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유은찬은 영락없는 고양이였다. 뭐든 잘 먹는다는 말과 달리 뜨거운 건 잘 먹지 못했고 예민하게 가리는 것도 많았다. 요즘 주한은 유은찬을 하나씩 알아 가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지금껏 많은 연애 경험을 해 봤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딱 꼬집어서 말할 수 없지만 느낌이 그랬다.
지금 주한의 기분은 최고로 좋았다. 드디어 김동만과 헤어졌다는 소식을 방금 들었기 때문이다. 주한이 잠시 사내 게시판을 관리하는 부서에 다녀올 동안 김동만과 관계를 정리했단다. 이제 유은찬은 완전히 이주한의 것이었다.
“안 먹어요?”
은찬이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주한의 시선이 녀석의 빈 접시로 향했다. 조금 전까지 핏물이 뚝뚝 흐르는 스테이크가 있던 자리는 깨끗하게 비워진 상태였다.
“잘 먹네? 더 먹을래?”
“여기 비싼 데죠? 입에 넣자마자 고기가 사르르 녹는 거 있죠. 더 먹어도 돼요?”
유은찬은 알면 알수록 신기한 녀석이었다. 고양이 수인 주제에 비린내가 난다며 생선은 싫어하더니 고기는 또 거의 익지 않은 레어가 취향이란다. 표범 수인인 주한도 저 정도 날것은 먹지 않는데 말이다. 거기다 저번부터 느낀 거지만 먹성도 끝내주게 좋았다.
주한은 제 접시에 있는 고기를 반쯤 덜어 준 뒤 똑같은 거로 하나 더 주문했다.
“맛있게 먹어 주니까 좋네.”
“좀 부끄러운데. 스테이크를 이렇게 먹는 사람 없죠?”
아마도 없을 것이다. 주한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지만 유은찬을 배려해 내색하지 않았다.
“우리 밥 먹으러 온 거잖아. 배고프면 더 주문할 수 있는 거지. 먹고 싶은 만큼 실컷 먹어. 아, 오늘 퇴근하고 같이 병원 가기로 한 거 알지?”
고기라면 늘 지겹게 먹고 있었기에 점심까지 먹고 싶지는 않았다. 유은찬이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른 주한은 물 한 모금으로 입을 적셨다. 그런데 병원이라는 단어에 유은찬의 얼굴이 또 어두워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녀석을 살피던 주한은 뭔가가 있다고 짐작했다. 아침에도 이랬다. 당장 병원으로 가서 검사를 받자고 말했지만 유은찬은 한사코 거절하며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밥을 많이 먹어서 나온 똥배라고 주장했지만 저건 누가 봐도 똥배는 아니다.
적당한 근육질 체질 녀석은 지금 비정상적으로 배만 나온 상태였다. 생각해 보니 얼마 전보다 배가 더 나온 것 같기도 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주한이 조심스럽게 은찬을 달래기 시작했다.
“병원 가기 싫어? 왜, 무서워? 큰 병이라도 생겼을까 봐? 아니면 병원비 때문에? 내가 내준다니까. 내가 걱정돼서 그래. 저번보다 더 나온 것 같기도 하고. 이참에 괜찮은 건지 같이 확인하러 가자. 응?”
“괜찮은데……. 진짜 괜찮다니까요? 얼마 전에 병원 갔어요, 동만이랑.”
그놈의 김동만 왜 안 나오나 했다. 저도 모르게 발끈한 주한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 와중에도 김동만을 질투하는 자신이 웃겼지만 기분 나쁜 건 어쩔 수 없었다.
“어디, 무슨 병원 갔는데. 나는 서울에서 제일 크고 좋은 병원에 갈 건데.”
“뭐 하러 그래요. 돈 아깝게. 진짜 괜찮은데.”
“내가 안 괜찮아. 너 아프면 내가 다 고쳐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가! 가는 거다?”
주한이 고집스럽게 밀어붙이자 은찬은 수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빈 접시를 조용히 응시했다. 지금껏 이런저런 말을 재잘거리던 녀석이 입을 꾹 다물고 있자 분위기는 급속도로 무거워졌다. 유은찬 성격을 아는 주한은 슬슬 불안해졌다.
정말 어디 아픈 건가. 그러고 보니 죽어도 김동만하고 못 헤어진다고 하던 녀석이 하루아침에 말을 바꿨다는 것부터 이상했다. 불치병에 걸려 몇 개월 남지 않은 시한부 삶. 그런 건 아니겠지?
순간적으로 주한의 머릿속은 그런 상상으로 가득 찼다. 불치병에 걸린 연인을 사랑한 남자. 그리고 홀로 남아 그 연인을 죽을 때까지 가슴에 품고 사는 남자가 자신이 될지도 모른다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주한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유은찬. 너 혹시…….”
주한은 자신을 똘망똘망하게 보는 은찬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혹시 그렇다면 내가 널 책임 져 줄게. 무슨 일이 있어도 고쳐 줄 거니까. 주한의 비장한 표정에 은찬도 뭔가 고민하듯 말문을 열었다.
“저기, 부장님.”
“형. 둘이 있을 땐 형이라고 하랬잖아.”
“주한…… 형.”
유은찬이 막 입을 열었을 때 때마침 스테이크가 나왔다. 녀석은 그 스테이크에 집중한 채 말을 이었다.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유은찬, 거리감 느껴지게 왜 이래? 너 그 자식한테도 이랬어? 아니잖아. 이제 네 애인은 그 자식이 아니고 나야. 그러니까 일일이 물어보지 말고 그냥 말해.”
아직까지 유은찬에게 김동만의 흔적은 짙게 남아 있었다. 방심하면 그 녀석 이름이 튀어나와 주한을 발끈하게 만들었다.
“아기 좋아해요?”
난데없는 주제에 주한은 순간 당황했다. 아기? 웬 아기?
“왜?”
“아니, 뭐. 그냥…… 좋아하시는가 해서. 좋아해요?”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그게 중요해?”
“지금 생각해 보면 되잖아요. 대답 못 하는 거 보니까 별로구나? 그렇죠? 아기 안 좋아하죠?”
“굳이 따지자면 싫어하는 편이랄까.”
“아…… 그렇구나.”
갑작스러운 질문에 조금 놀랐지만 시무룩한 은찬의 반응을 보고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남자와 남자가 사귄다는 것 자체가 불안한 것이다. 아무리 사랑해도 그들 사이에 아기는 생길 수 없으니까.
할아버지가 매번 증손주 타령으로 주한을 귀찮게 하지만 딱히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유은찬과 진지하게 오래 갈 생각이라면 확실하게 정리해 두는 편이 좋을 것이다. 새롭게 시작하려는 지금이 적절한 시기 같았다.
“유은찬.”
“…….”
좀 전과 달리 뭔가 기분 나빠 보이는 은찬은 시큰둥했다.
“나 아기 안 좋아해. 시끄럽고 귀찮아서 싫어. 결혼해도 아기는 안 가질 생각이었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그럴 일 없으니까.”
“그럴 일이 뭔데요?”
어째 유은찬 목소리에 날이 서 있는 느낌이다.
“너랑 사귀다가 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는 일. 뭐 그런 거?”
주한의 말을 끝으로 그들 사이에 묘한 정적이 맴돌았다. 긴장한 주한은 자신이 뭔가 잘못 말한 건가 싶어 곱씹어 봤지만, 딱히 이상한 점을 찾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딱 하나만 더 물어볼게요.”
“…….”
유은찬은 정말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고 주한은 왠지 모를 긴장감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만약에 누가 지금 부장님 애를 가졌다 쳐요. 그럼 기분이 어떨 거 같아요?”
“……누가?”
“누구든. 지금껏 부장님하고 잤던 상대 중 하나?”
그럴 일은 절대 없다. 철저하게 피임도 했고 반 이상이 남자였다. 이것은 유은찬이 자신을 시험하는 것으로 생각한 주한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내 애가 맞는지부터 확인해야지. 그리고 나 애 싫어한다니까. 우리 이 이야기 그만하고 너 배, 그거 좀 말해 봐. 언제부터 그랬어? 오래됐어? 갑자기 그런 거야? 속은 괜찮고?”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주한의 관심사는 오롯이 유은찬에 관련된 것뿐. 전체 건강 검진을 받아 봤으면 좋겠지만, 시간상 그게 안 되니 일단 복부 MRI만 찍어 보자고 말하려던 중이었다.
쾅! 소리와 함께 스테이크 정 중앙에 포크가 살벌하게 꽂혔다. 묵묵히 앉아 듣고 있던 은찬이 꽂은 것이다. 다행히 접시는 깨지지 않았지만, 깜짝 놀란 주한을 비롯한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은찬에게 집중됐다.
“너 왜 그래?”
눈을 동그랗게 뜬 주한이 다그치듯 묻자 은찬은 신경질적으로 짧게 혀를 찼다.
“입맛이 뚝 떨어져서요. 저 먼저 가 볼게요. 잘 먹었습니다, 부장님.”
냉기가 흐르는 말투와 태도. 좀 전과 달라진 분위기에 주한은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조금 전까지 눈을 반짝이며 고기를 먹던 귀여운 고양이는 어디 가고 다시 사나운 고양이가 보였다. 벌떡 일어나 자신을 지나가는 녀석의 팔을 황급히 붙잡았다.
“유은찬.”
은찬은 그 팔을 차갑게 뿌리치며 담담하게 통보했다.
“마음 바뀌었어요. 우리 사귀는 거, 그거 없었던 일로 해요.”
“뭐? 왜?”
“그냥요.”
그냥. 이 한마디만 남긴 채 은찬은 서둘러 가게를 나섰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알다가도 모를 유은찬의 변덕에 주한은 어안이 벙벙했다. 홀로 남겨진 그가 정신을 차리고 뒤쫓아 갔을 때 녀석은 택시를 타고 있었다.
“야, 유은찬!”
있는 힘껏 뛰어갔지만 출발하는 택시를 따라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서둘러 핸드폰을 꺼낸 이주한에게 유은찬의 메시지 하나가 날아왔다.
[몸이 안 좋아서 반차 쓰겠습니다.]
반차 통보에 즉시 통화 버튼을 눌러 봤지만 받지 않았다.
[왜 이러는 건데? 내가 뭐 잘못했어?]
[유은찬!]
[어디가 안 좋아? 많이 아파?]
연달아 메시지를 보내도 녀석은 읽고 씹을 뿐 답장이 없다.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몇 분 전까지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면 지금은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다.
“뭔데, 왜 그러는지 말을 해야 알지!”
주한은 길 한복판에서 버럭 소리치며 그 자리에 없는 유은찬에게 따졌다. 다른 사람보다 특히 고양이 수인은 너무 다루기 힘든 존재라는 걸 최근 들어 몸소 체험하고 있는 그였다.
***
현관문을 열자마자 은찬은 부엌으로 직진했다. 냉동실에 가득한 아이스크림 한 통을 들고 소파에 앉아 아이스크림 신경질적으로 퍼먹었지만 그래도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뭐? 아기를 싫어해? 시끄럽고 귀찮다고?”
갑작스럽게 꺼낸 아기 이야기에 그렇게 정색하며 말할 필요는 없었다고 본다. 솔직히 그냥 임신했다고 밝힐 수도 있었다. 물론 믿지 못하겠지만, 병원에 가서 사실을 확인시켜 주면 간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전에 아기에 대한 그의 속마음이 궁금했다. 물론 그렇게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허구한 날 애인을 갈아 치워 가며 섹스나 하던 놈에게 부성애 따위 있을 리는 없을 테니까.
“내가 미쳤지. 너 같은 놈은 평생 혼자 살다가 늙어 죽어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주한과 행복한 나날을 꿈꿨지만, 지금은 진심으로 저주를 퍼부었다. 그 사이에도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핸드폰은 끊임없이 진동 중이었다. 시끄럽고 귀찮아진 은찬은 단호하게 핸드폰 전원을 껐다. 그리고 잠잠해진 핸드폰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너는 그냥 내 몸이 목적이지? 섹스에 미친 새끼.”
생각해 보니 그렇다. 개다래 술을 마신 것도 아니고 발정기도 아니면서 기회만 있으면 치근덕거렸다. 설마 이런 게 작업의 일종인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섹파 타령하더니 어느 날 갑자기 잘해 준 것도 이상하고. 비싸고 맛있는 것을 사 줄 때부터 의심했어야 했나?
모처럼 이주한에게 순수한 마음으로 끌리고 있던 은찬은 실망감이 밀려왔다.
“너희 이제 어쩌냐.”
부른 배를 어루만지며 던진 혼잣말이 조용한 거실에 울렸다. 일단 화가 나서 무턱대고 집으로 오긴 했는데 막상 오니 할 게 없다. 다 먹은 텅 빈 아이스크림 통을 그대로 내버려 둔 채 은찬은 소파에 벌러덩 누웠다.
욱하는 성격에 그 자리에서 이주한에게 헤어지자 말한 걸 동만이 알면 뭐라고 할까. 안 봐도 훤했다. 분명히 잔소리를 퍼부을 거다. 뭐가 이렇게 귀찮은 게 많은지. 연애도 애도. 만사가 귀찮아진 은찬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배도 부르고 디저트로 아이스크림 한 통을 다 먹었더니 슬슬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반차를 썼으니 오후는 자유의 몸이었다. 망설일 것 없이 편안한 자세로 고쳐 누운 은찬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이주한이 얼마나 애를 태우고 있는지 따위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거실은 어두웠다. 은찬의 단잠을 깨운 건 현관의 도어 록 소리였다. 조용히 현관문이 열리더니 지쳐 보이는 동만이 보였다. 신발을 벗고 터벅터벅 안으로 들어온 녀석은 은찬이 있는 걸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거실 불을 켜자마자 소파에 누워 있는 은찬을 발견하고 꽥 소리를 질렀다.
“아악! 씨발! 놀랬잖아! 있으면 불이라도 켜 놓고 있던가!”
“자고 이제 막 일어났어.”
은찬은 눈을 비비며 상체를 일으켰다.
“배고파. 밥 줘.”
“이게 입만 열면 밥 달라네? 야, 너 오늘 왜 쨌어. 부장님이랑 싸웠냐?”
은찬을 발견하자마자 동만은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옆에 엉덩이를 내렸다.
“이따가 말할게. 밥 줘.”
“이따 가는 무슨! 너 때문에 내가 오늘 얼마나 시달린 줄 아냐? 네가 이런 식으로 비련의 주인공처럼 잠적하면 또 이상한 소문이 날 수밖에 없다고! 대체 핸드폰은 왜 꺼 놓은 거냐고!”
예상대로 김동만은 오자마자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은찬은 한 귀로 흘려듣고 심드렁하게 머리를 벅벅 긁었다.
“밥 줘. 배고파.”
“왜 싸운 건데? 이유나 알자. 오늘 너희 형이 사무실 분위기를 얼마나 즐겁게 해 주시는지 숨이 막혀 죽을 뻔했으니까. 나도 알 권리는 있지?”
오늘 하루 이주한 때문에 힘들었다는 김동만의 절규에 은찬은 별일 아닌 듯 툭 던졌다.
“형은 무슨. 나 오늘 이주한 그 개새끼하고 끝냈어.”
“뭐?”
“끝냈다고. 아무 사이 아니라고.”
그대로 굳어 버린 동만은 입을 떡 벌렸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 못 하는 동만에게 은찬은 친절히 다시 설명했다.
“내가 그 새끼하고 다시 만나면 사람이 아니다.”
“너 사람 아니잖아.”
“사람이거든?”
“부장님에서 형이랬다가 이제는 또 개새끼냐? 나 좀 헷갈리게 하지 말아 줄래? 호칭이 너무 급속도로 바뀌는 거 아니냐? 지금 너희 사랑싸움하냐?”
“사랑싸움 아니거든! 야, 그 자식이 뭐라는 줄 아냐? 아기는 시끄럽고 귀찮아서 싫단다! 얼마나 정색하던지 네가 그 표정 봤어야 해!”
앞뒤 다 잘라 낸 은찬의 설명에 동만은 급속도로 흥분하기 시작했다. 얼굴이 울긋불긋 변한 녀석은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이주한을 씹어 댔다.
“뭐? 시끄럽고 귀찮아? 진짜 그랬다고?”
“너도 열받지? 나 들고 있던 나이프로 찌를 뻔했다니까!”
“확 찔러 버리지! 이런 개자식을 봤나! 우리 나비하고 까망이가 귀찮아서 싫어? 하, 됐다 그래! 너 그 자식하고 상종도 하지 마! 너랑 헤어지라고 나 협박할 때부터 이상하더라! 이런 양아치 같은 새끼를 봤나!”
“그치? 양아치지? 내 몸이 목적인 게 분명해! 우리 애들 태어나면 거들떠도 안 볼걸? 나한테 질리면 버리고 갈 놈이야, 그 새끼는!”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진짜 좆같은 새끼네. 아오. 내일부터 어떻게 얼굴 보면서 일하냐? 그냥 눈 딱 감고 한 대 쳐? 유은찬! 내가 복수해 줘?”
“역시 김동만밖에 없다! 동만아, 네가 최고야!”
역시 이주한은 이렇게 씹어야 제맛이라니까. 김동만의 맞장구에 은찬은 한결 기분이 풀렸다. 하지만 동만의 텐션은 급격히 바닥을 쳤다.
녀석이 오늘따라 이상해 보였다. 침울한 표정으로 바닥을 응시하던 동만은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달싹였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쉽게 꺼내지 못했다. 잠시 뒤 어렵게 말문을 연 녀석의 입에서는 뜻밖의 말이 나왔다.
“유은찬.”
“어? 왜?”
“내 거기가…… 많이 작냐?”
“…….”
은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김동만의 다리 사이로 향했고, 잠시 둘 사이에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솔직히 크지는 않지. 이주한과 비교한다면 많이 작은 편에 속했다. 은찬은 미련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동만의 시선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었다. 그것이 모솔인 김동만의 마지막 자존심임을 알기에.
“갑자기 그건 왜? 누가 너 고추 작다고 그래? 누가?”
“작은지 안 작은지 그것만 말해. 나 정도면 평균이지 않냐?”
아니. 은찬의 기억상 김동만의 크기는 평균에 못 미쳤다. 양심도 없는 새끼. 그게 평균이면 이주한은 코끼리 고추냐?
“몰라. 네 고추 본 지 오래돼서 생각도 안 나.”
어차피 사실대로 말해 주지 못할 거면 회피가 나았다. 김동만답지 않게 갑자기 왜 고추 타령일까. 은찬은 진지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는 동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디 아픈 건가? 아니면 진짜 누가 뭐라고 한 건가? 어쨌든 은찬은 배가 고팠다.
“김동만. 밥 달라니까?”
“아, 쫌! 정신 사납게 하지 말고 있어 봐! 정 배고프면 배달시키든가!”
“배달시켜? 니가 쏘는 거지?”
째려보는 동만의 시선에 은찬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비싼 거 안 시킬게. 소박하게 우리 삼겹살 구이 먹을까?”
“니 애인한테 사 달라고 하지? 잘나신 형 있잖아.”
기습적으로 날아온 김동만의 빈정거림에 은찬이 입을 삐죽 내밀며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주한 그 새끼 이야기 한 번만 더 꺼 내봐. 너 잘 때 고추 사진 찍어서 사내 게시판에 올려버릴 테니까.”
말도 안 되는 협박이었지만 김동만에게 먹힌 모양이다. 조용히 고개를 떨군 김동만의 표정이 어둡다. 핸드폰으로 저녁 메뉴를 고르던 은찬은 그런 동만을 소리 없이 힐끔거렸다. 이럴 놈이 아닌데. 평소라면 미친놈이라며 길길이 화를 내야 정상이었다. 은찬은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왜 그래. 야, 진짜 어디 아파?”
“나 진지하게 생각해 봤는데…….”
동만이 진지하게 말을 이어갈 동안 은찬은 재빨리 삼겹살 구이 4인분 주문을 하고서 녀석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척했다.
“수술할까?”
또 그 주제인가. 김동만은 애인을 못 사귀는 이유가 얼굴 때문이라 믿고 있었다. 물론 아니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은찬이 보기에는 딴 곳에 문제가 더 컸다. 고양이를 너무 좋아하는 것도 문제였고 남자는 괜찮은데 여자와 사적으로 만나면 얼어 버리는 체질이었다.
“어디? 눈하고 코? 진짜 하게?”
“아니, 여기.”
김동만의 검지가 아래를 가리켰다. 자연스럽게 그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이 따라간 은찬은 동만을 아련하게 응시했다.
“왜……? 굳이?”
“일단 그 전에 사이즈 좀 재 봐야겠다. 우리나라 성인 남자 평균 사이즈가 10에서 11이라잖아. 기준 미달이면 수술 고려해야지.”
“얼굴이 아니라?”
“보이는 게 다가 아니잖아. 이건 남자의 자존심 문제라고. 야! 자 있냐?”
동만은 갑자기 자를 찾기 시작했다. 집에 자가 있을 턱이 없었기에 벌떡 일어난 녀석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뭐하냐?”
“자 어플 다운받으려고. 야, 내 거 길이 좀 재 줘.”
은찬에게 핸드폰을 던진 뒤 동만은 신속히 바지를 발목까지 내렸다. 몸에 착 달라붙은 붉은색 드로어즈 팬티 색깔이 너무 튀었다.
녀석은 은찬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팬티를 확 내렸다. 가운데가 영 볼품없이 초라한 것이 대놓고 관찰하니 작긴 작았다. 졸지에 친구의 쪼그라든 고추를 눈앞에서 관찰하게 된 은찬의 기분은 참담했다. 아무래도 김동만이 미친 것 같다.
“야, 방에 들어가서 혼자서 해.”
“오차가 생길까 봐 그런 거지! 야. 어때? 작아?”
아무리 같이 목욕탕도 간 사이지만 대놓고 성기 사이즈를 재 달라니. 얼굴이 구긴 은찬은 동만이 간과한 사실을 하나 알려 주었다.
“발기해야지 잴 거 아니냐. 내 앞에서 자위할 생각 아니면 조용히 팬티 올리시지?”
“아……. 맞다.”
“동만아. 내가 진심으로 걱정돼서 하는 소리인데. 너 혹시 노출증 생겼어? 남 앞에서 막 그거 내놓고 싶고 그래?”
은찬의 걱정이 가득 담긴 말과 시선에 동만은 잽싸게 팬티를 입으며 버럭 소리쳤다.
“아니거든! 변태는 그 새……! 하아, 됐다. 내가 그 개새끼 때문에 잠시 돌았나 보다. 애 가진 놈한테 태교는 못 할망정 무슨 짓을 한 거야. 밥은? 시켰어?”
뭔지는 모르겠지만 심란했던 김동만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았다. 언제나 그랬듯 은찬은 딱히 김동만의 고민에 관심이 없었다. 제 일만 아니면 된 거다.
“어, 시켰어.”
씨익 웃으며 동만에게 주문했다.
“나 아이스크림 좀.”
“벌써 한 통 처먹었구먼. 뭘 또 먹어! 밥 먹기 전에 안 돼! 그리고 너, 손 씻었어? 오자마자 또 소파에 누워 잤지?”
동만은 테이블 위에 놓인 빈 아이스크림 통을 들고 부엌으로 향하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녀석은 은찬이 어지럽힌 부엌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빨간색 드로어즈 팬티와 하얀색 와이셔츠가 언밸런스 하지만 팬티 한 장만 걸치고 살던 사이라서 그런지 별 감흥도 없었다.
“먹은 거는 휴지통에 좀 버려라! 버려!”
“동만아, 나 물 좀.”
“물은 니가 떠다 먹어!”
말은 저래도 좀 있으면 컵에 물을 떠다 주는 녀석이다. 다시 소파와 한 몸이 된 은찬은 배달시킨 삼겹살이 오기만을 이제나저제나 기다렸다. 좀 전에 켠 핸드폰에 쌓인 이주한의 메시지와 부재중 전화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아……. 배고파, 배고파. 동만아, 먹을 거 없어?”
“기다려. 오겠지.”
“야, 김동만. 웬만하면 팬티 색깔 좀 바꿔. 그게 뭐냐. 너무 튀잖아.”
“빨간색이 어때서! 이거 행운의 색깔이거든?”
“촌스러워.”
“눈깔이 썩었네. 이거 정열적인 색이거든!”
“정열이 다 뒈졌다. 연애도 못 해 본 놈이 무슨 정열.”
“죽을래?”
동만과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다. 띵동. 벨 소리가 울리자마자 벌떡 일어나 앉은 은찬은 동만을 불렀다.
“동만아, 왔다! 카드! 계산!”
언제나 그랬듯 배달 음식을 받아 오는 쪽은 김동만이었고 세팅 담당도 녀석이었다. 은찬은 앉아서 흘리지 않고 먹어 주면 끝이었다. 동만은 소파에 앉아 눈을 반짝이고 있는 은찬을 흘기며 현관으로 향했다. 수많은 경험으로 배달 기사겠거니 생각하고 인터폰 확인도 생략한 채였다.
삼겹살 구이를 먹을 생각에 입맛을 다시고 있던 은찬은 빨리 돌아오지 않는 동만 때문에 조바심이 났다. 그 순간 열린 문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유은찬. 안에 있죠?”
“저기요, 부장님. 말도 없이 이렇게 오시는 거 좀 그런데요.”
단번에 이주한의 목소리라는 것을 눈치챈 은찬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주한이 이 시간에 왜 왔을까? 나 때문에? 그것 말고는 이유가 없었다. 괜히 주변을 서성이던 은찬은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김동만과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이주한을 훔쳐보았다.
무척 화가 난 듯한 그는 김동만의 아래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은찬은 그제야 동만이 팬티와 와이셔츠 차림이라는 것을 인지했다. 이주한이 왜 화가 났는지 알 것 같았다.
“아무래도 내가 정확한 타이밍에 온 것 같은데. 좋은 말 할 때 비켜. 여기서 소란스럽게 하고 싶지 않으면.”
분노한 이주한은 본성을 숨기지 못하고 표출했다. 동공이 동물처럼 변한 그가 김동만을 향해 뾰족한 송곳니를 보이며 으르렁거렸다. 늘 복싱으로 단련된 몸이라고 으스대던 김동만은 이주한의 눈길 한 번에 끽소리도 못 내고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성큼성큼 거실로 들어선 이주한은 덩그러니 서 있는 은찬을 향해 돌진했다.
“유은찬!”
성난 이주한의 포효에 은찬은 시큰둥하게 반응하며 가자미눈을 하고 따라 들어오는 동만과 시선이 부딪쳤다. 이 자식 왜 이러느냐는 동만의 눈짓에 은찬의 조용히 아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지만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맞다. 너 눈치 없는 김동만이지.
“어디서부터 따질까.”
이주한의 살벌한 기세에도 은찬은 전혀 주눅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치켜세우고 먼저 그에게 따졌다.
“뭘요?”
“적어도 무슨 이유로 화가 났는지 말해 줘야 알 거 아니야!”
“없어요. 나 화 안 났어요.”
“났잖아! 그러니까 사귀는 거 없던 걸로 하자는 거잖아! 너 사귀는 게 애들 장난 같아? 내가 어떤 마음으로 너한테 사귀자고 했는지 모르겠어?”
“모르겠는데요?”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열변을 토하는 이주한의 모습과는 반대로 은찬은 무시하듯 낭창하게 받아쳤다. 알 게 뭐야. 그는 아이를 싫어했고 은찬은 아이를 가진 상태였다. 서로 추구하는 바가 다르니 헤어져야지. 다 끝난 마당에 이제 와서 이러는 이주한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저 자식하고 사귀는 거 알면서도 내가 매달렸잖아! 자존심 다 구기고, 너한테!”
“솔직히 말해 봐요. 그냥 나하고 자고 싶어서 매달린 척한 거죠?”
“너 내가 그런 놈으로밖에 안 보여?”
이주한은 눈을 부릅뜨고 따졌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머리 위로 표범 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다고 기죽을 은찬이 아니다. 은찬도 고양이 귀를 내놓고 이를 세웠다.
“네! 충분히 그런 놈으로 보이거든요! 차에 콘돔을 박스째로 가지고 다녔으면서! 내가 야근할 동안 애인 바꿔 가며 호텔 들락날락하던 사람이 누군데!”
치사하지만 시시콜콜한 지난 일을 들먹였다. 유은찬에게 잔업을 떠넘기고 유유히 성욕을 즐기러 떠난 개자식이 이주한이었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은찬의 외침에 움찔한 주한은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
“애인 아니야! 나 지금까지 특정적으로 사람 사귄 적 없어!”
“쓰레기.”
순간 조용히 지켜보던 동만의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당연히 이주한의 표정이 좋을 리 없었다. 이를 세워 으르렁거리자 김동만은 머쓱하게 웃으며 한걸음 물러났다.
“대신 섹파 많았잖아요. 좋았겠다. 섹파 많아서. 잘됐네. 나처럼 귀찮고 덜떨어진 놈 말고 취향 맞는 섹파 찾아가세요. 난요! 적어도 부장님처럼은 안 살았거든요?”
“지랄.”
은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동만의 어이없다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눈을 가늘게 뜬 은찬은 웃음을 참고 있는 동만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무거운 정적 속에서 녀석은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지랄을 한다. 지랄을 해. 누가 들으면 엄청 깨끗한 줄 알겠네. 발정날 때마다 기어 나가서 새벽에 들어온 놈이. 내가 보기에는 도긴개긴이야. 둘 다 끼리끼리 만난 거지 뭐.”
우정이고 뭐고 간에 줘 패 버릴까? 내적 갈등을 하던 은찬은 애써 동만을 외면했다. 김동만은 나중에 생각할 일이고 일단 앞에 있는 이주한이 먼저였다. 눈치 없는 저 자식 덕분에 상황이 묘하게 됐다.
“발정 날 때마다 외박했다?”
“본능이니까.”
“하……!”
“그쪽도 섹파 많았잖아요. 적어도 난 주기적으로 하는 섹파는 없었거든요? 발정 날 때만 꼴리니까 한 거지!”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이주한이 크게 역정을 냈지만, 은찬은 당당하게 턱을 치켜세웠다. 그땐 이주한과 아무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화를 냈다가 한숨을 내쉬던 이주한은 잠시 뒤 가만히 서 있던 김동만을 몰아붙였다.
“이 자식도 그런 놈 중 하나지?”
말도 안 돼. 차라리 고자가 되고 말지. 죽어도. 절대로 김동만과 그럴 일은 없었다. 은찬은 망설임 없이 소리쳤다.
“미쳤어요?”
“미쳤어요?”
동시에 김동만도 버럭 소리치며 이주한에게 따졌다. 두 사람의 강한 부정에 이주한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 동만의 팬티를 의식한 이주한은 은찬에게 확인하듯 물었다.
“둘이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고.”
“네,”
“키스도 손도 잡은 사이가 아니라고.”
“네.”
하늘에 맹세코. 배 속에 있는 녀석들을 걸고 맹세할 수 있다. 은찬은 김동만의 나체를 봐도 고추가 서지 않았다. 반대로 지금 이주한의 나체를 본다면 금방이라도 풀 발기가 될 것이다.
“저 새끼는 팬티 차림으로 있고 너는 와이셔츠를 풀어헤치고 있는데. 내가 지금 그걸 믿길 바라?”
그러고 보니 답답해서 와이셔츠 단추를 반쯤 푼 게 생각났다. 팬티 차림의 김동만과 와이셔츠가 풀어진 유은찬. 이주한이 오해할 만했다. 머리를 벅벅 긁으며 은찬은 귀찮은 투로 말을 꺼냈다.
“오버 하지 말죠? 우리 아무 사이 아니잖아요.”
“난 아직 안 끝냈어!”
“난 끝냈고. 더는 할 말 없어요. 그리고! 자꾸 저 자식이랑 나랑 뭐 했다는 식으로 돌려서 말하지 말래요? 섹스했냐고 묻는 거잖아요! 안 했거든요?”
가뜩이나 배고픈 마당에 이주한의 행동은 짜증을 유발했다.
“그럼 뭐 했는데! 나 오기 전까지 뭐 했냐고!”
진짜 사람 귀찮게 하네. 인상을 팍 쓴 은찬도 목소리를 높였다.
“저 자식 고추 봤다! 됐어요?”
“뭐?”
“야, 그걸 말하면 어떻게 해!”
벙해진 이주한과 당황한 김동만. 배고픔에 예민해진 은찬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김동만 고추만 봤다고요. 만지지 않고 보기만 했다고!”
잠시 거실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김동만의 시선은 갈피를 잡지 못했고 이주한은 그런 김동만의 목을 물어뜯을 듯이 노려보았다. 깊은 분노가 느껴지는 육식 동물의 으르렁거림이 거실에 낮게 깔렸다.
그때였다. 때마침 ‘띵동’ 울리는 벨 소리에 은찬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어? 삼겹살 왔나 보다!”
은찬은 굳어 버린 동만의 손에서 카드를 빼앗아 신속하게 현관으로 달려갔다. 예상대로 배달 기사였고 신속하게 결제를 마친 은찬은 양손 가득 봉지를 들고 나타나 환하게 웃었다.
“밥 왔으니까. 일단 밥 먹고 합시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싸한 반응 속에서 은찬 혼자만 삼겹살 구이를 먹을 생각에 신이 난 상태였다. 식탁에 앉아 완벽하게 세팅을 끝낸 은찬은 노릇하게 구워진 삼겹살을 보고 흥분했다. 물론 두 사람은 여전히 거실에서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김동만. 안 먹을 거냐? 그럼 나 혼자 다 먹는다?”
뜨거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본격적으로 쌈을 싸서 먹었다. 오랜 기다린 보람이 느껴지는 맛이다.
“미친놈. 이 상황에 그게 넘어가냐?”
“누구보고 미친놈이라는 거야?”
유은찬이 밥 먹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김동만의 핀잔에 이주한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따졌다. 두 남자의 말다툼이 시작됐다.
“와…… 이 와중에 편드네. 저 자식이 그렇게 좋으세요? 이 꼴을 보고도?”
“그쪽이야말로 헤어졌으면서 구질구질하게 이러는 이유가 뭐야? 미련이라도 남았어?”
“미련? 내가 찼거든요! 야, 유은찬! 내가 너 찬 걸로 말하라고 했지!”
김동만이 버럭 소리 지르자 은찬은 빠르게 인정을 했다.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가벼운 어투로.
“아, 맞다. 내가 차였어요. 김동만한테.”
“봤죠? 내가 차인 게 아니라. 찼다고! 그러니까 나 저 자식한테 미련이고 뭐고 없거든요?”
동만은 자신이 은찬을 찼다는 것을 강조하며 흡족해했다. 그럼에도 이주한의 굳은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찼든 차였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은데. 헤어졌으면 끝난 거지. 왜 거기를 보여 줘! 변태야?”
“변태? 내가 살다 살다가 변태라는 소리 처음 듣거든요! 변태는 당신이나 저 자식이고! 나는 평범한 인간이고! 와…… 아니, 친구끼리 그것 좀 보여 줄 수도 있는 거지! 그게 눈을 부라리면서 따질 일인가? 그게 무슨 범죈가!”
“누구보고 저 자식이래? 김동만 씨.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것 같은데. 나 지금 엄연히 유은찬 애인으로 여기에 온 거야. 내 애인 그런 식으로 취급하지 마!”
이주한은 매서운 눈길로 동만의 위아래를 훑으며 경고했다.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동만은 평온하게 밥을 먹고 있는 은찬에게 따지듯 물었다.
“야, 끝났다며! 아니야?”
“끝났어. 근데 이 집 맛있다. 진짜 안 먹을 거야?”
“이쪽은 아니라잖아! 확실하게 끝난 거 맞냐고! 야, 이 미친 새끼야! 그만 좀 처먹고 집중 좀 해!”
이 사태를 구경꾼 모드로 지켜보고 있는 유은찬에게 울컥한 동만이 버럭 화를 내자 이주한이 녀석의 멱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평범한 인간이 수인의 힘을 이겨 낼 리 없었다. 속절없이 끌려간 김동만은 이주한의 손에 종이처럼 대롱대롱 매달렸다.
“누구보고 미친 새끼라는 거야? 쟤는 밥 먹게 놔둬! 애초부터 당신하고 나하고 해결하면 될 문제였으니까!”
“나…… 나는 왜, 왜요오오…….”
겁먹은 김동만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억울하다는 듯 호소했다.
“유은찬하고 너 무슨 사이야. 확실히 끝난 거 맞아? 무슨 의도로 거기를 보여 줬는지 그것만 말해. 사실대로 말 안 하면. 던져 버린다.”
이주한이 가볍게 손을 흔들자 김동만의 몸도 덩달아 흔들렸다. 지금껏 수인이라고는 유은찬밖에 모르던 김동만이었다. 표범도 같은 고양잇과라며 좋아하던 녀석의 환상은 잔인하게 깨졌다. 고양이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거친 모습에 동만은 울먹이며 은찬을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결국, 보다 못한 은찬이 나무젓가락을 거칠게 던졌다.
“우리 동만이한테 왜 그래요! 애 울라고 하잖아!”
“우리 동만이? 너희 헤어진 거 아니었어? 헤어졌다며!”
“헤어졌다고요! 방금도 말했잖아! 나 차였다고!”
“그런데 왜 우리라는 단어가 들어가! 핸드폰도 꺼 놔서 사람 미치게 만들어 놓고! 왜 그 시간에 이 자식 그걸 보고 있냐고! 고추만 봤다고? 그걸 믿으라고?”
“미치겠네! 아니라고! 저 자식이 고추 작다고 지랄을 하잖아! 수술까지 생각할 정도로 심하게 작다는데 친구 사이에 그거 정도는 봐 줄 수 있는 거잖아요!”
“너희 친구 아니잖아!”
“친구거든요? 친구 맞거든요!”
“지금은 친구겠지. 어제까지는 사귀던 사이고.”
물론 지금까지 그렇게 속인 은찬의 잘못도 있었지만, 사실대로 털어놓아도 이주한은 믿지 않았다. 어쩌라는 거야. 갑자기 찾아와서 식사를 방해하는 이주한에게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내가 이러니까 싫다는 거예요! 옛날부터 나하고 하나도 안 맞았어!”
“구체적으로 뭐가 싫은지 말해야 내가 고치든 말든 할 거 아니야!”
“성격 더러운 것도 싫고! 잘난 척하는 거, 그리고 무식하게 힘만 세서 저렇게 사람 몰아붙이는 것도 싫어요! 됐어요?”
은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주한은 동만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사귄 이후로 너한테 지극 정성으로 잘했다고 생각되는데? 나 잘났으니까 잘난 척하는 거고! 힘은 불가항력이야. 태어나길 이렇게 태어났으니까!”
하나하나 반박하는 이주한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었다. 그래서 분한 은찬은 생각나는 대로 지껄였다.
“고추 큰 것도 짜증 나!”
“크다고 좋아한 게 누군데?”
맞다. 배 안을 꽉 채울 때마다 은찬은 자지러질 듯 소리를 질렀다. 허를 찔린 은찬은 더 발끈했다.
“섹파 많았잖아! 이리한인가 뭔가! 그 사람은 또 뭔데요?”
“너 하나한테 올인 하려고 다 정리했어! 그 자식은…… 무시해. 원래 그런 놈이니까.”
의도와는 다르게 하나씩 불만 사항을 말할 때마다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지고 있다. 이러면 안 된다. 정신을 차린 은찬은 다시 단호하게 쏘아붙였다.
“아기 싫다면서요? 나 닮은 애도 싫겠네?”
“애는 싫어! 그런데 너 닮은 녀석이면 예쁘겠지!”
날 닮은 녀석이면 예쁘겠단다. 깜짝 놀란 은찬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주한을 물끄러미 보았다. 뭐야. 왜 아까랑 말이 달라?
“우리한테 애가 생기면요? 그래도 싫어요?”
“아까부터 계속 이 주제를 물고 늘어지는데. 잘 들어! 그럴 리 없겠지만, 만약 너하고 나 사이에 애가 생기면…….”
생기면? 말끝을 흐린 이주한의 침묵이 길어졌다. 은찬은 숨을 죽이며 귀를 쫑긋 세웠다. 이게 뭐라고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좋아서 미치겠지.”
“……진짜요?”
“내가 내 자식 가지고 거짓말할 놈으로 보여?”
예상치 못한 답변에 은찬은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이주한에 대한 서운함도 한순간에 눈 녹듯이 사라지고 입꼬리가 슬슬 올라갔다. 은찬은 괜히 이주한에게 투덜거렸다.
“그럼 아까 왜 그렇게 말했어요? 나 서운하게!”
“네가 이렇게 안 물어봤잖아. 그거 때문에 그런 거야? 내가 아기 싫어한다고 해서?”
은찬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은찬이 화난 이유를 알게 된 이주한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미안. 내가 생각이 짧았어.”
“나 엄청 엄청 섭섭했단 말이에요.”
“이제 안 그럴게.”
자리에서 일어난 은찬은 그대로 이주한의 품에 안겼다. 제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기분 좋은 손길을 만끽하던 중 묘한 기분에 눈을 뜨니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동만과 시선이 마주쳤다. 실망과 배신감. 여러 가지 감정이 복합적으로 뒤섞인 녀석의 표정은 한마디로 썩어 있었다.
“화해한 것 같으니까. 이제 그만 나가 줄래요? 두 사람 다.”
모든 것을 체념한 동만의 외침은 허공에서 겉돌았다.
“계속 집에 있었던 거야?”
“네.”
“핸드폰은? 일부러 내 연락 무시한 거지?”
“네.”
“앞으로 그러지 마. 진짜 화낸다.”
“네.”
“정말 친구 사이지?”
“네.”
재차 이어진 이주한의 질문은 집요했지만,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럽고 달콤했다. 그는 은찬의 고양이 귀에 뺨을 문지르며 속삭였다.
“믿을게. 보기만 한 거지? 네 거 보여 주거나 한 건 아니지?”
“길이 재 달라는 거 발기가 안 돼서 재지도 못했어요.”
“야!”
사실대로 말하자마자 김동만이 빽 소리를 지르며 끼어들었다.
“이제 화해한 것 같으니까. 그만 나가 줄래요? 둘 다!”
동만은 격한 감정을 그대로 표출하며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켰다.
“싫어! 내가 왜 나가냐? 여기 내 집이기도 하거든?”
은찬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반항하자 동시에 이주한은 시선도 다시 싸늘해졌다. 동만은 은찬과 주한을 번갈아 보며 절규했다.
“제발……! 제발 나가서 싸우든지 말든지 하라고! 왜 내가 강제로 이 꼬락서니를 봐야 하는 거냐고! 나도 내 생활이라는 게 있잖아! 집에서만큼은 편안하게 살고 싶다고! 잘됐다. 이참에 나도 너한테 해방돼 보자. 너도 내 고마움을 알아야 해!”
정신 나간 사람처럼 김동만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이주한에게도 목소리를 높였다.
“부장님도 그러는 거 아니에요! 회사에서 눈치 주고! 여기서는 멱살 잡고! 이거 노동청 신고감이라고요! 내가 뭘 잘못했다고. 고양이 하나 수발든 거, 그 죄 하나밖에 없거든요! 저 자식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지 아세요? 지금 홑몸도 아니라서 평소보다 두 배는 더 손이 많이 가고 신경 써야 하거든요? 그거 바톤 터치 해 드릴게요. 가져가세요! 대신, 반품 안 받아요!”
“홀몸?”
김동만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이주한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은찬을 응시했다. 망했다. 이렇게 알릴 생각은 아니었는데 김동만 때문에 다 망쳐 버렸다. 얼굴이 확 구겨진 은찬은 김동만과 난데없이 눈싸움을 벌였다.
그 중요한 말을 네가 하면 어떻게 하냐고! 두고 보자, 김동만. 고양이의 원한을 사게 되면 무섭다는 걸 알게 해 주마.
“유은찬. 저게 무슨 말이야. 홑몸이 아니라니?”
다그치는 이주한에게 시선을 돌린 은찬은 어색하게 웃었다. 어떻게 말해야지 믿을 수 있을까. 갑작스러운 상황이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저기, 그러니까…….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이 믿기지는 않겠지만…….”
“퍽도 믿겠다.”
김동만의 쓸데없는 추임새가 신경에 거슬렸지만, 은찬은 애써 무시했다.
“우리 워크숍 때, 기억나요? 부장님하고 나하고…….”
“기억나.”
이 순간 유은찬답지 않게 많이 긴장되고 떨렸다.
“그날 우리가 한 것 때문에…… 임신, 이 됐는데.”
“뭐? 다시 말해 줄래? 잘 못 들은 것 같아서.”
당당하게 임신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부끄럽고 쪽팔렸다. 수줍은 임신 고백에 은찬은 입술이 바짝 말랐고 심장 박동은 빨라졌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다시 입을 열었다.
“임신…했다고요. 이거 똥배가 아니라…….”
은찬은 사태 파악이 안 된 이주한의 손을 잡아 제 배를 만지게 했다. 출산일이 한 달 넘게 남은 상태라서 그런지 태동도 하루가 다르게 활기찼다. 태동을 느낀 이주한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리 기분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굳은 그를 보며 은찬의 기분도 묘했다.
이걸 어떻게 납득시켜야 하나 마음이 착잡해 죽겠는데, 그사이에도 동만은 분위기 파악 못 하고 계속 깐죽거렸다.
“나 같아도 못 믿지. 안 믿지. 어떻게 믿냐? 지금 부장님 벙한 거 안 보여? 야,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병원에 가라니까?”
“넌 좀 닥쳐!”
“내 말 들어. 입 아프게 지껄여 봤자 진단서 때오는 게 확실하다니까?”
“가서 바지나 좀 입어! 부장님 앞에서 쪽팔리지도 않냐?”
“내 집에서 내가 이렇게 입고 있겠다는데 왜!”
“유은찬.”
김동만과 또다시 쓸데없는 입씨름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다행히 걱정했던 것보다는 이주한의 상태가 좋아 보였다. 그는 은찬과 배를 번갈아 보며 입을 달싹였다.
“진짜……야?”
“봐, 못 믿는다니까! 부장님 못 믿으시겠죠? 이해해요.”
어렵사리 입을 연 이주한의 물음에 동만이 툭 끼어들어 훼방을 놓았다.
“넌 좀 닥쳐! 왜 자꾸 끼어들어?”
“누구는 이러고 싶어서 이러겠냐? 나가! 나가라고! 너하고 부장님이 멋대로 여기서 사랑싸움한 거잖아! 솔직히 부장님 심정도 어떻겠냐? 남자가 임신했다는데 너라면 믿겠어? 안 그래요, 부장님?”
“유은찬.”
이주한의 부름에 은찬은 다시 그에게 집중했다.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배를 응시하던 그가 돌연 은찬을 와락 껴안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믿어. 믿을게. 우리 애라는 거지? 그렇지?”
은찬과 동만도 처음부터 이런 반응이 아니었다. 부정하고 회피하다가 병원에서 눈으로 사실을 확인하고서 수긍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쉽게 믿는다고? 오히려 고백한 은찬이 당혹스러울 정도다. 마찬가지로 동만도 벙해진 표정으로 입을 쩍 벌렸다.
잠시 세 사람 사이에 묘한 침묵이 흘렀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던 찰나…….
“말도 안 돼! 이걸 믿는다고? 이렇게 쉽게? 미쳤어요?”
은찬이 하고 싶었던 말을 고맙게도 김동만이 대신했다. 놀람을 넘어서 경악한 김동만의 태도에도 이주한은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했다.
“김동만 씨. 지금부터 한마디만 더 하면 이리한 여기로 부르겠습니다.”
이리한. 그 이름 하나에 김동만은 오만상 인상을 쓰며 처음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