 빌딩의 펜트하우스라니. 재벌들이나 사는 곳이 아닌가.

띵,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널찍한 복도에 문은 달랑 하나였다.

근데 비밀번호도, 키도 받지 못했는데. 잡혀 온 것과 별다르지 않은 우영이 턱 아래를 긁적였다. 어찌해야 하나. 사현에게 전화라도 걸어야 하나, 생각하는데 직원 하나가 벨을 눌렀다. 안에 누가 있는 건가. 가늠하기도 전에 문이 열리고 빼꼼, 작은 머리통이 나타났다.

“⋯⋯B?”

사현이었다.

“들어오세요.”

우영에게 시선 한번 던지지 않은 그가 문을 활짝 열어 고정해 주고는 다시 쏙 들어가 버렸다. 우영은 모든 이삿짐 직원이 집으로 들어갈 동안 문밖에 멀뚱히 서 있었다. 그러다 문이 닫히기 직전,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후다닥 들어갔다.

집은 확실히 빈 집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온갖 가구가 꽉꽉 들어차 있지도 않았다. 우영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이곳이 사현의 집이라는 걸. 인테리어가 묘하게 그의 사무실과 닮았다.

집안은 블랙 앤 화이트. 철저히 그 색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자그마한 티 테이블이나 서랍장은 나무색과 차콜이 가미되어 있었으나 융화, 그 이상 그 이하의 역할도 아니었다. 바닥은 하얀데 가구는 검은색이다. 펜트하우스에 걸맞게 천장이 높았고, 널따란 공간에 눌리지 않기 위해 소파나 테이블, TV 등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더 컸다.

한쪽에 색을 먹인 미끈한 나무로 된 검은 계단도 있는 걸 봐선 위층도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무수한 작품들이 벽을 채우고 있었다. 한눈에도 제법 많은 그림이 보였는데, 다닥다닥 타일처럼 붙어 있는 게 아니라 널찍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만큼 넓고, 군더더기가 없는 집이었다.

“제가⋯⋯ B랑 같이 삽니까?”

우영이 직원들에게 이래저래 지시하고 있는 사현의 뒤통수에다 대고 물었다.

“어, 왔어?”

사현이 뒤늦게 인사를 건넸다. 마치 우영의 존재를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버건디색 니트에 가벼운 소재의 검정 바지를 입은 그는 평소와 달리 편한 차림새였다.

“저를 감시하려고 집에 들이신 거예요?”

우영이 다시 캐물었다.

“내가 두 번 만난 너를 어떻게 믿어? 코앞에 두고 틈날 때마다 들여다봐야지.”

고저 없이 대꾸한 사현이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꾀죄죄한 우영의 이불 더미를 본 탓이다. “그거, 이불. 버려요, 버려.” 그가 휘휘 손을 저으며 명령했다. 우영은 졸지에 살림살이 하나를 잃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요?”

만면 가득 억울함을 담은 우영이 따졌다. 그러자 사현이 홱 뒤를 돌았다. 곱게 말려 올라간 속눈썹에 신경질이 가득했다.

“너.”

“네.”

“지금부터 백 개의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그 좁아터진 집구석에서 그릴 수 있어? 온갖 습기와 세균이 득실거리는 반지한데? 그러다 그림에 곰팡이라도 피면. 얼룩이라도 지면. 네가 책임질 거니?”

“⋯⋯.”

사현은 말을 너무 잘한다. 어떠한 문장을 뱉더라도 타당한 이유에 자신감마저 있었다. 그래서 우영은 도무지 그를 이길 수가 없었다. 우영이 입술을 삐죽였다.

“그래도⋯⋯.”

“첫 전시가 끝나면 네 통장에 몇억이 꽂힐 거야. 좋지? 근데 그거로 끝일까? 아니, 그때부터 시작이거든. 전 세계에서 주문이 들어와.”

“⋯⋯.”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넌 하나잖아. 커미션이 하나둘씩 밀리다가 나중엔 스무 개씩 밀릴 거라고.”

“⋯⋯.”

“그럼 그림 퀄리티가 엉망진창이 되는 작가들이 있어. 내가 아무리 작품을 뻥 튀겨 판다지만, 팔아도 될 만한 걸 팔고 싶거든. 적어도 상도덕 없는 사기꾼은 되기 싫단 말이야.”

“⋯⋯.”

“그걸 방지하기 위해 널 여기 두는 거야. 작업실을 다른 데 두면 내가 널 감시하러 왔다 갔다 해야 하잖아. 귀찮아.”

사현은 한 문장 한 문장을 마칠 때마다 조금씩 다가왔다. 귀찮아, 까지 말했을 때 두 사람은 한 뼘 정도 되는 거리에 서 있었다. 집안에 들어선 모든 이가 바쁘게 움직이는데 두 사람만 정적이었다.

“자기야.”

사현의 목소리는 들으면 들을수록 적응이 어렵다. 한없이 낮은 음성도 아닌데, 귓바퀴가 간지러울 정도로 감미롭다. 그렇다고 톤이 높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가 입을 떼면 우영은 자신도 모르게 온 정신을 그에게 집중하게 됐다.

“네.”

“너 전시 끝날 때까지 먹고 살 돈도 없잖아.”

“⋯⋯.”

“내가 먹이고 재워 줄게. 그것도 잘.”

‘그것도 잘.’ 자못 낭만적인 꾐이었다. 우영은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착한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사현이 만족스럽다는 듯 우영의 턱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예고 없는 스킨십에 우영이 움찔 어깨를 떨었으나 사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따라와.”

사현이 우영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우영은 고분고분하게 끌려갔다. 자그마한 몸집이 태산만 한 덩치를 끌고 가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사현을 따라 걷는 복도는 몹시 길었다. 문 몇 개가 띄엄띄엄 있었는데, 그 길이가 남다른 거로 봐선 방 크기도 예사롭지 않을 듯했다.

“와⋯⋯ 방이 몇 개예요?”

우영이 감탄처럼 물었다.

“일 층에 다섯 개. 이 층에 세 개.”

사현이 무감하게 답했다. 그 답에 우영은 그 몰래 잠시 숨을 참아야 했다. <갤러리 비>의 대표이자 관장이니, 더군다나 대기업인 ‘화(火ㆍ花)’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사람이다. 당연히 엄청나게 좋은 곳에서 살리라 가늠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두 개는 내 개인 수집품들 보관하는 곳이야. 하나는 GYM이고. 그리고 나머지 두 개가 네 거.”

사현의 설명에 우영이 눈을 크게 떴다.

“두 개나요?”

이런 집이면 복도에서 먹고 자래도 아이고 감사합니다, 할 판인데. 하나도 아니고 두 개라니. 때마침 두 사람이 열린 문에 다다랐다.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들락날락하는 방이었다. 아마 우영의 방이리라.

방은 이제껏 봐 왔던 거실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연한 하늘색 벽지에 진회색 가구들. 크다 못해 넓은 침대. 바닥에 깔린 네이비색 카펫. 빛을 그대로 들여오는 얇은 커튼.

“두 개는 돼야지. 침실에서 그림 그리긴 좀 힘들걸?”

사현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어⋯⋯. 힘들긴 하겠네요.”

눈 깜박이는 것조차 잊은 우영이 중얼거렸다. 저 멋진 침대와 카펫에 물감이라도 튀기는 날엔 목을 매지 않곤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네가 계속 반지하에 살았다기에 인테리어를 밝게 해 봤어. 마음에 들길 바라.”

사현의 배려에 우영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할 나위 없이 마음에 든다는 뜻이었다. 사현이 픽, 웃음을 흘렸다. 어떤 이유든 간에 선물을 준 입장에서 받는 이가 저리 좋아하니 퍽 뿌듯했다.

사현이 다시 우영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다음 목적지는 맞은편 방이었다. 문에 손바닥만 한 도어 록도 달려 있었다. 비밀번호를 누르는 건 아니었고, 지문 인식이었다. 사현이 우영에게 곧 지문 등록을 해 주겠다며 자신의 엄지를 가져다 댔다. 철컥, 문이 열렸다.

“여기가 네 작업실. 방 두 개를 터서 만든 거야.”

문을 연 사현이 한 발 옆으로 비켜섰다. 먼저 들어가라는 뜻이었다. 우영이 쭈뼛쭈뼛 발을 옮겼다.

“와⋯⋯.”

작업실은 침실보다 더 넓었다. 커다란 공터 같은데, 화창하고 깔끔했다. 여기저기 물감이 때처럼 묻어 있던 우영의 반지하 집과는 감히 비교를 불허했다. 침대로 써도 될 만큼이나 커다란 원목 테이블과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전문가용 이젤, 크기 별로 깔끔하게 정리된 캔버스. 그리고 한쪽 벽면을 빼곡히 메운 온갖 종류의 물감과 붓.

우영이 무언가에 홀린 듯 물감 앞에 섰다. 눈에는 익숙하나 손에는 익지 않은 브랜드들이 즐비했다. 감히 살 엄두도 못 냈던, 그 물감. 화방에 전시된 한 섹터를 통째로 사 온 듯했다.

“물감 반은 국내 브랜드고, 반은 내가 임의로 프랑스에서 주문했어. 네 그림에 맞춰서 산 거니까 어색해도 일단 손에 익혀 봐. 네가 원래 쓰던 건 너무 싸구려라 발색이 별로야.”

“네.”

“붓은 웬만한 종류별로 다 있어. 물론, 네가 쓰던 그⋯⋯ 개털 같은 붓은 없어. 그래도 쓸 만한 것들로만 골랐으니까 틀어박혀서 연구 좀 해 봐.”

“네.”

우영이 보들보들한, 또는 선인장 가시처럼 뻣뻣한 붓들을 손끝으로 쓸었다. 놀이동산에 온 기분이었다. 아니, ‘천국 같다’고 묘사하는 게 더 맞을 듯싶다.

한참 작업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던 우영이 문득 사현을 쳐다봤다.

“근데 이거 그냥 주시는 거예요? 나중에 수익에서 깐다거나⋯⋯.”

“내가 괜히 9할이나 가져가겠니? 마음껏 써.”

“네.”

두 손을 꽉 말아 쥔 우영이 뒤꿈치를 뜰썩였다. 입술이 간지럽다. 정수리도 간지럽고. 갈비뼈도 간지러웠다. 붓을 처음 쥐었을 때도 이러한 기분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좋아 죽겠다.

그런 우영을 지켜보던 사현이 여러 가지 일과 규칙을 나열했다.

“더 필요한 건 제이한테 말하면 돼. 바로 사 줄 거야.”

“네.”

“이 방은 조명이랑 습도, 온도까지 조절할 수 있어. 그리고 나중에 전시장 디자인이 정해지면 리터치가 필요할지도 몰라. 지금 보존 상태 검수 중인 네 그림도 리터치가 필요할 거고. 괜찮지?”

“네.”

“1층은 얼마든지 돌아다녀도 좋아. 부엌도 있고, 욕실도 있고, 작은 GYM도 있어. 대신 2층은 올라오지 마. 전부 내 방이니까.”

“네.”

우영의 대답은 군더더기가 없다 못해 허무하기까지 했다. 네, 말고 다른 말을 모르는 로봇 같기도 했다. 사현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내려갔다.

“⋯⋯원래 그렇게 말을 잘 듣는 타입?”

우영이 그제야 사현과 시선을 맞췄다.

“제가요? 어⋯⋯. 그런가 봐요.”

흐리멍덩한 우영의 대답에 사현은 여기서 대화를 마치기로 했다. 그림쟁이에게 좋은, 고급의, 값비싼 등등의 형용사로 설명되는 도구와 재료들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잘 안다. 사현은 우영이 그 도구들과 마음껏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이만 빠져 주기로 했다.

“점심은 먹었니?”

“아니요.”

“뭐 먹을래?”

그래도 잘 먹이고 잘 재워 주겠다 했으니 일단 밥은 먹여야 했다. 사현의 질문에 우영이 가늘게 눈을 떴다. 그러더니 사현에게 다시 질문을 떠넘겼다.

“B는 뭐 드시고 싶으신데요?”

“나?”

“네. 저는 B가 드시는 거로 먹을게요. 뭐든 잘 먹거든요.”

우영이 샐쭉 웃었다. 동그란 안경 너머의 눈이 반달처럼 휘어졌다. 늘 답답하게 우물거리던 입술은 시원하게 찢어졌고, 구릿빛 광대는 반질반질한 게 꼭 매끈한 맥반석 달걀 같았다. 사현이 혀로 자신의 안쪽 이를 더듬었다. 이상하게 목구멍이 셨다.

“⋯⋯그래, 그럼. 내가 알아서 시킬게.”

그리 말한 사현이 작업실을 나왔다. 문이 닫히고 띠리릭, 도어 록이 잠기는 소리가 났다. 사현이 문에 등을 기댔다. 우영이 웃는 모습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덩치는 남산만 한 게 쓸데없이 귀엽네.”

어려서 저렇게 싱그럽게 웃는 건가. 콧잔등을 찡긋거린 사현이 거실로 향했다.

* * *

“이런 것도 드세요?”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본 우영이 물었다. 비아냥이 아니고,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은 말이었다. 악의 없는 우영의 추궁에 나무젓가락을 뜯던 사현의 광대에 발간 열이 올랐다.

“나 먹고 싶은 거 시키라며?”

“아니, 스테이크나 파스타. 뭐 그런 것만 드실 것 같아서.”

“드라마를 너무 본 거 아니니? 돈 많은 사람도 된장찌개랑 김치찌개 먹어.”

얼굴을 잔뜩 구긴 사현이 우영을 힐난했다. 우영이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포장을 뜯었다.

사현이 시킨 건 돈가스였다. 두툼하고 바삭바삭한 고급 돈가스가 아니라 육천 원, 비싸 봐야 팔천 원쯤 할 것 같은 경양식 돈가스 말이다. 그것도 전문점이 아니라 온갖 것을 다 파는 분식집에서 시킨 듯했다. 이런 걸 좋아할 줄이야. 예상 밖이다. 우영이 탄산음료로 목을 축이며 생각했다.

우영이 젓가락으로 샐러드를 휘젓고 있을 때였다. 사현이 넌지시 물었다.

“왜. 이런 거 싫어해?”

“제가요?”

“어.”

“저야 없어서 못 먹죠.”

우영이 보란 듯이 돈가스를 입에 욱여넣었다. 길게 잘린 걸 베어 물지도 않고 한입에. 그런데도 어째 부스러기 하나 떨어트리지 않고 꿀떡꿀떡 잘도 먹었다. 그제야 사현도 수저를 움직였다.

사현은 답지 않게 편식이 심했다. 날것은 입에도 못 댔고, 비린내가 나거나 양념 냄새가 역한 것도 먹지 못했다. 물론, 채소도 즐기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이런 것도 먹을 줄 알아야 해’하며 잔소리해 주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먹고 싶은 것만 먹었더니 이 나이 되도록 편식을 이어 왔다.

그래서 일을 할 때도 식사 자리는 피하는 편이었다. 교묘하게 밥 때를 피해 커피를 마시거나, 아니면 아예 술을 마셨다.

사현은 조용히 식사를 이어 가면서도 샐러드나 브로콜리엔 손도 대지 않았다. 김밥도 당근을 콕콕 눌러 죄다 빼서 먹었다.

우영은 그 모든 걸 눈짓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세상 차갑고, 어른스레 행동하는 사람이 당근을 빼고 있으니 뭐랄까. 별나다고 해야 하나. 특이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특별하다고 해야 하나.

꼴 보기 싫진 않았다. 그가 손대지 않은 샐러드를 제가 먹겠다고 하면 불쾌해할까, 그 생각뿐이었다. 앞서 말했듯, 우영은 뭐든 없어서 못 먹었기 때문에.

“벌써 다 드셨어요?”

사현은 입도 짧았다. 통통한 입술로 이것저것 입에 맞는 것만 오물거리더니 밥을 반 공기도 채 비우지 않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근데 우영은 어째 그것도 아니꼽지 않았다. 사현답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쯤, 우영도 비슷하게 수저를 놓았다. 사현처럼 입이 짧아서는 아니었고, 먹는 속도가 빨라 죄다 먹어치운 거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이래저래 움직였던 터라 배가 몹시 고팠다.

“잘 먹네. 다음엔 이 인분 시켜 줄게.”

사현이 깔끔하게 빈 우영의 그릇을 바라보며 말했다.

“음, 굳이 그러실 필요 없는데요.”

말로는 거절하면서도 우영이 샐러드 틈에 끼어 있던 방울토마토를 입으로 가져갔다. 말과는 퍽 다른 행동이었다.

“잘 먹여 주겠다고 했잖아. 그림 그리는 게 얼마나 노동 강도가 높은데.”

“⋯⋯그럼 남기신 거 먹어도 돼요?”

잠깐 고민하던 우영이 물었다. 그런 것에 예민한 사람이 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사현의 눈썹 위로 진한 홈이 파였다.

“내가 먹던 걸 먹겠다고?”

“네. 근데 불쾌하시면 괜찮아요.”

“불쾌는 내가 아니라 네가 해야 하는 거 아니니?”

그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제가 남긴 걸 먹겠다는 것도 이상했지만, 꽤나 많은 양이었는데 그것을 다 먹고도 제 것을 탐낼 만큼 위가 비어 있다는 게 가장 이상했다.

“저는 괜찮아요.”

우영이 도리도리 머리까지 흔들며 말했다. 어찌나 당찬지. 사현은 차마 거절을 뱉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우영은 사현이 가늠했던 것보다 훨씬 더 구질구질하게 살아 온 모양이다. 그게 퍽 안쓰러웠다.

사현이 대답 대신 자신의 그릇을 밀어 줬다. 조금 불긴 했으나 손도 대지 않은 우동과 밑반찬들도 넘겨줬다. 우영은 그것 역시 싹 비웠다.

사현이 우리 안의 동물 보듯 우영을 구경했다. 허겁지겁 바쁘게 먹는 것도 아니고, 쩝쩝거리며 추잡스레 먹는 것도 아니고. 조용하고 깔끔하게 먹는데 속도는 빨랐다.

덩치가 커서 그런가. 먹음과 동시에 소화하는 건가. 배가 나오진 않았던데. 어떻게 저렇게 먹고도 판판한 배를 유지할 수 있는 거지. 별별 시답잖은 의문이 다 들었다.

“잘 먹었습니다.”

드디어 수저를 놓은 우영이 빠릿빠릿한 손놀림으로 빈 식기들을 정리했다. 부엌 어귀에 있는 물티슈는 또 언제 봤는지 그것으로 식탁까지 깔끔하게 닦았다. 사현은 그저 멀뚱히 그를 보고 있었다.

“자기야.”

“네?”

“냉장고에 케이크 남은 거 있는데. 그것도 먹을래? 얼마 안 됐어. 어제 사 둔 거라.”

다분히 충동적인 제안이었다. 무심코 그가 먹는 모습을 더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꼭 잘 만들어진 미디어 예술을 보고 있는 기분이랄까.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고 물으면 대꾸는 못 하겠다. 저도 저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먹어도 돼요?”

우영의 눈에 반짝이는 별이 서렸다. 사현이 대답 대신 손끝으로 냉장고를 가리켰다. 우영이 기다란 다리로 휘적휘적 부엌을 가로질러 냉장고 문을 열었다.

“⋯⋯.”

그가 잠시 말을 잃었다. 제 몸뚱이만큼 커다란 냉장고가 어찌 이리도 허투루 쓰일 수 있단 말인가. 놀라웠다.

냉장고에는 케이크가 있었다. 케이크만, 있었다. 그 흔한 물이나 맥주도 보이지 않았다. 대체 뭘 먹고 사는 거람. 늘 사 먹고 시켜 먹는다 한들 한계가 있을 터인데. 김치나 케첩 한 통 보이지 않아서야⋯⋯.

우영이 무어라 말을 하려 벙긋 입을 뗐다가 말았다. 제가 뭐라고 그에게 잔소리하겠는가. 케이크를 꺼낸 우영이 포크와 앞접시를 찾아 다시 사현의 앞자리에 앉았다.

“생일이셨어요?”

그가 케이크를 자르며 물었다. 케이크 위에는 딸기가 듬뿍 올라가 있었다. 익숙한 메이커는 아니었지만, 사현이 먹는 것이니 분명 맛있을 터였다.

“아니. 내가 달고 짜고 그런 걸 좋아해서 가끔 사 먹어.”

사현이 시럽에 절인 딸기 하나를 포크로 찍으며 말했다. 우영이 그 몰래 입술을 삐죽였다. 쥐똥만큼 파먹어 놓고 좋아하긴 개뿔. 케이크는 한 조각이 채 사라지지 않은 상태였다. 언뜻 보면 새것과 다름없었다.

사현의 앞접시에 케이크를 놓아 준 우영이 이번엔 자신의 접시에다 케이크를 덜었다. 사현의 몫은 혹 형체가 어그러지기라도 할까, 조심조심해 놓고는 자신의 몫은 무슨 죽 푸듯 했다.

우영은 케이크 역시 잘 먹었다. 조그마한 포크로 어찌 저리도 넘치게 입에 넣을 수 있는지 진귀할 지경이었다.

“맛있어?”

사현이 물었다. 유명한 호텔 베이커리 것이니 맛이 없을 리도 없고, 우영 역시 만면에 황홀함을 띄운 채 먹고 있지만 구태여 캐물었다.

꿀꺽 케이크를 삼킨 우영이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시간 전쯤 작업실에서 봤던 그 미소였다. 사현이 딸기 하나를 더 집어 먹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달던 딸기가 지금은 시큼했다. 탄산이라도 마신 듯 목구멍이 간질간질하기도 했다.

익숙한 기분인데. 이게 무슨 기분이더라⋯⋯. 사현이 입술을 씰룩이며 우영을 응시했다.

우영은 케이크도 뚝딱뚝딱 먹어치웠다. 매일 끼니를 챙겨 먹기도 버거운 판에 케이크는 분에 넘치는 호강이다. 입에 넣자마자 사르르 녹는 게 어찌나 맛있는지. 우영은 이제 제법 배가 부른데도 포크질을 멈추지 못했다.

“진짜 잘 먹는다, 너.”

사현이 누르고 누르던 감탄을 내놓았다. 그에 우영이 흠칫 몸을 굳혔다. 그러고 보니 너무 게걸스레 먹었다. 사현 성격에 그런 걸 귀엽게 봐줄 리 없었다. 끔찍하고 역겹다며 다시는 겸상하지 않겠노라, 엄포를 놓을지도 몰랐다.

“⋯⋯보기 싫으시면 작업실 가서 먹을까요?”

우영이 물었다. 사현의 얼굴이 기괴하게 뒤틀렸다. 얘가 날 뭐로 보고.

“내가 싸가지는 없어도 그렇게 못된 사람은 아니야. 계속 먹어. 먹는 거 보기 좋아서 그래.”

“정말요?”

“응.”

우영이 데구루루 눈알을 굴렸다. 사현의 말이 진심인지 거짓인지를 판단하기 위해서였다. 결론은 전자로 났다. 제가 아는 사현은 혹 타인의 기분이 상할까, 거짓을 말해 줄 만큼 친절한 이가 아니었으니까.

“그림 진짜 열심히 그릴게요.”

케이크 한 판까지 멀끔히 비운 우영이 말했다. 힘이 잔뜩 실린 말이었다. TV 보듯 그를 구경하던 사현이 난데없이 무슨 소리냐고 눈으로 물었다.

“저 올해 들어와서 오늘이 제일 많이 먹은 날이에요.”

“⋯⋯.”

“밤새도록 그림 그릴 수도 있어요.”

우영이 가슴을 쫙 편 채 으스댔다. 고작 밥 한 끼 든든하게 먹은 것치고는 과하게 상기된 몸놀림이었다.

그런 우영에 사현이 몰래 다짐했다. 적어도 파트너로서 함께 일을 하게 된 이상, 지극히 신경 써서 먹이겠다고. 배를 곯는 작가들이야 널리고 널렸지만, 이렇게 해맑은 얼굴로 배를 곯으니 곱절은 더 안쓰러웠다.

그런 사현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영이 발랄하게 물었다.

“그런데요, B. 저 질문해도 돼요?”

“응.”

“저는 이제 뭐 해요? 계속 그림만 그려요?”

“아니. 내일 프랑스로 출국할 거야.”

사현의 말은 ‘오늘 저녁 메뉴는 라면에 햇반이야’ 정도로 담담하고 상투적인 어투였다. 덕분에 우영은 자신이 들은 말이 환청인지 실재인지 고민해야 했다.

“누가요? 제가요?”

“응. 너랑 내가.”

“왜요?”

“전시회 하러.”

“<갤러리 비>에서 안 하고요?”

지척에 있는 대단한 갤러리를 두고 굳이. 우영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프랑스에도 날고 기는 갤러리와 전시장이 넘치지만, 그건 완전히 딴 세상 이야기였다. 우영에겐 <갤러리 비>가 그 어느 곳보다 대단했다.

사현이 삐뚜름히 턱을 괴고 나른한 시선으로 우영을 바라봤다.

“명목이 있어야지. 평론가들한테 등신 같은 대학 졸전에 갔다가 널 발견했다고 할 순 없잖니. 내가 진흙 속에 파묻힌 진주를 찾아냈다는 스토리가 필요해. 그러니까 음⋯⋯ 그래. 너를 재창작하는 거야.”

“그 진흙이 프랑스라고요?”

우영이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은 미술계의 심장이다. 성지와 가깝단 말이다. 그런 곳을 ‘진흙’으로 칭하는 거야 개개인의 자유이지만, 적어도 우영은 송구스러웠다. 허나 사현은 손톱만큼의 거리낌도 없었다.

“응. 프랑스 유명 갤러리는 아니고, 작은 마을에 있는 소담한 갤러리에서 할 거야. 명목상으로 날짜만 채워서. 네가 그 작은 갤러리에서 전시하게 된 비극적 역사와 슬픈 연유는 우리 큐레이터 팀이 기깔나게 써 줄 거고.”

우영이 아, 짧은 감탄사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명확히 이해한 건 아니지만 어렴풋이 그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한국만큼 유학과 비극적인 생애에 열광하는 나라도 드물다. 그 두 요소를 합쳐 놓으면 분명 열렬한 관심이 따라올 터였다.

“근데 저 여권 없는데.”

우영이 민망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사현이 헛웃음을 흘렸다. 저가 설마 그것도 몰랐을까 봐. 밥도 제대로 못 먹는 이십 대 애송이에게 여권이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필요도 없었고.

“진짜 가는 건 아니고. 그림만 보낼 거야. 내가 바빠서 왕복 스물네 시간을 버릴 수가 없거든.”

“⋯⋯.”

“아무튼, 쥐도 새도 모르게 프랑스로 휴가를 갔던 내가. 작은 갤러리에서 전시 중이던 네 그림을 우연히 발견하고. 그 그림에 홀딱 반해 전체 구매를 할 거고. 추후 그중 한 점을 경매장에 내놓을 거야. 물론 그 전에 온갖 매체에 은근히 네 존재를 알릴 거고.”

사현의 계획이자 계략은 참으로 평범했다. 그래서 그럴싸했고, 그러니 아무도 의심하지 못할 테였다. 아주, 몹시, 극히 드문드문 있는 케이스였다. 말 그대로 진흙에 파묻힌 진주. 쉽게 발견되지 못하고 쉽게 발견할 수 없는.

우영은 새삼 감탄했다. 그의 계획에는 분명 못된 짓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게 불법은 아니었다. 누군가가 사현을 표적 수사하며 작정하고 몰아넣지 않으면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테였다.

“그 경매에서, 네 그림은 아주 비싸게 팔릴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거고. 자연히 이슈와 기사가 따라붙겠지.”

“그림 값이 엄청 오르겠네요.”

“그래. 그때, 내가 찾은 진귀한 진주인 네가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고, 국내 첫 전시를 <갤러리 비>에서 하는 거야.”

우영이 곰곰이 사현의 말을 곱씹었다. 드문드문 이해가 어려운 문장도 있었으나 더 묻지 않았다. 어차피 제 의견을 피력할 순 없을 테고, 사현의 말을 거스르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도 하나 걸리는 게 있었다. 바로 저 자신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러다 제가 누군가에게 그걸 말하면 어떡해요? 실수하거나, 술에 취해서 말하거나 뭐⋯⋯ 제가 의도하지 않더라도 새어 나갈 수 있잖아요.”

“그걸 누가 믿겠니.”

“왜 안 믿어요? 제가 작간데?”

우영이 한쪽 눈을 어그러트렸다. 사현이 비릿하게 웃으며 포크로 딸기를 내리찍었다. 날카로운 포크에 난도질당한 딸기가 시뻘건 피를 토해 냈다. 사현은 그것을 먹지 않았다. 그저 하얀 크림을 더럽히겠다는 듯 그의 포크가 접시 위를 배회했다.

“네 그림은 네 이름으로 팔리지 않아. 가명이 쓰일 거야.”

우영이 숨을 말아먹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 * *

작업실 구석에 마련된 일인용 소파에 앉은 우영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제 이름이 아니라 다른 이름으로 선보이는 제 그림이라. 꼭 전 재산을 도둑맞은 것 같았다. 그만큼 허탈하고, 참담했고, 슬펐다.

서우영.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생물학적 부모가 저를 보육원에 내다 버리며 붙여 준 이름이다. 그게 뭐 얼마나 대단하고 중요하겠느냐마는, 이유와 생애를 떠나 몇 안 되는 제 정체성 중 하나였다. 헌데 이제 그마저도 잃게 생겼다.

우영이 반도 완성하지 못한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반지하 집에서 이 번지르르한 곳으로 함께 이사 온 동지였다. 완성되면 아래쪽 귀퉁이에 ‘S’라는 이니셜이 들어갔을 텐데. 아마 그러지 못할 듯싶었다.

사현이 필요하다던 리터치도 이니셜을 지우기 위함이었을까. 속이 매웠다. 괜히 슥슥 배를 문질러 봤다. 이렇게까지 잘 먹고 기분이 좋지 못한 건 일평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똑똑똑.

정갈한 노크 소리가 울렸다. 우영이 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노크의 주인은 보나 마나 사현일 것이다. 근데 왜 노크를 할까. 얼마든지 문 열고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

우영은 대답을 하지도, 그렇다고 문을 열어 주지도 않았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도어 록이 저절로 열렸다. 역시나 사현이었다. 문틈으로 고개만 빼꼼 내민 그가 노을을 등지고 있는 우영을 쳐다봤다. 눈치를 봤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그림 그려?”

사현은 우영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 뻔히 봐 놓고도 물었다. 우영은 이번에도 대답 없이 멀뚱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입술이 한일자로 길게 뻗은 게 답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사현이 소리 없이 혀를 찼다.

“나와. 갈 데 있어.”

“⋯⋯지금요?”

“어. 얼른.”

그리 통보한 사현이 문을 열어 두고 사라졌다. 우영이 두 뼘 정도 벌어진 문틈을 노려봤다.

가기 싫다. 사현과 함께 있기도 싫었다. 어울리지 않게 반항심이 솟구쳤다.

그러나 그것도 찰나였다. 어찌 됐든, 제가 사현의 명령을 거역할 순 없었으니까. 물에 퉁퉁 불은 얼굴을 한 우영이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현은 운전을 잘했다. 늘 적정 속도를 유지했고, 커브는 부드러웠으며 퇴근 시간에 몰린 차들이 무례하게 새치기를 해도 잠깐 미간만 구길 뿐, 욕설도 뱉지 않았다. 아무런 음악도, 라디오도 듣지 않는 것 역시 그다웠다.

우영은 그런 사현을 창으로 구경하고 있었다. 이건 무슨 차예요? 계기판이 엄청 멋져요. 운전 잘하시네요. 근데 우리 어디 가요? 할 말은 많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화난 걸 알아 달라 시위 중인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자기야.”

흘끔흘끔 그런 우영을 보던 사현이 그를 불렀다. 우영이 네, 짧게 대답했다.

“삐졌니?”

“⋯⋯.”

머리끝까지 차올라 있던 화가 순식간에 반절로 뚝 동강 났다. 우영이 코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요.”

“근데 왜 말이 없어?”

“할 말이 없으니까요.”

대놓고 뾰로통한 투였다. 사현의 검지가 톡톡톡, 운전대를 두드렸다. 이 덩치 큰 애새끼를 어떻게 달래야 하나.

사현은 작가에게 다른 이름으로 작품을 내라는 게 얼마나 큰 모욕감을 주는지 잘 알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본디 무슨 일을 하든, 모든 걸 가질 수는 없는 법이다. 수억 원을 벌기 위해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짓을 하는 인간도 수두룩한데, 고작 이름 하나 잃는 것쯤이야 그렇게 뼈아픈 일도 아니었다.

그러니 달래 주는 것으로 일을 무마해야 한다. 그래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다. 뭘 사 주면 풀어지려나. 명품 같은 것은 사 줘 봐야 귀한 건지 모를 것 같고, 먹을 거로 때울까. 아이스크림 같은 걸 손에 들려 주면 좋아할 듯한데.

사현이 방법을 고심하는데, 우영이 먼저 치고 들어왔다.

“꼭 제 이름을 숨겨야 해요?”

“⋯⋯.”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요. 진짜 조심할게요.”

우영이 퍽 애절한 낯으로 말했다. 사현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가 놨다.

“세상에 서우영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 같니?”

“어⋯⋯. 걱정하실 만큼 많지는 않을 거예요. 저 친구도 없어요.”

그 말에 사현이 비스듬히 고개를 뒤틀었다. 시선은 여전히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 앞차의 후미등이 비쳐 반짝였다.

“네가 정의하는 ‘아는’과 내가 정의하는 ‘아는’이 좀 다른 것 같은데. 친구나 가족 같은 관계 말고, 어린 시절, 학창시절, 대학 시절 네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 같냔 말이야.”

“어⋯⋯.”

우영이 뻐끔, 입술을 벌렸다. 그런 수준의 ‘아는’ 사이면 답이 좀 달라진다. 못해도 백 명은 되겠지. 학창시절 한 반이 몇 명이더라. 저희 과는 몇 명이었지? 동기 말고 선배와 후배까지 포함하면 기백은 훌쩍 넘을 듯했다. 제 존재 자체를 기억하지 못할 순 있지만, 그렇다고 기억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도 없는 사람들.

사현이 부드럽게 운전대를 돌렸다. 창밖으로 드문드문 풀숲이 스쳐 갔다. 어느새 서울을 빠져나와 있었다.

“네가 프랑스는 개뿔, 제주도도 못 가 봤을 걸 아는 사람. 네가 볼품없는 대학을 졸업한 걸 아는 사람. 네 나이가 스물여덟인 걸 아는 사람. 네 생김새와 이름을 매치시킬 수 있는 사람.”

“⋯⋯.”

“그게 다 위협이야. 그러니까 안 돼.”

우영이 입술 끝에 꾹 힘을 줬다. 사현은 단호했다. 틈이 없었다. 희한하게 그게 더 얄미웠다. 우영의 커다란 손이 자신의 무릎을 갉아 댔다.

“제가 꼭 프랑스에서 B에게 발견되어야 할 필욘 없잖아요. 가까운 일본이나 중국도 괜찮고. 제가 싸게 그림을 팔았는데, 그게 어쩌다 해외로 나갔고 우연히 B가 발견했어도,”

잠자코 듣던 사현이 핸들을 옆으로 휙 돌렸다. 우영의 몸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그만큼 사나운 핸들링이었다. 창밖 세상이 휘몰아쳤다. 끼이익. 야트막한 도보 옆에 차가 섰다. 짜증스레 비상등 버튼을 누른 사현이 뾰족한 눈으로 우영을 노려봤다.

“자기야. 등신 같은 소리 하지 마.”

“⋯⋯.”

“나는 그렇게 어쭙잖게 일 안 해.”

묵직한 사현의 꾸지람에 우영의 고개가 아래로 푹 고꾸라졌다. 길쭉한 그의 속눈썹에 서러움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이러다 눈물까지 떨어트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사현은 누구를 보듬고 위로하는 데에 재능이 없다. 당연히 우는 애를 달랠 줄도 몰랐다. 사현이 벅벅 세게 마른세수를 했다. 멀미가 날 것 같았다.

“이 판은 꼰대가 많아.”

“네?”

뜬금없는 꼰대 타령에 우영이 눈꺼풀을 빠르게 깜박거렸다. 사현이 차내 에어컨 온도를 조절했다. 열을 냈더니 머리통이 후끈했다.

“한창 떠오르는 작가의 그림을 억을 주고 샀는데 알고 보니 그 작가가 자기보다 젊고, 잘생긴 애송이면 기분이 좋겠니?”

“…….”

“현대 미술이 성황하면서 젊은 작가들이 주목받긴 하지만, 결국 돈 쓰는 건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란 말이야.”

“⋯⋯.”

“그분들은 아직 화가라고 하면 듬성듬성 머리가 빠지고, 낡은 코르덴 재킷을 입고, 피죽도 못 얻어먹은 것처럼 비쩍 마른 인간을 생각하거든. 그렇게 고통스러운 인간이, 고단하게 그린 게 진정한 예술이라 여겨. 그래서 죽은 이의 작품이 훨씬 높게 평가되는 거고.”

이번에도 사현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설사 틀렸다 하더라도 미술계에 경험과 지식이 전무한 우영은 이렇다 할 반박을 할 수 없었을 테다. 아무튼, 그의 말은 우영을 우울하게 함과 동시에 어떠한 당위성을 지니게 했다.

아, 어쩔 수 없는 일이구나. 그림으로 먹고 사려면 지금의 나는 숨기는 게 맞겠구나. 그런 거 말이다.

어딘가 씁쓸한 우영의 표정에 사현의 목울대가 일렁였다. 그가 안쓰러웠다. 이러한 감정에 무딘 편인데, 유독 우영에게만 너그럽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애를 데려다가 못된 짓을 시켜서 그런가.

사현이 미간을 긁적이며 머리를 굴렸다. 나름대로 위로의 말을 고민하는 거였다.

“너무 비극적으로만 지금을 바라보지 마.”

“⋯⋯.”

“나는 너를 최고로 만들기 위해, 너를 숨기는 거야.”

급하게 생각해 낸 말치고는 썩 번지르르했다. 내리막길을 그리던 우영의 눈꼬리가 움찔거렸다. 먹힌 모양이다. 사현이 가볍게 그의 팔뚝을 쓰다듬었다. 두툼한 팔뚝이 제법 단단했다.

“이해했어?”

“⋯⋯네.”

우영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우울함은 그의 뒷덜미에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었다. 케이크를 먹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낯이다. 사현이 자신의 아랫입술을 연달아 두 번 핥았다.

“⋯⋯아이스크림 사 줄까?”

그러다 내놓은 말이 이따위였다. 눈썹을 추켜세운 우영이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뭘, 뭘 사 줘?

“네?”

“농담이야.”

간결하게 일갈한 사현이 팩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비상등을 끄고, 차를 출발시켰다. 우영이 그런 사현의 옆태를 집요하게 응시했다. 늘 하얗던 그의 귓바퀴가 새빨갛다. 속눈썹은 분주하게 팔랑이고, 핸들의 움직임이 아까보다 조금 각이 졌다.

우영은 뒤늦게 눈치챘다. 사현이 자신을 위로하려 했다는 걸. 그걸 깨닫자마자 치솟는 광대를 도무지 막을 수가 없었다. 손바닥이 간지러웠다. 볼 안쪽을 지그시 씹었다가 놓은 우영이 입술을 달싹였다.

“사 주시면 맛있게 먹을 수 있어요.”

“농담이라고.”

“사 주시면 좋겠다. 저 아이스크림 좋아하거든요.”

그 말에 사현이 슬쩍 우영을 바라봤다가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감히 저를 놀리는 건가, 싶었는데 만면에 둥둥 뜬 웃음을 보아하니 그건 아닌 모양이다.

“⋯⋯집에 갈 때 사 줄게.”

사현이 애써 고저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네.”

쓸데없이 발랄하게 대답한 우영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새 까맣게 죽은 바깥 덕에 사현의 얼굴이 더 또렷하게 비쳤다. 반듯한 이마에서 동그란 코끝까지 떨어지는 선이 그 어떠한 명화보다 감미로웠다. 차가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으면, 하고 바랄 정도였다.

그 시선을 느낀 사현이 에어컨 온도를 조금 더 낮췄다. 어째 온도를 낮추면 낮출수록 더웠다.

차가 멈춘 곳은 이름 없는 창고 앞이었다. 곧 무너질 듯 허름한 창고는 아니었고, 반질반질하고 새것 냄새가 나는 게 중요한 것들을 보관하는 곳인 듯했다.

주변엔 키가 큰 나무들이 우뚝 서 있었다. 도시에서는 맡기 힘든 나무 내음이 여름밤 냄새와 얽혀 코끝을 간질였다. 우영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좋은 냄새다. 붓을 쥐고 싶어지는 냄새랄까.

“<갤러리 비>의 소장품들을 보관하는 곳이야.”

사현이 익숙한 듯 창고 문을 향해 걸어갔다. 우영이 바짝 그의 뒤로 따라붙었다.

“수장고란 말이에요? 근데 왜 <갤러리 비> 로고가 없어요?”

우영이 판단하기에, <갤러리 비>는 자신의 이름과 가치에 큰 자부심이 있다. 그래서 갤러리 건물에도, 안내도에도, 작은 리플릿에도, 포스터에도 여기저기 로고가 찍혀 있었다.

근데 이 커다란 창고에 그런 게 없다니, 이상했다.

사현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우영을 쳐다봤다. 뜬금없는 곳에서 눈썰미를 발휘하는 우영이 신기했다.

“사실은 <갤러리 비>의 소장품이 아니라, 내 소장품을 보관하는 곳이거든.”

그러니까, 남이 알면 안 되는 것들. 사현이 익살맞게 눈을 일그러트렸다. 우영이 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단한 <갤러리 비>의 대표인 사현인데 소장하고 있는 작품들이 어디 한두 개겠는가. 웬만한 박물관이나 미술관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진귀한 게 많을 터였다.

창고 문엔 아주 많은 잠금 장치가 달려 있었다. 사현이 열두 자리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지문을 대고, 홍채까지 인식하고서야 문이 열렸다. 두껍고 커다란 문은 마음먹고 뜯어내려 해도 반나절은 걸릴 듯했다.

안은 서늘할 정도의 기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림 특유의 냄새가 났다. 캔버스와 물감, 쇠로 만든 액자와 유리 등이 섞여 나는 냄새였다. 맡을 때마다 설레는 향이다.

“오셨어요?”

익숙한 이가 두 사람을 반겼다. 베이지색 슈트를 입은 제인이었다.

“응. 분류 다 됐어?”

“네. 보세요.”

그녀가 사선으로 기울어진 기다란 테이블을 가리켰다. 그곳엔 우영의 그림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눈대중으로 봤을 때, 열 개쯤 되는 듯했다. 우영이 무언가에 홀린 듯 다가갔다. 부드러운 조명을 받고 선 제 그림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이게 뭐예요?”

우영이 물었다. 정체를 묻는 게 아니라, 왜 이 몇 작품들만 전시되어 있냐는 거였다. 색감도, 주제도, 크기도 제각각. 뭐 하나 통일성이 없었다. 굳이 꼽자면 오래된 그림이라는 것.

주머니에 손을 꽂은 사현이 우영의 옆에 섰다. 그러고는 허리를 굽히고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작품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응, 버릴 거 모아 둔 거야.”

“⋯⋯뭐라고요?”

우영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튀어 올랐다. 버릴 거라니.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대답이었다.

“버릴 거.”

사현이 똑같은 말을 반복하며 우영의 정수리에 못을 땅땅 박았다. 우영의 얼굴이 괴롭게 구겨졌다. 이름도 버렸는데 이제는 그림까지 버려지는 건가. 더군다나 버릴 걸 왜 이리 정성 들여 모아 놨단 말인가. 성대한 이별식이라도 하는 건가, 싶었다.

“왜, 왜 버려요?”

“제이. 설명 좀 해 줄래?”

사현이 답을 제인에게 떠넘겼다. 제인이 태블릿을 들고 딱딱한 어조로 그림 사형을 시작했다.

“1번은 20cm 정도의 희미한 이염이 있습니다. 2번은 유화 물감이 잘못 말라서 크랙이 심하게 갔고, 3번은 오염된 린시드 오일을 쓴 건지 물감이 캔버스에 밀착되지 못하고 떠 있습니다.”

“⋯⋯.”

“그리고 4번은 캔버스가 밀려서 우그러졌고요, 5번은 곰팡이가 폈습니다. 6번은 다른 작에 비해 밀도가 조금 떨어지는데, 사진상으로는 티가 나지 않을 듯해 셀렉트 했습니다.”

“사진상이라는 게 무슨 말이에요?”

뭐 하나 피력할 반박이 없어 잠자코 듣던 우영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쐈다. 제인이 슬쩍 사현을 바라봤다. 이것도 자신이 설명하냐, 아니면 직접 설명하시겠냐는 물음이었다. 사현이 직접 하겠다는 뜻으로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이 그림들은 질이 떨어져서 판매하지 못하는 것들이야. 만약 판매한다 하더라도 컨서베이터(conservator, 소장품 보전 처리 담당 복원사)가 한참을 손봐야겠지. 그래서 이걸 프랑스로 보내려 해. 어차피 실제로 진행되지 않는 전시고, 내가 다 살 거니까 아무도 몰라. 증거 삼아 리플릿은 제작해야 해서 사진만 찍을 거야. 오염 부분은 홍보 디자인 팀에서 포토샵으로 없애 줄 거고.”

“⋯⋯.”

“그러니까 일종의 재활용 같은 거지. 그냥 버리면 아깝잖아.”

사현이 프랑스에서 구매한 작품들은 사진으로만 공개되고 따로 전시나 판매는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래야 사람들이 아, B가 어지간히 그 그림들을 아끼는구나. 억을 준대도 팔지 않을 만큼 대단한 그림이구나. 그리 여기기 때문이다.

우영은 사현의 말을 단번에 이해했다. 그림 하나가 아쉬운 시점에 멀쩡한 것들을 놀릴 순 없었겠지. 그래도 슬픈 건 슬픈 거였다. 감정이 현실을 따라가지 못했다.

우중충한 우영의 낯에 사현이 고개를 꺾으며 그와 눈을 맞췄다.

“왜. 아쉽니?”

“⋯⋯네.”

“그러게 보관 좀 잘 하지.”

사현의 비난에 우영이 코를 찡긋거렸다. 그 움직임에 맞춰 얇은 안경테가 들썩였다. 사현은 그게 못내 귀여웠다.

작가가 그림을 바리바리 싸 들고 오면, 그중 전시도 판매도 못 할 작품들이 꼭 한두 개씩 껴 있다. 제작 자체에 문제가 있거나, 운송 중 오염이 생겼거나, 이유는 많다.

그리고 당연하게, 작가들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제 작품은 단 하나도 버릴 수 없노라 온갖 행패를 부려 댔다. 전시를 하지 않겠다며 잠수를 타는 경우도 있었고, 난장을 피우며 폭력을 행사하는 이도 있었다. 그런 것에 비하면 우영의 반응은 마냥 귀엽기만 했다.

사현이 우영의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작품이랑 이별하는 방법도 배워. 한 번 팔린 작품은 다시 보기 힘드니까.”

그 말에 우영의 속눈썹이 바짝 위로 치솟았다. 한 번도 가늠해 보지 않은 것이었다. 그렇구나. 팔리면 영영 이별이겠구나. 그림을 팔아 본 적이 없으니 몰랐다.

“그림이 팔리면 아, 돈이 들어오겠네. 하고 영악하게 기뻐만 하란 말이야.”

“⋯⋯네.”

우영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사현과 우영의 대화를 관망하던 제인이 끄트머리에 걸린 그림을 가리켰다.

“마지막 것은 추후 귀국하신 후에 경매장에 내놓을 그림입니다. 지시하신 그림으로 픽업했습니다.”

앞선 것들과 달리 멀쩡한 그림이었다. 우영이 큰마음 먹고 그린 100호짜리 그림 말이다.

“이, 이것도 버릴 거예요?”

우영이 경악 어린 눈으로 사현을 쳐다봤다. 이건 제가 캔버스를 살 때부터 공을 들인 건데! 다행히 사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경매장에 내놓을 거라니까. 많은 사람이 볼 거라 일부러 괜찮은 거로 고른 거야.”

“아⋯⋯.”

우영이 수긍한다는 듯 멋쩍게 웃었다. 제인이 설명했는데, 괜히 캐물었다. 사현이 저를 멍청하다고 꾸짖어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사현은 웬일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저기 놓인 우영의 그림을 감별하느라 우영에게까지 나누어 줄 신경이 없는 듯했다.

“좋아. 새벽에 바로 보내.”

“네.”

사현이 이번엔 바닥에 기대 서 있는 우영의 그림들로 다가갔다. 처연한 빛을 내리쬐고 있는 우영의 그림은 어둑어둑한 창고에서 발광하듯 빛났다.

제인이 익숙한 듯, 그의 뒤로 따라붙었다. 멍하니 있던 우영이 뒤늦게 그들을 따라나섰다.

사현의 걸음걸이는 느렸다. 그림 하나 앞에서 수 분을 서 있기도 했다. 가장 뒤에 있던 우영이 어깨를 접고 목을 수그렸다. 제 그림을 보는 사현이라니. 알몸뚱이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열심히 그릴걸. 쥐도 새도 모르게 리터치 좀 해 둘걸. 온갖 후회가 몰려 왔다.

“B. 큐레이터 팀이 작품과 어울리는 닉네임을 몇 개 뽑아 줬습니다.”

제인이 사현의 옆통수에다 대고 보고를 시작했다.

“불러 봐.”

사현이 그림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아스틴, 콜린, 다리오, 체스틴, 데이브, 파비앙, 제이드, 포피입니다.”

사현이 턱을 당기고 눈살을 찌푸렸다. 죄다 지지부진한 이름들이다. 확 꽂히는 게 없었다. 그림만큼 중요한 게 이름인데. 빈센트 반 고흐나 폴 고갱, 구스타프 클림트, 파블로 피카소, 마르크 샤갈. 이 이름들은 활자에서부터 어마어마한 기운이 뿜어지지 않는가.

뭔가 세련되고, 적당히 유니크하면서 특별한. 또 너무 어렵지 않으면서 독보적인.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그런 이름이 필요했다.

사현의 구두 앞꿈치가 톡톡톡 바닥을 두드렸다. 뭐가 좋을까. 뭐가.

“자기야.”

사현이 어둠 속에 서 있는 우영을 불렀다.

“네?”

우영이 호출당한 이등병처럼 퍼드득 몸을 떨며 가까이 다가왔다.

“너는 마음에 드는 거 없니? 영어 이름 하나 만든다고 생각하고 골라 봐.”

사현이 제인에게 눈짓하자, 그녀가 앞서 부른 이름들을 다시 줄줄이 나열했다. 우영의 손가락이 꼼지락꼼지락 산만하게 춤을 췄다. 영어 이름이라⋯⋯. 그런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낯설었다. 아스틴으로 불리는 저라니. 포피라고 불릴 저라니. 그저 끔찍하기만 했다.

길어지는 우영의 고민에 사현이 다시 발을 옮겼다. 우영의 그림이 어떠한 이름을 목놓아 부르짖고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걸 발견해 주고 싶었다.

“한국 이름은 어떨까요? 어차피 유학 간 건데, 이름까지 외국인일 필요는 없잖아요.”

한참 고민하던 우영이 내놓은 답은 영 실용적이지 못했다. 사현의 눈이 가늘게 좁아 들었다. 우영은 하등 도움이 되지 않으니 결국엔 제가 결정해야 했다.

그때, 느긋하게 이어지던 사현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3시」라는 작품 앞에서였다. 언젠가 우영에게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던 그것이었다.

「3시」는 말 그대로 3시. 오후의 일상을 그려 놓은 것이다. 길쭉하게 이어진 우영의 붓 터치가 탄생시킨 건 흔한 보도블록이다. 어디에도 있고, 어디서든 볼 수 있는 그 보도블록 말이다.

보도블록을 자세히 본 사람은 알겠지만 네모난 벽돌 사이사이엔 시멘트 틈이 있다. 그 틈으로 봄엔 벚꽃잎이, 여름엔 푸른 나뭇잎이, 가을엔 단풍잎이, 겨울엔 눈이 앉았다가 간다. 그림 속 보도블록에 자리 잡은 건 부서지는 오후 햇살이었다.

보도블록은 모두 한날한시에 태어나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반복의 반복. 그리고 카피. 또 반복. 현대 미술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요손데 그 위로 빛이 쏟아지니 그 자체로 풍경화가 되어 버렸다.

우영의 그림은 묘했다. 어떤 방면에선 팝아트의 교황인 앤디 워홀의 수프 캔을 닮았는데, 또 어떤 방면에선 빛의 대가인 클로드 모네를 닮았다. 그에겐 빛을 분석하고 표현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풍경화에선 쉽게 쓰이지 않는 형광색의 물감들이 빛을 나타내고 있는 것만 봐도 그랬다.

우영의 그림엔 꼭 형광색이 들어갔다. 아침에는 형광 노란색이, 나뭇잎을 투과한 빛엔 형광 연두색이, 땅거미가 지는 하늘에는 형광 보라가. 그래서 가만히 놓아두기만 해도 빛을 발산하는 듯 쨍한 느낌을 받았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사현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네온(NEON). 네온으로 하자.”

우영의 그림은 이 어둑한 미술사에 또 다른 이름의 빛이 될 것이다. 해와 달이 만드는 고결한 빛이 아니라, 발광하길 원하는 욕망이 만들어 낸 네온사인처럼. 적당히 인위적이고, 조금 천박하며, 몹시 나른한 도시의 빛이 될 테였다.

* * *

우영의 집은 하루 스물네 시간 내내 어두컴컴했다. 반면 사현의 집은 해가 떠오르는 걸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얼굴을 있는 대로 구긴 우영이 베개에 코를 묻었다. 평소 일어나려는 시간이 되려면 한참 멀었는데. 오늘 집이 왜 이리 밝은지. 저가 형광등을 켜 두고 잤던가. 아니, 형광등도 오래돼서 이렇게 밝지 않은데.

앓는 소리를 내며 침대를 뒹굴던 우영이 더디게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잖아도 곱슬한 머리가 비죽비죽 솟아올라 터질 듯했다. 정수리부터 턱 끝까지 아무렇게나 벅벅 쓸어내린 우영이 이불을 더듬었다. 안경을 찾는 거였다. 그러나 오늘따라 유독 보드라운 이불은 쉽게 안경을 내어주지 않았다.

휘적, 휘-적. 팔을 움직이던 우영이 반쯤 감고 있던 눈을 번쩍 치켜떴다.

“헉⋯⋯.”

비로소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상기했기 때문이다.

어제는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이사를 하고, 집을 구경하고, 사현과 점심을 먹고, 이름을 잃었다가, 또 다른 이름을 얻었다. 아마 지금, 네온이라는 작가의 그림은 프랑스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있을 터였다.

흐린 시야로 침실을 둘러보던 우영이 카펫에서 안경 비슷한 것을 발견했다. 자다가 떨어트리기라도 한 모양이다. 안경을 낚아챈 그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안경알에 가득한 손자국 탓에 시야가 얼룩졌다. 다시 벗어 티셔츠 끄트머리로 안경알을 문질러 닦았다. 이제 좀 볼 만했다.

문 앞에서 큼큼, 목을 가다듬은 우영이 복도로 고개를 내밀었다. 집은 조용했다. 어떠한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우영은 한참이나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사현의 흔적을 찾는 거였다. 근데 집이 좀 커야 말이지. 사현이 어디선가 마이크에 대고 노래를 부르고 있어도 모를 것 같았다.

우영은 굽은 허리가 뻐근해질 때쯤에야 침실을 나섰다. 복도는 고요했다. 거실도, 부엌도 고요했다. 까치발을 든 우영이 여기저기를 바쁘게 돌아다녔다. 2층으로 향하는 계단 앞에서는 한참을 서성거리기도 했다. 사현이 2층은 올라가지 말라 했으니 갈 수도 없고. 그저 기웃거리며 그의 흔적을 찾아보는 거였다.

결국 신발장까지 뒤져 사현의 흔적을 발견한 우영이 시무룩해졌다. 수십 개의 구두가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는데, 딱 한 부분이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사현이 신고 나간 것이리라. TV 옆에 있는 시계가 10시를 가리키고 있으니 출근한 게 당연하겠지만 그냥 조금, 아쉬웠다.

“푸후⋯⋯.”

자욱하게 한숨을 내쉰 우영이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 통을 찾아냈다. 어젯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현이 사 준 거였다. 그렇게 퍼먹었는데도 아직 반이나 남았을 만큼 커다래서 보고 있으면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아이스크림을 옆구리에 낀 우영이 작업실로 향했다.

우영은 그림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시간의 흐름에 무뎠다. 그래서 직장은 물론, 정기적으로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아르바이트도 하지 못했다. 정신 차리면 새벽 2시라거나, 아예 밤을 꼴딱 새우는 날도 많아서 잘리기 일쑤였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간헐적으로 일할 수 있는 막노동판에 뛰어든 거고.

그런데 아무래도 시간의 흐름에 무딘 게 아니라, 흐르는 시간을 느끼지 못한 것이었나 보다.

사현이 내어준 작업실은 한쪽이 통유리였다. 리모컨 버튼 하나면 불투명으로 만들 수도, 두껍고 무거운 암막 커튼을 칠 수도 있었는데, 스며드는 햇살이 좋아 그냥 뒀다. 그러다 보니 시간의 흐름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해가 완전히 정수리 위에 떴을 때였다. 똑똑, 간결한 노크가 울렸다. 캔버스를 노려보고 있던 우영이 붓을 쥔 채로 부리나케 문으로 달려갔다.

“B?”

역시나 사현이었다. 비에 젖은 듯 눅눅한 녹색 슈트에 검은색 티셔츠를 받쳐 입은 그는 포인트로 금색 안경을 쓰고 있었다. 등줄기가 찌르르 울릴 정도로 잘 어울리는 복장이었다. 그리고 그 특유의 바닐라 냄새. 누가 갤러리 관장 아니랄까 봐 패션 센스도 기똥차다.

“점심 사 왔어. 나와.”

사현이 부엌 쪽으로 고개를 한번 까닥이더니 먼저 걸음을 뗐다. 팔레트 위에 붓을 아무렇게나 얹어 둔 우영이 후다닥 그를 뒤따랐다.

사현은 척 보기에도 묵직해 보이는 비닐을 낑낑거리며 뜯고 있었다. 가위를 찾아온 우영이 비닐을 싹둑 잘라 냈다. 그러자 곱게 포장된 갈비찜이 드러났다. 우영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우와⋯⋯. 갈비예요?”

“어. 여기 맛있게 잘해. 앉아서 먹어.”

우영이 냉큼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사현을 도와 음식을 세팅했다. 공깃밥이 두 개다. 당연히 하나는 제 몫, 다른 하나는 사현의 앞에 놨다. 그러자 사현이 그것을 우영 쪽으로 밀었다.

“다 네 거야.”

“B는요?”

“나가 봐야 해.”

사현이 손목시계를 흘끔거리며 말했다. 우영의 입술이 각진 모양으로 굳었다.

“⋯⋯같이 안 드세요?”

“어. 나 바빠. 간다.”

우영의 앞에 수저까지 놓아 준 사현은 차마 잡을 새도 없이 부엌을 나섰다. 매몰찰 정도로 빠른 퇴장이었다. 잠깐 굳었던 우영이 얼른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지만, 문을 나서는 사현의 조막만 한 뒤통수만 볼 수 있었다. 쾅! 세게 문이 닫히고, 저절로 도어 록이 잠겼다.

우영이 철옹성처럼 생긴 현관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기분이 이상했다. 아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갈비찜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데도 그랬다.

* * *

우영이 며칠 사현을 지켜본 결과, 그는 바빴다. 아주, 몹시, 매우, 지극히 바쁜 사람이었다. <갤러리 비>의 일을 혼자 처리하나, 아니면 세상만사 모든 일을 다 하나, 바보 같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눈을 뜨면 없었고, 눈을 감을 때까지도 들어오지 않았다. 대체 언제 들어와서 언제 자고, 언제 일어나서 언제 씻고 나간단 말인가.

밥 때마다 들어와서는 입이 떡 벌어지게 맛있는 걸 식탁 위에 올려 두고서는 또 나갔다. 식사를 함께 한 지도 까마득했다.

그래도 오늘은 좀 달랐다. 포장 꾸러미를 풀자 공깃밥이 세 개나 나왔기 때문이다. 두 개는 우영의 몫이고, 하나는 사현의 몫이었다.

우영의 입가에 대번 미소가 스몄다. 언제부터 타인과 겸상했다고 이리 좋은 건지. 사람 바뀌는 게 정말 한순간이라는 걸 이리 깨닫는다.

점심 메뉴는 달짝지근하게 졸인 불고기였다. 양념을 듬뿍 머금은 당면이 기가 막혔다.

우영이 부지런히 수저를 움직이며 사현을 훔쳐봤다. 늘 창백할 정도로 하얗던 눈가가 피곤에 짓눌려 발갰다. 처음 사현을 만나러 <갤러리 비>에 갔을 때 봤던 그 모습이었다. 식사도 깨작깨작, 제대로 하질 못했다.

“많이 바빠요?”

우영이 물었다.

“어? 어⋯⋯. 좀.”

사현이 눈을 비비며 대답했다.

“전시회 준비하시는 거예요?”

“어. 네 일 시작하기 전에 굵직굵직한 전시를 연달아 처리해야 하거든. 보통 신진 작가 전은 기성 작가전 다섯 번 할 때 한 번쯤 하니까.”

“그럼 저 때문에⋯⋯.”

우영의 눈썹이 아래로 축 처졌다. 따지고 보면 우영을 꼬신 것도, 일을 벌인 것도 사현인데 괜히 우영의 마음이 불편했다. 사현이 저리 열심히 일할 때, 우영 자신은 호화로운 집에 들어앉아 삼시 세끼 대접받으며 신선처럼 그림이나 그리고 있으니 당연했다.

울상인 우영의 얼굴에 사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 때문에 아니야. 기성 작가들이 너무 드세서 그래. 다 사회성이라고는 쥐똥만큼도 없어서. 전시장 인테리어를 몇 번이나 뒤엎는 건지 모르겠다.”

빌어먹을. 페인트 냄새 때문에 갤러리 들어가기가 싫을 정도라니까. 입술을 삐죽 내민 그가 불평을 토해 냈다.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우영이 몰래 그 광경을 눈에 담았다. 냉철하기로 유명한 B의 흐트러진 모습이라. 쉽게, 또 아무나 볼 수 있는 장면은 절대 아닐 터였다.

“그런 것도 직접 하세요? 그건 큐레이터가 하는 일 아닌가. B는 갤러리에서 제일 높은 관장님이잖아요.”

“자기야. 내가 어쭙잖게 일 안 한댔지.”

숟가락을 곧추세운 사현이 또박또박 말했다. 그는 일에 대한 집착이 대단했다. <갤러리 비>를 그만큼 키워 냈으면 적당히 쉬엄쉬엄 살 만도 하거늘. 돈도 많고, 많이 벌고, 또 앞으로 더 많은 돈을 벌 거면서.

“<갤러리 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완벽해야 해. 하물며 화장실에 트는 클래식도 계절마다 바꾼다니까.”

“푸흐⋯⋯.”

우영이 웃음을 흘렸다. 이걸 유난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대단하다고 해야 하는 건지. 금세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운 우영이 새 공깃밥 포장을 뜯었다. 사현은 막 수저를 내려놓는 참이었다.

“너는 어때. 완성 전인 작품은 보지 않는 게 예의라 내가 부러 검사 안 하는 거 알지?”

“열심히 하고 있어요.”

“그건 알아. 너한테서 유화 기름 냄새가 엄청 나거든.”

“어⋯⋯. 잘 씻는⋯⋯데⋯⋯.”

우영의 광대에 열이 화르륵 올랐다.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그가 낭패라는 낯으로 킁킁 자신의 팔 냄새를 맡았다.

사현의 집엔 뜨거운 물이 콸콸 나왔다. 피부가 따가울 정도로 세찬 수압은 덤이었다. 꼬부랑 글씨로 쓰인 워시 제품에선 황홀한 향기도 났다. 씻는 재미가 있어 아침저녁으로 열심히 씻었는데. 분명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히 씻었는데 유화 냄새라니. 억울했다.

와르르 무너지는 우영의 눈 코 입에 사현이 쯧, 혀를 찼다. 무슨 말을 못 하겠다.

“열심히 한다는 칭찬이야. 냄새 좀 나면 어떠니. 내가 너랑 부둥켜안고 잘 것도 아니고.”

쿨럭.

우영이 둔탁하게 기침했다. 입에 아무것도 없어서 다행이지, 하마터면 더러운 꼴을 보일 뻔했다.

“뭐야. 왜 부끄러워해. 나랑 안고 자는 상상이라도 했어?”

사현이 그런 우영을 놀리며 킥킥거렸다. 그러자 우영이 눈을 잔뜩 홉떴다.

“아니요? 절대로, 아니요!”

하늘에 맹세할 수 있었다. 2층이 궁금하고, 그중 한 방에서 자고 있을 사현의 모습을 상상해 보긴 했지만 그건 동거인이 생긴다면 누구든 한 번쯤 해 보는 상상 아니겠는가.

굳게 닫힌 방문을 보며 지금은 자려나, 일어났으려나, 아니면 일을 하려나, 책을 읽으려나, 그런 상상 정도는 다 하지 않냔 말이다.

부둥켜안고 자는 상상이라니. 그런 엄한 상상은 결코 해 본 적이 없었다.

⋯⋯솔직히 방금, 방금 해 봤다. 그래도 이건 제 탓이 아니었다. 전적으로 화두를 던진 사현에게 책임이 있었다.

“알았어, 알았어.”

입가에 스민 웃음을 지우지 않은 사현이 성의 없이 우영을 달랬다. 우영이 뾰족한 시선으로 사현을 보다 수저 가득 밥을 펐다. 삐친 건 삐친 거고, 이 야들야들한 불고기가 식어 가는 꼴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었다.

“너는 어떠냐니까. 그림은 그릴 만해? 환경이 바뀌어서 적응하기 힘들 텐데.”

사현이 물잔 주둥이를 매만지며 물었다. 입 안 가득 차 있던 음식물을 열심히 씹어 삼킨 우영이 어딘가 모난 음성으로 대답했다.

“물감이 원래 쓰던 것보다 뻑뻑해요.”

“그러니?”

“네. 근데 붓은 진짜 너무 좋아요.”

“그래? 다행이네.”

사현이 여유롭게 웃으며 우영의 말을 받아쳤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꾸해 주는 거였다. 음담패설도 아니고, 조금 놀린 것 가지고 얼굴 전체가 타오르는 스물여덟 살 남자애가 귀여워서.

우영이 밥 먹는 모습을 구경하던 사현이 시계를 확인하곤 대충 식기를 정리했다. 그러고는 지갑에서 카드 하나를 꺼냈다. 새까만 신용카드였다.

“내가 앞으로 끼니마다 못 올지도 몰라. 열두 시 반까지 안 오면 혼자 시켜 먹어.”

“어⋯⋯. 네⋯⋯.”

우영은 실망한 티를 감추지 못했다. 간간이 얼굴만 비추고 가는 것도 애달팠는데, 이제는 아예 오지도 않겠단다.

좁고 또 좁던 반지하 집에 홀로 있을 땐 저만으로도 집이 꽉 차서 외로움 같은 걸 모르고 살았었다. 반면 사현의 집은 수십 배나 넓다. 혼자 있으려니 적막하고 또 공허했다. 더군다나 나가고 들어오는 것도 못 보는데. 앞으로 며칠이나 혼자 살다시피 해야 하는 건지.

우영의 머리 위로 진한 암울함이 드리웠다.

“근데 배달 책자 같은 건 어디 있어요?”

그래도 먹는 문제는 조금 다른 것이다. 사현이 밥을 주지 않으면 쫄쫄 굶어야 하는데, 그러고 싶진 않았다. 뭐든 먹어야 그림을 그리지.

“무슨 책자?”

사현이 잘못 들었다는 듯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배달 책자요. 왜 중국집이랑 치킨집이랑 책처럼 정리된 거.”

우영이 허공에다 손바닥만 한 직사각형을 그려 보였다.

“핸드폰 앱으로 시켜. 너 젊잖아. 그런 거 할 줄 몰라?”

“⋯⋯.”

“나도 잘은 모르는데. 나 말고 네이버한테 물어 봐.”

사현이 퍽 좋은 해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우영은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비로소 이상함을 눈치챈 사현이 지그시 우영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핸드폰 들고 있는 걸 못 봤다. 그 나이답지 않았다. 우영의 나이대는 물론, 사현의 나이대도 핸드폰 없이 못사는 사람이 열에 여덟이었다.

“자기야.”

“네?”

“너 핸드폰은 있니?”

“어⋯⋯ 네.”

“설마 이렇게 여는 거?”

사현이 손뼉 치듯 손바닥 두 개를 겹쳤다가 악어 입처럼 벌렸다. 이제는 입에 담기도 어색한 폴더폰의 모습을 묘사하는 거였다.

“네.”

우영이 주머니에서 작은 덩어리 하나를 꺼냈다. 말 그대로 작은 덩어리였다. 모서리마다 칠이 벗겨진 검은색 폴더폰. 열 살이 채 안 된 아이들은 저게 핸드폰이라는 것도 모를 터였다.

어이없다는 사현의 표정에 우영이 굳이 폴더를 열어 핸드폰을 구경시켜 줬다. 조그마한 액정에 새끼손톱만큼 작은 자판. 그래도 작동은 되는 모양인지 불은 들어온다. 헛웃음이 다 나왔다.

저 커다란 손으로 버튼을 하나씩 누를 순 있나? 숫자 ‘5’ 하나 치려면 앞뒤 좌우의 숫자인 2, 4, 8, 6 네 개까지 함께 눌릴 것 같은데.

“⋯⋯.”

“⋯⋯.”

진한 정적이 도래했다. 우영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죄인처럼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가난이 부끄러운 적은 없었는데. 물론, 부끄러워할 사람도 없긴 했다.

에둘러 말하지만, 어쨌든 지금 부끄럽단 뜻이다. 그것도 몹시. 그의 넙데데한 어깨가 안으로 한껏 말려 들어갔다.

“그⋯⋯ 스마트폰은⋯⋯ 요금이 너무 비싸서⋯⋯.”

지금 이 핸드폰도 연락할 이가 없어 해지할까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래도 하나 남은 바깥과의 통로라 꾸역꾸역 뒷주머니에 쑤셔 넣고 살았다. 알람으로도 쓸 수 있었고.

사현이 벅벅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폴더폰 쓰는 작가를 처음 보는 건 아니다. 메일을 쓰거나 읽지 못하는 늙은 작가들도 수두룩했다. 그래서 일일이 프린트를 해 우편으로 보내거나, 직접 방문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우영은 백발의 노인이 아니지 않은가. 한창인 스물여덟인데. 갑갑한 마음과 측은한 마음이 동시에 솟구쳤다.

“옷 갈아입어. 나가자.”

사현이 쯧,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영의 손에 들린 건 얼마 전 새로 나온 신형 스마트폰이었다. 사현의 것과 같은 기종이기도 했다. 우영이 어색한 손짓으로 액정을 눌렀다. 손끝이 닿음과 동시에 휙휙 바뀌는 화면이 어찌나 정신없는지 멀미가 다 날 것 같았다.

그래도 볼록 올라온 광대는 내려갈 줄을 몰랐다. 그가 흘끔, 운전 중인 사현을 쳐다봤다. 핸드폰 값이 얼마더라. 백사십만 원이던가. 백육십만 원이던가. 사현은 그것을 일시불로 한 번에 결제했다.

“이거는 저한테 주실 돈에서 빼도 돼요.”

“괜찮아.”

사현이 앞을 주시한 채 말했다. 백만 원이라 봐야 그가 신고 있는 구두 한 짝 값에도 못 미쳤다. 그러나 우영에겐 몸에 걸친 모든 걸 합해도 채울 수 없는 금액일 터였다.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빚을 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다니까. 두 번씩 말하게 하지 마.”

“네. 감사합니다.”

우영이 앉은 채로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러다 글로브 박스에 쾅, 이마를 찧었다. 자신의 덩치를 미처 가늠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이마를 부여잡은 우영이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차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에 사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차 수리비는 네 지분에서 깔 거니까 조심 좀 해 줄래?”

“⋯⋯네.”

풀이 잔뜩 죽은 우영의 음성에 사현이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우영은 정말 독보적인 캐릭터다. 사현은 직업상 아주 많은 사람을 만나 봤지만, 우영 같은 성격은 듣도 보도 못했다.

우영을 쉽게 정의하자면…… 음……, 그래. 딱 사기당하기 좋은 상이다. 일하고도 돈을 받지 못한다거나, 은근히 무시당하는 일이 허다할 듯한 인생. 그래도 영악한 것보다는 낫나, 싶으면서도 조금은 영악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현의 차가 펜트하우스 건물 주차장에 들어섰을 때였다. 아까부터 입술을 달싹이던 우영이 우물쭈물 말을 내놨다.

“근데요, B.”

“응.”

“저 B 번호 저장해도 돼요?”

사현의 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이건 또 무슨 멍청한 질문인가 싶었다.

“안 하려고 했니?”

“아니요. 하고 싶었어요.”

우영이 샐쭉 웃었다. 가방 한 편에 들어 있는 사현의 하얀 명함을 떠올렸다. 포장마차에서 받았던 그 명함을 여태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하나 더 물어봐도 돼요?”

“그래.”

“B한테 카톡 보내도 돼요?”

줄줄이 이어지는 시답잖은 질문에 사현이 엄지와 검지로 꾹꾹 눈두덩을 짓눌렀다. 어떠한 반응을 해야 하는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어떻게 ‘카톡’이라는 신문물은 알고 있구나, 칭찬을 해 줘야 하는 건지. 아니면 어디까지 물을 거냐고 짜증을 내야 하는 건지.

“하아⋯⋯. 그래. 보내도 돼.”

사현이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우영의 얼굴에 미소가 만개했다. 사현과 ‘아는’ 사이가 됐다. 번호도 알고 메시지도 주고받을 정도면 두말할 것 없이 ‘아는’ 사이가 아니겠는가. 우영의 손가락 끝이 신나게 무릎을 두드렸다.

사현의 차가 엘리베이터 입구 앞에 멈춰 섰다. 우영이 통신사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힌 종이봉투를 들고 내렸다.

“가 보겠습니다.”

“어. 핸드폰 너무 가지고 놀지 마. 그림 허투루 그리면 다시 뺏을 거야.”

사현이 아이에게나 할 법한 충고를 했다.

“네.”

우영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하얗고 맑은 대답이었다.

사현이 입술을 씰기죽거렸다. 하여튼 대답은 참 잘하지. 파트너 대접을 하는 게 아니라 중학생을 키우는 기분이다.

가벼운 손짓으로 인사를 대신한 사현이 차를 출발시켰다. 주차장을 빠져나오는데, 백미러로 멀뚱히 선 우영이 보였다. 사현이 주머니를 더듬어 자신의 핸드폰을 확인했다.

그냥. 별 뜻 없이. 그저 핸드폰의 안위를 확인한 거였다.

* * *

[B. 출근했어요?]

[B. 오늘 점심 같이 먹어요?]

[B. 언제 오세요?]

[B. 저녁은 드셨어요?]

[B. 저 오늘 그림 많이 그렸어요.]

[B. 많이 바빠요?]

[B. 저 먼저 자요.]

우영의 핸드폰 주소록엔 B라는 이름 하나뿐이다. 휑한 여백에 쓰인 B라는 이름은 참으로 독보적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모든 메시지가 그에게 향했다.

아무리 좋은 핸드폰이라 해도 쓰는 법도, 즐기는 법도 모르니 무용지물에 가까웠다. 우영이 핸드폰으로 하는 일이라곤 사현에게 카톡 보내기, 배달 음식 주문하기(이것도 너무 어려워서 네이버를 수십 번이나 드나들었다), 그리고 시간 확인하기가 다였다. 게임이고 미디어고 접할 방법이 없으니 할 수도,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작업실 테이블에 걸터앉은 우영이 카톡 창을 쭉쭉 올렸다. 사현과 자신의 대화방이었다.

[늦어.]

[너 혼자 먹어.]

[그래.]

[어.]

사현은 늘 단답형이다. 그마저도 서너 시간 후에 답을 주곤 했다. 그가 누구보다 바쁜 사람임을 알지만, 섭섭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저를 감시하겠다고 했으면서. 감시는커녕 살아 있냐고 묻지도 않았다.

하루는 부러 메시지를 스무 개나 보냈다. 사현이 너 그림 안 그리고 핸드폰 만지고 노는 거냐고 윽박이라도 지르길 바라서. 근데 그날은 아예 답조차 하지 않더라.

입을 꾹 다문 우영이 짜증스레 핸드폰을 내던졌다. 아니, 내던지려다 비싼 몸값을 상기하고는 조심히 내려놨다. 창밖으로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다.

이렇게 또 하루가 지났다. 제가 사현의 집에 들어앉은 지 얼마나 됐지. 우영이 주마다 손가락을 접었다. 세 개가 접혔다.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그런데도 사현과의 ‘아는’ 사이는 별로 진전이 없다.

딱히 특정한 관계를 바라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좀 친해졌으면 했는데. 어쩌면 제 인생 첫 친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터라 여간 아쉬운 게 아니었다.

창밖 가득 펼쳐진 서울 야경과 완성 막바지에 다다른 그림, 그리고 얄미울 정도로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 핸드폰을 번갈아 보던 우영이 거센 콧김을 뿜으며 몸을 일으켰다.

씻고 잠이나 자야겠다.

머리에 타월을 뒤집어쓰고 반바지만 걸친 우영이 욕실에서 나왔다. 처음 몇 주는 혹 사현과 마주칠까 꽁꽁 싸매고 나왔었는데 이제는 바지라도 걸치면 다행이었다.

우영이 세면대에 올려뒀던 핸드폰을 밝혔다. 연락 올 사람도 없으면서 꼬박꼬박 몸에 지니고 다니는 제 꼴이 우스웠으나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또 모르잖는가. 사현에게 연락이 올 수도. 다른 이유가 아니라, 일적으로 말이다. 일, 적으로.

그러나 기대와 달리 핸드폰은 미적지근한 배경화면만 띄웠다. 비딱하게 입술을 뒤튼 우영이 사현에게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B. 오늘도 늦어요?]

문자를 입력하는 데 적응하지 못한 손가락이 더듬더듬 느리게 움직였다.

핸드폰에 들어갈 듯 집중한 우영이 부엌으로 향했다. 물을 마시기 위함이었다. 그쯤, 메시지가 완성되어 전송 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

핸드폰을 옆구리에 끼고 팔꿈치로 고정한 우영이 정수기 아래에 물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찬물을 따르는데,

“아니. 방금 집에 도착했어.”

“으허억!”

사현의 목소리가 뒤통수를 후려쳤다. 기겁한 우영이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핸드폰과 물잔이 온갖 요란법석을 떨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물잔은 와장창 깨지기까지 했다.

소스라치게 놀란 우영이 휙 뒤를 돌았다. 사현이 조리대에 기대 물을 마시고 있었다. 타이도 풀지 않은 슈트 차림으로 봐선 방금 들어온 듯했다. 한 손엔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아마 우영의 메시지가 떠 있으리라.

“왜, 왜 여기 있어요?”

우영이 물었다.

“⋯⋯내가 내 집에 있는 이유를 너한테 설명해야 하니?”

한쪽 눈을 설핏 어그러트린 사현이 되물었다.

“아니, 아니요. 그건 아닌데.”

우영이 손까지 휘저으며 부정했다. 머리에 쓰고 있던 수건이 눈치 없이 눈앞을 가렸다. 휙휙 아무렇게나 쓸어 넘기자 수건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덕분에 안경을 쓰지 않은 우영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순간 사현의 눈이 가느다랗게 좁아졌다. 우영이 저런 얼굴이었던가. 매번 어벙해 보이는 안경으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어 몰랐다.

우영은 속눈썹이 길었다. 쌍꺼풀도 짙었고, 눈동자는 예쁜 갈색이었다. 늘 안경에 짓눌려 있던 코는 높고 곧았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지 이따금 미간을 찌푸리기도 했는데 그 표정이 예술이었다. 말 그대로 예술.

사현은 그의 얼굴에 감탄했다. 물론, 순전히 미적인 감탄이었다. 이런 얼굴이 그 반지하 방에서 썩고 있었단 말이야? 제법 봐줄 만한 미모임을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전시해도 관람료가 쏠쏠하게 들어올 것 같은데.

“자기 이렇게 보니까 되게 예쁘게 생겼다.”

사현의 말은 늘 그래 왔듯, 거름이 없었다.

“네?”

우영이 맹한 낯으로 반문했다. 그러는 와중에 사현은 우영의 목선부터 길게 이어진 쇄골, 널따란 어깨. 그 아래에 자리 잡은 탄탄한 가슴과 부담스럽지 않게 빚어진 복근까지 분주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몸도 예쁘네.”

“으아⋯⋯.”

그제야 자신의 행색을 알아차린 우영이 두 손으로 잽싸게 몸을 가렸다. 당장 방으로 달려가 옷을 입고 싶은데, 눈앞엔 컵이 깨져 있다. 우영이 어쩔 줄 모르고 발을 동동거렸다. 그러나 깨진 컵을 두고 갈 순 없었다. 어찌 됐든 제가 저지른 일이니까. 쪼그려 앉은 우영이 깨진 조각을 줍기 시작했다.

“운동하니?”

사현이 붉게 익은 우영의 귓바퀴와 목덜미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가, 가끔요. 그림 안 그려질 때 이것저것⋯⋯.”

“으응, 좋은 버릇이네.”

사현이 과장스레 턱을 끄덕였다. 명백한 장난이었다. 남자끼리 몸 좀 본 게 뭐가 그리 부끄럽다고 시뻘겋게 달아오른 우영이 귀여워서. 뭐, 한쪽만 벗고 있으니 부끄러울 만도 하겠다.

컵과 핸드폰을 내려놓은 사현이 우영을 도와 주기 위해 허리를 굽힐 때였다.

“아!”

우영의 손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큰 파편을 집었는데, 그 위에 작은 파편이 있었나 보다. 안경을 쓰지 않은 탓에 뭐가 보여야 말이지. 검지 옆으로 얇고 긴 선 하나가 났다. 피가 뿜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래도 핏방울이 뚝뚝 흐를 만큼 깊은 상처는 아니었다. 고작 해 봐야 긁힌 정도.

코를 찡긋거린 우영이 그것을 입에 가져가려 할 때였다.

“야! 너 미쳤어!”

눈을 부릅뜬 사현이 고함을 내질렀다. 어찌나 성량이 좋은지. 우영은 하마터면 뒤로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네? 아니요⋯⋯. 이거 많이 비싼 거예요?”

우영은 뒤늦게 컵의 정체를 확인한 사현이 화를 낸다고 생각했다. 엄청 비싼 건가 보다. 돈이 있어도 쉽게 구하지 못할 정도로 유명한 장인이 만들었나.

“아우⋯⋯. 컵 말고, 네 손! 네 손이 비싼 거지!”

사현이 복장이 터진다는 듯 팡팡 자신의 가슴팍을 내리쳤다. 내가 지금 저 손에 얼마를 투자하고 있는데! 그림을 프랑스로 보내며 낸 운송료가 얼마였는데! 프랑스 시골 마을의 손바닥만 한 갤러리를 빌리며 얼마를 냈는데! 평론가들을 구워삶느라 뒷구멍에 꽂아 준 돈이 얼만데! 지금 우영의 그림에 매달리고 있는 큐레이터가 몇 명인데!

사현이 우영의 손목을 움켜쥐고 확 자신의 눈앞으로 당겼다. 그리고 상처를 꼼꼼히 뜯어봤다.

“네가 앞으로 그림을 몇 점이나 그려야 하는 줄 알아?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

“아⋯⋯.”

우영이 바보처럼 감탄사를 내놓았다. 사현이 화를 내는 게 깨진 컵 때문이 아니라 제 손이 다쳤기 때문이라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방금 씻고 나왔는데, 등줄기에 땀이 스몄다. 목덜미가 간지럽고 입 안에 열이 올랐다.

“너 조심해. 잘못해서 그림 못 그리게 되면 내가 투자한 돈 갚느라 평생을 써야 할 거야.”

눈을 홉뜬 사현이 자못 음산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우영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저리 꺼져. 내가 이거 치울 동안 무릎 꿇고 손 들고 있어.”

사현이 꼴도 보기 싫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우영이 축 처진 어깨로 몸을 일으켰다.

작은 유리 파편을 치우느라 청소기까지 돌린 사현이 피곤한 낯으로 부엌에서 나왔다. 오랜만에 일찍 퇴근했는데, 퇴근한 보람이 없다. 사현이 거추장스럽게 내려온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거실을 가로질렀다.

⋯⋯가로지르려 했는데. 바위처럼 커다란 덩어리 하나가 거실 한가운데에 터를 잡고 있었다. 우영이었다.

“뭐 하니, 너?”

“⋯⋯벌서는데요.”

우영은 소파 아래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들고 있었다. 허⋯⋯. 사현이 한숨 같은 감탄을 내놓았다. 벌서랬다고 진짜 벌을 서면 어쩌냐. 스물여덟 살의 건강한 사내놈이 헐벗고 벌 서는 꼴이라니.

사현이 넥타이를 풀어헤치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우영은 여전히 두 손을 든 채 벌을 서고 있었다. 쭉 뻗은 팔이 쓸데없이 곧고 예쁘다.

“자기야.”

“네?”

“그만하고 이리 와.”

사현은 한 걸음 물러나 주기로 했다. 그만하면 됐다, 라고 말하지 않으면 내일 아침까지 저 모습으로 있을 게 뻔해서.

잠시 사현의 눈치를 보던 우영이 쭈뼛쭈뼛 자리에서 일어났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말은 정말 잘 듣는다. 공들여 훈련한 개보다 더했다.

우영이 사현의 옆에 조심히 엉덩이를 붙였다. 무릎은 모으고, 손은 가지런한 게 숫기 없는 새색시처럼 단아했다. 사현이 박력 넘치게 그의 손을 채 갔다. 그리고 상처를 찾아 요리조리 면밀하게 살폈다. 큰 상처는 아니나 물이 닿으면 꽤나 따가울 듯했다.

“집에 약이 없는데.”

김치도 없는 집에 약이 있을 리 있나. 지금이 몇 시지. 약국 문이 열려 있으려나. 요즘은 편의점에도 약을 판다던데. 건물 아래에 편의점이 있던 것도 같고.

사현이 고민하는 차에 곱게 손을 내주고 있던 우영이 벌떡 일어났다.

“저 약 있어요.”

“너한테?”

“네!”

우영이 후다닥 방으로 뛰어가 손바닥만 한 구급상자를 가져왔다. 거기엔 밴드와 연고 따위가 들어 있었다. 상자를 받아든 사현의 얼굴이 묘하게 가라앉았다.

“이런 걸 가지고 있다고?”

네가? 어째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우영이 멋쩍게 웃으며 뒷덜미를 긁었다.

“여기저기 자주 긁혀서⋯⋯.”

실은 공사판에서 온종일 뒹굴다 오면 다치기 일쑤라 장만해 놓은 것인데, 사현이 알면 또 호되게 꾸지람을 할 것 같아 숨겼다.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우영을 보던 사현이 별다른 말없이 연고 뚜껑을 열었다. 연고 특유의 텁텁한 향이 넘실거렸다. 검지에 물방울만큼 짠 연고를 우영의 손가락에 발랐다.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우영이 그런 사현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고작 이깟 상처에 눈조차 깜박이지 않고 집중하는 그가 신기했다. 고작 이깟 상처에 화를 내는 그도 신기했고, 고작 이깟 상처에 저를 걱정하는 그도 신기했다.

우영의 시선이 자연히 사현의 얼굴로 향했다.

사현은 피부가 참 하얗다. 쌍꺼풀이 없는데 큼지막한 눈과 기다랗고 풍성한 속눈썹은 그 어떠한 명화보다 아름다웠다. 우영의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더 지척에서, 더 자세히 보고 싶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탓에 보일 듯 말 듯한 입술이 말도 못 하게 아쉬웠다. 우영이 슬그머니 가까이 다가가 앉았을 때였다.

“이번 주말에 경매가 있어.”

사현이 나지막이 말했다. 소리 없이 놀란 우영이 꿀꺽 마른침을 삼키곤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했다.

“제 그림 경매요?”

“그래.”

“저도 가요?”

“가고 싶니? 가면 좋지. 구경할 게 많을 거야. 배우는 것도 많고.”

밴드를 붙이던 사현이 자꾸 손등을 덮는 소매를 짜증스레 추켜올렸다. 그의 가느다란 손목이 오롯이 드러났다.

“B도 가세요?”

“응.”

“그럼 저도 갈래요.”

우영이 샐쭉 웃었다. 사현이 그의 웃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원래부터도 참 싱그럽게 웃는다고 생각은 했었으나, 안경을 벗은 상태로 이리 가까이서 보니 또 새로웠다.

사현이 자신의 아랫입술을 빠르게 핥았다.

“⋯⋯내일 제이보고 집에 들르라 할게. VIP 경매라 옷을 신경 써서 입어야 해. 덥수룩한 이 머리도 어떻게 좀 하고.”

그가 우영의 복슬복슬한 머리카락을 헤집듯 쓰다듬었다. 방금 씻고 나온 터라 유독 크게 부푼 머리칼 속으로 사현의 손이 사라지다시피 했다.

“네.”

우영이 입가에 핀 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 사현을 쳐다봤다. 두 사람은 잠시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 쓸데없이 가까운 거리라 서로의 눈동자 안에 서로가 있었다. 수 분, 혹은 수 초. 묘한 정적이 흘렀다.

사현이 우영의 머리칼에서 손을 뗐다. 그러고는 벌떡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래, 그럼. ⋯⋯잘 자라.”

우영이 덩달아 일어났다.

“네. B도 안녕히 주무세요.”

사현은 망설임 없이 2층으로 향했다. 우영은 매번 그랬듯, 그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사현이 모습을 감추자 내내 웃는 낯이던 우영의 얼굴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잠깐 드러났던 사현의 손목에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봐 버렸기 때문이다.

분명 흉터였다. 수술 따위로 만들어진 상처가 아니라, 날카로운 것으로 마구잡이로 난도질한 모양새였다. 저렇게 멋지고 대단한 사람이, 왜 저런 걸 손목에 달고 있지.

궁금했으나 묻진 않았다. 아직 그것을 물을 만큼 ‘아는’ 사이가 아닌 듯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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