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25)

16805267497665.jpg

#16

“바꿔! 나는 싫어! 분명히 싫다고 했어!”

“나는 좋다고요! 부르기도 쉽고. 그리고 벌써 입에 베여서 바꾸기 싫다고 몇 번이나 말해요! 진짜 이럴 거예요?”

“너야말로 한 번쯤 내 부탁 정도는 들어줄 수 있는 거잖아!”

오피스텔 문 앞까지 따라온 이주한은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다.

퇴근 직전. 다시 싸움에 불이 붙었지만 먹는 것과 싸움은 별개였기에 은찬은 그가 사 주는 고기로 배를 채웠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또 시작됐다. 이주한은 당연히 제집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고 은찬은 오피스텔로 가겠다는 의견 대립이 벌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오피스텔까지 왔지만, 이주한까지 덩달아 딸려 왔다. 그는 은찬이 제 의견을 들어줄 때까지 돌아가지 않겠다는 엄포를 놓았다. 조용했던 오피스텔 복도가 그들로 인해 소란스러워지자 굳게 닫혀 있던 문들이 하나둘씩 열렸다.

그들을 향해 쏟아지는 호기심 어린 시선에 은찬은 한숨이 터졌다. 내일 또 난리가 나겠구나. 기숙사에 살면 집세 걱정을 하지 않아서 좋긴 했지만 이런 단점도 있었다. 사생활이 없다.

은찬은 씩씩거리는 이주한을 무시하고 도어 록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재빨리 문을 닫으려 했지만, 이주한은 생각보다 민첩했다.

“누가 들어오랬어요?”

“생각한 것보다 더 작잖아. 당장 필요한 것만 챙겨서 우리 집으로 가.”

성인 남자 둘이 서 있기에 좁은 현관에서부터 이주한은 경악했다. 신발을 벗고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선 그는 짧게 혀를 차며 은찬에게 명령했다. 자기가 뭔데 이래라저래라야? 귀찮을 정도로 간섭하는 이주한을 흘기며 은찬은 그를 지나쳐 소파에 털썩 앉았다.

“방은 하나야? 화장실도 하나고? 진짜 이게 다라고.”

이주한은 허락도 없이 집안을 돌아다녔다. 은찬은 질린다는 시선으로 그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두 번째 방문이지만 저번에는 경황이 없어 자세히 보지 못한 탓이 컸다.

“그럼? 방이 뭐 두세 개 되고 화장실도 두 개 정도 있을 줄 알았어요? 요즘 집값이 얼만지 아세요? 역세권에 오피스텔 기숙사가 있는 것만 해도 진짜 대단한 거거든요? 그리고 왜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이러는 건데요!”

자고로 집이란 편안하게 쉬어야 하거늘 이주한의 잔소리에 은찬은 스트레스 지수가 치솟았다. 그래도 동만은 따라다니면서 잔소리는 하지 않았다.

“애인으로서 네가 다른 놈하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 확인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보는데.”

“난 좀 쉬고 싶거든요?”

“우리 집에 가서 쉬어. 가자마자 욕조에서 반신욕하고 푹신한 침대에서 쉬어. 네가 먹고 싶은 거 아침에 차려 놓아 있을 거고, 넌 아무것도 할 필요 없이 눈 뜨자마자 먹고 출근만 하면 돼. 피곤하면 출근 도장만 찍고 집에 와서 쉬어도 되고.”

이거 완전 대박인데? 생각지도 못한 이주한의 제의는 은찬의 입꼬리를 올라가게 만들었다. 야경이 보이는 욕조에서 반신욕을 하고 큰 소파에 벌러덩 누워 티브이를 보고 있는 제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 봤다. 아침에 일어나면 먹고 싶은 것이 한가득 차려진 식탁. 거기다 출근 도장만 찍고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가도 된다는 제안을 거절하기란 힘들었다.

“……네가 이런 좁은 곳에서 다른 놈이랑 같이 있다는 게 참기 힘들어서 그래.”

“질투해요?”

“그래, 질투.”

질투란다. 망설임 없이 인정하는 이주한의 태도에 은찬의 기분은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속으로 욕을 퍼부었던 건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내가 일 때문에 다른 남자랑 붙어 있어도 질투 나요? 회사에서도?”

“네가 어떤 놈이랑 인사만 해도 질투 나.”

솔직한 이주한의 말을 끝으로 그들 사이에 묘한 정적이 맴돌았다. 괜히 기분이 말랑말랑해진 은찬은 몸을 비비 꼬았고, 주한은 그런 은찬의 옆자리에 슬그머니 앉았다. 2인용 소파가 그로 인해 꽉 찼다.

“그거 곤란한데……. 나도 사회생활은 해야죠.”

“하지 마. 나도 돈 벌어.”

“나 그런 거 싫은데. 나도 돈 벌 수 있거든요? 벌 수 있을 때 바짝 벌어야죠. 애가 둘인데.”

“나 돈 많아.”

“요즘 애 키우는데 돈이 얼마나 들어가는데.”

“나 그 정도 돈 있어.”

“어휴……. 그래도 애가 둘이에요, 둘. 이놈들 먹성이 얼마나 좋은지 돌아서면 배가 고프다니까요?”

“그러니까. 내가 그 수발 다 들 테니까. 우리 집으로 가. 자다가 먹고 싶은 거 생기면 어떻게 할 거야? 배달도 그 시간에 안 되면? 김동만 씨 시킬 거야? 그 사람이 잘도 해 주겠다.”

뭐라 반박하고 싶지만, 이주한의 말이 맞았다. 얼마 전에도 밤늦게 먹고 싶은 게 생겨서 동만을 깨웠더니 타박만 들었다. 서러웠지만 그냥 그렇게 지나갔다.

“누가 그러던데. 꼬실 때는 간이고 쓸개고 다 줄 듯이 한다고.”

“누가 그래?”

“동만이가요.”

“…….”

이주한의 미간에 작은 주름이 생겼다.

“형이 그렇게 보인다는 게 아니라…… 보통 그렇대요. 사람 함부로 믿지 말라고.”

“유은찬.”

“왜 이러는지 알겠는데. 이해는 되는데요……. 우리가 너무 빠른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좀 느긋하게 생각하고 싶은데.”

“유은찬.”

하루가 다르게 배는 나오고 이주한은 결혼식으로 압박해 왔다. 계획대로라면 휴가와 월차를 몰빵 해서 쥐도 새도 모르게 애를 낳고 복귀하는 것인데. 완전 다른 인생을 개척하게 됐다.

“나 사람 아니잖아. 그러니까 믿어도 돼.”

“네? 아…….”

“우리 종족이 그렇다고 했잖아. 내 짝한테는 진심으로 돌진한다고. 그러니까, 믿어. 너한테는 진심이니까.”

조용한 거실에 울리는 이주한의 목소리. 그리고 끈적끈적한 그의 시선. 모든 것이 로맨틱했다. 은찬은 자연스럽게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조금 전까지 다툼의 주제를 슬쩍 꺼냈다.

“나비하고 까망이 아직도 별루예요?”

“……솔직히 별로지만. 네가 좋다면 받아들일게.”

“내가 그렇게 좋아요?”

“그럼 내가 여기 왜 있겠어.”

“언제부터?”

“그럼 넌 언제부터 내가 좋았는데.”

“그걸 꼭 말로 해야 아나?”

“나도 꼭 말로 해야 해? 보면 알잖아. 내가 언제부터 그랬는지.”

미안하지만, 모르겠다. 은찬의 기억 속에 이주한은 영원한 개새끼로 남아 있을 줄 알았기 때문에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게 뭐 중요한가. 지금 이렇게 서로 좋아하게 된 결말이 중요하지.

은찬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주한과 마주친 시선에 씨익 웃었다. 자연스럽게 그의 입술이 내려와 은찬의 입술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다른 남자 쳐다도 보지 마. 말도 섞지 마. 인사도 안 돼.”

“형도 다른 남자 쳐다보지 마요. 말도 섞지 마요. 여자도 안 돼요.”

은찬의 볼멘소리가 그의 마음에 더 불을 지폈나 보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시선이 쏟아졌다.

“날 애태우려고 작정했지?”

그 말의 의미를 단번에 이해한 은찬은 이주한의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섹스해도 돼요.”

“해도 돼?”

“세게만 안 하면……. 근데 형이 힘이 좋으니까.”

“조심할게.”

은찬은 오늘따라 더 잘생겨 보이는 이주한의 매력에 풍덩 빠졌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다짜고짜 서로의 목을 끌어안고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키스에 굶주린 사람처럼 게걸스럽게 서로의 입안을 거칠게 탐색하던 중 은찬은 소파 위로 쓰러졌다.

이주한의 양팔 사이에 갇힌 은찬은 수줍게 눈을 내리깔았다. 그의 거대한 것이 은찬의 허벅지에 닿았다.

“……유은찬.”

욕망에 젖은 이주한의 부름에 은찬은 그의 목을 끌어안고 키스를 퍼붓는 것으로 대답했다. 서로의 몸을 쓸어 만지며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고 있을 때였다.

띠. 띠. 띠. 건조한 전자 버튼 소리의 울림과 동시에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현관의 정면이 소파였다. 미처 피할 새도 없었다. 은찬은 아무 생각 없이 집 안으로 들어온 김동만 마주쳤고, 녀석은 못 볼 걸 본 사람처럼 소리를 질러 댔다.

“유은찬, 형님 오셨다아아아아악! 뭐야! 내 소파에서 더럽게 여기서 뭐 하는 짓이야!”

무슨 일이든 당당한 이주한마저 굳어 버린 상황. 무거운 정적 속에서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은찬이었다. 킁킁. 코끝을 스치는 갓 튀긴 치킨 냄새에 코를 벌렁거리며 이주한을 밀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치킨 사 왔어?”

은찬은 넋이 나간 김동만이 들고 있는 치킨을 향해 돌진했다.

***

이주한과 김동만은 식탁에 앉아 신나게 치킨을 뜯고 있는 은찬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이게 무슨 상황일까. 분명 이런 의도로 이곳에 온 건 아닌데. 정신을 차려보니 주한은 김동만과 덩그러니 남게 됐다. 한우를 혼자 4인분이나 먹어 치운 유은찬은 치킨 한 마리를 눈 깜짝할 사이에 해치우고 유유히 사라졌다.

“아, 잘 먹었다!”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졸리다며 방으로 들어가는 녀석을 차마 잡을 수 없었다.

“고양이 주제에 코는 개코야, 개코! 진짜 너무한다, 너무해! 처먹었으면 좀 치우든가! 어떻게 몸만 쏙 일어나서 가냐? 양심도 없는 새끼!”

김동만의 잔소리가 쏟아질수록 주한은 자신이 죄인처럼 몸 둘 바를 몰랐다. 소파에 다소곳이 앉아 움찔거리며 눈치를 보는 어색한 순간이 이어졌다.

“와아……. 이 새끼 하나도 안 남기고 다 처먹었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욕까지 할 필요가……. 애가 잘 먹었으면 된 거지. 그까짓 거 얼마 한다고. 묵묵히 듣고 있던 주한은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김동만 씨.”

“네?”

“한 마리 시켜 드려요?”

“…….”

신경질적으로 식탁을 청소 중이던 김동만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다. 지금 내가 그깟 치킨 한 마리 때문에 이러는 거로 보이냐는 눈빛에 주한은 머쓱하게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아, 맞다! 유은찬! 너 양치는 좀 하고 자지? 와이셔츠는 벗었어? 옷은 갈아입었냐고!”

돌연 손에 들고 있던 행주를 거칠게 던진 동만은 침실로 무섭게 돌진했다. 반쯤 일어난 그는 곧장 침실로 달려갈 준비를 했지만, 방 안에서 들려오는 두 사람의 대화는 주한의 말문을 막히게 만들었다.

“야! 내 말 안 들려? 내가 오면 옷부터 갈아입고 씻으라고 했지! 최소한 양치는 좀 해! 이 더러운 새끼야!”

“자고 일어나서 하면 되잖아!”

“넌 위생 개념도 없냐? 가글이라도 하든가!”

“그거 싫다고 몇 번을 말해! 혀에 이상한 맛 나서 싫다고……. 아…… 졸린다고. 가. 꺼져. 잘 거야. 자고…… 이따가. 나…중에.”

“이따가 같은 소리 하네! 남 밥을 다 처먹고 혼자 배불러서 자면 좋냐? 너 내가 오늘 어떤 고생을 했는지 아냐? 내가 물 한 모금도 못 마시고 몇 시간을 끌려다녔는지! ……자는 놈 붙잡고 무슨 짓이냐.”

김동만은 씩씩거리며 달려들었고 유은찬은 익숙하게 귀를 틀어막고 잠을 잤다. 흡사 엄마와 아들 같은 모습이랄까. 한때 연인이었다는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덕분에 주한은 확신을 하게 됐다. 유은찬과 김동만의 관계에 대한 확신.

터벅터벅. 힘없이 부엌으로 향한 김동만은 캔 맥주 두 개를 들고 조용히 소파 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그중 하나를 주한에게 쓱 내밀며 바닥에 퍼질러 앉았다. 주한은 잠시 맥주와 김동만을 번갈아 보며 고민에 빠졌다. 이 맥주의 의미가 뭘까 싶어서. 혹시 화해? 타협의 의미인가?

“맥주 싫어하세요?”

주한은 선뜻 받을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김동만에게 쌓인 게 많았기 때문이다.

“차 때문에…….”

“저는 두 번 안 권합니다.”

냉큼 도로 가져가려는 그의 손에서 맥주를 낚아챘다. 때마침 목이 말랐다. 주한의 변덕에 김동만은 어깨를 으쓱이며 제 맥주를 따서 마셨다.

“캬, 시원하다!”

주한도 캔 맥주를 한 모금 마시자 그제야 김동만이 능글맞은 표정으로 묻는다.

“차 때문에 안 된다고 하시더니?”

“택시 타고 가든가 대리 부르면 되죠.”

“저기요. 부장님.”

고작 맥주 반 캔에 취한 건 아닐 테고. 김동만은 눈을 반짝이며 주한을 빤히 쳐다봤다. 뭔가 묻고 싶은 게 많은 표정이다.

“말하세요.”

“저 자식이 어디가 좋아요?”

조금 전 유은찬에게도 이런 질문을 받았지만, 그때와 상황이 달랐다. 주한은 지극히 건조한 표정과 말투로 짧게 답했다.

“그걸 왜 김동만 씨한테 말해야 하죠?”

“방금도 보셨다시피 쟤 진짜 자기밖에 모르는 놈인데, 그래도 좋으세요? 자고 일어나면 이불도 하나 정리 안 하고요. 밥 먹고 나서 치우는 거 한번 못 봤고요. 자기 몸 씻는 것 이외에 청소하는 거 한 번도 못 봤어요. 씻는 것도 내가 씻으라고 잔소리 열 번은 해야 씻는 놈인데 그래도 괜찮으세요?”

확실히 전 연인에게서 나올 법한 말은 아니었다. 지극히 현실적인 조언에 주한은 김동만을 물끄러미 보았다.

유은찬 먹일 케이크를 사기 위해 가는 중 이리한에게 전화가 왔었다. 주한이 김동만과 사귀는 줄 알았다는 개소리에 욕을 퍼붓고 끊었다. 그랬더니 또 전화가 와서 김동만을 찬양하는 말을 쏟아 내는 것이다. 착하고 배려심 많다는 김동만 전도사 이리한의 말을 떠올리며 녀석을 자세히 관찰했다.

이리한이 반한 배려심과 착함은 유은찬 때문에 생긴 습관 같은 게 아닐까 싶다. 지금까지 한 말을 들어 보니 앞으로 주한이 해야 할 일을 대놓고 알려 주는 것 같았다. 맥주를 한 모금 마신 주한은 피식 웃었다.

“집안일은 사람 부르니까 신경 쓸 필요 없을 테고. 씻는 건 내가 씻겨 주면 되니까 그것도 별문제 없을 것 같은데.”

“아…….”

이런 대답을 원했던 건 아닌 모양이다. 동만은 무표정으로 맥주를 홀짝홀짝 마셨다. 같은 팀원으로 있을 때도 그리 친한 편은 아니었기에 지금 이 순간이 어색한 건 사실이었다. 어색한 정적 속에서 유은찬이 몸을 뒤척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저기, 김동만 씨.”

“네?”

슬슬 이쯤 해서 그들의 어색한 연기가 들통 났다는 것을 밝힐 때가 된 것 같다.

“왜 거짓말한 겁니까?”

“네? 뭘요?”

“유은찬하고 사귄다고 한 거. 거짓말이죠?”

역시 그는 알기 쉬운 남자였다. 순간 김동만의 눈이 노골적으로 커졌다.

“아닌데요? 누가 그래요? 은찬이가 그래요?”

그때까지 소파에 앉아 있던 주한도 바닥으로 내려왔다. 김동만과 시선의 높이를 맞춘 그는 자의적인 미소가 아닌 진심으로 옅은 미소를 지었다. 유은찬과 김동만 사이가 귀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질투도 났다.

“이런 거 저런 거 따져 보고 계산해 보면…… 얼추 아닌 거 금방 알겠던데. 왜 그랬어요? 차라리 나한테 사실대로 말했으면 더 편했을 텐데.”

김동만의 표정은 놀라움과 당혹스러움 그리고 고뇌를 거쳐 최종적으로 체념으로 마무리됐다. 그는 캔 맥주를 빙빙 돌리며 별일 아니라는 듯 툭 던졌다.

“솔직히 저도 사람인데 고민됐죠. 그때 부장님이 유은찬하고 헤어지면 정말 승진이라도 시켜 줄 기세였잖아요. 근데…… 뭐, 어쩌겠어요. 미우나 고우나 2년 살 붙이고 산 놈을 배신할 수는 없잖아요. 저놈이 아주 이기적이긴 해도 일부러 그러는 것도 아니거든요. 같이 있다 보면 재미있고 좋아요. 평생 안 볼 사이도 아니고.”

주한은 김동만이 생각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이리한이라는 미친놈을 떠안긴 게 왠지 모르게 미안해졌다.

“오늘 데리고 가려고 했는데 아시다시피 저 녀석 고집이 못 당하잖아요. 한동안만 더 고생해 줘요. 내가 몇 배로 갚아 줄 테니까.”

“고생은 고생이죠. 말도 마세요. 먹고 싶다는 거 배달시켰더니 비린내 나서 싫다고 투덜거리고, 또 다른 거 사 주면 입맛 없다고 안 먹고. 근데 당장 저 녀석 없으면 저도 좀 그래요. 맨날 티격태격하면서 싸웠는데. 이 조그만 집이 넓게 느껴진다니까요. 걱정 마세요. 잘 먹이고 잘 챙길 테니까.”

주한이 어깨에 힘을 좀 풀고 자연스럽게 손을 내미니 동만도 한결 편하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뭐랄까. 동만에게서 꼭 철딱서니 없는 딸내미를 시집보내는 엄마 느낌이 났다.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겨우 참은 주한은 캔 맥주를 내려놓고 일어났다.

“가시게요?”

“가야죠. 저 녀석도 자고, 내가 더 있으면 동만 씨도 불편할 테고.”

마지막 집을 나서기 전 아쉬운 마음에 유은찬이 자는 방을 힐끔거렸다. 섹스하기 직전에 김동만에게 들킨 것도 그렇고 그 상황에 치킨을 먹는 유은찬을 보며 얼마나 당혹스럽던지. 유은찬 때문에 여러모로 웃을 일이 늘어났다.

“부장님, 잠깐만요!”

현관문을 나서기 전 김동만이 다급하게 불러세웠다. 후다닥 뛰어온 그는 무언가를 주한에게 내밀며 씨익 웃었다. 처음에는 그게 뭔지 몰랐다. 한참을 뚫어지게 보자 김동만이 말해 줬다.

“나갈 때 쓰레기 좀 버려 주실 수 있죠?”

“…….”

“요 앞에 경비실 옆에 모아 두는 데 있거든요. 거기 던져 놓으면 돼요. 아, 좀 그런가……?”

고작 대화 몇 분으로 친근한 사이가 됐다는 착각을 하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회사 부장에게 이런 걸 시킬 생각을 하다니. 눈치가 없는 걸까, 없는 척하는 걸까. 주한이 쓰레기봉투를 무표정으로 쳐다보고만 있자 김동만이 한마디 더 덧붙였다.

“좀 그렇죠? 그럼 뭐, 내일 은찬이 시키죠. 원래 이거 오늘 은찬이가 버리는 날이었는데…….”

유은찬에게 쓰레기 버리는 걸 시키겠다는 말에 주한은 더 들을 것도 없이 그것을 떠안았다.

“고맙습니다, 부장님! 조심히 가세요!”

쾅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자마자 주한은 쓰레기봉투를 던질 뻔했다. 잠시 김동만을 좋은 놈으로 착각할 뻔했지만 이 일로 그가 어떤 놈인지 정확히 파악했다. 저런 놈에게는 이리한이 딱이지. 평생 개 뒤치다꺼리나 하고 살아라.

엘리베이터로 씩씩거리며 걸어가는 이주한의 손에는 묵직한 쓰레기봉투가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쓰레기봉투를 버리러 가는 그의 마음은 착잡했다.

내가 이런 걸 하다니…….

오직 유은찬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것 하나만으로 하는 일이었다.

***

유은찬은 행복했다. 입사 이래로 이렇게 행복했던 적은 단연코 없었다. 출근부터 퇴근까지 책임지며 맛있는 밥까지 사 주는 이주한이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누구 하나 은찬에게 잔소리하는 이가 없었다. 대놓고 잠을 자도 컴퓨터를 켜 놓고 딴짓을 해도 다들 모른 척 외면했다. 특히 아부의 제왕 곽 과장은 놀고 있는 은찬에게 쉬엄쉬엄하라는 말까지 던졌다.

덕분에 은찬은 지금 행복 지수가 매우 높았다. 이대로라면 이주한과 결혼을 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왜 웃어? 뭐가 그렇게 좋아?]

이주한이 보낸 메시지를 확인한 은찬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왜 계속 나만 보고 있어요?]

[어떻게 알았어? 너만 보고 있는지.]

[형 시선이 너무 뜨거워서 얼굴이 타 버릴 것 같은데?]

[그럼 안 되지. 우리 은찬이 타 버리면 안 되니까. 다른 거 볼게.]

[일해요, 일. 우리 티 나게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요.]

[좋은 걸 어떻게 해.]

좋단다. 그 단어에 은찬이 히죽 웃고 있자 옆에서 가자미눈을 뜨고 있던 김동만이 핸드폰을 훔쳐보고 토하는 시늉을 펼쳤다. 이게 죽으려고.

“티 다 나거든?”

“뭐가.”

퉁명스럽게 녀석을 흘기며 은찬은 다시 핸드폰에 집중했다. 김동만과 가짜 사내 연애 할 때는 몰랐는데 진짜 사내 연애를 해 보니 그 재미가 쏠쏠하다.

[우리 형, 그렇게 앉아 있으니까 너무 멋지다.]

지금 이주한이 차지한 곽 과장의 자리가 은찬이 고개만 돌리면 시선이 마주치는 자리였다. 은찬의 말 하나에 이주한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살짝 턱을 내리깐 그는 살짝 고개를 튼 은찬과 마주친 시선에 윙크를 던졌다. 보답으로 은찬도 윙크를 던지자 보다 못한 동만의 쓴소리가 쏟아졌다.

“지랄을 한다. 지랄을 해! 그냥 나가서 주접을 떨라고. 신성한 사무실에서 이러지 말고!”

“네 할 일이나 하셔. 너 오늘 외근 안 가? 안 바빠?”

며칠 연달아 외근을 나가더니 오늘은 어째 사무실에 붙어 있다. 동만의 허전함을 느낄 사이도 없었다. 그동안 은찬은 이주한과 지금과 같은 애정 행각을 마구 펼치고 있었으니까.

“어, 안 가! 나도 살아야지! 내가 얼마나 걸어 다녔는지 군대 행군할 때도 안 생긴 물집에 발톱도 빠지기 직전이거든? 그 개새끼는 정도를 몰라. 정도를! 왜? 너 내가 나갔으면 좋겠냐? 그러고 보니까 좀 그렇다? 너는 친구가 밖에서 그 고생을 하는데, 밥은 먹었는지 살아 있는지 그런 예의상 안부 연락도 안 하냐?”

“우리 사이에 무슨 그런걸.”

김동만의 쓴소리를 가볍게 받아치는 동안에도 은찬의 시선은 여전히 핸드폰에 고정된 상태였다. 퉁명스러운 목소리와는 달리 핸드폰에 집중하는 눈에서는 생기가 돌았다.

“이봐, 이봐. 이래서 다 소용없다니까. 나 없는 동안 이랬냐? 사무실에서 작정하고 깨를 볶았구만?”

“아니거든? 깨 같은 소리 하네. 눈치챈 사람 아무도 없거든?”

동만의 투덜거림에 은찬은 픽 웃었다. 절대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호언장담에 동만은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빼고 다 알거든? 그딴 식으로 사인 주고받는데 누가 모르냐? 내가 눈치챌 정도면 팀원들 다 아는 거지! 그냥 눈꼴셔서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거지, 이 멍청아!”

“…….”

순간 표정이 굳어진 은찬은 주위를 휙 둘러봤다. 팀원들 모두 필요 이상으로 고개를 내리고 있는 게 보였다.

“회사에서 부장님하고 너하고 사귀는 거 모르는 사람 없거든요? 깨를 볶아도 정도껏 해야지. 사람 숨을 쉴 수 있게 해 줘야 할 것 아니야. 나가서 해!”

동만은 만사 귀찮다는 투로 허공에 손을 휘휘 저었다. 핸드폰을 내려놓은 은찬은 턱을 괴고 녀석을 빤히 쳐다봤다. 집에서는 늘 보지만 사무실에서는 오랜만에 만난 얼굴이었다. 잠시 말없이 눈싸움을 벌이던 중 갑자기 동만이 ‘손’이라는 말과 함께 손바닥을 펼쳤다.

“이게 어따 대고 손이래?”

“그래, 이 맛이지. 도도한 고양이는 이 맛에 키우는 거지. 너 손 줬으면 나 막 화냈을 거다?”

“미쳤냐?”

“너무 힘들어서 그래. 그 개새끼가 자꾸 귀찮게 하잖아! 진짜 거래처만 아니었으면, 하아…….”

동만은 울상이 되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매일 밤늦게 들어와 잠만 자고 나간 탓에 얼굴이 푸석푸석했다.

“밥은 먹고 다니냐?”

“어. 근데 고기만 먹어. 내가 살다 살다가 고기가 물릴 때도 있다?”

“그러니까 중요한 거래처 그분이 누구냐니까? 나도 아는 사람이야?”

“있어. 미친놈.”

아무리 물어봐도 동만은 알려 주지 않았다. 기업 일급비밀도 아닌데 왜 저렇게 숨기나 몰라. 은찬이 입을 삐죽 내밀 동안 동만의 시선은 그사이에도 연달아 울리는 핸드폰을 슬쩍 훔쳐보았다.

“충격이다, 진짜. 부장님이나 너나.”

“원래 다 이렇거든?”

“닭살인 건 아냐?”

“남이사.”

김동만의 핀잔을 은찬은 기꺼이, 흐뭇하게 받아들였다.

“점심은? 부장님이랑 먹을 거지? 난 또 그럼 혼자 먹어야겠네.”

“아니, 오늘 약속 있대.”

“약속?”

“어. 회장님이랑 점심 약속 있대. 잘됐다. 오랜만에 같이 먹자.”

“회장님? 아, 말이 나와서 말인데. 너 회장님은 만나 봤어?”

갑자기 목소리를 낮게 깐 동만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회장님을 왜 만나?”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은찬은 가볍게 넘겨 버렸다. 그러자 주위 눈치를 슬쩍 본 동만이 목소리를 더 낮춰 속삭였다.

“두 사람 사귀는 거 모르는 사람이 없잖아. 회장님 귀에도 당연히 들어갔겠지. 마음 단단히 먹어. 내가 듣기로는 엄청 무서운 분이라고 했으니까.”

“…….”

거기까지는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사뭇 심각해진 은찬에게 동만이 뭐라 한마디 더 하려고 할 때였다.

[두 사람 너무 붙어 있잖아. 떨어져]

[귓속말 금지.]

연달아 온 이주한의 메시지에 동만은 징하다는 표정으로 핸드폰을 노려봤다.

“야. 배고픈데 간단한 거 뭐 좀 먹자.”

동만은 갑자기 뜬금없이 배고프다는 타령을 하기 시작했다.

“편의점 갈래?”

곧 점심시간이지만 은찬도 애매하게 배가 출출하던 참이었다. 은찬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동만이 서둘러 어깨를 꾹 누르며 말렸다.

“어디 가. 귀찮게. 이럴 때 써먹는 거지.”

“뭘?”

“고양이의 대리 보은.”

“뭔 소리야.”

“너는 이렇게 좋은 걸 두고 왜 안 쓰냐?”

은찬의 핸드폰을 낚아채 간 동만은 재빨리 손가락을 움직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미처 말리지도 못했다. 은찬이 핸드폰을 빼앗았을 때는 이미 이주한이 메시지를 확인한 뒤였다.

[형, 은찬이 배고픈데 맛있는 거 사 주면 안 되욤? 은찬이 편의점에 있는 딸기 샌드위치랑 거기 핫바 종류별로 다 먹구 시푼뎅.]

이 새끼가 돌았나. 아무리 유은찬이 사랑에 눈이 멀었다지만 이딴 식으로 보내지 않는다. 은찬은 핸드폰과 김동만을 번갈아 보며 얼굴을 팍 구겼다. 김동만이 연애하면 어떻게 될지 안 봐도 훤했다. 상상만으로도 몸서리칠 만큼 무서운 일이었다.

설마 이걸 믿지는 않겠지? 김동만이 쓴 걸 봤겠지?

“야, 야. 부장 쏜살같이 나간다. 크크크크크크.”

벌떡 일어난 이주한은 곧장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갔다. 아무래도 김동만이 쓰는 걸 못 본 모양이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동만은 배를 잡고 웃었다.

[은찬이 기다리구 이쩌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핸드폰을 빼앗아 쓴 장난에 은찬은 핸드폰 모서리로 그의 머리를 찍고 싶어졌다. 아무리 그래도 이쩌염이 뭐야.

“야!”

“왜, 부장 좋아할걸?”

동만은 너무 웃어서 눈물이 나올 정도였다.

그때였다.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당연히 이주한인 줄 알았지만 뜻밖에도 이리한이었다. 은찬이 느닷없는 그의 출연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을 동안 이리한은 망설임 없이 직진해 왔다. 그가 발을 멈춘 곳은 김동만의 앞이었다.

“동만 씨, 나 왔쪄염!”

이리한의 외침에 순간 사무실엔 알 수 없는 정적이 흘렀다. 방금 전까지 미친 듯이 웃던 김동만은 귀 끝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들지 못했고 반대로 은찬은 웃음이 터졌다. 김동만의 똥 씹은 표정이 너무 웃겨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누구도 외부인 이리한의 등장에 제재를 걸지 않고 있을 때. 때마침 이주한이 나타났다. 양손에 묵직한 편의점 봉투를 들고 사무실로 들어선 그는 자신을 반기는 이리한을 보자마자 그대로 굳어 버렸다.

“주환이 와쪄염?”

‘와쪄염’의 위력은 대단했다. 왈칵 얼굴을 구긴 이주한이 신경질적으로 이리한의 멱살을 거칠게 움켜잡고 사무실 밖으로 끌고 갔다.

“야, 왜 이래! 동만 씨! 나 구해 줘염! 나 살려 줘염!”

대놓고 콕 집어서 말한 덕분에 모두의 시선이 김동만에게 집중됐다. 부담스러운 주위의 시선에 별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동만이 가만히 있는 은찬의 팔을 툭 쳤다.

“왜.”

“같이 가.”

“내가 왜?”

“그냥 좀 가! 어차피 부장님이 끌고 나간 거잖아!”

자의가 아닌 타의로 등 떠밀려 나가는 동만과 동만에게 끌려간 은찬은 저만치 멀어지는 이주한과 이리한의 뒤를 쫓았다. 뭔가 큰일이라도 터질 듯한 분위기였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은찬과 동만은 부장실 소파에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너는 사람을 그렇게 끌고 나가면 어떻게 하냐? 내가 누군지 잊었어?”

화가 난 이리한의 핀잔에 이주한은 싸늘한 기세로 되물었다.

“네가 누군데?”

“나? 중요 거래처 담당자!”

기세등등한 이리한의 태도와는 반대로 김동만은 공허한 시선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제야 은찬은 김동만이 말한 중요 거래처 담당자가 누군지 알았다. 더불어 살인 충동을 일으키는 애교의 시작점이 어딘지도.

“회사에서 사고 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이주한의 날 선 경고에도 이리한은 전혀 그런 적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고라니? 난 단지 우리 동만 씨 보러 왔을 뿐이라니까.”

그러곤 제 옆에 있는 김동만을 향해 눈웃음을 던졌다. 너무나 해맑은 미소였지만 동만이 외면해 버리자 그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동만 씨. 리한이 안 보고 싶었쪄염? 나는 동만 씨 이따만큼 보고 싶었는뎀.”

이주한이 넘긴 편의점 봉투에서 먹을 것을 뒤적이던 은찬은 정색하며 이리한을 쳐다봤다. 이 방 안에 있는 이리한을 뺀 모든 이들의 표정이 일심동체라도 한 것처럼 똑같았다. 못 볼 걸 본 표정.

“내가 그거 하지 말라고 했지!”

이주한의 두 번째 경고였지만 이리한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이주한에게는 콧방귀를 낀 채 김동만의 말에만 반응했다.

“이리한 씨.”

“네, 동만 씨. 왜염?”

“그거…… 좀.”

“너무 귀여워서 그렇구낭? 내가 보기보다 애교가 엄청 많아욤. 동만 씨가 그랬잖아염. 애교 많고 귀여운 사람이 좋다고. 뿌잉뿌잉.”

그 와중에 핫바 하나를 까서 입에 막 넣으려던 은찬은 이리한의 뿌잉뿌잉 공격에 입맛을 상실했다. 그리고 김동만을 원망스럽게 쳐다봤다.

귀여운 사람 좋아한다고? 지랄하고 있네. 가슴 큰 여자 소개해 달라고 했으면서. 고양이처럼 눈이 위로 올라간 스타일이 좋다며!

은찬이 핫바를 내려놓자 주한은 그 이유를 알겠다는 듯 이리한을 살벌하게 노려봤다.

“미쳤어?”

“왜? 부럽냐? 너도 해 봐. 은근히 먹힌다니까? 내가 이렇게 애교 부리면 동만 씨 얼굴이 새빨개지거든? 부끄러워하는 게 얼마나 귀여운뎀.”

열받아서 그런 건 아닐까. 지금도 김동만은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은찬이 잠시 이들을 지켜본 결과 이리한은 김동만을 좋아하는 게 확실했다. 반대로 김동만은 살인 충동을 품고 있고. 게다가 그는……

“동만 씨 오늘 바빠염? 리한이 심심한데에. 그거 다음에 하면 안 되염? 우리 백화점 가염. 리한이가 동만 씨랑 놀구 싶단 말이에염.”

“오늘 느므느므 바쁘다고 했잖아요. 고객님.”

눈치가 김동만보다 없는 남자였다. 어금니를 꽉 깨물며 힘주어 말하고 있는 동만은 누가 봐도 빡친 모습 그 자체인데 이리한 눈에만 다르게 보이나 보다.

“힘들어염? 얼마나 바쁘면 말하는 것도 평소하고 달라. 안 되겠다. 우리 동만 씨, 내가 보약 한 제 해 줘야겠어염. 남자에게 좋은…… 아! 야!”

이리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한이 편의점 봉투에서 뭔가를 꺼내 그에게 던졌다. 이리한의 이마에 맞고 소파 위로 떨어진 건 찌그러진 삼각 김밥이었다.

“나가.”

“누구? 나? 지금 나보고 나가라는 거야?”

“그럼 여기 너 말고 나갈 사람이 누가 있어. 당장 나가.”

참다못한 이주한의 퇴장 명령에 이리한은 금세 울먹이는 표정으로 바뀌더니 동만의 어깨 뒤로 숨었다.

“동만 씨, 나 이마 맞았쪄염. 아야 해염. 호 해 줘염.”

“이리한 씨.”

인상을 확 쓴 동만이 생각보다 차분한 투로 그를 불렀다.

“나는 그냥 동만 씨 보고 싶어서 온 것밖에 없는데에에.”

“한 번만 말 그런 식으로 하면 다시는 같이 안 다닐 겁니다. 아기가 말하는 게 귀엽다고 했지.다 큰 어른이 그러면 정신 나간……. 하, 됐고. 지금부터 또 그런 식으로 말하면 다시는 나 볼 생각 하지 마세요.”

“안 할게요.”

동만이 정색하자마자 이리한의 태도가 순식간에 돌변했다. 정신 나간 애교를 버린 그는 놀라우리만치 멀쩡해 보였다.

“곧 점심시간이죠?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어디 갈까요?”

같은 공간에 이주한과 유은찬이 있다는 걸 잊어버린 걸까. 이리한은 김동만의 팔에 매달렸다. 동만은 그런 그의 행동이 너무 익숙해 보였다. 모든 것을 체념한 표정으로 먼 산을 바라보았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김동만의 유사 연애 장면을 구경하던 은찬은 자꾸만 손목시계를 힐끔거리는 이주한이 신경 쓰였다.

“왜요? 가야 해요?”

“어. 미안. 약속 시각이 다 돼서. 나 먼저 일어날 테니까 여기 있다가 점심 먹으러 가. 김동만 씨랑 같이 갈 거지?”

“네.”

“뭐 먹을 거야? 비싸고 맛있는 거 먹어. 내 카드 줄게.”

은찬은 그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려고 하는 걸 거절했다.

“어디 멀리 가는 것도 귀찮고 해서 오랜만에 구내식당 갈 거예요. 그치? 동만아. 구내식당 갈 거지?”

“어? 그럴까?”

동만은 반색했지만.

“거기 싫은데. 사람 많은 데 가면 손도 못 잡는데.”

이리한은 시무룩했다. 저 두 사람 무슨 사이일까. 분명 뭔가가 있는 것 같은데 딱 꼬집어서 말하기 힘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제도 동만은 소개팅을 외쳤기 때문이다.

“가 봐야겠다. 얼른 먹고 올게. 맛있게 먹어.”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주한이 뛰다시피 걸으며 사라지자 주인 없는 방에 세 사람만 덩그러니 남았다.

“이렇게 넷이서 먹어도 괜찮을 것 같았는데. 쟤 약속 있었나 보네.”

“회장님하고 점심 약속이요.”

“……회장님하고요?”

이리한의 물음에 은찬은 아무런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이리한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왜요? 뭐 아는 거 있어요? 이리한 씨?”

김동만의 질문에 갑자기 이리한이 화제를 전환했다.

“우리 구내식당 말고 딴 거 먹으러 가요. 네? 내가 쏠게요. 요 앞에 초밥집도 있고 맛있는데 많은데 왜 하필 구내식당이에요. 사람만 바글바글하고 맛도 없어 보이던데.”

“그냥요. 오랜만에 먹고 싶어서요. 난 구내식당 갈 건데 동만이 너는?”

“콜. 먹기 싫은 사람이 다른 데 가야지.”

은찬은 이주한이 남겨 놓은 편의점 봉지를 제 자리에 놔두고 다시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이리한은 마지못한 표정으로 그런 둘을 따라나섰다. 어깨너머를 훔쳐본 은찬이 동만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뭐야, 김동만.”

“뭐가 뭐야.”

“냄새가 난다.”

“무슨 냄새.”

“저 사람. 너 좋아하는 거 같은데?”

“좋아해도 내 사전에 안 되는 게 있단다. 남자, 수인. 그건 연애 범위 밖이야.”

동만이 담담하게 툭 내뱉은 말에 은찬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수인이야?”

“몰랐냐? 개.”

“개?”

“그래서 진정한 개새끼지. 내가 신기한 거 보여 줄까?”

“어?”

잘 가다가 우뚝 멈춘 동만이 몸을 획 돌려 이리한에게 손을 쭉 내밀며 외쳤다.

“손!”

동시에 동만의 손위로 이리한의 손이 턱 하니 올려졌다. 은찬이었다면 화냈을 법한 상황인데 이리한은 즐거운가 보다. 눈을 반짝이며 더 관심을 바라는 표정이 행복해 보였다.

“유은찬 씨?”

한참 개 수인이 재롱떠는 것을 구경하던 중 은찬은 등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멀지 않은 곳에 김 실장이 서 있었다.

“네?”

“시간 괜찮으시다면 같이 가시겠습니까.”

한 걸음 다가온 그는 정중하게 물었다.

“어디를요?”

“가 보시면 압니다. 유은찬 씨를 만나 보고 싶다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옆에서 떠들어대던 동만이 조용히 팔을 잡았다. 마주친 시선에 녀석은 고개를 저으며 가지 말라는 뜻을 전했다. 김 실장이 직접 찾아와서 데려갈 정도면 그분이 누구인지 은찬도 짐작이 갔다.

어차피 한번은 겪어야 할 상황이었기에 은찬은 피하지 않기로 했다. 동만의 손을 뿌리치고 김 실장의 뒤를 따랐다. 로비를 지나 차에 올라탔지만, 회장님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은찬과 김 실장을 태운 차는 한참을 달려 호텔 정문 앞에서 멈췄다.

왜 여기에 왔느냐는 은찬의 물음에 김 실장은 묵묵부답했다. 단지 그는 안내만 할 뿐이라 말했다. 커피숍 창가에 앉은 노인 한 분이 눈에 확 들어왔다. 이주한과 어딘가 많이 닮은 듯한 생김새. 김동만이 보여 준 회사 정기 간행물에서 본 사진과는 조금 더 주름이 많은 얼굴이었다.

“회장님.”

그는 김 실장의 부름에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은찬을 빤히 응시했다. 이주한이 수인이니 회장도 표범 수인일 것이다. 최상계층 수인에게서 느낄 수 있는 압박감이라는 게 이런 걸까. 회장과 시선이 마주친 은찬은 마른침을 삼켰다. 사실 커피숍에 들어섰을 때부터 회장의 매서운 시선이 느껴졌었다.

“너구나.”

딱 한마디를 들었을 뿐인데 성량이 엄청났다. 어색하고 무거운 자리였다. 일단 오긴 왔지만 어떻게 할지는 정하지 않았다. 은찬은 일단 제 소개부터 하기로 했다. 물론 이미 다 알고 있겠지만 말이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유은찬입니다.”

은찬을 바라보는 회장의 표정은 한결같았다. 차갑고 쌀쌀맞다. 은찬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걸 노골적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앉아요.”

한참 뜸을 들이다가 앉기를 권유하는 것도 계산된 행동일 것이다. 회장이 시키는 대로 자리에 앉은 은찬은 그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유은찬 씨.”

“네, 회장님.”

입사 이래로 회장을 실물로 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것도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마주 앉아 있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신기했지만, 그뿐이었다. 딱히 미친 듯이 심장이 떨리거나 긴장되지는 않았다. 유은찬에게 회장이란 복지 좋은 회사 주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은찬과 회장의 교차점은 이주한 말고는 없었다. 그와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지 않았다면 이런 자리도 없었을 것이다.

“내가 왜 유은찬 씨를 만나고 싶어 했는지. 알고 있나?”

“네.”

회사 내에서 이주한과 유은찬의 연애를 모르는 사원은 없다고 들었다. 다들 입만 열면 회장 손자가 고양이 수인 유은찬과 사귄다고 떠들어 댔으니 회장 귀에도 당연히 들어갔을 테다. 은찬은 건조하게 대답하며 물 한잔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럼 이야기가 쉽겠네. 유은찬 씨. 회사에서 지금…….”

“저기요, 회장님.”

은찬은 회장이 말하는 것을 잘라 내며 머쓱하게 웃었다.

“저도 뭐 좀 시켜도 될까요? 목이 말라서…….”

목이 마른다는 건 핑계고 점심을 먹으러 가기 직전 끌려와서 배가 고팠다. 은찬의 요청에 회장은 헛기침과 함께 곁에 앉아 있던 김 실장에게 눈짓을 던졌다. 오른손을 든 김 실장의 호출에 호텔 커피숍 직원이 다가와 은찬에게 메뉴판을 내밀었다.

원래 이런 자리에서는 커피를 주문하는 게 정석이겠지만 은찬은 배가 고팠다. 게다가 이곳은 은찬이 좋아하는 치즈케이크를 파는 호텔. 이곳 커피숍의 다른 케이크도 맛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런데 호텔 커피숍이라서 그런지 조각 케이크의 가격이 너무 비쌌다.

심란한 표정으로 메뉴판과 회장을 번갈아 보던 은찬은 주문을 머뭇거렸다. 김동만은 늘 은찬에게 염치없다고 타박했지만 때가 때이니만큼 오늘은 달랐다. 예의상 물어보기는 해야 할 것 같았다.

“저기요, 회장님. 먹고 싶은 거 시켜도 돼요?”

“……그렇게 해요.”

회장의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은찬은 메뉴판에 있는 케이크를 종류별로 한 개씩 주문했다. 총 6종류의 조각 케이크가 접시에 담겨 왔고 잠시 이 자리가 무슨 자리인지 망각한 은찬은 케이크를 보며 환호했다.

“맛있겠다! 잘 먹겠습니다!”

먼저 딸기 레어 치즈 조각 케이크를 한입 가득 입에 넣자마자 은찬은 감탄사를 쏟아 냈다.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회장은 눈살을 찌푸리며 손가락을 까딱여 김 실장을 불렀다.

“김 실장. 저 녀석 어디가 좀 모자란 놈인가?”

“회사에서 팀원들과 사이도 원만하고 주어진 일도 잘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고양이 수인이라서 그런지 어디가 좀 모자라 보이는데. 진짜 우리 주한이가 저런 놈을 좋아한다고? 그 녀석 눈이 어떻게 된 거 아니야? 하필 저런 덜떨어진 놈을…… 쯧.”

이주한 성격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 잘 알겠다. 회장은 혀를 차며 은찬을 흘겼다. 그와 마주친 시선에 은찬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씨익 웃었다. 다 들린다고요. 고양이 수인도 귀가 밝다는 건 모르는 모양이다. 회장과 김 실장의 귓속말을 들으며 은찬은 조각 케이크 세 개를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유은찬 씨.”

“네, 회장님. 말씀하세요. 아, 죄송해요. 제가 너무 먹죠……. 요즘 식욕이 왕성해서.”

말을 하면서도 케이크를 먹어 대고 있으니 회장의 표정이 좋을 리 없었다. 값비싼 손목시계를 힐끔거린 회장은 예상보다 시간을 질질 끌고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원래 있던 미간의 주름이 더 깊어졌다.

“이주한이 나와 어떤 사이인지 알고 있을 테니 빙 둘러서 말하지 않겠네. 꼴사나운 짓 그만두고 깨끗하게 끝내 주게.”

오, 드라마 같은 전개. 이런 막장 전개 좋지. 어차피 욕하면서 보는 게 막장 드라마니까. 비장하게 말을 꺼냈는데 은찬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회장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왜? 싫은가? 자네가 누구하고 사귀는지는 내 상관 할 바 아니지만. 내 손주 일이면 다르지. 우리 집안이 하찮은 고양이 따위가 넘볼 집안은 아니지. 좋게 타이를 때 끝내!”

회장이 눈을 치켜세우고 엄한 목소리로 호통치듯 말했다.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 사내 정기 간행물이 두꺼운 책으로 나오나 했더니 회장이 조선 시대 마인드였다. 하찮은 고양이라니? 가뜩이나 케이크 따위로 배를 채우는 것도 짜증 나는 판국에 회장의 말은 은찬의 신경을 제대로 건드렸다. 포크를 소리 나게 내려놓은 은찬이 삐딱한 투로 말했다.

“저기 봉투 안 주세요?”

“뭐?”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 은찬은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봉투요, 봉투. 보통 이럴 때 헤어지라고 돈 봉투 주잖아요.”

“……하, 당돌한 놈일세. 김 실장!”

그냥 던져 본 말인데 진짜 준비한 모양이다. 김 실장은 품에서 꺼낸 하얀 봉투를 은찬에게 건넸다. 그것을 꺼내 헤아려 보니 천만 원짜리 수표 열 장이다. 애걔. 꼴랑 1억.

“부족하면 더 주겠네. 적정선에서 원하는 만큼 말해. 대신 조용히 나가.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알다시피 우리 주한이는 회사를 끌고 가야 할 놈이야. 하찮은 자네 때문에 그 아이 인생에 오점이 생겨서는 안 될 일이지. 놀이 값으로 많이 쳐 준 셈이니까. 고민할 필요 없이 당장 이 자리에서 결정하게.”

어이가 없다. 그러니까 회장 말인즉슨 유은찬이 이주한의 인생의 오점이란다. 그래서 이 돈 받고 떨어지라는 그런 말인데……. 은찬은 아무렇지 않게 그 돈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회장은 은찬을 경멸스럽게 쳐다봤다. 예전에 이주한이 자신을 째려보던 그 표정이 그대로 묻어났다. 재수 없게 생각하던 그 표정 말이다. 그래서 은찬도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은데요. 그 말은 회장님 손자한테 해야 할 것 같은데. 제가 회장님 손자하고 사귀는 그런 사이는 맞는데. 제가 좋다고 따라다닌 건 아니거든요? 저는 분명히 싫다고 몇 번이나 거절도 했거든요. 그런데 회장님 손자가 저 아니면 안 된다고 매달리는 걸 어떻게 해요.”

“김 실장. 이거 무슨 소리인가?”

회장은 처음 듣는 말이라는 반응을 보였고 은찬은 빙긋 웃었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으셔야죠. 아직 끝난 거 아니거든요?

“회장님 손자가 저 스토커처럼 쫓아다녔다니까요? 그리고 헤어지라고 경고할 거면 이왕 할 거 한정식집이나 고깃집에서 하시든가. 점심시간에 사람 끌고 나와서 이러시면 안 되죠. 최소한 뭐라도 먹여야죠. 회장님은 모르시겠지만, 우리 같은 일개 사원은 점심시간이 엄청나게 소중하거든요? 한 시간 안에 밥도 먹어야 하고, 커피도 한잔 마셔야 하고. 그리고 친한 사람들 하고 수다를 떨든가 낮잠을 자든가. 얼마나 쪼개 써야 하는데! 회장님처럼 시간이 널널한 게 아니라고요.”

“…….”

“지금도 봐요. 고작 그거 말하려고 사람 여기까지 끌고 와서 이러신 거예요? 차라리 밥 다 먹고 회장실로 부르셨으면 더 좋았잖아요!”

빡친 은찬의 폭언에 회장은 말문이 막힌 듯 다시금 손가락을 까딱여 김 실장을 불렀다.

“김 실장. 내가 뭐 잘못한…… 거 있나?”

“…….”

회장과 김 실장은 씩씩거리는 은찬의 눈치를 봤다. 볼일도 다 끝났으니 더는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어진 은찬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돈은 이왕 주신 거니까. 제가 감사하게 받아 가겠습니다. 맛있는 거 사 먹고 그럴게요.”

“아니…… 저기. 유은찬 씨!”

입을 떡 벌리고 굳어 버린 회장을 대신해 김 실장이 돌아서는 은찬을 붙잡았다.

“왜요? 돈 달라고요? 아니면 헤어지라고요? 몇 번을 말해요. 이주한이 나 좋다고 쫓…… 아.”

김 실장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무의식적으로 쳐다본 은찬은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곳에 이주한이 있었다.

회장님과 점심 약속이 있다고 하더니 그는 웬 여자와 함께 있었다. 마주 앉은 긴 생머리의 여자가 수줍게 웃자 이주한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누가 봐도 어울리는 한 쌍이었고, 그들의 만남이 맞선이라는 것쯤은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회장님하고 점심 약속이 있어? 저 여자가 회장님이냐?

은찬은 자신이 멍청하게 속았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주한 개새끼. 쓰레기 새끼. 좆같은 새끼. 좆을 잘라 버릴 새끼. 할 수 있는 모든 욕을 중얼거리며 은찬은 죽일 듯이 이주한을 노려봤다. 그 욕을 옆에서 고스란히 들어 버린 김 실장은 은찬의 무서운 기세에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주한이가 오늘 선본다는 말을 안 했나 보네. 저 녀석한테는 노는 것과 결혼은 다른 문제니까.”

등 뒤에서 들려오는 회장의 말은 불난 집에 휘발유를 퍼부은 셈이었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이주한은 바람둥이였다. 저런 새끼를 믿은 내가 등신이지. 내 발등을 내가 찍은 미친놈이지. 결혼 어쩌고 한 것도 분명 다 입에 발린 소리였을 것이다.

은찬은 무서운 얼굴로 이주한이 있는 곳까지 성큼성큼 걸어갔다. 화난 고양이가 얼마나 무서운지 본때를 보여 주겠어. 눈은 분노로 활활 타올랐다.

“부장님 아니세요?”

한참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던 중.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린 이주한은 불쑥 나타난 은찬을 보곤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다. 이해한다. 얌전히 회사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할 은찬이 이 자리에 있으니 놀랄 만도 하겠지.

은찬은 주한과 마주친 시선을 외면하고 맞은편에 앉은 여자를 빤히 보았다.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그녀도 당혹스러운 눈치였다. 긴 생머리를 한쪽으로 늘어뜨린 그녀는 누가 봐도 선보는 차림새였다.

청초하고 단아한 스타일. 딱 이주한 할아버지가 좋아할 만한 취향 같았다. 빠른 속도로 그녀를 스캔한 뒤 은찬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부장님하고 같이 일하는 팀원인데 지나가다가 부장님이 보여서요. 급하게 일이 생겨서 잠깐 방해 좀 할게요. 괜찮죠?”

“아…… 네. 그러세요.”

은찬은 기꺼이 시간을 양보해 준 그녀에게 립 서비스를 날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부장님, 너무한 거 아니에요? 회장님하고 점심 약속 있다고 하시더니. 난 우리 회사 회장님이 이렇게 예쁜 분인 줄 몰랐는데요?”

“어머.”

가시 돋친 말의 의미를 당연히 알 턱이 없던 그녀는 싱겁게 웃었지만, 이주한은 웃지 못했다. 새하얗게 질린 그와 시선을 맞추며 은찬은 더할 나위 없이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부장님. 식사, 맛있게, 하셨어요?”

“유은찬, 너 여기 어떻게……. 아니, 일단 그게 문제가 아니라. 이거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에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그러면 앞에 계신 분이 뭐가 돼요. 안 그래요? 우리 부장님이 부끄러워서 그러는 거니까 이해하세요. 선보시는 거죠? 두 분.”

은찬의 물음에 그녀는 피식 웃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이주한이 아니라고 발뺌하려 해도 이제는 빼 박이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도 이 순간부터 끝이었다.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좀 전까지만 해도 하하, 호호 떠들던 이주한은 똥 마려운 개처럼 안절부절못했다. 은찬은 웃고 있지만 살기 가득한 시선으로 이주한을 빤히 쳐다봤다. 마음 같아서는 아이는 어쩔 거냐고 고래고래 소리라도 지르고 싶지만, 애를 들먹거리며 매달리는 건 너무 치졸해 보였다.

“부장님.”

“오해하지 마. 내가 다 설명할 테니까.”

“오해 안 해요. 에이, 제가 왜 오해를 해요? 우리 사이가 뭐라고. 그냥 사실대로 말해 줬으면 좋잖아요. 왜 거짓말을 하고 그러세요. 부장님이 오늘 약속 있다고 하셨던 분. 그분 제가 만났거든요.”

“누구?”

이주한의 물음에 은찬은 어깨너머로 턱짓을 던졌다. 저 멀리서 이곳을 숨죽여 지켜보고 있던 정장 차림의 두 남자가 재빨리 고개를 획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백발에 가까운 머리 색깔은 단연 돋보였기에 이주한은 그들이 누군지 단번에 눈치챈 것 같았다.

“미치겠네…….”

이주한의 혼잣말에 은찬은 콧방귀를 꼈다. 지금 진짜 미칠 것 같은 사람이 누군데. 은찬이 점점 시간을 끌자 그녀는 노골적으로 빨리 가 줬으면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금방 갈 생각이거든?

“어? 여기에 모기가 있네?”

감정 없는 톤으로 말함과 동시에 은찬의 손은 허공을 가르고 이주한의 뒤통수를 세게 내려쳤다. 퍽 소리와 함께 이주한의 머리가 속절없이 앞으로 내려갔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그곳에 있는 이들의 시선이 한곳에 집중됐다. 그러거나 말거나 은찬은 다시 한 번 더 내려쳤다.

“어머! 저기요……!”

저기요는 무슨. 깜짝 놀란 그녀의 외침을 무시하고 은찬은 연속으로 이주한의 머리를 힘껏 내려쳤다. 퍽. 퍽. 퍽. 퍽. 퍽.

“이상하네. 호텔에 모기가 있네.”

“유은찬, 아파! 아프다고!”

아예 주먹을 쥐고 때리자 더는 참을 수 없었는지 이주한이 꽥 소리를 질렀다. 멈칫한 은찬은 마지막으로 한 대 더 내려치고서야 빨갛게 부어오른 주먹을 내려놓았다. 은찬의 양손에 무참히 구타당한 이주한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머리카락도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어쩐 일인지 전혀 피하지 않았다.

“이제 화가 좀 풀려?”

오히려 은찬의 기분을 묻는 여유까지 보였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아니요. 내가 왜 화를 내요?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너 아까부터 왜 이래? 왜 말이 삐딱해!”

“두 분 너무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요. 아, 부장님 수인이라는 거 알고 계세요?”

은찬의 말이 끝나가기 무섭게 그녀는 은찬을 흘기며 날이 선 목소리로 받아쳤다.

“네, 당연하죠. 집안끼리 선보는 자리니까요. 그쪽도 수인인 것 같은데 공공장소에서 생각 좀 하고 행동하시죠. 꼴불견이지 않나요?”

그녀의 시선이 은찬의 머리 위로 향했다. 그제야 은찬은 고양이 귀가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화가 얼마나 났는지 그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시구나……. 조심하세요. 저희 부장님 개쓰레기거든요. 뭐, 결혼할 사람한테는 다르겠지만.”

“할 얘기가 그거예요? 나한테 던지는 충고에요. 아니면 협박?”

첫인상과는 다르게 그녀는 만만한 상대는 아닌 것 같았다. 보아하니 같은 과 수인끼리의 만남 같은데 잘해 보라지. 이런 놈 나도 필요 없거든? 은찬은 어깨를 으쓱였다.

“가지세요. 난 필요 없거든요.”

“유은찬!”

“봤죠? 사람이 보기보다 구질구질해서 별로였거든요. 드릴게요. 부장님, 사무실에서 뵐게요.”

그를 적선하듯 던지고 그 말을 끝으로 쌩 돌아서는 은찬을 이주한이 붙잡았다.

“선은 맞는데 할아버지가 억지로 밀어붙인 거고, 거절하려고 했어!”

지랄도 가지가지 한다. 왜? 연애와 결혼은 별개라고 하지? 은찬은 짧게 혀를 차며 이주한의 손을 획 뿌리쳤다.

“고양이 보은이라고 아세요?”

“뭐?”

“고양이는 은혜를 입은 사람한테 자기 방식대로 갚는다고 하잖아요. 저도 부장님께 은혜를 입었으니까 갚으려고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은찬은 무언가를 꺼내는 척하다가 이주한의 코앞에 주먹을 내밀고 가운뎃손가락을 쫙 폈다.

“이거나 먹어라. 개새끼야!”

“…….”

“왜? 별로야?”

은찬은 웃으면서 쌍 빠큐를 날렸다. 순간 커피숍 안에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지나가던 직원도 손님들도 모두 숨을 죽인 채 은찬의 쌍 빠큐에 시선을 고정했다.

“하, 유은찬……. 알았어. 네가 화가 많이 났다는 거 알겠으니까. 진정하고 내 말 좀…….”

이 와중에도 이주한은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차분하게 말하며 다시 팔을 뻗었지만, 은찬은 그 손을 찰싹 내려쳤다.

“내가 미쳤지! 너 같은 바람둥이 새끼를……! 그래도 애들 아빠라서 좋게 보려고 했는데 나도 못 참아! 아니 안 참아! 내가 이런 모욕까지 당하면서 왜 참아! 우리는 지금 이 순간부터 끝이야, 끝! 알겠냐?”

지금껏 은찬에게 두들겨 맞고 빠큐를 받았음에도 화내지 않던 이주한이 이때만큼은 참지 못하고 버럭 화를 냈다.

“누구 마음대로 끝이래!”

“내 마음이다, 왜! 너도 네 마음대로 선봤잖아! 거짓말을 하고 선을 봐? 저 여자가 할아버지냐? 내가 왜 저 영감한테 하찮은 고양이라는 말 따위 들어야 하는 건데! 나도 우리 집에서 귀한 자식이거든! 됐다고! 나도 그런 말까지 들어가면서 너랑 뭐 어떻게 해 볼 생각 없다고! 안 하다고!”

이주한은 빡친 표정으로 회장을 노려보다가 은찬을 붙잡았다. 하지만 다시 뿌리쳐졌다.

“잡지 마! 나 열받게 하지 마! 따라오지도 마! 다시는 꼴도 보기 싫으니까!”

은찬이 눈을 부라리며 꽥 꽥 질러 대는 소리가 커피숍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지금 이 순간 머리끝까지 화가 난 은찬은 쪽팔린 것도 없었다. 할 말을 끝낸 은찬이 그대로 돌아서자 따라오는 소리가 또 들렸다.

“따라오지 말라고 개새끼야! 진짜 나 어떻게 되는 거 보고 싶어?”

흥분한 은찬은 고양이 귀를 바짝 세우고 소리를 질렀다. 몇 걸음 걸었을 때 어깨너머로 이주한을 훔쳐보니 굳은 표정으로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은찬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호텔 정문을 나섰다.

“은찬아! 여기!”

택시를 타기 위해 두리번거리던 중 때마침 김동만이 그곳에 있었다. 조수석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들고 있는 김동만을 발견한 은찬은 망설일 것 없이 그쪽으로 갔다. 그리고 차에 타자마자 통보했다.

“이주한 저 새끼랑 끝냈으니까! 내 앞에서 그 새끼 이야기 꺼내면 너하고도 끝이다!”

그 어느 때보다 은찬이 화가 났음을 눈치챈 동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운전하는 이리한만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했을 뿐. 그의 밝은 목소리가 무거운 정적을 깨트렸다.

“주한이랑 싸웠어요?”

이 새끼 개 수인이랬지. 이래서 개와 고양이가 앙숙인 거다. 싸늘한 시선으로 이리한을 노려보며 은찬은 진심으로 살인 충동을 느꼈다.

<3권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