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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2. 절대 그럴 리 없다며! (25/25)

외전 2. 절대 그럴 리 없다며!

“아. 아아……! 좋아! 거기, 더 깊이 넣어! 아! 아앗!”

엎드린 채 거칠게 숨을 헐떡이던 은찬은 밀려오는 쾌감을 참지 못하고 야한 교성을 질렀다. 아이들이 잠든 새벽 시간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손톱을 세워 침대 시트를 긁으며 헐떡였다.

“기분 좋아?”

“좋아! 좋아, 더! 앗……! 아읏!”

내벽을 휘젓는 성기는 점점 폭력적으로 변해 갔다. 머릿속이 새하얘진 은찬은 그대로 무너졌다. 엉덩이만 내놓은 채 온 몸을 와들와들 떨었다. 퍽. 퍽. 퍽. 내벽 끝을 짓이기는 거친 삽입을 버텨 낼 재간이 없었다. 앞서 두 차례의 사정이 있었던 후였다. 덕분에 거대한 주한의 성기가 더 깊이 들어 갈 수 있는 윤활제 역할을 톡톡히 해 주고 있었다.

“아, 아아…….”

겨우 숨만 쉬고 있는 은찬의 입에서는 새된 신음만 터졌다. 곧 정신이 까무러칠 것 같았지만, 주한은 은찬을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삽입한 채 은찬을 일으켜 세워 몇 시간 동안 유린한 젖꼭지를 손톱으로 비틀었다.

짜릿한 통증이 쾌감으로 변질되는 건 금방이었다. 은찬은 가쁜 숨을 헐떡이며 또다시 신음을 토해 냈다. 얼마나 소리를 질러 댔는지 목이 쉬고 배 속이 메스꺼워질 정도였지만 주한은 끝장을 볼 기세였다.

“하아, 하아. 출근 하려면 이제, 이제 그만해야…….”

그만해야 할 텐데……. 물론 그건 말뿐이었다. 은찬은 주한의 성기가 깊이 들어 올 때마다 자지러지듯 흐느꼈다. 어느새 그가 주는 쾌락에 몸이 길든 것이다. 처음부터 느꼈지만 두 사람의 속궁합은 정말 좋았다.

“그만할까? 응? 진짜 그만해?”

주한의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렸다. 일부러 아주 느리게 내벽을 가르고 들어오는 행동에 은찬은 부르르 떨며 엉덩이에 힘을 꽉 줬다.

“진짜 이러기에요?”

“끝내자며.”

“급한 불은 꺼 주고 끝내야죠!”

“귀엽긴.”

은찬의 볼멘소리에 주한은 이를 세워 어깨를 깨물었다. 그리고 다시 속도의 박차를 가하자 은찬의 하반신은 녹아내렸다. 주한은 은찬이 일어날 기력이 없을 때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그때가 새벽 동이 틀 때였고 둘은 고작 두 시간만 눈을 붙인 채 출근 준비를 해야 했다.

***

“하아아암.”

역시 잠이 부족했다. 은찬이 몇 번째인지도 모를 하품을 늘어지게 하고 있자 동만은 픽 웃음을 터트렸다. 동만은 나란히 식탁에 앉은 두 아이의 입에 이유식을 떠먹이기 바빴다. 태어난 지 반년 만에 두 발로 일어나게 된 두 녀석은 요즘 한참 먹성이 좋을 때였다.

“밤에 잠 안 자고 뭐 했냐? 요한아, 맛있지? 엄마하고 아빠하고 밤에 뭐 했을까?”

명색이 엄마지만 은찬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식탁에 턱을 괴고 아이들 이유식을 한 수저씩 훔쳐 먹기 바빴다.

“왜? 궁금하냐? 자세히 말해 줘?”

“됐거든. 앞에서 하품 좀 그만하라고 눈치 준 거잖아. 졸리면 저기 가서 자! 야, 그만 먹어! 왜 애들 밥을 훔쳐 먹어!”

동만은 은찬의 손에 있던 아기 수저를 획 낚아채 갔다. 은찬은 입맛을 다시며 또 늘어지게 하품을 팼다.

“이거 은근히 맛있다? 잘까 했는데…. 아침에 보니까 이 녀석들 약간 열이 있는 것 같아서. 그게 은근히 신경 쓰이네.”

은찬의 말에 동만은 아이들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하지만 별 이상을 느끼진 못한 모양이다. 고개만 갸웃거리는 행동에 은찬은 콧방귀를 꼈다.

“야, 수인 아기는 원래 체온이 조금 높거든? 쟤들 열 재려면 똥꼬에 체온기 넣어야 해.”

“그래? 병원 갈 정도야?”

순식간에 동만은 근심, 걱정이 가득한 시선으로 두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두 녀석은 입을 쩌억 벌리며 얼른 더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맘마아아. 맘마아아!”

이제는 제법 말 같은 단어도 쏟아 냈다.

“모르지. 그래서 내가 잠도 안 자고 이러고 있잖아.”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 생색내기는. 근데, 너희 일주일에 몇 번을 하는 거냐?”

애들이 자고 난 뒤 눈만 마주치면 했으니……. 따지고 보면 일주일에 6일 정도랄까. 은찬은 음흉하게 웃으며 동만을 지긋이 응시했다.

“왜? 우리 동만이 그게 왜 궁금할까? 그 개가 잘 못 해 줘?”

은찬의 음흉한 농담에 동만은 썩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집 개새끼 걱정 안 해도 됩니다. 너무 심해서 중성화 수술할까 생각 중이니까. 너나 걱정하세요. 요즘 너 입맛 변한 거 아냐?”

“중성화? 미친놈. 그 개가 이 말 들으면 좋아하겠다. 근데 내가 입맛이 변했어? 아닌데?”

“나보고 둔하다고 하더니 어째 너는 니 몸에 관해서 더 둔하냐?”

뜻밖의 말에 은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만은 담담히 아이들의 이유식을 먹이며 말을 이었다. 넥타이를 매고 앞치마를 두른 김동만의 모습이 이제는 익숙해질만도 한데 볼 때마다 영 낯설었다.

“이게 맛있어? 너 처음에 이거 맛볼 때 생각 안 나? 맛 더럽게 없다고 툴툴거렸잖아.”

“그랬나?”

“그랬다. 얼마 전부터 애들 거 야금야금 다 훔쳐 먹고 있어. 가뜩이나 먹일 것도 없는데.”

동만의 싸늘한 핀잔에 은찬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심각한 표정으로 바닥을 드러낸 이유식 그릇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어제는 오랜만에 고등어회가 먹고 싶었다. 배불리 먹고 그 기운으로 밤새도록 이주한에게 안긴 탓에 온몸이 노곤해 죽을 지경이었다.

“내가…… 요즘 정력이 딸려서 그런가?”

“그래, 그런가 보다. 그러니까 작작 좀 하시고. 애들 상태 좀 봐 봐. 괜찮겠지?”

“아침에 주치 쌤한테 물어봤는데 애들은 수시로 바뀐다네? 잘 지켜보래.”

동만도 은찬도 그 문제 관해 딱히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느덧 겨울의 끝자락. 곧 봄이 오니 식욕이 도는가 보다. 이런 식으로 가볍게 넘기며 아이들에게 신경을 쏟았다.

오전까지 괜찮던 아이들은 오후가 되자 갑자기 얌전해졌다. 잘 먹고 잘 뛰어놀던 두 녀석이 갑자기 열이 들끓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당황한 은찬은 주한을 호출했고 그들은 두 아이를 품에 안고 급히 병원으로 향했다.

뒤늦게 이 소식을 들은 회장님은 한참 뒤에야 병원에 도착했다. 그 사이 두 아이는 진료를 끝마치고 의사와 면담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진 아이들의 칭얼거림은 은찬과 주한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초조한 마음에 주한이 몇 번이나 의사와 면담을 요청했으나 아직 검사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는 말만 되돌아왔다. 일분일초가 너무나 길게 느껴지는 시간. 까딱하다 애들이 잘못될까 봐 은찬은 눈시울을 붉혔다.

그들이 있는 VIP실에 무거운 정적이 맴돌았다. 아이들의 칭얼거리는 소리가 어찌나 가엽게 들리는지 회장님의 표정도 점점 어두워졌다. 집안의 보물이라며 누구보다 두 녀석을 사랑하는 분이셨기에 결국 분통을 터트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셨다.

“김 실장, 병원장한테 연락해! 이러다 우리 애들 잘못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네. 알겠습니다.”

“유한아, 요한아. 많이 아파?”

다른 이들에게는 무서운 분이셨지만 증손주들에게 만큼은 세상 누구보다 다정한 증조할아버지였다. 그래서인지 두 녀석은 스스럼없이 회장님을 잘 따랐다. 평소 같았으면 환하게 웃으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을 테지만 지금 두 아이는 힘없이 축 늘어져 울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니 회장님의 속도 말이 아닌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끙끙 앓던 회장님은 죄 없는 김 실장만 다그쳤다. 사실 그들 때문에 지금 병원에 비상이 걸렸다는 건 문 앞을 지나는 분주한 발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특히 5분마다 병원장이 직접 김 실장의 핸드폰으로 진행 사항을 알려왔다. 모두 극도로 예민해진 상태였다.

다들 은찬과 주한의 품에 안겨 울먹이고 있는 녀석들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토록 기다리던 의사가 하얀 가운을 펄럭이며 다급하게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오래 기다리셨죠. 검사 결과가 이제 막 나왔습니다.”

두 아이가 병원 문을 넘어 선 순간 미리 연락받은 의료진들은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전부 검사를 진행했다. 다들 의사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귀를 쫑긋 세웠다. 은찬은 덜덜 떨리는 마음을 겨우 다잡았다.

“홍역으로 결과가 나왔습니다. 다행히 다른 곳은 전혀 이상 없습니다.”

“……홍역, 이요?

은찬의 되물음에 의사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네, 홍역입니다.”

“그런데 왜 아무것도 해 주지 않는 겁니까? 애가 이렇게 몸이 불덩이 같은데! 주사라도 놓아 주든가 무슨 조치를 해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지금껏 침착함을 유지하던 주한은 은찬에게 아이를 떠넘기고 의사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의 멱살을 잡고 거칠게 흔들었다. 사람이 이성을 잃은 수인의 힘을 당해 낼 리 없었다. 종이처럼 펄럭이던 의사는 겁에 질려 소리쳤다.

“수인 아기니까요! 그러니까 수인 아기는……!”

“형!”

의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은찬은 놀란 목소리로 주한을 찾았다. 제 품에 안긴 두 녀석이 눈 깜짝할 사이에 새끼 표범으로 변했다. 좀 전까지 귀와 꼬리만 표범 흔적이 남아 있던 녀석들이 지금은 네발 달린 새끼 표범 그 자체가 되었다. 맙소사. 이게 무슨 일이야.

놀란 은찬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녀석을 와락 끌어안았지만 기운을 되찾은 녀석들은 잽싸게 도망쳐 병실 안을 제집처럼 뛰어다녔다. 모두의 시선이 술래잡기하듯 뛰어다니는 두 마리의 새끼 표범을 쫓았다.

“……이게 무슨.”

아무리 수인이지만 동물로 변신까지 할 수 있는 건 금시초문이었다. 남자가 낳아서 돌연변이인가? 여러 가지 생각에 은찬이 혼란 속에 빠지고 있을 때 회장님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병실을 꽉 채웠다.

“그만하니 다행입니다. 회장님.”

“그렇지, 이놈들. 늙은이 이렇게 놀라게 하면 안 된다.”

회장님은 엄한 목소리로 뛰어놀고 있는 새끼표범을 꾸짖었지만, 녀석들을 바라보는 눈빛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누가 설명 좀 해 주시겠어요? 저희는 아직 이해가 안 가서요.”

까칠한 주한의 말에 은찬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의사의 설명이 이어졌다.

“홍역은 아기에게 흔한 증상 질환입니다. 사람 아기 경우에는 입원이나 주사가 처방되지만, 수인 아기는 저희가 딱히 처방해 드릴 게 없습니다.”

“네?”

이게 무슨 소리야? 은찬은 의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픈데 병원에서 처방할 게 없다니. 그럼 평생 저대로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번에는 은찬이 의사의 멱살을 쥐고 거칠게 흔들었다. 이미 주한에게 멱살이 잡힌 터라 의사의 가운은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살려 내! 우리 애들 살려 내라고! 당신이 그러고도 의사야!”

순간 너무 흥분한 은찬은 날카로운 송곳니를 보이며 소리쳤다. 위협을 느낀 의사는 울먹이며 호소했다.

“아니, 해 드릴 게 없다고요! 저희가 딱히 처방을 하지 않아도 일주일 뒤면 본래대로 돌아온단 말입니다!”

모든 행동이 일시 정지된 은찬은 의사의 겁에 질린 눈과 마주치자마자 손에 힘이 빠져나갔다.

“수인 아기 경우에는 몸에서 스스로 방어 작용을 해서 일시적으로 변한다고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그것도 모르고 흥분한 은찬이 의사를 몰아붙인 것이다. 어색한 정적 속에서 은찬은 머쓱하게 웃었다.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겠냐는 웃음에 의사는 쭈글쭈글한 가운을 신경질적으로 탁탁 털었다.

“그럼 저희가 해야 할 건…….”

주한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의사가 대답하려 했지만, 회장님이 한 발 더 빨랐다. 어느새 유한과 요한을 품에 안은 회장님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네가 이만할 때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렇지? 김 실장.”

“네, 회장님. 오래된 일이라서 저도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이놈들이 지 아빠를 닮아서 그런 것도 닮은 것 같네. 그때도 야단법석을 떨었지. 이게 다 걸리는 게 아니라 간혹 걸리는 아기가 있다고 하더구나. 의사 말대로 일주일 정도만 잘 먹이고 잘 뛰어놀게 하면 원래대로 돌아올 거다. 걱정하지 말고, 이만 가자.”

저렇게 나가도 될까 싶었지만 두 녀석은 마치 고양이처럼 회장님 품에 얌전히 안겨 있었다. 좀 전까지 눈시울을 붉혔던 은찬은 코를 훌쩍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짧은 순간 머릿속에 불길한 생각이 얼마나 떠오르던지. 큰 병이 아니라서 다행이긴 한데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다.

한시름 덜고 나니 싱겁게 웃음이 터졌다. 주한도 은찬과 같은 기분이었나 보다. 잔뜩 긴장한 그에게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고 은찬과 눈이 마주치자 그도 피식 웃었다. 은찬은 부모가 되는 게 힘들다는 걸 한층 더 절실히 깨달았다.

“놀랬지?”

“형도 많이 놀랐죠?”

이미 아이들을 품에 안은 회장님은 김 실장과 함께 병실을 나서고 없었다. 덩그러니 남은 은찬과 주한이 서로를 위해 주다 묘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은찬의 머리 위에 불쑥 솟아난 고양이 귀를 만지작거리는 주한의 손길이 예사롭지 않았다.

“다행이다. 그렇지?”

은찬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곧 키스로 이어질 것 같은 상황이 펼쳐졌다. 그때 요란한 헛기침 소리가 분위기를 와장창 깨트렸다.

“여기 병원입니다만.”

획 고개를 돌린 은찬은 띠꺼운 표정으로 빤히 쳐다보고 있는 의사와 시선이 마주쳤다. 계속할 거면 모텔이나 호텔로 꺼지라는 시선이었다. 의사는 눈으로 욕을 하고 있었고 은찬과 주한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담담하게 병실을 나섰다.

부부끼리 나쁜 짓한 것도 아니고 애들도 큰 병이 아니라는데 뭐 어때. 원래 신혼에는 밥 먹다가 눈만 마주쳐도 한다고 했다. 요즘 그 재미에 푹 빠진 은찬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주한의 엉덩이를 툭 쳤다.

부부라서 좋은 점 하나 더. 콘돔 없이 하는 섹스의 맛을 제대로 알아 버렸다.

***

“집 좋다. 나는 이런 집에서 언제 한번 살아 보냐.”

조심스럽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동만은 조금 흥분 상태였다. 반짝이는 눈을 잠시도 가만두지 못하며 이리저리 힐끔거리기 바빴다. 그런 동만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은찬은 왜 저 녀석이 이곳에 있는지부터가 궁금했다.

오랜만에 출근 걱정 없이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있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고작 10시. 회사에 있어야 할 녀석이 왜 이 곳 회장님 저택에 있는 것일까. 소파에 반 눕다시피 한 은찬은 아이처럼 들뜬 동만을 시큰둥하게 응시했다.

“너 여기 어떻게 온 거냐?”

“어? 뭐가?”

“여기 회장님 집이잖아.”

“그러니까! 내가 이런 데를 다 오네.”

동만은 피식 웃으며 앞에 놓인 커피 잔을 들었다. 그 모습이 현실처럼 보이지 않았다. 분명 이곳은 회장님 집 거실. 그곳에 김동만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꿈인가? 은찬은 눈을 비볐지만 꿈은 아니었다.

“회장님 댁에서 마시는 커피라서 그런지 커피 맛도 다르네, 달라. 이거 엄청 비싼 커피겠지?”

“몰라. 내 입에는 여기 커피나 회사 커피나 그게 그거니까. 너 여기 어떻게 온 거냐니까?”

“나? 몰라? 출근하니까 김 실장님이 이곳으로 데려다주시던데? 앞으로 일주일 동안은 여기서 출퇴근하라면서. 그나저나 너는 내가 애들 걱정하는 거 뻔히 알면서 ‘홍역이란다.’ 이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 버려? 이 매정한 새끼야!”

갑자기 씩씩거리기 시작한 동만은 눈을 가늘게 뜨며 은찬을 노려봤다. 소파에 아예 누워 버린 은찬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유한, 이요한. 두 아이가 홍역에 걸려 새끼 표범으로 변해 버린 그 시점으로부터 만 하루가 지났다. 사람일 때조차 운동량이 넘쳤던 녀석들은 동물로 변해 버리자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가 폭발해 버린 것 같았다. 도저히 집에서는 돌볼 수 없을 정도였고, 결국 은찬과 주한은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회장님 집에 잠시 머물게 됐다.

은찬은 아이들을 보살펴야 한다는 명목으로 출근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김동만까지 이곳에서 재회할 줄이야. 불쌍한 김동만. 본인만 모르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회장님께 단단히 찍힌 것 같았다. 아이들의 보모로 말이다.

“별거 아니라잖아.”

“그러니까, 저렇게 귀여운 모습을 볼 수 있는 게 흔한 일이냐고! 저 작고 귀여운 귀하고 꼬리 봐! 저런 건 사진으로 소장해 줘야 한다니까? 조그만 게 표범이라고 으르렁거리는 거 봤어? 완전 딱 내 취항인 거 있지?”

고양이 덕후 김동만은 거실 창문 너머 정원을 뛰어다니는 두 마리의 새끼 표범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눈에서 하트가 막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귀여우면 너도 하나 낳으라니까?”

“낳아서 저렇게 귀엽고 깜찍하다는 보장만 있으면 낳고 싶지.”

“진짜?”

웬일이야? 농담으로 던진 말에 동만은 진지하게 받아쳤다. 깜짝 놀란 은찬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동만은 짧게 혀를 찼다.

“남자가 애를 어떻게 낳냐? 웃자고 하는 소리지.”

“난 낳았잖아.”

“그러니까. 너 같은 놈의 몸에서 저런 귀엽고 깜찍한 녀석들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불가사의한 일이라니까. 솔직히 검정고양이가 나왔으면 하고 바랐지만 표범도 나쁘지 않네. 재들 크면 부장님처럼 잘생겼겠지? 부럽다, 녀석들. 잘생기고 돈 많은 아빠 만나서.”

“별게 다 부럽다. 왜 신세 한탄을 여기서 해. 요즘 개가 못 해 줘? 권태기야?”

“권태기가 뭐냐. 먹는 거냐? 그거 좀 왔으면 좋겠다. 사람 좀 살게. 야, 개 발정기가 봄, 가을 맞지?”

“아니.”

“아니야?”

“대체로 그렇게 알고 있지만, 수인도 반은 사람이거든? 하고 싶을 때 발정이 오기도 하거든요? 특히 마음에 드는 암컷이 있으면 개는 성욕이 왕성한 것 같던데? 엄청 해대걸?”

“왕성…… 하…….”

그러고 보니 동만의 눈 밑이 퀭했다. 한때는 연애 한번 못 해 보고 죽는 거 아니냐고 걱정하던 놈이 이제는 복상사를 걱정하게 될 노릇이다. 은찬은 킥킥 웃으며 테이블 위에 놓은 주스 잔을 잡았다. 새콤달콤한 오렌지 주스를 홀짝홀짝 마시던 은찬은 자신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동만과 시선이 마주쳤다.

“뭘 그렇게 보냐?”

“그거 오렌지 주스야?”

“보면 몰라? 아줌마가 바로 갈아서 주는 백 퍼센트 오렌지 주스다. 왜? 먹고 싶어? 한 잔 더 달라고 할까?”

“아니. 너 원래 그거 싫어했잖아. 시다고.”

은찬은 반 이상 비운 오렌지 잔을 잠시 응시하다가 피식 웃었다.

“요즘 들어서 맛있더라고.”

“살 좀 찐 거 같다?”

“그래?”

눈을 가늘게 뜬 동만은 은찬을 샅샅이 관찰했다. 그런 관심이 귀찮기만 한 은찬은 머리를 긁적이며 남은 오렌지 주스를 마셨다. 동만이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을 동안 은찬은 점심 메뉴에 대해 고민하기 바빴다.

“너 혹시 임신……한 거 아니지?”

“무슨 소리야. 너 저번부터 계속 이상한 소리 하는데. 나 화낸다.”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거듭된 동만의 의심에 은찬의 표정은 싸늘해졌다. 그러자 동만은 난처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어영부영 말꼬리를 흐렸다.

“아니, 안 먹던 걸 먹고 살도 좀 찐 거 같아서.”

“그냥 입맛이 좀 바뀌고 요즘 많이 먹으니까 찐 것뿐이지. 살 좀 쪘다고 임신이냐?”

“콘돔은 하지?”

“하다 하다 별걸 다 묻는다. 왜? 우리 형 거시기 크기도 알려 달라고 하지.”

이 자식이 도대체 왜 이런 걸까. 김동만 답지 않게 그런 질문까지 퍼붓자 은찬은 슬슬 짜증이 치밀었다. 동만은 은찬의 눈치를 보며 질문의 타당성을 내세웠다.

“아니, 내가 얼마 전에 꿈을 하나 꿨는데. 그거 태몽 같거든. 검정 새끼 고양이가 막 뛰어오는 거야, 내 쪽으로. 얼마나 생생하던지 깜짝 놀라서 깼다니까?”

“개가 아닐까?”

은찬은 시큰둥하게 말하며 거실 창가 너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내가 개하고 고양이를 구분 못 하겠냐? 고양이었다니까?”

“그래서. 태몽 같으니까. 내가 임신한 거 같다고? 그 말이야?”

“꼭 그렇다는 건 아니고…….”

자리에서 일어난 은찬은 팔을 머리 위로 올려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동만과 은찬 사이에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하여튼 김동만. 쓸데없는 데 진지하다니까. 그 관심을 개한테 쏟아부으면 얼마나 좋아할까.

“몇 번을 말하게 만들어. 의사가 절대로 그럴 리 없다고 했다니까? 야, 이따 점심 뭐 먹을래? 아줌마 고기 국수 맛있게 하는데 그거 먹을래? 나 그거 먹고 싶은데.”

갑자기 그게 머릿속에 떠오른 은찬은 몇 번이나 침을 삼키며 말을 했다. 물론 답은 정해진 말이었다. 동만은 좋을 대로 하라는 말을 남기고 정원으로 사라졌다. 은찬은 커다란 거실 유리창 너머로 김동만과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요즘 잠이 부쩍 많아졌지만 원래 좀 많은 편이기도 했다. 다시 잠든 은찬은 점심시간쯤에 눈을 떴다. 그리고 고기 국수를 세 그릇이나 먹어 치우는 먹성을 과시했다. 원래 좀 많이 먹는 편이긴 하지만 요즘 들어 자꾸 뭐가 먹고 싶어졌다.

어느덧 해질녘이 됐다. 그사이 치킨, 과자, 빵, 과일. 가릴 것 없이 먹어 대는 은찬을 동만은 아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쉴 새 없이 온 종일 먹어 대니 그럴 만도 했다.

“속 안 부대끼냐?”

“아니. 괜찮은데?”

실컷 뛰어놀다 지친 두 마리의 새끼 표범이 거실 한가운데 쓰러져 자고 있었다. 동만은 툭 건드려도 미동도 없이 곯아떨어진 녀석들이 귀엽다며 핸드폰을 들이밀어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먹고. 저녁도 먹어?”

“그럼? 먹어야지.”

소파에 반쯤 누워 육포를 질겅질겅 씹고 있던 은찬은 동만의 핀잔에 콧방귀를 꼈다.

“이 정도는 먹어 줘야 몸이 버텨 내거든?”

“뭔 소리야.”

“우리 형, 그거잖아. 낮저밤이. 밤에 끝내준다니까? 내가 그 체력을 따라가기 위해서 이렇게 먹는 거 아니냐. 봐, 먹는 거에 비해 살도 별로 안 쪘지?”

“미친…….”

움직임을 멈춘 동만의 한심스러운 시선이 날아왔지만 은찬은 개의치 않았다.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였으니까. 오히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너도 알지? 나 비혼 주의자였잖아. 그런데 결혼이 이렇게 좋은지 몰랐다? 진작 할걸.”

“그래, 진작하지 그랬냐. 그랬으면 그 난리를 안 피웠어도 될 것이고. 나도 그 개자식하고 엮일 일도 없었을 것이고. 아주아주 평범한 인생을 살았을 텐데. 누구 덕분에 인생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됐단 말이지. 누구 덕분에.”

벌써 몇 개월이 지났는데 아직도 저런다. 은찬이 원망스럽다는 듯 동만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은찬은 씹고 있던 육포를 동만의 머리에 휙 던졌다.

“야, 그래도 꿈에 그리던 아파트 생겼잖아! 너 평생 회사 다녀도 그런 아파트 근처에도 못 가! 그래서? 나 원망해? 어쭈, 그렇단 말이지. 그 개한테 지금 네가 한 말 그대로 말해 줘? 동만이가 너 만난 거 후회한다고!”

“왜 주제가 그쪽으로 쏠리는 건데! 난 너한테 불만이 많다고! 너…… 됐다. 말을 말자. 말해 봤자 내 입만 아프지. 몇 시냐? 나 이제 가도 되지?”

“벌써 가게?”

“그럼, 여기서 살까? 회장님 오시기 퇴근해야지. 눈치 보이잖아.”

“회장님은 좀 늦으시던데? 더 있다 가.”

찍은 사진의 결과물이 만족스러운지 동만은 흐뭇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덩달아 일어난 은찬은 그런 동만을 붙잡았다. 이 넓은 집에 대화 상대라고는 동만뿐이었기 때문이다.

“형 오면 가.”

“됐거든?”

“야아, 나 혼자 애들이랑 있으라고?”

“왜 이래? 아까는 왜 왔냐는 식으로 따지더니.”

동만이 눈을 흘기며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하지만 은찬은 김동만이 자신을 버리고 가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비장의 무기. 고양이 귀와 꼬리를 꺼내 불쌍한 척 힘없이 늘어뜨리면 그게 김동만한테는 직빵으로 먹혔다.

“너 불리할 때마다 그것 좀 안 쓰면 안 되냐?”

“진짜 나 두고 갈 거야?”

“아니.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온종일 너 대신 애 봐 줬으면 내 일은 거기서 끝난 거잖아! 왜 네 뒤치다꺼리까지 해야 하는 건데!”

“에이, 동만아…….”

혹여나 애들이 깰까 봐 동만은 최대한 목소리를 죽이며 정색했다. 은찬은 씨익 웃으며 꼬리를 살랑거렸다.

“에이, 동만아. 알면서.”

“그래, 알지. 널 너무 잘 알아서 탈이지. 부장님 언제 오시는데. 정확히 몇 시 몇 분.”

더 이상 말을 길게 끌어 봤자 입만 아플 뿐이라는 걸 동만은 잘 알고 있었다. 체념한 녀석은 다시 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꺼냈다.

“한 30분 뒤?”

“정확히 30분 뒤에 간다.”

“쩨쩨하게.”

“쩨쩨하고 싶어서 쩨쩨한 게 아니란다. 정시에 퇴근해서 집에 안 들어가면 그 개자식이 개지랄을 떠니까 그렇지. 5분이라도 늦잖아? 왜 늦었는지부터 시작해서 사람 질릴 정도로 귀찮게 하거든?”

“질릴 정도로 섹스해?”

“머리에 음란마귀로 가득 찬 새끼야. 너는 죄의식도 없냐? 애들 앞에서 그런 말이 쉽게 나와?”

“쟤들이 뭘 알겠냐?”

“이 녀석들도 귀가 있거든?”

“너 콘돔 없이 해 봤어? 진짜 죽이지?”

은찬은 태연하게 음담패설을 늘어놓았고 동만은 대화를 단절하고 핸드폰에 집중했다.

“개한테 늦는다고 연락하는 거야? 고작 30분인데?”

“말했잖아. 늦으면 개지랄을 한다고. 킁킁거리면서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냄새 맡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다. 의심병 있나 봐.”

“원래 바람둥이들이 정착하면 그렇다고 하잖아. 자기가 해 본 짓이 있으니까 상대방도 그럴까 봐 그런 거겠지.”

은찬이 킥킥 웃으며 주절주절 거릴 동안 동만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 뭔가 마음에 안 든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부장님도 그러겠네?”

“어? 뭐가?”

“아니, 네 말대로라면 부장님도 바람둥이였잖아. 좋겠다. 경험이 많으니까 밤일도 잘하는 거잖아.”

갑자기 저 자식이 왜 저래? 순간 표정이 싹 변한 은찬은 뚱한 표정으로 동만과 눈싸움을 벌였다. 별생각 없이 던진 말에 동만은 잔뜩 독이 오른 상태였고 은찬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야, 그냥 던진 말을 꼭 그렇게 받아쳐야겠냐?”

“왜? 내가 틀린 말 했어?”

“너 지금 은근히 그 개 편드는 거지? 좀 전까지는 귀찮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그래도 애인이라고 편드는 거지?”

“그 개새끼. 욕해도 내가 욕하지 남이 욕하니까 좀 그렇다?”

갑자기 은찬은 동만을 그 개에게 빼앗긴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정색할 필요는 없잖아. 왠지 모를 서운함이 밀려온 은찬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동만을 등지고 앉았다. 잠시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평소였으면 동만이 먼저 말을 걸었겠지만, 지금은 녀석도 굳게 입을 다문 채였다.

그렇게 10분이 흘렀을 때였다. 현관문 도어 록 열리는 소리에 제일 먼저 반응한 건 자고 있던 새끼 표범이었다. 벌떡 일어난 녀석들은 곧장 현관으로 달려갔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은 주한밖에 없었다. 동만과 함께 있는 게 조금 껄끄러웠던 은찬은 일찍 퇴근한 그의 등장이 내심 반가웠다.

“요한아, 유한아. 아빠 왔다.”

문을 활짝 열고 들어온 주한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두 녀석을 보자마자 함박 미소를 지었다. 낑낑거리다가 주한의 품에 폴짝 안긴 두 녀석은 온몸으로 반가움을 표시했다.

“아빠도 보고 싶었어. 은찬아, 나 왔어. 동만 씨 여기서 보네요.”

그는 동만이 여기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인사를 했다. 두 녀석을 품에 안은 주한은 닫힌 문을 다시 열었고 익숙한 얼굴이 불쑥 나타나 은찬을 놀라게 만들었다.

“우와, 거실 봐. 여기가 회장님이 사는 곳이구나? 으리으리하다, 으리으리해. 야, 고양이 나왔다. 동만 씨, 나 왔어요! 히…….”

초대받지 못한 손님. 이리한의 등장에 은찬은 미간을 왈칵 구겼다. 자연스럽게 시선은 동만을 살폈다. 이리한의 등장이 불편한지 반기지도 않았다. 뭐야? 이럴 거면서 아까는 왜 편든 건데? 고양이 수인 은찬은 인간 김동만의 마음을 알다가도 모르겠다. 심오하다. 심오해.

“어? 진짜네? 동만 씨한테 듣긴 했는데. 진짜 새끼 표범이 됐네?”

뒤늦게 주한의 품에 안긴 두 아이를 발견한 이리한은 신기한 듯 쳐다봤다. 그러더니 손가락으로 애들 머리를 쿡쿡 찌르며 성질을 돋웠다. 가뜩이나 이리한을 좋아하지 않던 녀석들이니 그런 손짓이 기분 좋을 리 없었다. 콧잔등을 찡그리며 하악질을 했지만,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한 이리한은 재미있는지 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오, 니들도 맹수라고 성질내는 거야?”

손가락을 머리를 툭툭 치는 행동을 할 때마다 애들은 앞발로 그것을 잡기 위해 버둥거렸다. 분명 날카로운 손톱을 바짝 세우고 있는데 이리한만 모른다. 저러다 또 피 보지. 은찬을 비롯한 모두의 시선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만하지?”

주한이 싸늘한 시선과 함께 던진 작은 경고에 이리한은 머쓱하게 웃으며 손을 거뒀다. 그리고 조용히 동만의 뒤로 피신했다.

“저 자식은 왜 데리고 온 거예요?”

은찬의 볼멘소리에 주한은 아이들을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자신에게는 죄가 없음을 알렸다.

“내가 데려온 거 아니야. 집 앞에서…….”

“데려오긴 누가 데려와? 내가 스스로 온 건데?”

주한의 말을 끊어 버린 이리한은 당당하게 말하며 씨익 웃었다. 그 말에 동만은 눈을 크게 뜨고 따졌다.

“언제부터? 설마, 너……! 하루 종일 밖에서 나 기다린 거 아니지?”

“설마. 나도 바쁜 사람이거든요? 하루 종일까지는 아니고 한 네 시간 정도?”

“미치겠다! 그냥 전화하지!”

“에이, 일하는 거 뻔히 아는데 어떻게 그래요. 퇴근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30분 늦는다고 하길래 무슨 일 있나 싶어서 문 앞에서 기웃거리다가 앞에서 이 자식 만났지 뭐예요.”

네 시간. 이리한은 이 집 밖에서 네 시간을 기다렸다고 밝혔다. 하여튼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니까. 이 와중에도 이리한은 칭찬해 달라는 듯한 기세로 동만을 빤히 바라보았다. 눈이 얼마나 반짝거리는지 제삼자인 은찬마저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번 저러니 동만이 정색하지. 누가 개수인 아니랄까 봐. 뭐 하기만 하면 칭찬해 달란다. 왜 여기에서도 저 녀석을 봐야 하는 걸까. 은찬은 괜히 저 면상을 한 대 후려갈기고 싶었다.

“스토커냐?”

“주인님 계신 곳은 어디든 가서 지켜 주고 싶은 마음이랄까. 야, 고양이. 너는 이 순수한 마음을 어떻게 스토커하고 비교하냐?”

“그게 한 끗 차이거든. 너, 동만이 애인 아니었으면 바로 경찰에 신고했어. 너 범죄자 될 끼가 다분해.”

“그럴 일 없거든? 요즘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데. 누가 동만 씨 납치하면 어떻게 해? 내가 지켜야지.”

납치……. 그 단어 하나에 은찬과 주한의 시선은 김동만에게 집중됐다. 어딜 봐서?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얼굴이 특별나게 잘생긴 것도 아닌 평범한 회사원인 김동만을? 오히려 납치당할 확률이 높은 건 이리한 쪽이었다. 그리고 요즘 시대에 누가 납치를 한다고.

“야, 너 뭐라고 말 좀 해 봐.”

동만은 제 뒤에 있는 이리한을 아예 외면해 버렸다.

“개가하는 소리를 뭘 그렇게 진지하게 듣고 있냐? 그냥 씹어. 개소리야.”

뭐야 이 온도차는. 아까는 그렇게 이리한을 챙기던 녀석이 지금은 너무나 매정했다. 동만은 입이 삐죽 나온 이리한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서둘러 나갈 채비를 했다.

“나 간다. 내일 보…….”

“야, 이놈들! 아무리 내가 좋지만 그러면 안 돼! 바지에 구멍 나!”

잠깐 다른데 정신이 팔린 사이. 두 마리의 새끼 표범은 이리한의 바짓가랑이를 물고 늘어졌다. 바지를 씹고 뜯고 맛보고 하다가 손톱을 세워 긁어 버리는 짓까지 서슴없이 벌였다. 이리한이 몇 번이나 발로 슬쩍 밀어 내도 두 녀석의 집착은 끈질겼다.

아무리 새끼 표범이라 해도 맹수는 맹수였다. 새 것 같은 바지가 눈 깜짝할 사이에 넝마조 각이 되었다. 분명 고가의 바지겠지만, 다행히 재벌 집 막내아들인 이리한은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해맑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 내가 많이 봐주는 거다. 커 봐. 너희 다 죽었어. 진짜 복수 제대로 할 거다.”

애들한테 복수를 다짐하고 있었다. 은찬은 잠시나마 저런 하찮은 개 따위에게 동만을 빼앗겼다 생각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동만도 그런 이리한이 부끄러웠던지 다급하게 녀석의 뒷덜미를 잡고 현관 쪽으로 향했다.

“벌써 가요? 왜요? 나 이제 왔는데? 나 여기 구경도 안 했는데?”

“입 닥쳐! 제발 어디 가서 가만히 있으라고 몇 번을 말해!”

“그래서 밖에서 네 시간을 기다렸잖아요! 주한아, 나 갈게! 야, 고양이! 나 다음에 또 온다!”

동만에게 억지로 끌려가던 이리한은 그 와중에 인사는 빼먹지 않았다. 해맑게 손을 흔드는 녀석을 은찬은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우리 동만이 고생이 많다. 그냥 그 생각만 하고 있을 때였다. 동만이 막 문을 열기 직전 문이 스스로 벌컥 열렸다.

“으악!”

“어?”

동만의 단발의 비명 뒤로 김 실장이 나타났다. 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당황해하는 동만과 이리한을 번갈아 보았다.

“아직 퇴근 안 했나 봐요?”

“……이제 하려고.”

“회장님, 동만 씨 아직 있습니다. 네, 네. 여기 있습니다. 네, 그렇게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김 실장은 그 소식을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에 전달했고 통화를 끝낸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회장님께서 생각보다 일정이 일찍 끝나셔서 곧 도착하실 겁니다. 김동만 씨 바쁘지 않으면 다 같이 저녁 함께 하는 건 어떻겠냐고 여쭤보시네요, 회장님께서.”

회사원에게 회장님의 말은 곧 법이었다. 고로 김동만에게 거부권이란 있을 수도 없는 일인 것이다. 김 실장의 물음에 동만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은찬은 자신을 향한 동만의 비난 어린 시선을 외면했다.

그로부터 15분 뒤 회장님이 도착하셨다. 평소보다 일찍 오신 걸 보니 애들 때문인 게 확실했다.

식탁에 둘러앉은 어른 여섯.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도우미 아줌마를 제외하고 모두 입을 꾹 다문 채 식탁 정중앙에 앉은 회장님의 눈치를 살폈다. 고요한 정적 속에서 두 마리의 새끼 표범은 거실과 부엌을 종횡무진하며 신나게 뛰어다녔다.

회장님은 두 녀석 덕분에 집에 활기가 돈다며 소리 내어 웃으셨고 동만은 그저 이 자리가 가시방석처럼 보였다. 의도치 않게 숙연한 식사 자리가 됐다. 다들 말없이 먹기만 하고 있을 때, 분위기를 풀어 보고자 회장님이 말문을 열었다.

“저 녀석들 돌보느라 김동만 씨 고생이 많죠?”

“아닙니다. 회장님.”

“많이 먹어요. 나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우리 은찬이 친한 친구잖아요.”

저 녀석, 그 고양이에서 우리 은찬이로 바뀐 호칭이 은찬은 괜히 낯간지러웠다.

“내가 요즘 저 녀석들 보는 재미에 산다니까. 자네가 보기에 어때? 저 녀석들 귀엽지?”

“그럼요! 진짜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싶을 만큼 귀엽다니까요? 애들이 너무 빨리 자라니까 속상한 거 있죠?”

“내 마음이 그래. 고스톱 칠 때부터 느낀 건데 우리 통하는 데가 있어.”

“제가 오늘 애들 사진 찍은 거 몇 장 보내 드려요? 정말 끝내주게 귀엽게 나온 거 있거든요! 아…… 회장님 폰으로 보내는 건 좀 그런가? 아니면 김 실장님 폰으로 보내 드려도 되는데….”

신나게 대화를 주고받던 중 동만이 주춤거리자 회장님은 손사래를 쳤다.

“불편하게 그럴 필요 없지. 김 실장, 이따가 식사 끝나는 대로 김동만 씨한테 내 개인 폰 번호 알려줘.”

“네, 회장님.”

“내가 요즘 눈이 침침한 게 노안이 온 것 같은데, 되도록 크고 잘 나온 사진으로 부탁하네.”

뭔가 분위기가 훈훈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이리한이 아니었다. 주인의 관심을 다른 데 빼앗긴 이리한이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대박. 노망나셨어요?”

뜬금없는 단어 소환에 국을 떠먹던 주한은 기침을 해 댔고 은찬은 입을 떡 벌렸다. 동만도 놀라 자빠질 표정을 짓고 있는데 당사자만 뭐가 잘못됐는지 모르는 낌새였다.

저 바보. 노안을 노망으로 들은 것이다. 회장님이 그런 이리한을 빤히 쳐다보며 되물었다.

“뭐라고 했지?”

“회장님, 병원 가 보세요. 모든 병은 초기에 잡아야 해요.”

은찬은 또다시 칭찬해 달라는 듯 씨익 웃는 이리한과 마주친 시선에 고개를 저으며 눈치를 줬다. 야, 개. 그거 아니야. 아니라고! 하지만 눈치 꽝인 이리한은 다른 뜻으로 해석했다.

“혹시 다들 알고 나만 몰랐던 거였어? 진작 말해 주지. 모른 척할 건데.”

망했다. 회장님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김 실장.”

“네, 회장님.”

결국, 회장님은 수저를 소리 나게 내려놓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와중에도 이리한의 개념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왜요? 더 드세요. 체력이 있어야 오래오래 사시는 거예요.”

마지막 폭탄 발언에 회장님은 싸늘한 시선과 함께 굳게 닫힌 입을 열었다.

“앞으로 이 집 안에 개는 출입 금지해.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들여보내지 마.”

“네, 알겠습니다.”

“그럼 식사 마저들 해. 노망난 늙은이는 방에 들어가서 쉬도록 할 테니까.”

“에이, 삐지셨어요?”

차갑게 돌아서는 회장님의 등에 그 말을 마지막으로 던지고 이리한은 김동만에게 끌려 나갔다. 귀 끝까지 빨개진 동만은 몸 둘 바를 모르겠다며 연신 회장님께 사과했지만 보기보다 소심하신 회장님은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은찬은 또다시 끌려 나가는 이리한을 구경했다. 이번에는 새끼 표범도 은찬의 발치에 앉아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왜에! 내가 뭘 잘못한 건데에!”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지 못하는 눈치 없는 개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은 한심 그 자체였다. 역시 개하고는 상종도 하지 말아야지. 아무리 봐도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다.

“개하고는 노는 거 아니다.”

은찬의 차분한 가르침에 두 마리의 새끼 표범이 작은 소리를 냈다.

***

오늘도 은찬은 거실 소파에 누워 아이들과 놀아주고 있는 김동만을 관찰했다.

눈을 뜨면 김동만이 와 있고, 밥 먹고 간식 먹고 꾸벅꾸벅 졸다가 잠시 아이들과 놀아주고 낮잠을 자는 패턴. 지난 며칠 동안의 일과가 이랬다. 물론 이주한과 밤 생활도 뜨거웠다. 어젯밤도 얼마나 혼쭐이 났는지 아직도 엉덩이가 얼얼했다.

나른한 오후. 은찬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히죽 웃었다. 이 생활을 쭉 유지하고 싶을 만큼 모든 게 완벽했다.

“뭘 그렇게 웃냐? 너 또 야한 생각 했지?”

덤덤한 동만의 물음에 은찬은 배시시 웃었다.

“우리 동만이 눈치 빨라졌다?”

“눈치 같은 소리 한다. 너 얼굴에 음란이라고 써 있거든? 너 요새 먹고 자고 먹고 자고만 했더니 얼굴에 살이 오를 때로 오른 거 모르지? 어째 애들보다 니가 더 팔자가 폈다?”

“너는 입만 열면 잔소리냐. 입 안 아파?”

“답답해서 그런다! 밖에 저렇게 정원이 넓은데 나가 보고 싶다는 생각 안 들어?”

동만은 지금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하고 있었다. 손은 고양이 용 낚시 장난감을 흔들고 있었고 입은 은찬을 향해 잔소리를 퍼부었다. 잘 살고 있느냐고 가끔 안부 전화 오는 엄마보다 잔소리가 더 심했다. 외국에 있는 시어머니보다 김동만 시집살이가 더 무서운 지경이랄까.

“어, 안 들어. 춥고 귀찮게 왜 나가.”

“계속 그렇게 누워 있으니까 배가 나오지.”

은찬은 짧게 입맛을 다시며 제 배를 만지작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어젯밤 섹스하는 도중 제 배를 보고 깜짝 놀랐다. 살이 쪘다는 건 느꼈지만, 이 정도일 줄 몰랐다. 이주한은 귀엽다고 했지만 사실 좀 심각한 상태였다.

이 정도로 살이 찐 적은 없었는데……. 임신했을 때 빼고는 말이다.

“다이어트 해야겠지?”

“심각성을 아는 놈이 육포를 그렇게 처먹냐?”

동만의 직구에 은찬은 습관처럼 먹고 있던 육포를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요즘 들어 저도 모르게 뭔가를 자꾸 먹고 있었다. 이러니까 살이 찌지.

“개는? 오늘도 데리러 와? 그놈도 진짜 충성심 하나 대단하다.”

“그게 개하고 고양이의 차이점 아니겠냐.”

“고양이가 뭐 어때서?”

“내가 널 2년 넘게 키우면서 많이 깨우쳤지. 너도 느껴야 해. 너 손 많이 가고 자기중심적인 놈이라는 거.”

자신을 사육했다는 동만의 의견에 은찬은 미간을 구겼다. 맞는 말이지만 어째 이제는 개가 더 좋다는 투로 들렸다.

“그래서? 이제 고양이에서 개로 취향 바뀐 거냐? 지조 없게?”

“거기서 왜 지조를 찾아. 각각 다 매력이 있는 거지. 물론, 난 아직 고양이 파지만.”

그럼 그렇지. 어쩌다 보니 개 수인과 살고 있지만 고양이 덕후인 김동만이 쉽게 변할 리 없었다. 회장님께 망언을 남발한 그날 이후 이리한은 이 집안에 발을 들이지 못했다. 동만은 차라리 그편이 좋다며 이리한의 출입 금지를 반겼다.

“근데, 너 결혼은 안 해?”

“남자 놈들끼리 무슨 결혼이야.”

“우리는 했는데?”

“부장님하고 너는 특이한 경우고. 나하고 그 개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그냥 종을 뛰어넘는 게이로밖에 안 보이거든?”

“어쨌든, 그 개 집안에서 너 좋아하잖아.”

“그러니까. 난 그게 진짜 미스터리라니까? 너 그 집안사람들 얼굴 봤지?”

결혼식장에 왔을 때 봤다. 이리한의 어머님과 아버님의 용모가 빼어나니 삼 형제 모두 잘생긴 건 당연해 보였다.

“다들 모델해도 되겠던데?”

“그치? 그런 사람들이 나보고 귀엽게 생겼단다. 그게 칭찬인지 욕인지. 들을 때마다 헷갈린다니까.”

은찬은 동만이 낚시 장난감을 흔들 때마다 허공에 손을 날리는 두 마리의 새끼 표범을 멍하게 보았다. 동만의 능수능란한 손길에 농락당하는 게 웃겼다.

“그쪽 집안 취향이 이상한 거 아닐까?”

“죽을래? 하여튼 만날 때마다 다른 세상 사람들 같아서 심장이 쪼그라든다고.”

“그래도 평생 그렇게 살 수 없잖아.”

“아직 사귄 지 1년도 안 됐는데 뭐.”

“사귀자마자 동거부터 한 거 면 말 다한 거지. 이리한 누가 채 가기 전에 결혼하라니까?”

“유은찬.”

“왜?”

“개는 말이다……. 특히 저 집안은 그런 게 있더라고.”

“뭐가?”

동만은 뭔가 체념하듯 한숨을 크게 내쉬며 말을 이었다.

“한번 짝을 정하면 그대로 쭉 가는가 봐.”

“에이, 설마. 이리한이 그동안 얼마나 문란했는지 다 아는데?”

은찬은 피식 웃으며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동만의 표정 속에는 슬픔, 체념, 인내, 그리고 사랑. 모든 게 복합적으로 섞여 있었다.

“그러니까, 나도 그게 이상해서 저 자식 어머님께 물어봤거든? 근데 노는 거 하고 진심을 준 상대는 다른 거래.”

한마디로 김동만은 이리한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은찬은 배를 잡고 박장대소를 했다. 어쩌면 김동만은 무릎 연골이 다 닳을 때까지 개와 산책하러 다녀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축의금은 얼마를 원하냐?”

“야!”

정색하는 동만을 무시하고 은찬은 자리에 앉았다. 이대로라면 정말 돼지가 될지도. 아무래도 나가서 걷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걸을래?”

“산책하게?”

“어, 너무 안 움직였더니 몸도 찌뿌둥하고 해서 좀 걸어…… 어?”

기지개를 켜며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하고 돌았다. 왜 이러지? 순간적으로 밀려오는 어지러움에 당황한 은찬은 굳어 버렸다.

“밖에 추우니까 옷 걸치고……. 야, 왜 그래? 유은찬!”

동만이 뭐라 더 말했지만 은찬은 대답할 수 없었다. 눈앞이 깜깜해졌기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온몸에 힘이 쭉 빠져 버린 은찬은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곳은 집이 아니었다. 코끝을 스치는 소독약 냄새에 병원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뒤늦게 자신이 쓰러졌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을 때였다.

“은찬이 눈 떴어요!”

동만의 외침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침대 주위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회장님과 김 실장. 이주한과 김동만 그리고 이리한까지. 익숙한 얼굴이 총집합하여 은찬을 부담스럽게 내려다보았다.

“은찬아, 괜찮아?”

얼굴 가득 걱정이 서려 있는 이주한의 물음 뒤로.

“다른데 불편한 데는 없지?”

회장님의 물음이 이어졌다.

“인마! 너 그렇게 쓰러져서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동만은 원망 어린 핀잔을 쏘아붙이며 울먹였다.

“내가 살다 살다 너 걱정하는 날이 올 줄이야.”

이리한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다들 왜 이래? 한 사람씩 차례대로 훑어보던 은찬은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분명 잠시 정신을 잃은 건 알겠는데 이렇게 호들갑을 떨 만한 일인가 싶었다.

혹시 죽을병이라도 걸린 건가? 그래, 그럴지도 모른다. 드라마에서 가끔 이런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우연히 병원에 실려 간 주인공에게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결과가 나왔다는 뭐 그런 거.

눈앞이 아득해진 은찬은 자신을 빙 둘러싼 사람들의 표정을 다시 찬찬히 훑었다. 특히 이주한의 표정이 참담했다. 은찬과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는 그의 행동에 뭔가 감을 잡았다. 아무래도 그건가 보다. 은찬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모두 놀란 표정으로 극구 말리기 바빴다.

“야! 왜 일어나려고 해! 누워 있어! 누워 있어!”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라. 다 들어줄 테니까. 너 지금 누워 있어야 한다고 좀 전에 의사 선생이 신신당부하고 갔어!”

다들 한꺼번에 떠들어 대니 시끄러워서 귀가 아팠다. 그들의 만류에도 고집스럽게 몸을 일으킨 은찬은 베개에 등을 기대앉았다. 그리고 조용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주한에게 물었다.

“애들은?”

“걱정하지 마. 아주머니가 봐 주고 계셔.”

그 말을 끝으로 병실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다들 암묵적으로 은찬의 눈치를 보며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은찬은 어두운 표정으로 링거 줄을 멍하니 응시했다.

예상대로 자신이 병에 걸린 것이라 확신한 은찬은 코끝이 시큰거렸다. 갑자기 식욕이 늘어난 것도 살이 찌기 시작한 것도 배가 나온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착잡한 마음으로 잠시 생각에 잠긴 은찬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의사 좀 불러 주세요.”

“왜?”

주한의 물음에 은찬은 이유를 말하는 대신 의사를 불러 달라 재차 요청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다들 쉽게 말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차라리 의사에게 직접 듣는 편을 선택한 은찬은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사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은찬의 분만을 도와준 의사였다. 웃긴 게 마음을 굳게 먹었음에도 의사를 보자마자 울컥 목이 메여 왔다.

의사가 침대 쪽으로 걸어오는 그 짧은 순간, 주한과 아이들 그리고 부모님 얼굴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인생이라는 건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지만 이건 너무 참담한 현실이었다.

“선생님.”

“네.”

“저, 마음의 준비 했으니까. 사실대로 말해 주세요.”

“네?”

동그랗게 눈을 뜬 의사를 마주한 은찬은 애써 태연한 척 했다.

“저…… 어디가 안 좋나요.”

“아, 빈혈입니다.”

거짓말. 거짓말일 것이다. 고작 빈혈 때문에 다들 병실에 모여 있을 리 없었다. 다들 자신을 위해 애써 태연한 척 하고 있는 게 고마울 정도였다. 은찬은 아련한 표정으로 그들을 번갈아 보았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임신성 빈혈입니다.”

“네?”

마지막으로 동만을 응시하던 은찬의 시선은 황급히 의사 쪽으로 돌아갔다.

“초반에는 별다른 증상이 없다가 임신 초기가 넘어서는 시점에서 간혹 빈혈이 발생하는 분이 있습니다. 걱정할 만큼 위험 수준은 아니고 철분제 드시고 정기적으로 검사받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네? 임신성 빈혈이요? 누가요?”

은찬의 되물음에 의사는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물론 유은찬 씨죠. 이거 다 맞으실 동안 안정 취하시고 퇴원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아니면 입원하신 김에 검사받고 가시는 게 어떠세요?”

임신성 빈혈? 빈혈 앞에 임신이라는 단어가 들어갔으니 임신했다는 뜻일 것이다. 설마, 내가? 또 임신했다고……? 말도 안 돼. 은찬은 소리 나게 웃으며 다른 이들의 표정을 살폈다. 다들 눈도 마주치지 않고 피했다. 뭐야, 이 분위기.

“형, 의사 선생님이 나보고 임신성 빈혈이라는데 농담이지? 다른 병인데 괜히 이걸로 페이크 치는 거지? 다들 왜 말이 없어요? 야, 김동만. 뭐라고 말 좀 해 봐.”

“어? 그러니까, 그게…….”

김동만 답지 않게 우물쭈물하는 게 이상했다. 이럴 때 유일하게 빛을 발휘하는 존재가 있었다. 긴장감이 가득한 공기를 가르고 이리한이 물개 박수를 치며 축하 멘트를 날렸다.

“야, 고양이! 임신 축하해!”

“…….”

“한 번하기도 힘들다는 임신을 두 번씩이나 하냐?”

“야, 닥쳐! 조용히 해!”

“왜! 아까 저 자식 깨기 전에 다들 좋아했으면서 왜 아닌 척해? 회장님이 젤 좋아하셨잖아요! 야, 넌 아무리 멍청해도 그렇지 임신한 것도 몰랐냐?”

개한테 무시당한 건 둘째 치고 은찬은 이 현실을 인정할 수 없어서 헛웃음이 터졌다. 임신. 내가 또 임신이란다. 은찬은 살벌한 시선으로 의사를 뚫어지게 보았다.

“임신이요?”

“네, 임신…입니다. 그럼 전 이만. 바빠서…….”

은찬의 살기 어린 시선에 흠칫한 의사가 황급히 도망치기 직전. 어금니를 꽉 깨문 은찬이 버럭 소리쳤다.

“어이, 의사!”

“…….”

“농담이지?”

“…….”

의사는 말이 없었다. 그것은 불길한 징조였고 은찬에게 절망적인 소식이었다.

“그럴 리 없다며! 두 번 다시 임신할 확률은 희박하다며! 그렇게 말했어, 안 했어!”

“저 그게……. 확률적으로 따지자면 정말 희박한 게 맞는, 데…….”

“안심하라고 했잖아! 그런데 이게 뭐야……! 또 임신이라고? 지금 장난쳐? 장난치냐고! 어쩔 거야! 어쩔 거냐고오오!”

“……그러게요. 저도 이렇게 될 줄은…….”

“절대로 그럴 리 없다고 했잖아! 책임져, 책임지라고! 애 낳은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임신이야! 이게 말이 돼? 말이 되냐고!”

분노에 찬 은찬은 윽박지르며 의사를 향해 달려들었고 모두 그런 은찬을 말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은찬아, 진정해! 너 지금 임신 상태야!”

“놔! 저 새끼 죽이고 말 거야! 이거 놔, 형!”

눈을 번뜩이며 손톱을 바짝 세운 화가 난 고양이 수인의 모습에 의사는 겁을 먹고 덜덜 떨었다.

“그럴 리 없다고 했잖아! 없다고!”

임신.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은찬은 눈물이 앞을 가렸다. 첫 임신이야 우연이라고 쳐도 두 번은 정말 계획에도 없던 것이었다. 이제 겨우 살 만해졌는데 왜 이런 시련이 자신에게만 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걸 누굴 탓해. 콘돔 안 쓴 사람 탓이지.”

은찬이 의사의 멱살을 흔들기 위해 발악하던 중 이리한이 불쑥 던졌다. 한번 입에 시동을 건 녀석은 동만이 말려도 소용없었다.

“너 왜 이래! 조용히 하라고 했지!”

“아니,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의사가 아무리 그렇게 말했다 하더라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피임은 했었어야지.”

“좀! 너 왜 이렇게 눈치가 없냐?”

“내가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저 고양이가 눈치가 없는 거죠! 자기 임신한 걸 왜 남 탓을 한데?”

“그만하라고 했다!”

동만이 윽박지르며 리한의 입을 틀어막았지만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침착함을 되찾은 은찬은 의사가 아닌 이리한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

“……형.”

“어?”

“나 지금 미치기 일보 직전이거든? 저 개새끼 죽여 버리기 전에 당장 여기서 내보내.”

은찬의 말이 끝나자마자 동만은 리한의 팔을 잡아끌었지만 무슨 고집인지 녀석은 나가지 않으려고 버텼다.

“아, 왜! 나도 여기 있고 싶다고! 축하해 줬잖아!”

“그냥 좀 나가!”

“동만 씨도 나갈 거야?”

“그래! 간다, 가! 그러니까 좀 나가자!”

“응!”

동만도 같이 나가겠다고 말하니 그제야 이리한은 제 발로 방을 나섰다. 다시 정적이 흐르는 방안에서 은찬은 고개를 떨구며 속삭였다.

“형 빼고 다 나가 주세요.”

은찬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방 안에는 둘밖에 없었다. 이 상황이 너무 절망적이라 은찬은 울컥 목이 메여 왔다. 임신이라니……. 또 임신이라니!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은찬은 울먹이며 이주한에게 물었다.

“뭘 어떻게 해.”

“낳아?”

“그럼?”

“나보고 그 고생을 또 하라고? 애 낳은 지 얼마나 됐다고! 술도 마시고 싶고, 매운 것도 먹고 싶고, 밤새도록 놀고 싶다고! 나 아직 젊어! 하고 싶은 거 많다고!”

“은찬아, 진정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너도 나도 몰랐잖아.”

“이리한, 저 개새끼 말이 맞아! 누굴 탓해! 콘돔 안 쓰고 맨날 해댄 내 탓이지! 하기야, 그 큰 좆으로 맨날 박아 대는데 애가 안 생기고 배기겠어?”

“유은찬. 너 꼭 말을 그렇게 해야겠어?”

“생각도 안 하고 있던 애가 생겼잖아! 지금 내 배에 또 애가 있다고! 나도 남자라고!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배에 애가 있다고 하면 내 기분이 어떻겠어!”

은찬은 거칠게 머리를 긁적이며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죽을병이라고 생각했더니 임신이라니. 너무 극적인 반전이었다.

“미안해. 다 내 탓이야. 그렇게 해서 기분이 풀리면 얼마든지 날 욕해. 은찬아…… 남자 수인 임신은 정말 어렵다고 하잖아. 우린 그 어려운 걸 두 번이나 해냈잖아. 이건 신이 주신 선물이 아닐까? 그러니까 기분 좋게 생각하자. 응?”

주한은 헝클어진 주한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기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하지만 흥분한 은찬에게 그 말이 아름답게 들릴 턱이 없이 없었다.

뭐? 선물? 그 어려운 걸 두 번이나 해냈어? 지랄을 한다, 지랄을 해. 그 죽음의 문턱을 두 번이나 맛봐야 하는 심정을 알 턱이 있냐? 한쪽 입꼬리를 비릿하게 올린 은찬은 자신을 향해 싱긋 웃고 있는 주한에게 버럭 소리쳤다.

“그럼 네가 임신을 해 보든가!”

“…….”

“말은 쉽지! 씨발…… 네가 해 보고 그런 소리를 나불거려 봐! 어,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너도 임신되나 해 보자!”

이성을 잃은 은찬은 주한의 팔을 잡아 침대로 끌어당겼다. 속수무책으로 끌려온 주한이 침대 위로 나자빠지고 그가 반항할 틈도 없이 와이셔츠를 뜯어 버렸다.

“은찬아! 야, 유은찬!”

“나만 당할 수 없잖아! 공평하게 해! 공평하게!”

손은 말보다 빠르게 이미 그의 바지를 벗기는 중이었다. 바지를 사수하려는 주한과 끈질기게 벗기려는 은찬. 두 사람의 실랑이가 잠시 이어지고 있을 때였다. 쾅 소리를 내며 문이 거칠게 열렸다.

“유은찬!”

병실을 가득 채우는 고함 소리에 깜짝 놀란 은찬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넓은 포복으로 걸어오고 있는 엄마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짧게 혀를 찼다. 망했다. 사위 사랑이 지극한 엄마가 이런 꼴을 가만히 보고 있을 리 없었다.

“너 이게 무슨 짓이야!”

“엄마…… 그게 아니고.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임신이라는 말을 입에 담기 거북했다. 은찬이 머뭇거리고 있자 엄마가 먼저 아무렇지 않게 그 단어를 입에 담았다.

“임신했다며.”

“…….”

“넌 어떻게 임신한 지 2개월이 됐는데도 몰라?”

이 개월이었구나. 은찬은 쏟아지는 엄마의 잔소리를 묵묵히 들으며 열린 문 너머를 힐끔거렸다. 회장님를 비롯한 모두 살짝 열린 문 너머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방 안을 훔쳐보고 있었다.

“유은찬! 엄마가 지금 너 때문에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평소 네 몸에 얼마나 무관심했으면 그걸 몰라!”

“…….”

히어로처럼 나타난 엄마 덕분에 다행히 더 이상 소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은찬은 쥐 죽은 듯 조용히 입을 다물었고 그제야 병실 안으로 돌아온 모두는 은찬의 임신을 마음껏 축하했다. 주인공인 은찬만 빼고 다들 축제 분위기였다.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던 은찬은 소리 없이 눈물을 글썽였다. 이런 와중에도 배가 고프다는 사실이 더 절망적이었다.

***

오랜만에 햇볕이 따뜻한 오후였다. 하늘도 구름한 점 없이 깨끗했고 뺨을 스치는 바람도 한결 부드러웠다. 유난히 추웠던 겨울이 끝나고 봄이 왔다는 것이 피부로 와 닿았지만 지금 은찬에게 계절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세상 다 산 표정으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은찬은 눈앞에 불쑥 나타난 츄러스를 시큰둥하게 응시했다.

“왜? 이거 먹고 싶다고 했잖아. 안 먹어?”

“감자는?”

은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동만은 손에 들고 있던 치즈를 추가한 버터구이 감자를 내밀었다. 냉큼 그것을 받아든 은찬은 한입 가득 먹자마자 너무 맛있어서 눈을 찡그렸다. 역시 놀이동산은 이런 맛에 오는 거지. 별거 아니지만 나와서 먹으니 더 맛있다.

“그렇게 맛있냐?”

“존맛이지. 너 내 거 훔쳐 먹을 생각 하지 마! 먹고 싶거든 하나 더 사 와!”

은찬은 동만이 사 온 음식들을 하나라도 빼앗길까 봐 경계했다. 그런 은찬에게 동만은 귀찮다는 듯 쏘아붙였다.

“됐거든. 내가 너처럼 돼지인 줄 아냐? 너 진짜 먹어도 너무 먹는다. 그리고 아무리 회장님이 여기를 통째로 빌려 주셨다고 하지만 너무 자유분방한 거 아니냐? 귀하고 꼬리 그렇게 막 내놓고 다녀도 돼?”

“우리밖에 없는데. 뭐 어때.”

양 볼이 미어터지도록 먹고 있던 은찬에게 동만은 생수병 작은 것을 건넸다.

“야, 천천히 먹어. 누가 훔쳐 먹냐? 어차피 손님은 우리밖에 없으니까 다 니가 먹을 거 아니겠냐.”

“맛있는 걸 어떻게 해! 천천히 먹고 있거든!”

그러면서도 은찬은 입안에 음식물을 오물오물 먹었다.

두 마리의 새끼 표범이 다시 사람으로 돌아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 네발로 신나게 뛰어다녔던 습성을 잊지 못해서인지 한동안 고생했지만, 다행히 아이들은 잘 적응했다. 오히려 그 시기를 넘기자 부쩍 더 성숙해진 것 같았다. 말도 더 잘했고 제 의사도 더 또렷이 밝혔다.

태어난 지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은 아이들의 빠른 성장에 김동만은 놀람을 금치 못했지만, 직감적으로 지옥의 그 날이 다가왔음을 느꼈다. 흔히 미운 네 살이라고 하지만 수인 아기는 딱 지금이 그 시기였다. 호기심이 아주 왕창 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이 과도기를 잘 보내야 했다.

하필 이 시기에 놀이동산에 온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두 아이는 임신 소식을 들은 이후 계속 저기압인 은찬의 다리에 매일같이 매달려 놀이동산에 가고 싶다며 떼를 썼다. 티브이에서 애들이 재미있게 노는 모습에 반한 모양이었다. 아직은 아기였고 사람 많은 곳은 피하고 싶었다. 더군다나 은찬은 사람이 북적거리는 곳에 갈 기분도 몸 상태도 아니었다.

엄마에게 통하지 않자 영리한 두 녀석은 증조할아버지. 즉 회장님에게 떼를 썼고 그 방법은 먹혔다. 두 증손자를 위해 저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줄 기세였던 회장님이 통 크게 놀이동산을 하루 통째로 빌려 버린 것이다.

그래서 자의가 아닌 타의로 끌려온 은찬은 죽을 맛이었다. 이렇게 날이 좋은 날에는 집 소파에 누워서 자야 하는데. 딱 그런 날씨인데. 여기서 이딴 거나 먹고 있는 제 신세가 처량해졌다. 한숨을 푹 내쉰 은찬은 먹던 것을 내려놓았다. 지금 이주한과 이리한은 두 아이에게 미친 듯이 끌려다니고 있을 것이다.

“왜 먹다 말아.”

“입맛이 없다.”

“웃기고 있네. 거의 다 먹어 놓고서.”

동만의 핀잔에도 은찬은 굴하지 않았다. 쓰레기를 한곳에 모아 놓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또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누굴 돼지로 아냐?”

“원래 먹덧이 그런 거라고 하잖아. 안 먹으면 계속 속이 메슥거려서 뭘 자꾸 먹게 된다잖아.”

은찬은 자신이 뭔가를 계속 먹는 행위가 먹덧이라는 것도 나중에서야 알았다. 똥배라고 생각했던 것도 아기집이 자란 것이었고. 첫 아이 때는 입덧 때문에 고생을 시키더니 이번 녀석은 너무 먹어서 문제였다.

“웃긴다, 너. 아까는 그만 좀 처먹으라고 하더니. 무슨 말이 앞뒤가 안 맞냐?”

“우리끼리 장난도 못 치냐? 뭔데? 저기 슬러시? 아니면 따뜻한 거?”

“다 귀찮아. 집에 가고 싶다.”

은찬의 중얼거림에 동만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아직도 기분이 그래? 이제 그만 받아들여. 그런다고 해결된 문제가 아니잖아.”

“그게 마음하고 머리하고 따로 논다니까. 어제는 그냥 내 운명이려니 하고 받아들이려고 했다가 자고 일어나면 내 인생이 왜 이렇게 됐나 싶기도 하고.”

“니 인생이 뭐? 이 정도면 최고지. 돈 많고 잘생긴 남편 있지, 귀엽고 사랑스러운 애들도 있지. 그리고 한 명 더 태어날 예정이지. 시어른들께는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데 뭐가 문제야?”

“그게 내 꿈은 아니었거든?”

“꿈? 꿈같은 소리 하고 있네. 야, 너 발정기 때 이 남자 저 남자 만나고 다니는 것보다야 지금이 훨씬 보기 좋거든?”

눈치 없는 김동만의 팩트에 욱해 버린 은찬은 눈을 가늘게 뜨고 녀석을 노려보았다.

“내가 틀린 말 했냐? 아니잖아. 야, 너 임신했다고 회장님부터 전부 다 너 눈치 보고 있는 거 모르냐? 니가 완전 상전인 거 알지?”

“울 엄마 빼고.”

“아…… 그건 그렇지.”

은찬이 담담하게 말하자 동만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첫 아이를 낳을 때도 사내 녀석이 진통 그거 하나 못 참는다고 혀를 찬 엄마였다. 은찬의 부모님과 두 번 마주친 적이 있던 터라 동만도 반박은 하지 않았다.

“너희 어머님은 강하시지. 아버님은? 좋아하시지?”

“너무 좋아서 매번 울어.”

아버지는 자신은 능력이 되지 않아 한 명만 낳았지만 은찬에게는 힘닿는 데까지 낳으라는 악담도 서슴없이 퍼부었다. 그것도 울면서 말이다.

“이번에는 뭔데? 결과 나왔어?”

“저번에도 말했지만, 초음파는 털 색깔이라든가 그런 거 나오지 않거든? 나와 봐야 알지.”

“딸이야?”

“나와 봐야 안다고.”

“난 공주님이었으면 좋겠다. 이번에야말로 검정고양이 공주님.”

은찬은 상상의 나라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동만을 썩은 표정으로 보았다. 정작 임신한 사람은 아무런 감흥도 없는데 주위에서 이러니 이것도 미칠 노릇이었다. 딸이든 아들이든, 고양이든 표범이든 반갑지 않은 선물임은 확실했다. 피임 미스로 인해 생긴 녀석이니 말이다.

“그래, 많이 기대해라.”

은찬이 남 일처럼 퉁명스럽게 말하자 동만은 어이없다는 시선을 던졌다.

“말하는 꼬락서니 봐라. 너 인마, 배 속에 있는 쪼꼬미한테 미안하지도 않냐?”

“쪼꼬미는 또 뭐냐?”

처음 듣는 낯선 이름에 동만은 히죽 웃었다.

“쪼그맣고 귀여운 공주님이 태어나길 바라는 나의 마음을 담은 태명이랄까.”

작명가 김동만 선생 납셨다. 은찬의 임신을 두 팔 벌려 반기는 동만은 제 미래를 알고 있기나 한 걸까. 은찬은 녀석을 물끄러미 보았다.

“김동만.”

“뭐, 왜. 또 왜 그렇게 부르는데. 나 너 그렇게 보면서 부를 때마다 뭔가 불길해!”

동만은 인상을 쓰며 엉덩이를 살짝 뒤로 뺐다. 그래 봤자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너 요한이하고 유한이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만 봐 주기로 약속했지?”

“그랬지. 야, 근데 수인은 원래 저렇게 성장 속도가 빨라? 금방 크겠는데?”

“아니. 그럼 우리가 사람보다 수명이 더 짧겠냐? 한 번에 확 컸다가 정체기가 올걸? 네 살인가 다섯 살 때부터.”

“아…… 그래?”

고작 몇 달뿐이지만 육아의 고충을 몸소 느끼고 있던 동만은 매우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이해하는 바였다. 빨리 도망가고 싶겠지. 가끔 제 자식이지만 은찬도 귀찮을 때가 있으니까. 안 됐지만 동만은 느닷없이 생긴 셋째 때문에 이제 도망갈 수도 없는 처지였다.

“보자…… 너 앞으로 한 10년은 더 고생해야 할걸?”

“뭘?”

동만은 정말 모른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이래야 김동만이지. 은찬은 입꼬리를 올리며 녀석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만에 하나 내 배 속에 있는 녀석이 진짜 딸이라면, 넌 아마 이 녀석이 중학교 들어갈 때쯤이나 풀려나지 않을까 싶다.”

“어?”

“생각해 봐. 요한이, 유한이. 저 두 녀석은 사내놈이라 초등학교까지라는 기한을 둔 거라 쳐. 그런데 딸이면? 회장님이 귀한 증손녀를 그렇게 내버려 두겠냐 이거지.”

“그렇겠지……? 워낙 증손자들을 사랑하시는 분이니까. 그런데 그게 왜? 엄마는 너잖아.”

“네 눈에는 지금 내가 애들 육아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것 같냐?”

“아니, 전혀.”

“그러니까. 답은 나왔네.”

은찬의 말이 끝나자마자 동만은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잠시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혼란에 빠진 동만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은찬의 팔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간절한 시선을 담아 입을 열었다.

“설마…… 아니지? 내가 생각하는 그거.”

“네가 생각하는 그거 맞을걸.”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결말은 같을 것이다. 김동만은 유은찬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고로 녀석이 원하는 비서실 입성은 물 건너갔다는 말이었다. 동만은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인정할 수 없다는 발악을 시작했다.

“내가 왜! 어째서! 니 애니까 니가 좀 봐! 내가 이러려고 초, 중, 고에 대학교까지 열심히 공부한 줄 알아?”

“너 말하는 꼬락서니 봐. 너 쪼꼬미한테 미안하지도 않냐?”

“뭐? 내가 왜!”

은찬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일부러 제 배를 만지작거렸다. 솔직히 이게 똥배인지 뭔지 아직도 구별이 되지는 않았다. 일단 애라고 치고 동만을 공격했다.

“너 지금 그거. 우리 쪼꼬미 싫다는 말이잖아. 오빠들은 다 봐 줘 놓고서 왜 이 녀석만 차별하는 건데? 고양이 좋아한다, 사랑한다 노래를 부르더니. 개하고 엮이고 나니 이제 고양이는 별론가 봐?”

“…….”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이지. 너 하는 일에 비해 월급도 많이 받잖아. 오늘도 남들은 열심히 일하는데 너는 나하고 노가리 까면서 놀이동산에서 놀고 있으면서 돈 받잖아. 이런 직업이 세상에 어디 있냐? 그것도 애인까지 데려와서.”

“……데려온 거 아니고 지가 따라온 거거든?”

“어쨌든. 그래서 불만이야? 요즘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데. 이 녀석이 공주라면 날 닮아서 얼마나 예쁘고 섹시하겠어. 안 그래?”

은찬은 싱긋 웃으며 잘빠진 검정 꼬리를 허공에 살랑살랑 흔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색하던 동만은 은찬의 말에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김동만 하나 구워삶은 건 은찬에게는 일도 아니었다.

“그렇지. 위험하긴 하겠……지?”

“그럼. 위험하고말고.”

“공주니까 애교도 많겠지?”

“그럼.”

미안하다, 김동만. 그건 장담할 수 없었다. 이주한도 은찬도 딱히 애교 많은 성격은 아니었으니 만에 하나 부모 성격을 닮았다면 김동만이 원하는 애교 많은 공주님은 보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은찬은 동만의 꿈을 지켜 주고 싶었다. 그래서 대답 대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이 미래에 관해 한참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을 때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이리한의 고통에 찬 비명이 들렸다.

“안 돼! 나 더는 못 가! 힘들어, 힘들다고! 야, 니들끼리 가! 니들끼리 가라고! 나 끌고 가지 마! 안 돼! 저거 안 타! 토할 거 같단 말이야!”

상대적으로 조용한 놀이공원에 이리한의 목소리는 유독 잘 들렸다. 누가 들어도 괴로워 보이는 이리한과는 달리 동만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야, 유은찬.”

“어?”

“나 뭐 하나만 부탁해도 되냐?”

“뭐?”

손님 하나 없는 한적한 놀이공원을 천천히 걷기 시작한 은찬은 그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가 저번부터 생각한 건데 가끔 애들 좀 빌려도 되지?”

“빌려? 왜?”

“이리한 산책할 때 좀 데리고 다니게. 나보다는 이리한에게 더 안성맞춤인 것 같아서.”

“……너 되게 기분 좋아 보인다?”

매번 개새끼 산책 때문에 힘들다고 구시렁대던 김동만은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

“도가니 연골 나가기 직전이었거든. 아, 날씨 좋다……. 야! 너 왜 이쪽으로 가! 저쪽으로 가, 저쪽으로! 저기 가면 테마 공원 있대. 그거나 더 둘러보고 가자! 오늘은 저쪽이 애들 보라고 하고 우린 자유 시간 좀 가져도 되잖아. 안 그래?”

애 보는 것보다 이리한 보는 게 더 힘들다는 동만의 말은 사실인 것 같았다. 좀 전까지 아이들 운운하던 녀석이 지금은 자유를 운운했다. 은찬은 피식 웃으며 동만이 이끄는 대로 발길을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리한의 외침이 또 들렸다. 이번에는 살려 달라는 구조 요청이었지만 동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리한도 당해 봐야 안다나.

***

출근한 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건만 유은찬의 메시지가 왔다. 담담하게 핸드폰을 확인한 주한이 답장을 하기도 전에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그리고 나 거기 시장에서 파는 식혜.]

[알았어. 사 갈게.]

서둘러 일을 마무리한 주한이 사무실을 나서기 전에 또 왔다.

[형, 나 닭강정도. 어디서 사야 하는지 알지?]

[알았어. 사 갈게.]

부랴부랴 사무실을 뛰쳐나간 주한은 마음이 급했다. 차를 몰고 나가는 사이에도 은찬의 주문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은찬이 임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 직후 주한을 비롯한 가족들은 축제 분위기였다. 워낙 자손이 귀한 집이다 보니 셋째가 태어나는 건 몇백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 했다. 요즘 같은 저출산 시대에 특히 개체 수가 희귀한 수인이 셋째를 가지니 나라에서도 축하 꽃바구니를 보내 주는 진풍경도 펼쳐졌다. 물론 은찬은 그 꽃바구니를 보자마자 신경질적으로 발로 차 버렸지만.

대략 일주일간 은찬은 임신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의사를 고소하겠다며 온종일 뚱한 표정으로 말 한마디 하지 않는 녀석을 어르고 달랜 끝에 지금의 평화가 찾아왔다.

대신 주한이 고달팠다. 지금 은찬은 먹덧이었다. 음식 냄새만 맡아도 토할 것 같은 입덧과는 반대로 입이 쉴 틈을 주지 않고 먹어 대는 먹덧. 첫 임신 때는 못 했으니 이제라도 아빠 노릇을 하려고 부단히 노력 중이지만 온종일 음식을 사러 다니는 일도 쉬운 게 아니었다. 주한이 노는 사람도 아니니 말이다.

할 수 없이 간단한 업무는 핸드폰 통화로 마무리하고 그 외의 업무는 틈틈이 마무리를 해야 했다. 지난 며칠간을 이런 식으로 고생하다 보니 보다 못한 김동만이 은찬에게 쏘아붙였다. 요즘 배달 어플이 얼마나 좋은데 왜 자꾸 사람을 고생시키냐고 말이다. 내심 그 말이 반가웠던 주한의 귀에 은찬의 시큰둥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 거 하고 같냐? 우리 쪼꼬미가 먹을 건 아빠 정성이 들어가야지. 안 그래요. 형?’

저 망할 고양이 자식. 이번 기회를 빌미로 주한을 엿 먹이려는 속셈이 뻔했다.

솔직히 사랑하는 유은찬을 위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다. 전혀 귀찮지 않았다. 다만 화가 나는 건 고생해서 사 와도 마음이 바뀌었다고 먹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열 개의 메뉴 중 다섯 개의 메뉴를 먹지 않으니 누가 봐도 고의성이 짙어 보였다.

그럼에도 주한은 따질 수 없었다. 지금은 누가 뭐래도 유은찬이 킹 오브 더 킹이었으니까. 그 무서운 할아버지도 유은찬 한마디에 아무 말도 못하는 처지였다. 말 그대로 검정고양이가 표범 집안을 장악하고 있었다.

“저거랑 저거. 저것도 다 4인분씩 포장해 주세요. 여기 식혜도 두 통 포함해서요. 계산은 여기.”

재빨리 주문을 마친 주한은 카드를 내밀고 핸드폰에 시선을 집중했다. 일하랴 음식 사다 받치랴, 그 와중에 아이들도 보랴. 요즘 주한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이주한?”

누군가 주한의 어깨를 부드럽게 움켜쥐며 이름을 불렀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린 주한은 낯익은 이와 눈이 마주쳤다. 얼굴은 알겠는데 이름까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새 수인이었던 것 같다. 두 번 정도 잤었나? 아마 그럴 것이다.

“여기서 보네.”

“……그러게.”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들린다는 시장 한쪽의 반찬 가게 앞에서 예전 상대를 만날 줄이야. 그도 이곳에서 주한을 만난 게 믿기지 않은 눈치였다. 거의 1년 만의 만남에 그는 눈을 반짝이며 좋아했다.

“그거 뭐야? 그동안 입맛이 변한 거야? 단거 싫어하더니.”

그는 주한의 앞에 있는 식혜 두통을 힐끔거렸다.

“여긴 웬일이야? 백화점이나 마트만 다니더니.”

“아, 일. 알잖아. 내가 무슨 일 하는지.”

오랜만에 만난 그는 여전히 기분 좋게 웃었다. 외국인을 상대로 소규모의 여행사를 운영 중인 그는 종종 전통 시장을 둘러보기도 했다. 이런 코스를 좋아하는 외국 관광객이 많다며 말이다.

새 수인이라서 그런지 그는 잠시라도 한곳에 머물지 못했다. 철새처럼 한동안은 외국 또 한동안은 한국 이런 식으로 오갔고,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주한과 연락이 끊어졌다.

“요즘 뭐 하고 지내? 아직도 말단 사원이야?”

“아니. 부장 달았지.”

“오, 축하해야겠는데? 어때? 오늘 밤에 돼? 내가 축하주 거하게 쏠게.”

시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의 그는 주한의 코트 자락을 살짝 매만지며 유혹했다. 아무래도 주한의 결혼 소식을 듣지 못한 모양이다.

“번호 그대로지?”

“못 들었나 보네.”

“뭘?”

“나 결혼했어.”

“뭐?”

눈을 동그랗게 뜬 그는 믿지 못하겠다는 시선을 던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이주한은 절대로 일찍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 떠들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실컷 놀다가 늦게 하고 싶다고 큰소리쳤으니 이럴 만도 했다. 주한은 제 손가락에 낀 반지를 보여 주며 피식 웃었다.

“언제?”

“좀 됐어. 애도 있는데?”

“어?”

“두 명, 아니다 셋.”

“…….”

1년 만에 만난 전 섹스 파트너가 잠깐 사이에 유부남에 아이 셋 아빠가 됐다는 사실에 그는 크게 충격받은 듯 보였다.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입을 떡 벌린 그가 뭐라 말하기 전 유은찬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 은찬아. 뭐? 언제 오냐고? 금방 갈게. 얼마 안 걸려. 가는 길에 사서 가면 돼. 응. 알았어. 기다려.”

“누구야? 내가 아는 여자? 무슨 수인인데? 선본 거야? 아님 사고 친 거야?”

전화를 끊자마자 그는 무서운 기세로 몰아붙였다. 우연한 만남은 반가웠지만 이제 슬슬 귀찮아 지려 했다. 장본 것들을 손에 들자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이 무게는 유은찬을 향한 주한의 마음과 비례하는 것이었다.

“고양이. 사고는 아니고 내가 좋아서 따라다녔지?”

“……네가? 고양이를?”

주한은 그 자리에서 얼어 버린 그의 어깨를 툭 두드리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더 이상 그와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유은찬을 좋아한다고 마음먹은 그 시점에 주한은 제 핸드폰에 있는 그런 유의 번호는 싹 다 지워버렸고, 모르는 번호는 받지 않는 주의였다.

차로 돌아온 주한은 서둘러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할아버지. 닭강정 사셨어요? 네, 저도 이제 들어가요. 네, 네. 이따 뵐게요.”

간단한 통화를 마친 주한은 바로 시동을 걸었다. 한꺼번에 많은 메뉴를 조달할 수 없었던 나머지 할아버지 찬스를 썼다. 싫어하는 기색은 전혀 없으셨다. 오히려 가게 하나를 통째로 사 올 기세여서 문제랄까.

회사로 돌아가는 길. 운전대를 잡은 주한은 괜히 피식피식 웃음이 터졌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화려한 밤 생활을 즐기던 자신이 어느덧 세 아이의 아빠라니. 단 한 번도 제 미래가 이럴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데 말이다.

이제는 유은찬을 위해 시장을 다니는 것쯤 자연스러운 일이 됐다. 예전에 만난 녀석들이 지금의 주한을 보았다면 다들 좀 전에 만난 그 녀석 같은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충격과 경악. 그리고 당혹스러움.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깃든 얼굴이었다.

주한은 회사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자마자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자고로 음식이 식으면 맛이 없다는 유은찬의 까다로움 때문이었다.

“어? 안녕하세요, 부장님.”

“안녕하세요.”

엘리베이터에 타고 얼마 지나지 않아 1층 로비에서 마케팅 일부서 직원들과 마주쳤다. 어색한 인사 뒤에 엘리베이터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오가다가 가끔 스치는 얼굴들이었지만 따로 말을 섞지는 않았다. 주한이 마케팅 1부서에 자주 들렀던 건 유은찬이라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지 그들과 따로 친분을 쌓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건 주한의 생각이었고 마케팅 일부서 팀원들의 생각은 달랐다. 주한이 그들과 거리를 두는 이유는 곽 과장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회사 거래처 리스트를 경쟁사에 넘기는 조건으로 이직하려던 곽 과장 때문에 주한이 마케팅 1부서에게 등을 돌린 거라고. 퇴근길 마케팅 1부서 팀원들에게 붙잡혀 무려 30분간 시달린 김동만이 전달해 준 말이었다.

유은찬이 일하다가 휴직을 한 시기가 묘하게 맞물린 것뿐. 그들에게 악의적인 감정이 있는 건 아닌데 말이다.

“저기, 부장님.”

“네?”

“왜 요즘 저희 부서에 놀러 안 오세요? 가끔 들리셔서 저희랑 이야기도 좀 하고 해요.”

그럴 시간 있으면 유은찬과 애들 얼굴을 한 번 더 보겠다. 부부는 닮는다더니 주한은 유은찬이 짓던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바빠서요.”

주한의 단 답에 모두 벌떼처럼 한마디씩 입을 열었다.

“그래도 예전에는 종종 오셨잖아요. 혹시…… 곽 과장님 때문에 그러세요?”

“박 주임, 범죄자한테 과장님이라니? 그 자식 그거 한번 사고 칠 줄 알았다니까요? 부장님. 곽 과장 그 자식 그거 보석금 천만 원 내고 풀려난 거 아시죠?”

“아니 글쎄. 저번에 저한테 전화가 왔더라니까요? 잘 지내냐면서. 은근슬쩍 취직자리 좀 알아봐 달라는 뉘앙스를 풍기더라니까요? 말이 돼요? 어느 회사가 범죄자를 써 주겠어요. 우리 회사처럼 좋은 회사가 어디 있다고 그런 짓을 했는지……. 진짜 멍청하다니까요?”

“어머, 나한테도 전화 왔었는데. 진짜 뻔뻔하다니까.”

“그러니까. 나도, 나도. 나한테도 왔었다니까?”

다들 곽 과장을 물어뜯기 바빴다. 미안하지만 주한은 곽 과장을 비롯한 그 어떤 주제에도 흥미가 없었다. 머릿속에는 오롯이 유은찬에게 빨리 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꽉 차 있었다. 이윽고 마케팅 1부서가 있는 층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부장님, 놀러 오세요!”

“자주 봬요!”

주한은 대답 없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닫힘 버튼을 꾸욱 눌렀다. 그렇게 부랴부랴 제 이 비서실 문을 열었을 때 이미 할아버지가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아아압빠아아아!”

“아압빠아아아!”

주한을 보자마자 귀를 쫑긋 세우고 달려온 두 아이는 주한의 다리에 매달렸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무거워지는 무게가 다리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형, 와써? 얼른 와서 먹어.”

할아버지와 김 실장 그리고 동만과 은찬까지 식탁에 둘러앉아 닭강정과 여러 가지 음식을 먹고 있었다. 그 와중에 주한과 눈이 마주친 할아버지는 일찍 도착한 승리의 미소를 짓고 계셨다. 아무래도 빨리 도착한 만큼 은찬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으니 묘한 경쟁 심리가 생겼다.

“……빨리 오셨네요?”

“능력의 차이 아닐까요?”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김 실장의 어깨에도 힘이 들어간 상태였다.

“은찬아, 맛있지?”

“네, 배달 어플보다 회장님이 더 빠른 것 같은데요?”

닭강정으로 양 볼을 가득 채운 은찬은 엄지를 척 들었다. 동시에 할아버지와 김 실장의 얼굴에는 뿌듯함이 깃들었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주한이한테 말고 나한테 바로 말하라니까. 눈 깜짝할 사이에 대령하마.”

“에이, 죄송해서 어떻게 그래요.”

“죄송하다니. 뭐가? 내가 더 미안하지! 애 낳은 지 얼마 안 돼서 또 가진 거. 그게 쉬운 일이야? 너는 아무 걱정 하지 말고 몸 관리나 잘하면 되는 거다. 알겠지?”

근엄하고 무섭던 할아버지가 많이 달라지셨다. 애들과 놀아 준다며 느닷없이 꼬리를 꺼내 흔들지 않나 고양이라고 무시하던 유은찬을 이제는 손자보다 더 끔찍이 아끼셨다. 어쩌다 보니 찬밥신세가 됐지만 기분이 나쁘지만도 않았다.

“할아버지, 쉬엄쉬엄하세요. 그러다 몸살 나요. 나이 생각도 하셔야죠.”

“너 지금 나하고 은찬이 사이 질투하는 거지?”

질투? 무슨 질투? 할아버지의 핀잔에 주한은 저도 모르게 발끈했다.

“제가 왜요?”

“뭐라더라. 아까 김 대리가 나하고 은찬이 뭐가 좋다고 했는데.”

할아버지가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자 김동만이 불쑥 끼어들었다.

“케미요, 케미. 회장님.”

“아, 그래! 케미! 젊은 사람들은 그걸 그렇게 말한다며. 케미!”

김동만하고는 또 언제 저렇게 친해지신 거야? 둘이서 손뼉을 치고 난리가 났다. 요즘 들어 달라진 할아버지의 모습에 주한은 깜짝 깜짝 놀란다.

주한의 다리에 매달렸던 아이들은 방 안을 미친 듯이 뛰어다녔고 식탁도 소란스러웠다. 이 와중에도 은찬은 볼이 터질 정도로 닭강정을 흡입하고 있었다. 이제 자신의 일상에서 예전의 평온함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오히려 이게 더 좋았다.

“유은찬, 이거. 너 먹고 싶다던 거.”

주한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밀자 유은찬은 눈을 동그랗게 환하게 미소 지었다. 살짝 송곳니가 드러난 저 미소 하나에 주한은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은찬은 술에 취해 낄낄 웃고 있는 동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구리처럼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동만은 무척 행복해 보였다.

“너 괜찮냐?”

“나? 누구, 나?”

그럼 여기 너 하고 나 말고 누가 있냐? 은찬은 눈으로 말했다. 그러자 동만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흘겼다.

“나 하나도 안 취했는데? 야, 고작 이거 마셨다고 내가 취할 꼬 가토?”

취했네. 은찬은 잘 익은 양꼬치 구이를 오물오물 씹으며 취한 동만을 구경했다. 동공이 풀리고 혀가 꼬일 대로 꼬였건만 본인만 아니란다.

“오늘따라 술이 음료수눼, 음료수! 쫙쫙 잘 넘어간다야!”

“더 마실 거냐?”

“고럼! 나 아직 거뜬하거든?”

눈을 게슴츠레 뜬 동만은 히죽 웃더니 맥주잔을 들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저런 놈이 괜찮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다.

“야. 자냐?”

은찬의 한마디에 눈을 번쩍 뜬 동만이 정색하며 맥주잔을 비웠다. 그리고 다시 소맥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사건의 발달은 퇴근 시간 직전. 양꼬치 구이가 먹고 싶다는 은찬의 발언이 문제였다. 갑자기 그게 먹고는 싶은데 붕어 똥처럼 이주한과 애들을 줄줄이 데려가서 먹고 싶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조용히 느긋하게 먹고 싶었던 은찬은 김동만과 단둘이 양꼬치 구이집으로 향했다. 물론 애들은 이주한이 보기로 하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결혼하고 처음으로 동만과 밖에서 밥을 먹는 것 같았다. 그것도 이렇게 둘이. 같이 살 때는 싫어도 매일 저녁 얼굴을 봐야 했는데 그게 불과 몇 달 전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양꼬치 구이가 노릇노릇 익어 갈 동안 은찬과 동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피식피식 웃었다. 아이들에 관한 주제가 대부분이었지만, 녀석과 은찬이 함께 살았던 시절에 관한 이야기도 꺼냈다.

그때부터였다. 지난날의 추억에 젖은 동만이 술을 마시겠다며 소주와 맥주를 주문했다. 이때만 해도 그러려니 했다. 이리한에게서 오랜만에 해방된 김동만이 기분이 좋아서 그렇구나 하고 말았다.

임신한 은찬은 원래의 목적대로 양꼬치 구이를 미친 듯이 흡입하고, 동만은 소주와 맥주를 섞어서 아주 행복하게 마셔 댔다. 그렇게 몇 잔을 연거푸 마시더니 지금의 빨간 너구리가 되어 은찬을 부담스러운 시선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때 은찬은 김동만이 취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렇다고 해서 녀석을 말리지는 않았다. 은찬은 양꼬치 구이를 먹기 위해 왔을 뿐이고 술은 동만이 자발적으로 마셨기 때문이다.

“은찬아!”

“…….”

“은찬아아아아!”

동만의 부름에 은찬은 한숨을 내쉬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어.”

“너 잘 살아서 보기 좋다아아. 이 형이 참 보람을 느낀다아아.”

그래서 뭐. 웃기고 있네. 은찬은 대답은 하지 않고 양꼬치 구이를 질겅질겅 씹었다.

“너 왤케 귀엽냐? 고양이는, 고양이느으으은 진짜아아. 진짜아아아…… 사랑이야. 너 그거 아냐? 개 하고 고양이가 뭐가 다른지 아냐아아?”

아니, 알고 싶지 않다. 그런데 은찬은 귀찮아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김동만이 술주정하는 것을 무표정으로 지켜보며 양꼬치 구이를 먹기 바빴다.

“개는 말이다. 개는…… 날 너무 사랑해에에. 귀찮아 죽겠다니까아아아……. 근데 너, 요한이랑 유한이는 왜 날 사랑하지 않는 고야? 왜! 왜에!”

요한이와 유한이의 사랑을 왜 여기서 은찬에게 따지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다가 또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동만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종업원이 빈 술병을 거둬 가는 소리에 눈을 번쩍 뜬 동만은 또 아무렇지 않게 술을 마셨다. 아직 익지도 않은 양꼬치 구이를 질겅질겅 씹는 걸 보니 확실히 맛이 간 상태였다.

“너 괜찮냐?”

“괜찮다니까아아. 몇 번을 말해……. 야. 나 오줌 좀…….”

벌떡 일어난 동만은 가게 바깥에 있는 화장실을 찾아 긴 여행을 떠났다. 가는 도중 몇 번이나 넘어질 뻔하더니 결국은 가게 문을 나서다가 바닥을 굴렀다.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자신은 괜찮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외치는 동만을 조용히 구경하던 은찬은 핸드폰을 꺼냈다. 배부르게 먹었으니 이제 슬슬 이리한을 부를까 싶다.

“야, 개. 네 주인 데려가. 술? 마셨지. 아니, 내가 먹이긴 뭘 먹여. 지가 알아서 먹던데. 몰라. 어딘지 알지? 빨리 와. 귀찮으니까.”

이리한은 15분 안에 도착할 것이다. 이어서 이주한을 부를까 하다가 관뒀다. 애들 보는 사람을 귀찮게 하기 싫었다. 자신은 그냥 택시를 타고 갈 생각이었다. 마지막 남은 양꼬치 구이를 입안에 다 털어놓고 있을 때였다. 무심코 가게 문밖으로 시선을 돌린 은찬은 입이 떡 벌어졌다.

“저게 미쳤나!”

아무리 개하고 살지만 이건 아니지. 수인도 아닌 놈이 개처럼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은찬은 계산을 마치고 가게를 나왔다. 그리고 여전히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는 김동만을 막아섰다.

웬만하면 일으켜 세워 주고 싶지만 지금 은찬의 몸으로는 무리였다. 임신 4개월이 되니 배도 제법 나오고 몸도 많이 무거웠다.

“은찬아, 위험해! 너도 얼른 앉아! 지진 왔나 봐! 땅이 막 흔들거려!”

“…….”

맙소사……. 지진이란다. 그 와중에 동만은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바닥에 몸을 붙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인적이 드문 곳이라는 점이다. 은찬은 담담하게 말했다.

“동만아, 저기 건물 무너졌다.”

“진짜? 야! 얼른 앉으라니까아아아! 우리 다 죽어어!”

순간 은찬은 이 장면을 핸드폰으로 찍어야 할지 말지에 대해 내적 갈등을 했다. 그러다 벌벌 떠는 김동만을 향해 입으로 쾅 소리를 냈고 녀석은 거의 기절 직전처럼 보였다. 은찬은 이 상황이 너무 웃겨서 눈물이 터졌다. 지난 몇 년간 본 김동만의 모습 중 오늘이 레전드였다.

“동만 씨!”

그때 저 멀리 이리한이 달려오고 있었다. 누가 개 아니랄까 봐 눈 깜짝할 사이에 코앞까지 왔다. 이리한은 동만의 꼬락서니에 눈살을 찌푸리며 은찬을 노려봤다. 마치 은찬이 김동만을 어떻게 한 것처럼 말이다. 은찬은 자신의 죄가 없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술에 취해 이성이 날아간 동만의 뺨을 찰싹 내려쳤다.

멱살을 잡고 찰싹. 찰싹. 두 번 정도 힘껏 내려쳤지만, 동만은 눈을 뜨지 못했다. 대신 얼굴에 은찬의 손자국이 빨갛게 남았다. 이리한은 눈을 크게 뜨고 은찬에게 따졌다.

“우리 동만 씨 왜 때려! 꼴은 또 왜 이래! 무슨 짓 했어!”

개가 주인을 지키기 위해 달려드는 건 갸륵하지만, 번지수를 잘못 집었다.

“나 아무 짓 안 했는데?”

“그럼 왜 이러고 있어!”

은찬은 어깨를 으쓱이며 동만을 이리한에게 인계했다.

“이 자식도 너 닮아 가는 모양이다. 네 발로 기어 다니는 거 보니까.”

은찬의 말을 이리한이 이해할 리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녀석과 품에 공주님처럼 안겨 잠든 동만을 번갈아 보던 은찬은 이 장면은 놓칠 수 없었다. 사진을 찍어 증거를 남겨 놓은 뒤 경쾌하게 돌아섰다.

“안 저랬는데 술에 떡이 되니까 개가 되네. 아무튼, 나간다.”

술 먹고 개가 된 김동만을 위해 한달음에 달려온 개 수인 이리한. 두 사람은 누가 뭐래도 천생연분이 틀림없었다.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고 큰길가로 나온 은찬은 곧장 택시를 탔다.

“뭐야? 혼자 왔어?”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은찬을 보자마자 주한은 깜짝 놀란다. 시간을 확인한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택시 타고 온 거야? 나 부르지.”

거실을 가로질러 소파로 직행한 은찬은 그대로 소파와 한 몸이 됐다. 이미 잘 시간이 훨씬 지났건만 두 꼬마는 오늘도 일찍 잘 생각이 없어 보였다. 몇 시간 만에 만난 엄마가 반가운지 옆에 찰싹 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엄마아아아. 엄마아아아.”

“고기, 고기.”

은찬의 몸에서 나는 양꼬치 구이 냄새에 두 아이는 코를 박고 킁킁거렸다. 살랑살랑거리는 작은 꼬리를 쓰다듬으며 은찬은 피식 웃었다. 요즘 들어 느껴지는 거지만 이 맛에 애들을 키우는 건가 싶다. 리틀 이주한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은찬을 웃게 만들었다.

“유은찬.”

“왜요. 나 양꼬치 구이 배부르게 먹고. 기분 좋게 잘 놀다 왔으면 됐잖아요.”

은찬을 부르는 이주한의 목소리와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느긋하게 소파에 반쯤 누운 은찬은 화가 났음을 알리는 주한과 시선을 맞추고 씨익 웃었다.

“그래. 그거는 좋은데. 내가 걱정한다고 몇 번이나 말해. 그러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떻게 할 거야?”

“무슨 사고? 요즘 들어 왜 그렇게 극단적으로 생각해요?”

“사람 일이라는 게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너 이런 식으로 하면 앞으로 혼자 못 다니게 할 거야.”

“형, 나 애 아니거든?”

“애는 아니지. 하지만 배 속에 아이는 있지. 제일 조심해야 할 때잖아.”

첫 임신 때는 김동만이 따라다니면서 잔소리를 하더니 지금은 이주한이 그 바톤을 넘겨받은 것 같았다.

“아. 형은 날 걱정하는 거야, 아니면 배 속에 있는 이 녀석을 더 걱정하는 거야?”

심드렁한 투로 던진 은찬의 질문에 대한 답은 잠시 보류됐다. 은찬의 양쪽 겨드랑이에 자리를 잡은 두 꼬마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길게 침을 늘어뜨리며 자는 모양새에 주한은 자연스럽게 두 녀석을 품에 안고 사라졌다.

재우는 게 힘들지 한번 잠들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르는 녀석들이었다. 잠시 뒤 방에서 나온 주한은 소파 위에 널브러진 은찬의 양발을 벗기며 속삭였다.

“씻기 귀찮아?”

“귀찮아.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

“같이 씻을까?”

“형, 안 씻었어요?”

“두 번 씻지 뭐.”

주한은 조심스럽게 은찬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억지로 욕실까지 끌고 가 익숙하게 옷을 벗겼다. 아무것도 안 하고 멍하니 서 있던 은찬은 욕실 거울 속에 비친 제 나체를 물끄러미 보았다. 계속 먹어 대니 살이 붙어서 포동포동했다. 거기다 배가 볼록 나온 모습은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흡사 배만 나온 중년의 아저씨 같은 몸매였다. 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은찬은 콧잔등을 찡그렸다.

“왜? 뭐가 마음에 안 들어?”

온도에 민감한 은찬 때문에 욕실 물 온도에 신경 쓰던 주한이 그런 은찬을 훔쳐보며 물었다.

“나 매력 없죠?”

“무슨 말이야.”

“아니, 배 봐. 이런 데 무슨 매력이 있어. 안 그래요?”

제 배를 내밀며 은찬은 입술까지 삐쭉 내밀었다. 그러자 주한이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거든요. 이제 들어와. 딱 적당하다.”

그의 부름에 은찬은 마지못해 욕조 안으로 발을 넣었다. 저번에도 그랬지만 배가 불러옴에 따라 몸도 버거워졌다. 다리도 퉁퉁 부었고 허리에 통증이 생겼다. 은찬의 반신욕과 다리 마사지는 이주한의 마지막 일과가 되어 버렸다.

은찬은 주한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고 그의 단단한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머리에서 양꼬치 냄새 난다. 많이 먹었어?”

이주한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욕실 가득 울렸다. 그 목소리를 음미하며 은찬은 입꼬리를 올렸다.

“배 터질 것 같아.”

“동만 씨랑 오랜만에 재미있게 놀았어?”

“말도 마요. 레전드 찍었지.”

“레전드?”

“김동만. 그 자식 기분 좋아서 혼자서 술 빨다가 맛이 갔거든요. 형도 그걸 봤어야 하는 건데.”

“왜? 어쨌길래.”

주한은 은찬의 머리에 얼굴을 기대고 은찬의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계속 물음을 던졌다. 그가 욕조 안에 던진 캣닙 입욕제 덕분인지 긴장된 근육이 노곤하게 풀리는 것 같았다.

“개가 됐어요.”

“개?”

“바닥을 네발로 기었다니까요.”

“……진짜?”

“형은 절대로 어디 가서 그러지 마요. 난 내 친구가 그러는 건 상관없지만 내 남자가 그러는 건 쪽팔리니까.”

“난 주량 센데? 그리고 나 주사도 없어.”

“동만이 그 자식. 주사 없었는데 이상하게 변했다니까요. 갑자기 바닥이 흔들린다면서 지진 왔다고. 혼자서 재난 영화 한 편 찍더라니까요. 이리한은 그런 놈이 뭐가 좋다고. 데려가라니까 눈 깜짝 할 사이에 와서는 나한테 막 뭐라고 하는 거 있죠?”

“너한테? 왜?”

“아니, 내가 그 자식 술 먹인 거 아니냐고 하면서 김동만 술 좀 깨라고 뺨 좀 때린 거 가지고 또 얼마나 지랄하던지.”

콧잔등을 찡그린 은찬은 제 배를 만지작거리는 이주한의 손을 깍지 껴 잡았다. 두 사람의 손짓 때문일까. 조용히 있던 배 속의 아기가 발차기를 시도했다.

“이리한 혼내 줄까?”

“됐어요. 동만이 아무리 지랄해도 내가 보기에는 둘이 천생연분인 거 있죠?”

“우리는?”

“거기서 우리가 왜 나와요.”

“유은찬.”

제 귀에 입술을 바짝 붙여 속삭이는 이주한의 목소리는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나는 우리가 더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하는데? 우린 전생에도 부부였을 것 같지 않아?”

“끔찍한 소리 하지 마요.”

“왜?”

“같은 사람하고 두 번이나 부부였다고요? 난 더 멋지고 잘생긴…….”

“야.”

“아니 그렇잖아요. 세상에 잘생기고 정력 좋은 남자가 얼마나 많은데.”

“너 절대로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소리는 안 한다? 아까도 그래! 이리한은 불러 놓고 왜 나는 안 부르는 건데? 전화 한 통 하는 게 귀찮아? 힘들어?”

삐진 이주한은 잠시 보류된 질문을 다시 들먹였다. 어쩌다 보니 이리한을 은찬이 불렀다는 사실을 실토했으니 더 그럴 만도 했다.

“형.”

“너 말 돌리려고 하지 마!”

단단히 뿔이 난 이주한은 봐주지 않을 기세였다. 할 수 없이 비장의 무기인 고양이 귀를 꺼낸 은찬은 그의 목덜미에 머리를 비비며 그르렁거렸다.

“나는 형하고 이렇게 오붓하게 있을 때가 제일 좋더라.”

“…….”

“형, 나 이따가 여기도 마사지해 주면 안 돼요?”

은찬은 주한의 손을 잡고 제 다리 사이에 반쯤 발기한 성기를 슬쩍 만지게 했다. 그것이 신호가 되어 엉덩이 사이에 있던 주한의 성기가 존재감을 과시했다.

“너, 이럴 때만…….”

“이제 알았어요?”

은찬이 야릇하게 웃자 주한은 앓는 소리를 내며 그의 턱을 잡아 살짝 돌렸다. 그리고 입술을 깊게 빨았다. 욕실을 가득 채운 진득한 입맞춤 소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옅은 신음으로 바뀌었다.

***

전날 술에 떡이 된 김동만은 다음 날 점심때쯤이 되어서야 회사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미리 전화로 늦겠다는 연락을 받았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나올 필요는 없었다. 하루쯤 쉬라는 은찬의 만류에도 동만은 꾸역꾸역 나왔다.

회사에 각별한 애정이 있어서라기보다 두 아이 때문인 것 같았다. 자신이 없으면 누가 애들 밥을 먹이고 놀아 줄까 하는 그 걱정에 기어코 왔다.

“괜찮아?”

“……솔직히 말해서 죽을 것 같아.”

다 죽어 가는 얼굴로 나타난 김동만은 서 있는 것조차도 힘들어 보였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바닥에 대자로 누워 버린 동만의 몸 위로 두 아이가 뛰어다녔다. 은찬이 말린다고 말려 봤지만 그런다고 들을 녀석들이 아니었다.

은찬은 죽은 듯이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동만을 구경했다. 과장이 아니라 하룻밤 사이에 폭삭 늙어 보였다.

“그러니까 왜 나와서 사서 고생을 하냐? 집에서 쉬라니까.”

“니가 예뻐서 온 줄 알아? 너 말고 요놈들이 눈에 밟혀서 왔거든? 아, 몰라. 말 시키지 마. 나 30분만 좀 자자.”

두 아이가 소란스럽게 뛰어다니는 이 와중에도 눈을 감고 있는 걸 보면 정말 힘들긴 힘든 모양이었다.

“해장은 했어?”

“아니. 나 밤새도록 토하다가 이제 좀 정신 차린 거거든?”

어쩐지. 김동만 눈이 풀려 있더라니. 소파에서 내려온 은찬은 슬그머니 김동만 옆에 앉았다.

“많이 마신 것도 아닌데 오버 하기는.”

“나 혼자 소주 네 병에 맥주 네 병 깐 거면 평소 주량 훨씬 넘긴 거거든?”

“네 병이 아니고 다섯 병. 너 어제 일은 기억 다 하냐?”

그러고 보니 평소보다 많이 마신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까지 동만의 입에서 진한 알코올 냄새가 흘러나왔다. 마치 알코올에 절인 사람처럼 녀석은 쉽게 기력을 찾지 못했다.

“너 나한테 빚졌다.”

“뭔 소리야.”

은찬이 동만을 팔을 가볍게 툭 치며 말하자 녀석이 실눈을 뜨며 째려보았다. 그 시선 속에는 그만 좀 귀찮게 하라는 의미도 포함된 것 같았다. 애들이 떠드는 건 괜찮지만 은찬이 말하는 건 못 참겠다는 거다. 하지만 은찬은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한 사실을 알릴 의무가 있었다. 이런 건 본인이 알아야 더 쪽팔린 법이니까.

“어제 거기 맛집인 거 알지? 다행히 어제 손님이 얼마 없었으니까 다행이지. 아니었음, 넌 진짜 개 쪽 팔았어.”

번쩍 눈을 뜬 김동만은 잠시 생각을 가지더니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내가 뭐 이상한 짓 했어?”

했지. 동만이 그 질문을 던져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은찬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몇 달 동안 김동만을 놀릴 거리가 생긴 것이다.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니고…….”

은찬이 씨익 웃자 동만은 찌릿 노려보았다. 진심으로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나 기운 빼기 싫으니까 말 걸지 마.”

“이리한하고 사귀더니 난 또 네가 개가 되고 싶은 줄 알았지.”

“뭔 소리야?”

“뭔 소리긴. 한국말 못 알아들었어? 네 갠 줄 알았다고. 진짜 기억 안 나나 보네. 멀쩡한 두 발 놔두고 엎드려서 기어 다녔잖아.”

“……어?”

말이 끝남과 동시에 벌떡 상체를 일으킨 동만은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벌써 이러면 어떻게 하냐. 아직 할 말이 남았는데. 은찬은 겨우 웃음을 참으며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땅이 흔들린다면서. 지진 왔다고 나한테 소리친 거 생각 안 나? 야, 너 진짜 웃기더라. 지진 왔다고 혼자 살겠다고 바닥에 납작 엎드리던데?”

“내가?”

이럴 줄 알았으면 동영상으로 남겨 두는 건데. 이래서 증거가 필요한 법이다. 동만은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시선을 던졌다.

“그럼 내가 그랬겠냐?”

기지개를 쭉 켜며 자리에서 일어난 은찬은 그대로 굳어 버린 동만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나 살다가 그런 주사 가진 사람 처음 봤거든? 야, 너 요즘 같은 시대에 조심해야겠더라. 언젠가 핸드폰에 찍혀서 인터넷에 네 얼굴 돌지 모른다?”

“……내가 네발로, 기었다고?”

“너 손바닥 안 까졌어?”

무심결에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던 김동만의 얼굴은 더 하얗게 질려 갔다.

“개 주인이 개화되는 건가 싶기도 하고. 너 이러다가 전봇대에 다리 들고 오줌 싸는 거 아니야?”

원래 술 취하고 주사 부리는 놈은 말이 없는 법이었다. 그럴싸한 말에 동만은 말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잠시 침묵하던 녀석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너 집에는 잘 들어갔냐?”

“일찍도 물어본다. 잘 들어갔으니까 여기 있겠지.”

욕실을 나와 침대에서 형과 농염한 애무를 주고받다 잠들었다. 그래서 오늘 컨디션은 좋지 않았다. 끓어오르는 성욕 때문에 이 지경이 됐지만, 그 성욕을 마구 분출할 수 없는 현실 때문에 짜증이 난다고 해야 할까. 정확히 욕구 불만이었다.

“야, 이 잔인한 자식아. 그런 건 좀 말 안 해 주면 안 되냐? 하필 지금 말하는 이유가 뭐냐?”

“뻔하잖아. 너 엿 먹이려고.”

“와, 유은찬…….”

어차피 은찬은 동만이 길거리에서 네발로 기어 다니든 옷을 벗든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이 말을 꺼내는 이유는 그냥 김동만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게 재미있으니까.

은찬이 씨익 웃자 김동만은 눈으로 욕을 던치고 있었다. 차마 애들이 있으니 욕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어금니를 꽉 깨문 동만은 다시 기절하듯 누웠다. 그리고 그로부터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입을 벌린 채 코를 골았다.

그 모습이 신기했는지 뛰어놀던 두 아이가 다가와 김동만 자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잠시 방 한편에 놓인 서랍장을 뒤적인 은찬은 두 개의 유성 매직을 들고 돌아왔다.

“이요한, 이유한. 너희에게 임무를 주겠다. 이거 잡고 여기다 하고 싶은 대로 그려.”

이럴 때만 상냥한 엄마 모드로 돌아온 은찬은 아이들 손에 유성 매직을 꼭 쥐여 줬다. 아이들은 누구보다 엄마의 말을 착실하게 듣는 편이었다. 그 즉시 김동만의 얼굴을 도화지 삼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도 녀석은 미동도 없이 잘도 잤다. 은찬은 터지려는 웃음을 꾹 참고서 낙서장이 된 김동만을 구경했다. 그러니까 집에 있으랄 때 있지. 괜히 나와서 사서 고생을 한다니까. 김동만 덕분에 우울했던 기분이 조금씩 풀려 갔다.

“삼초오오온.”

“삼초오온, 죽지 마아아.”

한참 신나게 그림을 그리던 아이들은 뒤늦게 죽은 듯이 자는 동만이 이상해 보였나 보다. 울먹이며 동만의 몸을 흔드는 게 제법 귀여웠지만, 은찬은 픽 웃으며 한마디 던졌다.

“밥 먹자.”

그 말 한마디에 두 녀석은 매정하게 김동만을 버리고 부엌으로 달려갔다. 역시 은찬의 아이들다웠다.

***

은찬은 두 아이의 손을 꼭 잡고 현관 앞에 서 있었다. 주한은 그런 은찬을 무서운 표정으로 노려보며 한숨을 터트렸다. 이러길 10분째. 검은 정장 차림을 하고 나가려는 주한을 막아선 은찬은 이미 결심을 굳힌 채였다.

“안 된다고 했지.”

주한이 몇 번이나 말한 터였지만 괜히 더 심술이 나 고집을 부리게 됐다.

“왜요? 같이 가요.”

“너 힘들까 봐 그런다고 몇 번이나 말해. 집에 있으라니까. 할아버지도 그러라고 하셨고.”

“형 부모님도 오셨다면서요. 몇 달 만에 보는 건데 나도 가야죠. 왜 나만 오지 말래? 기분 나쁘게. 애들만 쏙 데려가고. 형 내가 부끄러워요?”

은찬의 핀잔에 주한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짧게 혀를 찼다.

“아니, 그런데 왜 나는 오지 말래? 표범 문중 제사에 고양이 수인은 오지 말라는 법도라도 있어요?”

“나도 모르는 분들이 대다수야. 가봤자 이상한 소리만 들을 거 뻔하니까.”

“그런데 애들은 왜 데려가요?”

“야. 너 일부러 이러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기분 나빠서요. 가족 모임에 나는 쏙 빼놓고 애들만 데려가는 거. 나 고양이 수인이라서 따돌리는 것 같아서. 표범끼리 노는가 싶어서.”

“그런 거 아니라고 했잖아. 너 불편할까 봐 그러는 거라고. 몸도 무거운데 그냥 집에 있어. 고집 피우지 말고.”

주한의 당부에도 은찬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솔직히 처음에는 갈 생각이 아예 없었다. 오히려 오랜만에 혼자만의 시간이 생겨서 좋아했더니 동만이 눈을 크게 뜨고 호들갑을 떨었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나.

‘가야지! 무조건 가야지!’

‘왜? 귀찮게 그런데 왜 가냐?’

‘이 녀석 보소? 야! 가야지 왜 안 가? 문중 제사가 뭐야? 부장님 친척 중 힘 있는 분들만 오는 자리 아니냐. 최상 계층 수인이라고 했으니까 다들 한 자리씩 뭔가 있을 거잖아. 안 그래?’

‘그렇겠지.’

은찬의 심드렁한 태도에 동만은 답답한 듯 가슴을 팡팡 치며 말을 이었다. 꼭 딸내미를 시집보낸 심정이라며 말이다.

‘미친놈. 내가 왜 네 딸이냐? 내가 비록 임신은 했어도 남자다.’

‘누가 모르냐!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야, 생각을 해 봐. 너 결혼식 할 때 부장님 쪽 일가친척 중에 너 좋게 보는 사람 있었냐? 없었잖아! 다들 왜 하필 고양이냐는 시선이더라!’

‘그거야…… 그랬지.’

대충 사정 설명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양이 수인이라는 점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일종의 최상 계층의 자존심이랄까.

‘그러니까! 니가 가서 게임을 끝내 버려야지.’

‘게임은 무슨. 귀찮게 그런 짓을 왜 해.’

‘애가 뭘 모르네. 내가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니가 눈치가 없다. 야! 너 자손 귀한 집에 아들 둘이나 낳아 준 몸이야! 그리고 또 한 놈 더 배 속에 있잖아! 가서 큰소리 좀 치고 오라고!’

심드렁한 은찬과는 반대로 동만은 목에 핏대를 세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은찬은 소파에 반쯤 누운 채 육포를 질겅질겅 씹었다.

‘귀찮아.’

‘내가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그럼 하지 마.’

도저히 안 되겠던지 동만이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은찬은 새끼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파며 픽 웃었다. 거기 가 봤자 좋을 거 없다는 거 뻔히 아는데도 잔소리하는 동만이 귀찮아지려던 참이었다.

‘우리 집 개가 그러는데. 거기 사촌 중에 부장님 노리는 애들 꽤 많대.’

‘……뭔 소리야.’

‘그러니까. 거기 오는 놈 중에 이주한 부장하고 어떻게 한번 잘 해 보려고 오는 애들도 있다고. 이주한 부장이 남자, 여자 안 가리고 꽤 놀았잖아. 그렇게라도 엮이면 뭐 하나 콩고물이라도 안 떨어지겠나 하는 그런 속셈 아니겠냐. 그러니까 가서 임팩트 있게 딱! 이주한 내 남자다, 하고 존재감을 심어 주고 오라 이거지!’

‘결혼까지 한 거 뻔히 아는데?’

‘결혼해도 바람피우는 놈 널렸거든요?’

임팩트. 동만은 그 단어를 강조하며 은찬의 등을 떠밀었다. 집에 와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동만의 말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이주한이 바람을 피우지는 않겠지만, 상대편에서 작정하고 덤벼들면 모를 일이었다.

내 거는 내가 챙겨야지. 결혼식 이후 따로 친척들과 대면할 기회가 없었던 은찬은 동만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구경만 할게요.”

“너 진짜 말 안 들을래?”

주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목소리 톤을 높였다. 은찬은 겁을 먹기보다 그의 위아래를 찬찬히 훑었다. 애가 셋이나 있는 유부남으로 보기에는 위화감이 있었다. 새삼 잘생겼다는 것을 실감하며 짧게 혀를 찼다.

“쳇.”

“뭐? 쳇? 너 지금 혀 찬 거야?”

은찬이 혀를 차자마자 양옆에 있던 두 꼬마도 따라서 혀를 찼다. 귀와 꼬리는 표범이었지만 표정은 유은찬과 흡사한 꼬마들은 은찬과 나란히 주한을 빤히 응시했다.

“나 거기 가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요? 왜, 옛날 애인이라도 오나?”

“오나?”

“애인 오나?”

은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꼬마는 말꼬리를 따라 했다. 순간 이마에 굵은 힘줄이 생긴 주한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말없이 고개를 떨군 그가 항복을 선언했다.

“알았어. 같이 가는데……. 대신, 중간에 집에 오고 싶다고 조르지 마! 난 분명히 안 된다고 했다!”

“콜.”

동만이 호들갑을 떨어 가긴 가는데 딱히 걱정할 만한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일종의 예방 차원에서 가는 거니까. 은찬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콜.”

“콜.”

당연히 말을 따라 하던 두 녀석은 이유도 모른 채 주한을 향해 씨익 웃었다.

“뭐 해요. 가요.”

“마지막으로 묻는데 진짜 갈 거야? 가 봤자 좋을 거 없다니까.”

“문중 제사가 뭔지 구경이나 합시다. 나는 뭐 며느리 아닌가? 할아버지도 그렇고 왜 다들 나보고 오지 말래요? 그러니까 더 가고 싶잖아요.”

“너 가 봤자 좋을 일이 없으니까…….”

“내가 알아서 합니다. 가요.”

앞장서는 은찬의 등 뒤로 주한의 걱정 어린 시선이 느껴졌다.

그로부터 두 시간 뒤 은찬은 자신의 혀를 뽑아 버리고 싶었다. 김동만의 말에 넘어가 따라왔지만 이렇게 멀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집에 있을걸. 후회가 물밀 듯이 밀려오지만 되돌릴 수는 없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산과 논, 그리고 밭뿐인 시골. 공기는 좋다만 흔한 편의점 하나 보이지 않는 곳에 도착한 은찬을 반겨 주는 건 구수한 거름 냄새였다. 괜히 왔다. 김동만 말 따위 듣는 게 아닌데. 여기까지 오는 것도 힘든 마당에 돌아갈 생각을 하니 눈앞이 아득해졌다.

“괜히 왔다고 생각하지?”

은찬의 표정이 좋지 않을 걸 확인한 주한은 웃음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이다. 오기가 생긴 은찬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아니, 그런 척하려고 애를 썼다. 활짝 웃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아무리 봐도 보이는 건 논과 밭, 그리고 몇 채 없는 집뿐이다.

“아니요! 공기도 좋고 나쁘지 않은데요?”

“미리 말해 두는데 여기 배달 안 된다.”

주로 배달 음식을 선호하는 은찬에게는 날벼락과도 같은 말이었다. 하기야, 아무리 대한민국 배달 시스템이 좋아도 이런 첩첩산중까지 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 우리 뭐 먹어요?”

“제사 음식. 야! 이요한, 이유한! 아빠랑 같이 가야지! 뛰지 마! 야, 이놈의 자식들! 거기 안 서?”

차에서 폴짝 뛰어내린 두 녀석은 풀 냄새를 맡자마자 물 만난 물고기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달리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한참 말을 듣지 않을 때였다. 주한이 버럭 소리를 질렀음에도 두 녀석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주한은 큰 기와집 대문을 향해 달려가는 아이들을 쫓아갔고 은찬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착잡했다.

이제 겨우 오전 11시. 밤까지 이곳에 있어야 할 텐데. 은찬은 큰 기와집 담장 너머를 꽉 채우고 있는 고급 승용차들을 훑었다. 김동만 말을 들은 내가 미친놈이지. 집에 있었으면 지금쯤 먹고 싶은 거 실컷 먹고 티브이 좀 보다가 자고 있었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괜히 왔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튈까?

“유은찬.”

슬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은찬은 주한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는 두 녀석의 팔을 꽉 잡고 얼른 오라는 눈짓을 던졌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할 수 없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터벅터벅 걸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첫 임신 때보다 몸에 부담감이 없었다. 배도 덜 무겁고 숨쉬기도 편했다.

“할아버지, 저희 왔어요.”

큰 기와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마당을 가득 채운 사람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연세 지긋하신 분들부터 은찬의 또래까지. 다들 하나같이 도포 자락과 갓을 쓴 모양새에 흡사 조선 시대로 시간 여행을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고. 내 새끼들 왔어? 은찬이는 오는데 힘들지 않았고?”

바로 좀 전까지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던 회장님은 증손자를 보자마자 잇몸이 만개했다. 품에 폴짝 뛰어든 두 아이를 양팔에 거뜬히 안아 든 회장님은 평소와 달리 표범 귀와 꼬리를 드러내놓고 계셨다. 회장님뿐만이 아니라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랬다. 누가 봐도 표범 수인의 문중 제사가 확실했다.

“아. 네, 뭐……. 형, 여기서는 그거 꺼내야 해?”

은찬의 조용한 물음에 주한은 픽 웃으며 속삭였다.

“너 편할 대로 해. 할아버지 그 녀석들 좀 봐 주세요. 저 방에서 옷 좀 갈아입고 올게요.”

“알았다. 걱정 말고 네 할 일 해. 은찬이도 들어가서 쉬고.”

두 녀석을 품에 안은 회장님은 곧장 사람들이 모여 있는 쪽으로 향했고 곧이어 아주 큰 목소리로 증손자 자랑을 시작하셨다.

“요한아, 유한아. 할아버지들한테 인사해야지. 내 증손주일세. 어때? 똘똘하게 생겼지? 이놈들이 앞으로 우리 집안을 이어 갈 놈들이지. 자네들 알지? 우리 집안에서 몇백 년 만에 처음으로 형제가 태어난 거. 내가 오늘 조상님 앞에서 면목이 좀 서겠어. 하하하하.”

회장님 체면도 던져 버린 할아버지의 증손자 사랑은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애들이 회장님 귀를 물어뜯어도 꼬리를 가지고 장난을 쳐도 예뻐 죽겠다는 표정이셨다. 녀석들 버릇이 없는 이유 중 반은 회장님 탓이었다. 잠시 구경하던 은찬은 주한이 이끄는 대로 발걸음을 돌렸다.

제사를 지내는 본채와는 별개로 별채는 현대식으로 지어진 구조였다. 큰 거실 하나에 작은 방 두 개. 문중 제사 말고는 특별히 쓸 일이 없는 곳이라 간단하게 지은 것이란다. 주한을 따라가던 중 은찬은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제 또래 무리와 눈이 마주쳤다.

“형! 주한이 형!”

“어, 왔어? 오랜만이다.”

그중 한 녀석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주한의 앞길을 막아섰다. 이놈 보게? 눈을 반짝이며 주한을 바라보는 꼬락서니가 은찬의 심기를 건드렸다.

“뭐야, 나 잠깐 유학 간 사이에 결혼했다면서?”

“그래. 잘 지냈지?”

“나 연락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그렇게 됐어.”

“치, 언제는 결혼 안 한다더니. 1년 전만 해도 노는 게 좋다면서 그랬잖아. 평생 결혼 안 하고 혼자 산다고 그래 놓고서.”

이 자식. 앞에 있는 은찬이 누군지 뻔히 알면서 이렇게 말하는 저의가 뭘까. 은찬은 당황스러워하는 주한과 그놈을 번갈아 보았다. 오케이. 견적 나왔네. 좀 전까지 동만을 욕했지만, 지금은 녀석의 선견지명에 박수를 던지고 싶었다.

“노는 거 좋지. 그러니까. 나도 결혼 안 하려고 했는데 누가 계속하자고 매달려서.”

두 사람의 대화에 은찬은 불쑥 끼어들었다. 그러자 못마땅한 시선이 날아왔다. 그렇게 보면 네가 어쩔 건데?

“형이 결혼하자고 매달렸다고요?”

“형, 누구야?”

은찬의 물음에 주한은 뒤늦게 싸가지 없는 그 자식을 소개했다.

“사촌 조카 이종한. 여기는 내 와이프 유은찬.”

“아, 그 고양이 수인분? 말씀 많이 들었어요.”

이 자식. 고양이 수인이라는 것을 일부러 강조한 게 분명했다. 주한을 사이에 두고 은찬과 그 녀석 사이에 작은 눈싸움이 시작되려던 찰나였다.

“나 옷 갈아입어야 하거든? 나중에 보자.”

“아, 네.”

주한의 빠른 중재로 은찬은 녀석과 헤어져 방으로 들어왔다. 싱글 침대 하나와 옷걸이가 전부인 방안은 생각보다 꽤 컸다. 옷걸이에는 주한의 것으로 보이는 한복이 걸려 있었다. 침대를 차지한 은찬은 서둘러 양복을 벗고 한복으로 갈아입기 시작한 주한을 시큰둥하게 보았다.

“괜히 왔다고 생각되지?”

“쟤 뭐예요?”

“누구?”

“아까 걔. 친해요?”

“아…… 종한이? 1년에 한두 번 보는 사이?”

“그것뿐?”

“그럼?”

“아니…… 뭐. 그냥.”

그렇단 말이지. 은찬은 주한에게 관심을 끄고 생각에 잠겼다. 별것도 아닌 놈이 까부는 게 거슬렸다.

“유은찬.”

주한의 부름에 무심코 시선을 돌린 은찬은 픽 웃음이 터졌다. 귀와 꼬리를 들어낸 이주한의 한복 차림은 양반집 귀하신 도련님 같았다.

“이상해?”

“그거 알아요? 우리는 조선 시대에 태어났으면 만나지도 못했을 걸요?”

“왜?”

“딱 봐도 형은 양반집 도련님이었을 거고 나는 평민이나 노비 정도? 그리고 그 시절에 남자끼리 그런 거 하면 난리나는 거 알죠?”

말하고 보니 그럴 것 같았다. 최상계층의 표범 수인과 하층인 고양인 수인.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주한과 은찬은 눈도 마주칠 수 없는 신분이었을 테니 말이다.

주한은 인상을 쓰며 침대에 살짝 걸터앉았다. 두 사람이 눕기에 좁은 침대는 그의 무게에 맞춰 푹 꺼졌다. 그가 은찬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 만지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걱정하지 말아라. 그리되어도 내 너를 어여삐 여길 터이니.”

갑자기 사극 톤으로 말하는 주한을 향해 은찬은 콧잔등을 찡그렸다. 낯설고 이상했다.

“재미있어요?”

“왜, 이상해? 네가 그런 소리 하니까 그러지. 나는 우리가 조선 시대에 태어났어도 이렇게 만났을 것 같은데?”

“이렇게? 어떻게?”

은찬의 물음에 주한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내가 널 마음에 들어 했겠지.”

끈적끈적한 주한의 시선과 부드러운 키스를 받은 은찬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조용한 방안과는 달리 창밖은 여전히 할아버지의 호탕한 웃음소리로 시끄러웠다. 은찬은 잘생긴 주한의 얼굴을 빤히 보며 입을 열었다.

“왜 내 생각은 안 물어봐요? 난 싫다니까. 내가 몇 번을 말해. 형 별로라니까? 지금하고 똑같으면 조선시대의 난봉꾼일 텐데. 내가 그런 놈하고 왜? 뭐가 아쉬워서.”

“야……. 너는 꼭 그런 식으로 분위기를 깨야겠어?”

“사실이잖아요. 방금도 들었잖아. 형 조카가 하는 말. 노는 게 좋아서 평생 결혼 안 한다고 했다면서요.”

“그건…… 널 만나기 전이고.”

“아닌데. 1년 전이면 내가 형 밑에서 해방돼서 자유를 맛보고 있을 때고 형은 형대로 파트너 바꿔가면서 호텔…….”

순간 말을 다 내뱉기도 전에 주한의 입술이 은찬의 입술을 먹어 버렸다. 부드럽게 입술을 가르고 들어온 혀가 은찬의 입안을 휘젓고 빠져나간 후. 그는 제발 살려 달라는 시선을 던지며 호소했다.

“우리 지나간 얘기는 그만하자. 응?”

짓궂은 말장난에 쩔쩔매는 이주한은 귀여웠다. 은찬은 개구쟁이처럼 웃으며 주한의 입술을 혀로 핥았다.

“키스 좀만 더 해 주면.”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분위기 타는 건 이상했지만, 은찬의 요청에 주한은 망설임도 없이 달려들었다. 서로의 입술을 집어삼킬 듯한 격정적인 키스를 이어 가고 있을 때 돌연 두 사람은 행동을 멈추고 시선을 마주했다. 주한이 난처한 듯 미간을 찡그리며 배를 힐끔거렸다.

“어?”

“이런…….”

주한의 상체가 은찬을 살짝 누르자 배 속의 녀석이 화가 난 모양이다. 그걸 참지 못하고 발로 배를 뻥 차 버렸다. 둘은 마주친 시선에 픽 웃음을 터트렸다.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 할 것 같았다.

“누굴 닮았는지 성격 있는데?”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주한의 말에 은찬은 난 아니라며 발뺌을 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지만 말이다.

***

“웃겨. 지가 뭔데 여기까지 따라와? 여기가 어디라고. 안 그래?”

“그렇긴 한데……. 우리가 따질 입장은 아니지. 어쨌든 주한이 형이랑 결혼도 했고 애도 낳았으니까. 너도 들어서 알잖아. 회장님이 증손주 자랑 엄청 하시는 거. 우리 가문에 외동이 아닌 형제가 태어난 건 몇백 년 만이라잖아.”

“그럼 뭐하냐? 순수 혈통도 아닌데. 하필 골라도 고양이가 뭐냐 고양이가. 격 떨어지게. 주한이 형 눈이 높은 줄 알았는데 영 꽝이더라.”

“야, 이종한. 너 지금 주한이 형 결혼했다고 삐진 거지?”

“내가 왜?”

“너 형한테 몇 번 꼬리 쳤었잖아. 유학 가기 전에 밥 한번 먹자. 술 한잔 하자 연락했다가 까인 거 소문 다 났어, 인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친척 형을 꼬시려고 하냐? 넌 도덕도 없냐?”

“야, 원래 금단의 사랑이 더 애틋한 법이거든? 두고 봐. 나 아직 포기한 거 아니다.”

“아니면?”

“형이 한 사람한테 만족하겠어? 그것도 저런 별 볼 일 없는 고양이한테.”

“형하고 불륜이라도 하겠다고?”

“못할 것도 없지. 바람이 뭐 대단한 거라고. 결혼과 즐기는 건 별개잖아?”

지랄도 가지가지 한다. 바람이 뭐 어째? 결혼과 즐기는 건 별개라고? 주한의 사촌 조카 이종한이 지껄이는 말을 조용히 엿듣고 있던 은찬은 콧방귀를 터트렸다.

그럼 그렇지. 유은찬 촉은 틀리지 않았다. 어쩐지 주한을 보는 시선이 남다르더라니. 사촌이지만 이것도 엄연히 근친 아닌가? 친척들 앞에서 대놓고 불륜을 하겠다고 말하는 놈이나 그걸 들어 주는 놈들이나. 은찬은 소파에 빙 둘러앉아 희희낙락거리는 무리를 한심하게 쳐다봤다.

제사 준비를 위해 방을 나가기 전 주한은 은찬에게 방에서 편하게 쉬고 있으라고 당부했다. 아직 시간도 남았고 친척분들에게는 다 끝나고 난 뒤에 인사해도 된다며 말이다. 하지만 낯선 곳에 혼자 있기는 싫었다. 배도 고프고 그래서 문을 열고 나왔더니 이 사단이 벌어지고 있었다.

결혼식장에서 본 얼굴도 있고 몇몇은 처음 보는 얼굴도 있었다. 녀석들은 고양이 수인 은찬을 주제로 아주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 집안에서 자신이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코앞에서 욕하는 걸 듣고는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하늘이 내려 주신 이런 기회를 그냥 넘기면 안 되는 법.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은찬은 녹음 버튼을 눌렀다. 그들은 자신들의 말이 녹음되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신나게 말을 이어 갔다.

“일부러 임신했다는 핑계로 주한이 형 물고 늘어진 거 아닐까?”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좋은 집안 선 자리가 그렇게 많았다던데? 그거 다 파투 내고 그 고양이랑 결혼한 거라잖아.”

“회장님은 또 어떻게 꼬셨대. 그 대쪽 같은 영감을.”

“고양이는 요물이라잖아.”

“불쌍한 우리 주한이 형. 어쩌다가 저런 놈한테 잡혀서. 쯧쯧…… 진짜 잘 나가던 형이었는데.”

“근데 좀 그렇긴 하다? 우리 다 표범인데 고양이가 있으니까. 꼭 사냥감 같지 않냐?”

“야, 아무리 같은 고양잇과라지만 급이 다르잖아. 우리 조상님들은 저런 놈들 잡아먹었을걸?”

“방에 들어가서 코빼기도 안 비치는 거. 우리한테 쫀 거 아니야?”

“쫄아서 못 나오는데 한 표.”

이종한은 손을 번쩍 들며 픽 웃음을 터트렸다. 싸늘한 표정으로 그 녀석을 빤히 쳐다보던 은찬은 조용히 입 모양으로 욕을 퍼부었다. 이런 개썅 후레자식들을 봤나. 쫄기는 누가 쫄아! 애들 때문에 그리고 임신도 했으니 웬만하면 욕을 안 하고 살려고 했지만 자연스럽게 육두문자가 튀어나왔다.

좋네. 오늘 조상님 제삿날이 아니라 니들 제삿날이다. 눈을 번뜩인 은찬은 신나게 떠들어 대는 무리 앞으로 조용히 다가갔다. 물론 아무것도 못 들은 척 순진한 얼굴을 하고서.

“안녕하세요. 혼자 있으려니까 심심해서 그런데. 저도 여기 앉아도 되죠?”

그렇게 툭 말을 던지고서 대답도 듣지 않고 이종한 옆으로 엉덩이를 밀어 넣었다. 다리를 쩍 벌려 앉은 은찬 때문에 이종한의 자리가 좁아졌다. 차갑게 굳어 버린 그의 얼굴을 일부러 외면한 은찬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어쩐 일인지 좀 전까지 잘도 떠들던 놈들이 은찬이 나타나자마자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렇다니까. 뒤에서 욕하는 놈들 치고 제대로 된 놈들 하나 없다. 이 병신 머저리 새끼들. 꼭 멍석을 깔아 줘야 하냐? 은찬은 제 앞에 있는 놈들을 한심하게 바라보다 슬쩍 운을 띄었다.

“여기 처음 오는데 공기가 너무 좋네요.”

“……아, 네. 그럼 실컷 맡으세요. 공기.”

누군가 툭 던진 비아냥거림에 다들 픽 웃음을 터트렸다.

“여기가 체질에 맞으면 쭉 사시면 되겠네요.”

은찬은 잡아먹을 듯 그들을 지긋이 쳐다보았다. 또다시 녀석들은 침묵했고 은찬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그래서 어떻게 꼬실 건데?”

모두의 시선이 은찬에게 집중됐다. 표범 귀를 쫑긋 세운 무리가 똑같이 행동하니 마치 미어캣처럼 보였다.

“왜들 그렇게 놀래? 왜 대답을 안 해. 너 말이야, 너. 이주한 꼬신다며. 불륜하겠다며.”

“…….”

그대로 굳어 버린 이종한과 그 무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엿들었을 줄은 생각도 못 한 모양이다. 원래 고양이가 귀가 밝거든. 거기다 화나면 앙칼지고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든다는 걸 몰랐나 보네. 그래서 김동만은 은찬이 화나는 걸 제일 무서워했다. 고양이 기분 풀어 주는 게 제일 힘들다나.

“나 안 쫄았는데.”

“…….”

“내가 니들한테 왜 쫄아? 웃긴다. 유치하게 그런 말이나 듣고 있으니 내가 진짜 같잖아서.”

은찬이 픽 웃자 다들 크게 움찔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저기, 그건 그냥 한번 해 본 말인데…….”

다른 놈이 핑계라고 꺼낸 말이 은찬에게 먹힐 리 없었다.

“구체적으로 날 씹던데? 아. 그것도 그냥 해 본 말인가? 됐고. 태교에 안 좋은 말을 들었더니 기분이 무척 안 좋네. 머리도 아프고……. 아, 이러다가 조산하면 어쩌지.”

물론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엊그제도 병원에 다녀왔는데 너무 튼튼하게 잘 있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찬은 배를 부여잡고 앓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앞에 있는 녀석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해 갔다. 다들 지레 겁을 먹은 표정으로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별것도 아닌 것들이 까불고 있어. 은찬이 눕는 포즈를 취하려고 하자 다들 황급히 자리를 만들어 주며 눈치를 살폈다. 자연스럽게 소파를 차지한 은찬은 여전히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끝자락에 앉아 있는 이종한을 발로 툭툭 찼다.

“어이, 너 다리 마사지 좀 하고. 너희는 나가서 치킨 좀 사와 봐.”

뜬금없는 은찬의 요구에 이종한을 비롯한 다른 녀석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들 너무나 당연하게 시키는 은찬의 행동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네?”

“치킨. 치킨 몰라? 배 속 애가 놀라서 치킨이 먹고 싶다잖아. 이러다가 애 나오면 책임 질 거야? 뭐 해? 빨리 가지 않고? 나 식은 거 싫어하니까 빨리 와! 반반이야. 반반!”

이종한을 뺀 나머지 녀석들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거실을 나섰다. 그도 그럴 것이 치킨을 사려면 차로 30분 이상 가야 했기 때문이다. 치킨 먹을 생각에 내심 기분이 좋아진 은찬은 다음 타킷인 이종한에게 시선을 돌렸다.

“야, 불륜. 좋은 말 할 때 시키는 대로 하지?”

“내가 왜?”

어쭈, 이 자식 봐라. 이종한은 당돌하게 눈을 치켜세우며 벌떡 일어났다.

“말 깐다?”

“네가 먼저 깠거든?”

“그럼, 내 남편이랑 불륜하겠다는 놈한테 존대해 주리?”

“왜? 자신 없어서 불안해?”

녀석은 눈웃음을 치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은찬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오랜만에 제대로 열받은 은찬은 녀석과 눈싸움을 벌였다. 이주한 집에 이런 놈들밖에 없나? 사회생활하면서 별별 놈을 다 만나 봤지만 이렇게 도덕 개념 자체가 없는 놈은 또 처음이었다.

“그렇고 싶냐?”

“뭐?”

“이주한이 뭐가 좋은데? 잘생겨서?”

“……물론. 그것 포함. 내 롤 모델이거든.”

미친. 롤모 델이란다. 녀석의 입에서 그 단어가 자랑스럽게 나오자마자 은찬은 반사적으로 코웃음이 터졌다. 확신하건대 이놈은 이주한의 성격이 얼마나 더러운지 모르는 게 분명했다. 지금이야 이렇게 지내고 있는 거지 2년 전이었다면 은찬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이주한과 결혼하지 않았다.

“이주한에 대해서 무슨 환상을 가지고 있는 모양인데.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좋은 놈 아니거든?”

“뭐라는 거야. 그런다고 내가 포기할 거 같아? 나 너보다 주한이 형하고 알고 지낸 시간이 길거든? 어디서 아는 척이야? 깝치지 마.”

은찬의 충고에도 이종한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표정을 구기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자식아, 그래 봤자 너는 1년에 몇 번 만난 게 다였겠지만 나는 2년간 그 미친놈 밑에서 일한 사람이거든? 그 시절 당한 설움은 농담이 아니라 일주일 내내 밤낮으로 말할 수 있었다. 그런 놈을 롤 모델이라고 찬양하는 이종한이 은찬은 한심해 보였다.

“그래서 불륜을 하시겠다. 롤 모델이라서?”

“그런 것도 있고…… 뭘 또 그렇게 자세히 알려고 해? 걱정하지 마. 당신 자리 뺏으려고 그러는 건 아니니까.”

이 자식은 왜 또 혼자 앞서가는 거야.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이종한은 거만한 포즈를 취하며 은찬을 내려다보았다. 근거 없는 자신감에 순간 전투 의지가 팍 식어 버린 은찬은 녀석이 지껄이는 걸 묵묵히 들었다.

“그러면 회장님이 가만히 안 계실 테니까. 난 조용히 애인으로만 지낼게. 내가 필요한 건 주한이 형의 관심과 사회적 지위 조금이니까.”

“…….”

이주한이 퍽이나 널 좋아하겠다. 은찬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이종한의 위아래를 노골적으로 훑었다. 아무리 봐도 이주한 취향은 아니다. 이리한은 잘생기기라도 했지 앤 그냥 멍청하기만 했다.

욱해서 달려들긴 했지만, 이종한과 대화가 길어질수록 은찬은 기운이 빠졌다. 방에서 잠이나 잘까. 이종한이 뭐라 중얼거릴 동안 은찬은 습관적으로 하품하며 기지개를 켰다. 그게 녀석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다. 말을 멈춘 이종한은 순간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 말이 우스워?”

“아, 깜짝이야……. 왜 소리를 질러! 애 놀라게.”

“야, 나 장난으로 하는 말 아니야! 나 형이 결혼 안 한다는 말 믿고 유학 간 거였어! 솔직히 너 같은 거! 애만 안 가졌어도 형이 결혼해 줬을 것 같아?”

흥분한 이종한은 눈을 번뜩이며 따지고 들었다. 반대로 은찬은 낭창하게 받아쳤다.

“나도 결혼하기 싫었거든? 이주한이 결혼하자고 매달려서 귀찮아서 해 준 거거든?”

“뭐? 이게 어디서 거짓말이야!”

“거짓말인지 진짠지 본인한테 물어보면 될 거 아니야! 아까부터 왜 소리를 질러! 나 임산분 거 몰라? 배 안 보여?”

너만 성깔 있냐? 나도 있다. 순간 확 짜증이 치밀어 오른 은찬은 송곳니를 세워 으르렁거렸다. 둘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을 때였다.

“얘, 종한아. 나와서 인사하라니까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엄마 말 못 들었어?”

풍채가 우람한 중년의 여성이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종한은 그녀를 보자마자 입을 삐죽 내밀며 씩씩거렸다. 그녀는 누가 봐도 이종한의 엄마처럼 보였다. 얼굴이 닮았다.

“엄마! 이 자식이 주한이 형 애 가졌다고 기세등등해서 나 완전 무시해!”

“뭐어?”

“방금 나한테 송곳이 보이면서 으르렁거렸다니까? 이게 말이 돼?”

“누가 우리 귀한 아들한테 감히……! 우리 종한이, 많이 놀랐어?”

“나 심장 마비 올 뻔 했다니까? 엄마 알지? 내가 그런 거 약하잖아.”

“알지, 알지. 우리 아들 심장 약하지.”

이곳으로 오는 도중 은찬은 주한에게 집안에 관한 이야기를 대략 들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시집온 여인의 몸에서는 단 한 명의 아이만 태어났다고 한다. 만에 하나 가문의 대를 이을 아이가 돌연사라도 하는 날에는 가문은 존폐의 위기에 놓이는 셈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많은 첩을 두어 자손을 번창시켰지만, 지금은 표범 수인의 개체 수가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라 했다. 그러니 은찬의 존재가 할아버지에게는 굴러들어온 복이나 마찬가지라나.

귀한 자식이니 다들 얼마나 애지중지 키웠는지 알 만했다. 그 증거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은찬이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었건만 역으로 몰아세워 버리니 말문이 막혔다. 이종한의 엄마는 콧김을 뿜어 대며 은찬을 획 째려보았다.

“너, 회장님이 귀여워해 주신다고 기고만장한 것 같은데! 우리 집안 그렇게 만만한 집안 아니다? 어디서 고양이 따위가 감히!”

“엄마, 쟤 임신했다고 엄청 유세 떠는 거 있지?”

“남자가 임신한 게 뭐가 자랑이라고 그러고 다녀?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회장님이 네가 좋아서 받아 준 거 같니? 아니! 그냥 네 배에 있는 씨가 우리 표범 집안 씨라서 받아 준 것뿐이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야! 고양이면 고양이답게 조용히 방에나 처박혀 있을 것이지 뭐 한다고 여기까지 와서 걸리적거려!”

이래서 가정교육이 중요한가 보다. 모자가 아주 죽이 잘 맞아 떨어졌다. 두 사람이 만담처럼 폭언을 쏟아 부었지만 애석하게도 은찬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런 일방적인 말싸움은 관심도 없었다. 오직 머릿속에는 치킨은 언제쯤 올까. 그 생각으로 꽉 찼고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너, 어른이 말하는데 그게 무슨 버릇이니? 이래서 없는 것들하고 상종해서는 안 된다니까!”

이종한의 엄마는 푸짐한 풍채에 걸맞게 목소리도 컸다. 거실이 떠나갈 듯 쩌렁쩌렁 울렸다. 웃긴 게 그녀의 꼬리도 살이 쪄서 포동포동했다.

“자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가!”

누군가 은찬 대신 화가 난 목소리로 따졌다. 고개를 돌린 은찬의 시야에 주한의 어머니가 들어왔다. 단아한 검정 원피스 차림으로 머리를 한 가닥으로 질끈 묶은 그녀는 무서운 표정으로 은찬의 곁에 섰다. 그리고 차가운 목소리로 이종한의 엄마에게 따지듯 물었다.

“지금 우리 애한테 무슨 말을 그리하는 건가?”

“……들으셨어요? 아니, 뭐 틀린 말 한 것도 아니고…….”

기가 팍 죽은 이종한의 엄마는 눈을 내리깔며 말끝을 흐렸다. 반대로 이주한의 어머니는 눈을 치켜세웠다.

“한 번만 더 그런 식으로 우리 은찬이를 대하면, 아버님께 말씀드리겠네! 자네 집 사업에 투자한 것도 다 회수할 거고!”

“아니, 애들 싸움에 뭐 그렇게까지 해요. 너무 오버 하신다.”

이종한의 엄마가 꼬리를 내리며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항변했지만 이주한의 어머니는 단호하게 말했다. 은찬의 손을 꽉 잡고서.

“내 며느리니까. 난 내 며느리가 되지도 않는 것들한테 무시당하는 거 그냥 못 보겠거든. 왜? 아니꼬운가? 억울하거든 아버님께 가서 말해. 예전처럼. 내가 자네를 울렸다고. 그런 거 잘하잖아.”

“…….”

이종한의 엄마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모자는 똥 씹은 표정으로 한동안 침묵하더니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이주한의 어머니는 둘만 남게 되자 비로소 웃음을 터트렸다.

“오랜만에 속 시원하다.”

그녀가 잡은 손은 땀으로 흠뻑 젖은 채였다. 성격상 소극적인 그녀가 이렇게까지 나서서 은찬을 감싸 준 것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말이다. 솔직히 은찬은 그 모자가 하는 말은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리고 있었다.

“오랜만이지? 몸은 어때? 괜찮아? 걱정 마, 은찬아. 내가 너 지켜 줄게.”

“괜찮으세요?”

“나? 괜찮아. 하…… 하하. 좀 떨리네. 나 이렇게 소리 지른 거 태어나서 처음이거든.”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좀 전의 강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보호 본능을 일으킬 만큼 가녀린 어머니였다. 은찬은 그녀와 마주친 시선에 애써 웃으며 쓰러지지 않게 어깨를 감쌌다. 지금 보호를 받아야 할 사람은 은찬이 아니라 그녀였다.

***

은찬은 상다리가 휘어질 만큼 차려진 음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전복구이에 갈비찜. 거기다 선홍빛을 자랑하는 육회도 있었다. 배가 고프던 참이긴 했지만 다 먹을 수 없을 만큼 방대한 양에 입이 떡 벌어졌다.

“입에 맞으려나 모르겠네. 어서 먹어. 맛없으면 맛없다고 해 줘.”

주한의 어머니는 조곤조곤 말하며 기대에 부푼 눈으로 은찬을 빤히 보았다. 방 밖의 마당은 제사 준비에 여전히 분주했지만, 누구도 두 사람을 찾는 이가 없었다.

작은 판상을 사이에 두고 주한의 어머니와 마주앉은 은찬은 이 자리가 불편하고 어색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그녀와 얼굴을 마주한 건 딱 두 번밖에 없었다. 결혼식 때와 아이들을 보기 위해 잠시 귀국했을 때. 그리고 오늘까지 치면 세 번째였다.

물론 전화와 영상 통화는 간간이 했지만 직접 마주하는 건 갭이 컸다. 어색한 정적 속에서 은찬은 마지못해 젓가락을 들었다.

“직접 하신 거예요?”

“아니. 주한이한테 못 들었어? 나 요리 못 해.”

그녀를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아직도 소녀 감성이 남으신 분이셨다. 부끄러운지 양 볼을 붉히며 배시시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다 유명한 집에서 사 온 거야. 너 주려고 아침부터 주한이 아빠하고 서울 일대 다 돌아다녔다니까.”

이주한하고는 다르게 애교도 많으시고 정도 많으시고. 회장님과는 달리 처음부터 은찬을 편견 없이 받아 주신 분이기도 했다. 아이를 낳고 첫 영상 통화를 했을 당시에도 은찬에게 고맙다는 말을 끊임없이 하시던 분이셨다. 덕분에 시집살이는커녕 편안하게 살고 있지만, 어떻게 이런 분에게서 이주한 같은 놈이 태어난 걸까?

그렇다고 아버지를 닮은 것도 아니다. 이주한의 아버지 또한 어머니처럼 선한 인상에 늘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짓고 계신 분이셨다. 그의 부모님을 만나 제일 큰 충격을 받은 게 그거였다. 입만 열면 소리 지르고 짜증 내던 이주한과는 너무 판이한 부모님이라서. 너무 선하고 좋으신 분들이셨다.

“맛있어?”

“……네, 맛있네요.”

그 말 한마디에 그녀는 활짝 웃었다. 그러다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은찬을 측은하게 보았다.

“옆에 있으면 먹고 싶은 거 맨날 사 줬을 텐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살이 쏙 빠졌네.”

순간 흠칫한 은찬은 갈비를 씹다 말고 그녀를 힐끔거렸다. 어딜 봐서 살이 빠졌다는 거지? 임신하고 지금까지 무려 10Kg나 더 찐 상태였다. 얼굴에 살이 오를 때로 올라서 동그란데. 심지어 은찬의 엄마도 작작 좀 먹으라고 잔소리를 할 정도인데 말이다.

“제가요? 살이 빠졌어요?”

“영상 통화 할 때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까 너무 말랐어. 주한이 이 녀석이 너 신경 안 쓰지? 쟤가 그렇다니까. 누굴 닮아서 저런지 몰라. 주한이 아빠는 안 그런데 애가 좀 무뚝뚝하고 그렇지?”

“아니요. 안 그래요. 틈틈이 애들도 잘 봐 주고 맛있는 것도 많이 사 줘요.”

“얘는. 그건 당연한 거지. 사내 애 둘 키우는 게 쉬운 줄 알아? 엄마 혼자서 어떻게 다 키워. 안 그래? 그리고 너는 홀몸도 아니잖아. 시킬 거 있으면 주한이 다 시켜. 만약에 주한이가 네 말 안 들으면 나한테 연락해. 내가 따끔하게 혼내 줄 테니까.”

빈말인지 진담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호언장담에 은찬은 씨익 웃었다. 그녀는 씩씩하게 잘 먹는 은찬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같이 안 드세요?”

“난 너 먹는 것만 봐도 배불러. 밥 먹는데 이런 소리해서 미안하지만, 알지? 너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 내가 못한 걸 네가 해 줘서 고맙고 한편으론 남의 집 귀한 자식 힘들게 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집안에서 제일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주한의 부모님이셨다.

“괜찮아요. 저희 부모님은 힘닿는 데까지 낳으라고 하시던데요?”

정말 그랬다. 이왕 그런 체질로 태어난 거 수인 인구 증가에 기여를 해 보라는 엄마의 조언을 떠올리며 은찬은 쓰게 웃었다. 반대로 주한 어머니는 정색하며 극구 말리기 바빴다.

“안 돼. 너 몸 상해. 아무리 남자라지만 애 낳는 게 쉬운 게 아니잖아.”

“고양이 수인은 원래 다산해서 괜찮대요.”

“누가 그래?”

“엄마가요.”

“은찬이 너는 형제 없지?”

없다. 은찬은 고양이 수인 가족치고 특이하게 외동이었다. 그건 그럴 만한 이유가 다 있었다.

“아빠가 나 낳고 바로 묶었거든요.”

“어? 뭘?”

“엄마가 애 키우는데 돈 많이 든다고 하나만 낳기로 했대요. 그래서 바로 묶어 버렸대요.”

“아…….”

그제야 이해한 주한 어머니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그 틈에 은찬은 육회를 흡입했다. 계란 노른자와 비벼진 육회가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맛을 음미하던 은찬은 불현듯 좀 전 일이 떠올랐다.

“아까요.”

“응?”

“종한인가, 중한인가.”

“아…… 왜?”

“그쪽 집하고 사이 안 좋은 거 맞죠?”

“그렇게 보여?”

“네.”

사이가 좋았다면 그렇게 언성을 높일 필요는 없었을 테니까. 짧은 찰나, 그들은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눈치껏 던진 질문에 주한 어머니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고 잠시 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왜요?”

원래 남의 일에는 관심 없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아직도 은찬은 벌벌 떨면서 자신을 감싸 주던 그녀의 모습이 뇌리에 박혀 있었다. 태어나서 큰소리 한번 치지 못했을 것 같은 그녀가 자신을 위해 그렇게 해 준 게 감명 깊었다.

“……아무래도 내 입지가 안 좋았으니까. 최근 들어서 아버님하고 관계가 개선됐지만, 예전에는 인연을 끊다시피 했거든. 그래서 친척들이 날 깔보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었지. 난 하나밖에 없는 며느리지만 아버님 눈밖에 난 며느리였으니까.”

“그럼, 좀 전에 그 아줌마가 어머니 괴롭혔던 거예요?”

“별거 아니야. 입만 열면 자기 자랑에다가 말끝마다 피박 주고, 가족 모임에서 무시하고, 그러다가 내가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아버님께 모함하는 거 정도? 유치하지?”

이래서 핏줄이 무서운 법인가 보다. 좀 전에 이종한이 은찬에게 했던 패턴 그대로였다. 육회를 오물오물하며 은찬은 담담하게 말하는 그녀를 응시했다. 대략 짐작해 봐도 20년 넘는 그 세월을 잘도 참았다. 만약에 은찬이었다면 못 참는다. 당장 그 자리에서 머리채라도 쥐어뜯었을 것이다.

“어머니.”

“응?”

“복수해 드려요? 아니다. 우리 복수해요.”

“무슨 복수? 아까 그거? 됐어. 나는 아까 그거로 만족해.”

아니. 은찬이 만족 못 하겠다. 육회 접시를 다 비운 은찬은 배가 너무 불러서 숨이 찼다. 저걸 다 먹다니 아무래도 살 빼려면 고생 꽤 하겠다.

“어머니, 고양이 보은이라고 아세요?”

“고양이 보은? 그게 뭔데?”

고개를 갸웃거리는 어머니와 마주친 시선에 은찬은 씨익 웃었다.

“고양이가 은혜를 입으면 갚는다는 건데요. 제가 또 그런 건 잘 지키거든요. 어머니는 가만히 앉아서 구경만 하세요.”

그런 의도로 녹음한 건 아니지만 핸드폰에 녹음된 그것이 아주 요긴하게 쓰일 것 같았다. 이게 바로 일석이조. 누이 좋고 매부 좋고지.

그로부터 정확히 세 시간 뒤 제사가 시작됐다. 집안의 여자들을 제외한 남자는 모두 한복 차림으로 마당에 질서정연하게 서 있었다. 제사는 정숙하고 차분하게 진행되고 있었고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할 정도로 분위기는 엄숙했다.

그때였다. 제사가 뭔지 이해하지 못한 두 꼬마 맹수사 할아버지를 찾아 주변을 뛰어다녔다. 그러다 할아버지를 찾은 이요한이 활짝 웃으며 소리쳤다.

“할부지! 할부지!”

“오냐. 할부지 여기 있다.”

제사를 방해하는 어린 두 손자가 마냥 귀여운지 회장님은 혼내기는커녕 껄껄 웃으셨다.

“할부지 내가 춤 춰 줄게!”

종종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보여 준 적이 있어서 요한은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 화면을 터치했다. 이요한의 작은 표범 꼬리는 노래가 나오면 흔들기 위해 허공에서 대기 중이었다. 하지만 기다리던 노래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이종한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마당을 가득 채웠다. 좀 전에 이종한 무리들이 지껄이던 그 말들이 고스란히 흘러나왔다.

노래가 나오지 않자 요한은 울상이 되었고, 회장님의 얼굴도 붉으락푸르락 물들어 갔다. 제사는 그대로 파토가 났다. 녹음을 끝까지 듣고 다시 돌려 듣던 회장님의 잔뜩 화가 난 목소리가 담장을 넘어 마을 전체에 울려 퍼졌다.

“누가 우리 은찬이를 이딴 식으로 무시해! 언놈이냐! 당장 나오지 못해!”

등골이 오싹할 만큼 쩌렁쩌렁한 그 포효에 모두 덜덜 떨기 시작했다. 특히 이종한과 녀석의 엄마는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은찬은 사이다 같은 이 광경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물론, 요한의 손에 핸드폰을 쥐여 준 건 은찬이었다. 나름 완벽한 복수였다.

***

“아……. 우울하다, 우울해.”

구름 한 점 없는 청량한 하늘과는 반대로 은찬의 표정과 목소리는 어두웠다. 한숨을 푹 내쉬며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길 몇 분째. 옆에서 그런 은찬을 구경하던 동만의 한심한 시선이 날아왔다.

“너는 친구가 우울하다는데 왜 그러는지 이유라도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냐?”

“별로. 안 궁금한데?”

“궁금한 척이라도 해 봐. 나 말하고 싶으니까.”

은찬의 강요에 동만은 절레절레 고개만 흔들 뿐 입을 열지는 않았다. 왈칵 얼굴을 찡그린 은찬은 조용히 동만을 째려보다가 다시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애꿎은 동만에게 이러지 말자. 그렇게 생각하며 잠시 옛 생각에 잠겼다.

여기 이 자리에서 매일 이주한을 욕하고 그랬었는데. 이주한이라면 치가 떨린다며 몸서리치던 은찬이었건만 지금은 그의 셋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만약 예전의 자신을 잠깐이라도 만날 수 있다면 은찬은 이주한하고 절대로 자지 말라고. 개다래 술 따위 입에도 대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모든 사건의 발단은 그것이었으니까. 은찬은 커다란 제 배와 하늘을 번갈아 보며 또 한숨을 내쉬었다.

수인은 왜 임신 주기가 짧은 걸까. 눈 깜짝할 사이에 출산일이 코앞으로 다가온 은찬은 벌써부터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아무것도 몰랐을 때와는 달리 이미 한번 지옥 맛을 본 경험이 있기에 더 그랬다. 저번에는 지옥의 문 앞까지 같다면 이번에는 저승사자와 대면할지도 모른다는 극단적인 생각이 며칠째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왜 또. 뭐 때문에 그러는데. 아까 족발 대 자 하나 홀라당 다 먹어 놓고서 벌써 소화 다 된 거야? 아이스크림 먹을래? 사 올까?”

“내가 돼지냐? 됐거든. 그냥 요즘 이 형님 기분이 들쭉날쭉하다.”

은찬이 허공을 바라보며 힘없이 중얼거리자 동만의 혀 차는 소리가 바로 들렸다.

“너 변덕 심한 거 하루 이틀이냐. 분위기 잡지 말고 용건만 말해. 이리한한테 애들 맡기고 왔잖아. 얼른 내려가서 애들 봐야 해.”

“나 심각해. 얼굴에 심각이라고 써 있는 거 안 보여?”

은찬의 요청에 동만은 건성으로 은찬을 한번 휙 보더니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요즘 사내 게시판에 주식 붐이 불어서 녀석도 그 대열에 합류했단다. 그래서 틈만 나면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나한테 관심 좀 가져. 나 관심이 필요해.”

“그런 말은 남편한테 하셔야죠.”

“아니, 너의 애정이 고프다고.”

비장의 무기 고양이 귀를 꺼냈지만, 동만의 반응은 차가웠다. 녀석은 핸드폰 화면만 뚫어지게 보았고 눈길 한번 받지 못한 은찬은 골이 났다. 요즘 들어 김동만의 관심이 예전 같지가 않았다. 이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너 주식한다고 했지?”

“왜? 너도 관심 있어?”

“아니, 너 무슨 주식 샀는데? 그 주가 다 하락시켜 버리게.”

은찬의 말에 동만은 코웃음 터트렸다.

“웃기고 있네. 니가 무슨 재주로.”

“난 재주가 없지. 근데 회장님은 그럴 수 있지. 너 퇴직금하고 대출도 받아서 넣었다고 했지?”

은찬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던진 말에 동만은 그제야 핸드폰을 손에서 내려놓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녀석은 은찬의 말을 믿는 눈치였다.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이리한하고 살면서 멍청함도 옮은 게 분명했다.

“야, 나 여기에 몰빵 했어! 그러지 마!”

“주식은 아무나 하냐?”

“요즘 같은 세상에……. 월급 빼고 다 오르는. 월급만 받아서 먹고 살기 쉬운 줄 아냐? 나 같은 서민은 로또 아니면 주식밖에 답이 없거든!”

“너 로또 걸렸잖아.”

“내가 언제?”

“이리한이라는 로또.”

“…….”

짧은 찰나, 김동만의 표정에서 많은 감정을 엿볼 수 있었다. 은찬은 씨익 웃으며 녀석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이제 그만 포기해. 넌 도망 못 가. 너 저 개 버리면 유기하는 거다? 세상에서 제일 나쁜 사람이 누군지 알아? 키우던 동물 버리는 사람이야. 너는 그러지 마라.”

“……저 새끼 동물 아니고 사람이거든?”

어금니를 꽉 깨문 동만의 발악에 은찬은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사람 아니고 수인. 반은 동물. 그러니까 버리면 반은 유기.”

“나 솔직히 좀 전까지 기분 좋았거든? 내 주식이 상승세를 타서 아주 날아갈 듯 좋았다고……. 그런데 나까지 우울하게 만드는 저의가 뭐냐. 같이 우울함의 끝을 보자 이거냐?”

다시 주제가 원점으로 돌아왔다. 은찬은 우울했고 그 우울함을 덜어줄 동만의 위로가 필요했다. 고로 다시 관심을 받게 된 은찬은 만족스러웠다.

“동만아, 나 우울해.”

“아까 그 말 했다고. 그러니까 왜 우울한지 그거나 후딱 말하고 끝내.”

“무서워.”

“난 니가 더 무섭다. 너 얼마 전에도 사고 쳤다며.”

사고? 무슨 사고? 은찬은 동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하자 동만은 혀를 끌끌 차며 설명에 들어갔다.

“아, 왜. 문중 제사. 너 거기 안 간다고 했다가 갔다며. 거기 완전 뒤집어 놓고 왔다고 소문 다 났다던데?”

“아, 그거.”

일주일도 훨씬 더 지난 일을 들먹거리니 기억날 리가 없지. 은찬은 픽 웃었다.

“누가 그래? 너희 집 개?”

“극대노한 회장님이 문중 제사를 엎어 버리고 너하고 증손자들 무시한 사람들 색출해서 발도 못 붙이게 만들었다면서? 그 집 사업 자금도 다 회수하고 완전 알거지가 돼서 난리 났다더라.”

“그래? 관심 없어서 거기까진 몰랐네.”

은찬은 시큰둥하게 반응하며 배를 긁적였다. 거짓말이 아니라 그날 이후 그 집이 어떻게 됐는지 누구도 말해 주지 않았고 은찬도 굳이 묻지 않았다.

솔직히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그 녀석이 제 입으로 지껄인 걸 누굴 탓할 일도 아녔다. 그 날 그 시점에 대화를 녹음한 건 은찬이지만 그 부모에 그 자식이라고. 그렇게 가르쳤으니 그런 결말을 당해도 쌌다.

“근데 그거 내가 한 거 아닌데? 이요한이 한 거지.”

은찬은 모든 탓을 죄 없는 요한에게 넘겼지만, 동만이 믿을 리 없었다.

“웃기고 있네. 야! 요만한 애가 그걸 녹음해서. 그 타이밍에 회장님 앞에서 틀었다고?”

“그럴 수도 있지. 우리 요한이 머리 좋잖아.”

“좀 전에 동영상 하나 틀어 달라고 내 다리에 매달리던 애는 요한이 아니고 딴 애냐? 아무튼. 그래서 그 날 이후로 널 대하는 게 달라지긴 했냐?”

“누가?”

“누구긴. 콧대 높으신 표범 수인 집안사람들.”

은찬은 대답 대신 씨익 웃었다. 말해 뭐 해. 그 시간 이후부터 그들은 은찬이 보이기만 하면 눈을 내리깔고 침묵했다. 한순간에 집안 실세로 등극한 셈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는 진짜 대단해. 거기 가서 임팩트 있게 네 존재만 알리라고 했지. 완전 끝장을 내 버릴 줄은 몰랐다. 우리 고양이 최고다, 최고!”

갑자기 동만은 박수를 치며 은찬을 찬양했다. 민망할 정도로 띄워 주는 녀석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은찬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너도 끝장내기 전에 닥쳐.”

평소 같았으면 재미있게 받아쳤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은찬의 날 선 반응에 동만의 손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공에 맴돌았다.

“우리 은찬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까칠할까……. 너무 까칠해서 이 형님이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우울하다고. 우울하다고 몇 번을 말해!”

재차 말한 은찬은 미간을 찡그렸다. 눈치 없는 이 자식을 붙잡고 너무 많은 걸 바란 것 같았다.

“잘 들어! 나 지금 엄청 우울하고 심란해! 왜냐? 애 낳을 때 그 고통을 다시 겪어야 하니까! 됐냐?”

“뭘 그렇게 고민해. 수술하면 되잖아.”

그렇지. 수술하면 되겠지. 모두 다 그렇게 말할 테지만 다들 간과하는 게 있었다. 그건 겪어 본 자들만이 아는 것이다.

“수술하면 안 아플 거 같지? 아니. 수술해도 아파! 야, 배를 째는데 안 아프겠냐? 자연 분만은 낳기 전에 고생하면 그만이지만 수술은 낳은 후가 더 고통스럽거든?”

은찬은 눈을 부릅뜨고 발끈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는 듯이 말이다.

“……내가 낳아 봤어야 알지. 그래서 이번에는 자연 분만 할 거야?”

곧바로 태세 전환을 한 동만은 은찬의 어깨를 툭툭 털었다.

“아니! 미쳤냐? 내가 지금까지 말한 거 뭐 들었냐? 그 고통을 어떻게 참아! 죽는다니까? 진짜 눈앞에서 지옥문이 열렸다가 닫혔다가 한다니까?”

“수술도 싫다. 자연 분만도 싫다. 나더라 뭐 어쩌라고. 애는 니가 낳지 내가 낳냐?”

동만의 핀잔에 은찬은 서운함이 밀려왔다. 입을 삐쭉 내밀고 동만을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

“너는 내가 걱정도 안 되냐?”

“아직 한참 남았는데 무슨 걱정을 벌써부터 해.”

“한참 남은 거 아니거든? 난 아침마다 피가 바짝바짝 마른다고. 엄마는 잠깐만 참으면 된다고 하지. 형은 이번에 아예 처음부터 수술로 하라고 하지. 의사 말로는 자연 분만이 아이한테 좋다고 하지. 그런데 너도 알다시피 내가 아픈 거는 못 참잖아. 하아……. 누가 나 대신 낳아 줬으면 좋겠다.”

죽을상을 한 은찬은 고개를 툭 떨궜다.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고 태교나 신경 써. 인마. 우리 공주님 너 때문에 놀라겠다.”

동만은 은찬의 배를 부드럽게 쓸어 만졌다. 녀석은 이번에 태어날 아이가 여자아이라고. 그렇게 확신했다.

“태교해 봤자 소용없어. 요한이 유한이 봐 봐. 귀에서 피가 날 만큼 클래식 들어도 얌전하기는커녕 죽어라 말 안 듣잖아. 누구 닮아서 그러는지 모르겠다니까?”

“너 닮은 것 같은데. 지 좋을 때로 하다가 뭐 필요하면 와서 꼬리 치는 거. 딱 너잖아.”

어딜 봐서 날 닮았다는 거야? 귀부터 꼬리까지 완벽한 표범 핏줄이구만. 고양이는 그렇게 미친 듯이 달리지 않거든? 은찬은 기가 찬다는 듯 녀석을 흘겼다.

“너 개랑 살더니 감 떨어졌냐? 어딜 봐서 날 닮아. 고양이가 하루 종일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거 봤냐? 태어나자마자 고기에 환장하는 거 봤냐고.”

“뭘 또 그걸 심각하게 받아들여.”

은찬은 넉살 좋게 받아치는 동만을 시큰둥하게 째려봤다. 기분이 좋지 않으니 별개 다 짜증이 났다.

“너 개가 좋아, 고양이가 좋아?”

“또 유치하게 그런다. 개도 좋고 고양이도 좋고. 됐냐?”

“나 개하고 겸상 안 하거든! 하나만 골라! 의리 없게 개 고르기만 해 봐! 너 진짜 가만 안 둔다!”

“언제는 그 개가 로또라며. 잘 살라며. 너야말로 사람 헷갈리게 말을 이랬다저랬다 하는데?”

“뭐랄까. 다른 수인은 몰라도 개한테 만은 지면 안 된다. 뭐 그런 느낌이랄까?”

은찬이 비장한 표정으로 말하자 동만은 그런 은찬을 말없이 빤히 보았다.

“그 표정 뭐냐.”

“너희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더라. 그냥 사이좋게 지내면 안 돼?”

은찬은 이리한과 평화 협정을 맺길 바라는 동만의 바람을 단칼에 잘라 버렸다.

“안 돼! 아니, 못 해! 조상 대대로 내려온 견묘지간을 우습게 보지 마! 나는 그 개랑 하나부터 열까지 맞는 게 없으니까! 내가 너 하고 그 개하고 잘해 보라고 한 건 돈이 많아서 너 고생은 안 시킬 것 같아서지 다른 이유는 없거든?”

“씨발, 존나게 고마워서 눈물이 나려고 하네.”

동만은 전혀 감정이 들어있지 않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 말에 영혼이 없다?”

“…….”

동만은 은찬과 마주친 시선에 영혼 없는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며 한창 대화의 열을 올리고 있을 때 닫혀 있던 옥상 문이 벌컥 열렸다. 두 사람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열린 문 쪽으로 향했고 이내 침묵했다. 평화롭던 자유 시간이 끝났다.

활짝 문을 젖히고 나타난 이는 이리한이었다. 동만을 찾은 이리한은 환하게 웃으며 미친 듯이 달려왔다. 시선은 오직 김동만에게 고정한 채였다.

“애들은?”

“회장님 오셨길래 토스하고 나왔죠. 나 빼고 두 사람 여기서 뭐 했어요?”

“뭐 했을 거 같냐.”

“둘이서만 맨날 재미있게 놀더라.”

개는 원래 질투가 많은가? 아님 저 녀석만 유독 심한 건가. 이젠 말하는 것도 질투하는 이리한이다. 녀석은 오자마자 동만과 은찬 사이에 억지로 엉덩이를 구겨 넣었다. 가뜩이나 좁은 마당에 이리한까지 끼어드니 은찬의 자리도 확 줄어들었다.

“야, 저리 가! 왜 하필 여기에 앉는 건데! 빈자리도 널렸잖아!”

“동만 씨 옆은 원래 내 자리거든?”

“웃기고 있네. 거기는 원래 내 자리였거든?”

은차은 픽 쏘아붙이며 자신을 등진 이리한의 등을 발로 퍽 찼다. 얼마나 힘껏 쳤으면 눈 깜짝할 사이에 멀리 날아간 이리한은 은찬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어! 너 나 쳤어!”

“그래, 쳤다. 왜. 어쩔래?”

“왜 쳐, 왜!”

“그냥, 재수 없어서. 너하고 같이 앉기 싫어서.”

흥분한 이리한과 달리 은찬은 아주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분한지 숨소리가 거칠어진 이리한은 동만을 향해 억울함을 호소했다.

“동만 씨! 쟤가 나 때렸어!”

“…….”

동만은 또 시작이라는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볼뿐 어떤 액션도 취하지 않았다. 짧은 정적이 흐르고 이리한은 혼자 반격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너어! 내가 우리 동만 씨랑 알콩달콩 잘 지내니까 질투하는 거지? 동만 씨, 여기 당장 관둬요! 엄마한테 말하면 더 좋은데 취직시켜 준다니까?”

이리한이 말하고 있는 도중이었지만 동만은 은찬에게 눈짓을 던졌다.

“야, 가자.”

“너 관둘 거냐?”

“미쳤냐. 저 자식 말 듣지 마. 나 여기서 정년퇴직한다니까?”

“좋은데 취직시켜 준다잖아.”

“나는 고양이 보면서 월급 받는 게 더 좋거든?”

“오, 김동만. 의리 있는데.”

은찬이 기분 좋게 웃으며 주먹을 내밀자 동만도 웃으며 주먹을 부딪쳤다. 둘은 신나게 주절거리고 있는 이리한을 버려두고 문으로 향했다. 그러자 뒤에서 이리한의 악에 받친 소리가 허공에 쩌렁쩌렁 울렸다.

“야, 고양이! 너 사람 말하는데 그냥 가면 어떻게 해! 동만 씨, 나 두고 어디 가요!”

지금 김동만은 화가 난 상태였다. 그저께도 산책이라는 명목하에 몇 시간을 걸었다고 했으니 아마도 이리한이 바뀌지 않는 이상 둘 사이는 지금과 변하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 둘의 관계는 산책하기 싫은 주인과 산책에 환장하는 개였다.

은찬은 뒤에서 쫓아오는 이리한과 김동만을 번갈아 훔쳐보며 가볍게 웃었다. 하루걸러 하루 싸워도 그 둘은 제법 잘 지내고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천생 연분이라니까.

***

“이요한, 이유한. 오늘 어떻게 해야 한다고 아빠가 그랬지?”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두 아이를 겨우 잡아 소파에 얌전히 앉혀 놓은 주한은 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연히 녀석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아빠 말 잘 들어야 한다고 했어요.”

“조용히. 얌전히 있어야 한다고 했어요.”

앙증맞은 표범 귀를 쫑긋 세우고 환하게 웃는 녀석들은 천사가 따로 없었지만 은찬은 더 이상 그 미소에 속지 않았다. 지금은 이렇지만 돌아서면 작은 악마로 변할 것이다. 악을 쓰고 화를 내고 소리를 질러야 겨우겨우 말을 듣는 악마들이었다.

두 녀석이 갓 태어났을 때, 주한과 은찬은 아이들 육아 문제에 관하여 잠시 이야기를 나눴었다. 그때 둘은 아무리 화가 나고 힘들어도 애들에게는 소리를 지르지 말자. 화를 내지 말자. 그렇게 다짐했다. 하지만 그 다짐은 불과 몇 달도 안 돼서 깨지고 말았다.

특히 둘이라서 더 그랬다. 한 놈이 가만히 있으면 한 놈이 사고를 치고, 아니면 둘이 동시에 사고를 치고. 하루하루가 다채로운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아빠랑 약속. 증조할아버지랑 김 실장 아저씨 말도 잘 듣고. 이리한 아저씨 깨물면 안 돼. 바지 물고 늘어져서도 안 돼. 알겠지?”

“네!”

“네에!”

주한은 재차 강조하며 신신당부했고 아이들도 곧잘 대답했다. 이렇게만 본다면 오늘 나들이는 순조로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절대로 그럴 리 없다는데 은찬은 제 꼬리를 걸겠다.

“모르는 사람 따라가면 안 돼!”

“네!”

“뭐 사 달라고 떼써도 안 되고!”

“네에!”

늘 하는 말이지만 오늘따라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이유가 있었다.

따뜻한 봄날. 색색의 화려한 꽃들이 대지를 수놓는 계절. 출산일을 일주일 앞둔 은찬을 위해.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봄을 맞이하는 아이들을 위해 가족이 함께 소풍을 가기로 했다.

장소는 그리 멀지 않는 근처 공원이지만 그럼에도 애들은 잔뜩 신이 난 상태였다. 당연했다. 태어나서 사람들이 많은 곳은 처음 가 보는 것이었으니까. 이제껏 집과 회사. 그리고 증조할아버지의 넓은 저택이 전부였던 녀석들이다.

사실 수인 유치원에 보내려 했지만, 표범 수인 유아가 워낙 귀해서 간혹 나쁜 사람들의 표적이 된다는 말에 포기했다. 애들이 조금 더 클 때까지 곁에 두는 거로 이미 주한과 이야기를 마친 상태였다.

두 아이의 사회성이 걱정되지만, 성격을 보아하니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좋아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 호불호가 너무 강해서 탈이긴 해도 그럭저럭 붙임성도 좋았다. 은찬은 아빠의 팔에 매달려 장난치는 두 아이를 보다가 픽 웃음이 터졌다. 하루가 다르게 아이들이 자라니 이제는 주한도 버거운 모양이다.

[야, 도착했다. 내려와.]

그러던 중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이 짧게 진동을 했다. 동만의 메시지에 은찬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났다.

“형, 밑에 왔대.”

“자, 아빠랑 약속한 거 잊지 말고! 나가자!”

이미 말을 끝내자마자 애들은 현관 앞에서 어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른 나오라며 아우성치는 두 꼬마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은찬과 주한은 잠시 그 자리에서 서서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요즘 들어 부모의 마음이 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몸은 괜찮아? 기분은 어때?”

“이 녀석이 축구 선수처럼 발로 안 차면 괜찮아요. 가요. 형.”

은찬은 주한과 마주친 시선에 활짝 웃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울하다느니 무섭다느니 하며 난리를 쳤지만 지금은 한결 마음이 편했다. 오히려 얼른 아이를 만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야 좋아하는 맥주를 마실 수 있으니까. 맥주뿐만이 아니라 매운 떡볶이도 매운 닭발도 먹고 싶지만 얼마나 참고 있는지 모른다.

“아빠, 빨리!”

“엄마, 빨리!”

두 꼬마 맹수의 재촉에 은찬은 일부러 걸음을 느리게 옮겼다.

“엄마 동생이 여기 있어서 빨리 안 된다고 했지.”

“아, 맞다! 그럼 아빠만 빨리!”

“빨리! 아빠만!”

은찬에게는 관대하고 주한에게만 야박하게 구는 녀석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귀엽게만 보였다. 물론 주한은 살짝 삐진 듯 보였지만.

“왜 아빠만 빨리야!”

“아빠는 아빠니까!”

주한의 볼멘소리에 요한이 아무렇지 않게 툭 뱉었다. 이게 바로 아빠의 숙명이 아닐까 싶다.

***

저 멀리 잔디가 깔린 공원 중앙에서 회장님과 김 실장이 아이들과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굴러다니는 공을 보면 환장하는 습성 탓에 두 녀석은 열심히 공을 쫓아 달렸다. 이주한과 이리한은 먹을 것을 사 오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덩그러니 동만과 남게 된 은찬은 느긋하게 봄볕을 쬈다. 따뜻한 바람이 살랑살랑 불고 있으니 슬슬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유은찬.”

“어.”

“자냐?”

“아니.”

막 잠이 들려던 찰나에 동만의 부름이 이어졌다. 은찬은 눈을 감은 채 성의 없이 대답했다.

“왜 휴일까지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걸까 싶다.”

“그러니까. 나도 왜 여기까지 와서 너하고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건가 싶다. 개가 지랄 안 해?”

“……안 해.”

“웃기고 있네. 아까 보니까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더만. 난 네가 이렇게 야망이 많은 놈인 줄 몰랐다. 아무리 네가 회장님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런다지만 너무 티 낸다.”

살짝 실눈을 뜬 은찬은 동만을 심드렁하게 흘겼다. 살며시 두 무릎을 끌어안은 동만은 은찬과 마주친 시선에 방긋 웃었다.

“그럼. 사람은 야망이 있어야지. 솔직히 내가 지금은 이리한하고 살고 있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 저 새끼랑 헤어질 수도 있고. 안 그래? 이 회사에 뼈를 묻으려면 누구한테 잘 보여야겠어? 회장님과 그리고 부장님. 그리고 다음 후계자 아니겠냐.”

은찬은 동만의 전략에 웃음이 터졌다. 그러니까 이 녀석이 노리는 건 아마도……

“너 김 실장님 다음 자리를 노리냐?”

“그렇쥐! 지금의 회장님 곁에 김 실장님이 계시듯 나 또한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겠어? 지금은 비록 아이를 보고 있지만 이것도 교육의 일환일 수도 있고.”

김동만의 눈에 욕망이 일렁이는 게 보였다. 한번 권력의 맛을 보더니 야망가가 됐다. 잠시 고민에 빠진 은찬은 앞에 놓인 과자 하나를 먹으며 입을 열었다.

“안 됐다. 김동만. 그거 안될 걸?”

“어? 왜? 내가 실력이 부족해서? 나 요즘 토익 공부 다시 시작하고 있는데? 뭘 좀 더 공부해야 할까? 이탈리아어? 아님 중국어?”

동만의 자신만만한 표정에 은찬은 겨우 웃음을 참았다.

“아니, 그게 아니라. 여기 집안은 예전부터 수행하는 수인 비서가 따로 있다고 하던데? 회장님 옆에 주 실장님처럼?”

“무슨 말이야. 수인 비서라니. 주 실장님 사람이잖아.”

“아닌데? 수인인데?”

“무슨 소리야. 사람이야, 사람. 백 퍼 사람.”

은찬이 아무리 사실을 말해도 동만은 콧방귀를 끼며 믿지 않았다. 주 실장이 사람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그때였다. 순간 두 사람의 시야에 여우 귀가 빠른 속도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두 아이가 주 실장에게 매달리자 저도 모르게 귀가 나온 것 같았다.

눈앞에서 주 실장의 실체를 확인한 김동만은 입을 떡 벌렸다. 멍청한 얼굴로 한동안 허공을 초점 없이 응시하던 동만은 곧이어 울상이 됐다.

“그럼, 나는 아무리 꼬리를 흔들어 봤자 김 실장님처럼 될 수 없다는 거지? 그런 거지?”

이제야 말이 좀 통했다. 은찬은 과자 하나를 더 먹으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꼬리도 없으면서 뭘 흔드냐? 김 실장님 아들이 형 보좌할 거래. 조상님들끼리 맺어진 거래라나? 아무튼, 그렇다네.”

한참 헛소리를 지껄인 동만의 모습은 처연했다. 넋이 나간 녀석은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런 동만을 지켜보던 중 은찬은 제 아랫배에서 이상한 통증이 번지는 것을 감지했다.

설마 아니겠지. 아직 예정일이 일주일도 더 남았기에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면바지 안쪽이 뭔가에 젖어 있는 것을 본 순간 은찬은 양수가 터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은찬은 다급하게 동만을 보았다. 그러나 혼자만의 생각에 잠긴 녀석은 은찬을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때마침 이주한과 이리한이 양손 가득 무언가를 사 들고 돌아오고 있었다. 벌떡 일어난 은찬이 그를 목 놓아 불렀다.

“형, 형!”

그 부름에 주한은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이리한은 마치 못 볼 꼴 본 것처럼 눈살을 찌푸렸다. 어금니를 꽉 깨문 은찬은 다시 한번 주한을 불렀다.

“형!”

“야! 그만 좀 불러 귀…… 헉! 너 왜 이래? 야, 이거 뭐야? 너 혹시 설마……! 아직 예정일 남았잖아!”

무심코 고개를 돌린 동만은 은찬의 젖은 바지를 보자마자 경악했다.

“몰라. 터진 거 같아.”

“여기서 터지면 어떻게 해!”

“내가 터지고 싶어서 터졌냐?”

“어떻게 해! 119 불러? 배 아파? 나올 거 같아?”

당황한 동만이 우왕좌왕할 동안 이주한과 이리한은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럼에도 주한은 이 상황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이리한이 굳은 표정으로 서 있는 은찬에게 핀잔을 던졌다.

“고양이. 너는 쪽팔린 것도 없지? 그렇게 둘이 사이좋다고 티 내고 싶어? 형, 형! 애틋하게도 부른다.”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눈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이리한. 오늘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한마디 쏘아붙였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여력도 없었다. 겉으로는 담담해 보였지만 사실 은찬도 많이 놀란 상태였다.

“주한이 너는 좋겠다. 이런 애교 많은 고양이랑 살아서.”

“그만해. 은찬아,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그제야 은찬의 상태가 이상한 것을 눈치챈 주한이 끼어들었다. 다리 사이에 느껴지는 축축함에 눈을 질끈 감은 은찬이 입을 열기 직전 이리한이 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야, 고양이. 너 오줌 쌌어?”

“…….”

씨발……. 저 개새끼. 내가 오늘 안으로 죽이고 만다. 은찬은 이를 꽉 깨물었다.

“이리한, 시끄러워! 너 말하지 마!”

뒤늦게 동만이 이리한을 말렸지만, 가뜩이나 기분이 좋지 않던 녀석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발판삼아 은찬을 물고 늘어지며 비아냥거렸다.

“아무리 화장실이 급해도 그렇지. 나이가 몇 살인데 바지에 오줌을 싸냐? 애들 보기 부끄럽지도 않냐? 야, 주한아. 쟤 오줌 쌌나 보다. 그래서 아까 너 그렇게 찾았나 봐.”

이리한은 킥킥 웃으며 주한의 어깨를 퍽 쳤다. 다들 그런 이리한을 무표정으로 쳐다봤다. 그 무거운 정적 속에서 혼자 큭큭 웃던 이리한은 살기를 느낀 것인지 김동만의 등 뒤로 슬금슬금 도망쳤다.

“왜! 전부 왜 나 그렇게 보는 건데……!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아니잖아! 쟤 오줌 싼…… 악! 동만 씨, 아프잖아! 아프다니까!”

더는 봐줄 수 없었던 동만은 이리한의 머리를 주먹으로 내려쳤다. 퍽. 퍽. 퍽.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이리한의 고통에 찬 비명 소리와 주먹에 울리는 머리 소리가 아주 경쾌했다.

“유은찬.”

그사이 은찬과 젖은 바지를 번갈아 보던 이주한의 표정은 어두웠다. 아마도 이제부터 고달파질 자신의 미래를 떠올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타깝게도 생각할 시간을 더는 줄 수 없었다. 은찬은 지금 당장 병원에 가야 할 몸이었다.

“동만아!”

“어? 왜?”

은찬은 주한을 빤히 보며 이리한을 패는 동만에게 지시했다.

“나 지금 당장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으니까. 회장님께 상황 설명하고 우리 애들 좀 부탁한다.”

“어? 어. 알았어. 여기 걱정하지 말고 얼른 가.”

“형.”

“어……?”

주한은 아직까지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조금 전까지 잘 먹고 떠들던 은찬이 갑자기 양수가 터졌다고 하니 그럴 만도 했다.

“정신 차려요. 나 양수 터졌다고!”

“…….”

“뭐 해요? 야, 이주한! 정신 차려! 차 시동 걸어야지! 지금 니 애 나온다고! 여기서 애 낳을래?”

얼굴을 팍 찡그린 은찬이 버럭 소리치자 그제야 이주한은 달렸다. 표범의 피를 가진 수인답게 빠르긴 빨랐다. 빛보다 빠른 속도로 차가 있는 쪽을 향해 달리는 그를 따라가려던 참이었다. 동만이 은찬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은찬아.”

슬슬 통증이 오는 것 같았다. 은찬은 신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어.”

“나 안 따라가도 괜찮아? 내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

이 자식은 또 왜 이래. 은찬은 자신의 옷깃을 잡고 있는 동만의 손을 툭 떨쳐 냈다. 하지만 이내 다시 잡혔다.

“미안해하지 말고 나 필요하면 말해.”

담담한 은찬과는 반대로 동만이 울먹거렸다. 왜 하필 지금 이러는 건데. 밀려오는 통증을 겨우 참으며 은찬은 동만과 마주했다.

“은찬아……. 내가 필요한 거지? 얼마나 아프겠어. 걱정하지 마 이번에는 내가 옆에서 꼭.”

거기까지. 은찬이 눈치 없는 김동만의 개소리를 들어 주는 것도 거기까지였다. 동만의 멱살을 움켜잡은 은찬은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으르렁거렸다.

“너나 입 닥쳐! 너 애 낳아 봤어? 이게 어떤 고통인 줄 알아? 모르지? 그러면 입 닥쳐! 더는 나 말 시키지도 말고 잡지도 마! 그냥 넌 저 녀석들 데리고 있는 게 날 도와주는 거야! 알겠냐! 나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닌 거 알지?”

은찬의 살벌함이 전해진 것인지 동만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이윽고 이주한의 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앞에서 멈췄다. 그 차에 가까스로 오른 은찬은 차가 출발하자마자 훅 밀려오는 통증에 저도 모르게 욕을 쏟아 냈다.

“씨발……! 아프잖아, 아프다고! 밟아! 이주한! 밟으라고!”

“…….”

“밟아, 밟아! 신호 무시하고 달려! 달리라고오오오!”

목에 핏대를 세우고 꽥 소리를 질렀건만 차는 빨간색 신호에 멈췄다. 당연한 일임에도 은찬은 원망 가득한 시선으로 주한을 째려보며 비난을 퍼부었다.

“무시하고 가자니까? 나 지금 응급상황인 거 안 보여요? 파란불이든 빨간불이든 그딴 거 다 무시하고 가라고!”

“이럴 때일수록 조심해야지! 조금만 참아! 최대한 빨리 가도록 해 볼게!”

“어떻게 참아! 네가 참아 봐! 지킬 거 다 지키고 언제 가겠다고!”

예민할 대로 예민해진 은찬은 거칠게 호흡을 내쉬며 분통을 터트렸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주말이라 차도 얼마나 막히는지 오늘따라 달리는 족족 신호에 걸리니 미칠 노릇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119를 불렀지.

“아오, 씨발! 차 존나 막히네! 이것들은 주말에 왜 기어 나와서 지랄이야!”

밀려오는 통증의 강도가 점점 강해지기 시작하자 은찬은 점점 이성을 잃어 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진통을 두 번 겪을 자신이 없어서 출산 예정일에 맞춰 수술까지 잡아 둔 상태였다. 그런데 하필 오늘 양수가 터진 것이다.

차라리 집에 있을걸. 은찬은 거친 숨을 내쉬며 으르렁거렸다.

“은찬아……. 많이 아파?”

“그럼! 내가 괜히 이러겠냐!”

은찬의 포효에 주한은 움찔거렸다. 또다시 지옥의 문이 열린 건 은찬만이 아니었다. 옆에서 운전하고 있던 주한은 은찬의 눈치를 보랴 운전하랴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

“조금만 참아, 조금만! 호흡, 그거……! 우리가 배운 거 해 봐.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길게 내뱉고.”

주한은 한쪽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나머지 한쪽 손으로 은찬의 배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평소에 자주 하던 행동이었지만 지금은 그 손길마저 짜증 났다. 은찬은 그 팔을 잡아 뾰족한 송곳니로 힘껏 물었다.

“악! 야, 날 왜 물어! 야……!”

“내가 지금 이런 거 해 달라고 했어? 이럴 시간에 운전이나 해! 나 수술할 거라고! 수술!”

“알았어! 알았으니까, 진정해!”

지금 진정하게 생겼냐? 지금은 참을 만하지만 잠시 뒤 어마어마한 진통이 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더 초조했다. 은찬은 주한이 제 팔을 만지작거리며 한눈판 사이 운전석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클랙슨을 미친 듯이 치며 소리쳤다.

“비켜! 비키라고! 꺼져! 다들 꺼져!”

빵! 빵! 빵! 빵아아아앙! 요란하게 울리는 클랙슨 소리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화들짝 놀란 주한이 말렸지만 은찬은 그의 얼굴을 밀치며 멈추지 않았다.

“야! 이러면 운전을 할 수 없잖아!”

결국 주한에게 운전대의 주도권을 빼앗겨 버린 은찬은 무섭게 인상을 쓰며 창밖을 노려보았다. 창가에 고양이 귀가 나온 제 모습이 보였다. 얼마나 놀랐으면 귀가 튀어나온 줄도 몰랐다. 일분이 한 시간처럼 느껴지는 순간. 다행히 교통 체증은 풀리기 시작했다.

은찬은 두 손을 꼭 잡고 기도했다. 하느님, 부처님, 고양이 신님. 뭐든 좋으니까 여기서 안 낳게 해 주세요. 진통도 최대한 늦게 오게 해 주세요. 남자한테 임신할 수 있는 몸을 줬으면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요? 안 그래요?

대답도 없는 신에게 타협을 제시하며 간절히 기도했지만, 정성이 덜했던 건지 닿지 않은 모양이다. 결국, 그것이 오고야 말았다. 좀 전까지 느껴진 미미한 수준과는 확실히 달랐다. 순간 짧고 강렬하게 밀려오는 진통에 은찬은 인상을 팍 썼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죽을 맛이었다.

“……형.”

어금니를 꽉 깨문 은찬은 이주한의 허벅지를 꽉 잡았다. 제 미래를 감지한 것일까. 흠칫한 이주한이 두려움 가득한 표정으로 은찬을 응시했다. 제발 살려 달라는 시선이었지만 은찬도 고통을 분담할 것이 필요했다. 그가 뭐라 말하기 전에 은찬은 손톱을 세워 힘을 꽉 주었고 동시에 이주한의 입에서 고통에 찬 비명이 터졌다.

“유은찬! 나 운전 중이잖아! 야아아아, 손톱 세우지 마아아! 아아악!”

얼마나 아팠으면 결국 이주한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사이 밀려왔던 진통은 짧고 굵게 끝이 났다. 은찬의 표정도 한결 평화로웠지만 차 안에 무거운 정적이 맴돌았다.

“형.”

은찬의 부름에 주한은 화들짝 놀라며 두려움에 떨었다.

“어? 왜……. 거의 다 왔어.”

목숨의 위협을 느낀 탓일까. 미친 듯이 달린 덕분에 병원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이제 모퉁이만 돌고 신호 두 번만 받으면 병원이었다. 진통이 있음과 없음의 차이는 확연히 달랐다. 세상이 달라 보였다.

“천천히 가요. 이러다 사고 나겠다.”

“…….”

그러고 보니 안전띠도 안 한 채였다. 은찬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뒤늦게 안전띠를 매고 주한과 마주친 시선에 싱긋 웃었다. 이주한이 촉촉이 젖은 눈시울로 그런 은찬을 빤히 바라보았다. 분명 눈으로 욕하고 있는 게 확실했다.

사실 자연 분만이 아니라 수술을 강력하게 권한 사람은 주한이었다. 그게 두 사람을 위하는 길이라면서 말이다.

“형.”

“아무래도 나 묶을까 봐.”

“뭘요?”

“묶어야겠다. 두 번까지는 참아도 그 이상은 안 되겠다. 너도 힘들고 나도 힘들고. 솔직히 우리 더 이상 애 계획은 없잖아.”

묶는다는 게 그 말이었구나. 은찬은 주문처럼 맥없이 중얼거리는 그를 힐끔 보았다. 이 기세라면 정말 묶을 기세였다. 그렇다면 반대는 하지 않을 것이다. 은찬도 더는 임신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럼 나야 고맙지.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할아버지한테 말도 못 하고 왔네. 전화라도 해야…… 아, 씨발.”

병원을 바로 앞에 두고 또 진통이 왔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던 은찬은 저도 모르게 이주한의 머리채를 거칠게 움켜잡았다.

“악! 야, 야! 나 운전……! 운전!”

“아…… 씨발! 너 묶어! 꼭 묶어! 다음에 내가 또 임신하면 너 그날로 죽여 버린다!”

“묶을게! 묶을 테니까 이거 놓자! 이러다 사고 나!”

이주한의 애원에 그의 머리카락은 해방시켜 주었지만 대신 주먹으로 클랙슨을 내려쳤다. 좀전과 같은 상황의 반복이었다. 빵. 빵. 빵. 빵. 빠아아아앙! 요란한 클랙슨 소리와 동시에 은찬의 욕설이 터졌다.

“저리 비켜! 꺼져! 나 위급 환자야! 저리 가!”

“야! 유은찬!”

말리는 이주한과 진통에 이성이 나가 버린 유은찬. 둘의 실랑이는 약 5분간 지속됐다. 가까스로 그들이 탄 차가 병원 정문 앞에 도착했을 때 미리 연락을 받은 의사들은 휠체어와 함께 대기 중이었다.

차에서 내린 은찬은 비교적 멀쩡한 상태였다. 차 안에서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건만 수술실로 향하는 길은 조용했다. 반대로 뒤따른 주한의 상태는 엉망진창이었다. 머리는 산발이었고, 다리 한쪽도 절뚝였다. 어디 아프신 거 아니냐는 의사의 물음에 주한은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렇게 가족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아기는 세상에 나왔다. 출산 예정일보다 일주일 앞서 태어난 아기는 동만의 바람대로 은찬을 쏙 빼닮은 공주님이었다.

***

오늘 반찬은 푸짐한 갈비찜과 미역국. 생일상에서나 볼 법한 조합을 병원에서 받고 있었다. 공주님이 태어난 이후 병실은 조용한 나날이 거의 없었다. 은찬의 부모님과 주한의 부모님은 어제까지 장작 사흘 내내 병원에 들렀고 회장님과 동만은 병원에서 살다시피 했다.

심신의 안정을 위해 꺼져 달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그들이 이곳에 들린 주된 목적은 은찬 때문이 아니었다. 주목적은 공주님. 은찬은 그저 온 김에 얼굴이나 보고 가는 존재가 돼 버렸다.

지금도 그랬다. 갈비찜을 우걱우걱 먹고 있던 은찬은 제 옆에서 핸드폰을 뚫어지게 보고 있는 동만을 한심하게 보았다.

“미쳤냐? 그만 좀 봐. 누가 보면 네 앤 줄 알겠다! 요한이하고 유한이는 어쩌고 또 왔냐?”

“잠시 개한테 맡기고 왔지. 야, 니 애가 내 애지. 새삼스럽게 뭘 그래. 어차피 내가 봐야 하잖아. 맞지?”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행복한 미소를 짓는 김동만을 보자마자 은찬은 입맛이 뚝 떨어졌다. 젓가락을 소리 나게 내려놓은 은찬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녀석을 째려봤다. 맞는 말이지만 며칠째 이 꼬락서니를 보고 있으니 심사가 뒤틀렸다.

“싫은데?”

“어? 뭐? 왜! 왜 싫은데! 야, 이건 말이 다르잖아. 내가 봐야지, 누가 봐!”

“볼 사람 많아.”

“아니지! 내가 봐야지! 내가 적임자지!”

눈을 동그랗게 뜬 동만은 정색하며 따졌다. 잠시 개 쪽으로 취향이 흔들렸던 동만이 다시 고양이 파로 확실히 돌아온 것 같았다. 은찬의 반응이 영 시원치 않자 동만은 돌연 씨익 웃으며 은찬의 팔을 툭 쳤다.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나 놀리려고.”

“…….”

아닌데. 진심인데. 은찬은 아기에게 집착하는 동만이 부담스럽기 시작했다. 확실히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와는 반응 자체가 달랐다. 아침부터 잘 때까지 녀석의 주된 관심사는 공주님이었다. 정확히 검정고양이 아기 수인.

“은찬아아아, 내가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잖아. 나 진짜 이 녀석 보자마자 첫눈에 반해 버렸다니까?”

“어. 그러냐.”

“그러어어엄! 야, 이 귀랑 꼬리 봐 봐! 완전 인형 같지? 눈이 완전 보석이야! 반짝반짝 빛난다니까?”

동만이 흥분하며 내민 핸드폰 화면에는 은찬이 낳은 공주님 사진이 있었다. 반짝반짝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아직 눈도 뜨지 못한 애 눈에 대한 동만의 감상평에 은찬은 코웃음을 터트렸다. 이러다가 말이라도 하면 까무러칠 기세였다.

성격 같아서는 미쳤냐고 한마디 쏘아붙이고 싶지만 비단 김동만뿐만이 아니라 이곳에 오는 모든 이들이 이런 상태기 때문에 은찬은 말을 아꼈다. 다들 공주님에게 넋이 나간 상태였다.

“내가 낳았다.”

“그러니까! 니 유전자에서 이런 애가 나왔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다니까? 너는 완벽하지 않은데, 얘는 존재 자체가 완벽하잖아. 봐!”

“…….”

은찬은 먹다가 만 국그릇과 김동만을 번갈아 보았다. 저 녀석 면상에 던져 버리려다가 국이 아까워서 참았다. 자고로 먹는 것 가지고 장난치면 벌 받는다고 했다.

“안 가냐?”

“왜?”

“할 거 다 했으면 가지?”

“너 언제 퇴원이랬지?”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던진 동만의 물음에 은찬은 시큰둥하게 받아쳤다.

“네가 알 필요 없잖아.”

“섭섭하게 왜 이래? 야, 내가 알아야지 병원으로 헛걸음 안 하지!”

“집으로도 오게?”

“그럼! 공주님 보러 가야지이이잉!”

동만이 은찬과 마주친 시선에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윙크를 던졌다. 몸서리를 친 은찬은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이 녀석에게 공주를 맡기면 위험하지 않을까?

“진짜 언제야? 내일? 모레?”

“내일.”

건성으로 대답한 은찬은 식판을 동만 쪽으로 밀었다. 녀석은 군말 없이 그것을 문밖으로 내놓고 돌아왔다.

“몸은 좀 괜찮아?”

“죽을 맛이지.”

수술 직후에는 금식에 물도 한 모금 마시지 못했다. 수술 부위는 아파 오지. 거기다 손발은 미친 듯이 퉁퉁 부어올랐다. 딱 죽을 맛이었다.

“아니. 너 말고, 부장님. 다리 아직도 쩔뚝거리던데?”

은찬은 픽 웃었다. 여기서 이주한의 몸 상태를 걱정하는 김동만을 어떻게 해야 할까 잠시 고민했다. 욕을 시원하게 해 버릴까 아님 발로 차 버릴까. 맞다. 이 자식 눈치 없는 김동만이지. 그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김동만.”

“어? 왜? 나한테 할 말 있어?”

할 말 많지. 많지만 오늘은 아껴 두련다. 차곡차곡 마일리지로 쌓았다가 한 번에 큰 걸로 복수할 테다. 예를 들어 이리한한테 사람을 임신시킬 수 있다는 거짓말을 알려 준다든가 하는 거.

“이리한, 그 개랑 절대로 헤어지지 마. 오래오래 죽을 때까지 절대로 떨어지지 마.”

“……왜 이래? 불길하게. 내 걱정하지 말고 너나 잘해. 너는 이제 애가 셋인 몸이잖아. 야, 근데 부장님 진짜 묶을 거야?”

“묶어야지.”

“왜에? 왜 묶어?”

동만은 정말 아깝다는 듯이 탄식했다. 어깨를 으쓱인 은찬은 침대에서 내려올 준비를 했다. 밥도 먹었으니 잠시 걸을 필요성이 있었다. 은찬이 조심스럽게 병실 안을 걸어 다니는 모습을 녀석은 눈으로 좇으며 입을 열었다.

“셋까지 낳았는데 하나 더 낳는 건 어때?”

“죽을래? 또 그 말 하면 진짜 죽인다!”

순간 고개를 획 돌린 은찬은 진심을 가득 담아 협박했다. 하지만 동만은 동요하지 않았다. 턱을 괴고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야, 저렇게 예쁜 딸이 또 생기는데?”

“딸인지 아들인지 네가 어떻게 알아! 아무튼 나 못 낳아! 네가 낳든가! 얼마나 힘든지 모르니까 그딴 소리나 지껄이는 거지. 야, 아무리 고양이가 다산한다지만 이건 아니다. 내가 애 낳는 기계냐?”

“아니지. 기계는 아니지. 다만 섹스를 좋아하는 음탕한 고양이지. 솔직히 이번에 공주님 생긴 것도 너희가 실수한 거잖아. 피임 안 한 실수.”

“…….”

저 녀석은 늘 결정적일 때 맞는 말을 했다. 반박할 여지가 없었기에 은찬은 따질 수가 없었다.

“물론, 고마운 실수지. 저렇게 천사같이 예쁘고 사랑스러운 공주님을 못 볼 뻔했잖아? 너, 지금 회장님 입에 귀에 걸린 거 모르지? 뜬금없이 회사 직원들한테 상품권 돌렸다니까? 10만 원짜리로.”

“어?”

이건 또 처음 듣는 소리였다. 은찬의 어이없다는 반응에 동만은 자신이 받은 걸 내밀었다. 정확히 10만 원 짜리 한 장. 상품권이었다.

“다짜고짜 귀한 손녀가 태어났다고 전 직원과 이 행복을 나누고 싶다면서. 야, 회사 창립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라고 사내 게시판에 난리 났어. 무슨 돌 떡 돌리듯이 이걸 전 직원한테 다 돌렸다니까? 그러니까 잘 생각해 봐. 너는 잠깐 고생하지만, 모두에게 행복을 주잖아. 아니다. 나라에 크게 이바지하는 거지. 솔직히 너는 낳기만 하면 되잖아. 그다음은 회장님이 알아서 해 주실 거 아니야. 자손 귀한 표범 집안이라며. 이참에 그냥 시원하게 확 낳아서 족보에 한 획을 그어 버려!”

이상하게 김동만 말은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은찬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사실 은찬도 낳고 보니 나쁘지는 않았다. 아기도 너무 예뻤고, 김동만이 다 키워 줄 거고, 돈 걱정도 없었다. ……정말 족보에 한 획을 그어 버려?

“둘이 무슨 작당을 그렇게 하는 거야?”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은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형.”

“오셨어요?”

아직 퇴근 시간 전이지만 은찬을 보기 위해 틈틈이 들리던 그였다. 동만을 대할 때와는 달리 은찬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달콤했다.

“오늘 회의 있다면서 이렇게 와도 돼요?”

“너 걱정돼서. 몸 안 좋다고 빠졌어.”

“안 그래도 되는데…….”

말과는 달리 은찬은 온몸으로 좋다고 표현 중이었다. 병실로 들어서는 주한에게 몸을 비비며 검정 꼬리로 그의 허리를 스르륵 감쌌다.

“몸은 어때?”

“아직 아파요.”

동만의 말대로 걸을 때 살짝 쩔뚝였지만 주한은 그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영광의 상처라나.

“자, 저는 이제 물러갑니다. 나 간다.”

“어? 가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동만이 던져 놓은 재킷을 챙겨 들었다.

“그럼. 바톤 터치 할 사람 왔으니까 가야지. 애들도 봐야 하고. 개한테 맡기기에는 불안하…….”

김동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닫힌 문이 벌컥 열리더니 이리한이 불쑥 나타났다.

“동만 씨!”

이곳에 있으면 안 될 사람의 등장에 김동만의 눈이 커졌다. 주한은 알고 있었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 개가 여기에 왜 온 거야? 애들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지만, 곧 모든 의문이 풀렸다.

“엄마아아아!”

“아빠아아아아!”

한층 더 제어가 되지 않는 두 마리의 꼬마 맹수가 병실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그럼 그렇지. 혼자 감당할 수 없자 여기로 데리고 온 게 분명했다. 상황을 알아챔과 동시에 동만의 두 눈이 분노로 일렁였다.

“야, 여기로 애들 데리고 오면 어떻게 해!”

“아니……. 난 안 데리고 오려고 했는데 엄마 보고 싶다고 해서…….”

동만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움찔한 이리한 머리에 강아지 귀가 불쑥 튀어나왔다. 겁을 먹은 녀석이 주춤거릴 때 뒤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머쓱한 표정으로 등장한 회장님의 헛기침 소리였다.

“……할아버지? 회의는요?”

아프다는 핑계로 회의를 빠진 이주한은 누구보다 회장님의 등장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잠시 병실에 정적이 맴돌았다. 그 정적을 뒤따라온 김 실장이 깨트렸다.

“갑자기 뒷목을 잡으시더니 병원에 가야겠다고 하셔서요. 회의는 연기됐습니다.”

특유의 담담한 목소리로 회장님을 대변한 김 실장의 말에 모두 침묵했다. 회장님은 귀 끝까지 붉게 달아올랐고 헛기침만 연속으로 하셨다. 그 모습에 시선을 빼앗긴 은찬은 불현듯 웃음이 터졌다.

“형, 내 사주에 자식 복이 엄청나다네?”

“어?”

진짜였다. 아주 오래전에 재미 삼아 철학관에 갔다가 들은 말이었다. 그땐 한 귀로 듣고 흘렸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힘닿는 데까지 해 보지 뭐.”

은찬은 씨익 웃으며 주한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렸다. 섹스를 즐기는 두 사람이니 임신이 되든 안 되든 그건 하늘에 달린 문제였다. 또 임신이 된다면 감사한 마음으로 낳아 보려고.

“유은찬. 그거 무슨 뜻인데? 설마, 아니지?”

은찬은 눈을 동그랗게 뜬 주한과 마주한 시선에 씨익 웃었다. 그리고 쿨하게 인정했다.

“맞아, 그거. 어떻게든 되겠지 뭐. 우린 본능에 충실하면 되는 거 아니야?”

“오, 유은찬! 획을 그으려고? 그래! 이왕 긋는 거 확실하게 그어 버려!”

김동만은 환호했고.

“축하합니다, 회장님! 회장님의 바람이 이루어졌습니다!”

김 실장은 울먹였으며 회장님은 감격에 겨워했다. 은찬은 동만에게 엄지를 척 들며 씨익 웃었다.

“안 돼! 난 못 해!”

이주한은 절망에 빠진 얼굴로 중얼거렸지만 이미 그만 빼고 모두 축제 분위기였다.

정력 좋은 표범과 다산하는 고양이 수인의 만남. 그것만으로도 이미 끝난 게임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와 이렇게 됐으니 본능에 따르는 수밖에.

애석하게도 주한의 바람대로 묶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리고 셋째 이요아가 태어난 지 정확히 2년 뒤 두 사람 사이에 고양이 남자 수인, 넷째가 태어났다.

<그것은 고양이의 본능!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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