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김동만이 아래였다. 사내 게시판에 적힌 김동만의 변강쇠 설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뇌피셜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이리한에게서 직접 들은 내용이니 이것이 팩트였다. 은찬은 옆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김동만을 슬그머니 훔쳐보았다.
어쩐지……. 엉덩이를 툭 쳤을 뿐인데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라니. 사람하고 달라서 수인 성기는 꽤 컸을 텐데. 생애 첫 섹스를 거기부터 개통했으니 얼마나 아팠을까. 김동만을 향한 유은찬의 시선 속에는 동정과 측은지심. 그리고 이 상황을 누구보다 즐기고 있는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뭐냐.”
“어?”
“왜 아까부터 자꾸 힐끔거려. 신경 쓰이게. 할 말 있어?”
할 말 있지. 많지. 이주한 방에 갔다가 이리한을 만났는데. 그 개자식한테 몇 가지 소스 좀 던져 주니까 너하고 있었던 일을 쿨하게 자백하더라? 아래라며? 이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은찬은 가볍게 웃음으로 넘겼다.
“곽 과장은? 뭐래?”
“뭐라긴. 뻔하지. 팀이 왜 팀이냐. 같이 열심히 으쌰으쌰 해야 팀 내 점수도 올라가고 다 같이 승진할 기회도 노릴 수 있는 거 아니냐. 뭐 그딴 개 같은 소리?”
“본인이 잘해서 승진할 생각을 해야지. 허구한 날 저 지랄을 하니까 승진을 못 하지.”
곽 과장을 오징어 씹듯 잘근잘근 씹던 은찬은 무의식중에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곽 과장과 눈이 마주쳤다. 불과 얼마 전까지 이주한이 앉아 있던 자리라서 저도 눈이 간 것 같다. 아, 씨발. 마주쳤어. 속으로 욕을 하면서 은찬은 어색하게 웃었다.
예전이었다면 싸늘하게 외면했을 곽 과장의 태도는 확연히 달랐다. 부처 같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김동만과 수다 떠는 장면을 조용히 묵인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동만은 짧게 혀를 차며 작게 속삭였다.
“봤지? 아주 자비롭다 못해 승천하시겠다. 저렇게 줄 잘 서는 사람도 드물걸? 이제 니가 곽 과장의 승진 동아줄인가 보다.”
“썩은 동아줄이겠지.”
“황금 동아줄이지. 이 부장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고 회장님이 너 데리고 간 것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돈데. 지금 무슨 소리 안 들리냐?”
“무슨 소리? 아무 소리 안 들리는데?”
“곽 과장 머리 돌아가는 소리. 지금 저 녹슨 머리를 엄청 굴리고 있을 거다. 아무리 네가 회장님이 공인해 준 사이라고는 하지만 남자니까 결혼은 안 될 거고. 그러면 공식 정부쯤? 그래도 너한테 잘 보이면 차장이나 부장까지는 가지 않을까. 하는 그런 스토리 라인을 만들고 있겠지.”
뭐가 재미있는지 동만은 혼자 키득 키득 웃었다. 미안하지만 은찬은 동만의 말에는 흥미가 없었다. 대신 앞으로 벌어질 김동만의 미래를 떠올리며 키득거렸다.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며 웃고 있는 모양새가 동상이몽이 따로 없었다.
“아, 맞다. 야. 아까 말한 소개팅 말인데.”
“어? 왜, 잡혔어? 누군데? 회사 사람 아니지? 나이는? 예뻐?”
동만은 대놓고 반색했다. 생기 없던 눈을 반짝이며 기대에 찬 시선을 던졌다. 그렇다면 그 기대에 보답하는 게 인지상정이지.
“내가 말했지? 나만 믿으라고. 너 소개해 달라고 나한테 그렇게 매달렸다니까? 멀리서 너 봤는데 완전 이상형이라잖아. 첫눈에 반했대.”
“진짜? 어디서 봤는데? 나도 아는 여자분이야?”
“글세……. 아무튼 할 거야 말 거야! 빨리 대답해 줘야 해.”
“누구지? 회사 사람은 아니지? 확실하지?”
진지하게 기억을 더듬기 시작하는 동만에게 은찬은 양심의 가책 따위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미안, 김동만. 난 여자라고는 안 했다.
“당연하지. 회사에 너 게이라고 소문났잖아. 누가 너랑 소개팅하겠냐?”
은찬이 아무렇지 않게 던진 말에 김동만의 표정이 서늘해졌다. 어금니를 꽉 깨문 녀석은 모든 것을 은찬의 탓으로 돌렸다.
“그게 누구 때문인데! 그냥 내 말대로 부장이랑 처음부터 사귀었으면 내가 피 보는 일도 없었잖아!”
“이리한이랑 잔 건 내가 시킨 게 아닌데?”
“…….”
시작이야 어떻든 남자랑 잔 건 사실 아닌가. 은찬의 도발에 동만은 숨죽여 분노했다.
“내가 그 개자식 이름 꺼내지 말라고 했지!”
그딴 경고. 은찬은 아무렇지 않게 무시하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점심밥 먹으러 가자는 이주한의 메시지가 왔다. 시선은 핸드폰에 고정한 채 은찬은 귀찮다는 투로 동만을 재촉했다.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빨리 말해. 나 바빠.”
“콜. 당연히 해야지.”
“알았어.”
급하긴 급한가 보다. 망설임 없이 냉큼 외친 김동만은 일어서려는 은찬을 잠시 막았다.
“야. 사진 있어?”
“어?”
“보통 사진 교환하거나 아니면 연락처 교환하잖아.”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평소에는 별 신경도 쓰지 않던 놈이 오늘따라 예민하게 굴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은찬은 일부러 혀를 차며 타박했다.
“야! 금방 막 대답해 놓고서 뭐가 이렇게 급하냐? 순서가 있지. 그쪽한테 물어보고 사진을 주든 전화번호를 주든 할 거 아니냐.”
“아, 맞다.”
녀석이 머쓱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었다. 다행히 위기를 잘 넘긴 은찬은 동만의 어깨를 툭툭 쳤다.
“나 밥 먹고 올 테니까 너는 그 시간에 사우나라도 갔다 오든가. 이왕 하는 거 깔끔하게 보이면 좋잖아.”
“그럴까? 니가 보기에는 어때? 느낌 좋아? 잘될 거 같아?”
지금껏 소개팅에서 단 한 번도 승률을 올린 적 없던 김동만이 기대에 부풀어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여자가 아니라 남자고, 그 상대가 이리한 이라는 것을 알면 분명 길길이 날 뛰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주한과 동만을 엮어 주려는 건 복수가 아니라 일종의 고양이 보은이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듣자 하니 이리한이 재벌 집 아들이란다. 그런 놈이 별 볼 일 없는 김동만이 좋다고 죽자 살자 매달리는데 지금껏 보살펴 준 도리로 도와줘야 인지상정이지. 김동만 소원이 한강 보이는 고층 아파트에 사는 건데 평생 이 회사에서 열심히 일개미처럼 일해 봤자 아파트는커녕 전세금도 마련하지 못할 신세라는 건 뻔했다.
그러니 동만아, 날 너무 원망하지 마. 어차피 여자한테 인기도 없으니 이편이 너한테 좋잖아. 이리한이 원하는 대로 해 줘야 그 개자식이 이주한을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여러모로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은찬은 기대에 부풀어 있는 김동만에게 긍정적인 메시지를 날렸다.
“완전 좋아. 잘되면 나중에 한턱 쏘기?”
“당연하지 인마!”
지금이라도 그 기분 즐겨둬. 은찬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김동만을 남겨 두고 문으로 향했다. 뭐 먹을까. 점심 메뉴를 생각하며 문을 열자 그 앞에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주한이 있었다.
“왜 이렇게 늦게 나와.”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투덜거리는 이주한은 귀여웠다.
“빨리 나온 건데요? 점심시간 20분 전이잖아.”
“눈치 보지 말고 그냥 나오라니까. 배 안 고파? 뭐 먹을까? 먹고 싶은 거 다 말해 봐.”
“음음……. 육회도 먹고 싶고, 삼겹살도 먹고 싶고, 딸기도 먹고 싶고.”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어 가며 말하자 그가 그 손을 깍지 껴 잡았다. 두 사람에 대한 소문을 모르는 이가 없다 해도 회사에서 대놓고 이러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복도를 지나는 그들 곁으로 스쳐 지나가는 사원들의 쏟아지는 시선에 은찬은 쭈뼛거렸지만 그는 덤덤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주한이 굳은 은찬을 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사내 커플은 이렇게 해도 되는 거 아닌가?”
“네?”
“우리. 너하고 나 사내 커플이잖아. 공인된 사이 아닌가? 게시판에 우리 지분도 꽤 있던데.”
“……아.”
“점심시간이니까. 이렇게 해도 상관없잖아. 그렇지?”
“뭐…….”
이주한 목소리가 얼마나 달달한지 저도 모르게 고양이 귀가 뿅 하고 튀어 나왔다. 엘리베이터 문에 반사된 이주한은 그런 은찬을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싫지 않던 은찬은 그와 깍지 낀 손을 꽉 잡았다.
“나 배고파요, 많이. 아까 말한 거 다 사 줄 거예요?”
“얼마든지.”
“계속 이렇게 손잡고 다녀요?”
“그럴까 하는데.”
“밥은 어떻게 먹으라고?”
“내가 먹여 주면 되지.”
진짜 사내 연애는 이런 맛에 하는가 보다. 뭔가 기분이 간질간질했다. 이 순간만큼은 누구도 부럽지 않을 만큼 행복한 은찬은 이주한의 팔에 얼굴을 비비며 그르렁거렸다. 저도 모르게 나온 행복의 골골송이었다.
***
지금껏 수많은 소개팅을 해 봤지만,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자는 사람은 또 처음이다. 선도 아니고 첫 만남부터 격식을 차여야 할 것 같은 느낌이랄까. 커피숍에 들어서기 전 긴장한 동만은 화장실로 직행했다.
세면대에서 손을 씻으며 오랜만에 잔뜩 멋을 부린 제 모습을 훑었다. 좋다. 나쁘지 않다. 유은찬 말대로 점심시간에 사우나에 들려 때 빼고 광낸 보람이 있었다. 동만은 물에 젖은 손으로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심호흡을 했다.
‘이분이야? 진짜? 이쁜데? 장난 아닌데? 완전 내 이상형인데?’
‘……그래? 다행이다.’
동만은 퇴근 시간 전 은찬에게 건네받은 사진 한 장에 흥분했다. 비록 얼굴이 반밖에 보이지 않은 사진이었지만 살짝 웨이브 진 긴 생머리를 한쪽으로 늘어뜨린 모습이 청초해 보였다. 무엇보다 우수에 찬 눈빛에 오뚝한 콧날. 촉촉한 붉은 입술. 연예인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완벽한 얼굴이었다. 동만은 첫눈에 반했다.
‘고맙다, 유은찬! 너밖에 없다니까! 나 진짜로 잘해 볼게!’
은찬은 그런 동만을 뚫어지게 보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잘해 봐.’
‘당연하지! 내가 이번에는 진짜 성공하고 만다!’
망할 그 개새끼 따위는 잊어버리고 그녀와 함께하는 미래를 머릿속에 그려 봤다. 예쁜 아내와 토끼 같은 자식을 낳고 알콩달콩 사는 제 모습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그래, 이게 정상이지. 핸드폰을 꺼내 다시 한번 그녀의 사진을 확인한 동만은 거울 속 제 모습을 응시하며 기합을 불어넣었다. 파이팅! 김동만!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없다! 잘해 보자! 그렇게 다짐하며 비장한 표정으로 화장실을 나섰다.
커피숍 안으로 들어선 동만의 눈은 그녀를 찾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고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다른 테이블은 다들 일행이 있었지만, 창가 쪽 동만을 등지고 있는 여자 한 분만 혼자였다.
그녀라는 것을 직감한 동만은 망설임 없이 그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불과 몇 걸음 남겨 두고 우뚝 멈춰 섰다. 뭔가 이상했다. 멀리서 볼 때는 몰랐지만 가까이에서 보니 여자치고는 꽤 어깨가 넓었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든 동만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설마 이리한은 아니겠지? 에이, 설마…….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의 뒷모습을 숨죽여 응시했다. 그러다 이내 피식 웃었다. 이리한한테 며칠을 시달리다 보니 말도 안 되는 상상까지 하는 스스로가 웃겼다.
더군다나 이건 유은찬이 직접 다리를 놔 준 소개팅이었다. 유은찬과 이리한. 둘 사이가 친하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에 의심할 가치도 없었다. 어깨가 넓긴 했지만, 동만의 이상형에 가까운 그녀였다. 그 정도쯤이야 사랑으로 커버하면 그만이었다.
그녀와 간격이 좁혀질수록 불안감과 기대감이 동시에 동만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이윽고 그녀의 앞에선 동만은 목소리를 깔았다.
“안녕하세요. 저기 오늘 소개팅…….”
“아, 네.”
수줍게 고개를 내리깐 그녀의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얼른 맞은편에 앉아 정면을 응시한 동만의 얼굴은 서서히 굳어졌다. 맙소사.
“하…… 씨발.”
맞은편에 앉은 이리한을 보자마자 진심이 가득 담긴 욕설이 튀어나왔다.
“안녕하세요. 이리리예요.”
수줍게 자신을 소개한 이리한은 그런 동만을 향해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지만, 오히려 역효과만 가져왔다. 얼굴에 어둠이 드리워진 동만은 이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허탈감이 밀려와 다리에 힘이 풀렸다.
완벽한 이상형이었던 내 그녀가 이리한이라니…….
“이리한 씨.”
“이리리예요.”
이 개자식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하다 하다 이제 여장까지 할 줄이야. 그런데 더 짜증 나는 건 그 여장이 어색하지 않다는 거다. 왜 이렇게 잘 어울리는 건데!
동만은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기분이 나락으로 떨어진 그는 그저 입안이 썼다.
“누구 생각입니까?”
“뭘요?”
새초롬하게 흘러내린 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긴 이리한의 모습이 어색하지 않았다.
“이거, 이 자리 만든 거! 유은찬? 아님 그쪽? 아니다! 알아서 뭐 해! 둘 다 다시는 안 볼 건데!”
“왜요? 내가 나 와서 실망했어요? 아닌데. 긴 생머리에 청순가련형 좋아한다고 해서 나름 신경 쓴 건데.”
아니. 그게 아니잖아! 이리한은 뭐가 잘못된 것인지 요점을 모르는 것 같았다. 동만은 속에서 욱하고 올라온 걸 겨우 참았다. 상대는 자신보다 더 눈치 없는 이리한이다. 참자. 릴렉스.
“뭐가 별로예요? 옷? 아님 화장? 가발? 나 이거 청담동 숍에 가서 다 한 건데.”
맨정신에 그걸 해 달라고 했다는 게 더 신기했다. 동만은 이리한의 말을 가만히 듣다 보면 자신의 상식이 비정상처럼 느껴졌다.
“유은찬하고 짜서 나 가지고 노니까 재미있어요?”
“나 동만 씨 가지고 논 적 없는데. 유은찬 씨 잘못 없어요. 내가 도와 달라고 사정 한 거예요.”
“사정한 게. 이거, 여장해서 나랑 만나는 거? 하아…….”
답답함에 긴 한숨을 내쉰 동만은 핸드폰을 꺼내 좀 전까지 자신을 흥분시켰던 그 사진을 들이밀었다.
“이거, 누굽니까?”
“나요.”
빼꼼히 그 사진을 훔쳐본 이리한의 대답에 동만은 콧방귀를 꼈다. 지금 모습이 위화감이 없어도 사진 속 인물과는 전혀 달랐다. 사진은 여신 그 자체였다.
“다르거든! 전혀 다르잖아!”
동만이 버럭 화를 내자 이리한이 턱을 괴며 말했다.
“필터. 요즘 셀카 필터가 얼마나 좋은데. 진짜 예쁘게 잘 나왔죠?”
“하, 필터…….”
기가 찼다. 필터 사진에 홀라당 넘어간 자신이 한심해 죽을 지경이다. 고작 이리한 따위나 만나려고 점심도 거르고 사우나를 갔다 온 건가 싶다. 단숨에 기운이 빠진 동만은 연거푸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내 팔자에 무슨 소개팅이냐. 유은찬, 이 망할 고양이 자식! 은혜를 원수로 갚아? 너 내일 죽었어! 집에 가서 소주나 마시다가 자야겠다. 화낼 기운조차 사라진 동만은 맞은편에 앉은 이리한을 힘없이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다음에 또 이러면, 그땐 진짜.”
“오빠.”
이리한의 입에서 튀어나온 오빠라는 호칭에 동만은 흠칫했다. 동만이 알고 있기엔 그가 더 나이가 많았다. 도대체 저한테 왜 이러세요. 고객님.
“오빠, 우리 이제 뭐 할까요? 리리는 밥 먹고 좀 걷고 싶은데.”
너는 밥 처먹고 좀 걷는 게 아니잖아. 걷기 대회 하니? 걷다가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니? 이리한과 만나는 동안 평생 걸을 걸 다 걸은 것 같았다. 그대로 더 걷다가는 도가니가 나갈지도 모른다.
“이리한 씨.”
“이리리.”
“…….”
“이리리요.”
누가 이 자식 좀 말려 줬으면 좋겠다. 곧 죽어도 여자란다.
“야!”
“왜요. 오빠?”
제발 턱을 괸 체 그렇게 보지 말았으면 좋겠다. 동물 특유의 귀여운 표정에 동만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자꾸 이럴 거예요?”
“내가 오죽하면 이럴까. 그런 생각 안 해 봤어요?”
“안 하면 되잖아요. 안 하면!”
“핸드폰은 차단한 것 같고. 만나 주지도 않고. 나만 보면 피해 버리잖아요. 보고 싶었다고요, 많이. 이주한 찾아가서 만나게 해 달라고 내가 그 짓까지 했는데. 내가 수인이라서 싫어요? 남자라서? 그래서 이렇게 꾸미고 왔잖아요.”
핸드폰 차단한 거 맞고 만나 주지 않고 피해 버린 것도 맞다. 남자에다 수인이라서 싫은 것도 맞지만 이렇게 꾸미고 왔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을까? 거기까지는 잘 추리했으면서 마지막은 왜 모르는 거냐. 싫다고. 정상적으로 살고 싶다고!
이 자식의 머릿속에는 도대체 뭐가 들어 있는 걸까.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드러난 동만의 표정은 착잡했다. 그래, 이런 정성이 갸륵해서라도 한번은 따로 만나 줄 용의는 생겼다. 단, 남자 이리한의 모습으로.
“알았으니까, 오늘은 그냥 가고 다음에 봐요. 내가 연락할 테니까.”
“다음에 언제요? 그렇게 말하고 안 할 거면서. 싫어요! 지금 데이트해요! 나 위에 호텔 방까지 잡아 놨단 말이에요!”
“…….”
도망쳐. 동만의 머릿속에서 또 다른 동만이 그렇게 외쳤다. 단지 소개팅에 불과한 자리인데 호텔 방까지 잡았다는 소리에 동만은 기겁했다. 저 녀석 머리에는 다 계획이 짜여 있는 거다. 그러니 또 당할 수는 없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동만이 도망치려고 할 때였다.
“이리한.”
“어?”
“여기 웬일이야. 오랜만이다. 그 꼴은 뭐야. 새로운 놀이야?”
멋진 슈트 차림의 잘생긴 남자가 이리한을 알아보고 다가왔다. 이주한을 늘 보다시피 하니까 이제 웬만큼 잘생겨도 놀랍지가 않았다. 놀라운 건 그 남자는 이리한의 여장 모습에 딱히 놀라지 않았다는 거다. 그저 새로운 놀이로 치부하며 피식 웃을 뿐이다.
동만을 따라 엉거주춤하게 일어서던 이리한이 그 남자를 향해 씨익 웃었다.
“어때? 잘 어울려?”
“너야, 워낙 귀여우니까.”
남자의 손이 꺼릴 것 없이 이리한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그치? 내가 한미모 하지.”
이리한은 그 손길을 뿌리치지 않고 오히려 좋아했다. 뭐야, 저 개자식. 아무한테나 꼬리 흔들잖아? 불쑥 등장한 낯선 남자와 이리한을 조용히 보고 있던 동만은 왠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순간 도망쳐야 한다는 것도 망각한 채 두 사람을 빤히 지켜보았다.
“오늘 시간 있어?”
“오늘? 왜?”
남자의 물음에 이리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쁜 일 없으면 20분 정도만 기다릴래? 잠깐 누구 좀 만나기만 하면 되거든. 오랜만에 만났는데 맛있는 거 사 주고 싶어서. 혹시 이분이랑 약속 있는 거면 다음에 만나고.”
그제야 남자는 멀뚱하게 서 있는 동만을 의식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존재감이 없었던 동만은 이상하게 속이 뒤틀렸다. 남자는 동만의 위아래를 노골적으로 훑으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누구?”
“어? 음…… 그게…….”
지금껏 잘도 떠들어 대던 이리한이 처음으로 난처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하! 이 자식 봐라? 싫다는 사람 거머리처럼 달라붙어서 귀찮게 하더니. 이제 와서 모른 척하려는 태도에 동만은 기분이 더러워졌다.
필시 저 남자는 이리한의 예전 애인 중 한 명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놈이 이렇게 얌전하게 있을 리가 없었다. 왠지 모를 묘한 정적에 괜히 심통이 난 동만은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거래처 담당자입니다.”
“네? 거래처 담당자? 아아…… 그분. 이 녀석 새 남친?”
“아직은 아니야.”
“아직도 애먹고 있는 거야?”
“뭘 그렇게 꼬치꼬치 물어.”
“궁금하니까 그렇지.”
또 이런다. 그들은 동만을 앞에 두고 마치 없는 사람처럼 대화를 이어 갔다. 남자는 익숙하게 이리한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이리한은 뚱한 표정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헤어졌으면 끝인 거지 옛 애인의 애정 전선도 관리해 주는 마인드. 이것이 말로만 듣던 할리우드 마인드인가. 수인은 원래 그런 건가. 아니면 저 바닥이 그런 건가. 동만이 가지고 있는 윤리 의식의 개념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무튼 약속 없지? 기다려.”
“꼭 이럴 때만 제멋대로더라.”
남자의 일방적인 태도에 이리한은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핑크색 립스틱을 바른 입가에 옅은 미소가 맴돌았다.
데이트하자며! 밥 처먹고 산책하자며! 방까지 잡아 뒀다며! 이리한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방금까지 자신에게 꼬리를 흔들던 개가 곧바로 다른 놈에게 꼬리를 흔드는 꼬락서니에 동만의 심사가 뒤틀렸다. 뭐? 충성심? 이딴 게 충성심이냐?
“저하고 약속 있는데요!”
더 이상 무시는 사절이다. 동만은 두 눈을 부릅뜨고 그 남자를 빤히 쳐다보며 다시 한번 강조했다. 이 개는 오늘 스케줄이 꽉 차 있다고 말이다.
“저하고 밥 먹고, 산책하고……. 그러기로 했습니다만!”
물론 호텔 방에 관한 건 뺐다. 어때? 너도 기분 더럽지? 어디서 알짱거려? 남자를 향해 의기양양한 시선을 던졌건만 그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화를 낼 줄 알았더니 짐짓 놀랍다는 표정으로 이리한을 곁눈질했다.
그 시선을 따라 이리한을 쳐다본 동만은 괴기한 표정으로 히죽 웃고 있는 녀석과 시선이 마주쳤다. 한눈에 봐도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다. 뭐야? 왜 그렇게 웃는 건데. 녀석이 웃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 동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들었지? 그렇다네. 동만 씨가.”
“뭐야. 진즉에 그렇게 말하면 됐잖아.”
“우리 데이트해야 하니까. 방해하지 말고 얼른 가. 형.”
“아쉽네. 오랜만에 큰형 부를까 했는데. 너 이렇게 꾸민 거 보면 큰형 엄청 좋아할 건데.”
“됐거든?”
“나중에 집에 한번 그러고 와.”
“됐다니까! 가서 일이나 해!”
이리한은 귀찮다는 투로 남자의 등을 떠밀었다. 큭큭 웃으며 강제로 자리를 떠나던 남자는 동만에게 눈인사를 던졌다. 멍하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동만은 이들이 형제라는 사실에 마지막 남은 멘탈이 무너졌다.
“오빵.”
형이 떠나자 다시 이리리 캐릭터로 돌아온 이리한은 윙크를 던졌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린 동만은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스스로 도망갈 타이밍을 버렸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동만은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소리 없는 절규를 했다.
울고 싶다. 왜 그랬을까. 생각 없이 지껄인 제 혀를 콱 깨물어 버리고 싶었다.
“……저 사람.”
“아. 우리 둘째 형이요. 나가요, 우리. 뭐 먹을까요?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착잡한 동만의 마음도 모르고 이리한은 재촉했다. 잠시 둘 사이에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뭐라 말해야 흥분한 이리한을 진정시킬 수 있을까. 동만이 고민하고 있을 때 이리한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밥 생각 없으면 바로 위로 올라가도 되는데.”
“…….”
“그러고 보니까. 데이트하기에도 시간이 애매하다. 그쵸? 지금 딱 방에 올라가기 좋은 시간이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며 이리한은 욕망에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렇게 말했다. 정확히 따지자면 두 사람은 아무 사이도 아니다. 비즈니스로 만난 것뿐이지 이 자식과 이렇게 엮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김동만의 연애관은 사귀는 사이가 아니면 자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 나이 먹도록 동정이었던 것이다. 이리한의 연애관은 한눈에 봐도 동만과 반대였다. 풀 개방형인 녀석은 누군가와 쉽게 잘 수 있을지 몰라도 동만은 안 된다.
이참에 이 자리에서 명백히 거부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결심을 굳힌 동만은 비장한 표정으로 녀석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리한 씨.”
“이리리.”
“…….”
다행인줄 알아라. 만약에 유은찬이었다면, 애초에 그놈은 이런 귀찮은 짓은 하지 않을 테지만. 아무튼 유은찬이었으면 귀에서 피 나도록 욕을 했을 거다. 어금니를 꽉 깨문 동만을 말을 이었다.
“나는 누군가를 사귀기 전에 여러모로 심사숙고하고 고민해 보는 타입이라서요.”
“…….”
“선뜻 사귀는 게 쉽지 않거든요 물론 그쪽이 남자이고 수인이라는 점이 조금 부담스럽기도 하고……. 네, 솔직하게 말하자면 싫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이러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서로 곤란하니까. 그만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때 일은 실수였습니다. 그쪽도 나도 실수.”
몇 번이나 말했지만 이리한은 그 일을 실수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진심이었다고 말하는 그에게 동만은 다시 한번 쐐기를 박았다. 침착하게 말을 이어 가던 동만은 웬일인지 침묵하는 이리한이 불안했다. 눈시울이 붉어진 녀석은 동만과 시선이 마주치자 훌쩍이며 소리쳤다.
“실수! 실수! 자꾸 실수라고 하는데! 어떻게 사람이 그래요? 할 거 다 했다고 나 버리는 거죠?”
“……!”
뭐라는 거야? 뜬금없는 이리한의 시추에이션에 동만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하자고 했잖아! 그래서 한 거잖아! 한번 잔 뒤부터 쌀쌀맞고 나 만나 주지도 않고! 내가 이렇게까지 매달리는데!”
이리한은 커피숍에 울릴 정도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울먹였다. 그리고 동만은 그곳에 있는 모든 이들의 뜨거운 시선을 받았다. 그중에는 이리한의 둘째 형도 포함되어 있었다. 저 멀리서 날아온 살기 가득한 시선에 동만은 자연스럽게 수명이 단축되는 것 같았다.
“……이리한 씨.”
“내가 어떻게 하면 돼요? 어떻게 하면 나 만나 줄 거예요?”
기어이 이리한은 울음을 터트렸다. 제삼자가 본다면 덩치는 좀 있지만 예쁜 여자가 몹쓸 남자에게 버림받는 모양새. 딱 그 짝이었다. 당한 건 나라고! 저 개자식의 큰 좆 때문에 화장실도 못 가고 연고만 덕지덕지 바른 처참했던 3일의 기억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왜 네가 이러는 건데! 왜!
“저기, 이리한 씨?”
좀 닥쳐 달라고 애원하려던 찰나. 누군가 동만의 어깨에 턱 하니 손을 얹었다. 가히 위협적인 그 손짓에 동만은 손의 주인이 누구인지 짐작이 갔다.
“내 동생을 울렸겠다.”
“…….”
좀 전의 행동으로 보건대 저 망할 이리한을 끔찍이 아끼는 둘째 형이다. 자연스럽게 영업용 미소를 장착한 동만이 어색하게 웃고 있자 이번에는 이리한이 쇄기를 박았다.
“형! 동만 씨가 나랑 안 사귄대! 할 거 다하고!”
저 개 자식! 치사하게 형한테 이르냐! 멋대로 해석한 이리한의 말은 둘째 형의 심기를 건드렸다. 형의 눈빛이 한층 더 살벌해졌다. 그렇다고 여기서 자신이 깔린 거라고 주장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잘못한 건 없지만, 죄를 지은 듯한 기분에 휩싸인 동만은 사회인답게 빠르게 대처했다.
“아닙니다. 그런 거.”
“……그런데 내 동생이 왜 저럴까. 내 동생 가지고 장난쳐?”
“아니요. 그럴 리가요.”
“그러면 울리지 말아야지.”
이리한이 왜 버릇없이 제멋대로 날뛰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동만이 마른침을 삼키며 눈치를 보고 있자 어깨뼈가 으스러진 것처럼 아팠다. 이리한의 둘째 형은 손가락까지 근육이 있는 모양이다. 그는 동만의 침묵에 손에 더 힘을 꽉 주었고 살기 위해 동만은 입을 열어야 했다.
사람이 심리적으로 압박을 받으면 잠시 기억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어디선가 들었다. 동만이 지금 그랬다. 정신을 차려 보니 동만은 이리한과 침대 위였다. 가발을 벗어 버린 이리한은 긴 원피스를 입은 채 동만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우리 이제부터 진짜 사귀는 거죠?”
이리한은 수줍게 속삭이며 동만의 맨다리를 쓸어 내렸다. 자신이 알몸 상태라는 것을 알아챈 동만은 좀 전에 자신이 던진 말이 팍 떠올랐다.
‘사귀려고 했어요. 지금부터.’
얼떨결에 이리한의 형에게 두 사람 사이를 공표해 버렸다. 더 놀라운 건 동생이 남자와 사귄다는데도 형이라는 남자는 전혀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잘됐다는 식으로 이리한에게 축하 인사를 던졌다. 이것이 드라마에서만 보던 미국식 마인드를 가진 집안인가…….
둘째 형의 축복에 잠시 넋이 나간 동만은 그대로 호텔 방으로 끌려왔다. 그리고 지금 이 상태였다.
“잠, 잠깐만!”
“왜요?”
동만이 잠시 딴생각에 빠진 사이. 이리한은 동만의 반쯤 발기한 성기를 입 안에 넣고 정성껏 빨고 있었다.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문제는 녀석이 너무 잘 빤다는 것이다. 눈을 질끈 감은 동만은 한숨과 같은 신음을 터트렸다.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지금껏 자위만으로도 성욕을 다스릴 수 있었건만 한 번의 섹스는 동만을 타락의 길로 인도했다.
“할, 할 거야? 진짜?”
“그럼요? 사귀는 사이니까 해도 되잖아요.”
춥춥. 딱딱하게 선 동만의 성기를 맛있게 핥는 야한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서서히 밀려오는 야릿한 쾌감에 동만은 시트를 우악스럽게 움켜잡았다. 이래도 이리한을 뿌리치느냐 현실을 받아들이느냐 그것을 두고 내적 갈등을 하던 동만은 마침내 지긋지긋한 이 일의 종지부를 찍었다. 남아일언 중천금. 까짓것 한번 사겨 보지 뭐.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 그 옷 좀 벗자!”
“옷이요? 아, 이거.”
열심히 동만의 성기를 핥던 이리한이 고개를 들어 씨익 웃었다. 녀석은 단번에 원피스를 벗어 던졌고 그 안에 숨겨진 근육질 몸매를 뽐냈다. 같은 남자지만 자신과 너무나 차이가 날 정도로 몸이 완벽했다.
입을 떡 벌린 채 천천히 몸매를 감상하던 동만의 시선은 마침내 봐서는 안 될 것을 보았다. 자신의 항문을 파열 시킬 뻔 했던 그것이 오늘따라 더 우람해 보였다. 가히 사람의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야! 나 안 해!”
“또 왜요!”
“너 내가 저번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밥만 먹고 좆만 키웠냐?”
“처음에는 다 그래요. 익숙해지면 큰 게 좋아요.”
“니가 어떻게 알아!”
반쯤 남은 연고를 떠올린 동만은 진저리를 치며 이리한에게 버럭 소리쳤다. 그 와중에도 이리한은 손을 잠시도 가만히 두지 않았다. 동만의 가슴을 만지작거리며 젖꼭지를 가지고 놀다가 엉덩이와 허벅지를 가볍게 쓸어내렸다. 그의 손길이 지나가는 곳마다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이 일렁였다. 확실히 경험이 없는 동만보다 능숙한 솜씨였다.
“나도 해 봤으니까.”
“……뭐?”
“이왕 하는 거 큰 게 좋다니까요?”
이리한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팔을 뻗어 탁자 위에 있는 무언가를 잡았다. 그것은 콘돔이었고, 그 콘돔을 제 성기에 끼우려고 노력했지만 평균보다 큰 수인 성기에 맞지 않았다. 결국,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던져 버린 이리한은 다른 뭔가를 손바닥에 짰다. 딸기 향이 나는 그것의 정체는 젤이었다.
“너! 그럼 니가 아래해!”
또다시 그 고통을 맛보고 싶지 않았던 김동만의 외침을 이리한은 가볍게 무시했다.
“안 돼요. 나한테 넣고 싶거든 이거 나보다 더 크게 키우고 와요. 그럼 하게 해 줄게요.”
녀석은 가소롭다는 듯 딱딱하게 발기한 동만의 성기를 손가락 끝으로 튕겼다. 그리고 젤을 엉덩이 구멍의 주름에 덕지덕지 발랐다. 부끄럽게도 말과는 달리 그 손길 하나만으로도 동만은 부르르 떨었다.
“그건 의사도 못 고치는 거잖아!”
“동만 씨가 나한테 박힐 때마다 헐떡이는 게 좋더라.”
그렇게 말하며 이리한은 동만의 허벅지 안쪽을 혀로 쓸어내렸다. 하…… 이 변태 새끼. 이젠 나도 모르겠다. 전생에 뭔 죄를 지었길래 수인의 시중을 들어야 하냐고. 망할 고양이 놈 시집보내니 이젠 개가 달라붙어 이러고 있다.
이 상황에서도 녀석의 크고 단단한 성기는 구멍 주위를 탁탁 치며 워밍업을 하고 있었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동만은 조용히 숨을 삼켰다. 모든 것을 체념하니 마음이 한결 편했다.
“저번처럼 피 나거나 하면 죽인다.”
“그래도 좋았으면서.”
“야! ……헉.”
곤혹스러울 정도로 큰 성기는 예고도 없이 단숨에 내벽 끝까지 파고들었다. 장기가 위로 밀려 올라간 듯한 느낌. 그 압박감에 동만은 숨을 헐떡이며 미간을 찡그렸다.
“아파요?”
처음보다는 덜한 것 같은데 솔직히 아직은 잘 모르겠다. 겨우 그 감각에 익숙해지려고 할 때 고개 숙인 이리한이 동만의 목덜미를 핥으며 속삭였다.
“나 잘할게요. 동만 씨한테 잘할게요. 그러니까 개도 좋아해 줘요. 네?”
동시에 허리를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언가에 쫓기듯 필사적으로 움직이는 허리 때문에 동만은 대답 대신 신음밖에 지를 수 없었다. 박히고 보니 큰 게 좋긴 좋다.
“아. 아아! 하아, 아! 아, 좋아! 거기……! 아, 아아!”
동만의 교성이 점점 더 커질수록 이리한은 허리를 더 세차게 움직였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지 모른다고 했던가. 늦은 나이에 섹스에 눈을 뜨게 된 동만은 이리한의 허리 짓에 맞춰 몸을 흔들며 그를 재촉했다. 그들의 밤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