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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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좋은 아침입니다.”

이주한의 경쾌한 인사에 팀원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일제히 시선을 모았다. 그렇지 않아도 제일 일찍 출근하던 그가 보이지 않아 다들 수군거리던 참이었다. 평소보다 30분 늦게 등장한 주한은 누가 봐도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평소보다 늦으셨네요.”

이 대리의 물음에 그는 별일 아니라는 식으로 대답했다.

“제시간에 출근했습니다. 제 방에서 볼일 좀 보다가 아침 회의 겸 보고받으러 왔습니다. 제가 여기에 계속 있으면 일하기 불편하다는 의견이 있어서.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게시판에 적지 말고 직접 말해 주면 좋았을 텐데.”

이주한은 팀원들과 일일이 눈을 맞추며 ‘직접’이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잡히면 가만 안 두겠다는 의지가 담긴 시선에 팀원이 침묵하고 있을 때 그는 유독 은찬에게만 옅은 미소를 던졌다.

게시판이 익명이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속으로 뜨끔했던 은찬은 저도 모르게 그 시선을 피했다.

“자, 그럼 모입시다. 회의해야죠.”

이주한의 주도하에 회의가 시작됐다. 제주도 리조트 쪽에서 건의한 것을 수정했는지.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개발자와 동행해 그곳에서 시범 단계를 거쳐야 할 것 같다는 그런 말들이 오갔다.

다들 한참 회의에 집중하고 있을 때 은찬은 턱을 괴고 앉아 열심히 토론 중인 이주한을 바라보며 딴생각에 잠겼다. 이상하단 말이야. 사수였을 때 이주한은 인성 사이코 그 자체였는데 지금 이렇게 보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며칠 동안 욕을 안 들어서 그런가? 아니면 어제 밤늦게 아이스크림을 사 와서 그런 건가.

어제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면 그 빌미로 싸우려고 했건만 반대로 그를 계속 눈으로 좇고 있었다. 그러다 시선이 마주치면 모른 척 딴청을 피우길 몇 번. 결국, 옆에서 보다 못한 동만이 복화술로 조용히 따졌다.

“그만 좀 하지?”

“뭘?”

“시선 교환 좀 그만하지?”

“……뭔 소리야.”

“그런 건 둘이 있을 때 하든가. 회의 시간에 이게 뭔 짓이냐. 넌 아픈 친구 앞에 두고 그런 짓이 하고 싶냐?”

“아니거든.”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아까부터 계속.”

“김동만 씨.”

오늘따라 예민한 동만이 쏘아붙이고 있을 때 갑자기 이주한이 녀석의 이름을 싸늘하게 불렀다. 팀원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동만 쪽으로 쏠렸다.

“네?”

“회의 시간에 잡담하는 건 아니지 않나요? 아무리 사내 연애지만 공과 사는 구분할 줄 알아야죠. 공개적으로 크게 말할 거 아니면 개인적인 사담은 나중에 하세요.”

선생님에게 혼나는 학생처럼 이주한은 동만을 꾸짖었다.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익은 토마토가 된 녀석은 회의가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두 시간의 긴 회의가 끝나고 잠깐의 휴식 시간이 찾아왔다. 동만은 화장실로 급하게 뛰어갔고 목이 말랐던 은찬은 홀로 탕비실로 향했다.

“우유, 우유.”

아무도 없는 탕비실. 콧노래를 부르며 냉장고 문을 열어 우유를 꺼내 마시고 있을 때 이주한이 들어왔다. 조용히 들어온 그는 괜히 냉장고 문을 열며 두리번거렸다.

“……죄다 마실 거뿐이네.”

“우유 한 잔 드릴까요?”

“우유 좋아해?”

“고양이가 우유 싫어하는 거 봤어요?”

“그러네.”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낸 그는 컵에 따르고 자연스럽게 은찬의 옆에 섰다.

“아이스크림도 좋아하고. 또 좋아하는 게 뭐야?”

“어제 말했잖아요.”

“주면 다 잘 먹어요, 이런 대답 말고. 정말 좋아하는 거. 케이크 좋아해?”

좋아하지. 환장하지. 없어서 못 먹지. 은찬은 대답 대신 그를 바라보며 눈을 반짝였다. 그런 은찬을 보며 이주한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좋아하는가 보네. 마침 선물 받은 게 있는데. 먹을래?”

그는 우유를 마시지는 않고 컵을 빙빙 돌리기만 했다.

“지금요?”

“지금. 잠깐만 먹고 오면 되지 않을까.”

그렇지 않아도 배가 고프던 차였다. 평소라면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제의였지만 은찬은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 제의를 냉큼 받아들였다.

“그럼, 조금만.”

은찬의 대답이 나오자마자 그는 들고 있던 컵을 내려놓고 탕비실을 나섰다. 저번과 마찬가지로 임원 회의실로 향했고, 은찬을 밀어 넣은 뒤 잠시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제과점 상표가 적힌 작은 상자가 있었다.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상자 안에는 금박이 뿌려진 미니 치즈케이크가 들어 있었다. 은찬은 코끝을 스치는 진한 치즈 냄새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 치즈케이크!”

“좋아해?”

“네! 완전 좋아하죠! 이거 다 먹어도 돼요?”

다들 각자 업무를 보느라 바쁘게 일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은찬이 빠지면 그만큼 속도가 느려질 것이다. 조금만 먹고 얼른 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웬걸 치즈케이크다. 이걸 어떻게 그냥 지나쳐.

“다 먹어.”

이주한은 손수 의자를 빼주며 은찬을 앉혔다. 그리고 일회용 포크까지 쥐여 주는 친절까지 보였다. 망설일 것 없이 눈을 반짝이며 치즈케이크를 입안에 넣은 그 순간, 은찬은 몸을 부르르 떨면서 감탄사를 내뱉었다.

“너무 맛있다! 이거 어디에서 샀어요?”

“왜?”

“다음에 사 먹으려고요! 완전 내 취향! 내 인생 치즈케이크로 딱 정했어요!”

“그 정도야?”

말해 뭐 해. 은찬은 크게 하나 떠서 입안 한가득 채웠다. 좀 전에 은찬이 그랬던 것처럼 턱을 괸 이주한은 그런 은찬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천천히 먹어.”

“느므느므 맛있어서여.”

입안을 가득 채운 치즈케이크의 향연에 은찬은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비싼 그에여?”

“글세……. 얼마 안 해.”

“오디 그에여?”

대화를 하며 포크를 움직이던 은찬은 갑자기 치즈케이크를 보며 울상이 됐다. 아깝다. 벌써 반밖에 안 남았다.

“H 호텔 베이커리. 가격은…… 4만 원 정도 하려나.”

손바닥만 한 케이크 하나 가격이 4만 원이라는 말에 은찬은 치즈케이크를 천천히 음미하기 시작했다. 비싼 건 아껴 먹어야 하니까.

“왜 그래?”

한입 가득 퍼먹던 은찬이 포크로 찔끔찔끔 먹기 시작하자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싼 거라서…….”

“그냥 먹어. 또 사 줄 테니까. 그 자식은 이런 거 안 사 줘?”

“네.”

동만뿐만이 아니라 지금껏 은찬이 만나 왔던 누구도 이렇게 비싼 케이크는 사 준 적이 없었다.

“혹시 어제도 그 자식이 안 사 줘서 전화한 거야?”

“뭐…….”

은찬은 뭐라 대꾸할 말이 없어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이주한의 표정이 살벌해졌다. 뭔가 단단히 오해하기 시작한 것 같았지만, 굳이 정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일부러 그랬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 없으니까.

갑자기 둘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물끄러미 이주한을 보던 은찬은 치즈케이크에 살짝 기분이 들뜬 탓에 평소와 달리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걔는 다 좋은데 잔소리만 좀 안 했으면 좋겠어요.”

“잔소리. 어떤?”

“뭐 먹으면 더럽게 먹는다고 잔소리하고. 과자 먹어도 부스러기 흘리지 말라고 하고. 먹은 것 좀 치우라고 잔소리하고. 맨날 소파에 누워 있다고 잔소리하고. 그 소파 동만이가 샀거든요. 유세 엄청 떨어요.”

“나쁜 놈이네. 헤어지라니까. 내가 집도 구해 주고 소파도 사 줄게.”

“안 돼요. 나 동만이 없으면.”

청소도 해 주고 밥도 해 주는 김동만이 없으면 안 된다. 이런 숨은 의미를 알 리 없던 이주한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유은찬.”

“…….”

갑자기 무거워진 분위기에 은찬이 포크를 내려놓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은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르고 달래기 시작했다.

“다 먹어. 다 먹어야지 나갈 거야. 점심 뭐 먹을까. 먹고 싶은 거 있어?”

아직 한 시간이나 남은 점심 메뉴를 정하란다. 그나저나 또 같이 먹는다고? 은찬이 망설이고 있을 때 그가 먼저 선방을 쳤다.

“장어 덮밥 잘하는데 아는데. 그거 먹으러 갈까? 장어는 좋아하지?”

“두 그릇도 먹을 수 있는데요?”

평소에 먹기 힘든 장어 덮밥에 신이 난 은찬은 다시 케이크를 먹기 시작했다. 마지막 한 입을 막 넣었을 때 주한은 은찬의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털어 주며 픽 웃었다. 덩달아 웃던 은찬은 저도 모르게 습관처럼 또 동만을 들먹였다.

“동만이는 멍청해 보인다고 맨날 그랬는데.”

“이게 왜?”

“자기는 고양이 수인이라고 해서 엄청 깔끔떨 줄 알았대요. 근데 나보고 환상 다 깨졌다고 그러던데요? 부장님도 그런 환상 가지고 있으면 얼른 버리는 게 좋을 거예요.”

미리 던진 경고에 이주한은 입꼬리를 올리며 은찬의 양 볼을 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천천히 다가와 은찬과 코끝을 마주했다.

“난 오히려 더 귀여운데? 딱 내가 생각한 고양이. 유은찬인데?”

나지막이 속삭이며 그가 은찬의 입술을 살짝 머금었다. 이러려고 여기 온 건 아닌데……. 케이크 먹다가 난데없이 입맞춤을 당한 은찬은 너무 놀란 나머지 검정고양이 귀가 머리 위에 뿅 하고 튀어나왔다.

“이봐. 귀엽다니까.”

키득 키득 웃으며 이주한이 본격적으로 키스를 시작하기 직전, 임원 회의실 문이 벌컥 열렸다.

“갑자기 오후에 임원 회의가 잡혔으니까. 기본적인 것들 세팅…….”

활짝 열린 문 앞에 그대로 얼어 버린 남자는 회장님의 비서 김 실장이었다. 그는 이주한과 얼어 버린 유은찬을 번갈아 보더니 돌연 황급히 문을 닫아 버렸다. 멍청하게 눈만 끔벅이던 은찬이 이 상황을 이해한 건 한 박자 지나서였다.

맙소사, 들켰어! 그것도 키스하려고 할 때! 하필 그 타이밍에……!

경악한 은찬이 어떻게 하냐고 회의실을 왔다 갔다 할 동안 이주한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이리저리 움직이는 은찬을 따라 시선 쫓기에 여념 없었다.

***

동만이 점심시간을 틈타 잠시 병원에 간 사이 홀로 남겨진 은찬은 어쩔 수 없이 이주한과 밥을 먹어 줬다. 그가 사정사정해서 같이 가 준 것뿐이지 장어 덮밥 때문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주한은 별다른 말 없이 은찬의 말에 수긍했다.

잠시 묘한 공기가 맴돌았던 두 사람 사이는 김 실장의 등장으로 다시 냉랭해졌다. 정확히 따지자면 이주한은 아무렇지 않은데 은찬 혼자서 끙끙 앓았다.

“괜찮아. 괜찮다니까.”

이주한은 회장 손자니까 태평하게 그런 소리가 나올지 몰라도 은찬은 달랐다. 일개 사원인 자신이 그 빌미로 잘리게 되는 건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에 입맛이 없었지만, 장어 덮밥 2인분은 거뜬하게 해치웠다. 분하지만 맛있는 건 맛있는 거니까.

실로 오랜만에 먹어 보는 맛있는 장어 덮밥이었다. 은찬이 부른 배를 어루만지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자 이주한도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회사로 돌아가기 전 그는 볼일이 있다며 은찬을 먼저 회사 앞에 내려 주고 차를 돌렸다.

적당히 배도 부르고 기분이 좋은 은찬이 건물 정문으로 향하던 중 저 멀리 힘없이 터벅터벅 걷고 있는 동만을 발견했다. 녀석이 근처까지 오길 기다렸다가 슬쩍 다가가 팔을 툭 쳤다.

“야, 밥 먹었어?”

장어를 먹어 윤기가 흐르는 은찬과 달리 동만은 눈 밑이 퀭했다.

“치지 마.”

“밥 먹었냐니까?”

그 말을 무시하고 다시 한번 툭 치자. 녀석이 어금니를 꽉 깨물며 목에 핏대를 빡 세웠다.

“건들지 말라고! 나 지금 톡 건들면 바로 나올 수도 있으니까! 최대한 터치는 하지 말자!”

“…….”

한걸음 물러난 동만의 상태가 꽤 심각해 보였다.

“……뭐 좀 먹었어?”

“나 병원 간 거 뻔히 알면서 그딴 말이 나오냐?”

“이 정도 아프면 월차라도 내든가. 반차 내고 오후부터 째.”

“됐거든. 나 그거 모아서 애인 생기면 같이 놀러 갈 거야. 두고 봐. 나 올해 가기 전에 애인 만들 테니까.”

평소의 김동만이라면 버럭 소리치고도 남았을 상황에 녀석은 말도 섞는 게 귀찮은지 일정한 톤으로 이어 갔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던 은찬은 그런 동만을 빤히 쳐다봤다. 그러자 이제는 쳐다보는 것조차도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사람 그렇게 빤히 보는 거 아니다.”

“불쌍해서. 병원에서는 뭐래?”

“불쌍하게 보는 시선이 아닌데? 말도 안 되는 소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그럼 보지 말까?”

“그냥 오늘만. 나를 좀 내버려 두면 안 될까?”

오늘 녀석은 예민 그 자체였다. 신경질적이고 짜증 섞인 말투에 은찬은 입을 삐죽 내밀고 툴툴거렸다.

“나만큼 너 생각해 주는 사람 어디 있다고 그러냐? 그러게. 어제 아이스크림 누가 그렇게 다 먹으래? 미련하게.”

“그럼? 그 비싼 아이스크림을 그냥 버려? 냉동실에 다 넣지도 못할 만큼 사 온 놈이 미친 거지!”

“밥은. 뭐라도 먹어야 할 것 아니야. 빈속에 약 먹으면 속 버려.”

“안 그래도 편의점 가서 죽이라도 하나 사려고 했어.”

둘은 자연스럽게 로비를 가로질러 편의점으로 향했다. 즉석 죽 하나와 보리차를 산 동만은 은찬에게 다른 건 필요 없느냐는 시선을 던졌다.

“됐어. 나 배불러.”

“혼자 먹었어?”

“아니, 부장이랑.”

“얼씨구. 곧 죽어도 싫다더니 잘도 붙어 다닌다?”

계산을 위해 잠시 중단된 동만의 핀잔은 편의점을 나온 후 이어졌다.

“부장 그거 안 되겠어. 내가 볼 땐 영 아니다.”

“뭐가 아닌데?”

“우리 나비하고 까망이 아빠로 인정 못 하겠다고. 회의 시간에 나한테 하는 봤지? 팀원 앞에서 그렇게 무안을 주냐? 인성 쓰레기에 과거도 더러워서 안 돼. 난 인정 못 한다.”

어제는 잘해 보라더니. 하루아침에 말이 바뀐 동만의 강력한 주장에 은찬은 머쓱하게 웃었다.

“그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지 않나? 회의할 때 네가 잡담해서 그런 거니까 그럴 만도 하지.”

조심스레 말을 던지자 동만이 걸음을 멈추고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뭔가 냄새가 난다.”

“냄새? 무슨 냄새? 장어 냄새나? 나 장어 덮밥 먹고 왔거든. 되게 유명한 곳이래! 유명해서 그런지 가격도 장난 아니야. 나 그거 두 그릇이나 먹고 왔다?”

양팔을 들어 냄새를 킁킁 맡아 봤지만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은찬이 점심 메뉴를 자랑하자 동만의 표정과 시선이 바뀌었다. 기가 찬다는 표정과 이글이글 타는 시선. 금방이라도 한 대 때릴 것 같은 기세였지만 다행히 오늘은 그럴 힘이 없어 보였다.

“너 멍청하게 먹는 것에 넘어가지 마! 그게 제일 미련한 거야!”

“누가 넘어갔대? 나 안 넘어갔거든?”

“그런데 왜 그 자식 편드냐? 나랑 같이 씹어도 모자랄 판에?”

“그거야…….”

그거야 맛있는 거 사 준 사람이니까. 은찬이 적당한 핑계를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때마침 그들 쪽으로 직진하는 남자가 보였다. 이번에는 그가 누군지 한눈에 알아봤다. 이주한의 섹파, 이리한이다. 단숨에 코앞까지 다가온 그는 아주 반갑게 인사했다.

“여기서 또 보네요. 그쵸? 밥 먹었어요?”

“……네. 식사하셨어요?”

이 자리에서 이 만남이 반가운 사람은 이리한뿐이었다. 동만과 은찬은 그와 보이지 않는 선을 그어 놓고 최대한 말을 섞지 않으려 했다.

“그럼요. 지금 몇 시인데 밥 먹고 왔죠. 나는 딱 제시간에 밥 안 먹으면 안 되거든요. 배고파서 죽어요. 유은찬 씨 장어 먹었구나?”

이리한은 콧잔등을 찡그리며 은찬의 점심 메뉴를 단숨에 맞췄다.

“어떻게 아셨어요?”

“내 코가 개 코거든요. 장어 덮밥은 저기 경복궁 앞에 있는 집이 맛있는데. 거기 되게 오래된 집 있는데.”

신기하게도 그가 말한 곳이 오늘 은찬과 이주한이 간 곳이다.

“어? 거기 갔는데.”

“그래요? 그 집 맛있죠?”

“네, 엄청 맛있었어요.”

“양도 많고.”

“네, 엄청 많아요.”

“나는 너무 양이 많아서 한 그릇이면 배 터지겠던데. 주한이는 두 그릇 정도 먹거든요.”

이리한과 장어 덮밥으로 신나게 대화를 이어 가던 중 이주한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은찬은 차게 식었다. 대화의 내용을 추론해 보면 그 가게는 이리한과 이주한이 자주 가는 곳 같았다.

은찬은 이주한이 늘 두 그릇을 먹는다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닌데……. 좀 전에 그는 한 그릇도 채 먹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밥 위에 올려진 장어를 은찬에게 양보하며 먹는 것을 조용히 구경했다. 기분이 묘해진 은찬은 슬슬 이 남자가 거슬렸다.

“김동만 씨는 어디 아파요?”

처음 봤을 때도 그랬지만 보기보다 말이 많은 남자였다. 혼자 재잘 떠들던 그의 시선이 은찬을 지나 동만에게 꽂혔다.

“네, 아픕니다.”

애석하게도 김동만의 상태는 많이 까칠했다. 차갑게 쏘아붙이며 엘리베이터 앞의 사원증을 찍는 곳으로 가려던 동만을 갑자기 그가 막아섰다.

“뭡니까?”

동만의 말투 속에서 짜증이 한가득 묻어났다. 그럼에도 이리한은 표정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동만의 위아래를 노골적으로 훑으며 음흉하게 미소 지었다.

“어제 주한이 하고 한판 했나 봐요? 힘이 없는 걸 보니까 걷는 게 영 시원치 않네.”

완전히 헛다리였다. 아침에 동만이 추측하길 은찬이 집을 비운 사이 혼자서 신나게 시켜 먹은 매운 닭발과 맥주, 그리고 차가운 아이스크림이 콤보가 되어 장염이 온 것 같다고 했다. 먹는 족족 화장실로 직행했으니 걸을 힘도 없는 건 당연했다.

이리한의 음흉한 말에 동만은 별 미친놈 다 보겠다는 시선을 던졌다.

“맞나 보네. 이주한 거기가 좀 커서 많이 아프죠? 수인인 나도 받아들이기 힘든데 사람은 오죽하겠어요. 치질 안 생기게 조심해요. 아, 내가 주한이에 관한 거 몇 가지 알려 줄까요? 나 그 녀석에 관해서 많이 아는데.”

선의를 베풀 듯이 말하며 그는 동만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렸다. 그 순간 동만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울긋불긋해진 동만이 부들부들 떨었다.

“많이 아파요? 내가 항문 잘하는 병원 아는데. 거기 소개…….”

“이 개새끼는 또 뭐야? 야, 이거 가지고 먼저 올라가 있어!”

동만은 들고 있던 것을 은찬에게 던지고 빠른 속도로 화장실을 향해 질주했다. 그런데 눈앞에 있어야 할 이리한도 덩달아 사라졌다.

“내가 이주한에 관한 거 알려 줄 테니까! 언제 어떻게 사귀게 됐는지 그것만 말해 주면 안 돼요?”

그는 화장실로 달려간 동만을 뒤를 쫓고 있었다. 이리한이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는 걸 구경하던 은찬은 조용히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동만이 알아서 하겠지. 그렇게 회피하며 하품을 쩍 했다.

밥을 먹어서 그런가. 아니면 애를 가져서 그런가. 요즘 들어 잠이 부쩍 많아졌다. 뭐, 원래도 많았지만. 홀로 사무실로 돌아온 은찬은 책상에 엎드려 꿀 같은 낮잠에 빠졌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주한도 김동만도 생각나지 않았다. 잠이 최고였다.

***

망할 장염. 동만은 1초라도 늦었다면 바지에 똥을 지렸을지도 모른다. 멀지 않은 곳에 화장실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만약에 참지 못하고 회사 로비에서 그런 불상사가 일어났다면 그대로 옥상에서 극단적인 짓을 벌였을 것이다.

꼬르륵. 아침부터 지금까지 물 한잔도 마시지 못한 탓에 위장에서 뭔가를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뒤처리를 다 하고 변기 물을 내리면서 동만은 자기 연민에 빠졌다. 입사 동기에 룸메이트인 유은찬을 도와주겠다고 결정한 그 뒤부터 인생이 꼬인 듯한 느낌이다.

제대로 된 애인 한번 사귀어 보지 못한 몸이건만 게이라는 낙인이 찍힌 것도 그렇고, 매일 이주한의 살기 가득한 시선을 받고 있으니 하루하루가 가시밭길이었다. 거기다 장염까지 겹치니 악재도 이런 악재가 없다.

지금이라도 손 털까. 이주한 부장한테 찾아가 사실대로 이실직고하면 친구를 팔아먹었다는 죄책감은 들겠지만, 지금보다 편안하게 살 것 같았다. 잠시 심각하게 고민하던 동만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그러지 말자. 비록 손 많이 가고 사람을 종처럼 부려 먹는 유은찬이지만 일부러 그러는 것도 아니고 성격이 그런 것을 어쩌겠나 싶다. 거기다 홑몸도 아니고. 친구가 애를 가지고 혼자 키워 보겠다는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배신을 하겠다니. 아니 될 소리다.

동만은 태어날 나비와 까망이를 상상하며 위로로 삼았다. 아기 수인은 귀와 꼬리를 숨기는 능력이 없다고 했으니 얼마나 귀여울까. 동만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러다 또다시 울리는 위장 소리에 마른침을 삼켰다. 일단 나가서 즉석 죽과 약부터 먹고 나서 기운을 좀 차려야 할 것 같았다.

서둘러 뒷정리를 끝내고 화장실 칸막이 문을 생각 없이 열어젖힌 그 순간. 바로 코앞에 있는 남자와 시선이 마주친 동만은 저도 모르게 괴성을 질렀다.

“으아아아악! 씨발……! 뭐야! 뭐야, 당신!”

“괜찮아요? 속이 많이 안 좋은 것 같던데.”

이주한의 섹파였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던 남자. 조금 전 자신을 화장실로 뛰어오게 한 장본인. 이리한이 칸막이 문 앞에 딱 붙어서 동만을 향해 웃고 있었다. 기가 찬 동만이 그를 향해 따지듯 물었다.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던 겁니까?”

“동만 씨가 들어간 직후부터?”

세상에. 그 소리를 다 듣고 있었다는 말에 동만은 헛웃음이 터졌다. 유은찬보다 더한 놈은 없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자신이 오만했다. 로비에서 이주한의 섹파라는 사실을 당당하게 말할 때부터 미친놈이라는 것을 눈치챘어야 했다.

“화장실 엿듣는 취미 있으세요?”

“아니요. 그런 취미는 없는데.”

“그럼 왜 따라온 겁니까?”

“그쪽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대답을 안 해 주니까. 아쉬운 놈이 우물을 판다고 기다릴 수밖에요.”

“입구에서 기다리셔도 될 것 같은데요.”

동만이 검지로 화장실 입구 쪽을 가리키자 이리한은 뒤늦게 그런 방법도 있었다는 걸 깨우쳤다. 뭐야, 이 녀석. 유은찬보다 더 덜떨어진 것 같다. 순간 동만은 이 녀석과 깊이 엮여 봤자 좋을 게 없다는 직감이 들었다.

“보다시피 제가 지금 몸도 안 좋고. 점심시간 끝나기 직전이라 그쪽하고 따로 이야기할 시간 없을 것 같네요.”

더는 만날 이유도 없고 그와 이주한에 대해 시시콜콜하게 대화할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싸늘하게 쏘아붙인 동만은 그의 어깨를 제 어깨로 밀치며 입구 쪽으로 향했다. 이 정도면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귀찮게 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동만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엘리베이터 앞. 출입문에 사원증을 찍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동만의 옷깃을 잡고 매달리기까지 했다.

동만이 은찬을 좋아하는 이유가 뭐냐면, 녀석은 고양이 수인답게 절대로 동만을 귀찮게 하지 않았다. 밥 먹는 것 말고는 개인적인 성향이 강했다. 청소를 비롯한 집안일은 동만이 스스로 좋아서 하는 것이고, 유은찬은 가만히 앉아서 동만이 하는 걸 구경하기 바빴다.

가뜩이나 예민한 장은 그의 민감한 터치 하나에 다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미치겠네. 짜증이 치밀어 오른 동만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뒤 이리한의 손을 신경질적으로 찰싹 내려쳤다. 그는 이런 식의 스킨십이나 관심을 좋아하지 않았다.

“저한테 왜 이러세요?”

“이주한이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나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우리 커피 한잔만 해요. 그 정도 시간은 있죠?”

장소가 장소니만큼 세세하게 설명할 수도 없고. 게다가 지금 동만은 커피는커녕 물 한 잔 마실 수도 없는 몸이었다. 누가 봐도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오고 초췌한 몰골인데 그는 아무렇지 않게 빙긋 웃으며 환자인 동만을 자꾸 붙잡았다. 동만 자신도 눈치 없다는 말을 종종 듣지만, 이 남자는 더 심했다.

“부장님하고 아무 사이 아니고요! 저 애인 따로 있고요! 그리고 그쪽하고 커피 한잔할 그런 의무 없고요! 그러니까 사람 귀찮게 하지 마세요!”

“아아아. 알겠다. 애인 몰래 비밀로 만나는 거죠? 내가 아까 너무 눈치 없이 애인 앞에서 그런 말 해서 화난 거죠? 미안해요. 내가 이렇다니까.”

“…….”

태어나서 이런 식으로 자신의 말문이 막힌 적은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유은찬. 그리고 두 번째가 지금 이 순간이었다. 대화하고 있는데 서로 주제가 다른 것 같았다. 이럴 때일수록 도망가는 게 상책이다.

“마음대로 생각하시고요. 저는 이만 갑니다.”

“저기요! 김동만 씨!”

그가 또 동만의 옷깃을 붙잡았다. 이번에는 더 세게.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물고 늘어지자 동만도 화가 나 욕을 퍼부었다.

“야, 하지 말라고! 이 개새끼가 진짜……! 사람 말이 말 같지도 않나!”

성격 좋기로 소문난 김동만이지만 아플 때 건들면 누구라도 화가 나는 게 정석일 것이다. 동만의 욕설이 로비에 쩌렁쩌렁 올렸다. 지나가던 사내 직원들은 힐끔거리며 수군거렸지만 그걸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의사가 하루 입원을 권할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다. 그런데도 월차를 허투루 쓸 수 없다는 의지로 회사에 나왔다. 유은찬이 소개팅을 시켜 준다고 했으니 꼭 성사시켜서 애인과 여행을 갈 것이다.

“하지 말라면 하지 마세요! 사람 짜증 나게!”

거친 말투로 쏘아붙였으니 최소한 기분 나쁜 표정을 지어야 정상이건만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면 되레 물었다.

“나 개인 거 어떻게 알았어요?”

상대방에게 타격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동만은 허탈감이 밀려왔다. 뭐지, 이 새끼?

“네?”

“나 개 수인인 거 티 나요? 냄새나요? 아닌데. 향수 많이 뿌리고 다니는데.”

수인들은 다 저런 식으로 제 냄새를 맡는가 보다. 양팔을 들어 제 냄새를 맡는 모습이 참 낯이 익다.

“……개 수인이세요?”

“네! 방금 개새끼라고 했잖아요. 그거 알고 한 말 아니에요?”

알고 했을 리가 없잖아! 어쩐지 자꾸 개처럼 쫓아오더라니. 유은찬에게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행동의 이유가 있었다. 동만은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왜요? 개는 별로예요?”

“저는…… 고양이 파라서.”

동만이 대놓고 선을 그어 버리자 이리한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고양이보다는 개가 훨씬, 훠어어얼씬 더 좋거든요? 의리 있지? 영리하지? 그리고 충성심 강하지!”

손가락을 쫙 펴 강아지의 장점을 나열하던 중 순간 그의 머리에서 강아지 귀가 뿅 하고 튀어나왔다. 화가 난 나머지 감정 조절을 못 한 모양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당황한 동만이 두 손을 뻗어 그 귀를 제 손안에 숨겼다. 안절부절못하며 여태 시끄럽게 떠드는 남자에게 다급하게 속삭였다.

“귀! 귀! 귀 나왔다고!”

“귀? ……헉!”

화들짝 놀란 이리한이 펄쩍 뛰어 제 귀를 손으로 꾹 누른 뒤에야 동만은 안심할 수 있었다. 다행히 너무 순식간에 지나간 일이라 이리한의 귀를 본 이는 없는 것 같았다. 이래서 내가 고양이를 좋아한다니까. 개는 고양이보다 더 손이 가서 탈이다.

“저기…… 왜 도와준 거예요?”

“지금 그게 중요해요?”

사실 동만도 생각하고 움직인 게 아니다. 몸이 먼저 행동했다. 언젠가 유은찬이 그랬다. 수인이 사람들 앞에서 귀를 드러내면 동물원의 동물처럼 쳐다본다고. 그 시선이 그리 기분 좋지만은 않다고.

“고……마워요.”

“됐고요. 고마운 거 알면 조심히 가시고 다음에는 오지 마세요.”

또다시 붙잡힐까 봐 동만은 서둘러 출입구에 사원증을 찍고 통과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 어깨너머를 훔쳐보니 그는 아직도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진저리를 치며 얼른 엘리베이터에 오른 동만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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