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유은찬의 품격
이른 아침. 출근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주한은 초조했다. 양팔에 안겨 있는 두 녀석의 엄마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였다.
“유은찬. 은찬아, 계속 잘 거야?”
오늘도 역시 아무리 불러 봐도 유은찬은 답이 없다. 체념과 함께 한숨을 내쉰 주한은 거실 벽 한편을 차지한 웨딩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유은찬의 말대로 결혼식은 느긋하게 할 생각이었지만 유은찬의 어머니. 생각지도 못한 그분의 강력한 추진력에 정신을 차려보니 두 사람은 식장에 서 있었다.
평범한 결혼이 아니다 보니 각 집안의 소수 인원만 참석한 가운데 치른 결혼식은 다시 생각하기 싫을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수인이 득실거리는 곳에서 유일한 사람이었던 김동만. 유은찬의 절친이라는 명목으로 본인이 나서서 사회자를 하겠다고 하더니 입을 열 때마다 실수를 유발했다.
수많은 실수 중 제일 크게 친 사고는 각 부모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할 때였다. 키워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숙였는데 김동만은 두 번을 시켰다. 일순간 결혼식장에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하객들이 술렁였고 보다 못한 주례사가 황급히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악재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다음 순번이 이리한의 축가였다. 그럴 필요 없다고 말했는데도 굳이 하겠다며 고집을 부린 녀석은 화려한 싱글이 좋다는 노래를 신나게 불렀다. 추임새를 넣어 가며 자신과 주한의 화려했던 한때를 기억해 보라는 말까지 덧붙이며 말이다.
결혼식장의 분위기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워졌고, 주한과 은찬의 기분도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게 불과 두 달 전의 일이었다.
그 이후 두 사람은 신혼 생활을 즐길 여유도 없었다. 세상에 막 태어난 아이들은 24시간 부모의 손길이 필요했고 두 사람은 정성껏 아이들을 돌봤다. 다행이라면 사람의 아이와 달리 수인 아기는 유아기 때의 성장 속도가 조금 빨랐다는 거다.
불과 얼마 전까지 눈도 뜨지 못한 아기였지만 이제는 보행기에 앉혀 놓을 정도로 컸다. 조금씩 기기도 하고 뒤집기를 하려고도 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다시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렸다.
“하아……. 이유한, 이요한. 가서 엄마 좀 깨워 봐.”
죄 없는 아이들을 흔들며 불러 봐도 분유를 배부르게 먹은 녀석들은 동그란 눈을 깜박이며 주한만 말똥말똥 보았다. 첫째 이유한, 둘째 이요한. 나비와 까망이라 불리던 녀석들의 이름은 할아버지가 거금을 들여 작명가에게 지어 오셨다.
딱히 이름에 대해 생각해 두고 있지 않았던 터라 은찬과 주한은 할아버지가 주신 이름을 그냥 쓰기로 했다.
“아주머니.”
“네, 작은 도련님.”
“좀 도와주세요.”
아기 이유식을 만들고 있던 도우미 아주머니가 주한의 부름에 황급히 달려왔다. 그녀의 품에 요한을 넘긴 주한은 소파에 던져 놓은 아기 띠를 잡았다. 엄마가 일어나지 않으니 아빠가 데려가는 수밖에. 오늘도 녀석들과 동반 출근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유은찬을 닮아 두 녀석은 낯을 많이 가렸다. 몇몇 특정 사람이 아니면 거칠게 손길을 거부했다. 지금도 그랬다. 도우미 아주머니의 품에 안기자마자 요한은 작은 송곳니를 드러내며 거부반응을 보였다.
본능적으로 위협을 가하는 행동인데 어른들의 눈에는 그게 무섭기보다 사랑스럽게 보였다. 두 녀석의 머리와 엉덩이에 표범 무늬의 귀와 꼬리가 앙증맞게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대게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어야 그걸 조절할 능력이 생겼다. 물론 주한도 그랬다. 그전까지는 그저 한 마리의 귀여운 아기 맹수에 불과했다.
주한은 서둘러 아기 띠를 앞뒤로 둘러맸고 유한을 앞에 요한을 뒤에 넣었다. 잠시 거치적거리는 넥타이는 와이셔츠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이유식은요?”
“다 됐어요. 잠시만요. 담기만 하면 돼요.”
서둘러 다시 부엌으로 돌아간 그녀는 보온 통에 녀석들 이유식을 가득 담아 내밀었다. 오늘은 특등급 소고기가 듬성듬성 들어간 고기죽이었다. 그것을 받아 든 주한은 그녀에게 당부했다.
“은찬이 깨면 밥 먹이세요. 배달 음식 시키지 마시고요.”
“네. 그럴게요.”
“그리고, 회사로 오라고 해 주세요.”
“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작은 도련님.”
오랫동안 본가 일을 하시던 분이 할아버지의 특별 부탁으로 이곳에 온 지 두 달째. 그녀의 배웅을 받고 출근하기 전 주한은 죽은 듯이 자는 유은찬에게 인사했다.
“은찬아. 형 간다. 애들 데려갈게. 이따 회사로 와.”
“…….”
아이들이 태어난 이래 젖을 떼자마자 거의 매일 이런 식이었다. 다음 주부터 회사 복귀를 한다고 난리를 치더니 앞으로 더 바빠질 것 같은 예감에 주한은 눈앞이 암담했다. 아무튼, 출근 시간이 임박했기에 서둘러 집을 나섰다.
***
“은찬이는요?”
주한에게 두 아이를 넘겨받은 동만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오늘도 은찬이 보이지 않자 동만의 측은한 시선이 날아왔다.
“고생 많으시네요.”
“……여기 이유식이요.”
지금까지 주한이 고생했다면 이제는 김동만 차례였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에도 두 녀석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손톱을 세워 띠를 긁기도 하고 배고프다고 칭얼거리기도 하고. 뭐라도 하나 쥐여 주면 금방 흥미를 잃어버리고 또 칭얼거렸다. 거기다 기어 다니기 시작했으니 잠시라도 한눈을 팔며 사고를 쳤다. 한마디로 움직이는 사고뭉치였다.
“좀 이따 올 거예요. 그때까지 부탁해요.”
마케팅 1부서의 사원이었던 김동만은 단번에 대리로 특급 승진을 했지만, 그에게 주어진 비밀 임무는 아이들 돌보미였다. 이름하야 사내 탁아소.
할아버지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벌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회사 안에 아이를 봐 주는 이가 있으니 보고 싶을 때마다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물론 할아버지도 하루에도 몇 번씩 이곳을 들려 얼굴도장을 찍으셨다.
“유한아, 요한아. 삼촌 보고 싶었지?”
그렇다고 김동만이 유별나게 아기를 잘 보는 건 아니다. 본래 고양이를 좋아하는 성격이다 보니 사고뭉치 수인 아기를 사랑으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이면 충분했다.
오늘도 아이들을 보자마자 얼굴 근육이 풀어진 김동만은 늘 같은 질문을 던졌지만, 녀석들은 쳐다도 보지 않고 주한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빠에게 가고 싶다는 뜻이다. 김동만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밀며 야단법석을 떨기 시작했다. 얼른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럼, 수고하세요.”
“네. 유한아, 요한아. 삼촌하고 놀자.”
김동만의 다정한 목소리에도 아이들은 굴하지 않았다. 그의 손에는 이미 아이들의 잇자국이 수없이 많았다. 누구를 닮아서 저렇게 앙칼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주한은 어렸을 때 저렇지 않았다.
서둘러 사무실로 돌아온 주한은 자리에 앉자마자 녀석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데도 이러니 큰일이었다. 예전의 이주한이었다면 아기 띠를 앞뒤로 메고 출근하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을 텐데 유은찬 때문에 주한도 참 많이 바뀌었다.
바뀐 건 주한뿐만이 아니었다. 필요 이상으로 연락을 하지 않던 부모님과 할아버지 사이도 큰 변화가 생겼다. 예전보다 자주 연락을 하며 아이들 이야기로 꽃을 피웠고 쌓여 있던 높은 벽은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었다.
두 아이의 탄생은 많은 이들을 행복하게 했고, 변하게 했으며, 웃게 만들었다. 물론 일관성 있게 변하지 않는 이가 있었다. 책상 앞에 놓인 가족사진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던 주한은 잠든 유은찬을 떠올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보기보다 손이 많이 가고 까다롭고 예민한 유은찬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사랑스러운 존재였다. 핸드폰을 꺼낸 주한은 은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말하고 왔지만 못 들었을 게 뻔했다.
[애들 내가 데리고 왔어. 밥 먹고 회사로 와. 귀찮다고 집에만 있지 말고. 알았지? 사랑해.]
아이는 좋아하지만, 육아는 전부 김동만에게 맡겨 버린 유은찬. 오늘도 오후쯤 설렁설렁 회사로 올 게 뻔했다. 그럼에도 화나기는커녕 귀엽다. 특히 침대 위에서 자신을 유혹할 때 주한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자, 일하자.”
오늘도 가장의 어깨는 무겁다. 파이팅을 외치며 주한은 서류를 펼쳤다.
***
춥다. 후드 모자를 머리에 쓴 은찬은 모자 끈을 바짝 조였다. 어차피 계속 실내에 있을 요량으로 얇게 입고 나왔더니 날씨를 얕봤다. 겨울을 문턱에 두고 있는 것을 깜박했다.
“으……. 춥다 추워.”
은찬은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회사 정문까지 뛰다시피 걸었다. 로비에 들어선 직후 주머니에서 사원증을 꺼내 출입구에 내밀었다.
대외적으로 연차와 휴가를 몰아 쓴 긴 휴가라 알려진 상태. 아직은 마케팅 1부서 유은찬 사원증이지만 일주일 뒤 비서실 사원증을 새로 받을 예정이다. 사실 회장님의 배려로 산후 휴가 중이었고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손에 꼽았다.
엘리베이터 앞에 선 은찬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최근 들어 이런 식으로 회사에 들리는 일이 잦았다.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인사라도 하려 했더니 아무도 없었다.
엘리베이터 안으로 터벅터벅 들어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였다. 문이 닫히기 직전 누군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쏙 들어왔다. 별생각 없이 그 사람을 힐끔거린 은찬은 반가운 마음에 입 꼬리가 올라갔다. 곽 과장이었다.
“과장님!”
“깜짝이야……. 아, 은찬 씨.”
“어디 갔다 오는 길이세요?”
곽 과장의 몸에서 머스크 계통의 향수 냄새가 살짝 묻어 있었다. 향수 따위 쓰지 않는 곽 과장이니 아무래도 약속이 있었던 모양이다.
“요 앞에서 누구 좀 만난다고. 은찬 씨는? 휴간데 왜 이렇게 회사에 자주 와? 이럴 거면 휴가 반납해.”
곽 과장과는 이미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던 터였다. 그때마다 던지는 핀잔에 은찬은 말없이 웃었다. 불과 석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은찬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아부를 떨던 곽 과장이었건만 더는 그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저 다음 주에 복귀하잖아요. 겸사겸사.”
“너도 참……. 자존심도 없냐?”
곽 과장은 은찬을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그 시선 속에 측은함도 보였다. 곽 과장이 이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주한과 유은찬. 회사 내에서 공식 게이 커플로 소문났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주한의 결혼 소문이 돌았단다. 거기다 그 소문에 불을 지핀 유은찬의 긴 휴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당당하게 아기를 안고 출근한 이주한.
사내 직원들은 누구 아기냐고 물었고 이주한은 당당히 제 아이라고 대답했단다. 덕분에 은찬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주한에게 버림받은 불쌍한 수인으로 소문이 나 있는 상태였다. 그렇다고 이주한과 결혼한 사람이 나고. 그 아기를 낳은 게 바로 나 유은찬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도 뭐했다. 남자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믿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귀여운 외모 때문인지 아기 맹수들은 금방 유명해졌다.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수인이라는 것도 들키지 않았다. 사람들은 아기 머리와 바지 사이에 삐죽 튀어나온 표범 귀와 꼬리를 모자와 옷에 함께 달려 나온 것으로 인식하는 것 같았다.
“자존심이 밥 먹여 주나요.”
은찬이 가볍게 말하자 곽 과장은 콧방귀를 꼈다.
“밥 먹여 줄 때도 있지. 너도 참 넉살 좋다. 다른 여자 만나서. 떡하니 애까지 데리고 다니는 옛 애인을 어떻게 봐? 그냥 때려치워. 말이 나와서 말인데, 나 가는 데 따라갈래?”
이건 또 무슨 말이야? 같이 가자니. 말뜻을 이해 못 한 은찬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 때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곽 과장은 덩그러니 서 있는 은찬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는 사람이 없는 복도 끝자락으로 은찬을 끌고 가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경쟁사 회사의 로고가 눈에 확 들어왔다.
“너만 알고 있어. 나 스카웃 제의 받았거든.”
“네? 스카웃이요?”
“왜? 나라고 그런 거 받으면 안 돼? 이상해?”
“아니요……. 그건 아닌데.”
이상하지. 특출 난 인재도 아니고 능력 없는 만년 마케팅 1부서의 과장인 그가 스카웃이라니. 조용한 은찬의 반응에 김이 팍 샌 그는 명함을 도로 가져가며 말을 이었다.
“이참에 너도 같이 갈래? 어차피 너도 여기 있어 봤자 모가지 간당간당할 거 같은데. 솔직히 사귀던 남자가 눈앞에서 알짱거리는 거 부장이 좋아하겠어? 부인 눈치도 보일 거고. 안 그래?”
그 부인이 지금 눈앞에 있다고요. 은찬은 곽 과장이 더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동조했다.
“대신 너도 뭐 하나 넘겨야 해. 예를 들어 거래처 리스트라던가. 그런 거.”
곽 과장 이 새끼. 회사에 죽을 때까지 충성할 것처럼 아부를 떨더니 아무렇지 배신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거, 그래도 돼요?”
“그럼.”
아니지, 이 자식아. 그거 범죄잖아. 곽 과장은 능글맞게 웃으며 은찬의 등을 퍽 쳤다.
“너나 나나 여기 더 있어 봤자 좋은 꼴 못 봐. 나 봐. 이주한 그 어린놈 새끼한테 꼬리를 얼마나 흔들었냐. 그런데 돌아오는 게 뭐야. 없다, 이거야. 김동만 그 자식이 한 게 뭔데 대리 승진에 비서실로 부서 이동을 시키는 건데? 이런 대우 받고 내가 미쳤다고 여기 있을 거 같아? 너도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빨리 옮겨. 어때? 너도 가는 거지? 가는 거다!”
곽 과장은 반 강제적으로 은찬에게 강요했다. 은찬은 생각해 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그에게서 도망쳤다. 실력으로 승부를 봐야지 개뿔 한 것도 없으면 승진만 바라는 저런 부류는 뻔했다. 다시 엘리베이터에 올라 회장실이 있는 층에서 내렸다. 제2 비서실 문 앞에선 은찬은 익숙하게 비밀 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왔냐.”
“어.”
김동만과 간략한 인사를 주고받으며 방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간 은찬은 곧장 소파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애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김동만을 구경했다. 곽 과장은 절대로 모를 것이다. 승진하고 비서실로 발령 난 김동만이 뭘 하고 있는지.
두 맹수는 수인 아기라서 그런지 평범한 아기와 다르게 활동량도 어마어마했다. 지금도 두 녀석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김동만의 머리 위를 올라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첫째 이유한은 손톱을 세워 등에 매달려 있고, 둘째 요한은 그런 형을 밟고 동만의 어깨 위에 올라갔다.
은찬이 자유를 만끽하는 사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녀석의 몰골은 오늘도 엉망진창이었다. 날카로운 손톱 때문에 옷과 피부는 성할 날이 없을 정도였다.
“유한아, 그러다가 다쳐. 요한이도.”
“괜찮아, 안 다쳐.”
“잘한다. 너 처자다가 이제 일어났지?”
동만은 아이들이 다칠까 봐 안절부절못하면서 은찬에게 잔소리를 퍼부었다. 아예 본격적으로 편안한 자세를 잡은 은찬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피곤해서.”
“애는 부장님 혼자서 다 보드만! 니가 뭐가 피곤해!”
“쟤들 그냥 보고만 있어도 피곤해. 얼마나 돌아다니는지 아냐? 지금도 봐. 잠시도 가만히 못 있는 다니까? 이요한, 형님 머리 밟지 말라고 했지!”
은찬이 아무리 말해도 요한은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발을 헛디뎌 요한이 바닥에 떨어지고 덩달아 유한도 바닥에 뒹굴었다. 두툼한 매트가 깔렸었지만 동만의 얼굴은 사색이 됐다. 혹여나 애들이 다쳤을까 봐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이 녀석들! 괜찮아? 야! 너 그러고 있지 말고 이리 와서 애들 다친 데 없나 좀 봐!”
“괜찮아. 괜히 고양이 자식이겠냐. 우리는 다 저렇게 커. 이유한, 이요한. 이리 와 봐.”
은찬의 부름에 아기 맹수 두 마리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기어왔다. 두 녀석을 소파 위로 올리자마자 녀석들은 또다시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은찬의 배 위를 기어 다니거나 은찬의 몸을 벽으로 삼아 달려들거나 하는 그런 장난이 시작되면 은찬은 꼬리를 꺼내 아이들의 눈앞에 흔들었다. 그럼 또 단순하게 그 꼬리를 잡으려고 달려들었다.
“이것 봐. 웃기지? 꼭 낚시하는 기분이라니까?”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아이들을 유혹 중인 은찬이 킥킥 웃자 동만은 어이가 없다는 시선이 날아왔다.
“그게 엄마 입에서 나올 소리냐?”
“왜?”
“오구오구 내 새끼, 해도 모자랄 판국에 잘하는 짓이다. 애들만 보고 있어도 배부르고 막 그래야 되는 거 아니야?”
이어진 동만의 훈계가 은찬은 이해되지 않았다. 오히려 시큰둥하게 따졌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이놈들이 음식도 아니고. 보고 있는데 왜 배가 부르냐? 귀엽긴 하지. 이게 내 배 속에서 나왔나 싶기도 하고. 야! 그래도 명색이 내가 엄마다.”
“아이고 그러셔. 엄마라는 건 인지하고 있어서 다행이다.”
“그럼. 내가 이놈들 낳을 때 죽다가 살았잖아.”
다시는 생각하기도 싫을 만큼 끔찍한 출산의 고통을 떠올리며 은찬은 몸서리를 쳤다. 동만은 그런 은찬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녀석이 면회 왔을 당시 수술 후유증으로 끙끙 앓던 은찬을 코앞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불과 몇 달 전 일인데 그사이 아이들은 훌쩍 커 버렸다.
“이제 괜찮아? 애는 낳을 때도 중요하지만, 몸조리도 중요하다던데. 추운데 막 이렇게 돌아다녀도 돼? 다음 주에 복귀하지 말고 쉴 수 있을 때 조금 더 쉬지?”
“어차피 형이 애들 데리고 출근하나 내가 데리고 출근하나 그게 그건데 뭐. 지금 하고 별반 다를 거 없을걸?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조금 더 많아진다는 정도?”
짐작은 하고 있지만 은찬이 복귀를 한다고 해도 딱히 일거리는 주지 않을 것 같았다. 제2 비서실 자체를 아이들 놀이방으로 만든 것도 그런 의도였을 것이다.
“야, 나도 일이라는 거 하고 싶거든?”
“하고 있잖아.”
뜬금없이 나온 동만의 진지한 고백에 은찬은 잘 놀고 있는 두 녀석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은찬의 꼬리를 잡으려다 둘이서 싸움이 붙었다. 짧은 꼬리를 세우고 주먹으로 고양이 펀치를 날리는 모습이 심각하기보다는 귀여웠다.
“아니, 이거 말고! 진짜 일! 물론 이것도 나쁘지는 않은데……. 생각해 보니까 내가 지금 남들보다 스펙이 좀 딸리는 것 같거든? 그래서 애들 돌보는 틈틈이 토익 점수도 따고 다른 외국어도 좀 배워 놓으려고. 일단은 나도 비서실이니까. 그리고 저 녀석들이 유치원이나 그런데 갈 나이가 되면 나도 비서실 일원으로 넣어 달라고 좀, 말해 주면 안 될까? ……야! 사람이 말하고 있는데! 집중 좀 해!”
동만의 말이 길어지자 그 새를 참지 못한 은찬은 핸드폰을 꺼냈다. 사실 녀석의 말을 대충 이해했지만 모른 척했다. 자식, 요점만 말하지. 비서실에서 일하고 싶다는 말을 길게도 한다.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다. 지금은 녀석의 손이 필요해서 붙잡고 있지만 계속 이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나중에 애들이 유치원에 들어가면 김동만이 원하는 대로 비서실에 넣어 달라 회장님께 부탁하려고 했다.
“야, 재들 싸우잖아! 말려야지!”
뒤늦게 두 녀석이 싸우고 있는 것을 발견한 동만이 급하게 둘을 떼어 놓으며 은찬에게 따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은찬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내버려 둬.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니까.”
“너는 걱정도 안 되냐!”
“말려도 또 싸울 건데 뭐. 요한이 저게 형을 이겨 먹으려고 달려드는 건데, 한번 호되게 혼나 봐야 정신 차리지. 내버려 둬, 그냥.”
“야, 그러다가 애들 다치기라도 하면……! 상처라도 나면 어쩌려고!”
누가 보면 애들 엄마가 김동만인 줄 알겠다. 얼마나 유난을 떠는지 은찬이 질릴 정도였다.
“놀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뭐.”
“안 되지! 이유한, 이요한! 싸우면 안 돼요! 나쁜 거야!”
그렇게 타일러봤자 아직까지 동물적인 본능이 강한 애들한테는 통하지 않는데 저런다. 사람 아기가 아니라 수인 아기라는 기본적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동만의 훈계에 두 아기 맹수는 동만의 손가락을 덥석 물었다.
“악!”
그럴 줄 알았다. 고양이와 다르게 표범은 아기 때부터 송곳니가 매우 날카로웠다. 작지만 매운 송곳니 맛에 동만은 울상이 됐다. 안 되겠다 싶었던 은찬은 팔을 뻗어 두 녀석을 억지로 품에 안았다.
“아, 맞다! 나 아까 곽 과장 만났는데.”
“아……. 피 나. 유한아, 요한아. 삼촌 피나잖아. 그만 좀 물어. 어? 곽 과장?”
“어. 회사 그만 둘 거 같던데? 스카웃 제의 받았대.”
자리에서 일어나 싱크대 쪽으로 향하던 동만은 콧방귀를 꼈다.
“곽 과장한테 스카웃 제의 한 회사가 있다고? 어디 정신 나간 회사냐?”
“우리 경쟁사.”
“뭐?”
싱크대 위에 올려 둔 보온 통 뚜껑을 열던 동만이 행동을 멈추고 은찬을 빤히 보았다. 반쯤 열린 통에서 흘러나온 냄새에 두 녀석은 은찬의 품을 벗어나 전투적으로 동만을 향해 기어갔다.
“명함 보여 주던데?”
“진짜?”
“어. 너 승진된 거에 불만이 많은가 보더라. 너 엄청 씹어 대던데?”
“어, 그런 것 같더라고. 가끔 마주치면 치사하게 내 인사도 안 받아 준다니까? 야, 야! 이유한! 이요한! 다리 타고 올라오지 마! 야, 밥 줄게! 준다니까……! 내려가!”
나무를 잘 타는 표범답게 두 녀석은 나름대로 동만에게 올라가기 위해 끙끙거렸다. 가까스로 두 녀석을 식탁 의자에 앉힌 동만이 아주 능숙하게 이유식을 떠먹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엄마인 유은찬은 소파에 벌러덩 누운 채였고 동만이 밥을 먹이고 있는 상황이 펼쳐졌다. 고기가 듬뿍 들어간 이유식을 녀석들은 오물오물거리며 잘도 먹었다.
“잘 먹는다. 맛있어?”
은찬의 물음에 요한과 유한은 작은 송곳니가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이렇게 먹여도 돌아서면 배고프다고 난리야. 이런 거 보면 진짜 핏줄이 무섭다니까. 먹는 거 보면 딱 너 닮았다.”
“아니거든. 아기니까 많이 먹는 거지.”
“아니거든. 밥 줄 때만 나한테 친한 척 하는 거 너랑 완전 똑같아!”
말은 저래도 두 녀석만 보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동만이었다. 수인 아기는 너무 빨리 큰다며 좀 천천히 컸으면 좋겠다는 푸념 아닌 푸념도 늘어놓았다.
“그래서? 그거 너한테 말한 저의가 뭐래? 그 곽 과장이 아무 그거 없이 말하지는 않았을 텐데.”
다시 곽 과장에 대한 주제로 대화가 돌아왔다. 은찬은 어깨를 으쓱이며 일어나 앉았다.
“같이 그쪽으로 옮기자고 하던데? 대신 회사 자료 좀 몇 개 들고 가자고 하면서.”
“……어? 그거 범죄 아니냐?”
“범죄지.”
은찬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자 오히려 동만이 더 당황스러워했다.
“그거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물음에 은찬은 가볍게 반박했다.
“왜?”
충격받은 동만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야! 여기 이제 너희 회사야! 너 이주한 부장 와이프라고! 이주한은 이 회사 회장님 손자고!”
“그러니까 그게 왜. 귀찮게 그런 짓을 왜 해.”
잠시 방안에 정적이 흘렀다. 짭짭. 아이들의 입맛 다시는 소리만 공허하게 울렸고 다시 정신을 차린 동만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래야 유은찬답지. 내가 이래서 너 참 좋아한다.”
“뭔 소리야.”
“재벌 사모님이 되셨는데도 애가 변하는 게 없어. 참, 일관성 있다니까. 자기 일 아니면 쌩까는 그런 정신. 참 도덕적으로는 지랄 같지만 편리해. 저런 놈이 또 운빨 좋게 결혼은 잘했단 말이야. 돈 걱정 없지. 애 낳아도 나처럼 봐 주는 사람 있지.”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듣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은찬은 김동만의 빈정거림에 반격했다.
“사람 인생은 죽을 때까지 모른다고 하더니. 끝까지 여자 좋다고 한 놈이 결국엔 봐, 누구랑 살고 있나. 아파트 노래를 부르더니 100평짜리 떡 하니 생기고. 거기다 돈 많고 잘생긴 남자 애인도 생겼네? 어때, 요즘에는 연고 안 발라도 돼? 익숙해졌어?”
은찬이 빙긋 웃자 동만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두 사람이 어떻게 지내는지는 굳이 동만에게 묻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매일 여기서 이리한과 마주쳤기 때문이다.
“야, 유은찬!”
“네가 먼저 시작했다. 아무튼, 애들 잘 보고 있어.”
자리에서 일어난 은찬은 녀석들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고 입구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어디 가는데?”
“먹이 찾으러.”
“편의점 가? 야! 곽 과장 그거 내가 신고한다?”
“마음대로 하세요. 빨리 올게!”
이럴 때만 신고 정신이 투철한 김동만에게 손을 흔들며 방을 나선 은찬이 곧장 향한 곳은 이주한이 있는 곳이었다. 깜짝 놀래 줄 생각으로 벌컥 문을 열어젖히자 눈을 동그랗게 뜬 그가 은찬을 맞이했다.
“언제 왔어?”
“좀 전에. 바빠요?”
문을 닫고 그에게 다가간 은찬은 그의 주변을 기웃기웃거렸다.
“아니.”
“내가 아침에 꿈을 하나 꿨는데, 너무 생생해서 기분 나쁜 꿈이랄까.”
“무슨 꿈? 악몽?”
은찬은 이주한이 보고 있던 서류를 깔고 앉았다. 그리고 마주한 그를 향해 야릇한 미소를 던지며 속삭였다.
“야한 꿈.”
“자세하게 말해 봐.”
살짝 몸을 튼 주한은 들고 있던 볼펜을 툭 놓았다.
“굳이 말로 해야 해요?”
“그럼?”
툭. 조용히 오른쪽 신발을 떨어뜨린 은찬의 발이 이주한의 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이윽고 그의 다리 사이, 목적지에 도착하자 그곳을 배회하며 유혹하기 시작했다. 묵묵히 그 행동을 지켜보던 주한이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여기 회사야.”
“그러니까요. 딱 좋네.”
“안 돼.”
“내가 뭘 할 줄 알고?”
“발이 어디에 있는지 보면 답은 뻔하잖아?”
그는 은찬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예상치 못한 퇴짜에 은찬은 미간을 찡그렸다.
“여기서 왜 안 되는데요?”
“말했잖아. 회사니까.”
“그럼 지금 당장 근처 모텔이나 호텔 갈래요?”
“일하는 중입니다.”
주한은 은찬의 제의를 가볍게 거절하며 픽 웃었다. 그래도 이 유혹이 싫지는 않은지 은찬의 다리를 매만졌다. 기분이 팍 상한 은찬은 손톱을 세워 그 손을 살짝 할퀴었다.
“진짜 너무한다. 애 낳으면 끝내주게 해 준다면서요? 언제 그렇게 해 주는데?”
“어제도 한 거로 아는데.”
손등이 무사한지 확인한 주한의 미간에 작은 주름이 생겼다. 횟수로 친다면 자주 하는 건 맞지만, 양보다는 질을 따져야지. 은찬은 콧방귀를 끼며 팔짱을 꼈다. 그렇게 따진다면 은찬도 할 말이 많았다.
“했죠! 급하게 박고, 흔들고, 쌌지! 내가 무슨 자위 도구도 아니고! 하고 나서 나 진짜 기분 더럽거든요? 집에서는 애들 눈치 본다고 빨리 끝내 버리지. 지금은 회사라고 안 된다고 하지. 모텔이나 호텔 가쟀더니 그것도 안 된다네? 나랑 섹스하기 싫어요? 질렸어요?”
“무슨 말이 그래. 질리다니. 우리 사정 뻔히 알잖아.”
“그래서 내가 지금까지 참았잖아요! 그런데 오늘은 못 참겠다고 하잖아! 얼마나 굶었으면 꿈에서까지 섹스하는 꿈을 꾸겠어! 나 같으면 여기까지 와서 이러면 눈 딱 감고 모른척하고 넘어와 주겠다! 내가 여기서 하루 종일 이러고 있겠어요? 세 시간도 아니고 30분만 하자는 건데! 아니면 모텔 가자니까? 그것도 싫으면 나 바람피운다?”
“야!”
왈칵 얼굴을 찌푸린 이주한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겁을 먹기는커녕 은찬은 제 바지를 벗어 머리 뒤로 던졌다. 주한은 그제야 은찬이 노팬티로 온 것을 알아차리고 큰 소리로 숨을 삼켰다.
“설마…… 너 그러고 온 거야?”
“일어나서 형하고 할 생각밖에 안 했으니까. ‘여기 이렇게 누워서 다리 벌리면 형이 여기에 그걸 넣고 박아 주겠지?’라고 아까부터 계속 상상하고 있었는데.”
책상 위에 반쯤 누운 은찬이 다리를 쫙 벌리자 바지 안에 숨어 있는 그의 성기가 점점 커지고 있는 게 보였다. 거기다 은찬이 후드 티를 가슴까지 들어 올려 젖꼭지를 보여 주자 이주한은 작은 신음과 함께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한동안 애들 젖을 물렸더니 젖꼭지가 제법 커졌는데 원상태로 돌아가지 않았다.
“너, 진짜!”
“짧고 굵게 30분.”
아기들은 예민해서 조금만 이상한 소리가 들려도 엄마 아빠를 찾았다. 그들의 섹스 시간은 늘 10분 남짓. 욕구불만이 생긴 은찬의 돌발 행동에 이주한은 결국 항복을 선언했다. 책상을 점령한 은찬과 거리를 좁힌 그는 은찬의 보드라운 허벅지 안쪽을 혀로 핥았다.
“……근처에 모텔 있을 건데. 갈까?”
“안 돼요.”
이번에는 은찬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이주한은 이를 세워 허벅지 안쪽 연약한 피부를 꽉 깨물었다. 작은 신음을 터트린 은찬은 아예 뒤로 누워 버렸다. 덕분에 책상 위에 있던 서류와 전화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쏟아졌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 본격적으로 하면 하루 잡아야 할 걸요? 30분만 해요. 동만이한테 나 먹이 찾으러 간다고 했단 말이에요.”
“내가 먹이야?”
은찬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은 이주한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와중에 그의 손은 은찬의 가슴 주변을 배회했다. 딱딱하게 선 젖꼭지를 손톱 끝으로 비틀자 은찬이 상체를 들썩였다.
“어떻게 책임질래. 여기서 이러면 다음부터 계속 생각 날 건데. 일,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아?”
“아, 아…….”
주한은 예고도 없이 손가락 두 개를 은찬의 구멍 안으로 넣었다. 손가락 두 개가 작은 구멍을 넓혀 갈 때마다 엉덩이가 움찔움찔 거렸다. 은찬은 주한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움켜잡고 헐떡였다. 얼른 넣어 줬으면 좋겠다.
거칠게 박히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꽉 차 있던 그때, 주한이 젖꼭지를 세게 비틀었다. 오싹한 쾌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온 은찬은 주한을 보챘다.
“얼른, 빨리. 시간 없다니까!”
그제야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난 주한은 바지 지퍼를 내렸다. 이미 바지 안을 꽉 채울 정도로 발기한 성기가 튕기듯 밖으로 나왔다. 귀두 끝자락이 엉덩이 구멍 주름 부분을 꾸욱, 꾸욱 누르며 은찬의 애를 태웠다.
“유은찬. 이거 먹고 싶어?”
“하아…… 장난, 치지 마. 얼른…….”
쾌락에 젖어가던 은찬은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그의 팔에 손톱을 세웠다. 단단하고 굵은 성기를 얼른 품고 싶어서 안달이 난 상태였다.
“넣어 주세요, 해 봐.”
“……뭐?”
“‘맛있는 거 넣어 주세요.’라고 해야지 넣는다.”
일부러 음란한 말을 시키는 이주한에게 따지려 했지만, 지금은 반항할 수 없었다.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은찬이 입을 벌리던 그 순간. 퍽, 소리와 함께 이주한의 커다란 성기가 단번에 내벽 안을 비집고 들어왔다. 배 안을 꽉 채우는 묵직한 감각에 은찬은 겨우 숨을 내쉬었다.
그는 정신을 차릴 틈도 주지 않고 격렬하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아아……! 아, 앗! 앗……!”
그가 온 힘을 다해 강하게 박을 때마다 책상이 부서질 듯 덜컹거렸다. 더불어 은차의 입에서도 비명과도 같은 교성이 터졌다. 수인의 성기는 인간과 비교하면 너무 크고 굵었다. 거기다 이주한은 최상 계층의 수인이니 그 크기를 따라올 자는 없었다.
확실히 집에서 할 때와 달랐다. 애들이 깰까 봐 숨죽여 했던 섹스 따위와 지금은 비교도 되지 않았다. 흉포한 성기가 좁고 연약한 내벽을 강하게 찍고 나갈 때마다 은찬은 눈앞이 아찔해졌다. 발정기를 맞아 울부짖은 고양이처럼 신음을 내질렀고 격렬한 허리 짓에 몸이 부서질 듯 흔들렸다.
“아응! 아, 아아! 혀…엉! 형……!”
“조르긴.”
이주한은 낮게 그르렁거리며 상체를 숙였다. 은찬의 젖꼭지를 한입 크게 베어 물며 늘어졌다. 찌릿한 통증에 은찬은 그의 머리카락을 왈칵 움켜잡았다.
“아깝네. 맛있었는데.”
그는 젖꼭지를 잘근잘근 씹으며 아쉬운 투로 중얼거렸다. 예전보다 젖꼭지가 예민해진 건 그의 탓이다. 잠시나마 모유가 나왔을 때 이주한은 밤마다 은찬의 젖꼭지를 빨았다.
“거기. 하아. 아……거기. 그만!”
말과는 달리 은찬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는 그의 머리를 와락 껴안으며 헐떡였다. 동시에 흉포한 성기가 내벽 안을 짓누르고 빠져나갈 때마다 낮은 교성을 터트리며 엉덩이를 흔들었다. 이곳이 회사 안이라는 것도 잊고 마음껏 소리를 내질렀다.
다행이라면 이곳은 인적이 드문 장소였다. 잠시나마 육아에서 해방된 은찬은 이 시간을 마음껏 즐겼다.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소리를 지르며 주한이 주는 쾌락에 흠뻑 젖어 갔다. 이주한도 은찬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숨죽이며 욕정만 발산하던 집과는 달리 성욕이 폭발했다. 좁고 뜨거운 내벽 안을 짓이기던 성기는 점점 더 커졌다. 그 거대한 것이 뿌리 끝까지 단숨에 꿰뚫고 들어올 때면 은찬은 강렬한 쾌감에 울부짖었다. 허리 짓이 거칠어질수록 흘러내리는 애액의 양도 많아졌다.
“하아. 하아…… 아. 아, 아, 아응!”
정신없이 밀어붙이는 통에 숨도 쉴 수 없었다. 이주한의 밑에 깔린 은찬은 거추장스러운 그의 와이셔츠를 찢어 버렸다. 근육질 가슴이 드러나자 망설임 없이 손톱을 세워 가슴을 긁었다.
“귀엽긴.”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이주한이 그런 은찬을 사랑스럽게 응시했다. 작은 구멍을 가르고 들어온 성기가 내벽 끝을 툭툭 건드렸다.
“유은찬 씨. 이제 만족해요?”
“반 정도?”
“반?”
“머리가 그 정도밖에 안 돼요? 이것밖에 안 돼?”
장난 삼아 던진 툭 뱉은 말에 이주한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야……!”
그가 은찬의 사수였을 당시 자주 내뱉던 말이었다. 화들짝 놀라는 이주한의 반응에 은찬은 개구쟁이 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가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러게. 네가 이렇게 멋진 고양이인 줄 전혀 몰랐으니까. 빨리 눈치챘어야 했는데.”
“그때 형, 진짜 재수 없었는데.”
여전히 그의 성기가 은찬의 내벽 안을 꽉 채우고 있는 상태였다. 이런 분위기로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잠시 이어진 대화에 사랑스럽게 은찬을 내려다보던 주한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도?”
“……글쎄?”
은찬은 일부러 대답을 회피하며 킥킥 웃었다. 그러자 주한은 말도 없이 허리를 거칠게 움직였고 강한 삽입에 깜짝 놀란 내벽이 경련했다.
“잠……잠깐! 치사하게, 아…… 아응. 하아, 하아…… 흑! 응!”
벗어나려 몸부림쳐도 그의 팔 사이에 갇힌 은찬이 도망갈 수 있는 곳은 없었다. 활짝 벌려진 은찬의 다리 사이에서 살과 살이 맞부딪치는 음탕한 소리가 방 안에 크게 울렸다.
“하아…… 아. 아!”
정신없이 박고 박히는 상황이 이어졌다. 은찬은 엉덩이를 흔들며 교성을 질렀고 주한은 열심히 허리를 움직였다. 두 사람의 거친 행위에 책상 위에 있던 대부분 것들은 이미 바닥 아래로 추락한 뒤였다. 겨우 컴퓨터 모니터만 남겨진 상태였지만 그것도 위태로웠다.
“아아아……! 형! 혀어엉!”
밀려오는 강한 쾌감에 정신을 놓아 버린 은찬은 이주한의 단단한 어깨를 까득까득 깨물며 흐느꼈다. 그러다 반쯤 상체를 일으킨 은찬의 시야에 벌려진 다리 사이를 바쁘게 오가는 번들거리는 성기가 보였다. 그게 퍽 소리를 내며 박힐 때마다 은찬은 숨을 헐떡이며 상체를 뒤로 젖혔다.
“30분. 지났어.”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끔거린 이주한이 은찬을 와락 껴안고 끝을 알려왔다. 은찬은 반항할 틈도 없이 그에게 입술이 먹혀 버렸다. 이주한은 일부러 입을 틀어막고 폭력적으로 허리를 움직여 댔다. 내벽 깊숙이 들어온 성기는 잔인하게 안을 짓눌렀고 은찬은 숨이 넘어갈 듯 버둥거렸다.
“으! 으읏……! 으읍!”
내벽이 경련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숨소리도 더 거칠어졌다. 주한은 짐승처럼 달려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벽 깊은 곳에 뜨거운 정액을 힘차게 쏟아 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쏟아 낸 뒤에야 그는 은찬을 풀어 주었다.
힘없이 책상 위로 쓰러진 은찬은 겨우 숨만 내쉬며 흐느적거렸다. 벌려진 다리 사이에 넘쳐흐르는 정액이 길게 늘어졌다.
“유은찬 씨, 이제 만족하시는가요?”
멍하니 누워있는 은찬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 만지는 주한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쾌감에 젖은 은찬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런 주한을 올려다보았다.
“10점 만점에 7점.”
“점수가 짠데?”
“다음에 만회할 기회를 드릴게요. 조금 더 노력해 보세요.”
“지금 다시 해 볼까?”
“안 돼요. 30분 지났습니다.”
둘은 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서로의 몸을 만지작거리며 사소한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또 10분이 흘러갔다. 노곤한 몸을 일으킨 은찬은 엉망진창으로 변해 버린 주변을 보며 탄성을 질렀다.
“이거 다 어떻게 치워요?”
“잘. 고양이가 놀다 간 흔적이니까 감수해야지.”
“형이 치워요?”
“그럼 네가 치우고 갈래?”
이주한은 책상 위에 고여 있는 정액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후다닥 일어난 은찬은 휴지를 찾아 엉덩이부터 닦았다. 평소보다 양이 많아서 그런지 계속 나왔다.
“콘돔 안 했네?”
“갑자기 여기서 콘돔을 어떻게 찾아. 누가 그걸 챙길 시간을 줬어야지.”
“괜찮……겠죠?”
창문을 열어 비릿한 방 안의 공기를 환기부터 시키고 있던 주한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지 않아도 의사에게 또다시 임신할 가능성에 대해 물어보았다. 의사가 말하길 수인 남자의 임신은 워낙 희박해서 또다시 임신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고 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금껏 콘돔은 필수로 챙겼건만, 오늘 본능에 충실하다 보니 거기까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정액이 묻은 휴지를 휴지통에 던지며 은찬은 걱정도 같이 날려 버렸다. 의사도 그렇게까지 말했는데 설마 또 되겠어, 라는 생각이 컸다.
“오늘 저녁 먹고 들어가면 안 돼요?”
“왜?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오랜만에 동만이도 같이 가요. 아까 녀석들이 또 동만이 손 물어뜯었어요. 동만이 손 완전 못 봐 주겠다니까요. 죄다 애들 송곳니 자국에다가 발톱 자국뿐이잖아요. 미안해서 고기라도 사 주려고요.”
“네가 먹고 싶은 건 아니고?”
찢어진 와이셔츠를 걸친 채 물 한잔 마시고 있는 이주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땀에 젖은 가슴 근육에 시선을 고정한 은찬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시간만 더 있다면 이대로 더 하고 싶었지만, 이곳이 회사라는 게 안타까웠다.
“나는 지금 맛있는 거 배 터지게 먹었거든요?”
“맛있는 거 뭐?”
이주한의 짓궂은 장난에 은찬은 바지를 입으며 씨익 웃었다.
“이주한 정액.”
“맛있었다니 다행이네.”
“잘 먹고 가요.”
정갈했던 방을 30분 만에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린 유은찬은 목적을 달성했으니 미련 없이 그곳을 벗어났다. 한결 가벼운 발걸음으로 애들이 있는 제2 비서실 방문을 열자마자 김동만의 고통에 찬 목소리가 은찬을 반겼다.
“이놈들, 삼촌 무는 거 아니야! 나는 고기가 아니라고!”
표범의 피를 더 타고난 두 녀석은 아무래도 육식 성향이 강했다. 같은 고양잇과지만 고양이와는 전혀 다른 습성은 종종 김동만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지금도 그랬다. 장난이겠지만 김동만의 다리와 팔에 매달려 물고 늘어진 모습은 마치 먹이를 사냥하는 작은 맹수 같았다.
“은찬아아아아……. 애들 좀, 어떻게 해 봐.”
문 앞에서 멀뚱히 서 있는 은찬을 발견한 동만이 구해 달라는 간절한 시선을 던졌다.
“그냥 따끔하게 혼내면 되잖아.”
안 돼. 애초에 그 한마디를 못해서 쩔쩔매고 있는 김동만이다. 그러면 애들이 상처를 받는다나 뭐라나. 정작 은찬에게는 거침없이 쓴소리를 퍼부으면서 말이다. 알다가도 모를 김동만의 여린 마음에 은찬은 콧방귀를 터트렸다.
“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녀석들한테 어떻게 그러냐?”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김동만의 와이셔츠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넝마조각으로 변해 버린 것을 보며 은찬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쟤들 저래 보여도 맹수야.”
살려달라는 김동만의 시선을 외면하고 소파에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두 어린 맹수는 엄마에게로 기어왔다. 은찬은 두 녀석의 관심을 다시 꼬리로 돌렸다. 허공에 이리저리 오가는 고양이의 꼬리를 잡으려 안간힘을 쓰는 두 녀석은 조만간 일어날 기세였다. 일어나다가 엉덩방아를 찍기 몇 차례 보다 못한 김동만이 꼬리를 쳐 내며 두 녀석을 품에 안았다.
“너는 애들 넘어지는 거 불쌍하지도 않냐?”
“…….”
동만은 두 마리의 아기 맹수를 품에 꼭 껴안고 원망 가득한 시선으로 은찬을 째려봤다. 여기서 제일 불쌍한 인간이 그런 소리를 하니 은찬은 할 말을 잃었다. 정작 그 인간은 자신이 불쌍하다는 것을 모르니 문제였다.
“너 어쩌다 이렇게 됐냐?”
“내가 뭐!”
“완전 애 보는 게 체질인데?”
“미쳤구만? 야, 니가 애들을 너무 안 챙기는 거야! 나는 어디 다니다가 찍힐까 봐 부딪칠까 봐 한시라도 눈을 못 떼겠는데. 너는 어떻게 그렇게 태평하냐? 뭐 먹고 온다더니 30분 넘게 어디 갔다 온 거야? 애들 생각 안 하지?”
김동만이 땍땍거리는 와중에도 유한과 요한은 가만히 있지 못했다. 동만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버둥버둥거리다가 결국엔 또 동만의 팔을 덥석 물어 버렸다.
“아악!”
이번만큼은 고통을 참을 수 없었는지 동만은 단발 비명을 지르며 애들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드디어 자유를 되찾은 두 맹수는 방안을 자유롭게 기어 다니기 시작했다. 뒤늦게 화들짝 놀란 동만은 애들 뒤를 쫓아다니기 바빴다. 물론 은찬의 행동 범위는 여전히 소파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놔두라니까?”
“도와줄 거 아니면 입 닥치고 있어! 유한아 요한아. 삼촌이랑 놀자.”
“진짜 유별나다니까. 내가 몇 번이나 말했지만, 수인 아기는 사람하고 다르다니까? 그렇게 과보호 안 해도 돼.”
“그래도 아기는 아기야. 봐라, 얼마나 사랑스러운 존재들이냐? 이 귀하고 꼬리! 내가 이놈들만 보고 있어도 시간 가는지 모르겠다니까.”
낮은 포복으로 요한에게 달려드는 유한을 바라보며 동만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두 녀석이 엎치락뒤치락하며 장난치는 걸 조용히 바라보던 은찬은 귓구멍을 후비며 한마디 던졌다.
“그러면 너도 임신해. 물론 자식은 개새끼가 태어나겠지만.”
“야! 너는 애들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어……! 개새끼가 뭐냐, 개새끼가!”
발끈한 김동만은 기가 차다는 듯이 따졌다.
“왜? 그게 욕이야? 맞잖아. 개 새끼. 이리한이 개니까. 새끼 태어나면 개 새끼. 저놈들은 표범 새끼.”
“시끄럽고. 어디 갔다 왔냐니까? 혼자만 먹고 온 거야? 내 거는!”
소파에 벌러덩 누워 킥킥 웃던 은찬은 동만의 발언에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줄 수 있으면 주고 싶은데……. 네가 와서 꺼내 갈래?”
“뭔데? 뭐, 또 캐러멜 그런 거야? 나는 그렇게 맛있는지 모르겠던데. 있으면 하나 줘 봐.”
회장님께 선물 받은 캐러멜을 몇 번 먹어 본 적 있던 터라 그것으로 오해한 동만은 스스럼없이 손을 내밀었다. 은찬은 대답 대신 바지를 벗으려 했고 그 행동에 소스라치게 놀란 김동만은 근처에 뒹굴던 아기 장난감을 던졌다.
“뭐 하는 짓이야! 바지를 왜 벗어!”
“나눠 달라며. 그거 지금 배 안에 있거든.”
“뭐?”
은찬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반 박자 늦게 이해한 김동만의 얼굴이 우악스럽게 구겨졌다.
“미친놈……. 설마 회사에서 했다고?”
“그래서 더 짜릿하던데?”
“누가 문 열었으면 어쩌려고!”
“내가 바보냐? 당연히 문은 잠갔지.”
설마하니 그런 것 쯤 생각 안 했을까 봐. 콘돔을 생각하지 못한 건 실수였지만 방으로 들어갈 때 문은 잠가 뒀다. 은찬의 기분이 좋아진 이유를 그제야 이해한 동만은 한쪽 입술을 비릿하게 올렸다.
“그래서 얼굴에 생기가 도는구만.”
“그래 보여? 오랜만에 끝내주게 했거든. 너무 좋더라고.”
“그러고 싶냐?”
김동만의 비난 가득한 시선에 은찬은 씨익 웃었다. 오랜만에 격렬한 운동을 했더니 온몸이 노곤했다. 두 팔을 위로 올려 크게 기지개를 켜며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그러고 싶으니까 했지.”
“발정 났냐? 피임은 제대로 했지? 조심해. 또 임신하면 어쩌려고 그래.”
동만은 대놓고 정색했고 은찬은 무심하게 받아쳤다.
“걱정도 팔자다. 의사가 절대로 그럴 리 없다고 했거든? 남자 수인이 임신할 확률은 아주아주 희박하다잖아. 설마 내가 그 아주아주, 아주 희박한 확률을 또 뚫고 임신이 되겠어? 안 그래?”
“모르지. 한 번 됐는데 두 번 안 되라는 법도 없잖아.”
“안 돼. 절대로 안 돼. 그리고 내가 알아봤는데 수인 중에서도 표범 수인 자손이 제일 귀하다더라. 그만큼 임신이 힘들다는 거지.”
“그건 또 누구한테 들었냐?”
“김 실장님.”
회장님을 오랫동안 모신 김 실장의 말이었기에 신빙성 있었다.
“아무튼, 조심해.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나도 애 더 낳고 싶은 마음은 없거든? 네가 안 겪어 봐서 그러는데. 진짜 죽는 줄 알았거든?”
“지랄한다. 그런 놈이 전화를 그런 식으로 하냐? 뭐? 햄버거 사 들고 와?”
동만은 본격적인 진통을 겪기 전 이야기를 들먹거렸다. 다시 늘어지게 하품을 한 은찬은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 쪽으로 향했다. 그 뒤를 두 녀석이 쪼르륵 따라왔다.
“너 오늘 저녁에 약속 있어?”
“저녁? 왜?”
“밥이나 먹자.”
“밥? 무슨 밥.”
“너 좋아하는 소고기.”
냉장고 문을 열며 던진 말에 등 뒤에서 동만은 진절머리를 쳤다.
“나 소고기 안 먹어!”
“왜?”
“이리한 그 자식. 아침, 점심, 저녁으로 고기 먹잖아! 이제 고기 냄새만 맡아도 토할 것 같다. 다른 거. 다른 거 먹자.”
“그럼 뭐?”
냉장고 안에는 온통 애들 먹을 것으로 꽉 차 있었다. 입맛을 다시며 도로 문을 닫은 은찬은 물 한잔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게 맛있게 보였는지 은찬의 다리에 매달린 녀석들이 자기도 달라고 아우성이다.
“회?”
“내가 싫은데.”
“그냥 좀 먹자. 나 그거 먹고 싶다고! 이리한 그 자식은 회 안 먹는다고!”
“그러지 뭐. 이놈들아, 엄마 물 좀 먹자. 뭐만 먹으면 달려드네.”
물 컵을 내려놓은 은찬은 두 녀석의 목덜미 옷자락을 꽉 움켜잡았다. 허공에 출 늘어진 두 녀석을 보자마자 동만의 기겁하는 소리가 들렸다.
“야! 애들 그렇게 잡지 말라니까!”
“우리 원래 이렇게 잡는다니까?”
“그래도 안 돼! 하지 마! 그러다 다치면 어쩌려고! 유한아, 요한아. 엄마 나쁘다, 그치? 이리 와. 삼촌이 맛있는 거 줄게. 배고파? 그렇지? 배고픈 시간이지?”
맛있는 거. 그 단어는 알아듣기 시작한 두 녀석은 동만의 뒤를 쫄랑쫄랑 따라갔다. 하루라도 손이 성할 날이 없는 동만이지만 녀석의 표정은 너무도 행복해 보였다. 그렇게 고양이가 좋으면 진짜 고양이 한 마리를 키워도 될 텐데. 굳이 이러면서까지 회사에 다닐 필요도 없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녀석의 잠재의식 속에 유은찬을 보살펴야 한다는 게 있는 건가. 은찬은 행복해 보이는 김동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냥 우리 애들 데려가서 키울래?”
“나 회장님한테 죽는 거 보고 싶냐? 그 전에 부장님한테 죽을걸?”
증손자와 자식 사랑이 끔찍한 두 사람을 들먹거리며 동만은 진저리를 쳤다. 아이들 간식 시간은 너무도 조용했다. 찹찹 거리는 소리만 한동안 이어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들이 잠들자 덩달아 은찬도 단잠에 빠졌다.
비로소 평화가 찾아온 방안에서 동만의 나지막한 한숨 소리가 퍼졌다.
***
그 녀석이 나타났다. 쓸데없이 만나고 싶지 않아 일부러 퇴근 시간보다 일찍 회사를 나섰건만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서 딱 마주쳤다. 이주한과 김동만의 품에 각각 한 명씩 아이를 안고 혼자 덩그러니 서 있던 은찬은 이리한을 보자마자 짧게 혀를 찼다.
“어? 다들 왜 여기 있어? 아직 퇴근 시간 아니잖아.”
이곳 직원도 아니면서 뻔질나게 드나드는 너를 피해 도망가던 중이다. 모두의 시선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눈치 없는 이리한이 알 리 없었다. 그저 해맑게 웃으며 반가워할 뿐이다.
“너 왜 자꾸 오는 건데?”
“나? 우리 자기가 여기 있으니까. 안녕, 꼬맹이들. 어제도 봤지만 오늘도 보니까 반갑네. 우리 동만 씨랑 잘 놀았어?”
이주한의 쌀쌀맞은 태도에도 이리한은 여전했다. 이유한, 이요한. 두 아기에게도 손을 흔들며 친근하게 인사했지만 무시당했다. 어쩌다 보니 매일 보는 사이였음에도 녀석들과 이리한은 거리감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녀석들이 매일같이 김동만에게 작은 상처를 입히다 보니 이리한의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올 리 없었기 때문이다.
“이 녀석들 잘생긴 형을 봤으면 아는 척을 해야지. 야, 주한아 이 녀석들 누구 닮아서 성격이 이러냐?”
“우리 애들 성격이 어때서?”
아빠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주한은 부성애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은 상태였다. 그러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의 성격을 운운하는 이리한이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지는 것도 모르고 이리한은 요한의 꼬리를 잡아당기며 이죽거렸다.
“애들이 낯을 얼마나 가리는지. 맨날 얼굴도장 찍어도 아는 척을 안 한다니까? 그래 놓고 우리 동만 씨 손은 얼마나 물어 대는지 아냐? 우리 동만 씨가 착해서 참는 거지. 다른 사람 같았으면 난리 났을걸? 너 우리 동만 씨한테 고마운 줄 알아야 해.”
김동만에게 고마운 건 사실인데 왜 이리한이 생색을 내는 걸까. 그렇다고 공짜로 부려 먹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파격적인 승진과 동시에 월급도 인상된 거로 알고 있다. 은찬은 느닷없이 나타나 제 주인을 자랑하고 있는 멍청한 개를 한심스럽게 보았다.
“어, 그래. 알았으니까 잘 가.”
은찬이 먼저 이리한을 가볍게 지나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이주한과 김동만도 그 뒤를 따랐다. 덩그러니 엘리베이터 입구 앞에 서 있던 이리한은 뒤늦게 닫히는 문틈으로 손을 넣었다. 생각보다 행동이 잽싼 놈. 닫힘 버튼을 계속 누르고 있던 은찬은 아쉬운 마음으로 이리한을 째려봤다.
“오늘 김동만 씨 일이 있어서 늦을 거니까. 먼저 가.”
이주한이 던진 그럴듯한 핑계에 이리한은 빙긋 웃으며 물고 늘어졌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개가 웃을 때가 제일 무섭다.
“일? 무슨 일?”
“중요한 일.”
“중요한 일? 그게 뭔데? 이 시간에? 퇴근 시간 30분 전에 일어난 중요한 일이라는 게 뭔데? 그것도 다들 퇴근하는 삘로 나가면서?”
오늘따라 녀석의 눈치는 평소와 달랐다. 은찬은 이왕 이렇게 만난 거 이리한을 데려가는 게 어떻겠느냐는 시선을 던졌지만, 동만은 단호했다. 절대로 안 된다는 눈짓을 보낸다. 오랜만에 편하게 밥을 먹고 싶다는 간절한 애원이 담긴 눈빛이라는 건 알겠는데 왜 저러나 싶을 정도로 거부반응이 심했다.
“야, 개. 안 바빠?”
보다 못한 은찬이 핀잔을 던졌지만 이리한은 아주 빠르게 대답했다.
“응. 안 바빠. 나 한가해. 그러니까 뭐냐니까? 그 중요한 일이라는 거!”
이래서 돈 많은 집 애들은 재수가 없다니까. 짧게 혀를 찬 은찬은 동만과 한집에 사는 이리한을 떨쳐 낼 핑계거리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사이 엘리베이터는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뭔데? 왜 말 안 해 줘? 동만 씨! 주한아! 야, 고양이! 뭐냐니까? 나는 알면 안 되는 거야? 회사 기밀이야? 그런 거야? 치사하게 이러기야?”
회 먹으러 가는 게 회사 기밀은 아니지만, 누구도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세 사람이 호들갑 떨며 따라오는 이리한을 무시했음에도 녀석의 집착은 대답했다. 미친 듯이 주변을 돌며 짖어 댔다.
“야! 고양이! 나 말해 줄 때까지 계속 따라다닌다! 뭔데, 무슨 일인데! 우리 동만 씨랑 어디 가는 건데! 나 빼고 좋은데 가는 거지? 맞지?”
차를 앞에 두고 멈춘 은찬은 제 주변을 미친놈처럼 빙빙 도는 이리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정확하게 녀석의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쳤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하는 짓이 짜증 났다.
“왜 때려!”
“내가 이래서 개를 싫어한다니까!”
“나는 뭐. 고양이 따위 좋아하는 줄 아냐?”
“잘됐네! 그럼 회사에 오지 마!”
“너 보러 오는 거 아니거든? 그러니까, 어디 가는 건데! 말해 줘! 말해 달라고!”
포기를 모르는 집착성 개 때문에 시끄러워 미치겠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주인과 떨어지면 생긴다는 분리 불안증인가. 주한과 은찬은 자연스럽게 동만을 응시했다.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동만의 얼굴이 조금 전보다 더 어두워 보였다.
“같이 가. 대신, 입 다물고 있어.”
“뭐야. 나도 같이 가도 되는 거예요?”
이리한은 아이처럼 뛸 듯이 좋아했지만 김동만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다시 한번 경고했다.
“대신 입 다물고 조용히.”
“나야, 원래 조용하잖아요.”
이리한이 씨익 웃으며 동만의 곁으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녀석의 손이 동만의 어깨를 감싸려고 할 때였다. 동만에게 안겨 있던 요한이 작은 송곳니를 세워 이리한의 손을 콱 깨물었다.
“악! 내 손! 피, 피 나! 피!”
두 아기 맹수는 이리한을 싫어하는 게 확실했다. 미처 말릴 사이도 없이 벌어진 일에 모두 미친 듯이 팔짝 뛰며 혼자 야단법석을 떨고 있는 이리한을 구경했다. 한 방울 피가 맺힌 손을 동만에게 내민 이리한은 훌쩍였다.
“동만 씨, 나 아포.”
“지랄을 한다.”
동만은 냉정하게 한마디 던지고 이주한의 차에 올라탔다. 그럼에도 이리한은 동만을 쫓아가기 바빴다. 김동만에게 왜 저렇게 집착하는 것일까. 은찬에게 김동만이란 가만히 있어도 다가오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은찬의 관점에서 이리한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만 귀찮게 하지 않으면 상관없었다.
“어디 가는데요?”
입 아프게 묻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결국 목적지에 도착하고서 해결됐다. 횟집 간판을 본 이리한의 표정은 똥 씹은 표정이 됐다.
“회? 맛있는 거 많은데 왜 하필 회야? 우리 다른 거 먹으러 가자! 내가 살게!”
반찬 투정 하는 아이처럼 이리한은 횟집 앞을 막아서며 몸부림쳤지만 모두에게 무시당했다.
“싫으면 가시든가.”
은찬은 퉁명스럽게 말하며 녀석을 지나쳤고 이주한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러자 이리한은 동만을 붙잡고 매달렸다.
“우리 고기 먹으러 가요! 저기 건너편에 맛있는 집 아는데!”
등 뒤에서 들리는 이리한의 투정에 은찬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김동만이 말하길 이리한은 삼시 세끼 고기를 먹었으며 하루에 한 시간 이상씩 늘 산책을 해야 한다고 했다. 이게 별거 아닌 것 같아도 매일 고기를 먹으니 고기에서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동만은 자신을 붙잡은 이리한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애정이 깃든 시선처럼 보였다.
“내가 먹고 싶다고 했거든?”
“뭘요?”
“회! 그니까 먹기 싫으면 너 먼저 가. 난 먹고 갈 테니까!”
이리한은 멀뚱히 서서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김동만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회는 싫은데 김동만은 따라가고 싶은 내적 갈등이 고스란히 얼굴에 묻어났다. 이윽고 결정을 내린 이리한은 가게 안으로 한 발 들어섰다. 결국은 김동만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갈 거면서 저런다.
회는 오랜만이었지만 딱히 좋아하지 않았기에 은찬은 몇 점 먹지도 않았다. 육식 성향이 강한 이주한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이리한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고 콜라만 홀짝였다. 오직 김동만 혼자만 볼이 터질 듯이 회를 밀어 넣으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맛있냐?”
“어, 완전! 나만 이렇게 맛있게 먹어서 미안하네. 너도 좀 먹어. 부장님도 좀 드세요.”
“많이 먹어요.”
이주한은 김동만 쪽으로 접시를 밀었다. 김동만 이 자식. 다들 회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뻔히 알면서 저런다. 그럼에도 굳이 이곳으로 온건 오늘의 주인공은 김동만이었기 때문이다. 젓가락을 내려놓은 은찬은 습관적으로 아이들을 힐끔거리다가 김동만과 이리한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지금껏 애인이 수시로 바뀌었다는 바람둥이 이리한과 이제껏 애인 한번 사귀어 본 적 없는 모솔 김동만. 이 둘의 관계는 매번 볼 때마다 신기했다. 연애 경험 많은 이리한은 장소 불문하고 늘 김동만을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지금도 그랬다. 바로 옆에 앉아 있는데도 턱을 괴고 김동만을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도 좀 생각해 줬으면 바람이다.
“이 녀석들 이거 안 먹네. 편식이 심하네.”
“형 닮아서 그래. 고기 좋아하잖아.”
혹시나 해서 회를 한 점씩 줘 봤지만 두 녀석은 냄새를 맡기만 할 뿐 먹지는 않았다. 말캉한 촉감에 이리저리 가지고 놀기 바빴다.
“너는 나쁜 점만 나 닮았다고 하더라.”
조용히 있던 이주한이 끼어들어 툴툴거렸다.
“쟤들 귀하고 꼬리 봐요. 형 쪽을 더 닮았잖아.”
“반은 네 피야.”
“어쨌든. 형을 더 닮은 건 사실이니까. 좋은 점은 날 닮았고. 나쁜 점은 형 닮은 거고.”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펼치는 은찬의 주장에 주한은 반박하지 않았다. 그저 가볍게 웃으며 은찬의 잔에 콜라를 채웠다. 묵묵히 그들을 지켜보던 김동만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냥 셋째 낳아 버려. 너 닮은 고양이로다가.”
“미쳤냐!”
“안 돼!”
동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은찬과 주한은 버럭 소리쳤다. 애들이 예쁘기는 하지만 더는 낳을 생각은 없었다. 더군다나 낳고 싶다고 낳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너는 회 잘 먹다가 왜 지랄이야!”
“그냥. 유한이 하고 요한이도 귀엽긴 한데 너 닮은 딸이면 더 귀여울 것 같기도 하고 해서. 회장님은 축구단은 안 되더라도 다섯은 바라시는 눈치던데?”
동만은 회를 오물오물거리며 심드렁하게 툭 말을 던졌다. 그렇지 않아도 그게 문제였다. 은찬은 콜라를 벌컥벌컥 마셨다. 식도가 따끔거리는 느낌에 자연스럽게 콧잔등이 일그러졌다.
“내가 전에도 말했지만, 내가 낳고 싶다고 해서 막 낳아지는 게 아니라니까? 그렇게 낳고 싶으면 네가 낳든가.”
“난 수인이 아니라 인간 남자라서 안 되네요.”
김동만은 얄밉게 웃으며 회를 초장에 듬뿍 찍어 입 안에 넣었다. 그때였다. 뜬금없이 우욱 소리와 함께 이리한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잰 또 왜 저래? 모두의 시선이 잠시 잠잠하던 이리한 쪽으로 향했다. 그사이에도 이리한은 토하는 시늉을 거듭했다.
“왜? 속 안 좋아?”
깜짝 놀란 김동만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이리한은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야, 개. 아프면 병원 가 봐.”
은찬의 충고에도 이리한은 미소만 지을 뿐이다. 미친 건가? 제대로 대답하지 않고 소리 없이 웃기만 하는 이리한의 태도는 모두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잠시 묘한 정적이 흘렀다. 마치 짠 것처럼 모두 입을 축이고 있을 때 이리한은 굳게 다문 입을 열었다.
“나 애 가졌나 봐.”
이리한의 개 소리에 모두 터졌다. 풉. 김동만은 마시던 중 뿜었고 유은찬과 이주한은 동시에 사레가 들려 기침을 해 댔다.
“야!”
“너 미쳤어?”
순간 얼굴이 터질 듯이 빨개진 김동만은 이리한을 다그쳤다. 맞다. 은찬의 눈에도 미친개처럼 보였다. 모두의 타박에도 이리한은 꿋꿋이 임신을 주장했다. 양 볼을 손으로 감싼 채 수줍게 속삭였다.
“저 고양이도 했는데 나도 될 수 있잖아. 나 방금 속이 미식거리고 토할 것 같았거든. 얼마 전에 동만 씨 정액 많이 먹었는데. 그때 임신된 게 분명해.”
멍하니 듣고 있던 은찬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웃기기는 한데 울 것 같은 김동만을 보고 있노라니 안쓰러웠다.
“동만 씨, 우리 애 이름은 뭐로 지을까요?”
혼자 김칫국을 사발로 마시며 좋아하는 이리한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던 김동만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부장님, 은찬아. 애들 귀 막으세요.”
두 사람이 손으로 아이들 귀를 막자마자 동만의 입에서 시원한 욕설이 쏟아졌다. 욕을 아주 정성스럽게 쏟아 낸 동만은 한참 뒤에야 개운한 표정으로 나머지 회를 먹기 시작했다. 이리한은 축 처진 어깨로 고개를 떨군 채 훌쩍였다.
“미안. 가끔 저래. 이상한 소리 잘하거든.”
동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넘기려 했지만 어림없다. 은찬은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너 혹시 동정 땠어?”
“…….”
“아! 그거 아직 안…….”
은찬의 물음에 동만은 침묵했지만 이리한이 뭐라 말하려다가 제지당했다. 동만의 ‘쓰읍!’ 한 방에 이리한은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너는 그게 왜 궁금해!”
“혹시 아냐? 잘하면. 진짜 개가 임신했을지도 모르고.”
절대 그럴 일은 없을 테지만 김동만을 놀리기 위해 던진 말이었다. 역시나 동만은 발끈했다.
“애한테 이상한 기대 품게 하지 마!”
결국, 오늘은 그 주제로 옥신각신하다가 헤어졌다. 마지막 헤어질 때까지 은찬은 이리한에게 할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을 보냈고 동만은 정색했다. 물론 이리한은 믿는 눈치였다. 역시 개를 골리는 건 재미있다니까.
***
“으앙!”
“으아아아앙!”
주한은 우렁찬 아기 울음소리에 잠에서 깼다. 반쯤 눈을 뜬 그는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찾아 시간부터 확인했다. 오전 11시였다.
오늘은 토요일. 주말이니 만큼 느긋하게 늦잠을 자고 싶었지만,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소리 때문에 잠이 확 달아났다.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억지로 일어나 앉은 주한은 제 곁에서 몸을 웅크리고 자는 은찬을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새벽까지 괴롭힌 탓에 붉은 흔적이 몸 여기저기에 남아 있었다. 고양이 귀와 꼬리를 드러낸 채 자는 유은찬은 언제 봐도 사랑스러웠다.
“뭘 그렇게 봐요.”
“깼어?”
자는 줄 알았던 은찬은 미동도 없이 입을 열었다. 주한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은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가 뒤로 젖혀진 고양이 귀를 만지작거렸다.
“쟤들은 누구 닮아서 목청이 저렇게 좋은지 모르겠다니까.”
“너 아닐까?”
주한의 소심한 반격에 은찬은 살짝 실눈을 뜨며 노려보았다.
“나 어렸을 때 엄청 순했다고 울 엄마가 그랬거든요?”
“나도 아닌데? 나도 순둥이였다고.”
“형, 요한이 유한이 때 고삐 풀린 망아지 같았다고 하던데요?”
“누가 그래?”
생각지도 못한 은찬의 반격에 주한은 사뭇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 시절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지만 그렇다고 고삐 풀린 망아지 정도는 아니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은찬은 픽 웃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
“김 실장님이요. 돌아서면 사라져서 발에 바퀴 달린 줄 알았다던데. 저 녀석들이 아빠를 닮지 누굴 닮았겠어요.”
주한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봐온 김 실장이 그렇게 말했다니 할 말이 없었다. 진짜 어디까지 말하고 다닌 거야. 처음에는 은찬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김 실장이었지만 이제는 둘이 쿵짝이 너무 잘 맞았다. 그래서 이제 조금 무섭기도 했다. 주한에 관해 모르는 것 없이 다 알고 있는 김 실장이 다 불어 버릴까 봐.
“안 일어날 거야?”
여전히 문 너머 녀석들의 애타는 울음소리가 들렸지만 은찬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잠을 잘 기세였다.
“누가 주말이라고 계속 괴롭힌 탓에 잠이 부족하거든요?”
“싫지는 않았잖아.”
주한은 퉁퉁 부은 젖꼭지를 손끝으로 툭 튕겼고 은찬은 피식 웃으며 살짝 몸을 틀었다. 커튼 너머 햇살이 은찬의 몸 위로 쏟아졌다. 하얀 피부에 붉은 멍 자국. 가늘고 윤기가 흐르는 검정 꼬리가 시선을 확 끌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다시 달려들고 싶었지만 두 아기 맹수가 이제는 문을 긁기 시작했다.
영악한 놈들. 일어났으면 얼른 자신들을 봐 달라는 아우성이다.
“하아…… 정말. 아빠는 힘들어.”
“딱 지금 모닝 섹스 할 타이밍인데.”
“너 진짜…… 일부러 이러는 거지?”
팬티 한 장 걸친 채 무방비한 모습으로 자신을 유혹하는 유은찬이 야속해 보였다. 주한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마지못해 몸을 움직였다.
“미리 경고하는데 너 오늘 밤에 잠은 다 잤어. 내가 안 재울 거니까.”
“애들 방 가서 자면 되지.”
“내가 그렇게 놔둘 거 같아? 납치해 올 거야.”
“회장님 몇 시에 오기로 했죠?”
“한 시쯤?”
“그럼 그 전에 깨워 줘요.”
“밥은?”
“그건 그때 생각하고요. 애들 저러다가 문구멍 내겠다. 얼른 나가요. 나 자요.”
엎드린 은찬은 주한이 귀찮다는 듯 허공에 손을 휙휙 저었다. 괜히 심술 난 주한은 은찬의 엉덩이를 찰싹 내리친 뒤 침대를 벗어났다. 대충 옷을 걸치고 문을 열자마자 문 앞에 딱 붙어 있는 두 아기 맹수와 맞닥뜨렸다.
눈을 반짝이며 재빨리 방 안으로 기어가려는 녀석들을 양팔 사이에 끼운 주한은 거실 소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좋은 아침이에요. 아주머니.”
“잘 주무셨어요? 작은 도련님.”
주한의 팔에 끼워진 두 녀석은 도망치기 위해 허공에 팔과 발을 버둥거렸다. 그러다 안 되겠는지 뾰로통한 얼굴로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것이 주한에 대한 불만이라는 것을 느낌적으로 알 수 있었다. 늘상 있는 일이었지만 녀석들의 엄마에 대한 집착은 대단했다.
“이 녀석들 아침은 잘 먹던가요?”
“잘 먹고 잘 놀다가 엄마 일어날 시간 되니까 저러네요. 애들이 영특해요.”
영특한 게 아니라 영악한 거다. 주한은 작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두 녀석을 번갈아 보며 한숨을 터트렸다. 이대로 풀어 주면 또 문으로 기어갈 게 뻔했다. 녀석들의 관심을 돌릴 만한 게 필요했다.
이 방법만은 쓰고 싶지 않았지만 별수 없었다. 주한은 서랍에서 둥근 털실 뭉치를 꺼냈다. 아무래도 고양이 수인의 피가 섞여서 그런지 아이들은 이런 사소한 장난감에도 반응을 보였다.
“엄마 지금 자야 하니까. 이거 굴리고 놀고 있어.”
조심스럽게 바닥에 털 뭉치를 굴리자 두 녀석은 그것을 쫓아 기어갔다. 이리저리 굴러가는 털 뭉치를 쫓아가는 아이들을 구경하던 주한의 입꼬리는 자연스럽게 올라가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육아 전쟁을 치르고 있었는데 이제야 조금 살 만해졌다.
오랜만에 느긋하게 섹스도 했고 오후에는 할아버지께 아이들을 맡기고 데이트도 갈 예정이었다. 데이트라……. 멍하게 창밖을 바라보며 주한은 저도 모르게 픽 웃음이 터졌다. 그러고 보니 유은찬과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해 본 기억이 없다.
선 결혼 후 연애라는 게 이런 건가 싶다. 들뜨기 시작한 주한이 기분을 숨기지 못하고 있자 커피 한잔을 들고 온 아주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작은 도련님이 행복해 보여서 저도 기분이 좋네요.”
“그렇게 보여요?”
“네. 너무너무 행복해 보이세요. 저도 요즘 저 녀석들 보는 재미로 오는걸요?”
아주머니의 시선은 거실 끝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털 뭉치를 굴리고 있는 두 녀석에게 고정됐다. 주한의 시선도 그곳으로 향했다. 오래전부터 본가 집안일을 해 주신 분이다 보니 주한에게는 또 다른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작은 도련님이 그렇게 회장님 속을 썩이더니 이렇게 일찍 가정을 꾸릴 줄은 아무도 몰랐을 걸요?”
“앗! 뜨거!”
커피를 마시려다가 아주머니의 이어진 말에 주한은 혀를 데였다. 그 모습에 아주머니는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주방으로 몸을 돌렸다.
“은찬이 있을 때는 그런 말 하시면 안 돼요! 아셨죠?”
“저도 그런 눈치는 있어요.”
이래서 아는 사람이 더 무서운 법이다. 어째 사방이 적인 느낌이랄까. 물론 은찬은 주한의 과거에 크게 신경 쓰지 않겠지만 그래서 솔직히 더 열받았다. 주한은 은찬의 과거가 신경 쓰여 미칠 것 같은데 뭔가 불공평했다.
미간을 찡그린 주한은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과거가 어쨌든 유은찬은 이제 자신의 것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 현실이었다. 표범에게 잡힌 고양이였다.
오후 2시. 할아버지와 김 실장에게 아이들을 떠넘기고 유은찬과 데이트에 나선지 한 시간째. 여러모로 공을 들인 데이트건만 어째 유은찬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이상하다. 요즘 SNS에서 핫한 치즈케이크 집이라고 했는데.
주한은 맞은편에 앉아 하품을 늘어지게 하는 은찬을 물끄러미 보았다.
“별로야?”
“뭐가요?”
“여기.”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툭 말을 던졌지만, 주한은 속이 타들어 갔다. 수많은 데이트 경험이 있었지만 유은찬 같은 타입은 또 처음이다. 뭘 해 줘도 그럴듯한 반응이 없다.
“나쁘지 않은데요?”
“이제 뭐 할까. 뭐 하고 싶어?”
“형 하고 싶은 거 해요.”
은찬은 또 하품을 하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저 핸드폰 압수를 하든지 해야지. 어째 주한과 마주하는 시간보다 핸드폰에 집중하는 시간이 더 긴 것 같았다. 오랜만에 아이들에게서 해방된 시간. 그동안 여유가 없어 못 했던 것들을 하며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건만 아파트를 나서는 순간부터 유은찬은 춥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겨울이니까 추운 건 당연한데 문제는 유은찬이 추위를 극도로 싫어한다는 것이다. 덕분에 손잡고 거리를 활보하는 데이트는 시도도 못 해 보고 탈락. 영화를 보자고 했더니 마음에 드는 영화가 없다고 패스. 마지막으로 드라이브를 가자는 제의까지 던졌지만 귀찮다는 말에 주한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래 놓고 하고 싶은 거 하라는 저 말의 저의가 뭘까. 망할 고양이가 사람 가지고 노는 건가 싶었다.
“너 하고 싶은 거 하자. 뭐 할까? 쇼핑갈까? 너 옷도 좀 사고.”
“귀찮은데…….”
은찬은 진심으로 귀찮은 표정과 말투로 말했다. 집에서도 그러더니 나와서도 커피숍 소파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럼에도 주한이 참고 있는 이유는 외출복을 입은 유은찬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였다.
하얀 피부와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 붉은색 털 스웨터를 입은 유은찬은 족히 제 나이보다 다섯 살은 어려 보였다. 주한도 어디 가서 뒤지지 않은 외모였지만 사람들이 유은찬을 힐끔거릴 때마다 왠지 모를 뿌듯함이 밀려왔다.
이 녀석은 내 거라고. 주인이 있는 고양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목걸이라도 걸어 두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잘난 이주한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팔불출이 따로 없는 제 모습이 어이가 없지만 그렇다고 싫지도 않았다. 좋은 걸 어떡해.
“먹고 싶은 거 없어? 이 근처에 맛집 많은데. 저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수제 햄버거 맛있게 하는 집 있는데.”
“아, 거기. 나 먹어 봤는데 내 입맛에는 영…….”
“그래? 그럼 주꾸미 먹을래? 저쪽 골목 끝에 주꾸미 잘하는 집 있는데.”
“거기도 가 봤는데 오늘은 별로 주꾸미 안 당기는데.”
주한이 창밖으로 손가락질을 하며 다정하게 말할 때마다 은찬은 토를 달았다.
“그럼 저기 핸드폰 가게 뒤쪽에 있는 닭갈비는 안 먹어 봤지?”
“그거 없어졌어요. 봄에 장사가 안 돼서 문 닫았는데?”
구구절절 이어지는 은찬의 태클에 주한은 눈을 가늘게 뜨고 녀석을 빤히 쳐다봤다. 이 골목 일대가 수인들이 자주 찾는 곳이긴 해도 너무 샅샅이 알고 있는 게 수상했다.
“여기서 살았어?”
“그 정도는 아니고, 자주 왔죠.”
“누구랑?”
“친구요.”
“친구. 친구 누구?”
“누구라고 말하면 알아요?”
“김동만 씨?”
“내 친구가 동만이뿐인 줄 알아요? 나도 친구 많거든요?”
“그러니까 말해 봐. 친구 누구? 중학교 친구? 고등학교 친구? 아님 대학교 친구?”
처음과 달리 주한의 표정과 말투가 싸늘했다. 찬 바람 부는 주한의 행동에 은찬은 머쓱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분명 뭔가가 있다는 판단이 들었지만, 주한은 더 이상 물고 늘어질 수 없었다. 자신이 너무 치졸해 보였기 때문이다.
“형도 여기 자주 왔나 봐요? 맛집은 죄다 다 아네. 누가 알려 줬어요?”
생각지도 못한 유은찬의 반격에 주한은 잠시 멍해졌다. 어쩌지? 너무 많아서 누구 한 사람 딱 꼬집어서 말하기가 곤란했다. 이럴 때 제일 써먹기 쉬운 이름이 하나 있긴 있었다.
“이리한.”
“아, 그렇구나.”
불쑥 튀어나온 그 이름에 은찬은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겼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어째서? 이리한과 주한의 사이를 알고 있으면 질투라도 해야 정상 아닌가? 반대로 자신은 지금 질투가 끓어올라 미칠 것 같은데 유은찬이 너무 태연해서 짜증이 날 지경이다.
할 수만 있다면 유은찬과 사귄 상대를 모조리 찾아내서 두 사람이 결혼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떠들고 싶을 정도였다. 주한은 소파에 편안히 앉아 거리를 구경하는 은찬을 나지막이 불렀다.
“유은찬.”
“네?”
“질투 않나?”
“뭐가요?”
“나하고 이리한하고 이 주변에 자주 왔었다는 거.”
“뭐…….”
그럼 그렇지 기분이 좋을 리는 없겠지. 뒤늦게 은찬의 미간에 작은 주름이 생겼다.
“미안. 내가 생각이 짧았어. 네가 기분 나쁘면 우리 다른 데로 옮길까?”
이대로 장소를 옮겨서 유은찬이 좋아하는 곱창집에서 곱창이나 먹은 다음에 분위기 있는 곳에서 술을 한잔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은찬은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소파에 반쯤 들어 누웠다.
“괜찮아요. 나도 여기 자주 왔으니까. 이 카페 단골이었거든요. 특히 이 자리.”
“…….”
우연히 들어온 카페였다. 그런데 유은찬의 단골 카페란다. 그러니까 주한이 앉은 자리에 다른 놈이 앉아 있었다는 말이다. 점점 더 기분이 뭐 같아진 주한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혼자?”
“카페를 혼자서 왜 와요.”
“……누구랑?”
지금 가슴 속 깊이 질투심이라는 감정이 용솟음쳤지만 주한은 침착하기 위해 최대한 애를 썼다.
“친구요, 친구. 여기서 사람 지나가는 거 보면 재미있거든요.”
불행히도 주한의 기분이 어떤지 은찬은 모르는 것 같았다. 안 되겠다. 이성을 잃기 전에 얼른 다른 곳으로 가야지. 다시는 이곳에 오나 봐라. 주한이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였다. 웬 낯선 남자가 그들이 앉아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야, 유은찬.”
낯선 남자는 반가운 목소리로 은찬의 이름을 불렀고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은찬도 반가운 기색을 보였다.
“어? 오랜만이다? 살아 있었네.”
“너 요새 연락 안 되더라. 애인 생겼어?”
남자의 물음에 은찬은 주한의 눈치를 보았다. 혹시나 거짓말을 할까 봐 주한은 두 눈을 부릅뜨고 은찬을 뚫어지게 보았다.
“……어.”
마지못해 나온 대답에 주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낯선 남자를 향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나 남자는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진짜? 얼마나 됐는데? 이번에는 오래 가겠냐? 헤어지면 연락해. 술 한잔하자.”
“이번에는 네가 쏴.”
술 한잔. 그것은 많은 의미가 들어있는 말이었다. 남자를 바라보던 주한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어디서 개수작이야.
“헤어질 일 없으니까. 앞으로 쭉 연락하지 마세요.”
“형!”
“왜? 내 말이 틀렸어?”
화들짝 놀란 은찬이 뭐라 따지기 전에 주한이 먼저 선수 쳤다. 그러자 그 남자도 따지듯 물었다.
“누구세요? 아, 은찬이 애인 분? 어디서 많이 본 얼굴 같은데…….”
남편이다. 이 새끼야. 내가 좀 유명하긴 하지. 주한은 비릿하게 웃었다. 마음 같아서는 사실대로 말하고 싶었지만,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은 사절이었다. 주한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경고를 던졌다.
“그럼 뭐로 보입니까? 애인 앞에 있는 거 뻔히 알면서 이렇게 개수작 거는 이유는 뭔데? 이 자식 평생 내가 데리고 살 거니까. 앞으로 유은찬한테 수작 걸다가 걸리면 죽을 줄 알아.”
“뭐야, 이 자식!”
“이주한. 이 자식 이름이 이주한이고 불만 있으면 나중에 나 찾아와. 수인 중에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름이니까.”
주한의 살벌한 기세에 남자는 씩씩거리며 커피숍을 박차고 나갔다. 덕분에 사람들의 시선이 잠시 쏟아졌지만, 그뿐이었다. 은찬은 기가 찬다는 듯 주한을 바라보았다.
“뭐! 왜!”
“왜 그래요? 쟤 그냥 내 친군데?”
따지는 은찬의 태도에 주한도 목에 핏대를 세우고 화를 냈다.
“친구! 무슨 친구! 섹파 친구?”
“다 형 같은 줄 알아요? 진짜 그냥 친구요, 친구! 진짜 한동안 연락 안 돼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
은찬은 버럭 했다. 두 사람 사이를 그렇고 그런 사이로 오해한 주한은 말없이 눈만 깜박였고 은찬은 머리를 신경질 적으로 벅벅 긁었다. 큰일 났다. 고양이가 화났다.
“내가 진짜 쪽팔려서……! 미쳤나 봐! 왜 저래?”
“…….”
“좀 전까지 기분 좋았는데. 에이씨!”
벌떡 일어난 은찬은 커피숍을 박차고 나갔다. 그렇구나. 그게 기분 좋은 표정이었구나. 도무지 고양이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당황한 주한은 서둘러 은찬의 뒤를 쫓았다.
“아, 춥다.”
커피숍 문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있는 은찬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흩날렸다. 뭐라고 말해야 기분이 풀릴까. 바로 뒤에서 조용히 눈치만 보고 있을 때였다. 은찬은 별안간 주머니에서 꺼낸 손을 주한에게 내밀었다.
“뭐야, 왜 보고만 있어요.”
“어?”
은찬의 핀잔에 멍하니 손을 보고 있던 주한은 그제야 의미를 이해했다. 조용히 손을 꼭 잡자 은찬의 툴툴거림이 이어졌다.
“연애 많이 해 본 거 맞아요? 왜 이렇게 눈치가 없어. 손을 내밀면 알아서 잡아야지. 그걸 말해 줘야 알아요?”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본격적으로 사귀는 건…….”
하늘에 맹세코 본격적으로 누군가를 사귀고 싶다고 생각한 사람은 유은찬이 처음이었다. 물론 몇 번을 말해도 유은찬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 지금도 그랬다. 은찬은 주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단칼에 잘랐다. 그리고 얄밉게 빈정거렸다.
“본격적으로 사귄 건 건 나라고 칩시다. 근데 저기도 그렇고 저기도 그렇고. 전부 이리한 그 개자식하고 다 다녔다면서요. 맛있는 거 먹고 여기저기 돌아다닌 거면 데이트도 하고. 할 건 다 하고 다녔네. 그게 사귀는 거지. 뭐예요?”
“아니지! 난 그저 상대방이 밥 먹자고 해서 밥 먹은 거고, 커피 한잔 하자고 해서 커피 한잔 한 거고!”
“아, 본인 의사와는 상관없이 끌려다닌 거란 말이죠?”
“당연하지. 난 내가 먼저 만나자고 안 해.”
“어쨌든 마지막엔 호텔로 갔을 거잖아요. 맞죠?”
“…….”
은찬의 일침에 주한은 굳은 표정으로 녀석을 쓱 쳐다봤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주한이 생각한 데이트 분위기는 이게 아닌데 자꾸 이상한 쪽으로 흘러갔다. 날을 잘못 잡은 건가? 조금 더 따뜻한 날에 나왔어야 했나. 말문이 막혀 버린 주한은 조용히 숨을 삼켰다. 잿빛 구름으로 가득 한 하늘이 꼭 제 마음 같았다.
“……너 혹시 질투해?”
혹시나 하고 던져본 말에 은찬은 싱겁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그렇지. 유은찬이 질투 따위 할 리가 없다. 오히려 주한이 역으로 공격당했다.
“질투해 줘요?”
대놓고 이런 질문까지 하는 게 자존심 상했지만, 주한은 거부하지 않았다.
“어.”
“아, 해 줘요?”
두 번 묻지 말아 줄래? 주한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을 회피하려 했지만 유은찬은 끈질겼다.
“해 줘요, 말아요.”
고양이는 잔인한 동물이 확실했다. 분명 대답을 들었으면서 이런다. 주한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대답했다.
“어, 해 줘. 질투 좀 해 줬으면 하는데.”
“왜요?”
이제는 이유를 묻는다. 당황한 주한은 우뚝 멈춰 섰다. 사랑을 구걸하는 것도 모자라서 질투도 구걸해야 하는 처지라니. 순간 데이트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집에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 눈 온다.”
때마침 하늘에서 하얀 눈이 흩날리기 시작하자 은찬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형! 눈 와요!”
“눈 처음 봐?”
“처음은 아니지만……. 말투가 왜 그래요? 나한테 화났어요?”
“아니, 안 났는데?”
주한은 싸늘한 표정으로 툭 던졌다. 유지하지만 지금 은찬의 말에 맞장구쳐 줄 기분이 아니었다. 잠시 둘 사이에 묘한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을 그대로 유지한 채 묵묵히 걷기 시작했다. 사실대로 삐졌다고 말하는 것도 이상했고 이대로 데이트를 하는 건 더 이상 의미가 없어 보였다. 주한은 곧장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질투 그거 해서 뭐 해요.”
불쑥 튀어나온 은찬의 말에 콧방귀가 터졌다. 이봐 이렇다니까. 질투해서 뭐 하냐니. 유은찬은 이주한을 그렇게 많이 사랑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짝사랑이야, 뭐야? 그럼 왜 결혼한 건데? 애 때문에? 소리 없이 분노 지수가 점점 높아지고 있을 때였다.
“어차피 지금 형은 나하고 결혼했잖아요. 그럼 된 거지.”
“어?”
은찬은 흩날리기 시작하는 눈을 구경하며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렸다.
“옛날에 누구하고 사귀었다. 뭐 어쨌다 하는 거 의미 있어요? 그렇게 따지면 이리한. 그 개자식하고 동만이 사귄다고 했을 때, 나 동만이 하고 의절했어야 해요. 그런데 안 했잖아요.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따지지 말자고요. 형이 누구를 얼마나 사귀었는지 따지면 나도 머리 아프고 형도 신경 쓰일 거고. 결혼했으니 이제 다른데 한눈 안 팔고 서로만 보면 되는 거 아니에요?”
맞다. 그러면 되는 거다. 잠시 질투에 눈이 멀었던 주한은 자신의 어리석음에 허탈한 웃음이 터졌다. 그래도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나 사랑해?”
유은찬은 그 물음에 콧잔등을 찡그리며 짧게 혀를 찼다.
“애정 결핍이에요? 또 물어. 그럼 내가 왜 귀찮은 결혼까지 했을 거 같아요?”
이걸로는 충분한 대답이 되지 않았다. 주한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떼쓰는 애처럼 졸랐다.
“확실하게 말해 줘.”
“아……. 여기서 그러고 싶어요?”
“어, 그러고 싶어. 넌 표현에 너무 인색하니까.”
함박눈이 흩날리고 있는 거리. 주말을 맞아 사람들로 북적이는 그곳에서 은찬은 난감한 기색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이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사랑해요. 됐어요?”
아직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묻고 싶은 게 생겼다.
“진짜 질투 안 했어?”
“…….”
“진짜 안 했어? 요만큼도?”
“와……. 끈질기다.”
“요만큼도? 안 했어, 진짜?”
은찬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마주 잡은 손은 풀지 않았다.
“했다 쳐요.”
“쳐요가 아니라 했구나?”
“네. 그랬다 쳐요.”
이런 식으로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며 데이트를 이어 갔다. 조금 전까지 별 감흥 없이 보이던 눈이 너무 예쁘게 보이기 시작했다. 종잡을 수 없는 게 고양이라지만 이런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주한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유은찬.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티가 나지만 손을 놓지 않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이래서 고양이를 요물이라 부르는가 보다.
“이제 어디 갈까?”
“형 가고 싶은 데로 가요.”
이봐, 추위도 잘 타면서 이대로 집에 가자는 말은 절대 안 한다. 주한은 이런 유은찬이 너무 사랑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나 말고 앞 좀 보고 걷죠?”
은찬은 툴툴거리면서 주한의 팔에 몸을 밀착했다. 주한의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오랫동안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