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그러고 보니 은찬도 맨정신에 이주한과 키스부터 시작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것도 그의 집에 거실 소파에서.
천천히 목선을 타고 올라온 입술이 다시 은찬의 입술을 물고 늘어졌다. 부드럽게 머금었다가 깨물고 늘어졌다가. 장난치는 그 행동에 심술이 난 은찬이 목에 팔을 감고 매달리자 중심을 잡지 못한 그가 소파로 쓰러졌다.
은찬은 이주한의 허리에 어정쩡하게 걸터앉았다. 두 손으로는 그의 단단한 가슴을 짚은 채였다. 도발적인 그 자세 덕분에 은찬은 그가 얼마나 흥분했는지 노골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엉덩이 부근에 단단한 것이 닿았다.
이주한과의 하룻밤이 얼마나 정열적이었는지 몸은 다 기억하고 있었다. 새록새록 떠오른 그 기억에 은찬도 흥분하기 시작했다. 마른침을 삼킨 은찬의 모든 신경이 엉덩이 뒤로 집중됐다. 난감했다. 오늘 이곳에 온 목적은 이게 아닌데.
“유은찬.”
“네?”
“너 나 미치는 거 보고 싶어서 일부러 이러는 거지?”
이주한은 눈을 가늘게 접으며 으르렁거렸다. 그제야 은찬은 자신이 이주한의 발기한 성기에 엉덩이를 비비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덕분에 바지 속에 있던 성기는 더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냈다. 솔직히 하고 싶다. 평소의 유은찬이라면 물불 안 가리고 냅다 박고 보았을 거다. 다만 지금은 걸리는 게 딱 한 가지 있었다.
은찬이 부른 배와 그를 번갈아 보며 양심적으로 고민하고 있을 때 이주한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너 지금 맨정신이지? 술 마신 거 아니지?”
아니라고 따지려던 찰나 이주한의 셔츠가 가슴 윗부분까지 돌돌 말려 올라간 게 보였다. 그리고 은찬은 아주 자연스럽게 이주한의 탄탄한 가슴을 만지작거렸다. 늘 잠자리 상대와 하던 습관 같은 행동이었다. 마주친 시선에 은찬이 머쓱하게 웃었다.
“뭐랄까. 손길이 아주 자연스러워.”
“…….”
당연히 자연스러울 수밖에. 그동안 은찬과 하룻밤을 보낸 남자도 꽤 많았다.
“경험이 많은가 봐?”
“에이, 설마요. 저 생각보다 순진해요.”
“순진?”
예고도 없이 벌떡 일어난 이주한 때문에 이번에는 은찬이 소파에 반쯤 눕는 자세가 됐다. 제 다리가 이주한의 허벅지 위에 걸친 상태라 마치 섹스 삽입 전 자세 같았지만, 다행히 그들 사이에 옷이라는 걸림돌이 있었다.
“네가 얼마나 음탕한지 알게 해 줘?”
음탕하면 유은찬. 검정고양이 수인이라고 꽤 유명한데 이주한만 모르는 모양이다. 하기야 노는 바닥이 틀리니 절대로 알 수 없을 것이다. 몸은 달아오르고 섹스는 하고 싶은데……. 성기가 너무 커도 문제다. 저걸 넣으면 은찬은 좋지만, 배 속 아기들에게는 해로운 존재였다.
“하고 싶어요?”
“왜? 싫어?”
상체를 내린 이주한은 정확히 은찬의 젖꼭지를 머금었다. 와이셔츠 위로 느껴지는 감각에 은찬은 더욱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그를 말리기는커녕 다리로 엉덩이를 꽉 조였다. 그러자 딱딱하게 선 성기가 은찬의 엉덩이 구멍 끝자락을 꾹 눌렀다.
“아…….”
옷자락에 막혀 들어갈 수는 없지만 짜릿한 자극에 은찬이 옅은 신음을 흘렸다. 그냥 넣을까? 반만 넣었다가 뺄까? 빼는 건 괜찮을 것 같은데. 아니면 줄여서 넣어 볼까? 이미 달아오른 몸은 얼른 이 상황을 받아들이라고 아우성이었다.
그사이 이주한의 애무는 점점 저돌적으로 변해 갔다. 와이셔츠 속으로 손을 넣어 반대편 가슴을 우악스럽게 움켜잡았다. 임신으로 예민해진 가슴은 그 손길에 쉽게 반응했다.
“아…… 하아.”
점점 가쁜 숨을 내쉬며 은찬은 눈을 꼭 감았다. 갈림길에 섰다. 섹스를 포기하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그 순간, 날카로운 이를 세운 이주한이 젖꼭지를 깨물었고 은찬은 크게 숨을 삼켰다. 동시에 바지가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엉덩이 사이를 비비기 시작한 거대 성기는 곧 들어올 것이라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잠, 잠깐만요!”
다급한 외침에 이주한은 고개를 들었다. 은찬은 울며 겨자 먹기로 한 가지를 포기하기로 했다. 삽입 포기……. 애들을 위해서였다. 자신에겐 없을 줄 알았던 모성애가 생긴 모양이다.
“나 오늘 이러려고 여기 온 거 아닌데.”
“이제 와서 그만하자고?”
같은 남자로서 발기한 채 중단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지만 그렇다고 애들을 아빠 좆으로 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언젠가 임신 사실을 말할 기회가 온다면 오늘 은찬이 이럴 수밖에 없었던 것을 이해할 것이다. 은찬도 하고 싶어 미치겠지만, 눈물을 머금고 삽입을 참았다는걸. 그 심정이 생선을 앞에 둔 고양이 심정과도 같았다는 것을 말이다.
저 탄탄한 근육에 흉기 같은 성기가 자신을 천국으로 보내 줄 물건인데……. 아쉽지만 오늘은 날이 아닌 모양이다.
“안 넣고 우리 만지기만 하면 안 될까요?”
“뭐?”
어이없어하는 이주한을 뒤로하고 은찬은 적극적으로 바지를 벗어 던졌다. 그리고 그와 밀착한 채 마주 앉아 지퍼 사이로 불쑥 튀어나온 이주한의 성기와 제 성기를 비볐다. 그의 성기 끝자락, 작게 갈라진 곳에서 말간 액이 맺히더니 뚝, 뚝 흘러내렸다.
“형, 오늘은 이렇게 하자. 응?”
두 개의 성기를 두 손으로 꽉 움켜쥔 은찬이 이주한의 턱을 혀로 핥으며 속삭였다. 결국, 이주한은 체념한 듯 은찬의 턱을 거칠게 움켜잡고 혀가 뽑힐 듯한 거친 키스를 퍼부었다.
“내가 널 어떻게 이겨.”
이주한은 성기를 잡은 은찬의 손을 감쌌다. 그리고 순전히 이주한의 의지대로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위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하자마자 그들은 새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하아, 하아…… 아아……!”
“하아…… 좋아?”
“아…아아, 으응. 좋아! 좋아, 더 빨리…….”
이건 마치 서로를 바라보며 자위하는 기분이었다. 은찬은 이주한의 성기가 너무 커서 제 성기가 어린아이 것처럼 보였다. 얼마나 꽉 쥐고 흔들고 있는지 위로 쳐서 내려올 때마다 그들의 고환이 맞부딪쳤다.
“유은찬.”
욕망이 그득 담긴 이주한의 허스키한 목소리에 은찬은 눈살을 찌푸리며 헐떡였다. 그냥 이대로 했으면, 그와 밤새도록 침대 위에서 뒹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진짜 애들만 아니었으면 그랬을 텐데.
“하아…… 아. 나, 나올 거 같아. 나올 거 같…… 하아. 하아…… 아! 앗!”
“같이해. 조금만 더 버텨 봐.”
탁. 탁. 탁. 탁. 이주한의 거친 손짓에 은찬은 엉덩이를 들썩이며 소리를 질렀다. 그때 그가 귀두를 손톱으로 꾹 누르는 짓궂은 짓을 벌였다. 강렬한 자극에 은찬은 절박할 정도로 그에게 매달렸다.
“싫어, 하지 마! 하지 마! 나올 거 같……다고!”
은찬의 만류에도 이주한은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손가락을 빙빙 돌리며 애를 태웠다. 강한 자극은 은찬에게 참을 수 없는 쾌감을 선사했다.
“유은찬.”
“하지, 마! 하아, 하아…… 아아! 하지 말라고, 제발!”
오줌을 싸기 직전에 막힌 느낌. 그 답답함에 은찬의 눈시울이 촉촉이 젖어 갔다. 참을 수 없는 감각에 허리를 흔들며 그에게 애원했다.
“나올 거 같단 말이야!”
“싸게 해 줘?”
분하지만 이 와중에도 이주한은 침착했다. 마치 사냥감에 성공한 맹수처럼 은찬을 궁지에 밀어 넣은 그의 입꼬리에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생각할 겨를 따윈 없었다. 지금도 그의 손은 두 성기를 꽉 쥐고 바쁘게 움직였다.
코앞에 천국을 두고 은찬은 지금 지옥을 맛보는 중이었다. 자신을 희롱하는 이주한에게 화를 내고 싶지만, 몸은 이미 그의 손길에 지배당한 상태였다.
더는 참을 수 없었던 은찬은 그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살짝 벌려진 아랫입술을 짓궂게 물고 늘어졌다. 날카로운 송곳니에 찢어진 입술에서 붉은 피가 새어 나왔다. 비릿한 피 맛을 느끼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댈 동안 주한은 더욱더 은찬을 밀어붙였다.
자존심이 걸린 문제처럼 둘은 서로를 희롱했다. 은찬이 그의 귓가와 목덜미를 씹었고 한은 엄지로 은찬의 귀두 끝을 파고들어 강한 자극을 주었다. 쾌감인지 통증인지도 모를 감각에 결국 은찬이 먼저 백기를 들었다.
“하아, 아……. 하읏, 아! 아흑, 이제…… 그만.”
은찬이 거칠게 숨을 헐떡이며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싸고 싶어?”
이주한이 다시 한번 묻자 은찬은 눈물이 그렁그렁 달린 눈으로 작게 끄덕였다. 하지만 그는 그것으로 성이 차지 않은 모양이다. 오히려 손가락에 더 힘을 가했고 순간 은찬은 뾰족한 송곳니를 보이며 버럭 소리쳤다.
“대답했잖아……!”
“김동만하고 이틀 안에 끝내.”
질긴 자식. 결국, 그 대답을 듣고자 이렇게 밀어붙인 것이다. 화가 나서 따지려는 찰나 그의 손톱이 귀두 끝부분을 살살 긁었다. 헉, 소리와 함께 은찬은 몸을 파르르 떨었다. 삽입과는 전혀 다른 색다른 쾌감은 짜릿했다.
“짜증 나……. 성격 진짜 이상하다니까? 이러는 게 어디 있어!”
이주한의 목에 얼굴을 묻은 은찬이 젖은 목소리로 핀잔을 던졌다. 그는 그것을 기분 나빠 하기보다 오히려 즐거운 톤으로 받아쳤다.
“좆같은 새끼라서?”
이 새끼 보기보다 뒤끝 있다. 한 번씩 이주한 입에서 튀어나오는 욕설은 은찬이 그를 욕할 때 주로 쓰던 레퍼토리였다. 이런다고 기죽을 유은찬이 아니다. 이주한과 코끝을 마주한 채 마찬가지로 그의 성기 끝을 엄지로 꾹 눌렀다. 그 손길에 여유롭던 이주한의 얼굴이 꿈틀거렸다.
“형. 나는 이 좆이 참 좋더라.”
“다행이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은찬은 흐느꼈다. 치사한 새끼. 얍삽한 새끼. 더욱더 속도에 박차를 가하는 손길에 은찬은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다.
“얼른 정해. 이틀.”
“하으……. 알, 알았어. 헤어지면 되잖아! 헤어진다고, 이틀 안에!”
모든 신경이 그쪽으로 집중된 은찬은 고민도 없이 대답했고, 손가락이 떨어지자마자 밀려오는 사정감을 참지 못하고 헐떡였다.
“아…… 아아! 아, 아…… 하아.”
호흡하기 위해 벌린 입술 틈으로 새빨간 혀가 입안으로 들어왔다. 숨을 쉬기 위해 몸을 뒤로 뺐지만, 뒷덜미가 우악스럽게 잡혔다. 찌걱. 찌걱. 두 사람의 쿠퍼 액으로 젖은 손에서 나오는 소리가 야했다.
곧 절정에 도달한 은찬은 그와 게걸스레 키스하며 하얀 정액을 분출했다. 동시에 이주한도 사정을 했다. 서로의 정액을 몸에 덕지덕지 묻힌 채 둘은 계속 키스를 이어 갔다.
“넣으면 안 될까?”
정액의 열기가 채 식기도 전이었다. 이주한의 성기는 금방 회복했고 그의 손가락은 은찬의 엉덩이 구멍 주변을 배회했다. 마음 같아서는 미치도록 넣고 싶지만, 마지막 이성이 은찬을 붙잡았다.
“알았어. 그럼 핥는 건 상관없지?”
은찬을 소파에 눕힌 이주한이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미끌거리는 혀가 갈라진 엉덩이 사이. 주름으로 꽉 다물어진 구멍 안을 비집고 들어오는 감각이 고스란히 느껴지던 그 순간, 은찬은 눈을 질끈 감으며 속으로 욕을 삼켰다.
씨발. 이러면 더 하고 싶잖아! 아무런 저항감 없이 그곳을 핥고 있는 이주한의 행동은 고문이나 마찬가지였다. 식기는커녕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은찬은 허리를 들썩이며 이주한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쥐어 잡았다.
“하읏, 아…….”
이주한은 부들부들 떠는 은찬의 반응에 반쯤 일어난 그의 성기를 손톱으로 긁었다. 미쳤다. 어떻게 해서든 삽입하고 말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은찬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버텼다.
“흐응…… 으…….”
끈질긴 표범 자식. 누가 이기나 해 보자. 참을 수 없는 쾌감이 폭발적으로 밀려오겠지만, 참을 것이다. 왠지 오늘 밤이 길어질 것 같았다.
안 된다. 딱 한마디만 하면 된다는 걸 알지만 은찬은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솔직히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이주한과 하는 섹스가 끝내주게 좋은 건 사실이니까.
***
오랜만에 기분 좋은 꿈을 꿨다.
어린아이로 돌아간 주한은 부모님과 함께 놀이동산으로 소풍을 떠났다. 1년에 다섯 번 이상 만나기 힘든 바쁜 부모님이었다. 할아버지와 김 실장이 아니라 부모님과 함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어린 주한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기분이었다.
여느 또래 아이들처럼 양손에 엄마와 아빠 손을 잡고 떠난 소풍은 즐거웠다. 타고 싶었던 놀이기구를 실컷 타고 웃고 떠들었다. 얼마나 좋았는지 귀와 꼬리가 저도 모르게 튀어나와 있었지만,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놀이동산에서 파는 동물 귀 머리띠와 꼬리처럼 보였을 테니까.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잠시 한눈파는 사이 주한의 부모님은 사라지고 없었다. 많은 사람 틈에서 미아가 되어 버린 주한은 담담하게 이 상황을 받아들였다. 또다시 혼자가 된 것이다. 소리 내 울고 싶었지만, 꾹꾹 눌러 참고 또 참았다.
그때였다. 바로 앞 벤치에 검정고양이 한 마리가 불쑥 나타나 앉았다. 주한을 빤히 보던 검정고양이는 무심하게 제 발을 핥기 시작했다. 무엇에 이끌리듯 그는 검정고양이 옆에 털썩 앉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녀석이 팔에 몸을 비볐다. 그게 귀여워 만지려고 하면 달아나고 가만히 있으면 다시 와서 몸을 비볐다. 전형적인 고양이다운 행동이 주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 고양이를 잡아야겠다. 잡아서 집으로 데려가야지.
할아버지가 혼내겠지만 그래도 키우고 싶었다. 순간적으로 손을 뻗은 주한은 부드러운 감촉에 눈을 떴다. 어느 틈에 그는 제 팔에 매달린 채 자는 유은찬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있었다.
어젯밤, 끝까지 삽입은 안 된다며 고집을 피우던 녀석. 그러다 새벽을 넘겼고 꾸벅꾸벅 졸길래 침대로 떠밀었건만, 소파에서 자겠다며 버럭버럭 짜증을 냈다.
결국 유은찬은 도둑고양이처럼 주한의 침대를 차지해 버렸다. 그것도 자신의 옆자리를.
주한은 조심스럽게 녀석의 머리를 매만졌다. 귀와 꼬리를 드러낸 채 기분이 좋은지 본능적으로 제 품을 더 파고는 행동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딱 고양이네.”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럽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유은찬이 사랑스러웠다.
한참 동안 유은찬을 지긋이 바라보던 주한의 시선이 돌연 한곳에 집중됐다. 얼마 전보다 더 나온 배……. 유은찬은 별거 아닌 것처럼 똥배라고 말했지만 어디 아픈 건 아닌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살짝 배를 만져 보니 뭔가가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화들짝 놀란 주한은 심각한 표정으로 배를 응시했다. 이건 그냥 똥배가 아니다. 불길한 생각이 든 그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아무래도 당장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았다.
***
우우웅. 요란한 핸드폰 진동이 소파를 흔들었다. 벌써 아침인가.
반쯤 눈을 뜬 동만은 반사적으로 손을 휘적였다. 말도 없이 뛰쳐나간 유은찬을 기다리다 저도 모르게 잠이 든 모양이다. 소파 앞 테이블 위에는 밤새 그가 홧김에 마신 빈 캔 맥주가 지저분하게 나뒹굴고 있었다.
가까스로 핸드폰을 찾아 진동을 끄고 정신을 차렸다. 집안이 조용한 걸 보니 망할 고양이 녀석은 여전히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혹시나 싶어 핸드폰을 들여다보았지만, 연락 한 통 없었다.
“하아…….”
동만은 긴 한숨을 내쉬며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유은찬이 말도 없이 외박한 게 처음은 아니지만, 녀석과 쓸데없는 말다툼을 벌인 게 신경이 쓰였다.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 보면 그렇게 화낼 일도 아닌데 장염 때문에 예민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그렇지. 거기서 대놓고 이주한 편을 드는 유은찬도 너무했다.
저러다 이주한하고 사귀겠거니 하고 지레짐작은 했지만, 설마 이렇게 일찍 홀라당 넘어갈 줄은 몰랐다. 특별한 것도 아니고 고작 먹는 것 하나에.
“망할 자식. 내가 얼마나 잘해 줬는데.”
집에서는 청소 한번 안 하고 살았던 동만이다. 그런데 유은찬하고 같이 살게 된 이후 모든 가사는 동만의 몫이 됐다. 수인이니까. 사람 모습을 하고 있지만, 녀석의 몸에 흐르는 피가 반은 고양이니까. 도도하고 제멋대로인 고양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너그럽게 이해했다.
같이 산 지 2년. 지금껏 이렇게 크게 싸워 본 적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주한이 좀 잘해 준다고 태도부터 달라진 유은찬에게 못내 서운했던 것 같았다. 그래서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다가 싸운 거고.
연거푸 한숨을 내쉬던 동만은 입안이 썼다.
어젯밤, 유은찬이 사라진 뒤부터 동만의 기분도 좋지 않았다. 화해하려고 두 시간쯤 기다렸을까. 결국 기다리다 지친 동만은 오피스텔 주변을 돌아다녔다. 유은찬 성격에 먼저 집에 들어오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찾지 못했다.
“이 자식. 연락도 없이 어디 있는 거야?”
핸드폰을 들고 연락해 볼까 망설이길 수십 번. 하지만 끝끝내 통화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자신이 먼저 연락하면 왠지 이 싸움에서 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출근 준비나 하자.”
동만은 집 나간 고양이에 대한 미련을 떨쳐 버리려고 머리를 흔들었다. 어차피 회사에서 만날 놈이니 그때 차근차근 이야기해도 늦지 않았다. 기합을 넣고 자리에서 일어난 동만은 몇 걸음 걷지 못하고 미간을 팍 구겼다.
“아, 씨…….”
장염도 다 낫지 않은 상태에서 맥주를 들이부었더니 배에서 신호가 왔다. 심신 안정을 해도 모자랄 판국에 여러모로 고생하는 제 모습이 처량했다. 이럴 때 걱정해 줄 애인도 없고 집 나간 고양이 걱정이나 하는 팔자라니……. 괜한 팔자타령을 하며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빈속에 약을 털어 넣고 출근하는 길, 오늘따라 사람들의 시선이 이상했다.
“안녕하세요.”
“동만 씨, 괜찮아?”
우연히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친 마케팅 2부서의 박 대리가 동만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그의 말 한마디에 그곳에 있던 다섯 사람의 시선이 집중됐다. 왜들 이렇게 쳐다보는 거지? 장염 걸린 게 소문났나? 그렇게 판단한 동만은 씨익 웃었다.
“그럼요. 괜찮죠. 별거 아니에요.”
“별거 아니긴. 어제 난리 났었다며? 아무튼 수고해. 힘들면 버티지 말고 쉬어.”
“네? 네…….”
이상했다. 마케팅 1부서에 이를 갈고 있던 박 대리가 동만의 어깨를 안쓰럽다는 듯 두드리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뭐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사무실에 도착한 동만은 또다시 이상한 현상을 보게 됐다. 조금 전까지 한곳에 모여 대화 중이던 팀원들이 그의 등장에 황급히 흩어졌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동만 씨 왔어? 일찍 왔네?”
이 대리의 인사에 대답 대신 썩은 미소를 지었다. 일찍은 무슨. 동만은 평소와 똑같은 시간에 출근했다.
조용히 제 자리에 앉아 옆을 쳐다보니 유은찬은 아직 출근 전이다. 하여튼 이렇다니까. 어디서 잤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지각해서 부장한테 엄청 깨져 버려라. 속으로 저주를 퍼부었다. 물론 요즘 부장 하는 행동을 보면 그럴 리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낮잠 자는 유은찬이 깰까 봐 팀원 전체가 숨을 죽여야 했던 어제의 일이 떠올랐다. 사귀기 전에도 저런데 사귀면 얼마나 티를 낼지 안 봐도 훤했다. 진절머리를 치며 동만은 사내 게시판에 사이트에 접속했다.
의례 습관적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딱히 이유는 없었다. 부장도 없고, 아직 곽 과장도 출근 전이고. 그 전에 회사 내에 돌고 있는 이슈 좀 볼까 해서였다. 그런데 들어가자마자 제 이름이 딱 눈에 들어왔다.
‘우리 회사 게이 커플. 김동만 씨하고 유은찬 깨진 거 같은데?’라는 제목을 빠른 속도로 클릭했다. 그리고 내용을 보자마자 입이 떡 벌어졌다.
망했다. 복도에서 꽥꽥 소리를 지르고 싸웠으니 거기에 사는 회사 사람들이 죄다 다 본 모양이다. 너나 할 것 없이 그런 것 같다고 댓글을 달다가 누군가 유은찬이 바람피웠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상대는 이주한. 두 사람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글에 유은찬과 이주한은 천하의 쓰레기가 됐고, 김동만은 동정의 대상이 됐다.
하나하나 글을 살펴보던 동만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원치 않게 동정받는 것도 기분 나빠 미치겠는데 회사 사람들 십시일반으로 모여 김동만 새 남친 만들어 주기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었다. 고작 30분 전에 올라온 글이건만 조회 수가 삼백 건이 넘었고 동조하는 사람들만 서른 명이다.
미치겠네! 아니라고, 나 여자 좋아한다고!
“하아……. 미치겠네.”
누구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지 못하고 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자 기다렸다는 듯이 팀원들의 위로 말이 쏟아졌다.
“동만 씨, 힘내.”
“같은 사무실이라서 더 힘들지?”
동만은 흠칫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팀원들이 제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게 아니라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거기 같은 층에 사는 영업부 김 대리가 직접 보고 들었다던데? 김 대리랑 나랑 친하잖아. 어젯밤에 그 말 듣고 내가 얼마나 놀랐게. 그래도 회사 때려치우면 안 돼. 홧김에 때려치우면 그때는 좋을지 몰라도 이만한 회사 요즘 취직하기 힘들잖아. 안 그래?”
“그래, 더럽지만 어떻게 하겠어. 먹고 살려면 다 그렇지.”
“버티는 사람이 이기는 거예요.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동만 씨 편이니까. 진짜 유은찬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사람 못됐다. 안 그래요?”
다들 이 대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만에게 동정의 시선을 보냈다. 아니라고, 우리 애 착한 애라고 감싸 주고 싶지만 여론이 그렇지 못했다.
“아무리 이 부장님이 더 잘생기고 더 돈이 많아도 그렇지. 어떻게 동만 씨 두고 바람을 피워요?”
이 주임의 말에 동만은 썩은 미소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저것을 위로라고 던진 말인가. 아니면 위로를 가장한 속마음인가.
“그래서, 두 사람 언제부터 그런 관계였던 건데요? 동만 씨는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정확하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
어떻게 해서든 유은찬을 구제해 보려고 입을 열었지만 단칼에 차단당했다.
“알고 있었다는 거네. 세상에, 세상에! 그걸 알고도 참고 있었던 거죠?”
“내가 그랬죠? 고양이 수인이 은근히 뒤통수 잘 친다니까요? 김동만 씨한테는 별 볼 일 없으니까 냅다 부장님 쪽으로 갈아탄 거죠!”
“아니거든요. 어제 어떻게 된 거냐면, 우리가 좀 싸웠…….”
“동만 씨 사람이 너무 좋아도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호구 취급당한다니까요? 감쌀 사람을 감싸야지. 자기 버리고 돈 많고 잘생긴 부장님한테 붙은 유은찬 씨를 감싸요? 나 같으면 머리채 붙잡고 욕이라도 하겠다.”
한 대 칠까? 좀 전부터 이주임이 신경에 거슬렸지만, 그보다 더 기분 나쁜 건 아무도 반박을 안 한다는 것이다. 젠장, 내가 적금 깨서 수술하고 만다. 이로써 동만은 다시 한번 수술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다지고 있을 때였다.
“안녕하세요!”
기막힌 타이밍에 등장한 유은찬은 혼자가 아니었다. 나란히 함께 나타난 이주한과 유은찬. 두 사람에게 모두의 시선이 주목됐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뜨거운 시선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던 은찬이 동만을 의식하고 새초롬한 표정을 지었다. 뒤끝 있는 고양이 자식. 어제의 연장전인가 보다.
그거 아니야, 새끼야. 분위기 파악 좀 해 멍청아! 우리 이제 좆됐어! 계획이고 나발이고 다 끝났다고! 제발 평화롭게 조용히 살자!
동만은 유은찬을 향해 소리 없는 절규를 퍼부었다.
***
[잠깐 좀 보자.]
출근 이후부터 오전 11시인 지금까지 말 한마디 없던 유은찬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것도 메시지로. 둘이서 입을 맞춰도 모자랄 판국에 일방적인 무시를 당한 동만은 기가 차고 코가 막혔다. 썩은 표정으로 녀석에게 한마디 쏘아붙이려던 찰나 다급하게 연달아 메시지가 왔다.
[나한테 말 걸지 마! 너 먼저 조용히 옥상에 올라가 있어. 금방 따라갈 테니까.]
지랄을 해라, 지랄을. 그래도 사태가 심각한 건 아는 모양이다.
뒤늦게 사내 게시판을 확인한 은찬은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옆에서 계속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물론 회사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그 글을 이주한 부장도 본 모양인지 살벌한 기세로 사라졌다.
유은찬 분위기를 보아하니 화해하자고 부른 건 아닌 거 같고. 분명 또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가지 말까? 동만이 망설이고 있자 옆 책상에서 작은 종이가 쓱 넘어왔다.
[동만아, 아직도 화났어?]
그럼 내가 괜찮은 거로 보이냐? 시큰둥한 표정으로 쪽지를 노려보고 있자 다른 한 장이 또 넘어왔다. 보나 마나 시답지 않은 말이겠거니 하고 곁눈질한 동만은 순간 눈을 크게 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 부장님이랑 잘해 보려고.]
무거운 정적이 흐르던 사무실에 동만의 의자가 뒤로 넘어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소리를 안 지른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둘이 같이 출근했을 때 어젯밤 같이 있었을 거 같다고 예상은 했지만, 진도가 거기까지 나갔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망할 고양이 새끼! 이렇게 쉽게 사귈 거면 나는 왜 끌어들인 건데! 그냥 사귀었으면 됐잖아, 쓰레기 같은 자식아! 욕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내뱉지는 못했다. 그저 죄 없는 종이를 구기며 유은찬을 향해 씩씩거렸다.
동만의 분노에 찬 숨소리에 일순간 사무실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모두의 시선이 다시 그에게 집중됐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동만은 결국 옥상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유은찬과 대화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오늘따라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했고 옥상은 썰렁했다. 제일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서서 유은찬을 기다리고 있으니 곧이어 녀석이 나타났다. 동만의 기분도 모르고 유은찬은 웃으며 다가왔다.
그럼 그렇지. 저놈의 고양이 새끼. 어금니를 꽉 깨문 동만은 면상에 주먹이라도 날리고 싶은 걸 겨우겨우 참고 입을 열었다.
“너 지금 웃음이 나오지? 뭐? 부장님이랑 잘해 보려고? 너 지금 장난하냐? 장난해?”
“왜 화를 내? 네가 잘해 보라고 했잖아. 그래서 말인데, 우리 헤어져.”
뜬금없이 차였다. 사귄 건 아니지만 먼저 이별 통보를 받는 입장에서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왜 니가 먼저 그 말을 하는 건데? 기분 나쁘게!”
“그럼 네가 해.”
기분 나빠 하는 동만과는 반대로 유은찬은 아무렇지 않게 이별권을 양보했다. 동만은 그걸 또 덥석 받았다.
“우리 헤어져! 나도 너 같은 놈 필요 없어! 잘해 줘 봤자 딴 놈한테 덥석 가 버리는 놈!”
“너 나한테 고마워해야 해. 우리 형이 이틀 안에 너랑 안 헤어지면 너 잘라 버린다고 협박했단 말이야.”
이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이야. 기가 찬 동만의 표정과 달리 은찬은 바보같이 헤헤 웃는다. 이런 모습을 처음 본 동만은 유은찬이 사랑에 빠졌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날 위해서 헤어지는 거다? 핑계는……. 됐고! 게시판 봤지? 그거 수습이나 빨리해! 회사 사람들이 나 불쌍하게 보는 거 짜증 나 죽겠거든? 그리고 너 어제 그 자식 집에 있었지? 거기 있으면 있다고 연락을 해야 할 거 아니야! 사람 걱정하게!”
“걱정했어?”
“그럼, 그따위로 나갔는데 안 하냐?”
“진짜? 미안.”
유은찬이 씨익 웃으며 동만의 팔을 툭 쳤다. 고양이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 같다. 고작 사과 한마디에 동만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야, 너 걱정한 게 아니라 우리 나비하고 까망이 걱정한 거거든요?”
“아, 맞다! 너한테 물어볼 거 있어서 여기로 오라고 한 건데! 깜박할 뻔했다!”
갑자기 정색한 은찬이 손뼉을 치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헤어지자고 부른 게 아니라고? 그 일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라는 소리에 덩달아 동만도 심각해졌다.
“왜? 무슨 일인데.”
“형이…….”
“형?”
“부장님. 부장님이 형이라고 부르라잖아. 부장님이라고 부르면 거리감 느껴진다나?”
“…….”
개새끼에서 부장님이 됐다가 이제는 형이란다.
“나 배 나온 거 이상하다고 병원에 가서 검사받자는데 어떻게 하지? 오늘 아침에 병원에 끌려갈 뻔한 거 겨우 출근했다니까?”
순간 정말 뭔가 큰일이 난 줄 알았다. 애가 잘못되었다든가 그런 거 말이다. 동만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걱정하는 유은찬을 썩은 표정으로 응시하며 넌지시 물었다. 설마…….
“너 아까 계속 한숨 쉰 것도 그것 때문은 아니지?”
“맞는데? 그 전에 임신했다고 말하는 게 좋을까, 아니면 병원에 가서 말하는 게 좋을까? 임신했다고 나 싫어하면 어쩌지? 갑자기 애가 둘이나 생겼다고 하면 놀랄 거 아니야. 그치?”
양 볼을 붉히며 말하는 모양새를 보니 전혀 걱정하는 자세가 아니다. 또다시 망할 고양이에게 속았다고 생각한 동만은 화낼 전의도 상실했다. 고양이를 상대로 화를 내 봤자 무의미하다는 것을 좀 전에 깨우쳤다.
“사내 게시판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뭐? 우리 둘이 헤어진 거? 사실이잖아. 방금 헤어졌잖아. 네가 나 찼으면 된 거지.”
“고맙다. 차게 해 줘서.”
동만은 유은찬을 존경하기 시작했다. 졸지에 사람들의 맹렬한 비난을 받아도 녀석에겐 별거 아닌 모양이다.
“너도 한 번쯤 차는 기분을 느껴봐야 할 거 아니야. 아, 맞다! 우리 형이 너랑 헤어지면 아파트도 해 줄 수 있다고 했다? 부럽지? 어제 처음 형 집에 가 봤거든? 장난 아니다? 거실이 우리 오피스텔보다 더 커! 뷰도 끝내주고. 왜, 우리 오피스텔에서 보면 저기 멀리 콩만 하게 보이던 그 아파트 있잖아. 한강 근처에 있는. 그건 거 같아! 네가 목표로 삼는 아파트, 그거!”
행복해하는 유은찬의 모습에 동만은 왜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걸까. 진작 이랬으면 게이라는 오명을 받지 않아도 됐을 텐데. 유은찬에게 따질 말은 넘치고 넘쳤지만, 입 아프게 꺼내지 않았다. 어차피 저 녀석은 듣지도 않을 테니까.
“잘됐네.”
“그치? 생각보다 성격 엄청 좋아. 나한테 엄청, 엄청 잘해 줘.”
“좋냐?”
“말해 뭐 해.”
“그래. 그러면 잘된 거지. 소문은 뭐 어떻게든 되겠지. 헤어졌으니까. 소개해 주기로 한 거 잊어버리지 말고. 너 임신한 거는…… 니가 알아서 하고. 밥은? 점심 뭐 먹을래?”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확인한 동만은 어느덧 점심시간임을 확인했다. 지금껏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늘 같이 먹었기에 당연히 오늘도 그런 줄 알았다.
“나? 나 오늘 우리 형이랑 먹기로 했는데?”
“……그래. 그럼, 맛있게 먹고. 나 간다.”
더는 유은찬과 말싸움으로 체력 소모를 할 힘도 없었다. 모든 것을 체념한 동만이 문 쪽으로 향하자 등 뒤에서 은찬이 소리쳤다.
“동만아, 같이 갈래? 너 좋아하는 소고기 사 달라고 할게!”
동만은 손을 흔드는 것으로 거절을 표시했다. 지금 이주한이 사 주는 고기를 먹으면 그대로 체할지도 모른다. 눈앞에서 두 사람이 떠는 짓거리를 어떻게 보라고. 차라리 구내식당에서 혼자 먹고 말지.
그렇게 생각한 동만은 당당하게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역시나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은 엄청났다. 유은찬과 사귄다고 했을 때보다 더 반응이 뜨거웠다. 어차피 소문은 금방 다른 소문에 묻히는 법. 그때까지 견디면 되겠지 싶었다.
“왜 혼자 먹어요? 불쌍하게.”
묵묵히 밥에 집중하고 있을 때 누군가 비어 있는 동만의 앞자리에 털썩 앉았다. 식판도 없이 앉은 남자는 동만과 마주친 시선에 빙긋 웃었다. 순간 동만은 들고 있던 수저를 떨어뜨릴 뻔했다. 이리한이 눈앞에 있었다.
“……여기는 어떻게?”
“식당에 밥 먹으러 왔죠. 그거 맛있어요?”
요염하게 턱을 괸 이리한은 눈짓으로 동만이 먹던 된장찌개를 가리켰다.
“맛 없…… 아니, 그게 아니라. 여기 회사 식당인데? 함부로 들어 올 수 있는 데가 아닌데?”
회사 규정상 외부인의 출입은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었다. 낯선 외부인의 등장에 비단 동만만 놀란 것이 아니었다. 식당 안을 꽉 채우고 있던 직원들이 이리한을 힐끔거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그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태연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호기심 어린 시선을 쏟아 냈다.
“함부로 들어온 거 아닌데? 나도 지인 찬스 좀 썼죠. 그런데 이런 데서 먹으면 맛있나? 난 이런 데서 먹어 본 적이 없어서. 또 엄청 맛있는 줄 알았지. 맛없으면 나가요. 나가서 우리 맛있는 거 먹어요.”
“내가 왜요?”
동만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투로 받아쳤다.
“나 고기 좋아하는데. 그쪽은 뭐 좋아해요? 우리 소고기 먹으러 갈래요?”
하지만 이리한에게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생기 가득한 표정으로 동만을 뚫어지게 쳐다볼 뿐이다. 뭐가 저렇게 좋은 걸까. 보이지는 않지만 꼬리를 흔들고 있는 개처럼 보였다.
“저 그쪽한테 볼일 없다고 했을 텐데요. 초면에 이러지 마시죠.”
“우리 초면 아니잖아요. 어제도 저번에도. 이렇게 두 번 봤는데. 어제 내 귀도 가려 줬는데.”
그리고 화장실까지 쫓아온 전적도 있었다. 밥 먹는데 떠올리고 싶은 기억이 아니기에 동만은 입맛이 뚝 떨어졌다. 고양이부터 개까지 오늘 자신에게 왜 이러는 걸까. 심신이 피로해진 동만은 찌개를 떠먹으며 귀찮다는 듯 중얼거렸다.
“초면이라고 칩시다. 어차피 이제 마주칠 일도 없는 사이인데.”
“왜요? 왜 그렇게 생각해요?”
이리한이 귀찮게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동만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당연하지, 이주한하고 사귀는 사람이 유은찬이라고 곧 소문날 테니까. 동만은 마주친 시선에 썩은 미소를 지었다. 덩달아 이리한도 배시시 웃는다.
“저기요.”
그가 입을 열기가 무섭게 동만은 밥을 한입 가득 먹었다. 보나 마나 쓸데없는 소리일 거라 생각했다.
“나랑 떡 칠래요?”
“…….”
그대로 동만은 사고 회로가 정지됐다. 떡? 무슨 떡? 먹는 떡? 동공 지진을 일으킨 동만과는 반대로 이리한은 세상 즐거운 표정으로 자신을 어필하기 시작했다.
“나 그거 엄청 잘하는데. 아래위 둘 다 가능. 어떤 거 할래요?”
“아래, 위…… 뭘?”
자신이 생각하는 그 뜻이 아니길 바라며 물었지만 역시였다. 이리한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조곤조곤 속삭였다.
“에이. 알면서. 먹느냐, 먹히느냐 그런 거? 어떤 취향이에요?”
동만은 그저 편안하게 밥을 먹고 싶었을 뿐이다. 밥 먹고 약을 먹어야 할 의무가 있었으므로. 그런데 난데없이 나타난 개자식 하나가 그런 동만의 시간을 방해하고 있었다. 주제는 떡과 포지션.
어쩐지 첫 만남부터 심상치 않았다. 이주한의 섹파라고 해맑게 소개할 때부터 상종하지 말았어야 했다.
“나 여자 좋…….”
여자 좋아한다고 소리치려다가 말았다. 참자, 김동만. 여기는 구내식당이다. 이런 싸구려 대화에 휘말리지 말자.
머릿속이 복잡해지던 그때, 동만은 헉 소리를 내며 손에 쥐고 있던 수저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이리한을 노려보았다. 방심한 틈을 타 무언가 동만의 허벅지를 타고 올라가 다리 사이를 꾹꾹 눌렀다.
설마 아니겠지……. 애써 부정하며 아래를 힐끔거린 동만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설마가 맞았다. 이리한의 발을 확인한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여기 식당이라고, 이 미친놈아! 경악한 동만이 주변을 힐끔거리며 손으로 발을 밀쳐 냈지만, 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리한은 특유의 해맑은 목소리로 떠들었다.
“보기보다 거기가 작네. 작으면 재미없는데. 어쩔 수 없이 내가 넣는 거로 해야겠다. 나 넣는 것도 엄청 잘하니까 걱정하지 마요.”
“…….”
동만은 말문이 막혔다. 이래서 내가 개를 싫어한다. 개가 의리 있고 영리하고 충성심 있다던 이리한의 말은 전부 개소리다. 충성심 있는 놈이 애인 두고 이주한하고 섹파나 하고 있냐? 영리한 놈이 구내식당에서 이런 짓을 하냐고! 테이블 밑으로 다리가 훤히 보이잖아!
이 개새끼는 확실히 정상이 아니다. 이런 개보다는 차라리 멍청한 고양이가 훨씬 나았다. 그래도 유은찬은 도덕성이 결렬된 이런 덜떨어진 짓은 하지 않았다. 분노 게이지가 상승한 동만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을 동그랗게 뜬 이리한에게 경고했다.
“한 번만 봐준다! 다시는 나 아는 척하지 마! 아는 척하면, 죽는다! 진짜야!”
이래 봬도 복싱 학원 석 달을 다닌 몸이다. 자신보다 한 뼘 정도 큰 이리한 정도면 주먹 몇 방에 끝날 게임이었다. 큰소리치고 구내식당을 나오는 길. 동만의 뒤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김동만이 억울한 건 아닌 것 같은데? 혹시 김동만이 먼저 바람피워서 유은찬이 홧김에 부장하고 바람 난 거 아니야?”
“그러게. 저 남자, 호빠 아닐까? 얼굴도 번지르르 한 게 대담하게 다리 올리는 거 봤지? 김동만이 먼저 바람피운 거 같은데? 딱 느낌이 그런데? 그러고 보면 유은찬도 불쌍해. 김동만 볼 게 뭐 있냐? 방금 들었지? 거기도 작대.”
아니거든! 평균이거든! 작은 거 아니라고! 다른 건 다 용서해도 거기가 작다는 소리에는 울컥했다. 동만은 억울해 미칠 것 같았다. 유은찬의 애인도 이리한과도 아무 사이도 아닌 자신이 왜 이런 비난을 받아야 하는가.
후회가 일었지만 이제 와서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조만간 끝날 것이다. 길어 봤자 두 달. 유은찬이 임신했고 그 아이 아빠가 이주한이라고 알려지면 끝날 일이었다. 그리고 유은찬이 소개팅시켜 주기로 약속도 했다. 동만은 거기에 모든 희망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