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불 꺼진 방 안은 어둡고 고요했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 주한은 당당하게 침대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은찬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가슴까지 말려 올라간 셔츠 아래로 봉곳 나온 배가 어둠 속에서 도드라져 보였다.
숨죽인 주한은 그 배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임신이란다. 유은찬이 그 말을 했을 때 사실 장난인 줄 알았다. 남자가 임신이라니. 짓궂은 농담쯤으로 생각하고 가볍게 넘기려 했지만 돌아가는 상황이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김동만과 말다툼하는 유은찬의 표정과 말투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대로 굳어 버린 주한은 내적 갈등에 휩싸였다. 말 한마디로 인해 유은찬을 화내게 만든 전적이 있던 터라 쉽사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또다시 유은찬과 틀어지길 원치 않았기에 무조건 녀석의 말을 믿는 척했다. 덕분에 그 상황은 모면할 수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 혼란스러운 그였다.
뭔가 억울한 듯 따지기 시작하는 김동만을 피해 은찬과 제집으로 피신한 주한은 늦은 시간임에도 잠이 오지 않았다. 진짜 임신일까. 왼쪽, 오른쪽, 위에서 내려다보길 수차례. 그럼에도 이해할 수 없었다. 마른 몸에 나온 배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임신이라는 단어는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자신과 잔 놈들은 죄다 임신이 돼야 했다.
뭘까. 진짜 임신일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 미궁 속으로 빠지는 기분이다. 주한은 조심스럽게 은찬의 배에 손을 가져갔다. 어제도 만졌지만 그땐 별다른 감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확실히 배 안에 무언가가 있는 게 느껴졌다.
신기하게 배를 바라보던 주한은 유은찬의 몸부림에 재빨리 손을 거뒀다. 그리고 다시 한참 동안 그의 배를 응시했다. 문득 정신을 차리니 어느덧 새벽 2시였다.
작은 날숨과 함께 마른세수한 주한은 조용히 침실을 빠져나와 부엌으로 향했다. 시원한 물 한잔을 벌컥벌컥 마셨지만 개운하지가 않았다. 멍하니 불 꺼진 거실을 바라보던 중 주한은 순간 낮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사내 게시판 때문에 한참 김 실장과 싸우고 있을 때 이리한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 너희 회사 출입증 하나 만들어 주면 안 돼?]
이리한은 밑도 끝도 없이 대뜸 그런 부탁을 던졌다. 이건 생각하고 말 것도 없었다. 당연히 거절하자마자 녀석의 볼멘소리가 날아왔다.
[너 치사한 거 알지? 저번에 나는 네 부탁 들어줬는데. 그거 불법인 거 알지? 네가 사정사정해서 내가 안 되는 거 억지로 해 줬는데, 이렇게 나오시겠다?]
‘갑자기 우리 회사 출입증이 필요한 이유는?’
[그걸 왜 너한테 말해야 해?]
이리한과 첫 만남은 재벌가 자제들의 모임에서였다. 호텔 연회장에 모인 젊은 남녀는 수인 반 사람 반이었다. 몇몇은 익히 알고 있는 얼굴들이었고 대부분 부모님의 성화에 어쩔 수 없이 참석한 이들이 많았다. 주한과 이리한도 그중 하나였다.
개 수인이지만 성적으로 문란한 이리한과 이주한은 꽤 죽이 잘 맞았다. 이리한에게 애인이 있어도 서로의 집에서 거리낌 없이 섹스를 즐겼을 정도였으니까.
주한에게 섹스는 욕구를 해소할 수 있는 행위에 불과했다. 물론 이리한이 자신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었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다. 멍청한 개는 주한만 보면 좋아 죽겠다는 듯 꼬리를 흔들었다.
주한이 알고 있는 이리한은 특별한 이유 없이 남에게 부탁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주한의 집안처럼 녀석의 집안도 대대로 재벌 집안이었기 때문이다. 호텔 경영을 하시는 어머니와 검사 아버지. 그리고 두 명의 형들이 쇼핑몰과 백화점을 운영하는 걸로 알고 있다. 이리한이 눈치 없고 제멋대로인 건 삼 형제 중 막내인 탓이 컸다.
‘이유를 알아야 고민해 볼 거 아니야. 여기 일반인이 함부로 막 들어오는 곳 아니야.’
[꼭 알아야 해? 나 일반인 아니잖아. 네 친구잖아. 그걸로 안 돼?]
‘끊어. 바빠.’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기 싫었던 주한이 통화를 끊으려 하자 수화기 너머로 애가 탄 이리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끊지 마! 끊으면 나 화낸다! 이주한, 애인하고…… 잘 지내? 너 원래 쉽게 질리는 스타일이잖아. 언제 헤어질 거야?]
가뜩이나 심기가 불편했던 주한은 인상을 팍 썼다. 지난번에 무턱대고 회사로 찾아와 유은찬에게 두 사람의 관계를 털어놓은 게 떠올랐다. 주 실장의 시선에 할 수 없이 조용한 곳으로 장소를 옮겨 통화를 이어 갔다.
‘요점이 뭐야?’
[얼핏 보니까 귀엽고……. 뭐랄까, 괜찮은 사람 같기도 해서.]
유은찬이 귀엽긴 하지. 그렇다고 뜬금없는 이리한의 관심이 기분 좋을 리 없었다.
‘너 혹시 나하고 그 녀석 사이 방해하려고 출입증 달라는 건 아니지? 너한테 아무 감정 없다고 그때 말했을 텐데.’
차갑게 던진 말에 이리한의 반응은 생각보다 무심했다.
[너 아니거든? 됐고! 해 줄 거야 말 거야? 그냥 회사 생활이라는 게 어떤 건지 구경만 하다가 나올게!]
‘그럼 나 있을 때 오면 되겠네.’
[그건…… 싫어. 안 돼. 너 보러 가는 거 아니니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이 회사에 출입하고 싶은데. 주한이 있으면 안 된다는 말은. 즉 이곳에 이리한이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뜻으로 들렸다. 저 멍청한 개는 그걸 어렵게 빙빙 돌려 말하면 주한이 눈치채지 못할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그럼 안 되겠다.’
[그런 게 어디 있어! 친구 좋다는 게 뭐냐? 이런 거 하나 못 해 줘?]
‘못 해 주는 게 아니라 안 해 주는 거야. 끊어.’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자마자 이리한의 폭격이 시작됐다. 멍청한 개는 끝까지 이유를 말해 주지 않은 채 목표를 이룰 때까지 물고 늘어졌다. 결국, 하루만 로비에 말해들 테니 신분을 밝히고 들어오는 조건으로 합의를 봤다.
그날 오후. 유은찬과 싸우고 홀로 회사로 돌아온 주한은 괜히 김동만에게 화풀이를 했다. 그러다 로비에서 연락이 왔다. 미리 일러둔 이리한 씨가 점심때 왔었다는 말에 보안 팀으로 내려가 CCTV를 돌려봤다.
이리한이 로비에 나타난 그 순간부터 녀석의 행적을 좇던 주한은 구내식당 장면에서 실소가 터졌다. 화면을 확대하자 더 가관이다. 식당 테이블 밑에 곧게 뻗은 이리한의 다리가 김동만의 다리 사이에 있었다.
저 개자식이 신성한 회사에서 무슨 짓을 하는 거야? 그것도 김동만한테.
절로 눈살을 찌푸린 주한은 그제야 이리한이 누구에게 관심이 있는지 알아챘다. 저걸 보고도 모르면 바보였다. 그리고 이리한을 전적으로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 이주한 입장에선 김동만이 눈엣가시였으므로 어디로든 사라지는 편이 훨씬 좋았다.
다시 현실로 돌아온 주한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일단 아침 일찍 병원을 예약했으니 임신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몇 시간 뒤에 판가름 날 것이다. 어두컴컴한 거실 소파에 멍하니 앉은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침이 오는 게 두려웠다.
***
모든 검사를 마친 은찬은 왠지 모르게 개운해 보였지만, 결과를 확인 중인 의사의 표정은 상당히 혼란스러워 보였다. 은찬과 결과를 몇 번이나 번갈아 보던 의사사 마침내 굳게 다문 입을 열었다.
“임신은 맞는 것 같은데…….”
의사는 은찬의 배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생물학적으로 남자인 은찬의 임신이 그도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어쨌든 임신이라는 결과에 주한은 말문이 막혔다. 우리에게 아이가 생긴다면 좋아서 미칠 것이라는 말과는 달리 현실은 멍청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묘한 정적 속에서 유독 한 사람만 이 상황에 태연했다. 의사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은찬은 새초롬한 표정으로 그에게 따졌다.
“맞는 것 같은데가 아니라. 임신 맞잖아요. 나 다니는 병원에서 두 놈이라고 하던데? 맞죠?”
“아. 네, 네……. 여기 보시면 꼬리가 두 개. 손도 각각 있고……. 혹시 어디 병원에 다니셨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제가 의사 생활 하면서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라서. 그쪽 선생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국내에서 제일 유명하고 큰 대형 병원 산부인과 의사가 되레 은찬에게 자문을 구하고 있었다. 이해한다. 그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많이 놀랐을 것이다.
“시내 대형 서점 옆에 있는 산부인과 원장 선생님이 봐 주시는데, 같은 과 수인은 수컷끼리는 드물게 임신이 될 확률이 있다고 그랬나? 논문에서 본 적이 있다고 하시던데.”
“아…….”
의사가 감정 없는 톤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그는 주한을 바라보며 뒤늦게 축하 인사를 던졌다.
“축하합니다. 사람 경우에는 쌍둥이라고 말씀드리겠는데 수인은 쌍둥이라는 개념보다 워낙 다산하니까……. 그런데 남자 수인이 임신한 경우는 또 처음이고 해서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주한은 횡설수설하며 진땀을 흘리는 의사가 안쓰럽게 보였다. 사실을 확인했으니 더는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은찬아, 먼저 나가 있을래? 의사 선생님께 물어볼 게 있어서.”
“네.”
유은찬이 곧장 진료실을 나서자마자 주한과 의사 사이에 잠시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두 사람의 시선은 컴퓨터 화면, 유은찬의 초음파 사진에 고정된 상태였다. 몇 번을 봐도 손과 발이 네 개, 꼬리가 두 개였다. 졸지에 애 아빠가 된 주한은 아직도 이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선생님.”
“아, 네.”
의심할 여지 없는 증거가 나왔음에도 의사는 현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혹시 위에서 제가 오늘 여기 왜 왔는지 물어보면 치료받으러 왔다고만 해 주세요. 유은찬 차트는 숨겨 두시고요.”
“저…… 무슨 치료를. 여기 산부인과인데.”
아, 맞다.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다 보니 거기까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태어나서 산부인과라는 곳 자체를 처음 온 주한은 뭐라고 둘러대야 할지 몰랐다. 오래전부터 이 병원 의사들이 주한의 집안 주치의를 도맡아 왔었다. 그러므로 이주한 이름으로 예약된 순간. 무슨 이유로 왔는지 물어볼 게 뻔했다.
이런 식으로 할아버지와 부모님의 귀에 들어가는 건 싫었다. 일단 생각의 정리를 끝난 다음 조심스럽게 알려도 늦지 않을 것이다.
“애인하고 성병 검사받으러 왔다고 하면 될까요?”
불쑥 꺼낸 의사의 말에 주한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성병 검사라니. 절대 안 된다고 따지려다가 고개를 떨궜다. 생각해 보니 다른 변명거리가 없었다. 주한과 의사의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더 이상 길게 대화해 봤자 그들의 머리만 더 복잡해질 뿐이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진료실을 나온 주한은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는 은찬을 발견했다. 진지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뚫어지게 보고 있는 유은찬을 잠시 지켜보았다.
밤새 수인 임신에 관해 찾아봤다. 고양잇과 수인의 임신 기간은 6개월. 유은찬의 말대로 워크숍을 기점으로 잡으면 출산일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동안 혼자서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까. 그것도 모르고 녀석에게 헛소리를 지껄인 제 모습이 한심했다.
그렇다면 김동만은 뭘까. 거기에 대한 답은 금방 나왔다. 처음 생각한 대로 페이크였을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가 지금처럼 될지 몰랐을 테니 김동만이라는 방패를 내세운 게 틀림없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이 일을 숨길 생각을 했을까. 만약 주한이 끝까지 매달리지 않았다면 제 아이가 이 세상에 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물론 알 기회는 많았다. 새삼 자신이 그런 면에서 둔하다는 걸 알았다. 그러고 보니 한 치수 큰 와이셔츠를 입고 어떻게든 배를 가리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였다. 그게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유은찬.”
담담히 부른 이름에 획 고개를 든 녀석이 주한을 보며 씨익 웃었다. 이상했다. 방금까지 착잡했던 마음이 싹 사라지고 대신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유은찬이 한 걸음씩 그에게 다가올수록 더 요동쳤다.
“부장님.”
눈을 동그랗게 뜬 유은찬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귀엽게 보였다. 녀석의 머리를 다정하게 쓸어 넘기자 눈이 반으로 접힌다.
“형. 둘이 있을 때는 형이라고 부르랬잖아.”
“형.”
형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달콤하게 들릴 줄이야. 주한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나 배고픈데.”
임신한 녀석을 아침도 안 먹이고 병원에 데려왔으니 배고플 만했다. 물어볼 것도 많았지만, 나중에 천천히 해도 상관없었다.
“뭐 먹으러 갈까.”
“아까 폰으로 찾아봤는데 여기 주변에 맛집 엄청 많더라고요.”
핸드폰으로 진지하게 보던 게 그거였나. 예전 같았으면 버럭 화를 냈겠지만, 지금 주한은 그런 유은찬이 마냥 귀여웠다.
“먹고 싶은 거 있어?”
“사 주는 거예요?”
“당연하지.”
“비싼 거 먹어도 돼요?”
김동만하고 살면서 어떤 괄시를 받았는지는 안 봐도 훤했다. 편의점에서도 그러더니 이런 식으로 눈치 보는 게 못마땅했다. 짧게 혀를 찬 주한은 단호하게 말했다.
“말했잖아. 돈 생각하지 말고 먹고 싶은 거 가지고 싶은 거 다 말해.”
“어떻게 그래요……. 미안하게.”
“넌 해도 돼. 충분히 그럴 자격 돼.”
주한은 수줍게 웃는 은찬을 끌어안았다. 두 사람 사이에 장애물처럼 가로막고 있는 은찬의 배가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자신에게는 절대로 없을 것처럼 느껴졌던 책임감이라는 게 피어났다. 이상하게 그게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약속대로 주한은 유은찬이 먹고 싶은 것을 먹으러 갔다. 이른 시간부터 막창은 좀 버거웠지만 유은찬은 혼자서 5인분을 게 눈 감추듯 먹었다. 잘 먹으니 그것도 마냥 예쁘고 대견스럽게만 보였다.
회사로 돌아가는 차 안.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배를 쓰다듬고 있는 은찬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주말에 시간 괜찮아?”
주한은 은찬을 곁눈질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주말이요? 네, 괜찮아요. 왜요?”
“부모님 찾아뵐까 해서.”
“부모님이요? 누구 부모님이요? 형 부모님? 형 부모님을 내가 왜 봐요?”
은찬은 주한의 말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아니, 네 부모님.”
늦긴 했지만 그게 맞는 것 같았다. 아이까지 생긴 마당에 미룰 일은 아니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양가에 알리고 얼른 결혼식을 치러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은찬의 반응은 생각보다 시큰둥했다.
“우리 엄마 아빠를 왜요?”
“왜라니. 찾아뵙고 인사드려야지. 애들 태어나기 전에 결혼식 올리려면 바쁘겠지만. 넌 아무것도 신경 안 써도 돼.”
귀찮게 신경 쓸 필요 없이 유명한 웨딩 플래너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우선 할아버지에게 알리는 것부터 시작으로 할 게 많았다.
“네? 결혼식이요? 누구 결혼식이요?”
주한은 은찬이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했다.
“우리 결혼식.”
“우리요? 우리? 누가 결혼한대요?”
때마침 신호에 걸려 차가 멈췄다. 주한은 생뚱맞은 소리를 하는 은찬을 빤히 쳐다봤다. 녀석은 농담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정색하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럼? 애까지 생겼는데 안 해?”
“굳이 할 필요 없잖아요. 거기까진 오버 아닌가?”
“농담이지?”
“농담 아닌데요.”
순간적으로 주한은 말문이 막혔다.
“네 배 속에 애. 내 애 맞지?”
“네.”
“내가 너 좋아한다는 거 알긴 알지?”
“네, 알아요.”
“유은찬…… 너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데?”
그러고 보니 지금껏 주한만 적극적으로 밀어붙였지 유은찬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 틈에 신호가 바뀌었다. 뒤에서 요란하게 클랙슨이 울렸고 주한은 차를 갓길로 돌렸다.
“음…….”
심란한 주한의 마음도 모르고 은찬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꼭 말해야 해요?”
“말해.”
“음…… 우리 나비랑 까망이 아빠? 맛있는 거 많이 사 주는 사람?”
“…….”
“더 말해요?”
지금 유은찬이 집중하고 있는 건 이주한이 아니라 손에 있는 아이스크림이었다. 주한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깊은 상실감에 빠졌다. 어렵게 사귀게 됐지만, 그가 은찬에게 느끼는 감정과 은찬이 그에게 느끼는 감정의 거리감이 너무 멀게 느껴졌다.
회사에 도착한 이후 주한은 일부러 유은찬을 피했다. 마케팅 일부서 근처는 얼씬도 하지 않고 제 방에 틀어박힌 채였다. 태연하게 맛있는 거 많이 사 주는 사람이라 말한 유은찬 때문에 화가 머리끝까지 났기 때문이다.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 없는 충격과 분노였다.
옛 어른들이 말하길 같은 수인이라도 고양이는 별개라고 들었다.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종족이라 했지만, 이 정도까지인 줄은 몰랐다. 좋아하고 애까지 생겼으니 당연히 결혼까지 생각한 주한만 이상한 놈 취급당했다.
지금껏 자신과 정식으로 사귀고 싶어 안달 난 놈들이 이 모습을 봤으면 얼마나 웃을까. 그동안 너무 무분별하게 놀았던 죗값을 받는 걸까. 이 망할 고양이를 어쩌면 좋을까. 무엇하나 제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인상만 찌푸리고 있을 때였다. 책상 위에 던져 둔 핸드폰이 울렸다. 내심 유은찬의 연락을 기다렸건만 이리한이라는 이름을 보자마자 짧게 혀를 찼다.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다.
받을까 말까. 잠시 고민하던 사이에 전화가 끊어지고 다시 또 울렸다. 역시 이리한이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진저리를 칠 만큼 집요한 놈이었다. 온종일 핸드폰이 울리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받아야 했다.
“통화가 안 되면. 바쁜가보다 그런 생각은 안 들지?”
인사는 생략한 채 주한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차갑게 쏘아붙였다. 보지 않아도 느껴질 만큼 날이 선 말투였지만 이리한의 목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밝았다.
[지금 받았잖아.]
“그거야 네가……! 하아.”
안 받으면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전화할 테니까. 목까지 욱하고 올라온 화를 가까스로 삼켰다. 가뜩이나 머리도 복잡한 판국에 말싸움으로 힘을 빼고 싶지 않았다. 잠시 뒤 유은찬을 상대하려면 그나마 있는 힘이라도 비축해 둬야 했다.
“됐다. 왜 또. 왜 또 전화한 건데.”
[주한아. 나 지금 너희 회사 로빈데.]
건성으로 통화하고 있던 주한의 표정이 돌변했다. 이리한은 태어났을 때부터 금수저를 쥐고 태어난 녀석이었다. 무엇 하나 부족함 없이 자란 녀석이 특정한 것에 대한 집착이 있을 리 만무했다. 사랑도 그랬다. 금방 사귀었다가 헤어지는 일을 반복했다. 주한과 오랫동안 관계를 이어 간 게 신기할 정도로 말이다.
그런 이리한이 특정 인물에게 집착하기 시작했다는 건 확실히 재미있는 사건이었다. 물론 전적으로 이리한을 밀어 줄 생각이지만 그냥은 안 된다.
“그런데?”
[오늘도 나 그냥 들어가게 해 주면 안 돼?]
“안 돼. 어제만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잖아.”
[……아니면 네가 내려와서 나 데리고 가면 안 될까? 나 진짜 조용히 회사 구경만 하다가 갈게.]
“구경은 어제도 했잖아. 내가 일전에도 말했지만, 보안이 생명인 회사야. 아무나 들어올 수 없고 들어와서도 안 돼. 개인적인 친분은 한번 써먹은 거로 충분하잖아.”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라고?]
“바빠. 끊는다.”
[야아, 잠깐만! 끊지 마! 나 진짜 들어가야 하는데, 누구 만날 사람 있는데……. 그 사람만 보고 나오면 안 될까?]
그 정도로 김동만이 좋은 걸까? 핸드폰 너머 이리한은 낑낑대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주한은 불과 20분 전에 마주친 김동만을 떠올렸다. 특출나게 잘생기지도 못생기지도 않은, 뭐랄까……. 진짜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남자였다.
거기에 비한다면 이리한은 어딜 가나 시선을 끄는 남자였다. 조상님 중 골든 리트리버가 있었는지 유난히 옅은 갈색빛이 도는 머리카락과 하얀 피부를 가진 녀석은 이주한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체력도 좋았다. 그런 이리한이 뭐가 아쉬워서 김동만에게 이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거기까지는 관심 밖이다.
“누구?”
[어?]
“누구 만나는데. 내가 아는 사람이야?”
CCTV에 찍힌 이리한은 도망치는 김동만의 뒤를 악착같이 쫓아다녔다.
[있어. 그런 사람.]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 귀엽기까지 했다. 그냥 사실대로 말하면 될 걸 왜 이렇게 돌려 말하는 걸까. 알다가도 모를 놈이라니까.
[진짜 안 돼? 여기 너희 할아버지 회사잖아. 그런 거 하나 못 해 줘?]
“정 급하면 그 사람 퇴근하고 만나. 그러면 되잖아.”
[……너 오늘 퇴근하고 애인이랑 만나? 데이트할 거야?]
뜬금없는 이리한의 질문에 주한은 별생각 없이 가볍게 대답했다.
“봐야지. 어제도 우리 집에서 잤어.”
[뭐어어어! 잤어? 잤다고? 왜 안 헤어져? 헤어질 때 됐잖아!]
흥분한 녀석이 이상한 소리를 지껄였다. 잠시 말이 없어진 녀석의 숨소리는 점점 거칠어졌다.
[미안한데, 나 너한테 악감정 없거든? 근데 이번에는 나도 안 되겠다. 양보 못 하겠어. 괜찮지?]
이리한이 무슨 말을 하는지 주한은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오늘 고양이 하고 개가 자신한테 왜 이러는 걸까. 착잡한 표정으로 한숨을 길게 내쉰 그는 이제 녀석과 통화 자체가 피곤해졌다. 얼른 정리하고 끊어야 할 것 같았다.
“잘 들어. 네가 이 회사에 합법적으로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이 딱 하나 있긴 있어. 우리 회사 거래처가 되는 것. 지금 우리 회사에서 신제품 출시한 거 알고 있을 거야. 그거 너희 백화점과 쇼핑몰에 독점 계약하게 해 주는 조건. 어때?”
[어? 야…… 나 그런 거 몰라. 엄마하고 형들이 사업하지, 내가 하냐?]
알고 있다. 하지만 삼 형제 중 막내 이리한이 밀어붙인다면 못 할 것도 없었다. 단번에 손절하려는 이리한의 태도에 주한은 마지막 히든카드를 꺼냈다.
“그래? 아쉽네. 우리 거래처가 되면 영업사원하고 미팅도 따로 시켜 주려고 했는데. 이게 생각보다 복잡하거든. 각 기관에 맞게 프로그램도 다시 짜야 하고. 저번에 본 적 있지? 김동만 씨.”
[……누구?]
“김동만 씨. 저번에 제주도에서 봤을 텐데. 부서에서 꽤 유능한 인재야. 아무튼 그렇게 되면 거래처라는 명목으로 회사 출입도 한결 편해질 텐데. 안 된다니 아쉽네.”
주한은 미끼를 던졌고 이제 개가 물기만 하면 됐다. 그렇게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10초도 되지 않아 이리한은 덥석 미끼를 물었다.
[엄마하고 형한테 해 달라고 하지 뭐. 그럼 나 거래처 되는 거지?]
물론 주한은 구두 계약 따위는 믿지 않았다. 즉시 녀석의 어머니와 약속을 잡아 달라 독촉했고 어렵지 않게 다음 주 만남이 성사됐다. 김동만을 팔아 계약을 따내고 덤으로 눈앞에서 사라지게 하는 일거양득의 효과였다.
[김동만 씨 담당으로 붙여 주는 거지?]
“아, 아까 누구 만날 사람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 사람으로 해 줄게.”
[아니야. 괜찮아!]
멍청한 개는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인 줄도 모르고 혼자 흐뭇하게 웃고 있을 것이다. 유은찬이 이리한의 반의반이라도 닮았으면 좀 편했으려나. 개와 고양이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말을 몸소 체험 중인 주한은 쓰게 웃었다. 이 와중에도 유은찬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 걸 보니 자신도 중증이다 싶었다.
“오늘은 로비에 말해 둘 테니까 그냥 들어가고. 내일부터는 거래처 명단에 올라갈 거니까 이름 대고 들어오면 될 겁니다, 고객님.”
[알았어! 고마워, 주한아!]
오히려 이쪽이 더 고마웠다. 목소리까지 신난 이리한의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주한은 한숨과 함께 핸드폰을 가볍게 툭 던졌지만 돌연 다시 그것을 쥐었다. 그리고 어젯밤 몰래 찍은 잠든 유은찬의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다. 이제 어쩐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설득 말고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어쩔 수 있나. 더 좋아하는 쪽이 지고 들어가야지. 그나저나 나비, 까망이? 이름이 그게 뭐야.
“센스하고는. 촌스럽게.”
말과는 달리 주한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
이주한과 함께 회사로 돌아왔지만 홀로 사무실로 들어선 은찬은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했다. 힐끔힐끔 자신을 곁눈질하는 팀원들의 시선에 머쓱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뭐지? 왜들 저렇게 보는 거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김동만을 찾았지만, 옆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밥 먹으러 갔다가 아직 안 온 모양이다. 할 수 없이 제 책상으로 시선을 돌린 은찬은 오전 동안 쌓인 서류 더미와 마주했다.
“많네…….”
앉자마자 일부터 하기는 싫었다. 어차피 이주한도 없는 마당에 딱히 눈치 볼 사람도 없었다. 은찬은 서류 더미를 슬그머니 옆으로 밀쳤다. 그리고 제일 먼저 한 일은 사내 게시판 체크였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무슨 일이 터진 게 분명한데 누구 하나 속 시원하게 말해 주는 사람이 없다. 꼭 자신을 따돌리는 느낌이었다.
“뭐야. 왔는데? 아무렇지 않은 것 같은데?”
“동만 씨도 괜찮은 것 같았지? 그치?”
“둘이 아직 잘 지내 봐. 어제 그렇게 싸웠다며?”
“삼자대면했다잖아.”
등 뒤에서 또렷하게 들리는 팀원들의 속삭임을 은찬은 애써 모른 체했다. 삼자대면이라. 그게 문제였나? 아무래도 어제 이주한이 오피스텔에 찾아온 게 문제였나 보다. 턱을 괸 은찬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게시판을 뒤적였다.
맞네, 그거였다. 은찬과 동만. 그리고 이주한이 어제 오피스텔에서 삼자대면했다는 게시글의 조회 수가 사내 인원보다 많았다. 다들 그렇게 할 일이 없나? 남의 일에 왜 이렇게 관심이 많은지. 은찬은 모니터를 한심스럽게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일이 더 커졌고 귀찮아진 것 같았다. 이렇게 되면 김동만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헤어졌다는 글을 게시판에 남겨야 할 듯싶었다. 귀찮지만 약속은 약속이니까. 자세를 고쳐 잡고 키보드를 두드리려 할 때, 게시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구내식당에서 벌어진 애정 행각?”
누가 구내식당에서 키스라도 했나? 은찬은 망설임도 없이 그 게시글을 클릭했다. 그리고 이어진 내용에 입이 떡 벌어졌다. 귀티 나게 잘생긴 남자와 김동만이 식탁 밑에서 다리로 애정 행각을 벌였단다.
진짜? 리얼? 진짜 김동만이 그랬다고? 게시글 밑에 수많은 증언이 쏟아졌으니 사실임은 틀림없었다.
아깝다. 어제 반차 쓰고 째는 게 아닌데. 이 장면을 눈앞에서 보지 못했다는 게 아쉬워 미칠 것 같았다. 증인들 말에 의하면 둘 사이가 심상치 않아 보였단다. 덕분에 엊그제까지만 해도 이주한과 양다리 걸친 유은찬을 욕하던 여론이 지금은 동정에 가까웠다. 은찬은 픽 웃었다.
그런 것보다 지금 중요한 건 김동만이 구내식당에서 이상한 짓을 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남자랑. 도대체 누구랑? 그게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동만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은찬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렸지만, 녀석은 점심 시간이 끝났음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전화로 물어볼까? 아니다. 이런 건 전화로 물어보면 재미가 없다.
김동만을 기다리며 눈치껏 일을 하려던 찰나였다. 슬슬 졸음이 밀려왔다. 꾸벅꾸벅 졸던 은찬은 아예 대놓고 책상에 엎드렸다. 진짜 잠깐 눈만 붙일 생각이었는데 눈을 뜨니 어느덧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그사이 누구도 은찬을 깨우지 않았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흘러내린 침을 쓱 닦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은찬은 이 대리에게 동만의 행방을 물었다.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동만이는요?”
“동만 씨? 방금까지 여기 있었는데?”
“동만 씨 좀 전에 커피 들고 옥상 가는 거 같던데.”
이주임이 동만의 행방을 알려 주었다. 은찬은 즉시 옥상으로 향했다. 어제 일 때문에 삐진 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옥상에 도착하자마자 김동만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찾았다. 옥상 구석진 곳에 자판기 종이컵을 들고 멍때리고 있는 김동만.
“여기서 뭐 하냐?”
딴생각에 잠겨 있던 김동만이 은찬의 등장에 화들짝 놀랬다.
“아, 씨발! 깜짝이야!”
“왜 욕을 하고 그래. 혼자서 뭐 해?”
“뭐 하긴 잠 깨려고 왔다! 왜!”
여느 때와 달리 동만은 쌀쌀맞은 태도를 보였다. 그게 섭섭하기는커녕 은찬은 물어보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다. 구내식당에서 함께 있던 그 남자가 누구냐고, 너 진짜 게이가 된 거냐고 말이다.
“동만아.”
“…….”
이 자식 진짜 삐졌나 보네. 불러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고개를 획 돌리는 녀석의 팔을 툭 치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 김동만의 최대 약점인 고양이 귀를 뽕 내보이며 녀석의 눈앞에서 알짱거렸다. 동공 지진을 일으킨 김동만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은찬의 고양이 귀를 쫓았다.
“화 풀어.”
잠시 그런 은찬을 빤히 쳐다보던 동만이 느린 말투로 물었다.
“……너, 내가 왜 화났는지 알긴 알고 묻는 거지?”
동만과 마주친 시선에 은찬은 씨익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동만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을 했다.
“그래. 니가 알 리가 없지. 니가 그러면 사람이지 고양이겠냐. 내가. 너한테 너무 무리한 걸 기대했나 보다.”
“야, 나 사람이라니까?”
“적어도 사람은 염치라는 게 있거든요? 너 염치는 알지? 너는 정말 고양이 수인으로 태어난 게 신의 한 수다. 신께 감사해. 알겠냐?”
“나 종교 없는데.”
“……그래, 그래. 너는 너를 믿어라. 신도 너는 감당 못 할 거다. 나니까 지금까지 너를 케어해 준 거지. 이거 아무나 못 해. 고맙다. 나는 네 덕분에 죽어서 천국 갈 거 같다.”
동만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더는 은찬과 싸울 의지가 없다는 표시 같았다.
“부장이 잘해 줘?”
목에 걸고 있는 사원증이 바람에 휘날리자 동만은 와이셔츠 앞주머니에 쏙 집어넣으며 물었다.
“어?”
“어제 그렇게 갔잖아. 그 사람 집에서 잤을 거 아니야. 잘해 줘? 병원에는 갔고?”
“어. 뭐……그렇지.”
“그런데 부장 상태는 왜 안 좋냐?”
“어? 뭐가?”
“아까, 잠깐 스쳤는데. 표정 구리던데. 또 싸웠지?”
눈치 없는 김동만이 단번에 맞출 정도로 표시 났나 보다. 속으로 뜨끔했지만 은찬은 아닌 척했다.
“우리가 맨날 싸우는 줄 아냐?”
“우리라니? 우리라니! 너는 모르겠지. 니가 얼마나 이기적인 자식인지.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놈! 입만 열면 밥 달라는 소리나 하는 그런 놈이 뭐가 좋다고. 부장이 매달리는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
김동만의 말이 길어질수록 은찬은 이 자식을 옥상 난간에서 밀어 버릴 것 같은 충동이 일었다.
“결혼하재.”
결국, 싸우게 된 원인을 털어놓았다. 솔직히 은찬은 싸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일방적인 이주한의 생각일 뿐이었던 거지.
“누가?”
“누구긴 누구야. 한 사람밖에 더 있냐? 아침에 병원 가서 다시 검사 싹 다 하고, 막창 배 터지게 먹고 회사로 오는 길에 갑자기 뜬금포로 결혼식 이야기를 꺼내잖아.”
“그래서?”
“그걸 왜 하냐? 난 지금이 딱 좋은데.”
은찬이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마자 동만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감탄을 금치 못했다.
“너에게 이주한 부장이란?”
그리고 이주한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은찬의 대답은 똑같았다.
“맛있는 거 많이 사 주고 나한테 잘해 주는 사람?”
“너한테 김동만이란?”
“집안일 해 주고 우리 애 맡아 줄 친구?”
은찬의 말이 끝나자마자 동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손뼉을 쳤다. 브라보란다.
“너의 정신세계에 내가 졌다. 불쌍하다, 불쌍해. 나도 불쌍하지만 부장님은 무슨 죄냐?”
“우리 형이 왜 불쌍하냐? 너는 또 왜?”
인상을 팍 쓴 은찬의 물음에 동만은 친절하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말이다. 서로 좋아서 사귀는 도중에 애가 생기면 결혼을 하는 게 일반적인 정석이거든? 일단 너는 애부터 가지고 사귀게 됐지만. 어쨌든 좋아하고 애도 있어. 그럼 그다음 순서가 뭘 거 같아?”
“뭔데?”
“결혼!”
“왜? 형한테 사실대로 말했으면 된 거잖아. 네가 애 봐 주기로 했고.”
“물론 가끔은 봐 줄 수 있지! 근데 이 마당에 내가 전적으로 육아를 책임지는 건 웃기잖아! 내가 애 아빠냐?”
“그래서 싫다는 거야? 우리 나비랑 까망이 버리는 거야?”
“어째 번지수가 잘못된 거 같다. 그거, 부장님한테 해야 할 발언 같은데?”
오늘따라 물 만난 물고기처럼 김동만은 말을 너무 잘했다. 은찬은 이대로 질 수 없었다.
“야, 나 사내 게시판 봤는데. 난리 났더라?”
“어?”
갑자기 주제를 사내 게시판으로 바꾸자 녀석의 표정이 굳어졌다. 무언가 찔리는 게 있는 것이다.
“구내식당에서 그 남자 누구야? 내가 아는 사람이야? 너 원래 게이였어? 그런 거야? 남자가 다리로 어디를 만졌는데? 어?”
은찬은 동그랗게 든 눈을 반짝거리며 동만을 뚫어지게 보았다. 그러자 지금까지 청산유수처럼 말하던 동만이 은찬의 시선을 쓱 피했다. 분명 뭔가가 있다. 그런 촉이 왔다.
“사내에 소문 쫘아아악 났던데. 나만 몰랐던 거네. 그렇지?”
“……아, 날씨 좋다. 너 여기 계속 있을 거지? 나 먼저 들어간다?”
날씨가 좋기는.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처럼 먹구름이 잔뜩 있다. 은찬의 추궁에 동만은 기지개를 켜며 상황을 회피하려 했다. 이런다고 그냥 넘길 은찬이 아니다. 돌아서는 녀석의 목에 걸린 사원증 줄을 급하게 잡아당겼다. 팽팽하게 당겨진 사원증 줄이 동만의 목을 팍 조였고 녀석의 짧고 굵은 외침이 옥상을 뒤흔들었다.
“야, 유은찬!”
“동만아. 너 연애해?”
“무슨 개소리야!”
“연애하지? 그렇지?”
“너 지금 나 죽이려고 작정했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동만이 극대노 했지만 은찬은 물러서지 않았다.
“에이, 이러지 말자. 우리 사이에 숨기고 그럴 필요 없잖아. 구내식당에서 그런 짓 할 정도면 게임 끝난 거지. 본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던데? 의외로 그런 면에서 대담하네, 우리 동만이.”
쑥맥일 줄 알았던 김동만이 은찬도 못 해 본 일을 벌였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야한 발장난을 치는 김동만이라, 상상이 되지 않았다.
“아니라고!”
“누군데? 엄청 잘생겼다고 적혀 있던데. 우리 형보다 더 괜찮은 남자? 돈 많아? 수인이야? 사람이야?”
“야! 사람 말하는 것 좀 새겨들어! 아니라고!”
급기야 동만은 벌게진 얼굴로 성질을 냈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은찬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아니야? 진짜?”
“진짜 아니야. 자세한 건 알 필요 없고! 미친놈 하나가 구내식당에서 미친 짓 한 거니까. 거기서 그냥 끝내자. 가뜩이나 너 때문에 내 평판이 바닥으로 떨어진 거 모르냐? 나 여자 좋아하고, 여자하고 사귈 거고, 여자하고 결혼할 거다! 그러니까 헛소리하지 말고 다음 주까지 내 소개팅 준비나 해!”
심하게 정색하는 걸 보니 진짠가 보다. 좋다가 말았네. 누구보다 김동만의 연애 소식에 큰 관심을 가진 은찬은 실망감이 얼굴에 다 드러났다. 두고두고 놀릴 기회가 날아간 셈이었다.
“너 아주 재미있어 죽겠지?”
“어떻게 알았어?”
“눈이 아주 초롱초롱해서 부담스러워 죽겠거든? 내 일 관심 끄고 네 일이나 신경 써! 지금 네 코가 석 자다. 알긴 아냐?”
“내가 왜?”
은찬의 간결한 대답에 동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담담한 표정으로 소리 없이 눈으로 욕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기껏 찾아왔건만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한 은찬은 동만에게 급 흥미가 떨어졌다. 그나저나 자고 일어났더니 배가 고팠다. 내려가서 편의점이나 갈까.
“이제 그 집에서 살 거야?”
바람에 펄럭이는 사원증을 다시 제자리에 넣으며 동만이 물었다.
“아니? 내 집 놔두고 그 집에서 왜 사냐?”
“거기 엄청 좋다며.”
“좋은 거하고 편한 거하고는 다르지.”
은찬은 담백하게 대답했다.
“결혼은? 생각이라도 해 봐.”
“뭐 하러? 난 지금이 좋다니까.”
“이 이기적인 자식아. 네 생각만 하지 말란 말이다. 너야 지금이 좋겠지. 그런데 배 속에 있는 녀석들은 어쩔 거냐? 버젓이 아빠가 있는데 엄마하고 아빠하고 따로 살면 정서적으로도 좀 그럴 거고. 애들을 위해서 같이 사는 편이 더…….”
“동만아.”
은찬은 진지하게 이어 가는 녀석의 말을 맥없이 확 끊어 버렸다. 순간 괜히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따라 잔소리가 더럽게 더 길었다.
“나 배고파. 편의점 갈까?”
“밥 먹었다며! 막창 배 터지게 먹었다며어!”
“자고 일어났더니 소화 다 됐나 봐. 이 안에 2인분 더 있잖아.”
은찬이 배를 만지작거리며 씨익 웃자 동만은 절규했다.
“왜 나만 보면 배고프다고 하는 건데! 더 짜증 나는 게 뭔 줄 알아? 이 와중에도 너한테 뭘 먹이면 좋을지 그거 생각하는 내 모습! 짜증 나, 짜증 나!”
자신이 은찬을 습관적으로 챙기고 있다는 걸 녀석은 아직도 모르는 것 같다. 자신에게 분노 하는 동만을 구경하던 중. 갑자기 행동을 멈춘 녀석이 주머니에서 잽싸게 핸드폰을 꺼냈다. 굳은 표정으로 핸드폰을 빤히 보던 녀석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야, 편의점은 이따 가자. 곽 과장이 빨리 오래.”
“나도?”
“아니, 나만. 계속 여기 있을 거야?”
시큰둥하게 주위를 둘러보니 둘 말고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잠이나 깨고 가겠다며 동만을 먼저 보냈지만 사실 은찬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좀 전에 생각난 건데 임신 사실을 부모님께 말하지 않은 게 떠올랐다. 일단 결혼보다 그게 먼저였다.
“복잡하네.”
뭐가 이렇게 복잡해. 사귀면 끝날 줄 알았더니 더 복잡한 것투성이다. 심란해진 은찬은 고민하는 것을 관두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일은 한가득 쌓여 있건만 태평하기 그지없었다. 원래 성격이 이랬다. 그래서 이주한 밑에 있을 때 일이 느리다고 욕을 참 많이 먹었다.
편의점 가서 뭐 먹을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누군가 옥상 문을 경쾌하게 열었다. 사내 직원은 누구나 이용 가능한 곳이기에 은찬은 신경 쓰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누군가 불쑥 은찬에게 인사를 건넸다. 무심코 돌아본 은찬은 이리한과 시선이 마주쳤다. 외부인인 그가 옥상에 있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그의 목에는 손님용 출입증이 걸려 있었다. 그는 오늘도 어김없이 밝아 보였다.
“아, 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그쵸?”
“뭐…….”
친근하게 다가온 그가 부담스러워 은찬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상하게 이 사람과는 뭔가 맞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이럴 땐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김동만 씨 여기 있다고 해서 왔는데. 못 봤어요?”
“방금까지 있었는데 내려갔어요.”
“아깝다. 마주칠 뻔했는데. 뭐 잘됐네요. 나 그쪽 한번 따로 만나려고 했거든요. 이렇게 만난 김에 잠깐 시간 괜찮죠?”
은찬은 대답 대신 전혀 괜찮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누가 봐도 싫다는 기색이 역력한데 이 남자는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잔뜩 날을 세운 은찬은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났다.
“저번에 듣기로 김동만 씨하고 사귄다고 하던데…….”
조심스럽게 꺼낸 주제에 은찬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게 이자와 무슨 상관인가 해서였다.
“그런데요?”
“김동만 씨하고 사귄 지 오래됐어요? 많이 좋아해요?”
“…….”
“유은찬 씨. 김동만 씨하고 이주한. 어떤 사이인지 알죠? 세 사람 사이 제가 낄 자격이 없다는 건 알지만…… 그게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뭐야, 왜 이래? 은찬은 진지하게 분위기를 잡는 이리한을 시큰둥하게 보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 자신을 이주한 섹파라고 당당히 소개하던 자였다.
혹시 아직 이주한과 동만이 사귀는 사이라고 믿는 건 아니겠지? 설마……. 회사에 이주한과 유은찬이 어떤 사이인지 파다하게 소문이 난 상태였다.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물어도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을 정말 모른다고?
“저기…….”
“솔직히 처음에는 이주한이 왜 김동만 같은 남자를 좋아하는 걸까. 미쳤나 했거든요. 눈이 낮아도 너무 낮아져서. 한때 섹파였던 입장으로 자존심이 상했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겪어 보니…… 보는 것만이 다가 아닌 거 알겠더라고요. 김동만 씨, 정말 남자답고 귀엽고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남자지 않아요? 뭐랄까, 사랑스럽다고 해야 하나?”
“…….”
행복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이리한의 말에 은찬은 귀를 후볐다. 뭔가 잘못들은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까 동만 씨가 인기가 많을 수밖에. 이주한이 사람 보는 눈이 있다니까. 그래서 말인데. 유은찬 씨, 김동만 씨하고 헤어져 주세요. 물론, 이주한한테도 이렇게 말할 생각이에요. 나 김동만 씨한테 관심 있거든요. 그것도 아주 많이.”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지 이리한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 그 자체였다. 김동만이 사랑스럽고 귀엽단다. 어디가 그토록 사랑스럽단 말이지? 도대체 어떤 점이? 뜬금없는 이리한의 고백은 은찬을 충격과 공포에 빠뜨렸다.
“화났어요? 이해해요. 나 같아도 화났을 테니까. 그런데 그쪽보다는 내가 더 김동만 씨한테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아요?”
딱딱하게 굳은 은찬의 표정을 오해한 모양이다. 어울리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애초에 김동만은 남자와 사귄다는 것 자체를 정색하는 놈이었고, 두 사람은 필요에 의한 계약 관계였을 뿐이니까. 은찬은 오해가 더 깊어지기 전에 사실대로 말해 줘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들었다.
“저기…….”
“그런다고 나 포기 안 해요.”
“네?”
은찬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리한은 단호하게 잘라 버렸다.
“안 된다고 말할 거잖아요. 그런다고 내가 포기할 놈이 아니거든. 그쪽이 포기해요. 김동만 씨 내가 더 사랑하고 아껴 줄 테니까. 나 원래 이런 놈 아니거든요? 이런 거 유치하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다 보니 나도 이렇게 되네요. 그래도 어떻게 해요. 김동만 씨가 그만큼 매력적이고 누가 훔쳐 갈까 봐 걱정되는데.”
뭐지? 이 병신은. 은찬은 김동만을 찬양하다시피 하는 이리한의 정신 상태가 의심됐다.
“동만이 어디가 좋으세요?”
“어디에 반했는지 묻는 거예요? 알면서. 상냥함? 배려?”
김동만이 배려심 깊고 상냥하던가? 같이 산 지 2년이 넘어가지만, 은찬의 기억 속에 김동만은 잔소리꾼이었다. 물론 끼니때마다 밥은 잘 챙겨 줬다. 혹시 이 사람도 밥에 넘어간 건가? 많은 뜻이 담긴 은찬의 시선에 이리한이 픽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야, 애인이면서 나보다 더 모르네. 김동만 씨가 얼마나 착하고 배려심이 깊은지. 거기다 귀엽고 깜찍하기까지 하잖아요. 안 그래요? 확 잡아먹어 버리고 싶게 만든다고 할까?”
이 남자와 대화를 하면 할수록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김동만과 은찬이 아는 김동만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귀엽고 깜찍하다니……. 은찬은 김동만이 말한 그 미친놈이 이자라는 것을 직감했다. 확실히 제정신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잠시 그의 위아래를 관찰하던 은찬은 결심을 굳혔다.
“저기요. 저 김동만하고 헤어졌고요.”
“네?”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이주한 씨하고 사귀는 건 저고요. 김동만하고는 아무런 관계없거든요. 그러니까…….”
눈을 동그랗게 뜬 이리한과 시선을 마주한 은찬은 말끝을 흐리며 싱긋 웃었다.
“동만이하고 잘해 보세요.”
김동만에게는 미안하지만 빠른 손절을 선택했다. 이런 병신하고 더 엮여 봤자 좋을 게 없다는 판단이 섰다.
“네? 진짜예요? 진짜?”
“이주한 씨한테 물어보시든가요. 지금 사귀는 사람이 누군지.”
처음에는 믿지 못하던 이리한의 표정이 서서히 변해 갔다. 입꼬리를 올린 그는 누가 봐도 좋아하는 티가 너무 났다.
“헤어졌다는 거죠? 확실한 거죠?”
“네.”
“진짜죠? 진짜, 진짜죠?”
“저는 김동만한테 눈곱만큼도 감정 없으니까. 안심하세요.”
설명까지 덧붙인 은찬의 친절함에 그는 환한 미소와 함께 신속히 퇴장했다.
“고마워요! 나중에 한턱낼게요!”
은찬은 눈 깜짝할 사이에 문 쪽으로 신나게 뛰어가는 이리한의 뒤통수에 손을 흔들었다. 굳이 한턱낼 필요까지는 없었다. 단지 사실을 말해 준 이가 은찬이라는 것을 김동만한테만 말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뭐가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만 엮이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은찬에게 친구를 팔았다는 죄책감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배가 고픈 한 마리의 고양이처럼 본능적으로 편의점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