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네? 제가 왜요? 저 마케팅부인데요? 제가 왜 거래처 담당자하고 미팅해요? 그거 영업부가 하는 일이잖아요.”
“음, 그건 우리 김동만 씨가 유능한 인재이기 때문이지.”
곽 과장은 아무도 없는 텅 빈 회의실에서 비장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어쩐지, 사무실이 아니라 이곳으로 호출한 이유가 있었다. 말도 안 되는 개소리에 동만은 콧방귀가 터졌다. 유능한 인재 같은 소리 한다. 능력 없는 곽 과장이 맡은 마케팅 1부서는 회사에서 천덕꾸러기가 된 지 오래됐다. 동만은 어색하게 웃으며 곽 과장의 말에 토를 달았다.
“에이, 저보다 더 유능하신 건 과장님이시죠.”
“알지. 나도 알지.”
회사 짬밥 2년 차 정도 되면 이 정도 입에 발린 소리는 기본으로 나왔다. 동만의 아부가 싫지는 않은지 곽 과장이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목을 가다듬었다.
“그런데 위에서 내려온 지시라서 나도 어쩔 수 없어. 부장님이 김동만 씨를 지정했거든.”
“저를요?”
이주한 부장이 김동만을 지정했단다. 왜지? 헤어지라고 해서 헤어졌다. 게다가 유은찬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됐으니 머리 좋은 이주한은 모든 내막을 어렴풋이 짐작했을 것이다. 혹시 속인 것에 대한 복수인가? 뒤끝 있는 스타일인가?
회장 손자를 열받게 했다는 죄로 엉뚱한 부서에 밀어 넣는 지능적인 괴롭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동만은 표정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이주한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놈이었다.
“동만 씨만 알고 있어. 부장님이 그러시는데, 엄청 중요한 거래처래. 절대로 기분 상하게 해서도 안 되고 잘 모셔야 한다고 신신당부하시더라.”
곽 과장은 미팅이라 말했지만, 거래처 담당자를 거의 왕처럼 떠받들라는 협박에 가까웠다. 쉽게 말해서 신하 노릇을 하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그걸 왜 자신이 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는 그런 일 해 본 적도 없고, 원래 그런 접대는 영업부가…….”
“쓰읍. 김동만 씨. 말이 기네요. 회사에서 하라면 해야 해야지. 우리 부장님이 이걸 왜 영업부로 안 넘기고 우리 쪽에, 우리 마케팅 1부서로 넘겼겠어!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 다 부장님이 깊은 뜻이 있으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 중요한 거래처라고 하잖아! 김동만 씨가 잘만 해 주면 그 공이 다 우리 마케팅 1부서 쪽으로 넘어 올 거고. 그렇게 되면 뭐야? 다들 승진할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잖아!”
웃기고 있네. 재주는 동만이 부리고 승진은 자기가 하려고 그러는 거 모를 줄 아나. 목에 핏대를 세우며 열변을 토하는 곽 과장의 행동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해! 하는 거다. 알았지?”
그는 동만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일 것 같은 기세로 밀어붙였다. 하, 이 꼰대 새끼. 더럽고 치사했지만, 이런 게 직장 생활이었다. 동만은 마지못해 웃으며 승낙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그래, 생각 잘했어. 동만 씨도 얼른 승진해야지. 부장님이 그러시는데 그렇게 까다로운 분도 아니시라네.”
“하, 하하…… 네에.”
그러면 네가 하든가. 계급장 떼고 한 대 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 채 동만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일단 마음의 준비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그럼, 미팅 날짜는 언제…….”
“오늘. 아니, 지금. 회사 둘러보고 계신다고 들었는데…… 잠깐만. 내가 연락처 받아 뒀거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곽 과장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이 보이지도 않는데 그는 허리를 직각으로 숙이며 인사를 했다.
“아, 옥상에 계셨어요. 아하하하. 지금 어디신지……. 아, 바로 앞이시네요. 네, 네. 거기 모퉁이 돌면 회의실 하나 보일 겁니다. 네. 아! 바로 앞이시라고요!”
곽 과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굳게 닫혀 있던 회의실 문이 벌컥 열렸다. 아무 생각 없이 문 쪽으로 시선을 돌린 동만은 그 앞에 선 남자를 보자마자 기겁했다.
미쳤다. 이리한이 왜 저기에 있지?
“안녕하세요! 부장님이 말씀하시던…….”
“네. 이리한입니다. 거래처 담당자 조건으로 여기 왔습니다.”
“너무 잘생기셔서 웬 배우가 왔나 했습니다! 이쪽으로…… 앉으셨구나. 성격이 급하시구나…….”
곽 과장의 안내를 받기도 전에 이리한은 동만의 맞은편에 앉아 턱을 괴고 있었다. 당연히 그의 시선은 불쾌한 표정을 짓는 동만에게 고정된 상태였다.
“이쪽은 김동만 씨. 앞으로 김동만 씨가…….”
“알아요, 김동만 씨. 잘 알죠.”
이리한은 곽 과장의 말을 단칼에 잘라 버리며 구면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어떻게? ……아, 동만 씨를 원래 알고 있으셨나 봅니다. 보기보다 우리 동만 씨 발이 참 넓어. 하하, 저는 마케팅 1부서 과장인 곽…….”
“김동만 씨하고 자리 옮겨도 되죠? 옆에서 누가 시끄럽게 구는 거 별로라서. 제가 좀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라서요.”
동만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터졌다. 낯을 가린단다. 집요하게 화장실까지 따라와서 이주한과 관계를 묻던 놈이, 구내식당에서 당당하게 그 짓거리를 하던 놈이 낯을 가린다고?
“아. 그러시구나. 진작 말씀하시지. 네, 그럼요. 편하신 대로 하세요. 아니면 제가 나가 드릴까요?”
유은찬이 왜 곽 과장을 그렇게 씹어 댔는지 알 것 같았다. 중요한 거래처 담당자라는 직함을 달고 나타난 이리한에게 곽 과장은 필요 이상으로 굽신거렸다. 지금 모습의 반의반이라도 팀원들에게 잘했으면 그의 평판은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아니요. 우리가 나가는 게 맞을 것 같네요. 괜찮죠? 김동만 씨. 혹시 나 때문에 업무에 지장 있거나 그런 건 아니죠?”
책상 위에 쌓인 일감들이 눈에 밟혔지만 동만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코앞에서 곽 과장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거래처. 성심성의껏. 승진.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표정이 말해 주고 있었다.
“……전혀요.”
“잘됐다.”
이리한은 천진난만한 아이 같은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썩은 표정으로 말했건만 설마 진짜라고 믿는 건가? 자신도 눈치 없다는 말을 종종 듣는 편이지만 이 자식은 더한 것 같다.
“뭐 해요? 가요. 아, 맞다. 김동만 씨 저하고 같이 있다가 퇴근해도 되죠?”
자리에서 일어나던 동만은 곽 과장을 힐끔거렸다. 제발 안 된다고 말해 주길 바랐지만 곽 과장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럼요. 괜찮다마다요. 동만 씨 그대로 퇴근해. 그러고 보니 아직 제 소개를 안 한 것 같은데. 저는 마케팅 1부서의 곽 과…….”
“동만 씨 어디 갈까요? 뭐 좋아해요? 가고 싶은 곳 있어요?”
듣고 싶은 말만 쏙 들은 이리한은 더 이상 볼일이 없어진 곽 과장을 외면했다. 회의실을 나서며 동만은 어깨너머로 곽 과장을 훔쳐봤다. 처참하게 일그러진 표정. 표정 관리 안 되는 곽 과장을 보자마자 통쾌함이 밀려왔다. 본의 아니게 이리한이 고마워지는 순간이다.
“거래처 담당자라는 거 진짜예요?”
복도를 나란히 걸으며 담담하게 건넨 질문에 이리한은 매우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여기 아무나 못 들어오는 곳이라면서요. 보안이 철저하다고 하던데. 그래서 거래처 하기로 했죠. 뭐.”
주 거래처들은 대부분 대기업. 그중에서도 서비스 직종에 관련된 계열이었다. 사람이 세밀하게 신경 쓸 수 없는 곳까지 고객에게 맞추기 위한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판매 중이다. 중요한 거래처가 될 만큼 대단한 집안의 남자인가? 동만이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훔쳐보자 그가 픽 웃었다.
“내가 그렇게 잘생겼어요? 그렇게 훔쳐볼 만큼? 은근히 쑥스럽네. 그냥 대놓고 봐요.”
그거 아니거든! 얼굴 붉히지 마! 확실히 눈치가 없긴 하다.
“여기서 기다려요. 갈 때 가더라도 가방은 챙겨야 하니까.”
보아하니 이대로 나가면 다시 못 돌아올 분위기였다. 동만이 서둘러 가방을 챙겨 나가는 모습을 팀원들은 미어캣처럼 목을 길게 빼고 지켜보았다. 호기심 어린 시선을 뒤로하고 사무실을 나선 동만은 문 앞에서 조용히 기다린 이리한과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오늘 날씨 참 좋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던진 이리한의 말에 동만은 한심한 시선을 던졌다. 금방이라도 비가 떨어질 것 같은 날씨가 좋단다. 미친놈.
“……네, 좋네요. 딱 집에서 자기 좋은 날씨네요.”
“아. 그럼 김동만 씨 집으로 갈까요?”
아…… 머리야. 비꼰 말을 또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놈은 또 처음이다. 강적을 만난 동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텅 빈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제 뒤에 찰싹 붙은 이리한은 뭐가 좋은지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표정이 그랬다.
“어디 가는데요.”
“네?”
“그거 정하고 나가는 거 아니에요?”
“……김동만 씨 가고 싶은 곳?”
밝게 말하는 이리한을 보며 동만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래서 개를 싫어한다. 수동적인 개보다는 이기적인 고양이가 훨씬 좋다.
“미팅이라고 알고 있는데. 일로 뭐 물어볼 거라도 있어요?”
물론 그냥 던져 본 말이다. 미팅이라는 걸 해 봤어야 알지.
“아니요. 나 일 때문에 온 거 아닌데.”
“그럼요?”
“김동만 씨 보러.”
이리한이 수줍게 웃는다. 이 개가 나한테 왜 이럴까 싶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예요? 재미있어요?”
“네? 뭘요?”
텅 빈 엘리베이터 안.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물어보고 싶었다. 이 개새끼의 의도가 뭔지.
“나, 사귀는 사람 있다고 했…….”
“헤어졌다면서요.”
씨발. 어떻게 알았지? 말문이 막힌 동만은 흠칫했다.
“유은찬 씨가 말해 주던데요? 헤어졌다고. 그리고 처음부터 아니면 아니라고 말해 주지 왜 거짓말을 해요. 이주한하고 사귀는 거. 유은찬 씨라면서요?”
망할 고양이 자식. 그냥 입 닥치고 있으면 될 걸 또 일을 크게 만들어 놓았다. 동만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은찬이가…… 그래요?”
“나 고양이 수인은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 사람은 다르던데. 착하고 친절하고. 나한테 동만 씨하고 잘해 보라고 응원도 해 주고.”
망할 고양이 자식. 유은찬 너 오늘 집에서 보자.
“뭘 기대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 수인 아니고 남자 사람입니다.”
“네. 알아요.”
“난 종을 뛰어넘는 그런 사랑 안 해요. 그것도 남자랑.”
진심을 가득 담아 던진 말을 이해하기는 한 걸까? 이리한은 해맑은 미소를 지을 뿐이다.
“그거 왠지 로맨틱한 말 같지 않아요? 종을 뛰어넘는 사랑.”
“이 씨…….”
씨발, 개새끼야!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머릿속에서 곽 과장의 외침이 울렸다. 중요한 거래처. 성심성의껏. 분노에 찬 동만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대화 단절. 이 자식이랑은 말이 통하지 않는 걸 짧은 시간 안에 터득했다.
동만이 썩은 미소를 머금고 엘리베이터 문을 조용히 가로질러 갈 때였다.
“어? 주한이 할아버지다.”
이리한의 외침에 동만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로비 정문 쪽으로 향했다. 회사 정기 간행물 책자에서 주로 보던 회장님이 그곳에 있었다. 어쩐지 평소보다 로비가 북적이는 게 이상하긴 했다. 꽤 나이가 많은 거로 알고 있는데도 회장은 나이에 비해 정정해 보였다. 성큼성큼 로비를 가로질러 가는 회장의 모습은 누구라도 위축될 만큼 근엄하고 무서웠다.
“잘 아세요?”
동만은 멀어지는 회장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니요. 저 할아버지 나 싫어해요.”
“왜요?”
이리한은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딱 보기에도 엄청 무섭고 고지식해 보이잖아요. 저래 봬도 손주는 끔찍이 아끼는데, 내가 그 손주하고 그런 사이니까 좋을 리 있겠어요? 다른 수인하고는 다르게 저쪽 집안이 자식이 귀한 집이라나? 표범 새끼가 귀하잖아요. 그래서 그런지 이주한이 성인이 되자마자 증손주 타령을 얼마나 하던지. 나도 불려가서 혼날 뻔했다니까요? 울 엄마한테 자식 간수 잘하라고 몇 번이나 전화해서 성질을…… 아.”
말하다 말고 멈춘 이리한은 되레 멍청한 표정으로 동만을 빤히 쳐다봤다. 또 왜 이래? 이해할 수 없는 태도에 동만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녀석은 다급하게 손을 흔들며 변명하기 시작했다.
“나 지금 이주한한테 진짜 그런 마음 없거든요! 우리 예전에, 아주 예전에 끝난 사이고! 그러니까…….”
동만은 궁금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자기 스스로 말해 놓고 변명하다가 울려고 하는 건지. 낑낑거리는 이리한이 귀찮아진 동만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움직였다. 일단 회사를 나오긴 했는데 저 멍청한 개를 데리고 어디를 가야 할지 막막해질 따름이다.
그나저나 유은찬 이 자식 괜찮을까. 듣자 하니 회장 성격이 보통이 아닌 것 같은데. 증손주는 생겼지만 유은찬이 검정고양이 수인에 남자라는 점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고지식한 노인이라는데. 괜찮을까? 이 와중에도 유은찬 걱정에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보니 아직 정신을 덜 차린 모양이다. 동만은 묵직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궜다.
“일단, 회사에서 멀리 떨어진 데로 가죠.”
동만이 앞장서자 이리한은 군말 없이 졸졸 따라오기 시작했다.
***
“회장님.”
김 실장을 호출한 그는 굳게 닫힌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그를 빤히 바라보기만 할 뿐. 무거운 그 시선에 김 실장은 난처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제가 지은 죄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결재 서류를 건성으로 훑어보던 이태한 회장이 그것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김 실장.”
“예, 회장님.”
“자네 집사람들이 우리 집 일을 도운 게 언제부터였는지 알고 있나.”
고작 한마디 내뱉을 뿐인데 김 실장의 머리에 여우 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렇게 겁이 많으면서 왜 자신을 속인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짧게 혀를 찬 이태한 회장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내 조상의 조상, 그 조상의 조상쯤이려나. 그대들이 우리를 모실 때 딱 한 가지, 절대로 저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고 자네의 선대 때부터 가르치지 않았나? 그게 뭔가.”
“회, 회장님. 제가 생각이 짧…….”
“신의지. 신의. 우리 가문의 돈으로 대학원까지 마친 자네가 내 밑으로 들어온 지 꽤 오래됐지? 그 긴 시간 동안 자네는 결혼을 했고 난 손주도 보았으니까.”
“용서해 주십시오. 결단코 그럴 생각은 없었습니다. 회장님 귀에 들어가기 전에 마무리 지으려고 했습니다. 작은 도련님께도 몇 번 말씀드렸고.”
털썩 무릎을 꿇은 김 실장은 횡설수설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주 놈이 또 쓸데없는 짓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을 김 실장이 아니라 사내 게시판을 통해 알게 됐다.
물론 백 프로 김 실장의 잘못을 탓하는 건 아니다. 철딱서니 없는 손주 놈이 저지른 일이니 녀석을 불러 호되게 야단치는 게 순서였다. 그런데 김 실장을 꾸짖는 건 사소한 일이라도 보고해야 하는 의무를 저버렸기 때문이다.
“자네를 대체할 놈은 많아.”
“회장님!”
“섭섭한가? 그럼, 일 처리를 똑바로 했어야지! 주한이 그놈이 회사 사람들 입에 오르지 않게 했어야지! 부도덕한 손주 때문에 내가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어! 무슨 면목으로 들고 다녀!”
이태한 회장은 오랜만에 목에 핏대를 세워 소리쳤다. 방안이 쩌렁쩌렁 울릴 만큼 큰 성량에 김 실장은 몸을 덜덜 떨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다 제 불찰입니다.”
“이 늙은이가 사내 게시판을 볼 줄은 몰랐던 모양이지. 세상 참 좋아졌어. 안 그래? 핸드폰 하나만 있으면 안 되는 게 없으니까.”
“아닙니다. 회장님.”
고개를 떨군 김 실장의 여우 귀가 힘없이 처졌다. 이태한 회장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는 김 실장을 잠시 지켜보았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그는 어떠한 처사도 달게 받겠다는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잘못을 만회할 기회를 주겠네. 이주한 그 녀석하고 어울리는 짝을 찾아. 집안도 괜찮고 얼굴도 괜찮은 참한 아가씨로. 그리고 그 망할 고양이 녀석. 내가 한번 만나 봐야겠어. 둘 중에 한 놈은 단념시켜야지. 곱게 끝날 분위기가 아니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이해했나?”
머리가 좋은 놈이니 말뜻을 이해 못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 실장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이태한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한번 강조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끝냈으면 하네. 우리 집안이 명맥을 이어 가야 자네 집안도 계속 유지 될 거 아닌가. 그렇지?”
담담하게 말하는 이태한 회장과는 달리 김 실장은 굳은 표정을 풀지 못했다. 그럴 만도 했다. 이주한을 감싸 준 죄로 그를 내치려고 했으니까. 이만하면 됐다. 혼쭐이 났을 테니 다시는 손주 녀석을 감싸지는 못할 것이다.
이 나이가 되니 돈도 명예도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죽기 전 마지막 소원이라면 증손주를 품에 한번 안아 보는 것이 다였다. 그런데 증손주는커녕 사고 치는 손주 녀석 뒤치다꺼리나 해야 하다니. 여자를 만나도 모자랄 판국에 남자 따위에 정신이 팔린 시원찮은 놈.
“가서 달달한 거나 가져와.”
그 말에 김 실장의 표정이 환해졌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는 황급히 사라졌고 곧 따뜻한 차와 케이크 한 조각을 쟁반에 담아 왔다.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이태한 회장은 결단을 내렸다. 이번만큼은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을 테다. 주환이 녀석이 발악해도 제 생각대로 밀어붙일 생각이었다.
***
비가 내렸다. 탕비실 창문 너머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멍하게 보던 은찬은 때마침 진동하는 핸드폰으로 시선을 옮겼다.
[뭐 해?]
이주한의 메시지를 무시하고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봐, 이상하지? 유은찬 씨답지 않게 심각한 것 같지?”
“그러게요. 이 부장하고 소문이 쫙 퍼져서 쪽팔려서 그러나?”
“그걸 말이라고 해요? 당연히 쪽팔리겠죠. 김동만 씨하고 사귄다고 그 난리 피운 게 얼마 전인데. 바로 이 부장님으로 갈아타는 게 말이 돼요? 유은찬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사람 참 그래.”
“이 주임, 유은찬 씨 사람 아니잖아. 수인이잖아. 내가 듣기로는 수인이 그렇게 문란하다네?”
“대박. 진짜요? 어쩐지.”
다 들린다고요. 탕비실 투명 유리문 너머로 은찬을 훔쳐보며 수군거리는 팀원들의 대화를 듣고도 은찬은 가만히 서 있었다. 수인이 귀가 밝다는 건 모르는 모양이다. 그렇게 심각한 표정인가? 차장에 비친 제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봤지만, 평소와 다른 점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단지 배가 고파서 우유 한 잔 마시러 왔고 쏟아지는 비를 보며 멍때리고 있었을 뿐인데 그들은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그나저나 곽 과장의 호출을 받고 사라진 김동만은 퇴근 시간이 다 되도록 연락 한 통 없다.
곽 과장이 말하길 오늘부터 김동만은 외근이 많아질 거란다. 외근이라니? 지금껏 마케팅에 관련된 외근 업무는 주로 마케팅 2부서에서 전담했다. 김동만이 유능해서 부서 이동을 하는 건가 싶었지만 그건 아닌 게 확실했다. 승진에 목마른 곽 과장이 그걸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지금 사무실 분위기는 유은찬과 김동만 때문에 어수선한 건 사실이었다.
[읽은 거 아니까 무시하지 마. 아니면 사무실로 내려간다.]
또 이주한의 메시지가 왔다. 늘 답장을 갈구하는 그의 연락이 슬슬 귀찮아졌다. 이주한이 다섯 번 보내면 은찬은 한번 답장을 할까 말까 하는 빈도였다. 이 정도면 포기할 만도 한데 그의 집념도 대단했다.
[왜요.]
[아직도 기분 안 좋아?]
[그런데요?]
[우리 은찬이 어떻게 하면 화가 풀릴까. 오늘은 뭐 먹을까. 먹고 싶은 거 있어?]
웃겨. 결혼 문제로 차 안에서 목이 빨개지도록 화낸 사람이 누군데. 이제 와서 우리 은찬이란다.
[오늘은 그냥 집에 갈 건데요. 오늘 동만이가 맛있는 거 해 준댔어요.]
이주한과 마주하고 밥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그래서 있지도 않은 동만과의 약속을 들먹였건만 어쩐 일인지 먹히질 않았다.
[김동만 씨 오늘 바쁠 건데. 그냥 나하고 먹자.]
어떻게 알았지? 바쁜 것인지 일부러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사라진 동만은 은찬의 연락도 무시 중이었다. 입이 삐죽 나온 은찬은 괜한 심술을 이주한에게 부렸다.
[내가 왜요?]
[소고기 먹으러 갈까? 한우.]
처음부터 치트키 쓰는 건 치사하잖아! 소고기라는 단어에 반사적으로 입에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꿀꺽. 은찬은 침을 삼켰다.
“소고기……. 아씨, 소고기.”
아깝지만 이대로 덥석 물어 버리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됐거든요? 내가 그딴 소고기에 호락호락 넘어갈 것 같아요? 혼자서 많이 드세요.]
[그럼 이것도 혼자 먹어?]
불쑥 나타난 사진 한 장에 은찬은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진짜 치사하게. 제일 배고플 시간에 그는 치즈케이크 사진을 올렸다. 그것도 은찬이 인생 케이크라고 말한 그거.
[너 주려고 좀 전에 사 왔는데. 조용히 지금 내 방으로 와. 얼른.]
쏟아지는 빗줄기와 치즈케이크 사진을 번갈아 보던 은찬은 내적 갈등 끝에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한숨을 내쉬며 힘없이 탕비실을 나오니 모두 번개처럼 제 자리에 앉아 은찬을 힐끔거렸다.
우리는 한 팀. 가족같이 서로를 위해 줘야 한다던 그들의 행동은 말뿐이었다. 정말 은찬을 위해 주는 이는 입사 동기 절친인 김동만뿐이라는 걸 이번 일로 절실히 깨닫는 중이다. 제자리로 돌아간 은찬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서류를 챙겼다. 그것을 들고 조용히 사무실을 나서며 물끄러미 쳐다보는 곽 과장에게 설명을 덧붙였다.
“이 부장님이 검토할 게 있다고 자료 좀 가지고 오라고 하셔서요. 부장님께 갔다 올게요.”
다른 이유가 있어서 가는 게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나선 은찬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빨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부장실 문 앞에 도착한 은찬은 아무렇지 않은 척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빼꼼히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건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세팅된 치즈케이크였다. 은찬은 거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
“왔어?”
자리에서 일어나 반갑게 맞이하는 이주한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부장님 때문에 온 거 아니거든요?”
은찬의 퉁명스러운 말투에 이주한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얼른 앉으라는 손짓을 던졌다.
“이거 좋아하잖아.”
“…….”
“이게 하루에 몇 개 파는 한정판이라잖아. 가니까 이거 딱 하나 남았던 거 있지? 운 좋게 샀어.”
“…….”
꿀꺽. 은찬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 나게 침을 삼켰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이주한 옆에 앉아 치즈케이크를 먹고 있었다. 고작 케이크 주제에 비싸도 너무 비싸지만 그만큼 맛있으니 납득되었다.
“맛있어?”
흐뭇한 표정을 짓는 이주한의 물음에 은찬은 생각할 것도 없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 진짜 내 취향이요!”
“많이 먹어. 맨날 가서 사 올까?”
이주한은 은찬의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털며 상냥하게 말했다.
“에이, 어떻게 그래요. 한정판이라면서요. 갔다가 없으면 헛걸음이잖아요.”
“문 열자마자 가면 되지. 네가 이렇게 좋아하는데. 그 정도는 해야지. 네가 잘 먹어야 우리 나비하고 까망이도 쑥쑥 자랄 거 아니야.”
나비와 까망이. 부드럽게 말하는 이주한의 말투에 애정이 듬뿍 묻어 있었다. 기분이 묘해진 은찬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더워?”
“네? 아니요.”
“얼굴이 빨개서.”
“그냥, 좀…….”
빤히 바라보는 이주한의 시선을 피해 눈을 내리깔자 그가 은찬의 턱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너무 가까운데…….”
코끝이 마주칠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그의 눈이 서서히 변해 가는 게 보였다. 잡아 먹을 듯한 이글거리는 눈을 마주하며 은찬은 입안에 남아 있던 케이크를 꿀꺽 삼켰다.
“어때, 내 방인데. 아무도 없어.”
“그래도 회사에서 이러는 건…….”
“그래서 싫어? 하지 말까?”
말보다 행동력이 빠른 이주한은 은찬의 입술을 살짝 머금다가 떨어졌다.
“치즈케이크 맛 괜찮네.”
회사에서 이러는 건 도덕적으로 안 된다고 따져야 하건만 이 상황이 싫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좀 전의 일도 해결하지 못한 마당에 이렇게 얼렁뚱땅 넘어가는 건 좀 그런데……. 아니, 뭐 어때서? 그건 나중 일이고. 분위기대로 흘러가는 게 어때서? 은찬의 머릿속에 두 개의 자아가 싸우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난 키스가 너무 아쉬워서 그런다. 아, 이대로 확 내가 해 버릴까. 이주한의 입술에 시선을 고정한 은찬이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아까는 내가 생각이 짧았어. 애가 있다는 소리에 마음이 급해서. 결혼은 천천히 생각하는 거로 하자. 괜찮지?”
생각한 대로 무조건 밀어붙이는 이주한이 한발 물러나겠단다. 이 정도면 나름 괜찮은 성과였기에 은찬은 편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비 오는데 이거 사러 갔다 온 거예요?”
“우리 나비하고 까망이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어디든지 갔다 올 테니까. 그런데 나비하고 까망이. 이거 이름 누가 지은 거야?”
“왜요?”
이주한은 은찬의 한쪽 뺨을 살짝 꼬집으며 싱긋 웃었다. 자연스럽게 화해 모드로 변하자 은찬은 키스할 기회를 노렸다. 쿵. 쿵, 쿵.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촌스럽긴 한데 입에 착 감기는 이름이라서. 네가 지은 거지? 꿈이라도 꾼 거야?”
그럴 리가. 솔직히 은찬이 임신하고 한 일이라고는 먹는 것밖에 없었다. 병원에 같이 가고 영양분 신경 쓰며 아침저녁 밥 먹이고 애들 이름에 관련된 그 밖의 일은 당연히…….
“동만이가요. 뭐라더라? 고양이한테 그 이름 붙이는 게 자기 로망이였다나?”
“……김동만? 그 자식이 우리, 내 애 태명을, 그렇게 정했다고? 무슨 권리로?”
단숨에 이주한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동만이가 어때서요? 좀 촌스럽긴 한데 입에 착 감기잖아요. 부르기도 쉽고.”
기분이 말랑말랑해진 은찬이 이주한의 옷깃을 만지작거리며 속삭였다. 순간 그들 사이에 묘한 정적이 흘렀다. 키스할 타이밍은커녕 얼마 지나지 않아 이주한은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아니, 촌스러워! 어쩐지 이상하다고 했어! 촌스럽고 유치해! 바꿔!”
눈을 부라리며 씩씩거리는 이주한의 행패에 은찬은 기가 찬다는 듯이 쳐다봤다. 어쩐지 잘해 준다고 했다. 이러려고 여기 부른 건가 싶어 은찬도 똑같이 눈을 부라렸다.
“난 좋거든요?”
“이건 엄마하고 아빠가 고민해서 결정할 문제지 남이 짓는 건 아니라고 봐!”
“왜요? 아까는 촌스러워도 입에 착 감긴다면서요. 난 좋아요! 까망이, 나비! 그리고 동만이가 왜 남이에요? 애 낳으면 동만이가 봐 주기로 했단 말이에요!”
“그놈이 왜……!”
굳이 이유를 묻는다면.
“동만이가 제일 잘 돌볼 것 같으니까?”
딱히 없었다. 그냥 어쩌다 보니 동만이와 살게 된 유은찬의 선택이었다. 은찬의 말도 안 되는 관계성 이론에 이주한의 표정은 더욱더 어두워졌다.
비가 내리는 퇴근 시간. 내려치는 번개처럼 둘 사이에도 금이 갔다.
***
“에취!”
동만은 갑자기 재채기가 나왔다. 코를 훌쩍이며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어느덧 퇴근 시간. 그런데 퇴근은 고사하고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채 돌아다니길 몇 시간째다. 아무 데나 가자고 했더니 이리한이 향한 곳은 백화점 명품관이었다.
“동만 씨 이거 어때요?”
“…….”
태어나서 명품관을 처음 와 본 동만에게는 모든 게 낯설어 죽겠는데 이리한은 제집처럼 활개 쳤다. 원래 쇼핑이라는 게 금방 지치고 피곤해지기 마련이니까 잠시 비위만 맞춰 주면 될 거라 생각했지만, 판단 미스였다. 저 망할 개새끼는 지치지 않았다. 오히려 기력이 다한 건 동만이었다.
“또 사게요?”
“아까는 내 거 샀으니까 이번에는 동만 씨 거 사야죠. 이리 와서 입어 봐요.”
“아니요. 됐습니다. 저 이거 하나 받은 걸로 충분하니까 그만하고 가죠? 지금 몇 시인 줄 아세요?”
동만은 강제로 받은 종이 가방을 흔들었다. 그 안에 한 달 월급의 3분의 1 가격인 반팔 셔츠가 고이 들어가 있었다. 이리한이 보자마자 달려든 개 그림이 그려진 명품 티셔츠였다. 동만의 눈에는 동대문 시장에서 파는 것보다 더 유치한데 명품이란다.
“어? 벌써 이렇게 됐네.”
시간을 확인한 이리한을 보며 한 가닥 희망이 피어났다. 이렇게 간절히 집이 그리울 줄이야. 오후 내내 걸어 다녔더니 발바닥이 아파서 미칠 지경이다. 하지만 이리한의 입에서는 다른 말이 나왔다.
“밥 뭐 먹을까요?”
퇴근 시간이라고 개새끼야! 집에 좀 가고 싶다고! 눈으로 호소했지만 눈치 없는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개 아이큐가 이렇게 낮던가? 이제는 그의 뇌 구조도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성질 같아서는 버럭 소리치고 싶지만 중요한 거래처라는 게 동만의 발목을 잡았다. 자기 때문에 거래처가 떨어지면 회사에서 잘릴지도 모르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동만은 복지 좋은 이 회사에서 정년퇴직할 때까지 다니는 게 인생의 목표였다. 그래, 밥 먹는 게 뭐가 어렵다고. 중요한 거래처니까 원하는 대로 해 드려야지. 한숨 한번 내쉬며 동만은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일단 그거부터 내려놓고. 나가서 생각하죠.”
“나가서요?”
“여기서 먹을 수는 없잖아요. 그렇죠?”
동만에게 사 주겠다며 명품 와이셔츠를 들고 있던 이리한은 멍청한 얼굴에 함박웃음이 그려졌다.
“아, 그렇지! 다음에 또 오면 되죠. 뭐 먹을까요? 좋아하는 게 뭐에요?”
이리한이 쪼르륵 달려오기 직전, 동만은 손을 들어 그를 세웠다.
“흥분하지 말고. 천천히 생각해 볼게요.”
“그래요, 그럼.”
가까스로 숨이 턱턱 막힐 것 같은 명품관을 탈출한 동만은 속으로 만세를 외쳤다. 역시 사람은 살던 대로 살아야지. 저런 곳은 동만과 맞지 않았다.
“그럼 우리 밥 먹고 뭐 할까요? 다른 백화점 갈까요?”
“네?”
이리한의 질문에 당황한 동만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이 개자식이 뭐라고 한 거지? 밥 먹고 헤어지는 거 아닌가?
“밥 먹었으니 또 산책해야죠. 나는 시간만 있으면 이렇게 도는데. 다들 이렇게 하지 않아요?”
미친놈. 진짜 눈치도 없는 미친놈이다. 다리 아프다고 대놓고 두드리고 퇴근 시간을 강조했음에도 이 개새끼는 전혀 모르는 눈치다. 게다가 또 쇼핑하잖다. 역시 개보다는 고양이가 자신과 맞았다.
은찬아, 살려 줘. 멍청한 개에게 잡힌 동만은 이기적인 유은찬이 그리워 울컥 목이 메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