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자, 여기 있어요.”
주한이 김 실장에게 작은 상자를 건넸다. 오늘 아침 그가 이곳에서 훔친 상자와 동일한 상자였다. 김 실장은 묘한 시선으로 그 상자와 주한을 번갈아 보았다. 비서실에 흐르는 무거운 정적에 주한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작은 도련님.”
“식사는 하셨죠?”
“꼭 그렇게 하셔야 했습니까?”
“뭐 드셨어요? 맛있는 거 드셨어요?”
“작은 도련님?”
회피를 하려 해도 김 실장의 추궁은 끈질겼다. 쯧. 모른 척 좀 해 주지. 할아버지 옆에서 이런 점만 배웠나 보다.
이주한이 태어난 이래 곁에서 자신을 쭉 지켜본 그였다. 반대로 주한도 그를 오래도록 봐 왔었다. 심지 굳고 강건하기로 소문난 할아버지를 오래도록 모신 그는 좀처럼 화내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그런 김 실장에게서 다양한 면모를 많이 보았다. 임원 회의실에서 밀회를 즐기던 이주한과 유은찬을 발견했을 때의 그 표정은 지금도 잊히질 않았다.
다급히 문을 닫고 사라진 김 비서는 그 와중에 유은찬이 먹던 케이크 조각을 보았고, 그것의 출처를 단번에 눈치챘다. 허무하게도 이주한의 완벽한 범행이 들통나 버렸다.
사실 유은찬에게 선물받았다고 한 케이크는 할아버지의 간식이었다. 아침 일찍 잠시 할아버지를 뵙고 나오던 중 김 실장의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케이크 상자가 눈에 띄었다.
평소의 주한이라면 관심도 주지 않고 지나쳤을 테지만 왠지 유은찬이 떠올랐다. 그 녀석이라면 좋아할 것 같았다. 그래서 말도 없이 스리슬쩍 가져온 건데 그걸 거기서 들켜 버렸다.
점심 먹는 내내 김 실장의 협박이 날아왔다. 당장 똑같은 걸 사 오지 않으면 할아버지에게 모든 사실을 다 말해 버리겠다는 말에 점심시간을 틈타 부리나케 사 오는 길이다. 물론 가는 김에 겸사겸사 유은찬 먹을 것도 하나 더 사 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쩌시려고 그러세요.”
“뭘요.”
“아까요. 그 문을 연 게 저였으니까 망정이지. 회장님이었으면요?”
“오늘 회의 없다고 했잖아요.”
주한의 볼멘소리에 김 실장은 단호하게 받아쳤다.
“억지 부리지 마세요. 회의라는 게 갑자기 생길 수도 있고 취소될 수도 있다는 거 잘 아시잖아요. 그리고 이제는 도둑질도 하십니까? 제가 오늘 아침에 이것 때문에 회장님께 얼마나 혼났는지 모르시죠? 회장님 아침에는 커피하고 여기 케이크밖에 안 드신다고요!”
“할아버지 당뇨 없으세요? 그 연세에 아직도 이런 거 좋아하세요?”
“말씀 좀 가려서 하세요. 엄연히 회사입니다. 오늘은 누가 봐도 작은 도련님이 잘못했습니다.”
그의 질타에 주한은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천방지축 꼬마 표범이던 시절, 집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할아버지가 아끼던 백자에 오줌을 싼 적이 있었다. 자신이 한 게 아니라고 발뺌하던 어린 주한의 범행은 결국 CCTV를 확인하고서야 드러났다.
그때 할아버지는 어린 손주가 저지른 짓에 웃으며 넘어가려 했지만 어렸을 적 버릇이 평생을 좌우한다며 김 실장은 따끔하게 야단을 쳤다.
부모님이 해외를 오가며 일을 하고 계셨기 때문에 주한의 어린 시절은 할아버지와 김 실장과 함께 보낸 기억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갑작스러운 주한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시선을 던졌다.
“갑자기 왜 이러세요. 어느 정도 선은 지키셨잖아요.”
“…….”
알고 있다. 자신의 이런 변화를 제일 먼저 자각한 게 불과 얼마 전이니까. 망할 검은 고양이게 빠진 죄로 자존심을 굽히고 도둑질까지 하며 지금 열심히 잘 보이려고 노력 중이다.
“연애하면 다 이래요. 아시면서.”
괜히 앞에 놓인 서류를 뒤적이며 은근슬쩍 던진 변명에 김 실장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제가 그때 분명히 경고드렸습니다. 회장님 귀에 들어가게 되면…….”
“알아요. 안다고요. 내가 그런 거 하나 생각 안 했을 것 같아요? 할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얼마나 고지식하고 고리타분하신 분인지 잘 아니까 시키시는 대로 맞선도 보고 했잖아요. 회사도 그래. 남들은 아들이나 손자가 들어가면 대놓고 이사나 상무 시켜 주더만. 나는 철저하게 사원부터 시작했잖아요. 내가 홍길동이에요? 할아버지를 할아버지라 부르지도 못하고. 그래 놓고는 직원들 사이에서 자기 평판이 어떠냐고 나한테 꼬치꼬치 캐묻기나 하시고. 스파이야, 뭐야.”
김 실장의 잔소리에 폭발한 주한은 지난날의 억울함이 터졌다. 처음부터 특혜는 안 된다며 못을 박은 할아버지 때문에 철저하게 서류 심사와 면접을 걸쳐서 입사했으며 절대로 신분을 노출하지 말라는 김 실장의 당부에 쥐 죽은 듯 3년간 열심히 일했다. 그중 마지막 1년을 유은찬과 만났고 덕분에 일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큰 도련님도 그렇게 하셨고 응당 작은 도련님도 당연히 따라야지요.”
“네, 네. 그래서 열심히 했잖아요. 내가 여기서 얼마나 더 맞춰 드려야 해요? 나처럼 착한 손주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주말마다 찾아뵙고 밥같이 먹어 드려. 틈틈이 말동무도 해 드려. 고작 할아버지도 케이크 하나 가져간 걸로 이러시면 안 되죠. 이게 얼마나 한다고.”
주한이 열심히 궤변을 늘어놓고 있을 그때였다. 갑자기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김 실장이 눈을 연속으로 깜박였다. 나이가 들더니 눈이 건조해진 것으로 생각한 주한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이참에 할아버지한테 단것 좀 끊으라고 하세요. 몸은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어울리지도 않게 무슨 케이크야. 아무튼 똑같은 걸로 사 왔으니까 그냥 넘어가 줘요. 아까 본 것도 모르는 척해 주시고. 그 녀석이 엄청 놀랐거든요. 김 실장님 눈에 뭐 들어갔어요? 건조해서 그런가……. 나이 들면 안구 건조증이 심하다던데, 약 하나 사 드려요?”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뜨고 회의실을 분주하게 오가던 유은찬이 떠올랐다. 주한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며 계속된 김 실장의 행동을 걱정했다.
“그래. 나도 하나 사 줘라.”
“누구야? 헉.”
어깨 너머에서 들려오는 가벼운 질문에 생각 없이 받아친 주한은 무표정으로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할아버지와 시선이 마주쳤다. 순간적으로 등골이 서늘해졌다.
“내가 오늘 아침부터 엄한 김 실장을 잡았는가 보다. 도둑 새끼는 따로 있는데. 그렇지?”
“어, 언제 오셨어요?”
“우리 집안이 목청 하나는 끝내주지. 누가 놀랐단 말인 거냐? 그리고 늙으면 그런 거 먹으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냐? 내 돈 주고 내가 사 먹겠다는데 그걸 사다 주지는 못할망정 말도 없이 훔쳐 가?”
노한 할아버지의 성난 목소리에 주한은 애써 웃으며 김 실장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냉정하게 거절당했다. 조용히 케이크 상자를 들고 일어난 그는 그 자리를 유유히 떠났다.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사라지자 주환은 어색하게 웃었다. 웃음으로 넘길 심산이었지만 할아버지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이주한, 너 내 케이크 훔쳐 가서 누구 줬냐!”
큰일 났다. 노인네가 귀도 밝지. 할아버지는 주한과 김 실장이 주고받은 대화를 죄다 엿들은 게 틀림없었다. 지금껏 재벌가의 딸이나 손녀와 맞선을 본 주한이 일개 사원과 사귀고 있다고 알려지는 것도 난감했지만, 남자 수인이라는 게 알려지면 할아버지 성격에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점점 불리한 상황으로 몰리게 되자 주한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거짓말을 던졌다.
“제가요.”
“뭐?”
“제가 먹었다니까요. 갑자기 아침에 배가 고파서요. 죄송해요, 할아버지. 다음부터는 말하고 가져갈게요. 저 그럼, 일이 있어서 이만 가 볼게요. 나중에 연락드릴게요.”
도망치듯 그 자리를 허둥지둥 빠져나온 주한은 엘리베이터에 탄 직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일단 상황은 모면했는데 이다음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미지수였다. 그만큼 할아버지는 조용히 일 처리를 하시는 분이었다. 마음에 안 들면 자신의 방식으로 단칼에 끝내는 냉정한 사업가 마인드를 가지신 분이랄까.
이건 김 실장에게 틀긴 것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제 어쩌지……. 무거운 마음으로 사무실에 도착한 그가 문을 연 순간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는 유은찬을 보았다. 점심시간이 끝났는데도 누구도 녀석을 깨우지 않은 것 같았다. 김동만조차도 말이다.
주한은 조용히 유은찬의 책상 쪽으로 다가갔다. 장어 덮밥 두 그릇이나 먹었으니 잠이 올만도 했다. 은찬이 자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그는 이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제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
지금 제 눈에 유은찬은 잠자는 한 마리의 아기 고양이처럼 보였다. 누가 옆에 있는지도 모르고 새근새근 잘도 자는 아기 고양이 말이다.
하지만 그 시선을 오해한 김동만은 뒤늦게 유은찬을 깨우려 했다. 주한은 재빨리 그의 손을 힘주어 꽉 잡았다. ‘죽고 싶어? 잘 자는 애를 왜 깨워?’ 암묵적 의미가 담긴 시선으로 노려보았고 주한에게 잡힌 동만의 손은 피가 통하지 않아 새파랗게 변해 갔다.
“저기, 손 좀…….”
주한은 고작 이까짓 거 하나 참지 못하고 놓아 달라 낑낑거리는 김동만이 가소로웠다. 약해 빠진 이런 인간이 뭐가 좋다고 못 헤어진다는 걸까. 아무리 봐도 자신보다 잘난 구석 하나 없는데. 그깟 아이스크림 하나, 케이크 하나 안 사 주는 쪼잔한 인간을.
주한은 신경질적으로 그 손을 내려놓고 팀원들에게 일렀다.
“유은찬 씨 깨우지 마세요. 피곤한 거 같으니까 이대로 자게 두세요.”
다들 의아하다는 시선이 날아왔지만, 주한의 의견은 변함없었다. 오히려 그들을 강제 침묵시켰다.
“다들 일 보세요. 되도록 시끄럽게 하지 말고.”
이주한의 발언에 다들 김동만을 바라보았다. 이렇다니까. 어찌 되었든 지금 유은찬의 애인은 김동만이었고 주한은 이런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곽 과장의 자리를 차지한 주한은 잠든 유은찬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왜 못 헤어져. 이 세상에 헤어지는 연인들이 얼마나 많은데.
조용히 김동만 쪽으로 시선을 옮긴 주한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어떻게든 저 녀석과 빨리 헤어지게 만들어 버릴 테다. 그것이 지금 이주한의 최대 목표였다.
***
차에서 내려 오피스텔로 향하던 중 잠시 멈춰선 은찬은 어깨너머를 힐끔거렸다.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주한이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었지만 모른 척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전과 달리 등 뒤에서 느껴지는 그의 시선이 싫지 않아 괜히 걸음이 느려졌다.
퇴근하기 직전 올린 서류가 잘못됐다는 말에 꼼짝없이 야근 당첨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팀원들이 사라지자마자 은찬을 데리고 근처 삼계탕집으로 향했다. 더운 여름이라서 그런지 손님으로 꽉 찬 가게는 맛집으로 소문난 곳이었다.
닭 한 마리 뚝딱 비우고 나니 그렇지 않아도 볼록 나온 배가 더 커진 것 같았다. 그나마 지금은 큰 와이셔츠로 어느 정도 가려졌지만 여기서 더 커지면 문제였다. 다행히 주한은 아직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 배부르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은찬은 차에서 내리기 전 이주한이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
‘먹고 싶은 거. 가지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다 사 줄 거예요?’
‘그럼. 내가 왜 너한테 이런 말을 하겠어.’
‘비싼 것도요?’
‘차라도 한 대 뽑아 줘?’
솔직히 그가 먼저 이런 식으로 나올 줄 몰랐기 때문에 진심으로 놀랐다. 김동만이 말하길 상대방에게 뭔가를 계속 요구하면 정이 뚝 떨어질 거라던데 이건 정반대였다. 이주한은 진심으로 차라도 한 대 뽑아 줄 기세였다.
‘맥시멈이 어디까진데요?’
‘맥시멈이라……. 가지고 싶은 거라도 있어? 말해 봐. 들어 보고 생각해 볼 테니까.’
집이라고 말해 볼까. 요즘 집값도 비싸던데.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던 은찬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이주한과 마주친 시선에 괜히 민망해졌다. 어색하게 웃으며 얼른 차에서 내리려고 했지만, 이번에도 그냥 보내 주지는 않았다. 여기까지 태워다 준 차비를 달라고 해서 주머니에 있던 치즈 맛 사탕 몇 개 던져 주고 나왔다.
그나저나 어쩐다. 김동만의 말을 믿는 게 아니었다. 정떨어지기는커녕 이주한은 오히려 더 귀찮게 해 주길 원하는 눈치였다.
“하아…….”
“땅 꺼진다, 땅 꺼져. 좋다고 입이 찢어지더니 왜 한숨이야?”
불쑥 나타난 동만의 등장에 은찬은 녀석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병원에 갔다 와서인지 그래도 오전보다는 상태가 좋아 보였다.
“어디 갔다 와?”
녀석은 손에 들고 있던 봉지를 들어 흔들었다. 근처 편의점에 다녀온 모양이다.
“내일까지는 즉석 죽으로 때워야 할 것 같아서.”
“몸은 괜찮아? 이제 똥 안 나와?”
“약 먹으니까 좀 낫네. 근데 뭐냐, 너. 왜 이주한 부장 차에서 내려? 이때까지 같이 있었던 건 아니지?”
딱히 거짓말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은찬은 밥까지 같이 먹고 왔다는 말을 하며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쏙 들어갔다.
“이럴 거면 그냥 사귀라니까? 나만 중간에서 새우 등 터지게 하지 말고.”
“또 그런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러네.”
“아니긴. 너 처신 잘해. 이러다가 소문 이상하게 난다? 뻔히 너랑 나랑 사귀는 거 소문났는데. 부장이 너한테 껄떡댄다고 소문나 봐. 너도 부장도 회사 못 다녀.”
“왜 못 다녀?”
은찬의 반박에 동만이 콧방귀를 날렸다.
“정말 몰라서 묻냐? 나만 불쌍한 놈이 되는 거잖아! 너하고 부장은 그냥 바람으로 보이는 거야, 이 멍청아!”
“그러니까 아니라니까. 나 부장한테 그런 마음 전혀…….”
손사래를 치는 은찬을 동만은 아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며 단칼에 말을 낚아챘다.
“전혀 없는 게 아니던데. 나 시력 좋거든? 차 안에서 두 사람이 꽁냥꽁냥 하는 거 다 봤거든? 언제는 부장하고 한 공기 마시는 것 자체가 죽을 것 같다던 놈이 새초롬하게 웃기는. 여기 우리 말고도 회사 사람들 많이 사는 거 알지? 너 자꾸 이러면 들키는 거 순식간이다?”
“내가? 내가 새초롬하게 웃었다고? 야, 너 시력 안 좋은가 보다.”
“아니요. 엄청 좋아요. 아주 연애 드라마 한 편 찍더만. 부장이 손 흔드니까 입이 귀에까지 걸려서는.”
내가 진짜 그랬나? 은찬은 손으로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너 손에 그거 뭐냐?”
“아, 이거? 부장님이 나 먹으라고 줬어.”
“부장니이임? 부장 새끼에서 확 급이 높아졌다? 먹는 거로 넘어가는 거냐?”
보자 보자 하니 자꾸 자신을 빈정거리는 모습에 은찬도 기분이 확 상해 버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복도를 가로질러 집으로 향하는 동안 동만에게 따졌다.
“아니거든? 이렇게 된 게 누구 때문인데! 네가 그랬잖아, 자꾸 사 달라고 귀찮게 하면 정떨어진다고! 근데 얼마든지 말하라고 하잖아! 별도 달도 다 따 준다고 하잖아! 이제 어떻게 할래?”
“진짜 그렇게 말했다고? 별도 달도 따 준다고?”
그런 말은 한 적이 없지만, 뉘앙스가 그랬다. 동만은 눈을 크게 뜨고 걸음을 멈췄다.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하던 녀석이 조심스럽게 은찬을 불렀다.
“야.”
“왜!”
“크게 한 건 하고 튈래?”
“뭐?”
“요즘 집값 엄청나잖아. 집 받고 튀자. 그러면 우리 평생 돈 안 벌어도 될지도 몰라.”
“와…… 이런 양아치 새끼.”
“솔직히 말해 봐, 너도 이런 생각 했어, 안 했어? 양심에 손을 얹고 말해 봐. 인마!”
김동만의 쐐기에 은찬은 괜히 녀석의 엉덩이를 주먹으로 퍽 쳤다. 즉시 동만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야! 나 아직 장……. 죽을래? 너 아오. 진짜! 내가 오늘 부장 새끼 때문에 어떤 일까지 당한 줄 아냐? 아무튼, 그 새끼 진짜 마음에 안 들어. 잘 생각해 봐. 지금은 이리한인지 뭔지 그 개새끼 하나지만, 나중에 여기저기서 섹파가 더 튀어나올지 어떻게 아냐?”
현관 도어 록 비밀번호를 누르다 말고 멈춘 은찬이 퉁퉁 부은 표정으로 동만을 응시했다.
“왜? 왜 그렇게 봐.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다 너 걱정돼서 하는 소리잖아. 너는 그래도 뒤탈 없이 깔끔하기라도 했지. 내가 볼 때 그 새끼는 아니야. 돈 많고 잘생기면 뭐 하냐? 섹스에 미친…….”
섹스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은찬은 반사적으로 동만의 무릎을 발로 퍽 찼다.
“아프잖아!”
은찬은 다리를 붙잡고 고통을 호소하는 동만을 향해 꽥 소리 질렀다.
“김동만! 너 그렇게 안 봤는데! 우리보다 나이도 많은데 새끼가 뭐냐? 아무리 그래도 상사잖아! 그리고 사람이 사귀다가 헤어질 수도 있는 거지! 그걸 두고 우리가 따질 권리는 없는 거잖아!”
“너 미쳤어?”
“부장님 사람 좋아. 괜찮아. 내가 그동안 착각한 거 같아. 먹을 것도 많이 사 주고, 나한테 엄청 잘해 줘. 누구처럼 잔소리만 하지 않고.”
“야……! 너 어떻게 나한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아무리 그래도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 줬는……. 하, 너 뭐냐. 그 자식한테 마음 생겼냐? 그래서 이래? 내가 부장 새끼 욕해서 그게 듣기 싫다 이거야?”
“누가 그렇대?”
“지금 네 행동이 그렇잖아! 불과 이틀 전까지만 해도 그 자식 싫다고 길길이 날뛰었으면서! 막말로 욕은 네가 더 했잖아. 씨발 새끼, 개새끼, 악마 같은 새끼! 저승사자는 뭐 하나 저런 놈 안 잡아가고! 맨날 이렇게 욕했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변하냐?”
“그런 거 아니라고!”
“왜 거짓말해! 차라리 그냥 부장한테 끌린다고 사실대로 말해!”
둘은 복도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소리를 지르며 말다툼을 벌였다. 그 소란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슬그머니 열리더니 빼꼼히 내민 사람들의 머리가 보였다. 화가 난 동만은 씩씩거리며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고 은찬은 굳게 입을 다문 채 그 자리를 돌아섰다.
“야! 너 어디 가!”
“관심 꺼!”
“유은찬……!”
은찬은 좀 전에 내린 엘리베이터로 뛰다시피 걸어갔다. 그것을 타고 다시 오피스텔 밖으로 뛰쳐나가 한동안 주변을 서성거렸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동만이 화내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부장님을 새끼라고 부르길래 그러지 말라고 한 것밖에 없는데 그게 눈을 부릅뜨고 화낼 일인가?
이 상태로 녀석과 다시 마주하는 게 꺼림칙했던 은찬은 근처 커피숍에서 한 시간을 버텼다. 어느 정도 버티면 찾으러 오겠지 생각했는데 연락 한 통 없다. 치사한 자식. 풀이 죽어 먹지도 못하는 커피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뭐 해? 자?]
이주한의 메시지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은찬은 울컥 목이 멨다. 망설일 것 없이 통화 버튼을 누른 은찬은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부장니이이임…….”
울먹이는 은찬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 부장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동만이랑 싸워서 나왔는데요오오……. 나한테 막 소리 지르잖아요오. 부장님 편들었다고…….”
대충 자신이 나온 이유를 간략하게 설명한 은찬은 억울함을 강조했다. 잠시 이유 모를 정적이 흘렀고 곧이어 낮게 깔린 저음이 들렸다.
[어디야? 어디에 있어?]
“오피스텔 근처 커피숍이요.”
[기다려. 내가 금방 갈 테니까.]
그렇게 그와 짧은 통화는 끝났다. 커피숍에 홀로 덩그러니 앉아 있던 은찬은 너무 지루하고 따분했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하품을 연거푸 하고 있을 때 커피숍 문이 거칠게 열리며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유은찬!”
고개를 돌린 은찬은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와, 겁나 빨라. 그의 집과 오피스텔 거리는 못해도 30분은 걸렸지만, 이주한은 15분 만에 도착했다. 급하게 나왔는지 집에서 입던 홈패션 그대로 나온 차림새였다. 놀라워하던 은찬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가 먼저 팔을 뻗어 은찬의 붉어진 눈시울을 만지작거렸다.
“울었어?”
“…….”
울기는커녕 하품만 연속으로 했다. 그런데 사실대로 말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주한은 속상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는 일단 제집으로 가자며 은찬을 팔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어찌 됐든 집에는 들어가기 싫었던 은찬은 못 이기는 척 그의 차를 탔다.
“어디 가요?”
은찬의 물음에 그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내 집.”
어쩌다 보니 계획에도 없는 일이 벌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걸 계기로 이주한과 사귀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김동만이 마지막에 외친 ‘부장한테 끌린다고 사실대로 말해!’ 그 말을 곱씹으며 은찬은 자기 합리화를 했다. 의도치 않게 가출 중이고, 잠시 피신할 곳이 필요해서 이주한의 집으로 가는 것이라고.
“저기…….”
“왜?”
운전하던 이주한이 은찬을 곁눈질했다.
“혼자 사시죠?”
“왜 이래. 나 혼자 사는 거 알잖아.”
“혹시나 해서 물어봤어요. 괜히 민폐 끼치는 거 아닌가 해서.”
“왜 민폐라고 생각해. 그런 생각 하지 마. 섭섭하니까.”
사실 은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민폐는 무슨. 누가 오라고 한 것도 아니고 전화 한 통화에 곧장 달려온 건 이주한이었다. 차창 밖을 두리번거리며 은찬은 생각나는 대로 질문을 던졌다.
“멀어요?”
“아니, 다 왔어.”
“집 커요?”
“왜?”
“오늘 하룻밤 신세 좀 지려고요.”
“방 많으니까. 너 있고 싶은 만큼 있어도 돼. 아예 푹 눌러살아도 되고.”
좌회전 신호를 받은 차는 그대로 직진했다. 길치인 은찬은 그가 어디로 가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늘 가는 루트가 아니면 가끔 집으로 가는 길도 잃어버리곤 했다.
“그건 안 되죠. 동만이가 있는데.”
무심코 튀어나온 동만의 이름에 잠시 차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차 싶었던 은찬은 슬그머니 옆을 힐끔거렸다. 김동만 이름에 민감한 그가 한마디 쏘아붙일 줄 알았더니 의외로 조용했다.
묵묵히 운전에 집중하는 이주한을 구경하던 그때, 뭔가 허전하다고 생각하던 은찬은 뒤늦게 들고 있던 케이크를 커피숍에 놔두고 온 게 떠올랐다.
“아, 맞다! 내 케이크!”
울상이 된 은찬이 속상해하자 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왜? 무슨 케이크.”
“부장님이 준 거요! 그거 커피숍에 놔두고 온 거 같은데 지금 차 돌리면…… 안 되겠죠?”
비싼 케이크에 미련이 덕지덕지 붙었지만, 커피숍에서 나온 지 30분이 지난 뒤였다. 당연히 그는 단호하게 잘랐다.
“됐어. 또 사 줄게. 다 왔어. 내리자.”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간 차는 아파트로 들어가는 지하 출입문 바로 앞에 차를 멈춰 섰다. 낯선 곳에 도착한 은찬은 저도 모르게 이주한의 뒤에 바짝 붙었다. 그리고 그가 카드 키로 지하 출입문과 엘리베이터를 열 때마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역시 비싼 아파트는 다르구나……. 속으로 감탄을 자아내고 있을 때 그의 집을 본 순간 입이 떡 벌어졌다. 재벌이니 당연히 비싸고 좋은 곳에 살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긴 복도를 지나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신발을 벗었다. 그리고 중문을 열자 운동장만 한 넓은 거실이 나왔다.
티브이와 오디오. 가죽 소파. 카펫.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다 비싸 보였다. 특히 은찬의 시선을 끄는 건 창 너머 뷰였다.
“한강이다…….”
눈 앞에 펼쳐진 야경에 넋이 나가 한참을 멍하게 쳐다봤다.
“마음에 들어?”
“이런 집은 얼마쯤 해요?”
“왜?”
“나도 이런 데서 살고 싶어서요. 내가 사는 오피스텔은 이거 반의반도 안 되거든요. 앞에는 건물이 딱 막혀 있어서 이런 뷰는 꿈에도 못 꾼다니까요? 엄청 비싸죠?”
“비싸지. 가방 내려놓고 편하게 있어. 내 집이다 생각하고.”
은찬에게 다가온 그는 여태 메고 있던 은찬의 가방을 손수 내려 주며 자연스럽게 소파로 등을 떠밀었다. 하지만 은찬은 가만히 앉아 있지 않았다.
“집 구경 좀 해도 되죠?”
말을 하기도 전에 먼저 방문 하나를 열고 있었다. 양복과 다른 옷들이 꽉 찬방 하나와 운동기구가 들어찬 방. 그리고 컴퓨터와 책장이 자리 잡고 있는 방. 마지막에는 침대가 있는 방을 휙휙 구경했다. 방 네 개에 욕실 두 개. 다용도실 하나. 아무리 봐도 자신이 잘 곳은 마땅치 않았다.
소파에서 자야 하나. 다시 거실로 돌아온 은찬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소파에 얌전히 앉았다. 소파에 앉아 은찬이 돌아다니는 것을 지긋이 보고 있던 주한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구경 다 했어?”
“저 여기서 자면 되죠?”
“여기? 소파?”
“네, 따로 잘 곳이 없는 것 같아서요. 근데 저 침대 아니면 잠 못 자는데……. 푹신해야 잠자는데.”
그러니 침대를 양보해 줄 수 없느냐는 은찬의 암묵적인 시선에 그는 표정 변화 없이 대답했다.
“그럼 침대에서 자.”
“침대가 하나뿐이던데…….”
아무리 둘러봐도 하나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둘 중의 하나는 소파에서 자야 했다. 손님이지만 염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던 은찬은 눈을 깜박이며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통하지 않았다. 김동만은 이렇게 하면 먹혔는데 그는 그저 은찬을 빤히 쳐다만 볼 뿐이다.
아…… 안 먹히네.
“제가 여기서 자죠. 뭐. 부장님이 나 좋아한다는 것도 다 뻥이죠? 척하면 척이지. 이런 거 하나 양보 못 해 줘요? 이럴 거면 근처 모텔이나 가서 편하게 자는 건데. 괜히 부장님 전화 받았어.”
가뜩이나 김동만하고 싸운 것도 짜증 나는 판국에 이주한까지 제 마음대로 안 되자 은찬은 속마음을 대놓고 표출했다. 동만이 말대로 이런 아파트 하나 받고 튀는 게 나았으려나. 여길 와 보니 은근히 그런 마음이 없지 않아 생겼다.
“부장님. 나 다 해 준다고 했죠?”
“왜? 생겼어?”
“아파트요. 이런 아파트.”
은찬은 자연스럽게 아파트를 요구했고, 이주한은 말문이 막힌 모습을 보였다. 너무 심했나. 농담이라고 할까. 은찬이 분위기 파악을 하고 있을 때 그에게서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나왔다.
“김동만하고 헤어지고 나한테 오면.”
“네에?”
너무 놀란 나머지 은찬의 목소리가 음 이탈을 해 버렸다. 뭐야, 이 정도로 날 좋아하는 거야? 김동만이 늘 말하길 누군가 자신에게 아파트 한 채만 주면 그 사람의 발가락이라도 빨겠다고 했다. 동만아 나 이주한 발가락 빨아야 하는 거야?
“……농담이죠?”
“김동만하고 왜 싸웠어. 그것부터 말해. 나 때문이야? 혹시 그 자식이 때렸어?”
이주한 때문은 맞는데 때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은찬이 대답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좀 전과 달리 험악한 얼굴로 변한 그는 김동만에 대한 분노를 거침없이 쏟아 냈다.
“이럴 줄 알았어. 알았다고!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알고 일부러 그러는 게 분명해! 그 자식, 나 없을 때 너 구박하고 그런다며?”
구박은 아니고 잔소리. 묵묵히 듣고 있던 은찬은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어째 이주한의 분노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안 되겠다. 내일 당장 그 자식 잘라 버려야겠다. 네가 못 헤어지겠다면 내가 눈앞에서 사라지게 해 줄게.”
안 된다. 우리 김동만 이 회사에 뼈를 묻겠다는 각오로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는 놈이다. 난데없는 김동만의 해고 통보에 눈을 동그랗게 뜬 은찬이 이주한의 팔을 꽉 잡았다.
“안 돼요! 우리 동만이 자르면 안 돼요!”
“너…… 그래도 그 자식 편들어? 그 새끼가 그렇게 좋아? 이 밤에 너 이렇게 쫓아낸 놈이야! 너 울린 놈이라고!”
“나 안 울었어요!”
원래 유은찬 집안이 찔러도 눈물 한 방울 안 나오는 집안이었다. 고양이 수인이 눈물이 거의 없는 편이기도 했다. 하품한 걸 오해한 이주한은 김동만을 죽일 기세로 길길이 날뛰었다.
“내 앞에서 그 자식 감싸지 마! 널 여기까지 데려오면서 내 심정이 어떨지 생각은 해 봤어?”
이주한의 감정이 실린 호소를 들으며 은찬은 창 너머 한강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괜히 왔다고 후회했다. 그냥 집으로 들어갈걸. 여긴 여기대로 더 지랄 같았다. 아까 아파트 준다고 할 때까지가 딱 좋았는데.
“유은찬. 지금 여기서 선택해. 나야, 김동만이야.”
“네?”
이건 또 무슨 헛소리인가 싶었다. 룸메이트이자 베프인 김동만과 지금은 개과천선했지만, 한때나마 개새끼 상사였던 이주한 중 고르라니. 그들을 사이에 두고 고민하는 것도 웃겼다. 엄연히 두 사람을 대하는 은찬의 감정은 달랐기 때문이다.
은찬이 고민에 빠지자 이주한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적어도 난 진심으로 너한테 잘 보이려고 노력 중인데……. 넌 그놈의 김동만, 김동만, 김동만! 그 자식밖에 눈에 안 들어오지? 내가 왜 그런 하찮은, 하……. 내가 그 자식보다 못한 게 뭐야?”
결국 이주한은 질투 대상인 김동만과 비교를 하는 초라한 질문을 던졌다. 없다. 외모도 월등하고 재력도 월등하고 머리도 훨씬 좋고. 그리고 모솔인 김동만보다 연애 경험도 아주 많고. 이주한은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어서 재수 없는 그런 타입이었다.
그런데 요즘 그런 이주한에게 자꾸만 시선이 갔다. 사람 일은 정말 알 수가 없다더니. 매일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악담을 퍼붓던 남자인데 말이다. 은찬은 저도 모르게 이주한의 팔을 꾹꾹 눌렀다.
“부장님.”
“…….”
“키스해도 되죠?”
대답 없는 이주한에게 몸을 바짝 밀착한 은찬은 그의 양 볼을 부여잡고 끌어당겼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그냥 지금 기분상 키스가 하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입술이 닿기 직전 불쑥 끼어든 손이 은찬의 입을 틀어막아 버렸다.
“안 돼.”
단호하게 키스를 거절한 이주한의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파였다. 키스를 위해 내민 은찬의 입술만 무안하게 됐다.
“왜요? 왜요? 왜요?”
“이런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는 거 더는 안 봐줘. 제주도에서 당하고 또 당할 거 같아? 확실히 해. 김동만이야, 나야.”
“하아…….”
지금 그게 꼭 중요한가. 딱 키스할 타이밍이었는데. 빈틈을 노려 한 번 더 기습적으로 입술을 들이밀었지만 보기 좋게 저지당했다. 할 수 없이 그의 딱딱한 가슴에 턱을 괸 은찬은 불만을 표시했다.
“동만이 이야기 좀 안 하면 안 돼요?”
“너야말로. 왜 입만 열면 꺼내면 그 자식 이름이 나오는 건데? 최근에 더 그렇잖아. 일부러 그러는 거야? 나 질투하게 만들려고?”
질투까지는 아니고 포기하게 하기 위한 나름의 작전이었다고 할까. 물론 지금도 진행 중이긴 한데 그렇다고 보기에는 그들의 자세가 묘했다. 은찬은 턱을 괸 채 코앞에 있는 이주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주한. 세 글자 이름만 들어도 정색하던 자신이 지금 아무렇지 않은 건 무슨 이유일까. 맛있는 거 많이 사 줘서 좋았고 다정하게 잘해 줘서 좋았다. 이런 게 김동만의 말처럼 끌리는 건가? 아니면 좋아하는 건가? 그 둘의 명확한 차이를 따질 만큼 은찬은 머리가 좋지 않았다. 귀찮기도 하고.
“부장님. 나 부장님 엄청 엄청 싫어했던 거 알죠? 욕도 많이 했는데. 맨날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기도도 했는데.”
뜬금없는 은찬의 고해성사에 이주한은 묘한 표정이 됐다. 뭐랄까. 한 대 쥐어박고 싶은데 참는 느낌이랄까.
“……굳이 그 말을 꺼내는 이유가 뭐야? 난 네 이야기 말고 김동만에 관해서 묻고 있는데.”
“근데 이상하게 지금은 그런 마음이 하나도 안 들어요. 아까 내가 동만이하고 싸웠다고 했잖아요? 부장님 편들다가. 아니, 글쎄 그 자식이 부장님한테 부장 새끼라고 하지 뭐예요? 그래서 내가 그러면 안 된다, 아무리 그래도 새끼가 뭐냐고 그랬더니 눈을 부릅뜨고 막 나한테 따지는 거 있죠?”
“그랬어?”
한순간 이주한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미간에 있던 주름이 사라지고 입술 끝자락이 살짝 말려 올라갔다. 은찬은 여전히 그의 가슴에 턱을 괸 채 주절주절 떠벌리기 바빴다.
“네. 아무리 부장님이 씨발 놈 같아도 그러는 거 아니죠. 속으로 욕해야지. 안 그래요?”
“…….”
“그래서 싸웠어요. 내가 또 그런 건 못 참거든요. 위아래 상도덕은 지켜야지.”
“상도덕……. 네가.”
이주한은 뭔가 할 말이 많은 시선으로 은찬을 지긋이 보았지만,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제 감정을 정리하기에도 바빴기 때문이다. 이리저리 아무리 재고 따져 봐도 김동만의 말이 맞았다. 원래 몸 정이 무서운 거라고 두 번이나 뜨거운 밤을 보냈는데 감정이 안 생길 리 없었다.
섹파 하자고 달려들 때와는 전혀 달라진 모습이 은찬을 움직이게 만들었나 보다. 절대로 먹을 것에 움직인 게 아니라고 스스로 그렇게 합리화를 했다.
“생각해 봤는데……. 동만이하고 빨리 정리해 보도록 할게요.”
“언제까지.”
“일…주일 안에?”
일주일은 무슨. 지금 전화 한 통화로 헤어지자고 하면 김동만은 만세를 부를 놈이었다. 자세한 사정을 알 리 없던 이주한은 그것도 탐탁지 않은지 냉정한 목소리로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내일 당장 헤어져.”
“안 돼요. 어떻게 하루 만에 헤어져요. 헤어지는 것도 단계가 있는 거 모르세요?”
“난 그런 거 몰라. 내일 아니면 지금 당장 헤어져. 집 때문이면 그 집에 있는 거 다 버리고 와. 내가 다 사 줄 테니까. 머물 데 없으면 여기 있는 방 중에 하나 가져. 비워 줄 테니까.”
‘유은찬 씨, 체계적으로 일 좀 하세요. 체계적으로. 머리가 안 되면 눈치라도 있던가!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
귀에서 피가 나도록 들었던 이주한의 잔소리가 환영처럼 들렸다. 모든 일에 체계적이고 완벽할 줄 알았던 이주한이 이런 남자였을 줄이야. 그냥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기 일쑤였다.
“저 그 집 안 나올 건데요. 왜 나와요?”
“뭐? 헤어진다며!”
“네. 헤어지는 건 헤어지는 거고 집은 집이죠. 아무튼 동만이하고 헤어질 테니까, 이제 우리 동만이 그만 좀 괴롭혀요. 애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건강하던 놈이 장염까지 걸렸겠어요?”
“하……. 유은찬 너 지금 나 가지고 노는 거지?”
이주한이 갑자기 험악해진 표정으로 버럭 소리치자 깜짝 놀란 은찬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보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분명 고양이 귀도 튀어나왔을 거다.
“나 놀랐어! 와씨, 나 애 떨어질 뻔했잖아요! 내 심장 봐요!”
씩씩거리며 이주한의 손을 제 가슴에 가져갔다. 세차게 쿵쿵 뛰는 심장 박동에 이주한은 작게 미안하다고 속삭였다.
“부장님이야말로 나 가지고 논 거 아니에요? 처음에는 섹파 하자고 사람 열 뻗치게 하더니 나중엔 또 사귀재.”
“그건……! 나도, 미안하게 생각해.”
“애초에 부장님하고 동만이는 동등한 위치가 될 수 없어요. 왜냐, 우리는 애인 이전에 친구였잖아요. 애인이라고 해 봤자 우리 섹스는커녕 키스도 한번 안 해 봤거든요? 애인 끝났으니까 친구로 돌아갈 수 있잖아요. 안 그래요? 아무튼. 헤어진다고 하잖아요, 부장님 때문에. 빨리 끝낼게요. 일주일도 못 기다려요?”
김동만이 스트레스 받는다고 징징거리는 것도 듣기 싫고 자신도 어느 정도 마음이 있는 것 같으니 살짝 계획을 수정해야 할 것 같았다. 어찌 됐든 유은찬의 마지막 선택은 이주한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자 그제야 그의 표정이 좀 풀려 갔다. 하지만 아직은 응어리는 남아 있는 모양이다.
“진짜 키스 안 했어?”
“뭐…….”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거다. 김동만과 키스라니.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다시 한번 사실을 확인한 그는 돌연 다른 주제를 거론했다.
“나는 왜 부장님이고 김동만은 우리 김동만이야?”
옅은 미소를 지으며 던진 이주한의 질문에 숨겨진 의미를 은찬은 이해하지 못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럼 뭐라고 불러요? 부장님 말고 딴 거 있나? 부장 새끼? 아니면 부장 놈?”
“네 입으로 상도……. 아니, 됐다. 회사에서는 부장님으로 부르고 우리 둘만 있을 때는 다르게 불러 줬으면 하는데. 형, 주한 씨, 자기 뭐 이런 호칭들 많잖아.”
“아…….”
그제야 이해한 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접수했다. 은찬이 또 그런 건 기막히게 잘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해 달라는 건 잘 해 주는 편이다.
“형, 이주한 형.”
“너 진짜…….”
“왜요? 형.”
꽃받침 모양으로 턱을 괸 은찬을 보더니 갑자기 이주한이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헛웃음만 연신 터트렸다. 내가 뭐? 이상한가? 이주한은 은찬의 고양이 귀를 만지작거리며 속삭였다.
“사람들이 왜 고양이를 키우는지 알겠다. 진짜 미치겠네.”
“나 사람인데요?”
그 손길이 좋았던 은찬은 저도 모르게 그르렁거렸다.
“알아. 그래서 다행이지. 진짜 고양이하고 섹스하고 싶지는 않거든.”
이번에는 이주한이 먼저 은찬에게 돌진했다. 허리를 확 끌어당긴 그는 은찬의 뒷덜미를 움켜잡고 입술을 밀어붙였다. 살짝 벌려진 입술 틈으로 비집고 들어온 혀가 입안을 거칠게 훑었다. 난잡하게 뒤엉킨 혀가 서로의 입안을 오가는 동안 흥분한 그의 눈은 이미 짐승의 눈으로 변해 있었다.
“혀…엉.”
은찬의 속삭임에 그의 몸이 움찔거렸다. 고작 그 말에 이렇게 흥분할 일인가 싶으면서도 은찬은 그 반응이 재미있었다.
“주한 형.”
몸에서 뜨거운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한 주한이 은찬의 목덜미에 입술을 비비며 낮은 저음으로 속삭였다.
“형 소리에 흥분해 보기는 처음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