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잠시 생각에 잠긴 이태한 회장은 김 실장의 부름을 듣지 못했다. 평소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일단 앙칼진 고양이를 잡아 가둬 놓긴 했는데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회장님.”
“말해.”
“김 선생님께서 다시 연락 주셨습니다.”
김 실장의 말에 이태한 회장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그는 아직도 그 말이 믿기지 않았다. 사내놈이 임신이라니. 오피스텔 앞에서 만난 주한이에게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버럭 소리를 치며 차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매정하게 뒤돌아 서기에는 녀석의 표정이 더없이 진심이었다.
어차피 아니면 그만인 일이었다. 자신이 손해 볼 건 없기에 그는 주한을 따라나섰다. 만약을 대비해 김 실장에게 몇 가지 사항도 일러 놓았다.
그런데 진짜였다. 이런저런 세상 풍파를 다 겪었다 자부하는 그였지만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처음 보았을 땐 품이 넓은 옷을 입어서 그런지 티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집에서 보니 확실히 배가 남달랐다.
“김 선생이 뭐라던가.”
김 실장을 통해 그의 집안 주치의에게 남자 수인의 임신에 관해 넌지시 물어본 상태였다.
“아주 희박하긴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
“같은 고양잇과끼리 몸의 상성이 맞으면 종의 번식을 위해 몸에서 자연적으로 임신의 형태로 변형될 수 있다는 논문이 있다고 합니다. 아주 희박한 가능성이지만요.”
“그렇군. 아주 희박하단 말이지…….”
이태한 회장은 그 말을 곱씹으며 차창 밖을 응시했다. 어이없게도 그런 일이 제 집안에서 벌어지게 될 줄이야. 이걸 길조로 받아들여야 할지 말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받아…들이실 겁니까.”
김 실장의 조심스런 물음에 이태한 회장은 평소처럼 감정 없는 톤으로 대답했다.
“일단은. 우리 집안 핏줄이니. 자네도 알지 않나. 표범은 아이를 하나 이상 낳지 못해. 그런데 지금 저 아이 몸에 둘이 있다지 않나. 물론, 고양이가 나오면 달라지겠지. 출산할 때까지는 잘 지켜봐야지.”
“네, 알겠습니다.”
“호텔에 연락해서 그것 좀 넉넉하게 만들고.”
“네.”
냉랭한 말투와는 달리 이태한 회장의 한쪽 입꼬리는 계속 실룩였다. 악을 쓰면서도 캐러멜을 오물거리며 먹던 망할 고양이 녀석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고양이 따위에게 빠진 손자가 한심했는데 잠시 지켜본 결과 썩 나쁘지 않았다.
고놈, 데리고 있으면 심심하지는 않겠네. 그는 내친김에 김 실장에게 한 가지 더 지시를 내렸다.
“김 실장.”
“네, 회장님.”
“고양이 수인이 좋아할 만한 게 뭔지 알아봐.”
“네, 회장님.”
뜻밖에 증손자를 둘씩이나 얻게 된 이태한 회장의 기분은 나름 좋았다. 단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었다. 조용히 창밖을 응시하는 그의 모습은 근엄하고 진중한, 평소 모습 그대로였다.
***
편의점을 나와 오피스텔로 돌아가는 동만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슬리퍼를 질질 끌며 힘없이 걷고 있는 그의 손에 제법 묵직한 편의점 봉지가 들려 있었다. 소주 세 병과 육포 하나가 들어간 봉지였다. 그런 동만의 뒤를 이리한이 졸졸 따라왔다.
“왜 자꾸 따라오는 건데요? 나 댁하고 상대할 기분 아니니까. 가시죠?”
엘리베이터까지 같이 탔지만, 동만은 시선 한번 주지 않았다. 유은찬이 사라진 뒤부터 계속 이런 태도였다. 그건 이리한도 마찬가지였다. 한 사람은 쌀쌀맞고 다른 한 사람은 말없이 쫓아오고. 이런 상황이 줄곧 반복됐다. 이젠 말하기도 지쳐 버린 동만은 그를 내버려두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를 지났다.
회장이 이곳에 왔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고, 덕분에 동만의 핸드폰에도 불이 났다. 하나같이 회장과 유은찬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묻고 있었다. 그에 동만은 모른다고 잡아떼다 아예 핸드폰을 꺼 놓았다.
문을 열고 조용한 거실을 지나쳐 식탁에 털썩 앉아 소주를 깠다. 손에 잡히는 컵에다 소주를 부었는데 자세히 보니 유은찬이 주로 쓰던 컵이었다. 동만은 쓰게 웃으며 단숨에 소주를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천천히 마셔요. 그러다 훅 간다니까?”
맞은편에 털썩 앉은 이리한이 자연스럽게 소주를 넘겨받아 동만의 잔을 채웠다.
“유은찬 씨 때문에 그래요? 그렇게 슬퍼요? 진짜 좋아했었나 봐…….”
그 물음에 대한 답은 한참 뒤에 나왔다. 소주 한 병을 단숨에 비우고 두 병을 마시기 시작한 뒤. 유은찬이 매일같이 누워 있던 소파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동만은 목이 멨다.
“매일 저기 앉아 있었는데……. 저기 앉아서 밥 달라고. 식충이처럼 맨날 그 소리만 했는데. 사람 들어온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왜 이렇게 섭섭한지 모르겠단 말이지. 보내 준 건 난데. 솔직히 여기보다 거기 가는 게 맞잖아.”
김 실장의 제의에 짧은 찰나 동만은 만감이 교차다. 둘 다 사정 뻔한데 애가 둘이나 있으면 얼마나 잘 보살필 수 있겠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저 철딱서니 없는 망할 고양이 놈. 돈 많은 집에 가서 먹고 싶은 것 실컷 먹고 사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보냈다. 애초에 승진을 바랐다면 처음부터 이주한에게 은찬을 팔았어도 충분했다.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서. 유은찬 씨 임신한 거 맞죠?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죠?”
이리한의 물음에 동만은 술잔을 쥔 그대로 굳었다. 멍청하긴. 아무리 눈치 없는 바보라도 눈앞에서 다 봤으면 알아채야지. 짧게 혀를 찬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술잔을 비웠다.
“타고난 거죠?”
“뭐가요? 아, 얼굴? 나 손댄 거 하나도 없는데. 고친 것처럼 완벽해서 놀랐구나?”
이리한은 칭찬인 줄 알고 눈을 반짝이며 동만의 빈 잔에 술을 채웠다. 그런 이리한이 어이가 없기도 하고 이런 놈과 쓸데없이 말꼬리를 잡고 있는 자신이 웃기기도 하고.
동만은 픽 웃으며 또 잔을 비웠다. 그때마다 이리한은 조용히 잔을 채웠다. 이럴 때만 눈치가 생기는 건가 싶었다.
“잘 살아야 할 텐데. 그놈 성격이 지랄 같아도 나름 재미있었는데.”
동만의 시선은 이리한의 어깨너머 주인을 잃어버린 텅 빈 소파를 응시했다. 동만이 샀지만, 실질적으로 유은찬 손을 더 많이 탄 소파였다.
“왜요? 유은찬 씨 이제 여기 안 와요?”
“올 이유가 없잖아요. 나 같아도 안 오겠다. 좋은 집에서 먹고 싶은 거 실컷 먹고 지 마음대로 살 텐데 뭐가 아쉬워서 오겠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먹고 싶다고 한 거 실컷 먹이고 보낼걸. 나비하고 까망이 태어나면 볼 수나 있을지 모르겠네……. 그래도 지금까지 그 녀석들 먹인다고 고생한 건 난데.”
“나비하고 까망이?”
동만의 독백을 묵묵히 듣고 있던 이리한의 나지막한 물음에 동만은 싱겁게 웃었다.
“아까 들었잖아요. 유은찬 임신했어요. 두 마리라고 해야 하나. 두 녀석이라고 해야 하나. 암튼, 배 속에 둘이나 있는데, 사람으로 치면 쌍둥이겠지만 고양이는 원래 다산을 하니까 그건 또 아니라고 하고. 이게 또 웃긴 게. 수인이라고 해서 다 임신이 되는 것도 아니라네? 그 어렵고 힘든 걸 하필 유은찬이 해냈다는 게 웃기기도 하고. 결국, 이렇게 갈 거면서 사람 고생이란 고생은 다 시키고. 망할 놈. 하여튼 고양이는 이렇다니까. 나는 끝까지 지 걱정하는데 이 새끼는 전화 한 통 없는 것 봐.”
모든 것이 다 지나간 뒤에야 동만은 솔직하게 본심을 털어놓았다. 유은찬이 없는 곳에서 이래 봤자 무의미한 짓이었지만 그냥 해 봤다.
“그러니까 망할 고양이는 이제 그만 접고. 난 어때요?”
식탁 의자에 등을 기댄 이리한의 그윽한 시선이 쏟아졌다. 동만은 이리한과 마주친 시선에 콧방귀를 꼈다.
“아직도 포기 안 했네.”
“이게 고양이 하고 개의 차이죠. 봐요. 그렇게 보살펴 준 고양이는 연락 한 통 없지만 난 김동만 씨를 지키고 있잖아요.”
동만을 빤히 바라보며 이리한은 예쁘게 웃었다. 저, 미친놈. 또 지랄을 한다. 누가 누굴 지켜. 귀찮다고 가라고 해도 고집스럽게 말도 듣지 않았으면서. 눈을 가늘게 뜬 동만이 녀석을 째려봤다.
그런데 이상했다. 술에 취한 걸까. 이리한의 미소에 덩달아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포기해요. 난 남자는 연애 상대로 안 본다고 경고했습니다.”
술 한 잔을 입안에 탁 털어 넣고 동만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럼 사람 대 사람으로 따지면요? 나 나쁘지는 않잖아요.”
그걸 말이라고 하냐? 동만은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육포 하나를 질겅질겅 씹으며 이리한도 같이 씹었다.
“그럼 더 최악이지. 딱 보니까 애인도 많았던 것 같고. 바람도 주야장천 폈을 것 같고. 그러다 들키면 쿨하게 헤어졌을 것 같고. 오는 놈 안 막고 가는 놈 안 잡는 그런 타입 아닌가?”
이리한에게 막무가내로 끌려다니며 통화하는 내용을 본의 아니게 듣고 지레짐작했을 뿐이다. 통화 내용 대부분이 만나자는 내용이니 아무리 눈치 없는 동만도 모를 수 없었다.
“그리고 그쪽, 사람 아니잖아. 웃긴다니까. 수인들은 지들이 사람인 줄 알아요. 그러다가 조금만 불리하면 수인이라고 발뺌하고.”
“……내가 왜 싫어요? 어디가 싫은데요?”
연속으로 쓴소리를 던진 탓인지 이리한의 어깨가 축 처졌다. 이런 모습이 동만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유은찬이었다면 오히려 더 큰소리 쳤을 텐데. 수인 무시하냐며 말이다. 개와 고양이의 반응이 너무 극과 극이라 동만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잠시 이리한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동만은 조용히 잔에 소주를 채우고 또 한 잔을 비웠다. 평소 주량은 이미 넘어선 상태였다.
“그렇게 무턱대고 들이대면 내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한 건가? 부럽다. 자신감 쩌네. 나 남자는 연애 상대 제외라고 몇 번을 말해. 이봐요. 왜 나 같은 놈한테 아쉬운 소리 들어요. 잘나신 분이.”
가뜩이나 심란해 죽겠는데 이 자식까지 이러니 동만은 미칠 노릇이었다. 얼른 타일러서 보내 버리고 술이나 더 마시다 자야겠다.
이리한이 침묵이 길어질 동안 동만은 그를 보낼 생각만 가득 찼다. 그러다 무심코 고개를 드는데 술맛이 딱 떨어졌다. 축 늘어진 강아지 귀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촉촉한 눈망울이 콕 눈에 들어왔다.
앤 또 왜 이래. 고작 그 말 좀 했다고 이런다고? 꼭 주인에게 버림받은 개 모습에 뻔뻔할 정도로 당당한 유은찬이 그리워졌다. 결국, 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동만은 팔을 뻗어 녀석의 머리를 툭툭 쓰다듬었다.
“그렇다고 기분 나빠 하지 말고. 다 그쪽 생각해서 하는 말이니까.”
“……왜 나한테 잘해 줘요?”
“…….”
이리한의 젖은 목소리가 측은하기는커녕 동만의 혈압을 올렸다. 이게 어딜 봐서 잘해 주는 건데! 아까부터 꺼지라고 그렇게 소리쳤건만!
“싫으면 그냥 무시하지. 왜 이렇게 만지고 그래. 사람 헷갈리게.”
그거야 그쪽이 중요한 거래처니까! 목까지 올라온 그 말을 애써 삼키며 동만은 억지로 웃었다. 한 대 확 치고 술김에 그랬다고 둘러댈까. 이리한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에 힘이 확 들어갔지만 차마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었다.
“더 해줘요.”
동만이 쓰다듬기를 멈추자 이리한이 머리를 숙이며 더 만져달라는 몸짓을 취했다.
“어떻게 남자가 임신을 해. 말도 안 돼.”
돌고 돌아 다시 그 주제를 들먹거리며 이리한은 혼잣말을 했다.
“그러게요.”
동만은 건성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숨을 터트렸다. 술기운은 슬슬 올라오는데 이 개는 집에 갈 생각을 안 한다. 집에 좀 가라. 나도 혼자서 조용히 고독을 씹고 싶다고.
“그러니까 회장님이 직접 여기까지 와서 데려갔구나. 그 고양이를.”
“그러게요.”
“그러면 우리도 가능성이 있는 거 아닐까요?”
“그러게…… 네?”
건성으로 대답하던 동만은 마지막 ‘우리’라는 단어에 정신을 차렸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애쓰던 동만은 턱을 괴고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이리한과 시선이 마주쳤다.
“우리도 가능성이 있겠다. 그쵸?”
녀석의 눈이 살짝 맛이 간 거 같다. 이 개, 광견병 주사는 맞았겠지? 꿀꺽 침을 삼킨 동만은 녀석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때. 이리한이 던진 한마디가 동만을 도발시켰다.
“섹스. 안 해 봤다면서요?”
“누가 그래요! 누가!”
“내 정보에 의하면 김동만 씨 모솔이라…….”
“아니거든요! 그거 잘못된 정보네! 나 섹스, 해 봤거든요! 아주 지겹게 많이!”
잘했어, 김동만. 자연스러웠어. 당당한 태도에 스스로 만족하고 있을 때 이리한이 동만의 팔을 잡아당겼다. 일어선 것도 앉은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에서 두 사람의 거리는 한결 더 좁혀졌다.
“그래요? 지겹게 많이 해 봤어요?”
“네……! 왜요? 뭘 그런 걸 묻고 그래요!”
당황한 동만이 팔을 뿌리치려 했지만 이리한의 힘이 더 좋았다.
“그럼 그거 알겠네? 수인하고 섹스하면 진짜 끝내주게 좋은데. 그래서 사람들이 수인한테 달려드는 거잖아요. 당신 친구 유은찬도 이주한하고 해서 임신까지 한 것 보면. 대단한 뭔가가 있을 것 같지 않아요?”
“…….”
확실히 술에 취한 걸지도. 아닌 걸 알면서도 동만은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혹시 알아요? 수인하고 해서. 김동만 씨 거기가 커지게 될지. 세상 사람들이 왜 수인을 신기하게 보는데. 다 그만한 뭔가가 있으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요? 생각해 봐요. 유은찬 씨가 임신한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요.”
동만은 묘하게 설득되고 있었다. 정말 그런 걸까? 그래서 유은찬이 임신을 한 걸까. 동만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이리한은 예쁘게 웃으며 입술을 바짝 붙였다. 조금만 움직이면 닿을 듯한 거리에서 그가 동만의 입술을 혀로 할짝대며 속삭였다.
“눈 딱 감고 한 번만 해 볼래요?”
부드럽게 속삭이는 말이 동만의 귀에 마법처럼 메아리쳤다. 거기가 커지게 될 것이라는 그 말이 말이다. 까짓것 한번 해 봐? 뭐에 홀린 것처럼 입을 달싹인 동만은 순간 흠칫했다. 다행히 마지막 이성의 끈이 그를 붙잡았다.
정신 차려, 김동만. 이런 놈이랑 하려고 지금껏 기다린 게 아니잖아.
“웃, 웃기고 있네. 그딴 말을 내가 믿을 거 같아?”
“왜요? 수인도 있는 세상인데. 더군다나 남자가 임신도 했는데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해 보자는 거지.”
“…….”
이상하게 이리한의 말이 구구절절 맞는 말 같았다. 이리한은 넋 놓고 그의 말을 경청하는 동만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주문처럼 속삭였다.
“뭘 고민해요. 남들은 수인하고 한번 자고 싶어서 난리인데.”
거짓 한 점 없을 것 같은 반짝이는 이리한의 눈과 마주친 순간 동만은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이성은 저 멀리 날아간 상태에서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해. 할게.”
남들은 하고 싶어서 난리라잖아. 얼마나 좋은지 경험이나 해 보지 뭐. 그렇게 간단히 생각한 죄였을까. 허락이 떨어짐과 동시에 벌떡 일어난 이리한이 눈 깜짝할 사이에 동만을 식탁 위로 눕혔다.
식탁 위에 있던 것들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소주잔과 반쯤 남은 소주. 그리고 빈 병들과 잡동사니가 있던 곳에 어느새 동만은 벌러덩 누운 채였다. 반 박자 늦게 의미를 눈치챈 동만이 인상을 쓰며 따졌다.
“설마 내가 아래는 아니지?”
“그럼요?”
이리한은 당연하다는 듯 말하며 동만의 와이셔츠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누구도 닿은 적 없는 곳에서 느껴지는 끈적한 손길에 당황한 동만이 버둥거리며 소리쳤다.
“잠, 잠깐만! 왜 내가 아랜데! 이건 아닌 거 같아. 아니야. 그래, 아니야!”
“이걸로 나 만족시켜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자신 있어요?”
손 하나가 바지 속에 잠자고 있는 동만의 성기를 어루만졌다. 가뜩이나 작다는 것이 트라우마로 남았던 터라 동만은 괜한 승부욕이 생겼다. 술이 오를 때로 오른 탓도 있었다.
“너는 얼마나 큰데?”
“인정하면 조용히 아래하기.”
동만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리한을 향해 코웃음을 쳤다. 크면 얼마나 크다고. 인정 안 하면 그만이지.
“오케이! 콜!”
목청껏 대답했지만,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동만은 경악했다. 커 봤자지, 하고 우습게 생각했던 이리한의 성기는 생각 이상으로 컸다. 이래서 사람들이 수인을 찾는 건가 싶었다. 상체를 살짝 세운 동만은 이리한의 얼굴과 성기를 번갈아 보며 재빨리 후퇴를 선언했다.
“없었던 걸로 하자.”
“네? 왜요!”
반 정도 발기한 성기가 이 정돈데 풀 발기 상태면 항문이 찢어질지도 모른다. 불현듯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 버린 동만은 공포가 밀려왔다.
“크잖아! 그게 어떻게 들어가!”
“이게요? 이주한은 내 거 두 밴데?”
“그만해! 말하지 마! 상상되잖아!”
오만상 인상을 쓴 동만은 귀를 틀어막으며 발악했다. 괜히 들었다. 팔뚝만 한 흉기를 달고 다니는 이주한과 그놈과 잔 유은찬. 불순한 상상을 하는 동안 동만은 순간 제 아랫도리가 시원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야……!”
“약속은 약속이니까.”
“그걸 어떻게 넣어! 찢어진다고!”
“괜찮아요. 생각보다 피부가 얼마나 유연한데. 지금까지 찢어진 적 한 번도 없어요. 기름 없어요? 로션이나. 아, 저기 있네!”
당황한 동만과는 달리 이리한은 침착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긴 팔을 뻗어 식용유를 집었다. 따질 사이도 없이 동만의 엉덩이 사이에 식용유가 차박차박 발렸다.
이게 뭐 하는 짓일까. 인생의 목표에서 첫 섹스는 완벽하게 로맨틱한 섹스를 하겠다고 생각했건만 식탁 위에서 엉덩이에 식용유가 발리고 있다니. 그 와중에 너무 정성스럽게 바르니까 어이가 없다. 주름 하나하나 꼼꼼하게도 바른다.
섹스 전에는 뜨거운 전희가 있어야 할 텐데 이게 그건가. 섹스를 야동으로만 배운 동만에게 항문 마사지 따위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세계였다. 흥분은커녕 음식이 된 기분이다. 섹스할 의욕이 사라진 동만은 멍하니 천장을 응시했다.
“저기, 그냥 없었던 거로 하는 게…….”
“다했다. 이렇게 안 하면 나중에 화장실 가기 힘들어요. 오래 기다렸죠? 나 원래 이렇게까지 해 주지 않는데. 동만 씨니까.”
체념하고 식탁 위에 힘없이 누운 동만을 향해 이리한이 씨익 웃었다. 꼭 칭찬해 달라는 듯한 표정 같았다.
“그…래. 고맙다. 고마워서 눈물이 나려 하네.”
이딴 걸 고마워해야 하다니. 술 깨면 수치사는 확실했다.
“바람 안 피울게요. 절대로.”
“…….”
“엄마하고 형들한테도 동만 씨 이야기 다 해 놨어요.”
“뭐? 야! 잠깐만……! 뭐?”
방금 무슨 소리지? 놀란 동만이 벌떡 일어나려 했지만, 순간 무릎이 가슴까지 올라왔다. 곧바로 엉덩이 사이. 식용유를 정성스럽게 바른 그곳에 크고 단단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헉, 숨을 삼킨 동만은 필사적으로 도망치려 했다.
“일부러 나 도발하는 거죠?”
아니거든! 발악하기 직전, 이리한의 거대한 성기가 좁은 엉덩이 구멍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를 썼다.
“아, 아…….”
동만은 어쩌다 보니 반쯤 상체를 일으킨 채였다. 무릎이 가슴까지 올라온 상태. 엉덩이 사이를 가르고 제 몸 안으로 들어오는 거대한 성기가 너무도 적나라하게 보이는 자세였다. 반도 채 들어가지 못했건만 벌써 배 안에 이물감이 느껴졌다.
“아……. 안 되겠는데.”
곧이어 이리한의 작은 탄식이 들렸다. 그래, 안 되겠지. 눈으로 보고 있는 동만도 믿기 힘들었다. 저건 다 넣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동만은 이리한에게 애원했다.
“빼자! 뺄 수 있을 때 빼자!”
“미안해요. 나, 더는 못 참겠어. 발정 난 거 같아.”
처음보다 호흡이 거칠어진 이리한은 동만의 엉덩이를 거칠게 움켜잡고 최대한 벌리더니 단번에 성기를 뿌리 끝까지 삽입했다. 거대한 성기가 배 안을 꽉 채우자 동만은 사고 회로가 정지됐다. 그게…… 들어왔다고?
이리한은 적응할 시간도 주지 않고 급하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겨우 숨만 내쉬고 있던 동만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신음을 삼켰다. 크고 거대한 녀석의 성기가 배 안을 흉포하게 휘저을 때마다 토악질이 올라왔다.
“하아, 하아……. 쫀득쫀득한 게 장난 아니야. 아, 아아!”
“흐으…… 으읏.”
얼마나 세게 박아 대는지 동만을 비롯해 식탁 전체가 요동쳤다. 이게 그렇게 끝내준다는 섹스인가. 섹스가 처음인 동만은 이리한이 허리를 흔들며 박아 댈 때마다 느껴지는 감각이 뭔지 정확히 알기 힘들었다.
이게 쾌감인 건가. 이러다 엉덩이가 찢어지는 건 아닌가. 그 걱정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을 때였다.
“하아, 하아. 아응…… 아! 아아!”
동만보다 더 크게 신음을 지르던 이리한이 삽입한 채 갑자기 동만을 뒤집어 버렸다. 전보다 더 깊숙이 들어온 성기 끝자락이 절묘한 곳을 찍어 대기 시작했다.
“흐읏……. 으, 하으…….”
“여기. 좋아요?”
이리한은 능란하게 그곳을 다시 쑤셨고 동만은 움찔거리며 저도 모르게 교성을 내질렀다.
“여기구나?”
거기가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그 뒤 이리한은 계속 그곳만 공격했다. 덕분에 온몸이 녹아내릴 것처럼 흐물흐물해졌다. 이게 쾌감이구나. 쾌감을 맛본 동만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흔들며 이리한을 자극했다.
“하아. 하아…… 아, 아아! 좋아! 좋아!”
“하. 하아, 아…….”
아래에 깔린 자신의 신음 소리보다 이리한의 목소리가 더 컸지만 상관없었다. 격렬한 허리 짓은 동만을 전율하게 만들었다. 성기가 내벽을 훑고 올라갔다가 빠르게 빠져나갈 때면 동만은 움찔거리며 그것을 꽉 조였다.
“빡빡한데, 조이는 맛이 끝내줘서……. 하아, 하아, 아아……. 좋아. 좋아서 미치겠어.”
“아, 아아! 하아…….”
숨을 쉬기 위해 벌린 입에서 길게 침이 늘어져 식탁 위에 흥건히 고였다. 그 상태로 삽입될 때마다 동만은 찌릿한 감각에 몸부림쳤다. 배 안을 마구 휘젓는 느낌이 좋아서 미칠 지경이다.
“으…… 읏, 하아.”
“앙! 아앙! 아아!”
이리한의 교성이 거실 가득 울려 퍼졌다. 녀석은 동만의 가슴을 거칠게 움켜잡고 젖꼭지를 손톱으로 비틀었다. 자연스럽게 상체가 뒤로 젖힌 동만은 그대로 무너졌다.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위해 엉덩이를 난잡하게 흔들어 댔다.
그들의 격렬한 움직임에 식탁이 위태롭게 삐걱거렸다.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아…… 아아. 더, 조금 더.”
“조이지 마요. 나도 지금 겨우 참고 있는 거니까.”
이리한이 박아 댈 때마다 등줄기를 타고 올라가는 찌릿함에 동만은 고개를 저으며 소리를 질렀다.
“하아. 아으, 아…….”
“아앙, 아! 아아……! 이봐요, 내거 물고 안 놓고 있어. 하앗…….”
성기가 내벽을 흉포하게 짓이기고 나갈 때마다 동만은 잠시 까무러쳤다가 돌아왔다. 그럼 이리한이 음탕한 소리를 지껄이며 동만의 젖꼭지를 지분거렸다. 젖꼭지에서 쾌감을 느낄 줄이야.
이리한이 손길에 동만은 비음 섞인 교성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역시 이리한의 교성이 더 컸다.
“아앗, 아! 하아, 하……. 좋아! 좋아, 더……. 더 깊이 박을 거야. 아앙!”
“하아. 하아…… 아읏!”
점점 더 거칠게 박아 대는 통에 동만은 이제 숨쉬기도 괴로울 지경이었다. 불규칙한 속도와 박자에 겨우 버티던 그는 녀석이 뒤에서 와락 껴안아 버리자 그대로 무너졌다. 거대한 성기가 몸을 관통하듯 깊숙이 들어와 빠르게 쑤셔 댔다. 숨을 크게 들이키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 와중에 녀석은 땀에 젖은 동만의 목덜미를 핥으며 신음을 질렀다.
“하응! 앙! 아, 아아…… 아! 맛있어! 흑, 미치게 맛있어!”
예민해진 몸은 이리한의 신음 하나에도 반응했다. 오싹하고 저릿했다. 온몸이 덜덜 떨릴 만큼 쾌감에 녹아버린 동만은 침을 흘리며 제 몸을 이리한에게 던졌다. 이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몇 시간 동안 이어진 섹스는 동만을 지치게 만들었다. 몇 번의 절정도 맛보았다. 더는 정액이 나오지 않아 묽은 액체가 나올 지경인데도 이리한은 멈추지 않았다. 덩달아 허리를 흔들고 있는 저 자신도 놀라웠다.
“아…… 그만. 이제 그만……해.”
목이 잔뜩 쉰 동만의 외침이 허공에 공허하게 울렸다.
“아앙! 앗……! 아, 아앙! 조금만 더, 더……! 아앗!”
이리한은 지치지도 않았다. 거기다 박아 대면서 교성은 동만보다 더 많이 질렀다. 여전히 온몸이 부서질 듯 흔들리던 동만은 퉁퉁 부은 제 젖꼭지를 지분거리며 연신 박아 대는 이리한에게 따졌다.
“하아…… 아. 아…… 그만…… 좀……앙앙대! 나보다 왜…… 흐으, 네가 더 시끄러워!”
“버릇이 돼서…… 아앙! 기분 좋으면, 아응…… 못 참아서. 하아……. 아, 안 되겠다.”
갑자기 이리한이 움직임을 멈췄다. 드디어 끝난 건가. 거대한 성기가 제 몸에서 빠져나간 그 순간 살았다는 생각에 동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리한은 축 늘어진 동만을 공주님처럼 안고서 소파 쪽으로 장소를 이동했다. 동만은 수치심에 눈을 질끈 감았다. 녀석에게 쪽팔린 자세로 안긴 건 둘째 치고 엉덩이 안에서 울컥하고 흘러내린 진득한 액체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 액체의 색깔은 옅은 분홍색이었다.
온몸이 덜덜 떨리다 못해 죽을 것 같은 동만은 눈을 부릅뜨고 살려 달라고 호소했다.
“이런 적은 처음인데. 나 이 상태면 임신시킬 수 있을 것 같아.”
아니라고! 그건 상대가 수인이여야지 가능하다고, 멍청아! 동만이 고개를 저으며 최후의 발악을 해 보려 했지만, 입을 벌린 순간 이리한에게 먹혀 버렸다. 거칠게 입안을 빨아 대던 녀석은 아주 능숙하게 번들거리는 동만의 구멍 안으로 발기한 성기를 밀어 넣었다.
“읍……!”
이미 이리한에게 익숙해진 몸은 반항 한번 하지 못하고 그를 받아들였다. 오히려 들어오기 쉽게 엉덩이를 드는 배려까지 보였다. 또다시 이리한이 거칠게 허리를 움직이자 동만은 눈물이 터졌다. 죽을 만큼 힘든데 한편으로는 끝내주게 좋았다.
퍽. 퍽. 퍽. 집안 전체에 울리는 살과 살이 맞부딪치는 소리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 언제쯤 끝나는 것일까……. 이러다 복상사 하는 건 아닐까. 첫 섹스에 복상사라니.
“집중해요, 나한테. 하아. 아, 아, 아아……. 아직, 여유가 있네.”
“아니. 아, 아…… 하아. 아응! 잠깐, 깊어……. 아!”
“앙, 아아……! 하아, 하아. 여기. 여기 좋죠? 여기도, 이것도. 아앙!”
이리한은 동만이 느끼는 곳을 정확히 꿰고 있었다. 축 늘어진 동만의 성기를 움켜쥐고 젖꼭지를 비틀며 이리한은 미친 듯이 박아 댔다. 민감해진 내벽에 경련이 일었다.
“아앙! 아, 그렇게 꽉 물면……! 안 돼, 아앗! 아아아!”
애원하면서 교성을 내지르는 이리한은 끝까지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동만은 멍한 상태에서 흐느끼기만 했다. 결국, 녀석은 동만의 배 안을 정액으로 가득 채우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물러났다.
동만은 몇 번이나 사정했음에도 압도적으로 큰 이리한의 성기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다시는 수인하고 하지 않을 것이다. 죽지 않은 것에 대해 안도감을 느끼며 동만은 그 자리에서 기절하다시피 눈을 감았다.
다음 날. 눈을 뜨면 이 순간이 꿈이길 바랐지만, 숨이 턱 막히는 무게감에 눈을 뜨니 나체 상태의 이리한이 제 몸 위에 포개어 자고 있었다.
현실을 부정하려 해도 서서히 통증이 밀려왔다. 근육통과 더불어 몇 시간 동안 거대한 성기가 뚫고 들어온 그곳의 통증은 동만을 무섭도록 침착하게 만들었다. 동만은 그대로 이리한의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문 쪽으로 끌고 갔다.
자다가 날벼락 맞은 이리한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쳐다봤지만, 말할 타이밍도 주지 않고 문밖으로 쫓아냈다.
“갑자기 왜 이래요? 혹시 나 별로였어요? 아닌데! 좋다고 계속 그랬잖아요!”
이리한은 문을 쾅쾅 치며 소리쳤다. 지금 시간 새벽 3시. 시간을 확인한 동만은 다급하게 녀석의 널브러진 옷과 구두를 챙겨 들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서 있는 이리한의 면상에 그것을 던지며 단호하게 경고했다.
“경찰 부르기 전에 꺼져!”
“싫어요! 이러는 게 어디 있어.”
“가! 그냥 좀 가!”
“자고 오면 문 열어 줄 거죠?”
미치겠다. 동만은 정말 멘탈이 나갈 지경이었다. 겨우 고양이한테서 해방되나 했더니 이제는 개새끼가 달라붙었다. 일단 돌려보내는 게 급선무였기에 동만은 무조건 알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리한은 마지못해 옷을 입고 사라졌다.
드디어 혼자 남게 됐지만 엉망인 집안 꼴에 동만은 헛웃음이 터졌다. 개새끼가 동만이 기절한 사이 별짓을 다 해 놨다.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먹고 컵라면도 끓여 먹었다. 좀 전까지 그들이 정사를 벌였던 식탁은 한쪽으로 기울여진 상태였다. 그 뿐만이 아니라, 온 집안이 식용유로 번들거렸다.
더 최악인 건 지금 제 허벅지를 타고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는 연분홍의 무언가였다. 직감적으로 그곳이 찢어졌다는 것을 확신한 동만은 눈을 질끈 감았다.
망할 개새끼. 거기가 커지기는커녕 오히려 쓰라렸다.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개자식의 세 치 혀에 놀아난 자신의 멍청함이 문제였다. 처참한 제 몰골과 집 풍경에 좌절한 동만은 터벅터벅 걸어 침대에 몸을 던졌다.
일단 자자. 자고 나서 생각하자. 침대 위에 누운 동만을 더 짜증 나게 하는 건 녀석과의 섹스가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다.
***
고양이는 까다로운 존재였다. 지난날 김동만이 왜 반품이 안 된다는 말을 했는지 주한은 비로소 이해가 됐다.
라면 하나로 시작된 두 사람의 골은 점점 깊어졌고 주한은 아침까지 녀석의 마음을 풀지 못했다. 사실 풀고 말 것도 없었다. 그는 어떻게서든 비위를 맞추려 노력했건만 망할 고양이의 심기는 여전했다.
‘하나도 제대로 하는 게 없네. 고작 라면 하나도 못 끓이고. 할 줄 아는 게 뭐예요? 머리는 폼으로 달고 다니나? 그래서 일은 제대로 하겠어요?’
평소보다 늦게 출근하는 주한에게 던져진 유은찬의 핀잔이었다. 라면과 한바탕 전쟁을 치른 뒤부터 이랬다. 고작 라면 때문에 헤어지자는 말을 서슴없이 꺼내는 것도 짜증 났지만 김동만과 비교 대상이 된 것도 자존심이 상했다. 게다가 녀석의 말을 곱씹어 보니 1년 전 자신이 유은찬에게 주야장천 했던 말 중의 하나였다.
고양이는 영악했다. 어제부터 제 근처에는 얼씬도 못 하게 하면서 당당하게 하나뿐인 침대를 차지했으며 이른 아침부터 밥 달라고 행패를 부렸다. 다행히 도우미 아줌마의 출근으로 어제 같은 일은 모면했지만, 녀석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 갑갑하긴 마찬가지였다.
무거운 마음으로 회사에 들어선 주한의 머릿속은 온통 유은찬으로 가득 찬 상태였다. 도대체 김동만의 라면이 얼마나 맛있길래. 제 딴에는 성심성의껏 라면을 끓였건만 한입 먹자마자 헤어지자니…….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도 기가 찼다.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을 때였다. 왠지 모를 뜨거운 시선이 느껴진 주한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획 돌렸다. 그러자 엘리베이터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황급히 다른 곳으로 향했다. 순간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뭡니까?”
그중 낯이 익은 남자를 발견한 주한이 차갑게 묻자 그가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출근하시는가 봐요.”
“네, 일이 좀 있어서요. 무슨 일 있습니까? 아니면 저한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주한이 단도직입적으로 던지자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강하게 부정했다. 뭔가 있긴 있네. 직감적으로 눈치챈 주한은 쓰게 웃었다. 어차피 물어봐야 알려 주지도 않을 거고, 때마침 엘리베이터 문도 열렸다.
“수고하세요.”
“네. 좋은 하루 되세요, 부장님.”
서로 상투적인 인사를 주고받으며 헤어졌지만 괜히 찝찝했다. 분명 뭔가가 있는데……. 이놈의 회사는 하루라도 바람 잘 날이 없다니까. 사내 게시판을 없애든지 해야지.
모든 사건의 원흉인 사내 게시판의 최대 피해자인 주한은 출근하는 대로 곧장 들리라는 할아버지의 말을 무시하고 마케팅 1부서로 향했다. 유은찬은 없지만 만날 사람이 생겼다.
“김동만 씨.”
둥글게 모여 있던 팀원들은 소리 없이 불쑥 나타난 이주한을 보자마자 기겁했다. 모두 허둥지둥 제자리로 돌아가 일하는 척 연기를 펼쳤다. 이러니 매번 마케팅 2부서한테 못 당하지. 주한은 한마디 할까 하다가 접고 김동만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김동만 씨 오늘 출근 안 했어요? 외근입니까?”
“방금까지 있었는데……. 어디 갔지? 잠깐 바람 좀 쐬러 갔나 보네요. 하하. 호출할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곽 과장의 말에 주한은 미련 없이 그곳을 나와 옥상으로 향했다. 옥상으로 가는 길도 평탄치 않았다. 마주치는 직원마다 주한을 힐끔거렸다. 그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기에 주한은 체념한 상태였다.
곧이어 옥상 투명 유리문 너머 저편에 있는 김동만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저것들은 또 뭐야. 왜 저래? 얼굴이 뻘겋게 달아오른 김동만과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이리한. 두 사람의 분위기는 꽤 심각해 보였다.
“내가 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죽을래요? 여기서 같이 뛰어내려 볼까?”
“나는 왜 화났는지 이해가 안 가……. 어제 해도 된다고 해서 한 거고. 우리 그렇게 합의를 봤잖아요.”
“오케이! 나도 그거 인정한다고! 그래서 내가 지금 그거로 따지는 게 아니잖아! 너 보기 싫다고! 뭐? 거기가 커져?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잘도 지껄였겠다? 이렇게 찾아오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 이 멍청한 개새끼야! 내가 지금 수없이, 목 아프게 말하고 있잖아! 오지 말라고! 내 눈에 띄지 말라고! 담당자 바꾸겠다니까?”
김동만이 옥상에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소리치자 심리가 불안해진 이리한의 머리 위로 축 처진 개 귀가 나타났다. 그때까지 잠자코 지켜보던 구경꾼들 사이에서 개 수인이라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미치겠네! 귀 넣어!”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
이리한은 울먹였다. 누가 봐도 악당은 김동만처럼 보였다.
“이거…… 내가 의사 쌤한테 물어봤는데. 거기에는 이게 좋다고 해서.”
쭈뼛쭈뼛. 이리한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자 그것을 확인한 김동만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눈으로 욕을 하며 그는 손을 거칠게 내리쳤고, 그것은 묵묵히 구경 중이던 주한의 발아래로 굴러왔다.
치질로 인한 통증, 출혈, 가려움 완화 연고. 그 문구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연고의 종착지가 주한의 발아래인 것을 확인한 김동만은 많이 당황한 눈치였다. 반대로 주한을 발견한 이리한은 반가움에 눈물을 글썽거리며 달려왔다.
“주한아!”
애초부터 주한은 이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한 바였다. 두 팔 벌리고 달려오는 이리한을 차갑게 외면한 주한이 주운 연고를 김동만에게 건넸다.
“내가 저번에도 말했을 텐데. 수인은 사람하고 달라서 힘들 거라고.”
“…….”
“넣어 둬요. 그래야 덜 고생할걸. 아니면 병원이라도 가 보든가.”
김동만의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졌지만, 주한은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을 벌어졌는지 따위는 궁금하지 않았다.
“주한아, 나 좀 도와줘!”
주한은 애처롭게 자신을 도와달라는 이리한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이곳에 온 목적을 말했다.
“라면, 어떻게 끓여요?”
“네?”
맥락 없는 질문에 김동만이 미친놈 보듯 주한을 응시했다. 그러나 라면 하나 못 끓여서 욕먹었다는 걸 차마 말할 수는 없었다. 주한은 한숨을 내쉬며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유은찬이 집에 있는 탓에 그간 한 대도 피우지 못해 담배가 고팠다.
“라면 어떻게 끓이는지 그것만 말해 줘요.”
“글 못 읽으세요? 뒤에 설명서대로 끓이면 되잖아요.”
“……김동만 씨 방식대로 끓이는 방법이 있을 거 아니에요”
“없는데요. 그냥 물 넣고, 수프 넣고, 라면 넣고 끓이면 그만이지. 방식은 무슨. 마침 잘 만났네요, 부장님! 중요한 거래처인 저 새…… 저분. 저 담당 안 할 테니까 빼 주세요. 승진이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으니까!”
“내가 지금 그걸 몰라서. 김동만 씨 찾아온 줄 아세요? 저 그렇게 시간 남아도는 사람 아닙니다.”
주한이 살짝 언성을 높이자 김동만은 눈을 가늘게 뜨고 콧방귀를 꼈다.
“아, 그거네. 유은찬 사람 짜증 나게 하죠? 그래서 이러시는 거죠? 데려갔으면 알아서 하셔야죠. 사사건건 일일이 나한테 물어보면 곤란한데. 그 자식 막 입이라서 아무거나 잘 처먹으니까 대충 먹이세요.”
“막 입?”
“그냥 주는 대로 다 먹는다고요! 왜요? 까다롭게 굴어서 힘드세요? 고작 하루 가지고? 내가 저번에 그랬죠. 반품 안 된다고!”
조금 힘들긴 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이런 대우를 받을 만큼 유은찬이 하찮은 존재는 아니었다. 아무리 김동만이라도 그랬다. 기분이 더러워진 주한은 들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김동만을 빤히 노려보았다.
“그럴 생각 없고. 그렇게 생각한 적도 없거든? 그리고 우리 애가 왜 막 입이야! 아무거나 먹는다니!”
“모르셨어요? 걔 주는 대로 잘 먹거든요? 유은찬이 얼마나 사람 귀찮게 하는데! 돌아서면 배고프다고 난리 치지! 먹는 건 또 좀 많이 먹어? 고양이면서 귀여운 맛이라고는 전혀 없는 놈이 유은찬이거든요!”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배고프니까 배고프다고 한 거지! 왜 안 귀여워! 내 눈에는 귀여워서 미치겠는데!”
김동만의 말 하나하나에 발끈한 이주한은 씩씩거리며 반박했다. 김동만이 마지막 말에 인상을 팍 썼다.
“지금은 예뻐 죽겠죠? 그 자식 가끔 정떨어지게 말하는 거 들어 봐야 정신 차리지.”
“김동만 씨! 말 다했습니까?”
“아니요! 아직 많은데요! 나 2년을 넘게 그 자식 수발든 놈이거든요?”
인상을 확 쓴 주한이 뭐라 한마디 더 쏘아붙이려 할 때였다. 둘 사이에 불쑥 끼어든 이리한이 주한을 향해 소리쳤다.
“이주한! 너 왜 우리 동만 씨한테 화내는 건데!”
콧잔등이 일그러지고 뾰족한 송곳니를 잔뜩 세운 이리한. 녀석은 김동만을 지키기 위해 금방이라도 이주한에게 달려들 것처럼 자세를 취했다. 고작 개 따위가 겁도 없이.
“넌 빠져!”
주한의 경고에도 이리한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더 이를 세워 그르렁거렸다.
“아무리 너라도 우리 동만 씨 건들면 나 가만히 안 있어!”
“진짜야? 이리한, 네가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수인이라도 종류에 따라 체격과 힘 차이가 났기 때문에 달려드는 이리한 따위는 한주먹 감이었다. 본인도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럼에도 이리한은 말은 진심처럼 들렸다. 딱히 이럴 생각으로 온 건 아녔기에 주한은 간단히 물러났다. 단, 한 가지 정정해야 할 게 있었다.
주한은 이리한 등 뒤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김동만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유은찬 귀엽거든요? 주머니에 쏙 넣고 데리고 다니고 싶을 만큼! 도도하고 귀엽고 깜찍하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완전 고양이 그 자체인데 뭐가 아니라는 거야?”
말해 놓고 보니 만족스러워서 주한은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반대로 김동만은 말이 없었다. 대신 썩은 표정으로 주한을 한심하게 바라볼 뿐. 그런 동만에게 주한은 마지막으로 충고를 던지며 그 자리를 유유히 벗어났다.
“그 자식, 간수 잘해야 할 겁니다. 조금만 잘해 주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게 개라서. 고양이하고는 다르게 사람을 잘 따르는 놈들이니까.”
“무슨 헛소리야! 누가! 아니에요, 동만 씨! 저 자식 말 믿지 마요!”
안절부절 쩔쩔매는 이리한의 목소리에 주한은 픽 웃음이 터졌다. 오는 놈 안 막고 가는 놈 안 잡던 이리한도 별수 없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건 전과 달리 내 안의 무언가가 한 단계 성장하는 것 같았다. 표범 수인으로 자긍심이 가득했던 이주한이 검은 고양이 하나에 쩔쩔매는 모습만 봐도 그랬다. 눈엣가시로 생각한 녀석과 이렇게 될 줄이야. 꿈에도 생각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지만, 후회는 없었다.
복도를 거닐던 주한은 갑자기 유은찬이 너무 보고 싶어졌다. 출근한 지 30분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그는 엘리베이터에 올라 망설임 없이 1층 버튼을 눌렀다.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 유은찬을 보러 갈 생각이다. 지금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