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목이 말랐다. 침실 문 앞에서 서성이던 은찬은 굳게 닫힌 문을 살짝 열어 거실 상태를 확인했다. 숨죽여 이리저리 살펴본 결과 좀 전까지 청소중인 아줌마는 보이지 않았다.
쥐 죽은 듯 조용한 거실을 앞에 두고도 은찬은 쉽사리 나가지 못했다. 혹시나 그 아줌마가 어디선가 나타날까 싶어서였다.
이른 아침부터 들이닥친 아줌마는 집안일을 해 주시는 분이랬다. 눈을 뜨자마자 아침밥이 차려진 건 만족스러웠지만, 이주한이 출근한 이후 은찬은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과 단둘이 있다는 것이 은찬에게는 스트레스였다.
방 안이 갑갑해 몇 번이나 나갈 기회를 노렸지만 포기해 버렸다. 결국, 은찬은 이주한에게 저 아줌마 좀 내보내 달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살짝 열린 문 너머로 경계 태세를 갖춘 은찬은 한참이 지나서야 그 방을 나섰다. 이주한이 출근한 지 정확히 한 시간 만이었다. 곧장 시원한 물부터 한 잔 마시고 냉장고 문을 열어 먹을 게 있는지 확인했다. 은찬은 망설일 것 없이 정갈하게 놓인 반찬 통을 일일이 열어 하나씩 집어 먹었다.
맛있다. 여기가 맛집이네. 은찬이 좋아하는 건새우 볶음도 있고 멸치조림도 있었다. 장조림도 하나 입에 넣은 은찬은 밥을 찾아 뒤적였지만 아쉽게도 이 집구석에는 즉석 밥 따위는 없었다. 미련이 남아 반찬만 몇 번 더 집어 먹은 뒤 소파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제 뭐 할까. 소파에 앉아 넓은 거실을 쭈욱 둘러봤다. 내 집처럼 편안하게 있으라고 했으니 은찬은 본격적으로 집 탐방에 나섰다. 이주한의 드레스 룸에 들어가 이 옷, 저 옷을 뒤적였다가 서재로 가서 야한 책이 없나 찾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흥미를 잃어버렸다. 집주인처럼 재미있는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다시 거실로 돌아온 은찬은 소파가 아니라 표범 박제 등에 올랐다. 일어나서 밥 먹고 놀고. 그리고 늘어지게 하품하고. 단조로운 하루였다.
멍하니 앉아 창밖을 구경하던 중 은찬은 뒤늦게 의문점이 생겼다. 혹시, 나 잘린 건가? 그러고 보니 핸드폰이 유독 조용했다. 누구 하나 은찬에게 왜 출근하지 않느냐고 물어보는 이가 없었다.
이주한도 그랬다. 평소보다 늦게 출근했지만, 같이 출근하자는 말 한마디 없었다. 당연히 안 해도 되는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닌 것 같다. 잘렸다. 그렇게 직감한 은찬은 허탈한 표정으로 표범 박제 머리에 제 머리를 처박았다.
회장한테 그따위로 말했으니 잘릴 만도 했다.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큰소리 친 것과 달리 돈 걱정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눈 딱 감고 회장한테 잘못했다고 빌까? 어제는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말이다.
심각한 표정으로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현관에서 전자 버튼 소리가 울렸다. 이주한이 이 시간에 올 리 없으므로 그 아줌마가 확실했다. 방으로 숨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 버린 은찬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거실로 들어섰다. 이주한이었다.
“유은찬.”
“……어?”
“거기서 뭐 하는 거야.”
성큼성큼 다가온 그에게선 뜨거운 여름 냄새가 묻어났다. 그는 표범 박제 등에 멍청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은찬을 들어 올려 소파 위에 조심히 내려놓고 다정히 머리를 토닥였다.
“회사는요?”
“쨌어.”
“네?”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하며 재킷을 툭 벗어 던진 주한이 은찬의 옆에 앉았다. 은찬은 농담인 줄 알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이주한은 느닷없이 출근하지 않을 위인이 못 되었다. 상사로는 개새끼였지만 제 할 일은 완벽하게 하는 남자였다.
“어디 아파요?”
“왜?”
“아니, 갑자기 쨌다고 하니까…….”
“아프다고 치지 뭐.”
은찬은 넥타이를 풀고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는 이주한을 심각한 표정으로 보았다. 감기인가? 열은 없는 것 같은데.
“아프면 병원에 가야죠. 여기 오면 어떻게 해요. 나한테 옮기면 곤란한데…….”
“야.”
은찬이 노골적으로 떨어져 앉자 이주한은 정색하다가 돌연 픽 웃음을 터트렸다.
“너답다.”
“나답다뇨? 그게 뭐예요?”
은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틈에 주한은 멀어진 만큼 다시 다가와 큰 손으로 은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기밖에 모르는 고양이. 사람이 아프다고 하면 걱정해 주는 척이나 괜찮냐는 빈말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
사람 귀찮게 하네. 굳이 그 말이 듣고 싶어 구구절절 설명하나 싶었다. 은찬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툭 던졌다.
“괜찮죠? 죽는 거 아니죠?”
“……야.”
“해 줘도 난리야!”
“너무 나갔잖아. 너 내가 죽는 병이라도 걸렸으면 좋겠어?”
“사람이 변하면 죽는다는 말 몰라요? 그냥 하던 대로 해요.”
은찬이 툴툴거리자 주한이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됐다. 널 바꾸느니 내가 맞춰 가는 게 빠르겠다. 나 아픈 거 아니고. 죽는 것도 아니야. 너 보고 싶어서 출근 도장 찍자마자 퇴근 도장 찍고 나왔어.”
이주한은 그 말에 감동하길 원하는 것 같았다. 끈적한 시선이 달라붙었지만, 은찬은 이렇다 할 감흥이 없었다. 아, 그러고도 월급을 주는구나. 역시 월급쟁이하고 다르게 회장 손자라는 건 좋구나. 이 정도 감상이 다였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긴 정적이 맴돌았다. 이주한의 눈치를 보던 은찬은 뭐라도 하나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안 그러면 삐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
“잘됐다. 안 그래도 나 형한테 연락하려고 했는데.”
순 뻥이었다. 연락은 무슨. 온종일 집에서 잘만 노는 사람이 유은찬이다. 하지만 그 허울뿐인 말이 뭐라고. 라면 사건 이후 오늘 아침까지 살짝 냉전이 있었다는 게 거짓말처럼 둘 사이에 간질간질한 감정이 아지랑이처럼 피어났다.
“왜?”
“맞춰 봐요.”
다년간 김동만을 제 입맛에 맞게 길들인 경험으로 보건대 이럴 때는 이렇게 해 줘야 했다. 귀와 꼬리를 내놓은 은찬이 이주한의 한쪽 허벅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주 앉은 자세는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를 조금 더 묘하게 만들었다. 물론, 김동만한테는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난데없는 애교에 이주한은 조금 놀란 듯 보이다가 이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은찬의 머리부터 꼬리까지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배고파서?”
“어? 어떻게 알았어요?”
의외의 대답이었다. 깜짝 놀란 은찬의 반응에 이주한은 살짝 뺨을 꼬집으며 조곤조곤 말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앞으로 먹고 싶은 게 있거나 하고 싶은 거, 가지고 싶은 게 있으면 고민하지 말고 바로 말해. 나는 그런 거 하나도 귀찮지 않으니까.”
“내가 임신해서 이렇게 잘해 주는 거죠?”
“아니.”
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좋아하고 사랑하니까. 너하고 이 녀석들, 전부 다.”
“그러니까 왜요?”
“그러는 너는 왜 여기에 있는 건데. 나 좋아하니까 그런 거 아니야?”
“뭐…….”
그렇게 물으니 할 말이 없었다. 회장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솔직히 이주한이 싫지는 않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은찬의 배를 어루만졌다. 천천히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손짓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지금까지 김동만이 만졌을 때와는 확실히 다른 감정이 피어났다. 더군다나 그의 손길에 애들이 반응하는 것이 신기했다.
“움직이는 거지?”
“가끔 발도 차고 그래요. 엄청 씩씩해요.”
“널 닮았을 거야.”
문득 그와 이런 대화를 한다는 것도 신기하게 느껴졌다. 우리가 진짜 가족이 되는 걸까. 이런 게 가족인 걸까. 이상하게 기분이 묘했다.
잠시 혼자만의 생각에 잠긴 은찬이 말이 없어지자 주한은 배가 고파서 그런 줄 알았나 보다. 은찬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옷을 갈아입기 위해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유은찬. 여기 도둑 들었어?”
엉망진창이 된 드레스 룸에서 나온 그는 뒤이어 주방의 풍경을 보고는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반찬 통은 죄다 열려 있고 바나나 껍질은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장관이 펼쳐져 있었다.
“반찬 엄청 맛있던데! 근데 나 갑자기 파스타 먹고 싶은데, 그거 해 주면 안 돼요? 파스타.”
“먹었으면 넣……. 하아, 그래. 맛있게 먹었으면 됐지. 뭐, 파스타?”
“그건 할 줄 알아요?”
“라면은 못 끓여도 파스타 정도는 기본이지.”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닌지 그가 천창을 이리저리 뒤지기 시작하자 하나둘씩 재료가 나왔다. 소파에 앉아 있던 은찬은 슬그머니 주방으로 다가가 요리하는 이주한의 근처를 기웃거렸다.
“이런 거 어디서 배웠어요?”
“아줌마.”
“아침에 그 아줌마요? 누구한테 해 주려고 배웠어요?”
“예전에 만난…… 아.”
이주한은 말을 하다말고 멈칫하며 은찬의 눈치를 살폈다.
“예전 애인?”
그가 바람둥이였다는 것을 모르는 바도 아니고 그걸로 걸고넘어질 생각은 없었다. 은찬은 베이컨을 자르는 그의 곁에 서서 아무렇지 않게 잘린 베이컨을 훔쳐 먹었다.
“괜찮아요. 애인 정도 있을 수 있지.”
“아니, 애인 아니야! 그냥 잠깐 만난 사람. 너는 지금까지 만난 사람이 몇 명이야?”
뜬금없이 주제가 그쪽으로 흘러갔다. 은찬은 베이컨을 오물오물 씹으며 곰곰이 생각해 봤다.
“한 세 명? 아니다. 네 명인가?”
손가락을 쫙 펴서 헤아리고 있으니 이주한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수인이야?”
“뭐…….”
“어떤 놈들이야.”
이주한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호구 조사에 들어갔다. 왜 이래? 그럼 내가 지금까지 만나는 사람 하나 없었을까 봐? 애인만 그 정도지 발정기 때 스쳐 지나간 사람까지 치면 열 손가락은 넘었다.
“말해! 이름, 나이, 사는 곳!”
“왜요?”
“찾아서.”
“찾아서?”
칼을 꽉 쥔 이주한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겠는지 머리에 표범 귀가 뿅 하고 나타났다. 더불어 꼬리도.
은찬의 꼬리와 달리 크고 긴 표범 꼬리는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괜히 한번 만져 보고 싶을 만큼.
“나 베이컨 많이요. 얼른 해 줘요. 배고프단 말이에요.”
슬쩍 화제를 돌린 은찬은 이주한에게 바짝 붙어 그의 꼬리에 제 꼬리를 감았다. 그러자 이주한의 굳은 표정이 슬그머니 풀렸다. 그의 굵은 꼬리가 은찬의 꼬리를 꽉 휘감았다.
“조금만 기다려. 금방 해 줄게.”
요리하는 이주한의 팔에 찰싹 달라붙었지만, 그는 귀찮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은찬이 귀여워 죽겠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요리하는 도중 눈만 마주치면 입을 맞춘 탓에 면이 퍼졌지만, 그가 만든 파스타는 지금까지 은찬이 먹어 본 파스타 중 단연 최고였다.
느긋한 오후. 햇빛이 잘 드는 거실 창가를 차지한 은찬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래서 비싼 아파트가 좋은가 보다. 맞은편 건물에 가려 햇빛이라고는 하루에 한 시간도 채 들어오지 않은 오피스텔보다 훨씬 좋았다.
배도 부르고 일광욕도 즐기고. 잔소리하는 사람도 없고. 이곳은 그야말로 은찬에게 천국과도 같았다.
“안 더워? 이리 와.”
햇빛을 피해 소파 끝자락에 앉은 주한이 제 곁으로 오라는 눈짓을 던졌다. 감동만처럼 잔소리는 없지만 다른 면에서 사람을 귀찮게 하는 경향이 있었다. 애정 결핍인가. 잠깐이라도 은찬이 혼자 있을 틈을 주지 않았다.
“에어컨 빵빵하게 나오는데 뭐가 더워요? 나는 딱 좋구만.”
따뜻한 햇살 아래 즐기는 일광욕에 기분이 좋아진 은찬은 소파에 몸을 기대고 꼬리를 둥글게 말았다. 밥을 차려 준 이주한에게는 이제 볼일이 없어진 셈이었다.
“너는 내가 먹을 거 줄 때만 나 찾더라?”
“…….”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은찬은 반박 대신 자세를 고쳐 잡았다. 창밖을 바라보던 자세를 이주한과 마주 앉은 자세로. 비록 둘 사이의 거리감이 꽤 있지만 어쨌든 이 정도도 봐준 셈이었다. 만약 김동만이었다면 예외 없이 무시였다.
“됐죠?”
그럼에도 이주한은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다. 긴 한숨을 내쉬며 제 무릎을 탁탁 쳤다.
“웃겨. 내가 개인 줄 알아요? 그런 식으로 부르면 달려가게?”
“안고 싶어서 그래.”
“왜 지금 꼭 그래야 해요? 나중에 해요, 나중에.”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라도 그쪽까지 가는 게 귀찮았다. 혼자만의 사색에 잠긴 은찬을 잠시 지켜보던 이주한은 담백하게 물었다.
“나 좋아하긴 하는 거지?”
“그럼요.”
또 이런다. 정말 애정 결핍인지 벌써 똑같은 질문만 여러 번이었다. 특히 옛 애인에 관한 이야기 나온 뒤부터는 부쩍 집요함이 묻어났다.
“다른 놈들한테도 이랬어?”
“뭘요?”
“이런 식으로…….”
하염없이 창밖을 구경하던 은찬의 시선이 말끝을 흐린 이주한에게로 옮겨졌다. 그와 마주친 시선에 담담하게 한마디 툭 던졌다.
“유치한 거 알죠?”
“너는 너무 차가운 거 알지?”
“그럼 어떻게 해 주길 원하는데요? 막 달려가서 안기고 그래야 해요? 미친개처럼?”
“그렇게까지 해 달라는 게 아니잖아. 너랑 하루 종일 같이 있고 싶어서 회사 갔다가 도로 온 사람인데. 나 지금 여기 와서 한 거라고는 너 밥 먹이고 부엌이랑 옷방 정리한 게 다야.”
이주한이 제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러나 역시 은찬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게 뭐 어때서? 누가 오라고 했나. 김동만은 매일 하던 일인데.
“내 집처럼 있으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내 집처럼 쓴 건데. 지금 나한테 그거 좀 했다고 유세떠는 거예요? 이봐, 이럴 줄 알았다니까. 동만이는 군말 없이 다 해 줬는데!”
좀 전까지 둘 사이에 생긴 말랑말랑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은찬은 예민하게 반응했고, 주한의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생겼다.
“또 김동만! 그 자식 이름 꺼내지 말라니까!”
“김동만! 김동만! 김동만! 김동만! 아, 동만이 보고 싶다! 동만이!”
은찬은 하지 말라면 더 하고 보는 성격이었다. 김동만은 이런 은찬을 향해 민폐 고양이 불렀다. 동만을 찾는 은찬 때문에 이주한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너무 심했나. 속으로는 뜨끔했지만 은찬은 굴복하지 않았다.
“계속 이럴 거지? 알았어. 너한테 먼저 말 안 걸 테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해.”
이주한이 삐졌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나온 그의 손에는 노트북이 있었다. 거실 테이블에 노트북을 펼친 그는 그 뒤로 은찬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났다.
점점 따분해지기 시작한 은찬은 심각한 표정으로 집중하고 있는 이주한을 힐끔거렸다. 몸을 길게 늘어뜨리며 하품을 해 봐도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괜히 열받기 시작한 은찬은 성큼성큼 걸어가 노트북 뒤편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이주한이 노트북을 보는 방향에 앉아 턱을 괴고 그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이래도 모른 척할 거냐는 시위였다.
“너 뭐야.”
“나 심심해요.”
“하…….”
“왜 집에서까지 일해요?”
은찬은 철저히 이기적인 고양이였다. 자연스럽게 노트북을 닫아 버리고 당당하게 이주한의 다리 사이로 자리를 옮겼다. 깊게 패었던 미간의 주름은 막상 은찬이 다가가니 사라지고 없었다. 갑작스러운 은찬의 애교가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이주한의 손이 자연스럽게 은찬의 배를 감싸 안았다. 그의 넓은 가슴에 등을 기댄 은찬은 어느샌가 나와 있는 표범 꼬리를 만지작거렸다.
“나 궁금한 거 있는데 물어봐도 돼요?”
“뭔데.”
자꾸만 손에서 도망가는 표범 꼬리를 잡기 위해 은찬은 손을 허우적거렸다. 꽤 재미있었다.
“지금까지 만난 수인 중에 고양이 수인도 있어요?”
“…….”
“그 수인도 임신했…….”
“너는 그걸 지금 이 상황에서 꼭 물어야겠어?”
“물을 수도 있지. 또 삐졌어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 본 건데 이주한의 미간에 또 주름이 생겼다. 연애를 많이 해 봤으니 이런 면에서는 오픈 마인드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건 또 아닌 모양이다. 의외로 속이 좁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다.
“또 궁금한 거 있는데 물어봐도 돼요?”
“지금까지 만난 사람에 관련된 거만 빼고.”
“지금까지 섹스 몇 번 해 봤어요?”
“……유은찬.”
이주한은 은찬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뭐라 말은 안 하는데 눈에 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농담도 못 하겠네. 좋아하는 게 뭐예요?”
“뭐?”
뜻밖의 질문에 주한이 눈을 깜박였다.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그에게 질문을 받기만 하고 물어본 적은 없는 것 같았다. 그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은찬이 순수하게 궁금해서 던진 물음이었다.
“형은 내가 좋아하는 걸 다 아는데, 나는 형이 좋아하는 건 하나도 모르니까. 왠지 불공평한 거 같아서. 없어요? 좋아하는 거.”
말을 하다가 괜히 쑥스러워진 은찬은 그의 꼬리에 있는 털을 뽑았다.
“너.”
“나는 먹는 거 아니거든요. 먹는 거 말이에요.”
“너.”
이주한이 은찬을 와락 껴안았다. 그리고 은찬의 고양이 귀를 깨물며 그르렁거렸다.
“이래서 고양이를 요물이라고 하나 보다. 정말 못 당하겠네. 너 자꾸 이러면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내가 뭐 어쨌다고.”
툴툴거렸지만 내심 이주한의 말투와 행동이 싫지 않았던 은찬은 몸을 틀어 그와 마주 앉았다. 넓은 거실에 여러 사람이 앉아도 충분한 큰 소파였지만 둘은 찰싹 붙어 있었다.
“나 태어나서 표범 수인 보는 건 형이 처음인데.”
“그래서?”
“엄청 멋있어요.”
처음에는 표범 새끼라고 욕했다는 걸 굳이 말할 필요는 없으니까. 은찬의 고백에 이주한의 표정이 확 달라졌다. 딱 꼬집어서 말하기 힘든 간질간질한 시선이 쏟아졌다.
“아. 맞다. 나 잘렸어요?”
“왜?”
“아니 나는 말도 없이 출근을 안 했는데…… 왜 안 나오는지 묻지도 않고.”
“이대로 그만둬도 되는데.”
“안 돼요. 나 회사 계속 다니고 싶은데.”
“그런 놈이 회장님한테 그렇게 해?”
이주한은 엄한 목소리로 꾸짖었지만,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그러다 은찬이 울상을 짓자 곧 말을 이었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진짜요?”
“그렇게 말씀드려 볼게.”
“와! 나 잘린 거 아니죠?”
기쁨에 환호성을 지르며 은찬은 주한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러다 손이 그의 머리 위로 난 표범 귀를 스쳤다. 꿈틀거리는 귀를 만지작거리던 은찬은 주한과 마주친 시선에 픽 웃음이 터졌다.
“귀엽다.”
“뭐가.”
“귀가요.”
“난 네가 더 귀여운데.”
서로를 지긋이 바라보던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러다 이내 다시 맞물렸다.
“우리 이런 거 처음이죠?”
“키스?”
“아니.”
은찬이 주한의 입술을 혀로 핥으며 씨익 웃었다.
“이렇게 보면서.”
이어서 말을 하다 말고 그의 입술을 부드럽게 머금다가 떨어졌다.
“키스하는 거.”
“너, 일부러 이러는 거지?”
“싫어요? 하지 말까?”
계획한 바는 아니었다. 그냥 어쩌다 보니 분위기가 이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가 조금이라도 싫어하는 기색을 보인다면 은찬은 미련 없이 털고 일어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주한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은찬을 지긋이 바라보는 눈에 서서히 욕망이 일렁였다.
“고양이는 이런 식으로 사람을 홀리나?”
날카로운 송곳니를 새운 그가 잡아먹을 듯 달려들었지만, 실상은 목덜미를 간지럽게 깨무는 수준에 그쳤다. 거칠어지는 숨소리와 더불어 다리 사이에서 서서히 커지고 있는 그것의 존재감에 은찬도 덩달아 흥분되고 있었다.
“표범은 이런 식으로 사람을 잡아먹나 봐?”
서로의 몸을 만지작거리던 중 은찬은 이주한의 표범 귀를 크게 물었다. 은찬의 뾰족한 송곳니에 물린 그가 움찔거렸다.
“아파.”
곧이어 물어뜯은 곳을 혀로 핥아 주자 그의 손이 은찬의 바지 안으로 들어와 엉덩이를 거칠게 움켜잡았다. 허공에 흔들리던 은찬의 꼬리는 이미 표범 꼬리에 묶인 상태였다.
“하아…….”
이주한의 굵은 손가락이 은찬의 엉덩이 골 사이를 만지작거리며 애를 태웠다. 몸은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달아오른 은찬이 그의 머리를 꽉 끌어안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여기서 싫은데. 나 침대.”
“꽉 잡아.”
은찬이 주한의 목을 꽉 끌어안자마자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방으로 향했다. 창문 너머 눈부신 햇살이 방 안을 환하게 밝혔다. 대낮에 발정 난 적은 극히 드물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경황이 아니었다.
이주한은 은찬을 침대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자마자 티셔츠를 벗어 던졌다. 여유가 있었다면 느긋하게 감상했을 정도로 이주한의 가슴은 아주 탄탄했다. 그는 은찬의 뜨거운 시선에 픽 웃으며 바지를 내렸다.
“뭘 그렇게 봐. 처음 보는 것처럼.”
느긋하게 감상하는 건 처음이라서요. 한쪽으로 누운 채 팔로 머리를 기낸 은찬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 댔다. 그가 침대에 한 발 올리자 무게가 그쪽으로 쏠렸다. 주한은 천천히 은찬의 옆에 몸을 뉘이고 부드럽게 입술을 머금으며 몸을 어루만졌다.
그런데 이상했다. 기억 속에 각인된 그와의 섹스는 엉엉 울만큼 거칠었던 것 같은데 몇 분째 키스와 애무만 계속 이어졌다. 거대한 성기는 금방이라도 들어오고 싶어 안달 난 것 같은데 왜 이러는 걸까. 혹시 간 보는 건가? 애가 탄 은찬이 단단한 그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물었다.
“이제 나 별루예요?”
“아니.”
“그런데 왜 안 해요?”
“하고 있잖아.”
이게? 오랜만에 흥분한 은찬은 얼른 더 깊은 쾌감을 맛보고 싶었다. 하지만 주한은 도통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은찬은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가 보기로 했다. 그의 목과 턱, 눈에 닿는 모든 부위를 혀로 핥아 대자 이주한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 지금 최선을 다해서 참고 있으니까 이러지 마.”
“왜요? 왜 참아요?”
바지는 이미 벗겨진 상태였지만 셔츠는 입은 채였다. 자진해서 셔츠를 벗어 던진 은찬은 보란 듯이 제 젖꼭지를 만지작거렸다. 임신 때문인지 젖꼭지는 예전보다 커진 상태였다. 코앞에서 그 모습을 본 이주한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
“자꾸 그러면 넣고 싶잖아!”
“넣어요.”
“넣을 생각까진 없단 말이야.”
“왜요?”
대답 대신 이주한은 은찬의 배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제야 은찬도 작게 탄식했다. 맞다, 지금 임신 중이었지. 그렇지 않아도 의사한테 한번 경고를 받았던 터였다. 출산일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위험하다고.
은찬은 부른 배와 나체 상태의 이주한을 번갈아 보다가 이내 결정을 내렸다. 고민하고 말 것도 없었다. 고양이는 본능에 강한 종족이었다. 스르륵 이주한의 얼굴과 반대로 누워 그의 큰 성기를 손으로 움켜잡았다. 임신했다고 해서 성욕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하고 싶으면 해야지.
“야.”
“난 넣어야겠어요. 엄마가 아빠하고 섹스 좀 한다고 이놈들이 뭐라고 할 입장은 아니잖아요. 지들도 그렇게 해서 생겼는데.”
역시나 한 손에는 다 잡히지 않을 만큼 컸다. 이게 입안으로 다 들어가려나. 최대한 송곳니에 닿지 않게 입을 크게 벌렸지만 끝부분만 겨우 들어갔다. 귀두 끝 갈라진 곳에서 투명한 액체가 질질 흘러내렸다. 그것을 혀로 핥기 시작하자 이주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은찬의 성기를 한 손으로 꽉 움켜쥔 그는 단숨에 뿌리 끝까지 삼켰다. 크기의 차이에서 자존심이 상했지만, 곧 짜릿한 쾌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아…….”
“이 세우지 마.”
이주한이 잇새로 으르렁거리며 경고를 던졌다. 은찬도 나름 정성껏 혀를 놀리고 있지만, 이주한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그의 혀가 성기 끄트머리 갈라진 곳을 파고들 때, 은찬은 숨을 삼키며 발가락을 말았다. 이대로 질 수 없었기에 송곳니를 세워 그의 귀두를 긁었다.
“……읏.”
주한이 작은 신음을 터트렸다. 두 사람은 더욱더 밀착한 채 서로의 성기를 애무했다. 원래라면 목구멍 끝까지 넣어야겠지만 주한의 것이 너무 커서 어림도 없었다. 대신 은찬은 발기한 성기의 툭 튀어나온 핏줄을 일일이 정성껏 핥았다.
입이 얼얼할 정도로 정성스럽게 애무를 한창 이어가고 있을 때였다. 거친 호흡과 동시에 이주한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은찬의 머리를 우악스럽게 잡아 제 성기를 입에 물렸다. 다 들어가지 않는 성기를 은찬의 입안으로 억지로 밀어 넣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뜨거운 정액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하기도 전에 턱 빠지겠다. 은찬은 숨을 몰아쉬며 제 뺨을 어루만지는 이주한과 시선을 마주했다. 거칠게 다뤄서 미안해 죽겠다는 표정이다.
“봐. 도발하지 말라니까.”
미처 다 삼키지 못한 정액이 살짝 벌려진 입 밖으로 흘러내렸다. 그것을 혀로 핥던 은찬은 그의 입에 묻은 제 정액까지 혀로 핥으며 속삭였다.
“한번 뺐으니까 이제 넣어도 될 것 같은데.”
첫발은 뺏으니 괜찮지 않겠느냐는 의미였다. 이주한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고양이는.”
“요물이라잖아요. 특히 검정고양이는.”
은찬은 이주한을 쓰러트린 뒤 다리를 벌려 그의 몸 위에 올라탔다. 한번 사정을 했음에도 여전히 굵고 단단한 그의 성기를 엉덩이로 비벼 대며 자극했다. 얼른 넣고 싶어 엉덩이가 근질근질했다. 흥분하기 시작한 은찬이 반쯤 감은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난, 이렇게 박아 주면서 젖꼭지 빨아 주는 게 좋더라.”
주한은 그 유혹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입가에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그래서?”
“다른 놈들은 여기가 빨갛게 짓무를 때까지 빨아……. 하아.”
은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눈빛이 돌변한 이주한이 거칠게 달려들어 오른쪽 젖꼭지를 크게 머금었다. 허리를 꽉 끌어안은 그가 왼쪽 젖꼭지를 번갈아 가며 물어뜯었다. 날카로운 송곳니는 연약한 젖꼭지를 지독하게 괴롭혔다.
“아…… 하아. 아파.”
“넌 날 가지고 놀아.”
오른쪽 젖꼭지를 물고 늘어진 주한이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그의 손은 은찬의 엉덩이를 쥐어짜듯 어루만지다가 우악스럽게 벌렸다.
“그런데 그게 싫지 않단 말이지.”
벌려진 엉덩이 사이로 그의 단단하고 굵은 성기 끝자락이 비집고 들어왔다. 제 가슴을 그에게 내밀고 있던 은찬은 표범 귀를 까득까득 물어 대며 숨을 헐떡였다.
“넣어 줘요.”
민감해진 몸은 그의 작은 애무 하나하나에 착실히 반응했다. 귀두 끝자락이 겨우 비집고 들어간 작은 구멍은 스스로 그것을 더 삼키기 위해 꿈틀거렸다.
“원래 이렇게 야했어?”
이주한의 까끌까끌한 혀가 은찬의 예민한 젖꼭지를 쓸어내렸다. 점점 솟아오르는 흥분에 눈을 질끈 감은 은찬은 마른침을 삼키며 입술을 혀로 핥았다. 약았다. 그는 집요하게 젖꼭지만 공격하며 애를 태웠다.
“누굴 고자로 알아요? 수인 성욕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알면서.”
“……그 자식들하고 아직도 연락하는 거 아니지?”
대놓고 질투하는 이주한이 귀엽기도 하고 재미있어서 은찬은 숨죽여 웃었다.
“유은찬.”
이주한은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가슴을 핥던 혀가 천천히 목덜미를 타고 올라와 은찬의 입술 주변을 맴돌았다. 그가 은찬의 머리를 우악스럽게 잡아 내려 반강제적으로 시선을 마주했다. 분노가 일렁이는 표범의 눈은 등골이 오싹할 만큼 멋졌다.
손톱을 세운 은찬은 그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공평한 게 좋잖아요. 이리한인가 뭔가. 그쪽은 그 개새끼 달고 다니면서 나는 왜 안 되는데요?
“아직도 연락하고 있다는 말이네?”
“연락처는 있죠. 가끔 연락하니까.”
솔직한 은찬의 발언에 이주한의 표정이 더할 나이 없이 살벌해졌다.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진다 싶더니 그가 그대로 은찬을 잡아 침대 위로 눕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양팔 사이에 갇힌 은찬은 이 상황을 즐겼다. 최상계층의 표범 수인은 질투가 심한 남자였다.
“최근에 만난 적 없지?”
“뭐가 이렇게 질문이 많아. 나도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워크숍 이후로 한 번도 다른 사람이랑 한 적 없어요?”
“…….”
이주한은 말이 없었다. 대신 미간을 찌푸리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잤겠지. 이주한이 어떤 놈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놀랍지도 않았다. 콘돔을 무더기로 가지고 다니던 놈이었으니까. 대신 은찬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질투 따위를 왜 해? 먼저 매달린 쪽은 이주한이었다.
흐음……. 소리를 내며 은찬은 눈은 가늘게 떴다.
“그럼 나도 말 안 할래.”
“유은찬.”
“그게 공평하잖아요.”
은찬은 싱긋 읏으며 이주한의 팔 사이에서 빠져나왔다.
“지금 그게 뭐가 중요해요? 분위기 망친 건 형이에요. 할 마음 없으면 건들지나 말든가. 사람 짜증 나게.”
두 사람의 관계는 서두른 경향이 없지 않아 있었다. 서로에 대해 하나씩 알아가는 것도 이제 시작 단계였다.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던 상사와 부하에서 연인으로 넘어가는 단계는 생각보다 힘들었다.
짧게 혀를 차며 벗어 던진 셔츠를 들고 방을 나서려던 찰나였다. 달려온 이주한이 은찬을 와락 껴안았다. 바짝 몸을 밀착한 그가 은찬의 귓가에 진심을 담아 사과를 던졌다.
“미안. 그런데 너 잊으려고 그랬어.”
“그게 변명은 되지 않아요.”
“알아. 하지만 진짜야. 네가 그때 임신인 줄 알았으면, 아니 조금만 내 마음을 빨리 알았다면…….”
이주한 답지 않게 우물우물하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솔직히 은찬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이주한은 유은찬 인생에 악마 같은 존재였으니까. 물론 지금은 다르지만.
은찬은 제 목에 둘린 이주한의 팔을 힘껏 깨물었다. 얼마나 힘껏 깨물었는지 송곳니에 물린 팔뚝에 피가 송글 맺혔다. 아플 텐데도 그는 아픈 기색 하나 없이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이제부터 나 말고 다른 사람하고 그러면 안 돼요.”
“맹세할게.”
주한이 은찬의 목에 얼굴을 비비며 속삭였다. 자연스럽게 몸을 부드럽게 쓸어내리기 시작한 손은 능숙하게 은찬의 엉덩이를 만지작거렸다.
“엉덩이 닳겠네. 그만 만지고 이제 좀 넣죠?”
임산부와 잠자리를 가지는 게 처음인 그는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다. 물론 은찬도 임신이 처음이긴 하지만, 뭐 어때. 힘 조절만 잘하면 되겠지. 살짝 몸을 틀어 입을 벌리자 자연스럽게 그의 혀가 들어와 입안을 헤집어 놓았다.
다시 시작된 키스는 포악했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서로를 몰아붙였다. 그 와중에 은찬은 허리를 뒤로 빼 성기가 수월하게 들어올 수 있는 자세를 잡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이주한은 은찬의 적극적인 태도에 천천히 귀두 끝자락을 밀어 넣었다. 고작 귀두만 넣었을 뿐인데 은찬은 입술을 질끈 깨물어야 했다.
뭐든 처음이 어려운 법이었다. 작은 구멍을 비집고 반 이상 들어간 성기가 내벽 맛을 보자 단숨에 뿌리 끝까지 파고들었다. 헉 숨을 몰아쉰 은찬이 눈을 질끈 감으며 부르르 떨었다.
“괜찮아?”
“하아…… 천천히 움직, 하으……. 읏!”
은찬의 요구대로 주한은 부드럽게 움직였다. 단단하고 굵은 성기가 내벽을 부드럽게 가르고 들어와 그대로 스르륵 나가는 감각. 그 감미로운 자극에 은찬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흔들며 주한을 부추겼다.
“하아…… 아. 조금만 더 세게.”
치솟는 욕망은 더 많은 쾌감을 갈구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먼저 자제력을 던져 버린 건 은찬이었다. 성기가 내벽을 푹 찌를 때마다 교성을 지르며 그를 더 부추겼다. 그가 조금이라도 속도를 늦추면 엉덩이에 힘을 줬다.
“아, 아아! 더…… 하아! 더, 아읏! 아, 하아!”
점점 빨리지는 속도와 힘은 은찬의 몸을 무참히 흔들리게 만들었다. 그러다 성기 끝자락이 내벽 끝에 닿았을 때 은찬은 소리를 지르며 몸을 덜덜 떨었다. 아파서가 아니라 처음 느껴 보는 쾌감에 어쩔 줄 몰라서였다. 서 있기 힘들 정도로 다리에 힘이 풀린 은찬은 주한에게 몸을 의지했다. 이대로라면 바닥에 쓰러질 것 같았다.
“하아, 하아. 거기, 그대로 거기서.”
주한은 눈을 감고 신음을 흘리며 던진 은찬의 주문에 맞춰 움직였다. 그가 요구한 그 부분에 성기를 미친 듯이 깊게 박아 대자 은찬은 비명을 지르며 흐느꼈다.
“아! 아아아앙! 하읏…… 아, 아앙.!”
쾌락에 녹아 버린 은찬은 자신이 우는지도 몰랐다.
“유은찬…… 하아! 윽, 유은찬!”
귓가에 울리는 이주한의 거친 숨소리와 더불어 은찬의 비명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는 이리저리 허리를 움직여 내벽 곳곳을 후벼 팠다. 그때마다 은찬은 숨이 넘어갈 듯 소리를 지르며 주한의 팔을 손톱으로 긁어 내렸다.
침대 위였다면 조금 더 편했을 텐데. 서서 하는 섹스는 제약이 많았다. 이런 자세가 처음도 아니건만 은찬은 서 있는 것조차 버거웠다. 임신 때문에 몸이 많이 예민해진 탓이었다.
“흐윽, 으……. 하아, 하아.”
“이봐. 힘들어할 거면서.”
주한은 촉촉이 젖은 은찬의 눈가를 혀로 핥아 주었다. 하지만 삽입된 성기는 빼지 않았다.
“금방 끝낼게. 서 있기 힘들어? 이리 와.”
작게 고개를 끄덕인 은찬은 이주한이 시키는 대로 그의 몸에 매달렸다. 그는 은찬을 안아 문 옆에 있는 수납장 위에 올려놓았다. 높이가 이주한의 허리 높이와 딱 맞아 떨어졌다. 은찬의 입술을 쪼으며 다시 부드럽게 허리 짓을 시작했다.
넓게 벌린 다리 사이에 핏줄이 선 크고 단단한 그의 성기가 오가는 게 적나라하게 보였다. 주름 하나 없이 넓게 펴진 구멍은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처럼 팽팽했고 검은 그의 음모는 은찬의 애액으로 젖어 있었다. 점점 고조되기 시작한 둘은 가뿐 호흡을 나누며 진하게 입을 맞췄다.
“하아…… 아. 아응! 아!”
이주한은 은찬이 느끼는 곳을 계속해서 공격했고 은찬은 난잡하게 허리를 흔들며 받아들였다. 처음과 다르게 점점 거칠고 공격적으로 변해 갔지만 은찬은 거부하지 않고 밀려오는 쾌감을 음미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버릴 만큼 정신이 까마득히 날아가고 있을 때였다. 돌연 주한이 은찬의 뒷덜미를 거칠게 움켜잡았다. 겨우 숨을 쉬고 있던 은찬의 입을 막아 버림과 동시에 그의 허리 짓이 박차를 가했다.
“흐읍!”
은찬이 버둥거릴 때마다 그는 미친 듯이 내벽을 찍으며 그를 몰아세웠다. 더는 버틸 재간이 없던 은찬은 그의 팔을 할퀴며 비명에 가까운 교성을 질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것이 끝났다.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린 은찬의 귀에 흐트러진 제 숨소리와 이주한의 거친 호흡이 교차되어 들렸다. 멍하니 주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숨을 돌리던 은찬이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형.”
“괜찮아?”
이주한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은찬은 눈만 깜박였다. 그제야 그의 온몸이 땀으로 뒤덮인 것이 보였다. 팔도 손톱자국으로 엉망진창이었고 시원했던 방은 두 사람의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괜찮아?”
그는 은찬의 뺨을 걱정스럽게 매만졌다. 아직도 쾌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은찬은 흐느적거렸다. 구멍은 채 닫히지도 않은 채 정액이 뚝 뚝 흘러내렸고 비릿한 정액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은찬아?”
“아깝다.”
“뭐?”
은찬은 한숨을 내쉬며 제 배를 응시했다.
“이놈들만 없으면 더 좋았을 건데. 애 낳고 그땐 진짜 끝내주게 한 번 더 해요.”
아쉬움이 가득 담은 시선에 이주한은 픽 웃으며 은찬의 입술을 쪼았다.
“원하는 만큼 해 줄게.”
“약속했어요.”
“약속.”
둘은 서로의 목을 끌어안고 다시 키스에 열중했다. 가끔 서로의 송곳니에 혀가 쓸렸지만, 그것마저 로맨틱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기분이 따뜻해지고 좋은 느낌. 처음 느껴보는 이 감정이 사랑이라면 큰일이다. 점점 빠져들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