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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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 몰랐다. 계속 일을 다니겠다며 은찬이 고집을 부리자 주한과 회장님은 합심하여 반강제적으로 휴가를 쓰도록 강요했다.

예정보다 이른 휴가에 계속 집에만 있는 것도 지겨워지던 찰나, 예고도 없이 찾아온 김 실장은 은찬을 회사로 데려왔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온 은찬에게 그는 제2 비서실이라고 적힌 그 곳을 소개했다. 복귀를 해도 이곳으로 발령이 날 것이며 아이들과 함께 편안하게 일을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갖춰진 장소였다.

그것만이 끝이 아니었다. 혼자서 여기를 쓰는 거냐는 은찬의 물음에 김 실장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원리 원칙을 지키시는 회장님께서 이번만큼은 유은찬 씨를 위해 특별히 신경 쓰셨습니다. 유은찬 씨는 아무것도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특별히 신경 썼다는 것이 김동만의 파격 승진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제2 비서실의 사원은 김동만과 유은찬 단 두 명뿐. 이곳은 유은찬을 위한 방. 고로 김동만은 유은찬을 위한 존재라는 것을 녀석은 그날따라 빨리도 눈치챘다.

사실 다들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렇게까지 밀어붙여도 김동만은 이 회사를 그만두지 못할 것이라는 걸. 그로부터 이틀이나 지났건만 김동만의 얼굴에는 생기가 없었다. 책상도 없는 사무실에 멍하니 앉은 녀석은 오후에 잠시 들린 은찬을 보자마자 쌩하니 외면했다.

어느덧 여름의 끝자락. 이제 숨쉬기도 벅찰 만큼 커진 배는 옷으로 가려도 임신한 티가 제법 났다. 물론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복부 비만이 심한 남자로 보일 테지만.

“김동만.”

“…….”

“동만아, 김동만!”

“아 왜! 한 번만 불러!”

“여기 혼자 있으니까 좋지?”

“…….”

소파에 거의 눕다시피 한 은찬은 싸늘하게 자신을 노려보는 김동만의 시선을 가볍게 무시했다.

“야, 말이 나와서 말이지. 나 같은 친구를 뒀으니까. 이런 곳에서 놀면서 월급 받을 수 있는 거잖아.”

“……죽을래?”

“좋으면서 괜히 저런다니까. 야! 나 육포 하나만 줘. 슬슬 배고프네. 있지? 그거. 나 좋아하는 거.”

은찬의 당당한 요구에 동만은 인상을 팍 구기며 신경질을 냈다.

“너 휴가 냈으면서 여기까지 와서 이러고 싶냐?”

“어.”

“도대체 왜!”

동만의 절규에 은찬은 씨익 웃었다. 딱히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심심하고 무료해서. 이주한도 여기에 있고 김동만도 여기에 있고. 자신과 친한 사람이 다 있는 곳에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랄까.

거기다 회장님이 마련해 준 이곳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시야가 탁 트인 창가도 마음에 들고 대형 공기 청정기가 두 대나 돌고 있어 공기도 쾌적했다. 바닥은 마룻바닥에 소파와 벽걸이 티브이도 설치된 이곳은 누가 봐도 사무실이 아니라 원룸 같았다. 그래서 지금 은찬의 패션도 집에서 입던 그대로 맨발에 추리닝이었다.

“그냥, 놀러 오고 싶어서.”

“……너 지금 나 엿 먹이려고 일부러 이러는 거지?”

“설마.”

“아닌데, 그런 것 같은데. 너, 동기가 불순해. 아주아주 불순하다고!”

“소리치지 마. 이제 우리 애들 다 들어.”

흥분하기 시작한 동만을 향해 은찬은 일부러 핀잔을 던졌다. 사실 동만이 소리 지르든 말든 상관없었다. 녀석들은 이주한의 사랑을 받아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었다.

“너희 집에 가면 육포보다 더 맛있고 좋은 거 많이 있을 거 아니야! 왜 굳이, 여기 와서 날 귀찮게 하는 건데! 제발 휴가 때 만이라도 나 좀 살려 주면 안 될까?”

“안 되겠는데?”

“…….”

“야, 니가 끓여 주는 라면이 제일 맛있다니까?”

“…….”

“그리고 네가 해 준 밥에 길들여서 그런지 다른 건 영 입에 안 맞아. 육포 없어?”

김동만은 툴툴거리면서도 해 줄 건 다해 주는 녀석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육포를 은찬의 배 위에 던져 놓고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좀 전에 은찬이 먹고 던져 놓은 과자 봉지를 치우고 우유 한 잔을 가져오는 센스까지 보였다.

“이제 오지 마.”

“왜! 너 그 개랑 싸웠어? 오늘따라 더 예민하다?”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은찬은 이리저리 움직이는 동만을 눈을 쫓았다. 물론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소파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않았다.

“그 개가 아니고 이리한! 이름 알면서 자꾸 개, 개 그럴래?”

“오……. 개 편드는데? 그 개가 나보다 더 좋아? 이제 고양이는 별로야?”

“닥치고. 너 여기 있다가 애 낳을까 봐 불안해서 그런다! 어디 돌아다니지 말고 얌전히 집에 있어!”

“괜찮아. 의사도 운동 삼아 다녀도 된다고 했고. 아직 며칠 더 남았어. 아, 좋다. 나 아침마다 회사 출근하는 거 죽을 맛이었거든? 근데 일없는데 회사 오는 건 왜 이렇게 재미있냐?”

“넌 재미있지? 난 죽겠다.”

“그러니까. 그래서 재미있는 거 있지?”

은찬이 씨익 웃자 김동만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애 언제 낳는다고? 너 애 낳으면 보자. 그땐 진짜 내가 가만 안 둔다.”

“우리 형한테 이를 거다.”

“누구는 애인 없는 줄 아냐?”

“오. 김동만! 애인 생겼다 이거지? 그 개가 더 셀까, 우리 형이 더 셀까? 누가 이길까. 내기할래?”

누가 봐도 이주한의 승리라고 확신할 것이다. 자신의 패배를 짐작한 동만은 갑자기 대화 주제를 바꿔 버렸다.

“너 태교 안 하냐? 회장님이 입만 열면 태교 그러신다며! 남들은 안 하던 수학 공부 하거나 영어 공부 한다고 하던데. 너는 이게 뭐냐. 애들이 이주한 부장 머리 안 닮고 너 닮을까 봐 내가 다 겁이 난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인터넷으로 좀 찾아봤거든?”

심오한 대화를 위해 은찬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클래식 들으면 졸려서 미칠 것 같고, 영어는 더더군다나 안 되고. 수학을 다시 하느니 차라리 태교를 포기하고 싶고. 그런데 안 할 수는 없고. 야, 김동만 잘 생각해 봐. 애초에 태교라는 게 머리를 써야 하는 거잖아. 그치?”

“그렇겠지?”

동만의 동조에 은찬은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손에 있는 것을 내밀었다. 그것은 화투 패였다.

“와…….”

김동만의 단조로운 감탄사에 은찬은 뿌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것도 나름 수학적인 원리가 들어간 엄청난 고도의 심리전을 요구하는 거라고 할까? 너 이게 치매 예방에도 좋은 거 알지? 그러니까 태교에는 더 좋겠지? 어떻게 오랜만에 한판 당겨 볼래? 점당 백 원.”

예전에 가끔. 아주 가끔. 정말 할 일 없을 때 몇 번 녀석과 쳐 본 게 다였다. 지겨운 태교를 하느니 자신에게 적합한 태교를 선택하겠다는 타협점을 찾은 게 이거였다. 은찬이 화투 패를 흔들자 잠시 고민하던 동만은 슬그머니 일어나 바닥에 깔 것을 들고 왔다.

“현금은 들고 왔지? 외상없다.”

“당연하지. 전쟁터에 총알 없이 오는 군인이 어디 있냐?”

은찬은 주머니에서 오만 원짜리 두 장을 꺼내 턱 하니 내려놓았다. 시작은 좋았다. 처음에는 은찬이 이기는 쪽이었으나 점점 대세는 김동만 쪽으로 기울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만 원을 잃어버린 은찬은 괜히 속이 탔다.

짝.

“오예! 고도리!”

슬슬 승리의 패가 자신 쪽으로 기울고 있을 때였다. 예고도 없이 급작스럽게 문이 불컥 열렸다. 도어 록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은 손에 꼽았다. 회장님과 이주한. 그리고 김 실장. 애석하게도 문을 열고 들어선 이는 회장님이었다.

말도 없이 회장님이 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둘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잠시 그곳에 묘한 정적이 맴돌았다. 은찬과 동만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회장님의 미간에 작은 주름이 생겼다. 화투를 본 것이다.

딸꾹. 너무 놀란 동만은 딸꾹질을 터트렸지만, 은찬은 오히려 반가웠다.

“회장님! 고스톱 칠 줄 아시죠?”

역시 고스톱은 세 명이 해야 재미있는 법. 그 와중에 슬그머니 동만의 패를 보니 이 자식 흔들기 직전이다. 자신의 패배를 직감한 은찬은 치사하지만, 이번 판을 엎어야 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심상치 않은 목소리로 묻는 회장님의 물음에 은찬이 씨익 웃었다.

“화투요. 화투 모르세요?”

은찬이 아무렇지 않게 말하자 얼굴이 파랗게 질린 동만은 기겁했다.

“야! 너 미쳤어? 이게 자랑스럽게 떠들만한 짓이냐? 얼른 죄송하다고 해!”

“왜에. 이게 뭐 어때서! 우리가 죄 지었냐? 회장님, 이거 이상한 거 아니에요. 도박하고 놀이하고는 한 끗 차이거든요? 불순한 동기를 가지고 하면 도박이지만 지금 우리가 하는 건 놀이 겸 태교거든요, 태교!”

화투패를 들고 너무도 당당하게 말하는 은찬이 부끄러웠던 걸까. 동만은 아예 외면해 버렸다. 그리고 혼잣말로 미친놈이라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태교. 그게?”

“그럼요! 이게요, 집중력도 높이고 수학 공부도 되고. 일석이조라니까요? 화투는 도박이다! 그런 선입견은 버리셔야 한다니까요? 혹시 한 번도 해 본 적 없으세요? 이리 오세요. 오늘 가르쳐 드릴게요. 이거 엄청 쉬워요. 장담하는데 한번 배우면 써먹을 때 엄청 많을 걸요?”

은찬이 허공에 손을 휘휘 저으며 회장을 유인하는 모습에 동만은 소리 없이 다가와 복화술로 속삭였다.

“미쳤냐! 회장님께 뭐 하는 짓이야!”

“왜? 둘보다는 셋이 하는 게 더 재미있잖아.”

“하나도 재미없거든!”

“김동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네. 회장님 지갑 안에 있는 돈이 곧 우리 거가 될 거라는 소리 안 들려?”

“그렇다고 해도 이건 아니지! 너한테는 회장님이기 전에 시할아버지야, 이 미친놈아! 시할아버지하고 고스톱 치는 손자며느리가 어디 있냐?”

“시할아버지하고는 고스톱 치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냐? 이걸로 친목 도모 하면 되는 거지.”

“미친…….”

“회장님, 뭐 하세요! 얼른! 여기 앉으셔야죠!”

멀뚱히 서 있던 회장님이 반강제적으로 은찬의 옆자리에 앉았다. 이 상황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지만 상관없었다. 은찬은 그의 손에 화투 패를 쥐여 주며 서둘러 규칙 설명에 들어갔다.

“이게 똥이고요. 이게 싼 거고 이게 흔드는 거. 이게 오광.”

빠른 설명을 마치고 바로 실전으로 들어갔다. 봐주는 것 없이 살벌하게 전쟁을 치른 결과 첫 판부터 회장님의 지갑이 열렸다. 동만에게 오만 원 짜리를 만 원짜리로 교환한 회장님은 다음 판부터 서서히 빠져들었다. 그렇게 세 사람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두했다.

“짠! 광입니다, 광!”

광이라는 한자가 적힌 패를 이마 정 중앙에 턱 붙인 은찬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이미 고도리까지 하고 포고까지 한 상황에서 게임의 종지부를 찍을 광이었다. 광박, 피박, 거기다 흔들기까지 한 탓에 이번 판으로 김동만은 가지고 있는 돈을 전부 잃었다. 회장님도 마찬가지였다. 꺼내 놓은 돈 오만 원이 거의 다 은찬에게 넘어왔다.

“회장님……. 저 오만 원만 빌려 주시면, 내일 갚아 드릴게요.”

이래서 도박이 무서운 거다. 회장님 앞에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던 김동만이 어느덧 돈까지 빌리고 있었다. 크게 기지개를 켠 은찬은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빨리 판 돌려.”

은찬은 동만의 재촉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허리를 톡톡 쳤다. 아쉽지만 이제 갈 시간이었다. 오늘은 이주한과 데이트를 위해 나온 외출이었다.

“나 가야 해.”

“뭐? 어딜……! 야, 이래 놓고 간다고? 내 돈 다 따먹고?”

그래 봤자 오만 원이다. 무조건 고 하는 버릇 때문에 몇 판 돌리지도 않았는데 판 액수가 커졌다. 반면에 소심한 김동만은 고 한번 못 해 보고 끝이 났고.

“이걸로 우리 형이랑 맛있는 거 사 먹을게. 고맙다.”

“뭐? 야, 안 돼! 어디 가! 다시 앉아!”

“싫어. 이제 허리도 아프고 나 형하고 약속 있어.”

“두 판만! 아니다, 한판만 하고 가! 라면 끓여 줄게!”

녀석의 다급한 애원은 당연하게도 은찬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획 등을 돌리니 김동만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등 뒤에서 날아왔다.

“치사한 놈! 맨날 필요할 때만 나 찾는 놈! 너 진짜 나한테 이러면 안 돼. 내가 널 위해서 얼마나 많은 걸 희생했는데. 너는 그런 희생정신도 없냐!”

희생정신을 운운하는 김동만 때문에 문 앞에서 멈춘 은찬은 어깨너머로 녀석을 힐끔거렸다. 보아하니 또 삐졌다.

“정 하고 싶으면 저기. 회장님이랑 하면 되잖아!”

일순 굳어 버린 동만은 은찬을 향해 눈으로 욕을 퍼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은찬은 동만을 버려두고 그곳을 나왔다. 문이 닫히기 전 무거운 정적 속에서 회장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패 돌리게.”

“……예.”

승부욕이 강한 자와 잃어버린 돈을 메꾸려는 자. 두 사람의 승부가 궁금하긴 하지만 은찬은 데이트가 더 기대됐다. 기다리던 엘리베이터 문이 서서히 열리고 있을 때 그 안에 있는 사람과 눈이 마주친 은찬은 환하게 웃었다. 이주한이다.

“나 보고 싶어서 온 거에요?”

“그럼? 내가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왔겠어? 이리 와.”

이주한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두 팔을 벌렸고 은찬은 그 안으로 쏙 들어갔다. 두 사람 사이에 커다란 배가 장애물처럼 느껴졌지만 불편하지 않았다. 그는 은찬의 이마에 재빨리 입을 맞췄다.

“뭐 했어?”

“태교요.”

“태교?”

“회장님 하고 같이했어요.”

“할아버지도? 뭔데? 재미있었어?”

“치매 예방에도 좋고 태교에도 좋은 거.”

“그런 게 있어?”

돈 많은 사람은 화투 같은 건 안 하나 보다.

“나중에 같이해요. 근데 오늘 어디 가요?”

“회 먹으러.”

“나 회 싫은데…….”

“고등어회. 가게에서 싱싱한 고등어 들어왔다고 연락이 와서. 그래도 싫어?”

고등어회란다. 아침부터 입맛이 없는 은찬을 위한 메뉴일 것이다. 여전히 식욕은 없었지만 성의를 생각해서 조금은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은찬은 이주한과 마주친 시선에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이른 저녁을 먹고 후식으로 아이스크림도 먹고. 그 뒤 한가롭게 한강 산책로를 걸었다. 끝 여름을 즐기는 이들이 북적이는 곳을 당당하게 손을 잡고 거닐었다.

“이러다가 회사 사람이라도 보면 곤란한데.”

맞잡은 손을 흔들며 스리슬쩍 흘린 말에 이주한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사귀는 거 모르는 사람 없거든?”

“그래서요. 안 그래도 나 형 등에 빨대 꽂는 놈으로 찍힌 거 같은데. 낙하산.”

“그럼 좀 어때. 그냥 무시해. 일일이 신경 쓰다가는 끝도 없으니까. 그냥 너는 너만 생각해. 이기적인 고양이잖아.”

“나 안 이기적인데요?”

“그럼?”

“섹시고 요염한 고양이? 그렇게 보이지 않아요?”

“니가?”

실눈을 뜬 이주한은 은찬의 위아래를 노골적으로 훑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장난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괜히 기분이 나빠진 은찬은 발뒤꿈치로 그의 발등을 세게 찍었다. 고통을 호소하며 인상을 쓴 이주한을 버려두고 획 하니 몸을 돌렸다.

“야! 유은찬! 장난이야, 장난!”

“어, 그래! 나도 장난이다!”

은찬은 서둘러 뒤쫓아 오는 이주한을 피해 달아났다. 어쩌다 보니 쫓고 쫓기는 상황이 잠시 이어졌지만 나쁘지 않았다. 웃겼고 재미있었다. 비록 무거운 몸 때문에 오래 걷지 못한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정말 하루가 다르게 배는 무거워졌다. 소화도 잘되지 않았고 걷는 것도 앉는 것도 점점 힘들어졌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임신이 어느덧 은찬의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순간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날 밤, 데이트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은찬은 왠지 아랫배에 미미한 통증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제법 걸었던 탓이라 생각한 은찬은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회도 거의 손대지 않고 어딘지 모르게 이상해 보이는 은찬 때문에 덩달아 주한도 긴장한 기색을 보였다. 그의 품에 파고든 은찬은 그런 그를 다독였다.

“아직 예정일 일주일이나 더 넘게 남았거든요? 뭘 그렇게 걱정해요.”

“혹시 모르니까. 이상하면 당장 말해. 알았지?”

“네.”

쉽게 대답했지만 은찬은 배가 아프다는 것을 숨겼다. 잠시 이러다 말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도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미미한 통증에 잘 자는 그를 깨우기도 뭐했다. 그의 품에서 벗어나 침대 구석에서 몸을 둥글게 말았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엉덩이 구멍으로 뭔가가 흘러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번쩍 눈을 뜬 은찬이 다급하게 이주한을 불렀다.

“형.”

주한은 반사적으로 은찬을 안기 위해 손을 허우적거렸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자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침대 구석에 웅크린 채 울먹이는 은찬을 보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똥구멍에서 물이 나와…….”

“뭐? 언제부터!”

“몰라……. 배가 살살 아팠는데 똥이 마려운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잠깐 잤는데 거기서 뭐가 막…….”

주한은 횡설수설하는 은찬을 보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이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그는 황급히 일어나 분주하게 움직였다.

“김 실장님? 네, 접니다. 이 녀석, 지금 양수 터진 것 같아요! 준비 좀 해 주세요! 네. 부탁드릴게요. 아니요. 구급차 기다릴 시간 없어요. 지금 바로 출발해야 할 것 같아요. 네. 새벽이니까. 10분이면 도착할 것 같아요. 네. 네!”

한 손은 핸드폰을 쥐고 나머지 한 손으로 옷을 걸치며 다시 침실로 돌아온 그는 얌전히 앉아 있는 은찬의 곁으로 다가왔다.

“많이 아파?”

“아니. 그 정도는 아닌데……. 그냥 기분 나쁘게 아픈 정도? 이게 양수가 터진 거예요? 난 또 뭐라고.”

“생각보다 애들이 일찍 나오려는 모양이네.”

“그러게요……. 아직 한참 남았는데. 이제 병원 가면 돼요?”

불안해 미칠 것 같았지만 은찬은 애써 웃었다. 은찬이 웃자 주한의 표정도 한결 편해졌다.

“가자.”

“침대 다 젖어서 어째. 말려서 써야 하나?”

이 와중에 젖은 침대를 걱정하자 주한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걱정하지 말고. 일어나. 일어날 수 있어? 내가 안고 갈까?”

“나 두 발 멀쩡하거든요?”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온 은찬은 드디어 아이가 태어난다는 생각에 기분이 묘했다.

“가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은찬이었지만 주한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졌다. 차를 타고 병원으로 가는 동안 괜찮냐는 질문을 수없이 던졌고 그때마다 은찬의 대답은 똑같았다.

“괜찮다니까요?”

“아프면 참지 말고 말해. 알았지?”

“진짜 괜찮다니까요? 괜히 겁먹었네. 누가 그러던데. 진짜 죽을 만큼 아프다고 해서 솔직히 겁먹었거든요. 근데 이 정도면 뭐……. 가자마자 힘 한번 팍 주고 팍 낳으면 끝날 거 같은데요?”

은찬은 히죽 웃으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예상한 것 보다 의외로 별거 아니었다. 아이를 낳을 때 지옥의 문 앞까지 갔다 온다더니 지금 정도면 무난하게 웃으면서도 낳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김동만에게 애 나온다는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전화가 왔다.

“동만아, 이 형님 애 낳으러 가신다.”

[벌써? 괜찮아? 어디야? 병원?]

이 시간에 김동만의 목소리를 듣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자식, 꽤 많이 놀란 모양이다.

“이제 가는 길. 뭐야, 너. 이 시간까지 안 자고 뭐 했어!”

[잤다, 이 새끼야!]

“잤겠지. 누구랑 어떻게 잤느냐가 문제인 거지.”

부른 배를 만지며 킥킥 웃음을 터트리자 운전 중인 이주한의 시선이 느껴졌다.

[미친 자식아! 너는 그 상황에 그런 말이 나오냐? 아니면 너무 아파서 실성했어?]

“아니, 하나도 안 아픈데? 이 정도면 참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뭐라는 거야. 부장님은? 옆에 있어?]

“있지. 아무튼, 나 애 빨리 낳을 것 같으니까 이따가 나 문병 올 때 햄버거 좀 사 와. 갑자기 그게 먹고 싶네. 병원 다 왔다. 끊는다. 이따 보자.”

[이 미친 새끼가 뭐라는……. 야, 유은찬! 야!]

김동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은찬은 제 할 말만 하고 통화를 끊어 버렸다. 거짓말이 아니라 병원 정문에 많은 의료진이 대기하고 있는 게 보였다. 정문 앞에 차를 세우자마자 환자용 휠체어에 강제적으로 앉혀 준비된 입원실로 직행했다.

새벽 3시. 병실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아직 캄캄했고 은찬은 무료했다. 의사와 간호사는 수차례 상태를 살폈으며 이주한은 괜히 주변을 서성였다. 표범 귀와 꼬리가 나온 것도 모르는 것을 보니 심리적으로 많이 불안정한 모양이었다.

반대로 은찬은 아주 평온했다. 물론 조금 전보다 통증의 강도가 세지긴 했지만 참기 힘들 정도는 아니었다. 핸드폰을 주한에게 빼앗긴 은찬은 무료함을 달랠 방법이 없었다.

“뭘 그렇게 걱정해요. 애 낳는 사람은 난데.”

“너니까! 병원 의사들이 왜 저러는지 모르겠어?”

“원래 병원 오면 다 그런 거죠.”

워낙 건강한 체질이라 지금껏 병원 신세를 져본 일이 드물었다. 그래서 그런지 병실을 꽉 채운 소독약 냄새에 은찬은 콧잔등을 찡그렸다.

“남자 수인이 애 낳는 건 처음이니까! 그래서 어떤 응급 상황이 나올지 몰라서 그러는 거잖아!”

“아…….”

“아가 아니라…… 유은찬! 너는 걱정도 안 돼?”

평소의 이주한답지 않게 초조해 보였다. 반면 은찬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런 이주한을 차분하게 달랬다.

“형. 내가 낳지 형이 애를 낳아요? 괜찮대도? 봐요! 나 지금 멀쩡하잖아. 누가 보면 죽을병이라도 걸린 줄 알겠네. 정신 사납게 그렇게 있지 말고 여기 가만히 있어요.”

“진짜 괜찮아?”

“솔직히 나 배고픈데. 먹을 거 사달라고 하면 안 사 줄 거잖아. 맞죠?”

은찬이 씨익 웃자 마지못해 주한도 어색하게 웃었다. 그때까지 은찬은 애 낳는 것쯤 별거 아니라 생각했다. 티브이에서 보던 것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야단법석을 떨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아…… 얼른 낳고 푹 쉬고 싶다.”

그동안 무거운 배 때문에 행동 제약도 많았다. 이제 거기서 해방된다고 하니 은찬은 얼른 벗어나고픈 마음이 컸다. 하지만 여유로움도 거기까지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통증의 강도는 급격하게 올라갔고, 은찬은 곧 이성을 잃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아파! 아파, 아파! 아아아아아! 배 아프다고오오오! 진통제 없어요? 진통제에에에! 형! 야, 이주한! 가만히 있지 말고 가서 진통제 놔 달라고 해 봐아!”

“아직 안 된다고 하잖아! 조금만, 조금만 참자! 많이 아파?”

“죽을 것 같다고! 나 애 낳다가 죽을 거야! 애초에 남자가 애 낳는 게 어디 있어! 나 죽을 거야아아! 죽을지도 몰라! 아, 씨발! 존나 아파! 아프다고오! 차라리 수술 시켜 줘! 수술! 가서 의사 데려와! 의사, 나 안 돼! 못 해! 이거 진짜 안 돼!”

극강의 고통에 겁을 먹은 은찬은 눈을 번뜩이며 의사를 찾았다. 욕을 랩처럼 내뱉었고 의사와 간호사가 오면 그들을 물어뜯기 위해 송곳니를 세우고 달려들었다. 그러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평온해졌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정적이 흐르는 병실에서 이주한은 넋을 놓은 채 앉아 있었다.

“형? 괜찮아?”

“너는…… 이제 괜찮아?”

“어, 아까는 막 죽을 것처럼 아팠는데 지금은 괜찮아.”

“그럼 다행이고……. 차라리 수술, 할까?”

수술과 자연 분만. 처음부터 의사는 수술을 권유했다. 그런데 애한테는 자연 분만이 좋다는 말에 은찬은 고민도 없이 자연 분만으로 결정했다. 다들 극구 말렸지만, 까짓 거 그거 한번 못 하겠냐는 호기였다. 아직은 참을 만했다. 고통의 강도가 이 정도에서 끝난다면 말이다.

“괜찮아. 견딜 만해.”

“……하자.”

“괜찮다니까. 아기한테는 자연 분만이 좋다고 하잖아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은찬은 손사래를 쳤다.

“아니, 내가 못 견…… 못 보겠…….”

“안 해. 안 한다고. 나도 엄마야. 모성애가 그냥 나오는 줄 알아요? 세상 엄마들 다 겪는 일이에요. 유별나게 굴지 마요.”

오히려 주한에게 핀잔을 던진 은찬은 그로부터 5분 뒤 제 혀를 뽑아 버리고 싶었다. 조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강도의 고통이 밀려왔다. 이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태어나서 처음 겪어 보는 고통이었다. 저도 모르게 주한의 머리채를 움켜쥔 은찬은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내가 그날! 그 개다리 술만 아니었으면, 너 같은 거 하고 엮이는 일 없었는데! 이게 뭐야아아아! 나 죽네, 나 죽어! 의사! 의사 불러 와! 당장!”

“야! 머리 놓고! 머리를 놓아야지 의사를 불러 올 거 아니야! 유은찬! 은찬아, 이거 놓자!”

“닥쳐! 의사 불러 와! 의사아아아아! 수술, 수술해 달라고!”

그렇게 또 10분이 흘렀다. 은찬은 다시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워졌고 이주한의 몰골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만신창이가 되어 갔다. 비단 이주한 뿐만이 아니라 은찬도 회를 거듭할수록 자아가 분열되는 것 같았다.

“수술, 하자.”

어금니를 꽉 깨물고 던진 이주한의 말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수술해 버릴까? 이러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은찬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저기요. 아직 멀었어요?”

“네?”

“보통 언제 끝나요?”

때마침 상태를 확인하러 온 간호사를 붙잡고 물었다. 그녀는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산모에 따라 다 다르세요. 금방 낳으시는 분도 계시고 길면 하루 넘어가시는 분도 계시고. 그런데 유은찬 산모님은 남자분이시라서…… 잘 모르겠네요.”

잘 모르겠다. 그 말에 은찬은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어쩌면 그 지옥 같은 고통을 온종일 느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앞이 암담해졌다.

“저기요! 저 수술, 수술할게요! 의사 선생님 좀 불러 주세요. 형, 나 수술. 수술할게! 안 돼! 나 이거 못 해! 맨정신으로 못 견뎌!”

“선생님 모셔 올게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의사 선생님을 데려오겠다며 간호사가 사라진 사이. 하필 그때 다시 진통이 왔다. 강도는 순식간에 극강으로 치솟았고 은찬은 또다시 사나운 맹수로 돌변해 이주한에게 달려들었다.

“으아아아아아, 씨발! 의사! 의사 왜 안 와! 수술한다고! 수수우우우울! 야, 가서 의사 데려오라고!”

“간호사 갔어! 수술시켜 달라고 할게! 할 테니까, 조금만 참아 봐! 호흡! 산모 수업에서 배운 거 해 봐! 후, 후욱. 후…….”

남자 산모라는 특이 점 때문에 따로 산모 교실을 갈 수 없었던 은찬을 위해 회장님께서 강사를 집까지 불러 주셨다. 일대일의 수업이라 나름 열심히 배웠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주한의 이런 행동이 은찬의 심기를 건드렸다. 은찬은 이주한의 머리를 흔들며 악을 썼다.

“니가 낳아 봐! 이게 참을 수 있는 건지! 뒈지기 전에 닥쳐! 닥치라고! 악! 씨발……! 크레파스 십팔 새끼! 수박에 씨 발라 먹을 새끼! 너, 너 때문이잖아!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아픈 거잖아!”

“야! 나 이러다 대머리 되겠어!”

VIP병실에 두 남자의 고통에 찬 비명이 가득했다. 이제는 다시 찾아온 평화를 즐길 여유도 없었다. 녹다운이 된 은찬과 주한은 한발 늦게 나타난 의사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의사는 은찬의 상태를 확인한 뒤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기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수술하신다고요?”

“수술! 수술이요!”

“수술시켜 주세요.”

그 물음에 은찬과 주한은 동시에 대답했다.

“아……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반 이상 열린 것 같은데. 조금만 있으면 나올 것 같은데……. 이대로 수술하기에는 조금 아쉬운데, 괜찮으시겠어요? 물론 남자분이라는 점이 걸리긴 하지만, 남자 수인 최초로 자연 분만해서 아이를 낳았다는 기록도 세울 수 있고. 나름 의미가 있을…….”

묵묵히 의사의 말을 듣고 있던 은찬은 다시 훅 밀려오는 통증에 의사에 옷자락을 꽉 잡고 외쳤다.

“야, 이 새끼야! 그딴 기록 너나 세우고! 수술해 달라고, 수술! 씨발! 너 애 낳아 봤어? 이게 어떤 기분인지 알아? 배가 생으로 갈라지는 느낌이라고, 씨 발라 먹을 새끼야! 네 눈깔 손톱으로 후벼 파기 전에 얼른 수술 준비해라! 수술 준비하라고!”

날카로운 송곳니를 세운 화난 검정고양이는 금방이라도 의사의 목을 물어뜯을 듯이 으르렁거렸다. 진통이 밀려올 때마다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극강의 통증 속에서 은찬은 살기 위해 몸부림 쳤다.

비로소 수술실로 실려 갈 때, 은찬은 살았다는 안도감에 눈물 한 줄기를 흘렸다. 두 번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은찬아!”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 은찬의 손을 꼭 잡고 따라온 주한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말할 힘조차 없었다. 대신 은찬은 조용히 가운뎃손가락을 그에게 던졌다.

이주한 개새끼. 네가 좆 관리만 잘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잖아. 마지막 하고픈 말을 담아 던진 빠큐였다.

수술실도 평탄하지는 않았다. 하반신 부분 마취로 하는 수술이었고 정신이 또렷한 상태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의료진들을 지켜봐야 했다. 그래도 더 이상 그 고통을 맛보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 좋았다.

은찬은 멍하니 수술실 천장을 응시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한 명, 또 한 명. 멍한 상태에서 강보에 싸인 두 명의 아기를 확인하자마자 은찬은 기절하듯 잠에 빠졌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새하얀 천장이 보였다. 순간 이곳이 천국인 줄 알았다.

“사내놈이 그거 하나 못 참아서 수술해? 하여튼 엄살 심한 건 지 아빠를 닮았다니까.”

고막을 치고 들어오는 엄마 잔소리에 은찬은 다시 눈을 감았다.

“눈떠. 뜬 거 봤으니까.”

마지못해 뻑뻑한 눈을 겨우 뜬 은찬은 침대 옆에 앉은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올해 설날 이후 첫 만남이었다. 그동안 전화 통화는 간간이 했지만, 자세한 사정은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아들이 임신했다는 말을 어떻게 하냐고.

임신했을 때는 잘 몰랐는데 아이를 낳아 보니 새삼 엄마에 대해 애틋함이 솟았다. 불쑥 나타난 엄마를 보자마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엄마…….”

울먹이며 엄마를 불렀지만…….

“회사 착실하게 다니고 있는 줄 알았더니 잘하는 짓이다! 새벽에 전화받고 얼마나 놀란 줄 알아? 웬 놈이 전화해서 네가 애 낳으러 갔다는 소리를 하는 바람에 미친놈 지랄한다고 욕이란 욕은 다했다고! 이런 일이 있으면 재깍재깍 말이라도 해 주든가! 너는 누구 닮아서 머리가 그 모양이야? 그리고 그게 얼마나 아프다고 그걸 못 참고 수술을 해? 눈 딱 감고 참으면 금방인데!”

쏟아지는 잔소리에 눈물이 쏙 들어갔다. 이래서 엄마한테 말하기 싫었던 거다. 옆에 있는 아버지는 이미 눈시울을 적시고 계셨다. 콧물을 훌쩍이며 은찬의 손을 꼭 잡고 또다시 펑펑 울기 시작했다.

“날 닮아서, 그래. 날 닮아서……. 흑흑…….”

“그만 좀 울어요! 사돈 보는 앞에서 망신스럽게!”

엄마는 울고 있는 아버지의 등을 퍽 쳤고 깜짝 놀란 아버지의 머리에 고양이 귀가 툭 튀어나왔다. 하얀 털이 복실거리는 귀는 품종묘의 귀였다. 반면 화를 내고 있는 어머니의 머리위에는 은찬과 똑같은 검정고양이 귀가 있었다.

성격이 온순한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사납고 거칠었다. 당연히 집안의 가장은 어머니였고 은찬과 아버지는 어머니의 말에 찍소리도 못했다.

“순서가 바뀌긴 했지만 이렇게 됐으니 너 몸조리 끝나는 대로 결혼식 준비하기로 했다.”

“어?”

“왜? 애 낳았잖아. 결혼해야지.”

놀란 은찬은 눈을 번쩍 떴다. 주변을 둘러보니 그제야 방안에 회장님과 이주한도 함께 있는 것을 알았다. 도통 뭐가 뭔지 모르겠다. 머릿속이 멍한 은찬은 그것보다 아들이 애를 낳았다는데 놀라지 않는 엄마가 이상했다.

“엄마. 안 놀라?”

“뭐가.”

“나 애 낳았다고.”

“알아. 보고 왔으니까.”

“안 이상해?”

“그럼? 욕이라도 해 줄까?”

“…….”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해! 여보는 그만 좀 울어요!”

아버지에게 쓴소리를 던진 엄마는 조용히 일어나 회장님 쪽으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사돈 어르신,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가게 문을 열어야 해서요. 부족한 자식이지만 예쁘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눈물을 찍으며 마지못해 일어난 아버지도 엄마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죽기 전에 증손자가 둘이나 생겼으니 말입니다.”

“새벽에는 워낙 경황이 없어서 사돈 어르신인 줄도 모르고 험한 말을 한 거 다시 한번 사과를 드립니다.”

시장에서 억척스럽기 소문난 엄마가 마음먹고 욕을 하면 어떤지 잘 알고 있던 은찬은 회장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정말 괜찮을까 싶었다. 그런데 진짜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한껏 차리고 온 부모님과 깍듯이 예의를 차리시는 회장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견례가 치러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직 마취 기운이 남아 있는 은찬에게 이 모든 상황은 벅찼다. 좀 전까지 터질 듯이 나온 배는 푹 꺼져 있고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넋이 나간 채 멍하게 있는 은찬의 곁으로 주한이 다가왔다.

“형……. 이게 뭐 어떻게 된 거예요? 우리 애들은요?”

“수고했어. 건강해. 너 닮아서 신생아실에서 울음소리도 제일 커.”

“울 엄마하고 아버지는 왜 여기에 있어요?”

“애 낳는 건 아셔야지. 너 그것도 말 안 했더라?”

망했다……. 엄마가 알았으니 이제 꼼짝없이 결혼하게 생겼다. 은찬은 주한에게 원망 가득한 시선을 던졌다. 많이 초췌해 보였지만 그럼에도 그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에게 했던 행동들이 떠오른 은찬은 이주한을 빤히 보며 물었다.

“나 안 미워요?”

“왜?”

“욕하고 머리도 잡아당기고 그랬잖아요."

“전혀. 나 지금 엄청 행복한데? 고마워. 그리고…….”

이주한은 땀에 젖은 은찬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기며 나지막이 고백했다.

“사랑해. 내 검은 고양이.”

마치 짜인 각본처럼 때마침 병실에 정적이 흘렀다. 부모님과 회장님의 시선 속에서 이주한의 고백은 신성한 의식처럼 조용히 울려 퍼졌다.

뭐랄까. 좀 전까지 지옥의 문 앞을 갔다 왔다면 지금은 천국의 문 앞 같았다. 숨 쉴 수 없을 만큼 감정이 벅차오른 은찬은 천천히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찍었다. 바짝 말라서 갈라진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지만, 그 어느 때보다 로맨틱한 키스였다.

“나도 사랑한다고 해 줄게요.”

그와 마주친 시선에 은찬은 활짝 웃었다. 이런 게 고양이식 고백이라는 걸 아는지 이주한은 말없이 은찬을 끌어안았다.

첫 시작이 어찌 되었든 결과적으로 이렇게 됐으니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은찬은 이주한을 간택했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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