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동만이 이 자식. 전화를 안 받네. 화났나? 아닌데. 그러면 당장 전화로 욕을 퍼부어야 정상인데…….”
은찬이 심각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뚫어지게 바라보자 이주한의 핀잔이 날아왔다.
“왜 욕먹을 짓을 사서 해.”
“나 좋자고 그런 건가? 내가 김동만 안 넘겼어 봐. 그 개, 형한테 매일 찾아와서 징징거렸을 거 뻔한데. 솔직히 말해 봐요! 진짜 그 개하고 끝난 거 맞아요? 요만큼이라도 딴 마음 없어요?”
진담 반 농담 반으로 던진 말에 이주한이 자신의 무릎을 베고 누운 은찬을 무섭게 바라보았다. 아니면 그만이지 왜 사람을 째려봐. 다시 은찬이 핸드폰에 집중하자 결국 주한은 그것을 압수했다.
“어? 핸드폰 줘요!”
벌떡 일어난 은찬은 미간을 찌푸린 채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는 단호했다.
“일하고 왔으면 너도 좀 쉬어야지. 태교하기로 했잖아.”
“클래식 뭐 또 그런 거 들으라고요? 그거 나랑 안 맞는다고 몇 번을 말해요! 머리에서 쥐날 거 같다니까? 아니, 한 달도 안 남았는데 이제 와서 태교한다는 것도 웃기잖아요!”
“하는 데까지 해 보는 거지. 다른 집 부모들은 다 한다잖아.”
“그건 그 집 사정이고. 나랑 안 맞다고요. 닭발 먹고 싶은데 그것도 안 된다. 입만 열면 태교, 태교. 나 슬슬 여기 있는 거 짜증 나려고 하거든요? 그만하고 내 핸드폰 내놔요! 얼른!”
씩씩대는 은찬의 태도에 당황한 주한은 살짝 망설이다가 다시 강경한 태도를 유지했다. 아예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어 버렸다.
“찾아가시던가.”
못 할 줄 알고? 고양이를 우습게 보는 모양인데. 날렵한 게 고양이의 주특기다. 그의 도발에 은찬은 잽싸게 손을 움직여 핸드폰을 꺼내려고 했지만, 표범도 고양잇과라는 것을 잠시 망각했다. 그의 손이 은찬의 팔을 잡아당겼고 속절없이 끌려간 은찬은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
“태교, 안 해도 좋은데. 김동만은 그만 좀 찾고. 나도 좀 봐 주고 그래.”
이주한이 은찬의 등을 다정하게 토닥이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낯간지럽게 이런 소리를 아무렇게 막한다. 그러니까 자신과 놀아 달라는 주한의 투정이었다. 못내 싫지 않았던 은찬은 입꼬리가 실룩였다.
“맨날 보잖아요.”
“그걸로 부족하니까 그렇지.”
“내가 미치도록 좋아요?”
“좋아.”
이주한은 은찬의 머리에 얼굴을 비볐다. 이 별거 아닌 행동에 기분이 좋아진 은찬의 머리에 또 고양이 귀와 꼬리가 나왔다. 임신 때문인지 감정 변화가 심한 탓에 조금만 방심해도 나오는 귀와 꼬리를 이주한은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단둘뿐인 집안에서 꺼릴 것이 없었기에 그도 제 꼬리를 꺼내 은찬의 꼬리를 휘감았다. 집에 있을 동안 계속 보았더니 이제는 그 꼬리도 익숙해졌다. 은찬은 그의 가슴을 매만지며 아쉬운 한숨을 터트렸다.
“얼른 낳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 형 안 재울 자신 있는데.”
“나도 너 안 재울 자신 있거든?”
“이러다가 우리 계속 애 생기면 어떻게 해요?”
“…….”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말에 이주한인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피임하면 되잖아.”
“아, 피임. 콘돔이요? 근데 나 콘돔 하는 거 별론데. 근데 이런 일이 또 생기겠어요? 안 그래요? 어쩌다가 아주 희박하게 생긴 우연의 일치일 뿐이잖아요.”
“……그런데 왜 손은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걸까.”
주한이 제 성기 주변을 맴돌고 있는 은찬의 손을 잡아 올렸다.
“아. 내 손이 왜 거기에 있지?”
모른 척 웃는 은찬을 이주한은 사랑스럽게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나 피 말려 죽일 생각 아니면 이러지 마. 지금도 열심히 버티고 있으니까.”
“잘 생각해 봐요. 우리 애들 일찍 성교육시켜 준다고 생각하고. 할래요? 이것도 태교일 수 있는데.”
“야.”
“아, 아쉽다. 우리가 조금만 더 일찍 눈이 맞았더라면 미친 듯이 했을 텐데.”
“그러게.”
부른 배를 만지며 하소연을 하던 은찬은 불쑥 이주한의 입술에 제 입술을 찍었다. 그냥 뽀뽀가 하고 싶었다.
“왜 이렇게 귀여워요? 원래 표범이 이렇게 귀여운가?”
“누가 할 소리. 너 왜 이렇게 귀여워.”
“나는 고양이니까. 원래 고양이는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거 몰라요?”
은찬이 고양이 귀를 까딱이자 이주한이 픽 웃는다. 그러다 마주친 시선에 둘은 자연스럽게 거리를 좁혔다. 조용히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가 다시 닿았다. 벌린 입술 틈으로 서로의 혀가 뒤엉켰다. 한참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고 있을 때였다.
띵똥. 경쾌한 벨 소리가 둘 사이를 방해했다. 당연히 무시하고 키스에 집중하려 했지만 연달아 울리는 벨소리를 더는 외면할 수 없었다. 거실 벽 비디오 폰에 방문자의 얼굴을 확인한 그들은 동시에 썩은 표정을 지었다.
반갑지 않은 손님이었다. 이주한의 할아버지. 회장님이 심기 불편한 얼굴로 그곳에 계셨다.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다. 한참 좋았는데 하필 그때 오냐. 은찬은 문을 열기 위해 일어나는 주한의 팔을 황급히 잡았다.
“우리 없는 척해요!”
“뭐?”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주한에게 타당한 이유를 덧붙였다.
“오늘만이요! 오늘만 없는 척해요! 솔직히 너무 자주 오시잖아요! 나 불편하단 말이에요!”
오붓하게 둘만 있고 싶다. 그 의미를 담은 은찬의 간절한 시선에 주한은 망설이는 듯 보였다. 현관과 은찬을 번갈아 보던 그가 마침내 결정을 내리기 직전, 굳게 닫힌 현관문 너머 김 실장의 목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작은 도련님. 안에 계신 거 다 알고 왔습니다.”
그러니 둘이서 아무리 쥐 죽은 듯 있어도 소용없다는 말이었다. 주한은 살짝 골이 난 은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약속했다.
“다음부터는 갑자기 오시는 거 안 된다고 말씀드릴게.”
“진짜죠? 이게 뭐예요. 시집살이도 아니고. 불쑥불쑥 찾아오는 거 너무 싫단 말이에요.”
“알았어. 오늘만.”
손가락까지 걸고 약속했으니 꼭 지키겠지. 입술이 한 주먹만큼 튀어나온 은찬은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일어나기는커녕 요지부동 자세를 취했다. 오히려 소파에 거의 눕다시피 한 자세로 회장을 맞이하려 했지만, 코끝을 스치는 냄새에 눈이 번쩍 뜨였다.
익숙한 이 냄새. 이건!
“치킨! 치킨이다!”
갓 튀긴 치킨 냄새에 벌떡 일어나 한달음에 현관으로 달려갔다. 얼마나 신나게 달려갔는지 은찬이 발을 디딜 때마다 쿵쿵 소리가 울렸다.
“홑몸도 아닌 녀석이 그렇게 뛰어다니면……!”
막 신발을 벗고 들어선 회장은 그런 은찬을 향해 짧게 혀를 찼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인사도 생략한 은찬의 시선은 회장의 뒤에 서 있는 김 실장 양손에 집중했다. 마른침을 삼킨 은찬이 다급하게 물었다.
“회장님! 그거 치킨이에요?”
“그래, 이거 좋아한다며. 지나가던 길에 사…….”
“몇 마리 사 오신 거예요? 1인 일 닭인 거 아시죠? 나는 요놈들까지 있으니까 세 마리는 먹어 줘야 하는데.”
은찬은 재빨리 김 실장 손에 있는 봉투를 스캔했다. 푸짐한 걸 보니 족히 두 마리 이상은 돼 보였지만 이주한까지 먹는다고 친다면 모자랄 듯싶었다. 딱 맞게 세 마리라고 말한다면 은찬은 진심으로 화낼 기세였다.
“여섯 마리입니다. 브랜드 별로 제일 잘 나가는 것만 배달시켜서 앞에서 직접 받았으니 바로 먹으면 맛있을 겁니다.”
회 사건 직후 치킨을 두 마리 사 왔다가 욕먹은 경험이 있는 김 실장이었다. 그걸 누구 코에 붙이냐고 쏘아 댔더니 이제는 척하면 척이다.
“오. 김 실장님 센스!”
은찬이 엄지를 척 들자 김 실장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얼른 그의 손에서 치킨을 빼앗으려 할 때였다. 이주한과 회장이 정색하며 은찬을 극구 말렸다.
“무거운 거 들지 말라니까.”
“넌 이런 거 드는 거 아니다. 주한아 뭐해. 얼른 안으로 데려가지 않고.”
주한의 손에 반강제적으로 끌려간 은찬이 식탁 의자에 앉자마자 치킨이 식탁 위에 펼쳐졌다. 얼마나 많은지 은찬은 눈을 반짝이며 환호성을 질렀다. 이미 저녁은 먹었지만 치킨 배는 따로 있었다.
“기분이 좋은가 보군.”
“그럼요! 나는 치킨 사주는 사람이 젤 좋더라니까요!”
치킨에 시선을 고정한 은찬은 뭐부터 먹을지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일단 시작은 프라이부터. 닭 다리를 하나 든 은찬이 맞은편에 앉은 회장을 보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 손을 내밀자 회장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예의는 있…….”
“거기 소금 좀 주실래요? 역시 프라이는 소금 찍 먹이죠.”
“…….”
모두의 시선이 은찬에게 집중됐다. 무거운 정적 속에서 은찬은 잘도 먹었다.
“뭐 하세요. 얼른 드세요. 진짜 맛있어요! 형도 얼른 먹어 봐! 김 실장님도 드세요!”
먹어보라는 권유와는 반대로 은찬은 아주 전투적으로 닭 다리를 뜯었다. 얼른 더 많이 먹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모습에 다들 선뜻 먹지 못했다.
“아까 밥 먹었는데 배 안 불러?”
치킨 대신 콜라를 마시던 주한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은찬은 밝게 웃었다.
“몇 번을 말해요. 요즘은 돌아서면 배가 고파서 죽겠다니까?”
“천천히 먹어.”
“꼭꼭 씹어 먹고 있어요.”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회장이 갑자기 싸늘한 말투로 주한을 꾸짖기 시작했다.
“이주한, 너 내가 그렇게 일렀냐? 산모 굶기면 그 영향이 누구한테 가겠어! 잘 먹이고 스트레스 받지 않도록 하라고 몇 번이나 말해!”
“말씀 않으셔도 그렇게 하고 있어요.”
“그렇게 하는 놈이 출근하는 것 하나 못 말려? 이왕 이렇게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다만. 이 녀석 언제까지 출근시킬 생각인 거냐.”
열심히 치킨을 먹던 은찬은 오늘 회장이 이곳에 왜 왔는지 알 것 같았다. 회장은 은찬이 출근하는 게 불만인 것 같았다. 치킨은 미끼일 뿐이고.
“이 녀석, 이 녀석 하지 마세요. 유은찬. 이름 아시잖아요. 그리고 누가 굶겨요. 두 시간 전에 혼자 한우 5인분을 먹었다고요.”
이주한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모두의 시선이 다시 치킨을 먹는 은찬에게 집중됐다. 그게 뭐 어때서? 한우 그거 비싸기만 비싸고 1인분이 코딱지만 하던데. 은찬은 아무렇지 않게 치킨을 오물거렸다.
“그리고 이렇게 말도 없이 오시는 거. 그만하세요.”
“이놈이……. 할아버지가 손자 집에 오는데 허락 맡고 와야 해!”
“이제 저 혼자 사는 집이 아니잖아요.”
“지나던 길에 잠시 들려서 얼굴이나 잠깐 보고 가는 건데 그것도 귀찮단 말이지!”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한 번도 이런 적 없다가 갑자기 이러시는 이유가 뻔하잖아요! 아직 적응도 못 한 은찬이 스트레스 받을까 봐 그래요.”
“내가 스트레스라 이거지?”
“하아…… 할아버지.”
또 정적이 흘렀다. 회장은 말투와 표정까지 싸늘해졌고 이주한은 굳은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둘 사이에 일어난 싸움의 원인 제공자인 은찬은 양념 통닭 소스가 묻은 손가락을 쪽쪽 빨았다. 주한은 약속대로 회장에게 오지 말라 선포를 했지만, 계획을 변경해야 할 것 같았다.
“저 닭발, 아이스크림, 치즈케이크. 족발, 돼지 껍데기. 이런 거 좋아하거든요? 올 때마다 먹을 거 사 오시면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그거야 어렵지 않지. 내 증손주들 먹이는 거니까.”
은찬이 내민 조건에 회장은 쉽게 승낙했다. 반대로 주한은 조금 전과 달리 태세 전환한 은찬을 빤히 쳐다보았다. 원래 인생이란 다 그런 거 아닌가. 회장은 불편하지만 서프라이즈한 야식은 반갑다.
하지만 은찬의 말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회장이 그렇게 밀어붙인다면 은찬도 할 말은 해야겠다.
“그리고 저 회사 계속 나갈 거예요. 형하고도 그렇게 합의 봤어요. 그러니까 저 자를 생각 하지 마세요.”
“뭐 때문에. 돈이 필요해서? 굳이 그 몸으로 나가겠다는 이유가 뭐야.”
미간에 깊은 주름을 만든 회장의 물음에 은찬은 별거 아니라는 투로 가볍게 대답했다.
“애는 애고 나는 나죠. 애 핑계 대고 집에 눌러앉을 생각 전혀 없거든요? 우리 회사 복지가 얼마나 좋은데요. 그거 쓰면서 다니려고요. 형도 허락했어요.”
“계속 다니겠다. 애는 그럼 누가 키우고?”
“어린이집에 맡기든가, 정 안 되면 동만이한테 부탁해도 되고. 뭐 어떻게 방법이 있겠죠. 걱정하지 마세요.”
“내 증손자를 어떻게 걱정 안…….”
말끝을 흐린 회장이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이주한을 빤히 바라보았다. 다시 무거운 정적이 흘렀지만, 은찬만 아무렇지 않은 분위기였다. 그사이 혼자서 두 마리를 먹어 치운 은찬은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한우 5인분의 영향 때문인지 더 이상은 들어가지 않았다.
“하아, 더는 못 먹겠다. 아…… 느끼해. 이럴 때 동만이가 끓여 주는 라면 한 그릇이 최곤데.”
“도대체 김동만이 누구냐.”
은찬의 입에서 연속으로 나온 이름에 회장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유은찬 씨와 같이 살던, 그때 오피스텔에 있던 그 사람입니다.”
“아. 그자.”
김 실장의 답변에 누군지 알겠다는 듯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치킨 덕분에 회장에 대한 경계심이 사라진 은찬은 동만에 대해 주절주절 떠들기 시작했다.
“걔가 보기보다 엄청 착하고 집안일도 잘하거든요. 그리고 라면 하나는 기가 막히게 끓이는데. 딱 한 가지 문제점이 인기가 없어요. 여자한테. 우리 나비하고 까망이 자기가 다 돌봐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고양이 엄청 좋아하거든요. 고양이 척척 박사예요. 물론 고양이 하고 수인하고는 다르지만. 아무튼 그래요.”
묵묵히 듣고 있던 회장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회사는 계속 다닐 거란 말이지.”
“네. 정년퇴직할 때까지 다닐 건데요?”
“…….”
은찬의 당찬 포부에 네 번째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이주한도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것인지 많이 당황한 눈치였다. 다들 어안이 벙벙한데 갑자기 은찬은 귀찮다는 투로 툭 말을 뱉었다.
“아…… 이놈들이 또 움직이네. 진짜 누구 닮아서 이래? 아예 거기서 축구를 해라, 축구를 해!”
“또 차?”
“죽겠다니까.”
“이리 와. 만져 줄게.”
요즘 들어 활발해진 녀석들 탓에 하루에도 몇 번씩 배가 당겼다. 그럴 때마다 주한이 한번 만져 주면 조용해졌다. 아빠 손이 약손이나 다름없는 셈이었다.
“이놈들 얌전히 있어.”
“그래! 얌전히 좀 있어!”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둘은 빠른 속도로 가족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맞은편에서 지켜보던 회장의 표정은 만감이 교차해 보였다.
***
동만에게 지난 며칠은 다사다난했던 나날이었다. 반강제적으로 이리한과 사귀게 된 그 다음 날 아침부터 악몽은 시작됐다. 다행히 처음과 달리 그곳에 피는 나지 않았지만 강한 마찰로 인한 쓰라림과 허리의 통증이 동반됐다.
앉아 있기에도 힘든 상태였다. 그대로 일을 하기에는 힘든 상태라는 판단에 결국 눈물을 머금고 하루를 쉬었다.
뭔가 냄새를 맡은 유은찬은 왜 안 오느냐고 자꾸 연락해 댔고 이리한은 간호라는 핑계로 오피스텔에 쳐들어와 동만의 혈압을 올렸다. 그러다 허리에 파스를 붙이고 잠시 눈 좀 붙이고 일어났더니 집 안이 개판 5분 전이었다.
널브러진 과자 봉지와 부스러기들. 시켜 먹은 배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식탁 위. 상전처럼 모시던 고양이에게서 해방되니 이젠 개가 지랄이었다. 내가 전생에 뭔 죄를 지었을까 싶은 생각에 동만은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이런 놈과 과연 잘 해 나갈 수 있을까. 괜히 사귀는 건 아닐까. 이리한 때문에 제 인생이 엉망진창이 될까 봐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남자 수인과 사귄다고 소문이라도 난다면 그야말로 김동만의 평판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셈이니까.
우여곡절 끝에 다음 날 출근을 하긴 했지만 절대로 들키고 싶지 않았던 유은찬에게 단번에 발각되고 말았다. 동반 출근한 이리한이 옆에 보디가드처럼 달라붙어 있으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조금만 움직이기라도 하면 ‘어, 허리 조심!’이라고 소리치니 말이다.
거기다 음흉하게 웃는 유은찬 앞에서 이리한은 자신도 곧 애 아빠가 될 것이라며 망언을 쏟아 냈다. 물론 동만은 그 말이 나오자마자 녀석의 머리끄덩이를 잡아 회사 밖으로 쫓아내 버렸다.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며칠 이리한의 연락을 전무 무시더니 기어코 일이 터졌다.
며칠 뒤 이리한의 어머니. 호텔 회장인 그녀가 직접 회사까지 발걸음 한 것이다. 거래처에 일이 있다는 명목이었지만 그녀의 등장과 동시에 일개 사원인 동만이 불려 갔다. 다행히 회장실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이주한 부장의 방에서 마주한 그녀는 동만을 보자마자 따지듯 물었다.
‘우리 애.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요?’
‘네?’
‘보면 알겠지만 애가 철이 없어요. 막내라서 우리가 너무 오냐오냐 키운 탓이겠지만, 우리 가족은 리한이가 원하면 뭐든 들어줄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김동만 씨가 남자라고 해서 전혀 반대할 생각은 없어요.’
그때 동만은 이 가족은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다. 이 모든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이주한은 혼란스러운 동만과 마주친 시선을 슬며시 외면해 버렸다. 치사한 이주한! 내가 유은찬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럴 때라도 도와줘야지! 적진에 혼자 남겨진 동만은 정신을 똑바로 차렸다.
‘그래도 아드님을 조금 타일러 보시는 게…….’
애가 철이 없다. 눈치도 더럽게 없다. 차마 이 말은 할 수 없었기에 어렵게 꺼낸 동만의 말을 그녀는 단칼에 잘랐다.
‘이거 어쩌나. 난 김동만 씨 설득하러 왔는데? 우리 애가 같이 살고 싶다고 어제부터 난리를 치는데……. 어디가 좋아요?’
‘네?’
‘선호하는 지역이 있을 거 아니에요. 평수는? 100평쯤 하면 남자 둘이 사는데 적당한 것 같기도 하고. 이렇게 하죠. 일단 명의는 내 앞으로 해 놓고 우리 애 잘 데리고 있는 조건으로 나중에 그쪽 명의로 돌려주는 조건. 어때요?’
‘네에?’
동만은 그녀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그녀는 멍청하게 눈만 깜박이는 동만을 잠시 바라보더니 호탕하게 웃었다.
‘귀엽네. 그래서 우리 애가 좋아하는가 보다. 주한아, 나 이만 바빠서 가야겠다. 다음에 보자. 아, 너 애 아빠 된다며? 그것도 쌍둥이라며?’
‘어떻게 아셨어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다 말고 이주한을 흘겼다.
‘회장님 귀가 입에 걸렸다고 소문 쫙 다 났어. 나한테 자식 그따위로 키우지 말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시더니 소원 푸셨네. 누구니? 듣자하니 고양이 수인이라던데. 맞아?’
‘네, 말도 마세요. 할아버지가 얼마나 극성을 떠시는지.’
‘그러니까. 그래도 정정하실 때 증손자 보셨으니 다행이지. 노래를 부르셨잖아. 아무튼, 나 간다. 아, 김동만 씨.’
이주한과 간략하게 인사를 끝낸 그녀는 아직 할 말이 남았는지 동만을 찾았다. 그리고 멍한 동만을 향해 웃으며 살벌한 경고를 던졌다.
‘우리 애 어리광 좀 받아 줘요. 귀엽잖아요. 필요한 거 있으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말하고. 앞으로 자주 봐요.’
일방적인 면담이 끝나고 동만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이 상황이 뭔가 싶었다. 이주한은 그런 동만을 보더니 그냥 포기하라는 짧은 조언을 던졌다. 저 집이 원래 그렇단다. 막내 이리한을 끔찍이 생각하는 집안이라고.
‘이왕 이렇게 된 거 하나는 버리고 하나는 얻었다 생각해요.’
‘그게…… 뭔데요?’
뭔가 알 것 같지만 스스로 인정하기 싫었던 동만의 물음에 이주한은 잔인할 정도로 냉정히 답했다.
‘자유를 버리고 아파트가 생긴 거?’
대한민국 서울에서 내 집 마련이 어려운 건 익히 알고 있지만, 몸을 받쳐서까지 가지고 싶지는……. 아니다. 괜찮은 건가. 이리한을 상대하다 보니 자신의 정신 상태도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학부모 면담 같은 이리한의 어머니와의 만남을 치르고 난 뒤 동만의 눈에 이리한이 달리 보였다. 사람이 견물생심을 가지면 안 되는 거지만 이리한 머리 위에 아파트 100평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반쪽짜리 로또에 걸린 셈 치기로 했다. 세 번 짜증 낼 거 한 번으로 줄이는 정도로 잘해 주자 단순한 이리한은 너무 행복해했다.
모든 게 다 잘 풀린 것처럼 보였다. 그토록 오매불망 소원하던 아파트가 덤으로 딸려 오는 애인도 생겼고, 이주한 부장이 가지고 온 마케팅건도 마무리 단계였다. 예상했던 대로 성적이 워낙 좋아 마케팅 1부서 곽 과장은 자신의 승진을 내심 바라고 있는 눈치였다.
그리고 입사 동기이자 자신의 베프인 유은찬은 이틀 전부터 휴직 상태였다. 대외적으로는 휴가로 알려졌지만 회장님의 배려로 육아 휴직이 내려진 상태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과적으로 돈 많은 집에 시집가 잘 살고 있는 녀석을 보니 마음이 좀 놓였다.
가끔. 아주 가끔 연락 한 통 없는 유은찬이 미울 때도 있지만, 그래도 나비하고 까망이가 태어나면 보여 주기는 하겠지? 녀석들 볼 날만 학수고대하는 중이었다.
오늘도 동만은 휴가를 떠난 유은찬의 일까지 떠맡게 됐다. 늘 있는 일이니 그러려니 하지만 산더미처럼 쌓인 일을 보며 한숨부터 나왔다. 서류를 뒤적거리던 중 곽 과장의 콧소리에 일할 맛이 뚝 떨어졌다.
좀 전에 사내 게시판에 올라온 글을 보고 흥분한 게 틀림없었다. 인사과 직원으로 추정되는 누군가 갑자기 인사과 발령이 떨어졌다는 속보를 적었다. 1년에 한 번 있는 발령은 이미 끝난 상태였기에 누군가 마케팅 1부서의 단체 승진이 아니냐는 뇌피셜을 쏟아 냈다. 물론, 그런 드라마 같은 일은 없을 것이다.
자신의 승진을 확정 지은 곽 과장은 벌써부터 김칫국을 마시고 있었고 동만은 일개미처럼 열심히 일을 해야 하는 이 현실이 참담했다.
[동만 씨, 엄마랑 가구 보러 왔는데. 침대는 큰 게 좋겠죠?]
[동만 씨. 식탁은 이게 좋아요. 이게 좋아요?]
사진 첨부 여섯 장. 한눈에 봐도 고가로 보이는 가구였다. ‘네 마음대로 하세요.’ 건조하게 이 말을 써서 보내려다가…….
[다 괜찮네. 하고 싶은 거 해. ^^]
끝에 눈웃음 이모티콘까지 넣어 주는 센스. 이거 하나면 이리한 오늘 하루 종일 웃고 다닐 거다. 마치 신혼집 살림을 사듯 녀석은 아침부터 어머니와 함께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하아……. 신이시여. 정녕 제 인생은 이렇게 끝나는 것입니까. 오늘도 또 그 기도를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여전히 신의 대답은 없었다. 그때였다. 팀원 중 한 명이 괴성을 지르며 호들갑을 떨었다.
“헉…… 대박!”
“오오오! 김동만 씨!”
뜬금없이 제 이름이 호명된 동만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남자하고 동거는 게 소문이라도 났나 싶어서.
“김동만 씨 축하해요!”
“네? 무슨…….”
축하? 무슨 축하? 김동만 인생에서 이 회사에 입사 말고 축하받을 일이 있던가. 없다. 진짜 들켰나 보다. 유은찬 이 망할 고양이! 절대로 소문 안 내겠다고 약속했으면서! 괜한 유은찬을 욕하고 있을 때 다른 팀원이 다가와 동만의 등을 퍽 쳤다.
“완전 초고속 승진인데? 나 사원에서 대리로 초고속 승진하는 사람 첨 봤다니까? 김동만 씨도 혹시 이주한 부장님처럼 그런 거 아니야? 알고 보니 우리 회사 간부 아드님. 뭐, 그런 거?”
“진짜……. 이럴 줄 알았으면 동만 씨한테 잘 보일걸.”
설마요. 저는 평범한 집안의 아들입니다만. 그들과 마찬가지로 어안이 벙벙한 동만은 재빨리 사내 게시판으로 직행했다. 이미 그곳에는 사원 김동만의 대리 발령에 난리가 난 상태였다. 딱 한 가지 동만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유은찬이었다.
고양이는 은혜를 갚는다더니. 고맙다, 유은찬! 이렇게 갚을 줄은 몰랐다. 감동에 벅찬 동만이 울먹울먹 거릴 때 등 뒤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좀 전까지 콧노래를 부르던 곽 과장이 무서운 표정으로 뒤통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팀원들은 곽 과장의 추태를 애써 외면하며 동만을 위로했다.
“동만 씨가 이해해. 안 되셨잖아. 이번에는 진짜 승진하는 줄 알고 그렇게 난리를 치셨는데.”
“그러게요. 마음 넓은 동만 씨가. 아니지, 김 대리님이 이해하세요.”
“오, 이 주임. 빠른데? 벌써부터 김 대리 쪽으로 줄 선거야?”
“뭘 그렇게까지 확대 해석 하세요. 승진하셨으니까 대리님을 대리님으로 부르는 게 죄예요?”
그동안 갖은 멸시와 핍박을 받아온 동만에게 이 대리와 이 주임의 아부는 낯설다 못해 부담으로 다가왔다.
“김 대리님 아직 애인 없으시죠? 제 친구 중에 괜찮은 애 있는데, 어떻게 한 번 주선해 드려요?”
“어허! 이 주임. 찬물도 위아래가 있지. 나 먼저! 김대리 우리 둘째 처제 알지? 왜, 그때 한 번 사진 보고 예쁘다고 했잖아. 한번 만나 볼래?”
이래서 남자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가 보다. 한 번만 만나게 해 달라고 애원할 때는 처제 혼삿길 막힐 일 있느냐고 냉정하게 거절하더니 이 대리의 태세 전환에 동만은 입안이 썼다. 이 주임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능력도 외모도 재력도 기준 미달이라는 이유로 거절하더니 이번에는 동만이 그 제의를 깔끔하게 거절했다.
“아, 저 이제 소개팅 안 해요.”
“왜? 애인 생겼어?”
“설마…… 그분?”
그분이 누구를 칭하는 건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리한 일 것이다. 회사 직원도 아니면서 뻔질나게 얼굴도장을 찍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동만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요. 저 여자 좋아합니다.”
“어? 아니야?”
“네? 아…….”
뭐야, 이 반응. 다들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동만을 곁눈질했다. 승진까지 한 마당에 동만은 더 이상 게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싶지 않았다. 물론 남자를 사귀고 있지만 적어도 회사에서만큼은 평범한 남자로 보이고 싶었다.
“이제 소개팅에 연연하지 않기로 했어요, 그냥 개 한 마리 키우면서 살아 보려고요.”
“개? 개 키우세요? 오피스텔 애완동물 키우는 거 금지 아니에요?”
“나갈 거예요. 거기서 키우려고요.”
“이사도 하신다고요? 봐 두신 개 있어요? 무슨 개예요?”
이주임의 물음에 동만은 이리한과 어울리는 개를 떠올렸다.
“골든 리트리버?”
“진짜요? 그거 큰 집에서 키워야 할 건데? 대리님! 나중에 집들이 하실 거죠? 저희 불러 주실 거죠?”
안 된다. 집에는 이리한이라는 미친개가 항시 상주해 있을 예정이었다. 그리고 팀원일 뿐이지 그다지 친하지도 않은 이들이 이러는 것도 웃겼다.
직위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단 몇 분 만에 동만은 거만한 자세로 그들과 마주했다.
“글쎄요……. 생각해 볼게요.”
“혹시 우리가 다 들어가기에는 집이 너무 좁아서 그래?”
농담처럼 던진 이 대리의 가시 돋친 말에 동만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한 달 전 영혼까지 끌어 모아 대출받고 아파트를 산 이 대리의 의기양양한 모습에 코웃음을 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러워 죽을 지경이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제 김동만은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것을 다 가진 존재였다. 언젠가는 제 명의가 될 아파트도 한 채 생겼고 돈 많은 애인도 옵션으로 딸려 왔으며 승진도 했다. 물론, 그 애인이 남자라는 게 단점이지만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동만은 괜히 머리를 쓸어 넘기며 혼잣말하듯 말을 흘렸다.
“100평밖에 안 되는데 보여 줄 것도 없고 그래서 집들이 같은 건 안 하려고요.”
“100평……? 진짜? 거짓말 아니고?”
“저 허언증 없거든요? 100평 그거 별로 안 큰데. 다들 그런데 사는 거 아니에요? 하, 하하.”
동만의 허세에 모두 표정이 굳어졌다. 얼마 전까지 게이라고 손가락질하더니 부러워 죽겠지? 급속도로 표정이 어두워지는 그들을 보며 동만은 속이 뻥 뚫렸다. 그리고 획 하니 몸을 돌려 회사 홈페이지 공지 사항에 올라온 정식 인사 발령문을 확인했다.
[마케팅 1부서 김동만. 발령 내용 대리로 승진. 발령 일자 오늘.
정기 인사에서 상기와 같이 승진 발령되었음을 알려 드립니다.]
몇 번을 보고 또 봤다. 곽 과장의 분노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사무실의 분위기는 살얼음판 같았지만, 동만은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부모님께도 이 기쁜 소식을 알리자마자 난리가 났다. 잘만 하면 빠른 시일 내에 곽 과장하고 맞먹을 수도 있겠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한참 승진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을 때였다.
불길한 손님이 찾아왔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선 김 실장의 등장에 일동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회장님의 직통 비서였으니 직원들에게는 그 또한 어려운 존재였다.
“김 실장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승진 누락의 쓴맛을 본 이후 넋이 나가 버린 곽 과장은 김 실장을 보자마자 단숨에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왔다.
“아, 안녕하세요. 별일 아니니까 다들 일 보세요. 저는 김동만 씨한테 볼일이 있으니까.”
“네?”
갑작스러운 부름에 동만은 엉거주춤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김 실장이 무슨 일로 온 걸까.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찜찜했다. 혹시 승진이 잘못된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그가 동만을 찾을 이유는 없었다. 곽 과장이 승진 되어야 하는데 착오로 자신이 된 거라고 한다면 어쩌지?
이미 부모님께 다 자랑한 뒤였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 자리에서 혀 깨물고 죽어 버릴 테다. 김 실장의 입을 빤히 쳐다보며 동만은 마른침을 삼켰다.
“승진 축하합니다. 지금 이 시간 이후로 부서 이동 할 겁니다. 필요하신 거 챙기세요.”
다행히 최악의 상황은 없었다. 소리 나게 안도의 한숨을 쉰 동만은 반 박자 늦게 그 말을 이해했다. 부서 이동?
“네?”
“승진과 동시에 부서 이동 발령 났습니다.”
마케팅 1부서를 떠난단다. 혹시 이거 승진을 빙자한 퇴직 권고 아닐까? 순간 또 다른 망상에 빠진 동만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대로 굳은 채 낯빛이 하얗게 질려가는 동만을 지켜보던 김 실장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동만의 곁으로 다가온 그가 나지막이 귓속말을 했다.
“혹시 있을지 모를 사원들의 반발심 때문에 인사 발령문에 공백으로 해 놓았습니다. 간단히 필요한 것만 챙기고 따라오세요.”
“……지금 당장이요?”
“네, 지금.”
그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 마지못해 짐을 챙기는 동만의 감정은 참담했다. 좀 전까지 축하한다고 입 아프게 떠들던 팀원들은 동만과 눈이 마주칠세라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저기…… 김 실장님?”
“빨리 가시죠.”
동만은 비어 있는 제 옆자리를 물끄러미 보았다. 이건 마치 높으신 분들의 비밀을 알고 있어 쫓겨나는 그런 느낌이랄까. 육아 휴직에 들어간 유은찬한테 인사도 못 했는데 이렇게 떠나게 될 줄이야. 입사한 이래 지금까지 몸담아 온 부서를 떠난다니 발걸음이 무거웠다.
가방을 둘러메고 필요한 것만 몇 가지 챙겨 김 실장의 뒤를 따르기 전, 동만은 마지막으로 사무실을 쭉 둘러봤다. 그 순간 동만과 눈이 마주친 곽 과장은 아주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하여간 재수 없는 인간이라니까.
조용히 김 실장의 뒤를 따라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 앞에서 선 동만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어느 부서로 가는지 알 수 있을까요?”
“…….”
“혹시…… 저 쫓겨나는 건가요?”
“…….”
김 실장은 침묵했고 그 침묵은 동만을 극도로 불안하게 만들었다.
“맞죠? 저 잘리는 거죠? 그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알아서는 안 될 걸 너무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라서 쫓아내는 그런 거!”
흥분한 동만이 주절주절 말을 하기 시작할 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김 실장은 표정 변화 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랐고 동만도 뒤를 따랐다. 이윽고 문이 닫히자마자 김 실장의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이 열렸다.
“제2 비서실입니다.”
“네?”
“김동만 씨 발령지. 제2 비서실.”
제2 비서실. 그 말을 듣자마자 너무 놀란 동만은 들고 있던 작은 상자를 툭 떨어뜨렸다. 바로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지만 기쁨의 포효를 막지 못했다.
“악! 아악! 엄마야! 아버지, 부처님, 하느님! 이게 무슨 일이야! 진짜요? 저 진짜 비서실로 가는 거예요? 리얼?”
“네.”
“진짜! 진짜, 진짜로요?”
“네에.”
동만의 거듭된 물음에도 김 실장은 전혀 귀찮은 기색 없이 친절히 대답했다. 회장님의 모든 업무를 관리하는 비서실의 총 책임자가 하는 말이니 확실할 것이다. 존재감 없는 마케팅 1부서에서 엘리트만 뽑는다는 비서실로 초고속 승진을 하게 된 동만은 이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세상에. 내가 출세를 하다니!
“저도 오늘부터 비서실인가요?”
“네. 그럼요.”
비서실. 가끔 비서실 직원들이 지나갈 때마다 동만은 동경의 시선을 던졌다. 같은 사원임에도 그들은 다른 세상에서 일하는 것 같았다. 그들의 목에 걸린 사원증에 비서실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조차도 부러웠다.
동만은 비서실 직원들처럼 아메리카노를 들고 복도를 유유히 걷는 제 모습을 상상했다. 비서실 김동만이라는 사원증을 당당히 목에 걸고 있는 모습을 말이다. 상상만으로도 짜릿했다.
조금 전 바닥으로 떨어뜨린 상자를 다시 품에 안은 동만은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지만 쉽지 않았다. 자꾸만 웃음이 터졌다.
“제가 그런데 들어가도 되는지 모르겠네요.”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김동만 씨는 늘 하던 대로 해 주시면 됩니다.”
하던 대로란다. 동만은 지금껏 자신이 하던 일을 떠올려봤다. 말단 사원이 하는 일은 늘 정해져 있었다. 위에서 자료 정리한 것을 던져 주면 그걸 문서로 작성하는 것. 마케팅 2부서에서 넘겨 준 서류를 정리하는 것. 그런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설마 거기서도 그러고 있지는 않겠지. 뭐, 상관없다. 엘리트들만 있는 비서실에 발을 들인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거니까. 갑자기 초조해진 동만은 자신을 어필할 필요성을 느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조용히 나서는 김 실장의 등에 대고 다급하게 조잘거렸다.
“저 워드 프로세서 1급 자격증 있고 컴퓨터 활용 능력 2급 자격증 있습니다! 뭐든 시켜만 주신다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김 실장님!”
조용한 복도에 동만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우뚝 멈춰선 김 실장이 뒤를 돌아 동만과 마주했다. 정적 속에서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동만을 빤히 응시했다. 회장실이 있는 층이라서 그런지 조용해도 너무 조용했다. 긴장한 동만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김동만 씨.”
“네! 김 실장님!”
“영어 잘해요?”
못 한다. 대학교 때 필리핀 단기 어학연수를 간 게 단데 거기서 잘못 배운 억양 탓에 회화는 포기했다. 동만은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독일어, 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중국어, 러시아어. 이중에 하나라도 잘하는 거 있습니까?”
순간 기가 팍 죽은 동만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걱정 마세요. 저도 그런 걸 바라고 김동만 씨를 비서실로 부른 건 아닙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냥 하시던 대로 하시면 됩니다.”
그러니 여기서도 문서 작업 신세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동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김 실장의 눈에 띄어 출세 가도를 달려 보자는 당찬 포부가 생겼다.
“제가 언어는 좀 딸리지만 다른 거는 잘합니다!”
“예를 들어서요?”
예를 들어? 뭐가 있더라……
“전화 받는 거라든지……. 아니면 라면 끓이기?”
미친. 거기서 라면이 왜 나와! 동만이 라면만 끓이면 은찬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고 하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아, 라면. 김동만 씨 라면 잘 끓인다면서요?”
“네? 아…… 네. 하하, 하…….”
김 실장은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비서실을 코앞에 두고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동만은 서둘러 주제를 바꿨다.
“여기죠?”
드디어 비서실로 입성하는구나. 반투명한 문을 앞에 두고 열기 직전 김 실장은 동만을 불러 세웠다.
“김동만 씨.”
“네?”
손잡이를 잡은 채 멈춘 동만은 김 실장의 손가락이 향한 곳으로 자연스럽게 시선이 따라갔다. 그의 손가락 끝은 저 멀리 복도 끝을 가리켰다. 뭐지? 멍청하게 눈만 깜박이고 있는 동만을 향해 그는 다시 친절하게 설명했다.
“거기는 제1 비서실이고 김동만 씨가 발령받은 부서는 제2 비서실입니다.”
“제2 비서실이요?”
그런 곳도 있었나? 처음 들어보는 부서 이름에 동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만이 알고 있기로는 회사 비서실은 하나뿐이었다.
“생긴 지 얼마 안 됐습니다.”
“아…….”
“회장님의 특별 지시로 생겼습니다. 회사 기밀을 담당하는 부서라서요. 회장님께서 직접 김동만 씨를 추천하셨습니다.”
거기서 동만은 한 번 더 놀랐다. 회장님이 잊지 않고 자신을 이렇게 불러 주시다니. 그날 유은찬을 회장님께 고이 넘긴 일은 돌이켜 생각해 보면 너무 잘한 짓이었다. 수인들이 이렇게 은혜를 잘 갚고 착한 줄은 몰랐다.
“회장님께서요?”
“네.”
“저를요?”
“네에.”
입꼬리가 귀에 걸린 동만은 제1 비서 팀을 버리고 복도 끝자락을 향했다.
“그럼, 제가. 회장님의 신임을 받고 있다…… 뭐 그런 말인가요?”
“그런 셈이죠. 회장님께서 김동만 씨를 눈여겨보고 계십니다.”
세상에……. 엄마, 아버지. 노후는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이 아들 여기서 능력을 인정받아 뼈를 묻을 것 같습니다.
“회장님이 보는 눈이 엄청 높으시네요. 제가 이래 보여도. 보기보다 능력 있다니까요? 마케팅 1부서에서 썩을 인재는 아니죠.”
“그럼요.”
“회사 기밀이라는 게 뭔가요? 재무 담당? 아니면 회장님의 사적인 스케줄?”
“눈치가 빠르시네요. 비슷합니다.”
오. 태어나서 눈치 빠르다는 말은 처음 들었다. 역시, 사람은 자신의 진가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니까. 이윽고 복도 끝자락 제2 비서실 앞에 도착했다. 제1 비서실과 달리 두꺼운 나무 문에 도어 록이 설치되어 있었다. 한눈에 봐도 비밀스러운 냄새가 났다.
“팀원은요?”
“업무에 따라서 나뉜 것뿐이지 이곳도 제가 관리할 겁니다. 제2 비서실은 김동만 씨와 같은 직급인 팀원 한 명이 답니다. 그 외 보충될 인원은 없습니다.”
같은 직급이면 눈치 볼 일도 없을 테고 완전 좋은데? 흥분한 동만은 김 실장이 문을 열어 주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문이 열리는 순간 환한 미소와 함께 사무실 안으로 한걸음 들어선 동만은 즉시 뒷걸음질 치며 황급히 문을 닫았다.
내가 방금 뭘 본 거지? 당황한 동만이 현실을 부정하는 사이 친절한 김 실장은 다시 문을 활짝 열었다.
“이것 봐! 끝내주지? 이거 보라니까? 백화점에서 젤 비싼 거 사 왔다니까!”
“시끄러워. 필요 없다니까!”
“왜에. 동만 씨하고 잘되게 해 준 거 고맙다고 사 온 선물이잖아! 이것 봐라? 애들 신발 완전 귀엽지?”
“왜 개 발 모양 신발이야! 야, 개! 너 지금 나한테 시비 거는 거지?”
“어? 그러네.”
이곳이 제2 비서실인가. 족히 30평 정도 돼 보이는 넓이에 책상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소파와 침대. 티브이와 식탁. 그리고 간단한 부엌 용품. 이곳이 사무실인지 원룸인지 구별하기도 힘들만큼 꾸며진 그곳에 유은찬과 이리한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말문이 막힌 동만은 김 실장을 빤히 쳐다봤다. 그는 지금까지 하던 대로라 했다. 제발 자신의 불길한 예감이 아니라고 해 주길 바랐지만, 김 실장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동만의 등을 툭 떠밀었다.
“앞으로 김동만 씨와 함께 할 팀원 유은찬 대리입니다. 회장님께서 김동만 씨에게 거시는 기대가 아주 큽니다. 무슨 말인지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회장님의 특별 지시니만큼 모쪼록 싸우지 말고 잘 지내 주세요.”
이제야 동만은 자신이 왜 이곳에 왔는지 알아챘다. 망할 고양이를 겨우 떨쳐 냈더니 이번에는 종신 노예 계약으로 스스로 걸어온 것이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화도 나지 않았다. 동만은 현실을 외면했고, 은찬은 반가운 목소리로 그런 동만을 불렀다.
“야, 김동만! 오랜만이다?”
은찬이 던진 무언가가 허공을 가르고 날아와 동만의 머리를 치고 툭 떨어졌다. 신생아 신발이다. 그것도 개 발 모양.
“야, 그거 이 개가 너 주려고 사 왔대!”
“아니라니까! 네 거라니까!”
“난 개 발 따위 우리 애들한테 안 신겨! 고양이 자존심이 있지.”
유은찬이 던진 신발을 줍기 위해 달려온 이리한은 동만을 보며 해맑게 웃었다. 백화점에서 가구 본다던 놈이 여기에 있는 것도 이상했지만 유은찬이 던진 걸 계속 주우러 다니는 모습에 헛웃음이 터졌다.
승진에 행복하던 김동만은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처참할 정도로 우울한 동만만이 남았다. 조용히 상자를 내려놓은 동만은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지금 당장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면 그만일 테지만 그렇게 된다면 회사를 그만둬야 했다.
자존심이냐 회사냐. 두 개의 갈림길에서 고민하던 동만은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수인도 아닌데! 왜 이렇게 수인 놈들이 달라붙는 건데!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난 그저 고양이를 좋아하는 평범한 남자일 뿐이라고!
동만의 소리 없는 절규는 그렇게 묻혀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