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네? 그러니까 부장님이 회장님하고 점심 약속이 있는 게 아니라…… 선이요?”
“아마도 그럴걸요.”
이리한은 별거 아니라는 듯 말하며 김밥 하나를 입 안에 넣었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동만의 미간에 작은 주름이 생겼다. 에이, 아니겠지. 설마 부장이 그럴 리가.
“내가 알고 있는 그 선?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그거?”
“회장님이 그런 핑계로 불러낸 게 한두 번이 아니니까. 주한이도 알면서 간 걸 거예요. 그게 또 안 나가면 회장님이 노발대발하시거든요. 차라리 나가서 파투 내는 게 훨씬 편하니까.”
유은찬이 사라진 뒤. 어쩔 수 없이 이리한과 단둘이 남게 된 동만은 회사 근처 분식집에서 점심을 때우는 중이었다. 원래대로 구내식당을 가려고 했지만 쏟아지는 시선 때문에 급하게 계획을 바꿨다. 또 귀찮게 하기 전에 얼른 밥만 먹이고 보내 버려야지. 그 생각만 하고 있던 동만에게 이리한의 말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럼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거네요? 부장님이 하는 말 전부 거짓말이라는 거.”
“…….”
동만이 신경질적으로 수저를 내려놓자 이리한도 슬그머니 수저를 내려놓으며 눈치를 봤다. 그러면서 입안에 남은 음식물을 조심스럽게 씹어 대는 행동이 동만의 눈에 거슬렸다. 이 상황에 그게 넘어가냐?
“야, 그만 처먹어! 너하고 부장이 사람 하나 병신으로 만들었는데 그게 지금 목구멍으로 넘어가냐? 어!”
“어차피 가도 잘될 것도 아니고……. 주한이가 말 안 했는데, 내가 사실대로 말할 필요도 없고. 그리고 그 자식이 선을 보든 말든 나랑 상관도 없으니까…….”
아, 머리야. 이 개자식을 어떻게 해야 하나. 동만은 부장이 선을 보러 가는지도 모르고 김 실장에게 끌려간 은찬을 떠올렸다. 괜찮으려나. 김 실장이 회장님 비서였으니 녀석은 지금 회장님과 만나고 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입맛이 뚝 떨어진 동만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고 이리한은 그런 동만의 눈치를 보며 소리 없이 김밥을 먹었다. 그러다 마지막 김밥을 입에 넣으려는데 동만과 시선이 마주친 이리한은 머쓱하게 웃으며 그것을 도로 뱉으려 했다.
“……그냥 처드세요.”
“배가 고파서…….”
동만은 그런 그를 한심하게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거짓말하고 선보러 간 이주한이나 그놈 친구인 이리한이나 똑같은 놈으로밖에 안 보였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계속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달라붙은 이리한의 존재가 이제는 진절머리가 났다.
아무리 회사에서 시킨 일이지만, 동만이 하는 일이라고는 이리한과 하루 종일 돌아다니는 것과 밥 먹는 것. 그 두 개밖에 없었다. 오늘 하루 는 벗어났다 했더니 회사까지 찾아올 줄이야. 사람 비위나 맞추려고 이 회사에 입사한 게 아니란 말이다.
동만은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이리한을 뚫어지게 보았다.
“이리한 씨.”
“네.”
“저한테 왜 이러세요?”
“보면 모르세요? 이상하다……. 남들이 나보고 거짓말 못 하는 타입이랬는데. 얼굴에 다 드러난다고요. 당연히 동만 씨 좋아하니까요. 좋아하니까 이러는 거죠.”
“그러니까 내가 저번에도 말했잖아요. 난 종을 뛰어넘는 그런 금단의 사랑 같은 거 안 한다고. 여자도 아니고 수인도 아닌데 왜 굳이, 평범한 나를, 댁 같은 분이 따라다니느냐고요. 보아하니 인기도 많아 보이는데. 혹시 나 놀리는 거면 좋은 말 할 때 그만하고 다른 데 가 봐요.”
분식집 구석에서 물어볼 말은 아니지만, 오늘 이후로 더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여기서 결판을 내기로 한 것이다. 이리한은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쳐다보는 동만을 보며 씨익 웃었다.
“내가 인기는 좀 있는데. 진짜 내가 반한 사람은 동만 씨라니까요?”
웃기고 있네. 이주한과 그런 사이였으면서. 애석하게도 이리한의 말은 동만에게 통하지 않았다.
“부장님 좋아했죠? 그랬으니까 섹파니 뭐니 하면서 나 기죽이려고 했겠지. 맞죠?”
“과거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안 그래요? 다 지나간 일이지.”
자기에게 불리한 주제가 나오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굳어 버리는 모습이 영락없는 개였다.
“원래 개 수인은 이래요? 아무나 좋다고 따라가고 그런가?”
“아무나라뇨? 아니거든요. 지금까지 내가 사귄 사람들은 전부 김동만 씨를 만나기 위해 스쳐 지나간 인연이었다는 생각 안 들어요?”
오늘따라 이 개가 말을 청산유수처럼 잘도 한다. 턱을 괸 동만은 더 지껄여 보라는 표정으로 묵묵히 듣고 있었다.
“울 엄마가 울 아빠를 누구 결혼식 파티에서 만났다고 했거든요? 보자마자 뭔가 찌릿한 게 팍 꽂혔다고. 발정기가 온 것 같은 느낌이랬나? 아무튼 아무것도 안 보인대요. 그 사람밖에. 내가 진짜 그럴 줄 몰랐다니까요?”
그러니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동만은 이리한을 사랑에 빠트리게 할 짓을 한 기억이 없는데 왜 혼자서 이러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울 엄마하고 아빠가 그렇게 만나서 형 둘에 나까지 셋을 낳았으니까. 우리도 셋까지는 낳을 수 있겠죠?”
이 멍청이가 뭐라는 거야.
“나 인간 남자입니다.”
“걱정 말아요. 우리 집은 주한이 집처럼 엄격한 집구석은 아니거든. 울 엄마하고 형은 내 말은 뭐든 다 들어 주니까 동만 씨도 받아 줄 거예요.”
“…….”
그런 말이 아니잖아! 이 멍청아! 유전자적으로 남자는 임신을 못 한다고!
동만은 혼자서 히죽 웃고 있는 이리한을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며칠간 같이 있어 보면서 느낀 거지만 이 개새끼는 눈치도 없고 언어 해독 능력도 달렸다. 답답한 마음에 물을 벌컥벌컥 마신 동만은 허탈감이 밀려왔다. 바보랑 무슨 대화를 하는 건가 싶어서.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리한의 말이 좀 이상했다. 말을 곱씹던 동만이 녀석에게 다시 물었다.
“은찬이는 뭐 그 집에서 안 받아 준다. 그 뜻이에요?”
“당연하죠. 남자잖아요. 회장님이 증손자 욕심이 많다고 저번에 말했잖아요. 아마 지금쯤 유은찬 씨 눈물이 쏙 빠지게 혼나고 있거나 돈 봉투 그런 거 받지 않았을까 싶은데. 예전에 나한테 그 방법 써먹으려다가 내가 눈치가 좀 빨라서 그대로 튀었다고 말했죠? 그래서 회장님이 노발대발하면서 울 엄마한테 전화해서 욕한 것도. 그 집안이 그런 집안이에요. 회장님 말씀이 절대적인 집안.”
이리한은 자랑스럽게 말했지만, 동만은 한숨만 나왔다. 퍽이나 눈치가 빠르겠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중이었다.
“그나저나 같은 호텔은 아니겠지?”
혼잣말하는 이리한의 말에 동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봤다.
“지금. 방금 무슨 말이에요?”
“네?”
“방금 한 말, 그거!”
“……아. 회장님 우리 호텔 케이크 좋아해서 단골이시거든요. 그리고 주한이가 주로 선보는 곳도 거기 커피숍이고. 왜요? 무슨 문제 있어요?”
문제가 있다. 아주 큰 문제다. 너무 놀란 동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걸 왜 이제야 말해! 차 가져왔죠? 어디 있어요! 회사 지하 주차장?”
일분일초가 급했기에 사무실 가방에 있는 차 키를 가져올 시간은 없었다.
“바로 옆에 유료 주차장에……. 왜요? 혹시 유은찬 씨 때문에 그래요? 에이, 그건 아니다. 이건 유은찬 씨 문제지 동만 씨가 나서서 될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두 사람이 거기서 만날 수도 있는 거잖아!”
최악의 경우를 떠올린 동만의 얼굴은 왈칵 일그러졌다.
“니가 그 자식 성격을 어떻게 알아! 걔 한번 수틀리면 돌리는데 엄청 힘들다고! 고양이 달래는 게 얼마나 골 때리는지 알아? 잔말 말고 당장 차 시동 걸어!”
다급한 동만의 명령에 꼬리를 내린 이리한은 분식집 밖을 급하게 뛰쳐나갔다. 서둘러 계산을 끝내고 밖을 나오니 그의 차가 갓길에 세워져 있었다. 언제 봐도 타기 부담스러운 비싼 외제 차였지만 지금은 머뭇거릴 시간도 없었다.
“최대한 빨리 가! 당장!”
동만의 외침에 이리한은 속도를 높였다.
“유은찬 씨가 동만 씨한테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에요?”
뜬금없는 그의 질문에 동만은 콧방귀를 꼈다. 중요하냐고?
“걔가 부장하고 잘못되면 그 뒷감당은 다 누가 하는데? 그 성질을 누가 다 받아 내야 하는데! 나라고 나! 안 된다, 은찬아! 제발 그러지 말자아아아……. 부장아, 선보는 거 들키지 마라! 제발 안 된다고! 하느님, 부처님, 고양이 신님! 유은찬이 곱게 회사로 돌아오게 해 주세요! 아니면 부장 선보는 걸 들키지만 않게 해 주세요!”
동만은 눈을 꼭 감고 손을 모아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아직 멀었어요?”
“아니요. 여기 유턴만 하면 돼요.”
그때까지 열심히 기도 중이던 동만은 불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고양이의 지랄 맞은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므로 무서운 것이다.
“어? 저기 은찬 씨다.”
번쩍 눈을 뜬 동만은 이리한의 말에 아무런 의심 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때였다. 쪽. 이리한의 부드러운 입술이 동만의 입술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이게…… 뭐지? 사고 회로가 정지된 동만의 시야에 쑥스럽게 웃고 있는 이리한이 보였다.
“첫 뽀뽀.”
순간 동만은 머릿속에 무언가가 뚝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성이 끊어졌다. 눈을 부릅뜬 동만은 이리한의 멱살을 거칠게 움켜잡고 미친 듯이 흔들어 댔다.
“이런 미친 개새끼가……! 야! 너 죽고 싶어? 씨발, 죽고 싶냐고! 어디다 그 주둥이를 내밀어!”
“이것도 많이 봐준 거예요. 혀는 안 넣었잖아요!”
“혀? 너 혀 넣었으면 이로 잘라 버렸어!”
머리통이 갈대처럼 흔들리면서도 이리한은 좋아 죽겠다는 듯이 웃어 댔다. 그때 또 이리한이 외쳤다.
“어! 유은찬 씨다!”
“내가 두 번 속을 줄 아냐, 개새끼야!”
“진짠데? 저기…….”
이리한의 멱살을 미친 듯이 흔들다가 고개를 획 돌린 동만은 씩씩거리며 호텔 정문을 걸어 나오고 있는 남자를 보았다. 목에 걸린 사원증과 머리 위에 튀어나온 검은색 고양이 귀. 유은찬이 확실했다.
멍청한 부장 놈. 속이려면 제대로 완벽하게 속이든가. 녀석의 기세를 보아하니 한발 늦은 모양이다. 벌써 부장하고 한바탕하고 나온 것 같았다. 동만은 앞으로 닥칠 일들을 떠올리며 이리한에 대한 전투 의욕을 상실했다. 뽀뽀고 나발이고 일단 사람들의 쏟아지는 시선에도 아무렇지 않게 직진하는 저 망할 고양이부터 픽업하는 게 우선이었다.
“은찬아! 여기!”
동만을 발견한 은찬은 씩씩거리며 차에 탔다. 그리고 예상대로 이주한과 끝났음을 선포했다.
그 상황에서 동만이 할 수 있는 건 숨죽이며 침묵하는 것뿐이었다. 섣부른 말 한마디가 오히려 더 역효과가 날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분위기 파악 못 한 이리한 때문에 동만은 뒷목을 잡고 쓰러질 뻔했다.
“주한이랑 싸웠어요?”
동만은 어깨너머로 훔쳐본 유은찬의 눈에서 살기를 보았다. 2년 넘게 살고 있지만 저런 표정은 처음 보았다.
“주한이가 인기가 좀 많아요. 주한이가 잘못했다고 안 그래요? 그래서 싸웠구나?”
이주한. 조금 전부터 금기어가 된 이름을 이리한은 아무렇지 않게 남발했다. 이 녀석은 재벌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살았을까. 동만은 그저 해맑은 이리한이 진심으로 무서웠다.
“저기요. 개새끼 씨.”
유은찬의 차분한 어조에 이리한은 밝은 목소리로 반박했다.
“나 개새끼 아닌데. 내가 그쪽한테 고양이 새끼라고 하면 기분 좋겠어요? 우리 같은 수인끼리.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말죠?”
“김동만, 이 새끼 뭐냐? 지금 나 놀리는 거지. 어? 그런 거지?”
인상을 팍 쓴 유은찬의 목소리가 차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녀석의 뾰족한 송곳니가 동만의 시선을 끌었다. 큰일 났다, 진짜. 진짜 화가 많이 난 모양이다. 동만은 마른침을 삼키며 은찬을 다독였다.
“차 좀 빌린다고 같이 온 거야. 야, 화내지 마! 너 그렇게 흥분하면 너는 물론이고 애들도 안 좋아! 릴렉스, 릴렉스!”
“기분 나빠. 그냥 내릴래. 야! 저기서 차 좀 세워!”
멍청한 이리한은 유은찬의 말에 슬그머니 속도를 줄여 갓길 쪽으로 차를 빼려 했다. 이럴 때만 즉각 반응하는 걸 보면 일부러 눈치 없는 척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야, 어딜 내려! 잔말 말고 그냥 타고 있어! 이리한 씨, 차 세우기만 해 봐! 진짜 내가 가만 안 둔다!”
“저 개새끼가 자꾸 이주한 들먹거리잖아! 나 지금 그 새끼 이름 듣는 것조차 짜증 나거든?”
“안 해! 이제 안 해! 누구도 그 이름 안 꺼낼 테니까 걱정하지 마!”
동만이 이렇게까지 절절매며 은찬을 달래고 있는데 이와 중에 이리한이 또 불쑥 입을 열었다.
“어? 주한이한테 전화 왔네?”
……졌다. 이 눈치 없는 개새끼한테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아예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받으려는 이리한의 행패에 동만은 눈이 뒤집혔다. 그의 핸드폰을 빼앗아 전원을 꺼 버리고 목에 핏대를 세워 소리를 질렀다.
“하지 마!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몇 번을 말해야 알아처먹어! 그 이름 꺼내지 말라고! 이 개새끼야! 넌 그냥 입 닫고 운전이나 해!”
또다시 시무룩해진 이리한이 입을 다물자 그제야 차 안에 평화가 찾아왔다. 하지만 그 평화도 오래가지 못했다. 차창 밖 풍경이 좀 전에 그들이 지나온 그 길이었다.
“이리한 씨. 지금 어디 가는 겁니까?”
동만의 신경질적인 물음에 기가 팍 죽은 이리한이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회사……로 가는 거 아니에요?”
너 같으면 지금 회사로 가서 일할 수 있겠냐! 한 번도 일 따위를 해 본 적 없는 놈이니 알 리가 없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며 서늘하게 노려보자 이리한이 불쌍하게 혼잣말을 했다.
“말도 안 해 주고 무조건 출발하라고 했으면서…….”
듣고 보니 그랬다. 목적지를 알려 주지도 않고 출발시킨 제 잘못이 컸기에 동만은 괜히 민망해졌다. 묵묵히 차까지 태워 주는 이리한을 너무 막 대한 것 같았다. 조용히 내비게이션에 목적지 주소를 찍은 동만은 그곳으로 가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이리한은 여기가 어디냐고 묻는다.
“회사에서 기숙사로 내준 오피스텔이요.”
“아……. 그렇구나.”
이리한답지 않게 긴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의미 모를 미소만 지은 채 차선을 변경했다.
***
다행히 선 자리는 쉽게 파투 났지만 유은찬은 화를 내며 떠나 버렸다. 기분도 몰골도 엉망진창이 된 주한은 오늘 이 자리가 할아버지에 의해 계획된 자리라는 것을 비로소 눈치챘다. 그렇지 않고서는 유은찬이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한바탕 소란이 지나간 커피숍은 다시 정적이 흘렀다. 할아버지와 마주 앉아 서로를 노려보던 주한은 한참이 지난 뒤에 굳게 닫힌 입을 열었다.
“왜 그러셨어요.”
담담하게 던진 주한의 질문에 할아버지는 침묵했다. 어차피 좋은 소리는 듣기 글렀다. 애초에 유은찬과 사귀기로 한 순간부터 예상했지만 이렇게까지 하실 줄은 몰랐다. 유은찬과 결혼이라는 합의점을 찾으면 알릴 생각이었건만 그럴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주한은 방금 할아버지 덕분에 이별을 통보받았다.
“뭘 잘했다고 큰소리치는 거냐. 네놈이 집안 망신시킨 거. 내가 지금까지 조용히 눈 감아 줬으면 된 거 아니냐.”
“저랑 몇 번 잔 사람들. 그 사람들 따로 불러서 김 실장님 통해 돈 주고 협박한 거. 그게 눈 감아 주신 거예요? 제가 모를 줄 아셨죠? 아니요. 제가 할아버지를 봐 드린 거예요. 왜 제가 진지하게 누군가를 사귀지 않는지 그런 거 생각이나 해 보셨어요? 내 마음에 들어도 할아버지 마음에 안 들면 어차피 안 될 사이니까.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 아니라 손주 며느리는 할아버지 마음에 드는 사람이어야 하니까. 그럴 바에야 그냥 즐기자고 생각했어요.”
“다 우리 집 재력을 노리고 너한테 달라붙은 놈들이었어. 그만한 값어치밖에 안 되는 놈들이니까 거기서 끝난 거지. 주한아, 육식 동물은 풀이 아니라 고기를 먹고 살아야지. 우리는 우리만의 세계가 있는 거다! 하찮은 놈들하고 어울리는 짓 그만둬! 네가 하찮은 놈하고 어울리고 다니니까 네 수준이 그렇게 보이는 거 아니냐! 여기서 방금 그게 무슨 꼴이야! 쯧……. 집안 망신은 네가 다 시키는구나! 할애비한테 그런 모습 보이고 부끄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 거냐?”
할아버지는 눈에 힘을 주고 주한을 쳐다보았다. 잔뜩 노한 목소리에 주한은 실없는 웃음이 터졌다.
“할아버지가 이러시니까 아버지하고 어머니가 할아버지 보기 싫어서 절 버리고 해외로 가신 거잖아요!”
“버리다니! 때마침 해외 지사로 발령 났고 어린 널 데려갈 수 없어서 놔두고 간 것뿐이야!”
“아니요! 아니라는 거 우리 둘 다 알고 있잖아요! 할아버지가 사사건건 간섭하시니까 오죽하면 어린 절 버리고 가셨겠어요!”
“네 교육은 내가 시키겠다고 한 것뿐이다!”
“할아버지는 절대로 자기 잘못은 인정하시지 않는 분이시죠. 방금도 보셨죠? 할아버지가 다 망쳤어요! 겨우 그 녀석 설득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할아버지가 다 망치셨다고요!”
“바라던 바다. 그 아이, 오늘부로 회사에서 내보낼 테니 그리 알아라.”
“할아버지!”
“당돌한 놈이더구나. 돈은 받아 갔다.”
“그 문제가 아니잖아요!”
과거 주한은 갓 유치원이 입학한 자신이 할아버지와 같이 살게 된 건 부모님의 해외 지사 발령 때문이라고 알고 있었다.
부모님이 한국을 떠나던 날. 주한은 공항에서 부모님과 떨어지기 싫다며 목 놓아 울었다. 어린 아들을 놓고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던 부모님은 출국장 앞에서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눈물을 훔쳤다.
그 뒤 주한은 몇 달에 한 번씩 한국에 들르는 부모님을 만날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건 부모님과 사는 것만큼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할아버지가 잘해 주셔도 부모님의 자리는 크게 느껴지는 법이었으니까.
주한은 부모님이 일에 미친 사람인 줄 알았다. 어린 자식을 버리고 해외로 갈 정도면 일에 미치지 않고서야 힘들 선택이었을 테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는 걸 열아홉 여름방학 때 알게 됐다.
주한의 방학에 맞춰 잠시 한국으로 돌아온 부모님과 할아버지의 말다툼을 엿듣게 됐다. 아버지는 이제 아들을 미국으로 데려가겠다고 소리를 질렀고 할아버지는 그럴 수 없다고 엄포를 놓았다.
‘지금까지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해 드렸잖아요! 우리 아이예요! 이제 부모하고 함께 있게 해 주세요! 저 녀석도 부모의 손길을 느껴 봐야 하잖아요!’
‘너희가 없어도 내가 부족함 없이 다 해 줬다. 자식 버리고 간 녀석들이 왜 이렇게 말이 많아!’
‘아버지께서 주한이에게 집착하시니까, 그 등쌀에 못 이겨 떠난 거지 우리가 가고 싶어서 간 거 아니라는 거 아시잖아요! 이제 그만 놓아주세요. 제발요! 집사람 불쌍하지도 않으세요?’
‘그러게 왜 하나만 낳아서는. 주한이 동생을 낳으라고 그렇게 일렀거늘!’
‘집사람 몸이 약해서 더 이상은 힘들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저 사람, 아버지가 고르고 고른 며느릿감이잖아요! 왜 그렇게 미워하세요!’
‘몸이 약한 줄 알았으면 결혼시키지 않았다. 시끄럽다! 주한이한테는 아무 말 하지 마! 지금껏 내 손에서 잘 자란 놈이야? 미국 가서 나쁜 짓 배워 올까 겁난다!’
모두 할아버지를 욕하고 미워해도 주한은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했다. 가끔 공부를 못하거나 부모님이 보고 싶다고 울면 화를 내셨지만, 그것 말고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할아버지였다. 지난 세월 부모님의 원망이 누구보다 컸던 주한은 모든 사실을 알게 되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허탈감이 밀려왔다. 지금껏 삐뚤어진 생활을 한 것도 할아버지에 대한 반발심이 없잖아 있었을 것이다.
주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려는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께서 그토록 바라시던 증손주…… 있어요.”
주한의 생뚱맞은 고백에 믿지 못하겠다는 시선이 쏟아졌다.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라도 했다는 거냐.”
“……좋아하셔야죠. 입만 열면 증손주 타령하셨잖아요.”
“하찮은 고양이 말고 또 다른 사람을 만났다는 말인데. 금시초문이지만 누구든 그놈보다는 낫겠지. 수인이냐, 사람이냐. 그래, 어디 있다는 거냐.”
할아버지의 관심에 주한은 쓰게 웃었다.
“확실한 증거 가지고 갈 테니까 두 시간 뒤에 봬요. 주소는 제가 김 실장님께 보내 드릴 테니까. 분명히 말하는데. 약속 시간보다 먼저 도착해서 또 망치지 마세요. 그럼 증손주도 나도 더는 못 볼 테니까. 그렇게 아세요.”
단호하게 말한 뒤 주한은 할아버지보다 먼저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주차 요원이 끌고 온 제 차에 타자마자 그는 신경질적으로 핸들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갑작스러운 클랙슨 소리가 주위에 시끄럽게 울렸지만 이렇게라도 해야지 기분이 풀릴 것 같았다.
“왜, 하필!”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다. 할아버지의 명령을 거절했다간 불호령이 떨어질 게 뻔했으니까 그냥 평소처럼 잠시 얼굴만 비쳤다가 빠져나올 생각이었다. 확실히 이건 제 잘못이었다. 처음부터 거짓말로 둘러대는 게 아니었다.
조금 전, 유은찬은 진심으로 끝내자는 말투였다. 어떻게든 차분히 대화하려고 붙잡아 봤지만, 진심으로 몸서리치는 은찬을 끝내 잡지 못했다.
이제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할아버지가 해결하는 수밖에.
핏줄에 대한 욕심이 많으신 분이니 은찬의 임신 소식을 아시면 분명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단번에 믿지는 못하실 거다. 그래서 주한은 그것을 입증할 서류를 찾으러 병원으로 가야 했다.
***
급작스러운 이별을 맞이한 은찬은 슬프기보다 분했다. 유은찬이라는 애인이 있음에도 선을 보러 간 이주한에게 고작 할 수 있는 게 이별 통보밖에 없다는 것이 분하고 분했다.
“은찬아, 그러지 말고 이것 좀 먹어 봐. 너 치킨 좋아하잖아. 어? 점심도 못 먹었다며. 한 입만 먹어 봐.”
“안 먹어. 안 먹는다고!”
“두 시간 동안 물 한 모금 안 마셨잖아. 배 안 고파? 배고파 죽겠지? 치킨 안 당겨? 그럼, 족발 시켜 줄까?”
“안, 먹는다고!”
곽 과장에게 오후는 째겠다고 당당하게 큰소리치고 집으로 돌아온 지 두 시간째. 은찬은 소파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고양이 귀는 몇 시간째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수인 전용 구멍 뚫린 바지로 갈아입자마자 자유로워진 꼬리로 몸을 둥글게만 은찬은 극도로 신경이 예민해진 상태였다.
“그러지 말고. 하나만 먹자. 아, 해 봐. 내가 먹여 줄게. 자. 아 하자, 우리 은찬이.”
동만은 그런 은찬의 주위를 맴돌며 어떻게든 기분을 풀어 주려 애를 썼다. 갓 튀긴 닭 다리 하나를 동만이 은찬에게 내민 그 순간, 불쑥 튀어나온 이리한의 손이 닭 다리를 훔쳐 갔다. 은찬과 동만은 눈 깜짝할 사이에 닭 다리 하나를 먹어 치우고 있는 이리한을 싸늘하게 노려봤다.
저 개새끼 죽여 버릴까. 녀석이 훔쳐 간 닭 다리는 중요하지 않았지만, 아까부터 신경에 거슬렸다. 아니, 애초에 저 자식이 왜 이 집에 있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해 봐. 너, 저 개새끼랑 사귀냐?”
동만은 절대로 아니라고 강하게 부정했지만 이리한이 하는 행동을 보면 그것도 아니다. 당당하게 이 집에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는 저 뻔뻔함.
“동만 씨. 우리 뽀뽀까지 한 사이잖아요.”
기름에 번들거리는 입술을 씨익 올리며 이리한은 웃었다. 뽀뽀까지 한 사이란다. 기가 찬 은찬은 헛웃음을 터트리며 똥 씹은 표정인 동만을 곁눈질했다.
“미쳤냐! 너 나 알잖아! 내가 남자한테 뽀뽀할 놈으로 보여? 그리고 저 개새끼 말을 믿냐? 이주한 친구잖아!”
“그 자식 이름 꺼내지 말라고 했지!”
“미안. 아무튼!”
김동만의 얼굴이 뻘겋게 달아오른 걸 보니 뭔가가 있긴 있었던 모양인데 거기까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사귀든 말든 지금은 제 문제만으로도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은찬이 다시 입을 꾹 다물고 뚱한 표정으로 앉아 있자 슬금슬금 다가온 이리한이 김동만에게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동만 씨, 유은찬 씨 혼자 있고 싶다고 하니까 우리 나갈까요?”
“너나 가세요.”
“안 먹는다잖아요.”
“이 자식이 어떤 놈인데. 돌아서면 배고프다는 놈이 이래도 안 먹는 거면 진짜 큰일 난 거거든요? 유은찬! 너 진짜 이럴래? 너 혼자 몸도 아니잖아!”
김동만이 은찬에게서 벗어나지 못하자 이리한의 입이 한 주먹 더 튀어나왔다.
“원래 이럴 때는 혼자 있는 게 좋다니까요? 옆에서 아무리 뭐라고 해 봤자 귀찮기만 하지. 그러지 말고 나도 좀 신경 써 주면 안 돼요? 아까부터 은찬 씨만 챙기고……. 나도 그거 잘 먹는데.”
이리한의 머리 위에 강아지 귀가 뿅 하고 나타났다. 김동만의 옷자락을 잡고 낑낑거리는 이리한은 주인의 관심을 받고 싶어 안달 난 개처럼 보였다. 동만을 쳐다보는 이리한의 눈빛은 사랑을 갈구하는 개 그 자체였다.
가뜩이나 기분도 더러운 마당에 눈앞에서 펼쳐지는 이러한 광경은 은찬의 눈에 몹시도 거슬렸다. 결국, 은찬은 참지 못하고 이리한의 면상에 쿠션을 던졌다.
“너 나가!”
“너? 너 지금 나보고 너라고 했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이리한이 눈을 부라렸다. 상대적으로 그의 키가 더 컸지만 그런다고 겁먹을 은찬도 아니다. 개새끼가 왜 남의 집에서 이러는 거야. 소파에 앉은 채 콧방귀를 꼈다.
“꺼져! 재수 없는 개새끼야!”
“재수 없는 개새끼? 하…… 이게 진짜! 재수 없는 검은 고양이가!”
“뭐? 재수 없는 검은 고양이? 김동만, 저 새끼 안 내보내면 내가 나간다!”
“안 나가! 못 나가! 동만 씨하고 같이 나갈 거야! 네가 뭔데 동만 씨를 종처럼 부려 먹는 건데? 그거 하나 먹어 주는 게 뭐가 어려워서!”
“니가 처먹든가! 김동만. 결정해! 나야, 저 개새끼야!”
은찬의 외침에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동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녀석은 고민하지도 않고 이리한의 멱살을 잡아 현관으로 끌고 갔다. 실망을 감추지 못하던 이리한은 이내 애원 모드로 바뀌었다.
“동만 씨! 동만 씨! 나 조용히 있을게요! 입 꾹 다물고 쥐 죽은 듯이 있을게요!”
이리한은 나가지 않으려고 겨우겨우 버티며 동만에게 매달렸다.
“입 닥치라고 했지? 여기까지 태워 준 건 고마운데. 네 할 일 끝났으니까 조심히 가세요!”
“동만 씨이이! 나 유은찬 씨하고 안 싸울게요! 진짜 가만히 있을게!”
동만은 간절히 애원하는 이리한을 외면하고 단호하게 문을 열었다. 하지만 이리한은 문밖으로 쫓겨나지 못했다. 살짝 열린 문 너머. 그곳에 웬 노인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회장님?”
그가 누군지 이리한은 금방 알아보았다. 갑작스러운 회장의 등장에 동만은 얼어 버렸고 이리한은 재빨리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은찬은 허락도 없이 문을 열어 준 이리한을 죽이고 싶었다.
그런데 회장은 혼자 오지 않았다. 집안으로 발을 내딛는 회장의 뒤로 이주한의 얼굴이 보였다. 이주한은 거실에 멀뚱히 서 있는 은찬을 보자 얼굴에 화색이 돌았지만, 눈이 마주치는 순간 은찬은 획 돌아서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유은찬!”
굳게 닫힌 문 너머로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이주한이 반갑기는커녕 더 화가 났다. 회장은 왜 같이 온 거야?
“은찬아, 문 좀 열어 봐! 내가 잘못했어! 우리 얼굴 보고 얘기하자. 응? 은찬아!”
들어오면서 문을 잠가 버린 게 신의 한 수였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와 대치하던 은찬은 침대에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회장하고 같이 오면 뭔가 해결이 될 줄 알았겠지만 그럴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좀 전까지 은찬에게 돈을 주며 헤어지길 강요한 영감이었다.
정 안 되면 회사 그만둬 버리지. 물론 아쉽긴 했지만 하찮은 고양이라는 말까지 들으면서 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1억도 받았겠다. 집으로 내려가서 이 돈으로 버티다 보면 어떻게 해결 방안이 생기겠지 싶었다.
그나저나 엄마하고 아빠한테는 뭐라고 말해야 하나. 좋은 직장 잘 다니던 자식이 갑자기 때려치우고 거기다 임신까지 했다고 하면 졸도하려나 쫓겨나려나.
아마도 엄마 성격상 후자 쪽이 컸다. 그래도 임신한 자식을 모른 척하지는 않겠지.
은찬의 부모님은 시장에서 생선가게를 하셨다. 고양이 수인이 생선가게를 하는 게 아이러니하지만 오히려 그게 뜻밖의 광고 효과를 불러일으킨 덕분에 장사는 꽤 잘되는 편이었다. 재벌까지는 아니더라도 부모님에게 빌붙어서 살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은 된단 말씀.
“유은찬, 문 좀 열어 봐. 은찬아!”
대략 한 시간째. 소음 수준으로 제 이름을 부르는 이주한 때문에 고막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핸드폰 게임을 하며 마음을 다스리던 은찬은 결국 입을 열었다.
“가세요. 우리 끝났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을 텐데요.”
“나와. 나와서 얼굴 보고 다시 이야기하자.”
“난 그쪽 얼굴 보고 싶지 않거든요.”
“내가 보고 싶어서 그래.”
이주한은 부드럽게 은찬을 불렀다. 미안하지만 그런 방법은 이제 통하지 않았다. 은찬은 팍 인상을 쓰며 몸서리를 쳤다. 이게 어디서 약을 팔아.
“부장님은 인기 많으셔서 좋으시겠어요. 저 말고도 만날 사람 많잖아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침, 점심, 저녁으로 선보세요. 아까 분위기 좋던데. 그 여자분 부장님 마음에 든 것 같은데 잘해 보세요.”
“유은찬! 너 진짜 이럴 거야?”
“네, 이럴 겁니다. 그러니까 가세요. 그쪽하고는 더 이상 볼일 없다니까요?”
“내가 어떻게 하면 화 풀래. 무릎이라도 꿇을까?”
은찬은 피식 웃었다. 돌았냐? 무릎 꿇는 게 무슨 대수라고. 은찬이 일부러 대답하지 않고 있을 때였다.
“나하고 이야기 좀 하지.”
회장이 은찬을 찾았다. 이주한도 매몰차게 거절한 마당에 회장이라고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은찬은 회장을 말을 씹고 다시 핸드폰 게임을 시작했다. 10분쯤 지났을 때 화를 꾹 눌러 참는 듯한 회장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유은찬 씨.”
재수 없는 노인네. 그를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은찬과 맞지 않는 건 확실했다.
“지금 당장 이 문 열지 않으면, 자네 친구. 여기 있는 이 사람 오늘 이후로 회사에서 잘라 버리겠네.”
고요한 정적 속에서 회장의 묵직한 목소리는 유난히 크게 들렸다. 문 너머 힉, 소리를 내는 건 분명 김동만일 것이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은찬은 난감한 표정으로 문을 노려봤다.
“내가 사원 하나 못 자를 것 같나.”
확실히 회장이니 그런 것쯤 일도 아닐 것이다. 아씨, 어쩌지……. 이대로 나가는 건 자존심이 상했지만, 회장의 선포에 덜덜 떨고 있을 김동만이 눈에 선했다.
천천히 문 앞까지 걸어간 은찬은 망설임 끝에 문을 열었다. 방 안에 몸을 숨긴지 두 시간 만에 그들과 다시 마주한 은찬은 예상한 대로 거실 구석에서 넋이 나가 있는 동만을 발견했다. 그래, 넌 이 회사에서 뼈를 묻어라. 난 오늘부로 그만둘 테니.
불안한 눈빛인 동만과 시선을 교환한 은찬은 회장을 지나쳐 소파에 몸을 뉘었다. 2인용 소파를 은찬이 그렇게 차지해 버리자 회장은 마땅히 앉을 곳이 없었다. 어른 공경 따위 개나 주라지.
은찬의 그런 행동에 회장은 헛기침하며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성인 남자 다섯 명이 서 있기에는 턱없이 작은 거실에 무거운 정적이 맴돌았다. 결국, 동만이 나섰다. 녀석은 회장을 위해 식탁 의자를 들고 와 은찬의 맞은편에 두었다.
자의가 아닌 타의로 회장과 마주하게 된 은찬은 거의 누운 자세로 그와 눈싸움을 벌였다. 노인네 눈에 힘주는 것 좀 봐. 이럴 땐 먼저 기선 제압을 하는 쪽이 이기는 게임이었다. 은찬도 지지 않으려고 눈에 빡 힘을 줬다. 허공에서 마주친 두 사람의 시선은 이글이글 타올랐다.
“이주한, 아무리 봐도. 난 못 믿겠다. 사내놈이 어떻게 임신을 해!”
갑작스러운 회장의 외침에 은찬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이주한을 보았다. 소파 옆에 덩그러니 서 있던 이주한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손에 들고 있던 서류 봉투를 회장에게 내밀었다.
“이건 뭐냐.”
“눈으로 봐도 못 믿겠다고 하시니까. 과학적으로 확인시켜 드려야죠.”
봉투 안에서 서류를 꺼내 천천히 읽기 시작한 회장의 표정은 심오했다. 설마 말한 건가? 은찬은 자신과 눈이 마주친 이주한의 의미심장한 미소에 눈치를 챘다. 말했네. 어쩐지 노인네가 이상하게 배만 보더라니. 지금도 회장은 은찬의 배를 힐끔거렸다.
서류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회장은 한참 동안 침묵하더니 서류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혼잣말을 했다.
“이게……. 그러니까, 이 녀석들이…….”
회장이 손가락으로 초음파 사진을 만지작거렸다. 얼마 전 이주한과 함께 검진받은 자료였다.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회장은 잠시 은찬을 지긋이 보았다. 가늘게 뜬 눈이 은찬의 배에 집중되어 있었다.
“믿으마. 그래, 저놈이 임신을 했다. 그런데 그 애가 네 애라는 증거는 있는 거냐.”
“할아버지, 도대체 왜 이러세요!”
회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주한은 눈을 부릅뜨며 펄쩍 뛰었다.
“저기요, 회장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가만히 있던 동만까지 가세해 회장에게 달려들었다. 은찬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저 노인네가 뭐라는 거야? 진짜 노망이라도 난 건가? 기가 차고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안 났다. 얼마나 화가 나던지 꼬리로 소파를 소리 나게 탁탁 내려쳤다.
“저기요! 영감님!”
“영……감님?”
화가 난 유은찬은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원래 고양이가 그렇다. 화가 나면 물불 안 가리고 상대에게 달려들었다. 그 피가 몸에 돌고 있는 고양이 수인 유은찬은 송곳니를 바짝 세우고 소리쳤다. 상대가 지체 높으신 표범 수인 회장이라도 예외는 없었다.
“어차피 나 오늘부터 회사 떼쳐치울 거니까! 그쪽이 내 회장도 아니고!”
“…….”
“내가 임신한 건 믿겠는데 이 애가 이주한 애라는 건 못 믿겠다는 말은 뭔데요? 내가 문란하다는 그런 뜻이에요? 와…… 어이가 없네. 하반신 지조 없이 이 새끼, 저 새끼 가리지 않고 좆 박고 다닌 놈은 잘나신 영감님 손주거든요? 누구는 임신하고 싶어서 한 줄 아세요? 저 새끼가 얼마나 박아 댔으면, 내가 임신했겠어요! 됐고. 내가 이런 이야기까지 영감님하고 할 필요도 없고. 나 이주한하고 끝난 사이니까 관심 끄고 나가 주실래요?”
“말본새가 영……. 가정 교육이…….”
이 와중에 회장은 가정 교육을 운운하려 했다. 노인네 성격 답답하다 답답해. 여기서 한 번 더 빡친 은찬은 썩은 미소를 지었다.
“남의 집 가정 교육 따지기 전에 회장님 손주나 간수 잘하시죠? 저 새끼, 완전 걸레처럼 처놀았으니까!”
“뭐? 걸…….”
유은찬의 직설적인 화법에 회장은 얼굴을 왈칵 구겼다. 이주한도 표정이 썩 좋지는 않았다. 뭐 틀린 말은 아니잖아. 은찬은 콧방귀를 끼며 손가락으로 이리한을 가리켰다.
“저 새끼랑 저 새끼! 섹파였다는 건 알고 계시죠? 저놈뿐만이 아니라 호텔 갈 때마다 파트너가 바뀌는 건 기본이고. 콘돔을 상자째로 차 안에 들고 다니면서 하는 섹스에 미친놈이에요. 누가? 저분이!”
“…….”
폭주한 유은찬이 말을 다다 쏘아붙일수록 회장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은찬은 이주한 치부를 들춰내는 게 즐거웠다.
“어쩌다 보니 순진한 제가 저런 더러운 놈하고 엮여서 이렇게 됐지만, 저요! 저 새끼랑 어떻게 잘해 볼 마음 눈곱만큼도 없고요! 아이 책임져 달라는 말도 안 할 거고. 아이 핑계로 물고 늘어지지도 않을 테니까 그것 때문에 여기 오신 거면 걱정 전혀 안 하셔도 됩니다! 각서라도 써 드려요?”
은찬은 회장이 이곳에 온 이유가 그것 때문이라 생각했다. 유능한 손주 앞길을 은찬이 애 핑계로 발목 잡을까 봐. 은찬은 전혀 그럴 걱정할 필요 없다는 것을 강조하며 각서든 뭐든 써 줄 생각이었다.
씩씩거리는 은찬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던 회장이 이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을 꺼냈다.
“태교는.”
“……네?”
“주한이 애미는 임신 소식을 듣자마자 태교부터 신경 썼다. 먹는 것, 입는 것, 그리고 말하는 것 전부 아이에게 영향이 가니 하나부터 열까지 신경 써야 할 거다.”
은찬은 회장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웬 태교? 그딴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뭐라고 반박해야 할지 생각하던 은찬은 회장의 다음 말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주위를 가볍게 휙 둘러본 회장이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좁고 답답하군. 이런 곳에서 태교는 무리였겠어. 늦었겠지만 지금이라도 해 봐야지. 집 구하기 전에 잠시 주한이 사는 곳에 지내. 하나부터 열까지 필요한 것 있으면 내가 다 해 줄 테니까. 주한이 가졌을 때처럼.”
이주한의 고집이 누구를 닮았는지 알겠다. 지금까지 한 말은 전부 뭐란 말인가. 맙소사……. 은찬은 회장이 자신을 떼어 놓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데리러 온 것이라는 걸 이제야 알아챘다.
“따로 짐은 챙길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어차피 싸구려밖에 없을 테니까. 지금 그대로 몸만 나가지.”
누구 마음대로! 은찬은 절대로 회장의 말에 따르지 않을 것이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하찮은 고양이니 뭐니 하면서 사람을 깔봤으면서 이제는 같이 살란다. 은찬은 손바닥 뒤집듯 획 바뀐 회장의 태도 변화에 미간을 찡그렸다.
탁, 탁, 탁. 숨 막힐 듯한 정적 속에서 꼬리로 소파를 신경질적으로 내려쳤다. 머리 위로 삐죽 나온 고양이 귀가 옆으로 비스듬히 눕혀진 제 모습이 티브이에 비쳤다. 누가 봐도 화난 고양이 모습 그 자체인데 회장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감정이 없는 노인네인가? 은찬이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도 이랬다. 같이 사는 동만 조차 놀라서 기겁할 만한 사건이었건만 회장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너무나 담담하게 받아들였고 이주한 애가 맞느냐는 개소리까지 아무렇지 않게 던졌다.
다시 생각하니 열받네. 은찬은 회장을 삐딱하게 노려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저 여기서 한 발자국도 안 나갈 건데요? 아까 저한테 돈 주시면서 그러셨잖아요. 저 자식하고 헤어지라고. 그래서 저 돈 받았는데요? 커피숍에서 저 새끼하고 쫑 난 거 다 보셨잖아요! 구질구질한 것도 집안 내력인가? 왜 이래.”
“…….”
은찬의 거친 표현에 지금까지 아무런 반응이 없던 회장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입을 굳게 다문 회장은 여전히 은찬이 마음에 들지 않은 눈치였다. 그럼에도 그가 이렇게까지 안면 몰수 하고 들이대는 이유는 딱 하나. 아이 때문일 것이다.
“용돈이다 생각해. 이제 그만 가야겠다. 여기서 더 시간 끌어 봤자 좋을 건 없을 것 같으니까. 차차 나아지겠지.”
회장은 은찬의 눈을 똑바로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통화의 대상은 김 실장이었다.
“김 실장, 올라와야겠어. 혼자 내려가기 힘들 것 같네.”
솔직히 회장 성격이라면 머리끄덩이라도 잡고 끌고 갈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간단히 후퇴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은찬의 임신 소식에 많이 놀라긴 놀란 모양이다. 혼자서 내려가기 힘들어 김 실장을 호출할 정도면 말이다.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아무렇지 않게 앉아 있던 회장의 목소리는 처음보다 많이 지쳐 있었다.
그로부터 5분 정도 집안에 평화가 찾아왔다. 다들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회장과 은찬의 눈치를 보고 있을 때 벨이 울렸다.
“왔나 보군. 김 실장일 테니 문 좀 열어 주게. 데리러 온 것 같으니.”
회장이 구석에 앉아 눈알만 이리저리 굴리고 있는 동만에게 명령했다. 즉각 자리에서 일어난 동만은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하지만 그곳에 김 실장은 없었다.
“누구세요?”
당황한 동만의 물음은 자연스럽게 묻혔다. 검은 정장 차림의 덩치 좋은 사내들은 동만을 밀치고 집안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대략 열 명 남짓한 사내들이 작은 거실을 거의 점령하다시피 했다. 그 끝에 김 실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눈을 동그랗게 뜬 은찬이 주한을 쳐다보려는데 정장 차림의 사내에 의해 차단당했다.
“어허. 애 놀란다. 놀라지 않게. 귀한 몸이야!”
“예, 회장님. 소중히 모시겠습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회장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김 실장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가 정장 차림의 남자들에게 눈짓을 던지자 두 명의 사내가 은찬의 팔을 하나씩 잡았다.
“이거 뭐야……! 영감님, 이거 뭐냐고요! 이주한! 이거 뭐야!”
당황한 은찬이 송곳니를 세우고 으르렁거렸다. 이주한 쪽을 보니 그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사내들에게 포박당한 상태였다.
“할아버지, 이건 얘기가 다르잖아요!”
“기업가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준비해 놓아야 하는 법이지. 혹시나 해서 김 실장 편으로 준비시켜 놨다. 내 증손주가 이런 누추한 곳에 있을 수는 없으니까.”
“할아버지!”
얼굴이 울긋불긋해진 이주한의 머리 위로 표범 귀가 보였다. 그는 씩씩거리며 자신을 잡고 있는 사내들을 떼어 내려고 버둥거렸지만 아무리 그라도 세 명을 물리치기란 무리였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회장은 이주한 쪽으로 눈길 한번 주지도 않고 현관 쪽으로 향했다. 덩달아 은찬도 공중에 붕 뜬 채로 끌려갔다.
“이거 놔! 안 놔? 야, 놓으라고! 누가 간대! 영감! 경찰에 신고한다? 신고할 거라고! 이주한,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동만아! 동만아, 나 좀 살려 줘!”
은찬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선가 튀어나온 동만이 회장의 앞을 두 팔 벌려 가로막았다. 그때, 유은찬의 눈에 김동만은 히어로처럼 보였다.
“우리 은찬이 어디로 데리고 가는 거예요! 회장님이면 답니까?”
“동만아아아아!”
동만아, 너밖에 없다. 회사에서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할 놈이 김동만이다. 그런 놈이 은찬을 위해 회장에게 대들고 있었다. 은찬은 눈시울이 시큰거렸다. 이게 사나이의 찐 우정이지.
“자네,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죠! 유은찬 풀어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김 실장.”
“예, 회장님.”
은찬의 뒤에 있던 김 실장이 회장의 곁으로 빠르게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리고 있는 동만에게 앞으로 일어날 이들에 대해 조곤조곤 설명했다.
“김동만 씨, 저희 회장님께서는 지금보다 윤택하고 풍요로운 생활을 위해 유은찬 씨를 모셔가는 겁니다. 아시다시피 태교에도 신경을 써야 하고요. 임산부는 신경 써야 할 게 여러모로 많으니까요. 그게 무슨 의미인 것 같습니까. 저희 작은 도련님의 짝으로 인정하시겠다는 것이죠. 그런데 김동만 씨가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지금껏 유은찬 씨 때문에 고생한 걸 생각해 작은 보답이라도 해 드리고자 저희도 생각해 둔 게 있는데 말입니다.”
“…….”
그 순간, 은찬은 동만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게다가 은찬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안 된다! 안 된다고, 김동만!
“승진하고 싶지 않으세요?”
몇 초의 정적 후 김동만은 슬그머니 은찬의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머리를 긁적이며 딴청을 피웠다.
“야……! 이 새끼! 김동만 너, 죽을 줄 알아! 야!”
팔이 잡힌 은찬이 그들을 지렛대로 이용해 김동만에게 발길질을 했다.
“여기보다 훨씬 좋은 대로 가는 건데 잡아 봤자 뭐 하냐? 잘 살아, 인마.”
“야, 너! 내가 너 가만히 안 둬!”
은찬은 눈을 부릅뜨고 김동만에게 저주를 퍼부었고 그대로 엘리베이터 안으로 끌려들어 갔다.
“영감, 나 안 간다고! 안 간다고! 나 임산부야! 나 스트레스 받게 하면 안 되는 거 몰라?”
가지 않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반항을 해 봤지만 먹히지 않았다. 다만, 회장은 스트레스라는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김 실장. 그거 하나 넣어 줘.”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김 실장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은찬의 입에 쏙 넣었다.
“이거 납치야! 납치라고! 오물오물…… 내가, 오물오물…… 경찰에, 신고……한다고!”
입에 들어와서 뭔지 모르고 먹긴 먹는데 먹다 보니 맛있다. 신경질은 나는데 짜증 나게 맛있는 맛이다.
“마음에 드나 보군. 하나 더 있음 줘 봐.”
김 실장이 포장지를 까기도 전에 이번에는 은찬이 먼저 입을 쩍 벌렸다. 진한 치즈 맛이 느껴지는 캐러멜이었다.
“진짜 나 화났다고! 오물오물……. 당신들 다 고소, 오물오물…… 한다!”
“하나 더 줘.”
화는 나는데 먹기는 먹어야겠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은찬은 차 안에 떡하니 앉아 있었다. 제 옆자리에는 회장이 앉아 있었고 마지막으로 이주한이 조수석에 억지로 태워졌다. 차는 곧장 출발했다.
도망칠 타이밍을 놓쳐 버린 탓에 꼼짝없이 끌려가게 생겼다. 납치나 다름없는 이 상황에서 은찬이 할 수 있는 건 털을 잔뜩 세우고 앙칼지게 대드는 것뿐이었다.
“하찮은, 오물오물……. 고양이한테 왜, 오물오물, 이러세요?”
“애들 성별은 나왔지?”
“인성에 문제 있다는 소리 못 들어 보셨어요?”
“고양인지 표범인지는 낳아 봐야 알겠군.”
“양아치세요?”
불과 얼마 전의 유은찬이었다면 회장님과 눈도 마주치지 못했을 것이다. 김동만과 함께 이 회사의 고인물로 남고 싶은 꿈이 있었기에.
하지만 그 꿈은 오늘부로 깨졌다. 지체 높으신 회장님께 양아치라는 발언을 서슴없이 퍼부었다. 좀 전에는 화가 나 말도 찍찍 놓았으니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다.
“앞으로 그런 말은 삼가고, 되도록 고운 말 예쁜 말만 써. 그리고 좀 전처럼 함부로 발길질해서도 안 되고. 몸을 생각해야지.”
은찬이 아무리 공격을 해도 회장은 능구렁이처럼 이리저리 빠져나갔다. 그사이 차는 이주한의 아파트 정문을 지났다. 마음이 급해진 은찬이 다급하게 손잡이를 잡아당겨 봤지만, 문이 열릴 턱이 없었다.
“아씨, 안 열려!”
“아, 해 봐.”
회장의 명령에 반사적으로 입을 벌리자 또 그게 들어왔다. 노인네. 치사하게 아까부터 먹는 거로 이런다. 내가 한번 당하지 두 번 당할 줄 알고? 눈 뜨고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심과 다르게 그의 입은 본능적으로 캐러멜을 오물오물 씹었다. 은찬은 울상이 됐다.
씨발, 이건 더 거부할 수 없는 맛이다. 치즈와 캣닢의 조화가 가히 환상적이었다.
“이런 거 먹이면, 오물오물, 누가 순순히 따라갈 줄……! 오물오물, 알고?”
“보기보다 성격이 앙칼지구만. 그래도 맛은 있나 보네. 하나 더 주랴?”
“됐거든요! 이런 거…… 오물오물, 주니까 먹는 거지! 오물오물……. 별맛도 없거든요!”
인상을 쓰고 송곳니를 세웠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맛이다. 은찬은 입안에 남은 캐러멜 맛을 음미하며 회장에게 계속 하악질을 퍼부었다.
“특급 호텔 주방장이 날 위해서 특별히 만든 수제 캐러멜이지. 시중에는 팔지도 않고 살 수도 없어. 지금 네가 먹은 것까지 빼면 이제 딱 두 개가 남았는데…….”
어쩐지 태어나서 처음 먹어 보는 맛이더라. 자신이 이곳에 있는 본래의 목적을 잠시 망각한 은찬은 침을 꿀꺽 삼키며 회장의 손에 있는 두 개의 캐러멜에 집중했다. 특급 호텔 주방장이 만든 거라고 했으니 비싸겠지? 캣닢의 여파인지 좀 전과 달리 은찬은 한결 안정된 자세를 취했다.
“일단 내리지.”
차 문이 열리고 회장이 내리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 찰나 고민에 잠긴 은찬은 잽싸게 회장의 옷자락을 잡았다.
“저기요.”
“왜.”
“내리면 남은 두 개 나 주는 거예요?”
“조금 전까지 별로라며.”
노인네 기억력도 좋다. 은찬이 입을 삐죽 내밀고 회장의 옷자락을 놓았다. 회장은 차에서 한걸음 물러나 여전히 차 안에서 꿈쩍도 않고 있는 은찬을 캐러멜로 유혹하기 시작했다.
“여기 있다. 나오면 하나 주마.”
노인네가 지금 장난치나. 고작 그딴 걸로 내가 움직일 것 같아? 은찬은 신경질적으로 대답하며 고개를 획 돌렸다.
“됐거든요?”
“두 개밖에 안 남았대도. 이거 하나 만드는 데 들어가는 재료를 공수하는 것만 일주일이 걸려. 먹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지. 봐라, 겉에 금박 입힌 거.”
맛을 모른다면 이런 반응까지 나오지 않았을 텐데. 이미 맛을 알아 버린 은찬의 몸은 주인의 의지와 다르게 반응했다. 은찬은 작은 금덩이 같은 캐러멜에 시선을 고정한 채 홀린 듯 차 안에서 나와 버렸다. 그리고 나가자마자 아까 그 사내들에게 또 양팔이 잡혔다.
“아씨……!”
잘한다, 유은찬. 먹는 것에 홀라당 넘어간 병신 유은찬.
멍청한 자신을 속으로 욕하며 인상을 쓰고 있을 때 회장이 그런 은찬의 입안으로 캐러멜을 쏙 넣었다. 은찬은 아까부터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맛있게 캐러멜을 씹었다.
“다치지 않게 조심히 데려와.”
이미 모든 것을 체념한 이주한은 순순히 끌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은찬은 달랐다. 비록 캐러멜에 몸은 굴복했지만, 자존심은 굽히지 않았다.
“내가, 오물오물, 영감 정성을 봐서……! 오물오물…… 하룻밤만 자고, 오물오물, 가 준다!”
“그거 고맙군.”
씩씩거리는 은찬과 달리 회장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뭔가 더 기분이 나빠진 은찬이 눈을 치켜뜨며 한마디 더 하려고 할 때 기다렸다는 듯이 캐러멜이 또 입안으로 들어왔다. 회장의 말대로라면 마지막 캐러멜이다.
뭔데 이거 왜 이렇게 맛있는 건데. 먹는 데 정신이 팔린 은찬은 복도를 지나 이주한의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몰랐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말문이 막혔다.
분명 얼마 전에 왔을 때는 이런 게 없었다. 거실 창가에 거대한 표범 박제가 제일 눈에 띄었다. 거기다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아기 신발. 그것뿐만이 아니라 집안 곳곳에 표범 그림과 아기 용품들이 널려 있었다.
같은 풍경을 보고 있는 집주인 이주한의 표정은 다채로웠다. 당황과 빡침의 공존이랄까. 그도 집 꼬락서니가 이럴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하기야,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표범 박제는 좀 그랬다.
“이게 다…… 뭐예요? 할아버지!”
겨우 말문이 터진 이주한의 경악에도 회장은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급하게 준비한 것치곤 괜찮군. 우리 선조이니 함께 있으면 태교에도 좋을 거다.”
저게? 은찬은 조명에 반짝이는 표범의 날카로운 송곳니를 빤히 보았다. 저거랑 같이 있으면 가위에 눌릴 것 같은데? 이 노인네, 은찬이 고양이 수인이라는 걸 잊었나 보다.
“니들도 쉬어야 할 테니 난 이만 가 보마.”
회장은 자신의 계획을 다 실천한 뒤에야 쿨하게 퇴장했다. 이 넓은 공간에 이주한과 단둘이 남게 된 은찬은 뒤늦게 현타가 찾아왔다. 이주한 따위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살겠다는 야심 찬 계획은 회장님의 개입으로 물거품이 돼 버렸다.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온 상황에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터졌다. 믿었던 김동만의 배신도 다시 생각났다. 이 자식이 승진 때문에 친구를 버려? 또 화가 끓어오르기 시작한 은찬은 꼬리를 흔들며 분노를 표출했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표범 박제가 있는 곳으로 가 녀석의 다리를 퍽퍽 찼다.
“유은찬.”
“나 여기 오고 싶어서 온 거 아니거든요?”
“미안……. 저렇게 막무가내로 나오실 줄 몰랐어.”
“그렇다고 해서 우리 사이가 다시 잘될 거라는 기대는 하지 마세요. 이주한 부장님.”
“…….”
은찬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시큰둥한 말투로 그를 쏘아붙였다.
“치사하게 회장님을 데리고 집에 쳐들어와요?”
“너하고 나 사이를 당장 인정받으려면 그렇게라도 할 수밖…….”
“헤어진 마당에 무슨 인정?”
“우리 헤어진 거 아니야! 내가 인정 못 해!”
“애인 몰래 선본 주제에 되게 큰소리치시네?”
“그건, 미안해. 내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건 맞는데…….”
“그럼 말하지 마요! 짜증 나니까! 남자가 구질구질하게 할아버지한테 쪼르륵 가서 다 일러바치기는. 나잇값 좀 하시죠?”
조금 전까지 은찬에게 쩔쩔매던 이주한의 표정이 한순간에 차갑게 굳어 버렸다. 잠시 그들 사이에 어색한 적막이 흘렀다.
그런다고 무서워할 줄 알고? 여전히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은찬은 고양이 특유의 시큰둥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러다 한마디 더 쏘아붙이려던 찰나, 이주한이 말을 가로챘다.
“나보고 걸레라고 한 것 같은데.”
“…….”
한 걸음 다가오는 이주한을 피해 은찬도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어쩌다 보니 나온 말을 아직 가슴에 담아 두고 있는 모양이다.
“그것도 할아버지 앞에서.”
“내가 틀린 말 했나? 아니잖아요! 맞잖아! 거기다 성격도 영감하고 완전 똑같아! 고집불통에 소리만 꽥꽥 지르고, 남들 말은 듣지도 않고! 나보고 하찮은 고양이라고 했다가 여기까지 끌고 온 것 봐. 이러니까 내가 싫다는 거예요! 망할 표범 집안! 나랑 하나부터 열까지 하나도 안 맞아!”
“유은찬.”
이주한이 서늘한 목소리로 은찬을 불렀다. 설마 화난 건가? 그의 무서운 얼굴에 속으로 뜨끔했지만 은찬은 내색하지 않고 턱을 빳빳이 세웠다. 솔직히 이대로 끝냈으면 하는 바람도 없지 않아 있었다.
“정말 나랑 끝내고 싶어? 그래?”
어! 당연하지. 너 만나고 되는 게 없어. 귀찮아 죽겠다고! 이렇게 큰 소리를 치고 싶었지만 이주한의 붉게 충혈된 눈과 마주한 순간 그 말이 쏙 들어갔다. 누군가를 울리는 취미도 없지만, 이주한이 우는 모습 따위는 보고 싶지 않았다. 이게 그럴 만한 일도 아니고.
그나저나 이 집안 사람들. 회장도 그렇고 이주한까지 첫인상과 다르게 대놓고 은찬에게 집착했다.
“저기. 그러니까, 하아…….”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이주한에 대한 분노는 아직 그대로였지만 거짓말하고 선본 것만 뺀다면 그와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섹스도 잘 맞았고 특히 맛있는 것을 많이 사 줘서 좋다. 이렇게 붙잡는데 굳이 헤어질 필요가 있을까…….
팔짱을 낀 은찬은 심각한 표정으로 이주한을 지긋이 응시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에게 이 정도로 잘해 줄 사람은 이주한이 유일할 것 같았다. 동만도 있지만 이주한과 다르게 먹는 것에 은근히 돈을 아끼는 타입이었다.
김동만과 이주한. 두 사람을 놓고 저울질하던 은찬은 마침내 결심을 내렸다. 잔소리 없이 먹을 것 사 주는 쪽을 선택한 기적의 논리였다.
“하는 거 봐서요.”
“……하아.”
지금껏 헤어지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여파 때문인지 은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주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헤어지지 않겠다고 솔직하게 말해도 되지만 쉽게 용서해 주는 것 같아서 거기까진 말하지 않을 생각이다.
“안 하겠다는 건 아니고. 진짜 하는 거 봐서요. 나 또 화나면 알죠?”
“알았어. 잘할게.”
이제 어느 정도 마무리됐으니 여기 있을 이유는 없었다. 은찬은 아기 용품들이 빼곡히 들어찬 이곳이 부담스럽기 시작했다. 성큼성큼 걸어 현관으로 향했다.
“어디 가게.”
“집에요. 나 여기 불편해서 싫어요. 나 만 원만. 아니다 이만 원만 줘요. 택시 타고 가게.”
“늦었으니까 자고 가.”
주한이 다급하게 뒤쫓아 오며 은찬을 말렸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맨발로 끌려온 탓에 현관에 있는 슬리퍼를 대충 신고 문을 벌컥 열었다. 하지만 은찬은 그 이상 나가지 못했다. 그를 여기까지 끌고 온 정장 입은 남자 다섯 명이 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그들은 반쯤 열린 문 너머로 굳어 버린 은찬을 보곤 기계적으로 물었다.
“필요하신 거 있으십니까?”
“…….”
“부탁할 거 있으시면 편안하게 말씀하세요.”
“저기…… 밖에 좀.”
“필요한 거 있으면 저희한테 말씀하세요. 집 밖으로 나가지 말고 집에서 안정을 취하라는 회장님의 당부가 있으셨습니다.”
은찬은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까지의 거리를 가늠해 봤다. 예전이었다면 곧장 뛰어서 엘리베이터를 탔을 테지만 지금은 무리였다. 배가 모래주머니를 찬 것처럼 무거운 마당에 날렵하게 뛰기란 힘든 일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 은찬은 깔끔하게 문을 닫고 돌아섰다. 바로 뒤에서 눈이 마주친 죄 없는 이주한을 째려보며 거실로 들어가 소파에 벌러덩 누웠다. 기분이 영 좋지 않아서인지 고양이 귀와 꼬리는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지……. 오늘은 꼼짝없이 여기서 하룻밤 보내야 하는가 보다. 일찌감치 도망갈 생각을 단념한 은찬은 급작스럽게 허기가 밀려오는 걸 느꼈다.
“나 배고픈데.”
소파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은찬의 눈치를 보고 있던 주한이 멈칫했다. 은찬은 동만에게 하듯이 당당하게 요구했다.
“나 배고픈데 먹을 거 없어요?”
“어? 아, 배고파? 뭐 먹고 싶어. 말만 해.”
“라면이요. 집에 라면은 있죠?”
“아…… 라면. 글쎄. 그거 말고 다른 거 먹자. 라면은 몸에도 안 좋아. 우리 맛있는 거 시켜 먹을까?”
“진짜 라면 없어요? 나 라면 먹고 싶은데. 동만이가 라면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끓였는데…….”
잠시 거실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소파에 벌러덩 누워 허벅지를 벅벅 긁고 있던 은찬은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는 이주한과 눈이 마주쳤다. 별생각 없이 던진 말에 그가 격한 반응을 보였다.
“나도 잘 끓여! 기다려! 하나 먹다가 둘이 죽어도 모를 만큼 기가 막히게 끊여 올 테니까!”
“나 라면 두 개! 거기다 파 조금 넣고 계란 하나요!”
이주한은 비장한 표정으로 부엌에 들어섰지만, 시작부터 불안했다. 냄비를 찾지 못해 부엌 전체를 뒤져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끓인 라면은 30분 뒤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5분이면 끓이고도 남았을 라면을 30분 만에 대면하게 된 은찬은 이미 빡친 상태였다.
얼마나 맛있는지 두고 보자. 이를 갈며 한 입 먹은 그 순간, 그는 젓가락을 거칠게 던지며 소리쳤다.
“우리 헤어져요!”
“왜!”
“이게 뭐야! 더럽게 맛없잖아! 라면 하나 제대로 못 끓여요? 동만이가 끓인 것보다 훨씬! 훨씨이이이인 맛없다고!”
은찬의 핀잔에 자존심 상한 이주한의 얼굴에 경련이 일어났다. 화해 모드였던 그들 사이는 고작 라면 하나에 또다시 금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