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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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생각지도 못한 증손자가 생겼다. 그것도 두 명. 원체 자손이 귀한 집안이다 보니 경사도 이런 경사가 없었다.

좋은 일이긴 하나 고양이 핏줄이 섞였다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초음파 사진만으로는 녀석들이 표범인지 고양이인지 알 수가 없으니 더 애가 탔다. 이왕이면 표범으로 태어났으면 좋으련만.

일이 있어 호텔에 들른 이태한 회장은 내친 김에 근처 백화점까지 발걸음했다. 그가 직접 백화점까지 들린 일은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백화점 사장까지 내려와 맞이했다. 잠시 들른 것뿐이라 소란 떨 필요 없다고 말했지만, 이태한 회장은 백화점 내에 있는 신생아 용품을 모조리 VVIP실에 옮겨 놓았다.

명품 유모차부터 시작해서 수인용 기저귀까지. 세심하게 관찰하는 이태한 회장의 눈빛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난데없는 상황에 당황한 백화점 사장은 어색하게 웃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선물하실 건가 봅니다, 회장님.”

“선물이라……. 따지고 보면 선물이지.”

대외적으로 이태한 회장의 직계 존속은 아들과 손자 각각 한 명뿐이었다. 손자 이주한이 결혼 적령기였지만 아직 미혼이라는 것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주변에 아이가 있을 턱이 없으니 당연히 누군가의 선물이라 단정 짓는 것이다.

“중요한 분이신가 봅니다. 회장님께서 직접 고르실 정도면.”

백화점 사장의 영업용 미소를 조용히 무시한 이태한 회장은 김 실장이 들고 있는 옷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김 실장.”

“예, 회장님.”

“그거 괜찮네. 그 옆에 것도 괜찮고. 두 개씩 주문해.”

“예, 회장님. 아. 이건 어떠십니까. 모자인데 수인용이네요. 귀가 나올 수 있게 뚫려 있고.”

“괜찮네. 그것도 해.”

“너무 많이 사시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일단 급하게 필요한 건 사 놨고 엄마 취향도 고려해야 하니까요.”

“그래?”

김 실장의 만류에 이태한 회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백화점 사장이 슬며시 대화에 끼어들었다.

“김 실장님 말이 맞습니다. 선물도 좋지만 나중에 산모하고 같이 오셔서 고르시는 게 어떠십니까. 요즘은 명품 회사에서 나온 유아용품도 몇 가지 있습니다. 요즘 엄마들은 그런 걸 선호하죠.”

백화점 사장이 눈짓을 보내자 직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순식간에 눈앞에 명품 로고가 새겨진 유아용품이 진열됐다. 본디 이태한의 증손자라면 이런 것쯤은 해 줘야겠지만 김 실장이 코앞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렸다.

“회장님.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고양이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둬야 합니다. 강압적으로 나가면 더 화만 돋우는 거 기억하셔야 합니다. 엄마가 가지고 싶은 거. 엄마가 원하는 거. 그게 제일 좋은 거죠.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김 실장이 그렇게 말하니 더는 구매할 필요성이 없을 것 같았다. 아쉽지만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음을 기약했다.

“바쁜 사람 괜히 붙잡은 것 같네. 오늘은 시간이 없어서 이렇게 가지만 다음에 우리 증손자들 태어나면 같이 오지.”

“아닙니다. 다음에…… 예? 증손자…요? 회장님 손자분이 결혼을 했나요? 아직 미혼인 걸로…….”

백화점 사장은 당혹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이태한 회장은 이곳에 온 이후 처음으로 호탕하게 웃으며 별일 아니라는 듯 말을 흘렸다.

“요즘 애들이 빨라. 얼마나 빠른지 증손자부터 냅다 안기지 뭔가. 둘이라네, 둘. 그럼 다음에 오도록 하지.”

“아, 예. 감사합니다. 아래까지 모셔다…….”

“됐네. 일 보게.”

이태한 회장은 배웅 나오려는 백화점 사장을 만류하고 그곳을 나와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어제부터 그의 기분은 조금 들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앙칼진 그 고양이를 포획한 이후였다.

김 실장은 그런 이태한 회장을 훔쳐보며 연신 웃음을 터트렸다. 엘리베이터 문에 웃고 있는 김 실장이 비쳤다.

“많이 좋으신가 봅니다.”

“뭐가.”

“증손자 생기신 거 말입니다.”

“그럼, 좋다마다.”

여우 녀석, 꼬투리 하나 잡았다고 좋아하기는. 평소라면 한마디 했을 테지만 오늘은 묵인해 줬다. 영악한 여우 수인 김 실장 덕분에 어렵지 않게 유은찬을 데려올 수 있었다. 혹시 모르니 치즈 캐러멜을 챙긴 것도 김 실장이었다. 고양이는 치즈를 좋아한다며 말이다.

“회사로 돌아갈까요. 아니면 집으로 모실까요.”

퇴근하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이미 다른 목적지를 생각해 뒀다. 차에 오른 이태한 회장은 뜬금없이 이주한 행방을 물었다.

“주한이가 출근했다가 도로 집으로 갔다고.”

“네, 출근하고 한 시간도 채 안 돼서 갔다고 합니다.”

“녀석, 어지간히 좋은가 보네. 그 아이는 계속 집에 있고?”

“도우미 아주머니는 돌려보냈고 그 뒤 작은 도련님과 집에 계속 있다고 합니다.”

“김 실장.”

“네, 회장님.”

“고양이 수인이 좋아할 만한 게 뭔가. 먹는 거 말이네.”

“네?”

“저녁때이기도 하고. 배가 그렇게 부른 데 어디 다니기도 힘들 거 같으니 잠시 들렀다가 그것만 주고 나올까 싶기도 해서.”

사실 그렇게라도 한 번 더 부른 배를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오전 중에 주치의인 김 선생과도 다시 전화 통화도 했던 터였다. 희박하지만 가능성이 없지도 않다.

이 일을 두고 김 실장은 오히려 전화위복이라 했다. 고양이는 다산하는 종족이니 증손자가 더 생길지도 모른다는 김 실장의 말은 이태한 회장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

“고양이니까…… 생선을 좋아하지 않을까요?”

“생선.”

“가령, 회나 초밥 같은 거 어떠십니까.”

고양이니까 생선. 생각해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김 실장 의견이니 틀림없을 것이다. 이태한 회장은 망설일 것 없이 주문했다.

“유명한 횟집 알아보고 거기서 제일 비싼 자연산 포장 주문해.”

“네, 알겠습니다.”

고양이라는 점이 성에 안 찼지만 대가 끊길까 봐 가슴 졸이는 것보다는 녀석 덕분에 자손이 번성하는 것도 괜찮을 듯싶었다. 그들은 20분을 달려 자연산 참돔 회를 포장해 다시 30분을 달려 이주한 아파트까지 도착했다.

이런 수고스러움 일까지 마다치 않고 하게 만든 고양이 녀석. 자신을 영감이라 부르던 그 녀석이 아직은 좋게 보이지는 않았다.

점점 나아지겠지. 그리 마음을 먹고 이주한의 집 앞까지 당도했다. 그를 대신해 따라온 김 실장이 벨을 눌렀다. 집 비밀번호는 이미 알고 있지만, 예의상 그리했다. 곧바로 문을 연 이주한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들어가마.”

어차피 반기지 않을 걸 알고 온 것이다. 그는 집주인의 허락도 없이 안으로 성큼 들어가 조용한 거실을 휙 둘러봤다.

“그 녀석은.”

“유은찬이요. 이름 아시면서.”

“그래, 그 녀석. 고양이.”

“자요. 왜 오셨어요? 말도 없이.”

“지나가다가 들렸다.”

건조하게 대답했지만, 이주한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 당연했다. 지금껏 그가 이런 식으로 이 집에 쳐들어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한숨을 내쉬며 의미 없이 주위를 둘러봤다. 이곳에 온 의미가 없어진 이태한 회장은 잠시 앉아 있던 소파에서 막 일어나던 참이었다.

그때 방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유은찬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주한의 것으로 보이는 큰 셔츠를 입은 녀석은 졸음이 가득한 눈을 비비며 거실로 걸어왔다.

“왜 나왔어. 더 자지.”

“배고파서요. 몇 시예요? 나 밥. 어? 회장님.”

유은찬은 이태한 회장을 보자마자 이주한의 등 뒤로 몸을 숨겼다. 막 잠에서 깬 흐트러진 모습. 고양이 귀와 꼬리가 나온 걸 보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짙은 정사 냄새가 거실 가득 베여 있었다.

“배고프다니 잘됐다. 딱 맞춰서 왔네. 김 실장.”

현관 앞에 서 있던 김 실장은 빠르게 움직여 소파 테이블 위에 포장을 풀었다.

시중에서는 보기 힘들다는 진짜 자연산 참돔 회. 그것을 펼치는 순간 치즈 캐러멜을 먹던 것처럼 눈을 반짝일 것으로 예상했지만, 어쩐 일인지 유은찬의 반응은 영 시원치 않았다. 자연산 참돔 회 따위에는 흥미가 없는지 소파 끝에 앉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배고프다며. 얼른 먹어.”

이태한 회장이 직접 일회용 젓가락을 내밀며 먹어 달라 애원했건만 유은찬은 단호했다.

“나 회 싫어하는데.”

“…….”

“치킨 없어요? 족발이나. 아니면 닭발도 괜찮은데.”

이태한 회장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김 실장을 응시했다. 김 실장, 고양이는 생선이라며. 살기를 느낀 것인지 김 실장은 의도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이거 놔 둘 테니까. 먹고 싶으면…….”

“안 먹어요. 나 이런 거 안 먹어. 형, 나 치킨. 족발.”

“…….”

저걸 사기 위해 한 시간 가량을 소비했다. 그런 자연산 참돔회가 버림받는 순간 이태한 회장의 표정도 싸늘해졌다. 물론, 모든 비난의 화살은 당연히 김 실장에게 쏟아졌다. 자네는 나가면 죽었어. 암묵적인 의미가 담긴 시선에 김 실장은 덜덜 떨기 시작했다.

“가시게요?”

“가야지. 가서 할 일이 태산이다. 지나가다 들린 거니 신경 쓸 필요 없다.”

“안녕히 가세요.”

현관으로 향하던 길. 이태한 회장은 따라 나오지 않는 손자가 괘씸해 어깨너머를 훔쳐봤다.

검정고양이가 요물은 요물이다. 이주한은 팔에 매달려 부비적거리는 고양이의 애교에 푹 빠져 있었다. 소파에 밀착한 채 앉아 서로의 꼬리를 칭칭 감고 있는 모습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이태한 회장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그려졌다.

불청객이 된 이태한 회장은 그 집을 나서자마자 김 실장에게 쏘아붙이려 했다. 하지만 영악한 여우 수인 김 실장의 눈치는 늘 빨랐다. 싱긋 웃으며 재빨리 입을 재잘거렸다.

“저렇게 있으니 두 분 참 잘 어울리네요.”

“김 실장!”

“유은찬 씨 말입니다. 귀하고 꼬리털을 보니까 완전 검정고양이 같던데. 작은 도련님하고 저렇게 있으니 표범과 흑표범처럼 보이던걸요? 이런 걸 두고 천생연분이라 하는가 봅니다.”

욱하고 올라오던 노기가 쑥 들어간 이태한 회장은 입꼬리가 실룩였다.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고양이지만 이주한 옆에 있으니 귀하디귀한 흑표범처럼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 그렇게 보여?”

“네, 두 분 깨가 쏟아지던데요? 미리 축하드립니다, 회장님. 어쩌면 증손자 야구단 하나 만드실지 모르겠습니다.”

“에이. 그 정도는…….”

애써 부정하며 말끝을 흐렸지만, 이태한 회장의 광대가 승천하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생각해 보니 검정고양이가 나쁜 것만도 아니다. 애교도 많은 것 같고……. 잠시 생각에 잠긴 이태한 회장은 자신을 힐끔거리며 웃고 있는 김 실장과 마주친 시선에 헛기침을 터트렸다.

“회장님이 이렇게 좋아하시는 거 작은 도련님이 태어난 이후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감격에 겨워하는 김 실장을 지긋이 바라보던 이태한 회장은 차에 오르는 그를 말렸다.

“자네는 여기 남아.”

“네?”

영문 모를 이태한 회장의 행동에 김 실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들었잖아. 치킨하고 족발 먹고 싶다고. 사 주고 퇴근해. 가지.”

참돔의 복수였다. 그대로 차를 출발시키자 반쯤 열린 창문 너머 김 실장의 절규가 들렸다.

“요즘 배달 어플이 얼마나 좋은데오오오! 회장니이이임!”

여우의 간사한 혀는 제법 쓸모가 있지만, 가끔 흘려들어야 할 때가 있는 법.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이태한 회장은 북적이는 증손자들을 상상하며 피식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일이었다.

***

“유은찬, 아무래도 이건 아닌 거 같다. 다시 생각해 보자. 그만두라는 게 아니잖아. 산후 휴가 받고 애 낳고 좀 쉬다가 다시 복귀하면 되잖아.”

차에서 내리기 전 이주한은 한 번 더 은찬을 잡고 매달렸다. 출근하겠다고 확정 지은 어제부터 이러더니 회사 지하 주차장에서까지 이런다. 은찬이 없다고 회사가 안 돌아가는 건 아니겠지만 무단결근 3일째를 넘어가는 순간 제자리가 사라질까 봐 불안했다. 물론 그 소식을 들은 회장도 허락할 수 없다는 말을 전해 왔다.

회장과 이주한. 둘 다 결단코 반대를 했지만 그런다고 들을 은찬이 아니다. 은찬은 이주한의 손을 쳐 내며 인상을 팍 썼다.

“내가 어제도 말했지만 나 산후 휴가 쓸 생각 없다니까요? 남자가 임신했다고 뉴스에 나올 일 있어요? 가뜩이나 출세 때문에 부장님 꼬신 수인이라고 낙인찍힌 마당에. 딱 2주만 더 개기다가 휴가랑 월차 다 때려 박고, 애 낳고 좀 쉬다가 복귀할 거라니까요? 그게 내 원래 계획이었다고 몇 번을 말해요. 자꾸 입 아프게 할래요?”

“아침 일찍 출근해서 하루 종일 앉아 있는 것도 일이야. 너 그 몸으로 힘들다고!”

알고 있다. 그래도 지금까지 꾸역꾸역 잘 버텨 왔고 앞으로 조금만 버티면 됐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참견하는 그가 달갑지 않아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혼자서 잘했거든요?”

“내가 신경 쓰인다고. 너 때문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거 같다고.”

“그건 부장님 사정이고.”

3일 만에 형에서 부장님으로 바뀐 존칭 때문에 이주한은 인상을 구겼다.

“왜 부장님이야?”

“회사니까요.”

“출근 도장 안 찍었으니까. 아직 아니야. 네가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데, 만에 하나.”

회사 지하 주차장에 도착한 이후 20분째 이러고 있었다. 은찬은 자신을 과잉보호하는 이주한이 답답했다. 집에 있을 때도 은찬이 시야에서 벗어나면 따라와 지켜보던 그였다.

“걱정 말라니까요. 나 배고프면 형이 준 카드 들고 편의점 가서 왕창 사 먹을 거고, 졸리면 형 방에 가서 잘 거니까. 됐죠?”

“말은 잘해요.”

결국 주한은 은찬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그는 피식 웃으며 은찬의 머리를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누가 귀찮게 하면 말해. 당장 혼내 줄 테니까.”

“게시판을 안 봐서 모르겠지만 내가 그날 회장님한테 끌려가는 거 봤다면 이미 소문 퍼졌을 거고. 우리 사이 다 들통 났는데 어떤 미친놈이 그런 짓을 하겠어요. 아, 맞다. 형은 봤죠? 치사하게 말을 안 해 주냐. 나 뭐라고 적혀 있어요?”

지금껏 잊어버리고 있다가 이제야 사내 게시판 상황이 걱정됐다. 진지한 은찬과 달리 이주한은 픽 웃기만 웃는다. 뭔가 감추고 있는 느낌이랄까? 미간을 찡그리고 눈을 가늘게 떠도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뭔데요! 사람 궁금하게 하지 말고!”

“궁금하면 가서 봐. 우리 이야기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큰 센세이션을 일으킨 사건이 있으니까.”

“센세이션?”

“가자. 이러다 늦겠다.”

무슨 말인지 알다가도 모를 말에 은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까?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며 차에서 내린 이주한의 뒤를 쫓았다.

사흘 만에 처음으로 사무실에 얼굴을 내민 은찬은 입사 이래 처음으로 곽 과장의 환대를 받았다. 아부의 대왕 곽 과장은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일찍 왔다는 말로 말문을 열었다. 지하 주차장에서 설전을 벌인 탓에 15분 지각했는데 말이다.

일단 3일 무단결근한 것에 대해 시말서를 쓰겠다고 하자 곽 과장은 손사래를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리고 한다는 말이 불편한 점 있으면 어려워하지 말고 말하란다. 이래서 사람이 권력을 쥐어야 하는 건가.

곽 과장뿐만이 아니라 팀원들까지 은찬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다들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눈을 반짝였다.

“야. 사람이 왔는데 인사도 없냐?”

부담감을 느끼며 자리에 앉자마자 은찬은 바로 옆자리에 있는 동만의 옆구리를 콕 찔렀다. 그때 자신을 그렇게 보낸 것에 대한 앙갚음으로 머리라도 한 대 치고 싶었지만 어째 녀석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시선을 피하는 느낌이었다.

“……왔냐?”

목소리에도 힘이 없다.

“그래 왔다. 김동만 너 내가 이 갈고 있어. 거기서 어떻게 날 배신하냐?”

“…….”

“나 없으니까 좋아 죽겠지? 설거지 두 번 할 필요 없고 빨래도 줄어서.”

“…….”

은찬이 중얼중얼거릴 동안 동만은 말이 없었다. 이럴 놈이 아닌데. 지랄한다고 욕하면서 콧방귀를 뀌며 반박해야 정상이었다. 이상한 동만의 태도에 은찬이 심각한 표정으로 녀석의 위아래를 훑었다.

“어디 아프냐? 혹시 나 없다고. 자유를 찾은 김동만, 밤새도록 자위한 거 아니지?”

“닥치고 일이나 해.”

농담으로 던진 말에 동만이 급정색했다. 이상하다. 진짜 이럴 놈이 아닌데. 녀석을 흘기던 은찬은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오랜만에 왔으니까 제일 먼저 할 일은 당연히 사내 게시판 접속. 마우스를 몇 번 클릭하고 별 생각 없이 화면을 훑던 중 은찬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맙소사, 이게 뭐야! 게시판이 온통 김동만 이야기로 도배되어 있었다.

“마케팅 1부서 김동만 씨 변강쇠라면서? 진짜 사람 겉만 보고 모른다니까. 그때 파트너 자지러졌다는 거 진짜야? 신음 끝내줬다면서? 거기 오피스텔 방음 최악인데 그거 몰랐나 보네. 어쩌냐. 근데 누구야. 밑에 깔린 사람? 남자라던데.”

속으로 읽는다는 게 은찬은 저도 모르게 입으로 읽어 버렸다. 너무나 또렷하게 울려 퍼진 낭독 소리에 사무실은 정적에 휩싸였다. 은찬은 입을 떡 벌린 채 반사적으로 동만을 응시했다. 이 녀석이 변강쇠? 거기 크기를 너무 잘 알고 있는 입장으로 어이없는 괴변이었다.

“김동만.”

“입 닥쳐. 한마디만 더 해 봐!”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갛게 익어 버린 동만이 울먹이듯 애원했다. 사무실 분위기를 보니 이미 이 소식을 다 알고 있는 눈치였다. 다들 숨죽여 웃고 있었다. 이러니 이주한과 은찬의 일은 묻힐 수밖에. 이주한 말대로 센세이션을 일으킬 만한 사건이었다.

“동만아. 김동만, 너…….”

“조용히 해! 제발!”

동만의 간절한 호소를 은찬은 다른 방향으로 이해했다. 왜 그동안 김동만에게서 연락이 없었는지 알겠다. 깜찍한 놈. 그사이에 연애를 하고 있었다.

“야! 너 연애해?”

“제발, 닥쳐……!”

“그게 뭐가 부끄러워! 이미 다 소문났구만! 여기 온통 네 글밖에 안 보이네! 야, 너보고 변강쇠란다! 푸하하하하.”

김동만의 등을 퍽퍽 치며 웃던 은찬은 녀석이 고통스러움에 신음을 삼키는 걸 미처 알지 못했다. 결국, 동만은 벌떡 일어나 인상을 쓰며 밖으로 획 나가 버렸다. 그런데 녀석의 걸음이 영 시원치 않다. 어디가 불편한지 어기적거리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순식간에 이 주임이 나타나 이유를 알려 주었다.

“허리 다쳤대요.”

“허리요?”

“김동만 씨는 무거운 거 들다가 삐끗했다고 하는데. 아닌 거 같죠? 그날 얼마나 대단했는지. 옆방에 있던 사람 말에 의하면 상대방을 기절 직전까지 몰아붙이더래요. 소리가 막. 어휴……. 김동만 씨 순진하게 봤더니 그런 쪽으로 소질 있나 봐요. 그쵸?”

방음 안 되는 그 집에서 얼마나 해댄 거야. 그 말을 들으니 김동만이 달라 보이긴 했다. 은찬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 주임은 더 신나게 조잘거렸다.

“근데 그 상대가 누구게요?”

“누군데요? 아세요?”

은찬은 눈을 반짝였다.

“여기 온 적 있는 분이요. 곽 과장님이 중요한 거래처라고 떠받드는 그분.”

“이리한?”

“네! 그 사람이요! 완전 놀랄 노 자죠? 그 사람…… 아무리 봐도 그렇게 매치가 안 되는데. 그쵸? 그 사람 틈만 나면 여기 와서 김동만 씨 따라다닌다니까요? 사람에게 특별한 능력 한 가지씩 있다잖아요. 동만 씨는 그건가 봐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김동만 씨 따라다니지. 아무튼, 지금 그래요.”

아, 그 개새끼. 어쩐지. 그럴 거 같더라니.

이 주임은 은찬과 마주친 시선에 활짝 웃었다. 알려 준 건 고맙지만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들의 표적이 되었던 은찬은 이런 친절이 불편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문 쪽으로 향하자 쏟아지는 시선이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예전에는 아침부터 일 안 하고 어디 가냐고 핀잔만 들었는데 이제는 그런 말도 없었다.

은찬이 의미 없이 획 돌아보자 그들은 일하는 척 움직였다. 겨우 사무실을 나선 은찬은 김동만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하루가 다르게 부른 배 덕분에 이제는 조금만 걸어도 숨쉬기가 벅찼다. 한참을 찾아 헤맨 끝에 녀석을 흡연실 안에서 발견했다.

담배를 끊었던 녀석이 다시 피우기 시작한 걸 보니 뭔가 있긴 있는 모양이다. 은찬은 흡연실 창문을 톡톡 두드려 손가락으로 옥상을 가리켰다. 고작 며칠 만에 얼굴이 많이 상한 동만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옥상에 도착한 은찬이 벤치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이른 아침부터 옥상을 찾는 직원들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옥상 문을 열고 나타난 김동만에게서 담배 냄새가 옅게 흘러나왔다. 녀석은 은찬의 옆에 앉자마자 다짜고짜 이 말부터 꺼냈다.

“야! 나 소개팅시켜 준다며! 언제 시켜 줄 건데!”

“어?”

“소개팅! 너 혹시 잊어버린 거 아니지?”

미안, 김동만. 잠시 잊고 있었다. 미세하게 동공 지진을 일으킨 은찬은 이 위기를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그럼, 다 생각해 두고 있었지! 청순한 스타일이랬……지?”

“됐고. 일단 나랑 소개팅할 사람이 있긴 있지?”

찾으면 있기야 하겠지. 다만 상대방에게 김동만이 눈에 찰 리가 없다는 명백한 사실에 선뜻 말하기가 그렇다는 게 문제랄까.

어쩌지. 호기롭게 큰소리는 뻥뻥 쳤지만 은찬은 입안이 바짝 말랐다. 하지만 이제 와서 못 하겠다고 할 수는 없었다. 김동만의 표정에서 비장함이 보였다. 안 된다고 하면 은찬을 당장 옥상에서 던져 버릴 기세였다.

“이 자식이, 날 어떻게 보고! 야! 당장 오늘 잡아 봐? 어?”

“으아아아아아아!”

일단 지르고 본 은찬의 말에 동만은 좋아하기는커녕 난데없이 절규했다.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울부짖는 녀석은 괴로워 보였다. 왜 이러지? 이리한하고 잘 되고 있는 거 아닌가? 종잡을 수 없는 동만의 괴기스러운 행동은 은찬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너…… 이리한. 그 사람하고.”

“그 개자식 이름 내 앞에서 꺼내지 마!”

이리한. 그 이름 하나에 서슬 퍼런 눈을 한 김동만은 은찬의 얼굴에 삿대질하며 단호하게 경고했다. 은찬은 머쓱하게 웃으며 자신을 향한 손가락을 슬쩍 치웠다.

“나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묻지 마! 아무것도 묻지 마!”

그러기에는 김동만이 물어보고 싶게 만들고 있다. 이토록 절규하는 녀석을 본 게 처음이라서 더 그랬다. 은찬이 호기심 가득한 눈을 반짝이자 동만은 시선을 외면하며 멍하니 하늘을 응시했다. 어째 은찬이 있을 때보다 더 지친 기색이다.

“있잖아. 그거 진짜야? 너 오피스텔에서 그거 한 거.”

“……묻지 말랬다.”

“야, 거기 방음 안 되는 거 뻔히 알면서. 무슨 정신으로 그랬냐?”

“그러게. 내가 그때 잠시 미쳤……. 묻지 말라니까!”

진짠가 보다. 얼떨결에 이실직고한 동만은 얼굴을 우악스럽게 구겼다. 반대로 은찬은 이 상황이 웃겼다. 하필 방음이 전혀 안 되는 거기서 거사를 치를 게 뭐냐. 한편으로 김동만이 짠하기도 했다.

“야, 그럴 수도 있지. 쪽팔려 하기는.”

“…….”

“상대는 그때 같이 있던 그 개자식이 맞고?”

“…….”

히죽 웃으며 던진 은찬의 빈정거림에 동만은 침묵했다. 대신 무표정으로 은찬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는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었다. 더 지껄였다가는 진짜 한 대 칠지도 모른다는 경고도 그중 하나였다.

김동만이 어금니를 꽉 깨물고 노려보는 모습에 은찬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빙긋 웃으며 물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

“널 한 대 치고 싶은데, 노약자와 임산부는 건드는 게 아니라는 내 도덕적 신념을 깨 버릴까 하고 고민 중.”

은찬은 배시시 웃었다.

“소개팅은 여자가 좋아, 남자가 좋아?”

“야, 여자! 당연히 여자지! 그걸 말이라고 하냐!”

이 와중에 김동만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여자를 외쳤다.

“아니, 이리한하고도 잤으면 남자도 가능한 거 아닌가 싶어서 물어봤지. 왜 화를 내! 너 성격 이상해졌다? 게시판에 전부 네 글로 도배됐던데! 궁금해서 물어볼 수도 있는 거지! 우리 사이에 그것도 안 되냐? 어! 오랜만에 봤으면서 이러고 싶냐? 보자마자 소개팅 타령이나 하고! 너 인마, 그러면 안 돼!”

사과는커녕 오히려 큰소리치는 은찬의 태도에 동만은 혼란스러워하더니 이내 수긍했다.

“하아…… 미안. 지금 내가 좀 그렇다. 잘 지냈지? 잘 지낸 것 같네. 그러니까 너도 그동안 연락 한번 안 한 거겠지.”

“뭐…….”

잘 먹고 잘 자고. 그렇게 며칠 지내다 보니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상이었다. 이렇게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 줄 알았다면 조금 더 일찍 나오는 건데. 뒤늦게 알았다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둘은 눈이 마주치자마자 동시에 픽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각자 의미는 달랐다.

“근데 아까 보니까 걸음걸이 이상하던데. 그건 또 왜 그런 건데?”

“……무거운 거 들다가 삐끗했다.”

“아, 무거운 거. 무거운 거 뭐?”

집에 있는 살림살이야 뻔한데 그걸 들다가 삐끗했단다. 애쓴다, 김동만. 너만 빼고 회사 사람들은 그 이유를 이미 다 알고 있던데.

“……있어. 그런 거. 너는? 이제 거기서 출퇴근하냐? 아니다. 애초에 출근은 왜 하냐? 나 같으면 이참에 그만두겠구만.”

“야, 하루 종일 집에 있는 것도 일이야. 지겨워 죽는 줄 알았다니까? 솔직히 말해 봐. 나 보고 싶었지?”

“아니, 귀찮게 구는 놈. 치다꺼리해 줄 놈 없어서 얼마나 속이 시원하던지.”

“그런 것치고는 얼굴이 맛이 갔는데? 얼마나 좋았으면. 우리 동만이 이제부터 어른이네.”

은찬이 음흉하게 웃으며 옆구리를 푹 찌르자 김동만은 짧게 혀를 찼다.

“어른 같은 소리 한다. 나는 널 모시고 산 그 순간부터 몸에서 사리가 생긴 놈이거든? 아무튼, 너는 빠른 시일 내에 소개팅 자리나 마련해! 나 진지하다. 얼굴에 진지라고 써 있는 거 보이지?”

소개팅 못 해서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나. 동만은 다시 한번 소개팅을 강조했다. 일단 해 준다 치고. 그것 말고도 물어보고 싶은 게 산더미처럼 밀려 있는데 하필 이때 동만의 핸드폰이 울렸다.

“누군데? 아침부터 찾냐?”

“아씨……. 곽 과장 진짜!”

“왜?”

“내가 이 새끼 부탁으로 거래처 하나 담당했는데 때려치웠거든. 그거 왜 말도 없이 그만뒀냐고 그다음부터 틈만 나면 닦달이네. 알지? 이 새끼 성깔 보통 넘는 거. 이럴 거면 지가 그 자식 맡으면 될 거 아니야! 내가 진짜 더러워서 이 회사 때려치우든가 해야지!”

“진짜 때려치우게? 사표 쓸 거야?”

은찬이 그 말을 덥석 물고 늘어지자 동만은 발끈했다.

“그냥 하는 말이지! 말이라도 못 하냐? 아무튼, 너는 소개팅 잊지 마! 곽 과장이 불러서 나 먼저 간다!”

다행이다. 동만은 처음과 달리 한결 기분이 나아진 모습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녀석이 몸을 틀기 전 은찬은 녀석의 엉덩이를 힘껏 쳤다.

“짜식, 나만 믿어!”

그 순간, 헉 소리와 함께 굳어 버린 동만이 몹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허리가 아니라 엉덩이만 살짝 친 것뿐인데?

“야, 이……!”

“어?”

얼굴이 하얗게 질린 동만은 말을 하다 말았다. 왜 저래? 오늘따라 기분이 오락가락했다. 은찬은 끙끙거리는 동만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 거기가 아픈 걸까. 잠시 둘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김동만과 이리한 사이에 은찬이 모르는 뭔가가 있다. 그렇게 확신한 은찬은 동만이 허겁지겁 사라지자마자 이주한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주한이라면 분명 이유를 알고 있을 것 같았다.

“부장님! 형!”

노크도 생략한 채 문을 벌컥 열어젖힌 은찬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주한의 품에 안겨 있는 이리한을 보았기 때문이다. 왜 지금 이 시간에 이리한이 이곳에 있는 것일까. 그것도 안긴 채. 그들이 무슨 사이였는지 알고 있었기에 은찬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반면 갑작스러운 은찬의 등장에 이주한은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은찬아.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주한은 품에 매달린 이리한을 획 밀치며 변명하려 입을 열었지만 동시에 이리한이 끼어들었다. 아니, 그는 엉엉 소리를 내며 대성통곡을 했다.

“으아아아아앙! 어어엉, 엉엉! 동만 씨가아, 동만 씨가 나 안 만나 줘요오오!”

다짜고짜 울음을 터트리는 이리한 때문에 은찬은 인상을 썼다. 시끄럽다. 이 개새끼는 왜 여기서 울고 지랄이야. 뭔가 엮이면 안 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에 황급히 문을 닫고 도망치려던 찰나 이리한이 한발 더 빨랐다.

“동만 씨가 안 만나 줘요오오, 흐어엉…….”

그대로 이리한에게 잡힌 은찬은 도망은커녕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그때였다. 은찬의 팔을 잡고 늘어진 이리한의 콧물 한 방울이 옷자락에 툭 떨어졌다. 이래서 개가 싫다. 더럽고, 시끄럽고, 감정적인 녀석들.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은찬은 녀석의 뺨을 가차 없이 주먹으로 퍽 쳤다. 더 짜증 나는 건 고양이 펀치를 맞았음에도 녀석이 아무런 반응이 없다는 것이다.

“저리 꺼져! 안 꺼져? 죽을래?”

“흐어어엉! 동만 씨. 동만 씨가아아!”

그저 김동만을 찾으며 목 놓아 울부짖을 뿐이었다.

***

신경질적으로 주먹을 휘두르는 유은찬과 그 주먹을 맞으면서도 왜 맞는지 이유를 모르는 듯한 이리한. 그럼에도 이리한은 유은찬의 옷자락은 놓지 않고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에 주한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갑자기 동물 난투극으로 변해 버린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둘을 말리는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주한은 일단 유은찬부터 제 등 뒤로 숨겼다. 어지간히 화가 난 모양인지 은찬은 송곳니를 드러내고 하악질을 해 댔다. 반대로 이리한은 양 볼이 퉁퉁 부은 채 코를 훌쩍이며 멍청하게 눈만 깜박였다.

“그만. 그만해.”

“저 자식이 먼저 시작했단 말이에요! 더러운 콧물을 내 옷에 흘렸다고!”

유은찬이 카랑카랑 소리를 지르자 이리한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코를 훌쩍였다. 잘난 이리한이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피곤함이 밀려온 주한은 출근 직전으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그가 출근을 마쳤을 때, 이리한은 방 주인보다 먼저 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한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울음을 터트렸다. 김동만이 만나 주지 않는다며 말이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숨김없이 털어놓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주한이 도와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본인도 유은찬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판국에 남의 연애 문제까지 간섭할 만큼 한가하지는 않았다.

이리한의 말은 한결같았다. 김동만이 왜 화를 내는지 모르겠다. 그날, 두 사람 속궁합은 끝내주게 좋았다는 말만 반복적으로 했다. 딱히 알고 싶지도 않은 내용까지 듣고 있으려니 슬슬 짜증이 나려고 할 때, 생각지도 못한 유은찬이 등장한 것이다.

한때나마 김동만의 사랑을 받았던 유은찬의 등장은 이리한에게 희망처럼 보였을 것이다. 눈을 반짝이며 달려간 녀석은 대성통곡을 하며 애원했다. 결과는 참담할 정도로 실패했다.

애초에 고양이와 개는 성격부터 달랐다. 감정에 휩쓸리며 모든 기분이 드러나는 개와 달리 고양이는 예민하고 까다로운 존재였다. 겨우 두 사람을 떼어 놓은 주한은 이리한을 경계하는 유은찬을 제 곁에 앉혔다. 맞은편에 앉은 이리한은 여전히 시무룩한 상태였다.

“이렇게 때리는 게 어디 있어……. 내가 뭐 어쨌다고.”

이리한은 콧물을 훌쩍이며 유은찬에게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미친놈처럼 달려와서 내 옷에 콧물 흘렸잖아!”

“그게 뭐 어쨌다고! 콧물 좀 흘릴 수 있지! 물어 주면 될 거 아니야!”

이리한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반박했지만 은찬의 하악질 한 번에 반사적으로 움찔거렸다.

“말하는 것 봐, 진짜! 내가 이래서 개를 싫어한다니까? 미안하다고 사과부터 하는 게 정상 아닌가? 하기야, 개한테 뭘 바래. 개 수준이 그렇지.”

“이주한! 쟤 성격 진짜 이상해! 나 태어나서 저렇게 성격 사나운 애 처음 봐! 저런 애랑 왜 사겨?”

“웃겨! 우리가 사귀든 말든 그쪽이 상관할 바 아니잖아! 나도 댁처럼 멍청한 개는 처음 보거든? 이러니까 동만이가 싫어하지!”

김동만. 그 이름 하나에 이리한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달렸다. 반대로 유은찬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씨익 웃었다. 주한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 나직한 한숨을 내뱉었다. 물론 먼저 때린 쪽이 잘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은찬을 탓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이리한, 너 가.”

“왜에! 싫어!”

별안간 추방당한 이리한이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억울하겠지. 맞고도 이런 수모를 당하니. 그래도 주한은 유은찬 편이었다.

“나가. 시끄러워. 너는 왜 아침부터 쳐들어와서 이러고 있어? 정신 사나우니까 가! 꺼져!”

“이주한! 너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우리가 그동안 나눈 정…….”

눈치 없는 새끼. 유은찬 앞에서 할 말 못할 말을 가리지 않고 막 뱉어 내려 할 때 주한은 순발력 있게 옆에 있는 쿠션을 던졌다. 쿠션은 정확히 이리한의 얼굴 정중앙을 맞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야아. 아프잖아!”

아프라고 때렸다. 이 멍청한 개자식아! 눈으로 욕을 하며 주한은 애써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좋은 말로 할 때 가. 나 진짜 화낸다.”

“안 해! 싫어! 동만 씨 보기 전까진 여기서 한 발자국도 안 나가! 그러니까 동만 씨 불러 줘어어! 불러 달라고오오!”

“그건 직권 남용이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해!”

“나 거래처 해 줬잖아! 그러니까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 내가 너 섹스하자고 할 때 튕긴 적 있어? 없잖아! 너 왜 이렇게 치사해!”

“…….”

그 말이 여기서 왜 나오는 거냐고! 그것도 유은찬 앞에서! 이리한의 기적의 논리 덕분에 이주한은 말문이 막혔다. 표정 관리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야! 이리한!”

“뭐! 내가 틀린 말 했어? 저 망할 고양이도 우리 사이 다 알고 있잖아! 그러니까 동만 씨 만나게 해 달라니까? 그럼 나 조용히 입 닥치고 나갈게! 진짜야!”

미치겠네. 그걸 말이라고 지껄이는 거냐. 기분 같아서는 저 녀석 멱살을 잡고 창문 밖으로 던져 버려도 시원치 않았다. 주한의 표정은 급속도로 냉랭해지고 있는데 오직 이리한만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마치 주인이 먹이를 던져 주길 기다리는 개처럼 말이다.

잠시 방 안에 묘한 정적이 흘렀다. 삼 형제 중 귀한 막내로 자란 이리한의 고집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주한은 난감했다. 이래서 과거를 깨끗이 세탁해야 하는 건가 보다. 솔직히 주한은 지금 은찬에게 무안해 죽을 지경이었다. 자신에게 불리해진 상황에서 어떻게든 녀석을 쫓아내야겠는데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야, 개.”

조용히 이 상황을 묵묵히 지켜보던 유은찬이 이리한을 불렀다.

“왜? 고양아.”

처음과 달리 이리한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뚱한 표정으로 유은찬을 쳐다보며 받아쳤다.

“나 동만이 하고 친해. 엄청 친해.”

느닷없는 김동만과의 친분 과시에 이리한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알거든?”

“근데, 나한테 이래도 돼?”

“…….”

“내 말 한마디면 김동만 자다가도 일어나서 밥 차리는 그런 사이거든?”

“근데 뭐! 그게 어쨌다고! 하나도 안 부럽거든?”

말과는 다르게 이리한은 많이 부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녀석의 최대 강점이자 약점이 저거다. 고양이와 달리 표정에 다 드러난다는 거.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주한은 김동만이 좀 불쌍하게 느껴졌다. 자다가도 일어나서 밥 차리는 사이라……. 친구 사이라기보다 주종 관계 같이 들린다고 해야 하나.

“아, 그래?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뭐. 나 동만이 소개팅시켜 주기로 했는데. 당장 날 잡아야겠다.”

은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리한은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정적이 길어지자 은찬은 자리에서 획 일어나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누구를 소개해 줄까나…….”

“저기……!”

멍청한 이리한. 고양이가 던진 낚싯줄에 걸렸다. 녀석은 다급하게 은찬을 붙잡고 애처롭게 애원했다.

“……도와줘.”

“뭐? 개? 잘 안 들려. 뭐라고?”

“도와 달라고……. 동만 씨 하고 잘되게.”

“내가 왜? 그럼 넌 뭐해 줄 건데?”

“어?”

생각보다 유은찬은 계산적이었다. 바보 이리한. 그냥 미안하다, 사과 한마디면 끝날 사건이 너무 커졌다. 녀석들이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던 주한은 없던 두통이 밀려왔다. 다음부터는 이 둘을 절대로 만나게 하지 않을 테다.

일단 지금은 이리한부터 쫓아내는 게 급선무였다. 주한이 화제를 돌리려고 할 때 심오한 표정으로 고민하던 이리한이 갑자기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나도 너 소개팅시켜 줄게!”

저 망할 개새끼가. 누굴 소개팅을 시켜 줘? 화가 치밀어 오른 주한은 저도 모르게 손에 잡히는 대로 던졌다. 다행히 순발력 좋은 이리한이 모두 피했지만, 소파 옆 탁자 위에 있던 화분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 뒤 목숨의 위협을 느낀 이리한은 다소곳이 앉아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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